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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 8

#062화

"이런, 시부럴…!"

고개를 빼고 뒤를 돌아본 미구엘이 탄식했다.

그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형씨, 급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그거, 언제 쓰실 거요…? 아무리 형씨라도 칼만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소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이안이 기병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덧붙였다.

"강까진 얼마나 걸리지?"

"십 분…? 그보다 조금 더 빠를 수도 있소."

"어떻게든 다리까지 가라."

"그다음은?"

"…죽여야겠지."

어떻게? 거기까진 이안도 확실히 생각하지 않았다.

세세한 계획까지 세우기엔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고, 변수도 많았다.

다만 지금 마법을 써서 좋을 게 없다는 건 확실했다.

여기서 추적자들이 도망치면 따라잡을 방법이 없었고, 다음번엔 마법사를 상대할 준비까지 철저하게 해 올 게 분명했다.

그가 마법사라는 사실이 천칭 상단에도 알려지리란 건 덤이었다.

제국에 발을 들이지도 않은 시점에, 제국의 거대 상단에 정체를 노출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마법은 강 건너에서.

그리고 그가 마법사라는 걸 아는 자들은 전부 죽여야 했다.

"알겠소. 그럼 어떻게든… 이런."

고삐를 후려치던 미구엘이 인상을 구겼다.

마차의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마갑의 마석들이 점멸하고 있었다.

"하필 지금… 시간 좀 끌어 주시오."

내뱉은 미구엘이 달리는 말의 등 위로 위태롭게 올라탔다.

마석들은 하나하나 손수 갈아 끼워 줘야 했다.

"말처럼 쉽진 않은 일인데…."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마차 뒤로 걸음을 옮겼다.

로브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 박혀 있던 루시가 그를 바라보았다.

뭘 미안해하고 난리야.

심드렁하게 피식댄 이안이 후면 맨 위 칸막이를 검 무게추로 후려쳤다.

많은 이들이 오르내리며 덜렁대던 판자가 떨어져 나갔다.

저번에 증축한 판자.

그래도 아직 밖에선 미구엘의 뒤통수가 보이지 않았다.

이안은 낮아진 칸막이 위로 훌쩍 올라섰다.

발을 굴러 내구성을 확인한 그는, 이윽고 하이람 기병들을 다 따라잡은 상단 기병들을 바라보았다.

검은 갑옷과 투구. 마갑.

전에 만났던 놈들과의 차이점이 비로소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판금과 사슬을 정교하게 이어붙인 건 같았지만, 어디에도 마석이 박혀 있지는 않았다.

'그래. 아무리 제국의 거대 상단이라도, 모든 경호병에게 마법 무구를 제공할 순 없겠지.'

인공적으로 제작한 마법 무구는, 당연히 엄청나게 비쌌다.

갑옷에 마석 박힌 놈들만 조심해야겠군.

생각하며, 이안은 보란 듯 단죄의 검을 고쳐 쥐었다.

단죄의 검은 피와 기름으로 번들대고 있었지만, 여전히 예리했다.

"...?"

그때, 기병들 사이로 누군가 앞서 나왔다.

커다란 덩치와 민머리.

한쪽 눈 아래로 고대어 문신이 새겨진 자였다.

갑옷과 마갑에 박힌 마석과, 등에 멘 커다란 양날 도끼가 반짝였다.

이안은 등 뒤로 왼손을 넘겨, 아공간에서 투척용 단검을 네 자루 꺼내 들었다.

세 자루는 가슴 밴드의 빈 단검집에 끼워 넣은 그가, 마지막 한 자루는 역수로 쥔 채 놈을 바라보았다.

"거, 눈빛 한번 살벌하군."

웃음 지으며 말한 대머리가 턱을 까딱이며 덧붙였다.

"난 올레그다. 네가 죽인 카일과 케네스의 동료지."

"동료들 뒤를 따라가고 싶어서 왔나?"

이안이 내뱉었다.

딱히 말을 섞고 싶진 않았지만, 시간을 끌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 했다.

마차 속도가 줄었으니, 저놈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럴 생각은 없다. 딱히 죽은 놈들의 복수를 할 생각도 없고. 널 죽이는 건 내 역할도 아니야. 다만…."

그가 허리춤에서 기역 자로 꺾인 쇳덩이를 꺼냈다.

표면에 검게 음각된 문양들이 설핏 드러났다.

…저거, 부메랑인가?

이안이 인상을 찌푸린 그때.

"나도 맛은 좀 보고 싶긴 하군."

동시에 그가 부메랑을 쥔 손목을 가볍게 털었다.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부우웅-!

다음 순간, 은색 원반처럼 회전하는 부메랑이 이안의 코앞에 날아들고 있었으니까.

"...!"

까앙-!

이안이 부메랑을 발작적으로 쳐냈다. 하필, 휘몰아치는 방벽도 펼쳐 놓지 않은 채였다.

튕겨져 나간 부메랑이 그대로 허공을 선회해, 올레그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마법 부메랑이라니, 시발.

"으하! 인사치곤 나쁘지 않지?"

웃음 지은 올레그가 다시 한번 손을 털었다.

이번에 노린 건 그가 아니었다.

"...!"

부메랑이 마차 옆을 곡선을 그리며 지나치는 것을 본 이안의 눈에 핏발이 돋았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채앵-!

그가 내던진 단검이 부메랑과 부딪혔다. 궤적이 꺾인 부메랑이 땅에 박혔다.

'정말 맞을 줄이야.'

이안이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올레그의 탄성이 이어졌다.

"저걸 맞추다니…? 으하! 방금 네가 금화 몇 개짜릴 날려 버린 건지 모를 거다!"

순수한 감탄에 가까운 목소리.

거참 짜증 나는 새끼군.

혀를 차며 다시 앞을 바라본 이안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또 다른 기수가 맹렬한 속도로 올레그를 따라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털. 고양잇과의 무언가를 닮은 얼굴. 샬롯이었다.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올레그를 죽일 듯 노려본 그녀가, 이윽고 이안을 올려다봤다.

주황색 눈동자가 슬쩍 휘어진 것도 잠시.

"...!"

샬롯이 안장에서 솟구쳤다.

하늘로 치켜든 양손에, 어느새 송곳니 같은 형태의 쌍검이 쥐어져 있었다.

'이런 미친…?'

이안이 검과 단검을 교차해 내민 것과, 샬롯이 그를 덮친 건 거의 동시였다.

콰장창-

그녀에게 짓눌린 이안이 마부석 뒤까지 밀려 나가 처박혔다.

교차한 검이 수인의 양팔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뭔 힘이 이렇게….'

이안은 이를 악무는 사이.

고요하게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샬롯이 혀를 날름댔다.

"미리 말하지. 넌 내 거다."

"…하."

또 다른 미친년이군.

이안의 얼굴에 헛웃음이 번진 순간.

퍼엉-!

작은 폭발과 함께 샬롯의 얼굴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 틈에 이안이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묵직한 무게감. 인상조차 찡그리지 않고 뒤로 물러난 샬롯이, 구석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루시를 돌아보았다.

"너한텐 관심 없으니까, 찌그러져 있어라. 꼬마."

"있어야 할걸요?"

내뱉은 루시가 로브 아래에서 단검을 쥔 손을 들었다.

단검은 샬롯을 겨누지 않았다.

"당장 내리지 않으면, 자결할 거거든요."

자신의 목 앞에 단검을 댄 채, 루시가 내뱉었다.

"뭐라고?! 너 제정신이냐? 그거 당장 안 내려?"

말 위에서 낑낑대던 미구엘이 경악한 외침을 토해냈다.

샬롯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한 번에 성공할 자신 있어요."

루시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녹색 눈.

"…이래서 라르무트에서 탐을 내는 건가."

읊조린 샬롯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네 고용주가 죽겠다는데."

"샬롯! 당장 내려와!"

올레그의 외침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난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편이라서. 걱정 마라, 루시. 복수는 확실하게 해 줄 테니."

루시를 돌아본 그가 덧붙였다.

"천칭 상단은 물론이고, 라르무트도 전부 죽여 주마."

"하…!"

샬롯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르릉대는 숨소리를 낸 그녀가, 언제 웃었냐는 듯 싸늘해진 얼굴로 내뱉었다.

"두 번은 안 통한다. 꼬마야. 또 방해하면 그땐 내 손으로 죽여 주지. 난 네년이 어떻게 되건, 관심도 없어. 지금은 그냥 산통이 깨져서 물러나는 거다. 그러니까…."

쏘아붙인 샬롯이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다음번엔 끝까지 싸우자. 이안."

"…원한다면."

뒤로 펄쩍 뛰어오르며 검을 회수한 샬롯이 칸막이 위에 착지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발톱 같은 칼날이 달린 꼬리 갑주가 흔들렸다.

이안을 잠시 바라본 샬롯이 마차 뒤로 훌쩍 뛰어내렸다.

'혼자만의 사냥이라도 즐기는 건가…. 게임에서도 그랬지만. 수인들은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

이안은 헛웃음을 삼켰다.

수인은 게임에서도 아주 드문 존재들이었다.

수인 용병은 특히 그랬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능력치가 아주 높았고, 명령을 잘 따르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능력치 보너스를 받는 야성 특성까지 가지고 있었다.

복종하게만 만든다면 플레이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만드는 방법이 쉽지는 않았지만….

"…칼 내려라."

루시와 눈이 마주친 이안이 내뱉었다.

목 앞에 계속 칼을 대고 있던 루시가 비로소 팔을 늘어뜨렸다.

"좋은 협박이었어. 잘했다."

"협박 아니었어요."

"알아.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라. 압수당하고 싶지 않으면."

싸늘하게 덧붙인 이안은, 재빨리 휘몰아치는 방벽을 시전하고는 칸막이 위로 올라섰다.

샬롯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슬금슬금 마차로 접근하던 검은 기병들이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올레그가 감탄하듯 말했다.

"대단하군. 샬롯이 첫 시도에 실패하는 건 별로 본 적이 없는데."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마차의 속도가 다시 빨라진 건 그때였다.

멀어지는 마차 꽁무니로 재빨리 달려온 올레그가 소리쳤다.

"이봐. 너희는 어차피 실패할 거다. 내가 지금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너희를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지."

어깨를 으쓱인 그가 덧붙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희생은 좀 나오겠지만 말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안이 슬쩍 뒤를 돌아보고는 되물었다.

올레그가 미소 지었다.

"피차 쓸데없는 피는 그만 보자는 얘기지. 항복해라. 대신 네가 받기로 한 보수의 두 배를 주지. 그리고 천칭 상단에서 일해라. 너 정도의 실력이면 단주도 좋아할 테니까."

덩치는 산만 해서. 속엔 너구리가 들어앉았군.

생각과 달리, 이안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하지만 보수의 두 배를 지불하는 건 쉽지 않을 텐데."

"하. 그게 얼마건 상단 입장에선 푼돈일 거다. 내가 장담하지."

"내가 받기로 한 보수는 돈이 아니거든."

"...?"

"난 목숨을 받기로 했다. 그 두 배라면 두 개의 목숨을 받아야 하는데. 아, 그래."

이안이 턱짓했다.

"너와 샬롯의 목숨을 준다면, 고려해 보지."

그 순간 올레그의 미소가 사납게 돌변했다.

"뒈지고 싶단 말을 어렵게 하는군. 호의를 이딴 식으로 갚다니."

"시간을 좀 벌어야 했거든."

덜컹, 그 순간 마차가 기울어지고, 이안이 마차 안으로 내려갔다.

"강가에 다 와서 말이야."

"...!"

마차가 좁다란 돌다리 위로 올라서는 가운데, 올레그가 황급히 속도를 줄였다.

강가에 무사히 도착한 것이다.

다리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기 때문에, 기병들 사이에서 일시적인 병목 현상이 일어났다.

"조금 더 거리를 벌려야겠군…."

읊조린 이안이, 이윽고 아공간에서 기다란 창을 꺼냈다.

케네스가 쓰던, 천칭의 미늘창.

비싼 물건이긴 했지만.

그가 쓰기엔 무겁고 각인도 되어 있지 않아서, 여러모로 계륵 같은 녀석이었다.

창대의 도끼날이나 내장된 마법도 물론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끝의 창날만 예리하게 돋아 있으면 충분했다.

기병들이 줄지어 다리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둘씩 달릴 수도 있는 폭이었지만, 안전상의 이유 때문인지 일렬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게 잘될지 모르겠는데…."

중얼거리며 바람 칼날을 시전한 이안이, 투창 자세를 잡았다.

내뻗은 왼손으로 조준 지점을 가늠한 그가, 경악한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기병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창을 내던졌다.

쒸아악-!

창대에 실린 바람이 폭발하듯 회전했다.

퍼억-!

창대에 꿰뚫린 기병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러면서 바로 뒤를 따르던 기병까지 같이 말 아래로 떨어뜨렸다.

심지어 둘 다, 천칭 상단의 기병이었다.

"…되네."

읊조린 이안이 루시를 돌아보았다.

"감시를 부탁한다. 너무 가까워지면, 불러라. 충분해 보이지만."

"네…!"

루시가 재빨리 달려왔다.

이안은 비로소 마부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탓에 머릿속이 다 흐물흐물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런 와중에도 다리와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오래된 다리였다.

아마도 고대 문명의 유산.

짙은 남색의 강물은 제법 깊이가 있어 보였다.

적어도 이 날씨에 맨몸이나 말을 타고 헤엄쳐 건널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고행하셨소. 하, 저승 문턱을 몇 번은 건넌 것 같네."

그가 기대앉자 미구엘이 내뱉었다.

그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한고비 넘긴 것일 뿐, 추격을 따돌린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은 어떻게 이어지지?"

"저 숲 옆으로 비스듬하게 이어지는 거요. 원래는 여기가 죄다 허허벌판이었는데, 이젠 나무에 가려져서 저 안쪽부턴 길이 보이지도 않는군."

"그래…."

이안은 강 건너의 숲을 바라보았다.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잿빛 나무들이 높고 듬성듬성하게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시야를 가리기엔 그걸로도 충분해 보였다.

게다가, 묘하게 낯이 익었다.

'이거, 전에 봤던 환영이랑 너무 비슷한데.'

바닥에 눈이 깔려 있지 않다는 것만 빼면, 사실상 똑같은 수준이었다.

물론 이런 황량한 침엽수림이 이곳에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연관이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보였다.

그게 아니라도, 저 숲엔 뭔가 도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보고 있기만 해도 불길한 감각이 전해졌으니까.

"…형씨도 지금,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신 거요?"

미구엘이 불쑥 덧붙였다.

이안의 시선에, 그가 입맛을 다셨다.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형씨의 그 대비책이 있잖수. …지금이 또 써먹을 순간인 것 같은데."

"저 숲으로 들어가자고? 이걸 끌고 들어갈 수는 있고?"

"확실한 건 가 봐야 알겠지만. 어지간해선 가능할 거요. 대신 속도는 좀 줄겠지. 그 부분은 차라리 잘된 일이오. 이게 마지막 마석이니까. 어쨌든."

미구엘이 앞을 턱짓했다.

"딱 봐도 저주받은 숲이니, 저자들도 못 따라오지 않겠소?"

"글쎄… 그래 주면 좋겠지만."

전부 따라올 것 같은데.

턱을 어루만지며 읊조린 이안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최악의 제안은 아니군. 오히려 싸우기엔 편해질 테니까."

그가 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의 위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밤이 되기 전에 나올 수만 있다면 말이지."

"그야… 그렇겠소만. 그냥 길로 달리면, 결국엔 일이 더 복잡해질 거요."

"그럼 그렇게 해. 대신… 난 잠시 내려야 할 것 같군."

"내리신다고? 말이야 빼앗는다 치고, 어떻게 따라오시려고?"

미구엘이 눈을 치켜떴다.

숲에서 길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 이안이 모를 리 없건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최대한 잡히지 마라. 다시 관도 쪽으로 나올 수 있게, 방향도 잃어버리지 말고."

"어… 형씨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그때 마차가 다리를 건넜다.

강줄기가 옆으로 비스듬하게 돌아가고, 이내 듬성듬성 솟은 나무들에 가려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공기가 무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막상 앞에서 보자 영 내키지 않는지, 숲을 꺼림칙하게 바라보던 미구엘이 말했다.

"충분히 들어갈 수 있겠소."

"강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면 들어가라."

"…알겠소."

마차가 속도를 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적대가 뒤따라 강을 건넜다.

그때 일행은 이미, 속도를 줄이고 말 머리를 돌리는 중이었다.

"하… 루 솔라여, 부디 굽어살피소서."

온 진심을 담아 읊조린 미구엘이, 어둑어둑한 숲을 향해 고삐를 내리쳤다.

추적대가 그 자리에 도착했을 때, 마차는 이미 숲의 그림자 저 너머로 흐릿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

"루 솔라 맙소사…. 저길 정말 들어가다니."

천칭 상단의 기병들이 숲을 따라 늘어선 가운데.

뒤늦게 도착한 제이미가 탄식했다.

"추적을 뿌리치자고 자살을 선택하다니."

잿빛 나무가 끝도 없이 이어진 숲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주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추적대의 숫자도 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되찾는다. 진입해."

그때, 올레그가 숲으로 들어갔다.

상단의 기병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저런…."

제이미가 탄식하는 그때.

"돌아갈 자들은 돌아가라. 우리는 반드시 영애를 되찾아야 한다. 배신에 대한 복수 역시."

아겔 란의 친위 기사들 중 한 명이 용병들에게 내뱉고는 숲으로 들어섰다.

조나단. 직접 나슬란 용병들의 우두머리를 베어, 용병들끼리의 내분을 끝낸 자였다.

용병들의 피해는 양쪽 다 막심했다.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 이대로 가면 우린 그냥 다 망하는 거라고…!"

"시발…. 가자! 가!"

아겔 란 기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슬란의 용병들이 욕설을 토해내며 달려나갔다.

"나리, 설마 이대로 돌아가시려는 거 아니시겠죠?"

우베가 제이미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의 눈에도 살기가 넘실댔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부하들은 열 명도 채 남지 않았으니까.

그에 비해, 제이미가 이끌고 온 기병들은 단 하나가 줄었을 뿐이었다.

자신들이 칼받이로 동원되었다는 것을,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챌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대로 돌아간다면, 용병 대장으로서의 입지가 무너질 터.

"...."

제이미가 선뜻 대답하지 않자, 우베가 인상을 구겼다.

"시발, 마음대로 하십시오! 우린 들어갈 겁니다!"

제이미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귓가에 백작의 명령이 메아리쳤다.

그는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그 결과, 그가 이끄는 기병이 추적자들 중에서 가장 많았고, 납치범들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지금까지 그랬듯, 저들끼리 머릿수를 줄이도록 추격을 이어간다면.

'…최후에 웃는 건 우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속삭임처럼 귓가를 울렸다.

"나리, 돌아갈까요?"

"…아니."

눈을 뜬 제이미가 고삐를 쥐었다.

"우리도 들어간다."

추적대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전부 들어왔군.'

저 멀리 이어진 나무 위.

나뭇가지 위에 앉은 이안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달라질 거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마지막 남은 마석을 쥔 이안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애석하게도, 난 이런 흉지에서 싸우는 게 더 익숙한 사람이거든.'

#063화

숲은 부자연스럽게 어둡고 고요했다.

추적자들은 마차의 움직임을 쫓으면서도, 쉴 새 없이 주위를 경계했다.

신경이 바짝 곤두선 눈빛들.

샬롯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지금의 긴장감을 즐기고 있긴 했지만, 어쨌건 뭔가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 예감이 구체화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콰르르르-

그들로부터 멀지 않은 앞에,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은 것이다.

정확히는, 불의 장벽이었다.

키히이잉-!

눈부신 빛에 놀란 말들이 본능적으로 멈춰 섰다.

몇몇은 바닥을 구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자들을 신경 쓰지 못했다.

"저게 뭔…?"

"불? 불을 질렀다고?!"

다들 넘실대는 불길의 장막에 넋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주문쟁이 계집애의 짓이군! 이런 식으로 추적을 따돌리려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불을 지르다니. 다시 숲을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 건가…?"

불의 장벽은 주위의 나무들을 마구 불태우고 있었다.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삐죽 솟은 나무들과 버석버석한 풀.

그제야 몇몇은, 이 숲이 불이 옮겨붙기에 딱 좋은 조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우회해서 가면 돼. 다들 정신 똑바로-"

올레그가 말을 잇던 순간이었다.

콰르르르-

또 한 번 불길이 치솟았다.

이번엔 첫 장벽으로부터 비스듬한 측면이었다.

첫 장벽의 불길은 잦아들고 있었지만, 나무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고 타오르며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금 저주를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소. 느낌이 좋지 않아. 지금이라도 추적을 포기하고 돌아갑시다."

"겁쟁이들! 나갈 놈들은 마음대로 해라! 우린 계속 갈 거니까!"

추적자들이 두 부류로 나뉜 가운데.

샬롯은 여전히 떨리는 눈으로 불의 장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놈이다…!'

그녀만이 저 불길을 만들어 낸 것이 이안이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근거는 많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직관을 믿었다.

'마검사였다니…!'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존재.

심지어 저런 마법을 펼칠 정도라면, 카일과 케네스가 당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샬롯이 이 숲에서 끝내 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놈들을 쫓아야겠다고 내심 결정한 그 순간.

콰르르-

또다시 불기둥이 솟았다.

이번에는, 저 먼 후방이었다.

"아니…? 저런… 미친…?"

"저긴 우리가 왔던 길 같은데…?"

후퇴할 준비를 하던 자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숲에 붙은 불은 생각보다 빠르게 번진다.

저런 불의 장벽이라면, 순식간에 주변의 나무들을 불태우며 번져나갈 터.

"...!"

샬롯이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치켜뜬 건 그 직후였다.

그녀의 꼬리가 빳빳해지는 가운데.

"제기랄. 뭔진 몰라도, 우릴 가둬 놓고 태워 죽이려는 거군. 따라와라! 아직 길이 있을 때, 여길 빠져나갈 거니까!"

한발 앞서 상황을 파악한 올레그가 말 머리를 돌렸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측면에서 불길이 치솟은 건 그때였다.

콰르르르-

"젠장…! 다들 따라와!"

올레그가 고삐를 후려쳤다.

상단의 경호병들이 허겁지겁 그의 뒤를 따랐다.

오로지 샬롯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희열이 번지고 있었다.

'놈이 아직, 이곳에 있다…!'

그 계집애를 되찾는 건 이미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안이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제국인들을 따라라! 여기서 타 죽고 싶지 않으면…!"

"다들 넋 빼고 있지 말고, 움직여!"

비로소 상황을 파악한 다른 이들도 올레그의 뒤를 따르려 했다.

화르르륵-

허공에 수많은 화염구들이 피어오른 건 그 직후였다.

