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루시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휴고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척추에 고드름이 꽂히면 이런 느낌일까.
전신이 얼어붙고 숨 한번 쉬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멈춰버린 휴고를 향해 루시안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래? 웃어. 방금 전까지도 잘 웃었잖아?"
"...."
"이렇게 기쁜 날 그러고 있으니 참 어색하군. 대공의 아들에게 도박빚을 씌웠는데 얼른 어떻게 써먹을지 생각을 해야지? 자네라면 분명 날 협박할 시기도 잘 정해놨을 텐데."
"후웁."
뭐라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그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내쉬려던 숨이 턱 막혀서 목구멍을 틀어막은 듯이 답답했다.
이성이 둘러대라고 소리치는데 본능은 정반대의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변명을 잘못하는 순간 즉시 처형장으로 끌려갈 거라고.
애써 본능을 무시한 휴고가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도련님."
"왜?"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오해라."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몸을 눕혔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루시안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순간만 모면하면 어찌 될 것 같나? 하기야 비밀 통로도 마련해 놓았겠다, 충분히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
"솔직히 의자 손잡이에 기계장치까지 설치한 건 놀랐어. 상당히 교묘하게 만들어 놨던데 기술자는 어디서 구한 거야?"
"그걸 대체 어떻게!"
휴고는 너무 놀라 심장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의자의 손잡이를 특정 방향으로 돌리면 통로가 열리는 장치는 오직 휴고만이 아는 비밀.
이 자리에 있는 놈들은 물론이고 최측근들에게조차 밝히지 않았는데 그걸 무슨 수로 알아낸 건가?
유령에 홀린 듯한 휴고의 표정을 보며 루시안은 웃음을 참았다.
'어떻게 알긴. 너 잡으러 왔다가 발견한 게 나니까 알지.'
지금으로부터 2년 후 휴고는 마약을 유통하다가 꼬리가 밟힌다.
대공은 불같이 화를 내며 휴고를 잡아들이라 했고 다른 경비대원과 함께 루시안이 들이닥쳤다.
진즉 추적을 알아채고 비밀리에 빠져나간 뒤였기에 소득은 없었지만, 어떻게 도망쳤는지 몰라 샅샅이 이 도박장을 수색했다.
사흘 동안 수색을 이어갔지만 나오는 게 없었기에 루시안은 짜증 나서 의자를 후려쳤고 그 충격으로 우연히 장치가 작동했다.
'갑자기 벽이 좌우로 움직일 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 이후에도 루시안은 경비대장의 닦달에 떠밀려 비밀 통로 끝까지 수색을 이어가야 했다.
당연히 어디로 이어지는지, 안에 뭐가 있는지도 훤히 알고 있다.
"북문 성벽 주변이라. 위치 선정 한번 잘해놓았더군. 주변에 말도 팔고 갈림길도 많으니 비밀 통로를 찾는데 하루 이틀만 허비해도 놓쳐버리겠지. 주도면밀함은 마음에 들어."
루시안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휴고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체 이 도련님은 어디까지 아는 걸까.
계속 말하게 두면 오늘 먹은 점심이랑 속옷 색깔까지 맞출 판이었다.
'끝났다.'
한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라면 마약에 치를 떨 수밖에 없다.
영민을 걱정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만큼 손해가 막심하기 때문이다.
마약에 중독된다는 건 멀쩡한 인간이 폐인으로 바뀐다는 소리.
노동력과 세금이 확 줄어드는 건 물론이고 명령도 잘 안 듣게 된다.
약에 미쳐서 영주의 명령보다는 공급자의 말에 좌지우지되니까.
이러다 보니 영주들은 마약 공급책을 발견하면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한다.
돈 없는 시골 영주조차 빚을 내서 고문 기술자를 초청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
즉, 한 번 잡히면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빨리 죽여주길 빌어야 하는 게 바로 마약상이다.
그런데 마약을 판매하려다 눈앞의 도련님에게 덜미를 잡혔으니.
'죽일까?'
이 자리에서 눈앞의 도련님을 죽이고 파묻어버린다면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휴고의 눈에 살기가 맺혔으나 몇 초 지나지 않아 허탈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멍청한 놈. 무슨 생각을 한 거냐?'
대공의 자식을 살해한 죄가 마약 판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가 없잖은가.
후자는 10년 정도 도망치면 포기할 일이었지만, 전자는 지옥 끝까지 따라올 게 뻔하거늘.
"후우."
빠져나갈 길이 없다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고민이란 어디로 가야 안 잡힐지를 모를 때나 하는 것.
이미 잡혀서 내장까지 꿰였건만 굳이 고민할 필요가 있겠는가.
어차피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인데.
털썩
"살려주십시오."
휴고가 무릎을 꿇었다.
그 거대한 덩치가 내려앉으니 쿵 하고 방이 울렸다.
모두가 놀라는 와중에 휴고는 더더욱 몸을 낮춰 머리까지 찍었다.
"개가 되라면 개가 되겠습니다. 짖으라면 짖고 기라면 기겠습니다. 그러니 살려주십시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도련님!"
휴고의 행동에 깨달은 바가 있는지 나머지 부하들도 일제히 내려와 머리를 찍어댔다.
네 사람이 연신 바닥에 쿵쿵 머리를 찧는 걸 보며 루시안이 피식 웃었다.
"하긴, 개 한 마리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안 그래도 부릴 수족이 부족하던 참이었는데."
루시안의 말에 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된다.
이 일로 얼마나 오래 목줄을 잡힐지는 모른다.
몇 년으로 끝날지, 아니면 십수 년이 넘도록 굴러야 할지.
그래도 살아 있기만 하면 언젠가 기회가 오기 마련.
지금 당장은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목숨을 다 바쳐...."
"그런데 말이야. 개는 너무 별 볼 일 없지 않나? 네가 겨우 개로 만족할 사람도 아니고."
"예?"
"이봐, 휴고."
루시안은 쭈그려 앉아 휴고의 귀에 속삭였다.
"기사 한번 돼보고 싶지 않아?"
휴고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악마가 속삭인다면 이런 느낌일까.
미친 듯이 심장이 쿵쾅거렸다.
기사가 되고 싶지 않냐고?
'될 수만 있다면 혼이라도 팔아넘기겠다.'
재능이 있으면 뭘 하고 검식을 배우면 뭘 하나.
이놈의 혈통이 모든 발목을 잡아대서 되는 게 없었다.
암흑가에서 두목 소릴 들을 정도가 되긴 했지만 그게 전부.
일반인들이 벌벌 떠는 이 경력조차 양지에서는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라는 건 휴고가 누구보다 잘 안다.
한때는 미친 듯이 갈망했지만 진즉 묻어버리고 등을 돌려버린 꿈.
그런데 그 눈앞의 도련님이 그 꿈을 다시 파헤쳐서 내밀고 있었다.
"정말로... 될 수 있는 겁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휴고가 되물었다.
기껏 희망을 품게 한 뒤 당연히 안 된다는 조롱이 나올까 봐 겁이 났다.
하지만 루시안은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확답했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네 노력 여하에 따라선 가능하겠지. 먼저 두 가지 조건을 지켜야 하겠지만."
"무슨 조건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첫째. 나한테 절대적으로 충성할 것."
콰앙
휴고는 지금까지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게 머리를 박았다.
뜨뜻한 피가 이마에서 흘러나왔지만,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약속만 해주신다면 죽으라는 명령 빼고 다 듣겠습니다."
"그리고 둘째.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데."
루시안은 충성의 맹세에도 눈 하나 깜짝 않았다.
어차피 두 번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기사고 나발이고 시켜줄 생각 없었으니까.
"약, 누구한테 판 적 있냐? 지금이 아니라 예전에도 말이야."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휴고의 입은 귀에 걸렸다.
신이 자신을 버리지 않은 건진 두 번째 조건은 이미 충족한 상태였다.
"이번이 처음이고, 제조소만 막 완성했을 뿐 아직 재료도 주문 안 한 상태입니다."
루시안은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아직 재활용이 가능한 단계였기에.
****
"오늘부터 도련님의 시중을 들게 된 휴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
한스는 미소짓는 휴고를 보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사람 두셋은 우습게 죽일 것 같은 덩치가 굽신거리는 꼴을 보니 도저히 적응되질 않았다.
"도련님, 위에서 뭔 일이 있었던 겁니까?"
"쓸만한 놈들이라 내 아래에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설득했지."
"그래서 이 인간들을 하인으로 쓰시겠다고요?"
"왜? 안 될 거 없잖아?"
한스의 시선이 휴고와 그 뒤쪽을 향했다.
휴고 못지않게 무시무시한 인상의 남자 다섯이 루시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전부 얼굴이나 팔뚝에 흉터 두세 개 정도는 달고 있고 옅은 살기마저 배어 나오는 자들.
암만 봐도 하인이 아니라 암흑가에서 구르던 인간들 아닌가?
이런 인간들을 하인 대신 쓰겠다니.
"저, 도련님. 주제넘을지 몰라도 뒷골목 출신은 믿는 게 아닙니다."
"왜?"
"이득을 계산해서 수지가 안 맞는다 싶으면 바로 손바닥을 뒤집으니까요. 아쉬울 때는 철저하게 숙이지만, 얻을 걸 다 얻고 나면 눈빛이 달라져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쟤네들은 절대 배신 못 할걸?"
"설마 약점이라도 쥐셨습니까?"
"그것도 있지만, 내가 있어야만 원하는 걸 계속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왜 기사가 주군에게 목숨까지 바쳐가며 충성하겠는가.
출세하는 방법 중 가장 빠른 게 자기보다 높은 이를 섬기는 길이기 때문이다.
권력과 지위는 정당한 권력자에게 넘겨 받아야 비로소 주변에 인정을 받는 법.
아무리 강한 권력을 얻더라도 그 명분이 빈약하다면 수시로 도전이 들어온다.
귀족이라도 그럴진대 평민의 혈통, 그것도 뒷골목 출신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항상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주군이 없다면 누구도 그 지위를 인정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 남작을 참칭한 후에도 휴고는 끝없이 공격을 받아야 했지.'
비록 능력 덕에 계속 공격을 물리치고 남작이란 칭호를 이어갈 수 있었지만, 그게 지위를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힘이 없어서 두고 볼 뿐 누구 하나 그를 진짜 남작이라 인정하지 않았다.
한 세력을 일구었다고 해도 휘하에 들어가려는 기사가 없으니 언젠가는 스러질 운명.
전생에서든 지금이든 휴고 역시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으리라.
그렇기에 작위를 받아 진짜 기사가 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거고.
'기사가 되더라도 배신은 불가능하지. 내가 없다면 아무도 그 신분을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루시안의 보증 없이 귀족이란 소리를 들으려면 자식에 손자, 증손자까지 4대가 지나야 가능할 거다.
사실상 휴고가 꿈을 때려치우지 않는다면 살아생전 배신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루시안이 휴고와 그 패거리를 끌고 오자 경비대는 움찔했다.
"도련님. 뒤에 있는 자들은...."
"내가 고용한 새 하인들이다."
"하인이요? 저 얼굴로?"
"얼굴이 어때서? 내가 보기엔 괜찮구만."
경비대는 떨떠름했으나 곧 옆으로 비켜섰다.
암만 봐도 하인 일을 할 인간들은 아니었지만, 윗사람이 직접 고용했다는데 뭘 어쩌겠나.
루시안은 열린 문을 통과해 내성 안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돌아온 루시안과 같이 들어온 패거리를 보며 하인들은 흠칫했다.
"도, 도련님. 그 사람들은 누굽니까?"
"하인."
"예?"
"내가 새로 고용한 하인들이라고. 인사들 해라."
저 얼굴로 하인이라고?
정신 못 차리는 다른 하인들을 향해 루시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인사들 했지? 그럼 이제 하녀장 데려와라."
"하녀장은 또 왜 부르십니까?"
"왜긴. 하녀장도 얘네들과 인사해야 할 거 아냐? 후딱 데려와."
"...."
하인들은 이번에도 서로 눈치만 봤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덤터기 쓰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팍팍 느껴졌다.
그 머뭇거리는 꼴에 루시안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래서 내가 하인을 새로 고용한 거야. 내 말을 듣는 놈들이 없다니까."
"도련님, 저희 사정도 고려 좀 해주십시오. 무슨 힘이 있다고 저희가...."
"휴고."
"예, 도련님."
루시안은 하인의 말을 짧게 끊고는 휴고를 향해 돌아섰다.
"지금 내 말에 안 따르는 놈들 잘 기억해둬라. 네가 가르쳐야 할 것들이니까."
"한동안 바쁘겠군요. 죽지 않을 만큼 패는 것도 기술인데 일일이 교육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시간은 얼마든지 줄 테니 느긋하게 해."
"감사합니다. 이 잡것들의 머리통에 충성심이란 단어를 꿈에도 못 잊을 만큼 박아주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하인들은 일제히 멈춰섰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11화
"이번이 마지막이다."
루시안은 얼굴에 맺혀 있던 미소를 지우고 조용히 말했다.
"하녀장, 데려와."
"...."
생전 처음 보는 루시안의 모습에 다들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서 거절하면 무언가 큰일이 날 것 같은 예감.
하지만 그럼에도 하인들은 본능이 보내오는 경고를 애써 무시했다.
'셋째 도련님이 화내봤자 결국 셋째 도련님이지.'
'조르디 님에게 거역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 차라리 여기서 혼나고 만다.'
하인들에게 루시안이란 심약한 방구석 도련님.
아무리 화가 나도 자신들을 안 죽일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에 비해 조르디는 손속에 자비가 없었으니.
굳이 선택하라면 조르디를 거역하기보단 루시안을 거역하는 게 나았다.
"도련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쫘아악
재차 변명하려던 하인은 눈앞이 번쩍거리는 걸 느꼈다.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휴고가 하인의 얼굴을 갈긴 탓이었다.
"이 새끼들 봐라. 니들 주인이 누구냐? 제 주인이 명령하는데 무서워하는 건 딴 사람이야? 기본이 안 되어있구만."
"컥, 커헉! 갑자기 왜...!"
"갑자기 왜?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쫘악, 쫘악, 쫘악
냄비 뚜껑만한 손바닥이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하인의 얼굴이 좌우로 홱홱 돌아갔다.
손바닥으로 때리고 있음에도 쇠몽둥이로 맞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대여섯번 손바닥이 오가자 이내 이빨이 튀고 핏방울이 바닥에 철철 흐르기 시작했다.
"꺼억! 꺽! 커헉!"
"그, 그만두지 못해! 도련님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순식간에 동료가 피범벅이 되자 다른 하인들이 나서서 루시안을 들먹였다.
하지만 루시안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하라고 한 건데?"
"예, 예?"
"내가 시켰다고. 계속 말 안 들으면 교육하라고 해서 잘 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야?"
"도, 도련님."
"휴고. 계속 때려."
"옙."
쫘아악
"끄어억!"
잠깐 멈췄던 손은 아까 전보다 더욱 강하게 휘둘러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인의 이빨은 연신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잠시 후, 가족조차 못 알아볼 얼굴이 된 하인은 기절하여 축 늘어졌다.
