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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 8

< 변절자 룩 (4) > 끝

영산 노아로 돌아온 뒤, 정말로 며칠 동안은 꼬박 잠만 잤던 것 같다.

안 그래도 생과 사를 오가는 전투를 치렀건만, 그 이후에 일어난 변절자 룩과의 전투로 인해서 완전히 진이 빠져 버린 것이다.

[···혹시 죽었어요?]

가끔 잠결에 에스더가 진지하게 내 몸을 콕콕 찌르는 게 느껴지긴 했지만, 귀찮아서 반응하지 않았다.

[어, 어떻게 해! 이대로 죽으면 나는······.]

물론 그럴 때마다 자기 보전의 화신인 에스더가 난리를 피웠고, 나는 자면서도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를 드문드문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어휴, 놀랐네. 살아있으면 살아있다고 말 좀 해요. 간 떨어질 뻔했네.]

자면서 어떻게 말을 하냐.

[뭐 안 먹어도 돼요?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뭔가 묘하게 익숙한 잔소리였다.

그래서 더 귀찮기도 했고.

[재잘재잘재잘재잘재잘재잘재잘재잘재잘재잘재잘재잘재잘재잘······.]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저렇게 들렸다.

"···신경 꺼라."

결국 참다못한 내가 한마디 하고서야 에스더는 묘하게 풀이 죽은 모습을 보이며 재잘거림을 멈췄다.

[걱정해주는사람마음도모르고어떻게시끄럽다고한번에딱잘라서말할수가있어진짜내가더럽고치사해서걱정을안하지어휴앓느니죽지죽어진짜로······.]

그게 또 묘하게 신경이 쓰였지만, 나는 굳이 내색하지 않고서 잠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날이 밝았다.

[격렬한 전투 뒤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했습니다! 찢어진 근육이 회복되었습니다.]

[근력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6 -> 18]

[체력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9 -> 21]

생과 사를 오갔던 사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무려 순수 능력치가 2씩 올랐다.

근력과 체력 능력치 같은 경우는 그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인 만큼, 올랐을 때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치는 능력치들이었다.

'거기다가··· 체력 수치가 드디어 20을 넘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개 능력치의 10의 자릿수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특성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

즉, 지금 나도 새로운 특성을 얻을 때가 된 것이다.

[체력 능력치가 20을 돌파하였습니다!]

[특성, '재빠른 회복'을 습득하였습니다.]

──────────────

[재빠른 회복]

체력 회복 속도가 증가한다.

"상세 보기"

──────────────

'역시.'

내가 늘 강조하듯이, 특성은 설명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은 특성일 가능성이 크다.

별다른 조건부가 없이 깔끔하게 효과만 발휘하는 특성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재빠른 회복은 체력 능력치가 20이 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특성 중에서 손에 꼽히는 좋은 특성 중 하나다.

당연히 그만큼 얻기 위한 조건 역시도 까다로운 편이었건만, 이번에 그 조건을 충족한 모양이었다.

'그만큼 전투가 격렬했다는 거겠지.'

그냥 다중 웨이브만 해도 충분했을 텐데, 거기에 더해서 변절자 룩과의 전투까지······.

이쯤 되면 재빠른 회복이 아니라 그 이상의 특성이 생겼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테지만, 문제는 내 체력 수치였다.

'뭐, 그다음 특성은 30이 되었을 때 얻으면 되니까.'

재빠른 회복은 심플한 설명 그대로 체력 회복 속도를 상승시키는 특성이다.

그리고 그 체력에는 상처 회복 같은 자연 치유력은 물론이고, 지구력과 관련된 스태미너 회복 역시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전투에 있어서 장기전, 단기전 모두 유용한 특성이지.'

한마디로 그냥 좋은 특성이다.

'그건 그렇고······.'

쉴 만큼 쉬었겠다, 나는 슬슬 아크에 들릴 필요성을 느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목적은 역시나 병참 장교 게드윈을 만나는 일이었다.

'45만 공적치면, 슬슬 블래스터류 장비를 구해도 되겠지.'

물론 블래스터류 장비는 비싸다.

그냥 비싼 게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하물며 단점이 그뿐인가?

비싸고, 잘 고장 나고, 무엇보다도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에너지 소모량이 압도적이라 오래 사용하지 못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 멀어지는 이 망할 세계에서 쓰기에는 영 적합하지 않은 조건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래스터류 장비를 사용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압도적인 위력.

오직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블래스터류 장비의 가치는 입증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단점은 나에게 있어서 별로 의미 없으니까.'

블래스터류 장비는 많은 단점이 있지만,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무엇보다도 극악에 가까운 에너지 효율이다.

압도적인 위력을 자랑하는 만큼, 몇 번 쏘면 그대로 방전이 될 정도로 효율이 좋지 않다.

이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마수와 마물들을 상대해야 하는 아크의 입장에서는 계륵 같은 무기가 될 수밖에 없었기에, 블래스터류 장비는 지극히 제한된 조건 속에서, 제한된 인원만이 다루게 되었다.

'하지만, 난 아니지.'

블래스터류 무기가 지닌 가장 큰 단점을, 나는 극복할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래스터류 무기는 여전히 단점이 많은 무기지만, 일단 한 개 정도는 마련해두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러면··· 슬슬 가볼까.'

나는 오랜 휴식을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크로 향할 때다.

*

나는 아크로 향하면서 주심주섬 멀티 칼로리 바(초코맛)과 멀티 칼로리 바(바닐라맛)을 까먹었다.

아무래도 며칠 동안 사실상 굶다시피 했다 보니,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냥 흘려보낸 시간이 시간인 만큼 지금부터는 식사 시간도 아껴가면서 움직일 필요성이 있었다.

으적, 으적-

'맛있네.'

시장이 반찬이라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맛있는 건지는 몰라도 오랜만에 먹는 멀티 칼로리 바는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따로 없었다.

한 개로는 양이 차지 않는 기분이 들었기에, 나는 이동하면서 무려 멀티 칼로리 바 세 개를 먹어치웠다.

수통에 채워왔던 물 역시도 완전히 비운 지 오래였다.

[와··· 그걸 세 개나 먹네.]

멀티 칼로리 바는 아크의 기술력의 집약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영양소와 칼로리가 풍부한 물건이다.

당연히 하나면 식사로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치지만, 며칠만의 식사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조금 과식을 하긴 했다.

'이왕 가는 김에 멀티 칼로리 바도 사야겠어.'

물론 사람이 언제까지고 멀티 칼로리 바만 먹고 살 수 있는 건 아니었으나, 일단은 이만한 게 없는 게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슬쩍 확인해 보니까 싹이 자랐던데······.'

예상했던 대로 대산림의 흙을 이용한다면 영산 노아에서도 식물을 자라게 만드는 게 가능했다.

즉, 슬슬 모래 바람 상단을 찾을 때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거래할 품목은 충분해.'

다만, 그럼에도 조금 염려되는 게 있다면, 역시 모래의 딸의 존재였다.

모래 바람 상단과 거래를 하면 필시 그 돈 귀신이랑 엮일 수밖에 없을 텐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은 모래의 딸이 아니라 병참 장교 게드윈을 만날 때였으니 말이다.

[다 왔어요!]

에스더의 말과 함께 레드 라인의 게이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Red-1 게이트.

익숙한 얼굴이 있는 17번 게이트로 가도 됐겠지만, 아무래도 낭비한 시간이 있었기에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온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들려야 할 곳도 있었고.'

[인증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칼 마커스.]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한창 전선에 있는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 소거 작업을 이어가고 있던 레드 라인의 게이트가 개방되었다.

이제 나는 정당한 아크의 명예시민이었기에, 아무리 이런 시기라 할지라도 게이트를 통과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게이트를 통과한 나는 가장 먼저 안에 있는 병사에게 병참 장교 게드윈을 호출해줄 것을 요구했다.

내가 직접 찾아가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저쪽에서 오는 게 편할 테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그렇게 얼마 기다리지 않아서 병참 장교 게드윈이 버선발로 나타났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새삼스레 안부 인사나 묻자고 여기온 건 아니었기에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거래를 하고 싶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게드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내 주위에 있는 에테르를 읽어내는 눈, 마혼안을 발동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향했던 시선이 이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 어어어?"

나를 본 게드윈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근처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에테르를 본 것이겠지만 말이다.

"대체, 어떻게, 그런······."

감탄, 경외, 두려움.

온갖 감정이 게드윈에게서 드러났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번에 내가 수확한 공적치는 무려 30만에 달한다.

레드 라인의 병참 장교인 게드윈이 살면서 이런 수치를 얼마나 보았겠는가?

그 정도로 내가 이번 웨이브에서 펼친 활약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말도 안 돼······."

"엄청나."

"어떻게 인간이 이런 일을······."

그래서 처음에는 게드윈의 그러한 반응을 잠자코 내버려 두었으나, 시간이 너무 끌리는 듯했기에 결국 제지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됐고, 일이나 하지."

"······아."

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게드윈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다 보니··· 이게 대체······."

게드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만큼 내가 이번에 다중 웨이브를 치르며 얻어낸 공적치가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었다.

"···비록 제가 아크를 대표할 수는 없겠지만,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뭘 또 새삼스레.

일만 잘해주면 되는데.

"찾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제가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어째 예전과는 태도가 많이 달라진 기분이었지만, 내가 한 일이 있다 보니 그러려니 했다.

아크는 현재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고, 병참 장교 게드윈은 이러한 상황에서 각각의 병사나 군인들이 얼마나 활약했는지 알 수 있는 눈을 지녔다.

즉, 누가 아크를 지켰는지 역시도 알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블래스터 장비를 원한다."

"블래스터 장비··· 말씀이십니까?"

블래스터류 장비는 이런저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물건이다.

그 모든 단점을 상쇄하는 위력을 지녔다는 건,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참 장교 게드윈은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아무리 공적치가 많아도 감히 살 수 없었을 테지만, 아크의 명예시민이 된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정당한 아크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지니고 있었고, 거기에 더해서 합당한 공적치까지 있다면 못살 이유가 없었다.

"제가 접근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말씀해주십시오. 바로 보급해드리겠습니다."

대답이 시원시원한 게 참 마음에 드는구만.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원한다."

"BLT-47 플라즈마 발사기··· 말씀입니까?"

병참 장교 게드윈이 조금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엄밀히 말하자면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는 블래스터류 무기 중에서 썩 좋은 평가를 받는 장비는 아니다.

