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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 9

여급이 반색했다.

"역시…! 그렇다면 진심으로 응원할게요. 여긴 저뿐만 아니라 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많거든요. 부디 한 마리의 마물이라도 더 줄여 주세요. 언젠가, 우리가 다시 고향을 되찾을 수 있게."

꾸벅, 고개까지 숙인 여급이 금방 음식을 가져다주겠다며 달려갔다.

"별…."

이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왼손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머잖아 마물들과 박 터지게 싸울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양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건지, 슬슬 알 것 같았으니까.

이건 무작정 파장을 흩뿌리는 게 아니었다.

인근에 불러들일 수 있는 마물이 있을 때만 작동했다.

어쩌면 반대로 그것들이 공명을 이끌어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 정답이건 달라질 건 없으리라.

'이걸 해결하고 나면… 봄 전에는 트라벨가에 갈 수 있겠지.'

이안의 시선이 기억을 헤집었다.

이미 그가 기억하던 흐름과는 많은 부분이 달라졌지만.

그렇다 해서 큰 흐름이 뒤바뀌진 않았을 터였다.

필수적인 퀘스트는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

북부에 발을 들였으니, 해야 할 것들은 끝내고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때쯤이면 아마 변방의 전쟁도 절정에 이르렀으리라.

'…말도 안 되는 변수만 없다면 말이지.'

"…불편해."

그때, 가장 큰 변수 중 하나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후드를 깊이 눌러 쓴 테사이아는, 안에 받쳐 입은 옷이 어색한 듯 연신 몸을 꿈틀댔다.

'…반드시 죽여야 하는 녀석인데.'

이안은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애초에 이 동행 자체가, 게임에선 없던 상황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퀘스트가 뜨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지금 그는, 아예 새로운 길을 나아가는 중인지도 몰랐다.

'물론 이 녀석 하나가 전체의 흐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는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그냥 지금이라도 쳐 죽이는 게 합리적인 선택 아닐까.

"…왜 그렇게 무섭게 봐, 이안?"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해가 지는지,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다.

"맛있게 드세요. 많이 담았어요."

식사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불편하다고 옷 벗지 마라."

태연하게 내뱉으며, 이안은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더 지켜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으리라,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

딱딱한 침대 위.

"...!"

이안이 번쩍 눈을 떴다.

컴컴한 천장을 잠시 응시한 그의 미간이, 이윽고 구겨졌다.

미치지 않고서야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아무래도 일어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074화

아무런 전조도 느끼지 못했건만.

어느새 불길한 마력이 사방에 자욱하게 깔려있었다.

"힉...!"

옆에서 숨 삼키는 소리와 파드덕대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눈을 치켜뜬 테사이아가 천장 구석의 벽면에 등을 대고 붙어 있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입술을 떨며 내뱉었다.

"놈이야…! 놈이 왔어…!"

"알고 있다."

이안은 덤덤하게 내뱉으며 일어섰다. 바닥에서 주황색 안광이 번졌다. 샬롯이 나지막히 물었다.

"심판자가 왔단 말이냐?"

"이게 느껴지지 않아?"

테사이아가 도리어 되물었다.

샬롯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무래도 그녀의 감각은 이런 마법적인 부분에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방을 하나만 빌리길 잘했군.'

이안은 방어구들을 착용하기 시작하며 생각했다.

저 둘이 헛짓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불편을 감수한 게 이런 식으로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소리 없이 단숨에 몸을 일으킨 샬롯도 갑옷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너희 둘은 서로를 지키는 게 우선이야. 잊지 마라."

이안이 내뱉었다. 샬롯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둘을 멍하니 지켜보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속삭였다.

"뭣들 하는 거야? 그냥 여기에 있자. 저 괴물도 결국은 뱀파이어야. 이 안까진 들어올 수 없다고."

"겁에 질려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군."

흉갑 착용을 끝낸 샬롯이 코웃음을 쳤다.

"이런 일을 벌이면서 아무런 대책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무슨 방법이 있다는…."

"방법이야 여럿 있겠지."

각반의 사슬 이음매를 차례로 잠그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네 위치를 특정하면 건물을 부숴버리거나. 마을 주민을 홀릴 수도 있고… 나라면 그냥 주민 몇을 죽여서 널어놓을 거다. 네가 저지른 짓인 것처럼. 그것만 해도 넌 더는 여기 있을 수 없겠지."

"그럼 그냥 새벽까지 숨어있다가 곧바로 도망치면 안 돼?"

정말 마족이 할 법한 생각이군.

이안은 부츠를 발과 종아리에 딱 붙게 조이면서 싸늘하게 되물었다.

"왜 그래야 하지? 여기서 저놈을 쳐 죽이면 그만인데."

"…그러고 나면, 뒷감당은?"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고."

검을 허리춤에 찬 이안이 테사이아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네가 날 찾아온 이유를 잊지 마라. 정말 복수를 이루고 싶은 거라면, 도망치려는 습관부터 버려."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린 테사이아의 눈빛이 이윽고 가라앉았다.

"…알았어, 이안."

한 번만 더 이딴 식이면, 심판자가 하려던 것처럼 팔다리를 잘라서 가지고 다닐 거니까.

속으로 읊조리며 걸음을 옮긴 이안이,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

"...."

여관 문을 연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발아래, 그림자처럼 새카만 연무가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시선이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주위 건물의 지붕 아래 드리워진 어둠마다 박쥐들이 흑요석 같은 안광을 흘리며 매달려 있었다.

뱀파이어 아니랄까 봐. 박쥐라니.

생각하며 이안은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발목을 스치는 서늘한 한기.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흑마법의 진원지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관에서 이어진 대로 너머.

도시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한복판에, 새카만 형체 하나가 불쑥 솟아 있었으니까.

초승달 아래에서도 그의 모습만큼은 이질적일 정도로 선명했지만.

살아있는 존재라면 응당 느껴져야 할 온기나 숨결,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안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조각 같은 이목구비. 핏기없는 흰 피부. 제국의 정복으로 보이는 검은 옷. 적당히 곱슬 거리는 흑발.

심판자의 붉은 눈동자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살의는커녕 느긋한 여유와 기품마저 느껴지는 눈길.

"이 한복판을 아무렇지도 않게 거닐다니. 대단한 용기를 지녔군."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안이 피식댔다.

"넌 이런 도시 한복판에서 정체를 드러낼 만큼 정신 나간 마족이고."

심판자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이안의 비아냥이 오히려 즐거운 모양이었다.

"용기와 배포를 모두 지녔군. 요즘 같은 시대에는 드문 인재로다. 난 너 같은 인간을 좋아한다. 내가 필멸자이던 시절을 떠오르게 해."

고풍스럽게도 미친 놈이군.

생각하며, 이안은 주위의 지붕에 매달린 박쥐들을 돌아보았다.

놈들은 여관 문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여관을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였지만, 어쨌건 나란히 움직이고 있기는 했다.

심판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감사를 표하마. 너희들의 용기 덕분에 오늘 밤,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게 됐군."

"그렇지. 오늘 밤 죽음은…."

내뱉은 이안이 검을 뽑아 들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너 하나로 충분하니까."

달려오는 그를 응시하는 심판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마음에 드는 인간이군. 너는 돌아가는 길의 양식으로 삼아주마."

그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마도구…?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솟구칠 찰나, 그가 곧바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편히 잠들거라, 인간아."

꺄-아아아아아-!

상자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거대한 마력의 파장이 터져 나왔다.

"...?!"

저항할 틈도 없이 휩쓸린 이안이 추락했다.

그의 정신력과 저항력으로도 견디기 힘든 저주였다.

시야가 흐려지고 온몸의 힘이 빠지며 수마가 몰려들었다.

땅으로 떨어지는 찰나에도 뒤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짚단처럼 쓰러지는 샬롯과, 귀를 부여잡은 채 비명을 지르는 테사이아.

철퍽, 떨어진 이안이 연무 사이로 쓰러졌다.

도시 전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모든 생명체를 잠재운 심판자가 느긋한 걸음으로 그를 지나쳤다.

푸드드득-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있던 박쥐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놈들이 가뜩이나 희미하던 주위를 더 어둡게 물들였다.

"오늘은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잡종아. 저번 네가 선보인 잔재주는 귀여웠다만. 두 번 통하리란 기대는 하지 말거라."

"웃기지 마…!"

주저앉은 테사이아가 소리치고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을 벌렸다.

그대로 쓰러진 샬롯의 팔뚝을 깨문 그녀가 피를 삼켰다.

검붉은 눈동자가 번들댔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입을 뗀 그녀가 일어섰다.

파스스-

연무에 파묻혀 있던 그녀의 그림자가 매의 형상으로 변하며 날아올랐다.

심판자가 탄성을 흘렸다.

"이젠 그림자 사역마를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 내는군. 확실히, 너는 지금까지의 실험체들과는 달라."

"그딴 칭찬 필요 없거든? 이안…! 설마 이 짐승처럼 기절한거야? 이안!"

씹어 뱉은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그 사이 두 마리로 변한 그림자 매가 그녀의 주위를 호위하듯 맴돌았지만, 주위를 뒤덮은 박쥐들에 비하면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이렇게 어이없게 쓰러진 거냐고!"

건물 벽까지 뒷걸음질 친 테사이아가 분통을 터뜨렸다.

심판자의 웃음이 이어졌다.

"소용 없을 것이다. 이건…."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느긋하게 이어지던 그의 걸음이 멎었다.

심판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솨아아아-

휘몰아치는 돌풍이 주위의 연무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 사이로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퉤, 입에 물고 있던 살점을 뱉어낸 그가 내뱉었다.

"…잘난 척해서 미안하군."

"이안…!"

테사이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심판자의 탄성이 이어졌다.

"이건 증폭한 인어의 비명인데…. 대단하군. 이걸 듣고 잠들지 않은 인간은 네가 처음이다."

"아, 그래. 덕분에 누가 끼어들 걱정 없이 싸울 수 있겠군."

이안이 태연하게 내뱉으며 검을 고쳐 쥐었다.

입안을 깨문 고통 덕분에 정신만큼은 명료했지만, 몸의 감각은 아직도 온전하지 않았다.

"기어코 싸울 생각… 호오. 이건…?"

내뱉던 심판자가 별안간 눈을 감더니, 음미하듯 숨을 들이켰다.

그의 입가를 타고 송곳니가 삐죽 돋아났다.

입술 끝이 귀 아래까지 찢어졌다.

"그래… 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구나. 참을 수 없는 향기로군."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오른 건 그 직후였다.

그림자의 심판자.

이것들은 퀘스트를 준단 말이지. 잘 됐군.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닥쳐! 이안은 내 꺼야! 건드리기만 해!"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잡종아."

손짓하며 심판자가 눈을 떴다.

여관 건물 주위를 날아다니던 박쥐들이 테사이아에게 달려들기 시작하는 가운데, 그가 번들대는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보았다.

어느새 그의 손아귀에는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날 끝이 초승달처럼 앞으로 구부러진 기형검이었다.

"운명이란 재미있는 것이지. 저 잡종이 이토록 특별한 피를 가진 자를 곁에 두고 있을 줄이야. 너를 먹으면 더 강해지리란 확신이 드는군."

"비슷한 입장이네. 나도 널 죽이면 경험치를 얻을 테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대답 대신 투척용 단도가 파공음을 흩뿌리며 날아들었다. 옆으로 몸을 틀어 가볍게 피한 심판자가 왼손을 들었다.

치솟아 오른 검은 연무가 그대로 이안을 덮쳤다.

푸악-!

돌개바람이 연무를 흩어버린 건 그 직후였다.

그 사이를 뚫고 이안이 쇄도했다.

싸늘하게 번뜩이는 눈빛.

"하하...!"

참지 못하고 웃음을 토해낸 아스콜드가 마주 몸을 날렸다.

자욱한 연무가 그가 내딛는 걸음마다 치솟으며 밀려났다.

쩌엉-!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서로를 향해 돌진하던 둘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다.

손아귀를 타고 전해지는 묵직함.

쉬학-

먼저 뒤로 물러난 건 이안이었다.

아스콜드가 손목을 살짝 당긴 순간, 초승달 검의 검 끝이 어깨를 찍을 것처럼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아스콜드는 기다렸다는 듯 따라붙었다.

그의 손이 쉬지 않고 이안을 향해 움직였다.

채앵! 쩌엉-!

공방이 연달아 이어졌다.

검을 휘두르는 아스콜드의 눈동자에 점점 더 희열이 넘실댔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먹잇감이었기 때문이다.

잘 숙성된 와인 같은 피 냄새가 숨결마다 번졌고, 검격을 주고받는 중에도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검술 솜씨는 기대보다 떨어졌지만. 체구보다 월등하게 강한 힘과 빠른 움직임, 마법 무구로 보이는 바람 마법의 도움. 그리고 빈틈을 과감하게 찌르는 담대한 판단이 그 부족함을 상쇄하고 있었다.

촤르륵-

때때로 초승달 검이 놈의 팔다리를 감싼 사슬 위를 긁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옅게 번지는 피 냄새가 점점 더 아스콜드를 희열로 몰아넣었다.

여유와 기품으로 덮여있던 광기가 그의 붉은 눈에 넘실댔다.

자욱하게 깔린 연무가 그의 감정을 대변하듯 출렁댔다.

"훌륭하구나. 훌륭해. 몇 년만 더 갈고 닦았다면 필시 달인의 경지에 오른 검객이 되었을 터!"

쉴새 없이 검을 휘두르며 아스콜드가 소리쳤다.

"허나 상심치 말거라. 네 의지와 용기는 이미 능히 그들과도 견줄만한 수준이니!"

그는 수비 일변도인 와중에도 동요 없이 고요한 이안의 눈동자에 더 큰 기쁨을 느꼈다.

이 싸움을 조금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또한, 이 자리에서 단숨에 먹어 치우기엔 아까운 진미이리란 확신이 들었다.

저 무표정한 얼굴이 공포와 절망에 물들고, 눈동자에 맺힌 의지의 빛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그래서 더는 피가 향기롭지 않게 될 때까지 살려둔 채 음미할 생각이었다.

쩌엉-!

서로를 향해 내리친 검이 맞부딪쳤다.

카가각, 단죄의 검이 초승달 검의 검날 위를 긁으며 불똥을 튀겼다.

손목을 움직이려던 아스콜드는, 재차 이어진 압력에 일순간 뒤로 밀려났다.

검에 실린 힘이 더 강하고 유연해진 것 같은 느낌.

아스콜드의 미간이 꿈틀댈 찰나.

"…이제야 몸이 가볍군."

검을 맞댄 채로 이안이 읊조렸다.

아스콜드의 눈을 응시하며 그가 덤덤하게 덧붙였다.

"감사를 표하지. 네가 날 죽일 생각이 없었던 덕분에 시간을 충분히 벌었다."

"뭐라…? 하하!"

"부디 이게 전부가 아니길 바란다. 그럼 네 놈이 줄 경험치는 형편없을 것 같으니까."

"그 경험치라는 게 대체 뭐냐?"

퍼엉-!

대답은 이번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일순간 놈의 검으로 엄청난 인력이 느껴지더니, 다음 순간 그보다 더 강력한 무형의 폭발이 그를 덮쳤다.

영문도 모른 채 튕겨 나가던 아스콜드의 눈앞으로, 어느새 이안이 따라붙었다.

쩌엉-!

부자연스럽게 내리치는 검을 아스콜드는 팔을 들어 막았다.

오랜 시간 검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 이런 정직한 공격은 부지불식간에도 막거나 흘려낼 수 있는 것이었다.

치지직-

검과 검을 맞댄 채 밀려나던 그가 멈춰 설 때쯤. 연무를 머금은 돌개바람이 이안을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하지만 아스콜드는 휘몰아치는 장막에까지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이안의 동공에 붉은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사? 이렇게까지 강한 힘과 뛰어난 검술을 지닌 마법사가 존재할 수…?

콰아아아-!

의문을 채 끝맺기도 전에, 아스콜드의 발아래에서 불기둥이 폭발하듯 치솟았다.

#075화

불길은 넓게 번지지 않고, 휘몰아치는 바람을 따라 솟구쳤다.

장막 밖으로 튕겨져 나간 이안이 자세를 다잡으며 착지하는 가운데.

콰르르르-

타오르는 불길 주위로 검은 연무가 뒤섞였다.

잦아드는 불길을 바라보며, 이안은 곧바로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곧 연무를 뚫고 피부가 조금 타들어 간 아스콜드가 튀어나왔다.

"재미있구나!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너 같은 인간은 처음이야!"

소리치며 그가 왼손을 내리치자, 그의 뒤로 휘몰아치던 연기 폭풍이 이안에게 역류하듯 쏟아졌다.

카드드득-

늦지 않게 형성된 서리 방패가 쏟아지는 연무를 막아냈다.

방패 표면이 미세한 칼날에 갈리듯 순식간에 깎여나갔다.

이안이 훌쩍 거리를 벌렸다.

그 사이로 착지한 아스콜드의 손에, 어느새 손가락 길이의 병이 들려 있었다.

그가 안에 든 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입가로 붉은 액체가 흘렀다.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딱 봐도 피 같은데.'

체력 회복은 반칙 아닌가?

실없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아스콜드의 신체가 수복되기 시작했다.

주위로 휘몰아치던 연무가 한층 진하게 넘실댔다.

이제는 연기가 아니라 안개나 구름처럼 보일 정도였다.

"내 전력을 보고 싶다면 기꺼이 그리해 주마."

내뱉던 아스콜드의 고개가 튕기듯 뒤로 꺾였다.

투척용 단검이 그의 얼굴 한복판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 사이로 검은 연기가 푸스스 번지고, 아스콜드의 입꼬리가 주욱 찢어졌다.

챙그랑.

그가 다시 고개를 숙였을 때, 밀려 나온 단검이 땅에 떨어졌다.

아스콜드가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이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정말이지… 죽이기… 아깝군…!"

쿠확-!

말과 달리 그가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올려 치자, 바닥에 깔려 있던 연무가 솟구쳐 이안을 후려쳤다.

튕겨 오른 이안이 허공에서 회전하면서도 손을 치켜들었다.

화르르륵-

그의 주위로 일제히 피어오른 불꽃이, 동시에 쏟아졌다.

아스콜드가 치켜들었던 손을 내뻗었다.

퍼버버벙-!

연기 장막이 불길을 집어삼켰다.

허공에서 간신히 자세를 다잡은 이안이, 바람 칼날을 전신에 두른 채 그 한복판으로 몸을 날렸다.

이 순간에도 그는 모든 상황을 면밀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날아드는 박쥐들에게 씹히고 긁히면서도 역으로 움켜쥐어 찢어발기고 씹어 대고 있는 테사이아. 그녀가 날려 보낸 그림자 매가 지키고 있는 샬롯. 장벽 너머에서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아스콜드. 그리고 불꽃과 맞부딪히며 함께 연소되고 있는 검은 연무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집중 상태에서의 인지 능력이 높아지고 있었다.

푸확-!

다음 순간, 연무가 폭발하듯 이안을 향해 밀려들었다.

역시, 비슷하네.

이안은 게임 속 진혈의 여제 테사이아를 떠올렸다.

그녀의 공격 패턴 중에도 이와 흡사한 것이 있었으니까.

연무가 붉은색이었다는 걸 제외하면 사실상 똑같았다.

그때는 아스콜드의 진혈을 삼키고 손에 넣은 능력이었던 모양.

그러니까….

'파훼법도 같겠지.'

손아귀 한복판. 어느새 마력을 머금고 회전하던 하급 정수가 준비된 마법을 뿜어냈다.

푸화악-!

쏟아지던 연무가 터져 나온 광풍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돌풍. 게임에선 그저 강력한 바람을 뿜어내 넉백 효과만 일으키던 이 기본 회색 마법은, 한 줌의 혼돈력과 정수의 증폭이 더해지자 말 그대로 거대한 바람의 해일이 되어 연무를 흩어 버렸다.

이안이 허공에서 일순간 부유하듯 멈춘 가운데.

그 너머로 눈을 치켜뜬 아스콜드의 모습이 드러났다.

치켜든 이안의 오른손에서 푸른 빛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아스콜드의 눈동자가 떨릴 찰나.

푸확-!

신성력의 분출을 추진력 삼아 쇄도한 이안이, 허공에 푸른 호선을 새기며 단죄의 검을 내리쳤다.

아스콜드가 초승달 검을 치켜든 건 거의 동시였다.

