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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 9

모래바람 상단은 거래 상대를 정할 때 신중하게 정한다.

아크 바깥에서 가장 위험한 건 마수나 마물이 아닌 같은 인간이었고, 그런 이들 틈에서 장사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애초에 상인 집단주제에 이 험한 세상에서 거점을 정해놓지 않고 온갖 장소를 돌아다니는 것부터가 그러했다.

그렇기에 나도 직접 모래바람 상단을 직접 찾을 생각보다는, 접선지 중 한 곳에 도착한 뒤에 천천히 모래바람 상단을 불러낼 생각이었다.

모래바람 상단은 특정한 거점이 없는 대신에 거래를 위한 몇몇 접선지들이 존재했고, 그곳에서 특정한 방법으로 모래바람 상단을 호출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 모든 계획도 모래의 딸 아이라와의 만남으로 인해서 없었던 것이 되었다.

좋게 말하면 지름길을 만난 셈이었으나, 나쁘게 말하면 일이 내 의도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 셈이었다.

한편,

"이제 저 고개만 넘어가면 돼요!"

지금까지 걸어온 거리가 제법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라는 여전히 씩씩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물론 영산 노아를 제집처럼 돌아다녔던 나에게 있어서는 이 정도야 가벼운 산책 수준이었으나, 알고 있던 대로 아이라 역시도 보통은 아니었다.

"캠프와의 거리도 꽤 있는데, 그곳에서 혼자 뭘 하고 있던 거지? 혼자 돌아다닐 만한 장소가 아닐 텐데."

"에이, 장소가 뭐가 중요한가요? 어차피 안전한 곳 따위는 없는데. 그리고 선생님께서도 혼자 다니시던데요."

그것도 그러네.

설마하니 아이라가 이런 식으로 대답할 줄은 몰랐기에, 나도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다."

"저도 그래요. 아마 선생님께서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지금쯤 발에 땀이 나도록 도망치고 있지 않았을까요? 제가 이래 보여도 발은 제법 빠르거든요."

언제는 생명의 은인이니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니 어쩌니 하더니······.

"선생님께서 갑자기 하늘에서 왜 떨어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모두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중요한 건, 선생님께서 위기에 빠진 저를 구하셨다는 거죠. 이 모든 게 인연이라는 거겠죠. 아닌가요?"

가만히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에스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판정패.]

'시끄럽다.'

에스더가 내 판정패를 선언하고 있을 때, 아이라가 말했다.

"선생님께서도 사정이 있으신 거죠?"

"···그래."

"저도 그래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쩔 수 없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나는 하늘에서 갑자기 뚝- 하고 떨어진 사람이다.

아이라와 나 중에서 누가 더 수상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내 쪽일 수밖에 없었다.

[2연패.]

'······.'

괜한 의문을 제기했다가 본전도 못 찾은 기분이었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모래의 딸이 그곳에 있었던 건 결코 우연 따위가 아니다.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는 행동이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뭐지?'

아마 지금부터 그걸 알아내는 게 이번 거래의 핵심이 될 가능성이 컸다.

"저기에요!"

아이라의 외침과 함께 그녀의 손끝에서 상당한 규모의 캠프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만약 아이라가 아니었다면 그냥 못 보고 지나쳤을 정도로 위장이 잘 되어 있었다.

'과연.'

단순히 위장막을 덮고, 나뭇잎과 나뭇가지 몇 개를 덮어놓는 수준의 위장이 아니었다.

아마 눈에 보이지 않는 광학 미채 장비들 역시도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을 터.

거기다가 캠프를 둘러싸고 있는 접이식 울타리에 흐르는 고압 전류는 혹시 찾아올지 모르는 마수에 대한 방비 역시도 완벽하게 이루고 있었다.

'물론 이 역시도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크 바깥이라는 환경을 감안한다면 감지덕지겠지.'

아크를 제외한 인류의 도시가 모조리 멸망한 지금, 아크 바깥에서도 사람은 살아간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모래바람 상단 역시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쪽이에요."

아이라는 그러한 광학 미채 위장과 울타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고들었다.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디뎌도 그대로 고압 전류에 감전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위험천만한 사지를 말이다.

'하긴, 자기 집이니까.'

아무리 고압 전류가 흐르는 울타리가 위험해 보여도, 평생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이라의 뒤를 따라서 울타리 사이를 얼마나 거닐었을까.

"대체 또 어디를 간 건지······."

"됐어,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야?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이봐! 그건 그쪽 아니야!"

"아, 죄송합니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본격적으로 캠프 안의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모래바람 상단.

아크 바깥에 있는 무수한 세력 중에서도 몇 안 되는 상인 집단이 마침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흐음.'

나는 드러나는 풍경을 살폈다.

아크제로 보이는 대형 천막들이 하나도 아니고 열 개가량이 줄줄이 늘어져 있다.

저 정도면 천막 자체의 방호력만으로 마수들의 공격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 수준.

거기에 더해서 곳곳에 보이는 물자 운반용 대형 차량들은 엔진 하부의 모양새만 봐도 딱 봐도 화석 연료가 아닌 원자로로 작동하는 차종이었다.

저 정도 기술력을 지니고, 양산화할 수 있는 건 아크 또는 이제는 멸망한 크로노스 정도.

즉, 저것들 역시도 아크 혹은 예전의 크로노스와의 교역으로 얻어낸 것이라는 뜻이었다.

'여전하군.'

아무리 온갖 종류의 기술들이 발전한 세상이라지만, 저 정도 광학 미채나 원자로를 외부로 유출하는 건 설사 아크라 할지라도 부담되는 일이다.

그러나, 모래바람 상단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이 그러한 원자로 차량이 한두 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대충 본 거지만 몇몇 물건들은 내가 찾고 있던 것들이다.'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해도 좋은 아크지만, 그곳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은 주로 첨단 무기나 기기류다.

반면, 모래바람 상단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은 그보다는 못해도 아크 바깥과의 활발한 교역으로 인한 다양성과 특이성이 있었다.

"아이라!"

나와 아이라가 모래바람 상단 캠프에 발걸음을 디디기 무섭게, 상단원 중 하나가 아이라를 반겼다.

"저 왔어요. 아버지는요?"

"상단주님은 저 안쪽에 계신다. 그리고 이분은······? 아니, 아니다. 네가 하는 일이니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들어가 봐라."

"네. 고생하세요."

잠깐의 대화만으로 모래바람 상단 내에서 모래의 딸이 어떤 위치를 지녔는지 알 수 있었다.

이토록 철저한 위장을 펼치고 있는 장소에 외지인을 끌어들였다는 건 어찌 보면 큰일 같기도 했으나, 본질적으로 이들은 상인이었다.

상인은 당연히 외지인들과 잦은 접촉을 할 수밖에 없었으니, 내 존재가 이들에게 있어서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윌 아저씨예요. 저희 상단의 장부 관리를 맡고 계시죠."

"작은 상단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큰 상단은 아니지 않나요?"

"충분히 커 보인다만."

"관점에 따라 다르죠."

아이라가 싱긋 웃었다.

물론 모래바람 상단이 규모 면에서 엄청나게 거대하거나 한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영향력이 적지는 않았다.

'애초에 아크와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향력이 있는 셈이지.'

거기에 더해서 에스더의 말에 따르면 그림자단과도 거래를 트고 있다고 했으니, 이들의 역량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창 물자들의 정리로 바쁜 사람들 사이를 지나자, 마침내 모래바람 상단의 상단주이자 아이라의 아버지인 오르고 나세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창 상단원들을 지휘하고 있던 그는 멀찍이서 오는 아이라를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달려왔다.

"아이라! 대체 어디를 다녀오는 거냐? 한참은 찾았는데."

"잠깐 나들이 좀 다녀왔어요."

"···나들이라고?"

나들이라는 말에 오르고 나세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나를 향했다.

"이분은?"

"아, 저를 구해주신 분이에요. 생명의 은인이시죠."

"···생명의 은인이라고? 또 위험한 짓거리를··· 아니, 됐다.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지."

일전에 보았던 윌과 같은 반응이었다.

'여전하군.'

찾아온 시점이 꽤 빨라져서 내가 알고 있는 모래바람 상단과 좀 다를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래바람 상단은 여전하다.

즉, 내가 해야 할 일 역시도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모래바람 상단의 오르고 나세르가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모래바람 상단을 이끌고 있는 오르고 나세르라고 합니다. 딸 아이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워낙 천방지축인 애라 저도 단속이 쉽지 않습니다."

"애 아니에요."

"이렇지 뭡니까. 하하."

얼핏 보면 화기애애한 평범한 가족 같은 모습.

하지만 그조차도 나에게 있어서는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설었다.

저게 저들의 가짜 모습이라는 건 아니다. 실제로 오르고 아이라 부녀 사이는 매우 친밀한 편이었으니까.

단지, 그게 이제 막 외지에서 들어온 나에게 보일 모습이 아닐 뿐.

"실례지만 은인분께서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아, 혹시 불편하시다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폰이다."

"폰님이시군요! 딸 아이를 구해주셨다고 하니, 제가 크게 대접을 하고 싶습니다만··· 혹시 괜찮으십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만."

"아쉽군요. 꼭 대접을 해드리고 싶었는데··· 하, 그러면 이를 어찌한다, 어떻게든 꼭 은혜를 갚고 싶은데······."

남이 주는 음식이나 음료는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된다.

이건 아크 바깥에서의 상식 중의 상식이었고, 당연히 오르고 나세르 역시도 대접이 거절당했다 해서 재차 권유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 세상에서는 그 역시도 매우 큰 실례일뿐더러, 자칫 잘못했다가는 다른 의도를 가진 것으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아이라가 끼어들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선생님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 말고도 얼마든지 은혜를 갚을 방법은 있잖아요?"

"아아, 그렇지."

아이라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금빛으로 물든 그녀의 눈동자가 유독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모래의 딸 아이라가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저희 모래바람 상단은 비록 규모는 크지 않으나, 신의와 신용. 그리고 고객과의 관계를 통해서 유지 되어 왔습니다."

"찾은 물건이 있으십니까? 저희를 찾아 주세요. 팔고자 하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그 역시도 저희를 찾아 주세요. 모래바람의 이름과 양심. 그리고 신용을 걸고서, 최고의 가격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원하신다면, 앞으로 저희 상단의 특별 고객으로서 대우해드리겠습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시니까요."

황금빛으로 타오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본 나는 이내 지금까지 내 속에서 내내 메아리치던 의문에 대한 답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과연, 그렇게 된 건가.'

모래의 딸 아이라는 도대체 왜 뜬금없이 이런 장소에 홀로 마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가?

설마하니 혼자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었다거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아크 바깥이 어떤 장소인지는 아크 바깥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더욱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모래바람 상단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데, 그 역시도 가능성은 낮다.

모래바람 상단은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절대 약한 세력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약한 세력이었다면 이처럼 온갖 곳들과 교류하며 상행을 이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무슨 일이 있었다기에는, 지금 모래바람 상단의 분위기부터가 너무 평화로워. 무엇보다도 아이라가 캠프를 나섰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고.'

단순 가출이라고 부르기도 우스운 것이, 모래의 딸 아이라는 호위 한 명 없이 홀로 이런 외딴곳에서 홀로 마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만약 내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기를 겪으면서 말이다.

'내가 알기로 모래의 딸 아이라는 스테이지 후반부까지도 무사히 생존하는 인물이다.'

즉, 모래의 딸 아이라가 이러한 위기에 노출되는 건 본래였다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위험한 사지로 내몰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굳이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이곳에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여전히 어처구니없는 눈이란 말이지.'

황금안(黃金眼).

모래의 딸 아이라가 지닌 눈으로서, 말 그대로 돈의 흐름을 읽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지닌 눈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내가 모래의 딸을 찾은 게 아니다.

아이라가, 날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즉, 나를 돈줄로 봤다는 거군.'

엄밀히 따지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지금 나는 모래바람 상단에 상단한 수준의 물자를 팔고, 또한 구매하러 왔으니까.

모래의 딸의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찾아온 우량 고객인 셈.

'하지만 말이지······.'

다만, 아이라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면 아이라만 날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 역시도, 모래바람 상단을 비롯한 아이라를 찾고 있었다.

거의 같은 말 같았으나,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한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거래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신가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내가 오랜 경험으로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면, 모래바람 상단과 거래를 할 때 저들이 원하는 걸 쉽게 주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지금 역시도 그러했다.

"그러면 역시─"

"그래, 거절한다."

"······네? 지금 뭐라고─"

"거절한다고 했다."

"······."

내내 미소를 잃지 않던 모래의 딸 아이라의 표정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 모래의 딸, 아이라 (3) > 끝

"그게 무슨······."

지금 이 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모래의 딸이라 불리며 모래바람 상단을 이 자리까지 오르게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한 아이라조차 지금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못 들었나? 거절한다고 했다."

잘못들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문제였다.

"자, 잠시만요!"

이치에 맞지 않는 대답이다.

아이라가 생각하는 이치에 따르면 폰에게서 나올 대답은 '예' 하나뿐이어야 했고, 그렇기에 이러한 대답은 있어서는 안 될 대답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아이라의 입 밖으로 나온 질문 역시도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까······ 왜요?"

"거기에 따로 이유가 필요한가?"

"그건··· 아니죠. 네······."

평소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멍청한 질문에 아이라의 옅은 구릿빛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으로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거래에 있어서 늘 상황을 주도하기만 했던 아이라로서는 무척이나 생소한 경험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내가 잘못 봤을 리가 없는데······.'

황금안.

아이라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니고 있었던 이 특별한 눈은, 말 그대로 돈의 흐름을 읽는다.

아이라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황금안에 비친 황금빛의 길이 그녀를 인도한다.

아이라가 위험을 무릅쓰고서 홀로 캠프를 벗어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었던 찬란한 황금의 길이 그녀를 인도했고, 아이라는 마치 홀린 듯이 그것을 따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폰을 만났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진 인연이었다.

그러나,

지금껏 살면서 이 흐름을 의심한 적이 없었던 아이라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확인해야 해.'

아이라의 황금안이 다시금 자신을 폰이라 밝힌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이라는 보았다.

'아······.'

지금까지는 감히 본 적도 없는 찬란함.

아니, 후광에 가까운 빛.

이는 곧 모래바람 상단에 지금까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줄 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야.'

그에 대한 증거로 지금도 폰에게서는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찬란한 황금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단순히 폰뿐만이 아니라, 그를 향해 뻗어 있는 무수한 황금의 길이 그걸 증명했다.

'반드시 설득해야 해.'

이런 찬란함을 쏟아내는 이는 아이라조차도 본 적이 없었다.

모래바람 상단에 있어서 가장 큰 거래 중 하나였던 아크와의 거래에서 나온 장교와 마주했을 때도 이런 빛은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야.'

모래바람 상단의 운명이 걸린 순간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혹시 따로 원하시는 조건 같은 게 있으신가요? 최대한 맞춰드릴 용의가 있어요."

"내 말이 어려웠나? 거절한다고 했을 텐데."

"그, 그러니까 저희 측 제안을 들어보시면 생각이 바뀌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이라가 이렇게까지 굽힌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자신을 폰이라 밝힌 생명의 은인은 요지부동이었다.

'이게 어떤 기회인지 모르는 건가?'

그래, 그럴 수 있지.

잘 모르면 그럴 수 있지.

순간적으로 아이라에게 어떤 사명감 비스름한 책임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모래바람 상단의 고객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이에게, 그 의미를 알려주고야 말겠다는 사명감이었다.

