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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10

1화

"드디어...."

모니터 속 바쁘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감격에 겨운 눈으로 바라봤다.

5년 6개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플레이 한 끝에 마침내 출시 후 단 한 번도 공략되지 않았던 게임 '로스트 크로니클'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모든 군주와 지도자가 죽어 어부지리로 얻은 직위지만 최악의 캐릭터 '이안 드 모너'로 군주가 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뭐야, 그냥 이렇게 끝난다고?"

수천 판의 게임을 플레이 하며 기대했던 해피 엔딩은 어디 가고, 마주한 엔딩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힘들게 지켜 낸 인류의 터전이 불타고,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시기만 조금 변했을 뿐, 다른 베드 앤딩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결과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조소하듯 [Bad Ending]이라는 글자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배드 엔딩 000. 끝과 시작]

"하, 이건 뭐 놀리는 것도 아니고."

무려 0~999, 1,000개의 배드 엔딩을 전부 모았다.

한 번 정도는 해피 엔딩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역시는 역시.

-진짜? 멸망 엔딩이라고? 와 개발자들 양심 어디?

- 역시 배드 엔딩 수집가 ㅋㅋㅋ

- 뭐 군주 단다고 없던 병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당연하지 않나?

- 군주 된 시기가 너무 늦었음. 클리어 조건이 전쟁 시작 전까지 군주 되는 거였는데 전쟁 막바지에야 겨우 됐으니까.

- 그건 불가능 아님?

- 절대 불가능.

- 그래도 배드 엔딩 전부 모은 건 세계 최초 아님?

- 아직 로크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뭘 하든 세계 최초 아님?

맞다.

로스트 크로니클에는 단 하나의 캐릭터와 단 하나의 목표밖에 없다.

바로 '이안 드 모너'를 몬스터의 침략 전쟁 전까지 군주로 만들 것.

다른 RPG 게임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주인공인 '이안 드 모너'가 가진 디버프였다.

무려 해제 불가능한 디버프 '역대 최악의 망나니'를 가진 이안은 매력, 호감도, 신뢰도 –200의 디버프를 가지고 시작한다. 심지어 첫 직업이 '노예 검사'로 고정되어 있어 초반에는 아무리 많은 히든피스를 알고 있어도 써먹을 수 없다.

고작 한 달이 지나기 전 대부분의 게임 공략 방송인들이 공략 불가를 선언한 망겜 중의 망겜.

이제 이 게임을 공략하고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손에 꼽는 몇 명밖에 남지 않았다.

'거기에 목숨 건 내가 미친놈이지.'

모니터 속 죽음을 맞이한 이안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게임만큼은 제대로 공략해 보고 싶었는데, 이번 회차를 진행하면서 더 이상의 도전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다음 회차는 언제 시작함?

- 오늘 방송 접고 내일 시작하지 않을까?

- ㄴㄴ 공략왕은 로크에 미친 인간임. 오늘 바로 시작한다에 한 표

- 6만 명이 보고 있는데 설마 여기서 접겠냐 ㅋㅋ

반쪽짜리. 아니 반의반 쪽짜리 성공.

게임 속 이안은 군주의 자리에 올랐지만, 인류는 멸망을 막지 못했다.

심지어 레벨이 200임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경비대장보다 약했고, 게임 속 인류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동시에 이게 내 최선의 공략이다.

아쉬움과 후련함이 반씩 섞인 목소리로 토해 내듯 선언했다.

"로스트 크로니클 공략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 ?

- 오늘 방송 벌써 접음?

- 아, 이제 왔는데 좀만 더하다가 가.

- 로크 공략 접는다는 거 아님?

- 평생 콘텐츠인데 접을 리가 있겠냐?

'나도 평생 콘텐츠라고 생각했지.'

매번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때마다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메모부터 길거리 부랑자가 가지고 있는 쓰레기까지 모든 오브젝트가 의미를 지니는 '로스트 크로니클'인 만큼 공략을 도와줄 히든피스가 어딘가 숨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 더 열심히 찾아보면, 이번엔 그 지역에 가 보면, 드래곤을 찾아내면, 수많은 가능성이 클리어를 이끌어 줄 거라 믿었고 끝없는 패배 속에서도 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냈다는 사실에 즐거웠다.

하지만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는 법.

"이번 회차를 진행하면서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현재 버전의 로스트 크로니클은 이 이상 공략이 불가능합니다."

이번 회차는 말 그대로 천운의 연속이었다. 1% 확률로 몇 번이나 죽음을 모면하고, 0.001% 확률로 적을 죽이고 살아남는, 다시는 없을 천운의 연속.

"어떤 히든피스가 있다고 해도 현재 상태에서는 정복 전쟁 전까지 군주가 될 수 없어요."

노예에서 벗어나는 데 1년, 신뢰도 디버프를 해소하는 데 최소 2년, -200으로 시작하는 호감도를 0까지 끌어 올리는 데 다시 2년.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몬스터의 침략이 시작된다.

성검을 가지고 있어도, 황제의 옥쇄를 가지고 있어도 무시받는 주인공 '이안'은 절대 시간 안에 군주의 자리에 설 수 없다.

- 결국 공략왕도 포기하는구나 ㅠㅠㅠ

- 그럼 이제 로크 공략하는 사람 없는 거 아님?

- 애초에 노예에서 벗어나는 사람도 거의 없음. 이제 진짜 불가능하다고 봐야지.

- 이제 배드 엔딩 다 봤는데 ㅠㅠ

- 이렇게 포기하기는 너무 아까운데. 찐막ㄱ?

아쉬운 마음에 채팅창을 읽던 중 눈에 띄는 채팅이 보였다.

- 그럼 공략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은 뭔가요?

5년 차 구독 배지를 달고 있는 시청자.

'방송 초창기부터 계속 봐 왔던 사람이었던가?'

아이디가 익숙한 걸 보니 방송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한 시청자가 분명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아쉬운 마음도 더 클 거라는 생각에 잠시 고민한 뒤 답했다.

"…시간,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 흠… 독에 중독된 망나니라는 설정 아니었나요?

주인공 '이안 드 모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독에 중독되어 모든 걸 잃어버린 몰락 귀족이라는 설정이다.

"차라리 독에 중독된 시점부터 플레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중독자나 노예 검사나 플레이 하기 어려운 건 똑같으니까요."

게임 속 모든 캐릭터가 전쟁 발발 직후 모너 가문이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라며 모너가의 몰락을 아쉬워하는 만큼, 가문의 힘이 있다면 시간 안에 군주가 되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닐 터.

답답한 마음에 내뱉은 말에 답하듯 채팅이 올라왔다.

- 그럼 한번 해 보세요.

"네?"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모니터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시겠습니까?]

[YES / NO]

[특전 - 게임 시작 10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주의 - 동기화가 필요합니다.]

[※주의 – 동기화 후 해제가 불가능합니다.]

뭐지? 설마 저 구독자가 개발자였나? 동기화라니? 세이브 파일을 지우고 설정을 바꾼다는 건가?

오랜 방송으로 노곤해진 정신이 순간 번쩍거리며 떨리는 마음으로 확인 버튼을 눌렀다.

'진짜 개발자인가? 3년 동안 패치 한번 없었으면서 이런 특전을 준다고? 정말?'

[동기화가 진행됩니다… 1%]

동기화가 진행된다는 메시지가 나타남과 동시에 졸음이 쏟아졌다.

'무리하긴 했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14시간 동안 공략 방송을 진행했고 마지막 회차를 진행하면서는 잠도 방송 켜고 잤으니까.

'그래도 마지막이다! 한 번만 더 해 보자!'

[동기화가 진행 중입니다… 50%]

최소한 시간이 더 주어졌다는 걸 확인하고 저장한 뒤에 잘 생각으로 억지로 눈을 부릅뜨고 모니터를 바라봤지만,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눈이 스르르 감겨 왔다.

'아, 방송은 끄고 자야 되는데....'

하긴 뭐, 방송하다 자는 게 한두 번인가, 다들 그러려니 하겠지. 로딩하는 시간 동안 잠깐 눈만 감았다가 일어나야겠다.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전송을 시작합니다.]

* * *

"으아아아아악!"

쪽잠을 깨운 건 온몸을 지지는 듯한 통증이었다.

"아아아아악!"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비명이 쏟아져 나오고,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파, 아파!'

고통에 눈도 뜨지 못한 상태로 발작하듯 손을 움직이니, 낯선 밧줄의 촉감과 함께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딸랑!

"아아아악!"

너무 아프다. 쏟아지는 눈물과 콧물 사이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비명을 지르며 발악하듯 손을 움직여 종을 울리는 것뿐.

"도련님! 도련님!"

낯선 목소리가 들렸지만 의아함보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살려, 살려 주세요! 너무 아파!"

피부에 닿는 공기가 소름 끼치도록 차갑다. 살갗을 스치는 이불이 날카롭게 피부를 베어 내는 듯했다.

"제발, 제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자, 낯선 여자가 손을 맞잡으며 속삭여 왔다.

"도련님, 도련님, 참으셔야 합니다."

'못 참겠다고! 아픈 걸 어떻게 참아!'

"병원, 의사, 응급실!"

밀려오는 통증에 문장조차 형성하지 못한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낯선 목소리의 여자는 여전히 참으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도련님, 도련님, 참으셔야 합니다. 제발요, 제발. 참으셔야 해요. 이제 정말 며칠만 더 있으면...."

손을 꼭 잡은 여자는 당장이라도 울 듯한 목소리로 빌듯 속삭였다.

'안 돼, 죽기 싫어.'

도대체 어떻게 이 고통을 참으란 말인가.

온몸을 불태우는 것 같은 작열통에 손을 내치고 휘저었다.

'아까 그 종. 종을 울려야 해.'

어떻게든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발작하듯 움직이자 손끝에 까끌까끌한 줄이 느껴졌다.

'이거다!'

혹시나 손을 잡았던 여자가 방해할까 싶어 재빨리 끈을 당기며 소리쳤다.

"살려 줘!"

딸랑! 딸랑! 딸랑!

"도련님...."

미친 듯이 줄을 잡아당기며 목이 쉬어라 소리 지르자, 체념한 듯 씁쓸한 여자의 목소리 너머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이런, 도련님이 또 아프신 건가?"

"예."

간사한 남자의 목소리와 어딘지 모르게 날 선 여자의 대답.

"약! 아파!"

아쉽게도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너무 심했다.

온몸에 불을 지지는 듯한 통증이 번지고, 희미하게 방 안에 부는 바람과 함께 온몸에 참을 수 없는 한기가 퍼지길 반복했다.

"그렇게 약을 제때 드셨어야지… 쯧."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확인했어야 하는데...."

약? 약이 있다고?

약이라는 소리가 울리는 귓가에 퍼졌다.

어떻게든 고통을 끝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약!"

"예, 예, 도련님. 약을 드리죠."

낯선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차가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지자, 마법처럼 모든 고통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하아, 하아, 하아...."

낯선 사람들이 내 방에 있지만 무슨 상관일까. 내가 도련님인데.

'응? 도련님? 내가? 잠깐, 여긴 어디지?'

억지로 뜬 눈 사이로 붉은빛의 방이 보였다. 적색 이불과 노란 불빛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와 침대 맡에 주저앉아 내 손을 잡은 여자.

"이게 무슨...."

무엇보다 믿을 수 없는 건 눈앞에서 빛나고 있는 익숙한 시스템 창이었다.

[중독되었습니다.]

[독을 섭취하지 않으면 통증이 점차 심해집니다.]

[독을 계속 섭취할 경우 사망합니다.]

[현재 중독 의존도: 57%]

로스트 크로니클, 게임 속 시스템 창이 눈앞에서 빛나고 있었다.

'중독? 설마 이안의 몸에 들어온 건가?'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띠링!' 하는 맑은 알림음과 함께 퀘스트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 메인 퀘스트 1: 생존! ]

중독에서 벗어나십시오. 중독 의존도가 100이 되면 퀘스트에 실패합니다.

7일간 독을 섭취하지 않거나 의존도가 0이 되면 중독에서 벗어납니다.

퀘스트 보상: ??

실패 페널티: 칭호 획득 - 노예 검사

'이게 도대체 뭔....'

만약 진짜 게임 속이라면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상태창'

명령어에 대답하듯 눈앞에 반투명한 상태창이 나타났다.

이름: 이안 드 모너

칭호: 모너가의 망나니

직업: 소공작

『특성』

유능한 무능력자

부동심(不動心)

스틸하트

<상태: 중독됨. 중독 의존도: 57%>

<칭호에 의해 신뢰도, 매력, 호감도가 대폭 하락합니다.>

지난 6년 동안 지겨울 정도로 봐 왔던 익숙한 형태의 상태창은 이곳이 로스트 크로니클 속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멸망이 예정된 세상의 망나니에게 빙의하다니.

새 게임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방식으로 시작됐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http://blog.naver.com/jayplemedia1

ⓒ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화

일단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고개를 돌려 아직도 손을 잡고 앉아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올해가 몇 년도지?"

로스트 크로니클 '군주 모드'의 시작은 제국력 783년.

"네? 773년입니다, 도련님."

"딱 10년 전이군."

"네?"

무슨 소리냐는 듯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여자를 뒤로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퀘스트에 적힌 '노예 검사'는 퀘스트에 실패하면 10년을 잃어버릴 거라는 시스템의 경고가 분명하다.

'이안은 게임 시작과 동시에 노예 검사가 되어 쫓겨나니까.'

히든피스를 찾아 떨어진 휴지 조각에 적힌 낙서마저 읽어 왔던 나는 노예 검사가 된 이안이 모르고 있던 숨겨진 정보와 히든피스를 알고 있지만, 노예 검사가 되면 이용할 수 없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일단 중독에서 벗어나야 해.'