화염구들은 만들어짐과 동시에 그들의 한복판으로 떨어져 내렸다.

쾅! 콰광-! 쾅!

"아아악-!"

"미친! 다들 물러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폭발에 휘말린 인마가 전신에 불이 붙은 채 내달리고, 삽시에 두 무리로 갈린 추적자들이 혼란에 휩싸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샬롯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반대로 우리를 사냥하려는 거야.'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서로의 목숨을 건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다.

***

높다란 나무 위.

'역시, 화염 장벽은 마법봉 없이도 마력 소모가 장난 아니군.'

이미 한참 전에 비어 버린 마석을 던져 버린 이안이, 아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샤아아-

망령화한 늪지의 원한이 나무 아래의 기병에게로 뻗어나갔다.

놈이 저주를 심어 넣는 사이.

타탓-

단검을 역수로 뽑아 든 이안이 몸을 날렸다.

나뭇가지 위를 날듯이 내달린 그가, 이윽고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무리에서 떨어진 용병의 등 뒤.

이안은 말의 엉덩이 위에 착지함과 동시에 단검을 내리찍었다.

"꺽…!"

목덜미를 깊이 파고든 검에, 용병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몸을 떨었다.

"뭘 멍하니 보고 있어? 따라와 새꺄! …이봐? 어이?"

동료가 그의 죽음을 눈치챘을 때, 이안은 이미 나무 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혼돈력을 한 방울 머금고 증폭된 바람 칼날 덕에, 그의 움직임은 중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빨랐다.

그의 반사 신경으로는 넘어지지 않는 게 고작일 정도였다.

이안의 시선이 전장을 훑었다.

'역시, 혼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데는 불만한 게 없군.'

이 저주받은 숲의 주인은 물론 분노하겠지만.

'…지금은 나도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거든.'

콰직-!

또 한 명의 머리 위로 떨어지며 단검을 틀어박은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바로 옆. 눈을 치켜뜬 채 그를 지켜보는 기사.

"반가워. 제이미 경."

"네, 네놈은…?"

"선물을 하나 주지."

손가락에 늪지의 원한이 되돌아왔음을 확인한 이안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불길한 감각이 제이미의 얼굴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게 무슨…?"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원한이, 눈을 치켜뜨는 제이미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넣었다.

이안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솟구쳤다.

자신이 저주에 걸렸음을 깨닫지도 못한 채, 제이미가 소리쳤다.

"위! 위다! 그 미친 검귀 놈이 이곳에 있다-!"

그 외침을 마지막으로, 그의 시야가 녹아내리고 뒤섞이기 시작했다.

치솟는 불길과 날뛰는 악귀들.

제이미가 그렇게 착란 상태에 빠져드는 사이.

"석궁! 석궁을 쏴!"

"저기다!"

그의 외침을 들은 추적자들이 비로소 위를 올려다보았다.

매캐한 연기와 불길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 사이, 희끗한 형체가 내달리고 있었다.

피슈슉-

석궁을 든 자들이 일제히 볼트를 퍼부었다.

하지만 한 발도 이안을 스치지 못했다.

그들이 허둥지둥 재장전을 준비할 때, 이안은 이미 그들의 시야 밖으로 멀어진 뒤였다.

'어딜 빠져나가려고.'

그가 향한 건 불길을 피해 우회하는 올레그와 검은 기병들 쪽이었다.

이안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그의 마력에 한 방울의 혼돈력이 섞였다.

화르르륵-

불과 몇 초 만에 주문이 완성됐다.

수많은 춤추는 불꽃들이 피어올랐다.

그것들을 올레그가 달려가는 방향으로 일제히 쏘아 보내면서, 이안은 낮은 나뭇가지로 뛰어내렸다.

콰과과광-!

"피해! 나무가 쓰러진다!"

"이런 제기랄-!"

폭음과 비명. 날뛰는 말들.

폭발을 피한 검은 기병들이 뿔뿔이 흩어져 선회했다.

지켜보던 이안은 곁을 스쳐 지나가는 한 놈에게 늪지의 원한을 보내고는 비로소 몸을 돌렸다.

불길은 성실하게 번지고 있었다.

이안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연기에 휩싸인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마경이 따로 없군.'

타락자나 마족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그렇다 해서, 힘에 취하거나 방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이미 지쳐 있었고, 적들은 아직도 많았다.

심지어 네임드급이라 할 만한 놈들을 죽인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건, 게임에서는 물론 공략글에서도 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추적자들의 수준으로 봐선, 게임에선 오로지 도주하는 것만을 상정하고 만든 퀘스트였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섬멸이 아니라.

그러니까 지금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것에만 집중해야 했다.

'어쩌면, 그걸로도 부족할지도.'

이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마족이나 타락자가 아니라, 인간들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이 겹쳐져 만들어진 결과이긴 했지만.

아이러니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으, 으아아…!"

"이, 이런 시발! 다니엘이 미쳤다!"

추적자들 사이에서 혼란이 이어졌다.

착란 상태에 빠진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 서로를 향해 칼과 창을 겨눴다.

늪지의 원한은 마물이나 마족들에겐 별 쓸모가 없지만, 인간을 상대할 땐 더없이 유용했다.

지금 같은 난전에서는 특히 더.

이안은 그 사이를 누비며 쿨 타임이 돌아올 때마다 늪지의 원한을 보내고, 혼란에 빠진 자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천칭 상단 무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레그는 전진을 멈춘 채 착란 상태에 빠진 자들과 대적하고 있었다.

물론, 이 상황을 영원히 반복할 수는 없었다.

쩌엉-!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

이안의 기습을 막아낸 기사가 내뱉었다.

아겔 란의 기사, 조나단.

"다시 만나서 나도 반갑군."

이안이 뒤로 훌쩍 물러나며 내뱉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조나단이 검을 고쳐 쥐었다.

"뻔뻔하구나, 배신자. 이런 짓을 하고도 여신께서 용서하실 것 같으냐?"

"용서하고 말고도 없지. 난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으니까."

읊조린 이안이 단죄의 검을 뽑았다.

"그리고 사실, 루 솔라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도 없어."

"그럴 줄 알았다…! 이 더러운 타락자야!"

조나단이 울부짖으며 내달렸다.

결론이 왜 타락자야?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자세를 다잡았다.

콰직-!

승부는 일격에 결정 났다.

조나단은 휘몰아치는 방벽에 막혀, 검을 내려치지도 못했다.

"커… 헉…!"

단죄의 검이 흉갑을 꿰뚫었다.

조나단이 검을 떨어뜨렸다.

그의 입에서 피가 왈칵 토해졌다.

"믿… 었는데."

"정말 그랬으면, 그냥 날 찾아와서 물어봤어야지. 이런 멍청한 짓을 벌일 게 아니라."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안이 검을 뽑자 조나단이 그대로 쓰러졌다.

한때나마 알던 자의 목숨을 빼앗는 건, 뒷맛이 좋지 않았다.

시신을 내려다보며 다시 휘몰아치는 방벽을 시전한 것도 잠시.

"...!"

이안은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일렁이는 불길 너머.

부하 몇을 이끌고 달려가는 올레그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발광하는 자들을 다 처리한 모양.

당장 쫓아야 했지만, 이안은 그 너머의 광경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불길을 따라 솟구치던 연기가, 옆으로 느릿느릿 선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처럼.

그 사이로 오염된 마력이 물감처럼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낮인데.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본 이안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연기가 자욱한 하늘은 밤이나 다름없이 어두웠다.

그의 숨결이 비로소 다급해졌다.

이대로면 올레그는 오염된 마력에 휩쓸리기 전에 이 지역을 빠져 나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바로 몸을 날릴 수 없었다.

"…?!"

섬뜩한 한기.

고개를 돌린 이안이 본 건, 어느새 지척까지 쇄도한 샬롯의 주황색 눈동자였다.

그녀가 내뱉었다.

"드디어 잡았다."

뒤로 젖혀져 있던 그녀의 양손이 섬뜩한 곡선을 그릴 찰나.

푸확-!

휘몰아치는 방벽이 그녀의 돌진을 한순간 저지했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샬롯의 미간으로 단도를 던지면서, 동시에 춤추는 불꽃을 시전해 발사하고, 뒤로 몸을 날리며 얼음 감옥을 연달아 펼쳤다.

그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막힘 없이 이어졌다.

이안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전장을 넓게 사용한 건, 저 미친 수인에게서 자신의 위치를 최대한 오래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안은 다른 추적자들을 전부 죽이기 전까진 그녀와 싸울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그를 포기할 일도 없어 보였으니, 다른 놈들을 전부 정리한 후에 맞부딪히려 한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조우할 경우도 대비해 두었고, 그게 방금 선보인 일련의 반격이었다.

퍼버버벙- 쩌저적-!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면서, 이안은 춤추는 불꽃의 폭발 위로 얼음 감옥이 뒤덮이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혼돈력을 섞어 바람 칼날과 화염 걸음을 연달아 시전했다.

그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피어오른 불꽃이, 이어진 바람을 머금고 더 거세게 치솟았다.

첫 번째 챕터의 수많은 마물 소굴을 불바다로 만든 마법 연계.

불길이 시야를 가릴 만큼 치솟는 것까지 확인한 이안이, 비로소 앞을 바라보았다.

"…이런, 시발."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올레그의 뒷모습이 아니라, 부풀듯 솟아오르는 거대한 살덩이였다.

인간과 말을 가리지 않고 조각난 시체와 살점, 내장들을 마구 뭉친듯한 끔찍한 형태.

심지어 스스로 증식해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시발…!?"

"마물…! 마물이다…!"

공포에 질린 말 울음소리와 낙마한 자들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곳곳에서 시체가 뭉쳐 만들어진 덩어리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안은 가까워지는 살점 덩어리를 올려다보았다.

2미터를 훌쩍 넘기는 덩치. 마치 살점으로 빚은 아메바 같았다.

몸통이라 부를만한 부위에 세로로 쭉 찢어진 구멍에서,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운명을… 받아… 들여라…."

말까지 한다고?

다음 순간, 덩어리에서 무언가가 채찍처럼 뻗어 나왔다.

몸을 틀면서, 이안은 곁을 스쳐 지나가는 그것을 눈에 담았다.

시체 조각이 덕지덕지 박힌 촉수.

"아- 아아악-!"

저만치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촉수에 칭칭 감긴 기사 하나가 덩어리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손을 내뻗은 채 비명을 지르던 그의 몸이, 늪에 잠기듯 덩어리 속으로 흡수됐다.

경련하던 손끝이 사라졌다.

촤르르르-

이안 앞의 덩어리에서 대여섯 개의 촉수가 연달아 튀어나온 건 그 직후였다.

"선택… 받은… 자여…."

"진짜 너였냐…?"

이안이 헛웃음을 짓는 사이.

콰장창-!

얼음 감옥을 박살 내며, 샬롯이 솟구쳤다.

갑옷의 마석이 번쩍였다.

허공에서 핑그르 몸을 돌린 그녀가, 잠시 부유하듯 멈춰 섰다.

타오르듯 일렁이는 주황색 눈동자가 단숨에 이안을 찾아냈다.

"이아아아아안-!"

쌍검을 움켜쥔 채 포효한 그녀가,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064화

올레그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회전하는 연기가 장벽처럼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장벽에서 오염된 마력이 물씬 느껴졌다.

"하…."

쫓아가기에는 이미 늦었음을 직감한 이안이, 바람 칼날을 두른 채 쇄도하는 샬롯을 눈에 담았다.

피부가 저릴 정도의 살의.

그나마 다행인 건, 살덩이의 관심이 그녀에게로 돌아갔다는 사실이었다.

촉수들이 그가 아니라 샬롯을 향해 뻗어나갔다.

시선은 여전히 이안에게 고정한 채, 샬롯이 허공에서 궤적을 틀었다.

이안도 종종 활용하던 방식.

'…나랑 싸우던 놈들이 이런 기분이었겠군.'

서거걱-

그녀의 쌍검이 거침없이 촉수들을 썰어 댔다.

잘려 나간 촉수는 땅에 떨어져도 죽지 않고 지렁이처럼 꿈틀댔다.

그사이, 이안도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았다.

화르르륵-

연달아 피어오른 불덩이가 뿜어져 나가고, 휘몰아치는 방벽과 서리 방패가 연달아 시전됐다.

샬롯은 아까처럼 맞아 주지 않았다.

묘기 부리듯 몸을 틀어 날아드는 불덩이를 모조리 피한 그녀가, 쌍검으로 서리 방패를 내리찍었다.

콰장창-!

방패가 폭발할 틈도 없이 박살 났다.

뒤에서 손아귀에 냉기를 가득 머금은 이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푸확-!

냉기 파동. 샬롯의 주위로 돌풍이 휘몰아친 건 그 직후였다.

이안과 샬롯이 동시에 튕겨져 나갔다.

'휘몰아치는 방벽까지…?'

하위 회색 마법은 다 들어 있는 건가.

생각하며 착지한 이안이 고개를 들었을 때, 샬롯은 이미 그의 코앞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이안이 황급히 검을 들었다.

연달아 이어진 두어 번의 충돌.

물러나는 이안의 발걸음을 따라 불길이 치솟았지만, 샬롯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 냈다.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에는 주체할 수 없는 야성과 희열이 뒤엉켜 있었다.

지금 이 일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안이 어떻게 여러 색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그저 지금 이 전투를 즐기고, 그를 죽일 생각뿐.

쌍검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방어를 도외시한 저돌적인 공격의 연속.

갑옷의 마석이 쉴 새 없이 번쩍이면서 그녀의 움직임을 보조했다.

이안에겐 반대로 위기의 연속이었다.

여러 요인이 복합된 결과였지만, 동시에 상성의 문제이기도 했다.

'게임에서도 암살자한텐 쥐약이었는데. 회색 마법까지 쓰는 수인 암살자라니….'

무기를 맞부딪칠수록 모든 게 더 확실해졌다.

힘과 속도, 체력, 전투 기술에 이르기까지.

이안이 야성을 드러낸 그녀를 앞서는 부분이 단 하나도 없었다.

집중력이 최고조로 치달은 와중에도 언제나 샬롯이 더 빨랐고.

일격 일격에 실린 무게는 제대로 된 반격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공세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단 한 번이라도 실수하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면 치명상을 입게 되리라.

그나마 앞서는 요인은 마법이겠지만.

샬롯은 그가 마법을 시전할 틈을 조금도 만들어 주지 않았다.

단죄의 일격은, 물론 사용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안의 몸 곳곳에 자잘한 상처들이 늘어 갔다.

펑-!

이안이 간신히 피어 올린 화염구가 샬롯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폭발했다.

샬롯은 오히려 폭발의 반경에 머리를 들이밀면서 이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가슴팍에 끝까지 교차한 팔 끝, 쌍검이 섬뜩한 예기를 흩뿌렸다.

쩌엉-!

좌우에서 동시에 날아드는 궤적 사이로, 이안이 간신히 검을 밀어 넣었다.

교차된 검날이 목 좌우에서 멈췄다.

날 앞부분으로 이어진 곡선이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벨 듯했다.

이안은 왼팔을 자신의 검날에 가져다 대며 버텼다.

하지만 샬롯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밀려난 건 이안이었다.

이내 그의 등에 딱딱한 기둥이 닿았다. 나무 둥치였다.

퇴로가 막혔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섬뜩한 예감이 이어졌다.

콰직-!

날아든 꼬리 갑주가, 고개를 옆으로 젖힌 이안의 귀 끝을 살짝 잘라내며 둥치에 박혔다.

이게 여기까지 길어지는군.

생각하며,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교차한 검날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샬롯의 주황색 눈에 희열과 전율이 번졌다.

곧 이안의 목을 베리라 확신한 것이리라.

이런 순간에조차, 이안의 정신력은 제 역할을 다했다.

그는 조금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

다만 주마등처럼 밀려드는 정보들을 오롯이 받아들였다.

일렁이는 잿빛 장벽. 더 이상 비명도 들리지 않는 숲. 타들어 가는 나무와 매캐한 연기. 어기적대며 기어 오는 살덩이. 이 광경이 펼쳐지기 직전에 빠져나간 올레그. 뒤따르던 부하 넷. 그를 기다리고 있을 미구엘과 루시. 목을 노리는 단검과 되돌아가는 꼬리.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 주황색 눈동자. 그리고 곧 다가올 죽음.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의, 죽음.

"...."

그 모든 것들이 스쳐 간 찰나의 순간, 이안은 결정을 내렸다.

그는 샬롯의 눈을 응시하며 상태창을 열었다.

그리고는 힘 수치를 하나씩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다.

두 팔로 전해지는 압력이 견딜 만하게 느껴질 때까지.

다신 하지 않을 줄 알았던 선택이지만,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

이윽고 샬롯의 눈이 커졌다.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지만,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는 게 틀림없었다.

조금씩 그녀의 검을 밀어내던 이안이, 이윽고 이를 악물었다.

쩌엉-!

샬롯이 튕기듯 뒤로 물러났다.

검을 내리친 이안은, 올린 힘 수치의 절반만큼을 민첩성에도 투자했다.

필요한 작업이었다. 지능과 정신력이 그렇듯, 힘과 민첩성은 언제나 최소한의 균형을 맞춰 줘야 했다.

효과는 이번에도 즉각적이었다.

모든 감각이 한 꺼풀 더 선명해지는 느낌.

"...."

샬롯은 어떻게? 따위의 흔히 할 법한 탄성은 내뱉지 않았다.

그저 감탄하듯 이안을 바라보고는 양손의 검을 고쳐 쥐었다.

이안도 우묵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런 그들의 옆으로 그림자가 드리운 건 그 직후였다.

쒸에엑-!

파공음. 살덩이의 촉수가 이안과 샬롯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안과 샬롯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날렸다.

그들을 노리던 촉수가 조각나 떨어졌다.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살덩이에게로 달려들었다.

샬롯도 마찬가지였다.

검격이 연달아 이어졌다.

수십 조각으로 잘려나간 육편이 사방에 흩어졌다.

꿈틀대는 살점 한복판에서, 이안과 샬롯은 다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쉬학-!

먼저 움직인 건 샬롯이었다.

여전히 저돌적인 공세.

하지만 전처럼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안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고도의 집중 상태 속에서, 자신의 움직임이 더 빠르고 정교하고 강해졌음을 실감했다.

샬롯의 공격을 몇 차례 막아낸 그가, 그녀가 검을 회수하는 틈을 노리고 반격을 시도했다.

푸확-!

이안의 팔이 휘몰아치는 방벽에 막혀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 사이를 파고드는 샬롯의 움직임이 여전히 선명하게 인식됐다.

그는 밀려나는 힘을 고스란히 이용해 샬롯과 거리를 벌렸다.

그녀를 따라 한 움직임.

그러면서 그사이에 휘몰아치는 방벽을 시전하기까지 했다.

하위 마법에 불과할지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선 고위 마법만큼이나 유용했다.

푸확-!

달려들던 샬롯이 돌풍에 가로막혔다. 그 사이로 화염구가 뿜어지고, 폭발과 거의 동시에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이안의 검이 날아들었다.

카드득-

샬롯이 이안의 검을 막아냈다.

그건 달라진 전투의 양상을 증명하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역으로 그녀를 밀어붙이면서, 이안은 어떻게 더 빨리 주문을 완성시킬 수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시전 속도는 정신력과 지능 수치의 영향만을 받는 줄 알았는데.

인식부터 시전까지의 과정이 한층 더 매끄러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럼 모든 능력치가 서로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일까?

현실이 된 지금은 충분히 가능할 법한 가정이었다.

푸확-!

그때 샬롯의 전신에서 돌풍이 터져 나왔다.

이안을 밀쳐내고 소리 없이 포효한 그녀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몸을 날렸다.

여유가 사라진 얼굴.

하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희열로 가득했다.

자신의 모든 역량을 내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라도 한 듯이.

하지만 이안은 그녀의 장단에 오래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

이제는 이 전투를 충분히 끝낼 수 있었으니까.

콰직-!

달려든 샬롯이 이안을 덮쳤다.

교차된 쌍검 사이를 단죄의 검이 깊이 막아냈다.

다만 이번에는 한 손이었다.

이안의 왼손은 샬롯의 옆구리로 향해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조악한 형태의 회색 단검. 그 삐죽한 끝부분이 샬롯의 옆구리, 판금과 사슬의 이음매 사이를 정확히 찔렀다.

거미 여왕의 독니.

"...!"

샬롯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독이 번지면서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으리라.

이윽고 이안이 그녀의 몸을 걷어차 밀어냈다.

몸이 뻣뻣하게 굳은 샬롯이 쓰러졌다.

"하아… 하아…."

비로소 거친 숨을 토해내며, 이안이 그 앞으로 다가섰다.

샬롯은 이 순간에도 검이 아니라 그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공포 대신, 오히려 기묘한 만족감이 감돌았다.

'모든 걸 선보였으니 죽어도 괜찮다, 이건가.'

이안에겐 이해되지 않는 사고방식.

다만, 그녀의 그런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내내 최악의 방해자였고, 끝내 그가 능력치 포인트까지 사용하게 만들었으니까.

만족스러운 죽음을 선사하는 건, 그에 합당한 대가가 아니었다.

죽음은 그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나 최고의 형벌인 법.

이안의 눈동자가 스르륵, 그녀의 하반신으로 돌아갔다.

'게임에서 수인 용병을 복종시키는 방법이… 이거였지.'

그의 시선이 축 늘어진 샬롯의 꼬리 갑주로 향했다.

수인의 꼬리는 그들이 타고난 야성의 상징이자 자부심.

'이걸 자르면 야성이 거세되었다는 뜻이라던가….'

별거 아닌 서브 퀘스트를 주던 수인 NPC의 대사가 떠올랐다.

제국 귀족의 노예였던 자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꼬리를 자른 귀족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던.

고민은 거기서 끝났다.

"...!"

이안이 꼬리를 툭 발로 찬 순간, 샬롯의 눈동자에 파장이 번졌다.

경악과 불신.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눈에 공포가 번졌다.

이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나한텐 목숨이 가장 소중하거든. 그걸 빼앗으려 했으면… 너도 가장 소중한 걸 걸어야지."

"...!"

샬롯의 눈빛이 휘청댔다.

이안이 검을 들었다.

콰직-!

"...!"

온 힘을 다해 내리친 칼에, 그녀의 꼬리 절반이 잘려 나갔다.

샬롯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남은 꼬리 단면에서 피가 흘렀다.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잘린 꼬리를 집어 들었다.

놀랍게도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무려 유일 등급의 장신구였다.

샬롯의 야성.

보유 능력치는 하나였다.

수인, 샬롯의 복종.

…복종?

"...."

이안은 샬롯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하던 생기와 야성, 희열은 자취를 감췄다.