"선생님께서 아직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저희 모래바람 상단은 아크와도 거래하는 이름 있는 명문 상단으로서─"

"그게 내가 너희와 거래를 해야 할 이유가 되나?"

"그건 아니지만······."

어디 가서 말로 밀려본다고 느낀 적이 없었던 아이라다.

하지만 내내 정론으로 푹푹 찔러오는 폰에게는 한마디의 항변도 할 수 없었다.

상인에게 있어서 가장 까다로운 상대가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면 답은 늘 정해져 있었다.

답은, 처음부터 물건을 살 생각이 없는 이다.

이런 이들은 상인이 아무리 설득하고, 호객행위를 해봤자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은혜를 갚는다고 하더니, 강매를 하려고 하는군. 이만 가보겠다."

"자, 잠시만요!"

아이라는 알고 있었다.

이런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거래 이상의 무언가를 제시해야만 한다는 것을.

"더 할 말이 남았나?"

냉랭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아이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푸대접인 건 둘째치고서, 이대로 저 남자를 보냈다가는 다시는 상인으로서 서지 못할 것만 같았다.

"두 배, 두 배 쳐 드리겠습니다."

"뭘?"

"앞으로 저희 상단에 가져오시는 물건에 대한 시세를요."

정규화된 화폐가 없는 시대.

그렇기에 모래바람 상단이 하는 일은 물건에 대한 가치를 측정하고, 그에 대한 값을 치르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값을 두 배로 측정한다는 것은, 곧 모래바람 상단 측에서 이문을 전혀 얻지 않겠다는 뜻과도 같았다.

"아이라! 그건······."

평소 아이라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믿고 맡기는 모래바람 상단의 상단주 오르고조차도 이번만큼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만큼 아이라의 제안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전혀 상의가 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이번 일은 저에게 맡겨주세요."

"나야 널 믿긴 하지만··· 알았다."

이상할 건 없었다.

비록 오르고 나세르가 모래바람 상단의 상단주이긴 했으나, 지금의 모래바람 상단을 만드는 데는 아이라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일까.

"흐음."

지금까지 꼼짝도 하지 않던 폰이 처음으로 거절이 아닌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물론 저걸 대답이라고 불러야 할 지는 조금 의문 부호가 찍히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에 자신감을 얻은 아이라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제 페이스를 찾았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넘어올 거라는 판단이 든 것이다.

"어떤가요? 이 정도면 선생님께 절대 손해가 되는 관계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확실히, 그렇겠군."

아이라의 얼굴이 다시금 처음과 같은 열기를 띠었다.

드디어, 폰에게서 이치에 맞는 대답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지만 그건 내가 거래를 할 생각이 있을 때나 가능한 말이다."

애석하게도, 착각이었지만.

"······예?"

희망은 사람을 절망하게 한다.

애초에 희망 같은 게 없었더라면 그냥 체념하고 돌아서거나 포기했을 테지만, 희망이 있기에 더욱더 발버둥 치고, 또 달려들다가 끝내 절망한다.

지금 아이라가 그러했다.

"그게··· 무슨······."

"못 들었나? 거절한다."

마음 같아서는 거래 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으니 당장 이곳에서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면,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는 아이라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재신(財神)이었기 때문이다.

상인이란 무엇인가?

장사를 업으로 삼아서 이윤을 추구하는 이들이 바로 상인이다.

모래의 딸 아이라 역시도 상인으로서 고작 자존심 하나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래, 아직은 말이다.

"정말로··· 원하시는 게 없으신가요?"

아이라가 짜내듯이 말했다.

달아오른 얼굴은 어느덧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물들었고, 꽉 쥔 주먹 역시도 부들부들 떨렸다.

"아."

더욱더 미치겠는 건, 저렇게 폰이 무언가 여지를 보이려고 할 때마다 움찔하는 자신이었다.

"무언가··· 원하시는 게 떠오르신 건가요? 말씀만 하세요. 무엇이든지 들어드릴게요."

"음."

아, 음 거리지 말고 말을 해! 말을!

아이라는 턱밑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집어삼켰다.

이대로 있다가는 홧병으로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

"···네?"

"거래 말이다."

아이라는 눈을 끔뻑였다.

지금까지 거절 혹은 거절만을 말하던 폰이, 처음으로 모래바람 상단과의 거래에 있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절대로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마, 말씀만 하세요!"

"정말인가?"

"네?"

"뭐든지라고 한 말 말이다."

아이라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아이라가 한 말은 백지수표를 내민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더는 고민을 할 시간이 없었다.

언제 폰의 마음이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럼요!"

대답과 동시에 아이라의 머릿속에서 무수한 조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든 조건을 포함해도 폰과 거래 관계를 틀기만 하면 무조건 모래바람 상단 측에 이득이었다.

저 정도로 찬란한 황금빛을 쏟아내는 이라면, 앞으로 막대한 이문을 가져다줄 게 분명했다.

'무슨 조건을 제시하든, 충분히 감내할만해.'

아이라의 머릿속에 있는 계산기가 계산을 마쳤다.

그리고,

"잘 됐군."

아이라는 몰랐다.

지금, 뼈 가면 속에 있는 폰의 얼굴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면 앞으로 내가 가져오는 모든 물건을 매입해주었으면 한다. 물론 두 배로 쳐준다는 조건도 포함해서."

전혀 예상지 못했던 조건에 아이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네?"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고 해서 모래바람 상단이 꼭 그것을 매입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가치가 있더라도 처분하기 곤란하거나 까다로운 물건일 경우, 그리고 그 값이 너무나도 비싼 물건일 경우 모래바람 상단은 해당 물건을 매입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폰이 요구하는 건, 그러한 모래바람 상단의 당연한 권리를 박탈하는 것과도 같았다.

지금 폰의 말대로라면 어느 날 뜬금없이 폰이 값만 더럽게 비싸고 쓸모없는 아크의 예술품 같은 걸 가져와서 팔겠다고 했을 때, 모래바람 상단이 꼼짝없이 그걸 매입해야 한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건······."

"왜 망설이지? 뭐든지라고 하지 않았나?"

"그게··· 그랬었죠."

아이라의 시선이 오르고를 향했다.

오랜만에 딸의 시선에서 불안함을 읽은 오르고가 나섰다.

"하하··· 폰님. 아무래도 저희 딸 아이가 아직 어려서 아직 상단의 사정도 모르는 채로 협상부터 나선 것 같습니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협상은 없던 거로 하면 되겠군."

"그, 그건 안 돼요!"

간신히 만든 끈이 사라지는 일만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폰은 앞으로 모래바람 상단에 막대한 이윤을 가져다줄 이다.

그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아이라."

"···죄송해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따라주세요."

아이라는 구원투수로 나선 오르고의 말까지도 제쳐두었다.

더 이상 망설여서는 안 된다.

지금 이건 도박이었으나, 어떻게 보면 도박이 아니었다.

아이라는 이미 이 도박에서 승리할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요, 선생님. 선생님 말씀대로 할게요."

"그래."

아이라가 오르고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알았다."

오르고가 폰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록 협상 자체는 아이라가 나서기는 했어도, 모래바람 상단의 상단주는 그녀의 아버지인 오르고였기 때문이다.

"저희 모래바람 상단에서는 앞으로 폰님을 특별한 고객으로서 모시며, 또한 긴밀한 관계를 이어갈 것입니다."

"협상 성립인가?"

"그렇습니다. 바로 계약서부터 작성하시겠습니까?"

"그러지."

이런 세상에서 본디 계약서 같은 건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래바람 상단에게는 나름대로 의미를 지녔다.

상인은 신용과 신의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직종이고, 계약서의 불이행은 당연히 그러한 신용과 신의는 바닥에 처박는 행위였으니 말이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앞으로 저희 모래바람 상단과 좋은 거래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그래."

폰과 오르고가 계약서를 주고받은 뒤, 오르고가 모래바람 상단을 호출할 수 있는 지점과 방법에 대해서 폰에게 설명했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나고서야 오르고가 살며시 물러난 뒤 아이라에게 다가서서 속삭였다.

"아이라. 난 모르겠다. 이게 정말로 잘한 짓인지······."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저쪽에서 당장 물건을 팔겠다고 내민 것도 아니잖아요?"

아이라가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순순히 승낙한 데는 현재 폰의 행색 역시도 영향을 끼쳤다.

척 봐도 현재 폰이 지닌 거라고 해봐야, 개인 장비로 사용할 무기를 비롯한 보호복 정도가 전부였다.

설마하니 입고 있는 걸 팔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모래바람 상단의 접선지까지 물자를 옮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수량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다만, 아이라가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폰이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가시는 건가요?"

"잠깐 물건을 좀 가져오겠다."

"네?"

처음에는 폰이 무슨 소리를 하나 했다.

여기에 물건이 어디 있다고?

그러나 이내 캠프 밖을 나섰던 폰이 돌아왔을 때, 아이라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대체······."

어느새 캠프 한편에 쌓여있는 막대한 양의 물자들.

척 봐도 열정은 거뜬히 넘어 보이는 아크제 Ark-15 자동변환 소총부터 시작해서, 1레벨부터 3레벨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는 온갖 종류의 아크제 보호복들.

거기에 더해서 다른 아크제 장비와 물자들은 물론이고 헤스본제로 추정되는 장비들과 물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당했다.'

아이라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폰은 정말로 모래바람 상단에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줄 이였고,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이 거래를 준비하고 온 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래를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었다.

그거야말로 모래바람 상단과 모래의 딸 아이라가 쌓아온 신용과 신의를 단번에 땅바닥에 처박는 행위였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이 물건들이 모두 상당한 수요가 있는 물자들이라는 점.'

아이라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확신했다.

'이 사람은··· 진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이라의 환희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덧 모든 물자를 나른 폰이 그녀의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직 할 게 남아 있지 않나?"

"···그렇죠. 남아 있죠. 아주 많이."

캠프 한편에 쌓여있는 물자들을 바라보며, 아이라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 *

에스더가 혀를 끌끌 찼다.

[···여기 귀신보다 더 귀신같은 인간이 있네.]

'칭찬할 거 없다.'

[칭찬 아닌데요.]

< 모래의 딸, 아이라 (4) > 끝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모래바람 상단의 상단주, 아르고의 지시와 함께 상단원들이 부랴부랴 내가 가져온 물자들을 분류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물량이 물량이다 보니, 붙은 인원수가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

그러는 동안, 아이라는 어딘가 기뻐 보이기도 했고, 동시에 슬퍼 보이기도 했고, 또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에휴······."

한숨을 쉬었다가,

"하··· 내가 대체 왜······."

후회도 해보았다가,

"아냐, 이건 투자야. 내 안목은 정확해. 음음, 그렇고 말고."

혼자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주억거리기도 했다.

옆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어느덧 안중에도 없는 듯한 모양새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갖 신비로운 척은 다 하더니.'

뭐, 애초에 모래의 딸 아이라라는 인물 자체가 저런 인물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황금안이라는 특별한 능력 탓에 남들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딘가 동떨어져 있는 존재처럼 여기지만, 실상은 그냥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읏······."

순간적으로 아이라와 내 시선이 마주치자, 아이라가 시선을 획 돌렸다.

[꼴도 보기 싫을 법도 하네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그래도 뭐, 저 돈 귀신들한테 한방 먹인 거 보니까 속이 조금 시원하긴 하네요.]

아무래도 모래바람 상단에 대한 에스더의 원한은 꽤 깊은 듯했다.

그림자단조차도 벗겨 먹은 모래바람 상단이지만, 이미 그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나에게는 얄짤 없었다.

'내가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니고.'

원한으로 치면 그림자단이 아니라 그림자단 할아버지가 와도 나보다 못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폰님."

일전에 아이라가 소개했던 모래바람 상단의 장부 담당 윌이 나에게 다가왔다.

"폰님께서 가져오신 물자들의 확인이 끝났습니다. 목록을 확인하겠습니다."

곧이어서 윌에게서 속사포 같은 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단 일반탄, 철갑탄, 예광탄, 플레셰트, 작렬탄, B타입 산탄, 특수 그물탄, 2레벨 이상의 마취탄 등 총 3140발 확인되었고, Ark-15 자동변환 소총 13정 확인되었습니다. 일부 기종에 적용된 별도의 커스터 마이징과 업그레이드가 되어 있어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값을 더 쳐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아크제 1레벨 보호복 5벌, 2레벨 보호복 4벌, 그리고 3레벨 보호복 1벌 확인되었습니다. 일부 물품은 동력 기관이 파괴되어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정 금액이 차감될 수밖에 없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크로노스제 CRN-071 자동 소총 24정 및 헤스본제 기본 보급 소총 36정, 권총 21정. 크로노스제 CN-BOM-07 점착 폭탄 37개 역시도 확인되었습니다. 파손 정도에 따라서 일정 금액이 차감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아직도 안 끝났나?"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그 말마따나 내가 가져온 물자들의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윌의 속사포 같은 말이 다시금 이어졌다.

"······."

"······."

"······."

.

.

.

"······이상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내용이 맞습니까?"

장장 몇 분 동안을 쉬지 않고 물자 목록을 쏟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윌은 숨이 차기는커녕 평온해 보였다.

역시 잔뼈가 굵은 상인다웠다.

"맞다."

실수로라도 몇 개 빼먹어도 안 이상할 법도 했건만, 윌이 말한 물자 파악 내역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아니,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세세한 물자들까지도 생각한다면 윌의 것이 더 정확하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러면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윌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발걸음이 바빠 보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해야 할 일이 많은 듯했다.

"폰님."

마치 업무 교대를 하듯이 어느덧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있던 아이라가 다가왔다.

"들으셨겠지만, 물자들의 확인이 끝났어요. 총알까지 가져오신 걸 보니 대금으로 총알을 원하시는 건 아닌 것 같고··· 크레딧으로 받으시겠어요? 아니면 현물로 가져가시겠어요? 그것도 아니면 다른 원하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얼핏 보면 당연한 질문 같았으나, 여기에는 한 가지 숨겨진 질문 한 가지가 있었다.

만약 크레딧으로 받아가겠다고 말한다면 내가 아크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걸 실토하는 셈이었으니, 모래바람 상단으로서도 자연스럽게 내 신원에 대한 정보 한 가지를 얻게되는 것이다.

"현물로 받아가지."

아이라의 눈에서 이채가 잠시 스쳐 지나갔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직접 고르시겠어요? 아니면 저희가 알아서 챙겨드릴까요?"

"직접 고르지."

"괜찮으시겠어요? 아무래도 그 정도 양이면 직접 고르시기 번거로우실 텐데."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것도 아니고, 내가 저들에게 물물 교환을 직접 맡길 리가 만무했다.

물론 저들이 사기를 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가치는 있지만 수요가 적은 애물단지 같은 물건들을 이런 기회에 넘길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직접 고르지."

"알겠어요. 그러면 이쪽으로."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이라가 크게 당황하거나 하는 기색을 보인 건 아니었다.

비록 조금 전까지는 내가 그녀의 손바닥 바깥에서 놀고 있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부터는 명백히 그녀의 영역 안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럴 거라고 예상하기도 했을 테고.'

나는 아이라의 안내를 따라서 캠프 안에 있는 임시 창고로 향했다.

말이 창고지, 아크제 대형 천막 안에 물건들을 쌓아놓은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어지간한 건물보다는 튼튼하겠지만.'

