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과 필립의 첨언까지 더해지자, 메브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과신은 금물인 법이지. 알았다, 이안. 네 뜻에 따르지."
"현명하시군."
비로소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린 이안이 둘라한을 돌아보았다.
놈의 외형은 게임에서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심지어 대치 상황까지도 그때와 같았다.
'…그러니까 선빵 치면 귀찮아지는 것도 똑같겠지.'
그때의 놈은, 대치하던 플레이어가 선공을 택하면 방어 태세에 돌입한 채로 전투를 시작했었다.
까다롭고 위험한 패턴의 연속.
반대로 놈이 먼저 공격해 오길 기다리는 게 쉬운 공략법이었다.
둘라한의 공격 태세는 패턴이 훨씬 단순했으니까.
물론 이안은 놈이 어떤 태세건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지만.
굳이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택할 필요는 없었다.
전리품의 소유권이 걸린 상황이라면 더더욱.
"...."
그리하여, 필립조차 입을 열지 않는 고요한 대치가 이어졌다.
적막이 깨진 건, 이안이 슬슬 때가 되어간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다 끝났소! 드디어!"
무덤 쪽에서 걸걸한 외침이 불쑥 터져 나온 것이다.
"...!"
한쪽 눈썹을 치켜든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 미구엘이 해맑게 삽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소. 이제 짐을 챙겨서 떠나기만 하면…."
그의 미소가 뒤늦게 굳어졌다.
투구를 눌러 쓴 메브와 입을 떡 벌린 필립, 그리고 싸늘한 눈빛의 이안을 차례로 바라본 미구엘이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그, 뭔가, 문제라도 있소…?"
"방금까진 없었는데."
그를 노려보던 이안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확실히 생겼군."
그의 눈에 맺힌 둘라한의 실루엣이 선명해졌다.
실루엣은 어느새 불길처럼 맹렬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예상대로, 미구엘의 외침을 선전포고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게 대체 뭔…. 히익?!"
뒤늦게 고개를 돌린 미구엘도 둘라한을 발견하고는 얼어붙었다.
목 없는 기수가 한쪽 팔을 위로 치켜든 건 그 직후였다.
검은 형체로만 보이는 손바닥 위.
한 쌍의 새빨간 불빛이 일렁이는 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고음과 저음이 뒤섞인 괴이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으억?!"
"히, 히익…?!"
소리에 담긴 파장만으로도, 미구엘과 용병들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틀댔다.
필립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것은 이안과 메브, 둘 뿐이었다.
메브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게 뭐지…? 주문?"
"그냥 고대어요. 인간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군. 요정의 땅을 짓밟은 약탈자, 인간들을."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숨을 고르던 필립이 문득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걸 알아들으십니까?"
"어느 정도는."
"대체 어떻게…."
필립의 탄식에, 이안은 한쪽 어깨를 대충 까딱였다.
"뭐, 어쩌다 보니."
고대 언어학.
공략집 하나면 해결됐을 고대 문명 이벤트들을 위해, 무려 2레벨이나 익힌 비전이었다.
물론 이안에겐 잘못 찍은 수많은 스킬 중 하나에 불과했다.
심지어 현실이 된 지금도 그다지 쓸모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둘라한이 고대 늪지 요정의 망령이란 비밀 따위는 눈곱만큼도 궁금하지도 않았으니까.
"■■! ■■■, ■■ ■■■■!"
"저, 저것도 알아들으십니까?"
하지만 메브와 필립에겐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필립의 감탄 섞인 물음에, 이안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저주한다는군. 이 땅을 밟은 모든 인간을. 죽음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는데."
"그런 불길한…."
"■■- ■■■■, ■■■!"
중얼대던 필립이 이어진 포효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나, 나리? 이건 뭔가 다른데요…?"
"당연하지. 저건 주문이니까."
미간을 구기며 내뱉은 이안이 무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장 거기서 나와라. 곧 시체들이 되살아난…. 이런."
용병들을 본 그가 말을 멈췄다.
"흐흐… 흐."
"큭큭큭큭…."
용병들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풀린 동공과 넋 나간 웃음소리.
"이, 이 병신들아! 당장 이쪽으로 오라고!"
그나마 정신줄을 잡고 있던 미구엘이 대신 소리쳤지만.
푸확-! 푸화악!
경고는 이미 현실이 된 후였다.
무덤에서 팔다리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땅을 뚫고 기어 나온 것이다.
구울. 되살아난 망자들이 팔다리를 기괴하게 꺾으며 바로 앞의 용병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마구잡이로 붙잡힌 채 바닥을 뒹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어… 어어억?!"
"으, 으아! 으아악!"
뒤늦게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뿐.
쩍 벌어진 아가리와 손발이 무자비하게 그들을 뒤덮었다.
무장을 전부 근처에 던져 둔 터라, 그들에겐 저항할 수단조차 없었다.
깨물고 씹는 소리와 끔찍한 비명.
"안 돼! 이 배은망덕한 새끼들아!"
미구엘이 절규하며 몸을 날렸다.
그가 땅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들며 내달리는 사이.
"이, 이제 어쩌죠, 나리?"
사색이 된 필립이 물었다.
어쩌긴, 싸워야지.
이안은 대답 대신 검을 고쳐 쥐었다.
둘라한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어느새 평소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여러모로 원하던 것과는 다른 결과였지만. 이런 돌발 상황에는 지겨울 정도로 익숙했다.
일단은 어그로부터 돌려 볼까.
그가 담담하게 내뱉었다.
"약속대로, 선봉은 양보하겠소."
메브가 기다렸다는 듯 필립을 돌아보았다.
"너는 저들을 도와라, 필립."
필립이 화들짝, 눈을 치켜떴다.
"저, 저 혼자서 말씀이십니까?"
메브는 이미 고삐를 후려치며 저만치까지 달려 나간 후였다.
필립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안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역시 눈길도 주지 않기는 마찬가지.
"…부디, 제가 죽기 전에 먼저 해치워 주십시오. 나리."
결국은 체념한 필립이, 간곡한 한마디를 남긴 채 뛰쳐나갔다.
이안이 그제야 코웃음을 흘렸다.
"엄살떨긴."
구울이 세 봐야 얼마나 세다고.
사방이 개판이었지만, 그는 돌진하는 메브의 뒷모습만을 차분하게 눈에 담았다.
일단은 그녀의 진짜 실력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말을 타고 싸워야 하는 이상, 장기전은 피하고 싶었으니까.
그녀의 전력을 알아야 그에 맞는 계획을 수립할 터였다.
상황이 변했다 해서, 전리품까지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겸사겸사, 진짜 실력도 알아내고 말이지.'
메브의 검에 맺힌 푸른빛 너머, 둘라한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고요하게 불타는 검은 기수.
저런 마물이 상대라면, 메브도 본 실력을 드러낼 수밖에 없으리라.
놈의 실루엣이 출렁인 건, 메브가 언덕 중턱을 지나친 순간이었다.
슈화악-!
언덕 능선을 따라 새카만 가시들이 삽시간에 솟구쳤다.
돌진하는 메브의 코앞이었다.
말과 함께 꿰뚫리려는 찰나, 그녀가 검을 내뻗었다.
번- 쩍!
푸른 섬광이 가시들을 양단했다.
가시 장벽이 산산이 흩어지는 가운데, 전신에 신성력을 가득 머금은 메브가 솟구쳤다.
그녀는 한 줄기 빛살처럼 내달려, 그대로 둘라한을 들이받았다.
푸확-!
푸른 궤적이 둘라한을 꿰뚫고 언덕 반대편까지 이어졌다.
흩어지는 궤적 사이로, 포탄에 맞은 것처럼 너덜너덜해진 실루엣이 드러났다.
"하…."
비로소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기사를 골랐어야 했다니까.'
이런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전투력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저대로면 그녀 혼자서도 둘라한을 처리할 수 있으리라.
'…차라리 잘됐군.'
물론, 그렇게 둘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장기전으로 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검을 쥔 이안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어떤 방식으로 둘라한을 처리할지,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평소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이참에 해보지 뭐.'
서걱, 검을 휘둘러 안장에 매달린 안돌프의 머리를 떨어뜨린 이안이, 곧바로 고삐를 후려쳤다.
"…쉽지 않겠군."
말을 선회하며 메브가 혀를 찼다.
충돌의 순간, 전해진 무게감이 이상할 정도로 가벼웠기 때문이다.
쉭. 등 뒤에서 뱀의 숨소리 같은 파공음이 들린 건 그때였다. 인지와 동시에, 메브는 안장 위에서 묘기를 부리듯 몸을 꺾었다.
말은 그녀와 한 몸처럼 움직여, 평소였다면 불가능했을 급회전을 만들어냈다.
메브가 곧바로 검을 떨쳤다.
파슥-!
코앞에서 푸른 불똥이 번뜩였다.
지척까지 날아들었던 검은 궤적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밀려났다.
땅에 떨어진 궤적은 순식간에 증발해 사라졌다.
그 사이로 몇 개의 조각이 드러났다. 정체 모를 검은 뼛조각.
뒤이어 한 방향으로 날아간 뼛조각들은, 내달리는 검은 실루엣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둘라한. 놈은 어느새, 메브에게 꿰뚫렸던 게 거짓말처럼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게다가 여전히 새카만 실루엣처럼 보였다.
어둠에 가려진 것이 아니라, 저 자체가 둘라한의 본모습이었다.
저주와 원한이 서린 원념 덩어리.
메브와 대칭을 이루듯 달리고 있건만, 발굽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스스스, 어느새 본래 형태로 되돌아온 검은 궤적이 놈을 감쌌다.
방금 경험한 대로, 저건 채찍이었다. 그것도 사거리가 엄청나게 긴.
"■■■, ■■■!"
거슬리는 고함과 함께, 메브의 진로를 따라 새카만 가시들이 줄지어 솟아올랐다.
"...!"
몸을 낮춘 메브가 고삐를 당겼다.
말이 그녀의 손길을 따라 좌우로 기민하게 내달리며 가시를 피했다.
물론 모든 가시를 피할 순 없었다.
서걱!
메브는 검에 담긴 신성력을 뿜어내, 앞을 가로막는 몇 개의 가시를 연달아 잘라냈다.
토막 난 가시가 증발하는 순간.
쉭-!
그 사이를 뚫고, 검은 채찍이 메브의 미간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검을 회수할 틈도 없었기에 메브는 상체를 기울여 피해냈다.
그녀를 지나친 궤적이 뱀처럼 꺾이며 되돌아온 건 그 직후였다.
"...!"
메브가 재빨리 왼팔을 들었다.
촤륵, 투구를 노리던 채찍이 대신 그녀의 팔뚝에 휘감겼다.
카가각, 쇠 갈리는 소리와 함께 푸른 불똥이 눈부시게 튀었다.
채찍에 서린 마력이 장갑을 감싼 신성력마저 뚫고 파고들었다.
메브가 이를 악물며 검을 든 순간.
서걱-!
별안간 몰아친 돌풍과 함께, 팽팽하던 채찍이 힘을 잃었다.
그녀의 팔에 스며들던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증발했다.
떨어지는 뼛조각 하나를 움켜쥐며, 메브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안…!"
그녀의 목소리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안도가 묻어 나왔다.
흩어지는 가시밭 너머, 채찍을 잘라내고 스쳐 지나간 이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안도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력이 실린 그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한 번 더 부딪혀 주시오. 힘껏."
이안은 대답도 듣지 않고 말을 돌렸다.
촤악, 그가 달리던 자리에 검은 채찍이 떨어졌다.
메브의 시선이 다시 둘라한에게로 향했다.
놈은 갑작스레 난입한 불청객에게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메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퍼슥, 손아귀의 뼛조각을 바스러뜨린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비루한 검 끝에도 기꺼이 임하실지니…."
솨아아-!
흐릿하던 그녀의 검이 빛을 되찾았다. 갑옷에 맺힌 신성력이 또렷해지고, 전신에 힘이 솟았다.
헐떡이던 전마의 숨결도 안정됐다.
메브가 고삐를 힘껏 움켜쥐었다.
전마가 두려움을 잊고 내달렸다.
이안의 꽁무니를 쫓던 둘라한이 가까워졌다.
"하아아-!"
메브는 기합과 함께 신성력을 토해내며 놈을 들이받았다.
푸화아악!
둘라한이 산산이 흩어졌다.
다시 한번 놈을 꿰뚫어 버렸음에도, 메브는 미간을 좁혔다.
'또 실패인가.'
이번에도 가벼웠기 때문이다.
달려오는 이안의 말발굽 소리가 귓가를 스친 건 그때였다.
고삐를 당겨 말머리를 돌리며, 메브는 이안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엉망이 된 둘라한의 형체로 돌진하는 중이었다.
흐릿한 마력을 머금은 그의 검이 일순간 번뜩였다.
서걱-!
예리한 호선이 둘라한의 형체 한구석을 그대로 잘라냈다.
영문 모를 위치.
"...!"
하지만 다음 순간, 메브는 눈을 치켜떴다.
솨아아-.
둘라한의 실루엣이 신기루처럼 증발해 버린 것이다.
허공에 남은 것은 이안이 잘라낸 작은 조각뿐이었다.
그 직후, 이안이 안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검을 쥔 양손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로.
단숨에 검은 조각의 코앞까지 솟구친 그가, 힘껏 양손을 내리쳤다.
빠악!
#014화
빠악!
둔탁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메브가 싸우는 동안에는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소리.
검면에 맞고 튀어나온 무언가가 바닥에 처박힌 건 그 직후였다.
흙먼지가 치솟는 가운데.
촤악-!
그 앞에 착지한 이안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검을 내리찍었다.
빠악! 콰직! 빠각!
무자비한 타격이 이어졌다.
처박혀 있던 무언가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튀어 올랐다.
메브는 비로소 그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새카만 두개골이었다.
인간의 것이라기엔 눈두덩이가 큰.
'…저게 본체였던 건가.'
메브는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그 형체 사이에서 저걸 어떻게 찾아낸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건, 이안이 그 어려운 일을 성공시켰다는 사실이었다.
두개골을 깨부수려 한다는 것도.
"...."
메브는 말의 속도를 늦췄다.
그녀가 이안을 도와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 사이.
콰아아-.
두개골의 눈구멍에서 새빨간 안광이 줄기줄기 피어올랐다.
아까 보았던 그 안광.
"■■■-! ■■■■ ■■■!"
쩍 벌어진 턱뼈 사이로 악령이 울부짖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뒤이어 검붉은 마력의 파장이 두개골에서부터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읏…?!"
메브가 절로 눈을 부릅떴다.
전신이 얼어붙은 까닭이었다.
신성력을 두른 그녀조차 마비될 정도로 강력한 저주였다.
말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면 낙마하고 말았으리라.
'그렇다면…?'
메브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검을 내리치던 이안의 움직임도 굳어져 있었다.
솨아아-!
두개골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놈의 주위로 새카만 원념 덩어리가 뭉실뭉실 번지기 시작했다.
"...."
메브가 이를 악물었다.
놈이 본래 형태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 마비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녀가 황급히 신성력을 뿜어내려던 그 순간.
터억.
이안이 손을 뻗어, 두개골을 움켜쥐었다.
"...!"
손아귀에 잡힌 정수리의 딱딱함을 느끼며, 이안은 미소 지었다.
'이럴 줄 알았다, 새꺄.'
안돌프 때도 그랬듯, 네임드 몬스터들은 위기 상황을 탈출할 비기를 최소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다.
둘라한도 예외는 아니었고.
이안은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었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마비가 아닌 순간적인 둔화.
그마저도 1초 남짓한 순간이었다.
높은 정신력과 마력, 잘못 찍은 몇 개의 스킬들이 만들어 낸 시너지 효과였다.
"...!"
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안은 두개골의 눈두덩이에 타오르는 안광이 당황스럽게 흔들리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그는 입술 끝만 말아 올려 미소 짓고는, 그대로 두개골을 땅에 내리찍었다.
퍼억!
마력까지 담았기에 두개골이 땅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뭉실뭉실 번지던 원념이 흩어졌다.
뒤이어 이안이 검을 들어 올렸고.
빠각!
일방적인 구타가 다시 시작됐다.
현란한 기교나 화려한 기술 따윈 없었다.
그저 손에 든 검을 날이고 면이고 상관없이 힘껏 내리치고, 다시 들었다가 내리치는 것의 반복.
보통의 몽둥이질과 다른 건, 지금 이안의 검에는 바람 칼날 마법에 더해, 마력까지 가득 실려 있다는 점이었다.
내구성까지 높아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구타가 이어질수록 검 역시 망가지고 있었지만.
빡! 콰직!
이안은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서 내리쳤다.
두개골이 도망치려 하면 다시 붙잡아 내동댕이치면서.
"...."
메브는 검을 늘어뜨린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비는 진작 풀렸지만, 도저히 끼어들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불길하던 마물이, 저렇게나 단순한 폭력에 일방적으로 휩쓸리고 있다니.
더 황당한 것은, 그게 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붉은 안광이 눈에 띄게 휘청댔고.
빠각! 쩍-! 쩌적-!
금이 가는 두개골 사이로 오염된 마력이 연기처럼 새어 나왔다.
콰직!
두개골의 이마뼈 한복판에, 마침내 이안의 검이 박혀 들었다.
깜빡이던 붉은 안광이 폭발하듯 번쩍인 건 그 직후였다.
"■■■-! ■■■■! ■■■!"
둘라한이 어긋난 턱뼈를 들썩이며 울부짖었다.
메브가 듣기에 그건, 처절한 단말마나 애원처럼 느껴졌다.
"■■! ■■■ ■■■■■!"
비명을 토해내던 두개골이, 별안간 검에 박힌 채로 들려 올라갔다.
직후, 이안의 입술이 달싹였다.
"조까."
콰직!
그가 검을 땅에 내리찍었다.
쩌저적, 두개골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졌다. 그 사이로 새카만 마력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아아아아아-!
구슬픈 비명과 함께 안광이 눈부시게 점멸했다.
비명이 바람 빠지듯 잦아들었다.
안광마저 사라지자, 사위가 거짓말처럼 적막과 어둠에 휩싸였다.
"후…."
계속 두개골을 노려보던 이안이, 비로소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잠깐 사이에 두개골은 매우 낡고 볼품없게 변해 있었다.
툭 치면 부서질 것처럼.
이안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네 원한 따위, 내가 알 바냐고."
그는 둘라한의 단말마를 떠올렸다.
비화가 궁금하지도, 되새기고 싶지도 않은 케케묵은 원한.
퍼석.
박혀 있던 검이 손쉽게 뽑혔다.
이안은 거의 못 쓰게 된 검을 내려놓고는, 깨진 뼛조각으로 뒤덮인 두개골의 정수리로 손을 내밀었다.
희미한 마력이 느껴졌다.
그가 뼛조각 하나를 집어 든 순간.
쉭-!
눈구멍 안에서 작고 새카만 무언가가 화살처럼 뿜어져 나왔다.
아직도 뭐가 남았다고…?
생각보다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안은 날아오는 것을 반사적으로 잡아챘다.
움켜쥔 손아귀에 뭔가가 꿈틀댔다.
따끔한 통증이 뒤를 이었다.
"...?"
이안의 눈썹이 내려앉았다.
통증 때문이 아니라, 몸속으로 밀려드는 마력 때문이었다.
음습하고 끈적한 오염된 마력.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영문 모를 공포. 끝없는 증오와 분노가 해일처럼 치밀었다.
비명과 절규가 머릿속에 메아리치고 눈앞이 붉게 물들었지만.
"호오…."
이안은 그 광기에 조금도 휩쓸리지 않았다.
그저 조금 놀랐을 뿐.
애초에 이 정도 원념으론, 그의 정신을 조금도 무너뜨릴 수 없었다.
플레이하던 게임 속에 망캐로 내던져지는 정도라면 모를까.
물론.
"…더럽게 시끄럽네."
거슬리지 않는 것까진 아니었다.
콱, 이안은 손아귀에 힘을 줬다.
그리고는 손아귀의 무언가에게, 도리어 자신의 마력을 밀어 넣었다.
원념이 담긴 오염된 마력도 함께.
손아귀의 꿈틀거림이 거세졌다.
왜, 똑같이 당하니까 좆같냐?
이안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계속해서 마력을 주입했다.
꿈틀거림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윽고, 손아귀가 잠잠해졌다.
"...?!"
진짜 이안을 놀라게 만든 변화는 그 순간에 일어났다.
손아귀에서 새로운 감각 기관이 생겨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몸속의 마력을 느꼈던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손이나 발이 하나 더 생긴 것처럼 생경한.
심지어 이것에서는 감각뿐 아니라, 단순하지만 또렷한 감정까지도 전해졌다.
굴복. 그리고 복종.
'의식이 있다고…? 그게 나한테도 전해지고?'
더는 놀랄 게 없을 줄 알았는데.
감탄하며, 이안은 손을 펼쳤다.
손바닥 한복판.
검고 얇은 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뱀이었다. 5cm는 될까 싶은 가느다란 검은 뱀.
뱀은 깨알 같은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또다시 같은 감정이 전해졌다.
완전한 복종.
'뭐, 내 애완동물이라도 된 거냐?'
대꾸하듯 꼬리를 꿈틀댄 녀석이, 장갑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안은 재빨리 장갑을 벗었다.
뱀이 그의 중지를 감싸고 있었다.
자신의 꼬리를 깨문 채였는데, 영락없이 뱀의 형태로 세공한 반지처럼 보였다.
비로소 이안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이건…?'
둘라한에게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전리품이 이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유일 등급의 반지, 늪지의 원한.
일정 이상의 정신력과 지능 수치를 갖추지 않으면 캐릭터가 착란 상태에 빠지는 제약이 있었다. 막상 획득하는 1챕터에서는 사용조차 할 수 없던 물건이었다.
그 착용 제한 조건이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 것이었을 줄이야.
심지어 진짜 뱀이었다니.
"방금 그건 뭐지? 불길한 마력이 느껴지던데."
그때, 등 뒤에서 메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말에서 내려, 안면 가리개도 위로 올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
이안이 오른손을 들었다.
"이 반지에서 나온 마력이오."
메브가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그걸 그냥 손에 끼다니. 어차피 전리품은 전부 네 것이지만, 정말 괜찮은 거냐?"
"보시다시피. 무사하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를 찬찬히 살핀 메브가, 이윽고 감탄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쳤다.
"…정말이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이안. 망령을 두들겨 패서 처치하다니. 직접 본 게 아니었다면 믿지 못했을 거다."
"나도 실제로 해 본 건 처음이오."
피식 웃은 이안이 두개골의 뼛조각을 헤집었다.
"전리품은 내 것이라 하시니…."
이내 그의 손가락 끝에 익숙한 검은 구슬이 딸려 올라왔다.
또 다른 오염된 마력의 정수였다.
"이것도 내가 가지겠소."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주머니에 정수를 넣는 사이, 그녀가 덧붙였다.
"그 두개골은 내게 주겠나? 증거로서의 가치가 충분해 보이는데."
"기꺼이."
