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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30-40

30화

두말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는 루시안의 모습에 용병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질투, 탄식, 후회, 탐욕 등의 수많은 감정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루시안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용병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웃으며 말했다.

"액수가 많으니 조금 불안할지도 모르겠군. 원한다면 주변의 다른 목적지까지 호위를 붙여줄 수도 있다만."

"아뇨, 괜찮습니다.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해서."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지."

루시안이 옆으로 비켜서자 에이든은 쏜살같이 밖으로 튀어 나갔다.

서두르는 걸 보니 곧바로 말을 사서 떠날 생각인 듯 보였다.

그와 동시에 용병들이 덜컹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쫓아가서 죽이고 뺏을 속셈이군.'

하여간 용병이란 것들은.

전생에서는 동업자였다지만 몇 번을 봐도 쓴웃음이 절로 나오는 작태였다.

짝짝

"자, 아직 내 말 안 끝났으니 자리에 앉도록."

용병들이 움직이기 전에 루시안은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대부분 그 말에 멈칫했으나 몇몇 용병들은 못 들은 척 계속 움직였다.

한 용병단은 대놓고 루시안이 막은 입구까지 다가왔다.

"도련님, 잠시만 비켜주시죠. 화장실이 급해서 그럽니다."

"금방 올 테니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원하신다면 각서라도 써드리지요."

어디나 상황 파악 못 하는 놈들은 있는 법.

생목숨 하나가 눈앞에서 날아갔음에도 이놈들은 깨달은 게 없는 모양이었다.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백금화가 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스벤은 제 주제에 비해 과한 목숨값을 받았지. 네놈들 목숨값은 얼마일까?"

"···!"

"돌아가서 앉아. 아니면 내가 또다른 맹세를 하길 원하나?"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용병들은 창백한 안색으로 뒷걸음질 쳤다.

대답이 없자 루시안은 백금화 몇 닢을 탁자에 올려놓고 소리쳤다.

"하늘의 여덟 신이시여!"

"앉겠습니다! 지금 당장 앉는다구요! 보십쇼! 앉았습니다!"

"한 번만 봐주십쇼! 도련님을 무시하려던 게 아닙니다!"

입구까지 다가온 용병들은 기겁하며 냉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 광경을 본 다른 용병들도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계속 루시안의 말을 무시했다간 자신이 새로운 맹세의 대상으로 찍힐 수도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에.

머뭇거리면서 다시 자리에 앉은 용병들을 보고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최근 제국 해방연대라는 쥐새끼들이 주변에서 설치고 있다. 원래라면 네놈들이 잡았어야 할 놈들이었지. 근데 네놈들의 같잖은 태업으로 인해 놈들은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날뛰는 중이다."

"···."

"여기 찾아온 내 목적을 밝히도록 하지. 나는 네놈들이 계약을 이행하길 바란다. 내일부터 형님께 받아 처먹은 만큼 제대로 일하도록 해라. 지금처럼 게으름을 피운다면 용서치 않겠다. 알았나?"

그 말에 용병들은 일제히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용병 측이 상황의 유리함을 믿고 지나치게 뻗댄 건 사실이다.

하지만 몸값이 한창 높을 때인데도 평소 가격으로 후려친 발데크의 탓도 있었다.

아무리 지은 죄가 있다지만 이 문제만큼은 용병들로서도 순순히 따르기가 힘들었다.

"도련님, 오해하시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욕심을 부리려는 게 아니라···."

"제국 해방연대 놈들 하나를 잡을 때마다 백금화 한 닢을 주지."

"···!?"

루시안이 덧붙인 말에 용병들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까 전 맹세에 사용한 액수보다는 훨씬 적은 금액이나 추가 보수로서는 여전히 어마어마했다.

백금화 한 닢이면 용병단 전원이 나누어도 어지간한 일감 네다섯 개에 해당하는 수준이니까.

"그리고 제국 해방연대 놈들을 다섯 이상 잡은 용병단에게는 보너스로 백금화를 한 닢 더 얹어주지. 이 정도면 어떤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다섯 놈만 잡아도 백금화 여섯 닢이다. 그 정도면 보수를 나누고도 은퇴를 꿈꿔볼 만한 수준 아닌가.

상당히 끌리는 조건에 다들 머뭇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볼 때였다.

"좋습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안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요!"

구석에 있던 용병단이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다른 용병들은 일순간 흠칫 했으나 그것도 잠시.

한번 물꼬가 터지자 여기저기서 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희도 그 조건으로 일하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배치 장소만 말해주십쇼!"

"얘들아, 장비 챙겨라! 일할 시간이다!"

지금껏 널브러져 있던 용병들의 확 달라진 반응에 루시안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손을 올려 모두를 조용히 시킨 후 재차 소리쳤다.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푹 쉬어라! 내일 아침에 각자 배치될 장소를 알려주겠다! 단, 이번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일을 게을리했다간 앞서 지급한 계약금까지 모조리 토해내도록 할 테니 명심하도록!"

****

루시안 일행은 협상을 마치고 여관에서 나왔다.

경고성 발언이 몇 번 더 이어졌으나 이전과 달리 반발하는 자는 누구 하나 없었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끝났군. 이 정도면 큰형님도 만족하실 테니 돌아가서 알려드리자고."

별거 아닌 듯이 말하는 루시안의 태도에 레이먼은 마른침을 삼켰다.

실제로는 그리 가볍게 말할 성과가 전혀 아니었으니까.

'맹세 하나로 정체되어 있던 상황을 완전히 뒤집어버릴 줄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막대한 돈을 내고도 겨우 쓰레기 하나 치워버렸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백금화 몇 닢 따윈 루시안이 가져온 이득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했다.

'백금화를 과시하여 막대한 보수를 지급할 능력을 과시하고, 맹세를 통해 불신감을 없앴다. 용병들이 서로를 죽이게 만들어 결속을 깬 후 자신도 여차하면 그 꼴이 날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끼게 했지.'

말로 하기엔 쉽지만 실제로 행하려면 더없이 어려운 일이었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이익집단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들의 힘만 믿고 천지 분간을 못 하기 마련.

주제를 알려주려고 해도 힘에 비례해 커진 간덩이 때문에 유혈 사태를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루시안은 겨우 말 몇 마디로 놈들의 뺨을 후려갈기고 용병들이 정신을 차리도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구심점을 잃은 용병들은 협상 내내 삼공자의 의도대로 끌려다녔어. 그 스벤이란 놈이 살아 있었다면, 아니 최소한 결속이 깨지지 않았다면 협상 조건을 거부하고 반발하는 놈들이 나왔을 텐데 말이야.'

협상장까지 끌고 가는 과정만이 아니다.

놈들 앞에 들이민 조건조차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전체적인 보수는 그대로 유지하는 대신 과할 정도의 성과급 지불.

아슬아슬 균형을 맞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발데크 쪽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다.

'제국 해방연대 놈들이 여기저기서 겁 없이 날뛰는 건 어디까지나 경계망이 허술하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성과급에 눈이 벌게진 용병들이 나서는 순간 놈들도 몸을 사리지 않을 수 없어.'

비밀 조직인 만큼 은밀하게 행동하는 데는 도가 튼 놈들이다.

제대로 숨기 시작하면 용병들도 어지간해선 잡기 힘들 터.

최초의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계약 기간 내내 용병들은 놈들의 그림자도 보기 힘들 거다.

반대로 제국 해방연대 측은 용병들을 피하느라 운신의 폭이 좁아져서 죽을 맛일 테고.

그야말로 지출은 최소화하면서도 적들의 움직임은 제한하는 최선의 수가 아닌가.

'이번 일에서 딱 하나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도련님, 참으로 훌륭하신 일처리였습니다. 그렇지만 처음 던지신 백금화 주머니는 아무리 그래도 너무 과하게 넣으신 거 아닙니까? 누가 첫 시도에서 진짜로 그 용병놈을 죽여버렸다면 어쩌시려고요?"

본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휴고의 말에 레이먼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없이 넘어가긴 했으나 그 점만큼은 이번 계획의 불안 요소였다.

첫 번째 맹세에서 눈이 돌아간 용병이 스벤을 죽였다면 배보다 배꼽이 크지 않겠나.

'자신의 계획에 자신감을 가지는 건 좋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지나친 자신감을 가지는 건 후일 오만함으로 변질되기 쉬운 법.'

레이먼은 루시안의 대답에 따라 따끔한 충고를 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작 질문을 받은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백금화 주머니를 던졌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봐."

"헉!"

엄청난 금액이 날아오자 휴고는 기겁하며 두 손으로 잡아챘다.

실수로 한 닢이라도 떨어져서 잃어버리면 대참사였으니까.

"도련님, 간 떨어지게 좀 하지 마십쇼! 떨어뜨리면 어쩌려고요!"

"몇 개는 떨어뜨려도 괜찮아. 그 안에 백금화는 없으니까."

"예?"

"아까 전에 따로 옮겨 담았지. 이게 진짜 백금화 주머니야."

짤랑

루시안의 품속에서 조그마한 주머니가 튀어나왔다.

방금 휴고에게 던져 준 주머니의 반의반도 안 되는 아담한 크기였다.

"그, 그럼 이 주머니는···?"

멍하니 있던 휴고가 냉큼 큼지막한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이윽고 안에서 내용물이 드러나자 휴고는 뜨악한 표정이 되어 소리쳤다.

"전부 은화!?"

"생각을 해봐라. 아버지가 나한테 그 정도로 많은 백금화를 주시겠냐? 지원을 해주신다 쳐도 한도가 있지."

"그럼 아까 전 던지셨던 주머니에는···!"

"맨 위에 살짝 덮어 둔 것들 빼고는 다 은화였어. 색은 거의 차이가 없으니 주화에 새겨진 무늬만 감추면 그만이거든. 진짜로 백금화만 남긴 건 마지막 맹세를 할 때였지."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휴고는 물론 레이먼과 흑사자들마저 할 말을 잃었다.

그럼 백금화 주머니 자체가 블러핑이었다고?

"자, 잠시만요, 삼공자. 만신전의 맹세는 어떻게 된 겁니까? 분명 백금화를 주신다고 했을 텐데요?"

"내가 언제? 나는 맹세할 때 주머니를 준다고 했지 백금화를 준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는데."

레이먼과 흑사자들은 일제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저 말이 맞느냐는 물음에 기억력이 뛰어난 빈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리 말씀하시긴 했습니다. 백금화를 주겠다고 하신 건 용병들에게 처음 제안을 하셨을 때고, 만신전의 맹세를 하실 때는 주머니의 모든 걸 양도하시겠다고 하셨을 뿐이죠."

"그, 그럼 제안과 맹세를 다르게 하셨던 건가?"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 제안도 거짓말은 아닙니다. 주머니를 내밀면서 말씀하시긴 했지만, 주머니에 든 게 전부 백금화라고는 한 적 없지 않습니까."

"···."

억지스러운 면이 있긴 했으나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원래 계약이란 속임수가 난무하는 법이고 용병들 역시 지금껏 만만찮은 억지를 부려댔으니까.

무엇보다 애매한 첫 제안은 그렇다 쳐도 만신전의 맹세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특정한 무언가가 아니라 주머니에 든 걸 주겠다고 한 게 전부 아닌가.

"들키시면 어쩌려고 이러신 겁니까? 아까 전에 말했던 대로 첫 번째 제안을 하자마자 누군가 놈을 죽였다면···."

"냉큼 싸매고 품에 넣었겠지. 제정신이 박혔다면 탐욕스러운 동업자가 매의 눈으로 노려보는 데서 주머니를 풀어헤치겠냐? 기껏해야 색만 보고 덮지."

"설령 그렇다 해도 훨씬 많은 비용이 나갔을 겁니다. 삼공자께서 맹세를 철회하며 회수하신 백금화도 적지 않았으니까요."

"동시에 주머니를 가져간 놈은 사방에서 목숨이 노려졌을걸. 그 정도 액수라면 죄다 눈이 돌아갈 게 뻔하니까. 나중에 안을 확인하고 내용물이 은화란 걸 알아봤자 누구 하나 믿어주지 않을 테고."

까놓고 말해 아까 백금화 몇 닢을 가지고 간 놈조차 과연 무사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성과급과 경고로 억눌러 놓긴 했지만 쉽고 위험한 길을 가려는 멍청이는 언제나 있는 법이니까.

'전생에서는 그보다 더 적은 돈 때문에 몇 년간 쫓고 쫓기는 사람들도 질리도록 봤단 말이지. 운이 좋다면 추적을 따돌리고 여생을 편히 살겠지만, 재수 없으면 평생 뒤를 조심하며 살아야 할 거다.'

원래 액수에서 한참 줄어든 지금조차 이런 생각이 드는데 그 큼지막한 주머니를 다 가져갔다?

여관 밖으로 나간 뒤 12시간 이상 살아 있을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신의 기적이었다.

"그리고 정당한 보수의 주인이 죽었다면 굳이 회수하지 않고 내버려 둘 필요도 없잖아? 기사가 살인강도 몇 놈 때려잡아서 부수입을 올리는 건 특별한 일도 아니니까."

"···!"

31화

레이먼은 멍하니 루시안을 쳐다보다 이내 헛웃음을 내뱉었다.

지나친 자신감에 취하면 따끔한 한마디를 해주겠다?

'웃기지도 않는 생각이었군.'

자신감에 취하기는커녕 모든 변수를 철저히 고려한 뒤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비책까지 마련해두었다.

심지어 이 모든 건 스벤이란 용병의 존재가 드러난 후 십수 초 안에 세운 계획들이 아닌가.

이미 레이먼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있건만 주제넘게 충고라니.

"하."

레이먼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흑사자로 복무하면서 싹수가 있는 애송이는 넘치도록 봐왔다.

불행한 사고로 일찍 꺾여버린 놈을 제외하면 대개 예상한 대로의 길을 걸어 꽃을 피웠다.

하지만 이토록 미래를 가늠하기 힘든 젊은이는 난생처음이었다.

'돌아가면 전하께 삼공자의 호위로 넣어주실 수 있는지 청을 드려봐야겠군.'

겨우 열여섯에 이만한 심계를 보여주는 삼공자다.

과연 앞으로 성장하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그 미래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무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

"···훌륭하다."

트리스탄은 루시안이 가져온 결과를 보고 짧은 한마디를 남겼다.

어설프게 말을 덧붙이기엔 성과가 너무 대단했고, 일일이 칭찬하기엔 경쟁자의 입장이 허락지 않았다.

그렇다면 순수한 감탄만을 내뱉을 수밖에.

다행히 주변 사람들은 그 말만 듣고도 루시안의 성과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알아차린 듯했다.

'하기야 남을 칭찬하는 데는 더없이 인색한 사람이었으니, 저 정도만 말해도 주변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하겠지.'

"앞으로 용병들의 지휘는 네게 맡기겠다. 나는 가문의 기사들과 함께 국경과 가까운 지역의 수상한 장소들을 살펴보마."

그리 말하는 트리스탄의 얼굴은 처음보다 훨씬 편해 보였다.

비록 루시안에게 공적을 넘겨주긴 했지만, 골칫거리가 해결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모양이었다.

"물론 전부 기사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넓은 범위인 만큼 일부 지역엔 용병들이 필요하다. 지도를 줄 테니 네가 적당히 배치하도록."

"알겠습니다. 듣자 하니 제국 해방연대와 몬스터들이 같이 출현한다고 하던데···."

"각자 따로 표시해뒀으니 확인해봐라. 제국 해방연대 놈들이 붉은색, 몬스터가 파란색이다."

루시안은 옆에서 기사가 전해준 군사 지도를 유심히 살펴봤다.

확실히 국경지대인 만큼 커버해야 할 범위가 지나치게 넓었다.

이러니 용병들이 없으면 인력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용병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내일부터는 그나마 정상적으로 돌아가겠군. 그나저나 제국 해방연대만 해도 골치 아픈데 몬스터까지··· 응?'

지도를 보던 루시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제국 해방연대와 몬스터들이 나오는 구간이 듬성듬성 겹쳐져 있었다.

아무리 이 부근이 넓다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인간과 몬스터는 기본적으로 피식자와 포식자의 관계.

따로 구분된 지역에서 산다면 모를까 이토록 가까운 거리라면 충돌이 없을 수가 없다.

"형님, 이 지도에 적힌 게 정확한 정보 맞습니까? 제국 해방연대 놈들이 무슨 수로 몬스터가 돌아다니는 지역 사이에서 출몰하는 겁니까?"

"하급 유물이라도 구매했거나 몬스터를 쫓는 향이라도 뿌렸겠지. 다른 몬스터라면 모를까 지금 출몰하는 놈들은 코볼트와 놀이니까."

"코볼트와 놀? 그놈들이 같이 출몰한다고요?"

코볼트는 인간보다 작은 체구와 개의 머리를 가진 이족보행 몬스터.

