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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 - 10

아이리스는 두려웠다.

눈앞의 마수들이 두려운 게 아니다.

조사팀의 가장 앞에서 마수들을 상대하고 있는 남자, 칼 마커스.

아이리스는 그가 너무 두려웠다.

[히이이이익────]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가까이 오지 마······.]

그녀의 에테르가 떨리면서 내내 경고를 전해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칼 마커스의 주변에서 맴돌고 있는 에테르는 당장이라도 아이리스를 집어삼킬 것처럼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건··· 대체 뭐지?'

물론 아크 내에서도 강력한 에테르 적합자들은 많다.

그러나, 무려 레벨 5의 에테르 적합자인 벨로가 대령을 보았을 때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아니, 이건 마치······.'

아이리스는 이러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게 인간이 아닌 다른 것에게서 느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마물.'

그것도 평범한 마물이 아니라, 최소 2급 이상의 고위 마물이었다.

그리고 아이리스는 그러한 고위 마물 중에서 인간의 형상을 띤 마물을 이미 알고 있었다.

'···도플갱어.'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아닐 가능성이 더 컸다.

누가 뭐라고 해도 칼 마커스는 아크에서 인정한 용병이었고, 일개 이등병에 불과한 그녀가 그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물며 지금 칼 마커스는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며 마수들을 말 그대로 학살하고 있었다.

그 활약 덕분에 본래였다면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조사팀 역시도 마수들을 상대할 수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만약 아니라면?

그 모든 게 계획된 연기라면?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는 거라면?

'이번 임무는······.'

안 그래도 허옇던 아이리스의 얼굴이 아예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를 더욱더 두렵게 만드는 건,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알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누군가 어설프게 그 사실을 칼 마커스에게 노출했다가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칼 마커스.'

아이리스의 시선이 그 모습을 떠나지 않았다.

* * *

"허억, 허억······!"

"죽어어어어!!!"

치열했던 전투도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서 달려갔다.

조사팀 모두 자잘한 상처를 입긴 했으나, 생명에 지장이 가거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한 이는 없었다.

'꽤 잘하고 있는데.'

물론 위험하다 싶으면 내가 나서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이제 막 이등병이 된 신병에 불과하다는 걸 생각한다면 엄청난 일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칼라킨이 훨씬 더 잘해줬어.'

본래 칼라킨은 남을 이끄는 면에 있어서 그렇게까지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크의 전선 같은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때의 이야기고, 이런 소규모 분대 전투에서는 칼라킨의 능력이 빛을 발할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 전쟁 지휘에서는 칼라킨보다는 차라리 드미트리가 훨씬 더 낫지.'

지금 당장은 꼴통 같아 보이는 드미트리지만,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신분 자체가 레드 라인의 귀족 출신이다 보니, 출세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인물이기도 했고 말이다.

'뭐, 그건 그렇고······.'

슬슬 이들도 한계에 다다랐겠다, 나는 이만 이 전투를 끝낼 필요성을 느꼈다.

'에스더.'

[왜요.]

'이만 끝낼 거다.'

[지루하긴 했죠?]

에스더가 키득 웃었다.

그런 여유를 보일 정도로 이번 전투는 나에게 있어서 위기라고 할만한 것조차 되지 못했다.

애초에 웨이브 한복판에 달려들어서 싸웠던 게 엊그제인데, 고작 8급에서 10급 사이 마수들이 두려울 리가 없었다.

[이리와······.]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에스더가 일으킨 에테르 폭풍과 함께 남아 있던 마수들이 한 곳으로 일제히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단순 힘의 크기로만 보면 거의 레벨 4 이상의 에테르 폭풍이었기에 가능한 물리력이었다.

[키에에엑!]

[카아악!]

마수들과 대치하고 있던 조사팀원들에게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뭐, 뭐야?"

"미친!"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꺼내고는 그것으로 뭉쳐 있는 마수 무리를 한 번에 그었다.

지이잉──!

그리고, 전투는 그게 끝이었다.

후두두득──!

BLT-47 플라즈마 발사기가 지나간 궤적을 따라서, 한때 마수였던 고깃덩어리들이 가로로 쏟아져 내렸다.

조사팀의 팀원들이 일제히 경악했다.

"저게 무슨······."

"···원래 플라즈마 병기가 저런 물건이었나?"

"······."

그리고,

경악한 조사팀원들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끄, 끝이야?"

"···그런 것 같은데."

"하아······."

드미트리를 비롯한 조사팀원들이 하나둘씩 바닥에 드러 누웠다.

평소 체면에 목숨을 거는 드미트리가 거침없이 흙먼지 바닥에 몸을 누울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다.

"다들 고생했다."

"···대장처럼 굴지 마라, 야만인."

"그럴 생각은 없었다만."

"하지만··· 야만인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죽었겠지. 그 점은 감사한다."

그 말에 힐데가르트가 눈을 끔뻑였다.

"응? 뭐야, 드미트리 맞아?"

"뭐."

"아니··· 그런 캐릭터가 아니지 않나?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 더 시건방지고, 오만한 사람 아니었나?"

"시끄러워."

"떠들 여력이 남아 있는 걸 보니, 심각한 부상은 없는 것 같군."

"하, 여기 피 나는 거 안 보이나? 죽을 것 같은데."

"엄살 부리지 마라."

드미트리가 징징거렸으나, 그다지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굳이 수통에 있는 생명수의 물을 쓸 필요는 없겠어.'

만약 중상을 입었다면 써야 했겠지만, 지금 이들의 상처를 보아하니 기본적인 응급 처치만으로도 충분해 보였다.

"칼 마커스. 당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칼라킨이 나에게 인사했다.

가장 선두에서 앞장서서 싸웠던 칼라킨의 상태는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

"치료부터 하는 게 나을 것 같군."

"···알겠습니다."

비록 아직은 생명에 지장이 갈만한 상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방치할 만한 상처는 아니었다.

"칼라킨! 이쪽으로."

조사팀원들은 서로 진통제를 놓고, 상처를 소독한 뒤에 찢어진 곳은 의료용 스테이플러로 꿰매는 등 응급조치를 했다.

아크의 병사들에게 있어서 이 정도의 기본적인 의료 기술은 필수적인 교양이었다.

"아악! 살살 좀 해!"

"엄살은. 귀족 나으리가 이런 것도 못 참아?"

"감히 우리 가문을 비꼬아? 따라 나와! 그 모욕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말은 잘해요."

힐데가르트가 피식 웃으면서 드미트리의 붕대를 꽉 조였다.

"아악! 이게 해보자는 거야?!"

"시끄러워."

작은 소란 속에서 슬쩍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리스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손에는 의료 용품을 든 채로.

"당신은··· 괜찮으신 건가요?"

"난 괜찮다."

애초에 야누스에 의해서 보호받고 있는 내가 저런 수준 이하의 마수들에게 상처를 입을 리가 만무했다.

아니, 설사 야누스가 없었다 하더라도 이미 내 기본적인 스펙은 저런 하급 마수들에게 당하려야 당할 수가 없었다.

"그렇··· 군요."

아이리스의 반응이 어딘가 이상하긴 했지만, 하도 격렬한 전투를 치른 뒤다 보니 그냥 지친 거겠지 했다.

[겁 먹었네. 불쌍하게도.]

'그건 이상하군. 아무리 지금의 아이리스가 약해도, 고작 이 정도 전투에 겁을 먹을 사람은 아닌데.'

[아니, 주인 너한테 먹었다고요.]

'나? 왜?'

[그거야 주인님이 아시지 않겠어요?]

'으음.'

하긴······.

조금 전에 본의 아니게 야누스로 인해서 폭주한 에테르 폭풍에 쓸려나갈 뻔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안 그래도 아이리스는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에서도 몇 없는 에테르 적합자였으니 말이다.

"아까는 미안하게 됐다. 내가 실수한 것 같더군."

"아, 아니에요! 제, 제가 죄송하죠."

말은 그렇게 했으나, 지금 아이리스의 모습은 마치 겁에 질린 생쥐 같았다.

괜히 여기서 더 말을 붙여봤자 좋을 건 없어 보였기에 내가 말했다.

"마저 치료해라. 주변 경계는 내가 하지."

"아, 네에······."

한편,

"칼라킨! 지금 움직이면 안 돼요!"

"···괜찮다."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칼라킨이 내게 다가왔다.

전신에 감겨진 붕대에서 배어 나오는 피가, 조금 전에 있었던 격전을 설명해주는 듯했다.

"쉬는 게 나을텐데."

"···버틸만 합니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크와 이번 임무를 위해서다."

사실 그걸 위해서는 칼라킨의 몸이 상해서는 안 되니, 엄밀히 말하면 그게 그거긴 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다지 안 괜찮아 보인다만."

그 말마따나 상처의 경중을 떠나서 칼라킨의 몸에는 멀쩡한 곳이 없었다.

당장 쓰러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아무리 칼라킨이라도 할지라도 이렇게 무리하는 건 좋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그럼에도 칼라킨은 끈질겼다.

솔직한 심경으로는 그냥 가서 엎어져서 잠이라도 자면 좋겠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이제 진짜 목적을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목적?"

"굳이 이런 상황에서, 이번 마수 무리와 격돌했어야만 하는 이유 말입니다."

이것 봐라······.

"이유는 이미 말해주지 않았나? 너희가 바깥에서 흘리는 피가 늘어날수록, 아크의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

"단지 그뿐이었다면 칼 마커스 당신 혼자서 마수 무리를 상대할 수 있었을 겁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내가 그렇게 대단해 보이나?"

"아니라는 겁니까?"

칼라킨의 목소리에 확신이 깃들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전투만으로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보았다는 뜻이었다.

'역시, 칼라킨은 칼라킨인가.'

칼라킨의 말마따나 내가 굳이 이 시점에 이들을 마수 무리와 조우시킨 건, 단순히 웨이브 때 마수의 숫자를 줄이기 위함만은 아니다.

진짜 목적은 이들의 성장.

물론 그렇다 한들 내가 그걸 순순히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네 착각이다. 이만 가서 쉬어라. 전투는 오늘이 끝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아."

"···알겠습니다."

칼라킨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이내 그만두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나 쟤 싫어요. 어딘가 꺼림칙해.]

'너한테는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런 게 있다.'

유령종인 에스더에 있어서 월광검의 주인인 칼라킨은 그야말로 천적이나 다름없다.

물론 근접 무기라는 특성상, 에스더가 작정하고 도망치면 칼라킨으로서도 어쩔 수 없겠으나, 에스더가 불쾌감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실제로 칼라킨에 의해서 에스더가 소멸한 적도 있기도 했고.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만약 자기 보전의 화신인 에스더가 이 사실을 알았다가는 당장 칼라킨에게서 떨어져야 한다고 고래고래 난리를 칠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십 분 정도만 정비하고 바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시, 십 분이요? 하지만······."

"곧 웨이브가 올 거다."

그 말에 입을 연 힐데가르트는 물론이고 내내 투덜거리던 드미트리, 그리고 아이리스와 칼라킨까지도 표정을 굳혔다.

이런 평원 지대에서 웨이브를 맞이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조금만 더 가면 협곡이 하나 나올 거다. 그곳에서 숙영한다."

"아······ 예!"

어차피 무리해서 강행군을 펼치느니, 웨이브가 오기 전에 휴식을 취할만한 자리를 잡는 게 나았다.

[언제는 안 이끈다더니··· 아주 다 시키고 있네. 이럴 거면 뭐하러 감투는 벗었나 몰라.]

'뭐.'

[그냥 그렇다고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휴식이 끝난 뒤 우리는 다시금 기나긴 행군을 시작했다.

아무리 온갖 훈련으로 단련이 된 아크의 병사들일지라도 이런 상황은 익숙하지 않았는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허억, 허억······!"

"훅! 훅!"

처음에는 온갖 불평불만을 늘여놓던 드미트리도, 이제는 그럴 힘조차 없었는지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저, 저쪽!"

힐데가르트의 갈라진 외침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올라갔다.

드디어 숙영 장소로 예정해두었던 협곡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

"저게 뭐야?"

"말도 안 돼······."

그러나 팀원들은 웃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키이이이이이······.]

[칵! 칵!]

어느덧 협곡의 하늘에 보이기 시작한 수십, 수백 마리의 비행종들.

그리고 지평선 너머에서 몰려들고 있는 검은 무리 때문이었다.

'쯧.'

아직 본격적인 웨이브가 일어난 건 아니다.

다만, 아크에서 이미 멀리 나와버린 이곳은 그 징조에도 휩쓸리기 충분했다.

"이, 이제 어떻게 해요?"

팀원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칼라킨조차도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비록 제대로 된 웨이브가 몰려오고 있는 건 아니었으나, 이런 허허벌판을 건너기 위해서는 웨이브의 징조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설령, 그게 아크의 병사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팀원들은··· 아직 전투를 벌일만한 상태가 아니군.'

아무리 중상자가 없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수의 마수와 마물들을 상대로 연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아무리 이들을 성장시키는 게 중요하다 하더라도 자칫 잘못했다가는 누군가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나.'

내가 칼라킨에게 말했다.

"칼라킨. 지금부터 네가 팀을 이끌고 이곳으로부터 약 18km 떨어진 115 지점으로 향해라. 그 협곡 안으로 가면 갈라진 절벽이 있을 텐데, 그곳에 숨으면 될 거다. 나는 나중에 합류하겠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면 칼 마커스 당신은요?"

그거야 뻔한 소리 아니겠는가.

이들이 그곳까지 향하는 동안, 누군가는 이곳에 남아서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나는 여기서 저것들을 막겠다."

< 크로노스 연합 (4) > 끝

지금껏 내내 담담함을 유지했던 칼라킨조차도 이번만큼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뭐라고?"

"출발해라. 시간이 없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가는 조사팀이 협곡 안에 도착하기 전에 마수 무리에 휩쓸릴 터.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아슬아슬했다.

"그런··· 알겠습니다."

칼라킨 역시도 그러한 상황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더는 군말하지 않고서 움직였다.

과연 칼라킨다운 빠른 판단이었다.

"가자."

"칼라킨! 정말로 괜찮은 거예요?"

힐데가르트의 외침에 칼라킨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전술 디렉터의 판단이다. 우리가 왈가왈부할 게 아니다."

"하지만······."

"그리고··· 어차피 우리가 있어봤자 방해만 될 거다."

"네?"

"바로 출발한다."

떠나는 칼라킨은 슬쩍 나를 흘겨보고는 그대로 길을 떠났다.

"야만인··· 죽지 마라."

"조심하세요!"

"······."

드미트리와 힐데가르트, 그리고 아이리스까지도 칼라킨의 뒤를 따라서 이동했다.

[혼자 남겨졌네요?]

'이게 편하니까.'

[흐흥.]

솔직히 말해서 내가 말했던 것들 중 절반 정도는 핑계였다.

애초에 고작 조사팀을 갈라진 절벽까지 데려가는 일에 몰려오는 마수들을 막느니 뭐니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굳이 내가 이곳에 남아서 마수 무리를 상대한다고 한 이유는, 다름 아닌 웨이브 때문이었다.

'이쯤에서 숫자를 어느 정도 줄여놓는 게 좋겠지.'

조금 전에 있었던 전투도 그렇고, 내 상황상 조사팀과 함께할 때는 제대로 된 역량을 발휘하기 어렵다.

총알 상황도 눈치를 봐야 하고, 내 전력의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야누스 역시도 사실상 봉인이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 보호로부터 멀어진 조사팀에게 경험을 늘릴 수 있는 기회지.'

아무리 내가 이곳에서 마수들을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이곳에서 협곡 안의 절벽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다.

중간중간에 마수 무리와도 맞닥뜨려야 하고, 그들은 내 도움 없이 순전히 자기 자신들만의 힘으로 그것을 헤쳐나가야 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걸 피부로 느낄 테지.'

물론 그 과정이 엄청나게 위험했다면 내가 뒤따라 붙었겠으나, 내가 볼 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크로노스 조사팀이 아슬아슬하게 헤쳐나갈 수 있는 난관.

나로서는 웨이브도 처리하고, 더불어서 아크의 핵심 인물들을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서 굴릴 수도 있었으니, 여러모로 일석이조라고 볼 수 있었다.

[대체 왜 사서 고생인지······.]

'해야 하니까.'

더군다나 꼭 내가 손해보는 장사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차피 저 녀석들은 나보다 훨씬 더 고생할 거다.'

비록 상대하는 마수의 숫자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테지만, 저들과 내가 같은 상황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건 조금 마음에 드네요.]

에스더가 씨익 웃었다.

앞으로 조사팀 앞에 펼쳐질 고생길을 알아본 것이다.

[아, 근데 뼈순이는 안 불러요?]

'아직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무엇보다도 조사팀과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호루스를 타고 날아오르는 순간 그들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컸다.

비행형 마물을 타고서 하늘을 누비면서 플라즈마 빔과 온갖 폭격을 가하는 인물을 보고,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내가 변절자 폰이라고 스스로 실토하는 꼴이겠지.'

그렇기에 나는 홀로 다가오는 마수 무리 앞에 섰다.

아까 조사팀이 상대했던 마수 무리와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의 군세.

그러나,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그우우우우우────!!!!]

집채만 한 크기를 지닌 6급 괴수종의 울음소리와 함께 어느덧 사위를 검게 물들인 마수의 군세가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 * *

"정말로 괜찮은 거예요?"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힐데가르트의 말에 칼라킨이 짧게 답했다.

"아마도."

"···확신은 못 한다는 이야기네요."

힐데가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칼라킨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칼 마커스가 어째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했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때문에······.'

칼라킨은 칼 마커스가 스스로 위험에 빠뜨리는 걸 알면서도 그의 의견에 따랐다.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칼 마커스는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 조사팀이 도망갈 시간을 벌었다.

그렇지 않으면, 몰살당할 테니까.

이들은 모두 짊어지고 있다.

자신의 희생을,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의 각오를.

그렇기에 힐데가르트는 자신을 짓누르는 무기력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없다는 게 이게 처음은 아니다.

아크는 늘 거대한 위협에 시달려 왔고, 그 속에서 힐데가르트라는 존재는 매우 미약한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그게 이 모든 걸 손 놓고 지켜봐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안 되겠어요. 저라도 돌아가야겠어요."

"무언가 착각하고 있군."

칼라킨의 말에 힐데가르트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걱정해야 할 건 우리다."

"예? 지금 그게 무슨 소리─"

"저길 봐라."

힐데가르트의 시선이 칼라킨이 턱짓을 한 곳을 향했다.

이윽고 드러나는 마수 무리.

물론 그 숫자는 이전에 상대했던 마수 무리보다는 적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숫자도 아니었다.

"저건······."

"준비해라. 전투다."

짤막한 칼라킨의 말과 함께 드미트리가 투덜거렸다.

"망할··· 아직 찢어진 곳도 안 나았는데."

그 모습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힐데가르트가 짜내듯이 웃었다.

"···계속 쫑알거리면 이번에는 잘릴 수도 있어요."

"나도 알아."

드미트리와 힐데가르트가 언제나처럼 투닥거렸으나, 칼라킨의 눈은 더없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쉽지 않겠어.'

칼라킨은 알고 있었다.

이전에 있었던 마수들과의 교전에서, 칼 마커스의 존재가 얼마나 거대했는지.

하물며 지금 조사팀은 이전에 마수 무리와의 격돌로 상당한 탄약을 소모한 뒤다.

아크에서처럼 화력을 퍼부어서 원거리에서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즉, 이번 전투 역시도 필연적으로 근접 전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다들 준비해라."