이안이 두개골을 내밀었다.
메브가 혹시라도 부서질까, 조심스럽게 두개골을 받아 들었다.
금이 간 커다란 눈두덩이를 응시하던 그녀가 읊조렸다.
"고대 원혼에게도 힘을 주다니.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흑마법사의 속내를 누가 알겠소. 어쩌면 거창한 계획 따윈 없을지도 모르지."
이안은 대충 대꾸하며 일어섰다.
어차피 죽을 놈의 목적 따윈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이제는 그저, 새로 얻은 반지를 자세히 살펴보고 싶을 뿐.
"...."
메브의 침음이 이어졌다.
그저 나라의 앞날만을 걱정한다기엔, 지나치게 수심 가득한 눈빛.
마찬가지로 이안은 그녀의 사연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만나게 되면 다 알게 될 거요. 말 많은 놈이었으니."
몸을 돌린 이안이, 고요한 언덕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 지금은, 필립이 살아 있는지나 확인하러 갑시다."
타탁. 타탁.
모닥불이 어둠을 밝혔다.
필립이 식사를 준비하는 가운데, 꼬챙이에 꿴 육포와 햄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익어 갔다.
한쪽에 앉은 이안은 그쪽에 시선조차 주지 않고, 손가락에 낀 검은 반지를 묵묵히 응시했다.
정확히는 그만이 볼 수 있는 반지의 정보창을.
늪지의 원한. 이 반지는 그가 이 세계에 떨어진 후, 처음으로 손에 넣은 유일 등급 장신구였다.
성능 역시 그에 걸맞게 뛰어났다.
각종 능력치 상승도 그렇지만.
착란 상태를 유발하는 저주를, 약간의 생명력을 대가로 사용할 수 있다는 부분이 특히 그랬다.
이건 이 세계가 게임이었을 때에도 똑같이 붙어 있던 옵션이었다.
'쏠쏠하게 써먹었었지.'
그때는 근거리로 다가온 적에게 사용하여, 거리를 벌리거나 마법을 완성할 시간을 벌었었다.
일대 다수의 전투에서도 유용했다.
착란 상태에 빠지면 피아의 구별이 사라졌으니까.
현실이 된 지금은 더 많은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으리라.
'저주가 어떻게 발현되는지 시험해 봐야겠군. 만약 내가 사용했다는 걸 들키지만 않는다면….'
이안이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젠장할…."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어둠 너머에서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구엘이었다.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된 그는, 모닥불 옆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의 주위로 흙먼지가 푸스스 피어올랐다.
"...."
하지만 음식을 준비하던 필립은 인상만 찌푸릴 뿐, 그에게 핀잔까지 주지는 않았다.
부하들의 무덤을 파느라 저런 몰골이 되었기 때문이다.
육포를 툭툭 턴 필립이 다시 미구엘을 곁눈질했다.
"후우…."
모닥불을 응시하는 그의 표정은 그야말로 망연자실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의뢰를 빼앗긴 것으로도 모자라, 부하까지 전부 잃었으니까.
심지어 충실히 의뢰를 수행한 끝에 일어난 비극이었으니 더 허망할 터였다.
함께 싸웠던 필립은 그가 부하들을 구하려 얼마나 애썼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딱한 눈빛이 된 필립이,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동료분들에 대한 의리가 대단하시군요. 다시 봤습니다, 미구엘."
미구엘이 나지막이 코웃음 쳤다.
"의리는 무슨. 나 살자고 한 거요. 죽은 동료를 버리고 가는 건 재수 옴 붙는 짓이니까."
"그런 미신도 있습니까?"
"나는 객사했는데 동료는 살면, 죽어서도 억울하지 않겠수? 그러니 잘 묻어라도 주는 거요. 악령이든 원혼이든 되지 않게. 시부럴, 끝까지 손이 많이 간다니까…."
투덜대는 것과 달리, 그의 눈빛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필립이, 대신 햄을 꿴 꼬챙이를 들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메브가 고개를 젓고는 미구엘 쪽을 턱짓했다.
필립의 손이 냉큼 방향을 바꿨다.
"이거라도 드시죠."
"고맙소."
사양 않고 꼬챙이를 받아든 미구엘이, 햄을 질겅대며 말을 이었다.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요. 또 무리를 다 잃다니…. 동료가 다 죽고 혼자 살아남은 게 벌써 세 번째요. 믿어지시오? 세 번이나 나만 살아남았단 말이오."
"운을… 타고나셨군요."
"악운이겠지. 이게 소문나면, 누가 나와 함께하려 하겠소? 나만 빼고 다 죽는데 말이오. 이러다 사냥꾼이 아니라 사신이라고 불리게 생겼단 말이오. 세 번째면 충분히-."
미구엘의 말이 점점 자기 연민과 신세 한탄으로 흘러갔다.
어쩌면 이게 본심일지도 몰랐다.
이윽고 조금 질린 표정이 된 필립이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메브와 이안에게 차례로 꼬챙이를 건넨 그는, 이어지는 미구엘의 한탄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예상보다 여정이 너무 늦어지고 있습니다, 나리."
"음."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걱정하던 부분이었다.
이안이 합류한 이후, 거의 매일 싸우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말도 두 마리나 잃은 상태였다. 내일부터는 일행의 행군 속도가 더 느려지리란 의미였다.
"무덤 숲까지는 아직도 일주일은 더 가야 할 텐데 말입니다. 아니, 길을 돌아가게 됐으니 더 걸리겠군요. 이러다 다른 곳을 수색할 시간이 아예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어쩔 수 없지. 허탕이 아니기를 바랄 수밖에."
메브가 탄식하듯 읊조린 때였다.
"목적지가 무덤 숲이셨소?"
미구엘이 불쑥 끼어들었다.
필립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미구엘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일주일까지 걸릴 일도 없소. 마을을 들른다 해도, 길어야 닷새면 충분하지."
필립의 눈썹이 말려 올라갔다.
"그럴 리가. 계곡을 돌아가야 하니 시간이 더 걸릴 텐데요."
"돌아갈 필요가 없거든. 질러가면 그만이니까. 나처럼 오래 구른 용병들만 아는 샛길이 있소. 물론 좀 위험하긴 하지만…."
"그거, 책임질 수 있는 말이냐?"
말을 자르고 끼어든 것은,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던 이안이었다.
그를 돌아본 미구엘이 침을 꼴깍 삼키고는 대답했다.
"그, 그렇소. 직접 가 봤으니까. 말했다시피 좀 위험하긴 하오만."
"그건 상관없어. 안 그렇소?"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자, 그녀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일행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미구엘에게로 모였다.
미구엘의 이마에 식은땀이 돋았다.
"나, 나보고 뭐 어쩌란 거요?"
"안내하란 얘기지. 무덤 숲으로."
못 알아들은 척하긴.
코웃음 친 이안이 주머니에서 꺼낸 동전을 미구엘에게 튕겼다.
"널 길잡이로 고용할 테니까."
엉겁결에 받아든 미구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 저주받은 숲에 왜 가시려는지는 알아야…."
그의 목소리가 이내 잦아들었다.
손아귀에서 번지는 황금색 광채에 시선을 빼앗긴 까닭이었다.
그의 입이 멍하니 달싹였다.
"…이거, 제국 금화요?"
#015화
"알아보는군. 의뢰비다."
이안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니, 뭐, 이런…."
미구엘이 숨을 헐떡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일반 금화만 해도 거금인데.
제국 금화는 그 두 배에 달하는 가치가 있었으니까.
금 함량도 높고 위조도 불가능한, 사실상 기축 통화였기 때문이다.
미구엘이 금화를 뚫어질 듯 응시하자, 이안이 덧붙였다.
"왜. 금화가 마음에 안 드나?"
"아, 아니오!"
미구엘이 황급히 주먹을 쥐었다.
이안이 피식 웃자, 머쓱하게 시선을 돌린 그가 덧붙였다.
"그, 길잡이 고용비치곤 너무 큰 돈이어서 말이오."
"목숨값이니까. 그 정돈 되어야지."
태연한 대답이었지만, 미구엘은 도리어 섬찟한 표정이 되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오, 아니면 목숨 걸고 시간 내에 도착해야 한단 뜻이오?"
"글쎄…."
이안이 말꼬리를 흐렸다.
미구엘이 침을 꼴깍 삼키는 사이.
"자신 없으면 도로 가져오든가. 지금 돌려준다면 받아 주지."
이안이 혀를 차며 내뱉었다.
갈등하는 표정으로, 미구엘이 슬쩍 손아귀를 펼쳤다.
시선을 사로잡는 금빛. 그의 뇌리로 긍정적인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래. 고작해야 닷새잖아? 용병도 기사도 엄청난 실력자고. 숲까지만 데려가면 되는 쉬운 일인데, 무려 제국 금화라니. 이런 기회는 놓치는 게 등신이지. 안 그래?
"…하겠소. 닷새 안에 반드시 모셔다드리리다."
미구엘은 결국 금화를 품속 깊숙이 찔러넣었다.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바람직한 선택이군."
애초부터 미구엘이 의뢰를 받아들이리라 확신하던 그였다.
그의 말대로, 길잡이 고용비치고는 지나치게 큰돈이었으니까.
심지어 동료도 다 잃고, 의뢰도 알선비만 받아야 하는 신세라면야.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리라.
물론, 이안이 이런 좋은 제안을 던진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짬 처리할 놈이 필요했는데, 잘 됐군.'
그는 애초부터 무덤 숲까지만 메브와 함께할 생각이었다.
그때를 대비한 보험 역할로, 미구엘이 딱 적당해 보였다.
돈 냄새만 살짝 흘려도 지금처럼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테니, 떠넘기는 게 어렵지도 않으리라.
게다가 미신 때문일지언정, 목격자 없는 의뢰를 수행하고 죽은 동료를 묻어 줄 정도의 책임감까지 갖춘 녀석이니 금상첨화였다.
'괜히 입씨름하다 피 보느니, 그게 모두가 윈윈 하는 길이지.'
생각하며 미소 짓던 이안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필립이 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뭐지?"
"…아닙니다. 돈을 시원하게 쓰시는 모습에 감탄이 나와서요."
"호오…."
이 새끼가 이젠 비꼴 줄도 아네.
감탄하며 미간을 좁힌 것도 잠시.
"그래. 좋은 지적이다. 필립."
다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경. 내게 금화 하나 빚지신 거요."
이어진 말에 필립의 눈이 커졌다.
"우리 나리께서 빚을 지시다니요?"
"내가 경을 대신해서 낸 거니까. 그게 아니면 내가 왜 저놈을 고용해야 하지?"
"맙소사, 루 솔라여…."
이마를 감싸 쥔 필립이 탄식하듯 말을 이었다.
"정말이지 나리는, 제가 본 중에서 가장 대단한-."
"그만. 옳은 말이다, 필립."
메브가 말을 잘랐다. 이안을 돌아본 그녀가 담담하게 덧붙였다.
"이안. 빚은 의뢰가 끝난 후에 갚도록 하지."
이안은 눈을 질끈 감는 필립을 보며 피식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메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미구엘에게로 돌아갔다.
"정식으로 고용된 만큼, 네 역할을 충실히 해 주리라 믿겠다. 미구엘."
"…예. 물론입죠, 나리."
그녀의 엄격한 목소리에 미구엘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도 낯이 살짝 굳어진 것은, 이제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됐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눈동자를 굴리던 그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런데 말입니다. 무덤 숲에는 왜 가시려는 겁니까? 거긴 저주받은 숲이라,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바로 그래서 가는 거다."
이안이 육포를 베어 물며 말했다.
미구엘이 떨떠름하게 읊조렸다.
"그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흑마법사가 있길 바라고 있지."
미구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흑마법사? 하지만 여긴 마법사도 거의 볼 일 없는 동네잖소. 그런 대단한 악당이 숨어 있다는 얘긴 한 번도 들은 적 없소만…."
"소문이 나지 않은 거지, 있어."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오?"
새끼, 더럽게 의심 많네.
혀를 찬 이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놈과 만났었으니까."
"직접… 만나셨다고?"
"내가 놈의 권속을 하나 죽였거든. 놈이 현신한 분신체도 죽여 버렸고. 덕분에 원한을 제대로 샀지."
비로소 미구엘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가운데, 이안이 덧붙였다.
"목 없는 기수도 놈의 하수인이었다. 넌 재수 없게 휘말린 거고."
"…그럼 앞으로도 이런 습격이 있을 거란 말이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우리를 얼마나 빨리 무덤 숲까지 안내하느냐에 달렸지."
"허…."
마침내 미구엘의 입이 벌어졌다.
"왕국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자다."
굳어진 그를 바라보며, 메브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놈을 찾아내 단죄하는 것이, 우리 여정의 목적이지."
"정확히는 왕성에 도착해야 할 시일 전까지 말이죠. 그래서 당신의 역할이 중요한 겁니다, 미구엘."
필립이 말을 맺었다.
일행을 차례로 돌아보는 미구엘의 동공이 지진 난 듯 떨렸다.
실감한 것까진 아니었지만.
적어도 엄청나게 위험하고 중요한 일에 발을 들였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깨달았으리라.
"이런 시부럴…. 된통 걸렸군."
이윽고 그가 탄식했다.
입맛이 떨어졌는지, 어느새 꼬챙이까지 땅에 내려놓은 채였다.
이안이 피식 웃음 지었다.
"넌 길잡이로 고용된 거다. 싸움은 이쪽에 맡기고, 넌 그냥 네 역할에 충실할 생각만 하면 돼."
빈 꼬챙이를 불길에 던져넣은 그가 땅에 누우며 덧붙였다.
"그럼 아무 문제도 없을 테니까."
"...."
태연한 말투였지만, 미구엘은 순간 얼어붙었다.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문제가 생기리란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여기까지 온 이상 달라질 건 없었다.
저들에게서 도망칠 수도, 계약을 취소할 수 있을 리도 없었으니까.
"…알았소."
읊조리듯 대답한 미구엘은, 다시 꼬챙이를 집어 들었다.
입맛은 여전히 없었지만, 체력을 충분히 보충해 둬야 했다.
그래야 저들을 무덤 숲까지 한시라도 빨리 인도할 수 있을 테니까.
그의 생각엔, 그게 자신이 이 의뢰를 무사히 끝내고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다음 날부터, 사냥꾼 미구엘은 길잡이로 다시 태어났다.
"가시죠. 앞장서 모시겠습니다!"
그것도 아주 충실한.
***
구름 낀 해 질 녘 하늘 아래.
일련의 무리가 마을 어귀로 접어들었다.
평소였다면 힐끔 보고 말았을 경작지의 주민들은, 드물게도 그들의 모습을 한참 눈에 담았다.
몇몇은 아예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을 관찰할 정도였다.
무리 중앙의 기사 때문이었다.
번쩍이는 전신 갑옷은, 좀처럼 보기 힘든 진귀한 구경거리였다.
"어, 저자는…?"
덕분에 몇몇은 선두에 선 수염 난 사내를 알아보았다.
얼굴의 흉터를 씰룩대며 부하들을 끌고 다니던 용병, 미구엘.
술과 고기를 축내며 촌장에게 호언장담하던 바로 그였다.
하지만 지금의 미구엘은, 주민들이 기억하던 그 험상궂은 용병의 모습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해도 지기 전에 도착했군요. 예상보다 한 시간 이상 빠른 겁니다."
싱글거리며 떠들어 대는 길잡이일 뿐.
이안은 그의 자랑을 한 귀로 흘리며 시선을 돌렸다.
듬성듬성한 목책을 두른 마을의 전경이 그의 시야를 채웠다.
"이곳도 예상보다 크군."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까진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아겔 란에서는 충분히 큰 마을이었다.
"계곡을 넘지 않으면 근처에 다른 마을이 없어서 그렇소. 요새의 병사들도 종종 들르는 곳이고."
미구엘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늑대 무리에 습격당할 것 같지는 않은데. 설마, 이런 마을에도 상주 병력이 없는 것이냐?"
메브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쏟아지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였다.
그녀가 탄 말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안장 뒤에 달린 안돌프의 머리통이 달랑거렸다.
"요새 주둔군이 들르긴 합니다만. 사실상 쉬러 오는 겁니다."
미구엘이 공손하면서도 상세하게 대답을 이어갔다.
"그리고 촌장 아들놈은 아까 우리가 지나온 길목에서 죽었습죠. 칼 차고 몰려다니면서 건달 흉내나 내던 놈이었다더군요."
그는 일행 모두의, 심지어 본인의 예상보다도 훌륭한 길잡이였다.
앞장서서 가장 빠른 길로 일행을 인도했고, 지역의 소문이나 상황을 거의 꿰뚫고 있기까지 했다.
간밤을 평화롭게 보낸 건, 반 정도는 그 덕분이었던 셈이다.
물론 이안도 어느 정도는 그렇듯, 오래 살아남은 용병이 응당 갖춰야 할 소양이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미구엘은 이 분야에 특출난 면모가 있었다.
"어쨌든, 덕분에 오늘 밤은 편히 자겠군요. 식사다운 식사도 하고, 목욕도 할 수 있겠고요."
필립의 목소리에도 화색이 돌았다.
미구엘이 맞장구쳤다.
"이곳 여관은 음식이 괜찮소. 맥주도 맛있고. 밀 농사를 지어서 그런가, 목젖을 치는 맛이 일품이지."
"호오…. 기대되는군요. 맥주라."
필립의 눈썹이 씰룩댔다.
하여간, 잿밥에만 관심 있는 것들.
"의뢰부터 제대로 마무리 지어라."
"알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이안의 핀잔에 미구엘이 언제 실실댔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이틀 만에 이안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익숙해진 그였다.
마을로 들어선 후,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저놈이 돈을 제대로 나누는지 꼼꼼히 확인해라. 문제가 생기면 네게 책임을 물을 거다."
"저만 믿으십시오, 나리."
필립이 냉큼 대답했다.
더럽게 못 미더운데.
이안이 내심 혀를 차는 사이.
"저, 나리, 그런데 말입니다."
필립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웅얼댔다.
"똑바로 말해. 뜸 들이지 말고."
"아까 들어보니, 여긴 제대로 된 마구간도 있다더군요. 말을 두 마리나 잃었으니, 급한 대로 노마라도 구할까 합니다만."
"그런 의견을 왜 나한테 묻지?"
"그게… 송구스럽습니다만."
머뭇거리던 필립이 이내 고개를 푹 떨구며 내뱉었다.
"…말값을 좀 빌려주십시오."
"...!"
눈썹을 말아 올린 것도 잠시.
이안의 입가에 실소가 맺혔다.
"내가 돈을 시원하게 쓰는 용병이라 다행이군."
빈정대듯 덧붙인 말에 필립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 그 일은 다시 한번…!"
"농담이니 사과는 넣어 둬."
이안이 주머니에서 꺼낸 금화 몇 개를 내밀었다.
"잔돈은 고스란히 가져와라. 내 말에는 푹신한 안장까지 얹고."
"물론이죠, 나리! 가장 좋은 안장으로 고르겠습니다!"
냉큼 받아든 필립이 외쳤다.
돈의 힘은 여기서도 위대하군.
이안이 피식대는 사이 메브가 덧붙였다.
"또 신세를 지는군. 이안."
"별말씀을."
이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따지고 보면 말을 두 마리나 잃은 건 전부 그 때문이었지만, 아무도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너는 따로 할 일이 있는 건가?"
메브가 이어 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 솔라의 사원이 있다더군. 거기부터 들를 생각이오."
"사원? 그럼 여관에 들렀다가 함께 가겠느냐?"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같이…? 경도 사원에 가셔야 할 이유가 있으시오?"
"그건 아니다. 그저, 원정에 앞서 루 솔라께 기도드리려 했을 뿐."
"그런 거면 따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소."
재빨리 덧붙인 이안이, 허리춤의 검집을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사원에서 일을 본 후에 대장간도 들러야 해서 말이오. 시간이 꽤 걸릴 텐데, 그동안 경까지 안 계시면 이 두 놈이 무슨 헛짓을 벌일지 누가 알겠소."
"흠…. 하긴. 그래. 알았다."
메브가 아쉬운 표정으로 수긍했다.
하마터면 귀찮아질 뻔했네.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자신이 사원에서 뭘 하려는 건지도 굳이 알려 주고 싶지 않았지만.
사제가 가장 호구 잡기 쉬운 상대가 기사였기 때문이다.
신앙과 명예를 중시해야 하는 기사는 태생적으로 사제에게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함께 움직인다면, 이안까지 바가지를 쓰게 되리라.
"네 식사도 따로 준비해 두라 이르지.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라."
"알겠소."
"미구엘, 여관이 어느 쪽이지?"
"저쪽 길입니다, 나리."
메브가 미구엘이 가리킨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필립이 재빨리 뒤따르는 가운데, 미구엘이 이안의 곁으로 다가왔다.
"사원은 마을 뒤편에 있소. 대장간은 그 전 골목 끝에 있으니 알아두시고."
"알았다. 나 없다고 허튼짓할 생각은 하지 말고."
"허, 허튼짓은 무슨…."
뜨끔한 표정을 짓는 미구엘의 어깨를 두드린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는 더럽고 냄새나는 거리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꽤 큰 마을임에도 위생은 여전히 개판이었다.
오가는 주민들의 모습 역시, 현대인인 이안의 눈에는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이왕 게임 속으로 떨어질 거면, 소년 만화 같은 모험 판타지로 떨어지던가.'
이안은 혀를 차며 생각을 떨쳤다.
차라리 곧 만날 사제에 대해 생각하는 게 건설적일 터였다.
사기꾼일 가능성도 충분했으니까.
물론, 사기꾼이 아닐지라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사기꾼보다 더하면 모를까.'
암흑시대의 다른 것들처럼, 신을 섬기는 교단과 사제들도 부패하고 타락하긴 마찬가지였다.
물론 신과 사후세계, 기적이 실존하는 세계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중요한 건, 사제들은 죄다 짜증 나는 작자들이란 사실이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말을 섞고 싶지도 않을 만큼.
'그래도 힘을 빌려주는 신들이 사실상 제일 문제인 것 같지만….'
생각하던 이안은 이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작고 낡은 집 앞이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외관이건만.
"호오…."
이안의 눈에는 이채가 번져나갔다.
"제대로 찾아왔군."
안에서 신성력이 느껴졌다.
메브의 것만큼이나 선명하게.
문 위에 흐릿하게 음각된 태양 문양이, 이곳이 루 솔라의 사원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안은 문손잡이를 쥐었다.
스무 명도 앉기 힘들어 보이는 작은 기도실이 곧바로 드러났다.
내부를 훑던 이안의 시선이 기도실 끝의 석상에서 멈췄다.
무릎을 꿇고 양손을 머리 위로 치켜든, 로브로 얼굴을 가린 여인의 조각상이었다.
신성력은 그 석상의 손아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은한 빛과 함께.
"이런 곳에 성상이 있었다니…."
그 앞에 멈춰선 이안이 빛이 흘러나오는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마력도 발광체도 보이지 않는, 진짜 기적이었다.