놀은 마찬가지로 이족보행을 하지만 하이에나의 형상에 덩치는 인간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몬스터였다.

이 두 종류의 몬스터들은 코가 굉장히 좋아 추적에 뛰어났지만, 동시에 지독한 냄새에 약해서 비교적 쉽게 쫓아버릴 수 있었다.

"원래 몬스터끼리 비슷한 부류는 종종 협력하는 법. 고블린과 오크가 그린 스킨이라 같이 묶이는 것처럼 놈들도 동족 의식이 있는 거겠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않느냐."

"아니요. 굉장히 이상한 일입니다."

트리스탄은 별거 아니라고 느꼈는지 심드렁하게 넘겼지만, 설명을 들은 루시안의 표정은 더없이 심각해졌다.

고블린과 오크처럼 진짜 같은 부류라면 모를까 놀과 코볼트가 같이 행동한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는 비슷한 부류로 보이지만, 놀과 코볼트는 협력하지 않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놀이 코볼트를 먹잇감으로 생각하지요. 그린 스킨처럼 한데 묶이기는커녕 공존 자체가 불가능한 부류입니다."

"뭣이? 그럼 어찌 놈들이 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말이냐?"

"제가 아는 한 자연적으로 불가능한 방법을 가능케 하는 수단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형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루시안의 말에 트리스탄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거운 침묵이 집무실에 내려앉았고 그 누구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루시안은 어쩔 수 없이 정답을 내뱉었다.

"마법."

"말을 조심하거라."

마법이란 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트리스탄이 눈을 번뜩였다.

"마법이란 그리 쉽게 나올 말이 아니다. 현재 공인 마법사들은 전부 수도에 머물고 있거늘 그들이 뭐가 아쉬워서 여기까지 오겠느냐?"

"현실을 보십시오. 인간이 몬스터 영역 사이를 돌아다니고, 공존할 수 없는 종족들이 같이 움직입니다. 이게 가능한 건 마법뿐입니다."

"그만."

더 듣기 싫다는 듯 트리스탄은 루시안의 말을 끊어버렸다.

"일을 크게 만들지 말거라. 안 그래도 제국 내부가 어수선하건만 마법이라니. 누가 들을까 두렵구나."

"···."

"애초에 아버지께서는 내게 이 일에 대한 전권을 맡기셨다. 공적을 세운 건 훌륭하다만 너무 깊이 파고들지는 마라. 넌 용병들을 지휘하여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트리스탄은 말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일어서서 집무실 밖으로 향했다.

더 이야기 할 건 없으니 여기서 끝내자는 태도였다.

어쩔 수 없이 루시안도 일어섰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었다.

"오늘 포획한 여섯 명의 심문은 끝내셨습니까?"

"···아직이다."

"잘 캐내 보십시오. 이 이상 사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트리스탄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모습에 루시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래서야 제대로 캐내기보다는 죽여서 입을 막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래도 독자적으로 움직여봐야 할 것 같군.'

루시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어째 이번 일이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마법이라니. 일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해졌군요."

레이먼을 비롯한 흑사자들은 일제히 눈을 찌푸렸다.

제국 해방연대와 몬스터가 동시에 등장할 때만 해도 그저 골칫거리가 겹쳤다고만 여겼다.

그런데 그 사이에 마법까지 끼어 있을 줄이야.

루시안과 흑사자들이 모두 침묵하는 와중 휴고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큰일 난 거 아닙니까? 3백 년 전에 있었던 마법사들의 반란 이후 비인가 마법사는 황실에서 죄다 흑마법사로 낙인찍잖습니까. 여기에 마법사가 얽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당장 황실에서 움직이겠지. 마법사가 낌새를 눈치채고 도망간 이후에도 황실에서 파견된 근위대가 여기저기 헤집고 다닐 가능성이 커. 최악의 경우 보른홀름 지역 전체가 마녀사냥에 휘말릴 거야."

본래 반역이 아닌 이상 가신의 영토 내부 문제에는 손을 안 대는 것이 제국의 불문율.

하지만 비인가 마법사가 얽힌 순간 그런 불문율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비인가 마법사의 존재 자체가 반역의 수괴와 동급으로 여겨지니까.

"아버지께서 황제파라고는 하나 무려 3백 년이 넘도록 이어져 온 마법 혐오야. 진짜로 마법이 얽혀 있다면 사정을 봐줄 리가 없지."

"일공자께서는 뭐라 하셨습니까?"

"이대로 덮을 생각인 것 같아. 이해는 충분히 가지만 진짜 마법사가 있을 경우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도 있다는 게 문제야."

비인가 마법사만 보면 발작하는 게 황실의 문제긴 하다.

그러나 달리 말하자면 마법사를 상대하는 경험이 가장 많은 조직 역시 황실이란 소리.

평소 마법의 편린조차 본 적 없는 일반 기사들로서는 여차할 때 대응하지 못하고 쓸려나갈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지만 무작정 황실에게 알리는 것도 하책입니다. 자칫하면 마녀사냥 때문에 보른홀름 전체가 초토화될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내 말이 그 말이야. 무언가를 판단하기엔 정보가 너무 부족해."

루시안은 조용히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전생에서는 보른홀름에서 무언가 일어났다는 소릴 들은 적이 없다.

황실이 움직였다면 마녀사냥이 아니더라도 큰 소문이 났을 터.

트리스탄이 마법사와 관련된 걸 숨기고 넘어간 게 분명했다.

'아마도 철저히 은폐했겠지. 문제는 그 때문에 나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른다는 건데.'

앞뒤 정황만 보고 그나마 알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

일의 규모가 충분히 은폐할 만한 수준으로 끝났다는 것.

그리고 승전보로 꾸밀 수 있을 만큼 결과가 좋지도 않았다는 거다.

'은폐 가능할 정도로 작은 규모였다면 마법사의 존재를 숨기고 순수하게 제국 해방연대와 싸워 승리했다고 꾸미는 것도 가능했겠지. 그런데도 굳이 그러지 않았다는 건 결과가 패전에 가까워서였을 터.'

설령 이겼다 하더라도 상처뿐인 승리였을 가능성이 높다.

즉, 트리스탄의 방식대로 한다면 은폐는 성공적이더라도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못하리라.

어떻게든 중간에 개입해서 전체적인 계획의 방향을 바꿔야 하는 상황.

한참 고민하던 루시안은 이내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일단은 정보부터 수집해야겠군. 무언가 작전을 세우기엔 정보가 너무 적어."

"제국 해방연대 소속인 녀석들을 심문해보실 생각입니까? 하지만 일공자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실 텐데요."

"누가 그놈들한테 간다고 했어?"

레이먼의 의문에 루시안이 웃으며 말했다.

"이왕이면 감옥에서 반나절 썩은 놈보다 갓 잡은 싱싱한 놈에게서 캐내야지. 백금화도 성과급으로 걸었겠다, 의욕이 하늘을 찌르는 용병들의 활약을 기대해보자고."

아무리 성 주변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놈들이라 할지라도 경계망이 급격히 강화된 건 알지 못할 터.

적어도 한 명은 이틀 안에 걸려 들리라.

루시안은 그때까지 용병들을 지휘하며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

보른홀름 성벽 주변의 숲을 사람들은 황색 숲이라 불렀다.

커다란 나무의 가지가 너무 울창한 나머지 그 아래 작은 나무들이 햇빛을 못 받고 죄다 말라죽은 탓이었다.

말라비틀어진 황색 나뭇잎으로 가득한 숲은 밤에 더욱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평소 몬스터들이 자주 다니는 길이라 더욱 기피하는 황색 숲에 두 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정지. 하늘의 번개가 내려치면."

"옥좌의 죄인을 벌할지니. 나요, 동지."

암구호를 주고 받은 두 사람은 이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가까이 다가섰다.

양쪽 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이제 막 중년의 나이로 들어서고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십수 년간 제국 해방연대에서 함께했기에 이미 서로의 존재는 익숙했다.

"갑자기 무슨 일로 부르셨소? 계획을 앞당기기 위해 각자 맡은 일에 힘쓰자고 한 게 바로 며칠 전이거늘."

"바로 그것 때문이요. 일이 틀어졌소. 지금껏 태업을 일삼던 용병들과 발데크 가문의 협상이 오늘 타결되었다는군."

"뭐요? 아니, 대체 무슨 수로? 도저히 하루 이틀 만에 풀릴 상황이 아니었잖소? 설마 용병들이 부르는 대로 주기로 한 거요?"

"그럴 리가. 듣자 하니 본가에서 온 누군가가 하루 만에 협상을 끝냈다는군. 대공이 조력자로 측근을 보낸 것 같소."

"허허, 기가 막히는군. 대체 어떤 작자길래."

생각지도 못한 악재에 오른편에 선 남자가 눈을 찌푸렸다.

그토록 꼬이고 꼬인 힘든 협상을 한 번에 풀었으니 분명 대공이 아끼는 책사 중 하나일 터.

그런 최측근을 보냈다면 놈들도 계획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챈 건가?

32화

"이럴 때가 아니오. 서둘러 흩어진 동지들을 귀환시켜야 하오. 이대로 가다간 모조리 잡힐 거요."

"으음, 지금 당장 소집 명령을 내리긴 하겠지만···."

상념을 깨는 동지의 목소리에 남자는 뒷말을 흐렸다.

아무리 서둘러도 두세 명 정도는 용병을 피하지 못하고 잡힐 게 뻔했다.

한동안은 용병들이 나서지 않으리라 단정하여 너무 멀리까지 간 게 문제였다.

그 걱정을 알아차린 건지 왼편의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다 구하는 건 불가능하오. 가능한 동지들만이라도 살리는 수밖에."

"후우, 어찌 일이 이리되었는지."

착잡한 심정에 두 남자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탄탄대로였거늘 갑자기 상황이 뒤바뀔 줄이야.

"그러고 보니 고용된 마법사들은 뭐라 하오? 이리 급히 동지들을 도로 불러온다면 예정했던 기점의 설치가 늦어질 텐데."

"본인들도 잘 모른다고 하더이다. 이미 설치한 기점의 숫자에 따라 달라진다고는 하는데 아마 시간이 늦어질 때를 대비한 변명이겠지. 하여간 흑마법사들이란."

"아니···!"

흑마법사라는 단어에 오른편의 남자가 기겁했다.

아무리 듣는 사람이 없다지만 이리도 무신경할 줄이야.

"이보시오, 동지. 그 흑마법사라는 말 좀 쓰지 말라고 했잖소. 이야기가 새어나갔다간 골치 아파질 수 있단 말이오."

"새어나갈 이야기가 어디 있다고? 어차피 접선 지점이 들킨 시점에서 우린 죽은 목숨이거늘."

"굳이 적이 아니라 동포들의 귀에 들어가도 문제요. 무엇보다 협조해주는 마법사들도 싫어하는 소리 아니오."

일반적으로 흑마법사란 사람의 목숨이나 피, 생명력과 영혼에 관련된 마법을 다루는 이들을 말한다.

단순한 서면 연구만 한다면 문제없겠으나 마법이란 실습이 동반되는 법.

마법의 탐구를 위해서랍시고 사람을 잡아다 제물로 써대니 흑마법사의 존재 자체가 극악무도한 범죄자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멀쩡한 마법사들은 흑마법사라고 불리는 것 자체를 질색하며 엄청난 모욕으로 여겼다.

"안 그래도 제국에 의해 학파 전체가 흑마법사라는 누명을 쓴 이들이요. 그런 이들의 귀에 동지가 한 말이 들어갔다간 어찌 될 것 같소?"

"제깟 놈들이 뭘 하겠소? 그냥 참겠지. 동지는 너무 놈들의 눈치를 보는 것 같군. 마법사란 족속은 시시때때로 주제 파악을 시켜줘야 하는 법이오."

코웃음을 치는 동지를 보며 오른편의 남자는 머리를 짚었다.

그가 마법사를 싫어하는 이유는 잘 안다.

마법사들의 반역은 제국에 대한 반역이라기보다 귀족에 대한 권력 찬탈 시도에 가까웠으니까.

뼛속까지 귀족주의에 물든 사람이 보기엔 심히 거슬리겠지.

'하지만 서로 협조가 필요한 상황에서조차 그놈의 귀족주의를 앞세우면 어쩌자는 건가. 여차할 때 마법사들이 돌아서면 대참사가 일어날 판이거늘.'

같은 조직에 속해 있음에도 새삼 서로 꿈꾸는 게 다르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진정으로 조국의 해방을 원하는 남자에 비해 상대는 그저 제국의 간섭 없이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게 목적이었기에.

두 사람이 십수 년을 함께했음에도 도저히 서로를 친구라 부를 수 없는 이유였다.

'생각 같아서는 한마디 해주고 싶으나 듣지도 않을 터.'

속으로 한숨을 삼킨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도 작전 수행까지는 너무 뭐라 하지 마시오. 괜히 불만이 쌓여 일처리에 문제가 생긴다면 우리에게도 좋을 거 없잖소. 교육은 일이 끝나고 난 뒤에나 합시다."

"흠, 하기야 마법사 놈들은 원래 편협한 존재이니."

동지는 남자의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태도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나올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었다.

안심한 남자는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눈 후 그대로 갈라섰다.

일이 꼬인 이상 한시라도 빨리 수습할 필요가 있었기에.

****

루시안은 용병들을 정해둔 장소에 배치해두고 물고기가 걸리길 기다렸다.

한 놈이라도 걸리기만 하면 트리스탄에게 들키기 전에 즉시 달려가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다.

물론 그 와중 은근슬쩍 이미 잡은 포로들에게서 나온 정보가 없나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려 여섯 명이나 걸렸으니 입은 부족하지 않겠지. 마법사의 존재를 숨긴다 하더라도 최소한 심문은 해봐야 할 터.'

아무리 트리스탄과 루시안이 경쟁자 관계라지만 같은 가문으로 묶인 운명공동체.

필요하다면 정보 공유 정도는 기꺼이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트리스탄의 대답은 기대 이하였다.

"여섯 놈 모두 잡힌 이후로는 한마디도 안 하고 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봐도 입도 벙긋하지 않으니 원."

"설마 말로만 물어보신 건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당연히 고문도 해봤지. 하지만 죄다 통각이 마비된 건지 반응이 없더군."

"이런."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분명 그런 약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마시면 통각을 전혀 못 느끼게 되지만 동시에 미각을 포함하여 오감의 일부도 같이 잃는다던가.

한번 복용하면 되돌릴 방법이 없기에 광신도나 암살자들만이 쓰는 약물이라 들었건만.

'하필이면 이놈들이 복용했을 줄이야.'

이렇게 된 이상 고문으로는 입을 열 방도가 없다고 봐야겠지.

유일한 방법은 정신적으로 뒤흔들어 정보를 내뱉게 하는 것뿐인데.

"제가 한번 봐도 되겠습니까?"

"안 된다."

예상대로 즉시 거절이 날아들었다.

루시안은 설득을 위해 입을 열었으나 그보다 먼저 트리스탄이 단호하게 말했다.

"넌 지금 황실의 지원을 머릿속에서 저울질하는 모양이다만, 그 저울이 있는 한 나는 널 놈들과 대면시켜줄 생각이 없다. 어설프게 정보를 얻어 한쪽으로 저울이 기울어지는 것보단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나으니."

"자칫하면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과한 걱정이다."

트리스탄은 루시안의 가정을 일축했다.

"마법사의 존재가 얽혀있다면 분명 흑마법사로 낙인 찍힌 추방 학파일 터. 300년 넘게 마녀사냥을 당한 학파에 그 정도의 힘이 있을 것 같으냐? 지식의 전수는 고사하고 제 밥벌이조차 못 하는 놈들이거늘."

"음."

정확히 현실을 꼬집는 말에 루시안은 대답이 궁해졌다.

300년 넘게 제대로 된 근거지 없이 황실에 쫓겨 다닌 비인가 마법사의 삶은 대개 비참했다.

제자를 양성하기가 너무 어려워 학파가 소멸하는 건 예삿일이고 밥벌이를 못 해 굶어 죽는 이들까지 나올 정도.

학파의 성향 자체가 생존에 적합하거나 음지의 조직에 몸을 의탁한 경우가 아니라면 명맥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트리스탄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루시안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쓸데없는 걱정 그만하고 돌아가거라. 심문은 내가 알아서 하마. 공유해야 할 정보가 나온다면 사람을 통해 전해줄 테니 기다리도록."

그 말을 끝으로 트리스탄은 등을 돌려 떠나갔다.

설득할 방법이 막혀버린 채 혼자 남은 루시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골치 아프네. 그래도 아주 거짓말은 아닌데.'

트리스탄의 말대로 마법사는 보통 제 한 몸 건사하기조차 힘들다.

300년 동안 실전된 지식이 너무 많아 반쯤 망한 학파도 넘쳐나고.

하지만 언제나 예외란 있는 법.

