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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 5

평판이 좋은 작자인 모양이지."

"그 이상이죠. 폐하를 대신해 직접 영지를 오가며 칙명을 전하거나, 영주들의 요청을 처리해 주는 분이시니까요. 저도 국경 지대에서 두어 번 얼굴을 뵌 적이 있습니다. 현명하고 자비로운 분이셨죠. 전쟁도 반대하신다고 들었는데…."

필립의 눈빛이 우울하게 일렁였다.

"그분이 타락자들의 수장이라니."

"그러니까 더더욱 주위를 완벽하게 속인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계단이 끝났다.

이안은 음습하게 펼쳐진 지하실을 눈에 담았다.

"그자를 그대로 두면, 언젠가 왕국을 통째로 말아먹을 거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만, 네놈한테는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잡생각 그만하고 움직여. 분명 후작이 쓰던 비밀 공간이 있을 거다. 여기가 아니면 수로까지 갈 거니까, 하나도 놓치지 마."

"예."

벽면의 촛대 하나를 뽑아 든 필립이 앞서나갔다.

이안은 차분히 그 뒤를 따랐다.

제대로 왔다는 직감이 들었다.

대피소와 수로로 이어지는 이 지하실은, 밀실을 숨겨 놓기 딱 좋은 구조였으니까.

마력 탐지로 구석구석을 훑은 것도 잠시.

"호오."

이안이 구석진 벽면의 반파된 조각상 앞에 멈춰 섰다.

주위를 훑던 그가, 벽면의 벽돌 하나를 꾹 밀어 넣었다.

드드드득-

조각상이 옆으로 밀려나면서 숨겨진 통로가 드러났다.

계단 쪽에서 보면 조각상의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낮은 통로였다.

"결국, 또 나리께서 찾으셨군요."

달려온 필립이 입맛을 다셨다.

통로를 응시한 것도 잠시. 그가 몸을 숙여 앞장섰다.

"이젠 이런 게 놀랍지도 않네요."

짧은 통로를 지나고 나타난 광경에, 그가 중얼댔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밀실.

촛불을 비추자 벽면과 천장에 새겨진 검붉은 기호들이 드러났다.

신의 눈을 피하려 새긴 문양들이 분명했다.

여기 들어선 순간, 단죄의 검이 잠시 덜그럭거리다 침묵했으니까.

방의 구석. 책과 두루마리, 제식용 단검과 접시 따위가 놓인 책상을 대충 훑어본 이안이, 이윽고 밀실 중앙의 제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슴 높이 정도 되는 팔각형 제단.

그 위에는 내부에 자주색의 마력이 가득한 커다란 구슬이 놓여 있었다.

"증거가 될 만한 건 싹 다 챙겨라. 확인은 가면서 해도 되니까."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낸 이안이 말했다.

테사이아를 붙잡았던 봉인함을, 그는 보관 상자로 쓰고 있었다.

후작과 메이슨의 머리도 이 안에 있었다.

"예."

이안이 허공에서 상자를 꺼낸 것에 놀란 기색도 없이, 필립이 책상으로 다가갔다.

이미 이안이 무슨 묘기를 보여 주건 마법이려니 생각하게 된 그였다.

"흐음."

제단 앞에 선 이안이 침음했다.

이런 구슬에 얽힌 마지막 기억이 워낙 강렬한 탓에, 전처럼 손부터 나가지는 않았다.

'확실히… 혼돈의 조각은 아니네. 정수도 아니고.'

이안 본인도 그때와는 달랐다.

그는 이제 혼돈력을 어느 정도 별개의 느낌으로 구별할 수 있었다.

혼돈의 파편을 품으면서 생긴 변화였다.

구슬 내부의 오염된 마력에 담긴 혼돈력은 아주 희미했다.

'그럼 어디… 한번 볼까?'

이안이 손을 뻗었다.

구슬 내부의 마력이 그의 손길에 감응하듯 일렁였다.

그의 손이 표면에 닿은 순간, 자주색 마력이 역류하듯 그의 팔을 타고 밀려들었다.

이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의도했기 때문이다.

한 줌의 혼돈력을 손아귀에 머금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모든 일의 배후인 공작과 연결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환영이 눈앞에 펼쳐졌다.

공허인 것 같았지만, 전에 봤던 것과는 다른 광경이었다.

자주색과 선홍색이 뒤덮여 일렁이는 공간.

'공허의 다른 지역…? 아니면, 공허가 하나가 아닌 건가? 하긴. 블랙홀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공허가 거대한 블랙홀의 내부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때 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초월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인간의 형태와 비슷한, 아주 흐릿한 실루엣.

그것을 보았음에도 아무런 위압감이나 전율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안은 이것이, 지금 이 공허를 엿보고 있는 또 다른 타락자의 의식이리라 짐작했다.

어쩌면 공작일지도.

-귀하는 누구십니까?

이어진 사념은 뜻밖에도, 전혀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떤 분의 사도이시기에, 예고도 없이 심연에 발을 들이셨는지요. 혹여, 혼돈의 사도이십니까?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끈질기게 이어지는 사념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나이도 성별도 알 수 없는 타락자의 사념이 움찔했다.

-언짢으셨다면… 용서를….

-왜 나를 사도라고 생각했지?

이게 되네.

자신의 사념이 전해지는 것에 내심 놀라면서, 이안이 물었다.

잠시 멈칫한 타락자의 의식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야… 당연히….

치직, 주파수가 어긋난 라디오처럼 환영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공허의 혼돈과… 하게… 융합한....

잡음이 섞이던 사념이 사라졌다.

이안의 눈동자를 덮었던 자주색 마력이 한순간에 증발했다.

"...."

이안이 눈을 깜빡였다.

구슬 내부에 가득하던 마력이,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아, 그래. 소모품이었단 거지.

뒤에서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금 그건 또… 뭐였습니까?"

"내가 묻고 싶은데. 어때 보였지?"

"구슬에서 나온 마력이 나리를 감싸고 일렁였습니다. 나리한테 조금씩 스며들더니 사라졌고요."

"아, 그래?"

스며들었다라.

곱씹던 이안이 눈썹을 꿈틀댔다.

그의 심상에 자리한 혼돈의 파편이 조금,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느끼기 어려울 만큼 미세하게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입가에 헛웃음이 스쳤다.

아무래도, 게임에선 타락해야 얻을 수 있던 특수 능력을 갖게 된 것 같았으니까.

혼돈력의 총량을 이런 식으로도 늘릴 수 있다니.

타락자들을 찾아내 쳐 죽여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어난 셈이었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설마, 오염된 마력에 홀리신 건 아니겠죠?"

"네가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면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 물건이나 챙겨라. 볼 건 다 본 것 같으니까."

태연하게 내뱉은 이안의 시선이, 문득 텅 빈 구슬에 머물렀다.

'혼돈의 사도라….'

따지고 보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몰랐다.

***

다음 날 아침.

"정말 그거면 충분하겠어?"

데클란이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깨끗하게 씻고 단정한 옷을 걸쳤을 뿐인데도, 그에게선 귀족적인 품위가 묻어 나왔다.

"충분하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빈말이 아니었다.

새 장갑과 부츠. 얇은 사슬을 덧댄 견갑과 정체 모를 가죽으로 만든 밴드까지 몸에 걸친 참이었으니까.

하나같이 정보 확인이 가능한 고급품들이었다.

뒤따르는 필립도 새로운 방어구를 여럿 걸친 상태였다.

통일성 대신 실용성을 선택한.

전형적인 용병의 무장이었다.

"그렇다면야. 여기. 섭섭지 않게 넣었어. 마음 같아선 더 주고 싶지만. 알다시피 이젠, 영지의 재정도 생각해야 하는 몸이라서 말이야."

어깨를 으쓱인 데클란이 돈주머니를 건넸다.

"…이것도 충분하군."

말과 달리 꽤 묵직한 주머니였다.

미소 지은 이안이 주머니를 품에 넣었다.

내성 밖으로 나온 그들은 마구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데클란이 문득 내뱉었다.

"정말 아침 식사만 하고 떠난다니, 아쉽군."

"의뢰를 끝내야 하니 어쩔 수 없소. 어차피 귀하도 이제부터 해야 할 게 많으시잖소."

"그야 그렇지만."

데클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새 마구간지기에게 손짓을 보낸 데클란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이안. …이렇게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겠지?"

"상관없소. 버차드 후작."

멈춰 서며 이안이 답했다.

순간 굳어졌던 데클란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그렇게 불리니 어색하군. 아무튼… 자네가 말했듯, 난 이제부터 해야 할 게 아주 많아. 생각할 것도 많지. 내 입장도, 위치도, 모든 게 달라졌으니까."

"그래서,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거요?"

"의뢰가 끝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어? 평생 눌러살라고는 하지 않겠어. 다만, 내가 이 모든 일에 능숙해질 때까지만이라도 함께해 주면 좋겠는데. 유능하고 믿을 수 있는 오른팔이 필요해서 말이야."

이안이 피식 웃었다.

평소처럼 건조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듯한 미소.

"말 잘 통하는 오른팔이 필요하신 거겠지."

"당연히 그도 그렇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겠소. 난 한곳에 정착할 수 없는 몸이오."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지."

데클란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워서 한 말이었어. 이렇게까지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으니까."

"아마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그럴 거요. 나도 귀하처럼, 주위를 속이는 게 익숙하거든."

태연한 말투였지만, 데클란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의 시선에 이안이 피식댔다.

"용병들도 백성들도, 사실 전혀 좋아하지 않으시잖소."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아니, 어떻게 알았지?"

"글쎄…. 그냥 알겠던데."

"그래. 네 눈썰미가 좋은 거군. 그렇다면 다행이야. 난 또 내 연기가 엉망인 줄 알았네. 그건 문제거든. 앞으로도 계속해야 하는데."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데클란의 모습에, 이번엔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연기력을 걱정하신 거라니."

"이미 들킨 건 어쩔 수 없으니까. 틀린 말도 아니고. 사실, 지금도 걱정하고 있거든. 반란이 성공했으니, 이제부턴 용병 놈들이 내 속을 썩일 테니까."

당연한 걱정이었다.

이안 덕분에 기회를 얻었지만.

사실 그가 나타나면서 데클란의 본래 계획은 엉망이 됐으니까.

본래라면 용병들과 함께 전장을 구르면서, 그들에 대한 지배력을 확실히 다질 생각이었다.

통제되지 않는 녀석들은 제거하고, 남은 놈들은 잘 길들여서.

그 과정이 사라졌으니, 데클란은 저 못 배우고 제멋대로인 용병들에게 목줄을 채울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들개들이 걱정이면, 들개들과 대신 싸울 사냥개를 들이면 되잖소."

이안이 툭 내뱉었다.

데클란의 눈이 번뜩였다.

"사냥개?"

"본래 주인에게 버림받은, 죽음만 기다리는 놈들이 있잖소."

"…아!"

데클란이 짧은 탄성을 흘렸다.

숙청에서 살아남은 지휘관과 관료들을 뜻하는 말임을 곧바로 깨달은 것이다.

"새 주인이 직접 다시 목줄을 채워 주면, 감격하지 않겠소? 주인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들개들과 힘 싸움도 하고."

"난 상황에 따라 양쪽의 목줄을 잘 흔들어 주기만 하면 되겠군. …역시, 넌 굉장해."

데클란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자가 곁에 있다면, 지금보다 더 원대한 꿈을 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미 거절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면, 그나마 남은 일말의 가능성도 사라질 것 같았으니까.

그때 마구간지기가 말을 이끌고 나왔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말.

데클란이 시선을 돌렸다.

"저기 자네 말이 오는군."

"…저건 내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너희들이 타고 온 말은 너무 야위어서 말이야. 어울리는 놈으로 골라 놨지. 형님의 애마였어."

"사양하진 않겠소만…."

"뇌물이기도 해. 폐하께 잘 말씀드려 달라고. 새로운 영주는 왕국에 대한 충성심이 아주 깊다고 말이야."

"어렵지 않소. 나는 그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상관없으니."

"거참. 네 앞에선 거짓말을 할 수가 없군."

"뭐, 타락하지만 않으신다면야. 언젠가 유혹이 들 때, 나를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다는 것만 기억하시오."

그땐 아마도, 친구나 조력자로 만나게 되지는 않으리라.

데클란이 웃음 지었다.

"거참 무서운 말이군. 명심하지. 자네를 적으로 만나는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언젠가 또 뵙겠습니다, 후작 각하."

그때, 꾸벅 인사한 필립이 말을 받으러 달려갔다.

이안도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필립의 인도 아래, 능숙하게 말에 오르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데클란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도 되나?"

"이런 근사한 뇌물까지 주셨는데. 얼마든지."

"왕국에 이런 음모들이 도사리고 있는데도, 폐하께선 전쟁을 벌이실 것 같나?"

"무슨 예언자 취급이시군."

고삐를 쥔 이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아마도 일어날 거요."

"...!"

"그리고 그 후엔 어쩌면,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워낙 모든 게 개판인 세상이잖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말머리를 돌렸다.

"잘해 보시오. 이제 이 동네는 귀하가 하기에 달렸으니까."

이안이 말을 몰았다.

한 번 더 몸을 숙인 필립이 말의 고삐를 잡으러 달려갔다.

마구간 반대편. 성의 후문으로, 용병과 그의 종자가 멀어졌다.

아무런 미련도 없는 듯,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로.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데클란이, 문득 시선을 돌렸다.

패튼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떠났습니까?"

"그래. 떠났네, 패튼 경."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데클란이 말했다.

호칭이 낯간지러운 듯 웃은 패튼이 덧붙였다.

"가시죠. 성벽 앞에 주민들이 모두 모여 있습니다. 도련님, 아니, 영주님의 연설을 기다리면서."

"성벽 위에는?"

"용병 놈들… 아니, 우리 백인대와 살려 둔 관료와 지휘관들이 전부 모여 있습니다."

"좋아. 바로 가지."

"이대로요? 옷을 갈아입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괜찮아. 이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니까."

데클란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양손의 목줄이라… 그럴싸한 명분을 준비해야겠군. 시작부터 미움받고 싶진 않으니까.'

조언을 곱씹으며 걸음을 옮기던 그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이안과 필립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039화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걸음을 옮기던 필립이 문득 내뱉었다.

후작의 밀실에서 가져온 기록물을 세 권째 읽고 있던 이안이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뭐가."

"오른델이요. 제가 볼 땐 불안한 게 한둘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나리와 영주님의 대화가 아니더라도요."

"드디어 너도 사고라는 걸 할 줄 알게 됐군. 축하할 일이야."

"나리가 보시기에도 그렇단 거죠?"

이안은 어깨를 까딱였다.

필립의 말대로, 오른델의 불안 요소는 여전히 많았다.

데클란 본인까지 포함해서.

하지만 그게 마음에 걸리지는 않았다.

멸망을 향해가는 이 세계에서, 결국 개인이 만들어 내는 변화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오른델이 타락자의 손에 남겨지는 것은 막았으니, 이만하면 차선의 결말 정도는 될 터였다.

"신경 꺼라. 지금 네가 오른델을 걱정할 때냐?"

덧붙인 말에 필립이 퍼뜩 정신이 든 얼굴이 됐다.

"하긴. 옳은 말씀이십니다. 아겔 란의 문제가 가장 크고 시급하죠. 그런 의미에서...."

그가 턱을 까딱였다.

"뭔가 나온 게 있습니까?"

"아직은. 뭔가 있길 바라는 게 좋을 거다. 별 게 없다면… 아겔 란으로 돌아가는 날이 늦어질지도 모르니까."

"...!"

필립은 긴장한 얼굴이 됐지만.

사실, 이안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타락자란 것들은 마법사와 비슷해서, 제 놈들이 한 짓을 기록으로 남기는 걸 좋아했으니까.

그 내용은 배신을 염려한 증거 기록이냐, 정신 승리나 자의식 과잉에 의한 자기 과시냐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지지만.

후작은 전자에 가까워 보였다.

그렇게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온갖 잡지식과 정보들을 계속해서 눈에 담던 한순간.

"있군."

이안이 툭 내뱉었다.

슬슬 초조한 눈빛이던 필립이 홱 고개를 돌렸다.

"뭐가요? 뭐가 있습니까?"

이안이 보고 있던 책자를 필립 쪽으로 내밀었다.

필립이 눈을 깜빡였다.

"제 눈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그래?"

씩 미소 지은 이안이 표지에 그려진 문양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종이에 글자들이 홀연히 나타났다.

"지금은?"

"…마법이 걸린 책이었군요."

"그래. 남한테 보이면 안 될 내용을 기록하기에 딱 좋지."

이 많은 기록물 사이에 깨끗한 공책이 섞여 있으면 오히려 수상하다는 생각까진 못한 것 같지만.

"그래서, 뭐가 적혀 있습니까?"

"명단이야. 후작은 정말 아무도 믿지 않는 성격이었군. 언급된 자들의 명단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조사한 신상까지 다 적어 뒀어."

이 작자, 정말 왕이 되고 싶었군.

이안의 입가에 조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도 늙은 사슴, 레지스 브란트의 진짜 목적이 뭔지까지는 알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와의 밀회나 대화를 요약해 둔 부분 어디에도, 아겔 란 전체를 마경화시키리란 내용은 없었으니까.

타락자들을 주축으로 한 연합 국가를 설립하고, 심연에서 얻은 금단의 지식으로 불사의 군단을 만들어 세력을 넓히리란 계획만이 상세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변방 국가들을 집어삼켜, 끝내는 제국마저 위협할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이 후작과 다른 타락자들의 원대한 야망이었다.

'결국, 전부 레지스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거네.'

레지스 브란트라는 작자의 방식이 어떤지도 알 것 같았다.

권력자와 지식인들이 가진 은밀한 야망과 욕망을 부채질해, 끝내 선을 넘게 만들었으리라.

물론 그들이 원하는 바가 이뤄지리란 약속도 수없이 했겠지만.

이안이 볼 땐, 아겔 란이 마경화되면 다 없던 일이 될 것들이었다.

그때가 되면 타락자들은 원치 않아도 복종해야 할 테니까.

아니 어쩌면, 그들조차 제물에 불과할지도.

'이런 미친놈들이 전 대륙에 암약하고 있으니, 이 세상이 안 망하고 배길 리가 있나.'

이 와중에도 인간들은 서로 전쟁할 궁리나 하고 있으니.

혀를 차는 이안을 조바심 나는 얼굴로 바라보던 필립이 내뱉었다.

"어떤 이름들이 있습니까? 아는 이름도 있나요?"

"레지스 브란트는 확실히 있고."

페이지를 넘기던 이안의 손길이 멈췄다.

"프레드릭 헨슨…."

"…그건 누굽니까?"

"발크시의 사제다. 영주와 가까운 사이였지. 오, 한나 버튼. 이것도 아는 이름이군."

"그건 또 누구죠?"

"발크시의 귀족 부인이지. 정식 귀족은 아니지만."

"…정말 왕국 전역에 숨어 있었던 거군요. 토벌대를 파견하시라 건의해야겠습니다. 정 안되면 제국에라도 제보를-"

"그럴 필요 없어."

"...?"

"방금 말한 자들, 다 죽었으니까."

"예...?"

필립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죽이다뇨. 누가...."

이안의 시선에, 필립의 눈썹이 말려 올라갔다.

"나리가요?"

"의도한 건 아니었어. 의뢰비를 떼먹으려 하거나 뒤통수 치거나 해서 어쩔 수 없었지. 타락자라는 건 죽이기 직전에나 알았고."

"…발크 성의 영주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오히려 좋아하던데."

"예?"

"본인밖에 모르는 자였거든. 권력을 나눠 먹고 훈수질하던 것들이 죽으니 나쁠 게 없었겠지. 거기다 타락자라는 증거까지 명확했어. 오히려 비밀로 하자고 돈도 주더군. 일이 커지는 건 싫었던 거야. 그 후에 추방당하긴 했지만, 아무튼. 여기 있는 이름의 절반은...."

피식한 이안이 덧붙였다.

"내가 죽인 것 같은데."

"...."

오랜만에 얼빠진 종자의 표정을 지었던 필립이 이윽고 내뱉었다.

"나리는 정말이지… 대단한 분이십니다. 이만하면, 아겔 란의 수호자라 불리셔도 손색이 없겠군요."

"아겔 란을 위해서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러니까 내 이름 앞에 이상한 수식어 추가할 생각 하지 마라."

이안의 싸늘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립이 덧붙였다.

"그렇다면 타락자들을 물리칠 운명을 타고나신 것일 지도요."

