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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 70-80

70화

화아아악

휴고는 멍하니 자신의 몸에서 푸른 아지랑이 일렁이는 걸 보았다.

몸에 퍼져나가는 청량감 때문에 착각하는 게 아니었다.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눈으로 볼 수 있는 유형화된 마력이었다.

"이런 미친...!"

촤아아

경악하여 욕설을 내뱉는 와중에도 마력은 몸 전체를 휩쓸고 지나갔다.

지금껏 좁디좁던 마력의 길이 쏟아져 나오는 마력에 의해 확장되는 감각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웠다.

거침없이 나아가는 마력은 길을 넓히는 것도 모자라 근육과 뼈에도 가닥가닥 스며들었다.

'대체 이게 뭐야?'

휴고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분명 엄청난 청량감과 상쾌함이 전신에서 느껴짐에도 기쁨보다는 불안감이 먼저 들었다.

지나친 약효는 자신이 인간에서 다른 존재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게 했으니까.

'이건 영약이 아니야. 절대 아니야.'

일개 암흑가 보스였던 휴고로서는 영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휴고도 이게 풍문으로 듣던 영약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마력의 정순함을 높여주고 길을 더 매끄럽게 닦아주며 내부의 상처마저 약간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

이건 겨우 그 정도로 치부할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촤악

"후우욱!"

몸 전체에 가득 찬 마력에 전신이 찌르르 울린 휴고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입안에서 남색의 거무튀튀한 연기가 흘러나오며 악취를 풍겼다.

본능적으로 휴고는 남색 연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게 원래 내 마력인가? 이토록 불순물이 가득한 걸 지금까지 몸 안에서 돌리고 있었다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토록 귀하게 여겼던 자신의 마력은 지금 몸 안을 가득 채운 새로운 마력과 비교하여 너무도 초라했다.

"기분이 어때?"

"...!"

루시안의 말에 휴고는 흠칫하여 무심코 한쪽 귀를 잡았다.

갑자기 말을 걸어서가 아니라 귀에 들리는 음색이 이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맑았다.

"이, 이상합니다... 이게... 이건...."

도저히 말을 잇지 못한 휴고가 도중에 입을 다물고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청각만이 아니었다.

시각을 포함하여 모든 오감이 이전보다 훨씬 생생히 느껴졌고, 그중에서 촉각은 특출나게 예리해진 상태였다.

누군가 검을 휘두른다면 그 마력의 기운을 사전에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검... 검을, 휘둘러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떨리는 목소리로 부탁하는 휴고에게 루시안은 자신의 검을 내어주었다.

천천히 검을 뽑은 휴고는 허공을 향해 늘 사용하던 삼류 검식의 기술 몇 개를 휘둘러보았다.

후우웅

'보인다.'

확장된 감각은 검의 사정거리와 담긴 위력, 검 끝의 변화까지 휴고에게 생생히 전달했다.

검에 재능이 있다던 놈들은 이런 감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던 건가.

울컥하는 감정에 몸을 맡긴 휴고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푸화악

분명 똑같은 기술임에도 위력은 이전과 비교가 되질 않았다.

원숭이처럼 자세를 흉내만 내던 때와 달리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을 알아서 찾아가는 탓이었다.

자신의 검술에 매료된 휴고가 검을 내렸을 때는 아는 기술을 남김없이 사용한 후였다.

"후우우!"

짝, 짝, 짝

"훌륭해. 검식이 이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졌는데?"

"...!"

이마의 땀을 닦던 휴고는 옆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충성을 맹세한 주군 앞에서 진검을 꺼내 든 것도 모자라 한참을 휘두르다니.

뒤늦게 실수를 자각한 휴고가 냉큼 무릎을 꿇었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나가서 그만...!"

"괜찮다. 나도 그 마음 이해하니까. 그보다 영약 효과는 어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휴고가 입을 다물었다.

효과가 어떠냐고?

엄청난 수준을 넘어서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건 이런 영약을 거리낌 없이 넘겨준 루시안의 의중이었다.

'내가 첫 번째라고 하셨지.'

이건 지금껏 영약이라 불렸던 것들을 일개 잡동사니로 만들 정도로 대단한 보물이었다.

거래에 내놓는다면 천금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고, 충성을 얻을 때 쓴다면 석상의 마음조차 돌려놓겠지.

그런데 루시안은 이 대단한 영약을 당연하다는 듯 휴고에게 넘겨주었다.

본디 약속했던 기사 자리보다 이 영약 한 병이 몇 배는 더 가치가 있을 텐데도.

"제게 이럴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휴고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본심이 새어 나왔다.

굉장히 뜬금없는 말이었으나 루시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평생 내 곁에서 일할 텐데 이 정도 투자쯤이야."

"...."

더없이 가벼운 루시안의 태도가 반대로 휴고를 울컥하게 했다.

너무 당연한 일인데 괜히 쓸데없는 걸 묻는다는 것처럼 보였기에.

'예. 전장의 시체가 되어 바스러질 때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충성 맹세는 이미 질릴 만큼 했다.

이 이상 떠들어봤자 말의 무게만 가벼워질 뿐.

그러니 이건 그저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설령 주군이 원하는 걸 주지 못하게 된다 한들 절대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

"그래서, 효과는 어때?"

"끝내줍니다. 마력이 화악, 하고 몸 전체로 퍼지는데...."

언제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냐는 듯 두 사람의 말투는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휴고의 내면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만을 남긴 채.

****

며칠 후, 루시안은 북부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이전의 반란 진압 때처럼 화려한 출진식은 없었다.

북부의 일 자체가 가문의 일이라기보단 루시안의 개인 사정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아버지인 대공의 개인적인 배웅은 받을 수 있었다.

"잘 다녀오거라. 무리는 하지 말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

지그문트 대공은 굳은 얼굴로 루시안을 바라보며 충고했다.

아들을 걱정하는 눈빛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후계자의 안위를 염려하는 가주의 눈빛에 가까웠다.

"놈들은 네 유산을 강탈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절실히 필요했다는 뜻이다. 네가 놈들의 명분을 무력화하려 한다면 극단적인 수단도 고려할 거다."

"그렇다면 놈들은 발데크와 황실의 진노를 사게 되겠지요."

"물론이다. 하지만 귀족이라고 항상 지혜로운 건 아니지. 때로는 작은 탐욕에 눈이 멀어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곤 한다."

루시안은 대공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칼릭스 백작가의 현 가주가 정말 과분한 야망을 품었다면 발데크고 나발이고 눈에 보이지 않을 터.

최악의 경우 그리말디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루시안을 처리하려 할 수도 있다.

더없이 멍청한 짓이고 후폭풍도 엄청나겠지만, 때로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게 인간이니.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는 법. 놈들의 어리석음이 한도 끝도 없을 걸 예상하고 여차할 때는 발을 빼야 한다. 모든 업보를 되돌려주더라도 이미 희생당한 이는 되돌아오지 않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대공의 충고를 되새긴 루시안이 고개를 숙였다.

말에 오르자 이번 여행에 동행하는 이들이 루시안을 일제히 쳐다봤다.

휴고와 그 휘하의 십인대, 차기 검성인 펠리시아와 정식으로 가신이 된 레이먼.

참으로 조촐한 규모였으나 험한 북부를 빠르게 횡단하려면 이 정도가 딱이었다.

"출발하자."

루시안의 짧은 말과 함께 일행은 내성 밖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영주관을 슬쩍 돌아본 루시안은 발코니에 나와 있던 조르디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무덤덤하게 루시안을 바라보던 조르디는 이내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생각인 건지.'

기묘한 조르디의 눈빛에 루시안은 위화감을 느꼈으나 이내 신경을 끄기로 했다.

지금부터 향할 북부는 적지나 마찬가지.

발데크의 이름 아래에서 목숨을 보장받던 이전과는 다른 만큼 쓸데없는 데 신경을 돌릴 여유는 없었다.

"북부라. 실로 오랜만에 가보는군요."

긴장된 분위기를 환기하듯 레이먼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흥미로움을 느낀 루시안은 눈을 반짝였다.

"이전에 방문한 적이 있었나 봐?"

"10년 전쯤에 편력기사로 잠깐 북부를 돌아다녔지요. 고생만 실컷 하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호오."

루시안도 대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긴 했지만, 북부에 가본 적은 없었다.

그 대신 북부인들과 사귄 적은 많았으나 그들 역시 고향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험한 일을 겪고 떠나온 이들이 많았기에 일부러 화제를 피하곤 했으니까.

"마침 잘됐네. 북부에 도착하기 전에 알려줄 것들이 있으면 이참에 다 알려줘. 주의사항부터 조심해야 하는 관습까지."

"주의사항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습니다. 무지하게 춥다는 것과 귀족을 대할 때의 태도가 조금 가볍다는 것만 신경 쓰시면 됩니다."

"가볍다? 북부인들은 본인이 인정한 상대가 아니라면 과묵한 편이라 들었는데?"

전생에서의 북부 출신 용병들을 떠올리며 루시안이 되묻자 레이먼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건 북부가 아닌 지역에 온 이들 얘깁니다. 타지에 와 있으니 마음을 터놓은 상대가 아니면 말을 조심할 수밖에요. 하지만 북부는 그들의 고향인데 왜 눈치를 보겠습니까? 외지인이 눈치를 봐야지."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군."

구구절절 옳은 소리에 루시안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북부인들도 자기 고향에서는 아무한테나 마음껏 떠들고 다니는 건가?

북부 출신 용병들이 전생에서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리고 귀족을 대할 때의 태도 말입니다만, 이건 직접 보시지 않는 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제국의 다른 영민들처럼 주군의 신분을 알고도 극진히 대우하진 않을 겁니다."

"설마 영민 신분으로 주군께 무례를 범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펠리시아가 눈에 불똥을 튀기며 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루시안을 무시하는 이가 있다면 누구든 베어버릴 기세였다.

"그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북부에서는 평민과 귀족이 조금 더... 격이 없다고 해야겠군요."

"격이 없다니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요?"

"황당하게 들리시겠지만 진짜 그렇습니다. 직접 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레이먼이 손을 휘저었다.

이 이상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저 평민들이 주군을 대할 때 조금 무례해 보여도 성급히 처벌하시지만 말아 주십시오. 북부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거 참, 사람 궁금하게 하기는. 어쨌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으니 걱정 말도록."

전생에서 용병으로 구르며 온갖 푸대접을 다 받아본 루시안이다.

겨우 영민 몇 명이 무례하게 구는 정도로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레이먼의 말을 들을수록 호기심이 커졌다.

평민이 굽신거리는 꼴을 보지 않으면 성이 안 풀리는 게 귀족들인데 격이 없는 편이라?

'그거 꼭 한번 보고 싶군.'

한때 평민 신분으로 바닥을 구르던 루시안으로서는 더없이 기대되는 광경이었다.

****

"어흐, 추워 죽겠네."

"북부가 춥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기는 했지만, 진짜 춥구만."

켈하임에서 출발한지 보름이 되는 날.

북부 초입에 다다른 휴고의 십인대가 몸을 부르르 떨며 투덜거렸다.

출발 전에 산 두꺼운 방한복을 입고 있음에도 삭풍이 피부 사이로 스며들었다.

"크으, 이 기가 막힌 날씨는 여전하군요. 그리웠습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렇게 순식간에 추워지는 게 가능한 일인가?"

루시안은 추위보다는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북부가 춥다는 건 알았지만 지형에 의한 추위라면 천천히 온도가 내려가야 할 터.

그런데 북부는 일정 범위에 들어서자마자 말이 안 될 정도로 갑작스럽게 추워졌다.

"제가 보기에도 이건 자연스러운 추위가 아닙니다. 겨우 몇 발자국 차이로 이렇게나 큰 차이가 나다니."

펠리시아는 눈을 찌푸리며 냉기의 근원을 찾으려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민한 감각 탓에 다른 이들보다 위화감을 더 심하게 느끼는 듯했다.

"뭐, 확실히 이상한 추위긴 하죠. 그래서 북부에서는 이를 아득한 고대의 저주라고 보기도 합니다. 전승이 너무 많아서 신빙성은 없습니다만."

"저주인지는 몰라도 마법과 관련된 건 확실하군. 자연적으로 이런 기후가 형성될 리는 없으니...."

이상한 북부의 추위에 대해 루시안 일행이 떠들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들려온 쇳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울렸다.

"뭐지?"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같습니다만."

채앵

그 말이 맞다는 듯 다시 한번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쇳소리는 점점 커지며 루시안 일행을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쇳소리에 섞여 사람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이 후레자식이! 그 독사 같은 놈의 말만 믿고 아비의 뒤통수를 쳐!?

-아버지, 이제 그만 선조께 가시지요! 장례는 성대히 치러드리겠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가 막힌 대화에 루시안 일행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대체 무슨 패륜의 현장이야?

71화

"어떻게 할까요?"

휴고가 모두를 대변하듯 나서서 루시안에게 물었다.

남의 사정에 끼어들면 자연스레 골치 아픈 일을 떠맡게 되는 법.

하지만 잘만 하면 북부에서 아군을 만들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다.

"가보자."

잠시 고민하던 루시안은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향했다.

어차피 저들은 여기 오고 있으니 이대로 가면 금방 맞닥뜨리겠지.

멍하니 있다 휘말리느니 적극적으로 나서서 상황을 파악하는 편이 나았다.

쩌엉, 챙, 쩌억

"저기로군요."

언덕길을 오른 루시안 일행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아래에서는 약 서른 명 정도가 서로 뒤엉켜 싸우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단 한 명을 상대로 나머지 인원이 달려들고 있었다.

"이런 북부의 수치 같으니! 네놈들은 전사의 명예도 모른다는 말이냐!?"

콰직

"꺼억...!"

하얗게 센 머리의 노인은 포효하듯 외치며 도끼로 달려드는 병사를 찍어버렸다.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근육질의 몸으로 적을 쓸어버리는 모습은 황당할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노친네. 전사 전사 하더니만 정말 괴물같이 단련했구만."

근육질의 노인과 달리 다수의 병사를 부리는 자는 점잖은 귀족처럼 보였다.

수도에서나 볼 법한 고급스러운 정장과 하얀 장갑은 순간적으로 무도회장을 떠올리게 했다.

"이 썩을 놈이! 병졸들 뒤에 숨어서 지금 뭐 하는 짓거리냐!? 네가 널 그리 가르쳤더냐!? 아비의 목을 가지고 싶다면 네놈이 직접 나서거라!"

"그 시대에 뒤떨어진 사상을 아직도 고집하십니까? 제 목을 원해서 하는 기만책이라면 모를까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 더 한심스럽군요."

"이놈... 큭!"

촤악

분노한 노인이 호통을 치려던 순간, 병사 한 명의 창이 그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강철 같던 근육질에서 피가 흘러나오자 병사가 흥분한 듯 소리쳤다.

"찌, 찔렀다! 내가...!"

"어르신이 말하는데 이게 무슨 짓거리냐!"

푸확

번개처럼 휘둘러진 도끼가 기뻐하던 병사의 머리통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

어찌나 빠른 속도였는지 병사는 자기 죽음조차 인지 못 해서 웃는 얼굴 그대로였다.

바닥에 떨어진 병사의 목을 바라보며 귀족은 혀를 찼다.

"이런 쯧쯧. 저래서야 금화는 못 받겠군. 한 번 찌르고 빠졌으면 될 것을."

"네가 지금 그따위... 크윽!"

다시 호통을 치려던 노인은 현기증이 나는지 몸을 휘청거렸다.

자세히 보니 노인의 몸은 이미 다른 자잘한 상처들로 가득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노인의 모습에 중년의 귀족은 웃음을 터트렸다.

"전사니 뭐니 해도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아버지! 하기야 그 나이치고는 참 오래 버티셨지요."

"...하나만 물어보자. 네놈은 정말 그 독사 놈이 북부의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냐?"