학파의 방향성 자체가 대규모 파괴나 혼란에 적합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마법사 혼자면 모를까 제국 해방연대쯤 되는 조직이 지원까지 해준다?

'크게 한 방 먹기 딱 좋지.'

그러나 본인이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다면 아무리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터.

아무래도 트리스탄에게서 정보를 얻는 건 포기해야 할 듯싶었다.

남은 건 깔아놓은 어망에 물고기가 걸리길 기다리는 방법뿐인데.

"삼공자."

그때 레이먼의 목소리가 루시안의 상념을 깨웠다.

루시안은 고민을 한구석에 밀어두고 뒤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야?"

"입질이 왔습니다."

"···!"

미리 정해뒀던 암호에 루시안이 눈을 번쩍 떴다.

제국 해방연대 출신 포로가 잡혔다는 뜻.

기가 막힌 타이밍에 미소가 절로 맺혔다.

"당장 가지."

****

루시안은 즉시 지정된 장소로 향했다.

북쪽 끝자락에서 황색 숲으로 이어지는 길목 한가운데였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용병단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루시안을 쳐다봤다.

"하하하! 도련님, 보십시오! 여기 제국···!"

"쉿!"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는 용병단장을 향해 루시안이 재빨리 다가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냉큼 당황하는 용병단장에게 속삭였다.

"조용히. 다른 용병단에게 큰돈 벌었다고 광고할 일 있어? 조용히 백금화 한 닢만 받고 끝내자고."

실은 이들을 배려한 게 아니라 트리스탄에게 알려지길 원치 않아서지만, 일단 이유는 그렇게 대기로 했다.

용병단장은 잠깐 놀란 눈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루시안은 냉큼 주머니에서 미리 챙겨온 백금화를 꺼내 용병단장의 손에 쥐어줬다.

"자, 여기 약속했던 백금화. 남들 모르게 챙기라고."

"흐흐, 감사합니다. 역시 보수 지급 하나는 확실하시군요."

히죽 웃으며 백금화를 챙긴 단장은 냉큼 휘하 용병들을 이끌고 떠나갔다.

루시안이 이 일 자체를 비밀로 하고 싶다는 걸 깨달은 듯 보였다.

잠시 주변을 살핀 루시안은 호위로 레이먼만을 대동한 채 포로 앞에 다가갔다.

"제국 해방연대인가?"

"···."

"용병들에게 잡히다니, 생각 외로 허술하군. 아니면 본인의 능력을 과신했나?"

"···."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숲에 참으로 잘 돌아다니는데 비결은 뭐지?"

"···."

젊은 청년은 입술에 접착제라도 바른 듯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태도에 루시안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마법사를 고용했지? 놀과 코볼트는 원래 공존할 수 없는 몬스터인데 서로 잘 어울려 다니더군."

"···."

"그런 짓이 가능한 건 마법밖에 없지. 야수학파인가? 두 놈 다 짐승에 가까운 몬스터라 조종이 가능하다던가?"

"···."

"그거 거짓말이다. 야수학파는 그런 마법 못써. 이건 진짜 흑마법이야."

"···!?"

아무 반응이 없던 청년이 처음으로 눈을 번쩍 뜨고는 루시안을 쳐다봤다.

청년은 한 박자 늦게 본인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깨진 평정은 어쩔 수 없었다.

루시안은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흑마법사들이 다른 학파의 이름을 대면서 비인가 마법사인 척 속이는 일은 자주 있지. 특히 몬스터들을 부릴 때 그딴 소릴 하는 데 죄다 거짓말이다. 몬스터는 자연스러운 짐승이 아니라 오염된 존재니까."

"···!"

"너희는 지금 마법사를 고용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 반대야. 흑마법사가 마법사인 척 너희 안에 섞여 들어간 거지. 본인들이 무슨 짓을 하는 줄 알고 있나? 이 일대 모든 목숨을 제물로 바치는 대규모 희생 의식을 돕고 있어."

루시안의 말에 청년은 물론이고 레이먼까지 기겁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마법이 완성된 순간 일정 범위에 있는 인간은 다 죽는다는 거 아닌가!

청년은 저도 모르게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거, 거짓말하지 마라. 내 입을 열려는 속셈인 걸 모를 것 같으냐?"

"멍청한 놈. 마법의 마 자도 모르는 주제에 대체 뭘 믿고 고용한 건지 모르겠군. 아직도 모르겠나? 역사에 남을 대학살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단 말이다!"

청년에게 일갈을 날린 루시안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현자가 어리석은 이를 질책하는 듯이 쏘아붙였다.

"차라리 이 의식이 우리만 노리는 거라면 이해했을 거다. 어차피 네놈들에게 제국은 적이고, 그 아래 영민들도 별다를 거 없어 보일 테니까. 하지만 의식에 자기들 목숨까지 넣을 줄이야!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청년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으나 상대의 말엔 확신이 가득했다.

만에 하나 저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을 포함한 동지들 전부가 흑마법사에게 농락당한 거라면?

현기증을 느낀 청년은 머뭇거리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이 마법이 그런 사악한 의식이란 말이요?"

루시안은 청년과 시선을 맞추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보란 듯이 깊게 한숨을 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뻥이야.'

33화

마법이란 건 심오한 학문이다.

학파가 달라지면 같은 마법사조차 상대의 마법에 대해 전혀 모를 정도.

하물며 마법 하나 쓸 줄 모르던 루시안이 뭘 알겠는가.

그냥 대충 이거저거 건드려보면서 그럴싸한 말을 했을 뿐이다.

일단 상대방의 입을 열어야 심문이든 뭐든 시작할 수 있으니까.

'애초에 이 마법이라니, 그 마법이 뭔데? 이 자식들, 진짜로 무슨 의식을 벌이려 했던 건가?'

덤불을 적당히 건드렸더니 무언가 튀어나오긴 했다.

다만 그 무언가가 지렁이인지 뱀인지는 전혀 모르는 상황.

루시안은 조금 더 헤집어 볼 요량으로 입을 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짐작일 뿐이야. 나도 마법사는 아니니 정확한 의식의 내용은 모르지."

일단 다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으니 은근슬쩍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둔다.

서로 말이 어긋나면 단숨에 루시안의 밑천이 드러날 테니까.

"역시 날 속이려고 한 소리였나!"

부작용으로 청년의 불신이 깊어졌지만, 별문제는 아니다.

상대는 루시안보다 훨씬 마법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상태.

루시안은 잔뜩 내리깐 목소리로 분위기를 잡으며 말했다.

"그러나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몬스터를 한데 묶고 이토록 대규모로 움직이게 하는 방법은 흑마법뿐이지. 혹 그 마법사가 기점이 되는 무언가를 사방에 설치하라고 하지 않았냐?"

"...!"

"정말 그리 명령했다면 흑마법사가 맞겠군. 일반적인 마법사와 달리 흑마법사는 마법을 쓰기 전에 먼저 자연의 마력을 그런 방식으로 오염시켜야 하니까."

"그, 그럴 수가!"

청년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허공을 헤맸다.

마법사가 요청한 기점의 설치는 제국 해방연대에서도 일부만 아는 극비 사항.

그런데 황색 숲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던 인간이 어찌 그 사실을 안단 말인가.

"마, 만약 당신의 말대로라면 어떻게 되는 거요?"

"어떻게 되긴. 아까 말했잖아. 대규모 희생 의식이라고. 대체 무엇을 위해 의식을 치를 속셈인지는 모르겠다만."

"...!"

"말해봐. 너희들은 본인들의 목숨과 맞바꿔 우릴 몰살할 생각인 거냐? 정말 의식의 내용을 알고 동의하에 이루어진 계약 맞아?"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아직 의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사악한 흑마법사의 말에 모두 속아버린 거라면.

자신만이 아니라 간부들마저 아무것도 모른 채 넘어간 거라면.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바치는 거라면 목숨 따윈 아깝지 않았다.

그러나 흑마법사의 사리사욕을 채워주기 위해서 죽는다면 개죽음일 뿐.

이를 악문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만약 당신에게 상세한 내용을 말한다면, 이 사악한 의식을 막아줄 수 있겠소?"

루시안은 청년을 향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끄덕였다.

"반드시 그렇게 하지."

"후우."

깊게 한숨을 내쉰 청년은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지금껏 숨겨왔던 정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나도 마법사에 대해 자세한 건 모르오. 다만 윗분들께서 어느 날 두 명의 마법사를 데려오셨소. 지원군이라 하셨지."

한 명은 서른 정도 되어 보였고 다른 한 명은 중년과 노년 사이로 보였다.

그중에서 젊은 쪽은 본인을 천상학파로, 나이든 쪽은 본인을 야수학파라고 소개했다.

"당연히 우리야 그 말을 듣고도 뭐 하는 학파인지 알 길이 없었소. 마법 자체를 보기 힘든데 학파의 체계를 어찌 알겠소?"

"그야 그렇지."

자신을 변호하려는 듯한 말에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줬다.

그 태도에 안도한 건지 청년의 목소리가 조금 가벼워졌다.

"천상학파라는 마법사는 달리 하는 일이 없더군. 나중을 위해서 힘을 축적해둬야 하니 마력을 모아야 한다나. 그에 비해 야수학파를 자칭한 마법사는 활발하게 움직였소."

몬스터를 조종하고, 기점이 될 토템을 깎고, 어디에 그것들을 배치해야 하는지도 전부 야수학파 마법사의 짓이었다.

천상학파 마법사는 아무것도 안 하는 대신 별다른 지시도 안 했지만, 야수학파 마법사는 지나치게 의욕적이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마법의 강화에 필요한 일이라며 갓 잡은 짐승까지 요구하기 시작했다.

"대뜸 등장한 마법사가 이것저것 명령질을 해대니 모두 불만이 쌓였지. 하지만 상부에서 가능한 한 요구를 들어주라고 했기에 별수 없었소."

"그래서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줬고?"

"갓 잡은 짐승이 없으면 마법의 위력이 제대로 안 나온다니까 들어주는 수밖에."

야수학파 마법사는 몬스터나 인간이 아닌 짐승이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그들에게 당부했다.

자연의 기운을 받은 짐승이 아니면 제물로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말에 동지들은 짜증을 삼키면서도 사냥해줬다.

다행히 짐승을 몇 마리 받은 마법사는 대단히 만족해하며 그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았다.

"놈은 며칠 동안 토템을 짐승의 뱃속에 넣고 재워두다가, 새빨간 물이 들었을 때쯤 꺼내서 나눠주더군. 그리고 계획의 가장 중요한 단계라며 몇몇 장소에 설치하라 했소."

"그날이 오늘이었겠지. 너는 토템을 설치하고 돌아오다 붙잡힌 거겠지?"

청년은 루시안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흑마법사를 저지하고는 싶지만, 필요 이상으로 정보를 주는 것도 피하려는 것 같았다.

루시안은 대놓고 얼굴을 구기며 청년 앞에 쭈그려 앉았다.

"서로 적이니 경계하는 건 이해하지만, 이런 상황에서조차 정보를 숨겨야 하겠어?"

"...."

"넌 마법에 대해서 아는 게 없고, 나도 그리 많은 걸 알지는 못해. 서로 알고 있는 모든 걸 다 꺼내서 맞춰봐도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는데 공개할 정보를 고르시겠다? 정말 참극을 막고 싶은 마음은 있는 거냐?"

그 말에 청년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직 버리지 못한 '계획'의 희망과 본인의 행동이 배신이 되진 않을까 두려워하는 모양새였다.

루시안은 그의 머릿속에서 결론이 나길 잠자코 기다렸다.

여기서 괜히 말을 더했다가는 오히려 입을 다무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 테니까.

수십 초 후, 청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흘 후에 마법사들이 몬스터들을 이끌고 보른홀름 성 뒤에 있는 그레베 시를 공격할 계획이요."

"그레베? 거긴 그냥 평범한 도시인데? 인구가 밀집되어 있긴 하지만 전략상의 가치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렇소. 어디까지나 양동을 위한 공격이지. 이 주변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인만큼 몬스터 무리에 공격당한다면 보른홀름 성에서 지원군을 파견해야 하니까. 진짜 목적은 지원군이 나간 후의 보른홀름 성이요."

"...!"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이먼의 몸이 움찔했다.

무언가 벌일 생각인 건 알았지만 진짜로 성을 공격하겠다고?

보른홀름 성은 누구나 인정하는 철옹성인데 변변찮은 군대도 없는 놈들이?

'제대로 된 공성병기를 준비해와도 힘들 텐데 겨우 몬스터 무리와 마법사 둘로 그게 가능한가?'

"성벽은 천상학파 소속 마법사가 부수기로 했소. 그날 단 하루 쓸 마법을 위해 힘을 비축하는 중이라 했지."

레이먼의 의문은 곧바로 청년에 의해 풀렸다.

마법에 의해 성벽이 박살나고 그 안으로 물밀 듯이 몬스터 무리가 쏟아져 들어온다?

아무리 방비가 잘 된 성이라 해도 대혼란이 일어날 게 뻔했다.

성의 경계가 마비된다면 해방연대도 마음껏 목적을 위해 날뛸 수 있을 터.

"내 얘기는 여기까지요."

하지만 청년의 입은 거기서 닫혔다.

마법사들이 엮인 부분은 다 알려줬으니 굳이 그 부분까지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루시안도 그 정도면 충분했기에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네 덕에 무고한 희생자는 생기지 않을 거야."

"...."

루시안의 치하에도 불구하고 한번 닫힌 입이 열릴 기색은 없었다.

정말로 더는 아무 말도 안 할 작정인 것 같았다.

대화를 마친 루시안은 성으로 이송할 인력을 부르기 위해 포박된 청년에게서 떨어졌다.

동시에 지금껏 조용히 있던 레이먼이 탄성을 내뱉으며 다가왔다.

"대단하십니다, 도련님. 마법에 대한 건 언제 공부하신 겁니까?"

"무슨 마법?"

"방금 전에 기점을 설치하여 주변 마력을 오염시킨다고 하셨잖습니까. 전 흑마법사들이 그런 방식을 쓴다는 건 처음 들었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흑마법사들만 쓰는 방식이 아니니까."

"...예?"

"토템이든 표식이든 주변의 기점이 되는 무언가를 설치하여 마법을 증폭시키는 건 마법사가 자주 쓰는 방식이야. 굳이 흑마법사에 한정된 건 아니지."

레이먼은 멍한 얼굴로 루시안을 쳐다봤다.

아까 전에는 분명 흑마법사만 쓰는 방식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나?

표정에서 의문을 읽은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정보를 캐내려고 블러핑을 몇 번 날린 거지. 진짜 흑마법사일 가능성은 상상조차 못 했을 테니까. 본인들이 피해자일 수 있다면 자연스레 입이 가벼워지지 않겠어?"

"그, 그럼 전부 거짓말이었던 겁니까?"

"반은 거짓말이었지. 나머지 반은 진짜인 모양이지만."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일단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들을래?"

루시안의 말에 레이먼은 미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적들의 계획을 다 알아냈으니 좋은 소식만 있는 거 아닌가?

"일단 좋은 소식부터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적들의 계획을 알았다는 거지."

"그건 저도 옆에서 들었습니다만."

"제국 해방연대의 계획 말고 마법사들의 계획을 말하는 거야."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설마 마법사들이 제국 해방연대와 다른 마음을 품었다는 건가?

"무슨 뜻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뭔가 알아내신 모양이군요. 그건 나중에 여쭤보도록 하고... 안 좋은 소식은 또 뭡니까?"

루시안은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블러핑이 아니라 진짜로 흑마법사가 있어. 제국 해방연대 놈들도 속아 넘어간 모양이야."

"...!?"

****

루시안은 즉시 제국 해방연대의 포로를 잡아 성으로 보냈다.

동시에 트리스탄을 불러 긴급회의를 열었다.

"형님이 오시기 전에 포로를 잠깐 심문해봤습니다."

"...내 그토록 신경 쓰지 말라고 했거늘, 기어코 이런 짓을 벌이는구나."

트리스탄의 얼굴이 구겨졌다.

일을 자꾸 크게 만들려는 루시안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불쾌함을 숨기지 않는 트리스탄을 보며 루시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기분이 나쁘신 모양인데, 더 기분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제국 해방연대 측에 흑마법사가 있습니다."

"뭣이?"

"비인가 마법사를 사칭하여 숨어든 탓에 본인들도 아직 모르는 모양입니다. 형님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트리스탄은 심각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비인가 마법사들은 어디까지나 어쩔 수 없이 숨어 사는 부류들.

황실의 추적만 아니라면 당당히 마법사라는 걸 드러낸 후 제대로 된 지위를 얻고 싶어 한다.

하지만 흑마법사는 다르다.

'사회적 지위고 나발이고 제물과 희생양만을 원하는 놈들이니까.'

삶의 방향성 자체가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게 흑마법사다.

