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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

001화

 

숲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길목.

 

화르르-.

 

어둑한 하늘을 밝히며, 숲 너머에 주황빛이 너울거렸다.

 

"루 솔라 맙소사…. 어쩐지 탄내가 난다 싶더니."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그 광경을 응시하던 자경단원이 읊조렸다.

 

여기서 보일 정도라면, 저 너머는 불바다일 것이 틀림없었다.

 

"칼잡이 혼자라고 하지 않았어, 단장?"

 

애꾸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나무에 기대선 희끗희끗한 수염의 자경 단장이 미간을 구겼다.

 

"칼 찬 주문쟁이인 모양이지. 내가 직접 봤는데, 못 믿는 거냐?"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듯한 눈빛.

 

애꾸가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혹시나 해서지. 혹시나."

 

그와 달리 단장은 저 먼 제국군 출신이었다. 비록 탈영병이었지만, 칼솜씨만큼은 진짜였다.

 

"저, 단장. 그런 거면 말야."

 

그 옆에서 숲을 살피던 덩치 큰 대머리가 쭈뼛대며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자경 단원이었다.

 

"계획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마법사는 좀 꺼림칙한데…."

 

"내 말이 그거야, 단장. 저긴 아무리 봐도 코볼트 산채가 있는 방향 같다구."

 

애꾸가 이때다 싶어 거들었다.

 

"혼자 산채를 다 태워 버릴 정도의 마법사라면 그냥 물러나는 게 좋지 않을까?"

 

"...."

 

단장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그가 욕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용기가 났는지, 애꾸가 덧붙였다.

 

"부업 때문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잖아. 헤헤…. 가진 것도 별로 없어 보였다면서."

 

"…후우."

 

단장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이 한심한 족속들을 데리고 자경단을 결성한 건, 코볼트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위험해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코볼트. 그 작은 마물들은 웬만해선 숲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 데다, 한두 마리만 칼로 쑤셔도 도망치기 바쁠 정도로 겁이 많았으니까.

 

그 대가로 술과 음식이 무한정 공짜였으니 할 만한 장사였다.

 

게다가 부업도 쏠쏠했다.

 

종종 떠돌이 용병들이 산채를 없애준답시고 나섰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코볼트는 보금자리가 위험할 때만큼은 눈이 돌아 버렸으니까.

 

말 그대로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드는, 진짜 마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단장은 단원들과 함께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만신창이로 도망 나오는 용병들을 털어먹는 걸 부업으로 삼았다.

 

시체는 숲에 던져 두면 코볼트들이 해체하니 뒤처리도 편했다.

 

설사 허탕을 치더라도, 낮에 시체를 수색하러 다니면 그만이었다.

 

코볼트는 고기에만 관심이 있지, 소지품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던 셈이다.

 

그리고 오늘도 그럴 계획이었다.

 

"이 멍청한 새끼들아."

 

저 광경을 보기 전까지는.

 

단장의 한마디에 대머리와 애꾸의 어깨가 긴장으로 굳어졌다.

 

"저게 정말 코볼트 산채가 타는 거라면 부업이 대수냐? 내일부터 본업이 없어지게 생겼는데."

 

"...!"

 

"...!"

 

애꾸가 눈을 치켜떴다.

 

대머리도 마찬가지였다.

 

혀를 찬 단장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저 주문쟁이의 입을 막아야 하는 거다. 일단은 마을 놈들이 산채가 없어진 걸 몰라야지."

 

둘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침을 꿀꺽 삼킨 대머리가 물었다.

 

"계속 속일 순… 없지 않을까?"

 

"내일 산채를 소탕하러 출정하면 돼. 그리고 전리품만 챙겨서 돌아온다. 저 주문쟁이 덕분에 수월했다고 하면 누가 알겠어?"

 

"...!"

 

"...!"

 

두 부하의 눈이 다시 커졌다.

 

단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우린 계속 마을의 자경단으로 활동할 수 있을 거다. 어쩌면 공로를 인정받아 정식으로 임명될지도 모르지."

 

"역시 단장…."

 

애꾸가 감탄한 듯 읊조렸다.

 

함께 감탄한 것도 잠시.

 

"하지만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그것도 적색 마법사를…."

