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뭐 이렇게 터프해?'
탄환처럼 날아가면서, 이안은 당황하지 않고 바람 칼날을 시전했다.
포물선을 그리던 그의 궤적에 다시 가속도가 붙었다.
"이안만 던지면 어쩔 건데! 우리는?"
테사이아의 외침이 이어졌다.
"우린 끝까지 싸운다!"
"야이, 미친-"
샬롯이 포효하는 가운데, 닫히고 있는 대문의 틈이 가까워졌다.
집중력이 최고조로 치닫고, 허공에서 비튼 이안이 그 사이를 통과했다.
촤아악-
마력 장막을 단숨에 통과한 이안이 바닥을 구르며 착지했다.
-비정한 결단이구나, 찬탈자여…! 네 야망의 크기를 알겠노라…!
웅웅, 온몸을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안은 비늘 검을 고쳐 쥐며 고개를 들었다.
예상대로, 여왕의 알현실이었다.
높다란 단상 위. 벽면을 따라 천장까지 이어진 거대한 왕좌가 눈에 들어왔다.
잿빛 미라 같은 모습으로 그 위에 앉은 거인 여왕의 모습도.
머리에 얹은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황금 왕관. 목에 건 목걸이에는 거대한 보라색 보석이 빛을 머금고 일렁이고 있었다.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또 다른 퀘스트 창이 이어진 건 그 직후였다.
찬탈자의 선택.
그 순간 목걸이의 보석에서 빛이 번졌다.
익숙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여왕의 주문을 봉인하겠다, 맹약자여… 내 힘이 다하기 전에 왕좌를 찬탈하라….
보석의 빛이 잦아들었다.
여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건방지구나, 악마야. 불멸의 힘도 불사의 왕국도 오로지 짐을 위한 것인즉…!
"…지하에서도 심심할 틈은 없었겠군."
퀘스트 창을 닫으며 이안이 읊조렸다.
쿵, 대문이 완전히 닫혔다.
단상 앞, 중무장한 채 도열한 친위병 조각상들이 대검을 늘어뜨렸다.
이안의 눈동자에 붉은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순간.
쿠웅- 쿠웅-
대검을 움켜쥔 친위병들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둔탁한 움직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밖의 수호병들이 그랬듯 자연스럽고 기민해질 터였다.
콰르르-
물론 그렇게 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돌진하는 친위병들의 한복판으로 화염 장벽이 치솟았다.
평소보다 훨씬 작은 크기.
증폭이 더해지지 않았음을 감안해도 그랬다.
'적색은 잘 안 먹히는 공간이라 이거지.'
이안은 장벽을 뚫고 나온 친위병을 향해 몸을 날렸다.
화르르륵-
주위로 피어오른 춤추는 불꽃이 놈을 향해 뻗어 나갔다. 이어진 폭발. 그 사이를 뚫고 솟구친 이안이, 바람 칼날이 맺힌 비늘 검을 힘껏 내리쳤다.
카드드득-
친위병의 목덜미가 푹 파였다.
얼음 내부로 새카만 내골격이 설핏 드러났다.
'일단 하나는, 확인.'
검을 뽑아 물러나면서, 이안이 눈을 빛냈다.
저놈들과 싸워야 한다는 걸 직감한 순간부터, 실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헛된 발버둥을 치는구나, 찬탈자여…! 네놈은 끝내 죽음을 맞이할 것인즉. 왕좌를 탐낸 대가를 치를 것이다…!
여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난 네 왕좌에 전혀 관심 없거든?
생각하며, 이안은 다시 거인 친위병들의 한복판으로 몸을 날렸다.
떨어지는 대검들을 몸을 날려 피한 그가, 처음 자신이 공격했던 친위병을 향해 재차 솟구쳤다. 불길을 머금은 비늘 검이, 내골격이 드러난 목덜미를 향해 다시 한번 뻗어 나갔다.
카드득-
목을 단숨에 잘라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안은 실망한 기색 없이, 검 자루를 양손으로 움켜쥔 채 친위병의 가슴팍에 매달렸다.
다음 순간 놈이 그를 떨쳐 내려는 듯 손을 휘저었다. 훌쩍 놈의 어깨로 뛰어오른 이안이, 손길이 지나치자 다시 검 자루를 붙잡고 매달렸다.
쒸에에엑-
그런 그를 향해 또 다른 친위병이 대검을 휘둘렀다. 화륵- 비늘 검에 불길이 치솟고, 이안이 친위병의 가슴을 박차며 검을 뽑았다.
콰지직-!
날아든 대검이 그대로 친위병의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두꺼운 얼음 갑옷에 균열이 가고, 주위로 얼음 가루가 흩날렸다. 균형을 잃은 친위병이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바닥을 굴러 착지하며 그 모습을 돌아본 이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역시, 이게 공략법이었네.'
대회관을 가로지르면서도 느꼈지만, 이놈들은 방어력과 저항력이 지나치게 높았다. 등장 시기에 맞지 않는 수준이었다. 다른 공략법이 있으리란 생각이 든 건 당연한 수순. 게다가 이놈들은 지성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골렘에 가까웠다.
그래서 혹시나 싶었는데. 추측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현실이 되고 나서도, 게임에서 있었던 공략 요소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단 말이지.'
이어지는 둔탁한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이안은 쓰러진 친위병을 향해 달려갔다.
친위병들이 무감정한 움직임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곧바로 왕좌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여왕이 위기에 처했다고 느끼면, 이 친위병들이 어떤 식으로 미쳐 날뛰기 시작할지는 그도 예상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여왕 본인이 움직이기 시작할지도 몰랐다.
당장 확실하게 전력을 줄일 방법을 앞에 두고, 또 다른 도박 수를 더할 필요는 없었다.
-짐을 방해하지 말라, 악마여. 네 방해는 찬탈자의 고통으로 돌아올 뿐이니. 그 후엔 네놈에게도 길고 긴 고통을 약속하리라.
그가 쉴 틈 없이 움직이는 동안에도, 여왕의 목소리는 이어지고 있었다.
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시간이 많지 않다, 맹약자여…! 여왕이 주도권을 되찾는다면 대업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니. 어서 저들을 뚫고 왕좌로 오라…!
반면 악마의 속삭임은 점점 더 다급해졌다.
말하는 걸 보니 아직 살만한 것 같은데.
속으로만 대꾸하며 쓰러진 친위병의 위로 올라탄 이안이 다른 친위병들을 돌아보았다.
대검들이 고요한 공기를 찢어발기며 떨어져 내렸다.
이안이 몸을 날렸다.
콰앙! 콰직!
쓰러진 친위병이 난자당했다. 갑옷이 전부 으스러진 놈은 뼈대를 거의 다 겉으로 드러낸 채였다.
친위병들이 대검을 회수하기 전에 되돌아온 이안이, 훤히 드러난 놈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바람 칼날. 예리한 바람에 불길이 뒤엉켰다.
콰드드득-
친위병 하나의 목이 몸에서 분리됐다. 머리를 잃은 놈의 몸이 잠시 꿈틀대다가, 이윽고 잦아들었다.
본능적으로 상태창을 확인한 이안의 눈이 순간 빛났다. 경험치가 올라 있었다.
'보스전은 보스전이란 말이지…?'
그의 시선이, 대검을 회수 중인 다른 친위병에게 향했다.
두 번째를 처치하는 건 처음보다 더 쉬웠다. 친위병들이 공격을 준비하길 기다렸다가, 타이밍을 맞춰 돌진했다. 다른 친위병들의 대검이 이안이 매달려 있던 놈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이안은 갑주가 으스러진 채 쓰러진 놈의 위로 올라탔다. 곧 또 한 번 대검들이 쏟아졌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 비늘 검의 주문을 사용한 건, 놈의 목을 썰어 내는 한순간으로 충분했다.
-제법 재주는 있다만, 네 야망은 불가능한 것이다, 찬탈자여. 이 악마는 짐의 조각난 영혼에서 짐의 야망과 광기를 먹고 태어난 존재인즉…! 끝내 짐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며, 오로지 짐만이 이 악마를 다스릴 수 있느니라…!
-여왕의 기만에 흔들리지 말라, 맹약자여…!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그대는 나를 품을 수 있으며, 나 또한 그대 없이는 아무런 야망도 이룰 수 없음이니…!
번갈아 가며 더럽게 말 많네.
생각할 찰나, 문득 여왕의 목걸이에서 마력의 파장이 일었다.
-겁 먹었구나, 악마야. 네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여왕의 웃음소리.
친위병들의 전신에서 냉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내딛는 걸음마다 얼음 가시가 치솟고, 휘두르는 검격에 서리 칼날이 흩날렸다.
'2 페이즈인 건가.'
하지만 대응은 간단했다.
이안은 혼돈력을 섞어 화염 장벽을 펼쳤다.
날아들던 서리 칼날이 그의 몸에 닿기 전에 녹아 흩어지고, 얼음 가시도 빠른 속도로 녹아내렸다.
이안은 마력을 아끼지 않고 불을 지르며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하나, 그리고 또 하나의 친위병의 목이 달아났다.
-멈추지 말라, 맹약자여…! 여왕의 주문은 다시 봉인하였으니, 우리의 승리가 머지 않았다…!
악마의 속삭임과 함께 목걸이의 마력이 잦아들었다.
친위병들을 감싼 냉기도 흩어졌다.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전투를 이어 나갔다.
친위병의 숫자가 줄자 하나를 처치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늘었다. 이안은 놈들의 사이를 오가며, 놈들이 서로에게 비슷한 타격을 입히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또 하나의 목이 먼저 달아났다.
이제 남은 건 고작 둘이었다.
그사이, 여왕의 목걸이가 다시 일렁이기 시작했다.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지 말라, 찬탈자여. 놈은 자유를 손에 넣고자 그대를 이용하는 것일 뿐…! 악마가 끝내 네 영혼을 삼키리라…!
여왕의 목소리에 위기감이 묻어났다. 악마의 속삭임이 기다렸다는 듯 이어졌다.
-듣지 말라, 맹약자여. 여왕이야말로 이 순간에도 용의 마력으로 내 영혼을 녹이고 있으니. 그대가 아니라면 나는 끝내 소멸하고, 불멸의 정복자가 다시 대륙을 피로 물들이리라…!
지들끼리 난리가 났네.
난도질 끝에 또 하나의 친위병을 처리한 이안이 숨을 헐떡이며 코웃음 쳤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따위는 중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느새 친위병이 단 한 마리만 남았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쾅!
마지막 친위병의 가슴팍에 폭발이 일었다. 이어, 이안은 놈의 발아래 일점 폭발을 시전했다. 폭발에 휩쓸린 친위병이 쓰러졌다. 놈의 머리로 춤추는 불꽃을 퍼부은 그가, 균열이 잔뜩 일어난 목을 연달아 후려쳐 끝내 잘라냈다.
비늘 검에 일렁이던 불길이 잦아들더니 이윽고 완전히 꺼졌다.
자루에 박힌 마석이 빛을 잃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서 있는 친위병은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전부 난도질당하고 목이 잘린 얼음 조각이 되어 널브러졌다.
이안의 시선이 비로소 왕좌로 향했다.
남은 건 그 위에 걸터앉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여왕뿐이었다.
바싹 말라붙은 여왕의 얼굴에는 안광조차 맺혀 있지 않았다.
육신은 그저 영혼을 담아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듯이.
-끝내 비극이 일어나겠구나… 찬탈자여, 나의 병사들은 결코 네 즉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여왕의 목을 베어라, 맹약자여….
여왕의 탄식과 악마의 속삭임이 번갈아 이어졌다.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스쳤다.
정말 왕위 찬탈자가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지하 동굴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것 치곤, 정작 보스전은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이안은 왕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왕이 독백하듯 읊조렸다.
-왕국의 군단이 왕을 잃은 슬픔으로 눈을 뜰 것이다. 짐이 억눌러온 혼돈이 범람할 것이며, 짐의 반려가 죽음을 거슬러 돌아오리라. 끝내는 악마가 네 영혼을 삼켜 대륙을 피로 물들일지니….
저주나 다름 없는 말들.
단상을 올라 왕좌 앞에 선 이안이,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이 안에 갇혀만 있어서 모르나 본데. 이미 다 일어나고 있는 일이야. 새삼스럽지도 않지. 게다가…."
비늘 검을 쥔 이안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넌 결국 모든 통제력을 잃게 됐을 거다, 여왕."
-그게 무슨 의미지…?
"내가 이미 겪어 본 것들이 있단 얘기지."
내뱉은 이안이 검을 떨치듯 휘둘렀다. 검신을 타고 번진 바람 칼날이 여왕의 목을 갈랐다.
허무할 정도로 단숨에 잘려나간 머리가 왕좌 아래로 떨어졌다.
원통함이 가득 담긴 귀곡성이 장내에 메아리치고.
퍼석-
단상에 떨어진 머리가 그대로 재가 되어 허물어졌다. 귀곡성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황금 왕관이 볼품없는 소리를 내며 단상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푸스스스-
여왕의 몸도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녀가 걸치고 있던 목걸이가 떨어져, 이안의 발치로 굴러왔다.
팬던트 한복판에 박힌 주먹만 한 보석에서, 출렁이는 파장이 번졌다.
-휼륭하도다… 맹약자여…!
"그래. 너도 훌륭했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이놈 때문에 먼 길을 오게 되긴 했지만, 어쨌든 쏠쏠한 보상들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친위병은 물론, 방금 죽인 여왕도 적지 않은 경험치를 줬다.
이 녀석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편하게 해낼 수 없었으리라.
-불멸의 힘과 권능이 네 앞에 있노라. 이제 나를 들어 맹약의 증표를 내보이라…! 새로운 왕좌의 주인으로 거듭날지니…!
악마의 목소리는 아주 달콤하고, 동시에 강대한 마력을 머금고 있었다. 웬만한 자들은 듣는 것만으로도 홀리고 말았을 수준이었다.
"꼭 말해주고 싶었는데 말이지."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난 왕좌나 불멸의 힘 따위엔 관심도 없어. 네 약속을 믿은 적도 없고."
-뭐라고…?
악마의 목소리가 의아해졌다.
-하지만, 맹약을 맺었지 않느냐?
"내가 널 찾아가겠다 했지. 그리고 그 맹약은 지켜졌다. 너와 나 사이엔, 이제 남은 약속 같은 건 없어."
보석 표면의 광채가 휘청댔다.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고대 거인 왕국과 막대한 공허의 마력을 손에 넣을 기회를 거절할 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한 적 없었을 테니까.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은 뭐지?
"경험치. 그리고 퀘스트 완료 보상."
-퀘스트…? 그게 무슨…?
비늘 검을 떨어뜨린 이안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스르릉, 푸른 신성이 맺힌 검날이 서늘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단죄의 검을 양손으로 쥔 이안이 한 걸음 물러서며 내뱉었다.
"널 죽이면 얻게 될 것들이지."
검에 담겨 있던 신성력이 한순간 눈부시게 타올랐다.
단죄의 일격. 티르 엔의 신성력이 응축된 푸른 호선이, 보라색 보석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아- 아아아아악!
여왕의 그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쩌저적, 보석 표면에 균열이 일고 다음 순간 완전히 박살 났다. 그 내부에 고여있던 오염된 마력이 신성력에 닿아 타들어 갔다. 그 안에 담긴 영혼도.
-아아아… 아아아아악-!
비명이 악에 받친 울부짖음으로 변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잦아드는 푸른 섬광 사이.
푸화악-!
보석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온 검은 마력이 그대로 이안을 덮쳤다.
"...?!"
#086화
이안의 눈이 커졌다.
피할 틈도 없었다. 완전히 그를 집어삼킨 마력 덩어리가, 순식간에 그의 시야를 가리고 사지를 옭아맸다. 뒤이어 몸의 모든 구멍으로 오염된 마력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감히 날 속이고 배신하기까지 하다니…!
이안의 뇌리로 악마의 절규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나는 네놈과 함께할 생각이었다! 내 반려이자 그릇으로, 영원히…!
마력에 담긴 끈적한 광기와 탐욕. 불같은 분노와 배신감이 이안의 정신을 휩쓸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곧바로 이성을 잃고 미쳐 버렸을 막대한 감정의 해일.
-이젠 내가 네놈을 사로잡을 것이다…! 네 영혼은 영원히 내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니!
오염된 마력이 더 거세게 밀려들었다. 이안의 몸속을 가득 채우려는 모양이었다.
이안의 내면 어딘가에서 꿈틀대는 맥동이 번진 건 그때였다.
심상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혼돈의 파편이 울부짖고 있었다.
-네놈의 육신은 이제 내… …?
악마의 절규가 순간 잦아들었다.
지금쯤 이안의 온몸에 오염된 마력이 넘쳐흘러야 하건만.
아무리 마력을 밀어 넣어도 넘쳐흐르긴커녕 가득 채울 수도 없었다.
무언가가 오염된 마력을 끝없이 집어삼키고 있었으니까.
혼돈의 파편이었다.
-이건…? 아니, 웃기지 마라…!
포효한 악마가, 마력과 함께 자신의 영혼을 이안의 육체로 밀어 넣었다.
폭포수를 역행하는듯한 저항력.
이안의 몸속에 들어오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마력에 휩쓸리는 이안의 영혼이 조금도 오염되거나 물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단단함을 넘어 이질적인 느낌마저 드는 영혼.
오염된 마력을 끝없이 빨아들이던 혼돈의 파편이 심장이 맥동하듯 울리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작디작은 파편에서 혼돈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오염된 마력은 물론 악마의 영혼마저도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휩쓸려 밀려났다.
악마를 놀라게 한 것은, 이안의 육체에서 튕겨 나갔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렇게 순수한 혼돈을…? 아무리 고귀한 혈통이라 하나, 한낱 필멸자가…?
"…나도 궁금해하던 부분이군."
이안이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이안을 뒤덮은 마력이 당혹스럽게 출렁댔다.
악마의 마력은 이제 조금도 그의 육체를 침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전신을 움켜쥔 채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쨌든…."
이안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흰자위 전체가 선명한 보랏빛으로 일렁였다. 그의 시선이 마력 덩어리 한복판, 악마의 영혼을 꿰뚫듯 응시했다.
"…네놈이 내 몸을 차지할 방법은 없는 것 같군."
-네놈은 설마…. 혼돈, 혼돈의…?
악마가 더듬댔다. 그사이 이안은 전신에 넘실대는 혼돈력을 단죄의 검에 밀어 넣었다. 아직 남은 푸르스름한 신성력의 잔재가 짙은 남색으로 물들며 피어올랐다.
티르 엔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개하겠지만.
어차피 그녀의 시선은 마경의 이 깊은 지하까지는 닿지도 않았다.
투두두둑-
팔에 힘을 주자 팔을 옭아맨 마력이 떨어졌다. 머리 위로 치켜 올라간 단죄의 검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쉬학-
남색 호선이 오염된 마력을 가르고, 그 한복판의 영혼까지 꿰뚫고 지나갔다.
찰나의 적막.
세로고 길게 이어진 궤적이 폭발하듯 벌어졌다. 악마의 찢어지는 비명. 뭉쳐 있던 마력이 물풍선이 터지듯 흩어졌다.
-아, 안 돼…! 이렇게는…! 이렇게는…!
악마의 허망한 단말마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쩌적, 왕좌 옆의 허공에 균열이 일었다. 깨진 공간의 틈 너머로 보랏빛이 너울거렸다.
쉬하아아아-
사방에 자욱한 마력과, 타락자의 영혼에서 태어난 악마가 공허로 빨려 들어갔다.
한없이 멀어지던 비명이 한순간 칼로 자른 듯 끊어졌다.
공간의 균열이 사라졌다.
'…여왕은 그냥 사라지던데, 왜 저놈만 공허로 빨려 들어간 거지.'
생각한 순간, 눈앞에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당연하게도 더는 이어지는 퀘스트가 없었다.
확인 창을 닫은 이안이 잠시 숨을 골랐다.
전신을 뒤덮었던 혼돈력이 파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혼돈의 파편은 다시 고요해졌다.
아까 전, 파편이 오염된 마력을 빨아들인 건 이안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이안의 몸속에 다른 불순물이 끼어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처럼, 파편이 멋대로 작동했었다.
'설마, 이 안에서 뭐가 태어나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이안은 파편이 아주 조금 더 커진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사실 그는 이 파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혼돈력도 마찬가지였다.
태초의 힘이며, 게임에서 캐릭터를 타락시키면 다룰 수 있게 되는 힘이라는 것. 다른 힘과 어떤 식으로든 섞일 수 있다는 것 정도가 지식의 전부였다.
혼돈의 파편을 계속 키우다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혼돈력을 다루다 보면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 같은 건 전혀 알지 못했다.
딱히 관심을 두지 않은 건 타락 DLC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세계관이나 설정, 악역과 조연 캐릭터들의 뒷사정 같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1회차 플레이에 신경 쓸 콘텐츠는 아니었다.
'…어쨌든, 최악의 결말 같은 게 기다리진 않겠지. 그래도 엄연히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힘인데.'