무엇보다 아까 느꼈던 통증을 다시 겪을 수는 없다. 당연히 7일 동안 약을 끊고 견디는 것도 불가능하니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도 전에 긴장이 풀린 몸에 졸음이 쏟아졌다.

이안으로서 로크에 들어온 첫날, 나는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의지한 채로 잠이 들었다.

* * *

"도련님, 일어나세요."

따사로운 햇볕. 난생처음 느껴 보는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과 포근한 침대.

"도련님, 일어날 시간입니다."

나를 부드럽게 깨우는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역시 꿈은 아니었나....'

붉은빛이 감도는 방 안, 어제 내 손을 잡아 줬던 하녀가 수프와 빵, 베이컨이 탐스럽게 담긴 트레이를 끌며 나를 불렀다.

"도련님, 식사는 하고 주무세요."

올려 묶은 허리까지 오는 붉은색 머리카락, 오똑한 코와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은 입술. 애정을 가득 담아 날 내려다보는 커다란 눈까지.

어제 처음 본 얼굴이지만, 난 이 여자를 알고 있다.

"레이나?"

"네, 도련님."

레이나.

'로스트 크로니클'에 등장하지 않지만, 이안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캐릭터.

게임 속 그녀에 대한 묘사를 바탕으로 그녀의 팬클럽이 생겼을 정도로 인기 있는 캐릭터였다.

'이안이 그만큼 그리워했으니까.'

친모가 데려온 하인의 딸이라는 레이나는 세상 전부가 이안을 증오하는 순간에도 이안을 챙겨 줬다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다.

'이안이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하는 이유가 저 여자 때문이었지.'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이안은 끝까지 살아남아 달라는 그녀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해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노예 검사로 팔려 나가면서도, 세상의 박해와 증오를 겪으면서도 삶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든 여자.

"도련님?"

"아, 아니야."

봄에 핀 꽃처럼 화사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를 잠시 바라보다 보기 좋게 썰린 빵을 잡아 물었다.

'일단 독부터 해결해야 하는데....'

당장 독의 정체를 알 수 없으니 성직자를 불러야 하나 의사를 불러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빵을 씹어 넘김과 동시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중독되었습니다. 중독 의존도: 59%]

"뭐?"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빵을 먹었을 뿐인데 중독됐다고?

'설마....'

이어서 수프를 한 숟가락 떠먹자 역시나 메시지가 나타났다.

[중독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이어서 물과 베이컨을 먹자 역시나 중독되었다는 알림이 나타났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당황한 내 모습을 본 레이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지만,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 먹었던 건 '약'이나 '치료' 따위가 아니라 독이다.

거기다 이안을 중독시키려는 악의가 가득 담긴 식사까지.

문뜩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나는 어제 분명 치료를 막으려고 했어.'

꼭 잡은 손으로 참아야 한다고 빌듯 속삭이던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했다.

'그녀와 이안 둘 다 약이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어제 느꼈던 통증으로 유추해 볼 때 이안은 오랜 시간 동안 '치료'를 피해 왔을 것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작열통에 정신을 잃을 만큼.

"어제가 며칠째였지?"

혹시나 하는 물음에 레이나가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5일째였습니다. 도련님이 무슨 일이 있어도 약을 먹지 못하게 막아 달라고 하셨는데...."

역시. 이안도, 그녀도 약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송하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한 뒤 말을 이었다.

"레이나, 약을 며칠 끊었더니 기억이 뒤죽박죽이야. 내가 왜 약을 끊었지?"

"그건...."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레이나에게 다시 물었다.

"레이나, 날 좀 봐. 내가 지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내가 왜 약을 끊었지?"

분명 이안은 레이나에게 약에 대해 설명하고 약을 끊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정보와 현실의 틈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이 레이나밖에 없는 만큼, 그녀로부터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 내야 한다.

"그… 그게...."

이어서 한 레이나의 설명은 꽤 당황스러웠다.

"내가 널 때렸다고?"

"예. 약과 술에 취해서 그랬다며 이미 몇 번이고 사과하셨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때린 건 그게 처음이었나?"

"그건...."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피하는 그녀의 모습은 충분한 답이 되었다. '망나니'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는 막 나갔겠지.

누가 뭐래도 시스템이 인정하는 '망나니' 아닌가.

"그럼 널 때린 게 처음이었겠군."

"예, 도련님."

그런 망나니조차 자신을 아껴 주는 레이나에게 폭력을 가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 고통을 감수하고 약을 끊으려고 했다니.

"혹시 그 약이 독이라는 것도 알고 있나?"

"몇 번이고 말씀하셨지만, 영지 내의 의사와 학자 모두 독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독이 아니라고 했다고?"

"예. 벌써 몇 번이나 확인했지요. 술과 음식에도 약이 있다고 하셨지만, 성직자들의 해독 주문에도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설명에 눈앞에 있는 식사를 잠시 바라봤다.

'영지 내 의사와 학자 전부 썩은 건가? 아무리 로크의 성직자가 썩었다고는 하지만 독을 보고도 모른 척했을 리는 없는데....'

시스템이 중독되었다고 판단한 이상 독이 쓰인 건 확실하다. 폭력성을 키우고 이성적인 판단을 방해하는 극독이.

'의사도, 학자도 심지어 성직자조차 발견하지 못하는 독이라....'

무력이 없다시피 한 이안을 플레이 했던 만큼 이 게임 속 독과 약, 소모품이라면 그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테마핀? 아니야, 졸프뎀? 흠… 학자들도 모르는 걸 보면 새로운 독일 것 같은데....'

순간 독 하나가 번뜩이며 머릿속을 지나갔다.

'설마?'

이 시기에 나타날 리가 없는 독이지만 설명과 정확히 부합하는 독.

'퀸즈머시인가?'

인간과 몬스터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제국이 배포하는 기적의 진통제, '퀸즈머시'.

초보 플레이어들은 중상자도 완치한 뒤 전선으로 보내는 이 기적의 약을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하지만, 약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자신이 틀렸다는 걸 깨닫게 된다.

'미쳐서 아군을 공격하는 병사들과 약물 없이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는 군대 때문에 게임 오버를 당하지.'

공략을 알고도 피하기 어려워 몇십 번이고 봤던 배드 엔딩의 시작이 바로 퀸즈머시다.

[배드 엔딩 No. 009 희망이라는 이름의 절망]

하지만 치료가 불가능해 보이는 이 독에도 치료법은 존재한다.

'내가 찾았으니까.'

다만, 퀸즈머시는 몬스터들이 정복 전쟁을 벌이는 15년 후에서나 제국에 의해 배포되는 약물이다. 이 시점에 있을 리 없는 약물이 어떻게 약소국의 변방까지 흘러들어 왔을까?

"혹시 영지에 제국에서 온 인물이 있나?"

"음… 섭정관님이 제국에서 유학했다고 들었습니다."

"섭정관?"

"예. 공작님이 실종… 아니, 출타하신 후로 왕국에서 파견한 백작님이요. 도련님도 친절한 사람이라며 좋아하셨습니다."

레이나는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말에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면서도 질문에 친절히 답했다.

'제국에서 흘러들어 왔을 확률이 높은데. 15년도 더 전부터 제국은 약을 보유하고 있었던 건가.'

몬스터의 침략을 막기 위해 급하게 만든 약물이라던 게임 속 제국의 주장과 달리, 어쩌면 그들은 이 시기부터 약물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중요한 약을 왜 변방의 소공작에게 사용했을까?'

"일단, 독에서 벗어나는 게 먼저야."

"도련님, 한 번에 끊는 것은 어려워 보이는데 조금씩 양을 줄여 보는 건 어떨까요?"

"내가 생각하는 독이라면 완전히 끊어 버려야 해. 일단 내가 말한 물건들을 구해 와 줘."

물과 음식에 약이 있을 정도라면 이미 영지 전체가 적이라고 봐야 한다.

믿을 수 있는 건 레이나 단 한 명뿐.

"부탁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밝게 웃으며 화답했다.

"도련님이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지, 레이나가 들어드릴게요."

* * *

재료를 구하기 위해 레이나가 나간 뒤 텅 빈 방 안에 앉아 생각을 거듭했다.

방에서 나가지 않고 게임만 하던 내가 어떻게 미치지 않고 있을까.

'부동심과 스틸하트 때문인가.'

몇백 번이고 플레이 해 본 이안의 특성은 눈 감고도 말할 수 있다.

[부동심(不動心)]

영웅의 후손이 지닌 흔들리지도, 부러지지도 않는 마음이 전승되었습니다.

-모든 종류의 상태 이상 저항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스틸하트]

죽음을 앞에 두고도 초연하던 철혈군주의 기개가 전승되었습니다.

-모든 종류의 상태 이상 저항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말도 안 되는 상태 이상 저항력 덕분에 퀸즈머시를 먹고도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거야.'

마지막으로 그보다 더 중요한 특성이 남아 있다.

[유능한 무능력자]

자신이 가르친 인물의 특성이나 스킬을 습득합니다.

-개인 훈련 시에만 적용되며 단체 훈련 시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농부보다 약한 이안이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아 끝끝내 군주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만든 사기급 특성.

누구에게든 검을 가르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검술과 관련된 특성을, 마법을 가르치면 마법과 관련된 특성을 얻을 수 있다.

'이론상 모든 특성을 얻을 수 있으니 사기 특성이기는 하지만....'

게임 속 마나홀이 파괴된 채로 노예 검사로 팔려 나가는 이안은 검술도 마법도 배울 수 없다. 단 1의 마나를 가진 이안에게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 아무 의미 없는 특성인 셈.

결국 이안은 길 찾기, 응급치료, 점술, 도주, 야바위, 약초학, 독 등 온갖 잡다한 기술을 익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저급 특성들을 모을 수밖에 없다.

'유능한 무능력자. 그 말 그대로지.'

넓고 얕은 지식을 가졌지만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는 일반 병사만도 못한 무능력자. 있어 보이지만 쓸데없는 특성.

'마나홀이 파괴되기 전인 지금, 모든 건 나에게 달렸다.'

비록 10년의 세월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전부 믿을 수는 없겠지만 굳건한 마나홀과 소공작이라는 우월한 지위를 이용한다면 군주가 되는 것도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일단 영지부터. 레이나가 돌아오기 전까지 적과 아군을 구별해야 한다.'

이안은 몸을 일으켜 방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게임 속 설정대로라면 분명 어딘가 일기장이 있을 텐데....'

아무리 약에 절어 망나니 생활해 왔다고는 하지만 무려 부동심과 스틸하트를 특성으로 가진 이안이다.

'미치기 전의 기록을 읽어야 해.'

누가 적인지, 누구를 의심했고 누구에게 의지했는지, 부동심과 스틸하트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알아야 할 정보가 너무 많다.

'찾았다.'

한참 동안 방안을 뒤진 후에야 그 누구에게도 들킬 수 없다는 듯 침대 매트리스 속에 숨겨져 있던 일기장을 찾은 이안의 눈이 빛났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http://blog.naver.com/jayplemedia1

ⓒ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화

모너가의 섭정관으로 파견된 마크버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이안의 주치의에게 물었다.

"망나니가 약을 끊으려 했다지?"

"예. 멍청한 놈이 식음도 전폐하고 있다가 5일 만에 약을 찾으며 울부짖더군요."

"흥, 그깟 놈이 아무리 설쳐 봐야 이미 그 약 없이는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몸이 됐을 것이다."

퀸즈머시는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는 독이 아니다.

그 대단하다는 용사도, 성녀도 버틸 수 없는 지고의 독약.

'제국이니까 만들 수 있는 희대의 명약을 이제 갓 성인이 된 놈이 무슨 수로 이겨 낼까.'

제국의 보은으로 얻은 귀한 약을 끊으려 했다는 것 자체가 괘씸했다.

"쯧, 지금쯤이면 이성을 잃고 날뛸 만도 한데."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식음을 전폐하기 전에는 하녀 한 명을 겁탈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

그 재수 없는 놈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늪에 빠져 버렸다는 생각에 마크버그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걸렸다.

"혹시 모르니까 약을 늘려라. 이제 곧 17살 생일이 다가오니 그 전까지는 말 한마디에도 벌벌 기도록 만들어야 해."

"이미 물과 음식 모두에 약을 조금씩 타서 보내고 있으니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 그 정도면 놈이 무슨 수를 써도 중독을 막을 수 없겠지. 좋은 술이나 한 병 골라 놈에게 선물로 줘라."

"예."

마크버그는 손을 휘저어 의원을 내보낸 뒤 영주실 창문 너머로 펼쳐진 영지를 내려다봤다.

"이 공작령 전체가 내 것이다."

이미 공작령의 수뇌부 중 태반이 넘어왔다. 남은 건 죽어도 주군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군부의 머저리들뿐.

소공작이 망가지면 망가질수록 그들도 버티지 못하고 그 고귀한 뜻을 꺾으리라.

국왕도, 제국도 자신을 지지한다.

저 머저리가 독에 취해 죽거나 군부의 충성을 잃으면 이 영지를 가지는 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될 것이다.

마크버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창밖에 펼쳐진 영지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 * *

이안은 방 안에 틀어박혀 일기장을 탐독했다.

10살 때부터 매일 써 온 일기장은 어린아이가 썼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상세했고, 영지의 현 상황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역시 이안이 변하기 시작한 건 그 섭정관이 들어오고 나서부터야.'

갑작스럽게 사라진 아버지를 대신해 왕국에서 파견한 섭정관이 들어온 뒤, 오랜 시간 영지를 위해 헌신하던 가신들이 갑작스레 하나둘 떠나갔다.

술과 약에 의지한 채로 겨우겨우 버티는 나날 속에서 오롯이 믿을 수 있는 건 레이나 단 한 사람뿐.

