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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

< 실험탄 GHOST-157 (3) > 끝

강체(强體).

에테르 적합자가 에테르 적합자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도 근본적인 능력.

이걸 습득한 이후부터가 에테르 적합자의 진정한 힘이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디어인가.'

레벨 2 이상의 에테르 적합자는 에테르를 이용해서 육체를 강화하는 능력인 강체를 다룰 수 있게 된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비록 지금 강체를 습득하는 게 의도된 사안까지는 아니었지만, 한창 육체적 능력이 필요한 시점인 만큼 나로서는 더없이 잘된 일이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쉰다.

그와 함께 조금씩 들어온 에테르가 내 폐부로 스며들며 전신에 퍼지는 게 느껴졌다.

[들어왔다. 들어왔다. 들어왔다. 들어왔다. 들어왔다. 들어왔다. 들어왔다. 들어왔다. 들어왔다. 들어왔다. 들어왔다. 들어왔다. 들어왔다. 들어왔다.]

[아늑해······.]

[칼 마커스. 칼 마커스. 칼 마커스. 칼 마커스. 칼 마커스. 칼 마커스. 칼 마커스. 칼 마커스. 칼 마커스. 칼 마커스. 칼 마커스.]

[우리는··· 이제 함께야.]

언제나처럼 나에게 속삭이던 목소리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깝게 느껴졌다.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증거로, 내 몸이 서서히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대충 이런 느낌인가.'

단순히 에테르 감응력이 1 늘어난 것뿐이었지만, 레벨 2 이상의 에테르 적합자와 그렇지 못한 에테르 적합자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강체의 발현이 바로 그중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었다.

"후우······."

깊게 숨을 내쉬자, 내쉬는 숨결에서 미약한 에테르가 느껴졌다.

이제 에테르는 나와 함께 한다.

그게 긍정적인 일인지, 아니면 부정적인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실제로 나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어떤 경계에 한 발자국 나아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그 경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본능적인 경고가 울리고 있을 뿐.

'어찌 됐든 확실한 건, 지금 강체를 습득한 건 좋은 일이라는 거지.'

다리에 힘을 준다.

그와 함께 내 몸속에 있는 에테르들이 마치 혈액처럼 움직였다.

[가··· 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첫 발자국을 내딛는 순간, 마치 나에게만 중력이 작게 적용되는 것처럼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정말로 한 걸음을 떼기 무섭게 내 몸이 반쯤 날았다.

'이 정도 속도라면··· 회수팀을 앞지를 수 있다.'

열대 초원 랩터의 서식지는 이미 지났다.

더는 거리낄 게 없었다.

그렇게 달리기를 이어가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레벨 2가 이 정도면 레벨 3은······.'

그리고 자연스레 떠오르는 레벨 3의 에테르 적합자.

타티아나 벨로프.

'···아무튼, 아깝단 말이지.'

벨로프 패밀리의 일원만 아니었다면 참 요긴한 인연이 될 텐데··· 참 공교로웠다.

'뭐, 지금 생각해도 의미없지.'

어쨌거나 난 벨로프 패밀리와는 엮일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평원지대는 한적했다.

웨이브가 일어난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런 평원 지대에 있을 때 웨이브가 일어나면··· 반드시 죽겠지.'

그럴 확률이 거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세계에 절대라는 건 없다는 점 때문인지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서두르자.'

[킹, 킹!]

[케에엑!]

물론 웨이브 직후라고 해서 평원을 거니는 마수 무리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잠시 숨을 죽인 채로 마수 무리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완전히 지나간 뒤에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쓸데없는 전투를 벌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기다리는 게 훨씬 더 시간이 절약되기 때문이었다.

'회수팀이 보이지 않아. ···하긴, 아무래도 방향 자체가 다르니······.'

갈림길에서 회수팀은 곧장 남쪽으로 간 반면, 나는 동쪽으로 한참을 더 간 후에 뒤늦게 사실을 알고 대각선으로 목적지로 향했다.

비록 목적지는 같을지언정 방향 자체가 다르니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가 지평선 너머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남동쪽의 늪지대였다.

['오파쿰의 늪지대'에 들어섰습니다.]

[늪지대의 독기로 인해서 일정 시간이 지날 때마다 활동이 제약되고 체력이 감소합니다.]

오파쿰의 늪지대.

말 그대로 늪지대의 주인인 오파쿰이 지배하는 지역이다.

이미 보고 있는 대로 늪지대의 독기 탓에 이곳에서는 설사 에테르 적합자라 할지라도 웬만한 장비 없이는 장기간 활동할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실험탄 GHOST-157이 있는 장소가 늪지대의 초입이라는 점이지.'

애초에 실험탄 GHOST-157을 여기까지 물고 온 마수도 오파쿰의 존재 때문에 더는 나아가지 못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빠르게 실험탄만 챙겨서 나간다.'

여기부터는 긴장해야 했다.

숲의 주인도 그렇고, 늪의 주인도 그렇고, 특정 영역을 지배하는 주인들은 절대로 함부로 자극해서는 안 된다.

단순히 누구 하나의 죽음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그게 후에 또 다른 웨이브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아크는 웨이브 직후 한창 복구 중이야. 지금 웨이브가 들이 닥친다면··· 끝장이다.'

단 두 번째 웨이브에도 끝장이 나버릴 수도 있는 게 바로 더 디펜스였다.

괜히 흉악한 난이도로 전 세계에서 악명이 자자했던 게 아니다.

[스스스······.]

늪지대에 있는 괴수종들과 거충종들의 음울한 울음소리가 퍼진다.

이미 내가 오파쿰의 늪지대에 들어선 순간부터, 놈들은 내 존재를 알고 있었다.

'완전히 포위되면, 그때 나를 덮치려 들 터.'

만약 내가 강체를 습득하지 못했다면, 놈들은 나를 약자로 판단하고 굳이 이럴 필요도 없이 바로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 말마따나 지금 내 전신에서는 은은하게 에테르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안 그래도 에테르에 민감한 마수와 마물들로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게 편했을 텐데······.'

그렇기에 나는 포위망을 내주지 않으면서, 동시에 실험탄 GHOST-157가 있는 장소를 향해 나아가야 했다.

무척이나 까다로운 일이었으나, 이미 여러 번 해왔던 일이기도 했다.

'찾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실험탄 GHOST-157를 이곳까지 배달한 얄미운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키익······?]

9급 야수종, 홀린 검은 갈기 치타.

이번 실험탄 GHOST-157 서브 시나리오의 보스라고 볼 수 있는 녀석이었다.

'물론 보스라고 해봤자, 그냥 일반 야수종과 크게 다를 것도 없지만.'

그나마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검은 갈기 치타의 앞에 붙은 홀린이라는 수식어답게 현재 녀석이 에테르에 홀린 상태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령종에게 홀렸다고 해야 할까.

유령종에게 유일하게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있는 병기를 빼돌리려는 마음은 이해가 간다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굳이 총성을 낼 필요는 없겠지.'

내 의지에 감응한 뼈 기생체의 촉수가 판초 너머로 뻗어 나왔다.

내가 그중 한 개를 잡아서 뽑자, 경질화까지 적용된 훌륭한 창이 되었다.

'단번에 끝낸다.'

예전이었다면 조금 애매했겠지만, 뼈 갑옷의 보조와 더불어서 강체로 인한 신체 능력 상승은 그걸 가능하게 했다.

뼈 창이 날아들고, 날아든 단번에 홀린 검은 갈기 치타의 목을 꿰뚫었다.

[키엑───]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홀린 검은 갈기 치타가 쓰러졌다.

[9급 야수종, 홀린 검은 갈기 치타를 처치하였습니다.]

[9급 야수종, 검은 갈기 치타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그와 함께 나를 향해서 포위망을 좁히던 마수들의 움직임이 조금 느려지는 게 보였다.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협 대상으로 인식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나는 검은 갈기 치타가 물고 있던 총알 케이스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이미 케이스의 비밀번호는 알고 있었던 터라, 어려울 것도 없었다.

──────────────

[실험탄 GHOST-157] [??(??성)]

[현재 수량 : 1]

우연의 산물로 탄생한 탄환.

물리적 형체가 없는 존재에 대해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상세 보기"

──────────────

'좋아.'

나는 실험탄 GHOST-157을 빈 탄창 하나에 꽂아 넣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신기가 달린 케이스는 일부러 내버려 두었다.

회수팀의 발목을 잡기 위해서였다.

'빈 케이스나 찾아서 돌아가라고.'

그렇게 내가 몸을 빼려던 순간.

"멈춰라."

나지막이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밀림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복장으로 보나, 등장 타이밍으로 보나, 아크의 회수팀이 분명했다.

'쯧.'

계획대로 한발 앞지르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시간을 너무 허비한 탓인지 결국 이렇게 회수팀을 마주하고야 말았다.

그나마 다행히도 이미 전신은 위장용 판초를 비롯한 쿠프의 뼈 가면을 쓰고 있었던 터라, 내 정체가 들통날 가능성은 없었다.

"어디서 왔지?"

"······."

"대답해라."

회수 팀이 무어라 말하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에는 온통 다른 생각뿐이었다.

'어쩔까······.'

죽여서는 안 된다.

회수팀으로 차출될 정도면 훈련병 중에서도 뛰어난 이들을 뽑았을 테고, 훗날 아크의 중심으로 활약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아크의 훌륭한 군인이고, 아크를 수호하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이들이다.

즉, 죽여서 입을 막는다는 선택지는 당연히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제압.'

비록 마취탄이 있기는 해도 총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이들에게 내가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비롯한 아크 군용품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렇게 할까.'

스스스─

내 의지에 감응한 뼈 촉수들이 스멀스멀 흘러나오자, 내가 그중 두 개를 잡고서 뽑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회수팀 병사에게서 당황성이 터져나왔다.

"······뼈?"

죽일 생각은 없다.

치명상을 피해서 팔다리에 구멍 몇 개를 내준 뒤에 자리를 피하면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고 여길 터.

"칫!"

총구가 나를 향한다.

당연히 곱게 맞아줄 생각은 없다.

쐐색!

쐑!

Ark-15 자동 소총의 총구가 나를 향해서 바쁘게 움직였으나, 나는 최대한 총구를 피해내며 병사에게 접근했다.

강체로 인한 신체 능력 강화 덕분에 내 움직임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상태였다.

깡!

그중 몇 발이 내 몸에 적중했으나, 이미 경질화로 전신을 보호 중인 뼈 갑옷을 꿰뚫지는 못했다.

"무슨······!"

설마하니 총알이 튕겨나갈 줄은 몰랐는지 병사에게서 당황성이 터졌다.

그러나 상대가 당황한다고 해서 봐줄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그대로 병사의 팔을 꿰뚫었다.

이로서 당분간은 전투에 나서지 못할 터였다.

"크아아악!"

거칠게 울려 퍼진 비명과 함께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통신기를 통해서 이상을 감지한 회수팀이 합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전투는 피할 수 없겠어.'

어설프게 도망치려 해봤자 이미 발각된 이상 뒤에서 저격을 당할 가능성이 컸다.

내 입장에서는 상대를 죽여서는 안 되는 상황인 데다가 총기의 사용까지도 제한되다 보니, 필연적으로 남은 방법은 근접 전투를 통한 제압뿐이었다.

'여기서 모두 제압하고 떠난다.'

결론이 내려졌다.

"물러나!"

그와 함께 합류한 회수팀의 인솔 중사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익숙했다.

'헨릴 중사.'

비록 얼굴을 고글과 마스크로 가리고 있긴 했으나, 거의 확실했다.

헨릴 중사는 아크에서 믿고 실험탄의 회수팀을 맡길 정도로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군인으로서, 상대하기에 제법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 덕분인지 헨릴 중사는 내 모습을 보고는 단번에 내 정체를 파악한 듯했다.

"······뼈? 스컬 턴코트다! 다들 긴장을 늦추지 마라!"

단지, 무언가 오해하고 있었을 뿐.

스컬 턴코트.

변절자(Turncoat)라는 뜻 그대로 뼈 기생체에게 잡아먹히거나, 뼈 기생체를 통제하는 데 실패한 인간을 뜻한다.

스컬 나이트와 본질적으로 비슷한 존재지만, 스컬 나이트가 인간의 이지를 유지하고 있다면 스컬 턴코트는 완벽한 마물이다.

지금 헨릴 중사는 나를 그런 스컬 턴코트라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

'···하긴.'

위장용 판초와 쿠프의 뼈 가면.

거기에 더해서 전신의 뼈 촉수까지.

지금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인간과는 거리가 멀긴 했다.

'이것 참, 마침 잘 됐다고 해야 할지······.'

애초에 내가 총기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이유 자체도 정체를 감추기 위함이었으니, 헨릴 중사의 오해는 나로서는 더없이 잘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기깃!]

나는 뼈 창을 쥔 채로 전신에서 뼈 촉수를 뿜어내며 회수팀을 바라보았다.

나는 눈앞에 찾아온 기회를 걷어차 버릴 정도로 미련하지 않았다.

'해볼까.'

마물 연기.

< 실험탄 GHOST-157 (4) > 끝

척, 척척-

몇 번의 수신호와 눈빛이 오간 뒤 순식간에 회수팀이 나를 포위했다.

아무래도 정말로 나를 이지없는 마물로 보고 있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빠르게 상대의 전력을 살폈다.

'인솔자는 헨릴 중사, 훈련병의 숫자는 총 여섯 명. 그중 한 명은 전투 불능.'

이미 알고 있었듯이 회수팀의 인원수 자체는 평범한 분대에 가까웠다.

다만, 구성이 평범한 건 아니었다.

비록 고글과 마스크를 쓰고 있긴 했어도, 나는 인솔팀 소속의 훈련병 중 몇 명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헨릴 중사, 클루츠, 힐데가르트, 드미트리, 아이리스······.'

플레이어블 캐릭터라고 하던가.

하나하나가 직접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주연 캐릭터들이자, 훗날 아크에서 활약하는 핵심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칼라킨까지.'

더 디펜스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무수한 인물이 존재하는 더 디펜스 특성상, 그에 대한 논란은 유저들 사이에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주인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은 나를 99번째 스테이지까지 가게 해준 유일한 캐릭터였으니까.

천 개의 눈을 가진 자.

용 사냥꾼.

아크의 희망.

하나만 해도 거창한 호칭이라 여겨지지만, 놀랍게도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들이었다.

위대한 칼라킨(Kalakin).

내가 생각하는 더 디펜스의 주인공이, 지금 나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흐음.'

그러나 딱히 두렵거나 하진 않았다.

아무리 훗날 위대한 칼라킨이라 불리며 아크 내에서 추앙받는 존재가 된다지만,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그저 애송이 훈련병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칼라킨이 대단하다고 해도, 지금의 내 앞에서는 아크 안에서 보호받고 있는 도련님에 불과한 게 사실이었다.

'지금 가장 경계해야 할 건 헨릴 중사다. 애초에 무장부터가 훈련병들과 달라.'

현재 헨릴 중사가 들고 있는 무기는 DR-404 리볼버.

소형화기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커스터 마이징이나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은 순정 상태의 등급이 무려 5성에 달하는 괴물 같은 녀석으로, 비록 반동이 과할 정도로 크고 장탄 수가 작은 단점이 있으나 그런 단점을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무기다.

'훈련병들이 든 보급형 무기들은 뼈 갑옷의 경질화로 견딜 수 있겠지만··· 저것까지는 장담할 수 없어.'

설사 견딘다 하더라도 그 충격으로 내가 전투 불능에 빠질 가능성도 있었다.

'헨릴 중사를 최우선으로 본다.'

곧 일어날 전투에 대한 전술을 내리기 무섭게 소음기를 낀 Ark-15 자동소총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캉─!

총알이 뼈 가면을 때리고 지나간다.

경질화 덕분에 쿠프의 뼈 가면에는 실금 하나 가지 않았지만, 충격으로 인해서 잠시 머리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멈춰서는 안 돼.'

어설프게 발을 멈추면 그대로 과녁판 신세가 될 터.

쐐새색!

쐐색!

나는 연신 날아드는 총알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며 훈련병들에게 달려들었다.

'짖어.'

내 의지에 감응한 뼈 기생체가 기괴한 비명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기게게게겟!]

마물의 울음소리에는 인간을 움츠리게 하는 효과가 있다.

더군다나 마물 연기에도 생생함을 더해주기도 하니 나쁠 게 없었다.

꾸득, 꾸드득─

양손에는 뼈 창 두 개.

전신에서는 뼈 촉수.

"온다!"

그래, 간다 인마.

쐐애액!

바람을 찢으며 뻗어 나간 뼈 창이 단번에 클루츠의 왼팔을 꿰뚫었다.

"크아아악!"

"클루츠!"

일부러 뼈 창 자체를 최대한 가늘게 만들었으므로, 후에 근육을 쓰는 데는 지장이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조치하지 않으면 과다출혈로 인해서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이리스! 클루츠를!"

"알았어!"

칼라킨의 기민한 지시와 함께 훈련병들의 움직임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이리스는 부상자의 치료를,

힐데가르트는 현재 부상자를 보살피고 있는 아이리스와 부상자의 엄호를,

드미트리와 칼라킨은 나를 견제하며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한편,

한 차례의 공방이 오갔음에도 불구하고 헨릴 중사는 여전히 조용히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마치 때를 기다리는 맹수 같았다.

'역시, 헨릴 중사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내가 빈틈을 드러낼 때를 노릴 셈이다.'

애초에 DR-404 리볼버 자체가 연사로 사용하기에는 부담이 큰 물건이었으니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었다.

나로서는 영 좋지 않은 소식이었지만.

'한 번, 딱 한 번만 피하면 기회가 온다.'

그 정도의 틈이면 헨릴 중사가 다음 발을 격발하기 전에 제압할 수 있다.

'헨릴 중사만 제압하면, 나머지는 어렵지 않아.'

나머지 훈련병들이 지닌 무장으로는 경질화까지 발동한 뼈 갑옷과 뼈 가면을 뚫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번, 슬쩍 내줘볼까.'

찰나의 순간.

내가 일부러 작은 빈틈을 드러내기 무섭게 헨릴 중사의 손에 들린 DR-404 리볼버에서 화염이 뿜어졌다.

그러나 이미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나에게 헨릴 중사의 노림수가 통할 리가 만무했다.

'어딜.'

까딱-

가볍게 고개를 옆으로 젖히는 것만으로 헨릴 중사의 노림수는 물거품이 됐다.

그리고 나는 이 틈에 생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우선, 헨릴 중사부터.'

뼈 창에 있는 옆부분에서 작은 돌기가 우수수 나기 시작했다.

뼈 창이 뼈 작살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정도면 빼기 쉽지 않겠지.'

뼈 작살이 단번에 헨릴 중사의 왼쪽 다리에 박혔다.

이어서 나는 다른 손에 들린 뼈 작살로 헨릴 중사의 손에 들린 DR-404 리볼버를 거칠게 쳐냈다.

이로서 당분간은 제대로 걷는 건 물론이고 총을 쥐지도 못할 터.

아무리 헨릴 중사가 노련한 군인이라고는 해도, 2레벨 에테르 적합자의 신체 능력을 따라올 수는 없었다.

"크으윽······!"

"중사님!"

헨릴 중사의 부상과 함께 팽팽한 대치를 이루고 있던 구도 역시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리스! 그쪽!"

"······아."

내가 부상자를 노리는 척하기 무섭게 칼라킨과 드미트리가 총구를 옮겼으나, 이미 나와 그들의 일직선 경로에는 아이리스와 부상자들이 있었다.

자칫 잘못 방아쇠를 당겼다가는 동료들이 다치게 된 것이다.

'자, 못 쏘겠지?'

어째 삼류 악당 같은 대사가 되어버렸으나, 어쨌거나 지금 나는 악당이 맞았으므로 별로 상관은 없을 듯했다.

그러나,

쐐액!

칼라킨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훗날 용을 사냥할 사냥꾼에게 망설임은 미덕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카앙!

나는 그 총알을 피할 수 있음에도 피하지 않았다.

자칫 잘못 피했다가는 뒤쪽에 있는 부상자들에게 총알이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봐라.'

역시 칼라킨이라고 해야 할지······.

비록 지금 당장의 위협 수준은 내게 미치지 못하지만, 훗날 대적하게 되면 성가신 존재가 될 게 자명했다.

'뭐, 굳이 그럴 필요도 없지만.'

애초에 내가 이들을 살려두려는 이유도 이들이 내 적이 아닌 아군이기 때문이다.

비록 당장은 목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물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함께 등을 맞대고 아크를 지켜야 하리라.

'슬슬 끝내볼까.'

가장 위협이되는 헨릴 중사는 이미 전투 불능이 되었고, 저들이 지닌 병기는 나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못한다.

[끼기기깃!!]

전신에서 솟구치는 뼈 촉수와 함께, 내가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헨릴 중사는 피가 흘러나오는 다리를 붕대로 압박하며 신음했다.

