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협상 > 끝
임무는 이제 끝났다.
이제, 돌아가는 것뿐이다.
칼라킨을 비롯한 조사팀원들은 한때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게 착각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러다가 또 마수 무리한테 잡히겠군. 드잡이질을 또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사람이 왜 네 발로 기고 있지? 일어나서 두 발로 걸어라. 직립 보행은 유사시에 행동의 여지를 만들어 주고, 시야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굼벵이가 따로 없군."
여러 가지 의미로 칼 마커스는 굉장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거리를 이용해서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조사팀을 극한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뿌득, 뿌드득······.
조사팀 내에서 칼 마커스에 대해서 매우 우호적이었던 힐데가르트조차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냥 어디 가서 콱 뒈져버렸어야 하는 건데."
드미트리가 중얼거렸다.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다들 힘내라. 얼마 안 있으면 아크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칼라킨이 위로 아닌 위로를 전달해 봤지만, 조사팀원들에게 위로가 될 리가 만무했다.
"우린 죽을 거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천한 것."
아이리스의 중얼거림에 이죽거린 드미트리를 향해, 아이리스가 독기가 가득 찬 눈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재수 없는 새끼."
"뭐, 뭐?"
설마하니 아이리스가 저런 소리를 할 줄 몰랐기에, 드미트리는 잠시 얼이 빠진 채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실랑이 속에서도 여정은 계속됐다.
아니, 조사팀원들의 입장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겠다.
'어떻게 땀 한 방울 안 흘리지?'
'사람인가?'
'이해가 안 돼. 이해가······.'
조사팀원들은 뒤에서 자신들을 채찍질하며 오고 있는 칼 마커스를 보면서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신병이라고 해도, 아크의 촉망받는 병사들인 조사팀원들이 모조리 나 자빠질 정도의 강행군이다.
그런데 그런 강행군을 이끌고 있다 못해 진두지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 마커스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괴물이 따로 없군.'
안 그래도 칼 마커스를 높게 평가하고 있던 칼라킨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칼 마커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크는 절대로 이 자를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아니, 사실 엄밀히 따지면 아크는 더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현재 칼 마커스의 위치는, 아크에서도 섣부르게 건드리기 까다로운 위치가 되어버렸으니까.
'자칫 잘못했다가는 크로노스 잔당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겠지.'
물론 크로노스 잔당들의 현재 세력은 아크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라니아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중소 도시들의 연합을 만들어낸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뭐가 됐든··· 이번 임무로 인해서 큰 파장이 일어나겠어.'
그렇게 칼라킨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아, 아크다!"
"드디어······."
"살아, 남았구나······."
마침내 지평선 너머에서 그토록 보고 싶던 아크의 드높은 성벽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드디어 도착했나.'
절대로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에 아크를 출발해서, 웨이브가 종료된 지 한참 후에야 아크에 도착하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꽤 얻은 게 많은 여정이었어.'
본래 목적이었던 크로노스 연합에 대한 것도 그렇지만, 모트교의 상징을 비롯한 이런저런 소득이 많았다.
'균열 공간의 정체가 뭔지는 아직 몰라도, 일단 인벤토리를 얻었다는 것도 매우 큰 소득이고.'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 여정의 주된 목적 중 하나였던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성장.
이번 임무를 통해서 그 부분 역시도 어느 정도는 충족된 듯했다.
'확실히, 달라.'
느껴지는 기세라고 해야 할까?
아크에서 막 출발할 때만 해도 애송이들에 불과했던 조사팀원들이지만, 이제는 조금은 쓸만해진 듯했다.
'뭐, 그래도 아직은 멀었지만.'
물론 본격적으로 오렌지 라인 스테이지쯤에 진입하게 되면 저들 역시도 온전한 제 몫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어설퍼도 되는 건 딱 레드 라인 스테이지까지만이다.
그 이상부터 어설픔이란, 곧 죽음이었으니까.
지이잉······.
푸슈욱─!
우리가 Red-17 게이트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게이트가 열렸다.
별도의 신원 확인 절차까지 생략된 걸 보니, 어지간히도 아크에서 우리를 기다린 듯했다.
그리고, Red-17 게이트가 열리기 무섭게 안쪽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우리를 마중 나왔다.
게이트 담당 관리자인 이모샤 중위를 비롯한 부관과 병사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긴 하지.'
이번 임무의 중요성은 차치하고서, 아크에서는 이번 임무의 성공률을 그다지 높게 보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사팀이 이렇게 떡 하니 복귀를 하니, 저렇게 버선발로 나올 수밖에.
"돌아오셨군요!"
이모샤 중위의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게 한껏 높게 울려 퍼졌다.
"그래."
"정말 다행입니다."
"이번 임무에 대해서 해야 할 말이 있는데, 바놀 중령은 집무실에 있나?"
"아··· 예. 그렇습니다. 아!"
이모샤 중위가 재빨리 조사팀원들을 훑으며 말했다.
"혹시··· 겨, 결원은 있습니까?"
"보다시피, 없다."
"어떻게 그런······."
하긴, 어느 정도의 희생자가 나왔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임무다.
그런데 단 한 명의 결원은커녕 중상자 역시도 없었으니, 이모샤 중위가 저토록 놀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정말로···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잘못 본 건지 뭔지는 몰라도, 그렇게 말하는 이모샤 중위의 눈에 작은 물기가 보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 그만큼 기쁜거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칼라킨을 제외한 병사들은 아직 레드 라인 소속이니까.'
뭐, 그건 그렇고······.
"다들 고생했다. 임무에 대한 보고는 내가 할 테니, 다들 들어가서 쉬어라. 아, 칼라킨 너는 나와 함께 바놀 중령에게 간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조사팀의 정규 일원이 아닌 용병인 나 혼자서 임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어딘가 맞지 않았기에, 칼라킨을 동행시킬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지금 안 데려가더라도 나중에 바놀 중령이 따로 칼라킨을 호출하겠지. 차라리 한 번에 하는 게 나아.'
무엇보다도, 현재 내가 나누러 갈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한다면 여러모로 칼라킨이 필요했다.
현재 아크 내에서의 내 위치를 생각한다면, 발언이나 신뢰성에 있어서 조금 부족함이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면 가시죠."
"그래."
나와 칼라킨은 이모샤 중위의 인솔에 따라서 바놀 중령의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오게."
나와 칼라킨, 그리고 이모샤 중위가 바놀 중령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쉽지 않은 임무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돌아와서 기쁘네."
"계약에 대한 대가는 확실히 치러야 할 거다."
"물론일세. 그러면··· 이번 임무에 대해서 듣고 싶네만."
바놀 중령의 지긋한 시선이 나를 보았다.
나 역시도 바놀 중령을 보았다.
"우선, 이번 임무에 대해서 말하자면, 크로노스 잔당이 있는 위치와 그들의 목적을 알아냈다."
"···그게 정말인가?"
평소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바놀 중령이었건만, 이 소식에는 그럴 수 없었는지 약간의 흥분이 느껴졌다.
"그래."
"···잘 됐군. 말해보게."
"그 전에, 해둬야 할 말이 있다."
"그게 뭔가?"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크로노스와 아크가 화친을 맺었으면 한다."
"···뭐라?"
"칼 마커스! 그건······!"
바놀 중령과 이모샤 중위가 차례로 격하게 반응했다.
그만큼 내가 조금 전에 한 말이 엄청난 말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아크와 크로노스 잔당 사이의 관계를 알고도 하는 말인가?"
"그래. 알고 있다."
"그렇다는 건, 혹시 그게 크로노스 측의 요청이라는 건가?"
과연 바놀 중령다운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그렇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그게 무슨 뜻인가?"
"분명히 크로노스 측에서 그런 요청을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아크의 요청이기도 하다."
바놀 중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상하군. 우리는 그런 요청을 한 적이 없을 텐데? 이번 임무의 내용은 크로노스와의 동맹이 아닐세. 그들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목적이 무엇인지. 그걸 알아내는 게 조사팀의 목적일세."
"정말로, 그게 끝이었나?"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바놀 중령의 무거운 시선이 나를 응시했다.
"아크에 있어서 크로노스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지? 잠재적 위협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
"굳이 따지면 전자겠지."
"맞다. 이번 임무 역시도 잠재적 위협이 될 수도 있는 크로노스에 대한 정보와 움직임을 읽기 위해서였겠지."
"그러니까···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은, 이번 임무의 숨겨진 진의 자체가 아크가 크로노스와 화친을 맺고 싶어한다는 증거가 된다는 건가?"
"그래."
바놀 중령은 잠시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껄껄 웃었다.
"자네의 권한으로는 명백한 월권일세. 알고 있나?"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지. 나는 용병으로서 참여했을 뿐이니까. 그에 대한 책임은 여기 있는 병사가 질 거다."
내가 턱짓으로 칼라킨을 가리키자, 칼라킨이 무거운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가 없군. 좋아, 그렇다면 자네는 이번 임무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고 왔지? 크로노스가 원하는 게 뭐지?"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번 임무의 원래 목표였던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겠군. 크로노스의 지금 목표가 무엇인지 말이야."
"그게 뭐지?"
"크로노스 잔당은 지금 군소 도시들의 세력을 규합해서, 새로운 연합을 만들어 내려 하고 있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협상이란, 모름지기 양 측 간의 균형이 어느 정도는 맞아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사실인가?"
"그래."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오늘따라 유독 표정을 많이 드러낸 바놀 중령의 표정이 굳었다.
크로노스 잔당을 중심으로 새로운 연합이 만들어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바놀 중령이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고서 크로노스 측과 교섭해서 아크와의 화친을 종용했다, 이건가?"
"맞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는 건 인정하지. 아크 입장에서도 크로노스를 언제까지고 잠재적인 위협 요소로 내버려 두느니, 차라리 화친을 하는 게 나을 테니. 하물며 그게 지금처럼 크로노스가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 내고 있다면 더욱더 말일세."
과연 바놀 중령답게, 이 정도 이야기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째서 아크와 크로노스의 동맹을 제안했는지 꿰뚫어 보았다.
역시라면 역시였다.
"···하지만 이상하군. 크로노스 입장에서 자네들을 어떻게 믿지? 그리고 우리는 크로노스를 어떻게 믿고?"
이야기가 원론적으로 돌아왔다.
바놀 중령의 의문은 타당했다.
크로노스는 어째서 아크를, 더 나아가서 우리를 믿고서 협상 했는가?
그리고, 아크는 무얼 믿고서 크로노스를 믿어야 하는가?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라."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군. 어디 한번 들어보지. 자네가 믿는 구석이 과연 뭔지."
"내가 어디 출신인지 알고 있나?"
"그야, 크로노스의 피난민······."
말을 잇던 바놀 중령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맞다. 정확히는 크로노스 외곽에 있던 부족이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크로노스 측에 아는 얼굴이라도 있었다는 건가?"
"그냥 아는 얼굴 정도가 아니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믿을 수 없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는 얼굴이 나랑 보통 사이가 아니거든."
이윽고, 바놀 중령과 이모샤 중위의 얼굴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 협상 (2) > 끝
"그러니까··· 크로노스 잔당 중 한 명이 칼 마커스 자네의 누이라는 건가?"
"그래."
"그것도, 상당한 지위를 지니고 있고?"
"맞다."
"허어······."
바놀 중령이 칼라킨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용병인 내 말만 듣기에는 신뢰성에 문제가 있었으니, 아크에서 촉망받는 그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이었다.
"자네 생각은 어떻지? 칼 마커스의 누이라는 그자가, 실제로 그 정도의 권한을 지니고 있었나?"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한 지위를 지니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이에 대한 문제는 크로노스 내에서 임시 의회를 소집해서 협상 역시도 마쳤습니다."
바놀 중령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다시금 나를 돌아보았다.
"···사실인가?"
"그래."
"허, 허허······."
바놀 중령은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내가 뭘 하면 되지?"
"크로노스와의 화친의 증거로, 적당한 수준의 물자를 크로노스 측에 지원하면 된다."
"공물을 바치라는 건가?"
"당근으로 부리라는 거다."
"하하!"
바놀 중령이 껄껄 웃었다.
"어이가 없지만··· 그 역시도 내가 해야 할 일이겠지. 아무래도 바빠질 것 같군. 나는 갈 곳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보겠네."
바놀 중령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손님인 우리 역시도 함께 따라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칼 마커스."
"말해라."
"자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역시도 아크를 위한 것이라고 믿겠네."
"정확히 본 거다."
"하하!"
바놀 중령이 집무실을 나서며 말했다.
"자네를 믿겠네. 그리고··· 자네를 고른 내 안목 역시도 믿지."
바놀 중령은 그 말을 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이번 일을 수습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테니 말이다.
'애초에 이제는 바놀 중령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지.'
바놀 중령은 이제 아크의 진짜 실력자들을 만나러 갈 것이다.
아크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화이트 라인과 레드 라인의 유력가들과, 각 라인의 의원들을.
'여차하면 비장의 수까지 써야 하나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어.'
이미 알고 있던 대로 바놀 중령은 이치에만 맞는다면 비교적 말이 통하는 편이었고, 그렇기에 이번 일 역시도 무난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뭐, 엄밀히 따지면 아직 해결이 된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번 일은 이제 내 손을 떠났다.
나도, 있던 곳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아, 맞아."
"왜 그러십니까?"
내가 이모샤 중위를 보며 말했다.
"바놀 중령에게, 이번 임무에 대한 비용은 매우 비쌀 거라고 전해주면 고맙겠군."
"···아, 예.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내가 뒤돌아 서자, 이모샤 중위가 말했다.
"가시는 겁니까?"
"그래."
"아크에서 쉬었다 가시지······ 혹시 머물 곳이 필요하신 거라면 제가 마련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가 더 불편하다."
"아······."
이모샤 중위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슬슬 돌아갈 때가 됐기에, 내가 칼라킨에게 말했다.
"너도 고생했다."
칼라킨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면···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라."
"···예?"
"뭐."
"아니··· 조금 의외라."
"그냥 안부 인사다. 들어가라."
"아, 예······."
이래저래 칼라킨과는 앞으로도 쭉 마주쳐야 하는 사이였으니, 굳이 안 좋은 관계를 쌓을 필요는 없었다.
'마지막 인상이 좋으면 다 좋은 거니까.'
그렇게 인사를 마친 뒤,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슬슬 은신처로 돌아갈 때다.
*
나는 Z-74 제트팩의 에너지를 거의 풀로 사용하며 은신처까지 단번에 날아왔다.
애초에 아크와 내 은신처 사이의 거리가 엄청나게 먼 것도 아니었기에, 이 정도 거리는 Z-74 제트팩의 에너지로도 충분히 감당 가능했다.
'얼마만의 집인지······.'
은신처를 이제 집으로 여기게 된 게 조금 서글프긴 했지만, 그래도 여기만큼 마음이 편한 곳이 없었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은신처로 돌아온 내 눈에 가장 먼저 비친 건, 역시나 엄청나게 성장한 생명수의 모습이었다.
아울러 뿜어내는 기운 역시도 훨씬 더 강해져서, 내가 은신처에 다가오기 무섭게 에스더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자, 잠깐만요!]
"왜."
[토할 것, 토할 것 같아요오······.]
"하든지."
어차피 게워낼 것도 없는 주제에.
[웨에에에엑─]
···라고 생각했던 적이, 내게도 있었다.
"뭐, 뭐야?"
[···속 메스꺼워.]
귀신이 어떻게 토를 해?
아니, 잠깐······.
[킥, 키키킥······.]
[죽여죽어역겨워다죽어파괴혼돈죽음구역질배척불만미워거짓말교만덩어리고통거절분노······.]
[역겨워. 역겨워. 역겨워. 역겨워. 역겨워. 역겨워. 역겨워. 역겨워. 역겨워. 역겨워. 역겨워. 역겨워. 역겨워. 역겨워. 역겨워.]
일반적인 토사물이 아니었다.
이건 에테르의 찌꺼기들.
온갖 부정적인 에테르와 오염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꿈틀거렸다.
'···토사물보다 더 하네.'
보고 있자니 속이 안 좋아지는 기분이었기에, 나는 오랜만에 실험탄 GHOST-157을 꺼냈다.
[그, 그건 갑자기 왜요?]
"보기 메스꺼워서."
철컥-
이윽고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한때 에스더의 일부였던 무언가가 한번에 날아갔다.
[끼아아아아악─────!!!]
과연 실험탄 GHOST-157의 효과는 확실했다.
단번에 에스더가 토해낸 부정적인 에테르 찌꺼기들을 날려버린 나는 이내 무언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응?"
[왜요?]
"아니··· 너 몸이 조금 투명해진 것 같다?"
[···네?]
그 말마따나, 에스더의 몸에 있던 유령종의 상징과도 같은 푸른 빛이 조금 옅어져 있었다.
마치, 평범한 에테르처럼 말이다.
[나, 나 왜 이래요? 나 죽는 거야?]
"그건 아닌 것 같으니까 진정해라."
[사, 살려··· 살려주세요! 주인님. 다시는 밤에 몰래 욕 안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요······.]
"···내 욕했어?"
[어··· 그, 네. 했어요. 했는데··· 그래도 한 번만 봐주세요. 제발요오······.]
에스더는 진심으로 죽기 싫다는 듯이 눈물 콧물을 다 짜면서 나에게 애원했다.
물론, 고작 에테르 찌꺼기 좀 토해낸 것 정도로 에스더가 죽을 리는 만무했지만 말이다.
"안 죽으니까 진정해라."
[그치만, 그치만··· 나 몸이 이상하단 말이야······.]
"그냥 조금 정화된 거다."
그제야 눈물 콧물 다 짜면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있던 에스더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정화? 그게 뭔데요?]
"조금 착해졌다고 생각해라."
착한 뭐뭐는 죽은 뭐뭐라는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고······.
[착해지다뇨?]
"그냥 그렇게 알아라. 어차피 크게 이상이 느껴지거나 하진 않잖아? 속도 이젠 별로 안 메스껍지?"
[그러고 보니······.]
온전한 유령종일 때야 생명수에게 극렬한 거부 반응을 보였으나, 지금처럼 조금이나마 에스더의 에테르가 희석되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즉, 정말로 어떤 의미로 본다면 에스더가 착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로 저 괜찮은 거 맞아요?]
"그럴 거다."
[거다? 대답이 애매한데요?]
"그냥 그렇게 알아라. 귀찮게."
[귀, 귀찮게? 지금 제가 귀찮아요?]
"어."
[아니 어떻게 제가 귀찮을 수가 있어요? 우리 사이가 그것밖에 안 돼요? 주인님이 죽으면 저도 죽고, 제가 죽으면 주인님도 죽고, 우리 일심동체 아니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중간에 틀린 말이 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해요?!]
아······.
귀찮다.
*
은신처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하루가 지났다.
비록 고된 여정으로 인해서 몸에 꽤 큰 피로가 쌓였으나, 큰 상관은 없었다.
나에게는 생명수의 온천이 있었으니까.
비록 성체까지는 아니어도,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자란 생명수다.
그런 생명수의 뿌리와 맞닿은 온천수는, 살짝만 몸을 담가도 모든 상처가 회복되고 피로가 풀리는 엄청난 곳이 되어 있었다.
'생명수가 자란 만큼 효과 역시도 크게 증진되었어. 이제 이 정도면 정말로 포션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어.'
포션 기술이 어떤 기술인지를 생각한다면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으어······."
[이게 주인님이야 아저씨야.]
"둘 다로 하지 뭐."
그렇기에 하루의 시작을 겸해서 포션 그 자체인 온천에서 한껏 온천욕을 즐긴 나는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보자······.'
우선, 나는 그동안 한참을 방치해두었던 은신처를 청소하고, 이번에 얻은 물자들을 정리했다.
'이건 모래바람 상단, 이건 내가 쓰고··· 이건 굳이 멀리 갈 필요 없이 아크에 넘기는 것도 괜찮겠군.'
그렇게 은신처를 정리하다 보니, 익숙한 물건이 하나 눈에 띄었다.
'통신 단말기.'
일전에 타티아나 벨로프가 선물로 주었던 물건이었다.
