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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 - 13

뫼비우스 > 끝

아크에서의 모든 일을 마치고서 은신처로 돌아간 나는 가장 먼저 모든 옷을 집어 던지고서 온천수에 몸을 담갔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피로도 피로지만, 알게 모르게 전투 도중에 몸 곳곳에 멍이 들거나 타박상을 입은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으그그······."

[무슨 아저씨 같은 소리를 내고 있어요?]

"아저씨 맞을걸."

[예? 그렇게 안 봤는데······ 몇 살인데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

[뭐예요 그게. 어떻게 사람이 자기 나이도 몰라? 바본가?]

물론 내 실제 나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으나, 칼 마커스가 몇 살인지 나는 잘 모른다.

상태창은 물론이고 처음에 보았던 칼 마커스에 대한 정보에도 나이는 나타나 있지 않았으니까.

"신경 꺼라."

[네이네. 어련하시겠어요.]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생명수의 힘이 더욱더 강해졌는지, 온천수에 몸을 담근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멍이 빠르게 사라지는 게 보였다.

'과연··· 조금만 더 있으면 진짜 포션도 뛰어 넘겠어.'

아니,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지금 이 정도 수준만으로도 모래바람 상단은 물론이고 아크에도 충분히 팔아먹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아직은 팔 생각은 없었지만.

'괜히 어설프게 장사를 하려다가 누군가 내 은신처를 노리게 될 수도 있으니까.'

지금까지 내 은신처가 다른 누군가에게 습격당하거나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을 찾는 게 쉽지 않아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을 습격해봤자 얻을 게 없기 때문이다.

괜히 나랑 척이나 지게 될 뿐이지.

하지만 만약 얻을 게 생긴다면?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게 된다.

생명수를 심은 온천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고, 만약 내가 포션을 팔아 치우기 시작한다면 누군가 냄새를 맡고서 그 출처에 대해서 알려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생명수의 온천에 대해서 발각되는 것도 그야말로 순식간일 터.

'물론 나중에 내 존재감이 아크 내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커지게 되면 상관없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한참은 일러.'

온천욕을 마친 나는 보호복을 입은 뒤에 은신처를 점검했다.

아무래도 비워둔 시간이 워낙 길다 보니, 제대로 살필 틈이 없었던 것이다.

'어디보자······.'

현재 내 은신처는 마수 및 마물의 침입을 막는 생명수와 방호 능력이 있는 천막 덕에 나름대로 안전한 장소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부족함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유사시에 은신처를 지킬 보초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인공지능 포탑 같은 거라도 세워두고 싶었으나, 그건 효율성에 대한 문제로 아크에서도 개발이 거의 중단된 기술이었다.

물론 구하려고 한다면야 메이벨 필그림을 통해서 구할 수야 있겠지만······.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겠지.'

그 모든 걸 감안해서 얻는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볼 때 인공지능 포탑의 방어 성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

생각해 보라.

더 디펜스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온갖 특성을 비롯한 능력치의 존재로 인해서 일반적인 병사가 보통의 평범한 사람에 비해서 매우 강하다.

그러나 쓸만한 수준의 인공지능 포탑을 만들려면, 그런 병사를 스무 명은 족히 키울 수 있는 금액이 들어간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만든 인공지능 포탑이 병사 개인을 뛰어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장래성 역시도 마찬가지.

그렇기에 인공지능 포탑 기술은 아크 내에서 아직은 개발이 중단된 상태였다.

지금보다도 훨씬 더 나중, 그러니까 아크에 인력난이 지금보다도 극심해지면 그때서야 다시 개발이 진행되겠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지.'

비록 인공지능 포탑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그에 대한 대용품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그것도 내가 현재 지니고 있는 물건들로만 해서 말이다.

나는 야누스와 일전에 모래바람 상단을 통해서 구했던 벼락 맞은 가지를 바라보았다.

'좋아, 해볼 가치가 있겠어.'

다만, 벼락 맞은 가지를 야누스에게 먹이기 전에 미리 벼락 맞은 가지를 본래의 용도로 사용할 필요성이 있었다.

야누스에게 먹일 때 먹이더라도, 일단 쓸 곳에 쓴 뒤에 남은 걸 먹이는 게 효율상 좋을 테니 말이다.

'뭐, 안 남으면 어쩔 수 없고.'

나는 벼락 맞은 가지를 챙긴 뒤, 발걸음을 옮겼다.

안 그래도 고장 난 Z-74 제트팩도 고칠 겸 메이벨 필그림도 찾아야 했으니, 겸사겸사였다.

'지금쯤이면 대충 해야 할 일도 끝났겠지.'

생명수의 온천에서 한 차례 온천욕을 마치고 난 뒤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몸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굳이 따로 휴식을 취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애초에 지금 내 몸이 그렇게까지 자주 쉴 필요가 있는 몸도 아니지만.'

온갖 특성과 강화 혈청의 능력 덕분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생명수의 온천수는 잠깐 몸을 담그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휴식을 날려버리는 엄청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

나는 은신처를 나서서 아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이번에도 활약이 굉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군요."

병참 장교 게드윈이 너스레를 떨었다.

처음에는 나를 보고서 몸을 떠느라 말도 제대로 못 하더니, 이제는 어느덧 익숙해진 듯했다.

"빈말은 됐고, 구해주었으면 하는 물건이 있다."

"빈말은 아니었습니다만, 예. 무엇을 원하십니까?"

"Ark-34 자동변환 소총."

병참 장교 게드윈의 눈이 잠시 놀람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척 평소의 얼굴을 했다.

"Ark-34 자동변환 소총이라면··· 예.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Ark-34 자동변환 소총은 지금까지 내가 사용해오던 Ark-15 자동변환 소총의 상위 기종이다.

당연히 아크의 일반 보급용 총기는 아니었고, 몇몇 특수 보직 혹은 최소 령관급 이상의 이들만 Ark-34 자동변환 소총을 지급받는다.

'당연히 그 성능 역시도 훌륭하지.'

괜히 국밥이라 불리는 Ark-15 자동변환 소총의 상위 기종인 게 아니듯이, Ark-34 자동변환 소총은 스테이지 중후반부까지도 무난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개인 화기였다.

곧, 그만큼 비싸기도 했다.

'지금까지 모은 공적치를 거의 다 쓰겠지만··· 뭐, 상관없지.'

원래 돈이든 공적치든 써야 가치가 있는 법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본래 Ark-34 자동변환 소총은 이런 스테이지 초반부에 만질 수 없는 물건이었으니 더욱더 그러했다.

기다림의 시간은 꽤 길었다.

아무리 병참 장교 게드윈이라 할지라도 Ark-34 자동변환 소총을 구하는 게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아크에서 쌓은 입지가 조금만 부족했더라도 거절당했겠지.'

이미 온갖 중화기를 반출한 시점에서 그런 게 의미가 있나 싶지만, 그만큼 Ark-34 자동변환 소총이 그만큼 엄청난 물건이라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금 기다림이 지나고 나서야, 멀찍이서 병참 장교 게드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아니다. 그럴만 했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건입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병참 장교 게드윈은 깔끔한 박스에 포장된 Ark-34 자동변환 소총을 나에게 건넸다.

나름대로 신품이라는 거겠지.

"고생했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다른 건 필요 없으십니까?"

"그래."

[현재 공적치 : 2,451]

사실 뭘 더 사고 싶어도, 이제 남은 공적치가 없는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병참 장교 게드윈 역시도 그 눈으로 그걸 다 보고 있을 테니, 그 말은 그저 인사치레 정도라고 보는 게 옳았다.

"그러면 나는 이만."

"아크로 들어가십니까?"

"그래.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그렇군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어차피 자주 볼 사이였기에, 병참 장교 게드윈과는 그렇게 간단한 인사로 헤어졌다.

본격적인 레드 라인으로 들어선 나는 메이벨 필그림이 있는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를 찾기 전에, 우선 이번에 얻은 Ark-34 자동변환 소총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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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k-34 자동변환 소총] [★★★★★★(6성)]

아크의 자동변환 소총.

자동 소총, 대물 저격총, 샷건 모드로 변경할 수 있다.

몇몇 이들만을 위해서 소수만 생산되는 물건이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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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업그레이드나 커스터 마이징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6성에 해당하는 등급.

그것만으로 Ark-34 자동변환 소총이 지닌 가치는 입증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시 훌륭해.'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현재 내가 지닌 Ark-15 자동변환 소총과 비교해서 딱히 확연히 더 뛰어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등급도 같은 6성 등급이고, 무려 메이벨 필그림을 통해서 업그레이드된 내 Ark-15 자동변환 소총은 확실히 훌륭한 물건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지금부터 할 일은, 내가 지닌 벼락 맞은 가지를 활용해서 Ark-34 자동변환 소총을 업그레이드하는 일이었다.

'지금쯤이면 돌아와 있겠지.'

나는 곧장 레드 라인을 가로질러서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를 찾았다.

그리고, 애석한 소식을 들었다.

"죄송하지만, 연구소장님께서는 현재 부재중이십니다."

"그런가. 언제쯤 돌아오지?"

"죄송합니다만, 예정에 없으십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소리였다.

'으음.'

어차피 따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여기에서 기다리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쪽으로 오십시오."

나는 연구소 직원의 안내에 따라서 손님 응접용으로 만들어진 대기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먼저 앉아 있던 어떤 노인과 마주했다.

"······."

그 노인을 보는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노인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이였기 때문이었다.

'······저자가 여기는 왜?'

내가 알기에 저자는 자리를 쉽게 비울 수 있는 신분이 아니다.

즉,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모두 의미가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 그런 건가.'

나는 이내 저 노인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건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블루 라인의 수비사령부 사령관.

빅터 준장.

그리고, 빅터 준장의 또 다른 신분 중 하나는 바로 뫼비우스의 일원이라는 점이다.

뫼비우스를 이끄는 세 개의 별.

그중 하나가 바로 빅터 준장이었다.

"안 앉나? 언제까지 거기 멀뚱히 서 있으려고?"

빅터 준장의 말에 나는 가볍게 웃었다.

"그럴 생각이다."

"호오, 말하는 버릇하고는. 연장자를 존중하라는 말도 못 들어 봤나?"

"그쪽이 먼저 그런다면 나도 한번 생각해 보지."

"참으로 싸가지없는 청년이로군."

말은 제법 험하긴 했지만, 나는 원래 빅터 준장의 성격이 저런 걸 알고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만약 다른 사람이 빅터 준장의 신분을 알고서 저런 반응을 들었다면 당장이라도 살려 달라며 넙죽 엎드렸겠지만 말이다.

"이곳에는 무슨 볼일로 왔나?"

빅터 준장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여길 찾는 이유가 달리 있나?"

"지금 나와 선문답이나 하자는 겐가?"

"굳이 의미 없는 답변을 할 생각은 없다는 거다."

빅터 준장의 주름진 눈이 나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피어오르는 기세.

명백한 노기였다.

[끼이익······.]

[도, 도망쳐!]

[꺄아악!]

에테르가 요동쳤다.

그만큼 빅터 준장이 뿜어낸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렇다 한들 내가 앉은 자세를 고쳐 앉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말이다.

"내 앞에서 그렇게 삐딱한 자세로 앉을 수 있는 사람은 또 오랜만이군."

"그런가."

"싸가지없는 청년이지만, 조금은 마음에 드는군. 그 기개가 말이야."

"칭찬으로 듣지."