어차피 지금에 와서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중요한 건 덕분에 예상치 못한 기습을 무사히 넘겼고, 경험치와 퀘스트 보상까지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었다.
대충 결론 내린 이안은 비로소 단죄의 검을 회수하며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적막이 내려앉은 장내.
닫힌 대문 너머도 고요했다.
전투가 끝났거나, 둘 다 죽은 것이리라. 후자일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
몸을 돌린 이안은, 단상 아래 떨어진 왕관을 집어 들었다.
묵직한 무게감.
여왕의 머리에 있을 땐 족두리처럼 보였건만.
그의 머리통 정도는 그냥 통과시키고도 남을 크기였다.
정보도 확인할 수 있었다.
특별한 능력은 없는, 전리품.
하지만 이안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꽤 비싸게 팔 수 있겠군."
이건 고대 거인 왕국이 북부의 지하에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의 손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음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물이었다.
이만한 전리품이라면 자치령 사령부나 루 솔라 교단. 그도 아니라면 제국 황실에라도 비싼 값에 팔아넘길 수 있으리라.
게임에서도 공허나 고대 문명과 관련된 전리품은 그런 식으로 팔아먹을 수 있었으니까.
설사 그들을 통하지 않더라도 팔아 치울 길은 많았다.
딱 봐도 순금으로 만들었으니까.
중간중간 박힌 보석들도 전부 진짜일 터였다.
이 값만 받아 낸다 하더라도, 제국제 마법 무구를 몇 개는 살 수 있으리라.
"슬슬 장비 빨도 필요해지고 있으니까…."
왕관을 아공간에 넣은 이안이 다시 장내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측면의 벽 구석에 솟은 또 다른 대문에 멈춘 순간.
쿠… 구구구구….
알현실의 정문이 느릿느릿 열리기 시작했다.
수인과 흡혈 마족의 모습이 그 사이로 드러났다.
이안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샬롯이 먼저 장내로 들어섰다.
"호오… 대단하군…."
그녀의 모습은 대회관에서의 전투도 녹록지 않았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한쪽 볼에 가로로 길게 새겨진 새로운 상처. 쌍검 중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검집만 남았고, 새로 맞춘 방어구도 곳곳에 구겨지고 찢겨 나갔다.
견갑과 팔목 보호대, 허벅지까지 이어진 각반이 특히 그랬다.
안에 받쳐 입은 누비옷조차 갈기갈기 찢긴 한쪽 팔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부상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 많은 것들을 전부 홀로 상대했다니…."
그저 널브러진 친위병들의 잔해를 눈에 담으며 감탄할 뿐.
그 옆을 한심하다는 듯 노려보며 지나친 테사이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이안."
그녀의 행색 역시 남루해지긴 마찬가지였다.
늑대 로브는 곳곳이 찢어지고 구멍이 나서 너덜댔고. 안에 받쳐 입은 옷들은 죄다 찢어져서 새하얀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너희도."
이안이 걸음을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테사이아가 코웃음을 쳤다.
"이게 무사해 보여? 몇 번이나 죽을 뻔했어. 몇 번이나."
"엄살이 심하군. 그 정도론 죽지도 않는 주제에."
샬롯의 핀잔에 테사이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거의 다 너 때문에 그런 건데, 엄살? 이안, 쟨 그냥 광전사야. 도망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죽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군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잘들 하고 있군."
"뭐라고…?"
이안은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의 테사이아를 지나치며 덧붙였다.
"밖의 조각상들은 전부 해치웠나?"
"아쉽게도 그건 아니다. 갑자기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멈춰 버리더군. 덕분에 네가 이겼다는 걸 알았다."
그것들이 멈춘 건 여왕이 죽고 나서일까, 아니면 악마가 죽고 나서일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테사이아의 첨언이 이어졌다.
"그전까진 난리도 아니었어. 갑자기 칼에서 고드름이 튀어나오질 않나 얼음 가시가 치솟질 않나. 저 미친 야옹이만 신났었지."
여왕의 마법이, 대회관의 경호병들에게도 적용되었던 모양.
이안이 무심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샬롯이 덧붙였다.
"말은 결국 지키지 못했다. 적이 너무 많았다."
"테사이아가 피를 빤 건 아니고?"
"그것도 맞다."
"야, 그건 어쩔 수."
"하지만 그땐 이미 죽은 상태였고, 귀쟁이도 부상을 당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
끼어들었던 테사이아가 입을 뻐끔댔다. 샬롯이 자신의 입장까지 대변해 주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듯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예상하지 못 한 일은 아니야."
"복수는 제대로 해 줬다. 그거면 그 녀석들에게도 위안이 되겠지."
"그래서, 정말 여기 여왕이 잠들어 있기라도 했던 거야?"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타락했더군. 그래서 죽였다."
"대단한 업적이군. 왕 살해자라."
샬롯이 탄성을 흘렸다.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오해를 사기 딱 좋은 말이군. 어디 가서 그런 말은 하지 마라."
"그런데 어디 가, 이안?"
참 빨리도 묻는다.
알현실 측면의 문 앞에 멈춰 서며,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나가는 길을 찾아야 되거든."
"뭐라고…?"
테사이아가 순간 헐떡댔다.
"영원히 여기 갇힐 수도 있단 말이야?"
이안은 대답 대신 문을 밀기 시작했다.
벽을 미는 것 같은 묵직함.
쩍, 쩌적….
오랜 시간 열린 적 없는 듯, 문틈 사이로 얼음 깨지는 듯한 소리가 번졌다.
이안은 양팔에 더 힘을 줬다.
여왕과 악마를 죽이고 나서도, 동굴 입구가 움직일 때 느껴지던 지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동굴 입구는 아직도 지하에 묻혀 있으리란 의미였다.
그러니 다른 통로를 찾아야 했다.
넓은 궁전이니, 샅샅이 뒤지다 보면 하나쯤은 더 있을지도 몰랐다.
'최악의 경우엔 갈색을 찍을 수밖에. 지각 변동까지만 익히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을 테니까.'
쿠… 구구구….
다행히, 그런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한 문틈 너머로, 칠흑 같은 어둠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서늘한 한기가 흘러들었다.
'…어디로 이어지는 거지?'
이안이 미간을 좁히는 사이, 잽싸게 달려온 테사이아가 물었다.
"길이네? 나갈 수 있는 거야?"
"그건 가 봐야 알겠지."
내뱉은 이안이 다시 몸을 돌렸다.
테사이아가 눈을 끔뻑였다.
"길을 찾아 놓고, 또 어디 가?"
"궁전을 뒤질 거다."
걸음을 옮기며 대답한 이안이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냈다.
"너흰 쉬면서 상처를 치료해."
샬롯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전리품을 찾으려는 거냐? 그렇다면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뭐, 그럼 그러던가."
테사이아가 의욕 없는 표정으로 읊조렸다.
"…여기 뭔가 대단한 보물이 묻혀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있길 바라는 게 좋을 거다."
"왜?"
"여기서 얻은 전리품은 너희한테도 나눠 줄 거니까."
"...!"
눈을 치켜뜬 테사이아가, 곧바로 은발을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
파라락-!
"이안, 저 안쪽 방에 이런 돌이 잔뜩 쌓여 있어."
"마력이 다 빠져나간 마석이군."
"…쓰레기란 뜻이야?"
"바로 그거다."
파라락-
"이안, 저쪽엔 이런 뭔가 있어 보이는 책이… 어…?"
"다음부턴 들고 오는 동안 바스라 지는 건 그냥 버려라."
"...."
안에서부터 시작된 전리품 수색은 소득 없이 이어졌다. 지하 궁전은 정말 여왕의 연구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인 모양이었다.
알현실 옆에 따로 위치한 침실은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고. 이어진 여왕을 섬기는 마법사들의 휴식 공간. 창고. 연구실. 서고 따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나긴 시간을 놓여 있던 물건들은, 썩지도 않고 그저 빛 바란 채 삭아버렸다.
서고의 수많은 양피지와 책들은, 대부분 건드리기만 해도 툭툭 바스러졌다.
그나마 멀쩡한 책들도 건질 건 없었다. 하나 같이 불길하게 생긴 원시 상형 문자와 이안도 알아볼 수 없는 어려운 고대 북부어, 기호와 도형 따위가 빼곡했다.
심지어 방패로 써도 될 만큼 컸다.
땔감으로 쓰기 위해 몇 권 챙긴 게 소득의 전부였다.
공허의 힘을 연구할 때 쓰인 것으로 보이는 실험 도구들도 상태는 마찬가지였고, 창고마다 산처럼 쌓인 마석들은 마력이 모두 흩어진 돌 더미에 불과했다.
이안은 딱히 실망하지 않고 수색을 이어나갔다.
이미 충분히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이건 그저 혹시 모를 추가적인 보상을 놓치지 않기 위한 절차였다. 이런 본격적인 던전에 발을 들인 건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흠."
얼핏 보면 고문실 같은, 인간과 난쟁이를 대상으로 흑마법을 실험한 듯한 연구실과 불길한 주문 회로가 잔뜩 새겨진 용도를 알 수 없는 방 따위가 스쳐 지나갔다.
"북부 거인 왕국이 끔찍하게 타락했었다는 건 확실히 알겠군."
샬롯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저 조각상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저들 중에 마법사는 없었던 것 같은데…."
"마법사는 다 죽였겠지."
"...!"
"여왕은 힘에 대한 집착이 엄청났다. 공허의 비밀을 공유한 마법사들을 살려 둘 리가 없지. 다 죽였거나, 어쩌면 더 큰 힘을 얻기 위한 제물로 바쳐버렸을지도."
"설득력 있는 말이군…. 역겨운 주문쟁이 다운 방식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렇다고 네가 역겹단 얘긴 아니다, 이안."
"뭐, 틀린 말은 아니야. 나도 예외는 아니고."
이안은 다른 부분에서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진 공허의 힘을 끌어다 쓰면서 유지했다고 쳐도, 왜 아직도 어두워지질 않는 거지?'
궁전을 밝히는 광원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죄의 검도 여전히 침묵했다.
여기가 엄청나게 깊은 땅속이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마경이 아직 깨지지 않은 거라면, 여왕이나 악마가 아닌 다른 동력원이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벽을 부수고 다닐 생각까진 없었다.
최악의 가정이지만, 이 지하 궁전 역시 마법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풀겠답시고 들쑤시다 궁전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그보다 더한 개죽음은 없으리라.
'뭐, 용의 둥지였다니까. 용의 비전 같은 걸 수도 있겠지….'
파라락-
그때, 입구 근처의 통로들을 수색하러 간 테사이아가 돌아왔다.
이번엔 아예 빈손이었다.
"말도 안 돼. 이 넓은 공간에 쓰레기밖에 없다니…."
그녀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댔다.
샬롯이 콧방귀를 뀌었다.
"탐욕은 확실히 귀쟁이의 본성인 모양이군."
"난 그냥 내 걸 가져보고 싶은 것뿐이거든? 내 소유물이라고 할 만한 게 이 누더기뿐이란 말야."
샬롯이 뭐라 반격하려는 찰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저 앞도 다 허탕인 거냐?"
"여기보다 더해. 거긴 병사나 하인들이 쓰던 공간 같아. 낡아빠진 고철덩이들이 놓인 방 같은 거나 몇 개 있는 게 전부야. 내가 볼 때 여긴-"
"…고철덩이들이 놓인 방이, 몇 개나 있다고?"
이안이 말을 잘랐다.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확히는 세 개야. 둘은 거인들이 쓰던 걸 방 같고. 하나는 인간이나 난쟁이들이 쓰던 공간 같은데."
"...!"
샬롯이 이안을 돌아보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해맑게 덧붙였다.
"거인들은 정말 인간이랑 난쟁이를 노예로 부렸나 봐. 큰 것들이랑 작은 것들을 완전히 분리해 뒀어. 큰 것들 방은 화려한데, 작은 것들 방은 초라하고."
"그렇군. 그럼…."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테사이아를 마주 보았다.
"그 초라한 방으로 안내해라."
"...?"
#087화
초라하다는 건 궁전의 다른 방을 기준으로 한 이야기였다.
사람 백 명은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공간에, 온갖 병장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대부분은 변색되고 삭아 버린 것 같긴 했지만.
"멋지군…."
샬롯이 감탄한 얼굴로 장내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빛에,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뒤져 봐라."
샬롯이 재빨리 달려 나갔다. 발걸음에 생기가 돌았다.
"저러면서 나한테 탐욕 어쩌고 하다니. 참나."
반면 테사이아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걸음을 옮기며 이안이 내뱉었다.
"무기에는 관심이 없나 보군. 전의 그 심판자는 잘만 쓰던데."
"불편해. 쓰고 싶지도 않고. 아무래도 난, 그냥 요정일 시절에도 무기를 다루진 않았던 것 같아."
"무기를 다룰 줄 모르는 요정은 상상이 안 되는데…."
이안은 게임 속 요정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오만하고 동시에 잔혹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이종족들에겐 특히 더.
쇠나 두드리는 땅딸보라든가 누린내 나는 예비 마족, 돈 밝히는 들창코 등등.
그가 아는 이종족을 비하하는 욕 대부분은, 요정에게 배운 거였다.
"뭐, 알아서 해라."
이안은 다양하게 거치된 병장기들을 눈에 담으며 걸음을 옮겼다.
설정대로면 고대의 물건들이건만.
정보창을 확인할 수 있는 몇몇 물건들은, 내구도가 다했을 뿐 본래의 성능은 웬만한 이 시대 물건들보다 뛰어났다.
'제국을 제외하면 오히려 이때 기술력이 더 앞서는 것 같은데….'
하긴. 문명이 오히려 쇠퇴하는 건 본래 세상의 역사에서도 드물지 않게 일어나던 일이었다.
수많은 전쟁으로 점철된 이 세계에선 더더욱 잦았으리라.
번영했던 고대 왕국의 문명이 현 제국에 비견되는 수준이라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게임 속 유물들이 그렇게 뛰어난 능력치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제국의 기술자나 마법사들이 고대의 주문이나 기술을 연구할 이유도 없을 테고.
"…호오."
잡생각을 이어가던 이안의 걸음이 문득 멈췄다.
거치대에 툭 얹어져 있는 단검 하나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변색은커녕, 날의 예기가 그대로 살아 있는 양날 단검이었다.
날 표면에 묘한 문양이 일렁였다.
이안은 뭔가의 뼈로 만든 듯한 거무스름한 손잡이를 쥐었다.
정보창이 이어졌다.
고대의 운철 단검.
유물치곤 낮은 희귀 등급인 데다 특별한 마법이 새겨져 있지도 않았지만.
대신 공격력과 내구도가 특출나게 높았다. 내구도 감소 보정에 공격 시 장비 파괴 확률까지 옵션으로 붙어 있었다.
수리 불가능 옵션도 붙어 있었지만, 이건 유물들에 거의 다 기본적으로 붙어 있는 페널티였다.
'훌륭하군.'
기존의 단검 집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이안은 냉큼 아공간에 운철 단검을 챙겨 넣었다.
그 후로는 그다지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없었지만, 이안의 눈빛은 한결 여유로워졌다.
괜찮은 장비를 하나 건진 것만으로도 이미 소득은 충분했다.
"쓸 만한 물건을 찾았다, 이안."
샬롯이 다가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커다란 외날 도끼를 양손으로 든 채였다.
"너랑 참 어울리게 생겼네, 야옹아. 아주 무식해 보여."
테사이아가 비아냥댔다.
샬롯이 콧방귀를 뀌었다.
"귀쟁이다운 처참한 안목이군."
이안의 앞에 선 샬롯이 그에게 도끼를 내밀었다.
도끼는 보이는 것만큼 묵직했다.
넓고 길게 뻗은 외날. 날 하단은 길게 이어져, 자루의 절반 이상을 가릴 정도로 컸다.
자루를 쥔 손을 충분히 지킬 수 있을 수준. 거기다 자루까지 통째로 금속이었다.
"호오."
놀랍게도 이것도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희귀 등급인 고대 장인의 전투 도끼.
엄청나게 높은 공격력에, 무기임에도 방어력까지 올려 줬다. 내구도도 기본적으로 뛰어난데, 거기다 내구도 회복 옵션까지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자루를 따라 새겨진 고대어 주문이 보였다. 마석을 장착할 필요가 없는 걸 보니, 대기 중의 마력을 머금으며 작동하는 종류인 모양이었다.
옵션이 하나인 주제에 희귀 등급인 것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은 것도 이 주문 덕분일 터.
"훌륭하지 않나?"
샬롯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쓰기엔 너무 무겁군."
"그런가…."
샬롯의 귀가 살짝 처질 찰나.
"나보단 네게 어울릴 것 같은데."
"...?"
이안이 그녀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샬롯이 눈을 끔뻑였다.
이안이 그녀의 빈 검집을 턱짓했다.
"어차피 검도 한 자루 부러졌으니까. 이걸 다룰 수 있다면, 네가 써라."
"허…."
이안이 건넨 도끼를 받아든 샬롯이,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한 멍한 눈길로 도끼를 내려다보았다.
뒤이어 한 손으로 자루를 쥔 그녀가, 옆으로 슬쩍 팔을 휘둘렀다.
그녀에게도 무거워 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마음에 드는 눈치.
새로운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처럼 미소 짓던 그녀가, 퍼뜩 정신이 든 듯 이안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런 귀한 걸 내게 줘도 괜찮겠느냐?"
"어차피 난 있어도 안 써. 네가 안 쓰면 팔아 치울 거다. 돈으로 받고 싶나?"
"그럴리가…."
꾸욱, 도낏자루를 쥔 털로 뒤덮인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도끼를 응시한 샬롯이 다짐하듯 내뱉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다, 이안."
"말도 안 돼…. 또 저 짐승만 선물을 받다니."
테사이아가 탄식했다.
"원래 행운은 기대하지 않은 자에게 돌아오는 법이지."
보란 듯 도끼를 어깨에 걸친 샬롯이 그녀를 느긋하게 지나쳤다.
짤막한 꼬리가 흔들렸다.
그 뒷모습을 노려보던 테사이아가 홱 고개를 돌렸다.
"생각이 바뀌었어, 이안. 나도 이 안에서 뭔가…."
그녀의 목소리가 순간 끊어졌다.
주위를 은은하게 밝히던 광원이 한순간 사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쿠르릉….
저 먼 곳에서부터 번지는듯한 낮은 진동. 푸스스, 궁전의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지진이 잦아들었다. 다시 주위가 은은하게 밝아졌다.
굳어 있던 테사이아가, 눈동자만 굴려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거, 설마?"
"…여유를 너무 부렸군."
무표정해진 얼굴로 내뱉은 이안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
알현실로 돌아온 일행은, 곧바로 옆의 컴컴한 통로로 접어들었다.
어디로 이어진 길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횃불에 의지한 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살펴본바, 이곳 외에 다른 길은 결국 없었을 뿐만 아니라.
쿠르릉….
심연이 뒤척이는 듯한 나지막한 진동이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진동이 지하 궁전과 통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사실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여길 벗어나야 할 이유로는 차고 넘쳤다.
'…이래놓고 막다른 길인 건 아니겠지.'
이안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지하 궁전이 그랬듯, 이 통로도 게임에서 경험해 본 적 없는 길이었다.
이 세계에서 무지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가 새삼 와닿았다.
지하에 매몰되어 죽을 수도 있다는 가정 따윈, 지금까지 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
'만약 길이 막혀 있고 궁전도 무너진다면… 해 볼 수 있는 발악은 다 해 볼 수밖에.'
그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이런저런 계획을 쉴 새 없이 정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물론, 모두가 그처럼 미지에서 오는 두려움과 맞서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여기서 죽는다고…? 아니, 난 그냥 죽지도 못하잖아. 여기 영원히 산채로 파묻히게 되는 건가? 미라처럼 바짝 말라 가면서? 그건 안 돼. 얘들아, 부탁할게. 만약 그런 순간이 온다면 차라리 너희 손으로 날 죽여 줘. 아니? 난 죽고 싶지 않아. 이안, 이안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이안은 언제나 답을 찾아내니까. 이안, 그렇지? 제발 대답 좀-"
입술만 달싹이던 테사이아의 중얼거림이 점점 커졌다.
궁지에 몰리자 마족 특유의 광기를 주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주황색 눈동자가 결국 그녀를 노려보았다.
"입 좀 닥쳐라, 귀쟁아."
테사이아는 평소처럼 날카롭게 받아치지 않았다. 그저 붉은 눈의 떨림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샬롯을 마주 보았다.
"무서워서 그래, 샬롯. 넌 죽음이 두렵지 않겠지만, 난 아냐. 죽고 싶지 않아…."
"...."
샬롯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윽고 그녀가 내뱉었다.
"적어도 너 혼자 외롭게 죽지는 않을 거다, 귀쟁아."
"...."
"너 혼자 이 깊은 심연 속에 살아남을 걱정은 하지 마라. 그 전에 내가 안식에 이르도록 도와줄 테니."