그리고 천막 바닥 부분에 설치된 바퀴는 유사시에 트럭과 연결해서 재빠르게 이 장소를 벗어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아크 바깥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서 특정 장소에 뿌리를 내린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자, 이곳이에요. 다른 곳도 있으니까 천천히 둘러보세요."

과연 모래바람 상단의 창고답게, 아크 안에서는 볼 수 없는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창고를 장식하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마수들의 시체를 박제하거나 껍질을 벗겨서 가공한 것들도 있었기에, 솔직히 말해서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천천히 고르세요.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정도 여유는 있을 테니까요."

아이라가 말한 시간이라 하면, 당연히 다음 웨이브가 찾아올 때까지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곳은 아크 바깥이었고, 당연히 웨이브의 여파 역시도 피하기에 따라서 피할 수도 있었으나, 일단 웨이브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면 항상 대피가 가능한 상태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성물의 힘이 있는 모트교의 몇몇 지부와 그림자단의 근거지 정도를 제외한다면 아크 바깥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대부분 이처럼 유목민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건 모래바람 상단은 물론이고 아크의 위협 세력 중 하나인 크로노스 연합까지도 해당하는 이야기였으니, 자신들의 터전을 잃은 크로노스 연합이 유일한 인류의 요새인 아크를 탐낼 수밖에 없었다.

'흐음.'

나는 천막 안에 있는 물건들을 대충 훑었다.

일단, 총기류는 그냥 지나쳤다.

모래바람 상단이 구할 수 있는 총기가 아무리 뛰어나봤자, 결국 아크제 물품에 비해서 밀리거나 혹은 같은 아크제라 할지라도 아크에서 직접 구매하는 것에 비해 가격 효율이 맞지 않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어머, 그냥 가시게요? 여기 있는 크로노스제 대전차 로켓을 보시면 생각이 조금 바뀌실······."

"대마수도 아니고 대전차 로켓을 어디다 쓴다는 거지?"

"···그것도 그러네요."

흔히 구제 장비라고 불리는 대전차 로켓은 마수에게 생각보다 그 효과가 크지 않다.

그렇기에 아크에서는 대마수용으로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냈으나, 이미 멸망한 크로노스에게 그런 여력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 그러면 여기 있는 크로노스제 CN-BOM-07 점착 폭탄은 어떠세요? 미리 설치해서 함정으로 사용하기도 좋고, 투척해서 사용하기도 좋아요."

"조금 전에 내가 판 물건 같은데."

"···아. 죄송해요. 물건이 워낙 많다 보니 저도 그만 착각을······."

아무래도 일전에 있었던 일의 충격이 크긴 컸는지, 아이라는 정신을 못 차리고 횡설수설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실수였으나 아무래도 물자의 양이 워낙 많은 데다가, 아이라 본인이 현재 심신 미약에 가까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직접 둘러보고 정하지."

"···아, 네네! 물론이죠."

예상했던 대로 무기류 중에서 크게 기대해볼 만한 물건들은 거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 내가 지닌 장비보다 뛰어난 장비들도 있긴 했으나, 그것들을 모래바람 상단을 통해서 구매하려면 영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아크제 물건을 뭐하러 웃돈을 주고 아크 바깥에서 구매한단 말인가?

'아마 안 보이는 곳에 전술용 핵탄두 몇 개 정도는 꿍쳐두고 있을 테지만··· 그건 지금 내가 살 수도 없고, 괜히 아는 척 해봤자 피곤해지겠지.'

플라즈마 병기나 반물질 병기 같은 흉악한 병기들이 개발된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핵무기는 위협적이다.

웨이브 때도 사용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누군가 아크를 노리고서 사용할 경우 최악의 사태가 터질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아크 머리 위에 핵탄두를 터트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위험한 병기긴 하니까.'

실제로 크로노스 연합 역시도 몇몇 전술용 핵탄두를 지니고 있지만, 감히 그걸 아크의 머리 위에 발사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아크의 대공 방어망을 생각한다면 성공률도 지극히 낮을뿐더러, 함부로 시도했다가 실패할 경우 어떤 보복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아크 그 자체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크로노스 연합이 아크를 날려버릴 리도 없지.'

뭐, 그건 그거고······.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천막 내부를 둘러보던 나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묘하게 낯이 익은 물건 하나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이건······.'

잘못 본 게 아니다.

이건 내가 알고 있는 그 물건이 맞았다.

말라비틀어지고, 바싹 타들어 있는 것처럼 검게 그을린 나뭇가지 하나.

얼핏 보면 전혀 특별할 게 없는 물건이다.

아니, 오히려 창고가 아니라 길바닥에 돌아다니는 게 더 어울리는 물건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벼락 맞은 가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와는 달리, 벼락 맞은 가지는 정말로 벼락의 힘을 품고 있는 물건이다.

내가 알기로는 서쪽의 패자 중 하나인 1급 네임드 마물 중 하나인 벼락의 바바루가 애지중지하는 보물로 알고 있는데······.

'이게 대체 왜 여기에?'

이해는 된다.

본래 플레이어가 모래바람 상단을 마주할 수 있는 건 스테이지가 중반까지 다다른 후 아크 바깥으로 출입할 수 있을 만한 힘을 손에 넣은 뒤였으니까.

그렇기에 예정보다도 훨씬 더 빨리 마주한 모래바람 상단이 예상외의 물건을 지니고 있어도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예상 못했는데.'

물론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라고 보는 게 옳았다.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역시 아이라인가.'

벼락 맞은 가지가 길바닥에 굴러다녀도 이상하지 않은 비주얼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있다는 건, 전부는 아니더라도 모래바람 상단 측에서도 이 물건이 가치를 어느 정도 인지했다는 뜻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대뜸 벼락 맞은 가지를 구매하겠다고 한다면, 모래바람 상단 측에서도 옳다구나 하고서 잔뜩 바가지를 씌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모래의 딸 앞에서 내가 이 물건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친절하게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거래의 기본은 나의 속내를 상대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었고, 이 물건이 가치가 있다는 걸 아이라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형편없군."

"···네?"

"전부 형편없는 것들뿐이야. 다른 것들은 없나?"

"아··· 자, 잠시만요! 저쪽으로 가시죠. 아직 물건은 많아요."

아이라는 모를 것이다.

그 형편없는 물건 중에서, 진짜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 모래의 딸, 아이라 (5) > 끝

본래였다면 없었어야 할 물건이 있다는 건 좋은 신호이긴 했지만, 그게 꼭 긍정적인 사실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없었어야 할 게 있다.

그 이야기인즉슨 본래였다면 있었어야 할 게 없다는 소리와도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아직 없나.'

눈에 불을 켜고 내가 찾던 물건들을 찾아 보았으나, 애석하게도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게 훨씬 더 많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래바람 상단을 찾아온 시기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만큼, 내가 알고 있는 모래바람 상단의 품목들과 지금의 품목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물건은 이게 전부인가?"

"네, 여기에 있는 게 전부예요. 아니면··· 혹시 뭐 다른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혹시나 해서 아이라에게 물어보았으나, 들려온 대답은 역시나였다.

물론 숨겨진 창고도 있긴 할 테지만, 이제 막 모래바람 상단과 거래를 튼 주제에 숨겨진 창고를 보여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애초에 숨겨진 창고에 물건을 보관했다는 건 모래바람 상단 측에서도 어느 정도 가치를 알고 있다는 뜻이니··· 지금 살 수도 없겠지.'

어차피 모래바람 상단의 비밀 창고에 접근하는 건 나중의 일이다.

지금은, 아직 모래바람 상단이 채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보물들을 챙겨야 할 때다.

"한번 다시 둘러보지."

"얼마든지요."

아이라의 눈에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비록 지금까지는 잘 속여먹었다지만, 그 본질은 모래의 딸이라 불리는 황금안의 소유자다.

어설프게 대할 수는 없었다.

'흐음.'

보통 가치 있는 물건은 그 자체로 가치와 빛을 발하기 마련이나, 모든 물건이 그런 건 아니다.

당장 벼락 맞은 가지 역시도 겉으로 보면 그냥 평범한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에 불과하지 않은가.

실제로 지금 모래바람 상단의 창고에서 마치 쓰레기처럼 대충 놓여 있기도 했고 말이다.

'급할 필요는 없지.'

나는 다시금 모래바람 상단의 창고를 처음부터 돌았다.

비록 찾던 것 중에서 없는 물건들이 많긴 했어도, 그렇다고 해서 내가 챙길만한 보물들이 전혀 없는 건 또 아니었다.

앞서 보았던 벼락 맞은 가지도 그렇고, 애초에 내가 모래바람 상단을 찾은 가장 큰 이유라고 볼 수 있는 '그것' 역시도 고이 보관되어 있었다.

아니, 고이 보관되어 있었다는 표현은 조금 틀릴지도 모른다.

그건 벼락 맞은 가지가 그랬듯이, 마치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주워오기라도 한처럼 대충 놓여 있었으니까.

'생명수의 씨앗.'

겉보기에는 평범한 씨앗처럼 생겼고, 실제로 무언가 영험한 기운이 흘러나온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평범해 보이는 씨앗.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내가 머나먼 길을 날아와서 모래바람 상단을 찾은 이유이자, 더불어서 영산 노아 내에서 대산림의 흙으로 식물을 키우는 게 가능한지 확인한 이유였다.

'일단 생명수의 씨앗만 확보해도, 모래바람 상단에 온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다고 봐도 무방해.'

물론 아쉬운 게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당장은 생명수의 씨앗과 벼락 맞은 가지 저 두 가지만 챙겨가도 어마어마한 이득이었다.

'그러면······ 남은 건 협상인가.'

사실, 지금부터가 진짜라고 봐도 좋았다.

내가 가져온 물건들의 가치가 적은 건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모래바람 상단에게 눈 뜨고 코 베이는 건 순식간이었으니까.

여기까지는 나름대로 잘 속여 먹었다고 할 수 있었으나, 상대는 모래바람 상단과 모래의 딸이다.

방심은 있을 수 없었다.

'우선, 모래바람 상단이 벼락 맞은 가지와 생명수의 씨앗에 대해서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가 중요해.'

일단, 벼락 맞은 가지와 생명수의 씨앗에 대해서 온전한 가치를 파악하고 있지 못한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가치 없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만약 정말로 모래바람 상단 측이 벼락 맞은 가지와 생명수의 씨앗을 겉모습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면 애초에 창고에 넣어두지도 않았을 테니까.

'벼락 맞은 가지와 생명수의 씨앗이 모래바람 상단의 창고에 있다는 건··· 어느 정도 특이한 물건들이라는 걸 인지했다는 거지.'

그러나, 그 진정한 용도나 가치까지는 짐작하고 있지 못하다.

그저 어느 정도 특이해 보이는 구석이 있기에 창고에 처박아 두었을 뿐.

"흠."

"마음에 드는 게 없으세요?"

"더 둘러보지."

나는 모래바람 상단의 창고를 몇 바퀴 정도 돌면서 이런저런 물건들을 하나씩 집었다.

어느 정도 가치가 있으면서도 당장 나에게도 쓸모 있는 물건들이었다.

"이야, 안목이 뛰어나시네요! 그게 어떤 물건이냐 하면, 무려 3급 비행종인 하늘 고래의 가죽으로 만든 외투예요. 모자도 달렸죠. 무게가 조금 나가긴 하지만, 보온 기능과 방수는 기본이고, 불에 타지도 않고, 거의 4레벨 수준의 방호력까지 가지고 있죠. 엄청나죠?"

나도 하늘 고래의 가죽은 썩어날 정도로 구할 수 있지만, 당장 그걸 이런 식으로 정교하게 재단하고 가공해서 이와 같은 물건은 만들지는 못한다.

물론 하려고 한다면야 얼마든지 할 수야 있겠으나··· 준비물도 많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시간 대비 효율이 영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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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고래 망토] [★★★★★(5성)]

3급 비행종, 하늘 고래의 가죽을 가공해서 만든 망토.

보온, 방수 기능이 있다.

굉장히 질기고 튼튼하나, 그만큼 무겁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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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검은색 판초 우의도 아크제 물건답게 썩 나쁘지는 않지만, 역시 무려 3급 비행종의 가죽을 가공한 물건보다는 못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크에도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를 가공한 물건들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아크에서 그것들의 가격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마수와 마물의 시체를 가공한 물건이야말로 아크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모래바람 상단의 주력 상품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흠. 나쁘지는 않군."

"역시! 그러면 계속 보시겠어요?"

내가 가치를 후려칠 물건은 어디까지나 벼락 맞은 가지와 생명수의 씨앗이다.

이렇게 대놓고 가치가 드러난 물건을 억지로 후려치려고 해봤자, 이미 그에 대한 가치를 알고 있는 모래의 딸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나는 모래바람 상단의 창고를 돌면서 이런저런 쓸모 있는 물건들을 챙겼다.

그리고 그중에 은근슬쩍 벼락 맞은 가지와 생명수의 씨앗을 끼워 넣었다.

이상할 건 없었다.

내가 고른 물건이 한두 가지도 아니었고, 저런 물건들이 한두 개 끼어 있다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어머."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챙겼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이라의 눈에 이채가 띄고 있었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활기를 찾은 아이라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이 어디인지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벼락 맞은 가지.

그리고, 생명수의 씨앗.

모래의 딸의 시선은 정확히 그 두 가지에 향해 있었다.

'역시.'

아무튼,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지.

"그걸 고르셨군요?"

아이라가 저 두 가지 물건의 진실된 가치를 알고 있기에 바라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저 두 가지 물건의 가치만 모르고 있었기에 바라보았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설사 가치를 모르더라도, 아니 가치가 없더라도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

누군가는 그것을 상재(商材)라고 부를 것이다.

'진짜 거래는 이제부터라고 봐야겠지.'

모래의 딸이 나를 보며 웃었다.

* * *

마수와 마물들이 들끓는 사막과 평야, 그리고 온갖 험지를 헤쳐나가며 장사를 업으로 삼은 이들이 있다.

모래바람 상단.

그리고, 지금의 모래바람 상단을 만드는 데 가장 크게 일조했다고 봐도 좋은 게 바로 모래의 딸이었다.

모래의 딸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 아주 특별한 눈이 있다.

바로 그 특별한 눈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역시.'

황금안에 비친 찬란한 황금빛의 후광이 말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물 중의 거물이라고.

그게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눈앞에 있는 폰이라는 자는, 모래바람 상단에 그야말로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줄 이다.

그렇기에 아이라는 폰을 믿었다.

그렇기에 그의 안목 역시도 믿었다.

협상에는 그거면 충분했다.

"역시, 정말로 안목이 뛰어나시네요. 그 물건들을 고를 줄은 몰랐는 걸요?"

"그래? 그러면 다른 걸 고르지."

"네?"

"지금 내가 진귀한 걸 살 수 있을 만한 형편이 아니거든."

이미 알고 있던 대로, 상대는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수에 두 번씩이나 당할 아이라가 아니었다.

"그러면 그러세요."

아이라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폰은, 저 두 가지 물건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걸.

딱히 황금안이 무언가를 보았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이건 단순히 장사 이야기였다.

"이게 무슨 씨앗인지 아나?"

그때, 폰의 말에 아이라는 잠시 고민했다.

아이라는 저 물건의 용도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폰의 안목에 판단을 맡긴 거였건만, 이토록 직접적으로 묻는다면 아이라도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한다면 그건 장사가 아니라 사기가 되기 때문이다.

"진귀한 물건이죠. 아주 비싸고."