빅터 준장은 내 반응에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이런 사내인 줄은 몰랐군."

"나를 아나?"

"모를 수가 있나? 이제 자네는 아크의 유명인이지 않나? 칼 마커스."

"아쉽군. 싸인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마침 내가 펜과 종이가 없군."

"뭐? 하하하!"

빅터 준장이 다시금 껄껄 웃었다.

처음의 웃음보다도 몇 배는 더 큰 웃음소리였다.

"한 가지 물어도 되나?"

"거절해도 물을 생각인 것 같다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이미 알고 있던 대로 빅터 준장은 과할 정도로 마이 페이스인 인간이었다.

[누구랑 똑같네요.]

'시끄럽다.'

에스더가 한마디 하고 있을 때, 빅터 준장이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내뱉었다.

"만약 레드 라인과 로즈 라인이 전쟁을 한다면, 누가 이길 것 같은가?"

< Ark-34 자동변환 소총 > 끝

어느 라인이 가장 강한가.

아크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했을 법한 질문.

그러나, 그 질문이 어린아이가 아닌 블루 라인의 수비 사령관에게서 나왔다면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반역.

아크에서도 반역은 대죄다.

아니, 세상 그 어느 나라라고 한들 반역에 대한 대가는 참혹하다.

그런데 빅터 준장은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는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은 것이다.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재미있는 질문을 하는데."

"궁금하지 않은가? 과연 최후방에서 안빈낙도를 누리고 있는 레드 라인과, 아크의 최전선에서 아크를 수호하고 있는 로즈 라인이 부딪힌다면 누가 이길지 말이야."

얼핏 듣기에는 당연히 로즈 라인이 이길 거라고 단언하는 듯한 말이었다.

물론, 내 생각은 달랐지만.

"레드 라인이 이기겠지."

"호,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만일 로즈 라인이 이길 수 있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테니까."

빅터 준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흥미로운 관점이군. 하지만 단지 로즈 라인이 아크의 평화를 중시했을 뿐일 수도 있지 않나? 로즈 라인은 아크의 최전방으로서 사실상 아크를 수호하고 있는 라인이야. 그런 투철한 사명감 정도는 있을 법도 하지."

"그만큼 많은 피를 흘리고 있기도 하지. 그런데도 화이트 라인과 레드 라인에 반기를 들지 못하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나?"

"하하! 그러니까, 칼 마커스 자네의 말은 결국 로즈 라인이 레드 라인에 반기를 들지 못하는 건 힘이 부족해서다?"

"그래."

"흥미로운 관점이야. 아주 흥미로운······."

빅터 준장은 껄껄 웃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봐야겠군."

"볼일이 있는 거 아니었나?"

"아, 조금 전에 끝났네."

원래도 겉치레 없는 성격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예 대놓고 나를 만나러 왔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다음에 보지. 칼 마커스."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게 될 걸세."

빅터 준장은 확신에 찬 마지막 인사말을 마지막으로 껄껄 웃으면서 손님 응접실을 떠났다.

아주 잠깐의 마주침.

그러나, 그 잠깐의 만남 사이에 있었던 대화는 절대로 얕지 않았다.

"칼 마커스님."

빅터 준장이 떠나기 무섭게, 마치 밖엣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연구소의 직원이 손님 응접실로 들어왔다.

"소장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딱 맞은 타이밍.

정말로 지금 막 메이벨 필그림이 돌아온 건지, 아니면 빅터 준장과의 선약 때문에 잠시 미뤄진 건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빅터 준장이라······.'

빅터 준장이 나를 찾아온 이유는 그다지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뫼비우스.

바로 그 비밀 결사대에 나를 가입시키기 전에, 한번 나를 살펴보러 온 것이겠지.

'굳이 뫼비우스를 적대할 필요는 없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분명히 이용할 수 있는 세력이니까.'

뫼비우스의 목표는 현재의 아크에서 이뤄내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거의 망상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뫼비우스가 지닌 힘과 세력은 오롯이 진짜였고, 그렇기에 이용할 만한 여지 역시도 많았다.

'후에 그림자단을 비롯한 다른 비밀 결사들과 대립하게 된다면,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어.'

뫼비우스.

여전히 그에 대한 생각은 확실히 정한 건 아니었으나,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새만큼은 맞춰줄 생각이 있었다.

빅터 준장이 직접 움직인 것도 그렇고, 뫼비우스에게는 그 정도의 가치가 있었으니까.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일단 메이벨 필그림을 만나야 할 때였다.

"이쪽입니다."

연구소 직원의 안내에 따라서 엘리베이터에 오른 나는 이미 알고 있던 대로 메이벨 필그림이 있는 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나는 익숙한 걸음으로 메이벨 필그림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오셨군요."

"얼굴 보기 힘들군."

"하하··· 네. 용건은 그쪽에 있는 그 물건인가요?"

메이벨 필그림이 내 어깨에 있는 Ark-34 자동변환 소총을 가리켰다.

"맞다. 하지만 그 전에 봐줬으면 하는 에 있다."

"네, 뭐죠?"

"이거다."

내가 등에 매고 있던 Z-74 제트팩을 벗어서 보여주자, 내내 평온했던 메이벨 필그림의 표정이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웬만한 충격에는 고장이 나지 않게 설계되었는데, 어쩌다 이런 거예요?"

"2급 네임드 마물의 공격을 받았다."

"2급 네임드 마물이라고요?"

"그래."

"흐음··· 그렇다면 현재의 Z-74 제트팩의 내구성으로는 2급 네임드 마물이 공격에는 버틸 수 없었다는 거군요. 좋은 정보 감사해요."

뭔가 실험용 모르모트가 된 기분이었으나, 애초에 메이벨 필그림에게 Z-74 제트팩을 건네받은 이유가 그것이었으니 불평할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내구성에 대한 부분은 개선을 하려고 했는데, 특히 더 신경을 써야겠네요. 만약 공중 전투 도중에 공격을 받았다가는 추락사를 할 수도 있으니까요."

"전적으로 맡기지."

"여기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 맡기시는 김에 그것도 한번에 할까요?"

"아니, 하나씩 하지. 이거에 대해서는 따로 부탁을 할 것도 있어서."

"그렇군요. 그러면 잠시만 기다리세요."

메이벨 필그림이 작업대로 향한 뒤, 나는 메이벨 필그림의 연구실 내에 있는 것들을 구경할 겸 그곳을 거닐었다.

'흐음··· 역시 알고 있던 대로 인공지능 포탑 기술은 거의 진척되지 않았어.'

작업대에 있는 과정들만 보아도, 현재 아크의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무기 공학에 엄청난 지식이나 기술을 정보를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라, 이러한 광경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뭐, 어차피 중요한 건 아니니까.'

인공지능 포탑 기술은 되면 좋지만, 지금 시기에서는 그다지 절실한 기술은 아니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아크가 예정보다도 훨씬 더 적은 피해를 입은 상황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다만, 아크의 힘이 예상보다 더 남아돌게 됨으로서 생기는 문제들을 경계해야겠지.'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당장 뫼비우스가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부터가 그 증거 중 하나였다.

만약 여력이 없었다면 활동을 하지 못했을 테지만, 여력이 생기니 이리저리 움직일 기미를 보이는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것도 확인해야 하는군.'

나는 내 ID 계좌에 남아 있는 크레딧을 확인했다.

이번 웨이브에 대한 대가가 입금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들어왔군.'

액수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아크에서 내가 이번에 한 활약을 꽤 높게 쳐주긴 한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Ark-34 자동변환 소총을 업그레이드하기에는 충분한 숫자였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업그레이드뿐.'

그렇게 메이벨 필그림의 연구실 내를 얼마나 거닐었을까.

한창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던 작업대의 소음이 마침내 멎었다.

끼이익······.

그리고 서서히 열리는 문.

메이벨 필그림이 손에 Z-74 제트팩을 쥔 채로 작업대에서 나왔다.

"다 됐어요."

나는 메이벨 필그램이 건넨 Z-74 제트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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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74 제트팩 MK.II] [★★★★★★(+★)(7성)]

아크제 신형 제트팩.

특수 목적 무기 공학 권위자인 메이벨 필그림이 직접 만들었다.

고속 비행이 가능하다.

내구성이 크게 개선되었다.

3레벨 방호 기술이 적용되었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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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지 않군."

"어디 그뿐이겠어요? 저 구조에서 3레벨 보호 기술을 적용하기 위해서 어떤 방식을 취했냐면······."

"나중에 듣지."

괜히 여기에서 듣고 있었다가는 오늘 안에 Ark-34 자동변환 소총을 업그레이드 할 수 없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러면··· 아까 말씀하셨던 게 어떤 말씀인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Ark-34 자동변환 소총을 업그레이드를 할 때, 이걸 사용해서 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는 내가 품에서 벼락 맞은 가지를 꺼냈다.

이 순간 사용하기 위해서 아끼고 아껴왔던 것이었다.

"이게··· 뭐죠?"

"보면 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에게서 벼락 맞은 가지를 받아간 메이벨 필그림이, 작업대로 향하더니 온갖 측정 기구로 벼락 맞은 가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오······."

"······말도 안 돼."

"서, 설마······?"

벼락 맞은 가지를 살피던 메이벨 필그림에게서 온갖 추임새가 흘러나왔다.

보고 있는 입장에서는 어딘가 조금 웃기기도 한 모습이었다.

[···주인님, 쟤 좀 이상해요.]

'나도 안다.'

현직 유령종조차도 괴상하게 생각할 정도였으니, 메이벨 필그림의 연구욕은 진심인 듯했다.

아니, 달리 말하면 그런 메이벨 필그림의 연구욕을 자극할 만큼 벼락 맞은 가지가 특별한 물건이라는 뜻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게··· 대체 뭐죠? 어떻게 나뭇가지가 이런 막대한 자기장을······."

"가능하겠나?"

"자, 잠시만요! 이거 잘만 이용한다면 엄청난 게 나올 수도······."

"맡기지."

"저, 정말로 저에게 맡겨도 괜찮겠어요? 이런 물건이라면 충분히 다른 용도도······."

"아니, 이곳에 써주었으면 한다."

어차피 Ark-34 자동변환 소총 이상의 무기로 간다면, 굳이 벼락 맞은 가지를 사용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가 된다.

즉, 벼락 맞은 가지는 딱 지금 사용하는 게 가장 좋다.

무엇보다도 후딱 써버려야 남은 걸 야누스에게 먹여서 내 이차적인 목적도 이룰 것 아닌가.

"아, 쓰고 남은 건 나에게 다시 돌려주었으면 한다."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메이벨 필그림이 바쁜 걸음으로 작업대로 돌아갔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워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주인님.]

'왜?'

[왜 그렇게 떨고 있어요?]

'떨어? 내가?'

[네. 지금 식은땀 흐르는데요?]

'······.'

솔직히 말해서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비록 Ark-34 자동변환 소총이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처럼 내구도가 극한으로 낮은 건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벼락 맞은 가지를 사용하다 보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초심자의 행운 효과도 끝났었지.'

기분 탓일까.

왜인지 모를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게.

쿵!

쾅! 쾅!

메이벨 필그림의 작업대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왜인지 곧이어서 뽀각- 이나 빠각- 같은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기분.

빠각-

[주인님?]

'······아무것도 아니다.'

하마터면 그대로 작업실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갈 뻔했다.

만약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정말로 업그레이드 도중 어떤 대참사가 일어날지 알면서도 말이다.

