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탕!
타탕─!
울려 퍼지는 총성 속에서 연신 방아쇠가 당겨진다.
그러나 마수들은 멈추지 않았다.
[크릉, 크르릉!]
[캬오오오오!!!]
'오는군.'
어느새 마수 무리와의 거리가 500m 안쪽까지 좁혀졌다.
예전 같았다면 자리를 피했겠지만, 지금 이곳에는 메이벨 필그림이 있었다.
'슬슬 해볼까.'
마수 무리와의 거리가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자, 내 의지에 감응한 뼈 기생체가 호응했다.
[기잇!]
그리고 내 손으로 뻗어 나온 뼈 촉수.
나는 그것을 거침없이 뽑아 들고는 과감하게 땅에 박았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6분 13초.]
그우우우우우─!!!
엥켈렌스의 영역이 선포되며 마치 엥켈렌스의 포효와 같은 떨림이 주변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 나갔다.
그와 함께 나를 향해서 거침없이 달려들던 마수 무리의 진군 역시도 멈췄다.
본능적으로 이곳이 누구의 영역인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크릉······?]
[컹! 컹!]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수들은 본래의 목적을 떠올리고는 머리를 돌렸다.
어그로가 초기화되었다는 뜻이었다.
'지금 공격하면 영역이 전개된 상태에서 마수 무리의 공격을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답이 없어.'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놈들이 아크로 향하게 둘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마수들과의 거리가 조금 멀어진 뒤 바닥에 박혀 있던 뼈 촉수를 힘껏 뽑았다.
['엥켈렌스의 영역'이 해제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5분 56초.]
나는 다시금 방아쇠를 당겼다.
제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걸 느낀 마수들이 뒤늦게 내 존재를 알아차린 듯했으나, 이미 마수들끼리의 진영이 꼬여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떤 마수는 아크로 다시금 돌진하려 했고, 또 어떤 마수는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다시금 노아를 오르려 했다.
내가 의도한 상황 그대로였다.
'문제는, 네임드 녀석들.'
그 말마따나 몇몇 영악한 네임드 마수와 마물들이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각자의 의사 소통 방식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전달했다.
[캬오, 캬오!]
[아우우우우!]
[킹, 킹컹!]
지금까지 노아를 내려갈지 말지 갈팡질팡하고 있던 마수들의 움직임이 일사불란하게 변했다.
이윽고 내려진 결론은 분명했다.
'나를 노릴 셈이군.'
이 역시도 의도한 바였다.
애초에 내 목적은 이 마수 무리를 아크로부터 완전히 떼어 놓는 게 목적이지, 잠시 붙들고 있는 게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조금 더 깊게 빨아들인다.'
엥켈렌스의 영역은 분명히 일정 수준 이하의 마수와 마물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무적과도 같은 힘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약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직 뼈 기생체가 엥켈렌스의 힘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은 제약 시간은 약 6분.'
이 시간을 이용해서 마수와 마물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려면 최대한 아슬아슬할 때까지 놈들의 접근을 허용할 필요가 있었다.
타타탕!!!
이제 자동 소총 모드로 변경한 Ark-15 자동 소총이 연신 불을 뿜었다.
놈들과의 거리가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슬슬 발동해야겠어.'
내가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하기 위해서 뼈 촉수를 땅에 내리꽂으려던 순간.
쐐애애액─!
바람을 찢고서 날아든 무언가.
뼈 기생체조차도 미처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투사체에 나는 반사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뼈 촉수와 Ark-15 자동 소총을 교차로 들어서 투사체를 막아냈다.
빠각─!
미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내 몸이 뒤로 한 바퀴 굴렀다.
그 정도로 강력한 투사체였다.
"큭······."
좋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뼈가 부러진 건 아니었다.
부러진 건 다른 것이었다.
다급히 총기를 확인하자 투사체를 막아낸 뼈 촉수와 Ark-15 자동 소총의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부숴진 것이었다.
'자가 수복 기능은··· 안 되겠군.'
자가 수복 기능이 발동하지 않을 정도로 크게 박살이 나버렸다.
'대체 뭐가 날아온 거지?'
아무리 '저격수의 시간'을 발동하지 않은 상태였다지만, 내가 간신히 막아내는 게 고작이었다니?
'이건······.'
나는 이내 바닥에 널브러진 투사체 하나를 발견했다.
순식간에 내가 들고 있던 Ark-15 자동 소총을 부숴버린 그것은 다름 아닌 웬 돌멩이였다.
다만, 인간이 들고서 던졌다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크고 단단한 돌이었다.
나는 이내 이 돌멩이를 던진 마물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5급 영장종, 돌팔매질의 무그. 놈이 분명하다.'
돌팔매질의 무그.
겉보기에는 거대한 침팬지의 형태를 한 네임드 마물로서, 이름 그대로 돌팔매질이 특기인 영악한 녀석이다.
설마 놈이 노아와 인접한 마수 무리 행렬에 끼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놈의 존재를 알아차린 건 좋지만··· 문제는 무기를 잃었다는 점이다.'
현재 내 위치는 거대한 바위를 뒤에 낀 채로 엄폐 중인 상태.
만약 여기서 어설프게 나가려 했다가는 다시금 무그의 돌팔매질이 날아들 게 분명했다.
악재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예비용 무기들은 모두 이전 은신처 및 현 은신처에 흩어놓은 상태다.
당장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보조 장비라고 해봐야, 허리춤에 있는 HE2050 권총과 스멜제 7번 마체테뿐.
'···하필이면 유탄 발사기도 같이 파손됐어.'
평소였다면 하지 않았을 방심.
최근에 실험탄을 손에 넣고, 성물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었다고 해서 조금 자만해버린 듯했다.
'어쩔 수 없나.'
아직 싸울 방법은 있다.
비록 손에 쥔 무기는 권총 한 자루와 마체테 하나뿐이지만, 나에게는 강체를 습득한 강인한 육체와 엥켈렌스의 힘마저도 일부 흡수한 뼈 갑옷이 있다.
이제 남은 방법은 육탄전 뿐.
자만에 대한 대가를 외면할 생각은 없었다.
'가볼까.'
그렇게 내가 HE2050 권총과 스멜제 7번 마체테를 뽑아든 채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한 순간.
"자, 잠시만요······!"
귓가에서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목소리.
아니, 애초에 이곳에 있는 인간은 나를 제외한다면 오직 한 명뿐이었다.
"제, 제가, 고쳐 드릴게요. 예전보다 더, 좋게, 네. 그렇게······."
메이벨 필그림.
아크 내에 있는 최고의 무기 공학자 중 한 명이 이제야 깨어났다.
< 메이벨 필그림 (3) - 여기까지 무료입니다. > 끝
< 메이벨 필그림 (4) - 여기부터 유료입니다. >
"일어났나?"
"네? 아, 네네··· 아고 머리야······."
메이벨 필그림의 미간에는 작은 멍 하나가 들어 있었다.
대충 고무탄을 맞은 느낌이라고 보면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고쳐준다니? 설마 Ark-15를 말하는 건가?"
"예, 맞아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당신이 저를 지켜주고 있었던 거죠?"
"그건 맞긴 하다만······."
뭐지?
뭔가 지나칠 정도로 협조적이라서 오히려 의심이 갔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상황 파악이 빠를 수가 있나?
'설마 유령종에게 장악당해 있었던 기억까지 있는 건 아니겠지?'
나도 실험탄을 직접 쏴본 건 몇 번이 채 되지 않는다.
애초에 서브 시나리오의 목적 자체가 실험탄을 회수해서 다시 연구소에 돌려놓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나도 유령종에게 강신을 당했다가 실험탄에 의해서 원래대로 돌아온 인간의 기억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만약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채로 나에게 실험탄을 빼앗기 위해서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면 메이벨을 믿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분명히 매력적인 제안인 건 사실이야.'
애초에 내가 메이벨 필그림에게 빚을 지우려던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장비의 업그레이드였다.
아크 내 최고의 무기 공학자 중 한 명인 그녀라면 필시 현재 내가 지닌 장비들을 한 단계, 혹은 그 이상으로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을 터.
더군다나 의심이 조금 가기는 해도 메이벨 필그림의 입장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전후 상황은 제쳐두고서, 주변에 마수가 득실대는 상황에서 내가 그녀를 지키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먼저, 말해둘 게 있다."
"뭐, 뭐죠?"
"만약 네가 Ark-15를 고치는 데 실패한다면, 아마 우리 둘 다 죽을 가능성이 크다."
"······네?"
혹시 메이벨 필그림이 허튼 수작을 부릴 수도 있기에 한 말이기는 해도,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나나 메이벨 필그림이나 상당한 위기에 처한 게 사실이었으니까.
"하, 하지만 여기는 영산 노아 아닌가요? 이곳에는 마수들이 찾아오지 않는 거로 알고 있는데······?"
"절대적인 건 아니지."
영산 노아에는 마수와 마물들이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거의'일 뿐, 절대라는 명제가 될 수 없다.
그 사실을 뒷받침 하듯이 멀찍이서 마수들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우우우!]
[크르릉······!]
"그런······."
순식간에 메이벨 필그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 경고가 썩 잘 먹혀든 듯했다.
"하, 할게요!"
"좋아, 그러면 고치는 데는 얼마나 걸리지?"
"그, 글쎄요······? 파손 정도를 봐야 알 것 같은데······."
"오 분."
"네, 네?"
"그 이상은 어렵다."
실제로 내가 이제 엥켈렌스의 영역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5분 남짓이었다.
물론 그 시간 전부를 사용할 생각은 없었지만, 최소한 마수들이 물러날 때까지 기다리려면 2분 이상의 시간을 소요해야 할 터.
'더군다나 돌팔매질의 모그까지도 엥켈렌스의 영역에 영향을 받을지는 알 수 없어.'
이성이 본능을 이겨낼 수 있는 고지능의 마물일 수록 엥켈렌스의 영역에 대한 영향력이 적다.
실제로 잔영의 사르트, 2급 환상종 나이트메어는 엥켈렌스의 영역이 선포되어도 잠시 움찔할 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평상시였다면 돌팔매질의 모그도 굳이 엥켈렌스의 영역으로 오지 않았겠지만, 이미 돌팔매질의 모그는 나를 적으로 인식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어그로가 완전히 초기화되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바로 시작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아, 네네!"
나는 메이벨의 시선을 피해서 슬며시 뽑아낸 뼈 촉수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5분 55초.]
메이벨의 표정이 단번에 헬쓱해졌다.
엥켈렌스의 영역 선포는 마수나 마물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다.
생물체가 지닌 본연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게··· 뭐죠?"
"알 거 없다."
"제 가방은······."
"여기 있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메이벨 필그림의 공구 가방 역시도 이미 챙겨두었다.
"아! 감사해요······."
메이벨 필그림은 부랴부랴 공구 가방 안에서 예비용 안경을 써내서 썼다.
그러고 보니, 원래 메이벨은 안경을 쓰고 다니는 인물인데 제놀란 동굴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쓰고 있던 걸 잃어 버려 가지고··· 다행히 이건 안 깨졌네요. 제가 원시가 좀 심해서 가까운 건 잘 안 보이거든요."
안경을 쓰자 내가 알고 있던 평소의 메이벨 필그림의 모습이었다.
뭔가 그립기도 한 그 모습에 나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장비 강화할 때 메이벨 앞에서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던지··· 이 여자가 깨 먹은 장비만 수백 개가 넘어갈 거다.
"어··· 음, 왜요?"
"···아니. 나도 난시가 있어서."
"네에?"
메이벨 필그림은 굉장히 의외라는 얼굴로 말하자, 쓸데없이 하지 말아도 될 소리를 했다는 생각에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됐고, 이만 서둘렀으면 하는데."
"아, 네네."
안경을 고쳐 쓴 메이벨 필그림이 부서진 Ark-15 자동변환 소총과 NO-13 유탄 발사기를 살폈다.
"파손 정도가 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고칠 수 있겠어요."
"유탄 발사기도 고칠 수 있나?"
"아, 네네. 다행히 이건 파손이 그다지 심하진 않네요. 금방 되겠어요."
"부탁하지."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한 메이벨 필그림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진중한 모습이었다.
"저어,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작업에 집중해라."
"이 정도는 가뿐해요."
실제로 메이벨의 손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스패너인지 드라이버인지 모를 온갖 공구들이 움직이고, 파손되어 있던 Ark-15 자동변환 소총과 NO-13이 순식간에 분해됐다.
"제가 신경 쓰이는 게 있으면 작업이 잘되지 않아서 그런데··· 어쩌다가 저를 구하게 되신 건가요? 제가 어느 동굴까지 들어간 건 기억하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어서요."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당연한 의문이었고.
네 가출을 이미 알고서 찾아갔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할 수 없었다.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메이벨이 들고 있는 Ark-15를 반으로 쪼개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칼 마커스가 지닌 신분과 배경을 조금 이용하기로 했다.
토착 신앙을 믿는 부족의 후예.
이 세계에서 나는 문명화가 되지 않은 야만인이자, 에테르라는 초월적인 현상과 공존하는 부족의 일원이다.
"영혼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네에?"
메이벨 필그림의 손이 멈칫했다.
과학의 신봉자.
에테르라는 현상조차도 어떻게든 규명해내려 하는 그녀에게 있어서 영혼의 목소리가 이끌었다는 말은 굉장히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게 대체 무슨······."
"영혼이 나를 이끌었다.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다. 손이 멈췄다. 작업을 계속해라."
"······어, 음. 네. 그렇군요."
메이벨 필그림은 그제야 내 외모가 상당히 이국적이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쿠릴타만큼은 아니어도 나 역시도 아크 내에서 살아온 사람들과는 피부색을 비롯한 약간의 외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이 장비들은 다 어디서 나셨죠?"
"아크와 거래를 했다."
"···밀수품인가요?"
"아니. 정당한 거래였다. 레드 라인 게이트 책임자인 이모샤 중위에게 물어봐라."
어차피 메이벨 필그림이 아크에 돌아가게 되면 내 정체 정도는 금방 알아차릴 테니, 이 정도는 말해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내가 실험탄을 가져간 스컬 턴코트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는 것이었다.
"···확실히. 등록 코드가 레드 라인의 정품이네요. 이걸 밀수했다가는 관계자들의 목이 전부 달아날 테니 그럴 수는 없었겠죠."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와중에 어느새 그것까지 살펴본 건지, 메이벨 필그림은 그렇게 말했다.