죽음을 앞두었다고 생각했는지 노인은 분노를 거두고 순수한 궁금증만을 담아 물어보았다.

귀족은 그 말에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랍니까? 북부의 영광이니 뭐니 제가 알 게 아닙니다."

"뭣이? 그럼 대체...!"

"중요한 건 칼릭스 백작가가 북부를 재편하려고 하고 있고, 그 말에 동조하는 자가 생각보다 많다는 겁니다. 정말 북부가 재편된다면 가능한 한 일찍 그들의 편에 서서 떡고물을 받아먹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너는 마지막까지!"

이를 악문 노인의 입에서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자식의 패륜보다는 전통을 부정하는 모습에 더욱 처참한 기분을 느끼는 듯했다.

"설교는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그만 떠드시고 과묵하게 가시지요. 아버지께서 그토록 좋아하시는 전사답게 말입니다."

비아냥을 담은 말과 함께 귀족이 손짓하자, 지금껏 힘을 아끼고 있던 기사 셋이 앞으로 나왔다.

기사들의 말이 투레질을 하며 당장이라도 돌격할 듯 자세를 취한 순간이었다.

"아니, 그건 안 되겠군."

"...!"

언덕 위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루시안의 음성이 울렸다.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에 귀족은 눈을 찌푸렸다.

"네놈은 누군데 남의 가문 사정에 끼어드는 것이냐?"

"그러는 네놈은 누군데 남의 가문 사정에 끼어드는 것이냐?"

"...?"

귀족은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이 되었다.

아니, 끼어든 건 저들이면서 자기보고 끼어든다니?

"무슨 개소리냐! 지금 네놈이 나랑 말장난을 하자는 거냐!?"

"그럴 리가. 난 진심으로 묻고 있는 거다. 왜 칼릭스 백작가를 들먹이지? 놈들은 내 허락도 맡지 않고 그리말디의 이름을 쓰고 있는데 말이야."

"...!?"

루시안의 말에 귀족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그리말디를 들먹거리다니?

"그대는 대체 누구요?"

혼란 섞인 귀족의 물음에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루시안 발데크. 발데크의 삼공자이자 그리말디의 마지막 가주이신 분의 외손자다."

****

"...."

"...."

루시안이 정체를 드러내자 귀족은 물론 기사들마저 일제히 침묵했다.

특히 기사들은 귀족보다도 더 혼란에 빠진 듯이 연신 서로를 쳐다봤다.

"...그대는 정말로 그리말디의 혈족이요?"

"남의 이름을 들었으니 이제 본인의 이름을 댈 차례인 듯한데."

"크흠, 실례했소. 토릭 오스고르요. 오스고르 자작가의 현 가주지."

"웃기는 소리. 내가 네놈에게 언제 가주 자리를 물려줬더냐?"

노인의 반박에 토릭이 눈을 찌푸렸다.

입 닥치라는 듯한 눈빛이 쏘아졌지만, 노인은 콧방귀를 뀌며 루시안에게 소리쳤다.

"내가 바로 오스고르 자작가의 현 가주인 하랄드 오스고르다! 그대가 정말 클라우스 공작 전하의 외손자가 맞는가!?"

클라우스 그리말디.

외조부의 이름이 노인의 입에서 나오자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의 여덟 신께 맹세컨대, 그분의 피를 이은 외손자요."

"어째서 지금 북부에 왔는가? 난 지금껏 그대를 본 적이 없다!"

상처투성이의 하랄드는 형형한 눈빛으로 루시안에게 물었다.

지금껏 북부에 발도 안 디딘 주제에 갑자기 무슨 일로 왔냐고 책망하는 듯했다.

루시안은 하랄드를 향해 당당히 말했다.

"원래 내 것이었던 그리말디의 이름을 되찾고, 멋대로 가져다 쓴 도둑놈을 징치하기 위해서 왔소."

"북부인이 아닌 그대가 북부의 일에 끼어들 자격이 있는가?"

"내가 어디 출신이든 나는 그분의 손자요. 내 것을 되찾는데 더 무슨 자격이 필요하단 말이오?"

"모든 북부인이 그대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겠다면?"

하랄드는 당장이라도 도끼를 던질 것처럼 근육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루시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갑게 웃었다.

"그럼 내가 모든 북부인에게 남의 집안일에 끼어들 자격을 물어야겠지."

"푸하하하!"

오만하다 못해 시건방짐이 느껴지는 대답이건만, 하랄드는 오히려 폭소를 터트렸다.

아직도 지혈이 안 된 상처에서 피가 울컥거렸으나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크흐, 그분의 외손자가 확실하구만. 이거 옛날 생각나는군."

"문답은 다 끝났소?"

"끝났지. 북부에 온 것을 환영하오, 그리말디의 후예여. 그리고...."

도끼를 한 바퀴 휘두른 하랄드가 토릭을 노려보며 말했다.

"미안한데 조금 도와줄 수 없소? 부끄럽지만 내가 자식에게 뒤통수를 맞아서 이 꼴인지라."

하랄드의 지원 요청에 토릭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대는 이 일에 끼어들 이유가 없소! 이건 우리 가문의 일이니 못 본 셈 치고 떠나시오!"

"싫다면?"

"뭣!?"

"방금 전 대화가 아주 흥미롭더군. 뭐라고 했더라? 칼릭스 백작가가 재편하는 북부의 새로운 질서에서 떡고물을 받아먹겠다?"

이런 빌어먹을!

와락 얼굴을 구긴 토릭은 빠르게 루시안 일행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입꼬리를 울리며 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를 되찾았다.

"겨우 그따위 전력으로 내게 덤비겠다는 건가? 기가 막히는군."

"내 전력이 어떻길래?"

"퇴물 기사 하나, 기사 흉내 내는 용병 계집 하나와 오합지졸 열 명으로 보이는군. 아,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도 추가해야 하나?"

"호오."

비아냥거리는 토릭을 향해 루시안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렇게 보인단 말이지?

"레이먼, 펠리시아. 길을 열어라. 휴고, 십인대를 이끌고 두 사람이 포위되지 않도록 뒤를 지켜라."

"예, 주군."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레이먼과 펠리시아가 선두에 서고, 그 뒤를 따르듯 휴고와 십인대가 좌우로 늘어섰다.

일개 병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토릭은 움찔하면서도 애써 미소를 드러내 보였다.

"훈련을 제법 열심히 시켰나 보군. 하지만 아무리 정예라도 겨우 열 명으로는...."

"돌격."

루시안은 토릭의 말을 무시한 채 조용히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흑사자와 차기 검성이 검을 뽑으며 언덕 아래로 향했다.

****

"...."

토릭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돌격을 막던 병사들이 수수깡처럼 쓰러지는가 싶더니만 어느새 목에 차가운 금속이 닿고 있었다.

"움직이면 죽인다."

펠리시아의 목소리에 토릭이 마른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울리자 닿은 검이 더욱 피부를 파고드는 듯했다.

"병사들에게 무기 버리라고 해."

"그건...."

"죽고 싶나?"

"무기 버려! 전부 다 무기를 버려라!"

검날이 목을 파고들자 기겁한 토릭은 비명처럼 소리쳤다.

살아있던 병사들은 지휘관의 말에 일제히 무기를 집어 던졌다.

무장해제가 끝나자 토릭이 떨리는 눈으로 펠리시아를 쳐다봤다.

"나, 날 어쩔 셈이오?"

"주군의 의향에 달렸지."

"몸값, 몸값을 내겠소. 그러니 제발...."

"닥쳐."

살기등등한 펠리시아의 목소리에 토릭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연신 주변을 힐끗거리던 토릭의 눈이 이윽고 시체가 된 세 명의 기사에게 향했다.

'대체 언제....'

한 명은 어떻게 쓰러지는지 확실하게 봤다.

퇴물 기사로 보이던 실력자는 단 세 합으로 자신의 기사를 베어 넘겼다.

문제는 다른 두 기사였다.

'휘두르는 것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여검사가 검을 살짝 턴 순간 어느새 두 명의 기사는 낙마한 상태였다.

바닥을 적시는 피를 보고 나서야 토릭은 기사들이 목을 베였다는 걸 알아차렸다.

진짜 괴물이 누군지 알게 된 토릭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내, 내가 방금 뭐라고 했더라?'

"쯧쯧."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두 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느새 뒤에서 지켜보던 루시안과 하랄드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토록 대세니 뭐니 하더니만 코앞의 피 냄새조차 제대로 못 맡는구나. 이게 네가 말하던 정치냐?"

"...."

수치심으로 벌게진 토릭이 몸을 떨었으나, 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에 하랄드는 더 뭐라 하지 않고 한숨만 내쉬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루시안은 아까 전과 달리 공손한 어조로 하랄드에게 물었다.

연장자에 대한 배려이자 작위 귀족에 대한 존중이었다.

이전 반란 진압에서는 그나마 가주 대리라는 직책이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 아무 직책 없는 일개 삼공자였으니까.

하랄드도 루시안의 배려를 알아차리고는 말투에 힘을 뺐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밧줄 가지고 있나?"

"있습니다. 북부에서는 곧잘 눈에 빠진다기에 넉넉히 챙겨왔지요."

"전원 포박해주게. 포로로 데려가고 싶네."

"괜찮으시겠습니까?"

하랄드는 루시안의 물음에 씁쓸히 웃었다.

"한심하기 그지없는 데다 패륜까지 저지른 놈이지만 그래도 내 자식일세. 이 자리에서 목을 치고 싶지는 않아."

"원하신다면야."

루시안은 십인대에게 명령하여 무장 해제한 병사들을 포박했다.

겨우 열 명이 두 배가 넘는 병사들을 포로로 잡는 광경은 참으로 기묘했다.

포박되는 병사들을 조용히 응시하던 하랄드는 루시안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클라우스 공작 전하의 외손자라고 했지? 우리 대화 좀 하세."

72화

"그 전에 상처부터 치료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보아하니 꽤 다치신 듯한데."

루시안의 시선이 하랄드의 상반신에 가득한 자상들로 향했다.

큰 상처는 없었지만, 워낙 자잘한 부상이 많아 내버려 두면 좋지 않을 듯했다.

"이 정도쯤이야 침 바르면 낫는다고 하고 싶지만, 허세를 부릴 상황이 아니군. 괜히 남들 고생시키기 전에 약이라도 발라두는 편이 좋겠어."

"침 대신 이걸 바르시지요. 효과도 더 좋을 겁니다."

루시안이 붉은 포션을 꺼내자 하랄드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허, 포션? 이 귀한걸?"

생각보다 요란한 반응에 루시안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분명 포션이 비싸긴 하지만, 자작이 이리 반응할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닐 텐데.

"크흐, 그토록 포션이 신기합니까? 그거 그리 귀한 것도 아닙니다."

하랄드가 신기한 듯 포션을 바라보고 있자 토릭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도회지에 사는 사람이 시골 촌놈을 보는 듯한 비웃음이 어린 눈동자였다.

"값이 조금 나가긴 해도 자작이라면 개나 소나 사는 수준밖에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따위... 크헉!"

쩌억

"닥치고 있어라! 포로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쫑알쫑알 떠드느냐!?"

뺨을 후려 맞은 토릭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찌나 세게 후려친 건지 살이 터지는 소리가 울릴 정도였다.

"그리고 다른 지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한들 무슨 상관이냐? 흔해 빠진 물 한 방울도 사막에서는 천금의 가치고 빵 한 조각도 사흘 굶은 자에겐 진수성찬이나 마찬가지거늘...!"

하랄드는 이내 훈계를 하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 가르친다고 무슨 소용인가 싶은 씁쓸함이 엿보였다.

토릭도 하랄드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았기에 더더욱.

"미안하군. 못 볼 꼴을 보였네."

"괜찮습니다. 상처부터 치료하시죠."

"그럼 사양 않고."

조심스럽게 뚜껑을 연 하랄드는 상처 구석구석에 포션을 발랐다.

그 거대한 덩치로 포션 한 방울조차 낭비하지 않으려는 모습에 루시안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호쾌하게 뿌릴 줄 알았더니 새신부가 따로 없네. 포션이 귀하긴 귀한가 보군.'

"흠흠, 잘 썼네. 나중에 꼭 보답하지."

하랄드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쓰려는 듯 몇 번이고 탈탈 털어낸 뒤에야 병을 루시안에게 돌려줬다.

유리병을 받아 챙긴 루시안은 제대로 포션의 효과가 듣는 걸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멀지 않은 곳에 내 영지가 있으니 그곳으로 가세. 이 난리가 났으니 손님 대접은 변변치 않겠지만, 그래도 대접할 만한 게 없지는 않네."

"괜찮겠습니까? 반란의 동조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런 놈이 있어도 지금쯤이면 다 끝났을 걸세."

두리뭉실한 답변에 루시안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오랜 세월 영지를 통치해온 자가 이토록 장담한다면 믿는 구석이 있다는 소리일 테니까.

****

반나절 정도 걷자 하랄드가 말했던 그의 영지가 보였다.

비교적 작은 영지임에도 세워진 성벽은 켈하임 못지않게 견고해 보였다.

"대단한 성이군요. 대전쟁이 일어나도 굳건히 버틸 것처럼 보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린 관두게. 분수에 안 맞는 성이라는 건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

부정할 말을 찾지 못한 루시안이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성은 영지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공을 들인 것처럼 보였기에.

자금이 풍부한 대귀족이나 여차할 때를 대비해야 하는 국경지대라면 모를까, 일개 자작령에서 저만한 성을 쌓는 건 솔직히 낭비였다.

"뭐, 우리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네. 자세한 건 안에 들어가서 얘기해주지."

"알겠습니다."

루시안 일행이 성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성벽에 매달린 둥그런 것들이 보였다.

잠시 후, 그 물체가 사람들의 머리란 걸 알아챈 토릭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어째서...!"

"내 이럴 줄 알았지. 하여간 멍청한 녀석들."

입을 뻐끔거리는 토릭을 무시한 채 하랄드가 혀를 찼다.

상황을 보아하니 매달린 머리의 주인들은 토릭의 공모자들인 모양이었다.

"뭘 기대한 거냐? 저 녀석들이 성을 장악하고 널 구출하리라고 믿었던 거냐? 북부의 자식들이 그리 약해 보였느냐?"

"...."

토릭은 대답하지 않은 채 생기를 잃은 눈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래도 저들이 토릭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듯했다.

이윽고 일행이 성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정지! 네놈들은 누구... 자작 각하!?"

"그래, 나다. 반역자들 붙잡아왔으니 문 좀 열어다오."

"예, 예! 뭣들 하냐!? 당장 열어!"

쿠르릉

경비병들은 루시안 일행에 대한 질문 하나 없이 성문을 열었다.

하랄드가 선두에 서서 안으로 들어가자, 그를 알아본 이들이 사방에서 경악을 터트렸다.

"자작 각하!? 각하시다!"

"나리께서 돌아오셨다!"

영민들은 떼를 지어 우르르 하랄드에게 몰려왔다.

그들의 손에 들린 피 묻은 연장을 보고 루시안 일행은 흠칫했으나 아무도 영민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랄드는 저도 모르게 검을 뽑으려는 루시안 일행을 제지하고 영민들을 가만히 놔두었다.

"나리, 무사하십니까!?"

"보면 몰라? 이 하랄드, 여기서 죽을 인물이 아니지!"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당장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이미 구석구석 약을 발랐으니 걱정 말도록. 효과도 좋더군."

껄껄 웃으며 하랄드가 영민들에게 일일이 답변했다.

그 기이한 광경에 루시안은 할 말을 잃었다.

이래서야 마치 영주라기보다 존경받는 촌장 같지 않은가.

'이유 없이 귀족에게 접근하면 당장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게 제국의 법도이건만.'

"놀라셨습니까? 의외로 북부에서 이런 광경은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놀란 채 굳어있는 일행을 향해 레이먼이 웃으며 속삭였다.