"후우······."

인고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작업대의 문이 열리면서 메이벨 필그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찌릿, 찌릿─

기분 탓일까.

메이벨 필그림이 작업대의 문을 열고서 모습을 드러내자, 몸이 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정전기라도 생긴 듯한 기분.

'설마······.'

나는 메이벨 필그림의 손 위에 들려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성공이에요."

그와 함께 나는 빼앗듯이 메이벨 필그림의 손에 있는 Ark-34 자동변환 소총을 받아들었다.

──────────────

[Ark-34 자동변환 소총 Mk.II] [★★★★★★(+★★)(8성)]

아크의 자동변환 소총.

자동 소총, 대물 저격총, 샷건, 뇌전총, 레일건 모드로 변경할 수 있다.

몇몇 이들만을 위해서 소수만 생산되는 물건이다.

벼락 맞은 가지를 사용하여 전체적인 위력과 내구성이 모두 상승했으며, 탄환에 번개의 힘을 부여할 수 있다.

"상세 보기"

──────────────

'이건······.'

엄청난 게 튀어나왔다.

< Ark-34 자동변환 소총 (2) > 끝

'8성이라······.'

고작 한 단계를 업그레이드했을 뿐인데, 무려 장비 등급이 2성이나 올랐다.

그만큼 이번 업그레이드의 재료로 사용한 벼락 맞은 가지의 위력이 엄청났다는 뜻이었다.

'거기다가, 레일건 모드라······.'

본래 벼락 맞은 가지를 재료로 사용해서 Ark-34 자동변환 소총을 업그레이드했을 때 추가되는 모드는 뇌전총 모드 하나뿐이다.

그런데, 레일건 모드가 추가되는 건 나로서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레일건이라······.'

본래였다면 레일건은 아무리 하위 등급의 물건이라도 지금 시점의 내가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아니, 설사 스테이지 중후반부를 가더라도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런데 아무리 벼락 맞은 가지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Ark-34 자동변환 소총의 변환 모드 중 하나에 레일건 모드가 추가되다니?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메이벨 필그림과의 친밀도가 영향을 끼친 건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

아니면 그냥 운이 좋았던 걸 수도 있으나, 확실한 건 운이 나에게 따라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시험해 보고 싶은데··· 그러지 않는 게 좋겠지.'

만약 이 레일건 모드가 내가 알고 있는 레일건과 비슷한 위력을 낸다면, 어디에 쏘든지 간에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큰 반향이 일어날 게 뻔했다.

나로서도 괜히 이런 시기에 어그로를 끌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 레일건을 시험하는 건 조금 나중으로 미뤄둘 생각이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메이벨 필그림이 살며시 다가왔다.

"어떤가요?"

"훌륭하군."

그것 말고는 말이 필요 없을 수준이었다.

"역시 그렇죠? 이래 보여도 벼락 맞은 가지의 자기장을 여러 겹으로 이용해서 코어를······."

"음, 설명은 나중에 듣지."

"그래요? 아쉽네요."

메이벨 필그림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다른 건 필요한 거 없으신가요?"

"아쉽게도 가진 돈이 그게 전부라."

"그런가요? 그것도 아쉽네요."

혹시 불쌍한 척하면 공짜로 한번 업그레이드를 해주지 않을까 했는데, 과연 프로답게 어림도 없었다.

"그러면, 나는 이만 가지."

"네, 다음에 뵈요."

"그 전에. 그건 줘야지."

"뭘 말인가요?"

메이벨 필그림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뻔뻔한······.

"벼락 맞은 가지. 남은 게 있을 텐데?"

"어··· 그, 글쎄요? 남은 게에··· 있었던가? 아, 그것보다 뇌전총 모드와 레일건 모드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설명해드릴 게 있는데······."

아무래도 벼락 맞은 가지가 단단히도 탐이 났는지, 메이벨 필그림은 슬쩍 시치미를 떼려는 듯했다.

"흐음, 그렇다면 내가 직접 들어가서 찾아봐도 되나?"

"···그러고 보니, 마침 조금 남았던 것도 같네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이대로 두었다가는 내가 연구실 내부를 개판으로 만들 거라고 생각했는지, 메이벨 필그림은 순순히 남아 있는 벼락 맞은 가지를 가져왔다.

예상했던 대로 처음보다 절반이 조금 안 되게 남은 양이었다.

"따로 챙긴 건 없겠지?"

"···없어요 없어. 치사해서 진짜."

메이벨 필그림은 뭔가 평소답지 않게 욕심을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그 정도로 벼락 맞은 가지가 탐이 났다는 뜻이리라.

'조금 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메이벨 필그림에게 벼락 맞은 가지를 손톱 정도 떼어서 건넸다.

"······뭔가요? 이건."

"수고의 표시라고 생각해라."

그와 함께 실망감이 가득하던 메이벨 필그림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저, 정말인가요?"

"그래."

"고마워요!"

메이벨 필그림이 내 손을 잡고서 붕붕 흔들었다.

"이것만, 이것만 있으면······."

메이벨 필그림의 눈이 탐욕인지 개발욕인지 모를 무언가로 번들거렸다.

'잘한··· 거겠지?'

내가 단순히 메이벨 필그림에게 고마워서 벼락 맞은 가지를 건넨 건 아니었다.

어차피 남은 벼락 맞은 가지는 모조리 야누스에게 먹일 생각이었으니 벼락 맞은 가지가 얼마나 있든 별로 차이도 없었던 데다가, 무엇보다도 이번에 레일건 모드가 추가된 걸 보니 메이벨 필그림과의 친밀도가 생겨서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레일건 모드가 생긴 건 친밀도가 아니라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이런 전례가 없었다는 걸 생각해야 해.'

이번에 나는 메이벨 필그림을 위기에서 구했다.

일종의 생명의 은인인 셈.

당연히 메이벨 필그림이 나를 대하는 태도 역시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레일건 모드 역시도 그로 인한 변화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아크의 무기 수준이 지금보다 높아져서 나쁠 게 없지.'

메이벨 필그림이 벼락 맞은 가지를 연구해서 무얼 만들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로 인해서 아크의 무기 수준이 지금보다 한 차례 진보한다면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목표는 아크를 지키는 것이었고, 이런 작은 대가로 아크의 힘이 강해지면 이득이었다.

"이 은혜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갚을게요. 꼭이요."

"뭐, 굳이 그러겠다면."

그러면 나야 좋지.

"그러면 이만 가지."

"네! 조심히 가세요!"

메이벨 필그림은 지금부터 벼락 맞은 가지를 이용해서 무얼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는 눈이었다.

그렇게 나는 Ark-34 자동변환 소총을 소중히 끌어안은 채로 메이벨 필그림의 연구실을 나섰다.

'Ark-15 자동변환 소총은 모래바람 상단에 넘기면 되겠지.'

지금까지 내가 사용했던 Ark-15 자동변환 소총은 성능 면에서 꽤 훌륭한 편에 속한다.

뭐라고 해도, 무려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장 메이벨 필그림이 직접 업그레이드한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아니면 예비용으로 균열 공간 안에 넣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지금까지의 경험상, 전투 도중에 무기가 과열되거나 파손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그러면······.'

마침내 메이벨 필그림을 통한 볼 일도 끝났으니, 이제는 진짜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를 나선 나는 레드 라인을 가로질렀다.

이제까지의 웨이브와는 달리 한번 전선이 뚫렸다는 걸 증명하듯이 레드 라인의 풍경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무너진 외곽 도시의 건물들.

건물들의 잔해와 그걸 수습하는 작업팀의 움직임.

곳곳에서 들리는 신음과 비명.

아무리 아크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화이트 라인과 레드 라인이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안전함일 뿐이다.

어떻게 보면 아주 잠시, 그것도 게이트 하나의 구역 중 일부 전선이 뚫였을 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레드 라인의 피해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나마 아크에서도 안전한 축에 든다는 레드 라인이 이 모양이었으니,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새삼스레 와닿았다.

"······."

왜일까.

이제껏 질리도록 보아왔던 광경일 터인데도 불구하고, 직접 눈앞에서 보는 그 광경은··· 무언가 달랐다.

"더! 더! 더!"

"끄으으······."

"생존자 발견! 의료팀 불러!"

무너진 잔해 속에서 기적적으로 생존자를 발견하자, 작업팀과 의료팀이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잠시 갈 길도 잊고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이내 생존자가 살아나오는 걸 보고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

"바놀 중령님께서 찾으십니다."

Red-17 게이트에 도착한 내가 이모샤 중위에게 가장 먼저 들은 건 바놀 중령이 나를 찾는다는 이야기였다.

"바놀 중령이?"

"예."

"이유는?"

"거기까지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중요한 일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가. 알았다. 곧 찾아가지."

나는 이모샤 중위를 보았다.

이모샤 중위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위태한 듯하면서도 꿋꿋이 선 채로 복구 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모샤 중위에게 있어서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의 난입은 그야말로 자연재해나 다름없었지만, 고지식한 이모샤 중위가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다.

결국, 남은 건 결과뿐.

Red-17 게이트의 전선은 무너졌고,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게 지금의 이모샤 중위에게 남은 것이었다.

"괜찮나?"

"···예.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로 괜찮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내가 무어라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그러면 수고해라."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평소처럼 지내주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칼 마커스."

"말해라."

"···다시 한번, 정말로 감사합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가 Red-17 게이트에 난입한 건 나 때문이다.

그러나 이모샤 중위가 그 사실을 알 리가 만무했기에, 이렇듯 나에게 감사 인사를 표하고 있었다.

어째 조금 양심에 찔리는 기분이 들었으나, 굳이 그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단지, 이 말만을 해둘 뿐.

"네 탓이 아니다."

"···아닙니다. 제가 조금만 더 제대로 했었다면 많은 이들이 죽지 않았을 겁니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마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거다."

"······."

이모샤 중위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말이 나을 것이다.

능력 이상의 것을 짊어지려 하는 자는, 결국 무너지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러면··· 다음에 보지."

이모샤 중위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대답 대신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을 뿐이지.

'이 정도면 되겠지.'

나는 곧장 바놀 중령의 집무실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왔나."

"무슨 일이지?"

"아무래도 자네의 도움이 또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아주 알차게도 부려먹는군."

이번에 크로노스 조사를 다녀온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부탁이라니······.

이건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어쩔 수 없네. 이번 일은 자네가 벌인 일이기도 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크로노스 측에 지원할 물자 지원대가 결정되었네. 자네도 그곳에 꼭 참여해주었으면 좋겠군. 아니, 그래야만 하네."

"···생각보다 빨리 진행됐군."

그 말마따나 이 정도로 아크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건 나로서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최소 웨이브가 세 개 정도는 지나고서야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트리파티 가문 쪽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였네. 아, 혹시 트리파티 가문에 대해서 알고 있나?"

"대충은 알고 있다."

"생각보다 아크 내의 소식에 밝군. 뭐,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네만."

트리파티 가문이라······.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가네샤 트리파티였으나, 아직 가네샤 트리파티는 내가 이 일을 주도했다는 걸 모른다.

아직 칼 마커스가 변절자 폰이라는 사실을 가네샤 트리파티에게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아크에서 상대적으로 전방 라인에서 기반이 있는 트리파티 가문에서 이번 크로노스 잔당과의 동맹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흐음, 속셈이 있나보군.'

뭐, 설사 어떤 속셈이 있다고 한들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기에, 기꺼이 이 기회를 이용해주기로 했다.

