60화
"호오, 역시 수도는 대단하군."
티브론의 북쪽 거리에서 루시안이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누가 봐도 수도의 위용에 감탄하는 시골뜨기 귀족을 연상시키는 반응.
반은 진심이었기에 누가 봐도 연기라고 알아챌 수 없을 정도였다.
옆에 서 있던 레이먼은 루시안의 말에 맞춰 연신 추임새를 넣었다.
"성벽도 대단했지만, 내부는 그보다 더하군요. 제국의 보석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다 돌아보는 데만 해도 며칠 걸리겠어."
"기간은 넉넉히 잡고 왔으니 마음껏 구경하고 가시지요."
"그래야지. 어디 보자, 이번엔 저쪽으로 가볼까?"
수도의 시민들은 주종의 대화에 비웃음 섞인 눈초리를 향했다.
또 어디선가 촌뜨기 귀족이 상경했구만, 하는 태도였다.
물론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도 두 사람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 척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음, 어째 점점 볼 게 없어지는걸. 장소를 잘못 찾아왔나?"
"보아하니 빈민가인 모양이군요. 이대로 돌아갈까요?"
"아니, 조금만 구경하고 가지. 이것도 다 경험이니까."
최대한 눈을 초롱초롱하게 뜬 루시안이 빈민가로 향했다.
누가 봐도 세상 물정 모르는 열여섯 살 도련님다운 행동이었다.
레이먼은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그 뒤를 따랐다.
"이거야 원, 점점 더러워지는군.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고."
"빈민가니까 어쩔 수 없지요. 이 이상 깊이 들어가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야. 이만 돌아가지."
빈민가에 막 들어선 루시안이 도로 떠나려던 찰나였다.
"헤헤, 나으리들. 수도는 처음이십니까?"
등이 굽은 꼽추 하나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루시안에게 말을 걸었다.
루시안은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코를 막았다.
"무례한 놈! 내가 누구인줄 알고 함부로 말을 거느냐! 물러서거라!"
"아이구, 죄송합니다요! 부디 용서를! 용서를!"
꼽추는 기겁하며 냉큼 엎드려 덜덜 떨었다.
자존감 높은 귀족이라면 저도 모르게 우월감으로 으쓱거릴 만큼 비굴한 모습.
언뜻 보기에는 자연스러웠지만,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 분명했다.
"저, 저는 그저 도련님께 수도를 안내해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 주변이 이래 봬도 숨겨진 구경거리들이 제법 많은지라...."
"숨겨진 구경거리들?"
"예, 예에! 실은 제가 이 부근에서 안내인 역할을 하며 나리들께 돈을 받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돈은 무슨 놈의 돈이냐. 암만 봐도 볼 게 없건만."
루시안이 코웃음을 치면서도 꼽추를 쳐내지 않자, 꼽추는 비굴한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올렸다.
"잘 살펴보면 의외로 흥미로운 것들이 제법 많습니다. 예를 들면 암시장이나 정보상이 있습죠."
"암시장과 정보상?"
"예. 대놓고 드러내지 못하는 일들은 원래 이런 데 숨겨져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호오."
꼽추의 설득에 루시안이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쓸었다.
더 말해보라는 듯한 침묵에 꼽추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한번 이용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다른 곳에서는 팔지 않는 물건과 숨겨진 정보를 손에 넣을지도 모릅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안내해드립지요."
"크흠, 별 흥미는 없다만 빈민에게 베푸는 것도 귀족의 의무. 특별히 일거리 하나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이쿠, 감사합니다! 자비로우신 나리께 여덟 신의 축복이 있기를!"
"어디 한번 안내나 해보거라. 네 말대로 흥미롭지 않다면 죄를 묻겠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일단 암시장부터 보여드립죠!"
꼽추는 냉큼 일어나 루시안을 빈민가 구석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루시안과 레이먼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다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갔다.
****
"내 이럴 줄 알았지."
미로 같은 골목길에서 빠져나온 루시안이 피식 웃었다.
어느새 루시안과 레이먼은 십수 명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꼽추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둔 채 놈들 사이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먹잇감 데려왔다. 남김없이 잘 발라내서 먹고 뼈만 깨끗하게 버려라."
"형님, 장비 벗겨내고 알몸으로 내보내란 소리를 왜 그리 흉흉하게 하십니까?"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해먹지! 도련님 겁 좀 먹게 하려고 했다, 왜?"
"하여간 취미 한 번 고약하시다니까. 안 그래도 겁을 잔뜩 먹으셨을 텐데."
"푸하하하!"
웃음소리가 공터에서 메아리치듯 퍼져나갔다.
시골에서만 살던 촌뜨기 귀족이라면 겁을 먹어 무심코 뒷걸음질 칠 듯한 흉흉함.
하지만 루시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레이먼을 쳐다봤다.
"어때? 상대할 수 있겠어?"
"음, 조금 힘듭니다."
"진짜로?"
"이런 지형에서 뒷짐 지고 싸우는 건 조금 힘들죠. 한쪽 팔 정도는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저런 떨거지들 상대하는 거면 한쪽 발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해야지."
"골목길에서 1대 1로 연전을 벌이면 그래도 괜찮지만, 사방에서 동시에 달려들면 팔을 써야죠."
"하하하!"
이번엔 반대로 루시안 쪽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혀 주눅 들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에 꼽추를 포함한 불량배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것 보쇼, 나리들.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은데...."
푸확
꼽추의 협박이 끝나기도 전에 바람이 터지는 소리가 울리며 돌담 한쪽이 부서졌다.
어느새 검을 뽑은 레이먼이 돌담을 날려버린 탓이었다.
언제 뽑았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한 꼽추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빈민가라 그런지 주변 구조물이 무르군요. 지형지물을 이용하면 귀찮겠다 싶었는데 그냥 통째로 베어버리면 되겠습니다."
"가능하면 죽이지 말고 불구만 만들도록. 시체 생기면 나중에 경비대한테 설명해야 하니까."
"그 전에 항복 권고 안 하십니까?"
"소용없을 것 같아서 관뒀는데, 일단 해보기나 할까?"
루시안은 잠시 고민하다 굳어있는 꼽추를 쳐다봤다.
"네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지. 첫째, 얌전히 무릎 꿇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한다. 둘째, 반항하다 몇 놈 죽은 다음 뒤지게 맞은 후 묻는 말에 대답한다."
"너, 뭐 하는 놈이냐?"
꼽추가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품에서 휘어진 칼을 꺼냈다.
힘의 차이를 눈앞에서 봤음에도 여차하면 덤빌 기세였다.
루시안은 품을 뒤적거려 아까 받은 동패를 꼽추 앞에 던졌다.
텅그렁
"...검은 비늘 기사단의 인장!?"
"선물로 받았다. 귀찮은 일이 있으면 이거 내밀고 통과하라더군."
루시안의 말에 꼽추를 비롯한 불량배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른 건 몰라도 검은 비늘 기사단이 일황자의 친위대라는 건 안다.
황제가 직접 나서서 아끼는 아들에게 붙여준 최정예들.
그런데 그런 검은 비늘 기사단에게 직접 인장을 받다니.
"호위 기사의 실력만 믿고 까부는 애송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거물이셨군. 크흐!"
"혀, 형님. 이거 어째야 하는 겁니까?"
"어쩌기는? 너희는 날 그토록 오래 봐왔으면서 모르는 거냐?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몇 번이고 알려줬을 텐데!"
꼽추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눈으로 루시안을 노려봤다.
그 강인한 의지에 루시안은 속으로 감탄했다.
'수하들 앞에서 추하게 꿇는 모습을 보여주느니 죽겠다 이건가?'
그렇다면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주는 정도의 배려는 해야겠지.
생각을 마친 루시안이 레이먼에게 명령을 내리려던 찰나.
꼽추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몸을 깊게 숙이며 소리쳤다.
털썩
"뭐든 말씀드리겠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나리!"
"...."
****
"그러니까 네가 도둑 길드의 지부장이라고? 티브론 지부 담당?"
"예! 친구들은 '휘어진 칼날의 존'이라 부르지요!"
"휘어진 칼날은 개뿔. 휘어진 허리겠지."
"역시 나리의 센스는 대단하십니다! 원하신다면 바로 그리 부르라 바꾸지요!"
자신을 존이라 소개한 꼽추는 손바닥을 불이 나도록 비비며 아부했다.
보기 흉할 정도의 비굴함에 루시안은 혀를 찼다.
"도둑 길드 지부장이란 놈이 자부심도 없냐? 계급장 좀 슬쩍 보여줬다고 바로 굽히고 말이야."
"어휴, 모르시는 말씀. 이 치안 좋은 티브론에서 도둑으로 살아가기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높으신 분들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순간 끽, 입니다요."
존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목을 그으며 혓바닥을 내밀었다.
"뭘 모르는 인간들은 제국의 수도에 있다며 대단하게 보지만, 실제로는 황제 폐하 말씀 한마디에 내일이라도 몰살당할 수 있는 처지지요. 오죽하면 수도 담당인 제가 길드장이 아닌 지부장이겠습니까."
"과연."
왜 수도를 담당하고 있음에도 길드장이 아닌 지부장인지 궁금했는데 공권력이 너무 강해서 그랬던 건가.
가장 뜯어먹을 게 많은 제국의 중심지임에도 도둑들이 오히려 기피한다니.
"반대로 말하자면 정보에 빠삭하다는 소리겠지. 수도의 시류를 읽지 못했다면 진즉 모가지가 날아갔을 테니까."
"이야, 나리의 혜안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겨우 그 몇 마디로 전부 파악하셨군요."
"아부는 됐고, 뭐 하나만 물어보자."
"뭐든 말씀만 하십쇼!"
"최근 월광초를 어디서 많이 매입했는지 알고 있나? 단체가 아니라 개인이 말이야."
뜬금없는 질문에 존이 잠시 눈을 끔뻑였으나, 이내 루시안의 눈초리를 깨닫고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만, 시간이 며칠 걸릴지도 모릅니다."
"정보만 확실하다면 상관없어."
"그리고 가능하면 착수금이 조금 필요할 듯합니다만...."
존이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며 슬쩍 루시안의 눈치를 봤다.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모습에 루시안이 피식 웃었다.
"이거면 충분하냐?"
쩔그렁
"...!"
금화가 가득한 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지자 존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착수금이 필요하다고는 했지만 지나치게 많은 액수.
굳이 돈으로 허세를 부릴 사람이 아닌데도 이토록 많은 액수를 내놨다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원하는 대로 주마. 근데 빨리 못 찾으면 알지?'
존은 마른침을 삼키며 이마를 바닥에 가져다 댔다.
"이틀 이내로 알아내겠습니다."
****
그로부터 이틀 후.
도둑 길드원 하나가 루시안의 여관에 찾아와 서류 하나를 전달했다.
서류에는 최근 월광초를 구매한 사람들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약속은 지켰구만."
"이 넓은 도시에서 잘도 찾아냈군요."
"착수금을 두둑이 줬으니 아마 그걸로 알아냈겠지. 사람의 입을 여는 데는 폭력과 돈 만한 게 없으니까."
그 점을 감안해도 찾아낸 속도가 무척 빠르긴 했지만 말이다.
서류를 훑어보던 루시안은 금방 찾던 이름을 발견했다.
"역시나."
가장 위쪽에 쓰인 하이데의 이름에 루시안이 미소를 지었다.
옆에 적혀 있는 월광초의 구매량은 남들의 몇 배를 상회하는 수준.
이전에 월광초에 대해 흥미가 없던 점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보다 더 수상쩍은 기록도 있었다.
"우리랑 대화한 날도 월광초를 사 갔다는군. 그 전날과 전전날에도."
"그 인간, 분명 얼마 전까지 다른 도시에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하이데가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답은 하나.
부재중일 때 다른 누군가가 그의 명의를 빌려 월광초를 구매한 거다.
루시안은 서류를 촛불에 태워서 없애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자. 찾던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알아낸 것 같으니."
"어디로 갈까요?"
"하이데의 저택."
"예? 그 한심한 인간을 또 만나시려고요?"
"연금술사의 집이라고 해서 연금술사밖에 안 사는 건 아니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먼을 향해 씩 웃은 루시안이 여관 밖으로 나갔다.
하이데의 집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연금술사 길드에서 정식 연금술사에게 무상으로 제공되는 저택 중 하나였으니까.
루시안은 경비병 하나 없는 저택에 다가가 문을 두드렸으나 문 안쪽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또 월광초를 사러 간 건가?'
-누, 누구세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루시안의 귓가에 소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목소리에 루시안이 소리쳤다.
"문 좀 열어주시죠. 여기 사는 사람을 만나러 왔습니다."
-하, 하이데 스승님은 지금 안 계세요. 외출 중이시니 나중에 오세요.
"연금술사를 만나러 온 게 아닙니다."
-그, 그럼 집을 잘못 찾아오셨네요.
"잘못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당신을 찾아왔으니 말입니다."
-...?
"스승의 이름을 빌려 비싼 약초를 몰래 구매하는 도둑을 말이죠."
우당탕, 콰당, 우르르르
루시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누군가 넘어지고 무너지며 박살 나는 소리들이었다.
잠시 후, 허겁지겁 누군가 문으로 달려와 급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덜컹
"오해, 오해에요! 도둑질이 아니에요! 연구를 위해서 스승님이 부탁하신 거라...!"
문을 연 사람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다급하게 변명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루시안의 귀에 변명따윈 들어오지 않았다.
그깟 변명보다는 문 안쪽에서 드러난 얼굴이 훨씬 충격적이었기에.
'소년?'
사슴과 같은 눈동자로 루시안을 올려다보는 이는 루시안 또래의 어린 소년이었다.
61화
"드, 드세요."
달카닥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루시안과 레이먼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루시안은 차에 일절 눈길을 주지 않고 소년만을 바라봤다.
'정말 이 소년이 그 넥타르의 개발자라고?'
쌓아온 세월과 능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루시안도 안다.
때로는 다른 분야에서도 펠리시아 못지않은 천재가 등장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본능과 감각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는 검식과 배경 지식이 필요한 학문은 경우가 다른 법.
그런 점을 고려하자면 눈앞의 소년은 연금술사를 자칭하기엔 나이가 너무 어렸다.
"이름이 뭐지?"
"예? 이, 이안이요."
"나이가 올해로 몇이지?"
"열일곱인데요...."
"어리군.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예상대로.
저도 모르게 솔직한 감상을 내뱉자 옆에 있던 레이먼이 다가와 속삭였다.
"삼공자, 본인의 나이를 까먹으셨습니까?"
"...하이데의 조수인가? 아니면 제자?"
루시안은 은근슬쩍 레이먼의 말을 무시하며 되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소년, 이안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제자 후보요."
"뭐? 아니, 제자면 제자지 제자 후보는 또 뭐야?"
"스승님께서 전 정식 제자가 아니라고 하셨거든요. 일을 잘 도우면 나중에 승격시켜주신다고 했어요."
"하."
어떻게 된 건지 대강 짐작한 루시안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바로 제자라고 인정해주면 손에 쥐고 흔들 수 없으니 어정쩡한 위치에 앉혀서 협박했군.'
하여간 알면 알수록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루시안은 그냥 본론부터 꺼내기로 했다.
상대가 정식 연금술사가 아니라면 괜히 빙빙 돌려 얘기할 필요도 없으니까.
"얼마 전 밖에서 연금술사 하이데를 만났다. 월광초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그런데 정작 그 인간은 관심이 없는 정도를 넘어서서 우습게 여기더군."
"...!"
"솔직히 말해서 실망했지. 연금술사라길래 뭔가 알고 있나 싶었는데 말이야. 어쩔 수 없이 월광초만 구해서 돌아 갈려고 했는데."
말을 끊은 루시안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이안을 쳐다봤다.
"그 인간이 우리와 만난 시간에 월광초를 구매했다는 내역이 있더군."
"...."
"남의 일에 끼어드는 취미는 없지만, 스승의 돈을 횡령해서 개인적인 용도로 쓰는 건 문제 아닌가? 하물며 그 돈은 나라의 지원금이니 황제 폐하와 연관되어 있을 텐데."
황제라는 말에 이안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루시안을 쳐다봤다.
변명을 해보라는 듯 루시안이 턱을 까딱이자 이안이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바,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오해에요. 스승님께서 전부 허락해주신 건데...!"
"허락해줬다고? 그 하이데가 제 돈을 마음껏 쓰라고 했단 말이야?"
"정확히는 연금술에 써도 된다고 하셨어요! 성과만 있으면 괜찮다고 하셔서 쓴 거예요!"
과연.
황실에서 나오는 지원금 중 유흥비로 바꿀 수 없는 분량은 제자에게 맡겨버린 건가.
그 와중 괜찮은 연구 성과라도 나오면 자신이 강탈해서 발표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이안의 설명으로는 다 해명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액수를 전부?"
"...."
"내가 생각하기엔 아닌 것 같은데. 이 정도 액수면 스승이 허용한 범위를 초과해도 한참 초과한 거 아닌가?"
제자에게 지원금 일부를 쓰게 해주는 것도 정도가 있다.
