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아다만티움제 검과 마도 갑주는 분명 보물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분쟁 한가운데 뛰어드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얻기에는 애매한 보물이기도 했다.
어지간한 수준이면 모를까 자칫하면 미래를 말아먹을 수도 있는 사안었기에 더더욱.
그 모습에 대공이 혀를 차며 말했다.
"셋째가 왜 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너희들의 태도가 알려주는구나. 아무도 짊어지지 않으려는 짐은 대신 짊어질 사람이 있는 짐보다 100배는 더 무거운 법이다."
대공의 일갈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세 형제는 일제히 수그러들었다.
이후 루시안이 받은 것들에 대해 말이 나오는 일은 없어졌다.
그로부터 이틀 후, 마침내 황실에서 정식으로 사자가 찾아와 대공에게 병력을 요청했다.
"크레펠트의 무도한 무리를 진압하기 위해 발데크 가문의 가주, 지그문트 발데크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진즉 밀서를 통해 준비된 일이었기에 공식적으로 보이기 위한 요식 행위였다.
루시안은 한참 전에 준비된 군대를 외성의 성문 앞으로 모았다.
발데크 가문에서 파견한 군대의 숫자는 총 1천.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전원이 상비군 출신인 정예병인 걸 생각하면 부족함이 없는 전력이었다.
'게다가 연합군을 결성할 때는 병력 많이 보낸다고 다 좋은 게 아니니까.'
안 그래도 권위가 높은 발데크 가문인데 병력까지 대량으로 보낸다?
보급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연합군 내에서 발언권이 높아질 수 있었다.
그리되면 황실 입장에서도 든든한 걸 넘어서 불편하게 여길 터.
황실이 연합군의 고삐를 쥘 수 있을 만큼은 적게 보내야 했다.
'그러면서도 가문의 격에 맞는 실력은 보여줘야 한다니, 정치란 골치 아프구만.'
루시안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머리에 대공의 가르침을 새겨넣었다.
훗날 군주가 되고자 한다면 이런 정치적 고려도 중요한 일이니까.
출진할 준비를 마치자 곧 중년의 기사 한 사람이 루시안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삼공자. 제라드 루덴이라 합니다. 이번에 삼공자의 곁에서 참모로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군에 대해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무엇이든 물어봐 주십시오."
"신세 질 일이 많을 텐데 앞으로 잘 부탁하네, 제라드 경."
대화는 훈훈했으나 정작 제라드 쪽은 정중한 어조에 비해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그의 심정을 대강 짐작한 루시안은 피식 웃었다.
'전권이 내게 있으니 가시방석이겠지. 말이 참모지 여차하면 내가 무시해버리고 강행하면 그만이니까.'
차라리 무시로 끝나면 다행이다.
대공이 직접 전권을 내준 이상 루시안이 마음만 먹으면 참모 자리에서 쫓아내 버릴 수도 있으니까.
옆에서 루시안의 폭주를 제어하기는커녕 밉보이지 않길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니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
'뭐, 그런 심경까지 일일이 배려해줄 생각은 없지만.'
애초에 작정하고 참모를 붙여줄 생각이었다면 대공도 좀 더 명망 있는 자를 붙여줬으리라.
이름값이 있다면 아무리 루시안이라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정작 참모로 부임한 이는 경험만 많을 뿐 이름조차 못 들어본 기사.
어디까지나 조언은 참고만 하고 네 뜻대로 움직여 보라는 대공의 의도가 진하게 느껴졌다.
'본인이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게 불쌍하구만.'
알아봤자 좋을 건 없었기에 굳이 설명해주진 않기로 했다.
루시안은 일단 대충 인사를 마치고 제라드를 참모로서 옆에 두었다.
의견이 서로 부딪치지 않는다면 굳이 관계를 망칠 필요도 없으니.
"그나저나 댁은 또 왜 여기 있는 건지 모르겠군."
"하하, 오랜만에 보시는데 왜 이리 차가우십니까? 이래 봬도 같이 어깨를 맞대고 싸운 전우 아닙니까."
"눈 찡긋거리지 말게. 나이 먹을 대로 먹은 남자가 그러면 징그러워."
루시안의 말에 레이먼이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이래 봬도 겨우 서른다섯입니다만."
"나이는 됐고,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당연히 삼공자의 호위지요."
"이렇게 병력이 많은데 호위라니?"
"그래도 만일에 대비한 개인 호위 하나쯤은 있어야죠. 실은 이번에도 동료들과 같이 오고 싶었는데 그건 과하다 해서 저 혼자 왔습니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우시죠?"
"푸핫!"
레이먼을 추궁하던 루시안은 넉살 좋은 대답에 기어코 웃음을 터트렸다.
감시인가 했더니만 정말 순수한 호의로 자원한 듯 보였다.
"뭐, 실력 있는 기사 하나 옆에 있으면 나쁠 거 없지. 그나저나 자네는 여기서도 레이먼인가?"
"뒤가 구린 일이 아닌 이상 언제나 레이먼입니다."
"잘 됐군. 호칭이 달라져서 헷갈리면 어쩌나 했는데 말이야."
명령하면 따르는 기사와 신뢰하고 등을 맡길 수 있는 기사는 다른 법.
레이먼이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다른 기사보다는 중요한 일을 맡기기엔 더 믿음직했다.
루시안은 마지막으로 십인장에 임명한 휴고를 찾았다.
"십인장 자리는 어때? 할 만해?"
"어찌어찌 놈들에게 대장으로 인정받긴 했습니다. 제기랄, 십인장 자리를 차지하는 것 정도는 쉬울 줄 알았는데 다들 독기가 보통이 아니더군요."
"그야 몇 번이고 토벌전에 참여한 숙련병들이니 그렇지. 사선을 넘나든 정예병 입장에선 네가 애송이로 보일걸."
"실제로 그렇게 대하더군요. 검식으로 찍어 눌러도 반발이 수그러들지 않아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이전 보른홀름에서의 참전 경험을 말해주니 간신히 납득하긴 했습니다만."
휴고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경험마저 없었다면 모처럼 루시안이 준 자리에서 쫓겨날 뻔했다면서.
"일단 고삐는 쥐었으니, 나머진 놈들에게 능력을 보여주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래도 한동안은 틱틱거릴 텐데 내가 한마디 해줄까? 그럼 다들 순순히 따를 텐데."
"아뇨."
말이 끝나기 무섭게 즉답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휴고의 눈동자에서 불똥이 튀었다.
"겨우 열 명의 병졸조차 제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면 기사라고 할 수 없겠지요. 반드시 제 능력만으로 놈들을 승복시키겠습니다."
"좋은 대답이야."
혹시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까 시험해 봤는데 의지는 확고한 모양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루시안은 말에 올라 1천의 군대를 내려다보았다.
배웅은 끝났고, 대공의 축사도 받았으니 남은 건 루시안의 명령뿐.
호흡을 가다듬은 루시안이 크게 소리쳤다.
"전군, 출진!"
****
루시안의 명령과 동시에 1천의 군대는 이동을 시작했다.
이미 경로와 예상 시간은 정해져 있었기에 한동안은 행군만 이어질 예정.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참모인 제라드에게서 다른 의견이 나왔다.
"경로는 유지하되 속도는 높이시는 편이 좋습니다. 정확히는 지금 진군 속도의 두 배 정도로요."
"너무 강행군 아닌가? 군사들이 금방 지칠 텐데."
"징병으로 모은 오합지졸이면 모를까 상비군 출신 숙련병들입니다. 이 정도는 충분히 버팁니다."
"그 전에 속도를 높여야 하는 이유부터 들어보지."
"정치 때문입니다."
아직 도착도 안 했는데 정치라니?
고개를 갸웃하는 루시안을 향해 제라드가 차분히 설명했다.
"이런 식의 연합군은 갈등이 생기기 쉽습니다. 아무리 총지휘관의 권위가 크더라도 사소한 잡음은 어쩔 수 없지요."
"그야 그렇겠지."
"문제는 때로 그 잡음이 생각보다 큰 균열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겁니다. 심하면 파벌 수준으로 나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갈등은 생각보다 군사 작전에 영향을 많이 미친다.
부족한 물자의 공유 여부에서부터 위급한 순간에 지원을 오는 속도까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면 적보다 아군 사이가 더 험악할 때도 있다.
"그런데 합류하는 시기가 늦어지면 이미 무슨 일이 생긴 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입할 여지를 놓치는 거지요."
"이미 나누어진 진영 중 하나를 선택해 편을 들어줘야 한다?"
"예. 골치 아픈 일이지요. 이를 막기 위해서는 가능하면 일찍 도착하는 게 제일입니다. 갈등을 미리 막을 수도 있고, 막지 못해도 최소한 어떻게 돌아가는 판인지는 알 수 있으니까요."
"음."
일리 있는 의견에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서도 대규모 전투에서 다수의 용병단이 불렸을 때 비슷한 일이 곧잘 일어나곤 했다.
물론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걱정일 뿐이지만, 보험을 하나 들어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
"그럼 진군 속도를 조금 올리지. 단, 군사들이 지쳐서 퍼져버리면 본말전도라는 걸 명심하도록."
"예!"
제라드는 우렁차게 대답하고는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뒤로 빠졌다.
조언이 받아들여진 덕인지 얼굴이 아까보다 밝아 보였다.
****
다행히 진군 속도를 높여도 군사들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묵묵히 따랐다.
그 와중에도 불평은커녕 아쉬운 소리를 내뱉는 병사 하나 없었다.
엄정한 군기에 많은 군대를 봐왔던 루시안도 살짝 놀랄 정도였다.
'이게 대가문이 보유한 군의 저력이라는 건가.'
똑같은 숫자라도 이만한 질이면 어지간한 군대를 상대로도 어렵지 않게 승리하겠지.
후일 자신만의 군대를 가지게 되었을 때 목표로서 참고할 만했다.
그리고 며칠 후, 예정보다 훨씬 단축된 시간으로 루시안은 연합군의 합류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 지친 기색 하나 없군. 조금은 피로가 느껴질 줄 알았는데."
"발데크의 병사라면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지요."
루시안의 감탄에 제라드가 웃으며 말했다.
다른 영주들 앞에서 창피를 당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끄덕인 루시안은 시선을 돌려 합류 지점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아무래도 다들 내 생각보다 훨씬 일찍 모인 것 같으니 말이야."
크레펠트로 넘어가는 호르센 강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깃발이 보였다.
깃발에는 각각의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들이 가득했다.
꽤 서둘렀음에도 벌써 반절이 넘게 모인 듯했다.
"자네 말을 듣길 잘했어. 안 그랬다면 진짜 늦을 뻔했군."
"저들도 저와 비슷한 생각으로 서둘렀을 겁니다. 다들 도착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겠죠. 기껏해야 사나흘 차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뭐, 영지끼리의 거리를 생각하면 그 정도가 적당하겠지. 황실 문양도 있는 거 보니 일황자 전하는 이미 도착하신 건가?"
오직 황실의 일원만이 쓸 수 있다는 붉은 용의 문양.
다른 모든 깃발보다도 높이 걸린 깃발에 새겨진 모습이 멀리서도 잘 보였다.
"보통 이럴 때는 총지휘관이 늦게 도착하는 게 암묵적인 약속인 줄 알았는데. 총지휘관보다 늦으면 나머지가 죄인이 되니까."
"상황에 따라서 다르죠. 제가 말씀드린 갈등을 미리 봉합하기 위해 가장 먼저 와 있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갈등의 봉합이라."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황자한테 그럴 만한 능력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들려오는 소문 중에 좋은 게 없었으니까.
'뭐가 되었든 도착한 이상 인사는 해야겠지.'
루시안이 군을 이끌고 합류 지점인 호르센 강 근처로 향하자 주변이 술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발데크 가문임을 밝히고 신분을 확인한 순간 곧장 붉은 용 문양이 찍힌 기사들이 뛰쳐나왔다.
그중 수장으로 보이는 젊은 기사가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발데크 가문의 변함없는 충의에 감사를. 검은 비늘 기사단의 단장인 위르겐 발트가 대공 전하의 대리인께 인사드립니다."
"황실의 굳건한 신뢰에 보답할 뿐일지니. 지그문트 대공 전하의 대리로 참전하러 온 루시안 발데크입니다."
"루시안 공이셨군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보른홀름에서의 활약은 황제 폐하께서도 감탄하셨지요. 분명 제국을 짊어질 인재가 되실 분이라면서요."
"과분한 칭찬이시군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만."
가벼운 인사와 함께 위르겐은 연신 루시안의 얼굴에 금칠을 해줬다.
제국의 충신이자 단 하나의 대공가인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한 대우.
그런데 인사치레가 끝날 시간이 되었음에도 위르겐의 칭찬은 끝나질 않았다.
"역시 겸손하시군요. 당시 용병들을 다루던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가벼운 말재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말재주로 끝날 게 아닙니다. 심지어 그 이후에는 직접 용병들을 이끌고 전장을 지휘하셨잖습니까? 첫 전투라고는 도저히 생각지 못할 정도입니다."
"칭찬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슬슬 일황자 전하를 뵐 때인 것 같군요."
참다못한 루시안이 직설적으로 본론을 내뱉었다.
다른 가문들이 다 모여 있건만 밖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도착했으면 가장 먼저 총지휘관부터 보고 인사를 해야 하거늘.
"절 여기 세워두는 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보고를 미루는 건 일황자 전하께도 실례이지 않습니까. 일단 총지휘관이신 전하께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대화는 그 이후에 나누도록 하지요."
"예... 그게... 참으로 맞는 말씀인데... 지금 그게...."
루시안의 말에 위르겐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을 더듬었다.
수상쩍은 그 태도에 루시안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41화
"설마 일황자 전하께서 부재중이신 겁니까?"
"아니, 아닙니다. 그건 아니지만... 후우!"
루시안의 추궁에 위르겐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부재중이라면 더 나을 거라는 듯이.
잠시 후, 눈을 질끈 감은 위르겐이 무언가를 꺼냈다.
"일단 이걸 받아주십시오."
"이게 뭡니까? 가면?"
어리둥절한 얼굴로 루시안이 가면을 받아들였다.
처음엔 무슨 유물인가 싶었으나 그런 건 아니었다.
순수한 가면, 그것도 얇고 망가지기 쉬운 파티용 가면이었다.
"갑자기 가면은 왜 주시는 겁니까?"
"연합군에 참여하는 모든 영주가 모일 때까지는 그 가면을 써주십시오. 단, 가능하면 신분을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그게 대뜸 무슨 소립니까?"
"최근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놀이입니다. 가면을 쓰고 정체를 숨긴 채 어울리다가 어느 순간 신분을 드러내는 거지요."
"놀이?"
위르겐의 설명에 루시안은 눈을 찌푸렸다.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단어가 섞여 있었다.
"지금 놀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저는 잘 모르지만 이게 꽤 친목 도모의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작위의 높낮음에 상관없이 어울릴 수 있으니...."
"그런 걸 물어보는 게 아니잖습니까. 저희는 반란을 진압하러 왔지 파티를 즐기러 온 게 아닙니다만."
자포자기한 듯한 표정으로 위르겐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옳은 소리지만, 어쩔 수가 없다는 것처럼.
"사실 일황자 전하께서 연합군의 친목 도모를 위해 제안하신 일입니다."
"일황자 전하께서 직접 말입니까?"
"예. 그러니 부디 부탁드립니다. 내키지 않으실 수는 있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는 일이니...."
"하."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름의 이유가 있기는 개뿔이.
암만 봐도 일황자 본인이 즐기기 위해 벌이는 일이었다.
영주들이 서로 신분을 모른 채 좌충우돌 부딪치는 꼴을 보고 싶은 거겠지.
'그 인간은 생각이 없나? 궁정 귀족들이라면 모를까 영지 귀족들 상대로 이런 장난질이라니.'
영지가 없는 궁정 귀족은 철저한 황실의 수족.
이런 장난질을 벌인다 하더라도 결코 반항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 모인 영지 귀족들은 궁정 귀족과는 천지 차이.
자체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데다 충성심도 그리 강하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어지간하면 최소한의 존중 정도는 표해야 하거늘.
'백 보 양보해서 별 볼 일 없는 가문한테만 장난을 친다면 모를까, 발데크 대공가의 가주 대리인 나한테도 이러는 건 아니지. 자칫하면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사안이잖아.'