"끅······."

방심을 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분명히 신중하게 때를 기다렸다.

단지, 상대가 그마저도 읽었을 뿐.

'······최소 6급 이상.'

스컬 턴코트는 뼈 기생체로 인해서 탄생한 마물이라는 특성 탓에 특별한 등급이 정해지지 않은 마물이다.

숙주의 상태나 뼈 기생체의 성장 상태에 따라서 그야말로 개체마다 천차만별로 강함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등급 외 마물.

그게 스컬 턴코트라는 마물이었고, 지금 눈앞에 있는 스컬 턴코트는 얼핏 봐도 6급 이상의 마물이었다.

상대가 그 정도의 마물이었으니, 헨릴 중사가 당한 시점에서 이미 승산이 없는 싸움이 되었다.

훈련병들이 지닌 보급형 장비는 스컬 턴코트의 단단한 뼈를 뚫지 못하고 있었고, 유일하게 타격을 줄 수 있는 DR-404 리볼버는 늪 밑으로 빠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끝인가.'

그 어떤 징조도 없이 갑작스레 등장한 스컬 턴코트는 강했다.

완전무장한 훈련병들은 물론이고 헨릴 중사조차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제아무리 훈련병들이라 할지라도, 이번에 회수팀으로 뽑힌 훈련병들은 아크의 병사들과 비교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들이다.

'···제기랄.'

헨릴 중사는 자신의 실책으로 그런 인재들이 죽게 된다는 게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크윽!"

"드미트리!"

뼈 창, 아니 뼈 작살이라 불러 마땅한 물건이 휘둘러질 때마다 훈련병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눈앞의 스컬 턴코트는 마물화된지 제법 오래되었는지, 이미 움직임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있었다.

'아니··· 단순히 움직임뿐만이 아니다.'

전투 자체에 대한 탁월한 감각.

모르긴 몰라도, 눈앞의 스컬 턴코트가 숙주로 삼은 인간은 본래 아주 뛰어난 군인이나 전사였을 가능성이 컸다.

"악!"

한 명씩, 한 명씩.

훈련병들이 쓰러졌다.

"후욱, 후욱······!"

헨릴 중사가 눈여겨보고 있었던 훈련병 중 한 명인 칼라킨이 그나마 마지막까지 버티긴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찔러 들어 온 뼈 작살에 가슴을 꿰뚫렸다.

"끅!"

그토록 강인했던 칼라킨의 몸이 허물어지는 걸 마지막으로, 회수팀 전원이 쓰러지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흐윽."

"끅, 끄윽······."

그나마 다행이도 아직까지 숨이 끊어진 훈련병은 없는 듯했으나,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헨릴 중사가 죽음을 직감한 순간.

'······음?'

어째서인지 스컬 턴코트가 그냥 뒤돌아서 자리를 떠났다.

"어······?"

"응?"

훈련병들 사이에서 의아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스컬 턴코트가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어, 어어?"

"살았··· 다?"

그러나, 그게 착각이었다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쉬익, 쉬이익······.]

[기에에엑······.]

주변에서 느껴지는 마수들의 기척.

아까부터 이 근방을 배회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먼저 달려들지 않기에 굳이 건드리지 않았던 건데··· 아무래도 회수팀이 약해지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마수들이 나서려는 듯했다.

헨릴 중사가 외쳤다.

"···다들 이쪽으로 모여라!"

"주, 중사님······."

상처 입은 훈련병들이 어기적어기적 헨릴 중사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그 누구 하나 몸이 성한 이가 없었다.

제대로 무기를 쥘 수 있는 이조차도 몇 없는 상황에서, 이 상황을 타개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스스슥─

스스스스─

마수들의 기척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저벅, 저벅, 저벅─

죽음이 다가온다.

훈련병들의 얼굴이 절망이 깃든 그 순간.

[끼에에에엑!]

[게엑, 게에엑!]

밀림 저편에서 마수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 실험탄 GHOST-157 (5) > 끝

[그엑, 그에엑─]

[끼에에······.]

몇 분 동안 울려 퍼진 마수들의 비명이 서서히 멎자, 훈련병들이 멀뚱멀뚱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확실한 건 어떤 일이 일어난 것만큼은 확실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마수들이 약해진 회수팀을 덮쳤을 테니까.

"······무슨 일이지?"

드미트리가 의문을 제시했으나 다른 훈련병들이라고 해서 알 리가 만무했다.

"그, 글쎄?"

"설마······ 지원군?"

애석하게도 답은 알 수 없었다.

만약 정말로 지원군이라면, 헨릴 중사가 모르고 있을 리도 만무할뿐더러, 무엇보다도 지금쯤 회수팀 앞에 모습을 드러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회수팀의 인솔자이자 팀장인 헨릴 중사가 곧장 판단을 내렸다.

"······우선, 바로 이곳을 바로 벗어난다. 부상치료는 늪지대를 벗어난 뒤에 한다."

헨릴 중사의 말과 함께 회수팀이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늪지대 밖으로 향했다.

부상치료도 중요하긴 했지만, 의외로 상처가 그렇게까지 깊지 않았던 데다가 이 이상 늪지대 안에 있어서 생기는 독기와 마수들의 위협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저길 봐."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퇴각 도중.

훈련병 중 꽤 특별한 '눈'을 지닌 힐데가르트의 말에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마수들의 시체로 향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마수들의 시체는 마치 미라처럼 비쩍 말라 있었다.

마치 지니고 있던 체액을 모두 잃은 것처럼 말이다.

"···우선,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다. 다들 이동하라."

헨릴 중사의 말에 훈련병들이 찝찝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잠자코 이동했다.

그 말마따나 이 이상 이곳에 있었다가는 생명이 위험한 부상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

모두가 발걸음을 서두를 때도 칼라킨의 시선은 마지막까지 쓰러진 마수들의 시체를 눈에 담았다.

'···만약 지원이 왔던 거라면 마수의 시체가 미라가 된 게 아니라 총알 구멍이 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체액을 모두 빨렸다라······.'

칼라킨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런 끔찍한 일이 가능한 건 오직 같은 마수와 마물뿐.

그리고 최근 이 근방에서 보았던 마물이라면 한 마리뿐이었다.

'설마.'

곧이어서 머릿속에서 한 가지 추측이 떠올랐으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겠지.'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칼라킨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지금 회수팀에게 닥친 진실은 한 가지뿐이었다.

임무 실패.

오직 그것만이 지금 칼라킨 앞에 닥친 진실이자, 현실이었다.

* * *

회수팀을 제압한 이후,

나는 그들의 주위를 천천히 맴돌며 회수팀을 향해 달려드는 마수들을 모조리 사냥했다.

비록 회수팀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특히나 이번 회수팀의 훈련병들 같은 경우는 하나하나가 모두 귀중한 인재들인 만큼, 이런 곳에서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이쯤이면 대충 되겠지.'

마침내 회수팀이 늪지대를 무사히 빠져나가는 걸 보고서야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조금 시간이 지체되기는 했어도 충분히 성과가 있는 일이었다.

'슬슬 나도 가볼까.'

돌아가는 길에 회수팀과 마주칠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살짝 길을 돌아갈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늪지대를 벗어났다.

['오파쿰의 늪지대'에서 무사히 생환하였습니다!]

[독에 대한 면역력이 증가합니다.]

[5% -> 10%]

[당신을 적대한 자의 생명을 살려주었습니다.]

[특성, '불살주의'를 획득하였습니다.]

──────────────

[불살주의]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자여.

"상세 보기"

──────────────

──────────────

"상세 능력"

[불살주의]

구한 생명의 숫자가 100이 될 때마다 '구사일생(九死一生)'의 기회를 한 번씩 얻습니다.

-현재까지 구한 생명 : 6

-누적된 구사일생 수 : 0

──────────────

'오호······.'

불살주의는 얻는 조건이 꽤 까다로운 특성 중 하나다.

불살주의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구사일생은 말 그대로 누적된 숫자만큼 목숨을 건지게 해준다.

말 그대로 생존과 직결된 특성인 셈.

아무리 의도한 사안이었다고는 해도 이렇게 쉽게 얻다니··· 아무래도 때 아닌 마물 연기를 한 보람이 없지는 않은 듯했다.

'꽤 잘 먹힌 것 같았지.'

베테랑 군인인 헨릴 중사가 쉽게 속을 정도로 내 마물 연기는 상당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거기에는 누가 봐도 마물일 수밖에 없는 외견이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만 말이다.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게 있다면··· 힐데가르트와 칼라킨인가.'

회수팀에 속한 훈련병 중에서 감각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힐데가르트와 칼라킨은 각각 남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눈과 직감을 소유하고 있다.

아무리 내가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했다고는 해도, 그 둘의 감각마저도 완전히 속이기는 어려울 터.

'뭐, 그래봤자 의혹에 불과하겠지만.'

아무리 그 둘이 뛰어나다고 해도 내 정체를 밝혀낼 수는 없다.

애초에 그 둘은 내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뭐가 됐든 간에 실험탄은 손에 넣었으니까.'

──────────────

[실험탄 GHOST-157] [??(??성)]

[현재 수량 : 1]

우연의 산물로 탄생한 탄환.

물리적 형체가 없는 존재에 대해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상세 보기"

──────────────

이로써 앞으로 등장할 유령종을 비롯한 몇몇 마물에 대해서 나는 절대적인 상성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유령종뿐만이 아니지.'

에테르를 근간으로 둔 모든 존재.

그래, 나를 엿 먹인 그놈들.

'뭐··· 그놈들은 맞추기 좀 어려울 테지만, 어떻게 하면 되겠지.'

소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슬쩍 뼈 촉수 중 하나에 걸려있던 리볼버를 살폈다.

다름 아닌 헨릴 중사가 가지고 있었던 무장인 DR-404 리볼버였다.

──────────────

[부서진 DR-404 리볼버] [★★★★★(5성)]

아크제 특수 제작 리볼버.

매우 강한 파괴력과 일반적인 근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반동을 지녔다.

현재 과하게 파손되어 자가수복 기능의 사용이 불가능하다.

"상세 보기"

──────────────

'쯧.'

헨릴 중사의 손에서 DR-404 리볼버를 쳐내면서 이걸 확보할 수는 있었으나, 아쉽게도 그 과정이 너무 과격했던 탓에 심하게 파손되어 버렸다.

'자가수복으로 복구가 안 될 정도면··· 아예 핵심 부품들이 고장 났나 보군.'

아크제 총기류는 단순한 기계 장치를 넘어서 아크 기계 공학의 정수라 부를 만한 기술의 집합체다.

당연히 웬만한 일로는 고장 나지 않지만, 그렇기에 한번 크게 고장 나면 전문적인 장비 없이는 고치기가 쉽지 않다.

'조금 살살 칠 걸 그랬나?'

내심 후회가 안 되는 건 아니었으나, 만약 정말로 어설프게 힘을 뺏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아쉬워하는 게 아니라 싸늘한 흙바닥에 누워있었을지도 모른다.

헨릴 중사는 그만큼 노련한 베테랑이었고, 동시에 DR-404 리볼버 역시도 그에 못지않게 위험한 물건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소리다.

'그래도 나중에 고치면 되겠지.'

목표로 했던 실험탄 GHOST-157은 확보했다.

거기에 더해서 여러 소득도 있었으니, 남은 건 돌아갈 일뿐이었다.

'그나마 노아와 가까운 곳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만약 정말로 크로노스까지 가야 했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상당히 힘든 여정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중간에 헤매기는 했어도 오파쿰의 늪지대 루트 자체는 평범한 루트였다.

'돌아가자.'

집에 갈 때다.

*

돌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애초에 가장 빠른 지름길 쪽으로 회수팀이 향한 탓에, 나도 어느 정도 조심하며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수들의 서식지를 또 지나칠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조금 더 길을 돌아가는 선택을 했다.

'그나저나, 오늘 뼈 기생체가 꽤 포식을 했는데도 별 다른 변화가 없네.'

아무래도 일정 급 이하의 마수나 마물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뼈 기생체의 허기를 채우는 용도 정도밖에 되지 않는 듯했다.

물론 말이 허기지, 뼈 갑옷에 많은 힘을 축적하면 할수록 한 번에 뿜어낼 수 있는 뼈 촉수의 숫자나 강도가 강해진다는 걸 생각한다면 그것도 충분했지만 말이다.

'뼈 갑옷을 더욱더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급이 되는 마수나 마물을 잡아야 해.'

문제는, 그런 존재들은 하나 같이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들이라서 최소한 Ark-15 자동변환 소총이 어느 정도 업그레이드가 된 상태여야 상대할 만했다.

'그나마 기회가 있다면 웨이브인데······.'

애석하게도 아직 아크의 전선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위험한 일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여정이 길어졌다.

길을 돌아서 간 탓이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왔던 길과는 조금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데.'

평원지대가 이상할지만큼 썰렁했다.

보통이었다면 이쯤에서 지나가는 마수 무리를 몇 번 정도 마주할 법도 했건만, 어째서인지 한 번도 마주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거기다가, 에테르의 반응까지도 평소와는 달라.'

[누가, 나를······.]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에테르의 반응이 점차 기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뭐지?'

물론 평소에도 목소리가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으나, 지금 에테르는 명백히 이질적이었다.

'뭔가, 느낌이······.'

속이 울렁거린다.

체내에 있는 에테르가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 아아아아────!!!!!]

[가고 싶지 않아.가고 싶지 않아.가고 싶지 않아.가고 싶지 않아.가고 싶지 않아.가고 싶지 않아.가고 싶지 않아.가고 싶지 않아.가고 싶지 않아.가고 싶지 않아.]

[칼, 마커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에테르가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하자 전신의 핏줄이 터질 것처럼 튀어나왔다.

에테르의 움직임에 따라서 신체에도 영향을 받는 강체의 부작용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대체 왜?'

내가 알기에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건 몇 없었다.

'하지만······ 아니, 말도 안 돼.'

나는 더 디펜스의 메인 시나리오가 진행되며 아크 안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대부분 알고 있다.

물론 타티아나 벨로프처럼 몇몇 예외들은 모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모르는 일이 또 있다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무언가, 또 변했다.'

대체 왜?

의문 속에서 나는 에테르의 이끌림에 따라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점차 에테르의 폭풍이 심해졌다.

마치 태풍 속에서 태풍의 눈을 향해 나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 아아아아───]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기에, 에에엑──!]

[놓아줘어어어어─────]

에테르가 요동치는 중심지.

지평선 너머에서 느껴지는 그곳을 본 나는 곧장 스코프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 있는 건 어느 무리였다.

나는 이내 그곳에 있는 어떤 심볼 하나를 알아볼 수 있었다.

심장과 영혼을 제물로 바치는 문양을 상징하는 심볼.

모트교.

마수와 마물을 추종하는 종교이자, 아크의 가장 큰 골칫덩어리 중 하나.

이곳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에테르 폭풍의 원인은 놈들이 분명했다.

'이것 봐라······.'

설마 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지금 놈들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내가 모를 리가 만무했다.

'웨이브를 일으키려 하고 있다.'

다만, 최근 웨이브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정규 웨이브보다는 못한 급조 웨이브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지금 이 타이밍에 웨이브가 일어난다면, 평원 한복판에 있는 나로서는 피할 곳이 없다.

꼼짝없이 마수 군단에 깔려서 죽는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누구 마음대로.'

예정에 없던 웨이브가 일어나고, 이젠 두 번째까지도 일어나려 하고 있다.

설사 그 주체가 서로 다른 집단일지언정, 나는 더 이상 놈들이 제멋대로 날뛰게 둘 생각이 없었다.

철컥─

나는 그대로 탄창을 갈아끼웠다.

실험탄 GHOST-157.

놈들의 목적을 부술 총알이었다.

< 실험탄 GHOST-157 (6) > 끝

'모트교 놈들, 대체 속셈이 뭐지?'

모트교가 이번 급조 웨이브의 배후라는 건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이 급조 웨이브는 예정된 일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었으니까.

'분명히 이전에 일어났던 첫 번째 웨이브와 관련이 있어.'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건 필시 타티아나 벨로프의 생환일 터.

'대체 왜지?'

타티아나 벨로프가 안톤 벨로프의 딸이라는 가정이 맞는다고 쳐도, 그게 그림자단과 모트교 모두가 웨이브를 일으킬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보니, 나는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애초에 접근을 잘못했다?'

나는 지금껏 세웠던 모든 가설들을 폐기하고, 전제 조건을 처음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가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로.

'어쩌면, 타티아나 벨로프의 신분이 중요한 게 아니었을지도 몰라.'

타티아나 벨로프의 죽음으로 인해서 일어난 네이비 라인과 블루 라인의 갈등은 그저 부차적인 것이고, 실제로는 다른 이유가 따로 있기 때문이라면?

타티아나 벨로프가 어째서 죽었고,

어떤 임무를 위해서 아크 바깥으로 나갔으며,

무엇보다도 어디를 다녀왔는가?

'이 가설대로라면 그림자단이 배후라는 첫 번째 추측 역시도 틀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배후는 모트교인가?

아니면 모트교와 그림자단 둘 다?

'타티아나 벨로프.'

그 여자에게 열쇠가 있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이변에 대한 열쇠가 말이다.

생각을 마친 나는 시선을 옮겼다.

타티아나 벨로프도 중요하지만, 우선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거고··· 일단 지금은 눈앞에 일에 집중해야 할 땐가.'

모트교나 그림자단은 각기 다른 방법이지만 인위적으로 웨이브를 일으킬 수 있다.

바로 지금이 그랬고, 며칠 전에 일어났던 첫 번째 웨이브가 그러했다.

그러나 첫 번째 웨이브와 지금 일어나려는 웨이브와 차이점이 있다면, 지금 일어나려는 웨이브는 첫 번째 웨이브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웨이브 사이의 최소 간격은 약 일주일.'

그렇기에 평소였다면 이런 식의 급조 웨이브는 소위 말하는 보너스 스테이지로 치부된다.

급조된 만큼 정규 웨이브에 비해서 마수나 마물의 수나 질에서 크게 떨어질 뿐만 아니라, 긴급 상황으로 분류되는 만큼 아크에서의 공적치 역시도 몇 배로 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

가장 큰 문제는 지금 내가 아크 바깥에, 그것도 위험천만한 평원 한복판에 있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서 제아무리 급조라도 웨이브가 발생한다면, 나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당연히 순순히 죽어줄 생각 따위는 없었기에 이번 급조 웨이브는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그나마 방법이 쉬워졌다는 게 다행인가.'

나는 실험탄 GHOST-157을 장전한 채로 조용히 에테르 폭풍이 몰아치는 곳을 바라보았다.

만약 실험탄 GHOST-157을 얻지 못했더라면 나는 더 귀찮고 번거로운 방법으로 이번 급조 웨이브를 막아야 했을 것이다.

'굳이 오래 끌 필요는 없겠지.'

나는 스코프를 통해서 총구를 에테르 폭풍의 중심지에 겨누었다.

폭풍 자체가 워낙 큰 탓에 어딜 쏴도 맞겠지만, 내가 노리는 건 그중에서도 핵이라 부를 만한 곳이었다.

'찾았다.'

유독 에테르의 농도가 짙은 곳.

나는 그곳에 총구를 겨눈 채로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그 순간.

[하, 지, 마······!]

[이새 끼가 아───]

[!라─춰─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고 선명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물론 내가 그런 말을 들을 리가 만무했지만 말이다.

철컥-

천천히 방아쇠가 당겨지고,

피우웅─────!

총구에서 뿜어진 작은 불꽃과 함께 실험탄 GHOST-157가 에테르 폭풍을 향해 올곧은 궤적을 그렸다.

거대하게 일어난 에테르 폭풍에 비해서,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단 한 발의 총알은 너무나도 미약해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그러했다.

거대한 에테르 폭풍을 헤쳐나가기에 한 발의 총알은 너무 작고, 또 작았다.

다만,

그 작디작은 단 한 발의 총알이 일으킨 일은 절대로 작지 않았다.

실험탄 GHOST-157이 에테르 폭풍에 맞닿은 바로 그 순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기긱, 기긱, 기기기───!]

[드, 디······ 어···.]

에테르가 거칠게 울부짖었다.

어떻게 들으면 비명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들으면 기쁨의 환희 같기도 한 그 폭풍은 이미 거대한 재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프스스──

머지않아서 에테르의 요동침이 멎었다.

고작 단 한 발의 총알로는 이 거대한 재해를 막을 수 없다는 게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상관없어.'

어차피 한 발로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한 발로 안 되면 두 발, 세 발을 쏘면 될 뿐이었으니까.

철컥-

방아쇠가 연신 당겨졌다.

본래였다면 첫 번째 격발을 끝으로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졌어야 할 실험탄 GHOST-157가 끝까지 살아 숨 쉬며 집요하게 에테르 폭풍을 노렸다.

[까아아아아악────!]