분해되어 있던 총기들 역시도 어느새 제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그것도 파손되어 있던 부분들이 말끔히 수리된 채로.
눈앞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NO-13 유탄 발사기는 오렌지 라인의 것인데··· 이건 어디서 나셨죠?"
"주웠다."
"···정말인가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걸 지니고 있던 병사들의 시체에서 챙겼지. 병사들을 납치해온 마수들은 모조리 내가 죽였고. 문제가 되나?"
"···그런 거라면, 문제까지 될 건 없겠죠. 아무리 아크라도 그런 물건에까지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이 부분은 사실 그대로였기에 굳이 감출 필요도 없었다.
아무리 아크가 군수품의 외부 유출에 예민하다지만, 병사들이 들고 나가서 손실된 물건에까지 집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안 물어봤네요. 저는 메이벨 필그림이에요."
"칼 마커스다."
"아직 감사하다는 말씀을 못 전했네요.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지켜주신 것도, 지켜주시고 있는 것도 감사하고요."
"영혼의 목소리에 따랐을 뿐이다."
메이벨 필그림은 허탈한 미소를 한번 짓더니, 이내 말했다.
"제가 왜 그곳에 갔는지는 안 궁금하신가요?"
"굳이 내가 궁금해할 필요는 없지. 나는 영혼의 목소리에 따랐을 뿐이니까."
"···정말인지, 한결같네요. 그래도 제가 말하고 싶으니까 그냥 말할게요. 저는 찾는 물건이 있었어요. 아마··· 이제는 영영 못 찾을 테지만."
"그런가."
"그것만 있으면 유령종과 에테르에 고통받는 아크를 구할 수 있을 텐데··· 다 제 탓이겠죠."
어째 양심이 조금 찔리는 기분이 들었으나, 내색할 필요는 없었다.
어쨌거나 실험탄이 결국 양산화에 실패한다는 것과 내가 메이벨을 구한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다 됐어요, 특히 내구도 부분은 신경 써서 수리했으니까 다음에는 이 정도 충격에는 파손되지 않을 거예요."
"수고했다."
정말로 5분이 되기 전에 Ark-15 자동변환 소총과 NO-13 유탄 발사기의 수리를 끝냈다.
메이벨 필그림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최소한의 부품과, 기존에 있던 잔해들만을 이용해서 이 일을 해냈다.
쓸 수 있는 건 쓰고, 그렇지 못한 건 아예 분해하거나 수리해서 쓴다.
과연 아크 내에서도 손꼽히는 무기 공학 권위자다운 솜씨였다.
'아니··· 이 정도면 단순한 수리 수준을 넘어 섰지.'
나는 곧장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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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k-15 자동변환 소총 MK.3] [★★★(+★★★)(6성)]
아크의 기본 보급형 자동변환 소총 MK.3 버전.
무기 공학 권위자, 메이벨 필그림의 손길을 탄 물건이다. 기본적인 성능 및 내구도가 크게 향상되었다.
연사력이 1단계 상향되었다.
공격력이 1단계 상향되었다.
내구도가 1단계 상향되었다.
자동소총, 대물저격총, 샷건 세 가지 모드로 변경할 수 있다.
NO-13 유탄 발사기를 하부에 결합했다.
NO-13 유탄 발사기의 탄속이 1단계 상향되었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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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능력치"
[Ark-15 자동변환 소총 MK.3]
공격력 : ★★★(+★) (4성)
연사력 : ★★★(+★) (4성)
탄속 : ★★★ (3성)
사거리 : ★★★ (3성)
저지력 : ★★★ (3성)
반동 제어 : (+★) (1성)
내구도 : (+★) (1성)
+
[NO-13 유탄 발사기]
공격력 : ★★★★ (4성)
연사력 : ★ (1성)
탄속 : ★(+★) (2성)
사거리 : ★ (1성)
저지력 : ★★★★ (4성)
공격 범위 : ★★★ (3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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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메이벨 필그림은 과연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장이라는 직책 및 무기 공학 권위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리와 동시에 장비의 업그레이드를 해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해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업그레이드 단계 상승으로 인해서 공격력 수치가 오르고, 추가로 내구도까지 올랐다. 이건 장인 효과라고 봐야겠지.'
같은 업그레이드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추가로 능력치가 붙을 수 있다.
이번 경우에는 메이벨 필그림이라는 아크 최고의 권위자 중 한 명이 직접 업그레이드를 맡은 터라, 내구도 증가라는 추가 능력치가 붙었다.
'거기다가, 공격력 증가가 붙었다. 이건 업그레이드 한 장본인이 메이벨 필그림이라는 점과 초심자의 행운 덕분이라고 봐야겠지.'
능력치 업그레이드에서 가장 고평가를 받는 항목은 공격력이다.
그렇기에 이번 업그레이드로 인한 공격력 상승은 큰 소득이었다.
즉, 이제 파괴력의 등급만 놓고 보면 NO-13 유탄 발사기와 거의 동급이라는 소리였다.
"저··· 이제 괜찮은 거겠죠?"
메이벨 필그림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처음에 했던 경고가 썩 잘 먹혀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아마도."
불확실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나는 이곳에서 자신이 없었다. 죽을 자신이.
나는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한번 다잡았다.
철컥-
준비를 마친 나는 거침없이 땅에 꽂혀 있던 뼈 촉수를 뽑아 들었다.
['엥켈렌스의 영역'이 해제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2분 11초.]
중간중간에 엥켈렌스의 영역을 해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지속 가능한 시간이 2분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게 2분이든, 1분이든, 마수 놈들을 쓸어 버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으니까.
[오고 있어······.]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에테르가 들썩였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머지않아서 멀찍이서 마수와 마물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르릉······.]
[캬우우우!]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사냥꾼은 먹잇감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 메이벨 필그림 (4) - 여기부터 유료입니다. > 끝
마수들이 몰려온다.
여전히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숫자의 마수와 마물들이었다.
조금 전까지 우리를 지켜주고 있던 엥켈렌스의 영역을 해제한 탓이었다.
"어, 어떻게 해요?"
메이벨이 내 등 뒤에 숨은 채로 울상을 지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소음 모드를 적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전보다 총성이 조금 줄어든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별도의 표시는 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전체적인 총기의 성능 자체가 아예 달라진 기분이었다.
"위험하니까 저쪽에 가서 숨어 있어라."
"아, 네네!"
다행히 메이벨은 괜한 오기를 부리지 않고서 얌전히 뒤로 숨었다.
혹시나 돌팔매질의 무그에게 저격이라도 당했다가는 그야말로 대참사였으니 나로서도 저렇게 숨어 있는 게 좋았다.
'염두에 두어야 할 건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돌팔매질의 무그.'
어쩌면, 그 외에도 원거리 공격을 하는 마수나 마물들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본래였다면 최소 오렌지 라인부터 드문드문 등장하는 원거리형 마물을 고작 두 번째 웨이브부터 걱정하게 될 줄은 몰랐으나,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어차피 언젠가는 상대해야 할 녀석들이었다.
'가급적이면 메이벨 앞에서는 뼈 갑옷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게 좋아.'
조금 전에야 메이벨이 기절한 상태인 데다가 무기까지 파손된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하려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꽤 괜찮아졌기에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메이벨이 깨어났으니 뼈 갑옷에 대한 제약이 생겼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메이벨을 이곳에 내버려 둔 채로 홀로 멀찍이 나가서 싸울 수 있느냐? 하면 그 역시도 개의치 않았다.
아무리 영산 노아가 마수와 마물에 있어서 안전지대에 가깝다고는 해도,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눈먼 돌멩이라도 맞게 된다면······.
'어쩔 수 없지.'
곧, 한 가지 결론을 내린 내가 뼈 갑옷에게 의지를 전달했다.
'당분간은 방어 외에는 나서지 마.'
[기깃······.]
어차피 뼈 갑옷은 본래의 목적인 방어 목적으로 사용하더라도 충분히 훌륭한 방어구였다.
특히, 지금처럼 언제 돌팔매질의 무그가 저격을 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러했다.
'이제 방심은 없어.'
나는 돌팔매질로 뚫을 수 없는 바위 하나를 엄폐로 둔 채로 본격적인 사격을 시작했다.
[10급 야수종, 헬하운드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야수종, 헬하운드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10급 야수종, 헬하운드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야수종, 헬하운드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과연 공격력 업그레이드가 괜히 1티어 취급을 받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이, 이전과는 아예 느낌 자체가 달랐다.
'더군다나, 안정성 역시도 크게 늘어났어.'
눈에 보이지 않는 수치.
메이벨 필그림의 손을 아주 잠시 탄 것에 불과했지만, Ark-15 자동소총은 이전과는 아예 다른 물건이 되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총신의 내열 관리 성능 역시도 크게 상향된 기분이었다.
그 순간.
쐐애액───!
아니나 다를까, 본격적으로 사격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대한 돌 하나가 내가 있는 곳을 향해서 쇄도했다.
'이 정도야.'
나는 가볍게 몸을 피했다.
아까처럼 예상하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엄폐를 끼고 대비를 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다시금 무식하게 들고 있는 무기로 저걸 막아낼 필요는 없었다.
돌팔매질의 무그가 한 가지 모르는 게 있다면, 나는 이런 식의 저격전에서 마물 따위에게 져본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돌팔매질의 무그는 영악한 녀석이다. 누군가를 앞에 세워두고, 확실한 엄폐가 있는 곳에 숨지.'
즉, 그러한 무그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무그가 있는 곳 역시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이곳은 영산 노아.
있는 거라고는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암석 지대가 대부분인 곳이었기에, 숨을 장소는 더욱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돌팔매질의 무그의 사정거리 내에서 몸을 숨길만 한 포인트는 대략 여섯 곳 정도.'
그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을 또다시 추리면 두 곳이 남는다.
'그렇다면······.'
나는 유탄 발사기의 거리조절 레버를 조절한 뒤에 각도를 45도 정도 하늘로 향한 뒤에 예상 포인트에 발사했다.
이 정도 거리에서 총알은 거의 직선으로 뻗어가지만, 유탄 발사기는 사용하기에 따라서 곡사포 형태로 사용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퉁! 퉁! 퉁!
유탄을 아낄 필요는 없었다.
탄이라면 차고 넘쳤으니까.
예상 포인트로 날아든 유탄이 이내 목표 지점에 도착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카캉!
첫 번째 지점에서 마수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으나, 애석하게도 돌팔매질의 무그는 아니었다.
[10급 거충종, 근면한 일개미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거충종, 근면한 일개미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10급 거충종, 사각턱 병정 개미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거충종, 사각턱 병정 개미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그러나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쏘아진 유탄은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쾅! 콰카캉──!
하늘에서 유탄이 쏟아져 내린다.
하나, 둘, 셋, 넷······.
콰카카카캉──!!!
연신 울려 퍼지는 폭음.
그와 함께 예상 포인트 중 마지막 포인트 근처에 유탄이 떨어진 순간, 무언가 불쑥 튀어나왔다.
[꾸깃, 꾸끼낏!]
돌팔매질의 무그.
놈이었다.
'엉덩이가 뜨겁긴 했나 보지?'
하지만 어쩌나.
이제는 엉덩이 말고 다른 곳이 뜨거워질 차례인데.
나는 거침없이 조준점을 돌팔매질의 무그의 눈을 조준했다.
예전 같았다면 무려 5급 네임드 마물을 일격에 죽일 수는 없었을 테지만, 왜인지 모르게 지금은 가능할 것 같았다.
'돌팔매질의 무그는 특히나 방어에 취약한 마물이야.'
오히려 방어력만 따지자면 6급 네임드 마수인 이끼의 쿠프보다도 약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직감했다.
찰칵-
타아아아앙───!!!
지금 쏘아진 총알이 놈의 뇌를 꿰뚫을 거라는 걸.
[끼에에에에에─!]
단말마의 비명.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5급 영장종, '돌팔매질의 무그'와의 저격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마물조차 압도하는 놀라운 솜씨입니다.]
[특성, '칼날 탄환'을 획득하였습니다.]
[네임드 마수를 처치하였습니다.]
['괴수 사냥꾼' 효과가 10배로 적용됩니다.]
[5급 영장종, 악마의 팔 침팬지에 대한 피해량이 0.5% 증가합니다.]
'역시······.'
괜히 공격력 업그레이드가 가장 좋은 취급을 받는 게 아니듯이, 공격력이 4성에 다다르기 무섭게 무려 5급 네임드 마물을 일격에 처치했다.
물론 내가 노린 곳이 가장 취약한 급소인 눈이라는 점과, 원거리 마물 특성상 방어력이 취약하긴 했어도 엄청난 성과였다.
'거기다가, 칼날 탄환 특성까지 얻을 줄이야······.'
──────────────
[칼날 탄환]
총기를 통한 원거리 공격 시, 일정 시간 동안 대상의 방어력을 저하시킨다.
저하되는 방어력은 적중시킨 부위에 따라 다르다.
"상세 보기"
──────────────
칼날 탄환은 후에 전방 이상의 전선부터 등장하는 괴암종을 비롯한 방어력이 탁월한 마수와 마물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특성 중 하나였다.
아무리 좋은 무기와 총알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칼날 탄환 특성이 없으면 놈들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주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예상보다 빨리 얻었어.'
적어도 오렌지 라인 이상은 가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돌팔매질의 무그와의 만남이 행운이 된듯했다.
'뭐, 엄밀히 말하면 행운과는 거리가 좀 먼 만남이긴 했지만.'
잠시 감상을 마친 나는 다시금 Ark-15 자동 소총을 다잡았다.
아직도 마수 무리의 진군은 멈추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컥-
방아쇠가 다시금 당겨졌다.
* * *
메이벨 필그림은 기억한다.
어둠 속에 있던 자신이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자신의 앞에 서 있던 어느 사내의 뒷모습을.
처음 심장이 뛰었던 건 아마 긴장해서일 거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주책맞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말이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져 있었으나, 메이벨 필그림은 이내 명석한 두뇌로 순식간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했다.
지금 자신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과, 정체조차 알 수 없는 낯선 사내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밖에 남지 않은 선택지 중에서 고른 것뿐이지 정말로 이 사내가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는 별개였다.
아마 그래서일 거다.
메이벨 필그림은 지금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에 경악하고 있었다.
'대체······.'