지닌 파괴력이야 블래스터 발사기 중에서도 손에 꼽히지만, 장탄수나 에너지 효율에 있어서 단점이 매우 큰 장비였기 때문이다.

'내구도 역시도 썩 좋은 편이 아니고.'

장점은 극명하고, 단점은 더욱더 극명한 무기.

하지만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맞는 무기라고 볼 수 있었다.

"그래."

"알겠습니다. 그 외에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여기 적어둔 것들을 부탁하지."

나는 미리 적어두었던 목록을 건넸다.

아무래도 노아에서 살아가려면 필요한 물건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예전에 적어두었던 것들이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병참 장교 게드윈이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 내가 말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하십시오."

"메이벨 필그림 중령을 만나고 싶다."

< 블래스터(Blaster) > 끝

"···소장님을 말씀이십니까?"

특수 목적 무기 연구 소장, 메이벨 필그림 중령.

보통이었다면 스테이지 초반부인 지금 시점에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인물이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보통의 경우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나에게 병참 장교 게드윈을 소개해준 이가 메이벨 필그림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병참 장교 게드윈 역시도 나와 메이벨 필그림 중령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혀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메이벨 필그림 측에서 내 요청을 거절하더라도, 일단 내 요청을 게드윈 선에서 막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여기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알았다."

병참 장교 게드윈이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부탁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보니, 미리미리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에서 얌전히 병참 장교 게드윈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도 있었으나, 내가 부탁한 물건들을 생각한다면 시간이 꽤 걸릴 게 분명했다.

'슬쩍 둘러볼까.'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런 초반부 스테이지에 예상지 못한 다중 웨이브를 겪은 아크의 상태를 직접 확인할 필요성이 느껴져서였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게 있으니 생각보다 피해는 크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직접 확인해볼 필요가 있어.'

나는 Red-1 게이트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이! 이쪽이야!"

"그쪽을 더 당겨!"

"더, 더, 더!"

발걸음을 옮기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분주하게 움직이는 군인들의 모습이었다.

현재 외부에서는 마수 및 마물 시체 소거 작업이 한창이었고, 그중 일부 마수와 마물의 시체는 직접 수거해서 옮기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몇몇 마수 및 마물의 시체는 상당한 활용성이 있는 게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가죽은 방어구나 천막 같은 거로도 활용할 수 있고, 다른 부분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으니까.'

물론 멀쩡한 시체가 워낙 드물고, 회수하는 과정 역시도 쉽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아크 내에서는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의 가치가 꽤 높은 편이었지만 말이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나는 본격적으로 Red-1 게이트 안쪽의 상황을 살폈다.

상당한 고위 등급으로 보이는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를 나르고 있는 모습.

초대형 마수에 의해 무너진 듯한 외벽과 내벽을 보수하기 위해서 한창 공사 중인 군인들.

마지막으로 새로 보급된 듯한 중화기들을 옮기고 있는 모습까지.

'생각보다 피해가 적어.'

아무리 레드 라인의 전선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라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

무려 다중 웨이브를 겪고서 이 정도 피해라면 거의 천운이 따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행이라고 봐야 할지, 아니면 내가 그만큼 고생을 했으니 당연하다고 봐야 할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크의 피해가 전혀 없다는 건 아니다.

사상자의 흔적이야 내가 아크를 찾은 건 웨이브가 종료된 지 며칠이 지났으니 그렇다고 쳐도, 여전히 무수한 전쟁의 흔적들이 있었으니까.

그것은 상흔이었다.

아무리 성벽을 보수하고, 사상자를 감춰도 드러나고야 마는 상흔.

그렇게 내가 Red-1 게이트의 상황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여기 계셨군요."

병참 장교 게드윈이 나를 찾았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빠르게 물자 보급이 완료된 듯했다.

"신경쓰게 했군."

"아닙니다. 말씀하신 물자들은 Red-1 게이트 출구에 맡겨 두었으니, 아크를 나서실 때 이름을 말하고 받아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받으십시오. 말씀하신 물건입니다."

병참 장교 게드윈이 품속에서 무척이나 익숙한 물건 하나를 건넸다.

권총과 자동 소총의 중간 정도의 크기를 지닌, 검게 도색된 총 한 자루.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였다.

'흐음.'

나는 곧장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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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T-47 플라즈마 발사기] [★★★★★★(6성)]

아크의 첨단 기술이 집약된 플라즈마 발사기.

위력은 강력하지만, 에너지 효율이 좋지 않다.

"상세 보기"

──────────────

얼핏 보면 고작 6성 등급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중요한 점은 이 등급이 아무런 커스터 마이징이나 업그레이드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6성이라는 점이었다.

'더군다나, 플라즈마 발사기의 특성상, 동 등급 내에서의 공격력은 가히 최상이라고 부를만 하다.'

실제로 현재 내가 지닌 Ark-15 자동 변환 소총이 온갖 커스터 마이징과 업그레이드를 거치고서 6성 등급을 갖추게 되었지만, 단순 화력 면에서는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에 밀릴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서 만약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에 커스터 마이징과 업그레이드까지 하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내가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살피고 있을 때, 병참 장교 게드윈이 말했다.

"그리고 메이벨 필그림 중령님께서도 회답을 주셨습니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무시하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생명의 은인 효과가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예.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로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혹시 안내가 필요하십니까?"

"아니. 알아서 찾아가지."

게드윈이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이제 나는 당당한 아크의 명예시민이었기에 굳이 꿀릴 건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병참 장교 게드윈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크에도 몇 없는 병참 장교답게 상당한 업무 과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한테 상당히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뭐, 우수 고객 대우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실제로 이로써 나는 약 30만에 달하는 공적치를 한 번에 사용했다.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포함한, 새롭게 요청한 온갖 물자들에 대한 가격이었다.

스테이지 초반부에 해당하는 레드 라인의 병참 장교인 게드윈이 이런 큰 거래를 얼마나 해봤겠는가?

이 정도 대우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뭐, 그건 그거고······.'

나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장, 메이벨 필그림 중령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지금 내가 그녀를 찾는 이유는 간단했다.

모름지기 새로운 장비를 손에 넣었으면, 적당한 커스터 마이징과 업그레이드는 상식 아니겠는가.

'특히 BLT-47 플라즈마 발사기 같은 물건은 순정 상태로 그냥 쓰기에는 부담이 많이 되는 물건이야.'

장탄수나 에너지 효율 같은 건 아무래도 좋지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역시나 내구성이었다.

장탄수에 제한이 없다고 해서 마음대로 죽죽 쏴댔다가는 언제 뽀각-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소리다.

'Ark-15 자동변환 소총이나 다른 중화기들 같은 경우는 그냥 총신이 과열되어서 잠시 못 쓰는 수준이었지만,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는 달라.'

자칫 과용하다가는 자가수복이 불가능한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아크에서 수리가 가능하긴 할 테지만, 문제는 전투 중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가 생길 불상사였다.

'미리미리 준비를 해두는 게 낫겠지.'

나는 기억 속에 있는 길을 따라서 레드 라인의 도시를 걸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도시의 전경과 멸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치솟은 마천루.

전쟁을 겪어 본 적도 없는 것처럼 평화를 한껏 누리고 있는 사람들.

거리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웃음.

한결 같은 풍경.

마치 세상의 멸망 따위는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구는 레드 라인은, 실제로 아크가 멸망 직전까지 가더라도 이 풍경을 유지할 것이다.

근거는 별 거 없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겠지.'

이는 그림자단 루트가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림자단이 마치 의적들처럼 라인 간의 불평등과 갈등을 종식시킨 영웅처럼 느껴진 것이다.

'실제로는 라인 간 일어나는 갈등에 크게 일조한 녀석들이지만.'

뭐, 지금은 아무래도 좋겠지.

치솟은 마천루와 평화로운 거리를 지난 나는 마침내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의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라······.'

나에게 있어서는 감회가 색다른 장소였다.

한때 그곳에서 장비 업그레이드 및 커스터 마이징이 성공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실제로 모니터 앞에 물 떠놓고 업그레이드 버튼을 눌렀던 적도 많았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복잡한 장소라고 볼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초심자의 행운 효과가 종료되기 전에 찾았어야 했는데.'

무엇이든지 후회란 늦는 법이다.

아니,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이전에 찾아와봤자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구매하기는 어려웠을 테니 별 의미없는 가정이었지만 말이다.

마침내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의 입구에 다다른 내가 앞에 서자, 데스크에 있는 연구소 직원이 인사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연구소장, 메이벨 필그림 중령을 만나러 왔다."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칼 마커스."

"예. 확인되었습니다. 이쪽으로."

확실히 병참 장교 게드윈이 제대로 말을 해둔 건지, 외부인의 출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입이 어렵지 않았다.

'아니면 메이벨 필그림이 직접 언질을 해두었거나.'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소장님께서는 지금 지하 31층 개인 연구실에 계십니다."

"알았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서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얼핏 보면 보안이 허술해 보이기 짝이 없었지만, 만약 내가 침입자였다면 엘리베이터에 오르기는커녕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의 입구를 강제로 통과하려는 순간 침입자 방지용 플라즈마 세례를 받고서 먼지가 되었을 것이다.

[B31]

마침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와··· 이게 다 뭐야?]

에스더가 입을 떡 벌렸다.

그만큼 메이벨 필그림 중령의 개인 연구실은 마치 미래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늘어져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면 그림자단의 척후인 에스더가 이 광경을 보고 새삼스레 놀랐다는 점이다.

'처음오는 것도 아닐 텐데?'

[처음오는 건데요?]

'······.'

아무래도 지금은 에스더가 본격적으로 아크 내에 돌아다니기 전인 듯했다.

어쨌거나 그렇게 메이벨 필그림의 개인 연구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이내 작업복 차림의 메이벨 필그림 중령이 나를 맞이했다.

"오셨군요. 게드윈에게 연락은 받았어요."

"부탁할 게 있어서 왔다."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인가요?"

"그래."

내가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구매하기 무섭게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장인 메이벨 필그림을 찾았으니, 그 목적을 추측하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다음 반응은 나로서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그렇군요."

어딘가 조금 씁쓸해 보이는 듯한 표정.

나로서는 처음 보는 반응이었기에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뭐, 어려운 부탁은 아니네요. 하지만 BLT-47 플라즈마 발사기 자체가 워낙 예민한 물건이라,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알아두세요."

