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 40-50

40화

"백작님! 백작님! 큰일입니다!"

허둥대며 달려오는 집사를 본 옵솔 백작이 책상 서랍에서 위스키를 꺼내 들었다.

지난 수십 년간 함께한 집사가 허둥댈 정도의 일이면 맨정신으로 듣기 어려운 일일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인가?"

"왕궁에서 중재를 위한 협상가를 파견했다고 합니다! 늦어도 오늘은 마탑을 통해 올 거라고 하는데...!"

순간, 집사의 보고를 들으며 독한 위스키를 입으로 가져가던 백작의 손이 멈췄다.

"그거 잘됐군!"

하루라도 빨리 머천과 관계를 개선하고 빌어먹을 모너가와의 분쟁을 끝내야 한다. 영지의 가장 큰 수입원 중 하나인 식량 판매를 재개하기 위해서라도 왕궁의 개입이 절실한 상황에서 왕궁이 협상가를 파견했다는 건 희소식이다.

"그, 그게…. 파견된 게 둘째 왕자라고 합니다."

쨍그랑!

둘째 왕자라는 소리에 손에 움켜쥐고 있던 술병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그 또라이가?"

둘째 왕자는 왕비가 낳은 적자임에도 도를 넘는 패악질에 지지기반 하나 없는 허수아비 왕자다.

"왕께서 어찌...."

다른 가문과의 협상이었다면 둘째 왕자는 오히려 좋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왕자가 왕실의 이름을 들먹이며 협박하거나 패악질을 부리면 상대가 누구든 원만한 합의를 끌어낼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그 모너가가 상대라는 것.

백작의 눈치를 보던 집사가 입을 열었다.

"그게… 왕자님이 직접 왕께 청하셨다고 합니다."

"직접? 드디어 왕실에 있는 하녀가 질렸나 보지?"

백작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 넘기며 한탄하듯 읊조렸다.

모너가와 레임 왕실의 관계는 모호하다. 오래전 공작위를 받은 이후 모너가는 마물의 숲의 첨병을 자처하며 마물의 숲에 자리 잡았고, 그 이후 왕실과 왕국의 일에 참견하지 않을 거라 못 박았다.

당시 왕국을 위협하던 마물의 숲을 막겠다는 초대 공작의 결정에 왕실은 두 손 들어 환영했고 공작가의 사병 제한도 풀어 버렸다.

문제는 십 년도 되지 않아 모너가의 병력이 왕실을 위협할 수준까지 성장했다는 것.

"모너가는 그 미친 애송이가 패악질을 부려서 움직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초대 모너 공작은 모너가를 이용해 정복 전쟁을 벌이려던 왕군에 쳐들어가 장군의 목을 직접 베어 왕비에게 주면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지금껏 이어진 모너가에 대한 왕실의 지독한 견제는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작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 가문에 마스터에 달한 인간이 하나도 아니고 세 명이야."

아무리 공작이 사라진 뒤 죽은 듯 살아가던 공작가라고 하더라도 왕실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다면 어떻게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일단 왕자를 맞을 준비를 하지. 놈이 날뛰지 못하게 독한 술과 여자를 몇 명 준비해 놔. 약은 쓰지 말고. 되도록 조용히 돌려보낸 뒤에 다른 중재자를 요청해야겠어."

순간 백작이 수정구 너머 웃는 낯으로 협박하던 모너가의 소공작을 떠올렸다.

으드득.

돈을 갚지 않으면 차남을 죽일 거라고 백작인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협박하던 망나니.

'아마 경고를 전한 로진도 죽였겠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둘째 왕자와 모너가의 망나니가 만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알겠나?"

제멋대로 날뛰는 두 인간이 만나 협상한다니, 재앙도 그런 재앙이 없을 것이다.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똑똑. 덜컥.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답하는 찰나, 절도 있게 경례하며 문을 열고 들어온 기사가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백작님, 모너가의 소공작이 백작님을 뵙고 싶다며 찾아왔습니다."

당황한 집사와 백작의 시선이 기사를 향했다.

* * *

텅 빈 응접실 안, 앉아 있던 이안이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대접이 형편없네."

환대받지 못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소공작을 응접실에 홀로 둘 줄이야.

"차라리 나가서 돌아다녀 볼까."

언제 올지 모르는 상대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킨 찰나, 응접실 문이 열리며 귀엽게 생긴 소녀가 들어왔다.

"옵솔의 나타샤가 마물의 숲을 지키는 모너가의 소공작을 뵙습니다."

나타샤라고 소개한 그녀는 격식 있게 치맛단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이안은 한참이나 나타샤를 바라봤다. 게임 속 대부분의 캐릭터를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조차 처음 보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모른다는 건, 앞으로 10년 안에 죽는다는 뜻이겠지.'

혹시나 싶어 얼굴 이곳저곳을 유심히 살펴봤지만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인 걸 보니 이름을 숨기고 활동하는 인물도 아닌 게 분명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옅은 홍조를 띤 나타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다음에야 그녀에게서 눈을 돌렸다.

"아, 실례했어. 백작의 딸인가?"

"네."

이안은 일으켰던 몸을 다시 소파 깊숙이 밀어 넣으며 앉았다.

"백작을 보고 싶다고 했는데, 왜 네가 왔지?"

"갑작스럽게 급한 일이 생기셔서 피치 못하게 제가 오게 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타샤가 고개 숙이며 사과했다.

"업무를 마치신 다음에 이곳으로 오실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응접실로 오던 백작이 왕자가 곧 도착한다는 소식에 그쪽으로 향하고, 어쩔 수 없이 딸에게 시간을 끌어 달라 부탁한 것이다.

"흠...."

이안은 불쾌한 눈으로 싱긋싱긋 웃고 있는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싫은데?"

이안이 이죽거리며 나타샤를 바라봤다.

"내가 백작이 바쁘다고 하면 허허 웃으면서 기다릴 줄 알았나? 생각보다 날 더 무시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말을 마친 이안이 벌떡 몸을 일으키자 당황한 나타샤가 급히 일어나 이안을 막아섰다.

"소, 소공작님! 백작님께서도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게 만들다니, 백작가는 생각보다 예의를 모르는군."

애원하듯 달라붙는 나타샤를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라듯 말하자 나타샤가 발끈해 외쳤다.

"그, 그거야 소공작님이 말씀도 없이 오셔서...! 헙!"

물론 누가 보나 갑작스럽게 들이닥쳐 백작과의 면담을 요청한 이안의 잘못이 컸지만 그걸 눈앞에서 지적할 수는 없는 법.

실책을 깨달은 나타샤가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아, 그래서 내 탓이라는 건가? 갑자기 들이닥쳤으니 볼 가치도 없다고? 이거 참 미안하게 됐군."

이안이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

"이거 대옵솔 가문에 큰 실례를 저질렀어. 미리 예고도 없이 이렇게 찾아오다니. 나는 옵솔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진심이었는데,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나뿐이었던 것 같군."

정말 실망했다는 듯, 고개를 돌린 채 문을 향해 나아가자 사색이 된 나타샤가 재빨리 달려 나와 앞을 막았다.

"아니,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어딘가 절박해 보이는 그녀의 말에 이안이 그녀를 다시 바라봤다.

아무리 소공작 앞이라고는 하지만 백작가의 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저자세였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무려 그 모너가의 망나니에게 딸을 보내다니. 제정신이 박힌 아버지라면 절대 그런 결정을 할 리가 없다. 심지어 자신이 가야 할 자리에 딸을 대신 내보내다니, 누가 봐도 망나니의 화풀이 대상이 되라고 보낸 모양새 아닌가.

"점점 더 마음에 들지 않아."

그제야 나타샤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떨고 있던 게 망나니 호칭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죄, 죄송합니다. 백작님께서 곧 내려오실 테니...."

아까부터 백작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백작의 딸. 아마 지금 보이는 두려움도 망나니 소공작에 대한 두려움만큼이나 백작에 대한 두려움이 큰 것이리라.

"소공작이 직접 방문했음에도 기다리게 할 정도라니, 백작은 어디 있지?"

"그건 저도 잘… 그, 금방 내려올 테니 잠시만 말벗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벗이라...."

이안이 잠시 고개를 돌려 나타샤의 눈을 바라봤다.

"하염없이 기다리기 지루하니 이 근처를 안내해 주지 않겠나?"

"배, 백작님께서 꼭 응접실 안에 있으라고...."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눈을 마주 본 채 생각에 잠겼다. 제 아비를 아비라고도 부르지 못하는 아이가 백작가의 세세한 사정을 알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 눈치를 보고 산 이들은 그 누구보다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일기장 속 이안이 그랬듯, 누구 하나 알려 주는 사람이 없으니 사소한 변화와 주변 사람들의 행동 변화에 집중하고 집착할 수밖에 없다.

"그럼 내 궁금증이라도 풀어 줄 수 있나?"

"저, 저는 별로 아는 게 없어서...."

도저히 백작가의 여식이라고 믿을 수 없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은 뒤, 말을 이었다.

"혹시 한 달 전쯤에 영주성에 갑자기 온 손님들이 있지 않았나? 아마 용병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었을 텐데."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나타샤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해맑게 웃었다.

"한 달 전쯤에 오신 손님들이면… 아! 그분들은 큰 오라버니의 친구분들이세요!"

하. 엘프 사냥꾼을 끌어들인 건 백작이 아니라 백작가의 장남이었나.

"그래, 그 친구들이 공작가에 왔었는데 내가 바빠서 미처 인사를 못 했어. 혹시 아직 여기 있나?"

"음… 가셨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으니까 아직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영주성보다 밖에서 더 자주 머무시거든요. 사람을 시켜서 알아봐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이 영지에 아직 있다는 것만 알면 됐으니까. 혹시 백작 영식도 여기 있나?"

"그, 그건 잘...."

원하는 정보를 얻은 이안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타샤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괜찮아.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백작이 오늘은 바쁜 것 같으니 따로 기별한 뒤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

"잠시, 잠시만...!"

* * *

"오늘은 확실하겠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백작가의 장남, 트레온의 물음에 무기를 점검하고 있던 엘프 사냥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준비는 끝났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노예 상인이 오긴 오는 겁니까?"

엘프 사냥꾼의 삐딱한 목소리에 트레온의 얼굴이 한층 더 구겨졌다.

"너희들은 너희들 일이나 잘해. 노예 상인이 없으면 대금은 우리 백작가가 지불할 테니."

엘프 노예거래는 엄연히 모든 국가에서 불법이지만 수도에서 엘프 노예만큼 인기 있는 물건이 없다. 같은 국립 아카데미를 졸업한 자작가의 놈팽이가 엘프 노예를 바쳐 왕실 기사단에 들어갔다는 소문을 들은 후로 트레온은 엘프 노예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됐다.

한 달 전, 운 좋게 다크엘프가 사는 땅을 발견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경계를 넘자마자 쏟아지는 매서운 공격에 단 한 명도 잡아 오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십쇼."

정식 기사처럼 온몸을 가리는 갑옷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아무리 엘프의 화살이 무섭다고는 하지만 플레이트 메일까지 뚫을 수는 없겠죠. 거기다 엘프를 위한 특제 함정까지 준비했으니 걱정 없습니다."

마나를 담은 화살이라면 철판 따위야 어렵지 않게 뚫고 지나가겠지만 엘프 사냥을 업으로 하는 사냥꾼들은 나름의 비책을 가지고 있었다.

"이 독약은 만드라고라 뿌리와 절연초를 섞어 만든 것으로, 이걸 마신 엘프들은 손톱만큼의 마나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흐흐흐...."

아쉽게도 서쪽 숲의 엘프들은 이안의 도움으로 마나 제압용 독기에 대한 방비를 마쳤지만, 사냥꾼들은 그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올가미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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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왕자를 마중하기 위해 영지 내 마탑으로 향하는 옵솔 백작은 발걸음을 서두르면서도 계획을 짜느라 여념이 없었다.

'왕자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 미친놈이 정말 일하러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으니 적당히 술과 여자를 끼워서 대접하고 실무자를 이용해 공작가를 견제하는데....'

머릿속으로 1왕자를 지지하는 귀족들과 국왕파 귀족들이 지나갔다.

'드미트리 후작이 둘째 왕자와 함께 움직일 리는 없고… 로스운 백작? 공작가의 일에 백작을 파견했을까?'

만약 1왕자가 직접 왔다면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됐을 터. 머릿속이 터질 듯 복잡했다.

'실무자가 누구든 왕궁에 중재 요청을 보내도록 회유해야 한다. 2왕자가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술판을 벌여야겠군.'

이미 성안에서는 성대한 환영식을 준비 중이었다. 실무자가 불쾌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이런 중요한 일에 2왕자를 파견한 왕궁의 잘못을 모르지 않을 터, 백작은 분명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마탑 입구 바닥에 주저앉아 기다리고 있는 2왕자를 마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왕자님?"

왕자의 주변에는 단 한 명의 시종도, 사용인도 없었다. 왕가의 일원이 왕에게 임무를 받으면 최대한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게 관례이건만, 왕자는 레임 왕가의 적통임을 상징하는 찬란히 빛나는 금안과 금발도, 수십 개의 금빛 수가 달린 화려한 정복도 숨기지 않은 채 일어나 흙이 묻은 옷을 툭툭 털며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옵솔 백작, 이거 오랜만이야. 지난 연회 때 이후 처음인가?"

"왕자님,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혹시 같이 오신 분들은...?"

"같이 온 사람들이라니? 아, 자네는 아직 연락을 못 받았나 보군. 왕께서 이번 일의 전권을 내게 위임하셨네."

순간 백작의 눈앞이 컴컴해졌다.

설마 왕자가 실무자 한 명 없이 단신으로 영지를 방문할 줄이야.

'괜찮아. 놈이 술에 취한 틈을 타 왕궁에 진정을 보내면 분명 다른 사람을 파견할 수 밖에 없을 터.'

어쩌면 1왕자나 후작이 대신 방문할지도 모른다.

왕자를 모시고 움직이기 시작한 백작이 재빨리 집사와 보좌관에게 손으로 신호를 보내자, 두 사람이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백작이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왕자를 바라봤다.

"죄송하지만, 이렇게 빨리 도착하시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해서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먼 길을 오셨으니 그동안 식사라도...."

백작이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양해를 구하자 왕자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식사는 괜찮네. 국왕 폐하의 명을 받고 온 내가 어찌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있겠나. 응접실이라도 좋으니 우선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자세히 한번 듣고 싶네만."

생각보다 훨씬 적극적인 왕자의 태도에 백작이 얼굴을 굳혔다.

'분명 술과 여자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놈이라고 했는데...?'

왕자가 왕께 직접 부탁했다는 말이야 들었지만, 설마 왕자가 이 변방의 영지까지 일하기 위해 왔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백작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저하, 먼 길을 오셨는데 바로 업무를 보시다 몸이 상할까 염려됩니다. 업무는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신 후에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정말 고민하는 듯한 왕자의 모습에 백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럼요. 휴식하는 동안 적적하실 테니 술과 안주를 조금...."

왕자가 술을 앞에 두고 절제할 리가 없으리라 생각한 백작이 신나서 입을 연 순간, 왕자의 싸늘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상해. 왕께서는 그대를 도우라 명하셨는데 정작 그대는 전혀 도움이 필요한 것 같지 않아. 설마 왕께 거짓을 고한 건가?"

그 시선만큼이나 날 선 왕자의 목소리에 백작이 순간 멈칫했다.