그런 흑마법사들이 권력을 위해 제국 해방연대에 협조할 리가 없다.

어디까지나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이용하고 있다고 봐야 할 터.

"제국 해방연대는 마법의 힘을 빌어 보른홀름 성을 무너뜨릴 생각입니다. 흑마법사는 거기에 편승할 생각이겠죠."

"보른홀름 성의 주민을 제물로 쓸 생각인가?"

"그럴 리가요."

트리스탄의 추측에 루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보른홀름 성은 전략적 가치는 높지만 그리 살기 좋은 곳은 아닙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최전선이 될 장소니까요. 인구 상당수는 보른홀름 성 뒤의 그레베 시에 살죠."

"하지만 제국 해방연대가 그레베 시를 노릴 리가 없잖느냐? 인구만 많을 뿐 별다른 게 없는 도시다. 보른홀름 성이 뚫리면 단숨에 함락될 중간 지점에 불과한 곳인데."

"듣자 하니 양동으로 노리는 척을 할 생각이었답니다. 지원군이 파견되면 전력이 확 줄어든 보른홀름 성을 칠 계획이었던 거죠."

"...잠깐만 기다려 보거라. 이야기를 잠시 정리해보자꾸나."

제국 해방연대의 원래 목적은 그레베 시를 치는 척하면서 보른홀름 성을 공격하는 것.

전략적 가치가 막대한 보른홀름 성이 초토화된다면 제국에 심대한 타격이 갈 테니 그밖에 목표로 삼을만한 건 없었다.

하지만 흑마법사에게 매력적인 목표는 제물로 삼을 인구가 많은 그레베 시지 보른홀름 성이 아니다.

그리고 우연히도 마법사들은 양동 작전을 위해 먼저 그레베 시로 몬스터들을 보냈다가 합류할 예정이었다.

"흑마법사는 제국 해방연대를 이용해 그레베 시에서 제물만 보충하고 쏙 빠지려는 겁니다."

"...!"

34화

루시안의 추측에 트리스탄은 할 말을 잃었다.

눈속임이 아니라 진짜로 그레베 시를 공격해 제물을 확보한다?

제국 해방연대는 보른홀름 성 근처에서 쭉 세워둔 채로?

"그게 가능한 일이더냐?"

"가능합니다. 애초에 마법사의 목적이 뭐라 생각하십니까? 흑마법사가 아니라 평범한 비인가 마법사들 말입니다."

"300년 전에 누렸던 옛 영광을 되찾는 거겠지."

"예, 보통은 그렇죠. 그러니 제국 해방연대도 마법사들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마법사들이 원하는 지위는 제국 해방연대가 새로 만들 사회에 있다고 믿을 테니까요."

협조하는 게 평범한 마법사라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라도 제국 해방연대를 위로 올려줘야 한다.

대륙을 지배하는 제국이 자신들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하니까.

하지만 애초에 지위고 나발이고 관심 없는 흑마법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어떤 놈이 권력을 잡든 대우는 똑같으니 원하는 것만 쏙 빼먹고 빠지면 그만.

"제국 해방연대는 자신들을 배반하지 않을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을 테고, 흑마법사는 그 인식을 이용할 속셈이겠죠. 나중에 속은 걸 알아도 이미 늦은 뒤일 텐데 뭘 어쩌겠습니까."

무엇보다 전생에 이 사건은 철저히 은폐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은폐될 수 있을 만큼 사건의 규모가 크지 않았다는 거다.

전략적 요충지이자 철옹성인 보른홀름 성이 박살 났다면 절대 숨길 수 없었을 터.

그레베 시를 향한 몬스터들의 습격 사건 정도로 끝났다고 보는 편이 맞으리라.

"뭐, 다행히도 황실에 지원을 요청할 필요는 없겠군요. 이 정도 계획이라면 현재 있는 전력만으로도 충분히 대응 가능하니 말입니다."

"...확실히 그렇군."

마지막에 덧붙인 말을 듣고 나서야 트리스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가장 큰 고민이 해결된 덕에 만족스러운 듯했다.

"흑마법사의 목적이 드러난 이상 그레베 시의 경계를 강화해야 합니다. 적들이 눈치챌 수 있으니 가능한 조용히...."

"아니, 병력은 이동하지 않겠다. 다른 이들에겐 비밀로 하고 지금까지처럼 제국 해방연대에 대한 경계만 계속하도록."

"...예?"

****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적의 목적이 알려졌는데도 아무런 대처 없이 현상 유지만 하겠다고?

"지금까지 제 설명 들으신 거 맞습니까?"

"물론 잘 들었지. 놈들이 성벽을 파괴 가능한 수준의 마법을 쓸 수도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게 뭔 상관입니까? 놈들이 노리는 건 어차피 그레베 아닙니까?"

"흑마법사가 제물을 원해서 그레베로 갔는데 방비가 튼튼하다면 과연 놈이 계속 그곳을 노리겠느냐? 내가 생각하기엔 성벽만 부수면 병력이 더 적어지는 보른홀름 성을 노릴 것 같다만."

루시안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야 트리스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레베 시를 제물로 던져줄 생각입니까?"

"흑마법사라고는 해도 겨우 둘이다. 제대로 된 병력 없이 제물을 조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 내 생각엔 몬스터로 습격한 후 혼란 속에서 수십 명 정도를 납치하는 게 고작일 것 같다만."

"자그마치 수십 명이겠지요. 그 와중 살해당할 사람까지 생각한다면 더 많아질 겁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가장 적은 피해를 낼 방법이기도 하지. 무엇보다 몬스터 무리의 습격은 드물지도 않은 일. 황실에서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트리스탄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은 황실의 마녀사냥이 보른홀름 주변을 휩쓰는 일이다.

그 자체가 내정 간섭인 데다 발데크의 체면을 떨어뜨리고 막대한 재산 및 인명 피해까지 발생하니까.

그에 비해 흑마법사의 제물 조달은 충분히 통제 가능한 범위.

굳이 선택하라면 트리스탄으로서는 후자를 고른 후 은폐하는 편이 나았다.

"몬스터의 습격이라고 해도 그레베 시가 초토화되는 건 아니다. 물론 영민들에게는 재앙이 되겠지만, 기껏해야 삼사백 정도의 사상자로 끝나겠지. 지원을 해주지 않더라도 알아서 처리할 터."

"그 삼사백이 발데크의 영민인 건 아십니까? 차기 가주 자리를 노리신다는 분이 제 영민을 제물로 넘겨주겠다고요?"

"마법사의 존재가 황실에 알려지면 그 삼사백이 근위대에 의해 불타 죽을 수도 있다. 자국의 군주에게 그런 꼴을 당하느니 몬스터와 흑마법사에게 당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전자는 무고한 이들의 억울한 죽음이겠지만, 후자는 불행한 이들의 명예로운 죽음일 테니까.

기가 막힌 논리에 루시안이 이를 갈며 트리스탄을 노려봤다.

"정 그러시다면 제 휘하의 용병이라도 데리고 가서 막겠습니다."

"안 된다."

"기사단도 아니고 겨우 용병 무리를 뒤로 빼는 것조차 안 된다고요? 황실이 그리도 무서우십니까?"

"아니, 네가 가기에 안 된다는 것이다. 널 위험한 곳에 보낼 수는 없다."

루시안은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설마 이전의 루시안과 트리스탄 사이에 형제의 우애 같은 게 있었던 건가?

"넌 발데크다. 대공가의 혈족인 자가 어찌 자신의 몸을 위험에 드러낸다는 말이냐? 네 몸에 흐르는 피를 잊지 말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신중히 택하거라."

그 착각이 깨지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기가 막힌 대답에 루시안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이 인간, 골수까지 귀족주의자였나.'

전생에도 이런 인간이 있었다.

높은 신분의 혈통은 그 자체만으로 존중받아야 하며, 설령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그에 따른 대접을 해줘야 한다는 놈들.

평민은 그림자만 밟더라도 베어 죽이는 주제에 귀족은 영지 수십 곳을 초토화해도 유폐로 끝내는 인간들.

"발데크의 혈통은 그 무게 또한 남다르다. 지배하는 자는 언제나 결단을 강요당하고 저울에 목숨의 무게를 달아야 하는 법. 하찮은 연민으로 자신의 목숨을 함부로 하지 말거라."

분명 걱정이 담긴 충고임에도 속에서 울컥거리는 분노가 치솟았다.

지금 트리스탄은 삼사백의 목숨보다 루시안 한 사람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이야기.

전생의 루시안은 항상 버려지는 삼사백의 목숨이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힌 루시안이 트리스탄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 말씀은 들을 수 없겠군요. 전 가야겠습니다."

"귀족의 의무를 들먹일 속셈이더냐?"

"아니요. 귀족의 의무 같은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숨을 고른 루시안은 환생한 후 처음으로 마음 속 깊은 곳에 담아뒀던 말을 꺼냈다.

귀족이 아닌 평민의 관점에서 언제나 품고 있었던 단 한마디.

"보호받기 위해 섬겨온 이들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애초에 누군가를 다스릴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

트리스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지금 루시안이 한 말은 귀족주의의 근본을 부정하는 말이었기에.

이를 악문 트리스탄은 루시안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영웅담을 너무 읽은 모양이구나! 자아도취에 빠져 현실을 잊은 꼴이라니! 같잖은 미의식으로 가문의 중대사를 결정할 생각이더냐!?"

"예, 그럴 생각입니다."

"뭣이?"

"형님, 추합니다."

"...!"

단 한마디에 트리스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법에 따라 처벌받을 일도 없고, 차기 가주 경쟁에 흠이 되지도 않으며, 실질적인 타격조차 없다.

그저 반푼이 동생이 제멋대로 재단한 미추의 구분일 뿐.

겨우 그 정도에 불과하거늘.

"감히 네놈이...!"

저도 모르게 트리스탄은 허리춤에 있는 검을 잡았다.

그러나 검이 뽑혀 나오기 전에 옆에 있던 레이먼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진정하시지요, 일공자."

"비켜라! 네놈이 끼어들 일이 아니다!"

"전 대공 전하의 명령으로 삼공자의 호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지금 삼공자께 손을 대신다면 제 의무는 물론 대공 전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레이먼의 경고에 트리스탄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수치심에 몸을 떨면서도 검에서 손을 떼었다.

흑사자를 이길 리도 없거니와 레이먼의 경고 역시 빈말이 아니었으니까.

"...좋다, 용병들은 네가 고용한 놈들이니 데려가려면 멋대로 데려가라! 허나 네 선택에 대한 책임은 네가 져야할 것이다!"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었습니다."

루시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집무실에서 떠났다.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루시안이 슬쩍 레이먼을 쳐다봤다.

"형님은 왜 막았나? 가만히 둬도 내가 알아서 했을 텐데."

"제 임무가 호위 아닙니까. 삼공자가 처리할 수 있는 안건이건 뭐건 위협을 막지 못하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슬쩍 주변을 둘러보던 레이먼은 비밀이라는 듯 속삭였다.

"...사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일공자의 이론은 좀 추했습니다."

"푸핫!"

루시안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에는 그저 임무에 충실한 인간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꽤 유쾌한 면이 있었다.

"그나저나 삼공자께서는 이제부터 어찌하실 겁니까?"

"어찌하긴. 아까 말했잖나."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루시안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휴고랑 남은 흑사자들 불러 모아서 그레베 시로 가자고. 형님과 달리 아주 멋지게 말이야."

****

사흘 후, 그레베 시 인근에 있는 황색 숲의 끝자락.

옅게나마 빛이 들어오는 숲의 경계선 주변에 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한 그림자는 다 헤진 검은 로브를, 다른 그림자는 빛바랜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중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중년 남성에게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좋군. 아주 좋아. 이렇게 마력이 충만해진 게 얼마 만인지. 멍청한 제국 연대 놈들 덕에 득 좀 보는군."

"...제국 연대가 아니라 제국 해방연대요, 주드 공. 그리 말하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잖소."

"물주 이름이 뭐 그리 중요한가. 하여간 요즘 젊은 마법사들은 이상한 데 신경을 쓴다니까. 아니면 천상학파의 특징인가? 하늘의 별 하나하나를 연구한다더니 참 집요하군."

킬킬거리는 중년 남성의 웃음에 젊은 마법사, 콜린은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웃음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피와 살점이 끈적하게 달라붙는 기분이었으니까.

'흑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토록 기분 나쁠 줄이야.'

처음 이 주드라는 흑마법사를 만난 건 제국 해방연대의 소개에 의해서였다.

대뜸 같이 일해줘야겠다는 통보에 콜린은 당황했지만, 거절할 방도가 없었다.

어찌 됐건 제국의 추격에서 콜린을 보호해주고 있는 건 그들이었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몇 주만 참으면 될 줄 알았는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건 주드가 산제물을 요구하면서부터였다.

콜린은 야수학파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무언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마법은 흑마법밖에 없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 이후에 의식이랍시고 벌이는 행동도 학파의 차이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뒤틀린 것들 뿐.

참다못한 콜린은 직접적으로 주드에게 물어봤다.

-당신, 흑마법사요?

-그렇네.

-이미 눈치챘으니 숨길 생각은... 뭐요?

-그렇다고 했네. 난 흑마법사일세. 왜? 순순히 인정하니 신기한가?

의외로 주드는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걸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당당하게 밝히면서 능글맞게 웃기까지 했다.

-자, 이제 내가 흑마법사라는 걸 알았으니 어쩔 텐가? 놈들에게 알릴 생각인가?

-당연한 소릴! 아무리 제국에 의해 쫓기는 몸이라고 해도 흑마법사와 동업이라니...!

-곤란하군. 그럼 난 자네를 죽이고 도망치는 수밖에 없는데.

-뭐, 뭣!?

-별수 없지 않나. 들키면 놈들이 나부터 죽이려 할 게 뻔한데. 다행히 자네는 직접적인 전투력이 약하니까 나 정도면 손쉽게 죽여버릴 수 있겠구만.

주드의 손에 맺힌 검붉은 마력에 콜린은 기겁했다.

기사처럼 육체를 강화하는 게 아니라 외부로 쏘아내는 마법사 특유의 마력 운용 방식.

저 넘실거리는 마력이 쏘아진 순간 콜린의 배에는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릴 게 뻔했다.

죽음의 공포에 몸을 떠는 콜린을 향해 주드는 차갑게 웃으며 속삭였다.

-너무 그러지 말게. 자네가 놈들에게 알리지만 않는다면 나도 굳이 죽일 생각은 없어.

-워, 원하는 게 뭐요? 내가 어쩌길 바라오?

-원하는 거라니. 그저 마법사끼리 이 험한 세상 돕고 살자는 거지. 서로 연구 분야는 다르더라도 동류 아닌가.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말해주시오. 난 말재주가 없는 편이니.

-간단하네. 그저 마력의 언약 하나만 맺어주게나.

마력의 언약.

상대와의 약속을 어긴 순간 마법의 힘이 영구적으로 반 토막 나는 마법적 계약이었다.

코가 꿰인 콜린은 어쩔 수 없이 주드와 마력의 언약을 맺어야 했다.

다행히 언약의 내용은 지극히 간단했다.

-같이 다니다가 내가 원할 때 마법 하나만 써주게나.

-...너무 간단하지 않소? 정말 그거면 되오?

-자네 유리한 쪽으로 해줘도 불만인가?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서 그러오. 보통은 계약 내용을 왜곡하지 못하도록 이것저것 조건을 더하건만 이리 허술한 내용이라니.

-하하! 왜곡해서 들어준 다음 뒷감당을 할 자신은 있고?

검붉은 마력이 넘실거리는 모습에 콜린은 할 말을 잃었다.

하기야 원하는 바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다면 주드가 콜린을 그 자리에서 쏴죽일 터.

콜린으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계약 내용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주드는 지금까지 별문제 없이 제국 해방연대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잘만 하면 성공적으로 의뢰를 끝마치고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콜린의 마음속에서 그런 희망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자, 이제 슬슬 그레베를 공격해볼까. 조종할 수 있는 놈들을 모조리 긁어왔으니 제물을 조달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

"뭐요? 아니, 그레베 시는 어디까지나 양동을 위한...."

"그건 놈들의 사정이지 내 사정이 아니야. 난 여기서 제물만 먹고 빠질 생각이네. 남은 건 놈들이 알아서 하라지."

콜린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주드를 바라봤다.

설마 지금껏 이때를 기다리며 명령을 따르는 척한 건가?

문득 콜린은 마력의 언약을 떠올렸다.

"잠깐, 나한테 바라는 마법이라는 게 설마?"

"그 말대로네. 여차하면 이제까지 모아왔던 마력으로 큰 거 한 방 쏴줘야겠어. 내 귀여운 멍멍이들이 진입하기 쉽도록 말이야."

"이런 미친...!"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다른 것도 아니고 몬스터들의 도시 공격과 사람 납치를 도우라고?

제국 해방연대에게 거하게 엿을 먹이면서까지?

