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 60-64

60화

"웃기지 않느냐?"

왕이 물었다.

"주인을 지켜야 할 개는 도망가고, 주인은 개를 지킨다며 사지를 무릅쓰니."

그가 기껍다는 듯 입매를 쭉 찢어 히죽 웃어 보였다.

"모너의 핏줄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한탄하듯 말한 왕의 시선이 일렁이는 모닥불을 향했다.

"이곳에서 스벤의 아이를 잡아 그를 불러낼 생각이었다. 그랬다면 내가 쌓아 놓은 모든 게 무너졌을 테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스벤이 말해 주지 않더냐? 위대한 영역에 발을 들이는 자의 영혼은 뜻을 품고, 내 영혼이 품은 뜻은 정의(正義)라고. 정의를 지키는 고블린이라니, 세상에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또 있을까."

끅끅대며 웃어 댄 고블린이 바닥에 놓인 망치를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방금 도망간 겁쟁이를 인질로 부렸다면 내 격 또한 그만큼 주저앉았을 게다."

자조하듯 웃어 대던 고블린의 눈이 다시 이안을 향했다.

"참으로 다행이구나. 참으로 다행이야."

기껍다는 듯 쭉 찢어진 입이 호선을 그림과 동시에 왕의 흉흉한 기세가 주변을 휘감았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지 않던 살의가 공기를 가득 메우고 명백한 적의가 살갗을 찔러 댔다.

"빌어먹을 모너의 핏줄을 끊는 것만큼 정의로운 일이 또 있을까."

고블린의 싸늘한 웃음에 당장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고블린의 마나가 사방에 퍼져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저 망치가 움직이는 순간 내 목숨은 끝나리라.

눈앞에 마주한 죽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게임 속 수없이 마주한 실패만큼이나 허무한 끝이었다. 마물의 숲에서 우연히 고블린 왕을 만나 죽다니.

그것도 아득한 힘을 가진 마족도 아니고, 한 종족을 지배하고 농락하던 반신(半神)도 아닌, 고작 고블린 따위에게.

"흐흐흐...."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테헤키란 이름은 게임 속에선 들어 본 적도 없으니, 놈은 10년 안에 죽을 터.

복수는 걱정할 필요 없겠다며 자조하고 있을 때, 사방을 옥죄던 고블린의 기세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러니 그 목숨을 대신해 한 번만 내 말을 들어다오."

히죽거리는 왕은 어딘가 절박해 보였다.

"이 또한 개똥만도 못한 내 정의(正義)니."

* * *

내가 정신을 차린 순간, 모두가 날 고블린 왕이라 불렀다. 그래서 나는 그리 믿었고, 그리 행동했다.

본능과 욕망에 충실한 동족(同族)을 이끄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동족에 대한 혐오였다.

수십 년이 지나, 수없는 싸움 끝에 숲의 끝자락을 얻어 낸 그 순간까지도 나는 동족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저들은 고작해야 십 년도 살지 못하는가.

왜 저들은 마수와 다름없이 본능과 욕망만을 따르는가.

왜 저들은.

왜 저들은.

도대체 왜 저들은.

그리고 마침내 피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저들과 다르다.'

처음에는 작은 의심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의심은 숲에 들어온 인간들을 몰래 따라다니며 점점 확신으로 변해 갔다.

인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은 분명 고블린보다 인간에 가까웠으니까.

나는 인간의 술을, 노래를, 감정을, 전의와 전우애를 그리고 그들의 용맹함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롯한 증오가 되어, 동족에게로 향했다.

'왜, 왜 못 알아듣는단 말이냐!'

고블린들은 언어도, 요리도 익히지 못했으며, 조금의 이타심도 꾸미지 못했다.

죽은 동료의 시체 위에서 울부짖던 인간과 달리, 고블린은 동료의 시체를 찢어 먹기 바빴다.

'배가 고파서, 먹이가 충분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당장 생존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언어가, 노래가 무슨 소용이랴.

그래서 수없이 많은 전투 끝에 숲의 한 자락을 얻어 내 축제를 벌였다.

'이제 더 이상 배를 곯지 않아도 된다.'

'드디어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

왕의 염원을 담은 첫 축제는 비극으로 끝났다.

술을 마시며 노래 부르던 인간과 달리 술을 먹은 고블린은 충혈된 눈으로 사방에 칼을 휘둘렀고, 눈먼 칼에 누군가 죽으면, 그 시체를 뜯어 먹으려는 고블린들이 모여 싸움을 벌였다.

그 앞에 산더미처럼 많은 고기가 쌓여 있었음에도, 고블린은 고블린을 먹었다.

그제야 그들의 노래 소리가 들렸다.

키히히, 케헤헤, 키키긱.

기쁨에 넘쳐 성대를 긁어 만든 노랫소리가.

저열하고 미개한 두 발로 선 마수들.

왕은 자식을 씹어 먹는 아비를 보고서야 그들의 백성을 버렸다.

그저 멍하니 서서, 저들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이 조잡하게 피운 모닥불과 함께 사그라지는 걸 바라보고 있을 때, 내게 다가온 저능아가 미숙한 발음으로 옹알이하듯, 속삭였다.

"버리지, 않는다."

그녀는 내게 처음으로 생긴 백성이었고.

그 말은 내가 왕으로서 들은 첫 간청이었다.

"버리지, 않는다."

이름조차 없는, 그저 '숲의 저주'라고 불리던 아이였다. 태어난 날 걷고, 싸울 줄 아는 고블린들과 달리 걷지도, 말하지도, 싸우지도 못하는 존재.

단 한 번도 가치 있다 생각하지 않은 이들이, 다른 고블린들이 그렇듯, 숲의 저주를 막을 부적쯤으로 치부한 저능아들이, 마침내 찾은 내 동족(同族)이었다.

그녀의 성장을 바라보며, 나 또한 배웠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걷지 못한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검을 집지 못한다.