"알고 있다."

"그러면 다행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말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자, 그러면 비용은······."

"비용?"

"설마 공짜로 해달라는 건 아니겠죠?"

혹시나 공짜로 해주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역시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메이벨 필그림에게 커스터 마이징이나 업그레이드를 맡기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크레딧이 든다.

물론 공적치를 크레딧으로 바꿀 수 있긴 하지만, 그건 효율상 매우 좋지 않았다.

공적치로 살 수 있는 물건의 값과 크레딧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의 값을 비교하면, 효율상 크게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그나마 저번에 아크 안에서 활약하면서 벌어둔 크레딧이 있긴 하지만······.'

즉, 앞으로 크레딧을 벌기 위해서는 저번처럼 웨이브를 아크 안에서 치를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매번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크레딧이 필요할 때도 있을 테니까.'

아니면 아크 바깥으로 나가서 상대적으로 멀쩡한 마수나 마물의 시체를 가져와서 파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가 될 것이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내가 말했다.

"지불하지."

저번 웨이브 때 벌어둔 크레딧을 생각한다면, 아마 업그레이드 한 번 정도가 고작이겠지만 말이다.

"알겠어요. 원하시는 건 업그레이드인가요?"

"그래."

"이리 주세요."

나는 메이벨 필그림에게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넘겼다.

이미 수백 차례는 겪어본 순간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떨림을 감출 수 없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메이벨 필그림이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들고서 자신의 작업대 앞으로 향했다.

마침내,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 블래스터(Blaster) (2) > 끝

장비 강화.

많은 게임에서 이 순간은 무수한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든다.

더 디펜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더 디펜스 같은 경우는 자칫 강화 실패로 장비를 날려 먹었다가는 그대로 클리어 실패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사실상 게임을 건 순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원래였다면 같은 종류의 장비를 최소 한 개 정도는 여유분으로 두고 시도하는 게 맞지만······.'

애석하게도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는 두 개씩이나 마련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는 물건이다.

필요한 공적치도 그렇고, BLT-47 플라즈마 발사기 자체가 지닌 위력도 그렇고, 애초에 이런 스테이지 초반부에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메이벨 필그림에게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을 건넨 손이 떨렸다.

수전증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말해서 다른 이유가 더 큰 것 같다.

'···괜찮겠지?'

내가 이토록 걱정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Ark-15 자동변환 소총의 경우, 기본 보급 장비답게 커스터 마이징과 업그레이드 확률이 엄청나게 높다.

초심자의 행운 효과가 있다는 가정하에 메이벨 필그림 정도 되는 인물에게 맡긴다면 그 확률은 사실상 90% 이상이었으니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예전에 내가 메이벨 필그림에게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맡겼을 때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는 다르다.

본래부터 내구성이 매우 약한 물건인 탓에, 업그레이드 같은 정교한 작업 시 파손 확률이 엄청나게 올라간다.

거기에 더해서 지금까지 나를 든든하게 지탱해주었던 초심자의 행운 효과까지도 이미 종료되었으니, 걱정을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하실 말씀이라도?"

"···잘 부탁한다."

[푸훕!]

에스더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메이벨 필그림 앞에만 서면 약해지는 건 경험에 의한 반사작용이었으니까.

"여기서 기다리세요. 제가 집중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러지."

아무런 작업대도 존재하지 않았던 영산 노아 한복판에서도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업그레이드했던 메이벨 필그림이지만,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다룸에 있어서는 신중함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작업대가 보이는 투명 유리창 너머에서 메이벨 필그림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작업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메이벨 필그림이 망치를 들었다.

'응? 망치?'

···원래 업그레이드 때 저런 흉악한 물건을 들었던가?

내가 의아함을 느낀 순간.

메이벨 필그림의 손에 들린 망치가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거침없이 내려쳤다.

까앙!

쇳소리가 울려 퍼지며 저도 모르게 내 어깨가 움찔했다.

[어머.]

마치 짓궂은 악동 같은 미소.

아니, 마치가 아니라 실제로 그러할 터였다.

에스더는 장난이라면 아주아주 좋아하는 악질 중의 악질이었으니까.

'···왜, 뭐.'

[아니이··· 뭘 좀 놀란 것 같아서요. 혹시 저거 부러질까 봐 그런 거예요?]

'아니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에?]

'아니라고.'

그렇게 내가 에스더와 작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순간.

빠각─!

다시 한번 들려온 영 좋지 못한 소리와 함께 내 고개가 휙 돌아갔다.

혹시 업그레이드에 실패한 건가 했으나, 다행히 메이벨 필그림의 표정을 보아하니 작업의 과정인 듯했다.

'아.'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내가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에스더의 미소가 더욱 짙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당황한 내 표정을 본 듯했다.

[흐흥.]

'······.'

[네, 뭐. 별로 안 놀랐죠? 음음, 그런 것 같더라.]

'···시끄럽다.'

[네이.]

나와 에스더가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메이벨 필그림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예전에 노아에서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업그레이드할 때도 봤던 거지만, 인간이 한 가지 기술에 통달하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었다.

'···괜찮겠지?'

그런 전문가에게 맡겨놓고도 안심하지 못하겠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지이잉······.

깡! 깡!

치이이익─!

유리창 너머로 온갖 공구들이 움직이는 소리와 열선이 내뿜는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과연 Ark-15 자동변환 소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밀 장비답게 들어가는 수고 역시도 엄청났다.

지이잉······.

쇠가 긁히는 소리.

열선의 열기.

사방으로 튀는 빛.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렸었나?'

내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순간.

어느덧 손을 멈춘 메이벨 필그림이 작업을 위해서 입었던 방호복을 반쯤 벗고는 작업대에서 나왔다.

"다 끝났어요."

"결과는······."

"여기요."

메이벨 필그림이 내민 건 까맣게 뭉쳐 있는 어떤 덩어리였다.

"···그게, 말인가?"

검게 탄 숯검댕이.

내가 알고 있는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와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무엇이었는지조차 알아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네, 맞아요."

"그러니까··· 그게 내가 맡긴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라는 거지?"

"그렇다니까요."

"하······."

목소리가 떨린다.

안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메이벨 필그림이 내민 건, 처참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었으니까.

'망했다.'

물론 아직 아크의 멸망이 확정되었다든가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에 상당히 많이 근접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제 어쩌지?'

물론 실패 확률이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실패할 줄은 몰랐다.

원래 도박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으레 그렇듯이, 계획이란 성공을 전제로 짜는 법이었으니까.

'평소에 이럴 때는··· 보통 이쯤에서 그대로 게임을 종료하곤 했지.'

그렇다고 해서 업그레이드를 시도하지 않는 선택지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는 언젠가는 했어야 할 일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응? 왜 그러시는······ 아."

그런데, 메이벨 필그림의 반응이 무언가 이상했다.

"왜 그러지?"

"잠시만요."

메이벨 필그림이 무언가를 알아차렸다는 듯이 손에 들려 있는 까만 덩어리를 탁탁 털었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이내 메이벨 필그림의 손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혹시 실패한 줄 아셨던 거에요?"

"그 얘기는······."

"성공이예요."

성공이라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가 내민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을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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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T-47 플라즈마 발사기 MK.II] [★★★★★★(+★)(7성)]

아크의 첨단 기술이 집약된 플라즈마 발사기.

무기 공학 권위자, 메이벨 필그림의 손길을 탄 물건이다. 기본적인 성능 및 내구도가 크게 향상되었다.

내구도에 특히나 신경을 쓴 물건이다. 내구도가 추가로 한 단계 더 상승했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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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7성 등급의 무기.

거기에 더해서 메이벨 필그림의 손을 탄 물건답게, 장비 설명에서 내구도가 약하다는 문구가 사라졌다.

'거기다가, 내구도에 특히나 신경을 썼다는 설명은······.'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업그레이드와도 조금 다르다는 뜻.

즉, 메이벨 필그림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친분으로 인해서 일반적인 업그레이드보다 한 차례 더 높은 수준의 업그레이드를 받았다고 보는 게 옳았다.

"특히 힘 좀 써본 건데, 어때요?"

메이벨 필그림이 마치 칭찬 해달라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히 나도 그에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훌륭하군."

"그렇죠? 다른 사람한테는 안 해주는 거예요. 생명의 은인이라서 특별히."

그리고는 배시시 웃는 모습에 하마터면 그대로 메이벨 필그림을 얼싸안고 춤이라도 출 뻔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이곳에서 수상한 짓을 했다가는 위협 감지 센서에 의해서 그대로 먼지가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음흉해.]

'아무 생각도 안 했다.'

[늑대.]

'······.'

에스더의 힐난을 뒤로한 채로 내가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품에 챙기며 생각했다.

'그래도 완전한 주력 병기로 사용하기에는 어렵겠지.'

아무리 내구도가 이중으로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라는 물건 자체가 워낙 예민한 물건이다 보니 함부로 굴리다가는 금세 고장 날 게 뻔했다.

즉, 별도의 주력 병기를 마련하기 전까지는 지금까지처럼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여전히 손에 쥐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괜히 Ark-15 자동변환 소총이 더 디펜스에서 국밥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중요한 순간이나 화력이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게 생겼다는 게 중요하지.'

비록 크기는 크지 않아도, BLT-47 플라즈마 발사기가 순간적으로 뿜어내는 화력은 중화기인 NOA-8 중기관포를 뛰어넘는다.

필요한 순간에 적절히 활용한다면 설사 상대가 변절자 룩 정도의 강적이라 할지라도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으리라.

"자, 그러면··· 이제 본론이 남았네요."

"본론?"

"계산이요."

"···그렇군."

나는 메이벨 필그림에게 크레딧 카드를 겸하는 명예시민권을 내밀었다.

어설프게 먹고 튀는 행위 따위는 당연히 불가능했다.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에서 빠져나갈 방법도 없을뿐더러, 설사 성공한다 하더라도 다시는 메이벨 필그림에게 업그레이드를 맡기지 못할 테니 말이다.

'아니, 그 전에 아크에서 수배되어서 도망자 신세가 되겠지.'

계산을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렇게 내가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내 명예시민권을 받아든 메이벨 필그림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크의 명예시민이 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역시 대단하시네요. 외지인이 명예시민이 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운이 좋았다고 해두지."

"네, 저도 그랬죠."