"아, 자네가 알아둬야 할 게 또 있네."

"뭐지?"

"이번 지원대의 규모는 단순 조사팀 때의 규모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네. 당연히 그에 걸맞은 이가 지원대를 이끌어야 하지."

딱히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단순 조사팀과는 달리, 지원대는 막대한 양의 물자를 운송해야 한다.

당연히 그걸 호위할 병력 역시도 필요하고, 그걸 지휘하는 이 역시도 이제까지의 외부 파견팀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인물이 나설 거라는 이야기였다.

"본론만 말해라."

"지원대를 이끌 이가 정해졌네."

"그게 누구지?"

"그건······."

이윽고 바놀 중령의 입술이 달싹이고, 나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 Ark-34 자동변환 소총 (3) > 끝

이윽고 바놀 중령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가씨가 이번에 크로노스 지원대를 이끌기로 했네."

아가씨.

아크에서 그렇게 불리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아가씨··· 라고?"

"알고 있나?"

"······아니. 모른다."

아는 척을 할만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나는 짐짓 모르는 척했다.

"그런가? 저번에 한번 아가씨와 만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저번에 Red-17 게이트 위에서 단장과 마주했던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당시 상황을 생각한다면 바놀 중령이 모르고 있는 게 더 이상하긴 했다.

나로서도 실수가 나온 것이다.

"뭐··· 어쨌든 모른다니 말해주지. 아가씨라는 공식적인 직책이 있는 건 아닐세. 단지, 아크에 있는 모두가 아가씨를 그렇게 부르고 있을 뿐이지."

"······."

"아크에는 왕이 없지만, 비슷하게 부를 수 있는 자는 있지. 아가씨 역시도 그러한 맥락일세. 그러니까··· 일종의 아크의 공주인 셈이지."

바놀 중령의 말대로였다.

비록 아크가 왕정 국가 같은 건 아니었기에 공주 따위로 부르지 않았을 뿐이지, 단장의 아크 내 신분은 공주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현재 아크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쥔 화이트 라인을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엘 가문.

아가씨는 바로 그 엘 가문의 금지옥엽으로서, 말 그대로 아크의 공주나 다름없는 신분이었다.

'아니··· 그 신분은 오히려 별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

아가씨의 진정한 정체는 익히 알고 있듯이 그림자단을 이끌고 있는 단장이다.

훗날, 아크를 집어삼킬 존재.

그렇기에 이번 여정에서 물자 지원대를 이끄는 자로 아가씨가 발탁되었다는 소식은, 나에게 있어서 절대로 달가울 리가 만무했다.

'···외통수군.'

이번 여정은 나로서는 거절할 명분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여정이다.

만약 내가 거절했다가는 물자 지원대와 크로노스 측이 접촉 후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동맹 자체가 엎어질 수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림자단의 단장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점이었다.

즉, 나로서도 어떻게든 이번 여정에 참여해서 동맹을 무사히 성사시켜야 했다.

"···그런가. 알았다."

"뭐 문제 있나?"

"아니, 없다."

상황은 대충 알았다.

하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다.

예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출발은 내일이라고 했나?"

"그렇네."

"그러면 내일 다시 찾아 오지."

"가는 건가?"

"할 일이 많아서."

"그런가. 알겠네. 내일 Red-15 게이트 앞으로 오면 될걸세."

바놀 중령과의 만남 후, 나는 바놀 중령의 집무실을 나섰다.

영 좋지 않은 소식만 들은 기분이었지만, 언젠가 들어야 할 소식이기도 했다.

'단장이 직접 움직였다라······.'

역시 그 원인에는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의 패퇴가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지금껏 침묵했던 에스더의 진정한 배신까지도.

'뭐, 그건 에스더가 홧김에 질렀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그러나 에스더 입장에서도 이제는 돌아가기에 조금 멀리 온 감이 없잖아 있는 것도 사실.

늘 에스더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염려해 왔던 나로서는 좋은 소식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홧김에 한 배신이었으니, 에스더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른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

갑작스럽게 들려온 에스더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하고 말았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에스더는 나에게 종속된 존재였고, 그렇기에 내가 일부러 의사를 전달하려 하지 않는 이상 내 마음 속을 읽을 수 없다.

그러나, 꼭 생각을 직접 읽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게 있는 법.

[저한테 뭐 잘못했죠?]

···역시 귀신 같은 눈치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인 듯했다.

'글쎄.'

[했네, 했어. 욕했죠?]

'아니.'

[안 했으면 그렇게 극구 부인할 이유가 없을 텐데요? 그러면 당장 머리 열어봐요. 제가 직접 들어가서 한번 볼게요.]

'선 넘는군.'

오랜만에 에스더에게 실험탄 GHOST-157의 따가운 맛을 보여줄까 하다가, 착한 내가 한 번은 참기로 했다.

[···방금 주머니에서 뭐 만지작거린 거예요? 제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죠?]

'맞을 걸.'

[······우리 주인님, 농담도 잘 하셔라.]

에스더가 금새 깨갱하면서 꼬리를 내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법보다는 주먹이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 너는 괜찮나?'

[뭘요?]

'아가씨의 정체가 단장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곧 마주칠 텐데 별 생각없냐고 묻는 거다.'

[뭐······ 아무렇지도 않다면 당연히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미 엎어진 물인데. 단장도 이해할 거예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속 편한 대답이었다.

지금까지 고민한 내가 멍청이처럼 느껴질 정도로.

'하긴, 뭐. 단장과 에스더는 특히 각별했으니······.'

애초에 내가 고민할 문제도 아니긴 했다.

단지, 내일 마주하게 될 단장의 반응이 걱정되었을 뿐.

'일단 돌아가야겠지.'

어차피 앉은 자리에서 고민해봤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으니, 해야 할 일을 할 셈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

은신처로 돌아온 후.

나는 가장 먼저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비롯한 중화기들은 균열 공간 내에 밀어 넣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함이었다.

'저번에는 균열 공간 내에 미리 중화기를 안 넣어놔서 곤란해졌었지.'

그러나 이번에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예전 장비가 된 NOA-8 중기관포와 TITAN-17 대마수 로켓을 모두 균열 공간 내에 넣어두었을 뿐만 아니라, Ark-15 자동변환 소총 역시도 넣어 두었다.

예비용 화기는 충분해진 셈이다.

'물론 가장 좋은 건 균열 공간 내에 있는 것들을 쓸 상황 자체가 안 나오는 거겠지만 말이지.'

예비용은 어디까지나 예비용일 뿐.

현재 내가 주력으로 사용하는 주력 병기들보다는 화력이 부족한 게 당연했다.

'그러면··· 내일 떠나기 전에 은신처 작업부터 마무리해볼까.'

현재 내 은신처는 생명수로 인해서 마수와 마물들이 들어오기 어려운 장소가 되었다.

거기에 더해서 있는 장소 자체가 영산 노아 한복판이었으니,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마수나 마물이 이곳까지 들이닥칠 일은 없을 거라고 보는 게 옳다.

하지만······.

'이곳을 찾아오는 불청객이 꼭 마수나 마물들뿐만은 아닐 테지.'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바로 그걸 위함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야누스."

[기깃!]

나는 품속에 고이 모셔두었던 반으로 조각난 벼락 맞은 가지를 야누스에게 내밀었다.

Ark-34 자동변환 소총을 업그레이드한 뒤에 남은 것이었다.

"먹어."

[기잇!]

내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야누스는 사양하지 않고 벼락 맞은 가지를 단번에 집어삼켰다.

아그작, 아그작-

까득, 까드득······.

불에 탄 나뭇가지를 이렇게 맛있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의 식사.

그렇게 시간이 얼마 흐르자, 마침내 소화를 마친 야누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벼락 맞은 가지'의 힘을 흡수하였습니다.]

──────────────

[뼈 갑옷(Lv.5)] [야누스] [★★★★★★★★★★★(11성)]

아크의 장교용 기본 방호복(Lv.5)의 에너지원에 가축화시킨 뼈 기생체를 연결한 방어구.

아누스의 이름을 부여받았다.

현재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 : 39.6%

'엥켈렌스의 포효'를 사용할 수 있다.

벼락 맞은 가지의 힘을 흡수했다.

벼락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상세 보기"

──────────────

[기이이이잇───!!]

야누스가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파직, 파지직!

그와 함께 주변에 번개로 이루어진 폭풍이 들썩였다.

말 그대로 벼락의 힘을 품게 된 것이었다.

[······우리 뼈돌이 왜 이래요?]

"뭘."

[애가 좀 반항기가 생긴 것 같아서요.]

"쓸데없는 소리를."

에스더의 시답잖은 소리를 뒤로한 채로, 나는 야누스에게 벼락 맞은 가지를 먹인 진짜 목적을 사용하기 위해서 야누스에게 의지를 전달했다.

[기깃!]

이윽고 야누스에게서 벼락의 힘을 품은 길다란 뼈 촉수 하나가 뻗어 나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무려 수십 개의 뼈 촉수들이, 각각 벼락의 힘을 머금은 채로 땅밑으로 스멀스멀 들어가기 시작했다.

'좋아.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대로야.'

본디 뼈 촉수들은 야누스에게서 떨어진 뒤 조금의 시간이 흐르면 괴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벼락의 힘을 품고 있다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뼈 촉수들에게 벼락의 힘을 주입한 채로 분리하게 되면, 뼈 촉수들은 벼락의 힘 그 자체를 에너지원으로 삼아서 기존 시간보다 월등히 긴 시간 동안 형태와 힘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면······.'

내가 살며시 야누스에게 의지를 전달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땅에 매복되어 있었던 뼈 촉수들이 나를 향해서 쇄도했다.

쐐새새새색!

물론 그 뼈 촉수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나에게 닿지 못했으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분명히 야누스와 분리된 지 시간이 흘렀는데도 움직였어.'

즉, 벼락의 힘 그 자체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해서 뼈 촉수를 야누스에게서 떼어놓고도 생존시키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좋아. 성공했어.'

이제 남은 건 간단하다.

내가 은신처를 비울 때마다, 벼락의 힘을 품은 뼈 촉수들을 은신처 주변에 매설해두고 자리를 비우면 된다.

그렇게 되면 혹시 모를 마수나 마물의 침입은 물론이고, 불청객의 방문까지도 막아낼 수 있으리라.

'그뿐만이 아니다.'

은신처의 방비도 방비지만, 야누스가 품게 된 벼락의 힘은 단순히 에너지원 이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뼈 촉수에 벼락의 힘을 부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자기장 역시도 일으키는 게 가능했다.

'이걸 이용한다면 벼락의 힘을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금속에 대한 통제권을 어느 정도 가지는 것도 가능하다.'

여러모로 야누스에게 벼락 맞은 가지를 먹이는 선택이 옳았던 셈이었다.

'그러면······.'

나는 은신처를 정비했다.

*

다음날이 됐다.

머나먼 길을 떠나기에 앞서서, 은신처를 위장막으로 덮고, 여러가지 준비를 해놓고서야 나는 본격적으로 은신처를 나섰다.

벼락의 힘을 품은 뼈 촉수들을 인근과 은신처에 심어두는 것 역시도 잊지 않았다.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돌아올 때까지는 유지할 수 있겠지.'

물론 침입자가 찾아올 확률 자체는 낮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방비를 해두는 게 내가 마음이 편했다.

'뭐, 어차피 훔쳐갈 것도 별로 없긴 하지만.'