이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드디어 오염된 정수를 정화할 수 있으리란 의미였기 때문이다.
솨아아-.
"...?"
성상 손아귀의 빛이 진해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손아귀 가득 찰랑대던 이내 빛이 흘러넘쳤다.
성상 전체가 아침 햇살을 머금은 것처럼 일렁였다.
…이거 갑자기 왜 이래?
이안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기도 시간은 지났소만."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흰 사제복을 걸친 중년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거만한 표정과 목에 걸린 태양 형상의 황금 펜던트.
역시,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군.
속으로 혀를 찬 이안이 물었다.
"댁이 이 사원의 사제시오?"
"보다시피. 그보다 지금은 출입이 허락된 시간이 아니오. 특별한 용무가 있는 게 아니라면-."
싸늘하게 말하며 다가오던 사제의 목소리가 문득 잦아들었다.
그의 시선이 이안의 어깨너머, 빛을 발하는 성상에 고정됐다.
멍하니 입을 벌린 것도 잠시.
"맙소사, 루 솔라시여…."
장탄식을 흘리며, 사제가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부담스럽게 일렁이는 눈빛.
그의 입술이 이내 달싹였다.
"찬란한 여신의 사도께서, 이런 변방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이안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사도…?"
이건 또 뭔 개소리야?
#016화
이안의 시선을 오해했는지, 사제가 빙긋 입술을 말아 올렸다.
"오래전에도 제국의 사도께서 방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루 솔라께서 친히 이토록 찬란한 신성을 내리신 건 그때뿐이었지요."
친히, 라고?
이안의 시선이 성상으로 돌아갔다.
"...?!"
그의 눈썹이 이내 치켜 올라갔다.
빛 너머, 정말 신성을 넘어선 초월적 무언가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러니 용무를 말씀해 주십시오. 기꺼이 돕겠습니다."
사제가 공손하게 덧붙였다.
보란 듯 성상의 빛이 밝아졌다.
"애석한 말이지만."
화들짝 성상에서 시선을 뗀 이안이 내뱉었다.
"나는 용병이오. 사도가 아니라."
"사도가… 아니시라고요?"
"그렇소. 심지어 신도도 아니지."
평소라면 이용해 먹었을 오해건만.
이안이 굳이 정정한 건, 빛의 여신이 정말 성상을 통해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왜 보고 있는 거지? 관음증 환자도 아니고.'
아무리 그라도 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사도를 사칭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어떤 천벌이 내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말씀이 사실이시라면…."
멍하니 고개를 기울이던 사제가, 이윽고 성상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이제라도 찬란한 여신을 섬기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갑자기 전도를 하고 난리야.
헛웃음을 삼킨 이안이 되물었다.
"진심이시오?"
"여신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게 아니라면, 이리 큰 신성을 내리시면서까지 지켜보실 리 없으니까요."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며, 사제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귀하가 루 솔라를 섬긴다면, 분명 사도로 선택받게 되실 겁니다. 필멸자에게 그보다 큰 명예와 영광은 없지요."
"...."
사제의 말에 감응하듯 성상의 빛이 더 찬란해졌다.
이안의 대답을 종용하듯이.
하지만 이안의 미소가 굳어진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정말 사도 퀘스트였다니.'
눈앞에 선택 퀘스트 수락 창이 떠올라서였다.
루 솔라의 사도.
물론 게임에서도 특정 레벨 이상이 되면 신의 사도 퀘스트를 받을 수 있는 직업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안이 알기로 마법사는 거기 포함되지 않았다.
마법사는 대신 깨달음을 얻거나 근원적 진리를 엿보는 식의 각성 퀘스트가 있었고, 심지어 이안은 아직 거기까지 레벨을 올리지도 못한 상태였다.
'…어쩌면 이제 그런 제약 따윈 없는 걸지도 모르겠군.'
정신을 추스른 이안은, 퀘스트를 거절하며 입을 열었다.
"곧바로 결정 내릴 문제는 아닌 것 같군. 차차 고민해 보겠소."
사실상 사제가 아니라, 지켜보고 있을 루 솔라에게 한 말이었다.
물론 나중에라도 그녀를 섬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당장은 그녀의 힘을 써먹어야 하니 여지만 남겨둔 것이다.
딱 잘라 거절했다가 그녀가 신성을 거둬들이기라도 하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또 없을 테니까.
덩달아 낚인 사제의 눈빛이 일렁였다.
"부디 옳은 결정을 하시길 바랍니다. 찬란한 여신께선 신도에게 아낌없는 자비를 베푸는 분이시니까요. 그리고…."
빙긋 미소 짓는 사제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그 영광스러운 순간이 온다면, 이 신실한 에드워드를 기억해 주십시오. 충실히 보필하겠습니다."
얼씨구, 이젠 자기 어필까지.
입가에 실소를 머금은 것도 잠시.
"알겠소, 에드워드. 내 반드시 기억하지."
이안도 같은 은근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주머니를 털릴 줄 알았더니, 오히려 털어먹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건 거짓말도 아니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침 그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소만."
"말씀하십시오."
에드워드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찬란한 여신의 신성으로, 타락한 마력을 정화해 주셨으면 하오."
사뭇 경건하게 말하며, 이안이 아공간에서 오염된 정수를 꺼냈다.
큰 구슬 하나와 작은 구슬 셋.
오염된 마력이 타르처럼 끈적하게 꿈틀댔다.
"이렇게나 오염된 마력이라니. 이런 정수를 품었다면 여간 타락한 마물들이 아니었겠군요."
손아귀를 꺼림칙하게 내려다보며, 에드워드가 탄식했다.
"여신께서 귀하를 어여삐 여기시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타락한 마력을 정화하면 그대도 어여삐 여기시겠지. 그래서…."
이안이 정수를 쥔 손을 까딱였다.
"이 중에서 몇 개나 가능하시겠소? 내일 정오쯤엔 떠나야 하오만."
고심하듯 정수를 응시하던 에드워드가 답했다.
"여신께서 평소보다 많은 신성을 내리셨으나, 기도를 올리는 제 체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 이상은 힘들 듯합니다."
"하나라…."
이안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하루 만에 상급 정수까지 정화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는 너무 적었다.
"다만 사원의 유지를 위한 기부금을 충분히 내주신다면…."
에드워드의 은근한 목소리가 이어진 건 그때였다.
"몸이 상하더라도 밤새 여신께 정화의 기도를 올릴 수도 있겠지요. 그런다면 아마 하나 정도는, 더 정화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새끼 봐라…?
한쪽 눈썹을 치켜든 이안이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에드워드가 빙긋 미소 지었다.
사람 좋아 보이지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미소였다.
이안의 시선이 뒤쪽의 성상과 그를 차례로 오갔다.
이런데도 돈을 받을 생각이냐는 눈빛.
에드워드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걸 끝까지 갈등하네.
이윽고 코웃음을 친 이안이 품에 손을 넣었다.
"얼마나 원하시오? 루 솔라를 섬기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겠군…."
비웃듯 덧붙인 말에, 비로소 에드워드의 미소가 무너졌다.
"받지… 않겠습니다…."
그가 웅얼대듯 입술을 달싹였다.
움직임을 멈춘 이안이 그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여신께서 어여삐 여기시는 분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이겠지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였다.
거기에 일말의 미안함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눈빛까지.
"그럼 기꺼이 부탁드리지. 여신께서도 분명 그대의 신실함을 알아주실 거요."
산뜻한 손길로 정수 두 개를 골라내 내밀면서, 이안이 미소 지었다.
"…그러시겠지요."
에드워드도 입술을 말아 올렸다.
말 그대로 억지 미소였다.
***
이안이 여관 앞에 도착한 건 한 시간쯤 더 지나서였다.
'아공간이 꽉 찬 건 오랜만이군.'
무덤 숲에 도착하기 전에 물자를 보충할 마지막 기회였으니, 대장간을 탈탈 털고 온 참이었다.
흑마법사가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사고는 언제나 방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뜻밖의 사건으로 주머니 사정에 여유가 생긴 덕이기도 했다.
'신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그렇게까지 대놓고 돈을 밝힐 줄이야.'
에드워드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피식댄 이안이, 여관 문을 열었다.
"오…! 용 사냥꾼께서 마침내 돌아오셨군!"
얼큰하게 취한 미구엘의 목소리가 그를 마중 나왔다.
"나리! 말씀해 주십시오! 정말 늪지대의 용을 사냥하셨습니까?"
필립의 외침이 뒤를 이었다.
그 역시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진 상태였다.
신나게도 들이부었군.
혀를 찬 이안이 장내로 들어섰다.
그를 힐끔대던 주정뱅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무슨 대화가 오갔을지 짐작이 가는 순간이었다.
"좀 늦었소. 볼 게 많더군."
모르는 척 메브에게 말한 이안이 테이블에 앉았다.
눈치를 살피던 여급이 재빨리 음식을 차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튜와 정체 모를 고기. 그리고 맥주 한 잔.
이안이 포크를 드는 사이.
"그러니까, 정말 나리께서 용을 죽이셨단 말이죠? 늪지대에 산다고 소문난, 그 용을요."
필립이 참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이안은 대답 대신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서늘한 눈빛을 마주한 미구엘의 미소가 뒤늦게 굳어졌다.
"아니, 그, 별말 안 했소. 이 친구가 댁의 과거를 궁금해하기에 조금만…."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아, 아니오! 기껏해야 뭐, 댁을 어떻게 만났는지, 댁한테 까불다가 손모가지 날아간 놈들이 몇인지. 어떤 의뢰를 해결했고 댁을 뭐라고 불렀는지 라던가…."
"...."
전부 다 얘기했단 소리잖아.
입가에 절로 쓴웃음이 스쳤다.
미구엘은 무용담이랍시고 얘기한 거겠지만.
그에겐 그다지 좋은 기억들도 아니었다. 사실 이 세계에선 좋았던 기억을 찾는 게 더 어려웠다.
"맙소사. 정말이었군요. 하긴, 나리께서 보여 주신 능력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긴 합니다만-."
"그래서, 의뢰비는?"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잘랐다. 필립이 냉큼 품에서 은화를 꺼내 들었다.
"말을 사고 남은 돈도 포함했습니다, 나리."
이안은 눈대중으로 돈을 확인하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이로써 이 마을에서 해야 할 일은 전부 끝난 셈이었다.
"어떻게 용을 사냥하신 겁니까?"
이제 속 편하게 먹고 쉴 일만 남았건만.
"…그건 용이 아니었다."
지치지 않고 이어진 질문에, 이안은 결국 입을 열었다.
"성체가 된 지 얼마 안 된 늪지 드레이크였지. 그놈은 그냥 날개 달린 도마뱀일 뿐이야."
게임에선 튜토리얼 지역의 보스이기도 했던 놈은, 늪지대 외곽에 터를 잡은 포식자였다.
잘 무장한 병사들이 오갈 때는 숨어 있다가, 홀로 다니는 행인만을 노리던 영악한 포식자.
덜 자란 놈이었기에 택한 방식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늪지대 거주민들이 탈출로로 택하는 길목 근처의 계곡에 터를 잡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동시에 그를 반년 넘게 늪지대에 묶어 둔 가장 큰 원흉이기도 했다.
높은 레벨과 능력치 따윈, 날개 달린 거대 도마뱀이 울부짖는 현실 앞에선 별로 와닿지 않았었으니까.
심지어 놈은 이안이 특별해 보였던지, 유독 집착하기까지 했었다.
"그게 용 아닙니까? 나리 말씀대로 덜 자랐을 뿐인 거고요."
"도마뱀은 커도 도마뱀이지. 진짜 용은 그딴 거랑은 비교도 안 돼."
그러니 슬슬 닥쳐라.
그런 눈치를 읽었는지, 테이블이 순간 조용해졌다.
필립의 멍한 목소리가 이어진 건 직후였다.
"진짜 용을 보신 적이… 있으신 겁니까?"
말실수 때문이었던 거군.
이안은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뭐, 꿈에서."
사실은 당연히 게임에서였다.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다 보면 언젠간, 직접 만나게도 될 테고.
'그것도 목숨 원 코인으로 말이지.'
상상만 해도 개 같네.
이안은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고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필립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았냐? 정말 혀가 짧아지고 싶은 모양이군."
"근본적인 의문이 들어서 말입니다. 왜 나리께서 늪지대에 계셨던 건지에 대한 의문이요. 거긴 버려지거나 유배당한 자들이 사는, 저주받은 땅이잖습니까."
"그, 나도 전부터 궁금하긴 했소. 댁 같은 양반이 갑자기 늪지대에서 걸어 나왔을 리는 없잖소."
미구엘도 은근슬쩍 거들었다.
졸라게들 끈질기네, 진짜.
혀를 찬 이안이 툭 내뱉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해라. 늪지대 출신이라고."
물론 사실이었지만.
"…제국에서 유배 오신 걸까요."
"나야 모르지. 어쩌면 늪지대 너머의 밀림에서 왔을지도."
술 취한 둘은 전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거긴 고대의 저주가 서려 있다지 않습니까. 고대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아니면, 발을 들이기만 해도 목숨을 잃는다던데요."
"사실일 거요. 직접 본 놈이 말하길, 숲이 살아 움직이면서 사람을 산 채로 잡아먹는다더군."
그냥 둘 다 혀를 잘라 버릴까.
생각하던 이안은 문득 굳어졌다.
캐릭터 설명에서 고대의 후예 어쩌고 하는 문구를 봤던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나서였다.
그래서 검은 벽의 광기에도 휩쓸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 밀림이 날 살려두려 하진 않았었는데.
그가 새삼스럽게 자신의 육체에 대한 고찰에 빠진 중에도, 필립과 미구엘은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그쯤 하는 게 좋겠군."
메브가 입을 연 건, 이안이 망국의 왕실 혈통일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이야기가 전개됐을 무렵이었다.
"실언이 과했다, 필립. 미구엘."
평소보다 싸늘한 목소리에 필립과 미구엘이 화들짝 머리를 조아렸다.
"예. 죄송합니다, 나리."
"그, 죄송하게 됐습니다…."
메브가 위층을 턱짓했다.
"이만 마시고 올라가거라. 둘 다."
"…예, 알겠습니다."
두 사내가 순순히, 그러나 끝끝내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걸음을 옮기던 미구엘이 이내 필립을 돌아보았다.
"댁 때문에 이게 뭐요?"
"저 때문이라니요…? 신나서 떠들어 댄 건 당신이잖습니까."
"말은 바로 해야지. 댁이 술까지 사면서 물어봤잖소?"
"그, 그건 사실이지만, 애초에 당신이 술을 얻어 마시려고 미끼를 던진 거였잖습니까."
"허. 이젠 생사람도 잡으시는군."
"뭐라고요…?"
투덕대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계단 너머로 사라졌다.
내분이 나고 지랄이야.
이안이 피식대는 사이, 메브가 입을 열었다.
"대신 사과하지. 저렇게 과음하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다."
이안은 맥주잔을 들며 대꾸했다.
"됐소. 취해서 한 말들이니."
물론 저것들이 술에서 깨고 나면, 한동안은 숨소리도 못 내게 만들어 줄 생각이지만.
맥주를 꼴깍대던 이안은, 문득 느껴진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메브가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러고 보니, 그녀는 투구를 벗어 두고 있었다.
붉은 머리칼과 녹색 눈동자, 한쪽 턱의 흉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머지 갑옷은 입고 있었지만, 얼굴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사람 같은 분위기였다.
"입맛이 없는 모양이지?"
이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던 메브가 문득 말했다.
이안은 한쪽 어깨만 까딱였다.
"그럴 만한 얘기를 들었잖소."
"그럼, 잠시 함께 걷겠느냐?"
이안의 미간이 순간 좁아졌다.
이건 또 무슨 안 어울리는 소리야.
"…혹시, 경도 취하셨소?"
메브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말려 올라갔다.
"조금은."
저게 물이 아니었군.
이안은 그제야 메브의 앞에 놓인 잔을 바라보았다. 필립과 미구엘의 상태로 미뤄 보았을 때, 그녀 역시 첫 잔은 아닐 터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다만, 여기서 하고 싶진 않군."
그녀가 넌지시 덧붙였다.
듣는 귀가 너무 많다는 뜻이리라.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시시껄렁한 이유는 아니겠지.
생각하며 이안은 잔을 내려놓았다.
"알겠소. 나갑시다."
#017화
여관의 생기가 무색하게, 마을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길을 오가던 행인들은 어느덧 자취를 감췄고, 곳곳의 불빛만이 어둠을 밀어내며 일렁일 뿐이었다.
암흑시대 변방 마을들의 흔한 밤 풍경이었다.
그나마 여긴 횃불과 등잔이 곳곳에 있으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보통은 집안만 겨우 밝힌 채 마물들의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으니까.
밤에 돌아다니는 건 외지인이나 떠돌이, 혹은 마물을 사냥하는 자들뿐이었다.
셋 전부에 해당하는 이안은, 주점 입구에 놓여 있던 등잔을 손에 들고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묵묵히 옆에서 걷던 메브가, 문득 입을 열었다.
"무장을 단단히 꾸렸군."
자꾸 안 어울리는 짓을 하네.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무덤 숲이 멀지 않았잖소."
이안의 등에는 메이스가 담긴 가죽 걸이가 걸려 있었다.
허리춤의 검집에는 새 장검이. 반대편 허리에는 단검을 담은 검집까지 찬 상태였다.
'더 마법사 같진 않아졌지만.'
그가 실없는 결론을 읊조리는 사이, 메브가 말했다.
"넌 정말 무덤 숲에 흑마법사가 있으리라 믿는 거군."
"그렇소."
이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겪어 보셨다시피, 이 동네에 소문이 퍼진 것들은 거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래. 내가 국경 지대에 떠나 있는 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더군."
마을 어귀를 응시하는 메브의 녹색 눈동자가 어둠을 머금었다.
"백성들의 삶은 더 어려워졌고. 치안은 혼탁하며, 귀족들은 본분을 잊었다. 내가 보고 자란 모습과도, 전해 들은 소식들과도 다르지."
"국경에서 오래 계셨나 보오."
"짧지는 않았다. 그래야만 했고."
이안은 비로소 메브와 필립이 종종 보이던 어리숙한 모습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겸비한 귀족이라 해도, 암흑시대에 어울리는 덕목은 아니라 생각했었는데.
이들은 정말 인생의 대부분을 국경 지대에서만 보낸 것이다.
그러니 전투력과 전술에는 뛰어날지언정 세상 물정에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쩌면 그의 말에 대부분 수긍한 건, 그의 판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전쟁이 멀지 않았으니 귀환하라는 왕명을 받았을 때만 해도, 이 지경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지."
"뭐, 왕국이 태평성대라도 누리고 있는 줄 아셨나 보오."
"그건 아니다. 달리 지금을 암흑시대라 부르는 것은 아닐 테니."
비아냥거린 말에도 진지하게 답한 메브가 이내 덧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너를 만나게 된 건 내게 행운인 셈이다. 이안."
이안은 문득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한 녹색 눈동자. 붉은 머리칼 때문인지 흐릿한 호롱불 때문인지, 피부가 평소보다도 희게 느껴졌다.
'오히려 이쪽이 마법사 같은데.'
잡생각을 떨치며 이안이 대꾸했다.
"그 반대요. 내가 운이 좋았지. 흑마법사 놈은 어차피 언젠가 죽여야 할 놈이었는데. 경 덕에 두둑하게 돈까지 받게 됐으니."
"그래. 너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었겠지."
메브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저주받은 늪지대에서부터 수많은 사선을 홀로 넘어왔으니 말이야."
"...."
미구엘 이 새끼, 뭘 얼마나 떠들어 댄 거야.
"어째서 네 명성이 아겔 란 전역에 퍼지지 않은 것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이안."
슬슬 거북해진 이안이 내뱉었다.
"그래서 뭐, 내 무용담이라도 더 듣고 싶어 따로 불러내셨소?"
"아니. 말했듯,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메브가 몸을 돌렸다. 마을 어귀의 바위에 기대선 그녀가, 어둠이 내려앉은 밀밭을 바라보았다.
"…내가 흑마법사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귀환 명령을 받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밀밭을 스치는 바람처럼 건조하게 이어졌다.
"귀환에 앞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나는 국경 수비의 중심이었으니, 내 부재가 느껴지지 않도록 세밀하게 신경 써야 했다. 그러던 중에, 서찰 한 통이 도착했지."
아, 결국 이걸 말하려던 건가.
한숨을 삼킨 이안은, 등불을 바위에 올려놓고는 메브의 곁에 섰다.
여전히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고용주이자 전우였고, 더는 말을 자를 핑계도 없었다.
"…버논이 보낸 편지였다."
처음 만난 날에도 들었던 이름.
이안은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버논은 누구요?"
"내 하나뿐인 아우다. 버논 리우렐. 리우렐 가의 가주이자, 대를 이어 왕가를 수호하는 방패이지."
남매가 다 기사라니, 유서 깊은 기사 가문이시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작 버논 리우렐을 게임에서 본 기억은 없어서였다.
그다지 중요한 역할이 아니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티르 엔의 사도인 귀하가 변방을 지키고, 아우께서 왕의 곁을 지키다니 의아한 일이군."
정말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언급될 리도 없었다.
"사도이기에 떠난 것이다. 남았더라면 왕의 곁에 머무르고, 가문은 나를 가주로 추대했을 테니. 그렇다면 버논은 응당 누려야 할 것들을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했겠지.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아하…."
동생 사랑이 대단하시군.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누이에게 가문을 빼앗긴 장남이 어떻게 살게 될지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건 그녀가 가주 자리를 포기하면 끝날 문제였으니, 해야 할 선택을 한 것이리라.
그렇다곤 해도 안락한 삶과 권력을 포기하긴 쉽지 않았을 텐데.
그야말로 숭고한 희생이었다.
암흑시대엔 더더욱 보기 힘든.
어쩌면 그 숭고함이 티르 엔의 눈에 든 것일지도 몰랐다.
"그 사실을 버논도 알고 있었다는 게, 문제의 근원이었다. 그 아이는 언제나 내게 증명하고자 했지. 혼자서도 가문을 이끌 수 있음을. 폐하의 곁을 지킬 수 있음을. 나아가 가문을 부흥시킬 수 있다는 것도. 증명할 필요 따윈 없건만."
"…그래서, 편지에는 뭐라고 쓰여 있었소?"
"왕국에 어둠이 드리웠다 했지. 폐하께서 전쟁 준비에 혈안이 되어 있으신 사이, 조용히 마수를 뻗치고 있다고. 적지 않은 귀족이 연루되었다고도 쓰여 있었다. 어쩌면 왕국의 뿌리까지도."
잠시 말을 멈춘 메브가, 조심스럽게 품을 뒤적였다.
곱게 접힌 편지지. 편지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이 과거를 오갔다.
거참, 더럽게 뜸 들이네.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읽어 봐도 되겠소?"
"글을 읽을 줄… 그래, 너라면 당연히 알겠지."
메브가 편지를 내밀었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편지지를 폈다.