액수를 보면 하이데가 유흥비로 돌릴 수 있는 비율까지 월광초를 사는 데 쓴 게 분명했다.
정곡을 찌른 건지 이안은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스승님께 제가 한 일을 밝히실 건가요?"
"네 대답에 따라 달라지겠지. 일단 그 많은 월광초를 어디에 썼는지부터 묻고 싶은데."
"그건...."
"마력의 증폭을 이용한 육체의 강화."
"...!"
"보아하니 재료는 월광초, 붉은 가시, 날개 초롱 등등이겠지. 안 그래?"
루시안의 입에서 상세한 재료가 나오자 이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레이먼은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름만 들으면 약의 재료인 것 같습니다만."
"정확히는 세상을 바꿀 약의 재료지. 성공만 한다면 천하의 둔재도 역사에 남을 기재로 만들어주는."
"저, 저 말고 연구하신 분이 있었던 건가요?"
이안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루시안에게 다가왔다.
호위인 레이먼이 빠르게 검집으로 가슴을 눌러서 막았지만, 고통을 못 느끼는 듯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왔다.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을 살짝 뒤로 밀치며 말했다.
"있었지.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그밖의 다른 재료로는 줄기꽃과...."
"줄기꽃!"
루시안의 한마디에 이안이 비명을 외치듯 뒤로 물러섰다.
"내가 왜 그걸 몰랐을까! 그래, 줄기꽃만 섞으면 모든 게 해결될 텐데! 왜 떠올리지 못했, 컥!"
우당탕
난리를 치던 이안은 이내 의자 다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그러나 아픔을 못 느끼는지 허겁지겁 일어나서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지금 막 깨달은 지식을 당장이라도 시험해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루시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도 올라가자."
"남의 집인데 그래도 됩니까?"
"학자라는 인종은 한번 저런 상태가 되면 못 말려. 가만히 기다리면 일이 다 끝난 후에도 안 내려올걸."
루시안이 본 진정한 학자들은 언제나 그랬다.
호기심과 본인의 가설을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에 미쳐 다른 건 다 내팽개친 채 연구에만 몰두했다.
옆에서 제동을 걸어줄 누군가가 없다면 알아서 배려해줄 거라는 기대는 무의미했다.
****
"허, 참."
2층으로 올라온 루시안은 연구실을 내부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작은 종이들에는 온갖 메모가 빼곡히 적혀 있었고 큰 종이는 곳곳에 어지간한 책 두께만큼 쌓인 상태.
여기에 더해 다 쓴 잉크와 펜이 바닥을 구르고 구겨서 버린 연구 일지는 한쪽 구석을 가득 차지했다.
우습게도 이토록 난잡한 와중에도 약의 재료와 일부 포션들만큼은 정성스레 분류되어 있었다.
'기가 막히는군. 이게 열일곱짜리 애송이의 연구실이라 하면 누가 믿을까?'
어지간한 정식 연금술사도 이토록 열정적으로 연구에 탐닉하진 못할 터.
연구실을 둘러보며 일지를 훑어보던 루시안은 이내 바삐 움직이는 이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제발, 제발... 제발 성공해라...!"
이안은 누군가에게 기도하듯 중얼거리며 가열되는 유리병을 지켜보았다.
점차 끓기 시작하는 유리병에서 알싸한 냄새가 퍼져 나갔다.
루시안이 열화판 넥타르를 제조할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그래, 냄새가 점점 심해지면서 포션이 붉게 물들면...!?'
유리병을 지켜보며 미소를 짓던 루시안은 이내 눈을 부릅떴다.
갑자기 알싸한 냄새는 사라지고 청량감마저 느껴지는 향기가 연구실을 가득 채웠다.
붉어지려던 액체는 점점 푸른색으로 바뀌다 은은한 광채마저 띄기 시작했다.
'뭐야 저게? 붉은색으로 변해야 맞는 거 아닌가?'
"돼, 됐다! 됐다고! 진짜로 됐어!"
전혀 다른 반응에 당황하는 루시안과 달리 이안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며 눈물까지 흘렸다.
가열을 그만두고 유리병을 꺼낸 이안이 몽롱한 눈동자로 자신이 만든 결과물을 바라보았다.
그 열기에 압도된 루시안이 가만히 있는 와중 레이먼이 다가와 속삭였다.
"도련님, 저놈은 대체 뭘 만든 겁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보십쇼. 저 액체 주변에서 마력이 공명하고 있습니다."
레이먼의 말에 감짝 놀란 루시안은 눈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정말 포션 주변에서 마력이 파동처럼 주변을 휩쓸고 다니는 게 보였다.
'뭔 말도 안 되는...!'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약 자체에서 마력이 느껴지다니.
대체 저걸 직접 마시면 약효가 어느 정도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때, 이안이 약병을 자신의 입으로 기울이는 걸 보고 루시안이 기겁했다.
"이런 미친! 그만두지 못해!"
퍽
"켁!"
잽싸게 뒷덜미를 후려치고 루시안이 약병을 빼앗자 이안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왜, 왜 그러세요!"
"너야말로 갑자기 무슨 짓이야? 왜 대뜸 마시려 들어?"
"임상 시험이요! 약을 완성했으면 효과를 직접 확인해 봐야죠!"
"내 참."
당당한 이안의 외침에 루시안은 눈을 찌푸렸다.
기사도 아니고 학자가 이런 엄청난 약을 목구멍에 들이붓는다?
지나친 약효를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컸다.
'최소한 마력의 길을 연 기사가 복용해야 제대로 된 효과가 나오겠지.'
"이리 주세요! 확인해 봐야 해요!"
루시안은 다시 달려들 기세인 이안을 옆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임상 시험을 하고 싶으면 내가 대신해줄 테니 넌 지켜나 봐. 그 허약한 몸으로 복용했다가 죽어버리면 어쩌려고."
"예? 정말요?"
"삼공자!?"
레이먼은 기절할 듯이 놀란 얼굴로 루시안을 쳐다봤다.
저토록 강렬한 기운을 내뿜고 있건만 약효도 모른 채 복용하겠다니!
"제정신입니까!? 그만두십시오! 약효를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차라리 제가 복용하겠습니다!"
"아니, 그건 안 돼."
"어째서요!?"
"난 괜찮을 거란 확신이 있지만 넌 아니거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레이먼이 루시안을 쏘아보았지만, 루시안은 이 이상 자세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체질과 관련된 문제였으니까.
'내 몸이라면 허용량을 넘어선 마력은 저절로 배출되겠지. 하지만 레이먼은 아니야. 아무리 오래 수련했다 하더라도 나보다 마력의 길이 깨끗할 리 없어.'
마력의 폭주나 역류는 허용량이 넘어선 마력이 제대로 배출되지 못하여 생기는 현상.
따라서 루시안과 같은 체질이라면 사실상 폭주나 역류 현상 자체가 일어날 수가 없다.
마력의 길 자체가 너무도 넓고 깨끗한 탓에 뭔가 잘못되더라도 순식간에 배출되니까.
'오만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복용할 수 있는 약일지도.'
루시안은 넥타르, 아니 넥타르의 원형일지도 모르는 약을 보며 묘한 흥분을 느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약과 유일하게 그 약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이 만나면 어찌 될까?
"삼공자!"
말로 해서는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레이먼이 버럭 소리치며 루시안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결심을 마친 루시안이 푸른 액체를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약병을 낚아챘을 때는 이미 한두 방울만 남기고 전부 식도 아래로 내려간 상태.
"이런 빌어먹을! 토해내십시오! 지금 그게 무슨 약인 줄 알고...!"
푸화악
기겁한 레이먼이 루시안의 입을 강제로 열게 하기 직전.
눈부신 마력의 분류가 루시안에게서 터져 나오며 연구실을 뒤흔들었다.
****
푸화아아악
세찬 마력의 분류는 연구실을 뒤집어놓았다.
종이가 사방으로 흩날리고, 재료를 넣어둔 유리병은 깨졌으며, 책장이 도미노처럼 뒤로 넘어갔다.
작은 폭풍과도 같은 위력에 레이먼이 이를 악물었다.
"이런 개자식이! 대체 뭘 만든 거냐!"
"끄으으으!"
레이먼이 살기 어린 목소리로 이안에게 소리쳤으나, 이안은 흩날리는 마력을 버티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모든 게 뒤집히는 난리 속에서 유일하게 잠잠한 건 루시안 뿐이었다.
'세상에.'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감탄사를 꾹 참았다.
여기서 입을 함부로 열었다가는 마력의 분류가 방 전체를 터트릴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증폭된 마력은 용광로처럼 들끓으며 루시안의 길을 미친 듯이 휩쓸고 지나갔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그 자리에서 전신이 터져 죽을 기세였지만, 루시안에겐 약간 시원할 뿐이었다.
무시무시한 마력의 노도 속에서 루시안이 한번 눈을 끔뻑일 때마다 마력이 반응하며 공기를 떨어댔다.
'겨우 눈 깜빡임에 이 정도라니. 검을 휘두르면 어떻게 되는 거지?'
순간 마음속에서 작은 유혹이 꿈틀거렸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자칫하면 레이먼과 이안이 여파로 죽어버릴 위험이 있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이 힘은 루시안이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용암 속에 들어와서 몸을 움직이니 용암이 같이 튀어 오르는 것에 가까웠다.
'온전히 제어해서 체내에 응축할 수만 있다면 바랄 게 없겠지만....'
현재의 루시안으로서는 손바닥으로 홍수를 막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면 온몸에서 줄줄 새어나간 후 효력이 사라질 터.
어떻게든 미량이라도 그러모을 방법이 없나 루시안이 고민할 때였다.
꿈틀
척추에서 머리까지 이어진 마력의 길 하나가 넘쳐나는 힘에 반응하여 움찔거렸다.
육체를 강화하는 데는 별 쓸모가 없어서 효율적인 순환을 위해 피했던 길이었다.
'설마?'
루시안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안 쓰던 길을 열어주었다.
한번 길이 열리자 휘몰아치던 힘은 단숨에 뚫고 머리까지 올라갔다.
아무런 역류 없이 올라간 마력은 이내 머리를 휘저었다.
순간적으로 루시안은 깜짝 놀랐으나 곧 이전과 비교도 안 되는 청량감을 느꼈다.
동시에 지금껏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시야에 잡히는 것이 느껴졌다.
'마력?'
눈을 강화하지 않았음에도 마력이 선명하게 보였다.
심지어 아무리 강화해도 볼 수 없었던 인간의 체내에 있는 마력까지.
힘겹게 마력의 분류 속에서 버티고 있는 레이먼과 이안의 움직임은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듯했다.
마치 예언자와 같은 시야를 손에 넣은 기분에 루시안이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펠리시아.'
루시안의 머릿속에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마력을 직접 눈으로 보고 상대의 모든 움직임을 예상하며 최적의 경로를 찾아내던 검의 천재.
그제야 루시안은 자신이 뭘 얻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구나.'
62화
물론 이게 그녀의 모든 재능은 아니겠지.
펠리시아는 단순히 눈만 좋은 게 아니라 힘을 조절하는 감각부터 남에게 가르치는 것까지 모든 게 천재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남들과 다른 시야를 가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적어도 동급의 기사라면 떼거리로 달려들어도 다 때려눕힐 수 있을 것 같군.'
후우우웅
흥분으로 루시안이 두 주먹을 꽉 쥐었을 때였다.
휘몰아치던 마력의 분류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드디어 넥타르의 약효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다들 괜찮나?"
푸확
"컥! 삼공자, 지금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어이쿠야.
루시안은 짧은 몇 마디에 반응한 마력이 레이먼을 후려치는 모습에 냉큼 입을 다물었다.
마력에 얻어맞은 게 레이먼이라 망정이지 이안이었다면 그대로 기절했을 위력이었다.
푸쉬이이이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모닥불이 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마력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혹 새로 얻은 시야도 마력과 함께 사라지는 게 아닌가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돌아가면 당장 검식 수련부터 해야겠군.'
루시안은 잔류하는 마력이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마력에 얻어맞아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멀쩡한 것 같군. 역시 흑사자야."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방금 도대체 뭐였습니까!? 갑자기 어디서 그런 마력이 나온 겁니까!?"
"뭐긴. 이 약이 내 마력을 증폭시킨 거지. 효과가 지나친 게 흠이지만 좋은 약이군."
"지나친 수준이 아닙니다! 그 마력은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라면 당장 터져 죽을 만한...?"
레이먼은 소리치다 말고 이내 기이한 눈동자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인간이라면 절대 버티지 못할 밀도였건만 대체 어떻게?
"내 체질이 좀 특수해서 말이야. 독이라면 모를까, 양이 많다고 해서 죽진 않아."
"아니, 그게 뭔 소립니까? 또 뭔가 숨기시는 게 있는 겁니까?"
"나중에 얘기해주지. 일단 지금은 저 녀석부터 챙겨야 할 것 같은데."
루시안이 가리키는 쪽으로 레이먼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 끝에는 무너진 책장을 엄폐물 삼아 숨어있던 이안이 쓰러져 있었다.
"어, 어으, 으어어...."
마력이 사그라들었음에도 이안은 정신을 못 차린 채 헛소리를 내뱉는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압력과 허약한 몸 때문에 일시적으로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저러다 죽어버리면 큰일 나지. 세상을 뒤집어버릴 세기의 천재니까 말이야."
루시안의 농담에도 레이먼은 웃을 수가 없었다.
진짜로 세기의 천재라는 표현조차 부족할 만큼의 업적을 이루어냈으니까.
'말도 안 되는 마력 증폭 효과다. 그대로 복용한다면 몸이 터져버리겠지만, 인간이 감당 가능한 수준까지 희석한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수십 년의 순환에 해당하는 효과를 볼 수 있을 터.
심지어 저만한 순도라면 희석한 양도 어마어마하리라.
몇 년에 한 번이라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면 대륙의 세력 구도를 바꿔버릴 수 있는 물건.
그 파급력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레이먼."
상념에 잠겨 있던 레이먼은 옆에서 부르는 소리에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평소의 말투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진지한 음색이 루시안에게서 흘러나왔다.
"네 주군은 누구냐?"
"...."
수많은 의미가 함축된 질문에 레이먼이 눈을 감았다.
굳이 따지자면 지금의 주군은 지그문트 대공이었다.
기사로서 충성을 다하고자 한다면 오늘 본 것들도 전부 대공에게 보고해야겠지.
그러나 레이먼은 가슴속의 망설임을 느끼며 자신에게 되물었다.
'그게 진정 옳은 일인가?'
대공을 향한 충성심과는 별개로 너무도 무거운 진실이 아닌가.
그 지그문트 대공조차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온전히 다룰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웠다.
무엇보다도 현재 발데크 대공가는 차기 가주 경쟁이 한창인 상황.
잘못 다루었다간 대륙이 뒤집힐지도 모르는 일에 함부로 손을 내밀 여유가 없었다.
'대공 전하라면 분명 철저히 제조법을 알아낸 후 도로 묻어두시겠지. 안 그래도 내부에서 경쟁이 한창인 상황에 다른 걱정거리까지 끌어들일 분이 아니니까. 본격적으로 이 영약에 손을 댄다면 차기 가주가 정해진 이후일 터.'
약의 안정적인 제조까지 고려하면 현 대공보다는 차기 가주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쓸 수 있으리라.
즉, 이 정보를 전달한 순간 대공의 아들 중 한 사람이 세상을 좌지우지할 힘을 얻게 된다는 소리.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레이먼은 순간 마음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끔찍하구만.'
첫째 트리스탄은 보수적이다 못해 꽉 막힌 귀족주의자에 둘째 조르디는 충성한 이들조차 토사구팽하는 이기주의자.
넷째 조슈아는 무언가를 제대로 보여준 적은 없으나 아무리 봐도 평범한 수준을 넘지 못했다.
이들이 대륙을 바꿀 만한 힘을 손에 쥔다면 과연 세상이 지금보다 좋게 바뀔까?
'더 나빠진다면 모를까, 도저히 더 나아지는 미래를 떠올릴 수가 없군.'
쓴웃음을 지은 레이먼은 재차 고개를 들어 루시안을 바라봤다.
아직도 수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는 발데크 가의 삼공자.
굳이 다음 세대에 미래를 맡겨야 한다면 루시안 외에 다른 적임자는 없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애초에 저 소년과 약에 대한 정보를 가져온 게 삼공자였지.'
레이먼은 순간 마음속이 후련해지는 걸 느꼈다.
이미 올바른 이에게 힘이 넘어갔다면 그가 굳이 고민할 필요 따윈 없었으니까.
생각을 마친 레이먼이 루시안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사자의 피에 충성을 맹세한 레프 노르세가 피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주군을 섬기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본명과 함께 흘러나온 말은 고대의 서약.
지금은 케케묵은 옛 의례를 입에 담으며 레프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젊은 사자시여, 제 검을 드리오니 뜻대로 쓰소서."
레프의 맹세에 루시안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어깨를 짚었다.
"지금부터 네 검은 언제나 내 검집에 있을 것이며, 그 어떤 전장이라도 함께하리라."
