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MERCENARIOHIJODELDUQUE / Chapter 6 - 50-60

Chapter 6 - 50-60

50화

"도, 도미닉 백작 각하!"

"각하께서 당하셨다!"

도미닉이 참수되는 광경을 목격한 예비대에서 경악이 터져 나왔다.

지휘관이 사라진 군대는 단숨에 오합지졸로 전락하는 법.

죽은 도미닉은 자신이 쓰려던 전략을 그대로 돌려받아야 했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와아아아아!

루시안의 외침과 함께 1천 정예가 일제히 예비대를 짓밟았다.

애초에 적은 수였는데 사기까지 바닥을 치니 쓸려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예비대를 치워버린 루시안은 냉큼 수급을 참모 제라드에게 던지며 말했다.

"제라드 경! 이놈의 수급을 창에 묶어 모두에게 보여주시오!"

"예, 삼공자!"

제라드는 냉큼 옆에 있던 병졸에게 명령하여 수급을 창 높이 걸었다.

연합군을 밀어붙이던 크레펠트 군은 곧 창에 걸린 도미닉의 목을 보고 기겁했다.

"백, 백작 각하의 머리가...!"

안 그래도 적의 지원군을 보고 사기가 떨어지던 상황.

여기에 지휘관의 처참한 죽음까지 겹치니 전의는 단숨에 사라지고 공포가 몰려왔다.

기세를 잃은 크레펠트 군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발데크 군이 그대로 측면을 들이박았다.

"죽어라, 이 쥐새끼 같은 놈들아!"

"도, 도망쳐! 살고 싶다면 도망쳐!"

"이 머저리들! 등을 보이지 마!"

다급하게 하급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수습하려 했으나 아무 소용 없었다.

대협정을 파기했으니 전쟁에서 패배하면 그 대가도 오롯이 받아야 할 터.

패색이 짙어지자 이후에 벌어질 보복에 대한 공포가 병사들을 지배했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대열을 무너뜨리지 말란 말이다! 이 이상 물러서면 내가 직접...!"

푸확

"커헉!"

"물러서기 싫다면 내가 직접 베어주지."

루시안은 필사적으로 혼란을 틀어막는 현장 지휘관에게 달려들어 하나씩 베어버렸다.

병사를 수습하려 할 때마다 루시안이 그쪽으로 달려가니 점차 명령은 줄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레펠트 군은 완전히 무너졌고, 연합군과 발데크 군은 사기충천하여 그 뒤를 쫓았다.

"한 놈도 남기지 마라! 포로는 필요 없다!"

"협정 파기자 놈들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가 바로 휴고다! 똑똑히 기억해둬라!"

지금까지의 울분을 풀 듯이 연합군은 크레펠트 군을 일방적으로 쓸어버렸다.

승리가 확정되자 다들 한숨을 돌리는 와중 세드릭이 일황자 클로드에게 달려왔다.

"형님, 구하러 왔습니다! 무사하십니까!"

****

"어... 세, 세드릭? 네가 왜...?"

세드릭은 정신 못 차리는 클로드 앞에 내려서서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루시안 공과 함께 형님을 구하러 왔습니다! 제때 도착하지 못한 이 아우를 용서하소서!"

"...!?"

세드릭의 말에 다른 영주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호르센 강까지 물러났다면 이리 빠르게 구하러 올 수 있을 리가 없다.

분명 가까운 거리에서 연합군의 뒤를 쫓아온 게 분명했다.

문제는 그 행위 자체가 총사령관인 클로드의 명령을 거스른다는 점이었다.

"설마 이황자 전하께서 루시안 공께 근처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신 건가?"

"아니, 그건 사실상 명령 불복종 아닌가?"

"어쨌건 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나. 현명한 판단이라 봐야지."

"그리 간단히 넘어갈 일이 아니야. 이황자 전하께서는...."

소곤거리던 영주들의 목소리가 일제히 멈췄다.

가장 민감한 부분인 황위 계승권까지 입에 담을 수는 없었으니까.

주변의 반응에 이황자 세드릭은 고개를 숙인 채 엷은 미소를 띄웠다.

'그래, 변명할 길 없는 명령 불복종이지. 형님의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 누가 나를 탓할 수 있을까.'

세드릭이 명령에 순순히 따랐다면 여기서 클로드는 죽거나 포로가 되었으리라.

대참사를 미리 막은 거나 다름없으니 명령 불복종을 대놓고 지적하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세드릭이 클로드의 명령을 거스르고 움직이는 걸 눈앞에서 보여주지 않았나.

'내가 진짜로 황위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는 것도 다들 눈치챘겠지. 어느 쪽에 줄을 서야 할지 계산하느라 바쁠 거다.'

클로드의 권위가 살아있고 황제가 그 뒤를 밀어주던 시절에는 능력을 보이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

황제 성격상 세드릭이 조금이라도 황위를 노리는 낌새가 있으면 저 멀리 변방으로 치워버렸을 테니.

하지만 이번 일로 클로드는 자신의 무능을 대놓고 제국 전체에 입증해버렸다.

귀족들로서는 클로드의 대체재로 세드릭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을 터.

아무리 황제가 세드릭을 치우려고 해도 맹렬한 반대에 부딪힐 게 분명했다.

'실은 내가 아니라 루시안 공이 직접 나섰지만... 굳이 착각을 정정해줄 필요는 없겠지. 이런 세세한 내용은 거래에 포함되지 않았으니까.'

루시안이 무명(武名)을 올리는 사이 세드릭은 이 모든 걸 예상하고 대비한 현자로 자신을 포장할 생각이었다.

굳이 거짓을 내뱉지 않고 분위기만으로 주변을 오해시킨다면 루시안도 뭐라 항의할 수 없으리라.

계산을 마친 세드릭이 재차 오해하기 좋도록 분위기를 잡으려 할 때였다.

"과연, 이 모든 게 일황자 전하의 안배였나! 실로 영명하신 분이로군!"

후작이 주변에 다 들리도록 감탄을 터트렸다.

뜬금없는 소리에 귀족들은 눈을 끔뻑였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일황자 전하께서는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생각들 해보시오. 그토록 충성을 바치던 이황자 전하께서 제멋대로 명령을 어기셨을 것 같소? 이건 다 일황자 전하의 밀명으로 한 일이 분명하오."

"...!"

"이황자 전하를 후방으로 물리신 것부터가 전부 연기였겠지. 적의 첩자가 만에 하나 눈치챌 가능성이 있으니 서로 말을 맞추신 거요. 안 그렇습니까?"

눈이 벌겋게 물들고 한쪽 귀에 피가 흘러나오는 상태로 후작이 씩 웃었다.

베른하르트의 그 얄미운 미소에 세드릭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저 미친 늙은이가! 모든 걸 형님의 공으로 돌리던가, 아니면 직접 명령 불복종을 자백하라 이거냐!'

클로드 측에서 명령 불복종을 함부로 언급하기 힘들었지만, 세드릭 역시 본인의 허물을 대놓고 밝히기는 껄끄러웠다.

공이 있는데도 억지로 책임을 꺼내는 입장이라면 모를까 스스로 잘못했다고 밝힌 순간 상대방에게 처벌의 정당성이 주어지니까.

베른하르트 후작은 그 점을 교묘히 이용해 언급 주체를 클로드에서 세드릭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미안하지만 당신이 명성을 날리게 둘 수는 없소이다, 이황자. 아무리 일황자가 멍청하더라도 댁이 제위에 오르는 것보단 낫거든.'

매서운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며 허공에서 불꽃을 튀겼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클로드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후작의 말대로요! 세드릭, 실로 잘 해주었다!"

'이런 개 같은...!'

세드릭은 속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평소엔 자기 혼자 옷도 못 갈아입는 주제에 이럴 때만 눈치가 빨라서는.

"아무리 내 명령이 있었다지만 이렇게나 빠른 움직임이라니! 참으로 시기적절했다!"

"...별말씀을요."

감정을 억누르고 대답한 세드릭이 살짝 고개를 올렸다.

아직 다리를 떨고 있는 클로드의 두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이전과 달리 세드릭의 야심을 눈치챈 게 분명했다.

'제기랄, 늙은 독수리를 너무 얕보았나.'

후작의 수작으로 단숨에 뒤집힌 상황에 한숨이 나오려 할 때였다.

-우리의 승리다!

부우우우

-와아아아아아!

크레펠트 병사들을 추격한 방향에서 뿔피리 소리와 함께 함성이 울려 퍼졌다.

****

촤악

루시안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저 멀리 도망치는 병졸들을 쳐다봤다.

숫자는 100명도 안 되는 소수였지만 놓쳐버린 이상 이 패배를 본대에 전할 게 분명했다.

"아깝구만. 다 쓸어버려야 했는데."

"이미 충분하고도 넘치는 공이십니다, 삼공자!"

참모 제라드는 루시안의 아쉬움 섞인 목소리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적의 지휘관을 참살하셨고, 일황자 전하를 구해내셨으며, 패전 직전까지 몰린 병사들을 수습해 적을 재기불능으로 만드셨습니다. 여기에 더해 베어 넘긴 기사만 일곱이 넘는데 더 공을 탐하실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공이 문제가 아니라 도망친 놈들이 문제지. 소식을 들은 크레펠트에서 우리가 퇴각하기 전에 온 힘을 다해 쫓아올 테니까. 이왕이면 정보까지 확실하게 차단해야 했는데."

"아니...."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는 게 아니냐 물으려던 제라드가 입을 다물었다.

루시안은 어디까지나 아쉬움을 내뱉었을 뿐 얽매임이 없었다.

과한 욕심이 아니라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눈높이가 다르다는 게 이런 건가. 정작 참모인 나보다 삼공자께서 훨씬 높은 장소를 당연히 여기고 계시다니.'

쓴웃음을 짓는 제라드를 뒤로한 채 루시안은 말머리를 돌렸다.

전투가 끝났으니 이제 총지휘관인 클로드에게 보고할 차례였다.

하지만 루시안이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기도 전에 클로드가 먼저 소리쳤다.

"훌륭했소, 루시안 공! 과연 내 명령대로 뒤에서 적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었구려!"

"...?"

이게 뭔 소리래?

루시안은 눈을 끔뻑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이내 미소짓는 후작과 얼굴이 구겨진 세드릭을 보고 대충 정황을 파악했다.

'아, 그렇게 된 거구만.'

루시안과 세드릭이 저지른 행동은 분명 변명할 수 없는 명령 불복종.

아무리 큰 공을 세웠다 한들 '나 사실 총사령관의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행동했습니다'라고 말하긴 힘들다.

그러니 이대로 모든 공을 일황자에게 돌려버릴 생각이겠지.

참으로 교묘한 한 수였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부당한 거래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어서 말이야.'

피식 웃은 루시안은 이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명령이라니요?"

"내가 그대에게 명하지 않았소! 후방으로 물러나는 척 뒤따라 오면서 적을 경계해달라고! 바로 그 일을 말하는 거요!"

클로드는 일부러 크게 소리치면서 눈을 부라렸다.

눈치 좀 챙기라는 시선이었지만, 루시안은 오히려 얼굴을 구기며 블라스커를 쳐다봤다.

"블라스커 공,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무, 무슨 소리요?"

"분명 저는 제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절 감싸주시다니요!"

"아니, 루시안 공...!"

"신상필벌! 공은 공이고 죄는 죄! 저는 책임에서 피할 생각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이러지 말아주십시오!"

짧게 일갈한 루시안은 이내 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절절한 목소리로 클로드를 향해 소리쳤다.

"전하! 저를 감싸주시려는 그 마음은 너무도 감사합니다만, 이는 옳지 않습니다! 전하의 명령은 받지도 않고 제멋대로 명령에 불복종하여 군을 대기시켜 놨거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

"후방에서 대기해야 했음에도 걱정을 못 이겨 뒤를 따라왔고, 이황자 전하의 만류마저 듣지 않았습니다! 모든 게 제 독단으로 이루어진 일이니 정당한 처벌을 해주소서!"

말을 마친 루시안이 재차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영주들은 일제히 침묵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비록 말은 길지 않았지만, 앞뒤 정황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일황자 전하의 명령으로 뒤를 따라온 게 아니다?'

'후방으로 빠졌어야 했는데 루시안 공의 독단으로 명령을 어겼다고?'

'이 말이 진실이라면 이황자 전하는 손을 보탠 게 아무것도 없잖나.'

루시안 본인이 명령 불복종이란 죄를 인정한 이상 그 결과 세운 공도 오롯이 루시안의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두 황자는 루시안의 공을 슬쩍 자신의 공으로 포장해 삼키려 했다는 소리.

짧은 몇 마디로 꼴이 우습게 된 세드릭과 베른하르트 후작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후작도 만만치 않았지만 루시안 공은 한술 더 뜨는군.'

'이런 지독한 놈. 정말 바닥까지 다 긁어가는구나!'

스스로 명령 불복종을 자백한 상황이지만 이를 처벌하자고 주장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가에 얽매여 있는 세드릭과 달리 루시안은 발데크 대공가의 전권 대리인.

클로드를 구출하는 공을 세웠는데도 잘못을 자백했다며 처벌하려 든다면 지그문트 대공이 분노할 게 뻔하지 않나.

어쩌면 그 전에 황제가 기겁하여 책임을 물은 행위 자체를 질책할 수도 있었으니 입을 다무는 것만 못했다.

"이익...!"

클로드가 시뻘게진 얼굴로 몸을 떨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은 패전의 졸장이자 인재를 못 알아본 멍청한 군주임과 동시에 다른 이의 공까지 빼앗으려 한 쓰레기가 된 게 아닌가.

활화산처럼 끓어오른 분노가 터지기 직전까지 갔지만, 이내 주변 영주들의 싸늘한 시선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안돼. 이렇게 되면 다음 제위가...!'

여기서 화를 냈다간 그나마 남은 권위와 인망마저 바닥에 처박힐 터.

자칫하면 야망을 드러낸 세드릭에게 제위에 대한 도전을 받을 수도 있다.

클로드는 냉큼 억지 미소를 지으며 루시안을 손수 일으켰다.

"그, 그러지 마시오. 내 어찌 그대를 처벌하겠소? 오히려 얄팍한 옹호로 그대의 명예를 상처입힌 것 같아 미안하구려."

"아닙니다! 모든 건 명령을 어긴 제 잘못입니다!"

"공에게 무슨 잘못이 있소? 굳이 따지자면 날 구한 공만 있을 뿐이오. 그러니 얼른 일어나 나를 보좌해주시오."

클로드가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어조를 쥐어짰으나 비참함에 목소리가 계속 떨려왔다.

이제 클로드는 루시안이 찌꺼기처럼 던져준 '신하를 감싸주려던 군주'의 허울이라도 허겁지겁 주워 먹어야 했으니까.

루시안은 웃는 듯, 우는 듯한 클로드의 표정을 보며 환한 미소를 내보였다.

"이토록 전하께서 자비를 베푸시니 제가 어찌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충심을 다해서 섬기겠나이다!"

"부디 그래주시오... 부디...."

고개를 푹 떨군 클로드는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루시안을 치하했다.

루시안은 클로드의 손을 맞잡은 채 슬쩍 베른하르트 후작을 흘겨보았다.

잠깐 시선을 맞춘 후작은 이내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 이상 이제 후작의 발언권은 소멸한 거나 마찬가지.

앞으로 연합군은 루시안 한 사람의 의견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전하, 전투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다들 힘겹겠지만 바로 군의를 열고자 합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그리 하시오."

루시안의 부탁 아닌 부탁에 클로드는 거부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51화

"처음 목표였던 한 번의 승리는 이루었습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퇴각해야 합니다."

루시안은 반론을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후작과 다른 영주들도 딱히 이의가 없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늑장을 부렸다간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야겠지. 병사들을 하루 정도 쉬게 한 후 바로 철수합시다."

"아니요,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뭣?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르지 않소? 병사들이 저런 꼴인데...."

이어진 루시안의 말에 후작은 당혹감을 내비쳤다.

아직도 몸이 저릿하여 움직이지 못하는 병사가 상당수다.

그런데 회복될 때까지 쉬기는커녕 바로 움직이자니.

"지금 출발해봤자 달팽이 기어가는 속도로 움직일 게 뻔하오. 못 움직이는 자들을 부축하느라 멀쩡한 병사들마저 더 지칠 테고. 최소 하루라도 쉬게 하는 게 낫지 않소?"