그 말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펠리시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더듬더듬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아무리 그래도 평민이... 기사도 아니고 영지 귀족한테...."

"북부의 험한 환경 때문이죠. 이 염병할 추위에 잦은 내전, 심지어 설산에 서식하는 몬스터까지 도사리는 곳이 북부입니다. 모두 힘을 합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드니 영민들도 누구나 무기를 들 수밖에 없죠."

"과연. 영민 전체가 반쯤 상비군이나 마찬가지인 건가."

"정확합니다. 영민들이 별다른 대가를 안 받는다는 점만 빼면요."

영주의 막강한 권위를 뒷받침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영민의 안전에 대한 보호다.

달리 말하자면 영민들이 핏값을 직접 지불하는 이상 영주의 권위도 그리 절대적이진 못하다는 소리다.

아예 영주가 겁쟁이처럼 의무를 내팽개쳤다면 진즉 쫓겨났을 터.

하지만 어디까지나 여력이 부족해서 영민의 도움을 받을 뿐 영주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영민은 영주가 짊어진 짐의 무게를 이해하고, 영주 역시 영민들의 고충을 알게 되는 구조였다.

'그 결과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는 건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정작 살기 좋은 내륙은 강철 같은 규율로 영민을 지배하면서, 가혹한 환경의 북부에서는 서로 간에 이토록 격이 없다니.

한참 걱정하는 영민들과 떠들던 하랄드 자작은 이내 진지한 어조로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반란은 진압되었다. 위기였지만 귀한 손님들 덕에 어찌어찌 넘길 수 있었지. 성으로 돌아가 은인들에게 대접을 하고 싶다만."

"어... 그게...."

자작의 말에 영민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 기묘한 공기를 읽은 하랄드는 얼굴을 구겼다.

"영주관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 반역자 놈들이 영주관에 틀어박히는 바람에 진압하다가 약간 부숴 먹었습니다."

"시체는 대충 치워놓긴 했는데, 핏물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냄새가 좀...."

"어이구야."

하랄드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좀 무너지고 말았으면 모를까, 아직 핏자국도 안 빠진 곳에 손님을 모시는 건 실례였다.

"어쩔 수 없지. 다른 장소로 그대들을 초대해도 되겠나?"

"영주관 말고 어디로 말입니까?"

루시안의 질문에 하랄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술이 맛있는 장소."

*****

"크허어! 좋구만!"

타악

하랄드는 거대한 맥주잔을 탁 내려놓으며 입술을 닦아냈다.

격이 없는 수준을 넘어서서 귀족의 기품을 내다 버린 듯한 행동이었다.

루시안 일행이 침묵하는 걸 보며 하랄드가 씩 웃었다.

"왜? 귀족치고는 너무 품위가 없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흠."

루시안의 대답에 하랄드는 입을 다물었다.

굳이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약간 실망한 기색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루시안은 씩 웃으며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마음에 드는군요. 기품이란 갖추어야 마땅한 장소에서 갖추는 것. 여관에서 격을 따지는 건 주변을 불편하게 만들 뿐이지요."

"거 참, 말 한 번 끝내주게 잘하는구만."

하랄드는 루시안의 달변에 혀를 내둘렀다.

그 말대로 지금 루시안과 하랄드는 일반 여관의 2층을 전세 낸 상태였다.

귀족들에겐 영 불편하고 더럽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루시안에겐 익숙하고 그리운 느낌을 줄 뿐이었다.

루시안의 말이 단순한 빈말이 아니라 진심인 걸 눈치챘는지, 하랄드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그래, 루시안 공. 그리말디의 이름을 되찾고 칼릭스 백작가를 징치하러 왔다고 했지. 무슨 계획이라도 있나?"

"아직은 없습니다. 북부의 현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기에 일단 직접 보고 판단하기로 했지요."

"무모하군. 하지만 정확한 판단이기도 해. 북부를 모르는 상태로는 뭔 계획을 짜오든 제대로 먹히지 않을 테니."

"일단 제 외조부 님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워낙 어릴 적에 돌아가신 데다 얼굴 한 번 뵌 적이 없는 분이라."

"클라우스 공작 전하가 어떤 분이냐, 라."

옛날을 추억하듯 하랄드가 먼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진정한 북부의 아들이셨지."

"역시 각하처럼 전사셨던 겁니까?"

"아니, 전사는 무슨. 완전 약골이셨는데."

"...예?"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루시안이 무심코 되물었다.

아니, 하랄드 같은 사람이 존경하기에 천생 무인인 줄 알았는데.

"몸은 빼빼 마르셨고 근육을 찾아볼 수가 없었지. 훈련하다가 쓰러지는 일도 잦았고 병치레는 어찌나 그리 잦던지. 술은 또 엄청 약하셔서 맥주 한 잔에 인사불성이 되셨다네!"

멍해진 루시안을 향해 하랄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한참 웃던 하랄드는 이내 미소를 거두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자신의 의무는 피하지 않으셨네. 약한 몸으로도 남부끄럽지 않은 힘을 갖춰야 한다며 훈련을 계속했고, 몸이 아프실 때조차 영민을 걱정하셨지.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는 갑옷부터 챙기셨고."

"...."

"주먹으로 사람 하나 때려눕히지 못하는 분이었지만 모두가 그분을 존경했어. 제힘만 믿고 나대는 놈이 전하를 무시하면 모두 동시에 달려들어 피범벅을 만들어주곤 했다네."

그리움이 담긴 목소리에 루시안은 할 말을 잃었다.

가혹한 환경 속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상무적 기풍이 생기기 마련.

자연스레 육체적 힘이 약한 자를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여기며 얕잡아 본다.

그런데 하랄드는 그의 외조부를 약골이라 하면서도 더없이 존경하고 있었다.

"만약 그분이 북부를 통합하고자 하셨다면 북부의 반이 가담했을 거야. 공작 전하께는 그만한 인망이 있었으니까."

"제가 조부와 같은 방식을 쓰는 건...."

"불가능하네."

하랄드는 일고의 여지조차 없다는 듯 즉답했다.

"그분은 전사는 아니었지만 북부인이셨지. 북부에서 나고, 북부에서 자라고, 북부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지키셨어. 하지만 자네는 어느 쪽도 아니지. 이제 와 어설프게 북부인을 따라 한다 해도 원숭이 흉내에 불과해."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저는 칼릭스 백작가를 징치하러 왔지만, 북부에는 아군이 하나도 없습니다. 세력을 일구지 못하고 단신으로 나선다면 제 주장은 간단히 깔아뭉개질 겁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루시안의 말에 하랄드가 히죽 웃었다.

"북부인이라고 타지인을 배척하기만 하는 건 아니야.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존경 정도가 아니라 숭배까지 기꺼이 한다네."

"숭배까진 바라지도 않습니다만, 무슨 방법인지 듣고 싶군요."

"간단하네."

하랄드는 아직 잔상처가 남아있는 근육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나를 꺾어보게."

73화

"...."

루시안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세력을 일굴 방법을 물었건만 대뜸 자신을 꺾어보라니.

"저, 죄송한데 일종의 비유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더 지혜로움을 증명하라거나...."

"지혜로움은 개뿔이. 당연히 제대로 한판 붙어보자는 소리지. 주먹다짐이든 칼싸움이든 말이야."

"음."

잘못 들은 건 아닌 모양이다.

하랄드는 진심으로 자신을 쓰러뜨리라 하고 있었다.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자 하랄드가 맥주를 잔에 부으며 말했다.

"북부가 제국 아래로 들어간 지 어느덧 수백 년. 전통의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워지고 있고, 날이 갈수록 얼굴 허여멀건 놈들의 탁상놀음이 유행하는 중이지."

"...."

"하지만 아무리 가벼워졌다 한들 전통은 전통. 옛 방식을 고수하며 전사를 존경하는 이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네."

"즉, 제가 가진 힘을 증명해보라는 겁니까? 권력이나 지혜 같은 게 아닌, 순수한 무력을?"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씩 웃은 하랄드는 맥주를 또 한잔 비워내고는 입에 거품을 닦았다.

그토록 많은 양을 들이켰음에도 그의 두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물론 힘만 있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겠지. 북부를 노리는 외부의 침략자에게 힘이 있다 한들 적으로 볼지언정 존경하지는 않듯이 말이야."

"하지만 전 완전한 외부인도 아니죠. 한때 북부에서 존경받던 외조부 님의 마지막 혈손이니까요."

"그렇고말고. 북부에서 자라지 않았더라도 클라우스 전하의 피를 이은 외손자가 북부의 전통을 중시한다면 그 누구도 자네의 권리를 부정하지 않겠지. 물론...."

하랄드는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시선을 마주쳤다.

"그 정도도 못한다면 클라우스 전하의 외손자라 할지라도 존중받을 이유가 없지. 북부의 일은 오직 북부인의 손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는 법이니."

"음."

차가운 눈빛에 루시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역에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아니라 외부에서 찾아온 이방인을 보는 눈빛.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다면 저 시선은 절대 바뀌지 않으리라.

아마도 하랄드만이 아니라 북부의 모든 영주가 그러할 터.

"각하를 쓰러뜨리면 전 북부의 인정을 받게 되는 겁니까? 보아하니 대단한 전사이신 모양인데."

"흐허허! 금칠해주는 건 고맙지만, 겨우 노인네 하나 쓰러뜨렸다고 북부 전체의 인정을 받을 수는 없지. 난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자격이 있는지 보고 싶은 것뿐이네."

이런 노인네에게도 이기지 못한다면 칼릭스 백작가를 상대로는 아무것도 못 할 테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뒷말을 알아차린 루시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기꺼이 보여드리지요."

"크흐, 시원시원해서 좋구만."

당연하지만 결투를 받아들인 직후 바로 밖에 나가 싸우는 일은 없었다.

이번 결투는 시험인 동시에 루시안이 가진 무력을 알리기 위한 것.

아무 준비 없이 후다닥 싸우고 끝내는 게 아니라 제대로 준비를 해서 행사처럼 열어야 했다.

가능하면 결투를 본 이들의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지도록.

"그리고 반란이 진압된 직후라 생각보다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네. 만에 하나 살아남은 잔당이 뒤통수를 노리면 골치 아프니 깨끗이 정리해둬야지."

"옳은 말씀입니다."

루시안으로서도 기껏 결투를 벌여놓고 다른 사고 때문에 결과가 묻히는 건 사양이었다.

무엇보다 포션을 사용했다고는 하나 하랄드의 몸도 완전히 회복되진 않은 상황.

나중에 '자작이 멀쩡한 상태가 아니라서 이긴 거다'라는 뒷말이 나돌 바엔 부상이 나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편안히 쉬십시오. 괜히 저한테 일정을 맞춰주신다고 무리하시다 결투에서 잘못되면 오히려 절 모욕하시는 행동이니 말입니다."

"거 참, 자신감 한번 대단하군. 자네의 패배는 아예 가정하지도 않는 건가?"

"패배를 가정해봤자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어떻게 어깨를 더 늘어뜨리고 불쌍하게 돌아갈지 상상하는 것보단 이긴 후의 일이나 생각하는 게 낫지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

하랄드는 웃으면서도 눈썹을 꿈틀거렸다.

전사로서 낮잡아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호승심이 솟구친 모양이었다.

"좋아. 자네 말대로 일주일 정도 푹 쉬면서 영지 정리를 끝마치도록 하지. 결투는 그 이후에 하세나."

"일주일 가지고 되겠습니까?"

"실은 사흘로 충분한데, 정리 시간이 더 걸리거든."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허허허."

"하하하."

서로 가벼운 기 싸움과 동시에 메마른 웃음이 울려 퍼졌다.

허세인지 진심인지 모를 대화가 끝난 후 하랄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자게나. 내일 청소가 끝나면 영주관에 정식으로 초대하겠네. 주인장에게 말은 해뒀으니 뭐든 부탁하면 해 줄걸세. 그리고 아까 잡은 포로들은...."

"데리고 가시지요. 처결은 맡기겠습니다."

"고맙네."

쓴웃음과 동시에 하랄드가 약간 처진 어깨로 여관의 계단을 내려갔다.

저토록 강건한 전사조차 아들의 패륜에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

루시안은 즉시 2층에 가신들을 불러 모았다.

일반 병사인 십인대를 제외한 모두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알려주자 레이먼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력을 통한 자격의 증명이라. 정석이로군요. 북부에서 인정받으려면 그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겠지요."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질 않는데."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질 않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레이먼은 깊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아래에서 대기하는 도중 다른 영민들을 통해 정보를 좀 모아봤습니다. 칼릭스 백작가가 꽤 본격적으로 움직이나 보더군요. 듣자 하니 이곳에도 자주 방문한 모양입니다."

"북부의 초입인 이곳까지 손을 뻗쳤다면, 어지간한 가문은 다 건드려봤다고 봐야겠군."

"예. 그리고 포섭된 가문도 꽤 많겠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남의 가문 사정에 끼어들어 반란을 부추기는 일 같은 건 엄두도 못 냈을 테니까요."

하랄드에게 듣자 하니, 토릭 곁에 있던 세 명의 기사는 본 적 없는 외부인이라고 했다.

애초에 가주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기에 불명예를 걱정하지 않고 칼을 들이댄 셈이다.

기사를 세 명이나 다른 가문 반란에 보태줄 정도라면 그 위세가 만만치 않을 터.

굳이 토릭을 심문해보지 않아도 배후에 칼릭스 백작가가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놈들의 세력이 작았다면 가벼운 증명 몇 번으로 충분할 겁니다. 트집을 잡아봤자 주변의 눈총을 사게 될 뿐이니까요. 하지만 세력이 크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자기 세력을 이용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밀어붙일 수 있으니 말이야."

"예. 그런 놈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면 그 누가 와도 꼬투리 잡기가 힘든 업적을 세워야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내가 그만큼 고생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

"정확합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가문으로 돌아가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무슨! 레이먼 경!"

갑작스러운 레이먼의 제안에 펠리시아가 눈을 치켜떴다.

이대로 돌아가면 루시안의 명예가 더럽혀질 게 뻔한데 감히 그런 소릴 하다니!

하지만 레이먼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무력의 증명이란 트집을 잡자면 끝이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랄드 자작이야 주군께 호의적이니 순수하게 시험해보고 싶은 것뿐이지만, 다른 작자들은 거인이라도 하나 잡아 오라며 주군을 설산으로 떠밀 수도 있습니다."

"그런 파렴치한의 헛소리따윈 무시하면 그만 아닙니까!?"

"의외로 제국의 정치판에서는 이런 파렴치한들의 방식이 꽤 잘 먹혔습니다. 펠리시아 경의 친부께서도 이 분야에서는 안 좋은 쪽으로 유명했고요."

"...."

펠리시아는 할 말을 잃고 시선을 돌렸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친아버지는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그저 베른하르트 후작과 같은 이가 많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뿐.

"권력자 여럿이 모이면 당대의 영웅조차 바보로 만들 수 있지요. 자칫하면 온갖 고생을 하고 아무 수확도 없이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일찍 돌아가자?"

"지금이라면 포기해봤자 주군께 생길 불명예도 없으니까요."

"심정은 이해한다만 너무 성급하군. 내가 없는 사이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길까 불안한 거냐?"

"...."

정곡을 찔린 레이먼이 몸을 움찔했다.

조르디에게서 수상한 낌새를 느낀 건 루시안만이 아닌 듯했다.

피식 웃은 루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심정은 알겠지만, 이대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주군."

"큰소리를 떵떵 쳐놓고 돌아가는 게 부끄러워서가 아니야.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이니까 그런 거지."

"승산이요?"

"일단...."

우당탕, 쿵쾅

루시안이 대답하기 직전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급하게 위로 올라오는 듯했다.

혹시나 하여 방에 모인 모두가 무기를 잡았을 때였다.

쿵쿵쿵

"나, 나리! 아직 안 주무시죠!? 나리!"

여관 주인이 요란스레 문을 두드리며 루시안을 불렀다.