'메이벨 필그림을 구할 때 한번 쓰고, 그 이후로는 까먹고 안 쓰고 있었지.'
특별히 어떤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너무 바쁘다 보니 태양광 충전을 시킬 여유도 안 생겨서 구석에 처박아두었다.
이왕 눈에 보인 김에, 나는 그것을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놔두었다.
놔두면 태양광으로 알아서 충전이 될 터.
'오랜만에 이걸로 아크의 소식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물론 내가 알기에 이 시기에 아크에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이미 나로 인해서 많은 게 바뀐 만큼 나비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여유가 전혀 없다면 몰라도, 아직 다음 웨이브까지 약간의 여유가 있었으니 이 정도는 해도 상관없었다.
치직, 치지직······.
머지않아서 일단 통신 단말기를 킬 정도의 에너지가 충전되자, 나는 곧장 그것을 켰다.
채널은 역시나 Red-F004.
레드 라인 내에서 일어나는 대외비 사항을 전달할 때 주로 사용하는 채널로, 사실상 레드 라인 내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이 일차적으로 거쳐 가는 채널이었다.
["어휴··· 이게 무슨 꼴이야."]
["그러게나 말이야. 저번부터 자기를 데려가야 한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기어이 사고를 치네. 쳐."]
["이래서 야만인은······."]
무언가 아는 사람 욕을 하는 것 같긴 한데, 애석하게도 그 이후로 대화가 끊긴 탓에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통신이 계속됐다.
치직, 칙······.
["이번에 크로노스 잔당 조사로 파견됐던 조사팀이 복귀했다더군."]
["그 조사팀이? 몇 명이나 죽었는데?"]
["놀라지 마. 아무도 안 죽었어."]
["뭐?"]
["아무래도 그 칼 마커스라는 야만인의 솜씨가 굉장한 모양이야. 조사팀으로 참여한 병사들도 하나 같이 굉장하다고 말하더군."]
마치 라디오를 듣는 느낌으로 통신 단말기를 켜놓은 채로 할 일을 했으나, 역시나 딱히 영양가 있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오올. 저거 들으려고 켜 놓은 거였어요? 칭찬하는 거?]
"···아니다."
[에이, 맞구만. 부끄러워하지 마요. 주인님이 칭찬받으니까 제가 다 기쁘니까.]
"···시끄럽다."
나는 채널을 돌렸다.
레드 라인 채널에서는 별 소득이 없었으니, 다른 라인의 채널에서 무언가 들려오는 소식이 없나 찾기 위해서였다.
["들었나? 칼라킨이 돌아왔더군."]
["그래? 환영회라도 해야겠어."]
치직-
["···스컬 나이트가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임무 수행 중이다."]
치직······.
["누가 좀··· 도와줘······."]
< 협상 (3) > 끝
······뭐지?
흐느끼는 여자의 목소리.
그러나 애석하게도 들려온 통신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방금 뭐였어요? 호, 혹시 귀신?]
"···네가 귀신이다. 네가."
[에이, 저는 엄밀히 말하면 유령종 마물이죠. 귀신하고는 달라요.]
"···누가 봐도 같다고 생각할 거다."
유령종이 귀신을 무서워하는 해괴한 상황은 차치하고서, 나는 조금 전에 들려왔던 정체 모를 목소리를 되새겼다.
에스더의 말마따나 정말로 귀신 같은 거일 확률은 없었다.
에테르의 목소리가 통신 너머까지 전달된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으니까.
'그나저나, 분명히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인데······.'
묘하게 귀에 익은 목소리.
그러나 애석하게도 스쳐 지나가듯이 들어서인지, 누구의 목소리였는지까지는 떠올리기 어려웠다.
'채널 대역폭은 블루 라인과 네이비 라인, 그리고 바이올렛 라인쯤인가.'
특정을 하려고 해도, 짐작가는 사람이 너무 많은 터라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뭐··· 조금 신경이 쓰이긴 해도, 별일 아니겠지.'
어차피 주어진 단서가 너무 적은 탓에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제 곧 찾아올 웨이브를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러했다.
[그냥 무시하려고요?]
"그래."
[여자의 눈물을 무시할 셈이야? 이 악당.]
"내 알 바 아니다."
[흐음, 혹시 쓰레기세요?]
"그리고 너는 그런 쓰레기의 훌륭한 일심동체지."
[그것도 그러네.]
나는 에스더의 중얼거림을 외면하고는 슬슬 아크로 향할 준비를 했다.
이쯤이면 아크에서도 결론을 내렸을 테고, 무엇보다도 아크에 받으러 갈 게 있었기 때문이다.
'슬슬 정산 받으러 가볼까.'
이번 임무에 대한 보상을 받으러 갈 때다.
*
Red-17 게이트.
내 은신처가 있는 곳과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으나, 나는 일부러 이곳을 찾았다.
아무래도 아는 얼굴이 있는 편이 이야기를 하기 편하기 때문이었다.
"오셨군요."
"그래."
이모샤 중위는 언제나처럼 버선발로 나를 마중 나왔다.
"저번에 하셨던 이야기는 아무래도 잘 된 것 같습니다. 바놀 중령님께 들었습니다."
"그래? 잘됐군."
예상했던 대로 크로노스와의 화친에 대한 이야기는 잘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크의 입장에서도 물자 조금 쥐여주고 크로노스를 통제 아래에 두는 게 낫지, 괜히 풀어 두었다가 어떤 변수를 만들어낼지 모르는 건 원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괜히 크로노스를 견제한답시고 투자하는 물자보다, 크로노스에게 쥐여주는 당근으로 주는 물자가 훨씬 더 싸게 먹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이번 임무에 대한 합당한 보상은, 칼 마커스님의 ID 계좌에 크레딧으로 입금되었다고 합니다."
"호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내가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기도 했고.
'안 그래도 크레딧이 엄청 부족했는데··· 잘됐군.'
하물며 이번에 큰 크레딧을 벌 기회마저도 차버리고서 임무에 임한 만큼,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는 게 정상이었다.
'한번 볼까.'
나는 손목에 있는 디바이스를 조작해서 내 계좌를 조회했다.
그리고,
이내 익숙한 숫자들이 내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군.'
당연한 이야기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들어왔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정도면 메이벨 필그림에게 무기 몇 개 정도는 넉넉하게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제법 두둑하게 챙겨줬군.'
임무가 임무였던 만큼 완전히 만족스러운 숫자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예상했던 것보다는 조금 더 많은 수준이었다.
이제 남은 건, 돈을 쓰는 것뿐.
'균열 공간도 있으니··· 이 기회에 화력이 높은 무장을 조금 늘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지금까지 내가 구매한 중화기들은 모두 휴대성 때문에 위력 면에서 조금 반감이 된 모델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균열 공간 덕분에 무게의 제약이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병참 장교 게드윈을 불러주었으면 하는데, 가능한가?"
"아, 물론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제법 귀찮은 심부름까지도 사서 해주니, 일부러 멀리 있는 Red-17 게이트까지 찾은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치 미리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병참 장교 게드윈이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입니다. 칼 마커스."
"그래, 오랜만이군."
병참 장교 게드윈의 시선이 빠르게 나를 훑었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몸을 부르르 떨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하다고 해야 할지··· 굉장하시군요. 역시 이번 웨이브 때도 당신이 활약한 모양이군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언제나와 같군요. 그러면··· 따로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있으십니까?"
"NOA-31 대마수 기관포를 원한다."
"······예?"
병참 장교 게드윈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문제 있나?"
"어······ 안 될 건 없지만, 따로 차량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크기가 크기다 보니 험한 산지까지 혼자서 옮길만한 물건이 아닌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그 말마따나 NOA-31 대마수 기관포는 개인이 다루거나 들고 다니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거대한 병기다.
병참 장교 게드윈이 저런 염려를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무래도 따로 차량을 수배해야 하는 터라······."
"그러지. 아, 그리고 규격에 맞는 일반탄과 이중목적고폭탄과 철갑소이탄, 그리고 분리철갑탄 각 10발씩도 부탁하지."
"아, 예. 알겠습니다."
비록 NOA-31 기관포 자체가 워낙 큰 가격대를 자랑하는 물건인 터라 내가 지닌 공적치를 절반 이상 사용해야 했으나, 절대로 아깝지 않았다.
"여기에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아, 내가 잠시 들를 곳이 있어서 그런데, 혹시 나보다 먼저 도착하면 여기에서 기다려 줄 수 있나?"
"물론입니다. 다녀오십시오."
병참 장교 게드윈에게 언질도 해두었겠다, 나는 곧장 아크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목적지는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
내가 만날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어서오십시오."
"소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미 신분은 확인된 상황인 터라, 별다른 어려움 없이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위이잉······.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는 메이벨 필그림의 개인 연구실이 있는 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칼 마커스, 당신이군요."
"오랜만이군."
"안부 인사나 나누자고 왔을 리는 없고··· 저에게 맡길 물건이라도 있으신가요?"
"의뢰할 게 있어서 찾아왔다."
"의뢰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한번 보여주세요."
"당장 내 손에는 없다."
"그러면요?"
"들고 다닐만한 물건이 아니라서 지금쯤이면 Red-17 게이트 쪽에 있을 거다."
"들고 다닐만한 물건이 아니다라··· 구체적으로 어떤 물건이죠?"
"NOA-31 대마수 기관포다."
"허어······."
그와 함께 메이벨 필그림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는데, 저는 아크 내에서도 꽤 고급 인력으로 치부되는 사람이에요. 그런 출장 업무라면, 당연히 그에 걸맞은 대가가 필요한데 괜찮으시겠어요?"
"그에 대한 대가라면 이미 있다."
"···크레딧이 꽤 많으신가봐요? 제 출장비는 상당히 비쌀 텐데요."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쓸모있는 게 있지."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등 뒤에 있는 Z-74 제트팩을 살며시 보였다.
"이것에 대한 데이터가 필요하지 않나?"
"제가 Z-74 제트팩을 제공하는 대가로 그에 대한 데이터는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 아니었나요?"
"맞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감상도 필요하지 않나?"
"이런··· 진짜로 못 당하겠네."
메이벨 필그림이 가볍게 웃었다.
"좋아요, 가보시죠."
"생각보다 순순히 승낙하는군."
"NOA-31 대마수 기관포라고 하셨죠? 저도 그런 물건이라면 만져 보고 싶거든요. 도통 기회가 안 생기거든요."
하긴, 보통 NOA-31 대마수 기관포 같은 물건을 업그레이드까지 해서 사용하지는 않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보통 업그레이드나 커스텀 마이징 같은 건, 주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병기에 사용하기 마련이니까.'
실제로 나도 만약 균열 공간을 손에 넣지 못했다면 굳이 NOA-31 대마수 기관포 같은 물건을 굳이 크레딧까지 들여가면 업그레이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런 대형 병기는 사용하려면 많은 조건이 필요했고, 무엇보다도 이동이 아주 까다로웠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메이벨 필그림과 함께 Red-17 게이트에 도착하자, 거대한 트럭 위에 놓인 NOA-31 대마수 기관포가 눈에 들어왔다.
"오셨군요."
"그래, 잘 구해줬군."
"그 옆에 분은··· 호, 혹시 메이벨 필그림 소장님 아니십니까?"
병참 장교 게드윈이 메이벨 필그림을 알아 보자, 메이벨 필그림이 웃으면서 인사했다.
"맞아요. 병참 장교 게드윈님이시죠?"
"아, 예!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쩐 일로······."
"칼 마커스의 부탁을 받고 왔어요."
"···예?"
병참 장교 게드윈이 눈을 끔뻑이면서 나와 메이벨 필그림을 번갈아서 보았다.
"너무 놀랄 거 없어요. 원래 저런 사람이잖아요?"
"아······."
메이벨 필그림의 말에 병참 장교 게드윈은 뭔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
메이벨 필그림의 시선이 천천히 NOA-31 대마수 기관포를 훑었다.
"아름답네요."
"보는 눈이 있군."
"매일 하는 일이 이런 거니까요. 물건들을 보고, 품평하고, 또 개조하고······."
"저건 어떻지? 가능하겠나?"
"하······ 저를 뭘로 보시는 거예요? 당연히 얼마든지 가능하죠."
메이벨 필그림의 양 손에서 언제 나왔는지 모를 공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연구소를 나설 때 공구 가방 역시도 챙겨온 터라, 장소는 더 이상 메이벨 필그림의 손을 막지 못했다.
"바로 시작할까요?"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그러면······."
메이벨 필그림이 차량 위에 있는 NOA-31 대마수 기관포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병참 장교 게드윈의 표정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메이벨 필그림은 멈추지 않고서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지이잉······.
쾅! 쾅! 쾅!
용접을 하는 듯한 불꽃.
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굉음.
그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 됐어요."
마침내 업그레이드를 마친 메이벨 필그림이 구슬땀을 닦아내면서 말했다.
일전에 업그레이드를 맡겼던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와는 달리, NOA-31 대마수 기관포는 크기만큼이나 튼튼한 물건이었기에 역시나 염려할 필요도 없이 업그레이드에 성공했다.
"고생했다."
"한번 보시겠어요?"
"물론."
나는 곧장 그 결과물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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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A-31 대마수 기관포 MK.II [★★★★★★★(+★)(8성)]
아크의 기술력이 집약된 대마수 기관포.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한다.
무기 공학 권위자, 메이벨 필그림의 손길을 탄 물건이다. 기본적인 성능 및 연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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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A-31 대마수 기관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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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A-31 대마수 기관포 MK.II [★★★★★★★(+★)(8성)]
아크의 기술력이 집약된 대마수 기관포.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한다.
무기 공학 권위자, 메이벨 필그림의 손길을 탄 물건이다. 기본적인 성능 및 연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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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NOA-31 대마수 기관포는 무려 기본 등급이 7성에 달하는 고급 장비다.
거기에 더해서 메이벨 필그림의 손에 업그레이드까지 이뤄지자, 무려 8성 등급의 장비로 변모했다.
등급만 보면 현재 내 장비 중에서 최고의 화력을 자랑하는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보다도 무려 1단계 높은 셈이었다.
'단순히 등급뿐만이 아니지.'
물론 순간적인 화력은 여전히 7성 장비인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보다 약할지도 모르겠으나,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에는 전투 지속력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러나 NOA-31 대마수 기관포는 다르다.
그 흉악한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만들어질 때부터 대형 및 초대형 마수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물건인 만큼 전투 지속력과 화력에 있어서는 가히 압도적인 물건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어때요?"
메이벨 필그림은 진심으로 뿌듯하다는 듯이 씰룩이는 입가를 애써 감추며 나를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어서 칭찬해달라는 듯한 모양새였다.
"괜찮군. 고생했다."
"흠, 흐흠······ 아뇨 뭘요. 별거 아니었어요. 아, 저쪽 보여요? 저 부분이 제가 심혈을 기울여서 바꾼 부분인데, 이러면 손잡이를 잡을 때 안정성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거든요. 그리고 또······."
메이벨 필그림은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신이 업그레이드 한 부분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 형태, 이 굴곡··· 정말로 아름답지 않나요? 이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 제가 어떻게 했냐면······."
"기존의 NOA-31 대마수 기관포는 위력을 높이기 위해서 연사력 측면에서 몇 가지 개선점이 존재했어요. 하지만 저는 이 개선점을 완벽하게 보완, 수정해서 기존 NOA-31 대마수 기관포가 지니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점 하나를 극복할 수 있었어요."
"아, 물론 연사력이 늘어나면 열 관리가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저는 총신 부분의 소재를 바꿔서 이 문제점을 해결했어요. 물론 비용이야 더 들었지만, 그거야 이미 포함된 비용이니까요."
나는 그걸 적당히 맞장구쳐주다가, 메이벨 필그림의 기나긴 말이 끝나고 나서야 말했다.
"아, 그리고 다른 물건도 부탁하고 싶은데 괜찮나?"
"물론이죠!"
아무래도 메이벨 필그림의 자랑 아닌 자랑을 모두 다 들어준 보람이 있었다.
"일단 이것부터 부탁하지."
내가 품에 지니고 있던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메이벨 필그림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받아든 메이벨 필그림이 슬쩍 그것을 살피고는 말했다.
"같이 안 가시는 건가요?"
"가지러 갈 물건이 있다. 그것도 부탁하고 싶어서 말이야. 참고로 아크제 물건은 아니다. 가능하겠지?"
얼마 전에 라니아에게 얻었던 CRN-842 대마물 로켓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현재 CRN-842 대마물 로켓은 호루스 위에 고이 놔둔 터라, 가지러 가려면 아크 바깥으로 나가서 따로 호루스를 불러낼 필요가 있었다.
"아크제 물건이 아니라··· 흥미가 생기네요. 그러면 제 연구소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부탁하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메이벨 필그림은 곧장 연구소를 향해서 발걸음을 돌렸다.
메이벨 필그림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본 뒤, 나는 병참 장교 게드윈에게 말했다.
"괜찮으면 저 차량으로 아크 바깥까지만 옮겨줄 수 있나? 아무래도 저걸 들고갈 수는 없어서."
"아, 물론입니다."
물론 하고자 한다면 내가 못할 건 없겠으나, 아무래도 아크 내에서 균열 공간을 펼치기에는 보는 눈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호루스를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여러모로 아크 바깥까지는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가실 겁니까?"
"그래."
나는 병참 장교 게드윈과 함께 NOA-31 대마수 기관포를 실어 왔던 차량에 탑승했다.
"출발하겠습니다."
마치 첫 임무에 나선 운전병 같은 말을 한 병참 장교 게드윈은 직접 운전대를 잡고서 Red-17 게이트를 통과했다.
"이 차량으로는 노아를 오를 수 없을 텐데, 괜찮으십니까?"
"그래. 경계까지만 놓아주면 그다음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지."
"으음··· 예. 알겠습니다."
병참 장교 게드윈은 내가 도대체 어떻게 저걸 옮기려는 건지 궁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으나, 딱히 그걸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게드윈 나름대로의 배려이리라.
"도착했습니다."
차량을 타고 이동한 덕분인지, 노아의 경계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원래부터 노아와 인접한 레드 라인에서 출발한 것이다 보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여기에 내려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래. 충분하다."
병참 장교 게드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량 안의 버튼을 조작했다.
지이잉······.
이윽고 NOA-31 대마수 기관포가 완전히 내려오자, 병참 장교 게드윈이 말했다.
"아크로 다시 돌아가셔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여기에서 기다려 드립니까?"
"아니. 내가 나중에 따로 합류하지. 아무래도 해야 할 일도 있어서."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병참 장교 게드윈은 괜한 배려 대신에 순순히 돌아갔다.
여러모로 나에게 있어서는 이런 게 더 편했다.
'그러면······.'
나는 병참 장교 게드윈의 거리가 멀찍이 사라지는 걸 보고서야 균열 공간을 열었다.
['균열 공간'을 발동합니다.]
일렁이는 균열 공간.
정확히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곳을 향해서 앞에 있는 NOA-31 대마수 기관포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뿌득, 뿌드득······.
팔과 다리에 힘줄이 솟았다.
온갖 강화 혈청과 더불어서 강체, 그리고 야누스의 신체 보조까지 있음에도 NOA-31 대마수 기관포의 무게는 확실히 보통이 아니었다.
"야, 도와."
[꼭 필요할 때만 부른다니까.]
"그러면 안 필요할 때 부르리?"
[에휴.]
에스더는 혀를 쯧쯧 차면서도 할 건 하겠다는 듯이 나와 함께 힘차게 NOA-31 대마수 기관포를 밀었다.
워낙 크기와 무게가 보통이 아닌 물건이다 보니, 야누스까지도 나서서 뼈 촉수를 뿜어냈다.
[기깃!]
그와 함께 조금씩 밀리던 NOA-31 대마수 기관포의 총신이 서서히 균열 공간 안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NOA-31 대마수 기관포이 허공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괴상한 모습이었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이렇게 무거운 걸 어떻게 쓰려고요? 꺼내는 것도 보통이 아닐 것 같은데.]
"아니, 꺼내는 건 걱정할 필요 없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균열 공간을 닫았다.