칼라킨의 말과 함께 지금까지 소란스러웠던 조사팀에 긴장이 찾아왔다.

"아이리스."

"···네."

"조금 무리한 부탁을 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칼라킨의 말에 아이리스가 각오를 마친 눈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알겠습니다."

그에 화답하듯이 아이리스의 주변에서 에테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도와줘?]

[도와주자. 도와주자. 도와주자. 도와주자. 도와주자. 도와주자. 도와주자. 도와주자. 도와주자. 도와주자. 도와주자. 도와주자. 도와주자···.]

그 모습을 본 칼라킨이 앞장섰다.

"그러면······."

칼라킨이 Ark-15 자동변환 소총 하부에 월광검을 결합했다.

월광검은 마(魔)를 벤다.

보통이었다면 스멜 공방제 나이프를 결합했겠지만, 그 정도로 지금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할 수 없나."

각오를 다진 건 비단 칼라킨뿐만이 아니었다.

어느덧 마수들을 향해서 시선을 고정한 힐데가르트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와 함께 그녀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야, 너!"

그 모습에 당황한 드미트리가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힐데가르트는 눈을 감은 채로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조용히."

통찰안에서 과부하가 일어나며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읽어 내려갔다.

전체적인 마수의 숫자, 위치, 해당 마수의 수준, 강함, 약점······.

이내 그 모든 정보를 취합한 힐데가르트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전달하겠습니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전장의 모든 정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

[뒤!]

"네가 막아!"

[그러기 싫어서 말한 건데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에스더는 착실하게 내 뒤에 달려든 마수를 옭아맸다.

[키히엑!]

곧이어서 BLT-47 플라즈마 발사기가 발이 묶인 마수를 향해서 섬광을 토해냈다.

번뜩이는 빛과 함께 플라즈마 빔이 단번에 마수의 목을 꿰뚫은 것도 모자라서 그 뒤에 있는 마수들까지 줄줄이 꿰뚫었다.

마치 거대한 빛의 기둥에 마수들이 줄줄이 꼬챙이로 꿴 모양새였다.

내가 잠시 시선을 붙들려 있는 사이에도 사방에서 마수들이 끊임없이 덮쳐왔다.

하지만 등 뒤에는 눈이 없어도, 야누스에게는 눈이 있었다.

[기깃!]

등에서 솟구친 뼈 촉수들이 단번에 마수들을 꿰뚫었다.

[쿠엑!]

[끽!]

무수한 마수와 마물들의 피와 살을 취해온 야누스의 힘은 이제 1급 마물 중에서도 중위급 수준을 넘어섰다.

고작 해야 6급 이하의 마수들이 덤벼들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푹!

푸푸푹─!

단번에 마수들을 꿰뚫은 뼈 촉수들이 그것들의 뼈와 살을 취했다.

마수들이 발버둥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치 미라처럼 전신의 체액을 모조리 빨리고는 축 늘어졌다.

야누스의 힘이 강해진 만큼 먹성도 좋아졌기 때문이다.

쐐액─!

원거리 공격을 하는 마수들이 독액을 쏘아냈다.

그러나 그 독액은 내가 쓰고 있는 하늘 고래의 망토를 뚫지 못했다.

과연 재질이 재질인 덕분인지 고작 저 정도 수준의 마수들의 공격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만 가면 무난하게 끝나겠지만, 애석하게도 한 가지 중대한 문제점이 있었다.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의 문제였다.

치이익······.

'뜨겁군.'

손끝에서 느껴지는 온도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 이상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사용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당분간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의 열을 식힐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튼, 지속성만큼은 별로라니까.'

그나마 메이벨 필그림에게 업그레이드를 받았기에 이 수준이지, 만약 아무런 업그레이드를 받지 않았더라면 진작 과열되어서 고철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이상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과열시킬 수는 없었기에 나는 나의 또 다른 주력 병기인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다잡았다.

철컥-

나는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샷건 모드로 변경하고는 달려드는 마수들을 향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너무나도 근접거리인 터라 A-985 폭발탄을 사용하기는 애매했기에, 나는 마수들의 접근을 저지하는 일반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화력이 부족해.'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금 에스더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다 밀어내라.'

[아 진짜 지쳤다고요. 밥도 안 주면서 이렇게 굴려먹어도 되는 거예요?]

'먹을 필요도 없으면서.'

[에휴······.]

에테르가 거칠게 들썩였다.

[밀어. 밀어.밀어.밀어.밀어.밀어.밀어.밀어.밀어.밀어.밀어.밀어.밀어.밀어.밀어.밀어.밀어.밀어.밀어.]

[쫓아내······.]

[오지 마아아아────!!!]

이윽고 단순 수치로 치면 레벨 4의 에테르 적합자에 달하는 에테르가, 1급 유령종인 에스더의 힘과 합쳐져서 방출되었다.

쿠우우우우우웅────!!!!

그렇게 나를 중심으로 일어난 에테르 폭풍이 주변을 밀어내자, 나는 탄창을 A-985 폭발탄으로 갈아끼웠다.

콰카카캉!!!

총구에서 불이 뿜어짐과 동시에 사방에서 마수들의 머리가 A-985 폭발탄에 의해서 터져 나갔다.

[카아악!]

[끼에엑!]

사방은 온통 적뿐.

그러나, 두려울 건 없었다.

'야누스!'

[기깃!]

야누스의 전신에서 뿜어진 뼈 촉수들이 마치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파박!

파바바바박─!

하지만 그것도 잠시.

A-985 폭발탄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에테르에 의해서 밀어냈던 마수들과의 거리가 점점 더 줄어들었다.

"쯧."

예상했던 대로 화력이 부족했다.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사용할 때야 상관없었으나, 이렇게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Ark-15 자동변환 소총의 화력만으로는 확실히 역부족이었다.

이 이상 포위되어 있다가는 정말로 위험할 수도 있었기에, 나는 한 가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굳이 아낄 필요는 없겠지.'

나는 거침없이 왼손에 있는 Z-74 제트팩 버튼을 눌렀다.

그와 함께 등 뒤에 있는 Z-74 제트팩이 불을 뿜어내며, 내 몸이 단번에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곧, 나를 포위하던 마수들은 마치 닭 쫓던 개처럼 나를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키엑!]

[카아아악!]

비록 NOA-8 중기관포나 TITAN-17 대마수 로켓 같은 중화기는 가져 오지 못했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걸 대체할 물건이 충분히 있었다.

나는 거침 없이 Ark-15 자동변환 소총 하부에 달린 NO-13 유탄 발사기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거나 쳐먹어."

퉁! 퉁! 퉁!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하늘에서 무수한 죽음이 쏟아져 내렸다.

< 크로노스 연합 (5) > 끝

NO-13 유탄 발사기를 통해서 토해진 유탄들이 지상을 향해서 쏟아졌다.

물론 TITAN-17 대마수 로켓으로 폭격을 가할 때보다는 위력 면에서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나, 질이 밀리면 양으로 밀어붙이면 그만이었다.

콰캉!

콰아아아아앙──!!!

나는 NO-13 유탄 발사기와 A-985 폭발탄이 장전된 Ark-15 자동 소총의 방아쇠를 교차로 연신 당겼다.

열관리 따위는 잊어버린 채로 쏟아내는 폭격.

순간적인 화력만큼은 TITAN-17 대마수 로켓 이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케에에엑!]

[그우우우우우─!]

자욱하게 일어난 폭연과 함께 마수와 마물들의 괴성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주인님! 위!]

에스더의 외침과 함께 위에서 비행종들이 나를 향해서 덮쳐왔다.

[카아악!]

나는 순간적으로 Z-74 제트팩의 출력을 높여서 비행종들의 공세를 피해내고는, 그대로 총구를 돌렸다.

"어딜."

철컥-

Ark-15 자동소총의 총구에서 토해진 불꽃과 함께 A-985 폭발탄이 건방진 습격자를 처참하게 응징했다.

[키에에에에······!]

그러나 습격자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날아들기 시작한 비행종들이 나를 향해서 일제히 덮쳐왔다.

"안 통한다니까."

다시금 발사된 A-985 폭발탄이 나를 지키는 탄막을 형성했다.

총알은 맞지 않았으나, 폭발에 휘말린 비행종들의 날개가 불타오르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카아악!]

그러는 와중에도 비행종들은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물론 Z-74 제트팩을 지닌 내게 기동력으로 승부를 보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행동이었지만 말이다.

쿠구구구───!!

순간적으로 Z-74 제트팩의 출력이 증가하며 비행종들과의 거리가 단번에 벌어졌다.

비록 그 탓에 Z-74 제트팩의 에너지 소모량이 늘어났으나, 아직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대충 반 정도는 정리했나.'

만약 누군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입을 떡 벌리고서 할 말을 잃었을 것이다.

개인이 마수의 군세를 향해서 할 수 있는 건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심지어 아크 바깥에서 홀로 마수의 군세에 맞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나에게 있어서는 언제부터인가 일상적으로 변한 풍경이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순간적으로 화력을 쏟아낸 터라 Ark-15 자동 소총과 NO-13 유탄 발사기가 상당히 과열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의 열기 조금 식긴 했지만··· 이 정도 숫자를 정리하기에는 부족해.'

무엇보다도,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는 나에게 있어서 비장의 수나 다름없다.

가급적이면 만약을 대비해서 아껴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캬오오오오오!!!]

그러는 와중에도 마수들은 포기하지 않고서 나를 향해서 흉험한 기세를 토해냈다.

비록 하늘 위에 있는 나에게 위협적인 마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지상에서 간혹 날아오는 돌팔매질이나 쏘아지는 독액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맞아도 야누스나 하늘 고래 망토에 알아서 막히겠지만··· 굳이 맞아줄 필요는 없으니까.'

원거리에서 폭격을 쏟아낼 수단은 이제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근접전뿐.

[···지금 뭐하려고요?]

'내려갈 거다.'

[굳이?]

'그 말대로, 굳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그대로 방향을 틀어서 지상으로 날았다.

Z-74 제트팩의 활용은 단순히 비행에만 있지 않다.

지상전에서도 Z-74 제트팩은 충분히 제 성능을 발휘하는 물건이었다.

'야누스.'

내가 왼손을 뻗자, 야누스에게서 칠흑의 창이 뻗어나왔다.

['엥켈렌스의 창'을 소환합니다!]

['엥켈렌스의 창' 소환 가능 시간 : 47분 12초.]

다만, 지금 뻗어 나온 엥켈렌스의 창은 평소의 세 배에 달하는 길이였다.

거의 전쟁용 장창 수준.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가 하려는 게 일종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에스더, 보조해라.'

[어련하시겠어요.]

내 주변에서 에테르가 움직였다.

다만, 에스더가 직접 통제하는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흉포한 에테르였다.

[카아아아아아악───!!!]

[다 죽여. 다 죽여. 다 죽여. 다 죽여. 다 죽여. 다 죽여. 다 죽여. 다 죽여. 다 죽여. 다 죽여. 다 죽여. 다 죽여. 다 죽여. 다 죽여······!]

[끼에에에에에에에!!!]

'날뛰기 딱 좋겠군.'

굳이 창을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Z-74 제트팩으로부터 흘러나온 추진력을 원동력으로 삼아서, 에스더와 가볍게 손을 맞춘 것만으로 그저 엥켈렌스의 창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 지상의 마수들이 쓸려나갔다.

[케에엑!]

[캬아아아악!]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몇몇 기민한 마수들은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으나, 이내 야누스에 의해서 가로막혔다.

[기깃!]

쐐색, 쐐새색───!!!

사방으로 뻗어 나간 뼈 촉수들이 나를 향해서 달려들던 마수들을 줄줄이 꿰었다.

[케헥!]

[가아아악······!]

애초에 야누스의 능력 자체가 강력한 소수보다는 약한 다수를 상대할 때 더 빛이 나는 능력인 덕분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러한 학살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칙, 치이익······.

Z-74 제트팩의 엔진 출력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효율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로 과하게 에너지를 소모한 탓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재충전되긴 하겠지만, 당장은 사용하기 어려웠다.

'뭐, 상관 없지.'

다시금 땅에 발을 디딘 나는 품속에 있는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어루만졌다.

꽤 오래 휴식을 취한 덕분인지 열기가 느껴지던 손잡이에서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제 남은 마수의 숫자는 처음에 비하면 1/4 수준에 불과했고, 이 정도면 나에게 있어서 큰 문제 없었다.

'다시 해볼까.'

지이잉······.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에서 파멸의 섬광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 * *

"전방에 7급 야수종 개체 12마리, 유효한 탄환은 저지력이 강한 슬러그 탄. 75방향에 8급 및 9급 거충종 17마리. 필요한 건 외피를 뚫기 위한 철갑탄. 그리고 후방에 잠재적 위협 요소로 보이는 10급 비행종 11마리······."

힐데가르트의 입에서 쉴 틈 없이 쏟아진 정보를 토대로, 정리를 마친 칼라킨에게서 지시가 떨어졌다.

"A-14 진형으로 간다. 각자 위치로."

아크의 병사들은 분대 단위 전투는 물론이고 소대와 중대, 그리고 대대 단위의 전투에서 필요한 진형에 대해서 필수적으로 훈련받는다.

칼라킨이 굳이 복잡한 지시를 내릴 필요도 없이, 이 정도 지시만으로 팀원들은 자신이 무얼 해야할지 알았다.

"아이리스. 후방의 위협 요소를 배제하는 걸 우선시해라."

"네."

"힐데가르트, 전황의 변화를 계속 보고해라."

"알았어요."

곧이어서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Ark-15 자동변환 소총에서 뿜어진 총성이 그것을 알렸다.

타앙─!

그 모습을 바라보던 드미트리는 이를 악물었다.

모두가 자기 자신들이 지닌 것들을 쏟아내면서 이 상황에 맞서고 있었건만, 드미트리에게는 저들처럼 특별한 것이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드미트리는 고귀한 혈통을 지니고 있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게 전부였다.

"빌어먹을······!"

물론 그렇다고 한들, 레드 라인의 귀족 출신으로서 자존심 높은 드미트리가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백번 천번 양보해서 칼라킨이나 힐데가르트까지는 그럴 수 있다.

그들은 아크에서도 인정한 특별한 인재들이었고, 드미트리도 내키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그들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아이리스만큼은 아니다.

레드 라인의 귀족인 그가 전장에서 한낱 저주받은 자에게 보호받는 처지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고.

'내가··· 내가······!'

뿌드득─

드미트리가 지니고 있던 레드 라인의 귀족으로서의 드높은 자존심에 조금씩 균열이 갔다.

권리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드미트리는 그러한 책임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실천하는 이였다.

그런데 이 비참한 꼴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익······!"

드미트리가 이를 악물고서 눈앞에 다가온 9급 야수종에게 달려들었다.

9급 야수종.

숫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다지 강한 개체는 아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안전한 아크의 성벽 위에서 상대할 때고, 이렇게 코앞에서 마주하는 9급 야수종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크르릉······.]

인간 따위는 한입에 삼켜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위협적인 송곳니가 드미트리를 향해서 벌려졌다.

"감히!"

드미트리의 손에 쥐어진 R-1 플라즈마 소드가 빛을 발했다.

플라즈마 소드는 평범한 병사가 지닐 수 없는 물건이었으나, 드미트리에게는 문제 될 것 없었다.

서겅!

R-1 플라즈마 소드에 의해서 9급 야수종의 머리가 단번에 잘려 나갔다.

그러나, 진형을 깨고서 너무 깊게 들어간 탓에 순식간에 드미트리가 마수들에 의해서 포위되었다.

"감히, 감히!"

드미트리가 마구잡이로 R-1 플라즈마 소드를 주변으로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마수들의 몸이 사정없이 잘려나갔으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R-1 플라즈마 소드의 빛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에너지를 너무 과소모한 탓이었다.

피이잉······.

R-1 플라즈마 소드의 빛이 꺼진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드미트리의 뒤에 있던 마수가 덮쳐왔다.

"피해요!"

아이리스의 외침과 함께 드미트리를 향해서 에테르가 움직였다.

[막아······.]

미약하기 짝이 없는 에테르.

그러나, 드미트리가 몸을 뺄 시간을 만드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허억, 허억······."

드미트리의 심장이 뛰었다.

만약 아이리스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위험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손 대지 마!"

드미트리의 눈에서 활화산 같은 분노가 차올랐다.

자신을 구해준 아이리스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이건,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내가, 내가··· 짐 덩어리라고?'

드미트리는 이미 과열되어서 고장나 버린 R-1 플라즈마 소드를 내던지고는, 품 안에 있던 또 다른 무기를 꺼내 들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가져온 DR-404 리볼버였다.

"드미트리! 위치를 떠나지 마라!"

"시끄럽다! 나에게 명령하지 마!"

칼라킨의 외침을 무시한 드미트리가 DR-404 리볼버를 말 그대로 난사하기 시작했다.

쾅─!

콰카캉!!

하지만 DR-404 리볼버는 강력한 파괴력만큼이나 반동도 큰 물건이었고, 네 발째가 되었을 때 드미트리의 오른쪽 어깨가 탈구되었다.

"큭!"

그나마 신체 보조 능력이 있는 5레벨 보호복을 입고 있었기에 이 정도 수준으로 끝났지, 만약 그 이하의 보호복이었다면 오른쪽 팔의 뼈가 부서졌을 것이다.

오른쪽 팔이 탈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드미트리는 DR-404 리볼버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이리스! 드미트리를 보조해라!"

"아, 네!"

칼라킨의 외침에 아이리스가 다시금 에테르를 일으키자, 드미트리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은 굴욕감을 느꼈다.

드미트리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지금도 아이리스는 피를 토하면서 억지로 에테르를 짜내며 드미트리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토록 멸시하고 무시해왔던 저주받은 자에게, 드높은 레드 라인의 귀족이 보호받고 있는 것이다.

'난, 대체······.'

한편, 칼라킨은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Ark-15 자동소총에 결합된 월광검을 휘둘렀다.

비록 드미트리가 폭주하기는 했어도, 쏟아낸 화력이 워낙 막강했던 터라 전황 자체가 크게 불리해진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유리해진 부분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다만 문제는 애초부터 이 인원으로 저만한 상대를 이겨내기가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이대로라면 희생자가 나온다.'

그게 현재 마수들 한복판에 고립된 드미트리가 될지, 아니면 이미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인 아이리스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아크의 외부 임무에서 희생자가 나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게 희생자를 만들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할 수 없나.'

칼라킨이 어떤 결심을 마치고서 Ark-15 자동소총에 결합된 월광검을 분리한 순간.

쐐액!

쐐새색─!!!

총성 대신 들려온 바람 소리와 함께 조사팀을 포위하고 있던 마수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건······.'

전혀 예상지 못하게 찾아온 구원의 손길에, 칼라킨의 시선이 빠르게 옮겨졌다.

그리고,

칼라킨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 크로노스 연합 (6) > 끝

바람 소리와 함께 픽픽 쓰러지는 마수들을 바라보며, 칼라킨의 시선이 재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음기를 꼈군.'

총성이 들려오지 않은 탓에 총이 쏘아진 방향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한곳에서 발사했더라면 칼라킨이 그 위치를 알아차렸겠지만, 쏘아진 총알의 방향은 한 곳이 아니었다.

'어디지?'

조사팀원들 중에서 그걸 유일하게 알 수 있는 이가 힐데가르트였으나, 애석하게도 현재 힐데가르트는 마수와 맞서느라 여력이 없었다.

'···칼 마커스인가?'

