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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7

적색 마법의 스킬 트리를 눈에 담으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적색 마법은 알다시피, 직관적이고 파괴적이지. 하지만 그런 만큼 위험하고, 통제하기 어려워."

고위 마법에 이를수록 장점과 단점이 모두 극대화됐다.

초월의 경지에 오르면 비로소 단점이 상쇄된다고 하지만.

이안은 그 수준에는 결코 닿을 수 없었다.

그게, 그가 다양한 속성의 마법을 필요한 수준까지 골고루 익혀야겠다고 결정한 이유이기도 했다.

어떤 속성에 올인한들, 대마법사가 될 수는 없었으니까.

섞어 사용하면 상승효과를 낼 수 있는 마법들을 최대한 익히고 활용해 돌파구를 찾는 게 현실적이었다.

자칫하면 더 엄청난 망캐가 될 수도 있겠지만….

"청색은요?"

"적색 말곤 굳이 네가 당장 알 필요는 없을 텐데."

"재미있어요. 궁금하고. …안 될까요?"

"…청색은 단단하고 날카롭지. 다채로운 변화가 가능하고. 하지만 그만큼 섬세함이 필요해. 숙달되기 전까진 별로 강하지 않기도 하고."

질문과 대답이 두런두런 이어졌다.

회색 마법은 빠르거나 치명적이지만 둘이 공존하지는 않는다거나.

갈색 마법은 변칙적이고 동시에 파괴적이지만 제약이 많아서 별로라던가 하는 식의 이야기를, 루시는 눈을 반짝이며 경청했다.

이안도 자신에게 내심 놀랐다.

이렇게까지 막힘없이 술술 설명할 수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쩌면 공략집의 정보와 직접 사용하며 체득한 지식들이 내면에서 융합된 것일지도 몰랐다.

…이런 걸 게임일 때 알았어야 했는데.

"듣고 보니 확실히 알겠어요."

루시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권이 있었더라도, 전 적색 마법을 배웠을 거예요."

피식한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게 일치하는 건 축복이지."

"하지만 다른 마법들을 배우기 싫은 건 아니에요. 그럴 순 없겠지만. 그 옛날 백마법사처럼요."

"백마법사…?"

"모르세요? 먼 옛날, 마법이 처음 태동하던 시기엔 마법사들이 지금처럼 나뉘어 있지 않았대요. 서로 지식을 공유하고, 여러 속성의 마법을 익히고 연구했다고요."

루시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다 마침내, 모든 마법에 통달한 대마법사가 나타났다는 거예요. 다들 그를 경외를 담아 백색 마법사, 그러니까 백마법사라고 불렀고요. 모든 빛이 섞이면, 하얗게 변하거든요."

말문이 트였군.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이안을 바라보며, 루시가 덧붙였다.

"백마법사는 본인이 익힌 마법을 다른 마법사들에게 가르쳤대요. 하지만 제자들은 그가 승천하자 여러 색으로 나뉘어 분열했죠. 당연히 백마법사의 유산도 쪼개지고 유실되어서, 이젠 어디에도 온전하게 남지 않았다고 하고요."

"…그것도 책에서 읽었냐?"

"역사서에서요."

"아, 그래."

"그게 그냥 전설이 아니었다고?"

미구엘이 불쑥 끼어들었다.

조용해서 딴생각 중인 줄 알았더니.

이안과 루시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너도 아는 얘기냐?"

"나름 유명한 전설이오. 형씨는 마법사인데도 모르셨소?"

공략엔 그런 거 안 나오거든.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역사나 전설 따위의 설정은, 굳이 책을 찾아 읽거나 NPC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퍼즐을 맞추듯 알아나가야 했다.

고인물이면 모를까. 주요 시나리오를 따라가기에도 바빴던 이안이 관심을 둘 분야는 아니었다.

"지금 마법사들의 지식과 주문은, 모두 한 명의 고대 대마법사로부터 전승된 것이라는 전설이오. 멋지잖소. 마법사들의 시조이자 신에게 가장 가까이 도달한 인간이 있다는 게.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역사서에도 기록이 있다는 걸 보면, 아예 없던 얘긴 아닌 모양이오."

"백마법사라…."

읊조리며, 이안은 눈앞의 스킬 트리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머리 뚜껑을 열려던 노인이 떠올랐다.

그가 이안의 지식을 원한 건 그 전설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이걸 실제로 보면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이안이 볼때, 이 많은 스킬을 다 마스터 하는 건 불가능했다.

미구엘이 넌지시 물은 건 그때였다.

"그, 아직 말씀하실 게 남지 않았소?"

"뭐가 남았는데."

"전에 그러셨잖소. 흑마법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고."

번갈아 귀찮게 하네, 진짜.

혀를 찬 이안이 말했다.

"그걸 네가 알아서 뭐하게."

"그냥 궁금해서 말이오. 형씨 아니면 어디 가서 이런 걸 묻겠소?"

"마법사도 아닌 놈이…."

"뭐든 알아야 오래 사는 거 아니겠소. 지금만 해도 주문쟁, 아니, 마법사를 만나면 어떻게 튀어야 할지 감이 딱 잡혔단 말이오."

"어떻게 해야 죽일 수 있는지가 감이 온 거겠지."

"아니, 뭐, 그 생각도 안 한 건 아니긴 한데…."

미구엘이 머쓱하게 중얼댔다.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중에.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 알겠소. 형씨가 기분 좋으신 날을 노려야겠군."

"그래. 지금은 닥치고."

미구엘이 냉큼 입을 다물었다.

비로소 조용히 집중할 수 있게 된 이안은, 차근하게 스킬들을 눈에 담았다.

그가 몇 개의 스킬 포인트를 투자한 건,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서였다.

'이만하면, 보급형 백마법사 정돈 된 것 같은데….'

피식한 이안은 미련 없이 스킬 창을 닫고 눈을 감았다.

자신의 판단이 옳았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터였다.

***

"후...."

긴 날숨과 함께, 이안은 명상에서 깨어났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완만하고 삭막한 오르막길.

언덕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했다.

북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일어나셨소?"

미구엘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든 루시를 확인한 이안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지금, 어디까지 왔지?"

"오늘 말이오, 아니면 전체적으로 말이오?"

"둘 다."

"일단 이 언덕을 넘으면 곧 갈림길이 나올 거요. 거기서 북쪽으로 꺾으면 새 영주가 다스리는 땅이지. 거기까지만 가도, 오늘 목표한 지점까진 간 거요. 전체적으론…."

수염난 턱을 긁적인 그가 이윽고 덧붙였다.

"반은 넘은 것 같소. 계속 지금처럼만 가면, 아마도 예상보단 빨리 도착할 것 같고."

이렇게 오래 움직였는데도, 반이라니.

이안은 등받이에 기대며 입맛을 다셨다.

더럽게 긴 여정이었다.

먼 거리를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이 빌어먹을 세상엔 그런 것도 없었다.

마차가 언덕 정상을 올랐다.

"엥…? 형씨, 좀 보셔야겠소."

미구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차 앞을 돌아본 이안의 눈매가, 이내 가늘어졌다.

완만한 내리막길 너머.

관도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에, 두 명의 기수가 서 있었던 것이다.

검은 마갑을 씌운 전마.

"정말 이쪽으로 가는 거였군."

"것 봐라. 내 말이 맞지? 우리가 길을 잘못 든 게 아니라, 앞질러 갔던 거라니까."

그리고 말에 기대 선 채 태연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검은 갑옷의 남자들까지 확인한 순간, 이안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올 게 왔군.'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소?"

미구엘이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이안이 내뱉었다.

"내가 내리면 마차를 뒤로 물려. 내가 안 보이는 거리까지 충분히. 알아 들어?"

미구엘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어쨌든 이번 내기는 내가 이긴 거다. 뒤로 물러나 있어."

옆의 갈색 머리에게 말 고삐를 던진 금발이, 앞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손에 든 투구를 눌러쓴 그가 마차를 향해 양팔을 흔들었다.

"반가워! 드디어 만나는군!"

"이런 시벌…."

미구엘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호의적일 리 없는 자가 호의적으로 군다는 건,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일 터였다.

금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너희 둘 중에 누가 검의 달인이지? 내가 그 친구한테 먼저 볼 일이 있거든."

"...."

이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여기서 또 저 얘길 들을 줄이야.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나다. 검의 달인은 아니지만."

장단을 맞춰주면서, 필요한 정보도 캐낼 수 있을 테니까.

저놈의 거만한 태도로 봐선, 알아서 술술 불어댈 게 틀림 없었다.

로브를 벗어 어느새 깨어나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루시에게 덮어준 이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섰다.

"오오… 당당하시군."

금발이 과장된 탄성을 터뜨렸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내가 상상한 거랑은 좀 다른데. 난 좀 더 우락부락할 줄 알았거든. 네가 볼 땐 어때, 케네스?"

"뭐, 사람은 겉모습만으론 판단할 수 없는 법이니까."

말고삐를 쥔 채 우두커니 선 케네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여유만만이군.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린 이안이 금발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대답했으니 나도 하나 묻지."

"얼마든지."

"어떻게 우릴 앞지른 거지?"

"의외인데? 난 우리 정체부터 물을 줄 알았거든."

"그건 이미 알아. 천칭 상단의 조무래기들이지."

"오...."

탄성과 달리, 금발의 눈빛이 순간 번들거렸다.

역시, 자존심이 센 놈이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금발이 어깨를 으쓱였다.

"암표범 말이 사실이었군. 우릴 눈여겨 봤던 거야. 애석하게도, 조무래기는 아니지만."

"그래서, 대답은?"

"간단해. 우린 다른 놈들이 사흘은 걸릴 거리를 하루면 달릴 수 있거든. 그것도 매일."

뒤의 전마 쪽을 가리킨 금발이, 선회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는 짐마차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도망쳐 봤자 소용없다는 뜻이지."

지금 이들이 보이는 여유도, 마주친 이상 절대 놓칠 리 없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안이 보기에도 당연한 자신감이었다.

제국에서 온 놈들이니까.

게임에선 3챕터에나 마주쳤을 자들.

상단에 고용된 놈들인 만큼, 제국 최고의 실력자까진 아니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상대해온 촌놈들과는 격이 다를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게, 질 것 같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도망치는 게 아니야. 마차가 상하지 않게 물러나는 거지."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선 이안이 내뱉었다.

"마차가 상하면, 앞으로의 여정이 피곤해지거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네 여정은 여기가 끝이니까."

미소 지은 금발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비늘을 이어 붙인 것처럼 생긴 검이었다.

이안이 덧붙였다.

"이름이 뭐지?"

"카일."

"그래, 카일.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저기 선 네 친구와 함께 덤비는 게 좋을 거야."

"...?"

"지금부터 싸울 텐데. 너 혼자서는 내 상대가 안 될 것 같거든."

"…하!"

순간 굳어졌던 카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케네스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검이 아니라 아가리의 달인인 것-"

콰직-!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고개가 옆으로 튕겨 나가듯 젖혀졌다.

충격으로 투구가 벗겨지고, 날아들었던 단검이 핑글핑글 회전하며 땅에 박혔다.

카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개… 자식이...?"

충혈되는 그의 눈을 마주 보면서, 이안이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함께 덤벼라. 이기고 싶다면."

#056화

"진심인 것 같은데. 합류할까?"

뒤에 선 케네스가 덧붙였다.

어깨를 부들댄 카일이 소리쳤다.

"지랄하지 마! 끼어들면 너도 죽인다!"

그가 붉어진 눈으로 이안을 노려보며 뿌득, 이를 갈았다.

"그 아가리부터 찢어 주마, 이 개자식아!"

그래.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카일이 돌진한 건, 이안이 실소를 삼키며 검을 뽑아 든 직후였다.

덩치에 걸맞지 않게 빠른 속도.

놈의 얼굴로 단검이 한 번 더 날아들었다.

콰직, 후웅-!

팔로 단검을 쳐 낸 놈이, 그대로 검을 내리쳤다.

옆으로 몸을 날린 이안이 바닥을 구르고, 비늘검이 허공을 갈랐다.

풍압에 땅이 푹 패였다.

힘 하난 엄청난 놈이군.

생각할 찰나, 한쪽 발을 내리찍으며 급제동한 카일이 그대로 몸을 돌려 검을 휘둘렀다.

이안이 황급히 검을 들었다.

카가가강-

날 사이에 단죄의 검이 걸리면서, 이안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검날에 팔을 덧댄 이안이 간신히 멈춰 섰다.

카일이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검의 달인이라더니, 고작 이거냐?"

"네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이안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난 한 번도 내가 검의 달인이라고 한 적 없어."

"...!"

화르르르-

이안의 주위로 불덩이가 연달아 피어올랐다.

눈을 치켜뜬 카일이 이안을 밀쳐내며 뒤로 물러났다.