 

대머리가 뒤늦게 또 중얼댔다.

 

"그러니까 지금인 거다, 이 겁만 많은 대머리야. 마법이 어디 무한정 쓸 수 있는 기적이냐?"

 

단장이 혀를 차며 말을 잘랐다.

 

"저 정도 불길이면 산채를 정리하느라 힘을 다 썼을 거다. 마력을 회복하지도 못했을 거고. 지금은 빌어먹을 마력의 황혼기니까. 마력 없는 마법사는 애보다 무력하지."

 

그가 엄지로 목을 쓱 그었다.

 

"칼로 대충 쑤시기만 하면 돼. 전쟁터에서도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 주문쟁이를 여럿 봤다고."

 

"만약 마력이 남아 있으면…?"

 

"적색 마법은 주문을 외우는 데 오래 걸려. 그러니까 눈치가 이상하면 바로 칼부터 던질 거다."

 

비로소 대머리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단장."

 

마지막 말은 거짓말이었다.

 

단장은 여차하면 두 부하를 희생양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가 마법사에게 칼침을 놓을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검술을 더 믿었다.

 

"걱정 마라."

 

속내를 감춘 채, 단장은 대머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런 변방까지 대단한 마법사가 올 리가 없잖냐. 진짜배기들은 죄다 탑에 틀어박혔다던데. 그러니까 하던 대로만 하면…."

 

문득, 단장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어둠 속을 노려본 그가 몸을 낮췄다.

 

"쉿. 온다."

 

"...!"

 

대머리와 애꾸가 화들짝 놀라 길 좌우로 몸을 숙였다.

 

저벅- 저벅-.

 

절뚝대는 느린 발소리.

 

"더럽게 무겁네, 시발…."

 

구시렁대는 목소리까지 이어졌다.

 

피 냄새와 탄내, 땀내가 뒤섞인 악취가 코를 파고들었다.

 

단장이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마법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재와 피로 목욕이라도 한 듯한 몰골이었다.

 

낮에 입고 있던 후드는 물론, 검 역시 차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한쪽 다리도 절뚝였다.

 

대신 품에 뭔가를 안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이마에 뿔이 돋은 머리통이었다.

 

단장이 알던 것보다 몇 배는 큰 코볼트의 머리였다.

 

'저 주문쟁이 새끼가 정말 코볼트 산채를 작살 냈군. 미친….'

 

단장은 그것이 코볼트 족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안도했다.

 

'역시 지금이 아니면 죽일 수 없는 놈이었어.'

 

지금은 마법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게 분명해 보였으니까.

 

마법사가 적당히 가까워질 때를 기다린 그가,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대머리와 애꾸가 소리 없이 일어섰다.

 

둘 다 검을 뽑아 든 채였다.

 

어둠 속에서도 검광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

 

마법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젠 들켜도 상관없었다.

 

고작해야 여섯 일곱 걸음 거리.

 

도약 한 번이면 코앞까지 달려들어 칼을 쑤셔 넣을 수 있으리라.

 

성공을 확신한 단장이 한 박자 늦게 몸을 일으켰다.

 

"멈추는 게 좋을 거야."

 

검 자루를 쥐며 그가 말했다.

 

마법사가 우두커니 멈춰 섰다.

 

"어휴…."

 

그가 한숨을 내쉬는 찰나, 단장이 재빨리 덧붙였다.

 

"입도 벙긋하지 마. 그리고 그거."

 

그가 마법사가 안고 있는 족장의 머리통을 턱짓했다.

 

"그대로 바닥에 내려놔. 그러면 목숨은 살려 주지."

 

"...."

 

잠깐의 적막.

 

이윽고 피식, 코웃음 친 마법사가 내뱉었다.

 

"원하는 대로."

 

그가 머리통을 쥔 손을 놓았다.

 

족장의 머리가 떨어지면서, 마법사의 손아귀가 드러났다.

 

새파란 마력이 일렁이는.

 

"...!"

 

어느새? 눈을 치켜뜬 단장이 본능적으로 외쳤다.

 

"쏴!"

 

쉬쉭!

 

마법사의 등 뒤에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후방에 매복 중이던 또 다른 부하가 석궁을 쏜 것이다.