그리고는 균열 공간을 내 머리 위에 열었다.
그 순간.
드르륵─!
머리 위로 펼쳐놓은 균열 공간에서 무언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집어넣었던 NOA-31 대마수 기관포였다.
쿵!
내가 살며시 피하기 무섭게 내가 있던 자리에 NOA-31 대마수 기관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했던 대로, 균열 공간을 머리 위에 만들게 되면 이런 식의 활용도 가능했다.
[···조금 전에 안 피했으면 그대로 깔려죽을 뻔한 건 알아요?]
"그래서 피했잖아."
[아니이··· 주인님이 죽으면 저도 죽는다고요! 건강 관리 좀 확실하게 하라고요!]
"나도 죽을 생각은 없다."
에스더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내 알 바 아니었다.
"어쨌든, 다시 집어 넣자."
[에휴······.]
다시금 일련의 과정이 지나가고, 진땀을 뺀 에스더가 넋두리하듯이 말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꺼낼 수 있는 거면 집어넣을 때도 바닥에다가 그 이상한 걸 만드는 식으로 하면 되지 않아요? 그러면 알아서 들어갈 거 아니에요?]
응?
[뭐예요? 설마 몰랐다는 듯한 그 표정은?]
"······그럴 리가."
[아닌데. 진짜로 몰랐던 거 같은데.]
"기분 탓이다."
에스더의 눈이 가늘어졌다.
집요한 사냥꾼의 눈이었다.
[왜 다른 데 봐요? 저 여기 있는데.]
"오늘 따라 네가 꼴도 보기 싫군."
[그건 좀 상처 받는데요.]
"···미안."
*
다시금 아크로 돌아간 나는 메이벨 필그림을 통해서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와 CRN-842 대마물 로켓의 업그레이드를 마쳤다.
특히 BLT-47 플라즈마 발사기 같은 경우는 이번에 혹시 실패를 하지 않을까 내심 염려했는데, 다행히도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즉, 성공이었다.
'그 탓에 기껏 벌었던 크레딧을 거의 다 쓰긴 했지만··· 뭐 크레딧이야 나중에 다시 벌면 되니까.'
나는 이번에 새롭게 탄생한 장비들을 꼼꼼히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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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T-47 플라즈마 발사기 MK.III] [★★★★★★(+★★)(8성)]
아크의 첨단 기술이 집약된 플라즈마 발사기.
무기 공학 권위자, 메이벨 필그림의 손길을 탄 물건이다. 기본적인 성능 및 내구도가 크게 향상되었다.
내구도에 특히나 신경을 쓴 물건이다. 내구도가 추가로 한 단계 더 상승했다.
"상세 보기"
──────────────
──────────────
[CRN-842 대마물 로켓 MK.II] [★★★★★★★(+★)(8성)]
크로노스의 첨단 기술이 집약된 대마물 전용 로켓.
극소량만 제작된 무기로서, 아크제에 버금가는 몇 안 되는 크로노스제 무기다.
무기 공학 권위자, 메이벨 필그림의 손길을 탄 물건이다.
기술적 개량이 이루어졌으며, 탄속 및 파괴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매우 강력하다.
"상세 보기"
──────────────
메이벨 필그림이 말했다.
"우선,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는 일전에 업그레이드를 할 때 내구도 면에 특히 신경을 써둬서 크게 어려울 건 없었어요. 아무래도 원래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라는 물건 자체가 잘 고장이 나거든요."
"CRN-842 대마물 로켓 같은 경우는 몇 번 만져본 적 있었지만, 확실히 관점 자체가 기존 크로노스제 물품보다는 아크제 물품에 가깝더군요. 그래서 크게 어려울 건 없었어요."
"이상이에요. 혹시 다른 질문 있으신가요?"
메이벨 필그림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을 마쳤다.
"···아니 딱히 없는 것 같군."
괜히 있다고 하면 했던 만큼의 말을 한 차례 더 쏟아낼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메이벨 필그림이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Z-74 제트팩을 사용한 후에 느낀 점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요."
"꽤 훌륭하더군."
"···그게 전부인가요?"
"그래."
메이벨 필그림은 잠시 얼이 빠졌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혹시 별다른 개선점 같은 건요?"
"에너지 효율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총량이나 충전 시간에 있어서는 조금 개선점이 필요해 보였다."
"그렇군요. 딱 염려하던 부분이네요."
메이벨 필그림은 내 대답에 충분히 만족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내 등 뒤에 있는 Z-74 제트팩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괜찮다면 Z-74 제트팩을 잠시 저에게 맡겨주실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개선점을 적용하고 싶어서요."
"나야 좋지."
예상치도 못했던 소득이었다.
"자, 그러면 주세요."
"그러지."
그렇게 내가 메이벨 필그림에게 Z-74 제트팩을 넘긴 순간.
"······어?"
사방으로 붉게 점등하는 경고등.
소음을 경계하는 아크답게 사이렌 같은 건 울리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적막이 더욱더 현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말해주었다.
"이건······."
"아무래도 Z-74 제트팩 개선은 다음에 맡겨야 할 것 같군."
"아··· 네!"
메이벨 필그림은 다급한 손길로 나에게 Z-74 제트팩을 돌려줬다.
그리고 나는 점등하는 경고등을 바라보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저게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왔나.'
8번째 웨이브.
그것이 일어났다.
< 장비 업그레이드 > 끝
나는 곧장 움직였다.
지금 웨이브가 일어났다면, 이렇게 아크에서 밍기적대고 있을 틈이 없기 때문이었다.
"···가시는 건가요?"
"그래."
"몸조심하세요."
무려 메이벨 필그림에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게 감회가 새삼스럽긴 했으나, 애석하게도 감상을 느낄 시간은 없었다.
지금도 아크 바깥에서는 무수한 마수 군단이 흉성을 드러낸 채로 아크를 향해 다가오고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오올, 응원도 받고 좋겠네요?]
'네가 해주는 것만 할까.'
[꼬리도 칠 줄 아네. 우리 주인님 많이 늘었어?]
에스더가 낄낄 웃었다.
그러한 웃음을 뒤로한 채로, 나는 바쁜 걸음으로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를 나섰다.
[그나저나, 웨이브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웨이브에요?]
'어쩔 수 없지.'
우리가 임무를 끝낸 뒤 아크로 돌아오는 여정은 절대로 짧지 않았다.
시간상 다음 웨이브가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나마 다중 웨이브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다중 웨이브라고 치기에는 웨이브가 일어난 간격이 너무나도 짧다.
즉, 이건 평범한 웨이브였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일들을 생각한다면 다중 웨이브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아크를 비우면서 상대적으로 마수와 마물들을 적게 잡았기 때문이었다.
'가급적이면 아크 바깥으로 나가는 게 좋겠지만··· 상황이 어렵게 됐어.'
아크 안에서 싸우는 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니겠지만, 지금 당장 내가 크레딧이 필요한 것도 아닐뿐더러, 무엇보다도 NOA-31 대마수 기관포를 꺼내기 위해서는 아크 바깥으로 갈 필요가 있었다.
어지간한 크기의 물건도 아니고, 이 정도의 물건을 꺼내려면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웨이브가 일어나게 되면 아크와 외부가 완전히 차단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아크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으나, 지금이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가야만 하는 상황까지는 또 아니었다.
'흐음··· 뭐, 어떻게든 되겠지.'
전투 중에 CCTV 같은 장비가 부서지는 건 매우 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향한 곳은 Red-17 게이트.
아무래도 다른 게이트 같은 경우는 외부인인 내 출입을 허용하지 않을 테지만, 이모샤 중위가 있는 Red-17 게이트라면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서둘러!"
"Red-11 게이트로 가!"
"엄마아······!"
"너 왜 여기 있어? 빨리 이리 와!"
도시 내부는 혼돈이었다.
증원을 가는 듯한 군인들.
바쁘게 움직이는 시민들.
이를 통제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호루라기를 불어대고 있는 경찰들.
아무리 웨이브가 익숙해져도, 웨이브 때마다 도시가 입는 피해 역시도 전혀 없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웨이브가 일어날 때마다 아크의 시민들은 도시 내에 있는 벙커로 잠시 피난한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한다.
부디, 이번 웨이브 역시도 잘 넘어갈 수 있기를··· 하고 말이다.
[와, 개판이네.]
에스더가 말했다.
딱히 부정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맞는 말이기도 했고.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아크 인간들은 왜 굳이 땅 밖으로 나와 있는 거예요? 어차피 이럴 때마다 벙커로 숨을 거면 처음부터 땅굴 속에 살면 안 되나?]
'땅속에도 마물은 있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상대적인 게 있잖아요.]
'지하에 그 정도의 생활 공간을 만드는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애초에 지하에서 생활할 수 있는 기반 자체가 안 될 거다. 당장 식량 조달부터가 큰 문제지.'
[땅속에서 버섯이라도 키워 먹으면 안 되나? 아니면 마수 고기라도······.]
'마수 고기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도 이미 한번 마수 고기를 가공해서 먹어본 적이 있지만, 그건 정말로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단순히 독을 제거하고 말고를 떠나서, 누린내와 비린내, 그리고 역한 냄새와 끔찍한 식감이 한자리에 모인 오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다운 삶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전 이해가 안 돼요. 살아남는 게 최우선 아닌가?]
'물론 포기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결국 그럴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아크의 상황이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정확히는, 아크의 상황이 그렇게 될 정도면 애초에 아크가 통째로 멸망할 것이다.
아크의 수비는 중간이 없다.
지켜내느냐, 아니면 멸망하느냐.
웨이브는 늘 그 둘 사이의 답 중에서 하나만을 요구한다.
[뭐, 주인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에스더와 잠깐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Red-17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멈추십시오. 여기부터는 일반 시민의 통행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신속히 벙커로 돌아가 주십시오."
병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말했다.
"아크에서 고용한 용병이다. Red-17 게이트의 방어를 돕겠다."
"···용병 말씀이십니까?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칼 마커스다."
"아! 들어가십시오."
병사는 그제야 순순히 길을 열었다.
아무래도 알게 모르게 내 이름이 Red-17 게이트 내에 알음알음 퍼져 있는 듯했다.
'뭐, 잘된 일이지.'
명성은 양날의 검이지만, 적어도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꽤 도움이 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굳이 싫어할 필요는 없었다.
"···오셨군요."
한창 지휘를 하고 있던 이모샤 중위는 내가 온 걸 보고는 가볍게 목례했다.
"상황은 어떻지?"
"좋지는 않습니다. 이전에 왔던 웨이브보다 규모는 적지만, 보이는 마수 군단의 수준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 말대로였다.
기본적으로 웨이브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강해진다.
아무리 다중 웨이브가 아닌 평범한 웨이브라고는 해도, 마수와 마물들의 수준만 치면 지금까지 있었던 그 어떤 웨이브보다도 위협적인 것이다.
"그러면 일개 소대 담당 포인트를 나에게 맡길 수 있겠나?"
"···죄송합니다. 칼 마커스 당신을 믿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역시 예전처럼 소대가 담당해야 할 포인트를 통째로 내가 맡는 건 불가능했다.
뭐, 어차피 나도 그건 꽤 리스크가 있는 일이었기에 무리해서 주장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혼자 있는 게 편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내가 말했다.
"그러면 현재 가장 공격에 취약한 포인트가 어디지?"
이모샤 중위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현재 상황에서는 R17-16 포인트 인근이 상당히 취약합니다."
"그쪽을 지원하지."
"···부탁드립니다."
그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곧장 R17-16 포인트를 향해서 떠났다.
[주인님! 저기!]
에스더의 외침과 함께, 아크의 하늘 위에서 무수한 빛들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피이이이이잉─────!!!
격한 파공음과 함께 말 그대로 공기를 찢고서 발사되는 수백 발의 미사일들.
JD-074 열압력탄은 아크의 선제공격을 알리는 가장 대표적인 수단 중 하나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치솟아 오른 미사일들이 이내 마수 군단이 득실대는 지상을 폭격했다.
콰아아아아아앙──────!!!!
땅이 울리고, 공기가 요동쳤다.
그 정도로 거대한 폭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수 군단은 정면으로 폭발에 휘말린 마수들을 제외하고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아크로 진격을 이어갔다.
'역시 끈질긴 놈들이란 말이지.'
물론 아크에서도 여기에서 끝낼 생각은 없다는 듯이, 2차 공격이 곧이어서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그러한 일방적인 공격도 언제까지고 이어질 수는 없었다.
어느새 제공권을 장악한 무수한 비행종들과 거충종을 비롯한 비행형 마수와 마물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놈들에게 하늘을 장악당한 상태에서 어설프게 미사일 공격을 했다가는, 자칫 잘못할 경우 미사일이 아크로 떨어질 수도 있다.
대재앙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크에서는 이제 미사일 공격을 멈추고 재래식 화력전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시작됐다.
물론 그러는 사이에도 나는 바쁘게 움직여서 R17-16 구역에 도착했다.
내가 도착하기 무섭게 현재 이곳의 책임자로 보이는 하사가 나를 마중나왔다.
"···칼 마커스님이십니까?"
"맞다."
"잘 오셨습니다. 담당관님에게 이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미 R17-16에는 이모샤 중위가 언질을 해둔 건지, 따로 설명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따로 움직이겠다. 방해는 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아크의 군인은 명령에 복종한다.
당연히 이모샤 중위에게 명령을 받은 부사관은 큰 의문 없이 그에 따랐다.
'그러면······.'
나는 아크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전투의 시작은 역시나 전선의 하늘에서 알짱거리는 비행종들과의 사투였다.
"온다!"
누군가의 외침.
그것을 시작으로 하늘에서 기웃거리던 비행종들이 아크의 성벽 위를 향해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발사!"
콰카카카카카!!!!
쾅! 콰카캉!
피우우우우웅──!!
아크의 화력은 압도적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하늘 위에서 무수히 많은 비행종들이 그럴듯한 회피 기동 한번 펼쳐내지 못하고 그대로 벌집이 되어 추락했다.
[키에에엑!]
[끼룩······!]
나 역시도 Ark-15 자동 소총을 들고서 그 화력을 보충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화력이 쏟아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행종들의 숫자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키에에에에엑!]
[캬오오오!]
어느덧 아크의 성벽 아래까지 도착한 마수 군단이, 조금씩 성벽을 부수거나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아크의 화력이 압도적이라고 한들, 더는 제공권만을 신경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지.'
나는 병사들의 시선이 잠시 전방에 팔린 사이, CCTV의 사각지대에서 조용히 균열 공간을 열었다.
['균열 공간'이 발동합니다.]
그리고는 가볍게 손을 뻗어서 안에 보관해두었던 CRN-842 대마물 로켓을 꺼냈다.
'어차피 나를 신경쓰고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철컥, 철컥-
CRN-842 대마물 로켓을 어깨에 맨 나는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피우우우웅!!!
한번이 아니다.
두번도 아니다.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기며 나는 몰려드는 마수 군단을 향해서 두려움과 공포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려주었다.
콰카카카카캉───!!!!
궤적을 그리고 날아간 로켓들이 지상에서 끊임없이 달려드는 마수들을 덮쳤다.
[케헤헤헥!]
[크루룩!]
하지만 치솟은 불길도 잠시.
어느새 그 자리를 다른 마수와 마물들이 채우며, 끊임없는 군세가 무엇인지 똑똑히 증명했다.
'역시 조금 아쉬운데.'
만약 NOA-31 대마수 기관포를 꺼낼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나는 다른 걸 꺼내기로 했다.
오히려, NOA-31 대마수 기관포보다도 순간적인 화력만큼은 더욱더 압도적인 물건이었다.
지이잉─
나는 품속에서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꺼냈다.
이번에 메이벨 필그림을 통해서 무려 2단계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진, 8성 장비였다.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메이벨 필그림을 통해서 두 단계씩이나 업그레이드 된 지금의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는, 일반적인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내구도를 지니게 되었다.
즉, 지금이라면 본래였다면 꿈도 꾸지 못할 말도 안 되는 활용을 보이는 것 역시도 충분히 가능했다.
'해볼까.'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조용히 마수 군단을 향해서 겨눴다.
그리고는, 버튼을 눌렀다.
지이이잉────!!
그와 함께 뻗어나가기 시작한 붉은 빛의 섬광.
그러나, 나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마음껏 손목을 휘둘렀다.
콰카카카카카카가가!!!!
붉은빛의 섬광이 거침없이 마수들을 휩쓸었다.
"뭐, 뭐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성립하지 않는 막대한 에너지가 지상을 훑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빛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파멸의 빛이 마치 모든 걸 집어삼킬 기세로 전장을 휩쓸었다.
< 8번째 웨이브 > 끝
이모샤 중위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갑작스럽게 치솟아 오른 파멸의 빛은 그녀가 있는 곳에서도 훤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즈마······ 발사기?"
그런데 저게 저렇게 활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나?
정상적인 플라즈마 발사기였다면 조금만 연달아서 사용해도 진작 에너지가 고갈되거나, 설사 고갈되지 않더라도 고장나서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그러한 상식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모샤 중위가 알기에, 아크에서 무언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건 오직 한 사람에 의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칼 마커스.'
도대체 자신을 내쫓은 아크에 대해서 칼 마커스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 마커스에 의해서 아크가 지켜지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만약,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이모샤 중위는 그날을 되새겼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칼 마커스를 아크 바깥으로 내쳤던 날.
만약 그날의 선택을 바꿨다면 무언가 다른 결과가 아크를 찾아왔을까?
모르겠다.
이모샤 중위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이모샤 중위가 잠시 옛 기억에 잠겨있을 때, 마치 모든 걸 끝낼 것만 같던 파멸의 섬광이 서서히 멎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빛이, 드디어 끝나고야 만 것이다.
이 와중에도 이모샤 중위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았다.
"R-17 소속 지휘관들에게 전달한다. 비행종을 비롯한 비행형 마수들을 최우선으로 상대한다."
현재 지상의 전선은 몰아친 섬광으로 인해서 잠시 여유가 생겼다.
즉, 이 틈에 가장 성가신 비행형 마수들의 숫자를 줄여놔야 했다.
그게 칼 마커스가 의도한 바였고, 이 상황에서 이모샤 중위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발사!"
이모샤 중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며, 하늘을 향해서 일제히 공격이 쏟아졌다.
* * *
칙, 치이익······.
몇 차례의 섬광을 흩뿌린 BLT-47 플라즈마 발사기가 먹통이 됐다.
상당히 무리를 해서 사용한 탓인 듯했다.
'아무래도 다시 쓰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어.'
고장이 났다거나 한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나, 자가 복구 기능으로 과열된 부분들이 수복되려면 상당히 시간이 걸릴 터.
그렇듯이 대가가 작지 않았으나, 얻어낸 것 역시도 절대로 작지 않았다.
'어쨌든, 덕분에 전선에 잠시 공백이 생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상에서 성벽을 긁고 기어오르던 마수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비록 엄밀히 따지면 아주 잠깐의 공백에 불과했으나, 지금으로서는 그 시간도 감지덕지였다.
그 시간은 R-17 게이트의 병사들이 전열을 정비하고 잠시나마 지상에서 시선을 떼고 비행형 마수들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단지 그것만으로 아크의 피해가 비약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쏴!"
"날개를 노려!"
아크를 수비함에 있어서 비행종을 비롯한 비행형 마수와 마물들은 가장 위협적인 적 중 하나다.
높디 높은 성벽도 비행형 마수들에게는 통하지 않을뿐더러, 특유의 기동력으로 화력 역시도 낭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로 인해서 제공권이 장악당하는 탓에, 아크의 강력한 화력이 묶여 버리게 되니 아크의 입장에서 비행형 마수는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대상 중 하나였다.
'그러면······.'
나 역시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나는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다잡고는 그것을 하늘에 겨눴다.
아무리 좋은 무기를 얻어도 돌고 돌아서 이걸 사용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만큼 국밥인 무기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철컥-
방아쇠가 당겨지며,
총구에서 불꽃이 뿜어졌다.
타탕!─
연신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A-985 폭발탄이 하늘을 뒤덮을 기세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쾅!