퍼버버버벙!

그를 따라 쏟아진 불덩이가 연달아 폭발했다.

카일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 가운데.

쉬학-!

폭발을 뚫고 쇄도한 이안이 검을 횡으로 후려쳤다.

카일이 당황한 와중에도 검을 들어 막아냈다.

콰지직- 펑.

"...?!"

이안의 검에서 소리 없는 폭발이 일었다.

일순간 주위 모든 것을 끌어당겼다가 밀어내는, 진공 폭발.

마법이라는 티가 거의 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난전에 사용하기 가장 편리한 마법 중 하나였다.

콰장창-

포탄에 맞은 것처럼 튕겨 나간 카일이 바닥을 굴렀다.

화르르륵-

춤추는 불꽃을 다시 피워 올리며, 이안은 쓰러진 카일을 향해 재차 달려들었다.

단죄의 검이 파공음을 흩뿌리며 날아들 찰나.

"주문쟁이였냐? 차라리 잘 됐군!"

쩌엉-!

일갈과 함께, 카일의 전신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후끈한 열기. 충격파에 부딪힌 이안이 뒤로 밀려나고, 날아들던 불꽃들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자욱해진 연기를 밀어내며, 카일이 몸을 일으켰다.

"나도 비슷한 걸 할 줄 알거든."

진공 폭발에 적중당했음에도, 그의 팔은 부러지지조차 않았다.

검은 갑옷 곳곳에 박힌 마석이 붉은빛을 머금고 일렁였다.

카드득-

자루를 움켜쥐는 손길을 타고 불똥이 튀었다.

"아, 그래. 템빨로 승부 보는 타입이었군."

착지한 이안이 자세를 다잡으며 내뱉었다.

카일이 되물었다.

"템빨…?"

"실력보다 장비가 좋다는 뜻이지."

"이… 빌어먹을 주문쟁이가…!"

쿠확-!

카일이 포탄처럼 돌진했다.

그의 뒤로 불똥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청색 마법으로 싸울 걸 그랬나.

전신에 바람 칼날을 두른 이안이 몸을 날렸다.

콰아아-

내리치는 칼날의 궤적을 따라 불길이 넘실댔다.

상단 호위병 주제에 마법 무구 풀 세트라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사실 상대가 제국인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변방의 왕국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코 제국보다 강대해질 수 없는 이유도, 이런 것들 때문이었다.

왕국은 저들처럼 마법 무구를 개개인이 소유할 만큼 확보할 수도, 만들어 낼 기술을 손에 넣을 수도 없었다.

저놈이 온몸에 두른 마법 무구는, 일종의 특권이나 다름없었다.

콰아아아- 콰르르-

카일의 공세가 숨 쉴 틈 없이 이어졌다.

섬세함은 떨어졌지만, 힘과 체력만큼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집중력과 육감, 바람 칼날의 도움까지 받으며 피해 내던 이안을, 끝내 회피할 수 없는 순간까지 몰아붙인 것이다.

이를 악문 이안이 날아드는 궤적에 맞춰 검을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 날아드는 비늘검이 느릿느릿 새겨졌다.

후끈한 열기가 궤적을 따라 밀려들었다.

"...!"

하지만 이안의 미간이 꿈틀댄 건, 그 불길 때문이 아니었다.

일순간 느껴진 불길함.

카가가각-

비늘검과 맞부딪친 단죄의 검에서 불똥이 튀고, 일순간 카일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뒈져라-!"

철컥, 촤르르르륵-

그가 검 손잡이를 누르자, 비늘검이 순간적으로 뱀처럼 늘어났다.

검날이 단죄의 검을 휘감으며, 그 너머의 이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안이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젖힌 건 그때였다.

"...?!"

승리를 확신했던 카일의 눈이 비로소 커졌다.

비늘검이 이안의 코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뒤따르는 불길.

하지만 이안의 저항력을 뚫어 낼 만큼의 열기는 아니었다.

불길은 그의 피부를 붉어지게 하고, 앞머리만 조금 불태웠다.

촤르륵-

카일이 늘어난 검을 끌어당겨 회수하는 사이.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킨 이안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것도 막아 봐라."

땅을 스치듯 휘둘러지는 단죄의 검에, 푸른 빛이 타올랐다.

카일의 눈에 핏발이 섰다.

"무슨?!"

쩌엉-!

그리고 그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올려 친 단죄의 검은 놈의 옆구리에 박혀 멈췄지만, 섬광은 그대로 뻗어 나가 상반신을 꿰뚫었다.

쩍 벌어진 카일의 입에서 피가 왈칵 토해졌다.

허리부터 가슴까지 사선으로 잘린 상반신이 뒤로 넘어갔다.

주위로 일렁이던 불길과 흩날리던 불씨가 뒤이어 잦아들었다.

"…허."

연기 사이로 드러난 광경에, 케네스의 입이 뒤늦게 벌어졌다.

카일의 일격으로 자욱해진 연기 속에서 푸른 빛이 번쩍인 것밖에 보지 못한 그였다.

다음 순간 이어진 광경이 가슴이 쩍 벌어져 죽은 카일과, 이제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이라니.

"어이가 없군.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검을 쓰는 마법사도 처음 보는데, 신성력이라니…."

케네스가 눈을 간신히 깜빡이며 내뱉었다.

어깨만 까딱이는 이안에게, 그가 덧붙였다.

"아무리 성물이라도, 신들이 마법사에게 신성을 내려 주실 리가 없는데. 어떻게 한 거지?"

"글쎄. 나한테는 내려 주던데."

"네 진짜 정체는 뭐지? 이런 촌구석의 떠돌이 용병이 카일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어."

"뭐, 이 세상 사람은 아니지."

"...?"

대답이 이어질수록, 케네스의 표정이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

이안은 더 내뱉는 말 없이, 팔을 휘둘러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비로소 케네스의 얼굴에 헛웃음이 번졌다.

"그래, 순순히 대답해 줄 생각 따윈 없는 거군."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곧 죽을 놈한테 뭐 하러 거짓말을 해?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우묵한 눈으로 케네스를 바라보았다.

"하나 묻지. 너희 패거리 중에, 이놈은 어느 정도 수준이지?"

케네스의 시선이 카일의 시신으로 향했다.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최약체… 라고 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샬롯을 제외하곤 다 비등비등하다고 할 수 있지. 샬롯은 확실히 남다른 구석이 있거든."

"샬롯...?"

"아, 이름은 모르겠군. 수인이다. 그 녀석은 널 기억하고 있던데. 우리가 너흴 쫓은 것도, 그 녀석 덕분이거든."

"아, 수인. 나도 기억하고 있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놈이 우릴 쫓아 올 줄 알았는데. 너희가 왔더군."

"그러고 있을 거다. 우리가 선발대일 뿐. …너희를 다 죽이고 아가씨를 들고 돌아갈 줄 알았는데. 이런 촌구석이 내 무덤이 될 줄은 몰랐군."

"그런 게 인생이지. 나도 내가 이런 개 같은 세상으로 떨어질 줄은 몰랐거든."

"영문 모를 소릴 잘하는군. 마법사라 그런가."

케네스가 등에 멘 창을 뽑았다.

자루를 비틀자, 창대 옆에서 반달 형태의 날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성물이라도 연달아 신성을 빌려 올 수는 없겠지. 네가 적색 마법사라는 것도, 검술이 엄청나진 않다는 것도 알았고. 이만하면 밑천은 꽤 드러난 것 같은데…."

담담하게 말을 이은 케네스가 이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 정도로 하고 보내주지 않겠나? 솔직히, 아무런 상처 없이 이길 자신은 없어서 말이야."

"보내 주면, 안 쫓아올 거냐?"

"나는 그러고 싶지만. 고용주가 그럴지는 모르겠군."

케네스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느새 헐떡이던 숨이 거의 가라앉은 채였다.

"그럼, 결론은 난 것 같군."

"애석하군. 아까 네 말대로 합공할 걸 그랬어. 카일을 도발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우리가 살 길을 알려준 거였군."

쿠- 확-!

다음 순간, 케네스가 예고 없이 달려들었다.

그의 갑옷에 박힌 마석들이 일제히 빛나고, 흐릿한 냉기가 뿜어져 나와 그를 떠밀었다.

적색 다음은 청색이냐?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뒤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손을 뻗어, 케네스를 향해 화염구를 발사했다.

펑- 퍼엉-!

케네스는 미늘창을 휘둘러 화염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베어 내며 돌진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가 손을 뻗었다.

쩌저적-!

이안의 뒤와 옆으로 순식간에 얼음 가시들이 솟구쳤다.

이안이 바닥을 구르며 멈춰 섰다.

쩌저적, 이어진 가시들이 그의 퇴로를 막았다.

아, 그래. 다 이유가 있는 조합이군.

이안은 쇄도하는 케네스를 바라보며 몸을 낮췄다.

이미 패배한 것처럼 굴었지만, 놈의 눈빛은 삶을 포기한 자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디까지나 이안의 방심을 유도하려 한 것일 터.

하지만 그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그는 이 전투를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

쩌저적-!

이안의 앞으로 얼음 방벽이 피어올랐다.

"...?!"

콰지직!

눈을 치켜뜬 케네스가, 그대로 방벽 위를 후려쳤다.

하지만 일격에 박살 낼 수는 없었다.

오히려 표면에 종유석처럼 튀어나온 얼음 기둥들이 그의 갑옷을 찔렀다.

혼돈력으로 발현한 서리 방패는, 한 번이라면 용의 숨결도 막아 낼 수 있을 터였다.

"청색...?!"

케네스의 얼굴에 경악이 번지는 사이.

콰앙! 방패가 폭발하면서, 파편이 그의 전신을 휩쓸었다. 투구 아래로 드러난 얼굴에 칼로 베인 것 같은 상처가 생겼다.

그 사이로 쇄도한 이안이, 마력이 휘몰아치는 눈으로 케네스를 마주보았다.

이를 악문 케네스가 갑옷에 새겨진 마법을 발동하려 한 그때.

쿠확-!

이안의 손아귀에서 마력의 파장이 터져 나왔다.

파치칫-

형성되던 마법이 흩어지고, 무구에 박힌 마석들이 멋대로 점멸하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케네스의 얼굴에 당혹이 번졌다.

"이게 무슨…?!"

마력 역류라는 거다.

속으로 대꾸한 이안이 곧바로 다음 마법을 준비하며 뛰어올랐다.

마력 역류는, 말 그대로 마력의 흐름을 역류시켜 마법 무구나 시전 중인 마법을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비전 스킬이었다.

유용해 보이는 능력과 달리 사거리가 짧고 정확한 타이밍에 써야 하는 데다가.

유물이나 성물, 보스급 네임드의 스킬은 무력화시킬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허를 찌른다는 측면에선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주문을 완성한 이안은 아직 상황 파악이 끝나지 않은 케네스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쩌저저적-

케네스의 주위로 벌집 같은 얼음 기둥들이 솟아올랐다.

청색 마법, 얼음 감옥.

"대체 어떻게…?"

내뱉던 케네스가 숨을 멈췄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안의 눈이, 어느새 다시 붉게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직! 콰장창-!

뒤늦게 창을 든 그가, 얼음 감옥을 마구 내리치기 시작했다.

콰르르르르-

하지만 샛노란 불길이 그를 집어삼키는 게 더 빨랐다.

불길은 케네스와 얼음 감옥은 물론, 인근 지역을 모조리 뒤덮었다.

중위 적색 마법, 화염 장벽.

새로 익힌 스킬 중 하나였다.

감옥을 뚫고, 불길에 휩싸인 케네스가 나뒹굴었다.

비로소 다시 갑옷의 마석이 번쩍이고, 냉기 파장이 터져 나왔다.

이미 너무 늦은 다음이었다.

케네스는 숨이 끊어지진 않았지만, 전신에 지독한 화상을 입은 데다 두 눈까지 멀어버린 상태였다.

"하...."

그의 입에서 체념의 한숨이 번지는 가운데, 인상을 찌푸린 이안이 그 앞에 착지했다.

의도한 결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케네스가 이렇게까지 고통받게 할 생각은 없었다.

단숨에 타죽을 줄 알았건만.

"미안하군, 지금 바로 편하게 해 주겠다."

케네스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번졌다.

"돈 받고 사람 죽이며 산 죗값을 이렇게 치르는군…."

콰직!

이안이 내리친 검이 케네스의 목을 단숨에 잘라냈다.

주위에 일렁이던 냉기가 잦아들었다.

"후우…."

한숨을 내쉰 이안이 그 곁에 주저앉았다.

두통과 현기증이 뒤늦게 밀려들었다.

마력을 연달아 너무 많이 소모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연구하고 체득해 온 그의 전투 방식이, 제국의 실력자들에게도 통한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물론 최강자들이라 할 순 없었지만, 이안 역시 전력을 쏟아부은 것은 아니었으니 의미는 충분히 있었다.

