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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 11

칼 마커스의 손에서 뿜어진 섬광이 번뜩일 때마다, 조사팀을 쫓던 마수 군단이 산 채로 잘리고, 타들었다.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의 어마어마한 위력이 그대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라버니!"

"뒤로 빠져 있어라."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타난 칼 마커스는 거침이 없었다.

그 많은 마수 군단을 상대로도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지잉-

촤아아악──!!

그러나 싸움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라킨은 한 가지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하지?'

무언가 이상하다.

단순히 위력 같은 걸 떠나서, 지금 칼 마커스는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라는 병기가 지닌 한계를 명백히 뛰어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런 식으로 플라즈마 병기를 운용하면 진작 에너지가 고갈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어째서?'

단순한 BLT-47 플라즈마 발사기가 아닌 건가?

아니, 아무리 특별하다고 해도, 저 정도 크기의 병기로는 도저히 이 정도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낼 수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가.'

칼라킨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당장 눈앞에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으나, 그것에 신경을 쓰기에는 당장 자신 앞에 닥친 현실이 급박했기 때문이었다.

[카아아아악!]

[키에에에에에에에!!]

아무리 칼 마커스가 엄청난 위용을 보이고 있다고는 해도, 본질적으로는 혼자다.

한 손으로 열 손을 막는 것까지는 어떻게 가능해도, 백 손, 천 손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칼라킨!"

힐데가르트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칼라킨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건 6급 괴수종.

아무리 칼라킨이라 할지라도 Ark-15 자동소총의 화력으로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인 상대였다.

'늦었─'

칼라킨의 눈에 어둠이 드리운 순간.

[키득······.]

갑작스럽게 일어난 에테르 파동.

그와 함께 눈앞에 있던 6급 괴수종이 날아갔다.

"뭘 하는 거야? 그런 고물로 저걸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쏘아진 목소리에 칼라킨은 자신을 구한 이를 바라보았다.

"······."

라니아.

그를 구한 건 다름 아닌 그녀였다.

"뭘 그렇게 멍청하게 보고 있어? 당장 달려!"

"······아."

애석하게도 상황은 좋지 못했다.

칼 마커스의 엄청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마수 군단과의 거리는 계속해서 가까워졌고, 마수들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면 전멸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

그래서일까.

함께 달리던 칼 마커스가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그리고는, 당장이라도 모든 걸 쓸어버릴 기세로 다가오고 있는 마수 군단을 마주했다.

"···오라버니?"

그 모습을 본 라니아가 경악하며 바쁘게 도망치던 발걸음을 멈췄다.

"먼저 가라."

"지금 무슨 짓을······!"

"난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있으면 오히려 방해된다. 금방 처리하고 뒤따르겠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오라버니가 아무리 잘났어도 혼자 저걸 어떻게 상대해?"

"상대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너희가 도망칠 때까지 시간을 벌고, 다음에 나도 도망칠 거다."

얼핏 들으면 자기를 희생한다는 말처럼 들렸으나, 칼라킨은 다르게 생각했다.

칼 마커스에게는, 정말로 그런 말도 안 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평소 자기 자신을 이성의 화신이라고 생각해온 칼라킨이지만, 지금만큼은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칼라킨의 모습에 라니아가 적의를 드러냈다.

"닥쳐! 네가 뭔데 끼어들어?"

"지금은 칼 마커스를 믿을 수밖에 없다."

"나보고 또 가족의 피를 짓밟고 서라고? 개소리하지마!"

잠깐의 실랑이가 오가는 사이, 어느덧 마수 군단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칭얼거림 같은 라니아의 고집도, 여기까지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따.

"가라."

칼 마커스는 단지 그말뿐이었다.

그 말이 너무나도 덤덤하고 무겁게 느껴져서, 라니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죽으면 영혼까지 괴롭혀줄 거야."

"그것참 무섭군."

"죽지 말라는 소리야!"

"그럴 거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라니아는 이를 악물고서 뒤돌아섰다.

라니아가 어떤 결심을 하고서 뒤돌아선 건지 모를 리가 없었기에, 칼라킨을 포함한 조사팀원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 * *

'갔나?'

나는 조사팀이 완전히 뒤돌아선 것을 보고서야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안 간다고 버티면 어쩌나 했는데, 이렇게 가주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러면 해볼까.'

아직 시야 안에 조사팀원들이 보이고 있는 만큼, 호루스를 불러내거나 야누스를 활용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철컥-

Ark-15 자동소총을 다잡은 나는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장전된 총알은 A-985 폭발탄.

현재 내가 지닌 총알 중에서 가장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총알이 Ark-15 자동소총의 어마어마한 연사력과 함께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쾅!

콰카카카카캉──!!!

절제라고는 조금도 없는 난사.

아니,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카아아아아악!]

[끼에에에에에엑!]

마수와 마물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A-985 폭발탄에 머리가 날아가고, 가죽이 터져 나갔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퉁, 퉁, 퉁-!

나는 NO-13 유탄 발사기의 방아쇠 역시도 함께 당기며, 혹여 부족할 수도 있는 화력에 보탰다.

폭발음과 괴성.

비명과 쇳소리.

A-985 폭발탄과 유탄이 뒤섞여서 만들어낸 거대한 탄막은, 마치 화염의 장벽이 일어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내가 방아쇠를 얼마나 당겼을까.

치이익······.

NO-13 유탄 발사기는 물론이고, 내구성 면에서 매우 탁월하다고 볼 수 있는 Ark-15 자동소총까지도 과열된 채로 총구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더 이상은 사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슬슬 빠져도 되지 않아요?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려고요?]

'최대한 숫자를 줄여놓을 필요가 있으니까.'

이미 여러 차례의 전투로 마수 군단의 숫자를 상당히 줄여 놓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이브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여기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아크가 입을 피해가 결정된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쳐서는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면 언제 가려고요?]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나는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뽑아들었다.

조금 쉬게 내버려 두었다고, 뜨거웠던 손잡이의 열기가 조금이나마 식은 듯했다.

'다시 한번 해볼까.'

사방으로 붉은 섬광이 비산했다.

일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파멸의 빛은, 이전에 내가 쏘아냈던 탄막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흉포하고 파괴적이었다.

콰카카카카카───!!!

두려움을 모르던 마수 군단조차도 그 붉은 섬광에는 진군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통해서 뿜어진 파멸은 광범위하고, 또한 절대적이었다.

치이익······.

그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듯이, 인정사정없이 파멸의 빛을 뿜어내던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의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에너지가 고갈된 것이 아니다.

BLT-47 플라즈마 발사기 자체가 자체 열을 견디지 못하고 고장나고 있는 것이었다.

'역시··· 오래 쓸만한 게 못 된다니까.'

마침내 BLT-47 플라즈마 발사기 역시도 과열되어서 사용이 불능이 되자,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내려두었다.

'여기까지인가.'

정체절명의 위기라고 부를 만한 상황일 수도 있었으나, 나는 뼈 창을 뽑아 들었다.

슬슬 이곳에서 빠져나갈 때가 됐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아주 잠깐 정도라면 사용할 수 있겠어.'

나는 그대로 뼈 창을 땅에 내리찍었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합니다!]

* * *

'음?'

입에서 단내가 나올 정도로 달리기를 이어가던 칼라킨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마수 군단이 있는 쪽에서 느껴진 불길한 느낌 때문이었다.

'방금······ 뭐였지?'

어디선가 느껴본 것 같은 느낌인데, 또 막상 어디서 느꼈냐고 묻는다면 더없이 낯설었다.

그만큼 지평선 너머에서 느껴진 것은 이질적이고, 괴상한 느낌이었다.

"이쯤이면 웨이브의 진행 방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아요."

그때, 힐데가르트가 말했다.

그 말마따나 칼 마커스가 시간을 버는 동안, 라니아와 아크의 조사팀은 무사히 웨이브의 영향권 밖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그 누구도 기뻐하지 못했다.

그건 라니아의 얼굴에 드리운 어둠 때문도 있었지만, 각자의 이유 때문도 있었다.

조사팀은 이번에 너무나도 많은 걸 잃어 버렸다.

"망할, 망할······."

누군가는 그토록 믿어왔던 고고한 신념과 명예를 잃어버렸고,

"······."

또 누군가는 책임을 저버렸고,

"······칼 마커스."

또다른 누군가는 그저 서글펐다.

그렇게 우울한 시간 속에서, 먼저 입을 연 이는 다름 아닌 드미트리였다.

"다들··· 미안하다."

고고한 귀족의 자존심 따위는 내려놓은 순수한 사과.

드미트리를 아는 이라면 놀랄 만한 일이었다.

"꼭 네 탓만은 아니야. 나도 거기에 동조했으니까."

"···저도 그래요."

힐데가르트와 아이리스가 말했다.

그 말마따나, 만약 그들이 칼 마커스와 칼라킨의 말을 따라서 처음부터 크로노스 잔당과 함께 웨이브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드미트리를 비롯한 조사팀원들은 크로노스 잔당을 믿지 못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러한 것이었고.

"맹세하겠다. 다시는, 이런 병신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거다. 다시는······."

드미트리의 눈에 핏줄이 섰다.

이번 여정에서 가장 큰 무력함을 느낀 건 다름 아닌 그였다.

레드 라인의 귀족.

명문가의 자제.

전도유망한 군인.

그 모든 사실들은, 이번 여정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방해가 되면 됐지.

그렇기에 드미트리는 이번 여정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말이다.

"저······."

"뭐."

힐데가르트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잔뜩 날이 선 라니아의 모습에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힐데가르트는 꿋꿋이 말을 이어갔다.

"···무사할 거예요. 칼 마커스는."

그게 라니아에게 향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말인지 힐데가르트는 알지 못했다.

"그렇겠지."

그런데 왜일가.

조심스럽게 위로의 말을 한 힐데가르트는 이내 들려온 라니아의 당당한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네?"

"오라버니가 나중에 따라온다고 했잖아. 당연히 무사하겠지."

어이가 없을 정도의 믿음.

그러나 왠지 힐데가르트는 그 말도 안 되는 믿음이 어째서인지 이해가 갔다.

그만큼 칼 마커스가 보여왔던 일들이 말도 안 되는 일들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정말로 칼 마커스가 무사할 거라고 믿는다면, 이렇게 냉기를 풀풀 날리고 있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러면 대체 왜······."

"왜 화났냐고?"

"어··· 네."

솔직히 말해서 화가 나 보였다기보다는 슬퍼 보였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힐데가르트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내가 한심해서."

라니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할아버님이 돌아가실 때도 아무것도 못했어. 그런데, 이번에도 오라버니의 손에만 맡겨두고··· 내가 너무 한심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라니아를 마치 괴물 보듯이 했던 힐데가르트였다.

그러나 지금 라니아가 보이고 있는 모습에 힐데가르트는 라니아에 대해서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 상황에서는."

"나도 알아."

담백한 대답.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왜인지 그 대답이 너무나도 무겁게 들렸다.

"야. 근데."

"네?"

"너무 친한 척 하지 마. 너, 아크 쪽 인간이잖아."

"···칼 마커스도 그런데요?"

엄밀히 말하자면 칼 마커스는 아크의 용병일 뿐이지만, 일단은 아크 소속으로 이 자리에 온 건 맞았으니 말이다.

"오라버니는 예외야. 뭘 당연한 걸로 트집을 잡으려고 해?"

"하하······."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라니아는 칼 마커스가 아크의 조사팀과 함께 왔다는 사실보다는, 그저 자신의 형제라는 사실에 더 주목한 듯했다.

아니, 애초에 앞선 사실 따위는 별로 신경도 안 쓰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아크를 싫어하는 듯이 굴면서 말이지.'

입장에 따라서는 혈육 따위도 저버릴 수 있는 아크 내에서 살아온 힐데가르트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이었다.

만약 힐데가르트가 라니아의 입장이었다면 자신의 가족을 끝까지 믿을 수 있었을까?

힐데가르트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어?"

그리고 힐데가르트는 보았다.

황야 너머에서,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한 인영을.

"설마······."

모두의 시선이 황야로 향했다.

이미 한계치를 넘어선 힐데가르트의 통찰안이 억지로 힘을 짜내려 했으나, 애석하게도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힐데가르트는 달렸다.

"야!"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라니아도, 다른 조사팀원들 역시도.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저 너머에서 다가오고 있는 인영을 향해서 내달렸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보았다.

칼 마커스가, 그곳에 있었다.

< 크로노스 연합 (17) > 끝

······응?

일단 돌아오긴 했는데, 막상 돌아오니까 라니아를 비롯한 조사팀원들의 반응이 어째 묘했다.

마치 죽은 사람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이야, 인기 많네요. 부럽다 부러워.]

'시끄럽다.'

에스더가 이죽거리는 사이, 멀찍이서 라니아의 외침이 들려왔다.

"오라버니!"

오늘만 저 소리를 몇 번 듣는 건지 모를 외침과 함께, 라니아와 조사팀원들이 반색하며 다가왔다.

"진짜로··· 왔구나."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나."

"···응, 그래. 알고 있었어."

그렇게 말하는 라니아는 전혀 그렇지 않은 눈치였지만, 굳이 이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내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칼 마커스."

칼라킨의 표정은 제법 볼만했다.

당황, 경악, 안도 등등······.

칼라킨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 이번 일은 제법 보람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잘 해줬다. 네 덕분에 아무도 희생되지 않은 것 같군."

"···제가 달리 한 건 없습니다."

"아니. 충분히 해줬어."

사실, 조사팀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임무와 환경 속에서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은 건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몇 번이고 전멸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기를 헤쳐오는 데는 당연히 칼라킨의 역할이 컸을 수밖에 없었다.

'흐음.'

슬쩍 둘러본 조사팀원들의 모습은 하나 같이 말이 아니었다.

설산에 쌓인 눈 같던 아이리스의 백발은 이제 진흙 발에 마구잡이로 밟힌 눈처럼 됐고, 항상 기품을 유지한다며 단정했던 드미트리의 옷은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칼라킨이나 힐데가르트 역시도 남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의 큰 부상을 입은 이는 없었으니,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돌아 오셨군요."

칼라킨과의 짧막한 인사가 끝난 뒤 나를 반긴 건 힐데가르트였다.

아무래도 조사팀 내에서는 드미트리와 더불어서 꽤 자주 마주친 사이여서 그런지, 나에게 꽤 친밀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래."

"대체 어떻게··· 라고 묻는 건 별로 의미 없겠죠."

"운이 좋았다."

"하하··· 네. 정말로 다행이에요."

힐데가르트와의 인사도 끝난 후에야 나는 드미트리와 아이리스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돌아왔나."

"그래."

"······그래, 그거면 되는 거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드미트리의 표정은 상당히 심각해 보였다.

저 성질 더러운 놈을 괜히 건드려서 좋을 건 없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리스는······.

"저어······."

아이리스가 주뼛주뼛 거리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녀의 입술이 간신히 달싹이던 순간.

[뭘 봐?]

"히익!"

간신히 나에 대한 경계심을 푸는 듯했으나, 에스더의 말과 함께 다시금 아이리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쯧쯧, 저리 담이 약해서야.]

'······원래 저 정도까지는 아니다.'

[응? 주인님 저 여자 알아요?]

'같은 팀원이잖나.'