"저도 아무 위협이 없었다면 하루가 아니라 사흘 정도 쉬게 했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합니다. 곧 적들의 추격대가 들이닥칠 테니까요."

"추격대라니? 기습한 적들은 연합군이 격퇴했고, 나머지 적들은 보디엄 성에 있을 텐데 무슨 위협이 남아있다는 말이오? 오히려 크레펠트는 제국을 격퇴했다며 좋아할 텐데."

"한 번 제국이 패배했다고 크레펠트가 독립한 건 아니지요."

이전에 루시안은 제국이 패배하면 속국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재진압이 불가능할 거라 보았다.

반대로 후작은 몇 번이고 재진압을 시도할 여력이 제국에 남아있다고 보았고.

루시안의 의견은 이전과 마찬가지였으나 문제는 크레펠트의 생각이었다.

대협정을 어긴 걸 보면 크레펠트도 전자에 무게를 두었을 테지만 언제나 만의 하나란 게 있는 법.

"크레펠트로서는 제국이 다시 진격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고 싶을 겁니다. 독립을 보장받지 못하더라도 다른 혼란이 일어날 때까지 시간을 끌고 싶겠지요. 예를 들면 유력한 제위 계승자를 포로로 잡아 위협한다거나."

"...!"

후작을 포함한 모든 영주들의 안색이 바뀌었다.

설마 그런 미친 짓까지 저지르겠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조금 전 당한 공격들이 떠올랐다.

대협정을 파기한 데다 비인가 마법사까지 고용하여 뒤가 없어진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과연 황제의 분노나 그로 인한 후폭풍 따위에 신경을 쓸까?

"크레펠트 놈들이 날 노리고 추격대를 보낼 거란 소리요?"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나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루, 루시안 공! 무슨 방법이 없겠소!?"

사색이 된 클로드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루시안은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 입을 열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일황자 전하께서 소수의 친위대만 데리고 먼저 전장을 빠져나가시는 건데...."

"그건 안 되오."

"후작?"

클로드는 놀란 얼굴로 대신 답변한 베른하르트 후작을 바라봤다.

후작은 클로드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차가운 눈빛으로 루시안을 노려봤다.

"아무리 일황자 전하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하나 총사령관이 가장 먼저 전장을 이탈하면 어찌 되겠소?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칠 테고 일황자 전하의 명성은 더럽혀질 게 뻔하잖소!"

"때로는 굴욕을 감내하는 일도 필요한 법입니다."

"굴욕 정도로 끝나지 않으니 하는 소리요. 자칫하면 몇몇 간신배들이 일황자 전하의 자질을 언급하며 제위 계승에 간섭하려 할 수도 있소."

"...."

후작의 직설적인 말에 다들 숨을 멈추었다.

잠깐이나마 루시안의 제안에 혹했던 클로드도 새하얗게 변한 낯빛으로 몸을 떨었다.

"후, 후작의 말이 맞소. 난 혼자 도망치지 않겠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클로드의 모습에 루시안은 입맛을 다셨다.

죽는 건 무섭지만 제위를 포기하는 건 더 싫다는 건가.

'쩝, 그냥 도망쳤으면 일이 편한데 말이야.'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루시안은 깔끔히 미련을 털어버리고 두 번째 안을 제시했다.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적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퇴각하는 것."

"아직 회복되지 않은 부상자는...."

"못 움직이면 업어서라도 가야지요. 장기 행군이라면 휴식을 취하는 게 옳겠지만 국경까지는 겨우 사흘 거리. 병사들을 더 고생시키더라도 빨리 움직이는 편이 낫습니다."

사실 부상자를 버리면 훨씬 빠르겠지만 연합군은 각 가문 간의 정예병을 차출하여 형성된 군대.

영주들이 자기 가문 소속 병사들을 버리고 갈 리가 없었으니 원한을 살 생각이 아니라면 버리자는 말을 입에 담는 건 불가능했다.

자칫하면 아군을 눈앞에서 내버렸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쓸 수 있으니 더더욱.

"방침은 정해진 것 같군요. 달리 이의가 없다면 바로 움직이고자 합니다만."

당연하게도 반론은 없었다.

루시안이 제시한 방침대로 연합군은 서둘러 부상자를 들쳐메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

"뭐라? 적들을 몰아붙였다가 후방에서 급습한 병력에 의해 대패했다? 도미닉 백작은 그 와중에 전사?"

"예. 놈들은 백작 각하의 목을 창에 매달아 마치 야만인의 수급처럼 보란 듯이...."

"이런 개자식들!"

콰앙

크레펠트의 젊은 왕, 에리히가 탁자를 후려쳤다.

대협정을 어겼을 때부터 보복을 당할 각오는 되어 있었다.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건 적들 역시 그리할 수 있다는 거니까.

하지만 아무리 각오했다 하더라도 아끼던 충신의 죽음과 그 시신이 욕보였다는 소식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적의 피해는, 피해는 어느 정도나 되지?"

간신히 흥분을 삼킨 에리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사는 패전 당시를 떠올리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대답했다.

"사망자보다는 전투 불능에 빠진 병사가 많았습니다. 거의 반절에 달하는 숫자가 마법의 여파로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지요. 움직일 수 있는 병사도 백작 각하의 공격에 의해 많이 줄었으니 실질적인 전력은 반 이하로 깎여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도 죽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느 정도는 회복되었겠군."

"마법사의 말에 따르면 보름 정도는 근육을 제대로 못 쓸 거라 했습니다. 빠르게 걷는 정도라면 몰라도 달리거나 무언가를 강하게 휘두르는 행동 같은 건 불가능에 가깝다더군요."

기사의 보고에 에리히는 눈을 번쩍 떴다.

즉, 패배하긴 했으나 적의 전력을 반감시킨 데다 남아있는 병사들도 부상자를 떠안은 처지.

여기에 도미닉의 공격에 사망한 인원까지 뺀다면 정면 공격으로 충분히 적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놈들이 알아서 보디엄까지 와준다면 일방적으로 박살 내버릴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겠지.'

대협정이 파기된 데다 일황자의 목숨까지 위협받았으니 한시라도 빨리 퇴각하려 할 터.

지금은 수성의 이점을 버리고 야전을 벌이더라도 성에서 뛰쳐나가 놈들을 쫓아야 했다.

일황자만 잡는다면 황제는 크레펠트의 요구를 받아줄 수밖에 없을 테니까.

"잠깐, 그러고 보니 동행한 마법사는 어디 갔느냐? 설마 전투 중에 죽은 건가?"

"모르겠습니다. 출격 전에는 남아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만 패전 후 나타나질 않고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도망쳤군."

일이 잘 풀리면 궁정 마법사로 고용하겠다 약속했건만 시큰둥한 반응이었던 떠돌이 마법사.

재물만 바라는 태도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패배하는 걸 보자마자 보수조차 안 받은 채 도망치다니.

'일개 마법사 놈에게도 크레펠트가 그토록 우습게 보였단 말인가? 한 번의 패배로 무너져 내릴 거라 확신할 만큼?'

에리히는 콜린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이미 떠난 이를 다시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

크레펠트가 당당히 독립한다면 놈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돌아오리라.

지금의 굴욕은 그때 되돌려 주면 그만이었다.

"출진이다! 제국군을 섬멸하고 일황자를 붙잡아 크레펠트의 독립을 이루어내겠다!"

****

"예상은 했지만, 진짜 기어가는군요."

레이먼은 투덜거리며 느릿느릿 따라오는 연합군을 바라봤다.

반 이상의 병사가 누군가의 부축을 받거나 업히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

부상자가 너무 많으니 자연스레 행군도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야 제때 도착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암만 봐도 적이 먼저 따라잡겠는데요."

"걱정되나?"

"정확히 말하자면 저희 보고 추격대를 막으라 할까 걱정이 됩니다. 마지막 뒤처리까지 저희가 떠맡는 거 아닙니까?"

루시안은 레이먼의 걱정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 없으니 걱정 마."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온전하게 전력을 남긴 건 저희뿐이잖습니까. 다른 영주들과 일황자 전하가 삼공자께 미루면 어쩌시려고요?"

"싫다고 할 건데."

"예?"

"내가 거부할 거라고."

"거, 거부해도 되는 겁니까?"

"안 될 게 뭐가 있어?"

당혹스러워하는 레이먼을 향해 루시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발데크가 몸을 던져 적을 막아야 연합군의 피해가 최소화되는 건 사실이지. 하지만 지금 내게 그딴 제안을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

루시안은 이 전쟁에서 계속 최선의 방책을 내놓았다.

대협정의 파기와 식수 고갈에 대한 우려, 퇴각 제안과 기습에 대한 예측까지.

그리고 그 모든 걸 듣지 않고 일을 망친 건 결국 연합군의 수뇌부였다.

속셈이 있던 세드릭을 제외하고는 누구 하나 루시안의 편에 서지 않았으니 모두 같은 죄를 지은 셈이다.

"그런데 내 제안을 다 무시한 끝에 죽을 뻔한 걸 살려놓았는데 뒤처리까지 해라?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 발데크 가문과 아예 척을 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런 말은 입도 담지도 못할걸."

"하지만 따라잡히면 누군가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남아야만 할 텐데, 과연 나설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 있고말고."

그것도 아주 믿음직스럽고 강력한 영주가 말이지.

루시안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기 직전, 병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호르센 강이다!"

"국경이다!"

처음 도착했을 때 같잖은 가면극을 하던 장소가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강만 넘으면 추격대도 함부로 연합군의 뒤를 쫓지 못할 터.

모두가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중이었다.

"추, 추격대! 추격대다!"

"크레펠트 놈들이 쫓아왔다!"

갑자기 뒤에서 절망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도하고 있던 병사들은 사색이 되어 뒤를 돌아봤다.

수는 많지 않으나 전원이 기마병으로 이루어진 추격대가 미친 듯이 연합군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직 멀긴 하지만, 저 속도면 강을 건너는 것보다 따라잡히는 게 더 빠르겠군."

"루, 루시안 공."

"뭡니까?"

눈치 없는 어느 자작의 부름에 루시안은 도끼눈을 떴다.

날카로운 눈빛에 적을 막아달라고 부탁하려던 자작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본인이 안 하겠다면 도저히 강권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니까.

루시안의 태도에 희생양을 찾던 모든 이의 시선이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발데크 대공가 다음으로 강력한 가문이자 그나마 전투 가능한 병력이 가장 많은 자.

'제기랄.'

베른하르트 후작은 무언의 압박에 이를 악물었다.

말이 좋아 퇴각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거지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임무.

하지만 후작으로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이번 전쟁에서 대활약한 루시안과 달리 잘못된 판단을 너무 많이 내렸으니까.

'여기서 최소한의 체면을 세워두지 않는다면 몇 년간 두고두고 발데크 아래에 눌려 지내게 된다. 자칫하면 귀족파 내부의 권위에도 영향이 갈지 몰라.'

이전과 같은 권력을 포기한다면 상관없겠지만 후작에게 그런 삶은 죽음이나 마찬가지.

차라리 목숨을 걸고 싸우더라도 손상된 권위를 회복하는 게 나았다.

결심을 마친 후작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크게 소리쳤다.

"일황자 전하! 제가 적들을 막고 있을 테니 그 틈에 몸을...!"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후작. 굳이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후작의 절절한 목소리를 끊은 건 이황자 세드릭이었다.

갑자기 끼어든 세드릭은 모두를 둘러보며 호르센 강 너머를 가리켰다.

"저쪽을 보십시오. 아군이 오고 있습니다."

"예? 아군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연합군의 지휘부는 세드릭이 가리킨 방향을 보고 일제히 굳어버렸다.

루시안의 반응도 다른 영주들과 마찬가지였다.

예상치 못한 지원군은 상상 이상의 실력자들이었으니까.

'붉은 날개 기사단.'

황제 직속의 근위 기사단이자 제국 최강으로 유명한 이들이 연합군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52화

"저놈들이 대체 왜!"

놀란 건 연합군만이 아니었다.

크레펠트의 국왕, 에리히는 경악성을 터트리며 다가오는 붉은 날개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황실 근위 기사단이 국경까지 튀어나온 거냐! 아니, 애초에 저들이 어찌 이리 빨리 올 수 있었다는 말이냐!"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닙니다, 전하! 저들이 오기 전에 뒤로 몸을 피하소서!"

"전하? 전하라고?"

전하라는 말에 에리히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독립을 선언한 게 벌써 몇 달 전인데 아직도 전하라니.

퇴각을 제안한 귀족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허겁지겁 말을 고쳤다.

"폐, 폐하... 제가 말실수를...."

"아니, 되었다. 제국에 의해 격을 강등당한지 벌써 수백 년. 발아래 깔린 처지에 익숙해질 만도 하지."

"그게 아니라...!"

"짐은 도망치지 않겠다."

"폐하!"

"닥쳐라! 아무리 제국 근위 기사단이라고는 하나 겨우 한 줌도 안 되는 놈들이다! 나더러 일개 기사단 하나를 상대로 도망치란 말이냐!?"

아무리 최강으로 이름이 높다지만 크레펠트 군에 비해 명백한 소수.

여기서 물러섰다간 황실의 위엄에 겁을 먹고 꼬리를 말았다는 소문이 돌 게 뻔했다.

반대로 저들을 격파하면 크레펠트의 무력을 대륙 전체에 알릴 수 있을 터.

"여기서 붉은 날개 기사단을 격파하고 일황자를 잡는다! 준비하라!"

"예, 폐하!"

크레펠트의 근위 기사들은 사기충천하여 왕의 부름에 답했다.

붉은 날개 기사단에 비하여 명성은 부족하나 여기 모인 이들도 크레펠트의 최정예.

동등한 숫자라면 모를까 열 배도 넘는 숫자로 질 것 같지는 않았다.

"이대로 붙어볼 생각인가.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군. 하기야 애초에 그럴 머리가 있었다면 반란도 일으키지 않았겠지만."

붉은 날개 기사단의 선두를 달리는 이가 투구 안에서 비웃음을 내뱉었다.

크레펠트 군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숫자면서도 목소리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전원 거창. 용의 이빨을 준비해라."

우우웅

짧은 명령이 내려지자 붉은 날개 기사단 전체에 붉은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갑옷과 창에 새겨진 수십 개의 룬이 또렷하게 빛나며 점점 그 광채를 더해갔다.

이윽고 그 빛이 다른 이들에게도 명확히 보일 정도로 강해진 순간.

"돌파."

푸화아악

붉은빛이 크레펠트 군의 중앙을 찢어발겼다.

****

"...!"

루시안을 포함한 연합군의 지휘부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기마 돌격이란 아무리 강력해도 적의 저항에 어느 정도는 속도가 느려지기 마련.

하지만 붉은 날개 기사단은 마치 종잇장을 찢는 것처럼 적군을 좌우로 분단시켰다.

강력한 걸 넘어서 명백히 물리 법칙을 벗어난 위업이었다.

"마법...!"

주문이 아니라 갑옷과 무구에 새겨진 마법이 분명했다.

때로는 단순한 철검조차 아다만티움제 무구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게 해준다는 고대의 유산.

말로는 많이 들었지만, 기사단 전체가 장비하니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왜 황실에서 그토록 마법사들을 위험시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군.'

본인들이 진정한 마법의 위력을 알고 있기에 그만큼 두려워했던 거겠지.

돌파력만 강한 게 아닌지 붉은 날개 기사단은 순식간에 선회하여 두 번째 돌격을 시행했다.

또다시 크레펠트 군은 사선 상의 기마병을 찢어발기며 군을 재차 분단시켜버렸다.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에리히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꺽꺽댔다.

보병이 이렇게 짓밟혔다면 비참하더라도 이해는 한다.

하지만 기사는 아닐지언정 기마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다.

그런데 그런 기마병들을 보병 짓밟듯 도살해가며 나아가다니.

"폐, 폐하! 피하셔야 합니다! 어서 피하소서!"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나의 정예가 어찌 이리 허무하게...!"

"무례를 용서하소서! 폐하를 모셔라!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에리히의 측근들은 서둘러 에리히를 데리고 전장을 이탈했다.

붉은 날개 기사단은 완전히 무너진 크레펠트 군을 쫓지 않고 돌격을 멈췄다.

잠시 후, 일렁이던 아지랑이는 완전히 사그라들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마법의 효과가 오래 가는 건 아닌 건가?'

광채가 사라진 기사단을 보며 루시안은 눈을 반짝였다.