루시안은 다른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후 문 너머로 소리쳤다.

"아직 일어나 있다. 왜 부르는 거냐?"

"아, 깨어나 있으셨군요! 지금 당장 영주관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뭔 뜬금없는 소리야?"

"방금 칼릭스 놈들이 왔습니다! 우리 영주님께서 놈들 낯짝 좀 같이 구경하시자고 합니다!"

"...!"

****

칼릭스 백작가에서 온 사절은 조촐했다.

선물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기사 하나에 병사 열 명.

사절로서 최소한의 격식만 갖춘 상태였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모욕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는 상황.

'일부러는 아니군. 반란이 진압될 줄 몰랐던 건가.'

사절로 온 기사는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는 중이었지만, 새어 나오는 당혹감은 숨길 수 없었다.

자신들의 도움으로 영주가 된 토릭을 상대로 으스댈 생각이었다가 예정이 틀어진 모양이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적의 속에서 기사가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데인 후스카르가 하랄드 자작 각하를 뵙습니다. 여전히 정정하시군요."

"내가 정정하니 퍽 안타깝겠군. 자식놈을 꼭두각시로 앉히고 네놈들 멋대로 부릴 생각이었을 텐데 말이야."

하랄드가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자 데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으나, 곧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영지에 난리가 났다는 소린 들었습니다만, 칼릭스 백작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입니다."

"칼릭스 백작가 휘하에 있던 기사 셋이 있는데도 말인가?"

"당혹스럽군요. 주군께서 한 번도 명령한 적 없건만 제멋대로 행동할 줄이야. 돌아오면 엄히 처벌해야겠습니다."

"한심한 놈들."

계속해서 발뺌하는 데인을 향해 진심을 담은 경멸이 날아들었다.

"네놈들은 언제나 그랬지. 내가 그랬다는 증거가 어디 있냐, 증명하고 싶으면 증거를 가져와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후 진짜로 태양이 사라졌다며 저들끼리 낄낄거렸어."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콰앙

말을 마치기도 전에 도끼가 날아가 데인의 옆에 꽂혔다.

튀어 오르는 흙먼지와 돌가루에 기겁한 데인이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죽고 싶으냐?"

"...."

"네놈은 섬기는 주인의 위세를 등에 업고 나와 맞먹고 싶은 모양이다만, 난 지금 기분이 더럽다. 시건방진 전령 놈의 농담 따먹기를 들어줄 만큼 마음이 넓지도 못하지."

서슬 퍼런 하랄드의 엄포에 데인은 입을 다물었다.

최소한 패륜 때문에 눈이 뒤집힌 아비를 건드려 봐야 좋을 거 없다는 것 정도는 아는 듯했다.

"내가 참을 수 있는 동안 지껄일 수 있을 만큼 지껄인 후 꺼져라. 단, 참지 못하게 되면 이 자리에서 모가지를 쳐버리겠지만."

"...그럼 딱 하나만 묻겠습니다. 아직도 칼릭스 백작가와 함께 북부의 영광을 되찾을 생각은 없으십니까?"

"하."

하랄드는 코웃음을 치며 턱을 괴었다.

"북부의 영광? 시건방지군. 칼릭스가 언제 북부 전체를 대변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냐?"

"각하, 그리말디의 이름을 이을 자격이 있는 건 칼릭스 뿐입니다. 칼릭스 외에 누가 북부를 대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루시안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내가 그럴 수 있다면 어쩔 거지?"

74화

"...?"

데인은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루시안을 훑어보았다.

곧 루시안의 나이가 생각보다 어리단 걸 확인한 데인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이건 대체 무슨 헛소리입니까?"

"헛소리라고 생각하나?"

"각하, 이건 농담으로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북부에서 그리말디라는 이름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근본 없는 대리인을 내세우신다면 그만한 후폭풍도 감당하셔야 합니다."

"후폭풍이라."

하랄드는 대답 대신 피식 웃으며 루시안을 향해 눈짓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본인 스스로 정체를 밝히라는 제스처였다.

기회를 준 하랄드에게 감사를 표한 루시안은 당당히 말했다.

"내가 바로 클라우스 공작 전하의 외손자이자 그리말디의 적법한 상속자, 루시안 발데크다."

"...!?"

데인은 기겁하여 떨리는 눈으로 루시안을 쳐다봤다.

잠시 후, 간신히 정신을 차린 데인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리말디의 영애께서 북부를 떠난 지 벌써 십수 년이 지났소! 그런데 이제 와 외손자라니!"

격한 반응에 루시안은 코웃음을 쳤다.

너무 당황해서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모양이었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냐? 내가 진짜 외손자가 아닌 가짜라는 거냐? 아니면 진짜 외손자라 할지라도 그만한 자격이 없다는 거냐?"

"그야...!"

전부 다, 라고 말하려던 데인이 입술을 어물거렸다.

전자는 몰라도 후자를 이 자리에서 지적하기는 힘들었다.

그가 섬기는 칼릭스 백작가 또한 그리말디의 외가 쪽 후손.

어설픈 논리로는 주군의 정통성 문제까지 건드릴 위험이 있었다.

"...전자요. 그대가 진짜 클라우스 전하의 외손자라는 증거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분의 영애가 어디로 시집갔는지는 알고 있나?"

"누가 모르겠소? 제국의 기둥인 발데크 대공가...."

이번에도 데인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도중에 다물었다.

발데크 대공가의 상징이 사자라는 건 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

그런데 눈앞의 루시안은 대놓고 옷깃에 사자 문양을 새겨놓은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본인이 직접 발데크란 이름을 남들 앞에서 대기까지 했으니.

'이런 빌어먹을! 진짜 발데크란 말인가!?'

본인의 가문을 속이는 게 얼마나 큰 불명예인지, 그리고 상대에게 얼마나 큰 모욕인지를 생각한다면 거짓일 가능성은 없을 터.

머릿속이 복잡해진 데인이 침묵하는 와중 루시안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더 해봐라. 내가 발데크란 걸 제대로 확인하고 싶지 않나?"

"...대체 왜 지금 북부에 온 거요? 그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북부에 발을 들인 적이 없지 않소."

할 말을 찾지 못한 데인은 에둘러 루시안을 쏘아붙였다.

북부에 애정도 없던 주제에 이제 와 그리말디를 들먹이는 게 우습지 않냐는 일침이었다.

하지만 루시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선언했다.

"그야 물론 내 것인 그리말디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서지."

"그대는 발데크요! 그리말디가 아니라!"

"그럼 칼릭스는 무슨 권리로 그리말디의 이름을 주장하는가? 수백 년 전에 혼인으로 맺어졌다는 같잖은 소리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따지자면 그 누구보다도 내 권리가 우선시되어야 할 테니."

"아니!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대에게 그리말디의 이름을 댈 권리는 없소. 북부의 일은 북부인이 결정지어야 하는 법. 그대는 북부인이 아니잖소?"

빈약한 논리였지만, 데인으로서는 필사적이었다.

여기서 루시안의 권리를 인정해버리는 순간 주군에게 버림받을 게 뻔했으니까.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갈 여지는 남겨둔 후에 돌아가야 했다.

"재산과 땅, 저택 같은 물질적인 것이라면 얼마든지 그대의 것이라 주장해도 상관없소. 하지만 옛 왕가가 가진 정통성을 주장할 권리는 없소. 그대는 북부의 방식조차 모르는 외지인이기 때문이오!"

"옳은 말이다."

지금껏 가만히 있던 하랄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무리 선대 공작 전하의 피를 이었다 한들 그는 외지인. 북부인이 아니지. 북부의 일은 북부인이 결정지어야 하는 법."

"그, 그렇... 습니다?"

데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랄드를 바라봤다.

이 노친네가 갑자기 왜 자신의 편을 들지?

지금껏 칼릭스 백작가의 대계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은 주제에.

'그러고 보니 북부인으로서 정체성 하나는 끝내주는 영감이었지. 외부인이 그리말디를 들먹이는 것보다는 칼릭스가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즉."

내심 헛된 기대를 하는 데인을 향해 하랄드가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북부의 방식으로 전사임을 증명한다면 아무 문제 될 게 없지."

"무슨...!?"

"일주일 후, 루시안 공과 나는 결투를 하기로 했다. 그가 북부의 진정한 아들인지 아닌지는 그때 밝혀질 것이다."

"말도 안 됩니다! 개인의 무력과 출신지가 무슨 상관이랍니까!? 칼릭스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뭐 어쩔 거지?"

"예?"

"적어도 나는 인정할 것이다. 다른 놈들이 인정할지는 모르나 그건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사정. 칼릭스 백작가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하랄드의 일방적인 통보에 데인이 이를 악물었다.

그 말대로 이건 칼릭스 백작가가 인정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북부인들이 루시안을 전사로 볼 것인가 외지인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

루시안이 북부의 전통에 따라 자신을 증명한다면 칼릭스 백작가에서 뭐라 하든 많은 이들이 내심 인정하리라.

북부에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전통을 따르는 혈족이라고.

'외통수다.'

이렇게 된 이상 데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수를 쓰든 루시안과 하랄드의 결투는 이루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세력도 형성될 것이기에.

"더 할 말이 없다면 꺼져라. 계속해서 네놈들의 낯짝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뒤틀리는 것 같군."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포로가 된 기사들만이라도 돌려주십시오. 반란에 가담했다고는 하나 그들은 칼릭스 백작가에 충성을 맹세한 이들. 저희 쪽에서 처벌하겠습니다."

"성벽에 목을 걸어뒀으니 찾아가라. 오른쪽 끝자락에 뒀으니 찾으면 금방 보일 거다."

경악한 데인이 눈을 부릅떴다.

적이었으니 전투 도중 죽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사인데 목까지 잘라서 성벽에 걸어뒀다고?

욱한 나머지 욕설이 나올 뻔했지만, 하랄드의 분노도 만만찮다는 걸 깨달은 데인은 간신히 한마디만을 내뱉었다.

"칼릭스 백작가는 이 일을 잊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데인은 등을 돌려 영주관을 떠나갔다.

데인의 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 하랄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당연히 그래야지. 나 또한 잊지 않을 테니 말이야."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루시안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칼릭스 백작가를 어떻게 떨어뜨려야 할지 감이 잡히는 것 같았기에.

****

데인이 영지를 떠난 후, 하랄드는 사방에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말디의 정당한 후계자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하랄드와 결투를 벌인다는 내용이었다.

뜬금없는 소문에 인접한 영지의 가주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정당한 후계자라니? 칼릭스 백작가 외에 그리말디의 이름을 들먹일 만한 데가 있었던가?"

"클라우스 전하의 영애께서 발데크 가문에 시집간 일은 벌써 까먹었나?"

"발데크? 아니, 발데크가 이 척박한 북부에는 무슨 일로? 그냥 제국에서 떵떵거리며 살면 될 텐데."

"나야 모르지. 하지만 이유야 어쨌건 정당한 권리가 있는 건 사실 아닌가."

"하긴. 사실이라면 그보다 가까운 혈족이 없긴 하지."

"솔직히 칼릭스 백작가가 그리말디의 이름을 쓰는 것도 우습지 않나? 마지막으로 혼인한 게 몇 년 전인데."

소문이 사실이라면 칼릭스 백작가는 북부를 통합하려는 명분 자체가 무너지는 상황.

칼릭스 백작가에 붙은 가문이건, 그들에게 반대하는 가문이건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몇몇 노가주들은 소문을 듣고도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별 시답잖은 소문이 다 도는군. 무시하고 내버려 둬라."

"주군, 최소한 사람을 보내 결투의 향방이라도 직접 봐야...."

"볼 필요도 없다. 선대 공작 전하의 외손자고 나발이고 겨우 열여섯짜리 애송이라지 않느냐. 그 '늑대 학살자' 하랄드를 상대로 한 합이나 버티면 다행이지."

"굳이 이길 필요는 없잖습니까? 무력만 증명하면 되니 자작 각하께서 손대중을 하실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멍청한 소리. 하랄드는 진짜배기 전사다. 적당히 싸우는 것 자체를 모욕이라 생각하는 놈이야. 그런 꽉 막힌 놈이 상대를 봐주기는 개뿔이."

소문의 진위가 어떻든 정말로 하랄드와 결투를 한다면 열여섯 애송이가 이길 일은 없으리라.

그리 생각한 노가주들은 관심을 끊어버린 채 관전할 전령 하나 보내지 않았다.

우습게도 하랄드 휘하의 영민들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나리, 정말 우리 각하랑 싸우시는 겁니까?"

"그건 왜 묻지?"

"이것 좀 드십시오. 노루의 생피입니다."

"...노루의 생피는 왜?"

"사내가 기운을 내는 데는 이만한 게 없습니다. 자칫하면 크게 다치실지도 모르는데 준비를 탄탄히 하셔야지요."

루시안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영주와 싸운다고 했음에도 정작 하랄드를 걱정하는 영민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루시안이 어떻게 패배할지, 지는 과정에서 크게 다치진 않을지 걱정할 뿐이었다.

몇몇 영민들은 대놓고 루시안의 용기에 감탄하기도 했다.

"대단하십니다. 전사임을 증명하기 위해 영주님께 도전하시다니!"

"조언을 해드리자면 힘으로 맞서지 마십시오. 가능하면 큰 동작 사이의 틈을 노리셔야 합니다."

"...."

그들의 호의에 루시안과 그 일행은 헛웃음을 내뱉어야 했다.

우습게 보였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도 진심 어린 걱정과 응원들이었다.

"이런 대접은 생소하군. 이래 봬도 두 번이나 선봉에서 싸웠는데 여기서는 완전히 신병 취급이네."

"원래 북부는 외부 정보가 상당수 묻히는 편입니다. 굵직한 소식 정도야 들릴 테지만, 이전 반란 진압은 대놓고 황실에서 은폐했으니."

"뭐, 그 점을 감안해도 하랄드 자작이 실력자라는 건 부정할 수 없겠지."

루시안은 이전에 하랄드가 휘두른 도끼를 떠올렸다.

별다른 기교가 없는 정직한 움직임이었으나 그 위력은 도끼를 비껴낼 엄두도 못 내게 만들었다.

어지간한 기사라면 기백에 압도된 채 무거운 공격을 막아내다 힘이 다해 두 쪽으로 갈라질 터.

'하지만 난 그 어지간한 기사가 아니지.'

눈을 감은 루시안이 자신의 내부를 관조했다.

원래부터 매끈하게 닦여 있던 길은 이전에 '눈'이 열리며 한층 커져 있었다.

강화된 근육도 이전보다 훨씬 많은 마력을 감당할 수 있도록 향상된 상태.

'오랜만에 한 방에 끝나지 않을 상대와 싸울지도 모르겠어.'

그리 생각하던 루시안은 문득 자신의 호승심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새 약자일 때는 상상도 못 했던 감정이 생겨나 있었기에.

****

결투 당일, 루시안은 검에 손을 댄 채 광장에서 하랄드를 기다렸다.

보통 귀족의 결투는 연무장에서 치러지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결투의 목적을 생각하면 관전자가 많은 편이 좋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결투에 관심 있는 영주들이 많은 모양이군.'

루시안의 시선이 몰려든 영민들 사이에 드문드문 끼어있는 기사들을 향했다.

하랄드 휘하에 있는 기사가 아니라 다른 영지에서 결투의 결과를 직관하기 위해 보낸 대리인들이었다.

겨우 일주일 남짓이었으니 관전자를 보내기엔 여러모로 시간이 촉박했을 텐데도 도착한 이들의 숫자는 상당했다.

'그만큼 내 존재에 흥미를 가졌다는 뜻이겠지. 괜찮은 시작이야.'

이렇게 주변의 시선을 끈 것만으로도 이번 결투의 목적은 반쯤 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

남은 건 하랄드를 꺾어 북부인들 앞에 무력을 증명하는 것뿐이었다.