그저 망연자실하게 이안의 손에 들린 자신의 꼬리를 바라볼 뿐.

…그렇단 말이지.

코웃음 친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표정을 감상할 여유 따윈 없었다.

'밤새 여기 있을 순 없어. 나가야 돼.'

지금쯤 올레그가 마차를 따라잡았을지도 몰랐다.

다른 장소에도 마물이 기어 나오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저런 살덩이를 만들어 내는 놈의 영역이라면, 그 어떤 악몽 같은 상황도 현실이 될 수 있었다.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다 해도,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당장 나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안은 연기의 장막을 따라 내달렸다. 엄청난 양의 오염된 마력이 뒤엉킨 결계였다. 당연히 빈틈 따윈 없었다.

'저것들을 다 죽이면, 길이 열릴까?'

멈춰 선 이안은, 꿈틀대는 살덩이들을 돌아보았다.

놈들은 가만히 멈춰선 채였다.

마치 그를 기다리듯이.

그때, 예의 그 가래 끓는 듯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번져나갔다.

모든 살덩이가 동시에 말하고 있었다.

"운명을… 거부하지…."

"그래. 받아들이겠다."

이안이 내뱉었다.

일순간 목소리가 끊어졌다.

당황한 것처럼 느껴지는 적막.

이안이 덧붙였다.

"내가 네놈을 찾아가겠다. 그러니까 당장 길을 열어."

"나를 찾아오리라… 맹세… 하겠느냐…?"

"맹세하지. 난 어차피 북부로 가고 있다. 의뢰를 끝내면 네놈을 찾아가마."

그리고 네놈의 대갈통을 박살 내 주지.

이안이 뒷말을 삼키는 사이.

솨아아아-

살덩이들에게서 잿빛의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마력은 곧 거대한 문양으로 바뀌었다.

"맹약은… 체결… 되었다…!"

다음 순간, 이안의 왼손 손아귀에도 같은 문양이 새겨졌다.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얼어붙은 심연.

이안은 더 보지 않고 창을 껐다.

당장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콰아아아-

장막의 흐름이 거세졌다.

살덩이들이 우르르 허물어지고, 나무의 불길들이 일제히 꺼졌다.

연기 장막이 흩어졌다.

숲의 전경이 비로소 드러났다.

일행이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찾아내는 것은, 뜻밖에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저 너머, 주황빛이 밤하늘을 밝히며 넘실대고 있었으니까.

숲이 불타고 있었다.

불길한 직감.

"…루시."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이안은 불빛을 향해 몸을 날렸다.

#065화

불길이 점점 선명해졌다.

여러 나무들에 붙은 불길은 주위로 옮겨붙지 않고, 그저 밝고 맹렬하게 타오르고만 있었다.

누군가의 감정을 대변하듯이.

불길의 인근까지 달려간 이안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상단 경호병의 얼굴이었다.

그는 말에서 떨어졌는지 불길을 등진 채 내달리고 있었다.

"여기 악마가- 악마가 있-"

콰아아아-!

눈부신 불기둥이 그를 집어삼킨 건 그 직후였다.

이안이 근처에 당도할 때쯤 불기둥이 잦아들고, 안에서 숯덩이가 된 시신이 허물어졌다.

그 너머로, 주저 앉은 루시의 얼굴이 드러났다.

거칠게 나부끼는 로브.

위로 삐죽 솟은 머리칼.

노란색과 주황색이 뒤엉켜 일렁이는 눈동자.

그리고 슬픔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

언제나 무표정한 그녀가 저런 표정이 된 이유를 알아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

주저앉은 그녀의 바로 앞에, 미구엘이 쓰러져 있었으니까.

주위는 피로 흥건했다.

팔이 잘렸기 때문일 터였다.

루시는 팔목 아래, 팔뚝 중간이 잘려나간 미구엘의 왼팔을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출혈을 조금이라도 멈춰 보려는 생각일 터.

"...!"

루시의 시선이 이안 쪽으로 득달같이 돌아온 건 그때였다.

발작적으로 일렁이는 눈동자.

이어진 섬뜩함에, 이안은 앞으로 몸을 날렸다.

콰아아-

불기둥이 바로 뒤에서 치솟았다.

그조차 뜨겁다 느낄 정도의 열기.

바닥을 구른 이안이 자세를 다잡으며 루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휘청댔다.

"이, 이안님…?!"

"그래. 나다."

"제가, 제가 무슨 짓을."

불기둥이 단숨에 흩어지고, 주위의 나무들을 태우던 불길이 힘을 잃었다.

루시가 입술을 떨며 내뱉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사과할 필요 없다.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일어선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이런 상황에서 조건 반사적으로 저지른 행동에 책임을 물을 생각 따윈 없었다.

게다가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미구엘, 미구엘이…!"

루시가 비로소 눈물을 왈칵 쏟으며 내뱉었다.

이안은 주변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다가가, 미구엘의 상태부터 살폈다.

팔뚝 중간 쯤부터 깔끔하게 잘려나간 왼팔.

왼쪽 어깨부터 명치까지 찢겨진 가죽 갑옷.

그 사이에서도 피가 배어 나왔다.

미구엘의 눈이 가늘게 뜨인 건 그때였다.

"…형씨."

"말 하지 마라."

"계획대로… 못 했소…."

"그건 딱 봐도 알아."

미구엘이 웅얼댔다.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다.

이안은 루시가 움켜쥐고 있는 미구엘의 잘린 팔 단면을 바라보았다.

피가 아직도 흘러 나오고 있었다.

당장 출혈을 멈추고 감염도 막을 방법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네 팔을 불로 지질 거다. 견디지 말고, 그냥 기절해."

이안이 손아귀에 화염구를 피워 올리며 내뱉었다.

미구엘의 창백한 입술이 간신히 달싹였다.

"시부럴…."

이안은 곧바로 화염구를 움직여, 미구엘의 팔 단면에 가져갔다.

"...!"

살 타는 냄새. 잠시 바들대던 미구엘이 이내 축 늘어졌다. 차라리 기절한 게 다행이리라.

필요 이상으로 많이 타지 않게 최대한 정교하게 처리한 이안이, 화염구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다행히 출혈은 멈췄다.

"계속 잘 들고 있어라."

"…네."

자신이 아픈 것처럼 눈물 흘리던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일어선 이안은, 멀지 않은 곳에 전복된 마차로 다가갔다.

마차는 처박히듯 뒤집혀 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아래에 깔린 것들은 거의 무사했다.

이안은 그 아래를 뒤져 배낭을 집어 들고는 다시 돌아왔다.

"그대로 들고 있어라."

배낭을 뒤적인 이안이 익어버린 단면에 천을 대고는, 주위를 붕대로 압박해 칭칭 감기 시작했다.

이내 그가 턱짓했다.

"천으로 몸의 피를 닦아."

루시가 재빨리 움직였다.

손이 이미 피투성이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구엘의 가슴팍에 번진 피를 닦아냈다.

이안은 그제야 루시의 손에 뭔가가 들려 있다는 걸 눈치챘다.

당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이안은 비로소 제대로 드러난 가슴의 상처를 확인했다.

다행히 그리 깊지 않아서, 벌써 피가 응고되고 있었다.

아마 팔로 공격을 막아내며 쓰러진 덕분일 터였다.

비록 손은 날아갔지만. 몸이 두 쪽 나는 것보단 나은 결과였다.

"하늘이 도왔군."

미구엘의 가죽 갑옷을 벗기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올레그가 이랬나?"

"…네."

"놈은?"

루시가 대답 대신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저만치에 널브러진 커다란 숯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말과 함께 통째로 타 버린 올레그였다.

도망치다가 숨이 끊어진 모양.

인마 모두, 걸치고 있던 마법 무구만이 그나마 형태를 보전하고 있었다.

타 죽은 시체는 저 하나가 전부가 아니었다.

곳곳에 숯덩이가 된 말과 인간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고통스러웠겠군. 잘 했다."

내뱉은 이안이 미구엘의 가슴 상처 위에 천을 덧댔다. 출혈이 거의 멎어서, 감염만 조심하면 될 것 같았다.

상처에 붕대를 감으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왜 계획대로 못 한 거냐."

"그게… 저 사람들의 상태가 이상했어요."

루시가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달려와선 마차를 넘어뜨렸죠. 그러면서 비명과 고함을 지르고, 마구 욕을 해 댔죠. 미구엘이 저를 안아 들면서 그랬어요. 저 사람들, 눈이 돌았다고."

"눈이?"

"정말 그랬어요. 눈가에 핏줄이 튀어나오고, 눈이 번들댔거든요."

"…오염된 마력에 중독된 거군."

이안은 멀어지던 올레그와 연기 장막, 그리고 번지던 오염된 마력을 떠올렸다.

결계가 완성되기 전에 통과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오염된 마력을 온몸으로 머금은 모양이었다.

오염된 마력은 종류에 따라 다양한 상태 이상을 유발했다.

공포, 착란, 광분 등등.

아까 본 자의 정신 나간 얼굴이, 단지 루시에 대한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저자가 저한테 소리쳤어요. 다 너 때문이라고. 그냥 죽여 버리겠다고. 저는 단검을 뽑으려고 했고, 미구엘이 막았죠. 그리고…."

루시가 미구엘의 창백한 얼굴을 돌아보며 숨을 골랐다.

떠오르기 괴로운 모양.

이안이 충분하다고 말하려는 찰나,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 님의 말씀이 맞댔어요. 전 칼을 들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고. 그러면서 이걸 쥐여 줬어요."

루시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로브에 문질러 닦고는 내밀었다.

고대어가 빼곡하게 새겨진 손바닥만 한 부적이었다.

안에 응축된 마력이 느껴졌다.

"이걸 쓰면 저를 멀리 날려 보내줄 거라고요. 거기가 어디든 안전한 곳에 숨어서 아침을 기다리라고. 그럼 이안 님이 찾으러 올 거라고요. 시간을 끌 테니, 이 부적 양쪽에 손을 올리고 힘을 주랬죠. 그리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어요."

"…널 살리려고 올레그와 맞섰다고?"

이안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어요. 첫 공격은 막았죠. 하지만 두 번째에… 이렇게 됐어요. 전 도저히 이 부적을 쓸 수 없었어요. 저자가 다시 치켜드는 피 묻은 도끼만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다음은 말 안 해도 돼. 주위만 봐도 충분히 알겠으니까."

"…저 사람의 말이 전부 틀린 건 아니에요. 전부 저 때문인 건 사실이니까."

루시가 눈물을 꾹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구엘이 이렇게 된 것도요. 제가 조금만 더 빨리 마법을 썼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볼 땐 이놈이 이렇게 돼서 네 마법이 더 강해진 것 같은데."

내뱉으며 붕대질을 마무리한 이안이, 루시를 돌아보았다.

"네가 도망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놈이 산 거고."

어디까지나, 아직은. 평소라면 내뱉었을 뒷말을 삼킨 이안이, 이윽고 덧붙였다.

"잘했다는 얘기다. 루시."

"...."

입술을 질끈 깨문 루시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주위의 나무에 붙은 불길들이 커졌다 작아지길 반복했다.

이안은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울도록 놔둔 채 미구엘의 옷을 대충 다시 입히고, 마차로 향했을 따름이었다.

돌아온 그의 품에는 부서진 잔해들이 여럿 들려 있었다.

"여기에 불 좀 붙여라. 주위에 붙은 불은 끄고. 이놈이 깨어날 때까진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으니까."

"네. 네에…."

대답한 루시가 눈물을 닦았다.

그녀의 눈과 머리칼이 일렁였다.

화륵, 이안이 모아 놓은 잔해에 불이 붙었다.

뒤이어 눈을 감고 숨을 고르자, 일대의 나무에 타오르던 불길들이 일제히 잦아들었다.

일렁이던 머리칼이 가라앉았다.

'저런 건 나도 못 하는데….'

어이가 없군.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마차에서 침구와 로브, 망토 따위를 되는대로 찾아냈다. 흙과 재로 범벅인 것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달라고?"

모닥불로 돌아온 이안이, 손을 내미는 루시를 보며 물었다.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건넨 침구들을 받아든 그녀는, 미구엘의 온몸을 말 그대로 꽁꽁 싸매기 시작했다.

지극 정성이군.

이안이 결국 피식댔다.

"숨 막히지 않게 잘해라. 네 것도 남기고."

"여기 같이 들어가서 자면 돼요."

"그러든가."

심드렁하게 내뱉던 그의 미간이 문득 좁아졌다.

그의 고개가 숲의 어둠 너머로 돌아갔다.

"...!"

루시도 마찬가지였다. 어둠을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이, 얼어붙듯 무표정해졌다.

뒤이어 어둠 너머로, 비척대는 인기척이 드러났다.

"…내 꼬리."

쌍검을 움켜쥔 샬롯이었다.

생기를 잃은 눈으로 중얼대던 그녀가, 이안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구겼다.

"내 꼬리…! 내놔…!"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루시의 눈빛이 타오르려는 찰나.

"넌 그냥 있어라."

손을 들어 저지한 이안이, 단죄의 검을 뽑아 들며 일어섰다.

앞으로 나선 그가, 달려오는 샬롯을 우두커니 마주 보았다.

"...!"

악에 받친 듯 이안을 노려보던 샬롯의 눈빛이, 이윽고 흔들렸다.

내달리던 발걸음이 느려졌다.

이안에게 멀지 않은 거리까지 다가왔을 때는, 빙판을 걷는 것처럼 주춤대기까지 했다.

"...."

이안을 바라보는 샬롯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움찔대며 일그러지는 얼굴.

자신의 꼬리를 잘라 낸 자에 대한 공포가, 그녀의 영혼에 각인되어 버린 것이다.

저벅.

이안이 한 걸음 내디딘 건 그때였다.

멈춰 선 샬롯이 몸을 떨었다.

전신의 털이 곤두선 것 같았다.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철그렁.

샬롯의 쌍검이 땅에 떨어졌다.

고양의 앞의 쥐처럼 몸을 떨던 그녀가, 이윽고 주저앉았다.

샬롯의 눈동자에 공포와 굴욕이 뒤섞였다.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차라리… 죽여라…!"

수인의 관점에선, 그녀가 공포를 이겨내고 목소리를 낸 것만으로도 감탄했을 일이었다.

물론 이안은 그런 사실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그저 그 앞에 멈춰 선 채, 공포에 젖은 주황색 눈동자를 내려다볼 뿐.

"그 전에."

이윽고 이안이 입을 열었다.

샬롯이 움찔대며 그의 입을 주목했다.

"네 고용주를 내 앞에 끌고 와라. 말만 할 수 있는 상태면 돼. 그리고 다른 놈들은 전부 죽여. 놈들의 목도 가져와라. 빠짐없이, 전부."

"...!"

샬롯의 눈이 커졌다.

이안은 추적자들을 멀찍이 뒤따르는 검은 마차의 존재를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이왕이면, 마차도 챙겨 와. 타고 갈 게 필요하니까."

"그러면… 꼬리를… 돌려줄 거냐…?"

샬롯이 더듬대며 물었다.

이안이 코웃음 쳤다.

"네 꼬리가 고작 그 정도의 가치밖에 없진 않을 것 같은데."

"...."

"네가 저지른 짓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부족하지."

"제… 기랄…!"

샬롯이 분한 듯 씹어 뱉었다.

하지만 이안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을 터였다.

꼬리를 되찾아야 하니까.

뿌득.

이윽고 샬롯이 자신의 쌍검을 부러뜨릴 것처럼 집어 들었다.

분한 표정과 달리, 그녀는 이안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내뱉었다.

"내일… 돌아오겠다…."

샬롯이 도망치듯 어둠 너머로 몸을 날렸다.

검을 회수한 이안이 모닥불로 돌아왔다.

"방금… 뭐였어요…?"

멍한 얼굴로 지켜보던 루시가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뒤처리는 깔끔하게 해야지."

"그게 아니라.... …아니에요."

루시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일 터.

피식한 이안이 턱짓했다.

"자라. 네 말대로 미구엘한테 체온도 나눠 주고."

"네. …감사해요, 이안 님."

"뭐가."

"전부 다요."

그 말을 끝으로, 루시가 로브와 망토 뭉치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가 미구엘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진짜 부녀지간 같군.

생각하며, 이안은 미구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

하지만 호흡은 훨씬 안정된 상태였다.

'…적어도 당장 죽진 않겠네.'

생각하며, 그는 미구엘의 행동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자기 희생이라니.

평소의 겁 많은 성격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었다.

루시에게 그만큼 정이 든 것일까.

무슨 이유건, 숭고한 결단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타심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이 세계에선 더더욱.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피식댄 이안이 모닥불에 마차 파편을 몇 개 더 던져 넣었다.

비로소 지독한 두통과 현기증, 피로가 몰려 들었다.

온몸이 트럭에라도 치인 것처럼 욱신거렸다.

하지만 잠들 수는 없었다.

아무리 맹약을 맺었다 해도, 정체도 모르는 고대 망령의 권역에서 모두를 무방비 상태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개 차가운 맥주 한 잔 마실 수 있음 소원이 없겠다, 진짜…."

읊조리며, 이안은 배낭에서 꺼낸 육포를 억지로 입에 물었다.

그야말로 긴 하루였지만, 밤은 이제 시작된 참이었다.

#066화

"으으…."

미구엘이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미구엘…? 미구엘! 정신이 들어요?!"

루시의 외침이 이어졌다.

미구엘이 힘겹게 눈을 떴다.

루시의 얼굴을 바라본 그의 얼굴에, 이윽고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여기가 저승은 아니구만."

"아니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며 이안이 그의 곁에 주저앉았다.

미구엘의 미소가 짙어졌다.

부르튼 입술이 갈라지면서 피가 맺혔다.

"형씨를 봤는데. 그것도 꿈이 아니었나 보군."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라. 네 꿈에 내가 왜 나와?"

혀를 찬 이안이 그의 이마에 손등을 얹었다.

미구엘이 이 와중에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열은 별로 없군."

"…좋은 의미인 거죠?"

루시가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이놈의 상처가 감염되지 않은 것 같단 얘기지."

"흐흐… 죽을 거면 진작 죽지 않았겠소."

"주둥이 놀리는 거 보니, 살 만한가 보네."

"이 정도야 뭐…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소?"

"한나절 좀 넘게. 루시한테 고마워해라. 그 녀석이 널 살렸으니까."

이안이 일어섰다.

미구엘의 시선이 루시에게로 향했다.

"고맙다. 안 도망가 줘서."

"원래는 미구엘이 가는 거였다면 서요. 고마워하지 마요.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까."

"무슨 소리냐. 다 나 마음 편하자고 한 결정인데. 그런데…."

마른 혀로 입술을 축인 그가 말을 이었다.

"왜 내 몸을 묶어 둔 거냐?"

"춥지 말라고 덮어 둔 거예요."

"이건 거의 결박한 수준인데."

루시가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표정 변화에 놀란 듯 눈을 끔뻑인 미구엘이, 이내 마주 미소 지었다.

"내가 준 부적은, 너 가져라. 언제 쓸 일 있을지 모르니까."

"아니에요. 이건 미구엘이…."

"주접 그만들 떨고 앉아라. 먹어야 하니까."

되돌아온 이안이 말을 잘랐다.

그의 손에는 작은 냄비가 들려 있었다. 리우렐가의 시녀가 챙겨 줬지만, 여정 내내 한 번도 쓴 적 없던 물건이었다.

그 안에서 고소한 냄새가 번졌다.

"제가 먹일게요."

"그래라."

루시가 냄비를 받아드는 사이, 미구엘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불에 탄 흔적이 역력한 공터. 사방에 그대로 널브러진 숯덩이가 된 시신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전부 다 꿈이 아니었군."

읊조린 미구엘이 왼팔을 들었다.

팔꿈치 아래로 절반이 비어 있었다.

"이것도 꿈이 아니고."

"애석하게도."

이안이 내뱉었다.

미구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신기한 걸 하나 알려 드리겠소. 분명히 손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군. 있지도 않은 손이 욱신거려."

덤덤하게 내뱉은 그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제 활은 못 쓰겠소."

"…미안해요, 미구엘."

대답은 루시에게서 나왔다.

그녀가 어느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미구엘이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네가 미안할 건 아니다. 거, 별거 아니야. 세상에 외팔이가 어디 한둘인가. 난 그냥 손만 하나 없는 거니까, 엄밀히 말해선 외팔이도 아니고. 응? 안 그렇소, 형씨?"

"그래. 우는 건 좋은데, 그건 먹이면서 울어라."

이안이 턱짓했다.

루시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냄비 안에 담긴 스튜를 한 스푼 떠서 미구엘의 입에 가져갔다.

그 모습이 퍽 우스워서, 미구엘은 물론 이안도 피식댔다.

결국 루시도 웃음을 지어 버리고는, 열심히 미구엘의 입에 스튜를 떠넣었다.

꽤나 따스한 광경이었다. 저주받은 숲 한복판, 타죽은 시체들 사이만 아니었다면.

"맛이 예술인데. 형씨, 요리도 할 줄 아셨소?"

"그냥 있는 거 다 넣고 불려서 끓인 거다."

"진작 이렇게 먹을 걸 그랬소. 흐흐…."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웃음 짓던 미구엘이, 문득 덧붙였다.

"고맙수. 살려 줘서."

"...."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슬슬 주접이 도를 넘고 있었다.

"형씨가 치료해 주신 거잖소."

"입 닫아. 네가 빨리 회복되어야 떠날 수 있으니까. 여기서 며칠씩 묵게 하면 그냥 죽여서 파묻고 갈 거다."

"이 정도는 반나절이면 너끈해질 거요. 그나저나…."

이젠 거의 뼈대만 남은 마차를 돌아본 미구엘이 덧붙였다.

"이동은 어떻게 하실 거요? 걸어가긴 쉽지 않을 텐데."

"걱정 마라. 방법이 생길 테니까."

"...?"

미구엘이 그 말의 뜻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두 시간쯤 지나서였다.

다각- 다각-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검은 마차를 발견한 것이다.

"추적자가 더 있소…!"

"진정해라. 저게 우리가 타고 갈 마차니까."

"...?!?!"

***

검은 마차가 공터 앞에 멈췄다.

말없이 짐칸으로 넘어간 샬롯이 마차 밖으로 뭔가를 연달아 집어 던졌다.

"...."

전부 사람의 머리였다.

천칭 상단의 경호병과 고용인들.

"읍… 으읍…!"

뒤이어, 그녀가 눈과 입을 가리고 사지를 결박한 남자를 집어 던지듯 마차 밖으로 밀어냈다.

샬롯이 그를 질질 끌고 이안 앞으로 다가왔다.

자신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미구엘과 루시를 일별한 그녀가 내뱉었다.

"약속대로… 했다."

"약속이라니."