"...."

그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의 육체인 이안 호프는 엄밀히 말해, 게임의 주인공이었으니까.

가는 곳마다 타락자와 마물, 마족들과 얽히게 되는 건 어찌 보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들과 관련된 퀘스트가 보상이 가장 좋으니, 더 강해지기 위해서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결론적으론 잘됐군요. 타락의 뿌리를 확실히 제거하면, 남은 타락자들에겐 기반이 거의 사라지는 셈이 될 테니까요."

필립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제 아겔 란으로 가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요."

"흠."

책을 아공간에 안전하게 넣은 이안이, 대답 대신 침음했다.

미간을 좁힌 필립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곳을 들르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닥쳐 봐. 고민 중이니까."

"...."

이안은 필립의 시선을 무시한 채 갈등에 잠겼다.

이대로 아겔 란에 간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지가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끝내면 아마도, 아겔 란을 떠나야 하리라.

한동안은 다시 발을 들일 수도 없을 테고. 게임에서도 그랬듯이.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을 퀘스트들과도 이별하게 되리란 뜻이었다.

아겔 란을 떠나는 것엔 조금의 미련도 없었지만, 그 부분엔 아니었다.

'굵직한 도시를 다 거치긴 했지만… 분명 몇 개쯤은 더 있을 텐데.'

메브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안은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이질적일 정도로 차분하던 모습.

아마도 격렬한 감정의 표출 끝에 찾아온, 잠깐의 평온이었으리라.

혼자가 된 지금도 그럴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내면의 저울이 오가는 가운데.

문득, 필립이 멈춰 섰다.

"뭐냐?"

이안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필립이 앞을 턱짓했다.

"갈림길입니다, 나리. 한쪽은 선회해서 발크시 쪽으로 이어지는 길이고. 한쪽은… 아겔 란으로 직행하는 길이고요."

"...."

이안은 앞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지는 가운데, 좌우로 길게 나뉜 관도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저는 나리의 종자이니, 어떤 선택을 하시더라도 따르겠습니다."

필립이 덧붙였다.

잠시 턱을 긁적인 이안은, 이윽고 말머리를 틀었다.

"이쪽으로 가지."

아겔 란으로 이어지는 길목.

굳어 있던 필립의 표정이 극적으로 밝아졌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

"이렇게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다니. 드디어 모든 게 잘 풀리리란 예감이 드는군요. 저희는 환대를 받으며 왕성에 들어가게 될 테고, 왕성에 드리운 어둠을 뿌리 뽑아 명예도 손에 넣게 될 겁니다."

"네 말을 듣고 있으니까 내 선택이 잘못된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데."

"그럴 리가요. 닥치겠습니다."

혹시나 마음을 바꿀까, 필립이 재빨리 말고삐를 끌었다.

이안은 피식대며 시선을 돌렸다.

아겔 란에서 순탄한 것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가는 길이라도 순탄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드디어…."

비탈길을 내려오던 필립이 감격의 탄식을 흘렸다.

저 멀리, 아겔 란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촌구석치곤 제법이군."

이안이 읊조렸다.

완만한 언덕을 중심으로 형성된 아겔 란은, 왕국의 다른 도시들보다 최소 수십 년은 앞서 있었다.

게임에서도 작은 도시는 아니었건만. 현실이 되고 보니, 그때는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언덕 꼭대기에 솟은 내성. 그 아래로 건물들이 이어지고, 언덕 중턱을 성벽이 둘러싸고 있었다.

언덕 아래로도 건물이 많았고, 또 다른 성벽이 한 겹 더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주위로도 건물이 많았는데, 가장자리로 또 다른 성벽을 두르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 옆으로는 적당한 넓이의 강이, 반대편 평야에는 밭이 가득했다.

도시의 이름이기도 한 아겔 란이 왕국을 이룬 비결 중에는, 이런 입지 조건 훌륭한 곳에 터를 잡은 것도 포함되어 있을 터였다.

아마 전 버차드 후작은 오른델을 이렇게 만들고 싶었으리라.

'아직 피바람이 불지도 않았고.'

이안은 멀쩡한 성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메브가 그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뜻이었으니까.

"오늘 밤은 드디어, 따듯한 방에서 잘 수 있겠군요."

필립의 걸음이 빨라졌다.

오른델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말끔하던 그의 몰골은 지금, 부랑자가 따로 없었다.

거기다 날씨도 조금씩 추워지는 중이었다.

계절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은 동네지만, 노숙하는 이들에겐 작은 변화도 크게 다가오는 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안은 아겔 란의 외곽 시가지로 들어섰다.

제법 많은 인파. 그들 대부분은 이안과 필립을 신경 쓰지 않았다.

외지인의 왕래가 잦고 치안이 좋다는 의미였다.

그때 필립이 말을 멈췄다.

첫 번째 성벽의 관문 앞이었다.

"외지인 같은데. 신분과 목적을 밝히시오."

경비병이 말했다.

같은 일을 수없이 반복할 텐데도, 꽤 군기가 잡힌 모습이었다.

"저는 아겔 란의 보검, 메브 리우렐 경의 종자입니다. 여기 이분은 리우렐 경의 손님인 이안 호프 나리이시고요."

"리우렐가의 손님이라고…?"

둘의 행색을 보며 불신의 눈빛을 보낸 병사가 턱짓했다.

"사람을 보내 확인하겠소. 기다리시오."

"예."

필립이 성벽으로 말을 몰았다.

이안도 군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이렇게나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절차라니.

"도시가 체계적으로 돌아가는군."

"당연하죠. 여긴 왕국의 중심이니까요. 법도부터 거주지까지, 모든 게 체계적입니다."

아마 제국을 따라 한 거겠지만.

이안은 생각하면서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이 세계에선, 이만하면 아주 살 만한 동네였다.

게임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화마에 휩싸인 채 아수라장이 되어 있던 도시가.

지금으로선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번에도 삐끗하면 그렇게 되겠지.'

그때, 관문 밖으로 누군가가 달려 나왔다.

귀족의 가신들이 걸치는 로브와 후드를 뒤집어쓴 체격 좋은 사내.

주위를 두리번댄 그가 이안과 필립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드디어 오셨군! 기다리다 목 빠질 뻔했소!"

후드를 벗으며 미소 짓는 건 그들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미구엘! 살다 보니 댁이 반가운 날이 다 있군요!"

필립이 그를 와락 껴안았다.

왜 이래?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그의 어깨를 토닥여 준 미구엘이, 말에서 내리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내뱉었다.

"얼굴에 기름이 줄줄 흐르는군. 살만했던 모양이지?"

미구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잘 다듬은 턱수염과 흉터가 흔들렸다.

"댁들 몰골을 보니 아니란 말은 못 하겠소. 자, 들어갑시다."

몸을 돌린 그가 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 경비병과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까딱여 보이기까지 했다.

필립이 피식댔다.

"현지인이 다 되셨군요."

"아시다시피 내가 적응력이 좋잖소. 여기서 지낸 기간을 생각하면 뭐, 그럴 만하지. 그러는 댁도, 이제 제법 용병 느낌이 나는군."

"원하진 않았지만 말이죠."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요."

껄껄 웃은 미구엘이 말을 이었다.

"우린 성벽을 하나 더 넘을 거요. 필립은 알겠지만, 리우렐가의 저택은 제일 안쪽에 있거든."

"그런데 왜 당신이 나오셨습니까? 전 나리께서 직접 나오실 줄 알았는데요. 사안이 사안이니까."

"물론 그러셨지. 나보다 더 댁들을 기다리셨는데. 다만, 그러실 수가 없었을 뿐이오."

볼의 흉터를 긁적인 미구엘이, 주위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 나리께선, 가택에 연금 중이셔서 말이오."

"...?"

필립은 물론, 이안의 미간도 설핏 좁아졌다.

#040화

"연금이라니?"

이안이 되물었다.

쩝, 입맛을 다신 미구엘이 말했다.

"일이 마음처럼 잘 풀리지는 않았다는 얘기요."

"자세히."

"…그래, 어차피 곧 나리를 만나게 될 텐데. 댁들도 다 알고 가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미구엘이 이안의 곁에 붙었다.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상관하지 않고, 그가 입을 열었다.

"댁들과 헤어지고 나서, 나와 나리는 곧바로 아겔 란으로 왔소. 중간중간 자잘한 싸움도 있었소만, 중요하지 않은 얘기고. 아무튼, 나리께선 아겔 란에 도착하자마자 성으로 향하셨소. 본가가 아니라."

놀라운 일이라는 식의 어조였지만, 이안은 덤덤했다.

메브라면 그러고도 남을 테니까.

"우린 거의 바로 입성했소. 난 어안이 벙벙했지. 아겔 란에 도착한 지 한 시간 만에 왕을 만나게 생겼으니. 어쨌든 폐하는 우리 행색 따윈 신경도 쓰지 않으셨소."

미구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리의 귀환을 환영하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셨지. 그리고 나서야 나를 보시더군. 나리께선 배덕자… 그러니까 타락자에 대한 말씀을 꺼내셨소. 내가 그 증인이라고."

"여기까진 순조로워 보이는데요."

필립이 덧붙였다.

미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런 줄 알았소. 곧 병사들이 늑대인간과 흑마법사의 머리. 그리고 전 가주의 관을 가져왔소. 전 가주의 시신은 썩지도 않더군. 폐하께선 놀라셨고, 이내 나리에게 감사를 표했소. 위로도 하셨지. 그리고는 나리를 새로운 가주로 임명하셨소. 전 가주를 대신해 기사단을 맡아 달라고 말이오. 그리고는…."

미구엘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돌아가 가문에 비보를 전하고, 충분히 여독을 풀라 하셨소. 이제부터는 바빠질 거라고 말이오."

"엥…? 타락자 색출은요?"

필립이 고개를 갸웃했다.

미구엘이 피식댔다.

"당연히 나리께서도 말씀하셨지. 하지만 폐하께선 이미 타락자가 죽었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셨소. 아겔 란에도 타락자들이 암약하고 있으리란 얘기에는… 표정이 좋지 않아지시더군. 그리고는, 회의를 소집할 테니 물러나 있으라 하셨소."

"은밀하게 진행하는 게 아니라요?"

"나도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나선, 깊이 생각할 틈이 많지 않았소. 나리의 본가로 돌아간 순간 난리가 났으니까. 실종된 가주가 죽어서 돌아왔잖소. 심지어 타락한 채로."

미구엘이 말을 멈췄다.

다음 관문에 도착해서였다.

이번에도 경비병이 있었지만, 그는 미구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별말 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분위기가 또 한 번 달라졌다.

넓고 깔끔한 길. 외부에서 안을 볼 수 없게 만들어진 집들은 벽돌이 더 하얗고 지붕은 더 붉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은밀한 시선이 여럿 느껴졌다.

특히 시선에 담긴 경계와 적의가.

이안이 내색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나리는 모든 전모를 밝히셨소. …자신의 손으로 가주를 죽인 것까지."

미구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들 나리를 원망하지는 않았소만.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두워졌소. 가문의 대가 끊겼기 때문이오. 전 가주는 혼사도 치르지 않으셨더군. 지금 리우렐가의 사내라고는 오늘내일하는-"

"그래서, 그 후의 회의에선 어떻게 됐지?"

궁금하지도 않은 개인사가 이어지자 이안이 말을 잘랐다.

헛기침한 미구엘이 말했다.

"회의는 며칠 후에 열렸소. 나리는 거의 모든 신하가 보는 앞에서 타락자의 존재를 공표하셨지. 나도 증인으로 섰고 증거도 모두 제출되었소.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들이었지."

미구엘의 걸음이 느려졌다.

리우렐가의 저택이 머지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소. 그러나 이것들이 아겔 란에도 어둠이 드리웠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고. 증명할 근거를 대라 했소. 그러지 않는다면 그저 신하들이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 뿐이라고 말이오."

"그자는 타락자가 분명합니다. 이름이나 얼굴을 기억하십니까?"

"전혀. 솔직히 말하자면, 엄청 쫄아 있었거든. …댁도 날 보는 그 눈빛들을 봤다면 공감할 거요."

머쓱하게 덧붙인 미구엘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나리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소."

"내 존재는 숨긴 거군."

이안이 내뱉었다.

미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둘 다, 처음부터 끝까지 언급조차 하지 않았소. 나는 나리께서 시키신 대로 한 거지만."

"혹시 이쪽의 일에도 영향이 미칠까 염려한 거겠지. 훌륭한 판단이야. 그래서?"

"폐하께서도 신하의 말에 동의하셨소. 한동안 자택에 근신하라 명하셨지. 그때부터 나리의 칩거가 시작된 거요. 지금까지."

"나리는… 괜찮으신 겁니까?"

"대외적으로, 업무는 완벽하게 처리하고 계시오. 기사단원들이 수시로 들락거리지. 개인적으로는… 사실, 잘 모르겠소."

미구엘의 눈빛에 염려가 묻어났다.

"종종 대화를 나누고, 나리께서 시키시는 일도 처리하고 있긴 하지만. 속내를 전혀 내비치지 않으시거든. 전보다도 더."

"…그러시군요."

읊조리는 필립의 눈동자에 걱정과 초조가 뒤섞였다.

"형씨만 믿겠소. 솔직히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거든."

말하며, 미구엘이 걸음을 멈췄다.

한쪽 벽으로 전면을 가린 대저택.

"들어갑시다."

미구엘이 벽면 한복판의 대문을 힘껏 밀었다.

문 너머의 정원이 드러났다.

정갈하게 가꿔져 있었으나, 적막만이 감돌아서 스산했다.

'이게 쇠락만 남은 귀족 가문의 분위기란 거군.'

이안은 덤덤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정원 구석의 하인 하나가 재빨리 달려와 필립에게 말을 받았다.

정원을 감싸고 이어진 2층 저택을 돌아보며, 이안이 말했다.

"경은 어디에 있지?"

"위에 집무실이 있소. 따라오시오."

미구엘이 성큼성큼 앞장섰다.

필립이 용병의 삶에 익숙해졌듯.

그도 메브의 부관 역할에 완전히 익숙해진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진심으로 그녀의 상황에 분개하고 염려하고 있기까지 했다.

'정 많은 용병이라니. 여태 살아 있는 게 용한 놈이라니까.'

생각하던 이안의 시선이 문득, 복도 너머에 멈췄다.

드레스 차림의 소녀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브만큼이나 흰 피부와 붉은 머리. 녹색 눈동자. 그리고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

"아가씨. 이쪽은 가주님의 손님입니다."

그녀를 본 미구엘이 깍듯하게 말했다.

소녀의 시선이 이안과 필립을 오간 후에, 다시 이안에게서 멈췄다.

그녀가 깍듯하게 인사했다.

이안도 엉겁결에 고개를 까딱였고,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루시 아가씨요. 이름은 루시아지만 다들 그렇게 부르지. 나리의 사촌이고."

미구엘이 속삭였다.

"저분도 알고 보면 딱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는 분이오. …지금 할 얘긴 아닌 것 같지만."

이안의 눈빛을 본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이안은 짜증스레 혀를 찼다.

궁금하지 않은 사연을 시시콜콜 알게 되는 것도 질색이었지만, 그 대상이 어린아이인 건 더 싫었다.

불편함을 넘어 불쾌했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저런 아이들이 살기엔 너무 야만적이고 가혹했으니까.

그래서 이안은 어지간하면 아이와는 엮이지 않으며 지내왔다.

아이들을 때리는 게 놀이인 줄 아는 건달이나 용병들을 병신으로 만들어 준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다 왔소."

멈춰 선 미구엘이 문을 열었다.

중앙에 기다란 탁자와 의자가 놓인 실내가 드러났다.

창가에 선 메브도.

다소 야윈 그 얼굴을 마주 본 순간, 이안은 그녀의 내면이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음을 직감했다.

일말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녹색 눈동자.

"오래 기다렸다, 이안."

내뱉는 목소리 역시, 내용과 달리 차가웠다.

기계처럼 살고 계셨군.

생각하며 장내로 들어선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오랜만이오, 경."

필립이 그녀에게 달려간 건 거의 동시였다.

"나리. 괜찮으신 겁니까? 얼굴이 너무 야위셨습니다. 미구엘이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모양이군요."

숨 쉴 틈 없이 이어진 말에, 메브의 입가에 비로소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아주 오랜만에 그런 표정을 지어 본 듯한 어색한 미소였다.

"못 본 사이 늠름해졌구나, 필립. 나와 비슷한 자리에 흉터가 생긴 것 같은데."

필립이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흉터가 늘었지요."

"그래서… 많이 배웠느냐?"

이어진 물음에, 필립이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예. 정말 많은 것을요."

"다행이군."

"뭐, 그래 봐야 이제 겨우 그냥저냥 쓸 만해진 수준이오."

의자 하나를 빼서 앉은 이안이 핀잔을 줬다.

메브의 눈매가 조금 더 휘어졌다.

"필립을 무사히 데려다줘서 고맙구나, 이안."

"저놈의 명줄이 긴 거지."

어깨를 으쓱인 그가 메브를 마주 보았다.

"대충 이야기는 들었소. 고생하셨더군."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필립을 보니, 고생을 한 건 너희들이었던 것 같군."

이안은 물론 필립도 그 말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메브가 상석에 앉았다.

"부탁한 의뢰는, 잘 해결되었나?"

"그렇소. 범인은 버차드 후작과 그의 장남이었소."

결론으로 운을 뗀 이안은, 오른델에서의 일을 차근히 설명했다.

때때로 필립의 첨언까지 더해진 이야기가 끝나자, 미구엘이 장탄식을 흘렸다.

"또 엄청난 일들을 겪으셨군."

"…해서, 증거와 증인까지 확보했단 말이냐?"

메브가 차분하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냈다.

"우왁?! 그거, 어떻게 한 거요?"

"잘."

미구엘의 질문을 일축한 그가 메브를 돌아보았다.

"이 안에 증거들이 들어 있소. 그리고…."

이안이 밀랍 인장으로 봉인된 두루마리를 꺼냈다.

"이건 현 영주인 데클란 버차드 후작이 직접 쓴 서한이오."

"정말 최선을 다해 줬군."

"가장 중요한 게 남았소."

덧붙인 이안이 느긋한 손길로, 문양이 새겨진 서책을 꺼냈다.

"타락자들의 명단이오. 전부는 아니라도…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포함된."

"...!"

내내 침착을 유지하던 메브의 눈이 비로소 커졌다.

이안이 미소 짓는 사이, 간신히 감정을 추스른 그녀가 일어섰다.

"이야기가 길어지겠군. 저녁 식사부터 준비하지."

복수를 향한 의지 덕분이겠지만.

그녀의 눈빛에 생기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이걸 잘 됐다고 해야 할지.

내심 탄식하면서도,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전에, 목욕부터 해야겠소."

***

방에 들어온 이안은,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후…."

드물게 기분 좋은 한숨이 번졌다.

미구엘의 얼굴이 반질반질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향신료와 소금을 적절히 곁들인 음식을 오랜만에 맛본 것이다.

깨끗한 새 옷에 푹신한 침대까지.

모든 간만의 호사를, 이안은 마음껏 만끽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비린내 나는 상황이 또다시 펼쳐질 테니까.

식사 자리에서 메브는 자신의 계획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꽤 과격한 방식이었지만, 이안은 그녀의 계획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과격하더라도 간단한 편이 좋았다.

'…게임이었을 때와 비교하면 귀여운 수준이기도 하고.'

문득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연 이안의 표정이, 이내 묘하게 변했다.

전혀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아. 많아야 열두어 살쯤 되었을까 싶은 소녀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냐?"

그가 내뱉자,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깜빡인 루시아가 다리를 굽혔다.

"인사는 됐어. 용무나 말해."

이안이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오래 대화할 생각 따윈 없었다.

간만의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 목소리에 주눅 든 기색도 없이,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어요."

"뭔데?"

"손님이 바로 그 용병님이신가요?"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용병?"

"미구엘이 말해 줬거든요. 늪지대의 용을 죽이고, 머리 없는 기수와 저주받은 고대수, 망자를 부리는 흑마법사를 처단한 전설적인 용병이 언니, 아니, 가주님을 돕고 있다고요."

"...."

미구엘 이 새끼를 진짜.

이안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아무래도 내일 당장 그놈의 혀를 뽑아 버려야 할 것 같았다.

"그 용병님이… 손님이신가요?"

"…그래. 용이 아니라 드레이크였지만."

루시아의 눈이 미미하게 커졌다.