"도련님, 이놈 기절했는데 어쩔까요?"
"적당히 옆에 던져두고 깨어나면 더 때려."
"괜찮겠습니까? 이 이상 때리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제 몸이 약한 탓이지. 주인 명령에 거역했으면 이 정도 맞을 건 예상했을 테니 이미 각오했을걸?"
"그것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교육하다가 죽으면 적당히 거적때기에 싸서 버리죠."
"...!"
두 사람의 대화에 하인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무리 봐도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방금 기절한 하인도 절대 살려둘 기세로 때린 게 아니었으니까.
목숨은 건졌다지만 이빨이 저리 나가서야 밥조차 제대로 씹을지 의문.
최악의 경우에는 눈이나 귀도 이전 같지 않으리라.
기절한 하인을 대충 던져둔 휴고는 얼어붙은 하인들에게 눈을 돌렸다.
"어디 보자, 다음은 네가 좋겠군. 방금 전에 도련님 명령은 안 듣고 사정이나 봐달라고 지껄였지?"
"자, 잠깐! 잠깐만... 커헉!"
쫘악
살벌한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다시 좌우로 휘둘러졌다.
이번엔 아까 전보다 더 강하게 휘둘러지는 게 광대뼈마저 부술 기세였다.
하인들은 그 모습을 보며 벌벌 떨다 이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도, 도련님! 용서해주십시오! 용서해주십시오!"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하녀장은 지금 당장 불러오겠습니다!"
"아냐, 안 불러와도 돼. 조르디가 무섭지? 내가 어떻게 하인들이 무서워하는 일을 시키겠어?"
"아닙니다! 아닙니다! 둘째 도련님이 무슨 상관입니까! 저희 주인은 루시안 도련님이신데요!"
"무리하지 마. 명령 안 하고 죽여줄게. 조르디한테 죽느니 나한테 죽는 게 낫지. 절대 조르디는 너희를 안 죽일 테니 안심해."
"끄흐흑! 도련님! 도련니임!"
하인들은 두 손의 가죽이 벗겨지도록 루시안을 향해 빌었다.
이제야 자신들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알 것 같았다.
확실히 조르디는 자신들을 파리 목숨처럼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대공도, 다른 부인들도, 모든 공자들도 그리할 수 있다는 뜻.
루시안 역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자기 주인에게 충실해야 했다.
주인은 적어도 하인 개개인이 누구인지 알고 여차할 때 구해줄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정작 하인들이 무서워했던 조르디는 여기서 그들이 죽어봤자 왜 죽었는지도 모르리라.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비웃고 말겠지.
충성심 없는 종복 따위 아무도 원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으니까.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제발!"
"원하신다면 손가락이라도 잘라 바치겠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하인들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루시안에게 빌었다.
그 와중에도 휴고의 손바닥은 계속해서 허공을 날아다녔다.
이윽고 두 번째 하인까지 기절하자 휴고가 세 번째 타겟을 찾으려 할 때였다.
"휴고, 멈춰."
"예, 도련님."
휴고는 명령이 내려지기 무섭게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하인들은 살았다는 생각에 가쁜 숨을 내쉬며 헉헉댔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루시안은 단 한마디만을 내뱉었다.
"하녀장."
"예!"
말은 더 필요없었다.
하인들은 죄다 일어나 번개처럼 하녀장 제니를 찾아 달렸다.
****
하인들이 제니를 끌고 오기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미친 것들이! 조르디 님이 무섭지도 않은 거냐!"
"닥쳐!"
하인들은 발버둥 치는 제니를 강제로 끌고 와 바닥에 무릎 꿇렸다.
뺨에 상처가 있고 옷이 흐트러진 걸 보아 오는 동안 몇 번 맞은 모양.
꽤 아플 텐데도 제니의 기세는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찌나 거칠게 저항하는지 하인들이 제대로 찍어누르질 못하자 루시안이 혀를 찼다.
"휴고, 무릎 꿇려."
"예."
휴고가 눈짓하자 부하들은 하인들을 치우고 좌우로 제니를 붙잡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장정들이었기에 이번엔 제니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씩씩거리던 제니는 앙칼진 눈으로 루시안을 노려봤다.
"도련님! 이러고도 무사하실 줄 아십니까!"
"...."
"...."
제니를 제외한 모두가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아무리 뒷배가 있어도 그렇지 하인이 주인에게 할 소리가 아니잖은가.
하지만 제니는 그 침묵을 오해한 건지 더욱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제게 상처를 내시면 조르디 님께서 가만 안 있으실 겁니다! 1년 전에 연무장에서 있었던 일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뻐어억
"컥!"
듣다 못한 휴고가 주먹을 휘둘러 제니를 조용히 시켰다.
계속 말하게 두었다가는 선을 한도 끝도 없이 넘을 것 같았으니까.
무심코 힘이 들어갔는지 단 한 방으로 제니는 기절할 것처럼 휘청거렸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귀가 썩는 것 같아서 그만."
"아니, 잘 했다. 누가 채찍 좀 가져와라."
"예!"
이전과 달리 하인 중 한 명이 허둥지둥 밖으로 튀어나가 채찍을 가져왔다.
물에 불린 물소 가죽 채찍은 가닥 하나하나에 작은 구슬이 박혀 있어 보기에도 무시무시했다.
"깨워."
"예."
짝, 짝
"으으으...!"
제니의 뺨이 몇 번 옆으로 돌아가더니 눈을 게슴츠레 떴다.
루시안은 채찍을 만지작거리며 제니 앞에 쭈그려 앉았다.
"정신이 드나?"
"도련님...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뭘 하기는. 제 주제 파악 못 하는 하인의 처형식이지."
"처, 처형?"
"그래, 처형. 처벌인 줄 알았냐? 미안한데 난 널 살려둘 생각이 없거든."
피식 웃는 루시안의 말에 제니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진짜로 조르디의 젖남매인 자신을 죽이겠다고?
"조, 조르디 님! 조르디 님이 무섭지도 않습니까!"
"그럼 넌 내가 안 무섭냐? 난 귀족이고 네 주인이야. 그런데 뭐? 이러고도 무사하겠냐? 귀족 모독죄로 당장 목을 잘라버려도 아무 문제 없는 거 알지?"
"말했잖습니까! 전...!"
"조르디의 젖남매여서 뭐 어쩌라고? 내가 널 죽여도 조르디가 날 어쩌진 못해. 기껏해야 좀 맞고 끝나겠지. 아버지가 개입하시면 그마저도 못할 테고. 주제 모르는 하인 하나 없애는데 그 정도쯤이야."
쫘악
말을 마친 루시안이 채찍을 허공에 휘둘렀다.
공기를 후려치는 소리에 제니는 몸을 떨었다.
위협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휴고."
"잘 고정해두겠습니다. 한스 선배, 곧 바닥이 더러워질 테니 걸레 좀 부탁드립니다."
"응? 아, 그렇지. 피는 닦기 힘드니까."
채찍에 맞은 상처는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 루시안이 들고 있는 건 처벌용 중 가장 위력이 강력한 것.
몇 대 맞으면 출혈이 생길 게 확실했으니 미리 닦을 준비를 해둬야 했다.
새하얗게 질린 제니는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루시안에게 말했다.
"도, 도련님... 자, 잘못했습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루시안은 제니의 항복 선언에 빙긋 웃었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그리고 채찍이 허공을 날았다.
****
조르디는 식사를 마치고 입을 닦았다.
평소와 똑같은 메뉴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훨씬 맛이 좋았다.
아니, 사실 그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기 밥그릇 하나 챙기는 것조차 못할 줄이야.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반푼이 이복동생이 당한 망신을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주변에 얕보인다는 건 알았지만 제가 부리는 하인들조차 못 다룰 줄이야.
심지어 그러고도 별다른 조치 하나 못 취하고 밖으로 도망쳤다니.
참으로 발데크의, 아니 귀족의 수치가 아닌가.
이 일로 안 그래도 낮던 평판이 바닥까지 추락할 게 뻔했다.
"과연 어찌 나올지 기대되는군."
조르디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였다.
놈도 굴욕을 안다면 어떻게든 손을 써서 제니를 쫓아내려 하리라.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
조르디야 누구든 두려워하겠지만 놈은 아무도 겁내지 않는다.
제니한테 손을 쓰려면 명령이 아니라 직접 움직여야 할 터.
그때부터가 진짜였다.
증언해줄 하인이 없다면 귀족이 하녀장의 몸에 손을 대려고 한 이유는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으니까.
'아버지께서야 진실을 아시겠지만, 그분께 이 일에 대한 진실은 중요치 않지.'
제 하인들을 관리하고 밥그릇을 간수하는 기본적인 것조차 못한 거다.
계획을 꾸민 게 조르디긴 해도 이런 장난질에 당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
조르디야 조금 꾸중을 듣고 끝나는 정도겠지만 루시안은 그나마 남아있던 기대마저 사라지리라.
물론 다 포기하고 제니를 가만히 놔두거나 아버지께 도움을 청해도 상관없었다.
그때는 스스로 노력조차 안 하냐며 아버지의 불호령이 루시안에게 쏟아질 테니까.
"도련님! 큰일 났습니다!"
"뭐냐?"
상념이 깨는 전속 하인의 목소리에 조르디가 눈을 찌푸렸다.
한창 기분 좋았는데 무슨 일로 이 난리인 건지.
그러나 하인은 조르디의 짜증에도 다급함을 감추지 않고 소리쳤다.
"제니가! 제니가 삼공자께 채찍을 맞고 있습니다!"
"뭣이?"
"채찍으로 맞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릴 정도라고 합니다! 당장 구해주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조르디는 사색이 되어서 일어섰다.
12화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조르디는 최측근을 이끌고 달려가며 소리쳤다.
그 얼굴은 당혹감과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놈이 제니를 벌하려다 망신만 당했다는 소릴 들은 게 아침의 일이다! 그런데 몇 시간이나 되었다고 제니를 채찍질해!? 하인들이 놈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면서!"
"그, 그렇습니다."
"똑바로 말해라! 하인들의 머리가 이상해져서 놈의 명령을 따른 것이냐? 아니면 그 빌빌거리던 놈에게 갑자기 괴력이라도 생겨서 혼자 끌고 갔느냐? 어느 쪽이냔 말이다!"
늙은 하인은 젊은 주인의 호통에 벌벌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하, 하인들입니다. 하인들이 갑자기 나타나 제니를 끌고 갔습니다. 저도 어찌 된 일인지 모르나 아침과 달리 조금도 무서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왜 말이 자꾸 휙휙 바뀌는 거냐!"
"죄송합니다! 그저 제가 아는 바로는 삼공자께서 외출하시고 돌아오시더니 태도가 급변했다는 것밖에는...!"
조르디는 어중간한 보고에 이를 갈았다.
본인이 스스로 잡아왔거나 외부인을 고용했다면 차라리 이해가 간다.
그런데 아침까지만 해도 비협조적인 하인들이, 저항하는 제니에게 손을 쓰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쫘악
-아아아아악!
살가죽을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복도를 울렸다.
그 낯익은 음색에 조르디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런 빌어먹을!"
마지막 체면까지도 내던진 조르디는 측근들과 함께 바닥을 박찼다.
그리고는 지체없이 루시안의 방문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콰앙
"그만! 지금 뭣들 하는 짓이냐!"
조르디의 고함과 함께 방안의 풍경이 드러났다.
제니는 거대한 두 장정에 의해 바닥에 무릎 꿇려진 상태였고 반쯤 기절한 채 늘어져 있었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체벌이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바닥에는 핏방울이 가득했다.
다시 채찍을 휘두르려던 루시안은 갑자기 들어온 조르디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형님께서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죄송하지만 전 지금 바쁘니 나중에 오시지요."
"올리버! 게르트! 제니를 데려와라!"
"예!"
조르디는 루시안의 말을 무시하며 좌우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막으면 가차 없이 베어버리겠다는 기세로 두 기사가 한 발짝 나아갔을 때였다.
"휴고."
척
"...!?"
루시안의 말 한마디에 휴고가 단검을 꺼내서 제니의 목에 들이댔다.
그 모습에 기사들은 깜짝 놀라 한 걸음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섰다.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에서 루시안은 다 들으라는 듯 재차 명령을 내렸다.
"누구든 가까이 오면 그대로 목을 그어버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망설이지 마라."
"예. 만에 하나라도 살려보내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시길."
꾸욱 하고 단검이 벌떡거리는 경동맥에 닿았다.
차갑고 예리한 금속의 감촉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제니는 공포에 질려 눈물을 후두둑 쏟아냈다.
"조, 조르디 님...!"
"그 단검 당장 치워라. 계속 대고 있으면 네놈은 물론이고 네 가족까지 전부 목을 잘라 성벽에 내걸어주마."
스산한 협박이 휴고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휴고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안 되겠습니다."
"뭣이?"
"제 주인은 루시안 님이지 이공자가 아니십니다. 주인이 아닌 분의 명령을 따를 이유가 없지요."
"이 천것이! 지금 내 말이 농담 같으냐? 아니면 이 반푼이가 나로부터 널 지켜줄 수 있으리라 믿는 거냐!?"
"어느 쪽도 아닙니다. 그저 종복이 된 자로서 할 일을 할 뿐. 나중 일이 어찌 되든 주인께서 죽이라시면 죽이는 게 제 소임입니다."
번뜩이는 휴고의 안광에 조르디가 움찔했다.
생각 같아서는 무시하고 싶었으나 도저히 허세라 볼 수 없는 기백이었다.
도저히 돌파할 방법이 없자 조르디의 눈빛이 기어코 루시안을 향했다.
"제니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리 독하게 구는 것이냐?"
"셀 수 없이 많지요. 저를 대놓고 모독했고, 명령을 거역했으며, 심지어 예산안에도 손을 댔습니다. 사실 채찍이 아니라 이대로 목을 쳐도 될 죄목들 아닙니까?"
"그래서 내 젖남매에게 손을 댔다? 네 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같은 걸 봤기에 이런 짓을 벌인 거겠지?"
조르디는 말을 하면서 은근슬쩍 살기어린 시선으로 하인들을 노려봤다.
제정신이 박혔다면 줄을 어디에 서야 할지 잘 알겠지.
그러나 조르디의 기대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빗나갔다.
"예! 저희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도련님께 입에 담지도 못할 소리를 마구 하더군요!"
"증언하시라면 이 자리에서 전부 증언할 수 있습니다!"
"...!?"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조르디가 더더욱 눈에 힘을 주었으나 하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딴소리를 했다간 루시안의 손에 죽을 거란 게 너무도 확실했으니까.
아무리 살기를 보내도 하인들이 말을 바꾸지 않았다.
더 이상 협박이 소용없다는 걸 안 조르디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이겼다. 풀어줘라."
앞뒤를 다 빼버린 말에 루시안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남의 귀한 자금을 휘저어놓고 겨우 그 말 한마디로 대신하시겠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형님. 이기다니요? 저는 어디까지나 사사로이 공금에 손을 댄 하녀를 처벌하고 있을 뿐인데요."