코웃음 친 이안이 덧붙였다.

"명령이겠지."

"...!"

샬롯이 이안을 노려봤다.

상단 놈들을 죽이면서 어느 정도 지난밤의 충격에서 벗어난 모양.

하지만 날 선 눈빛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안과 시선을 교환한 지 불과 몇 초 만에, 샬롯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제기랄… 그래… 명령대로."

이안은 축 늘어진 그녀의 꼬리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꼬리는 반도 남지 않았고, 끝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이윽고 이안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중년인에게로 돌아갔다.

왜소한 체구. 몸 곳곳에 험하게 다뤄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안은 그의 눈을 가린 천과 입에 쑤셔 박은 천을 빼냈다.

남자가 샬롯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샤, 샬롯…! 왜 배신한 것이냐! 왜?"

오, 첫 마디가 이거라니.

한쪽 눈썹을 치켜든 이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샬롯에게로 향했다.

"혹시, 연인 관계였나?"

"무슨 개소…! …절대 아니다."

반사적으로 내뱉다 움찔한 샬롯이 덧붙였다.

그녀가 경멸하듯 중년인을 내려다보았다.

"난 이런 나약하고 음습한 인간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어. 오히려 혐오하지."

"...!"

그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샬롯이 싸늘하게 덧붙였다.

"네가 날 어떻게 보는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비에르. 통탄할 일이 많군. 널 내 손으로 죽이지도 못하다니."

"샤… 샬롯…."

하비에르가 탄식했다.

이안이 그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지금이 사랑싸움이나 할 때는 아닐 텐데. 하비에르."

"이안…! 이안 호프…!"

그제야 눈을 치켜뜬 하비에르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살려 주게! 돌려보내 준다면 더는 자네 일에 관여하지 않겠네! 아니, 상단의 이름으로 보상금도 주겠네!"

"이제야 좀 상식적인 대답이 나오는군. 너도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지, 진심일세…!"

"그래서, 여기서 일어난 일은 상단에 얼마나 알렸지?"

"그, 그게...!"

하비에르의 눈에 갈등이 스쳤다.

어떻게 대답해야 살 수 있을지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애석하게도, 이안은 어떤 대답을 내놓건 살려 줄 생각이 없었지만.

"네 이름까진 알리지 않았다. 이 음흉한 놈은, 혹시 상단의 다른 단주가 공을 가로채려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샬롯이 대답을 가로챘다.

하비에르의 얼굴에 또 한 번 배신감이 번졌다.

"아, 그래. 좋아. 그럼 너랑 더 대화할 필요도 없겠군."

"...."

"사실, 누가 알게 된들 믿지도 않겠지. 나 같은 일개 납치범이 어떻게 천칭 상단의 정예를 모조리 죽이겠어."

"나, 나는 강철 금고에 보관 중인 돈이 아주 많아! 내 개인적인 돈이라 상단과도 관계없지! 살려만 준다면 전부 주겠네! 보관 중인 금화가 천 개가 넘어!"

"그건 거부하기 힘든 유혹인데."

이안의 시선이 하비에르의 결박된 손으로 향했다.

그가 중지에 끼워진 굵은 반지를 억지로 뽑아냈다.

"이게 그 열쇠인가?"

"...!"

하비에르의 눈이 커졌다. 너 같은 촌놈이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눈빛.

이안이 미소 지었다.

"이 돈은, 내가 나중에 제국에 가게 되면 유용하게 써 주지."

"그, 그건 내가 직접 가지 않으면-"

"그래도 기꺼이 내주겠지. 다만, 수수료를 삼 할이나 받아 가겠지만. 내 말이 틀렸나?"

"...."

하비에르가 굳어졌다. 반지를 보란 듯 흔들어 보인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았다.

"네가 이자를 처리해라."

"...!"

"애도 있으니 안 보이는 곳에서 끝내."

눈이 커진 것도 잠시.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녀가 하비에르를 내려다보았다.

하비에르가 침을 삼켰다.

"샤, 샬롯. 잠깐만, 내 말을-"

샬롯이 꽥꽥대는 하비에르의 얼굴을 움켜쥐고는 질질 끌고 갔다.

은근히 단순한 녀석이군.

생각하며, 이안은 홀가분하게 몸을 돌렸다.

이제 그들을 쫓는 추적자들은 전부 처리한 셈이었다.

더는 아무도 그들을 쫓지 않으리라.

'일종의… 성과급도 챙겼고.'

이안은 반지를 아공간에 넣었다.

금화 천 개 이상이라니. 수수료를 떼더라도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제도에 가면 돈방석에 앉겠군.'

생각하며 모닥불 앞으로 돌아온 이안이, 자신을 바라보는 미구엘과 루시의 시선에 미간을 좁혔다.

"뭐."

"저 수인, 어떻게 된 거요? 형씨를 죽이려던 거 아녔소?"

"그랬지. 그리고 내가 이겼다."

그 과정에서 추가 능력치 포인트를 엄청나게 썼지만.

이안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결정에 후회는 없지만.

어쨌든 또다시 망캐의 길로 몇 걸음 더 깊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힘이 강할 터였다. 이러다 정신력 다음으로 높은 능력치가 지능이 아니라 힘이 될지도 몰랐다.

힘보다 낮을 뿐, 민첩성도 만만치는 않았고.

"싸워서 이긴다고 명령을 따르게 되면, 형씨는 지금쯤 군단을 거느리고 있으실 것 같소만…."

"저러는 건 꼬리를 잘라서다."

"꼬… 리요?"

루시가 되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인은 자신의 꼬리를 자른 자에게 복종하게 돼. 지워지지 않는 두려움이 영혼에 새겨지지."

"…그럼, 계속 함께 다니게 된다는 건가요?"

루시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이안은 꺼림칙한 표정인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그냥 죽이길 바라나?"

"엉…?"

"내가 저걸 살려둔 건, 단지 저게 더 큰 고통을 주리라 생각해서일 뿐이야. 겸사겸사, 후환도 제거하고. 다 끝났으니 묻는 거다."

이안의 담담한 시선에, 오히려 미구엘이 당황했다.

이안이 진심으로 묻고 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는 천칭 상단의 추적자들에게 손을 잃었으니까.

자신이 그러라고 말한다면, 이안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기꺼이 저 수인을 죽여 주리라.

이윽고 미구엘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 복수는 여기 루시가 다 해줬소. 그리고 저 수인 빼곤 전부 죽었잖소? 형씨 명령에 복종한다면야, 뭐. 다만 신경 쓰이는 건 있소."

어깨를 으쓱인 그가 덧붙였다.

"형씨를 두려워한다면, 그냥 도망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말이오. 평생 형씨를 안 마주치면 그만인 거잖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대답한 건 샬롯이었다.

마차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녀가 모닥불 앞으로 다가왔다.

방금 튄 피가 그녀의 얼굴 털을 타고 흘러내렸다.

"잘린 꼬리를 두고 도망치는 건 수인의 가장 큰 수치다. 그런 건 더 이상 수인이라 할 수도 없지.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내뱉으며 모닥불 옆에 선 그녀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꼬리가 잘린 수인은, 꼬리를 되찾거나 꼬리를 자른 자를 섬길 수밖에 없지. …이 비밀을 아는 인간은, 이제 많지 않은데."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모양.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거기까진 몰랐다. 덕분에 알게 됐군."

"뭐라고…?"

샬롯의 얼굴에 충격이 번졌다.

"다 알고 내 꼬리를 자른 게 아니란 말이냐?"

"그게 수인에게 최악의 형벌이란 것만 알았지. 덕분에 네 꼬리의 가치가 더 올라갔군."

"그럴 수가…."

"그런 의미에서, 여기 이 둘에게 허튼짓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그 순간 네 꼬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테니까."

이안이 샬롯의 망연자실한 눈을 마주 보았다.

"물론, 나한테서 도망치지도 못할 거고."

"제기랄…."

샬롯이 가르릉대는 숨소리를 냈다.

그런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미구엘이, 이윽고 헛웃음을 지었다.

"재미있고만, 이젠 예비 마족까지 동행하게 되다니."

"그렇게 부르지 마라! 나는 루 솔라를 섬긴다…!"

샬롯이 으르렁댔다.

예비 마족은 수인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선입견이었다.

그들이 본래 섬기던 신을, 인간들의 신이 공허의 변방으로 유폐시켰기 때문이다.

포악하며 잔인한 신이라는 이유였다.

인간과 대적하다 몰락한 종족의 흔한 말로이기도 했다.

인간과 같은 신을 섬기는 다른 종족들과 달리, 수인은 아직도 공허에 갇힌 신을 섬긴다는 소문이 팽배했다.

물론 이안이 알기로도, 그게 아예 헛소문인 건 아니었다.

"어디다 이를 드러내는 거지? 송곳니 다 뽑히고 싶냐?"

"...."

잠깐의 긴장감은 이안의 한마디에 바로 끝이 났다.

시선을 돌린 샬롯이 이안의 뒤편에 주저앉았다.

루시와 시선을 교환한 미구엘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동안 별의별 꼴을 다 본 덕인지, 벌써 적응을 끝낸 모양이었다.

"그럼… 슬슬 다시 출발할 준비만 하면 되겠소."

이윽고 미구엘이 덧붙였다.

이안이 그를 턱짓했다.

"너만 괜찮아지면."

"그러니까, 갑시다."

"벌써 가자고?"

"팔이 잘린 거지 다리가 잘린 건 아니잖소. 몸이 좀 쑤시긴 한데,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오."

끙, 침음하며 일어선 미구엘이 이내 덧붙였다.

"충분할 것 같소. 마차는 한 손으로도 몰 수 있으니까, 갑시다. 여기서 또 밤을 보낼 순 없잖소."

"하루만 더 쉬어요. 이제 쫓아오는 사람들도 없잖아요. 그러다 상처가 덧나면, 그게 더 큰 일이라고요."

루시가 반대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가다가 송장 치울 순 없지."

"괜찮다니까 그러시네…."

"그러니까, 넌 뒤에 타서 길잡이나 해라."

"엥? 그럼 마차는 누가 몰고?"

이안이 대답 대신 샬롯을 돌아보았다.

샬롯이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나보고, 마부를 하란 말이냐?"

"정확히 알아들었군. 길잡이는 미구엘이니까, 이놈이 가라는 대로 마차를 몰아라."

"...."

샬롯의 시선이 미구엘에게로 향했다.

미구엘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잘해 보자고. 이름이, 샬롯이랬나?"

"이런… 젠장할…."

귀를 부르르 떤 샬롯이, 이윽고 벌떡 일어나 마차로 향했다.

제국 상단의 상단주 직속 호위병에서 마부로 전락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일행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차 때깔 한 번 죽이는군. 하다못해 마차조차 제국제가 더 좋다니. 기가 막힌 일 아니오?"

검은 마차의 짐칸.

피 묻은 바닥에 모포를 깔고, 그 위에 로브와 망토를 덮은 채 편안하게 기댄 미구엘이 웃음 지었다.

하비에르가 앉던 의자에 비스듬하게 기대앉은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편하긴 하군."

어깨에 기댄 루시를 확인한 미구엘이 이안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미소 지었다.

"출발해도 될 것 같은데? 다시 관도로 나갈 거니까, 말 머리부터 돌리라고. 샬롯."

"...."

대답 대신 낮게 그르렁댄 샬롯이 고삐를 후려쳤다.

마차가 잿빛 숲을 가로질렀다.

그 후로 더 이상의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버려진 땅을 건넌 일행은, 무사히 북부 외곽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067화

루 사드 왕국, 글루미르.

왕국에서 두 번째로 크고 부유한 이 영지는 마족, 그것도 흡혈 일족이 지배하는 땅이었다.

글루미르 외곽에 위치한 미로 저택이 바로 그들의 본거지였다.

제국 양식으로 지은 3층짜리 대저택. 미로 저택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저택에 딸린 거대한 정원이 미로의 형태로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정원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저택 역시 보기와 달리 어둡고 복잡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저택을 몇 번 방문해 본 이들 조차, 잠깐 방심하면 길을 잃을만큼.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대륙을 통틀어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미로 저택의 주인인 니그리안테 백작 부인과 마주 앉은, 후드를 눌러쓴 사내도 그중 하나였다.

"부인께서 잃어버린 어린 양은, 되찾으셨습니까?"

사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로브에는 금실로 커다란 원이 수놓아져 있었다.

루 솔라의 상징.

하지만 백작 부인은 문양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흡혈 일족은 제국과 교단에 복속된 지 오래였다.

불로와 불사의 비밀을 연구하는데 협조하는 것을 대가로, 그들은 제국과 가장 가까운 변방 왕국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눈앞의 이 남자는 바로 그 부분을 관리하는 자였다.

"애석하게도… 아직이에요. 사제님."

결론부터 말한 부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홀리게 될 미소였지만, 사제라 부르는 눈앞의 이 남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흥미로운 존재가 되어가는 모양이더군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실험체가 될 거예요. 단지 요정이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생에 대한 의지로 똘똘 뭉쳐 있는 것 같거든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부인은 긴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더욱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 자는 루 솔라의 광신도였다.

원한다면 미로 저택 전체를 빛으로 뒤덮어 버릴 수도 있는.

부인이 그의 정체와 얼굴을 밝히려 애쓰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오히려 안전한 법이었다.

"얼마 전, 벨 론데에서 그 아이의 행적을 발견했어요. 일족의 심판자를 파견했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부인께는 다행스럽게도, 우리 계획에 작은 차질이 빚어진 상태입니다."

우리가 정확히 누구를 뜻하는지는 부인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의 계획은 얼핏 알고 있었다.

"변방에 더 짙은 어둠이 깃들게 할, 그 계획 말씀이시군요."

"빛이 더 밝고 찬란하게 빛나기 위한 계획이지요."

사내의 정정에 부인은 미소로 화답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지만, 달라질 것은 없을 겁니다. 여신께선 예상할 수 없지만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주시는 법이니까요."

"부디 잘 해결되시길 바라요."

내뱉으며, 부인은 가장 미친 건 광신도가 아니라 루 솔라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역겨운 빛의 여신은, 신도들이 그저 자신을 열성적으로 섬기기만 한다면 무슨 짓을 벌여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눈앞의 이 사제에게 그토록 강대한 신성을 내려줄 리가 없었다.

"그리될 겁니다. 부인께서도 그러시길 바랍니다. 반년의 기한을 더 드리겠습니다."

내뱉은 사제가 일어섰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다음엔… 새로운 양이라도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기꺼이."

사제가 몸을 돌렸다.

부인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그가 문을 나선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서랍에서 소녀의 피로 담근 혈주를 꺼내며, 그녀가 읊조렸다.

"예상치 못한 변수라…."

사실, 그녀는 사제가 말한 변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겔 란의 구원자이자 벨 론데의 학살자. 그저 이름만이 알려진 출신 불명의 용병.

일족이라 부르고 싶지도 않은, 그 이종족 실험체 계집의 행적을 추적하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부디 더 어지럽혀 주길."

저들이 일족의 귀중한 진혈을 탐낼 여력이 없도록.

진심을 담아 기원하며, 부인은 혈주를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

내쉬는 숨결에 입김이 서렸다.

의자에 축 늘어진 이안의 얼굴에는 홀가분함이 감돌았다.

이제 몇 시간이면 화로의 사원에 도착할 터였기 때문이다.

루시와 미구엘을 그 안에 넣어주기만 하면. 이 길고 긴 의뢰도 마침표를 찍게 되리라.

그리고 나서는 곧바로 인근의 마을부터 들를 생각이었다.

재정비와 휴식도 필요했지만, 뜻밖에도 가장 급한 건 목욕이었다.

몸에서 하수구 냄새가 났으니까.

"아무래도, 라르무트에선 하비에르를 믿지 않은 모양이군."

문득 샬롯이 내뱉었다.

이안이 눈동자만 움직여 그녀의 뒤통수를 올려다보았다.

"알아듣게 말해."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뭐라고…?"

자세를 바로 한 이안의 미간이 이내 구겨졌다.

관도를 따라 이어진 언덕 중턱에, 모닥불을 피운 채 기다리는 판금 갑옷 차림의 사내들이 눈에 들어왔다. 총 넷. 둘은 기사였고 둘은 종자로 보였다.

"저자들이 우릴 기다리는 건진 어떻게 알고?"

그들을 보고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린 미구엘이 물었다.

샬롯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문장이 보이지 않나? 벼락 기사단이다."

"벼락… 기사단?"

"라르무트의 친위 기사단이지."

"이런 염병할… 다 끝난 줄 알았더니."

미구엘이 탄식했다.

이안의 미간도 절로 구겨졌다.

라르무트는 루시가 루 엔테르의 은총을 받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행선지를 예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터. 소식을 듣자마자 만일을 대비해 최정예 기사들을 파견한 모양이었다.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사원에 도착하기 전에 루시를 가로챌 생각이리라.

루시를 손에 넣으려는 의지가 강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철저할 줄이야.

'역시 통수는 방심한 순간에 맞는 건가….'

이안은 게임에서 벼락 기사단과 싸워 본 적이 있었다.

미쳐버린 채로도 마경이 된 성을 지키던 중간 보스들.

당연히 끔찍하게 강했고, 패턴도 까다로웠다.

숫자는 그때보다 훨씬 적지만, 그렇다 해도 강할 게 분명했다.

지친 상태로 상대한다면 더더욱.

마차를 발견하고 준비하기 시작한 기사들을 눈에 담던 샬롯이 이윽고 웃음 지었다.

"멋지군. 벼락 기사단이라니."

"지원군이 와서 신나셨나 보군."

미구엘이 비아냥댔다.

샬롯이 무슨 개소리냐는 듯 그를 돌아보았다.

"저들이 날 살려줄 것 같나?"

"...? 멋지다며."

"멋진 죽음이 될 거란 얘기다. 이 꼴로 오래 사느니, 저들과 싸우다 죽는 게 훨씬 아름답겠지."

"...."

"저들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들이다. 게다가 회색 마탑의 정수가 담긴 무구로 무장하고 있지. 결말은 정해져 있겠지만, 아름다운 전투가 될 거야."

미구엘이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뻐끔댔다.

이안의 코웃음이 이어졌다.

누구 마음대로 결말을 정해?

"싸워 보기도 전에 죽을 생각부터 하다니. 꼬리가 잘리더니 야성도 잃었나 보군."

샬롯이 발끈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내 야성은 무사하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제아무리 강자라도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터지면 죽어."

천천히 목을 풀면서, 이안이 샬롯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게 내가 아는 사실이다."

"...."

이번엔 샬롯이 말문이 막힌 표정이 됐다.

이안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윽고 수치스러운 듯 시선을 돌렸다.

이안의 눈빛은 전혀 삶을 포기한 자의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투사의 눈빛.

"마차를 멈춰라!"

그때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졌다.

말에 올라탄 기사들이 옆구리에 장창을 끼운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 둘뿐임에도 이안의 육감이 경고를 보냈다.

'졸라게 세다 이거지.'

이안은 몸을 일으키며 내뱉었다.

"미구엘, 전투가 시작되면 우회해서 언덕을 넘어라. 결과는 신경 쓰지 말고 사원으로 가."

"아, 알겠수…."

기사의 목소리가 재차 이어졌다.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게 해 준 네놈들의 저력에 찬사를 보내마! 하지만 여기까지다! 순순히 영애를 넘긴다면 고통 없는 죽음을 약속하지!"

거참 기사다운 짓거리군.

이안은 대꾸도 하지 않고 마차 옆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뒤로 쌍검을 뽑아 든 샬롯이 몸을 낮춘 채 착지했다.

마차 앞으로 나서는 둘의 모습에 기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명예로운 죽음을 원하는 거군."

생각을 바꾼 듯 말에서 내린 그들이 창을 던지고는 검을 뽑았다.

파치칫, 갑옷을 타고 번진 푸른 스파크가 검을 타고 흘렀다.

이안과 샬롯의 전신에도 바람이 휘몰아쳤다.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기사들의 걸음도 빨라졌다.

이윽고 양측이 서로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충돌이 임박한 순간.

화르르르-!

"...?!"

그들 사이로 샛노란 불의 장벽이 피어올랐다.

눈을 치켜뜬 이안이 멈춰 서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샬롯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네가 한 거냐는 눈빛.

이안은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렸다.

이건 마법이 아니었다.

신성력을 연료로 타오르는, 성화.

권능을 발현한 자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언덕 정상에 신성력을 머금은 기수가 팔을 치켜들고 있었으니까.

그 좌우로 서른이 넘는 기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를 멈추시오!"

사제복을 걸치고 손에는 메이스를 움켜쥔 자들이 언덕을 달려 내려오며 소리쳤다.

'루 엔테르의 사제들이군.'

이안이 검을 늘어뜨렸다.

사제들은 반으로 나뉘어 절반은 마차를 호위하고, 절반은 두 기사를 포위했다.

사제 중 하나가 말했다.

"무기를 거두시오. 여긴 타오르는 여신의 권역이오."

치칫- 파치칫-

기사들은 여전히 푸른 전격이 맺힌 검을 움켜쥔 채 사제들을 돌아보았다.

"우린 라르무트 영공 전하의 명을 받들어 이곳에 왔소. 그대들이 여신을 섬기는 사제들이라 하나, 무관한 공무를 방해할 권리는 없소."

"무관하지 않소. 여신의 은총을 받은 아이가 관계된 이상."

"그대들이 우리를 염탐하는 걸 알면서도 놓아둔 것은, 어디까지나 자비를 베푼 것이었소. 하나, 우리가 이대로 돌아간다면 영공 전하의 진노가 사원으로 향할 것이오."

노골적인 협박.

그에 대답한 건 사제가 아니었다.

"그대들은 영공께서 왜 그대들을 사원이 아닌 이런 장소에서 기다리게 한 것인지 까진 헤아리지 못한 모양이군요."

여인의 목소리.

사제들이 간격을 벌리고, 로브를 눌러쓴 여사제가 앞으로 나섰다.

성화를 일으킨 장본인.

그녀가 눌러 쓴 후드를 벗으며 내뱉었다.

"가서 영공께 전하세요. 루 엔테르를 섬기는 체르윈 아스트레이아가 기꺼이 기다리고 있겠다고."

금발과 붉은 눈이 드러났다.

"아, 아스트레이아...!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마마…!"

탄식한 기사들이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미 검에 맺힌 전격은 자취를 감춘 후였다.

눈앞의 이 여사제가 제국 황실의 직계 혈통이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다른 의미로 놀라워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로의 성녀. 실물을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가 게임에서 화로의 사원에 들른 3 챕터 중반부, 그녀는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꺼져가는 성화를 되살리기 위해 화로의 불씨에 자신의 몸을 바친 것이다.

덕분에 화로의 불길은 되살아났지만, 사제들은 광기에 빠졌다.