여전히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눈빛만큼은 순간적으로 부담스러울 만큼 반짝였다.

물론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냥 애도 불편한데.

이건 애 어른이군.

턱을 긁적인 이안은, 다시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에 혀를 찼다.

"아직 할 말이 남았냐?"

"만약 손님이 그 용병님이라면… 가주님을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어쩌면, 제 저주보다 더 강하실지도 모르니까."

"저주…?"

"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전부 죽거든요."

"...."

이건 또 뭔 소리야.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푹 쉬세요,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한 루시아가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작은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본 이안은, 이윽고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이놈의 가문에는 평범한 인간이 하나도 없는 건가…."

중얼대던 그의 목소리가 문득 잦아들었다.

웃어넘기려 했지만, 루시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전부 죽는다는.

묘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몸이 된 이후로는, 좀처럼 틀리는 일이 없는 감각.

결국, 이안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뭐. 나쁠 건 없으니까. 혹시 모를 최악의 상황도… 대비는 해 둬야겠군.'

#041화

침상에 걸터앉은 이안은 흉갑의 끈을 조였다.

며칠 만에 느끼는 답답한 일체감.

짧게 한숨 쉰 그가 앞에 늘어놓은 것들을 바라보았다.

견갑. 각반. 팔 보호대와 장갑. 부츠를 비롯한 장비들.

기사 가문의 하인들답게 묵은 때를 벗겨내고 새것처럼 다듬어 가져왔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문득 예비군 소집일 아침이 떠올랐다.

단지 군복을 걸친 것만으로도 기운이 빠지고 찌뿌둥해지던 기억.

지금이 딱 그랬다.

'…예비군보단 재입대에 가깝지만.'

심지어 전역 날이 언제인지도 모르는 재입대지. 시발.

복잡한 속내와 달리, 몸은 기계적으로 장비들을 정확한 위치에 착용하고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안은 불과 몇 분 만에 완벽하게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단검과 투척용 단도들이 몸을 가로지르는 밴드와 허리에 자리했다.

이 투척용 단도들은 오른델에서 새로 구비한 것들이었다.

단검을 몇 번 던져 본바, 생각보다 명중률이 높았으니까.

민첩 수치가 높지 않지만, 정신력과 집중력 특성이 보조 역할을 해 주는 게 분명했다.

몸을 이리저리 돌려 점검을 끝낸 그는, 마지막으로 침대 머리맡에 기대 놨던 단죄의 검을 들었다.

준비는 그걸로 끝이었다.

'슬슬 스킬 포인트가 써도 될 만큼 모인 것 같은데. 이번 일이 끝나면 진지하게….'

침상에 걸터앉아 개인적인 고민을 이어가던 한순간.

똑똑.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필립이 고개를 내밀었다.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리."

뭔가 익숙한 그림인데.

생각하며 이안은 방을 나섰다.

정원이 보이는 복도를 지나, 그는 집무실 앞에 멈춰 섰다.

필립이 문을 열었다.

상석에 앉은 메브. 그리고 탁자를 따라 좌우로 길게 이어 앉은 사내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

"...."

그들의 시선이 이안에게 집중됐다.

이안은 태연하게 장내로 들어섰다.

철컥. 문이 닫히자, 메브가 입을 열었다.

"소개하지. 내가 말한 조력자, 이안 호프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용병이며, 너희들이 들은 일들을 해결한 진짜 장본인이지."

사내들의 시선이 이안을 훑었다.

눈길에 담긴 감정들이 조금 더 노골적으로 전해졌다.

그에겐 익숙한 것들이었다.

호기심. 경계. 호승심과 불신.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쪽은 친위 기사단 단원들이다, 이안. 내가 직접 추린,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들이야."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로소 사내들을 돌아보았다.

총 일곱.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아무도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현 상황에 대한 설명은 끝마쳤다. 이들이 우리를 도울 거야."

"경의 계획이 어찌 되는지도, 설명하셨소?"

"간단하게는."

"흠…."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천천히 단원들의 주위를 돌았다.

묘한 긴장감이 번졌다.

느긋한 시선으로 그들 하나하나를 훑으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귀하들이 모시는 왕을 반드시 지키시오. 이번 계획에서 귀하들이 해줘야 하는 건 그것 뿐이오."

"...."

"...."

몇몇의 눈빛에 노골적인 불쾌함이 묻어 나왔다.

용병 나부랭이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그들은 메브에게 들은 말을 다 믿고 있지도 않을 터였다.

이안이 정말 그만한 실력을 지녔다면, 떠돌이로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저마다의 속내가 보이는 것 같았지만,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나눈 대화를 어디에도 발설하지 마시오. 가족에게조차. 이건 거부권이 없소."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지?"

누군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호승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던 젊은 놈.

메브의 뒤에 선 미구엘의 얼굴에 긴장이, 문을 막고 선 필립의 눈에는 한기가 돌기 시작한 가운데.

이안이 미소 지었다.

"죽겠지. 당연한 걸 물으시는군."

"뭐… 라고?"

젊은 놈의 미간이 구겨졌다.

입을 열지 않았을 뿐, 다른 단원들의 눈에도 날이 섰다.

메브가 없었다면 당장 검을 뽑았으리라.

미구엘이 당장이라도 말리고 싶은 표정으로 입술을 움찔댔다.

아무런 동요도 없는 것은 이안과 메브 뿐이었다.

이안이 말을 이었다.

"계획이 실패하면 피해를 보는 건 내가 아니오. 나는 이 나라를 떠나면 그만이니까. 고통받는 건 남겨진 자들이겠지. 당신들이나, 이 나라의 백성들 같은."

"계획에 따른다면, 그 모든 비극을 막을 수 있소?"

젊은 놈의 어깨를 꾹 누르던 옆자리의 중년 단원이 말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하지만 적어도, 이 나라가 타락자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건 막을 수 있겠지."

"정말 아겔 란에… 그토록 많은 배덕자가 숨어 있는 건가?"

간신히 감정을 억누른 젊은 놈이 씹어 뱉듯 말했다.

이안이 탁자 쪽으로 다가섰다.

단원 하나가 앉은 의자 등받이에 손을 기댄 그가 말했다.

"있소. 이 자리에도, 하나 있고."

"...?"

"경. 물러나시오."

젊은 놈의 미간이 다시 구겨진 것과, 내뱉은 이안이 단검을 뽑아 든 건 거의 동시였다.

콰직!

단검이 바로 앞의 의자에 앉은 자의 목과 어깨 사이에 틀어박혔다.

"아아악- 어억?"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왼손으로 놈의 머리채를 움켜쥔 이안이, 그대로 탁자 위에 마구 내리쳤다.

쾅! 쾅! 쾅! 콰직-!

유혈이 낭자하고, 몇 번 지나지 않아 탁자가 박살 났다.

그대로 단원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은 이안은, 한쪽 무릎으로 놈의 등을 찍어 누르며 단죄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며 치켜든 순간.

퍼억-!

누군가 몸을 날려 그를 저지했다.

벽에 처박히며 보니, 그 젊은 놈이었다.

온 얼굴에 분노를 머금은 놈이 이안의 얼굴로 주먹을 날렸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왼손으로 날아드는 주먹을 쳐내면서, 이안은 이놈의 배에 칼침을 한 방 먹여야 할지를 잠시 고민했다.

이내 그러지는 않기로 결정한 그가, 대신 놈의 배를 걷어찼다.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른 젊은 단원이 이를 갈았다.

"이 미친 새끼…! 이 개자식이 로튼을! 이것 보십시오! 이자야말로…?"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의 시선이 주위의 단원들에게로 돌아갔다.

다들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이안을 노려보며 서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메브가 그들을 저지했음을 깨달은 젊은 단원, 조나단이 미간을 찌푸리는 가운데.

"하아…."

한숨을 내쉬며 이안이 일어선 이안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다시 말하지. 다들 물러나."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려는 찰나.

"커헉…! 쿨럭, 컥… 끄… 그극…."

만신창이가 된 로튼이 피 섞인 기침을 토해냈다.

신음이 기괴한 경련으로 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로, 로튼…?"

단원들의 얼굴에 그제야 당황이 번졌다.

필립이 인상을 구긴 건 그때였다.

"물러들 나시라고요. 당장."

"...!"

비로소 다들 뒷걸음질을 쳤다.

그 사이로, 로튼이 몸을 활처럼 휘며 일어섰다.

"그… 그극…."

핏발 선 눈이 위로 돌아가고, 전신에 자줏빛 핏줄이 터질 것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쫙 펼친 손끝에서부터, 섬뜩한 뼈 소리가 번져 나갔다.

솨아아-

이안의 검에서 푸른 빛이 번졌다.

"신성력…? 어떻게...?"

몇몇 단원들의 얼굴에 또다시 경악이 번지는 가운데.

그대로 로튼에게 달려든 이안이 검을 내리쳤다.

서걱-

변이하던 로튼의 몸이 어깨부터 골반까지 사선으로 갈라졌다.

철퍽, 잘린 상체가 바닥에 널브러지고, 하반신은 피와 내장을 흩뿌리며 뒤늦게 주저앉았다.

신성력이 아른거리는 검을 손에 쥔 채, 이안이 벽에 붙어선 단원들을 돌아보았다.

"이놈처럼 가장 수준 낮은 타락자는, 이렇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본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지. 이렇게 변이하는 도중에 공격하면 쉽게 죽일 수 있소. 목을 자르는 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놈보다 수준 높은 것들이라도 어지간하면 정신을 집중해야 본 모습으로 탈피할 수 있소. 그러니 낌새가 이상하면 당황하지 말고, 일단 후려치시오."

"...."

"정말 타락자라 불릴 만한 자들은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고, 방어할 수단도 갖추고 있지. 놈들을 마주치면 도망치시오. 당신들의 실력으론 절대 상대할 수 없으니."

이안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알아들 들었소?"

"예, 예...!"

"…알았습니다."

단원들이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커헉… 아… 아아…."

그때, 피를 토한 로튼이 신음했다.

반 토막 난 데다 잘린 부위가 타들어 가듯 일그러지고 있었음에도, 아직 죽지 않은 것이다.

그 사실이 본인에게도 결코 축복으로 느껴지지는 않으리라.

"...."

싸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본 메브가,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검을 뽑았다.

그녀의 손아귀를 타고 붉은 신성력이 번졌다.

"...!"

그 모습에 단원들의 눈이 다시 한번 커졌다.

다들 그녀의 신성력이 푸른 빛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붉은, 심지어 불길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신성력이라니.

그사이 로튼의 앞에 멈춰선 메브는, 단 한마디의 질문도 하지 않고 검을 내리쳤다.

서걱.

로튼의 머리가 깨끗하게 잘렸다.

무감정하게 시선을 돌린 메브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면목이 없군. 잘 가려냈다고 생각했거늘."

"저들도 그걸 염두에 두고 하수인을 보냈을 거요. 어떻게든 경을 감시해야 했을 테니까. 내가 놈들을 구별할 수 있다는 건 몰랐겠지만."

이안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가 이런 자리를 요청한 건, 애초에 내부에 섞여 있을지 모르는 타락자를 색출하기 위해서였다.

고개를 끄덕인 메브가 단원들을 돌아보았다.

이안을 볼 때와는 달리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이었다.

"보다시피, 이안은 엄정한 여신께서 인정하신 성전사다. 자격이 없다면 축복을 내리지 않으시겠지. 또한, 나는 단죄의 사도가 아니다. 복수의 사도이며, 아겔 란의 타락자는 모두 내 복수의 대상이지. 그러니 아직도 의심하는 자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말하라."

"…의심하지 않습니다."

중년 단원의 말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대답이 이어졌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대답한 조나단이, 이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해와 무례를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어떤 벌이라도 받겠습니다."

꼴에 기사다 이거지.

정중하기 그지없는 말투와 표정에 피식한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내가 말한 것들이나 잘 지켜."

"…물론입니다. 그…."

"이안이라고 불러라."

"예, 이안 경. 성심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경은 아닌데.

헛웃음을 지은 이안은, 메브와 눈빛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지. 회의가 소집되면, 당신들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부터."

기사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같이 웃음기 없는, 비장한 얼굴들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들이 무엇으로부터 왕을 지켜야 하는지를 실감하게 됐으니까.

***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돌아갔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필립과 미구엘이 시체를 수습하고 하인들이 핏자국을 청소하는 사이.

이안과 메브는 정원에 마주 섰다.

"저들이 제 역할만 다 해 주더라도, 일이 편해지겠소."

"타락자의 존재를 확인했으니, 적어도 배신하진 않겠지."

고개를 끄덕이던 이안의 시선이, 문득 저만치의 복도 끝에 멈췄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루시아가 곧바로 몸을 돌렸다.

"아, 그래. 저 아이도 네게 소개하지 않았군."

같은 곳을 돌아본 메브가 말했다.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인사를 나눴소. 심지어 날 찾아오기까지 했었지."

"찾아왔다고…? 무슨 용무로."

"경을 지켜 달라더군."

예상 못 한 말을 들었다는 듯, 메브가 입을 벌렸다.

이안이 피식댔다.

"경이 어지간히 위태로워 보였던 모양이오."

"…루시아가 그랬다니, 상상하기 힘들군.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는 아이인데."

"그렇겠지. 본인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니까."

"저주…?"

"그렇소.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죽는 저주라던데."

이안이 눈을 치켜뜬 메브를 돌아보았다.

"아마 그래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거겠지."

"...."

메브의 눈동자에 연민과 애틋함이 스쳐 지나갔다.

아, 이러다 또 구구절절한 사연 팔이가 시작되겠군.

직감한 이안이 내뱉었다.

"어쨌든, 시간이 많지 않소. 최소한, 공작이 오른델의 반란과 경 사이의 연결고리를 눈치채기 전에는 시작해야 하오."

메브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이안이 나지막히 덧붙였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놈이 어떤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으니까."

"…그리하지. 날이 밝는 대로 움직이겠다."

그러나 회의 소집일이 정해진 건,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나서였다.

#042화

덜컹, 주점의 문이 열리고 기분 좋게 취한 두 남자가 어깨동무를 한 채 걸어 나왔다.

"딱 한 잔만 더 마시고 싶었는데."

"아서라. 그러다 내가 너희 아내한테 맞아 죽는다. 가뜩이나 지금도 날 볼 때마다 쌍심지를 켜는데."

"지금쯤 애랑 자고 있을 텐데. 그러지 말고, 응?"

"됐다니까. 내일 대회의도 있으니 일찍 자 둬야지."

두 취객, 도슨과 톰이 걸음을 옮겼다.

둘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아겔 란의 시민들은 밤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다.

치안이 좋고, 마물도 주기적으로 소탕해 씨를 말린 덕분이었다.

도슨의 말에 톰이 탄성을 흘렸다.

"맞아. 그게 내일이지? 왜 잊고 있었지."

"그러게 술 처마실 생각만 하지 말고 나처럼 건설적인 생각을 해야지. 관문이 열리면 같이 내성 근처나 어슬렁대자고. 또 아나, 이번엔 육포라도 줄지."

종종 이루어지는 대회의는 귀족뿐 아니라 자유민들에게도 의미 있는 행사였다.

회의가 끝난 후에 중대한 결정 사항을 발표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 그 후에는 밀이나 빵, 하다못해 귀리라도 나눠 주는 법이었다.

"갑작스럽긴 해. 설마, 또 그 가문 일인가?"

"아마 맞을걸. 리우렐가의 새 가주가 미쳤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미친 성기사라니. 폐하께선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군."

"제 손으로 타락한 동생을 죽였다잖냐. 나 같아도 제정신으론 못 살지."

"아무리 그래도 아겔 란에 타락자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어?"

도슨이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어깨동무를 푼 그가 눈을 끔뻑였다.

"내 눈이 이상한가…? 달이...."

"달이, 뭐?"

고개를 갸웃한 톰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갈라진 잿빛 먹구름 사이로 선명하게 떠 있는 선홍색 보름달.

주위의 구름마저 자주색으로 물들이는, 이상할 정도로 큰 달이었다.

달을 응시하는 톰의 동공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저렇게 큰 달은… 처음인데… 안 그래… 도슨…?"

멍하니 중얼대며 고개를 돌린 톰의 눈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현실감이 되돌아왔다.

"도슨…?"

도슨의 몸이 활처럼 뒤로 꺾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입도 기괴할 정도로 커다랗게 벌어지고 있었다.

자주색이 뒤섞인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았다.

"도, 도슨. 괜찮, 괜찮아? 너, 허리가…."

더듬대던 톰의 눈에 핏발이 섰다.

도슨의 관절에서 뼈 소리가 번지고, 양 볼의 피부가 벌어지는 턱을 견디지 못하고 찢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가 우수수 빠지면서 그 자리에 거대한 송곳니가 돋아났다.

뿌득, 뿌드득-

도슨의 허리가 뒤로 완전히 꺾였다.

손이 땅에 닿고, 관절이 반대 방향으로 꺾이면서 근육이 부풀었다.

복부를 뚫고 새카만 촉수가 돋아나기 시작한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톰이 주저앉았다.

"이, 이게… 무슨…."

간신히 입을 달싹이는 그의 가랑이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크… 르르…."

새카매진 도슨의 입에서 짐승의 그것과도 같은 숨소리가 번졌다.

땅에 닿을 듯한 위치에서 빙글빙글 돌던 자주색 눈동자가, 이윽고 톰에게서 멈췄다.

가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

"히이익-!"

숨을 삼킨 톰이 바닥을 구르다시피 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달빛이 음산하게 내리쬐는 거리.

'달을 보면 안 돼. 달을 보면 안 돼. 달을…!'

톰은 속으로 끝없이 되뇌며 거리를 내달렸다.

뒤에서 네 발로 뛰는 소리와 숨소리가 들렸다.

헥헥대는 짐승의 숨소리.

새카만 촉수가 볼을 스쳤다.

숨결이 그를 거의 따라잡은 찰나.

콰당탕-!

집의 문고리를 낚아챈 톰이, 그대로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등으로 문을 짓누른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쿵! 쿵! 크르르….

몇 차례 부서질 듯 들썩이던 문이 고요해졌다.

숨소리가 천천히 멀어졌다.

톰의 몸에 비로소 힘이 빠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탄식하던 그의 시선이, 문득 집 안으로 향했다.

열린 창문.

텅 빈 침대 위로 내리쬐는 달빛.

"...!"

으적, 으적, 까득….

희미하게 번지는 소리가 비로소 귀에 들어왔다.

톰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침대 아래로 갈기갈기 찢겨 이어진 옷가지의 잔해들.

그리고 한쪽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새카만 형체.

빠득. 으적, 으적….

섬뜩한 소리와 함께, 피비린내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이건… 말도 안…."

실성한 듯 중얼거리던 톰이 숨을 헐떡였다.

괴물이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인간과 개를 뒤섞어 놓은 듯한, 거꾸로 뒤집힌 얼굴.

피와 살점이 번들대는 아가리가 천천히 벌어졌다.

그 아래, 일그러진 자주색 동공이 톰을 마주 보았다.

"여… 보…?"

안광이 그를 향해 뻗어 나왔다.

송곳니가 촘촘하게 돋은 심연이, 톰의 시야에 가득 찼다.

콰직!

***

"...!"

이안은 번쩍 눈을 떴다.

뇌리를 찌르는 불길함과 이질감.

공기에 퀴퀴한 냄새가 가득했다.

레지스의 혼돈력을 흡수한 뒤로, 놈의 하수인들에게서 맡을 수 있게 된 것과 같은 냄새였다.

창밖, 부자연스럽게 큰 붉은 달을 본 이안은 튕겨 오르듯 일어섰다.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광기의 밤. 게임에선 첫 번째 챕터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퀘스트였다.

루시아와의 대화 이후 내심 대비하긴 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퍽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진 상황이 달라지면 퀘스트도 달라졌었으니까.

'어떻게 해도 일어나는 사건도 있다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멍청한 짓을...?'

생각하면서도 재빨리 장비를 착용한 이안이 방문을 열었다.

데엥- 데엥-

도시에서 거슬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시가 공격받고 있음을 알리는 대피 신호.

"아악… 컥…."

아래층에서 희미하게 번진 비명이 이내 잦아들었다.

짐승의 숨소리와 섬뜩한 파육음.

그대로 난간 밖으로 몸을 날린 이안이 아래층의 방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목덜미가 움푹 파인 채 널브러진 리우렐가 여인의 시신.

까득, 우적- 우적-

그녀를 씹어먹고 있는 건, 전신에 검은 털이 뒤덮이고 등에 기다란 촉수가 돋은 괴물이었다.

