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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 5

< 조사팀 (10) > 끝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도망, 쳐야, 해······!]

[깨어 났어. 깨어 났어. 깨어 났어. 깨어 났어. 깨어 났어. 깨어 났어. 깨어 났어. 깨어 났어. 깨어 났어. 깨어 났어.]

[하지 마, 하지······.]

에테르가 거칠게 동요했다.

우로보로스에게 반응한 것이었다.

물론 반응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 아아······."

마수의 울음소리에는 인간을 굳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걸 미연에 방지해주는 게 투지 능력치였건만, 지금 수준의 힐데가르트가 투지 능력치를 지니고 있을 리 만무했다.

"괜찮나?"

"그, 아으··· 괜찮······."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힐데가르트가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곤히 낮잠을 자고 있던 우로보로스를 깨운 건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이쯤이면 대충되겠지.'

그와 함께 어느새 내 옆에 나타난 에스더가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진짜 별 걸 다 시킨다니까······.]

'나에 대한 흔적은 찾았나?'

[그런 게 남아 있을 리가 없잖아요? 싹 다 무너져 내렸는데.]

'하긴.'

뱀동굴에 도착하기 전, 나는 에스더를 시켜서 일부러 쉬고 있는 우로보로스를 아주 살짝 자극했다.

괜히 뱀동굴 내부까지 조사했다가는 진짜로 우로보로스가 깨어날 수도 있었으니, 에스더를 통해서 그 존재만 힐데가르트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제 힐데가르트는 자신이 보고 들은 걸 그대로 아크에 가서 보고할 것이다.

특히나 힐데가르트가 지닌 통찰안이라면 뱀동굴 안에 있는 우로보로스의 존재 역시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터.

즉, 이대로 무사히 귀환만 할 수 있다면 이번 임무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목표는 사실상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첫 번째 목표는 등급 외 괴수종 우로보로스의 현재 위치와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으니 조금 전에 확인 되었고,

두 번째 목표인 변절자 폰에 대해서 조사하는 건 당연히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리가 없으니 문제없다.

'더군다나 우로보로스의 영향으로 근방의 마수와 마물들도 물러갈 테니 일석이조지.'

이제 남은 건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마지막 세 번째 임무에 대해서 대충 조사하고 아크로 돌아가면 된다.

'세 번째 목표가 아마··· 서부 전선 쪽에서 일어나는 불안 요소에 대해서 알아내는 일이었던가?'

사실 이 세 번째 목표는 앞선 두 가지 조사를 겸해서 조사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이었다.

상대적으로 우선순위가 낮은 임무인 만큼, 힐데가르트가 납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에서 적당히 구색만 맞추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 시기에 이 근방에서 일어나는 불온한 움직임이라면··· 대충 그것뿐인가.'

이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성이 없었기에 내가 힐데가르트를 재촉했다.

"이만 가지."

"아, 그······."

"못 걷겠나?"

"······죄, 죄송합니다."

힐데가르트는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렸는지 채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힐데가르트를 왼쪽 어깨에 걸쳐 맸다.

"꺅!"

힐데가르트가 기겁했다.

"내, 내려주세요!"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다."

힐데가르트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그··· 죄송합니다."

"됐다. 바로 출발하지."

그리고 나는 본격적으로 옛 뱀동굴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와, 그 많고 많은 방법 중에서 하필이면 그렇게 안아요? 진짜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시네요.]

'이렇게 업어야 유사시에 다른 한 손으로 대응할 수 있다.'

[네, 네. 그러시겠죠.]

에스더의 비아냥 속에서 힐데가르트가 말했다.

"···돌아가는 건가요?"

"아직 아니다. 임무가 남아 있어."

"남은 임무라면······."

"간단하게 이 근방을 둘러보는 일이다. 잠깐 길을 돌아가는 거에 불과해."

"그렇··· 겠죠?"

안 그래도 아크에서 썩 달갑지 못한 시선을 받고 있는 나다.

보상이 보상인 만큼 일단 접수한 임무에 대해서 만큼은 확실히 해두는 게 여러모로 좋았다.

'차라리 이게 낫겠지.'

비록 어깨에 짐이 하나 생기긴 했어도, 차라리 이게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나도 괜히 속도 맞출 필요 없이 전력을 다해서 달릴 수 있다.

'가볼까.'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깨에 짐 하나를 추가한 채로.

*

여정이 이어졌다.

중간중간에 마수 무리와 맞닥뜨릴 뻔한 적이 몇 번 있었으나, 기민하게 움직인 덕분에 큰 전투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그, 이제, 내려, 주세······."

"거의 다 도착했다."

"예?"

그제야 힐데가르트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이윽고 절벽 아래에 펼쳐진 풍경에 입을 떡 벌렸다.

얼핏 봐도 수천 명은 살고 있는 듯한 규모의 마을.

그 마을 중앙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사원.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상징.

"저게, 대체······."

힐데가르트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크 바깥에 저 정도의 마을이 아직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모트교다."

"모트교라면··· 그 광신도 집단 말인가요?"

"그래. 정확히는 그 지부 중 하나지."

비록 아직 모트교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트교의 악명은 아크 내에도 자자했다.

정확히는, 아크의 적 중 하나로서 병사들에게 교육이 되는 내용 중 하나였다.

[···설마하니 이곳까지 알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보통 방법으로는 찾기 어려울 텐데.]

에스더의 말마따나 모트교의 가이샤라 지부는 모트교가 지닌 세 가지 성물 중 하나의 힘으로 보호받고 있는 만큼 찾기 쉽지 않다.

즉, 서쪽의 가이샤라 지부는 모트교에서 가장 세력이 큰 지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나처럼 이미 위치를 알고 있다면 해당하지 않지만 말이다.

"이만 돌아가지."

"···이대로 가는 건가요?"

"그러면 저기에 폭격이라도 하길 바라나?"

"그건······."

물론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모트교는 아크의 적이었고, 훗날 아크에 위협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세계의 세력들은 놀라울 정도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모트교라 할지라도 꼭 암적인 역할만을 하는 건 아니다.

모트교라는 공동의 적에 가까운 세력은, 그 존재만으로 아크에게 적대적인 세력을 억제하는 역할도 되기 때문이다.

'특히나 여기에 있는 가이샤라 지부는 위치상 더 그런 면이 있지.'

아크를 기준으로 동쪽은 그림자단을 비롯한 옛 크로노스 연합이 활동하는 터라 군소 세력들이 설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서쪽 지대는 다르다.

말 그대로 무법지대.

특히나 지금처럼 군소 세력들이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을 시기라면 더욱더 그렇다.

'실제로 힐데가르트가 이에 대해서 아크에 보고를 해도, 특별한 조치를 취할 가능성은 낮아.'

앞서 말했듯이 모트교 지부 중에서도 제법 큰 편에 속하는 가이샤라 지부 자체가 이 근방의 세력들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가이샤라 지부의 덩치가 어느 정도 커지게 되는 중반부 이상의 스테이지가 되면 이야기가 또 다르겠지만, 그때는 그때가서 상황에 맞는 판단을 하면 될 것이다.

"이 근방에 잠재적인 위협 요소는 이 정도가 끝인 것 같군."

"···그런 것 같네요."

"이만 돌아가지. 돌아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웨이브에 덮쳐질 수도 있다."

"아, 그······."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시뻘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이제부터는 제가 걸을게요."

"알았다."

나는 힐데가르트를 내려주었다.

꽤 오랜 시간을 업힌 채로 있었던 덕분인지는 몰라도 우로보로스의 영향에서 벗어난 듯했다.

"가지."

"아, 네!"

마침내 조사팀의 모든 임무가 끝났다.

돌아갈 때가 됐다.

* * *

이어지는 여정을 함께하며, 힐데가르트는 확신했다.

칼 마커스는 아크의 적이 아니다.

그녀는 그렇게 확신했다.

* * *

돌아가는 길은 순탄했다.

물론 도중에 마수 무리와 적지 않게 마주치긴 했지만, 피할 수 있는 건 피하고 싸워야 할 때는 싸웠다.

"7급 정도 되는 마수 무리다. 전투를 피할 필요는 없겠군."

"···네? 7급 무리와요?"

보통 레드 라인 수준에서 7급 마수 및 마물 정도면 꽤 상대하기 까다로운 축이었으나,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아니었다.

"걱정할 거 없다."

찾아오는 자에게는 A-985 폭발탄을.

몰려오는 자에게는 유탄을.

그게 내가 마수와 마물들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전투를 그렇게 몇 번 겪다 보니, 자연스럽게 힐데가르트가 지닌 탄약 역시도 바닥이 났다.

"···탄이 다 떨어졌어요!"

"그러면 옆에서 보고 있어라."

"하지만······."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힐데가르트의 눈에 내가 쏘아내는 무한의 총알이 어떻게 비칠지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렇게 전투에 전투를 이어가다 보니 어느덧 익숙한 도시의 모습이 지평선 너머에서 드러났다.

"아크다."

지평선 너머로 본 아크는 여전히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도 마수 및 마물 소거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듯했다.

한편, 이제 임무가 끝났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힐데가르트의 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헉, 허억······."

나름대로 페이스 조절을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쯤 가서 힐데가르트의 상태는 그야말로 반 시체와도 같았다.

어쩔 수 없었다.

본격적으로 임무가 시작된 뒤, 거의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며 내내 강행군을 이어갔다.

하물며 그 도중에 크고 작은 전투가 몇 번이었던가?

지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그런데도 이를 악물고서 포기하지 않는 걸 보면, 과연 훈련병도 아크의 군인이라는 건가.'

모르긴 몰라도 이번 임무를 통해서 힐데가르트 역시도 꽤 많이 성장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크의 군인이 강해진다는 건 자연스럽게 나에게 있어서 좋은 일이었다.

'그 총구가 나를 향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마침내 우리는 레드 라인의 Red-7 게이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지."]

스피커에서 기계음이 들려오자 헐떡이고 있던 힐데가르트가 숨을 가다듬고는 앞으로 나섰다.

"···Red-106 훈련대 소속 3중대 4소대 훈련병 힐데가르트입니다. 아크 외부 조사 임무에서 복귀했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아크의 문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크의 조사 임무를 완료하였습니다!]

[공적치가 누적됩니다.]

[+5,000 공적치]

[현재 공적치 : 32,145]

생각보다 보상 공적치가 적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보통 세 번째에서 네 번째 사이의 웨이브 보상 공적치가 2천이 채 안 된다는 걸 생각한다면 무려 웨이브 2개 치 이상의 보상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 공적치를 적다고 느끼는 건, 그만큼 내가 웨이브 때 벌어들이는 공적치가 많기 때문이었다.

'뭐, 이 부분은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이번 임무에서 진짜 중요한 보상은 공적치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구구구구구······.

마침내 아크의 성문이 완전히 내려오고, 익숙한 얼굴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이모샤 중위였다.

"···무사하셨군요!"

이모샤 중위는 평소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퀭한 눈을 보니 아무래도 우리를 내버려 두고 아크에 복귀했던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쿠릴타는?"

"다들 무사합니다. 덕분입니다."

"회포는 나중에 풀고··· 그쪽은?"

내가 살며시 이모샤 중위의 뒤에 따라온 이를 가리키자, 그제야 이모샤 중위가 아차 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 됐네."

그와 함께 이모샤 중위의 뒤에 있던 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군. 칼 마커스. 바놀 중령일세. 레드 라인의 동부 전선 수비대장을 맡고 있지."

바놀 중령.

나를 아크 밖으로 내쫓았던 이를, 돌고 돌아서 마침내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

< 조사팀 (11) > 끝

비록 바놀 중령이 나를 아크 바깥으로 내쫓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바놀 중령을 원망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만약 내가 바놀 중령이었어도 같은 선택을 내렸을 테니까.

"칼 마커스다."

"반갑네. 무사해서 더 그렇고."

평소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바놀 중령이 작게 미소 지었다.

물론 나는 알고 있었다.

저 미소가 철저히 만들어진 미소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단 들어가지. 여기 서서 하기에는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바놀 중령의 말마따나 현재 아크 바깥은 아직도 마수 및 마물 시체 소거 작업이 한창인 터라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대로 게이트를 개방한 채로 있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아크에 출입 권한을 지니고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내가 들어가도 되는 건가?"

"물론일세."

명예 시민권이 달린 임무여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바놀 중령은 순순히 나의 아크 출입을 허락했다.

어차피 이제부터 한 식구다, 뭐 그런 건가?

'아니면 함정이거나.'

물론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아크에서 나를 적으로 판단할 근거는 아직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적이 아니기도 하고.'

그러나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봤자 아크가 믿어줄지 안 믿어줄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아크가 외부인에 대해서 얼마나 배타적인지 잘 알고 있다.

실제로 블랙 라인이 멸망한 원인 중 하나가 2급 환상종 마물인 도플갱어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모든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서 외부 인원들을 받아들이는 건, 그 정도로 아크 내에 있는 인력난이 극심하기 때문이었다.

'가보면 알겠지.'

최악의 경우 전투가 일어나더라도 이 한 몸 뺄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는 바놀 중령의 뒤를 따라서 나는 이 세계에 온 뒤로 처음으로 아크 내에 발걸음을 내디뎠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야누스, 여기부터는 존재감을 완전히 죽여.'

내 명령과 함께 야누스가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드 라인의 게이트를 지나기 위해서는 정밀 스캔을 통과해야 했고, 현재 야누스의 상태로는 스캔에 발각될 테니 아예 존재감을 죽일 필요가 있었다.

스르르──

보호복 안쪽에서 나를 지키고 있던 뼈 촉수들이 모조리 보호복의 에너지원에 빨려 들어갔다.

거기에 더해서 야누스 본인 역시도 잠시 동면 상태에 들어갔다.

이제 야누스는 뼈 갑옷이 아닌 평범한 5레벨 보호복이 되었다.

아크가 지닌 스캔 기술로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야누스가 깊게 숨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스컬 나이트들이 본다면 또 모르겠지만.'

하지만 레드 라인 내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스컬 나이트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굳이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레드 라인을 비롯한 후방 라인에서 에테르 병사들을 배척하는 이유와 같은 이유였다.

'언제까지고 자기들만은 안전할 거라고 여기는 거지.'

오래전에 블랙 라인이 무너졌을 때 아크가 감당해야 했던 대가를 생각한다면 우스운 일이었다.

이제 아크는 라인 하나만 더 잃어도 그대로 모든 라인이 멸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나는 그런 식으로 아크가 멸망했던 무수한 전례들을 보아왔다.

'이게 첫걸음이다.'

이미 나는 아크 내에 적지 않은 인연을 만들었다.

네이비 라인 특수 기동 타격 담당관이자 벨로프 패밀리의 일원인 타티아나 벨로프를 시작으로,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장 메이벨 필그림 중령까지.

거기에 더해서 병참 장교 게드윈이나 이모샤 중위 같은 든든한 실무진은 물론이고, 머지않아 두각을 드러내게 될 쿠릴타를 비롯한 몇몇 병사들과도 인연을 만들었다.

'지금은 미약해도, 반드시 이들의 힘이 필요할 때가 올 거다.'

나는 게이트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이잉─

그와 함께 녹색 빛이 나와 힐데가르트의 몸을 훑었다.

아크에 들어설 때 반드시 치르는 과정이었다.

[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바놀 중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조금 전에 치러진 스캔 결과를 통해서 내가 풍기는 에테르 반응이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하물며 지금 내 곁에는 에스더까지 머물고 있었으니, 수치만 보면 거의 레벨 4의 에테르 적합자 이상의 수치가 나올 터였다.