하기야 그토록 강한 마법이 오래 유지된다면 이길 사람이 없겠지.

크레펠트 군을 격퇴한 붉은 기사단은 이내 연합군 쪽으로 다가왔다.

투구로 얼굴을 가린 이는 곧 일황자 앞에서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투구만을 벗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다들 무사하여 다행이구나."

투구 안에서 드러난 얼굴에 영주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잠시 후,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베른하르트 후작이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제국의 주인이시자 위대한 용의 적통이신 황제 폐하를 뵙나이다!"

****

'뭐? 황제?'

황제의 얼굴을 모르는 젊은 영주와 대리인으로 온 후계자들은 기겁했다.

루시안도 그중 하나였다.

전생을 통틀어 황제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화, 황제 폐하를 뵙나이다!"

후작을 따라 제국의 귀족들이 우르르 무릎을 꿇었다.

루시안도 재빠르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말에서 내린 황제는 귀족들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아직 전쟁 중이건만 어찌 예법에 얽매여 경계를 소홀히 하는가? 인사치레는 국경을 넘은 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 다들 일어나도록."

조용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에 귀족들은 천천히 일어섰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황제는 이내 일황자 클로드에게 다가갔다.

클로드는 황제 앞에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버... 폐하, 그게... 이번 전쟁은...."

"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대충 알고 있으니."

"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전령은 겨우 이틀 전에 보냈는데...."

"다 아는 방법이 있다. 지금은 일단 네 무사를 축하하자꾸나."

황제는 씁쓸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클로드의 어깨를 잡았다.

차마 황제를 볼 면목이 없었는지 클로드는 푹 고개를 숙였다.

몇 번 클로드의 어깨를 두드려준 황제는 세드릭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드릭, 너도 형을 보좌하느라 고생했다. 말을 타고 전선을 달렸다 들었는데 상처는 없느냐?"

"여덟 신과 위대한 용께서 보우하신 덕에 무사합니다."

"다행이구나."

아까 전과 별다를 것 없는 대화였지만, 목소리에 담긴 온도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클로드를 향할 때의 목소리에 애정이 가득했다면 세드릭에게는 약간의 걱정 정도가 전부였다.

두 아들을 살핀 후 황제는 후작의 앞으로 향했다.

"베른하르트 후작."

"예, 폐하."

"속전속결. 좋은 방침이었소."

"폐하, 그건...."

"전쟁은 계속될 것이오. 전투가 벌어지지 않아도 누군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끝난 게 아니지."

그러니 이 전쟁에 드는 비용은 앞으로도 네가 부담해야 할 것이다.

이 패전의 실책을 혼자 모조리 뒤집어쓰고 싶지 않다면.

숨겨진 속뜻을 읽은 후작은 씁쓰레한 표정을 숨기며 머리를 숙였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로그란 후작가는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좋은 대답이군. 앞으로도 부탁하겠소."

황제는 차갑게 답한 후 재차 걸음을 옮겼다.

당연하게도 다음에 멈춰선 곳은 루시안의 앞이었다.

루시안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질책과 치하. 과연 어느 쪽일까.'

어느 쪽이든 가능성은 반반.

황제의 말에 따라 다른 대응을 하기 위해 루시안이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정말 고맙네. 제국의 황제로서, 그리고 한 아이의 아비로서 자네에게 감사를 전하네."

"...!?"

갑자기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하는 황제의 행동에 모든 이가 눈을 부릅떴다.

****

루시안은 황제의 뒤통수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잘했다며 치하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황제가 고개를 숙일 줄이야.

"폐하, 과분하여 차마 받을 수 없나이다. 어서 고개를 올려주십시오."

"그대는 나의 아들을 구했고, 나아가서는 제국의 미래를 구했네. 내 감사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네."

"신하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 당연함이란 없네. 군주가 믿음을 주면 신하가 충성으로 보답하는 게 군신의 도리. 하지만 클로드가 믿음을 먼저 거두었음에도 그대는 기꺼이 몸을 던졌지. 그 자체만으로도 더없이 고마울 따름이야."

황제는 계속해서 루시안을 치켜세우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루시안의 표정은 살짝 굳어졌다.

감사와는 별개로 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 알고 있다며 드러내는 의도가 느껴졌으니까.

'아예 숨길 생각이 없는 걸 보니 다른 귀족들에게 하는 경고도 포함된 모양이군.'

자신이 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도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암시일 터.

하지만 그와 별개로 루시안에게 전하는 감사 인사에는 절절한 진심이 느껴졌다.

"만약 내 어깨에 제국의 체면이 얹혀있지 않았다면 기꺼이 무릎이라도 꿇었을 걸세. 그러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는 게 미안할 따름이야. 부디 이해해주게."

"이해라니요. 말씀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못해 넘칠 지경입니다. 그러니 부디 고개를 들어주십시오. 이 이상은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그대가 부담스럽다면 어쩔 수 없지. 감사 한번 하려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격이 되면 큰일이니 말일세."

황제는 경직된 분위기를 풀 듯이 부드러운 농담을 건네며 고개를 들었다.

능수능란한 황제의 대화 솜씨에 루시안은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제국의 마지막 주인, 카를 빈 베이 아스트리아.'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으나 전생에서부터 이야기는 질리도록 들은 황제.

하지만 평가가 사람마다 너무 다양하게 갈렸기에 뭐라 정의하기 힘든 자였다.

제국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 암군이란 평도, 능력은 없었으나 인격만큼은 훌륭했다는 평도 있었다.

누군가는 명군이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암군 취급을 받는 비운의 황제라고도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후계 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오판에 오판을 거듭했다는 것.

'나도 그 때문에 내심 암군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전혀 다르군.'

루시안이 직접 본 황제는 옥좌에 앉을 자격이 충분했다.

먼 거리에서 전장 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일황자 클로드가 바닥으로 떨군 황실의 권위를 직접 출진하여 다시 되돌려놓았다.

이를 다른 귀족들에게 은근슬쩍 암시하여 황실을 우습게 보지 못하도록 한 후 과도한 감사를 전함으로써 헌신에 대한 보답을 보여줬다.

'황제가 가볍게 움직였으니 주변에서 말이 많겠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괜찮은 군주야. 난세가 아닌 치세라면 충성을 바쳐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이나.'

그런데 어째서 이런 황제가 후계 문제는 그리 엉망이었던 건지.

황제는 루시안의 의문에 답하는 대신 미소를 지으며 다른 제안을 했다.

"괜찮다면 그대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네만, 함께 하겠나?"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

루시안은 냉큼 황제의 제안을 받았다.

가문의 이해득실을 떠나 루시안 개인으로서 황제와 인맥을 형성할 기회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연합군은 황제의 방문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도 아까 전보다는 여유있게 퇴각 준비를 했다.

잠시 후, 루시안은 말을 타고 황제와 나란히 선두에 서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대의 명성은 많이 들었네. 열여섯의 나이임에도 들려오는 소문이 심상찮더군."

"과장 섞인 허명일 뿐입니다."

"내 감사가 과하다더니 그대의 겸손도 만만찮군. 이미 소문은 충분히 증명한 것 같은데 말이야."

황제는 웃음을 터트리며 루시안에 대한 호의를 계속해서 드러냈다.

첫인상이 좋아서인지 무슨 말을 해도 기꺼워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호르센 강에 가까워지며 두 사람을 향한 시선이 줄어들었을 때, 황제가 목소리를 죽이며 속삭였다.

"한 가지 묻겠네만, 가주 자리에 관심 없나?"

"폐하, 죄송하나 가문의 일은...."

루시안이 난처한 표정으로 뒷말을 흐렸다.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발데크 가문의 일에 개입하는 건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황제는 루시안의 말에 그게 아니라며 냉큼 양손을 내저었다.

"미안하네. 내 말이 부족했군. 대공가의 후계 문제에 개입할 생각은 없네. 내가 말한 가주는 다른 의미였다네."

"다른 의미라니요?"

"혹 대공이 아닌 변경백 자리에 관심 없나? 그대라면 새 가문의 창시자로 이름을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

예상치 못한 파격 제안에 루시안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53화

'다른 작위도 아니고 변경백이라니.'

중앙에서 간섭하기 힘든 변경주 중에서도 최중요 영지의 주인.

담당 영지의 중요성 덕에 황실에 바치는 세금은 적고 상비군 제한은 거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자.

격은 어디까지나 백작이라지만 보유 가능한 실질적인 무력은 후작 이상이라 봐도 과언이 아닌 게 변경백이다.

그 힘과 간섭이 힘든 위치 탓에 황실에서도 신뢰하는 가문이 아니면 절대 내주지 않는 작위거늘.

'대체 왜 나한테?'

아무리 아끼는 아들을 구했다고는 해도 너무 과하지 않은가.

루시안의 잠재력과 발데크 대공가를 향한 신뢰까지 더한다 쳐도 변경백 작위를 제안할 이유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내가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군."

"송구합니다, 폐하."

장난기 섞인 황제의 말에 루시안은 흠칫하여 냉큼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루시안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그리 어려워하지 말게. 속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모략은 아니니까. 아까 말했듯이 난 군주와 신하 간에 당연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웃음을 그친 황제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조건적인 충성이 현실에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동화 속 이야기지. 군주가 신하의 활약에 보답하지 못한다면 충성을 잃고, 신하가 군주의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신뢰를 잃는 법."

그러니 군주든 신하든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상대에게 버림받더라도 원망할 자격이 없다.

군신 관계를 성립하는 최소한의 요건조차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소리니까.

"모략도 마찬가지. 군주가 신하에게 무언가를 시킬 때는 공적으로 임무를 맡긴 후 성과에 따른 포상을 지급해야 하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건 군신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야. 안 그런가?"

"실로 옳은 말씀입니다."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세의 온갖 모략 중 가장 지독한 모략이 바로 생색내기였다.

땅을 내주는 척하면서 최전선에 꽂아 넣거나 특정 가문의 원한을 살 만한 보물을 포상이랍시고 주는 등.

여러 군주가 악의를 선의로 포장하여 자신을 드높이고 상대를 난처한 상황에 빠뜨리곤 했었다.

'경쟁 관계인 군주에게 쓰면 확실히 일석이조인 계책이지. 문제는 그중 꽤 많은 이들이 이런 짓을 자기 신하나 동맹에게도 써먹었다는 거지만.'

이유는 다양했다.

처음부터 작정한 토사구팽에서 손해 없이 골칫거리만 떠넘기고 싶다는 도둑놈 심보까지.

하지만 무슨 이유든 간에 그딴 짓을 한 결과 난세는 더 엉망진창이 되었다.

배신과 하극상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늘어났으니까.

이쯤 되자 루시안도 황제가 하고 싶은 말을 대충 알 것 같았다.

"제게 변경백 자리를 주시는 대신 바라시는 일이 있으시군요."

"그것도 두 가지나 있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최근 북부가 심상찮다네."

북부라는 말에 루시안이 눈을 크게 떴다.

다름 아닌 루시안의 외가가 북부 출신의 그리말디 공작가 아닌가.

황제는 그 생각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북부는 예전부터 황실의 통제력이 잘 미치지 않던 장소였지. 워낙 멀고 척박한 데다 상무적인 기풍이 강했으니. 그래도 지금까지는 나름 황실과 잘 지내왔네. 황실은 북부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고 북부도 제국의 일원으로 순순히 편입되었으니까."

루시안은 황제의 말 뒤에 숨은 불편한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입밖에 내지는 않기로 했다.

말해봤자 황실과 북부 양쪽 다 좋을 게 없는 진실이었으니.

황제는 루시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최근 사정이 달라졌네. 주변에서 제국을 위협하는 세력이 날뛰자 덩달아 북부도 영향을 받고 있어."

"북부가 황실의 지배를 벗어나려고 하는 겁니까?"

"그건 아닐세. 정확히 말하자면 황실의 눈이 다른 데로 돌아간 틈에 서로 영지전을 벌이는 중이지. 저들끼리 잡아먹고 세력을 불리려 하고 있어."

영주들끼리 싸우는 영지전은 황실이 제일 싫어하는 행위다.

결과가 어찌 굴러가건 승자는 패자를 잡아먹고 덩치가 커지니까.

따라서 황실이 멀쩡할 때는 절대 영지전을 허용하지 않는다.

자칫하면 황실을 위협할 대영주가 탄생할 수 있는데 누구 좋으라고 영지전을 허가하겠는가?

"문제는 지금 황실이 북부의 영지전을 만류하기 위해 일일이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는 걸세. 잘못 건들면 오히려 황실에 반발할 테니 더더욱 손대기 어렵지."

"설마 황실이 아닌 제게 북부의 제어를 맡기시려는 생각입니까?"

"정확하네."

황제는 씩 웃으며 루시안과 눈을 맞추었다.

"자네의 외가는 그리말디 공작가였다고 들었네. 한때 북부의 왕족이자 무려 황실보다도 역사가 긴 가문 아닌가?"

"지금은 마지막 가주이신 외조부와 함께 사라진 가문입니다만."

"하지만 외손주인 자네라면 가문을 부활시킬 자격이 있지. 북부인 모두가 자네와 그리말디 공작가의 권위를 부정하지 못할 테고."

루시안은 황제의 의도를 대충 알 수 있었다.

지그문트 대공의 아들인 루시안이 북부를 제어한다면 분명 황실은 한숨 놓을 수 있겠지.

북부 토박이보다는 황실과 훨씬 가까운 데다 가문의 부활에 큰 도움을 준다면 그만큼 의존도도 높아질 테니.

다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변경백이란 작위는 여전히 과했다.

분명 더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을 터.

"폐하의 뜻은 이해했습니다. 그럼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

"...."

루시안의 물음에 황제는 이전과 달리 시원스레 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자 침묵하던 황제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변경백이 된 후 공식적으로 내 아들... 클로드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해줄 수 있겠나?"

****

'역시나.'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북부의 안정화는 덤이고 진짜 이유는 친위 세력을 만들어두기 위함인가.

이번 전쟁에서 루시안의 활약을 보고 아들 곁에 붙여두고 싶은 모양이다.

"클로드가 믿음직스럽지 않은 건 인정하네. 하지만 사람은 성장하는 생물이란 걸 알아주게나."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북부의 옛 격언에서는 가장 작은 풀뱀도 시간만 주어지면 거대한 용이 될 수 있다고 했으니까요."

"좋은 격언이군. 그 말대로일세."

황제는 루시안의 말을 듣고 만족한 듯 웃었다.

사실 그 격언은 적이 약할 때 가만 놔뒀다가는 나중에 크게 후회할 수 있다는 뜻이지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폐하, 황공하오나 저로서는 그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루시안의 거절에 황제가 눈을 크게 떴다.

거절 자체에 기분이 나빠졌다기보다 변경백 자리를 걷어찬 게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평정심이 무너진 황제는 루시안에게 다급히 말했다.

"자네 정말 내 말을 이해한 건가? 내가 제안한 건 다름 아닌 변경백일세."

"물론 변경백의 권위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아버지의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제 능력을 다 보이지도 않았거늘 어찌 경쟁이 부담스러워 도망치겠습니까?"

루시안은 거짓 반, 진심 반이 담긴 말로 황제를 설득했다.

실제로 자기 능력을 선보이겠다는 호승심 같은 건 없지만, 발데크 대공가의 계승권은 루시안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계승권만 포기 안 하면 난세에서 온갖 상황에 적용되는 만능 명분으로 쓸 수 있었으니.

변경백이 탐난다고 해서 그 명분 제조기를 포기하기는 너무 아까웠다.

"그리고 아무리 그리말디 공작가에 대한 권위가 있다 한들 북부 전체가 절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어느 정도는 무력이 동반되어야 할 텐데 제게는 그 무력이 없습니다."

"내가 지원해주면 되지 않나?"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북부는 상무적인 정신이 강한 지방입니다. 오롯이 자신의 힘만으로 지배할 필요는 없더라도 대놓고 폐하의 지원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아무도 절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으음."

루시안의 반박에 황제는 할 말을 잃었다.

북부의 기질을 생각하면 일리가 있는 말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일황자께서 절 달갑지 않게 생각하신다면 제가 먼저 충성을 맹세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불경한 말씀일지는 모르나 전 절 원하는 분께 쓰이고 싶습니다."

"허허허."

정곡을 찌르는 소리에 황제는 쓰게 웃은 후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그렇지. 기껏 보검을 쥐여주어도 본인이 창고에만 둔다면 무슨 소용일까. 미안하네. 내가 실언을 한 것 같군."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클로드가 가진 단점은 황제 역시 잘 아는 듯했다.