"내 눈에는 딱히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그러면 폰님께서 보시는 이 씨앗의 가치가 무엇이죠?"

"나도 모른다."

"······."

그 대답에는 아이라조차 잠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딱히 지금 살 필요성은 느껴지지 않는군."

사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지금 살 필요가 없다는 그 말이, 지금까지 내내 여유를 지키던 아이라의 초조함을 순간적으로 건드렸다.

마치 어차피 내버려 두더라도 이 물건들이 팔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듯한 말이 아닌가?

'음.'

만약 다른 물품이었다면 아이라도 괜한 초조함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폰이 조금 전에 내려놓은 물건들이 아이라조차도 도대체 왜 상단 창고에 있는지 의아할 정도의 애물단지라는 점이었다.

'분명히 무언가 특별해 보이기는 하는데······.'

말라비틀어진 가지와, 도통 무엇인지 모를 씨앗.

물론 씨앗의 경우에는 땅에 심어 보아도 되겠으나, 그럴 경우에는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저걸 심고 자랄 때까지 키우자니, 모래바람 상단처럼 유목 생활을 하는 이들이 언제 씨앗을 심고, 언제 싹을 보고 결과를 기다린단 말인가?

저 씨앗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문제지만, 애초에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씨앗을 기를 만한 여유가 있는 곳은 몇 곳이 채 되지 않는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였다.

물론 아이라도 알고 있다.

진짜배기 보물들은, 바로 저런 물건 중에서 나온다는 걸.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보물들의 진가를 알아볼 안목은 모래바람 상단은 물론이고 황금안을 지닌 아이라에게조차도 없었다.

그녀가 보는 황금의 길은, 숨겨진 보물의 가치를 알아보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아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이대로 협상을 이어 나간다면, 이번 거래에서 적지 않은 이득을 볼 수 있으리라는 걸.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득을 좇아서는 안 된다는 상인의 기본 중의 기본을 떠올린 것이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생각에 잠겨 있던 아이라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편해졌다.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이라는 장차 폰과의 거래 관계가 어떠한 식으로 발전할지 이미 눈으로 '보고' 있었다.

황금안에 비친 찬란하고도 끝이 보이지 않는 황금의 길이, 지금 그녀의 눈에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고르신 물건들. 그것으로 이번 거래는 마치도록 하죠."

갑작스럽게 흥정을 멈춘 아이라의 말에 폰이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그 폰조차 놀랄 정도로 아이라의 결단이 갑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일종의 뇌물이라고 봐도 좋고요."

"과연."

단지 그 말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폰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구매한 물건들을 챙겨서 뒤돌아섰다.

"바로 가시는 건가요?"

"그래. 굳이 더 있을 필요 있나?"

"그렇진 않죠. 살펴 가세요."

인사는 짧았다.

특별히 정다운 인사를 나눌 사이도 아니었으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거래가 끝났다.

분명히 모래바람 상단은 이번 거래에서 큰 이득을 보았다.

막대한 양의 총기와 총알, 그리고 온갖 종류의 물자를 받은 대가로 몇몇 종류의 마수와 마물들의 가공품과 몇몇 물자. 그리고 도통 쓸모없는 애물단지 두어 개를 넘겨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터.

그 사실이 아이라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결과로 다가왔다.

'오히려 자기가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서로가 만족하는 거래.

이거야말로 진정한 상인이 추구해야 할 길이 아니던가?

'가치도 못 알아보는 보석은 길가의 돌멩이만도 못해.'

그렇다면, 차라리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이에게 적당히 넘기는 것도 어찌 보면 순리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그 상대가 앞으로 모래바람 상단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쌓아나갈 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폰이라······.'

미련 없이 떠나가는 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이라는 가볍게 웃었다.

아무래도, 오늘 그녀가 손에 넣은 건 단순한 이득뿐이 아닌 듯했다.

< 모래의 딸, 아이라 (6) > 끝

모래바람 상단과의 거래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나는 캠프를 나서서 호루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때, 에스더가 말했다.

[이상하다······.]

"뭐가?"

[저 돈 귀신이 이렇게 쉽게 물러날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난 또 뭐라고."

[뭔데요?]

"별 거 아니다."

에스더가 가자미눈을 떴다.

뜸 들이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러니까 그 별 거 아닌 게 대체 뭐냐고요.]

"이득을 추구했을 뿐이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상인이 추구해야 할 건, 단기적인 이득뿐만이 아니니까."

그제야 에스더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이 입을 닫았다.

짧은 침묵 속에서 나는 곧이어서 호루스의 등 위에 짐을 옮기고, 영산 노아로 돌아가기 위해서 호루스의 등에 올랐다.

"가자."

[키헷!]

호루스가 거칠게 날갯짓을 시작했다.

모래바람 상단의 캠프에서 제법 거리가 있었으니, 설사 호루스를 보더라도 이상하게 여길 가능성은 없었다.

애초에 이 세계에서 비행형 마수와 마물들이 하늘에서 보이는 게 드문 일도 아니었고 말이다.

시원한 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늘 느끼지만, 호루스를 타고 하늘을 누비는 경험은 늘 새로운 기분을 가져다주었다.

[조금 전까지 토악질하던 인간이 상쾌한 척하기는······.]

에스더가 투덜거리기 무섭게 왠지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육체라는 녀석은 생각보다 정신을 잘 따라주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해가 안 돼요.]

"뭐가?"

[아까 그 계집애요.]

"별로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을 텐데."

[아니, 그거 말고요.]

에스더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마치 엄청난 불만이 있다는 듯이.

[상인이 추구해야 할 게 장기적인 이득도 포함이라면, 그런데 왜 우리한테는 그렇게 등을 못 쳐먹어서 안달이 났던 건데요? 저는 그게 영 이해가 안 돼요.]

"뻔한 걸 묻는군."

나는 오히려 에스더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더 충격이었다.

[뭔데요?]

"그야, 너희가 장기적으로 교류할 만한 놈들이 아니라는 거지."

[···지금 우리 단 욕한 거예요?]

이제는 그림자단 소속도 아닌 주제에 발끈하기는······.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다."

[그게 욕한 거지. 나중에 단장 만나면 다 이를 거야.]

"······."

아니, 그건 좀······.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변절자 룩도 두들겨 패놔서 가뜩이나 밉보였을 텐데······.

'그러고 보니, 그 이후에 그림자단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없네.'

물론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그림자단에게 전한 경고 아닌 경고가 제대로 먹혔다고 볼 수도 있었으나, 일이 그렇게 쉬웠다면 내가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뭐, 사정이 있겠지.'

나는 이 시기의 그림자단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정확히 모른다.

하물며 에스더까지 잃은 그림자단이라면,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굉장히 컸다.

괜히 그림자단에게 지레 겁먹고 있는 것보다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게 낫다는 소리다.

[키엑!]

어느덧 지평선 저편에서 영산 노아의 모습이 보였다.

광활한 활화산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아득한 기분마저 느끼게 했으나, 이제 나에게 있어서는 집처럼 편안해진 광경이었다.

이제 목적지에도 거의 도착했겠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올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호루스의 등 위가 가벼워졌음에도 불구하고 허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 이번에 모래바람 상단을 통해서 입수한 물건들의 면면들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또, 또 그렇게 웃는다. 그렇게 웃지 말라니까요? 여기 팔 봐봐. 닭살 돋은 거.]

"···신경 꺼라."

애초에 귀신이 닭살은 무슨 또 닭살인가.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호루스가 속도를 줄이며 하강을 시작했다.

어느덧 은신처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출발할 때와는 달리 등 위가 가벼워져서인지는 몰라도 날갯짓 역시도 한결 가벼웠다.

[키엣!]

마침내 은신처에 무사히 착륙한 후, 내가 눈짓하자 호루스의 등 뒤에서 돋아난 뼈 촉수들이 제 등에 있는 물건들을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뼈 기생체 마물은 이런 부분에서는 참 편했다.

'뭐, 단지 이것 말고도 장점은 많지만.'

괜히 아크에서도 스컬 나이트나 뼈 장비를 배척하면서도 알음알음 활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단순히 윤리적이나 생리적 거부감 같은 이유로 배제하기에는, 그 효율성이 압도적이었으니까.

[확실히 갈 때보다 주머니가 많이 가벼워지긴 했네요. 그런데 다른 것들은 그렇다고 치고, 대체 저 나뭇가지는 어디다 쓰는 거예요? 분명히 뭔가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글쎄."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도 모르고서 주워온 거에요? 그 거금을 주고?]

물론 정말로 내가 벼락 맞은 가지의 용도를 모른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단지, 본래 내가 알고 있던 용도보다 더 잘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지.

'벼락 맞은 가지는 당장 쓰기에는 조금 애매하긴 하니까.'

본래의 벼락 맞은 가지는 무기나 장비를 만들 때 재료로 들어간다.

그렇기에 이걸 본격적으로 활용하려면 무기를 만들기 위한 다른 재료와 수수료로 사용할 크레딧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중 무엇도 없었고, 자연스럽게 벼락 맞은 가지를 사용하는 건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기깃!]

[키이잇.]

"안 돼. 이건 먹을 거 아니야."

야누스와 호루스에게 먹여볼까도 생각했으나, 이게 과연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아니, 먹일 때 먹이더라도 일단 장비를 만든 후에 남은 걸 먹이는 게 효율상 좋았다.

'일단 이건 미뤄두고······.'

어차피 당장 벼락 맞은 가지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게 어디로 도망가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보다는, 역시 이것부터 신경 써야겠지.'

나는 내가 이번에 모래바람 상단을 찾았던 진정한 목표물을 바라보았다.

생명수의 씨앗.

말 그대로 생명수를 키워낼 수 있는 씨앗이, 마침내 내 손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있었네. 무슨 씨앗인지 알아요?]

"생명수의 씨앗이다."

[···생명수? 그게 뭐예요?]

에스더조차도 그 존재를 모를 정도로 생명수의 씨앗은 드문 물건이다.

아니, 애초에 씨앗 자체가 잘 나오지 않는 물건이었으니 이 세상에도 몇 없다고 봐야 했다.

'이게 어떤 경위로 모래바람 상단까지 굴러가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상관 없지.'

애초에 모래바람 상단의 창고는 없는 것 빼고는 거의 모든 물건을 한 번씩 거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령 그게 생명수의 씨앗이라고 해도 한 번쯤 거친다 해서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는 이야기다.

[심으려고요?]

"그래."

[그런데 제가 농사 같은 거에 박학다식한 건 아닌데··· 정말로 여기에 심으려고요? 여기에?]

에스더가 의문을 가질 만도 했다.

이곳은 영산 노아.

단순히 영기가 흐르는 수준이 아닌, 무려 현재로 열렬하게 활동하고 있는 활화산이다.

하물며 노아의 토양은 사실 토양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거의 없을뿐더러, 설령 있다 하더라도 생명을 키워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 준비해둔 게 바로 대산림의 흙이었다.

대산림은 활화산인 영산 노아와 인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영역의 숲 지대를 만들어 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어도, 그 토양은 분명히 영산 노아 내에서도 생명을 품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즉, 생명수의 씨앗 역시도 대산림의 흙을 이용한다면 싹을 틔어낼 수 있다는 소리다.

바로 이곳 영산 노아에서.

'굳이 망설일 필요는 없겠지.'

나는 곧장 생명수의 씨앗을 꺼낸 뒤, 내가 미리 대산림의 흙으로 만들어 두었던 텃밭 한가운데로 향했다.

[바로 심으려고요? 뭐 준비 같은 거 안 해도 돼요?]

"다 해놨다."

어차피 생명수의 씨앗은 원체 생명력이 강해서, 웬만한 곳에 심어도 잘 자란다.

단지, 기존의 노아의 토양 같은 경우에는 그 웬만한 곳에 해당하지 않았던 게 문제지.

나는 동굴 안에서 야삽을 꺼내서 그대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대충 심어도 잘 자라기야 하겠지만, 모름지기 나무란 뿌리가 깊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그렇게 모든 작업을 마치자, 옆에서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에스더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뭐 별 거 없네요?]

"뭐가."

[아니··· 뭐 되게 특별한 씨앗인 것처럼 굴길래, 심자 마자 무슨 무지개 빛 같은 거 나오고 그럴 줄 알았죠.]

"그런 나무가 어딨나."

[···이상하다. 왜 갑자기 상식적인 척을 하지? 그 누구보다도 상식이랑 거리가 있으신 분이?]

"시끄럽다."

요즘 들어서 점점 더 에스더의 말이 많아지는 걸 보니, 조만간 관자놀이에 실험탄 GHOST-157 한발을 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비록 간신히 회복해 가는 에스더의 힘이 많이 줄어들겠지만, 이렇게 온종일 쫑알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 순간.

[어? 어? 저기! 저기!]

에스더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조금 전에 땅에 심었던 생명수의 씨앗에서 어느새 싹이 자라나서 흙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것이다.

내가 심어놓은 깊이가 절대 얕지 않다는 걸 생각한다면, 명백히 상식을 벗어나는 성장 속도였다.

[생명수가 싹을 틔었습니다!]

[일부 영역의 토양이 정화됩니다.]

[생명수의 영역이 전개됩니다.]

고작 싹을 조금 틔었을 뿐인데, 벌써 생명수의 진가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토양 정화와 영역 전개.

생명수가 지닌 무수한 능력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능력들이었다.

[이게 대체······.]

"그냥 조금 빨리자란 것뿐이잖나."

[아니 대체 상식이 어떻게 되먹었길래 저게 조금 빨리 자란 수준이에요? 하룻 강아지가 갑자기 다음 날 범이 되어 있는 수준인데?]

"그건 종부터 틀리다."

[지금 이것도 만만치 않거든요?!]

에스더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물론 이해는 됐다.

그 정도로 생명수의 씨앗이 자라나는 속도는 명백히 상식을 벗어나고 있었으니까.

'이 속도라면··· 나무의 형태를 갖추는 데 대충 일주일 정도면 되겠군.'

물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자라겠지만, 어디까지나 나무의 형태를 갖추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 정도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생명수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생명수가 지닌 힘 역시도 강해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러면, 해볼까.'

텃밭 한가운데에 자라난 작은 새싹을 보며, 나는 부지런히 온천수의 물을 퍼 날랐다.

생명수의 씨앗, 아니 생명수는 어마어마한 성장 속도를 자랑하는 만큼, 먹는 것도 엄청났다.

물론 생명수의 강인한 생명력을 생각한다면 굳이 따로 물을 주지 않아도 알아서 뿌리를 여기저기 뻗을 테지만, 그래도 직접 물을 주면 그만큼 더 빨리 자라는 건 사실이었다.

'어차피 조금 내버려 두면 알아서 뿌리를 온천수가 있는 곳까지 향할 테니··· 당분간만 이렇게 물을 주면 되겠지.'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내가 수통에 물을 옮기려고 온천에 왕복할 때마다, 텃밭에 돋아난 새싹이 눈에 띌 정도로 점점 길어졌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성장 속도였다.

그리고,

내가 생명수에 물 주기를 얼마나 지속했을까.

[생명수가 잎을 틔웠습니다!]

[생명수 주변에 있을 시, 체력 및 피로 회복 속도가 증가합니다.]

생명수의 첫 번째 잎이 피어나기 무섭게, 지쳤던 몸에 활력이 돋기 시작했다.