주술사의 주술도, 병사의 날렵함도, 홉고블린의 괴력도 없다. 고블린이라면 당연히 가지도 태어났어야 할 야성도, 본성도 없다.

수년이 흐른 후에야 그들은 걸음을 뗐다.

그러고도 수년이 흐르자, 언어를 배웠다.

그들은 울고, 웃고, 화내고, 기뻐할 줄 알았다.

허기와 살욕, 광기가 아닌 감각을 느낄 줄 알았다.

그건 오우거와 고블린만큼이나 전혀 다른.

그토록 기다리던 종(種)의 발견이었다.

조잡한 모닥불에 모여 춤추는 백성들을.

왕은 진심으로 사랑했다.

* * *

"크흐흐… 그 전에도 모두가 날 왕이라 불렀지만, 그제야 진정 왕이 된 셈이지."

모든 희망을 잃었던 그리고 다시금 희망을 되찾았던 그 불빛에 시선을 고정한 채, 테헤키가 말을 이었다.

"인간인 너는 믿지 못하겠지만, 우린 만족했다. 저주가 시작되기 전까진 그랬지."

얻어 낸 숲의 끝자락에.

풍족한 것 하나 없지만 웃을 줄 아는 백성들에.

'우리'는 부수는 것보다 만드는 걸 더 좋아했으니, 숲 밖의 인간들도, 숲의 주민들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적어도 숲의 저주가 시작되기 전까진.

"모너의 작은 주인아, 너는 왜 요새가 무너지지 않은 줄 아느냐?"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노란색 눈을 뒤룩 굴려 이안을 바라본 고블린이 이죽거렸다.

"인간이 지은 흐물 벽 따위, 오크도 버티지 못할 게다."

수많은 종족과 그들의 왕 중 오크를 지배하고 있는 폭군만 움직여도 요새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며 킬킬대던 고블린이 벌름거리는 코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놈들이 살아 있는 건 그저 숲의 주민들이 밖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저 숲 안에서 살아가는 것들은 마나로 호흡하니, 마나가 부족한 인간의 땅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이안이 인상을 구겼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프론트 홀드에 있던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요새를 공격하는 몬스터는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 얼굴을 본 테헤키가 다시 한번 킬킬댔다.

"네 애비가 그것도 가르쳐 주지 않더냐? 요새가 생기기 전, 모너는 숲의 다양한 종족과 교류했다. 늪지대의 나가(Naga)나, 숲 깊숙한 곳의 두 발로 선 늑대들에게도, 심지어 숲의 끝자락, 보잘것없던 우리에게도 각종 무기와 도구를 전해 줬다."

말만 통하면 친구가 될 수 있다며 웃어 대던 공작을 떠올려 봤지만, 오랜 시간만큼이나 그의 기억도 희미해졌는지 그의 웃음소리만 어렴풋이 들릴 뿐이었다.

"그러다 저주가 퍼졌다. 원초적인 감정과 욕망을 제외한 모든 걸 집어삼키는 저주가."

숲의 주민들은 인간의 믿음에 보답했다.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을 경고하고, 높은 울타리를 치라고 말했으니.

그렇게 숲을 틀어막는 요새가 생겼다.

"지금껏 들었다면 알겠지."

추례한 고블린의 떨리는 눈이 모너의 어린 주인을 이글거리며 노려봤다.

"내가 세상 그 무엇보다 저주를 두려워했다는걸."

어젯밤까지 웃고 떠들던 가족이 충혈된 눈으로 침을 흘렸다.

그토록 아끼던 망치가 아닌 조잡한 검과 창을 아무렇게 꼬나 쥔 백성이, 내 가족이, 흉흉한 적의를 내뿜었다.

그토록 혐오하던 고블린과 무엇 하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그래서 모너에게 몇 번이고 부탁했다. 그저 요새만 지나가게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그 넓은 땅 중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아니 모너의 땅이 아니어도 좋으니, 그냥 지나가는 것만 허해 달라고."

그 전의 공작에게도, 그 전의 공작에게도, 지금의 백작에게도 몇 번이고 설명했지만, 그 누구도 고블린이되 고블린이 아닌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스로 세우라 충고한 벽에 갇혀 그 벽 위의 인간들에게 죽어 가는 백성들을 허망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던 나약한 고블린은, 그 긴 시간 동안 힘을 길렀다.

끝없이 정의(正意)를 갈망하며.

"숲을 떠나도 저주가 사라지지 않을 수 있고, 내가 내 가족을 죽였듯, 너희도 다른 방법이 없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난 너희가 밉구나."

이제 이백도 남지 않은 백성의 면면을 떠올린 왕의 시선은 못이라도 박은 듯, 이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를 이 숲에서 구해다오."

* * *

떨리는 눈으로 테헤키를 훑어봤다.

벗어 던진 로브 사이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짜리몽땅한 몸.

고블린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튼튼한 근육.

쭉 찢어진 눈매 사이로 금을 박아 넣은 듯 형형히 빛나는 노란색 눈동자.

척 봐도 비범해 보이는 망치까지 눈이 닿자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졌다.

'망치가 주 무기고, 키는 짧고, 술이랑 노래 좋아하고, 만드는 거 좋아하는 종족이라....'

뒤룩 구른 눈동자가 다시 테헤키의 얼굴을 향했다.

'얼굴은 어디서 심하게 쳐 맞은 고블린 같은데....'

귀까지 찢어진 입가에서 줄줄 흐르고 있는 침만 봐도 고블린임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

아직 의심이 가시지도 않았건만, 죽음을 앞에 두고도 꼿꼿하던 허리는 익은 벼처럼 고개를 숙이고, 검을 떠나 공손하게 모인 두 손은 자연스럽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습니까?"

[『금귀(金鬼)의 눈』이 개안(開眼)합니다.]