"이쪽으로 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놀 중령은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나마 작은 변화를 눈치챈 것도 오랜 시간 동안 바놀 중령이라는 인물을 봐왔던 나였기에 가능했던 거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아크의 풍경이 나를 반겼다.

보통 각 라인의 외곽은 아크 정규군의 군영이 자리를 잡고 있는 터라 진짜 아크 내부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벽 안쪽에 가려져 있던 아크의 거대한 빌딩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자, 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아크에 온 것을 환영하네."

"환영해주니 고맙군."

"자네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정작 나를 아크 바깥으로 내쫓은 장본인주제에 말을 잘해요.

병사들의 경례 속에서 바놀 중령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들의 경례를 대신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들었겠지만,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을 것 같아서 말해주자면 쿠릴타와 클린트는 무사하네. 쿠릴타는 일주일 정도면 임무에 복귀할 수 있을 테고, 클린트는 이주 정도면 될 걸세."

얼핏 보면 전치 1주일과 2주일처럼 들리지만, 아크의 의료 기술이 상상 이상으로 발전했다는 걸 감안한다면 둘 모두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가, 다행이군."

"자네 덕분이지. 만약 자네가 나서지 않았다면 둘 모두 목숨을 잃었을 테니."

무언가 이상한 말이었다.

바놀 중령의 말대로라면, 만약 내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사상자를 감수하더라도 억지로 임무를 속행시켰을 거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게 무슨 뜻이지?"

"병사들의 생명이 가볍다는 게 아닐세. 다만, 이번 임무가 그만큼 중요한 임무였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군."

즉, 아크에서 새로운 지역의 주인급 마수, 우로보로스의 출현과 변절자 폰에 대해서 그만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토록 귀중한 병사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말이다.

'대충 경계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역시 지역의 주인급 마수라는 건가.'

실제로 더 디펜스에서 지역의 주인급 마수는 스테이지 보스로도 분류되는 만큼, 그대로 아크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존재다.

아크에서 이토록 과하게 반응하는 것 역시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단지 그뿐만은 아니겠지.'

아크에서도 설마 내가 마물 흉내를 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못 할 테니, 내가 변절자 폰이라는 의심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다른 의심이라면 얼마든지할 수 있을 터.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건 옛 크로노스 세력과의 연관성이겠지.'

실제로 이 시기라면 슬슬 크로노스의 잔존 세력들이 크로노스 연합을 만들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을 터.

나는 이번 기회에 그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부정할 셈이었다.

"들어오게."

바놀 중령의 집무실이 열렸다.

얼핏 보면 그냥 문이 열린 것 같지만, 그사이에는 홍채 인식과 지문 인식, 그리고 손목에 있는 디바이스의 신뢰성 검증까지도 이뤄진 것이었다.

그렇게 나와 힐데가르트, 그리고 이모샤 중위와 바놀 중령이 그의 집무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 마시겠나?"

"커피로 부탁하지."

커피는 아크 내에서도 꽤 값이 나가는 사치품에 속했지만, 바놀 중령쯤 되는 이가 접대용으로 못 내줄 것도 없었다.

"자네들은?"

바놀 중령의 시선이 차례로 힐데가르트와 이모샤 중위에게 향했다.

"저, 저는 물이면 충분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바놀 중령은 두 번 묻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상 위의 디바이스를 조작했다.

지이잉······.

그와 함께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 딱 컵이 들어갈 만한 구멍 네 개가 내려가더니, 이내 음료와 함께 다시 올라왔다.

나름대로 아크의 기술력이 집약된 물건이었지만, 어째 낭비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자, 이제 임무에 대한 보고를 받고 싶은데. 그곳에서 뭘 보았지?"

"최소 1급 이상으로 추정되는 마수의 태동을 감지했다. 자세히 조사했다면 좋았겠지만, 그 이상 접근하는 건 위험했기에 태동하는 것만 확인했다."

"최소 1급 이상이라··· 그렇다면 등급 외 마수로 분류해도 될 수준이던가?"

"그렇게 봐도 무방하겠더군. 포효만으로 힐데가르트의 몸이 완전히 굳을 정도였으니까."

"···그런가."

자연스럽게 바놀 중령의 시선이 힐데가르트에게 향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아크의 병사로서 추태를 보였습니다."

"탓하려는 게 아닐세. 그 정도의 마수를 보았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확인하고 싶은 건, 칼 마커스의 말이 사실인지 일세. 그의 말이 사실인가?"

힐데가르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그런가."

힐데가르트가 말하는 '보았다'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바놀 중령 역시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바놀 중령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외부 출신인 나와는 달리, 힐데가르트는 여러모로 신원이 확실한 아크의 시민이자 군인이다.

바놀 중령의 신뢰 역시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두 번째 임무는?"

"그 근방 자체가 지반이 완전히 무너져 있던 터라, 별다른 흔적은 찾지 못했다."

"···그런가. 하긴, 그렇겠지."

바놀 중령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내가 한 말이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기에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근방에서 어떤 불온한 움직임은 발견했나?"

"무너진 동굴에서 서남쪽에서 모트교의 지부로 보이는 마을을 발견했다. 절벽 아래에 있더군."

"모트교라······ 골치 아픈 자들이지. 그자들을 어찌하면 좋겠나?"

이건 떠보기였다.

내가 여기에서 어떤 대답을 하든지 간에 어차피 아크의 판단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내가 할 대답은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뿐이었다.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어째서지? 그들은 아크의 적이지 않나? 몰랐다면 모를까, 알았다면 내버려 둘 이유가 없을 텐데?"

그렇게 묻는 바놀 중령의 얼굴은 묘하게 즐거워 보였다.

"모트교를 적대하는 건 아크뿐만이 아니니까."

만약 내가 여기에서 모트교를 모조리 몰살해야 한다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바놀 중령은 나를 둘 중 하나로 판단했을 것이다.

아크의 전력을 소모 시키려는 크로노스 세력의 간자.

혹은 아크의 출정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모르는 머저리.

무엇이 됐든지 간에 나에 대한 바놀 중령의 판단이 내려갈 테니, 나로서는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가."

애초에 병력을 움직일 생각도 없는주제에 바놀 중령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임무에 대한 결과는 이게 전부다. 달리 궁금한 게 있나?"

바놀 중령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예 없진 않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힐데가르트 훈련병에게 따로 물어보도록 하지."

바놀 중령이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꺼낸 작은 카드 한 장을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약속한 아크의 명예 시민권일세. 이건 신분증이지. 원래였다면 사진은 따로 찍어야겠지만, 번거로워할 것 같아서 출입 기록에서 찾아서 만들었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찍어도 상관없네."

"그냥 쓰지."

"그럴 줄 알았네."

자리에서 일어난 바놀 중령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크의 시민이 된 것을 환영하네, 칼 마커스."

내가 바놀 중령의 손을 맞잡았다.

"감사히 받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아크의 군인이 되어줄 수 있겠나? 레드 라인에는 자네 같은 인재가 절실하게 필요해."

예상했던 권유였다.

아니, 아크의 외부인이 시민권을 얻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거절하지."

물론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아크의 일반 시민과 명예 시민과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의무의 존재다.

기껏 의무가 없는 명예 시민이 되었는데, 내가 왜 사서 고생을 한단 말인가?

"···그런가. 아쉽군."

바놀 중령은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바놀 중령으로서도 내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고서 한 말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라도 나를 찾아오게. 자네 같은 인재를 위한 자리는 늘 비워져 있으니."

"그렇게 하지."

"따로 머물 거처는 없을 테니, 내가 따로 관사에 자리를 알아봐 주지. 본래였다면 아크의 군인이 누려야 할 권리지만, 이번 임무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게."

"고맙게 받지."

안 그래도 아크 내에 거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바놀 중령 측에서 이 정도까지 배려해줄 줄은 몰랐다.

'물론 진짜 이유는 나를 감시할 수 있는 장소 안에 두려는 생각이겠지만.'

속내가 무엇이든지 간에 어쨌거나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아크의 임무를 완료하였습니다.]

[당신에 대한 아크의 신뢰가 한껏 깊어집니다.]

[아크의 명예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아크의 출입 권한이 부여됩니다.]

[아크의 명예 시민으로서 몇 가지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아크에 들어갈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얻었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몇 배로 늘어났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위이이이잉───!

여기저기서 점등되는 붉은 빛.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들릴 정도로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

"이건······."

"다들 움직여!"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1급 위험 상황 발생! 다시 한번 말한다! 1급 위험 상황 발생!"]

1급 위험 상황.

즉, 네 번째 웨이브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그만큼 조사팀의 임무가 길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침 잘됐다고 해야 하나.'

비록 중화기는 은신처 내에 있었지만, 딱히 아쉬울 건 없었다.

그보다 더한 물건들이, 이곳 아크에는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가볼까.'

전선으로.

< 바놀 중령 > 끝

사이렌이 울리기 무섭게 바놀 중령의 집무실은 단번에 전쟁터로 변했다.

"1급 상황이다. 소거 작업 인원들 복귀했나? ···복귀하는 대로 게이트 폐쇄하도록."

이모샤 중위는 이곳이 상급자의 집무실이라는 사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명령을 내렸다.

바놀 중령 역시도 그 사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가봐야겠어. 그러면··· 각자 해야 할 일을 하게."

바놀 중령은 그 말을 남기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물론 이 중에서 멍하니 집무실에 남아있을 사람은 없었기에 바놀 중령이 나서기 무섭게 각자 발걸음을 옮겼다.

"중위님,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이제 막 임무에서 복귀하지 않았나?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그러면 가지."

이모샤 중위와 힐데가르트의 대화는 짧았다.

그만큼 상황이 긴박했기 때문이다.

"같이 가지."

물론 나도 그 이동에 끼었다.

이미 전투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괜히 다른 곳으로 가서 일일이 드잡이질을 하느니 아는 얼굴이 있는 곳에 가는 게 여러모로 편하지 않겠는가.

"···같이 말입니까?"

"그래."

이모샤 중위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돕겠다는 사람을 쳐낼 정도로 아크는 여유롭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가시죠. 칼, 당신이 돕는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향한 곳은 Red-17 게이트였다.

게이트 담당 관리자인 이모샤 중위가 책임자로 있는 구역이었다.

"힐데가르트, 소대로 복귀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렇게 힐데가르트가 떠나고, 이모샤 중위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지금부터는 따로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신경 쓰지 마라. 바놀 중령이 말했던 것처럼 하면 된다."

"제가 해야 할 일말인가요··· 네, 맞네요. 그러면 이만."

이모샤 중위는 고개를 작게 숙이고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나는 순식간에 혼자 남겨지긴 했지만, 상관 없었다.

지금의 이 풍경은,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의 나에게 그 어떤 소속도 없다는 점 정도려나.'

본래였다면 소속 중대 및 소대, 그리고 분대로 나누어져서 그에 맞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을 테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소속이 없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아크의 명예 시민이라는 감투 아닌 감투 정도.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들 사이에서 크게 이질감이 없는 건, 아크 군인들의 정규복 중 하나인 보호복을 입고 있어서일 것이다.

"서둘러!"

"이쪽으로!"

아크 내부는 모두가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이미 아크가 웨이브를 겪어온 지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되었기에 병사들 역시도 나름대로 노련해졌기 때문이다.

"으, 으으······."

물론 병사 중에서 두려움에 빠진 자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제 막 훈련병 딱지를 뗀 신병들.

힐데가르트나 쿠릴타 군번의 바로 윗줄 기수인 이들이었다.

'저런 부류는 결국 둘 중 하나지. 두려움을 극복하든지, 아니면 전장에서 쓰러지든지.'

본래였다면 저렇게 담이 약한 자들은 훈련소 단계에서 자연스럽게 걸러졌어야 했지만, 아크의 지독한 인력난으로 인해서 현재 아크 내에 있는 대부분의 훈련소 수료 기준은 대폭 완화되었다.

한때 철인과도 같은 이들만 양성하던 아크의 군인들은, 이제 어디 한 곳이 불편해도 징집이 되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상황이 그랬으니, 신병이 웨이브를 앞에 두고 두려움에 빠지는 것 정도면 그나마 양반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이 아마 19번 게이트의 신병이었던가? 괜히 웨이브에 휩쓸려서 죽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아크의 신병 중에는 소위 황금 기수라 불리는 현 훈련병들 말고도 성장 포텐이 큰 인물들이 몇몇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이하다고 볼 수 있는 신병 중 하나가 바로 겁쟁이 벨이다.

개성 있는 특성을 지닌 덕분에 성장 포텐은 크지만, 대신 잠깐만 눈을 떼도 죽을 정도로 초반 스테이지 구간 때 약한 모습을 보인다.

'시간이 나면 한번 찾아봐야겠어.'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이긴 했으나, 나는 당장 더 급한 일을 마주하기 위해서 성벽에 오른 뒤에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현재 거리 약 7km!"

"사정권 내에 거의 도착했습니다!"

지평선 너머에서 몰려오는 무수히 많은 검은 점들.

[그우우우우우────!]

[카악, 카아악!]

[쒹··· 쒸시식······.]

멀찍이서 들려오는 온갖 종류의 괴성.

[온, 다······.]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아, 아아아아······!!!]

옆에서 떨고 있는 에테르까지.

이 모든 게 나에게 있어서는 사뭇 익숙한 풍경임과 동시에 더없이 낯선 광경이었다.

"게이트를 폐쇄하라!"

마침내 소거 작업에 나섰던 인원들이 다 복귀했는지, 잠시 열렸던 Red-17 게이트가 완전히 폐쇄되었다.

완벽한 전투 태세였다.

"6km!"

병사의 외침에 어느새 Red-17 게이트의 중앙 성벽 위에 올라간 이모샤 중위가 외쳤다.

"Red-17 부대, 모두 전투 준비!"

그와 함께 병사들의 얼굴과 몸짓에서 결연한 의지가 차올랐다.

철컥, 철컥-

차례로 장전되는 총기와 중화기들.

그리고 병사들의 시선이 지평선 너머에 고정됐다.

말이 6km지, 마수 무리의 이동 속도를 생각한다면 말 그대로 코앞에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5km!"

그리고 어느덧 레드 라인 전선으로 향하는 마수 군단의 선봉과의 거리가 5km 밑으로까지 줄어들었다.

다른 라인은 진작 포격을 시작했다는 걸 생각한다면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공격!"

이모샤 중위의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Red-17 게이트 수비대의 화력이 지평선의 마수와 마물들을 향해서 쇄도하기 시작했다.

피우우웅─────!!

시작은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미사일이었다.

무엇을 실었는지는 아직 내가 알 수 없었으나, 굳이 궁금해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곧 알게될 테니까.

콰카카카카카캉───!!!

JD-074 열압력탄의 막강한 화력이 내리꽂히며 레드 라인의 전선으로 향하는 마수 군단의 머리 위로 붉은 빛의 버섯 구름이 피어올랐다.

겉으로 보면 마수 따위는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막강한 화력이었지만, Red-17 수비대의 병사 중 그 누구도 환희에 찬 소리를 내지르거나 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건, 고작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피어오른 버섯구름 사이로 마수와 마물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크르릉······!]

[캬오오오오오!!!!]

[칵, 카아악!]

하나 같이 열 폭풍에 당해서 지독한 화상에 그을린 모습이었음에도 직접적인 폭발의 영향에서 벗어난 마수와 마물들은 쓰러지지 않았다.

아니, 몇몇 강력한 마수와 마물들은 JD-074 열압력탄의 직접적인 폭발의 영향력에 있고도 죽지 않았다.

'역시는 역시라는 건가.'