"안식…? 죽음이?"
"수인은 그렇게 여기지. 루 솔라께서도 그리 말씀하셨고."
"마족인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모르지. 하지만 네 영혼이 설사 공허를 떠돌게 된다 해도, 산채로 억겁의 시간을 파묻혀 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은데."
"…하긴, 그래. 그것보단 죽는 게 낫겠지. 알았어. 그 순간이 오면 시원하게 한 판 붙자. 야옹아."
"…붙자고?"
"넌 싸우다 죽고 싶다며? 나도 네 소원 하나 들어주지 뭐."
선심 쓴다는 듯한 말투.
샬롯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하지만 난 이왕이면 이안의 손에 죽고 싶다."
"사실은 나도. 이안은 안 아프게 죽여 줄 것 같아."
"그 기회는 다음에 주도록 하지."
대답한 이안이, 샬롯과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지금은 저 앞에 있는 계단을 오를 준비부터 해야 할 것 같으니까."
"...!"
샬롯과 테사이아의 시선이 저 먼 어둠 너머를 훑었다.
기나긴 어둠 끝에, 한 칸 한 칸이 높은 계단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방금 한 말은 취소할게. 난 안 죽을 거야."
내뱉은 테사이아가 은발을 펄럭이며 앞서갔다.
서로를 돌아보며 짧게 피식한 이안과 샬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안과 샬롯은 한 칸의 높이가 무릎보다도 높은 계단을 올랐다.
이안은 물론이고 샬롯의 숨결도 조금씩 거칠어졌다.
지치는 게 당연했다.
숲에 발을 들인 이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휴식다운 휴식을 취한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그저 묵묵히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를 뿐.
"여기야. 여기."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느덧 계단이 끝나고 있었다.
웅웅, 문득 단죄의 검이 낮게 울었다.
비로소 티르 엔의 시선이 닿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마침내 이안이 계단 끝에 섰다.
"이거 문 맞지? 생긴 건 그런데, 밀어도 안 열려."
테사이아가 앞에 높다랗게 솟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하 궁전과 달리, 검은색에 가까운 돌로 만들어진 문이었다.
문 옆에는 이안보다도 큰 기둥이 하나 불쑥 솟아 있었다.
"기관 장치인가…."
이안이 그 앞으로 다가갔다.
샬롯이 눈치껏 뒤를 따랐다.
"뭐야. 그게 그냥 장식이 아니었어?"
테사이아도 얼떨떨한 얼굴로 다가왔다. 이안이 레버 아래의 틈을 내려다보았다. 흙먼지가 뒤덮여 있었다.
"내가 밀면, 힘껏 당겨라."
이안이 레버를 힘껏 밀었다. 좌우에 선 샬롯과 테사이아도 온 힘을 다해 함께 당겼다.
끼기긱… 끽… 철컥.
불편한 소리를 내며 움직인 기둥이, 이윽고 반대편으로 비스듬하게 밀려나 멈췄다.
철컥철컥, 드드드드드-
낡은 태엽과 도르래가 맞물리고 돌아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푸스스-
흙먼지와 함께, 문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기대와 달리 빛이 스며들지는 않았다.
칙칙한 어둠. 아직도 땅속이었다.
쿠구궁….
이윽고 낮은 울림과 함께 문이 완전히 열렸다.
이안은 문 너머로 드러난 광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또 다른 유적 내부였다.
"여긴 또 어디…."
읊조리던 테사이아가 입을 다물었다. 이안이 검지를 입술에 댔기 때문이었다.
둘에게 눈짓을 보낸 이안이, 조심스럽게 문 너머로 걸음을 내디뎠다.
퀴퀴한 고인 공기.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리는 듯한 넓은 적막.
여긴 그들이 지나온 통로와 마찬가지로 광원이 전혀 없었다.
꺼져 가는 횃불만이 주위를 간신히 밝혔다. 이안에겐 그 정도 빛이면 충분했다.
한 걸음 더 나온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벽면 한복판이었다.
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위치.
'비밀… 통로?'
이안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거인족 유적 특유의 높은 천장.
몇 미터 앞에 돌기둥이 보였다. 아무런 장식이나 무늬도 없었고, 꽤 넓은 간격을 두고 좌우로 이어졌다. 저 먼 건너편에도 똑같은 기둥이 보였다.
묘하게 낯익은 광경이었다.
'…설마.'
기둥을 따라 이어지던 이안의 시선이 멈췄다. 저 멀리, 닫혀 있는 거대한 대문이 보였다.
대문 한복판에는 망치를 뒤집어 놓은 듯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런 비밀 통로가 있었다고…?'
아히고른 산맥에는 거인 군단과 군단장이 잠든 지하 유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군단을 상징하던 문양이 바로 저 망치였다.
그들이 나온 이곳이 거인 군단 유적이라는 뜻이었다.
'그럼 여긴 던전 어디쯤인-'
쩍.
빙하에 균열이 이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진 건 그때였다.
굳어졌던 이안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반대 방향으로 돌아갔다.
줄지어 이어진 기둥 끝에 솟은 거대한 의자.
그 위에 얼어붙은 거대한 실루엣.
쩌적.
얼음에 금이 가는 소리가 다시 한번 이어졌다.
실루엣 너머로 피어오르기 시작한 푸른 안광까지 확인한 이안의 입가에, 비로소 헛웃음이 번졌다.
'이런 시발….'
군단장이 깨어나고 있었다.
#088화
"하…."
탄식은 짧았다.
들고 있던 횃불을 툭 바닥에 던진 이안은, 걷느라 느슨하게 풀어두었던 흉갑의 끈을 바짝 조였다.
스르릉-
단죄의 검이 잦아드는 횃불의 불빛을 반사하며 뽑혀 나왔다.
"이안. 갑자기 칼은 왜 뽑아?"
문 너머에서 지켜보던 테사이아가 참지 못하고 속삭였다. 이안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대답했다.
"봉인된 거인이 있다. 깨어나고 있어."
"뭐라고…?"
테사이아의 눈이 커졌다.
이안이 덧붙였다.
"너희는 물러나 있어라. 지치고 부상당한 몸으로 상대할 놈이 아닌 것 같으니까."
"어, 응. 네 뜻이 그렇다면-"
"지치고 부상당한 건 너도 마찬가지다, 이안."
문밖으로 성큼 걸어 나오면서 샬롯이 내뱉었다.
흐릿한 어둠 사이로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나도 너와 싸우겠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안이 맘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사이, 테사이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안이 괜찮다잖아, 야옹아…. 난 지금 엄청 배고픈 상태라고. 여기서 더 힘을 쓰면 이성을 잃을 수도 있단 말야."
"그럼 넌 빠져라, 귀쟁아."
"네가 싸우는데 내가 어떻게 빠지냐고. 이 미친 짐승아…."
체념하듯 중얼댄 테사이아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안이 바라보는 어둠 너머, 흐릿하게 번지는 푸른 안광을 확인한 그녀가 탄식했다.
"얼어… 있는 거야?"
"그래. 저 얼음이 봉인 같군."
쩌적, 이안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균열이 번지는 소리가 났다.
그 짧은 사이 이미 바람 칼날과 휘몰아치는 방벽을 시전한 이안이, 잿빛 마력이 맺힌 눈으로 샬롯을 돌아보았다.
"네 방식은 알지만, 저놈은 심상치 않다. 한 대라도 잘못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라."
장비들을 몸에 맞게 재조정하며,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지."
"그런 건 걔가 아니라 나한테 말해야 돼, 이안. 쟨 싸우기 시작하면 기억도 못 한다고."
"그럼 너도 신경 써라."
무심하게 대답하며, 이안은 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치직, 치지직-
단죄의 검을 타고 푸른 스파크가 번지기 시작했다.
저 너머, 거인 군단장의 모습이 얼핏 얼핏 드러났다.
다른 거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체구. 놈을 뒤덮고 있는 몇 센티미터 두께의 얼음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점점 더 크게 번지고 있었다.
그 너머로 일렁이는 푸르스름한 안광.
'게임이랑 똑같네, 시발….'
과거의 기억이 절로 뇌리를 스쳤다. 그때 이 지하 유적에 발을 들인 건, 북부에서의 스토리를 반 이상 진행했을 무렵이었다.
트라벨가에서 여러 퀘스트를 해결하고, 북부의 지휘관 중 하나인 루카스의 신뢰를 충분히 얻은 후.
그에게서 산맥 깊숙한 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유적의 입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인력 부족을 비롯한 여러 이유들 때문에 탐색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그곳을 탐사한 건, 당연히 그때까지만 해도 게임 캐릭터였던 그. 이안 호프였다.
그리고 그는 탐사뿐만 아니라, 산맥을 배회하는 정예 마물들과 지하 유적에 잠들어 있던 군단장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때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지하 유적에 이런 비밀 통로가 감춰져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위치상으론 지하 궁전에서 엄청나게 먼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산맥 지하에 그런 통로가 이어져 있다니.'
지하 궁전으로 인도하는 퀘스트인 '얼어붙은 심연'은 조건부 퀘스트가 분명했다.
하지만 조건을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지하 궁전에 발을 들일 방법이 숨겨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것도 흔히 말하는 숏컷. 보스 룸으로 직행할 수 있는 지름길로.
그가 군단장의 방으로 나왔듯, 여기서 출발하면 여왕의 알현실에 곧바로 도착하게 됐을 테니까.
물론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플레이어가, 최소 한 번은 게임 오버 당하게 만들려는 악랄한 의도도 있을 터였다.
'악마가 여왕을 봉인한 상태도 아닐 테니까, 내가 싸운 것보다 더 어려웠겠지.'
여왕의 지원을 받는 친위병들은 엄청나게 까다로운 상대였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여왕 본인과도 싸워야 할지도 몰랐다.
그 정도면 악랄한 걸 넘어 악의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 게임에는 어차피 그런 요소가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이안은 그보다는 수월한 전투를 치렀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이 달가울 수는 없었다. 심지어 지금은 게임도 아니었고, 게임 오버 당한 후에 다시 도전할 기회 같은 것도 없었다.
'그나마 이건 겪어 본 보스전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치치치치칫-
어느새 검신에 맺힌 번개가 잔뜩 응축된 채로 눈부시게 명멸했다.
샬롯도 전투 준비를 끝냈고, 테사이아도 언제든 뛰어오를 수 있게 낮은 자세로 기다렸다.
이안은 팔을 살짝 들어 그들이 움직이지 않게 저지했다.
아직 봉인이 다 풀리지 않았으니까.
저 얼음은 평범해 보이지만, 외부의 모든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절대적인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게임에서는 그랬다.
지금도 그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법을 날리면서 실험할 필요는 없지.'
게다가 저 봉인이 깨진다고 해서, 군단장이 곧바로 미쳐 날뛰는 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봉인된 부작용인지, 게임에서도 놈은 한동안 아주 둔하게 움직였었다.
경직 상태일 때 최대한 많은 공격을 퍼부어서 체력을 빼놔야 한다는 걸, 그때의 이안은 두 번의 죽음을 통해 배웠었다.
'이번엔 이왕이면 아예 죽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진심으로 생각하며, 이안은 언제든 튀어나갈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망국의 군단장은 단순한 패턴을 가졌지만, 그걸로도 충분할 만큼 강했다.
조금만 방심해도 그는 물론이고 누가 죽게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행은 모두 지쳤고, 저 뒤편의 닫힌 대문 너머에는 수백의 거인 군단이 잠들어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진짜 죽었고, 되살아난 놈들은 수십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놈들이 깨어나 합류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최대한 빨리 군단장을 처리해야 했다.
'이왕이면 전투 망치를 꺼내 들기 전에.'
빠각- 쿠르르르-
단말마 같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군단장을 감싸고 있던 얼음이 완전히 깨져 허물어졌다.
동시에 눈앞에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망국의 대장군.
퀘스트 창 너머로 반개한 푸른 안광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타타탓-!
이안이 쏘아진 화살처럼 달려나간 건 거의 동시였다.
혼돈력을 머금고 증폭된 바람 칼날이 그의 무거운 발걸음을 보조했다.
단죄의 검에 가득 맺힌 전격이 허공에 새하얀 선을 아로새기며 뻗어 나갔다.
쿠구구구-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는 군단장의 모습이 비로소 선명해졌다.
거대한 덩치. 빛이 바랜 두꺼운 전신 판금 갑옷. 양쪽 허리춤에 찬 두툼한 쌍검. 등에 멘 전투 망치의 자루가 한쪽 어깨너머로 삐죽했다.
투구조차 쓰지 않은 머리는, 거대한 두개골 위에 잿빛 찰흙을 얇게 펴 바르고, 그 위에 수염을 대충 붙인 것 같은 끔찍한 몰골이었다.
반개한 눈구멍에서 일렁이는 푸른 안광은,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음을 증명하듯 흐릿하게 일렁였다.
그리고 저 머리통이, 군단장의 약점이었다.
'한 방에 죽어 줬으면 좋겠는데.'
다시 한번 생각하며 달려간 이안이, 놈의 머리로 검을 내뻗었다.
꽈릉-!
빛의 검처럼 보이던 검날에서 굵은 벼락이 토해졌다. 어둠을 단숨에 가른 번개가 군단장의 머리를 관통했다. 푸른 안광이 일순간 출렁이고.
콰치지지지직-!
수천 마리의 실뱀처럼 터져 나온 번개 자락이 군단장의 머리에서 시작해 전신으로 번져 나갔다.
혼돈력을 잔뜩 머금고 증폭된 연쇄 번개.
그나마 혼돈력이 충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위력이었다.
"크오… 오오오오-!"
군단장의 얼어 붙은 입에서 고통과 혼란이 뒤섞인 함성이 쩌렁쩌렁 터져 나왔다.
이안은 곧바로 다음 주문을 준비하면서 땅을 박차고 솟구쳤다.
다른 거인들이 그렇듯, 군단장 역시 저항력이 높았다. 적색과 갈색은 반감에, 청색은 면역. 그나마 저항력이 낮은 건 회색뿐이었다.
하지만 이안이 공격용으로 익힌 전격 계열 회색 마법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공격용 회색 마법은 시전 시간이 길어서, 급박한 전투에서 사용하기 쉽지 않았다.
'가진 자원 안에서 최선을 다해 볼 수밖에.'
치치치칙-
연쇄 번개가 군단장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갈 때쯤, 번개 돌풍이 완성 됐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군단장을 향해, 새파란 뇌전 자락을 가득 머금은 돌개 바람이 밀려들었다.
파-치치치치칙-!
또 한 번의 눈부신 점멸.
감전 당하며 울부짖는 군단장의 머리로, 이번에는 이안이 쇄도했다.
이안은 머리 위로 치켜든 단죄의 검을 힘껏 내리쳤다.
콰직-! 카드드득-
군단장의 왼쪽 이마에 박힌 검날이, 눈과 광대뼈를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바람 칼날이 더해진 와중에도 바위를 자르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그 저항감을 더는 이겨낼 수 없을 때쯤, 이안은 다음 마법을 시전했다. 앞의 것들과 달리 시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회색 마법, 진공 폭발.
퍼억-!
무형의 폭발에 군단장의 거대한 머리가 뒤로 튕겨 나갔다. 검이 할퀴고 폭발한 그의 얼굴에서 피부 조각들이 후두둑 튀어 올랐다.
그 아래로 드러난 눈구멍에서, 푸른 안광이 타올랐다.
"우- 오오오오-!"
놈의 포효는 분노 보다는 당혹에 가까워 보였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불청객의 존재를 느끼고 봉인에서 깨어나기가 무섭게, 맹렬한 공세에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었으니까.
본능적인 당혹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리라.
그러나 그것이 전투 의지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푸확-!
놈의 전신에서 마력의 파장이 터져 나왔다.
아직 남아 번쩍이던 뇌전 줄기들이 단숨에 흩어지고, 진공 폭발의 여파로 뒤로 튕겨 나가던 이안의 미간도 구겨졌다.
'이걸 벌써 쓴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는 서리 방패를 시전하고 있었다.
물론 얼음 방패가 그의 앞을 완전히 가리는 것보다 파장이 그를 훑고 지나가는 게 더 빨랐다.
콰직-
얼음 방패를 두른 이안이 어깨부터 떨어졌다.
그의 몸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가 났다.
높은 저항력 덕분에 몸까지 얼어붙지는 않았지만, 갑옷을 비롯한 장비들 위로 서리가 맺혀 있었다.
파장이 훑고 간 땅바닥에도 새하얀 얼음이 맺혔다.
냉기 파장. 아니, 냉기 물결에 가까운 마력 폭발이었다.
'역시, 한 번엔 안 되는군.'
혀를 찬 이안이 사지를 움직여, 표면에 맺힌 얼음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빨리 상태 이상에서 벗어나 다음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타타탓-
그의 뒤로 거뭇한 인영이 쏜살같이 가까워진 건 그때였다.
슈확-!
몸을 일으키는 이안의 머리 위를 뛰어넘고 서리 방패의 가장자리를 박차며 솟구친 건, 거대한 전투 도끼를 양손으로 움켜쥔 샬롯이었다.
숨 쉴 틈 없이 이어진 이안의 공세가 끝났음을.
그걸 넘어 군단장이 반격까지 시작했음을 깨달은 순간 비로소 돌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캬오오오오-!"
그녀는 자신보다 한참 큰 군단장을 향해 포효하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일어서던 군단장의 안광이, 자신에게 쇄도하는 샬롯에게로 향했다.
쒸에에에엑-!
도끼가 파공음을 흩뿌리며 날아들었다. 군단장이 팔을 들어 그 앞을 막았다.
콰직-!
두꺼운 팔뚝 보호대 한복판이 움푹 구겨졌다. 군단장의 몸이 뒤로 밀려나, 놈이 앉아있던 거대한 돌의자에 부딪혀 휘청댔다.
비스듬하게 뒤로 넘어가는 군단장의 팔뚝에 매달리듯 착지한 샬롯이, 재차 도끼를 치켜 들었다.
콰직-! 콰직-!
그녀가 포효하며 도끼를 내리찍었다. 처음 사용하는 것임에도, 평생 도끼를 휘둘러 온 야만 전사 같은 익숙한 움직임.
도낏자루를 쥔 손과 새카만 털이 올올이 뒤덮인 팔뚝에 근육이 터질 듯 부풀었다.
콰직-! 콰드득-!
멈추지 않고 이어진 도끼질에 군단장의 팔에 덮인 두꺼운 갑주가 구겨지다 못해 찢겨 나갔다.
그 아래로 잿빛 피부가 드러났다.
콰직-!
기어코 그 위로도 도끼가 떨어져 내렸다.
군단장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피부에 도끼가 후려친 자국이 고스란히 남았고, 그 아래의 돌덩이 같은 새카만 속살과 근육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고통까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으- 오오오오오-!"
의자에 기댄 자세 그대로 포효한 군단장이, 반대쪽 팔을 힘차게 휘둘렀다.
강철보다 단단한 잿빛 손아귀가 그대로 샬롯을 후려쳐 날려버렸다.
대포알처럼 튕겨져 나간 샬롯이, 대각선에 위치한 기둥 하나를 몸으로 부숴버리고는 그 너머까지 날아갔다.
퍼억-!
그녀가 벽면에 처박히기 전에 낚아챈 건 은빛이 넘실대는 덩어리였다.
은빛 머리칼은 충격을 단번에 흩어 버리진 못한 듯 튕겨 나가 허공을 핑그르르 돌고는, 이윽고 기둥 옆에 수직으로 착지했다.
그대로 기둥을 박차고 날아오른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이 미친 짐승아! 반격 당하기 전에 몸을 빼라고!"
그녀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샬롯을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은빛 매가 샬롯을 낚아챈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익숙한 듯 반항하지 않고 매달린 샬롯이, 입에 머금은 피를 뱉었다.
부러진 이빨 몇 개가 피에 섞여 흩어졌다. 아물었던 한쪽 얼굴의 상처가 다시 터져서, 그녀의 얼굴 한쪽 면을 붉게 물들였다.
"이번 건 예상을 못 했다."
"이안이 한 말 기억 안 나? 한 대라도 잘못 맞으면 죽는댔잖아. 그리고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알고 있다. 그리고 방금은, 시간을 벌려고 한 거다."
"시간?"
"그래. 이안이 다음 공격을-"
콰르릉-
샬롯의 말을 자르며, 대기가 울렸다.
테사이아는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군단장 쪽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뇌전을 두른 단죄의 검.
검자루를 역수로 쥔 이안이 놈의 코앞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샬롯을 떨쳐내고 허리춤의 쌍검을 뽑으려던 군단장이,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빛의 검을 노려보았다.
콰직-!
뼈가 훤히 드러난 눈구멍으로 단죄의 검이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반대편 안광이 일순간 흔들리고.
쿠르릉.
몸속에서 터져 나온 새파란 전격에, 군단장의 머리가 튕겨 나가듯 뒤로 젖혀졌다.
머리의 모든 구멍에서 일순간 푸른 빛이 번쩍였다.
