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들을 응시하는 이안의 눈동자에 흐릿한 마력이 일렁였다.
쉬아아-
순식간에 번져나간 바람이 메이스 자루를 타고 휘몰아쳤다.
이안은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자루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크게 휘둘렀다.
콰지직-!
달려들던 것들이 포탄에 맞은 것처럼 벽에 처박혔다.
산산 조각난 뼈의 잔해와 그 사이에서 곤죽이 된 구울의 살점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자루를 고쳐 쥔 이안은, 언데드들이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반대 방향으로도 팔을 휘둘렀다.
콰장창-!
언데드들이 또다시 벽에 처박혔다.
거대한 망치로 후려친듯한 광경.
실제로도 그랬다.
검으로 펼칠 때는 예리한 선이었던 바람 칼날이, 지금은 맹렬하게 회전하는 구체가 되어 메이스 끝에 휘몰아치고 있었으니까.
이게 잘 먹히는 것을 확인한 이상, 대응은 훨씬 간단해졌다.
콰지직-! 콰장창-!
기다렸다가 휘두르는 것의 반복.
그렇게 몇 번쯤 언데드들의 전진을 저지했을 때였다.
"...?"
언데드들이 불현듯 멈춰 섰다.
슬쩍 미간을 좁혔던 이안이, 이내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놈들 사이에서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증오와 분노가 뒤섞인.
이게 누구의 시선일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왜, 유물까지 챙겨올 줄 몰랐냐?"
이안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놈이 믿고 말고는 중요치 않았다.
"거기 쥐새끼처럼 숨어서 잘 보고 있어라. 이걸로 네 장난감 대가리를 다 터뜨려 줄 테니까."
어디까지나 놈을 열 받게 하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놈이 이성적이고 효율적인 판단을 추구할수록, 일행 중 누군가가 죽을 확률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 손에 든 메이스를 까딱일 찰나, 주문 회로의 빛이 출렁였다.
해골들의 안광이 타올랐다.
"제대로 빡쳤나 보네. 고맙게."
이안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소리 없이 포효한 언데드들이, 들짐승처럼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025화
"저런 미친…."
미구엘이 탄식을 흘렸다.
그의 시선은 홀로 통로를 막아선 이안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직까지 단 하나의 언데드도 그를 지나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언제라도 휩쓸려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아무리 봐도 저건 미친 짓입니다. 우리가 가서 도와야 해요…!"
필립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랫입술을 질근대던 미구엘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우린 나리를 지키는 게 맞소."
"하지만-"
"명령 잊었소? 우리가 낀다고 엄청난 도움이 되진 않을 거요. 차라리 뒤를 지켜서 형씨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 주는 게 낫지."
필립이 침음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를 막긴 했지만, 사실 미구엘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언데드는 끝이 없어 보였고, 이안이 아무리 강한들 영원히 싸울 순 없을 테니까.
미구엘은 본능적으로 발목을 까딱였다.
'시발, 여기선 안 통할 것 같은데.'
하지만 정말 최악의 순간이 온다면 이판사판이었다.
내면의 갈등을 이어가며 이안과 메브를 번갈아 곁눈질하던 한순간.
"...!"
미구엘의 눈이 마침내 번뜩였다.
메브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갑옷 속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녀의 어깨가 천천히 들썩였다.
미구엘이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나리?"
메브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뭔가 입을 열기도 전에, 미구엘이 말을 이었다.
"나리께서 기도에 들어가시고 나서, 주문 회로라는 게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언데드들이 득시글하게 튀어나왔고요!"
"…그래서, 이안은 어디 있느냐?"
"그게 제가 드리려던 말씀입죠!"
미구엘이 통로 쪽을 가리켰다.
"언데드들을 형씨가 혼자 막고 있습니다!"
"저희는 나리를 호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필립이 거들었다.
통로를 돌아본 메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렇군."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휙, 검이 거꾸로 회전하고, 날 윗부분이 그녀의 손아귀에 잡혔다.
"길을 뚫겠다."
철컥, 안면 가리개를 내린 메브가 질주했다.
갑옷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듯한 속도.
거꾸로 든 검을 얼굴 옆에 바싹 치켜든 그녀가, 이윽고 일갈했다.
"이안-! 길을 터라!"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늦으셨소."
숨찬 목소리로 내뱉은 그가 옆으로 훌쩍 물러났다.
드러난 공간으로 메브가 돌진했다.
이안을 지나치는 그녀의 전신에 희미한 푸른빛이 아른거렸다.
그녀의 돌진은 언데드들이 가까워지자 오히려 더 빨라졌다.
콰장창-!
메브와 충돌한 해골들이 산산이 튀어 올랐다.
순식간에 무리 한복판까지 뚫고 들어간 메브가, 거꾸로 쥔 검을 힘차게 올려 쳤다.
콰지직-
검이 만들어 낸 둔탁한 호선이 언데드들을 박살 내며 지나쳤다.
머리를 노리지 않았음에도 휩쓸린 해골들의 안광이 바스러졌다.
언데드에게 신성력은 적은 양으로도 아주 치명적이었다.
메브는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휘두른 검의 원심력을 살려 몸을 회전하며 다시 한번 휘둘렀고, 치켜들었던 팔을 힘으로 멈춰 반대로도 다시 내려쳤다.
꽈직!
같은 궤적으로 이어진 두 번의 공격에 운 좋게 살아남은 구울의 머리통에는 주먹이 틀어박혔다.
언데드들도 짐승처럼 달려들며 반격을 시도했지만.
부러진 칼이나 곤봉, 손톱 따위로는 그녀의 갑옷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신성력을 아주 조금 갉아먹을 뿐.
심지어 공격한 주제에 신성력에 닿아 허물어지는 놈들도 있었다.
"볼 때마다 박탈감 오지네…."
뒤에서 지켜보던 이안이 결국 헛웃음을 흘렸다.
언제 봐도 대단한 전투력.
하지만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메브의 몇 없는 약점 중 하나는 지구력이 부족하다는 거였고, 신성력도 여유롭진 않아 보였으니까.
빠각-!
메브가 놓친 해골의 머리통을 박살 내며, 이안이 따라붙었다.
메브도 자연스럽게 그에게 등을 맡겼다. 더불어 움직임이 훨씬 더 과감해졌다. 몇 마리를 놓치건 이안이 처리해 주리라는 확고한 믿음 덕분이었다.
전진에 순식간에 가속도가 붙었다.
통로를 지나 조금 작은 석실로.
다시 그 너머의 또 다른 석실까지.
파죽지세로 이어지던 전진이 멈춘 건, 더 깊은 지하로 이어지는 내리막길 앞에서였다.
쿠르르르-
별안간 솟아오른 석벽이 통로를 막아 버린 것이다.
"후, 후우…."
숨을 고르며 석벽에 새겨진 고대어를 응시하던 메브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향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제야 검을 늘어뜨린 메브가 뒤를 돌아보았다.
끝없이 이어진 언데드의 잔해들.
횃불을 든 필립과 미구엘이 그 한복판을 주춤대며 가로질렀다.
"길이 막혔다."
덤덤하게 말한 메브가 안면 가리개를 올렸다.
미구엘이 눈을 끔뻑였다.
"그럼… 갇혔단 말씀이십니까?"
"보다시피."
물주머니를 꺼내며 다가온 필립이 말했다.
"뭔가 방도가 있으신 거겠죠."
주머니를 받으며 메브가 답했다.
"방도는 없다만."
"역시 그러시… …예?"
아랑곳하지 않고 물을 마신 메브가 이안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그는 이미 벽에 기대앉아, 메이스 자루에 팔을 걸치고 쉬고 있었다.
"이안이 당황하지 않았으니까. 그걸 믿을 뿐이야."
이젠 보증도 서 주겠는데.
이안은 실소를 삼켰다.
흑마법사가 개 빡쳤으니 그들을 고이 굶어 죽게 놔둘 리 없다든가, 게임에서도 있었던 패턴이라든가 하는 설명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이면서.
"이렇게 된 거, 좀 쉽시다."
하고 말한 게 전부였다.
고개를 끄덕인 메브가 이안의 곁에 앉았다.
"두 분의 뜻이 그러시다면야…."
미구엘이 어물쩍 주저앉았다.
그의 곁에 앉는 필립의 얼굴에도 짙은 피로가 묻어났다.
싸우지 않았다 해서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 어둠과 주문 회로의 마력은,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갉아먹었으니까.
밀려드는 언데드와 마주하는 것 역시,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마물을 상대하는 자들이 미쳐 버리거나 어둠에 물드는 경우가 많은 이유이기도 했다.
"정수는 언제부터 그랬소?"
이안이 불쑥 물었다.
메브가 흉갑에 손을 얹었다.
오염된 정수를 품은 위치였다.
"그저 공명하고 있을 뿐이다. 성흔이 침묵하면서부터 이러더군."
"신과의 연결이 아예 끊어지셨소?"
"그래."
"그렇다면 조심하시오. 언제 경을 잠식하려 할지 모르니."
"그리하지. 염려 마라."
고개를 끄덕인 메브의 시선이, 이내 사방에 널브러진 언데드의 잔해로 향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이토록 거대한 군세를 거느리고도 지하에 숨어만 있었다니."
대체 왜 다들 그딴 걸 궁금해하지.
이안은 내심 한숨 쉬면서도 입을 열었다.
"여긴 놈의 마경이잖소. 여기라서 가능한 군세일 거요. 밖에선 유지할 수 없겠지. 아직은."
어디서 이만한 마력을 끌어오는지는 둘째 치고.
안개와 언데드 군단에 마력을 공급하는 건 주문 회로가 확실했다.
듣고 있던 필립이 물었다.
"마경 자체가 흑마법사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준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악마나 타락자가 마경을 형성하는 이유다. 거미가 거미집을 짓듯이. 자신만을 위한 작은 세계를 만들어 내는 거지."
물론 고위 타락자나 악마가 만들어 낸 마경은, 이런 지하 무덤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메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기서 힘을 축적하고 있었던 거군. 정수를 심은 건 세상에 나올 때를 위한 안배였던 거고. …왕국을 뒤엎을 거악이 탄생할 수도 있었겠어."
솔직히, 잘 풀려도 그만한 깜냥이 되는 놈 같진 않지만.
어깨를 으쓱이던 이안의 시선이, 문득 천장으로 향했다.
주문 회로를 타고 심상치 않은 마력이 밀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작된 건가?
이안은 기억을 복기하며 일어섰다.
메이스를 집어 든 그가 석벽을 돌아본 순간.
"어, 어어…?!"
필립과 미구엘 쪽에서 의문성이 터져 나왔다.
이안도 그제야 등 뒤에서 응축되는 마력을 느꼈다.
주문 회로의 마력 탓에 늦게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안의 미간이 좁아진 건, 바닥에 널브러진 잔해들이 덜컥대며 진동하는 소리 때문이었다.
'저게 벌써?'
이안이 뒤를 돌아본 순간.
잔해들이 자성에 이끌리듯 뒤쪽의 통로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데 뭉친 잔해가 순식간에 통로를 가득 채웠다.
뼈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덩어리.
그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기 시작하자, 이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죽음의 찌꺼기.
말 그대로 불사의 추적자인 비정형의 마물이, 게임에서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땐 갈림길로 들어서기 직전이었던 것 같은데. 시체가 충분히 모여서 그런 건가?'
개 같네.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저건 또 뭔 미친… 어억?!"
쿠구구구-
얼빠진 탄식을 흘리던 미구엘이 화들짝 어깨를 들썩였다.
앞길을 막았던 석벽도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너머로 일렁이는 수많은 안광.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작정을 했구만, 시발…."
메브가 굳은 얼굴로 내뱉었다.
"저 마물은 내가 상대해야 할 것 같다, 이안."
이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바라던 바였다.
"죽이려 하지 말고 저지만 하시오. 길을 뚫을 테니."
"다, 다가옵니다, 나리!"
필립의 외침이 이어졌다.
죽음의 찌꺼기가 일행을 향해 기어 오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일행 쪽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위쪽의 뼈와 살점이 앞으로 쏟아지면서 이동하는 거였으니까.
저 더미에 휩쓸리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메브가 안면 가리개를 내렸다.
"너희는 대열 중앙에 있어라."
내뱉은 그녀가 돌진했다.
이안이 거의 다 내려간 벽 너머로 몸을 날린 건 거의 동시였다.
쉬아악-!
언데드들이 삽시에 가까워졌다.
가죽 갑옷을 걸친 해골 전사부터, 고대 요정 갑주를 걸친 해골 기사. 비교적 최근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구울 병사까지.
더 깊은 곳에 있어야 할 것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군단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이거지.'
빠각! 이안이 해골 병사의 투구를 그대로 내리쳤다.
녹슨 투구가 움푹 들어가고 그 아래의 두개골이 산산 조각났다.
놈이 허물어질 때쯤, 이안은 이미 다음 언데드를 후려치고 있었다.
체력을 아낀 덕에 그의 움직임에는 한결 여유가 있었다.
거기다 이제는 머리만 박살 낼 필요도 없었다.
이안은 바람 칼날을 전신에 두른 채로 길을 뚫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한참 전진하던 그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경! 너무 뒤처지지 마시오!"
찌꺼기를 상대하던 메브가 그제야 몸을 돌렸다.
그녀도 저놈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저 전진을 늦출 뿐.
와르르르-
방해꾼이 사라진 찌꺼기가 석실을 지나쳐 통로까지 접어들었다.
뼈 더미가 허물어지는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장내를 울렸다.
머리가 부서져 허물어진 언데드들은 물론, 재조립되던 놈들까지도 잔해에 덮여 사라졌다.
"히익…! 히이익…!"
"앞만 보쇼. 앞만!"
필립과 미구엘은 압박감에 거의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지만.
'무한 동력이 따로 없네.'
이안은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슬슬 끝이 보였기 때문이다.
지름길로 들어서는 갈림길만 놓치지 않는다면, 흑마법사의 코앞까지 단숨에 들이닥칠 수 있으리라.
그 계획에 변수가 생긴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키히힛-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친 것이다.
잊고 있던 기억을 절로 되살아나게 만드는 섬뜩한 소리.
'아니 시발, 저건 또 왜 여기 있어?'
이안의 고개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득달같이 돌아갔다.
널찍한 석실의 천장에, 산발한 머리칼의 망령이 둥둥 떠 있었다.
뼈가 훤히 드러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저 망령은, 여기서 꽤 떨어진 호수에 사는 놈이었다.
남자는 홀려서 정기를 빨아먹고 여자는 호수에 가라앉혀 빙의체로 부리던, 호숫가의 망령.
저게 호수와는 관련도 없는 이곳에 와 있을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저 새끼도 권속이었던 거네.'
아예 소굴로 불러들였다 이거지.
앞을 가로막는 언데드들을 후려친 이안이 다시 망령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놈은 이미 사라진 뒤.
정수리 위에서 기척이 이어졌다.
크히힛-
"...!"
이안은 반사적으로 뛰어오르며 메이스를 휘둘렀다.
메이스는 정확히 놈을 후려쳤지만, 아무런 감촉도 전해지지 않았다.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 놈이니 당연했다.
그저 쫓아내려는 의도.
"이런 시부럴! 그건 또 뭐였소?!"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망령을 발견한 미구엘이 쉰 목소리로 외쳤다.
이안은 미간만 찌푸릴 뿐, 대꾸도 하지 않았다.
뒤에는 죽음의 찌꺼기. 앞에는 언데드의 물결. 위에는 망령까지.
별것 아닌 놈들이 한자리에 모이니, 이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 따로 노는 것도 아니었다.
크히힛-
저만치 앞쪽에 홀연히 나타난 망령이 웃음을 흘렸다.
산발한 머리카락에서 푸르스름한 마력이 안개처럼 번졌다.
언데드들의 안광에 푸른빛이 스며들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잠시 감전된 것처럼 몸을 떤 놈들이, 발작하듯 달려들었다.
더 빠르고 기민해진 움직임으로.
"염병을 떠네."
이안이 이를 갈며 달려드는 해골들을 후려쳤다.
이렇게 쳐 죽여도 찌꺼기의 덩치만 키워 줄 뿐이란 건 알지만, 다른 방법 따윈 없었다.
최대한 빨리 길을 뚫어서 이 빌어먹을 것들을 떨쳐낼 수밖에.
이안이 마력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크히힉-
저 뒤에서 망령의 웃음이 들렸다.
"...!"
뒤를 돌아본 이안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망령이 필립과 미구엘의 머리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신경이 탈 것처럼 곤두섰다.
주변의 모든 정보가 한순간에 인식됐다.
주위만 두리번대느라 이제야 망령의 존재를 눈치챈 두 놈.
얼마 없는 신성력을 쥐어짜며 찌꺼기의 전진을 늦추는 데에 여념이 없는 메브.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는 망령.
그리고 놈의 푹 파인 눈두덩이에 휘몰아치는 푸르스름한 마력까지.
단말마를 내지르려는 게 분명했다.
데미지는 물론, 지속시간이 긴 착란 상태까지 유발하던 스킬.
이안은 인지하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결론을 도출했다.
저걸 막지 못하면 필립과 미구엘은 죽는다.
"둘 다 귀 막아! 당장!"
이안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026화
콰르르르-
그의 주위로 새빨간 불덩이가 연달아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형태를 갖추기가 무섭게 앞으로 뿜어져 나갔다.
콰콰콰쾅! 끼아아악-!
불덩이 네 개가 연달아 망령에 부딪혀 폭발했다.
망령이 비명과 함께 증발했다.
콰광-!
빗나간 두 개는 찌꺼기를 맞췄다.
앞부분이 움푹 들어가며 뼛조각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흘러내린 파편들이 순식간에 그 자리를 메꿨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
필립과 미구엘은 눈을 치켜뜬 채로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악과 불신으로 가득한 눈빛.
"말도 안 돼…."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안이 마법사이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한 적 없었을 테니까.
"구경났냐? 정신 차려 새끼들아!"
태연하게 덧붙인 이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앞을 돌아보았다.
막상 마법을 쓰고 보니 속이 다 시원했기 때문이다.
"이왕 쓴 거… 제대로 쓰지 뭐."
읊조린 이안이 몸을 날렸다.
왼손 손아귀에 주먹만 한 화염구를 움켜쥔 채로.
콰직- 퍼엉!
몇 번째인지 모를 폭발이 일었다.
구울 기사가 파편이 되어 흩뿌려지고, 주위의 해골들이 우수수 튕겨 나갔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되는군.'
그 사이를 뚫고 돌진하는 이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메브는 흑마법사의 속삭임을 다시 떠올렸다.
적색 나부랭이. 어째서 그게 이안이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가.
단지 겉모습이 어울리지 않을 뿐.
식견과 지식. 안목과 통찰력. 신중하며 비밀이 많은 성격까지.
돌이켜 보면, 이안의 많은 의문스러운 부분이 마법사와 어울렸다.
물론 마법사는 온갖 음험한 소문과 비화를 몰고 다니는, 광기와 가장 인접한 존재들이었지만.
메브는 그런 뜬소문보다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것을 믿었다.
오히려 조금 안도하기까지 했다.
반드시 찾으리라 마음먹었던 적색 마법사가 이안이었다니.
'결국은 또 빚을 지게 되겠군.'
사실 빚은 지금도 지고 있었다.
품은 신성력을 다 소모할 각오까지 했건만.
이안 덕에 전진이 훨씬 빨라지면서, 찌꺼기를 막으려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놈이 전진하는 속도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빨랐지만.
그렇다고 달리는 걸 따라잡을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다.
키이… 키이잇-
이제 메브가 신경 써야 할 적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저 분노한 망령뿐이었다.
이안의 공격이 치명적이었는지, 놈은 한동안 일행의 근처로는 다가오지도 않았다.
웃음 대신 기분 나쁜 숨소리를 토해내며 주위를 맴돌 뿐.
하지만 메브는 놈이 곧 다시 공격해 오리라 확신했다.
계속 따라오고는 있었으니까.
그녀는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달리기만 했다.
망령이 방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근처까지 다가올 테니까.
그 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찾아왔다.
키이이잇-
정수리 위에서 울리는 숨소리.
곧장 쥐고 있던 검날을 놓은 메브는, 떨어지는 검의 자루를 낚아채며 그대로 길게 올려 베었다.
번쩍! 신성력이 푸른 선을 그렸다.
선이 망령을 세로로 관통했다.
망령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툭 떨어뜨렸다.
끼아아…
산발한 머리칼을 얹은 흉측한 두개골이 비명과 함께 쪼개지고, 이윽고 한 줌의 재가 되어 스러졌다.
"망령을 처리했다, 이안!"
메브가 소리쳤다.
좀 전부터 주위를 살피며 달리던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럼 이제부터 나를 시야에서 놓치지 마시오! 곧 갈림길이 나올 거요!"
"갈림길…? 알았다!"
대답한 메브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의아해한 건, 이안이 전에도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해서였다.
이 또한 마법사가 품은 수많은 신비 중 하나인가.
하지만 그녀의 새로운 의문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
이안이 후려친 구울 기사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이안은 자신이 죽인 구울을 돌아보지조차 않았지만.
그녀는 머리가 으깨져 널브러진 구울 기사를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설마….'
놈이 걸친 갑옷의 형태가 아주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왕국의 친위 기사들이 착용하는 것과 똑같이 생겼으니까.
이안이 계단 앞에서 주운 목걸이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애써 잊었던 불길한 상념들이 선명하게 고개를 들었다.
'설마….'
멈춰선 메브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떨리는 손길로 시신을 붙잡았다.
갑옷의 이음매 부분에 새겨진 사슴뿔 문양.
허겁지겁 시신을 뒤적인 그녀의 손아귀에, 이윽고 부러진 목패 하나가 들려 나왔다.
흔들리는 눈으로 거기 새겨진 이름을 확인한 메브가, 비로소 고개를 떨궜다.
버논이 아니었다.
"하… 하하."
안도인지 무엇인지 모를 한숨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그 순간.
품속에서 공명하던 정수가 문득 마력을 퍼뜨렸다.
신성력을 일으키려던 메브가 순간 멈칫했다.
흑마법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낯설지만 익숙한, 모순된 느낌이 드는 또 다른 누군가의 의식.
"...?!"
눈을 치켜뜬 메브의 고개가 좌측으로 돌아갔다.
수많은 언데드의 보랏빛 안광.
정수와 공명하는 무언가는 그 너머에 있었다.
그녀를 부르듯이.
"…경! 리우렐 경! 메브!"
마력 실린 이안의 외침이 메브의 정신을 간신히 일깨웠다.
눈을 깜빡인 메브는, 목소리가 들려온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널브러진 언데드의 잔해들.
그 위를 내달리는 필립과 미구엘.
그리고 그 너머의 통로 한복판, 눈을 부릅뜬 이안.
그의 외침이 이어졌다.
"조심하시오!"
"...!"
본능적으로 몸을 날린 메브가 바닥을 굴렀다.
촤르르르르-
그녀가 주저앉아 있던 자리로 뼈 무더기가 쏟아졌다.
구울 기사의 시신이 그 사이로 파묻혀 사라졌다.
어느새 죽음의 찌꺼기가 지척까지 다가온 것이다.
"나, 나리이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필립과 미구엘이, 바닥을 구르다시피 방향을 돌려 그녀 쪽으로 달려왔다.
연달아 땅을 구르며 메브는 숨을 헐떡였다.
충격을 받아서인지, 평소에는 한 몸 같던 갑옷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그런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운 건 필립이었다.
반대쪽 팔을 부축한 미구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또 부상이라도 당하신 건-"
쿠구구구-
익숙한 진동이 그의 목소리를 가렸다.
필립과 미구엘, 메브의 고개가 거의 동시에 진동의 근원지 쪽으로 돌아갔다.