콰카카캉!!!
연신 일어나는 폭발.
그 가운데, 나는 NO-13 유탄 발사기의 방아쇠 역시도 함께 당겼다.
[주인님! 위!]
그러는 사이에 몇몇 비행종들이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8급 비행종들.
비록 등급 자체는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비행종이라는 특성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위협적인 적이었다.
'뭐, 그래봤자지만.'
다른 레드 라인의 병사들에게야 위협적인 상대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8급 비행종 정도는 식후 간식거리 정도도 안 되는 놈들이다.
비행종이 자랑하는 특유의 기동력 역시도, 나에게 있어서는 훤히 들여다 보이기 때문이었다.
'왼쪽, 다시 오른쪽. 그리고 밑.'
기상천외하게 움직이는 비행종들을 향해서 총구가 불을 뿜어냈다.
완벽하게 움직임을 꿰뚫었다는 걸 증명하듯이, 날아든 A-985 폭발탄이 지나갈 때 비행종이 날아들어서 총알에 스스로 가져다 박는 모양새였다.
[키에에에엑!]
그러나 추락한 비행종이 향한 곳이 문제였다.
비행종이 추락한 곳은 다름 아닌 아크의 병사가 있는 곳.
당연히 자신의 머리 위에서 비행종이 추락하자, 당황한 병사의 몸이 굳었다.
"힉······!"
이대로면 비행종에게 병사가 깔려서 그대로 죽을 판.
'에스더!'
[알았어요, 알았어!]
에스더가 툴툴댔으나, 그렇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하지는 않았다.
[당겨. 당겨. 당겨. 당겨. 당겨. 당겨. 당겨. 당겨. 당겨. 당겨. 당겨. 당겨. 당겨. 당겨······.]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에테르가 두 가지로 움직였다.
하나는 병사를 잡아 당기고, 나머지 하나는 떨어지는 비행종의 속도를 늦췄다.
"악!"
그와 함께 병사의 몸이 당겨지며 아슬아슬하게 비행종이 추락한 지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만약 조금만 늦었더라면 수백kg에 달하는 비행종이 병사를 찌끄러진 두부처럼 만들었으리라.
['불살주의'를 시행하였습니다.]
[현재 구한 생명 : 74]
그렇게 병사를 구한 나는 이내 그 병사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으, 으으······."
그 용감무쌍한 아크의 병사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잔뜩 겁에 질린 모습.
그러나, 그 겁 먹은 모습이 나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익숙했다.
'겁쟁이 벨.'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바로 윗 기수이자, 아크의 신병 중에서 손에 꼽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
그러나 잠시 눈을 떼면 죽어버리는 탓에 개복치 벨이라고도 불리는 녀석이었다.
'설마 이 녀석일 줄이야······.'
본래였다면 다른 게이트 소속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부대 재정비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뭐, 잘 됐어.'
안 그래도 겁쟁이 벨이 그대로 죽어 있으면 조금 속이 쓰릴 뻔했는데, 이렇게 살아 있는 걸 확인했으니 다행이었다.
"일어나라."
"예? 예?"
겁쟁이 벨에겐 탁월한 재능이 있다.
비록 지금은 그 재능이 너무나도 탁월하여 지레 겁을 먹고 움직이는 것조차도 어려워했지만, 만약 그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면 칼라킨에 준하는 잠재력의 소유자였다.
"볼 필요도 없는 걸 굳이 볼 필요는 없다."
"예? 예? 그게 무슨······."
"지금 당장, 네 눈앞에 있는 것들에만 집중해라."
만약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겁쟁이 벨의 능력에 대해서 더 말해주고 싶었으나,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겁쟁이 벨의 재능이라면, 이 정도 말만 해둬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터.
"그러면, 죽지 마라."
"자, 잠깐만요!"
나는 겁쟁이 벨을 뒤로한 채로 다시금 시선을 전장으로 옮겼다.
어느덧 지상의 전선에 마수들이 몰려들어서 다시금 성벽을 오르고 있었다.
'어딜.'
나는 CRN-842 대마물 로켓을 다잡고는 감히 겁도 없이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마수들을 향해 겨눴다.
물론 CRN-842 대마물 로켓의 파괴력이라면 아크의 성벽에도 어느 정도 손상이 갈 수밖에 없었으나, 나에게 있어서 그 정도 피해 범위 조절은 일도 아니었다.
'대충 저쯤인가.'
조준, 그리고 발사.
심플하기 짝이 없는 과정과 동시에 CRN-842 대마물 로켓에서 로켓이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쿠웅─
콰아아아아앙───!!
자욱하게 일어나는 폭발들.
그 속에서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연기를 헤치며 마수들이 다시금 성벽을 기어 올랐다.
나는 슬쩍 주변을 살폈다.
아직까지는 나를 주목하는 병사들은 없는 것 같지만··· 언제까지고 이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지나칠 정도로 활약하면 분명히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올 터.'
마음 같아서는 CRN-842 대마물 로켓로 몰려오는 놈들을 쓸어버리고 싶었으나, 다른 아크의 병사들이 발목을 붙잡았다.
물론 언젠가 아크에 내가 지닌 능력이 들킬 수도 있겠지만, 그게 굳이 지금일 필요는 없었다.
'이래서 아크 바깥에서 싸우고 싶었던 건데··· 별수 없지.'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그렇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을 미룰 수는 없었다.
나는 Ark-15 자동소총을 다잡고는 성벽을 오르는 마수들을 겨누었다.
"이거나 처먹어."
타타탕!!!
장전된 총알은 철갑탄.
아크의 성벽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마수들의 머리 위에 구멍을 내주기에 적합한 물건이었다.
[케헥!]
[카아악!]
흩뿌려지는 철갑탄과 함께 머리에 구멍이 난 마수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모든 마수들이 그런 건 아니었다.
쿵!
쿠웅!
Ark-15 자동소총 정도로는 외피를 뚫기 어려운 마수들 역시도 적지 않은 숫자가 성벽을 기어올랐다.
최소 4급 이상의 마수들.
만약 저 정도 수준의 마수가 아크의 성벽에 오르게 되면, 적지 않은 피해가 생길 게 분명했다.
'에스더.'
[어쩌려고요?]
'저것들을 잠깐 성벽에서 떨어뜨려라.'
[······거리가 너무 멀어요. 제대로 힘을 쓰려면 주인님이 어느 정도 접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상관없다.'
말을 마친 나는 곧장 움직였다.
아크의 성벽 아래를 향해서.
"뭐, 뭐야?"
"잠깐! 사격 중지!"
내 돌발 행동에 공격을 이어가던 병사들이 당황하며 공격을 멈췄다.
어차피 야누스와 하늘 고래 망토 덕분에 Ark-15 자동 소총 정도의 화력은 거뜬히 견딜 수 있는 나에게 있어서는 그럴 필요 없었지만 말이다.
'빨리 끝낸다.'
나는 은밀하게 발바닥에 야누스의 뼈 촉수로 스파이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에스더의 보조에 맞춰서 성벽을 거꾸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정도 묘기는 일정 수준 이상의 에테르 적합자라면 얼마든지 보일 수 있었기에, 거리낄 건 없었다.
"미, 미친!"
머리 위에서 울려 퍼지는 경악성을 뒤로한 채로, 나는 어깨에 있는 CRN-842 대마물 로켓을 다잡았다.
"꺼져, 이 새끼들아."
내 신호와 동시에 에스더를 중심으로 에테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에스더의 악의가 신랄하게 느껴지는 에테르 폭풍과 함께, 성벽을 오르던 마수들의 몸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에 얻은 에테르 능력 중 하나인 발화였다.
[카아아아악!]
그렇게 마수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아크의 성벽 밑으로 떨어져 내리자, 이를 기다리고 있던 내가 CRN-842 대마물 로켓을 겨누었다.
"잘 가고."
피우우우우웅────!!!!
치솟은 불꽃과 함께 날아든 로켓이 마수들을 향해서 쇄도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연신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로켓포들이 마치 폭격처럼 쏟아졌다.
"끄응."
마수들을 대충 정리한 나는 다시 성벽 위로 빠르게 올라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성벽 위에는 이미 다른 곳에서 올라온 마수들이 아크의 병사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크아악!"
"쏴! 갈겨!"
고성과 비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나는 지금 내가 있는 위치가 CCTV의 사각지대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지금의 혼잡스러운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나를 주목하지 않다는 점 역시도.
'마침 기회라고 봐야하나.'
어차피 현재 내가 지닌 화력으로는 이 이상 웨이브를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더 큰 화력을 써야할뿐.
나는 내 머리 위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균열 공간'이 발동합니다.]
NOA-31 대마수 기관포 MK.II
그것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 8번째 웨이브 (2) > 끝
지금까지 균열 공간 내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던 NOA-31 대마수 기관포가, 마침내 아크의 성벽 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내가 본격적으로 NOA-31 대마수 기관포를 사용하게 되면 분명히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이 주변에서 OA-31 대마수 기관포가 나올 만한 곳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심증에 불과하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이상, 나도 조금은 뻔뻔하게 나가볼 생각이었다.
철컥, 철컥─
NOA-31 대마수 기관포는 특별히 따로 지지대를 설치하거나 할 필요도 없었다.
그 압도적인 무게가, 바로 지지대 그 자체였으니까.
드르륵······.
NOA-31 대마수 기관포의 총열들이 거칠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내가 노리는 건 지금 Red-17 게이트의 성벽 위에서 병사들을 공격하고 있는 마수들.
비록 병사들과 뒤섞여 있어서 NOA-31 대마수 기관포 같은 무식한 물건으로 조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할 수 있었으니까.
'해볼까.'
곧이어서, 회전하기 시작한 총열에서 거친 불꽃이 뿜어졌다.
콰카카카카카카───!!!
이게 정녕 총구에서 뿜어지는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드높게 치솟은 화염.
그리고 뿜어진 건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의 섬광과는 또 다른 의미의 파멸의 빛이었다.
"뭐, 뭐야?!"
"피해!"
아크의 병사들은 그제야 자신들을 향해서 포격을 쏟아내는 미친놈을 경악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나, 이내 그것에 당한 아군이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몸을 웅크렸다.
콰카카카카카!!!!
쿠구구구구구──!!!
[키에에에에에!!!]
[카아아악!]
마수들이 분쇄된다.
비유 따위가 아니라, 정말로 레드 라인의 전선에 들어선 마수와 마물들이 파멸의 빛에 마치 믹서기에 들어간 과일처럼 갈려 나갔다.
쿠구구구구구───!!!
한때 마수의 일부였던 고기 파편들이 제 주인을 잃고서 전장에 날아다녔다.
[카아아아아아아악!!!]
[끼에에에에엑!]
비명과 괴성.
총성과 폭음.
전쟁을 상징하는 온갖 소리들이 뒤엉키며 혼돈을 초래했다.
"쏴!"
"지금이야!"
마수들의 어그로가 모조리 나에게 끌린 사이, 전열을 정비한 아크의 병사들이 성벽 위에 있는 마수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캬오오오!]
[크르릉!]
그 와중에도 마수들은 발악을 하면서 앞발을 아크의 병사에게 찔러넣고, 흉성을 토해냈다.
하지만 아무리 마수들이 발악을 해도, 큰 흐름에는 반항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와 병사들은 Red-17 게이트의 성벽 위에 올랐던 마수들을 거의 다 제거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당장 성벽 위에 있는 마수들을 제거했다고는 해도, 아직 성벽을 오르고 있는 마수들은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으니 말이다.
철컥─
나는 NOA-31 대마수 기관포의 포구를 전선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금 시작된 포격.
콰카카카카카카──!!!
[네임드 마수를 처치하였습니다.]
['괴수 사냥꾼' 효과가 10배로 적용됩니다.]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에 대한 피해량이 0.5% 증가합니다.]
[8급 야수종, 굶주린 검치호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야수종, 굶주린 검치호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7급 비행종, 가시털 뻐꾸기를 처치하였습니다.]
[7급 비행종, 가시털 뻐꾸기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
.
.
[7급 괴암종, 저주 받은 새 동상을 처치하였습니다.]
[7급 괴암종, 저주 받은 새 동상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포구에서 화염이 뿜어질 때마다 마수들이 말 그대로 갈려나갔다.
아무리 두꺼운 외피를 지니거나 거대한 몸집을 지니고 있어도 소용없었다.
그만큼 메이벨 필그림을 통해서 업그레이드 된 NOA-31 대마수 기관포의 위력은 엄청났다.
'흐음······.'
그런데 왜일까.
이러한 엄청난 위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히려 약간의 부족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살짝 부족한 것 같은데.'
NOA-31 대마수 기관포는 단순 위력만 본다면 예전에 사용했던 고정식 포탑인 NOA-44 이레이저보다는 약하다.
아무리 메이벨 필그림을 통해서 MK.II로 업그레이드를 했다고는 하나, 본질적으로 NOA-31 대마수 기관포와 NOA-44 이레이저는 등급부터 크기까지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가 지닌 것들로 그때의 화력을 다시 찾으려면······.'
화력이 부족하다면, 추가하면 될 뿐.
나는 오른손으로 NOA-31 대마수 기관포를 잡고, 왼손으로는 CRN-842 대마물 로켓를 잡았다.
하나만 해도 한 손으로 들고 있기 버거운 병기들을 양손에 따로 드니 팔에 힘줄이 서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힘들군.'
이 상태로 제대로 된 조준을 하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
그렇다고 해서 신체 능력 보조 정도를 제외한다면 제대로 된 야누스의 보조를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니, 결국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에스더, 보조해라.'
한 손이 부족하면, 다른 손을 빌리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보조요? 어떻게요?]
'내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포신을 움직이면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격처럼 정밀한 동작을 따라하는 건 어려워요.]
'사격이 아니다.'
[···그럼요?]
에스더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물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사냥이지.'
에스더의 말마따나 이런 식으로 병기를 운용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정밀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아무리 빠르게 반응을 해서 포구를 돌려도, 에스더가 이에 반응하는 사이에 딜레이가 생길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부터 할 건 정밀한 사격 따위가 아니라 일방적인 사냥이었고, 모자라는 정밀도 정도는 채울 수 있는 충분한 화력이 나에게는 있었다.
'해보자고.'
드르르륵──
NOA-31 대마수 기관포의 다중 포신이 다시금 격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콰카카카카카카──!!!
내가 포구를 미세하게 돌릴 때마다 에스더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포구를 돌렸다.
[끄응··· 더럽게 힘드네!]
'이 정도로 우는 소리하기는.'
[손가락만 까딱까딱하면 되니까 편하시죠 아주?!]
'더 빠르게 해라.'
[손가락만 올려놓고 시켜 먹는 주제에 말은!]
에스더는 그렇게 툴툴 대면서도 나름대로 제 몫을 다해냈다.
오른손에는 NOA-31 대마수 기관포.
왼손에는 CRN-842 대마물 로켓.
간신히 방아쇠 정도나 잡은 아슬아슬하고 불안한 자세였으나, 이에 대한 보조는 모조리 에스더가 해냈다.
[이익!]
아무리 에스더가 대단하다고 해도 내 손끝에 맞춰서 두 병기들을 조절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에스더는 진땀을 빼면서 에테르를 일으켰다.
[움직여.]
[저쪽?]
[아니 저쪽.]
[왼손 들지 말고 오른손 들었다가 다시 왼손 들고 오른손은 들지 말고······.]
성벽 아래의 전선을 향해지는 무수한 폭격 속에서,
전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 * *
"으, 으으······."
겁쟁이 벨은 어렸을 때부터 겁이 많았다.
천성적으로 성격 자체가 유약한 것도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원인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는 특이한 능력 때문이었다.
겁쟁이 벨은 죽음 그 자체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러한 벨이 보기에, 이 저주받은 세상은 온통 죽음 그 자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기에 벨은 겁쟁이가 되었다.
모든 게 두려워서, 고작 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도 너무나도 두려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이번에 Red-17 게이트로 차출된 벨은 압도적으로 몰려드는 웨이브를 본 순간, 다시금 무수한 죽음을 보았다.
벨은 두려웠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도 두렵고, 죽는 게 두려웠다.
"흐아악! 오, 오지 마!"
그토록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도망쳤음에도 불구하고, 마수의 형상을 한 죽음은 어느새 벨의 지척까지 다다랐다.
겁쟁이 벨은 총을 놓았다.
싸울 용기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다가 이상한 사내를 만났다.
온통 죽음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어째서인지 죽음의 냄새를 전혀 풍기지 않던 이상한 사내.
벨은 알 수 있었다.
저 자는,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왜인지, 그런 기분이 들었을 뿐.
그 어느 때보다도 죽음과 가깝게 있었던 벨을 구한 그 사내가 말했다.
"볼 필요도 없는 걸 굳이 볼 필요는 없다."
"예? 예? 그게 무슨······."
"지금 당장, 네 눈앞에 있는 것들에만 집중해라."
벨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전투가 일어나는 와중에도 벨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 사내가 있는 곳을 향한 것이.
그리고 벨은 경악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였다.
'······저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인가?'
오른손과 왼손에 각자 중화기를 들고서 난사를 해대는 광경이라니······.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광경이었다.
물론 일정 수준 이상의 에테르 적합자들의 신체 능력이 일반인보다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야.'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엄청난 건 맞지만, 그보다도 더욱더 경악스러운 건 벨이 보고 있는 특별한 광경 때문이었다.
저 사내는 그 누구보다도 죽음과 가까이 있으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만은 죽음과 동떨어져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한 거지?
저런 게 정녕 가능한 건가?
사내의 모습을 지켜보던 벨은 무언가 알 것 같았다.
그토록 두려웠던 죽음이, 어째서 저 사내에게만은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있는지.
'운명을··· 스스로 만들고 있어.'
겁쟁이 벨은 믿을 수 없었다.
인간에게 그러한 일이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능히 해내고 있었다.
감히 해낼 수 없다고 여겼던 일을,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해내듯이 말이다.
사내의 주변에는 늘 죽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죽음은 단 한 번도 사내를 침범하지 못했다.
[키에에에엑!]
[카아아악······.]
그 모습을 본 벨은 사내가 했던 말을 계속해서 되새겼다.
볼 수 없는 걸 볼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 눈앞에만 집중해라.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벨은 자신이 지금부터 무얼 해야 할지는 왜인지 알 것 같았다.
겁쟁이 벨은 총을 들었다.
Ark-15 자동변환 소총.
아크의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기본적인 보급 총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성능이 부족하거나 한 건 아니었다.
"으, 으으······."
벨은 여전히 두려웠다.
총을 잡고서 방아쇠를 당기는 것도, 달려드는 마수를 향해서 맞서는 것도.
그 모든 게 두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벨은 해냈다.
몰아치는 죽음 속에서 벨은 끝내 Ark-15 자동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타탕!
총성이 울려퍼진 그 순간.
"······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벨의 목젖까지 침범해 있던 죽음이, 어느새 발끝까지 물러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늘 벨을 겁쟁이로 만들었던 죽음은, 언제고 물리칠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
겁쟁이 벨은 여전히 겁이 많았다.
그러나, 더는 도망치지 않았다.
철컥-
겁쟁이 벨의 손에 쥐어진 Ark-15 자동 소총이 불을 뿜었다.
* * *
대체 방아쇠를 얼마나 당겼을까.
치이익······.
나는 손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잠시 두 개의 방아쇠를 손에서 놓았다.
아무래도 전투를 장기간 지속하려면 잠시 열을 식힐 필요성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쿵!
쿠웅─!
성벽 위까지 닿은 거대한 진동이 울리며, 지평선에서 보일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아크를 향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아니, 저 거대한 몸집을 못 알아본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이리라.
'1급 네임드 괴암종, 돌바위의 쿠르크.'
아크의 성벽을 단번에 부술 수 있는 초대형 마물의 출현이었다.
< 8번째 웨이브 (3) > 끝
이모샤 중위는 지평선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산의 모습에 눈을 의심했다.
'저게······ 대체 뭐지?'
처음에는 지형이 새로 나타난 건가 싶었으나, 이내 그것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이모샤 중위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저 정도 크기가 움직이고 있다면, 그게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초대형 마물!'