파치치칫-
연쇄 번개가 군단장의 머리 속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했다.
군단장의 거대한 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푸스스 잦아드는 놈의 안광을 내려다보며, 이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해치웠나…?'
#089화
사그라들던 안광이 폭발하듯 분출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경련하며 축 늘어지던 군단장의 전신에 순식간에 힘이 되돌아왔다.
동시에 전해지는 심상치 않은 마력의 울림.
'이런, 시발.'
인상을 구긴 이안이 놈의 가슴을 박차며 뒤로 몸을 날렸다.
"크… 오오오오-!"
콰아아아-
군단장의 전신에서 냉기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카가가각-
냉기를 잠시 막아내던 휘몰아치는 방벽이 찢겨나갔다.
쩌저적,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르는 이안의 전신에 얼음꽃이 피어올랐다.
인상을 찌푸리는 와중에도, 이안은 포효하며 일어선 군단장을 바라보았다. 놈이 등에 멘 거대한 전투 망치를 뽑아 들고 있었다.
'…결국 저걸 뽑는군.'
이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게임에서 군단장의 전투 페이즈는 크게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봉인에서 풀려난 직후의 맨손. 그리고 허리춤의 쌍검을 뽑아, 냉기 칼날과 충격파를 날려 대는 2단계.
마지막이 저 전투 망치였다.
전신에 냉기 폭풍을 두른 채로 접근하는 플레이어의 움직임을 둔화시키고, 망치로 후려치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파훼하기 쉽지 않은 강력한 패턴이었다.
저 망치에 정타를 얻어맞으면 즉사였으니까.
전투 망치의 크기로 미뤄 볼 때, 현실이 된 지금도 결과가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쿵.
군단장이 힘껏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일어서려던 이안은 다리가 편하게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위에 번진 서리가 전투화와 각반, 그리고 그가 땅에 딛고 있는 장갑 표면까지 뒤덮여 있었다.
시린 한기가 뒤늦게 전해졌다.
'염병하네, 진짜.'
이안이 힘껏 팔다리에 맺힌 얼음을 떨쳐내는 그때, 군단장의 시선이 문득 옆으로 돌아갔다.
놈의 안광이 분노로 타올랐다.
타타타탓-!
샬롯이 돌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단장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모양.
하지만 지금은 아까와는 상황이 달랐다.
"멈춰!"
이안이 소리쳤다. 하지만 샬롯의 귀에는 제대로 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이미 군단장의 주위로 휘몰아치는 얼음 폭풍으로 접어든 후였으니까.
쩍, 쩌적-
샬롯의 돌진이 조금씩 느려졌다.
그녀의 전신이 얼어붙고 있었다.
갑옷의 표면뿐 아니라, 그녀의 검은 털 위로도 성에가 맺혔다.
"크- 아아아아-!"
샬롯이 포효하며 돌진을 이어 갔다.
그녀의 몸을 덮던 얼음이 깨져 나갔다.
'죽고 싶은 것처럼 싸운다더니.'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쉴 틈 없이 빙하 장벽을 시전하고 있었다.
군단장이 머리 위로 전투 망치를 치켜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샬롯은 물러서거나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실 이미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으리라.
군단장이 저 망치를 내려치면, 다음 순간 남은 건 한때는 샬롯이라 불렸던 얼어붙은 고기 파편뿐일 터.
쩌저저적-
이안이 샬롯과 군단장의 사이로 손을 내뻗었다.
두꺼운 얼음 장벽이 순식간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 일격으로부터 샬롯을 완전히 보호할 만큼 솟아오르기엔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파라라락-!
쏜살같이 뻗어나가는 출렁이는 은빛 덩어리가 시야에 들어온 건 그 직후였다.
이안은 그제야, 이대로면 샬롯이 죽으리라 생각한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콰지지직-!
힘껏 내리친 전투 망치가 아직도 솟구치는 중인 빙하 방벽을 깨부수며 떨어져 내렸다. 테사이아가 샬롯을 낚아채 집어 던진 건 거의 동시였다.
그 과정에서 일순간 느려진 테사이아의 몸을, 방벽을 깨부수며 떨어진 망치가 스치고 지나갔다.
쿠우웅-!
바닥을 친 망치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말려든 흡혈 요정을 바닥에 한차례 처박고, 벽면까지 단숨에 날려 버리기 충분하고도 남는 위력이었다.
콰드득-!
벽에 함몰된 것처럼 처박힌 테사이아에게서 끔찍한 소리가 터졌다.
"테사…?!"
똑같이 벽에 처박혔으나 별것 아닌 충격만을 받았던 샬롯이, 그제야 눈을 치켜떴다.
벽에 박혀 있던 테사이아가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가 입은 충격을 증명하듯 사방으로 튄 핏방울들이, 평소처럼 곧바로 그녀에게 모여들지 못하고 그저 흘러내렸다.
샬롯은 더 볼 것도 없이 테사이아를 향해 내달렸다.
방금 그녀가 자신을 살렸음을 모를 리 없는 그녀였다.
촤아악-
미끄러지듯 멈춰선 샬롯이 테사이아를 붙잡아 들었다.
온몸의 뼈가 다 으스러지고 살이 터진 끔찍한 몰골.
의식을 잃은 듯, 샬롯에게 붙잡히고도 잠깐 꿈틀댄 게 전부였다.
"제기랄…."
탄식한 샬롯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아귀를 그은 그녀가, 테사이아의 으깨진 입술 사이로 피를 흘려 넣었다.
그녀는 테사이아가 이런 상태에서도 죽지 않음을. 시간이 많이 필요할 뿐, 충분히 본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빚의 문제였다. 평생 마족 취급을 받으며 살아 온 수인에겐 그 무엇보다 혐오스러운 존재인 진짜 마족에, 심지어 원수나 다름없는 요정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목숨까지 빚지고도 가만히 버려둘 수는 없었다.
테사이아의 으스러진 목덜미가 꿀렁댔다.
하지만 그건 무의식적인 본능의 발현일 뿐이었다.
그녀의 의식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의식이 있다 한들, 눈알이 다 터지고 온몸이 다 으스러진 상황에선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겠지만.
콰아아-
번질 리 없는 후끈한 열기와 함께 등 뒤가 대낮처럼 밝아진 건 그때였다.
"...?!"
뒤를 돌아본 샬롯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한 차례 더 망치를 내려친 군단장의 모습. 그리고 그 망치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이안의 검에서 물결처럼 넘실대며 끝도 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샛노란 화염.
화염 해일이 군단장의 냉기 폭풍과 맞부딪치면서, 오히려 화염 폭풍이 되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선 이안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표정했지만, 군단장을 노려보는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흉흉하게 번뜩였다.
콰르르르-
장내를 얼어붙게 하던 냉기가 어느새 완전히 열기로 바뀌었다.
"...!"
넘실대며 사방으로 번지는 불의 물결이 자신 쪽으로도 가까워지자, 눈을 치켜뜬 샬롯이 테사이아를 안아 들며 몸을 날렸다.
군단장과 이안으로부터 가장 먼 기둥 뒤에 몸을 가린 그녀가, 기둥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전장을 돌아보았다.
지금부터는 그녀가 끼어들 영역이 아니었다.
콰아아아아-
화염 폭풍이 제멋대로 날뛰게 풀어 둔 채, 불길이 휘몰아치는 검을 움켜쥔 이안이 솟구쳤다.
***
'이게 되네.'
무표정하게 군단장의 얼굴을 노려보는 것과 달리, 이안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냉기 폭풍을 상쇄하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펼친 화염 해일이, 생각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기를 중화시키는 정도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화염 폭풍으로 승화될 줄이야.
그의 검에 휘몰아치는 불길도 마찬가지였다.
바람 칼날을 따라 넘실대면서, 불의 검을 움켜쥔 것처럼 변한 것이다.
'전에 할 땐 잘 안 됐었는데.'
이안은 전에도 비슷한 시도를 했던 적이 있었다.
바람 칼날이나 휘몰아치는 방벽에 불길이 맺히게 만들 수 없을까 싶어, 화염구나 화염 방사를 더해 본 것이다.
물론 그때는 폭발에 바람이 흩어지거나 불길이 사그라들 뿐이어서, 더는 시도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화염 해일은 아니었다.
'화력 부족이었나? 아니면 불길의 성질이 다른가?'
어쩌면 마법에 담긴 마력량의 차이 때문일지도.
어느 쪽이건,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놀랐냐, 새꺄."
코앞까지 다가온 군단장의 안광을 노려보며 내뱉은 이안이, 검을 놈의 드러난 눈구멍을 향해 내뻗었다.
콰르르르르-
검신에 맺힌 불길이 군단장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를 잡아먹으며 타올랐다. 일렁이던 안광이 바스러지고, 검날이 군단장의 눈두덩이를 파고들었다.
놈의 저항력 따윈, 지금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전투 망치를 꺼내 들었다는 것 자체가, 놈의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였으니까.
"오오오오-"
군단장의 입에서 고통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안은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았다.
놈의 눈두덩이에 깊숙이 박힌 검날이 붉게 달아올랐다.
콰아아아아-
뒤이어 샛노란 불길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혼돈력을 머금은 화염 방사. 불길은 군단장의 뒤통수를 뚫고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대신 놈의 몸속으로 뻗어나가, 내부를 산 채로 불살랐다.
콰르르르르-
비명조차 흘러나오지 않는 군단장의 벌어진 입에서 불길이 혓바닥처럼 넘실댔다.
놈의 전신에서 끊임없이 번져 나오던 냉기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이안은 마지막 한 가닥의 불길까지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푸스스….
불길이 잦아들었다. 냉기 폭풍을 타고 휘몰아치던 불길이 사방으로 바스러지며 수많은 불똥을 허공에 흩뿌렸다.
남은 건 벌겋게 달아오른 단죄의 검과, 군단장의 모든 구멍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뿐.
철크렁-
구단장의 손아귀에서 전투 망치가 떨어졌다.
서 있던 군단장의 몸이, 이안이 매달린 앞쪽으로 통나무처럼 기울어졌다.
재빨리 뒤로 몸을 날린 이안이 바닥을 굴렀다.
쿠웅-
군단장이 쓰러졌다. 그대로 일어선 이안은,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단죄의 검을 움켜쥔 채 놈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가 양손으로 움켜쥔 검을 치켜들었다.
콰직! 콰직!
이안은 군단장의 목을 연달아 내리쳤다. 아름드리나무를 베어내는 듯한 감촉.
콰득-
마침내 군단장의 머리가 완전히 몸에서 분리됐다. 푸학, 놈의 전신에서 푸른 마력이 뿜어져 나와 허공에 넘실대는 불씨를 꺼뜨리며 증발했다. 오싹한 한기가 이안의 전신을 핥고는 흩어졌다.
"하아… 하아…."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며, 이안이 굽혔던 허리를 들었다.
불씨까지 모두 꺼지면서 상대적으로 더 어두워진 시야 한복판에,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뒤이어 레벨 업을 알리는 확인 창이 이어졌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 1년 반 가까이가 지난 지금, 비로소 레벨이 하나 오른 것이다.
동시에 그건 곧, 상위를 넘어 고위 마법을 익힐 수 있는 영역에 첫발을 들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게임이었을 때는 끝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영역.
하지만 이안은 큰 기쁨이나 희열에 휩싸이지 않았다.
"...."
그저 숨을 고르며 눈을 감은 채, 청각에 온 정신을 집중할 뿐.
군단장의 죽음을 깨달은 거인 군단이 눈을 뜨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뒤통수였다.
다행히도 거인의 포효나 발소리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다.
들리는 건 자신의 펄떡대는 심장 소리와,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수인의 숨결뿐.
"후…."
비로소 검을 회수한 이안이 비틀댔다.
집중력을 너무 오래 유지하고 마력을 소모한 여파가, 비로소 밀려들었다.
게임에선 레벨이 오르면 체력과 마력이 일정 비율로 회복되었었는데.
지금은 딱히 그런 징후를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지독한 피로감뿐.
"…끝났다. 나와라."
비틀대며 걸음을 옮기던 이안이 내뱉었다.
기다렸다는 듯 샬롯의 길고 단단한 실루엣이 드러났다.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 아까는-"
"날 구하려고 한 거지. 알고 있다. 테사는?"
"…회복되고 있는 것 같다. 아직 의식은 없지만."
이안은 샬롯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있음을 느꼈다. 아주 희미했지만, 평소 테사이아를 대할 때의 냉랭한 말투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미운 정이라도 든 건가.
"그래. 야영지를 꾸릴 거다. 그 녀석도 회복해야 하고… 나도 한계니까."
내뱉으며, 이안은 아공간에 손을 넣었다.
내부를 거의 가득 채우고 있던 커다란 고서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아공간 구석, 땔감으로 쓰기 위해 미리 챙겨 둔 나뭇가지들도 전부 꺼냈다.
화륵-
이안이 던진 불덩이가 고서에 떨어졌다.
학자나 마법사에겐 하나하나가 대단한 가치를 지녔을 거인 여왕의 연구 기록들이,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 갔다.
이어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낸 이안이 모포와 붕대, 보존 식량을 대충 꺼내 샬롯에게 건넸다.
테사이아에게 모포를 덮어주며 샬롯이 말했다.
"혹시 모르니 내가 불침번을 서겠다. 쉬어라, 이안."
"저 문이 열리거나, 뭔가 다가오는 소리가 나면 바로 깨워라."
"그러지."
생각할 것들이 잔뜩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여력이 없었다.
깨우란 말이 무색하게, 이안은 눕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심연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이안은 소리 없이 눈을 떴다.
싸늘하고 칙칙한 공기와 흐릿한 어둠.
모닥불의 온기가 아직도 느껴졌다.
한나절은 기절할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정신이 맑았다. 몸도 푹 쉰 것처럼 상쾌하고, 마력 소모의 후유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레벨 업 덕분인가…?'
게임일 땐 즉각적으로 회복되던 체력과 마력이, 이제는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회복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찌 됐건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아직 지하 유적 내부였으니 더더욱.
"…일어났군."
그가 몸을 일으키자, 옆에서 샬롯의 잠긴 목소리가 번졌다.
놀랍게도 그녀는 아직 깨어 있었다. 물론, 주황색 눈동자에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긴 했지만.
"내가 얼마나 잤지?"
"몇 시간. …어쩌면 그 이상. 사실, 전혀 모르겠군."
샬롯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피식한 이안은, 자신이 덮고 있던 모포를 그녀의 모포 위에 얹었다.
"자라. 반나절 뒤에 깨워 줄 테니."
"알겠다…."
샬롯이 옆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그녀의 숨결이 곧바로 잦아들었다.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군.'
이안은 잦아드는 모닥불에 나뭇가지와 책을 더 얹었다. 땔감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지하에서 이렇게 불을 피워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이어졌다.
하지만 숨 쉬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여전히 공기가 싸늘한 걸 보니 모종의 환기 시설이 갖춰져 있는 모양이었다.
겉보기론 전혀 알 수 없었지만.
"...."
이안은 여전히 미동도 없는 테사이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처음에는 가죽만 덮인 연체동물 같더니, 이제 거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입가에 불그스름한 자국이 남은 걸 보니, 샬롯이 피를 더 먹인 모양이었다.
'눈 뜨자마자 미쳐 날뛰는 걸 볼 일은 없겠네.'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수통과 육포를 집어 들었다.
아무리 체력이 회복되었더라도 먹어 둬야 했다.
기계적으로 턱을 움직이면서, 이안은 저만치에 쓰러진 군단장의 시신을 돌아보았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죽음을 맞이한 고대 거인의 시신은, 다시 봐도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사실 지하 궁전에 발을 들인 이후의 기억이 전부 그랬다.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냐고….'
생각해 보면 왕 살해자라는 샬롯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다.
고대 거인 왕국은, 이제 정말 완전히 멸망해 버린 셈이었으니까.
이안은 게임에서의 기억을 곱씹었다. 광기에 뒤덮인 망령들이 북부 장벽으로 몰려들던.
'…여왕이 통제력을 잃어서 생긴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때는 끝내 여왕이 악마를 흡수한 걸지도 몰랐다.
아니면 거꾸로, 그녀에게 봉인된 악마의 반란이 성공했던 걸지도.
어느 쪽이건 만약 그렇다면, 이안이 여왕과 악마를 모두 죽인 지금은 그때와 같은 대규모 전투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북부가 맞이하게 될 미래 역시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식사를 끝낸 이안이 일어섰다.
이제 미뤄 뒀던 일들을 처리할 시간이었다.
#090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기면서, 이안은 상태 창과 스킬 창을 차례로 확인했다.
추가 포인트가 들어와 있었다.
퀘스트가 아닌 레벨 업으로 포인트를 얻었다는 사실에, 어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작은 기쁨이 샘솟았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찰나에 불과한 감흥이었다.
"...."
모든 창을 닫으며 군단장의 시신을 지나친 그는, 놈이 앉아 있던 의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여왕의 왕좌가 그러했듯, 특별할 것 없는 의자였다.
상형 문자와 기호, 도형으로 이루어진 고대 주문 회로가 촘촘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 전부였다.
내부에서 여전히 희미한 마력이 느껴졌다.
'지하 궁전이랑 동력원이 같은 건가…?'
이안은 새삼, 거의 무한대에 가까워 보이는 마력의 원천에 대한 호기심을 느꼈다.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는 몰라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력의 황혼기인 지금은 더더욱.
'용의 힘을 쓴댔지… 설마 정말 용이 동력원이기라도 한 건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당장 떠오르는 추측은 그것뿐이었다.
용은 살아 있는 마력 덩어리 같은 존재였으니까. 오래 산 용의 유해 같은 것에서 마력을 뽑아내고 있는 거라면, 이런 유적을 천 년도 넘게 유지시킬 수 있으리라.
'언젠가 용과 싸워서 이기게 된다면… 반드시 그놈의 마력의 근원을 찾아내야겠군.'
마력의 제약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 세계가 끝나는 순간까지 살아남는 것도 더 이상 막연한 목표는 아닐 터였다.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도, 용의 근원을 손에 넣어도 그걸 그가 사용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의자에서 더는 건질 게 없다는 걸 확인한 이안은, 주변을 한차례 돌아보고는 군단장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영혼은 물론 품고 있던 마력까지 모두 잃은 군단장은, 아주 오래된 미라처럼 변해 있었다.
"흐음…."
절그럭, 이안은 놈의 허리춤에서 쌍검을 분리해 냈다.
거의 그의 키만 한 칼이었다.
날이 끝부분에서 살짝 휘어지는 외날 검.
심지어 정보도 확인할 수 있었다.
군단장의 대검.
'인간에겐 양손 검이다, 이거지.'
무려 유일 등급. 몇 가지 능력치 보정에, 냉기 칼날 스킬까지 사용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면이 넓적한 날을 검집에서 뽑아 쥐어 본 그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검집에 되돌렸다.
억지로 쓰라고 한다면 아예 못 쓸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 몸처럼 휘두르는 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걸로 누굴 후려친다면 베는 게 아니라 때려죽이는 것이 되리라.
'비슷한 걸 무슨 만화 같은 데서 본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검 하나를 아공간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두 개를 다 넣을 수는 없었다.
사실 검의 크기를 봐선, 하나라도 들어가진 것이 기적이었다.
다음은 전투 망치였다.
이건 도저히 인간이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군단장조차 양손으로 쥐고 둔중하게 휘둘러 대던 물건이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도 정보를 볼 수 있다고…?'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군단장의 전투 망치. 유일 등급이었고, 충격파 스킬이 옵션으로 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이걸 대체 누가 쓸 수 있단 거지. 거인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 같은데.'
획득 가능한 전리품은 그 정도였다. 갑옷은 정보 확인도 불가능했고, 벗겨 봐야 쓸 수도 없었다.
정수라도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생한 보람이 없진 않네. 왕관에 단검에 대검에, 스킬 포인트에….'
거기다 혼돈의 파편도 커졌고, 군단장을 죽인 보상으로 냉기 저항력도 조금 올랐다.
추가적인 저항력은 스킬 포인트보다도 드문 보상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챙겨 가야겠지."
이안은 군단장의 잘린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비쩍 말라서인지 덩치에 비해선 작은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들고 다닐 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봉인함에 잘 구겨 넣으면 어떻게든…."
군단장의 머리를 양손에 든 이안이 중얼댈 때였다.
"헉…!"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테사이아가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눈을 끔뻑이는 그녀의 표정은, 말 그대로 얼떨떨해 보였다.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주위를 돌아보던 그녀의 시선이, 이윽고 이안에게서 멈췄다.
"멀쩡해 보이는군."
이안이 내뱉었다.
크게 말하지 않았음에도 목소리가 웅웅 울리면서 번져 나갔다.
"그러게.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이야."
그녀가 뱀파이어가 아니었다면 즉사하고도 남았을 상태였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깨를 으쓱이는 이안을 잠시 바라본 테사이아가, 이윽고 덧붙였다.
"그런데 그 머리는 왜 들고 있는 거야, 이안?"
"전리품으로 들고 갈 거다."