 

쉬학-!

 

마법사의 등 뒤에서 잿빛 아지랑이가 일렁인 건 거의 동시였다.

 

"아악!"

 

대머리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법사에게 박혀야 할 볼트가 그의 허벅지에 꽂혀 있었다.

 

"으, 으아아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생각할 여유 따윈 없었다.

 

애꾸가 고함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바로 그 뒤를 따라 단장도 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푸확-!

 

탄내가 뒤섞인 바람이 그의 몸을 돌연 밀쳐낸 건 그 직후였다.

 

볼트를 휘게 했던 그 바람 장막.

 

장막의 효과는 아주 짧았다.

 

짝!

 

하지만 마법사가 양손을 맞부딪힐 시간을 만들기엔 충분했다.

 

슈화악-

 

새파란 냉기가 마법사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터져 나왔다.

 

파문에 휩쓸린 것들이 삽시에 얼어붙었고.

 

"...!"

 

그걸 코앞에서 맞은 애꾸는 그대로 마법사를 지나쳐 고꾸라졌다.

 

꽈직-

 

바닥에 쓰러지는 그의 몸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의 뒤에 있었던 단장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아, 아으…."

 

전신에 지독한 동상을 입었지만, 살아는 있었으니까.

 

범위가 넓은 마법은 아니었다.

 

"...."

 

서릿발 사이에 쓰러진 그를 힐끗 내려다본 마법사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의 손아귀에는 다시 붉은 마력이 일렁이고 있었다.

 

화륵- 화르륵-.

 

주먹만 한 작은 불꽃 일곱 개가 그의 주위로 피어올랐다.

 

마법사는 그중 여섯 개를 차례로 뒤를 향해 발사했다.

 

펑, 펑, 펑, 펑, 펑, 펑-!

 

제대로 조준된 것도 아니었지만.

 

"아아악-!"

 

마구잡이로 폭발하면서, 매복하던 자경단원까지 휘말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사, 살려-!"

 

퍼엉! 화르르-!

 

마지막 불꽃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대머리를 머리부터 불태웠다.

 

덕분에 주위가 밝아졌다.

 

단장은 몸을 떨면서도 마법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 어떻게."

 

그의 입술이 간신히 달싹였다.

 

"불과 얼음을, 동시에…?"

 

그가 제국군 출신이었기에 품을 수 있는 의문이었다.

 

마법사를 흔하게 봤으니까.

 

그들은 한 가지 속성의 마법만을 전문적으로 익혔다.

 

지식에 대해 아주 예민했고, 다른 계통의 마법사와는 절대로 주문을 교류하지 않았다.

 

지식과 주문이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제국에서는 당연한 통념이었다.

 

"어떻게는 뭘 어떻게야."

 

바닥에 떨어진 단장의 검을 주워들면서 마법사가 읊조렸다.

 

"내가 망캐니까 그렇지."

 

짜증까지 섞인 어조.

 

"망캐…?"

 

단장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그리고, 그게 그의 유언이었다.

 

콰직.

 

마법사가 검으로 그의 목을 사정없이 내리쳤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한 새끼들…."

 

마법사가 다시 한번 한숨 쉬었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단장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주 익숙한 손놀림.

 

곧 그의 손에 작은 주머니 하나가 딸려 올라왔다.

 

살짝 언 입구를 억지로 연 마법사가 짧게 혀를 찼다.

 

"검이 쓸만해서 기대했더니."

 

고작 동전 몇 개.

 

대장이 이 정도라면 부하들도 별 볼 일 없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마법사는 대머리와 애꾸의 주머니까지 꼼꼼히 뒤졌다.

 

홀쭉한 주머니 몇 개를 더 챙긴 그가 비로소 몸을 돌렸다.

 

문득, 마법사의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향했다.

 

"…이젠 이래도 떨리지도 않네."

 

씁쓸하게 읊조린 그가 코볼트 족장의 머리를 다시 주워들었다.

 

"앗, 차거."

 

족장의 머리도 꽁꽁 얼어 있었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마법사는 단장의 것이었던 검을 지팡이 삼아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절뚝거리면서.

 

시체들은 그 자리에 덩그러니 버려둔 채였다.