웃어넘기려면 웃어넘길 수 있지만, 모욕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면 얼마든지 모욕이 되는 일.
그만큼 일황자의 장난은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서 있었다.
위르겐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낯빛이 거무죽죽했다.
짧게 혀를 찬 루시안은 가면을 받아들면서 말했다.
"뭐, 전쟁 전에 가볍게 피로를 푸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겠지요.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신하로서 따를 뿐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루시안 공!"
루시안의 말에 위르겐은 죽다 살아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발데크 가문이 모욕을 당했다며 크게 만들 수도 있는 일을 단순한 장난질로 넘겨주겠다는 소리였으니까.
"실로 발데크 가문은 제국의 기둥입니다! 후계자이신 루시안 공께서 이토록 영민하시니 이후로도 제국과 함께 중흥할 겁니다!"
"전 후계자가 아닙니다만."
"아직 아니신 거겠지요. 오늘 보여주신 면모만 봐도 알겠습니다. 차후 발데크 가문을 짊어지실 분은 분명 루시안 공입니다."
또다시 위르겐의 금칠 세례가 이어졌다.
루시안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위르겐이 앞을 막았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직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또 왜 그러십니까? 가면을 여기서 착용하나 안 하나 확인하실 생각입니까?"
"그리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기 정체를 숨기실 때 두를 망토도 드리겠습니다. 주변을 돌아다니실 때는 정체를 가급적 숨겨주시고 호위는 한 사람으로 제한하는 규칙이 있으니...."
그 후 위르겐은 한참 동안 식은땀을 흘려대며 시시콜콜한 규칙을 설명했다.
이어지는 설명에 루시안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연합군 상태 한 번 가관이구만.
****
"일황자 전하께서는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이는지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발데크 가문에 대한 우롱입니다!"
설명을 마치고 막사를 치자 안으로 들어온 제라드가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러뜨렸다.
루시안과 달리 제라드는 도저히 이걸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았다.
"삼공자, 굳이 일황자 전하의 장난을 받아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판을 엎는다 해도 대공 전하는 물론 황제 폐하께서도 이해해주실 겁니다."
"그리고 연합군의 분위기는 개판이 되겠지. 이런 장난질을 치는 인간이 판을 엎었을 때 순순히 물러설 것 같나?"
"그건...."
정곡을 찌르는 루시안의 지적에 제라드가 입을 다물었다.
영지 귀족들 상대로 이런 장난질을 치는 일황자다.
판이 엎어진다 해도 이성적으로 수습하기보단 감정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컸다.
"일단 일황자 전하에게 악의는 없는 것 같으니 대충 넘기자고. 그리고 이 가면 놀음에도 장점은 있으니까."
"장점이란 게 존재하는 겁니까?"
"영주 개개인의 속내를 떠보기는 쉬워졌지. 서로 격을 드러내고 만났다면 저마다 꾸민 얼굴만 보여줬을 테니까."
발데크 가문은 황가를 제외하면 제국에서 가장 격이 높은 가문.
달리 말하자면 정적 외에는 눈앞에서 대놓고 속내를 보이는 가문이 없다는 소리기도 하다.
대공가에게 밉보였다간 어떤 후폭풍이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하지만 가면을 쓴다면 일시적으로나마 정체를 숨길 수는 있을 터.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밝혀지겠지만, 그 전까지는 이전보다 진솔한 대화가 가능할걸. 이왕 일황자의 놀음에 어울려주기로 했으니 이 기회나 이용할 생각이야."
"으음, 꼭 필요한 일인지요? 제가 생각하기엔 오히려 쓸데없는 갈등만 일어날 것 같습니다만."
"필요하고 말고."
정확히는 발데크의 가주가 아니라 루시안에게 필요한 일이지만.
가주가 될 수만 있다면 중소 영주 개개인의 속내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
속내고 나발이고 발데크의 가주 앞에서는 절대 드러내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따로 독립할 여지가 있는 루시안으로서는 이참에 영주들의 성향을 파악해두는 것도 괜찮은 선택지였다.
'나중에라도 써먹을 상황이 올지 모르니 잘 살펴봐야지.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삼공자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뜻대로 하십시오."
루시안의 속셈을 알 리 없는 제라드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권을 받은 루시안이 마음 먹었다면 제라드로서는 말릴 방법이 없었으니까.
"다만 일황자 전하가 정한 규칙상 돌아다니실 때는 호위 한 사람만을 대동해야 한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만."
"그랬지. 안타깝지만 제라드 경은 여기서 기다려줘야겠어."
"데려갈 호위는 누구로 하실 생각입니까?"
"당연히 레이먼 경이지."
휴고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호위로서 격이 한참 부족하다.
죄다 호위기사를 데리고 다니는데 루시안 혼자 평민을 곁에 둘 수도 없는 노릇.
한 명만 대동할 수 있다면 흑사자 출신인 레이먼 외에 다른 적임자가 없었다.
"자, 그럼 마음먹은 김에 바로 살펴보도록 할까."
루시안은 즉시 가면을 쓰고 일황자가 마련한 '야외 파티장'으로 향했다.
과연 다른 귀족들은 이 황당한 놀음에 어찌 반응할지 확인해보기 위해서.
****
"...생각보다 훨씬 적네."
저도 모르게 루시안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가면을 쓰고 망토까지 뒤집어썼건만, 눈앞에 보이는 귀족은 깃발 수의 반절에 불과했다.
호위로 불려나온 레이먼도 주변을 둘러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굳이 일황자 전하의 장난질에 어울려 줄 필요는 없으니까요."
"굳이 판을 뒤엎지 않더라도 자기 막사에 콕 처박혀서 안 나오면 그만이라는 거군."
"그렇죠. 오히려 반절이나 나온 게 대단한 일입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다.
노회한 귀족이라면 괜히 장난질에 어울려주다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느니 아예 참여를 안 하겠지.
일황자의 심기는 조금 불편해지겠지만 차라리 그편이 남는 장사라 생각할 터.
"그런데도 반절이나 참여한 이유는 약소 가문이라 황실의 눈치를 심하게 보거나, 정치적 고려도 못 할 만큼 생각이 없거나. 그것도 아니면...."
"인맥이 급해서지요. 의외로 이런 자리에서 인연을 만들어두면 나중에 꽤 도움이 되니까요. 혹은 최근 제국의 급격한 변화를 대비하기 위해서거나."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루시안과 레이먼이 일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루시안과 마찬가지로 가면에 망토를 두른 귀족과 그 호위가 있었다.
가면 아래로 보이는 피부와 목소리를 볼 때 루시안과 비슷한 나이 같았다.
"...나이젤 크레이시?"
입술 아래에 보인 익숙한 흉터에 루시안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상대는 루시안의 말에 놀랐는지 흠칫 몸을 떨었다.
"절 아십니까?"
알고말고.
박쥐 남작 나이젤을 어찌 모르겠나.
겨우 남작밖에 안 되는 약소 귀족이면서 루시안이 죽을 때까지 자기 영지를 지켰던 외교의 달인.
전생의 루시안도 잠깐이나마 나이젤 아래에 고용되어 일한 적이 있었다.
'상대를 딱 협상장으로 불러낼 정도로만 위협하고 물러서는 솜씨가 예술이었지.'
그밖에도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 적당한 허세를 부려 공격을 막거나 다른 세력을 끌어들일 듯 말 듯 미묘한 여지를 주거나.
힘은 부족해도 신들린 듯한 외교 실력으로 끝끝내 독립을 지켜내었다.
물론 본인에게는 죽느냐 사느냐의 목숨을 건 결정이었겠지만, 그 결정이 모두 옳았던 만큼 타고난 외교관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생의 이야기를 여기서 할 수도 없으니.'
루시안은 유명한 나이젤의 일화로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실례했습니다. 입가의 흉터를 보고 지레짐작한 건데 맞았나보군요."
"아... 이거 말이군요. 거 참, 별일도 아닌데 쓸데없이 유명해졌나 봅니다."
나이젤은 쓴웃음을 지으며 매의 발톱에 찢어졌던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매사냥 도중 형이 실수로 매의 먹이를 나이젤의 얼굴에 던진 일화는 주변에서 제법 유명했다.
사실 그 일화가 유명해진 이유는 형이 고의로 나이젤을 노렸다는 뒷소문 때문이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공께서 절 맞추셨으니 저도 공의 정체를 맞춰보지요. 음... 당피에르 가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클라이스트 가문?"
"그것도 아닙니다."
나이젤은 한참 동안 여러 가문 이름들을 댔지만 그중 맞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대가문 출신이라 생각하질 않는 건지 백작가보다 높은 가문을 안 부르는 게 문제였다.
결국 나이젤은 쓴웃음을 지으며 양손을 올렸다.
"항복입니다, 항복. 이거 부끄럽군요. 제법 사람 볼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름은커녕 가문 하나 맞추지 못할 줄이야."
"저는 그만한 가문과 특징을 안다는 사실이 더 대단합니다만. 마구잡이로 대신 게 아니라 무언가 연관성을 찾으신 거 아닙니까."
"이런, 들켰습니까?"
멋쩍은 듯 나이젤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대뜸 이름을 불러버린 루시안의 실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나쁘지 않았다.
내친김에 루시안은 방금 전 들었던 일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 그러셨지요. 여기서 귀족들이 모인 이유는 인맥이 급하거나 제국의 변화를 대비하기 위해서라고요. 전자는 저도 알겠지만, 후자는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최근 제국은 요동치고 있으니까요."
두 사람은 산책하듯 거닐며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민감한 내용이라는 듯 나이젤은 목소리를 줄이며 속삭였다.
"일황자 전하와 관련된 승계 문제에 제국 해방연대 놈들의 부추김과 속국들의 준동, 여기에 더해 각지에서 숨어 살던 마법사들까지 꿈틀거린다죠. 아직까진 별일 없지만, 언제 일이 터질지 몰라 다들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인맥 하나가 소중한 법이죠."
"여차할 때 서로 돕기 위함입니까? 이미 있는 인맥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으니까?"
"그보다는 만들어둔 인맥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서입니다. 원래 폭풍이 불다 보면 아는 사람이 어느 순간 쓸려나가 있을 때가 곧잘 있으니까요."
과연.
기껏 인맥을 구축해뒀는데 모종의 사고로 아무 쓸모 없게 될 수 있으니 최대한 많이 만들어둔다는 건가.
종잇장처럼 얇은 인맥이라도 없는 것보단 낫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노회한 영주들은 별거 아닌데 젊은 놈들이 난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만, 저로서는 도저히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황실만 문제라면 모를까 발데크 대공가까지 술렁이고 있잖습니까."
루시안은 움찔했다.
여기서 발데크가 왜 튀어나와?
"발데크 대공가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못 들으셨습니까? 최근 은거하던 삼공자가 갑자기 나타나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답니다. 로그란 후작의 음모를 미리 밝혀내고, 제국 해방연대의 계책을 간파하고, 심지어 검성 아이젠 경의 지지까지 받아냈답니다."
"그,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 로 끝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만 해도 말이 안 되는데 심지어 이번 반란 진압에 대공 전하의 전권 대리인으로 온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후계 구도를 단번에 뒤흔드는 사태인데 그 여파가 얼마나 클지 짐작이 가질 않습니다."
"...."
"과한 충고일지도 모르나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럴 때 몸을 사려야 합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듣자 하니 삼공자의 나이가 꽤 어리다고 하던데, 외모만 보고 판단하지 마시고 행동을 조심하십시오. 어려도 사자는 사자. 앳된 외모 속에 무시무시한 성정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참...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42화
루시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을 듣자 하니 루시안에게는 무언가 꿍꿍이를 품고 발톱을 숨겨온 모략가 이미지가 붙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쭉 방구석에 처박혀있다가 튀어나오자마자 가문을 뒤흔들었으니, 그동안 뭔가 꾸몄다고 생각하겠지.'
실제로는 몸뚱이에 들어있는 영혼이 바뀐 것뿐인데 말이다.
어색해진 루시안은 주변을 둘러보다 냉큼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저희와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는 사람이 많군요. 제국에 젊은 가주가 이토록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럴 리가요. 대다수는 가주가 아닙니다. 대리로 온 후계자거나 한창 후계 경쟁 중인 아들 중 하나지요."
"예? 한두 명도 아니고 이들 전부가 대리인이라고요?"
"그야 공과 똑같은 이유지요."
똑같은 이유라니?
의미심장한 나이젤의 말에 루시안이 눈을 끔뻑였다.
설마 이 인간, 지금까지 정체를 알면서도 얼버무린 건가?
그 눈빛에 모르는 척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나이젤이 말했다.
"지휘관이 일황자 전하신데 가주가 여기 오면 지지세력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다분하지 않습니까. 최소한 후계자나 다른 자식을 보내야 변명거리가 생기지요."
"...아, 그렇군요. 일황자 전하의 지지세력으로 엮으려 해도 가주 본인이 거기에 없었다면 나중에 손쉽게 부정할 수 있을 테니."
"사람 생각하는 건 다 똑같은 법입니다. 저도 그렇고 공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이젤은 공감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왔으나 루시안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루시안이 여기 오게 된 이유는 그들과 정반대에 가까웠으니까.
'한쪽은 자식들을 변명거리로 삼기 위해 대리로 보내고, 다른 한쪽은 자식들끼리 엮으려는 속셈 때문에 대리가 되고.'
기가 막힌 엇갈림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아니라고 해서 위화감을 조성할 수는 없기에 대충 맞장구나 쳐주려는 순간이었다.
"참으로 무례한 일이지 않나. 황제 폐하의 칙명을 받고도 이리저리 빠져나갈 구석이나 찾는 꼴이라니. 명색이 한 가문의 주인들인데 참으로 보기 흉할 따름일세."
뒤에서 갑자기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리인을 보낸 가주들 전체를 싸잡아 모욕하는 소리에 나이젤이 욱하며 뒤를 돌았다.
본인 역시 그렇게 보내진 대리인이었기에 자신의 가문을 모욕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이젤은 말을 꺼낸 사람을 보자마자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 그게! 아니, 저...!"
"이런, 진정하게. 서로 정체를 숨기는 자리 아닌가. 여기서 내가 인사를 받아서는 안 되지."
중년의 가주는 너그러운 어조로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어조만 상냥할 뿐, 아래로 깔아보는 시선은 더없이 오만했다.
루시안은 갑자기 끼어든 가주를 빠르게 훑었다.
'군청색의 머리카락과 수염, 그리고 허리춤에 독수리 조각.'
그것만으로도 남자가 누군지 알기에는 충분했다.
이 제국에 군청색 머리칼의 대가문은 하나뿐이고, 마침 그 가문의 상징은 독수리였기에.
'로그란 후작가.'
거기까지 알면 눈앞에 있는 사람의 정체도 자연스레 짐작할 수 있었다.
당대 로그란 후작가의 가주, 베른하르트 로그란.
지그문트 대공의 정적이자 귀족파의 수장.
"그런데... 이 친구는 또 누군가?"
제국을 움직이는 거물 중 하나가 루시안을 쳐다보며 턱을 쓸었다.
****
후작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루시안은 피식 웃었다.
이 친구는 누구냐니.
'확실히 만남은 처음이지만, 댁이 날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루시안이 후작을 모르더라도 후작은 루시안을 알 거다.
로그란 후작가의 가주쯤 된다면 정보력도 손에 꼽힐 테니까.
하물며 루시안은 후작의 모략을 완전히 박살 낸 당사자.
정보의 필요성 이전에 열이 받아서라도 철저하게 조사했을 게 뻔하다.
'그런데도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는 건 내가 먼저 숙이는 꼴을 보고 싶어서인가.'
군청색 머리칼과 수염은 그렇다 쳐도 독수리 조각상까지 매단 인간이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숨길 생각은 아예 없을 터.
정체를 알아본 루시안이 숙이고 나오는 걸 보고 싶은 것이리라.
가문의 격이 같다고 해도 삼공자와 가주는 서 있는 자리가 다르니.
하지만 루시안은 후작의 의도대로 끌려다닐 마음이 없었다.