[흐음··· 아닌데. 뭔가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는데.]

'기분 탓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짧막한 해후가 지나가고, 내가 말했다.

"일단, 크로노스 잔당이 있는 쪽으로 가지. 할 말도 있으니."

"잔당 아니야. 아무리 오라버니라고 해도 또 우리를 잔당 취급했다가는··· 알지?"

"···내가 실수했군."

아무리 라니아와 칼 마커스가 피가 이어진 남매라고는 해도, 괜히 관계를 나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 빌어먹을 세상은 혈연이나 가족 간의 정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저버리게 만드는 곳이었으니까.

"그런데 할 말이라니? 나랑?"

"그래. 정확히는 모두 다 함께겠지."

"나는 쟤들이랑은 별로 할 말 없는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아크와 크로노스에 대한 이야기다."

라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라버니,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아크의 앞잡이야?"

"아니. 아크에는 출입이 거절당했다."

그와 함께 가늘어졌던 라니아의 눈이 당황으로 바뀌었다.

"······으응? 뭐라고? 오라버니를 왜?"

"수상한 자를 들일 수 없다더군."

"그런··· 아크 그 새끼들 진짜 눈깔이 삔 거 아니야?!"

언제는 앞잡이 아니냐며.

"하! 안 되겠다. 내가 당장 아크 이 새끼들을··· 아, 마침 아크 새끼들 여기 있었네. 너희 이리 와봐."

라니아가 날뛰자 드미트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칼라킨은 눈을 감았고, 힐데가르트와 아이리스는 겁에 질렸다.

"그만 해라."

"아니, 오라버니는 열도 안 받아요? 오갈 데 없는 사람을 아크 바깥으로 내쫓아? 하··· 진짜 안 되겠네."

그렇게 조사팀을 노려보던 라니아는 이내 무언가 이상한 걸 깨달았는지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잠깐. 그런데 아크에서 쫓겨났는데 왜 쟤네랑 같이 있어? 뭔가 앞뒤가 안 맞는데?"

"용병으로 왔다."

"용병? 아크가 그런 걸 고용해?"

라니아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칼라킨이 끼어들었다.

"이례적인 일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칼 마커스라서 가능한 거다."

"···오라버니라서 가능한 거라고?"

"그래. 칼 마커스가 얼마나 뛰어난지는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그리고 라니아의 시선이 나를 훑었다.

'의심하는 건가?'

아니, 당연히 그렇겠지.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흥, 흐흥······."

···굳이 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씰룩씰룩 거리는 입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미소.

도대체 왜 인지는 몰라도, 라니아는 나와 칼라킨을 번갈아 보면서 억지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뭐. 우리 오라버니 정도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암암."

왜 네가 거들먹 거리냐.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잘 됐다고 봐야 하나.'

안 그래도 라니아와 대화를 나눠야 하는 입장인 터라, 이렇게 이해해준다면 나쁠 건 없었다.

"그러면 바로 가지."

"어, 그런데 오라버니.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뭐지?"

"······그, 너무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우리 애들이 어느 쪽으로 도망쳤는지 모르겠네?"

"내가 안다."

"···으응? 오라버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까 가는 방향을 봤다."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보았냐에 대한 부분은 조금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래? 그러면 잘 됐고."

"그러면······."

나는 조사팀을 돌아보았다.

"일단 이번 임무에 대한 일차적인 목적은 이뤘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끝내면 안 될 것 같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떻지?"

아크 조사팀의 임무는 크로노스 잔당이 언제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목적이 무엇인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단은 임무를 완수했다는 뜻.

그러나 단지 거기에서 끝내기에는 이 상황 자체에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저는 동의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나선 건 역시나 칼라킨이었다.

"고맙군."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칼 마커스."

"그래."

힐데가르트가 곧이어서 뒤따르고, 드미트리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나도 동의한다."

"그······ 워, 원하시는 대로······."

마지막으로 아이리스는 어지간히도 겁을 집어 먹은 모습이었으나,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

괜히 따졌다가 더 겁먹으면 어떻게 해.

[쯧쯧, 진짜 담이 약하네.]

'너 때문이라니까.'

[에헤이, 또 내 탓하네. 그냥 쟤가 소심해서 그런 거라니까요. 세상에 어느 에테르 적합자가 귀신한테 쫄아요?]

그것도 그러네.

'···시끄러워.'

하마터면 에스더의 궤변 아닌 궤변에 설득될 뻔했다.

어쨌거나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마침내 큰 고비가 하나 넘어갔다.

'아크가 조금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했어.'

내가 자리를 피한 뒤, 마수 군단은 그대로 아크를 향해서 진격했다.

비록 처음에 비하면 내가 나름대로 숫자를 줄이긴 했지만, 그게 또 마수 군단의 주력을 줄였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마수들 수준은 전체적으로 그다지 높지 않았어. 만약 2급 이상의 마수나 마물이 있었더라면 나도 쉽게 몸을 빼지는 못했을 거야.'

곧, 이후부터는 순전히 아크의 능력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 계산이 조금이라도 어긋났다면, 아크는 멸망하거나 매우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렇기에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마수 군단의 꼬리를 붙들고 늘어지고 싶었지만, 이미 상황 자체가 내 손을 떠난 것도 사실이었다.

'믿어야겠지.'

내가 지금까지 지켜왔던 아크의 저력을.

"그러면 가지."

내가 앞장서자, 자연스럽게 내 뒤를 라니아를 비롯한 조사팀원들이 따랐다.

이번 임무를 마무리 지을 때다.

*

"현재 크로노스 잔··· 아니 옛 크로노스 세력은 누가 책임지고 있지?"

순간적으로 잔당이라는 단어가 나올 뻔했으나, 이내 느껴진 라니아의 시선에 나는 재빨리 말을 얼버무렸다.

만약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면, 모르긴 몰라도 꽤 유쾌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을 터였다.

"그 옛이라는 표현이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일단은 내가 그와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긴 해."

역시 그랬나.

내가 알기에도 훗날 크로노스 연합의 일인자로서 군림하는 이는 크로노스 잔당 출신이 아닌 다른 세력 출신이다.

당장 크로노스 잔당들을 책임지는 게 라니아라고 해서 딱히 놀라울 건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협상은 너와 하면 되나?"

"어··· 그건 또 아니야.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내가 특별한 어떤 권한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까. 무언가를 결정할 거라면, 의원들의 동의를 얻어야 해."

"그런가."

이미 알고 있던 대로였다.

크로노스 잔당들과 어떤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라니아 한 명만을 설득해서는 안 된다.

당장 크로노스 잔당을 대표하는 것처럼 움직였던 라니아조차도, 지금으로서는 그저 의석 하나 정도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였다.

"아크와 적대해봤자 옛 크로노스 세력 입장에서도 절대 좋을 게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을 거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지금 크로노스를 중심으로 한 군소 도시들의 움직임은 현재 아크의 신경을 거스르고 있다. 이대로라면 아크가 너희를 적대하는 건 시간 문제야."

크로노스 잔당들의 목적은 크로노스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연합을 만들어내는 것.

당연히 아크에서 이를 반길 리가 만무했다.

아니, 애초에 이로 인한 역사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크와 크로노스 연합은 결국에는 적대하게 될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었으면 해?"

"긴급 의회를 소집해주었으면 한다. 옛 크로노스인들뿐만 아니라, 새롭게 합류할 이들까지도."

라니아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그 말은, 오라버니가 아크를 대표할 수 있다는 뜻이야?"

"물론 아니지."

"엥?"

라니아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했다.

"하지만 제안을 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거다. 이래 보여도 아크에 친한 사람이 제법 있거든."

"아······ 그러면 오라버니의 마음은 고맙지만, 고작 친한 정도로 어쩔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그때,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칼라킨이 끼어들었다.

"그건 아닐 거다."

"그게 무슨 말이야?"

"칼 마커스는 아크에 있어서 완전한 외부인이 아니야. 아크에서 칼 마커스를 용병이자 전술 디렉터로 이번 임무에 보냈다는 건, 어느 정도의 권한을 부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너무 편한대로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칼 마커스를 믿는다. 너는 그렇지 않나?"

"누, 누가 안 믿는데? 하! 어이가 없어서. 내가 아무렴 너보다 오라버니를 못 믿을까!"

"그러면 다행이고."

흐음.

칼라킨이 나서준 덕분에 아무래도 이야기가 쉽게 흘러갈 것 같았다.

"어차피 아크에서 누가 온다고 한들 너희로서는 믿기 어려울 거다. 그러니까, 차라리 내가 중재하겠다."

"···아크랑 우리 사이를?"

"그래."

"하······."

라니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만큼 내가 한 제안이 황당하고 경악스러운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뭐. 까짓 거 해보자. 어차피 손해볼 것도 없는데."

"잘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크로노스 잔당의 피난 행렬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라니아가 앞장섰다.

"따라와. 노친네들을 만나러 가자고."

* * *

조용히 뒤에서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드미트리의 시선이 칼 마커스의 뒷모습을 향했다.

'···만약 칼 마커스가 크로노스 잔당과의 협상에 해낸다면, 칼 마커스의 입지는 아크 내에서 단순한 용병 수준이 아니게 된다.'

드미트리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물론 애초에 그게 가능한 것 자체가 크로노스 잔당 측의 주요 인물인 라니아가 칼 마커스와 남매 사이기 때문이겠지만, 레드 라인의 귀족가의 자제로서 살아온 드미트리는 알고 있었다.

권력이나 이득 앞에 서게 되면, 핏줄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어지는지.

'여러모로 칼 마커스는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자다. 그렇다면······.'

드미트리의 시선이 빛났다.

적으로 삼아서 안될 자라면, 친구로 삼는 게 가장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칼 마커스."

"무슨 일이지?"

드미트리는 주섬주섬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 뒤, 칼 마커스에게 조심스럽게 건넸다.

"멀티 칼로리 바다. 시장하실··· 아니 배고플 텐데 먹어라."

"···고맙다."

칼 마커스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멀티 칼로리 바를 받아들자, 드미트리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 크로노스 연합 (18) > 끝

"라니아!"

우리가 크로노스 잔당의 피난 행렬에 합류하자, 많은 이들이 라니아를 반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있는 이는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웃는 얼굴의 데니스.'

웃는 얼굴로 아크에 포격을 흩뿌리던, 훗날 크로노스 연합의 핵심 인물이 되는 이들 중 하나.

물론 그러한 이명은 나중에 가서야 생기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 데니스의 표정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무모한 짓을··· 무슨 일이라도 났으면 어쩌려고 했어?"

"미안미안. 그래도 멀쩡히 살아서 왔잖아?"

라니아가 배시시 웃었다.

아무래도 라니아가 조사팀이 있는 곳으로 간 것 자체가 독단적으로 행한 일인 듯했다.

그 모습에 데니스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됐고, 이 자들과 함께 왔다는 건··· 무언가 생각이 있는 거냐?"

"어. 의회를 소집해줘."

"···의회를?"

"중요한 일이야."

라니아의 진지한 얼굴에 데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고마워."

그렇게 데니스가 임시로 쳐놓은 천막 사이로 사라진 후, 라니아가 말했다.

"오라버니가 하라는 대로 했어. 이제부터는 오라버니가 해야 해."

"충분하다."

"에휴··· 말은 잘해."

옆에 있던 에스더가 끄덕였다.

[네가 뭘 좀 알긴 하네.]

"그치?"

아주 친구를 먹어라.

"오라버니,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나는 볼 일이 있어서."

"알았다."

그 말을 마친 뒤 라니아 역시도 임시로 쳐진 천막들 사이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자리를 비운 시간이 시간인 터라 할 일이 많은 듯했다.

"···괜찮은 겁니까?"

칼라킨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야 하겠지."

"칼,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에게 크로노스 잔당과 협상할 권한은 없습니다. 만약 이곳에서 이야기가 잘 풀린다고 해도, 아크에 가서 따로 협상을 해야 할 겁니다."

"알고 있다."

칼라킨의 우려가 무엇인지는 안다.

그러나 어차피 아크로서도 크로노스 잔당처럼 위험한 세력을 통제하에 두고 싶어 할 터.

내가 이에 대한 이야기를 가져간다면 거절할 가능성은 없었다.

'설사 거절한다고 해도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조사팀이 보기에 이 협상은 무모해 보일 수도 있었으나, 내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좋은 기회에 가까웠지.

'에스더.'

[네?]

'호루스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비행종들을 사냥해라.'

[그게 무슨··· 지금 저랑 뼈순이만 따로 마수 사냥이라도 하라고요?]

'내가 못하니까 너희라도 해야지.'

[하··· 진짜 악덕 사장이네.]

'가기나 해라.'

에스더의 몸이 흐릿해졌다.

내 말대로 호루스와 함께 비행종들을 사냥하기 위해서였다.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고양이 손이라도 보태는 게 낫겠지.'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천막 안에서 라니아가 나오며 손짓했다.

"준비 끝났어. 가자, 오라버니."

내가 조사팀을 향해서 눈짓했다.

"가지."

"···정말로 우리도 같이 가도 되는 겁니까?"

"잘못 알고 있군. 그래도 되는지가 아니라, 그래야만 한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지은 칼라킨이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제 드미트리를 비롯한 힐데가르트와 아이리스 역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라니아가 그들을 도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잘된 일이었다.

"일단 크로노스의 의원들은 거의 다 소집했어."

"크로노스의 의원들만?"

"어차피 다른 세력의 대표자들은 이곳에 없어. 그러니까, 그 전에 크로노스의 의원들부터 만나."

라니아가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다른 세력의 대표자들을 만나고 싶다면 일단 너희들부터 설득해라. 그런 말인가?"

"맞아."

"알았다. 어려울 것도 없군."

"오올. 자신 있나 봐?"

"없었다면 오지도 않았을 거다."

짧막한 대화를 마친 나는 그대로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각기 다른 모습을 한 크로노스의 의원들이 원탁에 앉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 내가 아는 얼굴들이었으나, 모르는 얼굴들도 몇몇 섞여 있었다.

"아크에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디알로입니다."

디알로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인물 중 하나로서, 크로노스 연합 내에서도 중추적인 인물을 맡은 이였다.

동시에 굉장한 수완가이기도 해서, 크로노스 연합에서 행해지는 정책은 대부분 이 자의 작품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칼 마커스다."

"시간이 별로 없으실 테니··· 그러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아크에서 원하는 것이 뭡니까?"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라······.

나 역시도 바라는 바였다.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

"오해라니요?"

"아크에서 크로노스에 바라는 건 없다."

"오라버니! 지금 무슨······."

이에 당황한 라니아가 입을 열었으나, 디알로가 이를 제지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크에서 원하는 게 없다면 칼 마커스 당신은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세월의 풍파로도 채 가려지지 않은 디알로의 날카로운 시선이 나를 훑었다.

"그 말 그대로다. 아크에서는 크로노스에게 원하는 게 없어. 아니, 내가 반대로 묻지."

내가 의석에 앉은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디알로와 라니아를 비롯한 익숙한 얼굴과 그렇지 못한 얼굴들을 향해서.

"너희 크로노스는 아크에게 무얼 줄 수 있지?"

내가 덧붙였다.

"너희는 무얼 가지고 있지? 무기? 병사? 식량? 진귀한 보물? 그중에서 무엇 하나라도 가지고 있나?"