이안이 선 통로 앞에 석벽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비로소 메브의 눈이 커졌다.
"이안-!"
이내 이안의 모습이 벽에 가려져 사라졌다.
홀연히 떠오른 검붉은 고대어.
"저런 미친, 염병할, 개 같은…!"
미구엘이 욕설을 토해내는 사이.
찌꺼기를 곁눈질하던 필립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나리! 이제 어떻게 할까요?"
굳어졌던 것도 잠시.
메브의 고개가 좌측으로 돌아갔다.
유일하게 남은 길.
"…따라오거라."
검을 으스러질 듯 움켜쥔 메브가, 이윽고 걸음을 내디뎠다.
이렇게 된 이상 갈 수밖에 없었다.
저 너머에 기다리는 게 무엇이건.
***
"뭘 봤길래 저런 거야…?"
앞을 가로막은 석벽을 응시하며, 이안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하필 갈림길 앞에서 멈춰 서다니.
영문 모를 상황이었지만, 이안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게다가 메브라면 필립과 미구엘을 데리고도 한동안은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늦기 전에 끝내면 되겠지."
이안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복도 너머, 낡아빠진 갑옷을 걸친 해골 기사 수십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혼자가 된 지금은, 저놈들의 숫자 따윈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솨아아- 타탓!
몸을 기울였던 이안이 예고도 없이 튀어 나갔다.
카앙-!
해골 기사 하나가 내리친 검을 메이스로 빗겨 막은 이안은, 미련 없이 자루를 놔버리며 내달렸다.
좌우로 줄지어 이어진 석관들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이안의 시선이 안치실 너머의 야트막한 단상 위에 꽂혔다.
한쪽 무릎을 꿇고 검을 땅에 꽂은 요정 기사의 석상.
'게임이랑 똑같이 생겼네.'
해골 기사들을 이리저리 피해 지나친 이안이 석상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에서 도약.
쩌억-
공중제비를 돈 이안이 석상이 내리꽂은 검의 무게추 부분을 짓밟으며 곡예하듯 착지했다.
한 박자 늦게 검이 단상 아래로 움푹 들어갔다.
철컥-! 쿠구구구-
단상이 뒤로 밀려나면서, 더 깊은 지하로 이어진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숨겨진 지름길이었다.
게임에선 흑마법사를 죽인 뒤에 출구로 사용했던 길.
달려오던 해골들이 우뚝 멈췄다.
고요하게 일렁이는 안광들.
들어오라 이거지?
이안은 보란 듯 미소 짓고는 계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계단은 직선으로 이어지다 꺾였다.
이안이 코너를 돌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 벽면이 사라졌다.
시야가 순식간에 트였다.
거대한 지하 동공.
'아겔 란의 국왕도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모르겠지.'
벽면을 따라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면서, 이안은 주위를 살폈다.
저 멀리까지 빽빽하게 이어진 주문 회로.
곳곳에 솟은 굵직한 기둥은, 거대한 신전을 고스란히 지하로 옮겨 놓은 것처럼 웅장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여긴 고대 요정들이 죽음의 신을 모시던 신전이었으니까.
주문 회로가 모이는 중심부에 높이 솟아 있는 제단이 그 증거였다.
제단 위에는 반으로 부서진 석상과 온갖 뼈로 만들어진 거대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유적을 타락시킨 장본인은, 바로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로브를 머리까지 덮어쓴 채.
흐르는 마력을 전신에 머금고서.
"기어코 여기까지 오다니…. 그 만용만큼은 칭찬해 주마, 적색 버러지야."
쇠를 가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보랏빛 안광을 줄기줄기 흘리면서, 흑마법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네 하찮은 잔재주가 통하리라 기대하지는…."
느긋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문득 끊겼다.
흑마법사의 안광이 흔들릴 찰나.
콰아아아아-
용의 숨결을 방불케 하는 불길이, 제단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콰르르르-
제단을 녹여 버릴 기세로 쏟아지던 불길이 한참 만에 잦아들었다.
자욱한 연기 사이, 왼손을 내뻗은 이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손아귀의 정수에서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번졌다.
"학습 능력이란 게 없나…."
겪어 보고도 주절대고 지랄이야.
이안이 비웃듯 읊조릴 찰나.
"이… 노오오옴!"
제단에 덮인 연기를 뚫고 보랏빛 안광이 터져 나왔다.
"감히 또 내 말을 자르다니!"
흑마법사가 연기를 뚫고 솟구쳤다.
입고 있던 로브가 너덜너덜해지면서, 놈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그때와 같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네놈의 조잡한 주문 따윈 더는 통하지 않을 테니!"
"말 많네. 되다 만 리치 주제에."
이안이 놈을 훑으며 빈정댔다.
얼굴은 물론 온몸이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졌고 어깨 위에 뼈로 만들어진 팔이 하나씩 더 돋아 있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의 기억보단 여러모로 초라했다.
게임에서의 놈은 뼈만 남은 데다 팔도 여섯 개였고, 이마 한복판에 커다란 정수까지 박혀 있었으니까.
"이… 버러지 같은 놈이!"
정곡을 찔린 듯 흑마법사가 격노했다.
제단 뒤편에서 보라색 마력이 번지더니, 그대로 흑마법사가 치켜든 마법 봉으로 빨려 들어갔다.
놈의 등 뒤로 거대한 악령이 뭉치기 시작했다.
사령 소환. 물리적 실체를 갖춘 악령 덩어리가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을 때, 이안은 이미 제단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네놈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철저하게 깨닫게 해 주마! 끝없는 고통은 그 후에 선사할지니!"
흑마법사가 마력이 맺힌 왼손을 치켜들었다.
퍼서석- 푸스스-
땅속에서 해골들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어 나왔다.
인간보다 더 크고 긴 골격.
시원 지하에 묻혀 있던 고대 요정들의 유골이었다.
순식간에 포위당한 형국이었지만.
이안의 눈빛은 여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 기억보다 약한 것 같은데. 변이가 덜 끝나서 그런가.'
게임 속 흑마법사는 날아다니는 데다 온갖 주문과 소환을 난사하고, 패턴도 까다로웠다.
하지만 그런 만큼 체력이 낮고 물리 공격에도 취약했다.
접근할 수만 있으면 의외로 쉽게 죽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여러모로 불완전한 지금은, 아마 더 쉬우리라.
"두렵나? 벌써 굳어 버리다니 애석하군. 공포는 이제 시작이거늘."
흑마법사가 마법 봉을 뻗었다.
장내의 모든 언데드가 이안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반대일걸? 새꺄."
이안의 눈동자가 다시금 붉게 달아올랐다.
손아귀의 정수가 회전하면서, 이안의 주위로 수많은 불덩어리가 동시에 피어올랐다.
춤추는 불꽃.
쓰기 쉽다는 이유로 별생각 없이 2레벨이나 배운 이 하위 적색 마법은, 정수로 증폭되자 불꽃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었다.
정확한 조준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조준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적이 모든 곳에 있었으니까.
콰과과과광-
달려들던 해골들이 불꽃에 부딪혀 터져나갔다.
후끈한 열기와 산산이 부서진 뼛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쉬학-!
그 사이로 이안이 솟구쳤다.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그를 보며, 흑마법사가 조소했다.
"통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그가 보랏빛 마력을 내뿜는 마법 봉을 길게 휘둘렀다.
마력의 궤적을 따라, 울부짖는 망령들이 맺힌 장벽이 피어올랐다.
끼아아아-
장벽에서 터져 나오는 귀곡성.
이안이 땅을 향해 화염구를 내던진 건 그 직후였다.
퍼엉-!
화염구는 얼마 뿜어져 나가지 않아 폭발했다.
그 반작용으로 연기에 휩싸인 이안의 몸이 허공에서 한 번 더 솟구쳤다.
"뭣…?!"
그것까지 예상하지는 못했는지, 흑마법사가 쇳소리를 냈다.
그사이 망령 장벽을 뛰어넘은 이안이 몸을 휘돌렸다.
잿빛이 아른거리는 눈동자.
바람을 전신에 두른 채 회전하던 그의 몸이, 일순간 화살처럼 흑마법사를 향해 쏘아졌다.
어느새 이안의 오른손에 들린 새로운 메이스가 흑마법사의 머리를 향해 뻗어나갔다.
네 개의 팔로 얼굴을 가린 흑마법사가 황급히 물러났지만, 이안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철퇴로 모여든 바람이 맹렬하게 회전했고.
콰지직-!
뼈로 만든 팔 두 개와 함께, 흑마법사의 한쪽 어깨가 통째로 박살 났다.
"키- 아아악-!"
흑마법사가 허공에서 활처럼 몸을 꺾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제단 위를 구르며 착지한 이안이, 혀를 차며 읊조렸다.
"빗나갔네. 씁."
#027화
역시 응용은 어렵다니까.
마법을 본래 용도와 다르게 사용하거나 서로 다른 속성의 마법을 섞어 쓰는 것은, 그가 망캐이기에 가능한 응용법이었다.
사실 망캐가 아니라면 연구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끝까지 살아남으려면, 계속 연구하고 시도할 필요가 있었다.
실패해도 괜찮을 때 특히 더.
한 번의 실수로도 목숨을 잃을 만한 시점이 됐을 때는, 연습할 기회조차 없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실패는 그리 위험하지 않았다.
"네 이노오옴…! 유물이 하나가 아니었구나! 방심을 유도하다니!"
자세를 추스른 흑마법사가 울부짖었다.
다른 속성의 마법일 거란 생각은 그 역시 전혀 하지 못한 모양.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들켰네."
흑마법사의 시선이 메이스로 향할 찰나, 이안이 다시 몸을 날렸다.
바람이 그를 힘껏 떠밀었다.
"쥐새끼다운… 짓이로구나!"
흑마법사가 하나 남은 팔을 치켜들었다.
용케도 마법 봉을 놓치지는 않은 채였다.
끼아아아-!
아까보다 훨씬 거대한 망령 장벽이 귀곡성을 흩뿌리며 펼쳐졌다.
이번엔 아예 주위 전체를 뒤덮은 형태.
역시 두 번은 안 통하나.
입맛을 다신 이안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무리 그라도 빈틈이 없는 장막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끼아악-!
장벽이 이안을 뚫고 지나가며 저주를 흩뿌렸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원한.
그의 정신을 오염시킬 수는 없었지만, 돌진을 막는 데는 충분했다.
이안이 그대로 추락하는 사이.
고오오오-
마법 봉을 치켜든 흑마법사의 전신에 보랏빛 마력이 휘몰아쳤다.
제단 뒤편에서 다시 한번 마력의 파장이 번졌다.
사방의 주문 회로가 번뜩이고, 이안을 올려다보던 언데드들이 감전된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 사이로 무사히 착지한 이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바로 2페이즈? 빨라서 좋네.'
촤르르르-
해골들이 조각조각 분해되어 흑마법사에게 빨려 들어갔다.
촤라락- 뼛조각들이 흑마법사의 전신에 끝도 없이 달라붙었다.
무수한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리치의 형상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놈의 약점 중 하나인 물리 방어력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방어력만 올라가는 건 아니었다.
"네 발버둥은 여기까지다, 적색 버러지야…. 이것이 공허의 심연에서 손에 넣은 권능이니."
공동을 웅웅 울리는 목소리.
무수한 두개골을 왕관처럼 두른 리치가, 거대해진 팔을 들었다.
"…전형적인 새끼 같으니라고."
그 손아귀에 뭉치는 사령의 덩어리를 바라보며, 이안이 피식댔다.
그의 눈동자에 붉은 마력이 휘몰아쳤다.
"죽음이 곧 축복이리란 깨달음을 내려주마."
이안이 마법을 완성하는 것보다, 리치가 손을 내리치는 게 빨랐다.
끼아아아아-
응축된 사령이 광선처럼 뿜어져 나갔다.
이안이 그대로 옆으로 내달렸다.
콰과과과과- 끼아아아악-
쏟아진 광선이 사방으로 사령의 잔재를 흩뿌리며 그를 따라왔다.
이안은 이를 악문 채 흑마법사의 주위를 돌았다.
빙글빙글 돌면서 조금씩 간격을 좁히는 건 게임에서의 전략이었다.
직선으로 달려가면 광선을 피할 수 없었고, 기둥 뒤로 숨으면 반격의 기회가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이 방식은 현실이 된 지금도 유효했다.
끼아아아-
한참 따라오던 광선이 잦아들었다.
사령의 잔재들이 천장과 벽면을 튕기며 수없이 날아들고, 흑마법사가 곧바로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나도 두 번은 안 당하거든.'
이안의 눈동자에 다시 붉은 마력이 몰아쳤다.
날아드는 사령의 잔재들은 굳이 피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화르르륵-
덕분에 이번에는 그의 마법이 더 빨리 완성됐다.
수십 개의 불꽃이 연달아 피어올라 리치를 향해 뻗어나갔다.
콰과과광-
놈의 거대한 머리와 어깨, 가슴팍에 마구잡이로 부딪힌 불덩이들이 폭발했다.
섬광과 자욱한 연기가 놈을 휘어 감았다.
"하찮은… 주문이군."
비웃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사령이 가득 맺힌 손아귀가 연기를 가르며 뻗어 나왔다.
끼아아아악-
사령 광선.
하지만 이안은 이미 거기 없었다.
처음부터 놈의 시야를 가리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마법을 펼치자마자 직선으로 내달린 것이다.
쩍, 텅 비어 버린 정수가 쪼개지며 손에서 떨어졌다.
개 아깝네, 시발.
혀를 찬 이안이 아공간에서 새로운 정수를 꺼냈다.
"쥐새끼 같은 짓만 골라 하는군!"
리치가 그제야 이안의 위치를 눈치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쏟아지던 광선이 빠른 속도로 따라붙었다.
이안이 놈의 발과 발 사이로 쑥 들어가 버린 건 그 직후였다.
"...?!"
리치의 안광이 흔들렸다.
그의 기형적인 팔은 다리 사이를 조준할 수 없을 만큼 컸고, 마법을 펼치는 동안에는 몸을 돌리는 정도밖에는 움직일 수 없었다.
치직- 치지직-
이안이 고등 마법을 완성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는 의미였다.
그의 주위로 푸른 빛이 번쩍였다.
그러쥔 손아귀 사이에서 전격이 줄기줄기 피어올랐다.
파치치치칫-
전격은 순식간에 거미줄처럼 빼곡하게 번져 나갔다.
손아귀를 넘어 팔뚝까지 번개를 휘감은 듯한 형상이 된 그때.
비로소 악령 광선이 잦아들었다.
둔탁한 움직임으로 한 걸음 물러난 리치가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해골에 표정이 있을 리 없건만.
그의 얼굴에 또렷하게 새겨진 감정은, 경악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회색…?! 유물이… 아니었다고?"
이안이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 그딴 게 중요하냐?"
"...?!"
그제야 리치의 안광이 출렁였지만.
이안은 이미 망설임 없이, 번개가 가득 맺힌 양손을 놈의 가랑이를 향해 뻗고 있었다.
손바닥 사이의 정수에서 시리도록 푸른 빛이 터져 나왔다.
꽈릉-!
굵은 벼락이 리치를 관통했다.
콰치치치칙-
눈부신 발광이 이어졌다.
시전 시간과 마력 소모량 때문에 거의 쓸 일이 없는 중위 회색 마법, 연쇄 번개.
하지만 그만큼 공격력이 높았고, 물리 방어력을 무시하는 부가 효과까지 있었다.
정수의 증폭까지 더해지면, 전신에 뼈 껍질을 두른 흑마법사라도 충분히 튀겨 버릴 수 있으리라.
파치치칙-
리치의 전신에 맺혀 한참을 번쩍이던 전격이, 이윽고 흩어졌다.
바들대던 리치가 굳어졌다.
거대한 눈구멍과 벌어진 턱 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른 것도 잠시.
파스스스-
놈의 전신이 가루가 되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이안이 황급히 물러났다.
하지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뼛가루를 피할 수는 없었다.
가루 더미에 파묻혔다가 솟아오른 이안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개 찝찝하네, 진짜.
얼굴만 대충 털어낸 그가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정수와 메이스를 아공간에 되돌린 그가, 검을 꺼내 들며 멈춰 섰다.
수북한 뼛가루 한복판.
흑마법사가 널브러져 있었다.
본래도 미라 같던 팔다리는 검게 타서 눌어붙었고, 눈은 익은 것처럼 하얗게 멀어 버린 채였다.
귀까지 먹지는 않았는지, 놈이 바들댔다.
"어떻게… 다른 색의 마법을…?"
입술 사이로 연기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안의 입가에 실소가 스쳤다.
"곧 뒈질 텐데 아직도 그딴 게 궁금하냐?"
"...."
흑마법사가 입을 뻐끔댔다.
놈의 비쩍 마른 얼굴에 비로소 공포가 번졌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진정한 불사자로 거듭날 수 있었을 텐데…. 태초의 진리가… 심연의 권능이 내 것이었거늘… 제기랄…."
몸의 뼛가루를 털며 애원인지 유언인지 모를 주절거림을 듣던 이안은, 이윽고 흑마법사의 등에 한쪽 발을 얹었다.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
그가 팔을 치켜들었다.
"넌 시간이 더 있어도 불사자가 되거나, 그놈의 진리라는 걸 깨닫지도 못했을 거다. 콘라우드."
"그럴 리가 없… 네, 네놈, 내 이름을 어떻게…?"
퍼석!
검이 콘라우드의 목을 쳤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잘려나간 그의 머리가 굴러떨어졌다.
몸을 숙인 이안이 놈이 사용하던 마법 봉을 주워든 그때였다.
푸스스스-
콘라우드의 머리에서 검 보랏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두 번져 나온 그건, 뒤틀리고 비대해진 흑마법사의 망령이었다.
"...?"
이건 없었던 일인데?
이안이 미간을 좁힌 순간, 또 다른 변화가 일었다.
허공에 쩍, 균열이 일더니 공간이 갈라지며 구멍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너머로 보랏빛이 일렁였다.
끄- 아아아아-
콘라우드의 영혼이 끌려 들어가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고통에 찬 비명.
진공청소기처럼 콘라우드의 영혼을 빨아들인 구멍은, 나타날 때만큼이나 한순간에 사라졌다.
"…뭐야, 저거."
이안이 눈을 끔뻑였다.
공간을 찢고 영혼을 삼키는 구멍이라니.
"공허… 인 건가?"
공허, 태초의 혼돈, 심연 따위는 타락자들이 달고 사는 말이었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은 마법 봉을 아공간에 넣으며 뼈 더미 아래로 내려갔다.
콘라우드의 수급.
영혼을 빨렸어도, 오염된 마력의 잔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증거로 써먹기엔 충분하겠지…."
준비해 둔 천 주머니에 머리를 넣은 이안이, 비로소 비틀대며 주저앉았다.
마력을 대량으로 소모한 여파가 뒤늦게 밀려들었다.
울렁거리는 속과 지끈거리는 머리.
정수로 마법을 몇 번만 더 썼더라면 마력 탈진 상태에 빠졌으리라.
"그나저나…."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이안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왜 안 꺼지지.'
주문 회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덤의 언데드들이 계속 움직이고 있으리란 의미였다.
게임에선 흑마법사를 죽이면 작동이 멈추면서, 언데드들까지 싹 다 쓰러졌었건만.
"혹시…."
이안의 시선이 제단으로 향했다.
콘라우드가 고위 마법을 쓸 때마다 번지던 마력의 파장을 떠올린 것이다.
또 쓸데없는 현실성 같은 게 생긴 건가.
'애초에 마법부터가 말도 안 되는 거라고….'
이안이 혀를 차며 일어섰다.
제단을 빙 돌아간 그는, 이윽고 제단 뒤편의 한복판에서 멈췄다.
제단의 옆면을 따라 새겨진 주문 회로가 모여, 원형의 빈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바닥이 충분히 들어갈 크기.
마력을 끌어올린 이안이 손을 가져다 댔다.
쿠르릉-
문양이 새겨진 벽면이 움푹 들어가면서, 제단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이 계단에 들어섰다.
벽면과 천장에 새겨진 마력 회로 덕에 어둡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과 계단 사이의 간이 공간이 나타났다.
작은 책장. 그리고 종이와 책이 쌓인 책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여간 마법사란 것들은.'
이안은 무심하게 책상을 훑었다.
마법사는 저마다의 연구와 탐구를 끝없이 이어가는 족속들이었다.
이안도 몇 번인가 다른 마법사의 연구 일지를 읽은 적이 있었다.
대부분 조현병 환자의 일기 같은 느낌이었지만.
'어쨌건 나름대로 도움 되는 정보도 섞여 있긴 했었지.'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가죽으로 제본된 두꺼운 책에서 멈췄다.
연구 일지.
일지를 챙긴 이안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주문 회로의 빛이 점점 더 밝아지는 가운데, 한 평 남짓한 넓이의 밀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문 회로는 밀실 중앙의 기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1미터 정도 높이의 기둥.
그 위에 축구공만 한 보라색 구체가 둥둥 떠 있었다.
'이게 정수가… 맞나?'
처음 보는 거대한 크기.
기둥으로 다가서면서 이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전해지는 느낌이 오염된 마력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순한 마력 같았고, 심지어 신성력 같기도 했다.
'어쨌든, 이게 동력원이긴 하겠지.'
기둥 앞에 멈춰 선 이안이 잠시 볼을 긁적였다.
'…부숴 버리긴 좀 아까운데.'
이안은 이내 자신의 저항력을 믿기로 했다.
전해지는 느낌이 타락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결정에 한몫했다.
손아귀에 마력을 응집시킨 이안이 구체로 손을 뻗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 손끝이 닿자, 구체 표면에 동심원이 번졌다.
이안의 손이 구체 내부로 쑥 빨려 들어간 건 그 직후였다.
"어…?"
눈을 치켜뜬 이안이 손을 빼려 한 다음 순간.
푸확-!
구체가 페인트 탄처럼 폭발하면서 그를 덮쳤다.
세상이 확 뒤집혔다.
그리고 암전.
#028화
'이게 대체 뭐야…?'
이안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불현듯 귀가 먹먹해졌다.
끝없이 추락하면서도 동시에 솟구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번졌다.
다음 순간, 별들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끝없이 펼쳐진 우주.
이안은 그 한복판으로 떨어지면서도 솟구치고 있었다.
이안은 지금 자신의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의식만이 우주 한복판에 떨어져, 엄청난 속도로 흘러갈 뿐.
온갖 행성들이 가까워졌다가, 다음 순간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황홀하고도 공포스러운 광경.
다큐멘터리나 영화에서 보았던 것들과 엄청나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현실감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뭐건 간에, 개 쩔긴 하네.'
이안은 시선을 돌리거나 눈을 감을 수도 없이, 그저 그 모든 것들을 마주 보았다.
저 멀리 반짝이던 별들이 형형색색의 선이 되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밀려났다.
이안은 자신이 점점 더, 끝도 없이 빨라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직선이 곡선이 되고, 지금 자신이 보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가던 한순간.
불현듯 모든 선이 사라졌다.
대신 이안의 시야를 채운 건, 소리 없이 일렁이는 빛의 고리였다.
암흑을 머금은, 거대한 빛의 고리.
이안은 그것이 예전에 영화에서 본 무언가와 몹시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블랙홀…?'
이걸 정말 그런 단순한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 것일까.
경탄을 끝맺을 틈도 없이, 그는 블랙홀의 고리 앞에 도달했다.
아무리 이안이라도 이런 순간까지 침착할 수는 없었다.
저 안에선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시야가 번쩍이고, 일렁이고, 다시 어두워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안은 눈이 부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법칙이 뒤집힌 세계.
다음 순간, 빛이 사라졌다.
