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 50-60

50화

회의가 끝난 후에도 이안은 리어에 남았다.

세 영지와의 합의가 끝나지 않아 자리를 비울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심적인 부담감이 더 컸기 때문이다.

부담감의 원인은 연무장의 한가운데 누워 있는 이안이 얼굴에 덮어쓴 종이.

회의가 끝난 후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내려온 모너가의 소공작을 임시 가주로 임명한다는 칙령이었다.

"공작님, 아직도 고민 중이세요?"

"리나?"

이제는 익숙해진 리나의 목소리에 이안이 친서를 살짝 들어 리나를 바라봤다.

"고민이란 원래 끝도 없는 법이야."

벌써 며칠째 이 자리에 누워 있었기 때문일까. 이곳을 왕래하는 모두의 걱정이 느껴졌다.

어쩌면 아이처럼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기 위해 생떼을 피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계획이 있으신 거 아닌가요?"

어느새 옆에 쭈그려 앉은 리나가 별 문제 없다는 듯 말했다.

"계획이야 항상 있지, 확신이 없을 뿐."

"공작님도 확신하지 못하는 게 있어요?"

놀람이 묻어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세상에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어딨을까.

"당연하지. 이미 벌어진 일도, 앞으로 해 나가야 하는 일도 전부 모르겠는걸."

이미 벌어진 일들이 화가 되어 돌아오진 않을까.

생각도 못 했던 난관이 들이닥치지는 않을까.

내가 벌인 일 때문에 흑귀대가, 모너가가 신음하지는 않을까, 하는 온갖 두려움에 몇 번이고 계획을 수정하고 다시 확인했다.

어느새 내 걸음에 걸린 목숨은 나 하나의 것이 아니기에.

말하고도 괜히 약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어기적거리며 몸을 일으켜 능청스럽게 말했다.

"자, 충분히 쉬었으니 일해 보자고. 오늘은 어느 쪽이지?"

센트럴 홀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벌써 며칠째 이어지는 협상을 끝내야 한다.

"오늘은 나타샤 백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나타샤가 왔다는 말에 응접실로 향하던 이안이 걸음을 멈췄다.

"드디어?"

고대하고 있었지만 피하고 싶은, 어색한 만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마물의 숲을 지키는 위대한 모너가의 소공작을 뵙습니다."

이제는 익숙해진 인사말과 함께 나타샤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백작이 돼서 본 건 처음이네. 벌써 몇 번이나 부른 것 같은데."

"아, 제, 제가 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이안은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제 아비와 오라버니들을 한순간에 잃은 그녀의 기분은, 그 둘을 맨손으로 죽인 살인자에게 비굴하게 고개 숙여야 하는 그녀의 기분은 과연 어떨까.

그녀가 가족과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스스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어쩌면 저 작고 연약한 소녀는 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지도.

"일단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모너가 옵솔에게 받아야 하는 건 황금 고블린 상단의 계약을 어긴 배상금 1억 5천만 골드와 곡창지대의 절반.

이안이 사무적인 태도로 앉아서 서류를 꺼내 들려는 때, 몸을 덜덜 떨면서 그를 바라보던 나타샤가 작게 고개 숙였다.

"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나타샤가 말을 이었다.

"다들 소공작님을 미워하라고 하지만, 옵솔의 사람들과 영주성의 식구들이 죽지 않은 건 소공작님 덕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서류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사정없이 떨리는 눈을 통해, 저 말을 하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용기 내어 이 자리에 섰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 덕분이라고?"

"전쟁이 벌어졌다면 수없이 많은 옵솔의 피가 흘렀을 것이고, 전쟁을 벌이지 않았더라도 저를 포함한 남은 가족 모두의 죽음을 요구할 수 있으셨겠죠. 왜 저에게 이런 과분한 자리를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말에 이안이 피식 웃었다.

누군가 고맙다는 말을 전한 게 얼마 만이던가. 그녀는 텅 비어 버린 영주성에 홀로 앉아, 며칠이고 고민했을 것이다.

왜 자신이 살아남았는지, 어째서 영주성이 무너지지 않았는지. 그리고 깨달았겠지. 내가 필요에 의해 그녀를 살렸다는걸.

그 마음과는 반대로 삐뚜름한 미소에 냉소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백작, 귀족은 어디서든 속마음을 숨길 줄 알아야 해. 함부로 고개를 숙여도, 허리를 굽혀도 안 되지."

뭔가 모굴이 했을 법한 말을 하면서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속마음을 숨기는 것보다 지금처럼 솔직하게 나서는 게 훨씬 강력할 때도 있는 법이니까.

"정말 고맙다면 영지에 돌아가는 즉시 경계에 배치한 기사들을 불러들이고 영주성의 방비를 강화해. 왕국은 서녀가 백작이 되는 걸 결코 반가워하지 않을 테니까."

"왕국이요...?"

"여자에, 서녀인 귀족이라니. 절대 인정할 리가 없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서녀의 신분으로 백작위를 이은 나타샤는 절대 중앙 귀족계에 발을 들일 수 없을 터. 모너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녀를 귀족으로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다. 결국 백작이 된 순간부터 그녀와 옵솔은 모너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그럴 계획으로 그녀가 옵솔을 잇길 바란 것이고.

"충고 감사합니다."

나타샤가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있었는지도 모를 가슴 한편에 숨겨 뒀던 양심이 조금, 아주 조금 아파 왔다.