메이벨 필그림이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겠다는 뜻 같았다.

'좀 깎아주려나?'

띠딕-

명예시민권의 인증 과정이 지나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9,785 크레딧이 결제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혹시나 했건만, 업그레이드 비용을 깎아주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약 1만 크레딧.

이번 업그레이드로 지난번 웨이브 때 레드 라인 전선에서 활약하며 받은 크레딧을 거의 다 써버린 것이다.

메이벨 필그림의 손을 통한 업그레이드는 일반적인 업그레이드보다 훨씬 더 확률이 높지만, 대신 가격 역시도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벌어야겠어.'

크레딧을 버는 방법은 대충 세 가지 정도다.

첫 번째는 웨이브를 치르고서 얻은 공적치로 교환하는 방법이고.

두 번째는 아크 내에 있는 전선에서 웨이브를 막아내며 보상으로 받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아크와 거래를 통해서 크레딧을 확보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영 효율이 좋지 않으니··· 그나마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두 번째 방법이겠지.'

아크 바깥에서 호루스를 타고서 활약하는 건 상대적으로 많은 공적치를 얻을 수 있지만, 위험한 데다가 크레딧도 벌 수 없다.

이제 아크 내에서 정당하게 활동할 수 있는 명예시민권도 있겠다,

'거기다가··· 내 가치는 이미 입증했으니, 예전처럼 공짜로 일해줄 필요는 없겠지.'

아무래도 바놀 중령을 한번 만나봐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가시는 건가요?"

"그래."

볼 일도 끝났겠다, 더는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젠 남은 크레딧도 없었고.

"아, 잠시만요."

내가 엘리베이터로 향하려던 찰나, 작업대를 뒤적거리던 메이벨 필그림이 나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저번에 절 구해주셨던 일에 대한 감사 표시에요. 물론 이걸로는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받아주세요. 이제 막 시험 기동을 마친 신형 모델이에요."

묘하게 눈에 익은 형태와 색깔.

나는 이 물건을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

[Z-74 제트팩] [★★★★★★(6성)]

아크제 신형 제트팩.

특수 목적 무기 공학 권위자인 메이벨 필그림이 직접 만들었다.

고속 비행이 가능하다.

"상세 보기"

──────────────

< 블래스터(Blaster) (3) > 끝

Z-74 제트팩.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건 최소 중후반 스테이지는 가야 본격적으로 아크 내에서 등장하는 물건이었다.

즉, 지금 시점에서는 아무리 공적치가 많고 크레딧이 많아도, 구하고 싶어도 절대 구할 수 없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이걸, 나한테 준다고?"

"네."

"그냥?"

모든 호의에는 이면이 있다.

그리고 그건 설사 생명의 은인을 향한 것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게 아직 개발 중인 물건이거든요. 가능하다면 Z-74 제트팩의 실사용 데이터를 부탁드리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Z-74 제트팩을 주는 대가로 고작 실사용 데이터 정도라면 무척이나 값이 싸다.

아니, 사실상 거저나 다름없었다.

'명분이 필요하다는 거군.'

아무리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장이라는 직책을 지닌 메이벨 필그림이라지만, Z-74 제트팩 같은 물건을 외부로 반출하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하다.

특히, 아직 Z-74 제트팩이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전인 지금 시점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그렇기에 실사용 데이터 수집은 아주 쓸만한 명분이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물건일지라도, 실제 사용 데이터 수집은 꼭 필요한 과정이었으니까.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메이벨 필그림은 억지로 명분을 만들면서까지 나에게 Z-74 제트팩를 선물하려한 것이다.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알았다."

"네, 감사해요."

멀리서 보면 선물을 한 쪽이나, 선물을 받은 쪽이나 똑같이 눈 가리고 아웅하는 행색이었다.

"그러면 Z-74 제트팩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자면······."

"아니, 괜찮다."

"···네?"

메이벨 필그림이 멍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메이벨 필그림의 설명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메이벨 필그림의 평소 성격을 생각한다면 일장연설이 될 것 같았기에 미리 발을 뺀 것이다.

"영혼의 목소리가 알려주었다."

"그건 또 무슨······ 아하하. 네, 당신은 그런 식이었죠. 잠깐 잊고 있었네요."

메이벨 필그림은 이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몇 가지는 말씀드릴게요. Z-74 제트팩은 기본적으로 반영구 사용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어요.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양에는 한계가 있지만, 사용하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 자동으로 에너지가 충전되는 식이죠. 아, 참고로 사용하는 도중에도 조금씩은 충전이 되니까 아껴서 쓰면 거의 온종일 사용할 수도 있어요."

"제트팩의 기본적인 전술 가치는 크게 두 가지에요. 첫 번째는 비행. 두 번째는 가속.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전술 가치라는 거지, 활용하기에 따라서 그 이상도 얼마든지 가능해요."

"비행은 말 그대로 Z-74 제트팩의 에너지를 추진체로 삼아서 비행을 하는 걸 말해요. 하늘을 나는 거죠. 정말 멋지지 않나요? 하늘을 나는 건 인류의 오랜 꿈으로서 이 정도 크기의 개인 장비 중에서 제대로 실전용으로 사용할 만한 건 제트팩 시리즈가 유일한 것으로······."

알겠다면서 할 말은 다 하는 걸 보니, 참으로 메이벨 필그림다웠다.

물론 더 들어줄 생각은 없었지만.

"···아니, 이쯤이면 됐다. 나머지는 직접 사용하면서 확인하지."

"그래도 괜찮겠어요?"

"그래."

더 듣고 있었다가는 다음 웨이브 때까지 앉아서 시간을 날리게 생겼으니 말이다.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도 아닌데 그런 사치를 누릴 생각은 없었다.

'얘기 좀 들어준다고 업그레이드 비용을 깎아주는 것도 아니고.'

물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이상 들어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 가는 건가요?"

"그래. 할 일이 많다."

"그래요, 떠나는 자를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죠. 다음에 뵈요."

"그러지."

아무래도 메이벨 필그림은 Z-74 제트팩의 위대함에 대해서 더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운 듯했지만, 기회는 또 오는 법이었다.

나로서는 오지 않길 바라지만.

"그러면 이만."

인사를 마친 나는 그대로 Z-74 제트팩과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소중히 품에 안고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를 나섰다.

"안녕히 가십시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층을 나서자, 들어올 때 보았던 안내 데스크의 연구소 직원이 인사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사를 대신하고는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를 나섰다.

"후······."

[···뭘 그렇게 헤죽헤죽 웃어요? 기분 나쁘게.]

"내가 언제."

[지금도 그러고 있는데요.]

"······흠흠."

에스더가 말했다.

[이제 아크 밖으로 갈 건가요?]

"아직은 아니다."

[네? 왜요?]

"아직 아크에 볼 일이 있어."

[뭐 하려고요?]

"바놀 중령을 만날 거다."

그에 에스더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 작자는 또 왜요?]

"바놀 중령을 알고 있나?"

[모를 리가 없죠. 얼마나 성가시게 우리 계획을···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보면 알 거다."

[매번 그런 식이지. 됐어요. 물어본 내가 바보지.]

"잘 아는군."

[아악!]

저 혼자 열이 뻗쳐서 비명을 내지르는 에스더를 뒤로한 채로, 나는 Red-17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장 바놀 중령의 집무실을 찾아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이모샤 중위를 통하는 편이 더 편할 것 같아서였다.

'겸사겸사 이모샤 중위도 보고.'

이모샤 중위는 유능한 장교다.

실제로 블랙 라인 참전 경험까지 있는 그녀는 장차 아크의 중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일단 적당한 관계를 쌓아둬서 나쁠 게 없다는 뜻이었다.

'가볼까.'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

"오셨군요."

내가 Red-17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 이모샤 중위는 한창 웨이브의 뒷수습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리 아크가 이번 웨이브를 상대적으로 잘 막아냈다고 하더라도, 웨이브는 어디까지나 웨이브다.

정리해야 할 일도 많고, 다음 웨이브를 위해서 준비해야 할 일 역시도 많았다.

"바빠 보이는군."

"아닙니다. 잠시 얘기를 할 시간 정도는 괜찮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바놀 중령을 만나고 싶다."

이모샤 중위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중령님을 말씀이십니까?"

"그래."

"실례지만 어떤 용무 때문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크의 안보와 관련된 거다. 자세히는 나중에 바놀 중령에게 들어라."

"아··· 그렇군요."

이모샤 중위가 시무룩한 기색을 보였다.

이대로 대화를 끝냈다가는 기껏 여기까지 찾아올 필요가 없었기에, 내가 말했다.

"상황은 괜찮나?"

"···웨이브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아요. 솔직히 말해서 전선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거든요."

"그렇군."

"혹시······."

"왜 그러지?"

"······아닙니다. 아무것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모샤 중위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며칠 동안 안 잔 거지?"

"예? 그건 갑자기 왜······."

"수면이 부족하면 유사시에 오판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 너는 철인이 아니야. 조금은 쉬어둬라."

"하지만 저는······."

"쉴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할 거면 그만둬라. 그릇된 방식으로 책임을 지지 마라. 전시 때 네 명령 한 번에 희생될 수도 있는 병사들을 위해서라도 쉬어야 할 땐 쉬는 게 좋을 거다."

그와 함께 이모샤 중위가 눈을 크게 뜨고는 나를 응시했다.

순간적으로 무수한 감정이 소용돌이쳤으나, 나는 짐짓 모른 척했다.

이모샤 중위가 조금 전에 나를 통해서 무얼 봤을지, 내가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때, 이모샤 중위의 손목에 있는 디바이스가 울렸다.

"···아, 바놀 중령님께 회답이 왔습니다. 바로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았다."

* * *

떠나는 칼 마커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모샤 중위는 조금 전의 대화를 곱씹었다.

"그릇된 방식의 책임······."

옳은 말이었다.

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용감히 싸우는 지휘관은 좋은 지휘관은 될 수 있어도, 훌륭한 지휘관은 될 수 없다.

이미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실책을 저지르다니······.

「"살아."」

이모샤 중위는 좋은 지휘관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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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그들이 희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블랙 라인은 지키지 못했다.

정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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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은 모두 죽었다.

심지어 그들이 희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블랙 라인은 지키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모샤는 알고 있었다.

지금, 아크에 필요한 건 좋은 지휘관이 아니라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어디 가십니까?"