"무례하군. 그대는 누구인데 함부로 끼어들어 다른 가주들을 모욕하는 거요? 연배로 보아하니 예법에 대해서는 배울 만큼 배운 사람 같은데 말이오."
"...!?"
폭언이나 다름없는 루시안의 말에 후작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나이젤의 안색은 백짓장처럼 변해버렸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이젤이 루시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고, 공! 이분은...!"
"어허! 일황자 전하께서 신분을 숨기라 하신 걸 잊었습니까? 나야 실수를 했다지만 일부러 밝히는 건 대놓고 황실을 기만하는 짓. 절대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에 후작의 얼굴이 악마처럼 일그러졌다.
'이 염병할 애송이 놈이 끝까지 모른 척할 생각이구나!'
방금 전 후작은 대리인을 보낸 가주들을 모욕했다.
황실의 칙명을 받고도 빠져나갈 구석만 찾는다면서.
그런데 여기서 후작이 일황자의 명령을 어기고 신분을 드러낸다면 본인 얼굴에 침을 뱉는 꼴.
암시를 아무리 줘도 상대가 작정하고 모르는 척한다면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왜 그러시오? 갑자기 입을 다물고서는. 무언가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이런 제기랄.'
뻗대는 루시안의 모습에 베른하르트 후작이 이를 갈았다.
상대가 알아서 절하기를 원했는데 이래서야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계속 하오체를 들을 판이 아닌가.
차라리 가주면 격이라도 같지 가주는커녕 후계자도 아닌 일개 삼공자.
가면이고 나발이고 이대로 동등하게 대화를 이어간다면 두고두고 망신살이 뻗칠 게 뻔했다.
"...미안하오. 내 실수를 했군. 그렇지만 난 그대보다 한참 연상인 것 같은데, 최소한의 존중을 바랄 수는 없겠소?"
후작의 어조가 하게체에서 하오체로 바뀌었다.
널 존중해줄 테니 너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라는 암시였다.
루시안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어조를 바꾸었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무례를 저질렀군요. 사과드리지요."
"아니, 이해하오. 갑자기 끼어들었으니 기분이 나쁠 만도 하지."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후작은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상대가 알아서 숙이게 하려 했건만 자신이 먼저 숙이고 존대를 받는 꼴이라니.
"크흠! 사실 이렇게 온 건 나도 공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요. 최근 한 가지 문제가 생겼는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참고해볼 생각이라."
"무슨 문제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별거 아니오. 독수리의 소유인 검을 사자가 가져가서 화려하게 보석을 박았소. 그리고 이전과 가치가 달라졌으니 이제 내 것이라 주장하고 있소. 그럼 그 검은 누구의 것이겠소?"
괴상한 비유였지만 루시안은 듣는 즉시 무슨 소린지 알 수 있었다.
독수리와 사자는 각각 로그란 후작가와 발데크 대공가의 상징.
검은 펠리시아를 말함이고 화려한 보석이란 검성의 제자라는 지위를 의미했다.
'그러니까 펠리시아는 애초에 로그란 후작가의 사람이다? 내가 멋대로 발데크 가문에 데려간 거니 돌려달라고? 낯짝 한번 더럽게 두껍군.'
사람들 대다수는 저 비유를 들은 순간 보석이 얼마나 추가되었건 검 자체는 원래 주인의 것이라 할 터.
지금 후작은 '검성의 제자가 된 펠리시아를 내놓아라'라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
펠리시아가 이때까지 받아온 푸대접을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글쎄요. 독수리가 검을 소중히 했다면 당연히 사자가 도둑이겠지요. 하지만 쓰레기처럼 반쯤 버려둔 물건을 사자가 가져가서 꾸몄는데 도로 내놓으라면 상황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검을 소중히 하건 안 하건 애초에 독수리의 소유였던 물건이오. 주인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가져간 시점에서 사자에게 소유권은 없지."
"검이 과연 원래의 소유주를 좋아할지 의문입니다. 그토록 명검이라면 알아서 주인을 고를 텐데요."
"도구 주제에 멋대로 주인을 고른다는 것 자체가 시건방진 일이지. 검이 뭐라 하든 소유주가 알아서 잘 쓰면 그만이오."
"그렇습니까? 하하하!"
"그렇소이다. 허허허!"
베른하르트 후작과 루시안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불똥이 튀어 올랐다.
어쩌다 보니 두 사람 가운데에 낀 나이젤은 무겁디 무거운 대화에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한참 동안 메마른 웃음만이 울려퍼지는 와중 루시안이 웃음기 섞인 어조로 말했다.
"사실 아주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습니다."
"해결 방법? 그게 무엇이오?"
"지금껏 검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몰랐던 독수리 아닙니까. 적당한 막대기 하나 들고 천에 감싸서 저게 바로 그 검이다,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차피 안 쓰던 검인데 그게 그거지요."
"...!"
"명검은 진즉 가치를 알아본 사자가 잘 써줄 테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게 바로 독수리도 좋고 사자도 좋은 궁극적 해결책 아닙니까?"
후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애초에 가치도 몰랐던 인간이 이제 와 무슨 헛소리냐는 비아냥이었기에.
잠시 후, 후작은 매섭게 루시안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독수리가 그러지 못하겠다면 어쩌시겠소? 기어코 자신의 검을 되찾겠다면? 서로 피범벅이 되더라도 사자와 싸우겠다면 말이오."
루시안은 차갑게 웃으며 후작을 향해 대답했다.
"그럼 독수리가 사자굴로 와야 할 겁니다. 애지중지 검을 품에 끼고 있었다면 사자가 독수리 둥지로 찾아갔겠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지요. 과연 독수리가 사자의 앞마당에서 얼마나 힘을 쓸지 궁금하군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작과 루시안은 서로 동시에 우뚝 멈춰섰다.
이젠 적의를 숨길 생각조차 없는지 후작의 눈에 살기마저 맺혔다.
한참 루시안을 노려보던 베른하르트 후작은 등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곧 볼 수 있겠지."
혼잣말인지 경고인지 모를 소리였다.
후작이 떠나간 뒤 루시안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독수리가 피범벅이 되는 꼴을 볼 수 있다는 건가? 보물도 못 알아본 인간 주제에 욕심하고는."
"고, 공...."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나이젤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루시안을 불렀다.
방금 전 대화를 다 들었는데 루시안의 신분을 짐작하지 못할 리 없었다.
루시안은 별것 아니라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양손을 휘저었다.
"진정하십시오. 저 화 안 났습니다."
"제가... 그러니까... 공께 무례를...."
"화 안 났다고 했잖습니까. 원래 이런 여흥이 다 그런 거지요. 하룻밤 뒤에는 다 잊을 겁니다."
"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잘 놀았습니다."
고개를 연신 숙이는 나이젤의 어깨를 두드린 후 루시안은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정체가 다 들통난 이상 이전처럼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순 없을 테니까.
루시안이 막사에 도착하여 가면을 벗었을 때였다.
"삼공자, 후작을 그리 도발하셔도 괜찮겠습니까? 그 인간 성격상 가만히 있진 않을 텐데요."
지금껏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레이먼이 다가와 속삭였다.
후드를 벗어던진 루시안은 레이먼을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한 가지 물어보지. 정적에게 끌려다니면서 제발 안 건드리기를 바라는 자와 맞을 각오를 마치고 먼저 한 방 먹여주는 자. 경에겐 누가 더 모시는 보람이 있지?"
루시안의 말에 레이먼은 멍하니 눈을 끔뻑이다 이내 짙은 미소를 드러냈다.
그리고는 과장되게 고개를 숙이며 웃음기 섞인 어조로 말했다.
"실로 모시는 보람이 있는 분을 호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43화
후작과 신경전을 벌인 다음 날.
재차 가면을 쓰고 밖으로 나온 루시안은 혀를 찼다.
그나마 있던 귀족들마저 거의 사라진 데다 남아있던 자들은 루시안을 보자마자 도망치기 바빴다.
"쯧, 하루 만에 소문이 쫙 퍼진 모양이군."
"어제 동행했던 그 나이젤이란 작자가 퍼뜨린 걸까요?"
"글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루시안이 생각하기엔 아닐 것 같았다.
전생에서 줄타기의 달인으로 유명하던 나이젤이다.
그런 나이젤이 일부러 루시안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짓을 할까?
동행하는 동안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 하는 걸 눈앞에서 봤는데 말이다.
"그보다는 후작의 탓일 가능성이 크지. 자기 정체를 은근슬쩍 드러내면서 대접받기 바빴으니까. 멀리서 후작과 싸우는 모습을 봤다면 내 정체도 대강 짐작하지 않았겠어?"
"그것도 그렇군요. 그나저나 이리되었으니 영주들의 진솔한 속내는 못 듣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지. 대신 다른 부분에서 이득을 봤으니 그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다른 부분이라니요?"
"여흥을 즐길 사람이 없어졌잖아. 일황자 전하가 과연 이 아무도 없는 파티를 계속하려 할까?"
"아하."
레이먼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가면극은 일황자가 귀족들이 부딪치는 꼴을 보고 싶어 마련한 여흥.
하지만 무대가 있어도 부딪칠 귀족이 없으면 여흥이고 나발이고 성립되질 않는다.
주최자로서는 재미를 잃을 테고, 더 여흥을 이어갈 이유도 사라지리라.
'즐길 거리가 없어진 이상 곧 숨어있는 일황자도 모습을 드러내겠지. 장난질에 계속 어울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선 다행이군.'
지지부진하게 이 같잖은 여흥을 이어갔다면 다른 가주들의 불만이 계속해서 쌓였을 터.
루시안의 목적은 둘째치고 연합군의 사기 측면만 보자면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다음 날 루시안의 막사에 일황자의 전령이 찾아왔다.
"총사령관이신 일황자 전하께서 소집령을 내리셨습니다."
"곧 가겠네."
이틀도 못 참은 건가.
루시안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바로 준비를 마치고 일황자의 막사로 향했다.
다른 막사보다 몇 배나 거대한 막사에는 이미 상당수의 영주와 그 대리인들이 모여 있었다.
자리를 둘러보던 루시안은 문득 가장 상석에 있는 후작과 눈이 마주쳤다.
"...."
"...."
두 사람 사이에서 잠시 매서운 시선이 오갔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던 영주들이 일제히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작이 먼저 시선을 거두는 것과 동시에 루시안도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루시안이 총사령관의 상석 오른편에 앉자 주변이 술렁거렸다.
"정말 저 소년이 대공 전하의 대리인이라고?"
"아니, 새파랗게 어린 나이에 어찌...."
"쉿. 조용히. 들리겠네."
짧은 술렁거림은 빠르게 진정되었으나 사방의 쏟아지는 시선은 여전했다.
특히 베른하르트 후작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노회한 가주가 대리인이라고는 해도 겨우 열여섯의 삼공자와 대등한 위치가 된 셈이었으니까.
다행히 불편한 침묵은 금방 끝났다.
"총사령관이신 일황자 전하께서 입실하십니다!"
시종의 외침과 동시에 막사의 입구가 열리며 백금빛 머리칼과 녹안의 귀공자가 등장했다.
외모 하나만큼은 전설 속에 나오는 용사라고 해도 믿을 정도.
그러나 부루퉁한 표정과 짜증 어린 눈매가 빛나는 외모를 반절은 깎아 먹고 있었다.
'일황자, 클로드 핀 베이 아스트리아.'
현 황제의 총애를 받는 장남이자 이번 연합군의 총사령관.
그러나 루시안의 시선은 일황자 클로드보다 그 뒤에 있는 사람에게 향했다.
일황자보다 키가 크면서도 살짝 허리를 숙여 자신을 숨기려는 듯한 남성.
같은 백금빛 머리칼을 가졌으나 차가운 분위기와 벽안 때문에 오히려 더 군주다운 분위기를 풍기는 자.
'세드릭 핀 베이 아스트리아.'
제국의 이황자이자 황실의 마지막 희망이라 불렸던 이가 바로 그였다.
****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신 일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음."
일황자의 등장에 영주들은 고개를 숙이며 우렁찬 외침을 토해냈다.
그러나 영주들의 인사에도 일황자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앉으시오."
"예!"
일황자가 상석에 올라 말하자 영주들이 다시 착석했다.
느긋하게 총사령관의 자리에 앉은 일황자는 주변을 훑으며 말했다.
"우선 이리 모여줘서 고맙소. 제국은 그대들의 충심을 잊지 않을 것이오."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자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나저나 모처럼 여흥을 마련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은 것 같구려. 겨우 이틀도 되지 않아 사람이 없어질 줄이야. 내 선의가 오히려 불편을 부른 것 같아 미안하오."
그리 말하면서도 일황자의 찡그린 시선은 베른하르트 후작과 루시안을 훑고 지나갔다.
어디까지나 사죄를 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무대를 망친 두 사람에게 원망을 드러낸 것이다.
베른하르트 후작은 재빠르게 일황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제가 그만 부주의하여 정체를 알리고 말았으니, 이 모든 게 제 탓입니다."
부주의는 개뿔,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었으면서.
후작의 처세에 헛웃음이 다 나왔으나 여기서 자신만 쏙 빠져나가도 그림이 안 좋은 법.
"어찌 후작께 모든 잘못이 있겠습니까? 저 역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일황자 전하께 사죄를 청할 뿐입니다."
"흐으음, 그렇소?"
일황자는 고개를 숙인 후작과 루시안을 번갈아 보다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특별히 용서해준다는 태도였다.
"뭐, 사람인 이상 실수할 때도 있는 법이지. 어차피 가벼운 여흥에 불과한 일이었으니 넘어갑시다."
"일황자 전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그건 그렇고, 이번 반란에 대해 그대들의 의견을 듣고 싶소만. 크레펠트를 어찌하면 좋겠소?"
사죄를 받고 만족한 일황자는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진압 방식부터 차후 크레펠트의 처우까지 포함된 광범위한 질문이었다.
가장 먼저 나선 건 베른하르트 후작이었다.
"가능한 한 최대한 빠르게, 속전속결로 끝낸 후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풀라? 감히 제국에 반기를 든 놈들을 용서해주자는 거요?"
후작의 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일황자가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후작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분명 반란이 진압되면 크레펠트는 본인들이 의도한 일이 아니라며 반역의 희생양을 내세울 것인즉, 희생양의 처형으로 끝내고 돌아가야 합니다."
"대체 이유가 뭐요? 반란 분자 놈들을 왜 용서해야 하느냔 말이오!"
"제국의 관대함 자체가 제국이 가진 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뚱딴지같은 소리에 일황자가 설명해보라는 듯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후작은 미리 준비해온 것처럼 막힘없이 이유를 풀어냈다.
"최근 제국은 여러 외침과 내부의 우환으로 골치를 썩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크레펠트 따위가 반란을 성공시킬 만큼 약해지지도 않았지요. 놈들도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소? 크레펠트가 실패할 걸 알면서도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리요?"
"아마 놈들은 이 반란 자체를 일종의 시험대로 삼은 것이겠지요. 언젠가 일으킬 '진짜 반란'을 위한 시험대 말입니다."
제국이 반란을 진압할 힘이 있는지, 있다면 얼마나 걸리는지, 전성기에 비해서 얼마나 약해졌는지.
상대를 파악하고 나면 자연스레 목표치도 보일 테니 크레펠트의 진정한 목적은 거기에 있으리라.
"물론 반란이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사태인 만큼 놈들의 변명도 빈틈없을 겁니다. 분명 왕이 유폐되고 다른 왕족이 전권을 휘둘렀다느니 뭐니 하는 식으로 나오겠지요."
"그러니 우린 그 완벽한 변명에 넘어가 줘야 한다는 거요?"
"속내가 빤히 보이는 변명이라도 넘어가 줘야 합니다. 그 자체가 언제 다시 반란을 일으켜도 진압할 수 있다는 여유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한 일황자를 향해 후작이 재차 차분히 설명했다.
속전속결로 반란이 진압되면 분명 제국의 힘은 증명될 터.
하지만 바로 지나친 처벌이 이어진다면 '다시 반란이 일어나면 버티기 힘드니 이참에 싹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
반란을 막으려는 조치가 오히려 제국을 위협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거다.
"그러나 반대로 뻔한 변명을 넘어가 준다면 크레펠트 따위야 얼마든지 진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보이게 됩니다. 반란 분자들이 과연 제국의 자비를 보고도 다시 대들 엄두를 낼 수 있을까요?"