대신 어둠이 내려앉았다.
새하얀 어둠.
어떤 거대한 존재의 눈동자였다.
그의 인지력으로는 형체를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 없는 무언가.
그때,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
전율. 뒤이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공포가 밀려들었다.
영원과도 같은 찰나의 순간.
모든 것이 점이 되어 멀어졌다.
시야가 다시 뒤집혔다.
"우웩…!"
처박히듯 바닥에 쓰러진 이안이 속을 게워냈다.
그의 전신에 맺힌 보라색 안개가 반짝이며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현실로 돌아왔으나, 이안은 여전히 공포에 잡아 먹혀 이성을 되찾지 못했다.
모든 감각이 뒤섞여 흘러내렸다.
전신이 발작하듯 떨리는 가운데, 이안은 상태 창을 열어 정신력 수치를 마구 올렸다.
본능적인 발악에 가까운 행동.
하지만 효과가 있었다.
발작이 가라앉고, 공포가 서서히 밀려났다.
감각이 제자리를 되찾았다.
칠흑 같은 어둠만큼은 여전했다.
주문 회로가 작동을 멈추면서, 광원이 완전히 사라진 탓이었다.
"퉤. 후우, 후우…."
이안은 위액 섞인 침을 뱉으며 숨을 골랐다.
상태 창을 보니 정신력 수치가 무려 아홉 개나 올라 있었다.
포인트를 대량 소모한 셈이었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쓰지 않았다면 미쳐 버렸을 테니까.
어차피 필요한 능력치이기도 했고.
상태 창을 닫은 이안의 시선이, 문득 다시 어둠 한복판에 고정됐다.
새로운 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건 또 뭐야…?'
처음 보는, 심지어 받은 적도 없는 서브 퀘스트가 완료되어 있었다.
혼돈의 조각.
태초의 혼돈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을 공허로 돌려보냈다는 게 본문의 내용이었다.
보상은 혼돈의 파편.
'그 블랙홀이 공허였다고?'
이안은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럼 그 존재는… 고대신인가.'
그렇게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타락자들이나 종종 언급하는 공허의 신 중 하나를 보게 될 줄이야.
'콘라우드도 이걸 봤을까? …하긴. 봤으면 살아 있을 리 없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어쨌건 보상은 있었다.
그것도 그의 몸속에.
이안은 이성이 돌아온 직후부터, 마력을 처음 느꼈을 때와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몸속 어딘가에 새로운 감각 기관이 돋아난 듯한 감각.
이안은 차분히 기관을 관조했다.
심상 어딘가에 멋대로 자리 잡은 주먹만 한 덩어리.
그 내부에서, 혼돈의 조각과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정순한 마력 같기도, 신성력 같기도 한 무언가.
'혼돈… 이거 설마, 혼돈력인가?'
이안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아귀가 딱 맞는 생각이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혼돈력은 공허의 에너지니까.
게임에서도 극소수의 타락자나 마족들이 사용하던 힘이었고.
플레이어가 혼돈력을 손에 넣으려면, 캐릭터를 타락시켜야 했다.
'…사도 퀘스트 때도 그러더니. 정말 모든 제약이 없어진 거군.'
이안은 이내 현상을 받아들였다.
원리나 근거 따윈 중요치 않았다.
혼돈력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잘 됐지 뭐, 가뜩이나 마력도 딸리는데. 연구만 잘해서 쓰면….'
생각을 이어가던 이안의 눈썹이 문득 꿈틀댔다.
익숙한 파장이 느껴져서였다.
"메브…?"
착각이 아니었다. 신성력, 그리고 오염된 마력이 만들어 내는 파장이 피부가 오싹할 정도로 전해졌다.
다 끝난 판에, 뭔데?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이안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날렸다.
빛 한 점 없는 암흑 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헤집으면서.
***
일행의 위치를 특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간 보스, 죽음의 기사.
주문 회로의 작동이 멈춘 지금, 이만한 전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놈은 그놈뿐이었으니까.
그의 생각은 정확했다.
"...."
단지 조금 늦었을 뿐.
울부짖는 듯한 기합 소리.
이어진 신성력과 마력의 충돌을 느끼며, 이안은 통로로 들어섰다.
그의 걸음이 이내 느려졌다.
기사의 방 한복판.
두 기사가 한데 들러붙은 채로 굳어있었기 때문이다.
승자와 패자는 명확했다.
메브의 검이 죽음의 기사의 갑주를 꿰뚫고, 놈의 등 뒤로 비죽 튀어나와 있었으니까.
죽음의 기사의 검은 메브의 한쪽 견갑에 박혀 있었다.
느낀 대로, 불과 몇 초 전에 결착을 맺은 모양.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어쨌거나 메브가 이겼으니까.
보아하니 주문 회로가 꺼지면서, 다시 신성력을 받을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막판에 다 망치는 줄 알았네….'
생각하며, 이안이 느긋하게 장내로 들어선 그때였다.
"아… 아아…."
굳어 있던 메브가 탄식했다.
"아… 아아아악-!"
탄식은 처절한 절규로 바뀌었다.
직후, 그녀의 전신에서 푸른 신성력이 폭발하듯 솟구쳐 치솟았다.
이안이 멍하니 굳어질 찰나.
콰아아아- 쩌엉!
타오르던 신성력은, 아예 빛의 기둥이 되어 메브를 집어삼켰다.
그 사이로 죽음의 기사를 움켜쥔 메브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안면 가리개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
대체 이게 뭔 상황이지.
눈을 끔뻑인 이안은, 이내 방의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필립과 미구엘이 거기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얼빠진 표정의 미구엘과 달리, 필립은 눈물을 글썽대고 있었다.
다가오는 이안을 발견한 미구엘이 눈을 치켜떴다.
"혀, 형씨…! 기다렸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놈은 또 왜 이러고."
넋 나간 필립을 보며 미간을 좁힌 이안이 물었다.
필립은 빛의 기둥을 망연자실하게 응시하며, 우리 불쌍한 나리… 따위의 말을 중얼대고 있었다.
미구엘이 우물댔다.
"그, 그게 말이오… 끄응."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전부."
"저, 나리가 죽인 기사 말이오."
"그래."
"그게… 나리의 동생이오."
"뭐…?"
이안이 눈을 부릅떴다.
털썩 주저앉은 필립이 말했다.
"용병 나리와 떨어진 후에, 저희는 반대쪽 길을 뚫었습니다. 위험했지만, 어떻게든 해냈죠. 나리께서 무리하셨습니다. 평정심을 잃으신 것처럼 보였죠. 전 그게 호프 나리와 떨어져서인 줄 알았습니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느끼고 계셨던 겁니다. 동생분께서 이곳에 있으시단 것을요."
"하…."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죽음의 기사가 버논이었다니.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정체였다.
"그래서."
"어쨌든 우린 여기까지 왔소. 언데드들이 물러나더군. 저 작자… 리우렐 가주가 명령한 거였소. 나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미구엘이 눈치껏 말을 받았다.
입맛을 다신 그가 빛의 기둥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나는 이제 누님보다 강해졌다고 했소. 누님을 죽일 수도 있을 만큼. 애초에 나리를 직접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경이 많이 놀라셨겠군."
"저 작자의 말에 대꾸도 못 하실 정도였소. 저자가 우릴 먼저 죽이겠다고 하니, 그제야 움직이시더군. 나 같아도 피붙이가 어둠에 물들어서 미쳐 버리면 바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거요."
버논은 미친 게 아닐 테지만.
생각하며,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물론 고위 언데드로 되살아나면서 정신이 오염되긴 했으리라.
하지만 아예 없던 생각을 하게 만들지는 못할 터였다.
가지고 있던 생각을 뒤틀거나 증폭시킬 뿐.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아예 다른 인격이 되긴 하겠지만.
버논이 언데드가 된 시간은, 그러기엔 너무 짧았다.
"어쨌든, 그렇게 싸움이 시작됐소. 우리 나리께서 밀리셨지. 충격도 받으셨고 신성력도 거의 없으셨으니까. 가주 저 작자는 나리를 조롱했소.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실력을 증명하려는 애송이처럼 굴었소. 그러다가…."
미구엘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저 작자가 갑자기 그러더군. 자신의 주인이 죽었다고. 그때 우리도 알게 됐소. 형씨가 흑마법사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는 걸 말이오. 그러면서 저자가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뜸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자신을 구속하던 존재가 사라졌으니, 세상으로 나가겠다 했소. 이 빌어먹을 왕국부터 불태울 거라더군. 모든 것들의 생명을 취해서, 더 강해지겠다고 말이오. 저 검은 벽 너머의 마족들처럼. 자신의 영지를 만들겠다고."
그 주인에 그 하수인이군.
이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야말로 헛된 꿈이었다.
분명 버논은 다른 타락자의 꼭두각시가 되었으리라.
"그래서 경이 결단을 내리셨군."
"아니오. 나리는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으셨소. 정화할 수 있다고, 저 작자를 설득하려 했지."
미구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소. 나리의 온몸에서 신성력이 샘솟더군. 나리도 당황하신 것처럼 보였소. 단죄의 여신께서 화가 단단히 나신 거요. 그러실 만하지. 아끼는 사도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돌아왔으니."
"이런…."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차라리 메브가 자의로 버논을 죽인 것이길 바랐건만.
"저 미친 작자는 오히려 즐거워했소. 그러면서 진심으로 나리를 죽이려 했소. 전력을 다하고 싶었던 건지…. 어쨌든, 그렇게 진짜 싸움이 시작된 거요. 나리께선 거의 울부짖으셨소. 끝까지 죽이고 싶진 않으신 것 같았는데…."
미구엘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마지막엔, 저 작자가 나리의 검에 몸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뭔진 모르겠소만. 어쨌든… 그리고…."
미구엘이 빛의 기둥과 이안을 번갈아 턱짓했다.
"저렇게 되셨고, 형씨가 온 거요."
"…그랬군."
이안은 짧게 혀를 찼다.
동생을 찾지 못하면 미친 학살자가 되고, 찾으면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하는 운명이라니.
이 세계가 게임이었을 때는 이런 비극적인 부분들이 재미있었지만.
현실이 된 지금까지도 즐길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세계라는 생각이 들 뿐.
그때.
푸스스…
마침내 빛의 기둥이 잦아들었다.
메브의 몸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그녀의 품에 안긴 죽음의 기사, 버논의 시신도 마찬가지였다.
전신에 흐릿한 신성력을 머금은 채, 메브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길이 버논의 찌그러진 투구를 훑었다.
철컥. 안면 가리개가 떨어지고, 버논의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의 한쪽에 뼈가 드러난, 언데드 특유의 변이된 몰골.
하지만 메브는 애틋하기까지 한 손길로 그 얼굴을 쓰다듬었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메브가 다가오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안면 가리개 너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의뢰는 완수되었다, 이안. 감사를 표하마. 네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뜻밖에도 아주 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더 함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여기서부터는 나 홀로 해나갈 생각이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멈춰 선 이안이 물었다.
잠시 침묵한 메브가 말했다.
"내 동생은 배덕자들에게 죽임당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강제로 되살아나 부려지기까지 했지. 그로 인해 이 아이의 영혼은 타락했고… 끝내, 구원조차 받지 못했다."
그녀가 버논을 돌아보았다.
"나는 여신께 간청하였다. 이 아이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라고. 하지만 응답하지 않으셨다. 당연하다. 여신은 죄를 심판하는 분이시지, 구원하는 분이 아니시니까."
그녀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일렁였다.
"…하지만 내가 복수를 바란다면, 응답을 주시겠지."
"...."
이안의 눈이 검게 가라앉는 가운데, 메브가 혼잣말하듯 내뱉었다.
"나는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든 자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을 섬기는 하수인들 역시."
"그러니까…."
비로소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 죽여 버릴 거란 말씀이오?"
메브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게 내가 원하는 복수다, 이안."
이윽고 완전히 일어섰을 때, 그녀의 전신은 핏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왕국의 타락자와 하수인을 찾아내,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복수의 사도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내가 버논에게 그리했듯. 단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전부."
"...."
슬쩍 눈을 감은 이안이, 피로가 묻어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허리춤의 장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눈을 떠 메브를 마주 본 그가, 고저 없는 말투로 내뱉었다.
"그렇게는 안 되겠소."
#029화
순간 굳어졌던 메브가 물었다.
"안 되겠다니?"
"경과 나 사이엔, 아직 의뢰가 남아 있잖소."
"그 의뢰를 취소하겠다는 뜻이다, 이안."
이안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의뢰인의 사정 때문에 받은 의뢰를 취소한 적이 없소. 의뢰를 받은 이상, 내 알 바 아니기 때문이지."
메브를 똑바로 마주 보며, 그가 덧붙였다.
"일어난 일은 유감이오. 하지만 예외를 둘 수는 없소."
"...."
메브의 신성력이 흔들렸다.
이안이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모양.
필립과 미구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거나 보수를 떼먹은 의뢰인을 살려 보낸 적도 없소. 그러니까 경이 계약을 파기하신다면…."
이안이 검을 고쳐 쥐었다.
"나와 싸우셔야 할 거요. 한 명이 죽을 때까지."
"그런…."
"어려우실 것도 없잖소? 경의 말씀대로면 수많은 이들을 죽이게 되실 텐데. 거기 나 하나 추가된들 뭐가 대수겠소. 물론…."
이안의 시선이 메브를 훑었다.
깨진 견갑. 지쳐서 떨리는 손끝.
"경이 죽게 되실 수도 있겠지."
"...."
신성력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안면 가리개 너머의 눈에 분노와 실망이 뒤섞인 살의가 번져나갔다.
이안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두, 두 분, 우선 진정을-"
허둥지둥 끼어들던 필립의 입을, 미구엘이 황급히 틀어막았다.
그가 버둥대는 필립에게 제발 닥치라고 속삭이며 물러나는 사이.
메브가 버논의 가슴에 박힌 자신의 검을 움켜쥐었다.
검이 천천히 뽑혀 나왔다.
"나는 오늘 이미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그녀가 이안을 다시 마주 보았다.
"…한 명을 더 잃고 싶진 않군."
신성력이 사그라들었다.
메브가 검을 회수했다.
바짝 긴장했던 필립과 미구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무너졌지만.
이안은 미동도 하지 않고 물었다.
"취소하지 않으시겠다는 거요?"
"그래. 우리의 계약은 유효하다. 하지만… 내 복수 역시 그렇다."
"경의 복수를 말릴 생각은 없소."
비로소 검을 늘어뜨리며, 이안이 덧붙였다.
"성공하실지는 모르겠소만."
"…내 방식이 틀렸다는 말이냐? 아니면, 혼자서는 힘들다는 뜻인가?"
이안은 그녀의 방식이 얼마나 추상적인지, 그리고 그걸 택한 그녀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둘 다라고 하겠소."
하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잠시 굳어졌던 메브가 이윽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철컹, 안면 가리개가 올라갔다.
여기사의 슬픔과 피로에 찌든 얼굴이 드러났다.
"…네가 내 복수를 돕는다면?"
"그럼 얘기가 달라지겠지."
이안이 검을 회수했다.
일행을 차례로 돌아본 그가, 이윽고 몸을 돌렸다.
"나갑시다. 이 썩은 내 나는 지하에서 할 얘긴 아닌 것 같으니."
물론 그 전에, 먼저 정리해야 할 부분들도 남아 있었다.
***
어느새 한밤중이었다.
미구엘은 지하 무덤의 출입구 앞에 모닥불을 피웠다.
흑마법사가 사라지면서, 역설적이게도 이곳이 밤을 보내기에 가장 안전한 공간이 되었다.
"대단하셨소, 형씨."
나뭇가지에 꿴 육포를 불 옆에 늘어놓은 미구엘이 이안을 돌아봤다.
쉬고 있던 이안이 입만 달싹였다.
"뭔 소리냐?"
"나리를 막으신 것 말이오."
저만치, 버논의 시신을 정돈하는 둘을 돌아본 미구엘이 목소리를 낮췄다.
"나리께서 아무리 눈이 돌았어도, 형씨까지 죽이려 들진 않으시리란 걸 알고 그러신 거잖소."
"아닌데?"
"아니긴 무슨. 미친 게 아니고서야, 그 살벌한 상황에서 진짜로…."
이안의 눈을 본 미구엘이 순간 입을 뻐끔댔다.
"…진심이셨군. 그러실 수 있지."
"예외라는 건, 두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거야."
죽일 생각까진 아니었지만.
이안은 뒷말을 삼켰다.
사실 그는, 팔 하나 정도는 날려 버려서라도 메브를 굴복시킬 생각이었다.
그녀가 복수의 사도가 되는 건 막지 못했지만.
미쳐 날뛰다가 개죽음당하는 꼴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메브가 먼저 검을 거둔 건 그로서도 의외였다.
분명 넘실거리는 증오와 광기를 느꼈고, 그걸 억누르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뭐가 한도 끝도 없으십니까?"
그때 필립이 옆에 앉았다.
"몰라도 되니까 이거나 드쇼."
미구엘이 육포를 건네는 사이, 메브가 이안의 건너편에 앉았다.
분위기가 순간 어색해졌다.
필립과 미구엘이 시선을 돌리며 육포만 질겅대는 가운데.
"괜찮으시겠소?"
이안이 침묵을 깼다.
메브가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말이냐?"
"복수의 사도가 되셨잖소. 많은 것이 달라지셨을 것 같소만."
"…그래."
메브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여신께선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만 신성을 내려 주시겠지."
극단적인 제약.
하지만 그런 만큼, 복수에 있어서만큼은 전보다 더 강대한 힘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으리라.
'단죄의 사도로서 지켜야 할 제약도 사라졌을 테고. …정말 복수를 위해선 뭐든 할 수 있게 된 거군.'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손으로 흑마법사를 죽이지 못한 것만큼은, 평생의 후회로 남겠지….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대의와 복수를 모두 저버렸으니."
자조적으로 읊조린 메브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놈과의 전투는 어떻게 된 거냐?"
"평소랑 같았소. 싸웠고, 죽였지."
이안이 옆에 내려놨던 천 주머니를 그녀에게 던졌다.
"놈의 수급이오. 가지고 돌아가시면 될 거요."
"...."
메브가 주머니를 열어, 안에 든 콘라우드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여러 감정이 오가는 눈빛.
눈동자만 굴리던 필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래서, 그… 마법으로… 죽이신 겁니까?"
왜 이 말이 안 나오나 했다.
이안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그런 셈이지."
"…필립. 내가 댁을 생각해서 하는 조언인데 말이오."
혀를 찬 미구엘이 끼어들었다.
"댁은 눈치를 좀 키울 필요가 있소. 아니면 말하기 전에 생각이란 걸 좀 하든가."
"뭐라고요…?"
"형씨가 왜 마법을 숨겼겠소? 알리고 싶지 않아서겠지? 그걸 우리를 살리려고 드러냈으면, 질문이 아니라 감사를 표해야 한다 이거요. 모르는 척도 해 주고. 눈치껏."
"...."
말문이 막힌 표정이 된 필립이, 이윽고 이안을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나리.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나리의 비밀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이는 그때, 메브가 천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의뢰가 완료되었으니, 보수를 지불하는 게 순서겠지."
그녀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흑마법사를 죽이면 추가 보수를 받기로 했었지. 무엇을 원하느냐?"
"흐음…."
이안은 턱을 긁적였다.
본래는 흑마법사를 죽이고 얻은 전리품을 다 요구할 생각이었는데.
메브가 족족 양보해 댄 덕에, 막상 더 요구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 받을 수는 없는 노릇.
이내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서 주시오. 합당한 것으로."
"합당이라…."
잠시 고민한 메브가 일어섰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멘 검을 검집째로 떼어 냈다.
"그럼 이 검을 받아 주겠느냐?"
필립과 미구엘은 물론, 이안까지도 순간 눈을 치켜떴다.
필립이 더듬댔다.
"나리, 그건 제국 강철로 만든 검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걸맞은 보상이 되겠지."
메브가 검을 내밀었다.
이걸 줄 줄이야.
그녀의 배포에 감탄하며, 이안은 사양하지 않고 검을 받아들었다.
이 검은 게임에선, 그녀를 죽여야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이었다.
복수자의 검.
'단죄의 검이라….'
하지만 지금은 이름뿐만 아니라 능력치도 달랐다.
그때는 부서지기 직전인 데다 수리도 불가능했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페널티도 없었다.
무엇보다, 게임에선 본 적 없던 권능까지 깃들어 있었다.
2레벨의 단죄의 일격.
24시간의 쿨타임이 있긴 했지만, 아무런 대가 없이 쓸 수 있었다.
유일 등급의 검이지만, 사실상 성물에 가까운 것이다.
게임에서 이런 게 없었던 건, 아마 무고한 자들의 피를 잔뜩 머금으면서 신성을 잃었기 때문이리라.
"들었다시피 제국 강철로 만들었고, 나와 오래 함께한 검이다. 이름난 명검은 아니지만, 도움이 될 거다."
"…이 검은 명검이 맞소."
자루를 쥔 이안이 가볍게 손목을 휘둘렀다.
좋은 균형감.
하지만 보기보다 훨씬 무거웠다.
그의 근력으로는 메브처럼 가볍게 휘둘러 대진 못하리라.
'최대한 적응해 보고, 정 안 되면 힘을 두어 개까진 더 찍지 뭐.'
가뜩이나 쓰는 무기마다 족족 부러뜨리는데.
이만한 명검을 오래 쓸 수 있다면, 그 정도 지출은 감수할 수 있었다.
이안이 계속 검을 관찰하는 사이.
메브가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네게도 합당한 보상을 더 지급할 것이다, 미구엘."
"저, 정말이십니까 나으리?!"
"대신, 왕성까지 동행해 다오."
"엥…? 왕성까지요?"
눈을 치켜떴던 미구엘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네게도 추가로 의뢰할 것이 있다. 네가, 이곳에서의 일을 폐하께 증언할 공증인이 되어 주었으면 해."
"공증…? 그, 증거가 이미 다 있지 않습니까?"
왕과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운 듯, 미구엘이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메브가 고개를 저었다.
"폐하 곁에는 가신들이 있지. 그들 중에는 배덕자들이 섞여 있을 것이다. 그들이 반박하지 못하게 하려면, 증거뿐만 아니라 증인도 필요해. 가능하다면 많이."
"그럼 이안 형씨는…."
"나는 오른델로 간다."
"아, 그랬었지… 염병…."
앓는 소리를 낸 미구엘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거, 없던 일을 지어내는 것도 아니고. 함께 가겠습니다."
"고맙군. 다소 위험한 순간들이 있더라도 염려치 마라. 너는 내가 지킬 것이니."
"위, 위험…. 에이, 뭐. 아무리 그래도 언데드가 득시글대는 무덤만 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새끼, 배포가 좀 커졌네.
검을 허리에 찬 이안이 피식대는 가운데, 메브가 이번에는 필립을 돌아보았다.
"네게도 부탁이 있다, 필립."
"예, 나리. 말씀만 하십시오."
"너는 이안과 함께 가거라."
"예…?"
필립이 황당한 듯 되물었다.
이안의 미간도 좁아지는 가운데, 메브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리 의뢰라고는 하나, 귀중한… 증인이자 용병인 이안을 홀로 보낼 수는 없다. 그러니 네가 이안을 보좌하고, 이안이 겪을 일의 공증인이 되어 주었으면 해."
"하, 하지만 나리. 저는 나리를 모셔야 하는데요."
"미구엘이 있잖느냐. 내 종자가 되어 줄 수 있겠느냐, 미구엘?"
"물론입니다, 나리."
미구엘이 실실대며 말했다.
필립이 말문이 막힌 듯 탄식했다.