"...!"
"젖남매라 불쌍히 여기셔서 구해주러 오신 것 같습니다만, 공사는 구분하셔야죠. 귀족도 처형되는 횡령죄입니다. 일개 하녀를 봐준다면 법도가 엉망이 될 텐데 본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 한마디로 끝낼 생각은 전혀 없다는 소리.
조르디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설을 간신히 참았다.
이 반푼이에게 패배한 것만으로도 굴욕인데 배상까지 하라고?
생각 같아선 다 엎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단순히 젖남매인 제니가 걱정되어서만은 아니다.
안 그래도 이전에 핸드릭을 버린 조르디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온 제니마저 버린다?
핸드릭을 버렸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평판이 깎일 게 분명했다.
최악의 경우 주군의 그릇이 아니라 여겨져서 남아있던 인재마저 빠져나갈 수 있었다.
"원하는 게 뭐냐?"
루시안은 이를 악문 조르디를 향해 환한 미소로 답했다.
"옛날부터 남의 돈에 손을 댄 범죄자는 대개 비슷한 처벌을 받았지요. 훔친 액수의 몇 배를 도로 토해내는 것."
"...그래서 얼마를 주면 된다는 거냐?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원하는 게 돈이라는 소리에 조르디는 내심 안심했다.
교섭하기 비교적 쉬운 게 바로 돈이었으니까.
지나치게 과한 액수라면 단칼에 거절한다.
만만한 액수라면 바로 받아들이고 내면 그만.
다른 형제라면 모를까 방구석 폐인으로 살던 놈이다.
이런 교섭의 경험이 거의 없는 이상 놈은 모처럼 쥔 칼자루도 제대로 써먹지 못하리라.
그리 생각하며 내심 얕보는 조르디를 향해 루시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습니까?"
"...."
****
결과적으로 조르디는 매달 받는 지원금의 8배에 해당하는 액수를 토해내야만 했다.
못 낼 정도는 아니었으나 개인 재산 중 당장 현금화 가능한 것들은 다 털린 셈이었다.
"이 형에게 두 번이나 이겼으니 즐겁겠구나. 충분히 즐겨둬라. 얼마 지나지 않아 피눈물을 흘리게 될 테니."
모든 금액을 지불하고 제니를 돌려받은 조르디는 마지막에 살벌한 경고를 남겼다.
루시안은 그 경고에 웃기지도 않다는 듯 피식 웃었다.
"더 토해내실 돈도 없으실 텐데 한동안 자제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회복도 안 된 상태에서 설쳤다간 돈보다 더한 걸 토해내는 수가 있습니다?"
조르디는 울컥했으나 굳이 반박하지 않고 물러섰다.
패배해놓고서 구질구질하게 말을 길게 하는 것도 추했으니까.
그렇게 하녀장을 사이에 둔 루시안과 조르디의 싸움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그 여파는 절대 작지 않았다.
-이공자의 젖남매가 사슴 공자에게 맞아서 초주검이 되었단다!
-그런데 이공자는 화는커녕 몸값까지 지불하고 왔단다!
-일주일이 지났는데 여전히 보복할 엄두도 못 내고 있단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가문 내의 구성원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 일로 쑥덕거렸다.
핸드릭 경과 관련된 일로 한번 부딪치긴 했지만, 그 일과 이번 일은 차원이 달랐다.
당시는 기껏해야 말싸움 수준을 넘지 않는 신경전.
물러서려면 얼마든지 물러설 수 있고 이겨봤자 잠깐의 재치로 치부할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이번 일은 한쪽이 상대방의 자금에 개입하고 다른 한쪽이 최측근에게 손을 댄 전면전.
물러선다는 건 패배와 다름없는, 서로의 체면을 건 일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그런데 그 전면전에서 조르디가 사슴 공자라 불리던 루시안에게 패배해 꼬리를 말았다.
두 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이라면 경악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아니, 정말 삼공자께서 채찍을 드셨다고?"
"그렇다니까.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등이 피범벅이었다고 하더군."
"거 참 놀랄 일이네. 파리도 못 죽이던 사슴 공자가...."
"쉿! 죽고 싶어 환장했어? 삼공자께서 들으시면 어쩌려고!"
"에이, 겨우 이 정도로 뭐라 하겠어? 예전에도 간간히 하던 소린데"
"이 머저리야, 존과 브룩이 너처럼 굴다 이빨이 몽창 빠졌단 말이다! 정신 못 차리고 예전처럼 굴다간 죽는 수가 있어!"
소문이 퍼지자 가장 먼저 바뀐 건 하인들의 태도였다.
제니는 물론 명령을 거부한 두 하인도 용서 없이 체벌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탓이었다.
몸짓은 이전보다 훨씬 공손해졌으며 이전처럼 대놓고 쳐다보는 일도 완전히 사라졌다.
공공연히 들려오던 사슴 공자라는 별명도 어느샌가 누구 하나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반쯤 무시하던 한스조차 조심스럽게 대하게 된 건 덤이었다.
"설마 삼공자께서 이공자를 저리 찍어누르실 줄이야."
"사자의 새끼는 결국 사자라더니, 혈통은 속일 수 없구만."
"그나저나 후계자 경쟁이 어찌 될런지 모르겠군. 삼공자께서도 참여하시는 건가?"
"힘들겠지. 변변한 성과도 없는 상태에서 1년 넘게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 와서 따라잡는 게 가능하겠나?"
"그건 모를 일이지. 대공께서 지원을 재개하신 걸 보면 아직 기대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뜻일 테니."
애초부터 접점이 거의 없던 기사들은 후계자 구도에 대해 떠들기 바빴다.
루시안이 뒤늦게나마 두각을 보인다면 가문 내부의 혼란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달리 보자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이미 세력을 형성한 다른 공자들과 달리 루시안에겐 세력이랄만한 게 없는 상태.
야망이 있는 기사라면 경쟁에 새로 참여할 후계자의 측근 자리를 노려볼 수 있지 않겠나.
지금 보여준 것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더 지켜볼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렇게 가문 내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나온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쯤.
지그문트 대공이 루시안을 불렀다.
13화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음."
루시안이 집무실에 들어오자 대공은 서류더미를 한쪽으로 밀어뒀다.
그리고는 잠시 침묵하다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최근 거하게 한판 벌였더구나. 너와 조르디에 대해 다들 말이 많다."
질책인지 감탄인지 구분하기 힘든 소리였다.
루시안은 고개를 숙이며 의례상의 대답을 했다.
"거하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저 주인이 누군지도 못 알아보는 하인 몇 놈을 체벌한 게 전부니까요."
"그 결과 네 형의 얼굴에 먹칠을 했지. 녀석은 그 일을 두고두고 잊지 않을 텐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
"감당하고 말고 할 게 없습니다."
"뭣이?"
"서열을 바로 세우고 법도를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이런 당연한 일조차 후환이 두려워 못한다면 어디 가서 발데크의 이름을 대겠습니까? 저는 발데크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크흠!"
대공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억누르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다시 무표정을 만든 대공이 고민하듯 턱을 쓸었다.
"하지만 아마 조르디 녀석은 계속해서 네게 달려들겠지. 옛날부터 널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놈이었으니까."
"...."
"외가에 대한 열등감만 없으면 지금보다 훨씬 높은 곳으로 비상할 녀석이건만, 엉뚱한 데 사로잡혀 시야가 좁아져 있으니 원."
그 말에 루시안의 눈이 번쩍 뜨였다.
환생하고 나서 여기저기 조사했던 정보가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내 외가는 북부의 그리말디 공작가였지.'
공작가라고는 해도 한참 전에 몰락해서 간신히 이름만 남아있던 가문이다.
권력은 물론이고 재력마저 없던 데다 핏줄도 귀해서 구성원 자체가 극소수.
심지어 마지막 가주였던 루시안의 외조부가 딸만 남긴 채 양자 하나 없이 죽어버려 지금은 완전히 단절된 상태다.
하지만 가문이 몰락한 것과 별개로 그리말디 가문의 이름 자체는 꽤 유명했다.
제국 성립 이후 우후죽순 새로 생긴 가문들과 달리 그리말디 가문은 한참 전부터 존재하던 북부의 왕가였기에.
통일 전쟁에서 항복하여 공작가로 격하되었지만, 가문의 역사로만 따지자면 무려 황가보다도 더 긴 수준.
덕분에 그리말디 가문은 한미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귀족 가문들에게 나름 괜찮은 대접을 받았다.
역사라는 건 권위를 중요시하는 귀족 사회에서 그 자체만으로 무게감이 있었으니까.
약해서 위협이 안 된다는 점과 정략혼을 맺으면 자기 가문에 권위를 더할 수 있는 점도 한몫했으리라.
'그에 비해 조르디의 외가인 헥센 남작가는 빼도 박도 못하는 상인 출신이지. 역사도 겨우 3대밖에 안 됐고.'
이것만으로도 주변에서 얕볼 요소가 넘쳐나는 데 작위를 얻은 과정도 문제였다.
당시 반란군과의 전쟁에서 막대한 전비를 부담하는 대신 남작 작위를 얻었으니까.
액수가 아무리 많다지만 결국 돈은 돈이다.
모두가 인정하는 전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돈 주고 산 작위를 누가 제대로 인정할까?
하물며 그 대상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들한테 굽신거리던 상인인데 말이다.
'3대라면 지위를 안정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지만, 장사치라는 멸칭을 떼기엔 한참 부족한 시간이기도 하지.'
루시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어째 유독 자신에게 죽자사자 달려들더니만 그런 이유가 있었나.
대공의 피를 이었다 한들 외가에 대한 시선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을 터.
내색은 안 하더라도 조르디에겐 나름 심각한 콤플렉스였을 거다.
그런데 정작 반푼이인 루시안의 외가 쪽 혈통은 깨끗하다 못해 번쩍이는 수준.
조르디로서는 억울해 미칠 지경이지 않았을까.
미치도록 원하는 보물이 그 가치를 모르는 팔푼이에게 있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굳이 당해줄 생각은 없지만.'
제 딴에는 정당한 이유일지 모르나 루시안 입장에서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대뜸 원한이 생긴 꼴이다.
맞아줄 이유는커녕 반대로 갚아줄 이유만 넘쳐났다.
잠시 혀를 차던 대공은 이내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본론을 꺼냈다.
"조르디가 네게 싸움을 계속 걸어온다면 반격하는 것 역시 네 자유다. 하지만 싸움이 지나치게 격화되어 가문에 누를 끼친다면...."
"결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잘잘못의 유무를 떠나 조르디의 손을 들어주겠다."
"예?"
이게 갑자기 뭔 소리야?
어안이 벙벙한 루시안을 보며 대공이 차갑게 웃었다.
"무엇을 그리 놀라느냐? 조르디 녀석이 성급하고 앞뒤 안 가리는 면이 있기는 해도 가문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다. 1년 동안 놀고먹은 너와는 다르지."
"...."
"가주로서 가문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녀석보다 조금이라도 손을 보태는 녀석에게 마음이 가는 건 당연한 일.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지그문트 대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편파적인 발언이었다.
잠시 미간을 좁히던 루시안은 이내 말의 속뜻을 알아채고 되물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제가 더 가문에 도움이 된다면 제 편을 들어주시겠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잘 알아들었구나. 이 아비가 네 옆에 서기를 원한다면 힘을 길러 가문에 보탬이 되어라. 계속 웅크린 채 있겠다면 나도 굳이 네 비호를 해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루시안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대공의 생각이 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위기감을 고조시켜 달리도록 만들 생각인가.'
무조건 조르디의 편에 서겠다고 한 건 반쯤 거짓말일 거다.
루시안이 정말 이전처럼 방구석 폐인 생활을 하지 않는 한 일이 벌어져도 최대한 공정하게 처리하겠지.
그런데도 굳이 이런 소리를 한 건 루시안을 자극하기 위함이리라.
이왕 날뛰기 시작한 거 능력을 제대로 보이라는 권유 겸 경고.
'평소라면 안 할 행동을 하는 거 보니 슬슬 후계자 경쟁 구도가 굳어지기 시작한 건가.'
아무래도 대공은 루시안이 마지막 기회를 잡길 원하는 모양이었다.
능력을 보여도 때를 놓치면 후계자 경쟁에 참여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럼 이제 가보거라. 발톱을 너무 감춘다면 쓸 일조차 없이 녹슬어 갈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고."
대충 말뜻을 알아들은 것 같자 대공이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나 루시안은 축객령에도 떠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이미 가문에 보탬이 될만한 공적을 세웠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뭐?"
뜬금없는 소리에 대공이 눈썹을 찌푸렸다.
일주일 동안 딱 한 번 외출한 게 전부면서 공적이라니?
"조급하다고 해서 허세를 부리지 마라. 공적이란 건 그리 쉽게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괜히 거리에서 적당한 소문 하나 듣고 공적이라 할 셈이면...."
"로그란 후작가가 영지에 개입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암흑가를 통해 마약을 퍼뜨릴 셈이었더군요."
"...!?"
"증거는 이미 모아뒀습니다. 한번 확인해보시겠습니까?"
****
루시안은 즉시 휴고를 불러 미리 준비한 증거들을 챙겨오도록 했다.
이번 계획을 진행한 당사자였기에 자료는 차고 넘쳤다.
제조소를 어디에 차렸는지, 유통 루트는 어떻게 마련했는지, 언제 판매를 시작하고 어떤 방식으로 수색을 피할지까지.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대공도 연이어 쏟아지는 증거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베른하르트! 그 잡놈이 감히 내 앞마당에서 이딴 짓을 하다니!"
콰앙
현 후작의 이름을 부르며 지그문트 대공이 탁자를 후려쳤다.
어찌나 분노했는지 튼튼하기론 강철 못지않다던 청금석 탁자에 금이 갔다.
한참 씩씩거리던 대공은 이내 털썩 주저앉으며 화를 삭였다.
"빌어먹을! 생각 같아서는 당장 폐하께 고해 이 제국의 수치를 재판대에 세우고 싶다만...!"
"힘들겠지요. 개입은 전부 휘하에 있는 상단의 이름으로 했으니까요. 아버지께서 이 자료를 내미시면 냉큼 꼬리를 잘라버릴 겁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이 영악한 놈 같으니라고!"
후작이 선을 넘기는 했다만 바보가 아닌 이상 제 가명을 직접 쓸 리가 없다.
이 증거를 앞세우면 누구나 후작이 뒤에 있다는 걸 알겠지만 어디까지나 심증의 영역,
후작가의 권력을 찍어누르고 재판대에 세우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증거라면 놈은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휘하 상단들을 쳐낼 수밖에 없겠지. 잘해주었다."
감정을 다스린 대공의 입에서 칭찬이 나왔지만, 얼굴은 여전히 찌푸린 채였다.
후작에게 한 방 먹일 수는 있겠지만 한 짓에 비해서 한참 부족한 대가라고 여기는 듯했다.
대공의 심정을 헤아린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하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하지만 놈이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채면 그나마 남아있던 증거마저 없애버릴 거다. 아쉽지만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고 속전속결로 끝내는 수밖에."