사냥개.

크르르….

이안의 존재를 눈치챈 놈이, 숨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슈화악- 서걱-!

이미 놈의 지척까지 쇄도한 이안의 검이, 예리한 바람을 머금고 떨어져 내렸다.

거꾸로 된 머리가 잘려 떨어졌다.

바들댄 사냥개의 몸이 허물어졌다.

검은 핏물이 자욱하게 번졌다.

떨어진 머리는, 인간이었을 때의 형태를 조금은 알아볼 수 있었다.

이안도 아는 얼굴이었다.

정원과 마구간을 관리하던 하인.

콰장창-!

그때, 2층에서 소란이 일었다.

"...!"

몸을 돌려 뛰쳐나간 이안의 눈에 들어온 것은, 복도에서 잠옷 차림으로 사냥개와 뒤엉켜 있는 메브의 모습이었다.

사냥개의 아가리를 검날로 막은 그녀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향했다.

"도울 필요 없다."

사냥개의 눈을 무릎으로 찍고 몸통을 힘껏 걷어찬 그녀가, 그대로 뒤로 굴렀다가 재차 땅을 박찼다.

그녀가 순식간에 튕겨 나가는 사냥개를 따라잡았다.

갑옷을 걸쳤을 때와는 다른, 빛살 같은 움직임.

서걱-

그녀의 검이 사냥개의 쩍 벌어진 아가리를 훑고 지나갔다.

아래턱과 위턱이 분리된 사냥개가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그 시신을 내려다보며, 메브가 읊조리듯 내뱉었다.

"…이상한 일이군. 버논이 그리되었을 때는 그토록 원통하더니."

그녀가 난간으로 뛰어오른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제 그런 기분은 들지가 않아. 그저…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만 드는군. 이런 짓을 벌인 자들에게."

그녀의 죽은 것처럼 가라앉은 눈을 바라보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게 될 거요."

"으, 으아아악-!"

복도 너머에서 미구엘이 튀어나온 건 그때였다.

크르르륵-! 크헝!

세 마리의 사냥개가 그를 뒤쫓고 있었다.

"...!"

미구엘의 품에 안긴 루시아를 보고 눈을 치켜뜬 이안과 메브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날렸다.

콰직- 퍼억-!

둘이 사냥개들과 뒤엉키는 가운데.

"대체 이게 무슨 소란… 미구엘?!"

뒤늦게 무장을 갖추고 문밖으로 나온 필립이, 달려오는 미구엘을 발견하고는 눈을 치켜떴다.

미구엘이 그의 발치에 자빠졌다.

그 와중에도 루시아만큼은 놓치지 않은 채였다.

"정말 죽는 줄 알았… 염병할…."

헐떡이는 그의 등에는, 어깨까지 이어진 긴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사냥개의 촉수가 만들어 낸 흔적.

"...."

필립이 복도 너머를 바라보았을 때, 이미 상황은 끝난 뒤였다.

머리를 잃은 사냥개들이 널브러진 가운데, 메브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루시아가 살아 있었다니. 어쩌면, 생존자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군."

"내가 찾겠소."

이안이 말을 잘랐다.

메브의 시선에, 그가 턱짓했다.

"경은 무장부터 갖추고 오시오."

메브는 그제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걸친 옷이 어느새 넝마가 되어서, 거의 벗은 것과 다름없었다.

드러난 허리와 어깨의 긁힌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자칫하면 또다시 짐이 될 터.

"…그래. 부탁하마."

이윽고 메브가 몸을 돌렸다.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문득 미구엘을 바라보았다.

"고맙다, 미구엘."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요, 나리."

고개를 끄덕인 메브가 멀어지는 사이, 이안이 필립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따라와라. 미구엘, 넌 루시아만 잘 챙겨라. 그리고, 절대 달을 올려다보지 마."

"아, 알겠소."

미구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아를 감싸 안는 가운데, 뒤로 따라붙은 필립이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아겔 란이 마경이 됐다."

"마경…!"

필립이 탄식하는 가운데, 미구엘이 내뱉었다.

"아겔 란 전체가 말이오?"

"그래."

"이런 미친…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라니."

"…저 붉은 달이 사람들을 오염시키고 있는 거군요."

필립이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달을, 봤냐?"

"예. 뭔가 어지러워져서 시선을 돌리긴 했습니다만."

"홀리지 않았다니. 굴린 보람이 있네. 그렇다고 계속 쳐다보진 마라."

계단을 내려가면서, 이안은 붉은 달을 올려다보았다.

"저건 진짜 달이 아니니까. 그저 저주의 덩어리지. 계속 보고 있으면, 결국엔 오염되고 말 거다."

이안이 볼 때, 마경은 아직 완벽하지 않았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지 못한 것도 그 증거였다.

붉은 달 역시 그의 기억보다 작고, 저주도 약했다.

그때는 공간이 일렁일만큼 강한 빛을 뿜어 댔었으니까.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정신력이 낮거나 내면이 불안정한 자들을 오염시키기엔 충분할 터였다.

슬픔과 실의에 잠겨있던, 리우렐 가의 사람들처럼.

이안은 1층을 뒤져 두 마리의 사냥개를 더 죽이고, 창고에 숨어 있던 시녀 한 명을 구해냈다.

생존자는 그녀가 전부였다.

"...."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가운데, 밖에서 울려퍼지는 소리가 고스란히 장내까지 전해졌다.

달을 보지 말라는 병사들의 고함.

왕성으로 대피하는 사람들의 다급한 발소리와 내달리는 사냥개의 숨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비명과 절규.

왕성과 가까운 이곳이 이런 상황이라면, 관문 너머는 지금쯤 생지옥이 펼쳐지고 있으리라.

모든 수색을 끝낸 가운데.

"…공작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미친 짓을 벌이는 걸까요."

필립이 문득 내뱉었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궁지에 몰렸을 때는, 판을 아예 부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니까."

"고작 그런 이유일 거라고요? 하지만 이런 일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을 텐데요."

"범인으로 내세울 만한 사람도, 이미 있잖아."

"…설마. 나리를."

"아마도. 광기에 빠졌다는 소문도 도는 데다, 실제로도 혈육이 타락하기까지 했으니. 이번이 경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타락자의 존재를 밝힌 것도 나리이지 않습니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사람들이 믿는 게 곧 진실이지. 아니면, 믿고 싶거나."

"그런…"

필립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부정하지 못했다.

이제 그 역시 암흑시대의 민낯을 충분히 겪었으니까.

"누명을 씌우고 사람들을 선동할 시간도 충분할 거다. 단죄의 사도는 불의를 외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어쩌면, 나리가 저 괴물들과 싸우다 죽길 바라는 걸 수도 있겠소."

듣고 있던 미구엘이 툭 내뱉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이 살아남더라도 이미 여론은 그의 편일 거고. 그때가 되면 경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계산이겠지. 단죄의 사도는, 무고한 자들을 해칠 수 없으니까."

"나리가 가진 제약을… 이용하려는 거군요."

"그래. …어디까지나 경이, 단죄의 사도라면 말이지."

이안의 의미심장한 말에, 필립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리께서 복수의 사도로 거듭나신 건… 모를 거란 말씀이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런 자충수를 둘 이유가 없으니까."

"내가 곧바로 자신과 하수인들의 목을 베러 가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을 거란 말이냐?"

계단 위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갑옷을 갖춰 입은 메브가 걸어내려오고 있었다.

"내 생각은 그렇소."

"그럼, 그 예상을 깨 줘야겠군."

"거기에 더해, 예상하지 못한 위기까지 더해져야 본색을 드러내지 않겠소? 그러니 나는 차라리…."

이안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경이 정말, 광기에 물든 복수귀처럼 보였으면 좋겠는데."

메브의 눈을 응시하며, 그가 덧붙였다.

"할 수 있으시겠소?"

섬뜩한 붉은빛을 머금기 시작한 메브의 눈동자가, 이윽고 휘어졌다.

"기꺼이."

#043화

아겔 란 왕성, 외곽 첨탑.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난간 앞에, 레지스 브란트 공작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

감은 눈꺼풀 너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가고, 지팡이를 쥔 손끝이 움찔댔다.

불룩 튀어나온 미간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번진 핏줄이 꿈틀댔다.

그는 지금 도시의 구석구석을 인식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달랐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색의 파장과 냄새, 소리로 넓은 공간을 동시에 인식했다.

마경을 열며 손에 넣은 초감각.

그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사냥개들을 통제했다.

비명과 공포가 가득한 것과 달리, 성벽 밖의 희생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레지스의 섬세한 안배였다.

그는 아겔 란이 완전히 무너지길 바라지 않았다.

백성들은 도시의 밀알. 희생은 공포와 분노가 그들의 영혼에 각인될 정도면 충분했다.

그의 주요 목표는 오히려 내성의 귀족들과 그들의 가신들이었다.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거나, 그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자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한 수였다.

버차드 후작까지 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최후가 멀지 않았다고까지 여겼건만.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길은 열리는 법이지.'

이 광기의 밤이 지나면, 소수에 불과했던 그의 추종자들이 다수의 편에 서게 되리라.

"큭큭...."

레지스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웃음이 번졌다.

메브 리우렐이 떠올라서였다.

가장 거슬리는 변수가 되어 돌아온, 티르 엔의 종년.

초감각으로도 찾을 수 없는 것을 보면, 좌절과 절망 속에 파묻혀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왕국의 수족들을 죄다 잘라낸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가문이 거의 다 죽음을 맞이했을 테니, 이만하면 추종자들의 복수도 충분히 해 준 셈이었다.

물론 자신이 그린 그림을 망친 대가는 아직 받지 않았다.

그 종년의 영혼과 사냥개들은, 그가 모시는 신에게 조공으로 바칠 생각이었으니까.

그만하면 마경을 열고 권능을 물려받은 대가로도 충분하리라.

"...!"

순간 레지스의 눈매가 꿈틀댔다.

또다시 외성 밖의 거슬리는 존재가 느껴진 탓이었다.

무언가가 외곽 지역을 오가며 사냥개들과 싸우고 도망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처음엔 메브인 줄 알았으나, 지금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저렇게 민첩하지 않았다.

물론, 대단한 놈은 아니었다.

레지스는 외곽의 사냥개들에게 놈을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어차피 사냥개들에겐 사냥감이 필요한 법이었다.

레지스의 종양처럼 튀어나온 미간이 터질 듯 꿈틀댔다.

이토록 많은 사냥개들을 통제해 본 것은 처음인지라, 제어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마경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힘이었다.

지금은 단지 하룻밤에 불과하지만.

언젠가 왕국 전체를 신께 바치고 영원히 이 권능을 손에 넣을 것이었다.

그때라면 그 역시 능히 반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때가 온다면, 제국을 상대로도 참된 진리를 설파할 수 있을 터.

"그 빌어먹을 년만 없어지면… 더 이상 나를 막을 자는…."

중얼거리던 레지스의 입이 닫혔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

툭 튀어나온 미간이 핏줄과 함께 잦아들고, 초감각이 흩어졌다.

레지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첨탑 아래의 광경이 펼쳐졌다.

"열어 줘! 열어 달라고!"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 아, 아아악!"

굳게 닫힌 성벽을 울부짖으며 두드리던 뒤늦은 대피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었다.

몇 마리의 사냥개들이 헐떡이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필멸자란 어쩌면 저토록 하찮은가.

레지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치는 가운데.

"공작 각하."

병사가 첨탑으로 들어섰다.

언제 미소 지었냐는 듯 침통한 표정으로, 레지스가 고개를 돌렸다.

병사가 고개를 숙였다.

"왜 이런 위험한 곳에 계십니까. 각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많은 이들이 무너질 것입니다."

"재앙이 닥치지 않았나. 찬란한 여신의 종이 외면할 수는 없는 법이지. 방금도 누군가의 가족이 성문을 두드렸네. 왜 문을 열지 않았는가?"

"폐하의 명이십니다…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해서, 무슨 일인가?"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다른 귀족 나리들도요."

"그래. 함께 돌아가세. 위험한 것은 자네 홀로 남아도 마찬가지일 테니."

병사가 계단을 가리켰다.

극진한 태도. 레지스는 사양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좁은 복도와 몇 개의 방을 지난 그는, 피난민들이 모여 있는 대회관에 들어섰다.

외곽과 통로를 따라 친위기사단과 병사들이 늘어선 가운데, 모여 앉은 피난민들이 쑥덕대고 있었다.

추종자 몇과 시선을 교환한 레지스가 상석의 왕좌로 향했다.

그 위에 걸터앉아 짜증과 초조함을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내고 있는 놈이 바로, 어윈 아치볼트 브란트. 그의 조카이자 국왕인 어윈 2세였다.

형님의 피만 물려받았을 뿐인 한심한 놈이라 생각하면서도, 레지스는 특유의 자비로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폐하. 찾으셨습니까."

"숙부. 밖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국왕이 그를 올려다봤다.

머리 위, 사슴뿔을 엮은 형상의 왕관이 촛불의 불빛을 따라 금빛으로 일렁였다.

"각 성벽의 병사들이 분투 중입니다. 마물들도 성벽을 기어오르지는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백성들은… 찬란한 여신께서 가호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빌어먹을… 왕국의 수도에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나다니. 소문이 퍼지면 아겔 란이 약해졌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번 일을 극복하면 오히려, 왕국의 저력을 입증하시게 될 겁니다. 날이 밝으면, 저주의 근원을 찾아 뿌리 뽑으시지요."

"그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가더군요. 숙부의 혜안이 필요합니다."

"혜안이라면, 어떤…?"

국왕이 손짓했다.

이쪽을 곁눈질하던 몇몇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다시 해 보시오."

국왕이 명했다.

고개를 숙인 귀족이 입을 열었다.

"소신은, 이번 일의 배후에 리우렐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는?"

"전대 가주인 버논 리우렐이 어둠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바. 또한, 메브 리우렐 경은 왕국의 분란을 조장하고 망상증에까지 빠졌습니다. 끝내 검은 벽의 광기를 불러들인 것이 분명합니다."

레지스의 하수인인 자였다.

몇몇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납득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인 자들이 더 많았다.

국왕의 표정까지 확인한 레지스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허나 리우렐 경은 엄정한 여신의 사도로, 아겔 란을 대표하는 성기사요. 또한 비통에 잠긴 누이이며, 리우렐가는 대를 거쳐 왕국에 충성한 명가이지."

"...."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좌중을 돌아본 레지스가 내뱉었다.

"하물며 본인이 요청한 회의를 앞두고,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단 말씀이시오?"

"진정 그렇다면 어째서, 이곳에 리우렐가의 사람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단 말씀이십니까? 또한, 폐하의 방패이신 리우렐 경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필시 어딘가에서 저주받은 마물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그만."

국왕이 손을 들어 레지스의 말을 잘랐다.

"숙부의 마음은 알고 있습니다만. 내 귀에는 저들의 말이 아예 허무맹랑해 보이지는 않는군요. 리우렐 경이 돌아온 이후로 아겔 란에 불길한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신하들 앞에서 자신의 친위 기사를 의심하다니, 어리석은 놈.

생각하면서도, 레지스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오나 폐하…."

"조사해 보면 알게 되겠지요. 이 빌어먹을 밤이 지나간 후에, 명명백백하게 진실을 밝혀내어 리우렐 경의 명예를 되찾도록 도와주면 될 일입니다."

"...."

레지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국왕이 덧붙였다.

"조사는, 숙부께서 맡아 주세요. 정말 리우렐 경이 무고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내 진심으로 사죄하고 더 언급하지 않을 테니."

"...."

내 뜻에 반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멍청한 놈. 그래서 고맙구나.

내심 웃음 지은 것과 달리, 레지스는 고개만 숙였다.

장내에 침묵이 내려앉고, 몇몇 친위 기사들의 눈에 소리 없는 불안이 스치던 그때.

"심려치 마십시오, 폐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좌중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 온 대회관의 입구로 향했다.

국왕과 레지스도 마찬가지였다.

"소신이 왔나이다."

흐릿하게 일렁이는 촛불 아래, 전신 갑옷 차림의 기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저년이 어떻게 여기에…?'

레지스의 눈빛이 가라앉는 가운데.

국왕이 미간을 좁혔다.

"경. 하나 묻겠네. 어떻게 성안으로 들어온 것인가?"

"정문으로 들어왔습니다, 폐하."

메브의 모습이 비로소 선명해졌다.

사냥개들의 검은 피를 전신에 뒤집어쓴 형상.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갑옷에 맺힌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잿빛 가죽 갑옷을 걸친 사내가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으나, 단 한 사람도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메브에게서 기이할 정도로 불길한 존재감이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하의 주변에 타락자들이 도사리고 있사온데, 신이 어찌 폐하를 홀로 남겨 둘 수 있겠사옵니까?"

"타락자들이라니…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저벅, 저벅-

메브는 왕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겨, 이윽고 대회관의 입구에 멈춰 섰다.

새 부리 형상의 안면 가리개가 느릿느릿 장내를 훑었다.

"보이지 않으십니까? 아겔 란을 혼란에 빠뜨리고도 이곳에 태연하게 숨어, 폐하의 눈과 귀를 가리는 자들이요."

어느 것 하나 틀린 말이 없었으나, 국왕의 귀에는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레지스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저년이, 진정 미친 것인가?'

그의 눈매가 순간 꿈틀댔다.

안면 가리개 너머의 서늘한 시선이, 일순간이지만 그에게서도 멈췄었기 때문이다.

…설마. 정말 다 안단 말인가?

그가 속으로 읊조릴 찰나.

"허나 심려치 마옵소서. 소신이 이곳에 왔나이다."

메브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점점 인상을 구기던 국왕이 내뱉었다.

"경,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가문의 식솔들은 모두 어디에 있지?"

천천히 일어선 메브가 대답했다.

"모두 죽었습니다, 폐하."

"...."

국왕이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짓는 가운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지켜보시옵소서, 폐하."

스르릉….

메브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소신이 이 자리에서, 타락자들을 뿌리 뽑겠나이다."

"뭣… 이라?"

비로소 국왕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장내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휘몰아쳤다.

창을 쥔 병사들의 손이 가늘게 떨리던 한순간.

"리, 리우렐 경이 정말 미쳤다! 우리를 전부 다 죽일 셈이야!"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누군가가 소리쳤다.

피난민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폐, 폐하! 폐하를 모셔라…!"

레지스가 뭔가 입을 열려는 찰나, 누군가가 소리쳤다.

친위기사단의 일원. 메브와 뜻을 함께하는 자들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메브에게 압도되어 있던 그가, 뒤늦게 자신의 소임을 떠올린 것이다.

여섯 단원이 거의 동시에 국왕을 향해 달려갔고, 남은 기사들도 검을 뽑았다.

병사들의 떨리는 창끝이 메브를 겨누기 시작한 가운데.

솨아아-

가슴 앞에 모아쥔 메브의 검에서 붉은 신성력이 피어올랐다.

불길하게 일렁이는 붉은빛이 메브의 전신으로 번져 나갔다.

"신의 불충을,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그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깨달은 순간, 레지스의 눈에 비로소 핏발이 섰다.

저 미친년이, 정말 무작정 타락자들을 쳐 죽이러 이곳에 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에 남은 전원을 죽여서라도.

***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군.'

이안은 내심 헛웃음을 지으며 메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태까지 단 한 걸음도 움직인 적이 없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메브의 존재감이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이었다.

복수의 사도가 내뿜는 신성력은, 단죄의 사도일 때의 그것처럼 찬란하지 않았다.

피처럼 끈적하게 흘러내리며 불길하게 타올라 증발했다.

그것이 복수의 본질이라는 듯이.

이안이 기억하는 피 흘리는 복수자의 모습, 그 자체.

그리고 그가 보기에, 그때와 같은 건 겉모습만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복수를 끝내고 죽을 생각이신가 본데….'

메브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목과 어깨를 풀던 이안이, 서늘한 눈빛으로 몸을 날렸다.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요.'

받아야 할 보수가 남아있으니까.

#044화

느릿느릿 걸음을 내딛는 메브의 모습은, 붉은 횃불을 방불케 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머, 멈추시오! 막아라! 폐하를 지켜!"

기사들 중 하나가 외쳤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향해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확실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맞설 수 있는 자는 드문 법.

다들 공포에 질린 채, 홀린 듯 메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덕분에, 아무도 자세를 낮춘 채 옆으로 내달리는 이안을 주목하지 않았다.

'일단 한 놈.'