버논의 성격을 대변하듯 휘갈겨 쓴 글자들.
"…말씀대로 야망이 넘치시는군."
이윽고 한쪽 입술을 말아 올린 이안이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를 가문을 부흥시킬 기회로 삼다니 말이오."
편지에는 흑마법사를 토벌하고, 관련된 자들을 처벌하리란 내용이 길게도 쓰여 있었다. 배덕자들을 뿌리 뽑아 왕국을 구원하고, 그들의 땅을 다스리겠다는 야망까지.
"리우렐 가는 다스리는 영지가 따로 없는 것이오?"
"왕가를 수호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살아왔으니까. 왕의 곁을 지키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버논이 그 사실에 불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편지지를 받아든 메브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언젠가 국경 너머의 혼란을 잠재우면, 그곳에 가문의 터를 잡을 생각이었다. 국경을 수호하는 가문으로. 내가 왕의 곁으로 돌아가고, 버논이 그 영지를 다스리게 할 생각이었지."
"하지만 그 아우님은 혹시라도 누이가 공적을 가로챌까 싶어, 어떤 단서도 공유하지 않았고 말이오."
"...."
메브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이안이 덧붙였다.
"말이 과했다면 사과드리겠소."
"…네 통찰력에 놀랐을 뿐이다. 정확히 봐서 할 말이 없군."
뭐 대단한 거라고.
이안은 어깨만 까딱였다.
편지에는 흑마법사의 존재와 자신의 목적에 관한 이야기가 다였다.
메브에게 남긴 말이라곤 왕성에 도착하면 다른 모습으로 맞이하리란 것뿐.
열등감과 인정 욕구에 시달리는 젊은 가주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지 유추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결국엔 그 염려가 현실이 됐군. 경께서 직접 흑마법사를 찾게 만들었으니 말이오. 그것도 용병까지 고용해 가면서."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메브의 숨결이 순간 흐트러졌다.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다시 평소의 건조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낸 편지의 답장이 오지 않았다. 내가 출발하는 날까지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흑마법사를 토벌하느라 바쁜 것일 수도 있잖소."
물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한 말이었고, 메브도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가문의 누군가라도 내게 연락했어야 했다. 필시,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내게 어떠한 답도 남기지 말라 명해둔 것이겠지."
"경의 편지가 엉뚱한 자의 손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아닐 것이다. 오래 가문에 몸담은 하인이 전령이었고, 편지를 봉인한 인장은 리우렐 가의 사람만이 풀 수 있지. 재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굳이 가로챌 이유가 없다."
그렇단 말이지.
"답장을 보낸 지 얼마나 되셨소?"
"한 달. …그리고 오늘부로 일주일이 더 지났군."
"이런…."
이안은 혀를 찰 뻔한 것을 간신히 멈췄다.
버논이 이미 죽었으리란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한 달은 아주 긴 시간이오."
이안은 메브를 마주 보았다.
"경이 보시기엔 아직 가주가 무사하실 것 같소?"
"아닐지도 모르지. 어쩌면. 아마도."
담담한 대답과 달리 불안한 듯 시선을 돌린 메브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평생 나를 넘어서기 위해 수련을 거듭한, 강한 아이니까."
믿는다기보단 희망사항에 가까워 보이는 말투였다.
그녀는 이안의 대답까지 기대하지는 않은 듯 이내 덧붙였다.
"만약 무사하지 않다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아니, 그렇다면 더더욱."
그녀가 꾹, 주먹을 움켜 쥐었다.
"흑마법사를 시작으로, 진상을 낱낱이 밝혀내야겠지."
"흠...."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로소 메브가 어쩌다 피 흘리는 복수자로 거듭나게 되는지 알게 된 것 같아서였다.
그녀가 어째서 단신으로 왕성까지 쳐들어갔는지. 왜 왕을 죽이려 했는지. 들리지 않던 단말마가 무었는지. 망령이 되면서까지 누구의 복수를 끝마치려 했는지도.
게임에서 흑마법사를 죽인 건 이안이었으니, 아마 메브는 끝내 흑마법사를 찾아내지 못했으리라.
지금으로 봐선 버논의 생사조차 알지 못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광기를 부추기고 잘못된 복수의 대상을 속삭이는 건, 아겔 란의 타락자들에겐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터였다.
'아주 손쉬운 먹잇감이었겠지.'
이안은 문득 메브를 바라보았다.
그 손쉬운 먹잇감이 지금은 자신의 손에 있는 셈이었으니까.
그것도 명백한 분기점으로 보이는 퀘스트와 함께.
그녀의 운명이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반드시 흑마법사를 찾아달라는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거요?"
이윽고 이안이 입을 열었다.
메브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길 바라긴 하지만. 내가 네게 이 긴 이야기를 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이안."
그녀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네 말대로 한 달은 긴 시간이지. 배덕자들이 버논의 목적을 알아차리기에도 충분할 만큼. 그러니 놈들은 본모습을 감추려 할 것이다. 내가 돌아오고 있으니까."
담담하고 단단한 목소리.
눈빛 역시 등불의 빛을 머금고 가라앉아 있었으나, 이안은 이제 그 너머에 숨겨진 위태로운 감정들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의외로 앳되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뒤를 이었다.
복장과 신분, 말투와 행동이 일종의 후광 효과를 만들었을 뿐.
얼굴만 놓고 보면, 그녀는 이십 대 초중반 정도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평균 수명이 짧은 세계였지만, 그래도 많은 나이라곤 할 수 없었다.
이안의 시점에선 더더욱.
'이건 뭐, 진짜 소녀 가장이었군.'
"버논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면, 나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돼. 만약 살아 있다 해도 달라질 건 없겠지. 그 아이는 필시, 내 뜻을 따르지 않을 테니."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내뱉었다.
"그러니까 나는, 믿을 수 있는 조력자가 필요하다. 이안."
"...!"
이안의 미간이 비로소 좁아졌다.
이래서 말을 빙빙 돌렸던 거군.
심지어 이건 일방적인 부탁이었다.
스스로 사연을 털어놓는, 체면 상하는 짓까지 불사한 끝에 나온.
그건 그녀가 혼자서는 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으리라 결론 내렸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이안을 유일한 대안이라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가 어쩌다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말을 꺼낸 이유 정도는 알 것 같았다.
필립과 미구엘 앞에서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았으리라.
"…그 조력자가 흑마법사와 이미 대립 중이며, 정신력과 통찰력, 무력과 지혜까지 한 몸에 지닌 사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결정을 종용하기라도 하듯,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연계 퀘스트였다. 타락한 자들.
어둠을 숭배하는 귀족들을 찾아내어 처단하는 것이 목표였다.
보상은 금화와 능력치. 그리고 몇 개의 물음표.
매력적이었지만, 이안은 차분하게 생각을 이어나갔다.
루 솔라의 사도 때도 그랬듯.
무작정 상황과 퀘스트에 끌려다닐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더 편리하고 유리한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선 더더욱.
다행히도, 이 경우엔 그걸 택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다.
"나는 용병이오. 용병은 결코 부탁만으로는 움직이지 않지."
아쉬운 쪽이 을이 될 수밖에 없는 건, 이 세계도 마찬가지니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냉정한 목소리로 말한 이안이, 메브의 눈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대신, 의뢰가 끝난 후에 나와 다른 조건의 새로운 계약을 맺고 싶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되겠소?"
"...!"
#018화
눈을 치켜뜬 것도 잠시.
"물론이다. 이안."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안이 거절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 듯, 차라리 안도한 눈빛.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안이 중대하고 위험한 만큼, 적합한 대가를 약속하겠다. 원한다면 귀족 작위라도-."
"지금 중요한 건 조건이 아니오."
이안이 말을 잘랐다.
"그전에 계약 내용부터 다시 고민하셔야 할 테니."
"내용을…? 어째서지?"
어리둥절한 눈빛.
이런 부분은 바로 못 알아듣는군.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말했다.
"배덕자들을 찾아내 처단하는 게 경의 다음 목적이라면, 계속 동행하는 방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오."
그제야 메브가 멈칫했다.
"…그리 말하는 이유가 있겠지."
"일단은 경이 너무 눈에 띄기 때문이지. 본인도 잘 아시지 않소?"
전신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는 아겔 란에서 아주 드문 존재였다.
그런 만큼 어디서든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이 마을에 들어올 때 그랬듯이.
"배덕자들의 눈을 피할 수 없으리란 거군."
메브가 비로소 읊조렸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경이 바로 왕성으로 가야 한다는 이유도 있소. 시간을 허비하는 건 둘째 치고, 성에 발을 들이면 다시 나오기도 쉽지 않을 것이오. 나는 흑마법사의 존재를 증명할 증인이고, 왕께선 전쟁을 준비하시니."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전쟁을-."
"흑마법사가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관련된 배덕자들이 있다 한들, 왕께서 전쟁을 포기하실 것 같소?"
메브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국왕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그녀도 확신할 수 없으리라.
"그러니 내가 새로 의뢰를 받는다면, 역할을 나눠야 할 것이오. 경은 안에서, 나는 밖에서."
메브의 눈을 마주 보며 이안이 느긋하게 말을 맺었다.
"그럼 각자가 더 많은 배덕자를 찾아낼 수 있겠지."
이유는 그럴듯하게 붙였지만.
결국은 혼자 다니겠단 얘기였다.
어차피 그가 해결해야 할 퀘스트들은, 아겔 란의 타락자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들이 태반.
그러니까 본래 하려던 것들을 해나가기만 해도, 그녀의 의뢰와 연계 퀘스트까지 해결될 터였다.
메브가 타락자들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게 되리란 건 덤이었다.
적어도 믿는 구석이 하나는 생길 테니까.
그런 이안의 속내를 알 리 없는 메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리 있는 말이군, 이안."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도 말했듯, 흑마법사의 존재를 증명할 외부의 증인이 필요하단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거야 뭐, 이제 일행의 용병이 나만 있는 건 아니잖소?"
"...! 그렇군. 미구엘이 있었어."
메브가 눈을 치켜뜨며 탄식했다.
실제 성격이 어떻든, 미구엘 역시 겉보기로는 산전수전을 겪은 베테랑 용병의 표본 같았으니까.
증인으로 딱 적당한 인물이었다.
미구엘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차차 고민해 보시오. 무엇이 최선일지.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이안이 느긋하게 덧붙였다.
메브가 제안을 받아들이리란 확신이 있기에 나온 여유였다.
지금까지 함께한바, 이런 부분에서 그녀는 이안의 상대가 안 됐다.
"알았다. 그러지."
고개를 끄덕인 메브가, 문득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속을 알 수 없군. 나는 네가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는지부터 물을 줄 알았거늘."
모든 일엔 순서라는 게 있거든.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피식댔다.
"그래서 작위를 꺼내 드신 거요?"
"꼭 그래서만은 아니었다. 너라면 왕국에도 큰 역할을 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
"애석하게도 그건 거절하겠소. 차라리 더 많은 돈이면 모를까."
"돈은 영지가 생긴다면 결국엔 손에 넣게 될 것들이다."
"대신 떠날 수가 없게 되잖소. 왕을 모셔야 하고."
"그편이 떠돌이 생활을 계속하는 것보다야 나을 텐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말이오."
이안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는 이 세계의 결말을 봐야 했다.
그를 이곳에 부른 원흉이 누구인지도 알아내야 했다.
그게 설사 신일지라도, 자신에게 왜 이런 짓거릴 했는지 대답을 들을 생각이었으니까.
답을 들을 수 없다면 적어도 한 방은 먹여야 직성이 풀리리라.
미친 복수귀가 될 수도 있는 성기사를 돕는 것도, 검은 벽의 광기나 어둠에 심취한 것들을 쳐 죽이는 퀘스트를 이어가는 것도, 결국은 그러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그래. 사연이 있겠지."
메브가 이해한다는 듯 읊조렸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바위에 놓인 등잔을 집어 들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도 되겠소? 아까부터 씻고 싶어서 말이오."
"그래. 그러는 게 좋겠군."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안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렸다.
뒤따라 바위에서 등을 뗀 메브가 문득 비틀댔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그녀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이안의 곁에 따라붙었다.
이안이 입을 연 건 그 직후였다.
"그러고 보니, 경의 말씀이 사실이었소."
"…무엇이 말이냐?"
"정말 신이 나를 지켜보고 있더군."
"...!"
***
다음 날. 일행은 정오를 조금 넘어 마을을 떠났다.
새로 산 말의 안장 양쪽에는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 가방이 각자 두둑하게 매달려 있었다.
무덤 숲까지 더는 거쳐 갈 마을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시 돌아올 여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행 사이에 감도는 적막은, 그런 비장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메브는 이안이 던진 화두를 고심하느라 안면 가리개까지 내린 채 침묵했고.
"...."
"...."
어젯밤 이후 눈도 마주치지 않는 필립과 미구엘은, 이안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상 모든 침묵의 중심에 이안이 있는 셈이었지만.
"흐음…."
늘 그렇듯, 정작 그는 그런 속사정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간만의 고요함에 만족하며, 손아귀의 감촉에 몰두했다.
이안이 슬쩍 손을 펼치자, 반투명한 흰색 구슬이 드러났다.
안에 가득 찬 마력이 안개처럼 진득하게 넘실댔다.
사원에서 정화한, 두 개의 마력의 정수 중 하나.
이건 마석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가치를 가진 귀물이었다.
마석은 마력 배터리에 불과하지만.
정수는 한 단계 더 나아가, 마력 증폭기의 역할까지 겸했으니까.
중급 마법 정도밖에 익히지 못한 이안도, 대마법사 뺨치는 화력을 선보일 수 있다는 의미였다.
'소모품인 게 아쉽긴 하지만….'
적어도 정수가 제 역할을 하는 동안에는, 아겔 란에서 그의 적수를 찾아볼 수 없으리라.
다시 꾹 주먹을 움켜쥔 이안의 눈빛이 만족스럽게 일렁였다.
'…이게 제대로 작용하는지 확인해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군.'
그리고 늘 그랬듯, 기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일행은 미구엘이 말한 샛길로 완전히 접어들었다.
이름과 달리 온통 잿빛에 가까운, 붉은 계곡 외곽 지역.
아는 사람만 아는 길이라던 말답게 좁고 등락이 심한 길이었지만.
정작 일행은 전혀 다른 부분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이게 뭡니까? 아예 말을 탈 수도 없잖아요."
말에서 내려 걸음을 옮기던 필립이 불쑥 내뱉었다.
풀과 나무가 점점 울창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제멋대로 솟은 가지들이 기수의 경로를 방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은 다들 말에서 내려, 고삐를 손에 쥔 채 일렬로 이동해야 했다.
미구엘의 바로 뒤였던 덕분에, 필립은 비로소 품고 있던 불만을 토로 하기 시작했다.
"두 나리께서 고생하시잖습니까. 이러다 말이 다리를 삐기라도 하면 상황이 아주 곤란해진단 말입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시벌, 이상하네. 전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미구엘이 목을 긁적이며 중얼댔다.
필립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전이 언제인데요?"
"글쎄. 한 삼, 사 년쯤 됐나…? 어쨌든 오 년까진 안 됐소. 내가 이 길로 내려가서 발크시로 갔던 거니까."
"뭐라고요? 그렇게 오래전에 갔던 길을 호언장담하면서 온 겁니까?"
"실제로도 길이 있긴 있잖소."
저것들 또 시작이네.
맨 뒤에서 걷던 이안이 혀를 찼다.
하지만 굳이 저들의 입을 다물게 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유의미한 정보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묘하게 기분 나쁘단 말이지.'
주위 풍경이 영 불길했으니까.
그 크기가 무색하게, 푸석하고 생기 없어 보이는 풀과 나무들.
동시에 어딘가 낯이 익기도 했다.
"길 똑바로 트십쇼. 댁이 실수하면 큰일 나는 겁니다."
그 와중에도 필립의 핀잔은 멈추지 않았다. 어젯밤, 미구엘에게 덤터기를 썼던 복수를 하리라 다짐한 것처럼.
"거, 그만 좀 뭐라고 하쇼. 최선을 다하고 있잖소. 애초에 출발하기 전에 위험한 길이라고도 했었는데. 조금 더 험해진 게 뭐 대수라고."
"이젠 위험한 데다 험하기까지 하니까요."
"대신 전보다 위험하진 않은 것 같다, 이거요. 전에 왔을 땐 여기 고블린이랑 그렘린이 득시글댔소. 그것들이 다 떠난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수풀이 우거질 리가 없단 말이오."
"고블린과 그렘린이라고?"
불쑥 끼어든 건 이안이었다.
"그, 그렇소. 여기가 놈들의 소굴이었지."
미구엘이 잽싸게 대답했다.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루 거리에 계곡 요새가 있는데 어떻게 여기에 마물이 살았단 겁니까?"
"국경 지대는 어떨지 몰라도, 여기선 병사들이 무작정 마물을 족치러 다니지 않소. 그러다 죽거나 다치면 누구 손해인데?"
코웃음 친 미구엘이 덧붙였다.
"영주님들이 신경 쓸 정도의 손해를 끼치거나, 선제공격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엔 있든 없든 신경도 쓰지 않소. 그러니 나 같은 용병들이 먹고사는 거지."
"만약 이 사이에 놈들이 숨어 있다면, 여러모로 피곤해지겠군요. 그쪽 덕분에."
"그것들이 있으면 이런 수풀이 있을 수가 없다니까? 메뚜기처럼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놈들이오. 의외로 풀도 좋아하지. 그래서 놈들이 살았던 숲에는 껍데기 없는 나무만 남는 거요. 뭘 알고 말해야지. 쯧."
"먹을 수 없는 상태일 수도 있지."
이안이 나지막이 말을 맺었다.
그는 어느새 미간을 좁힌 채로 주위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낯이 익다 싶더니, 이 길이 오염된 숲으로 이어져 있던 건가…?'
"먹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리?"
그의 말투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었는지, 필립이 물었다.
"말 그대로다. 너도 경험해 봤을 텐데. 죽은 채로 움직이는 것들."
"구울… 이요? 마물도 구울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보통은 없지만, 숲 자체가 오염된 마력에 침식된 상태라면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지. 늪지대의 숲이 그렇듯이."
"그 저주받은 밀림에… 들어가 보셨다고요? 그냥 늪지대에만 계셨던 게 아니라요?"
"그래."
아주 주옥같은 곳이었지.
이안은 뒷말을 삼켰다.
늪지 드레이크와 싸울 자신이 없던 때의 이야기였다.
그는 대신 밀림에 발을 들였고, 무작정 나아갔었다.
구울이 되어 살아난 온갖 동물, 살아 움직이는 나무와 미친 요정들까지 상대하면서.
그다지 강하진 않았지만, 놈들도 숲도 끝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안은 결국 며칠 만에 도망쳐 나왔고, 다시는 늪지대 주위의 어떤 밀림에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물론 이곳은 그 밀림과는 조금 경우가 달랐다.
게임에서 경험해 본 바로는, 검은 벽의 광기가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변방의 숲에 광기가 스며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게임에서 그가 퀘스트를 받았을 때는, 영주군도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오염이 진행된 상태였었다.
그리고 그가 볼 때 여긴 그 오염의 시발점에 아주 가까워 보였다.
"밤이 되기 전까지 여길 통과하는 건 무리겠지?"
이안의 물음에 미구엘이 난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껏해야 한두 시간 후면 해가 질 텐데. 그 사이엔 턱도 없소."
"…그럼 싸울 준비를 해야겠군."
"무덤 숲 말고도 저주받은 숲이 또 있다고요? 그것도 요새에서 하루 거리에 있는 이 숲이요?"
필립이 기가 막힌 듯 되물었다.
이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오염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까. 여긴 인적도 거의 없는 숲이고. 소문이 퍼지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할 거다."
식인 식물이 사람을 최소한 수십 명은 잡아먹은 후에 말이지.
그러고 보니 공교로운 일이었다.
오염된 숲이, 무덤 숲으로 가는 샛길과 이어져 있었다니.
게임이었을 때는 그 연관성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현실이 되고 보니 의미심장했다.
'무덤 숲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막으려는 것 같단 말이지. …그래서 내가 이 길을 몰랐던 건가.'
그리 생각한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턴 조심해라. 식물들도 변이되었을 거다."
"…풀과 나무까지 마물이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런 건 한눈에 구별할 수 있으니까, 절대로 건드리지 마라."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든 식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이해 마물이 되었다.
그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육식 나무는 일종의 부비 트랩이었다.
눈에 띄는 열매나 잎사귀를 지녔고, 뭔가가 건드리면 조건반사적으로 공격했다.
덕분에 육식 나무들로 뒤덮여 갈 수 없게 된 지역도 꽤 많았다.
이안이 저주의 근원을 처리한 후에도, 그것들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니까.
'정말 이 근처에서 오염이 시작된 거라면….'
그때보다 이른 시점이라 하더라도, 언제든 마주칠 수 있으리라.
"그게 혹시… 저런 걸 말씀하시는 거요?"
미구엘이 서늘한 목소리로 물은 건 그때였다.
멈춰선 일행이 차례로 옆으로 고개를 내밀어, 미구엘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울창한 나무 한 그루가 길옆에 불쑥 솟아 있었다.
주위의 다른 나무들도 얇지만 위로 높게 자라서, 근처의 하늘을 완전히 가렸다.
그중에서도 한 그루만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서였다.
와서 한입 맛보라는 듯이.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저 나무 바로 앞으로는 지나가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미구엘의 탄식이 이어졌다.
"시벌… 분명히 처음 보는 나무요. 몇 년 만에 저렇게까지 자라는 나무가 정상일 리가 없지."
"그 비정상인 숲으로 우릴 이끈 게 당신입니다, 미구엘."
필립의 일침에, 미구엘이 머쓱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사이에 이 사단이 일어났을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소."
"더 떠들면 저게 어떤 마물인지 몸소 체험하게 해 주지."
이안이 내뱉고서야 미구엘과 필립이 입을 다물었다.
이어진 잠깐의 침묵.
짧게 헛웃음 지은 이안이 말했다.
"뭐 하냐? 출발해."
창백한 안색이 된 미구엘이 마른 침을 삼키고는 내뱉었다.
"…까짓거, 그래. 시벌. 건드리지만 않으면 된다면야."
그가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다리를 후들대고 꺼림칙한 표정으로 나무를 주시하면서도, 어쨌든 멈추지는 않았다.
숨소리도 내지 않는 필립과 태연한 걸음의 메브가 뒤를 따랐다.
둘 다 말고삐만큼은 콱 움켜쥔 채였다.
'아직 덜 자란 놈이군. 다 자라면 내가 아는 모습이 되는 거였나.'
차분하게 관찰하며, 이안이 마지막으로 육식 나무 앞을 지나쳤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주위의 길쭉한 나무들도 저것과 같은 종류였다.
다만 아직 열매도 맺지 못했을 만큼 덜 자랐을 뿐.
다른 육식 나무들도 이 정도라면 아직은 이 길을 통과하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계속 이런 식으로 건드리지 않게 조심만 하면…."