 

***

 

끼익- 쾅!

 

주점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웅성대던 주점 내부의 소음이 칼로 자른 듯 끊어졌다.

 

주정뱅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온 남자에게로 집중됐다.

 

하지만 아무도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

 

그저 멍하니 눈을 끔뻑댈 뿐.

 

남자가 지옥에서 돌아온 듯한 행색이었을 뿐만 아니라, 품에 끔찍하게 생긴 커다란 머리통까지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물의 얼굴에는 최후의 순간에 느꼈을 고통과 공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저벅저벅.

 

시선을 무시한 채 장내로 들어선 남자가 카운터로 향했다.

 

쾅!

 

그리고는 마물의 머리통을 그 위에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꾸벅꾸벅 졸던 근육질의 주점 주인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이건…? 오. 허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족장의 머리를 바라보던 그가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산채를 없앴군. 기대도 안 했는데. 고맙소."

 

그의 인사에도 남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콰직!

 

카운터 위에 검이 박혔다.

 

"...?"

 

미간을 찌푸리던 주인의 시선이, 이윽고 검으로 향했다.

 

그의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자경단을 만났군."

 

누구의 검인지를 알아본 것이다.

 

"그래."

 

남자가 비로소 짤막하게 답했다.

 

주인이 덧붙였다.

 

"다 죽었소?"

 

"그래."

 

대답한 남자가 주인을 응시했다.

 

장내의 침묵이 한결 무거워졌다.

 

자신보다 왜소한 남자의 시선임에도, 주인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할 말은 그게 끝인가?"

 

남자가 물었다.

 

주인은 남자의 눈을 마주 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

 

그 안에 고인 살의 역시, 차분하지만 진득했다.

 

"…잘하셨소."

 

그 시선을 간신히 받아내며, 주인이 내뱉었다.

 

"그 개자식들. 하는 것도 없으면서 술과 고기만 축냈지. 안 그래?"

 

몇몇 술꾼들이 재빨리 화답했다.

 

"그래! 말이 자경단이지, 도적이나 다름없었지. 잘 죽었다, 건달 새끼들!"

 

"마을의 근심거리가 두 개나 동시에 없어졌군!"

 

동시에 간절한 어필이기도 했다.

 

자신들은 결백하다는.

 

코볼트 산채를 홀로 몰살시키고 자경단까지 다 죽인 남자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이 중에는 없었다.

 

"…그렇군."

 

이윽고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다시 뽑으며 그가 말했다.

 

"의뢰의 대가는 잊지 않았겠지?"

 

주인은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대로 우리 주점에서의 숙식은 평생 무료요. 원한다면 사례비도 거둬서 드릴 수도 있고. 살기 팍팍해서 많진 않겠지만."

 

"그건 됐어. 편히 자고 싶거든."

 

검을 대충 허리춤에 회수한 남자가 덧붙였다.

 

"뜨거운 목욕물이나 준비해 줘. 지금 바로."

 

"알겠소. 얼마나 드릴까?"

 

주인이 조마조마한 표정의 여급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물었다.

 

몸을 돌리며 남자가 대꾸했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계속."

 

남자가 절뚝대며 계단을 올랐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인이 문득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물은 적이 없는데. 댁은 이름이 뭐요?"

 

대답은 이번에도 짧았다.

 

"이안."

 

***

 

"이 모가지는 벽에 걸어 놓자고! 으하하, 더럽게도 못생겼군."

 

"네놈이랑 닮았는데? 혹시 네 조상 중에 코볼트가 있는 거 아냐?"

 

"뭐라고, 이 새끼야?"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소리가 바닥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더럽게 시끄럽네, 진짜."

 

욕조에 앉은 이안이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몸 곳곳을 박박 문지르는 중이었다.

 

벌써 세 번째 목욕물에, 웬만한 오물은 다 닦아냈건만.

 

찝찝함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하다못해 오이 비누라도 하나 있었으면 소원이 없을 텐데."

 

중얼댄 이안이 문득 실소했다.

 

"소원이 없긴 개뿔, 시발…."

 

가장 큰 소원은 따로 있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

 

이안은 욕조에 털썩 드러누웠다.