적어도 묘한 안도감을 주기엔 충분했다.

"좀 더… 아껴도 되겠네."

아직은 스탯 포인트와 스킬 포인트를 다 써 버릴 때가 아니다.

그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이안은 삶의 유예 기간이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

이안의 눈매가 꿈틀댄 건 그 직후였다.

두 호위병의 시신에서 기묘한 마력의 흐름이 전해졌다.

죽은 자들이 되살아날 리는 없었으니, 저들의 마법 무구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터였다.

케네스의 시신을 붙잡아 든 이안의 미간이, 이윽고 좁아졌다.

"아, 이런."

시신 아래에 마력이 모여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

과거 콘라우드의 정수가 그랬듯, 희미한 마력의 파장이 이어졌다.

아마 이들의 고용주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리라.

없애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촌놈들 상대할 때가 좋았지."

고게를 설레설레 저은 이안이,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

"그러니까 이게, 마법 표식, 뭐 그런 거란 말이오?"

미구엘이 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런, 시부럴. 좆됐구만."

"그럼 우리 위치가 알려지는 건가요?"

짐칸에서 고개만 내민 루시가 물었다.

"그렇겠지. 여기까지 오면, 우리가 북부로 가고 있다는 것도 확실히 알게 될 테고."

대답한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만 보고 누워 있어라. 자꾸 이런 거에 관심 가지지 말고."

"시체는 익숙한걸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하아…."

이안의 한숨이 깊어졌다.

시체가 익숙한 열두 살이라니.

그가 냉혹한 살인마가 된 것만큼이나 끔찍한 일이었다.

"와서 이거 벗기는 거나 좀 도와주시겠소? 이상하게 안 벗겨지는데."

그사이, 카일의 시체를 붙잡고 끙끙대던 미구엘이 말했다.

이 와중에도 경호병들의 마법 무구에 눈이 돌아간 것이다.

혀를 찬 이안이 내뱉었다.

"그걸 벗기려면, 시체를 다 토막 내야 할 거다."

"엥...? 왜?"

"귀속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거든."

이안이 이걸 아는 건, 물론 그도 이들의 갑옷을 벗기려는 시도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기들도, 주인이 아니면 제 성능을 다 낼 수 없을 거고."

천칭의 비늘검과 천칭의 미늘창.

정보 확인이 가능한 이 무기들은, 제대로 된 성능을 발휘하려면 각인 과정을 다시 거쳐야 했다.

그러려면 마법 무구를 다룰 줄 아는 장인도 필요했다.

게임에선 난이도가 너무 낮아지는 걸 막기 위해 만든 것이 분명했던 시스템이, 현실이 된 지금도 이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오, 그래도 이 석궁은 쓸 만해 보이는군. 좀 타긴 했지만."

케네스의 허리춤에서 쇠뇌를 집어 든 미구엘이 눈을 빛냈다.

시위가 이중으로 걸린 소형 석궁.

"그… 저기 말이오, 이거…."

"네가 써라. 눈치 보지 말고."

"어, 정말이오? 그래도 되겠소?"

화색이 된 미구엘이 석궁을 품에 안았다.

이안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곧 숨 막히게 쫓길지도 모르는데, 쓸 수 있는 건 다 써야지."

"…아, 그래서였소?"

"상단의 추적자가 더 있을 거다. 거기다 곧 벨 론데의 용병들도 따라붙겠지. 상단의 추적자들은 눈에 띌 테니까."

말을 이으며, 이안은 카일과 케네스의 품에서 뒤진 무기들과 마석들을 점검했다.

갑옷을 벗길 수는 없어도, 검날을 넣어서 비틀면 마석은 충분히 분리할 수 있었다.

정수만큼은 아니라도, 비상시엔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으리라.

비늘검과 미늘창을 아공간에 쑤셔 넣고, 카일이 쓰던 제국제 단검을 허리에 찬 이안이, 마지막으로 케네스의 단검을 들어 마차로 향했다.

"...?!"

그가 단검을 내밀자, 루시의 눈이 커졌다.

"제 거예요?!"

"가지고 놀라고 주는 거 아니다. 정말 위급한 상황에서만 뽑도록 해. 그러지 않으면, 그냥 다시 회수할 거다."

"네…!"

루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단검을 받아 들었다.

…벌써부터 불안한데.

입맛을 다시는 이안의 귓가로, 미구엘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가만 보면 말이오. 형씨는 보기보다 잔소리가 많으신 것 같소. 루시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그런 건 알아서… 크흠."

이안의 시선을 받은 미구엘이 헛기침을 했다.

재빨리 마차로 다가선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쩌실 생각이시오?"

"조금 더 빨리 움직여야지."

"어떻게…?"

이안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

같은 곳을 돌아본 미구엘의 눈이 이내 커졌다.

마갑을 걸친 전마 두 마리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갑에 박힌 마석들이 아직도 반짝이고 있었다.

#057화

검은 마차 위.

"아니…?"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던 하비에르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나른한 표정으로 그 옆을 따르던 샬롯이 고개를 돌렸다.

마석 박힌 목걸이를 움켜쥔 하비에르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날카로운 눈빛. 그와 반대로 억지로 미소를 그려낸 듯한 입매.

그녀의 고용주가 일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 지어 보이는 특유의 미소였다.

목걸이를 움켜쥐고 잠시 눈을 감았던 그가, 이윽고 상단의 고용인에게 손짓했다.

그를 포함해 열 명으로 꾸려진 추적대는, 그저 카일과 케네스가 남긴 이정표를 따라 이동만 한 것이 아니었다.

둘씩 짝을 지은 고용인들이 인근을 오가며 정보를 수집해 왔다.

하지만 바쁜 건 그들뿐.

샬롯에겐 따분한 행군의 연속에 불과했다.

"…그리 가지. 준비해 두도록."

속삭임 끝에 하비에르가 내뱉자, 고개를 끄덕인 고용인들이 말머리를 돌려 달려 나갔다.

그들이 달려가는 방향이 본래의 목적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샬롯이, 비로소 혀를 날름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뭔가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래… 카일과 케네스가 당했다."

"...!"

샬롯의 눈이 순간 커졌다.

나른하게 안장에 기대 있던 그녀의 허리가 꼿꼿해졌다.

마차 반대편, 또 다른 직속 호위병인 올레그가 내뱉었다.

"그 검의 달인이라는 놈의 짓입니까?"

"이 변방에 그 둘을 동시에 죽일 실력자가 또 있는 게 아니라면, 아마도. 국왕의 말이 아예 허무맹랑하진 않았던 거야. 내 오판 때문에 추가적인 손실이 생겼군…."

하비에르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애도나 슬픔도 담겨 있지 않았다.

손해 본 금액에 대한 아쉬움뿐.

올레그와 샬롯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은 고용주가 같을 뿐, 동료애 따위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었다.

샬롯의 얼굴에는 오히려 희열이 번지고 있었다.

빼앗긴 줄 알았던 사냥감이 돌아왔으니까.

"제가 나설 차례로군요."

그녀가 가르릉대는 숨소리와 함께 내뱉었다.

안장 위로 기분 좋게 곤두선 그녀의 꼬리를 홀린 듯 곁눈질하던 하비에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나슬란으로 간다."

"...?"

샬롯의 꼬리가 힘을 잃었다.

나슬란은 이 근방의 도시였다. 본래라면 들를 일정도 없었던 곳.

그녀는 그제야 조금 전의 고용인들이 나슬란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를 과소평가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 설사 요행수였다 하더라도, 두 번 반복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지."

"…전 그놈들처럼 당하지 않습니다."

샬롯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하비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네 실력을 잘 안다, 샬롯. 올레그, 자네도. 난 자네들을 믿어. 하지만 상인은 절대 믿음만으로 모든 걸 걸지 않지. 상대가 하룻강아지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조금의 위험도 간과할 수 없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올레그가 물었다.

하비에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다른 들개들이 그들을 쫓고 있지 않나. 우린 그것들보다 더 힘센 사냥개를 풀어야지. 사냥감의 힘이 빠질 때까지 쫓도록. 마침… 나슬란에 그런 사냥개들이 있다더군.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멍청한 사냥개들이 말이야."

그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샬롯에게 어떤 본능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상인 특유의 미소.

부하들을 바쁘게 놀린 덕분에, 그는 인근 영지의 상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다.

사냥감이 엄한 자들의 손에 들어갈 것을 염려한 행동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자들에게서 빼앗기라도 해야 할 테니까.

국왕이 파견한 기사들의 소식도, 그 과정에서 손에 넣은 정보였다.

루시아 리우렐의 행방을 놓친 것에 분개한 나머지, 거치는 마을마다 현상금을 뿌리고 용병을 고용한 멍청한 놈들.

놈들은 결국, 돈 냄새를 맡은 영주의 명령으로 구금됐다.

국경을 넘어왔으니 저항할 명분도 없었으리라.

그들은 나슬란에서, 벨 론데의 영주 중 누군가가 루시아 리우렐을 붙잡아 오길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그때가 되어도 몸값을 흥정할 전령으로나 활용될 테니, 하비에르가 내미는 구원의 손길을 거절할 수 없을 터였다.

자신들의 치욕과 불명예를 씻어 낼 방법은 그것뿐일 테니까.

샬롯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결국은… 몰이 사냥이로군요."

"그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으니까. 아무리 멍청한 것들이라도, 제대로 된 주인이 목줄을 채워서 부린다면 쓸모가 생기는 법이지."

"사냥감이 사냥개에 물려 죽게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걱정 마라.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하비에르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도시를 눈에 담았다.

"사냥감의 숨통을 끊고 전리품을 차지하는 건 자네들이 될 거야. 이만하면, 모두가 만족하는 거래 아닌가?"

"...."

그런 건 내 취향이 아니라니까. 당신처럼.

속으로 읊조리면서도, 샬롯은 더 이상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억눌린 야성을 발산할 기회가 다시 손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조금 더 인내할 가치는 충분했다.

***

말을 교체했음에도, 일행의 이동 속도는 그다지 빨라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마갑에 새겨진 마법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지만, 말이 달리면 마력 소모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시험 삼아 달려 본 결과,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마석들이 빛을 잃었다.

최소 세 가지 이상의 마법이 새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짐가방에 남아 있던 마석은 고작해야 사흘 남짓 달리면 동날 분량.

상단에서 온 추적자 놈들은 마석을 말 그대로 물 쓰듯이 하면서 그들을 따라왔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안은 속도 대신 이동 시간만 늘리기로 했다.

사실, 의미는 만약의 상황에 더 빠르고 멀리 도주할 방법이 생긴 것만으로도 충분히 있었다.

미구엘은 여기에 한 가지 제안을 더했다.

"시간도 벌었고 더 오래 이동할 수도 있게 됐으니, 여기선 조금 돌아서 갑시다."

"얼마나?"

"내 기억이 맞으면, 북동쪽으로 질러가면 영주성 인근을 지나야 한단 말이오. 별일 없으면 다행이지만, 있으면 난리가 날 거요. 그러니 우회해서 갑시다. 번 시간만큼 다시 쓰면, 충분할 거요."

"중간에 들키면 영지를 넘나들면서 튀고?"

"바로 그거요. 이젠 뿌리칠 수도 있잖소. 형씨도 영원히 싸울 순 없으니까. 피할 건 피해야지. 여기만 지나면 버려진 땅이오. 거긴 흉지 천지이니 여기보단 안전하겠지. …거길 안전하다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너도 드디어 사람이 마물보다 무섭다는 걸 깨우쳤군."

피식한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체력과 마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다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조용한 전진이 시작됐다.

마부석의 미구엘은 제국제 석궁을, 그 뒤에 기대앉은 루시는 단검을 질리지도 않고 만지작댔다.

이안은 구석에서, 갑각 같은 재질의 회색 가시에 가죽 띠로 손잡이를 만들고 있었다.

동굴 거미 여왕의 독니였다.

이건 심지어 정보 확인이 가능한 무기였는데, 무려 4레벨의 마비독을 머금고 있었다.

4레벨이면 순간적으로 이안도 마비시킬 수 있는 수준.

수치상 최대 5번에, 따로 독을 보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강적을 상대할 때 훌륭한 보험이 되어 줄 터였다.

단검을 완성한 이안은 독니를 아공간에 넣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짐가방에서 식량과 붕대, 양초 따위를 꺼내 작은 배낭에 꼼꼼히 눌러 담기 시작했다.

그 영문 모를 행동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루시가, 이윽고 등받이 너머의 마부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구엘."

"엉?"

"미구엘은 의뢰가 끝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어허! 빨리 침 뱉어! 빨리!"

어깨를 들썩인 미구엘이 재빨리 외치고는 밖으로 가래침을 뱉었다.

영문도 모른 채 일단 따라 한 루시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미구엘이 입맛을 다셨다.