"아니면 나를 기만하려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하, 저는 단지 저하의 안위가 걱정되어...."

백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왕자가 턱짓으로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됐군.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니 어서 들어가세."

왕자는 백작의 답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성을 향해 걸어갔다.

* * *

"편하게 앉게, 백작."

왕자가 백작의 집무실 책상에 앉아 당당히 말하자, 백작이 당황한 얼굴로 왕자와 소파를 번갈아 바라봤다.

애초에 왕자 앞에서 상석을 고집할 생각은 당연히 없었지만,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소파가 버젓이 있는데 굳이 자신의 의자에 앉을 줄이야.

불쾌하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찡그린 백작이 자연스럽게 의자를 끌어와 자리에 앉았다.

"예, 왕자님."

"그래, 보고는 들었는데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아."

심문이라도 하듯 앉은 몸을 길게 내뺀 왕자가 백작을 바라봤다.

"그 망나니가 변했다고?"

밑도 끝도 없는 물음에 백작이 당황하기도 잠시. 태어난 순간부터 귀족이었던 백작이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예. 전보다 상태가 심해진 듯 보였습니다."

"상태가 심해졌다?"

침을 삼킨 백작이 입을 열었다.

"모너가가 저희와의 거래를 완전히 끊기 직전, 제 부하를 통해 비상 연락망으로 연락해서는 제 차남을 죽일 거라 협박하지 않겠습니까? 분명 소공작의 상태가 악화된 게 분명합니다."

"소공작의 상태라면...."

고민이라도 하듯 심각한 표정을 짓는 왕자를 보고 백작이 쐐기를 박기 위해 말을 이었다.

"왕자님도 아시다시피 모너가의 소공작이 광증에 시달린다는 건 큰 비밀도 아닙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다고 한들, 백작가의 적자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다니요. 광증이 아니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백작의 말이 청산유수처럼 쏟아졌다.

옵솔이 저지른 일은 단 하나도 말하지 않으면서 소공작의 행동에 의구심을 일으켰다.

"…이거 생각보다 심각하군."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왕자의 모습에 백작이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모너가의 만행이 도를...."

그러나 이어지는 왕자의 말은 백작의 기대와 전혀 달랐다.

"레임의 귀족이 왕가의 적자를 눈앞에서 무시할 만큼 왕실의 권위가 바닥을 치고 있다니 말이야."

왕자의 서늘한 금안이 백작을 향하자 백작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나는 왕의 명령에 따라 최대한 공정한 중재를 위해 이곳까지 왔네. 그러나 자네가 지금처럼 날 이용하려 든다면 어쩔 수 없이 한쪽 편을 들게 되겠지."

"그게 무슨...."

백작이 항변하려 했으나 왕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소공작이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날뛰고 있는 건가?"

"그, 그것이...."

당황한 백작의 등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모래 섞인 식량을 팔았다고 당당히 말할 수는 없으니 다른 이유를 대야 했다.

"제 아들이 운영하고 있는 상단이 신생 상단에 빚을 조금 졌는데, 그 채권을 강탈한 소공자가 돈을 갚으라며 이 난리를 피웠습니다."

"빚? 빚이야 갚으면 그만 아닌가."

"합리적인 금액이라면 응당 그랬겠지요. 모너가가 저희에게 요구한 금액은 1억 5천만 골드입니다."

왕자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백작을 바라봤다.

"1억 5천만? 생각보다 훨씬 큰 금액이지만, 그래도 이상해. 돈을 받을 수 없으면 식량을 받으면 될 터인데, 되레 식량 거래를 끊었다고? 왜 그랬지?"

백작이 눈을 뒤룩 굴려 왕자의 눈을 피하자, 왕자가 손으로 턱을 괸 채 말을 이었다.

"백작,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들어 볼 생각이야. 나한테 무언가를 숨기려거든 절대 들키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어야 할 거야."

"수, 숨기다니요. 저희도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말씀드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아는 것만이라도 말해 보게."

"그, 그것이, 모너가가 저희가 판매한 식량에 모래가 섞여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순간 왕자의 몸이 굳었다.

"식량에? 모래를? 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이없는 표정으로 백작을 바라보는 왕자가 천천히 물었다.

"설마, 마물의 숲을 지키는 첨병인 모너가에 모래 섞인 식량을 판 건가?"

말을 하면서도 왕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공작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 모너가에게 모래를 팔 생각을 하다니.

왕자의 혐오 섞인 시선을 마주한 백작은 재빨리 아들을 팔았다.

"그, 그 부분은 제 차남이 관리하고 있어 잘 모르겠습니다. 설마 제가 고의로 그럴 수 있겠습니까? 아마 제가 모르는 어떤 필연적인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

백작이 입술을 짓씹으며 되는 대로 변명을 주워섬기는 모습을 본 왕자가 조용히 뇌까렸다.

"미친놈들."

모너가는 공국의 칭호를 얻지 않았을 뿐, 공국이나 다름없다. 왕실의 그 누구도 모너가의 허락 없이는 모너가의 땅을 밟지 못하며, 모너가 또한 왕실의 허락 없이는 좀처럼 모너의 영토를 벗어나지 않는다.

왕실과 모너가를 이어 주는 목줄은 세 영지를 이용한 식량 조절이다. 야생 늑대를 길들이듯 식량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느슨한 통제를 해 온 것이다.

"왕실의 분노가 두렵지 않나 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피식 웃은 왕자가 백작을 노려봤다.

"그, 그것이 아니오라...!"

"잠깐, 그런데 왜 모너가는 왕실에 보고하지 않았지? 세 영지가 식량에 장난을 치고 있다면 지금처럼 친서를 보내 조정을 요구하면 됐을 터인데...."

생각을 거듭하던 왕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세 영지가 단합하면 식량에 장난질 치는 정도야 어려울 일 없겠지만, 그러기 위해선 중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모래가 섞인 모너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 중앙에 중재를 요청할 것이고, 왕실은 중재를 위해 적당한 인선을 보내왔을 터.

"형님인가...."

몇 년 전부터 갑작스럽게 세 백작의 충성스러운 지지를 받은 제1왕자가 이들의 뒤에 있는 게 분명했다.

"이거, 형님이 나대는 꼴을 하도 보기 싫어서 나왔는데, 생각도 못 한 걸 듣게 되는군."

이제야 왜 왕세자가 이 자리에 오고 싶어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관련된 일인 만큼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하고 싶었으리라.

문제는.

"도대체 이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하려고 한 거지?"

도무지 이 상황을 원만하게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모너가는 이미 옵솔과 거래를 끊었다. 백작의 차남을 죽이겠다고 협박할 만큼 관계가 악화됐다면 약속이나 계약으로 개선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것이다.

다시금 변명하기 위해 나불대는 백작을 바라보는 왕자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았다.

* * *

옵솔의 영주성을 나선 이안이 성 근처의 여관방으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레이나와 아카샤가 그를 반겼다.

"다녀오셨어요, 도련님."

"응, 다녀왔어."

이안이 고개를 돌려 아카샤를 바라봤다.

"레인저들은?"

"영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여기까지 온 레인저의 인원은 아카샤를 포함해서 총 12명. 추적과 암살의 달인들인 만큼 목표를 놓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좋아. 엘프 사냥꾼은 옵솔의 장남과 같이 있는 것 같더군. 10명이 놈을 쫓고 나머지 3명을 영지에 풀어서 정보를 좀 모아 줘."

"정보를 말입니까?"

"오는 길이 텅 비었더라고. 누군지는 몰라도 높은 사람이 온 모양이야. 어쩌면 뒤처리할 때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 누군지만 알아 오면 돼. 사냥꾼의 위치를 찾으면 반드시 나한테 먼저 말하고."

두 손을 불끈 쥔 아카샤를 향해 이안이 흰 이가 보이도록 웃으며 말했다.

"그럼, 행복한 사냥이 되길."

오랜 시간 사냥꾼에게 쫓겨 다니던 사냥감들이 마침내 이빨을 보였을 때, 살아남는 사냥꾼은 하나도 없으리라 장담하면서.

* * *

백작이 마련한 방으로 들어온 왕자는 침대에 누워서도 고민을 떨치지 못했다.

"이상해. 갑자기 소공작이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왕에게 이 임무를 달라고 한 건 즉흥적인 선택이었다. 마침 평판을 떨어뜨릴 만한 시기라고 생각했고, 재수 없는 1왕자가 이 임무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실패하기 위해 왔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둘러봤을 뿐인데 상황이 생각보다 재밌게 돌아가고 있었다.

"모너가는 왕위 계승에 관여하지 않았지."

마물의 숲을 지켜 만인을 구한다는 그들의 숭고한 목적의식은 레임 왕국의 모든 백성이 알고 있을 것이다.

"과연 1왕자가 모래를 퍼먹여 왔다는 걸 알게 되도 그럴까?"

흘러가는 상황이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절묘했다.

모너가가 가장 원할 만한 순간에 산적이 페일세이프를 활보하고, 세 영지의 상단을 골라 약탈한다?

백작은 리트를 의심하고 있었지만, 이 모든 일로 이득을 본 건 모너가밖에 없다. 모너가를 움직일 수 있는 공작이 없기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있을 뿐.

"소공작이 움직인 게 분명해."

마치 자신처럼 오랜 시간 진면모를 들키지 않기 위해 오욕으로 점철된 가면을 쓴 채 살아온 사람이 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일까. 왜 하필 지금 움직였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2화

"이 사람아, 무슨 말을 해도 절대 안 된다니까!"

서쪽 숲의 경계를 담당하는 병사가 복면을 쓴 남자에게 소리쳤다.

"무슨 일인지 모굴 백작님께서 노발대발하셨다고! 나 말고도 뒤에 사람이 많아서 여길 지나가 봤자 금방 걸릴 거야."

단호한 병사의 말에 복면을 쓴 남자가 인상을 썼다. 하필이면 사냥을 시작하려는 때 수비군이 움직이다니.

"여길 지키는 병력은 얼마나 되지?"

"100명은 훨씬 넘을걸? 기사도 몇 명 배치된 것 같으니까 안에서 뭘 사냥하건 꿈 깨게. 애초에 마물의 숲에 뭐가 있다고 이 난리인지, 쯧."

잠시 고민하던 남자가 병사에게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20명 정도가 몰래 들어갈 방법도 없겠나?"

묵직한 주머니를 받아 든 병사의 얼굴이 순간 탐욕으로 물들었으나 이내 주머니를 돌려주며 말했다.

"지금은 내가 아니라 우리 조장이라도 몰래 보내 줄 수가 없는 상황이네. 마물 멧돼지야 동쪽 숲에서도 나오니까 그쪽으로 가 보게그려."

복면을 쓴 남자가 엘프 사냥꾼이라는 것을 모르는 병사가 선심 쓰듯 말했지만, 엘프를 잡기 위해선 서쪽 숲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백 명이라...."

돌아선 엘프 사냥꾼의 눈이 탐욕으로 번뜩였다.

* * *

"서쪽 숲 전체의 경계가 강화됐다. 서쪽 숲의 엘프가 모너가에 도움을 요청한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아."

엘프 사냥꾼 대장의 말에 듣고 있던 대원 중 하나가 물었다.

"다크엘프가? 그 저주받은 것들 때문에 모너가 움직였다고?"

사냥꾼들은 모너가가 다크엘프 따위를 위해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애초에 사냥감이 다크엘프가 아니었다면 절대 모너가의 영역에 숨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우리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아. 좀 더 시간을 두고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대장의 시선이 한쪽에 앉아 있는 백작 영식에게로 향했다.

"도련님, 상황이 이런데 납품 기일 좀 미뤄 줄 수 있을까?"

사냥꾼 대장의 말에 트레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벌써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사냥을 준비하면서 어마어마한 자금을 소모했다. 더 큰 문제는 너무 긴 시간 동안 사냥꾼들이 영지에 머물렀다는 것.

"꼬리가 길면 잡히기 마련이지. 아무리 뒤탈이 없을 거라고 해도 너희와 우리 옵솔이 연관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아버지도 모르게 벌인 일인 만큼 지금 당장 성과를 내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포기하는 게 더 좋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특히나 영주성 곳곳에서 모너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아쉽지만 이렇게 된 거 다음번을 기약하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얻은 게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돌아가려 할 때, 대원중 하나가 말했다.

"대장, 어차피 마지막이면 한번 해 보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저희 목표는 엘프도 아니고 다크엘프 아닙니까?"

이 사냥에만 벌써 한 달이 넘는 시간을 투자했다. 거기다 이미 주거지를 들킨 다크엘프가 언제 이동을 시작할지도 모른다. 즉, 이번이 아니라면 다크엘프를 잡을 일확천금의 기회는 다시 없을 터.

"솔직히 말해서 모너가도 더러운 연놈들이 자기 땅에 숨어 있는 걸 모르니까 방관하고 있겠죠. 따지고 보면 저희가 사냥하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몰래 들어가서 몇 명 데리고 나올 수 있으면 데리고 나오고, 그러다 걸리면 길 잃은 마물 사냥꾼인 척하면 설마 민간인을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순간 모든 사냥꾼의 눈이 대장과 트레온을 향했다.

"흠...."

방대한 서쪽 숲에는 적지 않은 희귀 몬스터가 살고 있고, 그런 몬스터를 노리는 사냥꾼들이야 항상 있었다.

부하의 말처럼 오우거 사냥이라도 나온 사냥꾼 무리인 척 얼버무린 뒤 벌금으로 몇백 골드쯤 내면 그만이다.

생각을 마친 대장이 트레온을 바라봤다.

"그렇게 하지? 만약에 재수 없게 걸려도 책임은 우리가 질게. 저 녀석 말마따나 사냥꾼인 척하면 되니까. 도련님은 돌아가 있어."

"잠깐...!"

순간 온몸에서 올라오는 불길한 예감에 트레온이 거부하려 했지만 이미 결정을 내린 사냥꾼들은 무리를 이뤄 움직이기 시작한 뒤였다. 그 모습을 본 트레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절대, 절대 옵솔과의 관계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너희가 다크엘프 사냥에 성공하면 판매를 도울 뿐, 설령 너희가 모너가에 잡힌다고 하더라도 옵솔은 절대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알겠느냐?"

트레온의 당부에 피식 웃은 사냥꾼 대장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쇼. 엘프 사냥꾼은 신뢰 빼면 시체라고."

곧이어 트레온이 옵솔로 떠나고, 사냥꾼 무리는 병사들의 경계가 허술한 부분을 찾아 서쪽 숲에 잠입하기 시작했다.

숲속 깊은 곳, 사냥꾼의 시선이 닿지 않는 나무 위에서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레인저들의 흑갈색 눈동자가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 * *

엘프 사냥꾼들이 서쪽 숲을 침입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안은 아침부터 옷을 빼입고 여관을 나섰다.

"왕가라...."

오늘 새벽, 길거리에 퍼진 정보를 모아 온 엘프들이 왕가의 일원이 옵솔에 도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역시 왕실이 개입하려는 건가.'

옵솔과 모너 사이에서 전운이 감돌자 급하게 나선 것일 터.

'왕가야 무조건 세 영지의 편을 들 거야. 왕가도 쉽게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해.'

예를 들면 마침 서쪽 숲을 침범한 사냥꾼들 같은.

"일단 누가 왔는지부터 확인해야겠는데."

10년 뒤 살아남는 사람이라면 캐릭터의 성향까지 확실히 알 수 있을 터. 우선 누가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영주성으로 향했다.

* * *

"왕자님! 왕자님! 잠시만...!"