[복수할 테다, 복수할 테다, 복수할 테다, 복수할 테다, 복수할 테다, 복수할 테다······.]

[고- 맙··· 다──]

에테르가 연신 들썩였다.

그제야 지평선 너머에 있는 모트교 신도들이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는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를 찾는 모양이었다.

'이미 늦었어.'

나는 다시금 방아쇠를 당겼다.

이미 형체를 잃어가는 에테르 폭풍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쐐애애액!!!

연신 총구가 들썩이고, 마침내 응집되었던 에테르 폭풍이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에에에에에엑──────!]

요동친 에테르가 폭발했다.

그와 함께 근처에 있던 모트교 신도들이 에테르 파동에 휩쓸려 나갔다.

쿠콰카카카캉────!!!

폭발은 모트교를 덮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있는 장소는 거리로 치면 10km를 넘는 장소였으나, 에테르 폭발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큭!"

위기를 느낀 뼈 갑옷이 전신에서 뼈 촉수를 뽑아내고는 이내 그것들로 내 전신을 감쌌다.

툭!

투투툭!

10km가 넘는 곳에서부터 날아든 모래나 돌 따위가 뼈 촉수로 만들어진 구(球)를 마구잡이로 때려댔다.

말이 돌멩이지, 에테르 파동을 머금고서 날아든 저것들은 이미 하나의 재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던 시간이 지나가고서 마침내 에테르 폭풍이 멎었다.

스스스─

뼈 촉수가 내려간 뒤에 내 시야에 보인 건 모든 게 휩쓸린 뒤인 평원이었다.

"후우······."

뒤질 뻔했네.

[억압된 에테르를 해방하였습니다!]

[떠돌이 영혼들이 당신을 강하게 주목할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에테르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1 -> 14]

에테르 감응력이 한번에 3이나 올랐다.

전례없는 성장세.

그 정도로 이번 급조 웨이브에 일어난 에테르 폭풍을 막아낸 일이 엄청나다는 뜻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트교의 음모를 막아섰습니다!]

[공적치가 누적됩니다.]

[웨이브를 사전에 막았습니다! 공적치가 추가로 누적됩니다.]

[+5,500]

[현재 공적치 : 16,921]

이전에 첫 번째 웨이브에서 목숨을 걸고서 싸워서 얻어낸 공적치가 약 1만.

그런데, 이번에 방아쇠 몇 번을 당겼을 뿐인데 무려 5천에 달하는 공적치를 얻었다.

'역시.'

비록 실제로 웨이브가 일어난 게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이브를 막아냈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 정도의 보상이 들어왔다.

실제로 더 디펜스를 플레이하다 보면 일부러 모트교와 그림자단을 찾아다니며 이런 급조 웨이브를 막기도 한다.

실제로 웨이브에서 활약하는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효율이 좋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도 여유가 어느 정도 있을 때나 가능한 거긴 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만약 실험탄 GHOST-157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급조 웨이브를 막으려면 엄청나게 번거로운 과정을 거쳤어야 했을 것이다.

이처럼 에테르 폭풍의 핵을 직접 타격하는 게 아니라, 에테르 의식을 진행 중인 모트교를 공략하는 쪽으로 말이다.

'급조 웨이브를 주도할 정도면, 필시 모트교의 주교급 이상의 인물이 껴 있을 터.'

원거리에서 저격을 시도한다고 해도, 지금의 나로서는 주교급 이상의 모트교 신도를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아니, 오히려 어설픈 저격을 해봤자 곧장 역습을 당할 가능성이 컸다.

'모트교의 주교급 정도를 감당하려면 최소 블루 라인에서 활약할 수 있을 정도의 전투력은 확보되어야 해.'

물론 지금 시기가 이제 막 첫 번째 스테이지가 끝났음을 생각한다면 내 성장세가 엄청난 건 사실이었으나, 자만에 빠질 수는 없었다.

한 번의 오만과 방심은 곧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법이었으니까.

'뭐··· 어차피 웨이브도 막았고, 굳이 저놈들과 지금 엮일 필요는 없겠지.'

비록 당장은 에테르 폭풍의 여파로 여력이 없을 테지만, 곧 추격대를 꾸려서 자신들의 일을 방해한 무뢰배를 찾으려 할 터였다.

'바로 이 자리를 피한다.'

그렇게 내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돌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에테르 폭풍이 일어난 중심지로 마수 무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 마수들이 모트교 놈들을 좀 상대해주면 좋겠지만,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모트교 놈들에게는 성물이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그랬을 텐데······.

[캬오, 캬오오!]

[크르르릉─!]

멀찍이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모트교와 마수들 사이에서 전투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트교가 마수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다?'

모트교는 마수와 마물을 숭배하는 종교다.

당연히 숭배하는 대상에게 공격당하지 않을 방법은 가지고 있는 놈들이었건만, 어째서인지 지금 마수와 마물들이 놈들을 노리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뿐이었다.

'성물(聖物)이 사라졌다?'

설마, 조금 전에 일어난 에테르 폭풍 때문에?

'···아니, 아니야. 모트교의 성물은 에테르 폭풍 정도로는 어떻게 되지 않아.'

괜히 성물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고작 에테르 폭풍 정도로 유실될 물건이었다면 애초에 성물로 여겨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트교의 성물은 이 세계에 단 3개밖에 없는 물건으로, 그걸 지니고 있으면 근처로 마수나 마물이 접근하지 않는다.

안전 따위는 없는 이 세계에서 모트교가 지금까지 아크 바깥에서 존속하고, 마수 숭배라는 말 같지도 않은 교리가 유지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인 셈이다.

'물론 일정한 등급 이상의 마수나 마물은 그마저도 무시하지만, 그래도 엄청난 물건인 건 사실이지.'

그렇기에 모트교는 활동을 할 때 반드시 세 개의 성물 중 하나를 지닌 채로 활동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마수 떼에게 언제 덮쳐져도 이상할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모트교가 공격을 당했다는 소리는, 곧 그러한 성물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흐음···.'

머릿속에서 천천히 퍼즐이 맞춰진다.

타티아나 벨로프의 생환.

예정보다 빨라진 웨이브.

본래는 없었던 급조 웨이브.

그림자단이나 모트교가 모두 움직여도 충분히 납득될만한 이유.

마수와 마물에게 공격당하는 모트교.

'이 모든 조건을 종합해보면······.'

이윽고 결론이 나왔다.

'모트교의 성물(聖物).'

아무래도 그걸 타티아나 벨로프가 가져간 듯했다.

< 성물(聖物) > 끝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타티아나 벨로프는 그게 모트교의 성물이라는 걸 모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도망치는 과정에서 마수와 마물들에게 쫓기고 있었을 이유가 없었다.

즉, 타티아나 벨로프는 성물의 사용법은커녕 그게 모트교의 성물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미 알고 있다면 상황이 심각해진다.'

설사 모트교의 성물이 있다고 한들 아크는 안전해지지 못한다.

'성물의 유효 범위는 딱 라인 한 개의 전선을 커버할 수 있을 정도.'

그렇기에 광활한 전선을 지닌 아크 내에서 성물을 발동시킨다고 해봤자, 결국 성물의 영역을 벗어난 다른 라인으로 마수와 마물들이 몰릴 뿐이다.

그렇게 되면 한 라인이 부담해야 할만큼의 마수와 마물들이 다른 라인에 가중될 테고, 자연스럽게 아크의 몰락이 앞당겨질 수밖에 없다.

'애초에 성물이 그렇게까지 완전한 물건인 것도 아니야.'

성물이 일으키는 힘은 어디까지나 마수와 마물의 본능적인 거리낌을 자극하는 것에 불과하다.

절대적인 안전 지역을 만드는 게 아니라는 소리.

여기에는 허점도 은근히 많고, 일정 수준 이상의 마수와 마물들은 대놓고 성물의 영역을 무시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모트교의 성물은 광활한 영토를 수호해야 하는 아크 내에 있어봤자 좋을 게 하등 없는 물건이었다.

'거기다가 한 가지 더 큰 문제는, 성물의 사용법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점이다.'

혹시라도 우연히 성물이 발동하게 된다면 아크 내에서도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테고, 안 그래도 심한 아크 내 갈등은 정점으로 향할 것이다.

성물(聖物) 탈취 전쟁.

이는 실제로 더 디펜스의 양대 메인 시나리오 중 하나인 라인 정쟁(Line 政爭)에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 중 하나이기도 했다.

'타티아나 벨로프를 만나야 해.'

혹은 좀도둑질이라도 해서 그녀가 지닌 성물을 반드시 탈취해야 한다.

설득이냐, 탈취냐.

그중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스코프를 통해서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급조 웨이브가 취소될 정도의 에테르 폭풍이 지척에서 몰아치고, 거기에 더해서 마수 무리와 전투까지 치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트교의 잔당은 상당수가 건재했다.

'역시······.'

저 거리에서 저걸 견뎌?

직접 보고도 질리는 광경이었다.

물론 일정 수준 이하의 신도들은 모두 첫 번째 에테르 폭풍 때 쓸려나가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트교 놈들의 숫자는 징그러울 정도로 많았다.

더욱더 끔찍한 건 저놈들이 모트교의 일부 중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바퀴벌레 같은 놈들.'

모트교.

놈들이 아크 바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성물의 힘뿐만이 아니다.

모트교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

오죽하면 더 디펜스의 유저들 사이에서는 모퀴벌레라고 불릴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반드시 얻어야 할 능력이긴 하지.'

놈들의 질긴 생명력은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혐오스러워도, 동시에 유저 입장에서는 더 디펜스를 클리어하기 위해서 반드시 얻어야 하는 필수 능력 중 하나였다.

물론 그 과정이 쉬운 건 아닌 터라 당장은 훗날로 미뤄둘 수밖에 없겠지만······.

'우선 돌아가야겠지.'

지금 우선해야 할 건 모트교도, 놈들이 지닌 능력도 아니다.

타티아나 벨로프.

그녀가 지니고 있을 모트교의 성물을 반드시 빼앗아야 했다.

* * *

아크.

한 차례 거대한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크의 전선에는 여전히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화륵, 화르륵!

24시간 내내 타오르는 불길들.

산처럼 쌓인 마수와 마물의 시체를 아크에 설치된 대형 화염방사기로 태우는 불길이었다.

마수와 마물의 기본적인 시체 소거법은 불에 태우는 것이다.

광범위한 구역에 있는 수백만 마리의 마수 시체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마땅한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물론 몇몇 고위 등급의 마수나 마물의 사체는 따로 챙기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수백만 마리가 넘는 마수의 시체를 물리적으로 치울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반작용 역시도 적은 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수와 마물의 시체를 저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만약 그랬다가는 토양 자체가 오염되어서 머지않아서 지하까지 침식할 테고, 지하수까지도 영향을 끼칠 터.

물론 아크 내에 있는 식수 수급원은 지하수뿐만이 아니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땅의 오염.

아크의 전선을 시작으로, 인근의 땅 자체가 오염되어 버리면 아크 내에 있는 농경지 역시도 머지않아서 땅의 오염이 퍼진다.

땅이 죽으면 당연히 농업이나 목축업도 죽는다.

식량 자급이 막히게 되는 것이다.

아크는 이제 인류 최후의 요새가 되었고, 그런 아크 내에서 식량 자급이 막힌다는 소리는 곧 인류의 멸망이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설령 불로 태운다고 한들 이미 땅으로 스며든 마수들의 피와 재는 남는다.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아크가 조금씩 오염되는 걸 피할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조금씩, 조금씩.

아크는 죽어가고 있다.

질 수밖에 없는 싸움.

그게 지금 아크의 운명이었다.

화르륵······.

방사능을 비롯한 온갖 독성 물질을 머금은 연기가 하늘 높이 타오른다.

그 탓에 아크에 있는 각 라인의 성벽 위로는 거대한 차폐막이 펼쳐져 있었다.

아크 내로 마수를 태우는 연기가 유입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차폐막이 펼쳐져 있는 동안에는 병력의 운용이 제한되어 아크의 수비가 극도로 약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보통 이런 대규모 웨이브 이후에 다음 웨이브까지는 어느 정도의 텀이 있었기에 괜찮았다.

"하아······."

타티아나 벨로프는 네이비 라인의 성벽 위에서 반투명한 차폐막 건너로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끔 이렇게 마수들의 시체를 태우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일종의 불멍이라고 해도 좋았다.

요즘 그녀를 괴롭히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정도라고 볼 수 있었다.

첫 번째는 그녀를 구해준 의문의 이방인, 칼 마커스에 대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이번 임무 도중에 동료가 목숨까지 걸고서 자신에게 건넨 어떤 물건이었다.

「"반드시, 반드시 이걸 지켜."」

목숨을 걸고서 자신에게 어떤 물건을 건넨 동료의 마지막 부탁.

그러나 시간이 워낙 촉박했던 터라 이게 어떤 물건인지까지는 듣지 못했다.

'대체 이게 뭐지?'

그녀는 손안에 쥐여 있는 작은 토템 하나를 바라보았다.

얼핏 보면 동물의 뼈로 만든 장신구 같기도 했고, 다르게 보면 어떤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물건 같기도 했다.

아크에 돌아온 뒤, 타티아나는 네이비 라인에 있는 물질 연구자들에게 맡겨도 보았다.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어떤 물질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뿐.

화이트 라인이나 레드 라인이라면 이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도 있었으나, 이 물건이 정확히 어떤 건지도 모르는 채로 함부로 다른 라인에 넘길 수는 없었다.

"하아······."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이 그녀의 입술 너머로 작게 흘러나왔다.

생명의 은인에게는 난데없는 한밤의 불청객으로 낙인찍히고, 동료가 목숨을 걸고서 건넨 물건은 무엇인지 그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녀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까드득······.]

그때 귓가에서 울려퍼지는 괴음.

또다.

최근 들어서 에테르의 반응은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이것과 관련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그녀로서는 에테르의 이상 반응과 이 정체 모를 토템과의 연관성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라면 이런 걸 알고 있지 않을까?'

칼 마커스는 야만족이다.

모르긴 몰라도 비슷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 테니 이런 류의 종교적인 물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는데······.'

차폐막 건너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불꽃을 머금었다.

그녀의 근심이 깊어졌다.

* * *

어둠이 드리운다.

내가 은신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은 뒤였다.

하루를 꼬박 지샌 것이다.

'휴식을 취하기는 해야 하는데······.'

무척이나 오랜만에 온천에 몸을 맡긴 채로 나는 생각에 잠겼다.

며칠 간의 강행군과 더불어서 격렬한 전투까지 치렀던 터라 이미 몸은 녹초였다.

남은 시간은 어느 정도 되는가.

간단한 산술적인 계산에 의하면, 이번 급조 웨이브를 막아냈으니 아마 다음 웨이브는 최소 일주일 뒤가 될 것이다.

'주어진 시간은 넉넉잡아서 약 4일에서 5일.'

그렇다면 방법은?

선택지는 대충 두 가지 정도였다.

설득과 탈취.

'설득이라······.'

타티아나 벨로프는 내게 빚이 있다.

그렇기에 잘만 설득한다면 성물을 건네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험부담 역시도 있었다.

'만약 타티아나 벨로프가 성물의 용도를 알고 있다면?'

그렇다면 생명의 은인이고 뭐고 타티아나 벨로프는 절대로 나에게 성물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괜히 내가 성물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만 타티아나 벨로프에게 노출하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설령 용도를 모르고 있다고 해도 목숨을 건 임무 도중에 얻은 물건을 함부로 외부인에게 줄 가능성은 적어.'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내가 타티아나 벨로프라는 인물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아크 내의 인물들에 대해서라면 줄줄이 꿰고 있는 나지만, 타티아나 벨로프만큼은 예외였다.

본래였다면 죽었어야 할 인물.

그렇기에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더없이 제한적이었다.

네이비 라인의 소령.

레벨 3의 에테르 적합자.

벨로프 패밀리의 일원.

어쩌면 안톤 벨로프의 딸일지도 모르는 인물.

이게 내가 타티아나 벨로프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전부였다.

물론 그 외에도 생각보다 순진한 것 같다거나, 그래도 은혜를 갚으러 오는 걸 보면 어느 정도 기본적인 개념은 잡힌 것 같다거나 하는 부차적인 이야깃거리는 있었으나,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었다.

'탈취도 쉽지 않아.'

만약 탈취가 쉬웠다면 나는 애초에 고민조차 하지 않고서 탈취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설득을 선택지에 넣었다는 건, 곧 아크 내에 잠입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타티아나 벨로프는 네이비 라인의 소속이다.'

네이비 라인은 아크의 전방으로 분류되는 첫 번째 라인으로서, 스테이지로 치면 무려 51번째부터 60번째까지의 스테이지에 해당한다.

기본적으로 레드 라인의 수비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경험 많고, 거친 병사들이 모여 있다는 뜻이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이라면, 지금은 뒷처리 기간이라는 점이다.'

웨이브가 끝난 후, 아크는 뒷정리를 위해서 아크의 성벽 위에 차폐막을 설치하고 전선에 있는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를 태우는 작업을 거친다.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으며 열 감지 센서가 무력화된 지금이라면 아크 내에 진입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설득과 탈취.

화합과 강제.

대화와 강요.

리스크가 있는 방법과,

리스크가 없는 방법.

그중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는 이미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좋아.'

결심을 마친 나는 온천을 나섰다.

방식은 정했으니, 더 이상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삼 일. 그 안에 끝낸다.'

나는 텐트로 돌아갔다.

지금은 쉬어야 할 때였다.

< 성물(聖物) (2) > 끝

그걸 감안한다면 다시 봐도 놀라운 성장세였다.

'이 몸뚱어리가 지나칠 정도로 강인한 것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겠지.'

아침이 밝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해가 중천에 떠 있었으니 조금은 늦은 아침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격전 뒤에 충분한 휴식을 취했습니다! 찢어진 근육이 회복하며 근력과 체력이 상승합니다.]

[근력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3 -> 14]

[체력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5 -> 16]

격렬했던 여정 끝의 달콤한 휴식.

그 끝에 찾아온 건 그보다도 더 달콤한 성장이었다.

'이 정도 수준이면··· 여러 가지 고려했을 때 거의 오렌지 라인급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어.'

근력과 체력 능력치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능력치인 만큼 올리기가 무척이나 까다롭다.

오죽하면 유저 커뮤니티에서 현실에서 체력과 근력을 늘리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는 소리까지 나올까.

이미 나는 지난번 실험탄 GHOST-157 회수팀과의 전투에서 한계를 넘어선 움직임을 몇 번이나 취했다.

아무리 뼈 갑옷의 보조가 있었다고는 해도, 무려 헨릴 중사를 비롯한 아크의 훈련병들이 포진한 회수팀을 근접 전투로 압도했다.

분명히 신체에 부담이 있을 만도 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내 신체는 어디 한 곳이 고장 나기는커녕 그걸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아버렸다.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아크 바깥에서 버틸 수 있겠지.'

칼 마커스는 아크 외부 태생인 것도 모자라서 애초에 아크 바깥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인물이다.

비록 훈련병들과 내가 훈련소 동기 같은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들과 내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다는 걸 생각한다면 이런 놀라운 성장세를 가지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는 소리였다.

'뭐, 그게 지금 중요한 건 아니고······.'

아침 겸 점심으로 헬하운드 고깃국을 준비한 나는 그것을 한술 뜨고는 절망적인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미 멀티 칼로리 바를 꽤 많이 먹었기에 이제부터라도 슬슬 마수 요리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질겅, 질겅─

···대체 어떻게 고기를 먹는데 고무 씹는 식감이 날 수 있지?

'···시간이 날 때 연구라도 좀 해야겠어.'

의식주라는 소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니듯이 먹는 건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군인에게 있어서도 맛있는 먹거리는 사기를 높이고 전투력을 상승시킨다.

하물며 이런 야생에서 홀로 살아가는 나에게 있어서 맛 없는 음식이란 곧 삶의 의욕을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이다.

예전에 모니터 바깥에서 볼 때야 캐릭터가 뭘 먹든 포만감과 영양분만 채우면 되니 맛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 없었으나, 직접 먹는 입장이 되니 실로 심각한 문제였다.

'물론 아크 내에서 식료품을 구해오는 게 가장 좋긴 하겠지만······.'

운이 좋다면 가끔은 그런 게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자주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으니 본질적으로 식량은 내가 확보해야만 했다.

'이런 데 와서 요리 연구를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중에 모래바람 상단 녀석들에게 향신료 같은 거라도 구해봐야겠어.'

물론 이 맛 대가리 없는 음식이 향신료 따위로 커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꾸역꾸역 식사 아닌 식사를 마친 나는 본격적인 성물 탈취 작전을 위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크에 잠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우선, 계획부터.'

물론 내가 아크에 잠입해본 게 한두 번은 아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아크의 군인이라는 신분과 더불어서 그림자단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의 나는 완전한 혼자였고, 이 상황에서 아크에 잠입하기 위해서는 완벽을 기해야만 했다.