만약 그랬다면 좋았겠으나, 칼라킨은 그 가능성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아무리 칼 마커스라 할지라도 그 어마어마한 마수의 군세를 처리하거나 따돌리고서 여기까지 지원을 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칼 마커스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물리적인 시간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칼라킨이 이런저런 추론을 하는 동안, 그러는 사이에도 소리 없는 사격은 멈추지 않고서 마수들을 향했다.

[카악!]

[칵!]

숙련된 저격수들이라도 있는 건지, 그토록 두려웠던 마수들이 픽픽 쓰러졌다.

총알의 파괴력을 생각한다면, 대부분이 급소를 노린 저격들이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야.'

만약 지금 구원의 손길을 건넨 이들이 막대한 화력을 토대로 그들을 구했다면 또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조사팀을 돕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은 채로 장거리 저겨만으로 그 많은 마수를 사냥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좋지 않은 일이었다.

'···팀원들을 다시 모아야 해.'

지금처럼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이후에 발생할 상황에 대해서 지시를 내릴 수 없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러한 지시를 내리기에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드미트리와 아이리스는 지금도 마수들로 둘러싸인 적진 한복판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고, 힐데가르트는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이익!"

"끅!"

아무리 멀찍이서 지원이 오고 있다고는 해도, 지금 조사팀의 상황 자체가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드미트리로 인해서 진형이 깨진 것 역시도 이에 한몫하고 있었고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칼라킨은 월광검의 검신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베었다.

월광검의 검신에 칼라킨의 피가 깃들자, 순간적으로 주변의 마수들이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본질적인 두려움.

지금 칼라킨의 손에 쥐어진 월광검은, 마수들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

칼라킨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서 가장 먼저 힐데가르트에게 향했다.

"뒤로 물러나라!"

"네, 네?"

마수를 상대할 때, 근접 무기는 효율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게 기본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월광검을 쥔 칼라킨은 그러한 상식마저도 비웃듯이 단번에 마수 두 마리를 베어 갈랐다.

"팀원들이 있는 곳까지 돌파한다!"

그 말에 잠시 얼이 빠져 있던 힐데가르트 역시도 다시금 Ark-15 자동소총을 다잡았다.

"네!"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진형을 붕괴시키는 건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드미트리의 행동으로 진형이 무너진 데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의 지원 사격까지 있었던 터라 칼라킨과 힐데가르트는 꾸역꾸역 눈앞에 있는 마수들을 베어가르며 전진했다.

[케헥!]

[카아아아악!]

월광검에 깃든 빛이 잦아들었다.

그와 함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겁에 질려있던 마수들이 다시금 흉성을 토해내며 칼라킨에게 달려들었다.

"뒤에!"

힐데가르트의 비명이 울려 퍼지기 무섭게, 어디선가 날아온 바람 소리와 함께 마수의 미간에 꿰뚫렸다.

[칵······.]

그 모습을 본 힐데가르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총알이 날아온 방향으로 향했다.

"···아군인가요?"

"아직 모른다. 위치는 파악했나?"

"파악하긴 했는데··· 한둘이 아니에요."

"그렇겠지."

칼라킨이 씁쓸하게 웃었다.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를 상대가 자신들을 향해서 총구를 겨누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이쪽에서는 반격은커녕 상대의 위치나 규모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팀원들의 목숨이 고작 운 따위에 모조리 달리게 생긴 것이다.

'···이럴 때 칼 마커스가 있었다면.'

칼라킨은 이내 스스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칼 마커스가 보여주었던 말도 안 되는 일들 때문이었다.

'···이 이상 남에게 기댈 수는 없다.'

칼 마커스는 지금 생존 여부조차도 불투명한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언제까지고 남에게 기대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를 악문 칼라킨이 월광검을 계속해서 휘둘렀고, 마침내 아이리스를 비롯한 드미트리와 합류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어지간히도 길길이 날뛰었는지, 드미트리는 사실상 탈진한 상태였다.

아이리스 역시도 그러한 드미트리가 죽지 않게 보조하느라 그에 못지 않은 상태였다.

빈사 상태인 이들이 이를 악 물고서 필사적으로 무기를 휘두르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렇게 얼마나 싸웠을까.

마지막으로 서 있던 마수가 쓰러지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싸움이 마침내 끝을 고했다.

"끝··· 인가?"

드미트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이리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것··· 같아요."

"···흥."

"······."

그러나 칼라킨과 힐데가르트는 그러지 못했다.

지금, 어디선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을 의문의 저격수들의 존재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칼라킨! 저쪽!"

"보고 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마수 무리가 정리되기 무섭게, 조사팀 앞에 알록달록한 위장용 판초를 뒤집어쓴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을 드러낸 이들의 숫자는 대략 셋.

그러나 그게 전부일 리는 없었다.

칼라킨은 자신들을 구해준 의문의 인영들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질문을 해야 할 건 너희가 아니다."

예상했던 대답.

역시나 의문의 인영들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목소리 역시도 쓰고 있는 마스크에 울려서, 상대의 정체는커녕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도 파악하기 어려웠다.

"아크에서 왔나?"

그리고 이어진 질문에 저도 모르게 아이리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상대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군. 아크라··· 아크에서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

아이리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아니, 사실 엄밀히 따지면 아이리스의 탓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조사팀의 복장 자체가 아크의 보호복을 입고 있는 데다가, 팀을 파견할 수 있는 세력이 아크 외에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이리스의 실수는 너무나도 당연한 추측 중 하나를 사실로 확인시켜준 것뿐이었다.

"···우리가 말해야 합니까?"

"그러지 않아도 되지. 입을 열게 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도발입니까?"

"착각하지 마. 지금 너희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아크의 병사."

그 말대로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선택권을 지닌 건 칼라킨을 비롯한 조사팀이 아니었다.

"아크에서 왔다니 묻지. 아, 너희의 목적이 뭐니 하는 건 됐어. 어차피 그건 나중에 천천히 들을 테니까. 그보다······."

곧이어서 나온 말에, 칼라킨은 제 귀를 의심했다.

"칼 마커스라는 남자를 알고 있나?"

* * *

지이잉───!!!

BLT-47 플라즈마 발사기가 사방으로 휘둘러졌다.

본래의 용도와는 전혀 다른, 마치 플라즈마 소드처럼 휘둘러진 섬광들이 주변에 있는 마수들을 태우고, 갈랐다.

촤아아아악────!!!

열관리는 충분히 된 상황.

즉, 이것만으로도 나머지 마수들을 정리하기에는 차고 넘쳤다.

[키에에엑······.]

[카아아악!]

마수들이 괴성을 내지르거나, 혹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통째로 갈려 나갔다.

에너지 제약이 사라진 플라즈마 병기의 위력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진짜 살벌하긴 하네.]

1급 유령종인 에스더조차도 그 광경에는 질렸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그만큼 지금 내가 보이는 화력이 상식을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9급 괴수종, 독 발톱 랩터를 처치하였습니다.]

[9급 괴수종, 독 발톱 랩터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8급 괴수종, 변이된 비늘 뱀을 처치하였습니다.]

[8급 괴수종, 변이된 비늘 뱀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10급 거충종, 근면한 일개미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거충종, 근면한 일개미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

.

.

[8급 거충종, 거대 파리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거충종, 거대 파리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손에 쥐어진 BLT-47 플라즈마 발사기가 마치 춤을 추듯이 주변을 마구잡이로 휩쓸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치이익······.

그리고 마침내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에서 다시금 열기가 달아올랐을 때, 이미 주변에 살아서 움직이는 마수는 없었다.

[휘유······.]

'대충 됐나.'

[대충이 아니라 아주 깔끔하게 된 것 같은데요?]

이 정도 규모의 마수 무리를 정리했으니, 웨이브 때 아크의 부담도 상당히 줄어들 게 분명했다.

당분간은 웨이브를 신경쓰지 않고서 다른 곳에 여유를 부려도 될 거라는 이야기다.

'물론 기회가 되면 또 정리를 하긴 해야겠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는 앞서간 조사팀을 찾으러 갈 때였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대체 정체가 뭐에요? 플라즈마 병기가 그렇게 마구잡이로 쏴댈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알 거 없다.'

[치사하게. 운명 공동체끼리 그런 것도 말 못 해줘요?]

'언제는 단장한테 이른다더니.'

[······그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어요? 와, 진짜 쫌팽이네.]

'잘 아니 다행이군.'

에스더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Z-74 제트팩으로 날아가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방전된 상태였다.

물론 사용하려고 한다면야 조금 날 수야 있겠지만 금세 에너지가 바닥날 게 분명했기에 충전만 지연될 뿐이었다.

'호루스라도 타고 싶지만··· 그건 진짜로 안 될 일이겠지.'

결국, 나는 여기까지 와서 다시금 도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호루스로 어느 정도 이동한 뒤에 내리는 방법도 있겠으나, 만약을 대비해서였다.

'···호버링 바이크라도 하나 사야 하나.'

호루스가 있는 나에게 있어서 크레딧을 낭비하기 딱 좋은 방법이었지만, 이럴 때는 솔직히 말해서 좀 필요성이 느껴지긴 했다.

'나중에 크레딧이 남아돌면, 그때 하나 마련하든가 해야지.'

에휴······.

그렇게 나는 격렬했던 전투가 끝난 후 조금도 쉬지 못하고 곧장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거리가 거리인 탓에 부지런히 움직일 필요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지는 않겠지.'

이미 나는 조사팀과 헤어지기 전에 목적지까지의 상황을 대강 파악했다.

조사팀의 전력을 고려해볼 때, 비록 죽을 만큼 고생하더라도 아슬아슬하게 죽지 않고 살아서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분명히 그랬을 텐데······.

'···뭐지?'

없다.

칼라킨에게 말해두었던 협곡의 갈라진 절벽까지 왔는데, 조사팀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마수 무리에 당한 건 아닐 테고.'

만약 그랬다면 오는 길에 어떠한 흔적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흔적은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들뿐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일단 조사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게 어떤 일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도 사실.

"에스더."

[···설마 저보고 걔네 찾으라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죠? 에이 설마.]

"똑똑하군."

[······.]

"뭐해? 어서 안 가고."

[진짜 더럽고 치사해서······.]

"서두르겠다는 말을 이상하게 하는데."

[아악!]

비명과 함께 에스더의 몸이 이내 흐릿해졌다.

내 말대로 조사팀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내가 야누스에게 의지를 전달하자, 이에 감응한 야누스가 호루스를 호출했다.

예전처럼 아예 먼 거리라면 몰라도, 이 정도 거리라면 야누스로도 충분히 호출할 수 있었다.

[끼에에에에에에에───!!!]

야누스의 포효와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늘 위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지금까지 하늘을 배회하고 있던 호루스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자."

[키헷!]

< 크로노스 연합 (7) > 끝

"칼 마커스? 그게 누구지?"

설마하니 여기에서 그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 칼라킨은 애써 침착하게 대응했다.

상대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목적인지 무엇인지 모르는 마당에 이쪽의 정보를 순순히 말해줄 수는 없었다.

"흐음. 그런단 말이지?"

칼라킨이 단번에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체불명의 인영은 낮게 웃었다.

"그런데 말이야··· 네 옆의 동료들은 생각이 다른 것 같은데?"

칼라킨은 그제야 창백하게 질린 아이리스의 표정과, 배신감을 느끼는 드미트리의 표정을 보았다.

상반된 반응이었지만, 어쨌거나 저 둘의 반응은 일행들과 칼 마커스가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걸 알리기에는 충분했다.

"순순히 말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일단 같이 가지."

"···누구도 우리를 데려갈 수는 없다."

"그것도 좋지. 나는 이런 종류의 설득도 싫어하지는 않아."

철컥-

놀랄 만큼 빠른 손놀림과 함께 순식간에 칼라킨의 미간에 총구가 겨눠졌다.

크로노스제 대물 저격총인 CRN-444였다.

비록 아크가 크로노스에 비해서 장비의 수준이 높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같은 등급의 장비일 때다.

지금 눈앞에 있는 CRN-444 대물 저격총은 Ark-15 자동변환 소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등급의 장비였다.

달리 말하자면, 일단 방아쇠가 당겨지면 칼라킨은 확실하게 죽는다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무슨 짓을!"

곧이어서 힐데가르트와 드미트리, 그리고 아이리스의 손에 쥐어진 총구가 위장용 판초를 쓴 저격수들에게 향했다.

"따라올 텐가? 아니면 여기에서 서로 죽일 텐가?"

드미트리가 말했다.

"엿 먹어."

"입이 험한 도련님이군."

칼라킨은 정체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단순히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저격수들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앞의 인물에게서는, 총구를 앞에 둔 자의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숨겨둔 한 수가 있다는 듯이.

'설마.'

무언가 이질감을 느낀 칼라킨이 월광검을 다잡으려던 순간.

[킥, 키킥······.]

[가지고 놀자.]

[재미 있어······!]

[끽끽긱!]

주변에서 들썩거리기 시작한 에테르가 단번에 칼라킨을 비롯한 조사팀원들을 단번에 옭아맸다.

'에테르 적합자!'

만약 칼라킨이 월광검을 휘두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모를까, 미간에 총구가 겨눠진 상황에서 그런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아니, 단지 그뿐이었다면 움직였겠지만, 칼라킨이 진짜로 경계하는 건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저격수들의 존재였다.

'아이리스는?'

신변이 구속된 상태에서 상대의 에테르에 대항할 수 있는 건 같은 에테르 적합자인 아이리스뿐이었다.

그렇기에 칼라킨은 아이리스에게 희망을 걸었으나, 이내 그 희망을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아이리스의 입가에서 흐르는 핏줄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콜록! 콜록!"

"무리하지 마. 허여멀건 한 게 몸도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가면의 인영이 이죽거렸다.

아니, 설령 아이리스의 컨디션이 멀쩡했다 하더라도 이 정도 에테르를 상대로 어쩔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정도로 지금 조사팀을 얽맨 에테르는 거대하고, 또한 위협적이었다.

"······."

칼라킨은 이를 악물었다.

모든 게 자신의 실책인 것만 같았다.

'만약 칼 마커스였다면······.'

칼라킨은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느끼고는 놀랐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의지해본 적 없던 그가, 지금 타인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이 빌어먹을··· 저주받을 족속들이······!"

"영혼의 축복을 아크에서는 그렇게 부르더군. 어이가 없는 일이지."

"닥쳐라! 네까짓 게!"

드미트리가 으르렁댔으나, 이미 팔다리가 묶인 맹수는 발톱을 세운 고양이조차 되지 못했다.

곧이어서 움직인 에테르가 드미트리의 기도를 조였다.

"컥, 커헉!"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드미트리의 몸이 축 늘어졌다.

죽은 건 아니었다.

다만, 기절했을 뿐.

"드미트리!"

그 모습을 본 아이리스가 악을 썼으나, 이내 가면의 인영에게 마찬가지로 기도를 졸렸다.

"컥, 커헉!"

하나씩, 하나씩.

조사팀원들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만! 순순히 따라가겠다!"

이를 악문 칼라킨의 입가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건방진 고양이 새끼는 매가 답이지. 전부 끌고 가. 알아내야 할 게 많다."

* * *

[키에엣!]

호루스를 타고서 하늘로 날아오르자, 아득하기만 해 보였던 협곡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역시 없군.'

예상했던 대로 이 높이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사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을 벗어나는 데 필요한 물리적인 시간대를 고려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근방을 벗어날 정도의 시간은 아니었어. 아직 이 근방에 있는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뿐.

조사팀이 하늘에서 보이지 않은 위치로 이동했을 가능성.

즉, 어딘가 은신처 비스름한 장소에 몸을 의탁하고 숨었다는 뜻이다.

'다만, 자의는 아니었을 거다.'

애초에 조사팀 입장에서는 내 말을 무시하고 합류 포인트를 떠날 이유가 없다.

하물며 그곳에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아니··· 애초에 합류 포인트였던 갈라진 절벽에 왔던 흔적도 없었지.'

그렇다면 조사팀은 타의에 의해서 합류 포인트에도 가지 못하고서 어디론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혹은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서 죽었거나.

'후자의 가능성은 적어.'

만약 그랬다면 마수들의 시체가 있던 곳에 어떤 형태로든지 조사팀의 흔적이 남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그런 흔적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나열된 정보들을 종합했다.

사라진 조사팀.

그 자리에서 죽은 마수들의 시체.

별달리 보이지 않는 저항의 흔적.

하늘 위에서 바라보아도 보이지 않는 조사팀의 흔적.

'모종의 세력이 개입했다.'

이 근처에 그럴 만한 세력은 오직 한 곳뿐.

아니, 애초에 조사팀이 무엇을 찾아서 이곳까지 왔는지를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러했다.

'크로노스 연합.'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은 크로노스 잔당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으나, 중요한 건 조사팀이 그들과 맞닥뜨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었다.

'쯧.'

물론 그 가능성을 아예 배제한 건 아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방치했다가 결국 일이 이렇게 됐다.

어지간히도 운이 없었다고 봐야 할지, 아니면 내가 미숙했다고 해야 할지······.

'차라리 잘 됐다고 봐야 하나.'

어차피 이번 임무를 생각한다면 크로노스 연합을 어떤 형태로든 만나긴 해야 했다.

저쪽에서 먼저 찾아와 준다면야, 결과적으로 본다면 나쁠 건 없었다.

'칼라킨 일행이 인질로 잡혀 있는 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나중에 크로노스 연합이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게 된 이후라면 모를까, 지금의 크로노스 잔당들은 아직 아크의 적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아크 측에서도 이렇게 미온적인 태도로 조사만 하려고 하는 것이었고 말이다.

그 이야기인즉슨, 크로노스 잔당 측에서도 아크의 병사들인 칼라킨 일행을 함부로 건드리지는 않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지금 시점에 이 근방에서 크로노스 잔당이 있는 곳이라면··· 역시 그곳인가.'

협곡 아래의 갈라진 절벽들에는 무수한 동굴들이 나 있다.

그중에서 몇 곳은 절벽 안쪽에 있는 굴과 연결되어 있는데, 크로노스 잔당들은 그곳을 고향을 잃은 뒤 임시 거처 중 하나로서 활용하고 있다.

통칭 개미굴이다.

'협상이 필요하겠군.'

물론 마치 미로 같은 길을 자랑하는 개미굴의 구조상 함부로 발을 디뎠다가는 나올 수 없었으나, 미로의 길을 완전히 꿰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는 해당이 없는 이야기였다.

'뭐, 여차하면 야누스로 땅을 파고 나와도 되고.'

나는 호루스의 고삐를 잡았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협곡 아래로 호루스를 몰았다.

[저 왔어요.]

'찾았나?'

에스더가 씨익 웃었다.

[물론이죠.]

* * *

칼라킨이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쇠사슬로 묶여 있는 자신의 몸이었다.

늘 자신의 몸을 지켜주던 보호복 역시도 발가벗겨진 상태인 데다가, 무엇보다도 월광검을 비롯한 그의 수족들이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일어났나?"

그제야 칼라킨의 시선이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맞은 편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목소리.

아니, 정확히는 익숙한 울림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눈앞에 있는 가면의 인영은 칼라킨이 알고 있는 이였다.

"···우리가 아크 소속이라는 건 알고서 이런 짓을 하는 건가?"

"의외인걸. 소속 세력을 등에 입고서 천방지축 모르고 날뛰는 유형은 아닌 줄 알았는데."

가면의 인영이 키득 웃었다.

"뭐, 됐고. 이곳에 온 목적이 뭐지?"

"말할 것 같은가?"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어차피 다른 녀석한테 물어보면 될 테니까. 어느 쪽 손가락이 좋아? 너한테 선물로 줄까 하는데."

"······."

칼라킨은 입을 닫았다.