* * *

세 영지와의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2억 골드나 되는 거금을 변제할 방법이 없는 머천과 리트는 변제 기간을 늘리는 대신 황금 고블린 상단에 식량 독점 유통권을 주기로 합의했고.

옵솔은 곡창지대의 절반을 모너가에 넘기되 농부나 농업에 관련된 기술이 전무한 상황을 고려해 임대 형식으로 소작을 계속하기로 했다.

이로써 세 영지의 상단 전부가 무너지고 세 영지의 식량 유통권을 모너가가 전부 획득한 것이다.

"그럼 돌아가 볼까."

준비를 마친 이안의 뒤로 어느덧 40명까지 불어난 흑귀대와 레인저들이 뒤따랐다.

비록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도, 흩날리는 꽃잎도 없었지만 지겨운 전쟁을 마치고 마침내 영주성으로 돌아가는 조촐한 개선식.

"가자."

흑귀대와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평소와 다름없이 말을 몰고 나서려는 순간, 뒤에서 리나의 우렁찬 외침이 들렸다.

"전원─! 공작님께, 충(忠)─!"

차랑!

흑귀대 전원이 검을 뽑아 들어 가슴 앞에 가져다 대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리고.

쿵! 쿵! 쿵!

흑귀대와 레인저가 동시에 발을 구르는 소리가 길가에 우레처럼 울려 퍼졌다.

"이게 무슨...?"

대륙에 오고 나서 처음 보는 맹세의 표시에 가슴 한편이 간질거렸다.

아직도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대원들과 레인저들은 고개를 치켜들고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자부심과 자신감에 그제야 그들을 마주 볼 수 있었다.

내가, 내가 만든 변화가 저기 서 있다는걸.

당장 한 걸음도 확신하지 못하는 내가 확신할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 냈다는걸.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사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리나가 말했다.

"비록 검도 제대로 못 휘둘렀지만, 다들 공작님의 승리를 축하하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나만의 전쟁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순간을 함께한 내 병사들이 나를 향해 검을 치켜들고 연신 발을 굴렀다.

날 믿고 있다는 듯. 내가 일궈 낸 승리가 자랑스럽다는 듯.

"쓸데없는 짓을."

퉁명한 목소리와 달리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올라간 입꼬리에 볼이 아팠다.

그 모습을 본 레이나가 바짝 다가와 물었다.

"도련님, 기분은 어떠세요?"

마치 답이 정해진 질문처럼, 나도 모르게 웃으며 뇌까렸다.

"끝내주게 행복해."

불과 얼마 전 자신을 지켜 낸 마법 같은 주문을.

* * *

다음 날 아침.

망나니 소공작을 비롯한 다크엘프들과 검과 무기, 검은색 갑옷으로 무장한 흑귀대의 등장에 센트럴 홀드의 주민들이 집 안으로 몸을 숨기고, 도시에는 전에 없던 적막감이 감돌았다.

척, 척, 척.

하루가 넘는 행군에도 변함없이 일정한 보폭으로 움직이던 이안의 작은 군대가 움직일 때마다 놀란 주민들이 급히 몸을 피하던 와중.

커다란 빵을 집어 든 아이가 선두에 선 이안을 향해 달려 나왔다.

"당장 돌아와, 테리!"

"안 돼!"

작은 발로 도도도 뛰어오는 아이의 모습에 이안이 손을 들어 진군을 멈추고 말에서 내리자, 아이가 빵을 건네며 이안의 발을 끌어안았다.

"빵 고마워요!"

이 작고 조그만 아이는 이안이 누군지, 시장에 어떤 소문이 퍼져 있는지 모른다. 다만 이안이 식량을 가져왔고, 황금색 명패를 단 상단이 소공작의 덕이라며 빵과 음식을 나눠 줬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우리 엄마가 고마운 건 항상 바로 말하랬는데 엄마는 부끄럼쟁이라 숨었어요!"

이안은 아무 말 없이 발에 달라붙은 아이를 내려다봤다.

"매일 먹으면 아픈 빵만 먹었는데 이제는 부드럽고 맛있는 고기랑 빵을 맨날 먹을 수 있데요! 엄마도 아빠도 엄청나게 신났어요!"

선 채로 굳은 이안은 한참이나 재잘거리는 아이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누군가 자신에게 달려와 감사를 표할 거라는 상상은 해 본 적도 없다.

아니, 그보다 이 작은 전쟁을 시민들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리를 움직이면 아이가 다치지 않을까 난감한 얼굴로 서 있던 이안의 귀에 저 멀리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맞아! 모너의 영지민이 고마움을 모를 리 없지! 감사합니다, 소공작님!"

'릭...?'

짝, 짝, 짝.

절대 고마움을 모를 것 같은 그의 외침에 얼떨결에 시작된 작은 박수 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함성 소리로 커져 나갔다.

"와아아아! 모너 만세!"

"센트럴 홀드 만세!"

"부드러운 빵 만세! 고기 만세!"

그 어색한 외침 안에서 이안은 발에 매달린 작은 아이를 집어 들어 눈을 마주쳤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아이.

"고마워."

나는 틀리지 않았다.

수없이 의심하고 흔들렸을지라도 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피게 했으니까. 결국 조용한 전쟁을 침묵 속에서 끝냈으니까. 나는 틀리지 않았다.