'실수란 있을 수 없어.'

아크는 적이 많다.

다른 도시의 피난민들이 뭉쳐서 만든 크로노스 연합은 물론이고 모트교와 그림자단, 그리고 그외 군소 세력까지 합친다면 이 세계에서 아크보다 많은 적을 지닌 세력은 모트교 정도뿐이다.

모트교가 평소에 저지르는 행패를 생각한다면, 아크가 얼마나 많은 적을 지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크는 침입자에게 조금의 자비도 없다.

진입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물론 지금은 아직 시나리오 초창기니까 조금 덜하긴 할 테지만······.'

아직 시기로 치면 크로노스 연합도 막 세력을 형성하는 시기고, 더불어서 모트교의 패악질이나 그림자단의 암약도 그다지 많지 않은 시기다.

아크의 경계도 상당히 약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

하물며 지금은 웨이브 직후였으니, 아크 내에 잠입할 거라면 지금이 가장 적기였다.

'진입 방법은··· 역시 그것뿐인가.'

현재 아크의 감시 체계는 마수 시체 소거 작업으로 인해서 열 화상 센서가 잠시 멈춰 있는 상태다.

그걸 감안한다면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아크 잠입 루트는 총 두 가지 정도.

'하수도를 통한 방법과, 블랙 라인을 통하는 방법.'

레드 라인의 시나리오가 5번째를 넘어가게 되면, 한 가지 서브 시나리오가 발생한다.

바로 아크의 외벽을 타고 있는 해자와 그곳과 연결된 하수도를 통한 마수와 마물의 습격이다.

그렇기에 그 이후가 되면 하수도를 통한 진입로는 봉쇄된다.

즉, 하수도를 이용할 거라면 지금이 적기라는 소리.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은······.'

블랙 라인.

한때 아크의 최전방 전선이었던 그곳은 이제 폐허만 남은 죽음의 땅이 되었다.

언제나 굳건하게 아크를 수호하던 성벽은 무너져 내렸고, 그곳을 지키던 군인들 역시도 사라졌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직 남아 있는 게 있었다.

'블랙 라인에는 로즈 라인과 연결된 비밀 통로가 있다.'

시나리오 후반부까지도 건재한 통로인 만큼 당연히 지금도 사용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아마 한번 사용한 통로는 사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

아크는 바보가 아니다.

침입자가 발생했다는 걸 알게된다면 필시 그 루트를 조사하려 할 테고, 그렇게 되면 내 흔적을 찾게될 터.

'어차피 하수도를 통한 루트는 얼마 지나면 사용하지 못하게 돼. 차라리 내가 쓰는 게 낫겠지.'

경로를 정했으니, 이제 남은 건 목적지에 대해서 알아내는 것이다.

성물은 어디에 있는가?

'우선, 타티아나 벨로프의 개인 집무실부터 찾아야겠지.'

우선 성물이 있는 위치를 알아내는 게 이번 계획의 핵심이었건만, 애석하게도 주어진 정보가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네이비 라인.

소령.

에테르 적합자.

외부 임무를 하는 직책.

벨로프 패밀리의 일원.

대충 이 정도의 근거만을 가지고서 타티아나 벨로프의 집무실을 찾아야 한다.

그야말로 사막에서 바늘 찾기가 따로 없었으나,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이미 내가 바늘이 있는 몇몇 장소들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조건들을 대충 추려 보면··· 가능성이 있는 곳은 대략 스무 곳 정도인가.'

여기에서 타티아나 벨로프가 안톤 벨로프의 딸이라는 가정까지 추가한다면, 경우의 수는 더욱더 줄어든다.

'가능성이 있는 곳은 총 다섯 곳.'

소령이라는 직급과 안톤 벨로프의 딸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나온 경우의 수였다.

만약 타티아나 벨로프가 안톤 벨로프의 딸이 아니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경우의 수가 더 추가될 테지만, 우선은 저 다섯 곳을 우선시해서 찾는 게 옳았다.

'설령 타티아나 벨로프의 집무실을 찾는다고 해도, 만약 그곳에 성물이 없다면······.'

가능성은 거의 반반이었다.

모트교의 세 가지 성물은 각기 다른 모습과 크기를 지니고 있다.

거기에는 평소에 품에 넣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것도 있고, 사람보다도 큰 것도 있다.

'일단, 후자는 아니야.'

애초에 후자였다면 마수들에게 쫓기는 과정에서 그냥 버리고 도망쳤을 것이다. 혹은 그냥 지닌 채로 잡혀서 죽었거나.

그런데 타티아나 벨로프는 끝까지 도망쳤다.

성물의 종류가 품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물건이라는 뜻이다.

'즉, 성물을 타티아나가 평소에 지니고 다닐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소리.'

나에게 있어서는 영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렇다면··· 성물을 강제로 타티아나 벨로프와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하자, 생각해.'

나는 타티아나 벨로프라는 인물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모습과 행동에 비쳐서, 행동 양식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는 있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인데도 마지막까지 성물을 품에 쥐고 있었다. 상당히 성실한 성격이다.'

'거기에 더해서 정체 모를 은인에 대한 정보까지도 찾으려 했지. 어느 정도의 신의까지도 있다는 뜻.'

'그렇다면······.'

타티아나 벨로프는 필요 이상으로 임무에 충실하고 성실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 그녀라면 성물의 정체를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간에 외부 임무를 나서게 된다면 그녀는 성물을 안전한 장소에 놓고 임무에 나서려 할 터.

'우선, 타티아나 벨로프를 밖으로 유인한다.'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마침, 얼마 전에 나에게 선물을 가져다준 산타클로스들이 적당한 물건을 전해주었으니까.

'좋아.'

굳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나는 바로 행동에 개시했다.

*

네이비 라인의 전선.

평소였다면 위험해서라도 절대로 오지 않았을 장소지만, 웨이브 직후인 터라 전선은 마수 그림자도 찾지 못할 정도로 한적했다.

본격적인 출발을 앞둔 나는 아크의 전선을 바라보았다.

'음.'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아니, 매연이라고 해야 할까.

매캐하기 짝이 없는 공기를 맡으며 나는 안에 방독면을 쓰고는 그 위로 뼈 가면을 썼다.

아무래도 저 연기를 그냥 맡고 있는 건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 복장은 평소와 같았다.

뼈 가면과 위장용 판초.

그리고 내 옆에는 예전에 비행종에게 납치 당했던 병사의 시체 한 구가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친구였다.

나는 불길이 다가오는 곳 바로 옆에 시체 옆에 파손된 권총 한 자루를 옮겼다.

마치 구조를 요청하다가 불길에 휩쓸려서 죽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조용히 아크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지금 아크의 성벽과 나 사이의 거리는 약 3km.

여기서 몇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아크의 색적 범위 안에 들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불길로 인해서 시야는 물론이고 열 감지 센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지.'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외부인이 아크에 잠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라는 소리였다.

나는 조용히 하늘을 향해 총구를 조준하고는, 살며시 방아쇠를 당겼다.

피우우우우웅────!

작지만 요란한 소음.

번쩍이는 불빛.

신호탄이었다.

곧이어서 하늘로 치솟은 신호탄에서 퍼진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구조 요청.

안 그래도 웨이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인 만큼, 조난자의 존재는 꽤 그럴듯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요란한 구조 요청을 아크에서 못 알아차릴 리가 만무했다.

지이이이잉─

아크의 성문이 천천히 내려간다.

이미 대기 중이던 수색팀이 파견되었다는 증거였다.

'과연··· 상당히 빠른데.'

시간상으로는 5분도 채 되지 않는 아주 기민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는다면 저 수색팀 중에는 타티아나 벨로프 역시도 포함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곳은 다름 아닌 그녀가 있는 네이비 라인의 전선이었으니까.

이제, 준비는 모두 끝났다.

'가볼까.'

성물을 가지러 갈 때가 됐다.

< 성물(聖物) (3) > 끝

신호탄은 이미 쏘아졌다.

나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두른다.'

나는 아크의 감시 카메라와 열 감지 센서를 피해서 불길 속에 몸을 숨기며 바쁘게 움직였다.

이 와중에 네이비 라인에서 파견한 정찰대와 마주쳐서는 안 되기까지 했으니,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 위치라면··· 가장 가까운 하수도는 14번 게이트와 15번 게이트 사이.'

5번째 스테이지가 지난 뒤에 서브 시나리오가 발동하게 되면, 단순히 쇠창살로 막혀 있는 지금의 하수도와 해자 사이는 시멘트와 철근으로 메워지게 된다.

하수 처리에서 어느 정도 곤욕을 감수하면서도 아크의 안전을 우선시하겠다는 판단이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아크의 약점 중 하나인 건 사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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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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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래도 여전히 아크의 약점 중 하나인 건 사실이지만.'

고위 등급의 마수나 마물 중에는 시멘트나 철근을 스티로폼처럼 부술 수 있는 놈들이 얼마든지 있다.

아무리 시멘트와 철근으로 메웠다고 한들 안심할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거의 다 왔나.'

마침내 아크와의 거리가 1km까지 좁혀지자, 멀찍이서 정찰대의 모습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저곳에 타티아나 벨로프가 함께 있는지 확인하고 싶지만··· 그럴 여유는 없어.'

만약 그런 짓을 했다가는 상대 역시도 나를 발견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터였다.

그 왜, 모 철학자도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들여다볼 거라고.

이럴 때 쓰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7초 정도 여기서 대기한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정찰대와 나 사이의 거리가 적지는 않았다.

하지만 네이비 라인의 군인쯤 되면 감각 역시도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군인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터.

'정찰대 하나하나가 헨릴 중사 이상의 강자들이라고 보는 게 옳겠지.'

상황이 그랬으니 신중함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3, 2, 1······ 지금.'

정찰대의 시선이 다른 쪽을 향하기 무섭게 내가 곧장 다른 화염 근처로 몸을 던졌다.

그와 함께 다시금 정찰대의 시선이 내가 있는 곳을 향했을 때, 이미 내 몸은 화염에 의해 가려진 뒤였다.

'700m··· 670m······.'

나는 화염 속에 몸을 의탁한 채로 조금씩 아크의 성벽을 향해서 다가갔다.

연기를 막기 위해서 네이비 라인 위로 덮여 있는 차폐막은 지금 나를 지켜주고 있는 아주 소중한 보호막과도 같았다.

'14번 게이트의 카메라가 돌아간다.'

나는 곧장 불꽃 밑에 몸을 웅크렸다.

위장용 판초 덕분에 어지간해서는 나를 발견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여기에서 어설프게 움직였다가는 전신이 후끈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바람구멍이 나서 아주 시원해질 테니 말이다.

'왼쪽으로 40도가 돌아가고, 그다음··· 지금이다.'

카메라의 사각으로 내달린 나는 또 다른 화염에 몸을 의탁했다.

어느덧 해자까지의 거리는 500m.

고지가 코 앞이었다.

'이 거리부터는 어설프게 숨어봤자 바로 걸려. 기회가 생겼을 때 단번에 돌파한다.'

나는 조용히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았다.

카메라 렌즈의 움직임까지 읽는 건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지금의 나에게는 가능했다.

['저격수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세상이 느려진다.

모든 게 확대되어 보인다.

지잉.

지이잉─

조금씩, 조금씩.

카메라가 움직이고, 그 안에서 렌즈가 별도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왼쪽으로 20도, 오른쪽 대각선으로 15도, 다시 오른쪽 위로 20도.'

요란하게 움직이는 카메라와 렌즈의 움직임의 사각을 포착하는 건 일반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지금 아크의 전선에 드리운 불꽃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본래는 없었던 사각이 화염으로 인해서 만들어지고, 본래는 완벽했던 아크의 방비에 허점이 드러났다.

'지금.'

뿌득, 뿌드득─!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신체가 또다시 한계를 넘으며 거의 반쯤 날다시피 발걸음을 내디뎠다.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그사이에 나는 성벽 밑에 있는 해자까지 도착해야만 했다.

'400m··· 350m······.'

화염과 카메라의 사각.

그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며 나는 점차 네이비 라인의 전선 앞으로 내달렸다.

'100m, 50m······.'

마침내 해자가 그 모습을 드러내자 나는 망설임 없이 그곳에 몸을 내던졌다.

해자의 깊이가 얕지는 않았지만, 어설프게 고민했다가는 그대로 발각이 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풍덩!

아슬아슬하게 발각되지 않고서 어떻게 해자 밑까지 도달했으나, 진짜 잠입은 지금부터였다.

'입구를 찾아야 해.'

지금 해자에 있는 물의 성분은 아크로부터 흘러나온 하수와 마수의 시체와 피 같은 온갖 것들로 어우러져서 독성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하수도의 입구는 해자 밑에 있었으니, 당연히 그걸 찾기 위해서는 이 빌어먹을 독물 속에 잠수를 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가면 아래에 방독면을 차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도 완전하지는 않았다.

'방독면으로 압력을 버틸 수 있는 시간은 1분 내외··· 이것도 숨을 참는다는 가정 하에 가능하다.'

"후······."

애석하게도 망설일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흡!"

한껏 숨을 들이쉰 나는 그대로 해자에 있는 녹색 물 아래로 잠수를 했다.

'분명히 이쯤이었던 거 같은데.'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따라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독물의 벽을 더듬다 보니, 이내 익숙한 촉감이 느껴졌다.

쇠창살이었다.

'찾았다.'

애석하게도 지금 나에게는 수중용 절단기가 없었기에 나는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네 차례다.'

[기잇.]

암석화가 된 뼈 촉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긱-

끼기긱─

창살의 두께가 제법 되었던 터라 암석화가 된 뼈 촉수들이 쇠창살을 긁어대는 데도 작업의 진척이 느렸다.

'···숨 막혀.'

벌써 일 분이 지난 탓인지 서서히 방독면이 침수되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저 독물을 그대로 입에 흡입했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터.

'···됐다!'

마치 영겁처럼 느껴지던 작업이 끝나고서, 아크의 하수도와 해자를 가르던 쇠창살이 잘렸다.

나는 곧장 쇠창살을 들어내고 그 속으로 헤엄쳤다.

"콜록! 콜록!"

간신히 아크의 하수도로 잠입하는 데 성공한 나는 몇 차례 기침을 하고는 위장용 판초를 접었다.

'이곳에서는 오히려 눈에 띨 뿐이지.'

그리고 뼈 가면 역시도 집어넣었다.

뼈 촉수들까지도 모조리 안으로 갈무리하고 나니, 이제 내 모습은 레벨 3짜리 보호복을 걸친 평범한 아크의 병사가 되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아크에 잠입하려면 군인으로.

'뭐··· 그 전에 옷 좀 말려야겠지.'

유독 가스가 가득찬 이곳에서 불을 피울 수는 없었으니 나는 조금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했다.

'알지? 알아서 말려.'

[···기잇.]

현재 뼈 기생체는 보호복의 에너지원과 연결되어 있다.

평상시에는 그 에너지원까지 사용할 일이 드물지만, 이번에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치이익─

보호복에서 뿜어져 나온 열기와 함께 푹 젖어 있던 옷이 점차 마르기 시작했다.

보호복의 에너지원을 의도적으로 오버드라이브 시켜서 열을 발생시키는 원리인데··· 조금 낭비이긴 해도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기이익······.]

힘이 빠진 뼈 기생체가 우는 소리를 했다.

옷을 말리는 데 좀 과할 정도로 힘을 사용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만 참아.'

그렇게 아크 병사로의 의태를 마친 나는 하수도와 연결된 사다리를 잡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는다면 이쪽에 있는 사다리 위에 네이비 라인의 정찰대 병영이 있을 터였다.

덜컥-

조용히 주변을 살핀 나는 인근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조용히 하수도를 빠져나왔다.

지금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내가 이동한 시간과 거리를 생각했을 때, 정찰대가 돌아올 때까지는 약 삼십 분.'

그 안에 모든 걸 끝내야 한다.

하수도를 빠져 나오자, 네이비 라인의 풍경이 나를 반겼다.

엄밀히 따지면 이곳은 군의 영내라고 볼 수 있는 장소라서 진짜 네이비 라인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말이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유동 인구는 거의 없어.'

지금 영내에 있는 대부분의 상주 인력은 웨이브 후의 뒷 정리를 위해서 차출되어 있다.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애초에 그런 시기를 노려서 온 거지만.'

그럼에도 걸리적 거리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영내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를 비롯한 보안 시스템.

어설프게 한 곳만 잘못 건드려도 네이비 라인의 수비대가 3분 내에 출동할 터였다.

'자연스럽게 움직이면서, 카메라에 얼굴을 노출하지 않게 움직여야 한다.'

첫 번째 난관은 정찰대 병영의 비밀 번호식 키 패드였다.

물론 어려울 건 없었다.

아크 내에 있는 대부분의 시설 비밀 번호라면 거의 꿰고 있었으니 말이다.

'0105. 정찰대의 부대 번호지.'

삑, 삑삑······.

띠딕─

당당히 비밀 번호를 누르고서 정찰대 병영에 들어선 나는 보호복에 달린 후드를 쓴 채로 카메라에 얼굴을 노출하지 않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소령급 장교의 집무실이 있는 곳은 2층. 이곳에 타티아나 벨로프의 집무실이 있을 확률이 제일 높아.'

그렇게 내가 병영 안을 거닐고 있을 때, 누군가 나에게 다가왔다.

"누구십니까?"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이 정도 상황은 나에게 있어서 상정했던 일 중 하나에 불과했다.

나는 빠르게 상대의 모습을 훑었다.

'계급은 일병, 보직은 행정병인가.'

그렇다면······.

"네이비 라인 작전사령부 소속, 제6 지원대의 칼라킨 중령이다."

정찰대의 상급 부대라는 소속과 중령이라는 계급을 밝히자 병사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사, 사령부에서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는지······?"

"타티아나 벨로프 소령을 만나러 왔다만. 내가 그걸 일일이 자네에게 보고해야 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타티아나 벨로프 소령은 부재중입니다만······."

그 정도야 당연히 알고 있다.

애초에 내가 타티아나 벨로프를 밖으로 유인한 것이었으니까.

물론 여기서는 마치 정말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던 것처럼 나올 필요가 있었다.

"오후 일정은 없다고 들었는데?"

"아··· 갑자기 긴급한 상황이 생겨서 출동했습니다. 곧 돌아올 겁니다. 저쪽에 가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니. 여기서 기다리지."

"아, 알겠습니다!"

병사는 나에게 경례를 하고는 도망치듯이 자리를 피했다.

모든 군인이 그렇겠지만 상급 부대에서 방문한 상급자와 대면하고 있는 자리는 불편하기 마련이었다.

'갔나.'

병사가 돌아가는 걸 확인한 나는 곧장 2층에 있는 집무실 앞의 이름을 확인했다.

[정찰대 특수 기동 타격담당관 타티아나 벨로프 소령]

그토록 찾았던 이름.

몇 번 정도 시행 착오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운이 좋았다.

'보안 시스템은 카드키 시스템인가. 이 정도라면······.'

아크의 보안 시스템은 화이트 라인과 레드 라인이 설계하고 만들어낸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언제라도 보안 시스템에 흔적 없이 접근할 수 있는 백도어를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한 접근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뼈 갑옷에서 뽑아낸 작은 뼈 바늘로 카드키 센서 밑 부분에 있는 작은 구멍을 이미 알고 있는 순서로 누르자, 곧이어서 카드키 패널에서 숫자가 나타났다.

백도어의 비밀 번호 입력이었다.

'···잘 안 보이네.'

난시 탓인지 패드의 숫자가 잘 안 보였다.

지금까지는 글자 같은 걸 볼 일이 없어서 몰랐는데··· 아무래도 패널티가 확실하긴 했다.

'뭐, 그거야 그거고······.'

나는 거침없이 백도어의 비밀 번호를 눌렀다.

삑, 삑삑.

띠딕─

마침내 열린 문틈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집무실은 평범했다.

아니, 안톤 벨로프의 딸이라는 배경을 생각한다면 싸늘해 보이기까지 했다.

'금고나 금고를 숨길만 한 장소는 딱히 보이지 않아.'

그때 타티아나 벨로프의 책상 서랍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자물쇠가 채워진 서랍이었다.

'···설마 여긴 아니겠지.'

이런 자물쇠를 여는 건 쉬웠다.

말 그대로 부수는 것도 쉽고, 뼈 갑옷을 조절해서 뼈 가시 하나를 만들어서 해제하는 것도 쉽다.

'아무리 그래도 여긴 아니겠지.'

아무리 타티아나 벨로프가 성실한 성격이라도 설마 이런 곳에 성물을 놔두었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그 성물을?

철컥-

···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허.'

자물쇠를 연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얼핏 보기에는 그냥 평범해 보이는 토템이었으나, 이게 무엇인지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

[송곳 토템] [??(??성)]

무언가의 송곳니로 만든 토템.