오랜 기간 검술을 수련한 이 뱀파이어의 육신은, 이 와중에도 그동안 연마한 기술을 본능적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카가가가가- 콰직!

단죄의 일격을 흘려내려는 시도는 검날이 부러지면서 실패했다.

하지만 아스콜드에겐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쇄골을 가르고 오른쪽 어깻죽지가 벌어질 정도로 깊이 박힌 이 일격을 머리나 왼쪽 어깨에 맞았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

치이이-

검신에 남은 신성력이 그의 살을 태웠다.

지독한 고통에 소리 없는 절규를 토해내면서, 아스콜드는 흩어진 그림자 안개와 사역마들을 모조리 불러들였다.

생사가 걸린 위기 상황에서만 발휘되는 극도의 집중 상태 속.

아스콜드는 자신이 죽음에 이를 만큼의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는 판단을 끝냈다.

글루미르로 돌아가 요양해야겠지만, 몇 년이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연무와 그림자 사역마들은 가장 빠른 속도로 모이고 있었고, 몇 초 후면 이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선보인 인간을 휩쓸어 버릴 터였다.

그리고 놈의 피는 자신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리라.

여기까지 이어진 판단은, 고통으로 잠시 찡그렸던 눈을 뜬 순간 산산이 흩어졌다.

"...!"

그를 내려다보는 이안의 눈동자가 붉은 마력을 가득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속셈을 꿰뚫고 있다는 듯 싸늘하게 번쩍였다.

비로소 그는, 이안의 시간이 자신이 느끼는 것과 동일한 속도로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로선 눈앞의 이 인간이 한때 게임의 캐릭터에 불과했음을.

그 생성 과정에서 기사나 야만 전사에게 걸맞은 특성인 집중력을 선택했음을 알 길이 없었다.

특성이 유의미하게 발휘될 만큼의 고레벨인 터라 전투 중에는 언제나 고도의 집중력을 끌어 올릴 수 있으며, 인지력과 유지력을 뒷받침할 지능과 정신력 수치를 가졌다는 사실은 더더욱.

'어떻게…?!'

아스콜드가 한 건 그저, 극소수만이 타고난 검의 달인이 될 재능을 마법사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사이에도 이안의 주문은 빠르게 완성되고 있었다.

슈화아아아-

사방에서 연무와 박쥐들이 밀려들었다.

세상이 완전한 어둠 속에 빠진 것처럼 어두워진 한순간.

'…설마.'

이안이 쥐고 있던 검을 놓아버리며 왼손을 치켜들었다.

힘없이 뒤로 쓰러지는 아스콜드의 눈에, 새빨간 마력을 머금고 타오르는 정수가 아로새겨졌다.

작은 태양 같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칠 찰나.

콰아아아-

정수에서 샛노란 불길이 봇물 터지듯 사방으로 토해져 나왔다.

콰르르-

파도치듯 넘실거리는 화염 물결이 밀려드는 연무와 그림자 사역마들을 집어삼키며 번져나갔다.

끝도 없이 토해져 나오는 화염의 해일.

사방이 순식간에 대낮처럼 밝아졌다.

'도시를 전부 불태워 버릴 생각인가…?'

땅이 아스콜드의 등에 닿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연무와 사역마들을 불태우며 번져나가는 불길의 장막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아름답군.'

철썩, 파도치듯 번진 불의 물결 한줄기가 그에게도 쏟아졌다.

'이래서 플랜 B가 중요한 거지.'

이안은 연무와 박쥐들을 불태우는 불길을 응시하며 손을 뻗었다.

상위 적색 마법, 화염 해일.

이안이 새로 익힌 스킬 중 하나였다.

시전 속도도 빠르고 범위도 넓어 보여서 선택했는데, 화력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증폭하느라 마력 소모량도 장난 아니고 통제도 어렵지만….'

지금처럼 사방팔방에 적이 있을 때는, 작은 희생은 어쩔 수 없이 따르는 법이었다.

이안은 정신을 집중해 불길을 최선을 다해 통제했다.

화르르르-

화염의 물결이 거칠고 빠르게 번져나갔다.

"캬아악-!"

테사이아가 바닥에 납죽 엎드린 채 비명을 질러 댔다.

그림자 사역마들과의 전투가 어지간히 급박했던 듯, 들짐승이나 다름없는 몸놀림이었다.

기특한 건, 그 와중에도 쓰러진 샬롯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화르르르-

모든 연무와 박쥐를 집어삼킨 불길이 허공에서 한 번 크게 솟구치고는 증발하듯 사라졌다.

모든 것들이 이안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소(一掃)였다.

파스스….

탈 것처럼 회전하던 정수가 한 줌의 연기와 함께 빛을 잃고 떨어졌다.

어둠과 적막이 함께 찾아왔다.

이안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아스콜드의 모습이 보였다.

놈은 숯덩이가 되고 오른쪽 가슴에 단죄의 검이 박힌 채로도, 아직 살아 있었다.

"여기가… 내 기나긴… 삶의…."

다가서는 이안의 발걸음을 느낀 듯 아스콜드가 입을 달싹였다.

피부 조각들이 툭툭 떨어졌다.

"내가… 끝이리라… 생각지…."

속삭이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이 놈의 가슴팍에서 단죄의 검을 뽑아 들었다.

달아오른 검은 손아귀를 태울 것처럼 뜨거웠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 편이 좋았다.

"너희는… 결국…."

아, 새끼. 끝까지 말 많네.

혀를 찬 이안이 망설임 없이 아스콜드의 심장에 검을 찔러넣었다.

퍼슥, 주위가 함께 으깨지며 검날이 심장을 꿰뚫었다.

치이이- 뭔가 타들어 가는 감촉이 전해졌다. 한 줌 남은 진혈이 남김없이 타 버리는 소리였다.

아스콜드의 몸이 굳어졌다. 그리고 곧, 잿더미가 되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하…."

한숨 쉰 이안이 검을 뽑을 찰나.

파드득-!

"...!"

잿더미를 뚫고 무언가 날아올랐다. 그림자가 뭉쳐 만들어진 검은 박쥐.

최후의 발악인가? 아니면 본인도 모르던 일족의 대비책?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멀어지는 놈에게 화염구를 날렸다.

불덩이가 박쥐에 정확히 명중했다.

화르륵-

불길이 허공을 빛냈다.

뜻밖에도, 화염구는 박쥐를 모조리 불태우지 못했다.

아주 작은 그림자 조각이 불덩이를 뚫고 튀어나오더니, 끝끝내 어둠 너머로 멀어졌다.

"…쯧."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퀘스트가 완료된 것으로 봐선 아스콜드는 확실히 죽었고, 저 작은 조각이 뭐건 본래의 소임을 다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였으니까.

털썩-

비로소 이안이 주저앉았다.

욱신거리는 두통과 현기증. 그리고 초승달 칼에 찍혔던 몸 곳곳의 통증이 비로소 느껴졌다.

하지만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퀘스트가 완료되면서 능력치 포인트를 하나 얻었고, 경험치도 유의미하게 올랐으니까.

심지어 이제 레벨업이 머지않은 시점이었다.

이대로면 조만간,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 처음으로 레벨업을 경험하게 될 터였다.

"끝난, 끝난 거야…?!"

바닥에 납죽 엎드려 있던 테사이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지친 목소리로 대답하며, 이안은 아스콜드였던 잿더미를 내려다보았다.

수북하게 쌓인 재 사이로 희미한 마력이 느껴졌다.

잿더미 속으로 손을 뻗은 그는, 곧인어의 비명이 담겼던 마법 상자와 피를 보관했던 병.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상자와, 불길한 문양이 새겨진 목걸이를 차례로 발굴해 냈다.

다들 불에 타고서도 용케 제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목걸이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신력과 몇 가지 저항력, 그리고 희귀한 옵션인 마력 회복력을 조금 높여주는 희귀 등급의 오팔 장식 목걸이였다.

"믿고, 믿고 있었다고…! 이안! 넌 정말 최고야…!"

테사이아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목걸이를 아공간에 챙긴 이안이 내뱉었다.

"샬롯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어. 이 쓸모없는 짐승 같으니!"

깔깔대며 샬롯을 발로 걷어찬 테사이아가 이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안이 홱 고개를 돌렸다.

"다가오지 마라."

"응…? 왜?"

"피를 흘렸다. 거리 유지해."

"아, 응…! 알았어. 그럴게."

그는 이번 일로, 자신의 피에서 뱀파이어가 이성을 잃게 하는 냄새가 난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이유나 원인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애초에 중요하지도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테사이아가 슬며시 덧붙였다.

"한번 핥아 보기만 하면 안 돼?"

"되겠냐?"

"사실, 기대도 안 했어."

어깨를 으쓱인 테사이아가 넝마가 된 옷을 벗어 던졌다.

그녀의 시선이 고요해진 밤거리를 돌아보았다.

푹푹 파인 대로와 불길이 핥고 간 흔적이 선명하게 남은 건물들.

대로가 교차하는 광장도 개판이 되어 있었다.

히죽, 미소 지은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그럼 이제, 이 도시 인간들이 깨어나기 전에 잽싸게 튈까?"

"튈까는 무슨…."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변방 왕국들이었다면 그래도 큰 문제 없었겠지만.

여긴 자치령이긴 해도 엄연히 제국의 영토였다.

그의 신분까지 기록된 마당에 이대로 튀었다간, 범죄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리라.

"샬롯 챙기고 방에 틀어박혀 있어라. 옷도 다시 걸치고."

"이안은?"

"여기서 해 뜰 때까지 기다릴 거다.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오해도 빨리 풀겠지."

사실 주변이 개판이 된 건 대부분 그의 마법 때문이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아스콜드에게 덮어씌우면 끝날 문제였다.

"너랑 샬롯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는 거다. 잠들어서."

"뭐, 알았어. 그럼 난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을게. 고생해."

냉큼 고개를 끄덕인 테사이아가 기절한 샬롯을 번쩍 들어 올렸다.

여관 문 앞까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그녀가, 문득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 안에 들어가서 초대 좀 해 줄래?"

"...."

#076화

"으음…."

샬롯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은 요정의 진녹색 눈동자였다.

테사이아가 속삭였다.

"잘 잤어, 쓸모없는 짐승아?"

"…헉!"

숨을 들이켠 샬롯이 튕겨 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뇌리로 흐릿한 기억들이 두서없이 스쳐 지나갔다.

자욱한 검은 연무. 그림자에 가려진 수많은 시선. 어둠 위를 홀로 걷던 이안의 뒷모습.

그리고 대로가 교차하는 한복판, 기척도 없이 서 있던 마족.

"심판자…! 놈은 어떻게 된-?"

"진정해, 샬롯."

꾹, 그녀의 어깨를 누른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다 끝났으니까."

"끝… 났다고?"

"그래. 다 끝났지. 네가 코 골며 자는 동안에."

"...."

샬롯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훤히 드러난 팔뚝으로 멍하니 내려갔다.

정확히는 그 위에 삐뚤빼뚤하게 대충 감긴 붕대 위로.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네 피를 조금 빨았어. 나도 별로 먹고 싶진 않았지만,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었거든. 물론 넌 까맣게 모르겠지만."

"...."

"설마 그걸로 화를 내진 않겠지? 이래 봬도 목숨 걸고 너까지 지켰는데 말야."

"...."

샬롯은 테사이아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반박할 말도 없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흔들리던 주황색 눈동자가 이윽고 퀭하게 풀어졌다.

거대한 자괴감의 폭풍에 완전히 휩쓸린 자의 눈빛이었다.

"어머. 귀 쳐진 것 봐. 가엽게도. 그렇게까지 충격받은 거야, 샬롯? 신경 쓰지 마. 보다시피 결국 우리가 이겼으니까."

테사이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적어도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확실히 즐기고 있었다.

"이안이 그 빌어먹을 뱀파이어를 잿더미로 만들었거든."

"…이안."

샬롯이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녀가 망연자실한 눈으로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이안은 지금 어디에 있지?"

"뒤처리할 게 있다던데. 아까 병사들에 잔뜩 둘러싸여서 어디론가 갔어. 아마…."

창가로 걸어간 테사이아가 창문을 가린 나무판자를 열었다.

구름 낀 하늘과 난장판이 된 거리. 그리고 그걸 수습하고 있는 주민들과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귀족의 모습이 드러났다.

모든 광경을 훑은 테사이아의 시선이 건물들의 지붕 저 너머, 삐뚤빼뚤하게 솟은 칙칙한 회백색의 성에서 멈췄다.

"지금쯤 저기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좀 늦네. 벌써 꽤 지났는데."

마찬가지로 성을 응시하는 샬롯을 돌아본 테사이아가, 상쾌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좀 더 잘래? 이안이 돌아오면 깨워 줄 테니까."

"...."

***

회의실 내부의 적막이 점점 무거워졌다.

문 앞에 나란히 선 경비병들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원탁에 홀로 앉은 이안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폈다.

그들 중에 도시 중심부가 어떤 몰골이 됐는지 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안은 시종일관 협조적이었고, 그 개판을 만든 건 마족이라고 증언했지만.

이들의 눈엔 그런 마족을 홀로 때려잡아 잿더미로 만들었다는 이 용병도 똑같은 괴물이었다.

그런 괴물이 한 시간도 넘게 방치되고 있으니, 병사들의 초조함은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

하지만 정작 이안은 별생각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기분이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감옥에 잠시 수감될 각오까지 했건만. 수감은커녕 족쇄도 차지 않은 데다가, 회의실은 따듯하고 먹을 만한 식사까지 대접받았다.

그가 마족을 죽였다는 증거가 명확할 뿐 아니라, 그의 신분을 보증한 것이 화로의 사원인 덕분일 터였다.

반나절 정도는 더, 이렇게 여유를 만끽하며 기다려 줄 수 있었다.

철컥, 철컥-

그때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회의실로 들어선 건, 판금 갑옷을 걸친 갈색 머리의 기사였다.

많아야 20대 중반. 전형적인 제국인처럼 생긴 자였다.

그가 이안의 건너편에 앉으며 미소 지었다.

"반갑습니다, 이안 경. 글루미르 방위군을 지휘하는 루카스 램필드라고 합니다."

"…반갑소, 루카스 경."

이안이 묘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물론 경어도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의 눈매가 가늘어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기서 이자를 다 보다니.'

루카스는 게임에서 그에게 크고 작은 퀘스트를 여럿 준 주요 NPC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트라벨가와 카링기온에 있었는데.

'이 외곽 지역의 지휘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올라간 건가…?'

그가 생각하는 사이, 미소 지은 루카스가 말을 이었다.

"경이 제출하신 증거물의 확인을 끝냈습니다. 병에는 술처럼 만든 것으로 보이는 피가 남아 있었고, 불온한 마도구에도 사용 흔적이 역력하더군요. 잔재 역시 기록에 묘사된 뱀파이어의 유해와 일치하고요. 제가 온 것은, 다시 한번 증언과 의문점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협조는 당연히 하겠소만…."

"...?"

"나는 기사가 아니니 그렇게 부르실 필요 없소."

루카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겸손하시군요, 이안 경. 귀하가 사용하신다는 검을 봤습니다. 그 안에 깃든 신성이 느껴지더군요. 전에도 비슷한 신성을 느낀 적이 있었죠. 엄정한 여신의 축복에서요."

"그건 의뢰의 보수로 받은 거요."

"저 역시 엄정한 여신을 섬깁니다, 경. 여신께서 자격이 없는 이에게 신성을 허락할 분이 아니시죠. 차라리 분노를 내리시면 모를까. 경께서 기사가 아니시더라도, 여신의 성전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게다가…."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루 엔테르의 성화를 되살리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셨다던데요. 제가 경을 존중해야 할 이유는 이미 차고 넘칩니다."

"…경비대장에게 들으셨소?"

"경의 신분을 확인한 사람이니까요."

하여간, 기사들이란.

이안은 결국 입맛을 다셨다.

"편할 대로 하시오.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마족의 저주에서 무사하셨던 건, 여신의 성물 덕분이었던 겁니까?"

정신력이었는데.

생각과 달리,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의 증언에는 날조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나 더 추가된들 크게 달라지지도 않으리라.

"여신의 신성으로 놈을 처단하셨고요."

"그렇소."

몇 가지 질문과 대답이 빠르게 오갔다. 이윽고 루카스가 턱을 어루만지며 침음했다.

"그 마물이 닝글로슬을 방문한 이유만큼은… 여전히 의문이군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뭔가가 있지 않겠소."

"그 부분은 본국의 교단에서 밝혀내겠지요. 경의 증언과 증거물들은 본국으로 보내지게 될 겁니다."

"알겠소."

"감사를 표합니다, 경. 그 저주받은 마족의 목적이 무엇이건, 경이 아니었다면 여러 무고한 희생이 뒤따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렇게 조사에도 최선을 다해 협조해 주시다니,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될 겁니다."

귀감은 무슨, 더 귀찮아지기 싫어서 그런 건데.

이안이 미소 지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도 되겠소?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 말이오."

"아, 용병으로 활동 중이라고 하셨죠."

"활동 중인 게 아니라 본업이오."

"그럴 리가요. 그저 용병일 뿐이라면, 마족의 마법이 도시를 뒤덮은 것을 알고도 목숨을 걸고 싸우러 나가지 않으셨겠죠. 아무것도 얻는 게 없으니까. 이런 귀찮은 결과들도 뒤따르고 말입니다."

점입가경이군.

거의 순례 여행 중인 티르 엔의 사도 취급이었다.

이안은 헛웃음을 눌러 삼켰다.

그의 일당에 뱀파이어가 섞여 있고, 경험치와 퀘스트라는 보상 때문에 싸웠다는 걸 알고도 이 젊은 지휘관이 이런 눈빛을 보낼지 문득 궁금해졌다.

물론 그 사실을 내뱉지는 않았다.

루카스와는 앞으로도 또 만날 일이 있을 테니까.

"불필요한 말이 너무 많았군요. 경께 아첨하려 꺼낸 말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용무가 있으신 거요?"

"혹, 트라벨가나 카링기온을 방문하실 계획은 없으십니까?"

"있긴 하오만…."

"그러시군요."

루카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저는 내달, 트라벨가로 전출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한동안 근무한 후에 카링기온에 합류할 예정이죠."

카링기온은 사실상 북부의 최전선에 위치한 요새였다.

멀지 않은 곳에 검은 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검은 벽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도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만. 여러 변화가 눈에 띈다더군요."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벌써 그럴 리가 없는데.

"해서, 전선 전체가 긴장 중이라더군요. 침공이나 광기의 침식이 또다시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침식과 침공은 모두 일어나게 될 일이었다.

짧으면 1년, 길면 1년 반쯤 후에.

그리고 전선은 무너지리라.

적어도 게임에서는 그랬다.

"해서, 모든 병력이 검은 벽 인근에 배치될 겁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북부에는 그 외에도 많은 문제가 산재해 있죠."

"도움의 손길이 하나라도 더 필요하실 거란 말씀이시군."

"예. 아마도, 분명히."

"경의 뜻은 알겠소만, 당장은 해결해야 할 의뢰가 남아 있소."

"들었습니다. 산맥 쪽으로 가신다고요."

경비대장 그 인간, 신나게도 떠들어 댄 모양이군.

루카스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용무를 끝내고 트라벨가에 들르실 때, 저를 찾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퀘스트창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젊은 사령관.

'이런 식으로 연계 퀘스트가 시작될 수도 있는 건가.'

퀘스트가 없을 줄 알았던 도시에서 벌써 두 번째 퀘스트였다.

이안이 미소 지었다.

"초면인 용병에게 다짜고짜 의뢰 예약이라니. 과감하시군."

"북부의 지휘관들은 언제나 외부의 도움을 필요로 하니까요. 이미 저마다의 세력도 형성하고 있죠. 저 같은 젊은 지휘관들이 북부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는 건, 그런 기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거는 것이 두려워서가 가장 클 것 같소만."

"그건 저도 그렇습니다만. 최선은 다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카스가 빙긋 미소 지었다.

이안은 게임에서의 그를 떠올렸다.

지금보다 닳긴 했어도, 북부의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던 모습을.

"의뢰가 끝나면 트라벨가에 들르겠소. 이 문제는 그때 다시 이야기합시다. 벌써 할 얘긴 아닌 것 같군."

"훌륭한 결정이십니다. 실력과 책임감을 모두 갖춘 용병은 흔치 않으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렇게 혀가 잘 굴러가는 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안은 결국 피식 웃음 지었다.