저들은 전쟁을 모르지만, 승리의 기쁨을 누린다.

이보다 더 큰 승리가 어딨을까.

당당히 영주성을 향해 나아가는 이안의 앞에 작은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칭호를 획득했습니다. - 모너가의 구호자(救護者)]

- 센트럴 홀드에서 평판이 상승했습니다.

- 센트럴 홀드의 주민 중 일부가 소공작을 지지합니다.

* * *

"저, 저, 저 입꼬리 올라간 거 봐라. 아주 좋아 죽는데요, 사장님?"

딱!

릭의 경망스러운 목소리에 릴라이가 부채로 릭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저보다 훨씬 더 큰 함성과 감사를 받아야 할 분이야."

부패한 행정관들을 벌하고 성직자를 바로 세우고 세 영지의 단합을 무너뜨리기까지. 만약 다른 영지의 공자였다면 광장에 전신상을 세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이고, 저보다 더 큰 함성을 지르려면 이번 분기에 번 돈을 전부 써야 했을걸요?"

"허튼소리 하지 마. 우리가 돈을 안 써도 그 아이는 뛰어나왔을 거고 사람들의 마음은 결국 움직였을 테니까."

릴라이는 저 멀리 영주성을 향해 이동하는 이안을 바라봤다.

조금이나마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의 평판을 올리기 위해 바람잡이를 좀 고용하긴 했지만, 갑작스럽게 뛰쳐나간 아이도, 거리에 퍼진 함성도 모두 소공작이 직접 만들어 낸 변화였다.

"이제야 모너가 진짜 주인을 모실 수 있게 된 거야."

그 위대했던 선대 공작들만큼이나, 어쩌면 그들보다 뛰어난 군주가 나타난 걸지도 모른다.

"에이, 뭐 그렇게까지야."

딱!

부채로 릭의 머리를 치면서도 피식 웃었다.

충분한 바람잡이를 고용했음에도 릭이 저 자리까지 뛰쳐나가서 소리 지른 건, 매일 무섭다고 징징거리면서도 변화하는 영지를 보며 소공작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다 큰 주제에 솔직하지 못하기는."

몸을 돌려 상단으로 돌아가는 릴라이의 뒤에 릭이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어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올가미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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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영주성에 도착한 이안이 갑옷도 벗지 않은 채 감사부를 찾자, 기다리고 있던 감사부장 베인이 뛰쳐나왔다.

"소공작님! 먼저 연락해 주신 대로 준비는 끝났습니다!"

집 밖에서 설치는 놈들을 치웠으니, 이제 집 안을 정리할 시간이다.

"상황은 어때?"

"대부분 어떻게든 연락이 닿았습니다. 다들 영지를 떠나지 않으셔서 충분히 모셔 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잔뜩 흥분한 베인이 이안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언제쯤 모셔 오면 되겠습니까? 몇몇 분은 프론트 홀드에 계시니 명령만 내리시면 제가 직접 가서 모셔 오겠습니다!"

노예 상단을 습격하고 전쟁을 벌이는 동안 부장은 다크엘프와 모굴 백작가의 도움을 받아 모너가의 옛 가신들을 찾아냈다.

섭정관이 영지에 들어선 후 자취를 감춰 버린 옛 가신들. 그중에서도 옛 감사부장을 특히나 그리워하던 베인은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듯 신나 보였다.

'아무리 옛 가신들과 사이가 좋았다고는 하지만 너무 신나 보이는데....'

헤실거리는 부장을 잠시 아니꼽게 바라보던 이안이 혹시나 싶어 그에게 말했다.

"베인,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전 감사부장이 온다고 해도 감사부장은 바뀌지 않아."

순간 헤실헤실 웃고 있던 부장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가슴 속 품고 살던 사직서를 드디어 던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거늘. 감사부장이 바뀌지 않는다니.

"그, 그게 무슨...."

금세 웃음을 잃은 베인의 얼굴을 보자, 이제야 삐뚜름한 미소를 되찾은 이안이 말했다.

"부장은 모너가에 뼈를 묻어야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 정도로 책임감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감사부장이라는 자리에 반드시 필요한 책임감과 정의감을 동시에 갖춘 베인은 영지 관리에 필수적인 인물.

그런 그에게 자유를 선물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은퇴한 사람들을 데려다 부려 먹어야 할 정도겠나? 그만큼 노동력이 부족한 영지다.

"일단 감사부를 시켜서 은퇴한 가신들을 전부 데려와. 복귀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더라도 이야기나 나눠 보자고 말해 주고."

"그, 그럼...."

"나는 그동안 가신들이 돌아올 자리를 마련해 봐야겠어. 전에 말했던 조사는 얼마나 끝났지?"

전쟁을 시작하기 전, 소공작은 부패한 관리들에게는 용서를 보이지 않을 것이라 말했었다.

벌써 몇 달간 이어진 조사로 수면 위로 드러난 범죄만 해도 수백 건.

"거의 다 끝났습니다. 전에 상인 협회를 급습하면서 얻은 장부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베인이 두꺼운 서류를 건넸다. 감사부장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신들과 하급 관리들의 범죄를 기록한 장부.

"이쪽은 흑귀대가 처리할 테니까, 감사부는 옛 가신들을 찾아내는 데 최선을 다해 줘."