"재수 없는 말을 하면, 빨리 침을 뱉어야 해. 일종의 액땜이지."

"액땜은… 왜 하는 건데요."

"잘 들어라, 루시. 용병들 사이에는 의뢰 도중에 절대 하면 안 되는 말들이 여럿 있어. 내뱉거나 대답하기만 해도 재수가 옴 붙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는 말이지."

"그건, 저주라고 부르지 않나요?"

"거의 비슷해.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도 많지만, 내 말 믿어라. 그렇게 무시한 인간들, 다 죽었으니까."

"제 질문이 그런 거였다고요?"

"그래. 이번 의뢰가 끝나면 뭔가를 하겠냐고 했지? 이 질문에 대답한 순간 저승에 한 다리쯤 걸쳤다고 보면 돼. 비슷한 말로 고향에 돌아갈 거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다. 자식들이 기다린다가 있지."

미구엘이 진지한 얼굴로 루시를 돌아보았다.

"이런 말은, 의뢰가 끝난 후에나 하는 거다. …사실, 넌 알 필요 없는 것들이지만."

"미구엘은 아는 게 참 많은 것 같아요. 특히 미신에 대해서는."

"네가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듯이, 나도 그렇거든."

"하지만 제 저주는 진짜인걸요. 지금까지 이걸 피해간 건 언니를 포함해서 세 분뿐이에요."

"나랑 저 형씨? 그럼 필립은?"

"필립은… 그 정도는 아니에요."

푸학, 웃음을 터뜨린 미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쨌든 내 말이 그 말이다. 난 불운을 몰고 오는 행동은 절대 안 해. 그 덕에 아직 살아있는 거고."

"…이해했어요."

고개를 끄덕인 루시가, 몸을 낮춰 등받이에 턱을 얹었다.

"전 그냥, 절 데려다준 후에 갈 곳이 없다면 함께 남아 주실 수 없나 해서 여쭤본 거예요."

"엥…? 화로의 사원에?"

"거기에도 고용인들이 있다던데요. 제가 부탁하면 미구엘이랑 이안 님도 지내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미구엘의 옆얼굴을 올려다 본 루시가 덧붙였다.

"나중에 제가 다시 세상에 나올 때, 같이 나올 수도 있고. 미구엘은 훌륭한 길잡이니까."

"흐음… 아니 뭐… 사실 딱히 갈 곳이 정해진 건 아니긴 한데."

턱을 어루만지는 미구엘의 입술 끝이 슬며시 올라갔다.

"저 형씨는 안 남겠지만, 나는 네가 그렇게나 원한다면 남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재수 옴 붙는다더니. 그거면 대답한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어느새 정리를 끝내고 한쪽 벽면에 기대앉은 이안이 되물었다.

미구엘이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끝을 흐렸잖소. 이건 대답한 게 아니지. …그래서, 형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난 당연히 떠날 거다. 그렇게 봐도 달라질 건 없어. 루시."

"…어디로 가실 건데요?"

루시가 입술을 꾹 누르며 물었다.

이안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글쎄… 어디든 가겠지."

"...."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미련 남길 시간에 연습이나 해. 그날 이후로, 아직 불씨도 못 만들어 내고 있잖아?"

"…알았어요."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눈길이 시무룩했다.

미구엘이 슬쩍 중얼댔다.

"거, 말 좀 곱게 하시지. 애 기죽게…."

"곱게 갈아 줄까?"

"…혼잣말이었소. 혼잣말."

미구엘의 뒤통수에 대고 콧방귀를 뀐 이안은, 이내 비스듬하게 드러누웠다.

"명상할 거니까, 싸워야 될 일 아니면 깨우지 마라."

"알겠소."

잠시 어둑어둑한 하늘을 눈에 담은 이안이, 명상을 활성화했다.

주위의 잡음이 사라지면서, 의식이 내면으로 침잠했다.

행선지에 대한 상념이 이어졌다.

이번 의뢰가 끝나고 어디로 갈지는, 그도 아직 제대로 결정한 적이 없었다.

이미 게임에서의 흐름과 그의 여정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벨 론데와 루 사드를 거쳐 북부로 갔고. 산맥 지대와 버려진 땅을 거쳐 화로의 사원으로 들어왔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든 순서가 어그러진 셈.

'그럼 아예 역순으로 움직이면…?'

이안은 심상에 지도를 떠올렸다.

화로의 사원에서 버려진 땅으로. 그리고 산맥을 거쳐 루 사드로 향하는 선이 어렴풋이 이어졌다.

그럴듯하지만, 변수는 여전히 많았다.

특히 버려진 땅이나 산맥 지대는, 길을 찾기가 어려운 데다 툭하면 눈보라에 얼어 죽는 바람에 많은 퀘스트를 건너뛴 지역이었다.

물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공략집을 보고 난 지금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직접 겪어 본 적은 없는 상황을 여럿 마주하게 될 터.

'…각오 단단히 하고 움직여야겠군. 기억도 열심히 되새기고.'

그 과정에서 죽지만 않는다면, 제국에 들어설 때쯤엔 게임에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으리라.

'만약 루 사드까지 포인트를 쓰지 않고도 버틸 수 있다면… ...?'

이안은 문득 생각을 멈췄다.

감각이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되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이이이-

휘파람을 부는 것 같은 바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시야가 천천히 밝아졌다.

새하얀 눈밭 위. 어둠 너머까지 끝도 없이 펼쳐진, 가지만 앙상한 흰 나무들.

'이건 또 뭐야…?'

#058화

미간을 찌푸리려던 이안은, 비로소 자신이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이 지랄이군.

게임이었다면 일종의 이벤트 컷 신에 불과했을 상황이었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결코 그렇게 맘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방비 상태로 정신이 붕괴할 뻔한 이후로는 더더욱.

'대체 어떻게 저항력을 무시하고 의식을 가로채는 거지. 그만큼 강한 놈이라는 건가…?'

어둠이 물결치듯 일렁이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이안의 생각이 뚝 멈췄다.

어둠 너머에서 무언가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종종 느껴지던, 바로 그 시선.

너구나.

이안은 내심 읊조리며, 물결치는 어둠을 노려보았다.

-…오라.

메아리 같은 속삭임이 번졌다.

어린 소녀의 목소리와 노파의 가래 낀 목소리가 뒤섞인 듯한 기묘한 목소리.

-내게로 오라… 선택받은 자여.

이어진 속삭임에, 이안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또다시 안타까워졌다.

코웃음을 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택받은 자라니. 진부하기 짝이 없는 멘트였다.

-불멸이 너를 기다릴지니….

심지어, 불멸?

유혹이라기보단 오히려 구애하려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안은 어둠을 노려보며 뇌까렸다.

그러니까 어디로 가면 되는데?

정체만 드러내 주면, 내가 알아서 찾아갈-

"…테니까."

…? 방금, 목소리가 나온 건가?

이안이 순간 어리둥절해 한 그때.

파도치던 어둠도 문득 고요해졌다.

적막은 잠깐이었다.

-운명이 너를 기다린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속삭임이 이어졌다.

방금 너도 당황했던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다시 목소리를 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보다 주위의 풍경이 흘러내리는 것이 더 빨랐다.

모든 감각이 아스라이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어둠.

"...."

이안은 비로소 눈을 떴다.

새카만 하늘.

방금 본 환영이 그 위에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그 어설픈 놈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게임에서 겪어 보지 못한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그도 모르는 어떤 특정한 조건을 만족 시켰거나, 어쩌면 또 다른 타락자 전용 이벤트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의 내면에는 타락자만이 가질 수 있는 혼돈력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으니까.

모든 걸 확실하게 해 줄 퀘스트 창이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이런 방식은 게임에서도 드물지 않았다.

그때와 같다면 이벤트 컷 신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의문의 어둠이 도사린 장소에 가까워지다 보면 다시 시작될 테고.

퀘스트 창은 놈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난 후에야 만들어지리라.

'…그럼, 방금 그것도 그래서 시작된 건가?'

이안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눈 덮인 숲. 북부로 향하고 있으니,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계속 북부로 향하기만 해도, 또다시 그 진부한 놈이 보내는 환영을 보게 될 터였다.

…다음번엔 정체를 드러내 줬으면 좋겠는데.

생각하던 이안은, 뒤늦게 건너편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를 깨닫고는 미간을 좁혔다.

"안 잤냐?"

"잠이 안 와서요."

담담하게 대답한 루시가, 이내 덧붙였다.

"방금 그거, 뭐였어요?"

너도 뭔가 느낀 거냐.

눈을 끔뻑인 이안이 되물었다.

"뭐 같아 보였는데."

"전혀 모르겠어요. 그냥, 섬뜩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안 님 주위로 뭔가 아른거리는 것처럼 보였고. 그러다가 이안 님이 마력을 내뿜으셨는데… 이것도 느낌이에요. 그렇게밖엔 설명할 수가 없어서요."

루시의 설명은 거의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들렸다.

본인도 자신이 느낀 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모양.

오히려 그래서 더 전형적인 마법사의 화법처럼 느껴졌다.

뭔가 눈을 뜨긴 한 것 같은데….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입을 열었다.

"환영을 봤다."

"환영… 이요?"

"정체는 모르지만. 보나 마나, 세상에 미련이 남은 고대의 원혼 같은 거겠지. 날 부르더군. 흔히들 말하는, 어둠의 속삭임이란 거다."

"...! 책에서 읽은 적 있어요. 마법사들은 의식의 경계를 허문 존재들이라, 그만큼 어둠과 광기의 유혹에 노출될 일이 많다고요."

"…넌 대체 무슨 책을 읽고 산 거냐."

"버논 오라버니의 서고에서요. 언젠가부터 마법이나 신비와 관련된 책들을 수집하셨었거든요. 다 읽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아하…."

왕국에 어둠이 깃들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나름대로 조사를 했던 거군.

루시와 관련된 자료도 모았다는 걸 보면, 버논은 그의 생각보다 꼼꼼한 성격이었는지도 몰랐다.

하긴. 성기사인 누이와 신의 은총을 받은 사촌 사이에 끼어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 노력이 이런 식으로 빛을 발하리라고는 본인도 알지 못했겠지만.

"…아무튼, 아예 틀린 얘긴 아니야. 더 강한 힘과 지식을 위해서라면 넘지 말아야 할 선도 넘고 마는 게, 마법사란 족속들이니까."

"이안 님도, 그러셔요?"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덧붙였다.

"다만 악마나 공허에 영혼을 팔 만큼 멍청하진 않을 뿐이지."

그런 자들의 말로가 어떤지는, 게임을 통해 지긋지긋하게 경험했으니까.

"저한테도, 그런 유혹의 순간이 있을까요."

"있겠지. 네 재능의 크기만큼, 네가 느끼게 될 유혹도 커질 거다."

이 세계에선 재능이 빛날수록 타락의 그림자도 더 짙게 드리우는 법이었다.

"어둠의 유혹에 넘어가면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된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으면 돼. 그러면 최소한 최악의 결정은 하지 않을 수 있을 거다. 경이 그랬듯이."

"마법사가 된다는 건… 제 생각보다 무서운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뭐든 마찬가지다. 네가 루 엔테르를 섬기게 되더라도, 또 다른 유혹이 있을 테니까."

루시의 눈이 순간 커졌다.

"제가 사제가 될 수도 있는 거예요?"

"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될 수 있어. 어쩌면 성기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네 몸엔 기사 가문의 피도 흐르고 있으니까."

"...."

루시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그렇게 많은 선택권이 있으리라 믿기 힘든 눈치.

하지만 이안이 볼 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루시는 아직 어리고, 그녀의 재능은 사제들의 눈길도 사로잡을 테니까.

어쩌면 메브가 원한 건, 루시가 마법사가 아니라 사제가 되는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결정은 루시의 몫이겠지만.

"당장 고민할 문제는 아니야. 이번 여정이 무사히 끝난 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을 거다."

"…그렇겠죠. 제국으로 가게 될 수도 있으니까."

이안의 낯이 순간 굳어졌다.

루시를 돌아본 그가 내뱉었다.

"그럴 일은 없다. 절대로."

"...?"

루시가 당황한 듯 눈을 끔뻑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제국에 끌려가면 어떤 일들을 겪게 될지, 꿈에도 알지 못할 테니까.

"제가 괜한 소릴 했나 봐요. 다시, 환영 얘기로 돌아갈까요?"

"돌아가긴 뭘 돌아가."

잠이나 자라, 늦었다. 하고 말을 맺은 이안이 벌떡 일어섰다.

"으응…?"

꾸벅꾸벅 졸던 미구엘이 곁에 앉은 이안을 돌아보고는 잠이 확 깬 듯 눈을 치켜떴다.

"조용하다 싶더라니."

"아니, 그,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소. 좀 깊이."

"입가의 침이나 닦고 말해."