 

거미줄이 가득한 천장을 응시하며,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애초에, 불법 다운로드 같은 걸 받는 게 아니었어."

 

그가 이 위생 관념도 인권도 없는 세계에 떨어진 건, 1년쯤 전의 일이었다.

 

#002화

 

본래의 그는 특별할 것도 대단한 것도 없는 사회 초년생이었다.

 

그나마 생긴 취미도 게임이었다.

 

그것도 RPG 위주의 싱글 게임.

 

온라인 게임은 그 세계에서조차 자본과 재능의 격차를 절감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도 자주 들락거리게 됐다.

 

소위 고인 물들의 영상이나 공략 글도 재미있었지만.

 

종종 불법 복제한 게임의 다운로드 링크도 올라왔기 때문이다.

 

옳지 않은 행동인 건 알았다.

 

하지만 박봉은 자기 합리화에 좋은 핑곗거리였다.

 

그러니까 그가 '이젠 못 구하는 희귀 게임 DLC, 모드 풀 패키지. 선착순.'이란 게시물을 클릭한 건, 그때까지만 해도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아퀼로니아.

 

배신과 타락. 반역과 음모로 점철된 세미 오픈 월드 다크 판타지.>

 

소개 글은 꽤 그의 흥미를 끌었다.

 

게임 스크린 샷도 그럴듯했고.

 

다만 이제는 제작사의 사정으로 판매하지 않는 게임이었다.

 

게시글이 삭제된 건, 그가 다운로드 링크를 누른 직후였다.

 

그는 자신이 선착순의 주인공이 된 것에 뿌듯해하며, 게임을 곧바로 실행시켰다.

 

주말을 불태워 엔딩을 보리라고 결심하면서.

 

아퀼로니아에서 유저가 선택 가능한 클래스는 5가지였다.

 

기사. 야만 전사. 마법사. 수색병. 수행 사제.

 

설치 중에 나온 팁에 따르면, 보스전 같은 특수 상황에서는 서버에 등록된 다른 유저 캐릭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서버 접속은 되지 않았다.

 

불법 복제판이어서인지, 애초에 서버가 없어진 건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모든 걸 혼자 해내야 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래서 그는 마법사를 선택했다.

 

원거리 딜러인 데다, 초보자가 선택하기에 가장 무난한 선택지였다.

 

고유 특성은 육감과 집중력.

 

난이도는 자존심상 보통.

 

외형은 기본. 이름은 랜덤.

 

장차 그의 육신이 될 캐릭터 이안 호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공략부터 찾아봤어야 했는데.'

 

이안은 한숨을 삼켰다.

 

이미 늦은 후회였다.

 

당시의 그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게임에 몰두했었으니까.

 

아퀼로니아는 전반적으로 꽤 훌륭한 게임이었다.

 

그래픽은 조금 낡았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 거슬리지 않았고.

 

무척 다양한 스킬 트리를 바탕으로 한 전투도 손맛이 살아 있었다.

 

세미 오픈 월드인 만큼 특정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다음 지역으로 넘어갈 수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자유도가 높은 데다, 서브 퀘스트나 컷 신을 건너뛸 수도 있어서 크게 지루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다크 판타지다운 음울한 결과를 보여 주는 수많은 선택지가 그를 즐겁게 했다.

 

물론 게임이 마냥 쉽지는 않았다.

 

아이템은 클래스의 제약 대신 착용 능력치의 제약이 있었고.

 

그 때문인지 옵션도 중구난방이었다.

 

스킬 트리의 방대함에 비해 스킬 포인트는 상당히 부족했다.

 

특히 보스전을 비롯한 네임드 몹과의 전투는 상당히 어려웠다.

 

그는 그때그때 필요한 능력치와 상황에 맞는 스킬을 적당히 선택해 가며 게임을 진행했다.

 

한계에 봉착한 건, 게임의 종반부에 접어든 4챕터에서였다.

 

3챕터부터 난이도가 체감될 정도로 오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일반 몬스터들도 상대하기 버거워진 것이다.

 

잠깐의 레벨업 노가다로도 달라질 건 없었다.

 

그는 결국 공략 글을 검색했다.

 

다행히도 오래전, 어떤 고인 물이 전문가 수준으로 정리한 글을 찾을 수 있었다.