이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테사이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설마 그거, 샬롯한테 배운 거야?"
"...."
***
"뭐, 그래도 아예 은혜를 모르는 짐승은 아니네."
이안이 봉인함에서 꺼내 건네준 옷을 걸치면서,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눈을 뜨자마자 어떻게 된 거냐며 떠들어 댄 그녀는, 결국 이안의 입에서 그 후의 전말을 끄집어냈다.
물론 아주 간소화된 얘기였지만.
테사이아는 또다시 그것만으로도 한참을 떠들어 댔다.
아예 적막한 것보다는 나쁘지 않아서,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깨를 으쓱이는 식으로 그녀의 말에 호응했다.
부지깽이로 쓰던 단죄의 검 검날을 더러운 천으로 닦아 내면서.
티르 엔의 신도들이 봤다면 참담한 심정이 되었을 행동이었지만,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정말이지, 너랑 함께 다니려면 목숨이 두어 개여도 부족할 것 같아, 이안."
테사이아가 문득 말했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악의 없는 얼굴.
"그렇잖아. 타락자에 마물에 마족에… 이젠 네 손으로 고대 거인인지 뭔지 하는 것들까지 죄다 죽여 버렸으니까."
"마족은 내가 아니라 널 따라온 놈이었던 것 같은데."
"물론 그렇지만… 이러다 언젠간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어. 내가 아니라, 여기 이 야옹이가."
테사이아가 잠든 샬롯의 종아리를 발끝으로 툭툭 쳤다. 샬롯은 입맛을 한 번 다셨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테사이아를 바라보던 이안이 툭 내뱉었다.
"그래서, 후회하냐?"
"뭘 후회해?"
"날 따라온 거."
"그건 아니야. 그러지 않았다면, 난 이미 예전에 루 사드로 끌려갔을 테니까."
"...."
이안은 그녀가 애초부터 자신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스스로 심판자를 이겨 낼 힘을 키울 수 있으리란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악점이 명확할 뿐, 어떤 의미론 자신보다 더 강한 존재가 되었으리란 사실도.
그녀가 선택한 일이었고, 동시에 이미 지나간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끝내 반드시 그의 손에 죽게 되었을 터였다.
그러니까 살아남을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생존이란 측면에선 최악의 결말은 피한 셈이었다.
물론 끝까지 그럴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널 떠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안. 혼자서 저런 거인을 상대하는 전사… 아니, 마법사… 아니, 아무튼. 대륙에 너보다 강한 존재가 과연 있을까 싶거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 그래도 뭐, 네 뒤에 잘 붙어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안은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긍정적이군. 어떤 최악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지금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미래는, 루 사드로 다시 잡혀가는 게 아니라 네가 내 목숨을 노리는 거야."
테사이아가 차분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난 네가 제일 무섭거든. 물론, 제일 맛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덕분에 편하게 욕망을 억누를 수 있지."
약발이 잘 먹힌다니 다행이군.
피식한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당장은 저 문밖에 있는 것들부터 무서워하는 게 좋을 거다. 우린 아직 유적을 나간 게 아니니까."
"…문밖?"
테사이아의 표정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밖에, 뭐가 더 있어?"
"봐서 알겠지만, 저놈은 군단을 이끄는 대장이었다. 그런 놈이 혼자 이곳에 묻혀 있었을 리가."
"...."
테사이아의 입이 벌어졌다.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또 목숨 건 싸움을 하게 될 수도 있겠군."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샬롯이 푸스스, 몸을 일으켰다.
"아직 반나절까진 안 된 것 같은데."
이안의 말에, 샬롯이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쉬었다."
"뭐라는 거야. 살이 쪽 빠졌는데."
테사이아가 비웃듯 말했다. 그녀를 슬쩍 돌아본 샬롯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테사이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머, 샬롯. 그게 전부야? 내가 또 네 목숨을 구했는데?"
"네 입가에 묻은 피가 누구 것일지 생각해라. 그만하면 빚은 충분히 갚은 것 같은데."
이안은 군단장의 머리를 봉인함에 담아 아공간에 넣었다.
움직일 준비는 빠르게 끝났다.
일행이 높다란 대문 앞에 섰다.
질렸다는 듯 문을 올려다 보면서,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이제 거인이라면 지긋지긋해. 다신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만큼."
"그 부분은 나도 동감이야."
내뱉으며, 이안은 대문을 힘껏 밀었다.
테사이아의 염원 덕분인지, 이어진 방마다 놓인 석관들은 단 하나도 움직이거나 열리지 않았다.
군단장을 잃은 거인 군단은, 끝내 깨어나지 않았다.
"…뭔가 꺼림칙한데."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몇 시간 후.
쿠구구구….
느릿느릿 열리는 대문 너머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폐를 얼릴 듯한 한기도.
"햇빛이 반가운 날이 있을 줄은 몰랐어."
망토의 두건을 눌러쓰면서,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문밖으로 나서며 샬롯이 피식댔다.
"마족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소릴 하는군."
"입들 다무는 게 좋을 거다."
이안이 말을 잘랐다.
샬롯과 테사이아를 돌아보며, 그가 덧붙였다.
"여기서 무사히 내려가려면, 말할 힘도 아껴야 할 테니까."
아공간에서 설표 망토를 꺼내 목에 두른 이안이, 유적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흰색과 검푸른 색으로 뒤덮인 험준한 산이, 거친 바람과 혹한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
"후…."
소년, 아스켈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슬슬 숨소리를 조심해야 할 시점이었다. 귀 밝고 겁 많은 짐승들을 죄다 쫓아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어깨에 걸치고 있던 활을 꺼내 들면서, 아스켈은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은 앙상한 나무와 바위, 창백한 눈이 덮인 산기슭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둘러야겠네."
눈을 한주먹 문 그가 읊조렸다.
이른 아침에 마을을 나섰건만.
어느새 해가 중천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어제 꿈이 좋았으니까. 오늘은 허탕은 아닐….'
생각하던 아스켈의 고개가, 득달같이 계곡 위로 돌아갔다.
버석대는 발소리들이 귓가를 스쳤기 때문이다. 짐승이 내는 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아스켈은 판단과 동시에 움직였다.
근처의 바위 뒤로 달려간 그는 재빨리 퇴로를 살피고, 몸을 숨긴 채 계곡을 노려보았다.
곧 불청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아스켈의 눈이 커졌다.
짐승이 두 발로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에는 늑대 털로 만든 망토를 두르고, 그 아래로는 인간처럼 갑옷까지 걸치고 있었지만.
갈기가 풍성하게 돋은 얼굴은 분명 육식동물의 그것이었다.
저건 가면 따위가 아니었다.
두 발로 걸으며 사람 말을 하는 짐승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린 아스켈이, 속으로 탄식했다.
'마족…!'
그 옆에 걷는 회색 머리칼의 여자도 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핏기없는 창백한 피부. 끝이 삐죽 튀어나온 귀. 심지어 이 산속을 맨발로 걷고 있었다.
앞장선 흑발의 남자는 인간 같았지만, 얼굴에 표정이 전혀 없었다.
사람 가죽만 뒤집어쓴 것처럼.
결정적으로, 저긴 산맥 쪽이었다.
산맥에서 온 자들이 평범한 인간일 리 없었다.
'어떻게 대낮부터 돌아다니는 거지…?'
생각하며, 아스켈은 바위 뒤에 바싹 몸을 숙였다. 숨을 느리게 쉬면서 기척을 최대한 죽였다.
저벅- 저벅-
괴인들의 발소리가 아스켈이 숨은 바위 근처를 지나쳤다. 숨을 참고 있던 아스켈은, 그들이 지나치고 나자 비로소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두 괴인이 멀어지고 있었다.
'…둘?'
아스켈이 굳어졌다.
"도적이라도 있는 건가 했더니."
위에서 그르렁대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 직후였다.
"헉…!"
숨을 삼킨 아스켈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없었건만.
어느새 그 새카만 마족이 바위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주황색 눈동자 한복판.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아스켈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여기 숨어서 뭘 하는 거지?"
#091화
"...."
시선에 담긴 살의에 얼어붙은 것도 잠시.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다."
고저 없는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느새 바위 옆으로 다가온 검은 머리의 남자가 아스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망토 사이로 검 자루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얼굴 곳곳에 튄 핏자국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심연처럼 검은 눈으로 아스켈을 바라보며, 남자가 물었다.
"여기서 혼자 뭘 하고 있었지?"
역시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아스켈은 활을 힘껏 움켜쥐었다.
죽더라도 벌벌 떨며 죽고 싶지는 않았다. 할 말은 다 하고, 그걸로 부족하다면 싸우다 죽어야 했다.
아스켈이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애쓰며 내뱉었다.
"당신들을 피해서… 숨어 있었습니다."
물론, 말투가 조금 공손해지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남자의 미간이 좁아졌다.
"숨어?"
"역시, 구린 게 있는 놈이군. 그게 아니라면 숨을 이유가 없지."
마족이 그르렁대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여길 내려가면 도적떼라도 숨어 있나? 네 신호를 기다리면서."
"그게 무슨…."
어리둥절하게 읊조리던 아스켈은, 이내 자신이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위험한 곳에서 도적질을 하다간 굶어 죽거나, 마물의 먹이가 될 겁니다."
"그럼 왜 숨었지?"
"산맥 쪽에서 오셨으니까요. 저기서 넘어오는 건 괴물들뿐이니까."
"우리도 그런 괴물이라고 생각한 거군. 그래서 숨어 있었던 거고."
남자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저도 모르게 마족을 곁눈질 한 아스켈이 되물었다.
"아니십니까?"
"당연하지. 우린 용병이다. 의뢰를 해결하고 돌아가는 길이야."
"...."
아스켈이 눈을 깜빡였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지금 같은 겨울에는 더더욱.
산맥 인근은 숙련된 전사도 쉽게 목숨을 잃는 위험한 곳이었다.
"또 야옹이 때문에 오해가 생긴 거네. 하긴, 누가 안 그러겠어."
맨발의 요정이 비웃듯 말했다.
마족이 송곳니를 드러내는 가운데, 남자가 아스켈을 내려다 보며 덧붙였다.
"숨은 건 그렇다 치고. 그럼 넌 왜 여기 혼자 있지?"
"사냥을 하러 온 겁니다."
"믿기 힘든 말이군. 네 말대로 여긴 위험한 곳인데. 너 같은 꼬마가 혼자 사냥이라니."
잠시 미간을 찌푸린 아스켈은, 그냥 툭 터놓고 말하기로 했다.
어차피 숨길 얘기도 아니었다.
이들이 인간이건, 아니건.
"전 꼬마가 아닙니다. 그리고 마을 근처엔 사냥감이 별로 없습니다. 씨가 말랐죠. 여기 위험한 대신, 사냥할 게 제법 있고요."
"다른 어른들은 뭘 하고?"
"어른들은 어른들의 일이 있죠. 전 아직 성인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거기 끼워 주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겁니다."
"배포가 대단한 녀석이군. 마물을 마주치면 어쩌려고."
"숨거나 도망치면 됩니다. 전 발도 빠르고, 이 근방도 훤히 꿰뚫고 있거든요."
지금은 허무하게 붙잡혔지만.
아스켈이 뒷말을 삼키는 사이, 마족과 눈빛을 교환한 남자가 어깨를 까딱였다.
뭔지는 모르지만 분위기가 느슨하게 풀어지고 있었다.
아스켈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그냥 죽이거나 잡아먹으려는 거라면, 이렇게 계속 말을 걸 이유가 없을 터였다.
맨발의 요정이 그의 앞으로 다가선 건 그때였다.
"반가워. 난 테사이아라고 해."
"…아스켈 입니다."
"그래. 아스켈. 이런 게 운명이 아닐까 싶네. 우린 지금 지치고 피곤한 상태거든. 어젯밤에 고생하기도 했고. 그러니까, 우릴 네 마을로 안내해 주지 않을래?"
"...."
아스켈의 얼굴이 굳어졌다. 느슨해졌던 경계심이 다시 바짝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금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테사이아라 밝힌 요정과 흑발 남자, 그리고 검은 털 마족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이윽고 아스켈이 결연하게 말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머. 왜…?"
"제가 사는 마을은 초대받지 않은 외부인은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입니다. 여러분을 초대하면 제 책임이 되죠. 그런데 솔직히 전 여러분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마을로 모시고 갈 수도 없고요."
"...."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스켈을 빤히 응시하던 남자가 이윽고 손을 뻗었다.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린 아스켈의 머리를, 그가 가볍게 헝클였다.
"똑 부러지는 녀석이군."
"...?!"
아스켈이 눈을 끔뻑이는 사이, 그가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저 너머론 갈 필요 없을 거다. 거긴 지금 사냥할 상태가 아니니까."
남자가 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아스켈의 옆으로 마족이 뛰어내렸다.
그녀가 아스켈에게 뭔가를 내밀며 말했다.
"나는 수인이다. 마족이 아니라. 하지만 나도 오해했으니 이번엔 용서해 주마."
"...."
엉겁결에 받아든 아스켈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육포 조각이었다.
"강단 있는 놈이군."
"그러니 이런 곳을 혼자 다니겠지. 전사의 자질을 타고난 거다."
아스켈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멀어지는 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스켈만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간다고…? 정말 이대로 그냥 가는 거야, 이안? 잘 설득해 보면 되잖아."
눈을 치켜 뜬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대답한건 마족, 아니 수인이었다.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말고 조용히 따라와라, 귀쟁아. 대답은 충분히 들었으니까."
"아니… 하아."
짧게 한숨 쉰 테사이아가 아스켈을 돌아보았다.
"네 생각은 이해하지만, 우린 괴물들과 싸우는 쪽이야. 특히 저기 이안은 괴물 전문가지."
"...."
"우리가 산맥에서 어떤 것들을 죽이고 돌아가는 길인지 네가 안다면 이런 오해는 없을 텐데."
입맛을 다신 테사이아가,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돌렸다.
"뭐, 별수 없지. 잘 지내렴, 꼬마 사냥꾼아."
그녀는 몇 걸음 만에 아쉬움을 떨쳐낸 듯,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앞서가는 일행의 뒤를 쫓아갔다.
"...."
잠시 눈을 깜빡인 아스켈은, 이윽고 육포를 입에 물며 몸을 돌렸다.
긴장이 풀려서 다리가 후들댔지만,
어쨌거나 하려던 일은 해야 했다.
아스켈이 계곡 정상에 오른 건,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나서였다.
"...!"
드러난 계곡 반대편의 광경에, 아스켈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끄트머리만 조금 남은 육포가 툭, 바닥에 떨어졌다.
반 토막 나거나 내장을 흩뿌린 채 죽어 있는 오거들. 뭔가가 폭발한 듯한 흔적과 흩어진 뼛조각들.
변이된 들짐승과 구울, 심지어 하피로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수많은 시체들이 사방에 계곡 곳곳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인근의 모든 마물들이 모여들었던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한쪽 구석, 다 타서 이제는 연기만 흐릿하게 뿜고 있는 모닥불의 흔적까지 눈에 담은 순간.
아스켈의 뇌리로 비로소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어젯밤에 고생했다는. 그리고 괴물을 상대하는 전문가라는.
"…설마."
비로소 그 말이 전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맥에서 온, 마물 사냥꾼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아스켈은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
"하아… 하아…."
이안은 가쁜 숨을 내쉬는 북부인 소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거의 산비탈을 구르듯이 그들을 쫓아 달려온 것이다.
나리, 나리, 하고 소리치면서.
"그래서, 무슨 볼일이냐?"
이안이 툭 내뱉었다.
아스칼이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예…?"
"왜 따라왔냐고. 소리까지 지르면서."
"아,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아스켈의 땀범벅인 얼굴에 옅은 당황이 스쳤다.
"…산 반대편을 봤습니다."
이윽고 일어선 아스켈이 말했다.
이안과 샬롯, 테사이아를 번갈아 본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까 제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오해했습니다."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사과나 하려고 온 거냐?"
"아뇨. 그게… 여러분들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일단 오긴 했는데. 막상 말하려니 망설여집니다. 저 혼자 결정하고 말할 문제가 아니라서요."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대로 해라. 할거면 하고, 말 거면 마는 거지."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묘한 미소를 지은 샬롯과 반가운 얼굴로 손을 까딱이는 테사이아가 그의 뒤를 따랐다.
아스켈이 재빨리 이안의 옆으로 따라왔다.
"사실, 부탁 드릴 게 있습니다."
"의뢰."
"네…?"
"부탁이 아니라 의뢰라고. 나는 용병이다. 자원봉사자가 아니라."
"자원봉사자가 뭐죠…? 아무튼, 의뢰할 일이 있긴 합니다만. 그 전에 먼저 마을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그야 당연- 악, 왜 때려?"
끼어들었다 샬롯의 손바닥에 입수를 얻어맞은 테사이아가 눈을 부라렸다.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우린 못 믿는다더니. 네 이름을 걸고 초대해야 하는 거 아니냐?"
"맞습니다. 같이 가 주신다면, 여러분들은 제 손님이 되시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마물을 전문적으로 사냥하시는 용병단이란 걸, 이제는 믿습니다."
"농담한 거다. 앞장 서서 길이나 안내해."
"아, 네."
아스켈이 재빨리 앞장섰다.
그래, 사냥을 부탁할 마물이 있나 보군.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의뢰가 급하진 않았지만.
일행 모두 지쳤고, 여정을 이어가기 위한 재정비도 필요했으니까.
게다가 여기가 정확히 어디쯤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고, 트라벨가까지는 아직도 꽤 멀리 떨어져 있으리라 추측할 뿐이었다.
의뢰를 몇 개 처리해 주다 보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들이었다.
'적어도 오늘 밤은 따듯한 음식과 잠자리가 기다릴 테니까.'
솔직히 당장은, 그거면 충분했다.
***
북부인 소년 하나가 더해진 것뿐인데도, 일행의 분위기는 한결 밝아졌다.
여정이란 건 보통 자고 쉬고 싸우는 시간을 빼고는 걷기만 하는 일이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대화를 나누는 것뿐.
하지만 일행은 이제 딱히 서로에게 궁금한 게 없었다.
그러던 차에 온 북부인 소년은, 충분히 흥미로운 대화 상대였다.
물론 밤을 따듯하고 안전하게 보낼 수 있으리란 사실도,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풀어주고 있었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잡담 후, 테사이아가 물었다.
"그래서, 네가 사는 마을은 어디 쯤에 있어?"
아스켈이 손가락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이제 두세 시간만 걸으면 나옵니다. 숲 한복판의 언덕 위에 있죠."
"그래? 잘 됐다. 난 당분간 마을은 구경도 못 할 줄 알았거든. 눈 덮인 동네는 죄다 버려진 마을만 있으니까."
안도하듯 내뱉은 테사이아가, 뭔가를 깨달은 듯 아스켈을 바라보았다.
"너희 마을도 그런 동네 아니야?"
"맞습니다. 작년까진 아니었지만."
"왜 남쪽으로 이주하지 않았지?"
샬롯이 물었다.
잠시 멈칫한 아스켈이, 이윽고 말했다.
"장벽 안쪽으로 이주하자는 얘기가 없진 않았습니다. 실제로 떠난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대부분은 남았습니다. 결정적으로, 마을의 대전사도 반대하는 쪽이었죠."
무덤덤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옅은 불만이 섞이는 것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걸 느낀 건 이안 뿐이었다.
다른 둘은 그저 내용에만 신경이 쏠려 있었다.
"대전사…? 아, 그래. 너희 마을은 북부의 전통을 따르는 거군. 야인 부족인 거야."
"그게 뭔데?"
테사이아가 되물었다.
샬롯이 태연하게 말했다.
"북부가 제국의 속국이 되기 전의 방식으로 사는 자들이지. 무슨 전설적인 전사를 숭상한다던데."
그래서 초대 어쩌고 했던 거군.
이안의 뇌리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폐쇄적인 북부 토박이들의 마을은 게임에서도 몇 개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 어디에도 발을 들일 수 없었다.
그의 입장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한 놈만 건드려도 마을 전체가 달려와 두들겨 패는 통에, 애꿎은 게임 오버 화면만 봤었다.
야만 전사를 선택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란 건, 공략글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전용 퀘스트가 몇 개 있다던가.
마법사와는 관계없는 부분이라, 아는 건 그 정도가 전부였다.
아스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카르하를 숭상하죠. 다들 그분처럼 되고 싶어 하고요."
"그게 누군데 숭상해?"
"북부의 전설적인 용사입니다. 거인 왕국의 잔당들을 수없이 죽이고, 악룡과도 단신으로 맞선 대전사. 끝내 악룡을 패퇴시키고 북부에 자유를 가져온 초인입니다. 사후에는 신이 되었고요."
"용을 죽였단 말이야?"
"전설에 따르면 사흘 밤낮을 싸웠고, 악룡이 끝내 먼저 물러났다더군요. 그 후론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요. 카르하에게 입은 상처가 너무 커서 결국은 죽었을 거라는데.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용의 유해는커녕 뼛조각 하나 본 적 없거든요."