핀잔을 준 이안이 턱짓했다.

"넘어가서 자라. 내가 몰 테니까."

"어, 그래도 되겠소…? 그럼, 몇 시간만 부탁 드리겠소."

미구엘이 어물쩍 뒤로 넘어갔다.

고삐를 쥔 이안은 묵묵히 마차를 몰았다.

루시의 시선에도 더는 입을 여는 일 없이, 밤새도록.

***

"어윽…."

도망치던 용병이, 등에 볼트가 박힌 채 쓰러졌다.

겨누고 있던 석궁을 내린 미구엘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처리했소."

"그래."

마차 앞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휙휙 끌어내던 이안이 눈길도 주지 않고 대꾸했다.

며칠간 이어진 평화로운 여정의 종지부를 찍은 건, 한 무리의 용병들이었다.

달려오며 찾았다고 소리치더니, 대뜸 쇠뇌부터 쏴 댄 것이다.

물론, 그들은 죽음으로 그 경솔한 행동의 대가를 치르게 됐다.

"괜찮냐, 루시?"

주위를 휘휘 둘러본 미구엘이 물었다.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행이군. 미친놈들, 애가 맞으면 어쩌려고."

미구엘이 혀를 차는 사이, 이안이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해."

주인 잃은 말들과 시체들을 뒤로한 채, 마차가 다시 나아갔다.

미간을 찌푸린 채 고삐를 쥐고 있던 미구엘이 이윽고 내뱉었다.

"저놈들, 예전 그 용병들처럼 우리 신원을 확인하려 들지도 않았소."

"그래. 그냥 본 순간 확신했던 거지."

"염병할. 이 정도면 다들 우릴 알고 있는 거요. 현상금이 얼마인지나 물어볼걸."

"예정된 일이었어. 요란 떨지 마라."

이안은 평소처럼 태연했지만.

미구엘은 침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올가미가 서서히 목을 옥죄여 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부터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은 더 선명하고 명확하게 느껴졌다.

"이러다 영주군까지 따라붙는 거 아닌가 모르겠소."

"그러겠지. 내 생각엔, 길목을 지키고 있을 것 같은데."

"제기랄… 병사들 피는 보고 싶지 않은데."

이안의 코웃음이 이어졌다.

"네 피를 보는 건 괜찮고?"

"의미가 다르단 얘기요. 용병 놈들이야 돈만 받을 수 있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놈들이니 상관없지만. 병사들은 아니잖소. 죄라고는 영주의 명령에 따른다는 것밖엔 없지. 대부분, 영문도 모르고 까라니까 까러 온 자들일 거요."

"호오…."

이안이 탄성을 흘렸다.

네가 그런 생각도 할 줄 아냐는 듯한 반응이었기에, 미구엘은 콧방귀를 뀌고는 덧붙였다.

"뭐, 칼 밥 먹고 살면서 불법적인 일도 여럿 한 건 사실이지만. 나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고 살아왔단 말이오. 앞을 가로막는 자들과 싸우는 거야 별수 없지만. 그저 자기 의무를 다할 뿐인 자들까지 죄다 죽이는 게 좋을 리 없잖소."

게다가 이안의 성격을 미뤄 봤을 때, 그는 자신에게 덤비는 자들의 사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죄다 죽여 버릴 것이 분명했다.

메브는 그를 기사보다 더 기사 같은 용병이라 했지만.

미구엘이 본 이안은 용병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용병이었다.

의뢰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일리 있는 지적이군."

"엉…?!"

그래서 이어진 이안의 대답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안이 자신의 말을 귀담아들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 놀라지? 내가 사람 죽이고 싶어 안달 난 놈처럼 보이냐?"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물론 이안이 동조한 건 그런 감정적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머잖아 필시 대규모 추적대를 마주치게 될 터.

그때 앞을 가로막는 자들의 절대적인 숫자를 좀 줄여 놓을 필요가 있었다.

경험상, 아무리 약한 놈들이라도 숫자가 많아지면 예상 못 한 변수를 만들어내곤 했으니까.

물론, 그런 생각을 알 리 없는 미구엘은 눈만 끔뻑일 따름이었다.

이안이 덧붙였다.

"네 말대로 병사들 대부분은 까라니까 까는 걸 테니까. 의무감을 넘어서는 공포를 한두 번만 심어줘도, 알아서들 몸을 사리겠지."

"그야… 그렇겠지만. 그게 쉽겠소?"

이쪽은 달랑 셋인데.

이안의 태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기들이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지 뭐."

"...?"

뒤를 돌아본 미구엘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깊이 눌러쓴 이안이, 그 위에 시녀에게서 받아 온 망토까지 걸친 채 서 있었기 때문이다.

품을 뒤적인 이안이 이윽고 웬 마법봉까지 꺼내 들었다.

끝에 보라색 정수가 박힌, 불길하게 생긴 거무튀튀한 마법봉이었다.

미구엘이 멍하니 물었다.

"그건 또 뭐요…?"

"지하 무덤의 흑마법사가 쓰던 마법봉이다."

"뭐라고…? 아니, 그 저주받을 물건을 계속 가지고 다니셨소? 어디에? 또 그, 허공에서 물건을 숨기는 마법이오?"

"그런 셈이지."

이안이 태연하게 대답하며 마법봉 끝에 박힌 정수를 분리했다.

"흑마법사의 마법봉이라고요? 우와."

루시가 탄성을 터뜨리며 뻗은 손을, 이안이 쳐냈다.

"이건 저주가 서린 물건이다.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저주까지 서려 있다고?"

미구엘을 슬쩍 돌아본 이안이 피식댔다.

"걱정 마라. 이건 쥔 사람한테만 영향을 끼치는 저주야. 어쨌든…."

그가 양팔을 슬쩍 펼쳤다.

"이만하면 내 정체를 들킬 일은 없어 보이는데."

"어…. 확실히, 검의 달인 같아 보이진 않소만."

비로소 이안의 생각을 짐작한 미구엘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정말 괜찮으시겠소? 촌놈들 겁주는 데 마법만 한 게 없는 건 사실이지만. 마력을 아껴야 한다고 하셨잖소."

"그럼 그냥, 하던 대로 앞을 막는 것들은 죄다 죽이면서 갈까? 그것도 효과는 충분히 있을 텐데."

"아,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오."

입맛을 다시던 미구엘은, 이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형씨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오. 난 그냥 하던 대로 따를 테니까."

뭐가 됐건, 무고한 자들까지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059화

"이런, 염병할."

완만하게 굽이진 길을 나아가던 미구엘이 마차를 황급히 멈췄다.

잎이 거의 떨어진 나무들 너머, 언덕 위의 전경이 설핏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마부석에서 뛰어내린 그가 살금살금 전진해 언덕 위를 살폈다.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간이 검문소.

얼핏 보이는 것만 해도 열 명이 넘는 병사들이었다. 죽 늘어선 목책 사이. 기사로 보이는 지휘관이 비스듬하게 기대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저 작자들이 기다리는 게 우리 같소."

마부석으로 돌아온 미구엘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 위치를 눈치챘나?"

"아직. 하지만 이 앞으로 나가면 어디로 가도 결국 들킬 거요."

"그럼 별수 없지. 기다려라."

부스럭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미구엘이 뒤를 돌아봤다.

그들이 탄 짐 마차는, 며칠 사이 모습이 조금 바뀌어 있었다.

좌우와 후방의 칸막이가 한 칸씩 높아진 것이다.

지나가다 발견한 버려진 마차를 분해해 덧댄 방호벽이었다.

혹시 모를 발사체는 물론, 내부가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여러모로 전보다 눈에 띄는 형태가 되었지만.

어차피 이 인근의 병사나 용병들은 다 그들을 알고 있으리라 가정하고 있었으니 상관하지 않았다.

"후…."

이안이 채비를 끝냈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깊이 눌러쓴 잿빛 로브. 망토도 안감이 겉으로 드러나게 뒤집어 입었고, 손에는 마법봉까지 움켜쥔 채였다.

"형씨를 아는 사람이 봐도, 동일 인물이라곤 생각 못 할 거요."

미구엘이 덤덤하게 내뱉었다.

마부석으로 넘어오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할 건 별거 없다, 미구엘."

마부석 등받이 위에 걸터앉은 그가 덧붙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 길을 따라 달리기만 하면 돼."

"그… 어떻게 하실 건지,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시지 않겠소?"

"별 도움 안 될 텐데. 그냥 쫄지 말고 달려라. 멈칫대다가 마차가 전복되기라도 하면, 다 같이 망하는 거야."

이안의 왼손에는 어느새 마석 하나가 들려 있었다.

전에 쓰던 정수보다 훨씬 작아서, 손가락 사이에 굴러다녔다.

미구엘은 알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물건이었다.

사령술사의 지휘봉은 스킬 데미지를 크게 올려 주는 대신, 마력 소모량도 3배나 높여 버리는 엄청난 마이너스 옵션이 붙어 있었으니까.

끝에 정수를 장착해야 사라지는 조건부 페널티였다.

물론 마이너스 옵션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지만….

"하… 알겠수."

마석을 꾹 움켜쥔 이안이 턱짓했다.

"그럼, 출발."

"내가 어쩌다 이런… 에라이…!"

미구엘이 될 대로 되라는 듯 고삐를 후려쳤다.

다각, 다각, 다그닥- 다그닥-

언덕을 오르는 전마들의 발굽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오르막이라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속도.

마갑에 박힌 마석들의 빛이 점점 선명해졌다.

"아, 아니, 저런 미친...?"

달려오는 마차를 발견한 병사들이 소란스러워졌다.

느슨하게 기대앉아 있던 지휘관이 허둥지둥 앞으로 달려 나왔다.

"당장 마차를 멈춰라! 멈추지 않으면 쏘겠다!"

석궁을 든 병사들이 마차를 겨눴다.

루시가 있는 이상 절대 진짜로 쏠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미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고삐를 당기면 안 돼. 쫄지 말자. 쫄지… 시부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건가 하는 생각이 또다시 뇌리를 스쳤다.

이게 다 그 병신 같은 아겔 란 기사들 때문이었다.

조용히 따라왔다면 이런 개 같은 상황은 겪고 있지 않았을 텐데.

"속도 늦추지 마라. 계속 달려."

이안의 말이 귀를 파고들었다.

웅웅 울리는 목소리.

마력이 담겼다는 증거였다.

"다시 한번 말한다! 당장 마차를 멈춰라!"

지휘관의 다급한 외침이 이어졌다.

이안이 벌떡 일어선 건 그때였다.

그가 보란 듯 양팔을 펼쳤다.

로브와 망토가 부자연스럽게 일렁이고, 그의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마력의 파장이 번져 나갔다.

의도적으로 마력을 내뿜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적어도 시선을 집중시키는 데에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마, 마법사...? 마법사가 있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당황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미구엘의 귀까지 파고들었다.

이안이 마법봉을 내뻗은 건 그 직후였다.

콰르르르르-!

"...!"

언덕 위로 거대한 불의 장벽이 눈부시게 치솟아 오르자, 미구엘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

콰르르르-

"우와아아악-!"

"어, 어머니...!"

초소가 아수라장이 됐다.

병사들이 후끈하게 밀려드는 열기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고개를 위로 꺾은 채 불의 장벽을 망연자실하게 올려다보던 지휘관이, 뒤늦게 입을 달싹였다.

"다들 당장 뒤로- 어어억?!"

쿠구구구-

그의 외침은 끝을 맺지 못했다.

지진이었다.

휘청댄 그가 바닥에 넘어졌다.

주위의 땅이 움푹 파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흙이 한 지점을 향해 모여드는 중이었다.

초소 한복판의 땅이 위로 불쑥 솟아오르고 있었다.

서 있던 병사들이 굴러떨어지고, 목책들이 우수수 넘어졌다.

입을 뻐끔대던 지휘관이 간신히 다시금 목소리를 냈다.

"다, 다들 물러나! 물러나라!"

필사의 외침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귀담아듣는 병사는 거의 없었다.

"루 솔라여… 저희를 굽어살피시고…."

"살려 줘. 제발 살려...!"

바닥에 넙죽 엎드려 기도를 올리는 자부터 벌벌 떨며 땅을 기는 자들이 태반이었으니까.

푸화악-!

돌풍과 함께, 불길 한복판에 구멍이 뻥 뚫린 건 그 직후였다.

그 사이를 쏜살같이 지나친 마차가, 마법으로 만들어진 언덕을 날듯이 타 넘었다.

"마, 막아야...!"

본능적으로 읊조리며 마차를 쫓던 지휘관의 눈길이 얼어붙었다.

멀어지는 마차 주위로 연달아 피어오르는 거대한 불덩이들.

그에게 남은 일말의 의무감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쾅-! 콰광! 쾅-!

쏟아진 불덩이들이 언덕 중턱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폭발했다.