루시안 역시 고대의 맹약으로 화답하며 레프를 일으켰다.
아버지의 신하와 주군의 아들이란 어정쩡한 관계가 진정한 군신 관계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
서약을 통해 본명이 밝혀졌지만, 레이먼은 본명 대신 여전히 레이먼이란 이름을 선호했다.
워낙 오랜 시간 레이먼으로 불린데다 본명으로 살던 시절 좋은 기억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니 굳이 본명으로 바꿔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이전처럼 레이먼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다들 제 이름을 그리 알고 있으니까요."
"하긴, 지금까지 잘 부르던 이름을 달리 부르면 오히려 이상하게 보겠지."
자신의 뿌리만 확실히 밝힐 수 있다면 어차피 이름은 사정에 따라 바뀌기도 하는 것.
때로는 주군이나 황제에게 새로운 이름을 하사받기도 하는 게 귀족인 만큼 본인이 원한다면 달리 불러도 문제가 없었다.
"그나저나 그 녀석, 좀처럼 안 깨어나는군요. 그렇게 강한 충격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방구석에서 연구만 파던 녀석이었으니 체력이 약한 거겠지. 딱히 다친 곳은 없으니 일어날 때까지...."
-이안! 나와라, 이 찢어 죽일 놈의 고아 새끼야! 감히 스승의 주머니에 손을 대!?
식은 차를 홀짝이던 루시안과 레이먼은 밖에서 들리는 고함에 눈을 끔뻑였다.
이전과 달리 상스러운 말투였지만 목소리 자체는 귀에 익었다.
잠시 후, 문에 드리운 그림자 하나가 거칠게 문을 걷어차며 안으로 들어왔다.
콰앙
"당장 나와! 오늘 네놈의 다리 한 짝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하이데는 곧 루시안과 눈을 마주쳤다.
루시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또 만나는군. 잘 있으셨소?"
"아, 아니... 루시안 공께서 왜 여기에 계십니까?"
"월광초에 대해 대화를 나눌 사람을 찾다 보니 방문하게 되더이다. 구매량이 가장 많은 장소가 여기였거든."
"월광초!"
하이데의 얼굴이 다시 험악해졌다.
자신의 돈이 어디에 쓰인 건지 떠올린 듯했다.
"이안, 그 배은망덕한 개자식이...!"
"진정하시오.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리 화가 나셨소?"
"개인적인 일이니 상관하실 필요 없습니다. 정 궁금하시다면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난 지금 듣고 싶은데."
탕
찻잔을 강하게 내려놓는 소리에 하이데는 움찔했다.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한 박자 늦게 깨달은 표정이었다.
머뭇거리던 하이데는 이내 루시안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제자 놈이 저지른 짓 때문입니다. 이안이라는 녀석인데 고아였던 걸 제가 친히 거두어주고 연금술도 가르쳐주었지요."
"호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찾아왔을 때 문을 열어준 소년이 있던데."
"그 녀석이 맞을 겁니다. 제가 부재중일 때 집을 관리하는 것도 녀석이니까요. 그런데 그놈이 제 연구 자금을 멋대로 횡령해서 쓴 정황이 발견되어...."
하이데의 입에서 뿌드득 소리가 선명하게 흘러나왔다.
남아있던 유흥비가 사라진 게 어지간히도 분한 모양이었다.
"세상에 이토록 배은망덕한 놈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다 죽어가던 고아 놈을 거둬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가르쳐줬더니 감히!"
배신감에 치를 떠는 하이데를 보며 루시안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누가 보면 아끼던 제자한테 뒤통수 맞은 줄 알겠군. 정작 자기는 넥타르 개발과 관련해서 제자의 이름 한 번 언급하지 않은 주제에.'
아까 전 대뜸 임상 시험을 하려던 이안을 보면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짐작이 가능했다.
아마 이안은 이번처럼 별생각 없이 자신의 몸으로 실험을 하다 부작용으로 죽었겠지.
하이데는 제자가 죽은 걸 보고 기겁했다가 과정을 조사하는 와중에 넥타르의 존재를 알았을 거다.
연구 일지가 상세한 만큼 남은 기록을 그러모아 재현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테고.
'사실 제대로 재현한 건지도 의문이지만 말이지. 그 정도 효과라면 희석해서 나오는 양도 상당할 텐데 예약이 그토록 밀렸으니.'
진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만큼 하이데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이름을 써서 넥타르를 선보였으리라.
하지만 훔친 연구 결과로는 순간의 영광을 훔칠 순 있어도 본인의 능력을 가려주지 못하는 법.
넥타르 이후에 별다른 개선도, 다른 발견도 못 한 채 놀아 재끼다 보니 금방 진실이 탄로 났을 거다.
'어쩌면 분노한 길드 내부의 고위층에 의해 살해당했을지도 모르겠군. 그들로서는 능력 없는 한심한 놈에게 속아서 농락당한 꼴이니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집니다. 부모의 마음으로 키웠거늘 스승의 돈에 손을 대다니요! 싹수가 노란 놈 같으니라고!"
루시안은 혀를 차며 시끄럽게 떠드는 하이데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억울하면 제자가 횡령한 돈을 내가 대신 갚아드리리다."
"돈이 문제가... 예?"
"내가 대신 갚아준다고 했소. 그 대신 그대의 제자를 내게 주시오."
멀쩡한 가족이 있다면 모를까 연고 없는 고아라면 제자는 반쯤 스승의 소유물이나 마찬가지.
본인의 의사는 둘째치고 스승인 하이데만 동의한다면 루시안이 데리고 가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하이데는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그놈을 어디다 쓰시려고요?"
"월광초를 제법 잘 다루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 고용할 생각이오. 말했다시피 내가 그쪽에 관심이 많거든."
"험험, 그러십니까?"
헛기침을 하는 하이데의 입꼬리가 은근슬쩍 올라갔다.
잠시 후, 무언가 골똘히 고민하는 척 하이데가 자신의 턱을 쓸었다.
"하지만 이안이 사라지면 저도 여러모로 곤란합니다. 배은망덕한 놈이지만 재주는 괜찮은 녀석이었으니까요. 연금술 조수부터 집안일까지 도맡던 놈이 하루만에 사라지는 겁니다."
"대가로 원하는 게 있소?"
"딱 이 정도만 주십시오."
하이데는 다섯 손가락을 쫙 피며 말했다.
애매한 제스처에 루시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금화 다섯 닢을 달라는 거요?"
"무슨 소릴. 백금화 다섯 닢입니다."
루시안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지금껏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레이먼도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대가를 지불할 용의는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선을 아득히 넘긴 액수가 아닌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비록 정식 연금술사는 아니지만, 엄연히 길드에 소속된 몸. 황제 폐하의 직속인 기관에서 인재를 빼가려 하시는 건데 이 정도는 싼 대가지요."
아, 그러니까 이젠 황제와 엮겠다?
머리가 제법 잘 굴러가는 놈이었다.
개인의 다툼이 아닌 발데크 가문과 황실의 자존심 싸움으로 일이 커지면 곤란해지는 건 루시안 쪽이니.
가문의 가주 경쟁에 미치는 영향부터 삼공자라는 애매한 위치까지 전부 계산한 다음 내뱉은 소리겠지.
이전 반란 진압에 참여하지만 않았다면 루시안도 별 방법이 없었을 터.
하지만 놈은 오늘 계산을 잘못해도 한참 잘못했다.
"백금화 다섯 닢은 없고, 그 대신 이거 하나 드리겠소."
"뭡니까? 현물이라고 해도 그만한 가치가 없으면...!?"
콧방귀를 뀌던 하이데는 이내 루시안이 내민 동패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일황자의 친위대를 의미하는 검은 비늘 기사단의 문양을 알아본 듯했다.
"이, 일황자 전하와... 무슨 관계십니까?"
"무슨 관계냐고?"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나는 루시안 발데크다. 크레펠트의 반란 진압에 아버지인 지그문트 대공 전하를 대리하여 일천 정예를 이끌었고, 베른하르트 후작과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 블라스커 공과 빚을 주고받았다."
"...!"
"또한 일황자 전하의 위기에 일천 군사를 이끌고 이황자 전하와 함께 달려갔으며 위르겐 경과 같이 검을 휘둘렀다. 물러날 때는 황제 폐하의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영광까지 누렸다. 더 말이 필요한가?"
로그란 후작가의 현 가주, 화염학파의 수장, 황제의 두 아들, 검은 비늘 기사단의 단장은 물론 황제까지.
연신 쏟아지는 거물들의 이름에 하이데는 창백하다 못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었다.
루시안은 벌벌 떠는 하이데를 향해 차갑게 내뱉었다.
"다시 말해봐라, 이 상놈아. 황제 폐하가 뭐 어쨌다고?"
63화
하이데는 기겁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루, 루시안 공. 부디 진정하십시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 난 그런 뜻으로 들었는데. 내 귀가 망가졌다고 비꼬는 건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이어지는 모욕에도 분노는커녕 두려움만이 하이데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황제라는 소리가 거리낌 없이 나왔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서 황제 폐하를 언급하는 건 불경죄다. 설령 발데크 가문의 공자라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그 발데크 가문이라 더 위험한 일이야.'
황제와 가까운 대가문인 만큼 문제가 생기면 그만큼 황제의 귀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동시에 함부로 황제를 언급한 대공의 아들도 가주 경쟁에서 멀어지기 마련.
그런데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황제와 그 자식, 최측근들까지 대놓고 언급했다?
전부 진실이라는 소리였다.
'게다가 일황자의 친위 기사단인 검은 비늘 기사단의 징표까지 있으니....'
"눈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군. 또 뭘 요구할지 생각 중이냐?"
루시안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하이데는 쿵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처박았다.
"제발,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그렇고말고. 황실의 은덕에 기생하는 벌레 놈 주제에 마치 황제 폐하의 대리자인 것처럼 굴었으니 말이야. 폐하께서 들으시면 참 기뻐하시겠어."
"...!"
"마침 잘됐네. 연구 성과가 꽤 자랑스러운 듯한데 나와 같이 폐하를 알현하여 말씀드리는 게 어때? 이전에 폐하께서 내게 다시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다고 하셨으니 같이 가면 될 거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방바닥을 적셨다.
안 그래도 황실에서조차 반쯤 식충이 취급받는 연금술사 길드다.
그런데 그 연금술사 길드 소속원이 황제를 들먹이며 같은 전장을 달린 전우를 압박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황제가 불쾌해하기도 전에 연금술사 길드에서 먼저 나서서 광장에 목을 걸어버릴 가능성이 컸다.
"폐하를 알현하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겁에 질린 하이데를 향해 루시안이 차갑게 내뱉었다.
자신의 처지를 자각한 하이데는 이마를 바닥에 댄 채로 말했다.
"원하시는 건 뭐든 다 드릴 테니, 살려만 주십시오...!"
****
서열 정리를 마친 루시안은 이안이 깨어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집주인인 하이데는 그 와중 루시안의 눈치를 보며 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저, 괜찮으시다면 제가 차라도 대접을...."
"닥치고 가만히 있어. 차 타는 방법도 제대로 모를 것 같은데 대접은 개뿔이."
"...."
정곡을 찌르는 소리에 뭘 좀 해보려 했던 하이데가 도로 쭈그러들었다.
사실 루시안으로서는 하이데를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데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괜히 넥타르의 연구 자료라도 보면 골치 아프단 말이지. 어지간한 건 죄다 2층에 있겠지만, 무심코 다른 데 자료 일부를 놔뒀을 가능성도 있으니.'
하이데란 인간은 더없이 한심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연금술사다.
이안이 연구한 자료들을 보면 분명 그 가치를 어느 정도는 알아차릴 터.
가능하면 넥타르와 관련된 모든 걸 회수할 때까진 시야에 붙잡아 둘 생각이었다.
잠시 후, 이안의 상태를 살펴보던 레이먼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녀석이 깨어났습니다."
"몸 상태는 어때 보여?"
"약간 피곤해하는 거 빼곤 멀쩡하더군요. 대화를 나누기엔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좋아, 들어가서 대화 나누고 있을 테니 이 녀석 좀 감시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예? 여긴 제집입니다만...."
루시안은 소심하게 항의하는 하이데를 무시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는 깨어난 이안이 상반신만 일으킨 채 루시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일어나서 무슨 일인지 혼란스럽겠지. 설명부터 해주마."
"알아요."
"뭐?"
"완전히 잠든 건 아니었거든요. 힘이 없어서 가만히 있긴 했지만, 드문드문 깨어나 있었어요. 그리고 사실 이 집, 방음도 잘 안 돼요."
과연.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설명할 필요가 없다면 나쁘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이안은 이내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전 이제 발데크 대공가로 가는 건가요?"
"그렇지. 네 스승도 동의한 일이니까. 다른 보호자도 없다며?"
"역시. 제 발명의 가치를 알아보시고 탐내시는 거군요."
"...응?"
"알아요. 전 세기의 발명을 했으니까요. 이런 보물을 누가 안 탐내겠어요?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긴 만큼 제 지식을 가지고 싶으시겠죠."
루시안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만, 어째 자화자찬이 상당히 들어간 것 같은데.
무언가 한참 고민하던 이안은 몸을 떨며 쥐어짜내듯 말했다.
"부탁드려요. 제조법은 다 알려드릴 테니 연구를 계속하게 해주세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알고 있어요. 저 같은 고아 출신 애송이가 이런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제조법만 쏙 빼먹은 후에 내버리는 거죠? 온갖 고문을 해서 알아낸 후에 목을 그어서 입을 막고...."
"잠깐, 잠깐, 잠깐!"
루시안이 다급하게 이안의 말을 막았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어쩐지 심한 착각에 빠진 모양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개소리야? 왜 내가 널 고문해서 지식을 빼?"
"예? 그 약의 제조법을 탐내서 오신 거 아니었어요?"
"탐은 나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이 널 고용하면 되는 일이잖아. 물론 연구도 계속 시켜야지."
"지, 지식을 빼먹고 나면 전 쓸모가 없으니 입을 막는 게...."
"그건 분수에 안 맞는 정보를 우연히 손에 넣은 인간 이야기고. 넌 처음부터 연구한 제조자잖아. 계속 연구하게 하면 더 좋은 성과를 얻을 수도 있는데 그런 멍청한 짓을 왜 해? 황금알 낳는 거위 배를 가르는 꼴인데."
"...."
잠깐 눈을 끔뻑이던 이안이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이제야 자신이 생각했던 미래가 망상이란 걸 깨달은 듯했다.
"하여간 그런 지식은 어디서 얻은 거야? 보아하니 어디 안 나가고 여기 처박혀 연구만 한 것 같은데."
"시, 실버폴 가문의 비극에서요."
"실버폴 가문의 비극?"
"몇 년 전에 수도에서 유행한 소설인데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이안의 모습에 루시안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에겐 연구보다는 사회 공부가 더 시급한 것 같았다.
****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주군!"
사정을 알자마자 이안은 싹싹한 태도로 돌변하여 고개를 숙였다.
불만 하나 없는 모습에 오히려 루시안이 살짝 당황할 정도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고용한다고 해서 바로 연구를 재개시켜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몇 년 동안은 네가 오늘 개발한 약만 계속 제조해야 할 거야."
"상관없어요. 어차피 임상 시험 결과가 단 한 번 나왔을 뿐이니까요. 반복해서 제조하는 동안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저야 좋지요."
"연금술 관련 서적도 부족해. 길드와 달리 정보가 필요할 때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거다."
"어차피 제가 열람 가능한 서적은 전부 봤어요. 그 이상 중요한 정보를 보려면 계급이 올라가야 하는데 언제 올라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네가 만든 약만 보여주면 단숨에 오르는 거 아닌가?
루시안이 고개를 갸웃하자 의중을 읽은 이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에게 제 연구 성과를 보여드리려면 스승님을 통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전 스승님이 어떤 분인지 아주 잘 알죠. 제 은인이시지만, 이 자료를 보여드리면...."
"모조리 털어내서 죄다 자기 성과로 발표하겠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군."
루시안의 말에 이안은 대답하지 않고 자료 정리를 계속했다.
아무리 그래도 스승의 욕을 직접 하기는 께름칙한 모양이었다.
"됐다. 다 끝났어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자료 정리를 끝낸 이안이 환히 웃었다.
가져갈 자료는 커다란 책 세 권 분량 정도에 불과했고, 나머진 쓰레기처럼 한 군데에 모여 있었다.
"저것들은 뭐야?"
"잘못된 가설과 오류로 인한 실패 사례들이요. 중요한 건 아니니 그냥 버려도 돼요."
"혹시 모르니 태우고 가지. 괜히 누가 보고 쓸데없는 영감이라도 받았다간 곤란하니까."
루시안은 레이먼을 불러 폐기된 연구 자료들을 죄다 벽난로에 넣고 태워버렸다.
꼼꼼히 재가 되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루시안의 입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넥타르의 제조법은 나만이 독점하게 되었군.'
아직 세간에 공개할 순 없지만, 드디어 남들과 다른 루시안만의 무기가 생긴 셈이었다.