그럼에도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지 간절함이 담긴 얼굴로 루시안을 쳐다봤다.

"그러나 가장 작은 풀뱀도 시간만 주어지면 거대한 용이 될 수 있지. 안 그런가?"

"그 말씀대로입니다."

"참으로 유익한 대화였네. 언젠가 다시 대화를 나눠보고 싶군. 나중에 다시 아는 척을 하더라도 타박하지 말게나."

황제는 최대한 밝게 농담을 하며 웃었다.

불안을 억지로 떨쳐버리려는 듯한 의도적인 행동에 루시안은 마주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미 기울어져 가는 황실에 해줄 수 있는 건 암울한 미래를 숨기는 게 전부였으니까.

****

연합군이 국경 지대에서 어느 정도 멀어져 안전한 영역까지 온 것을 확인한 후, 황제는 다시 영주들을 소집하여 말했다.

"이제는 안전해진 것 같으니 난 먼저 아들들과 함께 황궁으로 돌아갈까 하네. 원칙대로라면 그대들은 수도에 한 번 방문하여 논공행상을 한 뒤 해산해야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황제의 말에 다른 영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가 너무 짧았던 것도 있지만 대다수가 패전에 대한 책임밖에 없었다.

그나마 공을 세운 건 일황자를 구출한 루시안 뿐인데 그조차도 대놓고 알리긴 힘들었다.

너무 상세히 알려지면 그만큼 클로드의 어리석음도 알려져 황실의 체면이 깎일 테니까.

이미 일어난 일을 숨기진 못하겠으나 굳이 모여서 치부를 드러낼 필요도 없으니 여기서 해산하는 게 제일이었다.

"공을 세운 그대에겐 미안할 따름이네. 무언가 포상이 주어져야 할 텐데 이리되었으니. 내 나중에 반드시 따로 보상하겠네."

"그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루시안은 황제의 사과에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황제가 루시안의 공을 인정하고 직접 주변에 홍보한 것만으로도 여기 온 목적은 달성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황제는 루시안에게 몇 번이고 보상하겠다는 약속을 한 뒤에야 발걸음을 뗐다.

일황자와 이황자, 그리고 황실 소속 병사들과 붉은 날개 기사단을 불러모은 후 황제가 소리쳤다.

"푸른 길의 주인이 너를 부르노니, 오라! 맹약에 따라 너를 부르노니, 오라! 용의 피가 너를 부르노니, 오라!"

"...?"

영주들은 그 해괴한 광경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지금 저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

화아아아악

"헉!?"

"허공에 원이...!"

영주들은 기겁하며 여기와 다른 장소로 이어진 거대한 원을 쳐다봤다.

처음 보는 대마법에 루시안도 크게 놀랐지만, 일황자와 이황자는 루시안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황자들조차 모르고 있던 건가?'

"서둘러라! 길이 열리는 시간은 길지 않다!"

루시안이 의아해하는 사이 넋이 나간 병사들을 향해 황제가 소리쳤다.

기사단을 필두로 황실 소속 병사들은 허둥지둥 열린 원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열린 공간은 굉장히 넓었기에 병사들의 이동 시간은 길지 않았다.

마지막 병사가 원 안으로 몸을 던지자 힘겹게 떨리던 원이 이내 확 줄어들었다.

촤악

물풍선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닫힌 후에도 영주들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중 일부는 원이 열렸던 공간으로 가서 직접 허공을 더듬어보기도 했다.

베른하르트 후작은 황제가 떠난 장소를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어찌 그리 빨리 오셨나 했더니, 이런 방법이 있으셨군."

"으음."

후작을 필두로 한 귀족파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황실에서 이만한 저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어지간히도 충격적인 것 같았다.

모두가 침묵하는 사이 루시안이 앞으로 나와 영주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 흩어지도록 하지요. 저는 켈하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른 분들께서도 편히 귀향하시길."

루시안은 짧은 덕담과 함께 발데크 가문의 병사들을 이끌고 연합군에서 이탈했다.

대협정의 파기와 패전 때문에 다들 분위기는 좋지 않았으나 루시안 만큼은 예외였다.

사실 이 전쟁에서 유일한 승자라고 할 수 있는 게 루시안이었으니까.

'좋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얻었어.'

이번 전쟁을 통해 루시안은 대협정의 파기를 예지한 선견지명을 보여줬고, 대공가의 정적인 후작을 권위로 눌렀으며, 일황자의 목숨을 구했다.

이 이야기가 반만 퍼져나가더라도 대륙에서 루시안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질 터.

여기에 더해 황제와 개인적인 인연까지 만들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가장 좋은 건 일황자와 대립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면서 이득은 이득대로 다 챙겼다는 거지. 다른 형제와 부인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이번 전쟁에서 루시안이 클로드와 같이 묶인 적은 없다.

오히려 그 어리석음을 지적하며 대립하다가 미움을 산 게 전부.

일황자를 구해주며 명성은 얻었지만 자신이 일황자를 지지한다고 오해할만한 소지는 없어진 셈이다.

과연 일황자와 엮이기 싫다며 안 가려던 형제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뭐라 할까.

루시안은 자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켈하임으로 향했다.

54화

날이 저물었을 때, 루시안은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격렬한 전투로 인해 병사들이 많이 지쳤겠지. 마을마다 하루씩 쉬고 가자고."

"예?"

뜬금없는 루시안의 제안에 제라드가 눈을 끔뻑였다.

빠르게 행군하면 금방 도착해서 쉴 수 있는데 굳이 마을마다 쉬자니.

피로가 풀리긴커녕 괜히 귀환하는 시간만 더 길어지지 않겠는가.

"삼공자, 제 생각에는...."

"쉿. 나중에 얘기하지. 다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루시안은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제라드의 말을 끊었다.

레이먼을 비롯한 기사들은 죄다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루시안의 말에 따랐다.

지금까지 루시안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을 한 적은 없으니까.

발데크 군은 루시안의 뜻을 따라 어느 작은 마을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아이고! 나, 나리들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하루만 쉬고 가겠다. 값은 치를 테니 병사들의 식사를 준비해 주도록."

"예, 예!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촌장은 허겁지겁 사람들을 시켜 병사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규모가 워낙 작아서 숙소로 내줄 집조차 거의 없었지만, 병사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조용히 머물렀다.

처음엔 벌벌 떨던 마을 사람들도 약탈은커녕 엄정하게 군기가 잡힌 정예병들을 보고 안도했다.

"나리께는 제가 살던 집에서 머무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누추하지만 그나마 마을에서는 제일 좋은 게 이것뿐이라...."

"충분하다. 고맙군."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촌장의 집도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다행히 크기 면에서는 다른 집보다 나았기에 십수 명이 들어갈 정도는 되었다.

루시안은 촌장의 집에 들어간 뒤 기사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바로 켈하임으로 가지 말고 행군을 늦추도록 하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생각해 보도록. 여기서 우리가 바로 켈하임으로 간다고 해서 공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까? 내가 생각하기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다들 당황할 것 같은데."

루시안의 말에 기사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전쟁의 자세한 실상이 알려지는 건 논공행상을 거치며 소문이 퍼지기 때문이다.

물론 논공행상 이전에도 소문은 퍼지지만, 그건 황궁에 다 모이기까지 충분한 시일이 걸려서다.

지금처럼 전쟁이 끝나자마자 흩어진 경우 소문이 날 시간이 한참 부족했다.

"고지식한 사람들은 올바르게 행동하면 사람들이 언젠가 알아줄 거라 생각하지. 하지만 그건 다 착각이야. 무슨 행동을 하건 자기가 알리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그 말씀은 설마...."

"켈하임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번 전쟁이 어찌 진행되었는지 주변에 알려줄 생각이다. 물론 내 입으로 직접 말할 순 없으니 남의 입을 통해 퍼뜨려야겠지. "

기사들은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서로를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이들 역시 귀족인 만큼 정치에 대해 무지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질이 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루시안의 계획을 대체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다들 갈피를 못 잡던 와중 참모인 제라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건 황실의 치부를 들추는 꼴 아닙니까? 황제 폐하께서도 논공행상을 피하셨을 정도인데 저희가 나서서 알리는 것도 좀...."

"그럼 제라드 경은 연합군과 도매금으로 묶여 패잔병 취급받아도 괜찮나? 그대의 활약도 같이 묻힐 텐데 말이야."

"으음."

정곡을 찌르는 소리에 제라드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공이 묻히는 것도 억울한 마당에 남의 잘못까지 같이 짊어질 이유는 없었다.

병사들이야 재물만 받으면 만족하겠지만 기사에겐 명성이 모든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나중에 실상이 알려지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다른 형제들이 날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공을 묻으려 할 테니까. 지금이 본인의 이름을 높일 마지막 기회란 걸 명심해두도록."

머뭇거리던 기사들은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듯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일제히 목소리를 높여 저마다 소리치기 시작했다.

"삼공자의 말씀대로입니다. 공적이 없다면 모를까 자신이 세운 공적을 감추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안 받아도 될 비난을 짊어지는 건 미덕이 아니라 그저 어리석음일 뿐이지요. 전 삼공자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저 역시!"

자신들의 명성까지 걸려있는 일이기에 기사들은 일치단결하여 루시안에게로 붙었다.

루시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다가 이내 고민하며 턱을 쓸었다.

"모두 동의한 건 다행이지만, 문제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소문을 퍼뜨리는 일이란 말이지. 레이먼 경, 무슨 방법 없나?"

"제게 물으셔도 곤란합니다. 저는 어느 쪽이냐면 남들에게 숨기는 게 전문이라."

호위로 있던 레이먼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흑색 작전 경험이 없는 건 아니나 죄다 남의 시선을 피하는 일이라 이런 선동 쪽은 오히려 생소한 모양이었다.

반대로 루시안은 이런 선동도 자주 해봤지만 거의 다 본인이 직접 실행한 터라 남을 시키는 건 처음이었다.

'믿음직한 부관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군을 방치한 채 이곳저곳 돌아다닐 수는 없지. 이런 몸으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을 테고.'

정체를 숨긴다 하더라도 겨우 열여섯인 몸으로 떠들어봤자 제대로 믿는 사람도 없을 터.

소문을 퍼뜨리려면 어느 정도 세상의 풍파를 겪어본 인상이 필요했다.

고민하던 루시안은 한창 휴식중이던 휴고를 불렀다.

"십인대장 일은 어때? 잘 풀리고 있어?"

"이젠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대장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전투에서 대활약한 게 어지간히 인상 깊었던 모양이더군요."

휴고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뒷골목 껄렁패들이 아니라 정예병들 사이에서 인정받았다는 만족감이 상당한 것 같았다.

"그런데 전 어쩐 일로 부르신 겁니까? 특별대우한다는 소문 퍼질수도 있으니 귀환하실 때까지는 안 찾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실은 한 가지 문제가 있어서."

루시안은 휴고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가능하면 이번 전투에 대한 소문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퍼뜨리고 싶다는 것.

그리고 그에 적임인 사람이 없어서 고민이라는 것까지.

이야기를 들은 휴고는 환히 웃으며 가슴을 두드렸다.

"정말 잘 찾아오셨습니다. 이런 임무에 적임자인 녀석이 하나 있지요."

"네가 직접 나서려는 거냐? 하기야 암흑가 생활을 했으니 소문을 의도적으로 내는 것 정도야...."

"아뇨, 저 말고 제 휘하에 있는 놈입니다."

"뭐? 네 십인대 소속 병사?"

그럼 일반병 아냐?

아니, 온갖 어중이떠중이가 다 모이는 군대 특성상 적임자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만.

"음유시인이 꿈이었다는데 아버지가 헛꿈 꾸지 말라며 강제로 입대시켰다는군요. 병사 생활도 적성에 맞았는지 지금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이야기 하나는 정말 맛깔나게 풀어내는 놈입니다."

휴고는 이야기꾼을 시켜도 성공했을 놈이라며 열변을 토했다.

이 정도로 보증하는 걸 보니 능력은 확실한 듯 보였으나 루시안은 다른 부분이 걱정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 수상쩍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까? 내가 시킨 거라는 게 티가 나면 곤란한데."

"굳이 명령을 내리실 필요도 없을 텐데요?"

"무슨 소리야?"

"사내놈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자기 무용담 풀어내는 거 아닙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붙여서 대충 다른 마을로 보내놓으면 다 퍼뜨려 놓을 겁니다."

휴고의 말에 루시안의 눈이 번쩍였다.

그러고 보니 사내란 원래 그런 생물이지.

전생과 현생에 걸쳐 큰그림에만 신경 쓰다 보니 그런 당연한 열망을 까먹고 있었다.

예전에는 루시안도 자기 무용담을 풀어내기 바쁜 애송이였는데 말이다.

"휴고, 총사령관으로서 네게 명령을 내려야겠다."

"예? 부하가 아니라 저요?"

"내가 요즘 입맛이 없었는데 갑자기 염장한 사슴 고기가 땡기는군. 네 십인대와 같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최대한 맛있는 고기를 구해오도록."

고개를 갸웃하던 휴고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는 깊게 고개를 숙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이곳저곳 수소문해가며 최대한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겠습니다, 총사령관 각하."

****

루시안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다 대가며 최대한 진군을 늦추었다.

그사이 휴고는 십인대를 이끌고 발데크 영지를 사방팔방 돌아다녔다.

"아니, 그럼 벌써 전쟁이 끝난 거요?"

"그렇다니까! 놈들이 대협정을 어겼는데 거기서 뭘 어째? 독이라도 풀기 전에 돌아와야지."

"세상에나, 독이라니! 댁들은 어디 다친 데 없소?"

"다치기는 무슨! 오히려 루시안 님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활약했지!"

휴고 휘하의 십인대원들은 루시안이 챙겨준 경비로 병사들은 마음껏 먹고 마시며 떠들어댔다.

따로 명령할 필요도 없이 입단속을 시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전투의 상세한 과정이 그들의 입에서 줄줄 흘러 나왔다.

특히 휴고가 말했던 병사는 마음껏 재능을 발휘해 루시안의 공적을 떠들어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일황자 전하께 겁먹었으면 뒤로 빠져 있으라는 모욕을 받으셨다더군. 어찌 그럴 수가 있나? 루시안 님께서는 전하를 걱정해서 한 소리였는데 말이야."

"허어, 그래서 어찌 되었나?"

"어찌 되긴? 뒤로 빠지는 수밖에. 하지만 그때도 루시안 님은 선견지명을 발휘하셔서 몰래 뒤를 따르시기로 하셨네. 보디엄 성까지 도착하시는 것만 확인해보기로 한 거지."

"아이고, 그러다 걸리면 꼼짝없이 명령 불복종인데."

"설마 들켜서 또 한소리 들으신 건가?"

"그 반대야! 루시안 님의 예상대로 도움을 요청하는 불꽃이 파바바박 튀었지! 이 모든 걸 예상하였다는 듯 그분께서는 뒤를 돌아보며 '출진이다.'라며 묵직하게 말하시는데...!"

약간의 과정을 빼면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이 발데크 영지 전역에 퍼져 나갔다.

루시안과 베른하르트 후작의 대립, 일황자의 우행, 대협정의 파기, 연합군 구출과 황제의 등장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영민들은 연신 전투에 대해 떠들어댔다.

이윽고 소식은 켈하임에 있는 지그문트 대공과 다른 형제들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당장 그 멍청한 놈을 여기로 소환해야 합니다!"

조르디는 시뻘겋게 물든 얼굴로 대공을 향해 말했다.

도드라진 핏줄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꿈틀거렸다.

"전투가 끝났다면 한시라도 빨리 돌아와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 법! 그런데 장수의 의무는 내팽개친 채 뭉그적거리며 제 공을 자랑하다니요! 세상에 이런 몰지각한 짓이 어디 있답니까!"

"형님이 공을 세운 건 사실이지만 연합군은 패배했습니다. 제국으로서는 비극이지요. 그 사실을 저리 퍼뜨리고 다니는 건 객관적으로도 영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조르디의 말에 조슈아가 추임새를 넣었다.

분노한 조르디와 달리 담담함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목소리 사이사이에 스며든 짜증은 어쩔 수 없었다.

트리스탄 역시 좋은 기분은 아닌지 동생들의 주장에 한마디를 더했다.