주도권은 이미 넘어갔고, 상대는 타협이 통하지 않는 상대다.

괜히 어설프게 입을 열어봐야 정말로 팀원들의 손가락을 선물로 받게 될지도 모른다.

"말 안 하려고? 사실 짐작가는 건 있어. 어지간히도 우리의 움직임이 거슬렸나 봐?"

그 말에 칼라킨은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 상대가 스스로 밝혔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크로노스 잔당."

"잔당이라는 말은 빼주지. 비록 고향을 버리고 도망친 처지지만, 너희에게까지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거든."

가면의 인영이 말했다.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말해줄까?"

"······."

칼라킨은 묻지 않았다.

그걸 듣는 순간, 이곳에서 살아나갈 확률이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면의 인영은 짓궂은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연합을 만들 거야. 멸망한 도시들을 한곳으로 묶은, 크로노스 연합을."

"그게 무슨······."

그 말에는 칼라킨조차도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멸망한 도시들의 잔당 세력들이 하나의 세력으로 응집한다면,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크로노스 잔당이 몇 가지 움직임을 취했다는 것만으로 아크에서는 이렇게 조사팀을 파견하지 않았는가?

"아크의 목적인지 무엇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우리를 방해할 생각이라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아."

웬만해서는 냉정함을 잃지 않는 칼라킨조차도 지금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아크에 알려야 한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일어나려 한다.

그렇기에 칼라킨은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에서 살아나가야만 했다.

설사 그게 굴종을 의미하는 것일지라도.

"···칼 마커스는 왜 찾지?"

칼 마커스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지금까지 내내 주도권을 쥐고 있던 가면의 인영이 살며시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걸 네가 알아야 하나?"

"그러면 우리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하! 이빨을 드러낼 때는 언제고 도와?"

가면의 인영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뭐, 그래도 한 가지 사실은 알려주지. 칼 마커스, 그자는 나의······."

가면의 인영의 말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어느 순간 느껴진 거대한 진동 때문이었다.

"···응?"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개미굴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 크로노스 연합 (8) > 끝

콰르르릉───!!!

천장이 무너져 내린다.

쏟아져 내리는 돌무더기 속에서 칼라킨은 필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이대로 돌무더기 속에 생매장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칼라킨은 알 수 있었다.

이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 명백히 인위적인 붕괴였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물론 크로노스 잔당들에게도 적대적인 세력이나 원한을 지닌 이들은 있을 것이다.

아크 바깥에서 살아간다는 게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칼라킨 본인을 포함한 조사팀원들을 구하는 것이었다.

"대체 어떤 자식이······!"

무너져 내리는 공동을 바라보며, 가면의 인영이 드물게 감정을 드러냈다.

이대로라면 가면의 인영이 떠날 게 분명했기에, 칼라킨이 가면의 인영을 붙잡아 세웠다.

"이봐! 날 풀어줘라."

그와 함께 가면의 인영이 칼라킨을 돌아 보았다.

분노로 이글대는 눈동자가 가면 너머에서 느껴졌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정말로 우리가 죽으면 곤란할 텐데? 그러면 아크에서 새로운 조사팀을 파견할 거다. 우리 같은 애송이가 아니라, 진짜 조사팀을."

"내가 그딴 말에 굴할 것 같나?"

"우리가 죽으면, 칼 마커스에 대한 것도 영영 알 수 없게 될 거다."

"······."

그 말이 먹힌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건지는 몰라도 가면의 인영은 이내 칼라킨의 속박을 풀어주었다.

"···허튼 수작을 부릴 생각은 마."

"걱정하지 마라. 아직은 없으니까."

"뒷말이 거슬리긴 하지만··· 일단 알았다."

속박에서 풀린 칼라킨이 말했다.

"내 동료들은 어디에 있지?"

"···따라와라. 어차피 가는 길이니."

난데없이 붕괴 현상에 개미굴은 혼란 그 자체였다.

"공격이다!"

"서둘러!"

복잡하기 짝이 없는 개미굴 속에서 온갖 무장을 한 이들이 뛰쳐 나왔다.

칼라킨 역시도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어중이 떠중이들이 아니야.'

동굴이 무너져 내리는 혼란 속에서도 크로노스 잔당들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상황에 대처했다.

마치 이런 일 정도는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이.

칼라킨이 보기에 크로노스 잔당들의 수준은 전체적으로 매우 높았다.

아니, 애초에 처음에 마수 무리로부터 조사팀을 구했던 저격수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가면의 말대로 이들을 주축으로 연합이 만들어지게 된다면, 아크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이들이 아크를 적대하는지 적대하지 않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이들이 그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순간.

쿠르르르르릉───!!!!

다시금 공동이 격하게 흔들리며 돌 무더기가 쏟아져 내렸다.

다시금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봐! 내 장비들은 어디에 있지?"

"네 동료들과 함께 있다. 따라오기나 해!"

그러나 발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통로가 무너져 내리며 길이 막혔다.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건 어디서 공격하는 거지?"

"알 거 없어."

칼라킨이 슬쩍 물었으나, 가면의 인영을 답해줄 기미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칼라킨은 가면의 인영의 뒤를 따라서 걸었다.

그 순간.

"이건······."

앞서 가던 가면의 인영이 갑작스럽게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드디어, 드디어······."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으니 가면의 인영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무언가 환희에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혹은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다.

'뭐지?'

칼라킨의 의아함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어둠으로 물든 개미굴의 통로 저편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우··· 더럽게 깊게도 숨었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투덜 거린 그의 모습을 보자, 칼라킨은 그대로 할 말을 잃었다.

'칼 마커스······.'

그가 살아 있었다.

아니, 그가 조사팀을 구하러 나타났다.

대체 어떻게 알고서 온 건지, 혼자서 그 마수의 군세는 어떻게 상대한 건지, 그 외에도 묻고 싶은 말이 수백 수천 가지가 넘었다.

그러나 지금 드러난 사실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칼 마커스가 왔다.

"칼 마커─"

칼라킨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가면의 인영이 내뱉은 외침 때문이었다.

"오, 오라버니!"

너무나도 생소한 단어.

조용히 그 단어를 곱씹던 칼라킨의 얼굴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 * *

처음 내 계획은 심플했다.

개미굴의 입구 중에서 숨겨진 입구로 숨어든 후에, 은밀하게 조사팀 일원들을 빼내는 것.

그러나 모든 계획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붕괴 현상과 함께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콜록! 콜록!"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가 앞을 가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이번 방문이 그다지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무슨 일이야?'

잠시 상황을 지켜보러 개미굴 바깥을 다녀온 에스더가 말했다.

[이곳이 공격받은 것 같아요.]

'공격? 누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모트교 놈들 같아요.]

'모트교라··· 놈들이 여기는 왜?'

[그거야 저도 모르죠. 별로 안 친한가 보죠.]

'쯧.'

아무튼, 이 세계에서 무언가 이상하다 싶으면 그 원인은 모트교 아니면 모트교라는 격언이 딱 들어맞는다.

물론 그중에는 가끔 그림자단 같은 놈들이 끼어 있긴 했지만, 진정한 꼬장 전문가인 모트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림자단은 소수 집단이었고, 목적을 위해서 움직이는 집단이었으니까.

심심하다 싶으면 여기저기 행패를 부리고 다니는 모트교와는 질적으로 다른 집단이라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개미굴이 공격받기 시작했다면, 나에게 남겨진 시간도 썩 여유롭지만은 않았다.

그나마 그중에서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개미굴 내부에 혼란이 번지고 있는 와중인 탓에 외부인인 나에게 크게 신경을 쓰는 이가 없었다는 점일까.

"저쪽이다!"

"이쪽으로 와!"

"지원 요청이다!"

크로노스 연합, 아니 아직은 연합이 되지 않은 잔당들이 바쁘게 개미굴을 뛰어다녔다.

은밀하게 잠입하려고 했던 나로서는 참 묘한 광경이었으나, 좋은 게 좋은 거려니하고 넘겼다.

[···이렇게 대놓고 돌아다녀도 되는 거였어요?]

'어차피 저들도 저들끼리 전부 알지는 못해. 아직 연합이 만들어지는 도중일 테니까.'

[연합? 무슨 연합요?]

아차.

'됐고, 조사팀원들이나 찾아 봐라.'

[제가요?]

'어.'

[왜요?]

'하라면 할 것이지 말이 많아.'

[악덕 주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스더의 몸이 흐릿해졌다.

매번 투덜거리면서도 시키는 건 나름대로 착실하게 수행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에스더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어요.]

'상황이 어떻지?'

[누구랑 같이 움직이는 것 같은데··· 일단 분위기 자체가 험악하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일시 휴전 같은 느낌?]

'흐음. 일단 안내 해라.'

나는 에스더의 안내에 따라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쪽이예요.]

'그쪽은 막다른 길이다만.'

[으음··· 그러면 이쪽?]

'조금 전에 무너져 내렸다.'

[어라? 여기가 아닌가?]

'···똑바로 안 해?'

[웁스, 실수.]

아무래도 유령종 특성상 모든 벽을 뚫고 다니다 보니, 에스더의 길 안내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만약 이곳이 지상이고, 호루스를 타고서 이동하는 거였다면 더없이 적합한 안내 방식이었겠지만, 이곳은 온갖 길이 미로처럼 나 있는 개미굴이었다.

'···그냥 네가 보았던 풍경을 말해봐라. 내가 알아서 찾아가지.'

[진작 그렇게 말하지.]

이걸 확 팰 수도 없고······.

'아니, 그냥 패?'

나는 괜히 탄입대에 있는 실험탄 GHOST-157가 든 탄창을 만지작거렸다.

미간에 한 방 제대로 쏴줄까 하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 터라 쓸데없는 짓을 할 여유가 없어서였다.

'운 좋은 줄 알아라.'

[네? 뭐가요?]

'됐고, 본 거나 말해봐라.'

[음, 일단 앞에 세 갈래로 나눠진 통로가 보였어요. 그리고 오른쪽 벽에 녹색 전구가 있었고, 또······.]

'대충 알겠군.'

[진짜 이것만 듣고 안다고요?]

'그래.'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칫 늦었다가는 칼라킨을 비롯한 힐데가르트, 드미트리, 아이리스가 희생되는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누군가의 옆에 있는 칼라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우··· 더럽게 깊게도 숨었네."

내가 흙먼지를 손사래치면서 앞으로 나아가자, 칼라킨이 나를 보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칼 마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들려온, 묘하게 낯이 익은 목소리.

"오라버니!"

······으응?

"···지금 뭐라고?"

"오라버니, 살아 있었구나!"

······뭔 버니?

내가 잘못들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당황한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평소 웬만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칼라킨조차도 얼이 빠진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앞에 있는 정체불명의 가면인이 나를 향해서 쏘아붙였다.

"왜 이제야 온 거야!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나를 오라버니라 칭한 이는 다름 아닌 가면을 쓴 괴한이었다.

정황상, 칼라킨을 이곳까지 끌고온 장본인 같긴 한데······.

'아니 그것보다··· 저 가면, 무언가 익숙한데······.'

나는 낯섬과 익숙함이 공존하는 이 기묘한 상황 속에서,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했다.

[오라버니? 가족이에요?]

'···글쎄.'

[가족이면 가족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글쎄는 또 뭐예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뭐 이런··· 진짜 쓰레기네. 어떻게 혈육을 버릴 수가 있어?]

에스더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설령 눈앞에 있는 이가 내 동생이라고 한들, 칼 마커스의 동생이지 내 동생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목소리가 묘하게 낯이 익다는 거지.'

고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모르면 물어보면 되는 법이었으니까.

"오라버니라니? 나를 아나?"

"···지금 장난치는 거지? 안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나를 까먹어?"

"아니, 진짜 모르는데."

비록 가면에 가려져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면 안쪽의 사람이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어, 어떻게 오라버니가 나를 잊을 수가 있어······!"

"됐고, 가면이나 벗어보지."

"아."

그제야 가면인의 눈이 끔뻑였다.

자신이 한 멍청한 실수를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난 모습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나를 오라버니라 부른 이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때? 이제 기억 났어?"

갈색 눈동자와 갈색 머리카락.

나는 그 모습을 알고 있었다.

"···그래. 기억났다."

나는 필사적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칼 마커스는 크로노스 인근에 있는 부족 출신의 인물이다.

칼 마커스는 크로노스가 멸망할 때 쿠릴타를 비롯한 피난민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고, 간신히 아크에 도착했다.

그렇다면 본래 칼 마커스와 같은 부족민 중 칼 마커스와 함께 아크로 향하지 않은 이들은 어디로 갔는가?

깊게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크로노스 인근에 살던 부족민들이 크로노스 잔당이 되는 건, 얼핏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였으니까.

'···이 당연한 걸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니.'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이 닿을 틈이 없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상식적으로 간신히 크로노스를 탈출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까지 어떻게 신경을 쓰겠는가?

하물며 얼굴조차 모르는 동생이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라니아.'

파멸의 라니아.

훗날의 크로노스 연합의 이인자.

그리고, 아크를 파멸시킬 이.

그 여자가 내 동생이었다.

< 크로노스 연합 (9) > 끝

파멸의 라니아.

그 여자에 대한 내 기억은 솔직히 말해서 좋은 기억보다는 좋지 않은 기억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볼 수 있었다.

「"이제, 아크는 끝이다."」

「"위대한 영혼의 뜻으로."」

「"다, 죽어."」

파멸의 라니아는 흔히 말하는 성장형 빌런이다.

라니아가 지닌 에테르에 대한 감각은 스테이지 극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그 괴물 같던 그림자단의 단장마저도 뛰어넘을 정도였으니, 그 재능이 어떨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실제로 파멸의 라니아를 방치한 채로 스테이지가 진행되면, 아크가 크로노스 연합에 의해서 무너지는 경우도 존재했다.

그렇기에, 파멸의 라니아는 더 디펜스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스테이지 중반부가 되기 전에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빌런 중 하나였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아크는 말 그대로 파멸을 피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라니아가 칼 마커스의 동생이었다니······.'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나, 칼 마커스가 지닌 말도 안 되는 재능이 혈통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늘 위대한 영혼의 뜻이라고 했었지.'

당시에는 별 의미 없는 대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제 입으로 칼 마커스와의 관계를 실토하고 있는 셈이었다.

'위대한 영혼의 후예.'

그건 칼 마커스뿐만이 아니었다.

라니아 마커스.

아마 그게, 훗날 아크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파멸의 라니아의 이름이리라.

"오라버니라면 살아있을 줄 알았어!"

복잡한 내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니아는 해맑은 미소를 띠면서 나를 반겼다.

나로서는 부담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얼굴은 왜 이렇게 허얘졌어? 꼭 기생오라비같이. 뭐 잘못 먹었어?"

"···딱히 모르겠는데."

그러고 보니, 분명히 피부색이 라니아보다 진한 구릿빛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온천욕 때문인가?'

노아에서의 온천욕이 피부 미용에 좋다는 설명을 얼핏 본 것 같기도 하고······ 뭐, 모르겠다.

지금 상황에서 그게 중요한 건지도 잘 모르겠고.

"······오라버니라고?"

그제야 옆에서 가만히 이 사태를 관망하던 칼라킨이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칼 마커스. 크로노스 잔당들과 아는 사이였습니까?"

"그렇게 된 것 같군."

"······몰랐다는 겁니까?"

"그래."

"······."

칼라킨의 눈빛에서 불신이 묻어났다.

어쩔 수 없었다.

설사 내가 칼라킨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상황을 쉽게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이 상황에서 나를 크로노스의 간자로 의심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겠지.'

안 그래도 내 출신이 크로노스 인근의 부족 출신이라는 건 아크에도 알려진 사실이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건 말 그대로 순식간이리라.

한편, 칼라킨이 그러거나 말거나 라니아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역시나 부담이 될 정도였다.

"오라버니, 이 자들과 아는 사이야?"

"그래. 같이 왔다."

"아크에 무사히 도착한 거구나!"

"그래."

내가 아크의 조사팀과 함께 왔다는 사실에도, 라니아는 그저 기쁜 기색뿐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아크를 증오하는 크로노스 연합의 라니아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함께 도착했어?"

"쿠릴타라면 무사하다."

"그 대머리는 관심 없고."

"······."

쿠릴타가 들으면 섭섭하겠는데.

"생존자는 나와 쿠릴타를 포함해서 몇 명 없었다."

"···그래?"

그 말에 라니아의 눈꼬리가 살며시 내려갔다.

내가 알고 있는 라니아의 모습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마치 불쌍한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오라버니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물론 오라버니라면 살아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원래대로 역사가 흘러갔다면 칼 마커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상황에서 살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만큼 당시의 상황은 긴박했고, 스컬 하운드를 중심으로 한 헬하운드들의 추격은 집요했다.

"그리고 할아버님은··· 끝까지 우리를 지키다가 돌아가셨어."

할아버님이라······.

당연히 내가 그게 누구인지 알 리가 만무했으나, 몇 가지 짐작가는 건 있었다.

내가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쿠릴타가 얼이 빠져 있는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칼! 얼 타지 말고 이거나 받아!"」

「"이걸 왜 나한테······."」

「"망할! 노친네한테 몇 마디 들은 걸 아직도 꽁해 있는 거야? 장난칠 상황 아니니까 준비나 해!"」

「"···준비? 무슨 준비?"」

「"젠장! 네 마음대로 해!"」

아마 쿠릴타가 말한 노친네가 바로 라니아가 말한 할아버님과 동일 인물일 터.

'···나중에 쿠릴타에게 물어봐야겠군.'

피난길에 오르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어째서 칼 마커스와 라니아 마커스가 서로 다른 길로 찢어지게 된 건지.

"미안해 오라버니. 할아버님을 지키지 못했어. 내가 너무 약해서······."

라니아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내 가슴에 얼굴을 박고서 울었다.

"고생 많았다."

나는 내 품에 안겨있는 라니아를 살며시 흘겨보았다.

'지금 죽여야 하나?'

파멸의 라니아가 칼 마커스의 동생이라는 건 대충 알겠다.

지금 보이는 행동을 보건대, 딱히 칼 마커스를 원망하거나 하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게 꼭 라니아가 나에게 우호적일 거라는 보증은 되지 않는다.

'아니··· 설사 우호적이라 할지라도 크로노스 소속으로서 라니아 나름대로 입장이 존재할 터.'

아무리 혈육이라고 한들, 파멸의 라니아는 크로노스 연합 소속이다.

그것도 훗날 크로노스 연합의 이인자까지 꿰차며, 사실상 크로노스 연합의 무력을 상징하게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쉽게 죽일 수 있다.'

파멸의 라니아는 성장형 빌런이지만, 스테이지 초반부라고 볼 수 있는 현재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아니, 지금도 칼라킨보다는 강하다고 볼 수 있었으나, 나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 라니아는 나를 완전히 믿고서 무방비한 상태.

지금의 나라면, 라니아가 무언가를 느낄 새도 없이 죽일 수 있었다.

미래에 아크를 파멸로 몰고올 자를, 아무런 피해도 없이 깔끔하게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유는 충분하다.'

라니아를 죽이게 된다면, 현재 칼라킨이 나에게 품고 있는 의심 역시도 완전히 없앨 수 있다.

그리고, 개미굴 안에 있을 조사팀원들을 구출한 뒤에 유유히 이곳을 빠져나가면 된다.

평상시였다면 조금 어려웠겠지만, 현재 개미굴 안은 누군가의 습격으로 인해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흐음······.'

분명히 그럴 텐데······.

이상하게 손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파멸의 라니아는 아크에 있어서 큰 위협요소다.

아크를 위해서라면 죽여두는 게 여러모로 좋은 게 사실이었지만······.