한시도 잊지 못한 드워프(Dwarf)의 존재에 아득히 오래전 그들과 교류했던 대상(大商)의 재능이 깨어나자, 추악한 얼굴 위로 금이 반짝이고 불쾌한 숨소리 너머로 짤랑거리는 금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가 또 다크엘프도 받아들인 평화주의자 아닙니까! 숲속의 땅을 원하신다고요? 혹시 광산은 필요 없으시고? 잘 찾아보면 철도 있고 구리도 있을 텐데...."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드워프의 모습에 폭발하듯 터져 나온 상인의 재능이 멍하니 눈을 껌뻑이는 순박한 드워프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61화

테헤키가 눈을 뻐끔거리며 이안을 바라봤다.

평생을 마물의 숲에서 보내며 모너의 병사와 기사만 봐 왔던 테헤키로서는 이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술사처럼 굽어진 허리와 상한 시체를 먹은 고블린처럼 파들파들 떨리는 웃음을 바라보던 테헤키의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이윽고 이안이 자신을 모욕한다고 확신한 테헤키의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네놈이 감히 나를 능멸하느냐!"

그의 감정을 대변하듯 공기 중의 마나가 떨리고 그가 일으킨 기세가 온몸을 짓누르는 와중에도, 이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제가 어떻게 감히 테헤키 님을 능멸하겠습니까?"

허리는 여전히 어정쩡하게 굽어 있었지만, 능글맞던 표정은 사라지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당장 요새를 향해 오고 있는 오크와 고블린조차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테헤키 님과 그 일족을 적으로 돌릴 정도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과연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드워프답게 테헤키는 여전히 불쾌한 얼굴로 씩씩댔다.

"테헤키 님,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제 진심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만, 직접 보셨듯 저는 주인이되 주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주인이되 주인이 아니다?"

"예. 설령 제가 명령한다고 해도 요새의 문은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테헤키가 고블린이 아닌 드워프라고 아무리 우겨 봐야 믿지도 않을 것이다.

설령 믿어 준다고 해도 언제 몬스터로 전락할지 모르는 드워프를 성벽 너머로 들이지는 않을 테지.

이미 모너의 영역에 살고 있던 다크엘프와 달리 드워프를 받아들이는 건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대신 모너의 이름으로 약속드리겠습니다."

드워프는 게임에 없던 변수다.

어쩌면 전쟁의 승패를 바꿀지도 모르는 중요한 변수.

그러니까 배드 엔딩 하나 보지 못한 이들의 의견 따위,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무슨 일이 있어도 테헤키 님과 일족에게 자유를 드리겠다고."

* * *

진심을 담은 이안의 말에 숨을 거칠게 내쉬던 테헤키가 웃으며 일어났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구나."

어느새 희미해진 모닥불 너머를 잠시 바라본 그가 옆에 있는 커다란 자루를 뒤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중요한 약속을 할 때 물건을 주고받는다지?"

손가락에 달린 작은 족쇄를 자랑하며 분명 그렇게 말했다. 중요한 약속이라, 더 자주 기억하기 위해 잘 보이는 곳에 달아 놓은 거라고.

주섬주섬 자루를 뒤지던 그가 마침내 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언젠가 인간과 약속할 일이 생기면 주기 위해 이걸 만들었지."

언젠가 한 번쯤은 인간과 약속을 나눌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장난삼아 만들기 시작했던 검이었다.

저주가 시작된 이후 이걸 받아 든 인간이 자신을, 자신의 백성을 살려 주길 바라며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고, 또 얼마나 오랜 시간 저 검을 들고 다녔던가.

"흐흐, 받거라."

어린 주인이 검을 집어 드는 걸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 검으로 네놈을 꿰뚫어 주마."

어린 주인은 자유를 약속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를 테니까.

* * *

부러질 듯 당긴 활이 적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전장의 어느 곳에도 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헉, 헉, 헉."

토하듯 숨을 내쉬자, 현실감각이 조금 돌아왔다.

"...."

주변을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긴박한 외침도, 짜증 섞인 고함 소리도, 화살의 파공음도 들리지 않았으니까.

"이겼다!"

후드웍은 그렇게 외쳤다.

요새의 병사에게 승리가 값진 일이냐고 묻는다면, 백이면 백 비웃으며 말할 것이다.

승리가 아니라 살아남은 게 중요한 거라고.

"우리는 살아남았다!"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쾅쾅대며 뛰어 대는 심장이 정말로 터져 버릴 것 같아, 있는 힘껏 악을 썼다.

"와!"

숲에 울려 퍼지는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을 들으며, 바삐 고개를 움직여 소공작을 찾았다.

그의 훈련이 없었다면, 그가 앞장서서 기습을 막아 내지 않았다면, 그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살아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 테니까.

"뭐야? 어디 갔어?"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았다.

골무도 없이 당긴 시위에 손에서 줄줄 흐르는 피를 보이며 자랑하고 싶었다.

기어코 이 빌어먹을 활을 당겼다고.

활로 얼마나 많은 홉고블린과 고블린을 잡았는지 알려 줘야....

"...?"

소공작이 없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것 보라며 한껏 거들먹거렸어야 할 인간이 없었다.

그 뒤를 그림자처럼 졸졸 쫓아다니던 레이나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버질 단장을 찾았지만, 그 역시 아무 데도 없었다.

"씨발."

순간 심장박동이 멈추고, 얼음을 끼얹은 듯 머리가 차가워졌다.

활을 든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전원 집합!"

어둠에 삼켜진 숲속, 차갑게 가라앉은 후드웍의 눈이 빛났다.

* * *

레이나는 쉼 없이 달렸다.

거슬리는 철퇴는 던져 버린 지 오래고, 하녀 일을 시작한 후로 항상 애지중지하던 하녀복마저 일찌감치 찢어져 흰 다리를 드러냈다.

단 한 번도 말없이 자리를 비운 적 없던 그가 없어졌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그가 있는 것 같은 방향을 쫒아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마주 달려오는 기사가 보였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마나를 터트리며 달려가는 기사를 본 순간, 세상이 멈추는 듯했다.