"흠, 일리 있는 소리요."
어느새 일황자는 눈을 반짝이며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제국의 힘과 자비를 동시에 보여주고 너희 따윈 별거 아니라는 여유도 과시한다.
자신의 입맛에 딱 맞는 작전이 아닌가.
후작의 언변에 넘어간 일황자가 냉큼 제시한 방침을 택하려 한 순간.
"지나치게 희망적인 관측입니다. 후작께서는 너무 상황을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군요."
루시안의 차가운 목소리가 달아올랐던 열기를 확 꺼버렸다.
****
막사 안의 공기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무리 루시안이 지그문트 대공의 대리라고는 해도 후계자조차 아닌 아들 중 하나.
격으로 따지나 연륜으로 따지나 베른하르트 후작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리 대놓고 반대 의견을 내놓는다?
새파랗게 어린 루시안보다 식견이 짧다는 식의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지나치게 희망적 관측이라. 어째 내가 현실을 못 보고 듣기 좋은 소리나 한다는 이야기로 들리는군."
후작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루시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제처럼 가면을 썼다면 모를까 서로 신분을 드러낸 상황.
굳이 공대를 써가며 상대를 높여줄 이유가 없었다.
"그리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만약의 사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만약의 사태?"
"속전속결로 적을 진압하고 자비를 베풀어 아량과 여유를 보인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완벽하겠군요.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답니까?"
"자넨 지금 여기 있는 이들 전체를 모욕하는 건가? 일개 속국의 군대 따위에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패배할 거라고?"
"정신론을 이야기하자는 게 아닙니다. 현실적인 근거를 말씀해주시지요."
루시안의 말에 후작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실전 경험도 거의 없는 놈이 감히 자신을 현실 못 보는 몽상가로 몰다니.
"좋아! 현실적인 근거라고 했나? 원한다면 얼마든지 대주지!"
후작은 손가락 세 개를 펴고 하나하나 접어가며 말했다.
"첫째, 병력의 수가 명백히 우위에 있네. 크레펠트가 동부 최대의 속국이라 하나 제국 전역에서 모여든 우리와 비할 바가 아니지. 둘째, 병력의 질도 우리가 우위에 있네. 여기 있는 전원이 상비군이고 기사들마저 다수 있으니까. 그리고 셋째. 적의 지리적 우위도 거의 없네. 이미 제국은 한참 전에 크레펠트 전역을 세세히 지도로 작성해 놓았으니까! 더 이유가 필요한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더 이야기 해주겠다는 듯 후작이 루시안을 깔아보았다.
하지만 루시안은 고개를 저으며 후작을 향해 말했다.
"모두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후작께서는 미리 한 가지 전제를 깔고 전쟁의 승리를 논하시는 것 같군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대협정."
수백 년 넘게 지켜져 온 전쟁의 불문율이자 최악의 사태를 막는 마지막 보루.
"만약 적들에게 대협정을 준수할 생각이 없다면 어쩌시겠습니까?"
44화
대협정.
전장에서 지켜야 할 규칙이 제시된 협정이지만, 실제로 맺어진 공식 협정이나 성문법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제국의 시조이자 초대 황제가 발표한 권고 사항에 불과할 뿐.
그러나 이 대협정이 가지는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황제 본인은 끝까지 대협정을 지켰으니까.'
대협정이라고는 해도 담긴 내용은 별거 아니다.
독을 사용하거나 암살을 시도하지 말 것, 거짓 항복하고 뒤통수치지 말 것, 한번 맺은 조약은 충실히 이행할 것 등등.
항목은 이것저것 많지만 결국 전쟁 상황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신뢰만은 지키자는 게 주 내용이다.
이런 최소한의 선마저 지키지 않으면 전쟁이 한없이 끔찍해지니까.
'문제는 어디까지나 이 모든 게 권고 사항에 불과할 뿐이라는 거지.'
아무리 엄청난 무게가 있는 규칙도 작정하고 어기려 하면 답이 없는 법.
굳이 대협정을 성문법으로 남기지 않은 것 역시 그 때문이다.
상대가 안 지키겠다는데 법전 들이밀어서 뭘 어쩌겠는가?
"아무리 병력과 질이 앞서고 상대의 지형에 대한 이해가 있다 한들 우리가 향할 곳은 크레펠트의 한가운데입니다. 놈들이 대협정을 어기고 가진 모든 걸 이용하는 순간 속전속결은커녕 끔찍한 난전이 시작될 겁니다."
"크레펠트가 대협정을 어긴다? 웃기는 소리군. 나더러 지나치게 낙관적이라 하더니 정작 현실을 모르는 건 그대인 모양이야."
베른하르트 후작은 코웃음을 치며 루시안을 깔아보았다.
대협정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나 하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이보게, 왜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대협정이 지켜지는지 아나? 어느 한쪽이 어기는 순간 지옥도가 펼쳐지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 지옥도는 강자보다 약자에게 현저히 나타나지."
분명 수단을 안 가린다면 약자도 강자를 상대로 저항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단기적인 저항에 불과하다.
똑같이 더러운 수단을 쓸 경우 강자 측이 약자 측보다 훨씬 유리하니까.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의 가짓수가 다른 데다 사방팔방에서 공격이 들어오니 약자가 무슨 수로 버티겠는가?
"그뿐만이 아니야. 대협정은 승자가 패자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게 만드는 억제력이기도 하네. 상대가 대협정을 철저히 지켰다면 승자 역시 패자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대협정을 지켰다는 건 더러운 수단을 쓸 수 있음에도 끝내 인간의 도리를 다했다는 증거.
따라서 아무리 승자라도 대협정을 준수한 패자에게는 함부로 굴 수 없고 최대한 관대한 처분을 내려야 했다.
처형당할 만한 죄라면 재산을 몰수하는 것으로, 멸족을 당할 만한 죄라면 당사자만 처형하고 끝내는 것으로.
이런 불문율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엄격한 처분을 내리면 제국 전체에서 백안시당하기 십상이었다.
"대협정을 어긴다는 건 최소한의 보호조차 포기해버린다는 소리. 그런데 약자인 크레펠트가 겨우 한 번 이기자고 그따위 짓을 벌일 리가 있나.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이로군."
"패배해도 제국에서는 다시 크레펠트를 향해 진격할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까?"
"없다고 보나? 겨우 반란 진압 한 번 실패했다고 흔들릴 제국이 아닐세."
한 번은 대협정을 어기고 연합군을 물리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 보호조치를 못 받고 두 번째, 세 번째 연합군에 의해 찌부러질 터.
심지어 그때는 아무런 보호도 못 받을 테니 생각이 있는 존재라면 그럴 일이 없다는 게 후작의 논지였다.
일황자 역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야기는 끝난 것 같군. 더 할 말 있나? 그... 대공의 대리인인...."
"형님, 루시안 공입니다."
"아, 그래. 루시안 공. 반박할 말이 없다면 여기서 군의를 끝내고 싶네만."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일황자가 뒤에 있던 이황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후작의 말을 부정한다는 건 제국의 힘을 부정한다는 거나 마찬가지.
그러나 루시안은 기어코 고개를 저었다.
"분명 제국은 한 번의 실패로 꺾이지 않겠지요. 하지만 사방에서 도전이 들어온다면 과연 크레펠트로 다시 진격할 힘이 있겠습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대협정을 어겼든, 어기지 않았던 한 번이라도 패배하면 사방에서 반란이 연이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크레펠트 측에서도 굳이 대협정을 준수할 이유가 없지요."
어찌 됐건 한 번만 제국군을 물리치면 그다음부터는 독립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에 반해 제국군은 단 한 번의 패배로 수렁에 빠지게 된다.
반란을 진압하기는커녕 다시 연합군을 보낼 여유도 없어질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후작께서는 '완벽한 변명'이라고 하셨는데, 세상에 그런 변명이 어디 있겠습니까? 반란이란 결국 왕조와 주 권력층의 목을 거는 일. 겨우 제국의 힘 하나 가늠해보자고 반란을 일으킨다는 게 말이 안 되지요."
"즉, 자기들 목이 걸린 이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다? 지나치게 비관적이군."
"후작께서는 여전히 낙관적이시고 말입니다. 모든 게 제국에게 유리한 상황을 전제로 깔아두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자네는 모든 게 불리하게 돌아갈 때의 상황을 전제로 깔아두는 중이지."
"전 언제나 최악의 사태를 염두에 둬야 한다고 배웠습니다만."
"만일을 대비하는 것과 겁을 집어먹어 못 나아가는 건 다르네만."
"그만, 그만, 그만!"
탕탕탕
일황자는 의자의 팔걸이를 강하게 후려쳤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일황자가 루시안과 후작을 번갈아 쏘아보았다.
"내가 방침을 정하라고 했지 싸우라고 했소? 그대들 앞에 내가 있음을 잊지 마시오."
"송구합니다."
"부디 용서를."
루시안과 후작이 일제히 일황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일황자는 담담히 사과를 받으면서도 루시안을 한 번 더 쏘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대는 말을 조심하시오. 제국은 그리 약하지 않소."
"듣기 거슬리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전쟁이란 국가의 중대사인 만큼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그렇소? 참 대단한 충심이로군."
순순히 굽히지 않는 루시안을 향해 일황자가 비아냥을 날렸다.
하지만 루시안이 꿈쩍도 하지 않자 혀를 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침은 두 가지가 나온 것 같군. 베른하르트 후작의 속전속결과 루시안 공의... 안전제일. 그대들은 어느 쪽이 더 나은 것 같소?"
"...."
일황자의 말에 영주들은 후작과 루시안의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
그러나 침묵은 아주 잠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히 한쪽으로 기울어진 의견이 튀어나왔다.
"후작 각하의 의견이 조금 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루시안 공의 생각도 타당하긴 하나 아무래도 연륜이...."
"대협정을 어기고 나서 방침을 바꿔도 늦지 않겠지요."
본인을 지지하는 의견이 쏟아지자 베른하르트 후작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루시안을 바라봤다.
일황자 역시 이제 어쩔 거냐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되물었다.
"아무래도 후작의 의견에 더 힘이 실리는 것 같소만."
"저는 어디까지나 신하로서 조언을 드릴 뿐입니다. 결정하시는 건 일황자 전하시지요."
"그럼 대세를 따라 속전속결의 방침을 채택해도 되겠군."
"전하의 뜻이 그러시다면야."
루시안이 담담하게 수긍하자 일황자는 히죽 웃고는 소리쳤다.
"방침은 정해졌소. 빠르게 크레펠트의 왕도까지 진격하여 놈들에게 제국의 힘을 보여줍시다!"
****
군의를 마치고 자신의 막사로 향하는 루시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조금은 있을 줄 알았건만 설마 한 명도 없을 줄이야.
"한심하구만."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루시안의 한숨에 레이먼이 다가와 위로를 건넸다.
비록 군의에는 참가할 수 없었지만, 호위로서 막사 가까이 있던 터라 안에 있던 내용은 다 들은 레이먼이었다.
"삼공자께서 내신 전략도 일리는 있지만, 다른 이들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급진적인 내용이었습니다. 후작이 내놓은 정석에 끌리는 것도 어쩔 수 없지요."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정석은 무슨 정석?"
"속전속결 말입니다. 전쟁이 빨리 끝날수록 좋다는 건 상식 아닙니까."
레이먼의 말에 루시안은 눈을 끔뻑이다 이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어린애를 가르치는 것처럼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 반란 진압의 전비는 누가 대는지 알아?"
"베른하르트 후작 아닙니까? 삼공자에게 걸린 일 때문에 덤터기를 썼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럼 전쟁이 빨리 끝날수록 돈을 아끼는 건 누구지?"
"...!"
루시안의 지적에 레이먼은 두 눈이 번쩍 떠지는 기분이었다.
정석을 말하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자기 돈을 아끼기 위해 내놓은 방법이었던 건가?
"그럼 자비를 베풀어 제국의 여유를 보이라는 건 무슨 의도였습니까?"
"크레펠트의 왕가가 사라지면 혼란이 뒤따르겠지. 본격적인 전쟁은 없더라도 치안 유지 때문에 군을 해산하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져. 그만큼 후작은 돈을 많이 내게 될 테고."
"다른 영주들이 후작의 의견을 지지한 건...."
"대리인이라지만 후계자조차 아닌 일개 삼공자와 어엿한 한 가문의 주인. 두 사람이 싸우면 보통 어느 편을 들까? 한 가문이 압도적이지 않은 이상 대개 후자겠지?"
레이먼은 멍하니 루시안을 쳐다보았다.
군의에 처음 참여하는 루시안이라 흐름을 못 읽고 기세에 밀린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정작 흐름을 못 읽은 건 레이먼 본인이 아닌가.
"사실 후작의 속셈이야 어찌 됐건 일황자에겐 더없이 마음에 드는 방침이었겠지.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건 지휘관의 능력을 증명하는 거나 마찬가지. 이참에 명성을 올리고 싶었을 거야."
"그럼... 이번 방침 자체가 순전히 정치적 이유로 정해진 겁니까?"
"뭐, 내가 제시한 의견이 허무맹랑하게 들리기도 했겠지. 영주들 입장에서는 후작의 방침이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왔을걸."
이해는 한다.
자그마치 수백 년 동안 지켜진 대협정이다.
이제 와 깨진다는 상상 자체가 떠오르질 않겠지.
'하지만 진짜로 이번 전쟁에서 대협정이 깨지는 게 문제란 말이지.'
전생에서 크레펠트의 반란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크레펠트가 기어코 제국에 맞서 승리를 거둬서도, 후일 분노한 제국에 의해 초토화되어서도 아니다.
지금껏 당연히 지켜야 할 규약처럼 여겨지던 대협정을 처음으로 철저하게 파기했기 때문이다.
난세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느냐를 묻는다면 모두가 크레펠트의 반란을 지목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몇 년 후에는 대협정을 지키는 게 바보로 여겨지게 되었으니.'
루시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어찌 보면 미래에 펼쳐지는 모든 참극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시점.
처음에는 이왕 이 자리에 섰으니 가능한 한 연합군의 피해를 최소화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후작의 방침을 채택해버렸으니 루시안이 나설 기회는 없으리라.
기껏해야 데리고 온 병력의 안전을 챙기는 정도가 고작일 터.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기회는 줄 만큼 줬다.
제 욕심 때문에 눈앞의 기회를 걷어찬 이상 대가를 치르는 수밖에.
무엇보다 루시안은 이번 일로 손해 볼 게 없었다.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의견은 괴짜로 여겨지기 딱 좋지만, 그 의견이 맞아 떨어진 순간부터 괴짜가 아닌 선지자가 되는 법.
'내 주장대로 되었을 때 다들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지는군.'
루시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방금 전 군의를 나누었던 막사를 돌아보았다.
45화
"그럼 군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다음 날, 루시안은 재차 일황자의 소집령에 불려갔다.
어제는 단순히 방침만 정하고 해산했기 때문이었다.
방침이 정해졌으니 이제는 본격적인 작전을 짜야 할 때였다.
"지도를 봐주십시오. 보시다시피 첫 요새로 가는 길목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동안은 적의 공격을 걱정하지 않고 빠르게 진격할 수 있겠지요."
일황자의 측근인 위르겐이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가는 길은 더없이 평탄했다.
넓은 강도, 매복하기 쉬운 숲도, 오르기 힘든 산악지대조차 없었다.
국경지대에 외치한 시골 마을만이 드문드문 있을 뿐.
"옛날부터 크레펠트 외곽은 지리적 이점이 없는 평야였기에 요새 하나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방어가 어려워 금방 뺏기기 쉽고 어렵지 않게 우회할 수 있는 탓이죠."
"사실상 방어를 포기한 땅이라는 소리군."
"그렇습니다. 실질적인 저항은 첫 요새인 보디엄에 도착한 후부터 시작될 겁니다. 빠르게 나아가면 닷새 정도 걸리겠지요."
국경지대와 달리 보디엄은 천혜의 요새라 할 수 있는 성이었다.
루시안이 이전에 파견되었던 보른홀름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
공성 병기들을 여러 대 동원해도 함락이 쉽지 않으리라.
하지만 마침 연합군에는 왕실에서 데려온 비밀 병기가 있었다.