"다른 건 다 둘째 치더라도 폐하께서 최대한 묻으시려던 일입니다. 그 의중에 반하여 상세한 내용을 알리고 다니는 건 정치적으로도 좋은 처신이라 볼 수 없습니다."

"으음."

아들들의 반발에 지그문트 대공은 고민하며 턱을 쓸었다.

분명 이번 일은 루시안에게도 문제 삼을 소지가 제법 있었으니까.

대공이 망설이는 모습에 자신들의 주장이 먹혔다고 생각한 조르디가 소리쳤다.

"아버지, 당장 루시안 놈을 불러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훈계하셔야 합니다! 이대로 가면 저 머저리를 주변 사람들이 영웅시할 게 뻔합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예! 그래야 놈의 실상을 다른 이들도 알 테니...!"

"쯧!"

대공은 요란하게 혀를 차며 조르디를 노려봤다.

조르디는 갑작스러운 대공의 변화에 흠칫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한심한 녀석. 셋째의 잘못이 없는 건 아니나 너는 사소한 원한으로 모든 걸 망치려 드는구나."

"예?"

"셋째가 공을 혼자 세웠더냐? 녀석이 세운 공은 같이 싸운 모든 병사와 기사들의 공이기도 하다. 그런데 남들 앞에서 셋째를 깎아내려? 가문의 이름 아래에서 목숨 걸고 싸운 이들이 참 좋아하겠구나."

"...."

대공의 통렬한 지적에 조르디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55화

"명심하거라. 승전은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군의 승리. 승전 자체를 깎아내리는 건 같이 싸운 병사들의 용기와 공로도 깎아내린다는 뜻임을."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지그문트 대공의 차가운 목소리에 조르디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단순한 꾸중이 아니라 남의 위에 서는 사람으로서의 태도를 지적받은 것이라 더 속이 쓰렸다.

"하지만 둘째의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아무리 공을 세웠다 한들 이대로 셋째가 영웅으로 여겨지는 것도 문제입니다."

조르디가 침몰하자 이번엔 트리스탄이 나섰다.

차기 가주 경쟁은 둘째치고서라도 원칙주의자인 트리스탄의 눈에 루시안이 하는 짓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모략을 통해 자신의 공적을 알린다면 앞으로 셋째가 어찌 나오겠습니까? 아버지께 보고하지 않은 채 두 번, 세 번 같은 짓을 반복할지도 모릅니다."

"음."

"더 큰 문제는 황제 폐하의 성심입니다. 폐하께서 왜 논공행상을 피하고 연합군을 그대로 해산시키셨겠습니까? 일황자 전하에 대한 추문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루시안의 공적과 일황자의 추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사실상 루시안이 제시한 해결책을 일황자가 죄다 무시한 게 원인이니까.

달리 말하자면 루시안이 돋보이는 만큼 일황자가 추해질 수밖에 없는 셈.

"그런데도 셋째는 자신의 공적을 돋보이게 하려고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셋째가 황제 폐하의 의중을 못 읽어서 이런 짓을 하겠습니까? 알면서도 무시한 게 분명합니다."

"후우우."

트리스탄의 지적에 지그문트 대공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또한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셋째가 마냥 틀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할 수가 없구나."

"예?"

"황제 폐하께서는 분명 네가 말한 대로 일황자 전하의 추문을 감추시고 싶으셨겠지. 하지만 그건 우리 장병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들의 공적도 같이 덮어야 하니까."

"그건...."

"이번 전쟁에 패전인 건 부정할 수 없다만, 발데크 가문의 자랑스러운 병사들은 분명 많은 활약을 했다. 그럼에도 셋째가 소문을 퍼뜨리지 않으면 패잔병과 별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았겠지."

연합군이 패전한 이상 소속되어 있던 병사들도 패잔병이란 낙인은 피할 수 없다.

물론 지금처럼 세세한 사정이 알려진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굳이 알리지 않고 숨겼다면 '결국 졌잖아?'란 소리만 들었을 거다.

당연히 모처럼 공을 세우고도 패잔병과 도매금으로 엮인 병사들은 속이 문드러질 테고 말이다.

"셋째는 자기 공을 알리기 위해 이런 짓을 벌였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덕에 병사들도 활약에 걸맞은 대접을 받을 터. 녀석의 독단이라고는 하나 그 점에 한해서만큼은 셋째를 책망하기 어렵구나."

"그, 그럼 형님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으실 생각이신 겁니까?"

조슈아가 불안한 얼굴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명백한 월권행위조차 감싼다면 이미 가주 자리는 결정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다행히 지그문트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다. 셋째 녀석이 가주라면 문제 될 건 없으나 나를 내버려 두고 이런 짓을 한 건 조금 선을 넘었지. 남들 앞에서는 치하하더라도 불러서 혼 좀 내야겠다."

대공의 대답을 듣고도 세 형제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공식적으로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크게 혼내더라도 결국 아버지와 아들 간의 문제일 뿐.

루시안의 입지 자체는 흔들림이 없을뿐더러 이전보다 더욱 단단해질 게 분명했다.

'셋째가 멈출 줄 모르고 나아가는구나.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경쟁자는커녕 장애물로도 여겨지지 못했거늘.'

'이젠 셋이서 단합해도 놈의 발목을 간신히 붙드는 게 고작인가? 제기랄, 어쩌다 이리된 건지.'

세 형제는 현 상황을 한탄하면서도 속으로 경쟁심을 불태웠다.

아무리 독보적으로 치고 나간다 하더라도 루시안이 두각을 드러낸 건 겨우 1년 남짓.

진즉부터 가주 경쟁에 참여 중이던 형제들이 추월할 여지는 아직도 충분히 있었다.

'지금은 일단 때를 기다려야 한다. 기회만 잘 잡는다면 판은 얼마든지 뒤바꿀 수 있어.'

형제들은 일제히 같은 생각을 떠올렸지만, 모두 다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 기회란 다른 말로 하자면 신변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도박이라는 것을.

본인들이 위기에 먼저 뛰어들지 않으면 잡을 기회조차 없다는 것을 말이다.

****

그로부터 사흘 뒤, 소문이 퍼질대로 퍼졌다고 생각한 루시안은 당당히 켈하임에 입성했다.

이미 병사들의 활약을 알고 있던 영민들은 그들을 개선군처럼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연합군이 다 나자빠지는데 우리 병사들만 대활약을 했다며?"

"절체절명의 순간 등장해서 일황자 전하까지 구출했다잖아."

"이야, 내가 다 자랑스럽네. 역시 사자의 자식들이라니까."

사자의 자식들이란 보통 병사들이 발데크 가문 소속인 걸 자화자찬할 때나 쓰는 표현.

하지만 이날만큼은 영민들도 기꺼이 그들을 향해 사자의 자식들이라 불러주었다.

조금씩 주변에서 들려오는 칭찬에 병사들은 가슴을 쫙 펴고 당당히 행군했다.

지그문트 대공은 마중을 나와 기사와 병사들을 크게 치하했다.

"그대들이 없었다면 연합군은 퇴각조차 하지 못했을 터. 발데크의 주인으로서 참으로 자랑스럽구나. 술과 고기를 내릴 테니 마음껏 먹고 마시도록!"

"와아아아! 대공 전하 만세!"

연합군의 패배 때문에 포상 대신 질책을 내리지 않을까 의심했던 대공마저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자 병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만 대공은 모든 이를 치하하면서도 루시안만큼은 아무런 칭찬 없이 굳은 얼굴로 마주했다.

"들어오거라. 네게 할 말이 있다."

"대공 전하, 이번 일은 사실...!"

"조용. 이야기는 나중에 듣겠네."

다급히 제라드가 루시안을 변호하려 했지만, 대공은 차갑게 말을 끊었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에 루시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공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주변에 사람을 물린 대공이 집무실에 들어와 문을 닫고 소리쳤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조용히 오면 내가 네 공을 모르겠느냐? 제 명성을 알릴 욕심에 이런 협잡질까지 하다니!"

루시안은 다급히 고개를 숙였으나 동시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눌러야 했다.

목소리만 컸지 정작 진짜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병 시절 온갖 귀족들을 상대해 본 루시안에게 이를 구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도 내 판단에 대해 유감은 없으신 모양이군.'

굳이 따지자면 가주도 아니면서 가문의 중대사를 멋대로 처리했다는 걸 질책하려는 거겠지.

그 점은 루시안도 조금 찔리는 면이 있었기에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께 보고부터 드려야 했으나 전령이 오고 가는 시간만큼 귀환이 더 늦어지면 주변에서 수상히 여길까 싶어 제 독단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폐하께서 논공행상을 생략한 의미를 진정 모른다는 말이냐? 황실을 배려하고자 했다면 넌 이 일을 최대한 숨겨야 했다."

"하지만 그리 하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장병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았을 겁니다. 저는 그들이 활약한 만큼 명성을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물질적인 포상이 없더라도 최소한 패잔병 취급은 받지 않았으면 했으니까요."

"크흠, 여전히 말은 잘하는구나."

대공은 루시안의 해명에 불편한 표정으로 몇 번 헛기침을 하고는 넘어갔다.

굳이 더 파고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공의 진심을 엿볼 수 있었다.

"그에 관해선 나중에 더 이야기 하기로 하고... 소문과 별개로 이번 전쟁은 어찌 진행된 것이냐? 네 입에서 직접 듣고 싶구나."

형식적인 질책을 끝낸 지그문트 대공이 눈을 번뜩였다.

그 모습에 루시안도 자세를 바로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합군은 시작부터 좋지 않았습니다. 호르센 강에서 모인 직후 대뜸 가면부터 건네더군요."

****

"...그리하여 폐하께서는 두 황자 전하와 함께 귀환하시고 연합군은 그 자리에서 해산하였습니다."

"허어어."

대공은 루시안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들고 허파 새는 소리를 내었다.

한 단어로 정리하기 힘든 복잡미묘한 감정이 대공에게서 느껴졌다.

"기가 막히는군. 일황자 전하는 참으로... 참으로... 후우우!"

지끈거리는 이마를 매만지며 대공이 뒷말을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차마 황자에게 욕을 할 수는 없다며 본인을 다독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가슴을 진정시킨 대공은 루시안을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때는 네 활약에 과장이 포함되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이상이구나."

"과찬이십니다. 자칫하면 명령 불복종으로 몰릴 수도 있는 도박이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는 잘 풀렸지요."

"난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네 행동은 월권이고 불충으로 몰릴 수 있는 위험이 있었지. 하지만...."

말을 멈춘 대공은 자신의 손바닥을 펴서 바라봤다.

굳게 닫혀 있던 손바닥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런 나조차 네가 해낸 일에는 평소의 신념을 굽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만큼 일황자 전하의 신변은 중요한 문제였다. 최악의 경우 제국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을 만큼."

루시안은 대공의 말에 마음속으로 동의했다.

그도 그럴 게 전생에서 제국이 무너져 내린 건 반란 진압 도중 일황자가 사망했기 때문이니까.

'황제는 아끼던 자식의 죽음에 눈이 돌아갔고, 크레펠트를 풀 한 포기 안 남기고 초토화해버렸지.'

어디까지나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나 숨겨둔 모든 힘을 꺼낸 황실의 저력은 무시무시했다고 한다.

황제는 다른 영주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황실 소속 정예병들만을 이끌고 수도에 당도해 국왕 에리히의 목을 쳤다.

말도 안 되는 황실의 저력에 세상은 기겁했으나 문제는 반란 진압 이후 기력을 소진한 황제가 앓아누워버렸다는 거다.

황실은 위엄을 떨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혼란에 빠져들었고, 무기력하게 사방에서 난립하는 세력을 두고봐야 했다.

'호사가들은 크레펠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황실이 가지고 있던 힘을 다 소진한 것도 이유 중 하나라고 했지만....'

예전에는 루시안도 그 말을 믿었으나 다시 생각하니 조금 의심스러웠다.

황제는 연합군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마법을 펑펑 써대며 영주들을 압박했다.

그리 쉽게 소진될만한 힘이라면 기사회생의 한 수로 쓰지 대놓고 억제력으로 쓰진 않을 터.

'제국의 사정이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내긴 했겠지. 그렇지만 벼랑 끝에 몰려 있다는 느낌은 없었어. 그만한 여유가 있다면 크레펠트 하나 없애버린다고 바닥나진 않을 텐데 대체 왜 이후로 안 쓴 거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으나 이내 루시안은 생각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진상을 모르는 이상 모든 게 가설.

괜히 멋대로 가설을 반복한 끝에 잘못된 결론을 내리느니 판단을 보류하는 게 나았다.

"그나저나 황제 폐하께서 마법을 쓰시다니. 지금껏 모시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늘."

상념에 잠겨있던 루시안을 깨운 건 대공의 목소리였다.

루시안은 대공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설마 아버지도 모르셨던 겁니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 젊은 시절 폐하께서 슬쩍 귀띔해 주셨으니까. 하지만 말로만 들은 게 전부고 그나마도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이야기들뿐이다. 황실의 숨은 힘인만큼 폐하께서도 함부로 밝히시기 껄끄러웠겠지."

그런데 기어코 남들 앞에서 그 힘을 꺼내 쓰다니.

황제도 현 상황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명이나 마찬가지였다.

"난세가 오고 있구나."

등을 돌린 지그문트 대공이 착잡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끝으로 대공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한참 동안 침묵했다.

루시안이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 몇 분 후 대공의 입이 열렸다.

"루시안."

"예, 아버지."

"나는 발데크 대공가의 가주로서 뛰어난 자식을 후계로 앉히는 것만이 아니라 안정적인 승계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승계 과정이 불안정하면 기껏 후계자를 선정해봤자 금방 바뀔 테니 아무 의미가 없지."

"맞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귀한 보물이라도 본인이 지키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니."

대공은 다시 몸을 돌려 루시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가문에서 네 세력을 만들거라."

"...!"

56화

가문 내에서 차기 가주 후보들이 저마다 세력을 만드는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경쟁에서 앞서 나가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어디 한둘이던가.

정보 수집, 경쟁자의 발목 잡기, 부재 시 긴급상황 대처부터 자잘한 청탁 처리까지.

이러다 보니 세력 없이 혼자 경쟁에 나서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가문 내에서 따로 세력을 형성한다는 건 가주의 눈총을 받는 일이기도 하지. 가문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가주니까.'

그런데도 가주가 자식들의 세력 싸움을 가만히 보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

후계자가 사람 다루는 법을 익힐 기회인 데다 어차피 가주의 권위에는 범접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주 후보들이 기껏 세력을 형성해봤자 가주의 기함 한 번이면 모래성처럼 흩어지니까.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짓도 아니고 교육도 되는 데다 위협이랄 것도 없으니 내버려 두는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위협이 안 되더라도 가주 역시 인간.

'가문의 주인을 내버려 두고 저들끼리 아웅다웅하는 꼴을 보면 누구라도 눈에 거슬리겠지. 그래서 보통 권하지는 않고 세력 형성을 못 본 척해주는 정도가 고작인데....'

지금 지그문트 대공은 루시안에게 아예 세력을 형성하라 권하고 있었다.

뭐라 해야 할지 몰라 한창 머뭇거리고 있는 와중 대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착각하지는 마라. 아직 네게 가문을 물려주겠다고 정한 건 아니다."

"...."

"하지만 너도 후보 중 하나. 기껏 내가 널 차기 가주로 정했는데 눈 뜨고 코앞에서 빼앗기면 그게 무슨 추태냐? 최소한 누군가 가주 자리를 빼앗으려 할 때 저항할 수 있을 만큼은 세력을 키워두도록 해라."

어조는 쌀쌀맞았지만,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확정된 건 아닐지라도 루시안을 유력한 후보로 생각한다는 소리.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다만, 내게 의존할 생각은 관둬라. 다른 이의 힘으로 만든 세력이란 모래 위의 성과 같은 법. 옆에 설 전우는 오롯이 네 힘만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나가 보거라."

루시안은 고개를 깊게 숙이고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집무실에 혼자 남은 대공은 의자에 몸을 깊게 누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닌가? 다른 아이들도 아직 잠재력을 다 보이진 못했거늘.'

첫째 트리스탄은 지나친 원칙주의자에 너무 쉽게 포기하는 면이 있지만, 그 대신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굳건함과 재빠른 판단력을 보여주곤 했다.

반대로 둘째 조르디는 아랫사람을 험하게 다루고 신의를 자주 어겼으나 철저한 손익 계산을 통해 언제나 위기 상황에서의 손해를 최소화했다.