'정말로 그걸로 충분한가?'

나는 지금까지 내 손으로 파멸의 라니아를 무수히 많이 죽여왔다.

그 덕분에 아크는 크로노스 연합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나는 끝내 더 디펜스를 클리어하는 데 실패했다.

물론 그때는 생각했다.

총알만, 총알만 있다면 클리어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정말로 그걸로 충분한가?

다른 방법이 있지는 않았을까?

'만약 크로노스 연합을 아크의 우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아니, 우군까지도 필요없다.

그저 크로노스 연합이 아크를 적대하지 않고 중립을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게 바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쩌면 라니아 마커스라는 인물과 칼 마커스의 관계를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칼 마커스를 대하는 라니아의 태도를 보건대,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굳이 아크와 크로노스 연합을 우호적인 관계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저, 적대적인 관계만 형성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파멸의 라니아는 훗날 크로노스 연합의 이인자이자, 실세가 되는 인물이다. 라니아를 잘 설득할 수만 있다면, 아크와 적대적이지 않은 관계를 맺는 것도 가능하다.'

오랜 고민의 결론을 내린 나는 조심스럽게 라니아의 등을 토닥여 주고는 말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않나?"

"아."

그제야 라니아는 눈물 콧물이 줄줄 흘러나온 얼굴로 내 옷에 그것을 닦아냈다.

"······."

"왜 그래? 혹시 비싼 옷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비싼 옷이고 뭐고, 보통은 남의 옷에 그렇게 코 풀고 그러지는 않지 않나?

새삼스럽게 쿠릴타가 굉장히 신사적인 인물이었다는 걸 느끼면서, 나는 무너져 내리는 공동을 바라보았다.

"우선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알았어. 날 따라와."

"아니,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아크에서 파견된 조사팀원들은 어디에 있지?"

라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떤 년이야?"

"응?"

옆에 있던 칼라킨 역시도 그 말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뜨악한 얼굴로 나와 라니아를 번갈아 보았다.

"뭘 말이지?"

"어떤 년이길래 이 상황에서 오랜만에 만난 동생과의 재회도 제쳐두고 구하려고 하는 거야? 아, 혹시 그 얼굴 허연 그 년인가? 아니면 개눈깔년?"

"······."

아이리스와 힐데가르트를 향한 폭언 속에서도 나는 그대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건 아니다. 그냥 팀원으로서 구하려는 거다."

라니아가 씨익 웃었다.

"진작 그렇게 말하지. 따라와."

"······."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알고 있던 잔학무도하기 짝이 없던 파멸과는 영 매치가 안 되는 느낌이었다.

이래서야 꼭 진짜로······.

[남매 맞네요.]

'···어딜 봐서.'

[성격 이상한 것부터 뻔뻔한 것까지 완벽한 혈육인데요?]

'······.'

그 순간, 앞장서서 개미굴 통로를 걷고 있던 라니아가 시선을 돌렸다.

"그 년은 누구야?"

[히끅!]

물론 단순히 힘의 크기만 보면, 1급 유령종 출신인 에스더가 라니아에게 겁을 먹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라니아가 지닌 알 수 없는 분위기 탓인지, 에스더는 할 필요도 없는 딸꾹질까지 하면서 지레 겁을 먹었다.

[내, 내가 보여요?]

무슨 삼류 영화에 나오는 귀신같은 대사를 친 에스더는 다시 한번 라니아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했다.

사실 에테르 적합자가 유령종을 보는 게 그다지 특이한 일도 아니었건만, 아무래도 일정 수준 이하의 에테르 적합자들은 에스더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조사팀원 중 하나였던 아이리스 역시도 에스더를 보지 못했고 말이다.

"오라버니. 저거 뭐야?"

"···신경쓰지 마라."

"흐음.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하니까 알겠어. 하지만 너."

라니아가 두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지켜볼 거야."

[······.]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통로를 에테르로 억지로 붙든 채로 우리는 개미굴을 나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조사팀원들이 감금되어 있는 감옥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칼라킨? 당신도 잡힌 건가요?"

"아니. 구하러 왔다."

그와 함께 힐데가르트의 시선이 칼라킨을 지나서 라니아와 나를 향했다.

"···칼 마커스."

"함부로 오라버니 이름을 부르지 마."

"···예?"

갑작스럽게 끼어든 라니아의 말에 힐데가르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옆에 있던 드미트리와 아이리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너무 놀랐는지, 말은커녕 입만 뻐금거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설명하는 데만 온종일 걸릴 같았기에, 내가 끼어 들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주지. 우선 나가야 한다."

그 말마따나 애석하게도 일일이 설명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지금도 개미굴의 공동과 통로가 돌무더기를 흩뿌리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까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는 걸 라니아와 에스더가 억지로 붙들고 있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아."

라니아가 감옥 문을 열고 조사팀원들의 속박을 풀어 주었다.

"우리 장비는?"

"저기."

조사팀원들이 빠르게 재무장을 마친 뒤, 각자의 무기를 쥔 채로 라니아를 경계했다.

"뭐야, 해보려고? 후회할 텐데."

라니아의 주변에서 에테르가 들썩거렸다.

아무리 칼라킨이 월광검의 주인이라고는 해도, 지금 수준으로는 라니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끼어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여기에서 깔려 죽고 싶은 건 아니겠지?"

"···우리보고 너희를 믿으라고?"

드미트리가 말했다.

이미 나를 적으로 상정한 말투였다.

'쯧. 별 수 없나.'

가급적이면 좋게좋게 해결하려고 했건만, 이대로라면 단체로 이곳에 사이좋게 생매장되게 생겼다.

다소 강압적인 수단이라도 쓸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에스더.'

[네.]

'전부 기절시켜. 강제로 끌고 나간다.'

< 크로노스 연합 (10) > 끝

일촉즉발의 상황.

더는 지켜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건지, 칼라킨이 나섰다.

"다들 그만 둬라."

드미트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칼라킨! 지금 저들을 믿는다는 거냐?"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일단 이곳을 나가자는 이야기다."

"···나가면? 그때는 우리가 뒤통수를 맞겠지!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칼라킨! 상대는 혼자야!"

드미트리는 완고했다.

아니, 비단 드미트리뿐만 아니라 그의 뒤에 있는 힐데가르트나 아이리스 역시도 드미트리와 크게 생각이 다르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나는 협조하지 않겠다. 너희들끼리 해라."

"···지금 우리를 배신하겠다는 거냐?"

"머저리 같은 판단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거다."

"하! 그래, 네 멋대로 해라!"

"드미트리! 하지만······."

힐데가르트가 앗차하며 끼어들었으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칼라킨과 칼 마커스가 배신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지휘한다."

"······."

조사팀원 세 명이 무기를 들었다.

말로 끝낼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서 뭐. 덤빈다고?"

라니아는 자신의 앞에 총구가 겨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조사팀원 중에서 유일하게 라니아에게 대항할 수 있는 칼라킨이 포기했다.

즉, 조사팀원들에게는 애초에 승산이 없다는 뜻이었다.

"쏴!"

드미트리의 외침과 함께 Ark-15 자동소총이 불을 토해냈다.

그와 함께 라니아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지어졌다.

탕!

타타탕─!

분명히, 에테르로 총알을 막아낼 정도의 물리력을 행하는 건 라니아라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가능하기는 해도 효율상 영 좋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총알의 궤적을 아주 살짝 빗겨나가게 하는 정도라면 매우 적은 힘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킥, 키키킥, 킥킥, 키키키킥 키키킥, 킥킥, 키키키킥 키키킥, 킥킥, 키키키킥 키키킥, 킥킥, 키키키킥───!!!!]

이건 비웃음이었다.

다름 아닌 라니아의 비웃음을 형상화한 에테르.

쐐액-

쐐새색!

라니아를 향했던 총알들이 너무나도 쉽게 휘었다.

그 모습에 경악한 조사팀원들을 향해서 라니아의 손이 움직이려던 순간.

'에스더.'

[에휴··· 골칫덩이들.]

저대로 내버려 두면 조사팀원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게 분명했기에, 곧장 끼어든 에스더가 조사팀원들의 목을 압박했다.

"자, 잠깐!"

"조심─"

힐데가르트와 아이리스는 에스더의 존재를 느끼고서 뒤늦게 대항하려 했으나, 지금의 그들 수준으로 에스더에게 대항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컥!"

"끅!"

"끄윽!"

순식간에 에스더에 의해서 조사팀원들이 제압되자, 한창 살기를 풀풀 날리고 있던 라니아 역시도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가 조사팀원들을 제압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저들을 꽤 아끼나 봐? 오라버니."

"무의미한 희생을 피하려는 거다. 그게 서로에게 좋을 테니까."

"내 생각해주는 거야?"

라니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싱글벙글 웃었다.

"······그렇다고 치자."

"이번 한 번은 속아줄게. 하지만 다음에는 국물도 없어. 알았지?"

"그래."

뭔가 성가신 여동생이 생긴 것 같았다.

"그러면 슬슬 나가자. 버티고 있는 것도 꽤 힘든데."

[···내가 다 하고 있었거든요?]

"에이, 절반 정도는 양보할게."

[제가 거의 다 하고 있었는데?]

"소심하긴."

라니아와 에스더는 묘하게 죽이 맞는 듯했다.

아니, 애초에 에스더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인간 자체가 몇 없다 보니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대화 끝났으면, 이만 나가지."

참다못한 칼라킨이 말하자, 라니아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안 그래도 그럴 거니까 재촉하지 마."

라니아가 슬쩍 나를 보며 말했다.

"그냥 다 버리고 가면 안 돼?"

"안 된다."

"쯧."

그렇게 칼라킨이 드미트리와 아이리스를, 내가 힐데가르트를 어깨에 멘 채로 개미굴을 빠져나갔다.

나가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라니아는 물론이고 나 역시도 개미굴의 길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길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겠지.'

그렇기에 나는 조용히 라니아의 뒤를 따라서 개미굴을 빠져 나갔다.

이미 빠져나갈 사람은 다 나간 탓인지, 통로는 제법 한적했다.

'굳이 무너지고 있는 굴 안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지.'

마침내 우리가 개미굴을 벗어나자, 라니아와 에스더에 의해서 붕괴를 막고 있던 개미굴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쿠르르르르릉───!!!

자욱하게 일어난 돌풍이 한바탕 스쳐 지나가고, 주변의 사위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다들 괜찮나?!"

"여기 부상자가 있다!"

개미굴과 연결된 협곡 밑에는 개미굴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크로노스 잔당들이 주변을 경계하거나, 혹은 신음하고 있었다.

그만큼 갑작스럽게 개미굴을 덮친 기습은 갑작스러웠고, 또한 효과적이었다.

'이게 크로노스 잔당의 전부일 리는 없고··· 개미굴을 못 빠져나오고 매몰된 건가?'

그 말마따나 지금 당장 보이는 잔당들의 숫자는 기껏해야 백여 명 남짓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크로노스 연합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턱없이 모자라는 숫자였다.

'아니··· 개미굴의 입구가 이곳에만 있는 것도 아니니, 일단 지켜봐야겠지.'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이번 개미굴의 붕괴가 본래였다면 예정에 없었던 일이라는 점이었다.

'개미굴이 무너지는 건 훨씬 더 나중이 되어야 한다. 아마 나로 인해서 무언가 변했다는 거겠지.'

그게 무엇일지는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크에서는 내 존재로 인해서 본래라면 없었던 크로노스 잔당 조사팀을 조직했다.

즉, 크로노스 잔당 조사팀이 이곳에 온 것 자체가 어떤 트리거가 되어서 개미굴이 습격당한 거라고 볼 수 있었다.

'어쩌면··· 기회일 수도.'

현재 크로노스 잔당은 위험에 빠졌다.

설령 그 원인이 나나 아크의 조사팀으로 인해서 초래된 것이라 할지라도, 크로노스 잔당 측에서 그 인과관계를 알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요컨대,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뭘.'

[딱 봐도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는 표정이길래.]

'아무것도 아니다.'

에스더와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위장용 판초를 착용한 저격수 무리가 라니아에게 다가왔다.

"무사하셨군요."

"설마 내가 다치기라도 했을까 봐? 그건 됐고, 상황은 어때?"

라니아의 태도나 라니아를 대하는 이의 태도를 보건대, 지금도 라니아는 크로노스 잔당 내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훗날 크로노스 연합이라는 거대 세력의 이인자까지 가는 인물이니, 크게 놀라울 것도 없었다.

"별로 좋지 않습니다. 현재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인원만 해도 삼백 명이 넘습니다. 아마 그중 일부는 굴에 매몰된 것 같으니, 가능한 빠르게 구조 작업을 실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삼백 명······."

라니아의 표정에서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서늘함이 느껴졌다.

지금 라니아는 분노하고 있었다.

마치, 오래 전 내 기억 속에서 아크를 파멸로 몰고 갔던 그때처럼.

"그놈들은?"

"공격을 가한 뒤에 바로 발을 뺀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개새끼들."

라니아는 남은 생존자 중에서 멀쩡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수습했다.

"중상자와 부상자부터 옮겨!"

"서둘러!"

크로노스 잔당은 이제 터전을 잃었다.

하물며 곧 웨이브가 오기 직전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전열을 정비해야만 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웨이브에 휩쓸려서 크로노스 잔당 자체가 궤멸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인 것이다.

뿌득, 뿌득······.

뭐, 그나마 그런 상황이기에 라니아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얼굴로 용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라니아."

"···아, 오라버니. 미안. 내가 지금 너무 바빠서 신경을 못 썼네."

"누구 짓인지 알고 있나?"

"우리한테 이럴만한 놈들은 딱 한놈들밖에 없지. 모트교. 그놈들이 분명해."

예상했던 대로 크로노스 잔당들을 습격한 건 모트교인 듯했다.

모트교는 이 세계에서 마수나 마물에 버금가는 공공의 적이었고, 크로노스 연합에 있어서도 주적 중 하나였다.

또한, 아크의 적이기도 했고.

"이제 어떻게 하려고?"

"일단은 이동해야 해. 그리고··· 모트교 그 망할 새끼들한테 복수 해야지."

예상했던 대로의 대답이었다.

당했다면 갚아 준다.

내가 알고 있던 라니아는 그런 인물이었고, 실제로 지금도 그러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마침 잘됐어.'

아크에서 조사팀을 파견한 이유는 크로노스 잔당이 훗날 아크의 위협이 될지 안 될지 판단하기 위해서다.

본래였다면 임무 이상의 일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모트교의 개입으로 인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건 충분히 이용할 수 있다.'

모트교는 크로노스 연합은 물론이고 아크의 적이기도 하다.

공공의 적의 존재는, 곧 기존 세력들의 규합을 의미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딱 나에게 맞춰서 와주는 데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내 도움이 필요 하나?"

"···오라버니한테까지 그런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은데, 솔직히 말해서 도와줬으면 좋겠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거든."

"알았다."

라니아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 도와주려고?"

"가족이잖아."

"오라버니······."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목적이 있었으나, 일단은 이 정도로 말해두는 게 여러모로 좋았다.

물론 그러한 내 속내를 알 리가 없는 라니아는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어딘가 물기가 맺힌 것 같기도 하고, 조금 감동을 한 것 같은 눈이었다.

"······고마워. 나는 이들을 이끌어야 해서 자리를 못 비울 것 같아."

"상관없다. 내가 혼자 하지."

"정말로 괜찮아?"

"충분하다."

"하긴··· 오라버니니까. 알았어."

쿠릴타가 그랬던 것처럼 라니아 역시도 칼 마커스에 대한 믿음이 굉장한 듯했다.

뭐, 실제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내가 뭘 하면 되지?"

"우리가 매몰된 이들을 수습하고 피난을 가는 동안, 혹시 모트교가 어떤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해줘."

"그거면 충분하나?"

"응. 그 정도면 될 것 같아."

"알았다."

내가 덧붙였다.

"아, 그리고 가기 전에 중화기 하나 지원해줄 수 있나?"

"얼마든지. 뭐가 필요해?"

"대마물 로켓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알았어."

물론 현재 내가 지니고 있는 장비들만으로도 모트교를 견제하는 데는 충분하겠으나, 이렇게 좋은 기회를 내가 놓칠 리가 만무했다.

라니아가 부하로 보이는 저격수에게 손짓하자, 머지않아서 큰 나무 상자를 든 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여기."

딸깍─

마침내 나무 상자가 열리고, 이내 익숙한 모양의 로켓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이건······.'

──────────────

[CRN-842 대마물 로켓] [★★★★★★★(7성)]

크로노스의 첨단 기술이 집약된 대마물 전용 로켓.

극소량만 제작된 무기로서, 아크제에 버금가는 몇 안 되는 크로노스제 무기다.

매우 강력하다.

"상세 보기"

──────────────

CRN-842 대마물 로켓.

본래 내가 사용하던 TITAN-17 대마수 로켓보다 등급으로 치면 3단계 정도는 높은 물건이었다.

같은 등급의 물건이라면 아크제 무기가 크로노스제 무기를 압도하지만, 이처럼 등급 자체에서 차이가 나게 되면 당연히 크로노스제라고 해서 꿀릴 게 없었다.

'이걸 줄 줄이야······.'

솔직히 말해서 TITAN-17 대마수 로켓과 비슷한 등급의 물건 정도나 받으면 이득이라고 생각했건만, 라니아가 설마하니 이걸 건네줄 줄은 몰랐다.

현재 크로노스 잔당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유일한 CRN-842 대마물 로켓일 지도 모르는 데 말이다.

'그 정도로 라니아와 크로노스 잔당들이 현재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는 거겠지.'

라니아가 말했다.

"오라버니 미안해. 마음 같아서는 더 지원해주고 싶은데, 현재 우리 장비들의 상황도 좋지 못해서······."

"아니, 충분하다."

오히려 차고 넘쳐서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러면 바로 출발하겠다."

"···조심해 오라버니."

"그래."

그것을 끝으로 라니아는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사실, 이 상황에서 나에게 이만큼 시간을 내어준 것 자체가 매우 큰 부담이었을 텐데도 라니아는 그렇게 했다.

'가족이라······.'

그렇게 바쁘게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내가 CRN-842 대마물 로켓을 어깨에 멘 채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기절한 조사팀원들과 함께 있던 칼라킨이 살며시 다가왔다.

"칼 마커스."

"무슨 일이지?"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 크로노스 연합 (11) > 끝

생각할 필요도 없는 제안이었다.

지금의 칼라킨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떠나서, 애초에 내 상황상 단독 행동을 하는 게 훨씬 효율이 좋았기 때문이다.

"아니, 나 혼자 하지."

"그렇지만······."

"어차피 너는 여기에서 팀원들이 깨어날 때까지 지켜봐야 하지 않나? 설마 저들 사이에 이들을 내버려 두고 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 말마따나 칼라킨이 나를 따라오게 되면, 기절한 조사팀원들은 맨몸으로 크로노스 잔당 사이에 남겨지게 된다.

물론 라니아가 굳이 저들을 건드리지는 않을 테지만, 또다시 아까와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아무리 라니아가 나를 봐서 참는다고 해도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크로노스 잔당들이 외부인인 저들을 챙겨줄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물론 핑계지만.'

그러나 그 핑계만으로도 칼라킨의 의지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가장 중요한 명분이 나에게는 있고, 칼라킨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팀원들을 잘 챙겨라. 이곳에 있는 것도 쉽지 않을 거다. 지금 내가 움직이는 것 역시도 이번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다."

"······예."

이건 그냥 빈말이 아니었다.

적진 한복판이라고 볼 수 있는 이곳에서 기절한 조사팀을 지키면서 있는 건 보통 일이 아닐 테니까.