성녀의 유지를 이어받는다며 인간을 바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제물 의식의 종지부를 찍은 건, 물론 이안이었다.

그는 모든 사제를 죽이고 화로의 성화를 꺼뜨렸다.

루 엔테르의 신격을 떨어뜨린 것이다.

대륙을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넣은 결과라는 사실은, 물론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젠 사라진 미래겠지만.'

그사이, 기사들이 물러났다.

루시와 미구엘이 사제들의 호위를 받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가운데, 체르윈이 말에서 내렸다.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쥔 그녀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불씨의 운반자여. 화로의 사원이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상대의 종족과 신분 따윈 전혀 개의치 않는 정중한 태도였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루시에게로 향했다.

"반갑구나. 오래 기다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시페르 애쉬 리우렐이에요."

루시가 깍듯이 인사했다.

루시페르라고…? 생각하며 이안이 미구엘과 시선을 교환하는 사이, 그녀가 덧붙였다.

"저는 이제 바로 사원으로 가게 되나요?"

"그래. 너는 나와 함께 생활하며 공부하게 될 거란다. 장차 내 역할을 이어받게 될 테니까."

"…하지만 저는, 마법을 배우고 싶은걸요."

"놀랍게도, 타오르는 여신의 신성은 적색 마법과 비슷한 부분이 많단다. 나도 여신의 뜻을 섬기기 전엔 적색 마법사였어. 중요한 건, 네가 내면의 열정을 잃지 않는 것이지."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일행은 다시 마차에 올랐고, 사제들의 호위 아래 사원으로 향했다.

미구엘이 마차와 나란히 걷는 체르윈을 문득 돌아보았다.

"그, 그런데 저희가 오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요?"

"한 달여 전쯤, 여신께서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화로의 불씨가 운반되리라고요."

"신탁이요…? 여신께서 직접…?"

미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주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실소를 삼켰다.

한 달여 전이라면, 그가 퀘스트를 받은 시점과 겹쳤으니까.

'어지간히 절박했던 모양이군. 하긴, 신격이 추락하고 있었을 테니.'

"제국의 기사들이 마을에 머무는 것을 보면서, 저들이 불씨를 가로채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죠. 축객령을 내릴 명분이 없어 지켜보기만 했을 뿐.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미구엘이 다시금 눈치를 살폈다.

잠시 머뭇거린 그가 덧붙였다.

"사원에 들어가면, 저랑 루시는 당분간 나올 수 없는 겁니까?"

"견습 기간에는 사원 외부로 나서지 못하는 것이 철칙이니까요."

"어… 그럼… 사원에는 내일 가고, 마을에 먼저 들르면 안 되겠습니까?"

"...?"

체르윈이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미구엘이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꿋꿋이 하려던 말을 이어나갔다.

"이 긴 여정이 끝났는데, 술 한 잔도 하지 않고 헤어질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이안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이 와중에도 회식을 챙긴다고?

#068화

"...."

체르윈이 눈을 끔뻑이는 가운데.

"그렇다면, 제가 호위하며 마을로 모시겠습니다!"

"저도…! 새 불씨를 모시겠습니다!"

득달같이 돌아본 사제들이 연달아 소리쳤다.

거의 모든 시간을 사원에서 보내는 그들의 삶은, 기본적으로 금욕적일 수밖에 없었다.

화로가 꺼져 가던 요즘은 더더욱.

사제들의 뜨거운 눈빛에, 체르윈이 결국 웃음 지었다.

"그럼, 다 같이 가도록 하죠."

***

화로의 사원에 인접한 마을은 흔히들 대장장이 마을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루 엔테르의 가호를 받아 따듯한 편인 데다가 마물의 습격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원이 쇠퇴하고 있는 지금도 상당한 규모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안이 기억하던 살풍경한 마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광경.

어쨌건 덕분에 주점은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

이안을 따라 들어온 샬롯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던 마을 사람들은, 뒤따라 사제들이 우르르 들어서자 알아서 자리를 비켜 줬다.

곧 음식과 술이 자리에 깔렸다.

사제들은 기다렸다는 듯 앞에 놓인 것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축제 분위기가 따로 없었다.

루 엔테르의 사도가 될 불씨가 나타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몰락하던 교단에서 루시의 존재는 희망의 등불이나 다름없었다.

'난쟁이들이랑 섞여 살면서 수인을 보고 놀라다니….'

그 한복판에 묵묵히 앉은 이안은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실소했다.

그의 눈엔 난쟁이나 수인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어떠시오?"

그의 건너편에 앉은 미구엘이 묘한 눈빛으로 물었다.

술맛을 뜻하는 것이리라.

"좋군."

이안이 진심으로 내뱉었다.

식도가 탈 것 같은 독주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그는 높은 저항력과 정신력 덕분에, 어지간한 술로는 취기조차 느낄 수 없었으니까.

"북부의 술은 다 그 정도요. 맥주도 나쁘진 않지만, 종종 그리웠단 말이지."

미구엘이 술을 홀짝이며 말했다.

그의 볼은 벌써 발그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미구엘은 왜 북부를 떠났던 거예요?"

그의 곁에서 따듯한 수프를 입에 넣던 루시가 문득 물었다.

미구엘이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그런 게 왜 궁금하냐?"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별거 아닌 얘긴데."

"그래도요. 궁금해요."

"으음… 그렇다면야. 나는 북부의 작은 마을 출신이었다. 그때는 아직 마족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지…."

이안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미구엘의 과거 이야기를 귀에 담으며 천천히 음식을 음미했다.

질긴 고기, 그리고 정체 모를 건더기가 떠다니는 수프였지만 지금은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검은 벽이 미구엘의 고향을 앗아간 거네요."

"그런 셈이지만. 떠난 시간이 길어서 그런가, 지금은 그냥 북부 자체가 고향처럼 느껴지는군."

이안이 식사를 끝낸 건 미구엘의 과거사가 끝을 맺을 무렵이었다.

루시는 안타까운 눈빛이었지만.

이안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애초에 여긴, 비극적인 사연 하나쯤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드문 세상이었다.

'심지어 난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미구엘이 이안을 바라본 건 그때였다.

"그래서… 형씨는 어디로 가실 거요? 전에 말씀하신 대로, 곧장 제국으로 가실 거요? 그러니까, 직할령으로?"

"글쎄…."

"북부에 들른 김에 트라벨가로 가시는 건 어떻소? 형씨 능력이면, 거기서 떼돈을 벌 수 있을 텐데."

트라벨가는 북부 자치령의 수도였다. 이안의 옆에 앉은 샬롯이 귀를 쫑긋댔다.

그가 어딜 가든 따라다녀야 하는 만큼 신경이 쓰이는 것이리라.

"트라벨가도 들르긴 해야지."

술잔을 놓은 이안이 왼손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그 전에 먼저 끝내야 할 일이 있지만."

"엥…? 할 일이 남으셨다고?"

루시는 물론, 그녀의 옆에 앉은 체르윈까지도 이안을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한 이안이 내뱉었다.

"우리가 지나온 숲, 북부 깊은 곳까지 이어져 있는 모양이더군. 거기 도사린 놈과 맹약을 맺었어. 그러니까, 놈을 찾아가야 돼."

"뭐라고…? 그 얘길 왜 지금까지 안 하셨소?"

"별거 아니니까, 신경 꺼라."

"아니, 고대의 존재와 맹약을 맺은 게 어떻게 별 게 아니오? 그게 형씨한테 원하는 게 뭘 줄 알고."

다들 경악한 표정이었다.

샬롯조차 이안을 돌아볼 정도.

하지만 이안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날 원하겠지. 상관없어. 죽이면 그만이니까."

어차피 이안이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환영을 보내 댔을 놈이었다.

덕분에 버려진 땅을 평화롭게 지나쳤으니, 손해 본 것도 없었다.

게다가 이안이 맺은 맹약의 내용은 놈을 찾아가는 것뿐이었다.

일단 만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그를 손에 넣을 자신이 있다는 의미일 터였다.

물론 그런 주제에 자신의 정체도 위치도 알려 주지 않은 건 좀 열 받았지만.

그놈의 케케묵은 골통을 박살 내 주면 씻은 듯이 후련해 지리라.

"버려진 땅에서부터 북부까지 이어진 숲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체르윈이 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턱을 만지며 읊조렸다.

"서고를 찾아보면 관련된 자료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혹, 다른 단서는 없으신지요?"

"있소."

이안은 왼손의 장갑을 벗었다.

그의 손아귀에 흐릿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체르윈이 그 문양을 뚫어질 듯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에 얼마나 더 머무실 건가요?"

"이틀. 길면 사흘."

"그 안에 최대한 알아보도록 하죠.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더한 도움이라도 드리고 싶군요."

"뭐든 거절하진 않겠소."

"그럼 내일 사원에 들러 주십시오. 외부인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만, 여러분들은 예외로 두겠습니다."

"뭘 주시려고…?"

"화로의 축복을 청하겠습니다."

"...!"

이안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게임에선 냉기 저항과 체력 회복 속도를 상승시켜 주던 루 엔테르의 축복.

북부의 춥고 삭막한 야전을 누비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될 터였다.

"떠나기 전에 부탁드려도 괜찮겠소?"

"물론입니다. 여신께서도 불씨의 운반자인 이안 경에게는 축복을 아끼지 않으실 겁니다."

이안이 옆을 까딱였다.

"여기 이 녀석도 부탁드리겠소."

"...!"

샬롯이 놀란 듯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체르윈이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다시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목이 타는 듯한 감각에 기분 좋은 숨을 내쉰 그가, 이윽고 자신을 바라보는 샬롯을 돌아보았다.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재빨리 시선을 거둔 샬롯이, 문득 혀로 입가를 핥고는 내뱉었다.

"전에도 그런 고대의 존재와 싸워 본 적이 있는 거냐? 아주 익숙해 보이는데."

"전에도? 푸하.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대답은 미구엘 쪽에서 나왔다.

눈이 설핏 풀린 미구엘이 이안을 턱짓하며 소리치듯 말했다.

"이 형씨가 내 눈앞에서 쳐죽인 고대 마물과 망령, 타락자의 숫자만 해도 수십은 가뿐하게 넘는다고. 괜히 아겔 란의 구원자라고 불리는 줄 알아?"

"...!"

샬롯의 귀가 뾰족해졌다.

미구엘이 실실댔다.

"왜. 넌 그런 종류의 괴물들은 상대해 본 적은 없는 모양이지?"

"…제기랄."

시선을 돌린 샬롯이 술잔을 들었다. 애송이 취급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게 수치스러운 모양.

"앞으론 지긋지긋하게 겪게 될 거다. 난 그런 놈들 전문이니까."

심드렁하게 내뱉은 이안이, 무심한 눈길로 샬롯을 돌아보았다.

"물론 너도 목숨 걸고 싸워야 할 거야. 내게 진 빚을 다 갚아야, 꼬리를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

이안을 마주 보는 샬롯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어이없게도, 그녀의 눈에 번지는 건 기대감이었다.

혀로 입술을 축인 샬롯이 이윽고 내뱉었다.

"그것만으로도 언젠가 꼬리를 돌려준다면. 기꺼이."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라니까.

내심 실소하면서도, 이안은 말없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으니, 차라리 즐기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루시와 미구엘, 그리고 사제들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사원으로 향했다.

이안은 함께 가자는 부탁을 거절하고 마을에 남았다.

이곳이 여정의 종착지인 저들과 달리, 그는 마을에서 해야 할 일이 여럿 남아 있었다.

***

샬롯이 볼 때, 이안은 확실히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별난 구석이 있었다.

꼬박 한나절을 자고 일어나 가장 먼저 한 행동이 목욕이라는 것부터가 그랬다.

심지어 그는 한 시간이 넘게 공들여 몸을 씻었다. 뜨거운 물을 몇 번이나 돈을 들여 바꾸면서.

그녀가 아는 인간들은, 심지어 귀족이라 할지라도 씻는 것에 저렇게까지 집착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더러워질 텐데.

그 후로 이안은 마을을 돌며 필요한 물건을 샀다.

북부의 추위를 견디기 위한 방한복과 각종 병장기 위주였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고, 굳이 가격을 흥정하지도 않았다.

이안이 돈이 많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진짜 놀라운 건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그 많은 걸 어떻게 들고 가려는 거지? 마차에 실을 건가?"

숙소로 돌아와 물건을 분류하는 이안을 보며, 샬롯이 물었다.

이안은 대답 대신 허공에서 물건을 사라지게 만드는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보였다.

"어떻게 한 거지…?"

"잘."

"...."

무성의한 태도에도, 그녀의 의문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건 네 거다."

이안이 곰 가죽을 덧대 만든 망토와 갑옷 안에 입을 방한 장비들을 그녀에게 던져 준 것이다.

"내… 거라고? 왜…?"

샬롯은 당황한 나머지 되물었다.

자신은 그의 노예나 다름없는 데다, 보통 인간들은 수인이 추위를 타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그랬지만.

"왜라니? 네가 얼어 죽으면 그만큼 내가 할 게 늘어나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

다음날도 이안은 그녀를 끌고 다니며 식량을 비롯한 물자들을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그 과정에서 샬롯이 주목을 받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예비 마족 년이라니, 불길한 걸 데리고 다니는군."

"이미 예비가 아닌지도 모르지. 저런 것들은 죄다 죽여서 가죽을 벗겨 버려야 되는데."

이런 시선과 대우는 그녀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것들이었다.

천칭 상단의 경호병이 된 후로 대놓고 말하는 자들은 줄었었지만, 본질적으론 달라진 적이 없었다.

하비에르 같은 몇몇 괴상한 작자들을 제외하고는, 인간들은 언제나 그녀를 특이한 노예나 불길한 마족으로 취급했다.

물론 법은 언제나 인간들의 편.

보는 눈이 많을 땐 무시가 답이었으므로, 샬롯은 늘 그렇듯 보란 듯이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은 아니었다.

"수인 가죽은 특히 질기고 따듯하다던데. 이봐, 비싸게 쳐 줄 테니 우리에게 넘기는 게 어때?"

상인 중 하나가 그렇게 제안한 순간, 그의 얼굴 한복판에 곧바로 주먹을 꽂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마을의 건달들을 전부 다 묵사발로 만들어 버렸다.

망치나 집게 따위를 집어 든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오히려 그는 보란 듯 마지막 건달의 팔을 부러뜨리고는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또 수인 가죽 필요한 사람?"

나서는 사람은 물론 없었다.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남은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는 그 행동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마차를 몰고 마을을 떠날 때까지.

"어제, 왜 그런 거지?"

결국, 먼저 물은 건 샬롯이었다.

"어제…?"

"그것들 두들겨 팬 것 말이다."

"아. 그거. 난 개소리를 그냥 들어 주는 편이 아니라서. 그게 왜?"

샬롯은 진심인가 싶어 그를 돌아보았다.

"…정말 그게 다 개소리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죽인 타락자는 죄다 인간이었다. 그렇다고 인간을 전부 예비 타락자라고 부르진 않지."

평소처럼 의자에 기대 있던 이안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너희 수인도 그렇겠지."

"...."

샬롯은 눈을 끔뻑였다.

솔직히 말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처럼 아주 굴욕적이고 비참한 상황이 이어질 줄 알았건만.

요 근래 이안의 행동을 돌아보면, 그저 그녀를 시종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심지어, 그게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자꾸 그에게 빚을 지는 듯한, 그걸 넘어 은혜를 입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설마, 이것도 꼬리를 잘린 여파인가…?'

"다음부턴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내 귀에 개소리 들리지 않게."

이안의 말에 움찔, 귀를 떤 샬롯이 이윽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지."

그들은 화로의 사원에 도착했다.

체르윈과 제법 긴 대화를 나눈 그는, 사원 중앙에 놓인 거대한 화로 앞으로 샬롯을 데려갔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정말 화로의 축복이 내렸다.

몸속 어딘가에 열기가 들어찬 것 같은, 나쁘지 않은 느낌.

샬롯이 그 감각을 내심 즐기는 사이, 이안은 마중 나온 루시, 미구엘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루시는 이안을 꼭 껴안았다.

심지어 미구엘도 그랬다.

"수련이 끝나면 제국으로 갈 거예요. 그때 다시 만나요. 이안 님."

"또 봅시다. 형씨."

질색하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젠가는."

루시와 미구엘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이안은 길게 대화를 나누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

마부석에 탄 샬롯이 물었다.

"어느 방향으로 갈 거지?"

"북쪽으로."

마차가 출발했다.

뒤에서 루시와 미구엘이 뭐라 소리쳐 댔지만, 이안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의자에 깊이 몸을 묻을 따름이었다.

그게 떠돌이의 방식이라는 듯이.

#069화

"...."

말발굽 소리만이 이어지는 고요함에, 이안은 새삼 말 많은 용병과 호기심 많은 소녀의 빈자리를 느꼈다.

아주 조금의 허전함.

하지만 미련이 남지는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았고, 남은 삶을 더 가치 있는 방향으로 이어갈 기회를 손에 넣었으니까.

자신과 계속 함께해 봐야, 싸우고 죽이는 기술만 늘어날 터였다.

끝내는 죽음이 기다릴 테고.

'…혹은 그보다 더 나빠지거나.'

이런 여정을 이어나가는 건 그처럼 선택권이 없거나, 샬롯처럼 목숨 건 전투를 삶의 목표로 삼는 부류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니 이제 잊자. 다시 만날 일이 없으면 그게 더 좋고.

또다시 같은 결론을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시선을 돌렸다.

관도를 따라 이어진 황량한 전경.

그늘마다 얼어붙은 눈의 흔적들.

북부의 전형적인 날씨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몸속에 깃든 신성력 덕분이었다.

게임에서와 달리, 체르윈은 축복이 열흘가량 이어질 것이라 했다.

루 엔테르가 더 많은 신성을 내렸다고도 했으니, 어쩌면 더 오래 지속될지도 몰랐다.

'…혼돈력을 조금씩 흘려 넣으면, 지속 시간이 더 늘어날지도.'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 가정.

하지만 이안은 축복이 끝나가는 시점에나 실험해 보기로 했다.

축복이 어그러져서, 아까운 혼돈력만 날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혼돈력이 회복되는 속도는 마력보다도 훨씬 더 느렸다.

혼돈의 파편을 더 키우거나 회복 속도를 빠르게 만들 필요성이 조금씩 느껴지고 있었다.

능력치를 올려 높일 수 있는 마력량에는 한계가 명확했고, 범용성도 혼돈력이 더 뛰어났다.

공허의 힘이라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어떻게든 계속 강해져야 하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능력치 분배도 더 망한 지금은 더더욱.

'…방어력만큼은 확실히 올라갔지만.'

그가 새로 구비한 방어구들은, 대부분 사슬과 얇은 철판을 덧대 만든 것들이었다.

입어 본바, 가죽 방어구를 착용한 것과 움직임에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적어도 그가 마법사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코앞에서 마법을 부려도, 눈만 마주치지 않는다면 마법 무구나 유물을 가지고 있으리라 판단하리라.

'…마을에서 바이저 달린 투구라도 하나 살 걸 그랬나.'

이러다 언젠간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치고 양손검을 들고 있을지도.

이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치는 그때.

"…이안."

그를 더 강하고 빠르게 만든 주범이 뒤를 돌아보았다.

"왜."

이안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눈빛까지 감춘 것은 아니어서, 샬롯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 그게…."

이안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샬롯이 초조해하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일이 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종속되어 가는 과정인 것같긴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애초부터 빚을 지거나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성격인 것으로 보였다.

아마 수인족 특유의 자존심 때문일 터.

"그러고 보니, 식사 때가 지났군."

내뱉은 이안이, 옆에 놓여 있던 육포 덩어리를 그녀에게 던졌다.

점원 말로는 곰 고기라는데, 사실은 쥐 고기였다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맛을 가진 녀석이었다.

"더 필요하면 말해라."

샬롯은 전투에서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게 될 터였다. 당연히 평상시의 컨디션 관리 정도는 신경 써 줘야 했다.

그녀의 상태가 온전하지 못하면 귀찮고 피곤해지는 건 그였다.

"어… 아니, 음. 그래. 잘 먹겠다만."

육포를 받아 든 샬롯이 당황한 듯 주절댔다.

이안의 미간이 결국 구겨졌다.

"또 뭐.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해라. 답답하게 만들지 말고."

"그…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 언제쯤 야영지를 꾸려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내가… 마부로 살아 본 적은… 없어서…."

틈만 나면 잔소리를 해대던 미구엘의 빈자리를 그녀 역시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기본적인 걸 묻다니.

이안이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화로의 사원에서 받아 온 물건이었다.

마법이 담기지도, 축척이 정확하거나 자세한 물건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인근의 지리만큼은 알아볼 수 있게 그려져 있었다.

"조금 더 가다 보면 바위가 솟은 갈림길이 나올 거다. 거기서 왼쪽으로 가. 야영은 때가 되면 말해 줄 테니, 귀찮게 하지 마라."

"…그래. 알았다."

샬롯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짤뚱해진 꼬리가 축 처져 있었다.

코웃음 친 이안이 다시 지도를 눈에 담았다.

화로의 사원에서 먼 북쪽. 장벽처럼 이어진 아히고른 산맥의 서쪽 끄트머리 너머에, 체르윈이 남긴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버려진 땅에서부터 이어진 얼음 숲의 위치였다.

그 주위와 내부에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건, 물론 알려진 바가 없어서였다.

지도와 함께 두꺼운 역사책을 들이밀던 체르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귀하의 손에 새겨진 건 고대 북부 왕국 중 하나의 표식일 거예요. 다만, 고대 북부 왕국들의 문양은 국가뿐 아니라 통치자에 따라서도 조금씩 달라지는 특징이 있죠.

-그래서, 같은 건 찾았소?

-비슷한 건요.

그녀가 보여 준 건, 북부 거인 왕국의 문양이었다. 확실히 이안의 손에 새겨진 것과 비슷했다.

-거인 왕국의 정확한 이름은, 지금에 와선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거인 왕국의 마지막 여왕이 공허의 힘을 탐구한 초기의 권력자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로만 알려져 있죠. 불사의 군단과 불멸의 힘을 손에 넣으려 했다는데.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는, 말씀드릴 필요도 없을 것 같군요.

-불사와 불멸이라. 전형적이군.

-그녀는 자신의 별궁에서 연구에 매진했다더군요. 그녀와 왕국의 최후에 대해선 기록이 모호해요. 혹자들은 아직도 아히고른 산맥 어딘가에, 불사의 거인 군단이 잠들어 있다고도 하더군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이안은 게임에서, 산맥 깊은 곳에 묻혀 있는 고대 거인 왕국의 유적을 탐험한 적이 있었다.

지성과 기억을 잃고 잠들어 있는 거인 대장군과 그의 군단이 봉인된 곳이었다.