초대형 마물은 아크에 있어서 최위협 요소 중 하나다.
웬만한 마수나 마물들은 쉽게 부수지 못하는 아크의 견고한 성벽을 단번에 부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크기만큼이나 튼튼한 외피를 지니고 있어서 쓰러뜨리는 것도 절대 쉽지 않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초대형 마물이 아크를 향해서 그 거체를 옮기고 있었다.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한동안 초대형 마물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는데······.'
어쨌든, 당장 이모샤 중위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이모샤 중위는 곧장 바놀 중령과의 핫라인을 연결했다.
"이모샤입니다."
["보고하게."]
"전방에 초대형 마물이 출현했습니다. 크기와 외피로 판단하건대 최소 1급 이상의 괴암종으로 추정되며, 이에 지원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검토하지."]
초대형 마물 중에서도 매우 까다로운 축에 속하는 게 바로 괴암종이다.
괴암종 특유의 단단한 외피는 웬만한 공격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고, 설사 공격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마물의 핵을 찾지 못한다면 아무리 상처를 내도 의미 없다.
말 그대로 핵을 찔러서 죽이지 못한다면, 죽을 때까지 움직이는 게 바로 괴암종이라는 마물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모샤 중위가 추가적인 화력을 호출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직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되지 않은 상태인 만큼 원거리 화력 공격은 어려운 데다가, 기존에 있는 Red-17 게이트의 화력만으로는 초대형 마물인 1급 네임드 괴암종을 쓰러뜨릴 거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호출을 마친 이모샤 중위는 한창 전투가 이어지고 있는 Red-17 게이트의 포인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유난히 활약하고 있는 누군가 보였다.
'···칼 마커스.'
칼 마커스가 활약하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예상했던 것보다도 칼 마커스는 훨씬 더 전선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건 NOA-31 대마수 기관포 같은 데 저 물건을 어느새······?'
도대체 저 흉악한 물건이 갑자기 어디에서 튀어나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모샤 중위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당장 지금도 눈앞에서 초대형 괴암종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추가 인원과 화력을 요청하기는 했으나, 이모샤 중위 역시도 초대형 마물이 오는 걸 가만히 손 놓고 구경할 생각은 없었다.
"발사 준비!"
이모샤 중위의 외침과 함께 중화기를 든 병사들이 각자 위치에서 다가오는 초대형 마물을 조준했다.
"발사!"
피우우우우웅────!!!
일제히 발사된 로켓포가 각자의 궤적을 그리며 발사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발사된 로켓포 중 초대형 마물에게 닿은 건 채 반이 되지 않았다.
여전히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는 비행형 마수들 때문이었다.
[카아아아악!!!]
[캬오오오!]
로켓포의 폭발을 헤쳐나온 비행형 마수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성벽 위로 날아들었다.
초대형 마물이 다가오고 있는 와중에도, 여전히 마수들의 위협은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온다!"
"피해!"
병사들이 중화기를 내팽개치며 개인 화기로 바꾸며 재빨리 비행형 마수들의 습격에 대항하려 했으나, 몇몇 병사들의 희생은 피할 수 없었다.
"크아악!"
"사, 살려─"
아무리 아크의 보호복이 우수하다고는 해도, 일개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보호복의 레벨은 그다지 높지 않다.
곧, 병사들은 비행종에게 머리를 붙잡힌 채로 성벽 아래로 굴러떨어지거나, 혹은 머리가 통째로 날아갔다.
초대형 마물의 출현과 함께 간신히 안정을 되찾아가던 Red-17 게이트의 전선이 급격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초대형 마물이 성벽에 도착하는 순간 방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
"비행형 마수를 우선시해!"
이모샤 중위가 목이 터져라 명령을 전달했으나, 이미 성벽 위는 혼란으로 제대로 된 명령이 통하지 않았다.
상황이 점점 최악으로 치달아가고 있던 그 순간.
타아아앙──!!
온갖 괴성 사이에서 울려 퍼진 하나의 총성과 함께 비행형 마수의 몸이 허무하게 떨어져 내렸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탕!
타타탕!
연달아 울린 총성과 함께 아크의 병사들을 위협하고 있던 비행종들이 너무나도 쉽게 추락했다.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 귀신 같은 솜씨였다.
그리고 이모샤 중위는 보았다.
어느새 대물 저격총 모드로 변한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쥔 칼 마커스가, 전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 * *
나는 전선을 바라보았다.
'흐음.'
1급 네임드 괴암종, 돌바위의 쿠르크.
돌 바위라는 이명에 걸맞게 놈은 거대한 바위산이 통째로 움직이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몸집을 지닌 초대형 마물이다.
실제로 놈에 의해서 레드 라인이 무너졌던 적 역시도 있었으니,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역시 왔나.'
사실, 웨이브에 있어서 초대형 마수나 마물의 출현은 그다지 드물지 않다.
오히려 많다면 많은 편이지.
그러나 현재 시점이 초대형 마수와 마물들이 득실대는 후반부 스테이지가 아닌, 초반부 스테이지라는 걸 감안한다면 일반적이지는 않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얼마 있으면 찾아올 보스 스테이지(Boss Stage)를 미리 맛보는 일종의 예방 접종이라고 볼 수 있겠지.'
비록 더 디펜스가 난이도 설정 면에서 불친절함의 끝을 달리는 게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벨 디자인 설계가 아예 글러먹지는 않았다는 증거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예방접종이었다.
'뭐, 그래도 말도 안 되는 난이도라는 건 마찬가지지만.'
나는 현재 내가 지닌 화기들을 점검했다.
애석하게도 조금 전까지 신나게 난사를 해댔던 NOA-31 대마수 기관포와 CRN-842 대마물 로켓은 물론이고, BLT-47 플라즈마 발사기 역시도 아직 열이 충분히 식지 않았다.
즉, 현재 내가 지닌 화기라고 해봐야 Ark-15 자동 소총과 하부에 결합된 NO-13 유탄 발사기가 전부라는 이야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NOA-8 중기관포랑 TITAN-17 대마수 로켓도 균열 공간에 넣어둘 걸 그랬군.'
그 두 가지는 본래 내가 사용하던 중화기들이지만, 현재는 은신처에 고이 모셔놓은 상태다.
웬만해서는 쓸 일이 없을 거라는 계산하에 그렇게 한 거였으나, 나도 내가 이렇게 웨이브 때 아크에 갇히게 될 줄은 몰랐다.
'현재 내가 지닌 화력으로는 원거리에서 돌바위의 쿠르크를 잡을 수 없어.'
물론 돌바위의 쿠르크의 핵이 어디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Ark-15 자동변환 소총의 화력으로는 도저히 그 핵까지 공격을 닿게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접근전뿐.
나는 품에 있는 R-1 플라즈마 소드를 다잡았다.
예전에 챙겨두고서 평상시에는 그다지 쓸 일이 없었으나, 지금처럼 야누스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데 접근전을 해야 할 경우라면 충분히 쓸만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플라즈마 소드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음에도 파괴력만큼은 거의 최상위였으니까.
'문제는, 어떻게 아크에서 쏟아지는 화력을 뚫고서 저놈에게까지 닿느냐인데······.'
이모샤 중위에게 가서 공격 중지를 요청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한들 다른 게이트에서 하는 공격까지는 막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초대형 마물이 저렇게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는데 공격 중지를 말한다면, 당장 반역으로 즉결 심판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야.'
아크 위의 제공권은 여전히 비행형 마수와 마물들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는 상태다.
비록 처음보다는 조금 낫다고 할 수 있었으나, 초대형 마물에게 화력이 쏠리며 다시금 비행형 마수들이 설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주인님! 저기!]
그렇게 내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에스더의 외침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Red-15 게이트 쪽에서 성벽을 타고서 내려가는, 한 무리의 모습을.
'저건······.'
나는 저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특수 기동 타격대가 나섰나.'
레드 라인의 특수 기동 타격대.
비록 초반부 스테이지에 해당하는 레드 라인 소속이긴 해도, 그 실력은 다른 라인에 못지않은 엘리트들이었다.
'이건 기회다.'
저들이 나섰다는 건, 곧 아크 내에서도 초대형 마물을 향한 원거리 화력 집중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즉, 지금이라면 나 역시도 돌바위의 쿠르크를 향해서 달려들 수 있었다.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
나는 단번에 성벽을 박차고서 몸을 날렸다.
"미, 미친!"
누군가의 경악성이 울려 퍼졌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등 뒤에 있는 Z-74 제트팩을 가동했다.
쿠구구구구─!
푸른 빛의 플라즈마 엔진이 불꽃을 토해내며 단번에 내 몸이 날아갔다.
그와 함께 하늘에 있는 비행종들이 나를 보며 흉성을 토해내며 달려들었다.
[키에에에에에!]
[끼아악!]
'어딜.'
어차피 Z-74 제트팩의 에너지량을 걱정할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출력을 최대치로 높여서 비행종들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해냈다.
[카아악!]
물론 그중에서 독액을 토해내는 등 원거리 공격을 하는 마수들도 있었으나, 나는 가볍게 R-1 플라즈마 소드를 휘둘러서 그것을 베어냈다.
Z-74 제트팩의 출력을 최대치로 한 덕분에 나는 나보다 한발 더 빠르게 출발한 특수 기동 타격대보다도 더 빠르게 돌바위의 쿠르크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 크긴 진짜 더럽게 크네요.]
'이 정도면 보통이지.'
[···뭘 꼭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시네요? 얘보다 큰 놈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텐데?]
'아니까 얘기하는 거다.'
[어떻게요?]
'글쎄.'
의아함이 가득 찬 에스더의 물음을 뒤로한 채로, 나는 눈앞의 초대형 마물을 바라보았다.
"뭘 봐."
내 도발이 먹힌 걸까.
지금까지 굳건하게 아크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돌바위의 쿠르크가 나를 향해서 거대한 팔을 휘둘렀다.
마치 귀찮은 날파리를 쫓으려는 사람 같은 모양새였다.
"느려."
괴암종은 상대하기 무척이나 까다로운 마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적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애초에 아크에서 괴암종 전용 무기가 따로 개발되었을 것이다.
곧, 괴암종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가 바로 저렇게 둔한 움직임이었다.
아무래도 몸 전체가 거대한 암석으로 되어있는 데다가 일반적인 생명체와는 다른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 마물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둔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돌바위의 쿠르크처럼 초대형 마물에 속하는 괴암종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면······.'
나는 뻗어오는 돌바위의 쿠르크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는, R-1 플라즈마 소드를 뽑아 들었다.
지이잉······.
맹렬하게 솟구치는 백광(白光).
그러나 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평범한 R-1 플라즈마 소드로는 금세 고갈될 수준의 에너지를 단번에 뿜어내자, 평상시에 1m가량밖에 되지 않았던 R-1 플라즈마 소드의 길이가 어느덧 5m가량까지 치솟았다.
'어디, 요리 좀 해볼까.'
물론 아무리 에너지가 무한하다고 해도 이 정도로 R-1 플라즈마 소드를 혹사시키면 사용 시간이 극단적으로 단축된다.
그래, 내가 애초에 이 싸움을 길게 끌 생각이 있었다면 말이다.
푸슈욱!
나는 Z-74 제트팩을 여전히 최고 속도를 유지한 채로 돌바위의 쿠르크의 팔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쩌적, 쩌저적─!
깔끔하게 그려진 선과 함께,
마치 산과도 같던 돌바위의 쿠르크의 팔이 서서히 떨어져 내렸다.
< 8번째 웨이브 (4) > 끝
조금 전에 놈의 팔 하나를 단번에 날려버려서일까.
[그오오오오오오오오────!!!]
아무리 피부가 암석으로 이루어진 괴암종이라 할지라도 신체의 일부가 결손되는 건 참을 수 없었는지, 괴성을 내지르며 발버둥 쳤다.
놈이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아하니, 예상 이상의 만족스러운 성과라고 볼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 거체가 발버둥 치자 주변에 있던 마수들이 밟혀 나가며 마치 으깨진 두부처럼 되었다.
[주인님! 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따라붙은 비행종들이 나를 향해서 발톱을 드러냈다.
야누스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장 한복판에 날아든다는 건 이런 의미였다.
나는 R-1 플라즈마 소드의 전원을 잠시 껐다.
아무래도 현재 내가 당장 사용할 수 무기 중에서 돌바위의 쿠르크에게 그럴듯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다 보니, 되도록이면 아껴둘 셈이었다.
'저지해.'
[안 그래도 그러고 있거든요!]
에스더가 툴툴대는 사이, 나는 Ark-15 자동 소총을 들고는 나를 향해서 달려드는 비행종들에게 겨눴다.
장전된 총알은 A-985 폭발탄.
날개가 약점인 비행종과 거충종들에게 특히나 효과가 탁월한 무기였다.
타앙!───
쏘아진 총알과 함께 비행종의 움직임을 꿰뚫은 탄막이 놈들의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했다.
당연히, 움직임이 봉쇄된 비행종에게 남은 최후는 너무나도 뻔했다.
[9급 비행종, 거대 참새를 처치하였습니다.]
[9급 비행종, 거대 참새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8급 비행종, 검은 깃털 참수리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비행종, 검은 깃털 참수리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5급 비행종, 암흑 가오리를 처치하였습니다.]
[5급 비행종, 암흑 가오리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
.
.
[7급 비행종, 가시털 뻐꾸기를 처치하였습니다.]
[7급 비행종, 가시털 뻐꾸기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수십 마리의 비행종들이 A-985 폭발탄으로 만들어진 탄막에 가로막혀서 날개를 잃고 추락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것만으로는 몰려드는 비행종들을 모두 상대할 수 없었다.
'···확실히, 야누스의 빈자리가 커.'
이제 야누스의 힘은 거의 1급 네임드 마물 수준에 다다랐다.
더군다나 뼈 기생체 마물의 특성상, 그 힘은 단순히 야누스 혼자만이 아니라 나와 더불어서 몇 배가 넘는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
당연히 그런 야누스의 빈자리가 작으려야 작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돌바위의 쿠르크 역시도 상당한 문제였다.
비록 당장은 움직임이 둔해서 저 공격에 맞을 수가 없지만, 자칫 다른 마수들에게 발목을 붙잡힌 사이에 깔리기라도 한다면 야누스의 힘을 끌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가는, 아크에서 내가 변절자 폰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가능성이 크다.'
그 이후에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우선, 명예 능력치가 모조리 날아가다 못해 –가 되면서 '영웅의 길' 특성과 연동된 내 능력치가 어디까지 나락으로 갈지 감히 재단할 수 없었다.
이렇게 보면 '영웅의 길' 특성이 참 쓰레기 같이 보이긴 했으나, 원래는 좋은 특성임을 감안한다면 내가 문제라고 볼 수 있었다.
'여러모로 상황이 안 좋아.'
맨몸으로 전장 한복판으로, 그것도 초대형 마물 앞에 끼어든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을 야누스를 꺼낼 정도의 위기라고 느끼지 않는 건, 이유가 있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나는 방아쇠를 당기는 걸 멈추지 않은 채로 슬쩍 아크 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 무리의 팀이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레드 라인의 특수 기동 타격대.
그들이 드디어 도착했다.
* * *
레드 라인의 특수 기동 타격대.
그 긍지 높은 팀의 일원이자, 현재 특수 기동 타격대를 이끌고 있는 아르덴 소령은 두 눈을 의심했다.
'······저게 뭐지?'
비행종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한 무언가가 초대형 마물의 주위를 빠르게 비행하더니, 이내 거대한 빛줄기를 뿜어냈다.
그것을 본 아르덴 소령은 단번에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무려 5m에 가깝게 치솟은 백광.
상식을 벗어난 절삭력.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뿐이었다.
'플라즈마······ 소드?'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플라즈마 소드를 저런 식으로 과격하게 운용하지 않는다.
저랬다가는 과한 에너지 소모로 플라즈마 소드를 몇 분도 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더욱더 놀라운 건 지금부터였다.
무려 5m에 달하는 플라즈마 빔을 뿜어낸 무언가가, 제트팩을 운용하면서 무려 1급 네임드 괴암종의 팔을 단번에 베어버린 것이다.
쿠우우웅!!!
팔만 해도 어마어마한 무게를 자랑하는 초대형 마물의 팔이 떨어지자, 그것에 수십 마리의 마수들이 깔려죽었다.
직접 보고도 어처구니없는 광경.
그렇기에 아르덴 소령은 잠시 얼이 빠졌으나, 이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금 저쪽에서 교전하고 있는 자의 신원은 확인했나?"
"조회 결과, 아무래도 칼 마커스 같습니다."
"칼 마커스? 그 이방인?"
현재 레드 라인 내에서 칼 마커스의 이름은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아크의 수비에 있어서 활약한 용병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 있었던 데다가, 무엇보다도 이번에 크로노스 잔당 조사 임무에서 크게 활약했다는 이야기가 알려졌기 때문이다.
물론 아르덴 소령은 그 소문에 대해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난세는 영웅을 필요로 하는 법이었고, 이 소문 역시도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아크에서 시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퍼트린 소문이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직접 이렇게 칼 마커스가 활약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르덴 소령은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소문이 약했군.'
일개 개인이 혼자서 초대형 마물의 팔을 떨어뜨리다니······.
더욱더 기겁할 만한 건, 칼 마커스가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무수히 달려드는 비행형 마수들 사이에서 말이다.
"서둘러서 합류한다."
"예."
아르덴 소령의 시선이 칼 마커스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 * *
나는 바쁜 걸음으로 합류하기 시작한 레드 라인의 특수 기동 타격대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왔나.'
왠지 느낌으로는 한참은 걸린 기분이었으나, 실제로 내가 이곳에 도착한 지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다는 걸 생각한다면 딱 맞게 오긴 했다.
'그러면······.'
지원군도 왔겠다, 나는 다시금 돌바위의 쿠르크를 바라보았다.
쿵!
쿠우우웅─!!!
돌바위의 쿠르크는 지금도 길길이 날뛰면서 어떻게든 나를 짓밟기 위해서 발을 놀렸다.
그럴 때마다 지상에 있는 마수와 마물들이 통째로 으깨졌으나, 돌바위의 쿠르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동지애나 동료 의식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뭐, 당연한 거지만.'
비록 지금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본디 마수와 마물들은 각각의 종에 따라서 각기 다른 영역에서 다르게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서로 간에 영역 다툼을 벌이기도 하고, 약육강식의 이치에 맞춰서 먹고 먹히기도 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러한 마수와 마물들을 한데로 묶어내는 웨이브는 분명히 이질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비록 나조차도 아직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어느새 도착한 레드 라인의 특수 기동 타격대가 각자의 병기를 꺼내 들었다.
지이잉······.
R-1 플라즈마 소드와 BLT-11 플라즈마 발사기 비롯한 플라즈마 병기들이었다.
비록 내가 지닌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보다야 한 단계 급이 떨어지는 물건들이라고 볼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저들의 힘이 가짜라는 건 아니었다.
촤아아악─!
R-1 플라즈마 소드가 휘둘러지며 군인들의 앞을 막아섰던 마수의 몸이 그대로 갈라졌다.
현재 이곳에 도착한 레드 라인의 특수 기동 타격대의 인원은 총 20명.
약 한 개의 소대에 해당하는 인원이었다.
'역시. 명불허전이야.'
고작해야 일개 소대의 인원.
그러나, 그들이 난입하면서 일어난 일은 절대로 고작 따위가 아니었다.
촤아아악───!!
[캬아아아악!]
[키엑! 키엑!]
하나하나가 근접 전투의 스폐셜 리스트라는 걸 증명하듯이, 특수 기동 타격대는 거침없이 주변의 마수들을 도륙해 나갔다.
그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팀을 반으로 나눠서 돌바위의 쿠르크에게도 인원을 분배했다.
'저자는······.'
나는 선두에 서서 돌바위의 쿠르크에게 달려가고 있는 군인을 알아보았다.
레드 라인의 특수 기동 타격대의 담당관인 아르덴 소령이었다.
'아르덴이 왔다면 충분히 할만하지.'