일정 수준 이상의 마수와 마물 중에서 외피가 특출난 종은 저렇게 압도적인 화력에도 버틸 수 있다.

그런 마수와 마물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약점을 공략하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큰 화력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온다!"

그게 시작이었다.

열압력탄으로 인해서 피어오른 버섯구름을 신호탄으로, 레드 라인의 수비대가 지닌 화력이 뿜어졌다.

투두두두두───!!

쾅! 콰캉! 콰카캉!

슬슬 내가 나설 때가 됐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물론 나는 아크의 군인이 아니니 지휘관의 명령에 굳이 따를 필요는 없었지만,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건 순전히 바놀 중령과 이모샤 중위의 배려라는 걸 생각해야 했다.

굳이 내가 이모샤 중위의 공격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린 이유였다.

철컥─

Ark-15 대물 저격총이 불을 뿜었다.

목표물은 2급 괴수종, 변이된 케찰코아틀.

과연 2급 괴수종답게 놈은 JD-074 열압력탄의 폭격을 직접 맞고도 살아남을 정도로 끈질긴 가죽과 생명력을 지녔다.

'하지만 약해진 건 사실.'

그 단단하고 질기던 가죽도 폭발에 의해서 헤지고, 너덜너덜 해졌다.

더군다나 숨을 쉴 때마다 나오는 매캐한 연기는 변이된 케찰코아틀의 폐부가 완전히 타들었음을 말해주었다.

즉, 놈은 지금 매우 약해졌다.

타앙─────!

새삼스레 소음 모드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곳은 온갖 소음과 굉음이 울려 퍼지는 전장의 한가운데였고, 내가 내는 총성 따위는 개미가 짖는 소리보다도 못했다.

탕, 타앙──!

장전된 탄창은 철갑탄.

당겨진 방아쇠는 총 세 번.

철갑탄은 관통력에 있어서 현재 내가 지닌 탄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탄이다.

아무리 2급 괴수종이라 할지라도 지금처럼 약해진 상태라면 칼날 탄환의 효과와 더불어서 가죽을 완전히 꿰뚫는 것도 가능했다.

[케에에에에에───!]

세 발의 철갑탄이 같은 곳을 집요하게 노리며, 정확히 세 번째 철갑탄이 닿는 순간 단번에 변이된 케찰코아틀의 심장을 꿰뚫었다.

칼날 탄환의 효과로 같은 곳을 집요하게 공략하자 방어력이 낮아진 것이었다.

[기에에엑!]

곧이어서 하늘을 날고 있던 변이된 케찰코아틀이 지상으로 힘없이 추락했다.

JD-074 열압력탄조차도 버텨냈던 날갯짓이지만, 심장을 잃고도 이어갈 재주는 없었기 때문이다.

[2급 괴수종, 변이된 케찰코아틀을 처치하였습니다.]

[2급 괴수종, 변이된 케찰코아틀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무려 2급 괴수종이 쓰러지자, 공포탄의 효과가 발동했는지 주변의 마수와 마물들에게서 혼란스러운 움직임이 보였다.

물론 지금 레드 라인의 전선에 있는 병사들은 그런 것까지 차마 신경을 쓸 틈이 없어 보였지만, 내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자, 그러면······.'

나는 Ark-15 대물 저격총을 자동 소총 모드로 변경하고는 탄창을 갈아 끼웠다.

A-985 폭발탄이었다.

곧이어서 나는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쾅!

콰카캉!

중화기가 없는 게 아쉽지만, A-985 폭발탄의 위력은 그러한 아쉬움을 달래다 못해 차고 넘쳤다.

다만, 그럼에도 신경이 쓰이는 건 있었다.

'A-985 폭발탄을 이렇게 남발하면 주위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

물론 이 소란스러운 와중에 내가 총알을 몇 발이나 쏘는지 관심을 가질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의 만약이라는 게 있었으니 말이다.

이유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아크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는 처지야.'

그렇기에 나는 우선 아크의 신용을 얻기 위해서 행동 방침을 바꿨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상, 네 번째 웨이브를 막아내는 건 이미 기정사실화된 것이나 다름없다.

곧, 중점적으로 봐야 할 것은 웨이브의 클리어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가장 적은 피해로 웨이브를 클리어할 지다.

'약한 곳부터 지원한다.'

나는 레드 라인 게이트 전선을 살폈다.

< 레드 라인 방어 > 끝

웨이브 때 아크가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건 언제인가?

아크의 화력은 막강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웨이브를 막아내지 못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보면 아크 측에서 희생이 나오면 안 될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크 측에서는 매 웨이브 때마다 적지 않은 희생자가 나온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마수와 마물들이 줄지어서 질서정연하게 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수비를 하는 입장에서 보면 각 전선에는 마수와 마물들을 감당할 수 있는 일종의 한계선이 존재한다.

피해는 바로 그 한계선이 넘어섰을 때 갑작스럽게 발생한다.

그 어떤 예고도 없이 말이다.

곧, 그렇게 일어난 피해가 또 다른 한계선을 앞당기며 아크의 피해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게 된다.

마치 처음에는 작았던 눈 덩어리가 산꼭대기에서 굴러떨어지듯이.

요컨대 웨이브 때 병사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한계선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전장 한 곳에서 진득하게 활약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힘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며 아크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거라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Red-17 게이트의 수비 구역을 한눈에 살폈다.

가까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한 걸음 물러나니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음.'

아직 본격적으로 마수 군단이 들이 닥치기 전이었지만, 모든 마수와 마물들이 그런 건 아니었다.

비행종을 비롯한 하늘을 나는 괴수종들이 마치 척후병처럼 하늘에서 호시탐탐 아크를 노리고 있었다.

몇몇 비행종 같은 경우는 바위까지 들고 있었으니, 저대로 내버려 둔 다면 큰 피해가 생길 건 자명했다.

아크의 입장에서 저 비행종들에게 화력을 쏟자니 당장 지상에서 오고 있는 본대가 신경 쓰이고, 신경을 안 쓰자니 마치 날파리처럼 하늘에서 기웃대는 게 거슬린다.

다른 무엇보다도 비행종 특유의 기동성도 문제였다.

아무리 화력을 쏟아도 잡기가 쉽지 않으니, 아크의 수비에 있어서 비행종은 대형 마수와 더불어서 가장 까다로운 상대 중 하나였다.

투두두두두──!

"망할, 안 맞아!"

"비행종의 움직임을 예측해!"

"저걸 어떻게 예측해?!"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아크의 병사들이 비행종을 향해서 온갖 중화기와 화기를 쏘아내고 있었다.

단지, 그중 대부분은 빗나갔을 뿐.

물론 쏟아지는 화력이 화력이다 보니 비행종들도 섣부르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만약 마수 군단 본대가 더 가까워진다면 더는 여력이 없을 터였다.

'우선, 비행종부터.'

나는 총구를 들었다.

비행종을 비롯한 공중형 마수와 마물들의 공통적인 약점은 날개다.

물론 아크의 병사들 역시도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럴 능력이 있는지는 또 별개였다.

철컥-

울려 퍼지는 굉음과 소음은 사람의 집중력을 흐뜨려 놓기에 충분했지만, 이미 나에게 있어서는 익숙한 환경이었다.

['저격수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방아쇠가 당겨졌다.

타앙────!

발사된 총알은 A-985 폭발탄.

원래도 파괴력 면에서 더없이 강력한 탄이지만, 비행종처럼 상대적으로 약점이 드러나 있는 상대로는 더욱더 유효했다.

쾅!

콰캉──!

선두에서 얼쩡대던 8급 비행종들이 폭발과 함께 마치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비행종은 맞추기 어렵다.

다만, 맞추기만 한다면 피격 범위는 생각보다 넓다.

날개 전체가 약점이었기 때문이다.

[8급 비행종, 검은 깃털 참수리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비행종, 검은 깃털 참수리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8급 비행종, 검은 깃털 참수리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비행종, 검은 깃털 참수리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재차 방아쇠가 당겨졌다.

마수 군단의 본대가 다다르기 전에 최대한 많은 비행종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5급 거충종, 거대 말벌을 처치하였습니다.]

[5급 거충종, 거대 말벌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5급 비행종, 암흑 가오리를 처치하였습니다.]

[5급 비행종, 암흑 가오리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무려 5급에 달하는 마수와 마물들도, 약점인 날개를 폭발탄으로 공략한다면 생각보다 쉽게 잡을 수 있다.

A-985 폭발탄은 그런 물건이었다.

괜히 한 발당 가격이 정신이 나간 게 아니었다.

'그나저나, 조금 아깝긴 하네.'

아크의 전선에 널려 있는 무수히 많은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들.

저 정도면 야누스와 호루스를 엄청나게 성장시킬 수 있을 텐데······.

'뭐, 어차피 못 먹는 거니까.'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로 전선을 바라보았다.

적지 않은 비행종을 쏘아서 추락시켰음에도 여전히 하늘을 새까맣게 물들이고 있는 먹구름 떼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아직 본대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우우우우────!!!]

대형 마수들의 음울한 괴성이 전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마수 군단의 본대와 아크와의 거리가 500m 안쪽까지 줄어들었다.

전면전 시작이었다.

콰카카캉──!

콰아앙!

NOA-8 중기관포, NO-13 유탄 발사기, TITAN-17 대마수 로켓, BB-88 블래스터 등의 온갖 화기가 레드 라인의 전선을 향해서 쏟아졌다.

그야말로 막강한 화력에 용감하게 마수 군단의 선봉에 섰던 마수와 마물들이 마치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캬오오오!]

[그르륵!]

하지만, 그런 막강한 화력도 마치 해일처럼 몰려드는 마수와 마물 떼를 상대로는 조금 빛이 바랬다.

화력이 막강한 것과는 별개로, 아크가 사용할 수 있는 총알과 물자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NOA-8 중기관포 재장전!"

빈틈은 그럴 때 드러난다.

마수와 마물들은 끊임없이 몰려드는데, 그걸 상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정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이 내가 나서야 할 때이기도 했다.

탕-!

나는 재장전 중인 NOA-8 중기관포의 사수 앞에 달려들던 비행종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 거리에서 폭발탄을 사용했다가는 아군이 휩쓸릴 수도 있었기에 탄창은 철갑탄으로 바꾼 상태였다.

[기엑!]

그렇게 병사의 눈앞에서 비행종의 머리가 터지자, 중기관포의 사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물론 일일이 그런 것까지 챙겨줄 수는 없었기에 나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본격적으로 전선의 구멍을 메꾸러 다닐 때가 됐기 때문이다.

'왼쪽.'

철컥-

거침없이 방아쇠가 당겨졌다.

[6급 거충종, 붉은 눈 거대 잠자리를 처치하였습니다.]

[6급 거충종, 붉은 눈 거대 잠자리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전투 중인 이들에게 아주 잠깐의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그 정도면 재장전이든, 장비 정비든 뭐든지 해서 다시금 전투에 임할 수 있을 테니까.

비록 예전에 아크 바깥에서 혼자서 날뛸 때보다 공적치 자체는 적게 얻을 수도 있었으나, 이 방법이 아크의 희생을 줄인다는 관점에서는 더 효율적이었다.

'레드 라인의 병사들은 장차 성장하면 다른 라인으로 차출될 수도 있어. 지금부터 최대한 많이 살려놔야 한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아크의 수비가 단단해지는 건 확실했으니, 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Red-17 게이트를 누볐다.

쾅! 콰캉!

연신 폭발음이 들려오고, 가끔은 생명의 은인에 대한 감사 인사도 들었다.

"고, 고맙네!"

내가 방아쇠를 당기거나, 움직일 때마다 본래였다면 죽었어야 할 군인들이 살아남았다.

본래였다면 사라졌어야 할 아크의 전력이 보존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소득은 그뿐만이 아니다.'

만약 그뿐만이었다면 내가 굳이 상대적으로 공적치를 적게 얻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병사들을 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아크의 전력을 보존한다고 해도, 정작 내 성장이 막히면 본말전도가 되어버릴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 역시도 나에게 있어서는 꼭 필요한 과정 중 하나였다.

다름 아닌 불살주의 특성 때문이었다.

['불살주의'를 시행하였습니다.]

[현재 구한 생명 : 9]

예전에 실험탄 GHOST-157의 회수팀과 맞닥뜨렸을 때 얻은 특성.

불살주의 특성은 구한 생명이 100이 될 때마다 구사일생(九死一生)의 기회를 얻는 특성이다.

구사일생 특성은 충족하기 까다로운 조건을 지닌 만큼, 일단 얻기만 한다면 이름 그대로 목숨 하나를 얻는 것과도 같다.

'구사일생 스택은 적어도 한 개 이상은 유지해야 해.'

언제 어디서 생명의 위기에 처할지 모르는 게 바로 이 빌어먹을 세계다.

그런데 정작 내가 보유한 누적된 구사일생 수는 0이었으니, 챙길 수 있을 때 챙겨놓는 게 좋았다.

'오늘, 최소 한 개 이상의 구사일생 스택을 쌓아 놓는다.'

나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불살주의'를 시행하였습니다.]

[현재 구한 생명 : 11]

아크의 전력도 보존하고, 구사일생의 스택도 쌓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

* * *

Red-17 게이트의 수비를 지휘하고 있던 이모샤 중위는 어느덧 전선이 한껏 여유로워진 걸 느꼈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여전히 전선에서는 한창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마수와 마물들이 딱 병력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웨이브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많고 강한 마수들이 온다는 걸 감안했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수의 숫자와 강함은 웨이브가 지날 때마다 강해지지만, 반대로 아크의 전력은 시간이 지날 때마다 약해지기 때문이었다.

'마수들이 우리의 사정을 봐주고 있는 게 아니야.'

누군가 전장을 조율하고 있다.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그렇다면 누가?'

그리고 그게 누구인지 이모샤 중위는 곧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애초에 Red-17 게이트에 생긴 변화라면 오직 하나뿐이었다.

'설마······.'

그녀의 시선이 빠르게 Red-17의 전선을 훑었다.

장교, 부사관, 병사할 것 없이 모두가 목숨을 걸고서 싸우는 와중에 유독 먼지처럼 흐릿한 존재감을 지닌 사내가 있었다.

칼 마커스였다.

칼 마커스는 계속 움직였다.

가끔은 방아쇠도 당기고,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마수 무리를 향해서 유탄을 발사하기도 했으나, 적극적으로 교전에 응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체 무얼하는 거지?

얼핏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들 정도였지만, 잠시 지켜보니 칼 마커스가 무얼하는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병사들을 지원하고 있어.'

칼 마커스가 향하는 곳은 늘 전선이 불안정한 곳이었다.

중기관총의 탄이 걸리거나, 혹은 마수와 마물이 지척에 다다라서 위험에 처한 순간에 칼 마커스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 덕분에 Red-17의 전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수월하게 마수와 마물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희생자 역시도 이전까지의 웨이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적었고 말이다.

'···저런 게 가능하다고?'

전투 중에 전장의 상황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눈.

움직이기 위해서 필요한 판단력.

그걸 시행할 수 있는 힘.

그 중 그 어떤 것이라도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덕분에 지금 전장의 상황은 놀라울 정도로 바뀌고 있었다.

'이게··· 한 명이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병사들을 지휘하며 뛰어난 능력을 뽐내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개인의 능력.

칼 마커스는 홀로 그걸 해내고 있었다.

그때, 이모샤 중위의 디바이스가 울렸다.

바놀 중령이었다.

["이모샤."]

"예."

["Red-7 게이트에 지원이 필요하다. 인원 차출하도록."]

< 레드 라인 방어 (2) > 끝

"······인원을, 말씀이십니까?"