"내가 몇 달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으면 죽은 것으로 아시오."

"엄정한 여신께서 가호하실 겁니다. 그럼, 조사는 끝났습니다. 이안 경."

루카스가 일어섰다.

뒤따라 일어서며 이안이 물었다.

"내 무기들은 어디서 찾으면 되겠소?"

"준비시켜 뒀습니다. 나가시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루카스의 말대로였다.

무기를 전부 품에 안은 경비대장이 복도 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가 웃음 지었다.

"푹 쉬면서 돈만 잔뜩 쓰고 떠날 거라고 하지 않으셨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더군."

***

"이안…! 왜 이렇게 늦었어. 걱정했잖아."

이안이 방문을 열자, 테사이아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왔다.

미간을 좁힌 이안이 내뻗은 팔을 쳐 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실실댔다.

"뒤처리는 깔끔하게 끝냈어?"

"그래."

대충 대답하며 문을 닫은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방의 구석으로 향했다.

그와는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는 샬롯이 벽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왜 그러고 있지?"

대답은 테사이아가 대신 했다.

"왜겠어. 면목이 없으니 저러고 있겠지."

"...."

그녀를 돌아본 이안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어지간히 갈궈 댄 모양이군.

그는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겨, 이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몸은 괜찮나?"

샬롯이 퀭한 눈으로 대답했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있겠느냐? 너희들이 싸울 동안… 나는… 잠만… 잤는데…."

"...."

이안의 시선이 다시 한번 테사이아를 스쳤다.

최전방에서 싸워야 할 녀석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다니.

"받아라."

입맛을 다신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을 던졌다.

엉겁결에 받은 샬롯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건을 바라보았다.

붉은 돌이 박힌 목걸이.

오래전, 코볼트 족장을 사냥하고 손에 넣었던 혈안석 목걸이였다.

새 목걸이가 생겼으니 필요 없어진 물건이기도 했다.

"차라. 네 정신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거다."

테사이아가 눈을 치켜 떴다.

"뭐…? 목숨 걸고 싸운 건 난데, 왜 선물은 저 짐승을 줘?"

무시한 채 이안이 덧붙였다.

"같은 일 겪지 말라고 주는 거니까, 차고 다녀라. 그리고 다음번에 큰 싸움이 있을 땐, 널 가장 위험한 적에게 보낼 거다. 몸으로 벌충해."

샬롯의 눈이 커졌다. 이윽고 혈안석 목걸이를 내려다본 그녀가,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목숨을 버릴 각오로 싸우겠다."

누구 마음대로 자꾸 버려?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일어섰다.

"따라와라. 반 토막의 운명을 결정지으러 갈 거니까."

"이안? 내 건? 정말로 내 건 없는 거야? 아니지…?"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내려다보던 목걸이를 비로소 목에 건 샬롯이 걸음을 옮겼다.

짧아진 꼬리를,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흔들면서.

#077화

"흐음…."

난쟁이 장인이 내놓은 물건을 응시하며, 이안이 침음했다.

물건이 구리면 키가 더 작아지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는데.

장인의 실력이 그가 기대한 것보다 더 좋았기 때문이다.

색까지 재현하진 못했지만.

팔목 보호대는 형태를 자연스럽게 이어 붙였고, 사슬 갑옷까지 이어질 팔뚝의 사슬 보호대는 촘촘하고 이음새도 견고했다. 견갑은 어디가 찌그러졌었는지 티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어떻게 하루 만에 이걸 다 했지.

"말했듯이 주문 회로는 되살리지 못했소. 무게도 조금 더 무겁고 내구성도 떨어질 거요. 하지만 지금 재료로는 이게 최선이오."

"…그래 보이는군."

이안이 물건을 내려놓았다.

장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뒤에서 구경하던 도제가 달려왔다.

"팔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인간인 그가 샬롯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사슬 보호대는 상의와 어깨 부위를 세밀하게 연결해야 하는 공정이 남아 있었다.

샬롯이 순순히 부탁에 응했다.

그녀도 물건의 품질에 불만이 없어 보였다. 사실, 있더라도 표출할 상태도 아니었지만.

"듣자 하니 큰 사고를 치셨던데."

그 모습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난쟁이 장인이 물었다.

이안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사고는 마족이 쳤지. 난 그걸 막았고."

"지휘관이 그 얘길 순순히 믿어 줬소?"

지금 시비 거는 건가?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이안은, 장인의 눈을 보고 그가 정말 그저 궁금해서 물은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댁한테 칼을 휘둘러 댔다고 치지. 댁이 그걸 막다가 반대로 날 죽이면, 그건 누구 잘못으로 일어난 사건이오?"

"그야 먼저 휘두른 놈 잘못이지."

"내가 쓰러지면서 옆 가게 가판을 다 엎어 버렸다면, 그건?"

"그야… 흠, 그래. 이렇게 납득시키신 거군. 수완이 상당하시오."

"그게 사실이니까."

"정말 소문대로 뱀파이어였소?"

북부인은 다 무뚝뚝하다더니, 그것도 옛말인가 보군.

하긴, 이런 도시에선 뭐든 떠들 거리가 필요한 법이었다.

"그래 보이더군."

"그걸 정말 댁 혼자 때려잡으셨고?"

"그런 셈이지."

"흠… 산맥 인근으로 가신댔나."

이안은 대답 대신 다시 난쟁이 장인을 돌아보았다.

장인이 태연하게 그의 몸을 턱짓했다.

"댁의 장비 상태가 쓰레기 같아서 묻는 거요."

이게 본론이었군.

비로소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말했다.

"수완은 그쪽이 더 대단하시군. 수리라도 해 주실 거요?"

"그러니 얘길 꺼냈지. 벗어서 올려 두시오."

이안은 사양하지 않고 입고 있던 방어구들을 하나씩 벗었다.

그의 사슬 방어구들은 초승달 검에 찍힌 부위마다 죄다 고리가 떨어져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판금을 덧댄 부위들도 구겨진 곳이 한둘이 아니었고.

솜씨가 상당한 장인이니, 본래보다 더 튼튼하게 보완해 줄지도 몰랐다.

"얼마면 되겠소?"

"필요 없소. 저번에 준 돈이 상당히 많이 남았으니까."

"...?"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시선에 장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왜 그렇게 보시오?"

"돈을 거절하는 난쟁이를 본 건 처음이라서."

"흥정 실력은 영 꽝이시군. 받을 생각 없던 돈도 받고 싶게 해."

혀를 찬 그가 이내 덧붙였다.

"산맥은 본래 우리 난쟁이들의 땅이었소. 마족을 혼자 때려잡은 양반이니, 그 근처에 눌러사는 빌어먹을 것들도 잔뜩 때려죽여 주시겠지. 그런데 개떡 같은 걸 입혀서 보낼 수는 없지 않겠소?"

"내가 듣기론 거긴 예전에 거인 왕국이었다던데."

"그것들이 노예로 부린 게 우리와 인간들이었다더군. 거인 왕국이 멸망한 뒤로 난쟁이와 인간이 나뉘어 살게 됐고. 뭐, 그땐 서로 피도 많이 봤지만, 이젠 옛날얘기요."

"그러시군…."

별 관심 없는 사연이었지만,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비들을 무료로 수리해 준다는데 이 정도 얘기 정돈 충분히 들어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얼마나 걸리겠소?"

"나흘… 아니, 사흘 반. 저 수인의 물건은 크기도 작고 마침 준비된 사슬도 있어서 쉬웠지만, 손님 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오."

별수 없이 며칠 더 묵어야겠군.

생각하며,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흘 뒤 오전에 찾으러 오겠소."

***

여관으로 돌아온 이안은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뜨니 한밤중이었다. 아래층이 아직 떠들썩한 걸 보니 그리 늦은 시간까진 아닌 모양이었다.

'정말 여긴 방음이란 게 전혀 안 되는군.'

희미한 차 배기음만으로도 잠을 설치던 과거의 삶이 새삼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이제는 오히려 꿈이나 환상처럼 느껴지곤 하는 시절이었다.

생각해 보면, 요즘은 본래 세상의 꿈을 꾸는 일도 많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무의식은 이미 이 빌어먹을 세계가 자신의 세상이라 여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긴, 아예 틀린 얘긴 아니었다.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평생 여기서 살아야 할 테니까.'

더럽고 냄새나고 야만적인 건 둘째치고, 목숨을 잃을 위협이 산재한 이 세계에서 평생을 보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초능력에 가까운 힘과 능력 따위는 필요도 없었다.

따듯한 집. 대단하지 않아도 먹고는 살 수 있는 직업. 그리고 맛있는 음식과 소박하지만 안온한 삶.

아직도 그는,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달은 그 모든 것들을 언젠가 되찾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이안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듯 뇌까렸다.

넘어온 방법이 있으니, 돌아갈 방법도 어딘가엔 있을 것이다.

그걸 찾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남을 것이고. 유일한 단서대로, 어떻게 끝나는지도 모르는 이 빌어먹을 세계의 결말도 볼 것이다.

만약 그러고도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신이란 것들을 찾아가서 멱살이라도 잡아야겠지.'

그게 가능한 일인진 모르겠지만.

벌써 수없이 반복해 온 우울한 생각을 떨치며, 이안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둠 너머, 다른 이방인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집중됐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황색 눈과 붉은색 눈을 차례로 돌아본 이안이 내뱉었다.

"다 깨어 있었냐."

"배가 고파서."

"…난 잠이 안 오더군."

"넌 그럴 만하지. 낮에 많이 잤으니까."

"...."

테사이아의 핀잔에 샬롯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어디가, 이안?"

"식사하러 간다."

샬롯이 고개를 들었다.

"나도 따라가도 되겠나? 술 한잔하고 싶은데."

이안이 고개를 까딱이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튕겨 오르듯 일어섰다.

"나도 갈래. 내가 먹을 건 없겠지만."

"넌 남아라."

"뭐…? 왜?"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이안은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술 아래로 튀어나온 송곳니. 굶주림으로 번들대는 붉은 눈.

다른 이들에게 보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흡혈 마족의 습격이 있었던 직후에는 더더욱.

"넌 떠나기 전까진 낮에만 밖으로 나와라. 네가 먹을 건, 이따 샬롯이 잡아다 줄 거다."

"내가 먹을 건 내가 구할 수 있어, 이안."

"마족이 또 있다고 소문나고 싶으면 어디 해 봐."

"...."

테사이아의 말문을 막아버린 이안이 문을 열고 나섰다.

뒤따라 나가던 샬롯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조용히 박혀 있어라. 비쩍 마른 쥐새끼를 먹고 싶지 않다면."

"…두 마리. 최소 두 마리여야 돼. 네가 은혜를 아는 짐승이라면-"

"내가 네 먹이를 챙기는 거로 빚은 다 갚은 거다."

일방적으로 내뱉고는 문을 닫은 샬롯이 이안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내려오자, 소란스럽던 주점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곧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칼부림 날 일은 없겠군.

생각하며, 이안은 샬롯과 구석 자리에 마주 앉았다.

곧 여급이 테이블 위에 음식과 술을 올려놨다.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주문도 안 했는데."

"알아요. 이건 그냥 저희가 드리는 거예요."

"…왜?"

"마을에 들어온 마족을 처리하셨다면서요. 어쩌다 그런 일이 생긴 건진 몰라도, 나리가 주민들을 여럿 살린 거라던데요."

"누가 그런 소릴 하냐."

"다들요. 괜히 산맥 쪽으로 가신다는 게 아니구나, 하면서요."

"아, 그래…."

이안은 주위를 슥 돌아보았다.

다들 이쪽에는 관심도 없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런 게 북부식 배려인가.

"뭐, 사양하지 않지. 고맙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싱긋 미소 지은 검은 머리의 여급이, 이내 슬쩍 덧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질문 하나 더 드려도 될까요?"

"그래라."

"혹시, 작은 의뢰도 받으시나요?"

"받지. 하지만 여긴 날 필요로 할 만한 일은 없어 보이던데."

"그렇진 않아요. 도시 외곽으로 가면 유령이 나온다는 집도 있고, 광산 근처에 마물이 숨어 산단 얘기도 있고…. 저주가 깃들었다고 버려진 갱도도 있고요.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아서 방치해 둔 문제들이, 제법 있는 편이죠."

"그래…?"

시간 보내기엔 딱 좋은 것들이군.

생각하며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내뱉었다.

"난 공짜로는 일 안 해."

"그거야 당연하시겠죠."

"하지만 당장은 돈이 필요 없다. 이미 충분히 있기도 하고."

"그럼요…?"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북부가 초행이야. 눈 덮인 지역은 더더욱 가 본 적이 없지."

샬롯이 무슨 생각이냐는 듯 바라보는 가운데, 이안이 느긋한 눈길로 여급을 바라보았다.

"너희 중엔 이주민들이 많댔지. 그러니까 보수는, 우리가 눈 덮인 지역을 지날 때 필요할 만한 것들로 받겠다. 크건 작건 상관없어. 물론 보수가 좋으면 일도 더 정성껏 처리해 주겠지만."

"...!"

여급의 눈이 커졌다.

이안이 대답을 듣지 않고 말을 이었다.

"가서 전해라, 의뢰가 있는 놈들은 물건을 들고 직접 찾아오라고. 그리고 우린 나흘 뒤에 떠날 거다. 의뢰는 내일 오전부터 받을 거고. 이해했나?"

"네. 제대로요. 감사합니다…!"

내뱉는 여급의 표정이 밝아졌다.

벌써 생각나는 것들이 있는 모양.

피식한 이안이 턱짓했다.

"알면 술이나 몇 잔 더 가져와."

"당연히 그래야죠."

여급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곧 그녀가 다른 주정뱅이들 사이를 돌며 이야기를 전했다.

주정뱅이들의 토론이 이어졌다.

주로 추위 속에서 이동할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갑론을박이었다.

온갖 경험담이 다 나오겠군.

생각하며, 이안은 느긋하게 술잔을 들었다.

화로의 사원에서 받은 축복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북부인들이 가져올 물건들은, 척박한 북쪽에서의 여정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주리라.

술을 홀짝이던 이안은, 이내 자신을 응시하는 샬롯을 마주 보았다.

"왜?"

"놀라고 있었다. 넌 정말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꾀를 다 지녔군."

뭔 소릴 하려나 했다.

"별 것 아닌 요령이야. 의뢰인들이 정말 쓸만한 걸 듣고 올지는, 두고 봐야 알 테고."

"고향에서 가져온 물건은 쉽게 버리지 못하는 법이지. 그게 이제는 쓸모가 없을지라도."

덤덤하게 말한 샬롯이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덧붙였다.

"하지만 계기가 생긴다면 미련 없이 놓아줄 것이다. 언제나 현재가 과거보다 중요한 법이니까."

"경험담처럼 말하는군."

이안이 피식대며 말했다.

샬롯은 대답 대신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생각에 잠긴 눈빛.

과거를 떠올리는 것 같기도. 지금의 처지를 곱씹는 것 같기도 했다.

좀 전의 자신이 문득 겹쳐졌다.

"되찾고 싶나."

이안이 툭 내뱉자,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지막이 되물었다.

"과거의 삶? 아니면 꼬리?"

"둘 다."

"…혹시, 날 쫓아낼 생각인가?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그럴 생각은 없지만. 그게 네가 바란 것이었을 텐데."

"그랬지. 지금도 그렇지만…."

술잔을 쥐는 그녀의 눈빛이 복잡한 속내를 머금고 일렁였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야."

"왜지?"

"…네가 하비에르 같은 자였다면, 나는 아무런 수치심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정당하다 여겼겠지. 하지만 너는 전사다, 이안."

그녀가 이안을 다시 마주 보았다.

"서로의 가장 중요한 것을 두고 싸운 끝에 빼앗긴 것이니, 반환 역시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른 후에 요청할 것이다. 하물며 네게 목숨까지 빚진 지금은, 꼬리를 돌려받는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히려 평생의 수치로 남겠지."

이건 본래 가지고 있던 생각일까, 아니면 내게 종속되어 가는 자신을 합리화하려 내린 결론일까.

잠시 생각한 이안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어느 쪽이건 달라질 건 없었다.

"내가 꼬리를 돌려주지 않으리란 가정은 하지도 않나 보군."

"네가 하비에르 같은 자라면 했겠지. 그럼 내 내면에 자리 잡은 이 공포를 이겨 내고 널 죽일 방법을 찾으려 애썼을 것이다. 그 결과로 내가 죽게 될지라도.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군."

"하비에르를 어지간히 싫어했군."

이안이 피식댔다. 어쨌든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샬롯을 영원히 끌고 다닐 생각까진 없었으니까. 언젠간 꼬리를 돌려줄 날이 오게 될 터였다.

그때까지 그녀가 살아있다면.

"그러니 얼마든지 나를 가장 위험한 전투로 밀어 넣어도 좋다. 그러길 바란다. 설사 그러다 죽더라도, 내겐 나쁘지 않은 결말이야."

"걱정 마라. 필요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거니까."

샬롯이 미소 지었다.

곧 술잔을 말끔하게 비운 그녀가 일어섰다.

"그럼, 쥐를 잡으러 가겠다."

"내일부턴 바빠질 수도 있어. 테사가 문제 일으키지 않게 신경 써라."

"기꺼이."

샬롯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이안은, 이윽고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주점이 고요해진 새벽까지. 홀로.

#078화

다각- 다각-

마차가 닝글로슬의 북부 관문으로 가까워졌다.

"호오…."

경비대장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스쳤다.

마차는 그가 기억하던 모습과 여러모로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살이 오른 두 마리 전마는 마갑 위로 털가죽을 덮어썼고, 마차의 네 바퀴에는 넓적하게 다듬은 사슬 띠가 감겨 있었다.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건 마부석에 앉은 수인. 이제는 닝글로슬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샬롯의 행색이었다.

사냥꾼들이나 쓰는 여우 털모자와 부츠, 장갑에 늑대 가죽으로 만든 망토까지 두르고 있었으니까.

온갖 짐승의 털가죽을 두른 수인은, 경비대장이 보기에도 꽤나 괴상했다.

"정말 오늘 떠나시나 보군."

마차가 멈추자, 경비대장이 옆으로 다가서며 내뱉었다.

이안이 피식 웃음 지었다.

"닝글로슬의 관문은 댁이 다 지키나?"

"순환식 근무라서 말이오."

경비대장의 시선이 이안이 머리에 쓴 검은색 털모자와 설표 털가죽을 이어 붙인 망토를 훑었다.

"얼어 죽을 일은 없으시겠소."

"다들 그러더군. 검사할 게 남았나?"

"없소만. 차별을 둘 순 없어서 말이오."

온갖 털가죽이 푹신하게 깔린 마차 내부. 빵빵하게 들어찬 짐 가방.

마지막으로 늑대의 머리 가죽을 고스란히 남겨 만든 로브를 눌러쓴 테사이아까지 눈으로 훑은 경비대장이 웃음 지었다.

"돈을 안 받는다기에 무슨 소린가 했는데. 남는 장사셨군."

"강요한 적 없어. 다들 알아서 들고 온 거지."

"알고 있소."

이안의 방식은, 이 암흑시대의 인간들에겐 파격적인 것이었다.

보상만 마음에 들면 창고의 쥐 떼를 잡아 달란 식의 하찮은 의뢰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았다. 의뢰의 접수와 해결이 거의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도시에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으니 이안에겐 당연했지만, 현지인들의 눈엔 아니었다.

거기다 폐가에 깃든 망령처럼 병사들조차 겁을 내거나, 갱도에 깃든 저주처럼 해결할 방법을 몰라 방치해 둔 문제들도 별반 다를 바 없이 뚝딱뚝딱 해결해 버렸다.

이튿날부턴, 소문을 들은 병사들까지 집에 보관 중이던 물건을 들고 찾아갔을 정도였다.

이안은 아예 의뢰 접수를 몰아서 받았고, 그 후엔 받은 의뢰를 기계적으로 해결해 나갔다.

그렇게 며칠을 반복했으니, 마차가 이런 호화로운 모습이 된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주민들이 아쉬워하겠군…."

"아닐 거야. 당분간은."

"저 북쪽에서도 무사하시길 바라겠소."

"댁들도 그러길 바라지."

"뭐, 이 동네에 별일이야 있겠소?"

경비대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안은 웃지 않았다.

이윽고 경비대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별일이 있을 것 같소?"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뭐든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

"나라면 이 북쪽 장벽의 수비를 더 강화할 거야."