아르덴 소령은 네이비 라인의 특수 기동 타격대 담당관인 타티아나 벨로프에 비해서 전혀 밀리는 자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아르덴 소령 같은 경우는 타티아나 벨로프처럼 에테르 적합자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순수한 실력은 아르덴 소령이 훨씬 더 높다고 볼 수 있었다.
'해볼까.'
지원군은 도착했다.
이제 남은 건, 저 빌어먹을 초대형 마물을 쓰러뜨리는 일뿐.
[그오오오오오오······!!]
돌바위의 쿠르크가 날뛸 때마다 땅이 거칠게 들썩였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아크의 군인 중 그 누구도 그 정도에 균형을 잃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Ark-15 자동 소총을 어깨에 다시 둘러메고는, R-1 플라즈마 소드를 다시 꺼냈다.
슬슬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낼 때가 됐기 때문이었다.
그때, 아르덴 소령과 내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특별히 따로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서로의 목적은 서로가 알고 있었기에, 남은 건 움직이는 것뿐이었으니까.
'에스더, 보조해라.'
[네에.]
에스더도 이 순간만큼은 상황의 심각함을 알고 있었기에, 평소처럼 투덜대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지금.'
나는 에스더의 보조를 받아서 땅을 박차고 점프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Z-74 제트팩을 가동하면서 가속을 더했다.
비록 아르덴 소령에게 Z-74 제트팩 같은 물건은 없었으나, 특수 기동 타격대 담당관이라는 직책에 맞게 그는 왼손을 뻗어서 갈고리를 사출했다.
애초에 상대가 초대형 마물이라는 걸 알고서 왔으니, 그에 걸맞은 장비를 챙겨온 것이다.
푸슈욱-!
순식간에 나와 아르덴 소령이 돌바위의 쿠르크의 몸에 올라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나와 아르덴 소령이 각자 뽑아 든 R-1 플라즈마 소드가 강렬한 백광을 뿜어내며, 사정없이 돌바위의 쿠르크를 난자하기 시작했다.
[그오오오오오오오!!!]
물론 이 정도로는 무려 1급 네임드 괴암종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는 어렵다.
놈을 죽이기 위해서는 괴암종의 심장이라고 볼 수 있는 핵을 공략해야 했다.
'돌바위의 쿠르크의 핵이 있는 위치는 전신의 정중앙.'
어찌 보면 뻔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안전한 장소에 있는 것이었다.
내가 R-1 플라즈마 소드를 최대 출력으로 키우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아르덴 소령 역시도 그렇게 했다.
지이이잉─!!!
두 개의 백광이 한껏 치솟아 올랐다.
딱히 신호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내가 몸을 날린 순간, 이미 아르덴 소령 역시도 몸을 날리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날아든 건 돌바위의 쿠르크의 가슴.
돌바위의 쿠르크의 핵이 숨어 있는 급소였다.
지금 아르덴 소령이 돌바위의 쿠르크의 핵이 어디있는지 알 리가 없었을 텐데도, 아르덴 소령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였다.
그만큼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뭐, 그렇다면 보답 좀 해볼까.'
지이이잉!
맹렬한 백광을 토해낸 두 자루의 R-1 플라즈마 소드가 교차로 스쳐 지나가며,
콰득······.
콰드드득!
두 자루의 R-1 플라즈마 소드가 돌바위의 쿠르크의 가슴을 엑스자로 베어 갈랐다.
< 8번째 웨이브 (5) > 끝
[그우우우우우우!!!]
두 개의 R-1 플라즈마 소드의 공격에 의해서 돌바위의 쿠르크의 가슴이 활짝 열리며 이내 핵이 드러났다.
그 다음부터는 간단했다.
아무리 외피가 단단한 1급 네임드 괴암종이라 할지라도, 핵까지도 단단하지는 못하기 때문이었다.
지상으로 추락하면서 동시에 충격에 대비하고 있던 아르덴 소령은 보았다.
철컥-
어느새 칼 마커스의 손에 쥐어진 Ark-15 자동 소총.
그리고 하부에 결합된 NO-13 유탄 발사기가 거친 불꽃을 토해냈다.
타아아앙!!
퉁! 퉁! 퉁!
A-985 폭발탄과 유탄이 직선을 그리면서 곧장 돌바위의 쿠르크의 핵을 향해서 날아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토록 거대한 핵을 칼 마커스가 맞추지 못할 리가 만무했다.
콰아아아아앙───!!!
거칠게 일어난 폭발이 한두 번도 아니고 연달아서 일어났다.
콰캉!
콰카카카캉!!!
그리고 아르덴 소령은 보았다.
그토록 두려워보였던 1급 네임드 괴암종이, 아크의 성벽을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초대형 마물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쓰러지는 것을.
쿠우우우우우웅!!!!
어마어마한 거체가 쓰러지자, 당연히 그 밑에 있던 마수들은 물론이고 근처에 있던 마수들까지도 폭풍에 휘말렸다.
[카아아아악!]
[끼엑! 끼엑!]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 폭풍 속에서, 아르덴 소령은 간신히 몸을 추스리며 흙먼지 속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쉽게 초대형 마물을 물리쳤다.
모두 칼 마커스 덕분이었다.
'······이런 자가, 이방인이라고?'
도대체 왜 이런 자를 이방인으로 내버려둔 건지 아크의 판단이 의심스러웠으나, 거기까지는 아르덴 소령이 알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설마 초대형 마물이 쓰러지면서 휘말렸나?
'아니··· 그 정도의 실력자가 고작 이런 것에 휘말려서 죽었을 리가 없지.'
물론 미처 예상하지 못한 어떠한 변수가 발생해서 그랬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아르덴 소령은 그마저도 부정적이었다.
그만큼 칼 마커스가 보였던 모습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일까.
한참을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칼 마커스는 모습을 드러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지?'
아르덴 소령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알 수 없었다.
* * *
[1급 네임드 괴암종, 돌바위의 쿠르크를 쓰러뜨렸습니다!]
['바위의 의지' 특성을 습득하였습니다.]
──────────────
[바위의 의지]
물리 방어력을 상승시키고, 피해를 입을 시 고통을 감소시킨다.
"상세 보기"
──────────────
'호오······.'
이런 식으로 기본적인 육체 성능에 영향을 주는 특성들은 대개 좋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기본적인 밥값은 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다.'
나는 계속해서 올라오는 알림창들을 보았다.
[초대형 마물을 처치하였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이룩하였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 상승합니다.]
[근력 능력치가 상승하였습니다.]
[18 -> 19]
[체력 능력치가 상승하였습니다.]
[21 -> 22]
[재주 능력치가 상승하였습니다.]
[14 -> 15]
[행운 능력치가 상승하였습니다.]
[12 -> 13]
[투지 능력치가 상승하였습니다.]
[9 -> 10]
[통솔 능력치가 상승하였습니다.]
[2 -> 3]
[에테르 감응력이 상승하였습니다.]
[31 -> 32]
[명예 능력치가 상승하였습니다.]
[3 -> 4]
['영웅의 길' 효과로 명예 능력치를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1 상승합니다.]
.
.
.
[투지 능력치가 10을 돌파하였습니다.]
['불굴' 특성을 습득하였습니다.]
──────────────
[불굴]
정신계 공격에 저항한다.
"상세 보기"
──────────────
'흐음. 불굴 특성까지 생길 줄이야··· 나쁘지 않은데.'
내가 작게 감탄하는 사이, 돌바위의 쿠르크의 몸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쿠르르르릉─!!!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 속.
나는 이때다 싶어서 쓰러진 돌바위의 쿠르크의 핵 근처로 향했다.
'혹시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잘됐어.'
돌바위의 쿠르크가 쓰러지며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 덕분에 당분간 마수들의 움직임은 물론이고 시야까지도 가려졌다.
여러모로 야누스에게 먹이를 먹이기에는 최적화된 환경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야누스.'
[기깃!]
'먹어 치워.'
야누스가 향한 곳은 돌바위의 쿠르크가 남긴 핵 파편들과, 신체를 이루는 암석 파편들이었다.
으적, 으적······.
확실히 암석 파편들 같은 경우는 단단하긴 한 모양인지, 엥켈렌스의 송곳니마저도 소화했던 야누스가 조금 버거워했다.
물론, 그래봤자 결국에는 다 소화되었지만 말이다.
[기기깃!]
까득, 까드득······.
까드드득!
[1급 네임드 괴암종, 돌바위의 쿠르크의 핵과 파편을 흡수했습니다!]
──────────────
[뼈 갑옷(Lv.5)] [야누스] [★★★★★★★★★★★(11성)]
아크의 장교용 기본 방호복(Lv.5)의 에너지원에 가축화시킨 뼈 기생체를 연결한 방어구.
아누스의 이름을 부여받았다.
현재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 : 38.3%
'엥켈렌스의 포효'를 사용할 수 있다.
1급 네임드 괴암종, 돌바위의 쿠르크의 핵과 파편을 흡수했다.
돌바위의 쿠르크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상세 보기"
'호오······.'
지금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10성에서 정체되었던 야누스의 장비 등급이 무려 11성으로 올랐다.
1급 네임드 괴암종의 핵을 먹어치운 보람이 있는 셈이었다.
성장이 가능한 뼈 기생체 장비가 지닌 최대의 장점이라고 볼 수 있었다.
'거기다가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도 크게 올랐어.'
마음 같아서는 당장 조금 전에 얻은 돌바위의 쿠르크의 힘을 시험해보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이제 곧 흙먼지가 걷힐 것 같았기에 기회는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 있어.'
[기깃!]
나는 야누스를 다시금 안으로 집어넣은 뒤, 흙먼지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응?'
그렇게 나가자, 나는 의외의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오셨습니까."
레드 라인의 특수 기동 타격대의 담당관인 아르덴 소령이었다.
"무슨 일이지?"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 해서 잠시 기다렸습니다."
"걱정해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그러면 바로 아크로 복귀하시죠. 곧 이곳에 다시 화력이 집중될 겁니다. 저희와 함께 가면 무사히 복귀할 수 있을 겁니다."
딱히 혼자라고 해서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굳이 거절할 필요 없는 제안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가시죠."
흙먼지가 거의 걷히고, 돌바위의 쿠르크가 쓰러진 충격파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다시금 전선에서 마수들이 흉성을 토해내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서둘러서 아크에 복귀할 필요가 있었음에도, 아르덴 소령은 태평한 목소리로 대화를 걸어왔다.
"활약이 대단하시던데··· 아크 군에 입대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제가 직접 추천하겠습니다."
"제안은 고맙지만 사양하지."
"···아쉽군요."
아무래도 아르덴 소령은 나에게 상당한 호의를 가진 듯했다.
뭐,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유능하고 강한 자를 좋아하지.'
물론 아크의 군인 중에서 그렇지 않은 자가 얼마나 될까 싶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은 자도 상당히 많다.
반면, 아르덴 소령은 보이는 그대로 매우 솔직하고 강직한 자였다.
"이쪽입니다."
아르덴 소령이 향한 곳은 Red-11 게이트였다.
아무래도 이쪽에 일부러 밧줄을 걸어 놓고서 사람이 오를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은 듯했다.
"나는 그럴 필요 없다."
나는 거침없이 Z-74 제트팩을 가동하고는 아크의 성벽 위로 튀어 올라갔다.
"아······."
"안 올라 오나?"
아르덴 소령은 잠시 얼이 빠진 채로 그것을 지켜보다가, 이내 밧줄을 붙잡고서 성벽을 기어올랐다.
"어디로 가십니까?"
"있던 곳으로 가야지."
"···그렇군요. 무운을 빌겠습니다."
아르덴 소령과의 짧은 만남은 그게 끝이었다.
아무래도 레드 라인의 특수 기동 타격대 자체가 만약의 만약을 대비한 전력이다 보니, 웬만해서는 나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보스 스테이지 같은 상황이라면 다시 나설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일단 이번 웨이브에서는 그럴만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고작 이런 초반부 스테이지에서 초대형 마물이 두 마리 이상 등장할 가능성은, 다중 웨이브가 아니고서는 없었으니까.
'그러면······.'
나는 곧장 Red-17 게이트로 향했다.
자리를 비운 시간이 제법 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하늘에 메뚜기 떼처럼 펼쳐져 있던 비행형 마수들의 숫자도 어느덧 조금은 줄어든 것 같았다.
'그래도 여전히 많지만.'
내가 자리로 돌아오자, 한동안 열 때문에 사용하지 못할 것 같았던 NOA-31 대마수 기관포의 열이 어느덧 식어 있었다.
CRN-842 대마물 로켓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슬슬 다시 해볼까.'
나는 처음과 같이 그것들을 양손에 잡고는, 조금은 줄어든 메뚜기 떼가 된 비행형 마수들을 바라보았다.
'우선, 놈들부터.'
드르르륵······.
NOA-31 대마수 기관포가 거친 회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서 압도적인 화력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콰카카카카카!!!
하늘에 떠 있던 무수히 많은 비행종들이, 마치 살충제를 맞은 벌레 떼처럼 후두둑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내 왼손에 쥐어진 CRN-842 대마물 로켓은 지상에서 달려드는 마수들을 향해 끊임없이 로켓포를 발사했다.
피우우우웅!
비록 적지 않은 희생을 치르기는 했어도, 이 정도면 나름대로 무난하게 웨이브를 막아낼 수 있을 터.
그렇게 내가 압도적인 화력을 쏟아내면서 전선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크아악!"
"무, 무슨······."
"쏴!"
갑작스럽게 일어난 소란.
그와 함께 Red-17 게이트의 성벽 위에서 난데없는 학살극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푹!
푸푸푸푹!
"서, 설마······!"
"커허헉!"
범인은 뼈 촉수였다.
하나도 아닌, 무수한 뼈 촉수.
'이건······.'
그리고 그러한 뼈 촉수들을 거느리며,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이 나를 향해서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는 병사들을 거침없이 도륙하면서 말이다.
"나원··· 단장도 참 이상한 짓거리를 시킨다니까."
변절자 룩.
바로 놈이었다.
'쯧.'
상황은 별로 좋지 못했다.
이곳은 아크의 성벽 위였고, 이곳에서는 나도 함부로 야누스를 활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아크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레드 라인의 일반적인 병사 수준으로는 변절자 룩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없다.'
내가 온 신경을 변절자 룩에게로 집중하고 있던 순간.
[주인님! 뒤!]
쐐색, 쐐새새새색!!!
내 그림자에서 솟구치기 시작한 무수한 가시들.
'이까짓 것쯤······.'
그러나, 한 가지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그림자가 솟아 올랐다.
바로 내가 착용하고 있는 Z-74 제트팩 밑의 그림자였다.
쐐애애액!!
그리고, 방심은 대가를 치렀다.
콰드득-!
반응하려고 했으나, 조금 늦어버린 탓에 등에 메고 있던 Z-74 제트팩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무래도 고장이 난 듯했다.
야누스가 보호에 나선 덕분에 검은 가시가 나까지는 꿰뚫지 못했지만, 외부에 착용하고 있는 Z-74 제트팩까지는 지키지 못한 것이다.
'···쯧.'
그림자에서 솟구치는 검은 가시.
내가 이걸 모를 리가 만무했다.
"잘도 피하셨군요, 나으리."
이죽거리는 말투.
비열함이 한껏 묻어나는 눈매까지.
'···잔영의 사르트.'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의 출현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그림자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8번째 웨이브 (6) > 끝
그 어떤 징조도 없이 Red-17 게이트의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낸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는 순식간에 주변 일대의 병사들을 도륙했다.
아무리 그림자단이라 할지라도 웨이브 때 게이트 위의 병사들을 몰살하는 이런 엄청난 짓을 하는 건 분명히 매우 큰 위험부담을 지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 모든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 기어이 저지르고야 말다니······.
'야누스가 없다면 혼자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들인데, 둘이라······.'
한창 웨이브 도중이라는 시기도 그렇고, 그림자단이 작정하고서 찾아왔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무슨 속셈이지?'
본래였다면 이 시기에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가 이런 시기, 이런 장소에서 나타날 이유는 없다.
즉, 이는 나로 인해서 무언가가 변했기에, 그림자단의 행동 역시도 변했다는 뜻이었다.
'흐음.'
어쨌거나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대체 그림자단의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희 뭐야? 여긴 왜 왔어?]
익숙한 얼굴을 본 에스더가 모습을 드러내자, 잔영의 사르트가 이죽거렸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배신자 에스더 나으리 아니신지?"
[배, 배신? 내가 언제 배신을 했다고 그래!]
에스더가 빼액 소리를 내질렀으나, 사르트는 개의치 않고서 연신 이죽거렸다.
"어라? 배신한 게 아니라면 어째서 그곳에 있으신 건지? 어서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니지. 이왕 거기 계신 김에 그쪽에 있는 나으리의 목이라도 꺾어서 가져다 주시렵니까?"
[그, 그건······.]
"왜요? 못 하시겠습니까?"
[그, 그건 사정이 있어. 너도 단장한테 들어서 알 거 아니야?]
"못 들었는데요?"
[······뭐?]
에스더가 굉장히 충격을 받은 듯이 입을 닫았다.
아무래도 에스더 입장에서는 그림자단의 변한 방침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장난은 그쯤하고."
변절자 룩이 나섰다.
나 역시도 변절자 룩을 보았다.
"이제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칼 마커스."
짧은 말이었으나, 그것만으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림자단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다름 아닌 나 때문이었다.
"대가? 무슨 대가?"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닐 텐데."
현재 뼈 가면으로 얼굴을 비롯한 모습을 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절자 룩에게서 풍겨오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우리 단의 숙원을 방해한 대가. 그건 절대로 가볍지는 않을 거다."
변절자 룩이 말하는 바는 명료했다.
나를 죽이겠다.
그리고 그건 이제 그림자단에서 에스더를 포기했다고 선언하는 것과도 같았다.
당연히 앞으로의 방침 역시도 변했다는 뜻이기도 했고.
'···아니, 아직은 확신할 수 없겠지.'
나는 그림자단의 숙원에 있어서 에스더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지금껏 그림자단이 나를 죽일 수 있으면서도 일부러 내버려두고 있었다는 점 역시도.
그런데 갑작스럽게 그림자단이 에스더를 아무렇지도 않게 포기 한다?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오히려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가 진짜 속내를 감추고서 있다고 보는 편이 타당했다.
'그건 그렇고··· 상황은 역시 좋지 않군.'
나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일대의 병사들이 학살당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병사가 전멸한 건 아니다.
여전히 몇몇 병사들은 살아 남아서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를 경계하거나, 혹은 웨이브에 맞서서 싸우고 있었다.
즉, 나도 본격적으로 야누스를 꺼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그게 목적일 수도 있겠지.'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야누스를 꺼내게 된다면, 내 정체가 변절자 폰이라는 사실을 아크에 들키게 된다.
아무리 CCTV를 부수고, 주변의 시선을 피하려고 해도 병사들의 눈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크에서 쫓기는 나를 그림자단 입장에서도 요리하기 굉장히 쉬워진다.
그림자단 입장에서도 에스더를 되찾을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추론이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추론임은 사실이었다.
'일단, Red-17 게이트의 전선에는 사실상 구멍이 났어. 곧 있으면 전선 자체가 붕괴할 가능성이 커.'
물론 아크에서도 Red-17 게이트에서 발생한 이상 사태에 대해서 감지하고 지원이 오고 있긴 하겠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거기에 더해서 나는 이제 야누스의 도움 없이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 모두를 상대해야 했으니, 나로서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쯧.'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이 자리에서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를 죽인다.
그리고, 아크의 전선을 지켜낸다.
'간결한 것 치고는 더럽게 어려워 보이긴 하지만 말이지.'
애석하게도 내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변절자 룩에게서 뻗어온 뼈 촉수가 나를 향해서 쇄도했기 때문이다.
쐐애액───!
한 개가 아니었다.
최소 수십 개의 뼈 촉수들이 내가 감히 도망치지 못하도록 사방을 에워싸며 다가왔다.
푸슈욱······.
나는 재빠르게 Z-74 제트팩을 가동해서 공격을 피하려고 했으나, 상황의 다급성 때문인지 애석하게도 고장이 나 있는 걸 잠시 깜빡하고 말았다.