그런 그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이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경의 뜻은 알겠소만. 이번 의뢰는 위험할 수밖에 없소. 이 녀석이 죽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소?"
"...!"
필립이 눈을 치켜뜨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은 어엿한 종자이며 전사다. 그만한 각오는 언제나 되어 있겠지."
"그런 일이 생겨도 원망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으로 알아듣겠소."
"나리…!"
이안이 피식하는 가운데, 필립이 다시 메브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엄하게 덧붙였다.
"이안과의 여정에서 배울 것이 아주 많을 것이다, 필립. 성실히 모시고 많이 배우도록 하거라."
"…예."
필립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내키지 않는 표정.
나랑 둘만 남게 될 텐데 어쩌려고 저러지. 목숨이 두 개인가.
내심 코웃음 치는 이안을, 메브가 다시 바라보았다.
"이 순간부터 너는 나의 대행자다, 이안. 고대수 사건의 전모를 확실히 파헤쳐 주길 바란다. 그리고 살아서 돌아와다오."
"내 걱정은 마시오. 걱정하셔야 할 것은 경 자신이오."
이안이 언제 풀어졌었냐는 듯 냉정해진 얼굴로 말했다.
"누군가를 죽이지도, 속내를 드러내지도 마시오. 복수를 이루고자 한다면 신중해지셔야 할 거요. …적어도 내가 돌아올 때까진."
메브가 속내를 들킨 것처럼 아랫입술을 깨무는 가운데, 이안이 덧붙였다.
"살아 있으셔야, 내가 알아낸 정보의 값을 치르실 수 있지 않겠소?"
이윽고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하지. 네가 오기 전까지 분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중요한 말씀은 이제 다 나누신 것 아니오?"
그런 분위기를 바꾼 건, 뜻밖에도 미구엘이었다.
"내일이면 한동안 보지 못할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그가 짐가방에서 천에 꽁꽁 싸인 통을 꺼냈다.
"어떠십니까?"
술통이었다.
그 난리를 겪고도 저게 깨지지 않은 건 둘째치고, 던전을 앞두고도 술을 챙겨온 미구엘의 정신머리에도 기가 찰 지경이었지만.
이안은 핀잔을 주는 대신, 메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즐기진 않지만… 오늘은 마시고 싶군."
"잘 생각하셨습니다! 함께 사선을 넘었는데, 술잔도 나누지 않고 헤어질 수는 없지요."
일행은 충분히 취해 잠들 때까지 술을 나눠 마셨다.
더는 무거운 얘기를 꺼내는 일 없이, 시시껄렁한 농담과 무용담을 주고받으면서.
#030화
말과 마차는 기적적으로 무사했다.
버논의 시신을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짐 마차는 메브와 미구엘이 몰고 가기로 했다.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가 짐 마차에 앉은 모습은 전혀 멋지지 않았지만, 메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일행은 무덤 숲을 나와 갈림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작별은 담백했다.
"아겔 란에서 기다리마, 이안."
"또 뵙겠소."
인사는 그게 전부였다.
이안과 메브는 각각 오른델과 아겔 란 방향으로 갈라졌다.
마차가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를 힐끔대던 필립이 말했다.
"미구엘이 과연 나리를 잘 모실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이안이 피식댔다.
"네 걱정은 안 되고?"
"물론이죠. 나리께서 부탁하셔서만이 아니라, 제게 부여된 임무인 이상 성심을 다할 겁니다."
"경을 모실 때와는 여러모로 다를 거다."
"그게 나리께서 제가 경험하길 바라시는 부분이겠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그래,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말을 몰았다.
한동안은 성기사 덕에 편했지만.
이제 다시, 암흑시대의 본모습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밤. 어둠이 또다시 세상을 덮었다.
이안이 횃불을 켜지 못하게 한 까닭에, 필립이 점점 말의 옆구리로 바짝 붙었다.
"그래도… 횃불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안 괜찮아. 어젯밤 잊었냐?"
이안이 콧방귀를 뀌며 일축했다.
일행이 많을 때야 편하게 다녔지.
단둘인 지금 횃불을 켠다는 건, 걸어 다니는 전광판이 되겠다는 의미였다.
굶주린 마물들이 환장하는.
물론 그들이 아겔 란의 마물에게 당할 만큼 약하진 않았지만.
귀찮고 피곤한 일은, 아예 만들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어제만 해도, 모닥불을 보고 찾아온 고블린 몇 마리 덕에 잠을 설치지 않았던가.
"그렇게 어둡지도 않은데, 엄살 부리지 말고 노숙할 자리나 잘 찾아봐."
게다가 이안이 볼 땐, 이 정도면 다닐 만한 어둠이었다.
"그렇게 어둡지도 않다고요…?"
필립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달조차 제대로 뜨지 않은 밤.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전 주위가 거의 보이지도 않습니다."
"...?"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주위를 훑던 그가 이윽고 턱을 긁적였다.
'혼돈력 덕분인가…?'
마력의 도움 없이도 시야가 유독 선명하긴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횃불을 켜게 할 생각은 없었다.
"걷기나 해라. 이참에 어둠이랑 좀 친해지면 되겠네."
"…예."
침묵의 전진이 이어졌다.
때때로 느껴지는 시선과 바람 소리에 간헐적으로 움찔대던 필립이, 문득 눈을 치켜떴다.
"나리. 저기, 보이십니까?"
그가 어둠 너머를 가리켰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규칙적으로 번지는 빛.
나무와 풀숲 사이에, 모닥불을 피운 이들이 있었다.
이안은 불빛 사이로 보이는 그들의 형체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성인 남자, 다섯.
"가 볼까요? 저들과 함께 보내면, 밤이 좀 편하지 않겠습니까?"
필립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글쎄… 하고 중얼거리며 턱을 긁적인 이안이 그를 내려다봤다.
"네가 원한다면. 가 보지 뭐."
"잘 생각하셨습니다!"
혹시라도 맘을 바꿀까, 필립이 걸음을 재촉했다.
모닥불이 점점 가까워지던 순간.
"멈춰!"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나무에 몸을 가린 두 사내가 쇠뇌를 겨누고 있었다.
이안이 보기엔 얼토당토않은 수준의 오조준이었지만, 필립은 화들짝 몸을 숙였다.
"저흰 지나가던 여행객입니다!"
"그래서?"
"함께 밤을 보낼까 하는데. 합류해도 괜찮겠습니까?"
쇠뇌를 둔 두 사내의 시선이 모닥불 쪽으로 향했다.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술을 홀짝이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다가오시오."
이안에게 뿌듯하게 웃어 보인 필립이 모닥불로 다가갔다.
사내들이 가까워지자, 비로소 필립의 얼굴에도 긴장이 서렸다.
쇠뇌를 겨눈 둘 뿐만 아니라, 다섯 모두가 무장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대장으로 보이는 이는 한쪽 눈이 하얗게 멀어 있기까지 했다.
"보통 여행객이 아니시군. 앉으시오. 자리에 여유가 있으니."
이안과 필립을 번갈아 본 애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말에서 내린 이안이 터덜터덜 그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신세 좀 지겠소."
"자리만 내드리는 건데, 별말씀을. 보아하니 용병인 모양이오."
"댁들도 그래 보이는군."
이안이 모닥불 옆에 앉았다.
애꾸가 웃음 지었다.
"이 시간에 노숙하는 이들이야, 대부분 우리처럼 칼 밥 먹고 사는 부류들이지 않겠소?"
말을 나무에 묶어 둔 필립이 이안의 옆에 앉았다.
애꾸의 호의적인 반응에 마음이 좀 놓였는지, 방패와 검을 풀어 허벅지에 기대 놓았다.
"덕분에 오늘 밤은 좀 편히 자겠군요. 감사의 의미로 먹을 것을 좀 나누겠습니다."
"거참 반가운 일이군. 잘 먹겠소."
애꾸뿐 아니라, 다른 용병들도 홀짝이던 잔을 들어 감사를 표했다.
그들을 슥 돌아본 이안이 말했다.
"힘든 의뢰였던 모양이오."
"눈썰미가 좋으시군. 맞소."
애꾸가 웃었다.
필립도 그제야 그의 팔에 감긴 붕대를 확인했다. 다른 이들도 어깨나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엄청난 마물이었던 모양입니다."
"지랄 맞았지. 루 사드에서 들었던 얘기랑은 딴판이었소."
"국경을 두 개나 넘어오셨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보상이 짭짤한 게 촌구석까지 오가야 해서 그런 거겠지 했는데. 염병, 낮에 기습했는데도 부하를 셋이나 잃고 겨우 잡았소. 돈값을 하는 놈이었단 얘기지."
어깨를 으쓱인 애꾸가 덧붙였다.
"어쨌건 머리가 줄었으니, 우린 돌아가면 돈방석에 앉을 거요."
용병들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들 중 한 명이 걸터앉은 상자가 문득 들썩였다.
신음 같기도, 울음 같기도 한 희미한 소리가 그 안에서 번졌다.
필립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생포하셨나 보군."
"그게 요구 조건이었소. 저것도 고용주한테 받은 봉인함이오."
대답한 애꾸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댁은? 의뢰를 해결하고 돌아가는 길이셨소?"
"뭐, 그런 셈이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필립이 말했다.
"무덤 숲에서 오는 길입니다."
"무덤 숲…?"
"아, 모르시겠군요. 안개가 잔뜩 낀 숲입니다. 거기서… 음, 마물을 죽였죠."
"둘이서? 실력이 대단하신 모양이군. 하긴…."
애꾸가 이안의 허리춤을 곁눈질했다.
"차고 다니시는 검만 해도 범상치 않소."
"당연하죠. 이 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떠들려던 필립이, 이안의 서늘한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거둔 이안이 말했다.
"의뢰 보수로 받은 거요."
"호오… 그러시군. 알겠소. 이것도 인연인데, 한잔합시다."
애꾸가 부하에게 턱짓했다.
나무잔을 두 개 꺼낸 그가 술을 따라서 들고 왔다.
잔을 받아든 이안이 한 모금을 마셨다.
"좋군."
"괜찮을 거요. 우리가 딴 건 몰라도, 술에는 돈을 안 아끼거든."
용병들이 잔을 들며 웃음 지었다.
육포를 불 옆에 늘어놓은 필립도 잔을 집었다.
이안이 손을 까딱인 건 그때였다.
"잔 이리 가져와."
"예…?"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앞에 놔."
"…예."
필립이 시무룩하게 잔을 이안 앞에 내려놨다.
애꾸가 웃었다.
"부하 대접이 박하시군."
"부하는 무슨. 배울 게 많은 애송이요."
벌컥벌컥,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그가 필립의 잔을 들었다.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놈이지."
"호오. 기본이라면 무슨?"
"뭐, 간단한 것들이오. 낯선 자가 주는 음식은 받아먹지 말라던가."
"...."
애꾸의 눈매가 꿈틀거리는 가운데.
아무렇지도 않게 한 모금을 더 마신 이안이 입을 열었다.
"필립. 정면을 봐라."
이게 뭔 소린가 하는 표정이던 필립이 반사적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거기 보이는 둘은 네가 상대해."
"예…?"
필립의 고개가 기울어지는 가운데.
사내들의 눈빛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잠깐 굳었던 애꾸의 얼굴에, 이윽고 웃음이 번졌다.
"둘? 으하하…. 둘만? 댁이 나머질 상대하시고?"
"그래."
애꾸를 따라 사내들도 킬킬대는 웃음을 흘렸다.
"거참 재미있는 농담이군."
"왜. 못 할 것 같나?"
"당연하지."
"내가 독을 먹어서?"
애꾸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제야 필립의 얼굴에도 경악이 번졌다.
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애꾸를 돌아보았다.
"그럼 내가 왜 아직도 멀쩡한지를 궁금해해야 하지 않을까?"
"약 기운이 덜 돌았나 보지. 댁이 먹은 건 코끼리도 기절시키는 독이거든."
"코끼리를 실제로 본 적은 있냐?"
"네놈은 봤고? 푸흐… 흐…?"
애꾸의 웃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이 지나치게 고요했기 때문이다.
경험상, 지금쯤 속을 게워내거나 억지로 견디면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어야 했다.
이윽고 그의 미소가 굳어질 찰나.
푸확-!
벼락같이 달려든 이안이 왼손을 올려쳤다.
거의 뽑을 일 없던 단검이 애꾸의 볼과 눈, 이마로 이어지는 붉은 호선을 그려냈다.
"아악-! 내 눈!"
이제는 장님이 된 애꾸가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눈을 치켜뜬 부하들이 뒤늦게 잔을 집어 던지며 일어섰지만.
이미 이안은 올려친 단도를 그대로 내던지고 있었다.
푸욱-!
"아악!"
한 놈의 팔뚝에 단도가 깊숙이 박혔다.
"이, 이런 시발…! 죽여!"
"뒈져라!"
남은 세 놈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공교롭게도 이안이 지목한 둘은 필립에게 달려갔다.
약해 보이는 놈부터 제거하리란 심산일 터.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놈을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도약한 놈이 검을 힘껏 내리쳤다.
이안이 단죄의 검을 뽑았다.
쩌엉-!
단죄의 검과 맞부딪힌 상대의 검이 그대로 부러졌다.
"어…?"
놈이 얼빠진 표정을 지을 찰나.
콰직!
단죄의 검이 놈의 목덜미부터 가슴팍까지 깊이 박혀 들었다.
갈라진 몸에서 한 박자 늦게 피가 솟았다.
이안은 피거품을 무는 강도를 걷어차 밀어 버리고는, 팔에 박혔던 단검을 뽑아 들고 주춤대는 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보아하니 한두 번 한 짓이 아닌 것 같은데. 지금까지 너희가 죽인 자들도 그렇게 말했겠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뱉은 이안이, 놈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너는 그때 안 갔었냐?"
"이, 이런… 시바알-!"
푸욱-!
떠밀리듯 달려든 놈의 가슴 한복판에 검이 틀어박혔다.
이안이 검을 뽑자 그르륵, 하는 숨소리를 낸 놈이 허물어졌다.
이안의 몸에도 피가 튀었다.
…메브처럼 깔끔하게는 안 되는군.
생각하며, 이안은 놈이 떨어뜨린 단검을 주워들었다.
다른 두 놈과 뒤엉켜 있던 필립이 간신히 거리를 벌린 건 그때였다.
"나, 나리! 끝내셨으면 도와주십시오! 저 이러다 죽습니다!"
필립과 대치 중인 둘의 얼굴에 뒤늦게 경악이 스쳤다.
비명을 지르고 있는 대장은 그렇다 쳐도, 그 짧은 사이에 동료 둘이 다 죽어 버린 것이다.
놈들을 일별한 이안이 어깨를 으쓱인 건 그 직후였다.
"싫은데?"
"...?!"
"시, 싫다니요?"
두 강도와 마찬가지로 눈을 치켜뜬 필립이 되물었다.
단죄의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이안이, 검을 회수하며 말했다.
"그 두 놈은 네가 상대하라고 했잖아."
"아니, 그, 그러긴 하셨습니다만-"
"너희 둘도 생각 잘해라. 나한테 덤벼도 죽고 도망가도 죽어. 그러니까 저 녀석과 싸워라."
"그, 그러면 살려 주는… 거요?"
두 강도 중 하나가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이기고 나서 물어야 할 것 같은데."
"나, 나리.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은-"
"뒈져라아아아!"
"으아아아!"
필립의 목소리가 달려드는 두 놈의 고함에 묻혀 사라졌다.
고함과 비명. 검과 방패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살벌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이안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물론 필립이 싫거나 죽길 바라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눈치 없고 겁도 많지만, 이 세계의 인간 중에선 보기 드물게 성실하고 의리도 있는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여정 내내 놈의 뒤를 봐줘야 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와 함께 하는 이상, 필립도 한 사람 몫은 해낼 수 있어야 했다.
보기보다 실력 있는 놈이니, 부상당한 허접 용병 둘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저딴 것들에게 죽는다면, 차라리 지금 죽는 게 호상이지.'
이안은 장님이 된 두목을 향해 다가갔다.
놈은 고통에 흐느끼면서도 바닥을 기어 도망치고 있었다.
푹-
놈의 손등에 단검이 박혔다.
"아아악-! 개, 개자식아!"
손목을 움켜쥔 놈이 비명을 내질렀다.
놈의 바로 앞에 선 이안이 코웃음을 쳤다.
"먼저 독을 먹인 건 넌데? 누굴 죽일 생각이었으면 네가 뒈질 각오도 했어야지."
장님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죽이, 죽이려던 게 아닙니다…! 기절만 시키려던 겁니다! 우린 그냥 물건만 털었을 거라고요!"
"그래…?"
몸을 돌린 이안이, 필립이 건넸던 술잔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장님의 손등에 박힌 단검을 움켜쥐었다.
"으, 아악…!"
단검을 비틀자 놈이 비명을 질렀다.
이안이 벌어진 입에 술을 부었다.
"켁, 커억… 어억?!"
놈은 엉겁결에 삼키고 나서야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이 미소 지었다.
"기절만 한다며? 정말 그러면 살려 주마."
"이, 이런 개 같은, 컥… 꺼억…!"
욕지거리를 토해내던 놈의 얼굴에, 이내 핏발이 돋았다.
놈은 한참 고통에 몸부림치다, 이윽고 피를 토하며 잠잠해졌다.
"차라리 사실대로 말했으면 고통 없이 갔을 텐데."
이안이 혀를 차며 읊조렸다.
속에서 알싸함이 느껴졌다.
꽤 강한 독이었지만, 이안의 저항력을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4챕터의 적들에게 살아남기 위해, 이안은 공용 스킬인 태초의 내성을 무려 3레벨이나 올렸었다.
어지간한 상태 이상에는 눈도 깜빡하지 않는 비결이긴 했지만.
과 투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회수한 단검을 장님의 옷에 문질러 닦던 이안은, 문득 뒤에서 들려 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호오."
강도 한 놈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방패로 공격을 방어한 필립이 치명적인 반격을 선보인 것이다.
저 정돈 해야지.
이안은 모닥불 앞, 애꾸가 앉았던 돌에 걸터앉았다.
"…팝콘이 없는 게 아쉽네."
그가 앞에 놓인 육포를 느긋하게 집어 들었다.
이어지는 전투를 눈에 담으면서.
#031화
"커흑…."
단말마가 필립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품이 뜨뜻해지고, 그와 엉켜 있던 강도가 허물어졌다.
놈의 명치에 박혀 있던 검을 뽑은 필립이, 비로소 주저앉았다.
"하악… 하악…."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긴장이 풀리면서, 허벅지와 볼의 화끈함이 비로소 느껴졌다.
강도들과의 전투에서 생긴 상처.
지혈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헐떡이던 필립은, 이윽고 모닥불 옆에 앉은 이안을 돌아보았다.
느긋하게 육포를 우물대던 그가 말했다.
"남자다운 얼굴이 됐군."
"대체 왜…."
필립이 맥 빠진 목소리로 간신히 내뱉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경과 다닐 때랑은 다를 거라고 했잖아?"
"...."
그게 이런 식으로 다르단 얘기인 줄은 몰랐다고 토로하려던 필립은, 이내 한숨만 내쉬었다.
따지고 보면 각오했다고 말한 것도, 모닥불로 가자고 했던 것도 그였으니까.
이윽고 그가 읊조렸다.
"…어쩌면 나리께선 제가 이런 걸 경험하길 바라셨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왕국의 민낯이요."
"의미 부여하긴."
피식한 이안이 붕대와 천을 필립에게 던졌다.
"응급 처치부터 하고, 일어서라."
"뭐가… 또 남았습니까?"
"가장 중요한 게 남았지."
남은 육포를 한입에 털어 넣은 이안이 장님에게 다가갔다.
그가 시체의 장비를 하나씩 벗기고 품을 뒤지기 시작하자, 비로소 필립의 미간이 좁아졌다.
"지금 주머니를 터시는 겁니까?"
"소유권 이전이라고 하는 거다. 국경 지대에서도 많이 봤을 텐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때는 부대로 환수했었습니다. 상대가 해적 출신 야만인들이기도 했고요."
"그럼 이참에 내 주머니 채우는 기쁨도 배우면 되겠네. 네가 죽인 놈들은 네가 털어."
"...."
필립이 입을 뻐끔댔다.
성기사의 종자로 오랜 시간을 보낸 그로선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이래서야 자신이 강도가 된 것 같지 않은가.
"못 하겠냐? 그럼 내가 챙기고."
능숙하게 필요한 물건을 챙긴 이안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필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 또한 경험이겠죠."
대충 응급 처리를 끝낸 필립이 강도의 시체로 손을 뻗었다.
아직 따듯한 시신의 몸 이곳저곳을 뒤적인 것도 잠시.
"...!"
필립의 손에 돈주머니가 딸려 나왔다.
안을 확인한 그의 눈이 커졌다.
반짝이는 은화와 동화.
홀린 듯 응시하던 필립의 입꼬리가, 이윽고 슬며시 올라갔다.
주머니를 품에 챙긴 그의 손길이 바빠졌다.
열정적으로 시체를 벗겨 먹는 그 모습에,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신났네."
지가 기사인 것처럼 굴더니.
노획은 빠르고 순조롭게 끝났다.
주머니가 두툼해진 이안. 그리고 새 검과 단검, 장갑, 신발, 벨트를 착용한 필립이 나란히 섰다.
그들은 같은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병들이 운송하던 봉인함.
이안이 볼 때, 용병들의 실력에 비해 지나치게 좋은 봉인함이었다.
겉에 정교하게 새겨진 주문 회로.
사이 사이로 반짝이는 세공된 마석들.
'…이걸 장물아비한테 넘기는 게 돈을 더 벌었을 것 같은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필립이 그를 돌아보았다.
"저만 열어 보고 싶은 겁니까?"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그도 같은 마음이었다.
게임에서 겪어 본 적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호기심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내가 건너뛴 퀘스트일지도. …이왕이면 낮에 열어 보고 싶은데.'
봉인함의 고리를 쥔 이안은 슬쩍 아공간을 열었다.
하지만 자성이 밀어내는 듯한 느낌만 들 뿐, 넣어지지 않았다.
'역시, 안 되나.'
생명체를 넣으려 하면 생기는 반발력이었다.
봉인됐으니 혹시나 했건만.
어쩔 수 없지.
결정한 이안이 단검을 뽑았다.
"물러나 있어라."
"옙!"
필립이 냉큼 옆걸음질 쳤다.
단검에 마력을 흘려보낸 이안은, 상자의 이음새 부분에 박힌 마석을 힘껏 후려쳤다.
빠각!
세 번 만에 마석에 금이 갔다.
다른 마석들의 빛이 잦아들었다.
잠깐의 적막. 곧이어 봉인함의 뚜껑이 벌컥, 예고도 없이 열렸다.
안에서 튀어나온 형체가 그대로 이안을 덮쳤다.
놈과 뒤엉킨 그가 바닥을 굴렀다.
쿵, 이안의 등이 나무 둥치에 부딪혀 멈췄다.
이안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놈의 생김새를 눈에 담았다.
잿빛 머리칼과 뾰족한 귀. 검붉은 눈동자.
'요정? 이거 설마….'
이안의 눈이 가늘어질 찰나.
요정의 긴 머리칼이 망토처럼 주위를 가렸다.
동시에 놈의 입이 기괴한 각도까지 벌어졌다.
톱날 같은 이가 한가득 돋은 아가리가 가까워졌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단검을 뻗었다.
달려들던 아가리가 홱, 궤도를 틀어 검날을 깨물었다.
까득- 빠지직.
단검이 장난감처럼 부러졌다.
퉤, 부러진 날을 뱉은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놈의 인상이 순식간에 변했다.
심지어, 아름답게.