자신을 칼 마커스라 밝힌 사내가 약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얼핏 봐도 잘 단련한 것 같은 육체와 나쁘지 않은 장비.
그 정도만 보아도 충분한데, 심지어 영산 노아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약하다면 그게 더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메이벨 필그림을 경악하게 만든 건 칼 마커스가 보이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전투 능력이었다.
'병장? 하사?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메이벨 필그림이 알고 있기에, 아크 내에서 군인의 강함을 측정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계급이다.
절대적이진 않지만, 적어도 전장에 나서는 군인들은 계급이 높을수록 경험이 많고 육체적 능력이 뛰어나며, 지닌 장비조차도 좋다.
그렇기에 보편적으로 군인의 강함은 계급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같은 계급이라 할지라도 최후방인 레드 라인과 최전방인 로즈 라인의 군인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메이벨 필그림이 생각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레드 라인 기준이었다.
'···순간순간의 판단과 센스, 이 정도면 거의 중사급 이상의 전투 능력이야.'
메이벨 필그림은 전투원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숱한 전장을 멀리서나마 지켜봐온 덕분에 군인의 수준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군인들의 장비를 만들거나 테스트할 때 그들이 직접 전투하는 모습을 영상 기록 등으로 많이 접해왔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지닌 장비가 보급형 장비인 Ark-15를 비롯한 NO-13 유탄 발사기라는 걸 생각한다면······.'
자연스레 칼 마커스에 대한 메이벨 필그림의 평가는 더욱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설마, 에테르 적합자?'
영혼의 목소리를 들었니 어쩌니 하는 것도 그렇고··· 만약 칼 마커스가 에테르 적합자라면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이런 자가 아크 바깥에서 살고 있었다고?'
대체 왜?
이런 능력이라면 언제라도 아크에 들여도 이상하지 않다.
'잠깐, 에테르 적합자라고?'
메이벨 필그림은 그제야 칼 마커스가 어째서 영산 노아에서 살아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크는 늘 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리는 만큼 외부인을 받아들이는데 상당히 적극적이지만, 그중에서 절대적으로 예외가 되는 게 바로 에테르 적합자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테르 반응을 띠는 인간이 정말로 인간인지 확신할 수 없기에 거절하는 것이다.
'···블랙 라인.'
메이벨 필그림은 그날의 기억을 잠시 떠올리고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렇다면 나를 구한 것 역시도 어떤 목적이 있어서일 수도 있어.'
그러나 의혹은 의혹일 뿐.
메이벨 필그림은 정말로 칼 마커스가 어떤 꿍꿍이가 있어서 자신을 구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이상한 점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칼 마커스는 아크와 인접한 영상 노아에서 마수들과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가 흘리는 피만큼 아크가 안전해질 거라는 건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간단한 사실이었다.
'속단은 내릴 수 없어.'
만약 칼 마커스가 아크의 적이 아니라면, 아크는 아크에게 호의적인 외부인을 잃게 되는 셈이 된다.
그것도, 아주 유능한 전투원을.
메이벨 필그림은 아크가 그런 어리석을 선택을 하게 둘 생각이 없었다.
'그걸 위해서는··· 칼 마커스에 대해서 더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어.'
칼 마커스는 아크의 적인가?
아니면 아군인가?
메이벨 필그림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칼 마커스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부디, 칼 마커스가 아크의 적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면서.
< 메이벨 필그림 (5) > 끝
마수와 마물의 울음소리가 영산 노아를 가득 메울 것처럼 울려 퍼졌다.
[끼에에엑!]
[캬우우!]
격렬한 소음공해 속에서 놈들을 침묵시키는 데 필요한 건 총알 하나와 방아쇠를 당기는 간단한 동작 정도면 충분했다.
타아앙─!
타타탕!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방아쇠가 당겨질 때마다 마수와 마물들의 울음이 점차 줄어들었다.
본의 아니게 영산 노아의 쾌적한 주거 환경 조성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된 셈이었다.
[9급 야수종, 검은 갈기 치타를 처치하였습니다.]
[9급 야수종, 검은 갈기 치타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8급 야수종, 굶주린 검치호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야수종, 굶주린 검치호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사격을 이어나가는 와중에도 나는 여전히 엄폐를 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혹시 모를 저격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남아 있는 마물 중에서 돌팔매질의 무그 같은 원거리형 마물은 없었는지 또 다른 저격이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방심은 한 번이면 족해.'
지금 내가 있는 장소, 그러니까 노아와 가장 인접한 전선은 최후방인 레드 라인의 전선이다.
그렇기에 본래 이곳에서는 돌팔매질의 무그 같은 원거리 공격을 하는 마물이 거의 출현하지 않지만, 이미 한번 전례가 생겨 버렸으니 방심할 수는 없었다.
[끼에에에에!!!]
마수들과의 거리가 어느덧 500m 안쪽까지 좁혀졌다.
언젠가 닥칠 일이었기에, 나는 거침없이 뼈 촉수를 다시금 땅에 처박았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1분 15초.]
엥켈렌스의 영역이 선포되며 다시금 마수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최대한 빠르게 정리한다.'
나는 정확히 20초를 센 후에 다시금 뼈 촉수를 뽑아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영역을 유지해서 거리를 벌리고 싶었지만, 메이벨 필그림이라는 지켜야 할 대상이 있는 이상 엥켈렌스의 영역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을 어느 정도 남겨놓기는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엥켈렌스의 영역'이 해제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55초.]
'이번 타이밍에 마무리를 짓는다.'
나는 살며시 열기가 느껴지는 Ark-15 자동 소총과 NO-13 유탄 발사기의 총신을 훅훅 휘두르며 열을 식히고는 다시금 그것을 어깨에 견착했다.
통! 통! 통!
나는 유탄 발사기를 아낌없이 당겼다.
정밀한 사격이 아닌 이런 다수의 마수 무리를 상대할 때는 유탄 발사기만한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탄속이 올라간 게 체감이 커.'
유탄 발사기의 탄속은 상대적으로 느린 만큼 유탄이 떨어질 때 마수들이 본능적으로 범위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탄속이 향상된 지금은 웬만한 마수들은 반응하지 못하고서 유탄의 폭발에 휘말리고 있었다.
[10급 야수종, 열대 초원 랩터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야수종, 열대 초원 랩터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10급 야수종, 헬하운드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야수종, 헬하운드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Ark-15 자동변환 소총 및 NO-13 유탄 발사기의 내열 성능 역시도 크게 늘어났는지, 예전이었다면 진작 총신이 뜨거워져서 사용하지 못했을 터인데도 멀쩡했다.
탕, 탕탕─!
콰카캉───!!
총성과 폭음이 연신 울려퍼졌다.
자욱하게 일어난 탄연과 폭발연이 영산 노아의 하늘에 피어올랐을 때, 마침내 노아에서 울려 퍼지던 마수들의 울음소리 역시도 멎었다.
드디어 내가 영산 노아로 불러들였던 마수와 마물들을 모조리 사냥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영혼의 목소리를 이용하였습니다! 영혼들이 속았다는 걸 깨달았으나, 한편으로는 당신에게 감탄합니다.]
[에테르 감응력이 상승합니다.]
[16 -> 17]
에테르 감응력의 상승.
이 성장세라면 머지않아서 타티아나 벨로프가 도달한 경지인 레벨 3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레벨 3의 에테르 적합자부터는 말 그대로 초인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지.'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이미 강체를 손에 넣은 지금도 충분히 초인이라 부를 수 있겠으나, 레벨 3부터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에테르 감응력이 상승함과 동시에 한 가지 변화가 더 생겼다.
[영혼을 지배하는 힘이 강해졌습니다.]
['강체(强體)'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
[강체(强體)] [Lv.2]
에테르를 받아들여 신체를 강화한다.
"상세 보기"
──────────────
레벨 2의 강체 능력.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주변의 에테르가 요동치며 내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를 통해서 스며들기 시작했다.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칼, 마커, 스······.]
[이쪽이야. 이쪽이야. 이쪽이야. 이쪽이야. 이쪽이야. 이쪽이야. 이쪽이야. 이쪽이야. 이쪽이야. 이쪽이야.]
[우리가, 너의 힘이 되겠다······.]
"스읍··· 후우······."
느껴진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오가는 에테르의 움직임이.
그렇게 내가 신체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 조용히 관조하고 있을 때였다.
"저어······."
전투가 끝났다는 걸 알아차린 건지, 숨어 있던 메이벨 필그림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끝난··· 건가요?"
"아직."
"네?"
그 말마따나 여전히 아크의 전선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당장 참전하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지금 내 곁에는 메이벨 필그림의 존재를 생각한다면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단순히 메이벨 필그림을 지켜야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녀가 내가 치르는 전투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메이벨 필그림이 보기에 이미 나는 최소 수백 발이 넘는 총알과 수십 발이 넘는 유탄을 소모했다. 슬슬 이에 대해서 의심을 할 가능성이 있어.'
아니, 이미 충분히 의심스러울 터.
차라리 기절해 있었으면 편했겠지 싶으면서도, 만약 정말로 끝까지 기절해 있었다면 Ark-15 자동변환 소총의 수리와 업그레이드도 물 건너갔을 테니 나로서는 참 기묘한 기분이었다.
마치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기분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아무리 거슬려도 메이벨 필그림의 곁을 떠날 수는 없어.'
괜히 마수 몇 마리를 더 잡겠다고 무리를 하다가 메이벨 필그림이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큰 낭패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웨이브를 두고 보면 아크가 위험해진다.'
웨이브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내가 사냥한 마수의 숫자가 결코 적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있을 아크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한 마리의 마수라도 더 사냥해야 했다.
그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전까지와 같이 영산 노아로 마수를 유인하는 방식은 사용할 수 없었다.
이제 어그로 초기화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엥켈렌스의 영역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아크에 데려다주지. 이만 돌아가야 하지 않나?"
메이벨 필그림이 이곳에 있는 게 문제라면, 그녀를 아크에 되돌려 놓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어차피 이곳에 있는 게 더 위험하다. 너는 돌아가야 해."
메이벨 필그림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아크로 돌아갈 방법은 없어요. 레드 라인의 게이트로 향했다가는 그대로 마수 떼에 깔려 죽을 거예요."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온갖 마수와 마물이 득실대는 레드 라인의 전선 한 가운데를 뚫고서 아크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아니, 애초에 이 상황에서는 아크에서도 게이트를 내려주지 않을 테니 가봤자 개죽음일 뿐이다.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메이벨에게 돌아가라 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에서 전선을 거치지 않고 곧장 아크로 돌아가는 길이 없지는 않을 텐데?"
노아에서 아크로 들어가는 길은 꼭 레드 라인에만 있지 않다.
아크와 영산 노아 사이에는 그보다도 훨씬 더 가깝고 안전한 길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걸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메이벨 필그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가 말한 길이 다름 아닌 화이트 라인을 의미한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화이트 라인에 대한 정보는 아크 내에서도 거의 극비로 부쳐진다.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장, 메이벨 필그림 중령 정도가 아니고서는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당연히 외부인인 내가 화이트 라인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걸 알렸다가는 괜한 의심을 살 테지만, 여기서는 꽤 그럴듯한 핑계거리가 남아 있었다.
"영혼의 목소리가 일러주었다."
"···또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시겠다는 거군요. 알겠어요."
"사실이다만."
"알겠다니까요."
메이벨 필그림은 그다지 내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으나, 믿지 않는다고 해서 별다른 방법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돌아갈 건가?"
"···그래야겠죠.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제가 자리를 비우는 것도 안 될 일이고요."
"그렇다면 바로 출발하지."
"꺅!"
나는 곧장 메이벨 필그림을 안아 들었다.
"위치는 알고 있나?"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니였어요?"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이건 거짓말이었다.
아무래도 노아와 화이트 라인의 경계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으면 수상해 보일 테니 말이다.
'이미 충분히 수상하긴 하지만.'
그러나 지금 메이벨 필그림이 지닌 의혹은 어디까지나 심증에 불과하다.
굳이 내가 먼저 나서서 그 의혹을 확신으로 바꿀 필요는 없었다.
"저쪽, 저쪽으로 가면 돼요."
"알았다."
나는 메이벨 필그림의 손끝을 따라서 그대로 노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애초에 화이트 라인 자체가 아크 내에서 유일하게 영산 노아와 맞닿은 라인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괜찮겠나?"
"네. 여기부터는 화이트 라인의 수비 영역이에요. 당신과 함께 갔다가는 오히려 공격을 당할지도 몰라요."
옳은 말이었다.
실제로 내가 동부 전선에서 서부 전선 쪽으로 이동할 때 가장 신경 썼던 게 화이트 라인의 수비 영역이었다.
"알겠다. 뒤에서 엄호만 하지."
"감사해요."
메이벨 필그림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탄약을 좀 많이 사용하시는 것 같던데··· 혹시 저 때문에 무리를 하신 건가요?"
아니나 다를까, 메이벨 필그림은 내가 끊임없이 총알을 쏟아냈던 광경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사용한 총알의 숫자를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는지, 그저 무리했다 정도로 알고 있는 듯했다.
아마 이 이상 메이벨 필그림과 함께 전투를 치렀다면 확실하게 의심을 샀을 테지만, 다행히 그 전에 일이 마무리되었다.
"신경 쓰지 마라."
"아뇨! 그럴 수는 없어요. 돌아가는 대로 레드 라인의 병참 장교 한 명을 소개해드릴게요. 이번 전투에서 세운 공도 있으니··· 아마 어느 정도는 보급을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웬만하면 더 이상 같은 주제의 대화는 피하려던 나였으나, 그 말까지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병참 장교과의 인연.
현재 아크와 그 어떤 줄도 없는 나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보급이라고?"
"네. 아크에 당신의 활약을 제가 말할게요. 그러면 지금까지 사용하신 소모품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보상 정도는 확실히 주어질 거에요. 누가 뭐라고 해도··· 당신은 아크를 위해서 싸웠으니까요."
빈말이 아니었다.
메이벨 필그림에게는 정말로 나에게 병참 장교를 소개해줄 만한 인맥과 힘이 있었다.
즉, 드디어 지금까지 쌓아왔던 공적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렇게 하지. 병참 장교는 어디서 만나지?"
"웨이브가 끝난 후, 레드 라인의 게이트에 찾아가서 제 이름을 대면 될 거에요."
"그런가, 알았다."
애써 덤덤히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좋아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게 이렇게도 되네.'