"눈치를 못 채게 하면 그만이지요. 아무리 후작이라도 발데크가 직접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찌 눈치채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얼마 전 제게 이 계획의 실행자가 투항해왔습니다. 정확히는 용병 노릇을 하다 충성의 대상을 명확히 정한 것에 가깝습니다만."
"...!"
"아무리 의심 많은 이라도 계획의 실행자를 의심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다른 계획이라면 모를까 마약 판매라는 안건에서 편을 갈아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겠지요."
배신한다고 해서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평민에, 암흑가 출신에, 마약 판매까지 손댄 인간이다.
정보만 쏙 빼먹고 토사구팽해봤자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을 터.
오히려 제대로 보상을 준다고 하는 귀족을 이상하게 여길 거다.
이런 상황이니 후작이 보기엔 배신 자체가 바보짓이고, 휴고도 바보짓을 할 인간이 아니니 어지간해선 의심하지 않으리라.
설령 의심하더라도 텉릴 대로 다 털린 다음에나 간신히 눈치채겠지.
"그러니 굳이 아버지께서 움직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배신자가 내부에서 휘젓고 다닌다면 후작에겐 생각지도 못한 출혈이 되겠지요. 잘만 하면 상단 정도가 아니라 후작이 개입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도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루시안의 설명에 대공은 침묵했다.
과연 정말 가능한 계획인지 아닌지 가늠해보는 것 같았다.
기나긴 침묵이 끝난 후 대공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놈은 믿을 수 있느냐? 내력은 모르지만, 약까지 손을 대려 한 놈인데."
"그자를 믿는다기보다 그자가 가진 꿈을 믿을 뿐입니다."
"꿈?"
"기사가 되어 명성을 떨치고 싶다더군요.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새기고 싶다고 했습니다."
"주제넘은 꿈이구나. 뒷골목 불량배 주제에."
"하지만 사내라면 미치도록 갈망하는 꿈이기도 하지요."
루시안도 한때 같은 꿈을 꿨으니까 알 수 있다.
휴고는 배신하지 않는다.
기사 자리를 대놓고 약속하는 주군이란 평생에 단 한 번 만나기 힘든 존재니까.
꿈을 잃지 않는 한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루시안을 지키려고 하리라.
"네가 사람을 잘못 본 탓에 모든 걸 망친다면?"
대공의 날카로운 시선이 정면에서 날아왔다.
루시안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즉답했다.
"목을 내놓겠습니다."
"후."
대답을 들은 대공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맺혔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대공이 등을 돌린 채 말했다.
"몸이 회복되면 연무장으로 나오거라."
"예?"
"사자심검을 가르쳐주마. 이제 너도 차기 가주 후보 중 하나다."
"...!"
14화
루시안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사자심검.'
차기 가주 후보로 선정된 자와 극소수의 최측근만이 배울 수 있다는 검식.
고대 검식 중에서도 특출난 강맹함으로 유명한 최강의 검식 중 하나.
기사는 물론이고 평범한 농민조차 사자심검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다.
어릴 적 이야기나 다른 지방의 설화로 한 번쯤 들어보기 마련이니까.
지그문트 대공은 지금 그 사자심검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 것이다.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 루시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침내...!'
전생에서는 대륙을 사방팔방 들쑤시고 다녔음에도 고위 검식을 얻지 못했다.
간신히 손에 넣은 검식조차 평기사들이 배우는 검식의 열화판에 지나지 않았다.
일개 용병에게는 그조차 귀했지만 루시안은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어렵지 않게 이겼던 기사가 수년 만에 역전한 실력으로 루시안을 때려눕힌 일이 몇 번이던가.
패배하고 간신히 살아남을 때마다 미칠 듯한 자괴감과 함께 고위 검식에 대한 갈증에 시달렸다.
그런데 지금 단순한 고위 검식을 넘어선 최강의 검식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내일 당장 연무장으로 향하겠습니다."
"무리하지 마라."
"무리가 아닙니다. 몸은 이미 다 나았습니다. 이 이상 쉬어봤자 기껏 나은 몸이 녹슬 뿐입니다."
대공이 미간을 좁혔으나 루시안은 오히려 보란 듯 허리를 쭉 펴고 일어섰다.
한 차례 루시안의 몸을 훑고 나서야 대공의 미간은 도로 펴졌다.
근육 상태를 확인하고 허세가 아닌 걸 알아차린 듯했다.
"정 그렇다면 뜻대로 하거라. 하지만 몸간수를 잘못하여 생기는 피해도 오롯이 네가 감당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로그란 후작가와 관련된 일은 네게 맡기겠다. 능력껏 휘저어 보아라. 성과가 괜찮다면 포상을 기대해도 좋다."
"실망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가보거라."
루시안은 고개를 숙이고 대공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사자심검을 배운다고 들었을 때부터 울리던 심장이 아직도 요란스레 울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전생의 루시안에겐 꿈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 중 제대로 충족된 게 없었다.
혈통은 물론이고 검식과 육체까지 밑바닥을 간신히 면한 수준.
기반이 워낙 형편없으니 아무리 노력해도 용병단 단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게 채워졌지.'
그렇기에 다가올 난세는 이전과는 다르리라.
무엇보다 혈통이 채워진 이상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
루시안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볼 생각이다.
과연 이 지식과 힘으로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자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루시안은 머릿속으로 미래를 그려나갔다.
****
대공은 루시안이 나간 후 즉시 에드윈을 불렀다.
에드윈은 후작가의 계획이 적힌 서류들을 읽어보고 창백하게 질렸다.
"전하."
"사과할 생각이라면 관두게."
"제가 미욱해서...."
"관두라니까. 국경에 첩보를 집중시키라는 건 내가 직접 내린 명령이었어. 방첩에 구멍이 숭숭 뚫린 마당인데 자네가 뭘 할 수 있었겠나?"
"그래도 알아차려야 했습니다. 여긴 발데크의 심장부인 켈하임 아닙니까? 심장부에 적이 단도를 들이댔는데 눈치를 못 챈 건 제 실수입니다."
"겨우 이 정도로 단도는 무슨."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에드윈을 향해 대공이 코웃음을 쳤다.
"단도 수준의 위협이었다면 자네도 알아차렸겠지. 기껏해야 손톱으로 쿡쿡 찌르는 수준이었기에 못 알아챘을 뿐. 자네가 못난 게 아니라 베른하르트 놈이 우리의 허를 찌른 거야."
"약으로 영지를 오염시키려던 행위를 겨우 손톱이라 하시는 겁니까?"
"자료를 더 읽어봐."
에드윈의 시선이 다시 자료로 향했다.
한참 이것저것 읽어보던 에드윈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직 들키지 않는 데만 힘을 다 썼군요. 이래서야 약이 퍼지는 속도는 물론 돈조차 제대로 벌기 힘들 텐데요."
"그래, 재료 유통과 제조에 드는 비용을 제하면 이익은 없다 봐도 되겠지. 아마 돈이 아니라 내 체면을 깎는 게 목적이었을 거야."
자기 앞마당에서 마약 판매가 일어나는데도 눈 뜨고 당한 발데크.
정적들에겐 이리저리 씹어대며 놀리기 좋은 명분이겠지.
황제가 대공에게 중책을 맡기려 할 때는 반대하기 위한 사례로 제시할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놈은 선을 넘었어. 제국이 휘청거리는 와중에도 이따위 짓을 벌이다니. 이건 거의 반역 아닌가?"
"원래 충성심이 없는 자였습니다. 새삼스럽지도 않지요."
"어쨌거나 셋째 녀석 덕에 망신을 피할 수 있었지. 천만다행이야."
"예? 설마 이 자료를 삼공자께서?"
"판매 담당이 셋째한테 줄을 갈아탔다더군. 추측이지만 얼마 전 새로 들어왔다는 암흑가 출신 하인이겠지."
"휴고라는 이름이었지요."
"그래, 그 휴고. 참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닌가? 겨우 계획 하나 들켰다고 암흑가 두목이 홀랑 줄을 갈아탄다는 게."
대공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몸을 누였다.
방금 전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그리 간단히 넘어갈 소리가 아니었다.
"셋째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충성하겠나. 이왕 줄을 갈아탈 거라면 좀 더 힘 있는 놈한테 갔겠지. 혹은 그냥 다 포기하고 도망치거나."
"그런데도 삼공자께 갔다는 건 직접 움직이셔서 설득하셨다는 거군요."
"설득이라... 그래, 그렇겠지."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그 한마디로 표현하기엔 부족하리라.
과연 설득 몇 번으로 닳고 닳은 암흑가 두목 출신이 홀랑 넘어갔을까?
평생 간직해왔던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준다는 백지 수표만 믿고?
'그럴 리가.'
지방 귀족도 아니고 후작과 대공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한 놈이다.
담력이라면 어지간한 기사보다 더할 테고 머리도 팽팽 돌아갔을 터.
그런 놈이 루시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자신의 목숨줄을 넘겼다는 게 무슨 뜻이겠나.
신뢰만이 아니라 능력도 충분하고 넘칠 만큼 보여줬다는 소리다.
신중하다 못해 독사 수준으로 교활한 놈조차 껌뻑 넘어갈 만큼이나.
"아무튼 예정보다는 빠르지만, 셋째가 능력을 보여준 만큼 더 기다릴 필요는 없겠더군. 내일부터 사자심검을 가르칠 생각이야."
"훌륭하신 결정입니다. 검술 스승은...."
"아이젠 경에게 부탁하지. 가르칠 거 다 가르치고 편히 쉬는 사람을 불러내기는 미안하지만, 그만한 적임자가 달리 없으니."
"알겠습니다. 바로 전달드리지요."
"참, 그리고 자료에 있는 조직은 따로 손대지 말도록. 셋째가 내부에서 뒤흔들어보겠다고 했으니 솜씨 좀 봐야겠어."
대공의 말에 에드윈이 움찔했다.
아들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알겠지만, 일의 경중이 너무 크지 않나?
자칫하면 농락만 실컷 당한 채 아무런 반격도 못 하고 끝날 수 있거늘.
"전하, 죄송합니다만 이 일은...."
"무슨 소리 하고 싶은지는 알아. 시험으로 삼기엔 일이 너무 중요하다는 거지?"
"그뿐만이 아닙니다. 삼공자께서는 이런 공작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잘 풀린다 해도 제가 나서는 것만 못할 겁니다."
"그렇긴 해. 하지만 그 점을 감수하고서라도 셋째한테 맡겨보고 싶단 말이지."
"삼공자에게서 무언가를 보신 겁니까?"
"무언가까지는 아니고, 눈빛이 제대로 되어 있었거든."
대공이 생각하기에 사람은 눈을 통해 그 일생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평생 안락한 장소에서 지내온 귀족 영애는 범죄자의 처형을 명령할 때조차 천진난만함이 남아있다.
그에 비해서 험하게 자라온 밑바닥 출신은 아무리 겸손해도 눈구석에 억누른 살기가 어른거리기 마련.
이건 대공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였다.
타고난 재능과 위엄이 있더라도 귀족 도련님 특유의 풋내는 숨기기 힘들었다.
하지만 오늘 루시안의 눈에는 그런 풋내가 없었다.
"전장에 다녀온 눈을 하고 있더군."
"전장이라시면...."
"자네도 알다시피 영웅담만 파고든 애송이와 창칼이 오가는 전장에서 귓바퀴가 잘려본 병사의 눈빛은 다르지."
목을 내놓겠다고 할 때 루시안은 명백한 후자였다.
애송이의 치기나 각오를 드러내는 맹세가 아닌, 진짜 목숨을 걸 때나 볼 수 있는 눈빛.
적어도 다른 자식 중에 그런 눈을 할 수 있는 녀석은 아직 없었다.
"능력과 각오는 별개라지만, 그만한 각오를 보였다면 마땅히 대책도 있을 것 같더군. 과연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보고 싶어서 말이야."
"전하께서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에드윈은 고개를 숙이며 물러섰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 한들 대공이 후계자 육성에 더 뜻을 뒀다면 그쪽을 우선시하는 게 집사장의 의무였다.
동시에 삼공자가 과연 어떤 결과를 보여줄지 조금 기대가 되기도 하였다.
지그문트 대공의 사람 보는 눈만큼은 에드윈도 따라갈 수 없었으니까.
****
루시안은 돌아온 즉시 휴고를 불렀다.
"배후에 있는 후작가의 존재를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겠어?"
"끄집어낸다 함은?"
"꼬리 자르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유인할 할 수 있겠냐는 소리야."
후작을 재판대에 세우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발뺌만으로는 도저히 넘어가지 못할 만큼만 증거를 더 모으면 충분하다.
아주 약간 더 드러나는 것에 불과할지라도 꼬리와 다리는 천지 차이.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후작가가 감내해야 할 출혈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커질 거다.
루시안의 말에 휴고는 히죽 웃었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후작가의 관계자가 앞으로 두 번 정도 더 찾아올 예정이니까요."
"두 번?"
"약의 제조와 첫 판매는 직접 보러 올 겁니다. 제가 지원금만 받아먹고 일을 안 하는 건 아닌지 감시하기 위해 일의 시작 전에는 반드시 방문하니까요."
"관계자의 지위는? 그마저도 꼬리라면 별 의미 없을 텐데."
"제게 숨기긴 했으나 몰래 뒤를 밟아 신분을 알아뒀습니다. 후작의 넷째 아들이더군요."
"...!"
루시안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들이 얽혀 있다면 후작가도 휴고와 얽혔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아니, 부정하더라도 넷째는 물론 그와 연관된 모든 걸 잘라내야 한다.
휴고의 배신을 생각지도 않고 있다면 상상도 못 했던 치명타일 터.
"너 혼자 처리할 수 있겠어? 난 움직이지 못해. 발데크가 깊게 개입되었다간 저쪽도 눈치챌 테니까."
"이미 먹잇감이 알아서 오는데 무슨 도움이 필요하겠습니까. 때가 되면 알려드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호언장담을 들은 루시안은 이번 일을 휴고에게 완전히 일임하기로 했다.
후작가에게서 직접 일을 의뢰받은 만큼 세부 내용에 대해선 휴고가 누구보다 잘 알 터.
괜히 끼어들어서 이것저것 훈수를 놓는 것보다는 온전히 휴고의 역량을 발휘하게 두는 게 낫겠지.
능력이 없다면 모를까 이미 차고 넘치는 걸 아는 상황이니 더더욱.
"한스는 최근 하인들을 재교육하고 있다고 했지? 어때?"
"솔직히 말해 가르칠 것도 없습니다. 저번 일 이후 다들 정신을 차렸거든요. 하인 일에 관해서는 원래 저보다 오래 근무한 사람들이니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도 언제 약발이 떨어질지 모르니 잘 지켜보다 풀어지는 놈 있으면 바로 보고해. 사람이란 건 쉽게 안 바뀌는 법이야."
"그런 괘씸한 놈이 있다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루시안은 두 심복에게 앞으로의 방침을 재차 일러둔 후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약속한 시각이 되자마자 홀로 연무장에 향했다.