일기장의 후반부는 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자기혐오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다가 이성을 잃고 실수한 건가."

독에 취해 레이나를 겁탈하려다 기적적으로 정신을 차린 이안은 차라리 고통 속에서 죽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어쩌면 실제로 죽었을지도 모르고.'

이 몸에 빙의한 후 느꼈던 통증은 부동심도 스틸하트도 무용지물로 만들었을 정도니, 이안이 정말 죽었다고 해도 놀랍지 않았다.

"그럼 슬슬 나가 볼까."

독 문제는 레이나가 오기 전까지 해결할 수 없으니,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70%만 넘기지 않으면 돼.'

일기장을 덮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검은색 정복을 꺼내 입고, 허리에 검을 맨 뒤 거울을 바라봤다.

볼품없이 앙상한 얼굴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소년.

'이제 시작이다.'

방을 나서는 이안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 * *

문을 열고 비틀비틀 나선 이안을 부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공작의 방문이 열리자 시종들은 눈을 내리깐 채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나기 바빴고, 주변에 남은 사용인들 또한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과연 망나니는 망나니라는 건가.'

[모너가의 망나니]는 일반적인 칭호가 아니다. 무려 매력, 호감도, 신뢰도를 100이나 낮추는 저주나 다름없는 해제 불가 칭호.

게임과 달리 –200이 아닌 건 다행이지만, -100에서 시작하든 -200에서 시작하든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건 똑같다.

명색이 소공작이 며칠 만에 밖에 나왔는데,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커녕 부를 하인조차 근처에 없지 않은가.

'되도록 피하고 싶은 쓰레기라는 거겠지.'

당당하게 걸으면서도 고개를 바삐 움직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누가 그를 두려워하고 피하는지, 누가 멸시와 경멸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지, 누가 이안을 조롱하고 누가 입을 다무는지.

'내 편은 없겠지만 적이 없는 건 아니니까.'

경멸과 적의는 다르다.

일기장 속 이안은 약을 얻기 위해 단순히 망나니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의 폭거를 저질러 왔다.

그러니 이곳 영주성은 이안을 중독시켜 폐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과 원한을 가진 이들이 반씩 섞여 가득 차 있는 셈이다.

적의와 악의가 반쯤 섞인 시선들을 골라내 그 얼굴들을 기억하며 휘적휘적 걸어가는 도중, 어딘가 익숙한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소공작님, 드디어 방에서 나오셨군요! 쾌유를 축하드립니다!"

쥐새끼처럼 콧수염을 길러 비열해 보이는 남자는 건강해 보여 다행이라며 크게 웃고는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다음부터는 꼭 약을 제때 챙겨 드셔야 합니다. 혹시나 약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 아니겠습니까?"

약은 반드시 제때 먹어야 한다며 거만하게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는 놈의 정체가 기억났다.

'그때 약을 먹인 주치의로군. 말로푀유 남작이었나.'

섭정관이 이안의 발작을 고치기 위해 왕국 수도에서 데려온 의원.

하급 관리에 불과한 남작은 약을 가지고 습관처럼 이안을 협박해 일기장 속 이안이 가장 두려워하던 인물 중 하나였다.

'약을 안 먹으면 통증이 점점 커지니 약을 얻기 위해서라도 남작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겠지.'

하인들에게 약이라고 말하고 소금이나 설탕을 보내거나, 약을 몰래 숨겨 억지로 발작을 일으킨 다음 이안이 광증을 보이고 나서야 치료했기 때문에 이안은 약을 조금이라도 넉넉하게 받아 내기 위해 남작에게 비굴해질 수밖에 없었다.

'개새끼도 이런 개새끼가 없다는 거지.'

생각을 정리한 이안이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남작 덕분에 일어날 수 있었네. 남작은 어디 가는 길이신가?"

"저는 아침 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입니다. 아! 소공작님을 위해서 제가 좋은 물건을 구해 왔습니다."

남작이 큰 선물이라는 듯 뒤에 선 하인에게 명령해 고급스럽게 포장된 술병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뭔가?"

"소공작님께서 통증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지신 듯해, 좋은 술 한 병을 구해 왔습니다. 자기 전에 한 잔씩 하시면 숙면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술병을 받아 들자 남작의 뒤에 서 있던 하인이 미리 준비한 술잔을 들어 올렸다.

"한 모금만 해 보시지요."

대뜸 복도에서 술을 권하는 남작의 모습에 당황한 이안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서?"

"네. 소공작님께서 또 아프시면 영지의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이건 제가 소공작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건강주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쭉 한잔하시죠."

지금 당장 마시지 않으면 발작할 때까지 약을 끊겠다는 은근한 협박에 자연스럽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망나니라고 해도 그렇지, 아침부터 복도에서 술을 마시라고?'

자리도, 모양새도 좋지 않았다.

심지어 약을 끊겠다며 금주를 선언하고 방에 틀어박혔던 공자가 5일 만에 방을 나서자마자 술을 먹는다면 다른 이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고작 술 좀 처마신 걸 가지고 악명이 쌓일 리도 없고. 뭐지? 약이라도 탄 건가?'

속셈이 뻔히 보이는 음흉한 표정으로 뚫어져라 술병을 바라보는 남작을 잠시 바라봤다.

아쉽게도 남작은 이안이 바뀌었다는 걸 몰랐다.

자기 말이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하던 불쌍한 소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눈앞에 있는 소공작이 수천 번의 게임을 통해 가장 효과적인 망나니 플레이를 찾아낸 고인물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하하하! 날 챙겨 주는 것은 남작밖에 없군!"

한껏 신난 듯 과장된 몸짓으로 술병을 연 이안이 하인이 들고 있는 술잔 가득 술을 따르며 소리치자, 복도에서 둘을 보는 하인들이 잔뜩 표정을 구겼다.

'대낮부터 방도 아니고 복도 한복판에서 술판을 벌이다니....'

'누가 망나니 아니랄까 봐!'

'소공작이 저 모양이니… 영지가 어떻게 될지, 쯧.'

그러나 피부를 벨 듯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하고 말로푀유 남작만 바라보며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남작이 그토록 날 위해 노력하니 내가 살아 있는 것 아니겠나!"

"그럼요, 그럼요. 다 제 덕이죠!"

비웃음을 감추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남작을 바라보며 이안이 가득 찬 잔을 가리켰다.

"그런 의미에서 한잔하게."

"예?"

"남작은 항상 날 챙겨 주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지 않나. 소공작으로서 챙겨 준 것도 없으니, 잔이라도 받으시게."

술병을 들고 있는 이안이 웃으며 말하자 남작이 당황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이고, 소공작님.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다만, 저는 이제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지라...."

남작이 질색하며 손을 저었지만, 이안은 연신 웃으며 계속 술을 권했다.

"어허! 내가 남작을 위해 회의 한번 대신 못 나가겠는가! 걱정하지 말고 잔이나 받으시게."

남작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굴을 구겼다.

'이 미친놈이 갑자기 안 하던 짓을!'

아침 회의에 참석하기 전, 망나니에게 술이나 먹이고 회의에 조롱거리나 하나 가져갈 생각이었는데, 자기 말이라면 벌벌 기던 망나니가 이렇게 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소공작님, 저는 의원이기 때문에 항상 제정신을 유지해야 합니다. 근무 시간에 술은...."

창!

남작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안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검이 남작의 목 끝에 닿았다.

"히끅!"

자지러지듯 놀란 하인이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넘어져 술잔이 엎어졌으나, 이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남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런, 술잔이 엎어져 버렸군. 이상하게 치료를 계속할수록 참을성이 없어져서 말이야. 술잔이 없으니, 병으로 대신하는 걸 용서해 주게."

한 손에 검을 든 이안이 실실 웃으며 술병을 건네자 남작은 굳은 얼굴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약을 너무 많이 먹였나? 아니야. 그럼 음식에 약을 너무 많이 탔나?'

한 번도 본 적 없던 이안의 극적인 모습에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남작이 고민을 거듭했지만, 당장 알 수 있는 건 소공작이 미쳤다는 사실 뿐이었다.

'젠장 하필이면 이럴 때.'

10년을 넘게 봐 온 만큼 소공작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 하필이면 회의가 있는 오늘 이런 일이 생기다니.

"소공작님, 제가 저녁에 찾아뵐 터이니...."

억지로 정신을 다잡으며 입을 연 순간, 검이 목을 파고드는 느낌과 함께 소스라치게 차가운 소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아니야. 나는 이안 드 모너, 모너가의 소공작이다. 그대는 내 사용인이 분명한데, 내가 준 술 한잔도 받지 않으려 하는군."

* * *

이안은 얼굴을 죽 들이밀어 남작을 유심히 바라봤다.

과연 소공작의 잔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기서 남작을 죽이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고민하면서.

"아버지는 항상 잔을 함께하지 않는 신하들을 경계하라고 하셨지. 쥐새끼가 섞여 있을지 모른다고 말이야."

위대한 기사로 유명한 모너 공작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개판을 벌이길 원했다면 진짜 개판을 보여 줘야지.'

"그리고 쥐새끼를 찾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박멸하는 게 영주 된 자의 역할이라고 하셨네."

말을 마친 이안이 당장이라도 휘두를 듯 검을 치켜들자, 남작이 급히 술병을 입에 물었다.

벌컥! 벌컥! 벌컥!

"크하! 소공작님 덕분에 귀한 술을...."

겁에 질린 남작이 급히 술을 몇 모금 마시고 입을 떼자, 이안이 술병을 다시 잡고 입안으로 욱여넣으며 말했다.

"더, 더 마시게. 내가 사랑하는 만큼 줄 테니."

"컥, 컥, 소공작님. 그, 그만...."

"어허! 내 성의를 무시할 셈인가? 그대가 말하지 않았나? 맛있는 술은 아침이든 저녁이든 그 맛이 변하지 않는다고."

아예 검을 땅에 놓은 뒤 술병을 잡아 들고 남작의 목에 들이부었다.

"끄륵, 끄륵"

"하하하! 남작도 참. 그리 술이 고프면 말을 하지 그랬나!"

준비한 술병을 완전히 비우고, 남작이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안이 즐거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남작을 여기서 죽일 수는 없다.

그 순간 때를 기다리던 수많은 가신이 소공작의 광증이 도를 넘었다고 일어설 테니, 어쩌면 방 안에 갇혀 치료를 가장한 독극물에 죽게 될지도 모른다.

'역시 기절했군,'

약을 얼마나 탄 지는 모르겠지만, 복도에서 먹이고자 할 정도로 특별히 준비한 술인 만큼 한 번에 먹고 견딜 수 있는 양은 아니었으리라.

"그래, 그나저나 남작은 회의하러 가던 길이라고 했지."

빈 술병과 검을 들고 일어난 이안은 아직도 넘어져 바닥에 엎드려 있는 하인에게 명령했다.

"회의장으로 안내하거라."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http://blog.naver.com/jayplemedia1

ⓒ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화

'이게 맞아.'

한 손에는 술병을, 한 손에는 검을 든 채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악명이란 흰 도화지에 떨어진 먹물과 같다, 시간이 지나 색이 바랠지언정 절대 없어지지 않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망나니라는 칭호가 남아 있는 한, 이미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인식이 바뀔 리도 없다.

'망나니는 망나니로 남을 수밖에 없다.'

망나니라는 칭호는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다.

일기장 속 말로푀유 남작은 약이라며 설탕이나 소금 따위를 보낸 뒤 하인이 비싼 약을 팔아먹은 모양이라며 이안을 부추겼다.

멸시와 조롱이 섞인 시선과 매일 늘어나는 통증 속에서 이안은 정말 하인들이 약을 숨겨 판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 갔다.

술과 약을 찾으며 제멋대로 폭력을 휘두르던 망나니. 심지어 광증이 극에 달할 때면 누군가 죽어야 멈췄을 정도라니, 망나니도 그런 개망나니가 없다.

그리고 한번 찍힌 낙인이 지워지지 않듯, 그런 개망나니가 개과천선해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 봐야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기왕 망나니로 남아야만 한다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훌륭한 개망나니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개 같은 놈들을 향해서만 발작하는 선택적 개망나니가.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이 한 몸 불살라 주지.'

노예 검사였던 게임 속 이안과 달리 지금은 소공작이라는 빛나는 지위가 있다. 망나니에도 급이 있다면 망나니 소공작은 그중 최고일 터.

즐거운 얼굴로 회의장으로 향하는 이안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 * *

저벅, 저벅, 저벅.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떨리는 몸으로 안내하던 하인이 식당만큼이나 큰 문 앞에 멈춰서 말했다.

"소공작님 이쪽입니다."

"그래? 수고했네. 고마워."

"아이고, 아닙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응당 문을 열고 소공작의 도착을 알려야 했지만, 하인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종종걸음으로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문쯤이야 직접 열면 그만이라지만, 소공작쯤 돼서 낑낑거리며 문을 여는 것도 멋없는 짓이라는 생각에, 있는 힘껏 문을 발로 찼다.

쾅!

가뜩이나 오래된 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자 회의실 안에 있는 모두가 토끼 눈을 하고 문 앞에 선 이안을 바라봤다.

놀람과 경악을 담은 수십 쌍의 눈빛이 금세 경멸과 멸시로 변하는 걸 보면서 능청스레 입을 열었다.

"이거, 늦어서 미안하네. 오는 길에 남작이 술친구를 해 달라고 해서 말이지."

빈 술병을 흔들며 말하자 회의장 내의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난 7년간 단 한 번도 회의에 참석한 적 없던 소공작이 빈 술병과 검을 들고 참석하다니, 믿기지 않겠지.

뭐, 그건 저놈들 사정이고.

"그나저나, 명색이 소공작인데 조금 늦었다고는 해도 다들 앉아서 맞이할 모양이군."