무책임한 말투였지만, 경비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가 해낸 일들을 생각하면,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북쪽으로 떠나는 지금은 더더욱.

"명심해 두겠소."

내뱉은 경비대장이 턱짓했다.

병사들이 비켜서고, 마차가 느긋하게 관문을 지나쳤다.

마차 뒤로 늑대 머리 가죽을 뒤집어쓴 테사이아가 고개를 내밀어,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이안이나 샬롯과는 달리 아름다운 외모와 괴상한 언행으로 입소문을 탔다.

마법사보다 괴상한 건 요정 마법사란 농담이 생겼을 정도였다.

"근무가 끝나면 곧바로 보고부터 올려야겠군…."

중얼거리며 성벽 위로 올라간 경비대장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좇았다.

마차가 완만하게 이어진 황량한 언덕을 지나, 이윽고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

마차가 관도 위를 나아갔다.

중간에 다른 마을로 들어서는 갈림길이 있었지만, 일행은 진입하지 않고 나아갔다.

보급도 충분했고 경비대장의 조언을 잊지 않은 덕분이었다.

이안은 물론 샬롯도 말없이 육포만 씹어 댔다. 어느새 그녀도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둬야 한다는 이안의 지론에 감화된 상태였다.

이어지던 차분한 적막을 깨뜨린 건, 널브러져 있던 테사이아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야."

고개만 이안 쪽으로 돌린 채, 그녀가 말했다.

"산맥 쪽으로는 왜 가는 거야?"

"...."

"...."

이안과 샬롯이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샬롯이 내뱉었다.

"진심으로 묻는 거냐?"

"당연하지. 왜 아니겠어?"

"하… 누가 귀쟁이 아니랄까 봐, 제 일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군."

"그럴 거면 대답을 하지를 마, 야옹아."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긴. 그동안 테사이아의 관심사는 생존뿐이었을 터였다.

심판자는 물론이고, 이안과 샬롯도 여차하면 그녀를 죽일 기세였으니까.

문제들이 어느 정도는 해결된 지금에야 비로소,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생긴 것이리라.

테사이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왜야, 이안?"

"…우린 지금 산맥이 아니라, 그 옆으로 이어진 숲으로 가고 있다."

"숲? 거기 뭐가 있는데?"

"몰라."

"모른다고…?"

테사이아가 되물었지만, 이안의 설명은 그게 끝이었다.

눈을 깜빡이던 테사이아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이안은 역시 불친절하네. 괜찮아, 그것도 매력적이니까. 야옹아, 네가 대신 알려 줄래?"

"그래. 알려 주지.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밤까지 혀가 없어질 거다."

"알았으니 알려 줘, 샬롯."

"나도 모른다. 궁금하지도 않고."

"궁금하지 않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가면 알게 될 테니까. 뭐가 있건, 난 싸울 수만 있으면 돼."

"짐승다운 대답이네. 그래… 어쨌든… 위험한 뭔가가 있다는 거네. 너희 반응만 봐도 바로 알겠어."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샬롯이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살 만해지니 다른 생각이 드나 보지? 부디 행동으로도 옮겨 주면 좋겠군. 기다리고 있겠다."

"그냥 난 위험한 게 싫을 뿐이야. 내가 딴생각이 없단 건 이안이 제일 잘 알걸? 같이 목숨 걸고 싸운 사이니까. 안 그래 이안?"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테사이아가 고개를 돌렸다.

"이안…? 알고 있지?"

"...."

진심으로 묻는 건가.

이안은 다시 한번 생각했다.

눈을 깜빡인 테사이아가 말했다.

"왜 아무 대답이 없어?"

"테사."

"응?"

"우리가 함께한 지 얼마나 됐지?"

"글쎄. 한… 열흘… 쯤?"

"네가 내 목숨을 노린 시간은?"

"…에이, 뭐야. 그래서 아직도 날 못 믿는단 얘기야?"

"아니."

"역시 그렇지?"

"한 번도 믿은 적 없단 얘기다."

"응…?"

"난 계약을 맺은 거지, 널 믿는 게 아니야."

순간 벌어졌던 테사이아의 입이 다시 꾹 닫혔다.

상처받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렇다 해서 없던 신뢰가 생기는 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이 세계에서 그가 믿는 사람을 다 합쳐도, 고작해야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 계약이랑 믿음은 아무 상관도 없지. 네 말이 맞아."

이윽고 읊조린 테사이아가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난 정말 널 배신할 생각이 없어, 이안. 늘 말했듯이."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 하지만 그녀를 돌아보는 이안의 눈빛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테사."

"...!"

"내가 널 믿게 되길 바란다면, 스스로 증명해."

"널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걸?"

"네가 다른 마족과는 다르다는 걸."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이안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본 바로는 착한 마물은 죽은 마물뿐이었고, 그건 마족이나 타락자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애초에 필요에 의해 살려 두었을 뿐. 본래라면 테사이아는 보자마자 죽였어야 할 존재였고, 그 사실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다른 뱀파이어들을 모두 죽이고 난 후엔 그녀의 차례이리라.

그전에 그녀가 배신한다 해도 마찬가지일 테고.

다른 뱀파이어의 진혈을 흡수하지 못한 테사이아는 결코 이안의 적수가 될 수 없을 터였다.

테사이아가 살아남을 길은, 그러는 게 그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방법뿐이었다.

메브나 루시처럼, 게임에선 그에게 죽었던 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이 녀석이 가능할 것 같진 않지만.'

어쨌거나, 아직 테사이아에겐 남은 시간이 제법 많았다.

이런 말을 해 준 것 자체가 이안의 입장에선 기회를 준 셈이었으니, 남은 건 그녀의 몫이었다.

"어려운 말이네…. 하지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읊조렸다.

"…그래도 조금은 알 것 같아. 해 볼게, 이안."

그보다 한밤중에 도망쳐 버리는 게 더 빠를지도.

생각하며, 이안은 다시 육포를 입에 물었다.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은 듯 기대 있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문득 덧붙였다.

"그런데, 나는 안 믿으면서 설마 샬롯은 믿는 건 아니겠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는군. 이안과 나는 서로 목숨을 걸고 맞붙었던 사이다, 건방진 귀쟁아. 나한테 잡혀 온 너하고는 시작부터가 달라. 안 그런가, 이안?"

"...."

샬롯이 눈을 치켜뜨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

내 믿음이 왜들 그렇게 중요한 거야?

눈을 치켜뜬 샬롯과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짓는 테사이아를 번갈아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혀를 찼다.

"쓸데없는 집착들 하지 마라. 내가 뭐라 한들,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

샬롯이 충격받은 듯 입에 물고 있던 육포를 떨어뜨리는 가운데. 눈을 가늘게 뜬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결국, 우린 같은 처지네. 샬롯."

"...."

***

그늘이 아닌 곳에도 눈이 덮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만년설이 덮인 산봉우리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세상의 끝이라고도 불리는 아히고른 산맥이었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물론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난 관심도 없지만.'

이제 길어야 며칠이면 산맥 인근에 접어들 터였다.

지도대로라면, 저지대로 이어지는 계곡으로 들어서야 하리라.

날이 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버려진 마을로 들어서는 갈림길로 접어들었다.

폐허나 다름없겠지만, 야영지를 꾸리기에는 적당한 장소였다.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눈이 덮인 지역부터는 마경이나 다름없을 테니, 야간에 이동을 욕심내는 건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하늘에 점점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혹시 모를 눈보라를 피할 공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마을은 본래의 형태가 어느 정도는 보존된 상태였다.

목책도 대부분 무사했고, 버려진 집들도 눈이 쌓이거나 일부 무너진 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본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냉큼 안으로 들어서진 않았다.

이안과 샬롯이 먼저 폐허 내부로 진입했다.

이런 버려진 마을은 마물이 둥지를 틀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운이 좋군."

"아쉽군. 아무것도 없다니."

다행히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어쩌면 북부의 마물은 소굴을 만들 필요 따위는 없는지도 몰랐다.

마을로 마차를 몰고 들어온 샬롯은, 한쪽 벽면이 무너진 집 안까지 마차를 들였다.

어차피 버려진 마을이니, 이왕이면 마차를 가장 안전한 위치에 보관하려는 생각이었다.

샬롯이 의뢰의 보수로 받은 말린 콩을 말들 앞에 던져 놓는 사이, 테사이아가 모닥불로 쓰기 위한 장작들을 주워 왔다.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

그 사이 이안은 모닥불에 구워 먹을 건조 식량이나 준비하고 있었다.

한결 능숙하게 모닥불을 피운 샬롯이 건물 앞의 공터로 나섰다.

한동안 제대로 된 전투가 없었으니, 미리 감각을 일깨워 두기 위해서였다.

아스콜드와의 전투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충격도, 그녀가 다시 수련을 시작하게 하는 계기로는 충분했다.

"또 하게? 열심이네, 야옹아."

테사이아가 비웃듯 말했다.

샬롯은 신경도 쓰지 않고 허리춤의 쌍검을 뽑았다.

이내 그녀가 춤을 추듯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은 느리다 빨라지기도 했고, 묘기를 부리듯 움직이거나 때로는 궁지에 몰린 것처럼 물러나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하듯이.

묘한 기시감에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거, 나랑 싸우는 거 아닌가.'

그녀에게 패배를 안긴 유일한 상대이니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눈이 하늘하늘 내리기 시작했음에도, 그녀는 개의치 않고 검무를 이어갔다.

"…오늘은 그쯤 해도 될 것 같다, 샬롯."

그녀를 멈춰 세운 건 이안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본 샬롯이, 그의 눈빛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좁혔다.

"혹시?"

"…그래."

이안이 손을 펼쳤다.

"시작됐다."

손아귀의 문양이 공명하고 있었다.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079화

"뭐가 시작된 건데? 그 불쾌한 마력은 또 뭐고."

모닥불을 쬐던 테사이아가 물었다.

이안은 망토를 벗어 아공간에 넣고 느슨하게 풀어 뒀던 방어구의 끈들을 조이기 시작했다.

"테사. 넌 여기서 마차를 지켜라. 한 마리의 말도 잃지 마."

덤덤하게 덧붙인 그가 목과 어깨를 풀었다.

"그러니까 설명을 좀…. ...!"

투덜대던 테사이아의 고개가, 그들이 진입했던 마을 입구 쪽으로 득달같이 돌아갔다. 잠시 멈췄던 테사이아의 눈동자가 옆으로 천천히 움직여, 이윽고 반대쪽에 있는 또 다른 입구까지 돌아갔다.

"포위… 당한 거야?"

"네 역할만 잊지 마라."

내뱉은 이안이 공터로 향했다.

쌍검을 늘어뜨린 채 숨을 고르던 샬롯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에, 곧 시작될 전투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 고여 있었다.

"많다. 그리고… 뭔가 이전과는 다르군."

"그래. 통솔하는 놈이 있는 거다."

이안의 시선이 그들이 들어선 입구 쪽으로 문득 돌아갔다.

"그놈은 내가 맡을 거다. 하지만 그동안엔 다른 곳까지 신경 쓰지는 못할 수도 있어."

"나머지는 내가 상대하지."

"혼자서는 쉽지 않을 텐데."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안."

이안이 샬롯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담긴 여러 감정을 읽어 낸 그가, 이윽고 내뱉었다.

"여기서 죽을 생각은 마라."

"노력해 보지."

샬롯이 어깨를 으쓱였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니야…."

심드렁하게 중얼대며 일어선 테사이아가 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두 마리 전마는 벌써 뭔가를 느낀 듯 불안하게 콧김을 뿜어 대고 있었다.

앞으로 다가간 그녀가 녀석들의 겁먹은 눈을 응시하며 중얼댔다.

"괜찮아… 쉬고 있어. 안 잡아먹을 테니까."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한복판에서부터 동심원이 번지듯 일렁였다.

번들거리던 말들의 눈이 흐리멍덩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숨소리가 가라앉고, 두 녀석 다 바닥에 주저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반쯤 잠든 것 같은 최면 상태.

테사이아가 싱긋 미소 짓는 사이.

휘익- 타탓-

몸을 날린 이안과 샬롯이 서로 다른 건물의 지붕 위로 올라섰다.

망토를 벗어 버린 테사이아도 몸을 날렸다. 구석에 숨어드는 털쥐 한 마리를 낚아챈 그녀가, 그대로 옆의 담벼락을 타고 지붕 위로 솟구쳤다.

손아귀의 쥐가 바둥거리는 가운데, 버려진 마을의 초라한 전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삐죽삐죽 솟은 목책 너머.

"...."

마을을 포위한 채 멈춰 선 것들을 눈에 담은 테사이아가, 이윽고 미간을 찌푸렸다.

인간과 난쟁이 언데드들이었다.

낡아빠진 장비로 무장한 채, 무정물처럼 우두커니 선 놈들 수십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떨어지는 눈송이 사이, 고요하게 일렁이는 푸른 안광들은 뱀파이어의 눈에도 으스스했다.

"힉…."

언데드들을 훑던 테사이아가 문득 숨을 들이켰다.

놈들의 한복판, 불쑥 솟은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주위 언데드들보다 배는 큰, 새카만 피부의 거인이었다.

넝마 같은 바지만 걸친 채 손에는 거대한 양날 도끼를 쥔 놈의 머리는, 다른 부위와 달리 미라처럼 비쩍 말라 두개골의 형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텅 빈 눈구멍에 일렁이는 푸른 안광이, 다른 놈들과 달리 감정을 가진 것처럼 불규칙하게 일렁였다.

검은 벽의 광기를 머금고 되살아난, 거인 전사.

"멋지군…."

놈을 멍하니 응시하던 테사이아의 귓가로, 샬롯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거인 전사를 응시하는 샬롯의 얼굴에 미소가 맺혀 있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미친년이 따로 없…."

중얼대던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그녀의 뇌리로 한 가지 의문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저게 샬롯의 상대라면….

'이안은 뭘 상대하는 거야…?'

휘이이-

때마침 눈송이와 함께 밀려든 바람에, 테사이아의 몸이 굳어졌다.

바람에 섞인 오염된 마력. 그 안에 끈적하게 눌러 담긴 집착과 광기에 일순간 휩쓸렸기 때문이다.

손아귀의 쥐가 뼛소리와 함께 축 늘어지고,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춘 테사이아의 시선이 바람이 불어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처음 보인 건 건너편의 지붕에 선 이안의 등이었다.

"저게 왜…."

읊조리는 그의 고개가 비스듬히 아래로 향해 있었다.

테사이아의 시선이 그와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

이내 그녀의 눈이 커졌다.

마을로 들어서는 관도 한복판.

낡고 구멍 난 갑옷을 걸친 거대한 무언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갑옷 내부가 어두운 건 착각이 아니었다. 모든 빛을 빨아들일 것처럼 새카만 실루엣이, 놈의 본모습이었으니까.

온전한 형태를 갖출 만큼 강대한 망령.

새카만 사념 덩어리 사이로, 놈의 이목구비가 신기루처럼 일렁였다.

테사이아를 휩쓸었던 감정은 놈에게서 번지고 있었다.

코까지 가린 투구 아래로 짙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위태로운 적막.

이 모든 상황에 관심도 없다는 듯 내리는 눈이 주위를 조금씩 하얗게 물들이는 가운데.

"■■… ■■■■...!"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낮은 음성이 마력의 파장을 머금고 번져 나갔다.

온몸을 진동시키는 듯한 불쾌함.

망령 거인을 노려보는 테사이아의 미간이 천천히 좁아졌다.

'뭐라는 거야…?'

이안에게서 낮은 숨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그가 뭔가를 비웃을 때 내는 특유의 소리.

저걸 알아들어?

생각하며, 테사이아는 이안의 등을 바라보았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 같은, 묘한 위압감이 감도는 뒷모습.

"■■■- ■■■■...!"

망령 거인의 외침이 이어졌다.

"아, 그러셔?"

읊조린 이안이 검을 뽑아 들었다.

망령 거인의 푸른 안광이 일렁이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그-아아아- 갸아아아악-

사방에서 귀곡성이 메아리쳤다.

우두커니 서 있던 언데드들이 턱을 덜그럭대며 울부짖고 있었다.

놈들의 안광이 몸부림치듯 휘청대며 타올랐다.

거인 전사 역시 포효하고 있었다.

다른 언데드들과 달리 분노가 느껴지는 소리였다.

솨아아아-

이안의 전신을 타고 바람이 번졌다. 떨어지던 눈송이들이 그의 주위로 빨려들어 맴돌다가 하늘로 솟구쳐 흩어졌다.

망령 거인이 등에서 거대한 대검을 뽑아 든 건 그때였다.

일격에 건물도 쪼갤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였다.

"■■■ ■■■-!"

소리치는 놈의 전신에 푸르스름한 마력이 번져 나갔다.

"말이 많아졌네. 듣기 싫게."

씹어뱉듯 읊조린 이안이 놈을 향해 몸을 날린 건 그 직후였다.

무모해 보이는 돌격. 하지만 테사이아는 그와 망령 거인이 맞부딪치는 것을 확인할 수 없었다.

망령 거인의 외침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언데드들이 밀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왜… 벌써부터 위험한 건데…!"

내뱉은 테사이아가 손에 쥔 쥐를 으적, 입에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번들대고 은발에 윤기가 흐르기 시작한 가운데.

"마차 똑바로 지켜라, 귀쟁아."

쌍검을 움켜쥔 샬롯이, 그녀를 돌아보며 내뱉었다.

"난 저 거인의 목을 따 올 테니까."

"뭐…? 너까지 나가면-"

테사이아가 고개를 돌렸을때, 샬롯은 이미 지붕 위를 내달려 멀어지고 있었다.

"…미친 짐승 같으니."

탄식한 테사이아의 시선이, 밀려드는 언데드들에게로 돌아갔다.

멀리서 지켜보거나 이안이 휩쓸고 간 잔재만 마주했던 그녀는, 그가 어떤 여정을 이어 왔는지를 이제야 비로소 실감하고 있었다.

"이안을 따라다니는 게… 사실 더 위험한 거 아니야?"

이제 와선 늦은 깨달음이었다.

꾸득, 꾸드득-

그녀의 손끝에서 칼날 같은 손톱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

파삭-!

내뻗은 검 끝에 걸린 언데드가 산산이 부서졌다. 착지하며 바닥을 구른 샬롯이 그대로 튕겨 오르듯 몸을 날리며 질주를 이어갔다.

점점 굵어지는 눈발을 뚫고 안광을 흩뿌리며 달려오는 언데드들.

샬롯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면서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콰직-!

난쟁이 언데드가 던진 도끼를 몸을 옆으로 한 바퀴 돌려 피한 그녀가, 마주 달려오는 놈의 두개골을 무릎으로 후려쳤다.

투구와 함께 산산 조각나 튀어 오르는 뼛조각. 푸른 안광이 폭발하듯 흩어지고, 그대로 놈을 뚫고 지나간 샬롯이 검을 고쳐 쥐었다.

갸- 아아아악-

귀곡성을 내지르며 뒤따르던 언데드 전사 둘이 달려들었다.

샬롯이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콰직-! 퍼억-!

양팔에서 만들어져 검 끝까지 이어진 곡선이 그대로 놈들을 꿰뚫고 지나갔다.

놈들이 휘두른 녹슨 검은 샬롯의 견갑을 스쳤을 뿐이었다.

"...!"

내뻗었던 팔을 회수하던 샬롯이 불현듯 바닥을 굴렀다.

쒸에에엑- 콰앙!

정수리를 쪼갤 듯 떨어진 양날 도끼가 땅에 깊숙이 박혔다.

치솟는 흙먼지. 작은 인간만 한 크기의 도끼였다.

자세를 바로 한 샬롯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인 전사의 비쩍 말라붙은 머리가 거기 있었다.

놈은 도끼를 내리친 상태에서도 그녀를 내려다봤다.

순간 웅크렸던 샬롯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나선을 그리며 솟구친 쌍검의 궤적이, 이윽고 도끼를 움켜쥔 놈의 팔뚝으로 교차하며 떨어졌다.

카드득-!

샬롯의 힘으로도 거인의 검은 팔을 잘라낼 수 없었다. 얼어붙은 땅을 내리친 것 같은 느낌. 쌍검이 틀어박힌 놈의 팔뚝에서 타르처럼 검은 체액이 번졌다.

그 순간 반대편 손을 도낏자루에서 뗀 거인 전사가 그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쒸에에엑-!