["그래, 사태가 긴급하다. 한 개 소대를 차출하도록. 지금 Red-7 게이트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

과연 바놀 중령인지 특별한 보고 없이도 이미 각 라인의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차출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Red-17 전선 역시도 위험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았습니까?"

["최소 30분 안에 도착해야 하네."]

"···알겠습니다."

드넓은 아크의 레드 라인을 가로질러서 30분 안에 도착하라니······.

아무리 아크 내에서는 반중력 트레인을 운용할 수 있다고 해도 시간상 지금 당장 출발해야 간신히 도착 시간에 맞출 수 있는 상황이었다.

'생각보다도 시간이 더 촉박해.'

가능하다면 Red-17 게이트 전선을 안정화시키고 팀을 출발시키고 싶었으나, 바놀 중령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Red-7 게이트 쪽 사정이 정말로 심각하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상한데······.'

이모샤 중위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껏 서부 전선의 Red-7 게이트는 여타 서부 전선과 마찬가지로 늘 웨이브 때마다 큰 성과를 올렸다.

예전이었다면 늘 서부 전선 쪽이 버거웠기에 동부 전선에서 지원을 갓다가, 최근 들어서 서부 전선 쪽의 상황이 매우 좋아진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동부 전선으로 지원을 오지 않을까 했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지원 요청을 하다니?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무언가 나타난 건가?'

지역의 주인급 마수.

이모샤 중위가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아니야··· 만약 그랬다면 바놀 중령님이 말을 했을 터.'

바놀 중령은 유능한 지휘관이다.

실무자에게 정보를 전달할 때 의도적으로 정보를 누락하는 머저리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지역의 주인급 마수가 출현했다면 반대쪽 전선에서도 어떤 징조가 나타났어야 했건만, 이곳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설마.'

칼 마커스가 이곳으로 와서?

말도 안 되는 짐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달리 떠오르는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밖에 없었다.

한때 칼 마커스는 서쪽 전선에서 머무르며 아크를 도왔고,

이제는 동쪽 전선, 그것도 Red-17 게이트로 왔다.

물론 이모샤 중위로서는 쉽게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단 한 명의 존재가 전황을 그 정도까지 바꾼다고?'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일이었지만, 실제로 그러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실제로 칼 마커스가 Red-17 게이트에 온 뒤로, 사망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평소에 게이트에서 발생하는 사상사 숫자를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크고 작은 사상자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들 중에서 죽음에 이른 병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상황이 오기 전에 칼 마커스가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만약 정말로 이 상황이 칼 마커스 덕분이라면······.'

지원팀을 보내더라도 Red-17 게이트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는, 칼 마커스가 있었으니까.

"베타 소대, 응답하라. 5분 뒤까지 현재 전선을 알파 소대와 감마 소대에게 인계하고 Red-7 게이트로 지원 가도록."

["알겠습니다."]

이모샤 중위는 지금도 전선을 누비고 있는 칼 마커스의 뒷모습을 살며시 바라보았다.

잠시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모샤 중위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방아쇠에 손을 옮겼다.

지휘는 방아쇠를 당기면서도 얼마든지 내릴 수 있었고,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때였다.

철컥-

총성이 울려 퍼졌다.

* * *

타앙───!!

전장에 가득 울려 퍼지는 총성과 괴성 속에서 Red-7 게이트 담당관인 템벨 대위는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댄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목을 축일 틈도 없이 몰려드는 마수들 때문이었다.

["현재 R7-14 구역 위급하다. 지원 바란다."]

["R7-3 구역에 3급 마수 출현! 담당팀에게 지원 요청 바란다!"]

["흐아악!"]

어지럽게 울리는 보고들.

아니, 비명들.

템벨 대위는 경험이 부족한 걸 제외한다면 나름대로 정규 과정을 수료한 엘리트였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마수와 격전을 벌이면서 이 모든 것들을 총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지?'

최근 들어서 템벨 대위는 기세가 등등했다.

근래에 있었던 몇 번의 웨이브를 큰 피해 없이 너무나도 수월하게 막아냈던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다음에 있을 진급 심사에서 진급이 유력하다는 이야기까지 돌고 있었고, 템벨 대위는 고생한 부하들에게 술과 고기까지 베풀며 치하했다.

다음에도 이렇게만 하자고, 너희는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게 방심을 불렀던 걸까.

분명히 사기가 올랐을 텐데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맹렬해진 웨이브에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교들까지도 속수무책이었다.

"지원은 아직 멀었나?!"

["출발했다고 합니다."]

"언제?"

["3분 전입니다."]

"3분 전?! 10분 전에는 출발했어야지!"

템벨 대위의 목소리에 어느덧 아크의 성벽을 오른 5급 마수 하나가 으르렁댔다.

"담당관님!"

"이 새끼가 겁도 없이!"

템벨 대위의 손에서 뽑힌 DR-404 리볼버가 불을 토했다.

업그레이드는 물론이고 커스터 마이징까지도 마친 물건으로, 5급 마수 따위는 맞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찢어발기기에 충분한 물건이었다.

그래, 어디까지나 맞기만 한다면 말이다.

[케에에에에!]

초탄이 빗나간 후, 놀라운 속도로 달려든 5급 마수의 모습에 템벨 대위의 자세가 순간적으로 무너졌다.

날아드는 가시를 피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몸을 날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 자세 그대로 템벨 대위의 총구가 마수에게로 향했다.

철컥-

콰아아아앙───!!!

정녕 이게 리볼버에서 나간 소리인지 의심이 들 정도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불안정한 자세로 사격을 한 반동으로 그대로 템벨 대위의 어깨가 빠졌다.

무려 2단계의 업그레이드를 거친 DR-404 리볼버는 그런 물건이었다.

"크윽!"

여전히 지원이 도착하려면 25분은 남은 상태.

템벨 대위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번 싸움이,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그 어떤 싸움보다도 험난할 것이라고.

* * *

전선을 지켜보던 나는 R17-5 구역부터 R17-10 구역까지의 수비를 담당하고 있는 베타 소대가 물러나는 걸 보았다.

아무래도 다른 전선으로 지원을 가려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서부 전선 쪽에서 안 좋은 소식이 빨리 들려 왔어.'

나는 처음에는 동부 전선, 그리고 이후에는 서부 전선에서 활약했다.

활약한 빈도수로 보면 두 전선이 비슷했으나, 끼친 영향력은 확연히 다르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활약한 덕분에 서부 전선 쪽에서 어느 정도 전력이 보전되었으니,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웨이브를 막아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서부 전선은 본래 내가 알고 있던 속도보다도 더 빨리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방심한 건가.'

생과 사를 오가는 전장에서 방심이라니?

본래의 아크였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유는··· 역시 나 때문인가.'

이 부분은 내 실책이었다.

지난번 전투에서 중화기를 마음껏 사용했던 탓에, 본래였다면 서부 전선의 병사들이 막아냈어야 할 마수와 마물들을 매우 많이 사냥했다.

즉, 서부 전선의 병사들로서는 자신들이 웨이브를 막아냈으니 자만에 빠질 만도 했다.

'쯧.'

이럴 때 중요한 게 바로 지휘관의 역할이었건만, 애석하게도 자만에 빠진 건 템벨 대위 역시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염려는 했지만 그래도 잘 하길 바랐는데···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겠지.'

나는 본래 베타 소대가 담당하고 있던 R17-5 포인트로 향했다.

그리고는 Red-17 수비대 소속 베타 소대의 소대장인 리우를 찾았다.

"이봐."

"···누구십니까?"

"용병이다. 지금부터 이모샤 중위에게 내가 하는 말을 전해라."

"신원을 밝혀 주십시오."

"시간이 없으니 이 말만 전해라. 서부 전선으로 지원을 갈 소대를 세 개 소대로 늘릴 것. 칼 마커스가 전했다고 하면 된다."

"그게 무슨···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베타 소대의 소대장인 리우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곧장 이모샤 중위와 통신을 연결했다.

치칙, 칙─

["보고하라."]

그렇게 리우 하사가 이모샤 중위에게 설명을 마치자, 통신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떨렸다.

["···칼 마커스는? 지금 옆에 있나?"]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영상으로 전환하겠다."]

"예."

그와 함께 리우 하사의 손목에 있는 디바이스에서 이모샤 중위의 얼굴이 나타났다.

["칼,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계십니까?"]

"그래."

["하지만 세 개의 소대가 한 번에 전선을 비우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희 측에는 그럴 만한 여력이 없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라."

내가 살며시 R17-1 포인트부터 R17-15 포인트까지를 시선으로 훑었다.

Red-17 수비대 소속의 알파, 베타, 감마 소대가 담당하는 구역들이었다.

"빈 곳은 내가 맡는다."

["···예?"]

"내가 맡겠다고 했다."

["그게 무슨··· 설마 혼자서 R17-1 포인트부터 R17-15 포인트까지 맡겠다고 한 겁니까?"]

"그래."

이모샤 중위의 얼굴이 잠시 얼이 빠졌다.

그 정도로 내가 한 말이 허무맹랑하게 들렸기 때문일 터였다.

["말도 안 됩니다. 혼자서 세 개 소대가 맡아야 할 구역을 맡는다고요? 위험합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록 칼 당신이 이제 아크의 시민이긴 하나, 군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그게 내가 아니라면.

"할 수 있으니까 한다고 한 거다. 지금 이렇게 실랑이를 벌일 시간이 없을 텐데?"

["하지만 그건······."]

"날 믿어라."

이모샤 중위는 내 당당한 태도에 할 말을 잃었는지 잠시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애석하게도 그녀에게는 고민을 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길어야 30초.

그게 Red-17 게이트 담당관이자 명령권자인 이모샤 중위에게 당장 허락된 시간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침내 이모샤 중위의 결단이 내려졌다.

그녀가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놀라울 건 없었다.

애초에 받아들일 걸 알고서 한 제안이기도 했고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일들은 이모샤 중위에게 믿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니까.'

그 말마따나 이모샤 중위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을 믿겠습니다. 칼 마커스."]

"잘 생각했다."

이모샤 중위의 결단에 디바이스의 주인이자 알파 소대의 소대장인 리우 하사는 매우 놀란 듯했으나, 애써 동요를 감췄다.

일일이 놀라고 있기에는 지금 상황이 긴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됐으니, 알파, 감마 소대와 함께 바로 출발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렇게 이모샤 중위와의 통신이 끝난 후, 리우 하사는 나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체 뭐 하시는 분이신지는 모르겠으나··· 모쪼록 무운을 빕니다."

"그래."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새삼스레 수비 구역에 대한 설명이나 인수인계 따위를 할 시간은 없었다.

내가 혼자서 3개 소개가 책임지는 구역을 막겠다고 장담했고, 나는 이제 이모샤 중위의 믿음에 대한 증명을 해야 했다.

'어려울 거 없지.'

그 정도야 지금까지 질리도록 해왔던 일이었고 말이다.

그리고······.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갔다.

자신들의 수비 구역에서 한 번에 철수하게 된 알파 소대와 감마 소대는 자신들의 담당 수비 구역을 비워야 한다는 명령에 적잖이 당황한 듯했지만, 별다른 말 없이 명령에 따랐다.

Red-17 게이트의 담당관이자 지휘관인 이모샤 중위에 대한 신뢰가 높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들 철수한다! 지금부터 Red-7 게이트에 지원을 간다."

알파, 베타, 감마 세 개의 소대가 자신들의 구역을 떠나기 위해서 일제히 철수를 준비했다.

그들이 서부 전선으로 가게 되면, 서부 전선도 한숨 돌릴 수 있을 터.

'거기다가 세 개의 소대가 서부 전선에서 활약하게 되면, 그로 인해서 살아난 인원에 대한 불살주의 특성이 발동한다.'

즉, 알파, 베타, 감마 소대가 하기에 따라서 한 번에 30 이상의 불살주의 중첩을 쌓을 수 있는 기회라는 소리였다.

'지금 불살주의 중첩이 20 정도니··· 잘하면 오늘 안에 구사일생 1중첩을 얻을 수 있겠어.'

그러는 와중에도 내가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불살주의 중첩은 늘어갔다.

['불살주의'를 시행하였습니다.]

[현재 구한 생명 : 21]

한창 전투가 이어지는 와중에 레드 라인의 전선을 지키고 있던 3개 소대가 일제히 빠지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마수와 마물들이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최소 6급 이상의 마수들.

본래였다면 한 마리 한 마리를 사냥할 때 심혈을 기울여서 잡아야 한 놈들이, 무리를 이룬 채로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더해서 하늘 위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비행종들과 괴수종, 거충종들은 또 어떤가?

'현재 내가 지닌 병기로는 이걸 제지할 수 없어.'

Ark-15 자동변환 소총과 A-985 폭발탄은 분명히 훌륭한 병기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제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필요한 게 바로 이곳에 설치된 중화기였다.

아니, 대형 화기라고 해야 할까?

내가 사용하는 NOA-8 중기관포나 TITAN-17 대마수 로켓는 중화기이긴 하나, 어디까지나 휴대가 가능한 이동식 병기다.

하지만 이곳에 수비를 위해서 설치된 포탑은 달랐다.

'NOA-44 이레이저.'

통칭, 지우개.

아크의 병기에도 네임드가 있다면 NOA-44 이레이저는 충분히 그 자리를 꿰찰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동이나 기타 편의성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서, 오직 극대화된 화력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물건.

규격 자체가 휴대용 병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기본적인 총알 스펙부터 그렇다.

20mm의 탄환을 사용하는 NOA-8 중기관포도 충분히 괴물 같은 물건이지만, 이곳에 있는 NOA-44 이레이저는 무려 30mm 탄환을 사용한다.

기본적인 총알 크기가 크기인 만큼 당연히 안에 들어가는 화약과 폭발물의 양 역시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거기다가 총 24개로 이루어진 다총열은 분당 2만 발에 가까운 총알을 쉴새 없이 쏟아낼 수 있게 만드니, 이에 걸린 마수와 마물은 말 그대로 지워질 수밖에 없다.

'유일한 단점은 막대한 탄약 소모로 인한 보급과 재장전.'

아무리 큰 탄창 통을 구비 해도 무려 30mm짜리 탄을 사용하는 만큼 탄창 통 하나에 들어가는 총알의 숫자도 제한될 수밖에 없으니, 자연스레 분당 2만 발에 달하는 연사력을 감당할 수는 없다.

당연히 재장전 시간과 보급 과정 역시도 엄청나게 길어서, NOA-44 이레이저를 운용할 때는 항상 사수 1명당 부사수 3명이 붙는다.

그러고도 재장전 때마다 크나큰 빈틈이 노출되는 게 NOA-44 이레이저의 유일한 단점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나는 아니지만.'

철컥, 철컥, 철컥─

위이이이잉──!

NOA-44 이레이저의 총열이 거칠게 회전을 시작했다.

[캬오오오!]

[크르르르르!]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완전히 성벽을 오른 마수들이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물론, 이미 준비는 끝났다.

콰카카카카카────!!!

NOA-44 이레이저의 총구에서 불꽃이 뿜어지며,

그곳에 닿은 모든 게 지워졌다.

< 레드 라인 방어 (3) > 끝

말 그대로 모든 걸 지워버리는 NOA-44 이레이저 앞에서 모든 마수와 마물은 평등했다.

애초에 마수와 마물들을 사냥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30mm 탄환이 지나간 곳에 남는 건 한때 마수였던, 그리고 마물이었던 파편들뿐이었다.

[3급 비행종, 하늘 고래를 처치하였습니다.]