인재를 유혹할 수단, 허약한 신체를 치료하는 약, 강력한 병사의 양성 수단, 재정의 강화를 위한 무역 물품.
어떤 방식으로 쓰든 더없이 강력한 보물이 바로 넥타르였으니까.
"그럼 이만 가지. 배웅은 필요 없으니 집에 있도록."
"저, 루시안 공... 다른 건 몰라도 저놈이 횡령한 제 연구비는...."
"나랑 같이 폐하를 알현하고 싶다고?"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슬쩍 들러 붙어보려던 하이데는 루시안의 도끼눈에 냉큼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이안이 스승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 지금까지 감사했어요. 생각지도 못한 일로 이리 헤어지게 되었지만,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놈이 스승의 돈에 손을 대느냐? 낯짝도 두껍구나!"
"그 점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스승님은 나라에서 지원한 연구비를 쭉 유흥비로 사용하셨잖아요. 비록 제가 연구비에 손을 대긴 했지만, 그 결과 큰 성과를 얻었으니 학자로서 부디 절 이해해주세요."
"감히 네놈이 그딴...!"
"...."
"...기특한 말을 할 줄이야. 스승으로서 자랑스럽구나. 부디 행복하기를 바란다."
"예, 스승님."
루시안과 레이먼에게서 쏟아지는 살기에 울상이 된 스승을 보며 이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는 한없이 약한 스승이었다.
****
목적을 달성한 루시안은 수도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도둑 길드의 존을 찾았다.
나중을 대비하여 보험 삼아 도둑 길드와 가느다란 끈 하나를 만들어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존은 그대로 숨어버린 후 절대 루시안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상하군.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진즉 알았을 텐데 왜 안 나오지?"
"도둑놈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주군이 얼마나 황실과 가까운지 대충 눈치챘을 테니 당연히 도망치죠. 거래도 끝났으니 더 엮이고 싶지 않을 겁니다."
"하긴, 그것도 그런가."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 더 찾아오라고 협박이라도 할 걸 그랬나?
살짝 아쉬움을 느꼈지만, 어차피 반쯤은 보험에 가까웠기에 깔끔히 포기하기로 했다.
인연이 안 닿았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안을 데리고 검은 비늘 기사단의 숙소로 돌아간 루시안은 동패를 반납하며 감사를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징표 덕분에 골치 아픈 일을 상당히 피할 수 있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저희야말로 영광입니다."
진심을 담은 감사 인사에 기사는 환히 웃으며 동패를 돌려받았다.
전장에서 루시안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어 기쁜 듯했다.
떠나기 전에 관리하던 말들을 돌려받은 루시안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관리를 너무 잘했군. 며칠 사이에 살이 토실토실 올랐어.'
겨우 며칠이니 평범하게 관리해도 될 텐데 이토록 애지중지 돌보다니.
새삼 검은 비늘 기사단이 루시안에게 가진 호감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루시안 공."
"예, 여러분도 건강하시길."
마지막까지 정중하게 배웅을 받으며 루시안은 성벽의 열린 문으로 나아갔다.
처음 보는 기관 장치에 이안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성벽에 이런 출입구가 숨겨져 있었다니...."
"괜히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지 마라. 주군께서 저들에게 받은 신뢰이니, 함부로 그걸 깨서는 안 된다."
"옙!"
레이먼의 말에 이안이 군기가 잔뜩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학자가 아니라 주군을 섬기게 된 가신으로서 마음가짐을 배우고자 하는 것 같았다.
제법 기특한 모습에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라. 마음가짐 같은 건 선배들을 보면서 천천히 익히면 돼. 그보다는 네 연구에 힘쓰도록. 그편이 내게 더 도움이 되니까."
"예, 주군!"
연구를 계속할 수 있다는 좋은지 이안은 씩씩하게 소리쳤다.
그 대답에 만족한 루시안이 말고삐를 쥐며 속도를 높였다.
켈하임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돌아오는 길은 수도로 향할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이안의 저질 체력 때문에 쉬어가는 횟수가 늘어나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기는 했으나 그 점을 빼면 쾌적한 여행길이었다.
며칠 후 일행이 켈하임에 도착하자 이안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 큰 도시가 수도 외에도 또 있었군요."
"수도에 살던 녀석이 감탄할 정도는 아닐 텐데."
"그 전에는 작은 도시에서 살았어요. 스승님께서 절 제자로 들이면서 수도로 옮겨오긴 했지만, 수도 외의 도시는 다 똑같은 줄 알았죠."
이안의 말에 따르면 수도에 살긴 했어도 오갈 수 있는 장소가 워낙 적어 별 의미가 없었다고 한다.
사실상 하이데의 집과 시장, 약초상 몇 군데가 전부였으니 말이 좋아 수도 생활이었던 셈이다.
"스승님이 도시 생활에 맛 들이면 괜히 쓸데없는 데 돈을 쓰려 한다며 싫어하셨거든요. 여기서는 제 마음대로 다닐 수 있을까요?"
"뭐, 구석진 골목만 아니라면야 상관없겠지. 네 선배 하나 붙여줄 테니 길을 배워둬."
"감사합니다, 주군!"
루시안이 이안과 잡담을 나누며 외성 안으로 들어와 내성을 향할 때였다.
지금껏 조용히 주변을 살피던 레이먼이 루시안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주군, 어째 주변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분위기?"
"뭐라 설명하기 어려우니 직접 둘러보십시오."
삼공자에서 주군으로 바뀐 호칭을 들으며 루시안이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저들끼리 연신 쑥덕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루시안은 근처에서 순찰을 하던 경비대를 불렀다.
"이봐, 친구들. 잠깐 나 좀 보자."
"어느 놈이... 사, 삼공자를 뵙습니다!"
"인사는 됐고, 뭐 하나 물어보자. 영지 분위기가 이상한데 무슨 일 있나?"
루시안이 기겁하여 무릎 꿇은 경비대에게 묻자, 그중 한 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못 들으셨습니까? 검성이신 아이젠 경의 후계자께서 오늘 서임을 받는다고 합니다."
"오, 드디어 그날이 왔구만. 다들 그 서임식의 주인공이 궁금한 모양이지?"
"그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공자분들이... 흡!"
경비병은 말실수했다는 듯 냅다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이내 추궁하듯 쏘아지는 루시안의 시선을 못 이긴 경비병이 불안한 얼굴로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실은 아이젠 경의 후계자를 다른 공자분들의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서임식이 끝나 기사가 되면 주군을 정할 수 있으니 이참에 충성 맹세를 받을 생각이라고...."
"호오."
경비병의 설명에 루시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64화
기사의 서임식이 끝난 다음 곧바로 충성 맹세가 이어지는 일은 드물지 않다.
보통 서임식을 거행한 당사자나 기사로 추천해준 은인을 주군으로 섬기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임식 전에 미리 합의를 마쳐놓은 경우.
당사자의 의사를 묻지 않고 대뜸 충성 맹세를 강요하는 건 엄청난 실례였다.
'그런데도 이런 소문이 도는 걸 보면 다들 어지간히 조바심이 났나 보군.'
검성 아이젠의 제자인 만큼 펠리시아의 서임식은 꽤 요란하게 치러질 터.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셋이 동시에 나선다면 누가 되든 한 명은 선택하리라 생각했겠지.
서임식을 하는 건 지그문트 대공일 테고, 그 스승 역시 발데크를 섬기고 있는 만큼 직간접적인 은혜를 크게 입었으니.
'발데크의 자식들 중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배은망덕하다는 꼬리표가 붙겠지. 그 점을 노리고 들이대는 건가.'
하여간 잔머리하고는.
피식 웃은 루시안은 엎드려 있던 경비대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설명 고맙다. 이제 가보도록."
"예, 옙!"
루시안의 축객령에 경비대는 허겁지겁 근무지로 돌아갔다.
경비대가 멀어지는 걸 확인한 루시안이 레이먼을 향해 속삭였다.
"어떻게 생각해? 다른 형제들이 진짜로 펠리시아에게 충성 맹세를 강요할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도 그런 식의 충성 강요는 종종 일어나곤 하니까요."
"그리고 보통 소영주가 분수에 안 맞는 과분한 인재를 얻으려 할 때 쓰는 수단이지. 당당히 영입할 자신이 있으면 하지도 않을 짓이건만."
"그만큼 아이젠 경의 이름이 무겁다는 뜻이겠지요. 잘만하면 후계 구도를 한 번에 뒤집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정작 아이젠 경은 그따위 개수작을 굉장히 불쾌해할 텐데 말이야."
루시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불쾌함을 느낄 사람은 아이젠만이 아니다.
오랜 세월 아이젠과 함께하며 그를 존중해온 지그문트 대공의 눈에도 썩 달갑지 않겠지.
그런데 일을 벌이기도 전에 소문이 쫙 퍼질 만큼 눈독 들이는 모습을 대놓고 보여주다니.
"다들 어지간히 똥줄이 탔나 보군."
"주군의 행보에 다른 공자들도 조바심이 났겠지요. 상황을 뒤집을만한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결정적인 한 방이라. 마침 나도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참인데 말이야."
아무리 루시안이 요 1년 가까이 주가를 올렸다고는 하지만 다른 형제들보다 압도적인 위치라고 하긴 힘들다.
트리스탄과 조르디는 지금껏 쌓아온 기반이 있고 가장 후발 주자인 조슈아조차 외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으니까.
반란 진압으로 올린 명성 덕에 후계자 자리에 가장 가까이 가긴 했으나 아직은 충분히 제칠 수 있는 영역.
이참에 확고부동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으리라.
'마침 무대는 형제들이 마련해주었으니 숟가락만 올려보실까.'
****
"쯧."
검성, 아이젠 브라이트너는 혀를 차며 눈앞의 서신을 접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어제와 별다를 게 없는 내용이었다.
'서임식 때 본인이 나서더라도 부디 양해해달라? 제자가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 언질을 해주라고?'
발신자는 트리스탄, 조르디, 조슈아 중 하나로 매번 바뀌었으나 내용은 다 똑같았다.
이토록 무례한 행위인 줄 안다면 그만두면 될 것을, 매번 자신이 저지를 무례를 미리 사과하는 건 무슨 위선이란 말인가?
하물며 누군가의 목숨이 걸린 것도 아닌, 한갓 탐욕 때문에 저지르는 무례라면 더더욱.
'무엇보다도 양해를 구할 상대가 잘못되었다. 사과하려면 내가 아니라 그 아이한테 해야 하거늘. 내 눈치만 보며 그 아이의 의견은 신경도 안 쓰다니.'
아이젠의 허락만 얻을 수 있다면 당사자의 의지는 제 뜻대로 굽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발데크 가문을 오랜 시간 섬겨온 만큼 차마 욕을 내뱉지는 못했지만, 속에서 치솟는 불쾌감은 어쩔 수 없었다.
"펠리시아."
후우웅
"예, 아버지."
한창 검을 휘두르던 펠리시아가 아이젠의 부름에 냉큼 자세를 바로 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무너지지 않는 균형이 아이젠을 흐뭇하게 했다.
"읽어 보거라. 내게 온 편지긴 하지만, 사실상 네게 온 것이나 다름없으니."
펠리시아는 아이젠이 내미는 편지를 받아 빠르게 훑어봤다.
잠시 후, 불쾌감을 애써 억누른 듯한 목소리가 펠리시아에게서 흘러나왔다.
"여전하군요. 남들이 보는 앞에서 압박하면 제가 받아들이리라 생각하는 걸까요?"
"세간에서 이런 방법이 횡행하는 건 사실이니 말이다. 다른 이들이 하는 걸 보고 배웠겠지. 안타까운 일이다."
조르디야 원래 이런 수작질을 벌이는 데 거리낌이 없는 인간이었지만, 다른 두 공자는 아니었다.
트리스탄은 모략을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기질이었고 조슈아는 정도를 몰라 선을 넘을지언정 알면서 일부러 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젠 그 두 사람조차 조르디의 나쁜 점을 닮아가고 있었다.
'상황이 다급해진 나머지 펠리시아를 얻고자 잠깐 신념을 꺾은 것인지, 아니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쪽으로 아예 방향을 바꾼 것인지.'
전자라면 몰라도 후자라면 끔찍한 일이었다.
아이젠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는 와중 편지를 다 읽은 펠리시아가 결연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전 어느 분께도 충성을 맹세하지 않겠습니다. 평생 섬길 분은 제가 아버지의 딸이 되었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요."
"그게 네 뜻이라면 원하는 대로 하거라. 강제로 바치는 충성 따위에 의미는 없는 법. 기사라면 스스로 주군을 정해야지."
펠리시아의 대답을 알고 있던 아이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 충성이 누구한테 향하는지는 전부 알고 있었으니까.
아마 서임식을 주관하는 대공 역시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굳이 공자들의 무리수를 막지 않는 건 뒷공작의 결과가 얼마나 허무했는지 알려주기 위함이신가. 대공 전하도 참으로 엄격하시군.'
그리 생각하면서도 아이젠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펠리시아의 충성을 얻겠답시고 찍어누르려던 공자들이 헛물을 켜는 모습은 아이젠도 꼭 한번 보고 싶었으니까.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잡아먹었구나. 서임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다시 수련을 시작하자꾸나."
"예, 아버지."
"저... 아이젠 경, 또 편지가 왔습니다만."
막 수련을 재개하려던 아이젠이 눈을 찌푸렸다.
이번엔 또 누구란 말인가?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편지를 낚아챈 아이젠이 발신인을 확인했을 때였다.
"삼공자?"
아이젠의 중얼거림을 들은 펠리시아가 흠칫했다.
볼일이 있어 수도에 갔다더니 그새 돌아온 걸까?
잠시 후, 편지를 뜯어 내용을 확인해 본 아이젠은 웃음을 터트렸다.
"거 참, 삼공자께서는 여전하시군!"
"뭐라 쓰셨습니까?"
"직접 보거라!"
아이젠이 유쾌하게 웃으며 펠리시아에게 편지를 넘겨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편지를 다 읽은 펠리시아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편지에는 오후에 있을 서임식에서 루시안이 일으킬 파란이 예고되어 있었다.
****
루시안은 돌아오자마자 휴고를 불러 이안을 맡겼다.
갑자기 등장한 연금술사를 애지중지 곁에 끼고 있으면 주변에서 수상히 볼 게 뻔했기 때문이다.
남들의 시선을 피하여 넥타르를 제조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데 은신처를 만들어줘야 했다.
'가능하면 쾌적한 집이라도 한 채 마련해주고 싶지만, 월광초를 사는 데 족족 써버려서 돈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지. 한동안 휴고에게 맡기는 수밖에.'
휴고는 루시안에게 사정을 듣자마자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어렵지 않군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혹 부족한 게 있으면 말해. 지원할 수 있는 부분은 전부 지원해줄 테니까."
"저 모르십니까? 한때 대공 전하의 이목조차 속이고 약 제조소를 만들었던 휴고입니다. 연금술 기구 딸린 은신처 정도야 어렵지 않지요."
허세가 섞인 호언장담에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앞서 해본 경험이 있는 만큼 두 번째는 더 쉽게 할 수 있겠지.
당사자인 이안도 한동안은 대도시를 마음껏 구경하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연구에 대한 열망이 식은 건 아니지만, 내심 세상 구경을 하고 싶다는 욕망도 있던 모양이었다.
"약의 재료는 최대한 공수해줄 테니까 그동안 켈하임에 익숙해지도록. 오래 걸리진 않을거다."
"예, 주군. 바로 제조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둘 테니 언제든 말씀만 해주세요."
이안이 빠릿빠릿하게 대답하며 나가자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다른 인재들과 달리 평범한 소년처럼 보이는 이안에게 의구심을 느끼는 듯했다.
"도련님, 정말 저 녀석이 수도까지 가서 데려올 가치가 있는 녀석이었습니까? 꿩 대신 닭으로 데려온 거 아니에요?"
"그 반대야. 닭을 데려올 뻔하다가 꿩을 찾아냈다고 해야겠지. 운이 좋았어. 그나저나...."
루시안은 말끝을 흐리며 한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살이 쪽 빠져서 수척해 보일 지경이었다.
"너, 몸 괜찮은 거냐? 어디 아픈 건 아니지?"
"하하, 멀쩡합니다. 집사 수업이 조금 힘들어서 살이 빠지긴 했지만요. 열심히 배우는 중인데 참으로... 참으로...."
한스는 말을 하다 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마나 수업이 힘든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안색이 나빠지는 게 보일 정도였다.
"힘들면 며칠 정도 쉴래? 몸이 아프다고 내가 대신 말해줄 수도 있는데."
"아뇨, 괜찮습니다."
걱정 섞인 루시안의 제안에 한스가 냉큼 고개를 저었다.
"힘들긴 하지만, 새로 배울 때마다 성취감도 느끼곤 하니까요. 도련님 옆에 계속 서려면 이 정도야 고생도 아니지요."
"하여간 고집하고는."
루시안은 그리 말하면서도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었다.