이래서야 제국의 적 정도가 아니라 공공의 적 취급 받을 게 뻔하지 않나.

"뭐,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자넨 어디까지나 보험일세. 그레베는 어차피 방어 시설도 형편없는 장소니 잘만 하면 내 귀염둥이들만으로도 충분하겠지."

주드의 위로 아닌 위로에도 기분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마법을 안 쓰고 끝난다면 콜린은 앞으로도 계약으로 묶여 있어야 할 테니까.

어느 쪽이건 콜린에게 있어서는 낭떠러지나 마찬가지.

"그르르르...."

"키이이!"

"옳지, 다들 피 맛이 보고 싶은가 보구나. 잠시만 기다리거라. 곧 마음껏 날뛰게 해줄 테니."

주드는 좌절하는 콜린을 내버려 둔 채 침을 줄줄 흘리는 놀과 코볼트들을 쓰다듬었다.

누가 봐도 이성이 없는 꼭두각시건만 굳이 교감하는 흉내를 내는 모습은 혐오스러울 지경이었다.

"자, 가라! 만찬을 즐겨라! 그 대가로 바쳐야 하는 제물만 잊지 말도록!"

"캬아아아아!"

"끄르아아악!"

두두두두두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 숨어있던 놀과 코볼트들의 군단이 숲에서 뛰쳐 나왔다.

이성을 잃은 몬스터 무리는 땅을 진동시키며 일제히 그레베 시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 광경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주드는 웃음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하하하! 보이는가? 참으로 멋지지 않나! 인간보다 강한 몬스터의 군대! 내 연구의 결실! 나의 힘이자 나의 노예들!"

폭소를 터트리는 주드의 목소리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 웃음소리에 흠칫한 콜린은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내 놀과 코볼트의 무리가 그레베 시 외곽에 다다르자 주드는 손뼉까지 쳐대며 좋아했다.

"보게나! 저 우왕좌왕하는 꼴을! 얄팍한 질서 안에서 으스대던 놈들이 내 귀염둥이들에 의해 유린당하는 모습이 참으로... 참으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주드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그대로 굳어졌다.

콜린 역시 무슨 일인가 싶어 몬스터들이 향한 장소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입에 담았다.

"내가 보기엔 유린당하는 쪽은 댁의 귀염둥이들 같은데...?"

"...."

35화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레이먼은 멍하니 사흘 전의 일을 떠올렸다.

트리스탄과 한바탕 싸운 후, 루시안은 용병들을 이끌고 그레베 시로 향했다.

"적이 양동 작전을 위해 그레베 시를 기습할지도 모른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전부 모여서 이동한다!"

백금화를 구경조차 제대로 못 해본 용병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명령에 따랐다.

이미 루시안의 능력을 직접 본 데다 여차하면 추가 보수도 확실히 준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어렵지 않게 용병들을 이끄는 솜씨에는 레이먼도 감탄했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진짜로 적이 공격해올 경우 이동할 장소를 알려주겠다. 공격이 없을 때는 적당히 돌아가며 경계만 서도록."

널널하다 못해 지나치게 풀어진 명령.

당연히 적의 공격을 대비할 거라 생각하던 레이먼은 깜짝 놀랐다.

이래서야 용병들을 데리고 온 의미가 없잖은가?

"삼공자, 본격적인 방어 준비까진 아니더라도 경계는 지금보다 강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강화했잖아."

"그게 아니라 제대로 된 군사 배치를 말하는 겁니다. 겨우 사흘 후가 공격 날짜 아닙니까?"

레이먼의 호소에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십수 명 단위로 잘게 쪼개진 용병들이야. 억지로 합을 맞춰봤자 손발이 맞지도 않아. 괜히 부대끼면서 사고가 나느니 유사시 충돌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규칙만 마련하는 편이 낫지. 어차피 용병들에겐 그편이 익숙할 테니까"

"그건 즉석에서 용병들을 통제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삼공자께서는 전장에 나서본 경험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지. 내겐 그때가 지금이 되었을 뿐이고."

자신만만한 루시안의 말에 레이먼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루시안에게는 언제나 계획이 있었고, 그 계획을 실행할만한 담력과 행동력도 있었다.

하지만 피와 살점이 튀는 전장에서 병졸을 지휘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사람은 반상 위에 있는 말이 아니다. 가혹한 훈련을 받은 정예병들조차 때로는 명령대로 움직이지 못하거늘 하물며 용병들임에야.'

지휘관이 죽음 앞에서 초연하더라도 병졸들까지 그러기를 기대하는 건 너무 지나친 요구였다.

군대의 사기란 평소 얼마나 많은 훈련을 거쳐왔는지, 어깨를 나란히 한 전우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그리고 승산에 대한 확신에 달려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루시안 휘하의 용병들은 이중 어느 것 하나 충족하지 못했다.

'훈련은 해본 적도 없고, 툭 하면 돈 문제로 갈라서는 데다, 습격하는 적에 대해 전혀 모르지. 자칫하면 혼란에 빠져 자멸할지도 모르겠군.'

그나마 다행이라면 용병들도 루시안을 두고 도망치진 못한다는 점이었다.

도망친 결과 루시안이 사망한다면 분명 지그문트 대공은 여기 있는 모든 이를 찾아내 찢어 죽일 테니까.

용병들 역시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을 테니 우왕좌왕하면서도 도망치진 않으리라.

'그렇게 되면 내가 지휘권을 양도받아 수습하는 수밖에. 삼공자에게는 값비싼 교훈이 되겠군.'

다행히 흑마법사는 그레베 시로 용병들이 이동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무방비한 도시를 습격할 생각으로 몬스터들을 보낼 테니 숫자도 그리 많지는 않겠지.

병력이 흩어지지만 않는다면 어찌어찌 막아내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건만.

"이 멍청한 놈들아! 넋 놓고 뭐 하는 거냐! 죽고 싶지 않으면 얼른 움직여!"

"옆 사람이랑 거리 너무 벌리지 말라고 했지!? 배때기에 구멍 나고 싶냐!"

"엉덩이를 걷어차 줘야 움직일 셈이냐! 무너지는 부분 있으면 지원하라고!"

모든 걱정이 쓸데없는 일이라는 듯 루시안은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며 용병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

개개인의 능력은 어떨지 몰라도 집단으로서는 분명한 오합지졸들.

루시안은 그런 오합지졸들을 마치 자기 수족처럼 다뤄내고 있었다.

연이어 내려오는 명령에 용병들은 얼떨떨해하면서도 그대로 움직였다.

'놀랍군.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지만, 저 거친 용병들이 불평 하나 내뱉지 못한 채 따르고 있어.'

용병들 속에 섞여 있던 휴고는 주인의 솜씨에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쉴새 없이 몰아쳐서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하는 동시에 직접 전선으로 나와 명령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용병들도 고용주의 명령에 거부할 생각을 못 하고 끌려다닐 수밖에.

그뿐만이 아니었다.

"끄르륵!"

"오, 올라왔...!"

푸확

"멍청한 놈이! 손 쉬지 말라고!"

얕은 성벽을 놀 한 마리가 올라온 순간 루시안의 검이 날아들었다.

가슴팍이 베인 놀이 떨어지는 걸 확인하자마자 루시안은 냉큼 용병의 뺨을 갈겼다.

쫘악

"이 멍청아! 정신 차리라고 했지! 죽고 싶은 거냐!?"

"죄, 죄송합...!"

"닥치고 막아! 두 번째 행운은 없다!"

막 뚫리려던 부분을 막은 루시안이 재차 용병을 밀어 넣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벌써 몇 번이나 일어났다.

조금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그 자리로 달려간 후 정확한 타이밍에 끼어들어 지원했다.

어찌나 틈이 없었는지 주변에 분산되어 뚫리는 부분을 막으려던 흑사자들이 나서질 못할 정도였다.

'전장 전체를 관조하고 계신 건가? 이 혼란 속에서 어디가 무른 부분인지,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까지 전부?'

"끄르아악!"

"흡!"

휴고는 갑자기 아래에서 올라오는 코볼트의 괴성에 흠칫하며 검을 휘둘렀다.

가슴팍을 베인 코볼트는 괴성을 지르며 바닥으로 처박혔다.

한 박자만 늦었으면 반대로 휴고가 부상을 입었을 수도 있던 상황.

'나는 잠시 한눈을 판 것만으로도 이 꼴인데.'

심장이 벌렁거렸다.

암흑가에서 죽고 죽이는 일 따위 질리도록 겪었건만, 난생처음 겪는 전장은 그에게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분노나 원한에 의한 살의가 아니라 그저 보이는 적을 죽이는 것만이 전부인 혼돈의 폭풍우.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지 않으면 휴고조차 까딱하는 사이 이 혼돈 속에 말려 들어갈 것 같았다.

"휴고! 아직 살아있냐!? 바지에 오줌 지린 건 아니지!?"

문득 휴고의 귀에 루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볍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휴고는 무심코 웃음을 터트렸다.

"예! 멀쩡합니다! 아직 한참은 더 싸울 수 있습니다!"

"잘됐네! 기사가 되면 질리도록 볼 광경이니 이참에 익숙해지도록!"

"그 말씀을 들으니까 벌써 익숙해진 것 같군요!"

"너무 까불다 죽지는 말고! 적당히 몸 사리면서 죽을 힘을 다해 싸워!"

"말이 어째 이상합니다!?"

-와하하하!

두 사람의 대화에 용병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쏟아진 웃음에 깜짝 놀란 휴고는 그제야 전장의 승기가 완전히 기울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직 몬스터는 남아 있었으나 거의 다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고 남은 놈들은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도 이성을 잃은 채 무작정 올라오는 것이 전부.

여유가 생긴 용병들은 나머지를 여유롭게 처리했다.

푸욱

"끄르으으...!"

마지막 한 마리 남은 놀의 목덜미에 창이 박혔다.

꿈틀거리던 놀은 이내 축 늘어져서 시체 더미 가장 위에 철퍼덕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후우, 후우!"

"끝났나...?"

용병들은 머리의 땀을 닦으며 서로를 쳐다봤다.

그토록 폭풍처럼 몰아쳤는데 정말 이걸로 끝이라고.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대장인 루시안에게로 향했다.

루시안은 미소를 지은 채 모두 앞에서 소리쳤다.

"제군들!"

"...."

"기뻐하라! 우리의 승리다!"

잠깐의 침묵 후.

우레와 같은 함성이 그레베 시 전체를 울렸다.

****

-와아아아아아아!

흑마법사 주드는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에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대체 어디서 일이 이렇게 꼬인 걸까.

제물을 마련하러 왔다가 기껏 길들여놓은 놈들까지 죄 잃어버렸으니.

속이 쓰리다 못해 위장에 구멍이 날 지경이었다.

"...주드 공, 지금이라도 큰 거 한 방 쏘면 되겠소?"

"이제 와서 큰 거 한 방은 개뿔!"

상황 파악 못 하는 콜린의 목소리에 주드가 버럭 소리쳤다.

그레베 시를 공격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싸움이 다 끝난 지금 써봤자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적에게 타격을 입혀봤자 제물 조달이 불가능해진 상황에 무슨 이득이 생기겠나.

"쓰고 싶으면 자네 멋대로 쓰게! 놈들이 아주 좋아하겠구먼!"

"그런가? 그럼 써야겠군."

꽈르릉

순간 옆에서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빛이 번쩍였다.

주드는 기겁하며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빛이 쏘아져 나갔다.

동시에 전신을 후려치는 충격과 함께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뒤늦게 자신이 쓰러졌다는 걸 안 주드가 입을 벌렸다.

"끄륵!"

목소리 대신 피거품이 튀어나왔다.

어떻게든 주문을 외우고 수인을 맺어보려 했지만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죽을 힘을 다하자 간신히 오른손 하나가 올라갔으나 그 꼴은 처참했다.

불에 탄 것처럼 피부가 익어버린 데다 제어하지 못할 만큼 심하게 경련하고 있었으니.

"자네 멋대로 써라. 멋진 지시였소. 그래서 내 멋대로 썼는데 예상보다 훨씬 잘 구워졌군."

"끄르르! 네헤노옴!"

"그러니 언약을 맺으실 때는 조심하셨어야지. 이토록 구멍이 숭숭 뚫리면 이용하기 싫어도 이용하고 싶어지잖소? 이 일로 교훈을 얻길 바라오."

물론 이미 늦었겠지만.

콜린은 비아냥을 날리며 죽어가는 주드를 비웃었다.

간신히 오른손으로 수인을 맺은 주드가 뭐라 반격하려 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반쯤 타버린 폐는 이미 멀쩡한 주문 하나 외울 수 없었으니까.

십수 초 동안의 어설픈 발악 끝에 흑마법사 주드는 노릇하게 구워져 생을 마감했다.

"쯧, 흑마법사 놈 주제에 감히 누굴 이용하려고."

죽은 주드를 향해 침을 뱉은 콜린은 곧 한숨을 내뱉었다.

짧은 승리의 기쁨이 끝나자 남은 건 막막한 앞날에 대한 걱정이었다.

콜린 본인은 흑마법사에게 휘둘렸을 뿐이지만 제국 해방연대는 그리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일을 망쳤다는 걸 알면 죽은 놈과 한패라며 싸잡아 죽이려 하겠지. 또 몸을 의탁할 곳을 찾아 떠나야겠군."

이게 벌써 몇 번째 방랑길인지.

스승이 죽어가며 남겨준 과제는 아직 한가득 있는데 연구할 시간은커녕 맘 놓고 쉴 장소 하나 없으니 죽을 맛이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로브를 털어낸 콜린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와아아! 만세! 만세!

"...저놈들은 지치지도 않나? 하기야 저 물량을 훌륭하게 막아냈으니 기쁘긴 하겠다만."

여전히 기쁨에 겨워 소리치는 용병들의 외침에 헛웃음이 나왔다.

제대로 훈련받은 정예병이라면 모를까 단체 전투에는 영 힘을 못 쓰는 용병들이다.

그런데 저런 십인십색의 놈들을 이끌고 별 피해도 없이 몬스터 무리를 막아낼 줄이야.

'지휘관이 누군지는 몰라도 난 놈이군. 가능하면 저런 인간에게 몸을 의탁해야 하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을 털어버리듯 콜린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껏 콜린의 기대에 부합하는 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그가 생각하기에 능력이 있으면 지위가 낮고, 지위가 높으면 능력이 없는 게 세상 이치였다.

'하늘도 참 불공평하단 말이야. 저런 능력을 줬으면서 겨우 도시 경비나 맡게 하다니.'

본 적도 없는 경비대장을 불쌍히 여기며 콜린은 황색 숲에서 떠나갔다.

다음에 몸을 의탁할 곳은 조금이라도 여유 있는 생활이 가능하길 바라며.

조용해진 황색 숲의 경계선에는 번개에 지져진 흑마법사의 시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뭐? 경상자 열다섯에 사망자 없음이라고?"

"예. 대승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트리스탄이 시뻘겋게 물든 얼굴로 손에 든 서류를 구겨버렸다.

낮디낮은 성벽 하나 빼고는 변변찮은 방어 시설 하나 없는 그레베 시다.

그 그레베 시에서 백 하고도 수십 마리의 몬스터 무리를 격퇴했다고?

서로 합은 맞춰본 적도 없는 용병무리들을 이끌고?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이 전과는 말이 안 된다!"

"저도 처음엔 의심했습니다만, 알고 보니 흑사자가 직접 작성한 보고서였습니다."

흑사자가 작성한 보고서라면 지그문트 대공에게도 이 내용 그대로 올라간다는 소리.

미친 게 아니라면 굳이 거짓으로 보고서를 꾸며낼 리가 없었다.

트리스탄은 떨리는 손으로 방금 구겨버린 보고서를 다시 폈다.

-경상자 열다섯. 사망자 없음. 격퇴한 놀과 코볼트의 숫자는 약 140마리. 주민들의 피해는 없으며 성벽과 성문에 미세한 손상이 있음.

읽고 또 읽을 때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전공도 엄청난데 그 와중에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은폐는 은폐대로 하면서 동시에 아무도 희생시키지 않았다는 것.

그 사실이 더욱 트리스탄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희생이 없다면 내 저울은 대체 뭐였는가? 내가 지금까지 내려온 결정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게 옳다고 믿었다.

하지만 애초에 소를 희생시키지 않아도 되었다면 그 희생이 무슨 의미인가?

멍청한 지도자의 결정으로 안 흘려도 될 피를 쓸데없이 흘린 게 아닌가?

"끄으윽!"

"도, 도련님!"

"일공자!"

"괜찮으니 물러서라!"

트리스탄은 달려오는 하인을 뒤로 물리며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이런 고통이라도 없으면 머리가 뻥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한참 머리를 쥐어뜯느라 바닥에 트리스탄의 머리칼이 한 움큼이나 뽑혀 나왔을 때였다.