병사들과 함께 바닥을 나뒹구는 지휘관의 뒤로, 불의 장벽이 어느새 잦아들고 있었다.

***

"으… 으하하! 해냈소!"

미구엘이 비로소 웃음을 터뜨렸다. 뒤늦게 흥분이 밀려오는지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좋댄다, 새끼.

속으로 중얼댄 이안이 마부석 등받이에 털썩, 걸터앉았다.

두통과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어느새 손에 쥔 마석이 텅 비어 있었다.

'죽이지 않는 게 죽이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니. 어이가 없군.'

헛웃음을 지은 그가 사령술사의 지휘봉을 아공간에 쑤셔 넣었다.

귓가에 시끄럽게 울리던 귀곡성이 잦아들었다.

지휘봉에 깃든 원혼의 저주였다.

높은 정신력과 저항력 덕분에 아무런 영향도 없었지만, 시끄러워서 머리가 다 울렸다.

"대단하셨소, 형씨! 대마법사 흉내가 아니라, 정말 대마법사 같았단 말이오!"

"소리 그만 질러라. 머리 아프다."

후드를 벗고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푼 이안이, 이내 턱짓했다.

"적당히 달리며 속도도 줄이고. 마석 닳는다."

"아, 맞다. 그렇지. 알겠수."

"배… 백마법사...!"

루시가 불쑥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이안이 자신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응?"

"좀 전에… 적색 마법만 쓰신 게 아니잖아요...!"

"아니, 그건…."

"엥? 정말로?!"

끼어든 미구엘이 눈을 치켜뜨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럼 형씨가, 그 전설의 마법사란 말이오? 정말로?"

"확실해요…! 확실하다고요…!"

"확실은 무슨. 전혀 아니거든."

코웃음 친 이안이 내뱉었다.

루시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여러 색의 마법을 쓰셨잖아요."

"그건 맞지만. 그게 내가 백마법사란 뜻은 아니야. 애초에 별로 대단한 마법들도 아니었고."

이안이 루시와 미구엘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덧붙였다.

"이건 그냥 일종의 영업 비밀, 비장의 한 수 같은 거다. 그러니까 착각들 하지 마."

"…알았어요."

이윽고 고개를 끄덕인 루시가, 이안을 빤히 올려다봤다.

"이안님의 비밀은, 지켜드릴게요."

"나도 마찬가지요, 형씨."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듯한 눈빛들.

"하… 그래. 마음대로들 생각해라. 아닌 건 아닌 거니까."

진짜 그런 거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난 그냥 레벨만 높은 망캐일 뿐이거든?

혀를 찬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연기가 치솟는 언덕이 어느새 한참 멀어지고 있었다.

아마 오늘부로, 변방에 마법사에 대한 괴담 하나가 추가될 터였다.

이윽고 미구엘이 이성이 좀 돌아온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방금 든 생각인데. 저런 검문소를 한둘은 더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겠소."

"별수 없지. 그래도 그러고 나면, 우리 앞을 막으려는 병사들은 없어질 거다. 물론…."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도 쫓아오는 놈들과의 싸움은, 절대 피할 수 없겠지만."

"시부럴… 벌써 코에서 쇠 냄새가 나는 것 같네."

미구엘이 중얼댔다.

이안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슬슬 차라리 빨리 죄다 몰려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쉴 수 있을 때 쉬어 둬라. 쓸데없는 생각들 하지 말고.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

"그래서, 이 보고서의 내용들이 다 사실이다?"

책상 앞에 앉은 랜디스 백작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앞에선 기사, 제이미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개의 초소가 파묻히고 불바다가 됐습니다. 엄청난 마법사라고 다들 벌벌 떨더군요. 게다가 그자들이 탄 마차가 상당히 빨랐답니다. 앞을 막는 건 자살 행위고 뒤를 쫓을 수도 없으니, 철수하게 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겁 많은 놈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군. 보고서 대로면 엄청난 마법사인 것 같던데. 어디서 튀어나온 놈인진 모르지만, 나한테 경고를 보낸 것 같단 말이야. 아직까진 자비를 베풀고 있지만, 앞을 계속 막으면 다 죽이겠다고 말이지."

"그럼, 병사들을 물릴까요?"

"그래. 계속 내보냈다간 나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를 테니까."

물론, 그 건방진 놈들을 그냥 보내겠단 뜻은 아니었다.

랜디스 백작이 넌지시 덧붙였다.

"그자는, 기다리고 있나?"

"물론입니다."

"들어오라 하게."

제이미 경이 문을 열고 손짓했다.

곧 건장한 체구의 북부인이 걸어 들어왔다.

때가 반질반질한 갑옷과 검집.

이 하이람시에서 가장 실력 있는 용병이자, 우베 용병단의 우두머리인 우베였다.

"용병들의 분위기는 어떤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백작이 물었다.

우베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다들 이를 갈고 있습니다. 놈들 손에 죽은 동료가 꽤 있어서요. 거기다 나슬란에서 넘어온 놈들이 엄청난 속도로 따라가고 있단 얘기까지 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남의 영지를 제집처럼 뛰어다니는 그 빌어먹을 제국 놈들과 아겔 란 촌놈들. 나도 거슬리던 참일세."

백작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무엇보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그놈들을 저지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속 좁은 놈들에게 한마디라도 했다간, 영지로 물건을 공급하지 않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놈들이 빈손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싶단 말이지. 영애의 몸값을 깎아 달라고 애원하는 꼴을 볼 수 있으면 더 좋고. 아마 폐하께서도 기꺼워하시겠지."

납치범들은 어느새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끼치고 있었다.

아겔 란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파다한 와중이기 때문이다.

그 소녀를 이쪽에서 먼저 손에 넣는다면, 몸값은 물론이고 국왕 폐하의 총애까지 받을 수 있으리라.

"맡겨만 주십시오. 말 잘 타고 실력 있는 놈들로 서른은 추려 뒀습니다."

우베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납치범들을 잡아 족치고 싶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부하들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겔 란의 기사들을 따라 건너온 옆 동네 용병단 놈들 때문이었다.

나슬란 영주의 총애를 받으며 덩치를 불린 놈들은, 그의 용병단과 알게 모르게 대립하고 있었다.

아마 이번 일을 성공시키는 쪽이, 벨 론데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리라.

"잘됐군. 본론으로 넘어가지."

백작이 영지의 지도를 펼쳤다.

거기에는 납치범 일당의 이동 경로와, 나슬란에서 넘어온 추적자들의 경로가 꼼꼼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납치범 놈들은 버려진 땅으로 가고 있는 것 같더군."

"...!"

"자살이라도 하려 한단 말씀이십니까?"

제이미는 물론 우베도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백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그 마법사를 믿고 그러는 거겠지. 마법사에 검의 달인이면, 그 저주받은 땅을 돌파해 북부로 넘어갈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늘이 돕는다면 말이죠."

제이미가 읊조렸다.

백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믿기 힘들었네만. 그게 아니면 이 동선을 설명할 방법이 없더군. 우리에게 다행인 건, 놈들이 빙 돌아가고 있다는 걸세."

백작이 손가락으로 하이람시로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직선을 그렸다.

"우리가 앞질러 가서 놈들을 기다릴 수 있어."

국경 너머의 버려진 땅으로 이어지는 강가. 계곡 끄트머리.

"가능하다면 놈들이 다리를 건너기 전에 잡게."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지휘는 제이미 경에게 맡길 걸세. 대기하고 있게나."

고개를 끄덕인 우베가 몸을 돌렸다.

문이 닫히자, 백작이 제이미 경을 바라보았다.

"기병 스물을 붙여 주지. 희생은 되도록 저쪽에서 나오면 좋겠군."

우베 용병단은 유용하지만, 동시에 거슬리는 자들이었다.

갈수록 덩치가 커지면서, 언제 이빨을 드러낼지 모르는 상태가 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그 숫자를 조금 줄여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우베가 죽으면 더 좋고.

"만약 납치범들이 끝내 버려진 땅으로 넘어간다면…."

지도를 툭툭 두드린 백작이 덧붙였다.

"해가 지기 전에는 기병들을 이끌고 빠져나오도록 하게."

"용병단은, 남겨 둘까요?"

"저놈들은 포기하지 않을 걸세. 자존심이 걸렸으니까. 권유해 보고, 통하지 않으면 그냥 둬. 아마 천칭 상단 놈들과 촌놈들도 포기하지 않을 테니, 그쯤 되면 다들 죽은 목숨이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제이미 경이 몸을 돌렸다.

홀로 남은 백작이, 지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길어야 사흘이면, 이 모든 소란의 결과를 알 수 있게 되리라.

"돈과 자존심을 다 얻거나… 다 죽겠군. 상관없지.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납치범들이 살아서 도주하는 결말은,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다.

#060화

산기슭 한복판.

능선을 따라 이어진 길을 이동하던 짐 마차 앞에, 마침내 산의 반대편 얼굴이 펼쳐졌다.

"…그래. 다행히 보이긴 하는군."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던 미구엘이 손을 들었다.

굽이지고 완만하게 이어진 계곡들과 능선 너머.

산기슭에 가려진 창백한 푸른 빛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저 강이 국경이오. 이 길을 따라 쭉 돌아 내려가서 저길 건너면… 어라."

시선을 옮기며 말하던 미구엘의 미간이 문득 좁아졌다.

경치를 내려다보던 루시가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요?"

"아니, 저 너머부터가 버려진 땅이긴 한데. 내 기억이랑 좀 다른 것 같아서 말이야."

수염 난 볼을 긁적인 미구엘이 덧붙였다.

"내 기억에는 강가를 따라 길이 있고, 그 옆으론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단 말이지. 숲은 그 황무지 너머에나 있었고. …그런데 지금은 강 건너에 바로 숲이 보이네."

"...."

루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강 너머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희끗희끗한 땅과 나무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무들이… 자란 거 아닐까요?"

"고작해야 10년 정도 만에?"

"버림받은 땅이라며."

이안이 툭 끼어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지. 게다가 저건 내가 보기엔…."

읊조리는 그의 눈빛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보기엔, 뭐요?"

"…아니, 너희가 알아서 좋을 거 없을 것 같군."

이내 시선을 거둔 이안이 등받이에 머릴 기댔다.

한숨 쉰 미구엘이 이내 읊조렸다.

"하긴, 뭐. 모르는 게 약이오. 여기까지 온 마당에, 불길하다고 돌아갈 것도 아니고."

루시는 그런 미구엘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워낙 험악한 인상에다 수염이 많아서 티가 나지 않을 뿐, 처음에 비해 많이 야위고 푸석해진 얼굴.

한 번도 내뱉지는 않았으나, 루시는 그가 지칠 대로 지쳤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겉보기엔 별반 달라진 게 없었지만, 항상 앞장서 길을 헤쳐 온 그가 지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앉고 눕는 것밖에 하지 않는 그녀조차 힘든데, 이들은 오죽할까.

'결국은, 다 나 때문이야.'

루시는 또다시 같은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저 짐일 뿐이다.

그 사실이 점점 더 그녀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어리고 약하다는 건 결코 면죄부가 될 수 없었다.

물론 이안과 미구엘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염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 순간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말이 될 뿐일 테니까.

"...."

그래서 루시는 그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덩이는커녕 불똥도 튀지 않는 손아귀.

그 사실이 야속함을 넘어, 이제는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하고 말 거야. 할 수 있어.'

이를 악문 루시가 다시 온 정신을 집중하는 사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다만."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댄 채로, 이안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내가 낙오하는 순간이 있더라도, 멈추지 말고 달려라."

"…갑자기 또 뭔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하시오?"

미구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느낌이 안 좋아. 요 며칠 너무 조용하기도 하고. 보통 이럴 땐, 큰 게 오더라고."

"형씨 제발 좀…. 하아…."

미구엘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재수 옴 붙을 말만 골라서 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따라오는 놈들도 이제 우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 나만 없으면 루시를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놈도 분명히 있겠지."

"...."

"그러니까 뭔 일이 생겨서 내가 떨어져 나가도, 멈추지 말고 달려라. 만약 마차가 박살 나더라도…."

이안이 옆에 놓인 배낭을 들어, 미구엘에게 휙 넘겼다.

"루시를 안고 말을 타고 튀어. 이 안에 든 거면 며칠은 버틸 거다."

그제야 얼마 전에 그가 준비한 배낭의 용도를 알게 된 미구엘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럼… 형씨는?"

"죽을 생각으로 하는 말 아니니까, 그따위 목소리 내지 마라."

"아, 그런 거였소?"

"난 상황을 마무리하고 따라갈 거다. 그러니 어떻게든 도망쳐. 그리고 정 목숨이 위험해지면… 부츠에 넣고 다니는 그걸 쓰고."

"...!"

순간 숨을 멈췄던 미구엘이, 이윽고 내뱉었다.