특정 조건을 만족시킬 시, 숨겨진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상세 보기"

──────────────

드디어 라고 해야 할까.

마침내 찾았다.

'모트교의 성물.'

< 성물(聖物) (4) > 끝

낯익은 토템의 모습.

동시에 낯선 감촉.

설명에는 그저 무언가로 표현되어 있었으나, 나는 이걸 무엇의 송곳니로 만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등급 외 용종, 앵켈렌스(Angkelenth).'

등급 외 용종.

말 그대로 측정이 불가능한 강함을 지닌 존재로서, 그 존재 자체가 이미 아크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재앙과도 같았다.

송곳 토템은 바로 그 엥켈렌스의 송곳니를 가공해서 만든 물건이었다.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나는 성물을 보호복 주머니 안에 넣어두고는 뼈 갑옷의 뼈들로 든든히 봉인했다.

누군가 나를 거꾸로 뒤집고 흔들어도 절대로 빠지지 않을 정도였다.

'곧장 빠져나간다.'

괜히 이곳에서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건 없었으니 말이다.

빠져나가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몇몇 병사들과 내가 마주치긴 했으나, 이미 나를 사령부 소속의 중령으로 알고 있었는지 병영 내의 병사들은 나를 보고서 흠칫하며 경례를 할 뿐, 별다른 말을 걸지는 않았다.

아무리 아크라고 해도 이곳은 군대였고, 상급 부대의 상급자에게 먼저 말을 걸 정도로 담력 있는 군인은 이곳에 없었다.

무난하게 네이비 라인 정찰대 병영을 빠져나온 나는 주변을 슬쩍 살피고는 내가 빠져나왔던 하수도의 맨홀로 향했다.

드르륵─

마수의 침입 방지 역할로서 만들어지기도 한 탓에 맨홀 뚜껑의 무게가 제법 되긴 했어도, 이제 14가 된 근력 능력치와 더불어서 강체의 신체 능력 향상, 거기다가 뼈 갑옷의 보조까지 있었으니 못 들 것도 없었다.

뚜껑을 연 나는 사다리를 잡고 천천히 그곳을 내려간 뒤에 다시금 뚜껑을 닫았다.

드르르륵─

하수도를 빠져나가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으나, 해자를 빠져 나간 뒤부터는 다시금 쉽지 않을 과정이 될 터였다.

'하수도를 통한 아크 잠입은··· 이제 앞으로 사용하지 못하겠지.'

다른 라인이면 몰라도, 적어도 네이비 라인에서는 그럴 확률이 높았다.

타티아나 벨로프가 침입자의 존재를 알리게 되면 필시 아크 내에는 침입자의 침입 경로에 대해서 조사할 테고, 머지않아서 내 침입 경로가 하수도라는 사실을 알아낼 것이다.

당연히 그에 대한 방비 역시도 강화될 터.

'이렇게 되면 5번째 스테이지에서 발생하는 서브 시나리오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겠어.'

뭐, 그 정도는 애초에 큰 영향을 끼치는 시나리오가 아니니 별로 상관없겠지.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나는 다시금 하수도 밑의 독물로 잠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했다.

'에휴.'

정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흡!"

다시금 숨을 참은 나는 독물 속으로 기꺼기 몸을 던졌다.

여기서 망설여봤자 변하는 사실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들어올 때처럼 쇠창살을 자르기 위해서 고된 시간을 참을 필요는 없다는 점이었다.

마침내 하수도를 빠져 나와서 해자로 나온 나는 쇠창살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쇠창살을 다시 붙여두고 가고 싶지만··· 수중용 용접기 같은 물건이 나한테 있을 리가 만무했다.

"후우······."

간신히 해자 밖으로 머리를 내민 나는 해자를 빠져나가기 전에 카메라 렌즈의 움직임을 살폈다.

'불길이 조금 줄어들었어.'

이 상황에서 불길이 잦아들었다는 건 곧 내 몸을 숨길 안전지대가 줄어들고 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서둘러야겠어.'

감시 카메라 렌즈의 움직임을 살피던 나는 기회를 포착하고는 그대로 해자 밖으로 몸을 던졌다.

드디어 아크를 빠져 나왔다.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이쪽에서 5초 정도 기다렸다가··· 다시 쭉.'

바뀐 불길과 함께 퇴로 역시도 바뀌었으나, 고작 그 정도로는 나를 붙잡을 수 없었다.

등 뒤에는 눈이 없다.

즉, 어찌 보면 아크의 색적 범위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아크에 들어오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 탓에 나는 아크에 잠입할 때보다도 더욱더 신중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거의 다 빠져 나왔나.'

그제야 한숨을 돌린 나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여기도 저기도 온통 화염뿐.

그럼에도 가야 할 방향을 잃지는 않았다.

'돌아가면 토템을 써먹을 곳에 대해서 궁리를 좀 해봐야겠어.'

모트교의 성물은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은 물건이다.

특히나 그게 나처럼 아크 바깥에서 살아가는 처지라면 더욱더 말이다.

'무엇보다도 이건 전투에도 활용할 수 있는 물건이야.'

모트교의 성물 중에는 너무나도 거대해서 혼자서는 도저히 운반이 불가능하거나, 발동 조건이 매우 까다로운 것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송곳 토템은 그중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 모트교의 세 가지 성물 중에서 가장 범용성 있고 쓰기 좋은 물건이었다.

'아크의 색적 범위는··· 대충 벗어났다고 보면 되겠어.'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비교적 편하게 이동해도 되겠지.

내가 마음을 놓은 그 순간.

[기긱, 기기기긱······.]

[키득······.]

[여기, 있구나?]

에테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명백한 경고였다.

'무언가··· 온다.'

단순히 에테르뿐만이 아니라 내 직감이 그렇게 외쳤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타오르는 불꽃뿐, 무언가가 다가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어디까지나 지상 위에서는 그랬다.

'설마.'

쑤우우욱─!

그와 함께 내 발밑에 있는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오며 무언가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통증을 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이어지는 2격을 피하기 위해서 몸을 굴렸다.

만약 예상하지 못했다면 피하지 못했을 정도로 예리한 기습이었다.

"어라?"

그림자에서 뻗어나온 건 사람의 형체를 한 무언가였다.

전신에서 일렁거리는 그림자가 서서히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눈이 쭉 찢어진 사내의 형체를 갖췄다.

나는 놈을 알고 있었다.

"피할 줄은 몰랐는데··· 이것 참 번거롭게 됐군요, 나으리."

얼핏 예의바라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이죽거림이 여실히 드러나는 말투.

내가 알고 있는 녀석이 분명했다.

'···잔영의 사르트(Sart).'

그림자단.

아크에 대적하는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이자, 진지하게 아크의 전복을 꿈꾸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집단.

잔영의 사르트는 바로 그 그림자단의 척후였다.

"···왜 나를 노리지?"

"그거야 나으리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르트가 이죽거렸다.

그 말마따나 놈이 나를 찾아온 목적이 무엇인지는 굳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역시, 성물을 노리는 건 모트교뿐만이 아니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첫 번째 웨이브를 일으킨 게 그림자단이라는 가설까지는 맞았던 셈이었다.

물론 그게 지금 이 상황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순순히 내놓으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나으리께서 그러지 않으실 거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거든요."

사르트의 발밑이 일렁거렸다.

내가 그 전조를 못 알아볼 리가 만무했다.

쐐새새색─!

그와 함께 뻗어 나온 그림자에서 무수한 가시가 치솟아 올랐다.

단 하나의 공격이라도 허용했다가는 그대로 꼬챙이 신세를 피할 수 없을 터였다.

"큭!"

전부 다 피할 수는 없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나는 단번에 뽑아든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샷건 모드로 변경한 뒤에 방아쇠를 당겼다.

탕!

사르트가 행하는 공격들은 비록 그 근원은 그림자지만, 공격을 행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형태를 갖춰야 한다.

즉, 물리적인 방법으로 저지하는 것 역시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간신히 샷건으로 몰려드는 가시들을 쏴서 막아내자, 사르트가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오호··· 대단하십니다, 나으리."

사르트가 한껏 여유를 부렸다.

하고자 한다면 당장 이 주위를 온통 가시밭으로 만들 수 있을 텐데도, 굳이 그러지 않는다는 건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절대적인 자신감 때문일 터였다.

'···전투는 피할 수 없어.'

애초에 상대를 나를 죽이려고 찾아온 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설령 성물을 순순히 넘겨준다고 한들 사르트가 나를 살려 보낼 가능성은 단언컨대 절대로 없었다.

나는 사르트와 나의 전력을 가늠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나는 이제껏 내가 겪어왔던 그 어떤 이보다도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너무나도 좋지 않았다.

'사르트는 그림자단 내에서 전투원이 아니야. 하지만······.'

비록 지금은 마치 인간처럼 말하고 있었으나, 사르트의 진정한 정체는 다름 아닌 2급 환상종 마물인 나이트메어였다.

지금의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절대 강자라는 소리였다.

'그림자단에게 성물을 빼앗기게 되면 모든 게 끝장이다.'

그림자단이 성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그 방식들은 설령 그림자단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나 같이 아크의 미래를 멸망으로 이끌게 된다.

설사 사르트와의 전투를 감수하더라도 그림자단에게 성물을 넘길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와중에도 사르트는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쐐색, 쐐새새색─!!!

그림자, 그림자, 더 많은 그림자.

그것들이 나를 향해서 각기 다른 모습과 모양으로 죽음을 연기했다.

타앙!

탕!

파앙!

"나으리, 슬슬 탄이 떨어지실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사르트가 이죽거렸으나 나는 굳이 그 오해를 정정하지 않았다.

상대가 오해를 하고 있다면 나는 그 오해를 이용하면 될 뿐이었으니까.

"이거나 처먹어."

철컥-

NO-13 유탄 발사기가 불을 토했다.

콰아아앙─!!!

자욱하게 일어난 연기.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는 잔영의 사르트에게 그럴듯한 피해를 주기는 어려울 터였다.

"이런··· 생각보다 화끈한 나으리셨군요."

예상했던 대로 사르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놈에게 피해를 주려면 그림자가 기거하는 지하 밑부분까지도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을 정도로 큰 돌파력을 지닌 무기여야 했다.

'마침, 나한테 그런 게 하나 있긴 하지.'

문제는 지금 그걸 사용할 수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방법은 있다.'

내가 재차 유탄발사기의 방아쇠를 당기자, 사르트에게서 여유가 사라졌다.

아무리 2급 환상종일지라도 유탄 발사기를 이렇게까지 난사하는 상대로 언제까지고 여유를 부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잔재주가 대단하시군요, 나으리. 분명히 진즉 잔탄이 떨어졌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사르트는 내 유탄 발사기의 잔탄이 떨어질 때 접근하기 위해서 때를 기다리고 있던 듯했으나, 내가 그 틈을 드러낼 리가 만무했다.

"별 수 없지요."

사르트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여유를 부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우우우우우──

사르트의 발밑에서 뻗어나간 그림자가 순식간에 주변의 대지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도망쳐도망쳐도망쳐도망쳐도망쳐도망쳐도망쳐도망쳐도망쳐도망쳐도망쳐도망쳐도망쳐도망쳐도망쳐도망쳐도망쳐도망쳐도망쳐도망쳐───]

에테르가 요동치며 경고를 전했으나, 이곳에서 내가 도망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기회는 한번.'

무수한 그림자가 나를 향해 뻗어왔다.

'지금!'

그와 함께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뼈 갑옷이 본격적인 힘을 발휘하며 그림자와 맞섰다.

비록 2급 마물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일지언정, 아주 잠시 시간을 버는 건 가능했다.

"···스컬 나이트? 이건 의외의 정체로군요. 나으리. 저도 허투루 대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 전에··· 이거나 처먹어."

"음?"

그와 동시에 내가 사르트를 향해 권총 한 자루를 겨누기 무섭게 사르트가 한 걸음 물러나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사르트에게 겨눈 건 다름 아닌 DR-404 리볼버였으니까.

"···제법 위험한 걸 들고 계시는군요."

역시나 DR-404 리볼버를 알아본 사르트가 단번에 경계 태세를 취하며 그림자로 전신을 감쌌다.

아무리 2급 환상종이라 할지라도 이 물건에 제대로 맞게 되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차피 이거 못 쓰거든.'

내가 고장 내버렸으니까.

내가 굳이 이런 블러핑을 친 이유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아주 찰나의 시간.

나에겐 그거면 충분했다.

'지금이야, 먹어.'

내가 뼈 기생체에게 명령했다.

그와 함께 뼈 기생체가 보호복 주머니 안에 있던 송곳 토템을 그대로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아그작, 아그작─

그림자단에게 성물을 넘기느니, 그냥 이대로 먹어 치워버리는 게 낫다.

설령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말이다.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은 없지만··· 방법이 없어.'

나는 단 한 번도 뼈 갑옷에게 성물을 먹이는 미친 짓을 해본 적이 없다.

애초에 내가 뼈 갑옷을 활용한 경우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굳이 뼈 갑옷을 활용할 필요가 없었지.'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더 디펜스를 플레이할 때 대부분 뼈 갑옷이 아니라 스컬 나이트로 플레이했다.

그게 효율면에서 압도적으로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오래전에 스컬 나이트 상태로 모트교의 성물을 흡수하려 시도해본 적은 있었으나, 결과는 늘 죽음이었다.

인간의 몸으로는 성물의 힘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마물이라면?'

충분히 해볼만한 도박.

"지금 무슨 짓을······!"

까득, 까드득─

내 몸속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무언가 이변을 알아차렸는지 사르트가 달려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끼긱, 끼기기긱───!]

뼈 갑옷에서 기괴한 비명이 폭발하듯이 터져 나왔다.

< 성물(聖物) (5) > 끝

['뼈 갑옷'이 '송곳 토템'을 흡수했습니다!]

['송곳 토템'의 힘이 너무 강렬하여 흡수율이 제한됩니다.]

──────────────

[뼈 갑옷(Lv.3)] [★★★★★★★(7성)]

아크의 기본 보급형 방호복(Lv.3)의 에너지원에 가축화시킨 뼈 기생체를 연결한 방어구.

뼈 기생체의 숙주로 6급 네임드 괴수종 이끼의 쿠프의 심장이 사용되었다.

뼈 기생체의 힘과 이끼의 쿠프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다.

이끼의 쿠프의 피와 살을 섭취하여, 사용할 수 있는 이끼의 쿠프의 힘이 늘어났다.

등급 외 용종 엥켈렌스의 송곳니를 흡수했으나, 아직 온전히 그 힘을 흡수하지 못했다.

일정 시간 동안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할 수 있다.

현재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 : 3%

"상세 보기"

──────────────

'과연······.'

본래 송곳 토템이 지닌 힘이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이끼의 쿠프를 흡수한 뼈 기생체조차도 그 힘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했다.

아마 뼈 기생체가 엥켈렌스의 힘을 온전히 흡수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그 수치는 고작 3%.

하지만, 지금은 그걸로도 충분했다.

"나으리,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몰라도 제가 두고 볼 것 같습니까?!"

내내 여유로웠던 사르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당혹감이 드러났다.

그러나 요동치기 시작한 뼈 갑옷에서 뿜어진 촉수가 그 앞을 막아섰다.

"미천한 미물 따위가!"

2급 환상종 마물이 보기에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말이다······.

'얘가 조금 예민한 시기거든.'

이른 바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볼 수 있었다.

[끼깃, 끼기기긱!!!]

사방으로 뻗어 나간 뼈 촉수가 마구잡이로 난동을 부렸다.

이끼의 쿠프의 지닌 암석화.

거기다가 엥켈렌스의 송곳니까지 먹어치우며 그 강도가 놀라울 정도로 강해진 탓에 이제 뼈 촉수들은 사르트의 그림자에도 맞섰다.

쐐색!

쐐애애액─!!!

각각 그림자와 뼈로 이루어진 창과 가시들이 사방으로 난무했다.

비록 이쪽에서 유효타를 가하지는 못하고 있었으나, 이전까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철컥-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동 소총 모드로 변경한 Ark-15 자동 소총을 사르트의 심장에 겨눈 채로 끊임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비록 이걸로 유효한 타격을 주기는 어려울 테지만 사르트의 신경을 거슬리기에는 충분했다.

드르륵-

[일반 모드로 변경합니다.]

'굳이 소음 모드를 할 필요는 없겠지.'

지금 소음 따위를 신경 쓰다가는 내가 죽게 생겼으니 말이다.

쾅!

콰콰쾅─!

끊임없이 쏟아진 탄알이 만들어낸 탄막에 사르트가 사납게 웃었다.

"대체 어떤 잔재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적당히 하시지요, 나으리!"

사르트의 그림자 가시가 나를 향해서 곧게 뻗어온다.

그러나 이내 뼈 갑옷에서 뿜어져 나온 방패가 그것을 막아냈다.

까앙─!

그림자와 뼈가 맞부딪치며 거친 불꽃이 튀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어느덧 수십 개로 늘어난 그림자와 뼈 촉수들이 서로를 향해 흉험한 기세를 토해냈다.

그제야 무언가 이질감을 느낀 사르트가 말했다.

통상적인 스컬 나이트가 나이트메어에게 대항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이 힘······ 나으리, 지금 나으리께서 무슨 짓을 한 건지 아십니까?"

아무래도 뼈 갑옷이 송곳 토템을 먹어치운 사실은 눈치챈 모양이었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사르트는 나를 스컬 나이트로 알고 있었으니 내가 먹어치운 걸로 알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글쎄?"

애써 이죽거렸으나 점점 강해지는 공세에 힘이 부치는 게 사실이었다.

상대는 2급 환상종 마물.

뼈 기생체가 엥켈렌스의 송곳니가 지닌 힘을 온전히 흡수했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역부족이었다.

"나으리의 배를 갈라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꺼내야 할 게 있는 것 같거든요!"

쐐새색─!!

사르트가 흉성을 토해냈다.

그와 함께 그림자 칼날들이 뼈 갑옷을 베어 가르고 지나갔다.

하나씩, 하나씩.

작은 상처들이 늘어갔다.

'···이대로는 안 돼.'

영리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판다.

아무래도 두 번째 굴을 사용할 때가 온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한데······.'

내가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 사르트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세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이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슬슬 진짜 힘을 뿜어낼 생각인 듯했다.

"죽음보다 더한 공포와 고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아쉽게도 그건 나으리 뜻대로 되지 않겠군요."

저변이 어둠으로 물든다.

순식간에 주변을 어둠으로 물들인 사르트가 서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혼자지만, 혼자가 아닌.

저건 그림자가 아니다.

저건 어둠이었다.

"진정한 악몽(Nightmare)을 보여드리지요, 나으리!"

2급 환상종 나이트메어의 진정한 힘.

그것이 발현하며 주변에 있는 모든 게 어둠에 잠식되어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칠흑 같은 어둠이 다가온다.

[기에엑───!]

뼈 기생체가 반항했으나 애초에 저건 물리적인 힘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스스스스─────!!!

순식간에 시야가 어둠에 잠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에는, 오직 나 혼자뿐이다.

[기이잇······.]

나는 이 어둠을 알고 있었다.

나이트메어의 진정한 힘이라고 볼 수 있는 악몽 재현(惡夢 再現).

조금씩, 조금씩.

눈앞에 어둠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건 형체이기도 했고, 동시에 아니기도 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러한 일들이었다.

-지금부터, 나으리의 손톱과 발톱을 모조리 뽑겠습니다.

이죽거림과 함께 어둠이 나를 에워쌌다.

몸부림치며 반항을 해보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사르트가 만든 영역.

아니, 하나의 세계라고 봐도 좋은 장소였으니까.

투둑─

툭-

나를 에워싼 어둠이 단번에 내 손톱과 발톱을 뽑았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가짜다.

하지만, 고통과 공포는 진짜다.

"···큭!"

이건 가짜다. 이건 가짜다.

나는 그 말을 되뇌면서 이를 악물고서 버텼다.

-잘 참으시는군요. 하지만 이건 어떨까요?

어둠이 나를 유린한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별 수 없나.'

악몽 재현이 두려운 진짜 이유는 육체가 아닌 정신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도 악몽 재현에 당해서 몇 번이고 죽었던 경험이 있었으니, 아무리 사르트가 전투 담당이 아니다 하더라도 2급 환상종 마물의 힘은 오롯이 진짜였다.

'이건 물리적으로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야.'

그렇다면 물리적이지 않은 힘으로 막아내면 될 뿐.

천천히 정신을 집중한다.

내 몸 안에, 그리고 주변에 퍼져 있는 온갖 종류의 에테르가 느껴졌다.

[키득······.]

[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도와?]

[칼 마커스······.]

[우리가 왔어.우리가 왔어.우리가 왔어.우리가 왔어.우리가 왔어.우리가 왔어.우리가 왔어.우리가 왔어.우리가 왔어.우리가 왔어.]