기껏해야 텐트와 위장막. 그리고 생명수를 통째로 뽑아가는 것 정도?

'음··· 생명수는 조금 클 수도.'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나는 Red-15 게이트로 향했다.

바놀 중령의 말대로 Red-15 게이트로 향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규모로 이뤄진 지원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딱 봐도 백 명은 넘는 규모.

그야말로 대규모의 지원대였다.

'거기다가, 차량까지 있다.'

보통 아크 바깥에서는 소음이나 안전상의 문제로 차량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물자 이송용으로 차량을 사용했다는 건, 지금 지원대의 전력이 혹시 마수 무리와 마주쳐도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흐음······.'

점점 더 가까워지는 지원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지원대에 속한 이들의 면면을 하나씩 살폈다.

익숙한 얼굴들도 있고, 아닌 얼굴들도 있다.

아르덴 소령, 칼라킨, 힐데가르트, 아이리스, 겁쟁이 벨 등등······.

하지만 그런 익숙한 면면 중에서도 단연코 내 이목을 가장 잡아끄는 이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남들보다 한 곳 높은 곳에서 지원대를 지휘하고 있는 이.

'······역시, 있군.'

아가씨.

크로노스 지원대를 이끌 책임자이자, 아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지닌 그림자단의 단장.

"왔니?"

그 여자가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 물자 지원 > 끝

"······."

"······."

설마하니 첫 만남부터 저쪽에서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기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첫 만남부터 저쪽에서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기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잘 있었니? 에스더.]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그 잘나디 잘난 아가씨는 무려 에테르로 목소리를 전달하는 기기괴괴한 묘기를 선보이며 에스더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 응. 단장. 오랜만이야.]

[룩에게 이야기는 들었어. 하지만 그게 네 진심이 아니라는 건 알아. 보나 마나 사르트 그 자식이 긁어댔겠지. 그렇지?]

[······.]

[걱정하지 마, 에스더. 나는 반드시 너를 되찾을 테니까.]

[······.]

에스더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한 것이리라.

'별로 좋지 않은데.'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그저 대화가 끝날 때가 된 건지는 몰라도 아가씨가 말했다.

[남은 이야기는 천천히 하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아가씨는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섰다.

[······.]

뒤돌아서는 아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에스더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

아가씨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게 나에게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은 들지 않았다.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때.

어디선가 익숙하고 호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나를 향한 것이었다.

"와하하! 형제여! 역시 너도 왔었군!"

목소리만큼이나 호탕한 덩치.

예전보다 늘어난 듯한 상처.

특유의 대머리와 문신까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이였다.

"쿠릴타."

"이야기는 들었다. 이번 여정이 시작된 게 칼 네 덕분이라고 하더군. 역시 너라면 해낼 줄 알았다."

대체 소문이 어떻게 났길래 일반 병사인 쿠릴타의 귀에까지 들어갔는지 조금 의문이긴 했지만, 그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아무튼, 이번에는 함께하게 되어서 기쁘다 형제여."

"그러고 보니 최근 임무는 참여하지 않았었지. 이유가 있었나?"

"아······ 그건 훈련 도중 부상을 입어서 그랬다. 그래, 부상 때문이었어."

"그런가."

왠지 쿠릴타가 대답을 회피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굳이 숨기려는 걸 파낼 생각은 없었다.

정확히는, 그만큼 쿠릴타에게 큰 관심이 있지는 않다는 거였지만.

'안 그래도 망할 아가씨 때문에 머리 아픈데 거기까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겠지.'

그나저나, 쿠릴타에게 무언가 물어볼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아, 혹시 라니아에 대해서 아나?"

"라니아? 라니아 마커스? 네 동생?"

"그래."

"알다마다! 라니아를 찾았나?!"

아무래도 크로노스 잔당의 책임자가 나와 혈연이라는 이야기까지는 일반 병사에게 들어가지 않은 듯했다.

뭐, 나름대로 기밀일 테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래. 크로노스 잔당 중에 있었다."

"역시! 살아있을 줄 알았다! 과연 위대한 영혼의 후예답군!"

꿈틀-

또다시 튀어나온 익숙한 단어에 나는 드디어 지금껏 참아왔던 질문을 꺼내들었다.

"위대한 영혼이라는 게 대체 뭐지?"

그와 함께 쿠릴타의 표정이 굉장히 이상하게 변했다.

"칼······ 부상을 입은 거냐? 머리! 그래, 머리를 다친 거군!"

"···그런 거 아니다. 잠깐 그게 뭔지 잊었을 뿐이다."

"······잊었다고? 위대한 영혼을?"

"그래."

쿠릴타의 눈이 가늘어졌다.

"칼, 너······."

의심하는 건가?

아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역시 머리를 다친거군. 너는 모르겠지만, 그게 분명하다."

내 걱정과는 달리, 쿠릴타는 아주 간단명료하게 결론을 내린 듯했다.

뭐, 나로서는 처음부터 그냥 다쳤다고 말할까 약간 후회가 되는 부분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위대한 영혼이 뭐지?"

"모든 영혼의 시작이자 끝."

"그리고?"

"그게 전부다."

"······뭐?"

너무나도 당당한 쿠릴타의 태도에 나는 잠시 멍청하게 눈을 끔뻑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위대한 영혼의 후예라는 건 뭐지?"

"말 그대로 위대한 영혼을 이어받은 후예라는 뜻이다. 네가 나한테 이런 걸 묻다니, 확실히 머리를 심하게 다치긴 했군."

"그래서, 그게 뭐냐고."

"말 그대로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가 뭔데."

"그게 전부다."

또다시 이어진 쿠릴타의 당당한 발언에, 나는 다시금 할 말을 잃었다.

아······.

네가 그러면 그렇지.

'···하지만, 소득이 아예 없지는 않아.'

적어도 쿠릴타와 라니아가 말하는 위대한 영혼이 어떤 개념인지는 대충 알겠다.

그게 실존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알아둬서 나쁠 건 없었다.

"아, 그렇다면 이번에 라니아를 볼 수 있는 건가?"

"아마 그럴 거다."

"흐흠."

쿠릴타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아무래도 처음에 부족을 떠날 때 많은 이들을 놓고 올 수밖에 없었던 게 내내 마음에 걸렸던 듯했다.

'뭐, 나야 상관 없었지만.'

어차피 내 진짜 부족도 아니고 말이다.

"출발하겠습니다!"

그때, 대위로 보이는 장교의 외침과 함께 크로노스 지원대가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인원이 모이기 무섭게 출발을 하는 걸 보니, 그만큼 아크에서 이번 여정을 서두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긴 하지.'

아무리 웨이브가 일어난 직후라지만, 크로노스 잔당이 있는 곳과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출발해야 하는 게 맞다.

아니, 괜히 어중간한 속도로 출발했다가는 돌아오는 길에 웨이브에 둘러싸일 수도 있는 노릇.

그나마 예전의 여정과 차이점이 있다면, 차량이 있는 덕분에 이동 자체는 상당히 편하게 이뤄질 거라는 점이었다.

'물론, 정말로 편할 리가 없겠지만.'

아무리 아크에서 만들어진 물자 이송용 트럭이 큰 소음을 일으키지 않는다지만, 이토록 거대한 행렬은 그것만으로도 주변의 이목을 끌기 마련이다.

그래, 웨이브 때조차도 가만히 잠들어 있었던 마수와 마물들을 말이다.

위이이잉······.

최소 각각이 10톤은 거뜬히 넘어 보이는 트럭들이 행렬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되었다.

내가 트럭 한 구석에 앉은 채로 조용히 바깥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내 곁에 다가왔다.

아르덴 소령이었다.

"역시 오셨군요."

"그래. 네가 올 줄은 몰랐는데. 레드 라인의 특수 기동 타격대면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거 아닌가?"

"하하··· 사정이 있었습니다."

아르덴 소령이 멋쩍게 웃었다.

모르긴 몰라도, 특수 기동 타격대에서 해임됐거나, 혹은 정직 같은 처분을 받은 듯했다.

'딱히 그럴 만한 이유는 없을 텐데··· 뫼비우스 때문인가?'

내가 알고 있는 뫼비우스라면, 아르덴 소령처럼 함부로 신규 멤버를 영입하려 할 경우 나름의 처벌을 내릴 터.

아르덴 소령이 이곳에 있는 이유 역시도 그것과 아예 관련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면, 그걸 빌미로 나와 더 접촉을 할 생각이든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어차피 뫼비우스를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던 나로서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

아르덴 소령이 자리로 돌아간 후, 옆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던 쿠릴타가 말했다.

"알고 있는 이인가?"

"그래."

"흐음··· 계급이 제법 되는 것 같던데, 역시 형제로군."

쿠릴타는 무엇이 뿌듯한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그것보다, 이곳에 참여한 게 뫼비우스뿐만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

단순히 그림자단의 단장을 말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이 지원대에는, 그림자단과 뫼비우스말고도 비밀 결사들의 멤버들이 상당수가 타고 있었다.

나는 트럭 내에 있는 이들의 면면을 살며시 훑어보았다.

'수호자들과 은빛여명회까지 있군.'

거기에 더해서 다른 트럭들까지 합친다면, 못해도 다섯 종류 이상의 비밀 결사의 멤버들이 이번 지원대에 참여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림자단과 뫼비우스말고도, 움직이기 시작한 세력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그들의 각자의 목적과 이해관계에 맞춰서 움직일 것이다.

나는 그런 이들의 모든 이해 속에서 어떻게든 이번 여정을 성공시켜야만 했고 말이다.

'···그중에서 가장 경계되는 건, 역시 저 빌어먹을 아가씨겠지.'

그림자단의 단장.

저 여자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일전에 있었던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의 방문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나에게 있어서 좋은 일일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게 내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칼."

쿠릴타의 부름과 함께 나는 술렁거리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트럭 안에서 점등되는 사이렌.

주변에 마수들이 나타났다는 신호였다.

'예상보다 빨리 나타났나.'

아니, 현재 지원대가 이동하는 속도를 생각한다면 꼭 그렇게 여길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현재 지원대는 차량을 통해서 이동을 하고 있는 데다가, 그 규모 역시도 절대로 작지 않았으니까.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지원대의 행렬을 따라서 수백이 넘는 마수 무리가 달라붙고 있었다.

척 봐도 최소 6급 이상은 되어 보이는 마수들이 말이다.

'만약 이곳에 나 혼자 있었다면 조금 귀찮아졌겠지만······.'

그러나, 마수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어떤 이들인지.

"전군, 수비태세."

아가씨의 부관으로서 지원대에 참여한 헤밀러 중령의 목소리가 트럭 안에 울렸다.

철컥-

굳이 병사들이 차량에서 내릴 필요도 없었다.

트럭 바깥으로 내밀어진 무수한 총구들 앞에서, 이내 막대한 화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

쾅! 콰카캉!

무려 6급 이상으로 이루어진 마수 무리도 이 막대한 화력 앞에서는 걸어다니는 과녁판에 불과했다.

[키에에에엑!]

[끼기기긱!]

수백 마리가 거뜬히 넘었던 마수 무리는 순식간에 지원대의 막강한 화력에 의해서 두 자리 이하로 줄어 들었다.

그러한 희생 덕분에 마수들이 트럭까지 다다르는 데는 성공했으나, 문제는 아크의 물자 및 인원 수송용 트럭의 내구도가 그렇게 만만한 물건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깡! 캉! 캉!