인상을 구기며 말하자 장내에 있던 태반의 엉덩이가 들썩였지만, 굳은 얼굴을 한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섭정관 때문에 정작 일어나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이거 누가 영지의 주인인지 모르겠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가신은 섭정관이 영지의 실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상태가 나빠지는 이안이 섭정관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것도.

불편한 침묵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영지 관리가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 다들 허리가 좋지 않은 모양이야."

지금이라도 일어나 인사를 해야 하나 눈치를 보는 가신들과 대놓고 경멸 섞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가신들 사이를 걸어 섭정관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곳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영지로 부임해 온 뒤로 단 한 번도 겪은 적 없었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당황한 마크버그 섭정관을 향해 말했다.

"회의에 참석하러 왔네."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멀뚱한 표정으로 잠시 섭정관을 바라본 뒤, 섭정관의 앞 원형 테이블에 올라가 털썩 주저앉았다.

"자리가 없으니 여기라도 앉아야겠군. 내가 왔는데도 상석에 앉아 있는 걸 보니, 섭정관은 특히나 허리가 안 좋은가?"

여전히 상석에 앉아 있는 섭정관의 몸을 신발로 툭툭 치자, 기회라고 여긴 누군가가 뒤에서 소리쳤다.

"소공작! 지난 7년 동안 영지를 위해 피땀 흘려 노력한 섭정관께 이 무슨 무례요!"

슬쩍 고개를 돌리니 머리가 반쯤 벗겨진 뚱뚱한 중년인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다.

"흠...."

여전히 책상 위에 걸터앉아 똥 씹은 얼굴을 한 섭정관을 내려다본 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봤다.

'총 8명.'

12명의 가신과 영주, 총 13개의 자리 중 5개가 비어 있었다. 오는 길에 손봐 준 남작을 제외하고도 4자리가 비어 있던 셈이다.

'섭정관을 견제하는 가신들이 남아 있는 건가.'

마물의 숲을 지키고 있는 모너가는 전형적인 군벌가(軍閥家)다.

3개의 기사단과 6개의 군대를 운영하는 만큼 섭정관이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군사력을 움켜쥔 가신들을 쳐 낼 수는 없었으리라.

"저, 저!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야지!"

아직 한참이나 어린 이안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자 예의 중년인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지만, 이안은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 귀를 후비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상황이 좋은데. 섭정관을 지지하지 않으면 최소한 내 적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특히나 아무리 멍청하고 무능한 주인이라고 해도 충심을 지키는 걸 미덕으로 아는 로스트 크로니클 속 기사라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배신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일이 쉬워질 수도 있겠어.'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결국 참다못한 중년인이 고함을 질렀다.

"누가 망나니 아니랄까 봐!"

그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말 그대로 하늘이 돕네.'

이안이 화사하게 웃으며 얼굴을 붉히고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회의실에 앉아 있으니 분명 가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신이겠지만, 그가 누구건, 어디서 왔건, 어떤 역할을 하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저 눈치 없는 가신이 감히 소공작 앞에서 언성을 높이고 막말을 지껄였다는 사실뿐.

휙! 쨍그랑!

놈을 향해 던진 빈 술병이 벽에 부딪혀 깨졌다.

"흐흐흐!"

그 모습을 본 모두가 얼굴을 굳혔지만, 이미 분노에 몸을 맡긴 듯 중년인은 계속해서 고함을 질렀다.

"지, 지금 술병을 던지신 겁니까! 영지의 미래를 위해 매일같이 노력하는 가신들이 있는 곳에서!"

딱히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설령 분골쇄신하는 가신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소공작을 처음 봐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 하는 머저리나 그 머저리를 막지 않는 머저리나 썩은 건 똑같으니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적이다.'

어기적거리며 기다란 원형 테이블 위에 올라선 뒤, 검을 질질 끌며 아직도 소리치고 있는 중년인에게로 향했다.

"아무리 소공작이라고 한들 경우가 있는 겁니다, 경우가! 영지에 소공작님에 대한 상소가 매일같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제발 최소한의 예절을...."

그러고는 여전히 입을 나불대고 있는 중년인의 얼굴을 검 면으로 냅다 후려쳤다.

"커억!"

"도련님!"

"소공작님!"

"이게 무슨!"

설마 다른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검을 휘두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이들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긴 마침 섭정관 패거리밖에 없으니 조금 과해도 상관없지.'

이미 상황 파악을 마친 이안은 책상에서 뛰어내린 뒤 검집을 끌러 몽둥이처럼 휘두르기 시작했다.

"감히! 감히! 나를 모욕하다니!"

퍽! 퍽! 퍽!

"악! 제가 언제! 잠시만!"

검을 수십 번 휘두르자 온몸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놈이 아픈 만큼 내가 아픈 것 같은 기분에 억울함이 몰려와 검을 뽑아 한 손에 들고, 빈 검집을 휘둘렀다.

피가 튀기 시작하자 심각성을 깨달은 이들이 급히 막으려고 했지만, 한 손에는 검을, 다른 한 손에는 검집을 치켜든 이안의 으름장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날 막는 이들은 반역을 꾀하는 게 분명하니, 소공작의 이름으로 반드시 벌할 것이다!"

그 후로도 진심을 다해 검집을 휘둘렀다.

검집이 살을 파고드는 소리와 돼지 멱따는 소리만 울려 퍼지고. 중년인이 울며 빌다가 끝내 오물로 바지를 적시며 기절한 뒤에야 검집을 거뒀다.

"하아, 하아, 하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호흡곤란이라도 온 듯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섭정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왕국법에 따르면 가신의 처벌은 영주의 전적인 권한이라지."

물론 가신을 처벌하면 영지의 결속이 흔들리고 처벌받은 가신의 세력이 반역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정말 심각한 사건이 아니라면 가신을 처벌하는 경우는 없다.

'내가 알 게 뭐야.'

지난 10년간 가문의 충신들은 모두 낙향하거나 자취를 감췄으니, 누굴 어떻게 쥐어 패든 전혀 상관없었다.

"드미트리 후작가에서는 막말을 한 가신의 혀를 잘라 벌했다고 하는데, 섭정관은 어떻게 생각하나?"

웃는 얼굴로 섭정관에게 묻자 그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 자리에서 피를 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뿐.

사람이 기절할 때까지 두들겨 팼으니 다른 가신들이라고 안전할 리가 없다.

당장 미친 소공작이 여기서 검을 휘두르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없을 테고.

잠시 고민하던 섭정관이 어색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7년 만에 소공작께서 회의에 참석하시니 다들 놀란 모양입니다. 미처 예를 차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7년 동안 참석을 안 했다고 돌려 까는 건가?

미안하지만, 망나니는 수치심 따위 모른다.

"아니야, 가문의 가신들이 소공작인 내게 무례한 건 가문의 주인인 내가 부끄러워할 일이지, 자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네."

주인인 척하지 말라는 말에 섭정관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노여움을 푸시고 여기 앉으시죠."

그러나 이곳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원하는 것을 얻는 김에 개판을 벌이러 왔을 뿐.

이안이 입꼬리를 올리자 광기 어린 듯한 스산한 웃음에 장내의 가신들이 슬쩍 눈을 피했다.

"아니, 내가 어떻게 영지를 위해 분골쇄신하는 그대의 자리를 뺐겠는가."

'회의에 참석한다고 뭐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영지의 재정이나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회의에 참석해도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이 정도로 판을 벌였으니, 이제 슬슬 원하는 걸 얻어 볼까?'

만약 그냥 걸어와 원하는 게 있다고 말했다면 콧방귀나 뀌며 줄 수 없다고 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지의 가신 하나를 개 패듯 패고, 피가 뚝뚝 흐르는 검집을 들고 말한다면 같은 말도 그 무게가 다르게 들리는 법.

"내가 여기 있으면 아무래도 다들 불편해할 것 같아서 말이야. 영지 운영을 위해 밤낮없이 힘쓰는 자네들의 시간을 뺏기보다는 영지 구경을 해 보고 싶은데...."

그 말에 겁에 질려 있던 모두가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쉽게도 내가 돈이 없어서 말이야. 내탕금이나 조금 타서 영지를 구경해 보려고 하네."

"지금 당장 마련하겠습니다!"

드디어 검을 든 망나니를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모두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http://blog.naver.com/jayplemedia1

ⓒ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화

이안이 갑작스럽게 돈을 요구했음에도 무겁던 분위기가 한층 가벼워졌다.

'제깟 놈이 그러면 그렇지.'

'돈 몇 푼 쥐여 보내면 되겠군.'

미친개에겐 약도 없으니 어르고 달래 보내는 게 최선이다.

"바로 1,000골드를 마련하겠습니다."

재정관이 웃으며 말하자 이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고작?"

그 말에 섭정관이 급히 끼어들었다.

"이번 해는 세수가 적어 특히나 어렵지만 그래도 1만 골드 정도는 여유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그 정도면 괜찮으실까요?"

순식간에 10배나 늘어난 금액에도 여전히 얼굴을 구긴 이안이 섭정관을 향해 물었다.

"영지 한해 세수가 얼마인가?"

"2억 골드가 조금 안 됩니다만 그건 왜...."

"그중 가장 많이 나가는 돈은?"

"영지에서 농작물이 나지 않아 식량 구매에 가장 많이 쓰고 있습니다. 1억 정도는 식량 구매에 들어가죠."

항상 가난한 영지이니만큼 1만 골드도 쉽게 뺄 수 없는 금액이지만 마크버그는 갑작스러운 소공작의 행패를 기회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번 기회에 세금을 올리고 소공작을 욕받이로 내세워야겠군.'

마침 흔들리지 않는 소공작의 지지층인 군부가 눈에 거슬리던 차.

'기사야 그 고결한 충성심에 목숨 건다지만 당장 먹고 마시는 게 없어지면 병사 중 얼마나 버틸까?'

경계의 병사들에게 배정된 군비 중 한 천만 골드쯤 줄여 흙 섞인 밥을 먹인 뒤, 병사들의 고충을 통감한다며 사비를 조금 풀면 그들의 지지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향할 것이다.

1만 골드가 부족하면 10만 골드를 쥐여 줘도 상관없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충성심을 얻을 기회라면 그동안 벌었던 돈을 모두 토해 내서라도 잡아야 했다.

'기사들도, 병사들도 네놈 때문에 흙을 퍼먹는다고 생각하며 네놈을 욕할 것이다.'

그러나 이안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식량에 1억이라…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 1억 골드만 내어 주게."

"예?!"

경악한 얼굴로 재정관이 소리쳤지만, 이안은 담담히 다시 책상 위로 올라가 털썩 누우며 말했다.

"그럼, 돈이 준비될 때까지 나는 좀 자겠네."

"1억 골드라니, 절대 안 됩니다!"

마크버그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누워서 귀를 후비고 있는 이안에게 소리 질렀다.

"1억 골드라니요! 그런 큰돈은 영지에 없습니다!"

설령 다시 검을 꺼내 들어 목에 들이댄다 해도 1억 골드는 줄 수 없는 금액이다.

일단 있어야 줄 것 아닌가.

이 거대한 영지는 밑 빠진 항아리와 다름없어 세수가 걷히기 무섭게 빠져나간다. 지금 당장 1억 골드가 없을뿐더러 그나마 남아 있는 돈은 이미 식량 구매를 위한 계약금으로 쓰일 예정이었다.

"소공작님!"

마크버그는 당장이라도 안 들리는 척 누워 있는 눈앞의 망나니를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애써 분을 삭이며 소공작을 부를 뿐.

"1억 골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금액입니다!"

"그럼 5천만?"

"절대 안 됩니다."

"아, 왜! 5천 정도는 줄 수도 있잖아."

어처구니없는 생떼를 부리는 소공작의 모습에 섭정관이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답했다.

"그 돈이 없으면 저희는 겨울을 날 수 없습니다."

"왜?"

"왜냐니 당연히 식량이...!"

"식량은 내가 구해 올게."

당당한 이안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 머저리가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영지의 상황도 모르는 모자란 망나니의 말에 짜증을 넘어 분노가 일었다.

신뢰도 -100의 디버프가 없었더라도 단 한 번도 영주성을 벗어난 적 없는 소공작의 말을 누가 믿겠는가.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매력, 신뢰도, 호감도 -100을 찍은 이안의 호언장담에 섭정관의 얼굴이 구겨졌지만, 이안은 전에 없이 당당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래! 내가 다 책임질게! 식량은 걱정하지 말고 5천만 골드만 줘!"

개소리하지 말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갑자기 광증이라도 도진 걸까.

마크버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책상 위에 반쯤 드러누운 소공작을 노려봤다.

'아무리 무식해도 정도가 있지!'

소공작이 하인을 죽기 직전까지 때렸다거나, 자기를 무시했다며 병사를 불구로 만들었다는 말은 들어 봤어도 영지 재정을 요구할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5천만 골드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섭정관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10만, 아니 100만 골드를 달라고 드러누웠다면 한번 제대로 당해 보라는 생각으로 선뜻 내줬을지도 모른다.

영지 한 해 수익의 25%에 달하는 5천만 골드라니!

'내가 지난 시간 동안 일한 건 온전한 이 영지를 위해서지, 영지민이 다 굶어 죽고 없어진 폐허를 위해서가 아니란 말이다!'

뒷돈을 좀 많이 챙겼을지언정 머리를 동여매고 애정과 자부심을 느끼고 키운 영지다.

죽어도 약과 술에 절여진 망나니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소공작님, 혹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십니까? 제가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아예 드러누워 엉덩이를 긁는 모양에 튀어나오려는 울화를 억지로 삼키며 묻자, 이안이 이를 보이며 말했다.

"응. 돈."

날 선 듯 단호한 대답.