손가락에서 따끔한 느낌이 번지고, 늪지의 원한이 인근의 하수인 한 놈을 향해 마수를 뻗쳤다.

이안은 눈길도 주지 않고 다음 목표에게로 달려갔다.

문득 필립, 미구엘과 함께 저택의 은신처에 두고 온 루시아가 떠올랐다.

끔찍한 참상을 눈앞에서 겪고도 겁먹은 표정조차 짓지 않던 소녀.

하지만 그를 응시하던 눈빛만큼은 간절했다.

부디 자신의 부탁을 잊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듯한.

'…이래서 애새끼들은 싫다니까.'

생각하며, 이안은 코앞으로 다가온 귀족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의 접근을 눈치챈 듯, 놈의 눈이 커졌지만.

터억-!

이미 이안의 손아귀는 놈의 얼굴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아귀에 맺혀 있던 혼돈력의 일부가 놈의 눈과 코, 입을 통해 밀려들었다.

아주 적은 양.

'효과가 있으면 좋겠는데.'

생각하며, 이안은 놈을 확 끌어당겨 메브 쪽으로 내던졌다.

"어억-?!"

"꺄악!"

데굴데굴 굴러간 귀족 놈이 메브와 병사들 근처에 자빠졌다.

돌발 상황에 피난민 사이에서 짧은 비명이 번졌다.

달려들듯 말 듯 한 거리까지 가까워졌던 병사들과 메브의 시선이, 쓰러진 귀족에게로 돌아갔다.

"어윽… 컥… 크윽…?"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던 그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보라색과 자주색이 뒤섞인 핏줄이 전신에 돋아나고, 근육이 뒤틀리면서 팽창했다.

"벼, 변이…?"

병사들 중 하나가 중얼대는 그때.

발작하던 귀족이, 뒤틀리듯 일그러진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 아아- 악-!"

고통에 찬 절규.

그제야 피난민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 다들 도망쳐!"

그 외침을 시작으로 피난민들이 사방의 통로를 향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사이 또 다른 귀족의 얼굴을 움켜쥐고 있던 이안이, 변이 중인 타락자를 일별했다.

'정말 되네.'

변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하급 타락자들을 보며 떠올렸던 발상이었다.

이것들은 어쩌면 오염된 마력이 아니라 거기 섞인 혼돈력을 다룰 줄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그래서 순수한 혼돈력을 역으로 밀어 넣으면 오히려 반작용이 일어나지 않을까 추측하게 됐는데, 그 예상이 제대로 적중한 것이다.

혼돈력을 다룰 줄 아는 레지스 같은 제대로 된 타락자들에겐 오히려 힘을 보태 주는 꼴이 되겠지만.

이런 반쪽짜리들에게는 앞으로도 써먹을 수 있는 카드가 하나 생긴 셈이었다.

'아직은 구별할 수 있는 타락자가 많지 않지만.'

혼돈력을 밀어 넣은 귀족을 또다시 집어 던지면서, 이안은 장내를 향해 소리쳤다.

"폐하를 안전하게 모셔라! 병사들은 타락자를 상대해!"

도망치는 피난민과 변이하는 타락자. 신성력을 전신에 두른 복수의 사도까지 뒤엉킨 혼란의 한복판에서, 이게 누구의 외침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국왕을 감싸고 있던 여섯 기사단원 중 하나가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에게 반항하다 사과했던 젊은 놈, 조나단.

이번에도 이안을 가장 먼저 발견한 그는,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소리쳤다.

"호위병들은 폐하를 따르라! 폐하, 대피하셔야 합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아니, 이게 대체… 그래, 알겠소-"

당혹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횡설수설하면서, 국왕이 거의 연행되다시피 끌려나갔다.

어쨌거나 귀족들 사이에 진짜 타락자가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 방금 드러났기 때문이다.

절반에 가까운 병사들이 국왕을 따라 도망치듯 이동하는 가운데.

푸스스….

검을 늘어뜨린 메브가 변이 중인 귀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단숨에 놈을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완전히 변이가 끝나길 기다리듯, 신성력을 고요하게 가다듬은 채 기다렸다.

오히려 그 모습은 주위의 병사들과 기사들을 더 두렵게 만들었다.

"끄… 으으…"

검보랏빛 육체와 곳곳에 튀어나온 촉수.

이목구비가 멋대로 박힌 얼굴로 신음을 흘리며, 변이한 타락자가 메브를 내려다보았다.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

순수한 혼돈의 힘은, 나약한 인간의 정신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아아아아-!"

놈이 팔과 촉수를 활짝 펼치며 메브에게 달려들었다.

검을 쥔 메브의 손아귀에 비로소 힘이 들어갔다.

푸- 확!

붉은 반월이 타락자를 휩쓸었다.

상체가 비스듬하게 양단된 놈이, 달려들던 속도 그대로 허물어졌다.

사방에 검은 피와 내장이 흩뿌려지는 가운데.

터억-

자신을 향해 넘어지는 타락자의 머리통을 왼손으로 움켜쥔 메브가, 손아귀에 힘을 줬다.

퍼석, 머리통이 터져 나가면서 손아귀에서 붉은 신성력이 타올랐다.

축 늘어진 시신을 움켜쥔 메브의 눈동자에 그간 억눌러 왔던 모든 감정이 휘몰아쳤다.

안면 가리개를 뚫고 새어 나오는 안광이 격렬하게 일렁였다.

"아… 아아... 아아아아악-!"

온갖 감정이 뒤섞인 절규.

장내에 남은 자들이 공포에 짓눌린 얼굴이 되어가는 가운데.

"커욱… 으윽… 으으윽-"

늪지의 저주로 착란 상태에 빠져 있던 귀족이 변이하기 시작했다.

이안이 내던진 또 다른 자 역시, 마구잡이 식으로 뒤틀린 형태로 재탄생하고 있었다.

그들의 변이하는 모습에는 통일성이 없었다.

그들이 머금은 혼돈의 힘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철퍽-

들고 있던 시신을 내던진 메브가 놈들을 향해 쇄도했다.

전신에 맺힌 붉은 신성력이 긴 잔상을 허공에 흩뿌렸다.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해야…?"

그 모습을 손을 덜덜 떨며 지켜보던 병사들이 중얼댔다.

미친 리우렐 경과 맞서게 되는 줄 알았더니.

영문을 알 수 없게도, 정말 피난민들 사이에서 타락자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몇몇의 시선이 기사들과, 여전히 상석에 우두커니 선 레지스 브란트 공작에게로 돌아갔다.

미간을 찌푸린 공작과 달리, 기사들도 대부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시선을 느낀 기사들 중 하나가, 검으로 메브의 등을 가리켰다.

"뭣들 보고만 있느냐? 저자는 폐하께 검을 들이민- 읍?"

기사의 눈이 커졌다.

가죽 장갑을 낀 웬 손길이 우악스럽게 그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기사 주제에 왕이 아니라 공작을 섬기는 건, 괜찮고?"

나지막한 목소리.

어느새? 생각하며 눈을 돌린 기사가, 이안의 검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간신히 달싹였다.

"네놈은 또 누구…. 컥…!"

손아귀를 타고 일순간 밀려든 이질적인 힘에, 기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릴 찰나.

"네놈이 알 필요 없는 사람."

덧붙인 이안이 놈을 툭 밀쳐내며 물러났다.

근처의 다른 기사와 병사들이 허둥지둥 창칼을 그에게 겨눴다.

"네, 네놈은 또 뭐냐?"

"살고 싶으면 그것들 치워. 그리고 물러들 나는 게 좋을 거다. 괜히 섞여서 개죽음당하지 말고."

덧붙인 이안이, 별안간 투척용 단검을 기사 하나에게 던졌다.

"큭?!"

부지불식간에 팔뚝에 단검이 박힌 기사의 눈이, 이내 커졌다.

단검 날에 꼬물거리는 무언가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뱀이었다. 좁쌀만 한 송곳니가 돋은 아가리를 쩍 벌린.

놈이 그대로 기사의 팔뚝을 깨물었다.

"네놈…! 무슨 사술을…?!"

기사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이안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고개를 숙이니 실뱀도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세상이 물감이 녹듯 흘러내렸다.

숨을 멈춘 채 눈을 치켜뜬 기사의 동공을 가득 채운 건, 오로지 검붉은 신성력을 머금은 성기사의 거대한 모습뿐.

"아- 아아아악-!"

착란 상태에 빠진 기사가 공포에 질린 절규를 내질렀다.

혼돈력을 삼킨 기사도 섬뜩한 숨소리와 함께 변이를 시작했다.

남은 기사와 병사들이, 이안의 조언을 따라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그들이 주춤주춤 통로를 향해 뒷걸음치기 시작한 가운데.

"못 뛰겠으면, 여기 숨소리도 내지 말고 박혀 있어. 알겠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있던 여인을 회관 구석으로 끌고 가 처박은 이안이 내뱉었다.

눈물범벅이 된 여인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

어째, 이게 더 똥개 훈련 같은데.

숨을 내쉬며, 이안이 비로소 장내를 돌아보았다.

그가 이번 전투의 주역을 메브에게 양보한 건, 그저 그게 더 손쉬워서만은 아니었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를 떠나, 어쨌건 메브는 그가 이 세계에서 만난 중에서는 가장 책임감 있고 선한 쪽의 인간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한 끝에, 저 되지도 않은 타락자들에게 무릎 꿇는 광경은 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처럼 자신의 억눌린 내면을 마음껏 내보이며 폭주하길 바랐다.

어쩌면 별것 아닌 상사나 선배의 갈굼에, 제대로 된 항변조차 하지 못하던 시절의 자신이 겹쳐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걱-! 콰직!

그사이, 타락자 둘을 다 썰어 버리고 변이한 기사 하나마저 양단한 메브가 쓰러진 타락자의 머리를 짓밟아 으깨 버렸다.

과거의 그녀가 선보이던 군더더기 없는 전투 방식과는 상반된, 야만적이기까지 한 모습.

전신에 튄 타락자들의 피가 신성력에 증발해 뒤섞이면서, 암흑 기사를 방불케 했다.

푸확-!

그녀의 등 뒤를 노리고 달려들던 마지막 타락자마저 단칼에 찢어발긴 그녀가, 마침내 어깨를 들썩이며 멈춰 섰다.

"...."

피바다가 된 장내에 일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거친 숨을 내쉬던 메브의 시선이, 이윽고 상석으로 향했다.

레지스 브란트.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군…. 가장 이용하기 쉽다고 생각했던 인물이 자네인데. 어쩌다 가장 예상하기 어려운 존재가 된 것인지."

"나 혼자였다면… 그랬겠지…."

메브가 느릿느릿 내뱉었다.

레지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이 문득, 저만치의 회관 구석에 선 이안에게로 향했다.

"그래… 네놈이 배후였던 거군. 오른델의 반란을 주동한 성기사가 있다더니… 그게 헛소리가 아니었던 거야."

"그렇게 솎아냈는데도, 아직 오른델에 끄나풀이 남아 있나? 그것대로 대단하군. 바퀴벌레 같아."

이안이 피식댔다.

레지스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일개 용병 따위라고 생각했던 게 내 실책이었군. 하찮은 변수라도 무시하지 말아야겠어. 다음부터는 말이지."

"네놈에게… 다음이란… 없다-!"

울부짖으며 메브가 돌진했다.

검날을 타고 이어진 붉은 궤적이, 폭발하는 듯한 호선이 되어 레지스를 향해 흩뿌려졌다.

쩌엉-

반투명한 자주색 역장이 레지스의 앞에 피어오른 건 그 직후였다.

놀랍게도 역장은 신성력이 담긴 일격을 막아내고도 부서지지 않았다.

신성력과 마력이 뒤섞인 충격파가 장내를 휩쓸고 지나가는 가운데.

크르르- 크릉-! 크헝-!

사방의 통로에서 십여 마리의 사냥개들이 뛰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의 통로에 가까워졌던 기사와 병사들이 다시 벽면에 몰렸다.

그들을 그대로 지나친 사냥개들이 레지스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역장과 신성력의 잔해 사이로, 레지스의 웃음소리가 번졌다.

"잊은 모양이군. 오늘 밤 나는… 이 아겔 란에서만큼은…."

놈의 얼굴이 드러났다.

미간의 피부가 기괴할 정도로 불뚝 튀어나오고, 그곳을 중심으로 얼굴 전체에 거미줄 같은 핏줄이 번진 모습이었다.

온통 자주색으로 변한 눈동자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신이나 다를 바 없다네."

콰앙-!

남은 역장이 폭발하면서, 검을 내지른 자세 그대로 박제된 것처럼 굳어 있던 메브가 튕겨 나갔다.

"내가 참된 신을 섬긴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할 걸세. 그 어떤 목격자도 남지 않을 테니."

병사와 기사들의 얼굴에 소리 없는 경악이 번지기 시작한 가운데.

스르릉-

단죄의 검을 뽑아 든 이안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지랄하네."

이미 나한테 한 번 뒈졌던 새끼가.

#045화

레지스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입이 거칠군…."

지팡이를 쥔 그의 손이 움찔댔다.

으르렁대던 사냥개들이 기다렸다는 듯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이안이 질주하기 시작한 건 거의 동시였다.

그를 향해 달려드는 세 마리의 사냥개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집중력이 최고조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사각지대를 노리고 채찍처럼 날아드는 촉수와 송곳니가 마구잡이로 돋은 쩍 벌어진 아가리.

그리고 그 아래, 기듯이 낮은 자세로 접근해 오는 놈까지.

주위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선명하게 인식됐다.

자신의 움직임조차 느리게 느껴지는 가운데.

이안은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놈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낮게 밀려드는 놈의 머리를 짓밟고 뛰어올라 몸을 옆으로 힘껏 비틀어 회전시켰다.

그것으로 궤적을 틀어 정면에서 달려드는 놈의 아가리를 흘리면서, 회전력을 실은 검을 내리쳤다.

쉬학-!

그 틈바구니로 밀려들던 촉수와 발톱은 휘몰아치는 방벽에 부딪혀 스쳐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묘기에 가까운 움직임을 선보인 이안이 착지했다.

그를 지나친 세 마리 사냥개 중, 목이 잘린 한 마리가 착지와 동시에 허물어져 죽 미끄러졌다.

"재주는 있는 놈-"

그 모습을 보며 중얼대던 레지스의 고개가, 누가 뒤로 끌어당긴 것처럼 젖혀졌다.

어느새 이안이 내던진 투척용 단검이 그의 이마에 박혀 있었다.

검은 핏물이 배어 나온 것도 잠시.

철그렁-

밀려 나온 단검이 떨어졌다.

역시, 이 정도론 무린가?

이안이 혀를 차는 사이, 다시 앞을 보며 레지스가 웃음 지었다.

"이런 재주는 진작 선보였어야지. 지금은… 안 통한다네."

이마의 상처가 타르처럼 끈적한 점액질과 거미줄 같은 섬유질에 덮여 순식간에 봉합됐다.

뒤이어 날아든 단검은 자주색 역장에 막혀 떨어졌다.

그 너머로 눈속임이었다는 듯 앞으로 질주하는 이안을 바라보며, 레지스가 더 짙게 웃음 지었다.

그의 미간이 일순간 불뚝댔다.

이안의 머리 위 공간이 순간적으로 구겨지면서, 그의 정수리를 그대로 내리찍었다.

하지만 이안은 기다렸다는 듯 옆으로 몸을 날린 후였다.

땅을 찍은 공간이 다시 본래 형태로 되돌아갔다.

현실의 막 너머에서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었다.

"호오."

이걸 피할 줄은 몰랐다는 듯 레지스가 감탄했다.

하지만 그를 노려보는 이안의 눈빛은 조금의 흥분한 기색도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런 식이란 거지.'

그가 보여 주는 저돌적인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레지스의 전투 방식을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게임에서도 인간 형태의 놈은 상대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때는 전투 시작과 동시에 피 흘리는 복수자의 화신체인 복수자의 망령이 나타나, 놈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체력이 뚝 떨어진 레지스가 곧바로 본모습을 드러냈었다.

그러니까 사냥개를 부리며 잔재주를 쓰는 지금이, 이안에겐 오히려 가장 조심해야 하는 단계였다.

어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치명상을 입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고작 그게 전부냐? 기대보단 좆밥이군."

옆으로 내달리며 이안이 도발했다.

레지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날파리 같은 놈이 입담만 독수리구나. 의아하지만 흥미롭군."

역장을 두른 채, 그가 손을 내밀었다.

신성력과 비슷한 힘이 사냥개들을 감쌌다.

놈들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뒤틀린 몸이 더 부풀었다.

송곳니도 더 길고 날카로워져서, 이안이 오래전 사진으로 본 심해어를 방불케 했다.

"어디, 계속 앵앵대 보거라."

"오냐, 씹새야."

이안이 보란 듯 사냥개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그때.

"히익… 히이익…!"

"제기랄.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벽면에 빽빽하게 모여 선 병사들과 기사는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고 있었다.

레지스와 사냥개들이 대부분 이안을 주목하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몇 마리는 그들의 주위를 돌며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한층 더 크고 위협적인 모습으로 변이하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크허엉-!

역시나. 한 놈이 더는 틈을 노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듯 톱날 같은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콰지직-

내뻗은 창대가 무기력하게 부러지고, 놈의 톱날 같은 이빨이 병사 하나를 찢어발기려던 순간.

콰직-!

붉은 장벽처럼 떨어져 내린 신성력의 궤적이, 사냥개의 허리를 내리찍었다.

땅에 처박힌 사냥개의 잘린 상반신이, 검은 피와 내장을 흩뿌리며 튕겨 올랐다.

빠각!

놈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박살 내면서, 메브가 병사들 앞에 섰다.

벽에 처박힐 때 떨어진 돌 부스러기가 그녀의 궤적을 따라 부스스 흩어졌다.

기사를 돌아본 그녀가 내뱉었다.

"대회관의 모든 통로를 막아. 할 수 있겠나?"

지금까지 선보인 광기가 거짓이었던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

기사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요정의 유적을 멋대로 개조해 지어진 이 왕성은, 거의 모든 구역을 쇠창살로 격리할 수 있었다.

적이 성 내부까지 침입할 때를 대비한 방비책.

"가라. 회관을 격리하고 폐하께 합류해 상황을 전해."

콰직- 깨앵-!

달려드는 사냥개 한 마리를 후려친 메브가, 놈을 고기 썰듯 난자하고는 병사들 쪽을 돌아보았다.

"생존자들도 믿지 말고. 가라, 어서!"

"예…! 다들 통로로 달려!"

기사의 외침에 병사들이 발작하듯 내달렸다.

그들에게 달려드는 사냥개들을 메브가 온몸으로 막았다.

썰고 후려치고 짓이기는 과정에서, 한 마리가 끝끝내 그녀의 팔뚝을 깨물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검의 무게추로 놈을 후려쳐 턱을 박살 내고 장화로 마구 짓밟았다.

마지막으로 통로로 들어서며 그 흉신악살 같은 모습을 돌아본 기사가, 이윽고 내뱉었다.

"오해를 사과드립니다, 경. 임무는 목숨을 걸고 완수하겠습니다."

결의에 찬 얼굴을 한 기사가 사라졌다.

사냥개를 전부 도륙낸 메브가, 비로소 허리를 들었다.

헐떡대는 숨결. 팔뚝을 타고 흘러내려 장갑 끝에 맺힌 피가, 증발하면서 신성력에 녹아들었다.

비로소 그 모습을 확인한 레지스가 웃음 지었다.

"의미 없는 짓을. 이미 모든 사냥개들이 성으로 모여들고 있다. 네년의 선택은 희생자만 늘릴 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팡이를 쥔 그의 손이 다시 움찔댔다.

이안을 노리던 사냥개 대다수가 메브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메브가 말없이 검을 얼굴 옆으로 당겨 드는 가운데.

"이제 난 무시하는 거냐?"

그 빈틈을 뚫고 마침내 레지스에게 쇄도한 이안이 검을 내리쳤다.

역장을 형성하면서 레지스가 웃음 지었다.

"날파리에게 너무 많은 신경을 쏟을 필요는 없는 법이지."

콰지직-

이안의 검이 역장에 막혔다.

메브와 달리 역장에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지만, 이안은 오히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만 목격자가 없어지길 바란 게 아니거든."

"...!"

붉게 타오르는 그의 눈을 마주 본 레지스가 비로소 눈을 치켜떴다.

화르르륵-!

이안의 주위로 붉은 화염구가 마구잡이로 피어올랐다.

그와 맞붙은 레지스의 주위이기도 했다.