휴고도 그렇고 한스도 그렇고 삶의 자세 하나는 더없이 마음에 드는 가신들이었다.
잠시 루시안과 대화를 나누던 한스는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서임식입니다만 도련님도 참석하실 겁니까? 여독 때문에 피곤하시다면 빠져도 뭐라할 사람은 없을 텐데요."
"부재중이라면 모를까 가문에 돌아왔다면 당연히 참석해야지. 다름 아닌 아이젠 경의 후계자가 등장하는데 내가 빠져서야 쓰나."
그냥 구경만 해도 끝내주게 재밌을 텐데 판까지 깔아놨다.
루시안으로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대략적인 시간을 확인한 루시안이 서임식 장소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형님?"
"오, 조슈아."
우연히 길목에서 마주친 조슈아를 보고 루시안이 반갑게 인사했다.
반대로 조슈아는 루시안을 보자마자 질린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수도에 가신다더니 그사이 돌아오셨나 보군요."
"아슬아슬했지. 하마터면 서임식을 놓칠 뻔했어."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설마 형님도 아이젠 경의 제자를 노리는 건 아니겠죠?"
"왜? 나는 그러면 안 되냐? 듣자 하니 너랑 형님들도 다 노리는 것 같은데."
루시안의 대답에 조슈아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형님이 요즘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긴 합니다만, 이번에는 그냥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어째서?"
"검성의 후계자쯤 되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형님께 간답니까? 솔직히 말해 형님이 그만한 기사에게 어울리는 대접을 해줄 수 있을 만큼 재정이 풍족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뭐, 확실히 돈에 쪼들리긴 하지."
세 형제 중에서 외가의 지원을 못 받는 건 루시안 뿐인 데다, 조르디에게 받은 보상금도 죄다 월광초 구매로 빠져나갔으니 말이다.
루시안이 동의하자 조슈아가 이참에 세상 물정을 알려주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진정한 인재라면 결코 자신을 싸게 내놓지 않습니다. 돈이 탐나서가 아니라 대우야말로 인재를 대외적으로 인정하는 수단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스스로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 선언하는 꼴이니까요."
"흠."
"하물며 검성의 후계자가 뭐가 아쉬워서 형님 아래로 들어가겠습니까? 옛날옛적에 목숨이라도 구해줬다면 몰라도 봉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가난뱅이 주군 휘하에 들어가 자신의 가치를 낮출 이유가 없잖습니까."
65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본인이 인재란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자신을 싸게 팔지 않는 법.
루시안이 그토록 넥타르를 찾아다닌 이유 중 하나도 그 때문이 아닌가.
그 어떤 인재건 기사라면 단박에 유혹할 수 있는 수단이니까.
"확실히 목숨 빚이라도 지워놓지 않는 이상은 그러겠지."
"알고 계신다면 다행이군요. 그러니 여기서는 다른 형제들에게 얌전히 양보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글쎄다."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모르지. 내가 검성의 제자한테 나도 모르는 사이 목숨 빚을 지워놓았을지도."
"그건 또 뭔...!"
"농담이야. 너무 긴장하지 마라. 네가 영입할 수 있다면 어차피 내 기회는 오지도 않을 텐데 뭘."
"하."
조슈아는 멍하니 루시안을 쳐다보다 헛웃음을 내뱉었다.
할 말은 많지만 중요한 일이 있으니 참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했습니다. 곧 서임식이니 먼저 가보지요."
"가는 길도 같으니 동행하는 게 어때? 형제끼리 오붓하게 대화도 나누고 말이야."
"사양하지요!"
루시안의 제안에 조슈아는 얼굴을 와락 구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루시안이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재미있는 녀석이라니까."
어느 정도 세상 풍파를 겪어본 트리스탄이나 조르디와 달리 순진해서 놀리는 맛이 각별했다.
가능하다면 좀 더 순진하게 두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조슈아가 어른이 될 시간이었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조르디처럼 변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조슈아가 조르디처럼 바뀐다면 루시안도 진심으로 밟아줘야 할 테니까.
가능하면 적당히 놀려먹는 맛이 남아있는 동생으로 남아있길 바랄 뿐이었다.
****
서임식은 예상대로 화려했다.
내성 밖의 모든 영민이 보는 곳에 단상이 마련되었고, 길에는 붉은 융단이 깔렸으며, 그 양쪽에는 기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보통 서임식이 십수 분 안에 끝나는 간단한 행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모든 게 검성 아이젠을 향한 존중과 예우였다.
'뭐, 이목이 쏠리는 장소에 서 있을 필요는 없어서 좋네. 군중들 사이에 끼어있으면 일을 벌일 때의 주목도도 커질 테고.'
오늘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펠리시아인 만큼 다른 이들이 지나친 주목을 받아서는 안 되는 법.
비록 대공의 아들들이라 할지라도 따로 자리를 마련하진 않았기에 다른 기사들 뒤에서 숨어있을 수 있었다.
서임식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사이, 또 다른 인물이 루시안이 있는 위치로 다가왔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너, 이놈!"
"오랜만입니다, 형님."
애써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에 루시안이 반색하며 손을 휘저었다.
조르디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무심코 되물었다.
"대체 언제 온 것이냐? 한동안 수도에 머무를 생각이라 들었다만."
"얼마 안 되었습니다. 기껏해야 몇 시간 전이죠. 평소라면 진즉 보고를 받으셨을 텐데, 서임식 때문에 정신이 없으셨나 봅니다?"
루시안의 비아냥에도 조르디는 분노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낭패와 당혹감을 대놓고 드러냈다.
'나와 펠리시아의 관계를 대충 알고 있나 보군.'
펠리시아를 데려왔을 당시 트리스탄은 보른홀름에 파견 중이었고 조슈아는 막 경쟁에 참여한 햇병아리.
정보망을 제대로 구축한 채 가문에 있었던 건 조르디 뿐이니 대략적인 사정을 알고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습니다. 서임식이 왜 이리 갑자기 치러지나 했는데, 형님이 손을 쓰신 모양입니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 서임식과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조르디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넘기려 했지만, 순간적인 움찔거림은 감출 수 없었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루시안은 차갑게 웃었다.
"추잡한 수단을 쓰는 데는 여전히 망설임이 없으시군요. 어디 잘해보십시오. 꼴사납게 발버둥을 치고도 패배하면 추잡함만 남을 테니까요."
"우쭐대지 마라. 아무리 능력과 명성이 있어도 뒷받침할 세력이 없다면 그저 졸로 남는 게 고작이다. 네놈은 어디까지나 잠깐 반짝거리는 유성에 불과해."
"한창 반짝거리는 와중에 그런 소릴 해봤자 패배자의 울부짖음처럼 들릴뿐이지요."
루시안의 비아냥에 조르디의 눈이 치켜 올라갔으나 거기서 끝이었다.
괜히 서임식 전에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진 않았는지 조르디는 순순히 물러섰다.
잠시 후, 트리스탄도 다른 형제들을 보고는 혀를 차며 조금 떨어진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미묘한 긴장감 속에서 네 형제가 묵묵히 침묵을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철컥
잠시 후,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서임식의 주인공을 보고 구경꾼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
"투구?"
"아니, 서임식에 투구라니!"
"이런 무례가 있나!"
기사들은 발끈하여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주변에서 구경하던 영민들도 쑥덕대기 시작했다.
업무 중이나 전장이 아니라면 투구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는 어디에서나 실례로 통했으니까.
하지만 검성의 제자는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붉은 융단을 걸어 지그문트 대공 앞에 섰다.
"투구를 벗도록."
지그문트 대공은 모두에게 들리도록 엄숙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기사는 순순히 투구를 벗어서 얼굴을 드러냈다.
"여자!?"
"검성의 후계자가 여자라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펠리시아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흩날리자 사방에서 경악이 터져 나왔다.
여자 기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화 속 이야기.
현실에서는 정치적 명예직을 제외하면 실제로 검을 휘두르는 여기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검성의 후계자가 여자라니.
"위대한 검성, 아이젠 브라이트너의 제자여. 이름을 밝혀라."
"아이젠 브라이트너의 양녀, 펠리시아 브라이트너라 합니다."
"그대 펠리시아에게 묻겠다. 기사로서 무엇을 추구하겠는가?"
"충성을. 오직 절대적인 충성을."
간결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주변의 기사들이 흠칫했다.
보통은 정의라던가 선을 위한다는 맹세가 들어가기 마련인데 충성만을 언급하다니.
대공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펠리시아를 향해 물었다.
"설령 그대의 주군이 악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충을 지키겠는가?"
맹세의 모순을 정확히 꼬집은 물음이었지만, 펠리시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주군께서 악이 되고자 한다면 같이 악이 되어 진창에 구를지라도 함께 하겠나이다. 여덟 신께서 주군을 지옥에 떨어뜨리신다면, 오직 그 책임을 혼자 지고 지옥에서 영겁을 불타겠나이다."
과격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지그문트 대공은 침묵했다.
설마 간단한 시험에 이 정도의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그대의 주군이 부디 올바른 결정을 하기를. 위대한 기사를 위대한 길로 인도할 지혜가 있기를."
고민하던 대공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경직된 분위기를 넘기며 검을 내밀었다.
펠리시아가 무릎을 꿇자 검은 느릿하게 양쪽 어깨와 목 뒤를 툭툭 두드렸다.
"지그문트 발데크의 이름으로 그대의 명예를 보증하노니, 펠리시아 브라이트너. 이제 그대는 기사로다. 부디 나와 그대 모두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기를 바라노라."
서임이 끝나고 펠리시아가 일어섰으나 다른 서임식처럼 환호성이 터져 나오진 않았다.
아직 다들 검성의 제자가 여자란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침묵이 속삭임으로, 속삭임이 수군거림으로 바뀌기 직전이었다.
"대공 전하! 무례를 알면서도 한 가지 청을 드리고자 합니다!"
날카로운 인상의 기사가 뛰쳐나와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난입에도 대공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라."
"기사란 검으로 말하는 법! 과연 그녀에게 기사의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게 해주소서!"
"음."
도발에 가까운 언사에 대공이 펠리시아를 쳐다보았다.
도전을 받아들이겠냐는 의미가 담긴 시선이었다.
펠리시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지요. 기사는 검으로 말하는 법. 그토록 의심된다면 직접 보십시오."
"감사하오!"
갑작스러운 결투에 주변이 웅성거렸지만, 동시에 묘한 기대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다름 아닌 검성의 제자, 그것도 동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여기사의 실력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루시안은 결투를 위해 만들어진 원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지께서 아이젠 경과 함께 판을 만드신 모양이군.'
여기사란 존재는 사회적으로 생소하다 못해 위화감이 느껴지는 존재.
다른 이들이 쑥덕거리기 전에 실력을 남들 앞에 보여줘 입을 다물게 하려는 목적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감히 대공과 검성이 동의한 서임식에 난입하여 이런 짓을 벌이겠는가.
다 사전에 합의된 사안인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아이젠 경에게 배운 펠리시아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감이 안 잡히네. 제대로 된 스승이 있었으니 전생보다 훨씬 더 발전했겠지?'
루시안이 상념에 잠긴 사이 어느새 마련된 원 안에서 두 기사는 검을 들고 서로 마주 섰다.
"이 결투가 여덟 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정정당당한 일전이 되기를."
대공은 입회인이 해야 할 의례를 마치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두 검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겼다.
****
쩌엉, 카가각, 키잉
"...."
"...."
결투가 시작된 지 10분 후.
눈앞에서 벌어지는 결투에 시선을 뺏긴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그중에는 루시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름답군.'
보통 결투라면 피와 살이 튀기는 후끈한 열기를 떠올리기 마련.
하지만 펠리시아는 마치 춤사위 같은 움직임으로 부드럽게 검격을 쳐냈다.
상대방은 분명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검격을 쏟아내는데, 펠리시아는 훤히 보이는 움직임으로 그 모든 걸 막아냈다.
"...저게 진정 사람이 가능한 움직임인가?"
루시안 근처에 있던 기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말에 주변의 다른 이들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훤히 보일 정도로 느린 검이 제대로 따라가기도 힘든 검을 막다니!
모두가 놀라는 와중 루시안은 결투의 흐름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보인다.'
이전에 복용한 넥타르의 효과로 열린 눈은 펠리시아의 의도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의 춤추는 듯한 움직임은 전부 상대가 미리 검을 향할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검사라기보다 검을 읽는 예언자에 가까운 움직임.
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건 흐름을 읽고 망설임 없이 즉석에서 대응하는 펠리시아였다.
'이게 진짜 천재라는 인종인가.'
루시안은 몸에 전율이 흐르는 걸 느꼈다.
분명 똑같은 걸 보고 있음에도 루시안은 펠리시아처럼 움직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마력을 읽는 눈, 본능에 가까운 반사 신경, 즉석에서 내리는 완벽한 판단에 검에 매료된 성품까지.
'오직 검술만을 익히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군.'
신이 인간에게 검술의 가능성을 알려주기 위해 내려보낸 사도가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 만큼 펠리시아의 움직임은 범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쩌어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검이 튕겨 나가자 결투를 신청한 기사는 공세를 멈추고 물러섰다.
쉴새 없이 공격한 반동인지 기사는 전신에서 땀을 폭포처럼 흘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펠리시아는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도 없다는 듯 가볍게 검을 내렸다.
"더 하시겠습니까?"
"...아니, 충분하오."
기사는 씁쓰레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평생의 노력에도 닿지 못하는 천재를 경험하니 허탈감을 느끼는 듯했다.
'결투 신청은 미리 합의해뒀겠지만, 저 감정만큼은 진심이겠지. 나 역시 그랬으니.'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으려니 그새 감정을 추스른 기사가 펠리시아에게 경의를 표했다.
"기사는 검으로 말하는 법. 그대는 자신을 증명했소. 우습게도 나는 그대를 시험할 자격이 없었던 듯하지만."
"그대가 검에 쌓아온 무게는 검을 맞댄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절 시험한 게 선배이기에 전 이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과분한 칭찬이오."
펠리시아의 인정에 기사는 겸손히 사양하면서도 감격한 얼굴을 드러냈다.
'여기사'가 아니라 '차기 검성'에게 표하는 경의였다.
결투를 신청했던 기사가 물러나자 대공이 다른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펠리시아 경은 자격을 증명했다. 아직도 그녀를 더 시험해보고 싶은 자가 있다면 지금 나오라!"
나오는 기사는 누구 하나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미 바뀐 지 오래였다.
동화에서 나올 법한 시대착오적인 여기사가 아니라 진정한 동화 속 여기사의 재림으로.
아무도 나서지 않는 걸 보고 재차 대공이 소리치려 할 때였다.
"트리스탄 발데크가 펠리시아 경에게 묻고자 하오!"
지금껏 가만히 있던 트리스탄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트리스탄은 펠리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사람의 기사로서 나를 섬길 생각은 없는가!"
"...!"
당돌하다 못해 무례함마저 느껴지는 제의였다.
그러나 트리스탄은 멈추지 않았다.
"그대가 내 휘하에 오겠다면 항상 내 옆에서 말을 달리고, 같은 탁자에서 식사를 할 것이며, 마지막 숨결을 내뱉을 때 유언을 받들게 하리라! 그대, 검성의 이름을 이어갈 자여! 대답을 듣고 싶다!"
섬기는 군주와 같이 말을 달리고 식사를 함께한다는 건 사실상 친우나 마찬가지로 대우한다는 뜻.
유언을 받들게 한다는 건 죽어서도 후계를 맡길 만큼 신뢰한다는 뜻이니 가신이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예우였다.
인재에 대한 열망으로 번뜩이는 트리스탄의 제의에 펠리시아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의는 감사하나 거절하겠습니다."
"무슨...!"
"그렇다면 내게 올 생각은 없는가!"
거절에 놀란 트리스탄이 이유를 되묻기도 전에 한 박자 늦은 조슈아가 허겁지겁 나섰다.
볼썽사나운 모습이었지만 펠리시아만 얻을 수 있다면 체면 따윈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내게 온다면 어떤 기사도 그대의 위에 서지 못할 것이며, 모두가 그대에게 경의를 바칠진저! 내 숨이 끊어지는 그 날까지 이 약속은 지켜지리라!"
과장이 다분히 섞여 있긴 했으나 요점은 펠리시아를 죽을 때까지 2인자로 삼겠다는 소리였다.
그 어떤 공을 세우든 조슈아 휘하에서는 펠리시아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서지 못할 거라는 약속인 셈.
하지만 펠리시아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높은 평가에 감사드리나 거절하겠나이다."
"...!"
두 번에 걸쳐 발데크의 혈족을 거절하자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지그문트 대공에 의해 서임식을 받았으면서도 충성 맹세는 전부 거부할 셈인가?
그때 여유만만한 얼굴의 조르디가 일어서서 소리쳤다.
"차기 검성, 펠리시아여! 내게 검을 바칠 생각은 없는가? 그대가 내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내 능력이 닿는 한 그 어떤 요구든 들어주리라! 하늘의 여덟 신이여, 제 맹세를 들으소서!"
"흡!"
"만신전의 맹세!"