세상이 멈춘 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한참을 달리니,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과 흐릿한 인영이 보였다.

아....

한참을 더 뛰어 검을 휘두르고 있는 이안을 본 뒤에야 멈춘 심장이, 다시 뛰고 멈춰 있던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련님."

눈물이 얼굴을 간질이며 흘러내렸다.

꼴불견이지만, 괜찮아.

저렇게 한번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좀처럼 멈추지 못하시니까.

검을 휘두르는 그를 투정 부리듯 불렀다.

"도련님."

아무 일 없으셔서 다행이에요.

다음부터는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멍청한 저는 도련님이 보이지 않으면 이렇게 걱정부터 하니까요.

쏟아지려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찢어진 치마를 조심스럽게 정리했다.

"바보 같기는."

빈손으로 뺨을 찰싹 때렸다.

다시는, 다시는 그를 잃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 * *

검을 넘겨준 테헤키는 이제 가 봐야겠다며 야영지를 떠났다.

불과 두 걸음도 채 옮기기 전에 어둠 속으로 사라진 테헤키를 뒤로하고 그가 넘긴 검을 바라봤다.

나무를 대충 깎아 만든 듯한 조잡한 검집. 그리고 흔한 손잡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색 가죽이 대충 휘휘 감겨 있었다.

손잡이 끝에 달려 있어야 할 폼 멜도, 검이 타고 흐르는 것을 막아 줄 크로스 가드도, 그 흔한 술 하나 달리지 않은 그야말로 투박한 검이었다.

"아...."

검집에서 검을 꺼내는 순간, 공기를 타고 느껴지는 예기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과연 이 예기를 담을 수 있는 검집을 찾지 못해 마물의 숲에 있는 나무로 검집을 만든 건가.

투박한 검집과 아름다운 검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고블린을 닮은 드워프를 빼다 닮은 검 아닌가.

천천히 검을 내질렀다.

위대한 암살자의 비전에는 상대를 압도하는 화려함도, 유려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목표를 제거하기 위해 단조로운 직선을 그릴 뿐.

"후...."

천천히 나아가는 검에 마나를 불어넣자 옅은 마나가 검신을 덮었다.

'굳이?'

검신을 뒤덮은 마나를 움직였다.

베지 않으니 마나를 검신을 뒤덮을 필요도 없다.

온몸의 근육을 비틀어 힘을 끌어모았듯, 검 끝으로 검기를 그러모았다.

'조금만 더....'

불안정한 마나가 검 끝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조금만 실수하면 터지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정신을 집중한 채 쉬지 않고 마나를 움직였다.

검도, 마나도 흘러가게 두어야 한다.

쉼 없이 철을 두드려 검을 단조(鍛造)하는 장인처럼, 마나를 끊임없이 두드리고 응축시켰다.

검로의 끝에 도달하기 직전, 검 끝을 뒤덮은 얇은 검기가 마침내 하나로 뭉쳐 서늘히 빛났다.

[개인 기술을 상승했습니다.]

[암검(暗劍) 제1식 일점(一點) ─ 사(死)가 등록되었습니다.]

마나를 거두어들임과 동시에 힘이 탁 풀렸다.

극도의 긴장과 몰입이 사라지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싼 기사와 야영지에 모여 있는 병사가 보였다.

한쪽을 지키고 있던 버질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달려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말하는 그를 보자 싸늘한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늦기는 무슨, 도망가라니까."

도망가는 게 저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만약 테헤키가 적의를 가졌다면, 저들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로는 부족해. 고작 이 병력으로 테헤키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그가 날 죽일 생각이었으면 난 단 한 호흡도 버티지 못했을 텐데?"

"병사들과 레이나 양에게는 퇴각을 명령했습니다."

이안을 뒤로하고 척후조를 향해 뛰어가면서 버질은 레이나와 병사들을 만났고, 몇 번이나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병사들과 레이나만 요새로 돌려보내고 기사들과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레이나도, 병사들도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소공작님을 등지고 도망갈 사람은 없습니다."

버질이 슬쩍 뒤를 돌아 야영지의 병사들을 바라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저보다 기사에 훨씬 더 어울리는 이들입니다."

기습하려는 고블린을 발견했을 때도, 테헤키를 만났을 때도, 병사와 하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런 이안을 따라나섰다.

기사를 자처하는 자신만 퇴각을 고려했을 뿐.

비참한 마음을 억누르며 고개 숙인 버질에게 이안이 말했다.

"다음엔 기절이라도 시켜."

단순한 셈이라도 하는 듯한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상대할 수 없는 적을 만나면 언제든 누군가가 희생해야 돼. 이번에는 그게 나였을 뿐이고. 다음엔 너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약자의 생존법은 처절하고 비참한 법이다.

설령 그 약자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러니까 절대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개죽음으로 만들지 마."

최소한 게임 속에서는 그랬다.

희생을 존중할수록 희생하는 이들이 늘어난다.

희생이 헛되이 스러질수록 희생하는 이들이 줄어든다.

그게 약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생존법'이다.

마지막 말을 애써 삼킨 이안이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 뒤에 남겨진 버질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 *

다음 날 아침.

요새에 복귀하는 대신 이동을 계속하기로 한 척후대는 빠르게 야영지를 정리한 뒤 첫 번째 개활지를 향해 이동했다.

"빛이 보입니다!"

후드웍이 소리치지 않아도 일행 중 빛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빛에 모두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으니까.

"잠깐만 멈추지."

빛에 적응하기 위해 잠시 멈춰 선 뒤 빛을 향해 나아가자, 푸른 하늘과 거대한 개활지가 이들을 반겼다.

62화

숲을 지나 개활지에 들어서자 새파란 하늘과 눈부신 햇살이 일행을 반겼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검보라빛 평야에는 고성의 잔해처럼 보이는 부서진 성벽과 부서진 나무가 굴러다녔다.