검을 만지작거리며 기다리던 루시안이 슬슬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쿠르릉

내성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도끼를 어깨에 짊어진 하랄드가 등장했다.

루시안은 반갑게 하랄드를 쳐다봤으나, 이내 그 옆에 묶여있는 토릭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아니, 감옥에 있어야 할 놈이 왜 같이 오는 거야?

75화

"오래 기다렸나?"

"아뇨, 딱 맞춰오셨습니다. 그런데 뒤에 있는 놈은...."

하랄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지만, 루시안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예정에 없던 일이라도 벌였다간 곤란해질 수 있으니.

루시안이 불편해하는 기색을 눈치챈 하랄드가 씁쓸히 웃었다.

"이놈은 신경 쓰지 말게. 그저 나무 막대기처럼 세워둘 예정이니."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내 마지막 미련일세."

그 말에 루시안은 하랄드의 심정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북부의 전통을 지키긴커녕 갈아엎고 싶어 안달이 난 자식놈.

이미 관계를 되돌리기엔 늦었지만, 최소한 이번 결투를 통해 무언가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인가.

"...."

토릭은 그러거나 말거나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사정을 이해한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좋습니다. 언제 시작하시겠습니까?"

"관객들을 오래 기다리게 할 필요는 없겠지. 뽑게나."

터엉

무거운 도끼가 바닥에 떨어지며 주변을 울렸다.

이전까지 휘둘렀던 도끼와 사뭇 다른 음색이었다.

'보통 도끼가 아니군. 유물인가?'

지금은 사라진 고대의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옛 시대의 유산.

하급조차 굉장히 비싼 가격에 팔리고 중급 정도 되면 한 가문의 가보와 맞먹는 게 유물이었다.

당연히 그 희소함만큼이나 유물이 가진 위력도 상당했다.

'봐줄 생각은 조금도 없는 모양이네.'

스르릉

피식 웃은 루시안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유물은 아닐지라도 그 귀한 아다만티움이 섞인 검이다.

내구도만 따진다면 유물의 공격 정도는 버티고도 남을 터.

순수한 실력만이 결투의 결과를 판가름하리라.

"이 결투가 여덟 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정정당당한 일전이 되기를."

투확

입회인으로 나선 레이먼이 짧은 의례를 마치고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하랄드가 공기를 터트리는 소리를 내며 루시안에게 다가왔다.

말도 안 되는 속도에 루시안은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유물의 힘인가!'

도끼에는 어느새 숨겨져 있던 룬이 빛을 뿜으며 마법적인 기운을 드러내고 있었다.

평범한 기사였다면 맞붙을 엄두도 못 내고 뒤로 물러서려 했으리라.

그러나 루시안은 오히려 검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두툼한 도끼와 얇은 검이 서로 맞부딪치는 순간이었다.

쩌어어엉

귀를 먹먹하게 하는 굉음과 동시에 충격파가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

푸화악

"...."

칼릭스 백작가의 기사, 팔미르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검과 도끼가 부딪칠 때마다 터져 나오는 충격파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자신이라면 단 한 합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팔이 부러질만한 충격.

지금 결투에 나선 두 사람은 몇 번이고 그런 일격을 나누고 있었다.

'기가 막혀 웃음밖에 안 나오는군.'

하랄드 자작이 저만한 무력을 가졌다는 것도 놀랍긴 하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늙은 기사들과 선대 가주에게 '늑대 사냥꾼'이라 불리며 젊은 시절 무명을 떨쳤던 자다.

타고난 체격과 단련된 육체, 수없이 쌓아온 전투 경험과 유물의 힘까지 더해졌으니 저런 힘을 발휘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겠지.

'하지만 저놈은... 저게 말이 되나?'

팔미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루시안이었다.

겨우 열여섯 남짓한 애송이에 체구도 기껏해야 평균 수준.

종군 경험이라고 해봤자 뻔할 테고 쌓아온 연륜조차 없다.

심지어 검조차 더없이 튼튼한 것 외에는 아무런 마법적 효과가 없거늘.

'어떻게 저 하랄드와 비등비등하게 싸우는 거지?'

꽈아앙

또다시 굉음이 울리며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연이어 무기를 부딪치던 두 사람은 잠시 뒤로 떨어졌다.

"흐허허, 흐하하하하!"

하랄드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폭소가 터져 나왔다.

아직도 두 눈에서는 놀라움이 가시질 않았으나 그 이상의 쾌감이 몸을 휘감고 있었다.

'숨겨둔 한 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가보인 유물까지 동원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승리를 원해서가 아니라 북부가 어떤 곳인지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이 정도 압박조차 견디지 못하고 마음이 꺾인다면 얌전히 북부를 떠나는 편이 나을 테니까.

아무리 의기가 있다 한들 쌓아온 전투 경험과 단련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법.

그렇기에 설령 패배한다 하더라도 애송이 특유의 무모함과 기책 덕분일거라 예상했거늘.

'아예 정면에서 날 꺾을 기세가 아닌가!'

오랫동안 죽어있던 심장이 다시 뛰는 기분이었다.

전투에 의한 고양감 따위가 아니었다.

싹수 있는 애송이라 생각했던 게 알고보니 영웅의 알이었다는 걸 깨달은 듯한 흥분에 가까웠다.

'북부의 통합 따윈 이루어질 일 없는 헛소리라고 생각했건만.'

어쩌면 가능한 게 아닐까.

눈앞에서 검을 휘두르는 영웅의 알이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그리말디의 정당한 후계자로서 북부인에게 인정받는다면.

정말 옛 왕국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만족스러우신지요?"

흥분을 삭이던 하랄드의 귀에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랄드는 도끼를 꽉 쥔 채 눈앞의 소년을 쳐다보았다.

그토록 합을 나누었음에도 아직 여력이 한참은 남은 듯한 미소.

"암, 만족스럽고말고! 더 보여줄 게 있는가!?"

"원하신다면야."

기꺼운 마음으로 답하자 루시안의 몸에서 푸른 마력이 일렁였다.

유형화된 마력에 관전하던 기사들은 일제히 경악을 터트렸다.

"마력의 가시화!?"

"이런 미친...!"

체내의 마력이 남들 눈에도 보일 만큼 흘러넘친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마력의 운용이 검성급 경지에 달했던가, 상식을 벗어난 수준의 마력량을 보유하고 있던가.

전자는 세기의 천재란 소리고 후자는 육체가 인간보다 용에 가깝다는 뜻이니 어느 쪽이건 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허, 이 나이 먹도록 오늘만큼 놀란 적이 없는데 말이야."

하랄드는 피부에 닿는 마력의 파동을 느끼며 도끼를 쥐었다.

가능하면 계속해서 합을 나누며 무엇을 더 숨기고 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온 힘을 다해 유물을 사용한 결과 늙은 몸은 이미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상황.

이 이상 전투를 이어가봤자 힘이 빠져 볼품없는 공격만 날리게 되겠지.

"아쉽지만 다음 한 합으로 결판을 내고 싶은데, 어떤가?"

"좋군요. 오시지요."

"흐허허! 자넨 정말 마지막까지!"

방어 자세를 취하는 루시안을 보며 하랄드가 재차 웃었다.

전투에서는 언제나 공격하는 측이 주도권을 잡는 법.

그런데도 루시안은 마지막 일격의 선공조차 하랄드에게 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기대에 부응해야겠지.'

우우웅

하랄드의 투지에 부응하듯 도끼에 새겨진 룬이 번쩍였다.

광채는 점점 강해져 이윽고 전성기 시절 이상으로 눈부시게 빛났다.

이윽고 관객들이 룬의 빛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진 순간이었다.

꽈아아앙

폭음과 동시에 거대한 진동이 영지 전체로 퍼져 나갔다.

가까이 구경하던 이들 중 일부는 귀를 막은 채 쓰러졌고, 뒤로 넘어지거나 휘청이기도 했다.

광채와 흙먼지가 사라진 후 구경꾼들은 간신히 결투의 결과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바짝 붙은 두 사람 중 무기를 손에 쥔 건 루시안 뿐.

하랄드는 텅 빈 손으로 무언가 내려친 것처럼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터엉

"...!?"

한 박자 늦게 들려오는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어느새 하랄드의 손에서 날아간 도끼가 성벽에 꽂혀 있었다.

부들부들 손을 떨던 하랄드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거야 원. 이렇게 완벽히 패배해서야 할 말이 없구만."

"제 승리로군요."

"그래, 자네의 승리일세."

빙긋 웃은 하랄드는 이내 두 손을 맞잡고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젊은이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전사로서 존경받아 마땅한 이를 예우하는 자세였다.

"지금까지 실례했소. 하랄드 오스고르가 그리말디의 후예이자 북부의 전사에게 재차 인사드리오."

****

'무시무시하군. 대체 젊은 시절에는 얼마나 강했던 거야?'

루시안은 뻐근한 손목을 주무르며 혀를 내둘렀다.

유물을 통한 신체 능력의 증폭이 상당하긴 했지만, 완벽한 궤적으로 도끼를 휘두르는 솜씨와 최적의 힘 분배는 순수한 하랄드의 능력이었다.

안 그래도 강한 힘이건만 더없이 완벽하게 휘둘러지기까지 하니 그 위력은 루시안조차 놀랄 수준이었다.

'넥타르를 마시고 열린 눈이 아니었다면 이런 정공법이 아니라 요리조리 피해야 했겠지. 여기 오기 전에 준비를 마쳐둬서 다행이군.'

얼마 전까지 펠리시아와 그토록 대련을 반복했던 루시안이다.

피하고 반격하며 허를 찌르는 기교 정도야 부리려면 얼마든지 부릴 수 있었다.

하지만 북부는 화려한 기교보다 우직한 힘을 더욱 높게 치는 지방.

제대로 인정받으려면 정면에서 힘 대 힘의 대결로 이길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고생한 보람은 있네.'

"...."

"...."

어느새 구경꾼들은 조용히 루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승패의 결과를 의심하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 본 경이에 대해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것에 가까웠다.

하랄드도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웃으며 루시안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결투는 끝났네. 이제 돌아가서 대화를 나눠보세나. 여기 계속 있으면 저들이 꿈쩍도 안 할 판이니."

"그리 하지요. 잠시 지나갈 테니 비켜줄 수 있나?"

"예, 예!"

우르르르

루시안의 말에 영민들은 좌우로 비켜서며 지나칠만큼 널찍한 길을 만들어줬다.

그림자라도 잘못 밟을까 조심스러워하는 영민들의 태도에 루시안은 피식 웃었다.

'전설의 영웅이라도 된 기분이군.'

"자, 가세나!"

하랄드가 루시안의 등을 툭 치며 앞으로 향했다.

이 북부에서 스스로 얻어낸 존경을 마음껏 즐기라는 듯이.

루시안은 사양하지 않고 하랄드의 뒤를 따라 영주관으로 향했다.

모두가 선망 어린 눈길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와중 한 사람만큼은 굳은 얼굴을 풀지 못했다.

'큰일이다.'

팔미르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열여섯 애송이가 괴물같이 강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놈의 정치 감각이었다.

보는 눈이 없는 자들은 방금 전 결투에 대해 사내의 싸움이니 뭐니 해대며 칭찬하겠지.

하지만 팔미르가 보기엔 힘 대 힘으로 부딪치는 싸움 방식 자체가 철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흐릿하게 보인 게 전부였지만, 놈은 언제나 하랄드 자작보다 늦게 움직여 도끼를 쳐냈다. 한 박자 늦게 움직이면서도 완벽하게 대응하는 놈이 공격을 피하지 못할 리가 있나.'

그런데도 루시안은 일일이 도끼와 합을 나누며 자신의 힘을 구경하는 모든 이에게 보였다.

북부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싸움에 매료되는지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는 떠나가는 루시안을 우상처럼 바라보는 자들이 가득했다.

'이대로 놔두면 칼릭스 백작가의 발목을 잡을 놈이다. 더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해.'

물론 싹을 자른다는 게 암살을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팔미르의 실력으로는 루시안을 처리하긴커녕 역으로 살해당할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나 무력이 아닌 정치로 상대를 묶어두는 건 가능했다.

'일단 놈과 대면해야 한다. 직접 만나서 놈의 권리에 대해 논할 수만 있다면 반은 성공한 거지.'

제대로 꼬투리도 못 잡고 돌아온 데인과 달리 팔미르는 교섭에 자신이 있었다.

아니, 여차하면 순수한 교섭이 아니라 궤변과 거짓조차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었다.

아무리 정치 감각이 뛰어나다 한들 상대는 북부의 내밀한 사정을 잘 모르는 상황.

거짓 정보로 교란한다면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리라.

"크흠, 그러고 보니 영지를 방문해놓고도 자작 각하께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군."

"조금 늦었지만 이제라도 가는 게 좋겠지. 겸사겸사 루시안 공도 뵙고 말이야."

'이런.'

기사들이 변명처럼 주워섬기는 소리에 팔미르가 눈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간만 보던 영주 측 기사들이 루시안에게 줄을 대려는 듯했다.

"비켜라!"

팔미르는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한 채 냉큼 내성으로 향했다.

다른 누구보다 먼저 루시안을 만나서 심기를 어지럽혀야만 했다.

여유가 사라지면 자연스레 조급함이 배어 나올 테고, 뒤이어 찾아온 이들을 실망하게 할 테니까.

서두른 덕에 다른 기사들보다 먼저 영주관에 도착한 팔미르가 루시안을 만나고 싶다는 요청을 전달했을 때였다.

"아, 칼릭스 백작가의 기사시라고요? 미안하지만 도련님은 경께 볼일이 없으시답니다. 괜히 뭉그적대지 말고 얌전히 돌아가시죠."

"...!?"

기사도 아닌 일개 십인장이 내리는 축객령에 팔미르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76화

'내가 뭘 잘못 들었나?'

평민이 기사에게 축객령을 내리는 일이 없는 건 아니다.

귀한 손님이 아닌 이상은 대개 하인을 통하여 방문을 알리기 마련.

주인이 면담을 거절하면 하인은 당연히 주인의 뜻을 전달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순수한 전달자일 때 해당하는 이야기.

방문 소식도 안 알리고 제멋대로 비아냥까지 섞는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지금 뭐라 지껄인 거냐? 아니, 그 전에 왜 방문 목적도 전달하지 않고 네놈 멋대로 판단하는 거냐?"

"그야 도련님께서 미리 말씀해두셨으니 그렇죠. 두 번 설명 안 합니다. 얌전히 가시죠. 귀찮게 하지 마시고."

"이런 미친놈이!"

스르릉

분노가 폭발한 팔미르는 저도 모르게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뽑고 나서 순간적으로 아차 했으나, 생각해보니 나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교섭을 벌이기 전 우위에 설 만한 명분이 필요하던 차인데 마침 구실이 생겼으니까.

'놈이 북부에 데리고 온 인원 중 하나다. 신분이야 일개 십인장에 불과하나 여기까지 동행했다면 측근이거나 신뢰하는 부하겠지.'

최소한 죽어도 아깝지 않은 장기말은 아닐 것이다.

팔미르가 이 시건방진 놈을 죽이려 한다면 루시안 역시 막기 위해 뛰쳐나오리라.

그럼 자연스레 팔미르 쪽에서 루시안에게 빚을 만들어두는 구도가 나올 터.

여기에 더해 대면을 피하는 루시안까지 강제로 끌어낼 수 있으니 완벽한 일석이조였다.

"일개 평민 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이구나! 귀족 모욕죄로 당장 목을 쳐야 하겠지만, 무릎 꿇고 용서를 빈다면 이번만큼은 넘어가 주마!"

계산을 마친 팔미르가 분노로 눈이 뒤집힌 기사를 연기하며 칼을 들이밀었다.

사실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지만, 한 번 기회를 줬다는 식의 구도를 만들 필요가 있었기에 해본 말이었다.

'이놈의 오만한 언사를 생각하면 분명 거절할 게 뻔하....'