주먹이 만들어 내는 파공음이 심상치 않았다.

거대한 덩치 탓에 둔해 보일 뿐. 검 자루를 쥐고 있던 팔을 굽힌 샬롯은, 그대로 팔을 펴 튕겨 오르면서 자루를 쥔 손을 놓아 버렸다.

후우웅-!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아래로 스쳐 지나갔다. 그대로 공중제비를 돈 샬롯이 정확히 뛰어올랐던 자리에 다시 착지했다.

검 자루를 움켜쥔 그녀가, 힘껏 날을 뽑아 들며 주먹을 휘두르느라 교차된 거인의 팔뚝 위로 뛰어올랐다.

피부만 뼈에 붙은 형상인 거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분노로 타오르는 듯한 푸른 안광.

"아- 아아아아-!"

입을 쩍 벌린 놈이 포효했다.

동시에 터져 나온 충격파가 샬롯을 휩쓸었다. 검 한 자루를 놓치며 튕겨 나간 샬롯이 허공에서 핑그르르 돌며 착지했다.

거인 전사가 땅에 박힌 도끼를 뽑아 들었다. 팔뚝에 흐르던 체액은 어느새 끈적하게 응고되어 본래의 피부처럼 보였다.

쒸에에엑-!

놈이 또 한 번 휘두른 도끼가 샬롯을 쪼갤 듯 떨어져 내렸다.

도끼날을 응시하던 샬롯이 한순간 옆으로 비켜섰다.

콰드득-!

도끼가 땅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치솟는 흙먼지 사이. 샬롯의 안광이 주황색 선을 그리며 도낏자루로 쇄도했다.

양손으로 움켜쥔 검이 그대로 거인의 손목을 내리쳤다.

꽈드득-

검날이 거인의 손목을 반 이상 잘라냈다. 샬롯의 팔이 근육이 돋아나듯 일순간 부풀었다.

콰직-!

기어코 거인의 손목이 잘려 나갔다.

잘린 단면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체액이 샬롯의 머리에도 튀었다.

"오- 오오오오…!"

거인이 잘린 손을 치켜들며 울부짖었다.

"하… 하하...!"

놈을 올려다보는 샬롯의 얼굴에 희열이 번졌다.

그녀가 검날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는 다시 자세를 낮춘 찰나.

쩌어어엉-!

저 멀리서 터져 나온 충격파가 그녀의 전신을 울렸다.

샬롯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대검을 내리친 망령 거인의 모습이었다.

대검 주위로 일어난 거대한 폭발.

핑그르르 회전하며 날아가는 검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저 검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안…?"

탄식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일어선 거인 전사가 그녀를 향해 도끼를 내리치려 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이안을 걱정했다는 사실을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샬롯은 다시 거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콰장창창-

대포알처럼 튕겨나가며 바닥을 구르는 이안의 인상이 구겨졌다.

휘몰아치는 방벽과 바람 칼날의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보통 사람이었다면 뼈가 으스러졌을 충격이 이어졌다.

검을 그냥 놔 버리지 않았더라면 손목 정도는 진작에 부러졌으리라.

물론, 이안이 인상을 구긴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시작부터 최종 페이즈인 건 진짜 선 넘었지.'

이 망령 거인, '관문을 지키는 자'는 게임에서도 싸운 적이 있는 네임드 몬스터였다.

그리고 놈의 첫 번째 페이즈는 물리적인 공격이 전부였다.

마을 밖으로 나간 것도 놈의 대검에 쑥대밭이 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을 뿐.

이안은 게임에서 했던 것처럼, 놈의 갑주를 차근차근 부수며 최대한 안전하게 전투를 끌고 갈 생각이었다.

저놈이 곧바로 최종 페이즈에서나 쓰던 스킬들을 쏟아내기 전까지는.

물론, 그도 변수를 어느 정도는 대비하고는 있었다.

저건 애초에 여기서 출몰하는 놈이 아니었던 데다가.

"찬탈자여-!"

게임에선 한 적도 없던 저런 개소리를 지껄여 댔고. 결정적으로 전투 시작과 동시에 퀘스트까지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시작과 동시에 최종 페이즈로 넘어가는 수준이란 것까진, 예상할 수 없었다.

지금까진 그저 새로운 공격 방식이 튀어나온다거나, 단계가 빠르게 올라가는 정도의 변수가 전부였었으니까.

촤아아악- 쿠웅-!

구르던 몸이 나무 둥치에 부딪히며 멈췄다.

속에서 피비린내가 치미는 걸 느끼면서도, 이안은 팔다리의 감각을 먼저 확인했다.

다행히 전부 움직일 수 있었다.

'멀리까지도 튕겨 나왔네.'

그의 시선이 저 멀리, 내리찍었던 대검을 치켜드는 관문을 지키는 자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 하거나- 증명 하라-!"

놈이 이안을 돌아보며 포효했다.

타오르는 듯한 푸른 안광.

오냐, 해 주마. 씹새야.

입에 고인 피를 탁 뱉은 이안이, 아공간에서 사령 술사의 지휘봉을 꺼내 들며 일어섰다.

#080화

끼아아아아-

달리기 시작한 이안의 귓가로 귀곡성이 메아리쳤다.

'더럽게 시끄럽네, 진짜.'

이안이 사령술사의 지휘봉을 꺼내든 이유는, 당장은 그것밖에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그에게 단죄의 검보다 좋은 무기는 없었고.

저 망령은 코어라 할 수 있는 두개골을 제외하곤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비정형의 마물이었다.

갑주를 먼저 벗기는 것은 코어를 찾아내기 쉽게 만들기 위해서.

하지만 곧바로 최종 페이즈로 넘어간 지금은 여의치 않아 보였다.

적어도 단죄의 검 없이는.

저놈을 피해 검을 찾으러 뛰어다닐 수는 없으니, 남은 선택지는 마법뿐이었다.

'…마법만으로 싸우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그때, 관문을 지키는 자가 그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불과 몇 걸음 만에 도약한 놈이 대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콰아아-

검신을 타고 번지는 짙푸른 색의 오염된 마력.

검이 닿을 거리는 아니었지만, 이안은 속도를 줄이며 회피할 준비에 들어갔다.

다음 순간, 놈이 착지와 함께 대검을 내리찍었다.

콰과과과과과-

충격파가 흙먼지와 눈을 사방으로 튀기며 몰려들었다.

'아무리 산맥 주변만 돌아다니는 놈이라도, 이런 위험한 마물은 토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하며, 이안이 몸을 날렸다.

전신을 휘감은 바람이 그를 힘껏 떠밀었다.

콰르르르-

충격파가 사그라들었다.

폭격이라도 당한 것 같은 흔적.

하긴, 이런 괴물을 토벌하려면 최소한 성기사급 지휘관이나 상위 마법사. 그도 아니라면 격을 쌓은 야만 전사가 동원되어야 할 터였다. 보통 병사들은 그저 고깃덩이가 될 테고, 언데드로 되살아날 뿐이리라.

거기다 이놈은 본래 아히고른 산맥 인근을 배회하는 망령이었다.

자신처럼 아직 거인 왕국이 존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신 나간 언데드 군단을 부리면서.

그리고 산맥엔 무수한 망자가 파묻혀 있었다.

그래서 게임에서의 놈은, 거의 무한대로 망자를 일으켜 댔다.

그런 부분에선 지금이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여긴 눈 덮인 산속도 아니고, 놈이 이끌고 온 수십 마리의 언데드는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

이놈이 산맥과는 거리가 먼 이곳에 나타난 건, 아마도 이안의 손에 새겨진 문양 때문일 터였다.

'찬탈자 어쩌고 떠들어 대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저놈이 지킨다는 관문이, 산맥 지하의 유적이 아니었던 모양이네.'

그래서 내가 왜 찬탈자인 건데.

답 없는 의문을 뇌까리며, 이안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콰르르르-

허공에 불덩이가 연달아 피어올라, 대검을 회수하는 관문을 지키는 자에게 날아들었다.

놈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사실 가려야 할 얼굴 따윈 존재하지도 않건만.

저 정신 나간 망령은 정말 자신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믿는 듯, 방어 자세를 견고히 했다.

콰과과광-

폭발과 함께 놈이 밀려났다.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내달리며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적색은 반감이고 청색은 면역이었던가.'

치켜든 마법봉 끝에 어느새 잿빛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파치칫- 파칫-

그 사이로 번지던 푸른 스파크가, 이윽고 뇌전 자락이 되어 줄기줄기 번졌다.

폭발이 가라앉을 때쯤 주문을 완성한 이안이 마법봉을 내뻗었다.

콰치치치칙-

번개 돌풍이 망령 거인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짙푸른 안광이 드러났다.

"■■하군…!"

소리친 망령이 얼굴 앞을 가렸던 팔을 그대로 내뻗었다.

슈화악-!

그림자가 솟구치듯 놈의 발아래에서 치솟은 오염된 마력이 돌풍과 맞부딪혔다.

콰지지지직-!

눈부신 섬광. 뇌전 줄기가 마력을 찢어발기며 흩어졌다.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몸이 아니라 마력으로 막은 것만 봐도, 약점이 바뀌진 않은 건데.'

이 정도 거리에선 저놈의 방어를 뚫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전격 계통의 회색 마법은 시전 시간이 너무 길었다.

시발, 결국은 또 근접전인가?

"찬탈자여-!"

그 순간 망령이 다시 돌진하기 시작했다.

놈의 움직임은 둔중해 보이지만, 사실 어지간한 인간이 전력 질주하는 것보다도 빨랐다.

작은 건물만 한 거인이 삽시에 가까워졌다.

'사정거리 까진 두세 걸음쯤.'

그때 주문이 완성됐다.

이안의 눈동자가 붉게 일렁이고.

콰아아아-!

거대한 화염 장벽이 놈의 앞을 막아서며 솟구쳤다.

주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안은 곧바로 혼돈력을 더해, 중급 청색 마법인 빙하 방벽을 시전했다.

멈추지 않고 화염 장벽을 통과하려던 관문을 지키는 자가,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솟아오른 얼음의 성벽에 어깨를 들이받았다.

쿠웅-

빙하 방벽 한복판에 균열이 일었다.

혼돈력을 섞지 않았다면 지휘봉의 증폭을 받았더라도 저 돌진을 막을 수는 없었으리라.

콰르르르-

화염 장벽이 망령을 뒤덮었다.

이안이 다음 마법을 펼쳤다.

콰아아아아-!

아스콜드에게 일격을 먹였던 중위 적색 마법, 일점 폭발.

화력이 집중되는 범위가 적어서 움직이는 적을 명중시키기는 쉽지 않지만, 지금처럼 거대하고 멈춰 선 적을 상대로는 강력한 화력만을 선보일 수 있었다.

"우오오오오-!"

불길 속에서 놈이 울부짖었다.

그 사이, 이안은 쉴 틈 없이 다음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실상 앞의 마법들은 모두, 이 주문을 완성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으니까.

파치칫- 치칙- 파치치치-

마법봉의 끝부분부터 피어오른 전격이 줄기줄기 번졌다.

순식간에 거미줄처럼 빼곡하게 차오른 번개가, 마법봉을 고치처럼 휘감고 흘러내려 이안의 팔목까지 세를 불려 갔다.

전격이 뿜어내는 빛이 점점 더 눈부시게 밝아지던 그때.

"결코 ■■■ ■ 없으리라!"

마력이 가득 담긴 포효를 토해내며, 불길에 휩싸여 있던 망령이 몸을 비틀었다.

콰과과과-

땅을 파헤치며 밀려든 대검이 빙하 방벽을 산산조각내고, 그 너머의 이안을 쪼개 버릴 듯 치솟았다.

"...!"

푸-화악-!

이안이 눈을 치켜뜬 것과, 일순간 눈에 보일 정도로 맹렬하게 휘몰아친 돌개바람이 그를 날려 버린 것.

그리고 마법봉에 맺힌 전격이 터져 나간 건 거의 동시였다.

극도의 위기감 속. 이안은,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그 모든 변화를 전부 인지했다.

대검에 실린 마력이 바람결을 찢어발기며 굵은 호선을 그리고, 마법봉을 떠난 연쇄 번개가 꽃을 피우듯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콰직-!

호선이 솟구치는 이안의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풍압만으로도 각반이 찢기고, 그 안의 허벅지에서도 피가 튀었다.

그리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며 멀어졌다.

이안은 그 모든 상황을 느리게 재생하는 영상처럼 눈에 담았다.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눈송이들.

그리고 그 너머, 작달막한 시골 마을이었을 폐허의 전경이 드러났다.

한복판의 반파된 집으로 드글드글 몰려드는 언데드들.

놈들 사이, 동굴을 지키는 곰처럼 날뛰는 테사이아가 보였다.

주위에 쌓인 뼈 더미도.

후웅-

몸이 허공에서 한 바퀴 도는 짧은 사이. 테사이아는 언데드 병사 하나의 팔뚝을 후려쳐 부숴 버리고, 놈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있었다.

휙 날아오른 그림자 매가, 지붕 위에 선 언데드의 두개골에 자신의 몸을 들이받았다.

'피가 꽤 부족할 텐데. 애쓰는군.'

생각하며 한 바퀴를 더 돈 그때, 어느새 언데드의 머리통을 으스러뜨린 테사이아가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의 입 모양이 느리고 또렷하게 각인됐다.

-언제 와, 이 망할 짐승아!

그리고 그 짐승은 지금, 목책 바깥에 있었다.

후웅-

허공에서 몸이 또다시 한 바퀴 돌았다.

아무리 최대치로 증폭했기로서니, 시전자를 아예 날려 버리는 건 너무 과하지 않나?

새삼 생각하며, 이안은 샬롯을 눈에 담았다.

가뜩이나 새카만 그녀는, 먹물 같은 체액을 잔뜩 뒤집어써 번들거리고 있었다.

앞에는 양팔이 다 잘린 거인 전사가 쓰러져 있었고.

그녀는 한 자루는 어디다 팽개쳤는지, 한 자루의 칼만 손에 쥔 채로 놈의 목을 내리치고 있었다.

거인 전사의 목 두께는 나무 둥치에 필적해서, 한 번에 잘라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검의 궤적을 따라 튄 검은 체액이 주변의 눈밭과 살롯의 전신을 점점 더 검게 물들였다.

쉬아아아-

귀곡성에 섞여 귓가를 울리던 바람 소리가 잦아들었다.

비상이 끝났다. 남은 건 추락뿐.

그 순간 이안은, 자신을 날려 보냈던 돌개바람이 아직 전부 흩어진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센 바람이 마치 바람 칼날처럼 그의 전신을 감싸 안고 있었다.

비슷한 속도로 떨어지던 눈송이들이 바람을 타고 하늘로 역행했다.

추락사할 걱정은 없겠네.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은, 문득 미구엘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가 항상 발목에 숨기고 다니던 부적을.

'그걸 쓰면 바람이 멀리까지 날려 준다고 했었지. 그때도 어떻게 착지하는 건지 궁금했었는데.'

어쩌면 그 부적에 새겨진 마법은 가장 높은 수준의 휘몰아치는 방벽 이었는지도 몰랐다.

사용자를 그저 한순간 지켜 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위험으로부터 이탈시켜 주는.

언젠가 본 스카이다이빙 영상의 한 장면처럼 자세를 다잡은 이안은, 비로소 눈부시게 빛나는 아래쪽을 바라봤다.

빙하 방벽과 화염 장벽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대검을 타고 번진 연쇄 번개가, 관문을 지키는 자의 전신을 질주하고 있었다.

파치치치치칫-

두꺼운 갑주는 수천 가닥의 전격 앞에선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전신을 뒤덮은 뇌전이 한 번 번쩍일 때마다 망령의 덩어리가 뭉텅이로 증발하는 게 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놈의 짙푸른 안광이 놀라움과 고통을 머금고 휘청였다.

비로소 이안은 쥐고 있던 마법봉을 놈을 향해 내밀었다.

파직- 파지직-

마법봉을 중심으로 돌개바람이 휘몰아쳤다. 푸른 스파크가 결을 따라 번지고, 말려 들어간 눈송이들이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주문이 완성될 때쯤엔 추락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관문을 지키는 자를 고치처럼 뒤덮었던 전격도 반 이상 흩어진 채였다.

완성된 번개 돌풍이 뻗어 나갔다.

파지지직-

새파란 뇌전을 가득 머금은 돌풍이, 이번에는 오염된 마력에 막히는 일 없이 놈에게 도달했다.

파치치치칫-!

눈부신 섬광과 함께, 전격이 망령의 전신을 휩쓸었다.

흩어지던 연쇄 번개가 다시 빨려들어 망령의 덩어리를 태웠다.

휘아아악-

뒤이어 다시 한번 몰아친 돌개바람이, 추락하던 이안의 몸을 낚아채듯 솟구치게 했다.

이안이 가볍게 착지했다.

한쪽 허벅지에서 저릿한 느낌이 번졌다. 이안이 인상을 살짝 찌푸릴 찰나 핑, 현기증이 일었다.

단시간에 마력을 다량으로 소모했을 때 흔히 일어나는 반작용.

'내일은 앓아눕겠군.'

생각하면서도, 그는 화염구를 연달아 만들어 냈다.

화르르르-

화염구들이 완성과 동시에 뻗어 나갔다.

관문을 지키는 자는 여전히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감전당하고 있었지만.

이런 순간일수록 마무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그는 지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쾅-! 콰광-! 쾅!

폭발이 연달아 이어졌다. 형체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관문을 지키는 자의 몸이 연기처럼 터져 나갔다.

철그렁- 철컹-

걸치고 있던 갑옷들이 폭발에 휩쓸려 튕겨 나갔다.

폭발이 이어질수록 놈의 크기가 점점 더 작아졌다.

이안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쉬지 않고 화염구를 만들어 날려 댔다.

치명타를 입은 적을 마무리하는 건, 시전 속도가 짧고 단순한 마법일수록 좋았다.

쾅-! 쾅!

마침내 그가 멈춰 섰을 때, 관문을 지키는 자는 검은 진흙을 뭉쳐 놓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허리 어름까지 오는 놈을 내려다보며, 이안이 다시 화염구를 만들어 냈다.

콰앙-!

검은 덩어리가 폭발에 휩쓸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눈밭에 흩뿌려진 점액 같은 잔해가 이내 연기가 되어 증발했다.

흩어지고 남은 잔재 사이로, 커다란 두개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두개골.

눈구멍에 맺힌 푸른 안광이 일렁이고, 놈의 턱뼈가 달싹였다.

"훌륭…■■…. 찬탈자여…."

마법봉을 툭 떨군 이안이, 대꾸도 하지 않고 단검을 뽑아 들었다.

닝글로슬의 난쟁이 장인이 만든 희귀 등급의 제국제 단검.

"■■… 영원한… 왕국이여…."

콰직!

역수로 쥔 단검이 놈의 두개골 한복판에 떨어졌다.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면서, 그 사이로 짙푸른 마력이 연기처럼 번져 나왔다.

푸화악-!

한 번 더 내려치자 비로소 두개골이 부서졌다.

모든 구멍에서 푸른 빛이 터져 나왔다. 절규에 가까운 귀곡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푸른 빛 한 줄기가 이안의 손아귀로 빨려들었다.

"...?"

이안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공명이 순식간에 잦아들고 있었다.

문양 내부의 마력이 잠든 것처럼 고요해졌다.

퀘스트 완료 창이 이어졌다.

자격의 증명.

"찬탈자의 자격을 증명했다… 이건가?"

읊조린 이안이 덩그러니 남겨진 거인의 두개골을 내려다보았다.

후두둑, 발아래의 눈에 검붉은 동심원이 번졌다.

코피였다. 이어진 지독한 현기증에 주저앉은 이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끝에 닿는 사령술사의 지휘봉을 움켜쥐었다.

귓가를 스치는 귀곡성. 곧바로 마법봉을 아공간에 쑤셔 넣은 그가, 흐르는 코피를 문질러 닦으며 간신히 일어섰다.

"역시…. 마법만 가지고 싸우는 건…."

나 같은 반쪽짜리가 할 짓은 못 되네.

생각하며, 이안은 몸을 돌렸다.

당장이라도 기절하고 싶었지만, 마을의 전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081화

광분해 날뛰던 언데드들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다.

푸른 안광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뭐야, 왜들 이래?"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퍼석-

언데드 하나의 두개골을 후려친 샬롯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슨 상관이지? 그냥 다 처리하기나-"

끼- 아아아악-

끄오오오오-

언데드들이 절규하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덜그럭대는 뼈 소리가 사방에서 이어졌다.