조르디의 입에서 나온 만신전의 맹세에 사람들은 기겁했다.
한번 입 밖에 꺼내고 나면 절대 물릴 수 없는 맹세 아닌가.
자칫하면 평생 자신을 속박할 수도 있음에도 저리 거리낌 없이 내뱉다니.
담대함을 넘어선 무모함에 대공이 눈을 찌푸리고 다른 이들이 숨을 죽일 때였다.
"과분한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거절할 수밖에 없는 무례를 용서하소서."
"...!?"
"제 검은 이미 바치기로 한 상대가 있으니, 그 어떤 제안이 오더라도 그분 외에는 충성을 맹세할 생각이 없습니다."
단호한 펠리시아의 대답에 조르디는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만신전의 맹세까지 했건만 사람들 앞에서 이토록 망신을 주다니!
계속된 거절에 사람들 사이에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순간, 루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갔다.
"루시안 발데크가 그대에게 제안한다. 보다시피 비루한 몸뚱이 하나가 전부니 그대에게 약속할 수 있는 건 무엇 하나 없다."
"...."
"미래는 불확실하고, 보상은 적은 데다, 끊임없는 위험이 그대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함께한다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리라. 나와 함께 하겠는가?"
형제들은 물론 구경꾼들마저 루시안의 제안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제 나름대로 낭만을 챙기려 한 것 같지만 저래서야 거절해달라고 부탁하는 꼴이 아닌가.
사람들이 이번에도 '제안은 감사하나'로 시작될 펠리시아의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제안을 잘못하셨습니다."
빙그레 웃은 펠리시아가 루시안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지옥의 한가운데라 할지라도 상관없으니. 그저 곁에만 있게 해주십시오."
66화
펠리시아의 충성 맹세에 모든 이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어떤 보상도 필요치 않으니 섬기게만 해달라니.
헌신적이다 못해 광기마저 느껴지는 충성심이 아닌가.
모두가 충격을 받았지만, 그중 가장 심한 충격을 받은 건 루시안의 형제들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아... 아...!"
트리스탄은 조금도 예상치 못한 광경에 눈을 부릅떴고, 조슈아는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피가 배어 나올 만큼 입술을 꽉 깨문 조르디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붉어져 있었다.
형제들의 속이 뒤집히는 와중에 루시안은 검을 뽑아 펠리시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다면 루시안 발데크가 맹세컨대 그대와 나는 지옥까지도 함께하리라!"
군신 간의 맹세가 끝나자 펠리시아는 깊게 고개를 숙인 후 루시안의 옆에 섰다.
차기 검성의 주인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에 기사들이 다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이럴 때는 축하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건만, 모두 넋이 나가버린 탓에 환호성이 나오질 않았다.
탁, 탁, 탁
그때, 갑자기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몇몇 기사들은 검집을, 몇몇 병사들은 창대를 바닥에 찍으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전장에서 존중받아 마땅한 상대에게 경의를 표할 때 사용되는 특유의 의례였다.
텅, 텅, 텅
처음에 겨우 몇 명이 두드렸을 뿐이지만, 점차 그들의 행동을 보고 병사와 기사들이 동참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늘어날수록 소리도 점차 커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의례에 당황하던 기사들은 이내 그들이 왜 이러는지 알아차렸다.
'이전에 있었던 크레펠트의 반란 진압에 참여한 이들이구나!'
'자신들을 지휘했던 삼공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건가.'
쿵, 쿵, 쿵
켈하임 전체에 퍼져 나가는 진동은 마치 그들의 외침과도 같았다.
자신들만큼은 루시안이 차기 검성의 충성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한 외침.
점점 커지던 그들의 외침이 절정에 달한 순간.
"와아아아아아아!"
"삼공자 만세!"
"펠리시아 경 만세!"
"발데크여, 영원하라!"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오며 두 명의 군신을 축복했다.
병사들의 의례가 이어지는 동안 루시안이 세운 업적을 모든 이가 다시 떠올린 덕이었다.
아직 얼떨떨함이 남아있던 사람들조차 열기에 휩쓸려 저도 모르게 축복을 내뱉었다.
사방에서 환호를 받으며 루시안과 펠리시아는 서로에게 속삭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주군."
"나야말로."
****
-검성의 후계자가 사실 여자란다!
-게다가 삼공자에게 충성을 맹세했단다!
서임식 이후, 두 개의 소문은 폭풍처럼 발데크 영지 전역을 강타했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동화 속 여기사라는 존재가 실제로 등장한 것도 놀라운데 충성을 맹세한 대상이 유망주에 불과한 삼공자라니.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야? 삼공자께서 분명 두각을 드러내고는 있다지만, 검성의 후계자를 감당할 수준은 아니지 않은가?"
"설마 아이젠 경이 의도하신 건가? 후계자를 통해 삼공자에 대한 지지를 드러낸 거라면...."
"헛소리! 정치에 개입하시지 않겠다고 직접 말씀하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지나간 일을 꺼내 드나?"
"아니,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잖나! 안 그래도 여자라는 것 때문에 구설수에 휘말리기 쉬울 텐데 뭐가 아쉬워서!"
발데크 가문 내의 기사들은 물론이고, 소문을 들은 외부 영지의 기사들마저 이 충격적인 사건에 들썩였다.
그만큼 검성이란 이름이 가지는 무게감은 컸다.
예상치 못한 일에 온갖 허무맹랑한 추측이 오갈 무렵, 발데크 가문에서 진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들은 소린데, 사실 펠리시아 경을 아이젠 경께 추천한 사람이 삼공자였다는군."
"뭣? 그럼 그 전에는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느 가문의 서녀였다고 하네. 집안에서 푸대접받는 펠리시아 경의 재능을 삼공자께서 알아보고 데려왔다지."
"허,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삶을 구원해준 은인이라 이건가."
"하긴. 그렇다면 삼공자 외에 다른 사람을 섬기는 건 말이 안 되지. 기사는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죽는 법."
사정이 밝혀지자 기사들은 일제히 루시안과 펠리시아의 미담에 찬사를 보냈다.
세상을 놀라게 할 재능이 있더라도 그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없다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뿐.
명예에 집착하는 기사에게 재능을 알아보고 명성을 떨칠 기회를 준 은혜란 목숨 빚보다도 무거웠다.
진실이 퍼져 나감에 따라 뜬소문은 가라앉았지만, 이번엔 다른 이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삼공자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유야 어찌 됐건 그녀는 차기 검성이다. 그 상징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
'검성의 이름에 매혹당한 기사는 많다. 호승심이든 경외든 젊은 검성 주변에는 기사가 불나방처럼 모여들기 마련.'
'하물며 여자라면 그 힘을 시험해보기 위해서라도 찾아오겠지. 이거 큰일이군. 이러다 개입할 틈도 없이 세력이 만들어지겠어.'
루시안을 유망주 취급하며 개입하지 않던 이들은 뒤늦게 조바심을 냈다.
아무리 쟁쟁한 공을 세웠다 해도 겨우 1년이니 투자하기엔 이르다 생각해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거늘.
계속 어물쩍거리다가는 차기 검성의 명성을 통해 세력이 만들어질 판 아닌가.
인재들이 충분히 모인 후에 비집고 들어가려면 그만큼 이익도 적어지는 법.
'안 되겠다. 더 늦기 전에 최소한의 인연이라도 만들어둬야지.'
'다른 건 몰라도 삼공자에게 재력은 없어. 일단 선물을 보내면서 조금씩 환심을 사는 수밖에.'
'이참에 세력을 갈아타야 하나? 투자한 액수는 아깝지만 차기 대공과 같은 배에 오를 수 있다면....'
루시안의 명성에 업혀 가려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무력과 재력을 움직일 수 있는 진짜 실력자들의 등장이었다.
****
"도련님, 또 선물이 왔습니다만."
"보낸 사람은 누구야?"
"로트 상단의 지부장이랍니다."
"대충 구석에 박아둬."
루시안은 선물과 함께 온 편지를 확인하지도 않고 손을 휘휘 저었다.
한가득 쌓인 선물 더미 사이로 또 하나의 물건이 추가되는 걸 보며 한스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받은 게 있으니 답장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답장은 무슨. 자기들이 아쉬워서 들이대는 것뿐인데. 무시하기 곤란한 수준의 권력자라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슬쩍 옆을 돌아본 루시안이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내 곁에는 든든한 차기 검성이 있으니 말이야. 놈들이 앙심을 품더라도 무서울 건 없지."
"과분한 말씀입니다."
펠리시아는 주군의 신뢰에 응답하듯 깊게 고개를 숙였다.
서임식 이후 루시안은 펠리시아를 호위 기사로 임명하고 쭉 자신의 곁에 두었다.
차기 검성과의 인연을 외부에 과시함과 동시에 군신 간의 친목을 다지기 위함이었다.
'아이젠 경에게 융통성이 있어서 다행이군. 수련이 급한 상황이니 나중에 보내겠다며 냉큼 데려가도 뭐라하지 못했을 텐데.'
루시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명이 얼마 안 남은 만큼 아이젠으로서는 검식의 전수부터 마치고 싶을 터.
하지만 의외로 아이젠은 루시안의 제안을 순순히 수락했다.
-뜻대로 하십시오. 충성을 맹세하자마자 주군의 곁을 떠나는 기사라니, 제가 생각해도 기괴하군요. 조금 시간을 들이더라도 괜한 오해는 불식시키고 가는 편이 좋겠지요.
겨우 몇 달 동안 펠리시아를 가르쳤을 뿐이건만 아이젠의 얼굴에서 조급함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루시안의 제안을 받아들여도 자신의 모든 걸 전수할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나온 여유이리라.
'하여간 대단한 재능이야. 본인의 수명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아이젠 경을 저리 여유만만하게 만들다니.'
루시안은 펠리시아의 재능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묘한 기쁨을 느꼈다.
이제 그 경천동지할 재능의 기사는 온전히 자신을 섬기고 있었으니까.
문득 루시안의 머릿속에 형제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다른 형제들에 대해서 뭐 들은 건 없어? 서임식 이후로 시간이 좀 지났는데 말이야."
검성의 후계자를 놓쳐서 좌절하고, 분노하고, 새파랗게 질리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했다.
그땐 당장이라도 검을 빼들고 달려들 듯했는데 어째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저도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첫째 도련님은 서임식 이후 칩거하셨다고 합니다. 방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오신다더군요."
"다른 두 사람은?"
"자주 모이는 듯합니다만, 곧잘 다투고 헤어진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트리스탄은 충격으로 방에 틀어박혔고, 조르디와 조슈아는 불신감에 동맹을 제대로 맺지 못하는 건가.
의외의 결과에 루시안은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
셋이서 즉시 동맹을 맺고 루시안을 끌어내리려 들 줄 알았건만 이토록 뿔뿔이 흩어지다니.
'뭐, 나야 잘된 일이지.'
형제들의 견제가 없다면 더욱 시간을 알차게 쓸 수 있으니 말이다.
생각을 마친 루시안은 가득 쌓인 선물더미를 바라보며 한스에게 명령했다.
"선물들은 죄다 휴고에게 보내서 처분해. 약재를 사는 데 보태야겠다"
"또요? 이제까지 들어온 선물을 처분하고 남은 액수도 상당한데요."
"어차피 곧 부족해질 거야. 시간 남을 때 부지런히 벌어둬야지."
"이럴 바엔 그냥 적당한 물주 하나 잡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그건 안 돼."
한스의 제안에 루시안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질 수는 없었다.
'잠깐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돈 나올 구멍 자체가 없는 상황이다. 지금 물주가 생긴다면 아예 재무 담당으로 눌러앉을 수가 있어. 쉬운 방법이 생기면 의존하기 마련이니까.'
자칫하면 세력의 근간을 이루는 자금줄 자체가 외부인 손에 넘어갈 수도 있는 거다.
설령 충성을 맹세한다 하더라도 루시안이 절실할 때 도와준 만큼 가신들 사이에서의 지위 보장과 걸맞는 대우를 청구서로 내밀 터.
신뢰할 수 있는 측근이라면 모를까 외부인을 끌어들였다가 나중에 그런 꼴을 보고 싶진 않았다.
'최소한 자금줄 자체는 내가 손에 쥐고 있어야 해. 자금을 남에게 의존할 바에는 수단을 마련하기 전까지 세력 형성 자체를 미루는 게 낫지.'
"알겠습니다. 그럼 선물은 휴고에게 보내서 처분하겠습니다."
상념에 잠긴 루시안을 보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한스는 냉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발언이 주인이 신경쓰는 부분을 건드렸다는 건 눈치챈 듯했다.
"부탁하지. 그리고 펠리시아."
"예, 주군."
"내게 검 좀 가르쳐줘."
"...예?"
펠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대체 왜 자신에게 배우려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루시안은 오히려 떨떠름함을 느꼈다.
"검 좀 가르쳐달라는 소리가 그리 이상해? 차기 검성인 네게 검을 배우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잖아."
"아니, 하지만... 정말 제게 배우실 필요가 있나요?"
"난 사자심검을 배우곤 있지만, 검식과 별개로 검술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야. 너도 검식의 수준과 개인의 기량이 별개라는 건 알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잠시 머뭇거리던 펠리시아는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다.
"주군께서는 절 이기셨잖습니까. 주군의 재능이라면 그때보다 훨씬 더 발전하셨을 텐데요."
"...."
펠리시아의 말에 루시안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재능에 대한 오해부터 풀고 가야 할 것 같았다.
67화
"그러니까... 그날 제게 썼던 기술은 반쯤 감으로 때려 맞추셨다는 소립니까?"
"뭐, 그런 거지."
루시안의 해명을 들은 펠리시아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찬바람이 쌩쌩 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셨던 겁니까? 제가 휘두르려던 검의 궤적과 주군의 예상이 한 치라도 빗나갔었다면 그 자리에서 반 토막이 나셨을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 너도 썼던 방법이잖아. 네가 쓰는 걸 보고 힌트를 얻은 건데."
"저야 마력을 볼 수 있으니 사정이 다르지요! 어쩐지 그때 주군의 움직임이 전혀 예상이 안 되더라니...!"
한참 지난 일이건만 무모하기 그지없는 루시안의 행동에 펠리시아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작은 실수 한 번으로 루시안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오싹한 모양이었다.
"후우,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두 번 다시 그런 짓은 하지 마십시오."
"걱정 마. 정말 목숨을 걸고서라도 영입하고 싶은 인재가 없다면 굳이 할 이유가...."
"그런 인재가 있어도 하시면 안 됩니다!"
"알았다, 알았어."
단호한 펠리시아의 외침에 루시안이 한 발짝 물러섰다.
사실 루시안도 전생의 펠리시아를 몰랐다면 그런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았을 테지만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
주군의 확답을 받아낸 펠리시아는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주군께서 원하시는 대로 검을 가르쳐 드리지요. 다만 저도 아직 배우는 처지이니 큰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배우는 거라면 몰라도 가르치는 건 그다지 자신이 없으니까요."
"대단한 걸 바라는 건 아니니 너무 부담가지지 마. 그저 남들과 다른 시야로 검술을 봐줄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니까."
루시안은 마음에 없는 소리를 내뱉으면서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전생에서 그토록 잘 가르쳐주었으면서 자신이 없기는 무슨.
'솔직히 말해 아이젠 경보다는 오히려 펠리시아 쪽이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었단 말이지.'
펠리시아는 아이젠을 뛰어넘는 재능이 있음에도 오히려 자신보다 못한 이들이 어디서 막히는지 정확히 알아차리곤 했다.
보통 천재라는 인종이 다른 이들의 시야를 잘 모른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또한 재능 중 하나였다.
뛰어난 검사가 가르치는 솜씨까지 갖추었다는 건 그만큼 수준 높은 검사를 양성할 수 있다는 뜻이기에.
"무엇보다 전 남들과 시야가 다르니, 적당히 걸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오만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그것 때문에 네 도움이 더 필요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잠깐 합을 나눠보면 알 거야."
루시안은 훈련용 목검을 빼든 후, 펠리시아에게 건네줬다.
갑작스러운 대련에 펠리시아는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루시안과 가볍게 합을 나누어보았다.
따닥, 하는 소리와 함께 몇 번의 검격이 오가자 펠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주군, 설마...!"
"네 생각대로야."
뒷말을 흐리는 펠리시아를 향해 루시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 나도 너와 같은 게 보이거든."
****
펠리시아는 상기된 얼굴로 루시안을 이끌고 즉시 연무장으로 향했다.
남들은 모르던 시야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기쁜 듯했다.
"주군께서 저와 같은 걸 보신다면 이 눈을 어찌 써야 하는지도 아시겠지요."
"적의 움직임을 미리 보고 대처하는 식으로 쓰는 거 아닌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은 동격의 기사나 한 수 위의 상대에게만 먹히지요. 그 이상 강해진다면 오히려 이 눈이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
무슨 소린지 몰라 루시안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펠리시아가 자세를 잡았다.
"직접 보여주는 편이 빠르겠지요. 지금부터 공격할 테니, 한 번 막아보십시오."