연무장에는 대공이 미리 말해둔 사람이 나와 루시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2년 전 대공 전하의 생신 이래 처음 뵙는군요, 삼공자. 절 기억하고 계십니까?"
소탈한 노기사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루시안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가 누군지는 환생 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기에.
'아이젠 브라이트너.'
선대 대공의 오른팔이자 3대에 걸쳐 발데크 가문을 섬겨온 충신.
그리고 대륙에서 검성의 칭호를 얻은 다섯 기사 중 유일한 생존자가 눈앞에 있었다.
15화
"검성께 가르침을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족하지만 최대한 노력할 테니 부디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루시안은 최대한의 경의를 담아 아이젠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태도에 노기사는 멋쩍은 듯 손사래를 쳤다.
"너무 어려워하지 마십시오. 검성이라 해봤자 이미 죽을 날만 받아놓은 늙은이입니다. 하물며 삼공자께서는 이제 차기 가주 후보시거늘 어찌 이리 쉽게 고개를 숙이십니까."
노기사의 겸손에도 루시안은 전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순환의 한계에 달하여 각성을 마친 초인이 검식을 극한까지 연마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호칭이 검성이다.
기나긴 제국의 역사를 살펴봐도 동시대에 검성이 두 명 이상 존재했던 시기는 딱 한 번.
그나마도 전대 검성이 늙어 죽기 몇 년 전이라 했으니 한 시대에 한 명 나오기도 힘들다는 소리다.
전생에 검을 미친 듯이 파고 들었던 루시안으로서는 그 무게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발데크 가문을 낮출 수는 없겠으나 어찌 가신이라는 이유로 검성에 다다른 기사를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신분을 떠나 아이젠 경께서는 모든 기사의 경의를 받기에 충분하신 분입니다."
"허허."
진심을 담아 루시안이 재차 말하자 아이젠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다른 공자들도 아이젠에게 크게 경의를 표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공가의 후계자 후보로서 표한 경의였다.
검성의 이름은 후계자 구도를 단숨에 뒤바꿀 만큼 무게가 있었으니까.
그에 비해 루시안이 표하는 경의는 기사의 순수한 선망에 더 가까웠다.
'신기한 일이로구나. 일반적인 귀족 가문의 자제는 무력을 자신이 부리는 수단으로밖에 인지하지 못하거늘.'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어중간한 기사들과 수많은 병사를 보며 자라난 젊은이들이다.
일당백의 용사 따윈 과장 섞인 설화 또는 수로 압살할 수 있는 필부로 보일 수밖에.
그런데 삼공자의 태도는 마치 직접 검의 길을 걸어본 사람 같지 않은가.
-가망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으나 다시 보니 참 비범한 녀석이었소. 재능이 대단했냐고? 그보다는 마음가짐이 놀라웠지. 무슨 뜻인지는 직접 보면 알 거요.
아이젠은 여기로 오기 전 대공이 한 말을 떠올렸다.
이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겨우 특이한 반응 하나 보였다고 루시안을 특별취급할 수도 없는 노릇.
일단 다른 공자들과 같은 훈련을 통해 그릇을 가늠해볼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호의를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요. 삼공자께서 편한 대로 하십시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즉시 훈련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연무장을 달리십시오."
"예."
루시안은 바로 대답하고 연무장을 뛰기 시작했다.
이유를 물어보기는커녕 약간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그 덤덤한 태도에 오히려 달리기를 시킨 아이젠이 당혹감을 느꼈다.
"저, 삼공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예? 왜 그러십니까?"
"뭐 궁금한 건 없습니까? 왜 달리라는지, 얼마나 달려야 하는지, 이 훈련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같은 거 말입니다."
"궁금하긴 하지만 제게 필요하니 시키신 것 아니겠습니까.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으신다면 그 또한 이유가 있겠지요. 전 가르침을 받는 자로서 스승의 말을 따를 뿐입니다."
루시안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멈췄던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젠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말은 참 쉽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사람인 이상 무의미한 수고는 사양하기 마련.
하물며 귀족이라면 더더욱 숨 쉬는 것처럼 손익을 따지게 된다.
그런데 망설임은커녕 의문조차 가지지 않고 뛰다니.
'확실히 삼공자께서는 뭔가 다른 것 같습니다, 전하.'
검성 아이젠의 눈동자에 기대감이 어렸다.
귀족 도련님을 가르치던 이전과 달리 진짜 기사를 가르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
루시안은 말없이 연무장의 넓은 공터를 달렸다.
사실 아이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느 정도 거짓이 섞여 있었다.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던 건 아이젠에 대한 믿음보다 이 시험의 목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니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단순한 체력 단련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제자에 대해 이것저것 가늠해보기 위함이지.'
검술이 아니라 달리기를 명령함에도 얼마나 순순히 따르는지.
본격적인 훈련 전에 현재 체력이 어느 정도로 받쳐주는지.
멈추라는 말이 없으면 얼마나 쉬지 않고 오래 달릴지.
제자의 심성부터 몸 상태, 근성까지 모두 파악할 수 있는 게 바로 이 달리기인 셈이다.
사실상 가장 중요한 재능을 제외하면 제자를 결정하는 모든 게 포함된 셈이다.
'뭐, 재능이 없다면 대부분 심성과 근성에서 걸러지지만... 대공의 자식이라면 무조건 가르칠테니.'
루시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권력이란 게 참 좋긴 좋다.
스승으로서는 가르치기 싫은 제자도 가르쳐야 할 테니.
그렇지만 달리 보자면 검성 앞에서 점수를 딸 기회기도 했다.
아무리 심성과 근성이 좋아봤자 온갖 권력을 누리는 귀족 도련님.
검성 앞에서 보여준 수준도 빤하리라.
루시안은 그 점에서 누구보다 앞서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심성은 증명했고, 나머진 근성인가. 어쩔 수 없지. 며칠 앓을 각오를 하는 수밖에.'
몸이 회복되긴 했으나 운동 부족인 건 여전할 터.
얼마 안 가 금방 지칠 게 뻔하니 깊은 인상을 주자면 죽자사자 달리는 모습이라도 보여줘야 했다.
다행히 여기는 보통 귀족 가문도 아니고 발데크 대공가.
달리다 쓰러져서 호흡이 오락가락하더라도 회복할 약 정도는 있겠지.
각오를 마친 루시안은 땅을 박차며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1시간이 지났다.
"...."
"...."
타다닥
여전히 루시안이 뜀박질을 하는 소리가 연무장에 울렸다.
호흡이 거칠어지지도, 발이 느려지지도 않았다.
검성 아이젠은 상상도 못한 결과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아이젠보다 더 놀란 건 달리는 당사자였다.
'뭐야? 이거 왜 안 지쳐?'
예상대로라면 쓰러져도 진즉 쓰러졌어야 했다.
아니, 쓰러지진 않더라도 발이 느려지거나 호흡이 가빠지긴 해야 한다.
초인이 아닌 이상 그게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이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루시안의 몸은 전혀 지치지 않았다.
"도련님, 괜찮으신 겁니까?"
"그게... 어째선지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당혹감이 담긴 아이젠의 물음에 루시안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후 30분을 더 달렸으나 여전히 몸은 펄펄 날아다녔다.
아이젠도 이내 루시안의 몸 상태를 파악한 건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더는 의미가 없을 것 같군요. 그만하시고 잠시 와보시겠습니까?"
"예."
말한 대로 가까이 다가가자 아이젠이 루시안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푸르스름한 혈관에 가져다 대었다.
"잠시 삼공자의 몸상태를 확인해보겠습니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더라도 움직이지 마십시오."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청량한 기운이 손목을 통해 몸으로 파고들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루시안은 몸을 흠칫 떨었다.
'자신의 마력을 촉각 삼아 상대방의 내부를 훑어보는 건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마력이란 외부로 발현하는 것 자체가 지극히 힘들 터인데 이런 식으로 섬세하게 다루다니.
심지어 몸 곳곳을 침투하면서도 약간의 이물감 외에는 큰 이상을 느낄 수 없었다.
마력의 성질을 최대한 상대와 동화시켜 부작용을 최소화했으리라.
루시안은 새삼 검성이라는 경지가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깨달았다.
"이건...!"
한참 동안 몸을 훑어보던 아이젠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잠시 후, 마력을 거둔 아이젠은 루시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도련님, 몇 가지 묻겠습니다. 최근 홀로 순환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루시안은 망설임 없이 즉답했다.
순환 자체는 이 몸뚱이의 이전 주인도 진작 배웠기에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검식과 달리 육체 단련이 필요 없는 데다 외부에서 도와주면 쉽게 배울 수 있는 덕이다.
아이젠도 그 점은 알고 있었기에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가볍게 넘어갔다.
진짜 질문은 다음부터였다.
"그럼 순환 도중 무언가 막히는 느낌이나 압박감, 통증을 느끼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무언가 걸리는 느낌조차 없었단 말입니까?"
"전혀요. 물레방아처럼 잘만 돌아가더군요."
"허, 허허. 허허허!"
아이젠의 얼굴에 수많은 감정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불신, 환희, 안타까움, 안도, 고민.
그 외에도 파악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느껴졌다.
루시안도 그의 심경을 완전히 파악하긴 어려웠으나 왜 저러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마력의 길이 이미 다 뚫려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거겠지.'
생각해보면 아까 전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 않았던 이유 역시 이 육체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검사로 대성하지 못한 루시안으로서는 대충 그 정도만 짐작할 뿐이었다.
그에 비해 아이젠은 대륙 역사에서 손에 꼽는다는 경지인 검성.
루시안의 육체에 대해 무언가 더 많은 걸 깨달았을지도 몰랐다.
'생각 같아서는 물어보고 싶지만....'
검식 하나 제대로 못 익힌 삼공자가 어려운 부분만 콕 집어 물어보는 것도 이상할 터.
괜한 의심을 사느니 말해줄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게 나았다.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던 아이젠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잘 알았습니다."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삼공자의 육신은 그 누구보다도 사자심검을 익히기에 적합하니까요. "
"예? 그게 무슨 뜻이신지...."
"삼공자."
아이젠은 얼굴에 웃음기를 싹 지우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발데크 가문의 후계자 대신 차기 검성의 자리를 노려보실 생각 없습니까?"
"...!?"
****
루시안은 너무 놀라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고 차기 검성이 되라니?
당황하는 루시안에게 아이젠이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삼공자께서는 순환에 막힘이 없다는 사실을 가볍게 넘기셨지만, 사실 그건 엄청난 축복입니다."
순환이란 인간의 불순물 가득한 육체를 조금씩 정화하는 과정.
하루도 쉬지 않고 순환을 반복하더라도 막힌 길을 뚫고 넓히는 과정은 아득하게 길다.
소년기에 시작하더라도 최소 중년이 지나야 끝을 본다고 할 정도로.
그마저도 검식으로 마력을 키우는 과정이 동반되었을 때나 가능한 일.
조금이라도 단련을 게을리하거나 한눈을 팔면 늙어 죽을 때까지도 길이 막힌 채다.
"그런데 삼공자는 시작부터 모든 길이 뚫려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선천적으로 다른 검사보다 수십 년 앞서 있다는 뜻 아닙니까?"
"그 정도가 아닙니다."
"예? 달리 뭐가 더 있습니까?"
루시안은 진심을 담아 물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상의 효과를 떠올릴 수 없었다.
여기서 더 대단한 효과라 해봤자 복용한 비약이 몇 배의 효과를 낸다는 것 정도일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루시안에게 아이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모든 길이 뚫린 시점에서 육체는 완전히 정화된 겁니다. 그보다 더 위는 없습니다. 그런데 삼공자는 미미하게나마 순환의 효과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더욱 위로 갈 여지가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
16화
아이젠의 설명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잠재력만 뛰어난 것도 아니지요. 같은 경지라도 삼공자와 다른 기사는 육체의 정순함이 다를 테니 그만큼 마력의 강화 효과도 크게 받을 겁니다. 더 많은 양을 더 순도 높게 사용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말씀은 같은 경지의 기사라 할지라도 제가 우위에 설 수 있다는 뜻입니까?"
"처음엔 약간의 우위를 잡는 수준에서 끝나겠지만, 점차 동급의 경지인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할 만큼 발전하실 겁니다. 나중에는 자기보다 높은 경지의 상대와도 대등하게 겨루실 수 있겠지요."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루시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자심검을 배울 때까지만 해도 그리 많은 걸 원한 건 아니었다.
전생에 도달하지 못한, 진정한 강자의 영역에 발을 디밀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 정도로도 세상 사람들에겐 넘치도록 인정받을 테니까.
미래를 준비하려면 검술만 파고 있을 수는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강자의 영역 정도가 아니라 검성, 심지어 그 너머까지 노려볼 수 있다니.
'보고 싶다.'
야망 이전에 한 명의 검사로서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방금 전 아이젠이 한 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헌데 차기 가주 자리를 포기하라고 하신 건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검술과 후계자 수업을 병행할 수는 없는 겁니까?"
"음, 그건...."
아이젠은 말끝을 흐리며 한참 동안 머뭇거렸다.
말없이 기다리자 이내 아이젠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삼공자, 저를 보십시오."
"예?"
"이 얼굴을 보십시오. 뭐가 보이십니까?"
노기사는 자신의 얼굴을 한 손으로 쓸면서 말했다.
뜬금없는 질문에 루시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훑어봤다.
뭐가 보이냐니? 주름살 외에 보이는 것도 없는데.
"아."
"이제 아신 것 같군요."
아이젠은 무언가 깨달은 루시안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늙었습니다, 삼공자. 순환을 통해 정순해진 육체 덕에 나이치고는 정정하게 살고 있습니다만... 요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낍니다."
그렇겠지.
실제로 전생에서 검성 아이젠은 8년 후에 죽었다.
나이로 따지자면 백 살을 넘기고도 3년은 더 산 데다 병으로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으니 호상 중의 호상.
'하지만 검성의 후계자를 길러내기에 8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지.'
계단이 높으면 높을수록 오르는 시간도 오래 걸리기 마련.
검성 쯤 되면 제자에게 알려줄 것도 산처럼 쌓여있을 거다.
남은 8년 동안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검식을 전수해도 다 소화할 수 있을지 애매할 터.
제자가 성장하는 도중에 막히고 헤매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더욱 짧게 느껴지리라.
"제가 살아있는 동안 모든 걸 전수하려면 남은 시간조차 부족합니다. 그 와중 다른 공자들과 경쟁까지 해야 한다면 말할 것도 없죠."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습니다."
루시안은 잠시 눈을 감고 고민했다.
검성의 후계자라.
확실히 매력적인 선택지긴 했다.
세상이 언제까지고 평화롭다면 차기 가주 자리 따윈 바로 던져버리고 검술에 매진했겠지.
다른 경쟁자들과 십수 년간 더 투닥거리느니 검성의 유일무이한 후계자가 되는 편이 나으니까.
'문제는 지금 난세가 다가오고 있다는 거다.'
루시안은 세상이 뒤바뀌는 걸 눈으로 봤다.
황제의 권력은 유명무실해지고 사방에서 권력자들이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다.