< 생명수 > 끝

사실, 이토록 많은 효과와 효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수의 씨앗은 본래 아크 안에서 지내는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계륵 같은 물건이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많고 많은 생명수의 능력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주변의 토양을 정화하는 능력과 마수와 마물들의 접근을 막는 영역이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효과들이 있으나, 가장 강력한 능력은 그 두 가지라고 보는 게 옳다.

하지만 저렇게 뛰어난 생명수도, 아크 안에서라면 그 효과가 빛을 바랄 수밖에 없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크의 토양은 원래 엄청나게 비옥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인공 비료를 통해서 생산량이 나쁘지는 않다.

더군다나 생명수가 만들어 내는 영역을 통한 마수와 마물들의 침입 방지도, 아크 내에서 생명수를 기른다면 사실상 의미가 없어진다.

아크 안에서 사는 입장에서 볼 때, 굳이 고생을 하며 생명수의 씨앗을 구한 뒤에 아크 안에 심을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생명수에게는 그 외에도 주변에 있는 생명체들의 활기를 불어넣는 힘 등 여러 능력이 있었으니 심어서 나쁠 건 없었으나, 어디까지나 효율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거기다가 아크 안에서 생명수를 심으려면 자기 땅도 있어야 하지.'

토양이 귀한 아크에서 자기 땅을 소유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한다면, 난이도부터가 보통이 아닌 셈이다.

'하지만 아크 바깥이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지.'

영산 노아에는 마수와 마물들이 웬만해서는 접근하지 않는다.

이곳에는 마수와 마물들의 본능을 자극하는 에테르 파동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절대적인 보호 영역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일전에도 그랬듯이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마수와 마물들은 영산 노아에 찾아올 수 있다.

영산 노아가 흘려내는 에테르가 마수와 마물을 불편하게 만들기는 해도, 어떤 절대적인 침입 불가를 일으키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반쪽짜리 안전지대.

아니, 사실상 안전지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게 바로 현재 내가 기거하고 있는 영산 노아의 실체였다.

'지금까지 마수와 마물들에게 제대로 습격을 당하지 않은 게 용하지.'

아니, 만약 은신처를 조금만 더 어설픈 장소에 잡았다면 한밤중에 마수와 마물들에게 기습을 당하는 일도 빈번했으리라.

괜히 내가 낑낑대면서 노아의 중턱까지 올라와서 자리를 잡은 게 아니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여기에 생명수의 영역이 더해진다면 비록 그 넓이는 넓지 않더라도 진정한 의미로 안전지대라고 부를 만한 지대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대략 4급 이하의 마수나 마물 정도까지는 거의 완벽하게 이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 있을 터.

말이 4급이지, 보통 3급 이상의 마수와 마물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데다가 그 개체수도 상당히 적다는 걸 생각한다면 안전지대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생명수의 효과는 그뿐만이 아니다.'

사람의 활기를 북돋아 주는 것과 더불어서, 지금도 내 주변을 맴돌고 있는 악의를 지닌 에테르의 영향 역시도 줄여준다.

즉, 한밤중에 지긋지긋하게 나를 괴롭히던 환청과 불면증도 조금이나마 완화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속 울렁거려.]

그래, 예를 들면 저런 거 말이다.

'이 정도면 일단 기틀은 잡았다고 볼 수 있겠지.'

비록 생명수가 완전히 자라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 정도만으로 벌써 주변의 분위기가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공기부터 달라.'

더군다나, 생명수를 심기 전에 미리 시험용으로 심어두었던 작물들 역시도 싹을 틔우고 자라났다.

보통 생명수 같은 거대한 생명 덩어리가 자라게 되면 주변의 양분을 모조리 빨아들이게 될 것 같지만, 생명수의 힘이 본래였다면 독이 되었어야 할 주변의 오염된 토양을 정화한 덕분이었다.

과연 생명수다웠다.

'그러면······.'

나는 저번에 병참 장교 게드윈과 이번에 모래바람 상단을 통해서 얻은 물자들을 정리했다.

당분간 바쁠 것 같았다.

* * *

"왔나?"

바놀 중령은 숙취로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붙잡은 채로 보고를 위해서 찾아온 이모샤 중위를 맞이했다.

이런 흐트러진 모습이 이모샤 중위에게는 더없이 낯설었기에, 그녀는 내심 놀랐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전선의 마수 및 마물 시체 소거 작업이 거의 완료되었으며, 성벽 복구 작업 역시도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투로 손실된 사상자 37명에 대한 인원 보충 역시도 끝났습니다."

"수고했네."

37명.

이모샤 중위가 이끌고 있는 Red-17 게이트 소속 병사 중에서만 무려 37명의 희생자가 나왔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모샤 중위 역시도 알고 있었다.

아크가 멸망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이번 전쟁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37명이라는 사상자는 오히려 기적에 가깝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모샤 중위는 그들의 죽음을 더없이 무겁게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모샤 중위가 그들의 죽음에 짓눌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아크의 병사로서 죽었고, 그건 그들의 희생을 모욕하는 일이었으니까.

"얼굴이 보기 좋군."

"예?"

"아니. 그냥 못 들은 거로 하지."

"아··· 예."

그 말마따나 이모샤 중위의 상태는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좋아 보였다.

오랜만에 잠을 푹 잔 덕분이었다.

"자네도 이제 책임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됐나 보군. 좋은 일이야."

바놀 중령은 그것만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런 얘기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니네. 크로노스 잔당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크로노스 잔당이 말입니까?"

이모샤 중위도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으나, 바놀 중령을 통해서 이 말이 나온다는 건 그 상황이 정말로 심각해졌다는 뜻이었다.

"이상하지 않나?"

"무엇이 말입니까?"

"아크는 늘 지독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고, 크로노스 잔당들은 고향을 잃었네."

"······."

"얼핏 보면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이 두 집단이 이상할 정도로 서로를 견제하고, 주시하고 있네. 그러니 이상할 수밖에."

그 말대로였다.

비록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으나, 이모샤 중위 역시도 아크와 크로노스 잔당의 관계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크는 늘 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린다.

크로노스 잔당에게는 지붕이 필요하다.

거의 완벽한 이해관계가 성립함에도 불구하고, 아크 측에서 크로노스 잔당을 받아들이기는커녕 크로노스 측에서 아크로 접촉을 했다는 이야기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옛 크로노스 지역에서 피난민들이 몇몇 오긴 했어도, 그건 말 그대로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모샤 중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러나, 함부로 그 의문을 입 밖으로 토해내기에는 사안의 중대함이 너무나도 거대했기에 함부로 말할 수 없었던 일.

그것이 지금 바놀 중령의 입을 통해서 토해지고 있었다.

"답은 간단하네."

"···그게 뭐죠?"

"그들이, 그리고 아크가 그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만약 둘 중 하나라도 그걸 원했다면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졌겠지. 하지만 아크와 크로노스, 그 둘 모두 그걸 원하지 않아. 그러니 서로의 관계가 지금까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어째서입니까? 아크야 그렇다고 쳐도, 크로노스 측에서는······."

비록 아크의 인력난이 심하다고는 해도, 터전을 잃은 크로노스와 비교할 바는 아니다.

그런데 아크에서 일방적으로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 크로노스 측에서도 그걸 원하지 않는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크에서 포착할 정도의 세력이라면 절대로 적지 않은 세력을 유지 중일 텐데, 차라리 아크에 의탁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자네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하네. 모두가 그런 반응을 보이겠지. 하지만 때로는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도 있는 법일세."

바놀 중령이 숙취 해소용 꿀물을 한잔 들이켰다.

"자네는 크로노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기본적인 것들은 대충 알고 있습니다. 직접 가본 적도 몇 번 있고요."

"그렇겠지. 그렇다면 자네가 보기에 크로노스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었던 것 같나?"

"그건······."

이모샤 중위의 입술이 닫혔다.

어떻게 크로노스 같은 거대 도시의 문제점을 딱 잘라서 이것이다, 하고 답할 수 있겠는가?

"크로노스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네. 정말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말이지. 그리고 사람들이 그 정도로 모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계급화가 이루어지고, 차별과 갈등이 일어나지. 이건 아크 역시도 예외가 아닐세."

바놀 중령이 계속해서 말했다.

"아크는 라인을 나눴네. 영산 노아를 기준으로,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을 기준으로 삼았지. 그렇다면 크로노스는 어떠했을 것 같나?"

바놀 중령이 코웃음 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네. 그냥 서로 섞여 살게 했지. 그래서 일어난 현상이 무엇인지 아나?"

"······."

"계급을 세우고, 차별하고, 노예로 부렸지. 그중에서도 가장 쉬운 표적이 된 건 바로 크로노스로 새로이 들어온 이민자들이었어. 크로노스인들에게 있어서 이민자란 곧 노예와 동의어가 되었지."

"······."

"그들은 이민자가 받는 차별과 멸시에 대해서 몸서리치게 잘 알고 있네. 다름 아닌 그들이 해왔던 것들이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이민자란, 곧 노예였으니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응?"

설마하니 지금까지 침묵하던 이모샤 중위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기에, 바놀 중령은 잠시 뜬 눈으로 이모샤 중위를 바라보았다.

"아······ 죄, 죄송합니다."

"···아니, 아닐세. 자네 말이 맞아.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딱 그 말이 맞지. 하지만 크로노스 측에서 그렇다고 해서 아크가 옳다는 건 아니네. 설령 그들이 아크에 몸을 의탁하려고 했어도, 아크가 그들을 받아들였을지는 솔직히 나도 의문이니까."

"예?"

이번에는 이모샤 중위가 당황했다.

"그건 어째서입니까?"

"자네도 알겠지만 아크에서는, 정확히는 레드 라인에서는 에테르 반응이 보이는 외부인의 게이트 통과를 불허하고 있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이모샤 중위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통과시키지 않은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사내의 이름 역시도 말이다.

"······예."

"그렇다면 크로노스에 그러한 에테르 반응을 띤 인간들이 몇이나 있겠는가?"

바놀 중령이 덧붙였다.

"그들을 선별해서 통과를 막으면, 다른 크로노스 인들이 과연 그것을 용납할까?"

"용납하지··· 않겠죠."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이마저도 표면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지."

"그게··· 무엇입니까?"

"아크는 지금 각 라인으로 분열되어 있네. 라인을 가르는 별 의미 없는 구분선은, 현재 아크에서 생각보다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지. 그런 상황에서 전혀 다른 문화와 생각을 지닌 크로노스의 새로운 이민자들이 대거로 들이닥친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바놀 중령이 담담히 말했다.

"여러 가지 과정이 있겠지만, 종국에는 아크가 분열될 걸세. 절반, 혹은 그 이상으로."

"그런······ 너무 지나칩니다."

"자네 말대로 그냥 억측일 수도 있겠지. 나도 그렇기를 바라고.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 상황에서 아크의 입장에서 품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크로노스의 잔당들은 위협요소일 뿐이네. 그래서··· 절대로 그들의 행적을 놓쳐서는 안 되지."

바놀 중령의 눈을 본 이모샤 중위는 지금까지 바놀 중령이 이러한 이야기를 한 게, 어떠한 목적이 있어서임을 알아차렸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팀을 꾸리게."

"···어떤 팀을 말씀이십니까?"

"크로노스 잔당에 대해서 조사할 조사대가 필요하네.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얼 하고 있는지."

"하지만 곧 웨이브가······."

"오히려 그렇기 때문일세."

"예?"

"현재 크로노스 잔당들의 위치는 아크에서 파악할 수 없네. 하지만, 웨이브가 일어나게 되면 어떤 형태로든지 움직이게 되겠지. 몰려드는 마수 군단에 깔려 죽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 정도 인원이 움직이게 되면 필시 움직임이 포착될 수밖에 없겠지."

이 세계의 가장 중요한 생존 수칙 중 하나가 바로 웨이브 때 함부로 마수 및 마물 군단에게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곧 웨이브가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아크 바깥으로 나가서 크로노스 잔당들에 대해서 조사를 하라고?

말도 안 되는 임무였다.

"불가능합니다. 애꿎은 병사들만 죽게 될 겁니다. 차라리 라인 특임대를 보내시는 게······."

위험한 임무지만, 아크 바깥을 밥 먹듯이 드나드는 특임대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임무일 터.

임무의 중요도를 고려한다면 오히려 그쪽이 훨씬 더 타당해 보였다.

적어도, 이모샤 중위가 보기에는.

"그들에게는 다른 임무가 있네. 아크의 안보와 관련된 훨씬 더 중요한 임무지."

바놀 중령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이모샤 중위라고 해도 레드 라인의 특임대가 어떤 임무를 맡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확실한 건, 지금 바놀 중령은 지금의 임무에 특임대를 보낼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걱정하지 말게. 마침 아크 바깥에서 살아온 전문가가 한 명 있지 않나? 그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네."

이모샤 중위는 지금 바놀 중령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칼 마커스를 불러오게."

< 생명수 (2) > 끝

하루가 지났다.

생명수를 심고 나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하루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침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상쾌했다.

[생명수의 영역에서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상처와 근육이 빠르게 회복되고, 몸에 활력이 깃듭니다!]

[근력이 증가합니다.]

[17 -> 18]

[체력이 증가합니다.]

[20 -> 21]

[에테르 감응력이 증가합니다.]

[28 -> 29]

아직 제대로 된 나무도 아닌 데 벌써 이런 효과라······.

'엄청나긴 하군.'

더군다나, 몸에서 느껴지는 활력은 단순히 수치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모트교로 달려가서 드잡이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인데.'

가만히 있는 모트교로서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으나, 그놈들은 만악의 원인이었으니 조금 맞아도 싸다.

'그건 그렇고······.'

생명수 덕분일까.

한때 동굴과 그 안에 있는 천막, 그리고 온천만 있었던 은신처가 점점 그럴듯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의외로 온천부터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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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수의 온천] [★★★★★(5성)]

생명수의 뿌리와 맞닿은 온천.

생명수의 힘이 깃들어 있다.

상처 및 피로 회복에 탁월한 효과가 있으며, 피부 미용에도 좋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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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좋은데, 피부 미용은 또 뭐야?'

아무래도 온천수 근처에 생명수를 길러본 적이 없다 보니, 이런 해괴한 효과는 또 처음 봤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시험 삼아서 슬쩍 온천수를 마셔 보니,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온천수를 별다른 정수 과정 없이 그대로 식수로 사용해 왔고, 그렇기에 차이점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건··· 포션이다. 효과는 약해도 확실해. 포션과 비슷한 느낌이야.'

포션(Potion) 기술은 아크를 뛰어넘는 바이오 공학의 기술을 지녔던 헤스본에서도 만들어 내지 못했던 기술이다.

몸에 바르면 상처가 낫고, 마시면 병이 낫는다니··· 그야말로 터무니없지 않은가?

그러나, 인간은 늘 답을 찾는 법.

사람이 벌레처럼 죽어 나가는 이 세상에서 생존률에 크나큰 영향을 끼칠 게 분명한 포션 기술이 영원히 만들어지지 않는 건 아니다.

스테이지 중반부에 진행되는 실크로드 서브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게 되면, 비로소 아크에 마수와 마물들의 사체 수급이 원할해진다.

그걸 토대로 일정 시간이 흐르면, 비로소 아크에서 포션 기술을 개발하게 된다.

비록 생략만 부분이 많기는 해도 일단 대략적인 흐름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생명수의 뿌리와 닿은 온천수는 마치 포션처럼 사용할 수 있다.'

즉, 수통에 담아두고 다니면서 마시거나 몸에 바르면 일종의 포션처럼 활용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포션이라니··· 터무니없긴 하군.'