빠각!

잠시 고개를 갸웃한 샬롯은, 곧바로 다시 놈들의 머리통을 부숴 버리기 시작했다.

언데드들이 다시 달려든 건 그 직후였다.

하지만 놈들의 움직임은 광분했다기보단 혼란에 휩쓸려 발광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샬롯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그건 테사이아도 마찬가지였다.

콰직-! 빠각!

난폭할 뿐 별것 아니던 놈들은, 움직임까지 어설퍼진 후로는 더더욱 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순식간에 십여 마리의 언데드들이 뼈 더미로 되돌아갔다.

남은 건 불과 서너 마리.

퍼석!

한 놈은 샬롯의 주먹에 머리가 박살 났다.

빠각-!

또 한 놈은 달려든 테사이아의 양손에 두개골이 으스러졌다.

그사이 샬롯이 다른 한 놈을 더 박살 냈고.

빠각-

마지막 놈은, 뒤통수를 뚫고 파고든 단검에 푹 고개를 떨궜다.

파스스-

안광이 증발하고 뼈만 남은 몸이 우수수 허물어졌다.

샬롯과 테사이아는 이미 놈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 선, 단검을 던진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생들 했다."

폐허의 전경을 돌아본 이안이 내뱉었다.

테사이아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고생은 이안이 가장 많이 한 것 같은걸."

이안은 전투가 위험하고 격렬했음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눈이 섞여 진흙처럼 변한 흙이 온몸에 범벅이었고, 머리는 산발. 입가에는 피가 찐득하게 늘어 붙은 데다, 각반은 찢겨 나가 덜렁댔다. 그 아래로 드러난 두툼한 내복은 핏물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건 그렇지."

절뚝대며 걸음을 옮기던 그가, 이내 샬롯을 돌아보았다.

"난 쉴 거다. 테사가 내 곁으로 오지 못하게 해. 피를 많이 흘렸으니, 참기 힘들 거야."

샬롯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테사이아는 이미 이안의 허벅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전투의 여파가 남은 번들대는 붉은 눈에 갈증과 욕망이 뒤엉켰다.

꾹, 샬롯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알았다. 그렇게 하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대로 테사이아의 얼굴을 후려쳤다.

빠악-!

"아악!"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른 테사이아가, 성난 짐승처럼 자세를 잡으며 샬롯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야? 미쳤니?"

"한 번만 더 이안을 보면서 그런 표정을 지으면, 송곳니를 전부 뽑아 주지. 다시 자랄 때마다 계속."

"이건 그냥 어쩔 수 없는 현상이거든? 네가 게으름을 피워서 힘을 너무 많이 썼단 말이야! 쥐라도 한 마리 잡아 주고 지랄하든가!"

서로에게 날을 세우는 둘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모닥불로 걸어간 이안은, 모포를 꺼내 펼쳤다.

"...."

그는 모포 안으로 기어 들어가, 곧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안! 이 짐승이 한 짓은 절대로 그냥… 이안?"

"…?!"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쓰던 뱀파이어와 수인이, 뒤늦게 그를 돌아보며 눈을 치켜떴다.

그가 기절하듯 잠든 것임을 깨달은 둘의 얼굴에 안도가 스친 것도 잠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샬롯이, 이안의 모포를 등지고 앉아 테사이아를 노려보았다.

올 테면 와 보라는 눈빛.

손에 쥔 검을 까딱이는 채였다.

"그렇게 안 봐도, 어떻게 할 생각 같은 거 없거든?"

콧방귀를 뀐 테사이아가 몸을 돌렸다. 샬롯이 덧붙였다.

"어딜 가는 거지?"

"쥐 잡으러 간다. 버리고 가지 않을 테니까, 조용히 주인님이나 지키고 있으렴. 야옹아."

"...."

비로소 폐허가 된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송이들만이, 소리 없이 마을을 감싸 안았다.

***

악몽의 잔재는 빠르게 흩어졌다.

지끈거리는 두통. 약간의 현기증과 무기력함을 느끼며, 이안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

다음 순간, 그는 그 모든 불편에도 불구하고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머리가 모포 옆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두개골 위에 피부만 씌워 놓은 것 같은 끔찍한 몰골.

텅 빈 눈구멍 너머의 어둠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

거인의 머리통을 잠시 내려다본 이안이, 이윽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걸 누가 가져다 놓은 건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다신 이런 짓을 하지 못하게 못 박아 둬야겠다고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머리통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단죄의 검이 놓여 있었다.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샬롯이나 테사이아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심지어 반쯤 부서진 커다란 두개골도 그 옆에 있었다.

어제 그가 죽인 관문을 지키는 자의 잔해였다.

'무슨 트로피처럼 전시해 뒀군.'

현실감을 단숨에 돌아오게 만들기엔 충분한 광경이었다.

쓴웃음을 지은 이안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한참은 잔 것 같은데도 여전히 기운이 전혀 없었다. 두통과 현기증.

몸속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마력 탈진 증상이었다.

게임 캐릭터였을 시절의 자신에게 새삼스러운 미안함이 들었다.

툭하면 마력을 죄다 갈아 넣고 마력 탈진 상태에 빠뜨렸었으니까.

이런 줄도 모르고, 비실댄다고 욕만 했었다니.

'…그 업보까지 돌려받는 건지도.'

생각하며 고개를 든 이안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지붕과 모닥불이 있는 야영지 건물의 경계선 너머, 새하얗게 변한 마을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기절한 후로도 한참 더 눈이 내린 모양이었다.

아직 하늘에 구름이 덮여 있어 녹지 않은 건지, 이제 여기까지 설원 지역이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밤이 되면 느낌이 또 다르겠지만.

어쨌든 당장은 상념이 싹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광경이었다.

"어머. 잘 잤어, 이안?"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늑대 로브를 푹 눌러쓴 그녀가, 양손에 장작으로 쓸 나뭇가지들을 든 채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잤지?"

"정확히는 모르겠어. 한나절쯤?"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온 테사이아가, 모닥불 옆에 나뭇가지를 우르르 떨어뜨렸다.

가지 몇 개를 다시 집어 들어 눈을 털고 마구잡이로 부러뜨리는 그녀를 보며 이안이 피식댔다.

"용케도 기운을 회복했군. 내 피도 안 빨았고 말야."

"정말 군침이 돌긴 했지만, 잘 참았어. 대신 마을을 뒤져서 쥐를 몇 마리 먹었지."

"샬롯이 감시를 잘했나 보군."

"네 충실한 야옹이는 물론 해 뜰 때까지 잠도 안 자고 감시했지만. 그게 아니어도 참았을 거야. 잘못하면 네가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나뭇가지를 모닥불에 얹은 테사이아가 그 옆에 앉았다.

"어쨌든, 난 네 부탁을 훌륭하게 완수했어. 이안."

그녀가 뽐내듯 양팔을 들었다.

이안은 그제야 그녀 등 뒤의 마차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마른 풀을 질겅대는 말들은, 아주 평온해 보이는 상태였다.

"그래. 고생했다."

테사이아의 눈이 순간 커졌다.

이내 그녀가 활짝 미소 지었다.

"정말 그렇게 말해 줄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역시 그렇지?"

낮이라 그런지, 뱀파이어보단 그저 요정처럼 보이는 미소였다.

딴에는 노력하고 있다, 이거지.

피식한 이안이 덧붙였다.

"샬롯은?"

"뭘 좀 잡아 오겠다던데. 모르겠어, 알아서 오겠지. 네 야옹이니까."

"…그렇군."

사냥이라도 가나 건가? 설마 또 마물을 들고 오는 건 아니겠지.

생각하며, 이안은 옆의 짐가방에서 수통과 육포를 꺼냈다.

상당히 좋은 가죽 부대 수통이었는데, 이것도 닝글로슬에서 의뢰의 보수로 받은 물건이었다.

테사이아가 나른한 얼굴로 짐가방에 기대 누웠다.

물로 입을 축이고 육포를 뜯어 입에 넣은 이안이, 말없이 턱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체력과 마력을 회복하려면 입맛이 없어도 먹어 둬야 했다.

지난밤의 기억이 절로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슬슬 조금씩 빡세지기 시작하네.'

이안은 간만에 게임일 때부터 이어져 온 자신의 고질적인 약점을 실감했다.

소위 말해 압도적 한 방의 부재.

온갖 잡다한 스킬을 익히고, 능력치를 괴상하게 분배한 결과였다.

초반부. 한 번 해 본 경험. 그때는 없었던 동료나 자원 등 여러 요소가 더해져, 지금까진 어찌어찌 잘해 내고 있지만.

결국은 그래 봐야 망캐. 잘 쳐 줘야 잡캐였다.

관문을 지키는 자를 죽이려 쏟아부은 마법이 몇 개인지. 화력을 높이기 위해 마력을 더 많이 갈아 넣는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여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어쨌건 관문을 지키는 자는 상대할 만한 위험이었고. 게임과 비교해서도 훨씬 수월하게 잡아냈다.

레벨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그때는 몇 번이나 죽어 가며 재도전한 끝에 아슬아슬하게 죽였었으니까.

게다가 아직도 남은 포인트가 어느 정도는 있었다.

'그냥 아끼지 말고 다 써야 하나.'

잠시 갈등한 이안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통장에 여윳돈을 남겨 두듯. 능력치와 스킬 포인트는 항상 어느 정도 여유를 둬야 했다.

공허로 빨려들어 가거나 샬롯 같은 예상 못 한 강적을 만났을 때처럼, 급하게 능력치를 올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을 대비해야 했으니까.

웬만하면 지능과 정신력 이외의 능력치는 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예상 못 한 위기가 오면 어쩔 수 없이 또 그래야 하리라.

스킬도 그랬다. 그가 가진 것들로 해결할 수 없는 수준의 저항력이나 전투력을 가진 적이 언제 튀어나오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스킬 트리를 조금씩 넓혀가야 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속성의 스킬을 다 익히기로 한 이상 더더욱.

당장은 화력은 적색, 수비는 청색, 공수 보조는 회색, 비전은 다용도로 컨셉을 잡고 사용하긴 했지만.

이번처럼 회색의 화력이라든가 청색의 보조. 어쩌면 거의 올리지 않고 방치한 갈색이 필요한 순간도 생길지 몰랐다.

'외길만 걸었으면 할 필요도 없는 고민인데.'

이미 주워 담기엔 너무 많이 엎질러졌지.

짧게 혀를 찬 이안이 씹고 있던 육포 조각을 삼켰다.

물론 검술도 포기할 수 없었다.

어이없게도, 갈수록 실력이 좋아지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스콜드를 상대할 때도 그랬고.

관문을 지키는 자와 싸움을 시작한 순간에도 놈의 대검을 흘려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물론 시도하진 않았지만.

어쨌건, 육탄전은 앞으로도 포기할 수 없는 분야였다.

이미 투자한 자원이 너무 많았다.

다른 클래스들과 달리 물리 공격과 관련된 스킬은 공용 스킬을 제외하곤 전무하다시피 했으니, 지금까지 그랬듯 실전을 통해 계속 실력을 쌓아나가야 할 터였다.

네임드를 넘어 보스급 적을 상대로도 계속 먹힐 수 있을 만큼.

'신경 쓸 거 많아서 참 좋네.'

속으로 비아냥대며 육포를 다시 집어 든 그때, 발걸음 소리가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일어나 있었군, 이안."

샬롯이었다. 어깨에 웬 암사슴을 짊어진.

"정말 사냥을 나간 거였군."

이안이 육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눈밭 위에 목이 꺾인 사슴을 툭 떨어뜨린 샬롯이 덤덤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피를 제법 흘렸으니까. 신선한 고기를 먹어야 회복이 빠른 법이다."

이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뜻밖이군. 둘다 날 이렇게 극진하게 보살필 줄은 몰랐는데."

"당연한 일이다. 네가 가장 강한 마물을 죽였으니까. 네가 싸운 흔적들을 봤다. 어떻게 싸운 건지 알 수도 없더군."

"그래서 샬롯, 내 껀?"

테사이아가 끼어들었다. 인상을 찌푸린 샬롯이, 허리에 매달아 둔 걸 던졌다.

"귀여운 토끼네."

가볍게 받아든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이안이 흘깃 보니, 토끼는 심지어 아직 살아 있었다.

말 그대로 숨만 붙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밤까지 잘 살려 둬라."

"당연하지. 아직 살아 있을 때 먹어야 그나마 먹을 만하다구. 죽은 뒤에 시간이 좀 지난 건, 솔직히 말해서 끔찍한 맛이야."

테사이아가 부드러운 손길로 토끼를 쓰다듬었다.

그사이, 단검을 뽑아 든 샬롯은 사슴을 해체하고 있었다.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듯,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분리하고 관절과 근육을 따라 토막 내는 일련의 과정이 아주 빠르고 매끄러웠다.

"피를 빼진 않겠다. 그게 네가 회복하는 데 더 좋을 테니까."

"그런 건 사냥꾼 마음이지. 요리는 엉망이어도 해체는 잘하는군."

"부족에서부터 익힌 기술이다. 수인은 자식에게 가장 먼저 사냥부터 가르치지. 그걸 다루는 법도."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선 이안이, 나뭇가지 몇 개를 주워 이리저리 줄로 묶었다.

고기를 얹을 틀이 뚝딱 만들어졌다.

샬롯이 단검으로 허벅지 살을 크게 도려내 나뭇가지에 뀄다. 내장도 하나 뀄는데, 간이었다.

"회복에 가장 좋은 것들이다."

곧 불 위에 얹은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갔다.

건너편에 앉은 샬롯은 심장과 고기를 생으로 씹어먹었다.

익힌 음식만 먹는 줄 알았더니, 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기생충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건 몸속에서 다 소화될 거다."

"…글쎄다."

이안은 고기와 내장 모두 바싹 익혀 먹었다.

간도 되어 있지 않고 누린내도 꽤 났지만, 그래도 충분히 먹을 만했다. 짐가방 어딘가에 보수로 받은 암염 통이 있지만, 굳이 꺼내려 하지 않았다.

보존 식량에 비하면 이 누린내조차 호사였다.

"고기가 꽤 남았는데, 마차에 싣고 가겠느냐?"

"좋은 생각이군. 날이 이래서 금방 상하지도 않을 테니, 실어 둬라."

"알겠다. 그럼 하루 더 쉬고 출발할 건가?"

"아니. 준비해서 바로 출발하지. 이동하면서 쉬면 돼."

#082화

고기를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운 이안은, 곧바로 방한 바지와 거의 다 부서진 각반을 벗었다.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것들이라 아깝긴 했지만, 버릴 수밖에 없었다.

허벅지를 가로지르는 상처는 벌써 딱지가 앉아 아물고 있었다.

'회복력이 갈수록 좋아지는 것 같은데.'

샬롯이 남은 고기와 야영지를 정리하는 사이.

아공간에서 여분의 방한복과 각반을 꺼내 갈아입은 이안은, 한 번 더 몸 상태를 점검하고는 단죄의 검을 집어 들었다.

"그거, 내가 찾아냈어."

이안을 구경하던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네가?"

"응. 이안 냄새가 나기도 하고, 그 칼에선 뭔가 역겨운 느낌이 들거든."

"들지도 못하더군. 그래서 내가 옮겼다."

말 고삐를 점검하며 샬롯이 덧붙였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들, 이러니저러니 해도 슬슬 쿵짝이 맞아 가는 것 같은데.

나쁘지 않은 변화였다. 나중에 어찌 되건, 당장은 삐걱대더라도 서로 호흡을 맞춰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 얼음 숲에 있는 망령이 어떤 놈이건, 만만한 상대는 아닐 테니까.

"난 당분간 안 싸울 거다."

마차에 오른 이안이 말했다.

떠날 채비를 거의 끝낸 샬롯이 그를 돌아보았다.

"마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어. 하루 이틀에 회복할 수준이 아냐."

"…어제 같은 괴물이 또 습격하면 어떻게 해?"

기어 올라온 테사이아가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제 그놈 수준의 마물은 안 나올 거다. 자격을 증명했으니까."

"무슨 자격?"

"그것까진 네가 알 필요 없고."

샬롯을 돌아본 이안이 덧붙였다.

"그러니 당분간은 너와 테사가 싸워야겠다. 네가 주로 싸워야 할 거야."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마부석에 오른 샬롯이 대답했다.

오히려 묘하게 기뻐 보이는 얼굴.

그녀가 마차를 돌리며 덧붙였다.

"어제 같은 강한 마물이 습격해도 상관없다. 오히려 싸워 보고 싶군, 얼마나 강할지."

거인 전사를 난도질하던 그녀를 떠올리며 피식한 이안이, 이내 웃음기를 지우고 내뱉었다.

"그리고 다신 내 머리맡에 마물의 머리를 가져다 놓지 마라, 샬롯."

"...."

"시체도 안 돼."

건물 밖으로 나온 마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눈 덮인 폐허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들어온 반대쪽의 출구로 향하면서, 샬롯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럼 발치에 가져다 놓는 건? 그것도 안 되겠느냐, 이안?"

"그거, 진지하게 묻는 거냐?"

"그렇다만…."

"하…."

시답지 않은 대화와 함께, 마차가 버려진 마을을 벗어났다.

새하얀 설원이 어느새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

"예쁘네. 어딜 봐도 온통 하얗고."

주위 풍경을 응시하며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마차는 설원을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길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눈이 쌓이고 있었다.

그나마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안은 시간 대부분을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체력과 마력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명상의 레벨이 높은 덕분에,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지 않아도 명상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테사이아는 그런 그를 신경도 쓰지 않고 떠들어 댔다.

"이안을 따라오길 잘했다니까."

"팔자가 좋군. 소풍이라도 가는 모양이지."

샬롯이 심드렁하게 비아냥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테사이아의 말에 대꾸하는 건 대부분 그녀였다.

"네가 뭘 알겠니, 야옹아."

테사이아가 혀를 찼다.

"난 한 번도 주변 경치가 어떤지 제대로 즐겨 본 적이 없어. 도시를 맘 편히 거닐어 본 적도 없지. 살아남으려면 그래야 했으니까. 알지도 못하는 세상 한복판에 떨어져서 혼자 살아남는 게 어떤 건지, 네가 알기나 해?"

…잘 알지.

이안이 속으로만 대꾸하는 가운데, 샬롯의 코웃음이 이어졌다.

"건방진 소릴 하는군. 수인으로 대륙에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지."

"어떤 건데?"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너도 봤으니 알 텐데."

"그건 네가 무섭게 생겨서 그런 게 아닐까, 샬롯?"

"난 수인의 기준에선 충분히 아름다운 편이다. 거기다 특출나게 강하기까지 하지."

"그래. 하긴, 네 털은 부드럽긴 해. 윤기도 흐르고. 가죽을 홀랑 벗기고 싶달까."

테사이아가 로브 자락을 흔들었다.

"이 녀석처럼."

"...."

샬롯이 나지막이 그르렁댔다.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지은 테사이아가 말을 이었다.

"난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거야. 이안을 따라다니면서.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 빌어먹을 흡혈귀들도 전부 죽일 수 있겠지."

그녀의 시선이 주위의 설원과, 눈꽃이 핀 것처럼 솟은 나무들을 차근히 훑었다.

"내 진짜 자유는 그때부터 시작될 거야. 난 제국 곳곳을 돌아다닐 거고. 요정들이 모여 산다는 남부로도 갈 거야. 그들이 날 받아 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저 확인하고 싶은 거니까. 내가 한때 누구였는지."

"...."

"그것만 알고 나면 안전한 변방으로 숨어들 거야. 거기서 나만의 은거지를 꾸리고 평온한 여생을 보내겠지."

그녀의 말투는 동화책을 읽는 것처럼 낭랑했다. 사실 본인도 그렇게 되리라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그러길 바라는 마음일 뿐.

그 사실을 눈치챈 이안은, 굳이 눈을 뜨지 않았다.

계속 자신과 함께하다 보면 결국은 그녀가 흡혈 일족 최후의 생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요정들에게 버림받은 후엔, 영원한 존재론적 고독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굳이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현재로선 끝내 자신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사실 역시.

"꿈같은 소릴 하는군. 저주받은 마족 주제에."

대신 핀잔을 준 건 샬롯이었다.

테사이아가 정곡을 찔린 듯 미간을 좁혔다.