"내가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옵솔 백작은 아침부터 모너가로 향하겠다는 왕자를 말리기 위해 진땀을 뺐다. 다른 세 영지의 사정이나 상단의 이야기를 들어 보지도 않고 모너가로 향하겠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젠장, 젠장, 젠장!'

2왕자와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만 해도 그를 구슬려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 낼 자신이 있었건만, 단 하루 만에 백작은 생각을 완전히 바꿨다.

어젯밤 대화를 생각하면 2왕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 절대 멋대로 행동하게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를 막으려 최선을 다했지만, 이미 결정을 내린 왕자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왕자님, 제발 제 말을 한 번만 들어 주십시오."

"백작을 위해서라도 한시라도 빨리 해결해야 할 문제일세. 만약 오해라면 빨리 풀어야 할 것이고 오해가 아니라면 마땅히 보상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겠나?"

왕자의 냉정한 목소리에 백작이 주춤했다.

"그, 그것이… 왕실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면 분명 모너가에서 사실을 속이려 들 것입니다!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라도 저희가 직접 조사단을 꾸려 조사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속이 뻔히 보이는 변명이었지만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모너가가 조사하면 세 영지가 믿지 않을 것이고, 세 영지의 조사는 모너가가 믿지 않을 테니까.

결국 남은 것은 왕실 조사단뿐.

왕세자의 입김이 닿아 있는 왕실 조사단이야 세 영지에게 유리한 결과를 낼 수밖에 없을 터였다.

'놈을 보내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조사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정식으로 왕실에 조사단을 요청해서 놈이 함부로 움직일 수만 없게 만들면 돼.'

결국 중재안을 결정짓는 것은 책임자인 2왕자가 되겠지만, 아무리 2왕자라고 하더라도 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무시하는 결정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라며 다음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멀리서 보좌관이 달려와 귓속말을 건넸다.

"백작님, 모너가의 소공작이 알현을 요청했습니다."

젠장.

도대체 그 망나니는 왜 지금 이곳에 있단 말인가.

"나타샤, 그 계집을 보내서...."

급한 대로 시간을 벌 궁리를 하려는 순간, 저 멀리 영주성 입구에서부터 백작을 찾는 괴성이 울려 퍼졌다.

"오오오옵소오오올!!!"

마나를 담은 이안의 고함에 사방에서 온갖 물건과 창문이 부르르 떨어 대고, 사색이 된 백작의 시선과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듯 반짝 빛나는 왕자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혀 들었다.

"와, 왕자님 실례했습니다. 어떤 미친놈이 입구에서...."

백작이 멋쩍은 웃음과 함께 얼버무리려던 찰나, 괴성이 이어졌다.

"모너가의 소공작이 왔다아아아아아!!!!"

잠깐의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고.

"하하하! 아무래도 그 미친놈이 모너가의 소공작인 것 같네."

왕자의 폭소가 복도를 메웠다.

* * *

응접실로 안내된 이안이 웃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나타샤를 바라봤다.

"한 번 더 소리 지르면 백작이 올까?"

"히끅! 아, 아뇨! 소공작님! 지금 백작님께서 오신다고 하셨으니까...."

단숨에 울상을 짓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두 번이나 나를 기다리게 만들다니, 요즘 백작이 정말 바쁜 모양이야?"

"어제 중요한 손님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나타샤의 말에 이안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들었다'고? 중요한 손님을 만나 본 게 아니라?"

왕실의 인원이 영주성을 방문했는데 딸을 소개하지 않았다니.

'하녀가 낳은 딸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왕자에게 소개조차 하지 않았다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서자나 서녀에 대한 애정을 떠나 왕가의 일원에게 자녀를 소개할 수 있는 자리는 귀족에게 있어 더없이 중요한 기회.

'2왕자가 기회가 아닌 문제라고 판단했나?'

이안이 정답에 가까워질 무렵, 응접실의 문이 열리면서 백작과 왕자가 들어섰다.

"아! 드디어 만나 보는군!"

오랜 친우라도 만난 듯 반가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미남의 표본이라고 할 정도로 유려한 얼굴과 창문을 통해 넘어선 햇빛이 산산이 부서지며 밝히는 황금색 머리카락 그리고 보석을 담은 듯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황금색 눈동자까지.

"2왕자 트리미아라고 하네."

왕자와 눈이 마주친 이안이 저도 침을 꿀꺽 삼키며 속삭였다.

"광군(狂君)?"

* * *

광군(狂君) 트리미아.

미친 왕이라는 이름과 달리 게임 속에서의 비중은 크지 않지만 로스트 크로니클을 해 본 사람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캐릭터다.

노예 검사가 된 이안을 처음 구매하는 게 바로 광군 트리미아니까.

사람들은 광군이라는 말보다 곱게 미친 왕, 정광군(正狂君)이라는 이름을 더 좋아했다.

몬스터와의 전쟁이 시작된 후 가장 먼저 전선에 뛰어든 왕이자, 다른 국가나 캐릭터들이 사리사욕을 챙기는 동안에도 오롯이 몬스터 학살에만 최선을 다한 곱게 미친 왕.

전투에서 광증이 도져 단신으로 2만의 오크에게 달려가던 모습은 10년 전의 얼굴을 보고도 그를 기억해 낼 만큼 특별했다.

문제가 있다면.

'광군이 진짜 왕자라고?'

내가 기억하는 트라미아는 왕이 아니다.

미친놈답게 스스로를 왕이라고 부르던 트라미아는 백성도, 땅도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그를 따르는 소수의 산적뿐.

이안이 산적에 집착한 것도 기사들보다 멋있던 게임 속 산적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 하! 내가 잘생긴 건 알지만 그렇게 보면 조금 쑥스럽네, 소공작."

트라미아의 부름에 상념에 젖어 있던 이안이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눈으로 앞에 서 있는 두 남자를 바라봤다.

똥 씹은 표정을 한 백작과 광군 트라미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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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3화

멍하니 서 있던 이안이 트리미아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모너가의 이안 드 모너가 대륙 북부를 지배하고 있는 위대한 왕가의 트리미아 왕자님을 뵙습니다."

설마 그 트리미아가 레인 왕가의 미치광이 둘째 왕자였다니. 인사를 건네면서도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왕가의 망나니가 정광군이라고? 그럴 리가.'

광증에 시달리지만, 게임 속에서 광군만큼 뛰어난 지휘관은 거의 없다. 무력이 전무한 그가 영웅들과 나란히 이름을 올리며 최전선에서 활약했다는 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지휘관인지를 보여 주는 것일 터.

'그럼 2왕자가 미쳤다는 소문이 거짓이겠군. 트리미아는 광증을 연기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트리미아가 황금색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하하하! 만나서 반갑네. 그나저나 광군이라니! 뒤에서 욕하던 사람은 많이 봤지만, 면전에서 욕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야."

그러고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보란 듯 혼잣말을 했다.

"아니지, 미치긴 했어도 왕은 왕이니까 칭찬인가? 왕이 될 수만 있다면 미치는 것 정도야 문제가 아니긴 한데...."

순간 그의 광증이 연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자 왕자가 웃으며 말했다.

"뭐, 초면이고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드니 칭찬이라고 받아들이겠네. 욕이라고 한들 모너가의 소공작을 벌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고는 점심 메뉴를 묻듯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래서, 교수형이 좋은가, 화형이 좋은가? 역시 식량을 가지고 장난을 쳤으니 굶겨 죽이는 게 가장 좋지 않겠나?"

이 땅 위에서 눈을 뜬 그 순간부터 망나니로 살아온 이안조차 트리미아의 사고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백작가의 차남 말일세. 자네를 보는 순간 확신이 들었어. 분명 옵솔의 상단이 식량이라며 모래를 팔아 왔겠지. 이는 지엄한 국법으로 금지된바, 소공작이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차남의 목을 선물로 주지."

"왕자님!"

옆에서 듣고 있던 백작이 발작하듯 외쳤지만, 트리미아의 황금색 눈동자는 못 박힌 듯 이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바로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사실 이 조사는 형님이 왔어야 하는데 내가 억지를 부려서 온 거거든. 백작이 왕궁에 조사단을 요청하면… 때때로 세상에는 사실과 다른 진실이 퍼지는 법이지."

"왕자님, 지금 도대체 무슨 말씀을...!"

백작이 떨리는 눈으로 왕자와 이안을 번갈아 바라보며 소리쳤다.

"권력 좋다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럴 때 써야 의미가 있는 거지. 모너가는 정당한 처벌과 보상을 받을 것이고, 옵솔은 다시 식량을 팔아 빚을 갚을 수 있을 테니, 완벽한 해결책 아닌가?"

이안은 여전히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왕자를 질색한 얼굴로 마주 봤다. 이 세계에 온 후 처음으로 자신을 두려워하던 이들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곱게 미쳤든 미친 척을 하는 중이든 왕자와 몇 마디 섞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지치는 기분이었다.

매일같이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모두에게 마음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전한 이안이 작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 모너가는 고작 도마뱀의 꼬리를 잡고자 목소리를 높인 것이 아닙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놀란 왕자가 이안을 바라보자 이안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옵솔은 모너가뿐만 아니라 모너가의 영지민 그리고 마물의 숲을 지키는 정병(精兵)을 욕보인 것입니다. 설령 옵솔이 상단의 단독 행동이라 주장한들 모너가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말에 왕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말은, 모너가가 영지전을 원한다는 말인가?"

"그럼 내전이 일어나겠지요. 저희는 내전 또한 원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세 영지는 모너가를 이길 수 없다.

동시에 왕국은 모너가가 세 영지를 집어삼키는 걸 원하지 않는다.

결국 모너가가 영지전을 원하면 왕국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오랜 맹약(盟約)에 따라 왕실은 모너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고 모너가는 왕실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기로 약속한바. 모너가는 왕실에 신의를 지킬 것입니다."

이안이 삐뚜름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만약 누군가 우연히 영지를 침범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흠… 어려운 문제군. 옵솔은 모너와의 거래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왕실에 중재를 요청했네. 옵솔이 원하는 것은 명백하니, 모너의 요구 사항을 들어줘야 하는데, 모너는 원하는 것이 없다?"

"예, 그렇습니다."

왕자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실 때 이안이 지나가는 척 말했다.

"정 원한다면 옵솔의 곡창지대나 백작과 백작 영식의 목으로 모너의 한을 풀 수는 있겠습니다만."

이안이 고개를 돌려 손가락으로 목을 그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어떻게, 백작, 가문을 위해 한 몸, 아니 장식인 게 분명한 그 머리, 희생하겠소?"

이안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왕자가 이안과 백작을 번갈아 바라봤다. 얼굴이 벌겋게 물들인 백작이 이안을 향해 소리치려는 찰나, 이안이 말을 이었다.

"물론 그 정도 기개가 있는 인간이라면 식량에 장난질을 칠 일도 없었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왕자님?"

"하하하! 그도 그렇군! 모너가의 소공작이 비범하다더니 소문이 잘못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야!"

언제부터 망나니가 비범함과 동의어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친놈이 좋아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한 이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제가 좀, 비범한 편이기는 하죠."

* * *

"멈춰!"

자리에 선 사냥대장이 주변을 둘러봤다. 3미터쯤 되는 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빛 한 점 들지 않는 이 숲은 올 때마다 재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대장, 무슨 일이야?"

"너무 조용해."

숲은 소음으로 가득하다. 바람이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지나며 온갖 소리를 만들고 벌레, 새, 동물 할 것 없이 자기주장을 해 대니 조용할 틈이 없다.

그런데 지금 이 숲은 너무 조용했다.

"전원 전투 준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엘프를 사냥하면서 얻은 교훈 중의 하나는, 사냥꾼은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

조금 뒤 무기를 들고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한 사냥꾼 중 하나가 소리쳤다.

"엘프다!"

* * *

아카샤는 나무 위에서 무기를 든 사냥꾼들을 바라봤다.

"난 사냥꾼이라면 질색이야."

어린 시절, 그녀의 부모를 잡아간 것도 사냥꾼이었고, 친구 중 대부분을 잡아간 이들도 사냥꾼들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아카샤가 고개를 돌려 레이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큰소리를 치고선 고작 하녀 한 명밖에 보내지 않는다니. 소공작이 레인저를 과대평가하는 모양이군."

레인저는 다크엘프의 뛰어난 전사들이지만 사냥꾼들의 독을 이겨 낼 수는 없다. 이안이 제작법을 알려 준 뒤로 계속 해독법을 연구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해독약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국 또 도망치면서 게릴라전을 벌여야 한다.

눈앞에 원수를 두고도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에 아카샤가 입술을 깨물었을 때, 레이나가 어딘가 뾰족한 목소리로 답했다.

"도련님은 레인저를 무시한 게 아니라 저, 레이나를 좋게 봐 주시고 있습니다. 아, 그렇다고 과대평가는 아니고...."

아카샤를 보며 싱긋 웃은 레이나가 나무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도련님은 항상 저를 있는 그대로 봐 주시거든요."

"저 미친 인간이 지금 뭐 하는...!"

당황한 아카샤가 손을 뻗어 레이나를 잡기도 전에 바닥에 착지한 레이나가 발을 굴러 사냥꾼들을 향해 쇄도했다.

쾅!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소공작의 계획일 터. 지금 당장은 하녀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한다.

"레인저는 원거리에서 인간을 보조한다!"

외침과 함께 아카샤가 사냥꾼들을 향해 나아가자, 철퇴를 휘두르고 있던 레이나가 그녀를 반겼다.

* * *

모너가의 리어에서 옵솔로 향하는 길.

리나는 어느덧 4급에 다다른 귀흡법을 최대한 운용하면서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움직였다.

"도련님, 정말 괜찮겠습니까? 이러다 소문이라도 나면...."

"괜찮아. 사냥꾼들이 숲에서 나오면 성공했든 실패했든, 놈들도 전부 죽여 버릴 테니까."

숨을 죽인 채 멀리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를 들으며 적의 숫자를 파악했다.

'기사가 하나, 둘, 셋....'

공작이 경고한 것처럼 트레온 주변에는 기사들이 가득했다. 아마 이안의 말처럼 엘프 사냥꾼이 리어를 나서자마자 급습할 생각일 터.

'레이나와 그 다크엘프는 괜찮으려나?'

이안의 말로는 굉장히 강한 다크엘프라고 했지만, 레이나의 목숨이 그 다크엘프에게 달려 있다고 하니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심지어 공작에게 뺨도 맞았다고 하지 않던가.

'나도 뺨은 맞은 적 없는데.'

수백 번이 넘는 대련 동안 이안과의 호적수는 레이나와 리나뿐이었다. 그건 그녀에게 자랑이며 동시에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날 이렇게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분명히 레이나 쪽도 뭔가 준비해 놨겠지. 일단 내 일에 집중하자.'

리나의 목표는 숲에서 나온 다크엘프와 합류해 트레온을 안전하게 이안에게 배달하는 것.

숨죽인 리나의 호흡이 점점 더 낮게 가라앉았다.

* * *

응접실의 둥근 책상에 앉은 이안이 눈을 뒤룩 굴려 왕자 쪽을 힐끔 바라봤다. 도대체 뭐가 좋은 건지 연신 헤실거리고 있는 왕자는 도무지 자신에게서 눈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게임 속에서 광군을 자칭할 때는 개그캐인지 알았는데, 진짜 제대로 미친놈이었어.'

개그캐인 줄 알았던 게임 속 트리미아는 굳이 말하자면, 자기 객관화가 철저한 인물이었다.