나조차도 생명수에 이런 힘이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일전에도 말했듯이 생명수를 기르는 건 계륵 같은 일이었고, 그렇기에 굳이 그 존재를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키웠던 적은 몇 번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생명수와 온천이 만났을 때 이런 효과가 생길 줄이야······.

'더군다나, 생명수가 자라면 자랄수록 그 효과 역시도 커진다.'

비록 아직 생명수가 줄기 수준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온천수의 효과 역시도 포션급에는 못 미치는 게 사실이었으나, 그건 시간이 충분히 해결해줄 수 있는 사안이다.

단순히 아크뿐만이 아니라, 모래바람 상단에게 있어서도 이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가치를 가질 터였다.

나로서는 그냥 물만 퍼다 파는 것뿐인데도,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어설프게 물량을 뿌리면 나를 노리는 자들이 생겨날 테니 조심해야겠지.'

만약 내가 이 생명수의 물을 여기저기 대량으로 팔아 치우면서 이득을 취하면, 반드시 나를 주목하는 이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생명수의 물에 대한 출처를 알고자 하는 이들 역시도 생길 터.

'뭐, 어차피 당장 긴급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하니까.'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생명수의 물, 그러니까 포션의 효능은 점점 더 상승할 것이다.

나로서는 급한 이유가 없다는 소리다.

'일단 은신처는 대충 됐고··· 슬슬 아크로 가볼까.'

곧 웨이브가 찾아올 터.

그렇다면 나도 그에 대한 준비를 할 때가 됐다.

바놀 중령과 협상도 끝났겠다, 크레딧을 벌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크로 가려고요?]

"그래."

[휴······.]

"왜 그러지?"

[···몰라서 물어요? 여기에 있으면 속 메스껍단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그런 소리를 하기는 했던 것 같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집 잘 보고 있어, 뼈순아. 목 마르면 저것 좀 마시고.]

[키헷!]

"아마 마물한테는 독일 거다."

[앗, 실수.]

[케헥!]

*

"조사팀이라고?"

"예."

내가 레드 라인 게이트에 들어서기 무섭게 나를 찾아온 건 다름 아닌 이모샤 중위였다.

이모샤 중위의 용건은 간단했다.

지금 당장 크로노스 잔당에 대한 조사팀의 용병이자 전술 디렉터로서 참여해달라는 것.

"바놀 중령님께서 이는 아크의 안보와 매우 깊은 관여가 되어 있는 문제니, 반드시 계약을 이행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 늙은 너구리가······.

물론 내가 아크의 용병으로서 계약한 건 어디까지나 웨이브 때 아크를 지킨다는 거였으니, 그냥 무시해도 상관은 없는 게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무시하고 넘기기에는 신경 쓰이는 게 있는 것도 사실.

'그런데··· 이 시기에 원래 바놀 중령이 이런 임무를 맡겼던가?'

아니, 이제 그건 별로 의미 없을 지도 모른다.

이미 다중 웨이브가 일어난 시점에서 나의 개입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슬슬 크로노스가 연합을 구성할 때가 되긴 했군.'

크로노스를 비롯한 멸망한 도시들의 잔여 세력들이 만들어 낸 연합.

바로, 크로노스 연합이 말이다.

"조사팀은 어떻게 구성할 생각이지?"

"죄송하지만, 저는 담당 게이트 수비를 지휘해야 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믿을 만한 병사들을 따로 선별해 두었습니다."

"병사들?"

"예."

"인솔자는 따로 차출하지 않는 건가?"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인즉슨, 사실상 내가 인솔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믿을 만한 병사들입니다."

"그래 봐야─"

말을 잇던 나는 그대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모샤 중위의 뒤쪽에서 더없이 낯익은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알고 있던 것과는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음에도 내가 그들을 한 눈에 알아본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저들의 모습 또한, 나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편린 중 하나였으니까.

힐데가르트.

아이리스.

드미트리.

그리고······.

'······칼라킨.'

많고 많은 아크의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에서도 주인공에 가장 가까운 이.

아니, 사실상 내가 생각하는 더 디펜스의 주인공이 이 자리에 나타났다.

'듣기로는 지금까지 칼라킨은 오렌지 라인에 파견을 가 있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칼라킨은 아크 내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병사 중 하나다.

그런 칼라킨까지 이번 임무에 차출했다는 건, 바놀 중령이 이번 일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칼라킨까지 있다면··· 엄청난 독박까지는 아니겠군.'

그렇게 내가 저들을 살피고 있을 때, 저들 역시도 나를 향해서 맹렬한 시선을 보내왔다.

"아, 안녕하세요."

가장 먼저 다가온 건 이미 안면이 있었던 사람 중 한 명인 힐데가르트였다.

"오랜만이군."

"잘 지내셨어요?"

"그래."

"아, 이쪽은 아이리스와 칼라킨이에요. 초면이시죠?"

그와 함께 옆에 있던 아이리스와 칼라킨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힐데가르트에게 얘기 들었습니다. 저번 임무에서 크게 활약하셨다죠?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아이리스와의 짤막한 인사가 끝난 후, 칼라킨이 나를 바라보았다.

칼라킨에게는 힐데가르트나 아이라와 같은 특별한 눈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라킨이 쏘아내는 시선은 마치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칼라킨입니다."

칼라킨이 자연스럽게 악수를 청했다.

피할 이유는 없었다.

"칼 마커스다."

손에서 느껴지는 힘이 묵직하다.

만약 내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기가 눌렸을 법도 했지만, 애석하게도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아."

칼라킨의 눈에 잠시 동요가 일어났다.

가해진 압력이 제법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힘을 너무나도 여유롭게 받아냈기 때문이었다.

"···실례했습니다. 버릇인지라."

"이해한다."

과연 오렌지 라인에 파견까지 갈 정도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칼라킨답게 근력 수치가 상당한 듯했지만, 영산 노아에서 지내오며 강화 혈청을 비롯한 온갖 도핑으로 무장한 나에게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이모샤 중위가 끼어들었다.

"자, 그러면 인사는 대충 나눈 것 같으니, 바로 출발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이번 임무를 받아들인다고 안 한 것 같은데?"

"···부탁드립니다."

이런······.

만약 상대가 바놀 중령이었다면 더 물고 늘어지면서 뭐라도 더 얻으려 했겠지만, 이모샤 중위에게 그래봤자 서로의 감정만 상할 뿐이었다.

"대가는 확실하게 치러야 할 거다."

"물론입니다."

"그러면 바로 출발해주십시오."

"바로 말인가?"

"예.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하니까요."

이모샤 중위가 말하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의미가 어떤 건지 내가 모를리가 없었다.

다음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

그걸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아크에서 출발을 해야 하는 게 맞다.

만약 평원지대에서 웨이브에 휩쓸렸다가는 나는 몰라도 조사팀원들은 확실하게 죽을 테니까.

'아니··· 칼라킨은 또 모르겠군.'

아무리 현재의 칼라킨이 이제 막 오렌지 라인에 들어선 애송이라고는 해도, 칼라킨은 칼라킨이다.

설사 평원 한복판에서 웨이브를 맞이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칼라킨은 제 살길을 찾을지도 모른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중요한 건, 애초에 그러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바로 출발하는 것에는 동의한다만,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애초에 나는 아크 전선에 합류하러 온 거지 아크 바깥으로 조사 임무를 하러 온 게 아니다.

당연히 마땅한 채비 역시도 되어있지 않았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챙겨두었습니다."

이모샤 중위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에게 군장 하나를 내밀었다.

척 봐도 아크 특임대들이 사용하는 외부 파견용 군장 및 결속 물자들이었다.

소위 말하는 AAA급 군장인 셈이었다.

"철저하군."

"그래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이모샤 중위가 멋쩍게 웃었다.

씁쓸함이 묻어나는 미소였다.

이모샤 중위에게 군장을 받아든 나는, 그대로 그것을 등에 맸다.

"아, 기존에 쓰시던 수통은 따로 안 챙겨가셔도 됩니다. 이미 군장에 결속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놓고 가시면, 제가 책임지고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아니, 괜찮다. 내 것도 따로 가져가지. 물은 많이 챙겨가는 게 나으니까."

"아, 예."

이모샤 중위가 건넨 군장에 결속된 수통에 든 건 평범한 물이지만, 내 수통에 든 건 그렇지 않다.

생명수의 물.

비록 아직은 그 효과가 뛰어나지는 않아도 포션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인 만큼, 분명히 유사시에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사실상 예비용 목숨이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 가는 조사대원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면··· 바로 출발하면 되나?"

"예."

"쓸데없는 과정이 없어서 좋군. 우리가 뭘 하면 되지?"

"구 크로노스 잔당 세력에 대한 일종 조사 및 탐색 임무입니다. 자세한 임무에 대한 건 가는 도중에 힐데가르트가 설명해줄 겁니다."

"알았다."

나는 이제부터 하나의 팀으로 임무에 참여하게 될 팀원들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자세한 임무에 대한 건 가면서 듣지."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섰다.

어차피 이번 임무가 어떤 임무인지 짐작가는 게 없는 것도 아니고, 누누이 강조했듯이 시간이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도 총 5명.

인원수로만 치면 분대조차 되지 못하는 빈약한 인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맡은 임무는 더없이 무거웠다.

'아니··· 오히려 이런 임무에는 이 정도 인원이 딱 좋은가.'

아크 바깥에서 웨이브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용감히 맞서는 게 아니라, 피하는 것이다.

쓸데없이 필요 이상의 인원수가 몰려가봐야, 발각될 확률만 높아진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본격적으로 조사대가 게이트를 출발하려던 순간, 의외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이봐, 야만인."

드미트리였다.

"무슨 일이지?"

"···이번에는 발목을 붙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맹세하지."

아무래도 자존심이 강한 드미트리로서는 저번 조사팀 때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래라."

"흥, 예의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야만인 같으니라고."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뭐··· 정말로 그렇게 되면 좋겠다만.'

애석하게도 이번 임무는 저번처럼 널널한 임무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번 임무에서 우리가 상대해야 할 건, 단순히 마수와 마물뿐만이 아닐 수도 있었으니까.

* * *

앞서가는 칼 마커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칼라킨은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조금 전에 칼 마커스와 악수를 했던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칼라킨은 고개를 내젓고는 조사대의 뒤를 따랐다.

날카롭기 짝이 없는 그 시선만큼은 칼 마커스에게로 고정한 채로.

< 생명수 (3) > 끝

힐데가르트가 말했다.

"이번 임무는 크로노스 잔당들이 어디에 있는지, 무얼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입니다."

"알았다."

힐데가르트의 눈이 조금 벙쪘다.

"어··· 그걸로 충분한 건가요? 더 자세한 설명이라든가, 그런 거 안 필요하세요?"

"그건 나중에 필요해지면 물어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고.

"아··· 네. 얼마든지요."

사실, 이번 임무인 크로노스 잔당의 동태 파악 및 조사 임무의 목적이 무엇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아니, 굳이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크로노스 잔당들은 멸망한 도시들의 잔당 세력들을 합쳐서 크로노스 연합을 만들 거다.'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

이건 아크에서 개입을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크로노스 잔당은 제아무리 아크라고 해도 무시할 수 있는 세력이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아직은 아크가 개입할 명분조차도 없었다.

크로노스 잔당들이 지금 시점에서 특별히 아크에 어떤 해가 되는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적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크 입장에서는 마치 목에 걸린 가시 같겠지.'

한때 크로노스가 멀쩡했을 때는 아크와 경쟁 관계에 있기는 했어도 아크와 크로노스 모두 공동의 적을 지닌 같은 인류라는 최소한의 동질감이 존재했다.

하지만 크로노스를 비롯한 군소 도시들이 모조리 멸망한 후, 그들에게 닥친 극한의 상황은 그러한 동질감마저도 부수기에 충분했다.

생존의 위협을 받는 극한의 상황은, 타인에 대한 이타심 따위는 가볍게 짓밟는 법이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크로노스 연합의 탄생은 아크에도 큰 충격으로 다가올 터.'

크로노스를 비롯한 군소 도시들의 잔여 세력들이 그저 잔당으로 남아있을 때와, 그들이 한데 모여서 연합을 이루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세력이 거대해지면 필시 갈등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적이 많은 아크로서는 새로운 적의 탄생을 반기려야 반길 수가 없었다.

'예정된 일이라······.'

어쨌거나, 내가 크로노스 잔당의 목적과 방향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그 임무를 받아들인 이유는 단순히 이번 보상으로 주어질 크레딧 때문만은 아니었다.

'크로노스 잔당이라면, 헤스본의 강화 혈청을 확보하고 있을 확률이 크다.'

헤스본의 강화 혈청.

강화 혈청의 능력을 흡수할 수 있는 알파 타입의 강화 혈청 능력을 지닌 내게 있어서, 다른 타입의 강화 혈청은 반드시 얻어야 할 것들 중 하나였다.

'설사 강화 혈청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크로노스 잔당에 합류한 헤스본의 강화 병사들의 피를 흡수하면 될 터.'

거기에 더해서 나에게 필요한 이런저런 물건들까지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여러모로 이번 여정은 나에게 있어서 필요하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여기에는 한 가지 중대한 문제점이 존재했다.

곧 웨이브가 다가온다.

그 말인즉슨 나를 비롯한 병사들이 아크를 비우는 게 썩 좋은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현재의 아크에서 내가 전선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면 아크는 큰 피해를 입게될 테고, 그렇게 입은 피해는 조금씩 눈덩이처럼 커져서 훗날 아크 전체를 집어삼킬 테니까.

'하지만, 꼭 웨이브를 아크 안에서 막을 필요는 없지.'

애초에 지금까지 나는 아크 안보다는 바깥에서 더 많이 웨이브를 막아왔다.

이제 와서 아크 바깥에서 웨이브를 막아낸다고 한들, 별로 특별할 것도 없었다.

다만, 염려가 되는 게 있다면 역시 훼방꾼처럼 달라붙은 조사대의 팀원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저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호루스를 이용해서 이번 임무는 물론이고 웨이브 역시도 무난하게 치러냈을 테니까.

'아니··· 차라리 잘 됐어.'

힐데가르트와 아이리스, 그리고 드미트리는 아직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게 옳겠지만, 저들은 훗날 아크를 책임질 이들이다.

이번 기회에 저들에 대해서 알아두고, 나아가서 경험도 쌓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뭐어··· 물론 저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렇게 내가 크로노스 잔당 조사대 팀원들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힐데가르트가 말했다.

"아, 쿠릴타는 이번 다른 임무 중이라서 못 왔어요."

"그건 왜?"

"어··· 음,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요."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쿠릴타의 존재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굳이 입밖으로 낼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 아닌 긍정을 전달했다.

"그래, 알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는 것 같다만."

"···문제요?"

"설마, 이대로 도보로 이동해야 하는 건가? 크로노스 잔당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인데?"

그 말마따나 애석하게도 이번에도 무소음 호버링 바이크 같은 이동 차량은 지원되지 않았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막상 정말로 안 해주니까 솔직히 말해서 조금, 아니 많이 실망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 그건······."

"이번 임무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보군."

힐데가르트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 특별히 대기 중인 차량이 없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이번 임무에는 없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라고 바놀 중령님께서······."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번 임무는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크로노스를 조사하는 일이었고, 아무리 무소음 호버링 바이크라도 크로노스의 감시 체계에는 충분히 감지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상황에 따라서 임무 도중에 무소음 호버링 바이크를 버려야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건 달리 말하자면 나중에 버릴 때 버리더라도 일정 구간까지는 무소음 호버링 바이크를 이용해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토록 중요한 임무라고 말해놓고 그마저도 지원해주지 않는다는 건······.