넷째 조슈아는 아직까지 특출난 면을 보여준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족한 면도 보여준 적이 없으니 차차 지켜보며 판단할 일이었다.

'다들 미숙한 만큼 성장 가능성도 아직 많이 남아있다. 원래대로라면 아이들의 발전을 지켜본 후에야 결정을 내려야 하겠지만....'

느긋하게 자식들의 성장을 기다리기엔 상정 외의 사태가 너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자식들이 다 성장할 때까지 세상의 풍파가 발데크를 피해간다면 상관없겠으나 그럴 일은 없을 터.

대놓고 확정하진 않더라도 여차할 때 바로 정할 수 있는 후보 하나쯤은 필요했다.

'루시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형제들의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툭하면 잘못을 다른 이에게 돌리던 셋째 아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1년 만에 각성하여 사람이 바뀌었다.

과감하고 무모한 면이 있으나 모든 행동은 이치에 합당했으며 대국을 보는 시야는 다른 자식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

발전을 기다려야 하는 다른 자식들과 달리 어엿한 귀족으로서 완성되어 있는 게 루시안이었다.

"비상한 시기에는 비상한 선택을 내려야 한다고 했던가."

대공은 씁쓰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천장을 바라봤다.

여느 때처럼 세상은 인간의 사정 따윈 헤아려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

루시안은 가문으로 돌아왔지만 좀처럼 쉴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눈치를 보던 기사들이 이젠 대놓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삼공자, 괜찮으시다면 잠깐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절 기억하십니까? 예전에 한 번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지요."

"제 이름을 기억해주십시오. 곧 다시 뵐 날이 있을 겁니다."

접근해오는 방식은 각양각색이었다.

정중히 예를 표하면서 다가오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옷깃 하나 스쳤다고 아는 척하는 자도 있었다.

그중 제일 가관인 건 운명적인 만남을 가장하며 자신을 비범한 인재처럼 꾸미는 부류였다.

'명색이 대가문 소속이란 자들이 자존심도 없나? 이런 유치한 방법을 쓰다니.'

루시안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기사들을 물리친 후 한스에게 명령했다.

"앞으로 저런 어중이떠중이는 네 선에서 걸러."

"예? 도련님, 저분들은 기사입니다!"

"기사가 뭐?"

"저는 일개 하인인데 기사분들이 억지로 밀고 들어오면 무슨 수로 막습니까?"

"그렇게 멍청한 놈이라면 내가 직접 나서서 쫓아낼 테니 걱정 마. 제정신이 박혔다면 그딴 짓을 하지도 않겠지만."

제국에서 신분은 절대적이지만, 권력이 언제나 신분에 따라 결정되는 건 아니다.

한스는 루시안의 전속 하인인 데다 남들에게 무시당하던 시절에도 곁을 지킨 심복 중의 심복.

얼굴조차 모르는 기사의 애걸보다는 한스의 농담 섞인 부탁이 루시안에겐 더 중요했다.

그런데 그런 한스를 신분이 낮다고 함부로 대한다?

'기본적인 정치 감각조차 없다는 거지.'

그 정도로 수준 낮은 놈이라면 말을 나누는 것조차 시간 낭비였다.

루시안의 명령에 한스는 불안해하면서도 이후 찾아오는 기사들을 자기 선에서 돌려보냈다.

다행히 다른 형제들의 측근에게서 배운 바가 있었는지 한스를 무시하는 기사는 없었다.

"명성을 얻은 건 좋지만 이래서야 어중이떠중이 골라내느라 한세월이겠군."

루시안은 한숨을 내쉬며 창문 너머로 돌아가는 기사의 무리를 쳐다봤다.

문득 이전에 지그문트 대공이 했던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세력이라. 분명 있어서 나쁠 건 없겠지.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테고. 하지만 저런 놈들로 세력을 만들자니 영 안 내킨단 말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실속 없이 덩치만 큰 세력 따윈 만들기 싫었다.

지금껏 봐온 여러 세력이 수장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썩어갔기 때문에 더더욱.

최소한 구성원 하나하나가 남에게 보이기 부끄럽지 않은 정도는 돼야 할 것 아닌가.

루시안이 원하는 건 다른 형제들보다 훨씬 작더라도 속이 꽉 찬 최정예 세력이었다.

'문제는 인재에게 줄 보상이란 말이지. 제 능력을 아는 자들이 명성이랑 미래의 공수표 하나만 믿고 오진 않을 텐데.'

지금 달려드는 기사들은 죄다 미래의 가능성만 보고 선을 대려는 피라미였다.

진짜 자신의 가치를 아는 인재들은 애초에 자신을 싸게 팔아넘기지 않는다.

본인의 능력이라면 누구든 정당한 대가를 기꺼이 치르고 손에 넣으려는 걸 아니까.

그런데 루시안에겐 이런 인재들을 유혹할만한 보상이 수중에 하나도 없었다.

'휴고와 펠리시아는 애초에 내가 아니면 능력을 펼칠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충성을 얻을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이런 방식을 계속 써먹는 건 불가능해.'

모든 인재가 불합리한 환경에 갇혀 지내는 건 아니니까.

한참 고민하던 루시안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한때 황실조차 좌지우지했던 보물 중의 보물이 아직 잠들어 있는 상태.

그 보물을 먼저 발견하여 몰래 챙길 수만 있다면.

'정보가 거의 없어 찾을 가능성은 낮지만, 그래도 시도를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생각을 마친 루시안은 즉시 지그문트 대공을 찾아갔다.

****

"수도에 가고 싶으니 허락해달라고?"

"예."

지그문트 대공은 갑작스러운 루시안의 부탁에 눈을 끔뻑였다.

뜬금없이 웬 수도행이란 말인가?

그것도 한창 세력을 구성하기 위해 이것저것 바쁠 시기에.

"일단 이유나 들어보자꾸나. 수도에는 무슨 볼일이 있어서 가려 하느냐?"

"패전 이후의 분위기를 살피고 겸사겸사 인재도 찾고자 합니다."

"인재라니? 수도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느냐?"

"그건 아닙니다만 최근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터라 확인차 방문할 생각입니다."

대공의 질문에 루시안은 상세한 답변을 최대한 회피했다.

곧 개발될 영약의 제조자를 찾으려 한다는 소릴 할 수는 없었으니까.

루시안을 조용히 바라보던 대공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너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일이겠지. 네 뜻대로 하거라. 다만 신분을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건 가급적 피하거라."

"물론입니다. 대접받으러 가는 게 아니니 최대한 조용히 다녀오겠습니다."

"호위로는 레이먼을 붙여주마. 최근 네가 마음에 들었는지 호위를 선발할 때는 꼭 자청하더군."

레이먼이라.

첫 만남에서 호위를 담당한 이후 여러모로 정이 든 사내다.

그러고 보니 레이먼도 인재 중 하나인데 어떻게든 포섭할 수 없으려나.

루시안의 생각을 읽은 건지 지그문트 대공은 지나가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한 가지 네게 알려주자면 흑사자는 죽을 때까지 강제로 복무하는 게 아니다. 나이가 차면 은퇴할 수도 있고 충분한 공을 세운다면 소속을 옮길 수도 있지. 그 과정이 은밀해서 잘 드러나지 않을 뿐."

"...!"

"조만간 레이먼은 흑사자에서 나올 예정이다. 어디로 갈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레이먼쯤 되는 실력자라면 걸맞는 대우를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대공의 말에 루시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발전 도중인 펠리시아나 휴고와 달리 레이먼은 이미 완성된 인재.

그런 인재에게 적절한 대우를 해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루시안의 역량 문제나 마찬가지였다.

'이거 한번 찔러보는 정도로 끝내서는 안 되겠어. 수도 전체를 뒤집더라도 반드시 찾아야겠군.'

루시안은 굳은 결심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입니다. 실력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지 못한다면 그자는 인재를 손에 넣을 자격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음, 실로 그렇지. 알고 있으니 다행이구나."

호쾌한 대답에 대공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인재란 한번 놓치면 다시 손에 넣기 더없이 힘든 법.

제 역량이 안 된다고 포기하는 것보다는 저리 자신을 채찍질해서라도 품에 안으려는 자세가 있어야 했다.

대화를 마친 대공이 축객령을 내리려 하자 루시안은 재빨리 뒷말을 이었다.

"수도행을 허락해주신 건 정말 감사합니다만, 아버지께 하나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

"어디까지나 시간이 되신다면이지만...."

잠시 후, 이어진 루시안의 말에 대공이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웃던 대공은 이내 간단히 두 번째 부탁을 허락했다.

****

한스는 돌아오자마자 또 나갈 채비를 하는 루시안을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

"도련님, 또 어디 나가시게요?"

"그래. 이번엔 수도로 간다."

"수도요? 아니, 수도는 갑자기 무슨 일로요?"

"마침 볼일이 생겼거든. 나 없는 동안 집 잘 봐라."

루시안의 부탁에 한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예전 같으면 전속 하인의 신분으로 항상 같이 다녔을 주인이다.

그런데 주인 아래 사람이 모이고 관리해야 할 게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한스가 붙어있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주인의 위상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소리기도 했지만, 한스 입장에서는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옛말에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라 했는데.'

한스는 얼마 전 새로 들어온 휴고와 펠리시아를 떠올렸다.

전속 하인으로서 주인과 같이한 세월은 한스가 훨씬 더 길었지만, 그 두 사람은 이미 한스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다.

그나마 휴고는 아직 한스와 같은 평민 신분이었으나 정말 기사가 되어버린다면 입장이 뒤바뀔 터.

'이러다 나만 맨 뒤로 밀려나는 거 아닐까? 조금씩 존재감이 사라지다 도련님에게 잊혀지면....'

끔찍한 상상에 한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한창 나갈 준비를 하던 루시안은 생각에 잠긴 한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무슨 상상을 하는데 그리 떨고 있냐?"

"예? 아뇨, 잠깐 딴생각을 좀."

"뭔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농땡이 피울 시간은 없을 테니 정신 똑바로 차려. 오늘 밤부터 네게 집사 교육 좀 해달라고 아버지께 부탁드렸거든."

"...!?"

루시안의 말에 한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57화

귀족에게 집사란 본인의 지위를 간접적으로 상징하는 존재다.

아직 가문을 물려받지 못한 아들이나 작위가 낮은 하급 귀족이라면 굳이 집사를 고용할 필요가 없다.

찾아오는 손님의 급이 높지 않아 하인들로만 대응해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지위가 높아지면서 거물들과 만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평민과 귀족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에서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니까.'

지위가 높아지면 당연히 차려야 할 예법도 까다로워진다.

단순한 인사부터 써야 하는 용어, 물러날 때의 자세와 소리 없는 발걸음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숙련된 하인이라도 이런 세세한 부분은 전문적인 교육 없이 알 방도가 없었다.

'최악의 경우 주인보다 높은 지위의 손님을 잘못 접대하여 큰일을 낼 수도 있지. 가신이든 하인이든 군주가 부리는 자는 군주의 얼굴이나 마찬가지.'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게 바로 집사였다.

예법에 대해 철저히 교육받은 데다 정치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하급 귀족 출신의 고용인.

귀족의 사정에 밝은 만큼 신뢰할 수만 있다면 어지간한 긴급 상황도 대응할 수 있었으니.

고위 귀족을 만날 기회가 잦다면 집사를 고용하는 게 필수라 할 수 있는 셈이다.

"도련님. 제가 집사라뇨?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뭔가 잘못 아신 거 아니에요?"

한스는 루시안의 말에 한참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다 되물었다.

너무 놀라서 자신이 무언가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이었다.

"잘못 알기는 무슨. 내가 직접 집사 교육해달라고 부탁했다니까."

"집사는 귀족 나리들만 하는 일 아닙니까. 전 평민인데요?"

"알아. 그러니 나중에 귀족으로 승격시켜 줘야지."

한스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전장에서 공도 안 세웠는데 귀족으로 승격이라니?

"그, 그게 가능한 겁니까?"

"작위만 있으면 가능해. 백작부터는 평민을 준남작까지 승격시킬 수 있거든. 한 세대마다 승격 횟수가 정해져 있어서 남발할 수는 없지만."

즉, 아무 공이 없더라도 백작급 귀족이 마음만 먹으면 승급 가능한 거다.

그런데도 굳이 전장에서 공을 세워야 승격시켜주는 이유는 두 가지.

본인이 인재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일인 데다 주변에 그만한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어차피 귀족 취급을 못 받기 때문이다.

기껏 승격시켜 줘봤자 주변에서 계속 운 좋은 평민으로만 본다면 승격이고 나발이고 아무 의미 없으니까.

"뭐, 이건 어디까지나 기사 출신 귀족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법칙이지만. 가주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집사라면 별 상관없어."

기사는 대외적인 인정이 필수적이나 집사는 가주의 신임만 안 잃어버리면 충분하다.

애초에 집안일만 하는 집사가 밖에서 인정받아봤자 뭘 하겠나?

명성 때문에 접촉하는 자가 많아지면 오히려 가문 내에선 의심의 눈초리만 받을 터.

집사에겐 그따위 쓸데없는 명성보다 가주의 신뢰가 수백 배는 더 중요했다.

"그러니 잘 배워. 잠자는 시간은 조금 줄어들겠지만, 나중에도 계속 내 일을 도우려면 지금 배워둬야지."

"도, 도련님."

루시안의 미소에 한스는 울컥했다.

주인이 자신을 잊고 있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귀족으로 승격시켜줄 생각까지 했다니.

주인을 믿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과분한 대우에 대한 감동이 뒤섞여 목이 멨다.

간신히 입을 연 한스가 깊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절대,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제대로 배워서 반드시 도련님께 도움이 될 테니 기다려주십시오."

"기대하지.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진 말고. 다 배우기도 전에 쓰러지면 내가 곤란해지니까."

루시안은 가볍게 대답했으나 한스는 진심이었다.

계속 하늘로 날아오르는 주인의 뒤를 따라가려면 본인도 필사적으로 달려야 할 테니까.

****

여느 때와 달리 수도로 향하는 루시안의 호위는 레이먼 한 명뿐이었다.

레이먼이 흑사자임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작은 규모.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대공은 물론 루시안조차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거리가 가까운 것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치안이 좋았기 때문이다.

'누가 켈하임에서 수도로 가는 길을 건드려? 미치지 않고서야.'

한쪽은 발데크 대공가의 중심지요 다른 한쪽은 제국의 수도.

두 영지는 잘 정비된 가도로 연결된 데다 역참은 물론 경비초소까지 일정 거리마다 지어져 있다.

그런데 이런 가도 한가운데서 사람을 습격하려 한다?

가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대공가와 황실의 체면 때문이라도 즉결 처형당할 가능성이 컸다.

"사실 안전만 따지자면 수도로 가는 길목이 오히려 수도 내부보다 안전할 겁니다. 수도 내부에는 사기꾼과 소매치기, 깡패 놈들이 있지만 여긴 그런 놈들조차 없으니까요."

같이 말을 몰던 레이먼이 이런 우스갯소리를 내뱉을 정도니 말 다 한 셈이다.

여행길은 예상대로 순탄했고, 루시안과 레이먼은 곧 수도에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수도에 가까운 덕인지 도시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을치고는 규모가 상당했고 여관도 고급스러웠다.

"가장 좋은 방을 내주도록. 호위도 함께해야 하니 1인실이 아닌 2인실로."

"알겠습니다, 나리! 식사는 언제 올릴까요?"

"목욕 후에 먹도록 하지. 물을 준비해주게."

"그럼 당장 물부터 따뜻하게 데워드리겠습니다!"

여관 주인은 싹싹한 태도로 루시안의 주문을 받았다.

굽신거리는 솜씨를 보아하니 이미 귀족 손님을 꽤 많이 상대해본 것 같았다.

루시안과 함께 방으로 들어온 레이먼은 막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수도에 사람을 찾으러 가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누굴 찾으러 가시는 겁니까?"

"연금술사."

"예? 연금술사? 그놈들 황실에 비전 다 빨아 먹히고 껍데기만 남은 놈들 아닙니까? 가 봤자 무언가 얻을 것도 없을 텐데요."

솔직한 레이먼의 감상에 루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당시 연금술사 길드의 위상은 정말 그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연금술사들 앞에선 그런 소리 마라. 이젠 체면밖에 안 남은 인간들인데 그것마저 깎아내리면 발작할걸."