"...철수 준비를 해라. 켈하임으로 귀환하겠다."

생기 없는 목소리로 트리스탄이 명령을 내렸다.

적들이 병사 대신 쓰려던 몬스터는 전멸했고, 흑마법사의 배신으로 내부 분열까지 일어났다.

성벽을 파괴할 수 있는 마법이 건재하더라도 이젠 사용하지 못할 터.

적의 병력이 없어지고 용병들을 고용할 이유도 같이 사라진 만큼 트리스탄과 루시안 역시 이곳에 계속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쓰라린 귀환이구나.'

그토록 돌아가고 싶던 집이건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돌아간 순간 루시안과 트리스탄의 위상은 이전과 전혀 달라질 테니까.

물론 겨우 이 일 한 번으로 서로의 자리가 뒤바뀌진 않겠지.

하지만 언제든 추월할 기회를 노려볼 만큼 가까이 따라붙었다고 봐도 되리라.

"서늘하군."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에 트리스탄은 무심코 목덜미를 쓸었다.

전혀 느끼지 못했건만 목덜미를 훑은 손에는 식은땀이 잔뜩 묻어 나왔다.

가주 자리를 당연히 제 것처럼 여길 수 있었던 시간은 이제 끝났다고 몸이 알려주는 것 같았다.

36화

"흐음."

영주관의 집무실에서 지그문트 대공은 눈앞의 보고서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얼마 전에 귀환한 루시안과 트리스탄은 대공의 입이 열릴 때까지 그 앞에 서서 기다렸다.

잠시 후, 보고서를 툭 내려놓은 대공의 시선이 트리스탄에게로 향했다.

"트리스탄."

"예, 아버지."

"넌 언제나 결단이 빨랐지. 끊어낼 게 있다면 우물쭈물 망설이지 않고 칼같이 끊어내곤 했다. 하지만 때로는 결단력이 성급함이 되기도 하는 법."

"...."

"난 언제나 네 지나치게 빠른 결정이 걱정이었다. 넌 가끔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하곤 했으니까. 덜 나쁜 결정이 가장 좋은 결정이 아닌데 말이다."

살짝 고개를 숙인 트리스탄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실상 이번 일처리가 좋지 않았다는 걸 지적하는 말이나 다름없었기에.

대공은 고개를 숙인 트리스탄을 바라보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틀렸다고는 하지 않겠다. 그러나 희생만이 답은 아니다. 때로는 마음의 저울을 치우고 생각해 보거라. 모든 게 저울에 달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니."

"가슴 속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루시안."

말을 마친 대공의 시선이 재차 루시안에게로 향했다.

동시에 엄격했던 표정이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풀어졌다.

"이번 일은 잘해주었다. 영지를 지키고, 영민을 보호했으며, 그 와중 백작가의 손해는 전혀 내지 않았더구나. 이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다."

"과찬이십니다. 가문의 재산을 그렇게 많이 썼는데 이 정도 성과는 내야지요."

"그깟 금화가 대수더냐? 넌 지불한 비용에 비해 몇 배나 되는 이득을 얻어냈다. 적어도 널 지원해준 나로서는 아까울 게 없지. 다만...."

흐뭇하게 웃던 대공의 입가가 조금 쓰게 변했다.

모든 게 완벽하지만 단 하나의 오점이 있다는 듯이.

"마법사의 존재를 알고도 숨기려 노력하지 않았던 건 조금 걸리는구나. 하기야 넌 황실의 마법사 혐오를 모를 테니 그럴 수도 있겠지."

루시안은 흠칫했다.

처음엔 트리스탄의 과민반응인 줄로만 알았는데 대공까지 이런 소릴 하다니.

'대체 황실이 얼마나 마법사를 싫어하는 거야?'

황실이 마법사를 싫어한다는 건 루시안도 알았다.

난세가 시작된 이후 마법사가 하나둘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황실은 마법사의 존재에 발작했다.

그러나 마법은 너무 유용한 힘인 데다 황실의 힘도 이전만 못 했다.

결국 황실은 마법사를 싫어하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마법사의 존재를 인정해야 했다.

'난세인 점을 감안해도 인정받는 과정이 너무 순조로웠기에 적당히 싫어하는 수준인 줄 알았는데, 그 정도가 아닌 건가?'

난세 이전에 마법사 하나 제대로 못 본 루시안으로서는 이해 못 할 일이었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황실의 마법사 혐오가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다는 것뿐.

그 점에 대해서 이제부터라도 어느 정도 고려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뭐, 결과가 잘 나왔는데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질책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 별말은 안 하마. 그저 네 형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마법사에 대해 숨기려고 하는 편이 좋겠구나."

"명심하겠습니다."

"좋다. 둘 다 피곤할 텐데 돌아가서 푹 쉬도록 해라. 남은 일은 내가 처리하마."

"예, 아버지."

두 형제는 고개를 숙인 후 대공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한 사람의 얼굴에는 짙은 미소가, 다른 한 사람의 얼굴에는 쓰라린 패배감이 어려 있었다.

잠시 후, 두 형제가 동시에 등을 돌려 각자 다른 방향으로 떠나갔다.

굳이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승자와 패자는 명확히 갈렸으니까.

****

에드윈은 손에 들린 밀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소식일 거라 생각했건만 정작 돌아온 내용은 정반대였다.

'전하께서 뭐라 하실지.'

안 그래도 최근 안 좋은 일이 자주 일어나서 골치를 썩이던 지그문트 대공이다.

이 밀서의 내용까지 확인한다면 잔뜩 쌓였던 짜증이 폭발할지도 몰랐다.

"대공 전하, 에드윈입니다."

"들어오게."

집무실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더없이 밝았다.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에드윈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착각이 아니었는지 그를 바라보는 대공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무언가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읽어보게나."

지그문트 대공은 서류 한 장을 에드윈에게 넘겼다.

에드윈은 빠르게 내용을 읽어본 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삼공자께서 정말 이런 공적을 세우셨단 말입니까?"

"대단하지 않나? 말솜씨 하나는 좋은 녀석이라 생각했지만, 설마 모든 협상을 이리도 잘 해낼 줄은 몰랐네."

"그보다 더 대단한 건 그레베 시의 전투군요. 아무리 소규모 교전이었다지만 전장의 지휘까지 흠잡을 데 없지 않습니까."

"나도 녀석에게 그런 재능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네. 타고 난 모양이야. 물론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니 경험이 필요하겠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지."

루시안을 향한 칭찬에 에드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순전히 아들이라 높게 평가하는 게 아니었다.

첫 출진에서 이 정도로 수월하게 지휘를 해낸다는 건 재능이란 말로 부족할 정도의 무언가가 있다는 거니까.

"대신 일공자께서는 조금 충격이 크시겠군요. 이 보고서만 보자면 자칫 큰 실수를 하실 뻔하신 모양입니다만."

"잘된 일이야. 솔직히 트리스탄 녀석은 요즘 자신감이 지나쳤거든."

이미 쌓아놓은 공적이 상당한 데다 인망이 부족한 둘째와 능력이 검증도 안 된 셋째에 비해 주변의 평가도 좋다.

여기에 더해 평소 내린 결정 중에서 크게 잘못된 것도 없다 보니 질책도 거의 안 들었고, 결과적으로 독선이 심해졌다.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후일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마침 셋째 덕에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얻은 셈이지. 제 실수를 마주하고 고칠지, 끝내 무시하고 모른 척할지는 녀석에게 달렸겠지만."

"일공자라면 분명 본인의 실수와 마주하실 겁니다. 최근 조금 엇나가신 부분이 있다지만 총명하신 분이니까요."

"그러길 바라네. 그나저나 무슨 일인가?"

에드윈은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 전해줄 소식은 모처럼 좋았던 대공의 기분을 나락으로 처박을 수도 있었기에.

"...황제 폐하의 밀서입니다."

"폐하께서?"

"좋은 내용은 아닙니다. 직접 보시지요."

이미 봉인이 뜯어진 밀서를 에드윈이 내밀었다.

황제의 밀서를 미리 확인해본다.

다른 가신이라면 꿈도 못 꿀 폭거였으나 에드윈에 한해서는 용서받는 행동이었다.

지그문트 대공은 아무렇지도 않게 밀서를 받아 펼쳤다.

"...이런 제기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손에 쥔 밀서는 대공의 손에서 사정없이 구겨졌다.

"베른하르트, 그 개자식은 운도 좋군. 반란이 임박했으니 진압을 위한 군사 비용의 전액을 대는 것으로 용서받는다? 참으로 싼 대가야."

"가볍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반기를 든 크레펠트는 속국 중에서도 특출난 국력을 보유하고 있으니까요. 허리가 휘청일 정도의 돈이 나갈 테니 대외적인 영향력도 확 줄어들겠지요."

"하지만 정치적 권위만큼은 전혀 손상되지 않겠지. 놈은 궁정에서 목을 빳빳이 들고 다니며 할 말 다 할 테고 말이야. 설마 폐하께서 이런 거래를 받아들이실 줄은 몰랐는데."

지그문트 대공은 이마를 짚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반란이 일어나 지원이 급하다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때로는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쳐내야 할 건 쳐내야 할 거 아닌가.

오랫동안 충심으로 섬겨왔던 황제지만 이럴 때는 대공도 속이 답답했다.

"겨우 돈 가지고 이럴 분은 아니니 후계 문제까지 겹친 건가? 아직도 일황자에게 집착하시는 모양이군."

"예전부터 황실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장자 계승의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고 하셨으니까요. 아마 후작의 지지를 바라셨겠지요."

"장자 계승, 장자 계승이라."

대공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최근에는 정말 황실의 권위를 위해 장자 계승을 밀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이미 많은 사건이 일황자가 황제의 그릇이 아니란 걸 증명했을 터.

그런데도 이토록 장자 계승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죽은 전 황후를 못 잊고 계신 건가."

"...."

"낭만적이라고 하기엔 그분이 짊어지신 게 너무 크건만, 이젠 그조차 잊어버리신 게 아닌가 싶군."

분명 예전에는 총기 있고 사리를 분별할 줄 알던 황제였다.

단 하나의 단점이라면 피를 보는 걸 극도로 꺼렸다는 것.

그 결과 제국은 다시 회생할 기회를 몇 번이나 놓쳤다.

이번이 그 마지막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거늘.

'그런데 이마저도 놓쳤구나. 다음 기회가 과연 내가 살아있을 때 오기나 할지.'

지그문트 대공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침묵이 이어지자 머뭇거리던 에드윈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하,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아직 하나 더 있습니다."

"또 뭐가 있다는 말인가?"

"밀서는 아니고 밀서를 전달한 전령의 말입니다만, 이번 반란 진압에 일황자 전하가 참전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공자 중 한 분이 일황자 전하와 같이 출전하시길 바란다고...."

신이시여.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밀명에 대공은 기어코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

일을 마치고 가문으로 돌아온 루시안의 위상은 이전과 전혀 달라져 있었다.

전부터 수직상승을 하는 중이었지만, 이젠 누구도 흔들 수 없을 만큼 탄탄한 권위를 얻은 것이다.

안 그래도 조심하던 하인들의 허리는 더 아래로 꺾였고 기사들은 루시안의 눈에 들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다.

휘하에 있던 한스와 휴고의 권위가 상승한 건 덤이었다.

"예전엔 우습게 봤던 놈들이 이제 눈도 못 마주치더군요. 지금껏 쌓이고 쌓였던 게 쑥 내려가는 기분입니다. 크크크!"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닐 텐데. 청탁 같은 건 안 들어오냐?"

"물론 들어옵니다만, 죄다 거절하고 있습죠. 남이 함부로 주는 거 먹었다간 탈 나지 않겠습니까?"

"좋은 자세야."

의외로 한스는 권력에 사로잡히지 않고 나름 잘 대처했다.

천성이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데다 일하면서 내부 정치의 더러운 면도 많이 봤던 탓이었다.

혹시 모를 타락을 걱정했던 루시안으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이대로만 성장하면 나중에도 측근으로 쓸 수 있겠어.'

지그문트 대공과 에드윈 집사장 수준은 아니더라도 믿을 수 있는 최측근은 중요했다.

군주에게는 기사와 행정관만이 아니라 내부의 자잘한 문제를 정리해줄 집사도 필요했으니까.

휴고는 한스와 달리 달라진 대우에 신경 쓰기보다 전장에서의 감각을 되살려 훈련하는 데 집중했다.

"언젠가 저도 도련님 곁에서 같이 싸우는 날이 올 테니 이 감각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제가 익힌 검식이 삼류라는 건데...."

"어쩔 수 없지. 사자검은 기사가 된 이후에 배울 수 있는 거니까. 당장은 있는 걸 쓰는 수밖에."

직계만 익힐 수 있는 사자심검과 달리 사자검은 다른 기사들에게도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다만 아무리 충성을 바쳤다 해도 '기사'가 아니면 배울 수 없었기에 휴고에겐 아직 가르칠 수 없었다.

그 점은 루시안도 조금 아쉬웠으나 예정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로 출세할 기회가 올 터.

지금은 그때를 대비해 가진 검식을 연마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가문을 둘러본 후 루시안은 곧바로 검성 아이젠을 찾아갔다.

곧 다가올 전장에 나서기 위해선 사자심검에 대한 가르침이 절실했다.

37화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펠리시아의 예법 교육 시간이라 달리 할 일도 없었습니다."

검성이 얼마 전에 제자를 들였다고는 하나 그게 다른 사람을 못 가르친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무리 뛰어난 제자라도 인간인 이상 24시간 교육을 이어갈 수는 없는 법.

펠리시아는 여기에 더해 귀족의 예법까지 배워야 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안 그래도 남는 시간인데 삼공자께 도움을 드릴 수 있다니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정말 제가 필요하시다면 없는 시간이라도 쥐어 짜내서 와야지요."

비꼬는 게 아니라 순수한 진심이 듬뿍 담긴 어조였다.

펠리시아를 소개해준 후부터 아이젠은 루시안에게 깊은 은의를 느끼고 있었다.

때로는 생명의 은인 이상으로 감사히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펠리시아는 요즘 어떻습니까?"

"예법을 배울 때의 열정도 검술을 배울 때의 열정 못지않더군요. 동기는 다른 것 같아 조금 안타깝긴 합니다만."

펠리시아의 근황을 물었을 때 아이젠은 그리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순수하게 즐기는 검술과 달리 예법에 대한 열정은 사생아로서 살아온 세월의 한에 가깝다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제 오라비의 수발을 들고 있던 것만 봐도 집에서 어떤 취급이었는지 빤히 보이니까요. 보이지 않는 상처가 제법 깊을 겁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석의 가치를 무시했던 놈들은 제가 직접 피눈물을 흘리게 해줄 생각이니까요. 눈앞에서 그 꼴을 보면 펠리시아의 한도 조금은 풀리겠지요."

"허허, 그거참 기대되는 말씀입니다."

루시안의 말에 아이젠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차갑게 웃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검의 재능임에도 키워주긴커녕 역사의 뒤편으로 파묻으려던 후작이다.

스승과 아버지로서의 입장 이전에 한 사람의 검사로서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이거 어쩌다 보니 말이 길어졌군요. 자, 슬슬 검을 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에 가르쳐드린 사자심검을 펼쳐보시지요."

"예."

루시안은 얼마 전 배운 사자심검의 모든 검식을 펼쳐냈다.

사실 아직 기본기에 충실할 때였지만, 아이젠은 그 부분을 넘기기로 했다.

기본기 자체가 워낙 탄탄했던 데다가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루시안이 알아서 단련했기 때문이다.

검식의 위력 중 반이 기본기에서 나온다는 걸 생각하면 이미 반은 수행이 끝났다고도 할 수 있는 셈.

문제는 나머지 반이었다.

"끝났습니다."

"으음."

눈앞에서 사자심검의 시연이 끝나자 아이젠의 입에서 침음이 새어 나왔다.

한참 고민하던 아이젠은 이내 진지한 얼굴로 루시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보기에 삼공자의 육체는 하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마력은 정순하며, 그로 인한 파괴력도 더없이 강하지요. 기본기 역시 완벽하며 상대를 관조하는 눈도 뛰어나지요."

"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자심검 역시 삼공자의 성향과 잘 맞습니다. 파괴력에 중점을 둔 검식이니까요. 기교도 다른 검식 못지않습니다만, 때로는 자신이 잘 하는 부분에 집중하는 게 좋지요."

갑작스러운 칭찬에 루시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슨 소릴 하려고 이리 장황하게 말씀하시나.

한참 분석과 설명을 이어간 아이젠은 이내 빙긋 웃으며 루시안의 나아갈 방향을 알려줬다.

"그러니 제가 보기에는 삼공자의 특출난 신체의 장점을 살릴 수 있도록 기교보다는 순간적인 파괴력에 중점을 두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기사는 추풍낙엽처럼 쓸려갈 겁니다."