'이, 이, 이 개망나니가!'

영주 대리로 일하면서도 이미지 관리를 위해 단 한 번도 언성을 높인 적 없는 그였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이안의 모습에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이 개 같은 망나니 자식! 천벌 받아 뒤진 뒤에 똥통에 처넣어 비료로 써먹어도 아까운 자식!'

속으로 아무리 심한 욕을 해도 쌓인 울화는 풀리지 않았다.

선명한 증오와 혐오를 동시에 담은 눈빛을 덤덤히 받아 내며 이안이 말했다.

"있잖아. 내가 알아보니까 왕국법에 따르면 섭정관은 임기가 5년이라고 하던데...."

순간 섭정관의 눈이 가늘어졌다.

"왕실에 기한 연장을 요청하는 요청서를 보내면 연장이 되는 모양이야. 희한하지. 난 연장 요청서를 보낸 기억이 없는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정말 알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이안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누굴 죽이면 기억할까? 분명, 이중 영주의 인장을 함부로 쓴 반역자가 있을 것 같은데. 아니면 내가 보내고 기억을 못 하는 건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듯 검집을 치켜든 이안이 마크버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섭정관은 어떻게 생각해? 재정관의 팔을 베면 기억할까, 행정관의 가족을 효시하면 갑자기 기억이 날까?"

"히끅!"

"무슨! 저는 절대 그런 적이 없습니다!"

서늘한 이안의 목소리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행정관과 재정관이 엎드려 소리치자 섭정관이 짓씹듯 읊조렸다.

"골드, 골드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놈이 약을 너무 많이 처먹었건 너무 적게 처먹었건 지금은 위험했다.

가신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보란 듯 한 명을 개 패듯 팬 소공작이 미친 척 누군가에게 검을 휘두르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지금은 건드려서는 안 돼.'

사비를 토해 내는 한이 있더라도 돈을 준 뒤 약을 조절하면 된다. 그럼 놈은 받은 돈은 쓰지도 않고 방 안에 처박힐 것이다.

'돈을 쓰기도 전에 반병신으로 만들어 주마!'

그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식량은 내가 잘 구해 볼게. 대신 식량을 구하면 나머지 5천만 골드도 줘."

"걱정하지 마십시오. 식량만 구할 수 있다면 영지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입니다."

말이야 무슨 말이든 못 할까.

이 땅에서는 어떤 농작물도 자라지 않는다. 저주받은 마물은 독성 때문에 먹을 수 없으니, 결국 남은 거라곤 남쪽에 있는 세 영지로부터 구매하는 방법뿐.

'매년 별별 이유로 값을 올리던 그 개새끼들이 소공작을 보면 얼마나 행복해할까.'

가만히 있다 봉 잡은 격이니 식량값은 두 배, 아니 세 배로 뛸 것이고 밀과 모래가 반쯤 섞인 식량이 영지에 들어올 것이다.

물론 소공작이 정말 식량을 구한답시고 다른 영지로 향한다면 목숨을 걸고 막을 생각이었다.

"그럼 수고들 해!"

약 올리듯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에 마크버그와 가신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 * *

당당하게 회의실 밖으로 나선 이안은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후....'

처음 휘둘러 본 검집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고, 고통에 소리치는 사람을 바라보는 건 정신적인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해야만 했던 일이야.'

어떻게든 돈을 얻어야 했고, 결국 얻어 냈으니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필요하다면 한두 사람의 팔 정도는 자를 생각이었던 만큼 더 많은 피를 보지 않았으니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성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입에 자물쇠라도 건 듯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바삐 지나가는 하인들이 보였다.

누가 봐도 자신을 피하려고 기를 쓰는 모습에 자연스레 한숨이 나왔다.

"후...."

"히익!"

작은 한숨 소리에 하녀 중 한 명이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은 모습을 보니 머리가 아파왔다.

'괜찮아. 할 수 있어.'

할 수 없어도 어쩔 수 없다, 포기할 수도 없으니.

일단 길 안내를 받기 위해 주저앉아 있는 하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히끅!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하녀는 죽을죄라도 지었다는 듯 바들바들 떨며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하....'

걷다가 놀라 쓰려졌을 뿐인 하녀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망나니라는 칭호와 함께 오는 디버프라고 생각하자.'

호감이 0을 너머 –100쯤 찍히면 사람도 악마로 보이는 법이다.

"괜찮다. 고개를 들어라."

"제발,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뒤 하녀를 불렀지만, 하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연신 용서를 빌기 바빴다.

"흑, 저는 여기서 나가면, 흑,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소공작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아예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비는 하녀를 답답한 얼굴로 바라봤다.

'검집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자유의 대가라고 생각하지 뭐.'

소공작이 또 지랄이라고 생각했는지, 다른 하인들이 종종걸음으로 바삐 자리를 벗어나는 게 보였다

"하아… 그냥 날 보고 놀란 건데 무슨 잘못이 있겠어. 그냥 성문까지만 좀 안내해 줘."

"네? 네! 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의외로 부드러운 이안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듯 하녀가 급히 일어나 안내를 시작했다.

중간에 이름을 묻자 대성통곡하며 또 엎드려 용서를 빌었지만 억지로 일으켜 세운 뒤 우여곡절 끝에 성문에 도착했다.

"고마워, 리나."

힘들게 알아낸 이름으로 고마움을 전하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소녀가 기겁하며 도리질을 쳤다.

"아이고, 아닙니다. 하찮은 제 이름은 잊어 주셔도 됩니다."

진심을 담아 부탁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실소가 나와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가시면 영주성 밖으로 나가실 수 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 * *

소공작을 안내하고 돌아가는 길.

영주성의 신입 하녀 리나는 방금까지 같이 있었던 이안의 서늘한 눈과 목소리 때문에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아 10분도 안 걸리는 길을 몇 번이나 쉬었다가 걸어야 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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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화

모너 공작가는 공작가라는 이름에 걸맞은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고 있지만, 영토 대부분이 마물의 숲 내부에 위치해 밀조차 나지 않는다.

결국 식량을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모너 영지의 곳곳에는 수십 개가 넘는 상단이 들어와 있었다.

공작가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상단 중 지금에 와서 남은 것은 영지의 특산물인 몬스터 사체를 헐값에 사들이고 대량으로 들여온 식량을 2, 3배가 넘는 가격에 팔아먹으려는 사기꾼들밖에 없었다.

'허, 밀가루 한 포대에 75실버라니.'

심지어 전쟁 중에도 30실버를 넘지 않던 밀가루는 거의 두 배가 넘는 가격에 팔렸고, 질 나쁜 감자와 고구마가 시장에 넘쳐났다.

거리에서 산 빵에서는 모래가 씹히는 걸 보니 저 비싼 가격을 처받고도 모래를 섞어 놓은 모양이다.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네....'

어디를 가도 정상적인 가격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몬스터 부산물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데… 언제까지 그럴까?'

이건 결국 식량을 공급하는 인근의 영지들이 공작이 사라진 공작령을 개무시하고 있어서 벌어진 일이다.

'그걸 방치하는 왕국도 같은 마음이겠지.'

공작이 나타나면 몰랐다고 발을 빼면 그만이고 만약 나타나지 않으면 어차피 망할 가문이니 이 기회에 공작가의 세력을 줄여 보자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빌어먹을.'

섞인 모래가 텁텁해 도저히 빵이 넘어가지 않아 퉤 하고 뱉은 뒤 시장을 더 뒤지자, 시장의 끝 초라한 간판을 내건 상회가 보였다.

[황금 고블린 상회]

음식 대신 약초와 버섯, 무기, 값싼 의료 용품을 팔고 있는 조그만 상단.

'찾았다.'

인류가 멸망을 앞두고 있을 때까지 물류 유통을 담당했던 최후의 상단.

게임 속 그 어떤 상단보다 신용도가 높고 거래가 깔끔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플레이어들이 자주 찾는 상단 중 하나.

'황금 고블린 상단의 시초가 모너가 영주성 바로 앞 시장이라고 했지.'

호객 행위를 하는 젊은 소년에게 다가가자 소년이 반갑게 맞이했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황금 고블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초라한 간판과 그보다도 초라한 가게를 두고 할 말은 아니지만, 상인은 오랜만에 방문한 손님을 보고 잔뜩 기대에 찬 듯 신나게 말을 이었다.

"이 약초는 감기에 좋을 뿐 아니라 수프에 타서 먹으면 포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버섯은 몸의 피로와 추위에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좋죠."

감기, 추위, 피로, 허기. 영지민이 필요한 걸 정확하게 알고 필요한 물건만 들여온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중량까지 속이던 상단과는 질이 다른 선택이었다.

"좋은 물건이 많군."

"그럼요! 저희 상단에서는 고객 여러분들의 행복을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 타박상이 있으시다면 이 연고를 바르시면 좋고, 비싸긴 하지만 골절상에 쓸 수 있는 하급 포션도 안에 몇 병 있습죠!"

"지점장은 안에 있나?"

"당연히 지점장도 저렴하게… 네?"

기계적으로 뭐든 있다고 대답하던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안을 바라봤다.

"지점장이 있냐고 물었네."

소년은 자기 뒤편의 건물을 돌아봤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초라한 건물은 어떻게 봐도 지점이 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안을 미친놈처럼 바라보던 소년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 사장님은 지금 안 계십니다."

빠르게 이안의 옷을 확인한 그가 한층 공손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혹시 어디서 오셨습니까? 저희는 허가받은 상단이고 이번 납세액도 정확히 냈습니다."

"알 거 없네. 혹시 사장이 언제쯤 올지 알 수 있겠는가?"

"그게… 워낙 신출귀몰한 양반이라 모르겠습니다. 오실 때가 되기는 했는데...."

수상하다는 듯 몇 번이고 이안을 힐긋거린 소년이 주먹을 탁! 치며 말했다.

"아! 혹시 상인 협회에서 오셨다면 보다시피 저희는 밀이나 식량을 팔고 있지 않습니다."

"상인 협회에서 온 것도 아니네."

"그럼 도대체 어디서...."

"알면 서로 불편해질 테니 모르는 게 좋네."

이야기를 들은 이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소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그냥 같이 기다리지."

자리에 앉은 이안은 난처한 표정을 한 소년을 바라봤다.

상인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건 멍청한 짓이다.

즉시 신뢰도와 호감도가 떨어져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테니.

'그런 의미에서 상단주를 바로 만날 수 있다니, 천운이 따로 없군.'

원래 계획은 지점장을 만난 뒤 상단주와의 약속을 잡는 것이었지만 상단주가 직접 이곳에 올 수도 있다고 하니 삼고초려의 자세로 만나는 날까지 매일 이곳에서 기다려 볼 생각이었다.

* * *

상단에 출퇴근하길 삼 일째.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이안이 약을 달이고 있는 소년, 릭에게 말하자 그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도련님! 집에 안 가세요?!"

"아, 그거 그렇게 하면 약발 떨어지는데."

"아니,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방해하세요!"

릭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저런 미친놈이 세상에 있을 줄이야.'

행동 하나하나가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호객을 해도, 흥정을 해도, 물건을 팔아도, 심지어 약초를 달여도 옆에서 한마디씩 보태는 게 여간 짜증 나는 게 아니었다.

'그럼 좀 도와주기라도 하던가!'

직접 해 보라고 하면 싫다고 하고, 조용히 있으라고 하면 주변을 얼쩡거리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하면서 한숨을 푹푹 쉬어 댔다.

'저 인간 때문에 오늘 장사도 망했어!'

아직도 어디서 온 줄 모르겠는 자신 또래의 소년.

마땅히 부를 말이 없어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소년은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고 사장을 기다리고 있어 당장 꺼지라고 말하기도 무서웠다.

'꺼져라, 좀!'

릭의 간절한 기도가 닿았을까, 이안이 고개를 돌리며 저무는 해를 확인했다.

"슬슬 돌아갈까...."

드디어 이 개진상이 떠난다는 말에 릭이 화색을 보이며 소리쳤다.

"네! 가시죠!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 비열한 악마는 그의 절박한 마음을 피식하고 짓밟더니, 붉은 노을을 뿌리며 저무는 해를 보면서 말했다.

"아니다. 그냥 기다려야지."

릭은 가슴속에 고이 간직한 사직서를 움켜잡았다.

'사장님, 제발 빨리 돌아오세요!'

보고 있으면 괜히 욕만 하던 그 무서운 얼굴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 * *

이안은 재밌다는 듯 미소 지으며 릭을 바라봤다.

'설마 저렇게 재주가 없을 줄이야.'

릭은 호객도, 흥정도, 약초학도, 약학도 재주가 없었다.

지나가는 척 조언을 해 주고 특성이 있으면 얻어 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어지간히 친절히 설명을 해 줘도 도통 들어먹질 못했다.

'이런 애를 왜 데리고 있는 걸까.'

분명 황금 고블린 상단주가 그를 데리고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녀는 절대 사람이 좋다고 쓸 만큼 둥근 인간이 아니니까.

'정말 모르겠는데.'

이 젊은 청년은 성실하다는 것과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로 열심히 일한다는 점을 빼면 볼 게 없었다.

아쉽게도 재능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계에서는 딱히 빛을 보기 어려운 인재였다.

'그 상단주가 하나밖에 없는 가게를 맡겼을 정도면 내가 못 본 가치가 있다는 건데....'

황금 고블린은 이윤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상단이다.

신뢰도가 높은 것도, 되도록 판매자에게 도움이 되는 물건만 판매하는 것도 전부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한 전략에 불과하다.

세상 만물의 숨겨져 있는 가치를 본다는 상단주가 본 이 소년의 가치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아휴, 약 다 버렸네."