사실, 내가 메이벨 필그림을 구한 건 어디까지나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지 이득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그 과정에 장비의 업그레이드라는 소소한 덤이 있긴 했어도, 이 정도까지의 성과를 얻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시 한번 감사해요. 칼 마커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마음대로 해라. 어디까지나 나는 영혼의 목소리를 따랐을 뿐이니."
사실 이미 성과는 충분한 것 같았지만, 굳이 은혜를 또 갚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었다.
"에휴··· 알겠어요. 그러면 갈게요."
메이벨 필그림은 묘한 미소와 함께 꾸벅 인사를 하고는 영산 노아와 맞닿은 아크의 영역을 향해서 서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로써 메이벨 필그림에 대한 신변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셈이었다.
'그러면······.'
마침 쓸 곳도 생겼겠다, 나는 레드 라인의 전선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지긋지긋할 정도로 평원을 가득 메운 마수와 마물들.
'가볼까.'
공적치를 벌러 갈 때가 됐다.
* * *
마수가 몰려든다.
마물이 달려든다.
하늘과 땅을 모두 가득 메운 끔찍한 악마들을 바라보며, Red-17 게이트 관리자인 이모샤 중위는 목이 터져라 지휘를 이어갔다.
"알파 소대! 지금 어디에 있지?"
["R17-41 포인트에서 임무 수행 중입니다."]
"당장 R17-45 포인트를 지원해라. 41 포인트에는 내가 가겠다."
["알겠습니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부상자가 속출하고, 부하들이 죽어 나갔다.
그 순간.
콰카캉!
타타타탕!
어디선가 날아든 총알과 포격.
레드 라인 내에서의 지원이었다.
'뭐지?'
그리고 이내 모습을 드러낸 얼굴은 이모샤 중위 역시도 얼굴을 알고 있는 이였다.
Red-7 게이트 관리자, 템벨 대위.
서부 전선의 게이트 관리자.
그가 이곳에 있다는 건, 곧 서부 전선에서 지원이 왔다는 걸 의미했다.
"···지원 요청을 한 적은 없습니다만."
"상부의 지시다. 지금부터 우리 Red-7 수비대는 Red-17 게이트 수비에 가담한다."
'상부의 지시라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서부 전선에 여유가 생겼다는 뜻.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에 서부 전선은 동부 전선보다도 전황이 좋지 않다.
서부 전선에서 주로 출몰하는 마수와 마물들이 상대하기 까다롭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동부 전선보다도 그 숫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동부 전선에서 최대한 빠르게 공세를 막아낸 후에 서부 전선 쪽으로 지원을 가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역으로 서부 전선에서 동부 전선으로 지원을 오다니?
'···어떻게 된 일이지?'
이모샤 중위의 머릿속에 의문이 싹텄으나, 애석하게도 그 생각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새 비행종 한 마리가 자신의 지척까지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모샤 중위가 다급히 방아쇠를 당기려던 순간.
타앙─!!!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쏘아진 총알이 비행종에게 적중하며 비행종이 괴성을 내지르며 추락했다.
이모샤 중위는 천천히 뒤를 보았다.
그곳에는 조금 전에 지원을 온 Red-7 게이트 소속 수비대 병사가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그래. 고맙다."
"아닙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이모샤 중위는 한숨을 돌렸다.
만약 Red-7 게이트 소속 병사가 지원을 오지 않았더라면 위험할 뻔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모샤 중위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영산 노아를 향했다.
그리고는 잠시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떠올렸으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애써 부정했으나, 이모샤 중위는 왜인지 모르게 자신의 시선이 영산 노아로 향하는 걸 느꼈다.
아마 기분 탓일 거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 메이벨 필그림 (6) > 끝
메이벨 필그림이 화이트 라인에 들어서는 걸 지켜본 뒤, 나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본격적으로 서부 전선의 전장으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내가 사냥한 마수와 마물들의 숫자만 생각해도 충분히 이번 웨이브를 막아낼 수는 있을 테지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쉴 시간이 없어.'
아크의 자원은 한정적이다.
단순히 물자뿐만이 아니라 인적 자원 역시도 포함한 수치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쉬운 초반 웨이브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서 후반 웨이브의 난이도 역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아크의 전력을 최대한 보전해야 해.'
지금 내가 서두르는 이유였다.
마침내 영산 노아와 레드 라인 전선의 경계에 도착한 나는 Ark-15 자동 소총를 다잡았다.
짤깍-
약 50도 정도의 각도로 하늘을 조준한다.
그와 함께 나는 거침없이 NO-13 유탄 발사기의 방아쇠를 당겼다.
한발이 아니었다.
손가락에 쥐가 날 정도로 나는 방아쇠를 연달아서 당겼다.
퉁! 퉁! 퉁!
곡사 형태로 하늘을 향해서 쏘아진 무수한 유탄들이 이내 중력의 부름을 받아서 레드 라인의 전선 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록 몇몇 개는 공중형 마수들인 비행종들과 거충종들에게 맞아서 폭발했으나, 대개의 유탄들은 아니었다.
떨어져 내리는 무수한 검은 점들.
그건 일종의 폭격에 가까웠다.
마수들을 향한, 재앙과도 같은 폭격.
콰카카카카카────!!!!
[10급 야수종, 열대 초원 랩터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야수종, 열대 초원 랩터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한발도 아닌 수십 발의 유탄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니, 해일처럼 몰아치던 마수들의 진격도 잠시나마 멎을 수밖에 없었다.
[크르릉······!]
NO-13 유탄 발사기는 Ark-15 대물 저격총은 물론이고 자동 소총 모드와 비교해도 사정거리가 그렇게까지 길지 않다.
그렇기에 지금 나는 레드 라인의 전선에 어느 정도 노출되어 있다고 봐도 좋았다.
'어그로가 끌린다.'
그 말마따나 에테르의 반응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수와 마물들이 나를 향해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마수들과 나 사이의 거리는 기껏 해야 1km도 채 되지 않은 상황.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자동 소총 모드로 변경합니다.]
조준, 사격.
─────!!!
연달아 총성이 울려퍼진다.
메이벨 필그림의 업그레이드 덕분에 열 관리 따위는 잊어버린 Ark-15 자동 소총이 끊임없이 총알을 토해내며 거대한 탄막을 형성했다.
마수들이 쓰러진다.
마물들이 죽어간다.
곧, 그러한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는 곧 나를 지키는 방패이자 방벽이 되어주었다.
'잘들 지키고 있으라고.'
나는 다시금 총구를 대각선으로 겨누었다.
방아쇠를 잡는 위치가 변한다.
다시금 유탄 발사기의 방아쇠를 잡은 손가락이 거침없이 당겨졌다.
딸깍-
투웅!
NO-13 유탄 발사기의 발사음은 총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시시하다.
오죽하면 소음기를 착용한 총성보다도 적었으니, 얼핏 보면 이곳에서 쏟아지는 게 유탄이 아닌 다른 거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전장에 있는 마수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로 무엇이 떨어지는 지조차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소리 없는 폭격이 다시금 쏟아졌다.
콰카카카캉───!!!
폭격, 저지, 다시 폭격.
이 간단한 프로세서만으로도 레드 라인에 나타나는 마수 군단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는 충분했다.
돌팔매질의 무그 같은 녀석이 특이 케이스인 거지, 고작 두 번째 스테이지에서 레드 라인에 나타나는 마수와 마물은 대개 거기서 거기였으니 말이다.
'나중에 가서 이런 식의 무식한 전법을 썼다가는 그대로 돌팔매질이나 뼈 투창에 맞아 죽겠지만······.'
그러나 그게 지금은 아니다.
지금 이곳은 레드 라인의 전선이었고, 이곳에 있는 마수와 마물들의 수준은 그렇게까지 높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지금 전장에 서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아크와 마수 군단이 싸우는 것을 내가 한 손 거드는 것에 불과했다.
쾅! 콰캉──!
타타타탕!!!
아크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폭격.
지금 내가 지닌 장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무식한 수준의 중화기 역시도 아크의 전선에서는 마치 길가의 돌멩이처럼 굴러다니고 있었으니, 애초에 화력이 비교가 될 리가 만무했다.
그 덕분일까.
[그우우우우······.]
[끼에에에에──!]
어느새 땅과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마수와 마물들의 비명이 점차 멎어갔다.
절대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끝이라는 단어가, 드디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크릉!]
[캬오오오오!]
마수들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는 거침없이 뼈 갑옷에서 뼈 촉수를 뽑아내서 그것을 바닥에 꽂았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25초.]
이제 엥켈렌스의 영역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곧, 이 전쟁은 끝날 테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마침내 최후의 마수가 쓰러졌다.
[Red-02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였습니다!]
[공적치가 누적됩니다.]
[+11,514 공적치]
[전선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매우 뛰어난 활약을 보였습니다! 공적치가 추가로 적립됩니다.]
[+2,500 공적치]
[혼란스러운 와중에 위기에 빠진 레드 라인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장을 구출하였습니다! 공적치가 추가로 적립됩니다.]
[+1,500 공적치]
[현재 공적치 : 32,435]
두 번째 웨이브.
이 세계에 온 뒤로 두 번째로 겪는 웨이브가 드디어 끝이 났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전쟁을 증명하듯이 레드 라인의 전선에서는 여전히 무수히 많은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저걸 다 정리하기 위해서, 아크는 또다시 엄청난 여력을 쏟아내야 할 터였다.
"후아······."
나는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후끈한 열기와 함께 열기로 인해서 휘어버릴 것만 같은 Ark-15 자동변환 소총과 NO-13 유탄 발사기의 총신.
그리고 무려 2단계 강체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전신에서 비 오듯이 쏟아지는 땀은 지금까지 있었던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말해주었다.
'그래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지.'
이번 웨이브를 통해서 무려 15000에 가까운 공적치가 올랐다.
보통 첫 번째 및 두 번째 스테이지에서 얻을 수 있는 공적치는 기껏해야 500에서 1000 사이.
그런데 나는 고작 두 번의 웨이브, 그리고 한 번의 웨이브를 막아낸 것으로 3만이 넘는 공적치를 손에 넣었다.
이제 메이벨 필그림 덕분에 아크의 병참 장교와 접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엄청난 소득이었다.
'이 정도면··· 잘하면 '그것'도 살 수 있겠어.'
물론 어디까지나 병참 장교와의 협상이 잘 될 경우겠지만, 메이벨 필그림의 언질도 있었으니 아마도 가능할 것 같았다.
'병참 장교로 누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녀석이 나와줬으면 좋겠는데.'
뭐어, 그건 그거고······.
드디어 웨이브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챙겨야 할 게 있지.'
괜히 느긋하게 있다가는 아크에서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를 모조리 소각해버릴 수도 있었으니, 가능하다면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특히, 돌팔매질의 무그의 시체는 반드시 챙겨야 해.'
무려 5급 네임드 마물.
지금까지 뼈 기생체가 먹었던 것 중에서 엥켈렌스의 송곳니를 제외한다면 가장 상위 등급의 마물이었다.
다행히 돌팔매질의 무그의 시체는 영산 노아 내에 있었으니 아크에서 소각할 가능성은 적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내가 서두르지 말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괜히 쓸데없이 여유를 부렸다가는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게 이 빌어먹을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우선, 노아에 가기 전에 인근에 있는 마수 시체부터 먹어 치워야겠지.'
이곳에 있는 마수와 마물 시체들은 아크의 소각 범위에 포함되는 만큼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자, 밥 먹을 시간이다.'
[기잇!]
이번 전투에서는 엥켈렌스의 영역을 전개할 때 빼고는 거의 나설 기회가 없었던 뼈 기생체였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직접적인 전투일 뿐이지 이미 뼈 갑옷은 내 움직임을 보조하는 둥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니, 만약 뼈 갑옷이 없었더라면 내가 이처럼 과감하게 레드 라인의 전선 근처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스스스───!
뼈 갑옷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온 뼈 촉수들이 주변에 쓰러져 있는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에 거침없이 꽂혔다.
쪼옥, 쪽─
마치 빨대처럼 마수와 마물들을 빨아먹고 있는 광경은 이미 전장을 무수히 겪어온 나로서도 조금 보기 힘들었다.
'음.'
그 사이에 마수들의 피가 고인 웅덩이에 내 모습이 살며시 비쳤다.
사방으로 뼈 촉수를 흩뿌리며 마수들의 시체를 빨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마물의 모습이었다.
만약 누군가 이러한 내 모습을 본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서 그대로 방아쇠를 당길 터.
'빨리 먹어.'
괜히 여유를 부리다가 총을 맞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뼈 기생체를 재촉했다.
[기깃!]
뼈 기생체가 밥 먹는 데는 개도 안 건드린다며 반항했으나, 지금 상황에 내가 그런 걸 기다려 줄 리가 만무했다.
'야, 그리고 좀 좋은 거로 골라서 먹어. 쓸데없는 거로 배 좀 채우지 말고.'
지금 뼈 기생체가 먹고 있는 마수와 마물들의 등급은 대개 10등급에서 9등급의 하급 마수들이었다.
당연히 그런 것들을 아무리 많이 먹어봐야 만족스러운 성장도가 나올 리가 만무했다.
'어디 보자··· 아, 그래. 저런 것 좀 먹어.'
내가 이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8급 괴수종의 시체를 가리키자, 뼈 기생체가 알겠다는 듯이 촉수를 뻗었다.
그렇게 내가 안목 없는 뼈 기생체를 대신해서 마수들의 시체를 찾다 보니, 특히나 눈에 띄는 마수 하나가 보였다.
나도 이미 알고 있는 마수였다.
'저건······.'
6급 네임드 마수, 땅굴 파는 뮬.
무려 이끼의 쿠프와 동급의 마물로서, 6급 지하종인 검은 털 땅굴 두더지의 네임드 마수였다.
땅굴에 사는 특성상, 본래였다면 시체를 찾기 어려운 녀석이었건만··· 어째서인지 녀석의 시체가 마치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전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야야, 저거 먹어. 저거.'
나는 다급하게 뼈 기생체를 불렀다.
나중에 가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6급 네임드 마수의 시체는 레드 라인에서는 보기 힘들다.
하물며 지금처럼 아크의 시선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장소라면 더욱더 그렇다.
5급 네임드 마물 돌팔매질의 무그를 먹기 전에 애피타이저로는 딱 좋은 먹잇감인 셈이었다.