"...아이젠 경. 제 착각이 아니라면 어째 기교 부분은 힘에 비해 형편없으니 그냥 파괴력으로 다 때려 부수는 쪽으로 가자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허허허."

"아니, 웃지만 마시고요."

"허허허."

아이젠은 웃으면서 말을 돌릴 뿐 끝내 부정하진 않았다.

하지만 곧 얼버무리려는 게 아닌, 진심을 담은 미소를 보여주며 말했다.

"그래도 방금 한 말은 진심입니다. 어지간한 기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겠지요. 무엇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은 한 가지로 정해진 게 아니니, 기교 대신 파괴력을 통해 검성이 되는 길도 있을 겁니다."

"기술 없이 위력만 강한 검성이라. 어째 멋있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리 부정적으로만 볼 것도 아닙니다. 삼공자가 그 육체로 검의 극에 달한다면...."

"달한다면?"

"전설에 나오는 용조차 일격에 베어내실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지나친 평가에 루시안은 흠칫하며 아이젠을 바라보았다.

또 웃으면서 얼버무릴 줄 알았건만 더없이 담담한 표정이었다.

루시안이 믿든 안 믿든 자신은 어디까지나 진실을 말했다는 것처럼.

****

루시안은 검성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용에 대한 언급은 둘째치더라도 그 방향이 제일 낫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기교 부분은 타고난 재능이 없다면 익히는 데 한 세월이니까. 힘에 중점을 두는 편이 훨씬 낫지.'

그리고 실제로도 검식의 파괴력이 상승한다는 건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었다.

힘이 강하다는 건 속도도 빠르다는 뜻이고 적이 제대로 받아내기도 힘들어진다는 뜻.

훤히 보이는 경로로 검을 내질러도 못 막는다면 일격필살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전생에서 나도 그렇게 죽을 뻔한 경험이 몇 번이나 있었지.'

더없이 단순한 공격이었기에 당시의 루시안으로서는 대응할 방법조차 없었다.

최소한 어느 정도 힘과 속도가 따라줘야 뭘 할 것 아닌가.

이번에는 루시안이 상대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도 괜찮을 듯 싶었다.

이 축복받은 육체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

"후우우."

순환을 마친 루시안은 깊게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텅 빈 약병들과 열화 넥타르를 만들고 남은 재료들.

다른 건 다 넉넉히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월광초가 다 떨어진 상태였다.

"쩝, 구하질 못한다는데 더 들여놓으라 할 수도 없고."

약초상을 몇 번이나 닦달해도 이 이상은 불가능하다며 우는 소리만 돌려줄 뿐이었다.

어디까지나 구하는 난이도에 비해 값이 비싸고 사는 사람이 적어서 한번 보관하면 오래갔을 뿐.

주변 영지에 보관되어 있던 물량이 다 떨어진 이상 새로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온전한 넥타르 제조법이 있다면 이렇게 양으로 때울 필요도 없을 텐데.'

루시안은 새삼 아쉬움을 느꼈다.

물론 지금 복용하는 비약도 좋긴 하지만, 원판에 비하면 한참 희석된 수준.

당장 루시안의 힘을 키우는 데 전부 쓰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아쉽단 말이지. 가능하면 나 쓰고 남은 분량으로 다른 애들에게도 먹여주고 싶은데 그럴 만한 양이 안 나오니....'

"도련님."

상념에 잠겨 있던 루시안을 한스의 목소리가 깨웠다.

대충 옷을 갖춰 입은 루시안은 약병과 재료들을 구석에 밀어 넣고 나가보았다.

"무슨 일이냐?"

"그, 대공 전하께서 도련님을 부르십니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 가족회의를 여신답니다."

"가족회의? 설마 다른 부인들도 다 참여하는 거냐?"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루시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침 식사로 포장한 이전과 달리 대놓고 가족회의라는 표현을 썼다.

그만큼 지그문트 대공과 발데크 가문에 중대한 일이라는 소리다.

대공은 물론 가문 구성원 전체가 휘말릴 가능성이 있을 만큼.

'설마.'

루시안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현재에서 가장 가까운 역사의 분기점이자 루시안이 참여하기 위해 준비해왔던 사건.

아직 일이 벌어지기엔 시간이 남아있으나 고위 귀족들이 준비를 위해 움직인다면 딱 맞을 때였다.

"당장 준비해서 가지."

바로 준비를 마친 루시안은 영주관으로 향했다.

사자심검을 배운 이후 처음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루시안의 추측대로라면 이번 사건에 엮이느냐 마느냐가 미래를 결정짓는 분수령이었기에.

****

가족회의란 말에 반응한 건 루시안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역시 거의 동시에 영주관에 도착했다.

세 명의 형제들과 그들의 어머니인 세 명의 부인들.

그리고 유일하게 생모가 세상을 뜬 루시안.

일곱 명의 시선이 일제히 허공에서 부딪치며 묘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다 왔으면 앉지. 부인들도 앉으시오."

다행히 긴장감은 부풀어 오르기도 전에 대공의 등장으로 누그러졌다.

묵직한 지그문트 대공의 목소리에 모인 가족들은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괜히 끌어봤자 좋을 거 없다고 생각했는지 대공은 즉시 본론을 꺼냈다.

"크레펠트에서 반란이 일어났소."

"예!? 설마...!"

"동부 최대의 세력을 가지고 있는 그 크레펠트 맞소. 군사력도 속국 중에서 가장 강대한 곳이지."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크레펠트의 반란.

난세의 시작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전조를 알린 신호탄.

제국 황실의 몰락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건이 드디어 벌어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전쟁이 일어난 건 아니오. 하지만 곧 일어나겠지. 황실의 세금 징수를 거부한 데다 징병령까지 내렸다고 하니."

"사실상 선전포고나 마찬가지군요. 크레펠트라면 황실 홀로 제압하기는 힘들 듯한데, 아버지께서 나서시는 겁니까?"

조르디는 질문을 하면서도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국가 규모의 반란이 되면 자연스레 영주들의 연합군이 결성되는 법.

이때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황제 혹은 그의 대리인에 걸맞은 권위가 있어야 한다.

친정이 아니라면 지그문트 대공 외에는 적임자가 없었다.

황제의 신뢰를 받으면서도 전쟁 경험이 풍부하며 합당한 권위까지 가진 자는 지그문트 대공뿐이니까.

"아니. 내가 아니다."

그러나 대공은 고개를 저으며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을 입에 담았다.

"이번에 반란 진압을 지휘하실 분은 일황자 전하시다."

"예!?"

형제들은 물론이고 부인들까지 대공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권위라면 분명 부족함이 없으나 전장 경험은 없다시피 한 일황자다.

그런데 그런 일황자를 이런 대규모 반란에 지휘관으로 앉히다니.

"그, 그럼 설마 아버지께서 일황자 전하의 보좌를...?"

"그것도 아니다. 폐하께서는 너희 중 한 사람이 오기를 원하시더구나."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황제 대신 일황자에 지그문트 대공 대신 그 아들 중 한 사람이라니.

이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 노골적인 정치적 배치였다.

'일황자에게 권위를 실어줌과 동시에 우리도 일황자를 지지해달라는 소리로군.'

'제기랄, 너무한 거 아닌가? 아버지도 아니고 왜 애먼 우리를 끌어들여?'

황제의 의도가 빤했다.

충성심 강한 대공은 몰라도 그 자식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

이번 기회에 억지로라도 일황자와 엮어버릴 셈인 거다.

본인들의 뜻이 어디 있건 한번 엮이면 주변에서 지지세력으로 볼 테니까.

문제는 현재 대공의 아들 중 아무도 그걸 원치 않는다는 점이었다.

'일황자가 자질이 없다는 건 사교계에서도 유명한 이야기. 지금 같이 엮였다간 두고두고 발목을 잡힌다.'

'황제의 눈에는 들겠지. 하지만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차기 가주 자리지 황제의 신뢰가 아니라고.'

'애초에 차기 가주가 되면 제발 지지자가 되어달라고 먼저 부탁할 텐데 왜 지금 꿇고 들어가야 해?'

세 형제의 반응에 대공은 예상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마. 너희들 중 자원할 사람이 있느냐?"

"굳이 자원할 사람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요? 이미 적임자가 있는 것 같은데요."

대공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가만히 있던 부인 중 한 사람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남부 출신 특유의 붉은 머리가 돋보이는 미부인이자 트리스탄의 어머니인 베로니카였다.

무슨 뜻이냐는 대공의 시선에 베로니카가 루시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셋째를 보내시죠."

38화

갑작스러운 참견에 지그문트 대공의 눈이 찌푸려졌다.

"부인, 나는 자원자를 받겠다고 했소. 추천하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이 무슨 짓이오?"

"추천한 게 아니에요. 소거법으로 셋째밖에 선택지가 없다는 거죠. 생각해보세요."

대공의 질책에도 베로니카 부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든 부채로 주변을 훑었다.

"이번 반란 진압은 애들한테 경험 쌓으라고 보낼 만한 규모가 아니에요. 최소한 한 번 이상 전장에 나서본 경험이 있어야겠죠.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 둘째랑 넷째는 탈락이죠."

"음."

뭐라 반박하고 싶은 듯 대공이 미간을 좁혔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경험을 쌓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 반란 진압은 부적합했다.

적당한 소규모 교전도 아니고 안전도 보장되지 않았으니까.

물론 어지간해선 전면에 나설 일이 없겠지만, 만에 하나란 건 있는 법.

갑작스러운 사태가 일어났을 때를 대비해 최소한의 경험은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첫째도 후보에 들어갈 텐데?"

"트리스탄은 당신의 명령으로 꽤 오래 보른홀름에 있었어요. 다시 외지에 파견되기엔 너무 짧은 기간이죠. 게다가 공적도 다른 애들에 비해서 많이 쌓았죠."

"공적이 많은 건 이유로 한참 부족하오."

"아뇨,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에요. 다른 애들보다 가주 경쟁에서 앞서나가는 아이를, 황제 폐하께서 밀어주는 일황자와 엮고 싶은가요?"

"첫째가 일황자 전하와 친해진다 해서 가주 경쟁에 도움이 될 건 하나도 없소."

"하지만 황제께서 이상한 착각을 하신다면요?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겠어요?"

안 그래도 신경 쓰던 부분을 건드는 소리에 대공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지금 황제가 차기 가주로 트리스탄을 점찍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길 하고 싶은 건가?

"발데크 가문의 가주는 나요. 차기 가주를 정하는 것도 나고. 황제 폐하께서는 제국의 주인이시지만, 이 가문의 주인은 나란 걸 잊었소?"

"그 사실은 여기 있는 모두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요. 문제는 황제 폐하의 의지죠. 가신의 가족 사정에 개입하는 건 군주로서도 옳지 못한 일이지만, 요즘 폐하께서는 조금 과한 요구를 하실 때가 있잖아요?"

"...."

반론할 말이 없었기에 대공은 입을 다물었다.

당장 여기서 가족회의를 나누는 이유 자체가 황제의 과한 요구 때문이었으니까.

최근 황제가 보이는 모습을 생각하면 다음에도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폐하께서 일황자 전하를 내 아들과 엮어주려고 하시는 건 후일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다른 애들이야 보험 정도로 여기겠지만 가주 경쟁에서 제일 앞서는 트리스탄을 보낸다면....'

발데크 가문의 차기 가주가 일황자를 지지한다는 착각으로 끝난다면 차라리 낫다.

최악의 경우 트리스탄이 가주 자리에 오르도록 외부에서 도와줄 가능성마저 있다.

대공이 강하게 설득한다면 이해하고 손을 떼겠지만 군신 간의 관계가 나빠지는 건 피할 수 없을 터.

"모두 이치에 맞는 말 아닌가요? 셋째를 보내도록 하세요."

"저, 저도... 셋째가 적임자라고 생각하는데요...."

고민하는 와중 다른 두 부인마저 베로니카에게 합세했다.

그 모습에 지그문트 대공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치에 맞는 말이긴 하나 누가 봐도 목적이 루시안의 발목 잡기지 않은가.

하물며 경쟁자인 형제들이라면 모를까 부인들이 끼어들다니.

"이보시오, 부인들!"

분노한 대공이 세 부인을 향해 뭐라 소리치려 했을 때였다.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이외에 적임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 아버지!"

"...!?"

대뜸 나선 루시안을 보며 다른 이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지그문트 대공이었다.

대공은 기가막힌 얼굴로 루시안에게 소리쳤다.

"루시안,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

"물론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군대를 이끌고 일황자 전하를 도와 반란 진압에 나서는 것 아닙니까?"

"아니, 그건 그렇지만...!"

할 말은 많았지만, 목에서 턱 걸려서 나오질 않았다.

자기가 가져온 이야기인데 자원해봤자 좋을 거 없다는 소리를 어찌 하겠는가.

하물며 자식 중 아무나 한 명은 보내야 하는 상황이니 더더욱.

루시안은 말문이 막힌 대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황은 알고 있습니다. 괜히 일황자 전하와 친분을 다지겠다고 나서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주변의 시선이 더욱 기괴해졌다.

이야기의 이면에 숨은 정치적 의도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다 아는데 자원을 한다고?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루시안을 향해 물었다.

"무슨 생각이냐? 혹시 꾸미는 일이라도 있느냐?"

"꾸미는 일이라니,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애초에 절 추천하신 건 부인 아닙니까? 겨우 수십 초 전의 일인데 벌써 잊으셨습니까?"

루시안의 비아냥에 베로니카가 눈을 치떴으나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자기가 골칫거리를 떠넘겨 놓고 넙죽 받는 게 수상하다고 거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베로니카의 입을 다물게 한 루시안은 담담하게 말을 덧붙였다.

"방금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이 일에 적격인 건 저뿐입니다. 큰형님은 폐하께 이상한 오해를 안겨드릴 수 있고, 둘째 형님과 조슈아는 전쟁 경험이 없지요. 그렇다면 기꺼이 제가 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다만?"

"아버지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이번 일에 대한 전권을 제게 주십시오."

"전권이라니, 어차피 너는 내 대리로 가는 셈이다. 그 자체만으로 전권대리인이거늘 여기서 무슨 전권을 더 달라는 말이냐?"

대공은 별 이상한 소리를 다 한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그러나 루시안은 물러서지 않고 의미심장하게 대공을 바라봤다.

"정말 그렇습니까? 참모라는 이름의 실질적 지휘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닌지요? 제가 미숙하여 일을 망치거나 지휘를 잘못할 때를 대비해서 말입니다."

"...."

정곡을 찌르는 소리에 대공이 순간적으로 머뭇거렸다.

실제로 그런 이를 하나 딸려 보낼 생각이긴 했다.

솔직히 아직 스물도 안 된 소년에게 군사적 판단을 모조리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판단을 한 번 크게 그르치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게 전장.

최소한의 안전장치 겸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믿음직한 책임자가 필요하긴 했다.

"...어디까지나 일이 크게 잘못되었을 때나 나설 이다. 네가 큰 실책을 저지르지 않는 한 지휘권은 계속 네게 있겠지."

"여차할 때는 제 지휘권이 박탈될 수도 있다는 뜻이군요."

"다시 말하지만, 긴급상황에 한정해서다."

"그리고 그 긴급상황을 판단하는 건 참모겠지요."

"누굴 붙여주든 경험으로 따지자면 네 십수 배는 될 텐데, 그런 이의 판단을 믿지 못하겠다는 거냐?"

대공의 인상이 험악해졌으나 루시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다름 아닌 크레펠트의 반란이다.

만약을 대비해서라도 전권은 루시안이 가지고 있어야 했다.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권위의 문제지요. 제가 지휘관인 이상 참모의 작전권을 박탈할 권리는 제가 가져야 합니다. 그 반대는 있을 수 없습니다."

"허어."

대공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과하고 위험한 요구였다.

저 나이 때 혈기가 오죽 끓던가.

명성을 위해 말도 안 되는 작전을 내거나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는 건 일상다반사.

진짜로 전권을 넘겼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다.

'당연히 안 된다고 소리치고 싶지만, 상황이 너무 애매하구나.'

부인들이 합세해서 일방적인 견제를 퍼붓는 와중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자원한 녀석이다.

여기서 이 조건마저 들어주지 않는 건 아버지인 대공마저 루시안을 희생양처럼 본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거절하고 다른 형제 중 한 명을 대신 보내는 방법도 있지만, 누가 됐건 절대 못 간다고 눌러앉을 게 뻔하니....'

도저히 들어주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한숨을 내쉰 대공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게 전권을 주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네 경험이 부족한 만큼 조언자는 붙여주겠다. 전권이 있는 만큼 그의 말을 따를지 안 따를지는 네 마음이나 부디 허투루 듣지는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루시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부인들과 형제들도 퍽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방금 전 요구를 듣고 명성에 집착하여 무모한 짓이라도 하려는 줄 착각한 모양이었다.