아스켈이 어깨를 으쓱였다.
피식한 이안이 내뱉었다.
"제국에서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은 얘기군. 인간이 신이 되다니."
"루 솔라 교단에서도 인정한 신이다. 좋아하진 않겠지만. 어쨌건 인간의 신이고 실존한 초인이니까."
이번에도 샬롯이 대꾸했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잘 아는군. 이런 거엔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올레그에게 들은 얘기다. 그 녀석도 북부 야인 출신이었지."
올레그…? 아, 그 말 많은 대머리.
이안은 마법 부메랑을 던지던 천칭 상단의 경호병을 떠올렸다.
"수인의 신과 달리 자기네 신은 교단의 인정을 받았다고 으스댔는데. 지금쯤 카르하에게 얻어터지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뛰어난 전사였다면, 그럴지도요."
"그 녀석은 오염된 마력에 취해서 날뛰다가 어린 여자애의 마법에 타죽었다. 그 전에 같은 북부인의 손목도 날렸고."
이안의 덤덤한 말에, 아스켈이 어깨를 까딱였다.
"그렇다면 카르하의 군단이 되진 못했겠군요."
"카르하의 군단?"
"뛰어난 전사는 사후에 카르하의 군단이 됩니다. 신들을 지키는 천상의 병사들이죠. 말단이긴 하지만, 신이기도 하고요."
되는대로 다 갖다 붙인 종교로군.
하긴, 그러니 게임의 야만 전사들이 틈만 나면 그 이름을 외쳐 댔을 터였다.
내심 코웃음 친 이안은, 진짜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그럼 너희는 부족 생활을 하는 거냐? 자치령과의 교류는 없고?"
"아뇨. 저희도 자치령의 일원입니다. 관문도 자유롭게 오가고요. 부족이라는 말도, 적어도 저는 한 번도 써본 적 없습니다. 그저 사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죠."
그럼 됐군.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궁금한 건 그뿐이었다.
폐쇄적인 야만인들이 오로지 자급자족하며 연명하는 부락이라면 들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명화가 되어있다면, 변방 왕국의 작은 마을들과 별반 다를 것도 없으리라.
"너 같은 꼬마가 혼자 사냥을 다닐 정도라면, 그렇게 상황이 좋진 않겠군."
샬롯이 덧붙였다. 아스켈이 마음에 든 것인지,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문제가 있긴 하지만, 사냥은 제가 자발적으로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꼬마가 아니에요."
샬롯이 피식대는 사이, 이안이 덧붙였다.
"그래서, 네가 의뢰하고 싶은 게 마을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거냐?"
"…예. 그래서 말씀드리기 전에 고민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 혼자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러던가. 나는 대가 없이는 일하지 않아. 하루만 묵고 떠날 거고. 그 전에 알아서 결정해라."
"네. 제 손님이시니까, 마을에 머무시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서 대접하겠습니다."
"너희 마을에서도, 제국 돈을 쓸 수 있나?"
"당연하죠."
"잘 됐군."
이안은 아공간에서 은화가 든 돈주머니를 꺼냈다.
대충 무게를 가늠한 그가, 주머니를 아스켈에게 던졌다.
아스켈이 그를 돌아보았다.
"손님한테 돈을 받진 않는데요."
"네가 주는 대로 먹고 땅바닥에서 자고 싶진 않거든. 그걸로 우리가 든든하게 먹을 걸 사고, 따듯한 잠자리도 준비해라. 남는 건 너 가지고."
"남는 건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린 아스켈이 덧붙였다.
"가는 동안, 산맥에서 죽이셨다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샬롯과 테사이아가 말해도 되냐는 눈빛을 보내는 가운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안 될 거 없지."
#092화
샬롯과 테사이아가 주고받듯 내뱉은 이야기를 들은 아스켈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짓말이라기엔 지나치게 구체적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좀처럼 믿기 힘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면…. 여러분들은 카르하 못지않은 전사들이시란 얘기가 되겠군요."
"이안은 그럴지도 모르겠군."
"...."
아스켈은 믿기 힘들어하는 와중에도 굳이 의구심을 표하지 않았다.
일행도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둘 뿐, 아스켈의 믿음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호오…."
마침내 마을의 전경이 드러났다.
관도에서 떨어진 숲 한복판.
야트막한 언덕 위에 빽빽하게 솟은 목책을 보며 이안이 내뱉었다.
"내 예상보다 훨씬 크군."
"우리 마을에는 카르하의 성상이 있습니다. 성상은 북부를 통틀어도 몇 개 되지 않죠. 그래서 자치령 도시 대신 여기로 이주한 사람들이 꽤 됩니다."
아스켈이 말했다.
자랑스러워하거나 으스대는 것과는 거리가 먼 말투였다.
이안은 아스켈도 자치령의 관문 너머로 이주하길 원하고 있으리라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의외인 부분이었다.
보통 저 나이엔 대전사나 용사 따위의 단어를 동경하게 마련이니까.
'내가 상관할 부분은 아니지만.'
"잠시 기다려 주세요. 문을 열겠습니다."
아스켈이 마을 입구를 막은 대문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거의 요새나 다름없군."
목책 위로 드러난 활을 든 북부 전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샬롯이 말했다.
이안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겠지. 증축을 거듭하면서 요새화된 걸 거다."
목책을 구성하는 나무는 낡은 것과 새것이 섞여 있었다. 언덕 인근의 나무는 죄다 밑동만 남아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숲속의 요새처럼 보였다.
"속이 좀 울렁거려. 기분 나빠."
미간을 좁힌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속이 울렁거린다고?"
"응. 네가 전에 들렀던 사원 근처만큼은 아니지만."
"흐음."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성상이 있다더니. 눈 덮인 이곳에서, 그저 북부인의 기백으로만 버티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샬롯이 콧방귀를 뀌었다.
"잘됐군. 조용히 있어라. 그 눈깔 관리나 잘하고. 네가 마족이란 걸 들키면 상황이 피곤해질 테니까."
"눈은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닌데, 어떻게 관리하란 거야?"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장님인 척이라도 하든가."
"그게 말이 되는 소리-"
"입들 닫아라. 문이 열린다."
이안이 말을 잘랐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앞을 바라보았다. 대문이 열리고 있었다.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목책 위에 선 초병들의 시선이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두꺼운 대문 너머, 눈을 가늘게 뜬 북부인 전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전형적인 야만 전사군.'
미구엘은 북부인이라고 다 우락부락한 근육질은 아니라고 했었지만.
지금 보이는 전사들은 대부분 곰 같은 덩치의 소유자였다.
다들 온갖 짐승의 털가죽을 두르고 있어서 더 그렇게 보였다.
이안은 그들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며 대문을 지나쳤다.
뒤에서 샬롯의 그르렁대는 나지막한 숨소리가 이어졌다.
보나 마나 문지기와 눈싸움을 하는 것이리라.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따라오시죠."
기다리던 아스켈이 몸을 돌렸다.
"저건 마족 같은데. 이런 시기에 저런 자들을 손님으로 받다니. 마을의 일에 끌어들이려는 건가."
"그래 보이는데.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군. 하긴, 겁쟁이 아스켈이니 그러고도 남겠지."
"그 훌륭한 전사의 핏줄에서 저런 겁쟁이가 나오다니…."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들이 이어졌다.
아스켈은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겁쟁이 아스켈이라고…?"
오히려 미간을 찌푸린 샬롯이 되물었다. 아스켈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을에 눈이 덮이기 시작하면서, 전 마을 사람 전부가 관문 너머로 이주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제 또래에서 그렇게 말한 건 저뿐이죠. 그래서 붙은 별명입니다."
"나였다면 저자들의 목젖을 전부 뽑았을 거다. 다신 헛소리를 할 수 없도록."
"전 그럴 생각까진 안 드는군요. 겁쟁이라 그럴 지도요."
"그럴 리가."
피식한 이안이 말했다.
"나와 이 녀석들을 똑바로 보면서 할 말 다 하는 인간은 아주 드물다, 아스켈. 혼자일 땐 특히."
"동감이다. 넌 겁쟁이가 아니야."
샬롯이 거들었다.
덤덤하게 미소 지은 아스켈이 덧붙이는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안도 마을을 눈에 담았다.
진흙탕인 대로 좌우로 통나무로 지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멋대로 지은 것처럼 보였지만, 묘한 규칙성이 있었다.
저마다 바쁘게 움직이는 주민들은, 그 와중에도 거리를 지나치는 일행에게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아무리 폐쇄적인 마을에 샬롯까지 있다 해도 과한 경계심이었다.
"남자는 별로 안 보이는군."
"바쁜 시간이니까요. 어젯밤 경계를 선 사람들은 자고 있고, 나머진 사냥과 수색을 나갔을 겁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문제에 직면해 있거든요."
어느새 마을 중심부였다.
광장 비슷한 용도로 보이는 공터와 그나마 거대한 건물이 있었다.
일종의 연회장인 모양이었다.
아스켈이 손을 들었다.
"저게 카르하 성상입니다."
"이미 보고 있었다. 상당히 오래된 석상이군."
석상은 광장 옆에 솟아 있었다.
땅으로 향하게 든 대검을 양손으로 움켜쥔 장발의 전사였다.
석상을 응시하는 이안의 육감이 절로 예민하게 돋아났다.
"실제 모습을 그대로 만들었다는데.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아스켈의 말에,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신성이 깃든 거로 봐선, 사실일 수도 있겠는데."
석상 내부에서 신성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전 루 솔라의 성상이나 화로의 사원의 성화만큼 선명하진 않았지만. 저 석상의 내부 어딘가에 존재하는 건 확실했다.
샬롯이 흥미롭다는 듯 성상을 응시하고 테사이아는 조용히 미간을 좁히는 가운데, 아스켈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신성을 느낄 수 있으신 겁니까?"
"그렇지. 너희는 못 느끼나?"
"아주 선명할 때만요. …하긴, 이안 님이라면 느끼실 수도 있겠군요. 제가 들은 대로면 엄청난 전사실 테니까요."
별소릴 다 하네.
피식한 이안이 성상을 턱짓했다.
"칼끝의 저건, 피 같은데."
석상이 양손으로 쥔 대검 끝부터 인근의 땅이 검붉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 검에서 흘러나오고 있죠."
"기적인 거군."
루 솔라의 성상이 빛을 뿜던 것처럼, 카르하는 검에 피가 맺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피라니. 루 솔라 교단이 카르하를 악신으로 규정하지 않은 게 더 기적 같았다.
"두어 달쯤 전부터 저렇게 되기 시작했습니다. 불길한 징조라더군요. 전사의 검이 피로 물들 거라고요."
"두어 달…?"
"그 후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닐 지도요."
"흐음…."
이안의 눈매가 설핏 꿈틀댔다.
그가 북부에 발을 들인 시기와 묘하게 겹쳤기 때문이다. 지하 궁전의 악마와 맹약을 맺은 시기와도 비슷했다.
'…자의식 과잉이군. 모든 일이 나 때문인 건 아닐 텐데.'
이안은 이내 낮게 실소했다.
그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지만, 성상이 불길한 징조를 내보일 이유는 그 외에도 차고도 넘쳤다.
웅웅, 허리춤의 단죄의 검이 문득 낮게 울었다.
'뭐 어쩌라고. 난 댁들한테 관심 없어.'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성상을 지나쳤다.
카르하의 검 끝에 맺힌 붉은 빛이 조금 더 선명하게 일렁이는 것은, 보지 못한 채였다.
***
골목 끝. 아스켈은 목책 근처의 집 앞에서 멈췄다.
"여깁니다."
"혼자 살기엔 커 보이는데."
"영감님과 둘이 삽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제 손님이니 별일 없을 겁니다."
이안이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
"그냥 여관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우리 마을엔 여관이랄 게 딱히 없습니다. 빈집을 빌릴 테니, 잠시만 계시면 됩니다. 말씀드릴 것도 있고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스켈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대화가 몇 마디 이어지더니, 이내 다시 문이 열렸다.
"들어오세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테사이아와 눈빛을 교환한 이안이,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집 안에 들어섰다.
짐승 가죽에서 나오는 누린내와 퀴퀴한 한기가 감도는 내부.
구석의 의자에 기대앉은 노인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비쩍 마른 백발. 왼쪽 눈이 움푹 파인 애꾸였다. 눈을 앗아간 것으로 보이는 굵은 흉터가 한쪽 이마에서 턱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일행을 본 노인의 미간이 미미하게 좁아졌다.
"흐음."
"제 손님이니 무례하게 굴지 마시죠."
아궁이처럼 생긴 난로에 불을 피우며, 아스켈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노인이 실내 한복판에 놓인 식탁을 향해 팔을 들었다.
노인은 왼손도 손목 아래까지밖에 없었다.
"앉으시오."
이안이 태연하게 의자에 앉았다. 샬롯과 테사이아도 자연스럽게 주위에 모여 앉았다.
낡은 의자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불을 지핀 아스켈이 몸을 돌렸다.
"숙소를 빌리고, 먹을 것도 구해서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혹시, 목욕도 할 수 있나?"
"목욕이요…? 할 수는 있습니다만."
아스켈이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목욕 준비를 해 주고, 집을 미리 따듯하게 덥혀 주면 좋겠군. 추운 건 지긋지긋해서."
"예.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아스켈이 밖으로 나갔다.
잠시 불편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일행을 응시하던 노인이 이윽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마물 사냥꾼이라고 들었소."
"용병이오. 마물들과 주로 싸우긴 하지만."
"이미 의뢰를 받으셨소?"
"아직. 마을에 무슨 문제가 일어난 건지도 들은 바 없소."
"흐음. 마을 전사들의 동의라도 구하려는 건가. 동의할 리 없거늘."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여긴 용병에게 의뢰도 마음대로 할 수 없소?"
"그건 아니오. 하지만 당신들이 아무리 전문가라도 셋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오. 마을 전사들과 함께 해결해야 하지."
"글쎄…."
이안은 목책 근처의 전사들을 떠올렸다. 일행 셋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그런 놈들 수십이 더 있더라도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전사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오. 외부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건 의미 없다 여길 테니까. 아스켈은 이미 눈 밖에 났으니, 외부인을 들인 보복만 당할지도 모르겠군."
노인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카르하께서 싸운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건만. 다들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잊었소. 이러다 결국은 다 죽게 되겠지."
"그럼 그냥 떠나면 되지 않겠소?"
노인이 피식 웃음 지었다.
"난 살 자리가 아니라 죽을 자리를 찾아야 하는 늙은이요. 살아야 하는 건 젊은것들이지."
"호오…."
이런 대답을 들을 줄이야.
이안의 눈빛이 묘해지는 그때, 문이 열렸다.
바구니를 손에 든 아스칼이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식사부터 준비하겠습니다."
"준비는 다 끝냈냐?"
"예."
바구니를 옆에 놓은 아스켈이 이안에게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이안이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
"너무 조금 줄었는데."
"일단은 제 손님들이시니까요. 아예 안 쓰고 싶었는데, 제가 가진 돈이 별로 없어서요."
"흐음."
턱을 긁적이던 이안이, 문득 노인을 돌아보았다.
"영감님."
"...?"
"요리, 할 줄 아시오?"
"그냥 불에 굽는 정도라면."
"그럼 부탁 좀 드리겠소."
노인이 군말 없이 일어섰다.
아스켈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안이 탁자의 빈자리를 턱짓했다.
"앉아라."
자리에 앉은 아스켈이 눈을 끔뻑였다. 이안이 툭 내뱉었다.
"마을의 문제라는 게, 뭐지?"
"어… 여러분이 아무리 강하시다 해도, 세 분이 해결하실 순 없을 겁니다. 마을 전사들이 도움이 있어야 해요. 그 부분을 해결하는 게 우선입니다."
저 노인네 말대로군.
내심 피식한 이안이, 태연하게 아스켈을 바라보았다.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가불가와 방법 모두, 내가 판단하고 결정할 부분이지."
"...!"
"네가 할 건 의뢰의 내용을 설명하고, 보수를 제시하는 것뿐이야. 의뢰인의 역할은 거기까지지."
한쪽 어깨를 까딱인 이안이 덧붙였다.
"난 질질 끄는 건 딱 질색이야. 이미 그렇게 됐으니, 지금이 아니면 더는 묻지 않을 거다."
잠시 머뭇거린 아스켈이, 이윽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밤마다 마을을 포위하는 마물이 있습니다. 저희는 하얀 악마라고 부르죠."
"자세히."
"처음엔 하나였습니다. 하얗고 거대한, 처음 보는 종류의 하피였죠. 저도 한 번 실제로 봤는데, 하피라기보단 악마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눈도 없고, 하얀 왕관 같은 뿔만 돋아 있었죠. 마을 전사들이 달려 나가자 그대로 날아서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다시 왔겠군. 이번엔 부하들을 끌고."
아스켈이 눈을 끔뻑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얘기나 계속해."
"처음엔 오거 한 마리였습니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죠. 그다음 날엔 하피가 몇 마리 더 왔고, 그다음 날엔 고블린도 있었습니다. 그제야 부하가 계속 는다는 걸 알고, 토벌하러 나갔죠."
"실패했겠군."
"네. 놈은 마물들만 보내고 도망쳐 버리더군요. 몇 번 반복됐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턴, 망자들을 끌고 왔습니다."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망자…?"
"예. 걸어 다니는 해골들이요. 전사들이 나가면, 망자들만 보내고 도망치고요."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변이된 하피 여왕. 게임에도 있던 네임드 몬스터였다.
본래 하피는 여왕을 중심으로 소규모 무리 생활을 하는 마수였다.
날아다닌다는 걸 제외하면 전투력 자체는 별 볼 일 없는 놈들.
현혹 효과를 가진 정신파는, 정신력이 조금만 높아도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들어 변이된 녀석은, 하피 대신 다른 마물을 끌고 다녔다.
거기다 특유의 경계심도 여전해서, 처음부터 놈을 노리거나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으면 금방 도망쳐 버렸다.
하지만 언데드를 끌고 다니는 건, 게임에선 없었던 패턴이었다.
'이것도 현실이 되면서 달라진 건가. 내가 거인 네임드들을 죄다 쳐 죽여서 생긴 변화인지도.'
"그 후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쪽은 희생자가 조금씩 늘고, 피로도 쌓이고 있죠. 그래서 며칠 전부턴 토벌을 멈추고 낮에 놈의 둥지를 수색하고 있습니다."
"소득이 없겠군. 마물은 쌓일 만큼 쌓였겠고."
"…네. 다행히 어느 순간부터 숫자가 더 늘지는 않고 있지만, 싸우면 피해가 적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이젠 망자들만 보이고, 놈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다더군요."
"하피다운 방식이군. 그래서…."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아스켈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놈을 처리해 주면, 넌 대가로 뭘 줄 수 있지?"
"그건-"
"나한테 제국 금화가 몇 개 있소. 그걸 전부 드리지."
끼어든 노인이 말했다.
아스켈이 놀란 듯 그를 돌아보는 가운데,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하얀 악마. 힘 능력치를 하나 올려 주는 게 보상이었다.
…이거, 원래는 야만 전사 전용 퀘스트인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이 미소 지었다.
"받아들이지. 계약은 성립됐다."
#093화
식사를 마친 일행이 집을 나섰다.
"다녀올게요."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온 아스켈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묘한 눈빛.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왜."
"…아닙니다. 가시죠."
아스켈이 몸을 돌렸다.
'내가 어쩌려는 건지 궁금한 거군.'
이안은 간만의 포만감을 느끼며 그의 뒤를 따랐다.
투박하지만 나쁘지 않은 식사였다.
더불어, 딱히 궁금하지 않던 마을의 상황도 제법 자세히 알게 됐다.
흔한 얘기였다. 고향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대립.
다만 여긴 후자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할 뿐이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었다.
이 세계만 그런 건 아니지만, 인간들의 판단 기준은 보통 합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호오."
광장을 지나던 샬롯이, 문득 마을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십여 명의 남자들이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건장한 성인부터, 아스켈 또래의 소년들까지 섞여 있었다.
"수색대가 돌아왔군요. 수색은 허탕인 모양입니다. 사냥만 했네요."
"누가 대전사지?"
샬롯이 물었다. 아스켈이 가장 덩치가 큰, 곰 가죽으로 만든 망토를 걸친 남자를 가리켰다.
"발레리입니다. 대전사 중에서 가장 젊죠. 강하기도 하고요. 카르하의 총애를 받는다고들 하더군요."
이안이 보기에도 힘깨나 쓸 것 같은 놈이었다.
발레리를 비롯한 몇몇이 일행 쪽을 바라본 건 그때였다.
그들이 사냥해 온 짐승들을 받으러 온 마을 주민 몇몇이 그들에게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경계심과 비웃음이 뒤섞인 눈빛들.
"가서 말을 좀 해 볼까요."
아스켈이 물었다.
이안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발레리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숙소로나 안내해."
"…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안을 돌아본 아스켈이,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
"오만한 눈빛을 가진 놈이더군."