[3급 비행종, 하늘 고래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5급 식물종, 자라나는 가시 덩굴을 처치하였습니다.]

[5급 식물종, 자라나는 가시 덩굴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4급 거충종, 독침 말벌을 처치하였습니다.]

[4급 거충종, 독침 말벌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

.

.

[4급 괴암종, 가고일을 처치하였습니다.]

[4급 괴암종, 가고일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그 대상에는 아크에 직접적인 위협에 되는 위험요소로 분류되는 5급 이상의 마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무리 두꺼운 가죽과 근육을 지니고 있어도, 고폭탄을 품은 30mm 탄환에는 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무식한 화력이 대가 없이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30mm 탄환과 분당 2만 발이라는 연사력은 아무리 강한 지지대가 있어도 사수의 조준점을 흔들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NOA-44 이레이저는 그 무식한 화력과 크기 때문에 포구를 돌리는 것도 매우 어렵다.

괜히 기존에 NOA-44 이레이저를 운용할 때 부사수가 3명이나 달린 게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정작 지금 나는 혼자지.'

NOA-44 이레이저는 다루는데 숙달된 군인이 네 명은 붙어야 다룰 수 있는 병기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그런 무식한 병기를 다룰 수는 없다는 뜻.

물론, 어디까지나 내가 정말로 혼자였을 경우에 말이다.

뿌득, 뿌드득─

팔에 있는 핏줄이 서는 게 느껴진다.

범인(凡人)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근력으로도 NOA-44 이레이저를 다루는 건 무리였다.

그렇기에 나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내 파트너를 깨울 필요성이 느껴졌다.

'이제 일어나.'

[기깃!]

단잠을 이루고 있던 야누스가 내 부름에 깨어났다.

비록 대놓고 나설 수는 없어도, 평소에 하던 것처럼 내 움직임을 보조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나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조준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NOA-44 이레이저 하나로는 무려 15개에 달하는 수비 구역을 모두 커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크 내인 만큼 야누스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어.'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었다.

거리낄 건 없었다.

이 방법은 이미 아크에서도 알고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에스더.'

아크에서도 내가 에테르 적합자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애초에 내가 아크 바깥으로 쫓겨난 이유가 바로 에테르 적합자이기 때문이었으니까.

즉, 내가 에테르를 자유자재로 다룬다고 해서 딱히 이상할 건 없다는 이야기다.

[우리 잘나신 주인님께서는 꼭 아쉬울 때만 찾는다니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에스더는 조금 투덜거리기는 했어도 평소처럼 뻗대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 부분은 단순히 에스더가 나를 위했다기보다는, 애초에 그림자단으로서 에스더가 아크의 멸망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이제 반강제적으로 그림자단에서도 손을 뗄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 본질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다.

'기어오르는 놈들 막아.'

내 명령이 떨어지자,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에테르들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나와 에스더의 의지에 감응한 에테르가 거칠게 들썩거리며, 성벽을 기어오르는 마수와 마물들의 앞을 막아섰다.

거창한 물리력은 필요 없었다.

그저, 아주 잠시 동안 성벽을 기어오르는 마수의 앞길을 막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나머지는 NOA-44 이레이저가 해결해 줄 테니 말이다.

투콰카카카카────!!!!

하나의 병기에서 쏟아지는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화력이 전선을 휩쓸었다.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고 여겼으나, 지금 나는 혼자서 세 개 소대의 몫을 능히 해내고 있었다.

무한의 총알이 지닌 진정한 강점이 비로소 나오고 있는 셈이었다.

[10급 거충종, 근면한 일개미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거충종, 근면한 일개미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10급 거충종, 사각턱 병정 개미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거충종, 사각턱 병정 개미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8급 비행종, 검은 깃털 참수리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비행종, 검은 깃털 참수리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

.

[8급 괴암종, 화강암 골렘을 처치하였습니다.]

[8급 괴암종, 화강암 골렘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3개의 소대가 떠난 후, 처음에는 불안하기만 했던 Red-17 전선이 어느덧 안정되어 갔다.

이제 R17-1 구역부터 R17-15 구역까지 성벽을 넘는 마수와 마물은 없었다.

'음.'

아주 약간의 여유가 생긴 덕분에 나는 슬슬 다른 것에도 신경을 쓸 필요성을 느꼈다.

다름 아닌 아크의 시선에 대한 것이었다.

'슬슬 위험한데.'

수비를 말하는 게 아니다.

NOA-44 이레이저는 24개의 총열을 지닌 만큼 열 관리 측면에서도 매우 뛰어난 장점을 지닌 병기였기에 총열이 과열될 걱정은 아직 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분당 2만 발의 탄 소모를 지닌 NOA-44 이레이저를 혼자서 폭격하듯이 쏟아내고 있는 내 모습이 현재 아크의 감시 장비에 똑똑히 보여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나는 충분히 수상한 인물이야. 이 이상 수상한 점을 늘릴 수는 없어.'

이해할 수 없는 걸 본다면 사람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답은 둘 중 하나다.

두려워하거나,

혹은 경외하거나.

나는 그중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내가 지닌 비밀은 언젠가 아크 측에서도 눈치를 챌 수밖에 없을 테지만, 적어도 그 과정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나에 대한 아크의 신뢰가 쌓일 때까지.

곧, 나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때를 기다렸다.

마수와 마물의 위치가, 절묘하게 나와 감시 장비 사이의 일직선이 될 때를.

다행히도 기회는 머지않아서 찾아왔다.

내가 의도적으로 마수와 마물 다섯 마리 가량을 성벽 위에 올라오게 방치한 덕분이었다.

[주인아! 조심해!]

당연히 그러한 사정을 알 리 없는 에스더가 비명을 내질렀다.

'일부러 내버려둔 거다.'

[뭐? 왜?]

'보면 안다.'

에스더는 꺼림칙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하던 일을 이어갔다.

일일이 이런 거에 신경을 쓰다가는 전선이 흔들릴 위험성이 있어서였다.

'지금.'

마수와 아크의 감시 장비가 일직선이 된 순간.

마침내 기회를 포착한 나는 자연스럽게 방아쇠를 당겼다.

콰캉───!!!

마치 대포알이 쏘아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쏘아진 30mm 총알이 단번에 마수의 가죽을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쏘아진 총알은 한 발이 아니었다.

곧이어서 날아든 총알들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마수를 완전히 찢어발기고는 더없이 자연스럽게 뒤에 있는 감시 장비를 완전히 박살 냈다.

정확히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는 감시 장비였다.

푸슈욱······.

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살며시 시간 차를 두고서 우연을 가장한 채로, 아크의 감시 장비들을 하나씩 부숴나갔다.

콰득!

쾅─!

아크의 감시 장비는 무려 10cm에 이르는 방탄 유리와 강화 유리로 보호되고 있었지만, 30mm 탄환에는 영락없이 부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를 지켜보는 모든 눈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뒤, 나는 다시금 시선을 전선으로 옮겼다.

이제, 아크에서는 날 볼 수 없다.

웨이브 때 오발탄 혹은 마수로 인한 감시 장비의 고장은 워낙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특별할 것도 없었다.

하물며 타이밍 역시도 완벽하게 마수에게 사격을 하는 도중에 일어난 사고였으니, 의심은 할지언정 확신은 할 수 없을 터였다.

'어차피 이건 임시조치에 불과해. 결국, 내가 쏘아낸 총알에 대한 출처를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할 터.'

내가 한 건 어디까지나 총알을 쏘는 과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은 것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총알이 나타나는 걸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의심은 피할 수 없어.'

즉, 결정적인 모습만 감췄을 뿐이지 결국 내가 R17-1 구역부터 R17-15 구역까지 혼자 막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변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크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함부로 나를 적으로 규정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아크를 위해서 해왔던 일들이 적지 않다는 걸 슬슬 눈치챌 테니까.

그렇기에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번 시간 동안 아크의 신뢰를 쌓는 일이었다.

내가 무엇이든지, 아크를 위한다는 것만 전해진다면 결국 아크로서도 나를 적대할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바놀 중령이 말했듯이.

나는 끊임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이 싸움이 막을 내릴 때까지.

* * *

소리없는 사이렌이 울린다.

붉은빛으로 점등된 빛이 도시를 비추고, 비친 도시의 풍경은 황량했다.

1급 위험 상황.

즉, 웨이브가 일어나면 아크의 시민들에게는 지하 벙커 대피령이 내려진다.

그렇게 아크에서 한창 전시 체계가 발동한 와중임에도 한 쌍의 남녀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한적한 레드 라인을 거닐었다.

너무나도 이질적인 광경.

그 모습만으로도 이미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이어진 대화는 더욱더 기괴했다.

"회의록 중에서 에스더에 대해서 언급된 부분은 없었다. 에스더는 아크에 의해서 제거된 게 아니다."

룩의 말에 단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에스더는 그림자단의 숙원에 있어서 핵심 인물이었다.

그런 에스더가 사라지다니······.

어떻게든 에스더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서 아크까지 왔건만, 애석하게도 큰 소득은 없었다.

"그나마 특이한 점이 있다면 동면 중이던 우로보로스가 깨어났다는 건데··· 우로보로스의 기상이 에스더와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나?"

"그쪽에는 소피아와 크룩스가 갔으니까 오면 알게 될 거야."

하지만 단장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가능성은 낮았다.

우로보로스가 제아무리 지역의 주인급 마수라지만, 에스더의 본질은 유령종이다.

물리력으로는 해칠 수 없는 존재인 만큼, 우로보로스의 기상과 에스더의 소실을 연관짓기는 썩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하나 더 있었지."

룩이 덧붙였다.

그 말마따나 아크에서 얻은 정보 중에는 우로보로스의 기상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긴 했다.

특히나 룩에게 있어서는 꽤 흥미가 가는 정보였다.

"아, 그거?"

"그래. 내 동족."

아크에서 입수한 정보에는 새로운 변절자의 탄생 역시도 있었다.

변절자 폰.

지금까지 공석이었던 이름에게 드디어 주인이 생긴 것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동족을 챙겼다고?"

"우리 단장께서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원래 우리끼리는 잘 챙겨."

룩이 덧붙였다.

"하지만 이상하긴 해."

"뭐가?"

"내가 모르는 동족이 있었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얼마 전에 새로 탄생한 것치고는 너무 강하고. 아마 최소 몇 년 이상은 살아온 녀석일 거다."

"···그래?"

스컬 턴코트에 대해서만큼은 전문가이자, 동시에 당사자의 말이니 충분히 신뢰성 있는 말이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스컬 나이트 중 하나가 통제를 잃고서 우리에게 잡아먹혔을 경우인데··· 솔직히 가능성은 낮지."

"그러면 기회가 된다면 한번 영입해 볼까? 우로보로스와 맞설 정도면 매우 큰 전력이 될 텐데."

"그때가 되면 내가 나서지. 단장처럼 사교성 없는 녀석에게 맡겼다가는 칼부림 날 거 같거든."

"내가 어때서?"

"지금, 그런 부분."

단장은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라인을 거닐 던 중, 단장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는 어느 한 곳을 응시했다.

"어딜 그렇게 보나?"

"재미있어 보이는 게 있어서."

그제야 룩의 시선이 단장이 향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룩은 보았다.

Red-17 게이트의 성벽 위에서, 홀로 무려 15개 구역을 막아내고 있는 한 사내를.

"확실히, 재미 있어 보이는데."

룩의 입가가 씰룩였다.

홀로 15개 구역을 막아내고 있는 사내의 모습은 얼핏 봐도 너무나도 이상한 광경이어서, 웬만한 일에는 움직이지 않는 룩으로서도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가볼까?"

먼저 제안한 건 단장이었다.

숙원과 관련 없는 일에는 거의 흥미 위주로 움직이는 단장다운 결론이었다.

"그러든지."

"그러면 가보자."

물론 룩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의사 결정은 상당히 빠르게 이루어졌다.

어차피 현재 아크에게 그 둘을 직접적으로 제지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지금 아크에 찾아온 그들의 신분부터가 그러했다.

단장과 변절자 룩.

그 둘이 움직였다.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는, 레드 라인의 전선을 향해서.

< 레드 라인 방어 (4) > 끝

전투가 이어졌다.

당긴 방아쇠만큼이나 내가 구한 생명의 숫자 역시도 늘어났다.

['불살주의'를 시행하였습니다.]

[현재 구한 생명 : 29]

뭐, 살린 생명보다 죽인 생명이 훨씬 더 많다는 게 조금 아이러니한 점이었지만 말이다.

그 순간.

[주인! 뒤!]

귓가에서 에스더의 경고가 울려 퍼지며, 그와 거의 동시에 뒤에서 마수들의 괴성이 들려왔다.

[기에엑!]

[캬욱, 캬욱!]

NOA-44 이레이저를 다루는 사수의 특성상, 시선과 정신이 온통 전방으로 향해 있을 수밖에 없었기에 후방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다.

만약 야누스가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야누스가 처리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R17-1 구역부터 R17-15 구역까지의 감시 장비를 모두 제거하긴 했어도 사람의 눈까지도 그렇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었다.

'쯧.'

[지금 붙잡았어요!]

에스더가 내 뒤를 덮친 마수들을 붙든 동안, 나는 NOA-44 이레이저의 방아쇠를 오른손으로 잡은 채로 왼손으로 HE2050 권총을 뽑아 들었다.

NOA-44 이레이저는 무려 분당 2만 발에 가까운 연사력을 자랑하는 병기인 만큼 잠시라도 포격을 멈춘다면 그만큼 마수 군단이 들어올 빌미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철컥-

나는 총구를 대강 겨눴다.

만약 평범한 일반탄이었다면 아무런 업그레이드나 커스터 마이징이 되지 않은 순정 상태의 HE2050 권총로는 저 마수들을 저지할 수 없을 테지만, 지금 이곳에 장전되어 있는 총알은 다름 아닌 A-985 폭발탄이었다.

즉, 화력은 충분했다.

콰캉──!

쾅─!

거리상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니었기에 정밀한 사격을 하지 않고도 마수를 맞추는 건 충분했다.

두 번의 방아쇠와 함께 건방지게도 내 뒤를 덮치려던 8급 괴수종 두 마리가 운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있었다.

'어디서 온 거지? 이쪽 구역에서 놓친 건 없을 텐데.'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혼자서 R17-1 구역부터 R17-15 구역까지를 빈틈없이 막아 내고 있었다.

내 뒤에서 갑작스럽게 마수가 나타날 당위성이 없다는 이야기다.

[다른 구역에서 온 거예요.]

'쯧.'

설마했더니 역시 그쪽이었나.

이미 내가 맡고 있는 구역만으로 한계에 가까웠건만, 다른 구역의 뒷처리까지 해야 한다니······.

하지만 탓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병사들에게 총 한 자루 쥐여주고 이런 마수 군단에 맞서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으니까.

그나마 에스더라도 있어서 대응했지, 만약 에스더가 마수들을 붙들지 않았다면 나도 위험할 뻔했다.

그리고 내가 위험할 뻔했다는 건, 곧 이 구역의 수비가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최악의 경우, 야누스의 힘까지도 써야 할 수도 있겠어.'

비록 다른 병사들의 시선까지는 어쩌지 못해도, 어쨌거나 아크의 감시 장비를 무력화시킨 건 사실이었으니 최악의 경우에는 그것도 고려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

비록 그에 대한 해명을 비롯한 뒷처리가 매우매우 귀찮아질 테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크의 전선이 무너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살려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네요?]

'고맙다.'

[됐어요, 엎드려서 절을 받지.]