따라오지 않으려는 말의 고삐를 끌어당기며, 그가 결론을 읊조린 순간이었다.
푸스슥-!
방금 지나친 나무의 이파리들이 별안간 일제히 떨렸고.
쉬학-!
뒤이어 새카만 무언가가 이안의 등 뒤로 채찍처럼 떨어졌다.
"...!"
고개를 돌린 이안의 눈에 들어온 건, 잿빛 껍질이 돋은 파리지옥 같은 아가리가 말의 머리통을 콱 움켜쥔 모습이었다.
말이 파리지옥이지, 그 아가리에는 잿빛 껍질이 톱날처럼 돋아 있었다.
이안의 기억보단 훨씬 작은 크기였지만.
머리통이 씹힌 말은 단말마조차 흘리지 못했다.
콰직!
그대로 머리통을 으깨 버린 아가리는 내려온 순간만큼 빠르게 솟구쳐, 울창한 이파리 사이로 사라졌다.
푸화악-!
목 위가 사라진 이안의 말이 피를 뿜어내며 주저앉았다.
핏방울을 뒤집어쓴 이안의 눈에, 뒤늦게 불똥이 튀었다.
"이런… 시발…?"
#019화
산 지 하루밖에 안 된 말인데…!
"이런, 시부럴! 방금 그게 뭐요?!"
미구엘의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이안이 땅을 박찼다.
단숨에 육식 나무까지 달려간 그의 모습이, 가지를 휙휙 타 넘어 울창한 이파리 사이로 사라졌다.
파사사사- 콰직! 카드득-!
나무 전체가 경련하듯 뒤흔들리고 섬뜩한 굉음이 이어졌다.
잠시 후, 커다란 무언가가 나무 아래로 툭 하고 떨어졌다.
뒤이어 가볍게 이파리를 뚫고 착지한 이안이, 그 무언가를 집어 들고 다가왔다.
곧 이안이 손에 든 덩어리를 일행 앞에 내던졌다.
"루 솔라, 맙소사…."
홀린 듯 지켜보던 필립이 비로소 탄식했다.
말의 머리통을 씹어먹은 그 아가리였다. 반쯤 으깨진 말의 머리통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고, 절단된 단면에서 검붉은 액체가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아가리가 달린 나무라니. 뭐 이런 빌어먹을 마물이 다 있답니까?"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원래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들어 변이된 마물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종인 경우가 많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아가리를 응시하던 미구엘의 시선이, 다시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된다면서…? 모가지가 날아갈 뻔했잖소."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이안은 손바닥으로 얼굴의 핏물을 쓸어내리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소리 같은 외부 자극에도 반응하는 것 같군."
"외부, 뭐…? 아무튼, 그럼 이제부턴 소리도 내면 안 된단 거요?"
"차라리 잘됐지. 네놈들 떠드는 소릴 안 들을 수 있으니."
태연하게 대꾸하며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는 말의 사체로 다가가, 안장에 달린 짐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가 하나를 메브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됐으니, 옮겨 달아야겠소."
"그래, 알았… 다."
무심결에 왼손으로 가방을 받은 그녀가, 재빨리 오른손으로 바꿔 들고는 안장에 걸었다.
이안은 왼손 손목을 빙빙 돌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문제라도 있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라."
그렇다면야. 한쪽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덧붙였다.
"대형도 바꿔야겠소. 이놈들이 계속 나타날 것 같으니."
"좋은 생각이군. 그리하지."
"경이 후미를 맡아주시오. 미구엘, 경의 앞으로 가라."
말을 가진 필립이 이안의 뒤에, 홀몸인 미구엘이 메브의 앞에 섰다.
둘을 보호하기 위한 대형이었다.
미구엘이 머쓱하게 말했다.
"그, 내가 앞장서지 않아도 괜찮겠소? 나야 좋지만, 그래도 명색이 길잡이인데…."
"내가 틀린 길로 가면 제때 말해 주기만 하면 돼."
샛길을 돌아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밤새 움직여 최대한 빨리 통과하겠소.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오늘 밤은 잠들기 힘들 테니."
사실은 오염의 근원지를 찾으러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의뢰가 우선이니 미룰 수밖에 없었다.
'길어야 열흘 내로 돌아올 텐데. 그사이에 상황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지지도 않겠지.'
이안이 걸음을 옮기려는 때였다.
"이안."
메브가 문득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오."
"오염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댔지."
"…그랬소만."
"그럼, 지금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오염의 뿌리를 찾아낼 수도 있겠군?"
이안은 뒤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진심이시오?"
올 게 왔구나 하는 표정의 필립이 시야 구석에 걸리는 가운데,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연히. 이런 오염이 번지는 것을 보고도 지나칠 수는 없다."
"...."
이안은 이게 애국심의 발로인지, 아니면 티르 엔의 사도로서의 의무감 때문인지를 잠시 생각했다.
어느 쪽이건 대단한 결정이었다.
혈육의 목숨이 걸린 와중인데.
이것도 암흑시대 스타일인가.
내심 감탄하면서도, 이안은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였다.
"경의 뜻이 그러시다면야…."
내심 바라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메브까지 함께라면 길어야 반나절이면 충분하리라.
"아니, 잠깐만. 이게 무슨 말씀들이십니까?"
미구엘이 허둥지둥 끼어든 건 그때였다.
필립의 말 옆으로 불쑥 튀어나온 그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경로를 바꾸신다고? 그것도 이 우라질 숲속으로?"
"그래."
"그게 뭔…. 마물이 얼마나 있을 줄 알고 무턱대고 가신단 거요? 거기다 나는 왜? 난 무덤 숲까지 가는 길잡이로 고용된 거잖소!"
"갑작스러운 결정에 사과하마, 미구엘."
담담하게 끼어든 건 메브였다.
미구엘이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엥…?"
"차후에 합당한 추가 보수를 지급하겠다. 네가 죽거나 다칠 일도 없을 거다. 약속하지."
미구엘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중얼대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리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뭐…."
감격한 듯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아. 저놈, 아직 제 운명을 모르지.
피식 웃은 이안이 덧붙였다.
"넌 그냥 횃불이나 들고 있어라."
"그래서, 찾아갈 방법은 있소?"
"방법이야 있지…."
이안의 시선이 숲으로 향했다.
그 잠깐 사이에, 그의 눈동자에 은은한 광택이 어른거렸다.
마력 탐지. 고유 특성인 육감까지 깨어나 털이 곤두서듯 예민해졌다.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땅속에 혈관처럼 뻗어 있는 오염된 뿌리들.
내부부터 변이 중인 풀과 나무.
맥동하듯 번지는 마력의 파장.
나이테의 중심을 좇듯, 이안의 시선이 그 중심부로 향했다.
"…일을 끝내고 이 샛길로 돌아오는 건 별개의 문제겠지만."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책임지겠소."
돌아온 대답에, 이안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구엘이 얼굴의 흉터를 꿈틀대며 미소 지었다.
"숲에서 길도 못 찾으면 사냥꾼 출신이라 할 수 없지. 별거 아뇨."
거참 단순한 새끼일세.
"그것만 해도 밥값은 한 거다."
피식 웃으며 내뱉은 이안은, 이윽고 걸음을 옮겼다.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운 숲속으로.
일행의 이동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정해진 길도 없는 데다, 나무와 풀, 넝쿨들이 점점 더 우거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안의 인도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육식 나무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놈들은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이안이 스스로 나무의 공격 범위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육식 나무의 아가리는 매번 이안의 머리를 정확히 노렸지만.
콰직!
오히려 손쉽게 격퇴됐다.
머리만 노리는 것을 알고 있으니, 타이밍에 맞춰 검을 올려치기만 하면 된 것이다.
성체였다면 얘기가 좀 달랐겠지만.
아직 변이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것들뿐인지라, 이런 대응만으로도 아가리를 쪼개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안의 활약 속에서도, 일행의 긴장감은 전혀 느슨해지지 않았다.
해가 졌기 때문이었다.
숲의 어둠은 밀도부터가 달랐다.
필립과 미구엘이 각각 횃불을 들었지만, 어둠을 간신히 밀어내는 정도에 그쳤다.
이안은 그것만으로도 큰 불편함 없이 어둠을 헤집을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벌레 우는 소리도 없다니…."
횃불을 이리저리 비추며 미구엘이 중얼댔다.
이안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곧 이런 고요가 그리워질 거다."
미구엘이 질색하며 내뱉었다.
"제발 말씀 좀 조심하시오. 불길한 소릴 하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말도 모르시오?"
"그러라고 한 말이야."
"엥…?"
"어차피 마주칠 것들이니까."
"그게 뭔. 당연히 최대한 늦게-."
파스스-!
바람 소리가 미구엘의 목소리를 삼키며 주위를 쓸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 소리에 미구엘은 물론 필립까지도 굳어졌다.
소리만 들렸을 뿐, 바람이 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래서 미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들이 생기는 거군."
걸음을 늦추며, 이안이 검을 뽑아 들었다.
파스스스-!
다시 한번 바람 소리가 일었다.
이번엔 소리가 전부가 아니었다.
횃불에 비친 풀과 나무들도 들썩이기 시작한 것이다.
쩌적, 프스스, 쩌저적-!
이어 땅과 나무둥치 아래를 비롯한 곳곳의 땅이 솟구쳤다.
"저런… 미친…."
미구엘이 탄식했다.
기껏해야 반쯤 썩어 비척대는 고블린과 코볼트일 줄 알았건만.
지금 나타나는 것들은 비교도 할 수 없이 기괴했다.
풀뿌리나 넝쿨에 칭칭 휘감긴 채, 전신이 끔찍하게 뒤틀린 상태였으니까.
눈두덩이나 머리에 괴상한 버섯이 자라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덩치까지 커진 건 아니어서, 미구엘의 허리께밖에 오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더 불길해 보였다.
"구울… 이라면서요?"
필립이 망연자실하게 내뱉었다.
이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어쨌든 죽은 놈들인 건 똑같잖아. 저것들은 동충하초긴 하지만."
"동충… 뭐요?"
"천천히 따라와라. 멈추지 말고."
덧붙인 그가 그대로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가장 가까운 숙주 그렘린의 코앞까지 질주한 이안이,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콰직-!
숙주의 머리통이 쪼개졌다.
온몸을 칭칭 감은 풀의 뿌리와 정확히 이어진 부위.
풀썩. 본체를 잃은 몸이 무너졌다.
바닥에 떨어진 풀이 촉수처럼 꿈틀댔다.
푸스스스-!
다른 기생 식물들이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숙주들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키엑! 키에에엑-!
일제히 이안 쪽을 돌아보더니 짐승처럼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서걱-!
달려드는 숙주 한 마리를 더 베어내며 바닥을 구른 이안은, 순식간에 횃불이 닿지 않는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키야아아악-!
그 뒤를 꿈틀대는 식물로 뒤덮인 숙주들이 내달렸다.
"루 솔라여…."
바람 소리와 타격음, 절삭음이 울려 퍼지는 어둠 너머를 응시하며, 미구엘이 멍하니 읊조렸다.
"넋을 잃을 때가 아니다. 미구엘."
그를 일깨운 건 메브였다.
어느새 검을 든 그녀가 미구엘에게 고삐를 내밀었다.
"이안의 말대로 뒤를 따라 이동해라. 천천히."
"저쪽으로요? 그럼, 나리는…?"
멍하니 묻는 미구엘을 등지며 메브가 내뱉었다.
"나는 뒤를 맡겠다. 그러지 않으면 완전히 포위될 테니."
"...!"
눈을 치켜뜬 미구엘이 자연스럽게 후미와 측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꿈틀대는 어둠과 바람 소리.
"뭘 자꾸 멍청하게 있습니까? 나리 말씀 못 들었어요? 따라오십쇼!"
윽박지른 필립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시부럴."
메브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미구엘도 걸음을 옮겼다.
필립의 전진은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미구엘은 그를 조금도 재촉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울리는 괴성과 바람 소리에는 거리감이 전혀 없었고, 눈앞에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썩은 내를 풍기며 널브러진 그렘린과 고블린 사체들. 놈들을 양분 삼아 자라던 풀과 넝쿨의 잔해. 토막 난 육식 나무의 아가리까지.
그 악몽 같은 광경을 이정표 삼아 풀을 헤치며 나아가는 필립은, 그것만으로도 용기 있어 보였다.
"루 솔라여, 부디 찬란한 광명으로 이 필멸자를 굽어살피시고…."
비록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중얼대고 있다 하더라도.
"...!"
그 뒤를 따르던 미구엘의 눈이 불현듯 커졌다.
널브러져 있던 넝쿨 뭉치가, 필립이 다가서자 갑자기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어, 으아악?!"
넝쿨이 순식간에 필립의 다리를 휘어 감았다. 말이 울부짖고 필립도 비명을 토해내며 넘어진 찰나.
퍼억!
달려든 미구엘이 손에 든 횃불로 넝쿨을 내리쳤다.
"떨어져! 이 빌어먹을 새꺄!"
그는 넝쿨과 넝쿨에 휘감긴 필립의 다리까지 마구잡이로 후려쳤다.
놀랍게도, 그게 효과가 있었다.
불이 닿자 넝쿨이 발작적으로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떨어지라고! 당장! 이 개자식아!"
미구엘은 인정사정없이 횃불을 내리쳤다.
"악, 아악! 아아악!"
필립의 비명이 커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넝쿨 때문이 아니라 몽둥이찜질 때문이었다.
"그만! 아악! 놔줬습니다! 놔줬다고요!"
넝쿨이 다리를 놓아준 후에도 이어진 찜질은, 필립이 발악하듯 외치고서야 비로소 끝이 났다.
미구엘이 숨을 헐떡이며 읊조렸다.
"그래 봐야 풀 주제에, 쓰벌…. 까불고 있어."
묘하게 후련한 목소리.
꼼짝도 하지 못하고 널브러진 필립을 돌아본 그가 이내 덧붙였다.
"괜찮소?"
"…괜찮아 보이십니까?"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군. 다행이오."
미구엘이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잠시 바라보던 필립이 입맛을 다시며 붙잡았다.
미구엘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살리려 그런 거니, 이해하쇼."
"죽일 기세였던 것 같은데요…."
목소리를 무시하고 널브러진 넝쿨을 태워 버린 미구엘이 덧붙였다.
"기름 가진 거 있음 그거나 꺼내쇼. 이것들, 잘 타는 것 같으니까."
필립은 재빨리 안장에 달린 짐가방을 뒤지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 곁으로 미구엘이 따라붙었다.
둘 다 고삐를 한쪽 겨드랑이에 말아 끼우고, 기름 주머니와 횃불을 양손에 든 채였다.
"…당신도 정말 용병이긴 했군요."
문득 필립이 내뱉은 말에 미구엘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지금까진 아닌 줄 알았소?"
"뭐… 우리 용병 나리랑은 여러모로 다르니까요."
"시부럴. 비교 대상이 그 양반이면 누굴 가져다 대도 그렇지."
헛웃음을 지은 미구엘이 눈앞의 풍경을 다시금 눈에 담았다.
끝없이 이어진 사체들의 향연.
"혼자서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 것 같소? 국경 지대엔 넘치나 보지?"
"확실히… 그건 그렇지만요."
필립이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이토록 사체들이 즐비하건만.
바람 소리는 여전히 사방에 휘몰아쳤고, 타격음과 괴성, 기합 소리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아직 움직이는 기생 식물들을 간간이 불태우며 얼마나 나아갔을까.
콰직! 콰득!
숙주의 머리통을 내리치고 있는 이안의 모습이, 나무 둥치 아래에서 어슴푸레하게 드러났다.
"후…."
허리를 든 그가 미구엘과 필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온몸에 썩은 피와 내장 조각을 뒤집어쓴 상태였다.
얼굴에 튄 핏물을 닦아내는 표정에 짜증이 묻어났다.
저 모습이 더 마물 같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혀, 형씨! 옆에!"
미구엘이 손을 내뻗으며 외쳤다.
직후, 이안이 다시 움직였다.
키에엑-!
넝쿨을 출렁이며 이안에게 달려들던 그렘린이 그대로 머리통을 얻어맞고 처박혔다.
콰직! 빠각!
그렘린의 목을 양단한 순간 이안의 검이 부러졌다.
이안은 반만 남은 검을 옆에 달려들던 또 다른 고블린에게 내던지고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그의 손에 거짓말처럼 새 검이 들려 나왔다.
"...?!"
내가 잘못 봤나? 미구엘이 눈을 끔뻑이는 사이, 어느새 고블린까지 마구 후려쳐 처리한 이안이 다시 허리를 들었다.
"가성비 더럽게 안 나오네…."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댄 그가 고개를 돌렸다.
미구엘은 그제야 그가 자신들이 아니라, 뒤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드디어 하는군."
이어진 목소리에, 비로소 미구엘도 뒤를 돌아보았다.
"...!"
이내 그의 눈이 커졌다.
어둠 저 너머에서 푸른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푸른 빛이 단숨에 몸집을 불렸다.
신성력에 휩싸인 전신 갑옷이 숲을 대낮처럼 밝혔다.
덕분에 비로소, 미구엘도 밀려드는 마물들의 실체를 제대로 확인했다.
"이런… 미친…."
백 마리를 훌쩍 넘는 엄청난 규모.
한때는 숲의 주인이었을 그렘린과 고블린들은, 남김없이 기생 식물들의 숙주가 되어 새로운 숙주 후보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번- 쩍!
그리고 그것들을 향해, 메브가 검을 내리쳤다.
푸화악-!
푸른 궤적이 숲을 휩쓸었다.
수십은 되어 보이는 숙주들이 달려오던 그대로 썰려 나갔다.
"맙소사…."
연달아 펼쳐진 압도적인 광경에 미구엘의 입이 벌어졌지만.
"진작 좀 쓸 것이지."
이안은 혀를 찰 뿐이었다.
긴장감이 싹 사라진 목소리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메브가 신성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상, 이깟 숙주들의 숫자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이안도 마법을 사용한다면 마찬가지였겠지만, 마력은 오염의 근원지에 있을 놈을 위해 아껴야 했다.
'이미 충분히 초과 업무인데. 이제 얌전히 잔반 처리나….'
푸른 빛이 일순간 깜빡인 것은 그 직후였다.
"...?"
미간이 절로 좁아진 이안이, 시선을 메브에게 돌렸다.
전신 갑옷에 맺힌 신성력이 기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비틀대는 것 같다고 느낄 찰나.
푸확-!
자세를 낮춘 메브가 다시 검을 길게 휘둘렀다.
반월을 그리며 터져 나온 궤적이 뒤따라 밀려들던 숙주들을 다시 한번 양단했다.
하지만 이안은 그것들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고장난 형광등처럼 깜박이는, 메브의 신성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
그리고 다음 순간.
"쿨럭…!"
굳어져 있던 메브가, 안면 가리개 사이로 피를 토하며 허물어졌다.
"...?!"
#020화
피를 토한다고? 갑자기?
이안이 눈을 끔뻑이는 사이, 신성력이 증발하며 메브가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나, 나리?! 나리! 기다리십시오! 제가 가겠습니다! 나리이이!"
거의 동시에, 비명을 내지른 필립이 말고삐를 내던지고 달려나갔다.
'내 팔자에 버스는 무슨. 씁.'
비로소 상황 파악을 끝낸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두고 간 말부터 잡아라, 미구엘."
"엉…? 아, 알겠소!"
미구엘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도망치려는 말의 고삐를 낚아챈 그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잡았소! 그리고?"
이안은 숲의 중심부에 똬리를 튼 오염의 원흉을 떠올렸다.
그를 열 번은 게임 오버시키고, 마우스를 집어 던지게 했던 놈.
다시 그때의 빡침을 경험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짐에서 기름을 꺼내. 많이."
횃불을 안장 옆에 꽂은 미구엘이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사이 이안은 검을 회수하며 곁으로 다가섰다.
"넌 필립을 따라가라."
"알겠… 나 혼자 말이오?"
기름이 든 가죽 주머니를 연달아 내려놓던 미구엘이 고개를 들었다.
눈을 끔뻑인 그가 덧붙였다.
"이 많은 기름은 어디다 쓰시고?"
안장에 걸린 횃불을 집어 든 이안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디다 쓸 것 같냐?"
"그야 당연히…."
미구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 들린 횃불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리 댁이라도 그런 미친 짓은 안 하실 것 같소만."
글쎄다.
고개를 까딱인 이안이 말했다.
"필립에게 리우렐 경만 지키고 있으라고 전해.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말고. 물론, 너도."
"그게 말은 쉬운데…. 하, 시부럴. 정말 안 가실 거요?"
"그럼 나 대신 싸울래?"
튕겨 오르듯 일어선 미구엘이 양손의 말 고삐를 끌어당겼다.
"말 꼭 전하겠소. 살아 돌아오쇼."
그가 뒤도 보지 않고 멀어졌다.
저것들한테 메브를 맡겨도 되나.
이안은 고개를 저으며 기름 주머니를 차례로 집어 들었다.
마지막 하나만 남기고 아공간에 넣은 그는, 주머니의 기름을 횃불에 천천히 부으며 시선을 돌렸다.
숲의 어둠 너머. 살아남은 숙주들이 메브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숫자는 제법 줄어들었지만, 늘어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일행은 이미 오염된 숲에 발을 들였으니까.
보통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마물은 이유를 불문하고 침입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인간을 먹이로 삼는 것들은 더했고, 이 숲을 오염시킨 원흉도 그런 부류였다.
분명 곧 다시 공격을 시작할 터.
그래서 이안은 일행에게 돌아가기 전에 놈부터 제거할 생각이었다.
홀로 싸워야겠지만, 일행을 지키며 밤새 싸우는 것보단 그쪽이 훨씬 나으리라.
"일단은 어그로부터 나한테 돌려놓고… 앗 뜨거. 시발."
읊조리던 이안이 주머니를 든 손을 얼른 뒤로 뗐다.
횃불이 어느새 손잡이까지 태울 기세로 타오르고 있었다.
"뭐 이렇게 잘 타?"
마력 아껴 보려다 구워질 뻔했네.
주머니를 던진 이안은 검을 뽑아 들며 마력을 일으켰다.
눈동자가 잿빛으로 물들고, 산들바람이 그의 전신으로 번졌다.
하위 회색 마법, 바람 칼날.
화르륵-!
흘러내리던 횃불이 바람을 타고 솟구쳤다.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불의 철퇴를 든 듯한 형상.
"…이 정도면 싫어도 보이겠지."
양쪽 손목을 휘휘 돌린 이안이 땅을 박찼다.
쉬학-!
가장 후미의 숙주 한 마리가 어둠을 뚫고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콰직!
달리던 그대로 내리찍은 검에, 숙주의 머리통이 가슴까지 쪼개졌다.
놈에게 부딪혀 감속한 이안은, 옆의 숙주를 왼손의 횃불로 후려치고는 다시 몸을 날렸다.
생사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경험치도 주지 않는 놈들.
움직일 수 없게만 해도, 일행에게 도달하지 못하리라.