"여기서부터 평야가 5일 정도 이어집니다."

"생각보다 훨씬 큰데?"

"아무래도 한 종족이 살았던 땅이니까요."

버질의 자랑스러운 목소리에 전에 들었던 후드웍의 설명이 떠올랐다. 초대 공작이 코볼트를 내쫓고 얻어 낸 땅이라고 했던가?

'굳이 이런 땅을 노렸다고?'

발밑의 칙칙한 검보라빛 땅을 바라봤다.

이 검보라빛은 토지가 마나에 침식됐다는 증거.

설령 이 땅에 요새를 지었다고 해도, 인간은 이곳의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을 것이다.

'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코볼트를 쫓아내기 위해서였나?'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고개를 들어 버질에게 물었다.

"후드웍은 아직인가?"

"네, 가장 높이 있는 나무에서 전방을 확인하겠다고 했으니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평야가 계속 이어지는 개활지에 들어서기 전 전방을 확인하는 건 필수다.

오크를 보려면 아직 2주는 더 이동해야 하지만 오크나 오우거가 아니더라도 어떤 적이 있을 지 절대 알 수 없으니까.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다는 생각에 잠깐 휴식을 취하자고 말하려는 찰나, 급하게 뛰어오는 후드웍이 보였다.

* * *

"대장! 대장!"

얼굴을 잔뜩 굳히고 달려온 후드웍이 숨조차 고르지 않고 토해 내듯 말을 이었다.

"오크, 오크입니다!"

"오크?"

"최소 부족급의 오크 군락이 전방에 있습니다!"

오크 부족이라면 그들을 우회해 지나가면 된다. 하지만 만약....

"깃발, 깃발은?"

"천막 사이사이에 검은 가죽을 달아 놓은 장대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깃발을 모방한 검은 군기(軍旗)를 쓰는 오크들은 수백의 부족 중에서도 단 하나밖에 없다.

"오크 군단(軍團)...."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버질이 따지듯 물었다.

"조장! 검은 군기가 확실한가?! 요새까지 한 달 이상 걸릴 거라던 놈들이 벌써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다!"

"한시라도 빨리 알려 드리기 위해 여러 곳에서 정찰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군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놈들이 어떻게 벌써...."

후드웍의 대답에 버질이 절망 어린 얼굴로 탄식했다. 이곳에서 요새까지는 고작 5일 거리.

요새는 아직 전쟁 준비조차 끝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소공작님, 지금 당장 돌아가서 이 소식을 알려야 합니다!"

버질의 흥분한 목소리에 후드웍이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선발대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벌써 진을 치고 있을 정도라면 본대도 가까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준비를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의 긴박한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요새는 한 달 뒤에나 오크와 전쟁을 시작할 거라고 알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고작 5일 거리에 적들이 있음을 알리고 수비전 준비해야 한다.

분명 옳은 판단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우린 돌아가지 않는다."

분명 버질이 끼어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아무 말 없이 설명을 기다렸다.

"만약 우리 임무가 오크 군단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거였다면 지금 돌아가야겠지만, 우리 임무는 오우거의 수를 확인하는 것."

그 외에도 이상한 점이 많다.

한 달 거리에 있다던 오크가 어떻게 여기에 진을 치고 있을까. 아무리 오크가 인간보다 체력이 좋다고 해도, 척후대가 밤잠까지 줄여 가며 이동한 것보다 빨리 이동했을 리는 없다.

"우리가 지금 돌아간다고 해도, 고작 적이 가까이 있다는 정보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적이 오크 군단이라는 걸 알았을 뿐, 군단의 숫자도, 오우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까."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딱 하나다. 오크가 우릴 습격하지 않았다는 것.

생환한 척후대원들은 분명 오크에게 기습당했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오크 군단이 적일 거라고 예상하기도 했고.

"정말 오크 군단이라면 왜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을까?"

오크 군단은 그 어떤 종족보다 전쟁에 능숙하다. 놈들은 인간처럼 정찰대를 운영하고 상대 정찰대를 악착같이 추적해 사냥한다.

군단의 악명이 높은 이유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목젖까지 치닫기 전까지는 병력의 수조차 알 수 없는 적이니까.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거 아닐까요?"

후드웍의 말에 그를 바라봤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요새의 모든 척후대를 찾아낸 오크들이 기사와 하녀가 섞인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시선을 마주한 후드웍이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 그럴 리가 없겠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전히 우리가 운이 좋았을 수도 있지만,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그 말에 버질이 심각한 얼굴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우리가 귀환하길 바라는 거군요."

"요란하게 여기저기 세워 둔 깃발을 보면 바로 요새로 복귀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놈들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척후대를 나왔다면 깃발을 보자마자 돌아갔을 테니까.

아니, 그전에 고블린의 기습에 죽었으려나?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느새 침착해진 버질의 목소리에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야, 안 돌아가?"

솔직히 이쯤 되면 혼자라도 돌아가겠다고 나설 줄 알았다. 설령 적의 의도라고 하더라도 적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걸 알려야 한다는 건 사실이니까.

자기가 옳다고 믿는 순간조차 침묵을 유지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5성급의 기사라면 더더욱.

"저는 대장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멍하니 그를 바라봤지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버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이상한 놈."

언제부터 날 대장 취급했다고.

이유가 어찌 됐든 쓸데없는 말싸움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건 좋은 일이다.

"두 사람 말처럼 누군가는 요새로 돌아가서 이쪽 상황을 전해 줘야 해."

버질과 후드웍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여기서 두 조로 나눠서 움직인다. 후드웍, 병사 중에서 가장 발이 빠른 사람을 두 명 데려와. 버질은 기사 두 명을 데려오고. 두 사람이 정한 네 명이 먼저 복귀하는 걸로 하지."

"기사님들도요?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이쪽에 있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후드웍의 말도 일리 있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 말도 맞지만 귀환조가 무사히 복귀하는 게 먼저야. 설령 또 다른 기습이 있다고 해도 기사 둘이라면 병사들은 도망칠 수 있겠지."