"요새를 공격할 때는 황실 마법사이신 블라스커 공께서 다섯 제자와 함께 나서주실 겁니다. 아무리 철옹성이라도 블라스커 공의 마법에는 버티지 못하겠지요."
"음, 나 혼자라면 힘들겠소만 제자들과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하오."
위르겐의 말에 답한 것은 꼬장꼬장한 인상의 늙은 마법사였다.
몸에 걸친 적홍색 로브와 치켜 올라간 눈썹이 그의 성격을 말해주는 듯했다.
루시안은 블라스커라는 이름에 눈을 빛내며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블라스커 린베일. 그 유명하신 화염학파의 수장을 직접 눈으로 볼 줄이야.'
얼마 안 되는 제국 공인 학파의 수장이자 마법사임에도 드물게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있었던 별종.
황도 함락 직전에 목숨을 바쳐 2천에 달하는 병력을 잿가루로 만들고 황제를 구했다는 대마법사.
루시안이 전장에서 용병으로 활약할 때는 이미 반쯤 전설로 여겨지던 인간이었다.
'확실히 소문 중 반만 사실이더라도 성벽을 부수는 건 어렵지 않겠지. 그만한 대마법을 얼마나 많이, 자주 쓸 수 있는가는 모르겠지만.'
추측이나 아마 한두 번 쓰고 나면 한동안은 쓸 수 없을 것이다.
엄청난 위력의 마법을 펑펑 날려댈 수 있다면 세상은 이미 마법사가 지배했을 테니까.
"물론 파괴된 성은 방어 기능을 잃겠으나 반란 진압이 목적인 이상 굳이 점령할 필요는 없겠지요."
오히려 적이 도로 점령하여 퇴각로를 막지 못하도록 철저히 부수는 게 나으리라.
길목이 하나인 만큼 여차할 때 막혔다가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으니.
"보디엄에서 크레펠트의 수도까지 가는 경로는 셋으로 나누어집니다만, 그 부분은 보디엄을 점령한 후에 상황을 보고 정하는 게 낫겠지요. 적들이 어찌 나올지 아직은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말을 마친 위르겐은 달리 질문이 없냐는 듯 영주들을 둘러보았다.
주변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오지 않자 가만히 있던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보디엄까지 가는 길에 강이 없는 것 같은데, 식수를 구할 만한 장소가 달리 있습니까?"
****
병참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식수다.
사람은 물 없이 살 수 없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가장 보급이 힘든 것도 식수였다.
'의외로 물은 소모량에 비례해 부피도 많이 차지하는 데다 무게까지 상당하지. 장기간 보관하기도 힘들고.'
이런 이유로 군대의 식수 전체를 일일이 옮겨서 보급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도 식수 문제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 건 인간이 물 근처에서 살기 때문이다.
요새를 점령하든 마을을 점령하든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물이 있기 마련.
누군가가 악의를 가지고 수원을 망가뜨리지만 않으면 물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래, 의도적으로 망가뜨리지만 않으면.'
강이라면 그럴 걱정은 없다.
국가 단위로 몇 년간 움직이지 않는 이상 파괴하기도, 오염시키기도 불가능에 가까우니.
그러나 우물이나 개울 수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위르겐은 루시안의 질문에 머뭇거리며 답했다.
"지도에 따르면 도중에 마을이 셋 있습니다. 전부 우물이 있는 마을들이고, 두 번째 마을 근처에는 작은 개울도 있습니다. 물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으음."
최악의 답변에 루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마음만 먹으면 죄다 순식간에 엎어버릴 수 있는 곳들 아닌가.
하지만 베른하르트 후작은 루시안의 찡그린 표정에 코웃음을 쳤다.
"식수를 오염시키는 행위는 대협정의 위반일세."
"여전히 크레펠트가 대협정을 지킬 거라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자네는 그 반대일 테고. 안타깝지만 자네 의견은 기각되었네. 기각된 의견을 전제로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옳은 말씀이오."
일황자가 후작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추임새를 넣었다.
그리고는 바로 차가운 표정으로 루시안을 쳐다보았다.
"적들은 대협정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게 어제 정해진 방침의 전제요. 이미 기각된 주장을 고집하는 건 그만두었으면 좋겠군."
"죄송합니다."
루시안은 순순히 사과하고 물러섰다.
마지막 경고도 무시했으니 이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자업자득이었다.
이후로는 문제가 생겨도 루시안을 원망하진 못하리라.
더 이상 다른 의견이 나오지 않자 일황자가 일어서서 영주들을 향해 소리쳤다.
"달리 의견이 없다면 군의는 이걸로 마치겠소. 최대한 빠르게 보디엄까지 진격하여 성을 함락시킵시다!"
****
연합군이란 아무리 정예들만 모아도 따로 놀 수밖에 없다.
소속이 다르고 훈련받은 체계가 다르기에 섞어놓는 순간 뒤죽박죽이 되는 탓이다.
따라서 출진 전에 어느 위치를 담당할 것인지 미리 정해두어야 했다.
"라크모 백작과 몬텔 자작은 좌익을, 브랜 자작과 사이본 백작은 우익을, 그리고 다른 분들께서는...."
본격적인 진격 전에 위르겐은 정해둔 각 군이 담당할 위치를 알렸다.
영주 개개인의 힘과 정치적 위신, 가문 간의 관계까지 복잡하게 고려한 배치였다.
"루시안 공께서는 후작 각하와 함께 선봉의 좌우를 맡아주십시오. 일황자 전하께서는 두 분 뒤에서 친위대를 이끄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루시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도 먼저 적을 마주하지만, 동시에 공을 세우기도 가장 쉬운 게 선봉이다.
모두가 탐을 내는 위치이니만큼 후작과 루시안이 아니면 적임자가 없었다.
막 루시안이 군을 이끌고 배치 장소로 이동하려던 순간이었다.
"원하신다면 루시안 공은 뒤에 배치해드리겠소. 여전히 크레펠트가 대협정을 어길까 걱정하시는 것 같으니 말이오."
"...!"
뒤에서 지켜보던 일황자의 노골적인 비아냥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사실상 '무서우면 뒤에서 얌전히 지켜나 봐라'라는 소리였으니까.
베른하르트 후작마저 이번만큼은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전장에 나가는 데 가장 강력한 우군을 저리 모욕하다니!
모두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루시안을 쳐다봤지만, 루시안은 오히려 피식 웃었다.
"괜찮습니다. 전 걱정이 많을 뿐 용기가 없는 게 아니니까요. 사실 발데크 가문 사람들은 너무 용감무쌍해서 탈이지요. 나중에 전하를 놀라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군요."
"...그렇소? 얼마나 용감한지 나중에 한번 봅시다."
대담하게 루시안이 모욕을 받자 넘기자 일황자는 재미없다는 듯 등을 돌려 떠나갔다.
그 모습에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특히 가장 앞에 있던 위르겐은 루시안의 대처에 감동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루시안 공,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찌 보답을 드려야 할지...."
"한 게 없는데 무슨 감사입니까? 슬슬 출진이 다가오고 있으니 전 병력을 배치하러 가보겠습니다."
"허어."
웃으며 돌아서는 루시안의 모습에 위르겐의 입에서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새파란 애송이라면 광분하고도 남고 노회한 귀족이어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만한 모욕이었거늘.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때는 과장이 들어갔다고 생각했건만, 지금 다시 보니 오히려 축소된 게 아닌가 싶구나.'
저만한 배포를 가졌다면 그저 그런 인물로 끝나지는 않을 터.
이번 반란 진압을 끝내고 귀환하면 반드시 루시안의 중요성을 황제에게 알릴 생각이었다.
'빌어먹을. 사자 새끼가 벌써 발톱에 날을 세울 줄이야.'
위르겐이 순수한 경탄을 내뱉는 와중 베른하르트 후작은 얼굴을 구겼다.
위세랑 입담만 좋은 애송이인 줄 알았더니 저 나이에 심계도 만만찮은 수준이 아닌가.
저대로 성장하면 로그란 후작가의 앞날을 가로막을 거대한 벽이 될 게 뻔했다.
'지그문트, 그놈은 자식복을 타고 났군. 누구는 고만고만한 놈들 사이에서 골라야 하는데 말이야.'
사실 고만고만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형편없는 놈도 끼어있지만 유력한 가주 후보로 꼽히는 녀석들은 제법 싹수가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평소엔 괜찮게 생각했던 자식들조차 루시안을 보고 나니 영 눈에 차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루시안이 대공이 된다면 제대로 상대할 놈이 없었으니까.
"후작가의 앞날이 걱정이군."
베른하르트 후작은 짧은 혼잣말과 함께 지정된 위치로 향했다.
이번 반란 진압이 끝나고 나면 자식 놈들의 성장을 위해 시련이라도 내려야 할지 고민이었다.
****
진군을 시작한 지 이틀 만에 연합군은 목적지이던 첫 번째 마을에 도착했다.
국경지대에 가까웠지만 그만큼 정부의 통제력이 느슨하다는 점에 매력을 느낀 건지 마을은 제법 컸다.
군대가 나타나기 무섭게 마을의 촌장은 주민들과 함께 나와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어, 어서 오십시오! 원하시는 게 무엇이신지 말씀만 해주시면 전부 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병사들의 약탈만큼은...!"
약탈은 대협정에 포함되지 않았기에 전쟁 중 종종 일어나곤 했다.
귀족들이 평민의 목숨엔 별 관심이 없는 데다 약탈을 통한 보급은 때로 선택이 아닌 필수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군대가 주둔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상 마을 사람들로서는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건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애초에 이런 작은 마을에서 가져갈 게 뭐가 있다고."
일황자는 그런 촌장과 주민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용병들이나 오합지졸이면 모를까 각 가문의 최정예들이 이런 마을에서 뭘 털어가겠나.
약탈품보다 보급품이 월등히 좋은 데다 털어봤자 봉급의 한 줌도 안 될 텐데.
"됐으니 병사들 대접이나 제대로 하도록. 너희들이 무례를 범하지 않는다면 하루만 묵고 바로 떠날 테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촌장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마을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이것저것 시키기 시작했다.
집을 비워서 숙소를 마련하고, 식수로 쓸 물을 뜨고, 그나마 반반한 여자들을 한곳에 모으는 등등.
빠릿빠릿한 촌장의 일처리에 만족한 영주들이 병사들을 쉬게 하려 했을 때였다.
"이봐, 촌장. 뭣 좀 물어보지."
루시안이 미묘한 표정으로 촌장을 불렀다.
바쁘게 움직이던 촌장은 기겁하여 냉큼 무릎을 꿇었다.
"예엡! 무엇이 궁금하신지요, 나리?"
"이 마을에 애들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거지? 보이는 마을 사람들이 죄다 성인인 것 같은데."
"애, 애들 말씀입니까?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에 피신을 보냈습니다만."
"피신이라. 어디로?"
"보디엄으로 보냈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안전한 곳이기에...."
촌장의 대답에 루시안이 차갑게 웃었다.
"당신, 거짓말이 어설프구만."
46화
"거, 거짓말이라니! 제가 어찌 감히 나리께...! 제,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루시안의 말에 촌장은 사색이 되어 엎어졌다.
누가 보기에도 트집이 잡힐까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루시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 애들만 피신시키는 건 드물지 않지. 터전을 떠나는 건 쉽지 않지만 만일을 대비해 애들만이라도 살려야 하니까."
"그렇습니다! 저희들도 그래서...!"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유가 있거나 다른 마을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 얘기고. 보통은 마을을 두고 떠나거나 아니면 전부 남아있거나 둘 중 하나야. 왜인지 아나?"
"예, 예?"
"가족을 피신시킨다는 것 자체가 먹고살 만한 사람들이나 하는 발상이니까. 이런 벽촌에서는 보통 피신이고 나발이고 하루하루 살아남는 데 바쁘거든."
벌벌 떨던 촌장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의식적으로 떨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루시안은 마을 사람들을 재차 쭉 둘러보았다.
"뭣보다 애들이니 어른이니 하는 건 도시나 부유한 마을에서 통하는 구분법. 시골에서는 애고 나발이고 당장 일부터 시켜. 똥오줌을 못 가리는 나이가 아니면 무조건 장정 취급이고 결혼하는 나이도 빠르지."
"...."
"그러니 적어도 열세 살을 넘겼다면 피신하는 나이가 아니라 여기서 우릴 접대하는 어른 중 하나에 속해야 한단 말이야. 그런데 여긴 암만 봐도...."
잠시 말을 멈춘 루시안이 차갑게 웃으며 내뱉었다.
"죄다 스물 이상으로 보이는군. 참 이상해. 열세 살 새신랑은 없는 건가? 이런 벽촌에서 그 나이면 맹수가 나왔을 때 사냥에 끌고 갈만한 어른인데."
루시안의 말이 끝나자 사방에 침묵이 맴돌았다.
시골의 생활상을 모르는 영주와 기사들은 뭐라 할 말이 없어 눈치만 살피었다.
그나마 벽촌 출신인 병사 몇몇이 생각해 보니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촌장의 대답만을 기다리는 와중이었다.
"허허."
촌장의 입에서 대답 대신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지금껏 순박하던 눈동자가 날카롭게 바뀌며 살기를 띠었다.
푸확
"크헉!"
순간, 번쩍이는 빛과 함께 촌장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어느새 잘려나간 팔에서는 피가 철철 쏟아지는 중이었다.
단검을 들고 루시안에게 달려들었다가 레이먼에 의해 잘린 것이다.
레이먼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눈을 치켜떴다.
"버러지 놈이 어디서 감히!"
"죽여라!"
촌장, 아니 촌장으로 위장한 암살자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순박한 인상의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단검을 꺼내 들고 달려들었다.
급변한 마을 사람들의 행동에 연합군은 당황했으나 곧 냉철히 대처하기 시작했다.
"적이다! 전원 거창! 일제히 찔러!"
"방패로 후려쳐라! 넘어지면 즉시 사살해!"
암살자들은 요란하게 날뛰었으나 별 피해를 주지 못하고 하나둘 쓰러졌다.
아직 쉬기 전이라 멀쩡히 진형을 유지하고 있는 군대.
그것도 전원 상비군 출신의 정예병이니 일개 암살자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푸푹
"꺼억!"
촌장을 제외한 마지막 암살자의 몸에 다섯 개의 창이 박혀 들어갔다.
암살자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모든 암살자가 정리되자 팔이 잘린 촌장은 악귀 같은 얼굴로 웃었다.
"푸흐흐흐. 설마 백전노장도 아니고 이런 애송이한테 들킬 줄이야."
"웃어? 지금 네놈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는 있느냐!"
"물론 잘 알고 있지. 케케묵은 대협정의 파기다.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 아닌가?"
"이런 미친놈들!"
위르겐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정녕 대협정의 파기가 무슨 뜻인지 알고 이런 짓을 벌이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정작 촌장의 얼굴은 더없이 후련했다.
"그래, 그놈의 잘나신 대협정. 목을 자르고 배를 찌르는 대신 뺨을 때리고 발로 걷어차자는 약속이었지. 참으로 역겨웠건만 드디어 사라졌구나."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대협정의 가장 큰 수혜자는 입은 건 네놈들이었다!"
"아니! 네놈들을 위해 만든 법이지!"
촌장이 위르겐을 노려보며 일갈을 내뱉었다.
위르겐은 물론 다른 영주들마저 흠칫할 정도의 기백이었다.
"대협정 때문에 우린 한 번도 칼을 든 적이 없다! 네놈들에게 맞춰 항상 주먹을 들어야 했고, 몇 배나 덩치가 큰 제국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았지! 죽지 않을 만큼 밟히고 걷어차이는 삶을 네놈들이 아느냐!?"
푸확
잘린 팔의 절단면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출혈을 막기 위해 가져다 댄 손을 오히려 움켜쥔 탓이었다.
하지만 촌장은 고통도 못 느끼는 건지 더욱더 크게 소리쳤다.
"속국이란 이유만으로 크레펠트의 모든 건 제국보다 열등하게 취급되었다! 물건도, 사람도, 심지어 귀족과 왕조차도! 제국의 거지가 당연하다는 듯 크레펠트의 농민을 자기 아래로 보고, 일개 자작이 속국 출신이란 이유만으로 후작을 무시하지! 그런 억압 속에서 우린 꿈틀거릴 엄두조차 못 냈다!"