"아, 시끄러워 죽겠네. 검 휘두르는 방법도 모를 것 같은 양반이 꼴에 기사랍시고 자존심은."

속으로 미소짓던 팔미르는 또다시 멍한 얼굴이 되어 눈을 끔뻑였다.

잠시 후, 진심으로 폭발한 팔미르가 시뻘게진 얼굴로 팔을 부들거렸다.

"이, 이런... 이런 미친...!"

"왜요? 꼬우십니까? 꼬우시면 검 휘둘러 보시던가. 휘둘러봤자 그 실력으로는 베지도 못할 테지만."

"죽여버리겠다!"

더는 참지 못한 팔미르가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교섭을 위해서라도 죽여버릴 순 없겠지만, 팔 한 짝 정도는 가져가야 속이 좀 풀릴 것 같았다.

내리쳐진 검이 오른팔을 잘라내기 위해 십인장의 어깨 아래로 향할 때였다.

쩌엉

"흡!?"

균형을 잃은 몸이 휘청거리는 것과 함께 손아귀가 찢어질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간신히 검을 놓치지 않은 팔미르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고 나서야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이번엔 누가 끼어든 거냐!'

팔미르는 이를 갈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사인 자신에게 이만한 충격을 주려면 같은 기사밖에 없으니 분명 방해한 이가 따로 있으리라.

그러나 주변에는 시건방진 십인장과 일반 병졸 몇 명을 제외하고는 멀찍이 떨어진 구경꾼뿐이었다.

'뭐지? 설마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멀리서 무언가를 던진 건가?'

"진짜 휘두르네. 경께선 본인 실력도 객관적으로 못 보시는 겁니까?"

얼굴을 찌푸리던 팔미르의 귀에 재차 십인장의 비아냥이 들려왔다.

분노한 팔미르가 재차 욕설을 내뱉으려 할 때였다.

"...검?"

"예, 보다시피 검입니다."

십인장은 씩 웃으며 허리춤에서 뽑은 검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그 경박한 모습에 팔미르는 두 눈을 세차게 떨었다.

"설마 네놈이 쳐낸 것이냐?"

"그럼 유령이 쳐냈겠습니까?"

"...이런 미친!"

일개 십인장 따위가 자신의 검을 막아냈다고?

아무리 무력보다는 교섭에 자신 있다고는 해도 팔미르 역시 기사 중 하나.

떼거리로 달려들거나 멀리서 화살비를 내린다면 몰라도 1대 1로 병졸에게 밀린다는 건 상상조차 한 적이 없거늘.

"뭐 하십니까? 검 뽑으셨으면 제대로 싸우셔야죠?"

"...!"

"한 번 막혔다고 겁먹은 건 아닐 거라 믿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경께서 섬기는 칼릭스 백작가 수준도...."

"그 입 닥치지 못해! 이 천한 것이 어디서 감히 백작가를 들먹이느냐!"

고함을 버럭 내지른 팔미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경한 소리가 나오기 전에 막을 수는 있었지만, 고함 때문에 구경꾼들은 한층 더 늘어난 상태였다.

여기서 물러났다가는 백작가 이전에 팔미르 본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판이었다.

"빌어먹을! 그래, 좋다! 오늘 내 친히 네놈의 목을 베어 제국의 법도를 바로 세워주마!"

"그렇게 나오셔야죠."

이미 교섭에 대한 생각은 날아가 버린 팔미르가 살기를 뿜어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십인장, 휴고는 씩 웃으며 본격적으로 싸울 준비를 했다.

"칼릭스 백작가의 기사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봅시다."

****

"저것 좀 보게나. 결투가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자네에게 줄을 서고 싶어 안달이라네."

영주관의 객실로 루시안을 데려간 하랄드가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대로 관전자로 파견된 기사들이 모조리 영주관으로 향하는 게 훤히 보였다.

"다행이군요. 소식이 늦었다면 칼릭스 쪽에서 먼저 손을 쓰려 했을 텐데 말이죠."

"놈들이 손을 써봤자지. 북부의 통합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결국 놈이 내세울 수 있는 위치는 대표가 고작이야. 왕을 참칭하며 우리들에게 명령을 내릴 순 없네."

루시안의 말에 하랄드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칼릭스 백작가가 아무리 많은 영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한들 그들의 움직임을 제약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거대한 동맹의 대표로서 남들보다 행세할 수 있을 뿐.

무리해서 다른 영주들의 내정에까지 간섭한다면 누구 하나 칼릭스에 붙으려 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자네는 아니지."

호쾌하게 웃던 하랄드는 이내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루시안을 쳐다봤다.

"자넨 스스로 전사임을 증명했네. 그것도 북부의 전통을 철저히 따라서 모두를 매료시켰지. 오늘 자네와 나의 결투를 관전하지 않은 자들도 머지않아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겠지."

"...."

"무엇보다도 자네에겐 그리말디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지. 자격을 인정받은 지금이라면 왕가의 권리를 주장한다 하더라도 대부분 인정할 걸세."

"자작 각하."

"오해하지 말게. 제국에 맞서 반역을 일으키란 소리가 아니야."

착 가라앉은 루시안의 목소리에 하라드는 냉큼 양손을 휘저었다.

어디까지나 구심점에 필요한 요소지 제국에 반역하여 왕국을 부활시킬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는 듯이.

"솔직히 말하지. 지금 북부에는 정신적 지주가 필요하네."

"정신적 지주라니요? 강인한 북부인들에게 그런 것이 필요합니까?"

"필요하고말고. 아무리 북부라도 시대의 흐름에는 불안감을 느끼기 마련이니."

"정확히 어떤 부분을 불안해하는 겁니까?"

"황실과 북부의 관계."

잠시 말을 끊은 하랄드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눕혔다.

강인한 전사의 모습을 보여줬던 아까와 별개로 가주로서 막중한 책임감에 피로를 느끼는 듯했다.

"최근 황실은 계속해서 약한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북부가 독립을 원하는 건 아니지만, 여유가 없어진 황실이 어찌 나올지를 모두 걱정하고 있지."

북부는 오랜 세월 제국에 속해있으면서도 황실과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워낙 땅이 척박해서 먹을 건 없으면서 상무적 기풍 때문에 무력만큼은 더없이 강한 탓이었다.

괜히 깊이 간섭했다가는 아무것도 못 얻고 반감만 자극할 수 있으니 반쯤 방치할 수밖에.

북부로서도 황실의 이런 방침을 환영했고, 무역로를 통해 이득을 보면서 세금도 충실히 바치며 제국의 일원으로 살아왔다.

"가능하면 우리도 계속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네. 하지만 황실도 그러기를 원하겠는가?"

"원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골치가 아픈데 북부마저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문제는 황실의 신뢰 역시 적대 못지않게 성가시다는 거야. 우린 괜한 의심을 받고 싶지도 않지만, 지금보다 더 가까워지고 싶지도 않네."

"...?"

"생각해보게. 자네가 사정이 쪼들리면 얼굴만 아는 지인과 친한 친구 중 누구에게 부탁할 건가?"

루시안은 하랄드의 비유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북부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제국과 관계가 안 좋아지는 건 싫지만, 그 이상으로 황실의 지원 요청에 응하여 피를 대신 흘려주기도 싫다는 건가.'

하기야 오랜 세월 이어져 온 황실과 북부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게 당연하겠지.

북부는 자잘한 다툼이 옛날부터 끊이지 않는 데다 사람 하나하나가 귀한 지역.

영주의 의무를 들먹이며 파병을 요구하기엔 북부인들이 희생해야 할 게 너무도 많았다.

"일부 멍청이들은 조급한 나머지 제멋대로 영지전을 벌이며 상대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네. 황실에서 파병 요구를 하기 전에 덩치를 키워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설마 그리말디의 이름을 들먹이는 칼릭스에게 동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까?"

"아마도.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놈들도 적진 않겠지만, 대다수는 일단 북부가 통합되어 같은 목소리를 낼 필요성을 느낀 거겠지."

결국은 여유의 문제였다.

서로 초조함을 느끼니 상대의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과민하게 반응하고 더욱 상대를 자극한다.

하물며 이런 혼란에 편승해서 진짜 북부 독립을 꿈꾸는 세력까지 날뛰고 있으니.

'구심점이 절실하긴 하군. 이래서야 북부에서부터 문제가 터져 나오겠어.'

전생에서는 황제의 눈이 완전히 뒤집힌 덕에 북부는 오히려 바짝 엎드렸다.

황제가 쓰러져 북부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어지자 안심하고 원래대로 돌아갔고.

본격적인 난세가 시작된 후에는 북부도 다투기 시작했으나 그 정도야 평소에도 있던 일.

사실상 어중간하게 여유가 있는 황실의 태도가 전생과 달리 북부를 초조하게 만든 셈이다.

"각하께서는 제가 그리말디의 이름을 되찾는 것을 넘어 북부의 구심점이 되길 원하시는군요."

"이참에 그리말디 가문을 부활시켜 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겠네. 발데크인 자네에게 이런 벽지로 처박혀달라 하는 건 너무 염치가 없는 일이니. 하지만 발데크라는 성을 유지한 채 황실과 소통할 수 있는 연결점이 되어주길 바라네."

"그렇다면."

루시안은 하랄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아예 왕가의 권리를 주장한다면 어찌하시겠소?"

"...!"

갑작스럽게 바뀐 하오체에 하랄드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말디라 하지 않고 굳이 왕가를 언급했다는 건 왕의 자리에 관심이 있다는 뜻.

상징적인 구심점이 아니라 진정 북부 왕국을 부활시킨다면 어느 편에 서겠냐는 물음이었다.

"...."

"...."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는 도중 하랄드가 벌떡 일어나더니 찬장에 있는 봉밀주를 꺼냈다.

그리고는 병째로 입에 대고 쉴새 없이 들이켰다.

벌컥, 벌컥, 벌컥

독하디독한 술은 이내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목구멍을 타고 식도로 흘러 들어갔다.

텅 빈 술병을 탈탈 털던 하랄드는 이내 쾅 소리가 나도록 탁자를 내리쳤다.

봉밀주 한 병을 통째로 비워냈음에도 하랄드의 눈빛은 맑다 못해 서늘할 지경이었다.

"만약 북부 왕국을 진실로 재건하실 생각이라면."

조용히 입을 연 하랄드는 이내 열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루시안을 향해 답했다.

"이 늙은이가 가장 먼저 깃발을 들고 폐하의 뒤를 따르겠소이다!"

77화

'좋군.'

루시안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눌렀다.

당연히 발데크를 포기하고 북부에 눌러앉을 생각은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쪽을 포기해야 할 때의 이야기.

둘 다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리할 생각이었다.

'물론 황제는 용납하지 않겠지. 내가 발데크를 차지하고도 북부의 왕좌까지 노린다면 눈이 뒤집힐 테니까.'

황제가 루시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나 그 호감은 '신하'의 입장에 충실할 때만 유지되는 것.

황실을 위협할만한 세력으로 성장한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재적 반역자로 간주하리라.

그러니 지금은 자그마한 씨앗을 뿌려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난세가 다가왔을 때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내 사람을 심어두어 나중에 기꺼이 휘하에 합류하도록.'

생각을 마친 루시안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거 원, 너무 진지하시군요. 전 어디까지나 가볍게 물어봤을 뿐입니다. 황제 폐하의 은혜를 입은 몸으로 어찌 감히 제국에 반하는 짓을 하겠습니까?"

"...."

루시안의 얼버무리는 말에도 하랄드의 눈은 여전히 형형하게 빛났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가 맞는지 추궁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대답을 듣기 전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에 루시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그래도 사람의 일이란 건 어찌 될지 모르는 법이지요. 자작 각하의 말씀대로 제국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크레펠트의 반란 진압에 나섰다가 아무 소득 없이 돌아와 체면을 구기기도 했지요."

"뭣...!?"

"폐하께서는 황실의 숨은 저력까지 선보이며 억누르고 있습니다만 얼마나 갈지 모르겠습니다. 맹수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사방에서 물어뜯기 마련이니, 앞으로는 더더욱 힘들어지겠지요."

"으음."

하랄드는 살짝 창백해진 안색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나 다를까 북부의 폐쇄성과 황실의 은폐로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심각한 내용을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루시안은 지나가듯 몇마디를 더했다.

"방자한 영주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데 황실이 단속할 힘을 잃는다면 비극이 따로 없겠지요. 정말 그리된다면 북부는 북부 나름대로 살아날 방법을 모색해야만 할 겁니다. 예를 들면 옛 왕가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새롭게 일어선다거나."

"...!"

"확증은 없습니다. 보증도 할 수 없지요.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꿈 같은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 '언젠가'를 믿고 기다리실 수 있겠습니까?"

기다림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렸더라도 무의미하게 시간이 지나간다면 당시의 열정 또한 사그라들기 마련.

그런 무의미한 기다림을 감내할 수 있느냐는 루시안의 물음에 하랄드가 씩 웃었다.

"소득 없는 기다림이야 이골이 난 지 오래요. 어차피 얼마 안 남은 목숨, 눈 감을 때까지는 기다려 보려고 하오."

적어도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루시안을 배반할 생각은 없다는 소리였다.

바라마지 않던 대답에 루시안도 살짝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후사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그 반역자를 제외한 다른 자녀는 여기 없는 듯 합니다만."

"차남을 친구에게 보내놓았소. 얼마 전에 서임식은 끝냈으나 아직 충성 맹세는 하지 않았다니 도로 데려와야지."

"그가 절 따르겠습니까?"

"날 닮았으면서도 반골 기질이 심한 녀석이오. 툭하면 위대한 북부니 어쩌니 하면서 옛 왕국 시절을 자주 언급했지. 제국의 간섭이 최근 심하다면서 곧잘 투덜거리기도 했고."

"...성향은 다르지만, 의외로 저와 잘 맞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동시에 왜 그 '차남'이 여기 없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런 반골 기질을 대놓고 드러냈다면 제국의 반역자로 찍히기 딱 좋을 터.

괜히 토릭이나 다른 경쟁자에게 꼬투리를 잡히기 전에 내보냈으리라.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하지만 방금 말했듯이 사람 일은 모를 일이지. 나보다 잘 맞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잘 어울리지 못할 수도 있소."

그러니 가능하면 자신이 살아있을 때 대업을 시작하라.

일단 시작하고 나면 이것저것 재지 않고 따를 테니까.

대범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소리를 내뱉는 하랄드의 모습에 루시안이 피식 웃었다.

"그거참 무서운 소리군요. 자작 각하께서 건강히 오래 사셔야겠습니다."

"아니면 그대가 조금 더 서두르거나."

"글쎄요. 어느 쪽이건 건강을 챙기셔서 나쁠 건 없지요."

루시안은 품에서 넥타르가 담긴 약병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처음 보는 푸르스름한 광채에 하랄드가 눈을 끔뻑였다.

"이건 뭐요?"

"몸에 좋은 약입니다. 드셔보시지요."

"거참. 준다니까 먹기야 하겠는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하랄드가 약병을 열었다.

뜬금없는 뇌물이지만 호의인 건 확실하니 일단 받아두는 모양새였다.

한번에 넥타르를 입안으로 탁 털어넣은 하랄드는 다시 앉아 루시안을 쳐다봤다.

"약 잘 마셨소. 하지만 어떤 효능이 있건 시간은...."

화아악

하랄드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졌다.

속에서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마력의 분류가 전신으로 뻗어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말도 안 되는 약효가 폭풍처럼 전신을 휘감았으나 고통은 일절 없었다.

전신을 구석구석 씻어내는 듯한 청량감만이 가득할 뿐.

"무슨... 후우욱!"

놀란 하랄드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으나 새어 나오는 마력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잘못 말했다가는 분출하는 마력이 뿜어져 나올 것 같은 착각이 들었기에.

잠시 후, 전신에 스며든 마력을 확인한 후에야 하랄드는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이건... 이건 대체 뭐요?"