그와 함께 침묵이 찾아왔다.

"······."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들 역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처참하게 망해버린 옛 크로노스에는, 아크에 줄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그게 아크의 뜻입니까?"

디알로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아크의 의지를 대변하지 못한다. 그러니 아크의 뜻 역시도 될 수 없지."

"지금 말장난을 하자는 겁니까? 아크의 뜻을 대변하지 못할 거라면, 대체 당신들은 왜, 무슨 자격으로 이곳에 있는 겁니까!"

디알로가 노기를 드러냈다.

그와 함께 옆에 있던 조사팀원들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곳은 그들에게 있어서 적진 한복판 중에서도 심장이라고 볼 수 있는 곳이다.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아크의 의지를 대변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너희에게 있어서는 더욱더 믿을 수 있는 인물일 거다."

한창 노기를 드러내던 디알로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아크 사람이 아니다."

"그게 무슨······."

디알로가 라니아를 바라보았다.

라니아는 그런 디알로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다면 그 옆에 있는 자들은요? 그들도 아크 소속이 아닌 겁니까?"

"아니, 이들은 아크 소속의 병사들이다. 아주 장래가 유망한 병사들이지."

"그렇다면 그런 이들을 내버려 두고 왜 당신이 나선 겁니까?"

"그게 너희에게 더 좋은 일일 테니까."

그때, 조용히 의석에서 이 사태를 관망하던 의원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나도 모르는 얼굴인 걸 보니, 아무래도 훗날 크로노스 연합이 만들어지며 축출되거나 웨이브에 휩쓸려서 죽을 예정인 인물인 듯했다.

"···그렇다면, 칼 마커스 당신은 왜 우리를 만나려고 한 거죠?"

"아크에서는 크로노스에 바라는 게 없다. 하지만, 만약 크로노스가 아크를 향해서 이빨을 드러낸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런···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크로노스가 대체 왜 아크를 적대한단 말입니까?"

그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 당장 크로노스 잔당들이 아크를 적대하기에는, 아크가 너무나도 거대해 보일 테니까.

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크로노스 연합이 만들어지고, 그 세력이 커지게 되면 크로노스 연합 측에서도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크의 입장에서 옛 크로노스 세력이 거슬리는 건 사실이다. 이번에는 조사팀이지만, 다음에는 토벌대가 파견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와 함께 의석이 술렁였다.

"···토벌대라고?"

"아크에서 우리를 왜?"

"하지만 만약 정말로 아크에서 토벌대가 조직된다면······."

의원들의 얼굴에서 동요가 피어올랐다.

그만큼 아크의 이름은 이들에게 있어서 무거웠고, 이런 상황에서 토벌대가 조직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위협적이었다.

'뭐, 거짓말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아크라 할지라도 이런 먼 곳까지 토벌대를 파견할 여력은 없었다.

정확히는, 아크로서도 크로노스 잔당을 적으로 돌릴 만한 짓은 웬만해서는 피하고 싶어한다는 게 옳았다.

"···칼 마커스, 그렇다면 당신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별거 아니다. 내가 너희를 대신해서 아크와 협상해 주지."

"···예?"

그 말에는 의석에 앉아 있는 의원들은 물론이고 디알로조차도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조사팀과 라니아조차도 입을 떠억 벌린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현재 아크는 너희를 위협 요소로 여기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지. 하지만 내가 나서서 책임 지고 아크와 크로노스 사이를 중재해주지."

"무슨······."

의석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비웃는 이는 없었다.

이번 안건이 그만큼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다시금 디알로가 입을 열었다.

"···거기, 그쪽에 계신 아크분들은 칼 마커스의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칼라킨이 말했다.

"우리는 아크의 조사대로서 칼 마커스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듣기로는 당신들은 아크의 병사들이라는데, 당신들의 뜻은 곧 우리에게 아크의 뜻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 점을 알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허어······."

디알로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칼 마커스, 당신의 말대로 우리에게는 아크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크에게 받을 게 있는지도 의문이군요. 아크는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무기와 식량. 그 정도면 되겠나?"

"···아크에서도 무기와 식량은 귀할 텐데, 가능하다는 겁니까?"

"오히려 그렇기 때문이지. 아크가 크로노스에게 무기와 식량을 지원하는 한, 크로노스는 절대로 딴마음을 먹지 못할 테니까."

"지금 당근으로 우리 크로노스를 부리겠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들린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 맞다."

"하하······."

지금까지 허허 웃기만 하던 디알로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감히!"

쾅!

원탁의 중앙이 그대로 쪼개졌다.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지만, 디알로는 절대로 무시할 만한 늙은이가 아니었다.

물론, 그래봤자였지만.

"무언가 착각하고 있나 보군."

"착각? 지금 칼 마커스 당신은 우리 크로노스를 아주 졸로 보고 있군. 당신 말대로라면 아크에게 무기와 식량이나 받아먹고, 굴종의 맹세를 하라는 것이 아닌가!"

"그게 뭐가 나쁘지? 그리고 나는 크로노스에게 굴종하라고 한 적이 없다. 그저 적대적이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한다는 거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면 의미가 다르다고 보는 겁니까?!"

디알로에게서 흉흉한 기세가 흘렀다.

아니, 비단 디알로뿐만이 아니었다.

굴종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이 자리에 있는 의원들의 적의를 피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내가 말했지만, 지금 당신은 무언가 착각하고 있어."

"착각? 내가 뭘 착각했다는 겁니까?"

"내가 지금 당근만 가져온 것 같나?"

그와 함께 디알로에게서 흐르던 흉흉한 기세가 조금 잦아들었다.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아니. 현실 얘기를 하는 거다. 얼마 전에 너희를 기습했던 모트교를 기억하고 있겠지?"

"그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시는 겁니까?"

"놈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나?"

아무래도 디알로를 비롯한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는 듯했다.

이 자리에 내가 가져온 건, 단순히 상대를 회유하기 위한 당근뿐만이 아니라는 걸.

이제, 당근 대신에 내 손에 쥐어진 채찍을 휘두를 때가 됐다.

"모두 죽었다. 내가 그렇게 했지."

"···혼자서, 말입니까?"

"그래."

디알로가 믿기 어렵다는 듯이 라니아를 바라보자, 라니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어."

"허어······."

아무래도 의회 내에서 라니아에 대한 신용이 상당한지, 의원들의 얼굴에 경악이 깃들었다.

홀로 모트교 지부 하나를 통째로 없앴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애초에 크로노스 잔당조차도 그 모트교 지부 하나에 의해서 도망치듯이 이런 꼴이 되지 않았는가?

"모트교의 지부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 그 모트교에서 그에 대한 원인을 어디를 꼽을지는 뻔하지 않나?"

"···우리 크로노스가 모트교 따위를 두려워할 거라고 여긴 거라면 크나큰 착각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겠군. 이만 돌아가겠다. 너희 크로노스는 이제 모트교는 물론이고 아크와도 적이 되었군. 앞으로 조금 힘들어지겠어."

내 비아냥에 디알로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나에게 넘어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잠깐!"

"더 할 말이 남아 있었나?"

"···자리에 앉으십시오."

"내가 왜?"

디알로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마치 강조하듯이 또박또박, 씹어 삼키듯이 내뱉었다.

"저는, 정의와 공정, 그리고 선과 옳음을 추구하는 크로노스 의회의 일원으로서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칼 마커스."

< 크로노스 연합 (19) > 끝

뿌득, 뿌드득-

디알로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지경.

하지만 아직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비록 지금까지는 디알로가 크로노스 잔당의 대표처럼 말하고 있었으나, 엄밀히 따지면 한 명의 의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른 분들은?"

가장 먼저 손을 든 이는 역시나 라니아였다.

"나는 찬성."

그러한 라니아를 시작으로, 의석에 앉은 크로노스의 의원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저도 동의하겠습니다."

"동의하겠습니다."

내 의견에 동의하는 이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을 때, 유일하게 한 사람만이 손을 들지 않은 채로 꼿꼿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 디알로를 제외하고서 유일하게 나에게 말을 걸었던 이름 모를 젊은 의원이었다.

"···저는, 반대입니다."

라니아가 코웃음 쳤다.

"얘가 뭐래? 어차피 네가 반대하든 말든 이미 과반수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꼭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젊은 의원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도 그를 보았다.

분명히 모르는 얼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눈빛이 눈에 익었다.

"이름이 뭐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젊은 의원이 누구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비록 내 기억에는 없는 이지만, 왜인지 기억해둬서 나쁠 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율리우스입니다."

"···율리우스라고?"

나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우연인가?'

단순히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율리우스는 내가 알고 있는 율리우스와 너무나도 많은 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왜 그러시죠?"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할 말이 뭐지?"

"저는 당신의 제안에 반대합니다."

"이유가 뭐지?"

"칼 마커스, 당신의 말대로라면 크로노스는 물론이고, 훗날 만들어진 연합 역시도 아크에 종속되게 됩니다. 저는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뻔하다면 뻔한 대답.

그러나 어째서인지 나에게는 저 대답이 상당히 의외의 대답으로 들렸다.

왜냐면, 지금 율리우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 너무나도 입바른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율리우스였다면 앞장서서 크로노스를 팔아먹으면 팔아먹었지, 이렇게 반대할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군."

"무슨 오해 말이죠? 설마 당근이니 채찍이니 하는 소리인가요?"

"그런 말이 아니다. 대체 왜 아크에서 크로노스를 종속하길 원한다는 거지?"

"······예?"

율리우스의 얼굴이 벙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을 이어갔다.

"물론 나는 아크의 의지를 대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아크라면 굳이 크로노스를 종속시키거나 할 수고는 느끼지 못할 것 같군."

"지금 크로노스를 모욕하는 겁니까?"

"못 알아들었나?"

내가 조용히 덧붙였다.

"지금 나는 이렇게 처참해진 크로노스에는 그 정도의 가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젊은 의원."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크가 원하는 건 외부에 크로노스 연합 같은 거대 세력이 적이 되지 않는 것이지, 무언가 얻어먹을 콩고물을 찾는 게 아니니까.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아크에 위협이 될 정도의 세력이라면, 지닌 바 가치 역시도 있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틀린 말은 아니다.

단지, 가치라는 건 대상에 따라서 상대적이라는 것을 배제한다면 말이다.

'아크 입장에서는 크로노스가 아무리 좋은 걸 지니고 있어봤자, 운송료도 나오지 않는다고 여기겠지.'

그렇기에 아크의 입장에서 크로노스는 그다지 매력적인 먹잇감이 아니다.

단지, 적이 되지만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한 무수한 세력 중 하나일 뿐이지.

"그런······."

율리우스는 조금 충격이 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나?"

"······."

"아크에서 원하는 건 속국 같은 게 아니다. 친구지."

대놓고 말하자면 그저 적을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지만, 이렇게 둘러 말하는 게 훨씬 더 좋을 듯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말이라도 예쁘게 하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겠는가.

"친구······."

율리우스는 그 단어에 조금 감동이라도 한 건지, 조용히 그 말을 뇌까렸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아닌가?'

만약 내가 알고 있는 율리우스가 맞는다면, 저런 단어 하나하나에 일일이 저런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었다.

'물론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내가 눈앞에 있는 율리우스가 내가 아는 율리우스가 맞는지 이토록 고민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둘 사이에 존재하는 성격 차이도 차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율리우스는 전신에 끔찍한 화상을 입고, 늘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고 다녔기 때문이다.

즉, 겉모습으로 알아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뭐, 지켜보다 보면 알겠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오늘 의제는 여기에서 마무리 지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하지."

디알로의 의회 종료 선언과 함께 의석을 가득 채웠던 의원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알로와 율리우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오라버니."

그렇게 라니아를 제외한 의원들이 자리를 비운 후, 라니아가 나에게 다가왔다.

"라니아."

"응."

"이제 슬슬 연합에 합류할 다른 이들을 만나고 싶다만."

"음, 근데 오라버니도 알겠지만, 그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아마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하고. 하지만 오라버니는 그 전에 아크로 돌아가야 하잖아?"

라니아의 말대로였다.

비록 지금은 이곳에 있지만, 나는 여러모로 아크에 돌아가야 하는 몸이었다.

다만, 라니아가 그 점을 쉽게 납득했다는 점이 나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너는 괜찮은 건가?"

"어차피 가야 하는 거잖아? 그리고 오라버니가 가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말리겠어? 아, 뭐는 되려나? 그래도 가끔은 들릴 거지?"

그 말로 알았다.

내가 한 건, 쓸데없는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라니아는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다.

이런 여자가 내 동생이라는 게 조금은 자랑스러울 정도로.

"질릴 정도로 들릴 거다."

"그러면 다행이고."

라니아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연합의 대표자들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할 거 없어."

라니아가 씨익 웃었다.

"누가 감히 크로노스의 결정에 정면으로 반대하겠어?"

사실상 크로노스 연합의 뜻은 이번 의회에서 결정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나야 편하지만··· 괜찮겠나?"

"에헤이, 우리가 뭘로 보여? 크로노스야. 크로노스.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 알았다."

라니아가 장난스럽게 말하기는 했으나, 사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애초에 크로노스 연합이 동부 연합이나 다른 이름이 되지 않고서 크로노스 연합에 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이곳의 규모는 처음에 개미굴에서 빠져나왔던 인원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

얼핏 봐도 수천 명은 가볍게 넘어 보이는 엄청난 규모.

아마 이게 진짜 크로노스 잔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의회 내내 멍청한 얼굴로 앉아 있었던 조사팀을 돌아보았다.

"슬슬 돌아가지."

"어디로요?"

힐데가르트의 물음에 내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디긴. 집이지."

기나긴 임무가 마침내 끝을 맺었다.

이젠, 돌아갈 때다.

*

"8시간 후에 출발한다. 그때까지 충분히 휴식을 취해 둬라."

돌아가는 여정이 여정인 만큼, 당장 조사팀도 어느 정도 재정비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직 조사팀이 마수 군단에 맞서서 싸운 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다 보니, 그동안 쌓인 피로도 보통이 아닌 듯했다.

내가 그 사실을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조금 쉬라고 말하기 무섭게, 칼라킨을 포함한 조사팀원들이 그대로 고꾸라지다시피 쓰러져서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용케들 버티고 있었군.'

딱히 사치스러운 시간은 아니었다.

앞으로 왔던 것만큼의 거리를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잘 수 있을 때 자둬야 하지 않겠는가.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아직 웨이브가 진행 중이었으니 다음 웨이브가 올 때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았다는 점이었다.

'뭐, 많이 쉬어둬야지.'

이번 여정으로 확실하게 알았다.

칼라킨을 포함한 조사팀원들의 수준은, 내가 생각하는 수준에 채 미치지 못한다.

'돌아가는 내내, 확실하게 굴려주지.'

만약 이 사실을 칼라킨을 비롯한 조사팀원들이 알았다면 기겁했겠지만,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었다.

'그나저나, 에스더의 소식이 없군.'

호루스와 함께 비행종을 사냥하라고 보낸 게 벌써 시간이 훌쩍 지났다.

슬슬 돌아올 때가 됐는데······.

[나 찾았어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든가.

도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에스더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내 앞에 나타났다.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라.'