안 그래도 평탄한 국토에 날씨까지 온난해서 전쟁의 지리적 이점이 거의 없는 크레펠트다.
대협정을 준수하면서 제국과 싸워 이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서 한 번 이기자고 더러운 수단을 쓸 수도 없었다.
처음 한두 번은 몰라도 제국이 몇 번이고 다시 쳐들어와 크레펠트를 멸할 게 뻔했으니까.
"기나긴 영욕의 세월, 우리는 참고 또 참았다. 가슴 속에 있는 비수를 꺼내지도 못하고 그저 날카롭게 갈아만 왔지. 하지만 이젠 아니야."
광기 섞인 웃음을 터트리며 촌장이 일황자를 쏘아보았다.
살기가 줄줄 흘러나오는 눈빛에 일황자는 흠칫하며 무심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단 한 번의 승리면 족하다. 제국이 이전만 못하다는 걸 증명하면 족하다. 네놈들의 업보는 쌓일 대로 쌓였고, 수많은 이들이 네놈들의 멸망을 바라지. 그런데도 참고 있는 건 오직 확신이 없어서일 뿐."
"...그래서 대협정을 파기했다는 거냐? 겨우 단 한 번의 승리를 얻기 위해 크레펠트를 불태우겠다고?"
"글쎄. 과연 이번 전쟁이 끝나고도 네놈들에게 그럴 여력이 있을지 의문이군. 아무리 큰 손바닥을 가지고 있어도 인간이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
말을 마친 촌장이 웃음을 거두고 품에서 또다른 단검을 꺼내들었다.
레이먼은 다급히 루시안의 앞을 가로막았으나 단검은 촌장 본인의 목에 겨누어졌다.
"잘해봐라. 네놈들의 지옥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푸확
단검이 옆으로 그어지는 것과 동시에 베인 목에서 피가 쏟아졌다.
촌장은 만족한 듯한 미소와 함께 자신이 만든 피 웅덩이에 얼굴을 처박았다.
"...."
"...."
모든 게 끝났음에도 누구 하나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느낀 탓이었다.
한참 동안 이어진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루시안이었다.
"일단, 식수부터 확인합시다."
"...그리 하세."
베른하르트 후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안의 걱정을 비웃는 사람은 이제 누구 하나 없었다.
****
연합군은 즉시 군의관을 불러 우물이 오염되지 않았는지 확인해보았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였으나 만의 하나를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군의관이 굳은 얼굴로 막사에 들어와 보고했다.
"우물물에 독이 섞여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치명적인 독은 아니나 들이키면 이틀에서 사흘이 지난 후 복통과 토사를 일으키는 종류입니다."
"그럼 먹어도 죽지는 않는 건가?"
"그렇긴 합니다만, 보름 정도 심한 탈수 증상에 시달리게 되므로 돌봐주는 사람이 없이 오랜 시간 방치된다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잠시 말을 멈춘 의사가 한참을 머뭇거렸다.
과연 이 사실을 말해도 되는지 확신이 안 서는 것 같았다.
좀처럼 대답이 없자 일황자의 입에서 불호령이 튀어 나왔다.
"말을 해라! 치명적이지는 않아도 뭐가 어쨌다는 거냐!?"
"...죽지는 않아도 사람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주로 쓰는 독이므로 대개 좋은 이유로 쓰이지 않습니다. 이런 독을 쓰는 경우는 대개 살려서 무언가를 더 하려고 할 때입니다."
군의관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재차 촌장으로 위장한 암살자의 한 맺힌 절규가 떠올랐다.
제국에 그만한 원한을 가진 이들이다.
산 채로 영주와 병사들을 잡아서 과연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걸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다.
"해독은 가능한가?"
"가능하긴 합니다만 약초 몇 종류가 필요합니다."
"전쟁 중에는 힘들다는 소리군. 알았네."
보고를 마친 군의관은 고개를 숙이고 막사를 나갔다.
처음의 자신감은 어디 갔는지 창백한 안색의 일황자가 영주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어찌하면 좋겠소?"
"...."
영주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적들이 대협정을 지키리라는 전제 자체가 어그러졌는데 뭘 어찌한단 말인가.
수백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 경험 많은 기사들도 혼란스러울 지경인데.
'대협정을 지키지 않는다면 적들의 선택지는 대폭 늘어난다. 그에 비해 우리는 대비가 전혀 안 되어있어.'
'루시안 공의 예상대로 식수원만 오염시켜도 더는 진군할 방법이 없다. 물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식수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수백 년 동안 안 쓰던 방법을 다 써서 괴롭혀올 텐데 이걸 어쩌라는 건지.'
침묵이 이어지자 일황자는 불안한 눈빛으로 후작을 바라봤다.
처음 속전속결의 방침을 제시한 만큼 다른 방책이 없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가 담겨 있었다.
"후작,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거요? 처음 방침을 제시했으니 일이 잘못되었을 때의 대비책도 있었을 거 아니오."
"송구합니다. 저도 이런 일은 처음인지라...."
베른하르트 후작은 일황자의 시선을 피한 후 말을 흐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나 도저히 본인 입으로 말할 만한 게 아니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후작마저 입을 다물자 일황자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루시안 공, 무언가 방법이 없겠소?"
절박한 어조면서도 일황자의 몸은 굴욕감으로 떨리고 있었다.
얼마 전 모욕한 상대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게 수치스러운 모양이었다.
루시안은 잠깐 일황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이 있다고!?"
일황자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정말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다면 무슨 요구든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루시안의 입에서 나온 방법은 일황자의 기대를 와장창 깨부쉈다.
"일단 제국으로 돌아가서 군을 재편성하시지요. 적이 대협정을 어겼으니 그에 걸맞는 군세와 대비책을 짠 후에 도로 반란 진압에 나서시면 됩니다."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요!?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자니! 그래서야 내 이름이 웃음거리가 될 게 아니오!"
"그렇지만 가장 손해가 적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전투를 벌이고 패배해서 퇴각하는 것보단 스스로 돌아가는 편이 나으니까요."
"싸우지도 않았는데 겁쟁이처럼 패배를 입에 담지 마시오! 우린 아직 패배한 적이 없소이다!"
"패배하진 않았지만 불리한 상황에서 싸우게 되었지요. 전하, 실로 송구한 말씀이나 한 번에 모든 걸 뒤집을 기책 따윈 없습니다."
루시안은 떼를 쓰는 일황자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적의 함정에 빠진다면 불리한 위치에서 계속 싸워야 하고, 주도권을 빼앗기면 적의 움직임에 끌려다녀야 하지요. 그래야만 하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대비책은 그리되지 않기 위해 미리 세우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대비를 안 해서 우리가 이 꼴이 되었다는 거요? 결과적으로 최악의 상황이 되었으니 그냥 도망쳐야 한다고?"
"예. 연합군의 대비는 미흡했고, 우리는 이제 계속 적에게 휘둘릴 겁니다. 여기서 빠져나갈 유일한 방법은 퇴각하여 판을 엎고 새로 시작하는 것뿐입니다. 부디 손해가 적을 때 결단해주십시오."
후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였다.
분명 여기서 퇴각한다면 막대한 손해가 뒤따를 거다.
병사를 동원하는 데 들은 비용부터 제국의 체면, 여기 모인 영주들과 일황자의 명성까지.
'하지만 죄다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썩어버린 손가락을 못 자르겠다고 버틴다면 나중엔 팔을 잘라야 할 테니.'
피눈물을 쏟더라도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는 법.
루시안의 판단은 정확하다 못해 유일한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황자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아니, 그렇게는 못 하겠소!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라니! 최소한 한 번의 승전은 마치고 귀환할 것이오! 적이 그리 무섭다면 그대는 후방에서 푹 쉬고 계시구려!"
"저, 전하!"
"일황자 전하!"
"시끄럽소! 이미 결정한 사안이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시오!"
더는 듣기 싫다는 듯 일황자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막사에 남은 영주들은 사색이 되어 서로를 쳐다봤다.
이런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1천 정예를 쏙 빼버리다니?
이렇게 되면 발데크 가문은 병력을 온존한 채 다른 이들만 갈려 나갈 거 아닌가.
특히 베른하르트 후작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새하얗게 변할 지경이었다.
'큰일 났다.'
선봉은 분명 공을 세우기 쉬운 위치지만, 불리해지면 가장 먼저 적에게 노출되는 위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선봉을 발데크 대공가 없이 로그란 후작가 단독으로 맡는다?
여차할 때 피해를 분산시키지 못하고 로그란 후작가만 갈려나갈 게 뻔하지 않나.
"이, 이보게. 아니, 루시안 공."
후작은 허겁지겁 루시안을 향해 공대로 말투를 바꿨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지금은 다 필요 없었다.
어떻게든 루시안의 마음을 돌려 선봉에 같이 서야만 했다.
"일황자 전하께 내가 말씀드릴 테니 같이 가봅시다. 분명 마음을 돌리실 거요. 이런 불명예를 감수할 필요는 없소. 발데크 대공가가 선봉에서 빠진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니...."
"아뇨, 전 괜찮으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루시안은 후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정말 한 톨의 원한조차 없는 얼굴로 환히 웃었다.
"총사령관의 명령을 어찌 어기겠습니까. 저는 후방에서 근신하고 있을 테니 전하와 함께 영광을 쟁취하십시오. 승전보를 기다리겠습니다."
"...!"
루시안의 웃는 얼굴에 베른하르트 후작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47화
루시안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주변의 영주들을 둘러보며 덧붙였다.
"다른 분들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충심으로 올린 간언이라고는 하나 총사령관이신 일황자 전하의 심기를 상하게 해버렸으니 그에 따른 결과도 감수해야지요. 절 변호해주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 이번 결정을 이해하고 납득했습니다. 그러니 괜한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단호한 당부와 함께 루시안이 천막 밖으로 나가자 영주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좋게 돌려 말하긴 했으나 다시 선봉에 서게 했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가 아닌가.
이래서야 나중에 발데크 가문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일황자의 마음을 돌릴 수도 없었다.
'미치겠군.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쩌긴. 하늘의 여덟 신께 운명을 맡기는 수밖에.'
'그냥 나도 전하의 불흥을 사서 빠지는 편이....'
'가문 전체가 찍히고 싶나? 괜한 짓 말고 가만있게.'
영주들의 수군거림 속에 후작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처음엔 빠르게 전쟁을 마치고 비용을 최소화할 생각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젠 비용이고 나발이고 가문의 최정예들이 허무하게 소모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판이다.
'차라리 처음에 그토록 날을 세우지만 않았다면.'
루시안의 말을 어느 정도 긍정해주고, 일리가 있다며 입에 발린 소리만 한 번 해줬다면.
우리가 걱정하던 게 이런 상황이라며 되돌아가자고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모두의 앞에서 대놓고 루시안과 대립한 이상 그 선택지는 이미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
이젠 일이 어떻게 되든 저 머저리 같은 일황자와 함께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군주란 너무 총명해도, 너무 멍청해도 가신에겐 좋지 않다고 했던가.'
후작은 옛날에 아버지에게 배웠던 문구를 떠올렸다.
총명한 군주는 가신을 철저히 휘어잡고, 멍청한 군주는 저 혼자 떨어질 구덩이에 가신까지 끌고 가서라고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조언은 대개 피가 되고 살이 되었으나 그 말 만큼은 이해할 수 없었다.
군주가 멍청하면 멍청할수록 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으니 좋은 거 아니냐 생각했거늘.
'이런 뜻이었나.'
구덩이에 끌려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후작이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멍청하니 다루기 쉽겠다며 일황자를 밀어준 결과 발목이 잡혔으니 모든 건 자업자득.
부디 빠지는 구덩이의 깊이가 얕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일황자의 폭거에도 누구 하나 루시안을 변호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명령을 내린 일황자도, 당사자인 루시안도 그런 일을 원치 않았으니까.
여기서 변호한다며 나서 봤자 양쪽으로 찍힐 게 뻔한 상황.
영주들은 속앓이를 하면서도 루시안이 빠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형님, 이건 옳지 않습니다."
다음 날, 재차 어찌 진격할지를 의논하려 할 때 지금껏 가만히 있던 이황자가 나섰다.
굽히고 있던 허리를 쭉 펴자 이전과 달리 훤칠한 체격과 외모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 모습에 일황자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지금까지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주제에 갑자기 왜 난리냐?"
"처음엔 하루가 지나면 형님께서 기분을 풀고 명령을 철회하시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철회를 안 하니 나설 수밖에 없었다? 무슨 명분으로? 네게 그만한 직책이라도 있느냐?"
이황자는 어디까지나 일황자의 보조로 뒤를 따라왔을 뿐 공식적인 직책이 없었다.
격으로 따지자면 일황자 바로 다음이겠지만 군의에 참견할 입장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이황자는 기죽지 않고 일황자의 시선을 받아쳤다.
"직책은 없습니다. 하지만 황실의 일원으로서 저는 형님이 올바른 길을 벗어나셨을 때 도울 의무가 있습니다."
"뭣이? 올바른 길을 벗어나?"
"예. 제국 최고의 공신이자 충신인 발데크 대공가입니다. 실수를 저질러도 이리 홀대할 수 없건만 옳은 말을 했다고 저리 내치시다니요. 부디 명령을 재고해주십시오."
"네가 지금 날 훈계할 생각이더냐? 네놈은 올바른 길을 알고, 나는 모른다는 거냐!"
일황자가 발작하며 소리쳤으나 이황자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충성심을 알아달라는 듯 무릎을 꿇고 더욱 크게 소리쳤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잘못된 결정에 대해 주변의 말을 경청한 후 수정하는 용기가 필요한 법입니다."
"닥쳐라! 보아하니 발데크 가문의 병력이 빠져서 무서운가 본데, 그리 무섭다면 네놈도 후방에 남아 있어라! 남은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형님!"
"출진을 준비하시오! 최대한 빨리 진격하여 다음 마을에서 식수를 구한 후 보디엄까지 진격하여 성을 함락시킬 것이오!"
일황자는 더 듣기 싫다는 듯 군의를 끝내버렸다.
갑작스러운 두 황자의 다툼에 영주들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지금껏 남의 눈에 안 띄고 조용히 있던 이황자에게 저런 면이 있었을 줄이야.
'방금 그건 뭐지? 진짜 충언인가? 아니면 이 기회의 돋보이려는 계획?'
'이황자가 황제의 자리를 탐내는 건지, 아니면 진정 욕심이 없는 건지 모르겠군.'
별거 아닌 안건이었다면 모를까 차마 입밖으로 낼 수 없을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기에 수군거림은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영주들은 입을 다문 채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루시안도 다른 영주들에 섞여 막사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루시안 공."
이황자, 세드릭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루시안에게 다가왔다.
루시안은 다가온 세드릭을 향해 냉큼 고개를 숙였다.
"이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리 예의 차리지 않아도 괜찮소. 안 그래도 사과하러 왔는데 그리 숙이면 내가 다 곤란하오."
"사과라니요? 이황자 전하께서 제게 사과하실 게 뭐가 있습니까?"
"그대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소릴 하고 싶었소. 미안하구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찌 신경을 안 쓰겠소? 제국의 충신이 이리 홀대를 받고 있거늘...."
"그런 뜻이 아니라."
루시안은 계속 미안해하는 세드릭을 보며 빙긋 웃었다.
"후방으로 빠지려는 목적은 이미 달성하셨으니 사족을 더하실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
순간 세드릭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대체 무슨 소리냐고 화를 내기 직전 루시안이 말을 덧붙였다.
"일황자 전하께서는 실로 위태로운 길을 가고 계시지요. 대협정이 파기된 만큼 적이 어찌 나올지 알 수가 없건만, 적의 함정 속으로 직접 향하시는 중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대를 이용했다는 거요?"
"제가 변호를 원하지 않았다는 소식 정도는 들으셨을 것 아닙니까. 듣지 못하셨더라도 총명하신 이황자께서 그런 사실을 모르실 리가 없지요."
"루시안 공, 아무래도 심각한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소이다."
세드릭은 루시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난 어디까지나 군신 간의 사이가 이대로 틀어질까 두려워 나섰을 뿐, 내 몸의 안전을 위해 그대를 써먹은 게 아니외다. 날 모욕하는 건 상관없지만, 이용당했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오."