"나중에 보지."

"···조심하십시오."

나는 칼라킨과 눈인사를 대충 나누고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서 협곡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모트교가 공격한 곳은 필시 협곡 위일 테고, 그곳까지 가려면 가급적이면 이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이동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호루스는 따라오고 있겠지?'

[네. 잠깐 배고팠는지 사냥 좀 하고 온 것 같긴 한데··· 지금은 근처에 있어요.]

'잘됐군.'

협곡의 끄트머리에 도착한 나는 그대로 Z-74 제트팩을 작동시켰다.

쿠구구구구───!!!

푸른 빛의 플라즈마 엔진과 함께 단번에 공중으로 날아오른 나는 하늘 위로 향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이쯤이면 되겠지.'

협곡의 특성상, 일정 구간까지 날아오르게 되면 보이지 않는 사각 지대가 존재한다.

내가 도착한 곳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호루스."

[키헷!]

내 부름에 응답한 호루스가 자연스럽게 내 발밑에 모습을 드러냈다.

야누스와 에스더의 부름에 맞춰서 나를 따라오고 있던 것이었다.

"가자."

자연스럽게 호루스에 올라탄 나는 그대로 호루스의 뼈 고삐를 쥐었다.

[키헷!]

호루스의 외침과 함께 주변의 시야가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드넓은 창공의 주인이 된 듯한 감각 속에서, 나는 모트교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지상을 샅샅이 뒤졌다.

'역시 쉽게는 찾을 수 없나.'

모트교가 괜히 모트교가 아니듯, 사고를 치고 숨는 것 하나는 바퀴벌레 저리가라였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 근방에 있는 모트교의 지부가 어디인지, 이미 나는 전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깟 놈들이 숨어 봤자지.'

어차피 동굴 안에 불을 지르면, 알아서 비명을 내지르면서 나오게 되어있다.

"저쪽으로."

[키힛!]

호루스가 머리를 돌렸다.

내가 알고 있는 모트교의 지부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그나저나, 다시 볼까.'

이동을 하는 동시에 나는 챙겨왔던 CRN-842 대마물 로켓을 점검했다.

전투에 앞서서 주요 장비를 점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하물며 그게 타인으로부터 건네받은 물건이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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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N-842 대마물 로켓] [★★★★★★★(7성)]

크로노스의 첨단 기술이 집약된 대마물 전용 로켓.

극소량만 제작된 무기로서, 아크제에 버금가는 몇 안 되는 크로노스제 무기다.

매우 강력하다.

"상세 보기"

──────────────

'역시.'

순정 상태만으로 7성에 달하는 중화기.

메이벨 필그림을 통해서 업그레이드를 한 BLT-47 플라즈마 발사기가 7성 등급임을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물건이라고 볼 수 있었다.

'CRN-842 대마물 로켓 정도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메이벨 필그림을 통해서 업그레이드를 할 가치가 있지.'

점검을 마친 나는 지상을 내려다 보았다.

얼핏 보면 평범한 바위산으로 보이는 곳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사람이 드나들었던 인위적인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저기군.'

내가 CRN-842 대마물 로켓을 다잡고서 모트교 놈들에게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격에 대한 두려움을 알려주려던 순간.

[주인님!]

에스더의 외침과 함께 주변의 에테르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나는 보았다.

어느덧 지평선 너머에서 세상을 집어삼키는 어둠처럼 몰려오고 있는 마수의 군세를.

나는 보았다.

하늘 위를 가득 채운, 먹구름 떼와도 같은 마물들을.

"······쯧."

웨이브.

그것이 일어났다.

* * *

"서둘러!"

"곧 웨이브가 온다!"

"아악!"

"으으······."

온갖 고성과 비명. 그리고 신음이 들려오는 한 가운데, 칼라킨은 날을 세운 채로 기절한 조사팀원들을 돌봤다.

"끄응······."

어찌나 깔끔하게 기절을 시켜놓았는지, 기절한 조사팀원들은 도통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게 더 다행일지도 모른다.

만약 이들이 정신을 차린 뒤에 난동이라도 부리게 된다면, 칼 마커스가 없는 지금으로서는 정말로 위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칼라킨은 물론이고, 아크의 조사팀은 아직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크로노스 잔당의 목적을 알아내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아직 그 사실을 아크에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칼라킨의 신경을 거스르게 만드는 건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크로노스 잔당의 라니아와 칼 마커스. 도대체 무슨 관계지?'

분위기상 예전에 헤어진 가족 같긴 한데··· 위장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크로노스 잔당들을 이끌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라니아는 물론이고, 칼 마커스 역시도 속내를 알 수 없는 자다. 섣불리 단언하는 건 위험했다.

'최대한 칼 마커스와 라니아에 대해서 알아봐야 한다.'

그게 칼라킨이 이곳에 남아서 해야 할 일이었다.

"으, 으으······ 뭐야?"

그제야 정신을 차린 힐데가르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일어났나?"

"칼라킨, 이게 대체······."

"무모한 짓을 할 생각은 하지 마라. 이번에는 정말로 목숨을 장담할 수 없으니까."

힐데가르트는 그제야 주변의 상황을 눈에 담았다.

"···칼 마커스는요?"

"다른 볼 일을 보러 갔다."

그 순간.

"칼라킨, 저기!"

힐데가르트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칼라킨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저건······."

칼라킨의 눈에 먹구름 떼처럼 몰려드는 마수 무리가 보였다.

아크의 성벽 위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까마득함에, 칼라킨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온다."

웨이브.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이, 다가온다.

* * *

몰려드는 마수의 군세의 목적지는 늘 한 곳이다.

아크(Ark).

그러나 지금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아크로 가는 길목 중 하나에 크로노스 잔당들이 있는 협곡이 있다는 점이었다.

'이대로라면 크로노스 잔당들은 웨이브에 휩쓸리게 된다.'

저들이 이전처럼 개미굴 안에 숨어 있었더라면 입구를 봉쇄하고 조용히 웨이브가 지나가길 기다렸을 테지만, 지금 개미굴은 붕괴되었다.

지금 크로노스 잔당들에게는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모트교가 개입하기라도 한다면, 최악의 경우 크로노스 연합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을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이 세계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단순하게 생각하면 아크의 강력한 적 중 하나인 크로노스 연합이 사라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 세계의 세력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최악의 경우, 크로노스 연합으로 합류하지 못한 다른 세력들을 모트교나 다른 세력들이 흡수할 가능성이 있어.'

아니면 그 세력들이 각기 다른 세력을 일구어서, 기존에는 없었던 전혀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낼 지도 모른다.

크로노스 연합 정도는 우스워 보일, 아주 잔학무도한 놈들이 말이다.

'무엇보다도··· 현재 크로노스 잔당에 있는 라니아는 이용할 수 있다.'

그걸 위해서라도 크로노스 연합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나는 모트교의 지부 중 하나가 있는 바위산을 내려다 보았다.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크로노스 잔당도 구하고, 몰려드는 웨이브도 처리할 수 있는 데다가 모트교까지 한꺼 번에 정리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생각이 말이다.

'시도해봐서 손해 볼 건 없겠지.'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는 모름지기 오랑캐로 물리쳐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하물며 지금 모트교는 예전의 모트교가 아니다.

세 개의 성물 중에서 한 개의 성물을 잃어버린 모트교는 예전과는 다르게 몇몇 지부를 제외하고는 마수와 마물들의 공격에 크게 취약해졌다.

즉, 지금이라면 예전에는 절대로 통하지 않았을 방법도 통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뭐 하려고요?]

'뭘?'

[아니··· 또 표정이 기분 나쁘길래.]

'······.'

에스더와의 짤막한 대화를 마친 나는 그대로 호루스의 기수를 돌렸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협곡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우선, 입구부터 막아야겠지.'

내가 왼손을 뻗자, 야누스에게서 뻗어나온 뼈 창 하나가 손에 잡혔다.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호루스를 공중에 대기 시킨 뒤, 그대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또 나 시키려고!]

'이번에는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지상에 그대로 꼬꾸라지기 직전, Z-74 제트팩에서 뿜어진 플라즈마 엔진이 낙하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슈우우욱!!!

내가 지상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추락 속도가 아슬하게 0으로 수렴이 된 이후였다.

'그러면······.'

마침내 협곡의 입구에 도착한 나는 그대로 뼈 촉수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52분 13초.]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강렬한 파동이, 이곳이 누구의 영역이 되었는지를 알렸다.

이로써 협곡 아래에 있는 크로노스 잔당들이 웨이브에 휩쓸릴 일은 없어졌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서야 내가 섭섭하지 않겠는가?

'가볼까.'

나는 Z-74 제트팩을 가동시킨 뒤에 다시금 호루스가 있는 곳까지 단번에 날아올랐다.

[키헷!]

자연스럽게 호루스 위에 올라탄 나는 협곡의 입구를 벗어나서, 바위산까지 호루스를 몰았다.

그렇게 마침내 바위산까지도 지나고 나서야, 나는 주변을 살폈다.

'이쯤이면 되겠지.'

호루스의 위에 올라탄 채로,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피해간 마수 군단이 이곳까지 도착하기를.

그리고,

[카아아악!]

[그우우우우우───!!!]

[캭, 캬캭!]

마침내 마수 군단이 이곳까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내가 야누스에게 신호를 보냈다.

['엥켈렌스의 포효'가 발동합니다!]

야누스에게서 거친 포효가 터져나왔다.

[키에에에에에에에────!!!!]

그와 동시에, 이쪽을 향하던 마수 군단의 움직임이 서서히 바뀌었다.

엥켈렌스의 영역이 선포된 협곡 입구와 지금 내가 있는 곳 사이를 향해서 말이다.

양쪽 입구가 막혔다면, 남은 길은 오직 가운데 길 한곳뿐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곳에 있는 게 무엇일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디 한번 엿 좀 먹어봐라.'

모트교.

이건 내가 놈들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자, 양떼 몰이 시작이다.

< 크로노스 연합 (12) > 끝

"구조 작업을 서둘러라!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라니아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주변의 에테르가 들썩이며 무너진 개미굴의 잔해를 파헤쳤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했다.

언제 올까 노심초사했던 웨이브는 일어나고야 말았고, 지평선 너머에서는 죽음의 사신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라니아! 이들은 어쩔 수 없어. 일단 이곳을 피하고, 나중에 와서 구출해야 해."

"···그럴 수는 없어."

"라니아! 지금 네가 책임져야 할 이들을 봐! 여기에서 이들을 다 죽일 셈이야?!"

라니아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그녀가 몰라서 이렇게 버티는 것이 아니다.

해야 하니까. 해야만 하니까 이렇게 억지라도 부린 것이었건만, 이제는 정말로 한계였다.

"라니아."

"······빌어먹을."

"라니아!"

"알았어. 알았다고!"

라니아는 이를 악물고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개미굴 안에 메몰된 이들은 모두 다 죽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살릴 수 있을 텐데··· 지금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라니아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에게는 살아있는, 그리고 살아야 할 이들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여기에서 발목을 붙잡혀서는 안 됐다.

"···다들 움직여!"

라니아의 외침과 함께 피난 행렬이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마수 군단의 진격이 너무나도 빨랐다.

[캬아아아아악───!!!]

[크오오오오!!]

거리가 어찌나 가까워졌는지, 마수들의 괴성이 들려오는 수준까지 되었다.

"······."

이번 임무 중에서 위험한 순간이 많았으나, 칼라킨은 단언컨대 이번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고 느꼈다.

협곡 너머에서 다가오기 시작한 새까만 먹구름은, 당장이라도 이곳을 집어삼킬 것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으, 으으······."

"우리는 다 죽을 거야. 다······."

공포에 질린 신음이 귓가에서 들려왔다.

누군가는 저것을 웨이브라 부를 테지만, 칼라킨은 저것을 절망이라 부르고 싶었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다행히도 힐데가르트를 비롯한 조사팀원들은 이제 막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으······ 뭔데."

"···일어났나?"

"···칼라킨! 이 빌어먹을 새끼! 감히 네가 우리를 배신해?!"

"배신한 게 아니다. 필요한 방법을 취했을 뿐."

"말은 잘하는군. 아크로 돌아가서도 네가 그 잘난 입을 지껄일 수 있을까?"

"그 덕에 살아남았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드나보군."

보다 못한 힐데가르트가 끼어들었다.

"다들 그만 해요! 지금이 그럴 때예요?"

"힐데가르트! 너도 설마 저 배신자를 편드는 거냐?"

"그딴 소리가 아니야! 지금 눈이 있으면 저길 보라고!"

"저기에 대체 뭐가 있다고─"

이내 서서히 돌아간 드미트리의 사위에 비친 건, 까맣게 물든 지평선이었다.

드미트리가 저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망할."

"상황을 파악했다니 다행이군. 일어나라. 바로 움직여야 한다."

"···저 자식들이 우리를 보내줄 것 같아?"

"다행히 우리한테는 별로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 것 같은데?"

"뭐?"

드미트리의 시선이 라니아를 비롯한 크로노스 잔당들에게 향했다.

정말로 칼라킨의 말대로 라니아는 물론이고 크로노스 잔당 중 그 누구도 아크의 조사팀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이곳을 벗어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가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다. 너도, 칼 마커스도."

"그러든지."

"흥."

다행히 또다시 소란이 일어나는 건 피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직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여전히 웨이브는 닥쳐오고 있었고, 지금 당장 출발한다고 해서 웨이브의 범위에서 벗아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분명히 그랬을 텐데······.

'······뭐지?'

칼라킨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향해서 덮쳐올 것만 같았던 마수 군단이, 갑작스럽게 선두를 돌린 것이다.

운이 좋았다?

아니,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마수 군단이 보인 움직임이 명백히 이질적이었다.

마치 어떤 인위적인 힘이 개입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변을 알아차린 건 비단 칼라킨뿐만이 아니었다.

한창 피난 준비를 하고 있던 라니아 역시도, 갑작스럽게 기수를 돌린 마수 군단의 모습을 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대체······."

칼라킨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라니아가 한 일은 아니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크로노스 잔당 측에는 저러한 일을 벌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누가?

'······설마.'

칼라킨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한 남자의 뒷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말이 안 된다.

만약 칼 마커스에게 저런 능력이 있었더라면, 지금까지 굳이 이런 개고생을 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잠깐······.'

만약 칼 마커스가 그 능력을 감추고자 했다면?

'···애초에 칼 마커스는 지금까지 아크 바깥에서 살아왔다. 저런 능력이 있다면, 그것도 충분히 가능해.'

물론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으나, 칼라킨은 이 정체 모를 괴현상의 원인 중 하나가 칼 마커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저버리지 못했다.

'칼 마커스······.'

칼라킨의 시선이 절벽으로 가려진 협곡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게 아크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크로노스 잔당들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칼 마커스가, 저곳에서 싸우고 있다.'

* * *

본래 모트교에는 총 세 개의 성물이 존재한다.

그 성물들을 각기 다른 능력과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 성물들의 존재로 인해서 마수와 마물들이 공격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의 모트교는 세 개밖에 없는 성물 중에서 하나를 잃었다.

성물 중 하나는 가장 중요한 모트교의 본단을 지키기 위해서 사용된다는 걸 생각했을 때, 모트교에서 상시 활용할 수 있는 성물의 개수는 하나뿐이라는 이야기다.

말이 1개와 2개의 차이지, 무려 1/2로 줄어든 것이다.

나는 하늘 위에서 조용히 마수 군단의 움직임을 살폈다.

마수 군단이 내가 의도한 대로 착실하게 움직이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이곳에 있는 모트교 지부에는 성물이 없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엥켈렌스의 영역과, 엥켈렌스의 포효가 울려 퍼진 이곳을 피해서 마수 군단의 움직임이 한 곳으로 몰리고 있었다.

바로, 모트교의 지부가 있는 바위산으로 말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1개밖에 운용할 수 없는 성물이 이런 곳에 있겠는가?

[···진짜 사악하네.]

'병법이라고 해라.'

[뭐, 저도 저놈들은 마음에 안 드니까 쌤통이네요.]

과연 공공의 적 모트교답게, 그림자단 출신인 에스더에게도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듯했다.

[캬아아악!]

[그르르르릉!]

[꺄악, 까아악!]

검은 물결들이 다가온다.

그러나, 그것들이 향하는 방향은 당연히 이쪽이 아니었다.

흐르는 물줄기의 입구를 억지로 좁히면 어떻게 되는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물줄기가 흐르는 힘이 더욱더 강해진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역시도 그러했다.

본래였다면 넓게 퍼져서 진군했어야 할 마수 군단이, 양 옆의 길목이 막히지 바위산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남아 있는 엥켈렌스의 영역 유지 시간은 약 50분.'

적다면 적은 시간이었으나, 모트교로서는 아주 괴로운 시간이 될 터였다.

물론 모트교 역시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는지, 무언가 폭발하는 굉음과 함께 바위산의 중턱이 무너져 내렸다.

모트교가 머무르고 있던 바위산 내부와 연결된 통로가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제법 극단적인 수를 쓰는군.'

저렇게 무식하게 바위산을 붕괴시키면 분명히 내부 구조도 불안정해지고, 심할 경우에는 사망자 역시도 나왔을 텐데······.

'뭐, 모트교니까.'

원래 무언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짓을 할 때, 모트교라는 놈들을 대입하면 대개 말이 된다.

그게 바로 모트교라는 광신도 집단이었다.

뭐어··· 그것과는 별개로 효과는 상당히 쓸만해 보였지만 말이다.

'확실히, 저러면 아무리 마수 군단이라도 해도 억지로 뚫고 가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없을 때의 이야기.

내 목적은 마수 군단과 모트교가 아주 신명나게 한판 붙는 것이었고, 그걸 위해서는 저런 재미 없는 방식은 두고 볼 수 없었다.

덜컹─

철컥, 철컥-

나는 미리 챙겨왔던 CRN-842 대마물 로켓을 어깨에 멨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호루스를 몰고서 바위산의 입구가 있는 방향으로 날았다.

모트교가 억지로 문을 걸어 잠그겠다면, 이쪽에서는 반대로 억지로 문을 열어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문 열어, 이 새끼들아."

철컥-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CRN-842 대마물 로켓이 거친 불을 토했다.

콰아아아아앙───!!!!

과격하기 짝이 없는 거친 폭발음이 울려 퍼지며 대마물 로켓이 날아갔다.

꼭곡 문을 걸어잠그고 있는 모트교의 문을 발로 뻥 차주기 위해서.

쿠구구구구구구───!!!

거칠게 일어난 폭발.

그 폭발은 바위산이 무너져 내리며 사라졌던 입구가 다시 드러나기에 충분한 위력이었다.

[그우?]

[크르릉!]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위산에 무관심했던 마수 군단이 그곳에 신경이 쏠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캬오오오오오───!!!]

마수의 괴성을 일종의 신호탄으로서, 마수 군단이 바위산 내부로 비집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마리.

그다음에는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열 마리······.

서서히 불어나기 시작한 마수와 마물들이 모트교의 지부 중 하나인 바위산 내부로 마구잡이로 들어갔다.

하늘 위에서 보고 있으니, 마치 벌레들이 제 굴로 찾아서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 한번 버텨보든지."

[와··· 누가 악당인지 모르겠네.]

"당연히 저놈들이지."

[음, 그건 그렇긴 하네요.]

모트교는 마수와 마물을 숭배한다.

그런 녀석들이 막상 눈앞에 닥친 마수와 마물들을 상대로 얼마나 싸울 수 있겠는가?

자신들의 교리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일이니만큼, 쉽지 않을 것이다.