"제깟 놈들이 발작해봤자 뭘 어쩌겠습니까? 흑마법사 놈들한테도 쓸모없다고 버려진 놈들인데."

레이먼이 말하는 흑마법사란 진짜 흑마법사가 아니라 3백 년 전 반란을 일으킨 마법사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시 연금술사들은 마법사들이 아닌 황실에 붙었고, 그 덕에 지금까지 공인된 학파로 유지될 수 있었다.

연금술사 길드에선 종종 이 역사를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으나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비웃음이었다.

"연금술사들은 자기들이 그만큼 충성스러웠다고 주장하지만 다 헛소리지요. 다른 마법사들이 저들을 같은 종자로 여기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황실 편에 선 주제에 충성은 무슨."

마법사는 연금술사를 '재능이 없어 약으로 마법 흉내나 내는 놈들'로 취급하며 자기 아래로 본다.

반란 이후 마법사에 대한 위상이 상당히 내려간 현재조차 그러할 지경인데 마법사 전성시대는 오죽하겠는가.

반란을 저지른 마법사들조차 연금술사들에겐 반란에 동참하라는 제의를 전혀 하지 않았다니 그 대접을 알만했다.

"하다못해 세상에 도움이라도 되면 주변에서 인정해줄 텐데 그것도 아니잖습니까. 벌써 몇백 년이 넘게 황실의 지원으로 무위도식하고 있으니 욕먹어도 싼 놈들입니다."

현존하는 포션의 효과를 더 개선하지도 못하면서 새로 창조되는 것도 없다.

하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이미 발명된 포션을 순도 높게 만드는 것뿐.

여기에 더해 제조법도 황실에 탈탈 털린 지 오래니 사라진다 해서 큰일 날 게 없었다.

'오랜만에 옛날 분위기를 느끼니 적응이 안 되는구만.'

레이먼의 투덜거림에 루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 이 시절 연금술사의 취급은 딱 레이먼의 평가대로였다.

과거의 영광을 못 잊은 채 무위도식하는 떨거지.

이 평가가 완전히 뒤집히는 게 불과 몇 달 후라니.

"설마하니 연금술사를 고용해서 새로운 영약이라도 개발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그건 아니니 걱정 마. 굳이 가능성도 없는 일에 투자할 생각은 없으니까."

미심쩍은 레이먼의 시선에 루시안은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루시안이 원하는 건 모험심 넘치는 세기의 천재지 타성에 찌든 겁쟁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현재의 연금술사는 방금 레이먼이 말한 대로 후자가 절대다수였다.

"어차피 새로 영약을 개발할만한 환경은 길드가 훨씬 잘 갖추어져 있을 거 아냐. 거기서도 개발을 못 했다면 끝난 거지."

"말씀대로입니다. 황실의 지원으로 그 좋은 설비 놔두고 뭐하는지 원."

"하지만 아무리 썩은 조직이라도 모험심 있는 사람이 아예 사라지진 않았겠지. 일단 길드로 가서...."

우당탕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루시안의 말을 끊듯이 아래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아하니 아래에서 말썽이 일어난 듯싶었다.

"무언가 일이 생긴 모양이군. 성질머리 더러운 귀족이라도 왔나?"

"한번 내려가 보시겠습니까?"

"가보지. 이대로 놔두면 언제 끝날지 모르니."

때로 귀족의 자존심은 극한대립을 일으키기 마련.

가만 놔두면 진정되기보다는 일이 더 커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가능하면 그 전에 지위가 높은 쪽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는 게 최선이었다.

'어지간하면 신분은 밝히고 싶지 않지만, 괜히 숨기다가 골치 아픈 상황에 엮이는 것보단 나으니까.'

루시안은 혹시 몰라 무기를 챙기고 아래로 내려갔다.

****

"대체 왜 못 받겠다는 거냐!? 이 물건이 대체 얼마짜리인 줄 아느냐!"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전 포션이라곤 제대로 써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에게 물어봐라! 가져다 팔면 한 달 숙박비는 될 거다!"

"그리 말씀하셔도 전 이런 물건을 팔아본 적이 없는지라...."

루시안의 눈에 식은땀을 흘리며 손님을 상대하는 여관 주인이 보였다.

면전에서 고함을 내지르는 손님은 한창 얼굴에 약병을 가져다 대고 흔드는 중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 약병을 대금 대신 지급하려던 모양이었다.

"눈뜬장님 같으니! 이 포션에는 달의 설탕에 진주 가루, 비단 비늘까지 들었다! 네놈은 평생 손도 못 댈 재료들이란 말이다!"

그 말에 루시안과 레이먼이 서로를 쳐다봤다.

자기가 직접 포션을 만들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게다가 진짜 재료 하나하나는 더없이 비싼 물건들.

저만한 재료를 공수해 포션을 만들 수 있는 직업은 하나뿐이었다.

"저 인간, 연금술사 길드 소속인가 봅니다."

"맹수는 자기 이야기를 할 때 나타난다더니."

루시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암만 봐도 떨거지였지만 길드 소속이라면 내부 정보를 가지고 있을 터.

수도에 당도하기 전에 미리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 그만하고 진정하시죠. 강요하는 게 좋아보이진 않습니다."

"누군데 함부로 남의 일에 끼어... 드십니까?"

역정을 내려던 연금술사는 이내 루시안의 복장을 보고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다지 돋보이는 디자인은 아니었으나 소재가 고급스러운 걸 눈치챈 듯했다.

"보아하니 숙박비가 필요한 것 같은데 내가 대신 내주도록 하지요. 그 대신 연금술에 대해서 제게 조금만 알려주시겠습니까? 듣자 하니 연금술 쪽에 꽤 조예가 있으신 듯한데."

"크흠, 굳이 그러시겠다면야 뭐...."

괜히 떼를 써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연금술사가 한발 물러섰다.

루시안이 말갛게 빛나는 금화 몇 개를 여관 주인의 손에 올려주자 주인의 허리가 꺾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리!"

"됐으니 2층에 식사나 가져오도록. 저분 몫은 내가 대신 낼 테니 걱정하지 말고."

"예!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목욕물은...."

"나중에."

여관 주인을 물린 후 루시안은 연금술사를 데리고 2층에 올랐다.

연금술사는 주변의 눈길이 사라지자 연신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큼. 그래서 연금술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는 게 뭡니까?"

감사 한마디 없이 대뜸 본론으로 들어가는 연금술사를 보며 루시안이 피식 웃었다.

그냥 해본 소리인데 '거래니까 난 빚을 안 졌다'라고 자존심을 챙기는 꼴이 우스웠다.

"먼저 통성명이나 합시다. 아직 서로의 이름도 모르고 있잖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난 하이데라는 사람입니다. 하이데 포보르. 그쪽의 이름은?"

루시안은 상대의 대답을 듣자마자 웃던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전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기억하는 연금술사의 이름이 튀어나왔기에.

'넥타르의 개발자, 하이데 포보르.'

눈앞의 남자는 전설로 불렸던 그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58화

연금술사 하이데에 대하여 세간에 알려진 건 거의 없다.

기껏해야 태어난 고향과 외모, 나이 정도만이 널리 퍼졌을 뿐.

넥타르의 개발자치고는 이상할 만치 적은 정보였다.

수많은 이들이 달려들어 뒤를 캐냈음에도 그게 전부인 이유는 간단했다.

'넥타르 개발 빼고는 정말 업적이라 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몰락 가문 출신의 하급 귀족으로 어쩌다 보니 인연이 닿아 연금술의 길에 입문.

이후 제국의 지원금으로 숱한 개발과 실패를 반복하다 우연히 넥타르의 개발에 성공.

그로 인해 짧은 시간 동안 어마어마한 영광을 누렸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요절했다.

죽음에 수상쩍은 부분이 있긴 하나 그것만 빼면 평범한 연금술사였던 셈이다.

'일단 세간의 평가와 똑같아 보이기는 하는데....'

"왜 대답이 없습니까? 사람이 이름을 댔으면 그쪽도 소개를 해야지요."

하이데는 이리저리 훑어보는 루시안의 시선에 불쾌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루시안은 뒤늦게 자기 실수를 깨닫고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거 죄송합니다. 루시안 발데크라고 합니다."

"...발데크? 설마 그 발데크?"

"그 발데크가 어떤 발데크인지는 몰라도 사자를 문장으로 쓰긴 합니다."

입술이 댓발이나 튀어나와있던 하이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이데는 곧 냉큼 기울었던 자세를 바로 하고 냅다 고개를 숙였다.

"발데크 가문의 자제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저는, 그러니까...!"

"진정하시죠. 딱히 방금 전 일로 뭐라 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가, 감사합니다!"

"감사를 느끼신다면 잠깐 저와 이야기나 나누시죠."

"이야기라시면...."

"뭐, 연금술에 대한 것과 최근 수도의 분위기 같은 것들 말입니다."

루시안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태도로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다.

다행히 상대는 권력과 지위에 약한 타입.

이대로 밀어붙이면 정보를 끌어내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뭐든 대답해드리겠습니다! 부디 말씀만 해주십시오!"

잃은 점수를 딸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하이데는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하던 루시안은 가장 궁금하던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최근 연금술사 길드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예? 길드의 분위기라니요? 여느 때와 같습니다만."

"정말 다른 변화가 없습니까? 새로운 제조법이 발견되었다거나, 아니면 약초의 또 다른 효능을 알아내었다든가."

"으음."

최대한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했음에도 하이데의 반응은 똑같았다.

아니, 오히려 한참 더 생각했음에도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새로운 시도는 계속하고 있으나 실패, 또 실패지요. 성공 사례가 나왔다면 벌써 제 귀에 들어왔을 겁니다."

"과연."

루시안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사실은 꽤 당혹스러웠다.

전생에서 연금술사 길드가 월광초를 쓸어가는 게 앞으로 3개월 후쯤이다.

그런데 아직도 아무런 성공 사례가 없다고?

"그럼 최근 수도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전쟁으로 불안해하지는 않습니까?"

"글쎄요. 저는 얼마 전까지 다른 도시에 있었던지라. 적어도 제가 떠날 당시에 별일은 없었습니다."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한 루시안은 질문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실제로 정보를 얻으려는 질문이 아니라 하이데라는 인간을 파악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제국의 현 정세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 것 같은지.

자잘한 질문이지만 사람의 가치관은 대개 이런 질문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사람을 파악할 때는 그 사람의 가치관을 알아보는 게 제일이지.'

정말 눈앞의 하이데가 넥타르의 개발자라면 언젠가 거둬야만 하는 인재.

나중에 임관을 권유하기 위해서라도 무엇을 원하는지 이참에 알아둘 생각이었다.

****

한참 이것저것 묻던 루시안은 이내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뭔 놈의 대답이 죄다 모른다 일색이야?'

하이데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 대부분은 '모른다' 혹은 '관심이 없어서'였다.

학자 특유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하면 듣기는 좋으나 암만 봐도 그런 쪽은 아니었다.

학자의 무관심이라면 적어도 자신의 학문과 연관되는 사안만큼은 확실히 파악해둘 터.

그러나 하이데는 말 그대로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관심 자체가 없었다.

'이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무사안일주의자 같은데. 황실에서 돈만 꼬박꼬박 나오면 나머진 알 바 아니라 이건가?'

"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대화를 이어가던 하이데가 움찔하며 되물었다.

루시안은 그제야 자신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오. 대화하다 보니 목이 말라져서."

대충 둘러대긴 했으나 루시안의 말투는 어느새 하오체로 바뀌어 있었다.

하이데에 대한 평가가 몇 단계 떨어진 탓이었다.

"그럼 본론인 연금술로 돌아가 봅시다. 듣자 하니 포션을 직접 만든 것 같던데 성과가 좀 있었소?"

"아, 그야 물론이지요! 이건 비밀입니다만, 최근 일부 포션의 재료들을 바꿨더니 특이한 반응을 몇 개 찾아냈습니다."

연금술 연구로 화제가 옮겨가자 하이데는 신나게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까 전의 대화로 떨어진 본인의 평가를 되돌릴 생각 같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하이데의 설명에 평가는 오히려 더 떨어졌다.

'죄다 존재하던 포션 효과의 재탕에 시작할 때도 가설 하나 안 세워놓았군. 말이 실험이지 아무거나 무작정 섞어놓고 반응을 보는 게 전부고.'

루시안은 연금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꽤 오랜 연구를 거쳐야 새로운 제조법이 나온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그런데 이 인간은 새로운 제조법은커녕 이미 존재하는 포션 효과만 재탕하고 있다.

일부러 숨기고 있을 가능성도 있긴 하나 저 가벼운 입을 보면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았다.

"하나만 묻겠소. 월광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루시안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물었다.

뜬금없는 물음에 하이데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숨김없이 진심을 루시안에게 드러냈다.

"그냥 몸에 좋은 약초지요. 가끔 연금술에 써보겠다고 하는 놈들이 있지만, 한심한 소리입니다. 이미 다 연구된 재료를 다시 쓰는 것만큼 시간 낭비는 없으니까요."

****

"한심한 인간이더군."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짜증을 내뱉었다.

넥타르의 개발자, 하이데 포보르는 개뿔이.

"연구란 황실의 지원금을 받기 위한 요식행위, 어쩌다 새로운 발견을 해도 연구할 생각은 없고, 대충 이것저것 섞다 우연히 좋은 거 나오면 대박이라니. 요즘엔 저런 놈도 학자라 불리나?"

"딱 평범한 연금술사 아닙니까. 그리 실망할 일도 아닙니다."

레이먼의 말에 루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이 시대의 평범한 연금술사긴 했다.

전생에서의 이름값만 없었다면 루시안도 실망하진 않았을 텐데.

'그나저나 저놈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지? 아니, 애초에 왜 저놈이 넥타르의 개발자로 알려진 거야?'

전생과 같다면 3개월 후에 연금술사 길드가 전국의 월광초를 쓸어가기 시작한다.

달리 말하자면 남들에게 내보일 만큼의 성과가 지금쯤 있어야 한다는 뜻.

그런데 하이데에게 그런 연구 성과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 연구해봤자 남들 앞에 보일 만큼 성과가 나올 리 없지. 그렇다면 이미 다른 이가 연구한 걸 빼앗았다는 뜻인데.'

문제는 하이데 본인이 현 생활에 제법 만족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만한 연구 성과를 다른 연금술사에게서 훔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훔치는 데 성공해도 연구 성과를 빼앗긴 연금술사가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과연 저 야망 없는 인간이 목숨 걸고 연구 성과를 빼앗으려 들까?

'뭐, 그건 지금부터 알아내면 되겠지.'

다행히 진짜 개발자를 찾을 시간은 아직 넉넉히 있었다.

그리고 그 방법 역시 어렵지 않았다.

다음 날, 루시안은 레이먼과 함께 아침 일찍 여관을 떠나 목적지를 향했다.

이미 거의 다 온 참이라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삼공자께선 수도에 처음 와보시는 거 아닙니까?"

"맞아. 처음이지."

전생에서도 제국의 수도에 방문한 적은 없다.

방문할 여유가 생겼을 때는 이미 난세가 시작된 이후라 수도 전체가 엄청나게 위험해진 상태였다.

설령 찾아갔더라도 이미 몇 차례 공성전이 일어난 장소였기에 반쯤 폐허가 되었을 터.

"솔직히 조금 기대되는군. 제국의 보석이라던데. 켈하임보다 더 웅장한가?"

"어느 쪽이냐면 더 아름답다가 맞겠지요. 아, 마침 보이는군요."

레이먼은 손가락으로 저 멀리 보이는 성벽을 가리켰다.

처음엔 희끄무레하게 보였던 성벽이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그 자태를 드러냈다.

'하얗다?'

새하얀 백색의 성벽은 햇볕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성벽에 양각된 여러 문양이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그림을 그려냈다.

성벽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놀라는 루시안을 보며 레이먼이 씩 웃었다.

"제국의 수도, 티브론의 백색 성벽입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루시안은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성벽에 가까워질수록 루시안의 눈은 커졌다.

가까이 갈수록 성벽의 아름다움이 돋보인 것도 있었지만, 성벽에 이음새라고 할 만한 게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경사면이 매끄러운 나머지 사다리를 올려놓으면 그냥 미끄러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런 성을 공략하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대체 무슨 수로 함락시킨 거야?'

"듣자 하니 저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마법진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적이 오면 마법이 발동하여 가까이 오는 적들을 튕겨낸다더군요."