"듣기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저도 슬슬 출진 준비를 해야겠군요."
"출진 준비라니? 그대는 형님의 명령으로 후방에서 대기하게 되어 있잖소?"
"하지만 곧 그럴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명령만 내리신다면 언제든 지원군으로 나설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애매모호한 말과 함께 루시안은 등을 돌려 세드릭에게서 떠나갔다.
세드릭은 루시안이 떠날 때까지 그 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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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루시안이 사라지자 굳은 표정을 풀며 세드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안 발데크,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구나."
-무섭다니요? 제 눈에는 시건방진 작자로만 보입니다만. 주군의 진가를 못 알아보는 것은 물론 제멋대로 생각하여 결론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세드릭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낮게 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그림자에 누군가 숨어서 말을 거는 것처럼 기괴한 광경이었다.
세드릭은 천천히 구석진 장소를 거닐며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시건방진 작자라. 우스운 소리구나. 정작 그는 방금 전의 대화에서 내 건방짐을 꼬집었다만."
-...송구하오나 제가 미욱한 나머지 주군의 말씀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내가 그를 이용했다는 사실 정도야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면 누구든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일까지 알아내는 건 전혀 다른 문제지."
-이후의 일이라시면?
"형님을 구원하러 나서는 일 말이다."
이미 모든 일이 기존의 계획과 틀어진 상황이다.
일황자, 클로드가 병력의 질과 숫자로 밀어붙인다고 해서 반란 진압에 성공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 차마 입에 담지는 못해도 모두가 알고 있다. 이 반란 진압은 실패야. 형님은 분명 패배하시겠지. 문제는 얼마나 크게 패배하느냐다."
적들이 연합군을 격파하고 클로드를 사로잡는 정도라면 더없이 좋다.
하지만 적들이 원한 때문에 앞뒤 분간 못 하고 클로드의 목을 베면 어찌 될까.
세드릭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사태가 벌어질 게 뻔하다.
"제국의 위신이 깎이는 정도로 끝난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최악의 경우 폐하께서 분노에 눈이 뒤집혀 크레펠트를 쓸어버릴 수도 있어. 제국의 남은 힘을 바닥까지 긁어내서 말이야. 그 이후는 어찌 되겠느냐?"
안 그래도 여력이 없는 제국이다.
분풀이를 위해 남은 기둥뿌리까지 뽑아버리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터.
그러니 세드릭으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클로드를 살려야만 했다.
클로드의 목숨만 붙어있다면 황제도 어떻게든 이성을 붙잡고 있을 테니까.
"형님도 패배를 겪고 목숨을 위협받는다면 정신을 차리시고 퇴각하실 거다. 단, 만일을 대비하여 적절한 시기에 지원군을 보낼 필요가 있지."
-설마 그 지원군으로 보낼 이가 저 자였습니까?
"다른 군대라면 몰라도 발데크 대공가의 1천 정예다. 위기에 빠진 형님 한 사람 구해내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지."
돌아가는 상황을 얼추 파악한 세드릭은 일단 루시안을 들먹이며 후방으로 빠졌다.
위험한 장소에 굳이 목을 디밀어 화를 자초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와 동시에 병력을 가진 루시안에게 다가가 어떻게든 인간적 호감을 심어주고자 했다.
긴급 상황에서 권위로 찍어누르는 것보다는 서로 친해진 상태에서 부탁하는 게 제일 좋지 않겠나.
"그런데 그는 내 생각을 죄다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내가 빠지기 위해 본인을 들먹인 건 물론 진심을 들먹이며 호감을 사려던 것도. 그리고 그 호감을 바탕으로 나중에 형님을 구하기 위해 부탁을 하려던 것까지 말이다."
-....
"마지막에 그가 출진 준비를 한다고 한 건 내 행동을 비웃은 거다. 원하지도 않던 짓을 한 주제에 괜히 진심인 척 연기하지 말라고. 그딴 짓 안 해도 원할 때 병력을 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이다."
깊게 한숨을 내쉰 세드릭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이토록 완벽하게 책략을 간파당한 적이 있었던가?
책략으로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다고 생각했거늘.
"과연 세상은 넓구나. 저 혼자 특별한 것처럼 잘난 척했던 자신이 부끄럽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어찌하다니? 루시안 공 말이냐?"
-그토록 위험한 자라면 미리 처리하는 편이....
"아서라. 괜히 벌집을 쑤셨다가는 너도 나도 그냥 끝나지 않을 거다"
그림자의 말에 세드릭이 쓴웃음을 지었다.
책략을 완전히 간파한 후 세드릭 앞에 보란 듯이 들이민 사내다.
경계 당할 걸 뻔히 알면서도 속내를 드러냈다면 대비도 충분히 되어있으리라.
"적으로 돌리면 누구보다도 위험한 자다. 반드시 아군으로 만들어야만 해."
무엇보다 저만한 인물을 아군으로 삼는다면 분명 황위에 오를 때 큰 도움이 될 터.
루시안이 떠난 장소를 바라보는 세드릭의 두 눈이 인재에 대한 수집욕으로 번들거렸다.
48화
루시안과 발데크 가문의 최정예는 일황자의 명령대로 선봉에서 빠졌다.
1천 정예가 후방으로 물러날 준비를 하는 광경에 연합군의 분위기는 확 가라앉았다.
아직 제대로 된 전쟁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아군끼리 다투는 꼴이 보기 좋을 리 없었다.
'하물며 그 결과로 든든한 우군이 빠진다면 더더욱 그렇겠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끼며 루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왜 전장에서 패장이나 졸장의 처우를 굳이 뒤로 미루겠나.
아무리 정당한 처벌이라도 아군이 죽는 광경을 보면 사기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패전은커녕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아군을 이리 대놓고 뒤로 빼고 있으니.
'이건 글렀군.'
처음부터 이기긴 힘든 싸움이었지만, 무리한다면 보디엄까지는 어찌어찌 진격하여 함락할 수준은 되었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를 보니 이젠 그마저도 어려울 것 같았다.
루시안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화염학파의 수장인 블라스커를 찾아갔다.
"블라스커 공, 계십니까?"
"아, 루시안 공. 무슨 일이오?"
두꺼운 책을 읽고 있던 블라스커는 루시안이 들어오자마자 냉큼 일어서서 맞이했다.
나이로 치면 손자뻘인 루시안임에도 대공의 대리인이란 지위 때문인지 지극히 공손한 태도였다.
'처세가 능숙하군. 마법만 잘 하는 샌님은 아니었나.'
루시안은 블라스커가 보여준 예상 외의 일면에 눈을 빛내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실은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 미안하지만 잘못 찾아오신 것 같소. 나는 그저 황실의 지팡이일 뿐이오."
블라스커는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처세와는 별개로 정치와 엮이기 싫다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루시안은 블라스커가 오해할까 싶어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그런 게 아닙니다. 총사령관이신 일황자 전하와 황실을 위해 블라스커 공께서 해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실은...."
루시안은 주변을 살피고 블라스커에게 다가가 살며시 속삭였다.
잠시 후, 블라스커는 이야기를 듣고 눈동자를 크게 떴다.
"루시안 공, 그건 항명이오!"
"예, 일황자 전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겠지요. 그러니 블라스커 공께 온 겁니다."
"아무리 그대의 뜻이 대의에 있다 한들 이건 옳지 않소. 일이 잘못되면 나도 덤터기를 쓸 테고."
"하지만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합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질 테니 부디 부탁드립니다."
"끄응."
블라스커는 앓는 소리를 내며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전투에 앞서 보험 하나쯤은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군. 여차하면 그리하리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 보디엄 성까지도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모든 건 없던 일로 하겠소. 거기까지 진군했다면 그대의 제안도 의미 없을 테니까."
"물론입니다."
루시안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이 보험이 안 쓰일 일은 결코 없었다.
전생에서 일황자는 몇 번이나 이런 보험이 절실한 사태에 처했으니까.
대처가 달라지지 않은 이상 결과도 달라지지 않을 게 뻔했다.
'뭐, 나야 좋은 일이지.'
일황자가 멍청한 선택을 할수록 대비를 마쳐놓은 루시안이 더욱 돋보일 터.
루시안에게 일황자는 목숨만 붙어있으면 나머진 아무래도 좋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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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호르센 강 주변에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시오."
일황자, 클로드는 짧은 명령과 함께 루시안을 후방으로 보내버렸다.
제 딴에는 명령의 정당성을 덧붙여보려던 생각이었겠지만, 단순한 불화가 원인임을 모르는 병사들은 없었다.
정황을 명확하게 아는 영주들에 이르러서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만약의 사태는 개뿔. 국경 끝자락에서 무슨 놈의 만약의 사태야?'
'차라리 조금 거리를 두고 따라오면서 후방 경계를 시키던가 하지.'
영주들은 속으로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차마 입밖에 내뱉지는 못했다.
아직은 전투로 패배한 적이 없기에 클로드의 권위가 살아있었던 탓이다.
클로드는 루시안과 이황자 세드릭을 떨쳐내고 나서야 좀 살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자, 어서 다음 마을로 향합시다. 그쪽 우물도 망가뜨렸을지 모르지만, 주변에 개울이 하나 있다니까 식수를 구하긴 어렵지 않겠지."
"맞는 말씀입니다."
후작은 클로드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면서도 은근슬쩍 혀를 찼다.
우물을 망가뜨리는 놈들이 개울은 놔둘 거란 확신은 어디서 생기는 건지.
하지만 식수원의 상태를 빠르게 확인해볼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군소리 없이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합군은 다음 마을에 도착했으나 곧 마을의 상태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성스럽게 다 부숴놓았군. 우물 안도 엉망이고."
"이래서야 판자 하나 활용하지 못하겠어."
암살자들의 존재가 들킨 후부터 크레펠트는 전략을 바꾸었는지 마을을 철저히 파괴했다.
어차피 더는 속아 넘어가지도 않을 테니 본색을 드러내고 괴롭히겠다는 것 같았다.
"반쯤은 예상했던 일 아니오. 개울로 가봅시다."
클로드는 별거 아니라는 듯 코웃음을 치며 영주들에게 명령했다.
개울만 멀쩡하면 나머진 다 해결된다는 듯한 태도에 영주들은 불안해하면서도 클로드를 따랐다.
'보나 마나 망가뜨려 놨겠지. 별로 크지도 않더만.'
'그나저나 개울마저 엉망이라면 일이 심각해지는데.'
이미 식수원이 멀쩡할 거란 기대는 다들 버린 지 오래.
이젠 기대가 배반당했을 때 클로드가 어찌 나올지가 걱정될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하루의 시간을 소비해 연합군이 개울에 도착했을 때였다.
"놈들이 물줄기를 일부 막아놓은 탓에 흐르는 양이 줄어들긴 했지만,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식수로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에 영주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토록 철저히 파괴하던 놈들이 개울은 적당히 손만 보고 놔뒀다고?
대체 왜, 라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전에 클로드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의 빠른 진격에 시간이 부족했던 거겠지. 놈들이 심어놓은 암살자를 빠르게 알아차리고 대처한 게 놈들의 계산을 어그러뜨렸나 보군."
"그런 걸까요?"
"그 외에 달리 뭐가 있겠소? 자, 어서 놈들이 틀어막은 물줄기나 다시 뚫읍시다. 최근 물을 아껴서 다들 목이 마를 텐데 넉넉히 마시게 해줘야지."
영주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이상하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암살자를 간파한 당사자는 후방에 있지 않나? 왜 본인의 공인 것처럼 으스대는 건지 모르겠군.'
차마 입밖으로 낼 수 없는 생각을 삼키며 병사들은 일제히 개울에서 막힌 물줄기를 뚫기 시작했다.
바윗덩이와 돌조각을 치울 때마다 약해졌던 물줄기가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작업이 거의 끝나갈 때쯤, 블라스커가 찜찜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전하, 무언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아무리 봐도 시간이 부족해서 파괴를 멈출 만한 규모의 개울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일부러 연합군을 여기 잡아두려고 적당히 망가뜨린 것 같습니다만."
"쓸데없는 걱정은. 여기처럼 탁 트인 장소에 우릴 잡아둬봤자 놈들이 뭘 어쩐단 말이오? 기습을 하겠소? 아니면 불을 지르겠소?"
클로드가 코웃음을 치며 주변을 손으로 가리켰다.
조금 떨어진 장소에 작은 숲이 있긴 하나 꽤 거리가 있어서 기습을 해봤자 눈치채고 대비할 시간이 충분했다.
불을 질러도 사방에 트여 있으니 어느 쪽으로든 빠지면 그만이고 개울가이니 불이 잘 번지지도 않을 터.
블라스커는 그 말에 수긍하면서도 위화감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 군사행동을 하기엔 적합치 않은 지형이다. 하지만 적들이 흑마법사라도 고용했다면 멀리서 예상치 못한 공격이 날아올 수도... 잠깐, 마법? 물?'
순간 블라스커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물에 가까울 때 다수의 적을 상대로 유용한 원소가 있었던 것 같은데.
고민이 어이지는 와중 갑자기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우르릉
"방금 전까지 맑았는데 웬 천둥?"
"소나기가 오려나?"
갑작스러운 천둥소리와 병사들의 수군거림에 블라스커는 사색이 되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연합군의 머리 위에 부자연스러운 먹구름이 가득했다.
"이런 미친...!"
블라스커가 기겁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수인을 맺은 순간이었다.
꽈르르릉!
번쩍이는 빛과 함께 푸른 번개가 연합군이 모여 있던 장소를 강타했다.
****
"후우우!"
콜린은 오랜만에 쓴 대규모 마법에 피로를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신의 마력이 고갈되는 감각은 여전히 불쾌했으나 그 이상의 성취감이 있었다.
평소 마법사를 무시하던 머저리들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
"내 할 일은 다 했소. 나머진 그대들 일이오."
"으, 으음."
크레펠트의 지휘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실컷 콜린을 우습게 봤던 주제에 마법의 위력을 제대로 보고 놀란 것 같았다.
"수고하셨소. 이 정도 실력이라면 크레펠트의 궁정 마법사 지위는...."
"누누이 말했지만, 재물이면 충분하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공격이나 하시오."
지휘관은 잠시 눈을 찌푸렸으나, 말다툼할 상황이 아니란 걸 알고 병사들을 돌아보며 크게 소리쳤다.
"공격! 제국 놈들에게 크레펠트의 힘을 보여줘라!"
"와아아아아아!"
공격 명령에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크레펠트의 병사들이 숲에서 튀어 나왔다.
병력의 질과 양은 제국의 연합군보다 못하지만, 갑작스러운 벼락에 정신을 못 차리는 군대를 쓸어버리기엔 충분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를 나눕시다! 기다리시오!"
지휘관이 뛰쳐나가기 직전 콜린에게 소리쳤으나 콜린은 코웃음을 쳤다.
보나 마나 마법의 위력에 압도되어 크레펠트에서 일하라고 할 게 뻔했다.
콜린으로서는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내가 미쳤냐? 대협정을 파기한 너희들과 같이 일하게.'
마법을 쓰기 직전까지도 콜린을 무시한 놈들이 태도를 달리한 것도 괘씸했지만, 그 점을 제외해도 크레펠트엔 미래가 없었다.
분명 지금처럼 약해진 제국이라면 이번 전쟁에 승리하여 독립을 쟁취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대협정이 파기된 이상 개판이 벌어지겠지. 그리고 그 원망은 모든 일을 시작한 네놈들에게 향할 테고. 이런 당연한 사실도 모른 채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꼴이라니.'
너무 자유만 꿈꾼 나머지 자유롭게 된 이후는 아예 떠올리질 못한 걸까.
그게 사실이라면 우스운 일이었다.
자유를 얻고도 제대로 누려보기 전에 스러질 미래가 훤하니 말이다.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챙길 것만 챙겨서 빠지면 그만이니까.'
콜린은 생각을 마치고 자신의 마법이 작렬한 개울가를 쳐다봤다.
피해는 상당했지만, 그 와중에도 지휘관들이 모인 장소만큼은 멀쩡했다.
그 짧은 사이에 마력으로 막을 만들어 내서 벼락을 흘려낸 것 같았다.