목숨처럼 여겨온 신앙이냐.

아니면 진짜 목숨이냐.

저곳에 있는 모트교의 신도들은 이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래도 조금 버티기는 하겠지.'

모트교는 바퀴벌레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질긴 녀석들이다.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모트교의 신도들은 마물에 버금갈 정도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곧이어서 바위산을 뛰쳐나온 모트교의 신도들이 마수 군단에 맞섰다.

아무래도 목숨 같은 신앙보다는 진짜 목숨 쪽을 택한 듯했다.

그리고 이어진 치열한 전투.

마물 같은 인간들과 진짜 마물들이 한데 엉겨서 마구잡이로 싸우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누가 마물인지 모르겠는걸.'

그 정도로 모트교의 신도들은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질겼다.

과연 모퀴벌레다운 생존력이었다.

'뭐, 그래봤자지만.'

아무리 강한 자라고 해도 숫자 앞에는 장사가 없었고, 아무리 질긴 생명력이라 할지라도 진짜 배기 마수와 마물들 앞에서는 빛이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모트교의 신도들은 차근차근 쓰러져 나갔다.

마수들에게 물어뜯기고,

마물에게 산 채로 뜯어 먹혔다.

'흐음.'

분명히, 이대로 내버려 두기만 하더라도 머지않아서 모트교 놈들은 쓸려나갈 터.

그러나 마냥 그렇게 내버려 두기에는 한 가지 목적이 아쉬웠다.

'모트교 놈들이 조금 더 끈질기게 버텨줘야 마수 군단 측에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텐데.'

거기에 더해서 크로노스 잔당들이 이곳을 벗어날 시간 역시도 벌 수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CRN-842 대마물 로켓을 다잡았다.

겨눈 것은 현재 모트교를 둘러싸고 있는 마수 무리.

철컥-

거침없이 방아쇠가 당겨지고,

콰아아아아아아앙───!!!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포격이, 이번 싸움의 연장을 선포했다.

< 크로노스 연합 (13) > 끝

모트교는 굉장히 질긴 놈들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웨이브에 노출이 되고도, 바위산 내에서는 전투가 끊이지 않는지 온갖 비명과 괴성이 난무했다.

'에스더.'

[알았어요. 한번 보고 오라고요?]

'그래.'

에스더가 정찰을 위해서 사라지고, 나는 CRN-842 대마물 로켓의 방아쇠를 연신 당겼다.

콰앙─!!

콰카카캉───!!!!!

이 싸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주로 노린 건 마수와 마물들이었으나, 주변에 모트교 놈들이 있다고 해서 거리끼지는 않았다.

어차피 모두가 내 적이었으니,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카아아아악!]

[끼에엑!]

마수와 인간.

마물과 인간.

지상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하나의 지옥도를 펼쳐내고 있었다.

그 순간.

쐐애애액──!!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호루스를 공격했다.

콰아아아앙─!!!

이윽고 거대하게 일어난 폭발과 함께 호루스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크오오오오───!!!]

명백한 화기에 의한 공격.

아무래도 모트교 측에서 내 존재를 알아차린 듯했다.

'아니··· 모트교뿐만이 아닌가.'

어느덧 하늘 위에서 비행종들과 거충종, 그리고 괴암종 같은 비행형 마수와 마물들이 나를 향해서 날아들었다.

'······하긴.'

양쪽 모두를 적으로 돌린다는 이야기는, 곧 양쪽 모두에게서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언제까지고 나 혼자 속 편하게 하늘 위에서 폭격을 쏟아낼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그래봤자지.'

CRN-842 대마물 로켓은 여타 다른 로켓 런처가 그렇듯이 기동력이 빠른 비행종들을 상대하기에는 부적합하다.

하지만 용도가 맞지 않는다면, 용도가 맞는 다른 무기를 사용하면 되는 법.

나는 품에서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꺼내고는 그대로 그것을 휘둘렀다.

지이이잉────!!!

붉은 섬광이 사방으로 휘몰아치며 날아드는 비행종들을 거침없이 베어냈다.

[카아아아아악!]

[끼에에에엑!]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지상에서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호루스!'

[키엑!]

호루스가 회피 기동으로 전환하며 거칠게 날개짓을 했다.

그 덕분에 지상에서 쏟아진 공격은 우리를 추격하는 다른 마수들에게 적중했다.

콰아아앙──!!!

후두득──

하늘에서 몇몇 비행종들이 모트교의 공격에 맞아서 추락했으나, 추격은 멈추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놈들이었다.

'끈질기긴.'

내가 호루스의 고삐를 한 차례 재촉하자, 호루스의 몸이 거칠게 움직였다.

['파도 치기'가 발동합니다!]

호루스의 꼬리가 거칠게 움직이며 허공을 강하게 후려쳤다.

그와 함께 일어난 거대한 기파가 우리를 뒤따르던 거충종들을 덮쳤다.

쿠우우우우웅───!!!

공기의 파도가, 사방을 향해서 덮쳐나갔다.

쿠구구구구구!!!!

곧이어서 그에 휩쓸린 마수와 마물들이 나가떨어졌다.

[키에에에에에──!!]

[삐이이익!]

파도 치기는 범위는 넓은 대신에 위력 자체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으나, 10급 정도 수준의 거충종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단 지상으로 놈들을 떨어뜨리기만 하면, 지상에 있는 마수들과 부딪치며 2차적인 피해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10급 거충종, 거대 날파리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거충종, 거대 날파리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10급 비행종, 붉은 부리 참새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비행종, 붉은 부리 참새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10급 거충종, 사각턱 꿀벌을 처치하였습니다.]

[10급 거충종, 사각턱 꿀벌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

.

.

[10급 거충종, 거대 날파리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거충종, 거대 날파리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그렇게 전투가 한창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을 때, 바위산 쪽으로 정찰을 갔던 에스더가 돌아왔다.

[저 왔어요.]

'저 밑 상황은 어떻지?'

[음···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 혼란스러워 보이긴 했어요. 대체 마물들이 왜 자신들을 공격하냐는 듯한 분위기? 그래도 절반 정도는 맞서서 싸우는 분위기이긴 했지만요.]

'역시 그런가.'

모트교의 신앙은 마수와 마물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성물이 존재함으로써 성립한다.

성물을 잃어버린 모트교의 신앙이 흔들리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것보다··· 혹시 특이한 행색을 한 이가 없었나?'

[특이한 행색? 어떤 식으로요?]

'유난히 치렁치렁한 금목걸이들을 목에 걸고 있다거나··· 아니면 전신을 가리는 로브 같은 걸 뒤집어써서, 모습을 감추고 있다거나. 아니면 그 외에 특별함이 느껴졌다면 누구라도 좋아.'

[으음··· 그런 모습을 한 이들은 없었어요.]

'네 존재를 눈치챈 이도 없었나?'

[그랬던 것 같아요. 아니면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랬던 걸 수도 있겠지만요.]

'흐음··· 역시 그런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아무래도 주교급은 없는 모양이군.'

하긴, 모트교의 성물은커녕 변변한 상징도 없는 이런 변방의 작은 지부에 주교가 있는 게 더 이상하긴 했다.

'고작 이 정도 수준으로 크로노스 잔당에게 싸움을 걸었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아마 조사팀 때문에 크로노스 측 경계에 공백이 생겼던 거겠지.'

애초에 개미굴 붕괴 자체가 지금 시점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던 만큼, 당연한 추론이었다.

'만약 주교급 이상이 있었더라면 조금 귀찮아졌겠지만··· 있는 건 기껏해야 지부장 역할을 맡은 사제급 정도인가.'

뭐어, 어쨌거나 그 정도라면 크게 신경을 쓸 필요도 없는 수준이었다.

'슬슬 끝내볼까.'

언제까지고 여기에서 이러고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시간도 충분히 끌었다.

크로노스 잔당들을 비롯한 아크의 조사팀 역시도 이 정도면 몸을 뺐을 터.

"야누스!"

['엥켈렌스의 포효'가 발동합니다!]

오랜만에 내 부름에 응한 야누스가, 힘을 한껏 모으더니 이내 거대한 포효를 쏟아냈다.

[끼에에에에에에────!!!]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호루스!"

내가 호루스를 부르자, 호루스 역시도 이에 호응 하듯이 입을 쩌억 걸렸다.

['음파 교란'이 발동합니다.]

곧이어서 호루스의 입에서 거대 벌들을 교란하는 음파가 쏘아졌다.

[삐이이이이이익────!!!]

그리고서 일어난 것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없었다.

엥켈렌스의 포효로 인해서 길목이 막히고, 마수 군단 내에 있는 벌들은 반란을 일으키면서 저들끼리 자중지란을 일으켰다.

콰득!

콰드드득─!

[끼에에엑!]

[칵, 카아악!]

온갖 괴성과 비명이 난무한다.

나는 그 틈을 타서, 호루스를 몰고서 모트교의 본거지가 있는 바위산까지 내려갔다.

바위산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전에 챙겨야 할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뭐 하려고요?]

'챙길 게 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호루스, 위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네?!]

에스더의 비명 속에서 나는 그대로 호루스에서 뛰어내렸다.

[아, 진짜─!]

물론 바늘이 가면 실도 따라와야 하듯이, 에스더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쿠구구구──!!

Z-74 제트팩으로 추락 속도를 늦춘 나는, 그대로 묘트교 지부가 있는 바위산 입구로 향했다.

[캬아아악!]

[캬오오오오!]

바위산 입구 쪽에서는 아직도 모트교 신자들과 마수들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인간인 이상 이쯤이면 나가 떨어질 만도 했건만, 역시나 모트교답게 참으로 질겼다.

'뭐, 그것도 이제 한계처럼 보이지만.'

바닥에 널려 있는 무수한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 사이에는 모트교 신자들도 적지 않게 섞여 있었다.

그나마 서 있는 이들도 곧 있으면 쓰러질 것처럼 상처를 입고, 매우 지쳐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

"······불신자다!"

이내 나를 발견한 모트교 신도들이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짧은 단검을 든 이도 있고, 총을 든 이도 있었으나, 중요한 건 그들의 무기가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기깃!]

야누스의 전신에서 뿜어진 뼈 촉수들이 나를 향해서 날아들던 단검과 총알을 모조리 막고, 쳐냈다.

깡!

까가강─!!!

마치 칠판을 긁는 듯한 쇳소리와 함께 튕겨 나간 쇳붙이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마수와 마물들에게 맞았다.

[카아아악!]

아무래도 주변에 있는 게 물 반 고기 반 수준으로 마수와 마물들이 빽빽이 있었다 보니, 이럴 수밖에 없었다.

"불신자 따위가!"

온 몸에서 피를 철철 흘린 모트교 신자 하나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내 야누스에게서 뻗어 나온 뼈 촉수에게 꿰뚫리며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감··· 히······!"

전신이 뼈 촉수에 꿰뚫리고도 살아있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으나, 상대가 모트교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놈들이 치르는 특별한 의식은 비록 사이비스럽기는 해도 정말로 효과가 있었고, 그 의식 덕분에 모트교 신자들은 인간보다는 마물에 가까운 회복력과 재생력을 지닌다.

'뭐, 굳이 의식을 치르지 않더라도 그 능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에서는 기대할 수 없겠지.'

그렇기에 나는 조금은 기대를 저버린 채로 바위산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너진 잔해 속을 지나가자, 안쪽에서도 한창 마수와 모트교 신자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불신자!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네놈이렷다!"

곧이어서 나를 발견한 모트교 신도들이 나에게 달려 들었다.

물론 무모한 돌진이었다.

지이잉······.

손끝에서 잡혀 나온 BLT-47 플라즈마 발사기에서 뿜어진 섬광이 주변을 훑고 지나갔다.

바위산이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기에 아주 찰나만을 사용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주변에 있는 모트교 신자와 마수들을 쓸어버리기에는 충분했다.

"카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모트교 신도들이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그리고 이어진 건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아무리 모트교 놈들이라고 해도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견딜 수는 없었던 데다가, 이미 마수들과의 전투로 인해서 몸 상태가 한계에 다다른 이후였기 때문이다.

'쉽군.'

[······만약 저들이 멀쩡할 때 돌입했다면 이렇게 쉽지 않았을 거예요. 저놈들이 얼마나 끔찍한 놈들인데.]

'그래서 지금 왔잖아.'

괜히 이이제이가 좋은 게 아니다.

[에휴······.]

에스더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모트교 놈들을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로 산 채로 꿰뚫고, 잘라내며 앞으로 전진했다.

아무리 모트교 놈들이 질기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총알 정도를 견뎌내는 수준이지 LT-47 플라즈마 발사기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랐다.

'역시 쓸만한 건 별로 없나.'

모트교 자체가 일종의 종교 집단이다 보니, 바위산 내부를 샅샅이 살펴봐도 막상 아크나 모래바람 상단을 통해서 넘길 만한 물건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나마 무기 같은 건 쓸만한 게 있었으나, 마수들과의 싸움 속에서 고장이 나거나 파손된 게 대다수였다.

"쯧."

그렇게 내가 가장 안쪽 내부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응?"

두 마리의 뱀이 조각된 장식이 달린, 눈에 익숙한 목걸이 하나.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이건······.'

이게 이런 곳에 있다고?

──────────────

[모트교의 상징(뱀)] [★★★★★★★★★(9성)]

모트교의 상징 중 하나.

환생과 재생을 상징하는 뱀의 모양새를 지니고 있다.

착용 시, 재생력과 회복력을 크게 늘려준다.

"상세 보기"

──────────────

< 크로노스 연합 (14) > 끝

모트교의 상징은 모트교의 성물만큼은 아니지만, 모트교 내에서는 충분히 보물이라 불릴 만한 물건이다.

본디 모트교의 신도들이 지닌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의식을 치러야만 한다.

그러나 그 어떤 의식도 치르지 않고 모트교의 능력을 얻을 수 있는 물건이 바로 모트교의 상징이었다.

즉, 이 목걸이를 착용하면 나는 모트교의 가장 강력하고 기본적인 능력 중 하나인 뱀의 재생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뱀의 재생력은 모트교에 입교하게 되면 가장 먼저 치르게 되는 의식으로 얻을 수 있다.

모트교에서는 이를 축복이라 부른다.

소위 말하는 모퀴벌레가 탄생하는 이유 역시도 이 뱀의 재생력이라는 축복 덕분이었다.

'비록 내가 다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있어서 나쁠 건 없지.'

하물며 현재 내 육체는 강화 혈청 효과로 인해서 이미 인간을 벗어나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에 모트교의 상징까지 더해진다면?

'······잘하면 잘린 팔까지도 순식간에 재생할지도.'

결손된 신체를 순식간에 재생한다라······.

그쯤 되면 정말로 인간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어쨌거나··· 대충 챙길 건 챙겼다고 보면 되나?'

혹시나 해서 내부를 더 뒤져 보았으나, 뱀의 상징을 제외하고서 더 얻을 건 없어 보였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이 정도로도 충분한 성과라고 볼 수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그나마 나중에 팔아먹을 만한 쓸만한 장비들 몇 개를 챙긴 뒤, 바위산을 나섰다.

바위산 입구를 나서기 무섭게 주변에 있던 마수와 마물들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어딜.'

['엥켈렌스의 포효'가 발동합니다!]

야누스의 아가리가 다시 한번 쩌억 벌어지고, 흉포한 괴성이 퍼져 나갔다.

[끼에에에에에에에───!!!]

그와 함께 나에게 달려들던 마수와 마물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나는 그것들을 향해서 Ark-15 자동소총에 장전된 A-985 폭발탄을 깔끔하게 먹여주고는 제트팩을 가동시켰다.

슬슬 이곳을 벗어날 때가 되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있는 마수와 마물들을 모조리 다 없애 버리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이제 엥켈렌스의 영역 유지 시간이 거의 다 됐다.

슬슬 나도 이곳을 빠져나가서 조사팀에 합류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혹시 눈먼 마수 무리를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칼라킨을 비롯한 조사팀원들은 아직 채 여물지 못한 애송이들이다.

지금 상황에서 아크 바깥에서 마수 무리를 만난다면, 최악의 경우 누군가 죽을 수도 있었다.

'나로서는 크로노스 잔당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면 좋을 테지만··· 녀석들이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향해 총구를 들이밀던 사이다.

칼라킨이 중간에서 잘 중재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께 움직일 정도의 사이는 아니라는 소리다.

'뭐, 알아서 하겠지.'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제트팩으로 하늘로 도착한 나는 다시금 호루스에 올라탔다.

[키헷!]

나를 반기는 호루스의 울음과 함께, 나는 호루스의 뼈 고삐를 쥐었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기 전, 모트교놈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기 위해서 CRN-842 대마물 로켓을 다잡았다.

"잘 있어라, 썩을 놈들."

철컹-

방아쇠가 당겨지고,

피우우우우우웅───!!!

CRN-842 대마물 로켓에서 뿜어진 불꽃과 함께 로켓이 바위산을 향해 날아갔다.

한 발이 아니었다.

피웅, 피우우웅───!!!!

연신 뿜어진 불꽃과 함께 로켓이 바위산을 향해서 쏟아졌다.

쾅-!

콰카카카카카캉──!!!

안 그래도 위태위태하던 바위산이, 쏟아진 폭격과 함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궁-

쿠구구구구구구!!!

안 그래도 위태위태하던 바위산이 무너져 내리며, 그 안에 있던 마수들과 마물들이 깔렸다.

무려 크로노스 잔당을 궁지에 몰았던 모트교의 지부 중 하나가 완전히 끝장이 난 것이다.

허무하다면 허무한 최후였으나, 아무리 모트교 지부라 할지라도 마수 군단이 들이닥치는 와중에 뭘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모트교의 지부를 파괴했습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업적입니다!]

[명예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 -> 2]

[모트교를 수호하는 천 개의 눈 중 하나가 당신을 포착했습니다. 모트교와 적대 관계가 형성됩니다.]

'역시 봤나.'

모트교에는 모트교의 모든 지부를 살피는 천 개의 눈이 있다.

그것은 에테르의 형태를 띠고 있기도 하고, 혹은 비행형 마수나 마물의 형태를 띠고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비록 그 탓에 모트교와 적대 관계가 형성되긴 했으나, 어차피 모트교는 가만히 있다고 해서 적대하지 않는 집단이 아니었기에 별로 상관없었다.

지나가던 미친놈이 나를 이유 없이 칼로 찌르나, 이유 하나를 지니고 칼로 찌르나 어차피 결과적으로는 같기 때문이었다.

'다른 지부는 이렇게 쉽지 않겠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겠지.'

지부 내에 사제급의 인물이 보이지 않았던 것도 유효하게 작용했다.

아무래도 마수 군단이 들이닥치면서 무슨 일을 당했거나, 아니면 부재중이었던 모양.

만약 사제급 신도가 있었다면, 이처럼 일을 쉽게 처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주교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사제는 사제니까.'

모트교의 신도들은 계급이 올라가면 갈수록 강력하고 다양한 축복들을 소유하고 있다.

일반적인 신도들이 뱀의 재생력 축복만을 지녔다면, 사제급 정도가 된다면 최소 세 개 이상의 축복을 소유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중에는 지금의 나로서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축복들도 존재해.'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이번 모트교 지부 습격은 운이 상당히 따라준 셈이었다.

"가자."

나는 호루스의 기수를 돌렸다.

돌아갈 때가 됐다.

* * *

"허억, 허억······."

칼라킨과 드미트리, 그리고 힐데가르트와 아이리스는 달렸다.

꼼짝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협곡 안으로 들어오려던 마수와 마물들이 갑작스럽게 방향을 돌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이때 생긴 틈에 한시라도 빨리 웨이브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훅, 후욱······!"