"큼! 큼!"

백작의 헛기침 소리에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 보니 저 양반은 미친놈 둘이랑 대화하는 기분일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 입꼬리가 올라가자, 백작이 잔뜩 인상을 구기며 선언하듯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옵솔은 이번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소. 분명 우리 영지에서 나간 식량은 전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식량이었고 주신께 맹세코 나는 식량에 모래를 섞지 않았소."

저 말은 사실이다. 놈들이 모래를 섞은 건 영지에 식량을 들이고 나서니까.

"그런가요? 그럼 모너가는 제 영지 상단도 관리 못 하는 이들과 거래할 마음이 없다고 해 두죠."

"그게 무슨 막말이오! 소공작! 리트가 언제까지고 식량을 공급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그런 기대는 한 적 없습니다만? 최소한 올해는 문제없을 것 같군요."

백작의 위협에도 덤덤한 이안의 반응에 백작이 얼굴을 더욱 구겼다.

"왕실에 조사대 파견을 요청하겠소. 조사 결과에 따라...."

준비한 듯 백작이 조사대 이야기를 꺼내자, 이안이 슬쩍 왕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요. 조사대가 나오면 그에 따라야겠지요."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왕자를 한참이나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나서야 왕자가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날 왜 봐? 내가 뭐 해 줄까? 근데 조사대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게임 속 트리미아는 거의 유일한 지능캐였는데.

그것마저 게임 보정이었던 모양이다.

"왕자님, 아까 말씀드렸던 신의(信義) 말입니다."

"아! 그거! 멋있었지! 캬… 모너가의 소공자가 이름뿐인 맹약을… 음? 아?!"

그제야 눈빛을 알아챈 왕자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백작에게 소리쳤다.

"백작! 조사대 파견은 내가 용인할 수 없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4화

"왕자님, 갑자기 그게 무슨...!"

갑작스러운 왕자의 태도 변화에 백작이 벌떡 일어나 외치자 왕자가 설명했다.

"모너가가 신의를 보이는 만큼 왕가도 맹약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지. 이번 조사는 모너가가 하는 게 좋겠어."

백작이 다시금 끼어들려고 했지만, 왕자의 단호한 목소리가 더 빨랐다.

"왕께서도 그 부분이 염려되어 형님이 아닌 나를 여기로 보낸 것이겠지. 왕가가 먼저 맹약을 저버린다면 모너가가 신의를 지킬 이유가 없어지는 게 아닌가?"

그 말에 얼굴이 벌겋게 물든 백작이 침음성을 흘리며 다시 자리에 앉자, 이번에는 이안이 입을 열었다.

"백작께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죠. 왕가는 절대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절대요. 지금이야 백작의 편에서 움직일 수 있다고 하지만, 맹약을 깨면서까지 백작을 도울까요? 모너가가 맹약의 대가로 피를 요구할 걸 알면서도?"

모너가와 전쟁을 벌이느니 이 난장판의 원흉을 죽이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앉히는 게 더 빠르고 편한 방법일 터.

노골적인 협박에 두 주먹을 움켜쥔 백작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소공작...!"

"왕자님, 서로의 입장이 이렇게 다르니 더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시간 낭비일 것 같습니다. 왕자님을 뵙게 되어 큰 영광이지만 저는 이만 돌아가 볼까 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이 왕자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뒤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백작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모쪼록 우연히라도 제가 원하는 머리를 얻게 되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엄지로 목을 스윽 긋자, 백작이 발작하듯 외쳤다.

"소공작, 자네가 끝까지!"

"하하하! 재밌어, 소공작 자네는 진짜 재밌어!"

둘의 상반된 외침을 뒤로한 채 이안은 영주성을 나섰고, 왕자의 끈적한 시선이 그 뒤를 따라붙었다.

* * *

"저게 도대체 뭐야!"

사냥꾼 대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주변을 둘러봤다. 동료였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었는지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서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

무려 엘프 사냥꾼들이다.

선천적으로 마나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그 순간부터 정령과 활을 쏠 수 있는 자연의 사랑을 받는 존재인 엘프를 사냥하는 사냥꾼.

기사단이 아무리 화려한 검과 갑옷으로 치장해도 숲에서만큼은 그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 아니 확신했다.

자신만 해도 귀족들의 마나 수련법을 얻지 못했을 뿐 3급 유저의 끝에 다다랐고, 자신의 동료 중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런 확신은 오만이 아니라 자신감에 불과했다.

그런데.

"좀 쓰러지라고, 이 괴물아!"

눈앞의 괴물은 단신으로 사냥꾼 전원을 상대하고도 멀쩡해 보였다.

휘두른 철퇴에서 쏟아지는 사냥꾼들의 피가 몸을 적실 때마다 힐끗 보이는 새하얀 치아를 보면,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으아아악!"

땅을 박차고 나서서 검을 휘둘렀지만, 검은 살갗을 조금 베어 냈을 뿐.

"아, 안 돼!"

어느샌가 휘둘러진 철퇴가 두 눈 가득 보였다.

깡!

그와 동시에 뒤에서 휘둘러진 검에 대장은 정신을 잃었다.

* * *

"레이나 양...."

재빨리 활로 레이나의 철퇴를 막아 내고, 사냥꾼 대장을 제압한 아카샤가 두려운 눈으로 레이나를 바라봤다.

레이나를 뒤덮은 끈적한 피에서는 아직 채 식지 않은 더운 열기가 올라왔고, 붉게 물든 눈은 포식자의 그것처럼 연신 다음 먹이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특성 [피의 갈증]이 극한까지 발동한 전장 속의 그녀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전설 속 마족의 현신(現身)에 더 가까웠다.

물론 그녀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그녀를 도와줄 레인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녀가 혼자였다고 하더라도 지는 모습은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아! 죄송해요. 도련님께서는 복수를 돕기만 하라고 하셨는데...."

한참 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레이나가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고개 숙여 사과했다.

"아, 아니야. 살아 있는 놈들도 몇 있고, 놈들 대장은 제대로 잡았으니까."

아카샤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수백 년 동안 다크엘프를 옥죄어 온 쇠사슬 중 하나가 부서졌다, 이토록 간단하고 허무하게.

피하는 게 더 좋은 거라, 숨으면 안전할 거라던 어른들의 가르침에 따라 땅끝까지 피하고 도망쳐 왔다.

그 억겁같이 느껴진 그 도주로를 따라 살아오며 매 순간 꿈꿔 온 짜릿한 복수는 상상했던 것보다도 달콤했고, 두려워했던 게 멍청하게 느껴질 만큼 쉬웠다.

'그럴 수밖에 없지. 사냥꾼들은 독도, 함정도 쓸 시간이 없었으니까.'

아마 마지막까지도 이번 사냥의 사냥감은 자신이었다는 걸 몰랐으리라.

아카샤는 쓰러진 대장을 바라보며 비릿한 혈향(血香)이 섞인 숲의 공기를 폐에 가득 밀어 넣었다.

절대 이 순간을 잊지 않으려는 듯이.

"여태까지 왜 그렇게 멍청하게 살았을까?"

순간 닥쳐 온 허무함에 조용히 뇌까리자, 어느새 뒤로 다가온 레이나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는 방법이 그거밖에 없었으니까요. 누군가 안대를 벗겨 주기 전까지는 볼 수 없는 것도 있더라고요."

"누군가 안대를 벗겨 주기 전까지… 인가."

말을 마친 아카샤가 손짓으로 대원들을 불러들였다. 이제 자신에게 빛을 선물한 인간에게 은혜를 갚을 차례였다.

* * *

늦은 밤.

"역시 실패했나?"

트레온이 초조한 듯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젠장. 역시 그냥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설마 우리 이름을 파는 건 아니겠지? 몰랐다고 잡아떼면 그만이긴 하지만...."

"엘프를 포획해서 달아난 거 아닐까요?"

"그놈들이?"

"기사들도 두 영지의 분쟁 때문에 왕실이 움직인 걸 아는데 눈칫밥 먹고 살아온 놈들도 알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죽을 자리인 줄 알고 도망간 것 같은데...."

일리 있는 기사의 말에 트레온의 인상이 구겨졌다.

노예 사냥꾼들이 근래 성을 오가며 이쪽의 분위기를 파악했을 수도 있다. 옵솔과 모너의 분쟁에 왕가까지 개입한 지금, 옵솔의 장자가 노예를 얻기 위해 모너의 영토를 침범했다는 사실이 퍼진다면 옵솔의 입장은 곤란해진다.

머리가 조금만 돌아가도 옵솔이 사냥꾼들을 죽여 입을 막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끄응… 차라리 도망치는 데 성공했으면 다행이긴 한데...."

사냥꾼들이 호언장담했듯 어려운 일은 아니다. 노예를 얻으면 다행이고, 얻지 못하면 조용히 몸만 빼면 될 뿐인, 간단하다면 간단한 일.

그 드넓은 숲을 고작 몇 백의 병사로 경계할 수 있을 리 없으니, 어지간히 멍청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들킬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오늘 저녁까지는 기다려 보자고."

괜히 꺼림직한 감각이 사라지질 않아 몸을 부르르 떨어 댄 그가 밤공기를 피해 야영지 텐트로 향했다.

* * *

그날 밤.

리나를 따라 야영장에 도착한 이안이 밤하늘에 걸린 달만큼이나 차가운 눈으로 트레온을 바라봤다.

"자, 저놈이 엘프를 사냥하려고 했던 놈이야."

"...."

"짜증 나지 않아?"

얼굴을 잔뜩 구긴 이안이 아카샤를 바라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자기 영주성에 숨어 있어도 부족한 놈이 감히 서쪽 숲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이곳에 야영지를 펴 놓고 기다리다니. 도대체 얼마나 멍청한 거지?"

이안이 손가락으로 텐트 주변을 거닐고 있는 기사들을 가리켰다.

"저 멍청한 꼴 좀 보라니까? 꼴에 정체를 숨긴다고 갑옷도 안 입었어. 갑옷 문양을 덧칠한 것도 아니고 몬스터 가죽을 입고 나오다니. 도대체 머리에 뭐가 들으면 저런 멍청한 선택을 할 수 있지?"

그 이유는 이안도, 아카샤도 잘 알고 있다.

저들은 두려워할 게 없다.

모너가를 침범하고도, 서쪽 숲의 엘프를 노예로 부리기 위해 엘프 사냥꾼을 부르고도 자신들이 공격당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고, 여태껏 그 누구도 저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적은 상상조차 못 하는 것이다.

"저들은 너희를 적이라고, 아니 사냥감이라고조차 생각하지 않아. 그냥 길거리의 떠돌이 개처럼 잡아서 데리고 놀 수 있는 장난감쯤으로 생각하지."

희귀하고 아름다운, 가지고 놀고 자랑하기 딱 좋은, 그런 장난감.

이안의 검은 눈동자가 아카샤를 향했다.

"짜증 나지 않아?"

아카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분에 못 이겨 흐른 눈물이 조용히 마른 땅바닥을 적셨다.

다크엘프란 그런 존재였다.

힘을 드러내면 저주받은 다크엘프가 준동한다며 국가와 교단이 난리 쳐 힘이 있음에도 침묵해야 했고, 무력하게 사냥당해야 했다.

웃기게도 저주받은 엘프를 두려워해야 한다던 이들이 친구와 가족을 철창에 가두는 걸 보면서도, 멍청히 당해야만 했다.

그게 그들이 그토록 따르던 신의 뜻인 줄도 모른 채.

"난 짜증 나. 모자란 새끼가 모자란 줄 모르고 설치는 것도, 내 영지 코앞에서 그 지랄을 하고도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도. 그래서 모너가를 다시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영지로 만들 거야. "

이안의 손이 아카샤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진짜 망나니가 돼야 해. 그래야 모너가를 무시하고 욕하는 놈들을 때려 부수고 우습게 보는 놈들을 짓밟고 올라설 수 있으니까."

망나니의 맹세를 들은 아카샤가 울음을 참으며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씹어 뱉듯 말했다.

"저희도, 저희도 그들이 그토록 저주하던 악마가 될 것입니다. 악마가 되어 그토록 저희를 두려워한 그들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주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에 삐뚜름한 미소를 지은 이안이 활기차게 말했다.

"그럼 저 멍청한 새끼부터 시작해 보자고."

이안이 손을 치켜들며 속삭였다.

"전원 준비."

명령과 동시에 활을 꺼내 드는 레이저들을 돌아봤다. 저들은 이제 공포의 대상이 될 것이다. 어둠 속에서 쏟아지는 화살의 무서움을 언제가 대륙 전체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누구도 감히 다크엘프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리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숨을 들이켜자 차가운 공기가 폐부 가득 들어찼다.

"발사."

치켜든 손을 내림과 동시에 열 개의 화살이 소리도 없이 활을 떠나고, 그 바로 뒤에 다시 열 개의 화살이 뒤따랐다. 점점 더 많은 화살이 하늘을 수놓은 뒤에야 화살을 발견한 기사가 소리쳤다.

"적습이다! 마나를 둘러 방어해라!"

생각보다 훌륭한 지휘관인 듯한 기사가 재빨리 명령을 내렸지만, 마나와 정령력이 동시에 스며든 화살은 기사들이 급하게 일으킨 마나를 산산조각 내며 사지 곳곳을 꿰뚫었다.

애초에 갑옷을 벗고 있던 옵솔의 기사들은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무너져 내렸다.

"끄아악! 후퇴, 후퇴하라!"

"도련님! 도련님을 챙겨!"

"마나가 담긴 화살이다! 막을 생각 하지 말고 당장 도망가!"

순식간에 쓰러지는 동료들을 보며 당황한 기사들이 우왕좌왕하며 움직이는 동안, 레인저들은 쉴 새 없이 화살을 날리며 거리를 좁혔다.

"다, 다크엘프다!"

아카샤의 짙은 갈색 피부를 알아본 누군가 소리침과 동시에 그녀의 곡도가 기사의 머리를 갈랐다.

"자매들이여! 마침내 복수의 시간이다!"

캉! 캉! 캉!

카랑카랑한 아카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11명의 레인저가 곡도를 맞부딪치며 화답했다.

이미 대부분의 기사는 사지에 박힌 화살에 바닥을 기고 있었고, 남은 건 일방적인 살육뿐.

달을 머금은 수십 개의 곡도가 유려히 빛났다.

* * *

"공작님, 정말 괜찮을까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전장을 바라보던 리나의 물음에 전장을 지켜보던 이안이 대답했다.

"응? 괜찮아 보이지 않아? 직접 나서는 첫 실전이라 조금 신난 것 같기는 한데, 원거리로 다 죽여 놓고 나서 들어갔으니까 괜찮겠지. 여차하면 우리가 참전해도 되고."

"그게 아니라… 그래도 옵솔의 기사랑 장남인데, 이런 식으로 죽이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야?"

이안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옵솔의 기사가 어딨어? 누가 봐도 수상한 복장을 한 침입자밖에 안 보이는데."

놈들은 엘프 사냥꾼을 죽이고 입을 막기 위해 영지의 갑옷조차 입지 않고 왔다. 사냥꾼들이 엘프 사냥에 성공하면 엘프들을 밀수해야 하는 만큼 당연히 영지 경계를 지나가면서 신고도 하지 않았고, 리어를 오갈 때도 뒷돈을 써 가며 움직였다.

즉, 이 자리에 저들이 있다는 걸 아는 건 처음부터 저들을 추적해 온 리나뿐.