지금부터 탕아(蕩兒)의 귀환을 알릴 시간이다.

* * *

모너가의 망나니라 불리던 소공작이 갑작스러운 연회를 열었다. '임시 가주 취임식'의 참석을 요청하는 서신이 전방 프론트 홀드를 제외한 영지의 모든 가신과 관리들에게 전해졌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섭정관이 미간을 찌푸린 채 자기 앞으로 온 서신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임시 가주 취임식]

분명 실질적으로 영지를 장악한 섭정관의 위치에 있음에도 지난 몇 달간 벌어진 일들은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심지어 연락을 지속하던 왕실마저 며칠 전 소공작을 임시 가주로 임명한다는 통보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겨 버렸다.

"날 버리겠다는 건가...."

옵솔, 머천과의 거래를 끊었을 때만 해도 세 영지 사이의 결속력을 간과한 소공작을 비웃었다.

전쟁을 벌이겠다며 설칠 때만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도움을 요청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또한 전부 기만이었나."

답답한 마음에 몇 번이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 넘긴 그가 보좌관을 향해 물었다.

"제국은?"

"백작님, 저희의 계약은 약물만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국은 약을 제외한 그 어떤 도움도 드릴 수 없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는 보좌관을 향해 섭정관이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지금 이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본성을 드러내는 약이라며! 결국 죽음을 면하지 못할 거라 약조하지 않았나!"

7년을, 빌어먹을 7년을 기다렸다.

소공작이 죽으면 반드시 공작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제국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은 채로 그 긴 시간을 이 빌어먹을 영지에서 보냈단 말이다.

"네놈들의 약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거라 내가 몇 번이나 말했나!"

섭정관의 분노에 찬 시선에도 보좌관은 덤덤하기만 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 약에는 해독제가 없습니다. 벌써 몇 번이나 실험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성직자의 성력에도, 의술에도, 약초에도 반응하지 않는 천고의 독. 수많은 실험을 해 봤고 그 결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소공작은! 극독에 당한 소공작이 어떻게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분노에 몸을 떨던 섭정관이 돌연 안색을 바꾸면서 보좌관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와 놈이 중독되었든 되지 않았든 그게 무슨 상관일까. 문제는 놈이 아직도 버젓이 살아 있다는 거지."

소공작은 멀쩡히 살아 있다. 왕자 앞에서 옵솔 일가를 죽였다는 미친놈이 자신을 살려 둘 리가 없다. 살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몸을 피해야 한다.

그러나 어디로?

이곳이 내 땅이고 내 집이거늘. 7년을 바쳐 살아온 내가 계집질과 독에 허우적대던 놈에게 밀려나 도망가야 한다고?

절대 그럴 수는 없다.

결단을 내린 섭정관이 스산한 눈으로 보좌관을 바라봤다.

"제국이 원하는 것은 모너가의 몰락인가?"

"설마요. 제국은 마물의 숲을 지키는 번견의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목줄을 걸어 놓길 원할 뿐이죠."

처음부터 잘못돼 있었다.

가문의 수뇌부를 장악한 순간 무리를 해서라도 망나니를 죽였어야 했다.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렸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물렀다.

범의 새끼에게 똥칠한다고 해서 개새끼가 되지 않는 법이거늘. 그 행동과 언행에 속아 범 새끼가 발톱을 갈고 있음에도 위협조차 느끼지 못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 과오를 바로잡아야 했다.

"내가 그 목줄이 되겠네."

이미 전방의 병력과 모굴 백작의 수비군을 제외한 가신 대부분은 포섭이 끝났다. 모굴 백작은 무슨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을 테고, 스벤 백작은 전방을 지키느라 자리를 비우지 못할 터.

"내가 직접 모너가의 목줄이 될 테니, 내게 그 약을 주게."

각오를 다진 섭정관의 말에 무표정을 유지하던 보좌관의 눈이 곱게 휘었다.

* * *

취임식에 모인 모너의 관리들과 가신들은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초라한 연회가 어딨습니까?"

불만에 가득 찬 귀족의 말처럼 취임식이 열리는 연회장은 아무런 장식도, 음식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말이에요. 귀족인 가신들만 부른 것도 아니고, 관리직을 맡은 평민에, 천민에… 모너의 격을 얼마나 낮출 생각인지 정말."

"아무리 보고 배운 게 없다지만 당장 가주직을 수행하겠다는 소공작이 이 정도 연회도 준비하지 못해서야...."

연신 불만을 표출하던 가신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주제로 향했다.

"소공작에게 임시 가주 직위를 맡기다니, 도대체 왕께서는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아니랍니까. 지금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거 여차하면 모너가의 가신들이 탄원서를 내야...."

이 자리에 모인 관리도, 가신들도 모두 저잣거리에 퍼진 소문은 들었다.

소공작이 단신으로 옵솔에 쳐들어가 백작을 벌하고 식량을 뺏어 와 그 공으로 가주가 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들.

당장 식탁 위의 음식이 바뀌어 소공작이 일으킨 변화를 직접 체험한 이들과 달리,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귀족은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영지민이 굶고 있을 때도 푸짐한 고기와 부드러운 빵을 먹던 이들은 귀가 있음에도 듣지 못했고, 눈이 있음에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 망종이 검집을 들고 날뛸 때 몇 번이나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아이고, 소공작이 전처럼 눈깔을 뒤집고 섭정관님을 내몰면 영지가 어떻게 될지 정말...!"