부관의 질문에 이모샤 중위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없는 동안 부관이 현장을 좀 맡아주었으면 한다."

"잘 못 들었습니다?"

부관은 당황했다.

이모샤 중위가 어떤 인물인지, 어떤 책임감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갑자기 자러 간다는 말이 현실로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러 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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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진짜 주무시러 가십니까? 지금요?"

"자러 간다고."

물론 부관도 알고 있었다.

이모샤 중위가 벌써 며칠째 눈도 붙이지 않고 현장에서 뒷수습 지휘를 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평소에 이모샤 중위가 보였던 모습을 생각한다면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혹시, 도플갱어?'

부관의 손이 조심스럽게 허리춤에 있는 권총 홀스터로 향했다.

"내가 오면 그때는 교대해 주지. 오늘은 이만··· 쉬어야겠어."

그러다가 진심으로 피곤해 보이는 이모샤 중위의 모습을 보고는 부관의 손이 멈췄다.

'···무슨.'

이모샤 중위가 며칠째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면서 현장을 지휘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부관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심이라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한다."

이모샤 중위의 터덜터덜한 발걸음을 바라보며, 부관은 가볍게 웃었다.

항상 무거운 무게에 짓눌리고 있던 이모샤 중위가 조금은 풀어진 모습을 보이니, 저도 모르게 안심한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물론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현장 지휘관이 지휘권을 넘기고 갔으니, 이제부터 부관의 업무는 배로 늘어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에휴······."

앓느니 죽지.

앓느니 죽어.

부관이 발걸음을 옮겼다.

책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워졌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 * *

똑똑-

"들어오게."

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내가 바놀 중령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었네. 마침 좋은 술을 챙겨놨거든."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바놀 중령은 위스키로 보이는 술병 하나와 잔 두 개를 소파 사이에 있는 상 위에 놓고 있었다.

"그것도 좋다만, 바로 본론부터 말하지."

"말하게."

"나를 아크의 용병으로 고용해라."

"···재미있군. 다짜고짜 찾아와서 용병이라."

"능력은 입증했다고 본다만."

"그렇지, 입증했지. 충분할 정도로."

바놀 중령의 무거운 시선이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유능하다는 건 알고 있네. 실제로 저번 웨이브 때의 활약이 굉장했다는 것도 알고 있고. 하지만 그게 아크가 자네를 고용할 이유는 되지 않아."

바놀 중령이 덧붙였다.

"그러니 차라리 아크 군에 입대를 하는 건 어떤가?"

입대라······.

아마 이게 진짜 목적이겠지.

나를 아크 군에 입대시켜서, 비교적 저렴한 비용에 제멋대로 부려먹을 속셈.

"그건 거절하지."

물론 내가 그 제안을 승낙할 리가 만무했다.

내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부려먹으려 든단 말인가.

"나쁘지 않은 제안일 텐데? 비록 자네가 아크의 명예시민이긴 하지만, 아크의 군인이 되면 훨씬 더 많은 권리를 가질 수 있을 거네."

그만큼 많은 책임을 진다는 이야기는 쏙 빼놓는 걸 보니, 참으로 바놀 중령다웠다.

"유감이지만, 나는 아크 바깥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런가? 아쉽군. 그게 무엇인지는 말해주지 않을 테지?"

"말해주지 못할 건 없지만, 믿을지는 의심스럽군."

"하하. 내가 자네 말을 왜 안 믿겠나? 아크를 위해서 이토록 애써주는데."

"믿어준다니 고맙군."

바놀 중령은 내 거절에도 불구하고 별일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앉게. 메사 30년산일세. 이제는 구하기 무척이나 어려운 물건이지. 자네가 올 줄 알고 미리 손을 좀 썼네."

그 말대로였다.

아크의 위스키 제조업체 중 하나였던 메사는, 블랙 라인에 터를 잡고 있었던 기업 중 하나였고, 당연히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바놀 중령에게서 위스키 잔을 건네받고는 그것을 마셨다.

"독하군."

"그렇지?"

바놀 중령은 짐짓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소답지 않게 껄껄 웃었다.

"이상하지 않나? 현재 아크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이런 술 같은 사치품은 절대로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했네. 술은 곡식을 원료로 써서 만드니까. 그런데도 아크 내에서 술이 생산되었던 이유가 뭔지 알고 있나?"

바놀 중령이 덧붙였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블랙 라인에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할 정도였거든."

바놀 중령의 잔이 완전히 비워졌다.

그리고는 다시금 말했다.

"아니, 단순히 블랙 라인뿐만이 아니지. 아크의 군인들은 점점 지쳐가고 있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몰려드는 마물에 대한 공포.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무력감."

바놀 중령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네는 달랐어. 아크 바깥에서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고철 덩어리로 스컬 하운드를 잡고, 아크 바깥으로 쫓겨났음에도 포기하지 않았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아크에는 자네 같은 군인이 필요하네. 아크에서 태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크를 위하고, 또한 유능한."

바놀 중령이 잔에 위스키를 다시금 가득 따르더니, 그것을 단번에 들이키고는 말했다.

"아크의 군인이 되어주게. 자네라면 아크 사관 학교에도 충분히 입소할 수 있을 거네. 아니, 내가 직접 추천하지."

아크 사관 학교 추천이라······.

심상치 않은 제안이 들어왔다.

< 용병 > 끝

아크 사관 학교.

아크에서 장교를 육성하기 위한 기관으로, 아크 내에서도 각 라인의 고위층의 자제 혹은 레드 라인의 시민과 몇몇 극소수의 능력이 입증된 자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아크 사관 학교의 입학 조건이 이토록 까다로운 이유는 간단했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아크의 특성상, 아크에서 장교가 된다는 건 곧 출세 가도를 달린다는 것과도 같았다.

아크 내에서 군과 권력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그렇지만······.'

무엇이든 예외는 있는 법.

레드 라인 수비의 절반을 책임지고 있는 바놀 중령의 추천이라면, 사실상 입학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레드 라인의 수비를 책임지고 있는 바놀 중령의 위치는 단순히 중령이라는 계급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플레이어가 아크의 장교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크게 둘 중 하나다.

특성 포인트 대부분을 '귀족의 기품'이나 '행정보급관' 같은 신분과 관련된 특성으로 몰아서 아예 레드 라인의 고위층으로 시작하거나,

혹은 통솔과 관련된 능력치를 크게 올려서, 그 능력을 입증한 뒤에 장교로 임명되거나.

'그중 무엇도 쉽지 않지.'

신분과 관련된 곳에 특성을 소모한다는 건, 곧 다른 부분에서 결여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중에 능력을 입증해서 장교가 된다 한들, 그 과정 역시도 녹록지 않다.

'통솔 능력치는 올리기 까다로운 능력치야. 당연히 통솔 능력치를 올리는 데 집중하면 다른 쪽 성장이 더뎌진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아크의 장교가 되기 위해서는 버려야만 하는 것이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지금 바놀 중령은 나에게 그 모든 조건을 제쳐두고 장교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보통이었다면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인 셈이었다.

"파격적인 조건이군."

"하하, 그렇게 말하니 다행이군. 어떤가? 자네라면 분명히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네."

"그런데······."

내가 바놀 중령의 시선을 응시했다.

"그렇게 나를 평가하고 있으면서, 용병으로는 쓸 수 없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바놀 중령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거절이라는 건가?"

"이번 웨이브는 지금까지의 웨이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웨이브였다. 그런데도 아크가 무사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바놀 중령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번 웨이브의 규모에 비해서, 아크가 입은 피해가 이상할 정도로 적다는 것을.

그리고 이미 그에 대한 원인 역시도 다방면으로 조사하고 있을 터였다.

내 존재 역시도 아마 유력한 이유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을 게 뻔했고.

"···그게 자네 덕분이라는 건가?"

"그런 오만한 말은 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이번에 전투에 참여한 건 사실이지."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상 같은 말이었다.

너희는 내 덕분에 살아남았다.

바놀 중령으로서는 당장 나를 총살시켜도 모자라다고 느낄 모욕이었으나, 그럼에도 바놀 중령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바놀 중령 역시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 웨이브의 전체적인 규모에 비해서, 확실히 이상한 점이 있었다는 걸.

"······."

"나는 아크의 적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무료로 봉사할 의무는 없다는 걸 알아뒀으면 한다."

"원하는 게 뭔가?"

"대가."

바놀 중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듣기로는 이번에 병참 장교 게드윈에게서 받아간 보급 물자가 상당하다고 하던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그건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대가다. 하지만 앞으로도 내가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지. 안 그런가? 그래서 파격적인 조건까지 내걸면서 나를 입대시키고자 하는 거고."

그 말마따나 아크의 입장에서 나는 무척이나 도움이 되는 외지인인 동시에, 언제 떠나거나 등을 돌릴지 모르는 위험분자다.

내가 웨이브 때 활약을 하면 할수록, 자연스럽게 아크에서는 내 빈자리를 크게 느낄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바놀 중령이 나에게 아크의 장교 자리라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내걸 리가 없었다.

"하······."

바놀 중령이 위스키 잔을 들었다.

"당해낼 수가 없군. 내가 졌네."

"내 조건을 받아들이겠다는 건가?"

"별수 있겠는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차피 바놀 중령 역시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번 용병 제안은 내가 상당히 밑지는 제안이라는 걸.

그렇기에 바놀 중령도 한 번 더 찔러본 것이겠지만, 거기까지는 용납해줄 생각이 없었다.

"구체적인 조건은 천천히 얘기하지. 아무래도 길어질 것 같으니까. 그러니··· 우선, 마시지."

바놀 중령에 빈 잔을 채웠다.

"들게."

바놀 중령이 잔을 권했다.

나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크를 위하여."

"나도 해야 하나?"

"뭐, 내키지 않는다면 그냥 들고만 있게."

서로의 잔이 부딪쳤다.

서로가 속내를 감춘 채로.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잔이 부딪쳤다.

*

밤은 길었다.

기나긴 협상 끝에 맺어진 조건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다만, 한 가지 오산이 있었다.

"우웩!"

[와, 주인님도 사람은 맞았네요. 숙취도 느끼는 걸 보면.]

"···쓸데없는 소리를, 웁!"

[이야, 많이도 먹었네.]

에스더의 말마따나 내가 밤 중에 이것저것 많이 주워 먹긴 했는지, 나오는 게 참 많았다.