[기깃!]
뼈 기생체 역시도 뒤늦게 땅굴 파는 뮬의 강함을 어느 정도 느꼈는지 촉수 여러 개를 한 번에 움직였다.
쪽, 쪼오옥──!
쯥, 쯔으으읍······.
지금까지 하급 마수와 마물을 먹었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힘이 뼈 갑옷을 통해서 전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이끼의 쿠프를 먹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
나는 곧장 뼈 갑옷을 확인했다.
──────────────
[뼈 갑옷(Lv.3)] [★★★★★★★(7성)]
아크의 기본 보급형 방호복(Lv.3)의 에너지원에 가축화시킨 뼈 기생체를 연결한 방어구.
뼈 기생체의 숙주로 6급 네임드 괴수종 이끼의 쿠프의 심장이 사용되었다.
뼈 기생체의 힘과 이끼의 쿠프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다.
이끼의 쿠프의 피와 살을 섭취하여, 사용할 수 있는 이끼의 쿠프의 힘이 늘어났다.
등급 외 용종 엥켈렌스의 송곳니를 흡수했으나, 아직 온전히 그 힘을 흡수하지 못했다.
일정 시간 동안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할 수 있다.
현재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 : 9.8%
6급 네임드 지하종, 땅굴 파는 뮬의 피와 살을 모조리 먹어 치우고, 그 힘을 흡수했다.
땅굴 파는 뮤의 능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
"상세 보기"
──────────────
'과연······.'
이끼의 쿠프 때와는 달랐다.
이끼의 쿠프 때는 이끼의 쿠프 자체가 워낙 몸체가 거대한 마수였던 데다가 뼈 기생체의 성장 역시도 애매했던 때라 피와 살을 온전히 먹어 치우지 못했다면, 이번에는 땅굴 파는 뮬의 몸체가 이끼의 쿠프보다 훨씬 작은 것과 더불어서 뼈 갑옷이 성장한 만큼 먹성 역시도 늘어났기에 땅굴 파는 뮬의 모든 걸 먹어 치울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끼의 쿠프 때는 사용할 수 있는 능력도 암석화 하나 정도였으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뼈 갑옷에게 의지를 전달한 순간.
['땅굴 파기'가 발동합니다.]
그와 함께 거침없이 뻗어 나간 뼈 촉수가 단번에 땅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뼈 촉수가 땅속을 자유롭게 헤집을 수 있다는 걸.
'거기다가··· 이런 식의 활용도 가능해.'
땅밑으로 향한 뼈 촉수가 단번에 지상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야말로 발밑에서의 기습인 셈.
어떻게 보면 잔영의 사르트가 사용하던 그림자 능력과도 유사한 능력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 능력이라면 잔영의 사르트에게도 타격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잔영의 사르트는 물질계에 속한 마물임에도 그림자 속에 숨는다는 특이성 때문에 지반을 전부 날려버릴 수 있는 화력이 없다면 잡기가 매우 까다로운 마물이다.
하지만, 땅속에서 직접 잔영의 사르트가 숨어 있는 그림자를 공격한다면?
아마 내 추측이 맞는다면,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땅굴 파기의 진면목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할 수 있겠어?'
[기깃!]
뼈 기생체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과 함께 거침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뼈 촉수들이 단번에 내 발밑을 헤집기 시작했다.
마치 땅굴 파기의 뮬이 파는 것처럼 더없이 자연스럽게, 내 몸이 지하로 잠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하로 들어가다 보니 문득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나는 여기서 숨 못 쉬는데.'
하지만 방법은 있었다.
나는 곧장 속이 빈 뼈 촉수 하나를 지상과 연결해서 호흡용 대롱을 하나 만들었다.
일종의 뼈 호흡기라고 해야 할까.
조금 모양새가 우습기는 했지만, 흔적도 없이 땅밑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건 매우 쓸모있는 능력이었다.
'유사시에 은신용으로 매우 좋겠어.'
물론 땅밑에도 마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지상보다는 훨씬 더 덜한 게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뼈 촉수를 땅속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과, 유사시에 지하로 숨을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두 가지 모두 이끼의 쿠프가 지녔던 암석화만큼이나 매우 쓸모있는 능력들이었다.
'운이 좋았어. 이곳에서 6급 네임드 마수의 시체를 찾다니.'
더군다나 이로써 뼈 기생체의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도 더욱 올라갔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하지만 기뻐하기에는 이르지.'
나는 영산 노아를 바라보았다.
저곳에는 아직 내가 아끼고 아껴 두었던 메인 디쉬가 남아 있었다.
'돌팔매질의 무그.'
놈을 먹어치울 때가 됐다.
< 땅굴 파는 뮬 > 끝
'대충 여기서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겼나.'
땅굴 파는 뮬의 시체를 뼈 기생체에게 먹인 뒤, 나는 곧장 아크의 시선 바깥에 있는 마수들의 시체를 대부분 챙겼다.
아무래도 대다수의 마수와 마물의 시체들은 레드 라인의 전선에 있다 보니, 그 숫자가 마냥 많지만은 않은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내가 마수와 마물 시체를 먹이는 걸 아크에 발각될 수는 없으니까.'
아크 내에서도 뼈 기생체 장비를 비롯한 스컬 나이트들은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예전에 말했듯이 외적인 혐오감이었다.
흡사 마물과도 같은 생김새.
거기에 더해서 실제로 마수와 마물을 먹는 모습까지 보이는데 신원을 확인해보니 아크 소속의 군인이 아니다?
바로 스턴 턴코트 취급을 당하며 아크에게 공격받을 게 뻔했다.
'거기다가 나는 전과까지 있으니······.'
이미 아크 내에서도 회수팀을 공격한 스턴 턴코트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을 터.
괜히 뼈 촉수를 훤히 드러낸 채로 아크의 눈에 띌 필요는 없었다.
'조금 아쉽기는 해도··· 애초에 지금의 성과만으로도 크긴 하니까.'
땅굴 파는 뮬의 시체와 더불어서 마수들의 시체를 적잖이 먹인 덕분인지, 조금 전부터 뼈 갑옷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도 부쩍 올랐고··· 이 정도면 엥켈렌스의 영역을 전개하는 지속 시간 역시도 크게 늘어났을 게 분명했다.
[기잇!]
배가 부른 뼈 기생체는 아무래도 기분이 좋은지 촉수를 들썩였다.
'거기다가 아직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기도 하고.'
영산 노아에는 여전히 내가 사냥한 무수히 많은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가 있다.
거기에 더해서 오늘 얻었던 소득 중에서 가장 큰 소득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돌팔매질의 무그의 시체까지 있었다.
'슬슬 가볼까.'
그렇게 내가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웬 마수의 시체 하나가 눈에 띄었다.
7급 네임드 야수종, 붉은 송곳니 사카르.
비록 땅굴 파는 뮬이나 돌팔매질의 무그보다는 급이 떨어져도, 그냥 이렇게 눈앞에 가기에는 조금 아쉬운 녀석이었다.
'으음.'
만약 이곳이 영산 노아의 영역 안이었다면 당연히 챙겼겠지만, 애석하게도 위치가 애매했다.
붉은 송곳니 사카르의 시체가 있는 곳이 하필이면 아크의 시선이 아슬아슬하게 닿는 경계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 아크의 상태가 평온하게 전선을 감시하고 있을 상황은 아닐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정 짓고 가기에는 얻는 이득 대비 위험부담이 너무나도 컸다.
'흐음.'
역시 그냥 가야 하나?
조금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로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렇게 하면 되려나.'
물론 이 역시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대놓고 마수 시체를 가지러 가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은 방법이었다.
'이런 대규모 전쟁 중에 지반이 무너지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지.'
나는 아크의 시선이 닿는 아슬아슬한 곳까지 걸어간 뒤에, 곧장 정신을 집중했다.
이 정도 거리라면 굳이 내가 직접 지하까지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땅굴 파기'가 발동합니다.]
스스스───!
내 의지에 감응한 뼈 촉수들이 단번에 땅을 파고들었다.
지하로 파고든 뼈 촉수들이 길게 늘어나며 붉은 송곳니 사카르가 있는 밑의 지반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서서히 붉은 송곳니 사카르가 놓여 있는 지반이 무너졌다.
후두둑─!
마침내 지반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붉은 송곳니 사카르의 몸이 땅속에 잠겼다.
그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뼈 촉수들이 붉은 송곳니 사카르의 몸에 차례로 꽂혔다.
쑤욱, 쑥───!
쯔으읍, 쯥─!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뼈 기생체가 붉은 송곳니 사카르의 시체를 모조리 먹어치웠다.
아무래도 뼈 촉수를 늘릴 수 있는 최대의 거리로 늘린 탓인지는 몰라도 평소보다 마수를 흡수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만약 뼈 갑옷이 성장하지 못했더라면 이 정도까지 뼈 촉수를 늘리지도 못했을 테지만, 지금 뼈 촉수는 집중한다면 수십m까지도 늘릴 수 있게 된 상태였다.
[기깃!]
예정에 없던 포식을 마친 뼈 기생체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배를 두드렸다.
'아마 이 정도가 한계겠지.'
붉은 송곳니 사카르가 있던 곳은 아크의 감시망의 경계다.
그렇기에 지반이 살짝 무너져도 시선이 닿지 않았겠지만, 괜히 더 깊이 들어갔다가는 반드시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연달아서 지반이 무너지면 아크에서도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직접 지하로 들어가서 지하 속에서 직접 지상으로 촉수를 뻗는 방법 역시도 불가능했다.
아크의 감시망은 일정 이상으로 들어가면 지하 역시도 감시 영역에 포함될 뿐더러, 지상 위에서 보기에도 멀쩡했던 마수의 피륙이 갑자기 말라가면 눈치를 챌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여러모로 이쯤에서 돌아가는 게 맞아.'
생각을 마친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아쉬운 건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노아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노아에 오르는 내내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가 나를 반겼으나, 나는 무시한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것들은 나중에 먹여도 되니까.'
일종의 우선순위에 있어서 밀렸다고 볼 수 있었다.
돌팔매질의 무그의 시체가 발이 달려서 어디로 도망가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내버려 두기에는 조금 그랬으니 말이다.
'대충 이쯤이었던 거 같은데.'
나는 기억을 더듬어서 내가 돌팔매질의 무그를 사냥했던 바위를 찾기 위해서 노아를 헤맸다.
그렇게 찾아도 돌팔매질의 무그의 시체가 도통 보이지 않자, 결국 나는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영산 노아를 지켜보고 있는 무수히 많은 녀석들에게 말이다.
"돌팔매질의 무그는 어디에 있지?"
에테르가 들썩였다.
이제 내 에테르 감응력이 적지는 않았기에 이 정도 의사소통은 크게 문제가 없었다.
[저쪽. 저쪽. 저쪽. 저쪽. 저쪽. 저쪽. 저쪽. 저쪽. 저쪽. 저쪽. 저쪽. 저쪽. 저쪽. 저쪽. 저쪽. 저쪽. 저쪽.]
[따, 라와······.]
[저기에, 있다. 있다. 저기에.]
나는 에테르의 안내에 따라서 돌팔매질의 무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머지않아서 나는 유탄 발사기로 인한 폭발 흔적과 함께 돌팔매질의 무그의 시체를 찾을 수 있었다.
'드디어 찾았네.'
돌팔매질의 무그의 시체는 얼핏 보면 마치 병으로 죽은 것처럼 상대적으로 깨끗했다.
쏘아진 총알이 눈과 뇌는 꿰뚫었지만, 두개골까지는 꿰뚫지 못하고 뇌 안에서 멈췄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5급 마물의 뼈는 단단했고, 가죽 역시도 질기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곧 뻗어나온 뼈 촉수는 그 질기디질긴 5급 마물의 가죽을 향해서 거침없이 나아갔다.
푹! 푸푹!
예전 같았다면 쉽게 꿰뚫지 못했을 5급 마물의 가죽.
그러나 암석화와 땅굴 파기까지 발동한 뼈 촉수는 너무나도 쉽게 돌팔매질의 무그의 가죽을 꿰뚫었다.
아무리 돌팔매질의 무그가 방어력 면에서는 이끼의 쿠프만 못한 마물이라고는 해도, 그 자체로 이미 뼈 갑옷의 성장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쯔읍, 쯥, 쯥······.
한참 동안 뼈 촉수가 부지런히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레드 라인 전선에 널려 있는 하급 마수나 땅굴 파는 뮬을 먹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뼈 갑옷이 거칠게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부르르르───
[기깃, 기기기긱─!]
뼈 기생체가 비명을 토했다.
그러나 엥켈렌스의 송곳니를 먹었을 때와는 조금 달랐다.
그때보다도 훨씬 더 안정된 느낌.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머지않아서 뼈 갑옷의 떨림이 서서히 멈췄다.
['뼈 갑옷'이 '돌팔매질의 무그'를 흡수했습니다!]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이 15%를 돌파하여, 새로운 능력을 개방합니다.]
──────────────
[뼈 갑옷(Lv.3)] [★★★★★★★★(8성)]
아크의 기본 보급형 방호복(Lv.3)의 에너지원에 가축화시킨 뼈 기생체를 연결한 방어구.
뼈 기생체의 숙주로 6급 네임드 괴수종 이끼의 쿠프의 심장이 사용되었다.
뼈 기생체의 힘과 이끼의 쿠프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다.
이끼의 쿠프의 피와 살을 섭취하여, 사용할 수 있는 이끼의 쿠프의 힘이 늘어났다.
등급 외 용종 엥켈렌스의 송곳니를 흡수했으나, 아직 온전히 그 힘을 흡수하지 못했다.
일정 시간 동안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할 수 있다.
현재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 : 15.2%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이 15%를 돌파하여, '엥켈렌스의 창'을 소환할 수 있다.
6급 네임드 지하종, 땅굴 파는 뮬의 피와 살을 모조리 먹어 치우고, 그 힘을 흡수했다.
땅굴 파는 뮬의 능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
5급 네임드 영장종, 돌팔매질의 무그를 흡수했다.
돌팔매질의 무그가 지닌 능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
"상세 보기"
──────────────
'이건······.'
돌팔매질의 무그를 흡수하며 뼈 갑옷 자체가 7성 등급에서 8성 등급으로 성장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엥켈렌스의 송곳니에 대한 흡수율 역시도 훨씬 더 높아지며, 엥켈렌스가 지녔던 능력 중 하나가 개방되었다.