이안의 검집에 초주검이 되도록 맞은 뒤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한 징세 담당관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치다 한 여자에게 눈이 닿았다.

"그나저나 저기, 저 숙녀분은 누구십니까?"

"글쎄요. 다른 분들이 몇 번이나 여쭤봤는데 신성 제국의 성직자라고 하더군요."

"성직자가 여긴 왜?"

"뭐 본건 있어 가지고 취임식이니 사제에게 축복이라도 받을 생각 아니겠습니까?"

모인 이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던 때, 하인이 2왕자의 도착을 알렸다.

"위대한 레임 왕국의 기둥이자 정당한 계승자이신 트리미아 왕자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연회장에 들어선 트리미아는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 저 멀리 성직자, 쉔델자르와 그녀를 지키고 선 거한을 발견하고는 그녀를 향해 다가가 인사했다.

"또 뵙는군요."

"레임의 왕가에 축복이 있기를. 왕자님께서는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초대가 오질 않아 초대를 부탁했습니다."

트리미아는 취임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오매불망 모너가의 초대장을 기다렸으나 초대장은 오지 않았다.

자신뿐 아니라 왕가의 그 누구도 초대받지 못했다.

그래서 초대해 달라고 부탁했다.

"...?"

"아! 오늘 온다고 말은 했습니다. 아무래도 왕가의 피를 이은 제가 모너가에 말도 하지 않고 들어올 수는 없으니까요."

당당한 왕자의 말에 당황한 쉔델자르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왕자님께서 바라는 취임식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하하하! 만약에 다른 취임식과 같은 식상한 취임식이었다면 조금 실망했을 겁니다."

트리미아의 번들거리는 눈이 연회장을 빠르게 훑었다.

"음식도, 술도 없이 사람만 가득 모인 연회장이라니. 제가 꿈에도 그리던 취임식이 될 것 같습니다."

트리미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 유명한 모너가의 영주성에 오는데, 이것 참 우연인지 병사도 기사도 보이지 않더군요."

이를 이상하게 여긴 호위 기사가 말해 준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수선한 사람들의 소음과 발소리 외에 당연히 들려야 할 현악기의 음 하나 들리지 않았다.

왕자는 본능적으로 이 삭막한 취임식이 오랫동안 기억될 최고의 순간 중 하나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후… 이곳까지 와 주셨으니, 부디 제 옆에 서 주시겠습니까."

쉔델자르의 말에 왕자가 그녀의 옆에 섰다.

수많은 사람이 왕자와 이름 없는 성직자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음에도 트리미아는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짜증을 부리지도 않았다.

"꼭 연극을 보는 기분입니다."

그저 웃는 얼굴로 한 편의 연극을 관람하듯 입을 놀리는 사람들을 구경할 뿐.

"왜, 죽음이 예정된 배우들의 모습은 더 역동적이고 사실적이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더 무의미하며 추레한 법이고."

피식 웃은 왕자가 활짝 웃는 얼굴로 쉔델자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도 친우에게 좋은 걸 배워 갈 것 같습니다."

정광군(正狂君), 트리미아의 눈에 비친 광기에 쉔델자르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성호를 그었다.

* * *

왕자가 입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모두가 기다리던 이안의 도착을 알렸다.

"마물의 숲을 지키는 위대한 모너가의 유일한 계승자이자 이 땅의 주인! 이안 드 모너 소공작님이 입장하십니다!"

저벅, 저벅, 저벅.

척, 척, 척.

이안의 등장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이들의 시선은, 곧 이안의 뒤를 따라 등장한 흑귀대에게 향했다.

'공작의 베개들?'

'기사 놀음 한다던 그 여자들 아닌가...?'

정복을 입은 채 검을 찬 이안이 그의 뒤를 지키고 선 흑귀대에게 명령했다.

"흑귀대는 사용인들을 내보내고 문을 지킨다."

그의 말과 동시에 흑귀대가 사방으로 퍼져 하인과 시종들을 밖으로 인솔하기 시작했다.

"리나와 레이나는 살아야 할 이들을 한곳으로 모으고."

리나와 레이나가 하급 관리 몇몇과 가신 중 몇 명을 데리고 성녀와 왕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흑귀대의 등장에 연회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수선해지자, 이안이 천천히 연회장 앞으로 걸어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이안 드 모너."

이안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어수선한 연회장을 뒤덮자, 그의 기세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 땅의 주인이다."

마침내, 모너가의 주인이 그 귀환을 알렸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2화

높은 단상에 선 이안의 서늘한 눈빛이 연회장에 모인 면면을 바라봤다.

결국 모너가 마주한 모든 문제는 주인인 공작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주인 없는 집에 벌레가 끼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끓듯 튀어나왔다.

"다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저들은 영지를 좀먹는 벌레들이다.

영지민이 모래 섞인 빵을 먹는 동안 뒷돈으로 배를 채우고 타인의 고통을 기회 삼아 재산을 불려 온 이들.

이안이 천천히 단상 아래로 걸어 내려가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나도 다 이해할 수 있어. 섭정관에게 뇌물을 바쳐 자리를 얻은 자도 있고, 다른 가신에게 줄을 대 자리를 얻은 자도 있을 테니까."

가장 앞에 있던 징세 담당관을 향해 걸어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와서 내가 주인이라고 말한들 불쾌할 수밖에 없을 테지."