"예?!"

후드웍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버질을 번갈아 바라봤다.

"뭘 놀라고 그래. 그럼 초 단위로 죽을 병사들이 대신 몸을 던질까? 기사는 병사가 도망갈 시간을 벌 수 있지만 병사는 절대 그럴 수 없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걸 이해하는 건 다른 문제다.

후드웍의 난처한 얼굴을 본 버질이 안심시키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임무를 위해서라면 당연한 일이다."

임무를 위해서 불침번을 서라고 할 때마다 인상을 잔뜩 구겼던 게 누구더라?

"그럼 그렇게 알고 잘 전해 줘. 무슨 일이 있어도 병사들이 요새까지 복귀할 수 있도록 지켜야 한다고."

"예!"

두 사람이 병사들을 향해 돌아간 뒤, 근처에 있던 레이나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저번 전투 이후로 좀처럼 떨어지려고 하질 않는다. 가능하면 이번에 돌아갔으면 좋겠다만....

"안 됩니다."

역시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뭘 부탁할지 알고?"

"전 도련님만 두고 돌아갈 수 없습니다."

고개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명령을 내린다면 돌아갈 것 같기는 한데....

"대신, 무기를 들어 줘."

당황한 레이나가 재빨리 눈을 피했다.

"설마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어디다 숨겼는지는 몰라도 지금 레이나에게는 무기가 없다.

"무기가 없으면 전장에 있을 수 없어. 무기를 들든가 돌아가든가, 레이나가 선택해."

내 말에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그녀가 무기를 들겠다고 답했다.

* * *

버질이 모인 네 명의 기사와 병사들에게 작전에 대해 설명하는 사이, 나는 후드웍이 올랐던 나무에 올랐다.

후드웍이 오른 길을 따라 올라가자 광활한 평야가 한눈에 보였다.

"고성 뒤쪽을 보시면 됩니다."

그가 가리킨 곳을 보니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이 희미하게 보였다.

"더 가까이서 볼 수는 없을까?"

"아, 이걸 쓰시죠. 원통에다가 눈을 가져다 대면 멀리까지 볼 수 있습니다."

후드웍이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막대기를 꺼내 건넸다. 망원경을 예상했는데 막대기의 어느 쪽에도 유리가 없는 걸 보니 망원경은 아닌 모양이다.

"그냥 이걸 눈에다 가져다 대면 되는 건가?"

"예. 마나를 넣으면 더 멀리 볼 수 있다던데 눈에만 가져다 대도 잘 보이는 편입니다."

과연, 막대기를 눈에 가져가자 희미하게 보이던 깃발이 선명해졌다. 사물을 가까이 가져오는 게 아니라 시력 자체를 늘리는 기술이랄까.

가끔 이렇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이 튀어나온다. 이런 게 가능한데 하수도는 없는 세상이라니.

잠깐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고성에서 세 마리의 오크가 달려 나왔다.

잔뜩 흥분한 세 명의 오크가 서로를 향해 뭐라고 소리치는가 싶더니, 가장 뒤에 있던 오크가 앞서 달리는 오크의 등에 도끼를 던졌다.

"저게 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놀라기도 잠시.

고성의 성벽이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고, 먼지 사이로 희끗희끗한 회색 거체가 보였다.

"오우거다!"

거체를 발견한 후드웍이 소리침과 동시에 성벽을 부수고 나온 오우거가 쓰러져 있던 오크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고는, 그대로 입에 넣어 우적우적 씹어 댔다.

시간을 버는 데 성공한 다른 두 오크가 성벽에 올라 뿔리피를 울리자, 사방에서 무기를 든 오크들이 나타났다.

그중 턱까지 내려오는 어금니를 가진 오크를 발견한 후드웍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대전사, 대전사가 분명합니다!"

후드웍이 소리칠 필요도 없었다.

대전사가 아니라면 나무 위에 있는 우리를 발견했을 리가 없을 테니.

"새끼, 눈깔에 힘 준 거 봐라."

이안이 있는 곳을 흉흉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대전사가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성벽에 올랐다.

"방, 방금 분명히 눈이 마주쳤는데...."

하얗게 질린 후드웍의 말처럼 오크는 분명 이쪽을 바라봤다. 귀왕(鬼王)의 비전으로 기척을 전부 지워 확신은 못 했을 뿐.

"조용."

혹시나 저렇게 감이 좋은 놈이라면 소리마저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후드웍을 조용히 시키고, 대전사를 주시했다.

성벽에 올라선 대전사는 대뜸 도끼를 꺼내 뿔피리를 분 오크의 목을 베어 내고, 그대로 목 없는 오크를 발로 차 오우거에게 던졌다.

오우거는 씩씩거리며 대전사를 노려본 뒤 주변의 오크들을 향해 달려갔다.

작은 동산만 한 거체가 주먹을 내리칠 때마다 수십의 오크가 흔적도 없이 뭉개졌지만, 오크들은 바삐 거리를 벌릴 뿐, 누구도 오우거를 공격하지 않았다.

한동안 일방적인 소모전이 이어졌다.

오우거가 쫓아가면 도망가고 멈추면 같이 멈춘다. 그 과정에서 몇 명이 죽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오크의 포위망은 조금도 얇아지지 않았다.

이게 처음이 아닌 듯 흥분한 오우거가 몇 번이고 대전사를 향해 소리치자, 앞에 있던 오크를 집어 들어 던진 대전사가 킥킥댔다.

"내려가자."

오우거를 상대로 한 차륜전이라니.

절대 한두 시간 만에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후드웍을 불러 땅으로 향했다.

63화

땅에 내려서자 후드웍이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저희가 끼어들 수는 없을까요?"

딱 봐도 오크와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인다며, 우리가 멀리서 오우거를 도우면 승산이 있을 거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방금 오크들이 뭘 입고 있었지?"