이안의 눈에 이채가 서리는 가운데, 그를 응시하던 요정이 문득 내뱉었다.
"너, 엄청 맛있는 냄새가 나네."
히죽 웃은 그녀가 이안을 밀치며 물러났다.
둥치에 등이 짓눌린 이안이 인상을 구겼다.
그 사이 공중을 핑그르 돈 요정이, 고양이 같은 자세로 봉인함 위에 착지했다.
광택 없는 잿빛 머리칼이 망토처럼 그녀의 몸을 감쌌다.
'피 때문에 미친 건 줄 알았는데… 원래 미친 년이었나.'
이안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일어섰다.
저 여자는 그가 알기로, 이 세계의 유일한 흡혈 요정이었다.
진혈을 마시는 자, 테사이아.
장차 루 사드의 뱀파이어 군주를 흡수해 진혈의 여제로 거듭나는, 꽤 비중 있는 보스 캐릭터였다.
'가만, 루 사드의 의뢰인이란 게 뱀파이어였나…?'
자세한 사연까진 알 길 없었지만.
지금 눈앞의 테사이아는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는 훨씬 야성적이고 자신만만해 보였다.
그때, 사방의 시체를 훑어보던 테사이아가 다시 그를 마주 보았다.
"혼자서도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는데. 어쨌든 고마워, 대신 죽여 줘서."
자루만 남은 단검을 내던지며 이안이 대꾸했다.
"평소에도 고마우면 목덜미를 뜯어 버리려고 하냐?"
"배가 고파서 그만. 사실 지금도 군침이 돌아. 하지만 보아하니…."
싱긋, 요정이 미소 지었다.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설핏 드러났다.
"넌 지금 내가 어떻게 해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네."
"잘 아네."
그럼 이제 내가 어떻게 할 건지도 알고 있겠지?
이안은 속으로 뇌까리며 단죄의 검을 뽑아 들었다.
테사이아의 눈매가 휘어졌다.
"그러니까 다음을 기약할게. 또 만나. 그전에 죽지 말고."
그녀가 그대로 솟구쳤다.
잿빛 머리칼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더니, 순식간에 어둠 너머로 펄럭이며 멀어졌다.
화살처럼 빠른 속도.
"...."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튀어 버릴 줄이야.
숨을 죽이고 있던 필립이 그를 돌아본 건 그때였다.
"저거… 안 쫓아가셔도 되는 겁니까?"
"저걸 어떻게 따라가?"
이안이 검을 회수했다.
"언젠간 알아서 찾아오겠지. 선언했듯이."
"대체 뭐였을까요. 보통 요정 같진 않았습니다만."
"당연히 보통 귀쟁이가 아니지. 저년은 흡혈 귀쟁이다."
"피… 를 빨아 먹는다고요? 요정이요? 말이 됩니까?"
"원래 세상은 말도 안 되는 일투성이야, 필립."
이안은 피를 마시는 요정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게임에서 테사이아를 만난 건 다른 지역이었으니, 당연히 외지의 소문이 흘러들어온 건 줄 알았었는데.
정말로 이 촌구석에 숨어 있었을 줄이야.
하긴, 제국을 제외하면 마물이나 마족이 숨을 만한 지역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외곽의 모든 왕국에 아겔 란만큼의 타락자들이 암약 중이리라 생각하는 게 차라리 합리적이었다.
"…그럼, 저희가 그런 엄청난 괴물을 풀어 준 거군요."
"놔둬도 어떻게든 탈출했을 거다. 애초에 이깟 용병들한테 잡힌 것도, 낮이라 그랬겠지."
이안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부업으로 강도질이나 하는 놈들이 운반자인데. 루 사드까지 무사히 돌아갔을 리가 없어."
"어…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긴 합니다만."
못내 꺼림칙한 듯 읊조린 필립이 어둠을 응시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앞으로도 그러는 게 좋을 거다. 마음이라도 편해야지."
"…이런 일이, 계속 생길 거란 말씀은 아니시겠죠?"
"왜 아니겠어?"
"하… 루 솔라여…."
필립이 눈을 감으며 탄식했다.
시체 사이에서 새 단검을 주워든 이안이 봉인함의 손잡이를 움켜쥐며 말했다.
"말이나 끌고 와. 이동할 거니까."
"이렇게 바로요?"
"그럼 피 냄새 맡은 놈들이 몰려올 때까지 기다릴래?"
필립의 한숨이 깊어졌다.
여기서 멀어지려면 새벽까지 걸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이윽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몸을 돌렸다.
그사이 봉인함을 아공간에 밀어 넣은 이안은, 장비를 점검하고는 안장에 올라탔다.
떠돌이 용병과 그의 종자가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싸늘하게 식은 시체들과 잦아 들어가는 모닥불만이 고요하게 일렁인 것도 잠시.
어둠 너머에서 크고 작은 안광들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피 냄새를 맡은 아겔 란의 청소부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
오른델은 누더기로 기운 도시처럼 보였다.
고대 요정의 성을 멋대로 증축한 내성이 언덕 위에 삐죽했고, 외성 안팎으로는 주민들의 거주지가.
나무 말뚝으로 두른 울타리 너머에는 이주민들을 위해 급조한 판잣집들이 불규칙적으로 이어져 있었다.
통일성이라고는 없었지만, 도시의 규모만큼은 아겔 란에 필적했다.
판자촌에 위치한 여관도, 그에 걸맞은 크기를 자랑했다.
처음에는 집이 없는 이주민들을 위한 공간이던 여관은, 지금은 돈 냄새를 맡고 모여든 용병들의 아지트였다.
급격하게 성장하는 도시에는 그들을 필요로 하는 크고 작은 일거리들이 넘쳐나는 법이었으니까.
오늘도 번 돈을 고스란히 탕진하는 자들로 왁자지껄한 가운데.
끼이이-
여관 문이 시끄럽게 열렸다.
두 사내가 장내로 들어섰다.
술을 홀짝이던 이들이 하나둘씩 그들을 곁눈질했다.
못 보던 얼굴들이었기 때문이다.
앞에 선 주근깨 가득한 청년은 꽤 앳되어 보였지만, 험난한 여정을 해 왔음을 증명하듯 썩은 생선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뒤에 선 검은 눈의 남자는 태연해 보였지만, 베테랑 용병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가 묻어 나왔다.
몇몇 용병들이 그가 걸친 가죽 갑옷과 허리춤의 검을 훑는 사이.
"저 안쪽 자리가 좋을 것 같습니다, 나리."
이안에게 속삭인 필립이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태연하게 따르면서 이안이 말했다.
"꼭 구석에 앉아야겠냐?"
"그래야 싸움이 나도 뒤를 잡힐 일은 없을 것 아닙니까. 저번에 제가 죽을 뻔했던 것, 기억 안 나십니까?"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
덤빌 테면 덤비라는 듯 장내를 훑는 필립의 모습에,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의심암귀의 화신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마을을 거치고, 사이사이 노숙을 반복한 결과였다.
물론, 이안이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필립의 몫을 꼬박꼬박 할당한 덕분이기도 했다.
몸에 새겨진 상처의 숫자만큼 세상에 대한 불신도 깊어진 것이다.
물론 이안의 눈엔 아직도 애송이였지만.
고작 보름여가 지났음을 감안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필립을 보면서 성기사의 종자를 떠올릴 사람은 없을 테니까.
둘은 구석의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뭘 드릴까요?"
그들을 지켜보던 여급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의욕이라고는 없는 태도에 피식대며, 이안이 물었다.
"식사로는 뭐가 괜찮지?"
"괜찮은 건 없고, 먹을 수는 있는 걸 원하시면 소시지가 좋을 거예요. 빵을 시키실 거면 스튜를 꼭 같이 시키셔야 하고요. 그래야 삼킬 수 있거든요."
"그럼 그것들 전부."
고개만 끄덕인 여급이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필립이 이윽고 속삭였다.
"그래서, 이제부턴 어쩌실 겁니까?"
"왜 자꾸 속삭이는 거냐?"
"남들이 들을지도 모르잖습니까."
"들어도 상관없어. 오히려 태연해야 더 신경을 안 쓸 거다."
"…또 하나 배웠군요."
뭘 맨날 배우고 난리야.
실소한 이안이 장내를 돌아보았다.
용병으로 보이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사실 거의 전부로 보였다.
"며칠 머물면서 분위기를 좀 볼 거다. 겸사겸사, 푼돈도 벌고."
"일단은 이 사이에 섞여들겠단 말씀이시군요."
"갑자기 나타나서 실종된 병사에 대해 묻고 다니면, 그건 그것대로 수상하니까."
이안이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사이, 여급이 접시를 들고 돌아왔다.
테이블에 음식이 놓였다.
여급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시지를 한 입 먹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먹을 수만 있군."
"믿으세요. 다른 건 더 별로니까."
여급의 체념 섞인 말을 들으며, 이안은 품에서 은화를 꺼냈다.
이렇게 많은 팁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여급의 눈이 커졌다.
이안의 말이 이어졌다.
"보아하니 일거리가 꽤 많은 모양인데. 괜찮은 의뢰를 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누가 보기라도 할까, 재빨리 은화를 품에 챙긴 여급이 목소리를 낮췄다.
"곧바로 큰 건을 받으시면 충돌이 있을 거예요. 여긴 보기와 달리 나름대로 규칙이 있어서요. 아예 남들이 엄두도 못 낼 만큼 위험한 일이면 모를까. 작은 것부터 시작하셔야 해요."
받은 만큼의 의리가 눌러 담긴 조언.
이안이 미소 지었다.
"잘됐네. 내가 원한 게, 바로 그런 위험한 의뢰니까."
#032화
여급이 되물었다.
"…그게 아무도 완수한 적 없는 의뢰라도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시지를 한입 더 베어 물었다.
이윽고 한숨을 내쉰 여급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이 직접 현상금을 건 일이에요."
"내용은?"
"지하에 수로가 있거든요. 엄청 오래전에 요정들이 만든 거라, 아무도 전체 구조를 몰라요. 뭘 버리면 저 너머의 배수구로 빠져나가니까 그냥 쓰는 거지. 아무튼, 거기 뭐가 살아요. 가끔 하수구를 타고 그르렁대는 소리도 들리고."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은 들은 적 있어. 식인 악어."
"토벌하겠다고 들어간 사람 중에 딱 한 명만 돌아왔어요. 그 사람 덕분에 정체가 밝혀졌죠. 눈이 넷 달린 악어라던데. 사실 그게 진짜인지도 알 수 없어요. 그 사람 외엔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안 가시는 게 좋아요. 게다가 거길 들어가면…."
여급이 목소리를 낮췄다.
"똥물에 다리를 담그고 다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
이안과 필립의 인상이 동시에 구겨졌다.
필립과 눈빛을 교환한 이안이 물었다.
"그놈을 죽이면 어디로 가져가야 하지?"
"그냥 여기로 가져오셔도 돼요. 경비대가 찾아올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은화를 하나 더 건네며 말했다.
"침대 두 개 있는 방으로 주고, 내일 나와 이 녀석이 갈아입을 옷을 두 벌씩 사다 줘. 돌아와서 씻을 물도 준비해 주고. 이거면 충분하고도 남겠지?"
"정말 하시게요?"
"내일 낮에. 바로."
"…전 말렸어요. 최선을 다해서."
그들이 묵을 방을 알려 준 여급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멀어졌다.
"똥물이라니… 하…."
딱딱한 빵을 스튜에 적시던 필립이 한숨 쉬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어차피 내 눈엔 여기나 똥물이나 다를 것도 없어."
"지하 수로에 사는 식인 악어라니. 버차드 후작은 잘도 그런 걸 방치하고 있군요."
"병사를 희생시키고 싶지 않은 거겠지. 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어차피 많아야 백인대 한 두 부대나 지원할 거면서, 더럽게 쪼잔한 작자인 모양입니다."
"글쎄… 뭔가 생각이 있겠지."
"...?"
필립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길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대꾸도 하지 않고 소시지를 입에 넣었다.
내일 격하게 움직일 테니, 이런 맛대가리 없는 음식이라도 든든히 먹어 둬야 했다.
***
용병인 패튼은 늘 그렇듯,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일어났다.
간밤의 음주 덕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홀로 나간 그는, 평소와 달리 이른 시간부터 모여 앉은 용병들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뭣들 하고 있냐?"
"엉? 내기 중이었어. 너도 낄래?"
"내기…?"
그가 테이블로 다가갔다.
"뭔 내기?"
"어젯밤에 온 놈들 말이야."
양쪽 손가락이 둘씩 없어서 육손이라 불리는 녀석이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냈다.
"지하 수로로 들어갔다더라고."
"수로에…? 설마 둘이서 그 괴물을 잡겠단 건 아닐 테고."
"그 설마가 맞아."
"미쳤군."
패튼의 미간이 좁아졌다.
여급에게 손짓으로 스튜를 부탁한 그가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내기 조건이 뭔데?"
"오늘 자정까지 돌아오느냐, 마느냐."
"…너무 뻔한 조건인데."
"그래서 누가 돌아온다에 걸 건지로 얘기 중이었어."
다른 용병이 거들었다.
"돌아오면 한 놈이 판 돈을 다 먹고. 못 돌아오면 전부한테 한 잔씩 사는 거로 말이야."
"차라리 그냥 한턱 쏘는 게…."
중얼거리던 패튼이 문득 볼을 긁적였다.
때마침 여급이 스튜를 가져왔다.
접시째로 들어 입에 부으면서, 그는 어젯밤에 본 떠돌이들의 행색을 떠올렸다.
한 놈은 애송이 같았지만, 다른 한 놈은 묘한 위압감이 있었다.
덩치가 크거나 얼굴이 무서운 것도 아닌데도.
그래서 적당히 지켜보다가 말을 걸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쓸만한 인재가 필요했으니까.
"…그럼 내가 그쪽에 걸지."
이윽고 접시를 내려놓은 패튼이 말했다.
둘러앉은 용병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심이냐, 패튼?"
"그래. 살아 돌아오면 돈을 벌어서 좋고. 아니면 너희 새끼들한테 한 잔씩 사서 좋다고 하지 뭐."
패튼이 테이블에 은화를 내려놓았다.
잽싸게 챙긴 육손이가 돈을 내기용 주머니에 넣었다.
"역시 넌 괜찮은 놈이라니까."
"도련님이 아끼는 이유가 있어. 둘이 비슷하다니까?"
곳곳에서 이어지는 속 보이는 덕담에 패튼이 코웃음을 쳤다.
"작작들 해라, 새끼들아. 그딴 사탕발림은 다른 호구한테나 가서-"
쿠우웅-
패튼의 말이 멈췄다.
어딘가에서 둔중한 떨림이 번졌기 때문이다.
어리둥절해하던 용병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방금 그거, 뭐였."
구웅-
다시 한번 진동.
그들은 그제야 이 떨림이, 저 너머 어딘가의 땅속에서 번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용병들이 저마다 시선을 교환할 찰나.
쿠웅- 쿠우웅- 쿠구구구-
진동이 연달아 이어졌다.
여기서 이렇게 느껴질 정도라면, 외성과 내성에선 더 선명하게 느껴질 게 분명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다시 장내가 고요해졌다.
한참을 서로 눈빛만 교환하던 중, 이윽고 육손이가 웃음을 흘렸다.
"꽤 인상적이긴 했는데. 아무래도 끝난 것 같지?"
"그렇지? 무슨 짓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콰앙-!
그때, 이번엔 아예 폭음이 울려 퍼졌다.
순간적으로 지진이 난 것처럼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테이블 위의 잔들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아무도 주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으니까.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번지는 가운데.
키아아아아아-
난생처음 들어 보는 비명이 사방에 메아리쳤다.
도시의 모든 배수구를 나팔 삼아 울려 퍼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적막. 장내에도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여관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방금 들었어? 그거 뭐냐?!"
도시에 나가 있던 용병이었다.
그를 시작으로 곳곳에 흩어져 있던 용병들이 여관으로 모여들었다.
삼삼오오 모여앉은 그들은, 모두 저마다가 들은 것과 본 것들을 떠들어 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망치로 지하를 다 부수고 다니는 것 같은 소리였다고. 그 미친놈들이 수로를 막아 버린 거야. 악어를 잡으려고."
"난 욕이랑 외침을 들었어. 배수구 아래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막으라고 하는 걸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니까?"
"기름이야. 기름을 들고 가서 똥물에 불을 지른 거야. 불붙은 악어가 비명을 내지른 거지."
실체 없는 추측과 주장이 난무하고, 그에 따른 크고 작은 내기들이 성행하는 가운데.
끼이이이-
여관 문이 천천히 열렸다.
노을의 붉은 빛과 기다란 그림자가 장내에 드리웠다.
좌중이 삽시에 고요해졌다.
그림자를 앞세운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오물과 체액을 뒤집어쓴 이안이었다.
"...."
하지만 아무도 그의 행색이나 그에게서 풍기는 구린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품에 안고 들어온 것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장내를 돌아본 이안이, 여급을 발견하고는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내던졌다.
"가서 사람을 불러 와라."
철퍽-
거대한 머리통이 여관 바닥에 널브러졌다.
소 몸통만 한 크기에, 눈이 네 개나 달린 악어의 머리였다.
"지하 수로의 괴물을 죽였으니까."
이안이 말을 맺는 사이, 뒤따라 들어온 필립도 손에 든 것을 머리통 옆에 던졌다.
그건 머리와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으로 뜯겨나간 꼬리였다.
"못 들었습니까? 경비병이든 대장이든, 불러오라고. 당장."
"네, 네엣!"
필립이 짜증스럽게 덧붙이자, 여급이 불에 덴 것처럼 여관 밖으로 달려 나갔다.
다시금 장내에 내려앉은 적막을 깨뜨린 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패튼이었다.
"내 돈 전부 가져와, 이 새끼들아! 형씨, 고맙소! 덕분에 대박이 터졌어!"
그의 외침을 시작으로, 탄성과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사방에서 튀어 오른 용병들이 이안과 필립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떻게 한 거요? 기름. 기름이지?"
"망치로 짓이긴 것 맞소? 난 거기에 걸었거든."
"저걸 진짜 죽이다니! 정말 엄청나군!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쏟아지는 질문과 환호에 이안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필립도 마찬가지였다.
이해할 수 있는 반응들이었지만.
적어도 똥오줌을 뒤집어쓴 상태에서 나눌 얘기는 아니었다.
슬슬 이안의 눈에 살기가 돌기 시작할 때쯤.
"작작 해, 미친놈들아! 몰골이 어떤지 안 보이냐? 내가 맥주 한 잔씩 살 테니까, 그거나 마셔!"
이안 덕에 큰돈을 딴 패튼이 용병들을 물렸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는 얘긴 들었소. 안에 들어가면 준비되어 있을 거요. 댁들, 구린내가 장난 아니거든."
"…물 한 통으론 어림도 없어."
"여급이 돌아오면 말해 두겠소. 덕분에 한 달은 놀고먹게 됐는데, 이 정도는 도와 드려야지."
고개를 까딱인 이안이 걸음을 옮기고, 욕설을 중얼거리는 필립이 뒤를 따랐다.
악어의 머리와 꼬리를 중심으로 때 이른 술판이 벌어졌다.
그 한복판에서 복도로 들어서는 둘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고 응시하던 패튼이, 나지막이 중얼댔다.
"엄청난 놈들이 굴러들어 온 것 같은데… 도련님을 빨리 모셔 와야겠구만."
***
경비대장이 네눈박이 악어의 머리를 싣고 돌아갔다. 현상금은 사흘 내로 지급될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였다.
이안은 뒷수습까지 깔끔하게 끝냈다.
악어와의 전투 중에 지하 수로가 조금, 아주 조금 파손되었으니 석공들을 파견하라는 말을 잊지 않은 것이다.
혹시라도 꼬투리를 잡힐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고대수 사건의 진위를 밝혀내는 것보다 오른델의 영주와 충돌할 일을 먼저 만들고 싶진 않았다.
"이런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두 번은 절대 못 해요."
마주 앉은 필립이 우울한 얼굴로 중얼댔다.
앞에 놓인 음식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였다.
"동감이다."
이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을 세 번이나 씻고 옷도 전부 갈아입었건만.
아직도 몸에서 암모니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가지고 간 장비도 잘 씻어서 말려 두긴 했지만.
솔직히 완전히 깨끗해질 것 같진 않았다.
어쨌건, 그들을 향한 대우만큼은 극적으로 달라졌다.
어젯밤 같은 경계의 눈빛은커녕, 다들 눈길만 스쳐도 고개를 까딱이거나 술잔을 들었다.
이안에겐 익숙한 변화였다.
용병의 세계는 처세술이나 실력이 전부니까.
이제부턴 아무도 그들의 행동에 토를 달지 않을 터였다.
혹은.
"잠시 실례해도 괜찮겠소?"
오히려 저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거나.
이안은 다가온 남자를 돌아보았다.
아까 용병들을 물렸던 인상 좋은 사내.
그의 뒤에는 꽤 곱상하게 생긴 못 보던 청년이 부하처럼 서 있었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본론만 짧게 말한다면."
"하하. 실력만큼 성격도 시원하시군. 반갑소. 패튼이오."
웃음 지은 패튼이 빈자리에 앉았다.
"이안."
"필립입니다."
패튼의 뒤에 선 청년이 거슬린다는 듯 곁눈질한 필립도 고개를 까딱였다.
"이런 실력을 가진 분들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니. 이상하군. 혹시 출신지가 어찌 되시오?"
"늪지대."
"엥…? 하하. 말씀하고 싶지 않으신 거군. 알겠소. 그럼 전에는 어디서 활동하셨소? 실력을 봐선 분명, 어디에서건 명성을 떨치셨을 것 같은데."
"그딴 호구 조사나 할 거면-"
인상을 구기며 내뱉던 필립이, 이안의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이안이 패튼을 바라보았다.
"내가 범죄자 출신이 아니라는 건, 이런 개소리를 들어 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 것 같은데. 본론이나 꺼내시오. 그쪽 말고…."
그의 시선이 패튼의 뒤에 선 청년에게로 향했다.
"할 말이 있는 당사자가, 직접."
"...!"
패튼이 놀란 표정을 짓는 가운데, 필립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귀족이 왜 자유민 흉내를 내고 있소? 아니, 음지의 거물 흉내인가?"
"...?!"
그제야 필립도 눈을 치켜떴다.
공손하게 서 있던 청년이 머쓱한 웃음을 흘린 건 그때였다.
"들킬 줄은 몰랐는데. 내 연기가 그렇게 엉망이었나?"
"이런 베테랑 용병의 호위 흉내를 내고 싶으시면, 얼굴이나 손등에 흉터라도 몇 개 만드시는 게 좋을 거요."
"훌륭한 조언이지만, 그건 힘들겠군. 나름대로 이 얼굴이 재산이라서 말이야."
"죄송합니다, 도련님. 들켜 버렸군요."
패튼이 일어섰다. 청년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보아하니 처음부터 속일 수 없는 상대였던 것 같은데."
그가 자연스럽게 패튼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이안을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무례를 사과하지. 알다시피 용병 중에는 아주 위험한 과거를 가진 자들이 섞여 있어서 말이야. 최소한의 확인 절차가 필요했어. 나는 칼부림엔 영 젬병이거든, 하하."
귀족보다는 자유민에 가까운 말투.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오. 사과는 받아들이겠소."
"고맙군. 난 데클란 버차드라고 한다."
"버차드라면…."
필립의 입이 벌어졌다.
이안은 놀란 기색 없이 말했다.
"영주님의 아드님이시군. 귀하신 분이 우리 같은 일개 용병의 신분은 왜 확인하려 하신 거요?"