이안의 차디찬 시선을 마주한 징세 담당관이 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불쾌하다니 당치 않습니다! 소공작님께서 가주가 되신 것을...."

콰직!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안은 걸음을 옮겼다. 징세 담당관은 그 자리에 선 채 본능적으로 목을 더듬었다.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건만, 둔탁한 단검이 느껴졌다.

"이, 이게 도대체 뭐?"

놀란 징세 담당관이 무의식적으로 단검을 뽑아 든 순간, 그 안에서 더운 피가 쏟아져 나왔다.

"데, 데온 남작!"

방금 전까지 웃으며 대화하던 귀족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소리침과 동시에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경비병! 경비병!"

"소공작이 미쳤다!"

거짓말처럼 쓰러지는 데온의 몸 너머로 붉은 눈을 한 이안이 말했다.

"모너가에 충성을 맹세한 너희들은 영지를 지키는 대신 사리사욕을 채웠고."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이안을 향해 주변의 가신들이 소리쳤다.

"소공작! 정신 차리시오! 신성한 영주성에서 이게 대체 무슨...!"

그런 남자의 목에 다시금 이안의 단검이 날아들었다.

"영지민의 고통으로 배를 불리고, 덧없는 재물에 봉신의 맹세를 어겼으니."

이안의 품에서 손이 뻗어 나갈 때마다 우왕좌왕하던 가신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어찌 죽음 말고 다른 방법으로 그 죄를 갚을 수 있을까."

그의 눈에 번들거리는 살기가 흉흉히 빛났다.

"그러니, 죽어 마땅한 너희 모두 사형이다."

* * *

이안이 단상에 오르기 직전.

이안의 주치의로 오랜 시간 그의 광증을 지켜본 말로푀유 남작은 이안이 입장한 그 순간부터 그의 눈에 어린 광기를 읽었다.

"당장 문을 열어라. 화장실을, 당장 화장실을 가야 한단 말이다."

누구의 이목도 끌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면서 남작은 문을 지키고 선 흑귀대에게 사정했다.

"귀족 된 자로서 어찌 소공작님의 취임식에서 실례를 저지를 수 있겠나? 제발 부탁이니 잠시만 길을 열어 주게!"

그러나 흑귀대는 발을 동동 구르는 그를 보고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 이 빌어먹을 년들!"

연회장에 들어온 순간 깨달았다.

음식과 술조차 마련되지 않은 취임식.

이건 누가 봐도 축하와 축복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아니, 소공작은 이 자리에 모인 이들로부터 축하받을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젠장, 아까 도망갔어야 했는데!'

혹시라도 자리를 비웠다가 더 큰 화를 부르지 않을까 싶어 자리를 지켰건만, 일이 이렇게 돌아갈 줄이야.

'더 늦기 전에 섭정관을 찾아야 하는데, 이 양반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만약 이 자리에서 살아날 방법이 있다면 섭정관은 그 방법을 알고 있을 터.

아무리 찾아도 섭정관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 인간이 모너를 포기하고 도망간 건 아니겠지?"

점점 커지는 두려움에 손가락을 씹으며 섭정관을 찾던 말로푀유가 천천히 단상에서 내려오는 이안을 발견했다.

'늦었다!'

냉소적인 미소를 한 소공작과 눈이 마주친 순간, 온몸의 세포가 위험을 알리고 발끝에서부터 저릿한 소름이 온몸을 뒤덮었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주변을 바삐 둘러볼 때, 그때서야 로브를 뒤집어쓴 채 연회장 한쪽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연회장에 로브를 쓰고 있는 모습이 유독 눈에 띄었음에도 그가 보이지 않는 듯 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섭정관? 저기 숨어 있었군! 사, 살았다!'

허겁지겁 섭정관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어딘가 꺼림직한 예감이 들었다.

강박증이 있는 사람처럼 항상 꼿꼿한 허리를 유지하던 평소의 섭정관과 달리 잔뜩 수그린 허리와 떨리는 몸은 마치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이질감에 남작이 잠깐 멈춰 선 순간, 섭정관의 손이 길게 뻗어 남작의 입을 틀어막았다.

"큽, 읍, 읍!"

콰직! 콰직!

순식간에 섭정관의 몸에서 튀어나와 남작을 집어삼킨 어둠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다시 섭정관의 몸으로 돌아간 뒤 기둥 뒤에 숨었다.

* * *

"제발, 제발 살려 주시옵소서!"

"한 번만 자비를...!"

"네놈에게 신의 저주가...!"

저주와 비명, 애원이 뒤섞인 아수라장을 걷는 이안의 눈은 침착하기만 했다.

"컥!"

이안이 기계적으로 팔을 움직일 때마다, 대리석 바닥에 한 구의 시체가 더해졌다.

자비를 바라던 이의 미간을 찌르고, 살려 달라 간청하던 이가 목 없는 시체가 되어 바닥을 구른다.

무기조차 들고 있지 않은 이들은 뒤로, 더 뒤로 달려 나가며 자리를 피하려 했으나 문을 지키고 선 흑귀대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헉, 헉."

도대체 얼마나 베었을까, 계속된 마나 사용에 몸이 경고를 보냈다.

'조금만 더.'

나는 이 자리에 계속 앉아 있을 수 없다.

리어에서의 고민은 바로 거기서 시작했다.