궁금증과는 달리 소년이 버린 약이 안타까워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아, 원래 이렇게 만드는 거라고요! 여기, 이 레시피 보이세요? 이대로! 하나도 안 틀리고! 정확하게 따라 했다고요!"

이안은 참다못한 소년이 이를 아득바득 갈며 소리치는 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말했다.

"불이 너무 세서 약재가 다 탔어. 지거프 나무 목재는 일반 목재보다 화력이 세서 화로대를 낮춰야 하는데...."

"예? 어? 지거프 나무 안 썼는데...? 아?"

이안과 불타는 장작을 번갈아 쳐다보던 릭이 허망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으악! 그걸 다 끝나고 말해 주면 어떡해요! 사장님이 알면 나 쫓겨나겠네!"

반쯤 울며 소리치는 릭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와 웃으며 구경하고 있으니, 문 쪽에서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릭, 내가 반드시 조심해야 할 세 가지가 뭐라고 했지?"

"아휴, 몇 번이나 물어보시는 건지. 공무원, 영주성에서 나온 사람, 소공작이요."

"소공작님이 오시면 어떻게 하랬지?"

"보이자마자 얼른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비상 탈출구로 도망갑니다. 예, 예. 소공작이 여기 올 일이 뭐 있다고… 어?"

허망한 표정으로 약을 바라보며 습관적으로 대답하던 릭이 흠칫거리며 입구를 돌아봤다.

뒤집어쓴 로브 사이로 빛나는 황금색 머리카락과 로브 자락 아래에서도 숨겨지지 않는 날씬한 몸매.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황금 고블린의 상단주였다.

"사장님!"

"릭, 내 말을 훌륭하게 어겼구나.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어겼어."

이마를 잡고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이안을 바라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소공작님을 뵙습니다."

"네? 여기 소공작이 어디… 에엑?!"

릭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이 잘리고 싶지 않거든 어서 예를 표해라."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린 릭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넙죽 엎드리려고 했지만, 이안이 즐겁게 웃으며 만류했다.

"사이가 좋은 모양이군."

"영 쓸데가 없는 놈이라 걱정입니다."

"재미있는 친구야. 광대를 시키면 잘할지도 모르겠어. 그나저나 날 알아볼 줄은 몰랐는데. 영주성에서 나온 적이 없는 몸이라."

"제가 소공작님을 못 알아봤다면 상인의 재능이 없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다가와 이안과 눈을 마주쳤다.

"비록 다른 사람들은 눈앞에 두고도 소공작님을 몰라보는 모양이지만요."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혐오도, 기피도 담겨 있지 않았다.

'역시!'

10년 뒤 여자의 몸으로 대륙 최고의 상단을 일궈 낼 만큼 천부적인 능력을 갖춘 그녀는 상재(相才)만큼이나 용병술에 뛰어났다.

부랑아들 사이에서 최고의 상인을 길러 내고, 거지들 사이에서 손꼽는 호위 무사를 찾아낼 만큼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던 그녀의 주위에는 일국에 버금갈 만한 인재들이 모여 있었다.

'게임 속 이안에게도 호감을 표했으니, 분명 신뢰도, 호감도를 벗어난 직감이 있는 게 분명해.'

소공작인 걸 알고도 태연히 릭을 나무랄 수 있는 건 분명 망나니가 아닌 인간 이안이 보인다는 뜻일 터.

모든 사람의 가치를 볼 수 있다는 천부적인 특성. 얻을 수만 있다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얻어야 할 특성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빛나는 보석이라고 해도 오물로 덮여 있으면 피할 수밖에 없겠지. 그걸 탓할 생각은 없네."

"그럼 소공작님이 보석이라는 건가요?"

"아무리 값진 보석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으면 무가치한 돌덩어리와 다를 바 없지."

실제로 목숨 건 듯 게임을 해 왔던 건 게임 속 이안이 인정받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수천 배는 힘든 길을 걸어가도 끝까지 인정받을 수 없는 비운의 캐릭터가 모두에게 인정받는 해피 엔딩을 보기 위해서.

* * *

릴라이가 이안을 향해 우아하게 고개 숙였다.

"그렇군요. 그럼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릴라이, 황금 고블린 상단의 상단주이자 반짝거리는 것들을 그 누구보다 잘 보는 상인이죠."

그녀는 로브를 젖혀 빛나는 눈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보는 눈이라면 대륙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이곳까지 왔지.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거든."

이안과 릴라이가 서로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순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릭이 조심스럽게 릴라이에게 물었다.

"저기 사장님, 저 도련님이 진짜 그 소공작이라고요? 그 망나니? 말도 걸지 말고 눈도 마주치지 말고 같은 공기도 마시지 말라던?"

순간 릴라이의 얼굴이 굳었지만, 그녀는 듣지 못한 척 릭을 무시하고 이안을 2층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릭이 계단을 오르는 그녀에게 바짝 붙어 속삭였다.

"그 망나니는 인간 말종이라 절대 상종하면 안 된다면서요? 단둘이 방에 있어도 안전할까요? 혹시 모르니까 경비원이라도 불러올까요?"

물론 아무리 속삭인다고 해 봐야 바로 옆에 있는 이안에게 안 들릴 리가 없다.

릴라이가 슬쩍 옆을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안은 이 촌극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애는 착하니까. 참자, 참자....'

참을 인을 새기고 있던 그녀와 이안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릭이 안심하라는 듯 속삭였다.

"사장님, 그럼 몰래 경비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어처구니없는 그 말에 결국 참고 있던 화가 터져 나왔다.

"야! 소공작님이 여기 계시는데 경비원을 왜 불러! 경비원이 소공작님께 나가라고 할까?! 내가 눈치 좀 챙기라고 몇 번을 말해, 이 화상아!"

마침내 폭발한 그녀를 보며 소 같은 눈망울을 껌뻑인 릭이 되물었다.

"그럼 다른 영지 경비병을 불러 볼까요?"

"꺼져!"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http://blog.naver.com/jayplemedia1

ⓒ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7화

쾅!

문을 거칠게 닫은 릴라이는 문에 기대 숨을 고른 후 자리에 앉아 있는 이안에게로 향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아니야. 나도 여기 있는 동안 저 친구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몰랐네."

"후… 그래도 착하긴 정말 착한 아이랍니다."

"그렇더군. 릭은 검사도 마법사도 아닌 것 같던데."

"당연하죠. 몸 쓰는 일을 어지간히 싫어해 검사는 될 수 없고 보다시피 머리는 영 아니라 마법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꿉니다."

이안은 고운 미간을 찌푸린 채 작게 한숨 쉬는 그녀를 재밌다는 듯 바라봤다.

"그럼 도대체 뭐가 특별한 건가? 저 친구도 빛나니 데리고 있겠지."

릴라이는 자선 사업가가 아니다.

아무리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고 한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고용했을 리가 없다.

이안의 뜻을 파악한 그녀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아이입니다."

"선악?"

"제가 이 자리에 소공작님과 함께 앉아 있을 수 있는 것도 저 아이 덕분이죠."

순간 이안은 소공작인 걸 밝혔음에도 혐오가 아닌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릭을 떠올렸다.

"직감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모양이군."

"네. 제가 빛나고 가치 있는 것을 본다면 저 아이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재능을 가졌습니다. 이 오지까지 와서 장사할 수 있는 것도 저 아이가 몇 번이고 위험한 인연을 막아 줬기 때문이죠."

외모, 소문, 칭호,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직감적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능력.

"그럼 내가 악인이 아니라는 건가?"

피식하고 웃으며 말한 이안의 질문에 릴라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만약 위험한 사람이라 생각했다면 릭은 소공작님이 말도 걸기 전에 가게 문을 닫고 숨었을 거예요. 소공작님이 저와 같이 있었다면 절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을 테죠."

잠시 가냘픈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는 빛나는 것들을 잘 발견할 뿐 아니라 씻기고 광내는 것도 잘하거든요."

"그런가...."

이건 그녀 나름의 자부심일 것이다.

휘하에 있는 누구든 그녀를 위해 진심을 다하도록 만들었다는 자부심.

"자기 자랑은 이 정도만 할게요. 이 누추한 상회에서 고귀한 소공작님께 뭘 해 드릴 수 있을까요?"

이안은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대며 빛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 봤다.

"아무것도."

"네?"

"아무것도 없다. 돈도 없고 영향력도 없는 상회가 날 위해 뭘 해 줄 수 있겠나."

어이없다는 듯 입을 살짝 벌린 그녀를 향해 웃으며 이안이 말했다.

"다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영지에서 가장 유명한 망나니이자 지지 기반 하나 없는 소공작님이요?"

"나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똥 묻는 걸 무서워하지 않고 악명이 쌓여 봐야 바뀔 게 없는 나만이."

이안이 빙그레 미소 짓자 그 비열하고 무정한 웃음을 본 릴라이가 몸을 떨었다.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 * *

대화가 끝나 갈 무렵, 릴라이는 경외와 두려움이 반쯤 섞인 눈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소공작님은… 소문보다 훨씬 미치셨군요."

"그런 말은 매일 듣지."

"그치들은 소공작, 아니 공작님이 어떤 사람인 줄 모르니까요."

그녀가 이안을 부르는 호칭을 바꿨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소공작이 아닌 공작으로서 이안을 대하겠다는 결심이 선 모양이었다.

'그녀 나름의 존중인 건가.'

"말했다시피, 나는 역할에 충실할 생각이야."

"성심을 다해 돕겠습니다."

"망나니짓에 성심은 무슨. 돈 받은 만큼만 일하면 돼. 나는 훌륭한 장사꾼인 당신을 믿는 거니까."

그 말을 끝으로 이안은 상단을 나섰다. 그가 떠난 뒤 릭이 상단을 뛰쳐나와 시장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 * *

상단을 나선 이안은 몇 번이고 특성창을 확인했다.

[금귀(金鬼)의 눈]

돈에 미친 귀신이라 불렸던 금귀의 눈.

가치 있는 모든 것을 판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한 번에 얻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유능한 무능력자'로 무언갈 가르치고 특성이나 스킬을 습득할 확률은 로또에 가깝다.

'통계상 0.001% 정도였나?'

천혜의 심법이나 상승의 검술을 가르쳐도 배운 이가 멍청한 놈에게 훔쳤다고 느낀다면 어떤 특성도 얻지 못한다.

결국 배우는 사람이 정말 이안에게 배웠다고 느끼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인 셈이다.

"운이 좋았던 건가."

심지어 수천 번의 플레이 동안 릴라이에게 특성을 얻었던 건 단 한 번밖에 없었다.

'소공작의 위치뿐 아니라 거액의 돈을 상단에 투자했으니까 마냥 운은 아니려나.'

상인을 움직이는 데 돈보다 중요한 건 없다. 비현실적인 계획조차 그 위에 5천만 골드를 얹으면 그럴듯한 계획으로 둔갑하는 법이다.

상단주에게 가르쳐 준 것은 돈과 권력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 그 가능성에 대륙 최고의 상인을 움직였다고 생각하니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 * *

성으로 돌아온 뒤에는 한참 동안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데.'

지난 며칠간 둘러본 영지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처참했다.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형성된 식량 가격과 거리에 퍼진 모래 섞인 빵은 문제의 일부였을 뿐.

더 심각한 문제는 이안을 향한 영지민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이안을 그렇게 사용해 왔을 줄이야.'

섭정관은 세금을 높이거나 임금을 낮추는 등 모든 부정적인 일에 소공작의 이름을 앞세웠다.

그러고는 바닥 친 민심을 자신의 이름으로 진행한 복지사업으로 끌어 올리기를 반복했다.

이안의 이름으로 세율을 높여 굶어 죽어 가는 영지민들에게 섭정관의 이름으로 구휼 정책을 펼치는 식.

그 목적은 분명했다.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 영지민들 사이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는 것.

'마음 같아서는 그냥 내 자리를 요구하고 싶지만....'

섭정관이 없으면 행정 전반이 마비되고 갑작스럽게 망나니의 지배하에 놓인 민심이 반역을 일으킬 것이다.

반역을 진압하기 위해 군부를 움직이려고 한들, 망나니의 명령에 따른다는 보장도 없고.

'심지어 군부를 움직이기 위해 많은 걸 포기해야 했겠지.'

어쩌면 군부가 나서서 움직이는 대신 영지의 일부 독립을 요구하거나 손실뿐인 내전에 돌입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안팎으로 아주 병신을 만들어 놨어.'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사방이 적이라는 것.

섭정관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군부도 행정부도 아닌 제3의 세력을 만들어 민심을 움직여야 한다.

'아니면 모든 악명을 뒤엎을 만한 힘을 얻든지.'

그러기 위해선 준비가 필요하다.

"큭!"

고민이 너무 많았던 탓일까, 밀려오는 두통에 근처에 있던 물병을 들이켰다.

[중독되었습니다.]

[중독 의존도: 60%]

시녀들이 건네는 물과 음식 모두에 약이 타 있는 건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최소한 첫날 겪었던 고통을 또 겪을 일은 없었으니까. 문제는 중독 의존도를 조절하기 위해서는 물을 제외한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없다는 것.

이에 대비해 황금 고블린 상단에서 얻은 약초를 씹어 먹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날 따르는 제3의 세력을 키운다는 건 불가능할 것 같고....'

망나니를 맹목적으로 따를 사람을 구하느니 섭정관의 돌연사를 바라는 게 더 합리적이다.

'역시 특성인가.'

남은 방법은 릴라이에게서 얻어 낸 [황금귀의 눈]처럼 다양한 특성을 얻어 힘을 기르는 것.

"좋아. 내일부터 특성작이다."

어쩌면 '로크'와 달리 이 세상에서는 특성을 얻기 쉬울지도 모른다.