루시안은 순수히 펠리시아의 말에 따라 자세를 잡았다.
설령 같은 눈을 가진 상대라 해도 보이는 걸 막을 방법은 없다.
아무리 펠리시아라 해도 마력의 움직임 자체는 루시안에게 보이는 상황.
사선을 향해 움직이는 마력을 보고 루시안이 대응하려 했을 때였다.
푸확
"...!"
순식간에 호흡이 닿는 거리까지 다가온 펠리시아를 본 루시안이 몸을 흠칫 떨었다.
어느새 목덜미에는 펠리시아의 손에 들린 목검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고 있었다.
"보이셨습니까?"
"...봤어. 반응하지는 못했지만."
"바로 그겁니다."
펠리시아는 웃으며 목검을 내렸다.
"이 '눈'은 자칫하면 만능으로 여겨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너무 눈에 의존한다면 오히려 물러설 때를 놓치기도 하죠. 상대방의 공격이 다 보이니까 어지간하면 이길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겁니다."
"공격할 궤적이 다 보인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건가."
"그런 거죠. 보통의 기사였다면 상대방의 실력 차이를 아는 순간 맞대결이란 선택지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고 다른 방법을 찾았겠지요."
과연.
어중간한 실력 차이 정도는 씹어먹을 수 있기에 반대로 오만함에 빠지기 쉽다는 건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였다.
예전에는 망설임 없이 회피했을 선택지를 눈 하나 좋아졌다고 대뜸 고르는 건 분명 멍청한 짓이었으니까.
"물론 언제나 맞대결을 회피할 수는 없겠지요.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워야만 하는 때도 찾아오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니 이제부터는 '눈'의 사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눈의 사용법?"
"마력의 움직임은 그저 궤적만을 알려주는 게 아닙니다. 작은 흔들림, 두께, 주변의 아지랑이. 그 모든 게 적의 속도와 공격에 담긴 힘, 검의 변화를 알려주지요."
펠리시아는 따라 해보라는 듯 눈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루시안이 그대로 따라하자 펠리시아의 말대로 미묘한 변화가 더 생생히 느껴졌다.
"좋은데? 다만 알아보기가 좀 힘들군. 너무 미묘해."
"저와 자주 연습을 해보시면 주군도 나아지실 겁니다."
"연습? 어떤 식으로?"
"많이 싸워보는 거죠."
펠리시아가 빙긋 웃으며 목검을 손에 쥐었다.
"지금부터 전 계속해서 주군을 공격하겠습니다. 주군께서는 이어지는 제 공격을 보고 정확한 타이밍에 받아쳐 주세요."
"...설마 실패하면 그대로 맞는 건 아니겠지? 도중에 힘 뺄 거지?"
"주군, 아버지께선 절 가르치실 때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펠리시아가 또박또박 말했다.
"실패의 고통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
"...."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루시안은 폭발하듯 일렁이는 펠리시아의 마력을 보며 몸을 떨었다.
전생 후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에 살짝 후회가 드는 순간이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끄으윽!"
펠리시아가 훈련 종료를 선언하자마자 입에서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특훈이 시작된 지 어느덧 일주일 째.
그동안 하도 많이 맞아서 어디가 아픈지 제대로 구분을 못 할 지경이었다.
'아니, 안 맞은 부위가 없으니 그냥 다 아픈 건가.'
지금까지의 여유가 꿈으로 느껴질 만큼 펠리시아의 훈련은 혹독했다.
먼저 훈련을 제의한 루시안마저 자존심을 꺾고 그냥 그만두자는 소리가 목까지 치밀어 올랐을 만큼.
문제는 그 지독한 훈련의 성과가 상당했다는 거다.
'성과가 없으면 그만두자고 할 텐데 하루가 지날 때마다 발전하는 게 눈에 보이니 도저히 그러지도 못하겠단 말이지.'
루시안은 투덜거리면서도 내심 만족감을 느꼈다.
일주일 동안의 특훈을 통해 이제는 '눈'을 완벽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이젠 상대방의 움직임만이 아니라 얼마나 강하게 달려들지,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도 훤히 보였다.
검술 역시 마찬가지.
검식에 대한 이해도는 예전 그대로였지만 대신 눈과 손의 협응력 및 반사 속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한 상태였다.
'이 정도라면 굳이 단판 승부를 고집할 이유도 없겠군. 순간적인 폭발력에 의존하기보다는 순수하게 검격을 나눠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오만의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루시안의 마음을 읽은 듯 펠리시아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분명 주군은 강해지셨습니다. 강해진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으시겠죠. 하지만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강해지기 전에 피했을 강자라면 강해진 이후에도 조심하라. 알고 있어. 언제나 방심은 금물이지."
진심을 담아 루시안이 펠리시아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검에 인생을 바친 기사라면 모를까 루시안은 어디까지나 군주를 노리는 자.
호승심에 빠져 목숨을 잃는다면 더없이 멍청한 일이었다.
"그저 가능성으로 생각했을 뿐이야. 아무리 폭발력이 내 장점이라고 해도 상대가 받아치는 기술에 정통하면 내가 역으로 당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선택지가 늘어난 걸 기뻐해야겠지."
"예, 맞습니다. 전술을 한 가지 방식으로 한정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니."
침착한 루시안의 대답에 펠리시아는 비로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본인의 실력을 시험하고 싶어 안달이 난 기사야말로 가장 일찍 죽는 법.
냉철한 판단력이 없다면 기껏 힘을 길러놓고도 이름을 날리기 전에 스러지곤 했다.
그런 점에서 루시안은 비교적 안심할 수 있는 주군이었다.
때로는 놀랄 정도로 위험한 도박에 나서기도 하지만, 아무 대책 없이 나선 적은 절대 없으니.
"도련님."
"음?"
루시안이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던 와중, 긴정한 표정의 한스가 찾아와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도련님을 부르십니다."
****
루시안은 땀에 절어 있던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대공의 집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루시안의 머릿속에서는 의문이 떠올랐다.
'의외로군. 평소의 아버지라면 이런 상황에서 나와 독대하실 리 없는데.'
안 그래도 차기 가주 경쟁에서 루시안이 독주하고 있는데 따로 부르기까지 한다?
이미 차기 가주를 정했다고 주변에서 오해할 게 뻔하지 않나.
자식들에게 최대한 공정한 기회를 주면서도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던 대공답지 않았다.
'역시 크레펠트의 반란 진압 건 때문인가?'
대협정의 파기와 제국의 퇴각으로 대륙은 한 차례 크게 술렁거렸지만, 전생과 같은 여파는 없었다.
제국이 전력을 온존한 데다 일황자도 무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레펠트가 독립을 선언한 이상 제국으로서도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
제국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연합군을 재결성하여 철저히 밟아줄 필요가 있었다.
'슬슬 재정벌을 시도할 때가 되긴 했지. 아무래도 황제가 아버지께 말참견을 한 모양이군.'
이전 반란 진압에서 루시안에게 큰 호감을 보여준 황제다.
새로운 연합군이 결성되기 전에 루시안만 콕 집어 파견해달라 언급했더라도 이상할 건 없다.
그리 결론을 내린 루시안이 대공과 마주했을 때였다.
"북부에 문제가 생겼다."
"...예?"
루시안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제도 아니고 대공의 입에서 북부라니.
"저, 아버지. 죄송합니다만 북부라면 설마 제 외가와 관련된 일입니까?"
"그래. 그 때문에 널 불렀다."
"전 이미 발데크입니다. 외가의 대가 끊긴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제 와 들추어 내기엔...."
"너무 뜬금없는 일이겠지. 네 심정은 안다. 문제는 네가 받아야 할 유산을 엄한 놈이 차지했다는 거다."
"유산이라니요?"
"칼릭스 백작가가 최근 북부의 다른 가문들을 규합하려 하고 있다. 길게 이어져 왔던 북부의 다툼을 끝내고 옛 왕국 시절 영광을 되살리자더군."
칼릭스 백작가라면 루시안도 들어본 적이 있긴 했다.
그리말디 공작가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그래도 북부에서는 나름대로 인지도가 있는 가문.
하지만 다른 가문들을 자기 발아래 둘 만큼의 정통성을 가졌다고 하기엔 한참 부족했다.
"과분한 욕심을 부리는군요."
"그래, 과분한 욕심이지. 놈들도 그 사실은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칼릭스 백작가의 이름 대신 그리말디 공작가의 이름을 내걸었더구나."
"...!?"
갑자기 튀어나온 외가의 이름에 루시안이 눈을 끔뻑였다.
아니, 그리말디 공작가의 마지막 혈족이 여기 있는데 왜 엄한 놈이 그 이름을 가져다 써?
68화
"대체 무슨 자격으로 말입니까?"
"자격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 칼릭스 백작가는 옛 북부 왕국 시절 몇 대나 근위기사단을 배출한 가문인 데다 왕국이 사라진 이후에는 그리말디 공작가와 통혼한 적도 있으니."
일단 칼릭스 백작가에도 그리말디 공작가의 피는 흐르고 있다는 뜻.
최소한 아무 연관이 없는 데서 대뜸 공작가를 들먹이는 건 아니란 소리다.
문제는 루시안과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더 가까우냐였다.
"그리말디 공작가와 칼릭스 백작가가 마지막으로 맺어진 게 언제입니까?"
"백 년 전이다. 공작가의 여식이 칼릭스 백작가로 갔었지."
"하."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같은 외가 쪽 혈연인 것도 모자라 백 년 전이라니.
루시안이 죽어서 가까운 피가 완전히 끊겼다면 모를까, 현 상황에서는 그리말디 공작가를 들먹일 만한 자격이 없었다.
멀쩡한 외손자가 살아있는데 8촌 친척이 유산을 받겠다고 튀어나온 꼴 아닌가.
"기가 막힌 일이군요. 최소한 제게 양해라도 구해야 하거늘."
"보나 마나 넌 '북부인'이 아니라는 핑계를 댔겠지. 정치판에서 이런 말장난이야 드문 일도 아니다. 드물지 않다는 게 뻔뻔하지 않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담담하던 대공의 목소리에 살짝 불쾌감이 섞여 나왔다.
루시안은 그제야 이번 사태가 대공은 물론 황실에게도 심각한 일이란 걸 깨달았다.
"황제 폐하께서는 뭐라 하십니까?"
"당연히 매우 불쾌해하셨지. 이 이상 일이 커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고도 하셨고. 문제는 지금 황실에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는 거다."
"크레펠트의 반란 진압 때문입니까?"
"그래. 비록 최소한의 피해로 끝내긴 했다지만, 이전의 반란 진압 시도가 실패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제국의 위상을 위해서라도 한시바삐 연합군을 재결성하여 놈들에게 반란의 대가를 치르게 할 필요가 있다."
이전에 실패한 만큼 최대한 힘을 모아 크레펠트를 압도적으로 찍어누르는 게 황실의 목적.
당연히 크레펠트의 반란 진압을 이어가면서 외부로 투사할 힘까지 따로 뺄 수는 없다.
자칫했다간 안 그래도 낮아진 황실의 위상이 더 깎일 수 있었으니.
"가장 큰 문제는 칼릭스 백작가다. 놈들은 북부의 영광이니 뭐니 했지만, 황실에 대한 반역은 아니라며 철저히 숙이고 들어왔다. 어디까지나 북부의 잦은 내전을 끝내기 위한 명분일 뿐이라더군."
"전혀 믿음이 가질 않습니다만."
"나도 그리 생각한다. 황제 폐하도 같은 의견이시고. 자기 아래 북부를 통합시킬 때 방해받지 않기 위해 둘러대는 소리겠지. 하지만 골치 아프게도 상황이 너무 절묘하다."
크레펠트의 반란 진압 때문에 황실은 북부에 신경을 쓸 수가 없다.
여기에 더해 칼릭스 백작가는 나름 명분을 챙기며 최대한 저자세로 나오고 있다.
이 이상 의심을 드러내며 압박하면 백작가만이 아니라 북부 전체를 자극할 수도 있는 상황.
"그래서 제가 필요하신 거군요. 그리말디 공작가와 가장 가까운 저라면 칼릭스 백작가의 명분을 분쇄해버릴 수 있으니까요."
"네 말대로다. 허나...."
지그문트 대공은 잠시 머뭇거리다 굳은 얼굴로 루시안을 쳐다봤다.
"북부는 예로부터 상무적 기풍이 강하고 외부인들에게 배타적인 지역. 아무리 피가 가깝다고 한들 북부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너는 그들에게 완전히 인정받지는 못할 것이다."
"...."
"칼릭스 백작가는 물론 한때 그리말디 공작가를 경외하던 이들조차 너를 시험하려 들겠지. 무슨 시험이건 통과하는 건 쉽지 않을 테고."
대공의 말에 루시안은 전생을 떠올렸다.
용병 중에 가끔 있던 북부 출신들은 외부인과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뭘 맡기건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고 보상만을 받아갔다.
그 우직한 자세에 일부 용병들은 과묵한 북부 사나이라며 추켜세우기도 했었다.
'터무니없는 착각이었지.'
나중에 알고 보니 북부인들은 그리 과묵하지 않았다.
자신이 인정한 상대가 아니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일이 없기에 과묵한 것처럼 보일 뿐.
한 번 인정한 상대에게는 외지에서 오랫동안 말을 못 한 반동으로 더없이 수다스러워지곤 했다.
'북부 사나이라고 치켜세우는 작자들은 본인이 북부인의 인정을 못 받았다고 외치는 꼴이었는데 그걸 몰랐으니.'
쓴웃음을 감추는 루시안의 귀에 재차 대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말하마. 황제 폐하께서는 네가 북부로 가서 칼릭스 백작가의 명분을 무력화하길 바라신다. 너라면 제국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으시더군."
"과분한 평가로군요."
"하지만 나는 네 선택에 맡기고 싶다. 아무리 폐하의 바람이 있다 한들 강요하고 싶지는 않구나."
지그문트 대공의 얼굴 한구석에서는 숨길 수 없는 수심이 어려있었다.
그는 제국의 대공이 아닌, 한 명의 아버지로서 루시안을 걱정하고 있었다.
"칼릭스 백작가는 분명 네가 받아야 할 유산을 훔쳤지. 그러나 그 유산은 애매하고, 어쩌면 평생 쓸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북부는 험하고 매서우며 기풍 역시 만만찮은 곳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부에서는 발데크 대공가의 이름도 먹히지 않을 테고요."
다음에 할 말을 예측한 루시안이 먼저 대답했다.
아버지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기에.
"오랫동안 북부에서 저들끼리 살던 이들입니다. 황실과 연결이 희미한 만큼 황제 폐하가 아닌 이상 그 어떤 인물이 오던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방금 대공이 말한 것처럼 루시안조차 북부의 시험은 피할 수 없을 터.
오히려 그리말디 공작가의 피를 이었다는 소릴 듣고 더욱 험난하게 시험할지도 모른다.
고귀한 피를 이은 만큼 그만한 자격이 있는지 보고 싶을 테니까.
'게다가 시험에 통과한다 해도 간신히 출발선에 선 것뿐이지. 곧바로 칼릭스 백작가와 그 지지자들하고 명분 싸움을 거하게 해야할 테니까.'
즉, 가문의 힘에 전혀 의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상대의 텃밭에 들어가 싸워야하는 거다.
백작가라 해도 북부 왕국 시절부터 터를 잡고 살아왔다면 그 위세는 변경백에 맞먹으리라.
루시안은 맨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는 셈이다.
"그래도 저는 북부로 가고 싶습니다."
"...어째서냐? 그토록 힘든 일이라는 걸 알면서 왜?"
"놈들이 제가 받아야 할 유산을 건드렸으니까요."
루시안은 대공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충성이니 뭐니 하는 허례허식을 전부 때려치운, 순수한 진심만을 담아서.
"그건 제 것이었습니다. 평생 창고에 처박아놓을 일밖에 없을지라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저만의 것이었죠. 하지만 놈들은 제 허락은커녕 눈치조차 안 보고 제멋대로 꺼내 원래 자기 것이었다며 으스대고 있습니다."
"...."
"아버지께 묻고 싶습니다. 설령 먹지 않는 고기라 할지라도, 자기 고기를 빼앗기고도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자를 과연 사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말디 공작가의 이름은 분명 애매한 유산이다.
어쩌면 더없이 유용하게 쓸 수도 있겠지만, 평생 안 쓰고 있는 것조차 까먹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리말디라는 이름을 쓸 정당한 권리는 루시안에게 있었다.
칼릭스 백작가는 그 모든 걸 알면서도 루시안을 무시하고 멋대로 가져다 쓴 거다.
"저는 제 것을 멋대로 가져다 쓴 놈을 보고도 웃고 넘길 만큼 자비로운 성격이 아닙니다."
"하하하!"
솔직한 루시안의 대답에 대공이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웃던 지그문트 대공은 곧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래, 남의 것을 빼앗아 놓고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도적놈을 그냥 둘 수는 없겠지. 네 뜻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언제쯤 북부로 출발할 생각이더냐? 지금 바로는 아니겠지?"
"일주일 후로 하려 합니다. 저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지라."