임시 공작으로서 정치를 통해 귀족들을 포용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센트럴 홀드에 남아 있을 수 없다.

최전선을 방문해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파악해야 하고 모너가의 군대를 키워야 하고 용사들을 만나 그들의 특성도 훔쳐야 한다.

한가롭게 영주성에 앉아 영지를 관리할 수 없는 만큼 영주성과 모너의 모두에게 경고를 보내야 한다.

새로운 모너의 주인은 자비를 모른다는 것을.

"컥!"

그러니 팔을 계속 움직였다. 이 팔에, 이 몸에 쌓은 악명과 죽음만큼 살아남은 자들은 결코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고, 악명이 쌓일수록 모두가 모너가의 망나니를 두려워할 것이다.

"소공작─ 아니 공작님. 제발,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관리의 목젖에 단검을 넣으며 다짐하듯 기도했다.

"커억!"

오늘 흐른 피가 영주성을 더럽힌 만큼, 모너가 깨끗해지기를.

* * *

"후...."

배가 불룩 튀어나온 남자의 몸에서 단검을 뽑은 뒤 낮게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섭정관, 섭정관은 어디 있지?'

아무리 갑작스럽게 움직였다고는 하지만 섭정관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술도, 음식도 준비하지 않은 임관식에 수년간 모너가를 지배해 온 섭정관이 의문을 품지 않을 리가 없다.

매수한 병사나 기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성 내부의 병력을 모두 무르고 다크엘프 레인저와 흑귀대 전원을 준비시켰건만 섭정관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도망간 건 아닌데… 어디 숨은 거지?'

섭정관이 두려움에 젖어 숨었다고 생각한 찰나.

"크하하하하!"

연회장에 섭정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의 목소리라기보다는 쇠가 쇠를 긁는 소리에 가까운 불쾌한 음성이 이어졌다.

"모굴과 스벤 그 머저리들에게 무슨 변명을 댈지 고민이었는데 이렇게 풀어 주는구나!"

드르륵 하고 고개를 돌린 섭정관의 검고 탁한 눈이 2왕자 트리미아를 향했다.

"취임식 도중 광증에 눈이 멀어 살육을 벌이고 왕자를 죽인 네놈을 벌했다고 보고하면 왕국도 내 진가를 알아줄 것이다!"

이미 초점을 잃은 섭정관의 눈에서는 검붉은 액체가 쉼 없이 흘러내렸다.

"그럼 마침내 내가 이 땅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 땅을 위해 누구보다 헌신한 내가!"

7년의 기다림을 거쳐 이 자리에 선 섭정관은 패배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거라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죽인 뒤 모너를 가지고 싶은 욕망뿐.

이 자리에서 살아남아 영웅적으로 소공작의 만행을 막은 자신은 영원히 영지의 구원자로 기억될 것이며 이 땅의 주인으로 군림하게 될 것이다.

"네깟 놈이 감히 주인을 자처해?!"

섭정관은 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충만한 힘을 믿었다. 말로푀유 남작을 집어삼킨 후로 느껴지는 넘칠 듯이 타오르는 힘만 있다면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을 것만 같았다.

설령 모굴이나 스벤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도 집어삼켜 죽일 수 있었으리라.

넘쳐흐르는 힘에 만족스럽게 웃은 섭정관이 스산하게 웃으며 이안을 향해 소리쳤다.

"죽어라!"

제국이 선물한 '족쇄'를 끄집어 내 소공작을 향해 날리자, '족쇄'는 어둠이 되어 이안을 향해 쇄도했다.

* * *

이안은 다가오는 어둠을 지긋이 노려봤다.

"역시는 역시네."

저 불길한 어둠도 이 세계를 집어삼키는 멸망의 전초 중 하나다.

<배드 엔딩 No.011 증식하는 어둠>

6급 이하의 마법사도, 기사도 건들 수 없는 불가해의 어둠은 오직 성력으로만 제압할 수 있다.

'분명히 게임 속에서는 과포화된 마나로 인한 이상 현상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게임 속 바이러스처럼 퍼진 어둠은 사람을 잡아먹으며 그 덩치를 불린다. 초반에 제압하지 않으면 배드 엔딩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몬스터지만 인간에게 기생하기 때문에 극악의 사냥 난이도를 자랑하던 놈들.

그러나 마족과 제국이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 순간부터 이쪽은 마족과 싸울 충분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일방적인 살육과 처벌로 점철될 취임식에 무려 성녀 본인을 참관시키지 않았던가.

증식하는 어둠을 꼿꼿하게 바라보며 소리쳤다.

"쉔델자르!"

이안의 외침에 한쪽에 피신해 있던 쉔델자르가 성호를 그으며 미리 준비한 신성 마법을 발동시켰다.

"빛의 신께서 이 자리에 임하시니, 그 어떤 악도 범접하지 못하리라! 디바인 에어리어!"

그녀의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연회장을 가득 채우는 따듯한 빛이 퍼지고, 지정한 공간을 성역으로 만들어 악을 멸하는 신성 마법 <디바인 에어리어>가 발동됐다.

"끄아아악!"

전력을 다해 소공작을 죽이려던 섭정관은 갑작스럽게 온몸에 밀려드는 격통에 비명을 질러 댔다.

"아아아악! 그만, 그만, 그만!"