'진짜 악착같이 부려먹는군.'

아크에 돌아오는 대로 바놀 중령의 수염을 다 뽑아 버려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하는 사이, 힐데가르트가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죄,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건 아니지."

"그건 그렇긴 한데······."

바로 받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내심 억울했던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동 수단이 있었어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을 거다. 신경 쓰지 마라."

"하지만 조금 전까지는······."

"그냥 불평한 거다."

"아, 네······."

설마 내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힐데가르트는 끔뻑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뭐."

"아, 아니에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스더가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콧소리를 흘렸다.

[흥, 흐흥······.]

'쓸데없이 나오지 마라. 여기에는 나 말고도 네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이들이 있다.'

[괜찮아요. 설마 제가 저런 애송이들한테 걸리겠어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잠입, 은신 이런 거는 자신 있어요.]

그런 것치고는 힐데가르트는 물론이고 아이리스까지도 묘한 시선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에스더.'

[네?]

'지금 바로 노아로 가서 호루스 데려와. 나와 거리를 두고 상공에서 따라오라고 해.'

[왜요? 타고 가려고요?]

'아니. 하지만 쓸모가 있다.'

에스더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아니이··· 타고 갈 것도 아니면서 왜 굳이······ 지금 저 떼어놓으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죠?]

'데려오라면 데려와.'

[하··· 거기 가기 싫은데. 안 그래도 견디기 힘든데 주인님이 이상한 나무 심고 나서부터 진짜로 토할 것 같다고요.]

'시끄럽고, 갔다 오기나 해라. 그리고 토할 것도 없는 주제에 무슨 토야?'

[쳇.]

혀를 내두른 에스더의 모습이 이내 흐릿해졌다.

법은 멀고, 실험탄 GHOST-157는 가까웠으니, 지극히 현명한 판단이었다.

잠깐의 실랑이 후.

나는 나를 향해서 열렬한 시선을 쏘아내고 있는 이를 향해서 시선을 돌렸다.

"할 말 있나?"

아이리스.

칼라킨, 힐데가르트, 드미트리와 마찬가지로 아크의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한 명.

또한,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에서도 드문 선천적 에테르 적합자이기도 했다.

"···칼 마커스, 당신이 이번 조사팀을 이끈다고 들었습니다."

"금시초문이군."

"아니라는 겁니까?"

"전술 디렉터라는 감투를 준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게 조사팀을 이끄는 자리인 줄은 몰랐군."

"말장난이군요."

"진심이다."

"······."

평소 웬만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리스의 눈에 살며시 동요가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아크 바깥에서 살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늘 그랬던 건 아니지."

"당신에게 팀을 이끌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내가 팀을 이끄는지 여부는 둘째치고··· 어떻게?"

"간단합니다."

아이리스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서 에테르가 들썩 거리기 시작했다.

[증명해?]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

[증명해······!]

으음······.

아이리스가 이런 성격인 줄은 진즉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임무 시작부터 대놓고 들이받을 줄은 몰랐다.

'뭐, 상관없나.'

객관적으로 보면 현재 상황이 썩 좋지 않은 건 맞았다.

내 에테르 능력 중 과반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에스더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레벨 3의 에테르 적합자라는 이름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아무리 아이리스라 할지라도, 지금의 아이리스는 기껏해야 레드 라인의 병사 수준이다.

애초에 나에게 상대가 될 리가 없다는 이야기.

'살짝 겁만 줘볼까.'

내가 정신을 집중했다.

그 순간, 야누스가 이에 호응했다.

[기깃!]

'야, 지금 무슨······.'

야누스가 갑작스레 이런 행동을 보일 줄은 몰랐기에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에테르가 찢어지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이리스가 나에게 보낸 의심을 적의로 해석한 듯했다.

[끼긱, 끼기긱······.]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야누스의 본질은 마물.

그것도, 이제는 등급으로 치면 1급 수준에 다다른 마물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에테르가 단번에 아이리스가 뿜어낸 에테르를 집어삼켰다.

[악, 아악······!]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그만해에에에에───!!!]

평범한 에테르가 아니었다.

에테르보다는 유령종에 가까운 그것은, 단번에 아이리스의 에테르를 먹어치운 것도 모자라서 그 주인인 아이리스에게로 향했다.

'이런.'

순간적으로 에테르가 내 통제를 벗어났다.

물론 조금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다시 저것을 통제하는 건 일도 아니었으나, 문제는 지금 그 에테르들이 아이리스를 향해서 덮쳐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할 수 없나.'

내가 실험탄 GHOST-157을 꺼내 들려던 순간.

스릉─

서늘하게 들려온 쇳소리와 함께 뽑혀 나온 무언가가 에테르를 말 그대로 베어 갈랐다.

[끽────!]

단순 힘의 크기로만 따지면 무려 레벨 4의 에테르 적합자가 쏘아낸 에테르와도 비견되는 에테르 파동을 깔끔하게 없애 버린 것이다.

"······."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낸 무감한 눈의 사내, 칼라킨이 나를 마주했다.

스르릉──

서늘한 검신의 끝이 나를 향해 겨눠졌다.

< 크로노스 연합 > 끝

날카로운 쇠에는 마(魔)를 쫓는 힘이 있다.

물론 정말로 그런 힘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칼라킨이 들고 있는 물건은 그러한 일을 능히 해낼 수 있었다.

훗날 칼라킨이 악마를 사냥한 무기.

오직 칼라킨만을 위한, 칼라킨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

'월광검(月光劍).'

그것이 지금 빛을 발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할 정도의 파괴적인 빛이 마치 모든 걸 베어버릴 기세로 흘러넘쳤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칼라킨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날카로운 검기만큼이나 서늘했다.

당장이라도 월광검을 들고서 나에게 달려들 것 같은 목소리였다.

"자격은 증명됐나?"

그 말에 칼라킨이 나를 향해 뿜어내던 흉험한 기세를 누그러뜨리고는 말했다.

"···충분합니다."

"그쪽은?"

내가 아이리스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아이리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충분해요."

"좋아. 하지만 말해두지. 나는 어디까지나 용병이자 전술 디렉터로서 이 팀에 참여한 거다. 몇 가지 조언과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어도, 이 팀을 이끌 생각은 없어."

"···예. 죄송했습니다."

그것으로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태가 마무리됐다.

비록 그 과정이 조금 과격하게 흐른 듯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일도 없었으니 상관없었다.

"뭐야? 뭔데? 저 야만인이 뭘 했다는 거야?"

일행 중에서 유일하게 에테르 감응력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드미트리만이 이 사태에 대해서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물론 칼라킨 역시도 에테르 감응력이 없는 건 같았으나, 그에게는 그걸 보조할 인간을 뛰어넘는 감각과 온갖 도구들이 있었다.

"드미트리."

"오, 칼라킨. 내 대답에 응할 생각이 든 건가?"

"닥쳐라."

"···뭐?"

드미트리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사실, 칼라킨이 아무리 주목받는 병사라고 해도 아크 내의 신분으로만 보면 썩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레드 라인의 귀족 출신으로 자존심 높은 드미트리로서는 모욕을 당했다고 느낄 만도 했다.

"감히 네까짓 게······!"

"감히? 주제를 모르는 게 누구인지 모르겠군."

"이익!"

"다들 그만 해요!"

힐데가르트가 끼어들고 나서야 일련의 사태가 간신히 진정됐다.

아니, 사실 끼어들지 않았어도 그리 큰 사태로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드미트리가 아무리 자존심이 강해도, 이런 중요 임무 도중에 칼라킨에게 덤벼들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었으니까.

'···개판이군.'

물론 그 개판을 일으킨 장본인 중 하나로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조금 우습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걸 시작한 건 아니지 않은가.

'음.'

나를 향한 아이리스의 시선에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에 내가 뿜어낸 에테르는, 단순한 에테르라고 볼 수 없는 악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경계하는 건 단순히 아이리스뿐만이 아니었다.

직접 나에게 맞섰던 칼라킨도, 드미트리까지도 나를 향해서 경계의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조금 의아한 점이 있다면 유일하게 힐데가르트만이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 정도일까.

'곤란해졌어.'

가급적이면 플레이어블 인물들과 친하게 지낼 생각이었건만, 이렇게 되면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졌다.

이미 안면에 있던 힐데가르트나 드미트리는 둘째 치고, 초면이라고 볼 수 있는 아이리스와 칼라킨과 거의 반쯤 갈라서게 되었으니 말이다.

'에휴.'

나는 살며시 꼬리를 내리고 있는 사태의 원인을 노려보았다.

'너는 삼일 동안 굶을 줄 알아. 어딜 허락도 없이 이빨을 드러내?'

[기잇······.]

이 사태의 원인 중 하나인 야누스가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울었다.

하지만 마냥 야누스를 탓할 수도 없는 것이, 나 역시도 야누스가 에테르에 영향을 끼칠 줄은 나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흐음.'

아마 그 원인 중 하나에는 지금까지 내 에테르를 통제하던 에스더가 잠시 자리를 비운 탓도 있을 터였다.

여태껏 에스더가 에테르를 통제하며 사용했을 때는 이런 현상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마물을 마물이 억제한다라······.'

어찌 보면 조금 우스운 모양새였다.

'그리고, 월광검이라······.'

나는 살며시 어느새 칼라킨의 허리춤으로 갈무리된 월광검을 바라보았다.

월광검은 분명히 탐나는 물건이지만, 애초에 그건 칼라킨이 아니고서야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다.

정확히는, 칼라킨의 일족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해야 할까.

'뭐, 어차피 나보다는 칼라킨에게 더 필요한 물건이긴 하지.'

지금의 나에게는 월광검보다도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에테르를 요격할 수 있는 실험탄 GHOST-157이 있었으니 말이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서 근접해서 칼질을 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잠시 얼이 빠진 조사팀을 바라보며 말했다.

"계속 가지."

"···아, 네!"

대답을 한 건 힐데가르트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현재 조사팀 내의 분위기가 기묘하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휴······.'

왜인지 쿠릴타가 그리워지는 날이었다.

* * *

칼라킨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서 월광검의 손잡이를 만졌다.

유사시에 당장이라도 뽑을 수 있도록, 항상 손잡이에서 손을 떼어놓지 않았다.

그 정도로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칼라킨마저도 간담이 서늘했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분명히, 악의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칼라킨은 그러한 악의를 띠는 에테르를 무어라 부르는지 알고 있었다.

'유령종.'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칼 마커스는 인간이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유령종을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있을 수 없어.'

칼 마커스가 에테르 적합자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령종을 다루는 건 에테르 적합자 중에서도 단연코 이질적이었다.

칼라킨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대체 정체가 뭐지?'

칼 마커스가 비밀이 많은 사내라는 건 조사팀에 합류하기 전에 이미 들은 바 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칼 마커스가 품고 있는 것들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지켜볼 필요가 있다.'

칼라킨의 시선이 칼 마커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뭐야, 무슨 일이에요? 여기 분위기 왜 이래?]

그 말마따나 에스더가 돌아왔을 때 조사팀에 감돌고 있는 건 싸늘한 냉기뿐이었다.

'됐고, 시킨 일은 잘 했나?'

[네. 눈에 안 보이게 잘 따라오라고 했어요.]

'잘했다.'

[아니, 그것보다 지금 분위기 왜 이러냐니까요? 혹시 싸웠어요?]

움찔-

[······와. 진짜 싸웠어요? 나이가 몇 갠데 여기서 싸우고 있어요? 애야?]

······눈치 하나는 귀신 같네.

아니, 귀신 맞나?

'그런 거 아니다.'

[아니기는 개뿔이. 지금 쟤네 불쌍하게 눈치 보고 있는 거 보니까 드잡이질 한 번 했구만. 쯧쯧.]

저 얼굴로 마치 애늙은이처럼 혀를 차고 있는 모습을 보니, 복장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에휴······.'

그립다.

쿠릴타의 단순명쾌함이.

[그런데 뼈순이는 대체 왜 따라오라고 한 거예요? 여차하면 타고 혼자 도망치려고요?]

'···아니다.'

[에이, 아니긴. 마침 싸웠겠다, 그냥 마수들 몰려오면 얘네 버리고 도망가죠?]

'그럴 생각 없다.'

[진짜 없어요?]

'······없다.'

[진짜로?]

'······.'

솔직히 몇놈 정도는 확 여기다 버리고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아크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안될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이번 임무를 무사히 마치는 것뿐만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번 임무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나로서는 다른 쪽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주인님! 저쪽!]

'마침 왔나.'

지평선 너머에서 적지 않은 규모의 마수 무리가 이동하는 게 보였다.

아직 본격적인 웨이브가 일어난 건 아니었으나, 나중에 저 마수 무리가 어디로 향할지는 뻔했다.

"···저쪽!"

그제야 마수 무리를 발견한 조사팀원들이 자세를 낮췄다.

아크에서 훈련받은 대로였다.

"어떻게 할까요?"

힐데가르트를 비롯한 팀원들이 나를 향해서 일제히 시선을 옮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에게 판단을 맡긴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 기대에 부응해줄 수밖에.

"우리는 마수를 피하지 않는다."

"예?"

"뭐?"

"······."

각기 다른 반응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조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팀원들이 살짝 눈치를 보더니 이내 힐데가르트가 대표로 말했다.

"···어째서인가요? 피할 수 있으면 피해 가는 쪽이 좋지 않나요?"

"지금이 평시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곧 웨이브가 온다. 그건 알고 있겠지?"

"그러니까 더욱더─"

"저 마수들은 다음 웨이브 때, 아크로 공격할 거다. 그걸 그냥 두고 볼 생각인가?"

힐데가르트의 입이 꾹 닫혔다.

"···하지만 저희에게는 임무가 있어요."

"나도 안다. 하지만 임무보다도 중요한 게 아크의 안전이라는 것도 알지."

내가 계속해서 말했다.

"물론 나는 방향을 제시할 뿐, 너희를 이끌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것도 알아둬라. 지금 아크에서 너희가 빠진 전선의 자리는, 누군가의 피로 대신 채워질 거라는 걸."

"······."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 있어서 이번 임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이번 임무에 대한 답도 이미 알고 있겠다, 아크 바깥에서 별동대로 활용하며 웨이브를 막아냄과 동시에 이들에게 경험을 쌓게 할 생각이었다.

'이들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아크의 피해 역시도 줄어들 테니까.'

설사 조금 고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들을 조금 더 성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칼 마커스."

입을 연 이는 다름 아닌 칼라킨이었다.

"뭐지?"

"정말로, 그게 전부입니까?"

칼라킨의 시선이 마치 나를 꿰뚫기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래. 그게 전부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칼라킨!"

드미트리가 소리를 질렀으나, 칼라킨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너희들은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나는 칼 마커스의 의견에 따르겠다."

그렇게 말한 칼라킨이 자신의 무기인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다잡았다.

척 봐도 업그레이드가 된 물건이었다.

월광검은 근접 무기인 데다가 용도 자체가 에테르나 유령종처럼 물리적인 타격이 통하지 않는 걸 상대하기 위한 물건이다 보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좋은 거 쓰네.'

나는 이거 업그레이드 하려고 그 개고생을 했는데······.

'그래도 내꺼가 더 좋긴 해.'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내가 지닌 Ark-15 자동변환 소총은 무려 메이벨 필그림을 통해서 3단계까지 업그레이드된 물건이란 말이지.