피어오른 화염구가 일제히 그를 향해 쏟아졌다.

콰과과과과광-!

대다수의 화염구가 역장에 막혀 폭발했지만, 역장도 주위를 전부 막고 있는 건 아니었다.

몇 개의 화염구가 끝내 레지스에게 닿아 폭발했고, 오히려 역장에 가로막힌 화력이 내부에서 회전하면서 완전히 놈을 집어삼켰다.

반작용으로 튕겨 나온 이안이 바닥을 굴렀다.

연기에 휩싸인 가운데, 그가 눈을 들어 레지스 쪽을 바라보았다.

불길에 휩싸인 놈에게서 웃음소리가 번졌다.

"마법사였군…! 그래, 이제야 의문이 해소되는구나. 겉모습만 보면 누구도 네놈이 마법사라 여기지 않겠지. 콘라우드가 말한 적색이, 바로 네놈이었어. 그 모든 업적은, 눈속임으로 일궈낸 것이었군."

"네놈처럼 말이지."

이안이 마주 미소 지었다.

성공이었다. 불길 속 레지스의 모습이 변이하기 시작한 것이다.

놈을 감싼 역장이 더 선명하게 빛나며 거대해졌다.

보름달을 방불케 하는 그 한복판에서, 레지스의 몸이 뒤틀리고 부풀었다.

몸에 붙은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의 전신에 검은 촉수가 머리카락처럼 늘어졌다.

불룩대던 미간의 피부가 찢어지면서 붉은 촉수가 툭 튀어나왔다.

변이되어 비대해진 송과선.

핏줄은 아예 피부 위로 튀어나와 눈코입을 가렸고.

하나로 융합된 지팡이와 손끝으로 송곳니 같은 발톱이 돋아났다.

고대 신관, 레지스.

"졸라 징그럽네…."

읊조리며 아공간에서 정수를 꺼낸 이안이 다시금 질주했다.

핏줄 너머, 레지스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신은 당신의 피조물을 자신과 닮게 만드시는 법. 이 모습은 내가 신께서 나를 직접 빚어내셨다는 증표이니라-"

나긋나긋한 목소리.

그가 손을 내젓자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기다란 할퀸 자국이 생겼다.

보이지 않는 발톱이 이안을 찢어발길 듯 날아들었으나, 그는 예상한 듯 갈지자로 몸을 틀어 피했다.

이제부터는 오히려, 그가 알고 있는 전투였다.

크르릉-

텅 빈 허공에서 숨결과 발소리가 이어졌다.

공간의 틈에 숨어 사는 공허의 사냥개가, 본모습대로 이 자리에 소환된 것이다.

메브가 싸우고 있는 변이체들과는 다른, 진짜 공허의 마수였다.

물론 이놈을 굳이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화르르- 콰과광-

이안은 정수로 증폭한 춤추는 불꽃을 사방으로 난사하며 레지스에게 솟구쳤다.

허공에서 폭발이 일고, 공허의 사냥개가 거리를 벌린 찰나였다.

레지스가 지팡이를 내밀었다.

더 크고 겹겹이 쌓인 역장이 앞을 막았다.

이안이 예상했다는 듯 손을 내뻗었다.

붉게 달아오른 정수에서 샛노란 불길이 토해져 나왔다.

콰아아아-

증폭된 화염 방사가 레지스와 주위를 뒤덮으며 타올랐다.

역장이 녹아내리는 가운데.

허공에 부유하듯 멈췄던 이안이, 정수를 아공간에 되돌리며 양손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너희 신 곁으로 보내 주마."

검신을 타고 푸른 신성력이 폭발하듯 분출됐다.

그 힘을 추진력으로, 이안이 레지스에게 뿜어져 나갔다.

이안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는 게임에서의 경험을 통해, 레지스가 역장을 연속해서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 한 겹의 역장이 남아 있었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찢어발길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나면 남은 건, 메브에게 최후의 일격을 양보하는 것뿐.

"아닛…?!"

레지스의 송과선이 당혹스럽게 떨렸다.

그 앞의 공간이 칼로 그은 것처럼 죽 잘리더니, 칼날 같은 발톱이 달린 자주색 다리가 불쑥 튀어나온 건 그 직후였다.

"...!"

콰지지직-

이안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발톱과 단죄의 검이 맞부딪혔다.

눈부신 섬광. 발톱이 잘려 나가고, 검날이 그 너머의 역장을 찢고 레지스의 몸까지 할퀴고 지나갔다.

'시발…! 저걸 수비용으로도 쓴다고?'

착지하는 이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손으로 전해지는 감각이 얕았다.

현실이 되면서 일어날 수 있는 변수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 패착이었다.

저 공허의 발톱은, 게임에선 공격용으로만 사용되던 기술이었으니까.

철퍽, 땅에 떨어진 잘린 발톱이 증발하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레지스의 몸에 달려 있던 촉수들도 우수수 땅으로 떨어졌다.

놈의 어깨부터 허리까지를 훑은 단죄의 검이 잘라낸 것들이었다.

"제법… 이로구나. 티르 엔의 총애까지 받고 있었다니. 하지만… 가짜는 언제나 진짜를 이길 수 없는 법이지."

속삭임과 함께, 이안의 코앞으로 자주색 역장이 피어올랐다.

이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젠장."

콰과광-!

폭발과 함께 이안이 튕겨 나갔다.

한발 빨리 몸을 날렸건만, 그의 방어구가 너덜너덜해지고 허벅지와 팔이 피범벅이 됐다.

임기응변으로 혼돈력까지 끌어올리지 않았더라면 고깃덩어리가 되었으리라.

퍼억-!

벽면에 처박힌 이안이 피를 토하며 널브러졌다.

정신을 잃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얕은 부상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몸의 감각이 둔하고 현기증이 일었다.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았다.

아마도 뇌진탕. 고개를 털던 이안의 미간이 이내 다시 좁아졌다.

카득- 카드득-

돌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벽면과 바닥에 새겨지는 발톱 자국이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허의 사냥개.

이안의 높은 정신력은 이런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한 번만 피하면 돼. 아니, 적어도 치명상만 피한다. 어지러움이 가라앉을 때까지만 시간을 벌면-'

붉은 그림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은 건 그 순간이었다.

메브.

카가가각-

보이지 않는 발톱이 그녀의 검과 부딪혀 불똥을 토해냈다.

그녀의 너덜너덜한 왼쪽 팔 보호대가 누가 움켜쥔 것처럼 구겨졌다.

흘러나온 피가 신성력에 녹아들고, 공격을 막은 메브가 허공에 검을 흩뿌렸다.

사냥개가 황급히 물러나는 소리.

텅 빈 허공에 검은 핏물이 튀고,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대로 뻗어 나간 궤적이 회관 너머의 레지스마저 휩쓸었다.

역장과 신성력이 충격파를 흩뿌리는 사이.

"쉬고 있거라, 이안."

메브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포위했던 사냥개들은 이미 고깃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그녀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다.

급조한 왼쪽 견갑은 팔 갑주와 함께 너덜너덜했고.

그 아래의 팔뚝에도 속살이 훤히 드러난 상처가 여럿이었다.

반대쪽 팔도 마찬가지. 안면 가리개도 찢겨 나가서, 그녀의 붉게 물든 눈동자와 창백한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난 채였다.

"…경."

"남은 이들을 부탁하마. 물론, 너는 용병이니 부탁만으로는 움직이지 않겠지."

이안의 말을 자르며, 메브가 담담하게 말했다.

콰르르- 철컥!

그때 사방의 통로에서 철창살이 떨어졌다.

공허의 사냥개가 흘리는 검은 피가,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다시 가까워졌다.

충격파도 가라앉고 있었지만.

메브는 그저 이안의 눈만을 응시했다.

"남은 내 모든 것을 네게 주마. 그만하면 남겨진 이들을 보살필 대가로도 충분할 거야. 왕국에 남아 달라 부탁하지는 않겠다. 그저, 그들과 함께 해 다오."

"그럴 수는… 경…! 뒤…!"

떨리는 손으로 땅을 짚던 이안이 눈을 치켜떴다.

핏방울과 할퀴는 발자국이 어느새 지척이었다.

카드득-

메브의 등에서 피가 튀었다.

순간 휘청댄 메브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고마웠다, 이안."

한 마디와 함께, 메브가 몸을 돌리며 검을 올려 쳤다.

푸확-! 끼아아악-

텅 빈 허공에 검은 피가 폭발하듯 튀어 오르고, 사냥개의 귀곡성 같은 단말마가 이어졌다.

양단된 마수의 시체가 메브의 좌우에 홀연히 나타나 떨어졌다.

헐떡인 메브가 그 너머의 레지스를 바라보았다.

레지스의 얼굴에 희미한 놀람이 번졌다.

"이토록 정순한 신성이라…. 그래, 와 보거라. 티르 엔의 종년아."

신성력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전신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끝없이 증발하고 있었다.

"...."

이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뒷모습이, 게임 속 피 흘리는 복수자의 모습이 겹쳐졌다.

메브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안은 복수의 사도는 피를 흘릴수록 강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임 속 피 흘리는 복수자가 그랬으니까.

복수의 사도가 가장 강해지는 건,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다.

마지막 한 방울의 생명까지 불사르는 그 찰나의 순간.

이안의 앙다문 턱에 힘이 들어가는 가운데.

철컥.

검을 고쳐 쥔 메브가, 레지스를 향해 돌진했다.

#046화

그 심상치 않은 기세에, 레지스의 얼굴에도 여유가 사라졌다.

그가 한 손을 내저으면서 동시에 지팡이를 들었다.

자주색 역장이 앞에 겹겹이 쌓이고, 허공이 꿈틀대며 공허의 마물이 또다시 기어 나왔다.

쩌엉-! 쩌엉-!

두 겹의 역장을 돌진만으로 부숴 버린 메브가 솟구치려는 찰나.

레지스 앞의 공간이 세로로 길게 찢어지더니, 곤충이나 절지동물의 그것을 방불케 하는 기다란 다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다리 끝에 칼날처럼 돋은 발톱이 날아들었다.

메브가 검을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카가가가각-

검날이 발톱을 빗겨내며 붉은 불티를 튀겼다.

그대로 다리의 관절까지 미끄러진 메브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서걱-

다리가 잘려나가고, 공간이 한순간에 닫혔다.

그 너머로 드러나는 레지스.

비로소 메브가 몸을 날렸다.

달려오는 공허의 사냥개의 발소리가 다급해졌다.

신성력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검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레지스가 최대치의 역장을 만들어 낸 건 거의 동시였다.

카드드드득-

붉은 궤적과 역장이 맞부딪혔다.

2미터 가까이 늘어난 신성력의 검은 톱날처럼 타오르며 역장을 차례로 깨부쉈다.

하지만 분명히 조금씩 기세가 줄어들고 있었다.

공허의 사냥개가 보이지 않는 이빨과 발톱을 들이밀며 메브를 덮친 건 그 직후였다.

카드득-!

견갑과 흉갑이 우그러들면서 또 한 번 피가 튀었다.

메브가 튕겨 나가지 않게 붙잡아 준 건 역장과 맞닿은 검이었다.

서로 다른 힘이 만들어 낸 인력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를 악문 메브가 턱을 당겼다.

그녀의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검 자루를 움켜쥔 손아귀에서 뿌득, 뼈 소리가 번지고 검에 맺힌 신성력이 더 붉게 타올랐다.

"...!"

여유를 되찾아가던 레지스의 얼굴에 경악이 번지는 가운데.

"으… 아아아아-!"

메브가 절규에 가까운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내리찍었다.

마지막 역장마저 산산조각으로 흩어지고, 붉은 궤적이 레지스의 몸을 사선으로 가르며 뻗어 나갔다.

"오- 오오오오-!"

비명과 함께 레지스의 상체가 쩍 벌어졌다.

치솟는 검은 피와 잘린 촉수.

착지하며 검을 휘돌려 등에 매달린 공허의 사냥개마저 꿰뚫은 메브가, 비로소 땅에 손을 짚었다.

"이… 빌어먹을… 종… 년이…!"

금방이라도 양단되어 쓰러질 것 같던 레지스의 입에서 쇠가 갈리는 듯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환부에서 타르 같은 점액질이 번지고, 검붉은 근섬유가 분리되려는 상체와 하체를 붙잡았다.

몸이 꺾인 채로 간신히 봉합되면서, 레지스의 송과선이 발작하듯 펄떡댔다.

"영원토록 공허를 떠다니며… 고통받게 해 주마…! 보아라...!"

전신의 촉수들이 자주색으로 빛나며 꿈틀댔다.

레지스가 지팡이와 융합된 손을 들어 허공에 내리그었다.

쩌저적-!

공간이 부서지듯 갈라지고, 자주색으로 일렁이는 그 너머가 드러났다.

마경이 열리며 겹쳐진 현실과 공허의 틈.

"참된 신께서 네년을 심판하실지니…!"

레지스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간신히 허리를 일으킨 메브는, 눈 앞에 펼쳐진 공허의 장막과 그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오는 수많은 다리를 눈에 담았다.

그녀가 베어낸 것과 같은 얇고 기다란 다리들.

지네의 그것처럼 수없이 밀려 나온 다리들이 공간을 밀어냈다.

장막 너머로 시선이 느껴졌다.

악의로 일렁이는, 겹눈처럼 빽빽하게 겹쳐진 눈알들.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메브의 얼굴이, 오히려 평온해졌다.

끝내 죽이지는 못했으나, 그녀는 자신의 신성력이 레지스의 내면을 좀먹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안이라면 충분히 복수의 마무리를 지어 주리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리들이 그녀를 단숨에 찢어발기려는 듯 좌우로 넓게 벌어졌다.

메브가 겸허히 눈을 감은 그때.

"나는 아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소."

문득 들려 온 목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현실로 끄집어냈다.

그녀의 허리를 감싸 쥐며, 이안이 앞을 막아섰다.

메브가 눈을 치켜떴다.

이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리도록 푸르게 일렁이는 눈동자.

"의뢰는 내가 수락해야 성립되는 것이오. 통보가 아니라."

쩌저저적-

내뱉는 그의 주위로 거대한 얼음 방벽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반대편으로 종유석 같은 고드름이 수없이 돋아났다.

콰드드득-!

다리들이 방벽 위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얼음 방벽은 깨지지 않고, 그 안의 이안과 메브를 완벽하게 보호했다.

청색 마법, 서리 방패.

혼돈력으로 발현되고 정수로 증폭된 보호 마법이, 공허의 존재조차 단숨에 깨뜨릴 수 없는 방벽이 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콰광-!

다음 순간, 방패가 폭발하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다리들이 사방으로 밀려나고, 공간의 틈으로도 파편이 날아들었다.

그 순간 이안의 눈동자가 보랏빛을 머금었다가, 다시 붉게 일렁였다.

이안이 메브의 몸을 툭 떠밀었다.

"경의 의뢰는 거절하겠소. 그러니 경의 주변은 경이 챙기시오."

내뱉은 그가 몸을 돌렸다.

쩌적, 쩌저적-

손바닥 한복판, 표면에 균열이 이는 정수가 샛노랗게 점멸했다.

콰아아아-

새하얀 불길이 일직선을 그리며 뻗어 나가 공간의 틈을 꿰뚫었다.

다리들이 발작하듯 꿈틀댔다.

끼에에에에에엑-!

고막을 긁는 듯한 괴성이 공허의 장막 너머에서 터져 나왔다.

장막 너머의 눈알들이 익으면서 툭툭 터져나갔다.

이안은 앞으로 힘겹게 걸음을 내디디며, 끝까지 불길을 내뿜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다리들이 공간의 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깨져있던 공간이 다시 조각조각 접 붙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불길이 잦아들었다.

"...."

몸이 옆으로 꺾인 채 망연자실하게 선 레지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며 이안이 읊조렸다.

"댁의 사도가 죽을 뻔했는데. 이 순간에도 구경만 하실 거요?"

그저 비아냥 거린 말이었건만.

정말 단죄의 검을 타고 희미한 신성력이 번졌다.

레지스가 황급히 손을 뻗었다.

"잠깐…."

이안이 망설임 없이 검을 들었다.

콰직-

간신히 이어져 있던 레지스의 남은 허리가 그대로 토막 났다.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검을 마구 내리쳤다.

콰직! 콰지직!

레지스의 양팔이 잘려 나갔다.

마지막으로 놈의 목을 꾹 짓밟은 이안이 몸을 숙였다.

"하나 알려 주자면 말이야."

그가 속삭였다.

"네놈이 섬긴 건 진짜 고대 신이 아니야. 신이 키우는 애완견이지."

"뭐… 라고…?"

서걱-!

이안의 검이 송과선을 잘라냈다.

"갸- 아아악-!"

레지스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콱, 놈의 얼굴을 짓밟으며 일어선 이안이, 고개를 털어 어긋나는 시선을 다잡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검을 지팡이처럼 양손으로 짚은 채, 간신히 서 있는 메브.

이안이 말했다.

"이건 경이 하셔야 할 것 같소만."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와중에도, 메브가 미소 지었다.

"기꺼이."

다가온 메브는 도끼질하듯 온 힘을 다해 목을 내리쳤다.

레지스의 머리가 굴러떨어졌다.

놈의 얼굴을 덮은 핏줄이 심장처럼 펄떡대다 이윽고 잦아들었다.

"쿨럭...."

이안은 참고 있던 피를 뱉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휘청인 메브도 쓰러지듯 그에게 기대앉았다.

이안은 부서진 왕좌 너머, 레지스가 등지고 섰던 창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광기의 밤이 지났다.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완료 창을 확인도 하지 않고 꺼 버리며, 이안이 피식댔다.

"그래도 꽤 멋진 유언이었소, 경."

"...."

놀리려고 한 말이건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돌린 이안은, 자신의 등에 기댄 메브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이렇게 바로 잠드냐고."

아니, 기절한 건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 역시 메브에게 기댄 채로 정신을 잃었으니까.

***

이안과 메브는 친위기사단과 병사들의 호위 아래 리우렐가의 저택으로 후송되었다.

이안이 눈을 뜬 것은, 꼬박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더 지나서였다.

온몸에 감긴 붕대를 내려다본 그는, 욱신거리는 몸을 부여잡고 방을 나섰다.

정원을 청소하고 있던 미구엘이 눈을 치켜떴다.

"형씨…! 하도 안 일어나서, 영영 못 깨어나시는 건 아닌가 했소!"

"경은?"

"반나절쯤 전에 깨어나셨소. 지금은 다시 주무실 거요. 한동안 검을 쓰진 못하실 것 같지만 어쨌든…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더군. 아, 이건 형씨도 마찬가지요."

"다행이군."

이안은 정원 한구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쑤시고 기운이 없었다.

속도 메스꺼웠다. 전형적인 마력 탈진 증상. 혼돈의 파편 역시, 내부가 절반 이상 비어 있었다.

이 안의 혼돈력을 어떻게 다시 채워야 할지는, 당장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재빨리 달려가 물을 가져온 미구엘이 말했다.

"도시는 거의 정리가 끝났소. 생각보다는 크지 않았소만, 어쨌든 많이들 죽었소. 병사들이 희생자들의 시신을 모아 화장했고."

"사냥개들은?"

"그게, 흔적도 안 남았소. 어디로 간 건지는 아무도 모를 거요. 어쨌든, 덕분에 나리의 오명은 다 씻겨졌소. 그 빌어먹을 공작, 아니, 타락자의 시체는 성벽마다 걸려 있고. 세 조각이라 딱 좋더군."

이안은 물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지스와의 전투가 뇌리를 스쳤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 가장 강한 적이었다.

물론 앞으로 만날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반쪽짜리지만.

위협적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시발…."

"으응? 아니, 생각하니 또 열 받으시오? 괜히 말했나?"

"아냐. 계속해."

"이틀에서 사흘 뒤에 다시 회의를 열기로 했소. 형씨가 원래 하시려던 건 그날 하시면 될 것 같소. 원래 바로 열렸어야 했는데, 형씨랑 나리가 빠져선 안 되니까. 잠시 후에 형씨도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하러 가야겠소."

"...."

"맞다, 그리고 내가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는데 말이오-"

미구엘의 목소리가 은근해지려는 그때였다.

"나리! 나리...!"

이안을 발견한 필립이 구르듯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이안 앞에 주저앉은 그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외쳤다.

용병 다 된 줄 알았더니.

아직 멀었구만.

"그래, 너도 수고했다."

이안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이 덧붙였다.

"나리께서도 방금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드실 걸 챙기러 가던 참인데, 나리 것도 가져올까요?"