'이런.'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나는 허리춤에 있는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꺼내 들었다.
비록 여전히 잔열이 남아 있기는 했어도, 사용하기에는 크게 무리가 없는 수준까지 열 관리가 된 상태였다.
지이잉─!!
곧이어서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에서 뿜어진 붉은 섬광이 변절자 룩이 뻗어온 뼈 촉수들을 난자했다.
아무리 변절자 룩의 뼈 촉수들이라고 해도, BLT-47 플라즈마 발사기 앞에서는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콰카카카!!
사방에서 흩날리는 뼈 파편들.
그러나, 그림자단의 공격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쐐색, 쐐새새색!!
뼈 촉수들이 만들어낸 그림자.
그 속에서 또다시 사르트의 그림자 가시들이 솟구치며 나를 향해 쇄도했다.
'그럴 줄 알았다.'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의 협공은 더 디펜스 내에서 악명이 자자하다.
오죽하면 저놈들을 뒤통수쳐서 죽이려고 일부러 그림자단 루트로 게임을 한 사람들 역시도 있었으니, 그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깊은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기에, 공략법 역시도 매우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
뼈 촉수와 그 그림자를 이용한 공격은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의 가장 대표적인 공격 중 하나였다.
곧, 이런 뻔하디뻔한 수에 내가 이에 당할 리가 만무했다.
지이잉!
솟구치는 파멸의 빛이 다가오는 그림자 가시들의 그림자를 순식간에 일소했다.
파스스······!
잔영의 사르트의 공격은 얼핏 보면 에테르처럼 실질적인 질량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분명히 질량을 지니고 있다.
곧, 물리적인 힘으로도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제법이시군요, 나으리. 안 본 사이에 부쩍 느신 것 같습니다."
"뭘 그렇게 오래 본 사이라고."
"저와 나으리 정도면 꽤 각별한 사이 아닙니까? 하하."
사르트는 이죽거리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면서 조용히 내 주위를 돌았다.
변절자 룩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장기전은 불리해.'
현재 내가 지닌 무기 중에서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무기는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다.
물론 A-985 폭발탄으로도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힐 수 있긴 했으나, 변절자 룩이나 잔영의 사르트 정도 되는 상대를 죽이거나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는 열관리나 내구도 측면에서 상당히 하자가 있는 무기였고, 그렇기에 이번 전투에서 중요한 순간을 위해서 잠시 넣어둘 필요가 느껴졌다.
'우선,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는 최대한 아껴둔다.'
나는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품속에 넣고는 내 오랜 파트너인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들었다.
돌고 돌아, 그 많은 중화기를 내버려 두고서 다시금 이걸 써야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이번 웨이브가 지나면 슬슬 개인 화기 쪽도 구해봐야겠어.'
Ark-15 자동변환 소총은 분명히 매우 좋은 무기이지만, 지금의 내가 주력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약간은 아쉬운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림자단 같은 자들을 상대할 때는 중화기를 사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으니 더욱더 그러했다.
"지금 무슨 생각 하십니까? 나으리."
잠깐의 탐색전이 지나가고, 잔영의 사르트가 먼저 움직였다.
쐐색!
예전에는 더없이 위협적이었으나, 이제는 견제기 정도의 수준으로 전락한 검은 가시들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어딜."
철컥-
나는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샷건 모드로 전환하고는, 그대로 폭발탄 셀을 장전했다.
콰아아앙─!
시원하게 터져 나간 A-985 폭발탄과 함께 검은 가시들이 깔끔하게 일소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견제기.
진짜는 어느새 내 앞까지 다다른 변절자 룩이었다.
부웅!
마치 건들릿 같은 모양을 취한 변절자 룩의 주먹이 나를 향해서 쇄도했다.
'무기로 막으면 안 된다.'
저런 걸 무기로 막았다가는 단번에 무기가 파괴될 게 분명했기에, 나는 보호복 안쪽에 야누스를 둘러서 양팔을 교차했다.
콰앙─!
거친 파쇄음과 함께 내 몸이 멀찍이 날아갔다.
"호오. 막았나."
변절자 룩이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으나, 나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낑낑대면서 다시금 몸을 일으킨 나는 시큰거리는 팔을 어루만졌다.
'···더럽게 아프네.'
아무리 야누스로 보호를 하고, 내 육체 역시도 강화 혈청을 비롯한 온갖 효과로 인간을 뛰어넘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절자 룩 같은 진짜배기의 공격을 당해내기는 쉽지 않았다.
상대는 마물.
그것도, 아크에서 등급 외로 분류된 네임드 마물이었다.
'나 혼자서는 무리다.'
에테르를 일으키려고 해도, 이런 격한 싸움 도중에는 에테르를 일이킬만한 집중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즉, 에스더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배신을 한 게, 나는······.]
그러나 애석하게도 에스더는 구석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혼란에 잠겨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도움을 얻기는 상당히 어려워 보였다.
'억지로 시켜도 되겠지만··· 본인의 의지가 아닌 이상, 이런 전투에서는 오히려 걸리적거릴 가능성이 크다.'
애석하게도 이 이상 생각을 이어갈 시간은 없었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다른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의 공격이 또다시 이어졌기 때문이다.
쐐새새새색!!!
뼈 촉수들과 그림자 가시들.
하나만 꿰뚫려도 치명상을 입기에 충분한 공격들이 한두 개도 아닌 수십 개가 나를 향해서 쇄도했다.
"나으리, 이번에는 못 피하실 겁니다."
정면의 공격에 방비하려던 순간, 어느새 내 그림자에서 잔영의 사르트가 나타났다.
내가 재빨리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꺼내서 대응하려 했으나, 이미 잔영의 사르트의 그림자가 그것을 붙든 뒤였다.
"그런 위험한 건 잠시 넣어두시지요, 나으리."
그 탓에 내 행동이 잠시 지연됐다.
앞에서는 뼈 촉수들과 그림자 가시들이 난무하고, 뒤에서는 잔영의 사르트가 비열하게 웃고 있는 상황.
'이건··· 조금 위험한데.'
하는 수 없이 야누스의 힘을 꺼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순간.
[···이젠, 저도 모르겠네요.]
에스더에게서 체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뒤, 곧이어서 막대한 에테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림자단에게 적의를 드러내지 못했던 에스더지만, 조금 전에 있었던 사르트의 말로 인해서 무언가 변한 듯했다.
"······음?"
에스더가 뿜어낸 막대한 에테르 파동 때문일까.
곧이어서 잔영의 사르트의 얼굴에 사나운 미소가 깃들었다.
"이런, 진짜 배신했네."
그리고, 거칠게 일어난 에테르 폭풍이 잔영의 사르트를 단번에 덮쳤다.
< 기습 > 끝
[나는 배신하지 않았어. 나는 배신하지 않았어. 나는 배신하지 않았어. 나는 배신하지 않았어. 나는 배신하지 않았어. 나는 배신하지 않았어. 나는 배신하지 않았어······.]
[난 아니야. 난 아니야. 난 아니야. 난 아니야. 난 아니야. 난 아니야. 난 아니야. 난 아니야. 난 아니야. 난 아니야. 난 아니야.]
[대체, 아니라는 데 왜 안 믿는 거야······?]
[왜 안 믿어. 왜 안 믿어. 왜 안 믿어. 왜 안 믿어. 왜 안 믿어. 왜 안 믿어. 왜 안 믿어. 왜 안 믿어. 왜 안 믿어. 왜 안 믿어. 왜 안 믿어.]
에스더의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듯한 압도적인 에테르 폭풍.
그것이 오랜 원한을 풀어내듯이 잔영의 사르트를 단번에 날려 버렸다.
"커허억······."
아무리 도망에 일가견이 있는 잔영의 사르트라 한들, 본질은 물질계에 속한 이다.
당연히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닌 에테르 폭풍에는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
나는 저도 모르게 잠시 얼이 빠진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Ark-15 자동 소총을 다잡았다.
"에스더······!"
변절자 룩의 목소리에서 배신감이 처절하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A-985 폭발탄으로 놈의 쓰라린 가슴에 쐐기를 박아 주었다.
콰아아아앙!!!
자욱하게 일어난 폭연.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변절자 룩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면 애초에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런 선택을 했구나."
폭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변절자 룩이 씁쓸하다는 듯이 말하자, 그 모습에 에스더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답했다.
[허어······ 웃기고 있어. 언제는 배신자라며? 아주 제멋대로네.]
"그건··· 사르트가 제멋대로 지껄인 거다."
[이제 와서? 가만히 보고만 있을 때는 뭐고? 됐어. 이제, 다 필요 없으니까.]
에스더의 눈이 사납게 물들었다.
[너희가 그렇게 원한다면, 돼줄게.]
그리고는 씹어 삼키듯이 덧붙였다.
[배신자.]
에스더의 주위에서 에테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건 단순히 에스더의 에테르뿐만이 아니었다.
에스더는 이제 나에게 종속된 존재고, 그렇기에 내 허락이 있다면 에스더는 내 에테르 역시도 얼마든지 함께 사용할 수 있었다.
곧, 지금 에스더가 다루는 에테르는 1급 네임드 유령종 수준조차도 뛰어넘었다는 이야기였다.
[킥, 키킥······.]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키키키키킥······!]
지금까지 에스더는 나에게 전력으로 협조한 적이 없다.
그저 적당히, 내가 한 명령을 거스르지 않을 정도로만 대응하며 나서왔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에스더! 그만둬라!"
[응, 싫어.]
변절자 룩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에스더는 코웃음 치면서 점차 에테르의 영역을 넓혀갔다.
'주변을 완전히 장악했다.'
아무리 변절자 룩이라 할지라도 전력을 다하기 시작한 에스더는 절대로 쉽게 넘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스멀스멀 주변을 장악한 에테르가 다가오기 시작한 뼈 촉수들을 붙들었다.
"정말로··· 그럴 셈이냐."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게 할 거야? 그리고,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거 좀 어이없어.]
변절자 룩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나도 더는 참지 않겠다."
[허이고, 누가 보면 지금까지는 봐준 줄 알겠어?]
"후회할 거다."
에스더가 연신 이죽거렸다.
그와 함께 변절자 룩이 잠시 물러나더니, 이내 전신에서 뼈 촉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현재 입고 있는 뼈 갑옷의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우득, 우드득······.
곧이어서 변절자 룩의 양팔에 글레이브 형태의 뼈 날이 만들어졌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전투 형태.
이제부터, 변절자 룩은 진심으로 이 싸움에 임할 생각이었다.
[옷 좀 갈아입었다고 뭐라도 될 것 같아?]
에스더의 이죽거림이 울려 퍼지기 무섭게, 변절자 룩의 몸이 순간적으로 흐릿해졌다.
그만큼 엄청난 속도로 이동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미 변절자 룩의 공격 패턴을 꿰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 다음에 변절자 룩이 어디에서 나타날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뒤.'
굳이 뒤를 볼 필요도 없이, 나는 곧장 고개를 숙여서 변절자 룩의 공격을 피해내며 응사했다.
쾅!
콰캉!
A-985 폭발탄에서 일어난 폭발이 일어났으나, 이 정도로는 변절자 룩이 두르고 있는 두터운 뼈 갑옷을 뚫을 수 없었다.
'할 수 없나.'
A-985 폭발탄으로는 큰 피해를 줄 수 없다는 걸 안 나는 빠르게 철갑탄으로 탄창을 교체했다.
아무래도 장기전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쐐액!
변절자 룩은 멈추지 않고서 곧장 나에게 공격을 이어왔다.
양 팔에 달린 뼈 글레이브가 사정없이 휘둘러지며, 당장이라도 나를 반으로 쪼갤 것처럼 다가왔다.
'역시 빨라.'
나도 뒤로 몸을 날리면서 응사하긴 했으나, 철갑탄 한두 발 정도에 저지될 정도로 변절자 룩의 갑옷은 약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총구를 돌렸다.
내가 노린 건 변절자 룩의 몸체가 아닌, 나를 향해서 달려드는 위협스러운 글레이브의 날이었다.
타앙!
"···음?"
나를 향해 휘둘러지던 글레이브가 튕겨 나가자 변절자 룩은 잠시 당황했으나, 곧이어서 공격을 이어왔다.
탕!
재차 튕겨 나가는 글레이브.
그제야 변절자 룩은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는지, 흉성을 토해냈다.
"잔재주를······!"
내가 한 일은 간단하다.
변절자 룩의 글레이브가 날아들 때마다, 글레이브의 날을 맞춰서 미세하게 공격이 빗나가게 한 것이다.
물론 내가 단순히 시간끌기만을 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중요한 건 지금부터라고 볼 수 있었다.
[뭐 잊고 있는 거 없어?]
에스더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주변의 에테르가 들썩였다.
단순히 에테르를 통한 물리력 행사가 아닌, 전혀 다른 형태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화르륵!
발화(發火).
에테르로 일어난 영적인 현상이, 마치 세상을 전부 불태우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에스더의 주변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에테르의 불꽃이 이내 변절자 룩을 덮쳤다.
나 역시도 그 틈을 놓치지 않고서 Ark-15 자동 소총의 방아쇠를 당기며 화력을 보탰다.
타타탕!!
에스더의 공격과 더불어서 철갑탄 세례가 소용이 있었던 걸까.
굳건하던 변절자 룩의 뼈 갑옷들에 자잘한 균열들이 일어났다.
후두득······.
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뼈 조각들.
스르륵!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롭게 일어난 뼈 촉수들이 그 빈자리를 채우면서 일어났던 균열이 모조리 회복되었다.
얼핏 보면 허탈해질 수도 있는 광경이었으나, 나는 알고 있었다.
'뼈 기생체의 힘은 무한이 아니야. 그만큼 변절자 룩이 힘을 소진했다는 뜻이다.'
상황이 조금 유리해지긴 했으나, 애석하게도 유리한 건 거기까지였다.
아까 에스더에게 에테르 파동을 맞고서 날아갔던 잔영의 사르트가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으으··· 진짜 배신을 할 줄이야."
[그러니까 누가 지껄이래?]
"뭐, 됐습니다. 배신자 나으리.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
잔영의 사르트의 주변에서 어둠이 일렁거렸다.
"진정한 악몽을, 보여드리죠."
악몽 재현(惡夢 再現).
일전에 나를 몰아 붙였던 잔영의 사르트의 진정한 힘이, 다시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가짜.
그러나, 공포와 고통은 진짜다.
-자, 나으리. 비명을 내질러주세요. 아주 아름다운 비명을!
물론 이전에는 사르트의 악몽 재현에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에스더, 저거 치워.'
[여부가 있겠어요?]
분명히, 잔영의 사르트가 사용하는 악몽 재현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기술이다.
하물며 내 정신을 가두는 동안 외부에서 변절자 룩이 나를 공격하게 되면 그야말로 완벽한 합공이었으니,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가 악명이 높은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말이다······.
[야, 꺼져.]
에스더의 축객령.
그리고 그건 단순히 말로 끝나는 수준이 아니었다.
"···무슨!"
사르트의 당황성이 울려퍼지고,
어느새 몰아친 에테르 폭풍이 단번에 그림자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꺼── 져──────]
한때 잔영의 사르트가 자랑했던 악몽 재현은 그걸로 끝이었다.
다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변절자 룩은 악몽 재현이 펼쳐지고 있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리 악몽 재현에서 비교적 빠르게 벗어났다고는 해도, 변절자 룩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긴 틈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늦었─'
어느새 코앞까지 다다른 변절자 룩.
그리고 치솟은 글레이브.
[기깃!]
야누스가 이 불의의 기습에 대항하기 위해서 보호복 안쪽에서 최대한 방어에 뼈 촉수들을 움직였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변절자 룩의 몸이 잠시 움찔하는걸.
"······읏!"
그렇게 이어질 변절자 룩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순간.
어째서인지 변절자 룩이 그냥 나를 지나쳤다.
'음?'
뭐지?
도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위험하다고 느꼈던 순간에 변절자 룩이 공격을 멈췄다.
그러나 이상한 건 이상한 거고,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지이잉─
BLT-47 플라즈마 발사기가 붉은 섬광을 토해냈다.
아끼고 아껴왔던 것을 마침내 쓸 기회가 생긴 것이다.
콰카카카카카카───!!!
파멸의 섬광이 지척거리에 있는 변절자 룩을 강타했다.
"크윽!"
변절자 룩은 아슬아슬하게 세운 뼈 방패로 그것을 막아냈으나, 나는 여기에서 변절자 룩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더, 더, 더.'
끊이지 않고 뻗어 나간 붉은 섬광이 이내 변절자 룩이 만든 뼈 방패를 꿰뚫고, 이윽고 변절자 룩의 왼팔이 허공에 떠올랐다.
* * *
허공에 떠오르는 왼팔.
그러나 변절자 룩은 잃어버린 왼팔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조금 전부터 머릿속에서 울리는 어떤 목소리 때문이었다.
『복종하라.』
『복종하라.』
『복종하라.』
최근 들어서 조금 잠잠해졌다 싶더니, 안심하고 임무에 나섰더니 다시 이꼴이다.
'아니··· 정확히는 칼 마커스를 다시 마주한 게 그 원인이겠지.'
변절자 룩은 자신의 가슴에 박혔던 야누스의 파편을 뽑아내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새 야누스의 파편은 완전히 녹아들어서 변절자 룩의 일부가 되었고, 그 탓에 변절자 룩은 야누스를 일부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변절자 룩이 나지막이 말했다.
"······사르트."
"끄응··· 말해."
악몽 재현이 깨진 탓에 사르트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에스더가 일으킨 에테르 폭풍은 강력했다.
"돌아간다."
"뭐? 하지만 명령은?"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지금은 물러간다."
그 말에 잔영의 사르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단장한테는 혼자 깨지는 거다?"
"···알았으니까 준비나 해라."
그런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의 앞을, 칼 마커스와 에스더가 막아섰다.
[허어, 어이가 없네. 누가 놔준 데?]
"그래야 할 거다."
[어디 한번 해봐.]
변절자 룩과 에스더 사이에서 다시금 거친 기류가 흘렀다.
곧이어서 재차 둘 사이에 격돌이 일어나려던 순간.
"그만."
[···주인님?]
격돌을 막은 건 다름 아닌 칼 마커스였다.
"가라."
[주인님! 지금이 기회에요!]
"나도 안다."
[알면서 대체 왜······!]
칼 마커스는 대답 대신에 턱짓으로 성벽 안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중대급 인원들이 바쁜 걸음으로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아크의 지원이었다.
[그러면 더욱더 몰아붙여야죠! 쟤네는 우리 편이잖아요!]
"글쎄."
[네? 그게 무슨······?]
칼 마커스는 답하지 않았다.
단지, 변절자 룩을 바라보면서 말했을 뿐.
"가라. 두 번은 없다."
"······배려라고 생각하지는 않겠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그리고 변절자 룩은 뒤돌아 섰다.
곧 있으면 아크의 지원 병력이 올 테고, 그때가 되면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는 빠져 나가기가 더욱더 어려워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냥 보내준다라······.'
알면 알수록 칼 마커스는 알 수 없는 사내였다.
물론 칼 마커스와 에스더가 막는다고 한들 빠져나갈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쉽게 놓아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상황 파악이 빠른 거거나, 아니면··· 무언가 알고 있거나.'
그중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심상치 않은 사내였다.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아크의 성벽을 나선 변절자 룩의 귓가에 다시금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강하게.
『복종하라.』
< 기습 (2) > 끝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주인님 머릿속 한번 들어갔다가 나오면 안 될까요?]
"시끄럽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변절자 룩의 팔을 슬쩍 균열 공간 안에 던져 넣었다.
무려 네임드 스컬 턴코트의 일부인 만큼, 나중에 야누스의 먹이로 줄 생각이었다.
'이번 전투의 소득치고는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어쩔 수 없겠지.'
치열했던 전투가 지나가고,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가 Red-17 게이트의 성벽 위를 떠났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안심하기에는 아직 한참은 일렀다.
아크를 집어삼키려는 웨이브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캬아아아아악!]