"영약입니다."

"영약? 웃기는 소리! 이건 도저히 그런 수준이 아니지 않소!?"

"예. 세상을 뒤집을 발명이지요. 각하께서 이 약에 대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신다면 전 끝장입니다."

"...!"

하랄드의 두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 말대로 이건 단순한 선물 따위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대륙의 세력 구도를 뒤바꿔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보물.

루시안은 그런 보물을 하랄드에게 선물함으로써 신뢰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가.'

비로소 안심한 하랄드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보물을 자신 앞에 드러냈다는 것 자체가 언젠가 반드시 일어서겠다는 장담이나 다름없으니까.

"오래 살아야겠구려."

그 날을 직접 눈으로 볼 때까지.

하랄드의 완전한 신뢰를 얻은 루시안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자작 각하, 주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밖에서 레이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고 막 되물으려던 찰나, 레이먼 쪽에서 먼저 본론을 꺼냈다.

"휴고가 지금 칼릭스 백작가에서 나온 기사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번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

검식이 기사들만의 전유물인 건 아니다.

때로는 어떤 기사의 자비에 의해, 때로는 가르침을 훔쳐 듣는 것으로 그 일부가 세간에 흘러나오기도 한다.

이름을 날리는 용병 출신이라면 그럴싸한 검식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기 마련.

하지만 아무리 검식을 가지고 있다 한들 제대로 배운 기사에게는 질 수밖에 없다.

어설프게 배운 평민과 높은 경지의 지인들이 넘쳐나는 기사는 그 배움의 질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까.

'분명 그렇게 들었는데...!'

쩌엉

'이놈은 대체 무슨 수로 내 검을 죄다 받아치는 거냐!'

팔미르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휘두른 검이 튕겨 나감과 동시에 손아귀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건틀렛으로 인해 보이지는 않지만, 손바닥 안쪽을 다친 게 분명했다.

통증 때문에 시큰거리는 손을 꼼지락거리자 앞에서 비아냥이 들려왔다.

"갈수록 공격이 약해지십니다? 지쳤습니까?"

"닥치지 못해!"

팔미르는 이를 갈며 휴고를 노려봤으나 차마 달려들진 못했다.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갔다간 손이 아예 망가져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

최악의 경우 기사로서 아예 은퇴해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 물러설 수도 없고...!'

제대로 검을 익힌 기사가 일개 십인장에게 패배를 인정한다? 다른 데도 아닌 북부에서?

은퇴 정도가 아니라 평생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숨어 살아야 할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팔미르가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였다.

"장관이로군. 십인장에게 겁 먹고 물러서는 기사라."

귀에 익은 목소리에 팔미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루시안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간신히 기회를 잡은 팔미르가 있는 힘껏 소리쳤다.

"루시안 공! 이런 무례가 어디 있다는 말이오!"

"...."

"나는 그대를 뵈러 왔음에도 휘하 병졸은 전달조차 하지 않고 대뜸 나를 공격했소! 이게 루시안 공의, 발데크의 뜻이란 말이오!?"

팔미르의 외침에 구경하던 이들이 웅성거렸다.

루시안은 잠시 그 주변을 둘러보고는 조용히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을 당황하여 굳어버린 거라고 판단한 팔미르가 입꼬리를 올렸다.

"해명하시오! 이건 그대의 뜻이오!? 아니면 병졸의 독단이오!?"

"....."

"그대의 뜻이라면 이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일개 병졸의 독단이라면 마땅한 처벌이 뒤따라야 할 것이오!"

의기양양한 외침에도 루시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여전히 입을 다문 채 무심한 시선으로 팔미르를 바라볼 뿐.

한참 동안 이어지는 침묵에 재차 팔미르가 소리치려 할 때였다.

"지금 뭐 하나? 계속 싸워야지?"

"...뭐요?"

"내 십인장하고 한창 싸우던 중 아니었나? 소리치는 건 좋은데 왜 멈춰있는지 모르겠군. 휴고!"

"예, 주군!"

"싸우는 중에 한눈을 팔면 그대로 베어버리든 하지 왜 미주알고주알 떠들도록 내버려 두는 거냐? 검 들어!"

"...!?"

그 말에 경악한 팔미르가 냉큼 휴고를 돌아봤다.

어느새 휴고는 제대로 자세를 잡은 후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제대로 방어하지 않으면 그대로 베어버릴 기세였다.

"루, 루시안 공! 이게 무슨 짓이오!"

"닥치고 싸워라. 누가 이기고 지든 상관없으니 일단 결판이 난 다음에 떠들란 말이다. 결투에서 도망치는 것 따윈 내가 허락지 않는다."

"이건 결투가 아니오! 일방적인... 헉!"

쩌어엉

팔미르는 달려든 휴고의 공격을 간신히 막은 후 뒤로 물러섰다.

상처가 더욱 악화된 건지 손바닥 끝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장난 아니었다.

새어 나오는 비명을 참으며 팔미르가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결투를 포기하면 죽여버리겠다."

"...!"

"여기서 잔꾀는 통하지 않는다. 결과에서 도망치는 건 꿈도 꾸지 마라. 네놈은 패배를 품에 안고 가든가, 땅에 묻히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차가운 선언에 팔미르는 등골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살길이 보였다고 생각했건만 모든 게 착각이었다.

상대는 명예의 죽음과 육신의 죽음 중 하나를 택하기 전에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뒤늦은 후회가 팔미르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차라리 적당한 핑계를 대고 검을 집어넣었다면... 지병이 도진 척을 하면서 쓰러지기라도 했다면...!'

연이어 떠오른 후회 속에서 팔미르는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루시안보다 우위에 서려고 하지 않았으면 아무 문제 없었다는 사실을.

안타깝게도 깨달음은 너무 늦은 뒤였다.

쩌엉

"끄악!"

이어지는 공격으로 인해 튕겨 나간 검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동시에 손아귀의 피부가 벗겨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건틀렛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틈을 노려 사각에서 공격한 것도, 기기묘묘한 기술로 검을 빼앗은 것도 아니다.

순수한 힘 대결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무기끼리 부딪치는 충격조차 못 버텼다는 증거.

"아...."

탱그랑

팔미르는 떨어진 검을 주울 생각도 못 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구경꾼들은 경멸 가득한 시선으로 팔미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시안의 결투와 정반대의 상황에 팔미르는 절망 어린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78화

'끝났다.'

팔미르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옛날에 비해 많은 게 바뀌긴 했으나 북부는 아직 전사의 땅.

결투의 원인이 무엇이었건 간에 약자는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

하물며 패배한 상대가 상식적으로 져서는 안 되는 일개 병졸임에야.

"쯧쯧."

혀 차는 소리에 팔미르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루시안의 눈동자는 더없이 서늘했다.

"졌구만."

"저, 저는...."

"변명은 됐고, 할 말 있나? 결투도 끝났겠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해봐."

"...."

입을 뻐끔거리던 팔미르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할 말이야 산처럼 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렇게 처참히 패배한 이상 어떤 말을 하건 무게감은 이미 사라진 상황.

협상을 하더라도 시종일관 대화의 주도권을 잡혀 끌려다닐 게 뻔했다.

'그런 협상 따윈 안 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니 여기서 돌아가야 했다.

십인장에 패배하는 망신을 당하고 얻은 것 아무것도 없이.

상황을 보고하고 주군의 분노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새삼 눈앞의 처참한 현실에 이를 악문 팔미르가 중얼거렸다.

"이번 일은... 칼릭스 백작가에서...."

"크흡."

"...."

"아, 미안하군. 계속 말해보게."

루시안의 비웃음에 팔미르가 시뻘게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주군의 위세를 빌려보려 했건만 위협은커녕 비웃음만 사는 꼴이라니.

무슨 말을 하든 추해질 뿐이란 사실을 깨달은 팔미르는 도망치듯 등을 돌려 떠나갔다.

"싱거운 인간 같으니."

저 멀리 사라지는 팔미르를 보며 피식 웃은 루시안이 다른 구경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경멸이 가득 담겨 있던 시선들은 루시안과 마주친 순간 단숨에 경의로 바뀌었다.

극과 극의 반응에 루시안은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칼릭스 백작가의 기사를 격퇴한 그리말디의 외손이라. 멋진 구도가 완성되었군.'

겨우 기사 한 명의 망신으로 칼릭스 백작가가 흔들리지는 않겠지.

수백 년 동안 북부에서 뿌리를 내린 가문이니 위신만 좀 깎이는 수준에서 끝날 터.

중요한 건 그 위신을 깎은 자가 바로 루시안이라는 거다.

안 그래도 그리말디의 이름을 사이에 두고 루시안이 도전장을 내민 상황.

사람들로서는 칼릭스 백작가가 어찌 나올지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칼릭스 백작가에서는 이대로 뭉개고 싶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그걸 허락하지 않겠지.'

오늘 일에 대해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다면 누구나 칼릭스에서 한발 물러섰다고 여길 테니까.

좋든 싫든 칼릭스 백작가에서는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

'놈들이 어찌 나올지 기대되는군.'

루시안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손님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칼릭스의 대답이 돌아오는 시간 동안 본격적으로 아군을 만들 차례였다.

****

"허허."

칼릭스 백작가의 현 가주인 노르벡의 입에서 메마른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참 동안 수염만 쓰다듬던 그는 이내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그냥 왔다는 말인가? 기사도 아닌 일개 십인장에게 꼴사납게 패배한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팔미르는 실망감이 절절히 느껴지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대로 아무 변명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버려지리란 생각에 다급히 소리쳤다.

"평범한 십인장이 아니라 제대로 된 검식을 익힌 자였습니다. 실력을 보아 몰락 귀족 출신일지도...."

"팔미르 경, 내 말이 그런 뜻이 아니란 걸 알 텐데."

"...."

"중요한 건 자네가 처참하게 패배했고, 그 결과 교섭은커녕 말도 못 꺼내보고 꼬리를 말았다는 거지. 칼릭스의 이름에 먹칠을 한 건 덤이고 말일세."

"그건...!"

뭐라 말을 덧붙이려던 팔미르는 고개를 올린 순간 얼어붙었다.

노르벡의 차가운 눈빛은 실망 정도가 아니라 살기마저 느껴질 정도였기에.

"패배할 바엔 애초에 싸우질 말았어야 했네. 상대가 어찌 나오든 참았어야 했어. 그런데 실력 차이도 파악하지 못한 채 싸움을 걸었다가 이 사달을 내다니."

"...."

"자네 덕분에 놈만 좋게 되었어. 아무 방해 없이 신나게 동맹을 끌어모을 테니 말이야. 이거야 원, 목에 방울을 달라고 보내놨건만 원래 있던 족쇄마저 풀어줬으니."

쏟아지는 비아냥에 팔미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번 일로 루시안이 얼마나 많은 이득을 얻었는지는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알았기에.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노르벡은 이내 혀를 차며 축객령을 내렸다.

"어쨌건 지금까지 고생했네. 가서 푹 쉬게나."

"...!"

의미심장한 어조에 팔미르가 몸을 떨었다.

배려 같지만 두 번 다시 중요한 일에는 기용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닌가.

기겁한 팔미르는 뭐라 변명을 더 하려 했으나 곧 주군의 눈에서 사라진 기대를 읽고 힘없이 집무실을 떠나갔다.

"후우우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노르벡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신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던 약한 모습에 지금껏 옆에서 지켜보던 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괜찮을 리가 있나. 일이 복잡하게 되었구나. 최악의 경우 진짜 그리말디의 이름을 뺏길지도 모르겠어."

후계자이자 장남인 고드프리의 말에 노르벡이 고개를 저었다.

걱정이 가득한 아버지의 얼굴에 고드프리가 눈을 끔뻑였다.

"놈에게 한 방 먹은 건 사실입니다만, 아버지께서 그리 반응하실 정도입니까? 기껏해야 이제 막 세력을 모으는 수준 아닙니까."

"문제는 놈의 세력이 아니다. 놈과 우리의 구도가 바뀌었다는 거지."

"구도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놈은 발데크다. 아무리 북부인 흉내를 내더라도 그 근본은 남부인이지. 그 사실 자체가 우리의 무기였다."

선대 공작의 외손이라고는 하나 북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오직 피를 이었을 뿐이지 북부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없는 외지인.

별거 아닌 듯 보여도 다른 영주들의 마음을 뒤흔들기엔 이만한 문구가 없었다.

"생각해 보아라. 아무리 정당한 권리가 있다 한들 그 본질이 남부인이라면 과연 다른 영주들이 놈의 편에 서려 할까?"

"그럴 리가요.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누가 그딴 선택을 하겠습니까?"

고드프리는 냉큼 고개를 저었다.

현재 북부가 술렁이는 건 황실의 움직임을 경계해서다.

그런데 북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없고 황실에 더 가까운 이에게 그리말디의 유산을 먹인다?

제정신이 박힌 북부의 영주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다. 우리 가문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작자라 할지라도 원한 때문에 황실의 편에 서는 건 어리석은 일. 그렇기에 난 지금까지 안심하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더라도 출신지를 바꿀 방법은 없었으니까.

전사로서 자신을 증명하겠다는 결투의 소식을 들었을 때도 시큰둥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상대가 그 '늑대 학살자' 하랄드 아닌가.

상대가 열여섯 꼬맹이라 할지라도 봐주지 않고 죽일 기세로 달려들 게 뻔했다.

"물론 우리 가문에 대한 원한이 있는 만큼 오랜 신념을 꺾고 패배하는 연출을 할지 모른다는 걱정은 있었지. 그렇기에 팔미르 경을 파견해서 지켜보도록 했건만 이런... 세상에 이런...."

"아버지?"

콰앙

"이런 개떡 같은 일이 왜 벌어진 거냐!?"

노르벡은 입에서 화염을 토할 기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찌나 분노했는지 탁자를 걷어차고도 분을 삭이지 못해 발을 구를 지경이었다.

"열여섯이다! 이제 막 전장에 나가 피를 보고 덜덜 떨 나이란 말이다! 그런데 '늑대 학살자' 하랄드를 이겼다!? 심지어 가보인 유물까지 꺼내 쓴 하랄드를!?"

"아, 아버지. 진정하십...."

"이게 진정할 일이더냐! 이제 다른 놈들이 그 남부 놈을 보고 뭐라 하겠느냐!? 영웅이라 하겠지! 전사 중의 전사, 그리말디의 피를 이은 왕가의 후손이라고!"

안 그래도 옛 북부 왕국에 대한 향수가 짙게 남아있는 이들이다.

왕가의 혈통이 전설적인 무력을 선보였으니 역시 그리말디라며 떠받들기 바쁠 터.

노르벡으로서는 속이 뒤집히다 못해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그것뿐이라면 낫지! 멍청한 팔미르 때문에 놈과 우린 대등한 경쟁자가 되어버렸다! 놈은 완벽한 칼릭스의 대항마로 떠올랐어! 이제 영주들은 먹이를 발견한 들쥐 떼처럼 놈에게 붙으려 하겠지!"

"그래 봤자 애송이입니다. 확실히 무력은 대단합니다만 정치에도 능숙하다고 볼 수는 없지요. 북부에 대해 잘 모르는 이상 분명 어디선가 실수할 테니 느긋하게 기다리시지요."

"태평한 소리! 지금 그럴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토릭처럼 실패한 놈들 때문에 우리를 향해 이를 가는 세력이...!"

"아버지!"

고드프리의 고함에 노르벡은 움찔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입밖에 내뱉지 말아야 할 것까지 나온 모양이었다.

"크흠, 크흐흠! 아무튼, 우리에겐 생각보다 여유가 없다는 소리다. 한시라도 빨리 놈을 저지하지 않으면 쌓아둔 기반조차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니."

"그렇다면 이렇게 된 거 정공법으로 나가시지요."

"정공법이라니?"

"우리도 전통을 이용하자는 말입니다."

눈을 끔뻑이는 노르벡을 향해 고드프리가 씩 웃으며 말했다.