"이 도시의 용병들을 관리하는 게 내 역할이거든. 거기다 그대들은 특히 실력이 뛰어나고."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용병들이 득시글대는 것치곤 지나치게 평화롭더라니.
게임에서도 이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거기까진 알 수 없었다.
사실 스토리와 관련된 부가적인 설정에는 그가 모르거나 바뀐 부분이 더 많았다.
"소공자께서 이런 고된 일을 맡으시다니, 대단하시군요. 좀 전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필립이 정중하게 말했다.
데클란이 피식댔다.
"소공자가 아니니까 맡은 거다. 난 서자거든."
"아하… 그러셨군요."
"그래서, 신분에 대한 확신은 생기셨소? 뭔가 물증이 더 필요하신가?"
이안이 느긋하게 물었다.
데클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필요하지 않은 것 같군. 물론 실력을 검증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까 하는데, 괜찮겠나?"
그가 이안과 필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필립이 이안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는 보겠소."
"그래. 자네들, 내 밑에서 함께 일해 보지 않겠어?"
"...?"
#033화
데클란이 양손을 펼쳤다.
"이미 실력은 검증됐으니까, 약간의 훈련과 서약만 한다면 내 부대의 백인대장과 부관으로 임명하고 싶은데. 괜찮은 제안이지 않나?"
"용병들을 정규군으로 편성하신단 말씀이십니까?"
필립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오래 전선에 살았던 그는, 그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인지 알고 있었다.
데클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솔직한 야망으로 반짝였다.
"전쟁을 앞두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지. 다른 영주들은 용병을 천시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아.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용병들은 훌륭한 전력이지. 합당한 대가와 기회만 수반된다면 말이야. 내 밑에 있으면, 공적을 올린 만큼 출세할 수 있을 거다. 물론 결코 너희를 내치지도 않을 거고."
"흐음…."
이안은 턱을 어루만졌다.
물론 제안에는 흥미가 없었다.
흥미로운 건 이자의 태도였다.
이자는 진심으로 용병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자의 방식이 성공적이라는 건, 패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그의 부관이라도 된 것 같은 표정이었으니까.
"영주님은 허락은 받으신 거요?"
"물론. 할 거면 해 보라는 식이셨지. 아버님의 입장에도 손해는 아니거든. 우리를 선두에 세울 테니까."
"칼받이가 되기 딱 좋단 말씀이시군."
"부정하진 않겠어. 하지만 그런 만큼,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강한 명분을 가진 세력이 될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고. 이래 봬도, 아예 멍청하진 않거든."
데클란이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이 서자는 절대 멍청하지 않았다.
소탈한 행동부터 적당히 솔직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화법. 눈빛과 표정까지.
여러모로 촌놈치고는 인상적이었으니까.
물론 이안에겐 전혀 먹히지 않을 매력과 제안이었다.
이런 촌구석에서 출세할 생각도 없었고, 곧 일어날 전쟁이 어떻게 끝나는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속내와 달리, 이안은 담담하게 내뱉었다.
"당장은 아무런 대답도 드릴 수 없겠소."
"왜지?"
"아직 끝내지 못한 의뢰가 있기 때문이오. 앞서 받은 의뢰를 끝마치지 않은 채로 수락할 수준의 작은 제안이 아니잖소?"
"하지만 악어는 이미… 아, 그래. 애초에 오른델에 온 것 자체가 우연이 아니었던 거군. 의뢰를 해결하러 온 거야."
말귀는 잘 알아먹어서 좋네.
이안은 어깨만 까딱였다.
데클란은 자신이 낚싯대를 드리웠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안은,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거꾸로 이자를 낚아서, 의뢰를 해결하는 데에 이용하자고.
별 관심도 없는 얘기들을 끈덕지게 들어 준 것도 그래서였다.
"내가 네 의뢰에 도움을 준다면, 내 제안을 고려해 볼 텐가?"
"생각이라면야. 사실 귀하가 도움이 되실지도 확신할 수 없소."
"너희들의 용무가 이 도시 안에 있다면, 아마 될 거야. 내성을 제외하곤 내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거든."
데클란이 장담하듯 말했다.
이안을 바라보는 눈길에 호의와 열망이 느껴졌다.
이안은 태연하게 그 눈을 마주 보았다.
이게 이자의 본모습이건 아니건 상관없었다.
보이는 것만큼 선한 자라면 아버지의 본모습을 알게 될 테고.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모든 게 더 쉬워질 테니까.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그럼 저희의 의뢰를 노출하게 될 텐데요."
필립이 시기적절하게 끼어들었다.
특유의 고지식한 부분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됐다.
"아. 용병의 불문율 얘기군. 흠, 패튼?"
턱을 만지작거린 데클란이 고개를 돌렸다.
패튼이 미소 지었다.
"에, 도련님."
"미안하지만, 물러나 주겠어? 주변에 궁금해하면서 얼쩡거리는 놈들도 같이."
"예, 뭐, 그러겠습니다. 들었지? 쥐새끼들처럼 얼쩡대지 말고 다 물러나. 술이나 마시자고."
패튼이 몸을 돌렸다.
이안이 앉은 구석 자리를 중심으로 작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안이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귀하가 들으시기엔 맥 빠지는 내용일 수도 있소."
"사람의 궁금증을 자극할 줄 아는 친구로군. 말해 봐. 괜찮으니까."
"우리는 사람을 찾으러 이곳에 왔소."
이안이 품에서 반쯤 썩은 신분 패를 꺼냈다.
데클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데이브…?"
"보시다시피, 오른델의 정규군이오."
"이게 이 꼴인 걸 보니, 이자는 이미 죽었겠군."
"맞소. 이자는 죄수들을 이송하고 있었지. 이송 명령을 내린 자를 찾는 게, 의뢰의 첫 번째 목표요."
"두 번째 목표는, 이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를 알아내는 건가?"
데클란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려 드릴 수 없소만. 억울한 죽음이었소."
"정규군 내부에… 부패한 자들이 있다는 뜻이냐?"
"글쎄. 그건 귀하께서 더 잘 아실 것 같소만. 귀하가 보시기엔 어떻소?"
이안이 되묻자, 데클란이 볼을 긁적였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영주군의 내부 사정은 나도 잘 몰라. 그들을 지휘하는 건 형님과 아버님이니까. 그쪽이 적통이고 후계자거든."
"그러시다면… 귀하가 도움을 주실 건 없을 거요."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하진 않았어."
데클란이 미소 지었다. 이안이 볼 때 그건, 어떤 기회를 포착한 자의 미소였다.
그가 의욕적인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보았다.
"내가 알아봐 주지. 내 개인적인 호기심도 더해졌으니까, 실망할 일은 없을 거야."
"그래 주신다면야. 사양하지 않겠소."
"명령을 내린 자를 찾으면, 그 후엔 어쩔 거지?"
"그건 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아시겠지만 나는 용병이오. 용병은 의뢰를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데클란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몸에 밴 냄새를 빼면서 조금만 기다려. 좋은 소식 가지고 돌아올 테니까."
***
데클란이 말한 조금은, 정말 조금이었다.
다음 날, 해가 지기가 무섭게 여관을 찾아온 것이다.
이제는 이안의 지정석이나 마찬가지가 된 구석 자리에, 그가 마주 앉았다.
"나름대로 알아보니, 네 말대로 이상하더군."
용병들이 공간을 벌려 주고 입구 근처에서 떠들썩하게 떠들어 댄 덕분에, 그들의 자리는 인파 속의 밀실이나 다름없게 됐다.
이안이 미소 지었다.
"어떤 부분이 이상하셨소?"
"데이브는 가족이 여동생뿐이더군. 그리고 그녀는 데이브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아겔 란의 감옥을 지키러 떠났다고 말이야.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겠지. 재미있는 게 뭔지 아나?"
데클란이 이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데이브와 함께 죄수를 이송한 병사는 총 여섯이었지. 그리고 그들 모두가 부모가 죽었거나 고아였어.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행방을 제대로 찾아낼 사람이 없는 자들이었단 거야. 형제나 친구들 모두, 그들이 아겔 란으로 이주했다고 알고 있더군."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놀랍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자유민 중에서도 최하층민들.
체스에서 폰을 미끼로 쓰듯, 모든 음모의 첫 희생양은 그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송 명령을 내린 자는 누구였소?"
"브래들리라는 자야. 지휘관이자 형님의 수족이지. 나와 친하진 않아. 사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 그자는 내게 존대하는 게 싫어서, 거의 말을 걸지 않거든."
쾌활한 목소리로 말한 데클란이, 이안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대화를 나눌 생각이오. 오붓하게."
"원하는 말을 끌어내기 쉽지 않을 텐데?"
이안이 단검을 뽑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건 훌륭한 대화 수단이오. 과묵한 자도 말문이 트이게 하는 마법이 걸려있소."
데클란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그 마법을 구경하고 싶어지는데. 끼워 주겠나?"
"안 될 것도 없소. 대화의 장을 귀하가 마련해 주신다면야."
"하… 이럴 수가. 갈수록 자네가 마음에 들고 있어. 이렇게까지 말이 잘 통하는 상대는 오랜만인데. 혹시, 귀족 출신인가?"
또 이 소리군.
실소한 이안이 말했다.
"애석하시겠지만, 아니오."
"아니. 오히려 다행이군. 알다시피 내 피의 절반은 자유민이라서 말이야. 좋아, 그럼 먼저 일어나지. 생각할 게 많아. 자리가 마련되면, 바로 사람을 보낼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데클란이 일어섰다.
"나도 자네의 이 의뢰가 어떻게 끝날지, 너무 궁금하거든."
"나도 그렇소."
해사하게 미소 지은 그가 용병들 사이로 멀어졌다.
용병들과 친구처럼 어깨동무하며 술을 사는 그를 눈에 담으면서, 이안이 입을 열었다.
"여러 번 손 안 대고 코 푸는군."
"제가 볼 땐 나리께서 사람 부려먹는 데 도가 트신 것 같습니다만."
데클란의 자리에 앉으며 필립이 말했다.
피식한 이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봐."
"예."
필립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사실 그는, 이안의 명령으로 종일 데클란을 미행했다.
놀랍게도 필립은 미행이나 잠입 따위에 소질이 있었다.
겁 많은 성격이 이런 부분에서 빛을 발한 것이다.
"도련님이 예상보다 일찍 오셔서 말이 끊겼습니다만. 큰 특이점은 없었습니다. 도련님이 아까 말씀하신 그대로의 동선이었고요. 겸사겸사, 저분의 평판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장족의 발전이군. 명령하지 않은 것까지 해 오다니."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른델의 백성들은 다들 저 도련님을 좋아하더라고요. 자유민의 피가 섞여서 그런 것 같다고들… 아무튼."
헛기침한 필립이 목소리를 낮췄다.
"도련님의 어머니는 몇 년 전에 죽었다더군요. 후작이 아들로 거둬들이긴 했지만 중요한 일에 쓰지는 않고. 장남인 메이슨 대공자는 저분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다들 도련님이 가장 위험한 전장으로 배치되고, 죽어서 돌아올 거라고 걱정하더군요."
흔한 콩가루 집안이구만.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안에게, 필립이 덧붙였다.
"제가 볼 때, 저 도련님은 타락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타락했다면… 본모습을 정말 잘 감추고 있는 거겠죠."
"그래. 정말 잘 감추고 있긴 하지. 그게 혼돈이나 어둠을 숭배하는 쪽은 아닌 것 같다만. …아직까진."
이안은 앞에 놓인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일이 다 끝난 다음에도 그럴지는,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벌써부터 코끝에, 피 냄새가 감도는 것 같았다.
***
침대에 기대앉은 이안은, 무덤에서 가져온 연구 일지를 펼쳤다.
오른델에 온 지 며칠 만에, 그는 가장 좋은 방을 쓰게 됐다.
다른 용병들과 충돌하는 일 없이 마을의 잡스러운 의뢰들을 해결해 주고, 여급과도 친해진 결과였다.
여관이나 주점에서 일하는 여급들은, 항상 이상할 정도로 이안을 편하게 여겼다.
아마도 위협적이지 않은 외모와 덤덤한 말투 덕분이겠지만.
그걸 고려해도 과한 호의였다.
어쨌건, 덕분에 이안은 조용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제님은 내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 처음엔 완강하게 거부하고 분노했지만, 나는 결국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참된 진리였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진리인 줄 알았던 것들은 모두 거짓이었다. 이 세계도 마찬가지다….'
콘라우드의 연구 일지는, 전형적인 정신병자의 회고록이었다.
중간중간 놈이 정리한 수식이나 마법 공식, 규칙 따위가 나열되어 있었으나, 이안이 볼 땐 말이 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이 세계는 이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작동하는 세상이지만.
이안은 자신이 이 세계의 방식으로 마법을 배우게 되는 일은 없으리란 사실만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무리 예전보다 똑똑해졌다고 해도, 애초에 성립조차 되지 않는 것들을 이해할 순 없었다.
'…하긴. 이 세계 인간들에겐 스킬 포인트로 마법을 배우고, 쓰기까지 하는 내가 더 말도 안 되는 존재겠지.'
이안은 콘라우드라는 변방의 마법사가 어둠에 물들어, 비로소 인간의 굴레를 벗어가는 과정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예상대로 놈을 지하 무덤으로 불러들인 자는 아겔 란에 있었다.
이름이 언급되진 않지만, 이안은 그게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다.
때가 되면, 콘라우드는 그의 첨병이자 하수인으로 세상에 나올 계획이었다.
아겔 란 왕국 전체를 마경화시키기 위해서.
끝내는 검은 벽을 세운 것과 같은 공허의 존재들을 이 땅에 강림시키는 게, 그들의 원대한 계획이었다.
신도 악마도 아닌 고대 신들에게 지배당하는 삶을 원한 것이다.
타락자들의 눈에는 그것이, 세상이 태초의 순리로 되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본래의 세상이라며 사이비의 교리로 치부했을 내용이지만.
'이 세계는 전부 다 제정신이 아니라서, 뭐가 진실인지를 알 수가 없네.'
일지의 내용이 이안을 처음 만난 부분까지 접어들었을 때였다.
"나리. 주무십니까?"
문이 열리고, 필립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가 속삭였다.
"대화의 장소가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일 잘하는 양반이군."
미소 지은 이안은, 일지를 미련 없이 덮으며 일어섰다.
부하들을 어둠의 제물로 바친 자를 어르고 달랠 시간이었다.
칼과 주먹으로.
#034화
허름한 가구들이 놓인 판잣집.
"읍… 읍…."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팔다리가 결박된 브래들리가 버둥거렸다.
재갈을 물고, 먼지 덮인 주머니까지 머리에 뒤집어쓴 채였다.
"장소 선정이 훌륭하시군."
입장과 동시에 그 모습을 확인한 이안이 말했다.
여긴 판자촌에서도 특히 외곽에 위치한 집이었다.
패튼과 육손이의 안내가 아니었다면 찾기도 어려웠을 만큼.
벽면에 기대 있던 데클란이 웃음 지었다.
"애석하게도 그 부분만 내가 한 게 아니야. 여긴 이자가 정부와 밀회를 즐기는 장소거든. 난 그냥 기다리기만 했지."
그가 브래들리에게 다가갔다.
브래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부터 몸부림을 멈췄다.
데클란이 주머니를 벗겼다.
"반가워. 브래들리 경."
"퉷…! 이게 무슨 짓이오? 로즈는 어디에 있지?"
재갈을 풀자, 입에 고인 침을 뱉은 브래들리가 버럭 소리쳤다.
데클란이 어깨를 으쓱였다.
"집에서 잘 자고 있겠지."
"이런 함정을 파다니… 대공자께서 알게 되시면 감당할 수 있겠소?"
"그건 내가 걱정할 문제야. 경은 그보다, 자신부터 걱정하는 게 좋겠군. 아쉽게도 오늘 경에게 용무가 있는 건 내가 아니거든."
"그게 무슨…."
브래들리가 그제야 이안과 필립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데클란의 부하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안이 미소 지었다.
"드디어 만나는군. 브래들리."
"…넌 누구냐? 난 널 처음 보는데."
브래들리가 눈을 부라렸다.
품에서 신분 패를 꺼내면서, 이안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맞아. 나도 널 처음 보지. 하지만 이자는 당신을 잘 안다던데?"
"무슨 헛소리…. ...!"
신분 패를 확인한 브래들리의 눈이 커졌다.
"네놈, 이걸 어디서…?"
"유령이 주던데. 원한을 풀어 달라고 말이야. 자신들을 죽이고 고대수 아래에 파묻은 자를 찾아 달라더군."
"고대수라니, 난 그딴 거 모른-"
이안이 브래들리의 각진 턱을 움켜쥐었다.
이안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무기질적인 검은 눈동자.
"경고는 이게 마지막이야. 다시 묻지."
턱을 놓은 이안이 팔걸이에 결박된 브래들리의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누구의 명령으로, 이자들을 제물로 바쳤지?"
"고대수? 제물? 자꾸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으아악!"
브래들리가 비명을 질렀다.
이안이 그의 왼손 새끼손가락을 쥐더니 그대로 꺾어 버린 것이다.
"누구의 명령이었지?"
"이… 개새끼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이번엔 반대쪽 새끼손가락이 부러졌다.
비명을 지른 브래들리가 충혈된 눈으로 데클란을 노려보았다.
"천하고 어리석은 줄은 알았지만. 이런 개소리에 넘어가서 미친 짓을 벌이다니- 아아악!"
손가락이 또 하나 부러졌다.
고함과 비명에도 집을 찾아오는 자는 없었다.
원래 인적이 드문 곳이기도 했고.
패튼과 육손이가 패거리를 이끌고 주위를 돌면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길목을 막은 덕분이었다.
"손가락으로 끝날 거라 생각 마. 발가락, 귀, 코, 눈… 부러뜨릴 곳은 많고, 부러뜨린다고 잘리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 물론 넌 기절하지도 못할 거고, 전부 생생하게 느끼게 될 거야. 내가 보증하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한 이안이 눈물과 콧물, 침까지 흘리는 브래들리를 다시 마주 보았다.
"누구의 명령이었지?"
"…대공자."
이안이 중지를 움켜쥔 순간, 브래들리가 토하듯 내뱉었다.
"대공자께서 명령하셨소."
이안의 손길이 멈췄다.
"메이슨 버차드? 대공자가 왜 그런 명령을?"
"그건 나도 몰… 끄흐윽…!"
왼손 중지가 부러졌다. 이를 악문 채 버둥거린 브래들리가 숨을 토해냈다.
"제기랄…! 길목을 막아야 한댔소. 아겔 란에서 오른델로 향하는 길목을 하나만 막아도, 전략적인 우위에 설 수 있다고!"
"전략적인 우위…?"
연극을 관람하듯 지켜보던 데클란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그에게 닥치고 있으라는 눈빛을 보낸 이안이 말했다.
"버차드 후작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
"당연히… 후작 각하께서 원하신 거였소. 때가 머지않았다고 하셨지."
"때가 멀지 않았다라…."
"내가 들은 건 정말 그게 전부요. 나는 명령을 수행한 것뿐이란 말이오! 오른델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그깟 천한 것들의 희생쯤, 아무것도 아니잖소!"
브래들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래… 전쟁이 임박했기도 하고. 대업을 이루려면, 때로는 작은 희생도 필요한 법이지. 특히 그게, 독립과 건국이라면 말이야."
"이해하시는군. 제기랄… 나도 원하지는 않았소.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게 나였을 뿐이란 말이오."
"앞뒤가 딱딱 맞는 대답이군. 마치 들켰을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말이야."
이안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하긴. 너희가 타락자라는 사실을 감추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
브래들리의 눈썹이 순간 꿈틀댔다.
설마 이런 얘기가 튀어나오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는 듯이.
물론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자연스럽게 인상을 찌푸린 그가 되물었다.
"타락? 타락이라니, 이게 또 무슨 허무맹랑한… 아악!"
손가락이 여지없이 부러졌다.
"난 너희가 타락자라는 걸 이미 알고 왔어. 어설픈 연기는 그만해라. 너희 영주부터가 타락했는데, 그 장남의 심복인 네가 무고할 리가 있나. 자, 다시 시작하지."
이안이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그들과 함께하는 조건으로 무엇을 약속받았지? 불사? 힘? 권력?"
브래들리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안이 정말 전부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안이 그의 검지를 움켜쥘 찰나, 브래들리가 문득 내뱉었다.
"어떻게 알았지? 당신 말고도 그 사실을 아는 자가 더 있나?"
"글쎄. 사실 나도 다는 몰랐어."
"뭐…?"
"내가 아는 건, 네가 모시는 대공자가 타락했으리란 사실뿐이었지. 이젠 버차드 후작도 타락자라는 게 확실해졌군."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방금 네가 증명해 준 덕분에 말이야."
"이… 이런… 개자식이…!"
브래들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안이 그의 입에 다시 재갈을 물렸다.
"협조해 준 보답으로, 이제 단숨에 보내주지.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한 번에 편히 죽고 싶다면."
"으읍…!"
이안이 단죄의 검을 뽑았다.
브래들리의 눈이 터질 것처럼 충혈될 찰나.
"잠깐 멈추지."
데클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점점 굳어지던 그의 얼굴은, 이제는 어리둥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느 순간부터 대화의 맥락을 전혀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자를 죽이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겠지만, 내게 제대로 설명해 주는 게 순서 같은데."
브래들리의 앞을 막아선 데클란이, 웃음기 없는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보았다.
"고대수, 반란, 독립에 이어 타락자라니. 이게 다 무슨 말이지? 아버지가 왕국에 반란을 꿈꾸고 있으며, 심지어 타락하기까지 하셨단 말이냐?"
"그렇소."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아직 귀하도 모든 혐의를 벗은 것은 아니오. 그러니까…."
이안이 문득 말을 멈췄다.
잠시 미간을 좁혔던 그의 입가에, 이윽고 옅은 실소가 스쳤다.
"그래. 약속만 받은 게 아니었군."
"뭐…?"
멍하니 되묻는 데클란의 뒤에서 빠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브래들리를 구속하던 의자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뿌득, 빠득, 빠드드득-
뼈가 부러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이어졌다.
데클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솟아오르기 시작한 가운데, 득달같이 달려든 이안이 그를 끌어당겨 등 뒤로 내던졌다.
"도련님을 지켜라, 필립."
행동과 달리 차분한 목소리.
바닥에 자빠지려는 데클란의 팔을, 필립이 움켜쥐었다.
"제 뒤에 계십시오."
어느새 검을 뽑아 든 그가 굳은 얼굴로 내뱉었다.
대꾸조차 하지 않고 뒤를 돌아본 데클란의 눈이, 이내 찢어질 듯 커졌다.
뿌득, 빠각- 뿌드드득-
기괴한 형상으로 변이하고 있는 브래들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온몸의 근육이 증식하듯 커지면서, 피부가 찢어져 붉은 속살이 드러났다.
브래들리의 각진 얼굴은 종양처럼 일그러지면서, 부풀어 오르는 근육 사이에 파묻히고 있었다.
갑각류의 외피 같은 돌기가 그의 어깨와 옆구리를 뚫고 돋아났다.
쉭-
변이가 한창인 놈의 머리 위로, 이안이 솟구쳤다.
그의 손에 들린 단죄의 검이 날카로운 호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콰지직-!
브래들리의 어깨에 돋은 돌기가 이안의 검을 막았다. 검은 줄기를 반 이상 파고들었지만, 아예 절단하지는 못했다.
터질 것처럼 핏발이 돋은 브래들리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형편없는 일격이군… 흐… 흐흐."
저주파가 섞인 섬뜩한 목소리.
브래들리의 일그러진 얼굴에 희열이 번졌다.
"이것이… 힘인가… 흐… 흐흐흐. 나는 어리석었군… 이토록 강대한 힘을 앞에 두고도 고작…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였다니…."