'그걸 어떻게 안 먹어.'

바놀 중령과의 협상 자리에 안주로 나온 건, 이곳에 온 뒤로 거의 처음으로 먹는 제대로 된 음식들이었다.

비록 사치스러운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수 고기와 멀티 칼로리 바만 뜯어먹고 살던 나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천천히 먹게."」

오죽하면 걸신들린 듯이 먹는 나를 바라보며 바놀 중령이 질린 표정을 지었을 정도였다.

'물론 이제부터는 제대로 된 음식을 지금보다는 자주 먹겠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바놀 중령과의 기나긴 협상 끝에, 나는 몇 가지 조건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 조건을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내가 아크의 용병으로서 싸울 시, 나는 그에 대한 대가를 크레딧으로 받는다.'

다만, 조건이 달렸다.

아크의 용병으로서 참전하는 게 인정되는 경우는 어디까지나 아크 내에서 참전했을 경우로 말이다.

아무리 병참 장교 게드윈을 비롯한 병참 장교들이 마혼안을 통해서 내 활약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확실한 보증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뭐, 어차피 이 부분은 예상했던 부분이었으니까.'

오히려 내가 아크 바깥에서 활약하는 것까지도 크레딧으로 지급하겠다고 했다면 내가 더 곤란했을 것이다.

그럴 경우 필시 어떤 증거를 요구할 텐데, 그에 대한 증거로 바디캠 같은 거라도 몸에 달라고 했다면 아주아주 귀찮아졌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 크레딧 문제도 대충 해결됐고, 슬슬 움직여볼까.'

당장 아크 내에서 해야 할 일은 대충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은신처로 돌아가서 호루스를 타고 모래바람 상단을 만나러 가는 것 정도.

'하루를 협상에 그냥 쓰긴 했지만, 어차피 다중 웨이브 후의 웨이브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니까.'

다중 웨이브는 한 번에 압도적인 군세가 몰아치는 만큼 이전 웨이브와의 간격은 물론이고 다음 웨이브 때까지의 간격 역시도 일반적인 웨이브보다 긴 편이다.

평소였다면 이쯤에서 다음 웨이브를 준비하고 있어야 했지만, 한 차례 더 움직여도 된다는 뜻이었다.

'모래바람 상단이라······.'

비록 지금까지는 여유가 되지 않아서 접촉하지 못했지만, 슬슬 그들과 만날 때가 됐다.

그동안 부지런히 모아온 덕분에 모래바람 상단과 거래를 할 물건들도 잔뜩 쌓였으니 말이다.

'조금 걱정이 되는 게 있긴 하지만··· 괜찮겠지.'

모래바람 상단은 아크에 비교적 우호적인 세력이지만, 그게 꼭 선한 세력이라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류 최후의 요새인 아크 정도 되는 세력이니까 모래바람 상단에게 거래 상대로서 인정을 받고 존중을 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모래바람 상단이 함부로 악연을 만드는 세력은 아니지만, 얕잡아 보이면 거래에서도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어.'

야생이나 다름없는 아크 바깥에서 온갖 종류의 인간과 세력, 심지어 마물을 상대로도 거래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모래바람 상단은 그 모든 거래를 거뜬히 해내는 집단이었고, 당연히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뭐, 만나보면 알겠지.'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지금처럼 이른 시점에 모래바람 상단과 접촉한 경험이 없다.

지금의 모래바람 상단은 내가 알던 것과는 다소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우선 은신처로 돌아간다.'

나는 아크를 나섰다.

*

은신처로 돌아온 나는 가장 먼저 이번에 병참 장교 게드윈을 통해서 보급받은 물자들을 살폈다.

레드 라인의 게이트부터 이곳까지 옮기는 것만 해도 몇 차례나 왕복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아무래도 은신처를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아늑하게 만들 필요성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음, 좋군.'

이전보다 훨씬 더 크고 아늑한 데다가 방호력까지 강한 장교용 OFS형 야전 천막부터 시작해서, 온천을 샤워 시설로 개조할 수 있는 펌프와 샤워용 천막과 별도의 화장실용 천막까지.

거기에 더해서 태양광 자가 발전기와 그것으로 사용할 온갖 생활 가전들도 빼놓을 수 없었다.

기존의 내 은신처가 동굴과 천막. 그리고 온천 하나만 달랑 있는 모양새였다면, 이제는 정말로 야영지 같은 모양새를 갖춰가는 셈이었다.

'원래였다면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내가 굳이 지금에서야 은신처를 본격적인 야영지로 개조하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까지 여유가 나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은신처를 본격적인 주거지로 삼을 필요성이 느껴져서였다.

'지금 시점에서 아크 안은 적어도 나에게는 그다지 안전한 장소가 아니야.'

아크 안이 바깥보다 안전한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마수와 마물들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시점의 나는 더 이상 마수와 마물들의 위협을 큰 위협으로 느낄 필요가 없다.

애초에 기거하는 장소 자체가 마수와 마물들이 거의 오지 않는 영산 노아 한복판인 데다가, 무엇보다도 지금의 나에게는 엥켈렌스의 영역 선포 및 엥켈렌스의 포효를 사용할 수 있는 야누스가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집 지키는 경비견으로 활용할 수 있는 호루스까지 있고.'

하지만 아크 안은 다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는 이미 그림자단과 상당히 좋지 않은 첫 단추를 꿰고 말았다.

현재 아크 내에서 그림자단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을 때, 아크 안에서 머무는 일은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아무리 그림자단이라도 아크 내에서 대놓고 움직이지는 못할 테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당분간 아크 안에서 지낼 생각은 안 하는 게 낫겠지.'

그렇게 내려진 결론이 은신처를 본격적인 주거지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이왕 지낼 거라면 좋은 곳에서 지내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럴 수 있는 여유도 어느 정도 생겼고.'

물론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은신처를 주거지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아직 한 가지가 더 필요했다.

내가 굳이 대산림의 흙들을 영산 노아에 옮긴 뒤 작물이 자라는지 실험해본 게 아니었다.

'슬슬 가봐야겠지.'

내가 천막 한 편에서 조용히 엎드려 있는 호루스를 불렀다.

"호루스."

[키엣!]

그와 함께 호루스가 살며시 몸을 눕히자, 나는 자연스럽게 호루스의 등에 이런저런 물자들을 싣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아크 병사의 시체나, 헤스본에서 얻은 장비 등 차곡차곡 모아왔던 물자들이었다.

[······지금 뭐 해요?]

"보면 모르나. 짐 싸고 있는데."

[아니 그러니까··· 그걸 갑자기 왜요?]

"내다 팔 거다."

[······네? 어디다요?]

"모래바람 상단."

그와 함께 에스더의 얼굴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었다.

< 용병 (2) > 끝

[···모래바람? 설마 제가 알고 있는 그곳이요? 그 흙먼지 날리면서 온갖 괴상한 것들을 끌고 다니는?]

"그래."

[···혼자서요? 지금 미쳤어요?]

에스더가 그런 반응을 보일만도 했다.

비록 모래바람 상단이 비교적 중립적이고 아크에 우호적인 세력이라지만, 홀로 그들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개인이 그들과 대등한 거래 관계가 되는 건 절대로 쉽지 않다.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 줄 알아요? 틈만 보이면 남의 것을 홀랑 벗겨 먹으려 드는 악질 중의 악질이라고요!]

그림자단조차도 모래바람 상단의 장사 수완에는 몇 차례 당한 적이 있었는지, 에스더가 치를 떨었다.

"나도 안다."

[그걸 알면서 놈들과 접촉하겠다고요?]

"걱정할 거 없다."

어차피 이번에 할 거래는 서로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물론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에스더로서는 불안함을 감출 수가 없을 테지만 말이다.

[······에휴. 난 몰라. 알아서 해요.]

"안 그래도 그럴 거다."

[말이나 못하면.]

호루스가 단번에 지면을 박차고서 날아올랐다.

[키엣!]

이번에 새로 얻은 Z-74 제트팩이 있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 전술용이지 이동용이 아니다.

물론 이동용으로 사용하려고 한다면야 할 수야 있겠지만,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출력에 한계가 있는 터라 이런 단순 장거리 이동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짐도 있고.'

지금 내가 호루스의 등 위에 실은 짐은 절대 적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내가 모래바람 상단에게 팔아치우겠다는 일념으로 아득바득 모아온 물자들이다. 적을 리가 없었다.

'이 정도면 교섭 재료로는 충분하지.'

호루스의 거친 날개짓이 일어나며 본격적으로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바뀌어 갔다.

호루스의 날개짓은 평소보다 둔했다.

그나마 호루스 정도나 되는 마물이니까 이 정도 무게도 견디는 거지, 만약 다른 마물이었다면 날개짓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힘내 뼈순아.]

[키엑.]

[너도 주인 잘못 만나서 참 고생이다. 그치?]

[키에엑.]

에스더의 말에 화답하는 호루스의 목소리가 묘하게 구슬프게 들려왔다.

[그런데··· 뭘 알고 가는 거예요? 모래바람 상단은 접촉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녀석들인데.]

그 말마따나 모래바람 상단은 한 곳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찾아가려고 해도 찾아갈 수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없지는 않다.

모래바람 상단은 본질적으로 상단인 만큼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놈들이 오게 하면 된다."

[···그런 것까지 알고 있었어요?]

"이 상황에서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웃기지 않나?"

[에휴··· 하필이면 이런 이상한 인간한테 걸려 가지고··· 대체 정체가 뭔지······.]

에스더가 꿍시렁대고 있을 때,

'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 저편에서 검은 점들이 점차 다가오기 시작했다.

비행형 마수 무리였다.

[지금 뭘 보는······ 아?]

평소의 호루스였다면 저딴 것들이 따라붙든지 말든지 그냥 무시하고 가도 따라잡힐 일은 없을 테지만, 문제는 지금 호루스의 속도가 평소보다 월등히 느리다는 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지금 몰려드는 비행형 마수들의 수준은 설사 전투가 일어나더라도 호루스가 꼬리를 흔들어서 파도 치기 한 번만 해도 쓸어버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현재 호루스의 등 위에 있는 막대한 양의 물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호루스가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등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여 있는 물자들이 지상으로 줄줄 흘러내릴 게 분명했다.

"흠."

물론 원거리에서 요격하는 게 어렵지는 않을 테지만······.

'차라리 잘됐어.'