-이따금씩 산맥 인근에서 검은 벽의 광기를 머금고 되살아난 거인 전사가 발견되곤 하는 걸 보면, 아예 없는 말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귀하께서 말씀하신 숲은….

-산맥 옆으로 이어져 있는 거군. 이해했소. 어느 정도 거리가 있긴 하지만, 아예 동떨어지진 않았지.

-그 저주받은 숲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만. 귀하 덕분에 고대 거인 왕국과 관련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으리란 사실이 밝혀지게 된 셈입니다.

그 무언가의 정체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게임에서 겪어 보지 못한 건 물론이고, 공략글에서도 관련된 부분을 읽은 적이 없었다.

공략글을 필요한 부분만 훑어 댈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어야 했다는 부질없는 생각만 다시 한번 곱씹을 따름이었다.

'…위치라도 알게 된 것에 감사할 수밖에.'

생각하며, 이안은 의자에 더 깊이 몸을 묻었다.

마찬가지로 이 적막한 평온 역시,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둬야 했다.

북부의 밤은 특히 혹독하기로 유명했으니까.

언제 어디서 평화를 깨뜨릴 무언가가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

"이런…."

샬롯이 어설프게 야영을 준비하는 사이, 문득 이안의 미간이 꿈틀댔다.

후, 입김 섞인 한숨을 내쉰 그가 왼손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의 문양이 울리고 있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옅은 마력의 파장이 신호를 보내듯 번졌다.

이게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경험을 통해 확실히 알고 있었다.

"준비 해라."

이안이 내뱉은 말에, 모닥불을 피우기 위한 세 번째 시도에 들어가던 샬롯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준비?"

"네가 좋아하는 걸 할 준비."

대답한 이안이 손을 털었다.

그의 손끝에서 튀어나간 불꽃이, 단숨에 장작에 불을 붙였다.

잠시 허탈한 듯 모닥불을 응시하던 샬롯이, 이내 다시 홱 고개를 돌렸다.

"싸움? 싸움이 일어난다고?"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드디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순간이 왔다는 듯한 얼굴.

이내 귀를 쫑긋댄 그녀가 어둠 너머를 돌아보았다.

"그렇군…! 온다…!"

"…벌써 느껴진다고?"

이안이 되묻자, 샬롯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놀랄 것 없다. 수인족의 감각은 대륙의 모든 종족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축에 속하니까. 게다가 난 유독 더 그런 편이지."

"아, 그래."

피식한 이안이 턱짓했다.

"마차 바퀴에 돌부터 잔뜩 괴어 놔라. 혼자 도망간 마차를 되찾으러 가고 싶지 않으면."

"…아. 그렇군."

샬롯이 허겁지겁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자신이 이안이 시키는 걸 순순히 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그사이, 이안은 이리저리 몸을 풀며 주위의 어둠을 돌아보았다.

아직 그의 눈에는 짙게 깔린 어둠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북부는 온갖 마물의 천국이었다.

북부 자치령의 백성들은 대부분 화로의 사원이나 트라벨가 같은 거점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미구엘의 말에 따르면, 검은 벽의 광기가 잠들어 있던 고대의 존재들도 죄다 일깨우면서, 가뜩이나 살기 힘든 동네가 더 위험해졌기 때문이랬다.

휘이이-

황량한 어둠 너머.

비척대며 기척을 드러내기 시작한 놈들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많았다.

마차 가장자리에 훌쩍 올라선 이안의 동공이 올빼미처럼 확장됐다.

누더기를 걸친 언데드들.

되살아난 고대 북부의 망자 군단일 터였다.

'매일 밤 이러는 건 아니겠지.'

생각하며 검을 뽑아 든 이안은, 과거 메브가 그랬던 것처럼 검날 아랫부분을 움켜쥐고는 몸을 날렸다.

쉬하악-!

내달리는 발걸음에 바람이 휘몰아쳤다.

비척대던 해골 한 마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아겔 란에서 본 것들과 다른 점이라면, 이놈은 이안을 보자 방어 자세부터 취했다는 사실이었다.

꼭두각시에 불과한 언데드는 아니라는 의미.

다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퍼석-!

단죄의 검이 언데드의 낡아 빠진 검과 함께 두개골까지 박살 냈다.

그 안의 망령이 잠시 번쩍이다 흩어지는 사이, 이안은 이미 다음 언데드의 두개골을 후려치는 중이었다.

빠각-!

또 한 마리. 그리고 다음.

이안은 막힘 없이 언데드 병사들의 머리를 박살냈다.

콰직! 빠악-!

옆에서도 소란이 이어졌다.

득달같이 달려온 샬롯이 날뛰고 있었다.

쌍검을 움켜쥔 그녀는 자신의 야성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되살아난 망자들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이전과는 다른 전투 방식이었다.

기세는 더 흉험해졌지만, 훨씬 비효율적인 방식.

'어그로는 확실히 끌겠군.'

하지만 장차 그녀가 맡게 될 역할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변화였다.

언데드 부대가 뼈 무더기로 되돌아가는 데에는 불과 십여 분이면 충분했다.

"…후."

검을 되돌린 이안이 짧게 숨을 골랐다.

몸이 상쾌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이미 이쪽 세계에 완전히 물들어 버린 게 분명했다.

손아귀의 울림은 어느새 잦아들었지만.

같은 현상이 반복되리라는 확실한 징조로 느껴졌다.

'찾아오라고 해 놓고 마물들을 불러 모으는 건, 앞뒤가 안 맞는 짓 아닌가?'

선택받은 자의 시련, 뭐 그딴 거라도 내리고 싶은 건가.

생각하며 모닥불 앞에 앉은 이안은, 샬롯이 아직도 어둠 속을 거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전투 내내 이안을 힐끔댔고, 지금은 그가 쓰러뜨린 망자 사이를 돌며 두리번대고 있었다.

"뭐 하냐?"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샬롯이 모닥불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충격받은 듯한 눈빛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모닥불을 멍하니 응시하던 샬롯이, 문득 내뱉었다.

"어떻게 한 거지?"

"뭘."

"어떻게 네가… 나보다 더 많은 마물을 쓰러뜨린 거지? 분명히 근접전만큼은 내 쪽이 조금 더…."

그거에 그렇게 충격받은 거라고?

이안은 눈썹을 슬쩍 치켜들었지만, 샬롯은 여전히 진지했다.

"어떻게…?"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이안이 내뱉었다.

"내가 볼 때 넌, 전사보다는 암살자가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뭐라고…? 나는 태생부터 전사였고, 지금도 전사다."

샬롯이 자존심이 상한 듯 말했다.

뭐, 그러시다면야.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계속 그렇게 싸워라. 난 상관 없으니까."

"...."

***

샬롯은 밤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다음 날 밤에는 그 전날 같은 대규모 습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맴돌다 찾아온 마물 몇 마리가 습격의 전부였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그랬다.

그리고 마침내 그다음 날, 언데드 부대의 습격이 있었다.

샬롯은 기다렸다는 듯 온 힘을 다해 날뛰었다.

"어째서…?"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고작 이안과 비슷한 정도의 공적을 올렸을 뿐이었다.

"대체 그런 걸 왜 신경 쓰는지 모르겠군."

"...."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그녀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싸움 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말이 퍼져 버릴 때까지 쉬지 않아서 전진이 오히려 늦어지기도 했고, 야영지로 삼을 만한 위치를 제대로 찾아내지도 못했다. 여전히 모닥불 피우는 건 어려웠고, 심지어 육포조차 태워 먹기 일쑤였다.

그러니 꼬리의 반환을 정당하게 요구하려면, 전사로서라도 제 몫을 넘치게 해야 할 판이건만.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실수와 부채심만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녀의 야성이 더 빠른 속도로 꺼지고 있다는 것까진, 그녀도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만회해야 한다는 생각뿐.

그렇게 종일 한계까지 바짝 곤두선 그녀의 감각에 적당한 기회가 포착된 건,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

불침번을 서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던 샬롯의 귀가 문득 쫑긋댔다.

그녀의 시선이 마차 너머의 어둠으로 돌아갔다.

동공이 거의 원형에 가깝게 확정되고,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한층 민감해진 그녀의 후각에 옅은 피 냄새가 스며들었다.

또 그 기척이 분명했다.

샬롯이 이 기척을 처음 느낀 건 사흘 전이었다.

처음은 지금보다 노골적이었다.

다급함과 두려움이 섞인 숨소리. 조금 더 짙은 패 냄새.

상처 입은 마물의 기척과도 흡사했고, 이내 사라져서 처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다음 날에도 그 기척이 얼핏 느껴진 순간, 얘기가 달라졌다.

놈은 샬롯 조차 어렴풋이 느낄 거리까지만 다가왔다가, 이내 다시 사라졌다.

방금도 마찬가지였다.

샬롯은 비로소 저 기척이 자신들을 따라오고 있음을 확신했다.

놈이 왜 따라오다 멀어지는 건지는 뻔했다.

습격할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이쪽이 눈치챘으리란 생각 따윈 하지 않은 채로.

하긴. 이런 은밀한 기척을 느끼는 건, 수인 중에서도 그녀처럼 특출난 부류가 아니라면 불가능에 가까웠다.

"느껴지지 않나?"

"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되묻는 이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샬롯의 입술이 송곳니가 드러나게 말려 올라갔다.

그가 눈치조차 채지 못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한다면, 그건 상당히 큰 공적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잠시 다녀오겠다."

"...?"

#070화

샬롯이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그녀는 살기를 드러내거나 무기를 뽑아 들지도 않았다.

그저 땅에 깔리듯 낮은 자세로,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달려 나갔다.

"...."

홀로 남은 이안은 콧잔등을 긁적였다.

오감을 예민하게 일깨워 그녀의 기척을 쫓았지만, 벌써 어디로 간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확실히, 전사보다는 암살자가 어울리는데. 본인은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군.'

생각하며, 이안은 구운 육포를 입에 물었다.

요 며칠간 샬롯이 보이는 이상 행동에 완전히 적응한 그였다.

여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반대로 마음에 들고 싶어 애쓰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냥 놓아두기로 한 것이다.

적어도 요령을 피우려고 눈치를 보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 야밤에 혼자 사냥이라니….'

키우는 고양이가 자꾸 벌레를 잡아다 머리맡에 두고 간다던, 과거 친구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설마하니 그녀가 노리는 게 벌레는 아닐 테지만, 헛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쩌엉-!

저 멀리서 날카로운 굉음이 이어진 건 그때였다.

짐가방에 느슨하게 기대 있던 이안이 상체를 일으켰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가시 범위를 넘어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콰직-! 쩌엉- 콰르르-

심상치 않은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옆으로 이동하면서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안의 시선이 소리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돌아갔다.

저 멀리, 어둠을 머금은 앙상한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들썩이고, 한밤의 소란에 놀란 북부의 날짐승들이 소스라치게 날아올랐다.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모닥불 옆의 마차에 가로막혔다.

'…혼자서도 괜찮은 거 맞나.'

전력 이탈될 일은 없어야 하는데.

생각하며, 이안이 옆에 풀어 둔 검집을 쥔 순간 거짓말처럼 소음이 멎었다.

상대적으로 더 무겁게 느껴지는 적막.

이윽고 절뚝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뭔가를 질질 끌고 오는 듯한 소리가 마차 뒤편에서 가까워졌다.

코를 스치는 피 냄새.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는 가운데, 샬롯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났다.

"…조금 늦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것과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귀 아래부터 턱까지 할퀸 듯한 상처가 길게 새겨져 있었다.

철철 흐른 피가 주위의 털을 적시며 응고되는 중이었다.

한쪽 팔의 보호대도 날아갔고, 그 아래의 팔에도 긁힌 잔 상처가 남았다.

갑옷의 마석들이 흐릿하게 일렁이는 걸 보니 마력을 거의 다 소모한 모양.

하지만 이안은 그녀의 상태를 먼저 지적하지 않았다.

"…호오?"

그녀의 손아귀에 머리채를 잡힌 채 축 늘어져 있는 시신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피 묻은 은발과 헐벗은 가녀린 몸.

낯이 익은 실루엣이었다.

"널 따라오던 계집이다. 괴상한 짓거리를 하더군. 도망치려 해서 끝까지 따라가서 죽였다."

내뱉은 샬롯이 그의 앞에 시체를 툭 던졌다.

시신의 뒤통수에 단검이 자루만 보일 정도로 깊숙이 박혀 있었다.

헝클어진 은발 사이로, 미간에 단검 날이 삐죽 튀어나온 얼굴이 드러났다.

"테사이아…."

이안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내뱉었다.

얼굴의 피를 손으로 훑어 날름대면서, 샬롯이 곁에 주저앉았다.

"아는 계집인가?"

"그래. 봐서 알겠지만, 마족이다."

"마족…?! 마족이었다고?"

샬롯의 주황색 눈이 커졌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흡혈 요정이지. 전에 아겔 란에서 잡혀 가는 걸 구해 줬었다. 내 목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그럼, 그 서부 변방부터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건가."

"그런 모양이군. 또 만나자더니."

이안은 아겔 란에서 미구엘에게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사냥개의 피를 빨던 괴인의 소문.

그때도 설마 하긴 했었는데.

'북부까지 포기하지 않고 따라오고 있었을 줄이야.'

샬롯이 만족스럽다는 듯 가르릉댔다.

"그럼 그렇게 오래 눈치채지 못한 위협을 내가 처리한 거군. 심지어 마족을."

"그래. 네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한 건지 이제 알겠지."

"별거 아니었다. 이 정도는 하룻밤이면 멀쩡해질 거야."

누가 전사 아니랄까 봐, 허세는.

코웃음 친 이안이 가방에서 천과 붕대를 꺼냈다.

그가 얼굴에 붕대를 감아 주기 시작하자, 샬롯이 눈을 치켜뜬 채로 굳어졌다.

"다음부턴 혼자서 날뛰지 마라. 네가 죽으면 내 손해야."

덧붙인 말에, 굳어져 있던 샬롯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 그럴 일은 없다. 괴상한 계집이긴 했지만, 내 적수는 아니었어. 죽이기 어렵지도 않았고."

"그거야 죽인 게 아니니까 그렇지."

"뭐…?"

샬롯이 휙 그를 돌아보았다.

그럴 리 없다는 듯한 시선.

이안은 붕대를 더 꽉 압박해 감으며, 널브러진 테사이아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미간에 삐죽 튀어나와 있던 단검 날이, 어느새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밀려나고 있었다.

"뱀파이어는 이 정도로 죽지 않아. 목을 자르거나 몸을 양단해도 살아 있지."

"...."

붕대질을 마무리한 이안이, 굳어 있는 샬롯의 팔에도 천을 대고 붕대를 감으며 말을 이었다.

"마족이란 놈들은 대부분 목숨줄이 엄청나게 질기지. 네가 저 단검을 뽑은 채로 가지고 왔다면, 끌고 오는 도중에 기습당했을 거다."

"그런…."

샬롯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마족을 상대해 본 건 처음이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방심이었지만, 본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사실 이안에겐 오히려 이쪽이 더 잘된 일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편해지긴 했지. 이 녀석의 몸을 제압해라. 마족을 죽이는 법을 알려 줄 테니까."

테사이아를 직접 죽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녀라면 상당한 경험치를 줄 테고, 어쩌면 받은 적 없는 퀘스트까지 완료될지도 몰랐다.

물론, 그 전에 대화 몇 마디 정도는 나눌 생각이었다.

여기까지 따라온 그 정성이 갸륵해서라도, 몇 마디 정도는 이죽거려야 속이 시원해질 테니까.

"…그래. 알았다."

샬롯이 시무룩한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테사이아의 몸을 툭 발로 차 완전히 엎드리게 뒤집었다.

붕대가 감긴 팔을 이리저리 돌린 샬롯이, 무릎으로 테사이아의 등을 찍어 누르고는 양팔을 뒤로 꺾어 움켜쥐었다.

둘의 체격 차이가 상당했기 때문에, 어른이 아이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계집, 손발톱이 길어지더군. 하지만 이러면 소용없을 거다."

"자신의 피를 무기처럼 쓰기도 할 테니까. 방심하지 마라."

"알았다. 걱정 마라. 꿈틀대는 게 고작일 테니."

샬롯이 그르렁댔다.

이젠 말을 참 잘 듣는군.

생각하며, 이안은 테사이아의 뒤통수에서 조금씩 스스로 밀려나고 있는 단검을 단숨에 뽑아 들었다.

스르륵-

단검 날에 맺혀 있던 피가 테사이아의 상처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뒤통수와 얼굴에 이어진 관통상이 스르륵, 빠르게 아물었다.

동시에 탁하게 풀어져 있던 그녀의 동공에 빛이 되돌아왔다.

잠에서 깬 것처럼 눈을 깜빡인 테사이아가, 자신을 결박한 손길을 느낀 듯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놓고 다시 붙어. 이 피도 맛대가리 없는 짐승아."

낭랑하지만 약이 바짝 오른 목소리였다. 샬롯이 비웃었다.

"이미 한 번 뒈진 귀쟁이가 입이 험하군. 한번 빠져나와 보시든가."

샬롯의 무릎과 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팔의 붕대가 붉게 물들었다.

테사이아가 이를 갈며 바둥댔다.

"내가 조금만 더 기운이 있었어도 이까짓-"

푹.

테사이아의 악다구니가 순간 끊어졌다.

얼굴 앞의 땅에, 자신의 뒤통수를 꿰뚫었던 단검이 박혔기 때문이다.

등 뒤를 노려보던 그녀의 검붉은 눈동자가 비로소 위로 향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무표정한 얼굴. 서늘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

"…오랜만이야, 이안."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얼굴에도 배시시, 요사한 미소가 번졌다.

소녀 같기도 여인 같기도 한, 아주 공을 들여 빚어낸 듯한 미모.

물론 이안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는 없었다.

"오랜만이군. 테사이아."

"내가 너한테 내 이름을 가르쳐 준 적이 있던가…?"

"내가 너에게 내 이름을 가르쳐 준 기억도, 없는 것 같은데."

"네 이름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거든. 뭐, 무슨 상관이야. 반가워. 일단, 이 짐승부터 치워 놓고 이야기 나눌까? 사실,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난 지금 이 자세가 딱 좋아 보이는데. 집념이 대단하군.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네 체취는 대륙 끝에서도 맡을 수 있어. 게다가, 네 뒤를 따라다니면 먹을 게 알아서 떨어지더라고."

그런 거였냐.

이안의 입가에 실소가 스쳤다.

하긴. 피비린내 나는 여정을 거쳐 온 그였다. 그가 죽인 인간과 마물의 잔재만 주워 먹어도 굶주릴 걱정은 없었으리라.

그녀의 머릿결과 얼굴을 훑어본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그런 것치곤 좀 마른 것 같은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거든. 말했다시피, 사실 너한테 그 문제로 얘기를 좀 하고 싶었어. 그런데 겁이 나서 좀처럼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었거든. 어쨌든 이렇게 자리가 마련이 됐네."

테사이아가 창백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말인데, 마주 앉아서 얘기 나누면 안 될까? 이 짐승의 냄새가 너무 고약해서 말야. 요즘 토끼나 다람쥐 같은 것만 먹었더니, 짐승 피 냄새는 맡기만 해도 토할 것 같거든."

얘기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코웃음 친 이안이 단검을 뽑아 들며 샬롯을 바라보았다.

"잘 봐 둬라. 이런 평범한 날붙이로는 흡혈귀를 죽일 수 없어."

콰직-

"캬아아악-!"

단검이 테사이아의 어깻죽지에 틀어박혔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무시한 채, 이안이 말을 이었다.

"이런 건 그저, 잠깐 가사 상태에 빠지게 하거나 고통을 줘서 헛짓을 하기 어렵게 만들 뿐이지. 물론 그렇다고 이것들이 불사는 아니야. 죽일 수 있는 아주 다양한 방법이 있지."

"...!"

테사이아가 숨을 헐떡였다.

설마, 하는 눈빛.

샬롯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이안이 말을 이었다.

"가장 간단한 건 은이 섞인 무기로 목을 자르거나 심장을 찌르는 거다. 하지만 은으로 만든 무기는 구하기도 어렵고, 쓸 일도 많지 않지. 그러니까 보통은…."

화륵, 이안의 손아귀에서 불길이 솟았다.

"피가 전부 타 버릴 때까지 불을 지르거나, 신성력으로 뇌나 심장을 녹여 버려야 하지."

"…잠깐만. 이안? 잠깐만 얘기를 나누자. 응?"

테사이아가 타이르듯 내뱉었다.

이안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녀 역시 깨달은 모양이었다.

휙, 불길을 길가의 눈더미에 털어 버린 이안이 옆에 놓인 단죄의 검을 집어 들었다.

"불태우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지금은 신성력으로 죽이는 게 간단하겠지."

"이, 이안? 이안. 잠깐만. 제발."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녀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샬롯이 손을 움직여, 테사이아의 양팔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혀를 날름댄 그녀가 테사이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 덕분에 좋은 걸 배웠군, 귀쟁이 년아. 다음부터 네 동족을 사냥할 때 명심해 주지."

"닥쳐, 짐승아. 난 동족 같은 거 없어. 이안, 제발 부탁이야, 응? 살려 줘. 난 널 죽이려고 따라온 게 아니야. 물론 처음엔 그랬지만, 얼마 전부턴 아니었어. 네가 해낸 것들을 보면서, 내 힘으론 절대 널 죽일 수 없다는 걸 알게 됐거든. 그래서 그냥 네가 남긴 잔재만 주워 먹기로- 아아악-!"

테사이아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샬롯이 그녀의 어깨에 박힌 단검을 비틀었기 때문이다.

테사이아의 절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말이야, 이안! 제발 살려 줘. 난 정말 널 죽일 생각이 없어. 그럴 수도 없고. 난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안 된다구!"

"하나같이 식상한 유언이군. 테사이아."

말을 자른 이안이 천천히 단죄의 검을 뽑아 들었다.

"테사. 테사라고 불러 줘. 너는 괜찮아."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한 테사이아가 온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샬롯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버둥대는 그녀의 손에서 손톱이 길어졌다가 짧아지고, 발톱이 툭 튀어나왔다가 들어가길 반복했다.

어깨에서 흘러나온 피가 부글부글 끓으면서 삐죽댔다.

"정말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내 말을 들어 줘. 이안. 제발."

이안은 그녀의 절박한 붉은 눈을 내려다보았다.

남은 힘이 거의 없어 보였다.

샬롯과 싸우는 데 이렇게까지 힘을 소진한 걸 보면, 게임에서보다 턱없이 약한 상태인 게 분명했다.

당연히 그때 같은 보상이나 경험치를 기대할 수도 없으리라.

하지만 벌충할 수 있는 존재들은 있었다.