"알고 계셨소?"

"무슨 일이 생기면 발목부터 더듬대는데, 그걸 어떻게 몰라?"

코웃음 친 이안이 말을 이었다.

"어떤 놈들이건, 루시까지 상하게 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넌 아니지.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오면 그걸 쓰고, 알아서 화로의 사원까지 찾아와."

"그럼, 루시는…?"

"내가 되찾아 오면 돼. 그런 의미에서 네가 오래 튈수록 내 일이 편해지겠지. 안 잡히면 더 좋고."

"...."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얘기하는 거다.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어."

미구엘이 피식, 체념 섞인 웃음을 흘렸다.

"형씨가 그렇게 말하면, 꼭 그런 일이 일어나던데 말이오."

"그러니까 더더욱 명심해. 아무도 죽지 않을 방법이니까."

"대신… 루시가 좀 괴로울 거요."

"그 정돈 아무렇지도 않게 견딜 거다. 보기보다 강한 녀석이야."

최악의 상황에선, 저마다 조금씩은 희생해야 하는 법.

일견 냉정해 보이지만 루시에 대한 믿음이 깔린 이안의 말에, 미구엘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진 잠깐의 적막.

적막을 깨뜨린 건, 목소리가 아니었다.

화륵-

"...!"

루시의 손아귀에서 작은 불길이 피어오른 것이다.

루시의 눈이 커졌다.

이안과 미구엘도, 동시에 그녀의 손아귀로 시선을 돌렸다.

"해… 해냈다…! 해냈어요…!"

눈동자의 떨림을 숨기지 못한 채, 루시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뭐, 당연히 해낼 줄 알아서 놀랍진 않다만. 축하한다, 인석아."

미구엘이 말과 달리 헤벌쭉 웃음 짓는 가운데,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

"어쩌다 보니… 됐어요.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났는데, 갑자기 될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푸스스-

불길이 사그라든 건 루시가 대답한 직후였다.

허망하게 손을 응시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안이 웃음 지었다.

"아무래도, 네 감정의 영향을 받는 것 같은데."

"감… 정이요?"

"추측일 뿐이야. 아직은 불안정하니까. 어지럽진 않고?"

"네. 저번엔 그랬었는데… 지금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호오…."

이안은 또 한 번 감탄했다.

사실, 그는 루시에게서 전혀 마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불길을 일으키고 있는 도중에도 그녀의 눈동자에는 마력이 맺혀 있지 않았다.

'대기 중의 마력을 곧바로 끌어다가 연소시키는 건가.'

부러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를 알 수 없어서 더더욱.

…이래서 원소 친화력이나 마력 혈맥 같은 특성을 찍었어야 했던 거군.

생각하며 루시의 머리를 헝클이던 이안의 손길이, 이윽고 멈췄다.

마차 뒤. 얕게 이어진 계곡을 돌아본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어쩐지, 지금 말해 놓고 싶더라니."

이런 의미에선, 육감도 쓸모 있는 특성이라고 해야 할까.

미구엘이 그를 돌아보았다.

"…설마."

"그래. 마차 속도를 올려라, 미구엘. 마석도 미리 준비해 놓고."

"그, 마석 여분은 이제 한 번 더 쓸 분량밖에 없소."

"그거면 충분해. 길어야 한나절이면 판가름이 날 테니까."

내뱉은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저만치의 능선 위로 모습을 드러낸 일련의 기수들이, 그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

"낙마하지 않게 조심들 해라! 다 와서 자빠지면 그것만큼 꼴사나운 게 없으니까!"

"거, 기사 나리들, 길 트쇼!"

마흔이 넘는 기수들이 맹렬한 속도로 멀어졌다.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샬롯의 엉덩이가 안장 위에서 들썩였다.

돌진을 시작한 건 아겔 란의 기사들과 그들을 따르는 용병들 뿐.

그녀를 비롯한 천칭 상단 무리는, 아직 하비에르의 마차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

혀를 날름댄 샬롯이 올레그와 하비에르를 돌아보았다.

하비에르의 눈빛은 고요했다.

추적하는 동안에는 그토록 열성적이었건만. 막상 일이 시작된 지금은 오히려 무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또한 상인 특유의 습관이리라.

"카일과 케네스를 죽인 자들이라는 걸 잊지 말게. 흥분해서 앞장서지 말고, 사냥개들을 이용해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도록 해. 되도록이면 더 이상의 손실은 보고 싶지 않군."

"…예."

"알겠습니다."

샬롯과 올레그가 대답했다.

"강 너머까지 가지도 않았으면 좋겠군. 물론 난 저 저주받은 땅엔 한 발자국도 들이지 않을 걸세."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걱정 말고 이쪽에서 기다리십시오."

태연하게 내뱉은 올레그가 샬롯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덧붙였다.

"목표물은 저희가 반드시 되찾아 올 겁니다."

"가능하다면 밤이 되기 전에 돌아오게."

기수들을 쫓던 하비에르의 시선이 이윽고 멈췄다.

그들이 마차를 거의 따라잡았다.

"곧 시작되겠군. 합류하게."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고삐를 쥐어 들었다.

하비에르가 덧붙인 건 그때였다.

"샬롯. 우리 목표가 무엇인지, 잊지 말거라."

"...."

당신의 목표겠지.

생각하며 고개만 까딱인 샬롯이 그대로 달려나갔다.

호위병들의 절반이 그녀와 올레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올레그."

하비에르의 마차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샬롯이 입을 열었다.

올레그가 놀랍지도 않다는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검의 달인?"

"그래. 놈은 내 거야. 그러니까 계집애는 네가 챙겨라."

"나야 상관없지. 계획은 있고?"

"상황을 봐서, 내가 놈을 낚아챌 거다. 그전까진 너도 나서지 마. 그 이후론, 알아서 하고."

"단주가 싫어하실 텐데."

"좇까라 그래. 애초에, 난 나보다 약한 인간의 말은 듣지 않아."

"그래, 그래. 넌 너보다 강한 돈의 말을 듣지."

샬롯이 으르렁댔다.

웃음을 터뜨린 올레그가 보란 듯 간격을 벌렸다.

"사냥개들이 마차를 물어뜯게 거리 잘 유지해! 상단주의 명령을 잊지 마라!"

부하들이 그들을 앞질러 달려갔다.

올레그를 노려보던 샬롯이 이내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인간들이 자신을 이해하리란 기대는 한 적도 없었다.

그녀가 하비에르의 역겨운 속내를 알면서도 그의 곁을 지키는 건, 물론 돈 때문이긴 했다.

하지만 자신의 야성을 마음껏 분출하고도 뒤탈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그에 못지않게 큰 이유였다.

그녀의 본능은 언제나 사냥과 혈투를 원했다.

끝내 자신보다 강한 포식자를 만나 목숨을 잃게 될지라도.

'…후회는 없지. 꼬리만 잃지 않는다면야.'

"마차로 붙어!"

"저놈부터 떨어뜨려!"

어느새 용병들의 외침이 가까워졌다.

샬롯은 흥분을 억누르며 마차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마차의 칸막이 위에 곡예하듯 올라선 검은 머리의 사내, 이안 호프를.

휙-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창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피한 그가, 오히려 손을 뻗어 창대를 움켜쥐었다.

"어, 어억…?!"

균형을 잃은 용병이 그의 손짓에 딸려 들어갔다.

이안이 창대를 놔버린 건 그 직후였다.

"으, 으아악-!"

낙마한 용병이 땅을 굴렀다.

그의 몸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콰직!

달리는 말에 짓밟혀 꿈틀대는 놈을 바라본 샬롯이 눈을 빛냈다.

'시작부터, 마음에 드는데?'

그사이 훌쩍 몸을 날린 이안이, 낙마한 용병의 말에 올라탔다.

"이아아아안-!"

누군가 고함을 내지르며 돌진했다.

번쩍이는 갑옷.

아겔 란의 기사였다.

"이 더러운 배신자! 우리가 네놈을 얼마나 믿었는데!"

그를 돌아본 이안의 얼굴에 조소가 번졌다.

그의 목소리가, 샬롯의 예민한 귀를 파고들었다.

"난 믿어 달라고 한 적 없는데."

"이노오오옴-!"

기사가 달려들었다.

이안은 위태로워 보이는 자세로 그의 일격을 피하고는, 그대로 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결코 닿을 거리가 아니건만.

콰직-!

스쳐 지나간 기사의 몸이 크게 휘청댔다.

그의 갑옷 등 부분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마법…? 마법 무구…?'

샬롯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가 마차와 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이안을 관찰하는 건, 하비에르의 명령 때문이 아니었다.

이건 일종의 전희였다.

맛있는 요리일수록, 그 맛을 확실히 음미할 수 있을 때까지 아껴 먹어야 했다.

피슉-

"으악...!"

"마차 앞으로 나가지 마라! 마부 놈이 쏘는 석궁, 장전이 빨라!"

샬롯은 마차 앞쪽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란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안에게 점점 더 빨려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직-!

'손속은 단호하고….'

"이런 미친, 죽어억…?!"

서걱-

'과감한 움직임도 마다하지 않는군. 무모해 보일 정도야.'

그녀는 이안과 그의 손에 죽어 나가는 용병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검의 달인은 절대 아니야. 하지만… 그래서 더 신기하군. 저놈은 대체 뭐지…?'

샬롯이 혀를 날름거렸다.

입안에 점점 더 군침이 돌았다.

그와는 반대로, 그녀의 눈빛은 점점 더 섬뜩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이안을 강자로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적어도 이게 전부는 아닐 거야. 카일과 케네스가 당할 만한 뭔가를 숨기고 있겠지.'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오로지 이안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계곡이 끝나는 지점에서 기다리던 무리의 존재를 곧바로 눈치채지 못한 것은.

"…저것들은 또 뭐야."

문득 전방을 돌아본 이안이 읊조리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샬롯은 그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달려오는 수십 명의 기수들.

"길을 막아! 간격을 벌려라!"

지휘관으로 보이는 기사의 외침이 들린 순간, 샬롯은 비로소 비죽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녀에겐 오히려 깜짝 선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안의 진면목을, 더 빨리 볼 수 있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061화

머릿수를 겨우 좀 줄여 놨더니.

이안은 달려오는 무리를 눈에 담으며 혀를 찼다.

저것들이 아니라도, 사실 상황은 보이는 것만큼 좋지는 않았다.

그가 과격하게 싸운 건, 단지 적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였을 뿐.

마상 전투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고, 낙마할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소모품에 불과한 놈들을 상대하는 것임에도 그랬다.

제국의 기병들과 친위 기사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오기만 했다.

그를 관찰하면서 힘이 빠지길 기다리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을 뿐, 그의 육감은 지금도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전에 만난 두 놈에 필적하는 실력자들도 섞여 있는 것이리라.

적어도 그 수인은 확실히 있었다.

'이름이 샬롯이랬나.'

그녀는 처음 몇 분을 제외하곤 눈에 띄지조차 않았다.

이쪽에서 볼 수 없도록 위치를 옮겨 다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만 신경을 쏟을 수는 없었다.

저 검은 기병들은 개개인의 실력은 조금 떨어질지라도, 숫자가 많고 방심하고 있지도 않았다.

물리적인 전투만으로 전부 제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터였다.

아무리 능력치가 꽤 높고 근접전에 더 도움 되는 특성을 가졌다 해도, 본질은 마법사인 그의 물리 전투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들이 마차를 전복시키려 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빠르게 달리고 있는 만큼, 마차가 부서지면 루시가 다칠 수도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시간도 그들의 편이었다.

버려진 땅이 가까워질수록 조급해지는 건 저들일 테니까.

지켜보던 놈들도 계곡을 빠져나갈 때쯤엔 결국 이쪽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안이 생각한 승부처는 그때였다.

저 불청객들이 나타나기 전까진.

"이런 시부럴...!"

석궁을 만지작대던 미구엘이 결국 고삐를 당겼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아무리 마법 걸린 마갑을 걸친 말들이라 해도, 저 한복판을 무작정 뚫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면에서 달려온 놈들은 마차가 가까워지자 계곡 좌우로 산개하면서 말머리를 반대로 돌렸다.

기마술이 능숙한 자들이었다.

뒤따르던 추적자들이 그렇듯, 기사와 용병이 뒤섞인 무리.

'하이람 놈들이군. 마법사가 있단 걸 알 텐데. 대비책은… 아, 그래. 석궁이군.'

이안은 마차 측면에 바짝 붙으며 생각했다.

제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도 마법을 완성 시키지 못하면 무력하다.

번갈아 쏴 대는 석궁은 그런 의미에서 기본적이고 효과적이었다.

'나 한텐 별 의미 없겠지만.'

후방의 추적자들은 불청객들의 등장에 간격을 벌렸다.

자신들의 영역을 확실히 확보하려는 의도.

곧 양측이 시선을 교환했다.