"화염학파의 늙은이가 제법이군. 명성이 전부 헛것은 아니었나."
그래도 벼락을 정면에서 받았으니 한동안 대규모 마법은 사용하기 힘들 터.
설령 사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화염의 특성상 적과 아군이 뒤엉키는 난전에서는 별 쓸모가 없으리라.
자칫하다간 아군까지 휘말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 영감이 아무리 애써봤자 이번 전쟁은 크레펠트의 승리로 끝나겠지. 난 여기서 느긋하게 구경이나 해야... 응?'
피웅, 퍼퍼펑
갑자기 하늘을 수놓는 형형색색의 불꽃에 콜린이 눈을 찌푸렸다.
암만 봐도 전투용 마법이 아니라 겉만 그럴싸한 유희용 마법 아닌가.
기껏해야 신호탄으로 사용하는 게 고작일 텐데 왜 저런 마법을?
"설마...!"
****
퍼퍼펑
"삼공자, 신호입니다!"
"역시나."
하늘을 물들이는 형형색색의 불꽃에 루시안은 피식 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딱 예상한 지점에서 연락이 왔다.
블라스커가 저 신호탄을 쏘아 보냈다는 건 일황자에게 위기가 닥쳤다는 뜻.
그와 동시에 루시안의 이름을 알릴 기회가 왔다는 뜻이었다.
"루시안 공, 우리의 거래는...."
"물론 잊지 않았습니다. 선봉에 서서 일황자 전하를 구하시지요. 단, 깃발은 발데크 가문의 것으로 걸겠습니다."
"감사하오."
이황자 세드릭은 루시안의 대답에 만족하며 머리를 살짝 숙였다.
군대를 이끄는 것은 루시안이, 선봉에서 일황자를 구출하는 건 세드릭이.
각자 전장에서의 명성과 황제의 신뢰를 나누기로 한 게 서로 맺은 협약이었다.
"감사하실 거 없습니다. 오롯이 제 것이었던 공을 나눈 대가는 나중에 톡톡히 받아낼 테니까요."
"무서운 소리군.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지."
세드릭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루시안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세드릭을 배제한 후 공을 독차지할 수 있었으니까.
굳이 공을 나누는 건 세드릭에게 빚을 지워두기 위해서일 터.
나중에 값비싼 대가를 치를 게 뻔했으나 당장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내 이름을 걸고 대금은 제대로 치를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어쩐지 그대와의 거래는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거든."
"그거 우연이군요.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루시안은 세드릭을 향해 미소를 지어준 후 뒤를 돌았다.
전투 준비를 마친 발데크 가문의 1천 정예가 루시안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진이다."
루시안의 명령이 내려지기 무섭게 1천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사가 전생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순간이었다.
49화
"쿨럭!"
블라스커는 속이 진탕되는 걸 느끼며 기침했다.
동시에 핏방울 몇 개가 침과 섞여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스, 스승님!"
"시끄럽다! 소란 떨지 마라!"
기겁하는 제자들의 목소리에 블라스커가 소리쳤다.
윗사람이 동요하면 아랫사람은 더욱 혼란스러워하는 법.
이럴 때는 무리해서라도 의연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피해는, 피해는 어떠하냐? 병사들은? 전하와 다른 지휘관들은?"
"전하께서는 무사하시고, 지휘관들도 대부분 화를 피했습니다. 다만 병사들은...."
빠르게 보고하던 제자가 말끝을 흐렸다.
안 좋은 예감에 블라스커는 억지로 눈을 치켜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눈에 들어온 광경에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이래서야 싸울 수 있는 병사는 거의 없겠군.'
블라스커의 대응은 분명 재빨랐다.
적의 마법이 진영을 강타하기 전에 마력으로 막을 쳐 대부분을 흘려냈고,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직격타를 피해갔다.
문제는 병사 대다수가 개울 근처에 있던 터라 신체 일부가 물에 젖어있었다는 점이었다.
직격타를 피하긴 했어도 젖은 신체 부위를 통해 감전된 이들이 상당했다.
"끄윽! 블라스커 공, 이게 무슨 일이오!?"
지휘관급 귀족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베른하르트 후작이었다.
빛과 굉음, 충격 탓에 아직 눈과 한쪽 귀가 멀쩡하지 않았으나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블라스커는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적의 공격이오. 마력으로 기상 현상을 조작해 벼락을 내려쳤소. 다행히 직격은 피했으나 병사들의 신체에 남아있는 수분을 통하여 전류가 흘러 들어가 근육을...."
"학술적인 단어는 때려치우고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오! 난 그리 말해도 못 알아듣소!"
"죽은 자는 많지 않지만, 여파 때문에 전투 불능이 된 병사가 대다수란 소리요! 최소 너다섯 시간은 쉬지 않으면 못 움직일 거요!"
"이런 제기랄!"
최악의 답변에 후작은 붉게 물든 한쪽 눈동자를 감싸 쥐고 일어섰다.
새까맣게 타죽은 일부를 제외하면 다들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다만 기절한 병사가 상당수였고 정신을 차린 이들도 몸이 제대로 안 움직이는지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전하! 일황자 전하!"
"으어... 으아아...!"
총사령관인 일황자 클로드는 벼락에 놀랐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베른하르트 후작은 그 꼴에 이를 갈면서 클로드에게 다가가 지휘봉을 빼앗았다.
"전하! 부득이한 사태니 제가 지휘를 대신하겠습니다!"
"으으으...!"
지휘봉을 빼앗기고도 클로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신음만을 내뱉었다.
블라스커를 포함한 일부 지휘관들이 후작의 월권에 눈을 찌푸렸으나 뭐라 반박하진 않았다.
클로드가 저리된 이상 다른 누군가가 지휘를 대신하지 않으면 상황이 수습되지 않았으니까.
"일단 피해 상황부터 제대로 파악합시다! 현재 움직일 수 있는 병사가 어느 정도인지...!"
-와아아아아
베른하르트 후작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멀리서 함성이 들려왔다.
기겁하여 고개를 돌리자 숲에 숨어있던 병력이 연합군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런 미친...!"
거리는 여전히 기습이 의미 없을 만큼 멀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기습이고 나발이고 적의 공격 자체가 치명적이었다.
후작은 다급하게 병사들을 향해서 있는 힘껏 소리쳤다.
"일어서라! 적들이 오고 있다! 누운 채로 있다가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어서 일어서!"
"끄으윽!"
병사들은 후작의 외침을 듣고 힘겹게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쓰러져 있던 병사의 반절이 일어서는 걸 보고 후작은 순간 얼굴이 밝아졌으나 금방 도로 구겨졌다.
일어선 병사들의 반은 간신히 서 있을 뿐이고 전투 가능한 인원은 나머지 반에 불과했다.
"블라스커 공, 마법으로 어떻게 할 수 없소!?"
"여기서는 불가합니다!"
후작은 마법사인 블라스커에게 의지하려 했지만, 그 제자 중 하나가 대신 나서서 답했다.
"마법의 시전 시간도 부족한 데다, 평야 지대라 초점이 너무 넓습니다! 언덕 위라면 모를까 사용해도 이 거리라면 거의 빗나갈 겁니다!"
"주문 외우는 시간 동안 적들도 가까워질 테니 그때 쓰면 그만 아닌가!"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오히려 아군이 휘말릴 위험이 있습니다!"
이 도움이 안 되는 것들 같으니.
후작은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욕설을 삼켰다.
정말 다른 방법이 없단 말인가?
피융, 퍼퍼펑
"스승님?"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
갑자기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 후작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쏜 건지 형형색색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화염학파 마법사가 행사 때 가끔 보여주는 불꽃놀이였다.
후작은 기가 막혀서 쓸데없는 마법을 쓴 블라스커를 노려봤다.
"지금 뭐 하는 짓이오? 적들에게 불꽃놀이나 감상한 후에 떠나라 하는 거요?"
"내 말 잘 들으시오. 루시안 공이 발데크 가문의 1천 정예를 데리고 우리의 뒤를 따라오고 있소."
"뭣이!?"
"혹시 몰라 들어놓은 보험이오. 방금 쏜 건 신호탄이지. 그대는 어서 이 사실을 알리고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시오. 쿨럭!"
블라스커가 휘청이며 무릎을 꿇었다.
무리해서 다시 마법을 쓴 탓에 더는 말하기 힘들어 보였다.
후작은 더 묻고 싶었으나 상황이 다급했기에 냉큼 소리부터 쳤다.
"적을 막아라! 지원군이 있다! 발데크 가문의 군세가 우리를 지원하러 오고 있다! 신호를 보냈으니 금방 올 것이다!"
"...!"
"일황자 전하를 지켜내라! 지원군만 도착하면 우리의 승리다!"
절망적인 상황에 사기가 바닥을 치던 연합군이 눈을 번쩍 떴다.
후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희망이 있었으니까.
****
-와아아아아!
-죽어라, 제국의 개들아!
-이 비겁한 새끼들이!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욕설, 그리고 비명과 고함이 귀를 울렸다.
비릿한 피의 내음을 맡은 도미닉 백작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미 이 전쟁은 이긴 거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죽여도 연합군이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미소는 금방 사라졌다.
"...이상하군. 왜 이리 필사적으로 저항하지?"
군대는 한쪽이 몰살당해야 끝나는 게 아니다.
누가 봐도 이길 가능성이 없다면 싸울 여력이 있어도 알아서 무너지게 마련.
처음부터 목숨을 내버린 결사대가 아닌 이상 아무리 정예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병사가 반의반도 안 되는 상황에서 이리 필사적으로 저항하다니.
'마치 승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나?'
승산이 있다고 모든 병사가 확신하지 않으면 이 정도의 사기는 불가능할 터.
하지만 놈들에게 무슨 승기가 있겠나?
지원군이 있다면 모를까 모든 군세가 여기 몰려 있는데.
'설마 제국의 마법사가 마법이라도 준비하는 건가? 아무리 위력적인 마법이라도 서로 이렇게 가까이 붙었다면 쓰지 못할 텐데....'
부우우우
생각에 잠겨 있던 도미닉의 귀에 묵직한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도미닉은 물론 연합군마저 그 자리에 멈춰섰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사자 깃발을 앞세운 군세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발데크!?"
"루시안 공이다! 발데크 대공가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와아아아아아아!"
도미닉의 경악과 함께 후작의 흥분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연합군은 단숨에 사기를 회복하여 아까보다 거세게 밀어붙였고 당황한 크레펠트 군은 점차 뒤로 밀려났다.
예상외의 사태에 도미닉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런 빌어먹을!"
어쩐지 발데크 대공가의 깃발이 안 보인다 했더니만, 뒤로 빠져 있었던 건가.
순식간에 반전된 상황에 도미닉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놈들이 더해져도 싸울 수 있는 병사의 숫자는 여전히 우리가 위다. 하지만 한창 싸우는 중이라 소수의 예비대를 제외하면 병력을 따로 편성할 수가 없으니...!'
이대로 가다간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로 측면을 들이받힐 터.
진형이 무너져서 쓸려나가기 싫다면 어떻게든 그 전에 막아야만 했다.
방법은 두 가지.
일황자를 잡고 전투 자체를 끝내버리거나 발데크의 지휘관을 잡아 놈들을 멈춰 세우거나.
'전자는 힘들겠군.'
적들도 일황자의 중요성을 아는 만큼 정말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다.
베른하르트 후작부터 화염학파의 수장인 블라스커, 위르겐을 필두로 한 친위기사단까지.
온힘을 다해도 저들이 도착할 때까진 뚫지 못할 테니 남은 선택지는 발데크의 지휘관을 먼저 잡는 것뿐.
도미닉은 입술을 깨물며 소리쳤다.
"예비대는 나를 따르라!"
****
"좋아, 잘 버티고 있군."
루시안은 말을 달리며 연합군의 상황을 살폈다.
밀리는 중이긴 하나 금방 무너지진 않을 기세였다.
발데크 가문의 깃발 때문인지 오히려 적들이 주춤하는 낌새마저 보였다.
"삼공자, 공격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대로 측면을... 잠깐, 앞에 저거 뭐야?"
갑자기 앞으로 달려오는 병졸들의 무리에 루시안이 눈을 끔뻑였다.
암만 봐도 발데크 가문의 정예를 막기엔 턱없이 부족한 숫자.
이대로 밀고 가버리면 흔적도 없이 쓸려버릴 게 분명했다.
무슨 생각인가 싶어 다들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기사 하나가 앞으로 뛰쳐나왔다.
"내 이름은 도미닉 라이레! 크레펠트의 백작이자 이 군세의 지휘관이다! 발데크의 지휘관이여, 내가 두렵지 않다면 나와서 검을 맞대어라!"
"미친놈."
참모인 제라드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자신들은 대협정을 파기한 주제에 결투 신청이라니.
지나친 뻔뻔함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삼공자, 받아주실 것 없습니다. 이대로 뭉개버리죠."
"아니, 받아들이지."
"예? 그게 무슨...!"
"단, 멈추진 말고 속도만 조금 줄이게. 어차피 금방 끝날 테니까."
"삼공자!?"
제라드가 뭐라 하기도 전에 루시안이 속도를 올려 뛰쳐나갔다.
돌출되어 진격하는 루시안을 보고 도미닉은 순간적으로 계획이 먹힌 줄 알고 안도했다.
하지만 곧 진격 속도만 줄였을 뿐 멈추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기겁하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결투를 받아들였으면 일단 진격을 멈춰라! 그대는 결투의 작법도 모르는가!"
"대협정을 파기한 놈들에게 들을 소린 아니군. 그리고 잡것 하나 상대하는 데 무슨 놈의 작법이냐?"
"뭣이!?"
"어쨌건 이름은 잘 들었다. 내 이름은 알 필요 없고, 이대로 치우고 가마."
"네놈...!"
도미닉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갑주를 껴입고 있으나 체구와 목소리로 봐서는 막 성년이 될 나이가 분명했다.
그런데 노장도 아니고 이런 새파란 애송이한테 쓰레기 취급을 받다니.
아무리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해도 속이 뒤집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좋다! 그 만용의 대가를 치러라!"
분노한 도미닉이 그대로 말을 달려 루시안에게로 향했다.
예상과 조금 달라지긴 했으나 적의 지휘관이 나섰다는 건 변함없다.
이대로 목을 날려버리면 발데크의 병사들은 일제히 혼란에 빠질 터.
설령 같이 죽더라도 적의 발을 여기서 묶을 수만 있다면 도미닉의 승리였다.
'자세를 보니 단 한 합으로 끝낼 생각인가. 그 유명한 사자심검이로군.'
도미닉은 달려오는 루시안의 자세를 보고 의도를 금방 파악했다.
사자심검은 강맹함으로 유명한 검.
확실히 기교를 쓰기 힘든 마상 전투에서는 절대적으로 유리하겠지.
하지만 그 선택은 오히려 도미닉을 미소짓게 했다.
'역시 애송이로군. 아무리 검격이 강해도 경로가 제한되어 있는 이상 받아칠 방법은 있거늘.'
복잡한 기교를 쓰기 힘든 만큼 파고들어 벨 수는 없다.
그러나 적의 움직임에 맞춰 같이 부딪칠 수는 있다.
마침 도미닉이 쓰는 검식도 강맹함에 중점을 두는 검식.
서로 부딪치면 충격으로 인해 나란히 말에서 떨어지리라.
'그리고 낙마하는 놈이 당황하는 사이, 빠르게 자세를 고쳐잡고 먼저 친다.'
도미닉은 전투에서의 낙마를 몇 번 경험해봤지만, 과연 이 애송이는 어떨까?
누구든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는 데는 언제나 시간이 걸리는 법.
아무리 대단한 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지금이다!'
쩌어엉
두 사람이 서로의 검이 닿는 범위까지 가까워진 순간, 도미닉이 검을 휘둘렀다.
예상대로 강력한 충격이 몸을 덮쳤다.
그리고 동시에 도미닉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한 박자 늦게 도미닉은 자신의 검이 부러지고 루시안의 검은 멀쩡하게 목으로 날아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체 왜, 라는 눈빛으로 죽어버린 도미닉의 수급을 낚아채며 루시안이 중얼거렸다.
"미안하구만. 내 검이 좀 고급이라서."
5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