강철조차 찢어 버리는 6급 마수들의 발톱과 이빨은 아크의 호송용 차량의 견고함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틈을 놓친 마수들에게 남은 운명은 다시금 겨눠진 총구와 함께 끝이 났다.

타아아아앙───!!!

나는 가만히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는 역시라고 할만 하긴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막대한 화력을 뿜어낼 수 있는 게 과연 몇 번일지였다.

물론 이번 여정 자체가 크로노스에 대한 물자 보급인만큼 물자 자체가 부족하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급하려는 물자들을 모조리 소진해서야 이번 여정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어떻게 나올지 한번 지켜봐야겠지.'

아니, 어쩌면 아예 이동 중에 모든 물자를 소진해서 이번 여정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게 아가씨의 목적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그림자단의 방식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지저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스더를 잃은 그림자단이 언제까지고 기존의 방식을 유지할지 알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

에휴······.

'머리가 아프군.'

지켜봐야 할 놈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 * *

라니아 마커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폭풍이 오겠어."

"네?"

"그냥 그렇다고."

뒤돌아선 라니아의 귓가에 무수한 목소리들이 속삭였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고귀한 존재시여······.]

[우리의 숙원을 이루어줄 공주이시여.]

저 너머에서,

무언가가 오고 있다는 걸.

< 물자 지원 (2) > 끝

여정이 계속됐다.

아무래도 차량을 통해서 밤낮없이 이동을 하다 보니, 지원대에서는 병력을 반으로 나눠서 주간 조와 야간 조로 나누었다.

주간에는 야간 조가 자고, 반대로 야간에는 주간 조가 숙면을 취하면서 2교대로 마수들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칼 마커스, 당신은 야간 조입니다."

"알았다."

나는 야간 조가 되었다.

보편적으로 야간 조에 좀 더 실력이 뛰어난 병사들을 배치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확실히 차량 이동이 편하긴 하네.'

예전에 조사팀 임무를 수행할 때는 도보로 이동을 하다 보니, 별도의 휴식 시간 역시도 취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가씨가 이끄는 대규모 지원대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휴식이 필요하다면, 이동하는 도중에 차량 안에서 쉬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이 정도 속도면 예정보다 빠르게 도착하겠어.'

다만, 한 가지 신경이 쓰이는 게 있다면 그 아가씨가 과연 이번 여정을 순탄하게 가는 걸 허락할지였다.

아가씨는, 그러니까 그림자단의 단장은 어마어마한 에테르 적합자다.

당연히 마음만 먹는다면 주변의 마수나 마물들을 유인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고, 따라서 이번 여정을 망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대체 목적이 뭔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찾아가서 드잡이질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이곳에 있는 백명이 훌쩍 넘는 군인들에게 벌집이 될 것이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혼자서 이곳에 있는 모든 군인을 상대할 수는 없었고,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뭐겠냐.'

[뭐예요? 그 불만 가득한 목소리는. 저한테 뭐 불만이라도 있어요?]

'없진 않지.'

애초에 에스더가 쓸데없는 소리만 안 했더라도, 단장이 이런 수를 둘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뭐, 에스더 탓을 할만한 문제도 아니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누구 탓이라도 하고 싶어지는 상황인 것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뭘 알고 하는 소리인가?'

[네. 대충은요.]

'근거는?'

[단장 기분이 좋아 보였거든요.]

'······.'

어처구니 없는 근거.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묘하게 또 설득력이 있는 근거였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라······.'

내가 알고 있는 그림자단의 단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인물로 보이지만, 그 행동 하나하나에는 모두 의미가 있다.

즉, 단장의 기분이 좋다면 그 역시도 어떠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그러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바깥에서 일어난 소란 때문이었다.

쿵!

쿠웅!

멀찍이서 느껴지는 진동.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적습입니다. 다들 준비하십시오."

상황병의 나지막한 전달과 함께 야간 조의 병력이 하나둘씩 제 자리에서 바깥을 향해 총구를 내밀었다.

여정이 이어지는 동안 이런 습격이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움직인 것이었다.

하물며 이미 병력들에게 탄약 보급도 완료된 상태.

명령만 떨어진다면 이곳을 향해서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마수 무리 정도는 언제라도 벌집으로 만들 수 있었다.

[키에에에엑!]

[카악! 카아악!]

이번에 트럭을 습격한 마수들의 수준은 기껏해야 7급 이하의 마수들로 보였다.

이 정도라면 굳이 주간 조를 깨울 필요도 없이 대기 중인 야간 조만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번 해볼까.'

나 역시도 총구를 바깥으로 내밀고는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정밀한 조준은 필요 없었다.

어차피, 개떼처럼 달려든 마수들이 알아서 와서 맞아줄 테니까.

철컥-

타아아아앙!

Ark-34 자동변환 소총이 자동 소총 모드로 변경되며, 곧이어 불꽃을 토해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불꽃보다는 스파크에 가까웠다.

'흐음··· 레일건 모드도 아닌데 총기 내에 있는 자기장이 보조 추진제로 활용되고 있다.'

즉, 일반적인 Ark-34 자동 소총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하게 총알이 나간다는 이야기였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Ark-34 자동 소총에서 쏟아진 총알들이 단번에 마수들을 꿰뚫었다.

현재 내가 지닌 탄 중 가장 화력이 강한 A-985 폭발탄이 아닌 일반탄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력이 절대로 뒤쳐지지 않았다.

그만큼 벼락 맞은 가지를 재료로 사용해서 업그레이드된 Ark-34 자동 소총의 화력은 막강했다.

쐐애애애액───!

쐑! 쐐액!

과연 Ark-34 자동 소총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메이벨 필그림과 벼락 맞은 가지의 위력이 뛰어났다고 해야 할까.

트럭을 향해서 달려들던 마수와 마물들이 마치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설사 6급 이상의 마수나 마물들이 있다고 해도 이 화력을 견딜지 의문인데, 기껏해야 7급 이하 수준의 마수들이 이 화력을 견딜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저게 뭐야?"

"맙소사······."

방아쇠를 당기기 무섭게 몰아친 막대한 화력에, 순간적으로 주위에 있던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렸다.

한창 전투 중이던 병사들의 시선마저 빼앗을 정도로 Ark-34 자동 소총을 통해서 뿜어진 화력은 압도적이었다.

"혹시 저 자가 그······."

"그런 것 같은데?"

"칼 마커스."

"과연······."

딱히 눈에 띄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이번 여정은 나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했으니 굳이 몸을 사릴 생각은 없었다.

뭐, 이렇게 활약하면서 명예 능력치가 오르게 되면 영웅의 길 특성에 의해서 내 능력치가 오르니 나쁠 것도 없었고 말이다.

[이야~ 인기 많네요?]

'···시끄럽다.'

[왜요? 인기 많으면 좋지.]

'시끄럽다고 했다.'

물론 에스더의 이죽거림은 견뎌야 했지만, 그 정도야 이미 상정했던 바였다.

[카아아아악!]

[끼에에엑!]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트럭을 향해서 달려드는 마수와 마물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탕! 탕탕!

그리고······.

전투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끝났다.

안 그래도 압도적인 화력을 지닌 아크의 지원대다.

고작 7급 이하의 마수 무리가 감당하기에는, 상대가 너무나도 좋지 않았다.

"끝난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흐음, 싱겁긴."

"이 정도면 이번 임무도 별거 없겠어."

너무나도 싱거웠던 전투에 트럭 내에 있던 병사들이 한껏 여유를 과시했다.

그만큼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압도적이고도 쉬운 전투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언제까지고 그럴 수 있을지는 또 모르겠지만······.'

현재 지원대의 상황은 좋다.

물자도 넉넉하고, 몰려드는 마수들을 별다른 피해 없이 모조리 몰살시키며 사기도 한껏 올랐다.

하지만 마수들의 습격이 이어지고, 지닌 물자들이 조금씩 바닥나기 시작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크로노스 측에 물자를 전달해야 하는 만큼 탄약을 아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테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전투의 난이도 역시도 올라가게 될 터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부렸던 여유는 더는 부리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당연한 흐름 속에서 한 가지 변수가 있다면, 다름 아닌 아가씨의 존재였다.

현재 크로노스 지원대를 이끌고 있는 주인공이자, 무슨 속내를 감추고 있는지 모를 인물.

'쯧.'

아가씨, 그러니까 그림자단의 단장의 목적은 늘 한결같다.

아크를 손에 넣는 것.

아가씨는 그럴 수 있는 배경도, 힘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아가씨가 아크를 손에 넣기 위해서 취할 행동은 무엇인가?

나는 그걸 생각해야 했다.

'흐음······.'

내가 아가씨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내가 타고 있는 트럭과 아가씨가 타고 있는 지휘 트럭 두 대가 나란히 섰다.

그리고는 같은 속도로 달리며, 트럭 사이에 다리를 하나 놓았다.

철컹, 철컹─

마치 우주선 도킹이나 공중 급유 같은 광경.

촉박한 시간 관계상 이동을 멈출 수는 없었으니, 이런 식으로 트럭 간에 물자를 교환하고 인원을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직 물자를 교환할 시기가 아닐 텐데?'

그러한 의문도 잠시.

반대쪽 트럭에서 익숙한 얼굴의 장교가 다리를 타고서 건너왔다.

이름이 아마··· 클리프 대위였던가?

그렇게 트럭을 건너온 클리프 대위가 멈춰선 곳은 다름 아닌 내 앞이었다.

"칼 마커스."

"무슨 일이지?"

클리프 대위가 말했다.

"아가씨께서 찾으십니다."

"······나를?"

"예."

예상하지 못했던 호출.

하지만 나는 왠지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정 내내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 전전긍긍하느니, 차라리 시원하게 한번 부딪히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가지."

"예, 이쪽으로."

나는 장교의 안내에 따라서 반대편 트럭을 향해서 다리를 건넜다.

비록 속도를 상당히 줄인 터라 크게 휘청거리거나 하는 게 있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란히 달리는 트럭 사이를 가로지르는 게 쉬울 리가 만무했다.

"균형 감각이 좋으시군요. 보통은 몇 번 정도는 휘청거리는데."

뭔가 칭찬인데 칭찬 같지 않게 들렸지만, 나는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이쪽으로."

나는 클리프 대위의 안내에 따라서 트럭 내부에 있는 별도의 개인실로 향했다.

현재 지원대를 이끌고 있는 아가씨쯤 되는 인물이기에 가능한 대우였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클리프 대위의 말에 나는 천천히 개인실의 문을 열었다.

"왔니?"

그리고 문 안에서 마주한 아가씨가 나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보고 있는 건 단순히 나뿐만이 아니었다.

[······단장.]

"너도 어서 와. 에스더."

내가 말했다.

"나를 부른 이유가 뭐지?"

"뭐 별거 있겠어? 차나 한잔하자는 거지. 생각해보니까 우리가 꽤 깊은 인연인데도 차 한잔한 적이 없더라고."

아가씨가 아주 자연스럽게 나에게 각각 커피와 홍차가 담겨 있는 드립 포트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홍차? 커피?"

"커피로 하지."

"의외네. 당연히 홍차인 줄 알았는데."

아가씨가 싱긋 웃으면서 내 잔에 커피를 따랐다.

"설탕은?"

"필요 없다."

"음, 그건 예상대로네."

내가 커피를 입에 가져다 대자, 아가씨의 눈이 의외라는 듯이 치켜 올라갔다.

"당연히 안 마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나를 꽤 믿나 봐?"