나는 등에 미리 착용하고 있던 Z-74 제트팩의 끈을 조절했다.

[지, 지금 뭐 하려고요?]

"저걸 처리한다."

[아니, 그냥 멀리서 총만 쏴도 될 것 같은데 굳이?]

"테스트 겸이다."

내가 호루스의 등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호루스, 가고 있어. 알아서 합류할 테니."

[키엑!]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호루스 밑으로 몸을 내던졌다.

[······앓느니 죽지.]

에스더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언제라도 에테르를 방출할 수 있도록 내 주변에 에테르를 준비했다.

혹시라도 내가 추락사라도 할까 봐 염려하는 것이었다.

여전한 자기 보전의 화신이었다.

지이잉······.

물론 에스더의 걱정대로 내가 추하게 추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Z-74 제트팩의 엔진음이 울려 퍼지며, 이내 푸른색 불꽃이 뿜어졌다.

푸슈우우웅───!!!

처음에는 단순히 하늘 위에 떠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왼쪽 손바닥에 있는 Z-74 제트팩의 버튼을 조작하자, 점차 엔진의 화력이 강해지며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쐐애애애애애액────!!!

아직 속도 자체는 엄청나게 빠르지는 않았지만, 호루스 위에서 고삐를 잡고 앉아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내 몸뚱어리가 마치 하나의 총알이 된 것처럼 날아드는 기분.

'아.'

잠시 속도에 취하기라도 한 걸까.

어느덧 비행형 마수들과 나와의 거리가 단번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조금만 방심해도 그대로 충돌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면······.'

나는 메이벨 필그림의 손에서 재탄생한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다잡았다.

마침 시험용으로 사용하기 딱 알맞은 무대가 마련되었으니,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거리는··· 살짝 애매한가.'

Ark-15 자동 소총을 비롯한 다른 중화기였다면 당연히 유효한 사거리였지만,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는 아니었다.

플라즈마 장비 특성상 일정 거리까지는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대신에 거리가 멀면 위력이 극단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뭐, 상관없지.'

기다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비행형 마수는 물론이고, 나 역시도 그것들을 향해서 날아가는 도중이었으니 거리가 두 배로 가까워진 것이다.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의 사출구를 겨누었다.

여타 다른 총기들처럼 그럴듯한 가늠좌도, 배율도 없었지만, 굳이 조준이 어렵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의 사출구를 통해서 한 줄기의 섬광이 뻗어 나갔다.

빛의 속도로 뻗어 나간 섬광이 그대로 비행형 마수의 날개를 꿰뚫자, 총으로 낸 구멍과는 확연히 다른 구멍이 났다.

[끼에에에에엑───!]

비행형 마수가 괴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여전히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통해서 뿜어진 섬광은 멈추지 않았다.

아주 조금.

그저 아주 조금 손목을 움직이자,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통해서 뿜어진 섬광이 마치 파멸을 내리는 죽음의 빛처럼 마수의 몸을 그대로 갈랐다.

[키엑──!]

짤막한 외마디의 비명.

마수가 내지를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후드득─

한때는 마수였던 것이 반으로 쪼개진 채로 지상으로 힘없이 추락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다른 마수들이 움찔했다.

[키이이······.]

[끽! 끽!]

마수가 공포를 느낀다.

그 정도로 BLT-47 플라즈마 발사기가 뿜어낸 파멸은 절대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수들이 뒤돌아서 도망치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더욱더 흉성을 토해내며 달려들었을 뿐.

본능적으로 여기에서 나를 죽이지 못하면 자신들이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 봤자지만.'

본래였다면 에너지 효율상 플라즈마 장비를 이토록 연속해서 사용하는 건 실전성이 없는 퍼포먼스 행위에 가까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아니었다.

무한의 에너지와 메이벨 필그림에게 정비받은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의 내구성은, 본래였다면 퍼포먼스에 불과했어야 할 행위를 그 무엇보다도 파괴적인 공격으로 바꿨다.

바로 지금처럼.

지이잉───!!!

뻗어 나간 한 줄기의 섬광은 그야말로 파괴와 소멸 그 자체였다.

손가락 끝이 가볍게 움직일 때마다 마수의 날개가 잘리고, 몸이 찢어졌다.

마치 생과 사를 조종할 수 있는 권능이라도 부리는 기분이었다.

후둑-

후두득──

한때는 마수로서 하늘에 군림했던 고기 파편들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절단면이 모조리 플라즈마에 의해서 불타버렸기 때문이었다.

[8급 비행종, 검은 깃털 참수리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비행종, 검은 깃털 참수리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7급 비행종, 가시털 뻐꾸기를 처치하였습니다.]

[7급 비행종, 가시털 뻐꾸기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9급 비행종, 거대 참새를 처치하였습니다.]

[9급 비행종, 거대 참새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이게 무슨······.]

한때 1급 유령종으로서 두려울 게 없었던 에스더조차도 이 광경에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BLT-47 플라즈마 발사기 하나만으로는 일으킬 수 없는 일을, 무한의 에너지가 어우러져서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지상으로 추락한 마수들의 파편들을 가만히 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수준도 그다지 높지 않은 마수들이었던 터라, 야누스에게 먹이로 줘봤자 배를 채우는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이왕 먹일 거면 좋은 거로 먹여야지.'

나는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살폈다.

치이이익······.

겨우 이 정도 사용했을 뿐인데도 느껴지는 열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아마 조금만 더 과용했다가는 그대로 퍼졌어도 안 이상할 정도였다.

'역시 화려하게 쓰면 그만큼 열 관리가 안 되는군.'

본래였다면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는 이런 식으로 연달아서 사용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원거리용 발사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짧게 끊어서 사용하는 게 정석이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첫 개시 기념으로 조금 과하게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사용했고, 이게 바로 그에 대한 반동이었다.

'만약 메이벨 필그림에게 내구도 업그레이드를 받지 않았다면, 그대로 고장이 났어도 안 이상했겠어.'

역시 가진 크레딧을 모조리 털어서 도박을 한 보람이 있었다.

'뭐, 그리고 어차피 실전에서는 적당히 쓰면 되니까.'

어쨌거나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의 파괴력은 확실히 확인했다.

8급 수준의 비행형 마수 정도는 단번에 꿰뚫고, 절단 내버릴 수 있는 파괴력.

아마 마수들의 수준이 조금 더 올라가더라도 그 파괴력에는 변함이 없으리라.

'슬슬 돌아가 볼까.'

나는 호루스가 향한 방향으로 Z-74 제트팩의 방향을 틀었다.

이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을뿐더러, 괜히 시간만 끌었다가는 나중에 호루스를 따라잡기가 더욱더 힘들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꽤 빠른 속도로 비행했는데, 제트팩의 에너지량은 거의 소모하지 않았어.'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와는 반대로 Z-74 제트팩의 에너지 효율과 열 관리가 꽤 뛰어나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것도 일정 수준 이상의 속도를 낸다면 또 다르겠지만.'

지금 나는 Z-74 제트팩를 사용할 때 기껏해야 호루스의 비행 속도 정도로 사용했다.

하지만 만약 그 이상의 가속이나 비행 속도를 원한다면, Z-74 제트팩의 에너지 소모 역시도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게 분명했다.

'마침 딱 시험 해보면 되겠네.'

나는 호루스가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호루스가 막대한 물자들을 싣고 있어서 속도가 나지 않는다고 한들, 벌어진 거리가 거리인 터라 따라잡는 게 쉽지 않을 건 자명지사.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Z-74 제트팩의 속도를 실험하기에는 알맞는 대상이었다.

'가볼까.'

지이이잉······.

Z-74 제트팩에서 일어난 엔진음과 함께, 내 몸이 쏘아졌다.

*

Z-74 제트팩의 속도는 과연 굉장했다.

굳이 속도를 최대치까지 끌어올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호루스를 따라잡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용 비행 수단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우욱······."

[쯧쯧,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술 먹고 음주 운전하래요?]

속이 메스껍다.

평상시였으면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어젯밤에 바놀 중령과 함께 술을 거하게 먹은 것에 대한 숙취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었다.

[에휴, 내가 진짜······ 어?]

연신 혀를 끌끌 차던 에스더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주인님! 주인님!]

"···말 그만 걸어라. 머리가 울린다."

[아니, 그게 아니라! 밑! 밑에 봐요!]

"왜."

[그냥 보라면 봐요, 좀!]

나는 하는 수 없이 울렁거리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며 지상을 내려다 보았다.

몰려드는 마수와 마물 무리.

그곳에 포위된, 사람으로 보이는 인영.

'저건······.'

이곳이 아크 바깥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무척이나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탕!

탕탕─!

인영이 들고 있는 무기로 저항했으나, 몰려들고 있는 마수와 마물들을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있으면 마수들의 먹잇감이 될 상황.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에스더가 저런 말을 한 게 조금 의아하긴 했으나,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다만, 에스더가 도와야 한다고 한 이유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말이다.

'잘못본 게 아니야. 분명해.'

내가 본 게 맞다면, 지금 지상에 고립된 인영의 정체는 다름 아닌 모래의 딸이었다.

모래의 딸, 아이라.

지금 내가 찾아가고 있는 모래바람 상단주의 딸이었다.

< 모래의 딸, 아이라 > 끝

모래의 딸 아이라가 왜 이런 곳에서 혼자 동떨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해는 갔다.

아이라 자체가 워낙 일반인은 이해할 수 없는 해괴한 짓거리를 많이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또 어디서 귀신같이 돈 냄새라도 맡았나 본데.'

모래의 딸 아이라가 하는 행동은 하나 같이 이해가 되지 않고, 괴팍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일관성이 있다.

바로 그녀의 모든 행동이 돈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아크 바깥에서는 크레딧을 사용하지 않으니 돈이라기보다는··· 그래, 재물(財物)이라고 보는 게 맞겠다.

'이런 곳에서 뭘 주워 먹을 게 있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 있기에, 이 근처에는 돈이 나올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하물며 아이라 본인조차도 마수와 마물들에게 포위되어서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으니, 돈이 무슨 문제겠는가?

'뭐, 그건 됐고.'

중요한 건, 지금 이게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기회라는 점이었다.

'가볼까.'

나는 오랜만에 쿠프의 뼈 가면을 뒤집어쓰고는 후드까지 썼다.

비록 거래를 하러 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분을 완전히 노출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제가 생각하는 거 아니죠?]