샬롯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안이 피식했다.
"네 예전 눈빛과 비슷한 것 같은데."
"그럴지도. 하긴, 패배를 경험한 적 없는 자가 가질 법한 눈이다."
"언젠간 알게 될 겁니다."
빈집의 문을 열면서 아스켈이 말했다.
"이왕이면 제 손으로 느끼게 해 주고 싶지만요. 들어오시죠."
"네가? 몇 년은 걸리겠군."
집으로 들어서며 샬롯이 말했다.
이안의 말대로 미리 난로를 켜 둔 실내는 따듯했다. 딱딱해 보이는 침대. 방 중앙에 놓인 둥글고 커다란 통은, 이안이 쓸 욕조였다.
"몇 년… 그보다는 빨랐으면 좋겠는데요. 마을이 겨울을 몇 번이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글쎄. 두 번도 버티기 힘들 거다."
단죄의 검을 비롯한 무기들부터 벗어내기 시작하면서,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아스켈의 미간이 좁아졌다.
"겨우 두 번이요? 우리 마을의 전사들이 그렇게까지 약하지는 않습니다, 이안 님."
"강하고 약한 건 상대적인 거다."
흉갑의 연결 고리들을 풀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살고 싶다면 너라도 마을을 떠나는 게 좋아. 너희 영감님은 네가 떠난다고 하면 오히려 좋아할 것 같은데."
이안은 저녁 식사를 떠올렸다.
과거 마족과의 전쟁에서 눈을 잃었다던 노인은, 일행의 다음 목적지를 넌지시 물었었다.
그리고 트라벨가라고 대답했을 때 이어진 잠깐의 망설임을, 이안은 놓치지 않았다.
"저 혼자 떠날 수는 없죠."
"뭐, 알아서 해라. 목욕부터 할 거니까, 준비해."
"…아, 네."
아스켈이 재빨리 움직였다.
눈을 가득 담은 커다란 냄비를 난로 위에 올린 그가 밖으로 나가, 어디서 또 눈을 퍼 왔다.
퍼온 눈은 욕조로 들어갔다.
'뭘 어떻게 할 건가 했는데. 이런 식이군.'
생각하며, 이안은 샬롯과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난 목욕부터 할 거다."
"…그래서, 보지 말란 얘긴가?"
"그건 알아서들 하고. 너희도 씻을 건지 물은 거다."
"…?! 진심으로 물은 거냐?"
"어머. 음흉하네, 이안."
샬롯과 테사이아의 반응에 오히려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뭐라는 거야, 이것들이.
"같이 들어가잔 얘긴 아니었다만."
"…그렇군. 오해했다."
"난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배시시 미소 짓는 테사이아를 무시한 채, 이안은 안에 받쳐 입은 방한복을 제외한 모든 장비를 벗어 던졌다.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그사이, 욕조에 끓는 물을 한 번 부은 아스켈이 다시 한번 냄비에 눈을 퍼 와 난로 위에 얹었다.
"한 번만 더 부으면 될 겁니다."
"난 오래 들어가 있을 거니까, 멈추라고 할 때까지 계속 준비해."
"…목욕을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이안이 욕조를 응시하는 사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샬롯이 입을 열었다.
"북부의 전사들은 수인 전사들과는 추구한 바가 다른 것 같더군."
"저들도 너처럼 싸우다 죽길 바랄 것 같았나?"
"비슷한 부류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들의 투쟁은 생존과 자유를 위한 수단이더군. 목숨 건 전투 그 자체가 아니라."
눈을 한 삽 더 떠와 욕조에 부은 아스켈이 입을 열었다.
"죽기 위해 싸우거나 싸우기 위해 싸우는 자들을, 북부에선 광전사라 부릅니다."
"...."
샬롯의 표정이 묘해졌다.
테사이아가 씩 미소 지었다.
"그럼 넌 확실히 광전사네, 야옹아."
"…추구하는 가치가 다를 뿐이다. 멍청한 귀쟁아."
냄비의 끓는 물을 욕조에 부으면서, 아스켈이 읊조렸다.
"여기서 계속 버틴다면, 마을의 전사들도 사실상 광전사나 다름없어지겠죠. 언젠가는 끝이 올 걸, 다들 모르진 않을 테니까요."
"혹시 모르지.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카르하에 버금가는 초인이 탄생할지도."
이안의 말에, 아스켈이 그럴 리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냄비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옷을 벗은 이안이 욕조에 들어갔다. 딱 좋은 온기. 손으로 몸을 몇 번 문지르자 땟국물이 거뭇하게 번졌다.
'비누만 있었어도….'
내심 탄식하던 그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엎드려 양팔로 턱을 괸 테사이아가 실실 미소 짓고 있었다.
샬롯은 아예 옆으로 돌아앉은 채였다.
"목덜미가 아주 탐스럽네, 이안."
왜 저렇게 보나 했더니.
"원래 먹지 못하는 사과가 더 붉어 보이는 법이지."
"재미있는 격언이네. 딱 너 같아."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란 말도 있지. 눈 돌려라."
돌아온 아스켈이 새로운 솥을 난로 위에 얹었다.
몸을 적당히 문지른 이안이 욕조 옆에 머리를 기댔다.
뼈 사이에 고여 있던 한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이안의 잘 잡힌 근육과 그 위에 새겨진 크고 작은 흉터들을 눈에 담던 아스켈이, 문득 내뱉었다.
"전 지금도 이해가 안 됩니다."
"뭐가."
이안이 눈도 뜨지 않은 채 물었다.
"그 하얀 악마요. 왜 굳이, 전사가 이렇게나 많은 마을을 목표로 삼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겠지."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글쎄…."
이안은 게임을 떠올렸다.
게임에서 이게 야만 전사의 전용 퀘스트가 된 이유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변이된 하피 여왕은 강력한 장거리 공격이 가능하거나, 놈에게 은밀하게 접근할 수만 있으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네임드였다.
야만 전사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부분들이었다.
물론 변이된 하피 여왕은 반드시 잡을 필요는 없는 놈이었다.
게임의 난이도를 높이기 위해, 상성 상 좋지 않은 전투를 유도한 것이리라.
현실이 된 지금은, 적당한 다른 이유가 생겼겠지만.
"…하긴. 놈의 의도는 중요한 게 아니죠."
혼자 결론 내린 아스켈이 읊조렸다. 대꾸도 하지 않고 목욕을 만끽하는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이윽고 덧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이라도 발레리에게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 결정이 마음에 들진 않더라도, 놈을 퇴치하는 게 우선이라는 걸 모르진 않을 겁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하지만…."
"전사들은 도움이 안 돼."
이어진 말에, 순간 굳어졌던 아스켈이 눈을 끔뻑였다.
"이안 님은 저희 마을의 전사들을 얕보시는군요."
"약해서가 아니야. 전사들이 튀어 나가면, 놈이 또 도망칠 거란 얘기지. 전사들은 하던 대로 목책 뒤에 있어 주는 게, 오히려 우리 일에는 도움이 될 거다."
"그럼, 정말 세 분이서 해결하신다고요?"
"정확히는 둘이다. 이번 일은, 나랑 샬롯이면 충분해."
아스켈이 다시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안이 만들어 낸 광경을 봤지만, 동시에 그 하얀 괴물이 얼마나 끔찍한지도 잘 알았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안이 슬쩍 눈을 떴다. 그가 옆의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저 녀석은 마력을 아주 잘 감지하지. 하피가 숨은 위치를 알려 줄 거다. 저 녀석의 역할은 그걸로 끝이지. 그리고…."
이안의 시선이 샬롯에게로 향했다.
"샬롯이 한쪽에서 언데드들과 싸울 거다. 정확히는 시간만 끌 거야. 혼자인 데다 강해 보이지 않으니, 하피는 도망치지 않고 부하들을 이용해서 저 녀석을 사냥하려 할 거다. 그리고 그사이에."
아스켈을 바라본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조용히 놈에게 다가가서, 날개부터 찢어 놓을 거다. 그 뒤엔, 목을 벨 거고."
"...."
아주 단순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스켈이 볼 때는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이 더 많았다.
샬롯 혼자 수십의 언데드와 대적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이안도 홀로 그 거대한 괴물을 상대해야 하니까.
그게 말처럼 간단했다면, 마을의 전사들이 이렇게 고전하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안의 말투와 표정은 태연했고, 심지어 샬롯과 테사이아도 마찬가지였다.
"넌 목책 너머에서 다른 전사들과 함께 구경이나 해. 네가 마을을 위한 옳은 선택을 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될 테니까. 그리고 지금은…."
그런 아스켈을 바라보며 말한 이안이, 슬쩍 턱짓했다.
"뜨거운 물이나 한 번 더 부어라."
"…아, 네."
***
밤.
"...."
목책 너머를 응시하는 전사들의 눈빛이 침침하게 일렁였다.
목책 너머, 숲의 경계선을 따라 늘어선 수십의 언데드들이 그들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밤 이어지는 긴장은, 강인한 북부의 전사들조차 지치게 했다.
이런 끔찍한 밤이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그전에 저것들이 끝내 마을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에 잠을 설치는 이들이 늘고 있었다.
"...."
마을의 대전사인 발레리도 마을 전체에 점점 동요가 번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덤덤한 얼굴과 달리, 그는 내일 수색할 지역의 지리를 쉼 없이 되새기는 중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 하얀 악마의 둥지를 찾아, 이 불안을 잠재워야 했다. 끝내 이주하거나, 대전사의 지위를 내려놓고 싶지 않다면.
그래서였다.
"...!"
곁에 다가선 아스켈의 존재를 평소보다 늦게 깨달은 것은.
"잘 시간일 텐데."
아스켈을 돌아본 발레리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죽은 전 대전사의 아들인 그는, 발레리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뛰어난 전사의 피를 물려받았으면서도, 전통을 버리려 하는 겁쟁이.
하지만 동시에 내칠 수는 없는 존재였다. 이 녀석 덕분에 자신의 존재가 더 두드러지니까.
아스켈이 덤덤하게 말했다.
"잠이 안 와서."
"그 외지인들은 뭐지? 다들 네가 마족을 데려왔다고 수군대던데."
"수인이야. 마족이 아니라. 그리고, 마물 사냥꾼들이지."
"뭐라고…?"
발레리의 인상이 구겨졌다.
"마을의 일에, 정말 외지인을 끌어들였단 말이냐?"
"그래."
담담한 대답에 발레리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고작 셋이 뭘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이어졌다.
오늘 밤이 지나면, 아스켈은 겁쟁이 앞에 비겁자라는 수식어까지 더해질지도 몰랐다.
아스켈이 덧붙인 건 그때였다.
"끼어들지 말라더라."
"...?"
"마을의 전사들은 한 명도 나오지 말래. 우리가 나가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거라고."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그래."
믿는 구석이 있기라도 한 건가.
발레리의 미간이 좁아질 찰나.
"어…?! 저기…!"
측면의 목책에서 탄성이 터졌다.
동시에 숲의 경계에 서 있던 언데드들의 고개가 일제히 옆으로 돌아갔다.
서로를 돌아본 발레리와 아스켈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돌렸다.
빠각! 콰직!
"...!"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홀로 언데드들과 싸우고 있는 수인의 모습이었다.
거대한 전투 도끼를 들고, 언데드들을 박살 내고 있었다.
"...."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발레리의 눈매가, 이윽고 가늘어졌다.
용맹하긴 했지만 기대만큼 강하지는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데드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죽으려고 작정했군."
"저 도끼는 탐나는데. 저 마족이 죽으면, 누가 가질지 내기하자."
어느새 주위로 모여든 전사들이 수군댔다. 모든 언데드들이 몰려가고 있어서, 다른 목책은 지킬 필요가 없었다.
빡-! 빠각!
용맹하게 저항하고 있긴 하지만, 수인은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언데드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포위당하기 전에 간신히 한쪽을 뚫은 그녀가, 언데드들에게 쫓기기 시작했다.
완전히 궁지에 몰린 듯한 모습이었다.
"마족이란 거, 생각보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들은 얘기가 과장된 걸지도 모르겠어."
전사들이 하나둘씩 비웃었다.
외부인인 그녀를 도와주려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마을의 일에 멋대로 끼어들었으니, 그 책임을 지는 것도 본인의 몫이었다.
"...."
수인을 지켜보던 발레리의 시선이, 문득 아스켈에게로 돌아갔다.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였다.
초조한 것이리라.
발레리는 지금이 바로, 저 마족을 구하러 가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그럼 아스켈의 결정은 더 어리석어 보일 것이고 자신의 관대함은 더 도드라지리라.
"…안 되겠군."
결정을 내린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연 그때였다.
"키- 에에엑-!"
숲 저 너머에서, 생전 처음 듣는 비명이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듣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얼어붙는 듯한 소리.
낄낄대던 전사들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
"...?!"
다들 목소리가 들려 온 방향을 말없이 돌아보는 가운데.
콰지직-! 콰득-!
목책 저 아래에서 들려 오는 소리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저런…?"
"미쳤군…."
수인 쪽을 돌아본 전사 몇몇이 탄식을 흘렸다.
궁지에 몰려 도망 다니던 수인이, 오히려 놈들의 한복판으로 파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살 행위처럼 보였지만.
콰지지직-! 빠각-!
언데드들은 그저 일방적으로 박살나고 터져 나갈 뿐이었다.
수인의 공세를 뚫긴 커녕, 더는 그녀의 근처로 다가가지도 못했다.
마치 비명이 울려 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극적인 변화였다.
"기다렸다고…?"
발레리의 미간이 천천히 구겨졌다.
정말 저 많은 언데드를 단신으로 상대하면서, 전력을 감추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발레리가 저도 모르게 아스켈을 내려다본 그때.
"키엑-! 키에에에엑-!"
저 멀리에서 또다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번엔 비명이 전부가 아니었다.
푸확-!
어두컴컴한 숲을 뚫고, 새하얗고 거대한 마물이 솟구쳐 오른 것이다.
너덜너덜한 날개를 마구 홰치며 솟구치던 놈이, 이윽고 힘에 부친 듯 날갯짓을 멈췄다.
"...!"
솟구치던 괴물이 허공에 잠시 부유하듯 멈췄다. 놈의 등에 올라탄 새카만 형체가 비로소 또렷해졌다.
흑발의 외지인이었다.
머리 위로 검을 치켜든.
밤하늘을 등진 검날이 달빛을 반사해 일렁였고.
콰직-!
다음 순간 번뜩이는 궤적을 그리며 괴물의 목덜미로 떨어졌다.
"키에에에엑-!"
정신을 뒤흔드는 비명을 밤하늘에 흩뿌리며, 괴물이 다시 숲의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094화
비명이 마을 구석구석까지 메아리쳤다. 잠에서 깬 주민들이 하나둘씩 집 밖으로 나왔다. 저마다 무기로 쓸 만한 것들을 하나씩 움켜쥔 채였다.
"...."
외눈 외팔의 노인, 우르드만이 맨손으로 집을 나섰다.
"그 하얀 악마의 비명인가…?"
"왜 전사들이 다 저기 모여 있지?"
마을 사람들이 술렁였다.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키엑-! 키에엑-!"
또다시 비명이 메아리쳤기 때문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현기증이 이는, 끔찍한 비명.
주민들이 숨을 헐떡이는 가운데, 우르드는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히 알게 됐다.
마물 사냥꾼들이, 정말 그 하얀 악마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바로 시작할 줄이야."
읊조리며, 우르드는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키아아악-! 키엑-!"
높고 낮은 비명이 이어졌다.
목책 위에 선 병사들의 모습이 노인의 외눈에 담겼다.
"정말 고작 셋이서…."
우르드의 탄식이 순간 잦아들었다.
광장 한쪽에 솟은 석상으로 시선을 돌린 노인이, 이윽고 탄식했다.
"북부의 초인이시여…."
성상의 대검에서 붉은 신성이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 끝에 맺힌 피가 증발하면서 신성력으로 화하고 있었다.
"오… 오오…."
"카르하의 화신이 마을을 구원하고 계신 건가…?"
성상을 본 마을 사람들이 탄식을 흘렸다. 몇몇은 성상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카르하는 기도 따위에 응답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키에에엑-!"
단말마와 같은 비명이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가장 먼저 조용해진 건 방벽 위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의 적막은 마을로도 전염되어, 술렁이던 주민들의 입을 하나씩 닫게 만들었다.
"...."
카르하의 성상에서 번져 나오는 붉은 빛만이 소리 없이 주위를 밝히는 가운데.
"…오, 온다."
"맙소사… 정말 저걸 혼자…?"
"둘? 단 둘뿐이라고…?"
이윽고, 방벽 위에서 탄식과 경악이 번지기 시작했다.
전사들이 하나둘씩 주춤주춤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조금씩 아래로 굽어졌다.
"문! 당장 문을 열어요!"
이어진 외침은 우르드에게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스켈.
비로소 성상에서 시선을 뗀 우르드는, 목책의 난간을 내달리듯 걷고 있는 아스켈을 발견했다.
언제나 덤덤한 손자의 얼굴은 지금, 경악과 환희로 뒤섞여 있었다.
반대로 그 뒤를 따르는 발레리의 얼굴은 밀랍을 바른 것처럼 무표정했다.
허둥지둥 목책 아래로 달려 내려온 전사 몇이, 마을의 대문을 막고 있던 빗장을 풀었다.
끼이이이-
대문이 느릿느릿 열렸다.
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검은 머리의 이방인이, 이윽고 느긋한 발걸음으로 마을에 들어섰다.
검은 털의 마족이 뒤따라 들어왔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꺼림칙한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카르하시여…."
"정말 저 악마를 죽이다니…!"
다들 검은 머리 이방인이 품에 안은 거대한 머리에, 시선을 완전히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건 일반적으로 알려진 하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털 한 올 없는 새하얀 머리는, 비늘이 돋은 것처럼 윤기가 돌았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밋밋하게 비어있고, 깨진 유리 조각이 박힌 것 같은 아가리만이 그 아래 거대하게 벌어져 있었다. 축 늘어진 두꺼운 혀는 뱀처럼 두 갈래. 머리 앞뒤로 각각 두 개씩 돋은 뿔은 서로에게 휘어 있어, 마치 왕관을 쓴 것 같은 형태였다.
"하얀 악마…."
오랫동안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그 괴물이, 목이 잘린 채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남자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저분하게 잘린 목의 단면에서 광택이 도는 새카만 피가 방울져 떨어졌다.
그리고 자신을 이안 호프라고 소개했던 흑발의 남자는, 그것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미 그의 얼굴과 몸은 똑같은 검은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우르드의 시선이, 문득 다시 옆으로 돌아갔다.
성상의 빛이 더 짙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
착각이 아니었다.
이안이 가까워질수록, 카르하의 대검에서 흘러나오는 신성력도 더 짙어지고 있었다.
"카르하께서, 어째서 저런 이방인에게…?"
"혹시 저자도 북부 출신인 건가."
그 모습을 목격한 주민 몇몇이 속삭였다.
'설마, 정말 북부인인가…?'
같은 생각을 하며, 우르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적당히 흰 피부.
북부인 치곤 털이 없고 골격도 얇아 보였지만. 혼혈이라 생각하면 또 이상한 부분은 아니었다.
이윽고 고요한 마을을 가로지른 이안이 그의 앞까지 도착했다.
"하… 오늘 씻었는데."
우르드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읊조린 이안이, 그의 발치에 손에 든 머리를 내던졌다.
거대한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의뢰는 완수되었소. 이의 있소?"
그 무심한 검은 눈을 잠시 바라본 우르드가, 이윽고 대답했다.
"없소. 귀하는 의뢰를 완수하셨소."
목소리가 절로 경건해졌다.
"보수는 내일 받으러 가겠소."
고개를 끄덕이며 말 한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가 가까워지자 카르하의 성상이 더 밝은 빛을 흩뿌렸다.
"...?"
미간을 설핏 찌푸린 이안이 걸음을 멈추고 성상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이제야 성상의 상태를 알게 된 몇몇 주민들과 전사들의 얼굴에도 경악이 번졌다.
그가 멈춰선 건 아주 잠깐이었다.
낮게 코웃음 친 그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자신이 묵고 있던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끼익, 철컹.
낡은 문의 경첩 소리가, 마을의 악몽 같은 밤이 끝났음을 알렸다.
닫힌 문과 성상. 이윽고 자신의 발 앞에 놓인 마물의 머리를 내려다본 우르드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저자가 정말…?"
***
"토할 것 같아."
침대에 드러누운 테사이아가 신음했다.
그녀는 어제 새벽부터 쭉 이런 상태였다.
"부정한 존재라는 걸 온몸으로 드러내는군. 한 것도 없는 주제에."
"없긴 왜 없어. 내가 그 마물 위치도 찾아 줬는데."
"아주 대단한 일을 하셨군, 귀쟁아."
"조금만 견뎌라. 곧 마을을 떠날 거니까."
대충 닦아서 널어 뒀던 장비들을 몸에 걸치며, 이안이 말했다.
"카르하는 왜 갑자기 지랄이래? 이안 너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야?"