"그동안 세 영지를 괴롭힌 악덕한 산적을 잡았는데, 글쎄 그놈들이 모너가까지 침입한 거야! 연약한 모너가는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산적을 진압했고-"

이안이 장난스럽게 손을 활짝 벌렸다.

"거기에 있던 옵솔가 장남을 '우연히'! 발견하는 거지!"

어처구니없는 이안의 말에 리나가 입을 살짝 벌리고 그를 바라봤다.

"그 말을 옵솔이 믿을까요?"

"믿기 싫을걸. 근데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지."

"그게 누군데요?"

전투가 끝나 가는 것을 본 이안이 고개를 들어 반짝이며 어둠을 밝히고 있는 달을 가만히 바라봤다.

"국왕."

모든 피스가 모였고, 그림은 완성됐다.

과연 왕은 어떻게 움직일까.

"왕조차 믿지 않으면 모너가(家)가 모너국(國)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모너도 국왕도 절대 전쟁을 벌이려고 하지 않겠지만, 꿈은 꾸는 사람 마음 아니던가.

"모너국이라… 뭔가 구린 이름이네요."

그거 우리 아빠 성인데.

아, 이안 아빠였지 참.

피식 웃어넘긴 이안의 시선이 전장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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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그건 전투라기보단 학살에 가까웠다.

레인저의 화살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기사들은 달처럼 휘어진 곡도에 무력하게 쓰러졌고, 레인저들은 그간의 설움을 설욕하듯 기사들을 철저히 유린했다.

그 참혹한 공간에서 살아남은 건 옵솔의 장자, 트레온뿐.

"이 더러운 놈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내가 바로 옵솔의―!"

레인저들에게 엎드린 채 두 팔이 잡히고도 고개를 쳐들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대는 놈을 향해 이안이 다가갔다.

"옵솔의 장자, 트레온. 엘프 사냥꾼을 시켜 서쪽 숲을 침범한 등신. 백작이 사냥꾼을 부린 거길 바랐는데 영 아쉽게 됐어."

백작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목을 베어 왕실에 곱게 포장해 선물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다.

"누구냐!"

"나? 네가 침범한 숲의 주인."

이제야 그를 알아본 트레온의 눈빛이 떨렸다.

"소, 소공작? 그, 그대가 왜 여기에!"

"왜냐니, 당연히 산적 잡으러 왔지."

말과 함께 트레온의 뒤통수를 쳐 기절시킨 이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리어로 향했다.

이제 해야 할 일들은 끝났다.

여유를 가지고 뿌린 씨앗들이 발아할 때까지 기다리면 될 뿐.

* * *

일주일 후.

밀린 단련과 신입들의 훈련을 도와주며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던 이안과 달리, 옵솔은 전에 없이 바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째다! 트레온은 도대체 어디 갔단 말이냐!"

콰직!

날아든 재떨이가 머리에 부딪히고 담뱃재가 얼굴을 덮었음에도 켄타우르스의 기사단장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명령에 따라 리트와의 경계선을 지키던 단장이 트레온의 위치를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단지 백작의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걸 단장도, 백작도 알고 있었다.

"도대체가! 지금 이 영지에서 제대로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어! 트레온 이놈은 가문이 무너져 가는데 도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병사들을 풀어 다시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일주일째 반복되는 대답에도 백작은 더 이상 화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단장에게 윽박질러 봐야 바뀔 것도 없을 테고 지금 영지에는 아들의 방황보다 중요한 문제가 잔뜩 쌓여 있었다.

"머천이랑 리트는 어때?"

"머천 쪽에서 경계에 점점 더 많은 병사를 배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지만 정말 전쟁을 준비하는 것 같다고...."

"이 미친놈들! 그 새끼들은 도대체 무슨 약을 처먹었길래 갑자기 지랄이야!"

머천의 삼남인 티에르의 오해 때문에 옵솔이 의심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백작으로선 갑작스러운 머천의 태도 변화에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리트, 리트 놈들은?"

"그쪽은 의외로 많은 병력을 배치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에 대비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보다 무슨 일인지 영지 전체의 식량이 엄청나게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으아악! 이놈이나 저놈이나 제정신인 놈들이 없어!"

주먹을 움켜쥐고 책상을 내리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리트가 갑작스럽게 식량을 움직이는 거야 모너가와의 거래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일 터.

세 영지의 젖줄이나 다름없는 모너가와의 거래를 독점하다니. 리트 놈들은 선을 넘어도 훌쩍 넘어 버렸다.

"한시라도 빨리 중재를 시작해야 해. 두 백작의 얼굴이라도 봐야 대화를 해 보지, 리트건 머천이건 지금은 연락조차 안 받는다고."

"그럼 왕자님께서는 언제...?"

"이번 주 주말."

백작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단장을 바라봤다.

"만약 왕자가 중재에 성공하지 못하면 그와 동시에 영지전을 시작해야 돼. 옵솔가는 이렇게 무너질 수 없으니까."

만약 모너가가 끝까지 옵솔과의 거래를 거부하면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리트를 공격해 모너가에 식량을 공급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

"영지 전 병력을 이끌고 영지 경계에서 대기하게. 배신자에겐 죽음뿐이라는 걸 리트에게 가르쳐야겠어."

"예!"

절도 있게 경례한 단장이 나가고,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집사가 다가왔다.

"왕자가 끝까지 모너가의 편을 들으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흐흐흐… 1왕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사안이 심각한 만큼 왕께서 중재관을 한 명 더 파견하기로 한 모양이야."

"그럼 1왕자께서 직접...!"

"아니, 2왕자에게 내린 임무에 1왕자를 보내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보냈다고 하더군."

왕자가 영지를 방문한 후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던 백작이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후작, 드미트리 후작께서 오신다."

* * *

"도련님, 왕자님께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마나 고갈로 연무장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이안에게 레이나가 다가와 왕가의 인장으로 봉인된 편지를 건넸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번 주말에 중재 회의를 시작할 예정이니 참석하라는, 통보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편지를 끝까지 읽은 이안이 레이나에게 편지를 건네며 피식하고 웃었다.

"모두의 시간을 맞추기 위해 피치 못하게 이번 주말에 회의를 시작하자니...."

회의 시간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있으니 언뜻 불쾌할 수 있지만 이안은 이게 왕자가 주고자 하는 힌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거래를 끊지 않은 리트는 모너가와 문제가 없으니 흔쾌히 회의에 참석할 것이고, 일방적으로 거래가 끊긴 머천과 옵솔은 모너가와의 시간을 맞출 수밖에 없을 터.

그러면 '시간을 맞출 대상'은 왕가밖에 남지 않는다. 그것도 이미 옵솔에 와 있는 왕자가 아닌 다른 인물이.

"왕자 말고 다른 사람이 오는 거야, 트리미아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이나가 빠르게 다가와 부축하며 물었다.

"왕자님께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인물이라니, 그게 누굴까요?"

"글쎄, 중요한 건 누가 오냐가 아니라 누가 오든 지지 않는 거지."

누가 온다고 한들 이미 승패가 갈린 싸움의 결과를 바꿀 수는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커를 하나 더 준비해 볼까?"

* * *

회의가 시작되는 주말.

중재를 신청한 옵솔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네 영지 간의 첫 번째 회의는 옵솔에서 개최됐다.

소공작이 도착하기 전 미리 다른 영주들과 입을 맞추려는 속셈이었지만, 회의 시작 1시간 전까지 누구도 백작성을 찾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라면 세 영지의 의견을 맞추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는 리트와 머천이 아직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옵솔과 정말 상종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일 터.

"멍청한 놈들! 여기까지 누가 오실지도 모르고!"

자신감 넘치는 고함과 달리 어느새 목 끝까지 올라온 두려움에 연신 손톱을 물어뜯던 백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봐라! 후작님은, 후작님은 도착하셨느냐?!"

벌써 수십 번도 넘게 들었던 질문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후작님이야 워낙 바쁜 분 아니겠습니까? 마탑에 연락해 이곳에 도착하시는 대로 기별을 취하라 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집사의 말에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지 백작이 연신 손으로 얼굴을 쓸어 넘겼다.

"왕자는?"

"소공작을 맞이해야 한다며 아침부터 나가 계십니다."

"뭐?!"

솟구치는 짜증에 두통이 밀려왔다. 리트도, 머천도 전부 미친놈들뿐이지만 그중에서 단연코 미친놈들은 빌어먹을 소공작과 왕자다.

협상하자고 만났더니 대뜸 목을 달라는 소공작도 적당히 미친놈은 아니었지만, 그 이후 매일 찾아와 협상을 받아들이라고 종용하던 왕자만큼은 아니었다.

"괜찮아. 후작님께서 오시면 놈이 좋든 싫든 조사를 진행하자고 하실 게 분명해. 사태를 봐서 적당히 우리 쪽에 도움이 되는 증거를 심어 놓으면...."

백작이 앞으로의 계획을 짜고 있을 때, 집사가 다가와 그토록 기다리고 있던 후작의 도착을 알렸다.

* * *

"…아무도 없군."

회의실에 도착한 드미트리 후작의 목소리에 담긴 노골적인 불쾌함을 알아챈 백작이 재빨리 말했다.

"다, 다들 오고 있다고 합니다. 회의가 준비되면 제가 모시러 갈 테니 잠시 휴식을...."

백작의 말을 손짓으로 막은 백작이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는 자리로 가 앉으며 말했다.

"됐네, 2왕자도 계신 자리에서 허례허식에 신경 쓴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차라리 여기서 기다리겠네."

"그럼 제 보고서라도...."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어떻게든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후작은 냉정히 고개 저었다.

"보고서는 전부 읽었네. 알아야 할 정보는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모두가 모이면 그때 진행하지."

"혹시 궁금하신 부분이 있으면 제가...."

"백작, 자네가 구태여 말을 더하지 않아도 나는 왕국을 위한 결정을 내릴걸세. 시간이 남거든 리트 백작과 머천 백작을 회유할 방법이나 생각해 보게."

후작은 대표적인 왕실파 인물로 1왕자를 지지하는 귀족 중 가장 큰 파벌을 가지고 있다.

그가 말하는 왕국을 위한 결정은 모너가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을 터.

웃음꽃이 핀 백작이 깊이 고개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덕분에 큰 고민을 덜 수 있을 듯합니다."

"내게 감사할 일이 뭐 있겠는가. 나는 왕께서 내리신 임무를 수행할 뿐이네."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을 때, 하인이 두 영주의 도착을 알렸다.

"리트 영지의 정당한 지배자이자 리트 가문의 주인이신 리트 백작께서 입장하십니다!"

"머천 영지의 정당한 지배자이자 머천 가문의 주인이신 머천 백작께서 입장하십니다!"

회의장 안으로 들어선 둘은 옵솔 백작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후작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리트와 머천이 레임 왕국의 기둥이신 드미트리 후작님을 뵙습니다."

"후작님께서 먼저 나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래, 다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군. 어서 앉게."

설마 두 백작이 함께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후작이 멈칫해 있을 때, 문 쪽에서 다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물의 숲을 지키는 첨병이자 마물의 숲의 주인, 레인 왕국 북부를 지키는 모너 가문의 소공작께서 입장하십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 후작을 앞에 두고도 뻣뻣한 허리, 무심한 듯하지만 광오한 눈을 담은 이안이 회의장 안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섬과 동시에 밖에서 어수선한 말소리가 들렸다.

"히익! 위대한 레임 왕국의 왕자...!"

"됐어, 됐어, 저기 나 모르는 사람 없어."

시종의 인삿말을 막은 왕자가 이안을 뒤따라 들어왔다.

"거참, 먼저 가지 말라니까!"

"왕자님, 원래 아랫사람이 먼저 들어가서 윗사람을 기다리는 겁니다. 이렇게 된 김에 밖에서 한 시간 정도 있다가 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너무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왕자를 애써 무시한 채, 이안이 고개를 돌려 백작들과 후작을 바라봤다.

"후작님, 다 온 것 같으니 이제 시작할까요?"

"…그러지."

옵솔 백작의 손짓에 따라 하인이 문을 닫음과 동시에 이안과 왕자가 각자의 자리에 앉자, 진중한 표정을 한 후작이 입을 열었다.

"국왕께서 이 일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네. 북부를 수호하는 모너가에 문제가 생기면 왕국 전체에 고난이 닥칠 터. 모쪼록 원만한 합의를 바라고 계시네."

세 백작을 둘러본 백작의 시선이 이안에게 고정됐다.

"중재를 시작하기 전에, 이것 먼저 확실히 해야겠구먼. 소공작, 자네는 아직 계승식을 치르지 않아 귀족 신분도 아닐뿐더러 영지의 관리조차 섭정하고 있다고 하는데… 과연 자네가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는가?"

후작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조소가 걸렸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올가미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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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6화

후작의 노골적인 무시가 담긴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근데 이 새끼가...?'

후작이 지적한 대로 이안은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 왕가가 인정한 섭정관은 마크버그고, 18살 생일에 맞춰 계승식을 치르기 전까지는 소공작이라는 무늬뿐인 신분밖에 없으니까.

재수 없는 미소가 걸린 후작의 얼굴을 보니 짜증이 몰아쳤지만, 이 자리에서 쉽게 화를 내는 건 하책 중의 하책.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 앉은 뒤 입을 열었다.

"후작은 내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모너가의 뜻을 무시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 있나. 국왕 폐하를 대리해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으니 확실히 하려는 것일 뿐일세."

뱀처럼 혀를 놀린 후작이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이안을 바라봤다.

"…나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 힘을 줘 말했음에도, 백작은 피식 웃으며 이안을 무시했다.

"글쎄, 자격이라는 게 원한다고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지. 필부가 스스로 귀족이 될 자격이 있다고 꿈꾼다고 하여 귀족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후작은 이안의 약점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소공작은 지금껏 그의 뒤에 모너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지난 몇 년간의 보고에 따르면 모너가의 망나니는 소공작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매년 있어야 하는 영주 회의조차 단 한 번도 열린 적 없으니, 소공작이 아무리 짖어 봐야 의미 없는 고성일 뿐.

애초에 섭정관이 아닌 이안이 이 자리까지 오게 된 연유는 궁금했지만, 설령 이안이 분노한다고 한들 모너가의 스벤이나 모굴이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실제로 무늬만 소공작일 뿐, 가문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안은 후작의 노골적인 무시에도 강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후작은 내가 귀족이 아니라는 듯 말씀하시는군요."

"설마, 그대는 왕국이 인정한 고귀한 혈통을 잇는 귀족이네. 다만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뿐이지."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후작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섭정관을 협상장까지 데려올 수만 있다면 고작 단승 작위를 가진 백작은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터.

이 협상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모너가의 소공작이자 유일한 계승자인 내가 그 자격을 증명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안은 여전히 화를 내지도, 살의를 일으켜 기세를 폭사하지도 않았다.

감정하나 묻어나지 않는 눈으로 덤덤히 후작을 바라볼 뿐.

두 사람의 언쟁을 지켜보던 왕자가 입을 열었다.

"후작, 소공작의 말대로 그는 모너가의 유일한 혈육이네. 설령 아직 나이가 어려 영지를 직접 통치하고 있지는 않다고 하나, 공작이 없는 지금 그를 제외한 누가 모너를 대표하겠나?"

"왕자님, 감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국왕 폐하 명령에 따라 진행되는 회의니만큼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왕자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은 후작이 냉정하게 이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다 소공작이 스스로 자격을 증명할 수 있다면 아무 문제 없지 않겠습니까. 안 그런가, 소공작?"