루 사드의 뱀파이어들.

게임에선 대부분이 테사이아에게 잡아먹힌 후라 그와 싸울 수 있는 놈들이 거의 없었지만, 이번에는 아닐 터였다.

공략에도 테사이아가 그들을 죽이기 전에 미리 가서 정리하면, 그녀를 약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험치와 전리품도 더 많이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쓰여 있었었다.

그러니 아예 테사이아를 미리 죽인다면, 그런 시간 제한 없이 뱀파이어들을 처리할 수 있으리라.

"내 피를 끝내 먹지 못한 건 참 애석하게 됐군, 테사."

"거짓말이 아니야! 제발 잠깐만 내 말을 들어 줘. 응? 제발!"

"잘 가라."

이안이 검을 들었다.

테사이아가 왈칵 피눈물을 토하며 소리쳤다.

"도망치거나 반항하지 않을게. 그냥 잠깐만 얘기를 들어 줘, 제발! 부탁, 아니, 의뢰! 그래! 너한테 의뢰할 게 있단 말이야!"

머리 위로 치켜든 이안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의뢰라고?

그의 눈이 가늘어지는 가운데.

"넌 용병이잖아, 이안. 의뢰가 들어오면, 들어는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의뢰인이 인간이 아니라도?"

눈가가 피범벅이 된 테사이아가 간청하듯 덧붙였다.

#071화

"...."

이안의 팔이 천천히 내려갔다.

샬롯이 설마 이 개소리를 들을 거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테사이아의 말이 아예 억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들어 보고 정말 개소리면 그때 목을 날려 버려도 늦지 않았다.

테사이아가 안도인지 뭔지 모를 숨을 내쉬는 그때.

푹.

이안이 단죄의 검을 옆의 땅에 꽂았다.

정확히 테사이아의 목 앞.

날을 그녀의 목으로 향한 채였다.

그 옆에 주저앉은 이안이 검 자루에 손을 얹은 채 내뱉었다.

"들어는 주지. 하지만 개소리를 하거나 개수작을 부리면, 이게 작두로 변할 거다."

테사이아의 시선이 적당히 얇고 길게 이어진 검날로 향했다.

서슬 퍼런 예기.

침을 삼킨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래, 알았어. 하지만 정말 알아줘. 난 네 피를 빠는 걸 포기했어. 말 탄 인간들이 잔뜩 몰려가서 너랑 싸운 날 이후로는 특히. 그전에는 조금만 더 참으면 널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는 상상만 해도 등에 소름이 돋고 무서워졌거든."

…내가 능력치를 올린 그날이군.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안은 내심 놀랐다.

감으로 그 변화를 눈치채다니.

"그렇다고 널 따라다니지 않을 이유는 없었어. 말했다시피 굳이 내가 싸울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네가 요전 마을에 들렀을 땐, 상황이 조금 달랐어. 마을 근처로 갈 수가 없었거든. 밤에는 그래도 버틸만 했지만, 낮이 되면 몸속이 끓고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지. 역겨웠어."

화로의 사원 인근을 말하는 것이리라.

거긴 루 엔테르의 권역이니, 뱀파이어인 그녀에겐 흉지나 다름없었을 터였다.

이안이 미간을 좁힌 건 다른 이유였다.

검을 쥔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지금 네가 떠드는 말이 의뢰랑 무슨 상관이지?"

"이, 이제 본론이야. 네가 그 마을에 있는 동안, 나는 멀리 나와서 숨어 있었어. 네가 거길 떠나면 다시 따라갈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며칠 뒤에, 그자가 날 찾아왔어. 자기를 일족의 심판자라고 했지."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심판자…?"

"그래. 규율을 어긴 일족과 일족의 공적을 처단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댔어. 그러면서 잡종 실험체 주제에 자길 만나게 된 걸 영광으로 알라더군."

테사이아가 잠시 헐떡였다.

그때 느낀 공포와 분노를 다시 한번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놈은 내 앞에 작은 관 세 개를 꺼내서 보여 줬어. 팔다리를 내 몸과 분리해서 따로 가져갈 거랬지. 돌아가면 다시 조립해 줄 테니 걱정 말라면서. …나는 당연히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지. 그 실험실로는 다시 가지 않겠다고. 거긴 정말 끔찍했거든. 지금도 가끔 꿈에-"

"본론만."

"…그래서 싸웠어. 하지만 엄청나게 강했지. 내가 알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힘을 다루더라고. 하지만 나도 무작정 당하진 않았어. 네 덕분에 힘을 차곡차곡 비축해 뒀거든. 거기다 놈의 술수들을 따라 할 수도 있었고. 이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어. 놈이 본 실력을 발휘하니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지."

이안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가 기억하는 테사이아는, 뱀파이어들의 진혈을 삼키며 여왕의 자리까지 오른 대마족이었다.

그때도 심판자의 추적은 있었으련만.

'…혹시, 이것도 나 때문인가.'

짚이는 변화는 그뿐이었다.

테사이아는 그의 뒤를 따라다니게 되면서, 본래라면 홀로 투쟁하며 일깨웠을 잠재력과 전투 기술을 온전히 체득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도 나비 효과라고 해야 하나.

그가 생각하는 사이,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물론 나한테도 살아남기 위한 비장의 한 수가 있었어. 그건 통했지. 물론 나도 무사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도망칠 시간은 벌 수 있었어."

"추적을 뿌리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머리를 썼지. 난 짐승들을 많이 사냥했으니까. 그것들을 홀리는 건 숨 쉬듯이 할 수 있었거든. 보이는 짐승마다 내 피를 묻혀서 무작정 흩어지게 했어. 피 냄새로 날 추적하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테사이아가 이안을 올려다봤다.

"그리곤 네 냄새를 따라갔어. 네 생각밖에 나지 않았어. 너라면 날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전에도 날 구해줬었으니까. 근거 없는 생각이란 건 널 보고 나서 깨달았지. 그래서 일단, 숨어서 짐승들을 잡아먹으면서 힘을 회복하기로 했어.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도망은 칠 수 있어야 했으니까."

"개소리하지 마라. 네가 며칠이나 지켜보던 걸 알고 있다."

샬롯이 으르렁댔다.

테사이아가 곧바로 내뱉었다.

"그건 무서워서 그랬어. 네가 만나자마자 나한테 칼부터 들이댈 것 같았다구. 넌 날 죽이는 방법도 알 것 같았고. 몇 번 네게 다가가려고 시도했는데, 그때마다 겁이 나서 더 다가갈 수가 없었어. 이 짐승이 날 눈치챈 건 그래서일 거야. 알았어? 네가 잘나서 날 찾은 게 아니야. 날 이긴 것도 아니고. 내 힘이 온전했다면 네까짓 건 지금 산산조각 나서 굴러다니고 있을 거라고, 이 짐승아!"

이게 그라데이션 분노인가 하는 그건가.

이안은 샬롯을 죽일 듯 노려보는 테사이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샬롯의 코웃음이 이어졌다.

"그런 가정은 무의미한 거다, 귀쟁아. 지금 내 밑에 깔려 있는 건, 결국 너니까."

우득, 샬롯이 테사이아의 팔을 더 강하게 눌렀다. 테사이아가 고통스러운 듯 움찔댔지만, 이번에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무식하게 힘자랑이나-"

씹어뱉던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단죄의 검이 그녀의 목 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일말의 동정심도 담기지 않은 검은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심판자를 죽여 달라는 거냐?"

"그자가 전부는 아닐 거야. 그자가 나한테 그랬거든, 일족은 날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차라리 그냥 지금 자기한테 잡히는 게 나을 거랬지. 그러니까 그자를 죽이더라도, 또 다른 심판자가 내 뒤를 쫓아 오겠지."

"...."

이안의 눈빛이 깊어졌다.

테사이아가 침을 삼키고는 말했다.

"하지만 놈들은 그저 하수인일 뿐이야. 날 이런 괴물로 만든 것들은 여전히 루 사드에 도사리고 있지. 난 그놈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러니까 이안, 내 복수를 도와줘. 이게 내 의뢰야."

솔직히 말해,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테사이아를 곁에 두면, 언젠가 찾아가 죽여야 할 뱀파이어들이 제발로 찾아오리란 거였으니까.

어쩌면 게임에서 테사이아가 힘을 키워 간 방식도, 자신을 찾아온 심판자들을 죽여 그들의 진혈을 흡수하는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가 테사이아를 돕는다면, 심판자들이 줄 경험치를 손에 넣음과 동시에 테사이아가 더 강해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으리라.

겸사겸사, 언젠가 죽여야 할 뱀파이어들의 전력도 줄일 수 있을 테고.

하지만 그런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테사이아를 내려다볼 뿐.

"나 혼자선 도저히 놈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날 도와준다면 얘기가 달라질 거야. 난 네가 해낸 것들을 봤어. 넌 강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의뢰를 포기하지 않지. 그러니까 부탁이야, 이안. 내 의뢰를 받아 줘."

테사이아가 간청했다.

이윽고 이안이 입을 열었다.

"네 사정은 알겠다, 테사이아."

"테사. 부디."

"그래. 테사. 어쩌면 네 말대로 내가 널 따라오는 심판자와 싸워 줄 수도 있겠지. 네가 루 사드의 뱀파이어들에게 복수하는 것도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너라면 분명히 해낼 수 있을-"

"하지만 의뢰라는 건, 이런 부탁만으로 성립되는 게 아니다. 물론 나도, 알량한 동정심 따위로는 움직이지 않지."

"...!"

테사이아가 눈을 치켜떴다.

검 자루를 쥔 손을 까딱이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의뢰에는 합당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네 말대로면 나는 흡혈 일족 전체와 싸우게 될 텐데. 넌 어떻게 그에 합당한 보상을 지급할 거지?"

"뭐, 뭐든지. 뭐든지 줄게. 뱀파이어들은 돈이 아주 많아. 내 복수를 도와주면, 전부 다 네 거야. 난 그런 거엔 관심도 없어."

"확실하지 않은 보상이군. 게다가 그건, 널 돕지 않더라도 내가 응당 손에 넣게 될 전리품이기도 하지. 의뢰의 보수는 네가 가진 걸 줘야 하는 거다, 테사."

말을 자른 이안이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테사. 내가 네 의뢰를 받아들인다면, 너는 내게 뭘 줄 수 있지?"

테사이아의 눈동자가 떨리다가, 이윽고 서서히 가라앉았다.

자신이 잃게 될 것과 자신이 내놓아야 할 것 모두,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날 줄게, 이안."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안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지금 내 목숨밖에 없으니까."

"네 목숨은 내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데."

"날 마음껏 부려. 네가 하라는 건 전부 할게. 지금 네가 하는 일도 도울 거야. 대신 네가 하려던 일들이 끝나면, 내 복수도 도와줘. 영원히 이 북부에서 살 건 아니잖아. 그때까지 날 곁에 두고 써 줘."

"내 노예가 되겠다고?"

"뭐라고 불러도 좋아. 어차피 나는 다른 대안이 없어, 이안. 이대로는 결국 루 사드로 다시 끌려가게 될 테니까."

"...."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로 짐승처럼 다뤄지다 죽고 싶지 않아. 그러느니 차라리, 네 의뢰인이자 노예로 살면서 복수를 꿈꾸겠어."

아예 멍청하진 않군.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녀의 말을 다 믿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타산이 맞지는 않는군."

내뱉으며, 이안은 테사이아의 붉은 눈을 내려다보았다.

"심판자들로부터 얻게 될 전리품은 전부 내 거다."

"알았어."

"그리고 넌, 놈들에게서 단 한 방울의 진혈도 얻지 못할 거야."

"...!"

테사이아의 눈이 순간 커졌다.

진혈을 탐하는 건 흡혈귀의 본능.

그걸 참는 게 쉬울 리 없었다.

하지만 이안의 말에는 선택권이 없었다.

"…알았어."

이윽고 테사이아가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앙상한 어깨에 아직 박혀 있는 단검을 단숨에 뽑았다.

"계약은 성립됐다."

그가 샬롯을 바라보았다.

정말이냐는 듯 눈을 치켜뜨면서도, 샬롯이 테사이아를 제압하고 있던 손을 풀었다.

손목을 어루만지며 일어선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고마워, 이안. 진심이야."

"명심해라. 계약을 파기하고 도망치면, 심판자들뿐 아니라 나도 널 추적하게 될 거다."

"물론이지. …그런 의미에서."

테사이아의 시선이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는 샬롯에게로 향했다.

"이제 이 짐승은 쓸모없을 것 같은데. 내가 죽여도 될까?"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게 아니면 조용히 앉아 있어라."

"…알았어."

샬롯에게 날 선 시선을 보내면서도, 테사이아가 순순히 모닥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뒷모습을 죽일 듯 노려본 샬롯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정말 저런 귀쟁이 마족의 약속을 믿으려는 거냐, 이안?"

"우린 약속을 한 게 아니야. 계약을 했지. 너도 이제 용병이니 그 차이를 알아 둬라."

"분명히 우릴 배신할 거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는 네가 죽일 수 있게 해 주지. 네가 잡아 온 녀석이니까."

"...! 정말인가?"

샬롯의 눈이 번뜩였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저 녀석을 믿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네가 감시해라. 헛짓하지 않게."

순간 움찔했던 샬롯이, 묘한 기대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았다.

"헛짓거릴 하면, 그냥 칼로 찔러 버려도 되나?"

"필요한 상황이라면."

그 정도론 죽지 않을 테니까.

샬롯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홱 몸을 돌려 모닥불 옆으로 갔다.

"지켜볼 거다, 귀쟁이 년아. 부디 헛짓거릴 해 줬으면 좋겠군."

"나도 들었으니까 말 걸지 말아 줘. 입 냄새나."

샬롯이 으르렁댔지만, 테사이아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안의 얼굴에, 이윽고 헛웃음이 스쳤다.

티르 엔의 성기사. 그리고 루 엔테르의 은총을 받은 아이와 동행한 게 불과 얼마 전의 일이건만.

지금은 수인과 흡혈 요정이 동행이라니.

'…정말이지 앞날은 알 수 없는 거군.'

속으로 읊조리며 모닥불로 다가간 이안은, 모포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로브를 집어 테사이아에게 내밀었다.

"...?"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몰라서 저렇게 보는 건가.

혀를 찬 이안이 내뱉었다.

"앞으론 항상 걸치고 있어라. 네가 계속 벌거벗고 다니는 꼴을 보고 싶진 않으니까."

#072화

테사이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었다.

샬롯과 싸우고 이안에게 심문당한 여파가 상당한 모양이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채 야생 동물처럼 웅크리고 있던 그녀가 다시 꿈틀댄 건, 동쪽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시점이었다.

"…아."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켰던 그녀는, 건너편에 앉은 이안과 눈을 마주치고는 한 박자 늦게 탄식했다.

"왜 놀라냐."

이안이 단죄의 검으로 모닥불을 쑤시며 내뱉었다.

눈을 깜빡인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곁에 누가 있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미안."

그녀가 로브 안으로 꿈지럭대며 쪼그려 앉았다.

몸에 뭘 걸치고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어색한 움직임이었다.

이안이 준 게 아니었다면 진작 벗어 던졌으리라.

"까슬까슬해."

"참아라. 마을에 들르면 네가 걸칠 옷을 사 줄 테니."

"옷…?"

질색하듯 인상을 찌푸린 테사이아가, 이내 묘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럴 거면 차라리, 네가 입던 옷을 주면 안 될까, 이안?"

"너한텐 클 텐데."

현재 일행의 최장신은 샬롯이었다. 이안은 그녀보다 머리 반 개 정도가 작았고, 테사이아는 이안과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났다.

"상관없어. 네 냄새가 나니까."

테사이아가 로브 자락을 킁킁댔다.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반짝였다. 붉은 눈동자에 갈증이 감돌았다.

"냄새 맡는 것까진 막지 않겠다만. 나한테 헛짓을 하려 했다간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

이안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그렇게 멍청한 짓은 안 해."

본능을 이길 수 있는 동안에는 그렇겠지.

이안은 콧방귀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에게 피를 빨려 줄 생각은 없었다.

피와 함께 무엇까지 빨아 먹힐지 알 수 없었으니까.

이안의 시선이 동쪽 하늘로 향했다.

주위가 밝아지는 걸 보니, 곧 해가 떠오를 게 분명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테사이아에게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로브를 킁킁대던 그녀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왜? 냄새는 괜찮다며."

"곧 해가 뜬다."

"그런데?"

"...?"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햇빛을 맞아도 괜찮은 거냐?"

"좋진 않아. 약해지거든. 아하. 내 걱정을 한 거구나."

테사이아가 빙긋 미소 지었다.

허리를 쭉 편 그녀가 머리에 눌러 쓴 후드를 벗었다.

"보여 줄게."

그 순간 동녘에서 태양이 고개를 내밀었다. 저 멀리의 산 능선을 타고 뻗어 나온 빛이 단숨에 테사이아의 옆얼굴을 비췄다.

눈을 감은 테사이아가 따가운 것처럼 미간을 움찔댔다.

곧 그녀의 은발이 빛을 잃기 시작했다. 잿빛에 가까운 회색.

창백하던 피부 역시 완전히 푸석하게 생기를 잃었다. 입술 위로 불룩하던 송곳니가 사라졌다.

"빛을 제대로 쐬는 건, 역시 아프네."

읊조리며 테사이아가 눈을 떴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어느새, 짙은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오래 묵은 늪에서나 볼 법한 색이었다.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을 느끼며, 이안이 물었다.

"그게 네 본 모습인 건가?"

"모르겠어. 그냥, 낮에는 이렇게 돼. 힘을 거의 쓸 수 없지. 지금은 그냥 칼에 찔려도 죽을지도 몰라."

선선히 대답한 테사이아가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회색 머리카락에 진녹색 눈동자.

지금 그녀는 조금 덜 자란 평범한 요정처럼 보였다.

"그래서 낮에는 거의 그늘에 숨어 있어. 이 상태로는 곰 한 마리도 이기기 힘들다구."

"다른 흡혈 일족도 낮에 그렇게 되는 거냐?"

"모르겠네. 낮에 다른 뱀파이어를 본 적이 없어서."

"잠은?"

"어제 같은 경우가 아니면… 사흘에 한 번 정도로 충분해. 보통 낮에 동굴이나 풀숲 속에 숨어서 자는 편이지. 이 상태로 그냥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잖아."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몰랐던 사실들이었다.

만약 다른 뱀파이어들도 이런 식이라면, 낮에 상대하는 것으로 손쉽게 죽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약점을 알려 줘서 고맙군."

샬롯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느새 잠에서 깬 그녀가 하품하며 몸을 일으켰다. 덩치만 큰 고양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마른 혀로 입 주위를 핥은 그녀가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네년을 죽여야 할 때, 기쁜 마음으로 참고해 주지."

"아쉽게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짐승아. 그리고 언제든 덤벼 줘. 반대쪽 얼굴도 똑같이 긁어 줄 테니까. 균형이 맞게."

테사이아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샬롯이 콧방귀를 뀌었다.

"역겨운 귀쟁이는, 마족이 되어서도 똑같이 역겹군."

"몸은 괜찮나?"

이안이 물었다. 샬롯이 팔과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아주 괜찮다. 아프지도 않군."

"이리 와라. 붕대를 갈아 줄 테니."

또? 하는 표정으로 움찔하던 샬롯이, 이내 테사이아를 힐끔대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안 앞에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 감긴 붕대를 푼 이안이 눈을 깜빡였다.

"이건 좀 놀라운데."

"...?"

고개를 갸웃하며 얼굴을 만져 본 샬롯도, 이내 놀란 얼굴이 됐다.

상처가 거의 아물어서 손톱이 지나간 흔적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수인의 회복력이 빠르다고 해도, 비정상적인 속도였다.

"축복의 효과가 상상 이상이군."

이유를 깨달은 이안이 말했다.

화로의 축복이 가진 효과 중 하나가 체력 회복 속도를 높여 주는 거였으니까.

"놀랍군. 어쩐지, 몸이 가볍다 싶었어."

팔에 감긴 붕대도 푼 샬롯이 감탄했다. 팔의 상처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붕대를 더 감을 필요는 없겠군. 아침 식사를 준비해라. 먹고 바로 출발할 거니까."

"알았다."

샬롯이 몸을 돌렸다.

벌떡 일어난 테사이아가 마차로 몸을 돌리며 읊조렸다.

"아쉽네. 좀 더 깊숙이 파 줬어야 했는데."

마차로 기어 올라가는 그녀를 노려본 샬롯이, 이내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혀만이라도 자를 수 있게 허락해 다오, 이안."

"안 돼."

대답하면서도 묘한 기시감을 느낀 이안은, 이내 피식대고는 덧붙였다.

"하지만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네게 부탁하도록 하지."

***

마차가 관도를 천천히 나아갔다.

더 빠르게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이안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수많은 추적자들에게 쫓기며 이동한 지난 의뢰의 여파였다.

게다가 당장은 굳이 서두를 이유도 없었다.

가뜩이나 게임에서보다 이른 시점이었는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그보다 더 빨리 북부에 발을 들이게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변방 왕국간의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전쟁이 무르익어야 비로소 나타나게 될 메인 이벤트들까지도 아직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테사이아의 합류 역시, 여정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물론, 모든 게 평화롭진 않았다.

"마부석에 앉은 모습이 참 잘 어울리네, 샬롯."

"이름 부르지 마라, 귀쟁아. 역겨우니까."

"어머. 그렇게 말하니까 더 이름으로 불러 주고 싶은걸, 샬롯."

"한마디만 더 하면 정말 네 혀를 자를 거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여전히 서로에게 날을 세우고 있었으니까.

이안만 곁에 없다면 바로 다시 한번 서로의 목숨을 노릴 분위기였다.

이안은 일단 놓아두고 있었다.

이게 오래 갈 악감정인지, 한때 서로의 목숨을 노렸던 적수가 가까워지는 과정인지 아직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까 말할까 하다 말았는데. 내 혀는 잘려도 밤이면 다시 돋아나, 멍청아."

"그럼 매일 네 혀를 자르는 기쁨을 느낄 수 있겠군. 역겨운 귀쟁아."

"궁금한 게 있는데."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던 이안이 문득 내뱉었다.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둘이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악당 우두머리가 된 기분이군.

생각하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샬롯, 넌 테사이아가 뱀파이어라서보다 요정이라서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맞나?"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마족인 것도 물론 역겹지만."

"왜지?"

"이건 나도 궁금한데. 왜야, 샬롯?"

테사이아가 이안 쪽으로 붙으며 거들었다.

샬롯이 미간을 좁혔다.

"진심으로 묻는 거냐, 귀쟁아? 전형적인 고위 요정 주제에, 요정과 수인 사이의 일을 모른다고?"