키엑-! 키에엑-!
몇 마리가 더 토막 나고서야 근처의 숙주들이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안은 놈들을 지나쳐, 선두를 달리던 다른 숙주를 쪼개 놓는 중이었다.
쒸엑- 콰직!
거의 동시에 육식 나무의 아가리가 떨어졌지만, 이안은 몸을 뒤로 젖히는 것만으로 가볍게 피해냈다.
바람 칼날에 더해 고유 특성인 집중력까지 발휘된 덕분이었다.
움직임과 인지 능력이 함께 기민해진 지금의 그에겐, 모든 게 조금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쩌억! 콰르르-!
숙주들이 연달아 썰리고 불탔다.
때때로 육식 나무의 아가리까지 쪼개며 얼마나 싸웠을까.
콰득-!
숙주 한 마리를 죽이고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던 이안이 멈칫했다.
어느새 사방이 고요해졌다.
"하아…. 하아…."
울려 퍼지는 건 자신의 숨소리뿐.
이안은 비로소 검을 회수하며 시선을 돌렸다.
반쯤 무아지경으로 싸운 것이었지만, 목적은 훌륭하게 달성했다.
사방에 널브러져 움찔대는 숙주들.
그를 향한 증오와 광기를 머금은 마력의 파장과 오염된 뿌리까지.
일행을 노리던 적들을 전부 제거하고 주의도 확실히 끈 것이다.
이윽고, 이안의 시선이 숲의 어둠 너머에서 멈췄다.
악의가 끈적하게 묻어나오는 어둠.
"…겨우 이 정도로 빡치긴."
이제 시작인데. 서운하게.
보란 듯이 횃불을 치켜든 이안이 어둠 너머로 몸을 날렸다.
***
횃불이 유성처럼 숲을 가로질렀다.
키엑-! 키에엑-!
내달리는 이안의 뒤로 섬뜩한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그가 지나치고 나서야 깨어난 숙주들이 추격해 오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안은 멈춰서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달리기만 할 뿐.
'잡몹은 스킵이 국룰이지.'
이건 사실, 그가 홀로 다시 이곳을 찾을 때 쓰려던 전략이었다.
보스만 최단 시간으로 노리는, 속칭 스피드 런.
메브와 함께 오고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뿐, 효율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뒷수습이 문제긴 한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여기서 더 엉망진창이 된다고 티 날 것 같지도 않고.
이안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돌아보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숲 자체가 기괴하게 변해 있었다.
중심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 워억-!
앞을 가로막는 마물 역시도, 더 끔찍한 몰골로 나타났다.
타타탓-! 쉬학-!
거대 숙주의 공격을 흘려내며, 이안은 그대로 뛰어올랐다. 고블린 여럿이 넝쿨에 감겨 융합된 놈의 형상이 차근히 눈에 들어왔다.
놈의 어깨를 밟은 이안이 다시 도약했다.
그어억-!
고함과 파공음이 곧바로 이어졌다.
육식 나무 수준의 반응 속도.
"...!"
꼴에 네임드다 이거지.
이안은 풍차처럼 몸을 돌려 궤적을 틀었다. 넝쿨이 휘감긴 팔뚝이 아슬아슬하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꽈지직-!
대신 손에 든 횃불이 휩쓸려 부러지면서 사방으로 불씨가 튀었다.
손잡이를 미련 없이 내던진 이안이 바닥을 구르며 착지했다.
번쩍이던 시야가 어두워졌다.
동시에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섰다.
거대 숙주 때문은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놈은 제가 휘두른 팔의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자빠졌다.
그의 육감을 서슬 퍼렇게 일깨운 건, 저 너머의 무언가였다.
"...!"
고개를 든 이안은 자신의 시야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빛이 없음에도, 볼 수 없던 것들이 오히려 더 또렷한 형상으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번지는 마력의 파장과 땅속에 꿈틀대는 수많은 뿌리까지.
모든 게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이는 저 너머, 새카맣게 솟은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안의 눈에 그건 수많은 촉수가 꿈틀대는 기둥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저 기둥이 바로 숲을 오염시킨 원흉이자 보스인, 뒤틀린 고대수니까.
그 실루엣을 응시하던 이안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왜 저렇게 크지…?"
놈이 예상보다 거대했다.
게임보다 오염이 덜 진행된 만큼, 당연히 더 작을 줄 알았건만.
"방심할 틈을 안 준다니까."
투덜대면서도 이안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예전과는 다른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계획이 망한 것도 아니고.'
이안은 왼손을 펼쳤다.
손아귀에 흰 구슬 하나가 홀연히 나타났다.
마력의 정수. 곧바로 정수를 움켜쥔 이안이 마력을 일으켰다.
밀어 넣으려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정수에 닿은 마력은 자성에 이끌리듯 내부로 빨려 들어갔다.
솨아아-!
마력과 공명한 정수에서 흰 빛무리가 번졌다.
정수 내부에 응축된 마력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력은 단순한 응축이 아니라, 기하학적인 배열로 중첩되어 있었다.
인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 자체로 마법 술식의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마법이 증폭되는 건가.'
이어진 간지러움에 이안은 손을 펼쳤다. 기다렸다는 듯 정수가 빙글빙글 돌며 떠올랐다.
회전은 손바닥과 약간의 거리가 생기자 느려졌고, 이윽고 자리를 잡은 것처럼 허공에 멈춰 섰다.
손아귀와 정수가 자기장으로 이어진 듯한 묘한 느낌.
"이런 식이란 말이지. ...!"
감탄하며 손가락을 꿈틀대던 이안이 별안간 바닥을 굴렀다.
쒸에엑-!
다음 순간,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쿠웅-!
굉음과 함께 땅을 파고든 것은, 새카만 나무껍질이 비늘처럼 돋은 거대한 아가리였다.
이안 정도는 한입에 삼켜버릴 수 있을 만한 크기. 그 위에 이어진 줄기도 어지간한 육식 나무의 둥치와 맞먹는 굵기였다.
어느새 뒤틀린 고대수의 공격권에 들어온 것이다.
아가리가 둔탁하게 위로 솟구쳤다.
'여기가 최대 사거리인 건가.'
이안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경로를 틀어, 고대수를 중심으로 큰 원을 그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콰득! 콰앙!
뒤틀린 고대수의 아가리들이 이안의 등 뒤로 줄지어 떨어졌다.
저것들은 육식 나무처럼 민첩하진 않았지만, 훨씬 많고 거대했다.
꿈틀대는 촉수처럼 보이는 게 전부 놈의 아가리였다.
'실제로 보니까 더 개 같네.'
게임에서의 기억이 절로 겹쳐졌다.
놈에게 다가갈수록 더 많은 아가리가 떨어지고, 일정 거리부터는 뿌리도 솟구쳐 올랐다.
위아래로 정신을 쏙 빼놓는 합공.
거기다 어느 순간부터는 숙주들도 사방에서 몰려들었는데,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다.
고인 물이라면 모를까. 저놈은 무작정 덤벼들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도록 설계된 보스였다.
다른 몇몇 보스가 그렇듯, 놈을 죽이려면 약점들을 찾아내 공략해야 했다.
물론 지금이라면 정면승부로도 어떻게든 죽일 수는 있겠지만.
'뻔히 약점을 아는데, 굳이.'
늘 그랬듯,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갈 생각 따윈 없었다.
이안은 아공간에서 기름 주머니를 꺼내, 그대로 기름을 흩뿌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아가리들이 땅을 헤집어 놓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놈들도 기름을 머금을 테니 더 좋았다.
주머니가 비면 곧바로 다음 주머니를 꺼내 뿌리는 것의 반복.
그렇게 아공간에 있던 주머니를 다 꺼냈을 때쯤, 앞에 움푹 파인 구덩이가 나타났다.
처음 떨어진 아가리가 만든 흔적.
구덩이를 펄쩍 뛰어넘으며, 이안은 기름이 남은 주머니를 뒤로 던지고는 오른손을 뻗었다.
손아귀에서 불덩이가 솟구쳤다.
기초 적색 마법, 화염구.
퍼엉-!
주머니에 적중해 폭발한 화염구가 사방에 불꽃을 흩뿌렸다.
화르르-!
땅에 덮인 기름에 불이 붙고,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콰직! 쿠웅!
그 위로 떨어진 아가리들에도 마찬가지였다.
불붙은 아가리들이 되돌아갔다.
사위가 밝아지는 가운데 불길 사이를 내달린 것도 잠시.
호오오오-!
뿔피리 소리 같은 괴성이 울려 퍼지더니, 연달아 이어지던 아가리들의 공격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이안이 비로소 속도를 줄였다.
"약점이 없어졌나 했네…."
숨을 고르며 읊조린 그가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에 뒤틀린 고대수의 본모습이 맺혔다.
놈은 나무라기보단 거대한 검은 말미잘에 가까워 보였다.
높고 굵은 둥치 곳곳에 타르 같은 점액을 뚝뚝 흘리는 구멍들이 뚫려 있었고.
그 위로는 수없이 돋은 가지들이 멋대로 휘청대며 서로에게 불을 옮겨붙이는 중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저게 고대수의 첫 번째 약점이었다.
자신에게 일정 이상 불이 붙으면 공격을 멈추고 진화 과정에 돌입하는 것이다.
불이 약점인 건 머잖아 몰려들 숙주들도 마찬가지.
게임을 플레이하며 읽은 공략에는 등유를 충분히 챙겨가서 불을 지르고, 아가리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라고 되어 있었다.
두 번째 약점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물론 저놈을 상대할 당시의 이안은 그런 꿀팁까진 알지 못했다.
대신 그는 더 간단하고 무식한 방법을 택했었다.
몇 개의 적색 마법에 스킬 포인트를 더 투자한 것이다.
'생각해 보니까 그때부터 망캐 테크를 타고 있었…. 찾았다.'
고대수의 주위를 돌며 관찰하던 이안의 눈이 번뜩였다.
둥치 곳곳에 뚫린 구멍.
그중 하나에서 희미하게 번져 나오는 자줏빛을 확인했으니까.
정확한 이름까진 알지 못했지만.
저게 뒤틀린 고대수의 두 번째이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쓸데없이 높이도 있다, 진짜.'
혀를 차며, 이안은 고대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뒤틀린 고대수가 가까워졌다.
오오오….
울려 퍼지던 괴성이 불현듯 잦아든 건, 검을 거꾸로 쥔 이안이 둥치를 향해 도약한 순간이었다.
푸화악-!
둥치에 뚫린 모든 구멍에서 잿빛 수증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
수증기는 단숨에 가지들을 집어삼키고, 달려들던 이안까지 덮쳤다.
바닥을 나뒹군 이안은 놓친 검을 주울 새도 없이 고개를 들었다.
수증기 너머, 여러 개의 아가리가 활처럼 휘어지고 있었다.
곧 일제히 떨어져 내리리란 신호.
하지만 이안은 피하는 대신 왼손을 위로 내뻗었다.
'도대체 언제 끄나 했다, 새꺄.'
이 순간을 대비하고 있었으니까.
휘이이-!
손바닥 한복판의 정수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떤 마법을 쓸 것인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하위 적색 마법, 화염 방사.
불길을 직선으로 뿜어내는 단순한 마법이었지만, 그런 만큼 변수가 적고 효과도 확실했다.
'사거리가 단점이지만 정수가 있으면 충분히…. ...?!'
이안의 눈이 불현듯 커졌다.
휘아아아아-!
정수 내부에 중첩된 마력이 맹렬하게 회전한다 싶더니, 그의 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멈출 수도 없었다.
'이런 미친…?'
순식간에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의 마력이 빨려 나간 다음 순간.
콰아아아아-!
붉게 물든 정수에서, 용의 숨결을 방불케 하는 샛노란 불길이 터져 나왔다.
#021화
사방이 일순간 대낮처럼 밝아졌다.
숨이 턱 막히는 열기와 함께, 이안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콰르르르-
끝없이 뿜어져 나가던 불길이 이윽고 잦아들었다.
이안이 비틀대며 얼굴을 감쌌다.
"아오 내 눈, 시발…."
양손으로 압력을 버티느라 눈을 가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력 소모로 인한 두통과 배신감이 뒤를 이었다.
정보창의 불친절한 문구에 또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기 때문이다.
정수 내부의 마력으로 마법을 증폭시키는 건 줄 알았더니.
착용자의 마력을 빨아들여 증폭시키는 방식이었을 줄이야.
'게임에선 안 이랬던 것… 아.'
이안은 그제야 게임에서도 정수만 단독으로 사용한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날강도나 다름없는 사제들 덕분에, 정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때쯤엔 이미 유물과 마법 무구를 잔뜩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마석이나 정수가 없으면 제 성능을 내지 못하는 것들도 있어서, 정수를 굳이 단독으로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럼 그것들이 정수의 컨트롤러 역할까지 한단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게임의 설정이 억지스럽게라도 나름의 이유를 가지게 된 경우를, 이미 여러 번 경험하지 않았던가.
정수 내부에 중첩된 마력처럼.
자연스럽게 정수를 다시 손에 쥔 이안의 미간이 또다시 좁아졌다.
정수 내부의 마력 밀도가 현저히 낮아져 있었다.
'템에 장착하면 50번은 쓸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개 아깝네.
정수를 아공간에 되돌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시력이 어느 정도 되돌아왔다.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맞춘 것도 잠시.
"허…."
뒤틀린 고대수의 상태를 확인한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놈은 거의 통구이가 되어 있었다.
화염이 관통한 아가리와 가지들은 달궈진 숯덩이처럼 변했고.
화르르-
주위의 가지들은 제대로 꿈틀대지도 못하고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아나콘다를 방불케 하는 뿌리들만 땅을 헤집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등유 괜히 챙겨왔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음 냅다 마법부터 갈겨 볼걸.
허탈하게 읊조리며, 이안은 아공간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이제 저 불쌍한 마물의 고통을 덜어 줄 차례였다.
***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미구엘이 읊조렸다.
말들이 불안하게 투레질하고, 주위로 썰리고 불탄 숙주 몇 마리가 널브러져 움찔대고 있었지만.
그는 숲 저 너머의 밤하늘만 멍하니 응시할 따름이었다.
한 시간쯤 전.
콰아아-
굉음과 함께 웬 불기둥이 밤하늘을 밝히며 솟구쳤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부터는 그저 희미한 빛무리만 일렁이고 있었지만.
"분명히 형씨 작품인데."
그는 여전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기름으로 뭔 짓을 해야…."
읊조리던 미구엘이 굳어졌다.
저벅대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졸라게도 머네, 진짜…."
지친 목소리. 숨까지 참고 있던 미구엘이 비로소 내뱉었다.
"이안…? 댁이시오?"
풀숲을 헤치고 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미구엘이 허물어지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 간 떨어질 뻔했잖소! 그보다, 저기서 대체 뭘 하신 거…?"
횃불을 비춘 미구엘이 다시금 말을 멈췄다.
이안이 잿더미에서 뒹굴다 온 것 같은 몰골이었기 때문이다.
"그… 괜찮소?"
"괜찮겠냐?"
가뜩이나 찜찜해 죽겠는데, 시발.
미간을 구기며 대꾸한 이안은, 뒤틀린 고대수의 최후를 떠올렸다.
놈의 약점에 칼을 꽂은 순간.
원념 가득한 비명과 함께 마력 폭발이 일었다.
크게 위험하진 않았지만, 놈이 통구이 상태였다는 게 문제였다.
충격으로 숯덩이가 된 부분들이 떨어지면서, 사방이 연막탄을 터뜨린 것처럼 개판이 돼 버린 것이다.
뒈질 거면 좀 곱게 뒈질 것이지.
혀를 찬 이안이 멈춰 섰다.
"물."
"...?"
"물 내놓으라고."
미구엘이 잽싸게 움직였다.
그가 내민 수통을 받아 한 모금을 마신 이안은, 나머지로 대충 얼굴과 장갑을 씻으며 덧붙였다.
"자리 계속 지키고 있어. 뭔가 나타나면 태우든 썰든 알아서 하고."
"알겠…."
미구엘은 이안이 자신을 그냥 지나치자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그, 그게 끝이오? 더 하실 말씀 같은 건 없으시고?"
"없어. 닥치란 것 빼고는."
"...."
이안은 필립에게 다가갔다.
횃불을 든 필립은, 이안이 나타난 순간부터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안은 그의 발치에 주저앉은 메브를 내려다보며 멈춰 섰다.
땅에 박은 검에 몸을 기댄 그녀는 간헐적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그게… 나리께서 이리되신 건 저도 처음 봤습니다. 지병이 있으신 것도 아니고요."
필립이 메브를 내려다보았다.
"필시 뭔가에 중독되신 거겠지요. 흑마법은 아닐 테니."
"흠."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답지 않게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메브는 티르 엔의 사도니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신성력에는 기본적으로 부정한 것을 태우는 힘이 있었다.
어지간한 흑마법이나 저주는 범접조차 할 수 없을 터.
하지만, 전투의 여운이 남아 아직 날카로운 이안의 감각은 전혀 다른 느낌을 전해 주고 있었다.
묘한 이질감과 불쾌함.
오염된 마력인가?
이안이 다시금 메브의 전신을 자세히 훑어보려는 찰나.
"그냥 제게 맡겨 주십시오, 나리."
필립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횃불을 땅에 세운 그가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며 덧붙였다.
"이거면 금방 편해지실 겁니다."
이안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걸로 뭘 어쩌게?"
"모르십니까? 상처를 내서 오염된 피를 빼내는 겁니다. 오염된 피가 스스로 극복하실 수 있을 만큼만 남을 때까지, 충분히요."
"...."
이게 또 뭔 미친 소리야…?
이안의 표정을 오해했는지 필립이 말을 이었다.
"물론 피를 한 번에 너무 많이 잃으면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피는 매번 소모되고 다시 만들어지는 거잖습니까. 믿어 주십시오. 전 이미 국경에서 이 시술을 여러 번 해 봤습니다."
"하…."
이안은 결국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 암흑시대의 의료 지식이란 게 얼마나 야만스러운지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온갖 마법과 신비, 신성까지 실존하는 세상인 만큼, 의학 지식의 발전이 더딘 게 당연하겠지만.
막상 역사책에서나 볼 법한 개소리를 듣게 되자 밀린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넣어 둬라. 경이 돌아가시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달리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이안이 대답하려던 그때.
"이안…?"
메브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번졌다.
"왔구나… 기다렸다…."
간신히 덧붙인 그녀가, 기대고 있던 검 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이안의 시선이 검을 쥐는 그녀의 왼손으로 향했다.
덜덜 떨리는 팔. 그리고 긁힌 흔적이 올올이 남은 팔목 보호대.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사이, 필립이 허둥대며 말했다.
"아,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나리. 나리께선 지금-"
"아니, 아니다. 이제 괜찮다. 이만하면 충분히… 우웩…."
갓 태어난 사슴처럼 바들대던 그녀가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나, 나리!"
필립이 철렁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메브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쉬시오."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누른 건 이안이었다.
"마물은 이미 다 처리했으니."
"그런가… 또 네 도움을...."
메브의 몸에 힘이 탁 풀렸다.
기울어지는 그녀의 몸을 받아들며,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경의 왼팔 보호대를 벗겨라."
"예…? 아, 예!"
필립이 허둥지둥 움직였다.
넋이 나간 중에도 익숙한 손길.
곧 메브의 왼팔이 드러났다.
"맙소사… 루 솔라여."
"역시. 그때의 상처군."
뱀이 칭칭 감은 듯한 흔적.
고름이 가득 차 부은 데다, 주위가 검게 물들어 있기까지 했다.
툭툭 불거진 핏줄들이 불길하게 꿈틀댔다.
"나리께서 언제 이렇게 되신 건지… 알고 계신 겁니까?"
"둘라한에게 입은 부상이다."
혀를 찬 이안이 덧붙였다.
"갑옷과 신성력이 막아 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
사실, 이 숲이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든 것만큼이나 의아한 일이었다. 둘라한 따위의 원한이 아무리 깊게 남았다 한들, 신성력을 이길 만큼 강할 리는 없었으니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메브의 신성력으론 이 저주를 정화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안의 뇌리로 문득, 간단한 해답이 스쳐 지나갔다.
'이거, 그냥 내가 루 솔라에게 기도하면 해결되는 거 아닌가?'
빛의 신의 신성이라면 어떤 저주라도 정화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내키지는 않는 선택이었다.
그에게 러브콜까지 보냈던 만큼 큰 힘을 내려주긴 하겠지만.
그러고도 부름을 거절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천벌이 내리리라.
"쯧…."
이윽고 혀를 찬 이안이, 양손을 가슴 앞에 깍지 껴 모아 쥔 순간.
꿈틀-
오른손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멈칫하는 이안의 뇌리로 원초적인 속삭임이 이어졌다.
유일 등급의 반지, 늪지의 원한.
이안의 사역마이기도 한 놈이, 불현듯 사념을 보내온 것이다.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네가 삼킬 수 있다고?'
정보창에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하긴. 그게 전부는 아니지.
이안은 이윽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정보창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거기다 애초에 늪지의 원한은 둘라한의 본체나 다름없던 놈.
놈의 저주를 거둬들일 수 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할 수 있는데 왜 가만히 있었냐?'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명령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안의 몸에 신성이 깃드는 것은 달갑지 않았으니, 그전에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나만 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군.
뜻밖의 공통점에 실소하며, 이안은 장갑을 벗었다.
"경의 팔을 꽉 잡아라, 필립."
"알겠습니다… 만. 뭘 하시려고요?"
"치료."
"어떻게요?"
이안은 대답 대신 오른손을 메브의 팔 위로 내밀었다.
스륵-
중지의 반지가 살아 움직였다.
필립의 눈이 커졌다.
"그, 그게 뭡니까? 그냥 반지가 아니라고요?"
"둘라한이 남긴 원념이다. 지금은 내게 복속된 사역마고."
필립의 미간이 천천히 구겨졌다.
"마물이란… 말씀이십니까?"
"왜. 문제 있냐?"
"왜 없겠습니까! 타락한 자들이나 마물을 가까이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종으로 부리시다니요!"
뭐라는 거야.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지.
코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저 편협한 시각이야말로 이 세계의 보편적인 통념이었다.
이 암흑시대 인간들의 기준에선 이안의 실리적인 사고방식이 오히려 불경스러운 것이다.
"그걸 나리께 사용하신다면 분명, 여신께서도 진노하실 겁니다."
듣고 있던 이안이 툭 내뱉었다.
"사도가 죽도록 두는 것보다 더?"
"예…? 어, 그건, 글쎄요…."
필립이 말문이 막힌 듯 더듬댔다.
이안이 덧붙였다.
"네 눈엔 내가 타락한 것 같냐?"
"그래 보이진… 않습니다만."
"그럼 아가리 닥치고 팔이나 잡아. 한마디만 더 하면 내 진노가 뭔지부터 알게 해 줄 테니까."
"...."
입술을 떨던 필립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메브의 팔을 움켜쥐었다.
검은 실뱀이 기다렸다는 듯 메브의 팔 위로 떨어졌다.