어느새 내 옆에 모습을 드러낸 에스더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렇게 전방과 후방 모두를 상대로 방심할 수 없는 순간이 이어지며,

어느 순간부터인가 불살주의 중첩이 쌓이는 속도가 급속도로 상승했다.

['불살주의'를 시행하였습니다.]

[현재 구한 생명 : 32]

['불살주의'를 시행하였습니다.]

[현재 구한 생명 : 33]

['불살주의'를 시행하였습니다.]

[현재 구한 생명 : 34]

.

.

.

['불살주의'를 시행하였습니다.]

[현재 구한 생명 : 45]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지원 소대가 반대쪽 전선에 무사히 도착했나 보군.'

그들이 서쪽 전선에서 활약할 수록, 그렇게 살아난 생명들은 모조리 다 내 불살주의 특성의 중첩이 된다.

애초에 그들이 서쪽 전선으로 향하게 된 인과가 나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이 추세라면 이번 웨이브 안에 구사일생 중첩도 최소 1개 정도는 얻을 수 있겠어.'

모든 게 순탄하게 흘러갔다.

정확히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모름지기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만 가지는 않는 법이었다.

지금 내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그러했다.

[이봐, 주인님······.]

어느새 내 옆에 모습을 드러낸 에스더가 살며시 내 옷깃을 붙잡았다.

에스더의 손이 떨리고 있다.

애초에 유령종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지만, 중요한 건 그럴만한 이유를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도 안다.'

문제는, 안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무언가 오고 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에테르들 역시도 거칠게 요동쳤다.

[히에엑······.]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끼아아아아악!]

마치 지역의 주인급 마수를 만났을 때와 같은 반응.

하지만 전방에서 보이는 초대형 마수나 마물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아크 바깥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이 아니야.'

즉, 이건 아크 내부에서부터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에테르는 물론이고 에스더까지도 나에게 경고를 전할 정도의 존재감을 지닌, 무언가가.

'···아군인가?'

아크 내부에서 이런 존재감을 지닌 이가 레드 라인의 전선에 나타날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솔직히 말해서 회의적이었다.

지금 전선 상황 자체가 그렇게까지 위험한 것도 아니고, 그런 이들은 각자의 임무로 인해서 바쁘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존재감이라면··· 최소 로즈 라인의 준장급 이상.'

소위 별이라 불리는 아크의 장성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정치를 하는 군인과, 전쟁을 하는 군인.

지금 내가 말하는 부류는 당연히 후자 쪽이었다.

정치를 하는 군인들은 계급이 높다고 해서 꼭 전투 능력이 높지는 않지만, 전쟁을 하는 군인들은 다르다.

그들의 계급은 곧 강함을 의미하며, 비단 최전방인 로즈 라인이 아니더라도 준장급 이상이면 하나같이 괴물 같은 이들뿐이다.

'대체 누구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아크 내부에서 이만한 존재감을 지닌 이가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피하고 싶었으나, 지금 내가 자리를 비웠다가는 어떤 일이 생길지 뻔했기에 그럴 수 없었다.

[도망, 가자······.]

[다 죽는다. 끼힛, 다, 죽어······]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에테르의 거친 떨림 속에서, 존재감이 점차 가까워졌다.

내 시선은 여전히 전방을 향해 있었으나, 정신은 내내 뒤통수에서 따끔거리는 무언가를 향해 있었다.

[거의 다 왔어.]

다가오는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마치 호버링 바이크라도 타고 있는 것 같았다.

"도와줄까?"

그리고 이윽고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내 귓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마치 호의처럼 느껴지지만, 그 내면에 깃들어 있는 의미는 절대로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드러난 인원은 두 명이었다.

예상했듯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그림자단.'

무려 아크를 손에 넣고자 하는 야망을 지닌 집단이자, 실제로 그럴만한 능력도 있는, 모트교와 더불어서 아크의 최대 적대 세력 중 하나.

그림자단의 야망은 단순히 야망에서 끝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림자단과 함께 내 손으로 직접 아크를 손에 넣어본 적 있었던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아크는 그 사실을 모를 테지만.'

모트교와 그림자단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 규모와 은밀성이다.

아크는 모트교에 대해서는 꽤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지만, 그림자단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에 그림자단이 아크에 무수한 공작을 벌여도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중요한 건 바로 그 그림자단의 핵심 인물 중 둘이 내 뒤에 서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저들이 조금이라도 수틀린다면 무방비하게 서 있는 나를 제거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도대체 녀석들이 이곳에 왜 있는 거지?'

아니··· 그림자단 자체야 아크를 제집 드나들듯이 드나드니 그렇다고 쳐도, 여기는 대체 왜?

의문이 의문을 물었다.

애석하게도 답은 알 수 없었다.

아니, 되려 내가 답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사람이 묻는데 대답을 안 하네?"

도저히 대화를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괜찮다."

"에이, 그러지 말고. 사람이 도와준다는데 사양을 하고 그래? 가뜩이나 지금 상황도 안 좋아 보이는데."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분명히, 현재 내가 있는 레드 라인의 전선의 상황은 절대로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고, 지금까지 나는 큰 무리 없이 마수 군단의 움직임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웨이브가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이들이 찾아오면서 본래였다면 순탄하게 끝났어야 할 웨이브에 차질이 생겼다.

이제부터 나는 전방의 적뿐만 아니라 당장 내 뒤에 있는 적들까지도 신경을 써야했다.

위협적인 건 당연히 후방에 있는 이들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방아쇠를 놓으면 그대로 마수 군단이 진격하니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었다.

"괜찮다는데 뭘 그렇게 오지랖을 못 부려서 안달이야?"

그때, 옆에 있던 사내가 끼어들었다.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사내였다.

"너는 왜 끼어들어?"

"그럴만 하니까 끼어든 거다."

변절자 룩.

일전에 보았던 변절자 나이트와 마찬가지로 아크에서 지정한 네임드 스컬 턴코트 중 하나였다.

무려 아크에 수배 중인 마물임에도 불구하고 대놓고 아크 내에서 활보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림자단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니 딱 봐도 위험해 보이잖아? 내가 좀 도와주면 어때서?"

"상대가 싫다고 하잖나."

얼핏 보면 의견 다툼이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저건 어디까지나 나를 앞에 두고서 가지고 놀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저들은, 이미 나를 보았다.

내가 지금 발사하고 있는 NOA-44 이레이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역시도 눈치를 챘다는 뜻이었다.

"···재미있네. 정말로 재밌어."

단장의 입술이 비틀리며 나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단순한 시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검은 눈동자를 바라본 순간,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그리고,

위협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기기깃!]

순간적으로 위협감을 느낀 야누스가 촉수 수십 개를 세우며 한껏 경계심을 드러냈다.

약한 짐승일수록 잘 짖는다.

즉, 저 둘 앞에서는 야누스조차도 약한 짐승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단번에 야누스의 몸에서 뻗어 나온 수십 개의 뼈 촉수들을 바라보며, 단장의 입가가 일그러진 미소로 물들었다.

"야."

그리고는 또박또박, 나를 향해서 내뱉었다.

"너, 뭐야?"

< 레드 라인 방어 (5) > 끝

'···그만!'

[기잇······.]

내가 강하게 제지를 하고 나서야 야누스는 뻗었던 뼈 촉수들은 간신히 거둬들이며 진정했다.

아무래도 이 상황에서 내가 뼈 촉수들을 뿜어내고 있어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이 근방에 있는 감시 장비를 전부 처리해둔 게 다행인가.'

만약 이 모습이 아크의 감시 장비에 걸리기라도 했었다면··· 정말인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야누스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저들이 이곳에 온 시점에서,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상황이 좋지 않다.

그냥 좋지 않은 게 아니라 매우 좋지 않았다.

'싸우면··· 이길 수 있나?'

단번에 내가 지닌 패와 정체를 읽힌 나는 머릿속으로 견적을 냈다.

사실, 깊게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문제였기에 답은 빠르게 나왔다.

'불가능.'

백 번 싸우면 백 번 전부 다 진다.

변절자 룩은 그림자단 내에서도 몇 없는 진짜배기 전투원 중 하나다.

설사 내가 이곳에서 야누스의 힘을 전부 발휘한다고 해도, 정작 그 사용자인 변절자 룩과 나 사이의 기량 차이가 너무 컸다.

능력치로 말하자면, 거의 열 배 가까이 차이가 날 터.

'···지금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야.'

애초에 내가 얼마 전에 상대했던 변절자 나이트도 나보다 강한 상대였다.

다만, 변절자 나이트에게 적의가 없었기에 내가 일방적으로 우위를 점한 데다가 종속까지 시켰을 뿐이지.

'만약 여기가 아크 바깥이었다면 방법이 있었을 텐데······.'

호루스와 변절자 나이트.

현재 내가 호출할 수 있는 충직한 수하들이다.

그 둘을 부른다면 어떻게 자리를 벗어나는 것 정도는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아크.

그것도, 한창 전쟁 중인 아크다.

여기에 수하들을 부른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로 자살 행위에 가까웠을뿐더러 아크의 포격에 호루스와 변절자 나이트 역시도 잃을 가능성이 컸다.

'거기다가, 만약 단장까지 나서기라도 한다면······.'

아크 바깥이었다면 도주할 수 있다는 가정도 어디까지나 당장 룩의 옆에 있는 단장이 나서지 않을 때의 이야기다.

평소에 그녀는 잘 나서지 않았으니, 만약 아크 바깥이었다면 그 점에 희망을 걸어 볼 만했다는 대충 그런 가정.

하지만, 만약 그녀가 나선다면?

'그림자단의 단장.'

아크를 손에 넣고자 하는 야망을 지니고, 실제로 그걸 행할 능력도 있는 인물.

그녀는 설사 이 자리에 로즈 라인의 준장 이상의 강자가 있다 하더라도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왜 대답이 없어? 사람이 묻잖아."

그녀의 목소리에 살며시 노기가 깃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여긴 듯했다.

나는 여전히 NOA-44 이레이저의 방아쇠를 당기며 전투를 이어가고 있다.

당연히 한편에서는 마수들의 온갖 괴성과 NOA-44 이레이저에서 나오는 굉음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조곤조곤한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똑똑히 들렸다.

"···뭘 묻고 싶은 거지?"

"내 말 못 들었어? 너 뭐냐니까?"

"칼 마커스다."

직접 눈으로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잠시 흐른 침묵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단장은 조금 당황했다.

"···뭐?"

"누구냐고 묻지 않았나?"

그림자단의 단장은 숙원과 관련 없는 일을 할 때는 거의 흥미 위주로 움직이는 인물이다.

즉, 그녀의 흥미를 잘 충족시켜 준다면 이 위기도 어떻게 보면 기회로 바꿀 수 있다는 소리였다.

"아하하! 재미있는 친구였네. 자기소개 시간이야? 그래, 나는··· 으음. 그냥 아가씨라고 불러. 여기서는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참고로 이 옆에 있는 멀대는 루크라고 해. 일종의··· 내 보디가드 겸 비서라고 볼 수 있지."

"이봐."

그녀가 신원을 밝혔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는지, 변절자 룩이 살며시 끼어들었다.

루크는 변절자 룩이 아크 내에서 활동할 때 사용하는 이름이었다.

"괜찮아. 상대가 이름을 밝혔는데 이 정도는 하는 게 예의지. 안 그래?"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단장이 저렇게 마음을 먹었다면 변절자 룩이 말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룩의 체념은 빨랐다.

"좋아, 칼 마커스. 그러면 아까 봤던 그 귀염둥이는 어떤 귀염둥이인지 물어봐도 될까?"

야누스, 정확히는 뼈 갑옷과 뼈 기생체를 말하는 것이었다.

과연 단장답게 그녀는 내가 스컬 나이트나 스컬 턴코트가 아니라 뼈 갑옷을 장착한 평범한 인간이라는 건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그녀가 지닌 능력 중 하나를 생각한다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대답을 해야 하나?"

물론 내가 순순히 대답해 줄 리가 만무했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긴급하다 지만, 어설프게 틈을 내주었다가는 정말로 끝장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건 아니지. 의무도 아니고. 내가 권리와 의무에 대해서는 조금 예민하거든.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잘 못 참아서 그런데 대답해주면 안 될까?"

예상했던 대로 단장의 흥미를 끄는 데는 성공했는지, 단장은 제법 부드러운 태도를 취했다.

"그럴 시간 없다."

"시간? 아, 저것들이 문제야?"

단장의 시선이 전선을 바라보았다.

웨이브가 시작된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수 군단의 진군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으음, 곤란한데."

비록 뒷말이 생략되었지만, 나는 지금 단장이 무엇을 곤란하다고 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이곳은 아크.

마음껏 날뛰기에는 보는 시선들이 적잖이 의식이 되는 장소다.

현재 단장과 변절자 룩은 그림자단이 아닌 정당한 아크의 일원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다.

당연히 필요 이상으로 아크의 시선을 끄는 행위는 하지 않을 터.

특히 변절자 룩 같은 경우에는 애초에 모습을 드러내서 전투를 치르는 것만으로 단번에 정체를 들키게 되니, 특히나 그러했다.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예를 들면··· 당장 내가 조금 전에 했던 어떤 일이 묘한 나비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봐, 아가씨."

"응?"

"이 근방의 감시 장비가 모두 무력화되었다."

"오, 그래? 잘했어."

"내가 한 게 아니다."

"으응?"

그와 함께 단장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지어지는 묘한 미소.

"···재밌어. 진짜 재미있어. 솔직히 말해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단장의 입술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좋아, 기분이다. 도와준다."

"필요 없─"

"잠깐 빌릴 게."

내가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기도 채 전에, 어느새 단장의 손에는 무척이나 익숙한 권총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HE2050 권총.

우연이 아니라, 정말로 내가 착용하고 있던 바로 그 HE2050 권총이었다.

'···어느 틈에?'

비록 현재 내가 NOA-44 이레이저를 조종하며 전선에 집중 중이라고는 하나, 내 몸에 달려 있는 HE2050 권총을 가져가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만약 단장이 노린 게 HE2050 권총이 아니라 내 목숨이었다면, 그대로 내 생도 끝났을 거라는 이야기다.

"아, 이건 필요 없고."

그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장은 태연하게 탄창을 뺐다.

마치 이런 건 필요 없다는 듯이.

"이 정도는 해도 되겠지."

단장은 탄창이 빠진 빈 HE2050 권총으로 마수 군단이 밀려오는 전선을 겨누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대체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겠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철컥-

단장의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이며,

마침내 방아쇠가 당겨졌다.

"빵야."

보편적인 상식에 비추어 볼 때, 탄창이 없는 총은 발사되지 않는다.

물론 이미 약실에 탄이 장전되어 있다거나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관점으로 볼 때다.

그렇기에 지금 단장이 한 행위는 그 어떤 의미도 없어야 정상이었다.

분명히 그랬을 텐데······.

우우우우웅───!!!

비어있던 총구에서 거친 폭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죽 음을내 리리 라······.]

[파 멸을 선 고한 다.]

[사··· 라, 져라.]

그리고 들썩이는 에테르들.

내 주변에 있는 에테르와는 감히 비교조차 되지 않는 강렬한 농도였다.

'···단순히 농도뿐만이 아니야.'

에테르에 담겨있는 원혼.

마치 살아있는 모든 걸 증오하는 강렬한 원혼이 에테르를 통해서 전해졌다.

꼬옥-

누군가 내 옷깃을 붙잡는 게 느껴졌다.

[주, 주인아······.]

에스더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힘을 잃었다지만, 무려 1급 유령종이었던 에스더가 두려움에 떨 정도로 에테르 폭풍은 엄청나고, 또한 끔찍했다.