"내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게 아냐."

"그렇다고 네가 마족이란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귀쟁아. 그딴 말은 그저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에 불과해."

"…훌륭한 조언이네, 샬롯. 싸우다 죽는 게 삶의 목표인 미친년이라 그런가. 아주 현실적이야."

옆에 놓인 육포를 집어 든 샬롯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그건 가장 아름답고 명예로운 결말이다. 늙어 죽는 수인만큼 추한 건 없으니까. 싸우지도 사냥하지도 못하고, 그저 짐만 될 뿐이지."

"그래서 그 못생긴 인간의 뒤나 닦아 주며 산 거야?"

"뭐라고…?"

"난 네가 그 새카만 것들과 어울리는 것도 지켜봤어, 샬롯. 말 안장에 앉아서 거드름이나 피워 대는 게, 네가 떠들어 대는 전사의 삶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테사이아가 코웃음을 쳤다.

"영광스럽게 싸우다 죽고 싶다면서, 황금은 좋았던 모양이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지 마라. 귀쟁아."

샬롯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정곡을 찔렸나 봐. 부끄러워할 것 없어. 내가 본 인간들은 대부분 목숨 건 싸움보단 황금을 더 좋아했으니까. 날 붙잡았던 놈들도, 날 데려가면 황금을 궤짝으로 줄 거라며 좋아했었지."

"상단의 덕을 여럿 본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난 내 책임과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황금 따위, 내겐 별다른 의미도 없어."

"책임? 의무?"

"너희 귀쟁이들은 지킬 줄 모르는 명예지."

잠시 말을 멈췄던 샬롯이,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테사이아와 이안에겐 말해도 상관없다 여긴 것이리라.

"전사들은 성년이 되면 세상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한다. 일족의 번영을 위해서."

"그러니까, 널 위해 돈을 번 게 아니란 거야?"

"너희 귀쟁이들 덕분에 시작된 전통이지. 하지만 우리 수인은 고향을 잃었을 뿐, 뿌리까지 잃지는 않았다. 새로운 터전을 꾸렸지.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신 땅이다. 아직은 작고, 비루하지만."

이안의 뇌리로, 게임에서 스치듯 본 적 있는 대사가 떠올랐다.

남부 외곽 깊숙한 곳 어딘가에 수인들의 도시가 있다는.

동시에 수인 용병들의 특출나게 비싼 몸값도 떠올랐다.

그게 그저 드물어서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번 돈은 대부분 일족을 위해 쓰였다. 땅을 구매해 영지를 넓히고, 다음 대의 전사를 키워내는 데에. 내 의무는 몇 년 남지 않았었다. 그 후엔 미련 없이 상단을 떠났을 거야. 그저 전사로 살았겠지. 아름다운 최후를 맞이하기 위해서."

"그럼 네 일족은 지금, 굶고 있는 거야? 네가 여기 있어서?"

"멍청한 소릴 하는군. 세상에 나가 있는 일족의 전사는 나 하나가 아니다. 여럿이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지. 더는 그것을 짊어질 필요가 없어진 후에도."

"아항…."

고개를 끄덕인 테사이아가 마족다운 미소를 지었다.

"아쉽겠어. 그 신성한 의무를 다하기 전에 이안의 애완 고양이가 되었으니 말이야."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흔한 일이다. 많은 전사가 의무를 다하기 전에 죽음을 맞이하니까. 이렇게 꼬리가 잘리는 일은 드물겠지만. 나는 그런 운명도 받아들였다. 너와 달리."

샬롯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이안과 함께 목숨 건 전투를 이어나갈 것이다. 꼬리를 되찾기 전에 죽게 될지라도 상관없어. 전사로서는 오히려 명예롭겠지."

"그래. 너 혼자 많이 죽으렴. 나는 오래오래 살아남을 테니까."

"그게 축복일 것 같나?"

샬롯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넌 영원히 낮과 밤을 다른 얼굴로 살아가야 하고, 그 저주받은 갈증과 충동에 시달릴 텐데도?"

"...."

테사이아가 순간 입을 뻐끔거렸다.

영원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는 그녀도 아직 알 도리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뭐, 적당히 살다가 죽으란 얘기야?"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렇게 핀잔을 주는 것뿐이었다.

샬롯이 어깨를 으쓱였다.

"살기 싫어지면 언제든 말하란 얘기다. 기꺼이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사할 테니까."

"그 축복은 내가 먼저 선사해 줄게. 아, 물론 우리 일이 다 끝난 다음을 얘기하는 거야, 이안."

"죽고 싶다는 말을 길게 하는군."

"...!"

이안이 대답할 줄은 몰랐는지, 테사이아가 숨을 들이켰다.

"깨어 있었어? 자는 줄 알았더니."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면서, 내가 푹 자길 바란 거냐?"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눈을 떴다.

"너희 둘은 한 몸이다. 잊지 마."

"저 미친 야옹이가 자꾸 싸우다 죽고 싶어 하는데, 그것까지 어쩔 순 없잖아. 이안."

"그럼 같이 죽을 수밖에."

"뭐…?"

테사이아가 눈을 치켜떴다.

이안이 태연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싫다면 네가 샬롯의 뒤를 지켜. 죽이려 들 게 아니라."

테사이아가 입술을 비죽이는 가운데,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았다.

"너도 그놈의 명예로운 죽음 타령은 적당히 해라. 나도 죽고 싶은 생각 따윈 없으니까."

"…그러지."

그 말을 끝으로 이안은 다시 눈을 감았다.

너희 둘은 생각보다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도 그렇다는 이야기는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채였다.

이안은 다시 명상을 활성화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와 달리, 내면 저 깊은 곳까지 의식을 내던졌다.

불필요한 감정과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

백색 마경이리란 소문과 달리, 한밤중의 습격은 생각만큼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뜻밖에도 이안의 손아귀에 새겨진 문양 덕분이었다.

관문을 지키는 자를 죽인 이후로, 전과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양이 공명할 때면 인근에 여지없이 고대 거인 왕국의 망령들이 등장했지만.

놈들은 전처럼 다가오지 않고, 그저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거슬리는데, 가서 다 죽이고 와도 되겠느냐?"

"이건 나도 야옹이 말에 동감이야. 저것들, 기분 나빠."

샬롯과 테사이아는 불쾌해했지만,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덤비지 않는데 굳이 싸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저것들 대다수는 경험치도 주지 않는 놈들이었다.

"힘들 아껴라. 야영지 근처로 접근하는 놈들만 처리해."

물론 설원의 모든 마물이 거인 왕국의 잔당들인 건 아니었다.

기괴하게 변이된 들짐승들부터, 오거 같은 토착 마물들도 모습을 드러냈고. 거인 왕국과는 관계없는 언데드와 망령들도 출몰했다.

물론 대부분은 샬롯의 몸풀기 상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다 그녀가 상대할 수 없는 비정형의 마물들은, 반대로 테사이아에게 맥을 추지 못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망령처럼 물리적으로 타격을 입히는 게 거의 불가능한 것들을 맨손으로도 찢어발길 수 있었다.

그녀의 그림자 사역마들은 놈들을 씹어먹기까지 했다.

"어떻게 망령을 맨손으로 잡는 거지?"

"모르겠어. 그냥 되던데?"

본인도 모르는 이유를 굳이 알아내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이안은 그저 마족이 가진 능력 중 하나이리라 대충 결론 내렸다.

어쨌든 망령 같은 놈들은 처리하기 귀찮은 상대였으니, 대응책이 하나 더 생긴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손톱만 하게 이어져 있던 산봉우리들이, 어느새 정상을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할 만큼 가까워졌다.

바람이 칼날을 머금은 것처럼 차가웠다.

"말머리를 돌려라, 샬롯."

문득 옆을 돌아본 이안이 내뱉었다. 눈과 바위, 가지만 남은 나무만 드문드문 이어진 황량한 계곡.

"사람이 오간 흔적이 전혀 없군. 길도 없고."

"그러니 제대로 찾은 거지."

"동감이다."

덤덤한 대화와 함께, 마차가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알 수 없는 비탈길로 접어들었다.

#083화

계곡에 쌓인 눈은 의외로 그다지 두껍지 않았다. 바퀴에 두른 사슬 고리가 효과가 있는지, 마차는 미끄러지거나 바퀴가 빠지는 일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과 오르막. 거기다 산맥 인근을 따라 곡선을 그리고 있어, 이 계곡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외부에선 절대 저 안을 볼 수 없게 일부러 감춰 둔 것 같네.'

이런 인위적인 느낌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이 세계는 게임이었고, 온갖 작위적인 장치들이 뒤섞여 있으니까. 이런 걸 따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해야 게임이 현실이 될 수 있는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땅이 융기하는 과정에서 앞뒤는 오히려 가라앉는 경우도 많으니까. 산과 산 사이에 이런 구불구불한 계곡과 저지대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예 억지는….'

…내가 이런 걸 어디서 보고 기억하는 거지.

피식한 이안이 잡념을 떨쳤다.

어쨌건, 이제는 계곡 내부에서도 밖을 볼 수 없었다.

좌우로 솟아 이어진 산기슭이, 이 너머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라고 미리부터 알려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숲이군."

내리막을 지나 이어진 오르막의 끝에 도달한 순간, 샬롯이 내뱉었다.

"신기하네. 마법 같아."

테사이아의 탄성이 이어졌다.

아무런 전조도 없다가, 갑자기 계곡이 끝나면서 숲이 나타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안은 그걸 가능하게 한 지형적 특수성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그저, 계곡 끝부터 시작된 잿빛의 숲에 멈춰 있었다.

'제대로 찾아왔군.'

하얗게 덮인 눈과 그 위로 앙상하게 솟은 나무들.

귀가 울리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적막함까지.

환영 속에서 본 숲의 전경 그대로였다.

"…진짜 뭔가 마법이 깃든 숲 같아, 이안. 기분이 이상해."

숲을 응시하던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이안도 그녀의 말에 내심 동의했다.

"마차는 두고 가야 할 것 같다, 이안."

나무들의 간격을 가늠한 샬롯이 말했다.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진입 전에 정비는 필요하니까. 겸사겸사 모닥불도 피워라."

숲과 계곡 사이엔 경계선처럼 꽁꽁 언 개울이 있었다.

샬롯이 그 앞에 마차를 세웠다.

나뭇가지를 꺾으러 계곡으로 달려간 테사이아가 이내 소리쳤다.

"이안! 여기 뭔가 있어!"

"...?"

짐가방을 챙기던 이안이 그녀의 손짓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여기 봐. 뭔가 적힌 돌이 있어."

뽐내듯 말한 테사이아가 나무 아래의 눈을 파헤쳤다.

반쯤 튀어나와 있던 비석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오래된 듯 낡아 보였지만, 표면에 새겨진 글자만큼은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뒤따라온 샬롯이 미간을 좁혔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지? 처음 보는 문자인데."

"그러게. 혹시 알아보겠어, 이안?"

테사이아가 고개를 돌렸다. 비석을 응시하던 이안이 내뱉었다.

"대충은."

"역시. 이안은 알아볼 줄 알았어. 전에 그 유령 거인이 하는 말도 알아듣는 걸 봤거든. 그래서, 뭐라고 적혀 있는 건데?"

샬롯도 궁금한 듯 그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이안이 말했다.

"이건 경고문이다. 여기서부턴 용의 권역이라는군. 이름도 쓰여 있는데… 이건 못 알아보겠어."

"용…? 용이라고?"

샬롯의 눈이 커졌다.

테사이아도 마찬가지였다.

"이 숲에 용이 있단 얘기야? 어쩐지, 느낌이 안 좋더라. 당장 나가자, 이안."

샬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용이 뭔지는 아나 보군."

"그러게…? 듣자마자 그냥 무시무시하다는 생각부터 들었어."

테사이아가 얼떨떨하게 읊조리는 가운데, 샬롯이 이안을 돌아봤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상대가, 설마 용인 것이냐? 만약 그렇다면 내 생에 가장 영광스러운 전투가 되겠군."

"애석하게도 그렇진 않을 거다."

아마도.

뒷말을 삼킨 이안이 턱을 긁적였다. 그가 알기로, 대륙에 남은 용은 단 두 마리였다. 나머지는 오래전에 흑해 너머로 이주했다고 했다.

둘 중 한 마리에게 직접 들은 말이었고, 현실이 된 지금도 달라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게다가 다른 한 놈하고는 싸웠었지. 그것도 그놈의 둥지에서. 오래 산 용은 둥지가 여럿이라고는 하지만….'

이안의 시선이 황량한 숲으로 향했다.

두 용 모두, 이런 곳에 굳이 둥지를 만들어 뒀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게 전부야? 여기 적힌 글자들은 그것보단 길어 보이는데."

"대충, 허락받지 않은 자가 발을 들이면 살아서 나가지 못할 거란 내용이다."

"왜 대충이야?"

"전부 읽을 수는 없었으니까."

"…아."

"친절한 용이군. 침입자를 위한 글귀까지 남기다니."

샬롯이 콧방귀를 뀌었다. 용과 싸울 수 없다는 게 어지간히 아쉬운 모양이었다.

진짜 용을 마주하면 생각이 좀 달라지겠지만.

"미리 겁을 먹고 돌아가길 바란 건지도 모르지."

심드렁하게 말한 이안이, 테사이아에게 장작을 가져오라 덧붙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가 마차에서 짐가방을 내리는 사이, 돌아온 테사이아가 땔감을 우르르 떨어뜨리며 말했다.

"정말 저걸 보고도 들어갈 셈이야? 저 안에 있는 게 뭐건, 결국 용과 관련된 존재란 얘기잖아."

"이왕이면 보물도 있으면 좋겠군."

테사이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살아나가지 못할 거라는데, 보물이 무슨 소용이야?"

"그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얘기다. 난 초대를 받고 여기 온 거야. 거기다 우린 이미 저 숲에 한 번 발을 들인 적도 있다."

"응…? 언제?"

"버려진 땅에서."

테사이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안이 말들을 마차에서 분리 중인 샬롯을 돌아보았다.

"나랑 저 녀석이 싸웠던 숲."

"아, 거기. 기억나. 그런데…."

테사이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거긴 여기서 엄청 멀잖아. 이 숲이 그렇게까지 크다고?"

"아마도."

이안은 심드렁하게 잿빛 숲을 돌아보았다.

이 안에 도사린 게 뭐건, 권역 근처에서만 힘을 쓸 수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에 걸쳐 숲을 계속 넓혀간 것이리라.

자신에게 필요한 존재를 찾아 불러들이기 위해서.

'그놈이나 그 망령 거인 놈이나, 알아먹지 못할 소리만 해 댔지만….'

자세한 사연 따위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 숲에 도사린 놈도 상당한 경험치를 주리란 것과 퀘스트의 보상이 스킬 포인트라는 사실이었다.

이 보상 하나만으로도 이유로는 충분했다.

"그래… 내가 뭐라고 말해도 달라질 건 없단 거네."

테사이아가 체념한 듯 읊조렸다.

그녀가 모아 놓은 땔감에 불덩이를 던져 불을 피운 이안이, 다가오는 샬롯과 테사이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난 날 불러들인 놈과 싸우게 될 거다. 그 과정에서 너희 둘까지 신경 쓰지는 못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너희 둘은 서로를 지키는 걸 최우선으로 해라. 하던 대로."

"이 귀쟁이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을지 모르겠군."

"있을걸. 지금까지 그랬듯이."

테사이아의 말에 콧방귀를 뀌면서, 샬롯이 머리에 쓴 모자를 벗었다.

이안이 그녀의 머리를 문득 바라보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털이 길었네, 야옹아."

샬롯의 귀 사이 한복판. 정수리부터 뒷목으로 이어지는 털이 눈에 띄게 길게 솟아 있었기 때문이다.

샬롯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건 갈기다. 수인의 우월한 체질을 증명하는 변화지. 몸이 추위에 적응하고 있는 거야."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목덜미와 손목 근처에도 털이 풍성하게 길어지고 있었다.

"다 자라면 만지는 맛이 날 것 같은데. 수인은 원래 다 그래?"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샬롯이 어깨를 까딱였다.

"아마도. 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군. 나도 이야기로만 들었지, 실제로 이렇게 갈기가 자란 건 처음이다."

"다 자라면 쓰다듬게 해 줘."

"그러고 나서 네 손목을 잘라 버려도 된다면."

"그러지 뭐, 붙이면 그만이거든? 아픈 거야 참을 수 있어. 약속했다, 야옹아."

놀리듯 미소 지은 테사이아가 일어섰다.

이안의 시선에 그녀가 덧붙였다.

"토끼라도 찾아볼게. 그냥 들어가는 건 불안해서."

"그 몸으로?"

"괜찮아. 해가 가려져서 그런가. 몸 상태가 나쁘지 않거든."

"한 시간 안에 돌아와라."

고개를 끄덕인 테사이아가 휑하니 멀어졌다.

저거, 저대로 튀는 건 아니겠지.

잠시 생각한 이안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서 도망쳐 봐야, 그녀가 갈 곳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끝내 또 다른 심판자에게 붙잡히게 되리라.

그런다면 언젠가 루 사드에서 다시 만나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땐,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겠지.'

그것도 나쁜 결말은 아니었다. 슬슬 저 녀석에게 정이 붙기 시작한 지금은 더더욱.

옆에서 쇳소리가 이어졌다.

샬롯이 육포를 입에 문 채 자신의 쌍검을 숫돌에 갈고 있었다.

이안은 그녀의 모습을 새삼 눈에 담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화려하고 깔끔한 상단 경호병의 모습은 이미 오간 데 없었다. 야전에서 오래 구른 능숙한 수인 용병만이 존재할 뿐.

장착한 장비들이 전체적으로 누더기로 변했다는 것도, 그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에 한몫했다.

"샬롯."

"응?"

"네 마법 무구, 아직도 주문을 쓸 수 있는 상태냐?"

"흉갑과 전투화에 새겨진 주문은 아직 무사하다. 하지만 마석이 없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냈다.

그 안에 굴러다니는 마석을 집어 든 그가 샬롯에게 던졌다.

"이걸 써라. 마력이 가득하진 않으니까, 아껴 써야 할 거다."

"…사양하지 않겠다."

샬롯이 마석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이안이 지켜본바, 그녀는 수비적인 측면에 약점이 있었다.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제압할 방법도 없었다. 그런 약점들을 보완해 주는 게, 그녀가 가진 마법 무구의 역할이었다.

그러니 예전만 하진 않더라도, 없는 것보단 나으리라.

"아, 그래. 이것도 있었군."

이어 이안이 꺼낸 것은 톱날이 돋은 것 같은 형태의 기형 검이었다.

샬롯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건… 카일이 쓰던 비늘 검이군."

"그래. 그놈의 유품이지."

이안이 손잡이의 한 부분을 움켜쥐었다.

화륵, 검날을 타고 번진 불길이 이내 흩어졌다.

"당장 쓸 수 있는 건 이 주문 하나뿐이지만."

"…건방진 놈이었다. 자신이 검의 달인이라 생각해서 단련을 게을리했지."

애도하는 기색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그녀가 고개를 까딱였다.

"차라리 네가 쓰는 게 더 가치 있을 것이다, 이안."

"네가 쓸 생각은 없고?"

"전혀."

그렇다면야.

비늘 검을 다시 아공간에 넣은 이안은, 짐가방에서 보존 식량과 붕대, 간이 침낭 따위를 하나씩 꺼내 봉인함에 차곡차곡 넣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대비는 해 둬야 했다.

"…뭐야, 그걸 계속 가지고 다니고 있었어?"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손에 토끼 한 마리를 움켜쥔 그녀가 질색하는 얼굴로 다가왔다.

"물건을 보관하기 편하더군."

이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샬롯의 시선에, 그가 어깨를 까딱이며 덧붙였다.

"이 녀석이 갇혀 있던 상자다. 용병들에게 붙잡혀 있던 걸 내가 구했었지."

"그때도 말했지만,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어. 그 머저리들은 널 만나지 않았어도, 분명히 다른 헛짓을 했을 거라고."

이제 와선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봉인함까지 아공간에 돌려놓은 이안이, 샬롯이 풀어 둔 말들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 함께한 말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놈들이었다.

"저 녀석들을 풀어 주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힘들 거다. 계곡을 나간다 해도, 머잖아 마물들의 먹잇감이 되겠지."

"그럼 그냥 타고 들어가는 게 낫겠군. 저 안에서 죽더라도, 원수는 갚아 줄 수 있을 테니까."