고름 위를 기어간 놈이 상처 한복판을 콱 깨물었다.
검은 핏물이 뭉근하게 번졌다.
번진 피가 선이 되어 흘러내릴 때쯤, 필립의 눈이 커졌다.
"벼, 변화가 있습니다, 나리!"
검은 자국이 가장자리부터 눈에 띄게 희미해진 것이다.
쉬익- 몇 분 지나지 않아, 늪지의 원한이 만족스러운 숨소리와 함께 아가리를 뗐다.
비늘의 윤기가 더해졌을 뿐 겉모습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메브의 팔을 덮었던 검은 자국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물론 뱀이 기어간 듯한 흔적과 고름이 가득 찬 환부는 여전했지만.
'일단 고비는 넘긴 것 같군.'
적어도 육감을 자극하던 불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이 마물이 나리를 치료할 수 있었던 거군요."
그렇다니까, 새꺄.
콧방귀를 뀐 이안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샤아-!
늪지의 원한이 송곳니를 드러낸 건 그때였다.
필립이 화들짝 뒤로 몸을 젖혔다.
"왜, 왜 이러는 겁니까?!"
"글쎄."
이안은 태연하게 원한의 아가리 앞으로 계속 손을 가져갔다.
놈과 이안의 시선이 교차했다.
이안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또 해 봐, 어디.'
대치는 짧았다.
이안의 손끝이 닿은 순간 놈의 아가리가 스르륵 닫힌 것이다.
그대로 손가락을 타고 기어 올라간 놈이, 반지의 형태로 돌아갔다.
필립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정말 괜찮은 겁니까…?"
"길들인다고 본성까지 사라지진 않는 법이지."
아무리 닥치라고 해도 떠들어 대는 네놈처럼.
"단검이나 내놔. 가방에서 붕대랑 술도 꺼내 오고."
"술은 어째서…. …예, 나리."
이안의 눈빛에 입을 다문 필립이 단검을 건네며 일어섰다.
이안은 단검 날을 횃불에 지졌다.
어떤 의미론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가져왔습니다, 나리!"
필립이 붕대와 술병을 들고 돌아왔다.
이안은 술병의 마개부터 열었다.
코끝을 찌르는 독한 냄새.
다행히 맥주보단 럼에 가까웠다.
이안은 술로 손을 씻었다.
'이게 정말 영화에서처럼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경의 팔을 꽉 잡아라, 필립."
환부 끝에 단검 날을 가져다 댄 이안이 속삭였다.
"좀 아플 거요."
검을 쭉 그은 건 거의 동시였다.
끈적한 피와 고름이 번져 나왔다.
곧바로 단검을 내려놓은 이안은, 양손으로 환부를 힘껏 쥐어짰다.
"...!"
메브의 몸이 발작적으로 꿈틀댔다.
하지만 이안, 그리고 자신이 아픈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린 필립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이윽고 이안이 술병을 들었다.
피와 고름이 흥건한 팔뚝 위로 술이 쏟아졌다.
메브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졌다.
"흐윽…!"
쫙 편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안은 묵묵히 남은 피고름을 전부 닦고 환부를 천으로 싸맸다.
응급처치 스킬 덕분에 모든 과정이 제법 그럴싸했다.
이안이 손을 놓자 메브의 몸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저, 정말 치료가 맞습니까? 제 눈엔 오히려 나리를 해치시려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죽이려던 건 내가 아니라 너고.
코웃음 친 이안이 메브를 내려다보았다.
"정신이 드시오?"
안면 가리개 너머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덕분에."
#022화
"나리…!"
필립이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메브가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의술에도 조예가 깊을 줄은 몰랐거늘… 고맙구나, 이안."
"전혀 깊지 않소. 어디서 본 대로 해 본 게 통한 것뿐이지."
농담이라 생각한 듯, 메브가 힘없이 웃었다.
"그렇다기엔…. …그래, 네 말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메브가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비틀대며 일어선 그녀가 덧붙였다.
"보호대를 다시 씌워 다오, 필립. 싸우러 갈 것이다."
"예…?!"
필립이 화들짝 고개를 숙였다.
"재고해 주십시오, 나리!"
"...?"
"아직 몸을 다 추스르지 못하셨습니다. 상처가 덧나게 될 겁니다."
"검을 휘두르는 건 한 손만으로도 충분해. 나는 괜찮다."
"하지만-"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또 이런 촌극을 보게 될 줄이야.
메브가 그를 돌아본 건 그때였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이안?"
"뭐… 일리는 있는 말이오."
이안이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필립의 표정이 밝아졌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네 생각도 그러한가."
반대로 메브의 목소리에는 실망이 묻어나왔지만.
"뭐, 어차피 오늘 밤 경이 더 싸우실 일은 없겠지만."
이안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메브의 투구가 기울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만일 또 네가 홀로 해결하겠다는 뜻이라면-"
"이미 다 끝났단 말이오."
"결국엔 같은 말- 뭐라고…?"
메브가 굳어지는 가운데, 덩달아 눈을 치켜뜬 필립이 말했다.
"그럼 아까 그 소란이, 오염의 원흉과 싸우시느라 일어난 거였습니까? 마물들이 아니라요?"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메브가 휘청댄 건 그 직후였다.
"또… 이렇게 된 것인가…."
부축하려는 필립의 손길을 밀어낸 그녀가 안면 가리개를 올렸다.
붉은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메브는 입가의 핏자국도 닦지 않은 채 이안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것인지 들을 수 있겠느냐?"
"안 될 건 없소만…."
내가 다 하긴 귀찮은데.
시선을 돌린 이안은, 이내 적임자를 찾아냈다.
대화에 끼고 싶어 안달 난 표정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전후 사정은 저 녀석에게 들으시는 게 편하실 거요."
미구엘이 냉큼 달려왔다.
"어디서부터 듣길 원하십니까요?"
메브가 진중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쓰러진 직후부터."
"생각이 통하셨군요. 앉으십시오, 말씀드릴 게 많습니다."
미구엘이 손짓과 발짓까지 더해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메브의 표정이 점점 더 무겁게 가라앉는 가운데, 잠시 말을 멈춘 미구엘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막판엔 불기둥과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게 뭐였는지는, 형씨만 알고 있겠죠."
잘나가다가 끝에 사족을 다네.
이안의 눈빛에 날이 섰다.
재빨리 입을 다문 미구엘이 딴청을 피웠다.
머리칼을 쓸어넘긴 메브가 이안을 올려다본 건 그때였다.
"숲을 오염시킨 원흉의 비명이었겠지. 어떤 마물이었느냐?"
"고대수였소. 원한이 아주 깊어 보이더군."
"원한에 광기가 스며든 것인가…."
"아마도."
"그럼 불기둥은요?"
필립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들었을 텐데, 등유를 챙겨 갔다."
"기름을 태운 거였다고요? 그렇다기엔 불길이 지나치게 컸는데요. 안 그렇습니까, 미구엘?"
"당연히 그건 말도 안-"
대답하다 멈칫한 미구엘이, 이안의 눈치를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분명 형씨만의 비결이 있을 거요. 생각해 보면, 전에도 형씨가 불을 질러서 의뢰를 해결한 적이 있었소. 그때도 대단했지."
"그렇습니까…?"
"중요치 않은 호기심이다, 필립."
미심쩍은 표정으로 되묻는 필립의 말을 메브가 잘랐다.
그녀는 죄책감마저 느껴지는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토록 위험한 마물을 이안 홀로 퇴치했다는 사실이지. …또다시 말이야."
"뭐, 내 입장에도 아예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품에서 손바닥만 한 무언가를 꺼냈다.
"전리품도 챙겼으니까."
미구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씨앗… 이오?"
"그래."
"이렇게 큰 씨앗은 처음 보는데."
"그렇겠지."
이안은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고대수의 씨앗이니까."
그의 눈앞에 정보창이 떠올랐다.
게임일 때의 정보와 같았다.
섭취 시 추가 스킬 포인트.
그런데도 곧바로 먹어 치우지 않은 것은, 이 씨앗에는 사실 숨겨진 연계 퀘스트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옵션은 일종의 미끼인 셈.
예전에는 미끼를 물었었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다.
'퀘스트 보상이 뭔진 모르지만, 그냥 먹어 버리는 것보단 낫겠지.'
필립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고대수의 씨앗이라면… 그것도 오염되지 않았을까요?"
"상관없어. 그래 봐야 씨앗일 뿐이니까. 땅에 파묻기 전까진 별일 없을 거다."
"흐음…."
필립과 메브가 침음하는 사이.
"그럼, 이제 여기서 볼 장은 다 본 것 아니오?"
미구엘이 툭 끼어들었다.
일행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집중됐다.
"오염의 원흉을 없애려고 이 빌어먹을 숲까지 들어온 거잖습니까. 처리했으니 원래 가려던 길을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부담스러운지 자라처럼 점점 목을 집어넣으며 미구엘이 말을 마쳤다.
필립이 손뼉을 친 건 그 직후였다.
"아주 훌륭한 지적입니다! 이제 이 불길한 숲에 있을 이유가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리? …나리?"
필립이 고개를 돌렸다.
메브의 얼굴을 확인한 그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나리…?"
"틀린 말은 아니다."
이윽고 메브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원흉을 조사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
필립의 입이 벌어졌다. 미구엘도 루 솔라를 읊조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당황하지 않은 건 이안뿐이었다.
그는 오히려 길에 떨어진 금화를 발견한 것 같은 눈빛으로 메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메브가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허락을 구하는 게 순서 같군.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안?"
필립과 미구엘이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가운데, 이안이 대답했다.
"원흉을 제거했다 해서, 숲이 정화된 건 아니오. 저 너머엔 아직도 마물이 있다는 뜻이지."
두 남자의 얼굴에 희망이 번졌다.
이안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해가 뜨면 갑시다. 그편이 조사하기에도 편하지 않겠소?"
"아니, 나리!"
필립이 뒤통수를 맞은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미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엔 루 솔라를 찾는 대신, 체념의 탄식만 남긴 채였다.
"옳은 말이군. 알았다. 그러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메브가 곧바로 필립을 돌아보았다.
"야영을 준비하거라. 필립."
"…알겠습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한 필립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해탈한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넌 불침번을 서라."
미구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밤새 말이오?!"
"싫으면 싸우는 걸 네가 하든지."
"…둘이 나눠 서겠단 말이었소. 필립! 댁이 내 뒤에 서쇼!"
미구엘이 후다닥 달려갔다.
비로소 땅에 주저앉은 이안은, 메이스를 벗어 버리고 드러누웠다.
이제야 좀 살겠네.
그가 숨을 내쉴 찰나.
"…그냥 돌아갔어도 괜찮았거늘."
곁에 앉은 메브가 문득 말했다.
피식한 이안이 대답했다.
"나중에 다시 들를 생각이셨잖소. 그럴 바엔 그냥 함께 가는 게 효율적이지."
선심 쓰듯 말하긴 했지만, 메브의 제안은 그에게도 달가운 것이었다.
시간이 촉박해서, 씨앗만 챙기고 도망치듯 빠져나왔었으니까.
어쩌면 전리품을 더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의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메브는 감명받은 듯 탄식했다.
"내일은 내가 선두에 서겠다. 이것까지 사양하진 않았으면 좋겠군."
"편할 대로 하시오."
어차피 싸울 일도 거의 없을 테니.
뒷말을 삼킨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더는, 손가락조차 까딱이고 싶지 않았다.
***
다음 날. 돌아가는 길은 이안의 예상대로 수월했다.
숲이 정화된 것은 아니었으나, 남은 마물 대다수가 햇빛을 피해 숨어든 덕분이었다.
육식 나무 정도만을 간간이 처리하며 나아가길 한 시간여.
"이런… 미친…."
일행은 오염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이안이 그 사실을 알려 줄 필요도 없었다.
"개판일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소."
일대가 온통 잿빛이었을 뿐만 아니라, 불쑥 솟은 고대수의 잔해가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방에 불을 지르신 겁니까? 용케도 불이 번지지 않았군요."
파이고 뒤집힌 흔적이 가득한 땅에 발을 딛으며 필립이 말했다.
"이곳이 먼 과거, 요정들의 숲이었기에 그런 것이다. 필립."
앞서 걷던 메브가 안면 가리개를 올리며 답했다.
"요정이 살던 숲의 나무는 좀처럼 불에 타지 않지. 그래서 왕국의 많은 요새와 진지가 요정들이 살던 숲에 지어진 것이다. 몰랐느냐?"
"처음 알았습니다. 그랬군요…."
"아마 이안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불을 지른 것이겠지."
전혀 몰랐는데.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말을 묶어 둔 미구엘이 꺼림칙한 눈빛으로 고대수를 바라보았다.
"저거 진짜 죽은 게 맞소? 꼴로 봐선 통구이가 된 것 같긴 한데. 더럽게 불길하게 생겨서 말이오."
이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럼 누구한테 물으란 거요?"
"놀러 왔냐?"
"이, 일하러 왔지. 확인하겠소."
미구엘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덩달아 시선을 받은 필립도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랐다.
"뭘 찾아내든 보고부터 해라."
그들의 등에 대고 덧붙인 이안의 걸음이, 비로소 한결 느긋해졌다.
초과 근무는 어젯밤으로 충분했다.
오늘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을 생각이었다.
메브가 그의 곁에 나란히 걸었다.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불쑥 내뱉었다.
"아무래도 흑마법사의 원한을 산 자가 또 있는 것 같다. 이안."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어제, 정수의 오염된 마력이 날 잠식했었다. 난 의식을 겨우 붙잡고 있던 터라 저항할 수 없었지."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이안이 슬쩍 눈썹을 치켜드는 가운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놈의 존재가 느껴지더군. 웃음소리도. 그리고는 살고 싶다면 여기서 발길을 돌리라고 속삭였다."
"…경을 오염시키려 한 게 아니라 경고를 했단 말이오?"
"나 역시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랬다. 각자에겐 각자의 역할이 있으니, 주제넘은 짓은 멈추라더군."
각자의 역할이라….
이안의 미간이 비로소 풀어졌다.
게임의 메브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녀를 피 흘리는 복수자로 만든 것은 왕국의 흑막.
흑마법사도 한통속일 테니, 뭔가 알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원한을 산 자가 또 있다지 않으셨소?"
"그래. 주제넘은 건 적색 나부랭이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으니까. 놈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게 마지막 말이었다."
"...."
이안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적색… 아마도 마법사를 뜻하는 것이겠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다면 앞으로 도움이 될지도 몰라."
그녀를 바라보던 이안의 입가에 비로소 헛웃음이 맺혔다.
'그게 나일 거란 생각은 죽어도 못 하는 거군.'
숯덩어리가 된 고대수를 눈앞에 두고도 말이지.
이안의 미소를 오해한 듯 메브가 덧붙였다.
"뭔가 부탁하려 꺼낸 말이 아니다. 이안. 내가 알게 된 사실을 네게도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시다면야. 알아 두겠소."
이안이 고개를 끄덕일 찰나.
"형씨! 좀 와서 보셔야겠소!"
미구엘의 외침이 이어졌다.
메브의 시선이 돌아갔다.
"뭔가 찾은 모양이군."
"먼저 가 보겠소. 천천히 따라오시오. 뭔가 나오면 알려 드릴 테니."
태연하게 말한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 새끼가, 눈치를 깠단 말이지.'
방금 들은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
고대수 둥치 뒤편.
"시부럴… 아침부터 재수 없게."
"인간 사냥이라도 한 걸까요?"
미구엘과 필립의 목소리는 거대한 뱀처럼 뻗어 나온 두 갈래의 뿌리 사이에서 들려왔다.
"사냥은 무슨. 이 흔적들을 보시오. 땅속에 묻혀 있다가 드러난 거요. 먹은 걸 파묻는 짐승도 있소?"
확실히 전리품은 아니네.
이안은 혀를 차며 뿌리 사이로 들어섰다.
"뭐냐?"
미구엘이 그를 돌아보았다.
"시체가 나와서 말이오."
"그게, 숫자가 좀 많습니다, 나리."
필립이 옆으로 비켜서며 덧붙였다.
그들이 보던 광경이 드러났다.
뿌리가 파헤친 땅 위로, 다 썩은 시체들이 삐죽삐죽 솟아있었다.
"확실히… 많군."
그 앞에 선 이안이 읊조렸다.
게임의 기억이 희미하게 이어졌다.
고대수 주위의 반쯤 묻힌 시체들.
하지만 아직 숲이 다 오염되지도 않은 지금 시점에 시체 더미라니.
'내가 모르던 설정이 있는 건가.'
유골을 관찰하기 시작한 이안을 바라보며, 필립이 물었다.
"나리가 보시기에도 사냥당한 게 아닙니까?"
"그래. 그보단… 제물 같은데."
"제물이라니요?"
"이상했거든. 이렇게 거대한 고대수가 숲 한복판에 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적이 없다는 게. 누군가는 발견할 법도 한데 말이야."
이안의 눈동자가 한곳에서 멈췄다.
미구엘이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그럼 누군가가 이 빌어먹을 마물을 키우려고 시체를 바쳤단 거요?"
"모르지. 정황상 그쪽이 더 자연스럽다는 것뿐."
이안이 허리를 숙였다.
그는 곧 유골 사이, 땅에 반쯤 파묻혀 있던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흙범벅이 된 묵직한 쇠고리.
그가 고리에 묻은 흙을 터는 사이, 뒤에서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뭔가 나왔느냐?"
"경께서 찾으시던 단서인지는 모르겠소만…."
이안이 손에 든 것을 던졌다.
"이런 게 나왔소. 시체 사이에서."
반사적으로 받아든 메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고리 한쪽을 장갑으로 긁으며 다가온 메브가 이윽고 멈춰 섰다.
"설마 했거늘. 왕국의 수갑이 맞군. 인장이 남아 있다."
메브가 수갑을 내밀었다.
고리를 고정하는 부분에, 흐릿한 사슴뿔 문양이 드러나 있었다.
필립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이 시체들이… 전부 왕국의 죄인이란 말씀이십니까?"
"그건 이제부터 확인해 봐야지."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네가 잘하는 걸 할 시간이다, 미구엘."
"그게 뭔. …설마, 진심이시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한숨 쉰 미구엘이 몸을 돌렸다.
"삽 챙겨 오겠소…."
#023화
유골이 땅에 줄지어 놓였다.
발굴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열 구가 훌쩍 넘었고 온갖 유품도 줄줄이 딸려 나왔다.
"...."
그것들을 바라보는 메브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흙범벅이 된 해골에, 아우인 버논의 얼굴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아니.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곧바로 부정했지만, 이미 떠오른 생각을 떨치기란 쉽지 않았다.
차라리 어둠과 맞서다 장렬히 전사한 것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이름 모를 마물의 양분으로, 구원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면.
혹은 어둠 속에 버려져 끝끝내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라면.
'만약 그렇다면….'
까드득, 그러쥔 주먹에서 쇠 긁히는 소리가 번졌다.
'내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그녀의 눈동자가 늪에 가라앉듯 칙칙하게 일그러지던 그때.
"보면 볼수록."
이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건 우리가 찾는 놈의 소행은 아닌 것 같은데."
퍼뜩 정신을 차린 메브가 시선을 돌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심드렁한 얼굴로, 손에 든 뭔가를 응시하는 이안.
필립이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흑마법사의 짓이 아니라고요?"
"일단 방식이 달라. 놈은 마력을 이용하지. 산 제물이 아니라."
"…그리고요?"
"이 시체들. 반 정도는 알다시피 죄인이지만, 나머지는 병사다. 아마 죄인을 호송하던 자들이겠지."
이안의 시선이 유골들을 훑었다.
"이 정도 규모의 정규군을 제물로 삼는 짓은 나 같아도 안 해. 심지어 그게 오른델의 영주군이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을 거다."
"오른델… 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이안이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시신을 뒤지다 찾아낸 목패였다.
반쯤 썩어 인장은 흐려졌지만, 하단의 글자는 알아볼 수 있었다.
데이브. 오른델.
차근히 확인한 필립이 읊조렸다.
"정말이군요. 정규군에게만 발급되는 신분증이 맞습니다."
"숨어 사는 흑마법사가 건드리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큰 상대지."
묵묵히 듣고 있던 메브가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득력이 있는 말이군."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오. 아직은."
명패를 본 순간, 이안은 어렵지 않게 적당한 흉수를 떠올렸다.
그의 추론은 거기에 단서를 죄다 끼워 맞춘 것에 불과했다.
'표적 수사가 뭐 별건가.'
어차피 죽여야 할 자였으니, 틀렸다 해도 딱히 문제 되진 않으리라.
"그러니까…."
이안은 느긋하게 본론을 꺼냈다.
"직접 확인할 생각이오. 이게 사고인지, 누군가의 음모의 결과인지."
"직접 확인한다니?"
"아직 다음 계약의 목적지를 정하지 않으셨잖소."
"...!"
메브의 눈이 비로소 커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음 계약이라니요?"
어리둥절하게 묻는 필립을 무시한 채, 이안이 말을 이었다.
"오른델에는 분명 이들을 아는 누군가가 있겠지.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소?"
"…그래. 알았다. 그리 정하지."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은 항상 시원하시군.
덕분에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이안이 만족스럽게 목패를 품에 넣는 사이.
"계약을 또 하셨다고요, 나리?"
필립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필요한 일이었다, 필립. 보다시피, 흑마법사 말고도 배덕자들이 더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나리…."
"잡소리 그만하고 말이나 챙기러 가라, 필립."
이안이 말을 잘랐다.
"말이 죽으면 널 타고 갈 거니까."
"농담하실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리."
"...."
"농담이 아니시군요. 알겠습니다."
저건 언제쯤 눈치란 게 생기려나.
이안이 필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차는 그때.
"그… 슬슬 말씀들 다 나누신 것 같은데 말이오."
헐떡이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덩이 아래, 땀 범벅이 된 미구엘이었다.
"그만 파도 되겠소? 더 파도 나오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옆에는 유골 더미가 쌓여 있었다.
일행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삽질을 계속한 결과물이었다.
이안은 메브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녀는 다시 유골들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못내 눈에 밟힌다는 듯이.
"경."
"...?"
뒤늦게 자신을 마주 보는 메브를 향해, 이안이 툭 덧붙였다.
"기도를 올려 주실 수 있겠소?"
메브의 눈이 커졌다.
"기도라고 하였느냐?"
"이들이 마물이 되어 되살아나도 이상하지 않잖소. 경이 안식에 들게 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소만."
"훌륭한 판단이다. 기꺼이 하지."
반색한 메브가 앞으로 나섰다.
구덩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그녀가 기도문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안은 푸른 신성력을 머금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 전, 유골을 응시하던 그녀의 일그러진 눈빛을 떠올리면서.
'알기 쉬워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이안이 볼 때 그건 틀림없는 광기의 징후였다.
기도를 부탁한 건 그래서였다.
신성으로 광기를 잠재우려고.
물론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다.
이미 균열이 일어난 이상, 아주 작은 계기로도 다시 시작되리라.