[에이, 우리 사이에 깜빡이가 어딨어요. 그냥 신호 위반하고 가져다 박는 거지.]

'······.'

어쨌거나 에스더가 돌아왔다는 건, 웨이브 역시도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는 뜻과도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곧이어서 내 앞에 새로운 알림창들이 나타났다.

+

[Red-07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였습니다!]

[공적치가 누적됩니다.]

[+104,551 공적치]

[엄청난 활약을 보였습니다! 공적치가 추가로 적립됩니다.]

[+50,000 공적치]

[놀라운 전략을 사용하였습니다! 공적치가 추가로 적립됩니다.]

[+50,000 공적치]

[현재 공적치 : 271,542]

+

차곡차곡 쌓이는 공적치들.

아무래도 아크에서 이번 웨이브를 성공적으로 막아낸 듯했다.

'하긴, 이 정도까지 해줬는데 못 막으면 사람이 아니지.'

이 정도면 거의 입을 벌리고 떠 먹여준 수준이 아니라, 씹어서 대신 삼켜주기까지 한 수준이다.

아무리 지금까지 내가 웨이브에서 크게 활약해 왔다지만, 이 정도로 전력을 유지 시켜주었다면 아크에서도 어느 정도 해 줘야 하는 법이었다.

'그래도 역시 이전에 있었던 다중 웨이브를 막았을 때 보다는 공적치가 낮네.'

사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전에 다중 웨이브를 상대할 때는, 나도 목숨을 걸고서 웨이브에 맞섰다.

무엇보다도 내가 직접 웨이브를 상대한 시간부터가 큰 차이가 났다.

'그래도 예전과는 웨이브에 맞선 시간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데도 이 정도 공적치를 쌓았다는 건, 그만큼 내가 지닌 화력이 증가했다는 거겠지.'

비록 이번에는 결과가 나쁘지 않았으나, 이번처럼 웨이브 때 자리를 비우는 일은 앞으로 웬만해서는 피하고 싶었다.

지금이야 상대적으로 스테이지 초반부에 해당하는 데다가 내가 바쁘게 움직인 덕분에 이 정도 결과를 냈지만, 이후 스테이지에서는 아크를 비운 대가를 확실하게 치를 테니 말이다.

그렇게 조사팀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나는 돌아갈 여정을 위한 채비를 했다.

기본적인 군장을 꾸리고, 부족한 식량과 물을 보충했다.

조사팀원들이 회복하고 나면 쓸데없이 시간을 끌지 않고 곧장 출발하기 위해서였다.

"오라버니."

"어, 왔나?"

내가 한창 채비에 열중일 때, 라니아가 슬쩍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받아."

"이건······."

"별 건 아니고··· 오라버니한테 고마운 게 너무 많은데, 마땅히 줄 만한 게 없더라고."

라니아가 나에게 내민 건 조금 큰 유리로 된 주사기였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

[HSB-PSI700 강화 혈청] [★★★★★★★(7성)]

헤스본제 강화 혈청.

프시 타입.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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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로노스 연합 (20) > 끝

프시 타입 강화 혈청.

비록 오메가 타입보다 딱 한 단계 위의 강화 혈청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스본의 강화 혈청들 자체가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매우 긍정적인 소식이었다.

'프시 타입 강화 혈청의 능력은 지구력 강화.'

마침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딱 필요한 효과라고 볼 수 있었다.

프시 타입 강화 혈청의 능력이 있다면, 돌아가는 길 내내 조사팀을 아주 제대로 굴려줄 수 있을 테니까.

"고맙다."

"아니야. 다음에 이런 거 또 있으면 줄게."

"그래주면 더 고맙고."

라니아의 반응을 보니,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강화 혈청을 구하려면 크로노스 쪽으로 와야 한다는 생각이 옳았군.'

애초에 헤스본의 잔당들 역시도 크로노스 연합에 합류하게 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바로 써도 되나?"

"아, 물론이지. 내가 보고 있을 게."

라니아가 옆에서 보초를 서준다고 하니, 나는 굳이 망설일 필요 없이 그대로 프시 타입 강화 혈청을 팔에 주사했다.

푸슈욱······.

[프시 타입 강화 혈청을 흡수했습니다.]

[프시 타입 강화 혈청의 능력을 획득합니다.]

[프시 타입 강화 혈청 능력, '끈질긴 집념'을 습득하였습니다.]

느껴진다.

타들 것처럼 뜨거운 무언가가 내 혈관을 타고서 돌아다니는 것이.

'그 외에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원래 끈질긴 집념이라는 능력 자체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 제힘을 발휘하는 능력이니까.'

내가 잠시 강화 혈청의 힘을 느끼고 있을 때, 옆에서 조용히 이를 지켜보고 있던 라니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오라버니."

"뭐지?"

"나는 오라버니를 믿지만, 과연 정말로 아크에서 우리와 협상을 하려고 할까? 정확히는, 그럴 필요성을 느낄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라니아가 입을 삐죽였다.

"너무 자신감이 넘치니까 오히려 사기꾼 같아 보이는 건 알아?"

[그건 그래.]

"그치?"

여전히도 참 죽이 잘 맞는 둘이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안다. 하지만 너와 크로노스의 생각처럼 아크는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야?"

"그냥, 아크도 두려운 거다. 누군가의 총구가 자신들을 향할지도 모른다는 게."

그 부분은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인류 최후의 요새.

인류의 마지막 도시.

온갖 수식어가 붙은 아크지만, 그 수식어의 이면에는 언젠가 아크도 다른 도시들처럼 멸망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사실, 아크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원인에는 그러한 사실이 배경에 깔려 있기 때문도 있었다.

두려움이 안전을 찾게 했고,

두려움이 라인을 만들었고,

두려움이 외부를 배척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두려워서 숨고, 가시를 세우고, 배척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원하는 것에 닿을 수 없다는 걸.

아크는 변해야만 한다.

그게 긍정적인 결과가 되든지, 혹은 부정적인 결과가 되든지 말이다.

"어······."

라니아는 잠시 눈을 끔뻑이며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아니··· 세상 누가 아크가 무서워할 거라는 이야기를 믿을까 싶어서. 그런데 오라버니가 하는 말이니까 믿을게."

"사실이니까."

"그래, 그래. 믿는다니까."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닌데."

"에헤이, 속고만 사셨나."

라니아가 언제나처럼 배시시 웃었다.

"이번에 아크로 가면 여기는 언제 다시 들러?"

"글쎄. 웨이브 몇 번은 더 지나야 시간이 날 것 같은데."

물론 호루스를 탄다면 시간이 날 때마다 올 수도 있겠으나, 거리가 거리인 터라 볼 일이 없다면 굳이 올 생각은 없었다.

"그래? 아쉽네."

그렇게 말하는 라니아의 모습은 어딘가 조금 씁쓸해 보였다.

"혹시 더 필요한 건 없어?"

"아, 마침 있는데."

안 그래도 무언가 더 받을 게 없나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먼저 이야기를 꺼내준다면야 환영이었다.

머릿속으로 목록 정리를 마친 내가 본격적으로 입을 열려던 순간.

"자, 잠깐!"

"왜?"

"아니··· 오라버니는 왠지 말하면 정말로 줄줄이 읊어댈 것 같아서.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조금 전에 한 말은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이야. 알지?"

[확실히 핏줄은 맞네. 어쩜 저렇게 정확히 알고 있을까요?]

"······시끄러워."

라니아가 끼어들었다.

"왜 애한테 그래?"

"너도 시끄럽다."

그런 쓸데없는 실랑이가 지나가고, 라니아는 할 일이 있다면서 다시금 천막 사이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현재 크로노스 잔당들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래저래 할 일이 많은 듯했다.

'그러면 슬슬 갈 때가 됐나.'

이쯤이면 조사팀원들도 충분한 휴식을 취했을 터.

아무리 웨이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지만, 도보로 이동한다는 걸 생각했을 때 다음 웨이브까지 시간이 빠듯했다.

'언젠가, 크로노스인들이 아크에서 함께 사는 날이 올까?'

아크에 그럴만한 수용 능력과 여력이 있는지는 둘째 치고, 쌓여 있던 갈등과 오해를 풀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실제로 나도 아크와 크로노스가 반목하지 않는 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번에는··· 혹시 모르지.'

칼 마커스와 라니아 마커스.

이 둘의 혈연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게 될지 말이다.

잠깐의 생각을 마친 나는 조사팀원들이 머무르고 있는 천막으로 찾아갔다.

천막 안은 고요했다.

자고 있는 게 아니라 시체가 모여 있다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였다.

"다들 일어나라."

사부작, 사부작-

그다지 큰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사팀원들이 하나 같이 빠르게 침낭을 열고 몸을 일으켰다.

"···으음."

"끙."

"···몇 시간이나 잔 거지?"

물론 인간으로서 나른함까지는 감추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온갖 훈련을 받는 아크의 병사들이었고, 그러한 병사들 중에서도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바로 출발한다."

어느새 옷 매무새를 정리한 칼라킨이 침낭을 정리하며 말했다.

"출발이라면··· 아크로 돌아가는 겁니까?"

"그래."

드미트리 역시도 어느새 침낭 정리를 마치고는 장비를 점검했다.

"드디어인가."

곧이어서 힐데가르트와 아이리스가 말했다.

"···빨리 돌아가서 씻고 싶네요."

"저도."

빠르게 정리를 마친 조사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정말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뭐, 저런 태평한 소리를 하는 것도 지금뿐이겠지만.'

저들은 모를 것이다.

앞으로 조사팀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우리가 천막을 나오자,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라니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떠난다는 소식을 에테르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이제 가려고?"

"그래."

"잘 갔다 와."

"언제 올 줄 알고."

"오긴 온다면서? 그러면 됐지."

놀랍도록 담백한 어조.

뭐라고 해야 할까··· 이럴 때는 또 평범한 남매 같기도 했다.

"그러면 다음에 보지."

"응. 너희들도 잘 가고."

조사팀을 향한 인사에 칼라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배려에 고맙다."

"딱히 너희한테 한 건 아니야. 오라버니를 봐서 한 거지."

칼라킨이 가볍게 웃었다.

반면, 다른 조사팀원들은 질렸다는 표정이거나 혹은 겁에 질린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특히 아이리스 같은 경우는 여전히 라니아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아니, 그건 나도 포함인가.'

두려움과 공포라는 감정이 어떤 일을 만들어내는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뭔가 별로 좋지 않은 징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딱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시간이 어떻게 해주겠지.'

짧은 생각을 마친 나는 뒤돌아섰다.

"가자."

또다른 여정을 할 때다.

* * *

크로노스의 임시 천막 안에서 잠들기 전, 칼라킨과 조사팀원들은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칼라킨, 정말로 이대로 괜찮은 건가요?"」

힐데가르트는 우려했다.

칼 마커스가 하려는 일은, 자칫 잘못하면 이번 임무에 참여한 조사팀마저도 아크에서 곤란한 처지에 빠질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자칫 잘못하면 배신자라는 오명을 쓸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아크에서의 배신자는 곧 반역이었으니, 어떤 처벌을 받을지는 뻔했고.

그럼에도 칼라킨은 말했었다.

「"그래."」

「"칼 마커스를 믿는 건가요?"」

「"아니. 칼 마커스를 믿는 게 아니다. 단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미 칼 마커스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여러 일을 해왔다.

그렇기에, 칼라킨은 한번 걸어보고 싶어졌다.

과연 칼 마커스가 정말로 해낼 수 있을지.

「"그 의견에는 나도 동의한다."」

「"···의외네. 드미트리 너는 칼 마커스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딱히 싫어했던 건 아니다. 의심스러웠을뿐이지. 하지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니까."」

힐데가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아까 칼 마커스한테 뭘 주던데? 혹시 뇌물?"」

「"······그냥 멀티 칼로리 바였다. 최근 제대로 못 먹은 것 같길래."」

「"흐음."」

이런저런 의견들이 있었으나, 내려진 결론은 같았다.

「"칼 마커스를 믿어보자."」

그렇기에 칼라킨은 물론이고, 드미트리와 힐데가르트, 그리고 아이리스는 칼 마커스가 무얼 하든지 따를 결심이 되어 있었다.

그래, 어디까지나 이 여정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헉, 헉, 허억······."

칼라킨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와중에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약 80kg에 달하는 군장.

그 외에 개인 장구류 및 장비 무게 40kg가량.

총합이 약 120kg.

물론 아크의 병사라면 저 정도 무게는 거뜬히 들고서 이동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거리와 속도였다.

아크까지 남은 거리는 그야말로 까마득했고, 지금 조사팀의 뒤에서 그들을 재촉하는 이는 칼라킨을 비롯한 조사팀원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켰다.

"이 속도로 언제 도착하려고 하나? 더 빨리!"

달리기와 행군은 자신 있었다.

단순히 칼라킨뿐만이 아니라, 드미트리와 힐데가르트, 그리고 아이리스까지도 아크의 병사로서 고된 훈련을 받아온 몸이었으니까.

그러나, 칼 마커스는 그러한 사실을 비웃듯이 조사팀원들을 한계가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끄으으······!"

"망할, 망할, 망할······."

기본적인 체력이 월등한 칼라킨과 에테르 적합자인 아이리스의 경우에는 그나마 조금 버텼으나, 상대적으로 이러한 단순 체력에 약한 힐데가르트와 드미트리는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아크로 돌아가는 여정이 시작된 지 고작 세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었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칼라킨으로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조사팀을 쪼고 있는 칼 마커스가 인외의 무언가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저 괴물은 지치지도 않는 건가?'

칼 마커스가 대단하다는 건 여러 차례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전투에 관한 것이거나, 혹은 속을 알 수 없는 심계에 관한 것이었다.

설마하니 단순 체력까지도 이렇게 인간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칼 마커스는 지금 땀 한 방울은커녕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여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직접 같이 뛰고 있는 입장에서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일정 수준 이상에 이른 에테르 적합자는 강체를 사용한다지만··· 그걸 이렇게 장시간 유지할 수 있는 건가?'

에테르 능력은 양날의 검이다.

어설프게 사용했다가는 되려 에테르에 잡아먹힐 수도 있다.

그렇기에 아크에서도 화이트 라인이나 레드 라인처럼 영산 노아와 가까운 곳일수록 에테르 적합자들을 경원시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니··· 아무리 에테르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저런 건 불가능해.'

칼 마커스에 대해서 조금씩 알면알수록, 의문은 깊어져만 갔다.

'대체 목적이 뭐지?'

칼 마커스의 목적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서 순순히 아크의 요구에 응한단 말인가?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다고 하기에는, 지금까지 보였던 행동들이 너무나도 일관적이다.

바로, 아크를 위한다는 점.

'대체 칼 마커스의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조, 조금만 쉬었다가 가면 안 됩니까?"

이대로 칼 마커스의 일정에 무식하게 따르다가는, 죽는다

확실하게 죽는다.

"그것도 좋겠지. 마수에게 깔려서 죽고 싶다면."

그러나, 애석하게도 칼 마커스는 요지부동이었다.

"끄으윽!"

"일단 돌아가기만 하면 전부 잘 될 거야. 그래, 분명히······."