[···뭐 해요?]

'아무것도 아니다.'

칼라킨이 일어나자, 곧이어서 아이리스 역시도 그 뒤를 따랐다.

"···아이리스?"

"하. 망할."

그리고 드미트리, 마지막으로 힐데가르트가 일어났다.

"이봐, 야만인."

"말해라."

"네 선택이 옳았기를 바란다."

"발목이나 잡지 마라."

드미트리는 예전 일이 생각났는지 얼굴을 붉혔다.

"이······!"

"됐고, 앞이나 봐라."

"뭐?"

그 말마따나 어느덧 마수 무리가 지척까지 다다라 있었다.

딱히 우리가 숨어 있거나 엄폐하고 있었던 게 아닌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온다!"

힐데가르트의 외침과 함께 마수 무리가 우리를 향해서 덮쳐왔다.

[키에에에에에!]

[끼익, 끼기긱!]

[캬오오!]

고생 좀 해봐라, 이놈들.

* * *

조사팀을 꾸리기 전, 바놀 중령은 칼라킨을 은밀히 불러내서 말했다.

칼 마커스를 잘 지켜보고, 혹여 수상한 점이 있다면 보고하라고.

칼라킨은 그 말이 칼 마커스가 크로노스 혹은 다른 세력의 간자일 지도 모른다는 걸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칼 마커스가 보이는 행동은 명백히 이상했다.

'···아크를 위해서라고?'

처음에는 이 틈을 타서 조사팀을 몰살시키려는 계획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중요한 임무를 맡은 상태로 마수 무리와 무리한 교전을 벌일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가장 앞에서 나선 칼 마커스의 뒷모습을 보며, 칼라킨은 그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지?'

칼라킨의 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해졌다.

< 크로노스 연합 (2) > 끝

"망할··· 빌어먹을 야만인 같으니라고."

드미트리가 투덜거리자, 옆에 있던 아이리스가 말했다.

"···누군가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아크를 위해서입니다."

"나도 알아. 어디서 잘난 척이야? 저주받은 자 주제에."

아이리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저주받은 자는 아크 내에서 에테르 적합자를 모욕하는 말 중 하나였다.

"드미트리. 그럴 때가 아니다."

"나도 알아."

힐데가르트가 아이리스의 어깨를 짚었다.

"신경쓰지 마요. 저 자식 원래 저런 놈이니까."

"···네."

칼라킨의 말마따나 어느덧 마수 무리가 지척까지 다다랐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지금 시점에서 장차 아크를 이끌어야 할 핵심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는 힐데가르트, 드미트리, 아이리스는 약하다.

아니, 그 칼라킨조차도 지금은 강자보다는 명백히 약자 쪽에 가깝다.

예전이었다면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언젠가 예정대로 강해질 테고, 아크의 중역으로 성장할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그림자단의 일원인 에스더가 나에게 종속되었고, 다중 웨이브가 발생했다.

변수가 생겼고, 앞으로도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과정에서 이들 중 하나가 죽기라도 한다면?

아크의 전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빨리 줄어들 수 있다.

'굳이 이들을 이끌거나 할 필요는 없어. 그냥, 이들이 어느 정도 강해지기만 해도 아크에는 이득이다.'

그렇기에 이건 좋은 기회였다.

조사 임무 도중에 몰려오는 웨이브의 숫자를 미리 줄일 수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이들의 전투 경험도 늘릴 수 있을 테니까.

[캬오오오오오───!!!]

[캬아아아악!!!]

곧이어 저편에서 마수들이 흉포한 기세를 흘리며 달려들었다.

물론 이들 역시도 이제는 어엿한 아크의 병사들이었으므로, 마수 무리가 몰려온다고 해서 겁에 질리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들 준비해라."

앞에 나선 건 칼라킨이었다.

이미 내가 지휘관이 아니라고 무력 시위까지 하며 못을 박은 데다가, 외부인인 나를 제외한다면 현재 조사팀 내에서 가장 리더에 가까운 게 칼라킨이었기 때문이다.

"힐데가르트, 상대는?"

칼라킨의 물음에 힐데가르트의 눈이 다가오는 마수 무리를 빠르게 훑었다.

"···10급과 9급 야수종이 약 300마리, 그리고 8급 괴수종이 50마리 정도요."

"쉽지 않겠군."

나에게 있어서야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는 상대들이었으나, 이들에게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가급적이면 탄약을 아껴야 한다. 우리에게는 중요한 임무가 있어. 사격은 신중하게 해라."

"알았어요."

아크 안에서와는 달리, 이곳은 보급이 전혀 되지 않는 아크 바깥이다.

한정된 물자, 한정된 탄약.

그것으로 당장 눈앞에 있는 마수 무리는 물론이고 임무까지 해내야 했으니, 아무리 화력이 앞선다 하더라도 그 화력을 마음껏 뿜어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이들은 마수와 마물들을 이렇게 지척 거리에서 상대한 적이 거의 없다.'

아크의 성벽 위에서 웨이브를 막아내는 것과, 아크 바깥의 평원에서 마수 무리를 마주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아크의 성벽 위에서였다면 능히 상대할 수 있는 마수 무리라도, 평원 한복판에서 마주친다면 목숨을 위협하는 포식자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새삼스레 내가 지닌 능력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저랬던 때가 있었지.'

일일이 보급 상황을 따지고, 남은 총알의 개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물론 그건 이제 머나먼 옛날 일이 되었지만 말이다.

[크르르릉──!]

순식간에 마수 무리와의 거리가 300m 안쪽까지 줄어들었다.

지금까지는 탄약을 아끼기 위해서 사격을 망설였던 조사팀들 역시도 행동에 나서야할 때라는 이야기였다.

"지금!"

칼라킨의 신호와 함께 크로노스 조사팀의 손에 쥐어진 Ark-15 자동소총들이 불꽃을 토해냈다.

물론 내가 쏠 때처럼 정신 나간 연사까지는 아니었다.

[키엑!]

[칵!]

마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비록 신병이라고 해도 이들은 훗날 아크의 중역으로 성장할 이들이었고, 고작 이 정도 마수 무리 정도는 거뜬했다.

"재장전!"

마수들과의 거리가 100m까지 다다랐을 때는 이미 몰려오던 마수들의 숫자는 반수 이하로 줄어든 이후였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라고 볼 수 있었다.

'아직 상대의 주력은 남아 있다.'

9급이나 10급 야수종 정도야 Ark-15 자동소총으로도 충분히 정리할 수 있었으나, 8급 괴수종부터는 이야기가 달랐다.

스컬 하운드와 같은 등급의 마수.

물론 스컬 하운드 같은 경우는 각 개체가 정예 등급으로 취급되는 특별한 개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8급 괴수종들이 무시할 수 있는 상대라는 건 아니었다.

"망할! 온다!"

드미트리가 외쳤다.

지금까지 일방적인 공격을 이어가던 조사팀 역시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로서도 코앞까지 마수가 다다르는 경험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은 아직 신병에 불과한 게 사실이었으니까.

"아이리스! 선두의 발목을 붙잡아라!"

"아, 알았어요!"

조사팀 내에서 나를 제외한 유일한 에테르 적합자인 아이리스가 사격을 멈추고서 양손을 뻗었다.

[막아······.]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꺄아아악······!]

격렬하게 일어난 에테르 파동이 마수들을 향해서 뻗어나갔다.

하지만 기껏해야 레벨2조차 되지 못하는 아이리스의 수준으로는 마수들을 막기는커녕, 아주 잠깐 발목을 붙잡는 게 고작이었다.

"으윽!"

시간으로 치면 고작 몇 초에 불과한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라킨이 아이리스에게 발목을 붙잡을 것을 요구한 이유는 간단했다.

칼라킨에게는,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했으니까.

"힐데가르트, 포인트는?"

"NE 방향에 선두 4마리, 75 방향에 선두 3마리, SE 방향에 후방 5마리."

"확인했다."

통찰안을 통해서 마수 무리의 진형의 허점을 단번에 읽어낸 힐데가르트의 말을 따라서, 칼라킨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딸깍─

'AKR-BOM-30 수류탄.'

아크의 기본 보급용 수류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력이 약한 건 절대 아니었다.

'나야 효율이 나빠서 안 쓰지만··· 이들이라면 오히려 효율상 좋아.'

거리로 보면 절대로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칼라킨의 손은 거침없었다.

휘익!

곧이어서 칼라킨의 손을 떠난 세 개의 AKR-BOM-30 수류탄이 정확히 힐데가르트가 말한 포인트에 착지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쾅! 콰캉───!!!

[키에에에엑!]

[캬아아악!]

몇몇 마수들은 그 폭발에 휘말려서 죽었고, 살아남은 마수들도 달려들던 진형이 어그러져서 혼란에 빠졌다.

그 틈을 놓칠 칼라킨이 아니었다.

"착검."

칼라킨은 Ark-15 자동소총 하부에 스멜 공방제 나이프를 결합하고는 다가오는 마수들에 대비했다.

다른 팀원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온다."

어느덧 마수들과의 거리는 30m.

마수들이 덮쳐왔다.

* * *

인간은 마수를 이길 수 없다.

인간에게는 마수와 같은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도 없고, 설사 당장 손에 총을 쥐고 있다 한들 덮쳐오는 마수에게 대항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안된 게 바로 아크의 대마수 근접 전투 기술이다.

아크의 대마수 근접 전투 기술의 요지는 간단하다.

인간보다 몇 배는 거대한 마수들의 공격을 최대한 피하고, 피할 수 없는 건 막으면서 그사이에 마수의 급소에 총알을 박아넣는 것.

말이 근접 전투 기술이지, 사실상 마수를 상대로 한 회피 및 방어 기술이라고 봐도 좋았다.

"각자 위치로!"

칼라킨을 비롯한 아크의 병사들은 훈련받은 대로 대마수 근접 전투 기술을 행하기 위해서 자리를 잡았다.

이미 마수들의 진형은 한번 어그러 뜨려 놓았으니, 한 번에 그들을 향해서 달려드는 마수의 숫자는 기껏해야 셋을 넘지 않았다.

즉, 지금의 진형이라면 아무리 근접전이라 할지라도 마수들을 상대하는 게 어느 정도 가능했다.

[끼에에에에에!!!!]

콰앙─!

샷건 모드로 변화한 Ark-15 샷건이 불꽃을 토해냈다.

샷건 모드의 가장 강력한 장점은 저지력이었고, 그 덕분에 마수들의 급소를 노리지 않고도 어느 정도 접근을 막을 수 있었다.

"흩어져!"

8급 괴수종의 앞 발이 조사팀을 향해서 덮쳐오자, 칼라킨의 외침과 함께 조사팀이 순간적으로 흩어졌다.

쿠웅─!

그 덕분에 마수의 공격은 피해낼 수 있었으나, 조사팀의 진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난전이 시작된 것이다.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난전이 벌어지게 되면 피해는 피할 수 없게 된다.

"······큭!"

칼라킨은 이를 악물고서 눈앞에 달려드는 마수를 상대했다.

조사팀의 진형이 깨진 이상, 이제 각자가 알아서 달려드는 마수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이대로면 조사팀에 피해가 발생하고 만다.'

칼라킨은 바닥을 구르면서 달려드는 마수들을 향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Ark-15 샷건에서 쏘아진 벅샷이 단번에 8급 괴수종의 눈을 꿰뚫고, 곧이어서 머리를 터트렸다.

후두드득──

쏟아져 내리는 핏물 속에서 칼라킨은 전황을 살폈다.

"으아악!"

드미트리가 비명을 내지르자, 칼라킨을 그를 도우려고 했다.

어디선가 번뜩인 섬광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스걱!

붉은 섬광이 스쳐지나가고, 드미트리를 덮치려던 8급 괴수종의 머리가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그것을 본 칼라킨의 눈이 부릅 떠졌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플라즈마 병기?'

자연스레 칼라킨의 시선이 플라즈마 병기가 뿜어진 곳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번 조사팀의 용병이자 전술 디렉터로 참여한 칼 마커스였다.

"아악!"

조사팀 일행이 위험에 빠질 때마다, 칼 마커스의 손에서 섬광이 뿜어졌다.

[끼엑──!]

[끽!]

칼 마커스의 활약 덕분에 한숨 돌릴 수 있었으나,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플라즈마 병기는 지속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아.'

여전히 마수들의 숫자는 많다.

만약 이 상황에서 칼 마커스의 손에 들린 플라즈마 병기의 에너지가 바닥난다면, 상황은 다시금 최악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푸슈욱······.

끝을 모르고 뿜어지던 플라즈마 병기의 섬광이 잦아들었다.

칼 마커스는 곧장 Ark-15 자동변환 소총으로 무장을 교체했으나, 무기가 변한만큼 상황 역시도 변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꺅!"

균형은 빠르게 무너졌다.

아슬아슬하게 마수들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던 힐데가르트가 마수의 앞발을 피하지 못하고 치인 것이다.

이대로라면 그대로 마수들의 먹잇감이 될 상황.

'···별수 없나.'

칼라킨이 무리를 해서라도 힐데가르트를 지원하려던 순간,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힐데가르트를 덮치려던 마수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콰카카카캉───!!!

일반적인 Ark-15 자동소총에서는 볼 수 없는 압도적인 파괴력이었다.

'아무리 A-985 폭발탄이라고 해도 저런 파괴력은··· 대체 뭐지?'

칼라킨이 잠시 얼이 빠져 있는 동안에도 상황은 계속해서 급박하게 흘러갔다.

힐데가르트를 시작으로, 드미트리와 아이리스 역시도 곧 위험에 빠진 것이다.

"망할 새끼들이!"

"으으윽!"

총성과 에테르가 연신 일어났다.

그러나 몰려드는 마수 무리를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칼라킨이 이를 악물고서 Ark-15 자동소총을 다잡고서 사격을 하려던 순간, 연신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드미트리와 아이리스 곁에 있던 마수들의 머리가 연신 터져 나갔다.

"후욱! 훅!"

"가, 감사합니다."

칼라킨조차도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고 판단했건만, 칼 마커스는 너무나도 쉽게 그 둘을 구해냈다.

칼 마커스는 침착했다.

가장 선두에서 마수들을 상대하고 있음과 동시에,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병사들이 위험에 빠질 때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그들을 구해냈다.

그 덕분에 본래였다면 누구 하나 죽었어도 안 이상할 상황에서 그 누구도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

칼 마커스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솜씨 덕분이었다.

'저런 게··· 가능한 건가?'

단순히 강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마치 이 전장 자체가 칼 마커스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 같았다.

'···과연, 그렇게 된 건가.'

칼라킨은 단번에 이해했다.

어째서 아크에서 이런 중요한 임무에 고작 신병 네 명과 용병 한 명만을 보냈는지.

바놀 중령은 알고 있던 것이다.

칼 마커스가 어떤 인물인지.

'···달라.'

칼라킨은 지금껏 아크에서 무수한 강자들을 보아왔다.

전신(戰神)이라 불리는 레드 라인의 더글라스 준장.

오렌지 라인의 특수 기동 타격 대장, 에밀리 크로프트 대령.

그 외에도 아크의 전선에서 싸우며 오다가다 많은 이들을 보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무언가 달랐다.

단순히 강함을 떠나서, 전장 자체를 바라보는 시야 자체가 무언가 달랐다.

칼라킨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칼 마커스.'

칼라킨의 눈동자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담았다.

< 크로노스 연합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