'뭐, 틀린 생각도 아니지.'

명성을 원하는 것도 맞고, 무모한 짓을 하려는 것도 맞으니까.

다른 점이라면 루시안이 성공하리라는 것.

그리고 결과적으로 대륙의 미래가 크게 달라질 예정이라는 거다.

이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건 한참 후의 일이겠지만.

****

-출진은 두 달 후가 될 거다. 이번엔 반란 진압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못할 테니 충분한 휴식을 취해두도록 해라.

"생각보다 훨씬 넉넉하군."

루시안은 대공의 이야기한 기간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난세 이전에는 이런 식이었다.

군단을 꾸리고, 보급로를 구축하고, 병력이 한데 모인 후 최후통첩까지 끝내고서야 비로소 전쟁을 벌였다.

언제나 상비군을 뒤통수 찌를 준비가 되어있던 그 시절에 비하면 참으로 양식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번 반란으로 끝이지.'

크레펠트의 반란은 단순히 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 아니었다.

기존 질서 자체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지.

불명예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배신이 일상이 되는 난세의 시작.

루시안은 그 난세의 시작을 약간이나마 미뤄볼 생각이었다.

'아직 내겐 시간이 필요하거든.'

어차피 한계에 달한 제국으로서는 다가올 난세를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난세가 도래했을 때 세력을 가진 군주가 되기엔 준비가 덜 된 상태.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어 철저히 준비해야만 했다.

생각을 마친 루시안이 휴고와 한스에게 찾아가려던 때였다.

"뭘 그리 열심히 생각하는지 궁금하군. 못된 꾀라도 떠올렸느냐?"

"형님?"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루시안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조르디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루시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퍽 기분이 괜찮아 보이는구나. 당장 전장에 나가서 일황자와 엮이게 되었음에도 말이다."

"글쎄요.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건 사람에 달렸지 않습니까? 누군 위기를 위기로밖에 못 보겠지만."

조르디의 시비에 루시안 역시 독설로 돌려주었다.

말을 내뱉고 난 루시안은 곧 이어질 발작을 기다렸으나 이상할 정도로 조르디는 잠잠했다.

한참 동안 루시안을 말없이 쳐다보던 조르디가 차갑게 내뱉었다.

"분가라는 말을 아느냐?"

"원래 속해있던 가문에서 나와 새로운 가문을 세우는 일 아닙니까. 제가 바보로 보이십니까?"

"아니. 하지만 이 분가가 얼마나 뻔뻔한 행위인지는 잘 모를 것 같더구나."

뜬금없이 말을 꺼낸 조르디는 루시안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반드시 알고 말아야겠다는 듯.

"계승권이 없으니 새로 가문을 세운다. 듣기는 좋지. 하지만 이런 놈들은 보통 변변찮은 것들밖에 없다. 자수성가는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 놈들은 대부분 자신의 뿌리가 속한 가문의 등골을 빼먹는다."

"...."

"혈통에 기대어 정통성을 주장하고, 생득권을 내세우며 유산을 빼먹지. 정당한 후계자의 것을 뺏은 후 새 가문의 시조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는 거다."

"거참, 말씀 한 번 심하십니다. 분가한 가문의 가주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리고 후계자가 아니라면 빼먹을 게 뭐가 있습니까? 가져갈 권한도 없을 텐데."

"아니! 그 피로 얻은 모든 게 도둑질이다!"

조용하던 조르디는 버럭 소리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문에 속한 인재와 안면을 트고, 은혜를 주고받고, 끝내는 인연을 빼앗아 데려가지! 혈통을 타고났기에 고귀함을 인정받아 군주로 추대될 자격을 가진다! 심지어 선조의 유산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까지! 이게 도둑질이 아니라면 뭐란 말이냐!?"

개자식들, 도둑놈들, 찢어 죽일 파렴치한들.

조르디는 몇 번이나 바닥에 대고 욕설을 쏟아내었다.

조용히 조르디의 욕설을 듣던 루시안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래서? 분가한 가주들이 개자식이면 나보고 어쩌란 겁니까? 솔직히 왜 이런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황자와 엮이는 건 가문의 중대사다. 잘되면 몰라도 일이 커지면 너는 가문을 위해서라도 잘리는 꼬리가 될 수 있다. 황위 계승 다툼에 엮이는 건 아무리 발데크라도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니까."

"뭐, 그건 그렇지요."

"그런데 넌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지. 가문에 버림받는 것 따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이다. 마치 가주가 못 되더라도 다른 데로 가면 그만이라는 듯."

착각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조르디가 루시안의 어깨를 콱 쥐었다.

아플 정도로 세게 쥐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무거운 느낌이었다.

조르디는 루시안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명심해라. 넌 발데크다. 나도 발데크지. 큰형님도, 조슈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발데크와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 가주가 되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밑바닥으로 가는 거다."

"...."

"너 역시 실패한다면 같이 추락해야 한다. 명심해라. 가문의 깃털을 빼서 네 날개를 만들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도둑질 따윈 내가 용서치 않는다. 모든 걸 가지거나, 모조리 잃거나 둘 중 하나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조르디는 루시안을 팍 밀치며 지나갔다.

동시에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빠르게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루시안은 이내 헛웃음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거참, 저 새끼...."

...눈치 하난 더럽게 빠르네?

39화

귀족의 가장 큰 힘은 피 그 자체에서 나온다.

고귀한 혈통일수록 더욱 많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니까.

하물며 황가와도 피가 이어져 있는 발데크 가문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일단 제위 계승권까지 있지. 황족의 씨가 마르지 않는 이상 차례가 올 일은 없겠지만.'

달리 말하자면 여차할 때 제위에 대한 권리도 주장할 수 있다는 소리다.

평화로운 시기에는 씨도 안 먹힐 억지지만 난세라면 가능하다.

그 정도로 발데크 가문의 혈통이 주는 권리는 넘쳐흐를 만큼 많았다.

루시안의 재산 중 가장 큰 것은 발데크의 피가 주는 생득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여기에 더해 힘은 없다지만 외가마저 북부 왕가의 계보를 잇고 있으니.

'자체적인 힘과 그럴싸한 명분만 있다면 언제든 정당한 군주로 군림할 수 있다.'

루시안은 방금 전 조르디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가주가 되지 못한다면 같이 망하자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그렇게는 못 하겠수다, 형님. 뻔히 보이는 비단길이 펼쳐져 있는데 내가 왜 가지 말아야 하오?"

불안한 건 안다.

루시안과 달리 조르디의 외가는 겨우 3대째인 상인 출신의 가문.

가주 경쟁에서 탈락하면 두 번 다시 같은 무대에 서지 못하겠지.

그런데 자신과 같은 처지라 생각했던 루시안이 언제든 자립할 수 있는 역량을 보이고 있으니 불안했으리라.

하지만 루시안으로서는 굳이 조르디의 룰을 따라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내가 가진 걸 써먹고, 댁은 댁이 가진 걸 써먹는 거지. 세상이란 원래 그런 법 아니오? 미치도록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것."

전생의 루시안은 그 불합리 아래 짓눌려 죽어갔다.

반대로 조르디는 불합리 위에서 군림하며 형제들과 경쟁했고.

이제 와 처지가 바뀌었다고 한들 안타까움이 생길 리 없었다.

****

두 달의 시간 동안 루시안은 철저히 육체를 단련했다.

전장에 나서는 이상 단련은 아무리 많이 해도 부족했다.

다행히 기교보다는 파괴력에 집중하기로 한 덕에 단련 자체는 쉬웠고, 그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파앙

"후우!"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에 루시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이젠이 보여준 것에 비해서는 한참 부족하나 파괴력만큼은 발군이었다.

전생의 자신과 다시 싸운다면 한 합으로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 만큼이나.

'이름난 기사가 아니라면 검을 맞부딪친 순간 끝나겠군. 그것도 내 검이 버텨줄 때의 이야기지만.'

루시안은 얼마 전에 박살 난 검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상당히 좋은 검이었기에 생각할수록 아쉬웠다.

임무 수행에 필요한 물자 지원을 핑계 삼아 가져온 거라 새 검을 요청해도 비슷한 품질의 물건을 받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까 나 전쟁 나가잖아? '

잘만 하면 이 사실을 명분 삼아서 새 검을 요청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사안으로 따지자면 이전보다 훨씬 중요한 만큼 더 괜찮은 걸 받을지도 모른다.

'손해는 없으니까 일단 물어보기나 할까?'

"도련님!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뭐? 아버지께서?"

고민 중이던 루시안은 한스의 외침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얼른 루시안이 옷을 갖추어 입으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지그문트 대공이 들어왔다.

"아버지, 이런 꼴이라...."

"사적인 자리에서 일일이 예법을 따질 필요 없다. 단련하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땀범벅인 루시안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대공은 이내 손뼉을 두 번 쳤다.

짝짝, 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후 하인들이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실은 네게 줄 선물이 도착했기에 전해주러 왔다."

"선물이라니... 갑옷과 검이 아닙니까?"

"마음에 드느냐?"

루시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게 척 보기에도 명검이었으니까.

넋을 잃은 루시안을 보며 미소를 짓던 대공은 이내 검을 루시안에게 건네주었다.

"뽑아 보거라."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자신이 쓸 검의 날카로움은 직접 확인해봐야지."

대공의 말에 살짝 고개를 숙인 루시안이 검을 빼 들었다.

검은 너무도 부드럽게 뽑혀 나와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루시안은 손에 딱 맞는 무게와 날카로움에 감탄했다.

"좋은 검이로군요. 보통 강철을 쓴 게 아닌 듯합니다만."

"아다만티움을 적당히 섞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험하게 다뤄도 어지간해선 부러지지 않겠지."

아다만티움이란 소리에 루시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세상 모든 금속 중 가장 단단하다는 금속의 왕.

무구를 제련할 때 극미량만 섞어도 내구도가 격이 달라진다고 들었다.

그 때문에 가격 역시 엄청나서 전생에서는 구경하는 게 고작이었던 무구.

"원 녀석, 눈이 마치 토끼 같구나."

"아다만티움이 섞였다는 걸 들으면 누구나 저처럼 놀랄 겁니다. 정말 제가 이 검을 받아도 되는 겁니까?"

"당연한 소리. 나 대신 전장에 나서는데 무기가 조악하여 위험에 처한다면 우스운 일이지.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대공이 눈짓하자, 하인들이 갑옷과 그 거치대를 내려놓았다.

하얀색과 푸른색이 기묘하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갑옷이었다.

"전장에서 중요한 건 무기보다 방어구인 법. 검과 같이 이것도 네게 주마."

"참으로 훌륭해 보이는 갑옷입니다만, 흉갑 외에 다른 부위가 없군요."

장인의 솜씨가 느껴지는 표면에 감탄하던 루시안이 의문을 입에 담았다.

대공은 말없이 웃으며 루시안의 몸에 갑옷을 입혀주었다.

루시안이 얼떨떨하게 갑옷을 입고 나서야 대공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순환을 해보거라."

"여기서 말입니까?"

"굳이 온전한 순환을 할 필요는 없다. 가슴 한가운데로 마력을 보내기만 해도 되니까."

흉갑 하나 입혀놓고 대뜸 순환이라니.

루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순순히 마력을 흘려보냈을 때였다.

촤라라락

"...!?"

가슴에 일정 분량의 마력이 모인 순간 흉갑이 퍼져나가며 몸 전체를 덮었다.

팔과 다리는 물론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머리까지.

신기하게도 몸을 덮는 와중 살이나 머리카락은 전혀 걸리지 않았다.

겨우 10초도 안 되는 사이 흉갑은 어느새 전신 갑주로 변해 있었다.

"마도 갑주...!"

흉갑의 정체를 알아차린 루시안은 기겁했다.

황제의 허락과 궁정 마법사들의 협조가 있어야만 만들 수 있다는 기술의 진수.

전생에서는 수도에 왔을 때 근위대장이 입은 걸 딱 한 번 본 게 전부였다.

그런데 설마 그 마도 갑주를 직접 입게 될 줄이야.

"2대 가주께서 당대의 선제 폐하께 하사받은 갑주다. 귀한 물건임은 틀림없지만 아무래도 초창기에 만들어진 만큼 성능은 가장 떨어지지. 대가 이어지면서 선물 받은 갑주도 쌓이다 보니 쓸 데가 애매했는데, 네가 받아가면 되겠구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마도 갑주 아닙니까? 성능이 떨어진다고 해도 세상 모든 갑주 중에서는 수위를 다툴 텐데요."

별거 아니란 듯이 말하는 대공의 태도에 루시안은 혀를 내둘렀다.

분명 발데크 가문 정도 되면 황실에 이런 선물도 받겠지만, 가주 취임식 정도 되는 경사여야만 할 터.

아무리 쌓이고 쌓였다 한들 이리 쉽게 건네줄 물건은 절대 아니었다.

누가 봐도 부담을 줄이려고 일부러 가치를 축소해 말하는 게 분명했다.

"표정을 보니 얼떨떨한 것 같구나. 왜? 기쁘지 않으냐?"

"기쁘긴 합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겨우 반란 진압일 뿐인데 아다만티움제 무구에 마도 갑주라니."

"그래, 그렇지. 솔직히 말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루시안의 말을 순순히 수긍한 대공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 대신 왠지 모를 불안과 찝찝함이 떠올랐다.

"아무리 속국 중 가장 강한 크레펠트라 해도 제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 반란이라 해봐야 작은 꿈틀거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어째선지 불안함이 가시질 않더구나."

"무언가 짐작 가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없다. 단순한 감이다. 누군가는 아무 근거도 없는 헛소리라며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꼭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이런 느낌이었지. 게다가...."

잠시 말을 멈춘 대공의 시선이 루시안을 향했다.

"전권을 달라는 네 태도도 어쩐지 신경 쓰였고. 단순히 명성을 탐하는 게 아니라, 이미 위험에 몸을 던질 준비를 마친 후 허락을 받으려는 것 같이 보였다."

"...제가 미래를 보는 것도 아닌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속으로 뜨끔한 루시안이 시치미를 뚝 뗐다.

지그문트 대공이 비범한 인물이란 건 알았지만 설마 남들이 모르는 예지력이라도 있는 건가?

다행히 대공은 잠깐 루시안을 바라봤을 뿐 이내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전장에 나가는 데 대비를 철저히 해서 나쁠 건 없는 법. 챙겨두고 요긴하게 쓰거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빌려주는 게 아니라 선물하는 것이니 돌려줄 필요는 없다."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아비와 아들 사이에 은혜는 무슨. 그저 무사히 돌아오면 충분하다. 그리고 너무 위험한 짓은 하지 말거라. 명성을 떨치더라도 누릴 사람이 없다면 명성 또한 의미가 없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지그문트 대공은 하인들을 데리고 연무장에서 떠나갔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신경 쓰이는지 자꾸 루시안 쪽을 돌아보곤 했다.

지금껏 옆에서 지켜보던 한스는 대공이 사라지고 나서야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세상에! 도련님, 대체 언제 전하께 이리 총애를 받게 되신 겁니까? 아다만티움이 들어간 검에 마도 갑주라니요! 트리스탄 도련님께서도 못 받으신 것들인데!"

"글쎄다. 총애라고 해야 할지 감이 좋으신 거라 해야 할지."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세상엔 대단한 사람이 참 많다는 거다. 내 아버지도 그중 한 분이시고."

"...?"

루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스를 놔둔 채 마력을 재차 가슴에 집중시켰다.

그러자 다시 마도 갑주가 반응하며 원래의 흉갑 형상으로 돌아갔다.

흉갑과 검을 만지작거리며 루시안은 쓰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모처럼 이런 보물들까지 챙겨주셨건만 조금 위험한 짓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약속할 수 있었다.

무사히 돌아오는 것.

대공의 말대로 명성을 떨치더라도 누릴 사람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차분히 무구를 살펴보던 루시안은 문득 한 가지 걱정을 떠올렸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은 내가 이런 선물을 받았다고 뭐라 안 하려나?

****

루시안의 예상대로 과한 선물에 대한 부작용은 바로 나타났다.

아다만티움제 검에 마도 갑주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세 형제가 일제히 대공을 찾아간 것이다.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합니다. 아다만티움제 검이야 그렇다 쳐도 마도 갑주라니요?"

"심지어 2대 가주께서 당대 폐하께 하사받은 물건이라니, 단순한 방어구가 아니라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보물 아닙니까!"

"겨우 속국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저런 무구가 필요할까요? 차라리 형님께 병력이나 추가로 얹어 주시는 게 낫지 않습니까?"

쏟아지는 항의 속에서 대공은 담담히 자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불만이면 너희들 중 한 명이 셋째를 대신하여 반란 진압에 나서거라. 그러면 셋째에게 주었던 걸 도로 뺏어서 너희에게 나눠주마."

"...."

"...."

지그문트 대공의 한마디에 세 형제는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4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