타고난 자격을 증명하라니. 이토록 모순적인 요구는 누가 봐도 이안을 노린 것이다.

가문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망나니가 가문을 대표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리 없을 터. 무시와 경멸이 담긴 후작의 시선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바뀔 때쯤,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니 알겠습니다. 제 자격을 증명해야죠."

* * *

이안은 내심 치솟는 짜증을 억눌렀다.

'모너가의 망나니'라는 빌어먹을 호칭은 잊을 때쯤 되면 이렇게 고개를 쳐들고 외쳐 대는 것 같았다.

넌 영원히 이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고.

그러나 이 세계에 떨어졌던 그때와는 다르다.

고작 세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난 수많은 변화를 만들어 냈다. 혐오와 멸시가 뒤섞인 시선을 넘어서 오롯이 증명했다.

레이나가, 리나가.

릴라이, 릭, 퍽, 아카샤, 흑귀대와 레인저들까지.

모두가 그 증거다.

"아, 그 전에 먼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소공작, 자네가 뭐라고 하던─"

후작이 불쾌한 표정으로 끼어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절대 나를 무시해선 안 됐다.

이 순간, 이 자리, 이 구도조차 내가 만들어 낸 것이니까.

"들어 보시죠, 후작님. 재밌는 이야기니까요."

무슨 짓이냐는 듯 인상을 찌푸린 후작을 향해 웃어 준 뒤 머천과 리트 백작을 바라봤다.

"두 백작님은 처음 뵙는군요.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두 백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는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제가 듣자 하니 페일세이프에서 산적이 나타났었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세 상단이 모두 당했었다고."

그 말에 머천 백작이 발끈해 소리쳤다.

"흥! 산적인지 아닌지는 잡아 봐야 아는 법이지! 누가 아는가 우리 중에 누군가 자작극을 벌였을지도!"

여전히 옵솔이 산적질을 했다고 믿고 있는 머천이 옵솔을 노려보는 걸 보고 이안이 미소 지었다.

"세 상단이 산적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로 모너가는 최선을 다해 산적들을 추적해 왔습니다. 페일세이프는 모너가의 자랑이자 심장이나 다름없으니 절대 그들을 두고 볼 수 없었죠. 그리고 마침내 산적들을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후작을 바라봤다.

"옵솔과의 중재를 시작하기 전에 세 영주님 모두가 모였으니, 산적들에 대한 처벌을 먼저 논해도 되겠습니까? 제가 직접 잡은 산적들이니 그럴 자격은 충분히 되겠지요?"

갑작스러운 이안의 물음에 후작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인상을 구겼다.

"이 또한 오늘 안건 중 하나니 허락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소공작! 정말 그 산적들을 잡았단 말인가!"

리트 백작이 옵솔과 머천을 번갈아 노려보며 소리쳤다.

"내 소중한 막내딸이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했네! 누구든 감히 내 딸의 상단을 건들고 지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의 옆에 있던 머천이 말을 받았다.

"그래, 빨리 말해 주게! 도대체 어디서 온 놈들이기에 세 영지의 상단을 전부 털어먹고도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었는지!"

머천이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옵솔을 노려봤다.

두 사람이 노려보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황한 옵솔이 이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그래, 어서 말해 주게. 도대체 그 산적이 누구길래 이 난리란 말인가?"

회의장 안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것을 확인한 이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먼저 소개해 드릴 사람, 아니 엘프가 있습니다."

끼이익.

또각, 또각, 또각.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들어선 아카샤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더 이상 숨을 생각이 없는 그녀 전처럼 온몸을 가리는 로브를 뒤집어쓰지 않았다. 눈이 휘둥그레지게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만큼이나 매끈하고 매력적인 갈색 피부에 세 백작이 탄식을 터트렸다.

"다, 다크엘프...."

"소공작! 이게 무슨 짓인가! 중재를 위한 회의장에 다크엘프를 데려오다니!"

"이쪽은 아카샤. 선대 공작들이 인정한 모너가의 일원이자 서쪽 숲을 관리하고 있는 다크엘프를 대표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선대 공작들이 인정했다는 말에 순간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크엘프가 모너가의 일원이라고...?"

신의 저주를 받은 종족이자 역사 속 마족의 잔재라고 불리는 다크엘프는 대륙 그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데 그 다크엘프가 모너가의 일원이라는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이안과 아카샤를 번갈아 바라볼 뿐.

"예, 모너가의 영토에 살고 있으니 모너가의 신민(臣民)이고 선대 영주들로부터 그 땅의 관리를 일임받았으니, 서쪽 숲의 다크엘프 부족은 모너가의 일원입니다."

이안이 아카샤에게 눈짓하자 그녀가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왕자에게도, 후작에게도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지 않은 시선은 이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크엘프가 여기는 웬일인가?"

"신출귀몰한 산적을 잡기 위해서는 산과 숲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침 저희 영지에 엘프가 있으니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말에 세 백작이 서로를 바라봤다.

"소공작 페일세이프에는 산이 없네만...."

"산적이니 분명 산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요."

리트백작의 예상치 못한 지적도 자연스럽게 넘긴 뒤, 아카샤를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

"사실, 이번에 아카샤가 나선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아카샤?"

* * *

인간들 앞에 나선 게 처음인 아카샤는 노골적인 불쾌함과 멸시가 담긴 시선에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토해 내듯 말을 뱉었다.

"지난달. 우리를 습격한 인간들이 있었다."

덤덤하게. 감정이 배어 나오지 않게.

빌어먹을 인간들 앞에서 약한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감정을 억누른 아름다운 미성이 회의장에 퍼졌다.

"과거 다크엘프를 사냥하려는 인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모너가의 숲에 침범한 인간을 두고 볼 수가 없기에 모너가의 소공작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의 명령을 받아 감히 모너의 땅을 침략한 엘프 사냥꾼들을 추살(追殺)하는 데 성공했지."

덤덤히 말하는 아카샤의 눈이 회의장에 모인 면면을 훑었다. 소공작을 제외한 이 자리에 있는 인간들은 옵솔의 장자와 다르지 않다.

다크엘프를 혐오하면서도 신기해하고 더러워하면서도 보고 싶어 한다. 그 불쾌한 시선들이 몸에 달라붙었다.

신기한 게 있다면, 저들이 소공작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

다크엘프를 품겠다 약속한 그녀의 소공작은 자신과 같은 시선과 모욕을 견디고도 저렇게 여유로운 얼굴로 오롯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장을 고문해 산적집단을 찾았고,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죽였다."

아카샤의 신호에 기다리고 있던 레인저들 두 명이 거대한 포대를 두 자루를 들고 들어왔다.

툭. 툭. 툭.

레인저들이 손짓에 새하얀 포대에서 트레온을 지키던 기사들의 머리가 바닥을 구르고, 그사이 익숙한 얼굴을 본 옵솔 백작이 비명 지르듯 소리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오!"

* * *

"소공작! 이곳에 왕자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정도를 지키게!"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치는 옵솔을 보며 이안이 피식 웃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후작이 덩달아 소리쳤다.

그러자 이안이 덤덤히 후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국왕 폐하께서 직접 내린 명령인데 원칙을 따라야지 않겠습니까? 관련자들의 조사와 처벌에 꼭 필요한 일이니, 조금 더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익! 자네, 끝까지!"

자신이 한 말이 있어 말을 더할 수 없었던 후작이 다시 자리에 앉자, 옵솔 백작이 소리쳤다.

"이건 함정이다! 저들이 진짜 산적인지 아닌지 모너의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나!"

그의 의심은 매우 합당했지만, 아쉽게도 이쪽에는 정황 증거가 넘쳐났다.

"저들의 이동 경로를 추적해 본 결과, 무늬도 없는 가죽 갑옷을 입은 수상한 무리가 리어와 옵솔을 오갔다는 증언이 여러 곳에서 들리더군요. 심지어 기록도 남기지 않고서 말입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앉아 있던 머천 백작이 일어나 옵솔 백작에게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그럴 줄 알았다! 옵솔 백작! 당장 저들이 누군지 밝혀라!"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옵솔 백작에게 향하고, 그의 얼굴에 절망감이 깃들었다.

* * *

'젠장!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바닥을 구르고 있는 머리는 전부 옵솔의 기사가 분명했다. 문제는 왜 저기서 머리만 남아 있냐는 것.

'설마....'

불길한 감각이 엄습해 왔다.

갑작스럽게 자리를 비운 아들과 몇몇 기사.

며칠간 머무를 거라던 아들의 손님들.

설마 아들의 손님들이 다크엘프가 말한 사냥꾼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닐 확률이 높으리라.

생각을 마친 백작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모르는 얼굴입니다. 두 백작님도 정신 차리십시오. 저주받은 다크엘프의 말을 그냥 받아들이실 생각이십니까!"

어차피 저 둘은 바닥을 굴러다니는 머리가 옵솔의 기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알아본다고 해도 명망 높은 단장이나 부단장밖에 모를 터. 자신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기사들을 두 백작이 알 리가 없다.

'괜찮아. 들키지만 않으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백작의 시선이 후작을 향했을 때, 이안이 입을 열었다.

"정말요? 전부 다 모르는 얼굴들입니까?"

그 불안하고 불길한 목소리에 백작이 사색이 되어 머리를 하나하나 눈에 주워 담았다.

설마, 설마 자신의 아들이 차가운 바닥을 구르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불안한 마음에 몇 번이나 바닥에 떨어진 수급을 봤으나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안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백작을 놀리듯, 비아냥 섞인 이안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럼 다행이구요."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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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7화

"그런데 이상하네요. 분명 저들은 백작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안이 실실 웃으며 백작과 후작을 번갈아 바라봤다.

"소공작,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후작의 노호성에도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지난 몇 개월간 공들여 만든 판을 고작 목소리 크기로 뒤집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대신 방금 막 생각난 척, 머리를 치며 말했다.

"아! 마지막에 사로잡은 한 명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주장을 해 아카샤가 어쩔 수 없이 살려 뒀다고 합니다."

"무, 무슨...?"

자연스럽게 아카샤를 바라보자, 그녀가 다른 한 포대를 반으로 갈랐다.

"읍! 읍, 읍!"

그리고 마법으로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던 트레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친구가 글쎄 산적들과 같이 있지 뭡니까? 저는 처음 보는데 자기가 옵솔 백작의 장남이라고 우겨 대니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죠."

"읍! 읍! 읍읍!"

모두가 침묵한 회의장 안, 아버지를 발견한 트레온이 미친 듯이 고개를 움직이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어떻습니까, 백작님? 여전히 모르는 얼굴인가요?"

"소공작...!"

피떡이 되어 바닥을 기고 있는 아들을 본 옵솔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이안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러나 매 순간 혐오와 멸시가 담긴 시선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이안이 고작 눈빛에 겁을 집어먹을 리가 없다.

겁먹는 대신 명백한 조소를 띤 이안이 말을 이었다.

"물론 모르는 얼굴이겠죠. 감히 모너가의 영토를 침범하고 모너가의 일원을 노예로 잡으려고 한 파렴치한 인간을 백작께서 아실 리가."

똑, 똑.

백작의 움켜쥔 손에서 떨어진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그런 백작을 향해 머천과 리트의 경멸 어린 시선이 날아들었다.

"왜, 왜 그랬는가! 우리 세 영지의 단결을 깨면서까지 무엇을 얻으려 그랬나!"

후작도, 왕자도, 다른 두 백작도 옵솔 백작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그림이었으니까.

"…이건 모함이다."

백작이 분노로 덜덜 떨리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토해 내듯 말했으나, 회의장의 그 누구도 그를 믿지 않았다.

"모함이다! 내가, 우리 옵솔이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벌이겠나! 후작, 후작님! 이건 명백한 모함입니다!"

백작이 다른 두 백작과 후작을 차례로 바라보며 호소했지만, 후작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허...."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트리미아가 바닥을 기고 있는 트레온과 백작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하기는 그렇지만, 트레온 공자, 이거 오랜만이네. 신년 연회 때 만나고 처음이던가? 잘 지내는… 것 같지는 않고."

왕자의 시선이 옵솔 백작을 향했다.

"백작, 다시 한번 묻겠네. 저 주인 없는 머리들은 정말 모르는 이들인가?"

백작의 눈이 허망하게 죽은 기사들을 훑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도 정확히 이해되지 않았다.

아들이 산적질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모너가에 엘프가 숨어 있었다는 것도, 엘프 사냥꾼을 모아 모너가의 엘프를 사냥하려 했다는 것도, 전부 믿기지 않았다.

그래, 이건 거짓이다.

백작의 떨리는 눈이 아카샤에게로 향했다.

저주받은 짙은 갈색 피부가 번들거리고 거짓과 기만이 담긴 짙은 회색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나는 괴물이, 옵솔을,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가문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왕자님! 한 번만 저를 믿어 주십시오! 저들은 제 영지의 기사가 맞지만 저는 절대, 절대 세 상단을 습격하지 않았습니다! 산적도, 엘프 사냥꾼도, 전부 저 저주받은 다크엘프들의 거짓말이 분명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백작이 떨리는 걸음으로 트레온을 향해 다가갔다.

"아들아, 어서, 어서 말해 보거라! 너는 그런 적이 없다고, 전부 모함이라고 왕자님과 후작님께 고하란 말이다!"

도대체 왜 기사들이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는지, 왜 아들이 옵솔을 떠나 모너가의 리어에서 잡혔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진실을 마주하면 무너질 게 분명했기에.

"모너가가! 저주받은 종족을 들여 왕국에 악운(惡運)을 불러오려는 겁니다!"

트레온 앞에 꿇어앉은 백작이 절규하듯 외치며, 아들의 입을 막고 있는 재갈을 풀었다.

"왕자님과 후작님을 기만해 왕국을 선동하고 세 영지를 무너뜨리려는 모너가의 계략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재갈을 벗은 트레온조차 입을 열지 않았다.

-짜악!

"어서, 어서 말하라니까!"

짜악! 짜악!

분노한 백작이 연신 뺨을 휘갈기자 트레온이 기어와 그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 아버지, 죄송, 죄송합니다."

애원하듯, 속삭이는 듯한 아들의 말에 높게 쳐들은 백작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네가, 네가 정말 그랬다고? 모너가의 엘프를 사냥하고 산적으로 위장해 세 상단을 덮쳤다고?"

"아닙니다! 저는 절대 산적으로 위장한 적 없습니다! 저주받은 다크엘프 몇 명을 잡아 신께 바치려...."

트레온이 억울함을 증정했으나 그 누구도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타 귀족의 영토를 다른 귀족의 기사단이 침범했다는 건 상단을 습격했다는 것보다 심각한 일.

백작의 시선이 다크엘프에게로 향했다.

"마법이다. 저 악마 같은 년들이 내 아들에게 마법을 건 게 분명해. 나는, 나는 절대 믿을 수 없다!"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 외쳐 대는 백작의 얼굴에 굵은 눈물이 맺혔다.

"저 아이가 무슨 이유가 있어 엘프를 사냥하겠나! 옵솔이 뭐가 부족해서 세 영지의 오랜 관계를 망칠까!"

찢어지는 듯한 백작의 목소리에도, 두 영주와 후작의 시선은 냉랭하기만 했다.

* * *

백작의 신파극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던 이안이 후작을 바라봤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이안이 직접 옵솔의 장남이 벌인 일을 밝혀 낸 만큼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은 충분했다. 거기다 세 영지와 모너 간의 중재를 위한 회의장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트레온으로 인해 그 주제가 바뀌었다.