"놈이 그토록 북부를 존중한다면 당연히 전통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

루시안은 하랄드와의 결투 이후 연이어 찾아오는 손님들을 상대했다.

당연하게도 손님의 대다수는 주군인 영주를 대리하여 찾아온 기사들이었다.

보통 이런 기사들은 세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나를 지지하는 측, 중립을 지키면서 밉보이고 싶지는 않은 측, 그리고 칼릭스를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측인가.'

첫 번째는 알기 쉬웠다.

칼릭스의 북부 통합을 껄끄럽게 여기면서도 대책이 없어 가만히 지켜보던 이들.

애초부터 칼릭스를 싫어하던 이들이라 그런지 루시안이란 대체재가 생기기 무섭게 달려들었다.

"주군께서는 루시안 공의 정당한 권리를 존중하십니다. 그리말디의 이름은 공께 돌아가는 것이 순리지요."

"실로 올바른 결정이시군. 그대의 주군께 내 감사를 전해주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사실 칼릭스가 그리말디의 이름을 쓰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놈들에게 무슨 권리가 있겠습니까?"

루시안은 이들에게 감사를 표했지만, 사실 공개적인 지지 표명 외에 도움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발데크의 이름이 통하지 않는 북부 한복판에서는 군사력이 절실했기에 조금 아쉬운 결과였다.

하지만 이들의 지지만으로도 정치적인 면에서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기에 나름대로의 소득인 건 분명했다.

두 번째 부류는 첫 번째 부류보다도 더욱 노골적이었다.

"공자의 권리를 부정하진 않습니다만, 칼릭스 역시 아주 권리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요. 참으로 어려운 문제니 저희로서는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어째 일이 다 끝나면 조용히 승자한테 붙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크흠흠! 그저 공명정대한 신께 판단을 맡길 뿐입니다. 부디 하늘의 여덟 신께서 우리 모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속이 빤히 보이는 소리였지만, 이들 대다수가 칼릭스와 비교적 가까운 약소 영지였기에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다름 아닌 북부의 실세 칼릭스와 발데크 가문의 삼공자가 다투는 일이다.

여차하면 그 여파가 본인들의 영지와 영민에게까지 미칠 수 있으니 몸을 사릴 수밖에.

루시안이 전혀 예상치 못한 건 세 번째 부류였다.

"지금 당장 그리말디의 깃발을 들고 칼릭스를 징벌하신다면 주군과 제가 그 뒤를 따르겠나이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

"제 말이 의심스러우십니까? 그럼 신뢰의 증표로 이 팔을 잘라드리겠습니다! 공의 신뢰를 살 수만 있다면 이깟 오른팔쯤이야...!"

"아니, 잠깐!"

79화

루시안은 검으로 팔을 자르려던 기사를 다급히 붙잡았다.

단순한 흉내가 아니었는지 칼날이 피부를 파고들어 피가 나는 상태였다.

조금만 멈추는 게 늦었더라도 강화된 근력으로 뼈까지 닿았으리라.

'이런 미친... 얼마나 칼릭스를 증오하는 거야?'

검은 기사의 상징.

몸이 망가져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된 순간 기사로서는 끝장난 거나 다름없다.

그런데 한쪽 팔을 기꺼이 내버리면서까지 칼릭스를 박살 내려 하다니.

"일단 진정하고 설명이나 좀 해보시오. 칼릭스가 그대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러는 거요?"

"놈들의 죄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아깝습니다! 그리말디의 이름을 함부로 사칭한 데다 북부의 영주들을 분열시켰으니 그 죄가...!"

"대의를 위해서라는 말은 하지 맙시다. 내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그런 말에 속을 정도는 아니오."

냉정한 루시안의 목소리 한참 열변을 토하던 기사는 흠칫했다.

진짜 이유를 밝히기 싫어 대의를 변명 삼으려는 게 훤히 보였다.

한참 머뭇거리던 기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한이 있습니다."

"난 그 원한이 무엇인지 모르오. 개인적인 원한이오? 아니면 그대가 섬기는 주군의 원한이오?"

"둘 다입니다. 칼릭스 놈들은 주군의... 으음."

기사는 말하기 힘든지 연신 머뭇거리며 루시안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여기서 입을 다물어버린다면 신뢰는커녕 불신만 더 깊어질 터.

이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기사가 입을 열었다.

"놈들이 영지에서 반란을 조장했습니다. 어떻게든 진압할 수는 있었습니다만, 그 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습니다."

"반란? 설마 계승권이 없는 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거요? 그렇다면 제국에 대한 반역이나 마찬가지인데."

"아닙니다. 주군의 차남이신... 아니, 차남이었던 자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과연."

기사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에서 조장하긴 했다지만, 반란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영주의 가족.

영지 내에서 벌어진 추태에 가까운 만큼 남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사정이었다.

친족의 반란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는 것 자체가 가장으로서, 그리고 영주로서 능력이 부족했다는 뜻이니까.

'역시 하랄드 자작만 건드린 건 아니었나. 극렬한 반대파 영주 중 반란의 여지가 있는 곳은 다 들쑤시고 다닌 모양이군.'

북부의 공적으로 찍히는 걸 넘어 황실의 허락하에 토벌령이 내려질 수도 있는 중죄.

이쯤 되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고 봐야 했다.

루시안의 반응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기사는 다시 분기탱천하여 소리쳤다.

"놈들의 죄는 이미 하늘에 닿았습니다! 여덟 신께서도 더는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테니 남은 건 오직 징벌뿐! 공께서 바라시는 모든 걸 지원할 테니 부디 정의의 이름 아래 칼릭스를 단죄해주십시오!"

'아하.'

격렬하다 못해 애가 닳은 기사의 외침에 루시안은 속으로 미소지었다.

이들이 왜 이토록 자신에게 매달리는지 슬슬 알 것 같았다.

'나를 명분으로 복수를 하고 싶은 건가.'

아무리 반란을 부추겼다 한들 증거가 없다면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키는 건 불가능하다.

영지전 정도야 황실이 불편해하는 정도로 넘어가겠지만, 그 숫자가 무시못할 수준이라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평범하게 1대 1로 영지전을 벌인다면 칼릭스의 무력 앞에 박살 날 터.

'연합군을 일으켜 칼릭스를 쓸어버릴 명분으로 날 내세울 작정이군. 하기야 나만큼 완벽한 구심점이 없기는 하지.'

아무리 칼릭스라도 목숨을 거두기엔 더없이 껄끄러운 발데크 대공가의 삼공자.

그리말디의 이름에 대한 권리 역시 칼릭스보다 훨씬 위에 있는 정당한 대적자.

반란을 일으키는 게 아닌지 걱정하는 황실에 내밀한 사정을 전할 수 있는 인맥까지.

이들로서는 복수를 완수하기 위해서라도 루시안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셈이었다.

"경의 심정은 이해하오. 칼릭스는 용서받기에 너무 많은 짓을 벌였지. 슬슬 대가를 받아야 할 때가 왔소."

"그 말씀은...!"

"하지만 아직은 아니오. 나는 아직 그리말디의 이름을 되찾지 못했으니. 정당한 그리말디의 후계자로서 놈들을 징벌해야 비로소 정의가 바로섰다고 할 수 있지 않겠소?"

"물론입니다! 지원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기사는 혹여 마음이라도 바꿀까 다급히 지원을 약속했다.

단순한 구두 약속이 아니라 가지고 온 영주의 친서까지 내밀었다.

황실에서 허락만 한다면 언제든 군사를 이끌고 지원하러 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친서를 갈무리한 루시안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걸로 군사력은 확보되었군.'

말은 그리 했지만 칼릭스 백작가와 정면에서 전쟁을 벌일 생각은 없다.

든든한 우군이 생기긴 했지만, 상대의 세력도 만만치 않은 상황.

황실의 허가가 있더라도 어중간한 힘만 믿고 덤볐다간 낭패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내 존재가 절실한 이들이, 그것도 여차하면 기꺼이 군사를 일으킬만한 이들이 생겼다는 거다.'

루시안도 제 한몸 지킬 힘은 있다.

펠리시아와 레이먼, 휴고의 실력도 믿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이도 한 손으로 열 손을 막는 건 힘든 법.

약하든 강하든 다른 손이 필요하던 차에 자기들이 그 손이 되어주겠다며 달려든 거다.

'저들의 사정을 생각하면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내 신변만큼은 철저히 보호하려 들겠지.'

최악의 경우 납치나 강제 송환도 선택지에 넣었을 칼릭스 백작가로서는 심히 부담되는 상황이리라.

이렇게 된 이상 적들의 선택지는 루시안과 정면에서 대적하는 정공법뿐.

그리고 정공법이라면 루시안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그로부터 며칠 후, 칼릭스는 재차 사절을 파견했다.

"루시안 공께 인사드립니다. 칼릭스 백작가를 섬기는 마르셀 헤르셔라고 합니다."

마른 근육과 음침한 눈빛이 인상적인 기사는 자신만만했던 팔미르와 정반대의 인상이었다.

본인에 대한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마르셀은 본론부터 꺼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백작 각하께서는 그리말디의 이름을 걸고 공과 정당한 경합을 펼치길 원하십니다."

"정당한 경합이라."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우스운 소리군. 경합이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자들 사이에서 필요한 것. 선대 공작 전하의 외손인 나와 경합을 하자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 아닌가?"

"하지만 루시아 공께서는 북부인이 아니시지요. 몇 번을 말씀하시던 저희는 이 말을 반복할 겁니다. 공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 뻔뻔한 소리에 하랄드를 포함한 루시안의 가신들이 일제히 눈을 찌푸렸다.

본인들도 그리말디의 이름을 포기할 수 없으니 정당한 권리고 나발이고 어떻게든 물고 늘어지겠다는 뜻 아닌가.

사방에서 경멸 어린 눈빛이 쏟아졌으나 마르셀은 철판을 깐 듯 꿈쩍하지 않았다.

"공께서도 아시겠지만 이미 북부에는 수많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누군가는 이득을, 누군가는 손해를 봤지요. 이제 와 그 모든 걸 무위로 돌리신다면 어떤 명분을 가져오든 순순히 인정하고 물러설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경합에서 이기면 순순히 인정하겠다? 정당한 권리가 아닌, 공신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일개 경합에서?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북부의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벌어지는 경합입니다. 먼저 제안하고도 말을 번복하는 추태를 보인다면 누가 이후 칼릭스를 따르겠습니까?"

남들의 시선이 있으니 결과가 나오면 좋든 싫든 따를 수밖에 없다는 소리.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루시안은 더 말해보라며 턱을 까딱였다.

"무엇보다 이번 경합은 옛 북부의 전통을 따를 생각입니다. 루시안 공께서 북부인의 피를 이으셨다면 거절하진 않으시겠지요."

"옛 북부의 전통?"

"백일 사냥입니다."

콰앙

"이런 미친놈이!"

눈이 뒤집힌 하랄드가 탁자를 후려쳤다.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가운데 마르셀은 담담히 고개를 숙였다.

"진정하시지요. 저는 그저 경합의 내용을 전달했을 뿐입니다."

"닥쳐라! 이 뱀 같은 새끼들이 이젠 대놓고 수작질을 하는구나! 그토록 죽고 싶다면 내가 이 자리에서 목을...!"

"각하."

당장이라도 도끼를 집어 들려던 하랄드가 루시안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파르르 손을 떨던 하랄드는 이내 도끼에서 손을 거두며 짓씹어 뱉듯 말했다.

"네가 루시안 공의 손님만 아니었다면, 그 목은 지금쯤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각하의 배려를 가슴에 새기도록 하지요."

전혀 고맙지 않은 목소리에 하랄드가 다시 욱했으나, 루시안의 시선을 의식하며 도로 앉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진정된 후 루시안은 마르셀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백일 사냥이라는 게 뭐지?"

마르셀은 루시안의 물음에 서늘한 웃음을 내보였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북부의 오랜 전통이지요."

****

"보름 동안 북부의 설산에서 살아남은 후 가장 값진 전리품을 가져오는 자를 승자로 친다. 동행 가능한 이는 다섯 명 이하, 식량을 지참하는 건 일절 금지 라."

회의를 위해 마르셀을 밖에 내보낸 루시안이 방금 들은 내용을 곱씹었다.

원래는 백일 사냥이라는 이름대로 100일이었던 모양이지만, 걸리는 시간도 상당한 데다 지나치게 위험한 탓에 보름으로 줄었다고 했다.

"재밌는 전통이군요. 모든 배경을 벗어던지고 개인의 순수한 능력만을 시험하다니. 북부가 더 좋아지려 합니다."

"그리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오! 저들이 정말 정정당당한 경합을 벌이리라 생각하는 거요!?"

"그럴 리가요."

루시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지도를 쳐다봤다.

지도엔 방금 전 마르셀이 경합 장소로 표시된 장소가 붉게 칠해져 있었다.

"저들이 경합 장소로 제시한 설산은 칼릭스 백작가에서 가까운 데다 동맹인 영주들이 둘러싸고 있지요. 절 지지하는 이들이 감시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앞마당인 이상 몰래 함정을 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니 거절해야만 하오."

"그건 안 됩니다."

"어째서!"

"놈들이 전통을 들먹였잖습니까. 여기서 제가 엉덩이를 뒤로 뺀다면 기껏 사람들에게 심어준 환상이 깨집니다."

정곡을 찔린 하랄드가 입을 다물었다.

그 말대로 지금 루시안이 이 제안을 거부한다면 북부의 오랜 전통을 꺼리는 모양새가 될 터.

북부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영웅이라고 환호하던 사람들조차 크든 작든 실망하게 되리라.

"최악의 경우 지금껏 인정받으려 노력한 게 모두 허사가 될지도 모릅니다. 놈들도 역시 남부인은 어쩔 수 없다며 열심히 주변에 떠들어대겠지요."

"그렇다면 함정인 걸 뻔히 알면서도 제안에 응하겠다는 뜻이오?"

"예, 그럴 생각입니다."

"무슨...!"

자신감이 넘쳐 오만함마저 느껴지는 발언에 하랄드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루시안은 그런 하랄드를 진정시키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건 아닙니다. 저들도 제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해 발데크의 분노를 사긴 싫겠지요. 어디까지나 간접적으로 괴롭힐 수밖에 없을 겁니다."

"목숨이 안전하다고 해서 승리가 확정된 건 아니지. 그대가 경합에서 지면 놈들만 좋은 일 시켜주는 꼴이오."

"아니요, 경합만 받아들인다면 결과는 어찌되든 상관없습니다. 제게 중요한 건 북부의 인정이지 놈들의 인정이 아니니까요."

"...?"

무슨 소린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랄드를 향해 루시안이 씩 웃었다.

"저들이 인정하고 말고가 무슨 상관이랍니까? 제국법상 그리말디의 유산에 대한 권리는 어차피 제게 있습니다. 북부 전체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모르나 지금은 저들만 인정 못 하겠다며 날뛰는 꼴 아닙니까?"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하랄드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그게 또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는 건가?'

생각해 보니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북부가 황실과 데면데면하다고는 하나 명백한 제국의 일부.

개개인이 명분으로 써먹는 건 둘째 치더라도 제국법에 따르면 선대 공작이 남긴 재산과 땅에 대한 권리는 어디까지나 루시안에게 있었다.

대다수가 루시안을 인정한 상황에서 선대 공작의 유산을 차지하면 칼릭스 백작가가 그리말디를 들먹여도 웃음거리만 될 터.

"...아니, 하지만 저들이 그대의 권리를 순순히 인정하고 내줄 리가 없잖소? 설령 인정한다 하더라도 온갖 핑계를 대며 내주지 않으려 할 게 뻔하오."

"그럼 공권력의 도움을 받으면 그만이지요."

"공권력이라니?"

"주군."

막 루시안이 대답하려던 찰나, 밖에서 펠리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찰관께서 황제 폐하의 칙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8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