"우린 죽을 거야. 우린 죽을 거야. 우린 죽을 거야. 우린 죽을 거야. 우린 죽을 거야······."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조사팀원들의 중얼거림 속에서 여정이 이어졌다.

아주 길고, 괴로운 여정이.

* * *

해골이 쌓여 있는 네 개의 탑.

그리고 그중 정 가운데에 있는 제단에서, 자줏빛의 로브를 입은 인영이 놀라울 정도로 경건한 자세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주교시여."

처음, 그 부름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불신자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마치 시체처럼 기도를 올리고 있던 주교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불신자를 찾았다는 그 말이, 오랜 기도를 올리고 있던 주교의 평온을 깬 것이다.

"······어디에, 있지?"

천천히 주교의 입술이 달싹였다.

인간의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기괴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재 옛 바엘로 지역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런가."

주교가 조용히 덧붙였다.

여전히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죽여라. 전부."

< 귀환 > 끝

이번 임무 때 확실하게 느꼈다.

아직, 칼라킨을 비롯한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은 약하다.

물론 시기 자체가 레드 라인 스테이지에 불과하니, 약한 게 당연할 수밖에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변수를 생각한다면 이처럼 기회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이들이 강해지는 게 여러모로 나에게 좋았다.

'약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약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만약 이번 여정에서 자칫 조사팀 중 한 명이라도 희생되었다면, 아크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이들은 아크에 있어서 귀중한 인재들이었고, 또한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그래서였다.

내가 피눈물을 머금고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이들을 채찍질하는 것은.

"굼벵이가 기어가나? 이런 속도면 다음 웨이브가 올 때 사이좋게 깔려 죽겠군. 덕분에 아크는 병사를 잃겠어. 아, 이런 병사라면 잃어도 별로 상관없겠군. 그나마 다행이야. 경사 났네, 경사 났어."

"이따위 체력으로 아크를 지키겠다고? 우습군. 차라리 모트교에 입교하는 건 어때? 하긴, 모트교도 보는 눈이 있을 테니 안 받겠군."

"아크의 자랑스러운 군인? 퍽도 웃기는 소리로군. 아크의 시민들이 이 꼴을 알았다면 당장 세금 불매 운동이라도 벌이겠어. 그 한심한 꼴들은 대체 뭐냐?"

에스더가 혀를 찼다.

[······입에 침이나 발랐으면.]

'뭘.'

[아무것도 아니에요.]

비록 내가 이런 마음에도 없는 말로 이들을 갈구고는 있었지만, 그만큼 이번 여정은 좋은 기회였다.

체력은 모든 활동의 기본이다.

아무리 평소에 아크에서 훈련을 진행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체력만 집중적으로 단련할 기회는 많지 않다.

'거기다가 드문드문 나타나는 마수와 마물들의 존재는, 실전에 대한 감각도 기를 수 있지.'

그걸 위해서라면 이런 사소한 희생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만 했다.

"끄으으윽······!"

"칼, 마커스··· 멀티 칼로리 바에 대한 은혜를 이딴 식으로 갚아?"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드문드문 조사팀원들의 원망과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긴 했으나,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원래 유익한 잔소리라는 게 듣는 사람에게 기분이 좋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였으니까.

'그나저나, 모트교 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는데.'

모트교의 지부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

하물며 모트교의 눈 중 하나가 나를 포착했으니, 모트교는 반드시 복수에 나서려고 할 거다.

문제는, 그 복수의 대상이 나인지 크로노스 잔당인지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나에게 복수하는 게 맞지만··· 모트교놈들의 생각은 예측하는 게 무의미하단 말이지.'

괜히 광신도가 아니듯이, 놈들의 생각 회로는 어딘가 제대로 맛이 가 있어서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이상한 곳으로 불똥이 튈 가능성이 높았다.

'뭐, 크로노스 쪽은 걱정할 필요 없겠지.'

비록 얼마 전에는 예정에 없던 기습을 당하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지만, 제대로 된 전력을 낼 수 있는 크로노스 잔당은 모트교 지부 몇 개 정도가 움직이는 수준으로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물며 라니아 역시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본래보다도 더욱더 성장한 듯했으니, 이대로 크로노스 연합이 만들어진다면 예전보다도 더욱 강력한 연합이 만들어질 터였다.

'···괜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비록 라니아 앞에서 호언장담을 하긴 했지만, 아크와의 협상이 정말로 잘 될지는 미지수였다.

만약 아크가 내 예상과는 반대로 나간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단순히 크로노스 연합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뿐만 아니라, 아크 내의 내 입지도 크게 줄어들 테지.'

물론 나에게는 몇 가지 보험이 있었으니 상황이 거기까지 치달을 확률은 극히 적긴 했다.

다만, 그럼에도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역시나 그림자단의 단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아가씨가 나선다면 상황이 꼬일 수도 있어.'

생각에 생각이 이어지던 와중.

나는 지평선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잠깐."

"···예?"

"마수다."

그와 함께 심장이 터져라 내달리고 있던 조사팀원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하악, 하악······!"

"죽을 것··· 죽을 것 같아······."

"아, 아으······."

쯧쯧, 고작 몇 시간 정도 뛰었다고 이 꼴이라니··· 이래서야 아크는 누가 지킨단 말인가?

"······."

그나마 칼라킨만이 간신히 숨을 고르고는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탁 트인 황야라서 그런지, 칼라킨 역시도 머지않아서 마수들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아무래도 자리를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은신처로 삼을 만한 장소가 없는데···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럴만한 시간은 없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마수 무리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습니다."

'마침 잘됐다고 봐야겠지.'

지금 다가오는 마수들의 수준은 7급 이하의 야수종과 괴수종 무리.

지금 조사팀이 상대하기에 딱 알맞은 상대들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전투 준비."

"······예?"

칼라킨과 드미트리, 그리고 힐데가르트와 아이리스의 표정이 이내 경악으로 물들었다.

"지금 그게 무슨··· 전투 준비라고 했습니까?"

"그래."

"···무의미한 전투입니다. 이 거리라면 충분히 충돌을 피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지금 팀원들이 모두 지쳐있습니다. 위험합니다."

"맞아요."

"···나도 지쳤다."

"저, 저도 더 이상은 힘들어요."

칼라킨이 대표격으로 말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힐데가르트와 드미트리, 그리고 아이리스가 차례로 호응했다.

"우습군."

분명히, 칼라킨의 의견은 옳다.

아크 바깥이라는 위험한 장소에서 마수 무리와의 교전을 가급적이면 피하는 건 아크의 교전 수칙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말이다······.

"너희가 지치고, 다쳤으면 마수들은 공격하지 않나? 아크에서는 그렇게 가르치나?"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상황이 다르다? 어떻게 다르지?"

"피할 수 있는 교전입니다. 그리고 아군의 상황이 좋지 못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무의미한 교전으로 희생자를 낼 수는 없습니다."

"희생자를 낸다? 그렇게 단언하고 있는 건가? 고작 저 정도 마수들을 상대로?"

그때, 힐데가르트가 끼어들었다.

"자, 잠깐! 그 말은 칼 마커스 당신은 지금 다가오고 있는 마수들이 어떤 마수들인지까지 안다는 건가요? 저 멀리 있는 마수들을?"

"그래."

"말도 안 돼······."

칼라킨이 말했다.

"···칼 마커스. 당신이 어떤 의도로 저희에게 이런 가혹한 일정을 요구하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가 필요하다는 걸 알아주십시오."

"이유가 필요한가?"

"저희는 그렇습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말해줘도 괜찮으려나?'

그러나 고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모를까, 칼라킨이라면 내가 하는 말의 진의를 알아들을 테니 말이다.

"그다지 어렵지 않지. 그냥, 너희가 약하니까. 그게 이유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이 저희를 훈련시키기 위함이라는 겁니까?"

"맞다."

"알겠습니다. 이해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칼라킨은 쉽게 납득했다.

물론 다른 이들은 아니었지만.

"···칼라킨, 정말로 그거면 충분한 거냐?"

드미트리가 씹어 삼키듯이 말했다.

예전 같았다면 길길이 날뛰었을 녀석이 저렇게 말한다는 건, 나름대로 성장했다는 증거이리라.

"그래. 충분하다."

"···그렇다면 알았다. 칼 마커스와 칼라킨. 너희 둘을 믿지."

가장 격렬하게 반발할 거라고 예상되었던 드미트리가 오히려 쉽게 수긍하자, 힐데가르트와 아이리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덧 지평선 너머에 있던 마수 무리가 지척까지 다다랐다.

그만큼 기동력이 빠른 무리였다.

"다들 전투 준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쓰러질 것 같았던 조사팀원들이 칼라킨의 외침과 함께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탄약 역시도 크로노스에서 보충을 해 온 상태였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마음껏 날뛸 수 있는 상태였다.

[주인님.]

'나도 안다.'

나는 마수 무리가 아닌 다른 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반대쪽 지평선 너머.

그보다도 훨씬 더 먼 곳.

아무래도 손님이 온 것 같았다.

다만, 조사팀에게 맡기기에는 다소 위험한 손님인 탓에 따로 마중을 나갈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러면, 여기는 맡기지."

"···예? 자, 잠깐!"

칼라킨이 무어라 외치려 했으나, 나는 거침없이 제트팩을 가동했다.

* * *

"이게 무슨······."

칼라킨은 잠시 얼이 빠졌다.

마수 무리와의 격돌이 일어나기 직전, 칼 마커스가 제트팩을 가동하고는 자리를 떴기 때문이었다.

드미트리가 외쳤다.

"망할!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칼 마커스가 갑자기 왜 자리를 뜬 거야?"

"칼라킨.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혹시··· 도망친 거 아닌가요?"

드미트리와 힐데가르트, 그리고 아이리스에게서 각기 다른 의문이 터져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이 상황에 내몬 건 다름 아닌 칼 마커스다.

그런데 칼 마커스 본인이 전투가 시작하기 직전에 갑작스럽게 자리를 피한다?

이게 무얼 의미하겠는가.

"···동요하지 마라. 우리는 앞에 있는 마수만 상대하면 된다."

칼라킨이 말했으나, 동요하는 조사팀원들을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만큼 칼 마커스라는 존재는 거대했고, 그런 존재가 갑작스럽게 도망쳤다는 사실은 더욱더 거대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칼라킨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칼 마커스가 의미 없는 짓을 할 리는 없다.

그러니, 자신들 역시도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온다. 다들 위치로!"

"망할!"

"칼 마커스 이 개새끼!"

그동안 점잖을 떨던 힐데가르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오며, 마수 무리가 그들을 향해 덮쳐왔다.

* * *

모트교가 우리를 추격하리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

그러나, 이처럼 빠른 추격은 또 예상하지 못했다.

'이 근처에서 이 정도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면··· 역시 주교급 정도가 직접 지시를 내렸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이번에 오는 추격자들에는 최소 사제급 이상이 끼어있을 확률이 높았다.

즉, 어설프게 조사팀을 동행시켰다가는 예상치 못한 희생이 나올 수도 있었다.

'언젠가는 함께 등을 맞대고 싸워야 할 때가 오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러기에는 지금 칼라킨을 비롯한 조사팀원들의 힘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가 너무 강해진 탓도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아크의 적들은 우리가 강해질 때까지 기다려줄 정도로 친절한 자들이 아니었다.

'뭐, 나 때문에 생긴 변수이기도 하니까.'

제트팩으로 이동을 마친 나는 마침내 놈들이 있는 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약 백여 명의 무리.

고작 조사팀 하나를 잡기에는 과할 정도의 인원들임과 동시에, 하나하나가 절대로 만만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서 느껴지는 모습에서 당장이라도 몸을 내던질 것 같은 광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혼자서 되겠어요?]

'혼자는 아니지. 네가 있잖아.'

[하··· 감동 주려면 다른 상황에서 하면 안 될까요? 꼭 필요할 때만 그러더라.]

에스더와의 실랑이 속에서, 나는 저 무리를 이끌고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특유의 복장이나 느껴지는 기세로 보나, 누가 봐도 모트교의 사제였다.

'역시 사제급이 왔군.'

모트교의 계급은 자잘한 계급을 건너뛰고 크게 네 개 정도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교주, 주교, 사제, 신도.

물론 교주와 주교 사이에 추기경 같은 계급이나, 주교와 사제 사이에 있는 보좌 주교 같은 계급들이 있기는 했어도, 일단은 저 네 개가 기본적인 분류라고 볼 수 있다.

일전에 내가 궤멸시켰던 모트교 지부에는 그러한 네 개의 계급 중 하나인 사제가 없었다.

물론 지부를 책임지는 자는 있었을 테니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니겠으나, 적어도 나는 사제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모트교의 사제 계급부터는 모트교의 축복을 두 개 이상 받았다.

즉, 방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뜻과도 같았다.

"불신자여, 어찌하여 그런 무도한 짓을 저질렀습니까?"

지금 나를 찾아온 모트교의 사제는 제법 예의 바른 미친놈이었다.

물론 미친놈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딱히 내 태도가 달라질 이유는 없었지만 말이다.

"무도한 짓? 아, 설마 그 떨거지들 쓸어버린 걸 말하는 건가?"

"어찌하여··· 저희 신자들을 그리 말씀하십니까. 아무리 불신자라지만 너무 무도한 것 아닙니까?"

"하하. 내가 모트교놈한테 별소리를 다 듣는군. 싸우러 왔으면 덤비기나 해라. 아니면 내가 먼저 죽여주지."

모트교의 사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예전부터 느끼지만, 모트교의 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태도는 사람을 열받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불신자여, 이름이 뭡니까?"

"나?"

원래 모트교 같은 정신병자 집단이랑은 상종을 안 하는 게 내 원칙이지만, 웬일로 덜 미친놈이 왔으니 대답해주는 게 인지상정이겠다.

[기깃!]

스스스스──!

오랜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야누스가, 사방에 뼈 촉수를 뻗어내며 제 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내 얼굴에 씌워진 뼈 가면이, 내가 누구인지 똑똑히 말해주었다.

"변절자 폰이라고 한다."

야누스가 그에 맞춰서 괴성을 내질렀다.

[끼에에에에에에에────!!!!]

< 귀환 (2) > 끝

탄약은 충분히 보충했다.

장비도 점검했다.

비록 조사팀원들이 모두 지쳐있긴 했으나, 앞선 조건들 덕분에 그 정도 문제는 사소한 문제로 넘길 수 있을 만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조사팀은 너무나도 쉽게 마수 무리를 상대하고 있었다.

이번 임무를 시작하기 전의 예전의 조사팀 수준이었다면 절대로 해내지 못했을 일이었다.

"드미트리! 뒤!"

"흥! 이까짓 것!"

함께 생과 사를 넘는 전장을 드나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보급이 충분해졌기에 여유가 생긴 걸까.

칼라킨을 포함한 네 명의 조사팀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면서 마수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카아아아아악!]

[키에엑!]

칼라킨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스쳐 가는 바람에 흩날렸다.

동시에 쏘아진 총탄의 열기가 그 시원한 바람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힐데가르트, 전황은?"

"가장 위협이 되는 대상은 최우선으로 거의 다 정리됐어요. 이제 경계할만한 상대는··· 피해요!"

그와 함께 칼라킨과 힐데가르트가 서 있던 자리에 거대한 앞발이 쇄도했다.

쿠르르릉─!