'엥켈렌스의 창이라고?'
이건 나도 처음 보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
모른다면 직접 써보면 그만이다.
['엥켈렌스의 창'을 소환합니다!]
['엥켈렌스의 창' 소환 가능 시간 : 10분 11초.]
그와 함께 뼈 갑옷에서 기다란 뼈 촉수 하나가 뻗어 나왔다.
그러나 그건 지금까지 무수히 뿜어져 나왔던 뼈 촉수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온통 검은 빛으로 물든 탁한 빛.
기존의 뼈 촉수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불길함.
같은 두께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뼈 촉수보다도 압도적인 무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엥켈렌스의 창을 잡고서 그대로 돌팔매질의 무그가 엄폐로 삼고 있던 바위를 후려쳤다.
콰드득─!!
그와 함께 산산히 부서지는 바위.
아무리 내 신체 능력치가 일반인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고, 강체까지 소유하고 있다지만 뼈로 만든 창으로 바위를 산산 조각내버린 것이다.
'···거의 중화기급 파괴력이군.'
이게 사람이 직접 휘두른 무기가 낼 수 있는 파괴력이라고?
직접 엥켈렌스의 창을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력에는 저도 모르게 질릴 정도였다.
'단순히 무기가 단단하다거나, 무게가 무거워서가 아니야.'
말 그대로 무기 자체가 지닌 설명할 수 없는 파괴력.
그게 엥켈렌스의 창에는 있었다.
'엄청난 걸 손에 넣었어.'
설마 하니 송곳 토템을 먹은 뼈 갑옷이 이런 식으로 성장할 줄은 몰랐다.
'자, 그러면······.'
나는 그다음으로 본래의 목적이었던 돌팔매질의 무그가 지녔던 능력을 살폈다.
어찌 보면 오늘 얻었던 성과 중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도 있었으나, 엥켈렌스의 창을 보고 난 뒤라서인지 조금은 식는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지.'
내가 천천히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뼈 갑옷에게 의지가 전달되자, 뼈 갑옷의 몸체가 살며시 떨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뼈 갑옷에서 뼈 촉수 하나가 스멀스멀 튀어나왔다.
예전에 비하면 놀랍도록 강하고 단단해진 뼈 촉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있었던 뼈 촉수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내가 조금 의아한 시선으로 뼈 촉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뼈 투창'이 발동합니다.]
섬광이 뻗어나갔다.
< 돌팔매질의 무그 > 끝
쐐애애액───!!
귓가에서 들려온 파공음.
쏘아져 나간 건 분명히 조금 전에 뼈 갑옷에서 튀어나온 뼈 촉수였다.
콰앙─!
이내 쏘아진 뼈 촉수가 어느 바위 하나에 박혔다.
쩍쩍 갈라져 나간 바위틈 사이로 박혀 있는 뼈 촉수의 모습은 그야말로 흉험하기 그지없었다.
'사정거리는 분명히 Ark-15 자동 소총은커녕 NO-13 유탄 발사기보다도 짧은 것 같긴 한데······.'
하지만 총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질량을 지닌 뼈 촉수를 발사하는 수단인 만큼, 저지력에 있어서는 NO-13 유탄 발사기에 준하거나 그 이상으로 보였다.
'꽤 괜찮은데.'
어쨌거나 뭐가 됐든지 간에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공격 수단이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적의 허점을 찌를 수가 늘어난다는 것과도 같았으니까.
'혹시 이렇게도 활용할 수 있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이번에 얻은 두 가지 능력과 이끼의 쿠프를 사냥하고 얻은 능력을 섞어서 사용했다.
일종의 실험이었다.
['암석화'가 발동합니다.]
['땅굴 파기'가 발동합니다.]
['뼈 투창'이 발동합니다.]
그와 함께 단번에 노아의 암석층을 뚫고서 지하로 뚫고 들어간 뼈 촉수가 길게 늘어나더니, 어느 부분에서 멈춘 뒤에 그대로 중간 부분이 뚜둑-하고 끊겼다.
쐐애액─!
그리고 그대로 땅을 뚫고서 뼈 촉수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비록 지상에서 사용했을 때보다는 위력 면에서 다소 약해 보이긴 했으나, 적의 허를 완전히 찌를 수 있다는 점에서는 거의 백점짜리 공격이었다.
'다른 능력도 있지만··· 오늘은 일단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다음에 하는 게 낫겠지.'
나는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
치열했던 두 번째 웨이브가 지나간 후.
오랜만에 잠을 설쳤다.
[키득······.]
[들어줘······.]
[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
에테르 감응력이 늘어나며 그만큼 많은 목소리를 듣게 된 탓인지, 아니면 드디어 약초들에 내성이 생긴 건지는 몰라도 임시방편이 한계를 맞이했다는 뜻이었다.
[격렬한 전투 후 휴식을 취했습니다. 피로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체력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7 -> 18]
그 탓인지 무려 웨이브를 막아내는 격전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치 성장이 상대적으로 더뎠다.
'···죽겠네.'
아무래도 조만간 내 잠을 방해하는 무뢰배들에게 실험탄 GHOST-157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맛보여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원래 일방적 소통이 특기인 녀석들과 대화가 필요할 때는 실험탄 GHOST-157가 장전된 Ark-15 샷건만한 게 없다.
그리고······.
뒷정리의 나날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뒷정리는 역시나 영산 노아 내에 있는 마수 및 마물 시체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값어치가 될만한 마수의 부위랑 요리해서 먹을만해 보이는 것들은 따로 빼놓고, 나머지는 전부 다 뼈 기생체한테 먹이면 되겠지.'
팔 수 있는 건 팔고,
먹을 수 있는 건 먹고,
그렇지 못한 나머지는 죄다 뼈 기생체에게 넘긴다.
이렇게 알뜰하게 활용하다 보니 어느덧 마수와 마물 시체는 나에게 있어서 더없이 귀중한 자원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아크 바깥에서 지내며 무언가를 소모할 수밖에 없는 내가 채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이라고 해야 할까?
'마수와 마물 잔해물은··· 대충 아크에 팔아넘기면 되겠지.'
견고한 성벽 안에서 폭격을 쏟아내는 아크와는 달리, 외부인에게 마수와 마물 시체는 썩 매력적인 거래품목이 아니다.
그들 역시도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마수 및 마물 시체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상대적으로 멀쩡한 마수와 마물 시체를 얻기 힘든 아크에서 오히려 마수와 마물 시체의 가치가 꽤 있는 편이다.
비록 웨이브가 끝난 이후에 외부에 별도의 회수팀이 파견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사체를 찾는 건 쉽지 않다.
아크의 막강한 화력에 노출되면 아무리 가죽이 질긴 마수와 마물이라도 버티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크가 항상 마수와 마물들에게 공격받는 곳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뭐, 나로서는 잘 됐지만.'
마수 및 마물들의 잔해.
이건 충분히 아크를 상대로 교섭을 할 수 있는 재료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면··· 슬슬 찾아가볼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던가.
은신처 근처의 뒷정리도 대충은 끝났겠다, 슬슬 아크로 찾아갈 필요성을 느꼈다.
메이벨 필그림이 말했던 병참 장교와 만나기 위해서였다.
겸사겸사 지금까지 내가 알뜰하게 모아왔던 마수와 마물의 잔해물도 팔아치우고 말이다.
'마침 아크도 뒷정리를 거의 다 해가는 분위기기도 하고.'
첫 번째 웨이브가 끝난 후에도 그랬듯이 아크의 전선에서는 지난 며칠간 내내 화염이 타올랐다.
아크 인근의 거주민으로서 불법 방화로 인한 미세먼지 발생에 대해서 강하게 항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항상 화산재를 먹고 사는 처지에 굳이 따지는 것도 우습다 싶었다.
'뭐어··· 그건 그거고.'
나는 곧장 준비에 나섰다.
군장 안을 꽉 채운 것도 모자라서 그 위에 마수의 힘줄로 엮어서 마수와 마물의 부산물들을 잔뜩 실었다.
그렇게 한 아름 짐을 싸든 채로 내가 향한 곳은 Red-1 게이트였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고, 그냥 이곳이 내가 있는 장소와 가장 가까운 레드 라인의 게이트여서였다.
'이왕이면 아는 얼굴이 있는 Red-17 게이트로 가는 게 낫긴 하겠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지금 내가 챙긴 마수와 마물 부산물은 내가 지닌 것 중에서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말 그대로 막대한 양인 만큼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걸 메고서 그곳까지 갈 여력은 없었다.
만약 강체나 뼈 갑옷 둘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진작 나가떨어졌을 수준이었다.
마침내 게이트 앞에 선 나는 등에 메고 있던 군장 꾸러미를 내려 놓았다.
쿵-!
내려놓기 무섭게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오랜만의 자유가 느껴졌다.
만약 저런 걸 멘 채로 전투라도 일어났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깊게 파여 있는 해자 앞에서 잠시 기다리자, 앞에 있는 카메라가 움직였다.
치직, 칙-
["정지. 경고한다. 당장 모든 행동을 멈추고 손을 위로 보여라."]
굳이 트러블을 만들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순순히 요구에 따랐다.
["신원을 밝혀라. 아크에는 무슨 일로 왔지?"]
나는 길게 끌 것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병참 장교를 만나러 왔다.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장 메이벨 필그림 중령의 소개다. 내 이름은 칼 마커스다."
그와 함께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약속대로 메이벨 필그림이 미리 언질을 해두었던 건지, 아니면 메이벨 필그림의 이름이 먹혔던 건지는 몰라도 굳이 복잡한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신원 확인되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알았다."
과연 아크의 군인다운 신속한 일 처리였다.
'아니··· 어차피 내 얼굴에 대한 데이터는 저번 Red-17 게이트를 통해서 저장되어 있었을 테니 빠른 게 당연한 건가.'
나는 아크에 내 신원을 노출하는 걸 최대한 피해왔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회수팀을 공격한 스컬 턴코트로서의 정체다.
이미 아크는 칼 마커스의 존재를 내가 이 세계에 처음 왔던 날부터 알고 있었다.
["게이트를 개방하겠습니다. 잠시 뒤로 물러나 있어 주십시오."]
"그러지."
치익, 치이익─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한 성문을 겸한 다리.
언제봐도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치이이익─
마침내 다리가 완전히 내려오고, 그 위로 군인 한 명이 호위 한 명도 없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치의 어긋남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각이 잡힌 군복과 무테안경.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였다.
나는 그 사내를 알고 있었다.
'게드윈.'
더 디펜스에는 몇몇 특별한 눈을 지닌 인물들이 존재한다.
꿰뚫어 보는 자 힐데가르트가 그렇고, 모래의 딸 아이라가 그렇다.
게드윈에게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눈이 있다.
내 주위를 맴돌고 있는 특정한 에테르의 성질을 볼 수 있는 눈.
즉, 한마디로 말하자면 공적치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병참 장교 게드윈.
그가 나를 마중 나왔다.
"병참 담당관 게드윈 대위입니다. 연구소장님께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곤경에 처했던 소장님을 구하셨다죠? 아크를 대신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영혼의 목소리에 따랐을 뿐이다."
"하하, 연구소장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그런데 지금 가져오신 것들은······."
"남의 집에 가는데 빈손으로 올 수야 있나, 적당히 가치가 있을 법한 것들을 챙겨봤다."
"이것들을 아크에 팔고 싶다, 대충 그렇게 알아들으면 되겠습니까?"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
이미 알고 있던 대로 게드윈은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였다.
다만, 그게 꼭 긍정적인 의미로 향하지만은 않을 때가 간혹 있어서 그렇지.
"그렇다면 물건 좀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내가 군장 꾸러미를 비롯한 짐들을 풀어서 헤어놓자, 조심스레 그것들을 살핀 게드윈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수와 마물의 부산물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 역시도 병참 장교의 필수적인 조건 중 하나였다.
"이것 참··· 하나 같이 진귀한 것들뿐이군요. 마치 가치를 알고서 챙겨오신 것 같습니다."
"그 정도 보는 눈은 있다."
"아··· 실례했습니다. 저답지 않게 입이 방정을 떨었군요."
그러나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크레딧(Credit)은 필요 없으실 것 같고··· 따로 원하시는 물건이라도 있으십니까? 아크 바깥에서 살아가려면 필요한 게 아주 많을 텐데요. 딱히 원하시는 게 없다면 제가 따로 필요한 것들을 추려서 챙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나와 게드윈 사이에는 그렇다 할 신뢰가 쌓이지 않았다.
즉, 아무리 가져온 물건들이 진귀하고 값지더라도 단순한 '거래'로는 게드윈에게 얻어낼 수 있는 게 한정적이다.
그렇기에 우선 나는 얻을 수 있는 물건들의 품목을 넓힐 필요성을 느꼈다.
"그건 나중에 한꺼번에 말하도록 하지."
"한꺼번이라 하시면··· 아, 이번 웨이브에서 활약이 대단하셨다지요? 제가 잊고 있었습니다. 소모한 탄약들에 대한 보충도 연구소장님께서 확실하게 말씀하셨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쓴 총알이 몇 발이나 되는지 알고?"
"설마 연구소장님을 구한 은인께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 아는 방법이 있거든요."
그와 함께 나를 바라보는 게드윈의 푸른 눈동자가 빛났다.
키이잉─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눈.
병참 장교 게드윈이 지닌 눈인 마혼안(魔魂眼)의 능력이었다.
그리고,
"······어?"
마치 얼음장과도 같았던 게드윈의 표정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 *
며칠 전, 게드윈은 직접 듣고도 믿기 어려운 연락을 받았다.
무려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장 메이벨 필그림 중령으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용건은 간단했다.
["칼 마커스, 그가 찾아오면 합당한 대가를 주세요. 이미 그와 관련된 사항들은 모두 제가 처리해놓았으니 걱정하실 것 없어요."]
칼 마커스.
크로노스 인근의 부족민 출신으로서, 얼마 전에 아크의 출입이 금지당한 뒤에 노아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이방인.
그에 대한 내용은 이미 Red-17 게이트 관리자인 이모샤 중위의 보고로 아크에도 알려진 내용이었다.
이미 진작 죽은 줄 알았던 그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데, 우연히 위기에 빠진 메이벨 필그림 중령을 구하기까지 했다니?
직접 듣고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굳이 내가 자세히 알 필요는 없지.'