휴고처럼 정당한 권한 없이 힘만 믿고 일어선 세력도 다수 있었다.
하지만 그중 대부분은 참칭자라며 욕을 먹었고 항상 쏟아지는 도전에 시달려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의 권위에는 어떠한 명분도 없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살인이라도 부모님의 원수를 갚은 것과 아무 이유 없이 죽인 건 천지 차이.
참칭자들은 그 사실도 모른 채 희희낙락하다 곧 대가를 치러야 했다.
명분 없이 얻은 권력이란 남이 명분 없이 빼앗더라도 흠결이 안 된다는 소리였기에.
'하극상과 암살이 일상처럼 일어났지. 세력 구도는 수시로 뒤집혔고.'
안정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다스린 건 명분과 정통성이 있는 소수의 군주뿐.
그때 루시안은 명분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세상을 지배할 수 있더라도 명분이 없다면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다가올 난세에 대비해 이런 저런 명분을 확보해두는 건 필수 과정.
그런데 검을 위해 황가의 피까지 섞인 발데크의 차기 가주 자리를 공식적으로 포기하라?
발데크와 연관된 모든 건 물론 황가의 이름도 팔 수 있는 명분 제조기를?
'절대 안 되지.'
검성의 자리가 매혹적인 건 사실이지만 포기해야 하는 게 너무도 컸다.
아쉽지만 아이젠의 제안은 거부하는 수밖에.
"죄송합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발데크로 남고 싶은지라."
"아아."
에두른 거절에 노기사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기회마저 놓쳤다는 한스러움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삼공자께서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이 늙은이의 욕심이 과했나 봅니다."
"모처럼 제안해주셨는데 면목 없습니다."
"아닙니다. 사실 삼공자라면 제가 없어도 수십 년 후에 검성 자리를 노려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도 양자택일을 강요한 건 제 손으로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
"주책맞지 않습니까. 젊은 시절엔 뭘 하고 늘그막이 이 난리인지. 굳이 제가 손대지 않아도 새싹은 거목으로 자라기 마련인데 말입니다. 허허허."
힘없는 웃음소리가 루시안의 귀를 파고들었다.
말은 저리 해도 모처럼 희망을 품었다가 꺾인 충격은 적지 않아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루시안이 아이젠을 쳐다봤다.
"한 가지 여쭈어볼 게 있습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제자로 대성할 재목이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
뜬금없는 제안에 검성의 눈이 끔뻑거렸다.
****
루시안의 제안은 간단했다.
앞으로 2년 안에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를 찾아 데려오겠다는 것.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 2년을 메꾸고도 남을 만큼 뛰어난 이를 데려오겠습니다. 수백 년 후에도 검성 아이젠의 족적을 남길 만한 제자를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러시다면야 기다리겠습니다만 이 늙은이가 삼공자께 너무 걱정을 끼쳐드린 것 같아 죄송스럽군요.
아이젠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루시안의 말을 가벼이 넘겠다.
세상에 그런 인재가 쉽게 발견되겠는가?
루시안만 해도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인데 그보다 더한 재능이라니.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건넨 말 중 하나로 넘길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젠의 생각과 달리 루시안은 진심이었다.
'분명 검귀가 켈하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텐데.'
검귀 펠릭스.
루시안과 동갑의 나이이며 한때 용병으로서 잠깐이나마 마주했었다.
선이 가늘고 곱상해서 얼굴 때문에 여기저기서 놀림도 자주 받았던 미남.
하지만 그 놀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쏙 들어가곤 했다.
전장에서 단독으로 날뛰는 펠릭스의 검 실력은 괴물 같은 수준이었으니까.
'이름난 기사들조차 펠릭스의 검을 몇 합 받아내지 못했지.'
놀라운 건 펠릭스의 검식 또한 루시안과 비슷한 수준의 하급이었다는 것.
마력 강화의 효율에서 상대가 몇 배나 앞서는 데도 펠릭스는 상대를 순수한 기술만으로 압도했다.
심지어 눈으로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검식의 일부를 즉석에서 베껴서 사용한 적도 있으니.
처음엔 질투하던 이들조차 나중에는 경외감에 할 말을 잃곤 했다.
신이 내린 육체를 보유한 게 루시안이라면 신의 전투 센스를 가지고 있는 게 바로 펠릭스다.
과거로 돌아온 루시안으로서는 이름이 알려지기 전에 영입해야 할 인재 1순위라 할 수 있다.
문제는 펠릭스가 용병이 되기 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점이었다.
아는 거라곤 다음 해 겨울에 소도시 빈델른에서 첫 용병 활동을 시작한다는 것뿐.
그 전에는 위치를 모르니 데려오고 싶어도 데려올 방도가 없었다.
'1년 이상 기다리게 될 아이젠 경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감사합니다. 삼공자께 이리도 저를 신경 써주시니 기분이 나쁘진 않군요."
다행히 아이젠은 기분이 나아진 듯 미소를 띄웠다.
설령 위로에 불과하다고 해도 루시안의 마음에 고마움을 느끼는 듯했다.
"자, 늙은이의 푸념은 여기까지로 하지요. 삼공자께서 무슨 선택을 하셨든 제 일은 검을 가르치는 것이니."
진지해진 아이젠의 눈빛에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본견적인 훈련의 시작이었다.
****
"셋째 형님이 새로운 가주 후보로 선정되었다고?"
"예, 도련님."
조슈아는 하인의 보고에 눈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나이 때문에 경쟁에 늦게 참여한 조슈아다.
그런데 지금껏 잠잠하던 셋째 형까지 참전할 줄이야.
"미치겠군. 지금껏 잠잠하던 사람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기에."
나머지 두 형제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겠지.
이미 세력이 형성될 만큼 형성되었고 루시안의 능력이 자신들에게 못 미칠 거라 확신할 테니까.
하지만 아직 기반을 완전히 굳히지 못한 조슈아로서는 치명타였다.
두 형제의 측근이 되지 못한 기사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추가된 꼴이니.
다들 한창 루시안과 조슈아를 저울질하며 고민할 게 안 봐도 뻔했다.
"제기랄.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도움이 안 되는구나. 그대로 콕 처박혀서 이 동생에게 한 손 보태면 어디 덧나기라도 하나?"
"그리 걱정하실 건 없지 않습니까? 지금껏 아무 노력도 안 하신 삼공자께서 뒤늦게 경쟁에 뛰어들어봤자...."
"누가 그 팔푼이 형님을 두려워한다더냐? 기껏 모아뒀던 놈들이 흔들리는 게 문제란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요점이 뭔지 알지도 못하는 심복의 모습에 말이 절로 험해졌다.
조슈아는 부글거리는 속을 진정시킨 후 상황을 냉정히 바라봤다.
'쭉 못난 모습만 보여줬다면 별 상관없지만, 최근 조르디에게 한 방 먹인 게 문제야.'
조슈아가 볼 때는 별다른 생각 없이 저지른 행동이 우연히 잘 맞아떨어진 것에 불과했다.
지금껏 화낼 줄 모르던 루시안이 폭주하자 당황해 어쩔 줄 모르다가 추태를 보인 거겠지.
그러나 골치 아프게도 다른 사람들에겐 그 과정이 루시안의 철저한 계획으로 보인다는 거다.
최악의 경우 멀쩡한 인재가 헛소문에 넘어가 조슈아가 아닌 루시안에게 줄을 댈 수도 있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루시안의 도금을 벗겨야 한다.'
얄팍한 루시안의 속내가 드러난다면 다들 제정신을 차릴 터.
지금껏 발톱을 숨기고 있었다느니 뭐니 하는 헛소리도 도로 들어가리라.
고민되는 건 그 도금을 벗겨낼 수단이었다.
정식으로 가주 경쟁에 참여한 이상 직접적인 해를 끼치는 건 엄금이었으니까.
"잠깐, 그러고 보니 지금 셋째 형님이 뭘 하고 있다고 했지?"
"여, 연무장에서 아이젠 경께 사자심검을 배우고 있습니다. 예전에 도련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요."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조슈아가 일어나 소리쳤다.
"잠깐 연무장에 가봐야겠다. 잘 드는 검 두 자루를 챙겨라."
"예? 설마 진검 말씀이십니까?"
"그래. 훈련용 목검이 아니라 실전에 쓰는 진검 말이다."
조슈아는 히죽 웃으며 연무장이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먼저 배운 동생으로서 형님의 훈련을 조금이나마 도와드려야겠구나."
17화
"검식의 정수를 모르는 이들은 마력을 자세마다 나눠서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아이젠은 목검을 쓰다듬으며 루시안을 향해 말했다.
"강하게 내려칠 때는 팔에만 집중시키고, 검을 맞댈 때에는 무게로 찍어누르는 데만 집중해야 하며, 피할 때는 오직 다리에만 집중시키는 식으로요. 매번 전신의 마력을 요란하게 움직이곤 합니다."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지요."
즉답이 튀어나오자 루시안이 몸을 움츠렸다.
전생에 그런 식으로 검식을 썼는데 저리 확고하게 말하니 부끄러웠다.
"그럼 마력은 어떤 식으로 써야 하는 겁니까?"
"이런 식으로 써야 합니다."
후우웅
아이젠이 목검을 허공에 휘두르자 몸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눈으로 선명히 보이는 마력의 형태에 루시안은 움찔 몸을 떨었다.
'세상에, 아무 전조도 없이 전신의 마력을 유형화시키다니.'
이름난 기사들이 힘을 폭발시킬 때 집중시킨 특정 부분만 아주 잠깐 보이는 게 마력이다.
그런데 지금 아이젠은 겨우 교보재로 쓰기 위해 전신에서 마력을 유형화시키고 있었다.
"잘 보십시오."
후욱
아이젠이 움직일 때마다 유형화된 마력이 꿈틀거리며 형태를 바꾸었다.
어떤 자세일 때 어떤 식으로 마력의 이동이 이루어지는지.
순간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 마력은 어디에 집중시켜야 하는지.
그 모든 게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보였다.
신기에 가까운 기술에 넋을 놓고 있는 동안 어느새 검식의 시연은 끝나가고 있었다.
"아시겠습니까?"
"다, 다시 한 번만 보여주십시오."
"얼마든지요."
루시안의 말에 아이젠은 웃으며 재차 검식을 선보였다.
마력의 움직임을 따라 루시안도 바쁘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가볍게 선보이는 이 움직임 하나하나가 천금을 주고도 바꾸지 못할 보물들이었다.
"어떻습니까? 이젠 아시겠습니까?"
"...전신의 마력이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는군요."
"예, 바로 그겁니다."
이해가 빠른 학생을 보며 아이젠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세마다 모든 마력을 여기저기 이동시키면 동작마다 상당한 괴리가 발생하지요. 한번 기술을 쓰고 나면 움직임이 뚝뚝 끊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약간의 끊김 자체가 전투에서는 목이 잘리고도 남을 빈틈이죠."
루시안은 찍소리도 할 수 없었다.
검식이란 건 그 빈틈을 얼마나 메꾸는지가 관건인 줄 알았는데 애초에 빈틈이 생기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니.
바위산을 금맥이라 믿고 죽어라 파헤친 기분이었다.
'어쩐지 기사들이 자세를 빨리 잡더라.'
"마력을 사용할 때는 전신의 강화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곳에 돌릴 여력을 남겨둬야 합니다. 이미 사용하는 마력을 빼 오는 게 아니라 남겨둔 마력으로 검식을 이어가는 게 요점이죠.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아이젠은 유형화된 마력을 도로 거두었다.
그리고 이전과 달리 제대로 된 자세를 잡았다.
"마력의 수발이 자유로워지면 이런 것도 할 수 있지요."
파앙
"...!"
검을 휘두르자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위력에 루시안은 깜짝 놀랐으나 더 놀라운 일은 직후에 벌어졌다.
파팡, 팡, 파앙
'이게 무슨...!'
검이 흐르고 있다.
일반적인 검사라면 강한 힘으로 검을 매번 끊어서 휘둘러야 간신히 날 소리.
그런데 아이젠은 검을 흐르게 하면서도 허공을 터트리고 있었다.
대체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춤사위처럼 목검을 휘두르던 아이젠은 열 번째 공격을 마친 후 손을 내렸다.
"이게 앞으로 삼공자께서 배우실 검입니다."
꿀꺽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아직 아이젠은 사자심검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단순히 마력의 수발이 극에 달한 결과를 보여줬을 뿐.
그런데 검식이라 할 수도 없는 마력 운용 하나로 이 정도 위력이라니.
새삼 검사에게 스승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 같았다.
한창 감탄하고 있던 루시안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마력의 수발이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사자심검을 쓰면 어떻게 됩니까?"
질문을 받은 아이젠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지요. 가능하면 삼공자께 직접 시연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여기서는 안 되겠군요."
"어째서입니까?"
"여긴 다른 기사들도 같이 쓰는 연무장 아닙니까. 망가뜨렸다간 대공 전하께 제가 혼날 겁니다."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제대로 쓰면 연무장을 박살 내고도 남을 위력이란 소리니까.
"자, 나아갈 방향성도 보여드렸으니 마력의 운용을 해보지요. 시작은 종베기와 횡베기의 전환부터."
****
그후 루시안은 사흘 동안 종베기와 횡베기만을 계속했다.
단순히 검을 휘두르고 끝나는 게 아니라 마력을 일정량으로 유지하는 게 핵심이었다.
후욱
'쉽게 될 줄 알았는데 옛날 버릇이 자꾸 발목을 잡는군.'
몸은 달라졌다지만 영혼이 반복하던 작업이어서일까.
검을 휘두를 때 전생에서 끊어치던 버릇이 튀어나오곤 했다.
거의 자동반사 수준이라 고치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배우는 게 빠르군요."
"감사합니다."
아이젠의 칭찬에도 루시안은 웃을 수가 없었다.
십수 년 검식을 썼으니 이 정도야 하루 만에 완벽히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오히려 잘못 들인 버릇을 고치기 위해 사흘을 허비하다니.
'...한동안은 검술에 집중해야겠군. 괜히 옛날 버릇이 튀어나왔다간 여러모로 골치 아프겠어.'
차라리 어설프다고 하면 모를까, 잘못된 방식이라도 루시안의 검식은 하나의 기술이 되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배우지도 못한 기술을 선보였다간 단숨에 이목이 집중될 게 뻔하다.
괜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몸을 뜯어고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뭐, 그 덕에 성취 빠른 초보자 수준으로 끝났으니 다행인가. 이미 익히고 온 티가 났다면 골치 아팠을 텐데.'
무언가를 선보일 때 천재가 단번에 습득한 것과 범재가 완벽히 숙련된 것은 전혀 다르다.
평범한 검사라면 구분하지 못하겠지만 검성 쯤 된다면 분명 위화감을 눈치챘을 터.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루시안의 옛날 버릇이 생각지도 못한 도움이 된 셈이었다.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보죠. 이번엔 저와 합을 맞춰서...."
아이젠은 문득 하던 말을 멈추고 연무장의 입구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누가 나오기도 전에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공자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역시 스승님이시군요. 보기도 전에 알아차리시다니."