흉흉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질적인 측면에선 제국인들이 섞인 후방이 앞서겠지만.

이안이 여럿을 죽인 덕에, 단순히 숫자로만 치면 새로 합류한 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우린 잡아 놓은 물고기 취급이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속도가 느려지긴 했으나 어쨌든 마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으니까.

단숨에 포위망을 뚫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이 교착 상태를 앞장서 깨뜨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하이람의 기사이자 영주 권한 대행인 제이미라 하오!"

선두 쪽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제이미가 뒤를 돌아본 채 소리치고 있었다.

"당신들은 허가받지 않은 교전을 벌이고 있소! 그 마차에 탄 자들은 영지의 자산을 여럿 불태운 범죄자들이니, 우리가 연행해야겠소! 물러나시오!"

"저들은 아겔 란에서부터 도망쳐 온 자들이오! 먼저 추적을 시작한 것도 우리이며, 아겔 란의 일이니 외부인은 빠지시오!"

대답은 좌측에서 튀어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돌아본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친위기사단의 조나단. 항상 그에게 열렬한 동경의 눈빛을 보내던 자였다.

물론 다시 만난 지금은, 적의를 넘어 살의 가득한 눈빛만 보냈다.

"여긴 벨 론데요! 이건 무력 침범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명심하시오! 그것이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일인지 알고 계시리라 믿겠소!"

제이미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이번에는 우측에서 이어졌다.

거대한 체구를 가진 천칭 상단의 호위병, 올레그였다.

"우린 제국의 라르무트 전하의 명령으로 이곳에 있소! 제국의 뜻에 반하는 것이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일인지도, 잘 알고 계시겠지?"

"당신들이 천칭 상단의 고용인들임을 이미 알고 있소! 라르무트의 명령을 수행 중이라는 사실은 증명된 바 없으니, 절차를 거치시오!"

언쟁이 점점 격해졌다.

이안이 마부석 옆으로 다가갔다.

"아주 지랄들이 났네. 시부럴…."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중얼대던 미구엘이 그를 돌아보았다.

"이러다 지들끼리 싸우겠소."

"당장은 안 그럴 거다. 우릴 붙잡은 뒤에나 그러면 모를까."

이안이 속삭이듯 대꾸했다.

아무리 이 세계에 멍청한 인간들이 많다 해도, 이런 순간에까지 서로에게 칼을 겨눌 만큼 멍청하지는 않을 터였다.

원수의 원수는 친구라는 말이 있듯, 이 말싸움의 끝에는 적당한 합의점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안에겐 충분히 의미 있는 정보였다.

그는 작은 균열도 커다랗게 만들 방법을 가지고 있으니까.

"염병… 그럼 여기가 정말 내 무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정신 놓지 마라.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계획이라도 있으시오?"

"대충은. 넌 강을 건널 생각만 해라. 만약의 경우엔 마차를 버리는 것도 항상 염두에 두고."

이안이 마부석 뒤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루시를 돌아보았다.

루시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의 턱짓에, 미구엘이 옆에 놓여 있던 배낭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렇게 되면, 넌 미구엘과 같은 말을 타라. 루시."

"네."

"강을 건너고 나선? 보아하니 끝까지 따라올 것 같소만."

미구엘이 덧붙였다.

시선을 돌린 이안이 내뱉었다.

"그건 그때 다시 얘기해. 준비해라."

미구엘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고삐를 팔뚝에 걸친 그가 황급히 석궁을 움켜쥐었다.

양측의 대화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우선은, 협력하에 범죄자들을 제압하는 것으로 결정하겠소!"

제이미가 화답하듯 외쳤다.

"협력의 증표로 귀하들에게도 중요한 정보를 하나 전달하겠소!"

"말씀하시오!"

"저들 무리에 마법사가 있소!"

"마법사라고…? 그럴 리가! 코빼기도 안 보였는데?"

"방심을 유도한 건가? 벨 론데에서 추가로 합류한 공범이라도-"

추적자들이 술렁댔다.

좋아. 그게 나라는 건 안 들켰군.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검을 고쳐 쥐었다.

슬쩍 고개를 숙인 그가 바람 칼날을 시전하는 사이.

"입씨름 끝나셨다! 뭐 하냐 새끼들아! 덮쳐!"

용병단장인 우베가 소리쳤다.

눈싸움을 벌이던 하이람 용병들이 기다렸다는 듯 선회했다.

나슬란의 용병들도 이에 질세라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른 점이라면, 그들의 목표는 마차라는 점이었다.

이안을 하이람의 용병들에게 떠넘기려는 의도일 터.

"시부럴...!"

미구엘이 고삐를 후려쳤다.

마차의 속도가 다시 빨라지고, 이안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용병들을 눈에 담았다.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서면서, 집중력이 최고조로 치솟았다.

"흐럇-!"

선두의 용병이 도끼를 내지른 건 그때였다.

이안의 몸이 뒤로 눕듯 꺾였다.

그는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도끼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용병의 목덜미를 훑을 뿐.

늘어져 있던 팔이 채찍처럼 뻗어 나갔다.

서걱-

검신을 타고 예리하게 뿜어진 바람이 용병의 목을 갈랐다.

놈의 머리가 그대로 앞으로 날아가고, 목에서 피가 치솟았다.

"미친…?!"

뒤따르던 용병들이 경악성을 토해내며 달려들었다.

그들의 눈에는 두 기수가 교차하자마자 한쪽의 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였다.

이안의 눈동자가 좌우에서 달려오는 둘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몸이 인식과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왼쪽에서 떨어지는 칼을 검날을 비스듬하게 들어 흘려내면서, 동시에 안장에서 떨어지듯 몸을 틀어 오른쪽에서 찔러오는 창을 피했다.

뒤이어 다시 안장 위로 올라오면서 지나치는 말의 옆구리를 예리하게 긁어냈다.

키히히잉!

옆구리가 터진 말이 그대로 나뒹굴면서 기수를 땅에 처박는 사이.

이안의 시선은 이미 창 든 용병의 뒤통수로 향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따끔거리더니, 망령화한 늪지의 원한이 뻗어 나갔다.

순식간에 둘을 죽였지만 쉴 틈은 없었다.

고삐를 당기며 말머리를 돌린 이안이, 안장 위에 발을 얹었다.

관성을 이기지 못한 말이 비틀대며 미끄러지고, 뒤이어 또 다른 용병이 가까워졌지만.

이안의 시선은 마차에 올라타려 하는 놈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용병이 검을 후려치려는 찰나, 이안이 안장에서 그대로 뛰어올랐다.

바람이 그를 떠밀고, 몇 미터나 떨어져 있던 마차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으앗?!"

마차에 막 매달린 용병이 그를 돌아보며 눈을 치켜떴다.

팔을 치켜들며 검을 역수로 쥔 이안이, 놈의 등에 그대로 검을 찔러넣었다.

콰직!

"커헉…!"

용병과 칸막이를 동시에 꿰뚫은 이안이, 검 자루를 지지대 삼아 손을 뻗어 칸막이 위를 움켜쥐었다.

위로 올라서며 검을 뽑아 들자, 바들대던 용병이 그대로 떨어졌다.

피슉-!

볼트가 이안의 귓가를 스쳤다.

"쏘지 마라! 활을 쏘는 놈은 내 손에 뒈진다!"

올레그의 외침이 이어졌다.

대신 말해 줘서 고맙군.

생각하며 칸막이 위로 올라선 이안이, 반대편에서 마차 안으로 다리를 디밀고 있는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시발…!"

다급하게 검을 막으며 휘청댄 놈이, 마차와 나란히 달리던 자신의 말 안장으로 간신히 뛰어내렸다.

이안은 놈에게 다시 한번 늪지의 원한을 보냈다.

원한이 처음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피를 빨고는 놈에게로 향했다.

"조심해요!"

루시가 비명을 지른 건 그때였다.

마차 꽁무니에 올라탄 놈이 이안의 뒤를 노리고 달려들고 있었다.

퍼엉-

"마법…?!"

놈의 얼굴에서 불꽃이 튀었다.

폭발이란 단어가 무색한 반짝임이었지만, 놈을 순간 당황 시키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콰직-!

이안이 검을 휘두르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머리가 반쯤 썰린 용병이 목석처럼 뒤로 넘어졌다.

"계집애가 마법사다…!"

"꼬마가 마법을 쓴다! 다들 조심해!"

용병들의 외침이 이어졌다.

이안이 손을 뻗은 채로 굳어 있는 루시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용병들의 외침 그대로였다.

방금의 불길은 그녀가 만들어 낸 것이다.

놀람을 추스른 루시도 마주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이런 염병할…!"

미구엘의 탄식이 이어졌다.

어느새 옆으로 따라붙은 용병 둘이 말을 향해 창을 뻗고 있었다.

마갑의 마석들이 번쩍인 건 그 직후였다.

푸확-!

이어진 마법은 이안에게도 익숙한 방어 마법이었다.

휘몰아치는 방벽.

"으억?!"

자세가 흐트러진 용병들이 당황할 찰나, 두 발의 볼트가 연달아 놈들의 어깨와 가슴을 꿰뚫었다.

이어지는 비명.

"루 솔라여… 시부럴…!"

미구엘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석궁을 재장전했다.

"...!"

그 모습을 끝으로 다시 마차 옆면을 돌아본 이안이 몸을 날렸다.

한번 마차로 달라붙기 시작한 용병들은, 말 그대로 온몸을 던져 올라타려 하고 있었다.

두 용병단 간의 자존심 싸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안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미친 듯이 몸을 움직여 달라붙는 놈들을 쳐내고, 쿨 타임이 돈 늪지의 원한을 날려 보낼 뿐.

마차 외벽이 붉게 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마차로 다가가는 용병들이 겁에 질렸다.

이안의 움직임은 화려하거나 세련되긴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더 투박하고 거칠어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원초적인 두려움을 선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세만큼은 엄청나군…."

"소문이 잘못됐군. 저만하면 광전사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데."

지켜보던 천칭 상단의 호위병들이 탄식을 흘릴 정도였다.

"하아… 하아…."

정작 이안의 눈빛은 침착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싸우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와중에도, 착실히 혼란의 씨앗을 흩뿌리고 있었다.

"뭐, 뭐야?! 왜 날 노려봐?!"

그리고 마침내, 그 씨앗들이 발아하기 시작했다.

"우, 우와아아악-!"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몇몇이, 괴성을 지르며 같은 용병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늪지의 원한이 심은 저주가 발현되고 있는 것이었지만, 용병들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하이람의 용병과 나슬란의 용병들이 뒤엉켜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순식간에 극단으로 치달았다.

"시벌, 내 이럴 줄 알았지! 뒤통수나 치는 비겁자 새끼들아!"

우베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나슬란의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할 소릴…! 하이람 놈들이 뒤통수를 쳤다! 존을 죽였어!"

용병들끼리 칼부림이 시작됐다.

이미 동료들의 죽음과 칼부림으로 흥분한 터라, 더더욱 서로를 공격하는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아니, 이게 대체 뭔…."

미구엘의 얼굴에 당혹이 번졌다.

마차에 달라붙은 마지막 용병을 던져 버린 이안이 소리친 건 그때였다.

"속도 올려! 당장!"

"아, 알았수…!"

미구엘이 고삐를 후려쳤다.

말들이 발작하듯 내달렸다.

마갑에 박힌 마석들이 번쩍였다.

마차가 순식간에 용병 무리들과 거리를 벌렸다.

"제국에 가면, 꼭 가장 좋은 마갑부터 구해야겠군."

읊조리며, 이안이 마부석에 올라섰다.

앞을 막고 달리던 하이람 기병들이 가까워졌다.

당황이 역력한 얼굴들.

그들 역시 황급히 고삐를 후려쳤지만, 마법의 도움을 받는 전마들 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검을 움켜쥔 이안이,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것처럼 자세를 낮췄다.

"히이이익…!"

마차 바로 앞, 뒤를 힐끔대는 기병들이 숨을 삼켰다.

피범벅이 된 채 검을 움켜쥔 이안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가 말과 마차 사이를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벌인 짓을 보지 못한 사람은 이들 중에 아무도 없었다.

"으아아아-!"

이안이 뛰어오르는 것보다, 기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물러나는 게 더 빨랐다.

마차가 기병들을 앞질렀다.

"보, 보인다…!"

비로소 미구엘의 눈이 커졌다.

앞을 가로막은 자들이 사라지면서, 저 멀리 펼쳐진 강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혈투를 벌이느라 계곡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그였다.

"계속 달려라. 이제 시작이니까."

그러나 숨을 고르는 이안의 목소리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에 화색이 돌던 미구엘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짐칸에 한 발을 걸친 채 뒤를 응시하던 이안이, 이윽고 덧붙였다.

"놈들이 온다."

하이람 기병들 너머.

검은 기병들이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