에테르가 들썩였다.

잠시 어둠을 물러내는 듯했던 에테르는 이내 다시금 몰아친 어둠에 속절없이 밀려났다.

-이런 하찮은 힘으로 어쩌시려고요? 나으리.

어둠 속에서 사르트의 조소가 울려퍼졌다.

고작 2레벨의 에테르로는 2급 환상종 마물에게 대항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틈은 벌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아주 작은 틈.

그리고 그 틈은 방금 벌었다.

'지금, 해.'

그제야 지금껏 어둠에 짓눌려 있던 뼈 기생체가 반응했다.

가진 힘을 너무 많이 쓴 탓에 거의 기능이 멎어가고 있었으나, 마지막 최후의 한 수를 뽑아낼 힘은 있었다.

스르륵──.

뼈 갑옷에서 흘러나온 가느다란 촉수 하나.

나는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그걸 잡아서 뽑은 뒤에 거침없이 그걸 땅에 박았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5분 12초.]

-응? 이게 무슨······.

스스스스─!

그와 함께 어둠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물론 2급 환상종 마물 정도 되는 상대에게 성물의 힘은 거의 통하지 않는다.

본능보다는 온전한 이성을 갖춘 상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르트를 아주 잠시 물러나게 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이 따위 잔재주를······!"

어둠이 물러간 순간.

나는 이 틈을 타서 사르트를 향해 HE2050 권총의 총구를 조준했다.

주 사용 목적 자체가 보조 무장인 탓에 평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총기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여기에 장전되어 있는 탄창은 평소와는 다른 탄창이기 때문이었다.

"고작 그 정도로는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요? 나으리."

"나도 알아."

"잔재주는 소용없습─"

철컥─

서서히 방아쇠가 당겨지고,

삐이이이이이잉─────!!!

권총에서 뿜어져 나간 한 줄기의 붉은 섬광이 사르트를 스쳐서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신호탄이었다.

"지금 어디로 쏘는······ 아니, 지금 뭘 한 겁니까? 나으리."

"뭐긴."

신호탄을 왜 쏘겠냐?

그거야 당연히······.

[여기, 있다. 우리는, 여기, 있다.]

[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

[오고 있어······.]

에테르가 들썩였다.

지금 내가 보낸 구조 요청이 아주 잘 먹혀들었다는 걸 의미했다.

"···어지간히도 제가 우습게 보였나 봅니다, 나으리. 아크에서 이곳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사르트의 주위에서 그림자가 넘실댔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명료했다.

시간을 끄는 것.

"무슨 수작인지는 몰라도, 그때까지 나으리께서 살아있을 거라는 생각은 마십시오!"

사르트의 그림자가 일렁거리며 이내 송곳 모양의 그림자들이 나를 향해서 쇄도했다.

다시금 악몽 재현을 사용하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쐐새새색─!!!

다시금 전투가 이어졌다.

하지만 나에게는 한 가지 무기가 더 있었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4분 11초.]

엥켈렌스의 힘이 담긴 촉수를 땅에 하나씩 박을 때마다 사르트의 몸이 움찔움찔하며 어둠이 멈춰섰다.

비록 그때마다 영역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극단적으로 깎여 나갔으나, 나에게는 그걸로도 충분했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시간을 끄는 거였으니까.

"잔재주 하나는 여전하십니다!"

그림자 창이 나를 향해서 다시금 쇄도한 그 순간.

쿵!

쿠우웅─!

흔들리는 지축.

"······음?"

사르트는 이게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듯했으나, 나는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무소음 호버링 바이크가 기기의 생명인 무소음 모드조차도 끄고서 최고 속력을 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드디어 왔나.'

사르트는 아크에서 지원이 오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거라고 예상했겠지만, 미처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이미 이 평원에는 파견되어 있는 부대가 하나 있다는 걸 말이다.

아크의 병과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건 당연히 전투병, 그중에서도 소총수다.

그 외에는 중화기를 다루는 중화기병이나 포병, 그리고 기갑, 방공, 정보, 공병, 항공, 화생방, 정보통신 같은 보직들이다.

그러나 그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특수한 병과가 있다.

총기를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임무에 투입되는 이들이자, 아크 내에서도 선택받은 몇몇 이만 될 수 있는 특수 병과.

'에테르 전투병.'

대인전의 스폐셜 리스트.

네이비 라인의 정찰대 소속, 특수 기동 타격대.

위이이이잉──!!!

순식간에 내 앞에 나타난 열댓 가량의 호버링 바이크가 멈춰 섰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건 역시나 특수 기동 타격담당관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달고 있는 이였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또각, 또각─

유난히 굽이 딱딱해 보이는 군화를 신은 발이 서서히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벗어던진 헬맷 틈 사이로 익숙한 금발이 쏟아져 내렸다.

"구조 요청을 보낸 게 당신입니까? 칼 마커스."

타티아나 벨로프.

그녀가 내 구조 요청에 응답했다.

< 성물(聖物) (6) > 끝

타티아나 벨로프가 나타나기 무섭게 사르트의 그림자가 수십 개의 창과 가시의 형태를 이룬 채로 뻗어왔다.

"···대화는 나중에 하죠."

나는 기억하고 있다.

타티아나 벨로프가 마수 떼에게 형편없이 쫓기고 있던 광경을.

그러나, 예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스릉───!

섬광이 번뜩인다.

그와 함께 타티아나 벨로프의 배후를 덮치려던 그림자가 단번에 흩어졌다.

어지간한 물리력으로는 저런 일을 일으킬 수 없었으나, 타티아나 벨로프에게는 가능했다.

"방해마라, 마물."

현재 그녀가 입고 있는 보호복의 레벨은 최소 6.

내가 입고 있는 보호복의 레벨이 3인걸 감안한다면 이미 기본적인 성능부터 차원이 다르다,

거기에 더해서 오랜 전투로 인해서 지치고 상처 입었던 당시와는 달리, 만전의 상태인 타티아나 벨로프는 아무리 잔영의 사르트라 할지라도 쉽게 죽일 수 없는 상대였다.

"이거··· 어지간히도 우습게 보였나 보군요."

사르트가 사납게 웃었다.

더없이 소름 끼치는 미소였다.

"전부 죽여드리겠습니다, 나으리들."

스스스────!!!

저변에 물드는 어둠.

악몽 재현이 다시금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내려 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건 타티아나 벨로프 혼자만이 아니었다.

"포메이션 F-3. 상대는 1급 위험 마물로 지정된 2급 환상종 나이트메어다. 각자 위치로."

담담하게 내뱉어진 명령.

그러나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평범하지 않았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대원들.

하나하나가 에테르 전투병으로 이루어진 이들답게 그들은 순식간에 사르트를 포위했다.

"다시 한번 말한다. 상대는 1급 위험 마물로 지정된 2급 환상종 나이트메어다. 통용되는 화기는 최소 5레벨 이상의 화력을 갖춘 병기 혹은··· 플라즈마 소드 사용을 허가한다."

아크에서 개발하는 병기는 대부분 포나 총, 그리고 미사일 같은 원거리 화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접용 무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플라즈마 소드(Plasma sword).

에테르 전투병을 비롯한 몇몇 병과에만 허락되는 특별한 병기로, 말 그대로 플라즈마를 사출하는 사출기 형태의 검을 말한다.

근접용 병기라는 제한적인 용도.

에너지 효율이 썩 좋지 않은 탓에 오래 사용하지 못한다는 사용 시간의 한계.

고장이 잦은 낮은 내구도.

그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플라즈마 소드가 아크에서 가장 중요한 병과 중 하나인 에테르 전투병의 주력 장비로 지급되는 이유는 간단했다.

거의 절대적인 절삭력과 파괴력.

검(劍)이라는 단순한 용도를 넘어서 병기로서의 순수하고도 압도적인 위력.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타티아나 벨로프가 쥔 플라즈마 소드가 섬광을 그리자, 그림자가 숨어 있는 어둠이 통째로 갈라졌다.

콰카카카─!!!

땅이 뒤집히고, 어둠이 갈라진다.

빛이 번뜩일 때마다 점차 그림자가 숨을 곳이 사라졌다.

"고작 이까짓······!"

물론 상대는 2급 환상종 마물.

아무리 플라즈마 소드라 할지라도 호락호락 당해줄 상대가 아니었다.

스스스!

몰아치는 플라즈마 폭풍 속에서도 사르트는 개의치 않고 악몽 재현을 다시금 이 땅에 뿜어내려 했다.

만약 이게 순수한 일대일 간의 대결이었다면 그 시도는 성공했을 것이다.

다만, 사르트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지금 사르트와 맞서고 있는 건 타티아나 벨로프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목표를 포착했다."

그들은 팀이었다.

그것도, 2급 환상종 마물조차도 사냥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련하고 뛰어난 팀워크를 자랑하는 팀.

콰쾅─!!

내가 지닌 유탄 발사기보다 최소 2등급은 높은 유탄 발사기가 발사되며 사르트가 있던 자리에 작은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포격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콰카카캉!

콰카캉!

일정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 에테르 전투병 특성상 사격 적중률이 그다지 높지는 않은 듯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대하게 쏟아지는 화력은 제아무리 잔영의 사르트라 할지라도 쉽게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걸리적 거리게!"

사르트가 분노를 표출했다.

물론 돌아온 대답은 정정당당 호소에 대한 친절한 답이 아닌 폭발탄과 유탄이었다.

쿠르르릉─!!!

폭격이 이어질 때마다 그림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제 사르트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수모는, 잊지 않겠습니다. 나으리들."

그림자가 한곳으로 모였다.

노련한 군인인 타티아나 벨로프가 이게 의미하는 바를 모를 리가 만무했다.

"도망치려 한다!"

사르트가 그림자단 내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척후로서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모트교조차도 비할 수 없는 끈질긴 생명력과 도주력.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타티아나 벨로프의 플라즈마 소드가 뿜어졌음에도, 이미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놓쳤나."

만약 내가 나섰더라면 사르트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을 지도 모르나, 지금 시점에서 그건 별로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사르트도, 그림자단도.

비록 지금은 적으로 마주치긴 했어도 모두 이용하기에 따라서 각자 쓸모가 있는 녀석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성물의 힘을 발휘했다가는 쓸데없는 오해를 살 수도 있어.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지.'

여러모로 내가 나서지 않는 게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인가.'

구조 요청 덕분에 순간의 위기는 넘길 수 있었으나, 문제는 그 구조 요청이 마냥 나에게 이롭지만은 않다는 점이었다.

지금부터 나는 또다른 협상에 나서야만 했다.

다행히 상황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쨌거나 상대는 내가 생명을 주해주었던 사람이었으니까.

"칼 마커스."

타티아나 벨로프가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개인적인 용무가 있었다만."

"그게 뭐죠? 그리고 신호탄은 대체 어디서 난 거고요?"

"내가 그걸 말해야 하나?"

상황이 나에게 불리한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눅들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예, 말해야 합니다. 칼 마커스."

어차피 타티아나 벨로프가 이렇게 물고 늘어지리라는 것 정도는 예상했다.

그럼에도 내가 굳이 한번 튕긴 이유는, 본디 사람은 손쉽게 얻어낸 대답은 믿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떤 자의 뒤를 밟고 있었다."

"그게 누구죠?"

"이름은 레오폴드, 계급은 상병. 오렌지 라인의 병사라고 하더군."

"레오폴드! 그를 알고 있습니까? 어떻게요?"

알다마다.

내가 그자의 시체를 여기까지 가져다 놓고 태웠는데 모를 리가 있겠는가.

물론 타티아나 벨로프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이미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얼마 전에 웨이브가 들이닥쳤을 때, 비행종에게 납치당해서 죽으려던 걸 내가 구했다.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부상도 보살펴 주었지. 신호탄도 그때 받았다. 레오폴드가 요긴하게 쓸 때가 있을 거라고 하더니, 이렇게 쓰게 되는군."

실제로 레오폴드는 비행종에게 납치되었을 때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타티아나 벨로프를 납득시킬 수 있는 그럴듯한 이야깃거리였다.

"당신이 레오폴드를 구했다고요? 그런데 그를 쫓고 있었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죠?"

"레오폴드가 아크로 돌아가야 한다기에 내가 호위를 해주겠다고 했는데, 이 이상 외부인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다며 기어이 혼자 돌아가겠다더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여기 있는 거죠?"

내가 코웃음쳤다.

"허, 설마 내가 부상자를 그대로 혼자 보낼 정도로 냉혈한으로 보였나? 생명의 은인한테 너무 섭섭한데."

"그건··· 아니지만······ 죄송해요."

타티아나 벨로프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며 진심으로 어쩔 줄 몰라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참 성실한 성격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레오폴드를 그렇게 보낼 수가 없다고 판단했고, 그의 뒤를 몰래 밟으면서 그가 무사히 아크까지 돌아갈 수 있도록 지켜봤다. 그때, 그 검은 그림자···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내가 나타났고, 나를 공격했지."

즉석으로 만들어낸 핑곗거리치고는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내가 누군가를 구했다는 것도, 그리고 몰래 뒤를 밟으며 지키려 했다는 것도 타티아나 벨로프에게 있어서는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을 테니 말이다.

"2급 환상종 나이트메어. 아크 내에서도 1급 위험 마물로 지정된 자에요. 인간 이상의 지능을 지닌 영악하고 위험한 마물이죠."

타티아나 벨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잔영의 사르트에 대한 악명은 이미 아크 내에서도 자자했다.

"어쨌든, 그 마물이 나를 공격하는 동안에 레오폴드를 놓치고 말았다. 대충 얘기를 들어보니 레오폴드를 알고 있는 것 같다만, 그를 찾았나?"

"···예."

"잘됐군. 그 친구가 돌아가면 반드시 크게 은혜를 갚겠다고 했거든. 누구와는 달리 겁박질부터 하지는 않는 신의를 아는 자였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말하자, 점차 타티아나 벨로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그러지?"

"···죄송합니다. 제 미숙함 탓입니다."

"레오폴드가 죽었나?"

내가 짐짓 놀라는 척하면서 말하자 타티아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안타깝게도."

"쯧."

지나칠 정도로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그와 만난지 며칠 되지도 않을 사이일 테니까.

"어쨌든, 이번에 구해준 건 고맙게 생각한다. 이걸로 빚은 없던 거로 쳐도 좋아."

이번 사건에서도 겪었듯이 타티아나 벨로프와의 인연은 참 쓸모가 많은 인연이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이 이상으로 거리가 가까워지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이반 벨로프를 죽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은.

"레오폴드가 죽었다면 더는 내가 여기에 있을 필요는 없겠군. 이만 가보지."

"자, 잠시만요!"

타티아나 벨로프가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뭐지?"

"무선 통신 단말기에요. 저희 전용 채널에 맞춰져 있으니까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시면 거기로 연락 주세요."

본래였다면 타티아나 벨로프에게 뭘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이거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타티아나 벨로프는 미처 모르고 있겠지만 나한테 이게 있으면 아크 내의 통신을 도청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앞으로 아크 내의 상황을 지켜보는 것도 가능해진다.'

고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주는 걸 거절하는 건 내 상황이나 성미와 그다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한테 이런 걸 줘도 되는 건가?"

타티아나 벨로프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생명의 은인이니까요."

* * *

떠나가는 칼 마커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부관이 말했다.

"이대로 보내도 괜찮은 겁니까? 수상한 자입니다. 당장 데려가서 심문을 해봐야 합니다. 레오폴드의 시체가 그곳에 있었던 것도 그렇고, 사인(死因)을 확인하지 못하게 시신이 불타있는 것도 그렇고, 그의 장비가 보이지 않았던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한 부관의 말에도 타티아나 벨로프는 고개를 내저었다.

"장비는 처음에 도망치는 과정에서 유실되었겠지. 혹은 칼 마커스에게 사례로 주었을 수도 있고. 그리고 시신이 불탄 건 사체 소거작업에 휩쓸린 걸 테고. 애초에 처음에 신호탄을 쏜 게 레오폴드라는 건 그곳에 남아있는 흔적을 통해서 확인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그 정도 증거는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증거입니다."

"그의 신원은 내가 보증한다. 그는 크로노스 인근에서 거주하다가 크로노스가 멸망하며 피난을 온 피난민이다."

"···아무리 담당관님이 보증한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건 상부에 별도로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타티아나 벨로프의 시선이 부관을 향했다.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이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부관의 몸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네이비 라인에서 벨로프 패밀리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다.

부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벨로프 패밀리를 존중하고, 두려워 한다.

"그의 손을 보았나?"

"손이라니요?"

"떨고 있었어. 아마 두려웠던 거겠지. 아니,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칼 마커스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수상하다는 건 타티아나 벨로프 역시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칼 마커스가 나이트메어와 모종의 연관이 있었다면 애초에 공격을 받을 이유도, 그렇게 떨고 있을 이유도 없다는 게 타티아나 벨로프의 결론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믿고 싶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칼 마커스는 타티아나 본인을 구해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부관이 상부에 보고를 하든지 말든지 관여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할 생각을 해야 할 거다."

하려면 해봐라.

명백한 겁박이었다.

"···알겠습니다."

벨로프의 경고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부관이었기에 더는 이에 대한 문제를 입에 담지 못했다.

"돌아간다."

타티아나 벨로프가 발걸음을 돌렸다.

그동안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무언가가 조금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 성물(聖物) (7) > 끝

좆될 뻔했네.

나는 타티아나 벨로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도망치듯이 달렸다.

괜히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괜한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어차피 별다른 방법이 없었어.'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굳이 타티아나 벨로프를 부를 필요 없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림자단은 성물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고, 지금의 내가 사르트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타티아나 벨로프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타티아나 벨로프에게 연락하지 않고서 살아남는 세 번째 방법도 있긴 했지만··· 그건 타티아나 벨로프를 부르는 것보다도 더욱더 리스크가 큰 방법이었다.

'그리고··· 예상 외의 소득도 얻었어.'

아크 무선 통신 단말기.

그것도 평범한 단말기가 아니라, 무려 정찰대 소속 특수 기동 타격대 장교가 사용하는 물건이다.

당연히 아크 바깥에서도 거리가 너무 멀어지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타티아나 벨로프는 이걸 그저 구조 신호용 도구 정도로 생각하고 내게 건넨 모양이지만, 이건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용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걸로 아크 내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됐어.'

다른 사람은 못해도 나는 가능하다.

이미 아크 내에 오가는 공개 통신 채널은 물론이고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채널들의 접근 코드 역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태양광 및 운동 에너지를 통한 자가 에너지 수급이 가능한 덕분에 몇 시간 햇볕에 놔두거나 그냥 들고 다니며 흔들기만 해도 에너지가 고갈될 걱정은 없다.

말 그대로 반 영구적인 사용이 가능한 단말기인 셈.

'그리고··· 돌아가는 대로 은신처도 옮겨야겠어.'

사르트가 언제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뼈 갑옷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던 거로 봐서는 오래전부터 지켜본 건 아닌 듯했다.

대충 짐작가는 시기는 내가 아크에 진입한 이후 혹은 그쯤부터.

'애초에 마물의 입장에서 영산 노아에 오기는 꺼려지겠지.'

물론 2급 마물쯤 되면 의지로 오지 못할 것도 없지만, 어떤 뚜렷한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굳이 올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 덕에 아무래도 아직 내 은신처까지는 아직 알지 못한듯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사르트 때문만이 아니라, 타티아나 벨로프 역시도 언젠가 또다시 불쑥 나를 찾아올 수도 있었기에 여러모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서쪽 전선 쪽으로 가야겠어.'

아크 내에 있는 라인들은 최전방인 로즈 라인을 제외하고서 각 라인 별로 두 개의 전선을 지니고 있다.

서부 전선과 동부 전선.

지금까지 내가 있었던 곳은 동부 전선 쪽과 가까운 장소였지만, 이제 슬슬 자리를 옮길 때가 된 듯했다.

서부 전선과 더 가까운 쪽으로 말이다.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가야 할 곳이었어.'

서부 전선과 동부 전선은 등장하는 마수나 마물의 종류가 조금 다르다.

무엇보다도 그 근처에서 활동하는 세력 역시도 달랐다.

동부 전선 쪽에서 주로 활동하는 게 크로노스 연합과 그림자단이라면, 서부 전선 쪽에서 주로 활동하는 건 모트교를 비롯한 모래바람 상단 같은 군소 세력들이다.

그림자단의 활동 영역에서 멀어짐과 동시에 슬슬 모래바람 상단 측과도 접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슬슬 거래 재료들도 꽤 많이 쌓이기도 했고.'

온갖 종류의 총알을 비롯한 각종 장비들은 모래바람 상단의 입장에서 탐내기에 충분한 물건들이다.

이걸 토대로 거래를 한다면 내가 원하는 걸 충분히 얻을 수 있을 터.

'거기다가 이 시기라면 모래바람 상단이 그걸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어.'