이 넓은 영주성에 특성 한두 개쯤이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부터 이안은 성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병사들이 훈련하는 걸 한참이나 구경하다가 도서관에 들어가서 몇 시간이고 죽치고 앉아 책을 읽는가 하면 중앙 호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한참이고 앉아 있기도 했다.

성내의 모두가 이안을 피해 다니려고 노력했지만, 워낙 이곳저곳 들쑤시며 다니는 통에 단 며칠 사이에 성내 고용인들의 얼굴에 피로가 묻어났다.

"슬슬 위험한데."

피로가 늘어난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며칠째 음식과 물 대신 약초만 씹어 대고 있으니 당연했다.

수분이 많은 약초를 충분히 씹어 먹고 있음에도 입안은 바싹 마른 듯 텁텁하고 불쾌한 모래향이 입안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중독도 위험 수준이고."

현재 중독 의존도는 72%.

최대한 음식과 물을 피하면서 통증이 심해질 때만 물을 조금 먹었음에도 어느새 70%를 넘어섰다.

그냥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올라오는 걸 보니, 이제 슬슬 정상적인 판단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75%가 되면 이성을 잃으니 레이나가 안 온다면...."

최악의 경우 몸을 사슬로 묶은 뒤 약을 끊어 중독량을 낮출 생각이었다.

"으으으...."

첫날의 고통을 생각하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방법이지만 이성을 잃은 뒤 노예 검사가 되어 호송되는 길목에서 정신을 차리는 것보다야 더 낫지 않겠는가.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걱정은 내일부터.

일단 오늘은 오늘의 계획을 따라야 한다.

다시 [황금귀의 눈]을 사용해 주변 사람들을 관찰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희미한 빛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내재된 가치. 개화되지 못한 특성.'

[황금귀의 눈]은 개화되지 못한 특성을 빛으로 보여 줬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그 빛의 크기를 가늠한다. 지나가는 하인의 가슴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이고, 마부의 가슴에서 조금 더 강한 빛이 반짝였다.

"누구든 좋으니 대박 하나만 건졌으면."

지금 찾고 있는 건 뛰어난 무재(武才)의 특성.

훈련하는 병사들을 바라보는 것도, 도서관 한가운데 앉아 책을 읽는 척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도.

누군가 한 명쯤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숨겨진 원석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정 없으면 포기해야겠지만, 설마 이 넓은 성에 한 명이 없을까."

물론 지난 며칠간의 탐색에 따르면 없었다.

당연하게도 뛰어난 특성은 자연스럽게 개화하기 마련이다.

상재(商才)를 가진 사람은 호객 행위를 하다가도 가게를 열고 무재(武才)를 가진 이들은 동네 양아치짓을 하다가도 무가(武家)를 일으키지 않던가.

"역시 인생은 재능빨인데...."

이 땅은 로스트 크로니클, 멸망을 앞두고 있는 빌어먹을 게임 속 세상이다.

힘이 곧 권력이고 능력인 부조리의 극치를 달리는 세상.

검술가의 자식은 5살에 검을 들고, 마도가의 그 나이쯤 첫 서클을 만든다. 10살 이후로 아무 운동도 하지 않고 약과 술에 절여진 이안의 몸을 단기간에 바꾸기 위해선 아무래도 좋은 특성빨이 필요했다.

'오늘도 실패하면 진짜 그냥 맨땅에 헤딩이라도 해야 하나....'

일단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는 성안을 돌아다녀 볼 생각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기던 중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리나… 였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울던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쾌한 발걸음으로 성을 활보하는 그녀의 입에는 구김 하나 없는 맑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특성이다.'

이안은 그 미소보다 그녀의 가슴에서 요동치는 검은색 빛줄기에 주목했다.

단언컨대 지난 며칠간 봐 온 빛 중 가장 '빛다운 빛'이었다.

'꽤 대단한 재능인 것 같은데.'

며칠간 봐 온 수백 명의 사용인과 병사 중에서도 독보적인 빛인 만큼, 뛰어난 재능이리라.

언제까지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 저 아이를 가르치면서 다음 타깃을 찾아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착하고 순진한 하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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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8화

리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몰래 움켜 잡고 터질 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눈앞에 선 소공작을 조심히 바라봤다.

세상을 원망하는 듯한 차가운 눈매와 비열하고 무정한 냉소에 오금이 저려와 당장 지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자신을 칭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 네?"

"어려운 일은 아니야. 그냥 내 아래에서 배우기만 하면 돼. 봉급 확실히 올려 주지."

그 저열한 요구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혈향이 퍼졌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늘을 원망했다.

부모님의 상단이 망했을 때도, 그 여파로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병상에 누웠을 때도, 어린 동생의 학비와 어머니의 병원비를 위해 일을 시작했을 때도, 단 한 번도 하늘을 원망한 적이 없었건만.

"역시, 싫은가?"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눈앞의 비열한 악마는 강요에 가까운 저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대낮부터 찾아와 저런 저열한 요구를 하는 것이리라.

"아닙니다. 저는… 저는, 명하시면 따를 뿐입니다."

아래에 깔려 배우라니.

아직 어린 리나였지만 선배들에게서 듣고 배운 게 있는 만큼 저 말이 무슨 뜻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요즘 술과 마약을 찾는다더니, 언제 밤 시중을 들라고 할지 몰라.'

며칠 전에 들었던 선배들의 푸념이 환상처럼 귀가에 아른거렸다.

'참아야 해. 영주성에서 쫓겨나면 어디서도 일할 수 없는걸.'

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해도 영주성에서 쫓겨난 아이를 받아 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누가 나서서 소영주와 척지려 하겠는가.

자신이 쫓겨나면 가족이 전부 굶는다. 아픈 어머니는 약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감추려 고개를 내리니, 악마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음, 그건 곤란한데. 억지로 시키는 건 영 확률이 낮아서."

확률? 무슨 확률?

설마 임신이라도 시키려고...?

리나가 머릿속으로 절망적인 미래를 그리고 있을 때, 이안이 말을 이었다.

"어쩌지, 딱히 다른 사람은 없을 것 같고… 그럼 이렇게 하지.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거니까, 네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줄게."

아, 부모님이 항상 경고하시던 악마의 속삭임이란 이런 거였나.

착한 아이인 그녀는 응당 그 권유를 뿌리쳐야 했지만, 자신이 이 자리에 오게 만든 원흉이 번개처럼 선명히 떠올랐다. 잊고 살려고 했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원한.

그녀가 눈물로 글썽거리는 눈을 번쩍 치켜뜨며 말했다.

"그럼 행정관 로베르토를 벌해 주세요."

* * *

당황한 이안이 리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행정관을?"

"행정관 로베르토를요."

덜덜 떨리는 몸으로도 한 글자 한 글자 의지를 담아 말하는 그녀를 바라봤다.

"벌해 달라고?"

"네. 죽으면 더 좋겠지만 제 가치가 그렇게 높지 않다는 건 알아요. 대신 그가 죽을 정도로 고통받아도 좋고, 죽는 것보다 더한 치욕을 겪는 것도 좋아요. 그냥 그가 절대 잊지 못할 만큼 고통받았으면 좋겠어요."

죽거나 절대 잊지 못할 만큼의 고통이라니. 아무리 망나니에게 뭔가를 배우는 대가라지만, 너무 과한 요구 아닌가.

'나한테 소속된다는 게 다른 사람의 죽음을 요구할 정도로 싫은 일인가?'

가만 생각해 보니, 지난 며칠간 자신을 피해 다니던 하인들과 그들의 시선을 보건대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보다 로베르토라고?'

무려 소공작의 권한으로 한 약속이니 돈을 달라고 할 수도 있고, 직위를 높여 달라고 할 수도 있고, 심지어 하급 작위를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보다 더 죽길 원하는 상대라면 도대체 얼마나 사무치는 원한이 있었던 걸까.

"음… 일단 들어나 보자. 로베르토가 누군데?"

"시청의 상업 거래 허가 담당관이요."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래서 로베르토를 왜 벌하고 싶은데?"

"그 새끼가 우리 가족의 원수니까요."

* * *

모너 영지와 맞붙은 옵솔 영지에 인맥이 많았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 인맥을 활용해 식량 유통업에 뛰어들고 나쁘지 않은 성과를 내며 상단을 차렸다.

작은 상단이었지만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식량을 공급해 상단을 찾는 상인들이 점차 많아졌다.

문제는 공작이 사라진 후 상인 협회가 식량 가격을 조절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상단에 대한 조사가 심해졌어요. 거의 매일 병사들과 영주성의 직원들이 집과 창고를 헤집었고, 배송해야 하는 마차를 검문했죠. 심지어 건초에 마약을 숨긴 것 같다며 불을 지르기도 했어요."

물론 그 후 마땅한 보상을 받았지만 계약된 물량을 납품하지 못하게 된 신생 상단에게 보상은 무의미했다.

상단의 신용도는 매일같이 떨어졌고, 무너져 가는 상단과 함께 그녀의 아버지도 무너져 갔다.

"그때 조사를 담당했던 게 행정관 로베르토였어요. 그 개자식은 별의별 이유를 들어 보상금도 한참이나 주지 않았죠."

그 후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후, 그녀는 단 한시도 장례식을 찾아온 로베르토의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다.

"놈은 제 아버지 장례식에서까지 아버지를 모욕했어요. 수사 중에 죽다니 영 수상쩍은 죽음이라면서요."

고운 미간을 찌푸린 리나가 이를 아득 갈았다.

이 영지에서는 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던 일이라며 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끝내 잊지 못해 영주성에서 일을 얻어 하녀가 되었고, 언젠가 높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복수를 부탁하리라 다짐했다.

어쩌면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가 떨리는 눈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미친 망나니라고 소문난 소공작이었지만, 로베르토 그 개자식을 후회하게 만들 수 있다면 무슨 상관일까.

"그러니까 그놈만 벌해 주면 내 밑에서 배우겠다고?"

언뜻 노골적으로 들리는 소공작의 말에 수치심으로 귀가 빨개졌지만,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이안으로선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굳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혹시 로… 그 새끼가 어디서 일하는지 알아?"

"네? 그야 행정관이니까 시청에서...."

"안내해."

"네? 지금요?"

마침, 발광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은 매일이 그랬다.

"가자!"

이안이 먼저 외성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리나가 바삐 걸어 안내를 시작했다.

* * *

시청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상인들과 평민들로 붐볐다. 큰 거래야 상인협회와 시청 간의 협의를 통해 이뤄지지만, 작은 거래들이나 상업 거래 허가는 시청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다음!"

로베르토는 피곤한 눈으로 다가오는 여자를 바라봤다.

'쯧, 어디서 계집이 감히.'

이 영지는 이게 문제다.

남자가 죄다 병사나 몬스터 사냥꾼으로 일하니 여자가 돈을 번다고 설치지 않는가.

보나 마나 산에서 딴 약초 몇 개를 팔기 위해 좌판을 열고 싶다고 허가받으러 온 것이겠지.

저 천한 년 때문에 귀한 시간을 낭비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짜증이 솟았다.

"거, 빨리빨리 오쇼!"

"네, 네! 죄송합니다!"

괜히 짜증을 내며 여자를 재촉했다.

'전부 멍청한 것들뿐이야.'

영지에 보탬은커녕 누가 되지 않으면 다행인 것들. 아직 신청서를 읽지도 않았지만 로베르토는 거절할 마음을 굳히고 도장을 치켜들었다.

허가서를 받기 위해 몇 시간 동안이나 기다려 온 시민이야 억울하겠지만, 자신은 영지의 밝은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할 뿐.

여자에게 서류를 뺏듯이 받아 든 로베르토가 불허가에 도장을 찍기 직전.

쾅!

굉음과 함께 시청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문이 튕기듯 떨어져 나갔다.

"꺅!"

갑작스러운 굉음에 시청에 있던 시민들이 문 쪽을 바라보자 구겨진 검은색 정복을 입은 남자와 하녀 복장을 한 소녀가 보였다.

남자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을 힐끗 보더니 다짜고짜 소리쳤다.

"로베르토!"

'누구지? 감사관인가?'

여자가 한 복장 덕분에 영주성에서 나온 인물이라는 것은 알아봤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른 남자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가 갑자기 난입한 무뢰한에게 어떻게 반응할지 고민하는 사이, 남자가 다시 소리 질렀다.

"로베르토!"

그 소음에 시청을 총괄하는 행정관이 급히 내려왔다가 남자를 보고는 납작 엎드리며 소리쳤다.

"소공자님을 뵙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장내에 깊은 정적이 흘렀다.

* * *

"로베르토는 여기 있나?"

이안의 물음에 행정관이 엎드린 채로 눈을 뒤룩 굴리며 말했다.

"네, 네, 저기 있습니다."

행정관은 태어나 가장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 미치광이가 왜 여기 있지?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미친놈이 미친 짓을 하는 데 이유가 있을까.'

문을 차고 들어온 모양새를 봤을 때 아무리 봐도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자고로 광견병 걸린 개는 놈이 원하는 뼈다귀를 던져 내쫓는 것이 상책이니 이유를 물을 필요도, 막을 마음도 들지 않았다.

행정관은 혹시나 불똥이 튈까 싶어 엎드린 자세로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소리쳤다.

"로베르토! 소공작님께서 찾지 않느냐! 어서 이쪽으로 와 소공작님께 예를 갖춰라!"

그 부름에 로베르토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저, 저, 저 남자가 그 소공작이라고? 검집으로 징세 감독관을 후려 팬?'

이유도 없이 망나니에게 죽기 직전까지 맞은 징세 감독관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건 시청에서는 비밀도 아닌 이야기였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 돼지를 안 봐도 돼서 잘됐다며 고소해하지 않았던가.

'날 도대체 왜....'

소공작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좀처럼 발걸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마음이 이럴까.

움직이지 않는 발을 억지로 옮기려는데, 그보다 소공작 옆의 여자가 로베르토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게 더 빨랐다.