 

논문 수준의 긴 글이었기에, 그는 필요한 부분만 찾아가며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상황이 얼마나 총체적 난국인지를 차근차근 알게 되었다.

 

일단은 고유 특성부터가 그랬다.

 

육감과 집중력은 원거리 전투에는 그다지 도움 되지 않는 시너지를 가진 특성이었다.

 

원소 친화력이나 마력 혈맥, 통찰력, 병렬 사고, 하다못해 행운이나 반사신경 따위가 더 도움이 됐다.

 

게다가 그의 캐릭터는 능력치도 동 레벨 마법사보다 떨어졌다.

 

특히 지능과 정신력이 그랬다.

 

그만큼 힘과 민첩성, 체력에 투자했기 때문이었다.

 

홀로 적을 상대하기 위한 장비를 착용하려면 어쩔 수 없었지만.

 

그건 컨트롤과 압도적인 화력으로 극복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스킬도 마찬가지였다.

 

그처럼 여러 속성에 손대는 게 아니라 한 길만 파야 했고.

 

보조 역할인 비전(祕傳)과 공통 스킬은 최소한으로만 익혀야 했다.

 

스킬 포인트는 그만큼 귀중했다.

 

워낙 마력과 돈이 부족한 데다, 종종 극단적인 저항력을 가진 보스들이 튀어나왔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건 아이템 파밍과 적의 저항력을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게 정석이었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퀘스트와 선택지였다.

 

추가 스탯 포인트와 스킬 포인트를 주는 필수 서브 퀘스트를, 그는 너무 많이 놓치거나 건너뛰었다.

 

게다가 일부러 최악의 선택지들을 고른 탓에, 그에게 도움을 줘야 할 주요 캐릭터들도 너무 많이 죽거나 타락해 버렸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의 캐릭터인 이안 호프는 망캐였다.

 

그것도 총체적 망캐.

 

심지어 어느 것 하나 돌이킬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주말이 끝나기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캐릭터를 다시 키우자.

 

이번엔 공략을 참고해서 제대로.

 

더 쉬운 직업을 선택해서.

 

그러나 캐릭터 슬롯은 하나뿐이었고, 추가 개방에는 유료 결제가 필요했다.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그는 결국 캐릭터 삭제를 선택했다.

 

에러 창이 뜬 건 그 직후였다.

 

<삭제가 거부되었습니다.>

 

불가능도 아니고, 거부라고?

 

그가 황당해하는 사이.

 

다른 팝업 창이 연달아 이어졌다.

 

<◆◇◐◑들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들이 세계의 결말을 원합니다.>

 

<◆◇◐◑들이….>

 

그 후로 그가 기억하는 건, 눈부시게 점멸하는 모니터뿐이었다.

 

그가 살던 세상에서의 마지막 기억이기도 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낯선 늪지대 한복판에 누워 있었으니까.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때 보았던 튜토리얼 퀘스트 창과 함께.

 

"...!"

 

인기척에 이안은 번쩍 눈을 떴다.

 

몸이 본능적으로 먼저 반응했다.

 

욕조 옆에 기대 놓은 검을 집어 들어 침입자에게 겨눈 것이다.

 

"꺄악…!"

 

억눌린 비명이 이어졌다.

 

손에 물 양동이를 든 여급이었다.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물이 그녀의 다리에 철렁대며 튀었다.

 

"무, 물. 갈아 드리려고…."

 

목에 드리운 칼날에,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

 

이안은 여급의 겁에 질린 갈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옛날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오래전에 결론을 내렸던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건 정말 사람이 맞을까.

 

단지 아주 정교한 그래픽에 불과한 건 아닐까.

 

이 세계는 본래 게임이었으니까.

 

"…그렇군. 오해했다."

 

이안은 검을 거뒀다.

 

"죄송합니다…."

 

비로소 물통을 내려놓은 여급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안은 이번에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설사 저게 가짜일지라도, 절대 그렇게 생각할 순 없으리라고.

 

애초부터 이렇게 진짜 같은 가짜라면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욕조 물, 빼 드릴게요."

 

다시 일어선 여급이 욕조 쪽으로 몸을 숙였다.