더군다나 지금이라면 아직 그 물건의 가치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테니, 잘만 이용한다면 큰 이득을 볼 수 있다.

'어디까지나 모래바람 상단과 접촉을 해야 가능한 거겠지만.'

그에 대한 방법은 돌아가서 천천히 생각할 일이었다.

'우선, 돌아간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네이비 라인의 전선에서 레드 라인과 맞닿은 노아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거리로만 쳐도 수십 km가 거뜬히 넘는 데다가 드문드문 마수 무리의 움직임 마저도 피해야 했으니 더욱더 그러했다.

'아크를 따라서 이동하면 마수를 만날 일은 없었겠지만··· 굳이 아크에 내 존재를 노출할 수는 없겠지.'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이미 아크 내에는 내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레드 라인의 이모샤 중위를 비롯한 쿠릴타와 피난민들.

네이비 라인의 타티아나 벨로프 소령와 조금 전에 나를 구해준 정찰대원들.

거기에 더해서 이들의 보고를 받은 레드 라인과 화이트 라인의 상층부 몇몇만이 내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을 터.

'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나는 그냥 피난민에 불과해. 당분간은 딱 그 정도 포지션을 유지하는 게 좋아.'

어차피 웨이브가 지나면 지날수록 아크에서도 내 존재에 대해서 눈치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때가 오기 전에 최대한 해야 할 일을 해두는 게 좋았다.

그리고······.

마침내 노아에 들어섰다.

돌아오는 내내 그림자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지만, 다행히도 사르트가 따라오는 기색은 없었다.

사르트는 잠행의 귀재지만 그럼에도 사르트가 움직일 때는 그림자에서 조금이나마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만약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면 꽤 귀찮이 질 뻔했을 텐데,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사르트로서도 괜한 모험을 하는 것보다는 얻어낸 정보를 단에 보고하는 게 더 유익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게 더 정확한 판단이긴 했다.

나는 혹여라도 은신처가 들통날까 일부러 길을 빙빙 돌아서 몇 시간 동안 노아를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렇게 몇시간 후.

비로소 나는 노아의 중턱에 있는 은신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아······."

피곤하다.

무엇보다도 독물로 가득한 하수도를 잠수해서 지나친 탓에 온몸에서 그야말로 끔찍한 냄새가 났다.

아마 독성 가스일 테니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빨래도 해야 하는데··· 빨래터라도 만들어야 하나.'

그 말마따나 빨래를 위해서 온천수를 더럽힐 수는 없었기에 나는 삽을 들고서 수맥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작은 구덩이 하나를 팠다.

그리고 주변에서 주워온 평평한 돌들을 안에 넣어서 임시 빨래터를 만들었다.

아무래도 빨래를 한 물이 다시 지하로 스며들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나는 보호복을 비롯한 속옷을 훌훌 벗어서 임시 웅덩이 안에 넣고는 반합으로 온천수를 옮겨서 펐다.

아쉽게도 세제나 빨랫비누 같은 건 없었기에 빨래는 오롯이 손빨래로 해야했다.

그나마 뼈 갑옷은 뼈 기생체가 제 몸은 제가 관리하고 있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 그게 있었지.'

나는 부랴부랴 군장 안에서 세면도구를 찾은 뒤에 그 안에 있는 비누를 조금 잘랐다.

몇 개 없는 귀중한 비누를 저런 독성 물질에 노출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비누를 조각내서 대충의 빨래와 샤워를 마친 나는 온천수에 몸을 담갔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온천욕 덕분인지 금방 몸이 노곤노곤해졌다.

"후······."

나는 이번에 얻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 송곳 토템.'

정확히는 송곳 토템을 먹은 뼈 갑옷이 되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았다.

'긴가민가했는데 간신히 성공했어.'

막상 저지른 입장에서 말하는 것도 조금 우습긴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 그대로 뼈 기생체가 엥켈렌스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었다면?

혹은 이지를 완전히 잃고서 마물화되어서 폭주했다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끔찍한 결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송곳 토템과 뼈 기생체를 둘 다 잃는 건 물론이고··· 아마 지원이 오기 전에 죽었겠지.'

뼈 갑옷의 보조도 없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사르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여러모로 위태로운 순간이었다는 소리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뼈 갑옷이 송곳 토템을 흡수했다는 거다.'

송곳 토템의 발동 조건은 토템을 불꽃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엥켈렌스의 영역이 발동하며 일정 구역 내에 마수와 마물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영역이 전개된다.

하지만 뼈 갑옷이 송곳 토템을 흡수하며 그러한 제한 조건이 사라지고, 그 힘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아쉬운 건 아직 흡수율이 3%밖에 되지 않은 탓에 송곳 토템이 지닌 온전한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점이었다.

'아마 뼈 갑옷을 성장시키게 되면 흡수율 역시도 촉진될 가능성이 커.'

뼈 기생체에게 마수와 마물 시체를 열심히 먹여야 할 이유가 늘어난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진짜 문제는 엥켈렌스의 힘을 흡수한 뼈 갑옷에 대해서인데······.'

성물의 힘은 완전하지 않다.

일정 수준 이하의 마수와 마물은 본능적으로 성물의 영역을 피해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안에서 공격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안에서 마수를 공격하게 되면 마수는 본능적인 거리낌을 이겨내고서 성물의 영역 안으로 얼마든지 침입해 온다.

요컨대, 성물의 힘은 일종의 임시 중립지대를 만드는 거라고 보는 게 옳았다.

하물며 나 같은 경우에는 아직 엥켈렌스의 영역에 제한 시간이 달린 만큼 더욱더 제약이 심할 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비록 직접 실험을 해봐야 확신할 수 있겠지만, 성물의 힘을 활용하는 방법은 단순히 마수와 마물로부터 안전한 영역을 만들어내는 것뿐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성물의 진정한 활용은 그 영역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없앴다 할 때 생겨난다.'

성물로 만들어진 영역 내에서 공격을 가하게 되면 마수들은 본능이 거리낌을 이겨내고서 거침없이 성물 내의 영역으로 공격해 온다.

하지만 이미 공격을 한 뒤에 새롭게 영역을 펼쳐낸다면?

'그럴 경우, 마수들의 어그로(aggro)가 초기화 된다.'

게임 용어로 말하자면 일종의 어그로 핑퐁이라고 해야 할까?

이는 더 디펜스에서도 몇몇 최상위 유저들만이 사용하는 비밀스러운 테크닉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실험을 해봐야 확신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더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이 방법을 활용한다면 지금까지 고민거리였던 오렌지 라인 이상의 라인 개입도 가능해진다.'

지금 내 상황에서 일종의 안전지대라고 볼 수 있는 영산 노아에서 저격을 할 수 있는 거리는 기껏해야 레드 라인의 전선과 오렌지 라인 전선의 일부뿐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나로서는 오렌지 라인 이상의 라인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맨몸으로 전선을 누비거나, 혹은 아크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 어떤 것도 여의치 않았기에 나로서는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방법이 생겼어.'

비록 지금 당장은 엥켈렌스의 영역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짧은 탓에 제대로 활용하기는 어려울 테지만, 그건 점차 나아질 터.

'할 일이 많겠어.'

언제나 그랬지만 말이다.

그렇게 내가 온천에 몸을 맡긴 채로 쉬고 있을 때.

지직, 직─

통신 단말기에서 잡음이 들려왔다.

< 개인 정비 > 끝

치직, 칙─

단말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찾았나?"]

["아직 못 찾았습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작정하고 나가신 것 같습니다."]

["나이가 몇 갠데 가출인지··· 알았다. 소장님 찾으면 찾는 대로 바로 보고해."]

["알겠습니다."]

치직─

도청된 무전의 내용은 짧았다.

정확히 무얼 가리키는 내용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현재 내가 접속해놓은 통신 단말의 채널은 Red-F004.

레드 라인 내에서 일어나는 대외비 사항을 전달할 때 주로 사용하는 채널이었다.

물론 말이 대외비지, 사실상 레드 라인 내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들이 일차적으로 거쳐 가는 채널이라고 봐도 좋았다.

'소장이라······.'

아크 내에서 그리 불리는 직책이 몇몇 있었으나, 지금 시점에 가출을 할 정도로 충동적인 인물은 온갖 인간 군상이 모여 있는 아크 내에서도 몇 없었다.

'가장 가능성이 큰 건 역시 그 자인가.'

레드 라인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장, 메이벨 필그림 중령.

그 재능과 능력을 인정받아 특수 목적 연구소장이라는 거창한 직책을 맡게 된 인물이었으나, 사실 그 외의 부분에 있어서 아크 내에서 썩 좋은 평가를 받는 인물은 아니었다.

지닌 직책과 능력에 비해서 사람 자체가 워낙 즉흥적이고 충동적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얼마 전에 내가 얻은 실험탄 GHOST-157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했다.

'하필 지금 시점에 가출을 했다는 건··· 설마 실험탄을 찾고 있는 건가?'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설마.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전에 내가 더 디펜스를 플레이할 때 실험탄을 되찾는 서브 시나리오를 실패한 적은 거의 없다.

애초에 난이도 자체가 그렇게까지 어려운 시나리오도 아니었을뿐더러,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손해가 큰 서브 시나리오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 메이벨 필그림의 가출하는 일을 보는 건 나로서도 처음이었다.

'메이벨 필그림이 내 정체에 대해서 알아낼 가능성은 없지만, 그래도 염두에 둘 필요는 있겠지.'

메이벨 필그림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큰 도움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아크를 끝장낼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섣부른 접근은 금물이었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어떨 결에 무수한 변수 중에서 한 가지가 더 추가됐다.

웬만하면 아크 내의 인물들에게 내가 지닌 뼈 갑옷에 대해서 숨겨야 할 이유가 늘어났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생각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고, 단순히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안 그래도 거처를 옮겨야 해서 머리가 골치 아픈데, 이것까지 신경 쓰려니 머리가 아파 왔다.

[키득······.]

오늘따라 유난히 목소리가 거슬렸다.

*

아침이 밝았다.

슬슬 약발이 떨어져 가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잠을 설친 건지는 몰라도 예전처럼 잠이 개운하지 않았다.

'···내성이 생긴 건가.'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약물의 양을 늘리거나, 아니면 더 쌘 놈으로 바꾸거나.

'그것도 아니면 불면증 자체를 이겨내거나.'

그걸 위해서는 역시나 에테르 감응력을 올릴 필요가 있었다.

[일어났다.일어났다.일어났다.일어났다.일어났다.일어났다.일어났다.일어났다.일어났다.일어났다.일어났다.일어났다.]

지금도 이 빌어먹을 목소리들은 내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어제의 치열했던 전투는 끝내 나를 죽이지 못했고, 그 과정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체력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6 -> 17]

[끔찍한 악몽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강인함을 보였습니다!]

[투지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4 -> 5]

[악몽을 마주하였으나, 놀라운 행운으로 생존하였습니다!]

[행운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9 -> 10]

[특성, '초심자의 행운'을 습득하였습니다.]

──────────────

[초심자의 행운]

행운의 여신이 미소 짓는다.

단, 모든 능력치의 합이 100을 돌파할 시 특성이 소멸한다.

"상세 보기"

──────────────

'드디어인가.'

초심자의 행운.

얼핏 보면 별 것 아닌 특성 같지만, 사실 이건 더 디펜스에 있어서 손에 꼽히는 초반 특성 중 하나였다.

확률.

모든 게임을 지배하는 이 빌어먹을 법칙은 당연히 더 디펜스 역시도 지배한다.

무기의 업그레이드에 성공할 확률, 마수의 기습을 우연히 피할 확률, 길을 가다가 버려진 보급 트럭을 마주할 확률. 확률, 확률, 확률······.

바로 그러한 확률을 초반 구간 한정으로 높여주는 특성이 바로 초심자의 행운 특성이었다.

'그래도 원래 지닌 능력치가 하도 무식해서 오래는 지니고 있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쁠 거 없지.'

초심자의 행운은 레드 라인과 오렌지 라인 스테이지에서 가장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특성 중 하나다.

말 그대로 초심자를 위한 어드벤티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본래 지니고 있는 능력치 자체가 이미 레드 라인 수준을 뛰어넘은 터라 이 효과를 오래 누리지는 못할 터였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그건 그거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나는 이부자리에 있는 침낭을 비롯한 CC형 텐트를 정리했다.

예정대로 슬슬 은신처를 옮길 필요성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동굴을 나선 뒤에 빨래로 널어두었던 옷을 다시 챙겨 입고는 이곳을 떠날 채비를 하기 위해서 분주히 움직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전 은신처를 완전히 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이곳은 적당히 위장을 해두고, 나중에 동부 전선 쪽에 볼 일이 있을 때 사용하면 되니 말이다.

'그래도 당분간은 그림자단의 시선도 있으니, 서부 전선쪽으로 가 있는 게 맞아.'

나는 곧장 군장을 꾸렸다.

처음 노아에 오를 때보다도 짐이 부쩍 늘어난 탓인지 한 번에 옮기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였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물자를 어느 정도 분산해두는 게 나으려나.'

계란을 한 바구니 안에 담지 말라는 말도 있듯이, 내가 지닌 물자도 한곳에 모아놓는 것보다는 차라리 분산시켜 놓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필요할 때는 다시 챙겨가면 되니까.'

어디까지나 리스크 분산 차원에서의 분산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것들은 여기에 놔야겠어.'

나는 본래 은신처로 사용하고 있던 동굴의 굴을 조금 판 후에 이번에 얻은 총알을 비롯한 보호복 등 몇몇 물자를 숨겼다.

일부러 찾으려고 해도 찾기 어려운 수준이었으니, 대충 안심해도 될 터였다.

'가볼까.'

망설일 필요도 없이 산행이 시작됐다.

서부 전선과 인접한 노아의 영토 중에서 새로운 은신처로 삼을만한 수원지를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이미 그에 대한 위치는 알고 있었을뿐더러 주변에 은신처로 삼을 만한 동굴이 함께 있는 곳 역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초심자의 행운 덕분도 아마 적잖이 도움이 된 게 분명했다.

'이쯤이었던가.'

[반가워. 반가워. 반가워. 반가워. 반가워. 반가워. 반가워. 반가워. 반가워. 반가워. 반가워. 반가워······.]

[칼, 마커스··· 이곳에는, 어쩐 일이지?]

[킥킥······.]

[냄새, 냄새가 나. 내 목소리가 들리지? 그렇지?]

과연 새로운 터전이라는 건지 자리를 옮기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로운 목소리들이 나를 반겼다.

기존의 목소리가 슬슬 익숙해져 간다 싶더라니, 또 색다른 목소리와 주파수를 듣고 있으니 새삼 머리가 아파왔다.

'···듣다 보면 적응되겠지.'

나는 언제나처럼 편하게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고는 곧장 야삽을 들었다.

이제부터 파야할 게 많았다.

* * *

"대체 어디 간 거지?"

타티아나 벨로프는 한참 동안 자신의 책상 서랍을 뒤적거렸다.

아무리 찾아도 찾던 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동료와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서 건넨 물건이다.

필시 중요한 물건이었을 터.

그런데 그런 걸 이렇게 어처구니 없게 잃어버렸다고?

'설마······.'

누가 훔쳐 간 건가?

설마하니 자신의 집무실 내에 있던 물건을 도둑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타티아나는 곧장 병영 내의 병사들을 불러서 혹시 자신의 집무실을 다녀간 이가 없느냐고 물었다.

"아, 있었습니다."

"있었다고? 누가?"

"사령부 소속의 칼라킨 중령님이 다녀가셨습니다. 아마 그때 담당관님께서 부재 중이라 기다리다가 그냥 가신 것 같습니다."

"···사령부 소속의 칼라킨 중령?"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아니, 애초에 사령부에 저런 이름을 한 인물이 있다는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CCTV 좀 확인해야겠어."

"알겠습니다."

이내 확인한 CCTV 속에 비친 사내는 뻔뻔하게도 타티아나 벨로프의 집무실을 대놓고 들어갔다.

그것도 정찰대 부대 안에서 말이다.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해킹? 아니, 그 짧은 시간에 그런 게 가능하다고? 대체 어떻게 연 거지?'

타티아나의 집무실은 카드키로 인한 접근이 아니면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칼라킨 중령이라고 자신을 밝힌 이는 너무나도 쉽게 그녀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무엇보다도 더욱더 놀라운 건, 저 사내는 마치 정찰대 병영 내에 있는 CCTV의 위치를 모두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교묘하게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움직였다.

다시봐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카메라의 각도를 모두 피하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눈까지 그렇지는 못했겠지. 얼굴은 기억하고 있나?"

"그··· 죄송하지만 위압감이 너무 심해서 똑바로 쳐다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인상이 강렬했다는 것 말고는······."

"허."

타티아나는 네이비 라인 최고의 정예 중 하나인 정찰대 병영의 보안이 이토록 쉽게 뚫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침입 경로는 파악했나?"

"외부 해자와 연결된 하수도의 창살이 잘려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아마 그쪽으로 외부인이 침입한 것 같습니다."

"···외부에서의 침입이라고?"

그 말에 타티아나의 머릿속에 이내 한 사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으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칼 마커스는 외부 출신의 야만인이다.

대체 그런 자가 어떻게 자신의 집무실의 보안 시스템을 그토록 쉽게 돌파할 수 있단 말인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화이트 라인? 레드 라인?

모두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면··· 블루 라인일 수도.'

애석하게도 용의 선상에 오른 대상이 너무나도 많았다.

아크의 적은 단순히 아크 바깥에만 있지 않았다.

내부에도, 늘 적이 도사린다.

"하아······."

타티아나는 그 이상의 생각을 관두었다.

우선, 사라진 그 토템이 어떤 물건인지 알아보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어떤 물건인지를 알고 나면 누가 노렸는지도 명확해질 테니 말이다.

'칼 마커스라면 알고 있을 지도 몰라.'

근거 없는 믿음이었다.

어쩌면, 타티아나 스스로가 그렇게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고.

그러거나 말거나 타티아나는 칼 마커스를 다시금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칼 마커스는 외부인이 은신처에 찾아오는 걸 극도로 꺼려하는 분위기였다.

'아, 맞아.'

타티아나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건넸던 무선 통신 단말기를 떠올렸다.

그렇게 단말기를 손에 쥔 타티아나는 몇 번이고 통신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어서였다.

'···나중에, 나중에 하자.'

타티아나 벨로프는 왠지 모르게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쓸어내렸다.

* * *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은 대부분 새로운 은신처를 꾸리는 시간이었다.

그 덕분에 새로운 은신처는 기존의 은신처보다도 훨씬 더 그럴듯한 장소가 되어 있었다.

온천 역시도 이전의 온천보다도 더욱더 넓어졌고, 그 옆에 별도의 물길을 내서 빨래를 비롯한 따로 물을 쓸 일이 있을 때 쓸 수 있도록 만들었다.

거기다가 온천수 옆에 있는 동굴의 넓이 역시도 이전보다도 더욱더 큰 동굴이었던 터라 이제는 단순히 CC형 텐트뿐만 아니라 여러 물자를 저장할 수도 있었다.

그런 호된 삽질 덕분인지, 근력과 재주 능력치가 각각 1씩 올랐다.

근력 능력치는 체력 능력치와 더불어서 가장 기초적인 능력치에 해당하는 만큼, 하나하나가 정말인지 크고 소중한 능력치였다.

'이 정도면 근접 전투도 어느 정도까지는 할 수 있겠어.'

은신처를 꾸리는 와중에도 나는 아크 내에서 오가는 통신을 거의 매일 같이 들었다.

그중 대부분은 쓸데없는 잡담에 가까운 말들이거나, 혹은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이었지만 간혹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번 기수의 훈련병들은 꽤 괜찮더군. 특히 그 칼라킨이라는 친구는 보통이 아니야."]

["아아, 그 친구. 거의 모든 훈련 종목에서 엄청난 성적을 거두고 있다지?"]

["그래, 곧장 오렌지 라인으로 차출될 거라는 소문도 있더군. 다른 라인에서도 노리는 자들이 많다고 해."]

["이제 막 입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훈련병이? 대단하군."]

["아, 그리고 그 야만인 훈련병··· 쿠릴타라는 녀석도 아주 골치 아파. 분명히 꼴통인데, 그래도 할 때는 또 한다니까? 오히려 드미트리우스 같은 녀석들보다는 나을 정도야."]

["그래? 나는 그래도 드미트리우스가 더 나은 것 같던데······."]

["아냐, 놈은 너무 음흉해. 병사로서는 맞지 않는 자질이지. 차라리 장교라면 모를까."]

["하긴."]

흐음······.

다른 훈련병들이야 이미 알고 있었기에 신기할 건 없었으나, 쿠릴타의 이름은 조금, 아니 상당히 많이 의외였다.