"난 투명 인간 취급이냐, 근육몬 새끼야?"
검 자루를 쥔 채 돌기에 매달려 있던 이안이 내뱉었다.
브래들리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럴 리가…. 흐흐, 움직여도 상관없다… 편히 보내줄 생각은 없으니까…."
"창의력 없는 유언이군."
자루를 움켜쥔 이안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검신을 타고 불길처럼 푸른 빛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브래들리가 눈을 치켜떴다.
놈의 눈알이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신성…? 신성력이라고…?"
"그것도 진부하긴 마찬가지야."
내뱉은 이안이,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리쳤다.
번- 쩍!
신성력이 섬광처럼 폭발하고, 푸른 궤적이 브래들리의 몸을 가르며 떨어졌다.
검을 내리친 이안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착지했다.
"끄… 아… 아아악...."
어깨부터 사타구니까지 반으로 갈라진 브래들리가, 늘어지는 비명과 함께 좌우로 쓰러졌다.
흩뿌려진 피와 내장을 뒤집어쓴 채, 이안이 일어섰다.
그는 아직 빛을 머금은 검을 고쳐 쥐며 브래들리를 내려다보았다.
놈은 몸이 반으로 쪼개진 채로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고통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
더 덧붙이는 말은 없었다.
콰직! 콰직! 쩌억!
이안은 놈의 얼굴 근처, 뒤틀리고 비대해진 근육을 마구 내리쳤다.
신성력이 사그라들고, 검의 궤적마다 검붉은 핏물이 튀었다.
마침내 브래들리의 머리가 잘렸다.
난자된 살점 사이의 잘린 머리를 집어 든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넋이 나간 얼굴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데클란.
브래들리의 잘린 머리가 그의 발치로 굴러갔다.
"이제는 믿으시겠소?"
절대 인간의 형상은 아닌 브래들리의 머리를 응시하던 데클란이, 이윽고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너는… 아니… 너희들의 진짜 정체는 뭐지? 정말,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온 용병일 뿐인가?"
뭔가 말하려던 이안의 시선이 문득 필립에게로 향했다.
필립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가 결연하게 내뱉었다.
"이건 제 역할입니다만."
"…마음대로 해라."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이안이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그사이, 필립이 정중하게 검을 회수하며 입을 열었다.
"늪지대의 용 사냥꾼. 발크령의 해결사. 늑대 인간과 고대수, 목 없는 기사의 참수자이며, 무덤 숲 마경의 정화자."
이안의 인상이 점점 구겨졌다.
하지만 필립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희미한 미소까지 입가에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또한, 티르 엔의 사도이며 남부 국경의 집행자이자 아겔 란의 보검이신 메브 리우렐 경의 유일하며 공식적인 대행자. 이안 호프 나리입니다."
"...."
멍하니 입을 벌린 데클란이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가운데.
가슴에 손을 얹은 필립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저는 나리를 모시는 종자, 필립입니다."
#035화
골목을 지키던 패튼과 용병들은, 약속된 시간이 되자 브래들리의 판잣집으로 돌아왔다.
"도련님. 일은 다 끝내셨...."
장내로 들어선 패튼이 굳어졌다.
뒤따라 들어온 육손이와 패거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함께, 살풍경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토막 난 거대한 시체. 피와 내장, 살점이 사방이 흥건했다.
누가 이런 광경을 만들어 낸 건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장내의 세 사람 중 유독 이안만 피범벅이 되어 있었으니까.
데클란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마침 잘 왔어. 여길 좀 수습해 주겠어?"
안색은 다소 창백했지만,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말투.
재빨리 문을 닫은 패튼이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이게 다 뭡니까? …브래들리 경은 어디 있죠?"
"이 시체가 브래들리야."
데클란의 대답에, 패튼과 용병들이 어리둥절하게 시체를 돌아보았다.
"이게… 브래들리 경이라고?"
비대해지고 뒤틀린 근육과 징그럽게 생긴 돌기들. 거대한 덩치까지.
인간이라기보단 마수의 시체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타락자."
육손이 불쑥 내뱉었다.
그가 떨리는 입술로 덧붙였다.
"브래들리 경이 타락자였던 거야. 내 말이 맞습니까?"
이안의 눈치를 슬쩍 살핀 데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렀다.
명확한 실체를 아는 이는 거의 없었지만. 칼밥을 먹고 살다 보면 한 번쯤은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게 마련이었다.
검은 벽의 광기를 전염시킨다거나.
죽지도 못하게 될 수도 있다든가.
제국의 눈에 띄면 신성기사단이나 감찰단을 파견해, 주위의 모든 것들을 말살한다는 등의,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소문들.
그런데 오른델에. 그것도 지휘관 중 하나가 타락자라니.
"그럼 난 이만 돌아가겠소."
이안이 툭 내뱉은 건 그때였다.
용병들이 왔으니,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겸사겸사 데클란의 심문까지 끝마친 참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온몸이 너무 찝찝했다.
"잠깐만."
데클란이 황급히 그를 잡았다.
"시간을 조금 더 내주지 않겠어?"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았소?"
"이제 나를 의심하진 않는댔지."
"당장은 그렇소."
"그럼 알려 주지 않겠나? 이제부터 어쩔 건지."
"놈이 한 말을 들으셨잖소. 남은 타락자가 있으니, 처리해야지."
술렁이던 용병들이 얼어붙었다.
지하 수로의 마물에 이어 타락자까지 죽인 자가 내뱉은 말이 거짓일 리 없었다.
"아버지와 형님을, 모두?"
"...?!"
이어진 데클란의 말에는, 다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저마다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들으면 안 될 얘기를 듣고 있다고.
누군가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어느새 필립이 그 앞을 막고 서 있었다.
불신 가득한 눈빛을 한 채로.
"그렇소만."
"그렇다면… 며칠만 말미를 주지 않겠어?"
그러거나 말거나, 이안과 데클란은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말미?"
"말리려는 게 아니야. 다만, 하루아침에 영주와 후계자가 다 죽어 버리면, 영지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거란 얘기지."
"그건 내가 신경 쓸 바 아니오만."
"자네의 일이 조금 편해질 수도 있다고 한다면, 신경을 써 주겠나?"
"흐음…."
침음한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일단, 들어는 보겠소."
"내성에 잠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거야. 물론 너희들의 실력이면 충분히 해낼 수 있겠지만. 옳은 일을 하는데 도둑이나 암살자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 오명을 뒤집어쓸 필요도 없고."
"그래서?"
"정문으로 들어가자. 당당하게."
"…반란이라도 일으키겠단 거요?"
"반란이라니."
데클란이 미소 지었다.
"타락자를 심판하는 걸 어떻게 반란이라고 하겠어?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지."
"귀하가 영주 자리에 앉으시고?"
"그게 순리라면, 해야겠지. 나는 어둠에 손을 뻗을 생각도, 왕국에 반기를 들 생각도 없어. 왕국의 미래를 위해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 같은데."
뭔가 대단히 착각하고 있군.
피식한 이안이 말했다.
"왕국의 미래에는 관심 없소. 중요한 건, 귀하를 도와주면 내가 무엇을 얻게 되느냐지. 내가 저들을 죽이려는 것도, 그게 의뢰이기 때문일 뿐이오."
"아, 그래. 실리적인 걸 제시하란 거군. 내가 내리는 직위 따위엔 관심도 없을 테고…."
잠시 고민한 데클란이 말했다.
"무기는 이미 훌륭하니, 어울리는 방어구를 주는 건 어떤가? 성을 뒤지면 분명 좋은 게 있을 거야. 물론 돈도 주겠네. 넉넉하진 못해도 합당한 수준으로."
이안이 잠시 눈을 깜빡였다.
퀘스트 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서자의 복수.
이안은 수락을 선택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내뱉었다.
"네가 볼 땐 어떠냐, 필립? 이게 이치에 맞는 제안인가?"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에는 반드시 영주가 있어야 하는 법이죠. 버차드 후작과 그의 적자가 타락자였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국왕 폐하께서도 정당성을 인정하실 겁니다."
"그렇다는데. 후작과 대공자의 목까지 넘겨주시겠소?"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내 손으로 죽이게 해 준다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거든."
혈육을 죽이리란 말을 하면서도, 데클란에겐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오히려 바라 마지않던 일을 앞둔 것처럼 눈을 빛냈다.
물론, 이안은 그 속사정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계약은 성사되었소. 단, 완벽하게 준비하셔야 할 거요. 상황이 지저분하게 돌아가면, 나는 언제라도 가장 확실하고 손쉬운 방법으로 돌아갈 거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나저나, 이제 여기 이 친구는 나를 돕겠다는데…."
데클란의 시선이,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 용병들에게로 돌아갔다.
"너희들도 나와 함께해야지? 오른델의 타락한 영주와 가신들을 심판하고, 그 공로로 한 자리씩 꿰찰 기회인데 말이야."
그가 부드럽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용병들을 응시하는 눈만큼은 묘한 한기를 머금은 채였다.
몇몇이 마른침을 삼키는 가운데.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전 도련님을 모시기로 한 순간부터, 그런 미래를 항상 꿈꿨습니다."
"거, 재미있겠네. 손가락이 여섯 개밖에 없는 귀족이 될 기회잖아."
패튼과 육손이가 차례로 입을 열었다.
껄껄 웃은 패튼이 패거리들을 돌아보았다.
"뭘 쫄아 있어? 혼자서 타락자까지 쳐죽인 실력자가 함께 싸우겠다는데. 출세할 길을 병신같이 걷어찰 거냐?"
"그, 그럴 리가! 좋아, 해 보자고."
"까짓거, 그래! 해 봅시다!"
용병들이 그제야 함성을 지르며 호응했다.
어차피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합류하지 않는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게 되리란 것을.
고개를 끄덕인 데클란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좋아. 이안, 푹 쉬게. 준비는 나와 이 친구들이 할 거야. 자네는 자네가 하려는 일만 잘해 주면 돼. 계약 내용도, 잊지 말고."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만전을 기하시오. 귀하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을 테니까."
데클란의 미소가 짙어졌다.
"걱정 마. 난 평생,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가져 본 적 없었으니까."
***
이틀이 지났다.
변화는 조용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3할에 가까운 용병들이 소리소문없이 도시 밖으로 사라졌고, 판자촌 주민들의 얼굴에는 묘한 긴장감이 오갔다.
물론 저들과 함께 생활하지 않는다면 눈치채기 힘든 변화였다.
용병들은 여전히 많았고.
표면적으로는 모든 게 일상적이었으니까.
이안의 일과도 그랬다.
낮에는 소소한 의뢰들을 해결하고, 밤에는 식사와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다른 이들과 다른 부분은, 그의 여유는 연기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는 정말 서두르거나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종자의 입장은 또 달랐다.
"도련님은 오늘도 코빼기도 안 보이시는군요."
필립이 불만스럽게 읊조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심드렁하게 대꾸한 이안이 소시지를 입에 물었다.
놀랍게도 이 맛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서자이니 명분과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건 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정면 돌파는 무리입니다. 나리가 계시니 타락자는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다 해도… 영주군과 용병, 양쪽 다 타격이 클 겁니다."
"뭔가 생각이 있겠지. 도련님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테니까."
"짐작 가는 바라도 있으십니까?"
"짐작해서 뭐 하게? 때 되면 알게 될 텐데. 그리고 우리한테 중요한 부분도 아니야."
이안이 맥주잔을 들었다.
"우린 우리 일을 끝마치기만 하면 돼. 도련님의 계획이 뭐건, 원래 하려던 것보단 쉽고 편하겠지."
"…그러고 보니, 여쭤본 적이 없었군요. 원래 나리의 계획은 뭐였습니까?"
"하나는 외성 성벽을 기어 올라가서 내성까지 잠입하는 거였지. 경비병들과 다른 거주민들의 눈을 잘 피해서."
"…또 하나는요?"
"우리가 전에 가 본 길이 있잖아?"
멈칫한 필립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설마, 지하 수로요?"
"그래. 내성 안쪽까지 이어져 있을 테니까. 냄새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
질색하는 표정을 지은 필립이, 비장하게 덧붙였다.
"도련님의 계획을 믿어야겠군요."
"그러는 게 좋을 거다. 수틀리면 당장 오늘 밤이라도 내 계획대로 움직일 거니까."
"루 솔라시여, 부디…."
필립이 읊조리는 가운데.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인파를 뚫고, 데클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빈자리에 앉은 데클란이 미소 지었다.
"설마 그사이에, 우리의 계약이 없던 일이 된 건 아니겠지?"
"아직은. 귀하가 어떤 소식을 들고 왔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잘 됐군. 모든 준비가 끝났거든."
이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스쳤다.
"빠르시군. 미리부터 준비해 오셨던 것처럼."
데클란이 어깨를 으쓱였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두기만 했었지. 공교롭게도 그게 이번에 도움이 된 거고."
"그래서, 언제 시작하실 거요?"
"내일."
"내일 밤이요? 자정입니까?"
눈을 빛낸 필립이 물었다.
데클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밤이 아니라, 낮에 할 거다. 내일 정오. 종이 칠 때가 신호야."
"엥…? 밤이 아니라, 낮이라고요?"
"그래. 떳떳한 일이니, 루 솔라께서 지켜보시는 아래에서 해야지."
"허어…."
필립의 탄식이 길어졌다.
대낮의 반란이라니. 쉽게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피식한 이안이 물었다.
"우리 역할은 무엇이오?"
"자네들은 그냥 내 옆에 잘 붙어 있어 주기만 하면 돼. 자네들이 해야 하는 일을 하기 전까진."
"정말 그거면 되겠소?"
"그래. 만약 내 생각만큼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결전의 날을 앞둔 자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생기 넘치는 눈빛으로, 데클란이 미소 지었다.
"우리는 결국, 정문을 통해서 내성에 들어가게 될 거야."
***
데엥-
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던 이안은, 필립과 시선을 교환하고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그가 식당으로 나오자 무장한 용병들이 벌떡 일어섰다.
흥분과 두려움을 억누른, 번들거리는 눈빛들.
이안은 그들의 목례나 눈인사를 본 척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
하지만 용병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재빨리 달려간 필립이 여관 문을 열었다.
뭐 이렇게들 비장해?
이안은 내심 코웃음 치며 문을 나섰다.
"오. 딱 맞춰 나왔군."
데클란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 직후였다.
그가 패튼을 비롯한 심복들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사슬 갑옷은 물론, 원형 방패와 검까지 착용한 채였다.
고개를 까딱인 이안은 무리 맨 뒤편, 육손이가 몰고 있는 짐 마차를 돌아보며 데클란의 곁에 섰다.
"…이게 전부입니까?"
필립이 나지막이 물었다.
데클란을 따라온 자들과 여관의 용병들은, 다 합쳐도 서른 명 남짓에 불과했다.
평소보다도 더 적은 숫자.
데클란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그럴 리가. 곧 지원군들이 더 합류할 거야. 아주 많이."
판자촌의 골목을 지난 그가 외성의 정문으로 향하는 대로로 나섰다.
"...!"
필립의 눈이 커진 건 그때였다.
대로로 이어지는 거의 모든 골목에서 인파가 몰려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잡이 역할을 하는 용병들을 필두로 한, 판자촌의 주민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지원군입니까?"
데클란이 미소 지었다.
"그래. 대단하지?"
"고생 좀 하셨겠소. 이들을 합류시키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이안이 말했다.
현대인인 그는 신분 따위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지만.
이 세계의 인간들은 아니었다.
신분의 고하는 당연했고. 영주쯤 되는 귀족들은 신의 축복과 가호를 받는다고 여겼으니까.
당연히 그들에게 반하는 건 신성 모독이나 다름없었다.
주동자가 데클란이 아니었다면, 이건 성립조차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만큼 어렵진 않았어. 대부분 강제로 이곳에 이주했으니까. 그 과정에서 친우나 가족을 잃었고. 난 계기만 마련해 줬을 뿐이야."
태연하게 말한 데클란이 계속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행렬이 그를 따라 오른델 성으로 향했다.
성벽이 가까워지면서, 본래 오른델의 주민이었던 자들도 합류하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숫자였다.
성벽 안쪽에 사는 이들이나, 문을 걸어 잠그고 숨은 자들도 물론 있었지만.
어쨌거나 오른델의 백성 과반수가 동조하고 있는 셈이었다.
"브래들리가 한 짓을 알리셨군."
"저들도 진실을 알 권리가 있지. 내 형제와 친우에게 생긴 일이라면 특히."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도 데클란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정말 모든 걸 거셨군."
"그럴 만한 기회니까."
"그건 곧, 저들이 이번만 넘기면 된다는 뜻이기도 하오."
이만한 인원이 두 번 집결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
그전에 피바람이 먼저 불리라.
"그럴 일은 없지. 자네가 있으니까. 내 계획이 망해도, 자네는 자네가 할 일을 할 것 아닌가?"
"그건 그렇소만."
"그래서 자네의 성공이 내 성공이 되도록 준비했지. 그러니까 나는, 자네한테 완벽한 판을 깔아 주기만 하면 돼."
"호오."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그 부분에 방점을 찍다니.
훌륭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어차피 이건, 자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기도 하니까."
그를 돌아본 데클란이 미소 짓는 가운데.
"저, 정지! 멈추시오!"
성벽 위에서 외침이 울려 퍼졌다.
#036화
황망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는, 네눈박이 악어의 머리를 회수해 갔던 경비대장이었다.
"도련님! 대체 무슨 짓을 벌이신 겁니까?"
"도란 경, 가서 형님을 모셔 오시게. 가능하다면, 아버지도."
멈춰선 데클란이 말했다.
평소처럼 태연한 말투.
도란의 얼굴에 당황이 짙어졌다.
"이, 이런 일을 벌이신 이유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 이건, 어떻게 봐도 영주님께 반기를 든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오른델의 지휘관 중에선 그나마 데클란과 가까운 사이였다.
가장 말단이기도 하고, 판자촌을 오가며 마주칠 일이 많았던 덕분이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염려를 느낀 데클란이 미소 지었다.
"그 반대일세. 오른델의 백성들은 물론 왕국까지 배반한 건 오히려 아버님과 형님이시니까. 심지어 신들까지 배반하고 타락하셨지."
"타, 타락…?!"
도란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기, 기다리십시오! 이 이상의 접근은 불허하겠습니다!"
소리친 그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팔짱을 낀 데클란이 성벽 위의 병사들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오히려 초조해하는 건 경비병들이었다.
성 앞에 모인 모든 이들이 말없이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대부분은 아는 얼굴이었다.
만약 이게 반란이라면, 그들에게 무기를 겨눠야 한다는 뜻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 위로 누군가가 절뚝이며 올라왔다.
기다란 흑단목 지팡이를 짚은, 부드러운 인상의 중년인.
버차드 후작이었다.
'저 새끼, 게임에선 아들을 잃은 아버지 연기를 아주 잘 했었지.'
속지 말고 죽였어야 했는데.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는 가운데.
"오셨습니까, 아버지."
데클란이 가볍게 몸을 숙였다.
좌중을 돌아본 후작이 말했다.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냐, 아들아?"
"아버지와 형님께서 저지른 부정과 타락을 밝히기 위해서지요."
"찬란한 루 솔라께서 지켜보고 계시거늘. 어째서 그토록 불경한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이냐."
"이미 다 알고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백성들을 이주시키신 것이 왕국에 반기를 들기 위해서라는 것도…."
데클란이 말을 끌었다.
그사이, 판자촌 주민들의 눈에 원망과 분노가 번졌다.
"그 과정에서, 영지의 병사들을 마물의 제물로 바치셨다는 것도요. 아버님과 형님이 희생시킨 이들의 명단이, 제 손에 있습니다."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낸 데클란이, 거기 적힌 이름을 하나씩 외쳤다.
오른델 주민들의 얼굴에 슬픔과 분노가 서리고, 성벽 위의 병사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일었다.
그들도 아는 이름들이었으니까.
"무슨 근거로 그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는 거지?"
뒤이어 외친 건, 버차드 후작이 아니었다.
장남인 메이슨 버차드가 성벽 위로 올라온 것이다.
갑옷을 걸쳐 입은 그의 뒤로 쇠뇌를 든 병사들이 도열했다.
"아버님께서는 네 천한 핏줄을 아시면서도 자식으로 거두셨거늘. 은혜를 누명으로 갚다니. 그깟 명단으로 아버님을 반역자이자 타락자로 몰고 간단 말이냐?"
살기 가득한 목소리.
서늘한 푸른 눈이 좌중을 훑었다.
공기가 얼어붙는 가운데, 데클란이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저도 반갑습니다, 형님. 물론 물증도 있지요. 형님의 심복인 브래들리 경이, 모든 것을 실토했으니까요."
"뭐라고…?"
"심지어 브래들리 경은 자신의 타락한 본모습까지 제 앞에서 드러냈습니다. 보여 드릴까요?"
데클란이 손가락을 튕겼다.
인파가 갈라지고, 육손이가 짐 마차를 몰고 앞으로 나왔다.
마차가 성벽 앞에 멈췄다.
뒤따라간 용병 몇이 짐칸에 실린 커다란 관을 들었다.
관뚜껑이 열리고, 안에 든 것이 땅에 쏟아졌다.
"윽…!"
내용물을 본 백성과 병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토막 난 시체와 살점들이 흩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역겨운 썩은 내까지.
비위가 약한 자들은 고개를 돌려 토하는 가운데, 데클란이 외쳤다.
"똑똑히 보시오. 이 괴물이 바로 브래들리 경이니!"
그제야 시선을 피하던 이들조차 다시 시체를 살폈다.
인간보다는 마물에 가까운, 끔찍하게 뒤틀린 형체.
"브래들리 경이 모든 것을 실토했소. 아버지와 형님이 타락하였으며, 자신 역시 그리되었다고! 자신이 저지른 모든 부정 역시, 아버지와 형님의 명령으로 이뤄졌다고!"
데클란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메이슨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 것은 그 직후였다.
"치밀하게 준비했구나! 그래, 누명을 씌우려면 그 정돈 해야겠지! 하지만 그게 브래들리 경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 내 눈엔 마물의 시체로밖엔 보이지 않는데."
그가 데클란을 노려보았다.
"너야말로 무고한 브래들리 경을 죽이고, 그에게도 누명을 씌운 것이 아니냐? 나와 아버님께 지금 그리하고 있는 것처럼!"
"증인이 있습니다."
"내가 바로 그 증인이오!"
"나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소!"
패튼과 육손이를 비롯한 용병들이 손을 들었다.
메이슨이 코웃음 쳤다.
"다 네놈의 용병들이군. 저것들의 증언이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용병들의 인상이 구겨지는 가운데.
"그럼, 제 오라비는요?"
백성들 사이에서 걸어 나온 소녀가 문득 외쳤다.
"아겔 란에서 잘살고 있다던 오라버니의 신분패가, 왜 숲에 버려져 있었던 건가요…?"
이안이 회수한 신분패.
데이브의 여동생이었다.
"제 형님은 잘 있는 겁니까?"
"제 친구는요?! 연락이 없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메이슨의 얼굴이 붉게 물드는 가운데.
"너희들의 마음은 잘 알았다. 어째서 이런 의심을 품게 되었는지도."
후작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장남과 달리 너그러운 말투.
"정말 그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사건에 의해 희생당한 것이라면, 조사단을 꾸려 파견하겠다. 내 의도에 대한 의혹도, 폐하께 직접 수사를 요청하도록 하지. 우리가 타락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 역시… 제국 교단의 감찰과 판결을 요청하겠다."
차근하게 말을 이은 그가 군중들을 한차례 돌아보고는 덧붙였다.
"이만하면 노기를 가라앉힐 수 있겠느냐?"