군인은 명령에 복종한다.
비록 메이벨 필그림 중령이 직접적인 그의 직접적인 명령권자는 아니었으나, 그의 상관에게도 충분히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 그다지 다를 건 없었다.
며칠 뒤에 비로소 칼 마커스가 레드 라인의 게이트를 찾아왔을 때, 게드윈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가져온 마수와 마물들의 부속물들 때문이었다.
'이건······.'
6급 네임드 괴수종의 가죽과 뼈.
7급 네임드 야수종의 송곳니.
5급 네임드 영장종의 손톱.
그 외, 무수히 많은 부산물까지.
하나같이 마수와 마물의 부산물 중에서도 상당한 가치가 있는 것들뿐이었다.
"이것 참··· 하나 같이 진귀한 것들뿐이군요. 마치 가치를 알고서 챙겨오신 것 같습니다."
"그 정도 보는 눈은 있다."
"아··· 실례했습니다. 저답지 않게 입이 방정을 떨었군요. 크레딧(Credit)은 필요 없으실 것 같고··· 따로 원하시는 물건이라도 있으십니까? 아크 바깥에서 살아가려면 필요한 게 아주 많을 텐데요. 딱히 원하시는 게 없다면 제가 따로 필요한 것들을 추려서 챙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나중에 한꺼번에 말하도록 하지."
더욱더 놀라운 건, 칼 마커스가 마치 노련한 협상가처럼 굴었다는 점이었다.
마치 자신이 가져온 것들의 가치를 정확히 재고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아크 바깥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당장 필요한 게 많을 텐데도 이상할 정도로 침착해.'
뭐가 됐든 지 간에, 직접 확인해 보면 되는 거겠지.
키이잉─
마혼안이 칼 마커스를 응시했다.
그리고, 게드윈은 보았다.
마혼안을 통해서 비친 칼 마커스의 진면목을.
"······어?"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병참 장교 게드윈은 순간적으로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사내에게서 상상을 뛰어넘는 에테르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르르릉······.]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캬우, 캬오오!]
[다··· 죽어. 죽어. 죽어!]
게드윈은 알고 있었다.
저 에테르는, 일반적인 성질의 에테르가 아니라 저자의 손에 죽어간 마수와 마물들이 지닌 원혼과도 같은 것이라는 걸.
'맙소사······.'
게드윈은 이러한 에테르를 일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블랙 라인 출신의 군인들.
한때 아크의 최전방이자 살아있는 지옥에서 살아나온 그들은 한명 한명이 아크의 영웅들이자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일까.
눈앞에 있는 이방인에게서 그들과 같은 분위기와 기운이 느껴지는 건.
"왜 그러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애써 태연함을 연기했으나, 이미 게드윈의 호흡은 거칠어지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마치 깊은 심연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나한테 뭘 줄 수 있지?"
결국, 병참 장교 게드윈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주체하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거절이나 협상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든지··· 요."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적어도 이 이방인 앞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병참 장교 게드윈 > 끝
'얘 왜 이래?'
병참 장교 게드윈이 내 공적치를 보고서 놀랄 거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공적치가 쌓이면 병참 장교 게드윈이 상당히 다채로운 리액션을 보여준다는 건 여러모로 자주 겪어 보았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과한 반응은 나로서도 아예 처음이었다.
'···하긴. 엄밀히 따지면 두 번째 스테이지부터 공적치를 3만을 넘긴 것도 처음이긴 하지.'
내 기준으로도 이 정도 공적치를 모으려면 최소 오렌지 라인에서도 후반부에는 가야 간신히 모을 수 있는 수준이다.
그것도 매 웨이브 때마다 최선의 동선과 할 수 있는 모든 걸 탈탈 털어서 해야 간신히 도달할까 말까한 수준이었으니, 게드윈이 이처럼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뭐든지라고?"
"······아."
그제야 게드윈이 정신을 차렸는지 멍해져 있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건, 그러니까··· 예. 물론 전부는 아니겠습니다만, 제 권한이 닿는 부분까지는 노력해보겠습니다. 예예, 그렇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었다.
그 말마따나 무엇이든 지라고 말은 했으나, 일개 담당관이 접근할 수 있는 품목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삼스레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이는 적어도 병참 장교 게드윈이 접근할 수 있는 물자는 모두 거래 품목 위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는 뜻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면··· 대충 5레벨 장비까지 가능하다는 건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예상 이상의 성과였다.
최악의 경우에는 기본 보급품 외에는 거래하는 게 불가능한 것까지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Zero-999 전술핵 발사기나 Noah-01 물질분해기. 그리고 Zeus-444 레일건 같은 건 당연히 안 될 테고······.'
그런 것들은 일개 병참 장교가 아니라 라인 수비대장 정도는 나와야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Zero-999 전술핵 발사기 같은 경우에는 라인 수비대장이 아니라 라인의 시장이 나와도 안 되겠지만 말이다.
Zero-999 전술핵 발사기 같은 흉험한 물건을 얻기 위해서는 아주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나는 현실적으로 내가 지닌 약 3만의 공적치와 가져온 마수 및 마물들의 시체들의 가치를 추산했다.
'공적치로 치면··· 대충 4만 공적치 정도라고 보는 게 맞겠어.'
4만 공적치로 살 수 있는 품목들이라······.
만약 공적치가 지금의 두 배인 8만 정도만 됐어도 블래스터(Blaster)류 무기를 한번 탐내봤겠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내가 지닌 공적치로는 역부족이었다.
블래스터류 무기는 위력이 강한 대신에 장탄 수나 내구도 같은 전투 지속성에 있어서 큰 단점이 있다.
플라즈마 소드와 근본적으로 비슷한 무기인 만큼 장점과 단점 역시도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탄약수의 제약 따위는 없는 내가 그걸 사용한다면?
내구도 같은 문제는 어쩔 수 없겠지만, 가장 큰 단점이라고 볼 수 있는 장탄 수에서 나는 제약이 없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고, 이 추세라면 10만 공적치 정도야 웨이브 몇 번이면 모을 수 있겠지.
생각을 마친 내가 말했다.
"우선, A-985 타입의 폭발탄 세 발."
A-985 폭발탄은 Ark-15 자동변환 소총으로 발사할 수 있는 총알 중 가장 파괴력이 강한 총알이다.
말하자면, 총알의 사정거리와 탄속은 유지한 채로 유탄의 파괴력을 지닌 물건이라고 해야 할까?
"···A-985 타입의 폭발탄말입니까?"
게드윈의 목소리가 떨렸다.
병참 장교 게드윈으로서도 A-985 타입의 폭발탄은 외부로 방출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영역에 걸쳐진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지? 무엇이든지 된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 아닙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혹시 다른 건 또 뭐 필요한 거 없으십니까?"
A-985 타입의 폭발탄 한 발의 가치는 공적치로 환산하면 약 1000.
접근 제한이 있어서 그렇지, 사고자 한다면 못살 게 없는 가격인 셈이었다.
'물론 총알 한 발 당 가격이 정신 나간 건 사실이긴 하지.'
그렇기에 보통 폭발탄은 특수한 목적이 있거나 감당할 수 없는 대형 마수나 마물이 나타났을 때나 가끔 사용하는 총알이다.
그것도 아끼고 아껴서 최후의 일격을 가할 때나 주로 사용한다.
'나야 상관없지만.'
이로써 나는 말 그대로 압도적인 화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내가 그토록 손에 넣고자 했던 폭발탄은 그런 물건이었다.
'자, 그러면······.'
나는 우선순위를 정리했다.
가장 필요하다고 볼 수 있었던 A-985 폭발탄은 마침내 손에 넣었다.
그렇다면 그다음 순위는?
'5레벨 보호복? 이것도 나쁘진 않지만··· 현재 뼈 갑옷의 성장세가 나쁘지 않으니 이건 나중에 구매해도 돼.'
현재 내가 착용하고 있는 뼈 갑옷과 연결된 보호복의 레벨은 3.
일전에 Red-17 게이트에서 스컬 하운드의 시체를 대가로 얻어낸 물품인 만큼 일개 보급품에 가깝다.
'이걸 교체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보호복과 에너지원과 연결된 뼈 기생체만 따로 떼어내서 보호복을 교체하면 단번에 뼈 갑옷의 레벨을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정도까지 성장한 뼈 갑옷의 베이스 레벨을 3에서 5로 올리는 게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 지냐다.
'뼈 갑옷은 이미 송곳 토템까지도 먹어 치웠어. 공적치를 사용하기에는 별로 효율상 좋지 않을 가능성이 커.'
물론 해서 나쁠 건 없겠지만, 어디까지나 효율이 나쁘다는 이야기다.
즉, 나중에 공적치가 남아돌게 되면 그때야 비로소 고려해볼 만하다는 이야기.
그렇기에 이럴 때 필요한 건 선택과 집중이었다.
'주력 병기는··· 이것도 아직은 필요 없겠군.'
Ark-15 자동변환 소총은 기본 보급품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좋은 장비다.
오죽하면 유저 커뮤니티에서는 아크국밥이라고 불리며 온갖 비교 단위의 척도로 활용될 정도였다.
심지어 내가 사용하고 있는 Ark-15 자동변환 소총은 이제 3단계까지 업그레이드를 마친 상태.
그것도 메이벨 필그림을 타고서 업그레이드된 물건인 만큼 웬만한 장비를 구하지 않는 이상 주력 병기를 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화력이 필요할 때 사용할 만한 중화기 종류와 보조 물품들 정도인가.'
무려 3단계까지 업그레이드된 Ark-15 자동변환 소총은 분명히 매우 쓸만한 무기지만, 단순 화력만 따지면 작정하고 화력만을 쏟아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중화기만은 못하다.
'폭발탄은 위력 면에서는 거의 최고지만, 소총 한 자루만으로는 버거운 상대가 나타날 수도 있어.'
그렇기에 중화기가 필요하다.
물론 그런 중화기들은 이동에 매우 큰 제약이 걸리겠지만, 어차피 이동이 필요할 때는 기존에 사용하던 장비들을 사용할 것이기에 상관없었다.
'중화기의 용도는 어디까지나 웨이브 때나 은신처가 공격받았을 때를 대비하기 위함.'
즉, 이동에 어느 정도 제약이 생기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의 정리를 마쳤다.
"NOA-8 중기관포와 그에 맞는 20mm 규격 일반탄과 철갑탄 각 50발씩, 고폭소이철갑탄 10발."
쓸모도 없는 총알을 50발씩이나 요구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병참 장교 게드윈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다.
중기관포를 요구하면서 총알은 몇 발만 가져가서야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물론 NOA-8 중기관포의 무식한 연사력을 생각한다면 50발 정도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써버릴 테지만, 그나마 이게 내가 양보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알겠습니다만, 50발로 충분하시겠습니까? NOA-8 중기관포를 쓰시려면 그걸로는 부족하실 텐데······."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게드윈이 뭔가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게드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그래도 내가 손해는 아니지만.'
두 번째 이유는 20mm 규격 일반탄과 철갑탄을 외부인에게 팔아넘기기 위해서였다.
비록 내가 악성 재고처럼 가지고 있다가 넘기게 될 예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상으로서 내가 챙기는 몫이 없지는 않을 터였다.
"또 달리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왜 없겠어.
당연히 있지.
"TITAN-17 대마수 로켓과 그에 맞는 17형 탄두 2발. 그리고 TO15형 열 감지 스코프, 4레벨 이상의 보호 능력이 있는 위장막. 마약성 진통제과 수면제 각 50정씩. 그리고 3달 치 전투 식량도 부탁하지. 아, 맛은 초코맛이랑 바닐라맛 반반씩 섞어서."
"······어, 네? 음, 아. 알겠습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한참이나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게드윈은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고는 게이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정도 의심을 살 수밖에 없겠지만, 이 정도가 한계야.'
약간의 의심을 사는 게 두려워서 요구해야 할 걸 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그게 훨씬 더 크게 돌아올 가능성이 컸다.
나는 남은 공적치를 확인했다.
[현재 공적치 : 1,154]
'음.'
남은 공적치를 보아하니 폭발탄과 중화기 두 정을 얻기 위해서 말 그대로 있는 공적치를 싹싹 긁어서 사용한 듯했다.
'알뜰하게도 썼네.'
묘한 뿌듯함까지 느껴질 정도.
'중화기를 두 개씩이나 들고 은신처까지 올라가는 게 좀 문제긴 할 테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여차하면 흙이 들어가지 않도록 잘 밀봉한 뒤에 뼈 기생체를 이용해서 어디 적당한 곳에 묻어놓고 나중에 와서 찾아도 되고 말이다.
나는 게드윈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레드 라인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 * *
아크 안으로 돌아온 게드윈은 그제야 간신히 한숨을 돌렸다.
소용돌이치는 에테르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정체가 뭐지?'
아크의 장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물론 과거에 크로노스 등으로 아크제 물자가 유출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조금 과할 정도였다.
'거기다가, 그 에테르.'
칼 마커스가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게드윈은 아직도 몸이 떨렸다.
그의 주위에서 보았던 무수한 에테르들이 아직도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아크 바깥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지?'
아크 바깥에서 살아가는 건 절대로 쉽지 않다.
그런데 그 어떤 지원도 받지 않고서 그 많은 마수와 마물을 홀로 사냥했다고?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혹시, 크로노스의 간자인가?'
최근 들어서 아크에는 한 가지 보고가 올라왔다.
멸망한 크로노스를 비롯한 몇몇 도시들의 잔당들이 연합을 이루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물론 아직 아크에서 신경을 쓸 만한 수준은 아닌 것 같았지만, 칼 마커스가 아직 아크의 적이 아니라는 확신은 없었다.
'만약 칼 마커스의 배후에 크로노스 연합이 있고, 그곳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면··· 가능성은 있어.'
만약 칼 마커스가 조금만 덜 뛰어났다면, 게드윈은 칼 마커스를 아크 내로 들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칼 마커스는 너무 뛰어났다.
그가 자신과 같은 피가 흐르는 인간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단언을 내리기에는 위험한 것도 사실.'
무엇보다도 칼 마커스의 후원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랬다.
메이벨 필그림.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장이라는 거대한 직책은 일개 병참 장교 따위는 단번에 목을 날릴 수 있을 정도다.
'우선, 연구소장님의 안목을 믿어볼 수밖에 없나······.'
아직 칼 마커스가 아크의 적이라는 증거는 없다.