"...."

샬롯이 괴상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마물 인간 할 것 없이 수틀리면 목부터 날리고 보는 이안이, 고작 말의 복수를 운운하는 것이 이상해 보인 모양이었다.

훌쩍 말 안장에 올라탄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준비 끝나면 타라. 바로 들어갈 거니까."

***

숲은 고요했다.

짐승 소리는 물론이고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모든 게 얼어붙은 공간처럼 느껴졌다.

다각, 다각-

적막을 깨뜨리는 건 두 마리 전마의 발굽 소리. 그리고 녀석들의 겁먹은 숨소리뿐이었다.

"…이상해."

샬롯의 뒤에 탄 테사이아가 문득 내뱉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밖이 안 보여."

이안도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말 그대로였다.

그들이 들어선 계곡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기다란 나무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 나무줄기 중간중간 새겨진 눈동자 모양의 자국들이 그들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왜 둘 다 아무 말도 안 해?"

덤덤한 얼굴의 샬롯과 이안을 번갈아 본 테사이아가 이윽고 물었다.

샬롯이 콧방귀를 뀌었다.

"말한다고 달라질 게 있나?"

"…궁금하잖아.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지. 고대 마법인가?"

"시작은 그랬을지도."

대꾸한 건 이안이었다.

그가 다시 앞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숲은, 마경이다."

"마경…?"

"그래. 그게 아니면 네가 벌써 그 모습이 될 리 없겠지."

"...!"

테사이아가 그제야 자신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잠시 입가를 씰룩대자,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돋아났다.

"아직 밤이 아닐 텐데…?"

먹구름 자욱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도, 어느새 붉게 일렁이고 있었다.

이안이 태연하게 말했다.

"여긴 세상의 법칙을 뒤틀어 버릴 정도로 타락한 땅인 거다. 너 같은 마족에겐 오히려 천국 같겠지."

"어쩐지. 갑자기 기운이 난다 싶었어."

읊조린 그녀가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토끼를 집어 들어 단숨에 깨물었다. 전투를 준비하는 건지, 치미는 어두운 욕망을 가라앉히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뭐가 됐건, 여기 있는 놈이 타락해 버렸다는 건 확실하군.'

생각하며, 이안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이정표도 없는 숲이지만, 그는 자신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손아귀의 문양이 계속 울리고 있었으니까.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면 잦아드는 울림이었다.

이것도 게임의 시스템이 나름의 현실성을 갖춘 것이리라.

'…이러는 걸 보면, 게임에선 퀘스트 없인 들어올 수도 없는 장소였을지도.'

이안은 착실하게, 그러나 방심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손아귀의 울림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울림 이상의 변화가 느껴진 건, 그렇게 몇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음…?"

이안이 문득 손을 내려다본 순간.

겁에 질린 숨소리를 내던 말이 멋대로 멈춰 섰다.

테사이아와 샬롯이 탄 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안은 고삐를 후려치지 않았다.

손아귀의 문양이 강렬하게 공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구구구-

지축이 울리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

이안의 눈이 커졌다.

지하로 통하는 거대한 동굴이, 말 그대로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084화

쿠르르….

떨림이 잦아들었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동굴은, 웬만한 관문 못지않게 거대했다.

종유석이 돋아 있는 천장과 달리, 그 아래로는 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심지어 한 칸 한 칸이 아주 넓고 얕은 계단이었다.

내부에서 휘어지는 듯, 저 아래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지하에 공간이 숨겨져 있었다니. 숲은 침입자를 걸러내는 용도였던 거군."

말에서 내린 샬롯이 읊조렸다.

이안은 동굴 너머의 어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허리에서 울림이 번졌다.

그가 단죄의 검을 내려다보는 사이.

"갈수록 더 불길하네. 끝없이 이어진 숲에, 이제는 지하로 통하는 동굴이라니."

"마족 주제에 참 겁이 많군."

"이걸 보고도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건 너 같은 짐승이나 가능한 일이야. 이런 마법을 부릴 정도의 마법사라면, 엄청나게 강할 거라고."

"내가 아는 가장 강한 마법사는 이안이다."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테사이아와 샬롯이 동굴 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샬롯에게 고삐를 잡힌 말은, 콧김을 뿜으면서도 순순히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잘도 들어가는군."

말에서 내린 이안이 말했다.

테사이아가 눈을 끔뻑였다.

"그러게. 못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 전혀 없었어. 여기가 부정한 땅이라서 그런 것 같아. 아무런 제약도 없어진 거지."

설득력 있는 말이군.

생각한 그때, 허리의 검이 다시 한번 울렸다.

미간을 좁힌 이안은, 결국 단죄의 검을 뽑아 들었다.

옅은 신성력이 검신에 일렁이고 있었다. 이안이 뽑아 든 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날에 맺힌 빛이 점점 더 짙어졌다.

"...?"

찬란하게 빛나던 푸른 빛이, 이윽고 검날에 스며들듯 옅어졌다.

검 내부에 신성력이 가득한 것이 느껴졌다.

가볍게 검을 흔들자, 푸른 빛이 흐릿한 궤적을 그리며 바스러졌다.

그래, 학습이란 걸 하셨다 이거지.

이안의 입가에 실소가 스쳤다.

아무래도 이 광경을 티르 엔이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신의 예비 성물과의 연결이 느슨해진 것을 느끼고, 주목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엄정한 여신은 그들이 지하에 들어가면 자신의 손길이 닿지 않게 될 것을 염려한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미리 신성을 내릴 이유가 없었다.

이 정도 신성력이라면 단죄의 일격을 한 번은 쓸 수 있을 테니까.

'뭐, 나야 고맙지.'

이안은 검을 검집으로 되돌렸다.

빛이 검집에 완전히 가려지고,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은 들고 다니기만 해도 신성력이 줄줄 새어 나갈 테니, 필요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뽑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안! 빨리 들어와! 여기에도 뭔가 적혀 있어!"

그때, 계단 몇 개를 내려간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말고삐를 쥔 이안도 지하 통로로 들어섰다.

통로는 겉에서 보던 것보다 더 높고 넓었다. 그리고 싸늘했다. 숨을 쉬면 폐가 얼어붙을 것 같았다.

하나하나가 넓고 얕은 계단을 내려간 이안이, 둘의 곁에 나란히 섰다.

"호오…."

그의 입에서도 나지막한 탄성이 흘렀다.

테사이아의 말대로, 높다란 벽면에 고대 북부어가 새겨져 있었다.

글자들을 응시하는 이안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갔다.

"뭔데. 혼자만 알지 말고, 같이 알자."

테사이아가 붉은 눈을 빛냈다. 턱을 긁적이며 이안이 말했다.

"용의 이름은 여전히 못 읽겠군. 그 아래에는 한때 나의 둥지였던 이 지하 궁전을, 유일한 맹약자이자 한때의 반려인 여왕에게 선물한다고 쓰여있다. 그러니까 이건… 선물에 동봉한 편지인 셈이지."

"편지…?"

이안은 대꾸하지 않고 벽면의 글자들을 눈에 담았다.

비로소 조각나 있던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맞춰지고 있었다.

이름을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용.

공허의 힘을 연구했다던 고대 거인 왕국의 여왕.

그를 찬탈자라 부르던 망령.

"여기가, 여왕이 공허의 힘을 연구했다던 별궁인 거군."

이안이 툭 내뱉었다.

테사이아와 샬롯이 그를 주목했다.

"그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건, 용의 권역의 땅속에 감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던 거고. 어쩌면…."

이안의 시선이 계단 너머의 어둠으로 향했다.

"여왕이 이곳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여왕이…? 거인 여왕을 말하는 거냐?"

"최후에 대한 기록이 모호하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쿠르르-

이안이 말을 끝내기 전에, 동굴 전체가 또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비틀댄 일행이 자세를 낮추는 가운데, 침침하던 장내가 순식간에 더 어두워졌다.

"...!"

동불 입구가 다시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의 눈이 빠르게 어둠에 적응했다.

흙이 내부로 밀려 들어오는 불상사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동굴의 그것과 같은 재질의 검푸른 석벽이 입구를 완전히 막았다. 진동이 가라앉았다. 지하 깊은 곳에서 번지는 희미한 빛만이 계단의 어둠을 간신히 밝혔다.

다행히도, 일행 중에 이 정도 어둠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건 말 두 마리뿐이었다.

석벽을 응시하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입을 달싹였다.

"우리… 갇힌 거야?"

"그래 보이는군."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어둠 속에서도 번쩍이는 주황색과 붉은색 눈동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달라질 건 없다. 어차피 빈손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횃불을 켜 말 안장에 고정한 이안이 선두로 나섰다.

계단은 한참을 이어졌다.

점점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고, 그럴수록 오감이 묘하게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공간을 다루는 고대 마법이 깃든 공간이라는 증거였다.

용의 둥지였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천장이 점점 높아졌다.

손아귀의 문양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보채지 마라. 가고 있으니까.'

이렇게 쳐 부르면서, 대체 왜 찬탈자라고 부르는 거야?

혀를 찬 이안이, 푸르스름한 어둠 속을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

계단은 지금 여기가 어디쯤인지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었을 때쯤에야 끝이 났다.

"지하 궁전이라더니… 빈말이 아니었군."

펼쳐진 광경에 이안이 나지막이 탄식했다.

여왕에게 이 지하 궁전을 선물한 용이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대단한 사랑꾼이었음은 분명했다.

왕성의 내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높다란 천장. 대회관으로 보이는 기다란 광장이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고, 좌우로는 또 다른 방으로 보이는 높다란 관문들이 이어져 있었다.

직선으로 쭉 뻗은 기둥과 통로들.

규모로 봐선, 거인족의 눈에도 충분히 웅장해 보였으리라.

적어도 게임에서 본 거인 군단의 유적지보다는 훨씬 크고 화려했다.

바닥 외곽을 따라 은은하게 번지는 옅은 푸른 빛이, 계단을 밝히던 광원의 정체였다.

절대 밝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들이 지하 궁전의 전경을 확인할 수 있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대단한 유적이군."

샬롯조차 탄식을 흘렸다.

이안의 시선이 대회관 중앙을 가로지르는 대로 너머로 향했다.

대문이 활짝 열린 관문. 그 너머로 푸르스름한 마력이 번져 나왔다.

-내게로 오라. 맹약자여.

귓가로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환청이 아니었다.

"저것들 보여? 엄청 정교해."

궁전을 돌아보던 테사이아가 손짓했다.

대로 좌우로, 크고 작은 얼음 조각상들이 늘어서 있었다.

큰 것은 거인 병사였고, 작은 것은 인간과 난쟁이 병사의 조각이었다.

하나같이 거인 왕국의 복식과 무장을 섬세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녹지도 않았고.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아."

"…그래. 정말 그렇게 될 것 같군."

내뱉은 이안이 말 위에 올라탔다.

고개를 갸웃한 테사이아가 뒤늦게 그를 돌아보았다.

"농담이 아닌 거지?"

"그래. 그러니까 너희도 타라."

내뱉은 이안이, 정면 저 멀리에 열린 관문을 가리켰다.

"우린 저 너머로 갈 거다."

"이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고…?"

"멋지군."

샬롯이 말에 오르고, 테사이아도 인상을 찌푸린 채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안이 가볍게 고삐를 쳤다.

말이 대회관 한복판의 대로를 천천히 나아갔다.

시간은 물론이고 공기마저도 얼어붙은 것 같은 공간이었다.

일렁이는 건, 오로지 저 관문 너머의 푸르스름한 마력뿐.

-서두르라, 맹약자여. 불멸이 머지않았다.

속삭임이 선명해졌다.

그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샬롯도 테사이아도, 속삭임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이안은 회관 좌우에 늘어선 정교한 얼음 조각들을 차근차근 눈에 담으며 나아갔다.

한때는 살아있었던 존재들이 틀림 없었다. 어떻게 만들어 낸 것인지는 상상도 가지 않았지만.

'…어쨌건, 아무 일도 없이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진 않네.'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고삐를 후려쳐 달려나가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지금의 아슬아슬한 평화를 깨뜨리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 너머에… 뭔가 있어."

테사이아가 속삭였다.

샬롯의 눈에도 긴장과 기대감이 뒤섞여 일렁였다.

"용만큼은 아니라도, 기대되는군. 고대의 존재들과의 전투라. 전의 거인보다는 강했으면 좋겠는데."

"아마도 그건 확실할 것…."

읊조리던 이안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저 먼 관문 너머로 향했다.

귓가로 다급한 속삭임이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여왕이 깨어났다, 맹약자여. 서두르라….

뭔가 더 말하려는 듯한 속삭임이 칼로 자른 것처럼 끊어졌다.

대신, 전혀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기어코 짐의 궁전에 발을 들였구나, 찬탈자여…!

이어진 건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소녀와 노파의 목소리가 겹쳐진 것 같던 이전의 속삭임과 달리, 얼음장 같은 분노를 머금은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불멸의 힘은 짐의 것일지니…! 네 야망은 한낱 미몽으로 끝나게 되리라. 찬위는, 불허하겠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지만 깊이 생각할 틈은 없었다.

까득, 까드득- 투두둑….

사방의 조각상들이 태엽 인형처럼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얼음에 균열이 이는 소리.

고대 거인 왕국의 수호병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달려!"

외친 이안이 고삐를 후려쳤다.

말이 기다렸다는 듯 질주하고, 샬롯의 말도 그 뒤로 따라붙었다.

쿠구구구-

저 멀리, 관문 좌우에서 얼음 파편이 뒤섞인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좌우로 활짝 열려 있던 대문이 닫히기 시작한 것이다.

대문의 크기와 두께는 멀리서 봐도 심상치 않았다. 이 공간이 그렇듯, 저 문에도 분명 마법이 새겨져 있을 터.

문이 완전히 닫힌다면 물리적으로 다시 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게 분명했다.

'시간제한까지 있다, 이거지. 개 같네.'

게임에선 이런 경우에 보통, 시간을 맞추지 못한 순간 상황을 해결할 방법도 사라졌다. 퀘스트를 포기하거나, 세이브를 다시 불러오는 방식으로 재도전해야 했다.

지금은 둘 다 불가능한 선택지였다.

-서두르라, 맹약자여…!

다급한 속삭임이 울려퍼졌다.

-내 힘은 여왕이 주문을 사용할 수 없도록 붙잡아 두는 것이 고작이다… 명령을 내리지 못하게는 할 수 없으니, 그대의 능력으로 난관을 돌파하라…!

알아서 오란 얘길 길게 하네.

이안이 헛웃음을 지은 그때.

쿠웅-

거인 수호병 하나가 대로 위로 올라섰다.

전에 본 관문을 지키는 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둔탁한 움직임.

하지만 덩치는 비슷했고, 길을 막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단죄의 검을 뽑으려던 이안은, 이내 멈추고는 아공간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건, 카일의 비늘 검이었다.

'신성력을 그냥 쓰긴 아깝지.'

생각하며, 그가 등자에서 발을 뺀 순간이었다.

"이안! 속도를 늦추지 마라!"

뒤에서 샬롯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뒤에서 돌풍이 휘몰아치고, 전신에 바람을 두른 샬롯이 엄청난 속도로 그의 머리 위로 솟구쳤다.

"야! 나 혼자 어쩌라고!"

엉겁결에 고삐를 잡은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물론 샬롯은 그 외침에 대꾸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쌍검을 움켜쥐며 맹수처럼 뿜어져 나간 그녀가, 그대로 거인 수호병의 몸통 한복판에 틀어박혔다.

푸화악-!

한 박자 빠르게 돌풍이 휘몰아쳤다.

수호병에게 타격을 줄 수는 없었지만, 균형을 잃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풍압이었다.

조각상이 둔탁한 움직임으로 넘어지는 가운데, 허공에 잠시 부유한 샬롯이 몸을 휘돌리며 재차 허공을 박찼다.

그녀의 마법 무구에 박힌 마석들이 번쩍이고, 짐승 같은 포효와 함께 샬롯이 수호병에게로 떨어졌다.

콰지직-!

교차해 내뻗은 쌍검이 수호병의 거대한 머리를 후려쳤다.

놈의 머리에 균열이 일었다.

하지만 박살 낸 것은 아니었다.

몸을 움츠리며 착지한 샬롯이 그대로 다시 팔을 치켜들었다.

날 끝부분이 앞으로 튀어나온 쌍검이 연달아 떨어져 내렸다.

콰직! 꽈지직!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사이, 이안은 쓰러진 수호병의 팔을 뛰어넘으며 질주했다.

'아슬아슬한데.'

이안의 시선이 대로 좌우를 훑었다.

잠에서 깨어난 수호자들이 대로를 향해 둔탁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수십. 뒤에서 따라붙는 것들까지 합하면 백 마리는 가볍게 넘어설 터였다.

상대하지 못할 숫자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이 순간에도 저 대문이 닫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회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이 안에 완전히 고립되는 것이라면….

"이안, 계속 달려라!"

샬롯의 외침이 이어졌다.

뒤를 돌아보자, 테사이아가 모는 말 위에 선 샬롯이 보였다.

테사이아는 그저 고삐만 쥐고 있을 뿐, 사실상 말이 저 혼자 전력으로 질주하는 상태였지만.

샬롯은 그 거친 질주에도 전혀 균형이 흔들리지 않았다.

샬롯과 눈빛을 교환한 이안은, 그녀도 자신과 같은 생각임을 깨달았다.

"뭔데?! 둘만 알지 말고 나도 알려 줘!"

이안과 샬롯이 고개를 까딱이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외쳤다.

턱, 그녀의 어깨에 발을 얹으면서 샬롯이 내뱉었다.

"넌 싸울 준비나 해라."

"그러니까… 아욱?!"

테사이아의 몸이 순간 구부러졌다. 그녀의 어깨를 밟고 뛰어오른 샬롯이, 포물선을 그리며 앞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떨어질 뻔했잖아! 이 짐승아!"

한순간에 발 받침대가 된 테사이아가 소리치는 가운데, 샬롯은 대로 위로 올라오는 인간과 난쟁이 수호병들을 향해 포탄처럼 떨어져 내렸다.

콰장창-!

얼굴 앞을 교차해 가린 쌍검이 수호병들을 사방으로 튕겨냈다. 깨진 얼음 조각들이 비산하고, 그 와중에도 바닥을 구르며 안전하게 착지한 샬롯이 질주를 이어갔다.

말 없이도 말을 탄 것과 비슷한 속도였다.

'…즐기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샬롯의 입가에 번진 미소를 보며 이안이 입맛을 다셨다. 과감한 걸 넘어 무모한 짓거리였지만, 지금은 그녀를 말릴 때가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어느새 대문이 반 이상 닫히고 있었으니까.

그 너머에 맺힌 마력의 장막이 소리 없이 일렁였다.

이안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일렁였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그와 말을 감쌌다. 샬롯과 뜻이 통한 이상, 일행을 배려할 필요는 없었다.

이안은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앞을 가로막는 것들은 샬롯이 온 몸을 던져 막아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호병들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아껴 쓰라는 말이 무색하게, 샬롯은 마법 무구의 능력을 전부 다 끌어 쓰고 있었다.

-무의미한 저항이다, 찬탈자여…!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여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는 짓으로 봐선 둘이 한 몸 같은데. 여왕이 악마를 사로잡기라도 한 건가? 악마가 날 부른 거고?'

타락자가 미친 짓을 하는 건 고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거군.

콰아아-

이안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느새 다가선 거인 수호병이 거대한 대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샬롯은 반대쪽에서 인간 수호병들과 싸우는 중이었다. 어느새 수호병들은 그녀 혼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이안이 고삐를 후려칠 찰나.

콰직-!

대검이 휘몰아치는 방벽을 단숨에 찢어발기고 그의 뒤통수를 스치며 떨어져 내렸다.

양단되어 처박혔던 말이, 단면에서 피와 내장을 흩뿌리며 튕겨 올랐다.

이를 갈며 바닥을 구르는 이안의 눈에 마력이 휘몰아쳤다.

화르르륵- 콰과과광-!

피어오른 화염구가 수호병에게 연달아 날아가 폭발했다.

그사이 이안이 자세를 다잡을 찰나.

푸화악-!

피 보라를 뚫고 튀어나온 샬롯이 이안의 갑옷 뒷덜미를 낚아채며 내달렸다.

"네 말의 복수는 내가 하겠다."

내뱉은 그녀가, 그를 힘껏 내던졌다.

#08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