"맞을걸."

[아니─!]

그리고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호루스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높이가 높이인 만큼 아무런 대비 없이 맨몸으로 떨어졌다가는 확실히 죽을 만한 높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두려워할 리는 만무했지만 말이다.

쐐애애애액───!

이건 하강인가, 추락인가.

지상의 작은 점들이 점차 빠르게 가까워지는 동안, 나는 왼손에 있는 Z-74 제트팩 조종 버튼을 만지작거렸다.

'제트팩은··· 역시 안 쓰는 게 낫겠지.'

어차피 내 목적은 비행이 아니라 지상에 착지하는 것뿐이었으니, 굳이 신분을 노출할 수 있는 제트팩까지 쓸 것도 없었다.

물론 아크 내에서도 내가 Z-74 제트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메이벨 필그림을 비롯한 몇몇 이들뿐이겠지만, 어디까지나 만약을 대비함이었다.

곧, 나로서도 다른 착륙 방법을 써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에스더.'

[또 부려먹지.]

'하기나 해라.'

[알았다고요.]

에스더의 투덜거림과 함께 내 발 밑에서 에테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천천히?]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받아······.]

당장이라도 지상에 처박힐 것만 같았던 속도가 점차 줄어들었다.

물론 원래의 추락 속도가 절대 느린 편은 아니었기에, 아무리 속도가 느려졌다고 해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야누스.'

[기깃!]

내 부름과 함께 야누스의 뼈 촉수들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끼긱, 끼기긱······.

그리고,

뼈 촉수들이 나를 완전히 감싸기 무섭게 내 몸이 마수들의 위로 추락했다.

콰아아아아앙────!!!!

마치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진다면 이러한 느낌일까.

물론 실제 운석과는 파괴력 면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겠지만, 적어도 밑에 깔린 마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기에엑······.]

[끽!]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 속에서 두 마리의 8급 야수종이 그대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아무리 질긴 가죽과 생명력을 지닌 마수라 할지라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뼈 덩어리에 깔리고도 무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좀 우아하게 내려올 수는 없어요?]

'네가 속도를 더 늦췄다면 그렇게 됐겠지.'

[그게 지금 내 탓이라는··· 에휴, 됐어요. 내가 말을 말지.]

에스더가 무어라 혼자 열심히 꿍시렁대고 있을 때, 아이라를 포위하고 있던 마수들이 흉성을 드러냈다.

[키에에에에!]

[캬오오!]

나를 향해서 달려드는 마수들을 바라보며, 에스더가 혀를 찼다.

[쯧, 겁도 없이.]

굳이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쓸 필요도 없었다.

그저, 손에 잡히는 것 어떤 것이라도 사용해도 이 정도 마수 무리를 해치우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철컥-

지잉, 치익─

Ark-15 자동변환 소총이 샷건 모드로 변화했다.

샷건 모드의 가장 큰 장점은 근접에서의 압도적인 파괴력과, 마수의 접근을 막는 저지력.

특히 지금처럼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는 더없이 적합한 물건이었다.

쾅-!

마치 폭탄이 터지는듯한 굉음과 함께 소음 모드 따위는 개나 줘버린 Ark-15 샷건에서 일반탄이 쇄도했다.

아무래도 파괴력과 범위가 큰 A-985 폭발탄을 사용하기에는 근처에 있는 아이라가 휘말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쐐액!

쐐애애액──!!!

한 번, 두 번, 세 번······.

거침없이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쏘아진 총알들이 마수들의 몸을 꿰뚫었다.

[끼에에엑!]

[껙!]

아무리 일반탄이라 해도, 이런 지근 거리에서 쏘아대는 Ark-15 샷건의 위력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물며 저지력 때문에 마수들은 감히 근처로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일종의 탄막이었다.

[키에에에에───!!]

[껙, 껙!]

잠시 여유가 생겨서일까.

곧이어서 모래의 딸 아이라의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옅은 구릿빛의 피부.

머리와 얼굴에 두른 하얀 천 사이로 흘러내리는 검은색과 갈색이 섞인 머리카락.

유독 빛나는 황금빛의 눈동자.

하나하나가 내가 알고 있던 모래의 딸 아이라의 모습이 맞았다.

'흠.'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모래의 딸 아이라는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조용히 제 한 몸만을 건사한 채로 이 모든 것들을 지켜보았다.

단순히 침착하다고 보기에는 어딘가 이상할 정도였다.

정확히는···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뭐,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가.'

의문도 잠시.

나는 이내 아이라에게로 향해 있던 시선을 뗄 수밖에 없었다.

샷건 탄막에 가로막혔던 마수와 마물들이 다시금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귀찮게.'

어느덧 마수와 마물들이 아가리가 벌어진 채로 지척까지 다다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심드렁하게 재차 Ark-15 샷건의 방아쇠를 거칠게 당겼다.

탕!

탕! 타앙─!

이미 가죽이 해질 대로 해진 마수들의 가죽과 살이 펑펑 터져 나갔다.

칼날 탄환의 효과로 인해서 마수들의 방어력이 하락한 데다가, 마수 사냥꾼 효과로 인해서 놈들에 대한 추가 피해량이 일정 수준을 넘어선 덕분이었다.

때문에 마수들을 모조리 정리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굳이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나 A-985 폭발탄까지 사용할 것도 없이, 이 정도 마수와 마물들을 정리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기이이이······.]

탕─!

마지막으로 발악하던 마수의 머리에 바람구멍을 낸 뒤, 나는 구석에서 권총을 쥔 채로 서 있던 모래의 딸과 마주했다.

이런 곳에서 아이라를 만날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던 만남이었다.

'그것도 마침 내가 모래바람 상단을 찾아가고 있을 때 말이지.'

이게 단순한 우연인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래의 딸 아이라가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얼핏 보면 이상할 게 없었다.

지금 나는 아이라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었고, 이 정도 인사를 건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지금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 아이라라는 점이지.'

모래의 딸 아이라는 이 세계에서 가장 의중을 알기 쉬우면서도, 반대로 알기 어려운 인물 중 하나다.

얼핏 보면 모순처럼 들리지만, 아이라의 행동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라의 목적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과정은 절대로 범인(凡人)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이라 본인을 제외한다면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보는 게 옳았다.

단지, 아이라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는 이라면 그저 그녀의 행동에 무슨 뜻이 있겠거니 하면서 잠자코 지켜보게 될 뿐이지.

그렇기에 나도 일단은 아이라의 언행을 지켜볼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녀의 목적이 뭔지 알아야, 후에 모래바람 상단과 접촉할 때 써먹을 것 아닌가.

그리고, 도대체 왜 아이라가 홀로 이런 곳에서 마수와 마물에 포위되어 있었던 건지도.

"딱히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당연히 이렇게 말해두는 게 여러모로 좋았다.

[입에 침이나 바르지.]

'시끄럽다.'

[뭐··· 거짓말을 하는 쪽이 주인님뿐만은 아닌 것 같지만요.]

에스더가 웃었다.

묘하게 거슬리는 웃음소리였다.

"아니에요! 제 생명을 구해주셨는데 어떻게 고작 감사 인사 한마디로 퉁치겠어요? 만약 선생님께서 구해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죽었을 거예요."

아이라가 열변을 토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모래의 딸 아이라가 전투에 있어서 특출난 재주를 지닌 인물은 아니었으니, 실제로 내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수 무리에게 죽었을 테니까.

'하지만 신경 쓰이는 게 있는 것도 사실이지.'

본래 그녀의 모습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이 모든 게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돈, 돈, 돈! 돈을 내란 말이야! 더 많은 돈! 더, 더, 더!"」

내 기억 속의 아이라는 분명히 이런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물론 사람 기억이 으레 그렇듯이 어느 정도 왜곡이 있긴 하겠지만, 대략적인 기억은 저런 느낌이었다.

반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아이라는 어떤가?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요. 원수를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혜를 갚는 것 역시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특히 이런 세상이라면 더욱더 말이에요. 어떻게 목숨을 빚졌는데 모른 척 지나갈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부디 저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선생님."

그 돈 귀신이 은혜를 갚겠다니······.

무엇보다도 은혜를 갚겠다고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면전에서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은혜를 갚겠다고? 어떻게?"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은 제가 보답으로 드릴 만한 게 없어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저와 함께 가주실 수 있을까요?"

"어딜?"

"마침 저희 가족이 이 근처에서 작은 상단을 하고 있는데, 그곳까지만 함께 가주시면 꼭 보답할게요."

비단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들었어도 수상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아크 바깥은 야생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건 마수나 마물들이 아닌, 같은 인간이다.

그런데 지금 아이라는 이제 막 처음 만난 나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초대하고 있었다.

보통 이럴 때는 둘 중 하나다.

상대를 진심으로 믿거나,

혹은, 상대를 죽일 생각이거나.

물론 모래바람 상단은 근본적으로 교역을 주역으로 삼는 상인 집단인 만큼 이런 식으로 함정을 파고 사람을 끌어들여서 죽인다거나 하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들이 특출난 인격자라서가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손해라고 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모래바람 상단이 지닌 중립성은 바로 그 극단적일 정도의 상업성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모래바람 상단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 성립한다.

보통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순순히 아이라를 따라가는 머저리는 없었다.

그래,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말이다.

"그러지."

내가 순순히 제안을 승낙하자, 되려 아이라가 조금 놀랐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표정을 갈무리했다.

"잘 생각하셨어요!"

아이라가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나도 함께 웃었다.

물론 뼈 가면에 가려져서 보이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하지 않았네요. 아이라 나세르예요. 아이라라고 불러주세요."

"폰이다."

"폰님이시군요!"

그저 신분을 노출하기 싫어서 대충 둘러댄 것이지만, 아이라는 박수까지 치면서 열렬히 호응했다.

여전히 부담되는 반응이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어차피 상관없어.'

애초부터 내 목적은 모래바람 상단을 만나는 것이었고, 모래의 딸 아이라와의 만남은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모래의 딸의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것만 이용하면 족하다는 이야기였다.

"이쪽이에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캠프가 있어요."

"그래."

나는 총총걸음으로 뛰어가는 아이라의 뒤를 따라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라의 꿍꿍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손해 보는 장사가 무엇인지 알려주지.'

에스더가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그 가면 절대로 벗지 마요.]

'왜?'

[웃는 게 기분 나빠.]

'······.'

< 모래의 딸, 아이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