"그래? 내가 고위 요정이야?"

테사이아가 오히려 되물었다.

이안이 자신의 발치에 찰싹 기대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네 정체를 모르는 거냐?"

"응. 말 안 했나? 난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몰라."

테사이아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내 첫 기억은, 그 끔찍한 실험실에 묶여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거거든. 그 전의 기억은 없어. 내 이름도 겨우 떠오른 거라고."

진혈의 여제가 기억상실이었다니.

하긴, 생각해 보면 어제도 비슷한 소리를 했던 기억이 있었다.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내가 절대 죽을 수 없는 이유야. 복수도 해야 하지만, 내가 누군지도 알아내야 하니까."

"하…! 역시, 요정의 본질은 기억에 있는 게 아니군. 태생적으로 비열한 거야. 타고난 배신자랄까."

샬롯이 혀 차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테사이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욕을 할 거면 이유라도 알려주고 하지 그래."

"너희 요정들은 과거, 우리 수인과 동맹 관계였다. 함께 인간에 맞서, 영토를 지켜 냈었지."

샬롯의 목소리에 그르렁대는 저주파가 섞였다.

"마족들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인간들은 수인들이 모두 마족의 편에 섰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수인은 인간과 마족, 양 측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그건 너희 요정도 마찬가지였어. 다른 건 그저 너희가 더 많이 인간의 편에 섰고, 조금 더 약삭빨랐다는 것뿐이지."

샬롯이 테사이아를 바라보았다.

"너희는 스스로를 고위 요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마족들의 편에 선 자들은 흑요정이라 불렀고, 동족으로 여기지 않았지. 마족의 편에 선 자들도 신념에 따라 갈라 선 동족이라 여긴 우리와는 달랐어. 그리고 어느 날, 검은 벽이 대륙을 갈랐지. 그 후에 너희가 가장 먼저 한 게 무엇인지 아느냐?"

"뭐였는데?"

"남부에서 수인들을 쫓아내는 거였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마족의 편이 아니었다. 그저 너희처럼 인간의 편에 붙어서서, 그들과 권력을 나눠 가지지 않았을 뿐."

역사 깊은 악감정이었군.

이안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너도 그때 제국인이 된 거냐?"

"나는 운이 좋았다. 어렸고, 루 솔라를 섬겼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동족이 훨씬 많았다."

샬롯의 눈빛이 목소리만큼이나 가라앉았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남부를 손에 넣었다며 으스대던 귀쟁이들의 미소를. 만약 내가 그때 성체였다면, 한 놈이라도 더 저승길의 길동무로 삼았겠지. 다른 많은 동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루 솔라의 신도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이안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저들의 야성과 투쟁심은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에 가까웠다.

"듣고 보니 심하긴 했네."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덧붙였다.

"내 동족의 일은 사과할게. 샬롯."

전혀 미안하지 않은 말투였다.

샬롯이 혀를 날름대며 미소 지었다.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다. 네 처지는 나보다 더 나쁠 테니까."

"…그건 무슨 의미야?"

"네가 기억을 찾은들 달라질 게 있을 것 같나? 귀쟁이들은 절대 너를 동족이라 여기지 않을 거다. 마족이 된 요정이라니. 오히려 죽이려 들겠지. 네가 기억을 잃은 게 애석하군."

샬롯이 어깨를 으쓱였다.

"기억이 있었다면 삶이 더 괴로웠을 텐데 말이야. 어쩌면 그래서 스스로 기억을 지운 걸지도 모르지. 마족이 된 자신을 감당할 수 없어서 말이야. 너희들의 나약함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

테사이아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숙였던 그녀가, 이윽고 다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 아무래도 저 짐승의 말이 사실 같아. 본능이 자꾸 저걸 죽이라고 속삭이거든. 그냥 그 본능에 따르면 안 될까?"

"부디 허락해 다오, 이안. 지금이라면 1분도 걸리지 않을 거다."

샬롯도 기다렸다는 듯 내뱉었다.

둘을 번갈아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피식했다.

"덕분에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히 알겠군. 그래, 너희 둘은 한 명이 죽어야만 만족하겠지."

"맞아…!"

"드디어 알아주는군."

"그러니까 지금부터 너희 둘은 한 몸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둘이 동시에 굳어졌다. 어리둥절한 시선.

이안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볼 때, 너희는 실수인 척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서로를 죽이고도 남을 것들이야. 하지만 난 그 꼴은 못 보겠거든. 하나를 잃을 바엔, 차라리 다 잃는 게 속 편한 쪽이지. 테사?"

"응… 으응?"

"샬롯이 죽으면 넌 내 손에 죽어. 네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의해서 죽더라도, 넌 죽는다."

"뭐…? 아니…."

눈을 부릅뜬 채 이안을 돌아본 테사이아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우묵하게 가라앉은 이안의 눈빛은, 어떤 반항이나 거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완고했기 때문이다.

"…알았어."

"좋아, 그리고, 샬롯."

이안의 시선이 샬롯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을 잠시 마주하던 샬롯이, 이내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눈길을 돌렸다. 이안의 냉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눈을 봐라. 당장."

"읏…."

샬롯의 시선이 끌려오듯 이안의 눈에 고정됐다.

주황색 눈동자에 파장이 번졌다.

"너에겐 죽음이 오히려 축복일 수 있겠지. 그러니 난 널 죽이지 않을 거다. 하지만 손을 자를 거야. 영원히 무기를 잡을 수 없도록. 물론 날 벗어나지도 못할 거다."

"...."

샬롯은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에게 완전히 압도된 것처럼.

이안이 미소 지었다.

"대답."

"…알겠… 다…."

"좋아."

이안이 미소 지었다.

샬롯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마차에 적막이 내려앉았지만, 이안은 홀가분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젠 정말 악당 두목이 된 것 같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지금까지 의뢰인이나 일행을 설득하던 방식은 솔직히, 꽤 귀찮고 피곤했던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가 만족스럽게 다시 지도를 내려다보는 사이.

"운명 공동체가 된 기분이네, 샬롯."

테사이아가 마부석에 속삭였다.

샬롯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내뱉었다.

"넌 닥치는 방법을 모르나?"

"혼자 보낸 시간이 길어서 말야. 그동안은 거의 짐승들하고만 얘기했거든. 아쉽게도 걔들은 말을 못 해. 너와 달리."

"제기랄…."

샬롯이 탄식하는 사이, 이안이 지도를 접으며 내뱉었다.

"아마 내일 낮 정도엔, 도시를 거치게 될 거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움찔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이것들을 데리고 마을에 들어가야 하다니….'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적어도 거기선, 둘다 싸우지 말고 닥치고 있어 줬으면 좋겠군."

이것들 때문에 마을에 들르는 걸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따듯한 잠자리와 그나마 먹을 만한 식사는 더더욱.

#073화

관도를 가로질러 동쪽의 먼 산기슭까지 이어진 장벽은, 아주 오랜 세월 이곳을 지킨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다른 곳들이 으레 그렇듯, 고대의 성벽을 개조하고 증축해 만든 관문인 모양이었다.

성벽 위, 쇠뇌를 든 경비병들이 마차를 내려다보았다.

건조한 눈길로 샬롯을 응시하던 경비대장이 이안 쪽으로 다가왔다.

"신분을 밝히시오."

이안은 기다렸다는 듯 얇게 말린 양피지를 건넸다.

"용병, 이안 호프요."

양피지를 펼친 경비대장의 눈매가 이내 가늘어졌다.

"화로의 사원…? 이게 위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소?"

"없소만. 신분을 위조할 거였다면 그 이름을 붙이진 않았을 거요."

"하긴. 그야 그렇군."

경비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화로의 사원을 살뜰하게 이용해 먹었다. 지도나 축복뿐 아니라, 그의 신분을 보증해 줄 문서까지 부탁한 것이다. 아공간에서 썩어 가던 오염된 정수의 정화는 덤이었다.

사원은 당연히 은인의 부탁을 전부 들어주었다.

그 결과, 이안은 체르윈 아스트레이아의 인장이 찍힌 신분 보증서를 가지게 되었다.

북부는 물론이고 제국에서도 먹힐 이름이었다.

"사원과 각별한 관계이신 모양이군. 화로의 불길이 꺼져가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소만."

"그 불길을 되살리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이 여기 이 이안이오."

내뱉은 건 샬롯이었다.

이안의 눈길을 받은 그녀가 무표정하게 혀로 입가를 훑었다.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했다는 듯.

어떤 녀석들이 묘하게 겹쳐지는 그 모습에 이안이 미간을 좁히는 사이.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군. 하긴, 범상치 않다 여기긴 했소만. 그게 좋은 의미여서 다행이오. 일행은 모두 귀하의 부하들이시오?"

"…그렇소."

일단은.

"용병단이라… 여기선 귀한 손님이시군."

중얼댄 경비대장이 품에서 도장을 꺼내 양피지의 한쪽에 찍었다.

도장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그가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해서, 어디로 가는 길이시오? 트라벨가?"

"지금은 북쪽으로 가고 있소."

"얼마나 북쪽? 이 닝글로슬도 충분히 북쪽이오만."

궁금한 게 많은 양반이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더 먼 북쪽. 아히고른 산맥 근처로 가고 있소."

이안 자신이 보기에도, 이 마차와 마차에 탄 구성원의 면면을 보면 호기심이 들 만했기 때문이다.

제국제 검은 마차. 마찬가지로 검은 마갑을 덧입은 혈통 좋은 전마.

마부석에는 수인이, 이안의 발치에는 로브를 눌러 쓴 앙상한 체구의 여인까지 기대앉아 있었으니까.

이만하면 이 제정신이 아닌 세계에서도 충분히 특이한 조합이라 할 수 있었다.

"아. 진짜 북쪽을 말씀하시는 거군. 거긴 사람이 발을 들일 곳이 아닌데. 지금 같은 계절엔 특히 더. 의뢰라도 받으신 거요?"

"화로의 사원에서."

이안은 태연하게 사원의 이름을 팔았다. 설사 그들의 귀에 들어간들, 이 정도로 쪼잔하게 굴지는 않으리라.

"정말 대단한 실력자들이신 모양이군. 그게 아니라면 그런 무모한 의뢰를 청할 리 없으니."

"북쪽의 상황이 그렇게 안 좋소?"

"…혹시 북부는 초행이시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대장이 잠시 침음했다. 괜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닌지 갈등하는 눈치.

"무슨 얘길 하셔도 달라질 건 없으니, 편히 말씀하시오. 오히려 도움이 될 거요."

이안이 넌지시 덧붙였다.

경비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자면, 아주 안 좋다 할 수 있소. 북쪽 전체가 북부 자치령이라곤 하지만. 사실상 땅에 눈이 덮이지 않은 지역까지만 북부로 쳐야 하오. 그 너머는 백색 마경이나 다름없소. 그 인근에 살던 자들도 죄다 가까운 남쪽으로 이주한 지 오래요. 이 닝글로슬도 그중 하나고."

잠시 말을 멈춘 경비대장이 덥수룩한 수염을 긁적였다.

"나라면 최소한 봄까진 이곳에 머물거나 동쪽으로 말머리를 돌리겠소. 카링기온까지 갈 것도 없이, 트라벨가만 해도 실력 있는 용병단을 필요로 하는 일거리가 아주 많을 테니까. 여긴… 조금 심심하겠지만 말이오."

그렇단 말이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안이 물었다.

"그럼 사실상 여기가 북부 최북단 도시 중 하나란 말씀이시오?"

"아직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것이오. 해가 지날수록 점점 추위가 아래로 내려오고 있으니. 윗동네까지 눈이 덮이는 것도 머지않았지. 그래 봐야 이 위로 있는 건, 여기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은 마을들일 거요. 사실, 거기서 아직도 버티는 자들이 제정신일 것 같지도 않소."

"그럼 여기서 보급을 충분히 하고 떠나야겠군…."

"급한 의뢰인 모양이군."

"봄까지 기다린다고 그렇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아서 말이오."

"그것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군."

경비대장이 양피지를 말아 건네며 덧붙였다.

"도시 서쪽 너머에는 광산이 있소. 그 인근은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오. 성 근처도 마찬가지고. 웬만하면 시가지를 벗어나지 마시오. 문제 생길 일은 만들지 않으시리라 믿겠소."

"걱정 마시오. 푹 쉬면서 돈만 잔뜩 쓰고 떠날 거니까."

"훌륭하군."

경비대장이 뒤로 물러섰다.

관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길을 텄다.

샬롯이 느긋하게 마차를 몰아 관문을 지나쳤다.

계절을 증명하듯 황량하게 방치된 밭과 상당히 넓게 형성된 도시의 전경이 드러났다.

이안의 예상을 뛰어넘는 광경이었다.

사실 여긴, 게임에선 본 적도 없던 도시였기 때문이다.

게임에 없던 마을이 튀어나오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이만한 규모는 처음이었다.

'퀘스트가 없으리란 게 갑자기 좀 아쉬워지는군… 여유도 있는데.'

어쨌건 이런 도시라면 흡혈귀 심판자가 따라붙는다고 할지라도, 미치지 않고서야 난동을 피우지는 않을 터였다.

자치령 도시 한복판에 마족이 출몰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곧바로 제국의 추적을 받게 될 테니까.

그때, 테사이아가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들었다.

지난밤에 사냥을 한 덕에, 그녀의 얼굴에는 한결 윤기가 돌았다.

"언제나 이런 귀찮은 과정을 거치는 거야?"

"자유 도시가 아닌 경우에만."

"재미있는 경험이었어. 당당하게 관문을 통과해 본 건 처음이거든."

"그러시겠지."

"안에서도 잘해 볼게. 이상하게 전엔 항상 관심을 끌었었거든."

"그야 네가 벗고 다녀서 그런 거겠지."

"아하…."

하는 짓도 평범하진 않았을 테고.

이안은 몰랐다는 듯한 테사이아의 반응에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돌렸다.

어쨌건 지금은 샬롯이 있으니, 상대적으로 그녀가 관심을 받을 일은 많지 않으리라.

"어딜 가장 먼저 들러야 하지?"

그때 샬롯이 물었다.

또다시 기본적인 질문.

이안이 턱짓했다.

"여관이나 도시 어딘가에 마구간이 있을 거다. 거기부터 들러."

"알았다."

"아까는 왜 끼어든 거지? 너답지 않은 짓이었는데."

"아, 그거. 화로의 사원에서… 배웠다."

샬롯의 목소리에 머쓱함이 묻어났다.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미구엘?"

"네가 대사제와 대화 중일 때 다가와서 말을 걸더군. 너를 소개하는 방법부터, 시종으로서 대행해야 할 덕목들을 떠들어 댔다. 그게 생각이 나더군. 어쨌건 지금 나는… 네 시종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하…."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계속 전승하고 있었다니.

테사이아가 눈을 빛낸 건 그 직후였다.

"이안을 소개하는 방법이 따로 있어? 뭔데?"

"그자가 말하길-"

"그만."

말을 자른 이안이 싸늘한 눈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싸우지 말랬지 친한 척하란 얘긴 아니었다. 그리고 샬롯, 그 개소리는 잊어라. 필요 없으니까."

"그러면 나는 더 편하다만… 네 공적을 알리는 건 필요할 것 같다, 이안. 용병단은 소문과 평판이 중요한 법이니까."

"고작 셋인데 용병단은 무슨…. 필요 없어. 평판은 다시 쌓으면 그만이야."

"왜. 난 용병단, 마음에 드는데."

테사이아가 히죽댔다.

그러시겠지.

관자놀이를 누르며 이안이 내뱉었다.

"그걸 계속 유지하고 싶으면, 지금처럼 요정 마법사인 척이나 잘하도록 해."

"알았어. 그럴게."

마차가 도시로 접어들었다.

칙칙한 검은 땅과 벽돌 건물들.

마구간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자를 운송하는 일이 잦은 듯, 상당히 큰 마구간이 대로변에 따로 위치해 있었으니까.

여관에서 멀지도 않은 위치였다.

"굉장히 좋은 말이군요, 나리."

마구간지기가 마차와 말, 그리고 샬롯을 번갈아 힐끔대며 말했다.

마차에서 내린 이안이 내뱉었다.

"짧으면 이틀, 길면 며칠 더 묵을 수도 있다. 최대한 좋은 걸 먹이고 편히 쉴 수 있게 해라. 북쪽으로 갈 거니까."

"북쪽이면, 얼마나 북쪽이요?"

또 이걸 묻는군. 하긴, 여긴 이미 제국 기준으로는 북부였다.

"아히고른 산맥 근처까지."

"그 정도면… 돌아오실 땐 말이 없어지실 텐데요."

"가는 동안에라도 버틸 수 있도록. 그리고 청소도 부탁하지."

이안이 건넨 은화 몇 개에 마구간지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그의 뒤로 나란히 걸었다.

행인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한 번씩은 머물렀다.

이안은 소리 없이 입맛을 다셨다.

'별로 눈에 띄고 싶진 않지만….'

샬롯과 함께 하는 이상 익숙해져야 하는 부분이었다.

대장간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거리 하나가 온통 대장간이었기 때문이다.

"똑바로 잡아라, 멍청한 놈아! 내리칠 때 자꾸 튀잖아!"

"풀무질 제대로 해!"

인간과 난쟁이들이 뒤엉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여기서 만든 물건들을 북부 전선으로 보내는 모양이었다.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긴 하네.'

이 세계가 가상이 아니리란 사실을 새삼 곱씹게 하는 광경이었다.

게임에선 본 적 없는 도시에서 느낀 활기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극단적인 세계가 실존할 수 있는 건진 아직도 의문이었지만.

어쩌면 이런 것도, 그가 선진국 축에 드는 나라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지는 의문일지도 몰랐다.

전쟁이나 가난이 휩쓸고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처음부터 그다지 놀라지 않았을지도.

가판에 늘어선 물건들을 손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거리를 지나친 이안이, 이윽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가판 너머에 시큰둥하게 기대앉은 중년 난쟁이에게로 향했다.

"저기가 가장 실력이 좋은 것 같군."

"…그걸 어떻게 안 거지?"

"잘."

저 가게의 물건이 가장 정보를 많이 확인할 수 있다거나 하는 식의 설명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넌 선택권도 없어. 돈은 내가 내니까."

"…나도 돈이 있긴 하다만."

"네 돈도 내 돈이다."

"그것도… 맞는 말이군."

이안이 가판에 다가섰다.

그가 단검을 비롯한 물건을 몇 개 집어 들자, 비로소 난쟁이 장인이 그를 바라보았다.

"안목이 상당하시군."

"종종 듣는 말이지. 얼마요?"

"꽤 비싼데. 돈은 있으시고?"

물론 그의 입은, 이안이 가판에 제국 금화를 몇 개 놓은 순간 곧바로 닫혔다.

이안이 금화를 향해 뻗어 나오는 짧고 두꺼운 손을 막았다.

"이건 맞춤 제작비까지 포함된 돈이오."

"맞춤 제작?"

이안이 손목 아래가 찢겨 나간 샬롯의 팔 보호대와 금이 간 견갑을 그의 눈앞에서 벗겼다.

"이것들을 보수하고, 사이에 들어갈 것도 만들어 주시오."

"오… 이건 마법 무구로군…."

장인이 물건을 이리저리 확인했다.

"난쟁이 장인의 솜씨고… 재질도 보통 제국 강철이 아니오. 새겨진 마법도 정교하군. 똑같이 재현할 방법은 현재로선 없소만."

"움직이기 편하고 견고하기만 하면 달라도 상관없소."

"그러시다면야… 이리 오시오."

샬롯이 가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대장간 구석에서 코를 골며 잠든 도제에게 일어나라고 소리친 난쟁이 장인이, 이윽고 그녀의 팔 치수를 재며 중얼댔다.

"수인을 보는 건 오랜만인데. 거기다 요정과 함께라니. 괴상한 조합이군."

샬롯의 낯이 굳어지는 가운데, 이안이 코웃음을 쳤다.

"내 눈엔 댁들도 괴상하긴 마찬가지요."

"…수인과 요정을 함께 데리고 다니는 그쪽이 가장 괴상하오. 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시는 건가?"

태연하게 내뱉은 장인이 앞의 종이에 뭔가를 적기 시작하며 덧붙였다.

"내일 다시 오시오. 그리고 비용이 조금 부족한 것 같은데."

"제대로 된 걸 준비하는 게 좋을 거요. 바가지를 씌우는 만큼."

이안이 금화 한 개를 더 가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의 가라앉은 눈빛을 힐끔댄 장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도 당해 주는 손님에겐 그래야지."

이안이 몸을 돌렸다.

장인이 아직도 자고 있는 도제를 깨우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샬롯이 중얼댔다.

"무례하고 돈독 오른 땅딸보들…."

"걱정 마라. 내일 제대로 된 게 안 나오면, 저 반 토막은 반의반 토막이 될 테니까."

"…그래. 그… 또 나 때문에 돈을 쓰게 된 건…."

샬롯이 문득 더듬댔다.

차마 뒷말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

"알면 돈 값해라."

이안이 덧붙인 말에, 샬롯이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테사이아가 걸칠 옷까지 몇 벌 샀다.

테사이아가 입고 싶지 않다고 속삭였지만, 물론 그녀에게도 선택권 같은 건 없었다.

마지막으로 건조 식량까지 구매하고서야 비로소, 일행은 여관에 들어섰다.

"...."

테사이아가 걸음을 멈춘 건 그때였다.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린 이안은, 뒤늦게 그녀가 흡혈 일족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것들은 정말 사람 귀찮게 하는 데는 도가 텄군.'

샬롯과 테사이아 둘 다, 솔직히 말해 루시보다도 손이 많이 갔다.

테사이아는 이안이 여급을 불러 들어오라고 말하게 한 뒤에야, 비로소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북부의 집은 죄다 벽돌로 지은 것들이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판잣집보다 훨씬 따듯했다.

1층의 식당은 저녁이 되기도 전인데 이미 주정뱅이들로 북적였다.

난쟁이와 인간들이 뒤엉켜 독주를 마셔대는, 꽤 볼 만한 광경.

테사이아가 2층으로 옷을 갈아입으러 올라간 사이, 이안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도시의 여관에 들르면 늘상 그렇듯, 이쪽을 힐끔대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적의가 담기진 않았기에,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음식을 주문했다.

"여러분들이 그, 산맥 쪽으로 가신다는 용병분들이시죠?"

주문을 다 받은 여급이, 샬롯을 무서운 듯 힐끔대면서 물었다.

이안이 눈을 끔뻑였다.

"벌써 소문이 났다고?"

"돈을 뿌리고 다니셨다던데…. 실례가 안 된다면, 왜 거기로 가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용병이 다른 일이 뭐가 있겠어? 마물 때려잡으러 가는 거지."

이안이 피식대며 말했다.

여급이 반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