"…재밌는 짓을 벌였군, 소공작."

굳은 얼굴로 입을 연 후작에게 이안이 이죽거리며 답했다.

"그럼 좀 웃으세요. 기껏 힘들여 범인을 잡아 왔더니 왜 다들 죽상인지, 참."

비웃음이 가득 담긴 이안의 말에도 후작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불쾌함과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볼 뿐.

"기고만장한 것도 잠시뿐이다. 모너가가 충분한 조사를 했으리라 믿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왕국이 조사해 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후작이 손으로 턱을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거기에 다크엘프들이 모너가의 일원이라고 하나, 대륙에 널리 퍼진 속설도 무시할 수 없지 않겠나. 그들이 하는 말을 신뢰할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게."

후작의 말은 결국 너희가 하는 말은 못 믿겠으니 직접 처음부터 다시 조사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왕국이 조사단을 파견하고 실제 조사가 시작되면 수많은 증인과 증거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모너가에 불리한 증거들이 생겨날 터.

"모너가의 조사는 믿지 못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그를 노려봤지만, 수십 년을 고위 귀족으로 살아온 후작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이안의 시선을 태연히 넘기며 말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모너가의 말은 믿지만, 이번 조사를 진행한 자네와 다크엘프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거지."

자연스럽게 이안을 깎아 내린 후작이 다른 두 백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머천과 리트 모두 산적들에게 큰 피해를 보았다고 들었네만, 그건 옵솔도 마찬가지네. 페일세이프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본 것도 옵솔이고 이 근처를 오가던 노예 상단은 거의 궤멸 직전이라고 하더군."

과연 한 왕국의 정계에서 수십 년간 입지를 굳건히 다져온 후작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후작이 단호한 목소리로 리트와 머천에게 말했다.

"그러니 소공작의 주장에 너무 흔들리지 말게. 누가 뭐래도 일련의 사건으로 가장 이득을 본 것은 모너 아닌가."

두 백작을 바라보던 후작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카샤에게로 향하자, 두 백작도 아카샤를 바라봤다.

"악마의 환생이라는 다크엘프들은 거짓과 기만을 숨 쉬듯 일삼는다고 하지. 모너가야 그들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네들은 지난 수십 년간 함께한 옵솔보다 다크엘프의 말을 우선시할 생각인가?"

후작의 침착하고 날카로운 지적에 순간 두 백작의 눈이 떨렸다. 어쩌면 정말 다크엘프와 모너가에게 놀아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기에.

"이거 사실을 말해도 믿어 주시질 않으니 영 곤란하군요."

"자네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제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안과 후작의 시선이 허공에서 매섭게 부딪쳤다.

"그걸 왜 내게 묻는가? 만약 옵솔이 정말 모너의 영토를 침범했다면 그건 전쟁의 선포와 다름없을 터. 그 이후의 자네와 모너가 결정할 일이지 왕가가 개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듯 말하는 후작을 뒤로하고 이안이 왕자를 바라봤다.

"왕자님,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흥미롭게 회의를 지켜보고 있던 왕자가 갑작스러운 이안의 말에 흠칫하며 답했다.

"내게? 말해 보게."

왕자는 이안이 마음에 들었다.

어딜 봐도 광기가 섞인 눈이나 세상을 혼자 살아간다는 듯한 오만한 태도가 섞인 광오(狂傲)는 그가 평생을 바라던 것이다.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오롯이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굳건한 힘.

이안은 그가 원하는 인간상이었으며, 같은 고통을 공유하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압도적인 패다.

1왕자의 세력이 얼마나 강성하고 우세한지와 상관없이 모너가의 소공작이 2왕자인 자신을 지지하는 순간 파벌 싸움은 전에 없던 혼란에 빠지게 되리라.

재수 없는 형과 같은 선상에 설 수만 있다면, 마침내 지긋지긋한 가면을 벗어도 된다.

그러니 이안에게만큼은 뭐든 해 주고 싶었다.

동시에, 지지 세력 하나 없이 이름만 왕자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럼에도 트리미아는 주눅 들지 않고 말했다.

항상 그런 인생이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힘 닿는 데까지 도와주지."

그런 왕자를 잠시 바라보며 피식 웃은 이안이 후작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후작이 말하길, 사실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옵솔의 처분을 모너가의 뜻대로 하라고 하니. 마땅히 왕족이신 저하께서 증인이 되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증인이 되어 달라는 말에 왕자가 만연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국왕 전하를 대신해 이 자리에 선 후작이 자기 말을 바꾸겠나. 내 흔쾌히 증인이 되어 주지."

그 말에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린 후작이 말을 더했다.

"만약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모너가는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지도 않은 채 옵솔의 기사를 죽이고 장남을 납치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노골적인 후작의 위협에도 이안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혹시나 이런 일이 있을까 하여 특별한 분을 모셔 왔습니다."

"또? 중재 회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가신인 다크엘프며 옵솔의 공자며 많이도 준비했군."

불쾌하다는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린 후작을 보며 이안이 밝게 웃었다.

"그럼요. 전쟁을 준비하는데 어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쟁이 종막으로 향하는 지금.

준비해 둔 비밀 병기를 꺼낼 시간이다.

"레이나!"

이안의 외침과 함께 레이나가 방금 막 옵솔에 도착한 로브를 깊게 눌러쓴 사람과 함께 회의장에 들어왔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올가미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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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또각, 또각, 또각.

레이나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회의장에 들어선 여자가 로브를 벗어 넘겼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은색 머릿결과 엘프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 그리고 또렷히 빛나는 은색 눈동자.

"소공작, 다크엘프가 아니라 엘프를 데려온다고 한들 공작가의 일원인 이상...."

그녀가 엘프라고 생각한 후작이 인상을 쓴 채 이안에게 언성을 높이자 방에 들어온 그녀가 입을 열었다.

"좀처럼 밖을 나서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터라, 실례했습니다."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미성에 모두가 자연스레 그녀의 말에 주목했다.

"미약하지만 빛의 신의 뜻을 대리하고 있는 쉔델자르라고 합니다."

후작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빛의 신을 따르는 사제가 왜 레임 왕국의 회의장에 왔을지 고민하는 사이, 그녀에게 다가간 이안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중요한 건 누구를 모시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성...."

이안이 그녀를 성녀라고 소개하려는 찰나, 쉔델자르가 재빨리 말을 잘랐다.

"큼! 저는 성신의! 뜻을 대리하며 신성 제국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작게 인사한 그녀가 고개를 들어 이안을 바라봤다.

* * *

왕자의 편지를 받은 그 순간부터 쓸 수 있는 조커 카드를 고민했다.

누가 나오든지 왕자인 트리미아보다 높거나 최소한 동급인 인물을 준비해야 했으니 선택권이라고는 모굴 백작과 우연히 알게 된 성녀, 쉔델자르뿐.

그날부터 무려 3일을 아침저녁으로 연락하고 나서야 집착에 가까운 요청에 지친 쉔델자르가 마지못해 참석을 약속했다.

물론 모든 일이 정리된 뒤에 직접 성국으로 가겠다는 약속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지만.

"후작, 후작께서도 성신과 신성 제국을 대표하는 쉔델자르 님의 말이라면 믿으실 수밖에 없겠죠."

제때 도착한 쉔델자르의 등장에 싱글벙글한 이안과 달리, 회의장에는 적막감만 가득했다.

신성 제국을 대표하다니, 그럼 교황에 버금가는 존재라는 말인데 교황에 버금가는 존재가 있다는 말도 들어 본 적이 없을뿐더러 그런 인물이 단신으로 타국에 왔다는 사실도 좀처럼 믿기 어려웠다.

"소공작, 이게 무슨 장난인지는 모르겠으나...."

침을 꿀꺽 삼킨 후작이 입을 열자, 이안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후작의 걱정이 뭔지는 알고 있습니다만, 그 누가 일국의 후작과 왕자 앞에서 신성 제국을 대변한다 거짓말하겠습니까?"

이안의 말에 후작도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설령 저분이 신성 제국을 대표한다 해도, 어찌 저분이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물론 저분은 하실 수 없죠."

이안이 장난스럽게 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드높은 존재께서라면 몰라도."

인맥 싸움은 결국 누가 지체 높은 인간을 데려오냐의 싸움 아닌가. 신의 뜻보다 높은 인간이 존재할 리 없을 터.

당당한 이안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쉔델자르가 조용히 말했다.

"저, 저기 신께서 이런 일에 관여할 리가...."

빛의 신이 고작 영지 간의 불화에 답하기 위해 힘을 쓸 리가 없다. 진실을 판별하는 능력이 있었다면 신성 제국이 저 정도로 썩었을 리도 없고.

"아, 빛의 신이 인간사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성의 현신(現身)이라면 아시겠죠."

이안이 아카샤를 바라보자 그녀가 품에서 손가락만 한 작은 나뭇가지를 꺼내 들었다.

"다들 세계수가 오직 진실만을 말한다는 이야기는 알고 계시겠지만 그 세계수를 보는 건 처음일 겁니다."

오늘의 조커 카드는 쉔델자르가 아니다.

그녀는 조커 카드를 쓰기 위한 가장 적절한 도구였을 뿐.

엘프의 숲에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정보를 흘려 옵솔을 움직인 건 세계수다. 그러면 세계수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녀가 서쪽 숲에서 본 인물이 누구인지.

물론 세계수를 신성시하는 엘프였다면 절대 이런 일에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꺼내지 않았겠지만, 신을 저버린 다크엘프들은 달랐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이안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한 후작이 이안에게 물었다.

"오랜 시간 동안 엘프들을 이끌어 왔던 세계수는 때때로 인간에게 그 지혜를 빌려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모든 숲을 엿보는 만목(萬木)의 어머니라 불리는 세계수는 존재한 시간만큼이나 현명하다고 믿었으니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관음증에 걸린 반쪽짜리 신에 불과한 것 같지만 이 대륙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자리에서 세계수에게 물어볼까 합니다. 저기 있는 트레온이 과연 서쪽 숲에 있었는지. 아카샤."

"네."

이안의 말을 마침과 동시에 아카샤가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부러뜨렸다. 오랜 시간 구전된 신성한 의식도, 공양도 드리지 않은 채 길거리에서 주워 온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듯. 이윽고 부러진 나뭇가지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피이이잉!

순간 쏟아진 빛이 아카샤의 몸에 모여들더니, 그녀의 주변에 짙은 녹색 마나가 내려앉았다.

아카샤의 몸에 깃든 반신의 강림.

공기 중의 마나가 모두에게 조아리라는 듯 전신을 짓눌러 댔다.

"크흑!"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압박감에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이 하나둘, 의자에서 넘어져 무릎 꿇은 채 당황한 눈으로 아카샤를 바라봤다.

"...."

반신의 노골적인 불쾌함이 공기를 통해 퍼지고, 그녀의 의지에 따라 사방의 공기가 요동쳤다.

모두가 신을 경배하듯 조아리고 있는 회의장 속, 다급히 신성력을 끌어 올린 쉔델자르와 이안만이 꼿꼿이 서서 현신(現身)한 반신을 마주했다.

* * *

'누가 광신 아니랄까 봐 등장부터 재수 없는 거 봐라, 쯧.'

이미 있는 대로 마나를 끌어 올려 혈관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과연 엘프의 신이라고 불릴 만한 기세와 존재감이었다.

'그래 봤자 자길 믿는 다크엘프를 버린 놈이야. 신자를 버린 신이 어떻게 신이라 불릴까.'

그 존재감과 기세에 맞서 억지로 버티자 검은색으로 변한 아카샤의 눈이 천천히 움직이며 주변을 둘러보는 게 보였다.

"…내 아이들이 아니구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

그럼에도 지독하게 높은 존재감이 영혼을 짓눌러 경배하라 외쳐 댔다. 그녀가 은연중에 풍기는 기세에 땅을 버티고 선 다리가 덜덜 떨려 왔다.

고작 손가락만 한 가지를 꺾어 현신했을 뿐인 세계수는 생각보다 훨씬 강대하고 위대한 격을 지닌 존재였다.

"빛의 신의 아이도 있고...."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한 글자 한 글자에 담겨 있는 아득한 격에 정신이 혼미해지자 급히 입술을 짓씹어 뜯어 냈다.

더 이상 주도권을 뺏겨서는 안 된다.

이 계획의 가장 중요한 건 저 광신이 원하는 말만 지껄이도록 놔두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말만 하도록 만드는 거니까.

세계수는 모든 숲을 관조하는 신.

숲에서 떨어진 도시의 일은 전혀 모를뿐더러 지금 이곳이 어딘지도 모를 가능성이 컸다. 아카샤의 몸을 빌려 현신했으니 서쪽 숲 근처 어딘가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

그녀가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이 불쾌한 강림을 끝내야 했다.

피가 입안을 가득 메울 때쯤 돼서야 특성 『피의 욕망』이 발동되고, 아득한 격을 마주하고도 뜻을 굽히지 않자 『거인왕의 투쟁심』이 발동됐다.

그럼에도 신에 다다른 존재 앞에서 입을 여는 건 쉽지 않았다. 그것이 본신의 티끌에도 못 미치는 분신이라 하더라도.

토할 것 같은 압박감을 억지로 이겨 내며 입을 열었다.

"오랜 서약에 따라...."

"흐응...?"

그러자 세계수가 흥미롭다는 듯 이쪽을 바라봤다.

신성하다기보다는 기괴해 보이는 검은색 눈이 곱게 휘었다.

마치 장난감이라도 보는 듯한 재수 없는 눈빛을 무시하고 억지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설마 단지 존재감만으로 이토록 압도적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별다른 대비도 없었다. 지금 실수하면 옵솔의 처리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터. 어떻게든 계속 입을 움직여야 한다.

"그대의 신체를 바쳐 진실을 요구하니, 단 하나의 진실만 말해 주십시오."

이안의 말에 작게 웃은 세계수가 입을 열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당돌한 인간이구나. 물어보거라."

그녀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몸을 압박하던 힘이 사라졌다. 그제서야 손을 뻗어 바닥을 기고 있는 트레온을 가리켰다.

"저기, 저 남자를 서쪽 숲이라 불리는 모너가의 영토에서 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안의 물음에 고개를 살짝 돌려 벌레 보듯 트레온을 확인한 세계수가 의지를 움직여 다시금 이안을 짓눌렀다.

"난 대륙의 탄생과 함께한 존재이자 모든 엘프의 어버이다. 수없이 많은 왕국을 번영으로 이끌었지. 그런 나를 고작 이따위 질문을 하려고 불렀단 말이냐?"

그녀는 트레온이 누군지 모른다.

모든 엘프의 신이자 모든 숲의 주인인 그녀가 고작 인간 하나에게 관심을 가질 리가 없다.

그러나 세계수의 나뭇가지가, 자기 신체가 이토록 보잘것없는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부러졌다는데 옅은 분노를 느꼈다.

으득!

그녀의 기세에 이안의 한쪽 무릎이 절로 굽혀졌다. 더 이상 인간이 그녀 앞에 서 있는 걸 용인하지 않겠다는 듯, 이안을 내려다보는 세계수의 검은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카샤는 세계수가 진노했기 때문에 진실을 마주하는 데 한 달이나 걸렸다고 말했다. 아카샤와 다른 엘프 사제가 세계수에게 질문하려 했을 때마다 지금처럼 세계수가 날뛰며 다른 질문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러나 세계수의 현신은 그녀의 신체를 매개로 한 계약이자 대륙이 태동했을 때부터 존재해 온 맹약.