6급 네임드 괴수종, 배어먹는 베알라.

6급 괴수종답게 거대한 몸집과 두터운 가죽을 지닌 곰과 유사하게 생긴 거대 마수로, 현재 조사팀원들이 지닌 화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드미트리! 플라즈마 소드 점검은 끝났나?"

"끝나긴 했지만 결함이 생겨서 오래는 못 써."

"충분하다."

짧은 대화가 오간 후, 드미트리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R-1 플라즈마 소드를 칼라킨을 향해 던졌다.

"아이리스!"

이제는 그저 아이리스를 부르는 것만으로, 아이리스는 자신이 무얼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묶어?]

[묶어. 묶어. 묶어. 묶어. 묶어. 묶어. 묶어. 묶어. 묶어. 묶어. 묶어. 묶어. 묶어. 묶어. 묶어. 묶어······.]

[잡았다─]

아이리스의 주변에서 날뛰기 시작한 에테르들이, 이내 하나의 올가미가 되어서 베어먹는 베알라의 다리를 옭아맸다.

[그오오오오오!!!]

물론 현재 아이리스 수준의 에테르로는 6급 네임드 괴수종씩이나 되는 상대를 오래 묶어둘 수는 없었으나, 칼라킨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지이잉─

드미트리에게서 건네받은 R-1 플라즈마 소드가 푸른 불꽃을 토해냈다.

그리고 이어서 그려진 유려한 곡선.

칼라킨에게는 그거면 충분했다.

서걱─

[그우우우우우우───!!!]

플라즈마 소드로 인해서 순식간에 타버린 절단면에서는 피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단지, 허리가 절반으로 잘리고도 살아있을 수는 없었을 뿐이지.

순식간에 6급 네임드 괴수종을 제압한 칼라킨은 곧장 플라즈마 소드를 품에 넣고는 Ark-15 자동소총을 꺼내 들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건 일대일 대결 따위가 아닌, 전쟁이었다.

마수 한 마리를 잡았다고 한들 죽여야 할 적은 끊이지 않았다.

철컥-

어느새 칼라킨의 곁에 조사팀원들이 Ark-15 자동 소총을 든 채로 모여들었다.

누가 따로 지시를 내릴 필요도 없이, 기민하게 진형을 다시 짠 것이다.

드미트리가 사납게 웃었다.

"···생각보다 할만한데?"

"방심하지 마라. 아직 안 끝났다."

"잘난 척하기는."

그러나 칼라킨도 이번 전투가 의외로 할만하다는 것 자체는 부정하지 못했다.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칼 마커스는 이럴 줄 알고 일부러 자리를 비운 건가?'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너희는 강해졌다, 뭐 그런 건가?

아니··· 이건 조금 너무 나간 것 같기도 하고.

'······알면 알수록 모르겠군.'

아무리 칼 마커스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조사팀이 이렇게까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미리 자리를 피한단 말인가?

이쯤 되니 칼라킨의 머릿속에 있는 칼 마커스라는 존재는, 어느덧 팔이 네 개 달리고 눈이 열 쌍 정도는 달린 괴물처럼 되어 있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이제부터 남은 건 섬멸뿐.

칼라킨을 시작으로, 거침없이 조사팀원들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콰카카카카카───!!

일제히 총구에서 토해진 불꽃들과 함께 마수와 마물들이 비명을 토해내며 쓰러졌다.

[키에에에엑!]

[가각, 가가각!]

서서히, 이번 전투의 끝이 다가왔다.

* * *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고 여겼다.

언제나처럼 교의 교리를 부정하고, 불신하는 불신자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일일 거라고 여겼다.

아니, 오히려 어떤 의문마저 있었다.

'고작 불신자 서넛 잡는 데 이 정도 인원이라··· 주교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물론 교의 지부를 습격한 불신자가 보통 불신자가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위대한 의지가 보낸 사자와 사도들을 이용한 기책을 사용한 것에 불과할 뿐.

실질적으로 교의 위협이 되는 자는 아니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분명히 그랬을 텐데······.

'이게··· 뭐지?'

모트교의 사제 티르는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쐐애애액──!!

푹! 푸푸푹-!

사방으로 뻗어오는 뼈 촉수들.

그 속에서 뿜어지는 괴성.

"사도들이시여······."

"불신자에게 저주를!"

그들은 그냥 신도들이 아니다.

모두가 교에서 뱀의 축복을 받은 정예 신도들이다.

그런 신도들이 그럴듯한 반항은커녕 사방에서 쇄도하는 뼈 촉수에 꿰뚫린 꼬챙이 신세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아, 아아··· 위대한 의지여. 어째서 이런 시련을······."

푸욱─!

사도의 힘을 지닌 뼈 촉수는 교의 축복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꿰뚫은 이들을 모조리 빨아먹었다.

만약 단순히 꿰뚫기만 했다면 뱀의 축복을 받은 신도들이 다시 일어섰을 테지만, 이미 미라가 된 이들이 일어날 수 있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어찌, 어찌 이런······."

그뿐만이 아니었다.

총도, 칼도, 심지어 중화기마저도 눈앞에 있는 불신자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쾅─!

콰카카캉!!!

물론 중화기 같은 경우에는 충격에 잠시 머뭇거리는 움직임이 있긴 했으나, 단지 그뿐.

뼈로 막을 수 있는 폭발의 범위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을 텐데, 어떻게 비천한 불신자의 육신으로 저렇게 멀쩡할 수 있단 말인가?

"있을 수 없다. 있을 수······."

모트교의 사제이자 구름의 축복을 받은 자인 티르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아크의 불신자 중에는 저렇게 사도의 힘을 이용하는 무도한 자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 나타난 폰이라는 불신자는 무언가 달랐다.

사도의 힘을 저토록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불신자의 존재는 듣도 보도 못했다.

'저래서야 마치······.'

마치 정말로 위대한 의지가 보낸 사도와도 같지 않은가?

"아, 아아······ 이 얼마나 미약하고 비루한 믿음인가."

그러나 이내 사제 티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 전, 위대한 의지가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려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불신자여, 이제야 알겠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의지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시련, 그 자체로군요."

가면에 가려진 입술이 이죽였다.

"뭐래. 병신이."

"당신이 부정하여도 소용없습니다. 이 또한 시련. 저는 교의 사제로서, 이 시련을 맞이하겠습니다."

츠츳, 츳─!

이윽고 사제 티르의 양손에서 작은 스파크가 일어났다.

뱀의 축복과 더불어서 그가 지닌 또 다른 축복인 구름의 축복이었다.

"자, 저에게 보여주십시오. 당신이라는 시련을!"

* * *

······뭐라는 거야.

[이미 알고는 있었는데, 진짜 어지간히도 정신 이상한 놈들이네요.]

현직 귀신인 에스더조차도 그 광신에는 혀를 내둘렀다.

'그러게나 말이다.'

원래도 정신 나간 놈들인지는 알았으나, 오늘따라 더욱더 정신 나가 보이는 걸 보니 역시 모트교는 모트교다웠다.

"오십시오!"

물론 정신이 나간 것과는 별개로, 모트교의 사제가 지닌 힘만큼은 진짜였다.

'전기라··· 구름의 축복인가.'

만약 당장 나에게 벼락 맞은 가지를 이용해서 만든 무기가 손에 있었다면 무언가 달랐겠으나, 지금으로서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상대였다.

전기의 특성상, 어설프게 막는 것도 불가능할뿐더러 공격력 역시도 굉장히 강하기 때문이었다.

'일단, 회피를 우선시 한다.'

파지직─

순간적으로 짧게 일어난 스파크.

그러나, 효과는 강렬했다.

쿠르르르릉───!!!

조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가 새까맣게 그을렀다.

만약 피하지 않았더라면, 야누스로 피해를 상쇄했더라도 적지 않은 피해를 받았을 터였다.

'쯧.'

그나마 주교급이 오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으나, 사제급 중에서는 제법 까다로운 녀석이 왔다.

하지만 까다로운 건 까다로운 거고, 사제라고 해서 총알이 박히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지이잉─

내 손끝에서 뻗어 나간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의 붉은 섬광이 사제를 향해서 쇄도했다.

콰카카카카카──!!

사제는 나름대로 기민한 움직임으로 섬광을 피해냈으나, 결국 한쪽 팔이 잘려나갔다.

팔 하나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모트교의 사제는 비명 하나 내뱉지 않고서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다른 한쪽 팔을 뻗었다.

'이런.'

찰나의 틈.

그 사이로 뻗어온 강렬한 스파크가, 내 손에 들린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에 적중됐다.

파지직······.

'쯧.'

안 그래도 내구성이 약한 물건인데, 저런 고압 전류에 노출되자 바로 연기를 뿜어내며 먹통이 되어버렸다.

물론 자가 복구 기능이 있으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문제는 지금 당장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사용할 수는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재생을 상징하는 뱀의 축복은 모트교 내에서 가장 흔하고 기본적인 축복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강력한 축복이다.

괜히 모퀴벌레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사제의 잘려나간 팔 절단면에서 기분 나쁜 꾸물거림이 일어나고 있었다.

절단면의 화상이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주 시간만 있으면 잘린 팔도 다시 재생시키겠군.'

물론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리가 만무했지만 말이다.

'에스더.'

[···설마 저보고 저거 막으라거나 하라는 건 아니죠? 아무리 저라도 그건 좀······.]

그 말마따나 아무리 에테르라 할지라도 전기 공격을 막는 건 상당히 어렵다.

그러나, 에스더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한번이면 된다.'

[···진짜죠?]

'그래.'

[에휴··· 앓느니 죽지. 해봐요, 그럼.]

나는 Ark-15 자동소총을 손에 쥔 채로 사제를 향해서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A-985 폭발탄이 적중하며 몇 번의 폭발이 일어났으나, 사제는 전신에 그을린 화상 속에서도 꿋꿋하게 나에게 공격을 이어갔다.

츠츳, 츠츠츳!!

언제 어디서 올 지 모르는 전기 공격 탓에, 나도 마음 놓고 공격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총구를 조준하려고 하면 내가 있는 자리에 전기가 솟구치거나, 내려쳤기 때문이다.

'······진짜 까다롭네.'

웬만한 공격은 통하지 않고, 반면 저놈들의 공격은 위협적이기 그지없다.

이처럼 반칙을 쓰고 다니니, 괜히 모트교가 욕을 먹는 게 아니었다.

'뭐, 남말할 소리는 아닌가.'

엄밀히 따지면 이 전투의 승기는 명백히 나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점점 회복하기 어려워지는 상처와 화상을 입어가는 사제와는 달리, 사제의 공격은 나에게 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누스의 압도적인 방어력에다가, 방어 및 회복과 관련된 특성이 한두 개가 아니지.'

그 순간.

츠츳─

스파크가 일어나며, 내가 있는 자리로 벼락이 내리쳐지려 했다.

'에스더!'

[딱 한 번이에요. 이 이상은 저도 무리에요.]

그와 함께 일어난 에테르가 내 위의 벼락을 막아내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철컥-

방아쇠가 당겨지고,

타아아앙!───

Ark-15 자동소총에서 뿜어진 총알이 단번에 사제의 미간을 꿰뚫었다.

< 귀환 (3) > 끝

미간 사이에 총알을 맞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물론 거기에는 아예 총알에 뚫리지 않는 미간을 지녔다거나, 혹은 모트교 이상의 괴물 같은 재생력을 지녔다거나 하는 예외들이 있긴 하지만, 대개는 그렇다.

어쨌거나 지금까지 나와 싸웠던 모트교의 사제는 그 예외에 속하지 못했으므로, 미간 사이에서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사제님!"

"아아, 어째서 이런 시련을······!"

모트교의 사제가 쓰러지자, 남은 신도들이 마치 집단 광증에 걸린 것처럼 달려들었다.

"불신자를 처단하라!"

"위대한 의지의 뜻으로!"

그러나, 아무리 뱀의 축복이니 뭐니 해도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는 소용없는 법.

Ark-15 자동소총과 NO-13 유탄 발사기에서 뿜어진 A-985 폭발탄과 유탄에 의해서 통째로 날아간 머리에는, 그 잘난 재생력도 소용이 없었다.

쾅─!

콰카카카캉!!!

다만, 폭발의 중심이 아닌 외곽에 있는 이들은 마치 마수나 마물들처럼 폭발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와, 진짜 징그럽네.]

에스더가 혀를 찰 정도로, 인간임에도 마물 같은 그 모습은 상당히 끔찍했다.

'뭐, 그래봤자지.'

마물이든, 마물 같은 인간이든 상대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같다.

화력, 그리고 더 많은 화력.

다행이도 나에게는 모두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어떻게 불신자가······."

"위대한 의지시여! 어찌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자욱하게 일어난 폭연을 그대로 뒤집어쓰면서도 모트교의 신도들은 멈추지 않고서 달려들었다.

현재 Ark-15 자동소총과 NO-13 유탄 발사기 모두 상당히 열이 차오른 상태.

물론 쏘려면 쏠 수야 있겠으나, 나에게는 이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많았다.

"에스더."

[쟤네들 상대하기 싫은데. 저도 보는 눈이 있어요.]

"하기나 해."

[네엥.]

마치 어린아이의 칭얼거림 같은 목소리였으나, 그로 인해서 일어난 일은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꺼, 져─────────]

나를 중심으로 일어난 거대한 에테르 기파가 내 주위에서 퍼져 나갔다.

쿠구구구구구───!!!

마치 거대한 재해처럼 지면을 뒤집으며 뻗어 나간 에테르 파동은 나를 향해서 몰려드는 모트교 신자들을 단번에 날려 버렸다.

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바퀴벌레 같은 모트교 놈들이 고작 날아간 정도로 죽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야누스.'

[기깃!]

잠깐의 휴식을 마친 야누스에게서 다시금 흉포한 뼈 촉수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자세와 진형이 모두 무너진 모트교 신도들은 이에 대항할 수 없었다.

푹!

푹! 푹! 푹!

사방으로 뻗은 뼈 촉수들이 모트교 신도들의 몸에 꽂히며, 야누스가 게걸스러운 식사를 시작했다.

쪼옥, 쪽─

"끄아아악!"

"저주 받을, 불신자······."

단번에 모든 체액이 빨려들어가면서도 모트교의 신도들은 저주를 멈추지 않았다.

뭐, 그래봤자였지만.

[기기깃!]

그나마 위협적인 축복을 소유했던 사제가 쓰러진 이상, 야누스에게 위협이 될 만한 상대는 없었다.

즉, 이제부터는 야누스의 일방적인 식사 시간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그마안······."

"살려, 살려줘─"

광신도들조차도 두려움에 질릴 정도로 야누스의 식사 장면은 대단했다.

하긴, 사방으로 뼈 촉수를 흩뿌린 채로 마치 빨대처럼 인간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마물을 본다면 두려움에 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몇 번의 비명과 괴성이 울려 퍼지고서야 주변 일대가 고요해졌다.

모트교의 사제가 이끄는 기동대.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상처 하나 입을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대충 끝났나.'

애석하게도 모트교의 신도나 사제를 야누스가 먹어치워도 딱히 어떤 능력이 생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모트교의 신도는 마물과 비슷한 구석이 많기는 해도, 본질적으로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모트교의 축복이라는 정체 모를 힘이 육체에 스며드는 게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지.'