"알겠다. 다만 출발하기 전에 가족회의에 한 번 참여하고 가거라."
가족회의라는 말에 루시안이 눈을 크게 떴다.
어지간히 중대한 사안이 아니라면 열릴 일이 없는 게 가족회의건만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대공은 루시안의 의문을 읽었는지 곧바로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연합군을 재결성하고자 하신다."
"...!"
****
"...."
"...."
가족회의의 분위기는 무겁기 짝이 없었다.
이전에는 무언의 신경전이라도 오갔지만, 이번엔 그조차 못할 정도로 다들 여유가 사라진 상태였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대공이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연합군의 재결성을 명하셨소."
"...!"
"이번에야말로 크레펠트의 반란을 확실히 진압하려 하시더군. 당연히 나도 출진할 것이오."
대협정이 파기된 이상 적이 어떤 수를 써올지 모르는 상황.
일개 대리인에게 맡겨둘 상황이 아니니 대공이 직접 나서는 게 당연했다.
중요한 건 대공이 출진한 다음의 일이었다.
"그럼 출진해 계시는 동안 가주 대리는 누구로 삼으실 생각이시죠?"
트리스탄의 모친, 베로니카가 상기된 얼굴을 부채로 가리며 물었다.
입에 담기는 힘든 말이지만, 대협정이 지켜지지 않는 전장에서 대공이 무사히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다.
자칫하면 여기서 정하는 가주 대리가 그대로 차기 대공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가주 대리를 정하기 전에 한 가지 말해둘 게 있소. 나 말고 아들 중 한 사람을 부관으로 데려가려 하오."
"...!?"
"이번엔 황제 폐하의 뜻이 아닌 내 뜻이오. 혹 자원할 녀석은 없느냐?"
예상치 못한 대공의 제안에 다들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대협정이 파기되었다면 전장의 위험도는 이전과 비교도 안 될 텐데 동행하라니.
서로 눈치만 보던 와중 조르디의 모친, 율리아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전처럼 셋째가 가면...."
"셋째는 북부에 볼일이 있소. 나와 동행하지 못할 거요."
"부, 북부요?"
"그리말디 공작가와 관련된 일이오. 최근 칼릭스 백작가에서 루시안을 무시하고 그리말디 공작가의 후계자처럼 행동하더군."
지그문트 대공이 앞뒤 사정을 자세히 설명해주자 모두 얼굴이 굳어졌다.
루시안이 빠질 수밖에 없는 시기에 대협정이 지켜지지 않는 전장, 의도를 알 수 없는 동행 요구까지.
'설마 셋째를 위해 나머지 아이들을 정리하려는 건가? 기반이 약한 만큼 다른 아이들이 승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테니.'
'그럴 리가... 아버지가 그런 모략을 꾸미실 성격은 아닌데.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로 셋째를 차기 가주로 내정하신 거라면....'
의심이 부풀어 오르던 와중, 가장 먼저 터진 건 베로니카였다.
"당신, 정말 너무한 거 아닌가요!?"
베로니카가 항상 들고 있던 부채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벌떡 일어섰다.
대공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평정심을 잃은 베로니카를 응시했다.
"무엇이 말이오?"
"셋째에 대한 편애 말이에요! 어째서 저 아이는 무조건 제외되는 거죠!? 이전에 한 번 참여했으니 이번에도 참여시키는 건 불공정하다고 할 생각인가요?"
"허허."
베로니카의 말에 대공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제국의 적이 등장했을 때 군사를 이끌고 황실의 깃발 아래 모이는 건 모든 영주의 첫 번째 의무요. 세금과 더불어 이것만큼은 결코 어겨서는 안 되지. 그런데 그대는 마치 이를 형벌처럼 여기는구려."
"영주는 당신이에요! 우리 아이들이 아니라!"
"그리고 내 자식 중 누군가가 다음 대의 영주가 되겠지. 그때 전장에 나서기 무섭다며 숨는다면 내 뒤를 이을 자격이 있겠소?"
"...!"
베로니카는 새파랗게 변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곧이어 아무 말도 못 하는 베로니카를 향해 대공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명심하시오. 대협정이 지켜지건 말건 상관없이 의무는 지켜져야 하오. 나는 기본적인 의무조차 지키지 못하는 놈을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없소."
대공의 단호한 외침에 루시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작위 귀족은 세금과 군사력 동원, 두 가지 만큼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
대협정이 파기되었다는 핑계로 전장에 안 나서겠다는 건 어린애가 떼를 쓰는 거나 마찬가지다.
할 말을 잃은 베로니카가 주춤거리다 도로 자리에 앉자, 대공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겠다. 이 아비와 함께 전장에 나가볼 녀석은 없느냐?"
69화
"제가 가겠습니다."
아까 전과 달리 망설임 없는 대답이 누군가에게서 튀어나왔다.
잠시 후, 대답을 내뱉은 당사자를 확인한 베로니카가 비명처럼 외쳤다.
"트리스탄!"
"아버지의 말씀대로입니다. 세금과 군사. 모든 영주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의무지요. 이런 간단한 의무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대공은커녕 남작이 될 자격도 없는 겁니다."
아들의 단호한 태도에 베로니카는 말을 잇지 못하고 손만 휘적거렸다.
파랗게 질린 어머니를 잠깐 응시한 트리스탄은 대공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여기서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면 아버지께선 셋째를 차기 가주로 선택하셨겠죠. 아닙니까?"
"...!?"
베로니카는 물론 다른 부인과 형제들마저 트리스탄의 말에 경악했다.
곧이어 모든 이의 시선이 대공에게로 향했으나 정작 대공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생각이었다."
"여, 여보!"
"난세가 다가오고 있다.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약해졌고, 불온분자들은 사방에서 기회만 노리는 중이지. 폐하께서 제국의 숨겨진 힘을 드러내셨음에도 놈들의 기세는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질 않아."
"비상한 시기에는 비상한 선택을."
트리스탄은 아버지의 말에 옛 격언을 입에 담았다.
위급할 때에는 절차나 전통을 무시하고서라도 과감한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는 격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다가올 난세에 적합한 후계자를 원하시는군요."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나도 조금 더 느긋하게 너희들의 능력을 살펴보았겠지. 하지만 난세는 다르다. 순간의 망설임 하나로 시대의 파도에 휩쓸려 사라질 수 있으니."
아무리 명군의 자질이 있다 한들 그 자질을 살리기도 전에 쓰러져버린다면 무용지물.
영지를 얼마나 잘 다스리느냐보다도 대세를 읽고 과감히 대응하는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한 시대가 바로 난세였다.
"셋째는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걸 진즉 보여줬다. 남은 건 너희들이었지."
"설마 전장에 따라오라고 하신 건...."
"후계자 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과감히 나서지 않는다면 굳이 더 확인할 필요가 있겠느냐?"
"...!"
"다행히 아직 성급하게 후계자를 정할 때는 아닌 것 같구나."
지그문트 대공은 옅은 미소와 함께 트리스탄을 응시했다.
펠리시아를 영입하지 못한 이후 쭉 칩거하던 첫째 아들의 얼굴은 수척했다.
하지만 그 눈만큼은 절대 꺾이지 않겠다는 듯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어디 오랜만에 실력 좀 보자꾸나. 내 가르침은 기억하고 있느냐?"
"기억하다 뿐이겠습니까? 직접 전장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음, 좋은 대답이다."
만족스러움이 담긴 대공의 표정에 가족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사실상 차기 가주 후보를 루시안과 트리스탄 중에서 결정하겠다고 선언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
'이상하군.'
가족회의가 끝난 후, 루시안은 눈을 찌푸리며 턱을 쓸었다.
단 두 명의 후보 중 하나가 된 셈이지만 기쁨보다는 의아함이 컸다.
아버지의 결정에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형제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조슈아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지만 당연한 반응이지. 제대로 뭘 해보기도 전에 탈락해버렸으니까. 진짜 이상한 건 조르디다.'
루시안이 아는 조르디는 누가 가주가 되던 자신이 아니라면 절대 인정 못 하는 성격이다.
대공의 선언을 들은 순간 누구보다도 격하게 반응해야 할 인간.
그런데 오늘 가족회의에서의 조르디는 너무도 차분했다.
심지어 회의가 끝나고 퇴장할 때조차 눈 한번 흘기지 않았으니.
'대체 무슨 속셈이지? 외가 쪽에 다른 자리라도 마련한 건가? 설령 그렇다 쳐도 이리 순순히 차기 가주 자리를 내어줄 놈이 아닌데.'
잠시 고민하던 루시안은 이내 생각을 관뒀다.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시안이 당장 신경쓸 거리가 너무 많았다.
'일단 북부 문제부터 해결하고 보자. 그러고 보니 슬슬 레이먼이 내 아래로 정식 배속될 때가 되었는데....'
"도, 도련님! 도련님!"
루시안은 다급한 누군가의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휴고의 부하 중 하나이자 현재는 루시안의 하인으로 일하는 녀석이었다.
"무슨 일이야?"
"드디어 완성되었습니다!"
"완성되다니? 뭐가?"
"이전에 맡기셨던 그 꼬맹이의 약이...!"
루시안은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달려들어 하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기겁한 하인의 입가에 루시안의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언제 완성했는데?"
"오, 오늘 아침입니다. 원하신다면 곧바로 가져다 드릴 테니...."
"아니, 내가 직접 가지. 넌 휴고를 불러오도록 해."
미칠 듯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루시안이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영주관을 나섰다.
목적지는 내성 밖의 서쪽에 있는 암흑가 주변.
미로와 같은 골목길을 거침없이 나아가 이윽고 목적지에 다다른 루시안이 문을 두드리자 빗장 구멍이 열렸다.
달칵
"암호."
"내 얼굴이나 확인해."
"암호 대라니까 뭔 개소리... 흐억!"
빗장구멍 사이로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던 불량배는 이내 기겁하며 물러섰다.
루시안이 너무 가까이 있던 탓에 순간적으로 구분이 안 간 모양이었다.
덜컥, 끼이이익
"도, 도련님.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를...!"
"됐다. 이안 녀석은 어디 있지?"
"3층! 3층에 있습니다!"
3층이란 말이 나오기 무섭게 루시안은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노크조차 잊은 채 문이 벌컥 열린 순간, 안에 있던 이안은 깜짝 놀란 얼굴로 루시안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안이 웃는 얼굴로 손에 든 약병을 흔들며 소리쳤다.
"짜잔! 완성했습니다, 주군!"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액체를 본 루시안의 눈이 세차게 떨렸다.
달려가서 약병을 낚아채자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이전보다는 훨씬 약했지만 본질은 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만든 열화품 따위와 비교할 게 아니야. 강도만 약해졌을 뿐 정순함은 이전에 마셨던 것과 똑같은 수준이다.'
루시안은 이안에게서 받은 넥타르를 이리저리 확인해보았다.
적어도 이전에 마셨던 물건처럼 들이붓자마자 마력이 폭발하진 않을 것 같았다.
"약효는 처음 만든 것과 비교해서 어느 정도 차이가 나지? 마셨을 때의 효능은?"
"기사에게 임상 시험한 적은 없어서 잘 몰라요. 그래도 일반인이 아무 대비 없이 마셔도 괜찮은 수준인 건 확실해요."
"임상 시험은 누구한테 했는데?"
"저요."
"...."
저도 모르게 루시안은 차게 식은 시선을 이안에게로 향했다.
저번에 그런 꼴을 겪고도 자기 몸으로 임상 시험을 했다고?
"아니, 어쩔 수 없잖아요! 이런 약을 누구한테 임상 시험하겠어요? 시험해서 성공하면 약효가 뭔지 다 알려질 텐데!"
"직접 몸으로 시험해봐야 적성이 풀리는 건 아니고?"
"...그런 이유도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요. 어쨌건 농도를 최대한 약하게 해서 한 방울씩 마시며 확인해본 거니 문제없어요!"
"어휴."
애써 말을 돌리는 이안을 보며 루시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학자라는 인종은.
루시안은 고개를 젓고는 넥타르를 쥔 채 생각에 잠겼다.
'가능하면 당장 달려가서 모두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싶지만.'
그렇게 하기엔 시기가 참으로 애매했다.
며칠 후 칼릭스 백작가를 벌하기 위해 북부로 가야 하는 상황.
남의 앞마당에 맨몸으로 들어가는 만큼 현지에서 아군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 넥타르만 있다면 그 과정이 훨씬 수월해질 터.
"지금 제조된 양이 어느 정도지?"
"다섯 병이요."
"일주일 안에 몇 병 더 만들 수는 없나?"
"불가능해요. 순도를 올리기 위해선 그만큼 시간이 필요한데 일주일은 너무 짧아요."
다섯 병이라.
충분한 걸 넘어서 과분한 성과였지만, 휘하에 있는 이들에게 나눠주기엔 너무도 부족한 숫자이기도 했다.
북부에서의 일이 끝난 이후라면 모를까 당장은 힘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감안하더라도 단 한 명 만큼은 이 약을 누구보다도 먼저 마실 자격이 있었다.
'휴고.'
기사로 임명해준다는 공수표만 믿고 루시안에게 충성을 바친 첫 번째 가신.
약속을 지키기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으나 그 전에 적당한 선물을 안겨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예? 북부요?"
휴고는 갑작스러운 루시안의 말에 당혹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수도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북부라니.
"이번엔 무슨 일입니까? 또 인재라도 구하시려고요?"
"그건 아니야.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났거든."
루시안은 차분히 휴고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그리말디 공작가의 이름을 함부로 가져다 쓴 것과 그 징치를 위해 루시안이 나서려 한다는 것.
그리고 이번 북부행에 휴고와 그 휘하의 십인대가 동행한다는 것까지.
"거리와 소모하는 비용, 거주 공간을 생각하면 최소한의 호위만 갖추어서 가는 게 딱 좋거든. 이참에 네가 힘을 내줘야겠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밖에 동행할 사람들은...."
"레이먼과 펠리시아가 같이 갈 거야. 한스와 이안은 당연히 켈하임에 남아있고."
"알겠습니다. 곧바로 부하 놈들에게 전달하지요."
휴고는 고개를 숙이면서도 내심 입맛이 썼다.
가신 중에서는 한스를 제외하면 가장 고참인데도 누구 하나 마음 편히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레이먼 경이 이번에 도련님의 새 가신이 되었다지? 또 내 서열이 뒤로 밀리겠군.'
차기 검성인 펠리시아는 물론이고 흑사자인 레이먼조차 일개 암흑가 두목이었던 휴고가 범접하기 힘든 존재였다.
한스는 말할 것도 없는 루시안의 최측근으로 무력은 없지만 내밀한 일을 맡길 수 있는 심복 중의 심복.
심지어 이번에 새로 들어온 이안조차 서열만 밀릴 뿐 인재로서는 휴고보다 월등히 위였다.
'귀한 영약을 찍어내는 재주가 있다고 했지. 그게 사실이라면 나 따윈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귀하신 몸인데 말이야.'
영약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하급 영약이라고 할지라도 그 가치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황실의 손을 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영약을 제조해 기사들에게 줄 수 있다니.
영약에 목마른 기사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면 실로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했군. 조급해하지 말자. 어쨌건 도련님은 내게 가문을 세우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씁쓸함을 삼키며 휴고는 재차 마음속으로 충성심을 다졌다.
비록 계속해서 서열이 뒤로 밀리고는 있으나 루시안은 그를 잊지 않고 중용하는 중이었다.
세상에 더 쓸만한 인재가 나타나면 이전의 부하는 뒷방으로 밀어버리는 주군이 얼마나 많던가.
'그런데도 난 축복받은 거지. 이만큼 인재가 늘어나는데도 계속 곁에 두려 하시니까 말이야.'
나름 자기 위로를 마치고 평정심을 되찾은 휴고가 물러서려 할 때였다.
"자, 받아."
갑작스레 다가온 루시안이 푸르스름한 액체가 든 병을 휴고에게 건넸다.
휴고는 생전 처음 보는 약병을 받아들고는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이게 뭡니까? 푸른색으로 빛나는 액체라니, 난생처음 보는데요."
"이안이 오늘 제조에 성공한 영약이다."
"...!"
"마셔 봐. 네가 첫 번째다."
첫 번째, 라는 소리에 휴고가 흠칫 몸을 떨었다.
설마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가장 먼저 영약을 줬다는 소린가?
휴고는 떨리는 눈으로 루시안이 준 영약을 들어 올렸다.
'이게 진짜 영약.'
어지간한 기사들조차 손에 넣지 못해 애타게 갈망한다는 연금술의 비의.
가장 저급한 물건마저도 황실의 허락 없이는 제조가 불가능하다는 보물 중의 보물.
그 귀한 물건이 다른 가신들을 제치고 자신에게 가장 먼저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마셔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그러라고 했잖아."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휴고에게 루시안이 웃으며 답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휴고는 영약의 뚜껑을 열고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시원한 느낌에 놀라 무심코 약병을 입에서 땐 순간이었다.
"흡...!?"
몸속에서 치솟는 마력의 분류에 휴고가 눈을 부릅떴다.
7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