"굳이 불러놓고 죽일 정도로 성격이 나빠 보이지는 않으니까."

거짓말이다.

그저, 그 고상하기 짝이 없는 아가씨가 독살 같은 귀찮은 짓거리를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뿐이었다.

"흐음··· 그래? 일단 한 번 정도는 속아줄게."

"그래서 나를 부른 용건이 뭐지?"

"이런, 성격도 급해라."

아가씨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칼 마커스, 너에게 제안할 게 있어."

"제안?"

"아, 걱정할 필요는 없어. 우리도 이제는 방침을 어느 정도 바꿨거든. 에스더, 너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고."

[···방침을 바꿨다고? 어떻게?]

"성격도 급하기는. 일단 들어 봐."

아가씨가 말했다.

"듣자 하니 아크에서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다면서? 이번 임무도 용병으로 참여한 거고."

"그거랑 지금의 이야기가 무슨 상관이지?"

"아니, 매우 밀접한 상관이 있지. 우리 단에서도 너를 용병으로서 고용할까 생각 중이거든. 어때? 나쁘지 않은 제안 같은데."

아가씨의 미소가 더없이 짙어지고,

[······뭐어?]

경악에 가득찬 에스더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 물자 지원 (3) > 끝

"······용병이라고?"

"어때? 좋은 생각 같지 않아?"

과연 아가씨답다고 해야 할지······.

그 발상 하나만큼은 내 예상조차도 벗어날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러했다.

'하지만··· 확실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야.'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그림자단으로서도 한발 물러났다고 볼 수 있었다.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의 패퇴는 그림자단으로서도 큰 패착이라고 볼 수 있었을 테고, 그런 상황 속에서 더는 나를 적대하는 게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에스더가 나에게 있는 이상 그림자단으로서도 나를 억지로 죽이는 게 상당히 부담되었을 테니 말이다.

[단장,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응. 너희가 이겼어. 항복이야."

아가씨가 너스레를 떨면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물론 에스더나 나나 저 항복이 진짜 항복이라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게 전부인가?"

"일단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으음, 글쎄?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봤는데? 근데 어차피 거절 안 할 거 다 알아."

자신만만하다고 해야 할지··· 아가씨는 무척이나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마치, 이번 제안 자체가 자신이 배푸는 아주 큰 호의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뭐,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

나로서도 이 이상 그림자단과 극단으로 치닫는 건 당장으로서는 피하고 싶은 게 사실이었다.

단순히 그림자단의 힘이 부담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림자단이 지닌 나름의 역할 때문이었다.

'그림자단의 목적은 아크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

당연히 그 과정에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아크를 위하는 모습도 적지 않게 보여준다.

아무리 그림자단이라고 해도, 이미 멸망한 아크를 손에 넣고 싶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걸 넙죽 받기는 조금 그렇지.'

아무리 상대가 한 발 물러났다고 한들, 나도 함께 물러날 필요는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와 그림자단은 현재 적대 관계였으니까.

"검토해보지."

"검토? 에이, 우리 사이에 그런 단어가 어디 있어? 당장 정해. 이 자리에서."

여전히 웃는 낯.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들썩거리기 시작한 에테르가 그녀의 심기를 말해 주었다.

[감, 히······.]

[굴복하라. 굴복하라. 굴복하라. 굴복하라. 굴복하라. 굴복하라. 굴복하라. 굴복하라. 굴복하라. 굴복하라. 굴복하라. 굴복하라.]

[칼, 마커스.]

예전이었다면 단지 이 정도의 에테르 파동에도 짓눌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에스더.'

[나도 알아요.]

굳이 에테르의 상극인 실험탄 GHOST-157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에스더가 자신의 에테르와 내 에테르를 한번에 끌어 올리며 단장의 에테르 파동에 대항했다.

[끼긱, 끼기긱······!]

에테르와 에테르가 맞부딪치며,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을 것처럼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물론 여전히 단장의 에테르에 비하면 부족한 게 사실이었으나, 잠시 버티는 데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흐음······ 재미있네."

아가씨가 웃었다.

그리고는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던 에테르를 거두었다.

"뭐, 싸우자고 부른 건 아니니까. 그래도 검토해보겠다는 말은 지켜줬으면 해."

당장이라도 모든 걸 휩쓸 것 같았던 에테르가 거두어지자, 느껴지던 압박감이 줄어들었다.

"장난이 지나치군."

"장난? 아하핫.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네. 하지만 나는 장난 치는 걸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 특히··· 이런 상황이라면 더 말이야."

"그런 건 장난이라고 하는 거다."

"뭣하면 더 해도 되는데?"

"내가 겁낼 것 같나?"

아가씨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겁낼 필요는 없었다.

여차하면 실험탄 GHOST-157를 꺼내서라도 아가씨의 공격을 저지할 생각이었으니까.

"음음, 뭔지 모르겠지만··· 숨겨진 한 수라도 있나 보네? 무섭게."

아가씨가 두 손을 들었다.

"항복이야, 항복. 정말로 못 당해내겠네."

그렇게 나와 아가씨는 서로가 숨겨둔 수를 남겨둔 채로 한 발 물러나는 걸 선택했다.

어차피, 아크의 군인들에게 둘러싸인 이곳에서 끝까지 가봤자 서로에게 좋을 게 없었으니 말이다.

"에스더."

[······말해.]

"당분간 다시 떨어져야겠지만 참아줘. 언젠가는··· 반드시 너를 되찾을 테니까."

[······.]

"그러면 좋은 대답 기대하고 있을게. 칼 마커스. 알고 있겠지만, 이건 나로서도 굉장히 양보한 거야."

나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가씨와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음에 봐, 에스더."

아가씨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

에스더는 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가씨의 개인실을 나선 나는 트럭 내에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은 조금 전에 있었던 에테르 파동의 여파 때문인지 몸을 으슬으슬 떨고 있었다.

"······왜 이렇게 춥지?"

"그러게. 온도 조절 시스템이 꺼졌나? 이봐! 상황병!"

그다지 긴 만남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모르게 오랜 시간이 흐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일단, 소기의 성과는 있다고 봐야겠지.'

그림자단은 당장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 없다.

변절자 룩과 잔영의 사르트는 패퇴했고, 이 이상 억지로 나에게 무언가를 하려 해봤자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아가씨 역시도 그러한 생각으로 나와 협상을 하려한 듯했고 말이다.

[······주인님.]

'괜찮을 거다.'

[아니, 그것 말고요.]

'그러면 뭐.'

[단장의 제안을··· 받아들일 건가요?]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다.'

사실은 적당한 시기에 받아들일 생각이었지만, 일단은 이렇게 말해두는 게 구색이 좋으리라.

[그게 뭐예요. 확실하게 말해요.]

'말했던 대로다.'

[에휴······ 내가 말을 말지.]

아가씨와의 회담이 끝난 후.

나는 다시금 원래 있었던 트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아직도 연결 중이었군.'

현재 트럭 사이의 다리에는 병사들이 물자들을 교환하느라 한창이었다.

원래 교환 시기보다 빨라지긴 했지만, 이왕 도킹한 김에 해야 할 걸 하는 느낌이었다.

"아, 끝나셨군요."

나는 나를 이곳으로 안내했던 클리프 대위의 안내에 따라서 다시금 다리를 건넜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음?'

두 트럭을 연결하고 있던 다리가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던 두 트럭 간의 속도가 변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이건······.'

이 상황에서 섣부르게 다리를 건너는 건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트럭 아래로 굴러떨어져서 낙오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적습입니다!"

상황병의 전파와 함께 트럭 내에 있는 병사들이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수들의 습격이 있었던지 얼마나 시간이 됐다고, 또 다른 마수와 마물들이 몰려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게 원인인가.'

제아무리 소음 모드를 사용한다고 해도, 마수와 마물들이 내지르는 비명은 감출 수 없다.

바로 그 소리들을 듣고서 또다른 마수 무리가 우리가 있는 트럭을 향해서 온 것이었다.

'역시, 쉬울 리가 없지.'

그나마 부지런히 이동한 덕분에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만큼 마수들의 습격 횟수 역시도 도보로 이동할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뭐, 하면 되겠지.'

내가 Ark-34 자동 소총을 쥔 채로 창 밖으로 총구를 내민 순간.

그나마 부지런히 이동한 덕분에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만큼 마수들의 습격 횟수 역시도 도보로 이동할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칼라킨?"

본래였다면 한창 운전수 옆에서 길을 인솔하고 있어야 할 칼라킨이 이곳에 있다.

즉, 이제는 굳이 길을 안내할 필요도 없을 만큼 크로노스 잔당이 있는 장소에 거의 다다랐다는 뜻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럴 필요 없을 거라니?"

"저쪽을 보십시오."

나는 칼라킨의 손끝을 따라서 트럭 내에 있는 작은 창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로 드러난 광경은 현실성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누군가 허공에 떠 있다.

등 뒤에 제트팩을 단 것도 아닌데, 마치 하늘 위에 땅이라도 있는 것처럼 너무나도 평온하게 거닐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행할 수 있는 이가 누구인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저게······ 뭐야?"

"아가씨 아니셔?"

"아가씨라고?"

병사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그만큼 눈앞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일이 현실감 없기 때문이었다.

'직접 나선다고?'

그림자단이 방침을 바꿨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 이렇게 직접 나설 거라는 건 나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바깥에서 에테르가 요동쳤다.

아까 전, 내가 개인실 안에서 아가씨와 마주했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에테르였다.

[킥, 키득······.]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다, 없앤, 다.]

나나 에스더가 사용하는 에테르와는 감히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살기가 풀풀 흘렀다.

마수를 향한 맹목적인 증오.

지금 아가씨가 사방에 뿜어내는 에테르에는 그게 있었다.

'과연··· 엄청나군.'

분명히 나와 아가씨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는 상당히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상당한 수준의 격차가 나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카아아아악!]

[키에에엑!]

[카악! 칵!]

사방에서 마수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병사들에게서는 그 누구도 총구를 겨눌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현재 지원대를 이끄는 아가씨로부터의 명령이 그렇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거··· 정말로 괜찮은 거야?"

"아가씨께서 나서셨잖아."

"아니, 아무리 아가씨라도 해도 혼자서 저 숫자는 좀······."

명령에 살고 죽는 아크의 군인들조차도 의구심을 지닐 정도로 이번 명령은 괴상했다.

그러는 사이, 트럭을 향해서 달려들던 마수들이 어느새 사방을 포위한 채로 서서히 거리를 좁혔다.

"······병장님, 이제라도 발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가만히 있어. 명령 불복종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트럭에 있는 군인 중 그 누구도 섣부르게 움직이거나 하지 않았다.

아무리 의심스러워도, 아무리 의아해도 명령은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쿵!

쿠우우웅───!!

마수들이 트럭을 들이 받으면서 아크의 트럭이 작게 휘청거렸다.

아무리 견고한 트럭이라지만, 측면에서의 충격에는 비교적 취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크의 군인들이 이제는 정말로 총구를 당겨야하나 고민의 고민을 하고 있던 그 순간.

바깥에서 들썩거리던 에테르가 순간적으로 멎었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있었다.

들썩거리던 에테르가 어느 한 곳으로 일제히 응집되는 것을.

[─────────]

이윽고 모여들었던 에테르가 거칠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소용돌이는 곧 폭풍이 되었고, 폭풍은 곧 모든 걸 집어삼킬 듯이 주변을 향해서 뻗어 나갔다.