[끼에에에!]
나는 재빨리 NOA-31 대마수 기관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조종간을 잡았다.
오른손에는 NOA-31 대마수 기관포.
왼손에는 CRN-842 대마물 로켓.
현재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도 지속성이 좋은 중화기 조합이었다.
철컥, 철컥─
일차 목표 지점은 현재 성벽 위를 점거하고 있는 마수 무리.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나는 곧장 양손의 방아쇠를 당겼다.
쿠구구구구구─!!!
피우우웅!
쾅! 콰쾅!
에스더의 보조와 함께 오른손과 왼손이 바쁘게 움직이며 성벽 위에 있는 마수들을 향해서 막대한 화력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케헹!]
[그우우!]
내가 잔영의 사르트를 비롯한 변절자 룩과 싸우는 사이에 이미 Red-17 게이트의 전선은 사실상 대부분 무너졌다.
그나마 싸움의 여파 때문에 이곳으로 다가온 마수들이 모조리 죽긴 했지만, 그럼에도 전선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최대한 유도를 해서 망정이지··· 만약 신경 쓰지 않았다면 피해가 훨씬 더 커졌겠어.'
실제로 나는 변절자 룩, 잔영의 사르트와 싸울 때 최대한 그들의 공격이 성벽 위로 오르는 마수들을 향하도록 유도했다.
물론 거기에 더해서 내 공격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선은 사실상 붕괴하고 말았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한다면 잠시 이곳을 틀어막을 수 있겠지만··· 그래서야 다른 쪽 게이트에 부담이 더해질 뿐이다.'
그야말로 조삼모사와 같은 일이었으니, 이곳으로 온 마수들은 이곳에서 처리해야만 했다.
[카아아악!]
[키에에에에에엑!]
마수들의 온갖 괴성이 들려온다.
나도 그에 질세라 포구의 폭음으로 그 괴성과 비명에 화답했다.
물론 마수들 역시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향해서 흉성을 토해내며 달려들었지만, 압도적인 화력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후······."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요? 자기가 보내줘 놓고. 정작 한숨 쉬고 싶은 건 난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것 때문이 아니다."
에스더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뭔데요?]
"별거 아니다."
[별거 아닌데 왜 이렇게 나는 별거 같지? 기분 탓인가?]
"별거 아니니까."
[에휴······.]
그렇게 에스더와 잠깐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아크에서 온 지원 병력이 Red-17 게이트의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는 얼마 전에 나와 함께 초대형 마물을 요격했던 레드 라인의 특수 기동 타격대 역시도 함께 있었다.
"이게 대체······."
이미 나와 구면인 아르덴 소령은 성벽 위에 있는 병사와 마수들의 시체를 보고는 표정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러한 여유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새 성벽 위로 기어 올라온 마수들이 지원 병력들을 향해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각자 위치로!"
지원 병력들이 각자 전선의 빈자리를 채우고, 곧이어서 전투가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Red-17 게이트의 성벽은 물론이고, 다른 게이트의 성벽 위까지 마수들이 뻗어 나가고 있는 터라, 전선을 복구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이미 전선을 지나간 마수들로 인해서 레드 라인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겠지.'
물론 Red-17 게이트의 수비군을 제외하고도 라인 외곽에도 별도의 수비 병력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만약을 대비한 예비대로서, 이미 아크 안으로 난입한 마수들을 완전히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아크가 피해를 입은 건 안타깝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부디 아크가 큰 피해를 입지 않았기를 바라는 것과, 이곳에서 추가적인 마수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드르르륵─
NOA-31 대마수 기관포가 거칠게 회전하며 포구에서 불꽃을 토해냈다.
비록 이곳에 새로 합류한 지원 병력들의 눈치가 조금 보이긴 했으나, 그들 역시도 자신의 전장에 집중한 터라 나까지 시선을 줄 여유는 없어 보였다.
'조금 정도는 더 해도 되겠지.'
포구가 불을 뿜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그리고······.
전선이 다시금 힘을 되찾기 시작하자, 그제야 약간의 여유를 얻은 아르덴 소령이 나를 향해서 다가왔다.
나 역시도 NOA-31 대마수 기관포의 방아쇠를 놓고서 아르덴 소령을 마주했다.
아무래도 손님을 앞에 두고서 저런 걸 계속 발사하고 있다가는, 확실히 이상한 걸 눈치챌 테니까.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겁니까?"
"기습이 있었다."
"기습? 어떤 기습 말입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물들이었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최소 2급 이상의 네임드 마물들이었다."
"2급 이상의 네임드 마물··· 말입니까?"
"그래."
아르덴 소령의 낯빛이 무거워졌다.
전선이 그냥 무너진 것도 아니고, 갑작스러운 2급 이상의 네임드 마물들의 기습으로 인해서 병사들이 몰살당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2급 이상의 네임드 마물이라면, 보통 상대가 아니었을 텐데."
"간신히 목숨만 부지했다."
"···그렇습니까."
물론 그런 것치고 내 상태가 지나칠 정도로 멀쩡하긴 했지만, 아르덴 소령은 그에 대해서 딱히 의심하거나 하지는 않는 듯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르덴 소령은 나와 함께 1급 네임드급의 초대형 마물을 처리한 전적이 있었으니, 내 실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정을 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 저는 이만."
"그래."
아르덴 소령이 전선으로 돌아가고,
지원 병력의 도착과 함께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에 의해서 쑥대밭이 되었던 성벽 위가 조금씩 정리되어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버텨라! 곧 웨이브가 끝난다!"
아르덴 소령의 외침처럼, 끝도 없이 몰려들던 마수들의 숫자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줄어든 게 느껴졌다.
단순히 Red-17 게이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게이트 역시도 상대적으로 여유를 되찾으며, 총공세를 가하며 마수들을 물리치고 있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웨이브가 끝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막아!"
악에 받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큼 성벽 위의 병사들은 자신 모든 것을 짜내서 웨이브에 맞서고 있었다.
'쯧.'
나는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의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다급하게 파견된 보충 병력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평소보다도 훨씬 더 피해가 컸다.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에게 희생된 본래의 병사들까지 합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피해인 것이었다.
'안 좋아. 매우.'
물론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적은 희생을 치러온 아크라면 이러한 희생을 감당할 여력이 충분히 있다.
하지만 만약 이런 상황이 몇 번, 아니 한 번이라도 더 반복된다면?
'그때는 확실히 전선에서도 악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할 거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변절자 룩이 보였던 반응.'
처음에는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왜인지 알 것도 같았다.
'만약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이번 기습은 꼭 손해만 있었던 건 아니야.'
이제 남은 건, 손해를 본 것만큼을 새로운 이득으로 벌충하는 것뿐.
전투, 아니 전쟁이 계속됐다.
Red-17 게이트의 전선을 돌파했던 마수들이 어느덧 처리되었는지, 후방에서 새로운 지원군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웨이브 역시도 끝을 보이고 있었다.
* * *
모든 게 끝났다고 여겼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마물들은 너무나도 손쉽게 성벽 위에 있던 Red-17 게이트 소속 병사들을 몰살했다.
그로 인해서 전선에는 크나큰 공백이 생기게 되었고, Red-17 게이트의 전선이 마수와 마물들에게 점거당하는 데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이모샤 중위는 절망했다.
이제는 정말로 모든 게 끝날 수도 있겠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곳에서, 또다시 익숙한 뒷모습이 싸우고 있었다.
칼 마커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아크를 구했던 그 남자가, 또다시 홀로 마물들에게 맞서고 있었다.
난데없이 난입해서 성벽 위의 병사들을 몰살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마물들은 너무나도 강했다.
이모샤 중위로서는 감히 그들 앞에 설 수조차 없을 정도로.
하지만 칼 마커스는 그러한 강적들을 상대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서 맞섰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고, 칼 마커스는 마침내 그들을 물리쳤다.
이모샤 중위는 믿을 수 없었다.
모든 게 끝났다고 절망하던 순간, 또다시 칼 마커스가 아크를 구원한 것이다.
"아, 아아······."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칼 마커스에게 달려가고 싶었으나, 이모샤 중위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일어서라!"
무전을 타고서 번진 이모샤 중위의 목소리가, Red-17 게이트의 군인들에게 닿았다.
* * *
"후······."
[또 한숨 쉬네.]
"···이건 힘들어서 쉰 거다."
연신 울려 퍼지는 총성과 괴성.
비명과 온갖 고함이 몰아치는 전장에서 아르덴 소령의 R-1 플라즈마 소드가 마지막 마수를 베어 갈랐다.
마침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웨이브가 끝을 고한 것이다.
"끄, 끝났다······."
"하······."
본래였다면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질 법도 했건만, 남은 병사들에게는 그럴만한 여력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몸에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짜내고 짜내서 치른 전쟁.
그것이, 끝났다.
+
[Red-08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였습니다!]
[공적치가 누적됩니다.]
[+141,251 공적치]
[아크를 위기에서 구원하였습니다! 공적치가 추가로 적립됩니다.]
[+80,000 공적치]
[아크의 오랜 위협을 패퇴시켰습니다! 공적치가 추가로 적립됩니다.]
[+60,000 공적치]
[현재 공적치 : 318,125]
+
웨이브가 끝났음을 알리는 알림.
그러나 나는 이내 떠오른 숫자들을 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음?'
공적치가 왜 이렇게 높게 적립되나 했더니, 아무래도 그림자단 소속인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 역시도 웨이브의 마물로 집계된 듯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쓰러뜨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일단 막아낸 건 사실이니까.'
어쨌거나 공적치도 이렇게 쌓였겠다, 이번에는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대신할 개인 화기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2번의 업그레이드를 거친 Ark-15 자동변환 소총이 나쁜 건 아니지만, 지금부터 내가 상대할 적들을 생각한다면 부족함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슬슬 가볼까.'
그렇게 내가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할 때, 아르덴 소령이 다가왔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로 전신을 칠하고, 5레벨 수준의 보호복이 찢어질 정도로 온몸에 난 크고 작은 상처는 아르덴 소령이 겪었던 난전을 짐작하게 했다.
"칼 마커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아르덴 소령이 잠시 주위를 둘러 보더니,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전하듯이 말했다.
"당신은, 지금의 아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기습 (3) > 끝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저는, 지금의 아크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얼핏, 아니 자세히 듣기에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무려 레드 라인의 특수 기동 타격 담당관이 저런 말을 하다니······.
"칼 마커스, 당신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아크가 얼마나 틀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묻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지금 아크의 라인은 잘못되었습니다. 화이트 라인과 레드 라인을 중심으로 영산 노아와 인접한 후방 라인은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 되었고, 반면 과거에 멸망한 블랙 라인처럼 최전방은 없는 자들이 내몰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했다."
아르덴 소령이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리고는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혹시 그런 생각 해보신 적 없으십니까? 아크는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띠(Moebius)와 같은 형태가 되어야만 한다고. 모든 라인이 평등한, 아니 라인의 구분조차 없는 그런 곳 말입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아크에서 저런 말과 사고방식을 지닌 이들이 누구인지 말이다.
"저희 뫼비우스와 함께해 주십시오. 레드 라인에서 배척된 이방인인 당신이라면 저희의 뜻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뫼비우스.
더 디펜스에는 가장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자단을 제외하고서도 크고 작은 비밀 결사들이 존재한다.
지금 아르덴이 말하는 뫼비우스 역시도 그중 하나였다.
'뫼비우스라······.'
그림자단이 아크 내외로 폭 넓게 활동하며 아크를 집어삼키기 위해서 활동하는 이들이라면, 뫼비우스는 오직 아크 내에서만 활동하는 이들이다.
아크의 평등을 꿈꾸는 자들.
실제로 그림자단 루트를 진행하다 보면 뫼비우스와 마주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꽤 쉽지 않은 전투나 첩보전을 펼쳐야 할 때도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면 본래 뫼비우스는 레드 라인보다는 전방 라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비밀 결사라는 점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뫼비우스가 멀쩡히 활동하고 있다는 건······.
'아직 그 시기가 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보통 뫼비우스가 이렇게 레드 라인에서까지 활동하는 일은 없어.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는 거겠지.'
그나저나, 레드 라인의 특수 기동 타격 담당관이라는 직책까지 있는 아르덴 소령이 뫼비우스 소속이라는 건 나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뫼비우스라는 비밀 결사 자체가 레드 라인 같은 후방 라인보다는 전방 라인에서 주로 활동하는 결사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보고 뫼비우스라는 곳에 가입을 해달라, 그건가?"
"예. 맞습니다."
"나를 뭘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칼 마커스, 저는 당신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얼마나 아크를 위하는지 역시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아크를 위한다면 저희와 함께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흐으음······.
사실, 이 문제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굳이 내가 뫼비우스 같은 비밀 결사에 들어가서 아크를 적대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뫼비우스는 이용할 가치가 있는 자들이기도 하다.'
실제로 내가 그 구성원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부터가 그 증거였다.
뫼비우스는 더 디펜스에서 플레이 도중 등장하긴 하지만, 그 방향성 자체가 아크를 지킨다는 플레이어의 방향성과는 조금 어긋난 부분이 있어서 마주칠 일이 의외로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닌 세력과 힘만큼은 진짜배기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르덴 소령이 나에게서 무엇을 보고서 숨겨왔던, 그리고 앞으로도 숨겨야 할 정체를 밝혔는지는 몰라도 이는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지."
"···그건 불가능합니다. 뫼비우스에 대해서 들었다면, 이 자리에서 반드시 대답을 해주셔야 합니다."
"싫다면?"
아르덴 소령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에테르 감응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세를 낼 수 있다는 것부터가, 아르덴 소령이 얼마나 강한지 말해주고 있었다.
"입을 막아야겠죠."
"할 수 있겠나?"
"해야 하는 겁니다."
아르덴 소령의 허리춤에서 R-1 플라즈마 소드가 조심스럽게 뽑혀 나왔다.
아직 빛은 뿜어지지 않았다.
만약 빛까지 뿜어낸다면, 그건 그야말로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뜻이었으니까.
'R-1 플라즈마 소드는 야누스로도 막기 힘들다.'
플라즈마 소드를 막아낼 수 있는 건 엥켈렌스의 창 정도의 강도를 지닌 것들뿐.
만약 아르덴 소령이 R-1 플라즈마 소드를 휘두르려 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아르덴 소령을 저지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즉, 죽여야 한다.
"한 가지는 말해두지."
"···말씀하십시오."
"내가 너희에 대해서 떠벌리고 다닐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접근하지도 않았을 테지. 아닌가?"
"······맞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믿지 못하겠다면, 그걸 휘둘러라."
내가 조용히 경고했다.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그리고 몰아치는 에테르 폭풍.
[키득······.]
[죽이자?]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굳이 에스더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이, 순수하게 내가 뿜어낸 에테르만으로 아르덴 소령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아무리 아르덴 소령에게 에테르 감응력이 없다지만, 그로 인해서 일어난 현상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부디, 칼 마커스 당신이 현명한 선택을 내리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럴 거다."
아르덴 소령은 멋쩍은 미소를 짓고는 자리를 떠났다.
아직 웨이브 후의 뒤처리라는 일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레드 라인의 특수 기동 타격대인 그가 해야 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만히 아르덴 소령이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생각해야 할 게 많았다.
'뫼비우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다른 비밀 결사들 역시도 움직임을 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홍백회, 은빛여명회, 장미십자기사단, 천라지망, 수호자들, 기계교 그 외 등등······.
그림자단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지금까지 숨 죽여 지내던 다른 비밀 결사들까지도 움직임을 개시했다면 나로서는 귀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수호자들이나 기계교 같은 자들은 낫지만, 다른 결사들은 그 성질이 아예 다르다.'
수호자들이나 기계교 같은 경우는 특이한 목적이 있긴 해도, 그 자체가 아크의 존재와 충돌하지는 않는다.
즉,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딱히 내 앞길에 거슬릴 건 없다는 소리.
그러나 다른 세력들은 아니다.
은빛여명회나 장미십자기사단, 그리고 천라지망 같은 세력은 나와도 어떤 식으로든 부딪힐 확률이 컸다.
'···쯧.'
아무래도 신경을 써야 할 게 많아진 듯했다.
그리고, 내가 좋든 싫든 간에 뫼비우스와도 어떤 식으로든 결착을 지어야만 했고.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 이곳은 시신 수습 및 복구 작업으로 한창 바빠질 테니, 슬슬 은신처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병참 장교 게드윈과 메이벨 필그림을 만나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지금은 그 둘도 한창 바쁘겠지.'
병참 장교 게드윈 같은 경우는 원래 웨이브 직후 한창 바쁘게 움직일 때였고,
메이벨 필그림은 특수 목적 연구소를 진두지휘하며 아크의 모든 전선에 있는 고장 난 장비들을 수리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면··· 일단 대충 인사만 해두고 돌아가야겠어.'
생각을 마친 나는 곧장 발걸음을 돌려서 이모샤 중위가 있는 곳을 찾았다.
"······아. 오셨습니까."
"그래. 상황은 어떻지?"
이모샤 중위의 고개가 떨어졌다.
"많은··· 정말로 많은 병사들이 죽었습니다. 정말로······."
"네 탓이 아니다."
"아니요. 그렇게 책임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죽은 이들 중에는··· 만약 제가 똑바로 했다면 살 수 있는 이들도 있었을 겁니다."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는 갈라지고, 물기에 가득 잠겨 있었다.
나는 무어라고 말하려다가,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고생해라. 나는 가지."
"아······."
이모샤 중위가 말했다.
"그보다··· 칼 마커스, 만약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보다도 더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을 겁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예,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이모샤 중위는 애써 웃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티내지는 않았다.
그게 게이트 관리자가 짊어져야 할 무게였으니까.
"이만 가겠다."
"예. 조심해서 가십시오."
"그래."
8번째 웨이브.
그 치열했던 전쟁이 비로소 끝이 났다.
* * *
세 개의 거대한 왕좌와도 같은 의자 앞에서, 아르덴 소령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두 개의 빈 자리.
그러나, 왼쪽에 앉아 있는 한 존재만으로 아르덴 소령을 무릎 꿇리기에는 충분했다.
"아르덴, 너는 뫼비우스의 규율을 어겼다.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지?"
어둠 속에서 낮게 울려 퍼진 목소리는 고압적이지는 않았으나, 그 자체로 엄청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조금 전에 1급 네임드 초대형 마물을 처리했던 아르덴 소령조차도 그 목소리에는 몸을 움츠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를, 칼 마커스를 뫼비우스로 끌어들여야 했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지니고 검토한 사안인가?"
"그렇지는 않지만, 뫼비우스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런가."
이윽고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르덴 소령, 귀관을 레드 라인 특수 기동 타격대의 담당관에서 해임한다. 앞으로 삼 개월 동안 근신하도록. 이건 뫼비우스의 처분이다."
"···뫼비우스의 처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어떤 정식 절차도, 징계 위원회조차 없이 의자의 목소리는 아르덴 소령을 직책에서 해임한다 말하고 있었다.
더욱더 놀라운 건, 아르덴 소령이 아무런 반박조차 없이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또한, 앞으로 칼 마커스와의 추가적인 접촉을 금지한다."
"···예? 하지만 칼 마커스는 저희 뫼비우스에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제가 반드시 설득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고분고분하던 아르덴 소령이 갑작스럽게 목소리를 높이자, 어둠 속에 있던 인영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재고해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설득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이윽고 울린 낮은 목소리에 아르덴 소령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여기에서 잘못 말했다가는 그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본연의 공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칼 마커스는 내가 직접 만나겠다."
"······예?"
아르덴 소령은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보았다.
지금까지 어둠 속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던 이가, 서서히 일어서고 있는 것을.
어둠 속에서 드러난 얼굴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기세나 몸집으로 보나 누구도 그를 노쇠한 노인으로 보지 못할 터였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리에서 일어난 백발의 노인은, 다름 아닌 아크의 라인 중 하나를 책임지고 있는 이였으니까.
"아르덴 소령, 자네의 안목이 옳았기를 기대하지."
블루 라인 수비사령부 사령관.
빅터 준장.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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