"저는, 저는 이미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맹약에 따라, 세계수의 지혜를 빌려주십시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온몸을 짓누르던 압박이 사라지고 아카샤의 몸을 빌린 세계수의 공허하고 허무한 눈빛이 이안의 눈동자를 향했다.

"…재밌는 인간이구나. 그래, 저 아이는 서쪽 숲에 있었다. 그러나─"

짝!

그녀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이안이 손바닥을 치면서 입을 열었다.

"저희에게 지혜를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목의 어머니이시여."

명백한 축객령.

무려 수백 년 동안 다크엘프를 거짓으로 이끌어 온 뱀 같은 신이다. 대륙의 역사와 엘프가 세계수를 얼마나 찬양한들 세계수는 신자를 버린 반신이자, 악신이다.

진실만을 말한다는 제약 또한 대륙의 엘프와 인간들을 보다 쉽게 조종하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녀가 말을 더하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고작 손가락만 한 나뭇가지면 별 힘도 못 쓸 거라더니....'

새삼 방심하고 엉성한 계획을 짠 과거의 자신을 탓하고 있을 때, 세계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재밌는 아이로구나. 숲은 널 주시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아카샤의 몸이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하, 누가 관음증 환자 아니랄까 봐.'

악의가 느껴지는 협박이었지만 조금도 겁먹지는 않았다. 만약 세계수에게 그 정도의 힘이 있었다면 게임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언급되었을 터.

'아니, 그 전에 네 손으로 다크엘프를 죽였겠지.'

신이나 되는 양반이 타인의 손을 빌려 다크엘프를 사냥해 온 걸 보면 세계수는 이 땅 위에서 마음대로 날뛸 수 없는 게 확실하다.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게 있지.'

언젠가 태울 장작의 말에 신경 쓸 필요는 없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쉔델자르를 바라봤다.

전신에 성력을 두른 채 땀을 비 오듯 흘리던 그녀는 아카샤가 쓰러지고 나서야 끝났다는 듯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자. 쉔델자르 님, 방금 아카샤에게 깃든 인물이 세계수가 맞습니까?"

"…네?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아, 물론 이 방에 있는 모두가 느꼈겠지만, 만약 쉔델자르 님이 없었다면 분명 모너가의 사기극이라고 주장했을 사람이 있어서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반쯤 정신을 놓은 것 같은 후작을 바라봤다. 준비한 조커가 제대로 먹혔는지, 후작이 살짝 벌린 입 사이로 침이 흘러내렸다.

"후작, 세계수께서 인정하셨듯, 트레온은 서쪽 숲에 있었습니다. 리어도 아니고 마물밖에 없는 그곳에 야영하러 가셨을 리도 없으니, 후작의 말처럼 명백한 침략이었다고 봐도 되겠지요?"

이안의 질문에 초점조차 잡히지 않은 후작의 눈이 가파르게 흔들렸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올가미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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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모두가 침묵한 회의장 안.

후작은 이안의 물음에도 입을 열지 못했다.

널리 퍼진 전설 중 하나라고 생각한 세계수의 현신(現身)이라니, 누구에게 이 상황을 말한들 거짓말이라고 여길 것이다.

아니, 그보다 대륙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세계수를 불러 고작 범죄를 밝히는 데 쓰는 인간이 있을 리가 없다.

만약 소공작이 부귀영화를 바랐다면 부귀영화로 향하는 길을 알려 줬을 것이고, 가문의 독립을 바랐다면 독립으로 향하는 길을 알려 줬을 것이다. 그 귀중한 기회를 고작 작은 왕국의 백작가 아들이 숲에 있었는지를 묻기 위해 써 버리다니.

방금 전까지 느꼈던 세계수의 분노가 피부에 아직도 남아 경고를 보내는 듯했다.

"하… 하하… 하하하!"

모두가 침묵한 회의장에서 트리미아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내가 증인이 되어 주기로 했지."

곱게 미친 왕, 정광군(正狂君)이라고 불리던 왕자가 고개를 들고 이안을 바라봤다.

"나, 레임 왕국의 적법한 계승자 중 한 명이자 위대한 왕 데준의 아들 트리미아 드 레임이 증인이 되어 세계수와 신성 제국의 입회하에 옵솔이 모너가를 침범했음을 선언한다."

평소의 밝고 가벼워 보였던 건 거짓이라는 듯 낮고 진중한 모습으로 트리미아가 말했다.

"레임 왕실은 두 영지 간의 화해와 왕국의 번영을 바라나 강요하지 않을 것이니, 모너가는 가문의 의지를 행하라."

전쟁을 벌이고 싶으면 전쟁을.

복수를 원한다면 복수를.

"왕자님! 너무 성급한...!"

모너가가 영지전을 벌일 것을 두려워한 후작이 급히 끼어들었으나 왕자는 단호했다.

"후작, 자네가 말했던 것처럼 자네는 내 아버지이신 레임의 왕, 데준을 대신해 이 자리에 섰고, 사실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모너가의 마음대로 움직여도 상관없다 말했지. 왕의 약속은 결코 가볍지 않네."

"하지만 모너가가 영지전을 일으키면!"

모너가와 옵솔 간의 영지전이 발생하면 모너가는 결국 옵솔을 집어삼킬 것이다. 그러면 모너가는 옵솔의 드넓은 곡창지대를 얻을 것이고, 왕실은 모너가를 제어해 온 유일한 수단인 식량을 잃게 되는 셈이다.

"걱정하지 말게. 모너가는 영지전을 벌일 생각이 없을 테니까."

왕자가 태연히 이안을 바라봤다.

"너무 많은 걸 준비했어. 모너의 영토에 다크엘프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세계수를 목전에서 볼 줄이야!"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왕자가 말했다. 회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안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마치 잘 짜여진 연극처럼.

"그러나 그대가 원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겠지. 전쟁을 원했다면 이 자리에 모굴과 스벤 백작이 있었을 테니."

모너가의 망나니에 대한 소문은 왕국 전역에 자자했다. 모너가의 수치, 가문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망나니.

삐뚜름한 미소를 지은 이안이 입을 열었다.

* * *

회의장 안의 누구도 무기를 패용하고 있지 않다.

왕을 대신하는 후작과 왕자가 자리한 만큼 회의의 공적인 중요성과 안전을 지키기 위함이었으나, 귀왕의 무술을 익힌 이안에게 무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 드디어 두 분의 허락을 받았으니...."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 이안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움직였다.

서걱-

툭.

마나를 두른 손에 뼈와 살이 분리되는 불쾌한 감각이 느껴지고 둔중한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나. 백작의 목."

이제껏 참아 왔던 건 이 순간을 위해서다. 당위성이 확보된 이상 이곳에서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왕가는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모너가를 건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널리 알림과 동시에 모두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모너가의 망나니가 단순한 망나니가 아니라 진짜 미친놈이라는걸.

'언제고 후작 같은 새끼가 또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앞에서 거들먹거리면 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심어 줘야 했다. 이안이라는 이름이 언제까지고 무시와 경멸의 대상이어서는 곤란하다.

모너라는 이름에 사람들이 존중과 경의를 표하면서도 마물의 숲을 지키는 이들에게 알 수 없는 공포심을 느끼듯, 원초적인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바닥에 쓰러져 있는 트레온을 향해 다시 손을 휘둘렀다.

"하나. 서쪽 숲을 침범한 장자, 트레온의 목."

서걱-

툭.

두 사람의 목이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한 후작이 일어나 외쳤다.

"소공작!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후작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만약 옵솔이 침략한 것이 사실이라면 뭐든 마음대로 하라고."

핏물이 떨어지는 손을 보고도 후작은 소리쳤다.

"전장에서도 협정장에서만큼은 피를 보지 않는 법이거늘...!"

그 말에 이안이 피식 웃었다.

"내가 그런 걸 따질 줄 알았습니까? 모너가의 망나니, 이안 드 모너가?"

설마.

고작 말로 벌할 생각이라면 굳이 이 자리를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 모인 모두는 이 일을 잊지 못할 것이고,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은 왕국 전체에 퍼지게 될 터.

이건 일종의 쇼케이스장이다.

내가, 모너가의 망나니 이안 드 모너가 얼마나 미친놈인지 알리기 위한.

"아직 모너의 요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안이 차가운 시선으로 핏대를 세운 후작을 바라봤다.

"하나. 옵솔의 나타샤가 백작위를 잇고 곡창지대의 절반을 넘길 것."

모너가의 전원을 먹일 수는 없겠지만 곡창지대를 얻은 것만으로도 왕국의 견제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머천과 리트 또한 오랜 기간 식량에 장난쳐 온 대가로 각각 1억 골드를 배상할 것."

두 가문에 곡창지대를 요구할 수는 없겠지만 계약 위반으로 인한 배상금 1억 골드와 지금의 배상금을 합친다면 절대 지불할 수 없을 터.

이를 통해 추후에 유리한 협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지난 기간 발생한 문제들을 살펴본바, 왕국이 파견한 섭정관은 섭정의 의무를 다해 영지를 번영시키지도, 지켜 내지도 못했음이 명백하니. 나 이안 드 모너는 18세가 되기 전 섭정을 끝내고 정식으로 가주가 되고 싶습니다."

이안의 말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막무가내로 우긴다고 해서 이룰 수 있다면 누구도 협상장에 앉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작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이안이 피식 웃었다.

"후작, 나는 막무가내로 우긴 적이 없습니다. 대륙을 지탱하는 세계수가 내 말이 맞음을 증명했고, 그 증명을 증언할 신성 제국의 가장 큰 별을 데려왔습니다."

손을 털어 끈적한 피를 걷어 낸 이안의 눈빛이 살의로 번들거렸다.

"모굴과 스벤 백작이 없다고 하여, 내 말의 진의가 의심되거든 한번 두고 보십시오. 세계수와 신성 제국을 움직인 내가, 고작 내 가문의 병사를 못 움직일지."

이건 내 전쟁이다.

그렇게 시작했고, 그렇게 끝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저들이 끝끝내 내가 원하는 것을 토해 내지 않는다면, 나는 쓸 수 있는 모든 패를 써서라도, 수천의 병사와 수백의 기사를 움직여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어 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너가의 이름은 무게 없이, 덧없이 불릴 것이고, 결국 또 다른 하이에나의 먹잇감이 될 테니까.

"그리고 모너가가 일어선다면, 그 검이 어디까지 뻗을지 생각해 보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백작과 장자, 둘의 목으로 끝낼 수 있던 일이 여기까지 왔듯, 모너가가 일어서면 모너가를 더럽힌 모든 인간의 목을 벨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테니."

지금도 왕가와 견줄 수 있는 모너가가 세 영지를 집어삼키면 어떻게 될까.

가문이 왕국을 대표할 것이고 머지않아 왕국 그 자체가 될 테니. 리나에게 장난처럼 말했듯, 모너가가 아닌 모너국이라 불릴 것이다.

"왕자님, 모쪼록 국왕 폐하께 모너의 뜻을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후작."

바닥을 덥히는 백작과 트레온의 피에 발동한 『피의 욕망』으로 이안의 눈이 붉게 빛나고 목소리는 더욱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가 곪은 배를 움켜쥐고 모래 섞인 빵을 먹던 영지민들을 본 순간."

더 정확히 말하면 내 땅에서 살아가는 다크엘프들이 도망에 지쳐 찾아와 나를 비난했던 그날.

"이들은 그날부터 죽어 있었소."

머천과 리트를 살려 둔 건 오로지 전쟁을 벌이기 싫다는 욕심 때문일 뿐. 저들도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것이다.

"그러니 착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당신을 두려워한 적이 없는 것처럼, 모너는 단 한 순간도 왕국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왕국이 아닌 대륙을 지키기 위해.

모너가 아닌 인간을 지키기 위해 마물의 숲에 버티고 선 모너다.

"그러니 모너가 번견을 자처할 때 못 이기는 척 알아서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다 개만도 못하게 물려 죽을지도 모르니까."

이안이 다시 고개를 돌려 왕자를 향해 정중히 고개 숙이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왕가와 옵솔의 현명한 결정을 기다리겠습니다."

조용히 시작된 전쟁은.

이안이 바랐듯, 모너가의 그 누구도 피 흘리지 않은 채 모두의 침묵 속에서 끝났다.

* * *

"수고하셨습니다."

회의장을 나선 이안을 따라 레이나가 걷고, 그 뒤로 아카샤를 부축한 쉔델자르가 뒤따랐다.

"수고는 무슨. 다들 고생했어."

앞으로 있을 일 중 가장 사소하고 작은 승리다. 망나니 이안으로 멸망을 막기 위해선 고작 이 정도에 안주할 수 없다.

"집으로 돌아가자."

집 밖의 문제를 해결했으니, 집 안 정리를 시작할 시간이다.

모너로 향하는 이안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 * *

"뭐라...?"

왕의 시선이 급히 알현을 요청한 후작을 향했다.

"배, 백작과 장자가 죽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소공작이 말하길...."

"허… 후작, 내가 그대를 직접 보낸 것은 정확히 이런 결과를 피하기 위함이었네."

"죄송합니다, 전하."

고개 숙인 후작을 뒤로한 채 생각에 잠겼다.

모너가는 뿌리부터 썩어 시간에 따라 쓰러질 거목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정말 소공작이 그 자리에 나왔다고? 그 망나니가?"

"예. 섭정관을 데려오라는 요구에도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모너가 내부에서 다른 움직임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모너가에 있는 모든 눈과 귀가 소공작은 병풍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최근의 기행을 알려 오기는 했으나 부패한 관리 몇 명을 벌하는 데 그쳤을 뿐.

분명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수십 명의 여자를 모아 계집질에 한창이라는 보고가 있지 않았던가.

"허, 이해할 수가 없군."

무려 세계수의 조언에 따라 선별하고 파견한 섭정관이 고작 망나니에게 휘둘렸을까? 아니면 지금 이 상황조차 세계수가 내다본 계획 중 일부인가?

"세계수가 그 자리에 나왔었다는 말이지...."

7년 전 공작이 사라지고 레임 왕국을 방문한 엘프 사절단은 공작이 사라진 지금이 모너가를 통제할 유일한 순간이라며 레임 왕국의 번영을 위해 여러 가지 조언을 건넸다. 그럼 모너가의 갑작스러운 태동마저 세계수의 계획 중 일부일 터.

"일단 소공작이 원하는 대로 두거라. 단, 18세가 될 때까지 임시 가주직을 수행하는 것으로 하지."

"뜻대로 하겠습니다."

잠시 턱을 쓰다듬던 왕이 다시 후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옵솔의 서녀에게 백작위를 주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서녀가 백작위를 받게 되면 귀족들의 원성이 끊이지 않을 터.

"일단 소공작에게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 후 죽이는 게 낫겠어. 왕국의 인물을 움직이기는 힘드니 그대가 직접 처리해 주게."

"폐하의 뜻대로."

명령받은 후작이 깊게 허리 숙이며 어전을 나서자 레임의 왕 데준이 일어서 창가로 향했다.

"제국이 기승인 지금 모너까지 움직이기 시작하다니,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그림자 중 하나를 소공작에게 붙여야겠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어전에서 굵고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그를 지키던 그림자마저 자리를 비운 사이, 왕이 깊은 주름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그 모너가가 움직이다니.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아."

분명 시한부에 불과한 가문이고 망나니 하나가 나선다고 바꿀 수 있는 상태가 아님에도 기분 나쁜 예감이 가시지 않았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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