"예? 오크가 옷을요?"

그러니까.

바로 그게 문제다.

놈들은 전부 실오라기 한 올도 걸치지 않은 채로 나무줄기에 무기와 이빨을 줄줄 매달고 있었다.

"잘 생각해 봐."

딱 한 명을 제외하고.

"생각이고 자시고, 오크가 인간도 아니고 옷을 입을 리가… 아! 대전사만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죠!"

말을 해 놓고도 후드웍은 그게 뭐가 특별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단(軍團)을 알고 있으면 모를 리가 없는데… 아직은 알려지지 않은 정보인가?

"몬스터의 지성을 판단할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옷이야. 똑똑할수록 옷이나 문신처럼 눈에 드러나는 방식으로 계급을 표현하거든."

"예? 그야 뭐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 봤자 특별한 놈들만 입는 거 아닌가요?"

"당연하지. 그리고 군단은 전원이 특별해. 전사 중의 전사로 인정받은 오크들이 모여 만든 전쟁 부대니까."

그러니까.

"옷을 입지 않은 놈들은 군단의 지원자쯤 된다는 거지."

"그럼 저기 모였던 놈들이 전부?!"

"아마 대전사 말고 군단에 속한 전사들은 한 명도 모이지 않았을 거야."

애초에 진짜 오크 군단이었다면 절대 저런 개죽음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명예로운 죽음에 목숨 거는, 기사만큼이나 머리에 꽃밭 가득한 놈들이니까.

"난 올라가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복귀조를 보낸 뒤에 돌아와. 어떻게 끝나는지 교대로 지켜보자고."

확실한 게 하나도 없을 때는 하나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야 한다.

"아무래도 오우거를 사로잡으려는 것 같은데,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는 몰라도, 놈들이 어디에 오우거를 가두는지는 알아야겠어."

"예! 알겠습니다!"

* * *

차륜전이 시작된 지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알아낸 건 저 고성 근처에 여섯 개 이상의 캠프가 있고 최소 네 명의 대전사가 있다는 것.

"드디어 끝날 것 같네."

처음보다 수십 배는 느려진 오우거를 향해 세 번째 대전사가 조심스럽게 다가갔을 때.

콰직!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인 오우거의 주먹이 세 번째 대전사를 그대로 으깨 버린 뒤, 멀찍이 떨어져 있는 네 번째 대전사를 노려봤다.

그 후로 지겨운 차륜전이 다시 이어졌다.

네 번째 대전사는 오우거가 지쳐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 기다리려는 듯 돌멩이를 던지며 오우거의 성질을 돋웠다.

이윽고, 팔을 휘두르던 오우거가 무릎을 꿇었다.

제힘조차 버티지 못할 정도로 지친 모양인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대전사를 한번 노려본 오우거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다.

오우거를 사로잡아 뭘 하고 싶었던 걸까?

수백의 오크를 바쳐서라도 얻어 내고 싶은 게 뭐였을까?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놈들을 바라봤지만, 아쉽게도 놈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무줄기로 오우거를 속박한 뒤 그대로 땅에 내버려 뒀을 뿐.

오우거가 쓰러졌다는 걸 들었는지, 첫날의 대전사가 나와 뭐라 소리치자 오크들이 부산히 움직여 오우거를 옮겼다.

수백의 오크가 낑낑거리며 동산만 한 오우거를 옮기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그래서 저걸 도대체 어디에 쓰려는 거지?"

장담하건대 오우거를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다.

마지막까지 주먹을 휘두르던 놈을 보면 알겠지만, 애초에 타협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오크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일단 내려가 볼까."

일단 이용할 수 있는 정보는 전부 얻었다.

어디 그 오우거가 얼마나 소중한지 볼까?

* * *

"준비는?"

"저와 테일은 준비됐습니다."

"병사들도 준비됐습니다."

버질과 테일이 차례로 대답했다.

버질은 임무를 앞두고 한껏 몸이 달아올랐는지, 활을 만지작거렸다.

"화살은 얼마나 남았지?"

"다 합치면 이백 발 정도는 남았습니다."

턱없이 부족하다.

"쯧, 더 챙겨 왔어야 하나."

"이게 한계였습니다. 병사 중 몇 명은 갑옷 대신 화살을 더 들고 온 놈들도 있으니까요."

기사가 애검을 다루듯 버질이 조심스럽게 활대를 쓸어 넘기는 걸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내가 생각을 잘못 했어.'

오우거가 아니면 위험한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급한 게 오우거의 뼈와 힘줄로 만든 대몬스터용 쇠뇌 '나이트 슬레이어'.

기사의 개인 무장으로 개발된 활이지만, 막상 만들고 보니 도르래가 없으면 발사할 수가 없어서 몬스터 사냥에는 거의 쓰지 않고 인간들 사이의 전쟁에서나 쓰이는 비운의 전략 병기 중 하나다.

한 가지 더 안타까운 점은 특수 제작 된 화살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다는 것.

"부족하지만 어쩔 수 없지."

계획은 단순하다.

나머지 인원이 멀리서 활로 주의를 끄는 사이, 나와 후드웍이 야영지를 탐색한다. 화살이 떨어지는 순간 나머지 인원은 숲으로 대피하고 우리도 즉시 빠진다.

"각자 임무를 잊지 마. 활로 견제하면서 놈들의 수를 파악하는 게 첫 번째. 그리고 그것보다 중요한 건, 절대 전면전으로 들어가지 않는 거야. 숲으로 대피한 후에도 추적이 없어질 때까지 절대 멈추지 마."

확인은 못 했지만 분명 적지 않은 수의 정예병이 있을 터. 그 숫자를 피해 없이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놈들의 주둔지에서 적당한 병력이 빠지면 나랑 후드웍이 주둔지로 들어갈 거고, 알아서 빠져나올 거야."

그사이에 원하는 걸 찾으면 좋겠지만, 찾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건 안전이야.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화살이 얼마나 남았던 무조건 자리를 피해. 알았어?"