문의 뒤에서 아직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부러 숨은 게 아니고 한창 오는 중이었는지 발소리와 함께 음성도 가까워졌다.
잠시 후, 하인 하나와 루시안 또래의 미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슈아가 스승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형님도 오랜만에 뵙는군요."
조슈아란 이름을 가지고 루시안의 이름을 부를 만한 사람은 단 한 명.
대공의 넷째 아들인 조슈아 발데크밖에 없었다
동생이라지만 어머니가 다른 데다 겨우 6개월 터울이라 동갑이나 마찬가지.
갑작스러운 조슈아의 등장에 반응을 못 하는 사이 아이젠이 재차 나서서 소리쳤다.
"예, 반갑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삼공자의 훈련 중이니 물러가 주시지요. 이 늙은이와 나누실 말씀이 있다면 나중에 찾아가겠습니다."
"스승님이 아니라 형님을 뵙고자 왔습니다. 먼저 배운 동생으로서 형님의 수련을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부디 허락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수련을 돕는다?"
"마력의 운용을 배울 때 서로 가볍게 대련해보는 과정이 있지 않습니까? 검식을 쓰면서도 일정량의 마력을 유지하는 게 목적이었지요. 가능하다면 제가 그 대련 상대를 해드리고 싶습니다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조슈아도 누굴 가르칠만한 입장에 있을 정도로 많이 배우진 않았다.
그런데 교육 중에 대뜸 와서 끼어들겠다니.
아이젠이 헛웃음을 내뱉는 사이 조슈아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여러모로 바쁜 터라 형님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 이런 때밖에 없습니다. 가능하면 형님의 수련을 도우면서 이렇게나마 못다 한 만남을 가지고 싶습니다만."
한마디로 수련을 돕는다는 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
진짜 목적은 형제끼리 도우며 친목을 다지고 싶다는 거다.
이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친목을 다지는데 굳이 신성한 수련 시간을 고른다?
그것도 서로 검을 맞대는 대련만 골라서?
속이 빤히 보이다 못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이젠은 쉽사리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건... 정치로구나.'
검에 미쳐 살던 아이젠이지만 모략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직접 짜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젊은 시절엔 지겹도록 당해왔으니까.
당연히 모략가로서는 풋내기나 다름없는 조슈아의 생각도 훤히 들여다보였다.
'애초에 여기서 내가 승낙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계속해서 대련을 청하고 거절당하는 게 사공자의 진짜 목적인가.'
처음 몇 번은 조슈아의 체면이 조금 깎이고 끝날 거다.
남의 수련을 방해하는 것 자체가 실례인데다 거부할 이유도 넘쳐났으니까.
하지만 계속해서 대련을 청하는데 거절하고 또 거절한다면?
주변에서는 점차 아이젠을 배제하고 루시안과 조슈아에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
'삼공자께 겁쟁이의 낙인을 찍을 속셈이로군.'
죽일 작정으로 달려든다면 모를까 검성의 입회하에 벌어지는 대련이다.
누가 다칠 걱정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조차 거부한다?
조슈아가 수련에 끼어든 무례보다는 루시안의 용기가 더 크게 거론되리라.
더 골치 아픈 건 둘러댄 명목도 언뜻 보기엔 문제가 없다는 거였다.
다른 두 형제는 예전에 루시안과 탐탁치 않은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접점이 거의 없었던 데다 검술 수준까지 그리 압도적인 차이가 나지 않았다.
형제끼리의 친목을 위한 대련 상대 정도야 언제든 청할 수 있는 위치.
'어렵구나.'
이게 아이젠에 대한 무례로 끝나는 일이었다면 즉각 거절했을 거다.
문제는 이 제안 자체가 삼공자를 상대로 건 정쟁이라는 점이다.
거절했을 때 피해를 보는 건 아이젠이 아니라 루시안이었다.
고민하던 아이젠의 시선이 루시안에게 향했을 때였다.
"스승님, 무례인 줄은 알지만 아우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시죠."
"예?"
"비록 수련 중이라지만 모처럼 아우가 이 형과 친목을 나누고 싶다며 왔잖습니까. 형으로서 아우의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부끄러운 일이지요."
"...!"
그 말에 아이젠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조슈아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단 한마디로 조슈아의 행동을 어리광이라 내려치는 동시에 자신을 자비로운 형으로 포장하다니.
'삼공자의 혀도 만만치 않구나.'
이런 재치라면 분명 다른 생각이 있기에 받아들인 것일 터.
아이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삼공자께서 원하신다면 그리하지요. 다만 두 분의 대련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내겠습니다. 형제끼리 친목이 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수련에 사적인 감정을 우선시 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물론이지요. 그렇지 않으냐, 아우야?"
"맞는... 말씀이십니다."
억지웃음을 짓는 조슈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피해 다닌 주제에 업어 키운 동생처럼 말하는 꼴이라니!
'어디 이걸 보고도 그따위로 말할 수 있는지 보자.'
이를 갈며 조슈아는 하인의 품에 얹혀 있던 천을 거두었다.
갑자기 드러난 진검을 보고 아이젠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갑자기 웬 진검입니까?"
"단 한 번의 대련인데 목검으로는 긴장감이 없지 않습니까. 모처럼 기회가 왔으니 진검으로 겨뤄봄이 어떻겠습니까? 저도 형님도 전장에 나간 적이 없는 만큼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이런...!"
선을 넘는 조슈아의 행동에 아이젠은 분노했다.
수련을 정쟁으로 더럽힌 것도 무례일진대 이젠 진검이라니.
대련을 청하기 위해 둘러댄 명분조차 다 지키지 못하는가!
참다못한 아이젠의 입에서 호통이 터져 나오기 직전.
"그것참 좋은 생각이구나! 당장 하자!"
"...!?"
신이 난 루시안의 외침이 두 사람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18화
'요놈 봐라.'
처음 대련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루시안은 불쾌감을 느꼈다.
속셈이 뻔히 보이기도 했지만, 상황 자체가 지나치게 불리했기 때문이다.
'열여섯 애송이라지만 제대로 배운 기간은 나보다 길다. 게다가 난 이전 검식을 쓸 수 없는 데다 육체 단련도 덜 되었으니 제대로 붙으면 불리해.'
기술을 못 쓰는 초보 싸움에서는 까놓고 말해 힘이 전부다.
강한 힘으로 휘두를수록 빠르고, 위력적이고, 막기 힘드니까.
그런데 루시안은 강제로 기술이 봉인된 것도 모자라 육체마저 폐인 생활로 약해져 있는 상태.
틈틈이 단련을 계속한 조슈아와의 힘 싸움에서 이길 리가 없었다.
'쯧, 두 달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일방적으로 털어버리는 건데.'
축복받은 육체라지만 마력의 정순함이 진가를 발휘하는 건 충분한 단련을 마친 이후.
순수한 체력과 검식의 숙련도가 부족한 초보자 싸움에는 별 도움이 안 되었다.
우연이라지만 참으로 기가 막힌 타이밍.
하지만 여기서 대련을 피했다가는 기껏 높여둔 평판에 금이 갈 게 뻔했다.
'어쩔 수 없지. 최대한 경험으로 밀어붙여 무승부로 끝낸다.'
기술도 봉인되고 육체도 약해졌다지만 실전 경험만큼은 넘치도록 있다.
그에 비해 조슈아는 전장에서 칼 한 번 휘둘러 본 적 없는 애송이.
남아있는 모든 걸 쥐어짜면 그나마 무승부 정도는 가능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루시안의 귀에 생각지도 못한 제의가 들려왔다.
"모처럼 기회가 왔으니 진검으로 겨뤄봄이 어떻겠습니까?"
조슈아의 말에 눈이 번쩍 떠졌다.
목검이 아니라 진검이라고?
그럼 이야기가 다르지!
"그것참 좋은 생각이구나! 당장 하자!"
"...!?"
****
두 사람은 황당한 얼굴로 루시안을 쳐다봤다.
목검을 써도 걱정해야 할 판에 진검을 환영하다니?
특히 아이젠은 뭔가 단단히 오해한 듯 루시안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삼공자, 진검 한 번 안 쥐어보신 분이 어찌 그리 경솔하십니까!"
"뭐 어떻습니까? 검식이란 애초에 검을 쓰기 위해 있는 것 아닙니까? 목검 대신 진검을 쓴다면 오히려 실전 감각을 익히는 데 좋겠지요."
"그건 숙련자들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초보가 검을 잘못 휘두르다 다치는지는 아시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
"여기저기서 들어보긴 했습니다."
사실 들어본 정도가 아니라 직접 경험해봤다.
검을 휘두를 때 가감을 잘못하면 손에서 날아간 검에 의해 어깨나 허벅지를 베이기 십상이다.
루시안은 초보 시절 독학으로 검을 수련하다 두 번이나 그렇게 다쳤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척 시침을 뚝 떼며 말했다.
"그래도 대련입니다.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힘을 빼고 할 텐데 오히려 있는 힘껏 휘두르는 수련보다 덜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니, 그게...!"
"형님의 말씀이 실로 옳습니다. 스승님,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설마 제가 이 검으로 형님께 해코지라도 하겠습니까?"
아이젠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당사자들이 다 좋다고 하니 이젠 말릴 명분도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아이젠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슈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형님께 검을 건네드려라."
"예, 도련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인은 두 손으로 공손히 검을 올렸다.
루시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하인의 손에서 검을 낚아챘다.
"아아, 이 서늘하고도 묵직한 감각...."
진검을 쓰다듬으며 감동하는 루시안의 모습에 조슈아는 비웃음을 삼켰다.
하여간 멍청하기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가?
무구에 끌리는 건 사내의 본능이라지만, 그 무구가 곧 자신의 목에 겨누어질 예정인데 저리 태평해서야.
'하기야 나에겐 잘된 일인가. 미리 각오한다면 검을 맞댈 때의 공포도 누그러질 테니.'
애초에 조슈아의 목적은 루시안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것.
놈이 벌벌 떠는 모습을 만천하에 공개함으로써 쌓아온 평판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목격자는 지금 여기 있는 이들이 전부지만 별 상관은 없다.
검성 아이젠이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될 테니까.
"준비되셨으면 두 분 다 검을 뽑으십시오."
스르릉
루시안과 조슈아는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동시에 검을 뽑았다.
맑은 금속성과 함께 새하얀 두 개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동등 이상의 실력자와 검을 맞대본 이들은 알고 있다.
이 시린 칼날이 목덜미에 닿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는 것을.
살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디 형님의 얼굴은 어떨지 봅시다.'
곧 벌어질 일을 상상하며 키득거리던 조슈아가 자세를 잡았다.
"시작하십시오."
후웅
시작 신호가 내려지기 무섭게 날카로운 검날이 조슈아의 머리로 날아왔다.
****
까앙
"흐윽!"
"삼공자!?"
"도련님!"
검이 충돌하는 소리와 함께 세 명의 경악성이 연무장을 울렸다.
진검인데도 불구하고 인정사정없는 사선 베기.
간신히 막지 않았다면 조슈아의 어깨부터 아랫배까지 베였으리라.
하지만 루시안은 주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까앙, 깡, 까강
"이런 미친...!"
검이 불꽃을 튀길 때마다 조슈아는 등골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공격 하나하나가 잘못 막는 순간 치명상을 입을 수준이었다.
목검도 아니고 진검 대련에 이렇게나 살기 어린 공격이라니.
'이 팔푼이가! 여기서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간신히 제정신을 찾은 조슈아가 이를 악물었다.
상대의 궤적이 조금씩 보이자 두려움 대신 분노가 찾아왔다.
"이까짓 걸로!"
까아앙
조슈아는 날아오는 검격을 있는 힘껏 옆으로 쳐냈다.
충격으로 인해 루시안의 몸이 흐트러지자 두 번째 공격이 다리로 향했다.
죽이진 않겠지만 검면으로 허벅지를 후려쳐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루시안의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콱
"억!?"
"허."
조슈아의 입에선 경악이, 아이젠의 입에선 탄성이 튀어나왔다.
날아오던 검의 옆면을 루시안이 발로 밟아 막은 탓이었다.
"이 무슨!"
생각지도 못한 대응에 조슈아는 크게 당황했다.
검을 쳐내는 것도 아니고 발로 밟아서 막는다고?
이건 검술이 아니고 술집 왈패 싸움이 아닌가!
정작 옆에서 지켜보던 검성 아이젠은 루시안의 임기응변에 감탄했다.
'놀랍구나. 저런 건 보통 구를 대로 구른 노병에게서나 볼 수 있는 방식이거늘.'
아이젠은 실전에서 검식에 없는 임기응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언제나 검식을 완벽히 사용할 수 있는 상태에서 적이 싸워주는 건 아니니까.
검을 빼앗기는 건 물론 심한 상처로 움직임에 제약을 받거나 무른 지형 때문에 기술을 못 쓰게 되는 건 일상다반사.
심지어 상대와의 실력 차이가 너무 커서 순수한 검식만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때조차 있었다.
이럴 때는 상대방의 허를 찔러 빈틈을 유발하는 임기응변이 굉장히 중요했다.
실제로 훌륭한 재능을 가진 기사들 중에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임기응변을 떠올리지 못하고 일찍 목숨을 잃은 자가 수두룩했으니.
아이젠이 볼 때 루시안은 이런 면에서 야성의 감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제기랄!"
밟힌 검이 빠지지 않자 조슈아는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있는 힘껏 뒤로 뺐다.
그리고 딱 그 순간을 노려 루시안이 검면에서 발을 뗐다.
"윽!?"
갑자기 밟던 힘이 사라지자 조슈아의 몸이 휘청거렸다.
당기던 검의 무게가 더해진 탓에 한 번 잃은 균형은 좀처럼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했다.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버텼을 때는 이미 루시안의 검이 목으로 날아들고 있는 와중이었다.
"자, 잠깐...!"
사악
"어어억!"
"도련님!"
하인은 비명을 지르며 단말마를 내뱉는 주인에게로 달려갔다.
진짜로 망설임 없이 베어버릴 줄이야!
꺽꺽거리며 조슈아는 차가운 금속이 훑고 지나간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죽는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엄청난 공포와 함께 지난 세월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겨우 이런 데서 미친놈에게 죽으려고 그토록 필사적으로 살았단 말인가.
억울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하인은 허겁지겁 품에서 천을 꺼내 들이밀었다.
"도, 도련님! 일단 출혈을 막겠습니다!"
"소용없다. 이만큼 베였으면... 응?"
한탄하던 조슈아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토록 거칠게 목을 베였는데 말이 왜 이리 술술 나오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양손을 목에서 뗀 순간이었다.
"...도련님, 출혈이 없는데요?"
"뭐!?"
깜짝 놀란 조슈아가 더듬더듬 목을 만져보자 정말 피가 묻어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작은 상처조차 나지 않았는지 평소처럼 매끈했다.
당황하는 두 사람을 보며 루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뭐하는 짓이냐? 대련 중에 갑자기 쓰러져서는."
"아니, 방금... 내 목이... 검에...."