"댁이 모시는 나리가 둘인데, 당연한 소릴."

미구엘이 대신 대답했다.

피식한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경은, 침실에 있나?"

"예."

이안은 삐걱대는 다리를 움직여 계단을 올랐다.

그의 체력 수치로도 아직 이 정도밖에 회복하지 못하다니.

모르긴 몰라도 최소 몇 군데는 부러지거나 금이 갔던 모양이었다.

텅 빈 복도.

그러고 보니 이제, 이 저택에 남은 사람은 열 명도 되지 않았다.

문득 메브가 생을 포기하려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때 사랑하는 이들로 가득하던 공간에 홀로 남겨져야 한다는 건, 어쩌면 죽음보다도 더 큰 고통일지도 몰랐으니까.

저만치의 방문이 열리고 루시아가 고개를 내민 건 그때였다.

"...?"

이안이 고개를 갸웃할 찰나.

복도를 가로질러 달려온 루시아가 그대로 이안을 와락 껴안았다.

고통과 당황에 이안이 굳어졌다.

"…감사합니다, 용병님."

루시아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미간을 찌푸렸던 이안은, 이윽고 어색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시아가 불현듯 뒤로 물러났다.

"…그렇다고 용병님을 좋아한다는 건, 아니에요."

무표정하게 내뱉고는 몸을 돌린 그녀가, 자신의 방으로 쏙 달려 들어갔다.

"누가 뭐랬나…."

그놈의 저주 때문에 한 말인가?

멍하니 읊조린 이안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메브의 방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메브가 그를 돌아보았다.

텅 비어 있던 녹색 눈동자에, 꽃이 피듯 생기가 되돌아왔다.

"깨어났느냐. 기다렸다."

미소 지은 것과 달리 담백한 말투.

피식 웃음 지으며, 이안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래 봐야 반나절 차이였잖소."

#047화

회의는 대회관에서 열렸다.

이안과 메브는 아직 피 냄새가 다 가시지 않은 회관 한복판에 나란히 앉았다.

입회인들의 시선은 며칠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국왕 역시, 언제 메브를 광인 취급 했었냐는 듯 정중했다.

국왕의 공치사에도 메브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딱 해야 할 말만 했다.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버차드 후작과 메이슨의 목을 비롯한 오른델에서 가져온 증거품과, 데클란이 쓴 서한을 제출했다.

국왕은 서한의 내용에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오른델의 새 영주는 아주 신실하고 충성심이 깊군."

곧바로 데클란의 정통성을 인정한 그가, 이어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 서한에는 그대의 공이 아주 크다고 적혀 있군. 믿을 수 있으며 능력 또한 출중하다고 말이야. 버차드 후작의 목을 직접 베었다지?"

"그렇습니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공손하지 않은 태도에도, 아무도 비난의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그가 구국의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메브에 필적하는 검의 달인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국왕이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보다시피, 아겔 란에는 그대와 같은 유능한 인재가 필요해. 비극이 휩쓸고 간 지금은 더더욱. 어떤가, 아겔 란의 귀족으로 살아가는 건."

코웃음도 안 나오는 제안이었지만.

"고민해 보겠습니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쨌건 몸이 회복될 때까지는 아겔 란에 있어야 하니, 굳이 찬물을 끼얹을 필요까진 없었다.

화제를 돌릴 적당한 주제도 남아 있었다.

버차드 후작의 서책을 꺼낸 이안이 덧붙였다.

"지금은, 남은 타락자들을 색출하는 게 우선일 것 같군요."

"아직도 타락자가 남아 있단 말인가?"

이안은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이미 회의장에 들어서면서 타락자들을 눈여겨봐 둔 그였다.

회의가 재판으로 바뀌었다.

설마 이제 와 정체가 드러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타락자들이 줄줄이 포박됐다.

"아, 아니야! 이건 누명이오!"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 폐하!"

"살려 주십시오!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

반응은 가지각색이었지만, 결과는 모두 같았다.

병사들이 타락자들을 사형장으로 끌고 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검을 뽑아 든 친위 기사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또 한 번 피바람이 불었지만, 국왕은 오히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타락자 대부분이 평화를 주장하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레지스가 그랬듯. 하수인들도 왕의 반발심을 자극하기 위해 전쟁을 반대했었으니까.

덕분에 남은 회의는 일사천리로 끝이 났다.

"우리는 크나큰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끝내 시련을 이겨 내고 왕국의 어둠을 뿌리 뽑았으니. 찬란한 여신과 엄정한 여신께서 왕국을 보살피심이 이보다 더 명확할 수는 없으리라."

메브와 함께 성벽에 오른 국왕은, 모여든 백성들 앞에서 선언했다.

"이 순간부터, 아겔 란은 더 강대하고 신실한 왕국으로 거듭날 것이다. 왕국의 앞날에 승리와 영광만이 가득하리라!"

병사들이 술과 밀, 고기가 실린 수레를 끌고 나왔다.

국왕과 왕국을 연호하는 백성들의 함성이 커졌다.

아겔 란의 미래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

"승리와 영광이라니. 나 참."

미구엘이 고기를 씹으며 중얼댔다.

먹고 마시는 가신들의 목소리가 떠들썩했다.

아겔 란의 시민들이 그렇듯, 왕성에서도 연회가 열렸다.

이안과 필립, 미구엘은 연회장 가장 구석 자리에 모여 있었다.

"폐하에겐 이번 사건이 계시처럼 느껴지셨을 겁니다. 생각보다 피해도 크지 않고, 전쟁을 반대하던 자들도 죄다 타락자였으니까요."

씁쓸하게 내뱉은 필립이 맥주를 들이켰다.

상석의 국왕을 바라보는 눈길이 곱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국왕이 오늘 한 애도라고는 형식적인 몇 마디가 전부였으니까. 그 외에는 죄다 전쟁과 관련된 얘기뿐이었다.

이안과 함께한 그는, 지금은 전쟁 따위를 벌일 때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혀를 찬 필립의 시선이, 국왕의 옆자리에 앉은 메브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텅 빈 것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음식을 씹고 있었다.

"…나리가 걱정입니다."

필립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앞에 놓인 고기를 씹어 삼키는 것에만 열중했다.

하루라도 빨리 회복하려면 영양분을 충분히 보충해야 했다.

"이안 경."

그때, 기사 하나가 앞에 앉았다.

필립과 미구엘이 시선을 교환하는 가운데, 이안이 눈만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친위 기사단의 젊은 놈, 조나단.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드릴 말씀도 있고요."

"뭔데?"

이안이 다시 접시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조나단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안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는 존경과 경외가 가득했다.

메브는 회의에서, 레지스를 처단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이안이라고 말했다.

대다수의 귀족은 물론, 국왕도 그것이 그녀가 겸양의 미덕을 발휘한 것이라 여겼지만.

몇몇은 그게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나단도 그중 하나였다.

"건강이 조금 더 호전되시면, 다시 성을 찾아 주십시오. 아까 폐하께서도 언급하셨듯, 경께 합당한 포상이 있을 겁니다. 그때 이왕이면 제가 모시고 싶습니다만."

"돈?"

"예. 그리고 왕성의 병기고도 열게 될 겁니다. 경께 어울리는 무구를 하사하시겠다고요. 필요한 걸 고르시면 될 겁니다."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레지스와의 전투에서 거의 모든 장비가 파손됐기 때문이다.

남은 건 단죄의 검뿐이었다.

"경과 기사단의 일원으로 함께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김칫국 잘 마시네.

생각하며 어깨를 까딱이는 이안에게, 조나단이 덧붙였다.

"아겔 란의 두 영웅께서 함께하신다면, 다가올 전쟁에서도 분명 승리만이-"

탕, 필립이 맥주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은 건 그때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조나단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필립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전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리."

"엥? 벌써 가시게?"

미구엘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필립이 일어섰다.

"아가씨께서 혼자 계신 게 마음에 걸려서요. 입맛도 없어졌고. 집은 제가 지킬 테니, 편히들 즐기고 오십쇼."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졌다. 미구엘이 쯧쯧 혀를 찼다.

"못 본 사이에 성격이 많이 까칠해졌다니까. 거, 한 귀로 듣고 흘리면 될걸."

물론 그도 조나단을 바라보는 눈길이 곱지는 않았다.

새끼들, 성깔 있어서 좋네.

피식한 이안이 턱짓했다.

"알겠으니, 할 말 끝났으면 가 봐. 편하게 식사 좀 하게."

"아. 제가 방해가 됐군요. 알겠습니다."

"또 찾아오려는 자들이 있다면, 못 하게 하고."

"그것도 전달하겠습니다."

깍듯하게 인사한 조나단이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슬쩍 돌아보며 미구엘이 실실댔다.

"벌써 훌륭한 심복이 생기셨소. 필립의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솔직히 나쁘지 않은 제안 아니오?"

짧게 코웃음 친 이안이 말했다.

"그럼 네가 하든가."

"하고 싶다고 하나. 시켜 줘야 하지."

"하고 싶긴 하단 거군."

"뭐… 왕국에 애정이 있는 건 아니오. 다만…."

턱을 긁적인 미구엘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나리가 마음에 걸려서 말이오. 루시 아가씨도 그렇고."

"그래서, 눌러살겠다고?"

"나리께서 허락만 하신다면야."

"하긴, 그래. 네놈 실력이면 그게 더 오래 살길일지도."

미구엘이 메브를 슬쩍 돌아보았다.

"형씨는 걱정되지 않소? 아예 삶의 의지가 없어 보이시잖소."

"이제 지켜야 할 게 없으니까. 복수도 끝마쳤고. 남은 삶의 목표는, 경 스스로 찾아야겠지."

"…말씀하시는 걸 보니, 형씨는 떠나시려는 거군. 예상은 했소만."

"같이 가잔 말 안 하니 걱정 마."

"걱정이 아니라, 서운해서 그러는 거요. 서운해서. 참나."

콧방귀를 뀐 미구엘이 문득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전에 말하려다 만 얘기가 있는데 말이오."

"또, 뭐."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잖소. 왜, 그날 밤에 말이오."

미구엘이 목소리를 낮췄다.

"외성 주변에, 그 사냥개들이랑 싸우는 괴인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소. 주민을 여럿 구한 모양이오."

"괴인…?"

"좀 허무맹랑한 얘기긴 한데. 내가 들은 바로는 사냥개들의 목을 비틀어서 피를 빨았다더군."

이안의 턱짓이 멈췄다.

포크를 놓은 그가 미구엘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말해 봐."

"역시, 흥미를 보이실 줄 알았소. 누군 회색 머리칼에 붉은 눈을 가진 미녀였다고 하고, 누군 송곳니가 돋은 괴물이었다던데. 아무튼, 사람들한테 맛대가리 없는 것들은 처박혀 있으라고 소리쳤다더군."

미구엘이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기다려 보면, 폐하께서 수배령을 내리실지도 모르겠소."

"글쎄. 피를 그 정도로 먹었으면, 당분간 코빼기도 안 보일걸."

"엥…? 그게 뭔지 짐작이 가시오?"

"어느 정도는."

언젠가 서로 죽고 죽일 사이거든.

생각하며,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테사이아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흡혈 요정이 아겔 란에 있다니.

'설마, 날 따라왔나?'

억측이긴 했지만, 아예 가능성 없는 얘긴 아니었다.

'…혹시 모르니까, 당분간은 집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겠군.'

이 세계에서도 예외는 아닌, 뱀파이어의 유구한 설정을 떠올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정말 그를 따라온 거라면, 아겔 란을 나서고부터는 조심해야 할 터였다.

"표정이 너무 심각하신데. 그렇게 위험한 자요? 마물?"

"…아니. 그냥 오늘부턴, 잘 때 창문만 닫고 자라."

다시 포크를 들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창밖에서 누가 들어가도 되냐고 물어도 절대 대답하지 말고."

어리둥절해하던 미구엘의 얼굴이, 이윽고 구겨졌다.

"엄청 위험한 거 맞잖소! 뭐요? 대체 뭔데?"

넌 알 필요 없다니까.

이안은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고기를 입에 가져갔다.

***

"후…."

이안은 명상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맑고 몸이 한결 가벼웠다.

명상은 마력뿐 아니라, 부상을 회복하는 데에도 효과가 있었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 그가, 이윽고 자신의 팔을 내려다 보았다.

작은 방심의 결과가 팔과 다리 곳곳에 지워지지 않을 흉터로 남아 있었다.

물론 불과 일주일 남짓 만에 이렇게까지 회복된 것만으로도, 초인적인 회복력이라 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몇 달을 족히 요양해야 했을 테고.

영구적인 장애가 남았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부상이었으니까.

"…어쩌면 다음엔 정말 그럴지도."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전에도 비슷한 반성을 한 적이 있건만.

일이 생각대로 풀리는 횟수가 늘고 변수에 훌륭하게 대응한 경우가 누적되면서, 오만해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항상 변수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놓이기 전에.

물론 가능한 모든 변수를 예측할 수 있다면 상관 없겠지만. 그는 그 정도까지 똑똑하지는 못했다.

'어설프게 똑똑한 놈의 딜레마란 거지.'

이안은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몸 상태를 꼼꼼하게 점검했다.

슬슬 국왕의 제안을 빙자한 압박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지금까진 요양 중이라는 핑계로 잘 버티고 있지만.

그가 남을 생각이 없다는 걸 눈치채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윈 2세. 그 속 좁고 멍청한 자라면, 본인이 하사한 포상을 도로 빼앗으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 난 어쩔 수 없이 반항할 거고. 또 도시가 개판이 되겠지….'

아름다운 이별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상황이 귀찮고 지저분해지는 건 사양이었다.

그냥 한밤중에 홀가분하게 떠나버리는 게, 여러모로 깔끔하리라.

이안은 자연스럽게 벨 론데를 떠올렸다.

아겔 란과 전쟁을 벌이게 될 이웃 왕국.

또 다른 촌 동네였지만, 북부든 동부든 넓은 세상으로 나가려면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아직은 국경 간의 검문도 심하지 않을 테니, 느긋하게 이동할 수 있으리라.

'남은 볼일만 깔끔하게 끝내고 나면-'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린 건 그때였다.

"이안, 잠시 괜찮겠느냐?"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늦은 시각에 웬일이지.

문을 연 이안이 말했다.

"오늘치 대련이, 부족하셨소?"

이안은 재활을 핑계로 메브와 거의 매일 대련 시간을 가졌다.

그녀가 신경 쓰여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다.

메브를 따라 하면서 검술 실력이 일취월장 하는 것을 느꼈으니까.

헤어지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더 배워 두려 한 것이다.

물론 메브도 사양하지 않았다.

그녀의 회복력은 이안보다도 대단했다.

분명 더 큰 부상을 입었건만.

이안은 그녀와의 대련에서 단 한 번도 승리를 가져가지 못했다.

기술은 물론, 힘으로도 상대가 안 됐다.

신의 축복을 받은 그녀의 신체는, 보통의 인간과는 아예 구성 요소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어쨌건 메브도 그와의 대련을 즐기는 게 분명했다.

하루 중에 유일하게 웃음을 보이는 시간이었으니까.

대놓고 이안의 빈틈을 지적하거나, 위로를 빙자한 농담도 종종 던질 정도였다.

"당연히… 대련을 위해서 온 건 아니다."

이안의 벗은 상반신을 본 메브가 슬며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같이 목욕도 한 사이에 갑자기 웬 내외람.

피식한 이안이 비켜섰다.

"일단 들어오시오."

이내 윗옷을 걸친 이안이, 구석의 의자에 앉은 메브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시오?"

"그게 말이다. 으음…."

침음한 메브가 몇 번 입술만 달싹였다.

망설임과 미안함이 뒤섞인 눈빛.

이안은 그녀가 뭔가 또 부탁할 게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그동안 그녀의 일을 많이 도왔음에도, 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어지간히 미안한 모양이었다.

'가만히 두면 날 새겠군.'

피식대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그냥 말씀하시오. 의뢰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

메브의 시선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그걸 수락하고 말고는 내가 결정할 거요. 남은 이들을 부탁한다는 것같이 불가능한 의뢰는 거절할 거니까, 그냥 말씀하시오."

"…그래. 그거야 그렇겠지."

머쓱하게 헛기침한 메브가, 조심스러운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 혹시 이미 다음 행선지를 결정하였느냐?"

그들에게는 굳이 묻거나 언급하지 않는 주제가 여럿 있었다.

이안이 어떻게 청색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었던 건지 같은.

작별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녀는 이안이 언제, 어디로 떠날지 물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말을 꺼내 봐야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리라.

방금까지 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고민 중이오."

"다행이군. 그렇다면… 화로의 사원에 대해 알고 있느냐?"

"북부의?"

"그래."

"들어는 봤소. 루 엔테르를 섬기는 사제들과 정신 나간 대장장이들이 사는 곳이라던데."

게임에서는 가 본 적도 있었지만.

굳이 그 말까진 하지 않았다.

충분한 대답이 된 듯 고개를 끄덕인 메브가, 이윽고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루시아를… 그곳까지 데려다 줄 수 있겠느냐?"

"...?"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048화

"루시아를, 그 먼 곳까지?"

"그래. 그래서 네게 부탁하는 것이다, 이안."

이안은 잠시 침음했다.

가 불가를 떠나, 루시아와 화로의 사원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소?"

"여러 이유가 있지. 그래…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느냐."

"가장 중요한 것부터 시작하신다면."

이안이 탁자에 올려져 있던 술병을 들었다.

무려 포도주였다.

"경도 한잔하시겠소?"

"그래. 그게 좋겠군."

확실히 보통 일은 아니군.

이안은 잔에 술을 따라 건넸다.

메브가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얼마 후면, 루시아는 제국으로 보내지게 될 것이다. 네가 전에 예언했듯, 폐하께서 전쟁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니까."

"제국으로 말이오…?"

"그래. 표면적으로는 입양이지만… 사실상 조공이다. 볼모라고 할 수도 있겠군."

"제국은 아겔 란에 관심도 없을 텐데."

"네 말대로다. 하지만 전쟁은, 이야기가 다를 수도 있지. 물론 지금까지처럼 방관할 수도 있겠지만. 저들이 개입할 충분한 명분이 될 테니까."

"흐음…"

이안은 게임일 때를 떠올렸다.

제국은 변방의 왕국들에 관심이 없었다.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거나 반기를 들지만 않는다면, 그들이 뭘 하건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검은 벽과 그 너머에 있을 뿐이었다.

왕국간의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게 조공 때문인지, 늘 그랬듯 관심이 없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참에 아예 왕국들을 정벌해 버릴지도 모르지. 그래서 폐하는, 제국의 유력한 제후 가문에 따로 조공을 바치기로 하셨다."

"…언제 그렇게 결정한 거요?"

"내가 돌아오기 전부터.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제국 내부에서 아겔 란을 비호해 줄 우방이 필요하다 여기셨겠지."

전쟁에 어지간히 진심인 새끼군.

코웃음 친 이안이 내뱉었다.

"하지만 왜 하필 루시아지?"

"그건…."

술을 한 모금 마신 메브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아의 핏줄에 왕가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친모가 폐하의 여동생이셨지."

아, 정략결혼이군.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결속을 단단히 하는 데에 피를 섞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많지 않으니까.

"공녀께선 루시아를 낳고 돌아가셨지. 숙부는… 그 후 몇 년 뒤에 돌아가셨고. 폐하께선 루시아를 조카로 여기지 않으셨다. 누이의 목숨을 앗아간 원수이자 눈엣가시라 생각하셨지."

"흐음…."

미워하던 조카를 팔아 넘긴다라.

이해는 가는 이유였지만.

"루시아는 리우렐가의 사람이기도 하니, 충분히 거절할 수 있으셨을 것 같소만."

"폐하께서 청하셨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저쪽에서 루시아를 원했다. 해서, 달리 선택권이 없었지."

"루시아여야만 하는 이유가 더 있는 모양이군."

"루시아는… 축복받은 아이다."

"축복?"

"가문 어른들의 말씀에 따르면, 루 엔테르의 은총을 받았다고 하더군."

"...!"

의아해하던 이안의 얼굴에 비로소 놀람이 번졌다.

마력을 다루는 재능을 타고난 이들이 신의 권능을 흉내 내기 시작한 것이, 이 세계 마법사의 기원.

그런 주제에, 그중에서도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자들은 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여겼다.

루 엔테르는 열정과 광기의 신.

그의 은총을 받았다는 건, 적색 마법을 다루는 재능을 타고났다는 뜻이었다.