이에 대해서는 유저 커뮤니티 사이에서 이런저런 추론들이 나오곤 했다.

정말로 신의 축복이라느니, 악마와 거래를 했다느니 하는 온갖 추측들이 돌았으나, 정작 그럴듯해 보이는 가설은 하나도 없었다.

그 정도로 모트교에 대한 정보는 알려진 게 그다지 많지 않았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소득이 없지는 않으니까.'

나는 모트교 신도들이 사용하던 총기와 중화기들을 한데 그러 모았다.

그중 다수는 폭발에 휘말려서 파손되어 있었으나, 비교적 손상 정도가 낮은 물건들도 몇몇 있었다.

'모래바람 상단에 넘기면 알아서 고쳐서 팔아 먹겠지.'

새삼스럽지만, 총기류는 아크보다는 모래바람 상단 쪽이 훨씬 더 값을 잘 쳐준다.

아크에 넘겨봤자 고철값이나 받으면 다행인 걸, 모래바람 상단에 넘기게 되면 생각보다도 쏠쏠한 부수입이 된다.

'그뿐만이 아니지.'

아크를 기준으로 보면 알거지와도 같은 모트교 신도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건 아니다.

예를 들면, 모트교의 신도들이 착용하고 있는 옷이나 장비는 모래바람 상단에 팔면 제법 돈이 된다.

아크 사람 입장에서 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지만, 다 쓸 곳이 있다나 뭐라나.

"호루스!"

나는 내 머리 위를 맴돌고 있던 호루스를 불러냈다.

여차하면 전투에 가세 시킬 생각으로 불러두었던 건데,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호루스의 역할은 짐꾼 역할이 될 수밖에 없었다.

[키헤헷.]

어느새 도착한 호루스가 나에게 얼굴을 비비면서 잔뜩 친근감을 드러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야누스와 호루스를 시켜서 챙긴 물자들을 호루스의 등 뒤에 차곡차곡 실었다.

"잘 챙기고 있어라."

[키헤엣······.]

언제 그랬듯이, 물자들의 고정은 호루스의 등 뒤에 돋아나는 뼈 촉수들로 매듭을 지었다.

이래저래 참으로 변한 녀석이었다.

그렇게 내가 뭐 챙길 거 없나 모트교 신도의 시체 사이를 거닐고 있을 때.

'음?'

무언가 번쩍이는 게 내 눈에 스쳐 지나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무언가 번쩍였다는 것 자체가 어떤 금속류 악세사리일 가능성이 높다.

즉, 모트교의 상징 말이다.

'설마······.'

물론 사제 중에서도 모트교의 상징을 지닌 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바로 얼마 전에 한 가지 상징을 얻었는데 또라고?

운이 좋은 것도 정도가 있다.

물론 절대로 나쁜 건 아니었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일단 뭔지 확인부터 해봐야겠어.'

설사 모트교의 상징이 아니더라도, 귀금속 자체가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니 확인해봐서 나쁠 건 없었다.

'어디 보자······.'

나는 그게 뭔지 확인하기 위해서 가까이 갔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모트교의 상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한 그것을.

그것은 마치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듯한 작은 구였다.

저게 어떤 물건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한 건 있었다.

'이건 모트교의 상징이 아닌─'

그 순간.

[키득······.]

갑작스레 들려온 웃음소리와 함께,

[······주인님? 주인님!]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어?"

치열하기 짝이 없던 전투가 끝난 뒤, 간신히 한숨을 돌리던 아이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에 아이리스의 팔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던 힐데가르트가 말했다.

"왜 그래?"

"아니···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요."

"무슨 이상한 기분?"

힐데가르트는 아이리스의 반응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에테르 적합자의 기분은, 단순히 기분탓이 아닐 때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그 예감이 사실이라면 절대로 그냥 넘어서는 안 된다.

안 그래도 이번 전투로 조사팀원들 모두 크고 작은 부상들을 입었고, 무엇보다도 적지 않은 탄약을 소모했다.

여기서 또 전투가 일어난다면, 그때는 희생자가 나오는 걸 피할 수 없으리라.

"그게··· 모르겠어요. 하지만 뭔가 굉장히 불길한 기분이······."

그와 함께 아이리스의 시선이 휙 돌아가고, 자연스럽게 힐데가르트의 시선 역시도 그것을 따라갔다.

"저게 무슨······!"

힐데가르트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하늘 저편에서,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지?"

상황이 그렇다 보니, 마찬가지로 부상을 치료하고 있던 칼라킨과 드미트리 역시도 고개를 들었다.

"힐데가르트, 무슨 상황이인지 파악했나?"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 말에 칼라킨의 미간이 좁혀졌다.

만약 평범한 기후 현상이었다면 힐데가르트가 단번에 읽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통찰안의 주인인 힐데가르트조차도 이 상황이 무엇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단지 그뿐만이 아니라 칼라킨이 느끼기에도 지금 몰려들고 있는 먹구름은 심상치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그때, 아이리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저쪽 방향······."

"왜? 저쪽 방향이 왜?"

"···칼 마커스가 간 방향이에요."

"뭐?"

힐데가르트와 드미트리는 물론이고, 칼라킨까지도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칼 마커스가 간 방향이라고?"

"···칼 마커스랑 엮이면 그냥 끝나는 일이 없군."

"그러게나 말이야."

칼라킨은 확신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몰라도, 저 정체 모를 현상과 칼 마커스가 모종의 관계가 있으리라는 걸.

"···가봐야 할까요?"

힐데가르트가 조심스레 말했다.

"미쳤어?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데 저길 왜 가?"

드미트리가 바로 반박했다.

그 말대로였다.

지금 저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데 함부로 가는 건 절대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 말이 맞다."

칼라킨조차도 이번만큼은 드미트리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렇기에 이제 조사팀원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아이리스의 떨리는 시선이 몰려오는 먹구름 떼를 향했다.

* * *

······뭐지?

잠시 번쩍하는 느낌과 함께 눈을 떠 보니, 전혀 낯선 공간이었다.

분명히 그걸 본 뒤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에스더.'

일단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에스더를 불러 보았으나, 이어진 건 침묵뿐이었다.

'쯧.'

에스더에게서 대답이 없다.

혹시나 해서 에스더가 소멸한 건가 싶었으나, 아직 에스더와의 연결은 끊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정신 세계.'

다른 말로는 꿈속이라고 해도 되겠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보이는 풍경이 심상치 않았다.

'내 심상 세계··· 같은 건 아니겠지. 내 마음속이 저렇게 난리일 리는 없으니.'

물론 지금 에스더가 있었다면 그 의견에 동조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보이는 건 무수한 별들이었다.

밤하늘을 가득 메울 정도로, 도저히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별들.

나는 그런 별들이 보이는 어느 황야 위에 서 있었다.

이곳을 어디라고 해야 할까.

우주 한복판? 아니면 외딴 행성 위?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중요한 건, 내가 어째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였다.

'만약 내가 본 게 맞다면, 지금 이곳은······.'

그 순간.

[키득······.]

익숙하지만 더없이 낯선 웃음소리.

그와 함께 내가 별들이라고 생각했던 무수한 별들의 중앙이 가로로 조금씩 벌어졌다.

비로소 알았다.

내가 밤하늘에 떠있는 별들이라고 생각했던 그것들은 별이 아니었다.

스르륵─

그건 눈이었다.

하나도 아닌, 무수히 많은 눈.

밤하늘에 떠있는 별들처럼 거대한 그것들이 일제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 귀환 (4) > 끝

저 광경을 뭐라고 해야 할까······.

'좀, 부담되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보통 사람이 살면서 언제 저렇게 많은 시선을 받아보겠는가.

그것도 하나하나가 별 하나로 비견될 정도로 거대한 시선을 말이다.

"뭘 봐?"

그래서 일단은 쌔게 나가보기로 했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기세에 눌려봤자 나에게 좋을 건 없을 테니까.

스스스스─!

일단 강하게 나간 게 제법 소용이 있었는지, 나를 바라보던 거대한 시선들이 들썩였다.

느껴진다.

별들이, 눈들이 나를 보고 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당장 기절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

아니, 느껴지는 압박감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풍경뿐만이 아니었다.

'···소름 끼치는군.'

만약 굶주린 들개가 내 뇌를 혀로 핥고 있으면 이런 기분일까.

별의 눈들이 단지 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우주 한복판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게··· 대체 뭐지?'

처음에는 모트교에서 어떤 정신 함정을 펼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이건, 이 느낌은 고작 모트교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천 개의 눈 따위가 아니야.'

그렇다면 저건 무엇인가?

지금 나를 내려다보는 저 무수한 눈들은, 대체 무엇인가?

그 순간.

[보 너았 를다]

별의 눈이 직접 말한 게 아니다.

주변에 있는 에테르가, 마치 별의 눈의 사자처럼 그것들 대신 전달했다.

삐이이────────

그리고 나는 그것만으로 눈과 귀를 비롯한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흐르는 걸 느꼈다.

단순히 간접적으로 의사를 전달한 것에 불과한 데도 말이다.

'저건, 대체······.'

내 몸이 터질듯이 부풀었다.

그리고, 붉게 물든 사위 속에서 나는 보았다.

서서히 주변의 세상이 무너지는 걸.

쿠구구구구구──!

마치 하나의 세상이 종말을 고하듯이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일제히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 몸 역시도 마치 분자 단위로 흩어지듯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이 무너진다.

아니, 내가 무너진다.

이 세계에 종말이 찾아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내려다보는 눈들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아니, 무감했다.

마치 벌레가 죽어가는 걸 보듯이.

'망할··· 새끼들······.'

이윽고, 내 의식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의 편린을 마주했습니다. ■■■의 일부를 인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균열 공간'을 습득하였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새로운 알림창과 더불어서 모트교 신도의 시체들이었다.

다시금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프스스······.

나를 정신세계로 이끌었던 정체 모를 물건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순식간에 먼지로 흩어졌다.

애석하게도 나를 정체 모를 정신세계로 이끈 그 물건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주인님? 정신이 들었어요?]

"···내가 정신을 잃고 있었나?"

[뭐예요? 기억 안 나요? 그 갑자기 뭐가 번쩍하더니 그대로 기절했잖아요.]

"얼마나?"

[거의 두 시간 동안이요!]

"두 시간이라고?"

내가 정신세계에서 있었던 시간은 기껏해야 몇 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두 시간이라니······.

'시간의 흐름이 달랐거나, 아니면 내가 그만큼 오래 기절해 있었거나.'

뭐가 됐든지 간에 썩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만약 이런 무방비한 상태로 마수나 마물들의 공격이라도 받았다면, 아무리 에스더가 지키고 있었더라도 그대로 이 세상을 하직했을 테니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사실이 한 가지 있다면, 모트교가 이러한 사태를 예견한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만약 모트교에서 노리고서 이런 방식을 취했다면, 애초에 공격에 활용했겠지.'

모트교 입장에서는 함정을 설치한 뒤에 정신을 잃은 나를 가볍게 요리하기만 되는 일이었으니, 이게 모트교의 의도였다면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즉, 조금 전에 일어난 현상은 모트교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우연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그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대체 뭐였지?'

나조차도 지금 일어난 현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내가 처음에 모트교의 상징이라 생각했던 물건은 모트교의 상징 따위가 아니었고, 나를 정체 모를 정신세계로 이끌었다. 그 이후에 그 물건은 사라졌고.

유일한 단서가 사라진 셈이다.

'···아니, 단서는 남아 있다.'

그 '눈'들을 마주하고서 생긴 새로운 능력.

정확히는, 고작 그 눈들을 마주한 것뿐인데도 생겨난 능력.

'균열 공간이라······.'

나로서도 아예 처음 보는 능력.

그러나, 이 능력이 생기게 된 배경과 계기를 생각한다면 왜인지 어떤 능력인지 알 것도 같았다.

'이렇게 쓰는 건가?'

나는 천천히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균열 공간'이 발동합니다.]

그 순간.

쑤욱!

분명히 허공을 향했던 내 손이 마치 무언가로 빨려들어 가듯이 사라졌다.

그에 기겁한 에스더가 빼액 소리를 내질렀다.

[으왓! 그, 그게 뭐예요?]

"나도 잘 모른다."

[···모르는데 손을 그렇게 불쑥 집어넣고 그래요?]

에스더는 여전히 뜨악함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한 거니까."

[뭔지 모른다면서요?!]

나는 빼액 소리를 지르는 에스더를 뒤로한 채로, 이 능력이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휘적, 휘적.

'대충 뭔지 알 것 같은데.'

균열 공간.

앞서 말했듯이 이 능력이 생긴 원인을 생각해본다면, 말 그대로 내가 정신세계라 여겼던 그 정체 모를 공간으로 향하는 균열을 일으키는 능력인 듯했다.

물론 다른 능력일 수도 있었으나,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한번 들어가 볼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곳이 어떤 곳인지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나로서는 섣불리 각오가 생기지 않았다.

'내가 직접 들어가는 건 조금 아닌 것 같고··· 뭐 써먹을 수 있나?'

나는 시험을 겸해서 주변에 있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서 그것을 균열 공간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대로 균열 공간을 닫았다.

꿀렁─

그와 함께 허공에 일어났던 공간의 균열이 사라졌다.

'다시 꺼낼 수 있나?'

나는 다시금 정신을 집중했다.

처음 했을 때보다 느껴지는 피로감이 더욱 심한 걸 보니, 아무래도 자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아닌 듯했다.

['균열 공간'을 발동합니다.]

쩌적, 쩌적─

그리고 다시금 벌어진 균열 사이로,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있다.'

역시라고 해야 할까.

손끝에서 조금 전에 내가 집어넣었던 돌멩이의 촉감이 느껴졌다.

쑤욱-

[···지금 그거 거기서 꺼낸 거예요?]

"그래."

[저기 안이 도대체 뭔데요?]

"궁금하면 한번 들어가 봐라."

[절대로! 사양할게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강제로 명령하거나 할 생각은 하지 마요. 그러면 확 혀 깨물고 죽어버릴 테니까.]

"넌 혀 깨물어도 안 죽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왠지 내 마음속의 작은 악마가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잠깐의 가학심으로 에스더를 잃을 수도 있는 리스크를 짊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물건을 보관하는 건 가능하다.'

첫 번째 실험은 성공.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실험은 다음 스탭으로 넘어가는 게 수순이었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넣으면 어떻게 되지?'

일단 경험한 바에 따르면, 물리적 형체가 없는 정신체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전신이 녹아내리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그렇다면 물리적인 형태가 있는 생물체가 저 안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멀쩡할 것 같지는 않은데··· 일단은 한번 시험해 보는 게 최고겠지.'

물론 직접 들어갈 수는 없었으니, 나는 우선 모트교 신도의 시체 중 하나를 집어 넣어보기로 했다.

'이쯤이면 되겠지.'

생각보다 균열의 입구 자체가 크지는 않았는지, 모트교 신도의 시체를 밀어 넣는 게 쉽지 않았다.

"···보고 있지만 말고, 좀 도와."

[제가 말했잖아요. 저 걔네들 만지기 싫다고.]

"그러면 나는 만져도 되고?"

[네.]

"······."