"아얏!"

"아이리스! 내 손을 잡아요."

"고, 고마워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칼라킨을 포함한 조사팀원들의 상태는 영 좋지 못했다.

워낙 격렬한 전투를 계속해서 치러온 데다가, 부상 역시도 작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크로노스 잔당에 몸을 의탁했어야 했나?'

칼라킨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만약 그곳에 끝까지 남아 있었더라면 필시 무슨 일이 일어났을 터.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조금 위험하더라도 이렇게 따로 움직이는 게 나았다.

"···칼라킨!"

그때, 힐데가르트가 칼라킨을 불러세웠다.

그리고 칼라킨은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 지평선 너머에서 마수 군단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어찌된 영문인지 협곡을 통과하지 않고 있던 마수 군단이, 비로소 협곡을 통과하기 시작한 것이다.

'···칼 마커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칼라킨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조사팀의 상황이 칼 마커스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망할! 온다!"

드미트리가 외쳤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마수와 마물들의 기동력과 상처 입고 지친 조사팀의 기동력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즉, 조사팀과 마수들의 거리 역시도 빠르게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카아아아악!]

[키에에에에에에!]

가장 먼저 다가온 건 역시나 비행형 마수인 비행종들이었다.

비행종을 비롯한 거충종과 괴암종 등의 비행형 마수와 마물들은 상대하기 까다롭다.

특유의 기동력으로 인해서 총알을 맞추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어설프게 탄약을 아끼자니 비행종들에게 유린당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아크의 병사들.

당연히 이에 대한 대처법 역시도 얼마든지 존재했다.

"······아이리스! 신호하면 비행종들의 발을 묶어라!"

"네!"

팀 내에 에테르 적합자가 없었다면 모를까, 이미 있는 이상 비행종을 상대하는 법은 놀라울 정도로 심플해진다.

비행종들이 접근할 때를 노렸다가, 에테르로 기회를 노린다.

이게 에테르 적합자가 있을 때의 비행종에 대한 기본 전술이었다.

[카아아아악!]

비행종들과 조사팀의 거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를 침착하게 살피던 칼라킨의 손이 내려갔다.

"지금!"

칼라킨의 신호와 함께 아이리스를 중심으로 에테르 파동이 퍼져 나갔다.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았다──!]

[카학!]

순간적으로 일어난 에테르가 비행종들의 날갯짓을 잠시 멈춰 세웠다.

물론 아이리스 정도의 수준으로는 비행종들을 오래 붙잡아 둘 수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철컥-

"쏴!"

일제히 당겨진 장전 손잡이와 동시에 Ark-15 자동소총에서 뿜어진 총알들이 비행종의 몸을 꿰뚫었다.

투두두두두!!!

쏘아진 탄환들이 비행종의 몸을 마구잡이로 꿰뚫고, 이내 비행종이 전신에서 피를 흘리면서 힘없이 쓰러졌다.

'···생각보다 탄 소모가 심했어.'

나름대로 깔끔하게 제압을 했지만, 한정된 물자 안에서 이 이상의 전투를 이어나가는 건 무리였다.

"다시 이동한다!"

그리고 추격전이 이어졌다.

끊임없이 따라붙는 비행종들이 머리 위를 어지럽게 했으나, 지금의 조사팀에게는 그것들을 쫓아낼 총알도, 여력도 없었다.

"칼라킨! 뒤!"

"···알고 있다."

악재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덧 지상에서 추격하던 마수 및 마물들과의 거리 역시도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비행종들을 견제하는 사이에, 정작 중요한 지상형 마수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이다.

'······여기에서 끝인가.'

칼라킨은 주변을 보았다.

보이는 거라고는 온통 황야와 허허벌판뿐.

이런 곳에서는 아무리 칼라킨이라 할지라도 몸을 숨길 수도, 숨을 수도 없었다.

'아니, 혼자였다면 어떻게든······.'

칼라킨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혼자? 그렇게 살아남아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준비해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칼라킨은 발걸음을 멈추고서 뒤돌아섰다.

"···칼라킨?"

"어차피 이 이상 도망가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힐데가르트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드미트리가 끼어들었다.

"하, 이건 조금 마음에 드는군."

드미트리가 턱짓했다.

"이봐, 저주받은 녀석."

그에 아이리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명예는 귀족의 의무다. 너에게 그런 의무는 없으니, 냉큼 아크로 꺼져."

"···네?"

"알아들었으면서 못 알아들은 척하기는··· 꺼지라는 말 못 들었나?"

아이리스가 무어라 항변하려 했으나, 이내 칼라킨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미트리의 말이 맞다. 누군가는 아크로 돌아가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칼라킨 당신이······."

"너로는 시간을 벌 수 없다."

"그런······."

아이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들은 지금 죽음을 각오했다.

오직, 임무를 위해서.

이럴 때 아이리스가 해야 할 말은 치기 어린 고집이 아니었다.

"알겠······ 어요."

아이리스가 이를 악물었다.

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미치도록 한심해서였다.

"그래. 임무를 부탁한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아이리스는 뒤돌아섰고, 나머지 조사팀원들은 각자의 무기를 든 채로 웨이브 앞에 섰다.

"우리가 시간을 벌어야 한다."

"나도 알아. 잘난 듯이 떠들지 마라. 배신자 녀석."

"나는 배신한 게 아니다."

"그래, 그러겠지."

드미트리가 이죽거렸다.

그리고,

마수 군단이 다가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그것은 마치 삶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죽음의 물결처럼 세 명의 조사팀을 향했다.

"힐데가르트."

칼라킨의 나지막한 부름에, 힐데가르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처리해야 할 정보가 너무나도 많은 탓에, 과부화된 통찰안이 터질 것처럼 이글거렸다.

"────!"

힐데가르트의 입술이 달싹이고,

"───!!!"

칼라킨과 드미트리의 입에서 어떤 외침이 울려 퍼지며,

"──!"

조사팀원들이 마수 군단을 향해서 각자의 총구를 겨눴다.

그렇게 격돌이 일어나려던 순간.

"흐응."

나지막히 들려온 콧소리와 함께 조사팀을 덮쳐오던 마수 군단의 진격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이러한 현상이 가능한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에테르.

그것도, 엄청나게 강력한 에테르.

"이게 무슨······."

경악한 드미트리.

원인을 찾는 힐데가르트.

그리고··· 누군가를 마주한 칼라킨.

"너는······."

칼라킨은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라니아."

라니아.

아니, 라니아 마커스.

"힘들어 보이는데, 도와줄까?"

그녀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 크로노스 연합 (15) > 끝

"······무슨 속셈이지?"

칼라킨이 경계의 기색을 띠었다.

라니아가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함부로 그녀를 신용하기는 어렵다는 게 칼라킨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심각한 칼라킨과는 달리, 라니아는 가볍게 웃을 뿐이었다.

"속셈은 무슨. 너희 따위를 상대로 그런 게 왜 필요해?"

"감히······!"

드미트리가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비록 칼라킨이 말린 덕분에 또다시 사고가 터지지 않은 것이지, 라니아에 대한 드미트리의 원한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눈깔 봐라? 그게 생명의 은인을 대하는 태도야? 눈깔을 확 파서 마수 먹이로 줄까?"

"놈!"

"놈이 아니라 년이야. 이 쌍놈의 새끼야."

"감히 나를 모욕해!"

드미트리가 당장이라도 이죽거리는 라니아를 향해서 달려들 듯하자, 칼라킨이 그를 제지했다.

"드미트리."

"놔! 당장 죽여버리겠다!"

"드미트리!"

칼라킨이 씩씩거리는 드미트리를 간신히 진정시키고는 라니아 앞에 섰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지? 우리랑 반대 방향으로 간 게 아니었나?"

타당한 의문이었다.

이쪽 방향은 아크로 향하는 방향이고, 반대로 라니아를 비롯한 크로노스 잔당이 향한 곳은 그것과는 반대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뭐, 나도 웬만하면 그냥 가려고 했는데, 자꾸 귓속에서 어떤 여자가 징징거리더라고. 제발 좀 도와달라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온 거야."

"······어떤 여자?"

"그래, 그 너희랑 같이 있던 허여멀건한 애 있잖아. 응? 없네. 어디 갔어? 설마 벌써 죽었어?"

칼라킨은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아이리스의 절망함이, 그들을 사지에서 구해낸 것이다.

"무엇보다도, 너희가 그렇게 죽으면 오라버니가 싫어할 것 같거든."

"···그게 진짜 이유군."

"거의 그렇긴 해."

라니아가 키득 웃었다.

"나는 아크 놈들을 믿지 않아. 하지만 오라버니는 믿지."

"···대단한 형제애로군."

"이제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거든."

그렇게 말하는 라니아의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가득 묻어났다.

"표정이 왜 그래? 살려주지 마?"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는 주제에."

"나를 너무 착하게 보는 거 아니야? 자꾸 그렇게 건방지게 굴면 오라버니한테 조금 미움받는 것 정도는 감수할 수도 있어."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하는 라니아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라킨은 말했다.

"···부탁하지. 나와 팀원들을 구해주었으면 한다."

"흐흠, 조금은 예의범절이라는 걸 알았나 보네. 그래, 알았어. 까짓 거 내가 힘 좀 쓴다."

라니아의 주변에서 에테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마수와 마물들의 접근을 막고 있던 압도적인 에테르가, 이제는 공격으로 태세를 전환한 것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끼아아아아아악!]

몰아치는 에테르가 마수의 움직임을 막은 것도 모자라서, 마치 칼날 돌풍처럼 마수와 마물들을 갈가리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카아아악!]

[끼엑!]

'······터무니없군.'

칼라킨은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 수준의 에테르 적합자라면, 아크 내에서도 최소 네이비 라인은 가야 볼 수 있다.

라니아가 강한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도를 넘어서지 않았는가?

"칼라킨, 저건······."

힐데가르트가 두려움에 떨었다.

어쩔 수 없었다.

칼라킨조차도, 지금 힐데가르트의 통찰안이 라니아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감히 알 수 없었으니까.

'만약 이런 자가 아크의 적이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하물며 겉으로 보이는 라니아의 나이는 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다.

즉,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였다.

'절대로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아크를 위해서나, 모두를 위해서나.'

칼라킨이 그렇게 생각하는 배경 중 하나에는 칼 마커스 역시도 연관되어 있었다.

비록 칼 마커스는 수상한 점이 많은 이였으나, 칼라킨은 그가 아크를 위한다고 믿었다.

지금까지 칼 마커스가 보여왔던 모든 행동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만약 칼 마커스가 아크를 파괴하려 했다면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칼 마커스는 그렇지 않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칼라킨은 칼 마커스를 믿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칼 마커스와 라니아 마커스. 이 둘이 훗날 아크를 적대하기라도 한다면······.'

칼라킨의 눈동자에 찢어 발겨지는 마수와 마물들의 고기 파편들이 날아다니고 있을 때, 라니아가 말했다.

"뭐해?"

"···뭘 말이지?"

"빨리 튀어야지. 이제 한계야. 지금 내 이마에 식은땀 나는 거 안 보여?"

"아······."

"···응?"

"뭔데?"

칼라킨를 비롯한 조사팀은 잠시 얼이 빠졌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무리 강력한 에테르 적합자라 할지라도 홀로 이 군세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단지, 라니아가 보여주는 당당함과 어처구니없는 능력에 잠시 그 사실을 잊고 있었을 뿐이지.

"안 가? 두고 간다?!"

"자, 잠깐!"

칼라킨과 조사팀이 바쁜 걸음으로 라니아의 뒤를 따랐다.

* * *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크로노스 잔당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위장막이라도 전개한 채로 이동을 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이러면 웨이브에서도 웬만하면 노출되지 않겠어.'

노련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할지, 아니면 찾기 힘들게 만들었으니 화를 내야 할지······.

어쨌거나 쉽게 찾을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여정이 길어지자, 마수 군단의 진격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주인님! 잠깐만요!]

"왜?"

[목소리. 목소리가 들렸어요.]

'무슨 목소리?'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일단 저쪽으로 가봐요!]

에스더가 호루스의 앞에 앞장섰다.

유령종의 뒤를 마물이 뒤따르는, 웃기지도 않는 모양새가 한동안 연출됐다.

그리고 얼마나 날았을까.

[저기 밑에!]

나는 에스더의 다급한 외침에 지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황야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익숙한 인영 하나를 발견했다.

"······아이리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아이리스가 황야 한복판에 쓰러져 있었다.

나는 호루스의 고삐를 쥐었다.

"내려가."

[키헷!]

호루스의 몸이 지상으로 내리꽂히다시피 날았다.

그렇게 지상에 도착한 뒤, 나는 아이리스를 살폈다.

아직 숨을 쉬는 걸로 보아서, 불행 중 다행히도 죽은 건 아닌 듯했다.

'과부하로군. 에테르와 필요 이상으로 감응했어.'

아마 그래서 에스더 역시도 아이리스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일 터.

하지만 이상했다.

만약 전투 때문에 에테르를 발산한 것이라면 주변에 마수나 마물들의 시체가 보여야 했다.

그러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대체 왜 아이리스가 이렇게 쓰러질 정도로 무리를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애초에 왜 혼자 있던 거지?'

아이리스는 칼라킨과 함께 있던 게 아니었나?

아니면 설마 조사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아무리 죽지 않았다고는 해도, 지금 아이리스의 상태가 좋다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생명에 지장이 가거나, 혹은 백치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별 수 없나.'

나는 허리춤에 있는 수통의 뚜껑을 열었다.

가급적이면 아껴두고 싶었으나, 이대로 아이리스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심각한 상태는 아니니까 조금만 먹여도 되겠지.'

나는 수통의 뚜껑에 생명수의 물을 조금 따른 뒤, 그것을 아이리스의 입안에 조금씩 흘려 넣었다.

비록 지금은 그 효과가 옅긴 해도, 명색이 포션에 가까운 물건이다.

이 정도 조치만 해둬도 머지않아서 정신을 차릴 터.

"으, 으으······."

아니나 다를까, 생명수의 물을 흘려보낸 뒤 몇 분이 채 되지 않아서 아이리스가 정신을 차렸다.

"일어났나?"

"히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쓰러져 있던 아이리스가 내 목소리를 듣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서 뒷걸음질 쳤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느껴진다.

아이리스는 진심으로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설프게 아이리스의 상황을 봐줄 때가 아니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군. 왜 혼자서 떨어져 있는 거지? 다른 팀원들은?"

"팀원들은······ 아! 지금 팀원들, 팀원들이 위험해요!"

"위험하다고? 자세히 설명해 봐라."

"그럴, 그럴 시간이 없어요. 어서, 어서 구하러 가야해요. 팀원들이, 팀원들이······."

아무래도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만한 상황은 아닌 듯했다.

"어디지?"

"···예?"

"어디냐고. 바로 출발하지."

"아······ 저쪽, 저쪽이에요!"

아이리스는 잠시 얼이 빠졌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알았다."

방향도 알았겠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나는 그대로 아이리스를 한쪽 어깨에 멘 채로 Z-74 제트팩를 작동시켰다.

아무래도 아이리스 앞에서 호루스를 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어······."

"왜?"

"···꼭 이렇게 안아야, 아니 들어야 하나요?"

"이래야 유사시에 다른 한쪽 손을 쓸 수 있다."

"아······ 네."

아이리스는 무언가 불만이 있는 듯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 알 바 아니었다.

[진짜 그렇게 짐짝 들듯이 하는 것 좀 안 하면 안 돼요?]

'이유는 이미 말했을 텐데.'

[하··· 진짜 글러먹었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이리스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서 Z-74 제트팩을 가동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리스를 내버려 두고 가고 싶었으나, 만약 아이리스를 두고 간 사이에 또 길이 엇갈리게 되면 일이 귀찮아지기에 처음부터 데려가기로 했다.

'Z-74 제트팩의 에너지량이 조금 애매하기는 할 테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아무리 Z-74 제트팩의 출력이 강하다고는 해도, 사람 하나의 무게가 추가되면 당연히 에너지 효율은 그만큼 낮아진다.

그 탓에 거리가 조금 멀어지면 매우 귀찮은 상황이 발생할 테지만, 아이리스를 이곳에 두고가는 귀찮음보다는 조금 더 나았다.

쿠르르릉─!

거친 엔진음과 함께 푸른빛의 플라즈마 엔진이 불꽃을 토했다.

"꽉 잡아라."

"네? 꺅!"

에너지 효율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로, 거의 최대 출력에 가깝게 Z-74 제트팩의 속도를 높였다.

순간적인 출력만큼은 호루스의 속도마저도 뛰어넘었으니, 나뭇잎 한장에만 스쳐도 피부가 그대로 찢겨나갈 속도였다.

그렇게 얼마나 날았을까.

[주인님.]

에스더의 목소리와 함께 나는 지평선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한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전부 아는 얼굴들이었다.

칼라킨, 드미트리, 힐데가르트, 그리고··· 라니아.

조금 의아한 점이 있다면, 그들이 현재 마수 군단에게 쫓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것들은 왜 저러고 있어?'

아까 전, 내가 엥켈렌스의 영역과 모트교를 이용해서 벌어준 시간은 절대 적지 않다.

그 시간이라면 충분히 몸을 빼낼 수 있었을 텐데, 다른 크로노스 잔당들은 어디로 가고 라니아와 저들만 달랑 마수 무리에게 쫓기고 있단 말인가?

'아무튼······.'

나는 한 손에 BLT-47 플라즈마 발사기를 쥐었다.

아무래도 한쪽 손에 짐 덩어리를 든 채로 사용할 만한 병기에는 이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볼까.'

붉은 섬광이 솟구쳤다.

* * *

힘들다.

죽을 것 같다.

괴로워.

살려줘.

라니아는 입에서 단내가 나는 걸 느꼈다.

'내가 대체 여길 왜 왔지?'

라니아에게 있어서 아크의 조사팀은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이쁜 녀석들이 아니었다.

이곳을 찾아온 이유도 수상하고, 무엇보다도 건방진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특별히 칼 마커스의 얼굴을 봐서 지켜주려고 했건만, 제 발로 크로노스의 피난민에서 이탈했으니, 라니아로서는 도의적인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왜일까.

결과적으로 라니아는 이곳에 왔고, 결국 아크의 조사팀과 함께 마수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모두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여기를 대체 왜 와 가지고······.'

물론 지금이라도 라니아는 하고자 한다면 이들을 버리고서 혼자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라니아의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저들을 지키고 있었다.

[────────!!!]

한곳으로 뭉쳐진 에테르가 망치 몽둥이처럼 휘둘러지며, 힐데가르트를 덮치려던 마수를 날려버렸다.

그 탓에 라니아는 현기증을 느꼈으나, 내색을 할 만한 여유는 없엇다.

"고, 고마워요!"

"···그 말할 여력 있으면 뛰기나 해!"

"뒤!"

라니아를 향해서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왔다.

'아, 망했네.'

라니아가 곧이어질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에테르를 끌어모으려던 순간.

지이잉─

한 줄기의 붉은 섬광이, 라니아를 향해 덮쳐오던 마수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무슨······."

그리고 라니아는 보았다.

사실, 모양새로만 보면 썩 우스운 모양새였다.

왼쪽 어깨에는 백발의 머리가 산발이 된 여자를 들쳐 메고 있는 데다가, 오른손에는 빈약해 보이는 병기 하나만이 들려 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지금 나타난 남자의 존재에 안도감을 느꼈다.

"오라버니!"

칼 마커스.

그가 왔다.

< 크로노스 연합 (1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