앞으로 남은 일들을 생각하면, 그런 계기는 차고도 넘쳤다.
고민에 빠진 것도 잠시.
이안의 눈동자가 평소의 냉랭한 그것으로 되돌아왔다.
'…그렇다고, 이렇게 공들인 퀘스트를 실패로 끝낼 순 없지.'
***
오염된 숲을 빠져나온 이후, 여정은 거짓말처럼 평화로워졌다.
며칠째 습격은커녕 마물과 마주치는 일조차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평화를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
메브는 발작하듯 눈을 떴다.
그녀의 망막에, 피눈물을 흘리는 버논의 잘린 머리가 아른거렸다.
숨을 헐떡인 것도 잠시.
'이젠 이런 악몽까지 꾸는군.'
쓴웃음을 지은 메브가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먹구름 낀 하늘.
마차의 떨림이 비로소 느껴졌다.
'평화가 불안하다니. 이 무슨 어리석은 조바심인가.'
메브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등받이 너머의 마부석으로 돌아갔다.
메이스를 등에 멘 익숙한 뒷모습.
'뭔가 있다면, 이안이 가장 먼저 알아챘을 것이거늘.'
언젠가부터, 그녀는 자신보다 이안의 판단을 더 신뢰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 혼자서는 결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테니까.
필시 불안과 의문에 사로잡혀, 옳지 못한 결정을 내렸으리라.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랬듯이.
하지만 반대로, 이안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계속 증명해 왔다.
이 마차만 해도 그랬다.
짐수레에 더 가까운 이 마차는, 길가에 버려져 있던 것이었다.
미구엘은 이게 객사의 흔적이랬다.
습격이나 약탈이 휩쓸고 간 끝에 남겨진, 일종의 묘비라는 것이다.
불길하니 건들지 말자는 그의 말을 무시한 건, 당연히 이안이었다.
이게 더 효율적이라는 이유였다.
결과적으론 또 그의 말이 옳았다.
말의 부담이 줄면서 행군에도 속도가 붙었고, 일행도 교대로 쉬면서 체력을 보충할 수 있었으니까.
메브 역시 부상의 여파를 거의 떨쳐낸 상태였다.
'이러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대의마저 저버리게 될까 두렵군. 그러니 차라리, 앞으로도 내가 아니라 이안을….'
"깨셨소?"
그때, 이안이 불쑥 내뱉었다.
메브는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가 얼마나 잠들었었지?"
"두어 시간쯤. 적당한 때에 일어나셨소."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곧 무덤 숲에 도착할 거요."
"...!"
메브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앙상한 나무들과 그 아래로 깔린 잿빛 안개.
"언제부터…. 왜 미리 알려 주지 않은 것이냐?"
"그, 그게 말입니다…."
미구엘이 난처한 얼굴로 우물댔다.
"내가 말하지 말라 했소."
대신 답한 건 이안이었다.
그가 메브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미리 아셨다면 지금처럼 쉬지 않으셨을 거잖소."
말려 올라갔던 메브의 눈썹 끝이 다시 내려앉았다.
"…그랬군. 알았다."
그녀가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 또다시 미구엘의 시선을 느낀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그만 힐끔대고 타라. 새꺄."
눈알 파 버리기 전에.
이안이 마차에서 뛰어내리자, 미구엘이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교대하고 싶어서 본 게 아니오."
"그럼 뭔데?"
머뭇거리면서도 마부석에 오른 미구엘이 말을 이었다.
"그, 따지고 보면 말이오. 내 의뢰는 이제 완수된 것 아니오?"
"호오."
이안의 얼굴에 감탄이 번졌다.
지금 이런 말을 꺼낼 줄이야.
"여기까지 안내하는 게 의뢰였잖소. 그러니까 여기서부턴…."
"엄밀히 말하면 실패지."
"어떤 추가적인, 엉…? 실패라니?"
"약속한 시일을 지나쳤잖아?"
순간 굳어졌던 미구엘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 그건 그 빌어먹을 숲에서 하루를 날려서 그런 거잖소! 그건 참작을 해 주셔야지."
"그래서 네가 살아 있는 거다. 돈을 토해내지도 않은 거고."
"...."
"뭐, 어쨌든.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이안이 뒤편을 턱짓했다.
"가든지. 우린 계속 들어갈 거다. 넌 이대로 내려서 돌아 나가."
미구엘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잿빛 안개가 깔린 음산한 숲.
넷이 올 땐 별일 없었지만, 홀로 돌아갈 때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어 보이는 광경이었다.
이윽고 고삐를 고쳐 쥔 미구엘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냥, 내가 의뢰를 충실히 완수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오. 지금부턴 의리로 가는 거요."
"그러시겠지."
어차피 못 갈 거 알고 한 말인데.
코웃음 친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하여간, 용병이란 것들의 잔머리는 하나같이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메브가 뒤이어 몸을 일으켰다.
"너도 타거라, 필립. 걸으면서 몸을 좀 풀어 두고 싶구나."
"…감사합니다, 나리."
후들대던 필립도 짐칸에 올랐다.
이안과 나란히 걷기 시작한 메브의 시선이, 이내 무릎을 스치는 안개에 고정됐다.
축축하긴커녕 화장터의 안개처럼 메마른 느낌이 드는 안개.
바스락대는 듯한 불쾌한 감촉 사이로, 오염된 마력이 전해졌다.
낯익은 감각이었다.
그녀가 가진 오염된 정수에서 번지던 것과 같았으니까.
"놈의 마력이군…."
메브는 놀라지 않았다.
이안을 믿어서 뿐만 아니라, 흑마법사의 경고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소. 놈의 마력이지."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미구엘이 문득 한숨을 내쉰 건 그때였다.
"아무래도, 혼자서라도 숲을 나가는 게 맞았던 것 같소."
"그새 마음이 바뀌었냐? 정말 엄청난 의리군."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미구엘이 고개를 저었다.
"나 같은 잡졸이 끼기엔 너무 큰 판 같아서 말이오. 경험상 꼭 분수 모르고 낀 놈이 죽더란 말이지."
이안의 웃음이 짙어졌다.
주제 파악만큼은 확실한 놈이었다.
심지어 그에게 도움이 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몰라도, 경은 절대 너랑 필립이 죽게 두지 않으실 거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떠넘길 명분이 생긴 셈이었으니까.
메브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둘은 내가 반드시 지킬 것이다. 여신께 맹세하지."
"맹세라고 하셨습니까…?"
어리둥절하게 되물은 미구엘의 얼굴에 이내 감격이 번졌다.
"나리께선 정말이지, 제가 아는 모든 기사를 통틀어 가장 명예로운 분이십니다."
"감사할 것 없다. 나 역시 이유가 있기에 그리하는 것이니."
"엥…? 이유라굽쇼?"
이안이 불쑥 걸음을 멈춘 건, 메브가 뭔가 말하려던 그때였다.
덜컹, 마차도 뒤이어 멈춰 섰다.
"아윽. …갑자기 왜 멈춘 겁니까?"
등받이에 머리를 박은 필립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미구엘이 어리둥절하게 말했다.
"내가 멈춘 게 아니오."
"뭐라고요…?"
"이것들이 갑자기 왜 이러지."
미구엘이 고삐를 찰싹 후려쳤다.
하지만 말들은 콧김을 뿜어 댈 뿐, 더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소용없을 거다."
이안이 저만치 앞을 응시하며 내뱉었다.
그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메브가 미간을 좁혔다.
"…불길한 마력이 느껴지는군."
필립이 눈을 깜빡였다.
"불길한… 마력이라니요?"
"저기서부턴 마경이다."
대답한 건 이안이었다.
"들어가서 나온 자가 없다더니. 애초에 나올 수가 없는 거였어."
타락하거나 저주받은 땅.
완전히 어둠에 물들어 세상의 법칙마저 뒤틀린 장소들을, 이 세계에서는 마경이라 불렀다.
"마차는 두고 가야겠군."
결정을 내린 메브가 필립과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필요한 짐을 챙기거라."
미구엘이 눈을 치켜떴다.
"그 전에 설명부터 들으면 안 되겠습니까, 나리? 방금 형씨가 들어가면 못 나온다고 한 것 같은데요."
"신경 쓸 거 없어."
이안이 심드렁하게 말을 잘랐다.
"흑마법사를 죽이면 사라질 테니까. 아마도."
"아니, 뭐 그런 무책임한…."
"그냥 책임지고 죽여 줄까?"
미구엘이 냉큼 몸을 돌렸다.
그사이 가방을 등에 멘 필립이 굳은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각오는 했습니다만, 예상보다 더 떨리는군요."
"방심하는 것보단 낫지. 선두에 서게 될 텐데."
멈칫한 필립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선두라니요? 그게 무슨…."
그의 목소리가 이내 잦아들었다.
이안과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 것이다.
숲에서 앞장서겠다는 자신을 향해, 꼭 그렇게 해 주리라던 이안의 눈빛이 특히.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어떻게 잊겠어?"
낯이 하얗게 질린 필립이 메브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메브가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내뱉은 말이니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구나, 필립. 이번 경험이 네게 교훈을 남기길 바랄 뿐이다."
미구엘이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린 건 그때였다.
망연자실한 필립과 눈이 마주친 그가, 안개 쪽을 턱짓했다.
"뭐 하쇼? 얼른 안 서고."
"...."
#024화
안개는 마경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엄청나게 자욱해졌다.
"후우… 후우…."
선두를 걷는 필립의 얼굴에는 일말의 여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검과 방패를 바짝 치켜든 그가,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나리. 제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습니까…?"
"그래."
이안이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미구엘이 그를 곁눈질했다.
"여기서 어떻게 길을 찾으시는 거요? 사냥꾼인 나도 방향조차 모르겠소만."
"잘."
"…그게 끝이오?"
"그런데. 불만 있냐?"
이안의 시선에 재빨리 앞을 돌아본 미구엘이 중얼댔다.
"그럴 리가. 이런 비법을 맨입으로 배우려는 게 도둑 심보지. 암…."
어차피 넌 배워도 못 하거든.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자욱한 안개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보고 있는 건 안개에 잔뜩 섞인 오염된 마력이었다.
안개와 함께 선회하는 마력의 결이 신기루처럼 일렁였다.
이게 일종의 이정표였다.
무덤은 이 중심부에 있을 테니까.
마력의 결을 가로지르다 보면 도착할 수 있으리라.
'어떻게 이걸 다 유지하는 거지? 타락한다고 마력이 무한정 샘솟진 않을 텐데.'
전에는 해 본 적 없던 의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가 이런 잡생각을 할 정도로 느긋한 건, 이 숲엔 사실 위험한 마물 따윈 존재하지 않아서였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죽은 숲.
물론 숲 자체가 미로인 데다, 오염된 마력이 스며들어 침입자를 끝내 죽음에 이르게 만들긴 했지만.
길을 찾는 방법을 아는 이상,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나아갔을 무렵.
한순간 시야가 밝아졌다.
"어…?"
어리둥절하게 멈춰 선 필립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거 설마… 도착한 겁니까?"
"아마도."
이안이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칼로 자른 듯이 끝난 안개가 잿빛 장막이 되어 펼쳐져 있었다.
필립과 미구엘이 거의 동시에 주저앉았다.
"제가 정말 해낼 줄은 몰랐습니다. 루 솔라여… 감사합니다…."
"나도 댁이 해낼 줄 몰랐소. 명 짧아지는 소리가 들리네, 염병할…."
주접들 떨고 있네. 이제 시작인데.
이안은 콧방귀를 뀌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훤히 드러난 공터에 고대 요정 유적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 한복판, 반파되어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훤히 드러낸 건축물이 바로, 지하 무덤의 입구였다.
"저곳인가…."
안면 가리개를 올린 채 같은 곳을 바라보던 메브가 중얼댔다.
이안과 눈빛을 교환한 그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느긋하게 뒤따르면서, 이안은 게임에서의 기억을 헤집었다.
지하 무덤은 게임에서 처음 등장한 본격적인 던전이었다.
그런 만큼 전형적이기도 했다.
개미굴처럼 이어진 거대 미로.
공략 루트도 두 갈래였다.
빙 돌아가며 중간 보스를 상대하고 흑마법사와 만나는 정석 루트.
그리고 흔히들 숏컷이라 부르는, 기본적인 트릭으로 감춰진 지름길.
게임에선 보스전을 끝내고서야 그 존재를 알게 됐었지만, 이번엔 처음부터 지름길을 택할 생각이었다.
'안 그럴 이유가 없지.'
전리품을 놓치는 것도 아니고 추가 퀘스트가 있지도 않았으니까.
메브가 계단 앞에 멈춰 섰다.
그녀의 곁에 선 이안은, 계단 아래의 어둠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싸울 준비는 되셨소?"
"물론.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메브가 결연하게 내뱉었다.
이안이 피식댔다.
"어차피 물러설 곳도 없을 거요."
"맙소사, 루 솔라여…."
그때, 뒤에서 탄식이 이어졌다.
"허미, 시부럴. 산 넘어 산이네."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뒤따라온 필립과 미구엘이었다.
망연자실하기 그지없는 표정들.
이안이 무시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럼, 이제 내가 선두에 서겠소."
미구엘의 눈이 커졌다.
"엥? 이렇게 바로 가신다고? 잠깐 마음의 준비를-"
준비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코웃음 친 이안이 보란 듯 계단에 발을 들였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얼굴인 필립과 미구엘, 굳은 안색의 메브가 차례로 그 뒤를 따랐다.
곧, 지하의 어둠이 일행을 삼켰다.
***
저벅, 저벅-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유독 크게 메아리쳤다.
주위는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미구엘이 횃불을 켰지만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빛은 불과 몇 걸음 앞을 간신히 비췄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현상이었다.
이 세계의 어둠은, 그저 단순한 빛의 부재가 아니었으니까.
거기다 계단은 겉보기와 달리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었다.
무덤 자체에 어떤 영구적인 고대 마법이 깃들어 있다는 증거였다.
공간을 구부리고 휘어서, 외부에서 보는 것과 실제를 다르게 만드는.
이안이 볼 땐 그야말로 편의적인 설정이었지만, 어쨌건 이 세계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얼마든지 실존했다.
한참 이어진 침묵을 깬 건, 뜻밖에도 메브였다.
"지하에 도착하면, 잠시 기도를 올려야 할 것 같군."
무심하게 이어지던 이안의 걸음이 느려졌다.
"뭔가 문제라도 생기셨소?"
메브가 흉갑에 손을 얹었다.
"이곳에 들어서고부터 성흔의 공명이 약해지고 있다."
"성흔…?"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 메브가, 이윽고 진심임을 깨달은 듯 말했다.
"사도로 선택받은 순간 영혼에 새겨지는 낙인이다. 이를 통해 신께 감응하며, 신성을 부여받지."
그런 원리였다고…?
이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루 솔라의 성상이 뇌리를 스쳤다.
기도를 올릴 뻔했던 때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번이나 영혼을 저당 잡힐 뻔한 것이다.
'이 빌어먹을 세계는 신들도 통수를 치네.'
사도에 대한 실낱같은 미련조차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 세계 인간들에겐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일지 몰라도, 그에겐 노예 계약에 불과했다.
메브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신성이 선명하게 느껴지지 않는군. …어쩌면, 이 또한 마경의 영향인지도 모르지."
"알겠소."
이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력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지만.
앞에 들은 말에 비하면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얘기였다.
애초에 신성력은 흑마법의 천적.
흑마법사가 뭔가 대비를 해 뒀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어차피 잡몹 정리에는 아무 영향 없을 텐데. 그거면 됐지, 뭐.'
보스전 때 눈치껏 빠져 주면 더 좋겠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이안이 어깨를 으쓱일 찰나, 메브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혹여 여신께서 답을 주지 않으시더라도, 짐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염려하지 말거라, 이안."
피식 웃은 이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런 걱정은 한 적도 없소."
계단은 퀴퀴한 공기의 맛이 입안 가득 느껴질 때쯤 끝났다.
필립과 미구엘은 당장이라도 폐소 공포증이 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공간만 넓어졌을 뿐, 어둠은 여전히 그들을 집어삼킬 것처럼 짙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가 어둠에 짓눌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도를 올리셔도 될 것 같소."
주위를 훑던 이안이 말했다.
맹수의 그것처럼 일렁이는 그의 눈은, 어둠 너머를 꽤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부서진 석상의 잔해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넓은 석실.
"알았다."
메브가 검을 역수로 뽑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 끝을 바닥에 찍은 그녀가 눈을 감았다.
입술만 달싹이는 기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렇게 아무것도 없다니…."
횃불을 이리저리 비추던 미구엘이 중얼댔다.
필립이 고개를 갸웃하며 속삭였다.
"그게 왜 이상합니까?"
"여기 묻힌 시체가 내가 들은 것만으로도 수백이오."
"그런데요?"
"유골이 하나도 없잖소. 댁 같으면 이런 불길한 곳에 들어와서, 시체를 깊숙이까지 가져다 버리겠소?"
"어… 그러게요…?"
입을 뻐끔댄 필립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이안의 미간이 이윽고 좁아졌다.
"정말 몰라서들 묻는 거냐?"
"뭘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오히려 되묻는 필립을 보며, 이안은 정작 자신이 흑마법사에 대해 자세히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혀를 찬 그가 말했다.
"이 주문쟁이 놈은 자길 사령 술사라고 했었다."
"사령… 술사요?"
"사령술은 시체와 망령을 다루지."
"...."
필립의 입이 벌어졌다.
흑마법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음을 전혀 생각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저 막연하게 사악하고, 끔찍한 주문이리라 생각했을 뿐.
거의 사색이 된 미구엘이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시체를 되살리고 망령을 부리고 그런다는 말씀이시오?"
"아마도.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말도 안 돼… 그렇게 엄청난 힘을 가진 자가 왜 숨어만 있겠소? 왕국을 몇 번은 뒤집어엎을 텐데."
"못 그럴 이유가 있겠지."
이안은 대충 어깨만 까딱였다.
짐작이 가는 부분은 있었지만.
정말이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놈의 야망은 오늘로써 막을 내릴 테니까.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고…."
덧붙이던 이안이 순간 멈칫했다.
미간을 살짝 좁힌 것도 잠시.
"그래. 올 게 왔구만."
묘하게 후련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그가, 어둠을 돌아보았다.
"뭐, 뭐가 온단 겁니까…?"
그 모습에서 오히려 불길함을 느낀 필립이 물었다.
"사실 주문쟁이 놈은 한참 전부터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었거든."
"예에?!"
"그런데도 너무 조용해서 슬슬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이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역시. 여기까지 무방비인 건 말이 안 되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둠 너머에서 흐릿한 빛이 피어올랐다.
고개를 돌린 필립과 미구엘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혈관에 피가 돌기 시작하듯, 보랏빛 선들이 천장과 벽면에 빼곡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그게 끝없이 이어진 문자와 기호의 집합체라는 것을 깨달은 필립이 멍하니 뇌까렸다.
"고대어…?"
"주문 회로다. 무덤의 마법 기관이 작동하기 시작한 거야."
"고대 요정의 주문이라기엔 너무… 불길하게 생겼는데요…?"
"흑마법사 손에 들어간 주문이 멀쩡하겠냐?"
"…아."
게임에서 마법 기관이 작동한 건, 던전을 반쯤 진행했을 무렵이었다.
지하 무덤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시점이기도 했다.
게임에서와 같다면, 가장 먼저 시작되는 것은….
쿠르릉-
등 뒤에서 울려 퍼진 굉음에, 미구엘이 펄쩍 뛰어올랐다.
"으악?! 아니, 이런, 미친…?"
뒤를 돌아본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거대한 돌벽이 계단 앞에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입구를 완전히 막은 벽 한복판에, 고대어가 홀연히 떠올랐다.
유적의 타락을 증명하듯 검붉은 빛을 머금은 채로.
"이게… 대체…."
읊조린 미구엘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은 돌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어둠 너머를 응시하고 있을 뿐.
절걱, 절그럭- 절그럭-
희미한 소음이 이어졌다.
미구엘도 비로소 이안과 같은 방향을 돌아보았다.
주문 회로 가운데에도 여전히 어둠에 휩싸인 통로 너머.
절걱- 절그럭-
기묘한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둠이 구더기가 들끓듯 일렁였다.
수십 개의 보라색 안광과 함께, 살아 움직이는 해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령술로 되살아난 망자들.
"...."
미구엘의 입이 멍하니 벌어지고, 필립도 뒤늦게 얼어붙는 가운데.
절걱, 절걱 절걱-
둑이 터지듯, 해골들이 통로를 비집고 밀려들기 시작했다.
"너희는 경을 지켜라."
내뱉은 이안이 몸을 날렸다.
"엥? 잠깐만! 형씨! 또 혼자 싸우시려고?!"
내달리는 그의 뒤통수로 미구엘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럼 너희가 싸울래?
속으로 읊조리며 홀을 가로지른 이안은, 석상의 파편을 연달아 딛고 도약했다.
쉬아악-
바람이 전신을 휘감는 사이.
마력이 아른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눈 앞에 펼쳐진 통로를 훑었다.
복도를 가득 채우고, 그 너머까지 끝도 없이 이어진 해골들. 사이사이로 구울의 모습까지 보였다.
'존나 많긴 하네.'
단순히 숫자로만 치면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 가장 많았다.
심지어 이게 전부도 아니었다.
기관이 작동한 이상, 무덤의 거의 모든 언데드들이 몰려오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안의 눈빛에는 그다지 위기감이 묻어 나오지 않았다.
'무장도 허접하고 자아도 확실히 없어 보이고. 고작 이런 것들한테 당하면 살아남을 자격도 없지.'
물론 지하 무덤의 위험 요소는 이게 전부가 아니지만.
길만 막으면 되는 당장은 별로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였다.
활강하듯 통로로 접어든 이안이, 그대로 메이스를 내리찍었다.
콰직!
돌진에 반응도 하지 못한 해골의 두개골이 박살 났다.
안광이 바스러지고 온몸의 뼈가 우수수 허물어질 찰나.
푸확-!
이안의 주위로 폭발하듯 돌풍이 휘몰아쳤다.
돌풍에 휩쓸린 해골들이 뼛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휘몰아치는 방벽.
발사체나 돌진을 막아 주는 이 하위 회색 마법은, 이렇게 공격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살상력이 크진 않고, 머리를 없애지 않으면 되살아나는 이 언데드들에겐 더 그렇겠지만.
콰직-
공간을 확보한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굴러가는 두개골을 짓밟으며 착지한 이안은,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메이스를 치켜들었다.
빠직! 빠각!
굴러다니는 머리통들이 닥치는 대로 터져 나갔다.
검이었다면 날이 몇 번은 부러졌을 마구잡이식 타격.
하지만 메이스는 부러지긴커녕 휘어지지도 않았다.
"후…."
인근의 두개골을 모조리 으깨 버린 이안이 비로소 일어섰다.
튕겨 나갔던 언데드들이 어느새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놈들을 응시하는 이안의 눈동자에 흐릿한 마력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