 

퐁, 욕조 발치의 마개가 열렸다.

 

그녀의 벌겋게 변한 다리가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다리에 튄 뜨거운 물 탓이리라.

 

이안은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방금은 미안했다. 본능적이었어. 자주 습격당했거든."

 

이해한다는 듯 미소 지은 여급이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험한 일을 많이 겪으셨나 봐요."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 눈을 떴던 늪지대가 절로 떠올랐다.

 

병자. 난민. 도망친 죄인과 강도, 빌어먹을 마물까지 튀어나오던 광활한 늪지대.

 

한때 자신이 10분 만에 클리어했던 그 튜토리얼 지역에서, 그는 반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그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적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게임은 현실이 되었고.

 

그가 클리어한 시나리오들은 초기화되었으며.

 

이제는 오히려 그가 게임 캐릭터라는 역설적인 상황을.

 

"물 한 통 더 받아 올게요. …이번엔 칼 겨누지 마세요."

 

덧붙인 여급이 몸을 돌렸다.

 

이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지난 과거를 헤집는 중이었다.

 

바퀴벌레도 무서워하던 일반인을, 살인조차 망설이지 않는 암흑시대의 마법사로 바꿔놓은 기억들.

 

만약 그가 캐릭터의 능력치와 스킬을 그대로 가지지 않았다면, 이미 오래전에 목숨을 잃었으리라.

 

이안은 문득 의문을 곱씹었다.

 

왜 레벨과 스킬만 그대로였을까.

 

시간대, 퀘스트, 아이템까지.

 

모든 게 초기화됐는데.

 

가장 유력한 가설은, 그가 맥없이 죽지 않게 하기 위한 누군가의 안배라는 것이었다.

 

그를 이 세계로 불러들인 것들의, 뭐같이 고마운 안배.

 

'그냥 포인트로 줬으면 더 고마울 뻔했지만 말이지.'

 

문제는, 그렇다 해서 핵심이 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안 호프가 망캐라는 핵심.

 

지금은 촌구석 놈들과의 격차가 워낙 커서, 별다른 장비 없이도 죄다 죽이고 다니고 있지만.

 

결국엔 전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할 상태가 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 촌구석에 숨어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와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가고 있으니까.

 

일어나게 될 일들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리라.

 

그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 대륙을 떠나지 않는 한 벗어날 수 없는 흐름이었다.

 

만약 손을 놓고 있으면, 그 흐름에 떠밀려 반드시 죽게 되겠지.

 

심지어 이 세계는 게임일 때보다 넓어지기만 한 게 아니었다.

 

적들도 더 많고, 더 강해졌다.

 

게임에선 본 적 없던 마을과 사람, 괴물들도 존재했다.

 

그러니 한계가 오는 시점 역시 더 빨라질지도 몰랐다.

 

아니, 사실은 확신하고 있었다.

 

4챕터가 아니라 3챕터. 빠르면 2챕터 후반부쯤이 한계이리라고.

 

'이건 뭐 시한부 인생도 아니고.'

 

이안은 헛웃음을 흘렸다.

 

심지어 그의 레벨은 지난 1년간 단 하나도 오르지 않았다.

 

오른 경험치는 고작 몇 퍼센트.

 

그나마도 퀘스트를 완료하고 보상으로 얻은 경험치였다.

 

아마 상대한 적들이 그에 비해 지나치게 약하기 때문일 터였다.

 

코볼트나, 아까 그 자경단처럼.

 

물론 그렇다 해서, 상황이 마냥 비관적인 것은 아니었다.

 

'스토리가 초기화됐으니까.'

 

추가 능력치와 스킬 포인트를 주는 퀘스트를 클리어할 기회가 다시 주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었던 선택지도, 바꿔놓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그가 과거에 이미 얻었던 포인트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1챕터 초반부인 지금까지 얻은 게 총 3포인트…. 나쁘지 않아.'

 

물론 공략에서 봤던 최상의 마법사를 만드는 건 불가능할 터다.

 

하지만 그럭저럭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는 수준까지 만드는 건, 충분히 희망이 있었다.

 

제일 좋은 건 지금의 격차를 마지막까지 유지하는 거겠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이안은 물이 다 빠진 욕조의 발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부어오른 발목을.