테사이아가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물론, 이안은 그 부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성상은 그저 신성을 뿜어대기만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생처음 보는 퀘스트까지 선사했다.
"뭐,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전에는 루 솔라의 성상도 그렇게 빛났었지."
설마 야만 전사들의 신도 나한테 관심을 보낼 줄은 몰랐지만.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뒷말을 삼켰다.
게임의 야만 전사들은, 마법사 혐오에 있어선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족속들이었기 때문이다.
"천상의 모든 신들이 널 탐내나 보군. 이안."
샬롯이 감탄하듯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일처럼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이안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어느새, 그저 존경과 애정만이 가득했다.
이안은 심드렁하게 코웃음 쳤다.
"뭐, 마음대로들 하라지. 힘을 빌려 준다면 기꺼이 쓸 거니까."
절대 그 누구도 섬기진 않겠지만.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에게 이 세계의 신들은 이용해야 할 대상일 뿐, 결코 숭배의 대상이 될 순 없었다.
감정적인 부분을 떠나, 실리적으로도 그랬다.
제약은 지금도 충분히 많았으니까.
게다가 신의 낙인이 혼돈의 파편과 어떤 상호 작용을 일으킬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어땠어? 그 하피 여왕."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힘들다더니 주둥이는 살았군.
생각하며, 이안이 대답했다.
"별거 아니었다."
거인 망령들이 워낙 강해서인지, 변이된 하피 여왕과의 전투는 그리 위험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이건 상성의 문제이기도 했다.
변이된 하피 여왕은 강력한 현혹 정신파와, 상태 이상은 물론 실질적인 대미지도 주는 죽음의 비명을 주 무기로 사용했다.
둘 다 이안의 정신력과 저항력을 뚫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차라리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이 더 위협적인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안은 날개의 피막을 먼저 공격해 비행 능력을 떨어뜨려야 한다는 공략법도 미리 알고 있었고, 놈의 방어력은 바람 칼날로도 뚫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공격 마법을 더 활용했다면, 몸에 체액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잡아낼 수 있었으리라.
그러지 않은 건, 북부의 야인들에게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일 뿐이었다.
'확실히, 처음보단 훨씬 강해지긴 한 것 같은데.'
이안은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생각했다.
물론 망국의 군단장처럼 강한 적을 상대하다, 비교적 상대하기 쉬운 네임드와의 전투여서 더 크게 와닿는 것일지도 몰랐지만.
어쨌건 능력치 자체만 놓고 봐도, 처음보다는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시나리오가 초기화되면서 퀘스트 보상이 중첩된 효과가 지금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사실 마법사로서의 성장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계속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채비를 끝낸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이안?"
"보수 받으러 간다."
테사이아의 물음에 심드렁하게 답하며, 이안이 문을 열었다.
그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아스켈이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냐?"
"두 시간 정도 된 것 같은데요."
대답은 덤덤했지만, 이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경외가 담겨 있었다.
이제는 조금은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거북한 감정이었다.
그의 행동에는 그 어떤 숭고한 뜻이나 의지도 담겨 있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그를 두려워하거나 증오하는 이들이 상대하기 편했다.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냐?"
"예. 혹시 며칠 더 마을에 머물러 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려고요."
"왜?"
"내일 낮에 연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 하얀 악마를 토벌해 주셨으니, 꼭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결속을 다지려는 거군.
현실 도피일 뿐일 텐데, 하고 생각하며 이안이 대꾸했다.
"너희 대전사가 싫어할 텐데."
"이안 님을 꼭 모시고 싶다고 한 게, 바로 발레리입니다만…."
"그래…?"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해 보지. 난 이제 너희 집으로 갈 거다."
"보수를 받으러 가시는 거군요. 저희 영감님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뒤따라 나온 샬롯 쪽을 턱짓했다.
"혼자 가도 되니까, 넌 샬롯을 안내해라. 여정에 필요한 것들을 살 거다."
아스켈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샬롯이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마차는 구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안."
"짐 마차라도 상관없어. 지붕을 달아 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없으면 그냥 없는 대로 사라. 그것도 없으면, 그냥 말만 있어도 충분하고."
"알았다."
이안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지나치던 주민들이 그를 보고는 하나둘씩 고개를 숙였다.
의뢰를 해결하고 사람들의 태도가 변하는 건 흔히 겪은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그렇다고 기대하진 마. 댁의 사도가 될 생각은 없으니까.'
어젯밤의 퀘스트를 떠올리며 카르하의 성상을 일별한 이안은, 이내 낮게 콧방귀를 뀌고는 광장을 지나쳤다.
***
"오셨소."
노인, 우르드가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표정이나 말투의 변화가 크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훨씬 공손해진 태도였다.
'어제 같은 일을 한두 번만 더 하면, 카르하가 아니라 날 숭배할지도 모르겠군.'
이안이 식탁에 앉자, 오르드가 곧바로 작은 주머니를 앞에 놓았다.
"약속한 보수요."
이안은 돈주머니를 쥐어 들었다.
금화 두 개. 다 죽어가는 노인의 쌈짓돈이라기엔 큰 액수였다. 어쩌면 과거 전쟁에 참전하고 받은 돈인지도 몰랐다.
"훌륭하군."
탁, 주머니를 탁자 위에 놓은 이안이 우르드를 바라보았다.
"머리는 어떻게 하셨소?"
"연회장에 가져다 뒀소. 내일 연회에서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보복을 걱정하시더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소. 몇몇 전사들이 그러더군. 카르하께서 화신들을 보내 마을을 구하셨다고."
이안이 코웃음을 쳤다.
"난 카르하를 섬기지 않소. 그의 사도가 될 생각도 없고."
"오해가 있으시군. 카르하는 따로 대행자를 두지 않소."
"두지 않는다고…? 그럼 카르하는 사제도 없고 사도도 없단 말이오?"
이안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우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하는 자신의 힘으로 신이 된 초인이기 때문이오. 그렇기에 다른 그 무엇도 필요치 않으시지."
"…하지만 성상도 있고, 전사들에게 축복도 내려 주지 않던가?"
"그건 그저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전사들을 어여삐 여겨서지. 다른 이유 따윈 없소. 전사들이 카르하께 때때로 공물을 바치는 것도, 그저 공적을 자랑하려는 의도일 뿐이오."
이안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사도 퀘스트가 아니면, 이건 무슨 의미인 거지.'
퀘스트창을 응시하던 이안이, 이윽고 다시 우르드를 바라보았다.
이 노인이라면 답을 알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묻고 싶은 게 있소."
"잘 됐군. 나도 귀하께 여쭐 게 있던 참인데. 먼저 말씀하시오."
"북부의 대전사라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요?"
"...!"
느긋하게 미소짓던 우르드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095화
"그 말을 어디서 들으셨소? 누군가 귀하를 그렇게 부르던가?"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정확히는 어젯밤, 카르하의 성상 앞을 지난 순간 생성된 퀘스트의 이름이었다.
북부의 대전사. 카르하의 앞에 의지를 내보이라는, 게임이었다면 클릭 한 번으로 해결됐을 목표가 설명의 전부였다.
보상은 투쟁의 축복.
심지어 선택 퀘스트조차 아니었다. 야만 전사의 전용 퀘스트라 그럴 터였다. 야만 전사는 이걸 거절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이안은 이것이 카르하의 사도가 되는 퀘스트이리라 짐작했었다.
하지만 카르하가 사도를 두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은, 조금 더 알아볼 가치가 생긴 것이다.
"전사는 누구나 때가 되면, 카르하께 자신의 영혼을 내보이는 의식을 치르오. 일종의 성인식이지."
"정말 그가 영혼을 들여다보나?"
"전부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가끔 관심을 보이시는 경우는 있지. 그런 전사들은 보통 마을의 대전사로 임명된다오. 카르하께서 인정하셨다 여기는 거지."
물을 한 모금 마신 우르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진정 위대한 영혼을 가진 전사에게는, 카르하께서 직접 살피시고 축복을 내리시지. 그런 전사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대전사요."
"결국은 카르하를 섬겨야 한단 얘기 같은데."
"그렇지 않소. 카르하께선 설사 대전사의 목표가 천상에 올라 자신의 머리에 도끼를 내리찍는 것이라 해도 상관하지 않으시니까."
"그런 자가 정말 있었나?"
"있었소."
우르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전쟁의 시대에 탄생한 대전사가 그랬지. 죽인 마족의 머리를 성상 앞에 놓으며, 당신의 머리에 도끼를 찍어 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웃던 자였소. 그는 카르하를 섬기지 않았소. 자신이 넘어서야 할 경쟁자로 보았을 뿐. 그런데도 때때로 축복을 내려주셨었지."
"호오…."
"대전사는 상징적인 단어일 뿐이오. 책임지거나 얽매여야 할 것도 없소. 운명을 거스르고 자유를 위해 투쟁한 카르하가,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구속할 리가 있겠소?"
…하긴, 그런 설정이긴 했지.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안을 향해, 우르드가 덤덤하게 덧붙였다.
"카르하께선 그저 지켜보실 따름이오. 언젠가 자신처럼 신격에 다다를 또 다른 초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내킬 때 축복이나 던져 주면서 말이지. 제 멋대로인 작자로군."
"정확히 보셨소."
우르드의 대답에 이안이 결국 풀썩 웃음을 흘렸다.
카르하가 사제나 사도 따위를 두지 않는 건, 단지 필요 없기 때문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뜻을 대행하고 교리를 설파하는 대신 축복과 신성을 내리는, 그런 관계 자체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그럼 그 놈의 축복은, 게임에선 확률적으로 작동한 건가? 그럼 정말 다른 리스크나 제약이 없을 수도 있겠는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확률형 옵션이나 스킬은, 그 자체로 이미 제약의 역할을 했다.
지하 궁전에서 손에 넣은 고대의 운철 단검에 붙은 장비 파괴 확률 옵션이, 아무런 소모 값이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 대전사는 승천해 신이 되었소?"
이윽고 이안이 물었다.
우르드가 문득, 자신의 텅 빈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과거를 헤집는 듯한 시선.
"그건 모르겠소. 그는 결국 어떤 마족과의 전투에서 죽었으니까. 그것이 그의 정해진 운명이었는지, 운명을 거부하고 삶을 개척하다 맞이하게 된 최후인지는 알 길이 없소. 본인과 카르하만이 알겠지."
우르드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적어도 카르하의 머리에 도끼를 찍지는 못한 것 같소. 아직 카르하께서 건재하신 것을 보면."
'…대전사가 된다고 운명이 정해진다는 의미는 아니란 거군.'
그저 가능성을 본 것뿐이리라.
그것만으로도 이안은 묘한 감흥에 휩싸였다.
카르하가 자신에게서 정해진 운명을 거스를 가능성을 보았다는 뜻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어디서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보기에도 허무맹랑한 말은 아닌 것 같소."
다시 이안을 눈에 담으며, 우르드가 말했다.
"카르하는 마을의 그 누구에게도 귀하에게 보인 것 같은 관심을 두신 적이 없었소. 마을의 대전사인 꼬마 놈은 물론이고, 죽은 내 아들놈과 내게도. 귀하가 전사의 의식을 치른다면 카르하가 인정한 대전사가 탄생하게 될지도 모르지."
"나 같은 외부인도 의식을 치를 수 있나? 심지어 난 북부인도 아닌데."
"의식은 그저, 같은 인간들에게 보이기 위한 절차일 뿐이오. 카르하께선 그딴 건 신경도 쓰지 않으시겠지. 게다가…."
우르드가 이안의 얼굴을 가만히 훑었다.
"검은 눈과 검은 머리를 가진 혈통은 그리 흔하지 않소. 그리고 그중 하나가 북부에 있지. 귀하의 몸에 북부인의 피가 섞여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단 얘기요. 사실, 나도 그래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이건 그냥 랜덤하게 배합된 기본 외형을 선택한 결과일 뿐이야.
속으로만 읊조리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덕분에 호기심을 해결했군. 고맙소, 영감님."
"별말씀을. 나도 이런 얘긴 오랜만이오. 어린 놈들은 이제, 이런 건 궁금해하지도 않거든."
"그럼, 이제 영감님이 물으시려는 것도 들어봅시다."
이안이 느긋하게 물었다.
입가에 옅게 맺혀 있던 우르드의 미소가 흩어졌다.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평소와 같은 덤덤한 얼굴로 되돌아온 그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우리 마을이, 정말 고난을 극복한 것이 맞소?"
"...."
이안의 눈매가 꿈틀댔다.
우르드가 덧붙였다.
"솔직한 대답을 원할 뿐이오."
"당장은 넘어섰소. 하지만…."
이윽고 입을 연 이안이, 우르드의 외눈을 마주 보았다.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겠지. 이번보다 더할지 덜할지는 알 수 없겠소만."
"그렇군…."
우르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제 즐거웠냐는 듯 칙칙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노인이, 이윽고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귀하께 의뢰를 하나 더 하고 싶소만."
"일단 들어는 보겠소."
"마을을 떠나실 때, 아스켈을 함께 데려가 주실 수 있겠소?"
***
이안은 마을 인근의 숲을 몇 시간이나 뒤져, 간신히 청설모 두 마리를 붙잡아 돌아왔다.
사냥감이 씨가 말랐다던 에스켈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아마도 매일 밤 몰려오는 마물 무리에 겁을 집어먹고, 죄다 도망쳐 버린 것이리라.
"왜 이렇게 늦나 했네."
테사이아가 이안을 반겼다.
그녀의 눈동자가 어느새,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다.
"샬롯은?"
"잠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갔어."
"나갔다고?"
"지랑 비슷한 것들을 만나서 신난 모양이던데. 무슨 도끼 어쩌고 하는 별명도 붙었다던데. 촌스럽긴."
하긴, 대우가 달라진 건 샬롯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그녀를 대단한 전사로 대우했다. 홀로 수십의 언데드를 도륙하는 것을, 마을의 모든 전사들이 본 덕분이었다.
보편적인 도시였다면 그녀를 더 두려워하거나 꺼렸겠지만.
문명화되었어도, 야인 전사의 본질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좀 살 만한가 보군."
"낮보다는. 그거, 내 거야?"
"그래."
이안은 꼬리를 잡아 들고 있던 청설모를 테사이아에게 던졌다.
재빨리 받아든 그녀가 냉큼 한 마리를 입에 물고는 읊조렸다.
"…이젠 피만 마셔도 무슨 짐승인지 알 것 같아."
"맛이 그렇게까지 다르냐?"
무기를 풀며 이안이 물었다.
비쩍 말라 버린 청설모를 툭 내던지며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다양하게 맛없어. 사실, 맛있는 건 인간 피뿐이지만."
"...."
"왜 그렇게 봐?"
"마지막으로 사람의 피를 빤 게 언제지?"
"오래됐지. 네가 죽인 그 제국인들 피가 마지막이니까. 이젠 인간 피 맛이 가물가물할 지경이라고."
잘하고 있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말했다.
"충동을 잘 다스려라. 계속 살아남고 싶다면."
"…나쁜 놈들 피도 안 돼?"
잠시 침묵한 이안이 이윽고 대답했다.
"그놈들 피를 마시고도, 충동을 억누를 수 있다면."
"자신 있어. 걱정 마. 나 갈수록 인내심이 늘고 있다니까. 요즘은 야옹이가 때려도 참잖아."
"안 되겠군. 허락부터 구해라."
"…방금 내 얘기 어디가 못 미더웠던 거야?"
"전부."
"...."
입술을 비죽인 테사이아가 또 다른 청설모를 입에 물었다.
문이 벌컥 열린 건 그때였다.
화들짝 청설모를 집어 던진 테사이아가 빽 소리쳤다.
"노크 좀 해! 이 멍청한 짐승아!"
눈을 끔뻑인 샬롯이, 뒤따라 들어오던 아스켈을 몸으로 막으며 내뱉었다.
"깜빡했다. 앞으로 주의하지."
"…뭘 주의하신다는 겁니까? 왜 들어가다 멈추신 거고요."
아스켈의 물음에, 샬롯이 당황한 듯 눈을 끔뻑였다. 태연하게 대답한 건 테사이아였다.
"벗고 있었어. 옷 입는 중이니까, 훔쳐보지 마."
"아… 네."
탄식한 아스켈이 입을 다물었다.
테사이아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가의 피를 꼼꼼히 닦았다.
평소라면 함께 피식댔겠지만, 이안은 웃지 않았다.
"됐어. 들어와."
"목욕물부터 준비해라, 아스켈."
이어진 이안의 말에, 아스켈이 재빨리 냄비를 챙기며 말했다.
"어제도 하셨는데. 목욕을 참 좋아하시는군요."
"이안의 특이한 부분 중 하나지."
샬롯이 덤덤하게 덧붙였다.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어차피 여정 중엔 잘 못 씻으니까, 씻을 수 있을 때 매일 씻을 뿐이다."
"네 취향은 존중한다, 이안."
언제부터 목욕이 취향이 된 거냐고.
이안이 고개를 젓는 사이, 목욕물을 능숙하게 준비하던 아스켈이 말했다.
"테사이아 님과 그런 관계이실 줄은 몰랐군요."
이안의 머릿속을 한 번 더 헝클이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그런 관계?"
"남녀 간의 관계요."
"...."
이안의 미간에 골이 패이는 사이, 테사이아가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몰랐다니 의외네, 아스켈. 한눈에 알아봤을 줄 알았는데."
…쟨 또 뭐라는 거야.
아스켈이 고개를 저었다.
"전 샬롯 님과도 잘 어울리신다고 생각했거든요."
"엥…? 무슨 그런. 너 눈이 좀 이상한 거 아니니?"
테사이아가 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샬롯이 턱을 슬쩍 치켜들었다.
"안목이 뛰어난 거지. 애초에 너랑 나는 비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귀쟁아. 나는 너보다 크고, 강하고, 아름답지."
"키 크고 힘센 건 알겠는데. 다른 건 동의 못 하겠는걸. 큰 게 키를 말하는 게 아니면, 그것도 포함해서. 애초에, 넌 짐승이잖아?"
"또 무식한 소릴 하는군. 우리 수인은-"
"그만."
못 들어 주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말을 잘랐다.
둘을 싸늘하게 돌아본 그가 덧붙였다.
"애 앞에서 헛소리하지 마라."
"전 애가 아닙니다, 이안 님."
아스켈이 공손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안이 칼 같이 덧붙였다.
"나보다 어리면 애다. 그리고 이 녀석들은 내 동료지 연인 같은 게 아니야. 쓸데없는 상상의 나래 펼치지 마라. 목욕물이나 부어."
"…네."
아스켈이 곧바로 움직였다. 입술을 비죽댄 테사이아가 드러눕고, 샬롯은 동료란 말도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벽면에 기댔다.
곧 이안이 욕조에 몸을 담갔다.
…이제야 좀 살겠네.
생각하던 그의 시선이, 다음 물을 올리는 아스켈의 움직임을 좇았다.
'확실히,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아스켈의 얼굴에는 아무런 그늘이나 고민도 없었다.
마을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기쁜 듯 생기만 돌고 있을 따름이었다.
뇌리로 우르드의 목소리가 스쳤다.
트라벨가까지 저 녀석과 함께 가 달라는.
도시 인근의 야인 정착민들에게만 데려다주면, 나머지는 충분히 알아서 해나갈 수 있으리란 게 우르드의 생각이었다.
우르드가 그런 의뢰를 한 이유는, 물론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결국 마을이 무너질 거라 생각하는 거겠지.'
동의하는 부분이었지만, 이안은 그의 의뢰를 거절했다.
아스켈은 우르드와 함께가 아니라면 이주하지 않을 것이고, 녀석을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우르드는 걱정하지 말라며, 녀석은 마을을 떠나게 될 것이라 장담하듯 말했다.
날이 예리하게 선 장검을 보수로 내밀기까지 했다.
희귀 등급인 북부 전사의 장검.
이안은 아스켈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리란 조건으로 의뢰를 받아들였다.
손자라도 살리려는 늙은 전사의 마음을, 아예 모르는 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영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우르드가 저 녀석을 어떻게 설득할지는 여전히 의문인 데다, 퀘스트가 뜬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퀘스트는 일종의 이정표였다.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흐름이 있음을 알려 주는.
퀘스트가 없다는 것은,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테사이아가 그렇듯이.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스켈이 불쑥 물었다.
이안은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무것도."
"오늘 샬롯 님과 마을을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세 분이 계속 마을에 남아 주시길 바라더군요. 산맥에서 내려온 분들이니, 카르하가 보내 주신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카르하가 보낸 것도 아니고, 마을에 계속 남을 수도 없다. 연회가 끝나고 나면 떠날 거야."
"…아쉽군요. 남아 주신다면, 머잖아 대전사가 되셨을 텐데요."
"...."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퀘스트 창에 멈춰 있었다.
북부의 대전사.
"그래도 내일 연회는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전사들이 전부 사냥을 다녀와서, 고기를 마음껏 드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퀘스트 창을 닫으며 대답한 이안이,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09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