말을 마치고 버질을 바라봤다. 결의에 가득 찬 얼굴이지만 조금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버질,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존과 안전한 복귀입니다."

척하고 답을 내놓는 모습이 어딘가 의심스럽다.

정말 이놈에게 병사들을 맡기는 게 옳은 선택일까 싶어 다시 한번 경고했다.

"잘 들어.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면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여기 있는 사람이 다 죽어도 나는 안 죽어."

내가 무려 마족이랑 반신한테서도 살아남은 사람이거든.

뭐, 그래 봤자 소드 마스터 같은 불가항력적인 적이 있다면 죽겠지만, 그게 아니라면야 어디서든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

무엇보다 넘칠 정도로 과분하게 준비해 오기도 했고.

"그러니까 혹시라도 누군가를 구할 일이 생기면, 병사들을 먼저 구해. 만약에 도움이 필요하면 우리 쪽에서 신호를 보낼 테니까."

버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밤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전부 푹 쉬라고 해. 임무가 시작하면 쉴 새 없을 테니까."

후드웍과 버질이 돌아간 후 혼자 남아 하늘을 바라봤다.

게임 속에서 수천 번도 더 해 본 작전이다.

아니, 게임보다 훨씬 유리한 상황임에도 불안감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 * *

"전원 준비."

버질이 손을 들자 병사들이 동시에 활을 꺼내 들었다.

"단장, 아무리 경계 사격이라지만 너무 먼데요? 적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조금 더 가까이 이동해야 하지 않을까요?"

점처럼 보이는 고성을 바라보던 테일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이트 슬레이어의 사정거리가 아무리 길다고 해도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까마득히 멀리 있는 적을 맞출 수 있을까.

그나마 적 근처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다행일 터.

순간 후드웍의 말대로 앞으로 이동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한 버질이 고개를 작게 흔들며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대기한다."

소공작이 저 활이라면 천 걸음 뒤의 적도 맞출 수 있다고 했으니 분명 닿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니 눈이 마주친 병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신호가 보이자마자 시작한다."

조용히 시위에 화살을 메기는 병사들 사이로, 묵직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 * *

"저쪽은 어때?"

내 물음에 품에서 막대기를 꺼낸 후드웍이 평야의 반대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본대는 준비가 끝났습니다."

"장소는?"

"계획한 곳에 자리 잡았습니다."

"고성 쪽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다. 알아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당연한 말이다. 고성에서는 버질이 있는 작은 능선도 보이지 않을 테니까.

"레이나는?"

"서쪽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후...."

준비는 끝났다.

"그럼 부탁해."

"네! 저만 믿으십쇼."

말을 마친 그가 뒤로 이동하는 걸 지켜보다가, 더 이상 그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을 때쯤, 고성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첫날 봤던 대전사가 알아차리길 기다리면서.

* * *

한 걸음에 십 분.

다시 한 걸음에 십 분.

그렇게 움직이길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드디어 고성이 희끄무레하게 보이기 시작했지만 고성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젠장.'

아티팩트 '버드아이' 없이는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나무 위에 있던 날 발견한 놈이다.

내가 아무리 기척을 숨겼다고 해도 이렇게 가까이 왔는데 날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신중한 놈이라는 생각에 짜증이 날 정도로 천천히 움직였는데도 반응하지 않는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다.

다른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간다고 해도 놈을 끌어내지 못하면 작전은 실패할 테니까.

'괜찮아. 신중한 놈이라는 걸 알아냈으니 다른 전략을 구상하면 돼.'

아쉬운 마음을 숨기고 허리까지 올라오는 풀숲으로 들어선 순간, 고성 쪽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뿜어져 나오더니,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좋아!"

놈의 기세를 확인하자마자 뒤를 향해 미친 듯이 도망가니, 놈이 더 빨리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새끼, 놓치기는 싫었나 봐?"

여태까지 모른 척 눈 감고 있었으면서,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순간 이렇게 적극적으로 반응하다니.

점점 가까워지는 놈의 기세를 느끼며 미리 봐 둔 공터를 향해 달려가는 이안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역시 오크는 멍청해야 제맛이지.

* * *

-그어어어어어!

맹렬한 울음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진 오크가 내 앞길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인간! 어딜 도망가느냐!"

세상에, 공용어를 하는 오크라니.

이 세계는 도대체 얼마나 망가진 걸까.

"명예롭게 죽겠느냐 노예로 살겠느냐!"

놈은 나를 향해 도끼를 들이밀며 으르렁댔다.

흥분으로 덜덜 떨리는 도끼와 놈의 어금니에서 줄줄 흐르는 침을 보고 있자니, 이미 답은 정해 놓은 모양이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들고 말했다.

"항복."

오크는 기본적으로 죽음을 명예롭게 여기는 종족이다. 그중에서도 전쟁과 전투에 뛰어난 오크 군단은 전쟁을 명예로 여기고, 더 강한 상대와 싸우는 걸 기쁨으로 삼는다. 그중에서도 대전사까지 올라선 오크니 얼마나 전투를 즐기는 놈일지 안 봐도 뻔했다.

말하자면 나는 놈에게 둘도 없는 보물인 셈.

"...."

잠깐 눈을 감았다 뜬 놈은 내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 당당히 말했다.

"훌륭한 선택이다. 무기를 들어라, 인간."

역시, 오크가 노예를 원할 리가.

애초에 당장 노예로 부리는 오크만 해도 몇 개 부족을 넘어갈 놈들이다.

"살려 준다며? 항복이라니까? 밧줄 있어? 내가 대신 묶을까?"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놈의 시뻘건 눈동자가 나를 꿰뚫듯 노려봤다. 투쟁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전사의 흉포한 기운이 폭발하듯 퍼져 나갔다.

"네게 명예를 가르쳐 주마."

쾅!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발을 높이 들어 올린 놈이 진각을 밟으며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