"저기 저 사람이에요."

그와 동시에 로베르토에게 향한 이안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로베르토?"

"예, 예. 소공작님을 뵙습니다."

젠장.

소공작의 눈에 서린 광기를 읽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말과 동시에 납작 엎드린 그의 머릿속에 수백 가지의 상념이 지나갔다.

도대체 왜 소공작이 여기까지 왔을까.

날 알고 있는 저 하녀는 누굴까.

혹시 상을 주려고 온 것일까? 그런 분위기는 아닌 것 같은데.

"소, 소공작님, 무슨 일...."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검을 뽑아 엎드려 있는 로베르토의 손을 꿰뚫었다.

"끄아아아악!"

바닥에 고정된 손과 검 사이로 더운 피가 흐르고, 로베르토의 비명이 고요한 시청에 울려 퍼졌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http://blog.naver.com/jayplemedia1

ⓒ올가미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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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이안은 로베르토의 손을 꿰뚫은 검 손잡이를 불쾌한 눈으로 바라봤다.

검 끝이 살과 뼈를 헤집는 둔탁한 감촉과 비명이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더 큰 문제는 그 만족감이 싫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정말 인정해야겠어.'

나는 미쳐 가고 있다.

어쩌면 벌써 미쳤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있는 마나를 다 때려 박아 시청 문을 박살 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래된 문 특유의 끼릭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 문을 부쉈을 뿐.

눈앞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죄가 있는지, 리나의 말이 사실인지, 아무것도 확인된 게 없었다.

그에게 죄가 있다고 한들, 기록과 자료를 통해 옳고 그름을 가린 뒤 판결해야 한다. 법의 권위를 높이고 내 악명을 낮추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이런 식으로 벌해서는 안 됐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지 위에 소공작보다 고귀한 존재는 없다. 그 자체로 법이며 홀로 영지를 오롯이 대표할 수 있는 자. 모든 증오와 원망의 대상.

나를 향한 타인의 혐오가 불합리하듯 나 또한 그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이건 거래다. 리나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 그녀를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거래.

엎드려 있던 눈치를 보고 있던 다른 행정관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 명한 뒤 자기 손을 바라보며 흐느끼고 있는 로베르토에게 향했다.

"잘 들어."

여기서 당장 죽여도 하등 상관없는 놈이다.

그러나 여기서 놈이 죽으면 리나의 이야기 속 다른 등장인물들이 아쉬워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단역에 불과한 놈에게 큰 역할을 주기로 결심했다.

"이곳으로 영주성 감사관이 몰려올 거야. 나는 시청의 모든 역사를 뒤져서라도 네놈의 잘못을 찾을 생각이야."

설령 리나의 말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죄는 찾으면 그만이니까.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공무원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 그게 무슨...?"

퍽!

엎드려 있는 놈을 걷어차자 놈이 비명을 질러 댔다.

"듣기만 해. 감사관들이 도착하면 네가 지금까지 처리한 모든 업무를 재조사하고 네놈이 쓴 마지막 1실버까지 추적해서 부정한 뇌물이 있었나 확인할 거야."

이안의 말에 로베르토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그들이 찾기 전에, 네놈이 먼저 죄를 고하면 살려는 줄게."

"왜, 왜...."

로베르토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도대체 왜 저에게...."

이 상황이 꿈만 같았다. 검이 박힌 손과 배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통증이 아니라면 그렇게 믿었을지도 모른다.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

한점의 분노조차 담기지 않은 그의 목소리에 깨달았다.

이건 죄를 묻는 게 아니다. 다만 벌하기 위해 죄를 찾고 있을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지도 몰라.'

설마 수십 명의 사람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살인을 저지를까.

놈의 말처럼 재수 없게 망나니의 여흥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입을 다물기로 결심한 순간, 이안이 피가 흐르는 바닥에 털썩하고 주저앉아 눈을 마주쳤다.

"죄가 없으면 죄가 없다고 주장해도 돼."

눈에 서린 광기를 마주한 로베르토가 급히 고개를 돌리자, 이안이 펜과 종이를 멀쩡한 손에 쥐여 주며 말을 이었다.

"넌 절대 결백하지 않으니까."

'죽는다.'

광기 어린 눈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손에 박힌 검이 목을 향할 거라 경고하는 듯했다.

눈앞의 미치광이는 죄를 고하면 살려 준다고 했을 뿐, 죄가 없으면 살려 주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만약 진짜로 결백하다고 하더라도 이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선명한 죽음의 공포가 목을 옥죄어 왔다.

'살아야 해.'

죄를 적어야 한다.

태어나 저지른 모든 죄를 적어 내야 한다.

그렇게 결심한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상인협회. 아무리 망나니라도 그들을 건들 수는 없어.'

말단에 불과한 자신이라면 몰라도 상인협회에 소속된 상인 전부를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상인협회가 저지른 일들을 부풀리고 그사이에 어쩔 수 없이 권력에 의해 핍박받은 성실하고 불쌍한 공무원의 조그만 잘못을 적는다면, 소공작이 과연 다른 이들에게도 검을 들이밀 수 있을까?

이 영지의 모든 식량을 들여오는 상인협회에?

손에서 흐른 피가 그가 쥔 종이를 적시기 시작할 무렵, 로베르토의 손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이안은 멍한 표정으로 로베르토를 바라보고 있는 리나에게 다가가 펜과 종이를 건넸다.

"받아 적어."

펜과 종이를 받아서 든 리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요? 아, 아니 어릴 때 잘못한 게… 사실, 저번 주에도 시종장님 뒷담화를...."

헛소리하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은 이안이 로베르토를 가리키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저 새끼가 적는 걸 받아 적으라고. 사본을 만들어야 조사 후에 제대로 조사했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고작 일개 행정관 하나의 문제일 리가 없다. 놈이 적어 낸 내용에는 영주성 전반의 문제가 얽히고설켜 있을 터.

이안은 고개를 들어 낡은 시청 건물의 천장을 바라봤다.

낡은 천장 사이에서 한 방울씩 물이 새고 있었다.

맑은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은 더러운 시청 건물을 거쳐 바닥에 검은 웅덩이를 이뤘다.

"네 부모를 죽인 건 눈앞의 저놈뿐만이 아니야. 저놈을 움직인 새끼도, 식량을 가지고 장난치려던 새끼도 전부 책임져야지. 아직 그럴 수는 없겠지만."

못 할 건 없다.

광장에 일렬로 세워 단두대 파티를 벌이면 되니까.

다만,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가뜩이나 기피되는 이 땅까지 들어와 장사하려는 상인들이 더욱 적어질 것이다.

저주받은 마물의 땅과 인접한 모너 영지는 상인들의 기피 대상이다. 지금 당장 식량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고 있는 것도 담합이 될 만큼 상단이 적어서 그런 것 아닌가.

이 상황에서 왕국 내 상인 길드가 모너 영지 상행을 금하면 영지 전체가 진짜 굶어 죽을 수도 있다.

영지 내 상인협회도 상인 길드에 속한 만큼 함부로 움직여 겁박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적어 놔.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본 뒤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썩은 건지 한번 찾아보자고."

이안이 바삐 움직이는 로베르토의 손을 보며 사납게 웃었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감사관부터 상인협회, 영주성, 시장 조합, 시청에 이르기까지.

감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고 심지어 그 불행을 감춘 이들은 결국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다.

"얼마나 걸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약속할게. 네 부모님과 관련 있는 이들은 모두 잡아 마땅한 벌을 주겠다고."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리나의 눈에 조금이지만 경외(敬畏)가 어렸다.

* * *

이어 도착한 감사관들에게 이안이 내린 명령은 간단했다. 로베르토가 적은 모든 범죄의 진위를 조사할 것.

"이 영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잊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제 역할도 못 하는 개를 키우는 취미는 없거든."

썩은 부위는 퍼지기 전에 도려 내야 한다. 이미 썩을 대로 썩은 고기가 영주성 앞마당에 있다는 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었다.

"고의든 실수든 이 수사에서 제외되는 이름이 있거나 수사를 피해 가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가문의 이름을 걸고 그 사람과 담당 수사관의 목을 같은 자리에 걸어 놓을 것이다."

동네 거지보다 낮은 평판을 지녔지만, 그 어떤 것보다 무거운 가치를 가진 이름.

그 아이러니에 조소하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수사를 덮으려 하는 자가 있다면 나에게 직접 전해라. 만약 수사를 방해하거나 덮어 이득을 얻은 자가 있다면 그자의 가족, 친구, 친척, 이웃까지 이득을 본 모두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 서슬 퍼런 경고에 감사관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이안은 잠시 서서 모여 있는 감사관들을 바라봤다. 영지 행정의 부패와 부정을 막고 영지를 발전시키기 위해 모인 이들.

이안이 로베르토의 손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 검집에 넣었다.

"생각 같아서는 시청 한복판에 있는 썩은 고기 냄새도 맡지 못한 사냥개가 필요한가 싶어. 차라리 역할을 다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너희 전부를 면직시키고 치안부를 쓰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

감사관들의 몸에서 빛나는 금붙이들을 본 이안의 말투가 사나워졌다.

"이건 경고가 아니야, 너희 존재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이니까. 잘하자고, 잘. 불필요한 피가 더 흐르지 않게. 저 새끼가 쓴 마지막 1실버까지 찾아내. 어디서 돈을 얻었는지, 어떻게 썼는지, 시청에서 일하며 내 영지민에게 준 피해는 없는지. 필요하다면 수도 전체를 뒤져서라도 확실히 하는 게 좋을 거야."

건물을 나서기 위해 몸을 돌린 이안의 귓가에 털썩하고 로베르토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놈은 수사가 끝날 때까지 시장 광장에 묶어 놔. 놈이 적은 문서의 사본을 옆에 적어 두고. 치안대와 의료원에 말해서 죽지 않게 도와줘. 죽으면 어쩔 수 없고."

숨을 쉬든 쉬지 않든 시체와 다를 바 없는 그의 모습은 문서에 적힌 모두에게 전하는 분명한 경고가 될 것이다.

'일단 이 정도면 되려나.'

말을 마친 이안은 불안한 표정으로 탐문을 시작하는 감사관들을 뒤로한 채 피곤한 표정으로 리나와 함께 본성으로 돌아갔다.

지랄 맞게도 긴 하루였다.

* * *

그날 밤.

몰려드는 통증에 성에 귀환하자마자 방에 돌아온 이안은 73%까지 올라온 의존도를 보며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아. 행복하다."

이안이 남긴 일기장을 읽을 때만 해도 비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일기장은 머리에 꽃이라도 단 놈이 쓴 것처럼 희망과 긍정적인 말들로 가득 차 있어 세상 전부의 증오를 받는 놈이 썼다고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 행복해 미칠 것 같다."

지금은 왜 그런 일기장을 썼는지 알 것 같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날들 속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선 억지로라도 즐거움과 행복을 찾아 억지로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서.

통증에 굴복해 현실을 버리고 독에 취해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빌어먹을 통증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문 부정적인 생각들이 어느새 거목이 되어 사고를 어지럽혔다.

억지로라도 잠을 자기 위해 약초와 독초를 섞은 연초에 불을 붙였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나?'

어떻게든 이 방을 피하려는 시종들은 봤어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레이나가 떠난 뒤로 처음이었다. 레이나가 벌써 도착한 건 아닐까 하는 희망에 급히 일어나 문을 여니, 두 손을 꼭 잡은 채로 떨고 있는 리나가 있었다.

"리나?"

"네. 공작님."

잔뜩 굳은 그녀의 얼굴 사이에서 굳은 결의가 묻어났다.

공작이라고 부르기 위해 이 시간에 방까지 찾아온 건가 싶어 리나를 바라보자, 그녀가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전 준비가 됐습니다."

"준비? 무슨?"

이 시간에 무슨 준비를 한단 말인가.

애초에 몸이 너무 좋지 않아 일찍 잠자리에 든 참이다.

"그… 그 준비요."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애꿎은 옷을 만지작거리며 이안을 바라봤다.

"그게 뭔데?"

"그… 아래, 아래에서 배울… 저, 전 처음이지만, 아니, 그러니까, 가르쳐만 주신다면...."

어느새 귀까지 벌겋게 물들인 그녀가 수치심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하자 당황한 이안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내 휘하로 들어오는 것 말이야? 검이랑 무술을 배우는 거?"

"네. 휘하로… 휘하… 네? 무술이요?"

이안과 리나가 서로를 바라봤다.

'무슨 개소리야?'

'아래, 아래라고 했는데? 내가 무술을 어떻게 배워?'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두 사람 모두 아침에 했던 대화를 회상했다.

-그냥 내 아래에서 배우기만 하면 돼.

'아… 평판이 거지 같으면 이런 오해를 할 수도 있구나.'

'무술이라고? 내가? 어떻게?'

이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얼굴을 쓸어내리기 무섭게 리나가 엎드리듯 고개 숙이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네! 저는 공작님께 무술을 배울 준비가 됐습니다!"

정수리까지 벌게진 걸 보니 수치심이 한계까지 다다른 모양이었다.

"응, 그래. 일단 오늘은 돌아가고 내일마저 이야기하자."

어이없는 오해에 살짝 억울함과 분노가 올라왔지만, 이건 칭호의 영향이라는 걸 이안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몸을 바치러 와서 이안을 공작이라고 높여 부를 정도로 오늘 일에 감명을 받은 모양이니, 그녀를 가르쳐 특성을 얻어야 하는 상황에선 큰 이득인 셈이다.

'제기랄.'

동시에, 그 정도로 감명받은 그녀조차 칭호를 넘어서 그를 판단하진 못했다는 사실이, 너는 그 누구와도 마음을 나눌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이 갑갑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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