멍하니 성벽을 구경하는 루시안의 귓가에 대고 레이먼이 속삭였다.

척 보기에도 철옹성인데 마법까지 걸려 있다는 소리에 루시안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거 진짜야?"

"어디까지나 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 저도 이전까진 믿지 않았습니다만, 폐하께서 남들 앞에서 그토록 마법을 자주 쓰셨으니...."

레이먼이 말끝을 흐렸다.

하기야 예전엔 웃고 넘겼어도 이젠 혹시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겠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두 사람이 성문으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뭐야, 이 줄은?"

루시안이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줄을 보고 흠칫했다.

아니, 저 거대한 문을 두고서 이렇게 긴 줄이 생긴다고?

하지만 레이먼은 익숙한 광경이라는 듯 웃고 넘겼다.

"아무래도 티브론은 수도인 만큼 신원확인에 공을 들이니까요. 그래도 뭐, 금방 줄어들 겁니다. 경비대가 그리 융통성이 없진 않거든요."

레이먼의 말에 따르면 자주 수도에 방문하는 행상이나 기술자의 경우 비교적 검문이 널널하다고 했다.

유동인구가 워낙 많아 전부 원칙대로 했다간 지나치게 시간이 걸리는 탓이었다.

"원하신다면 삼공자의 신원을 밝힌 후 먼저 들여보내 달라고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아니, 일단 기다려보지. 다들 줄을 서는데 둘만 앞서 나가면 괜히 주목을 받을 수도 있으니."

가문의 공식적인 행사라면 당연히 그리했겠지만, 이번 수도행은 루시안의 개인적인 방문.

괜히 이목을 끌었다가 신분이 드러나는 건 원치 않았다.

줄을 서도 경비대에게는 신분을 밝혀야겠지만, 남들의 시선은 쏠리지 않을 테니 조용히 넘어갈 수 있겠지.

생각을 마친 루시안은 레이먼과 같이 늘어진 줄의 끝자락에 섰다.

그리고 3시간이 흘렀다.

"...하나도 안 줄어들잖아."

"이상하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루시안의 날카로운 시선에 레이먼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3시간이 지나도록 줄은 아주 약간만 줄어들었을 뿐 대부분 그대로였다.

이래서야 성문이 닫힐 때까지 안에 못 들어갈 판이었다.

"나리들께서는 전쟁 후에 처음 오시는가 봅니다. 얼마 전에 일어난 반란 때문에 신원확인이 엄격해진 지 꽤 됐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상인이 다가와 사정을 설명해줬다.

루시안과 레이먼을 오랜만에 상경한 촌뜨기 주종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요즘은 한번 들어가는데 이것저것 확인하느라 한참 걸립니다. 이 정도로 줄이 길면 오늘 안으로는 못 들어가실 겁니다."

"뭐? 그럼 자네는 왜 여기 줄을 서 있나?"

"오늘은 못 들어가도 내일까지 이어서 줄을 서면 들어갈 수 있거든요. 요즘은 성문이 닫히면 그 자리에서 하룻밤 자고 다시 들어가는 방법을 쓰지요."

상인의 가져온 침낭까지 보여주자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럼 맨몸으로 땅바닥에서 잔 다음 다시 줄을 서야 한다고?

"괜찮으시다면 제가 가져온 침낭이라도 하나 사시겠습니까? 마침 여분으로 두 개 더 가져왔습니다만."

"아니, 그게...."

물건을 판매할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상인은 노새의 짐에서 침낭 두 개를 꺼냈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뭐라 대답하지 못하자 착각한 상인이 설명을 덧붙였다.

"주무시는 동안 새치기를 당할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요즘엔 밤낮으로 저 기사 나리들이 순찰하시거든요. 새치기를 하다 걸리면 바로 맨 뒷줄로 보내버립니다."

상인은 루시안과 레이먼의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고개를 돌려보자 정말 기사 몇몇이 매의 눈으로 줄을 순찰하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때 선두에 선 기사와 루시안의 눈이 마주쳤다.

잠시 눈을 끔뻑이던 기사는 이내 경악에 물든 눈동자로 소리쳤다.

"루시안 공!? 왜 여기 계십니까!?"

59화

갑작스러운 기사의 외침에 일시적으로 시선이 모였다.

주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냉큼 말에서 내려 루시안에게 다가왔다.

"어째서 여기 줄을 서신 겁니까? 앞으로 가시면 바로 통과시켜드렸을 텐데...!"

"죄송합니다만 누구십니까? 저는 경을 알지 못합니다만."

"이전 반란 진압에 위르겐 단장님과 함께 참전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으니 루시안 공께서는 모르시겠지만요."

과연, 위르겐 곁에 있던 다른 기사 중 하나였나.

그렇다면 루시안이 일황자를 구출하러 뛰어들었을 때 펼친 활약도 직접 봤겠지.

가문이 아니라 루시안 개인에게 이토록 경의를 표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루시안은 계속해서 모여드는 시선들을 느끼며 최대한 목소리를 죽였다.

"실은 가문의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라 제 개인적인 방문이기에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금방 들어갈 수 있다는 소문도 들었기에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이런, 방문한 시기가 좋지 않았군요."

짧게 혀를 찬 기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주변의 이목은 쏠렸으나 루시안의 정체는 발각되지 않은 상황.

잠시 고민하던 기사는 루시안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따라오시지요. 먼저 들여보내 드리겠습니다."

"주변의 시선을 끄는 행위는 가능하면 지양하고 싶습니다만...."

"급박한 상황에서 쓰는 문이 따로 있습니다. 그쪽으로 들어가시면 꼬리가 붙을 일은 없을 겁니다."

루시안의 눈이 번쩍 떠졌다.

확실히 그런 문이 따로 있다면 잠깐 이목은 쏠릴지언정 뒤를 밟히지는 않겠지.

호기심으로 쫓아다니려던 사람들은 루시안을 찾지 못하고 금세 흥미를 잃으리라.

"그런데 제가 그런 문을 이용해도 되는 겁니까? 듣자 하니 남들이 모르는 숨겨진 입구 같습니다만."

"딱히 비밀 통로 같은 건 아닙니다. 관계자 외에는 출입이 엄금되어 있을 뿐이죠. 하지만 루시안 공쯤 되는 분이라면 충분히 허가가 나옵니다."

"확실한 겁니까? 허가가 안 나와서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웃음거리입니다만."

"책임자가 위르겐 단장님이십니다."

아, 그럼 괜찮겠구만.

연합군에서 루시안에게 이것저것 신세를 많이 진 위르겐이다.

마지막까지 좋은 인상을 남겼으니 부탁한다면 바로 통과되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지요."

****

루시안과 레이먼은 기사의 안내를 따라 줄에서 이탈했다.

두 사람을 따라오던 주변의 시선은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다시 수그러들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졌을 때쯤 루시안은 자신이 서 있던 장소를 재차 확인해봤다.

상인의 말대로 하루 안에 들어가기엔 도저히 불가능한 위치였다.

"뭐? 금방 줄어들 겁니다? 하마터면 하늘의 별 보면서 잠들 뻔했구만."

"아니, 갑자기 절차가 엄격해진 걸 제가 무슨 수로 압니까? 이전엔 진짜 금방이었다니까요!"

레이먼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변명을 주워섬겼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기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전이었다면 정말 금방 들어가실 수 있었겠지요. 시기가 안 좋으셨습니다."

"신원 확인 절차가 강화된 건 역시 크레펠트의 대협정 파기 때문입니까?"

"예. 대협정이 파기된 이상 놈들이 무슨 수를 써올지 모르니까요."

대협정이란 어디까지나 전장에서 지켜야 할 불문율이지만, 수백 년 동안 대륙 전체에서 지켜왔다는 점에서 그 무게가 엄청났다.

그런 대협정을 깼다는 건 크레펠트가 명예와 체면을 모두 내버렸다는 소리.

"암살 시도는 물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른다 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 수도의 영민들까지 길동무가 되겠지요. 예방을 위해서는 철저한 신원확인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루시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협정을 파기한 놈이 암살자는 안 보낸다?

인간을 제물로 삼는 흑마법사가 폭력만큼은 안 쓸 거라고 믿는 꼴이다.

"제대로 훈련받은 암살자라면 신원확인 정도는 가뿐히 통과하겠지만, 불순물을 거르는 체는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우연히 한 놈이라도 잡아낼 수 있다면 검문을 강화한 보람이 있지요."

"그 말씀대로입니다. 보안이 중요한 시기니 당연한 조치지요."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 마침 다 왔군요."

기사는 성벽의 한 자리에서 멈춰섰다.

아무것도 없는 매끈한 성벽의 모습에 루시안은 눈을 끔뻑였다.

여기에 무슨 입구가 있다는 거지?

그때 기사가 성벽에 새겨진 문양 하나를 꾹 눌렀다.

덜거덕, 철컥

"용의 날개가 얇다고 해서 우습게 여기지 말라."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성벽 안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꺼운 성벽 안에서 대체 어찌 목소리가 들리나 했더니 어느새 작은 구멍이 생겨 있었다.

팔뚝 하나도 통과하지 못할 만큼 작은 구멍 너머로 기사가 외쳤다.

"그 얇은 날개로 용은 세상의 모든 산을 굽어살피니."

"소속을 말하도록."

암호가 통하자 구멍 너머에서 재차 신원확인이 이어졌다.

기사는 익숙한 상황인지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검은 비늘 기사단 소속인 글렌이오. 순찰 도중 귀빈을 발견하여 성문이 아니라 이쪽으로 왔소."

"귀빈? 여긴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걸 알면서 외부인을 데려왔단 말이오?"

들려오는 목소리에 짙은 불쾌감이 배였다.

여차하면 그대로 닫아버릴 기세였으나 기사 글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렇소."

"대체 그 귀빈이 누구시길래 기본적인 규율조차 어기는 거요?"

"루시안 공이요. 그대도 전장에서 직접 봤을 텐데."

철커덕, 철컥, 달칵

대답 대신 돌아온 건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였다.

작은 구멍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성벽의 벽돌 하나하나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완전히 열리자 다섯 사람이 말을 타고 들어갈만한 구멍이 생겼다.

"들어가시지요."

"...."

루시안과 레이먼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다 안으로 들어갔다.

성벽의 두께와 정교한 기계장치를 보고 루시안은 내심 감탄했다.

'기관이 있길래 충격에 약한 부분일 줄 알았는데, 이래서야 반대쪽에서 안 열어주면 도저히 못 들어가겠어.'

"루시안 공!"

성벽 안으로 들어오자 반대편에 있던 기사들이 냉큼 투구를 벗으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극상의 예의에 루시안은 재빨리 말에서 내려 기사들을 만류했다.

"그만두십시오. 이토록 과한 대접은 오히려 제가 곤란합니다."

"어찌 이를 과한 대접이라 하십니까? 일황자 전하와 저희를 구출하러 와주신 그날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거늘."

초롱초롱한 기사들의 눈빛에 루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들의 눈에 루시안은 영웅의 새싹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본인들이 이래서야 아무리 만류해봤자 소용없겠지.

루시안은 그냥 포기하고 이들의 호의에 기대기로 했다.

"정 그러시다면 제가 조용히 일만 보고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공식적인 방문이 아니라 가능하면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말은 저희들이 맡고 있을 테니 그동안 편안히 수도를 돌아보시지요. 참, 이것도 내어드리겠습니다."

기사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루시안에게 내밀었다.

받아보니 검은 용의 발톱이 새겨진 동패였다.

"최근 전쟁으로 인해 수도 분위기가 뒤숭숭합니다. 검문도 꽤 강화되었으니 귀찮은 일을 피하실 때는 이 동패를 내밀어주십시오. 어지간하면 그냥 보내드릴 겁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루시안은 레이먼 몫의 동패까지 챙긴 후 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수도 안으로 들어왔다.

성벽 안쪽은 검은 비늘 기사단의 숙소 바깥에 있는 연무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뭣도 모르고 침입했다가는 한창 수련 중인 기사들에게 발각되어 반 토막 나기 딱 좋았다.

"완전히 비밀 통로로군. 정말 공개된 장소 맞습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공개된 지 50년쯤 되었습니다. 굳이 남에게 알려줄 일도 아니라서 입단속은 하고 있지만, 알만한 분은 다 알죠."

즉, 일부러 공개한 게 아니라 들켜서 어쩔 수 없이 공개했다는 건가.

그게 아니고서야 굳이 수백 년간 성벽의 입구를 숨길 이유가 없으니.

'들켰다고 바로 공개해버린 거 보면 다른 데도 이런 통로가 더 있다고 봐야겠군.'

하나뿐인 귀중한 통로였다면 입을 막아서라도 숨겼을 터.

새삼 황실의 저력에 루시안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만한 힘을 가지고도 난세에는 왜 그토록 무력하게 무너진 건지.

"이쪽이 기사단 건물 외곽과 이어지는 통로입니다. 구석이라 사람이 없는 장소이니 조용히 볼일만 보고 떠나시기엔 딱 좋지요."

"감사합니다. 오늘의 도움은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잠자리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숙소를 빌려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알아서 구할 테니 괜찮습니다. 이미 받은 호의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입니다."

루시안은 기사단이 더 매달리기 전에 냉큼 자리를 떴다.

아무리 그래도 황실 기사단 숙소에서 잠까지 자는 건 껄끄러웠으니까.

'뭣보다 지금부터 넥타르의 개발자를 영입할 생각인데, 괜히 남의 눈을 많이 타는 데 머물 필요는 없지.'

하이데의 명성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루시안은 실망하지 않았다.

루시안에겐 아직 진짜를 찾아낼 방법이 남아있었기에.

****

"과연 제국의 보석이라 불릴만한 도시야. 아주 훌륭해."

수도 티브론을 둘러본 루시안은 아쉬움을 담아 중얼거렸다.

켈하임 역시 상당한 대도시였지만, 티브론은 제국의 수도답게 그 이상이었다.

"반란 진압의 실패로 분위기가 우중충하지만 않았다면 완벽했을 텐데 말이야."

"어쩔 수 없지요. 황실에서 공식적인 발표가 없고 애매한 소문만 돌고 있으니까요."

"하긴, 제대로 된 정황을 모르면 오히려 나쁜 상상만 더 들겠지."

"그나저나 왜 길드에 안 가시고 주변만 돌아다니십니까? 연금술사 찾으러 오셨다면서요?"

대화를 나누던 레이먼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루시안을 쳐다보았다.

레이먼의 의문에 루시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길드 가서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 정보가 거의 없어."

"예? 그럼 어떻게 찾으시려고요?"

"다 방법이 있지. 돌아다니면서 확인해봤는데 북쪽 빈민가는 치안병력이 다른 데 비해 부족한 편이더군."

아무리 치안을 강화한다 하더라도 소홀히 하는 부분은 발생하기 마련.

이유는 도시에 따라 다르겠지만, 티브론에서는 그 부분이 바로 북문과 가까운 빈민가 주변이었다.

"지금부터 북쪽 성문 주변을 돌아다닐 생각이야. 가능하면 촌뜨기처럼 보이도록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예? 그리 행동하면 암흑가 놈들이 꼬일 텐데요. 아무리 귀족이라도 작위 하나 없는 촌뜨기 귀족은 놈들도 우습게 봅니다."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은 아니다.

말 그대로 작위 하나 없는, 혈통만 귀족인 경우는 평민도 우습게 본다.

무례를 저질러도 직접 처벌할 힘이 없는 데다 다른 귀족들도 그 꼴을 한심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도시에선 시골 귀족이 깡패들에게 제압당해 귀중품을 뺏기는 일이 종종 벌어지곤 했다.

"놈들도 정신머리가 있으니 귀족 살해까지는 절대 안 갑니다만, 자칫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

"신분을 안 알리고 정보를 얻으려면 그쪽 출신에게 묻는 게 제일이지."

루시안의 말에 레이먼은 무언가를 깨닫고 눈을 반짝였다.

이제야 루시안이 무슨 생각인지 대충 짐작한 듯했다.

"확실히 거칠긴 해도 그 방법이 제일 빠르긴 하죠. 최근 치안이 강화되었다지만 놈들도 '영업'을 쉽게 포기하진 않을 테니 금방 발견될 겁니다."

"말이 잘 통해서 좋군. 해본 적 있어?"

"자주는 아니지만 몇 번 해봤죠.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정보를 제공해줄 바보를 낚기 위해 낚싯대를 드리울 시간이었다.

6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