"...."
"...."
당장이라도 성벽으로 달려갈 것 같던 백성들이 움찔했다.
정말 그들의 요청을 전부 들어줄 줄은 몰랐으니까.
"그, 그렇게 해 주신다면야…."
누군가가 중얼댔다.
'역시. 정치인들의 구라는 세상을 가리지 않는군.'
이안이 심드렁하게 코웃음 쳤다.
아까 그가 우려했던 상황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이제 만족하겠지? 그렇다면 돌아가라! 계속 이곳에 남는 놈들은, 이제부터 반역자로 간주할 테니!"
소리친 메이슨이 손을 들었다.
병사들이 쇠뇌를 겨눴다.
백성들의 얼굴에 공포가 번졌다.
완전히 분위기가 넘어간 상황.
하지만 데클란의 얼굴에는, 반대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방금, 국왕 폐하의 수사와 교단의 판결을 받겠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그리 말했다, 아들아."
후작이 마주 웃으며 말했다.
데클란의 미소가 짙어졌다.
"잘 되었군요. 마침 제가, 그에 걸맞은 인물을 알고 있거든요."
"걸맞은 인물…?"
후각의 미간이 좁아졌다.
데클란이 필립을 바라보았다.
"전에 했던 그거, 다시 해 줄 수 있겠나? 이왕이면, 뒷부분만."
"그거…? 아, 그거 말씀이시군요."
필립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거라면, 설마.
이안의 미간이 좁아지는 가운데, 데클란이 그에게 한쪽 눈을 찡긋댔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어울려 주게."
"...."
입맛을 다신 이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용병…?"
"지하 수로의 괴물을 처치한, 그자 같은데."
그를 알아본 병사들이 수군댔다.
이안의 명성은 이미 오른델 전체에 퍼져 있었다.
"걸맞은 인물이라더니. 또다시 용병이군."
메이슨이 조소를 머금을 찰나.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이안의 옆에 선 필립이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티르 엔의 사도이며 남부 국경의 집행자, 아겔 란의 보검이신 메브 리우렐 경의 유일하며 공식적인 대행자이자, 엄정한 여신의 총애를 받는 심판자! 이안 호프 경입니다!"
…뒤에 뭐가 더 붙었는데?
이안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립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저는 경을 모시는 종자, 필립입니다."
"...."
메이슨과 후작의 입이 순간 벌어졌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
필립에게 고개를 끄덕인 데클란이 덧붙였다.
"또한, 호프 경은 브래들리의 타락을 직접 목격했고, 심판한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이만하면 자격은 차고 넘치는 것 같은데요?"
"…말도 안 되는."
이윽고 내뱉은 버차드 후작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지금까지의 너그러운 표정이 거짓말처럼.
"공식적인 대행자? 티르 엔의 심판자? 그자가 성기사라도 된단 말이냐?"
"글쎄요. 하지만 확실한 건, 두 분에 대한 판결은 엄정한 여신께서 직접 내리시리란 겁니다."
데클란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제 판이 다 깔렸다는 듯이.
희미하게 미소 지은 이안이, 보란 듯 단죄의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을 타고 푸른 신성력이 불길처럼 번졌다.
"오… 오오...."
"성기사. 정말 성기사시다…."
빛의 검을 움켜쥔 듯한 형상에, 병사와 백성들이 탄식을 흘렸다.
몇몇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기까지 했다.
후작과 메이슨의 얼굴에도 경악이 번져나가는 가운데.
"...."
이안은 설핏 미간을 좁혔다.
날을 타고 솟구치는 신성이 평소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검신 내부에서 싸늘한 분노가 전해졌다.
…아, 그래. 이걸로도 엿볼 수 있단 거지.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버차드 후작을 올려다보았다.
후작의 눈썹이 꿈틀댄 직후,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이내 질주로 바뀌었다.
"쏴, 쏴라! 왜 구경만 하는 것이냐?"
버차드 후작이 뒤늦게 소리쳤다.
하지만 쇠뇌를 든 병사들조차 망설이고 있었다.
"하, 하지만, 신의 사도입니다…!"
누군가 탄식하듯 말했다.
메이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희가 누굴 섬기는지 잊지 마라! 당장 저자를 저지해!"
검을 뽑아든 그가 덧붙였다.
"명령을 따르지 않는 놈들은 이 자리에서 목을 베겠다!"
그제야 병사들이 이안을 조준했다.
떨리는 손길들.
"쏴라!"
피피피핏-!
쇠뇌가 일제히 발사됐다.
대부분 조준이 형편없었지만, 일부는 정확하게 이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슈확-!
하지만 이안의 근처까지 날아간 볼트들은 보이지 않는 바람에 휘말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휘몰아치는 방벽.
어느새 전신에 바람을 두른 이안이, 쏜살같이 성벽에 닿았다.
타타탓-!
성벽을 연달아 박찬 이안이 새처럼 솟구쳤다.
바람이 그의 몸을 힘껏 떠밀었다.
허공에서 잠시 멈춘 이안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메이슨과 눈을 마주쳤다.
"여신께서 내린 판결은…."
신성력이 가득 맺힌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며, 그가 덧붙였다.
"사형이다."
눈부신 섬광이 메이슨을 향해 떨어졌다.
허공에 새겨진 푸른 궤적이 메이슨이 치켜든 검을 쪼개고, 그 너머의 팔뚝을 꿰뚫었다.
메이슨의 오른팔이 피를 흩뿌리며 잘려 나갔다.
"아아악-!"
메이슨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이안의 시선은 저만치에 선 후작에게로 향해 있었다.
'저자가 미쳐 날뛰면 좋겠는데. 할 수 있겠냐?'
손가락에 따끔한 감각이 이어졌다.
신성력에 질색하던 늪지의 원한.
놈의 분노가 이안의 피를 매개로, 후작을 향해 뻗어나갔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현상은 실제보다 훨씬 초라했다.
망령화되어 후작에게 날아간 놈이, 다시 실뱀의 형태로 돌아와 목덜미를 깨문 것에 불과했으니까.
후작은 이안의 난입에 놀라, 따끔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개자식이-!"
이안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후웅, 메이슨이 휘두른 팔이 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대로 뒷걸음질 친 메이슨이, 잘린 팔뚝을 움켜쥐었다.
"뭣들 하느냐! 다들 이자를 막아!"
"...."
이안은 주위의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두려움 가득한 눈빛들.
신성력 맺힌 검을 치켜든 그가 내뱉었다.
"오늘 흘릴 피는 타락자들의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마, 맞습니다."
챙그랑, 가장 가까이에 있던 병사가 창을 떨어뜨렸다.
다른 병사들도 손에 든 쇠뇌와 창을 떨어뜨리는 가운데.
"도란 경! 병사들을 물리시오!"
데클란의 외침이 이어졌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경비대장이 소리쳤다.
"경비병들은 모두 물러나라! 정규군 모두 물러나시오! 이건 우리가 낄 싸움이 아니니!"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물러나기 시작했다.
메이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 내성으로 물러 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님!"
주춤주춤 물러나며 외친 그가 고개를 돌렸다.
"아버님…?"
후작의 상태를 확인한 그의 눈이, 이내 찢어질 듯 커졌다.
#037화
후작의 상태가 얼핏 보기에도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목과 얼굴을 타고 새카만 핏줄이 거미줄처럼 돋아나고 있었고.
핏발 선 눈으로 주위를 쉬지 않고 두리번대고 있었으니까.
지팡이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늪지의 저주가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메이슨이 물었다.
"아버님, 왜, 왜 그러십니까?"
착란 상태인 후작이 소리쳤다.
"이, 이게 보이지 않는 것이냐? 병사들에게서 빛나는 여신의 증표가. 창과 활에 맺힌 신성이…?"
"그게 대체 뭔…."
되묻던 메이슨이 숨을 멈췄다.
이안을 본 후작의 눈동자에 자주색 마력이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야, 이제야 모든 게 명확하군! 네놈, 단순한 성기사가 아니구나! 티르 엔, 그 망할 여신의 화신이었어!"
고오오-
전신에 마력을 머금은 후작이 일갈했다.
"웃기지 마라…! 나는 네년의 심판 따윈 받지 않을 것이니!"
그를 바라보던 백성들과 병사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여, 영주님이 정말 타락하셨다!"
"도련님의 말씀이 전부 사실이었어…!"
이안의 입가에도 비로소 후련한 미소가 번졌다.
이 오글거리는 성기사 흉내를 계속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어째서… 제기랄…!"
탄식한 메이슨이 뒷걸음질 칠 찰나.
이안이 후작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직 옅은 신성력을 머금은 검이 후작의 목을 노리고 뻗어나갔다.
후작이 짚고 있던 지팡이를 쿵, 내리친 건 그때였다.
푸확-!
그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마력의 파장이 이안을 튕겨냈다.
이안이 성벽 끄트머리를 간신히 부여잡고 매달리는 사이.
"어억…?! 윽, 으윽, 그그극…!"
"컥, 크억…!"
동심원을 그리며 번진 파장에 휩쓸린 병사들의 몸이, 기괴하게 꺾이기 시작했다.
섬뜩한 뼛소리. 전신에 핏발이 돋고 눈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성벽 안쪽의 병사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운 좋게 마력 잠식을 피해간 병사들이 눈을 끔뻑인 것도 잠시.
"애들 이러는… 으헉?!"
관절이 뒤틀린 병사들이 그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콰득! 콰직-!
"아악-! 미친! 놔! 놓으라고!"
"으아악! 제기랄! 뒈져!"
성벽 위에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저렇게까지 본색을 드러내실 줄은 몰랐는데…."
그 광경을 바라보며 중얼댄 데클란이, 이윽고 검을 뽑아 들었다.
"백성들은 뒤로 물러나라! 패튼! 다 끌고 따라와!"
그가 용병들을 이끌고 성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사이.
"마법은 아닌 것 같은데. 괴상한 재주를 숨기고 있었네."
중얼대며 성벽 위로 올라선 이안이 몸을 날렸다.
눈 전체가 자주색으로 물든 후작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콰직-!
이안의 검이 손쉽게 막혔다.
후작의 손은, 어느새 피부가 벗겨지면서 마물의 그것처럼 변이되고 있었다.
검은 핏발이 돋은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공허의 참된 신께서 하사한 태초의 힘이다…. 너희 같은 가짜 신들과는 다른-"
펑-
이안의 검에서 소리 없는 폭발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진공 폭발.
아주 작은 범위에 일어난 폭발이었지만, 후작의 지팡이와 지팡이를 쥔 손을 피 보라만 남긴 채 날려 버리기엔 충분했다.
후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진 순간, 드러난 공간으로 이안의 검이 날아들었다.
콰직-!
후작의 옆얼굴에 틀어박힌 검날이 광대를 지나 코에서 멈췄다.
"...!"
치켜뜬 후작의 눈이 경련했다.
그를 마주 보는 이안의 눈동자에 잿빛 마력이 휘몰아쳤다.
"주절댈 시간에 변이나 했어야지."
서걱-
날을 타고 번진 바람 칼날이, 후작의 얼굴을 반대쪽 광대까지 깨끗하게 갈라 버렸다.
잘려 나간 후작의 머리가 스르륵,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잘린 단면에서 피가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가운데.
"마… 법…?"
코 아래만 남은 후작의 몸이, 탄식 같은 단말마와 함께 허물어졌다.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기계적으로 달려들어, 쓰러진 후작의 목을 기어코 잘라냈다.
후작의 몸이 축 늘어졌다.
"후우…."
비로소 숨을 내쉰 이안이 검을 늘어뜨렸다.
…깨끗하게 잘라내고 싶었는데.
혀를 찬 그가 두 개로 나뉜 후작의 머리를 각각 주워드는 사이.
"나리. 벌써 끝내신 겁니까?"
헐떡이며 달려온 필립이 그의 곁에 멈춰 섰다.
교전이 있었던지 벌써 얼굴에 피가 튄 채였다.
"아직. 잃어버리지 마라. 후작의 머리니까."
이안이 후작의 머리를 넣은 천 주머니를 내밀었다.
"가서 병사들을 도와."
주머니를 허리에 단단히 묶은 필립이 덧붙이는 말 없이 달려 나갔다.
이제야 좀 쓸 만해졌네.
피식한 이안은, 저만치에서 달려오는 데클란을 돌아보았다.
"병사들을 구하는 것에 집중해! 도란 경! 그대가 병사들을 지휘하시오! 다른 지휘관은 아무도 믿을 수 없으니!"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며 다가온 데클란이 그를 마주 보았다.
"이안, 괜찮나?"
"보다시피. 후작은 죽었소."
"아버님께서 이러실 줄은 몰랐는데. 설마, 자네가 뭔가 했나?"
"글쎄. 영업 비밀이오."
"그래. 그게 뭐건, 덕분에 일이 쉬워졌어."
데클란이 성벽을 훑어보았다.
용병들이 합류하면서, 난전의 무게추가 그들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형님은 어디 계시지?"
"후작이 본모습을 드러낸 순간 도망쳤소. 내성으로 달려가던데."
"아, 그래…? 내성엔 아버님과 형님의 수족들이 아직도 많을 텐데. 귀찮게 됐군."
데클란의 미간이 좁아지는 가운데.
검을 고쳐 쥔 이안이 내뱉었다.
"성에 도망칠 만한 뒷문이 있소?"
"내성 옆에는 마구간으로 이어지는 쪽문이 있고, 마구간에도 바로 말을 몰고 나갈 수 있는 뒷문이 있지. …설마, 형님이 성을 포기하고 도망칠 거라고 보는 거야?"
"남아 있어 봐야 죽을 걸 알 테니까. 설명은 이쯤 하고."
내성 쪽으로 시선을 돌린 이안이 덧붙였다.
"안내하시오. 형님의 목을 직접 베고 싶다면."
"그렇다면 기꺼이 앞장서지."
성벽의 정리를 끝내면 내성을 포위한 채로 대기하라고 외친 데클란이, 계단으로 달려갔다.
***
"빌어먹을…!"
벌컥, 쪽문을 박차며 뛰어나온 메이슨이 이를 갈았다.
하인들이나 오가는 길로 도망을 쳐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아버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붕대를 감은 오른 손목을 만지며 아직 소란스러운 성벽 쪽을 돌아본 그가, 이내 소리쳤다.
"빨리 움직여라! 여기서 뒈지고 싶지 않다면!"
"예, 예, 대공자!"
짐가방을 멘 채 그를 따라 나온 종자와 기사가 머리를 숙였다.
메이슨의 심복이자, 그를 통해 심연의 세례를 받은 타락자들.
그들은 메이슨의 턱짓에 재빨리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나, 나리. 이게 다 무슨… 커헉."
겁에 질린 채 다가오던 마구간지기를 망설임 없이 찔러 버린 기사가 종자에게 손짓했다.
종자가 그들이 타고 갈 말을 꺼내러 마구로 달려갔다.
"아버님의 말로 가져와라. 오른델에서의 마지막이 이 똥 냄새나는 마구간이라니… 제기랄."
마구간으로 들어서며 메이슨이 뿌득, 이를 갈았다.
데클란. 그 천한 놈이 성기사를 데리고 올 줄이야.
놈이 영주 자리에 앉을 것을 상상만 해도 속이 뒤집혔다.
"진작 죽였어야 했는데. …그래 봐야 잠깐일 거다. 내가 아겔 란에 도착하면 모든 게 달라질 테니까."
메이슨이 맹세하듯 읊조렸다.
"그 늙은 사슴도 오른델을 포기할 순 없을 테니. 병력을 내줄 수밖에 없겠지…."
야심차게 눈을 빛낸 것도 잠시.
메이슨의 미간이 다시 좁아졌다.
"뭘 꾸물대고 있는 거냐? 내 말은 어디에…."
뒤를 돌아본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가슴 한복판에 검날이 삐죽 튀어나온 기사가, 저만치에서 입을 뻐끔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를 꿰뚫려 신음조차 내지 못하던 그는, 검날이 쑥 빠져나가자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 뒤로 이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허억…!"
그의 새카만 눈을 마주한 제이슨이 숨을 들이켰다.
아랑곳 않고 쓰러진 기사의 목을 힘껏 내리쳐 잘라 버린 이안이, 비로소 미소 지었다.
"방금 한 얘기, 다시 듣고 싶은데."
"네, 네놈, 언제...!"
메이슨이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그의 시선이 마구간을 황망하게 훑었다.
불안하게 콧김을 뿜어 대는 말들.
그리고 마구 앞, 기둥에 기대듯 주저앉아 있는 종자.
"그렇게 보셔도 도와주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형님."
기둥 옆으로 모습을 드러낸 데클란이, 종자의 목을 후려치듯 잘랐다.
잘린 머리가 굴러갔다.
미간에 깊숙이 박혀, 자루만 보이는 단검.
"데, 데클란, 이 배은망덕한 놈!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그러는 형님은, 신을 저버리시고도 무사할 줄 아셨습니까?"
툭, 메이슨의 등이 마구간의 뒷문에 닿았다.
그의 시선이 빗장으로 향한 순간.
"안 그러는 게 좋을 거야. 남은 왼손이라도 지키고 싶다면."
느긋하게 다가오던 이안이 말했다.
모멸감에 이를 간 메이슨이, 왼손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웃기지 마라! 나도 두 번 당할 생각은 없으니!"
"부전자전이란 말이 딱이군."
이안이 입꼬리를 당겼다.
"네 아비도 본 모습을 드러낼 시간에 나불대다가 죽었거든."
"뭐… 라고…?!"
메이슨의 눈에 핏발이 돋았다.
이안이 그를 향해 쇄도한 건 그 직후였다.
채앵-!
메이슨이 그의 검을 막았다.
왼손으로도 상당히 능숙한 움직임.
이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는 짓도 똑같군."
퍼엉.
소리 없는 폭발이 일었다.
메이슨의 검이 튕겨 나가고, 육편이 흩날렸다.
"아, 아아악-! 내 손! 내 손이!"
양손을 다 잃은 메이슨이 울부짖었다.
이안이 비웃듯 덧붙였다.
"그러니까 진작 변신했어야지. 난 너희처럼 되다 만 것들은,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힘을 끌어내지 못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거든."
물론, 변이하는 걸 기다려 줄 생각 따윈 애초에 없었지만.
콰직!
입술만 올려 미소 지은 이안이 메이슨의 한쪽 발목을 내리쳤다.
"아아악-! 아악!"
메이슨이 바닥을 굴렀다.
변이할 수 없도록 계속 고통을 줄 생각이었다.
푹, 메이슨의 반대쪽 허벅지에 검날이 박혔다.
발작하듯 몸을 떠는 메이슨의 머리채를 움켜쥔 이안이 말했다.
"맘 같아선 내 손으로 목을 날리고 싶지만. 묻는 말에 솔직하게만 대답하면 참아주지."
"뭐, 뭐가 듣고 싶은 거냐…?"
"늙은 사슴이, 누구지?"
"그, 그건… 아으윽-!"
이안이 검을 비틀자, 주저하던 메이슨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안의 눈길에는 일말의 온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원하는 답을 끌어낼 생각뿐.
게다가 늙은 사슴이라는 말은,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안돌프… 그냥 헛소릴 한 게 아니었구만.'
저주받은 안돌프. 그가 유언으로 남긴 말도 그것이었으니까.
이제야 그게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남은 건 그 이름을 직접 듣는 것뿐.
"아겔 란의 귀족 같던데. 한 번 더 묻게 하면 허벅지를 자를 거다. 늙은 사슴이 누구지?"
"브란트 공작…!"
메이슨이 토하듯 내뱉었다.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브란트면, 왕족일 텐데?"
"그래…! 레지스 브란트. 나와 아버지는 그를 섬긴다…."
"그가 늙은 사슴이고?"
메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원하던 이름이 나왔으니까.
레지스에게 그런 별칭이 있다는 것까진 몰랐지만.
"레지스 브란트? 폐하의 작은아버지이자 왕국의 발이라 불리는 그 브란트 공작이, 타락자란 겁니까?"
데클란이 놀란 듯 물었다.
메이슨이 킬킬댔다.
"그러니 왕국을 손에 넣으신 거지. 왕은 아무것도 모르는 머저리다. 그저 우리가 내는 세금과 정보만 받아먹으며, 그 어떤 전쟁이라도 이길 수 있다고 믿는 병시… 읍."
이안이 메이슨의 턱을 움켜쥐었다.
"제보 고맙군. 이제 그 혀는 필요 없겠어."
"...?!"
메이슨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데클란이 이안의 곁에 주저앉았다.
"이안.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말씀하시오."
"형님의 혀도 내게 양보해 주게."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
메이슨이 말이 다르지 않냐는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약속대로, 나는 참고 있잖아? 네 아우가 참지 않을 뿐이지."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읍…!"
데클란이 메이슨의 턱을 콱 움켜쥐었다.
"제가 얼마나 오늘을 기다렸는지 모르실 겁니다, 형님."
메이슨의 공포에 질린 눈을 응시하면서, 그가 미소 지었다.
"형님이 저와 어머니가 사는 집에 독을 탄 음식을 보낸 그 날부터니까. 벌써 몇 년이나 됐군요."
"...!"
"어머니는 그것도 모르고, 아버님이 선물을 보내셨다며 좋아하셨죠."
좋은 추억을 이야기하듯 조곤조곤한 말투.
하지만 메이슨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제가 음식을 먹지 못하게 몸을 던져 막으셨습니다. 입에 피거품을 물면서도요. 나중에 보니 혀를 깨무셨더군요. 거의 끊어질 만큼. 절 살리려고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데클란이 단검을 메이슨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형님께도 어머니가 느끼셨을 고통을 꼭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려던 메이슨의 노력은, 이안이 허벅지에 찌른 검을 가볍게 비튼 것만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손과 발, 혀가 잘린 채 끌려 나온 메이슨 버차드는, 그의 타락한 본 모습을 드러낼 기회도 가지지 못한 채 목이 잘렸다.
내성 안팎의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새로운 오른델의 영주인, 데클란 버차드의 손에 의해서.
#038화
오른델 내성.
이안은 칙칙한 복도를 걸었다.
내성에 발을 들인 그는, 가장 먼저 후작과 대공자의 침실을 뒤졌다.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다들 그를 티르 엔의 성기사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를 신경 쓰지 못할 만큼 바빠서이기도 했다.
데클란은 간이로나마 후작 작위와 영지의 통치권을 승계받는 절차를 진행해야 했고.
용병들은 후작과 대공자의 심복들을 분류하고, 타락자를 가려내 처리하고 있었다.
사실상의 숙청 작업.
쿠데타가 성공했으니 당연히 이어져야 할 과정이었다.
"피비린내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군요."
뒤따라 걷던 필립이 말했다.
이안이 태연하게 말했다.
"곧 구린내에 덮일지도 모르는데, 그것보단 낫지."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지하는 내일 뒤지면 안 되겠습니까? 오늘은 전투도 있었고, 후작과 대공자의 방을 수색한 거로 충분할 것 같은데요. 물증이 제 발로 도망가진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 성에 도적들이 득시글한데."
"…아."
용병들을 떠올린 필립이 짧게 탄식했다.
지하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에 발을 들이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오늘은 다들 얄팍한 정의감이나 사명감에 취해 있지만, 내일만 돼도 다를 거다. 물증이 엄한 놈들의 손에 들어가면, 우리만 귀찮아져."
"하긴. 뭐가 숨겨져 있을진 몰라도, 남김없이 챙겨가야 합니다. 솔직히, 저도 믿기 힘들거든요."
벽면의 촛불들이 필립의 얼굴에 흐릿한 음영을 만들어 냈다.
"공작 각하가 타락자라니…. 아마 물증 없이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겁니다."
"평판이 좋은 작자인 모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