[기깃!]

두려움에 떠는 건 비단 에스더뿐만이 아니었다.

무려 엥켈렌스의 송곳니와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먹은 야누스 역시도 지금 일어난 현상에는 더는 참지 못하고 괴성을 내지르며 뼈 촉수를 뿜어내며 나를 보호했다.

본능적인 자기보호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모여든 에테르는 이내 총구에서 한 줄기의 폭풍으로 변했다.

콰카카카카카카───!!!

만약 폭풍이 일직선으로 나간다면 어떨까?

그에 대해서 견식 할 기회는 없었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눈앞에서 일어난 일과 같을 것이다.

────────!!!

마수 군단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단장이 쏘아낸 에테르 폭풍에 희생양이 되었다.

단번에 R17-7 구역부터 R17-9 구역 사이에 존재하는 마수 무리가 사라진 것이다.

[케겍!]

[크우우우!]

[캬오, 캬오오!]

운 좋게 아슬아슬하게 그 범위에서 벗어난 마수들 역시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아니, 오히려 더는 거동할 수 없게 된 마수들이 웨이브의 진격을 막는 시체 벽이 되어 버렸다.

저게 한 자루의 총에서 나올 수 있는 위력인가?

아니, 애초에 저런 현상을 개인이 만들어낼 수 있는 건가?

누구나 저 광경을 본다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테르 탄.'

내가 일전에 에스더의 보조를 받아서 실제 탄에 에테르를 실었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애초에 단장이 쏘아낸 건 빈 권총이었고, 발사된 에테르는 그녀의 순수한 능력이었다.

"오랜만에 힘 좀 썼더니 상쾌하네. 혹시 도움 더 필요해?"

"···그럴 필요 없다."

그런 무식한 공격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장의 상태는 너무나도 멀쩡해 보였다.

마치 저 정도 공격은 얼마든지 쏘아낼 수 있다는 듯이.

'···벌써 이 정도 수준이었던가.'

그림자단의 단장이 강하다는 사실은 이미 질리도록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시기가 아직 스테이지 초반부라는 걸 감안했을 때, 나는 단장의 힘이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는 조금 더 약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착각이었다.

단장은 단장이었고, 그녀의 힘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전선에는 잠시 여유가 생겼다.

이제, 그녀의 질문으로부터 도망칠 구실 중 하나가 사라졌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이제 대화를 좀 해볼까? 이제는 좀 덜 바빠졌을 거 아냐."

"······."

거절하고 싶었으나, 조금 전에 무지막지한 광경을 봐서인지 거절의 말이 채 떨어지지 않았다.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참 많아. 하지만 참을게. 아까부터 너무 신경이 쓰이는 게 있었거든."

단장의 시선이 나를 보았다.

정확히는, 나와 함께 있는 누군가를.

"네가 왜 거기에 있어? 에스더."

[히끅!]

< 레드 라인 방어 (6) > 끝

[어, 저, 음··· 오랜만이야. 단장.]

그와 함께 나를 방패로 숨어 있던 에스더가 주뼛주뼛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에테르 사이에 모습을 감추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걸렸나.'

솔직히 말해서 에스더의 존재만큼은 걸리지 않았으면 했는데, 그림자단의 단장을 앞에 두고서 그건 너무 희망적인 생각이었다.

만약 에스더가 나에게 종속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단장에게 들키지도 않았을 테지만, 애초에 그랬다면 나와 함께 있지도 않았을 테니 별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잠깐, 에스더라고? 에스더가 여기 있었단 말이야?"

단장과는 다르게 변절자 룩은 이곳에 에스더가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란 반응이었다.

애초에 변절자 룩 자체가 에테르에 대한 감각이 엄청나게 뛰어나진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만큼 단장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방증이기도 했지만.

"네가 왜 거기에 있어?"

단장의 시선이 꽂히자, 에스더는 여전히 주뼛주뼛하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차마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다고 할까? 아무튼 그래.]

"돌아와 에스더. 숙원을 위해서는 네가 꼭 필요해."

[그··· 나도 그러고 싶은데.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라서.]

"저거 때문에?"

느껴진다.

단장의 시선이 서서히 나를 향하서 옮겨오고 있다는 게.

'이런.'

여전히 전투가 한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도 모르게 전방으로 향해 있던 시선을 단장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단장 덕분에 여유가 조금 생긴 것도 있었지만, 만약 지금 단장을 마주 보지 않으면 그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압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치워줄까?"

이윽고 도저히 넘길 수 없는 말이 울려 퍼졌다.

마주 본 단장은 웃고 있었다.

'···이런.'

나는 저 미소를 알고 있었다.

사람의 목숨 따위는 파리 새끼처럼 찍어누를 수 있는 자의 미소.

지금, 단장이라는 존재에게 있어서 나는 찍어 눌러서 죽일 수 있는 파리 새끼와도 같았다.

[아, 안 돼!]

그러한 단장의 말에 에스더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솔직히 말해서 에스더가 단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을까 내심 염려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에스더가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내가 죽으면 에스더 역시도 소멸하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던 대로 에스더는 생존 본능이 매우 강했다.

"왜?"

[그······ 아무튼, 안 돼.]

"그러니까 왜? 이유는 말 해줘야지."

조금 전에 나를 향해서 미소짓고 있던 모습과는 달리, 에스더와 대화하는 단장의 모습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애초에 단장에게 있어서 에스더가 지닌 의미를 생각했을 때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에스더가 애꿎은 입술만 달썩였다.

지금 에스더의 말에 따라서 내 운명이 결정되게 생겼다.

나로서는 썩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었다.

'만약 구사일생 중첩이 있었다면 조금은 달랐을 텐데.'

불살주의 특성으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구사일생 능력은 말 그대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능력이다.

당연히 이러한 상황에서도 유효한 능력이었으므로, 만약 그게 있었다면 나도 타인의 결정과 판단에 내 목숨을 맡기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단장과 변절자 룩이 조금만 더 늦게 도착했더라면 구사일생 중첩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지금도 차근차근 불살주의 중첩이 쌓이고 있었다.

['불살주의'를 시행하였습니다.]

[현재 구한 생명 : 56]

나로서는 아쉬울 따름이었다.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마침내 어떤 결심을 마쳤는지 굳게 닫혀 있던 에스더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나, 이 남자 없으면 죽어.]

"···어머."

단장이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는 룩 역시도 뜨악한 건 마찬가지였다.

"큼, 크흠······."

이야기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에스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에스더는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런 의태를 자주 보이곤 했다.

살아 있는 기분이 든다나 뭐라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없으면 정말로 죽는다고!]

뒤늦게 에스더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나도 알아. 잠깐 놀려본 거야."

단장이 키득 웃었다.

나에게 지어 보였던 미소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미소였다.

[···뭐?]

"나도 안다고. 저 남자 때문이지? 칼 마커스.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나도 몰라.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

"흐음······."

단장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다만, 조금 전과 같은 미소는 아니었다.

그 어떤 표정도 없는 무표정.

나는 오히려 안심했다.

지금까지 단장에게 있었던 여유가 조금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에스더까지 저렇게 했으니··· 우리에 대해서 꽤 많은 걸 알고 있겠네?"

"그렇게 생각하나? 동료에 대한 신뢰가 그것뿐인가 보군."

그와 함께 단장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안 그래도 단원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단장에게 있어서 에스더는 특히나 특별한 존재다.

그런데 조금 전에 단장이 한 질문은 에스더를 불신하는 발언이었다.

[···단장, 나 아무것도 말 안 했어.]

에스더의 어깨가 추욱 쳐졌다.

저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인간을 기만하기 위함이지만, 그 효과는 충분했다.

"아니··· 너를 못 믿는다는 소리는 아니었어. 에스더."

나는 에스더의 기만을 믿지 않지만, 단장은 아니었는지 굉장히 당황했다는 게 느껴졌다.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

이내 단장이 나를 응시했다.

겉보기에는 조금 전과 같은 무표정 같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 동요가 깃들었다.

"에스더를 풀어줘."

단장의 요구는 직접적이었다.

물론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거절한다."

"그러다 죽을 텐데?"

"그렇게 해결될 문제였다면 진작 그렇게 했겠지."

에스더의 존재는 나에게 종속되었다.

즉, 나를 죽이면 에스더 역시도 함께 소멸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알고 있다.

에스더의 존재는 그림자단에게 있어서 숙원을 이루기 위한 필수적인 존재다.

애초부터 이 협상은 내가 이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이제 칼자루는 내 손에 있다.

"어쭙잖게 협상하려 들지 마. 설마 나한테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

"첫 번째 대답을 다시 하지. 방법이 있었다면 진즉 했겠지."

적어도 내가 알고 있기에 종속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종속시킨 당사자가 자신의 의지로 대상의 종속을 풀어주는 것밖에 없다.

그 외에는 어떤 짓을 해도 에스더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 수 없다.

착실하게 운명 공동체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었다.

"···별 수 없네."

단장의 눈에서 싸늘함이 흘렀다.

"룩."

나에게 밝힌 이름인 루크가 아닌 룩으로 불렀다는 건, 곧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다는 뜻과도 같았다.

"죽여."

변절자 룩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심이야?"

"그래."

"그렇다면······."

변절자 룩이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나는 NOA-44 이레이저의 포대에 앉은 채로 밀려드는 마수 군단을 상대하고 있다.

즉, 후방에서의 공격에는 상대적으로 무방비나 다름없었다.

[자, 잠깐! 단장! 진심이야? 이렇게 죽인다고? 하지 마! 그러면 나도 죽어!]

비명 섞인 에스더의 처절한 외침에 단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해. 에스더.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룩!]

룩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알고 있잖나. 단장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이렇게 나온다라······.

그렇다면 나도 방법이 있다.

'에스더.'

[당장 나를 풀어준다고 말해! 이러다가 둘 다 죽는다고!]

'시끄럽고, NOA-44 이레이저를 맡아라.'

[뭐?]

'당장.'

아무리 막강한 화력을 지닌 NOA-44 이레이저지만,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 자체가 많은 힘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니다.

즉, 에스더도 NOA-44 이레이저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 정도는 쉽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아무리 에스더라 할지라도 NOA-44 이레이저를 통제하며 무려 15개 구역에 다다르는 마수 군단을 막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아··· 난 몰라.]

에스더는 내 말대로 이내 NOA-44 이레이저의 사수를 맡았다.

그 잠깐의 사이에 간신히 막아내고 있던 마수 무리들이 하나둘씩 성벽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당장 내가 다시 조종을 맡지 않으면 R17-1 구역부터 R17-15 구역은 마수에게 점령당할 것이다.

레드 라인 동부 전선이 무너지는 것이다.

'시간을 끌면 안 돼.'

상대는 강적.

시간은 촉박.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저렇게 내버려 둬도 돼?"

단장이 이죽거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NOA-44 이레이저의 사수가 나에서 에스더로 바뀌기 무섭게 전선이 급격하게 밀리고 있었다.

"그렇게 만든 당사자가 말하니 조금 우스운데."

"그러면 그냥 에스더를 풀어주면 되잖아? 그러면 서로 갈 길 가고 얼마나 좋아?"

"그럴 생각도 없는 주제에 잘도 지껄이는군"

절망적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맞서는 이유는 간단했다.

'진심으로 나를 죽일 생각은 아니야. 아마 적당히 겁만 주려는 거겠지.'

애초에 단장이 직접 나서지 않고 룩을 시킨다는 것부터가 그러했다.

물론 그 적당히라는 게 단장의 기준에서는 거의 팔다리 중 몇 개 정도는 자른 상태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말이다.

"이건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무기를 들어라."

변절자 룩이 말했다.

단장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를 기습하지 않고 기다려준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이리라.

'마물이 배려라.'

스컬 턴코트는 스컬 나이트와 거의 비슷한 형태로 탄생하는 만큼, 인간을 숙주로 삼는다.

당연히 숙주인 인간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그럴만도 하지.'

변절자 룩은 변절자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기사나 전사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사내다.

웬만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등 뒤에서 기습 따위는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나는 아니지만.'

이곳은 아크다.

인류 최후의 요새, 아크.

그렇기에 상대가 나를 죽일 생각이 없다면,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예를 들면··· 지원군이라든지.

나는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들었다.

총구가 향한 곳은 하늘이었다.

"지금 뭐 하는─"

룩의 의문이 채 토해지기 전에 총구에서 총알이 발사됐다.

피우우우우웅───!

내가 발사한 총알은 신호탄.

즉, 지원 요청이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보면 모르나? 아크에 지원 요청을 했다만."

"신성한 결투에 타인의 도움을 요청하는가!"

"무언가 오해가 있나 본데."

내가 너희랑 왜 싸우냐?

싸워도 본전도 못 찾을 텐데.

그와 함께 아크 안쪽에서 지원대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과연 아크다운 신속한 대응.

단순히 신호탄뿐만 아니라 전선 자체가 무너져 가고 있었기에 다급히 파견된 이들이었다.

"계속할 건가?"

내 물음에 룩의 시선이 단장을 향했다.

물론 당장 하고자 한다면 단장과 함께 나를 죽이고 내뺄 수 있겠지만, 그래서야 에스더 역시도 소멸하고 만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제압인데, 현재 지원대가 오기 전에 나를 제압하고 협박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기깃!]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야누스가 임전 태세를 마치고, 에스더 역시도 NOA-44 이레이저의 사수를 맡음과 동시에 내 주변에서 에테르를 일으켰다.

이 상태라면 아무리 상대가 단장과 룩이라고 해도 쉽게는 당해주지 않는다.

"내가 저까짓 것들 하나 못 당해낼 거라고 생각해?"

"물론 아니겠지. 그렇다면 지원대와 함께 싸울 텐가?"

"으음, 확실히 그건 조금 귀찮을 수도 있겠네. 하지만 그거 알아? 나는 너를 아크의 반역자로 처형할 수도 있어. 지금 오는 지원대가 과연 너를 위한 지원대일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단장의 아크 내 신분을 생각한다면 더욱더.

단장이 괜히 아크 내에서 아가씨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무기는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네가 아크의 전복을 꿈꾸는 괴뢰 집단, 그림자단의 단장이라는 사실을 말하겠지."

"···허. 에스더, 이 뻥쟁이. 말 안 했다면서."

[어, 어? 진짜 안 했는데? 뭐야, 어떻게 알았어?!]

"······."

단장의 눈이 에스더를 노려보았다.

물론 노려봐도 나오는 건 없었다.

"과연 아크에서 네 말을 믿어줄까? 아무리 생각해도 네 말보다는 내 말을 더 믿을 것 같은데?"

"정보의 신뢰도에 따라서 다르겠지."

"자신이 넘치는걸? 우리에 대해서 아는 게 제법 많은가 봐?"

"목적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지. 그걸 위해서 현재 아크 내 라인 간 분열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 역시도."

딱 이 정도만 말해도 충분할 것이다.

괜히 더 말했다가는 단장이 모든 리스크를 감수하고 나를 제거하려 들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허어······."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는 걸 알아차린 단장은 어처구니없어하는 동시에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진짜 재미있네, 너. 생각 이상이야. 에스더가 반할만해."

[단장!]

"아, 듣고 있었어? 당연히 농담이지. 나는 아직 우리 딸 시집 보낼 준비가 안 돼 있어."

[···나이는 내가 더 많아. 그리고 반하기는 누가 누구한테 반해?]

"어머, 그랬나?"

단장은 에스더와 잠시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고는 나를 보았다.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자."

단장이 나를 향해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모습에 야누스가 괴성을 내지르며 뼈 촉수를 뻗으려 했으나, 단장의 에테르에 붙들려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렴."