 

'…마음대로만 될 리가 없지.'

 

코볼트 족장이 내던진 도끼가 문제였다.

 

휘몰아치는 방벽 스킬 덕에 도끼는 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놀라면서 발을 접질렸다.

 

원래의 코볼트 족장에게는 없었던 패턴이었기 때문이었다.

 

"없었던 패턴은 무슨…."

 

이안은 비웃듯 읊조렸다.

 

그 많은 일을 겪어 놓고도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다니.

 

고작 발목을 접지른 것으로 이런 큰 교훈을 얻었으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높은 체력 수치 덕분에, 이 정도는 하룻밤이면 회복될 테니까.

 

끼이-.

 

그때 문이 열렸다.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칼 안 들었다."

 

이안이 말하자, 그제야 여급이 냉큼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도 펄펄 끓는 물이 든 양동이를 손에 든 채였다.

 

이것들은 날 삶아 버릴 셈인가.

 

"늦어서 죄송해요. 용사님."

 

여급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용사가 아니라 용병이다."

 

"마을을 구해 주셨잖아요."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마을은 결국엔 불탈 운명이다.

 

"물이나 넣어. 헛소리 말고."

 

이안은 혀를 차며 턱짓했다.

 

여급이 먼저 가져다 놓은 양동이를 들었다.

 

"…너무 뜨거우면 말씀하세요."

 

그녀가 천천히 물을 부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그러면서도 그를 슬쩍슬쩍 힐끗거리면서.

 

자세히 보니 볼이 설핏 붉었다.

 

아, 내 벗은 몸 때문이군.

 

이안은 그제야 자각했다.

 

어느새 이 암흑시대에 너무 적응해 버린 모양이었다.

 

"허튼 상상 하지 마라."

 

"네, 네? 제가 뭘요?"

 

여급이 화들짝 어깨를 떨었다.

 

이안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말 그대로야. 허튼 상상 말라고."

 

이 세계 기준으로야 성인 취급이겠지만, 그의 눈에 이 주근깨 많은 여급은 너무 어렸다.

 

열다섯, 많아야 여섯쯤 되었을까?

 

이런 여자애에게 부성애 이상의 어떤 감정을 가지는 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범죄였다.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요."

 

거짓말도 못 하는군.

 

하긴. 술 냄새 풍기는 이빨 빠진 놈들만 봤을 테니, 이런 몸은 신기하겠지.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힘과 체력 능력치 덕분에, 그는 마법사임에도 근육이 보기 좋게 잡혀 있었다.

 

현실에서도 없었던 식스팩이 여기선 초콜릿처럼 선명했다.

 

지능과 정신력도 그랬다.

 

그는 자신이 예전보다 훨씬 더 빠르고, 다각적으로 사고하게 됐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웬만한 일로는 멘탈이 흔들리거나 깨지지도 않았다.

 

망캐 수준의 능력치 분배인데도 이 정도인데.

 

능력치를 제대로 찍었다면 득도한 선지자 수준이었으리라.

 

"그만. 물 넘치겠다."

 

이안이 마침내 손을 들었다.

 

가만히 두면 물을 한 양동이 더 부을 기세이던 여급이 아쉬운 듯 일어섰다.

 

"물, 더 끓일까요?"

 

그녀가 슬며시 물었다.

 

"물은 이제 됐어. 식사나 준비해. 한 시간 내로 나갈 테니까."

 

"그리고 나서는요…?"

 

그리고 나서는 무슨.

 

"없어. 나가."

 

단호한 축객령에 여급이 입술을 비죽이며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묘하게 도전적인 눈빛을 남기는 것은 잊지 않은 채였다.

 

"별…."

 

헛웃음을 짓는 이안의 귓가로, 다시 왁자지껄한 주정뱅이들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아무렴, 차라리 이 소음보단 여급에게 아무 말이나 재잘대 달라고 부탁하는 게 나았을지도.

 

이안은 욕조에 턱 끝까지 몸을 담근 채 눈을 감았다.

 

3레벨의 명상을 활성화하면서.

 

이것도 본래는, 딱 1레벨까지만 올려야 하는 비전 스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