[죽, 어─────────]

나지막하게 내려진 사형 선고.

그리고, 이윽고 이곳에 남은 건 오직 죽음뿐이었다.

< 물자 지원 (4) > 끝

인간이 이런 일을 해내는 게 정말로 가능한 걸까.

이게, 정녕 에테르로 행할 수 있는 일인 걸까.

그런 의문이 절로 들 정도로 아가씨가 일으킨 일은 어마어마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조금 전 트럭을 향해서 달려든 마수들의 수준은 절대로 낮지 않았다.

최소 7급 이상의 마수들.

그중에는 간간히 5급 수준의 마수와 마물들도 섞여 있었으니, 나로서도 상당한 화력을 퍼부어야 잡을 수 있는 상대였다.

하지만 아가씨는 단순히 에테르를 일으키고, 그것을 주변에 흩뿌리는 것만으로 일대에 있는 모든 마수와 마물들을 일소(一掃)했다.

직접 보고도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이었다.

[······여전하네요. 단장은.]

이제 본래의 힘을 모두 다 되찾은 데다가 예전보다도 강해진 에스더조차도 그 모습에는 혀를 내둘렀다.

"저게 무슨······."

"사람이··· 저런 게 가능하다고?"

병사들 역시도 에스더와 같은 심정이었는지, 대부분 입을 떡 벌린 채로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물론 아가씨를 알고 있는 몇몇 병사들은 다른 반응이었다.

"······역시 아가씨로군."

"···밴 하사님, 에테르 적합자라는 게 원래 저런 일이 가능한 겁니까?"

"아가씨라서 가능한 거다. 일반적인 에테르 적합자는 아가씨의 발끝도 못 따라가."

에테르 적합자는 아크 내에서 두려움과 배척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그 수준이 아가씨 정도가 되면, 배척보다는 경외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아가씨께서 우리를 위해서 직접 싸워주셨다!"

"아가씨께서······."

"오오!"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듯이 병사들 사이에서 아가씨를 찬미하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저런 엄청난 광경을 본다면, 경외 말고는 그 어떤 감정도 가지지 못할 테니까.

뭐, 엄밀히 따지자면 저런 찬양과 찬미에는 아가씨가 지닌 신분적 배경도 한몫했을 테지만 말이다.

'사이비 종교를 보는 것 같군.'

딱히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나 저런 엄청난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게 된다면, 광신(狂信) 말고는 선택할 게 없어질 테니 말이다.

"······이 정도였던가."

그 칼라킨조차도 아가씨의 무지막지한 위용에는 얼이 빠졌는지, 멍하니 창밖의 풍경만을 바라보았다.

창밖에 있는 건 오직 죽음뿐.

한때 생명을 품고서 날뛰었던 마수들은 이제 공기가 빠진 풍선 인형처럼 늘어져 있었다.

'아가씨가 직접 나섰다는 건, 나에게 보여주는 일종의 선언이겠지.'

그림자단은 한 발 물러났다.

이번에 아가씨가 직접 움직인 것 역시도 그걸 보여주기 위한 한 수였을 터.

즉, 지금 아가씨는 내게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지금 한번 물러났으니, 너 역시도 한번 물러나라고.

'뭐···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지만.'

이번 여정으로 인해서 뭐가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림자단과의 관계에서는 큰 변화가 있을 터였다.

'거기에 더해서, 뫼비우스와의 관계 역시도 그러겠지.'

다른 비밀 결사대야 아직 그럴듯한 접촉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들 역시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칼라킨은 여전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굳어 있었다.

칼라킨은 에테르 적합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아가씨처럼 강력한 에테르 적합자를 보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이해도 갔다.

사람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걸 보게 되면 평소와는 다른 어떤 감정을 품기 마련이었으니까.

"칼라킨."

"······아."

"지금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건,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는 건가?"

트럭 내부에는 크고 작은 창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격을 위한 포구에 가깝다.

당연히 주변의 시야가 완전히 보일 리가 없었기에,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런 황야에서 위치를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예,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예상보다 빠르군."

"부지런히 움직였으니 말입니다."

이 정도면 속도만 치면 예전에 조사팀이 움직였을 때보다 몇 배는 우습게 보일 정도의 속도였다.

하긴, 애초에 이동 수단에서 큰 차이가 있는 데다가 이쪽은 차량을 통한 24시간 이동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칼 마커스."

"말해라."

"에테르 적합자들은··· 모두 저런 일이 가능한 겁니까?"

칼라킨은 내가 알고 있는 한 더 디펜스에서 가장 강력한 플레이어블 캐릭터다.

비록 에테르 감응력은 없지만, 그걸 보완할만한 무수한 도구와 능력이 있다.

그런데도 저런 말을 한다는 건, 그만큼 아가씨가 보였던 에테르 파동이 충격적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글쎄, 저건 저기에 있는 아가씨가 특별한 거겠지."

"···역시 그렇군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저 영역에 닿지 못한다는 법은 없지."

당장 라니아만 하더라도 스테이지 후반부가 되면 아가씨가 지닌 에테르 능력을 뛰어넘는 힘을 손에 넣게 된다.

그만큼 압도적인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비슷한 재능을 타고난 나 역시도 성장 기대치는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아니··· 지금의 성장 속도로 보면 오히려 라니아보다는 칼 마커스쪽이 더 잠재력 있다고 봐도 되겠지.'

라니아가 순수하게 자신이 지닌 재능을 갈고 닦는 다면, 나는 강화 혈청이나 모트교의 축복, 그리고 온갖 특성 등 내가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취하면서 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습니까."

"기죽을 필요 없다.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되니까. 너는 충분히 쓸모 있다."

"쓸모라······."

칼라킨이 씁쓸하게 웃었다.

저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 나갔지만, 그 정도로도 칼라킨에게는 충분하리라.

"위로가 됐습니다."

"그래."

칼라킨은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아무래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생각인 듯했다.

'쯧.'

어쩌다가 내가 칼라킨을 위로하는 처지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칼라킨이 주눅 들어 있어봤자 나에게 좋을 건 없었으니, 좋은 게 좋은 거겠지 했다.

'그건 그렇고······.'

나는 슬쩍 다리 쪽에 있는 입구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보았다.

멀리서 보면 보호색으로 인해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조금 가까이 가자 황토색으로 뒤덮힌 위장막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착했군.'

옛 크로노스 잔당.

마침내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비록 아직 거리는 조금 있었지만,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거의 도착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이이이익─

아크의 물자 운송용 트럭들이 일제히 멈춰섰다.

갑작스럽게 트럭이 들이닥치면 크로노스 측에 의해서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으니, 일단 여기에서 따로 사람을 파견할 생각인 듯했다.

"칼 마커스. 가시죠."

물론 그중에는 나도 포함이었다.

애초에 이번 조사대의 핵심 인물 중 하나가 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지."

나는 클리프 대위의 말에 따라서 트럭에서 내렸다.

별도의 호버링 바이크를 탑승시킬 만한 공간적 여유는 없었기에, 여기서부터는 도보로 크로노스로 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서 아가씨와 칼라킨. 그리고 아르덴 소령과 나를 포함한 열 명가량의 인원이 꾸려졌다.

우선적으로 크로노스에 동맹 사실을 알리게 할 일종의 사신단이었다.

"갈까?"

아가씨가 웃으면서 앞장섰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인원들이 자연스럽게 아가씨의 뒤를 따랐다.

* * *

무언가 온다.

며칠 전부터 느껴진 불길한 기운에 라니아는 잠을 들지 못했다.

"왜 그러세요?"

"······준비해야 해."

"뭘요?"

"몰라."

"예?"

정확히 무엇이 오는지,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길함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키득······.]

[오고 있어······.]

[그분께서.]

[오오, 위대한, 오오!]

한밤 중에만 찾아오던 에테르들은 이제 라니아가 아침에 깨어 있을 때도 불쑥불쑥 찾아왔다.

그것이 경고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는 몰라도 라니아는 불길함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오라버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만약 칼 마커스가 실패했다면, 아크에서 반역자로 낙인찍힌 채로 처형을 당했을 테니까.

그런 후에는?

당연히 아크에서 크로노스를 몰살하기 위한 병력을 파견할 것이다.

외부에 크로노스 같은 위협 세력을 남겨둘 정도로, 아크는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으니까.

"전쟁을 준비해야 해."

"···전쟁이요? 어디랑요?"

"아크."

"예?!"

라니아가 전쟁주의자여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전쟁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고, 전쟁을 준비함으로서 혹시 유사시에 무력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협상의 여지를 만들 수 있었다.

약한 자는 잡아 먹힌다.

그게 이 세계의 절대 진리였다.

라니아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서 크로노스 연합은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건 그쪽이야!"

"어이! 이쪽으로!"

캠프가 있는 곳은 위장막으로 모두 감춰서 보이지 않게 하고, 아크의 공격에 대비한 군사 훈련 역시도 진행했다.

물론 전쟁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방법이었으니, 실제로 이 훈련의 실전을 겪기를 바라는 이는 없었다.

"······."

라니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전쟁 준비를 강하게 주장하긴 했어도, 진심으로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 가능성이 실현되려면 칼 마커스가 죽었다는 사실까지도 인정해야 했으므로, 더욱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키득······.]

그런 와중에도 라니아는 점차 짙어지는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

"라니아!"

다급하기 짝이 없는 부하의 외침에 라니아는 바쁜 걸음을 움직였다.

망루에 올라가서 보니,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적지 않은 차량들이 캠프를 향해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아크 바깥의 황야를 헤쳐왔다는 건 이미 상당한 수준의 무장을 갖추었다는 뜻과도 같았으니, 이는 곧 크로노스의 위협이나 다름없었다.

"어디서 온 건지 확인했어?"

"그게··· 차량의 수준으로 보나, 드문드문 보이는 무장 상태로 보나, 아무래도 아크 같습니다."

"······아크, 라고?"

그토록 염려하던 일이 기어이 현실로 일어나고야 말았다.

"······일단, 다들 준비하라고 해."

"정말로 아크와 전쟁이라도 하려는 겁니까?"

"어쩔 수 없어."

그러나 라니아는 아직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았다.

만약 상대가 공격을 할 것이었다면, 저렇게 대놓고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기습을 했을 테니 말이다.

"내가 가볼게."

라니아는 이를 악물고서 기다렸다.

그러한 라니아의 바람이 닿기라도 한 건지, 당장이라도 캠프를 덮칠 것 같았던 트럭들이 멀찍이서 멈춰섰다.

'······멀리서 공격할 셈인가?'

라니아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안에 있던 인원들이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거리가 거리인 터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당연하게도 모두가 무장한 이들이었다.

'공격을 하려면 지금 해야해.'

하지만 만약 저들이 공격을 할 의사가 없었다면?

그랬다가는 크로노스는 아크에 선제 공격을 한 꼴이 되어버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트럭에서 내린 이들 중 열 명가량의 인원들이 캠프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라니아!"

"나도 알아!"

라니아는 바쁜 걸음으로 그들이 오는 곳을 향해서 달려나갔다.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전쟁을 준비하고, 또 준비하면서 언제든지 총구를 겨눌 준비를 했다.

분명히 그랬을 텐데······.

막상 마주한 이들 중에는 라니아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얼굴이 있었다.

"오라, 버니······?"

"오랜만이군."

칼 마커스가 돌아왔다.

그것도, 아크의 물자들을 가지고.

< 물자 지원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