"그래, 목에 가져다 대고 그었지. 상처가 안 나도록 검면을 살짝 눌러서."
"...!"
얇은 부분이 목을 스치고 지나가서 검에 베인 줄로만 알았다.
근데 실제로는 검면을 아주 살짝만 닿도록 해서 착각하게 만든 거였다고?
'그럼 지금까지 난 베이지도 않았는데 목을 잡고...!'
수치와 분노로 눈이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이 팔푼이 새끼가 나를 농락해?
대련이고 나발이고 당장 죽여버리고 말겠다!
감정에 몸을 맡긴 조슈아가 막 일어서려던 순간.
"멈추십시오."
어느새 다가온 아이젠이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바윗덩이 같은 압력에 조슈아는 이성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노가 누그러든 건 아니었다.
망신살이 제대로 뻗쳤는데 이대로 물러나기엔 너무 억울하다!
"아이젠 경, 죄송하지만 아직 대련이...."
"끝났습니다. 시작할 때부터 한 번이라고 말했을 텐데요?"
"그건!"
"말을 번복하지 마십시오, 사공자. 발데크의 이름을 짊어지시는 분이라면 발언에 무게가 담겨야 하는 법입니다."
"...."
검성이 발산하는 기세에 조슈아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쪼그라들었다.
안 그래도 대련을 억지로 밀어붙인 탓에 아이젠의 신경을 잔뜩 건드린 상황.
이 이상 멋대로 군다면 사공자고 나발이고 직접 나서서 제압하리라.
어쩔 수 없이 조슈아가 검을 내려놓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을 때였다.
"너무 빨리 끝나긴 했다만, 나쁘지 않더구나. 무서워하면서도 아주 잘 반응했다."
"...!"
"그래도 목에 칼 좀 닿았다고 다리 힘이 풀린 건 좀 그렇더구나. 명색이 가주 후보 중 하나인데 말이야. 아우님께서 많이 정진하셔야겠어. 하하!"
루시안의 비아냥에 조슈아는 이를 악물었다.
잠시 가라앉았던 얼굴은 아까 전보다도 시뻘겋게 물들어 터질 지경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서로의 입장이 반대여야 했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더 비아냥이 이어지기 전에 조슈아가 다급히 일어섰다.
"대련은 끝났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검 잘 썼다. 챙겨가라."
"됐습니다. 그냥 드릴 테니 가지십시오."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기에 조슈아는 바로 등을 돌렸다.
하지만 루시안의 입은 조슈아가 달음박질치는 와중에도 멈추지 않았다.
"너무 상심하지 마라! 대련인데 질 때도 있는 거지! 언젠가는 네가 이길 거다! 오늘은 졌지만!"
"...."
"그나저나 정말 검 받아도 되는 거냐? 승리의 기념 삼아서 걸어두마! 동생을 이긴 검이니까!"
'저 개자식이 진짜...!'
19화
들끓는 속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조슈아는 걸음을 서둘렀다.
이 이상 여기 있어봤자 상대의 비아냥만 이어질 게 뻔했으니까.
'그래, 마음껏 즐겨라. 네가 이겼다고 해서 뭐가 바뀔 줄 아느냐? 여기서 잠깐 자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 데도 써먹을 일이 없을 거다!'
비록 창피를 당했다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여기 있는 네 명이 전부.
조슈아 본인과 하인은 당연히 입을 열지 않을 테고, 검성 아이젠도 일일이 이런 일을 떠벌일 사람은 아니다.
유일한 예외는 승리한 당사자인 루시안.
그러나 루시안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이 들지 않았다.
'떠들고 싶으면 실컷 떠들라지. 소문이란 게 그리 쉽게 퍼지는 것 같으냐? 정보를 다루는 것도 귀족의 소양이다, 놈!'
상대방에 대해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고 여론을 뒤흔드는 일은 귀족들 사이에서 흔하게 일어난다.
달리 말하자면 그 소문을 막고 혼란을 잠재우는 것 또한 귀족의 능력.
조슈아 역시 특기라 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런 정보전에 대해 그럭저럭 숙지하고 있었다.
상대도 정보전에 조예가 있었다면 도저히 막을 방도가 없었겠지만 이번 상대는 팔푼이 루시안.
소문을 제대로 퍼뜨리기도 전에 묻어버릴 방법은 넘쳐났다.
"혹시 모르니까 놈의 주변을 잘 감시해라. 오늘 일에 대해 소문을 퍼뜨리려고 하면...."
"반드시 막아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인의 호언장담에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무능한 모습을 보이긴 해도 이런 뒤처리만큼은 완벽히 해내는 종복이었다.
이번에도 믿고 맡겨두면 별일 없겠지.
그리 생각하고 딱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사공자가 삼공자에게 진검 대련을 신청했다가 아주 처참하게 패배했단다!
-심지어 사공자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까지 했단다!
-전리품으로 삼공자가 검을 요구했다니 반항도 못 하고 빼앗겼단다!
"이런 미친!"
와장창
하루 만에 퍼진 소문을 듣고 조슈아는 눈이 돌아가 방을 뒤집었다.
뒤처리를 제대로 하기는 개뿔!
필요 없어서 준 검까지 겁에 질려 빼앗긴 것처럼 바뀌었잖나!
주인의 분노에 하인은 벌벌 떨며 바닥에 이마를 붙였다.
"주, 죽여주십시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때려치워라! 진짜 죽여버리기 전에 어떻게 된 일인지나 설명해!"
"그것이...."
하인의 설명을 들은 조슈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니까 소문을 내는 하인 놈들이 말을 들어먹지 않았다고?"
"정확히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왈패 놈들입니다만,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입을 닫지 않았습니다. 칼을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빡하질 않으니 어찌할 방도가...."
"염병할! 대체 그놈들은 뭘 약속받고 그토록 놈에게 충성하는 거냐!"
루시안이 데려온 뒷골목 출신 하인들에 대한 건 이미 유명했다.
철저히 루시안의 명령만을 따르며 이공자 조르디가 위협했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미친놈들.
대체 뭘 믿고 기반도 없는 루시안에게 충성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차피 막장인 인생이니 되는 대로 사는 건가?
"그나저나 매수와 협박이 안 먹혀서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 말이 안 통하면 다리라도 분질러 놔야지!"
"그,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또 뭐!"
"나선 놈들이 오히려 죄다 한 군데 분질러져서 돌아왔습니다. 놈들의 대장인 휴고라는 놈이 여간내기가 아니라...."
기가 막힌 소리에 조슈아는 뒷목을 잡았다.
매수와 협박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서 맞고 돌아왔단다.
대련에서 밀린 것도 모자라 이젠 수족의 질에서도 밀린 셈이다.
심지어 소문마저 막기는커녕 더 상대에게 유리한 쪽으로 왜곡되어 퍼졌으니.
"후웁, 후우웁!"
간신이 호흡을 정리한 조슈아가 의자에 앉았다.
어떻게든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기가 막히게도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말 내 손에 죽어볼테냐!"
"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보나 마나 이번에도 루시안에게 당했다는 소리겠지! 또 그따위 말을 듣느니 그냥 네 입을 막아버리는 편이 낫겠다!"
"아닙니다! 그저 경과보고일 뿐입니다! 이 이상 삼공자와 엮인 일은 없으니 부디 진정해주십시오!"
조슈아는 이를 갈면서도 어디 한번 말해보라며 하인을 쏘아보았다.
정말 듣기는 싫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보를 소홀히 할 수도 없는 노릇.
속이 쓰린 정보라도 일단 숙지하고는 있어야 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하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삼공자의 하인들이 아이젠 경의 이름을 팔고 있습니다. 검성께서 당시 대련을 주관했다는 게 알려지자 기사분들께서도 관심을 가지는 중입니다. 심지어 몇몇 분은 직접 검성께 확인을 받고 진실이란 걸... 도련님? 도련님!"
"끄르륵!"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에 조슈아는 기어코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
"도련님, 사공자께서 쓰러지셨다는데요. 뭔가 짐작 가시는 거 있습니까?"
"그냥 현실을 못 받아들이고 기절한 거겠지. 하여간 어제도 그렇고 근성이 없는 놈이야."
한스의 보고에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전생에서는 입도 못 대본 고급 차의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그러게 왜 진검을 가져와? 오히려 목검을 썼으면 유리했을 놈이."
"진검과 목검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까?"
"엄청난 차이가 있지. 너 같으면 상대가 목검을 휘두르는 것과 진검을 휘두르는 것 중 어느 게 더 무서울 것 같냐?"
"그야 당연히 진검이죠."
"다 마찬가지야. 그 녀석은 날 겁먹게 하려고 진검을 골랐겠지만, 검날 앞에서 움츠러드는 건 본인도 마찬가지란 건 까먹었겠지."
목검이었다면 그만큼 조슈아도 심리적 압박감을 덜 느꼈을 터.
아마 루시안의 공격에도 우왕좌왕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을 거다.
순수한 힘에서 밀리는 루시안은 더 불리했을 테고.
그런데 멍청하게도 같잖은 모략을 꾸미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갔다.
"덕분에 난 편했지. 기껏해야 무승부로 끝날 승부였는데 진검 덕에 완벽히 이겨버렸으니."
"과연."
한스는 루시안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다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런데 도련님은 어제 진검 처음 들어보시지 않았습니까? 용케도 그걸 알고 이용하셨네요."
"그야 뭐... 임기응변이지."
한때 칼날이 눈썹을 스쳐 지나가는 감촉도 맛본 적이 있는 루시안이다.
한 뼘 이상 떨어진 검을 무서워할 리가 있겠는가.
그 진검을 다루는 게 목숨 걸고 싸워본 적도 없는 도련님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 사실을 말할 수도 없었기에 루시안은 대충 말을 뭉갰다.
"어쨌거나 한동안은 조용하겠군. 못난 형과 아우 모두 한동안 내게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을 테니."
조르디는 이전의 젖남매 사건 때문에 수중에 있는 자금을 거의 다 잃었다.
아무리 외가 쪽이 부유하다 한들 자금이 전달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어쩔 수 없을 터.
만약을 대비해서라도 주머니가 다시 두둑해지기 전까진 움직이지 않으리라.
조슈아의 경우는 조르디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제일 기반이 빈약한 가주 후보는 루시안이지만, 조슈아 역시 탄탄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
그런데 루시안에게 이런 망신을 당했으니 한동안은 흔들리는 내부를 수습하느라 바쁠 거다
'뭐, 아직 한 명 남아있긴 하지만 그 인간 성격상....'
벌컥
"도련님!"
루시안의 상념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휴고에 의해 깨졌다.
급히 달려온 듯 휴고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잔뜩 맺혀 있었다.
"갑자기 왜 그래? 조슈아가 또 발작이라도 했어?"
"부하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로그란 후작가가 일주일 후에 방문한다고 합니다."
"...!"
"제조소가 지어진 베스트라 영지에서 만나자고 하더군요. 어떻게 할까요?"
"일단."
찻잔을 놓은 루시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아버지께 알려야겠지."
****
"웃기는 놈들이군."
루시안의 보고에 지그문트 대공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깝기로 따지자면 제일 가깝지만, 교통이 불편하여 중계도시 역할을 다른 데에 다 빼앗긴 영지.
켈하임이란 거대 도시 곁에 있음에도 소외되어 간신히 도시 규모를 유지하는 게 베스트라였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제일 가까운 장소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건만 거기서 만나자니.
"이쯤 되면 놈들이 대담한 건지, 아니면 발데크를 우습게 보는 건지 모르겠구나. 사자 아가리 속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빨 아래 정도는 되는 곳인데"
"아버지의 시선이 그쪽에 향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는 거겠죠. 전혀 이득 될 게 없는 도시니까요."
"...하기야 나도 네게 보고 받기 전까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 어찌 보면 맹점이라 할 수 있겠군."
지도를 살펴보던 지그문트 대공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곧 진지한 얼굴로 루시안과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왜 내게 보고한 거냐? 전부 네게 맡긴다 했을 텐데."
"힘이 필요합니다."
"힘?"
"맹수가 덫에 걸렸다고 해서 제게 맹수를 사냥할 만한 도구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니 도구가 있는 내게 왔다?"
지그문트 대공은 루시안의 대답에 실망스러운 듯 눈을 깔았다.
"이성적인 판단이구나. 분명 내 힘을 빌린다면 덫에 걸린 짐승쯤은 어렵지 않게 잡겠지."
"그럼...."
"하지만 그렇게 잡은 짐승을 주변에서 네 사냥감이라 할 것 같으냐? 내가 생각할 때는 아니다만."
대공의 말에 루시안은 침묵했다.
대답이 없자 재차 대공의 날카로운 지적이 날아들었다.
"훌륭한 사냥꾼이라 인정받는 건 오직 자신의 힘으로 사냥감을 잡았을 때다. 아무리 좋은 작전을 짜낸다 한들 스스로 사냥을 해내지 못한다면 자립하지 못한 제자 중 하나로 남을 뿐."
"...."
"나는 네게 기회를 줬다. 직접 사냥할 수 있는 권한까지 줬지. 그런데 힘이 모자란다고 해서 이 기회를 걷어찰 생각이냐? 그런데 이 기회를 버리고 공을 남에게 넘기면서까지 안전을 추구하겠다고?"
"예. 기꺼이 그리할 것입니다."
"뭣이?"
너무도 당당한 대답이 나오자 이번엔 지그문트 대공이 눈을 크게 떴다.
말문이 막힌 대공을 향해 지금껏 가만히 있던 루시안의 반박이 쏟아졌다.
"사냥은 성공하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한 법입니다. 주민들이 맹수의 그림자에 떨고 있거늘 직접 창을 찔러야 성이 차겠다며 날뛰는 게 어찌 용맹이라 하겠습니까? 만에 하나 성공한다 해도 그건 필부의 만용이자 사람들의 신뢰를 깎아 먹는 우행일 뿐입니다."
"...!"
"그리고 제 이름이 가려진다 한들 괜찮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냥꾼만큼은 제자가 세운 공을 아는 법. 제 명성을 위해 맨몸으로 맹수에게 덤빈 제자와 공적을 나누더라도 확실하게 사냥감을 잡은 제자. 사냥꾼이 활시위를 더 당기지 못하게 되었을 때 과연 누구에게 활을 물려주겠습니까?"
루시안은 한번 숨을 가다듬고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설령 제자의 헌신이 스승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때쯤이면 제자도 직접 깎은 창과 활로 산을 누비는 한 사람의 사냥꾼이 되었을 테니까요. 저는 맨손으로 맹수를 잡겠다고 날뛰느니 공적을 스승에게 넘기더라도 창 깎는 법부터 배운 후 사냥에 나서겠습니다. 그게 제가 사냥꾼이 되는 방식입니다."
"...."
말이 끝나자 무거운 침묵이 대공의 집무실에 내려앉았다.
특히 하인들은 눈을 부릅뜬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아무리 자식이라지만 발데크의 주인 앞에서 저리 대놓고 반박할 줄이야!
1분 같은 1초 속에서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 와중.
"푸하하하하하!"
대공의 폭소가 집무실을 뒤흔들었다.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