아마 원소 친화력 특성과 비슷한 부분이 있을 터였다.

해당 속성의 마법을 사용할 때, 마력 소모량은 줄여 주고 성능은 높여 주는 특성이었으니까.

정확한 차이는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해서 알 수 없었지만.

"불을 다루는 걸, 직접 보셨소?"

"그래. 두 살쯤인가, 허공에 불을 피우더군. 물론 아무도 그 아이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이안 네가 더 잘 알겠지."

잘 알지. 개 부럽네, 진짜.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말했다.

"…정말 대단한 가문이오. 성기사에 마법사까지 배출하다니."

"이건 왕가의 영향이다. 초대 국왕께서도 그랬고. 그 후로도 대를 건너 은총을 받은 자손들이 나왔다고 하더군."

이안의 헛웃음이 짙어졌다.

특별한 능력과 재능을 가진 자들이 실존하는 세상인 만큼, 혈통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애초에 귀족이라 불리는 자들의 핏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조가 무언가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왕위에 올랐다. …마력의 황혼기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야."

아, 이젠 이 말까지 나오는군.

이안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이 암흑시대를 관통하는 말 중 하나인 마력의 황혼기는, 말 그대로 마력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저 검은 벽이 대륙을 가른 이후, 마력이 옅어지기 시작했으니까.

마법사들은 전처럼 마법을 남용할 수 없게 됐고, 자연스럽게 입지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의 마법사들이 유독 많이 타락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마법적인 재능을 타고나는 이들의 숫자도, 당연히 줄어들었으리라.

"루시아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해. 가문의 모두가 언급하지 않았지. 불경하게 비춰질 수도 있으니까. 물론, 루시아를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왕께선 재능이 없으신 모양이오."

"그래. 선대께서도 그랬지. 그러니 더더욱 루시아를 없는 사람 취급하신 건지도 모르겠군."

"제국으로 치워 버리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시겠군. …그래서, 그 꼴은 보고 싶지 않으신 거요?"

부정할 줄 알았건만.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메브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예 그런 마음이 없다고는 하지 못하겠군. 루시아는 내게 남은 마지막 혈육이니까. …하지만 단지, 그래서만은 아니다."

메브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버논도 루시아가 걱정되었던 모양이야. 제후 가문에 대해 조사해 놓은 문서가 있더군. 그걸 읽고 나니, 루시아를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흐음."

"마법에 조예가 깊은 가문이었어.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과 인재들을 자주 영입한다더군. 회색 마탑과도 긴밀한 관계인 것으로 보이고.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그들이 무슨 연구를 하는 건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더군. 가문 내부의 일을 모두 불문에 부치는 거야."

이안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 가문의 이름이 혹시… 라르무트요?"

"그걸 어떻게… 하긴. 제국에서도 가장 강대한 가문 중 하나이니, 너라면 알 수도 있겠군."

"이런…."

이안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술병이 절로 입으로 향했다.

"…루시아도 예외는 아니겠지. 아마 그곳으로 보내진다면 더는 연락을 할 수도,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 수 없게 될 거야."

실제론 그보다 최악이오.

이안은 한숨을 삼켰다.

아직은 먼 훗날의 일이긴 하지만.

라르무트가는 가문의 본거지가 통째로 마경이 될 운명이었다.

마법사의 악몽. 회색 마탑의 타락이 밝혀지는 계기가 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 안의 끔찍한 실험체들을 떠올린 이안이,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술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루시아가 그곳으로 가게 되다면, 그녀도 그 실험체들 중 하나가 될 게 분명했으니까.

어쩌면 이미, 게임을 통해 만난 적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차라리, 화로의 사원으로 보내려는 것이다. 루 엔테르의 은총을 받은 아이이니, 사제들도 극진히 보살피겠지. 그들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고. 타고난 재능을 만개할 기회를 손에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해서…."

메브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네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

"사정은 알겠소만…."

침음한 이안이, 이윽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북부는 여기서 아주 먼 곳이오. 여정이 순탄할 리 없지. 물론 고되기도 할 것이오. 여자아이에겐 특히.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그렇겠지."

"나는 그렇다 치고, 루시아 본인도 그걸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오."

징징거리는 애를 달래가며 그 먼 길을 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 부분은, 내가 직접 대답을 듣겠다."

"여정 자체도 문제요. 나는 사원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이 무엇인지 모르오. 여정이 지나치게 길어지거나, 자칫하면 아예 잘못된 길로 가게 될 수도 있소."

"으음…."

생각지 못한 부분인 듯 잠시 침음한 메브가, 이윽고 말했다.

"아는 북부 출신의 길잡이가 있긴 하다. 내키지는 않지만."

"그게 누구요?"

"미구엘."

"...!"

이안의 표정이 순간 묘해졌다.

아겔 란에 정착하리라던 미구엘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메브가 말을 이었다.

"북부 산맥 출신이라더군. 거기서 반평생을 살았다고 했어. 또다시 어려운 부탁을 하는 건 면목이 없으나… 네가 그렇듯, 미구엘 만큼 믿을 수 있는 길잡이는 또 없을 것 같군."

"…하."

이안이 짧은 웃음을 흘렸다.

이 얘기를 들은 미구엘이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궁금했다.

"그럼, 그것도 경이 확답을 받아 주시오."

"그리하겠다. …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느냐?"

"있소. 바로 경이오."

이안이 메브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우린 떠나면 그뿐이지만, 뒷감당은 경이 하게 되실 텐데. 괜찮으시겠소?"

메브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나는 더 잃을 것이 없다, 이안. 루시아라도 평온한 삶을 살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해."

"틈만 나면 목숨을 버리려 드시는군."

이안은 술병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메브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만약 내가 의뢰를 받는다면 말이오."

"...?"

"나와 미구엘이 경에게 추가적인 보수를 요구한 거요. 이를테면, 이 저택이라든가."

"원한다면 줄 수 있다만."

"말이 그렇다는 얘기요. 경은 당연히 거절하셨고…."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나와 미구엘이 루시아를 납치해 떠난 거요. 그 아이의 재능을 알고 있으니, 팔아 넘기기 위해서. 용병이라면 충분히 할 법한 행동이지."

"...!"

그제야 이안의 속셈을 눈치챈 듯, 메브가 눈을 치켜떴다.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면 경도 피해자가 되시는 거잖소. 나와 미구엘이야 뭐, 다신 아겔 란에 발을 들이지 않으면 그만이고. 경은 이제 단죄의 사도도 아니니, 이 정도 거짓말은 괜찮으시잖소?"

슬쩍 입술 끝을 말아 올린 이안이 덧붙였다.

"오히려 여신께서도 기꺼워하실 거요. 옳은 선택을 했다고."

"…이안, 너는 정말이지."

입을 몇 차례 달싹이던 메브가, 불현듯 다가와 그를 감싸 안았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이것밖에는 없다는 듯이.

깜짝이야.

순간 커진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화로의 불씨.

창을 닫으면서, 이안이 속삭였다.

"아직 할 말이 남았소만."

"…아."

메브가 그제야 굳어졌다.

귀가 붉게 달아오른 그녀가, 어색하게 팔을 풀며 물러났다.

피식한 이안이 덧붙였다.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아직 얘기하지 않았잖소."

"...? 아, 그래. 보수를 정하지 않았군."

"거기다 저번 의뢰의 보수도, 아직 받지 않았소."

국왕이 포상을 내리긴 했지만, 그건 일종의 보너스였다.

메브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주마. 무엇을 원하느냐?"

"어쩌면 지금 경에게는 가장 가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소만...."

그렇게 운을 뗀 이안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

그건 메브의 큰 눈을 더 커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잠시 굳어 있던 그녀가, 이윽고 내뱉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받아들이시겠소?"

"네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그래. 네게 주겠다. 반드시."

이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계약은 성립되었소."

***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난 이안은, 방을 나서자마자 메브가 이미 미구엘에게 이야기를 했다는 걸 알게 됐다.

빗자루질을 하는 그의 얼굴이, 말 그대로 죽상이었기 때문이다.

"일어나셨소."

이안을 발견한 미구엘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피식한 이안이 물었다.

"어쩌기로 했냐?"

"어쩌긴. 나 아니면 누가 그 먼 길을 안내하겠소? 염병할. 이제야 좀 뿌리내리고 살아보나 했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북부로 돌아가게 생기다니. 아무래도 나는 길바닥이나 떠돌다가 객사할 운명인 모양-"

미구엘의 한탄이 이어졌다.

코웃음 친 이안이 말을 잘랐다.

"헛소리할 시간이 떠날 채비나 제대로 해 둬라. 네가 해줘야 할 게 많아."

"형씨가 완치되셔야지 준비든 뭐든…. …설마, 벌써 다 나으셨소?"

이안이 붕대가 칭칭 감긴 팔과 다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였다.

"그래. 아닌 척하고 있을 뿐이지."

"말도 안 돼…. 의원이 몇 달은 요양해야 할 부상이라고 했소. 내가 보기에도 그랬고. 그런데, 벌써 다 나으셨다고?"

"내가 회복력이 좀 좋거든. 거기다 나만 다 나은 것도 아니고."

"아니, 나리는 신의 사도시잖소. …혹시, 형씨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신 거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진짜라는 걸 알게 된 미구엘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한동안은 더 이곳에 머물 줄 알았던 게 틀림없었다.

"하루 반 주지. 떠날 채비를 확실하게 해 둬라."

"염병할… 알겠소. 그리고 루시 아가씨가 나리의 방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한 시간쯤 됐을 거요."

"그럼 좀 더 기다리게 두지 뭐. 난 지금 꼭 아침을 먹어야겠거든."

며칠만 지나도, 여기서 먹은 음식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질 테니까.

식사를 마친 이안은 느긋하게 메브의 방으로 향했다.

메브와 루시아는 물론, 필립까지 그를 맞이했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필립의 시선을 무시한 채, 이안이 말했다.

"대화는 잘 끝내셨소?"

"그래. 루시아도 원한다는군."

이안은 의자에 가만히 앉은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의 그녀는, 장인이 공들여 빚어낸 도자기 인형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요 녀석이 천재 마법사란 말이지.

생각하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고될 거다. 네가 어리다고 배려받을 수도 없을 거고. 죽음을 보게 될 일도 많을 거야. 돌이킬 수도 없다. 중간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잠시 루시아의 눈을 헤집듯 응시한 이안이 덧붙였다.

"그런데도 정말, 가고 싶으냐?"

"…제국으로 간다고 해서,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아요."

특유의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 루시아가, 메브를 돌아보았다.

"화로의 신전으로 간다면, 적어도 제 이름은 지킬 수 있겠죠. 저는 리우렐로 살고 싶어요. 라르무트가 아니라."

메브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거참 애 어른다운 발언이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이윽고 루시아의 길고 붉은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렇다면 먼저, 이 머리부터 잘라야겠군. 아주 짧게."

루시아의 고개가 홱, 그에게로 돌아왔다.

#049화

"머리카락… 을요?"

이어진 물음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밖은 위험하니까. 남자아이라고 괜찮아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여자아이보단 덜하겠지. 게다가 넌 지금 너무 눈에 띄어. 그러니까 좀 망쳐 놓을 필요가 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이라면 얼굴 천재로 빛나는 삶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도적, 강도, 타락자, 마물, 이종족 따위가 득시글대는 이 세계에선,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온갖 봉변을 당하기 딱 좋은 외모였다.

물론 이안이 곁에 있는 한은 괜찮겠지만.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으니,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지금까지 몸소 겪은바, 변수라는 건 통제하는 게 아니라 대비하고 대응해야 하는 영역이었으니까.

물론 루시아의 생각은 다르리라.

"...."

입이 살짝 벌어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안은 묘한 즐거움을 느꼈다.

이 애 어른을 놀라게 만든 것이다.

메브는 그런 그녀의 속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지적이다. 루시아, 내가 외부에서 말을 아끼는 이유를 알고 있겠지?"

"…네."

"이안의 제안도 같은 맥락이다. 따르는 게 좋겠어."

"...."

루시아의 입이 다시 닫혔다.

그녀의 얼굴을 잠시 내려다본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가위를 가져와라, 필립."

***

사각, 사각.

가위질이 거침없이 이어졌다.

탁자에 걸터앉은 루시아는, 어느 순간부터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얼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허벅지에 얹은 손이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으니까.

우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어른스럽다 할 수 있었지만, 평소처럼 속내를 완전히 숨기고 있지는 못했다.

이안이 문득 내뱉었다.

"이미 일어난 일이야. 받아들여라. 새로운 너로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해.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니까."

"...!"

루시아의 눈꺼풀이 순간 떨렸다.

이안의 말에 와닿는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필립은 어쩌면 그렇게 무신경할 수 있냐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놀랍게도 루시아의 표정은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됐어. 눈 떠라."

이안이 머리를 털며 말했을 때는, 어느새 쥐고 있던 주먹도 풀어진 상태였다.

루시아는 주위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돌아보았다.

손을 든 그녀가 자신의 짧아진 머리를 만지는 사이.

"조금 덥수룩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보입니다. 나리."

필립이 말했다.

루시아를 빤히 응시하던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르고 보니 확실히 알겠군."

그가 손을 뻗어 루시아의 턱을 살짝 들었다.

"머리가 문제가 아니었어. 진짜 문제는 바로 얼굴이군."

"...?"

루시아가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는 눈물을 참는 표정이더니.

지금은 오히려 묘한 기대감이 묻어났다.

필립은 물론, 메브도 고개를 끄덕였다.

"인물이 지나치게 훤하시긴 하군요."

"우리 가문도 용모가 빼어나단 말을 많이 듣지. 왕가도 그러니, 루시아가 수려한 건 당연한 일이다."

이안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루시아는 미소년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이 세계의 널리고 널린 미친놈들의 눈에 들기에도 차고 넘칠 터.

"필립. 부엌에 가서 잿더미를 좀 퍼 와라."

"잿더미… 를요?"

"그럼 아가씨를 흙바닥에 대고 굴릴래?"

"아. 알겠습니다."

필립이 잽싸게 달려 나갔다.

루시아는 자신의 짧아진 머리가 신기한 듯, 연신 머리를 어루만졌다.

거참, 적응 빠른 녀석이군.

이안은 내심 웃음 지었다.

하긴. 어려서부터 온갖 불행한 사건을 겪으며 자랐으니,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리라.

곧 재를 담은 양동이를 들고 필립이 돌아왔다.

잿더미에 손을 넣었다 뺀 이안이, 루시아의 목덜미를 잡았다.

"눈 감고 숨을 참아."

루시아가 그의 말에 따랐다.

이안의 손길이 루시아의 얼굴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갔다.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목과 귀까지 꼼꼼하게 재를 발랐다.

그건 어떤 종교적인 의식 같아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도 이안을 제외한 모두가, 묘한 경건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손을 뗀 이안이 말했다.

"다 됐다. 눈 떠."

"...!"

눈을 뜬 루시아가 순간 어깨를 들썩였다.

이안이 내민 동경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짧고 헝클어진 머리.

꼬질꼬질한 얼굴.

놀람은 잠시였다.

"와…."

의미 모를 탄성을 흘리며, 루시아가 자신의 얼굴 이곳저곳을 비춰 보기 시작했다.

오히려 즐거운 듯 입꼬리를 꼼질대면서.

"가명도 지어야겠소. 남자아이 같은 이름으로."

이안이 무심하게 덧붙였다.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군. 가명이라…."

"루시페르."

루시아가 툭 내뱉은 건 그때였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는 가운데, 그녀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옛말로 샛별이라는 뜻이에요. 줄여 불러도 여전히 루시고. 남자 이름이고."

"...."

내가 살던 세상에선 전혀 다른 뜻으로 쓰는 이름이긴 하다만.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라. 이왕이면 성도 짓는 게 좋겠군."

"성까지요?"

"만약을 대비하는 거니까. 음…."

이안의 시선이 양동이로 향했다.

"애쉬라고 붙이는 건 어떨까."

"루시페르 애쉬…."

읊조린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어요."

"그럼 지금부터 그게 네 이름이다. 계속 쓰면서, 입과 귀에 익혀 둬. 어떤 상황에서 들어도 바로 알아들을 수 있게."

덧붙인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필립에게로 돌아갔다.

"나갈 채비를 해라, 필립."

"...?"

***

못마땅한 얼굴로 이안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필립이 경비병들을 지나쳤다.

보란 듯 혀를 차며 문을 닫은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저택에 들어섰다.

방금 그가 한 건 일종의 연기였다.

이안과 메브의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증언할 증인이 많을수록 좋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진짜 목적은 아니었다.

"정말 남김없이 쓸어 버렸군요."

정원을 지나치며 필립이 말했다.

이안은 대꾸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거의 폐허가 된 이 저택은, 레지스 브란트의 집이었다.

가솔들은 전부 처형당하거나 수감됐고, 저택의 모든 재산은 압수되거나 불태워졌다.

입구에 경비병들이 선 것도, 혹시 모를 잔당에 대비해서였다.

물론 이안은 예외였다.

"하지만 분명 아직도 어딘가엔, 숨겨진 예배당이 있겠죠."

"알면 떠들 시간에 찾아라. 아님 그냥 여기서 조용히 기다리든지."

"나리를 도울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놓칠 순 없죠. 솔직히 궁금하기도 합니다. 뭐가 있을지."

많이 컸네. 오염된 마력이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떨던 놈이.

이안이 저택을 누볐다.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오히려 수색이 쉬웠다.

한때 서고로 쓰였을 방에 들어선 이안은, 비밀 공간이 이곳에 있음을 직감했다.

갈수록 타락자들의 비밀 공간을 찾는 능력이 발전하고 있었다.

"…맙소사."

서고 구석구석을 뒤지던 필립이, 문득 이안을 돌아보았다.

"드디어 제가 찾아낸 것 같습니다. 나리."

내뱉은 그가 책장 뒤편의 벽돌을 눌렀다.

철컹.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

책장을 옆으로 밀자, 지하로 내려가는 좁은 계단이 드러났다.

"마지막에 한 건 했네."

피식한 이안이 계단을 내려갔다.

좁고 음습한 지하.

드러난 석실을 횃불로 비추며, 필립이 어깨를 으쓱였다.

"단출하군요. 예상과 달리."

레지스의 밀실은 다른 타락자들의 그것보다 소박했다.

벽면이나 천장에 흔히 보이던 문양이나 고대어는 물론, 서책이나 일지 따위도 놓여있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장식도 없는 제단과 그 위의 작은 목함이 전부였다.

"그럴 이유가 있겠지."

이안이 제단 앞에 섰다.

목함에 뭐가 들었을지는 그도 전혀 알지 못했다.

숨을 고른 그가 목함을 열었다.

"...."

상자 속을 내려다보는 이안의 눈빛이 검게 가라앉았다.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필립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이윽고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뭐길래 그러십니까?"

물으며 목함 안을 들여다본 필립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거무튀튀한 조각이었다. 뭔가를 말려 굳힌 것처럼 보이는.

필립의 눈매가 이내 꿈틀댔다.

귓가로 무언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스쳤기 때문이다.

헐떡대는 숨소리.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

"...."

필립의 눈동자가 멍하니 풀어지기 시작했다.

빨려 들어가듯 의식이 몽롱해지고, 조각 주위로 아른거리는 검은 잔상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필립의 손끝이 움찔거리기 시작한 순간.

"…하."

그를 돌아본 이안의 얼굴에 헛웃음이 번졌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홀리는 거군.

필립을 잠시 관찰하듯 응시한 그가, 이윽고 주먹을 들었다.

빡-!

"우왁?!"

얼굴을 얻어맞은 필립이 비명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턱을 부여잡은 그가, 잠이 확 깬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지, 지금 치신 겁니까?"

"널 살린 거다."

"그게 무슨. …어라, 설마."

뒤늦게 눈을 끔뻑인 필립이, 이안과 목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마, 제가 홀렸던 겁니까? 저 안에 든 것에요?"

"그래. 기억 안 나냐?"

"어, 그게. 저걸 쳐다본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필립이 미간을 찌푸렸다.

머릿속이 간질거릴 뿐.

술에 만취한 다음 날처럼, 기억에 통째로 공백이 있었다.

어렴풋이 스치는 아득한 심연의 편린.

…어둠에 잡아먹힐 뻔했다.

비로소 필립의 아래턱이 딱딱 떨리기 시작했다.

떨어진 횃불을 간신히 주워든 그가,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나, 나리는 괜찮으신 겁니까?"

"…아니."

이안의 시선이, 다시 목함 속의 조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