너무 단호해서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어쨌거나 나는 실험의 연속으로 다시금 균열 공간을 닫았다가 열었다.

'신체 구조가 붕괴했다거나 하는 징조는 보이지 않아.'

물론 이건 시체라서 그런 걸 수도 있다.

곧, 살아 있는 생물체로도 실험을 해볼 필요성이 느껴졌다.

'문제는, 이 근처에 마땅히 그럴 만한 생물체가 없다는 건데·······.'

아니··· 생각해보니 한 개 있었다.

마침, 내 주위에 있는 생명체.

[기깃!]

실험 대상은 야누스의 뼈 촉수 일부였다.

아무래도 뼈 촉수 특성상, 야누스와 분리되고도 얼마 동안은 생명 활동이 유지되니 그걸 이용할 생각이었다.

['균열 공간'을 발동합니다.]

나는 야누스의 뼈 촉수 일부를 분리해서 균열 공간 안으로 집어넣었다가, 잠시 기다린 뒤에 다시 빼냈다.

'음?'

그리고 나는 한 가지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보통 야누스와 분리된 뼈 촉수는 약 오 분이 흐르면 생명 활동이 완전히 정지하는데, 균열 공간 안에서는 십 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균열 공간을 나오자 뼈 촉수가 다시금 꿈틀거린 것이다.

이로써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추론할 수 있게 되었다.

'균열 공간 내에서는 물리적인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흐르거나, 혹은 아예 흐르지 않는다.'

이 모든 실험을 통해서, 나는 균열 공간의 용도를 대충 알 것 같았다.

'이제 남은 실험은 대충 한 가지 정도인가.'

물건도, 죽은 생명체도, 살아 있는 생명체도 모두 실험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내 추측이 맞는지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단계였다.

[···지금 뭐하려고요?]

"그냥 실험이다."

나는 손에 작은 상처를 내고는, 그것을 균열 공간 안으로 집어넣었다.

현재 내가 지닌 강화 혈청의 능력과 특성, 그리고 뱀의 상징의 힘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 상처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아물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역시.'

약 삼십 초 후에 그 속에서 손을 빼자, 처음에 내가 냈던 상처가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손을 빼내기 무섭게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즉, 내가 추측했던 대로 균열 공간 내에서의 시간은 현실과 다르게 흐른다.

매우 느리거나, 혹은 안 흐르거나.

[···와, 진짜 괴물이네. 무슨 상처가 저렇게 순식간에 아물어?]

에스더는 다른 의미로 경악한 듯했지만, 지금 내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실험 결과를 종합하면······.'

이 균열 공간의 용도는 명확했다.

'인벤토리.'

본디 더 디펜스는 별도의 인벤토리가 존재하지 않는 게임이다.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듯이 이제껏 나도 별도의 인벤토리를 사용하지 못하고서, 무거운 중화기는 평소에 은신처에 두고 다니거나, 호루스의 등 위에 놓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균열 공간은 아니다.

'비록 진짜 정체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건 충분히 인벤토리로 활용할 수 있어.'

이렇게 되면 나도 아크 바깥에서 운신하기가 훨씬 더 편해진다.

아무리 짐꾼을 겸한 호루스가 있다고는 해도, 호루스의 등 위는 무한하지 않을뿐더러 괜히 짐이라도 실었다가 전투 중 유실되기라도 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균열 공간 내에서 물건이 유실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일단 지금까지의 반응만 보아서는 그럴 것 같지는 않아.'

현실과는 다른 공간.

동시에,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는 정적인 공간.

그게 내가 생각하는 균열 공간의 정의였고, 이는 인벤토리로서 활용하기에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데 혼자 그렇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어요?]

"아무것도 아니다."

[누가 봐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구만 뭐. 갑자기 기절했다가, 깨어나서는 이상한 짓을 하고··· 진짜 뭐가 뭔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본래였다면 챙길 생각이 없었던 잡동사니들까지도 균열 공간에 싹싹 긁어 넣었다.

아까 내가 보았던 광활함이 거짓은 아닌지, 아무리 넣어도 공간이 찰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러면··· 슬슬 가볼까.'

조사팀과 합류할 때가 됐다.

* * *

"힉!"

갑작스러운 아이리스의 비명에 힐데가르트가 주변을 경계하며 두리번거렸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아, 아뇨. 갑자기 오한이 들어서······."

< 균열 > 끝

[······진짜 괜찮은 거 맞죠?]

"그래."

[진짜 진짜 진짜로?]

"그렇다니까."

내가 기절했던 게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던 건지, 아니면 균열 공간 때문인지는 몰라도 에스더가 아까부터 귀찮게 칭얼댔다.

[근데 왜일까요?]

"뭐가."

[아까부터 주인님 주위에서, 이상한 게 보여요.]

"이상한 거?"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에테르 같기는 한데, 에테르가 아닌 무언가를 보는 것 같다고 할까?]

"에테르가 아닌 무언가?"

무언가 신경이 쓰이는 말이었다.

애석하게도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1급 유령종인 에스더가 보는 걸 똑같이 볼 수는 없었기에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조금 무리를 한다면 가능하긴 하겠지만······.'

그랬다가는 자칫 잘못하면 내 육체에 대한 통제권을 에스더에게 빼앗길 가능성이 있다.

아무리 최근 들어서 에스더가 주인님 주인님 거리면서 따른다고 해도, 본질적으로는 전(前) 그림자단이자 1급 네임드 마물이다.

괜한 위험부담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무것도 아니다."

만약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에스더가 안다면, 지금 자기를 못 믿는 거냐면서 빼액 소리를 내질렀을 것이다.

뭐, 나는 당연히 못 믿는다면서 간단하게 일축했을 테지만.

'그건 그거고······.'

그렇게 내가 Z-74 제트팩을 가동시키며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

[자, 잠깐!]

에스더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았다찾──────]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에테르가 내 주위에서 넘실대는 것이 느껴졌다.

[어, 어어?]

에스더의 경악성이 울려 퍼지며,

[에테르 감응력이 상승합니다.]

[29 -> 31]

['발화(發火)' 능력을 습득하였습니다.]

넘실대던 에테르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순식간에 나에게 흡수되었다.

'이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균열 공간과 연관이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흡수된 에테르는 지금까지 내 주위에 맴돌던 에테르와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숫자로는 같은 2지만··· 이 에테르는 확실히 무언가 달라.'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에스더가 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괜찮아요?]

"그런 것 같다."

[방금 그건··· 뭐죠?]

"나도 모르지."

에테르에 대해서 에스더가 모른다면 나도 모를 확률이 높았다.

무엇보다도, 그 균열 공간과 관련된 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있군.'

이 세계의 비밀 중 상당수는 많은 유저에 의해서 이미 파헤쳐져 있다.

예를 들면 등급 외 용종 엥켈렌스가 잠들어 있는 곳이라든가, 혹은 그림자단의 진정한 목적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밝혀지지 않는 부분이 많았으니, 내가 모르는 게 있다고 해서 딱히 이상한 건 아니었다.

'만약 숨겨진 것들이 전부 밝혀져 있었다면, 내가 클리어하지 못했을 이유도 없었을 테지.'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한동안 오르지 않았던 에테르 감응력이 드디어 2씩이나 오르면서 나는 마침내 4레벨 에테르 적합자가 되었다.

단순한 화력으로만 치면, 무려 네이비 라인의 특수 기동 타격 담당관인 타티아나 벨로프와 동수를 이룰 수준이 된 것이다.

'거기다가 에스더까지 나선다면, 아예 압도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겠지.'

고작 레드 라인 스테이지에서 벌써 4레벨 에테르 적합자라니······.

상상을 뛰어넘는 성장세였다.

'뭐, 그럴만도 했지만.'

고생을 어중간하게 했다면 꿀빤다고 했겠으나,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쉬운 게 없었다.

이 정도 성장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겸사겸사 나는 오랜만에 내 정보를 점검했다.

──────────────

이름 : 칼 마커스(Carl Marcus)

계급 : ─

보직 : ─

근력 : 18(+13)(+20%)

체력 : 21(+13)(+20%)

재주 : 14(+13)(+20%)

행운 : 12(+13)(+20%)

투지 : 9(+13)(+20%)

통솔 : 2(+13)(+20%)

에테르 감응력 : 31(+13)(+20%)

명예 : 3

보유 특성 : [강인한 체력], [불면증], [날렵한 몸놀림], [초인적인 정신력], [수전증], [난시], [돌발성 난청], [일격필살], [화력 전문가], [무거운 탄환], [접신], [저격수의 시간], [괴수 사냥꾼], [불살주의], [초심자의 행운], [칼날 탄환], [공포탄], [영웅의 길], [하늘의 지배자], [질긴 생명력]······.

보유 능력 : [강체(强體)(Lv.4)], [방출(放出)(Lv.2)], [발화(發火)(Lv.1)]

*강화 혈청이 적용된 상태입니다.

*현재 적용된 강화 혈청 타입 : 알파, 시그마, 프시, 오메가.

──────────────

여전히 흉악한 능력치와 더불어서, 에테르 감응력이 31을 통과하며 강체와 방출 능력 모두 레벨이 올랐다.

'이젠 레드 라인이나 오렌지 라인 수준이 아니군.'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더 빠르게 강해져야 해.'

상황은 바뀌었다.

언제까지고 내가 알고 있던 더 디펜스의 세계를 생각하고 있다간, 아크는 멸망할 것이다.

'그러면··· 일단 가볼까.'

푸슈육─!

나는 거침없이 Z-74 제트팩을 가동했다.

* * *

"저, 저기!"

힐데가르트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조사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칼 마커스?"

아까 몰려든 먹구름 떼를 보고서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었으나, 칼 마커스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제트팩을 타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것 봐, 저 야만인이 그렇게 쉽게 죽겠어?"

드미트리의 의기양양한 말에 아이리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언제는 버리고 가자더니."

"내, 내가 언제!"

마침내 지상에 도착한 칼 마커스를 바라보며, 힐데가르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뭐지?'

다르다.

분명히 칼 마커스인데, 지금까지 보았던 칼 마커스와는 무언가 다르다.

힐데가르트는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잘 정리했군."

칼 마커스의 말에 드미트리가 이죽거렸다.

"누가 놀고 있는 동안 말이지."

"할 일이 있었다."

"어련하시겠어."

칼라킨이 말했다.

"할 일은 끝나셨습니까?"

"그래."

"그러면 바로 돌아가시죠."

"그게 좋겠지."

칼 마커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연스럽게 앞장 섰다.

* * *

치열했던 웨이브 후.

이모샤 중위는 상황의 보고를 위해서 바놀 중령의 집무실을 찾았다.

똑똑-

"이모샤 중위입니다."

"들어오게."

이미 이모샤 중위가 찾아올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에, 바놀 중령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패널을 조작하자 곧이어 탁상 밑이 열리며 찻잔이 모습을 드러냈다.

"들게."

"감사합니다."

바놀 중령의 권유와 함께 차를 홀짝인 이모샤 중위가 말했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크로노스 잔당 조사팀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나?"

"예. 아직······."

이모샤 중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안 그래도 그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웨이브의 뒷 정리를 최대한 서둘렀건만, 그들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모샤 중위는 화제를 돌릴 겸 Red-17 게이트의 피해 상황 및 복구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 등을 보고 했다.

모든 보고를 들은 바놀 중령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예상보다 피해가 적군."

"예. 비록 평상시보다는 피해가 많긴 하지만, 그래도 웨이브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예?"

이모샤 중위는 바놀 중령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설마 이 역시도 칼 마커스와 관련이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칼 마커스는 아크를 떠났습니다. 이번 웨이브까지 칼 마커스 덕분이라는 건 지나친 억측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겠지. 하지만 말일세."

바놀 중령이 가볍게 웃었다.

"왠지, 칼 마커스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웨이브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생각한다면 더욱더 말일세."

"아······."

웨이브가 어디에서부터 오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특정 짓기에는 너무나도 광활한 범위에서 마수 군단이 몰려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칼 마커스를 비롯한 조사팀이 떠난 곳에서도 웨이브는 몰려올 거라는 점이다.

만약 정말로 칼 마커스를 비롯한 크로노스 잔당 조사팀이 아크 바깥에서 활약했다면?

'정말로··· 칼 마커스 덕분인가?'

그의 활약을 의심했던 이모샤 중위조차도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지금까지 칼 마커스가 해왔던 일들이 말도 안 되긴 했다.

"자네는 이번 임무의 성공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나?"

"···그다지 높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칼 마커스를 믿는 이모샤 중위지만, 사실 이번 임무는 말도 안 되는 임무였다.

아크 바깥, 그것도 어디 있을지도 모르는 크로노스 잔당을 찾아서 그들의 동태를 조사하고 목적까지 알아낸다?

아무리 칼 마커스가 대단하다고 한들, 고작 신병 몇 명을 데리고 가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이번 임무의 성공 확률은 3% 미만일세."

"···예?"

3%라니······.

터무니없이 낮은 확률이었다.

"물론 단순히 조사팀이 생환 할 확률은 그보다 조금은 높겠지. 한 5%?"

"···그런 위험한 임무를 지금 이제 막 훈련병을 벗어난 병사들에게 맡겼다는 겁니까?"

"그냥 병사들이 아닐세. 그들은 모두 특별한 재능이 있는 병사들이지. 아마··· 칼 마커스와 함께라면, 그들의 재능 역시도 빛을 볼 수 있을 테지."

"···칼 마커스에 대한 믿음이 굉장하시군요."

"그저 내 안목이 맞길 바랄 뿐이지."

다른 병사들 역시도 매우 유능하고, 또한 미래까지 유망한 병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놀 중령의 시선은 온통 칼 마커스에게로만 향해 있었다.

그만큼 다른 병사들과 칼 마커스의 존재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만약 대장님의 안목이 틀렸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나도, 아크도."

이모샤 중위는 이를 악물었다.

형편없는 도박에 말도 안 되는 판돈을 올린 바놀 중령의 판단을 욕하고 싶었으나, 이모샤 중위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최선이었다는 걸.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게."

터덜터덜한 발걸음으로 바놀 중령의 집무실을 나선 이모샤 중위는 다시금 자신의 책임 구역인 Red-17 게이트로 향했다.

이미 웨이브 후의 뒷정리는 거의 끝났으나, 아직도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칼 마커스······."

이모샤 중위는 홀로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이윽고 Red-17 게이트에 도착한 이모샤 중위는 언제나처럼 현장을 지휘했다.

당장 급한 뒷정리는 끝났다지만, 다음 웨이브를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쪽 포인트는 화기와 병사를 더 배치해라. 특히 마수들이 잘 몰리는 곳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한창 현장을 지휘하던 이모샤 중위는, 갑작스럽게 울리는 경고에 고개를 들었다.

"설마······."

이모샤 중위는 보았다.

어느새 지평선 너머에서 오고 있는 한 무리를.

"담당관님!"

그리고 이어지는 보고에, 이모샤 중위는 앞뒤 제쳐두고 물었다.

"신원은, 저들의 신원은 확인했나?"

평소 그녀답지 않게 다급한 목소리로 부관을 채근하자, 부관이 말했다.

"아, 예! 아무래도 얼마 전에 아크에서 파견한 조사팀 같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칼 마커스가, 아크에 돌아왔다.

< 협상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