'어쩌면, 정말로 나중에 도움이 될 지도.'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큰 기대를 하고 있지도 않았건만, 의외로 쿠릴타에 대한 훈련소 교관들의 시선이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아무래도 쿠릴타라는 인물이 지닌 단순 무식함이, 명료함이라는 이름의 매력으로 다가선 듯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쿠릴타는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나에게 무기를 건넬 정도로 신의 있는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하늘에 드리운 먹구름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왔나.'

나는 알고 있다.

저게 평범한 먹구름이 아니라는 걸.

[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

[놈들이, 놈들이 와······.]

[히히, 히히히··· 빨리 와. 보고 싶어······.]

요동치는 에테르.

멀리서부터 울려 퍼지는 괴성.

[끼에에에에에!]

[게헥, 게헥!]

치직─

["1급 위험 상황 발생! 1급 위험 상황 발생! 다시 한번 전달한다. 1급 위험 상황이 발생했다!"]

이 모든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두 번째 웨이브.

마침내 그게 다가왔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모든 준비는 만반이었으니까.

철컥-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다잡은 나는 천천히 전선을 바라보았다.

치직─

다만, 그런 나조차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이 있었다.

["소장님이 또 사라지셨다! 아무래도 아크 바깥으로 나간 것 같다!"]

< 메이벨 필그림 > 끝

쿵! 쿵!

천지를 울리는 발돋움 소리.

마수와 마물 군단이 들이닥치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그우우우우우─!!!]

[크릉, 크르릉!]

온갖 울음 소리가 울려퍼진다.

웬만큼 담력이 있는 병사라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서 쓰러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끔찍한 비명이었다.

[도망, 가자······.]

[여기 있기 싫어.여기 있기 싫어.여기 있기 싫어.여기 있기 싫어.여기 있기 싫어.여기 있기 싫어.]

[키득······.]

에테르가 들썩였다.

목소리가 바라는 바는 각기 달랐으나, 확실한 건 지금 일어나는 현상에 에테르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세계에 온 뒤에 두 번째로 맞이하는 웨이브가 닥쳐온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신경을 온전히 웨이브에만 쏟을 수 없었다.

메이벨 필그림 때문이었다.

'···메이벨이 사라졌다라.'

메이벨 필그림.

레드 라인의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장.

비록 인격적으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인물이긴 해도, 그녀는 아크에 있어서 꼭 필요한 인재 중 한 명이다.

혹시 죽기라도 하면 아크의 무기 발전도가 크게 느려질 테고, 당연히 앞으로의 내 계획에 있어서도 큰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나.'

비록 아크 내에서도 메이벨을 찾고 있긴 할 테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이미 메이벨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크에 메이벨이 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위치를 알려봤자, 내가 그들의 대화를 도청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들통날 뿐.

즉, 메이벨의 생존을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메이벨의 목적지는 분명해.'

본래 내가 알고 있기에 메이벨은 이 시기에 가출 따위를 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게 웨이브가 몰아치고 있는 위험한 때라면 더욱더 말이다.

그럼에도 메이벨이 위험을 무릅쓰고서 아크 바깥으로 나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실험탄 GHOST-157.'

메이벨은 그걸 찾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차라리 잘 됐다고 봐야 하나?'

메이벨 필그림은 아크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무기 공학 권위자다.

비록 그녀에게 부서진 DR-404 리볼버의 수리를 맡기는 건 내 신분이 노출될 테니 어렵겠지만, 그녀를 구해준다면 기존에 착용하고 있는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비롯한 장비들의 업그레이드를 맡기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좋아.'

이제 남은 건 메이벨이 어디로 향했는지 추론하는 것뿐.

웨이브가 몰려온다는 징조는 아크 내에서도 이미 꽤 오래전부터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벨 필그림이 거침없이 아크를 벗어났다는 건, 웨이브에 휩쓸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소리.

즉, 메이벨은 레드 라인에서 출발한 뒤에 영산 노아를 따라서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영산 노아에 오른 뒤의 목적지는··· 역시 그곳인가.'

곧 아크의 전선에는 마수와 마물들이 득실득실하게 차오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크 바깥으로 나온 메이벨 필그림이 향할 수 있는 건 마수와 마물이 찾아오지 않는 영산 노아뿐이다.

자연스럽게 메이벨 필그림의 목적지 또한 영산 노아 내에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제놀란 동굴.'

영산 노아의 북서쪽에 있는 동굴 중 하나로서, 영산 노아 내에서도 특히나 에테르 농도가 짙은 장소 중 하나다.

내가 알고 있는 메이벨 필그림의 성격이나 행동 방식을 생각해보면, 아마 메이벨 필그림은 그곳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컸다.

'에테르 반응을 추적한 걸 테지만···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야.'

메이벨 필그림이 하필이면 많고 많은 장소 중에서 제놀란 동굴로 향한 이유야 뻔했다.

1. 실험탄 GHOST-157이 유실될 때 실험탄을 가져 갔던 마수에게서 다량의 에테르 농도가 검출되었어. 즉, 노리는 건 유령종을 비롯한 에테르 형태의 마물들일 게 분명해.

2. 그렇다면 그런 형태의 유령종이 있는 곳을 추적하자!

3. 여기가 에테르 농도가 제일 높네?

옆에서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기적의 삼단 추론이었으나, 실제로 메이벨 필그림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뭐, 엄밀히 따지자면 어느 정도 합리적인 부분이 있기도 했고 말이다.

실제로 실험탄 GHOST-157을 가져갔던 홀린 검은 갈기 치타도 유령종에 의해서 홀린 상태였으니 말이다.

'괜히 귀찮은 놈들한테 붙들리지 않길 바랄 수밖에.'

나는 부랴부랴 채비를 마치고는 곧장 움직였다.

마수 군단이 아크를 향해서 진군하고 있는 와중인 만큼,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북서쪽의 동굴까지의 거리는··· 대충 30km가 넘어.'

말이 30km지, 험준한 노아의 산지 지형을 생각한다면 절대 쉽게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나마 은신처를 옮겨서 다행인가.'

만약 지금 내 위치가 동부 전선 쪽에 있는 예전의 은신처였더라면 메이벨 필그림을 포기해야했을 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물리적인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메이벨 필그림이 아무리 아크의 미래를 위해서 있어야 할 인물이라지만, 당장 아크가 무너지는 것과 비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진짜 난이도 설계 한번 개 같이 했다니까.'

아무리 거대한 댐이라고 할지라도 작은 구멍 하나만 나도 쉽게 무너진다.

아크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웨이브라는 거대한 전쟁에서 이 한 손 정도 보태지 않는다고 해서 티도 안 날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 짓을 했다가는 그대로 아크는 멸망한다.

괜히 더 디펜스의 난이도가 악명이 자자한 게 아니었다.

'메이벨을 구한 뒤에 곧장 전선에도 참여한다.'

계획의 수립을 마친 나는 강체로 활성화된 육체의 능력과 더불어서 뼈 갑옷의 신체 보조 능력까지도 끌어내며 노아를 가로질렀다.

지난 일주일 동안 마수들을 사냥하며 먹인 덕분에 뼈 갑옷의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은 5%에 다다르게 되었다.

엥켈렌스의 영역의 지속 시간이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뼈 갑옷이 지닌 본연의 힘까지도 덩달아서 강해졌다.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어느덧 서부 전선에서 마수 군단이 모습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에게 남겨진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선, 가는 길에 선물 하나는 주지.'

지이잉-

철컥, 철컥-

나는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대물 저격총 모드로 변경했다.

목표는 7급 네임드 괴수종.

정확히는, 놈의 눈이었다.

['저격수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시간이 느려진다.

모든 감각이 예리해진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달깍-

총구가 불을 토하고,

쐐애애애액!!!

한 줄기의 섬광이 단번에 7급 네임드 괴수종의 눈을 꿰뚫었다.

[마수 군단에 선전 포고를 하였습니다!]

[투지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5 -> 6]

선전 포고로 투지 능력치가 오르면서 조금이나마 압박이 줄어든 건 덤이었다.

[네임드 마수를 처치하였습니다.]

['괴수 사냥꾼' 효과가 10배로 적용됩니다.]

[7급 괴수종, 회색 털쥐 전사에 대한 피해량이 0.5% 증가합니다.]

지금의 내가 일격에 급소를 노려서 처치할 수 있는 마수나 마물은 7급 정도가 한계.

이것도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약한 마수를 선제 공격 시 추가 피해량 효과를 포함해서 간신히 이 정도다.

'이동한다.'

이동하면서 부릴 수 있는 여유는 딱 여기까지였다.

나는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등에 멘 채로 다시금 노아를 내달렸다.

[끼깃!]

내가 거의 몸을 던지다시피 노아를 내달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뼈 갑옷의 보조 덕분이었다.

과속으로 인해서 내가 균형을 잃을 때마다 적절하게 뿜어져 나온 뼈 촉수들이 주변의 암석들을 붙잡고서 움직였다.

'이 속도면 곧 도착한다.'

그때까지 메이벨 필그림에게 별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아마 희망 사항에 불과할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내가 메이벨을 앞질렀다면 모를까, 이미 메이벨이 제놀란 동굴에 들어섰다면 일이 귀찮아진다.

그리고,

말 그대로 몸을 아끼지 않는 등산 덕분에 나는 마침내 제놀란 동굴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속도로 전력 질주를 한 시간 넘게 했더니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쉬고 있을 틈은 없었기에 나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제놀란 동굴.

영산 노아 내에서도 에테르 농도가 특히나 짙은 이곳에는 에테르가 뭉쳐서 만들어낸 것들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그걸 유령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역시 늦었나.'

나는 제놀란 동굴 입구와 그다지 멀지 않은 장소에 떨어져 있는 시계형 에테르 방해 장치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에테르의 간섭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는 도구지만, 애석하게도 메이벨은 제놀란 동굴을 너무 얕본 듯했다.

고작 이 정도 도구로 제놀란 동굴의 에테르를 완전히 차단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화이트 라인과 레드 라인에서 발생하는 강신 현상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그, 거거 치, 워어어······.]

내 체내에 있는 에테르들이 에테르 차단 장치에 반응하며 들썩였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걸 챙긴 뒤에 동굴의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불청객, 불청객, 불청객, 불청객, 불청객, 불청객, 불청객, 불청객, 불청객, 불청객.]

[돌아가.돌아가.돌아가.돌아가.돌아가.돌아가.돌아가.돌아가.돌아가.돌아가.돌아가.돌아가.돌아가.돌아가.돌아가.돌아가.]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꺼져!]

[헤헤··· 죽일까?]

제놀란 동굴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온갖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 호의적인 목소리.

그렇지 않은 목소리.

적대적인 목소리.

관심 없는 목소리.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에테르는 특정한 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밤하늘의 별을 세는 것만큼이나 무수히 많고, 또한 각기 다른 의지를 지니고 있다.

그게 나에게 긍정적이든,

혹은 그렇지 않든 말이다.

만약 어설픈 에테르 감응력을 지닌 자가 이곳에 들어섰다면 그대로 에테르에게 잡아 먹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나에게 무엇을 속삭이든지.

"메이벨 필그림은 어디에 있지?"

머지않아서 목소리가 답했다.

[저, 쪽······.]

나는 에테르의 안내에 따라서 제놀란 동굴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형 자체가 워낙 험준한 데다가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어딘가로 빠질 수도 있는 곳이었기에, 나는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모니터 바깥에서도 여기 오는 것만큼은 싫어했는데.'

그런 내가 제 발로 여기까지 걸어들어와 있었으니,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키득······.]

어디선가 들려온 비웃음 소리.

나는 이 웃음소리를 알고 있었다.

이건 평범한 에테르가 아니었다.

'유령종.'

엄밀히 따지면, 유령종 역시도 에테르의 일종으로 보는 게 옳다.

큰 범위로 에테르는 유령종조차도 포함하는 개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크에서 유령종을 별도의 마물로 분류한 이유는 간단했다.

에테르 중에서 짓궂은 악동이 있는 것과는 아예 근본적으로 달랐다.

에테르가 무언가의 '영혼'이라면, 유령종은 인간에게 적대적인 또 다른 무언가의 '영혼'이었으니까.

"꺄아아아아아아악!!!!"

그와 함께 동굴 안쪽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

이 동굴 안에서 에테르 외에 육성으로 비명을 지를 만한 존재가 달리 있을 리가 만무했다.

'찾았다.'

핏발이 선 두 눈.

산발이 된 검은색 단발.

입가에서 줄줄 흐르는 침.

"킥, 킥, 킥킥······."

한때 아크에서 손꼽히던 총명함과 미모는 어디로 갔는지, 마치 미친 여자처럼 어둠 속에서 광소를 흘리고 있는 그녀의 목이 기괴하게 돌아갔다.

"쯧."

예상했던 대로라고 해야 할까.

메이벨 필그림은 이미 유령종에 의해서 빙의 당한 후였다.

강신 현상.

이제 메이벨 필그림의 육체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너, 너, 너, 알, 아."

"그래, 나도 너 알아."

"킥, 켁, 날? 끼헤헤헤!"

···더는 못 상대해주겠네.

딸깍-

나는 SW-01 스왑형 탄창 탄창의 버튼을 눌렀다.

그와 함께 탄창 안에 있던 총알의 종류가 바뀌었다. 이곳에 오면서 미리 준비를 해두었던 총알이었다.

"거기서 나가는 게 좋을 걸."

"킥, 키킥! 쏘려고? 나를? 끼헤헤헤헤!!!"

물론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메이벨에게 빙의한 유령종은 내가 정말로 못 쏠 줄 아는지 겁도 없이 허리춤에 있는 군용 나이프를 뽑아 들고서 나에게 달려들었다.

어차피 이 정도 사태는 얼마든지 예상했던 바였다.

"그래, 안 들을 줄 알았어."

유령종이 괜히 유령종이겠는가.

애초에 저놈들은 말로 해서 알아들을 놈들이 아니다.

Ark-15 자동 소총의 총구가 메이벨 필그림의 미간을 향했다.

"쏘면, 이 여자, 죽어. 끼히힛!"

내가 오류를 정정했다.

"아니, 안 죽어."

덜컥-

그대로 방아쇠가 당겨졌다.

< 메이벨 필그림 (2) > 끝

실험탄 GHOST-157는 기존에 존재하는 통상적인 탄들과는 다르게 물리적인 타격이 거의 없다.

탄이 발사된 후 목표물에 적중하게 되면 탄을 이루는 물질이 분자 단위로 분해되는 특수한 구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운동 에너지가 완전히 소멸하는 건 아니었기에 미간에 작은 멍 정도는 들겠지만, 그 정도야 메이벨 필그림이 감내해야 할 사항이었다.

"끽, 껙, 게엑······ 이게, 대체, 어떻게, 너한테······!"

[돌려줘.돌려줘.돌려줘.돌려줘.돌려줘.돌려줘.돌려줘.돌려줘.돌려줘.돌려줘.돌려줘.돌려줘.돌려줘.돌려줘.돌려줘.]

어느새 메이벨 필그림의 기억까지도 장악을 했는지, 유령종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성을 내질렀다.

지금 자신의 미간에 쏘아진 총알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실험탄 GHOST-157.

메이벨 필그림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총알이, 지금은 내 손에 있었다.

본래였다면 이 세상에 한 발만이 존재했어야 할 총알이기에, 그 효과 역시도 확실했다.

"그거, 내꺼, 야아······!"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

메이벨 필그림에게 깃들었던 유령종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이내 끔찍한 괴성과 함께 사라져갔다.

[기에에에엑───!]

단말마의 비명을 마지막으로, 메이벨 필그림의 육체를 장악했던 유령종은 소멸했다.

메이벨 필그림은 해방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조금이라도 더 강신이 된 상태로 지속되었다면 아예 육체가 한계를 맞이했을 테지만, 다행히 그리 오래되지 않은 덕에 큰 이상은 없었다.

더군다나 실험탄으로 인한 효과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7급 유령종, 제놀란의 망령을 퇴치하였습니다!]

[존중은 두려움에서부터 나옵니다. 영혼들이 당신을 두려워하고, 또한 존중할 것입니다.]

[에테르 감응력이 상승합니다.]

[14 -> 16]

조금 전에 내가 실험탄을 쏜 건 지금껏 일방적인 우위에 있던 에테르들에게 어떠한 경고를 한 것과도 같았다.

나는, 너희를 소멸시킬 수도 있다는 경고.

그 말마따나 유령종이 소멸하기 무섭게 에테르가 들썩였다.

[없어 졌어?]

[어떻게?]

[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

역설적이게도 에테르가 나에게 두려움을 가지면 가질수록 나는 에테르에 대한 통제력과 장악력이 늘어나는 걸 느꼈다.

두려움은 지배자에게 필요한 덕목 중 하나라는 걸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그건 그렇고··· 우선 여길 벗어나야겠지.'

아무리 유령종을 퇴치하며 주변의 에테르들이 잠잠해졌다지만, 이대로 메이벨을 이곳에 내버려 두었다가는 언제 또다시 강신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메이벨을 그대로 어깨에 걸쳐 업고는 곧장 제놀란 동굴을 벗어났다.

빠져나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비록 길 자체가 복잡하기는 했어도 이미 제놀란 동굴이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와보았으니까.

'은신처까지 갈 시간은 없어.'

하는 수 없이 나는 제놀란 동굴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 위로 메이벨 필그림을 옮겼다.

이곳이라면 전선과도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니, 여차하면 바로 합류할 수도 있을 터였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다······.'

이대로 메이벨이 깨어나 준다면 참 고맙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대로 웨이브가 닥쳐오는 걸 손을 놓고 보고만 있으면 아크가 위험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첩첩산중이군.'

방법이 전혀 없진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는 워낙 위험한 터라 굳이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지.

'지금이라면··· 괜찮으려나.'

내가 마수 군단을 사냥하러 갈 여유가 되지 않는다면, 반대로 마수와 마물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이면 된다.

다행히도 내게는 방법이 있었다.

실제로 얼마 전에 사용했던 적이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다만, 예전과 지금의 차이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타의에 의한 방법이었고, 이번에는 자의에 의한 방법이라는 점이었다.

그우우우우우─

천천히 정신을 집중한다.

체내에 깃든 에테르가 요동쳤다.

[킥킥······.]

[나, 불렀어······?]

그래, 불렀다 이 녀석들아.

[나, 있다. 여기에.]

[친구들? 어디에?]

[있어. 우리가.]

[여기.여기.여기.여기.여기.여기.여기.여기.여기.여기.여기.여기.여기.여기.여기.여기.여기.여기.여기.]

마수와 마물들은 에테르에 민감하다.

그렇기에 에테르 농도가 짙은 영산 노아에는 웬만해서는 접근하지 않지만, 에테르가 직접 움직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곳으로 유인되는 마수와 마물의 숫자만큼 아크의 부담이 덜어질 터.'

지금 이게 내가 자리를 이동하지 않고서 두 번째 웨이브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둥.

둥- 둥─

나는 스코프를 통해서 마수 군단의 움직임을 살폈다.

비록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몇몇 무리가 무리에서 이탈해서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서 곧장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수는 대략 수백 마리에서 더 나아가서 수천 마리까지 될 듯했다.

'···조금 과했나?'

노아를 타고서 몰려오는 마수 무리의 숫자가 점차 불어났다.

아무리 이곳의 지형이 험준하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마수에게 있어서는 별 상관이 없을 터.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마수들과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크르릉!]

나는 Ark-15 대물 저격총을 다잡았다.

진동 때문인지, 아니면 수전증 때문인지는 몰라도 총을 잡은 손이 조금씩 떨려왔다.

그러나 이 정도 진동으로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우선, 네임드부터.'

사냥의 시간이 다가왔다.

* * *

메이벨 필그림은 끊임없이 걸었다.

출구도, 입구도 없는 암흑.

마치 악몽 속을 헤매는 듯한 기분이었다.

여긴 어디지?

그렇게 스스로 자문하며 걸었으나, 어둠에 끝은 없었다.

[메이벨, 필그림······.]

흠칫.

간간이 어딘가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메이벨은 그 목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천천히 기억을 되새긴다.

분명히 무언가 중요한 걸 찾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모르겠네.'

메이벨은 어둠을 거닐었다.

끝도 없는 어둠 속을 거닐다 보니, 어느덧 그녀는 자신의 발밑이 사라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 아아······!

끔찍한 공포와 어둠이 그녀를 덮쳐왔다.

꼼짝도 할 수 없다.

이대로 심연이 그녀를 집어삼키려던 순간, 그녀는 한 줄기의 빛을 보았다.

'······아.'

기나긴 어둠 속에서 깨어난 그녀가 가장 먼저 느낀 감각은 고통이었다.

부상이라도 크게 입은 건지 목 근육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고, 눈은 따끔따끔하고 목에서도 피 맛이 느껴졌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게 무엇인지는 대강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뒷모습이었다.

[컹! 컹!]

메이벨 필그림은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이곳을 향해 달려드는 마수와, 자신의 앞에 있는 누군가가 싸우고 있다는 걸.

메이벨 필그림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지키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