칼 마커스는 현재 아크에 득이 되면 득이 됐지, 절대로 실이 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차피 메이벨 필그림의 전언도 있었겠다, 병참 장교 게드윈은 한 가지 결심을 마치고는 천천히 게이트를 나섰다.
"생각보다 늦었군."
"죄송합니다. 챙겨야 할 물자가 워낙 많다 보니······."
그 말마따나 게드윈이 끌고 나온 수레 위에는 온갖 물자들이 쌓여 있었다.
"아, 그건 조심하십시오. 위험한 물건이라 터질 수도 있습니다."
"나도 안다."
그렇게 거침없이 수레 위에 있는 물자를 살피던 칼 마커스의 시선이 멈췄다.
"이건 부탁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칼 마커스가 물자 속에서 가리킨 건 다름 아닌 5레벨의 방호복이었다.
"별 것 아닙니다. 작은 성의라고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지."
칼 마커스는 거절 한번 하지 않고서 넙죽 5레벨 방호복을 받아들였다.
이것참, 순순히 호의를 받아들여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게드윈은 뭔지 모를 복잡한 심정 속에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전쟁에서 아크를 위해서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칼 마커스. 당신이 아크의 적이 아니라는 걸 믿습니다."
"그 부분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을 거다. 영혼의 목소리가 너희를 적대하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하하."
부디, 앞으로도 그래야 할 텐데 말입니다······.
게드윈은 턱밑까지 차오르는 그 말을 애써 삼켰다.
< 병참 장교 게드윈 (2) > 끝
"···그런데, 혼자서 다 들고서 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그러면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웨이브 직후라 괜찮긴 하지겠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으니까요."
"알았다. 선물은 잘 쓰지."
병참 장교 게드윈과의 만남 이후.
예상 외의 소득이 생겼다.
'5레벨 보호복이라······.'
5레벨 보호복의 가치는 공적치로 환산하면 약 2만.
그냥 공짜로 주기에는 한두 푼 하는 물건이 아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는 곧장 보호복 안에 혹시 도청장치나 추적기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하고 안을 꼼꼼히 살폈으나, 다행히 그런 건 없는 듯했다.
말 그대로 병참 장교 게드윈의 순수한 호의라는 이야기였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는데.'
병참 장교 게드윈이 추가적인 보상을 주는 경우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크 내에서 어느 정도 입지가 쌓이거나 혹은 스테이지 보스(Boss)로 분류되는 초대형 마수와 마물을 잡았을 때 정도.
물론 그 외에도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례적인 일이라는 건 분명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나로서도 이방인 신분으로 한 번에 무려 3만이 넘는 공적치와 마수 및 마물 부산물을 거래해본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우선··· 돌아가야겠지.'
짐이 한두 개가 아닌 터라 이동이 쉽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깨가 조금, 아니 많이 무거웠다.
*
은신처로 돌아온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뼈 갑옷의 베이스 보호복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다지 어려울 건 없었다.
현재 뼈 갑옷과 연결된 기본 보호복(Lv.3)의 에너지원에서 뼈 기생체를 분리하고, 그걸 새로운 보호복(Lv.5)의 에너지원과 연결하면 되는일이었으니까.
츳, 츠츠츳─!
츠츠츠츠!!
일전에 레벨 3짜리 에너지원과 연결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에너지가 솟구쳤다.
하지만 겁낼 필요는 없었다.
이미 뼈 기생체는 그 에너지들을 온전히 통제하고 있었으니까.
[기잇!]
이윽고 에너지원이 안정화되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은 뼈 기생체가 썩 만족스럽다는 듯이 울었다.
──────────────
[뼈 갑옷(Lv.5)] [★★★★★★★★★(9성)]
아크의 장교용 기본 방호복(Lv.5)의 에너지원에 가축화시킨 뼈 기생체를 연결한 방어구.
뼈 기생체의 숙주로 6급 네임드 괴수종 이끼의 쿠프의 심장이 사용되었다.
뼈 기생체의 힘과 이끼의 쿠프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다.
이끼의 쿠프의 피와 살을 섭취하여, 사용할 수 있는 이끼의 쿠프의 힘이 늘어났다.
등급 외 용종 엥켈렌스의 송곳니를 흡수했으나, 아직 온전히 그 힘을 흡수하지 못했다.
일정 시간 동안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할 수 있다.
현재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 : 23.2%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이 15%를 돌파하여, '엥켈렌스의 창'을 소환할 수 있다.
6급 네임드 지하종, 땅굴 파는 뮬의 피와 살을 모조리 먹어 치우고, 그 힘을 흡수했다.
땅굴 파는 뮬의 능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
5급 네임드 영장종, 돌팔매질의 무그를 흡수했다.
돌팔매질의 무그가 지닌 능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
"상세 보기"
──────────────
9성 등급의 장비.
최전방인 로즈 라인에서도 이 정도 수준의 장비는 보기 드물다는 걸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물건이 탄생했다.
[기이이잇······!]
느껴진다.
뼈 갑옷이 지닌 기본적인 힘 자체가 말도 안 되게 강해졌다는 게.
뼈 기생체와 결합한 에너지원이 레벨 3 보호복의 에너지원에서 레벨 5 보호복의 에너지원으로 옮겨갔으니 출력 자체가 달라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실제로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 역시도 적지 않게 올랐다.
'그뿐만이 아니지.'
나는 차례로 이번에 얻은 중화기들을 살폈다.
──────────────
[NOA-8 중기관포] [★★★★★(5성)]
NOA-8 중기관포.
20mm 탄환을 사용한다.
분쇄할 게 필요하다면 요긴하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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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AN-17 대마수 로켓] [★★★★★)(5성)]
TITAN-17 대마수 로켓.
17형 고폭탄을 사용한다.
대형 마수 및 마물에게 탁월한 효과가 있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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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커스터마이징이나 업그레이드도 없이 순정 상태가 무려 5성에 달하는 괴물 같은 물건들.
말하자면 일전에 헨릴 중사에게서 얻은 DR-404 리볼버와도 동급의 무기인 셈이었다.
'그것도 고치긴 해야 하는데··· 뭐, 언젠가는 기회가 있겠지.'
중요한 건 이번에 얻은 중화기들.
비록 무게 무게인 터라 이것들을 들고서 평소처럼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전투에 임하기는 어렵겠지만, 일단 사용할 수 있는 조건만 갖춰진다면 어마어마한 화력을 뿜어낼 수 있을 것이다.
'NOA-8 중기관포의 최대 단점은 분당 1만 발이 넘는 말도 안 되는 연사력으로 인한 막대한 탄 소모.'
하지만 나는 상관없다.
분당 1만 발을 토해내든, 아니면 그 이상을 토해내든, 나에게는 한 발의 총알이면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TITAN-17 대마수 로켓 역시도 보통은 17형 고폭탄의 가격이 부담돼서 자주 못 사용하는 물건이지만··· 이 역시도 상관없지.'
단점은 딱 하나다.
두 중화기 모두 무게가 보통이 아닌 터라, 자리를 잡고 싸우는 게 아닌 이상은 한 번에 둘 모두를 운용하기에는 조금 어렵다는 점.
'하지만 이 부분도 뼈 갑옷을 활용한다면 어떻게든 돼.'
물론 그럴 시에는 아크의 시선을 피해야 하거나, 아예 스컬 턴코트로 위장을 해야겠지만 말이다.
'자, 그러면······.'
다음 웨이브까지는 아직도 일주일가량의 시간이 남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림자단이나 모트교에서 별도의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을 거라는 가정하에 지만, 모트교 같은 경우는 바로 얼마 전에 웨이브를 일으키려다가 실패했으니 크게 염두에 둘 필요는 없었다.
'성물로 인해서 많은 게 바뀌긴 하겠지만··· 그림자단에서도 이미 성물이 사라졌다고 여길 테니 당분간은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을 터.'
만약 그림자단이 성물을 먹은 게 내가 아니라 뼈 갑옷이라는 걸 알아차린다면 어떻게든 뼈 갑옷을 회수하기 위해서 움직일 테지만, 그들은 지금 나를 스컬 나이트로 알고 있었다.
혹여 나중에 사실이 발각되더라도 벌써 그에 대한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생각을 마친 나는 다음 웨이브가 일어나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슬슬 외부 세력에 개입할 때가 됐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오히려 초반 스테이지 구간에 해당하는 지금이기에 움직이기 딱 적기라고 볼 수 있었다.
아크 바깥에는 비단 크로노스 연합이나 모트교, 그림자단을 제외하더라도 무수히 많은 군소 세력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훗날 아크에 도움이 되는 세력이 있고, 그렇지 않은 세력이 있는데, 대개 그 세력들은 서로 반목하는 경우가 많다.
즉, 전자의 세력이 크면 클수록 후자의 세력이 축소되거나, 반대로 후자의 세력을 축소되거나 사라지면 전자의 세력이 크게 된다.
'몇몇 세력들은 조건만 갖춰진다면 후반부 스테이지쯤에 크로노스 연합이나 모트교 이상으로 성장하기도 하지.'
그러한 상황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아크에게 도움이 되는 세력은 돕고,
그렇지 못한 세력은 없앤다.
물론 아크 바깥의 사정이 내 말처럼 간단하게 딱딱 맞춰서 돌아가는 건 아니기에 무작정 없앤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었다.
아크에 적대적인 세력 중에는 저들끼리도 적대 관계에 있어서 어느 한쪽이 갑자기 사라지면 다른 한쪽이 갑작스레 세력을 확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었다.
고려 해야 할 조건은 몇 가지.
이 세력이 훗날 아크에 위협이 되는가.
이 세력과 적대 혹은 협력하는 다른 세력들과의 세력 판도.
이 세력을 없앰으로써 생기는 나비효과.
'그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세력은··· 역시 그곳인가.'
바고스의 형제들.
아크를 기준으로 서부 전선에 있는 군소 세력 중 하나로서, 주로 약탈이나 강도를 벌이는 일종의 도적 집단이었다.
그러나 도적 집단이라고 해서 우습게 보면 안 될 것이, 놈들은 온갖 화기로 무장한 데다가 우두머리인 바고스는 아크 바깥에서도 오랜 세월을 생존했을 정도로 잔뼈가 굵은 자다.
놈들의 타겟은 주로 모래바람 상단이나 블랙 스미스 길드처럼 상업을 중점으로 활동하는 세력들.
그리고 상업 중점의 세력들은 대개 아크에 중립 혹은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크를 제외하고 모든 인류의 도시가 멸망한 이 세계에서 가장 큰 거래 상대는 아크가 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우선 놈들을 제거한다.'
바고스의 형제들은 중반부쯤에 등장하는 서브 시나리오인 '실크 로드(Silk road)' 시나리오에 가장 큰 방해물이 되는 녀석들이다.
실크로드 시나리오는 말 그대로 아크를 중심으로 아크 바깥에 있는 여러 세력들이 교역로를 완성하는 에피소드로, 늘 지독한 물자난에 시달리는 아크를 살리기 위해서 반드시 진행해야 하는 서브 시나리오였다.
'그때가서 바고스의 형제들을 없애려고 하면 쉽지 않지만··· 지금은 아니지.'
지금은 아직 바고스의 형제들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형성하기 전이다.
놈들을 없애려면 지금이 적기라는 소리였다.
나는 곧장 채비에 나섰다.
이번에 병참 장교 게드윈과의 거래에서 얻은 중화기들은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동해야 할 거리가 거리이다 보니 괜한 짐만 될 것 같아서였다.
'거기다가 괜히 중화기의 흔적을 아크가 발견이라도 하게 된다면 굉장히 일이 귀찮아져.'
그렇기에 무장은 최소화했다.
항상 입고 다니는 뼈 갑옷과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비롯한 기본적인 장비와 물과 멀티 칼로리 바가 들어 있는 군장 하나.
거기에 약간의 사치를 더해서 침낭 하나까지가 이번 여정의 전부였다.
'일단 이 근처는 가려놓는 게 좋겠지.'
나는 이번에 게드윈과의 거래에서 얻은 대형 위장막(Lv.4)를 은신처에 뒤집어썼다.
무려 4레벨의 방호 능력이 있는 물건인 데다가 은폐력 역시도 상당한 물건인 만큼 잠시 내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완벽하게 은신처를 숨겨줄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는 은신처로 사용하고 있는 동굴 근처를 판 뒤, 중화기들을 비롯한 물자들을 비닐로 잘 밀봉해서 그 안에 숨겼다.
어지간히도 깊게 파두었으니 설사 알고서 찾아왔다고 하더라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었다.
'대충 다 됐나.'
떠나기 전의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본격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서쪽으로의 여정이 이어졌다.
웨이브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덕분에 평원은 비교적 한적했다.
애초에 내가 영산 노아를 끼고서 움직인 탓도 있기도 했고 말이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뼈 갑옷의 베이스가 되는 보호복의 레벨이 무려 5로 올라가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움직이는 발걸음이 한껏 가벼웠다.
레벨 4 이상의 보호복부터는 보호복 자체에 있는 운동 능력 보조 시스템이 크게 향상되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라면, 바고스의 형제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곳은 역시 그곳이겠지.'
서쪽의 뱀동굴.
오래전에 어떤 초대형 마수가 사용하던 거대 동굴로써, 웬만한 마수나 마물들이 접근하지 않는 덕분에 바고스의 형제들이 거점으로 이용하는 장소였다.
'내가 보기에는 썩 현명한 거점 선택은 아니지만 말이지.'
뭐, 그건 그거고······.
무려 이틀간의 이동 끝에 나는 마침내 뱀동굴 근처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 저곳에 있군.'
스코프를 통해서 나는 뱀동굴 앞에 서 있는 보초들을 발견했다.
보초의 어깨에 새겨진 문신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문신이었다.
바고스의 형제들임을 증명하는 문신.
'찾았다.'
바고스의 형제들.
저곳에 놈들이 있었다.
'우선 신원을 가려야겠지.'
은원(恩怨)은 쌓인다.
그럴 생각은 없지만, 혹시라도 바고스의 형제들 중에서 생존자가 빠져나가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이 광경을 목적하는 자가 없다는 보장은 더욱더 없고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쿠프의 가면을 쓰고서 다시금 스컬 턴코트로 변장했다.
'가볼까.'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나는 곧장 놈들을 사냥하기 위한 준비에 나섰다.
< 바고스의 형제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