단장은 마치 어르고 달래듯이 야누스의 뼈 촉수를 모두 붙들어 버리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칼 마커스."

단장이 천천히 손바닥을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공격이 아니었다.

그건, 어떤 의사 표현이었다.

"우리와 함께 가자."

< 레드 라인 방어 (7) > 끝

그림자단 루트.

한때, 많은 더 디펜스 유저들 사이에서 이 루트가 거진 정석 루트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이전까지는 50번째 스테이지를 넘는 유저도 드물었던 때에, 그림자단 루트를 타게 되면 무난하게 중후반 스테이지까지도 넘을 수 있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림자단 루트를 요약하면 간단하다.

그림자단에 가입해서 그 일원으로서 아크의 분열을 유도하고, 최종적으로 라인 간 내전을 일으킨 뒤에 아크의 지배자로서 군림한다.

그로써 현재 화이트 라인부터 로즈 라인까지 분산되어 있는 아크의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림자단 루트는 딱 거기까지다.

91번째 스테이지, 즉 블랙 라인에 들어서게 되면 그림자단 루트를 진행하며 줄어든 아크의 전력이 확실하게 체감이 되기 시작한다.

부족한 물자와 병력.

사방에서 덮쳐오는 적들.

유능한 군인들의 빈 자리.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림자단 루트는, 틀렸다는 걸.

'하지만 이용할 가치가 전혀 없지는 않아.'

누가 뭐라고 해도 그림자단은 실제로 아크를 전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 중 하나다.

만약 그들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이 막막하기만 한 상황도 타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 대답하라고는 안 해.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대답은 다음에 들을게. 가자, 룩."

"···이대로 가도 괜찮은 건가? 에스더는?"

"괜찮을 거야. 어디 가서 허무하게 죽을 놈은 아닌 것 같거든."

제멋대로 떠들어댄 단장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긍정적인 대답 바랄게. 다음에 봐. 에스더. 그때까지 저거 안 죽게 잘 보살펴주고."

[···나 의심해놓고. 부탁은 또 하는 거야?]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잖아."

[아니, 진짜로 내가 말 안 해줬다니까? 이 인간이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어.]

"흐흠, 그렇다고 칠게."

단장이 마치 짓궂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에스더와 함께 있을 때 그녀는 그림자단의 단장이 아니라, 그냥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사람 같았다.

그렇게 단장이 아크의 성벽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지원을 오고 있던 지원대와 마주쳤다.

타이밍 상 마주칠 수밖에 없었음에도 단장은 조금도 당황한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당황한 건 저쪽이었다.

"······어?"

지원대 소속 특수 지원대 담당관인 발로아 소령이 단장을 보자마자 발걸음을 멈췄다.

"아, 아가씨? 아가씨께서는 여기 어쩐 일로······."

"지원이 필요해 보여서 한 손 거들고 있었지. 왜, 안 돼?"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너희들이 왔으니까 난 이만 가봐도 되지?"

"무, 물론입니다!"

단장과 변절자 룩은 그렇게 대놓고 아크 안으로 사라졌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참으로 자신의 신분을 잘 활용해 먹는 인물이었다.

'뻔뻔하기는.'

단장과 변절자 룩은 그렇게 떠났다.

[위대한 영혼을 일부 엿보았습니다! 에테르 감응력이 상승합니다.]

[23 -> 25]

'오호.'

단장이 보였던 무지막지한 에테르를 목격한 것만으로 에테르 감응력이 올랐다.

그 정도로 단장의 힘이 엄청나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곧장 시선을 돌려서 공석이 되어 있는 NOA-44 이레이저의 사수석에 올랐다.

지금까지 내가 아닌 에스더가 방아쇠를 대신 당긴 탓에, 그 많던 탄은 모두 소모한 상태였다.

'어차피 다 소모하기는 했어야 하니까.'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속이 쓰렸다.

잘만하면 어디 구석에 박아 놓고 뒤로 빼돌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빼돌리는 건 위험부담이 크니까, 나중에 기회가 생길 때 하는 게 낫겠지.'

슬쩍 주위를 살펴 보니, 어느새 성벽 위에 마수와 마물들이 들끓었다.

그것들은 단장과 변절자 룩이 있을 때는 그 존재감으로 인해서 감히 달려들지 못하고 있다가, 그들이 떠나기 무섭게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쯧.'

[크르르르!!!]

[캬오오오!]

다시 전투가 시작됐다.

다만, 이제 나도 혼자는 아니었다.

"지원 요청을 한 게 자네인가?"

조금 전에 '아가씨'를 상대로 쩔쩔매고 있던 이는 어디 갔는지, 지원군으로서 합류한 발로아 소령이 짐짓 진중한 말투로 물었다.

"그렇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계급장도 없고. 소속이 어디지?"

"나는 아크 군인이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일종의 용병이라고 보면 될 거다. 자세한 건 이모샤 중위와 바놀 중령에게 물어봐라."

"설마 지금 용병에게 이 전선을 다 맡기고 있었다는 건가?"

"그런 셈이다."

"허······."

발로아 소령은 잠시 얼이 빠졌으나, 그렇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을 잊지는 않았다.

"각자 위치로!"

발로아 소령의 명령과 함께 1개 분대급에 해당하는 인원들이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나도 슬쩍 NOA-44 이레이저에서 내렸다.

안 그래도 총알이 한 발도 남아 있지 않은데, 괜히 여기에서 쏘고 있다가 내 비밀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내리는 거지?"

"총알이 다 떨어졌다."

"···아, 그렇군. 알겠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유였기에 발로아 소령 역시도 큰 의심 없이 그대로 넘어갔다.

혼자서 이 엄청난 전선을 커버하고 있으면 총알이 남아나려야 남아날 수가 없는 게 정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주력 병기인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잡았다.

NOA-44 이레이저 같은 괴물을 쏘다가 이걸 쏘려니까 조금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총알 자체의 파괴력 면에서는 밀리지 않았다.

A-985 폭발탄.

현재 내가 지닌 총알 중 물리력 면에서는 최강의 총알이었다.

쾅! 콰캉!

거침없이 사격이 이어졌다.

지원군이 생긴 덕분인지, NOA-44 이레이저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전선이 한껏 여유로워졌다.

그리고······.

['불살주의'를 시행하였습니다.]

[현재 구한 생명 : 100]

[구사일생(九死一生)의 기회를 '1회' 습득하였습니다.]

[누적된 구사일생 수 : 1]

내 불살주의 중첩이 비로소 100이 되기 무섭게 마침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4번째 웨이브가 막을 내렸다.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구사일생 능력을 얻게 된 것이다.

[Red-04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였습니다!]

[공적치가 누적됩니다.]

[+84,542 공적치]

[전장에서 매우 엄청난 활약을 보였습니다! 공적치가 추가로 적립됩니다.]

[+30,000 공적치]

[믿기지 않는 업적을 세웠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적립됩니다.]

[+10,000 공적치]

[현재 공적치 : 160,421]

이제까지 내가 아크 바깥에서 활동했을 때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공적치.

중화기 이상의 병기인 NOA-44 이레이저로 아크의 전선을 향해 총알을 무한히 쏟아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정도면 아크에서 별도로 크레딧까지 수여하겠군.'

아크의 외부인이었던 때와 달리, 지금 나는 아크의 명예시민이다.

당연히 그에 대한 권리 정도는 응당 뒤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이득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명예' 능력치가 생성됩니다.]

[특성, '영웅의 길'을 습득하였습니다.]

──────────────

[영웅의 길]

고귀한 자여, 그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명예 능력치가 상승할 때마다 명예를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함께 상승한다.

단, 명예 능력치가 하락할 시 능력치 역시도 함께 하락한다.

현재 상승한 모든 능력치 : 1

"상세 보기"

──────────────

'이건······.'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영웅의 길' 특성을 획득하기 무섭게 몸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비록 수치로는 1에 불과하지만, 현재 내가 지닌 모든 능력치를 합치면 거의 6가량의 능력치가 한 번에 오른 것이다.

나는 능력치를 확인했다.

──────────────

이름 : 칼 마커스(Carl Marcus)

계급 : ─

보직 : ─

근력 : 16(+1)

체력 : 19(+1)

재주 : 14(+1)

행운 : 10(+1)

투지 : 7(+1)

통솔 : 2(+1)

에테르 감응력 : 25(+1)

명예 : 1

보유 특성 : [강인한 체력], [불면증], [날렵한 몸놀림], [초인적인 정신력], [수전증], [난시], [돌발성 난청], [일격필살], [화력 전문가], [무거운 탄환], [접신], [저격수의 시간], [괴수 사냥꾼], [불살주의], [초심자의 행운], [칼날 탄환], [공포탄], [영웅의 길]······.

보유 능력 : [강체(强體)(Lv.3)], [방출(放出)(Lv.1)]

──────────────

그야말로 엄청난 효과였다.

'변절자 폰의 정체를 들키면 안 될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군.'

영웅의 길은 일반적인 플레이를 할 때는 분명히 매우 뛰어난 효과를 지닌 특성이다.

다만, 그림자단 루트 같은 특이한 루트를 타게 되었을 때, 영웅의 길 특성은 플레이어의 발목을 잡는 엄청난 족쇄가 된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악명이라도 쌓이게 되면, 명예 수치가 양수가 아닌 음수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음수가 된 명예 능력치는 그대로 그 수치만큼 모든 능력치를 깎아버린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그게 바로 영웅의 길 특성이었다.

'뭐, 어차피 안 들키면 되니까.'

만약 정말로 변절자 폰의 정체를 들킨다면, 내 명예 수치는 몇 정도가 깎이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모든 능력치를 다 잡아먹을 가능성이 컸다.

곧, 변절자 폰의 정체를 들키는 건 나에게 있어서 죽음에 가까운 행위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특히 더 조심해야겠어.'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비록 웨이브는 조금 전에 끝났지만, 쉬고 있을 틈이 없었다.

* * *

웨이브가 끝난 뒤.

이모샤 중위는 바놀 중령의 호출에 발걸음을 옮겼다.

공치사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확히는, 그 반대였다.

이모샤 중위는 지금 레드 라인 군 징계 위원회에 의해서 결정된 징계 내용을 들으러 가는 중이었다.

이번 웨이브에서 외부인이나 다름없는 칼 마커스에게 전선을 맡겼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감봉 3개월이네."

"···잘 못 들었습니다?"

"못 들었나? 감봉 3개월이네."

이내 들려온 바놀 중령의 말에 이모샤 중위는 눈을 끔뻑였다.

만약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최소 보직 해임, 아니 불명예 전역까지도 각오하고서 내렸던 결정이다.

그런데, 의외로 징계 내용이 약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감봉도 충분히 중징계였지만, 사안에 비해서 약한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자네가 내린 판단은 무리해 보이는 판단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칼 마커스가 홀로 R17-1 구역부터 R17-15 구역까지 수비에 거의 성공했다는 게 주된 이유였네. 물론 도중에 지원을 요청하긴 했지만, 혼자서 거기까지 했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지."

"······."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바놀 중령의 입에서 그 사실을 다시금 들으니 새삼스레 감회가 들었다.

"어쨌거나 레드 라인 군 징계 위원회에서는 자네의 결정 덕분에 서부 전선의 피해가 매우 줄어들었다는 점을 높게 봤네. 사실, 그 때문에 원래였다면 벌이 아니라 상을 줬어야 하는 데, 내가 징계를 주라고 했네."

"···예?"

이모샤 중위가 눈을 끔뻑였다.

설마하니 자신의 징계를 주장한 게 직속 상관인 바놀 중령이었다니?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얼마 전까지 외부인이었던 자에게 전선 하나를 통째로 맡기는 게 말이 되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좋았지. 자네도 알겠지만, 아크를 지키는 군인들에게 있어서 결과보다 더 좋은 건 없네. 허울 좋은 허례허식 같은 건 전부 블랙 라인과 함께 무너졌으니까. 내가 자네에게 징계를 준 건 다른 이유일세."

"그게 뭡니까?"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켜서야 쓰겠나? 자네는 아크의 군인일세. 본분을 망각하지 말게."

"···예?"

이모샤 중위는 처음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알아듣고는 소리를 빼액 질렀다.

"네에?!"

"깜짝이야. 귀청 떨어지겠군."

"그런··· 아닙니다!"

"아닌가? 그렇다면 미안하네. 하지만 징계 철회는 할 수 없어. 이미 결정된 사안일세."

이모샤 중위는 할 말을 잃었다.

최악의 경우 불명예 전역까지도 각오하고서 이 자리에 왔지만, 정작 들려온 말들은 이모샤 중위를 더없이 혼란스럽게 했다.

'내가?'

아니, 아니다.

이 감정은 그저 훌륭한 군인이 될 자질이 보이는 이에 대한 경외심 같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내쫓은 이들 중 유일한 생존자라는 점 역시도 거기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내가 할 말을 여기까지일세. 이만 가보게. 해야 할 일을 하게."

"···알겠습니다."

이모샤 중위가 경례를 하고 나간 뒤, 바놀 중령은 가만히 그녀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역시, 아닌가.'

이모샤 중위의 반응으로 보건대, 이모샤 중위가 뭘 알고서 칼 마커스에게 전선을 맡긴 것 같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다급한 상황과 높은 신뢰에서 나온 판단이었을 뿐.

바놀 중령은 이모샤 중위가 오기 전까지 하던 대로 다시금 레드 라인 전선에 있는 CCTV 녹화 장면을 돌려보았다.

R17 전선에 설치된 CCTV였다.

'···믿기지 않는군.'

CCTV에 나온 건 칼 마커스였다.

칼 마커스의 활약은 대단했다.

무려 R17-1부터 R17-15까지의 구역을 홀로 커버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NOA-44 이레이저에 탑승한 칼 마커스는 정말로 홀로 그걸 해냈다.

다만 조금 아쉬운 건,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를 향한 감시 장비가 모두 박살이 났다는 점 정도였다.

'설마 고의인가? ···아니야. 고의라고 하기에는 마수와 마물들의 위치와 정확히 맞아.'

설마하니 인간이 거기까지 노리고서 저런 중대형 병기를 정밀하게 움직일 수 있겠는가?

아크에서 무수히 많은 괴물을 보아왔던 바놀 중령조차도 그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만큼 칼 마커스가 고의적으로 아크의 감시 장비를 파손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대체 정체가 뭐지?'

바놀 중령은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상한 찝찝함을 느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는데, 정작 그에 대한 목격자가 하나도 없다.

'거기 있는 물자만으로는 부족했을 텐데······.'

대체 어떤 식으로 싸웠는지 감도 안 잡힌다.

물론 칼 마커스는 에테르 적합자였으니 에테르를 활용해서 싸웠다고 한다면 납득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나마 지원 요청을 했다는 게 상식적으로 느껴질 정도니··· 어처구니가 없군. 일부러 지원 요청을 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야.'

이상한 건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듣자 하니 그곳에 '아가씨'까지도 나타났다고 하니, 무언가 흘러가는 게 심상치 않았다.

'아가씨라······.'

아크의 시민이라는 누구나 경외해 마지않는 인물이지만, 바놀 중령은 그 아가씨를 볼 때마다 어딘가 꺼림칙했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할까?

물론 만약 이딴 소리를 다른 누군가에게 했다가는 당장 바놀 중령의 옷이 벗겨질 게 뻔했기에, 혼자만이 간직한 생각이었다.

'당분간 지켜봐야겠지.'

바놀 중령의 시가가 깊게 타올랐다.

* * *

"···아크를 떠나신다고요?"

< 영웅의 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