그의 눈과 코, 귀에서 검은색 액체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몸과 근육이 타들어 가듯 녹아내렸다.

고작 약으로 만들어진 조잡한 악(惡)으로는 세상에 현신한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성 마법에 대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난, 난 죽을 수 없다!"

섭정관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고작 성직자에 불과한 가냘픈 여자의 주문에 전능해 보이던 힘이 바스러지듯 사라진 것도, 7년을 기다려 온 대계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아아아악!"

그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건 온몸을 불로 태우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정신을 잃고 죽어야 할 고통이 끝없이 이어졌다. 살을 태운 매캐한 연기가 눈을 가리고, 영혼이 갈리는 듯한 통증에 더 이상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몸을 동그랗게 만 채 죽음을 기다릴 뿐.

그때 머리 위에서 비웃음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렸다.

"너한테 딱 걸맞는 최후구나."

공략왕이 빙의하기 전 이안이 그랬듯, 고통 속에 갇혀 한껏 움추린 채로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섭정관의 모습을 보자 이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너는 절대 쉽게 죽지 못할 것이다."

품에서 약병을 꺼낸 이안이 약을 조심스럽게 섭정관의 입안에 흘려 넣었다.

"끄헉! 헉? 끄아아아악!"

놈에게는 들어야 할 정보가 많았다.

왜 모너를 노렸는지, 마계의 독이라는 퀸즈머시를 어디서 구했고 '증식하는 어둠'을 어떻게 얻었는지 알 수 있다면 게이머로서 보지 못했던 엔딩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급 엘릭서라고 불리던 스팀팩과 신성 마법의 조합이라면 설령 다 죽어 가는 시체라도 삶을 붙들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한 순간, 신성력이 닿은 섭정관의 머리가 종기처럼 부풀어 올랐다.

"끄아아아아악!"

펑!

따듯한 성력이 햇빛처럼 감싼 연회장 안.

섭정관의 단말마가 애처롭게 울려 퍼졌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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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3화

쉔델자르 옆에서 거대한 로브를 둘러쓴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모굴은 침음을 삼켰다.

"허허...."

모굴은 자신이 멍청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우둔함을 보고 과묵하고 우직하다 말했고, 또 누군가는 사려 깊고 진중하다 표현했으나, 실상은 미련하고 어리석을 뿐.

그렇기에 자신에게 기회를 준 공작에게 진심으로 충성했으며, 단 한 순간도 그에게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실종되기 전 공작이 찾아와 힘을 숨기고 있으라고 부탁했을 때도, 마땅히 그러겠다고 답했다.

-영지에 감당할 수 없는 적이 숨어 있으니 그 적이 스스로 존재를 드러낼 때까지는 절대 힘을 보여서는 안 된다.

미련한 그에게 공작의 마지막 부탁은 명령과 다름없었고, 모굴은 그날부터 백작성을 걸어 잠갔다.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적에게 대비하기 위해서, 힘을 기르기 위해서.

공작이 사라지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수많은 사람이 백작성을 찾아왔다.

공작이 되어 달라는 사람도, 공작을 찾아 달라는 사람도, 새롭게 부임한 섭정관을 견제해 달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굴은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기사단을 움직여 공작령을 감시했고, 조카나 다름없는 소공작의 추락에 왕국과 제국이 얽혀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으나 영지에 숨어 있다는 적만큼은 찾지 못했다.

그렇기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안이 악마에 대해 말했을 때도 믿지 않았다. 그저 모너가를 압박하던 세 영지를 벌한 이안이 신기해 이 자리에 왔을 뿐.

"정말 악마였다니...."

허탈한 표정으로 바닥을 뒹굴고 있는 섭정관의 찌꺼기를 바라봤다. 기괴하게 부풀어 오른 잔해가 꿈틀거릴 때마다 불길한 검은색 액체가 바닥을 적셨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악마나 악마를 사냥한 백면 둘 중 하나를 반드시 보여 드린다고."

"그래, 그랬지."

소공작은 사실을 말했으나 자신이 믿지 못했을 뿐이다. 하마터면 악마에게 조카나 다름없는 아이를 잃을 뻔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의 미련함에 분노가 치솟았다.

'아무리 공작의 명령이 있었다고 한들 그의 핏줄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어야 했거늘!'

뭐라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이 아이에게 뭐라고 변명한단 말인가?

공작의 부탁 때문에 네가 망가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숨어 있다는 적이 두려워 힘을 보일 수 없었다고?

설령 악마의 존재를 알았다고 한들 모굴은 힘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공작의 부탁은 적이 나타나는 순간까지 힘을 숨기는 것이었으니까.

"미안하구나."

그렇기에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라곤 고작 사과뿐이었다.

* * *

모굴이 고개 숙여 사과한 순간 이안의 눈앞에 알림이 떠올랐다.

[철벽의 기사, 모굴이 당신을 지지합니다.]

- 센트럴 홀드, 리어를 통치할 수 있습니다.

- 수도 수비군과 기사단의 통제권을 얻었습니다.

[일시적으로 센트럴 홀드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 이제부터 센트럴 홀드를 통치할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리어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 이제부터 리어를 통치할 수 있습니다.

[영지 관리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이미 예상했던 결과라 고개 숙인 모굴을 향해 덤덤히 말했다.

"고개 숙일 필요 없습니다, 백작."

힘이 전부인 세상에서 힘을 가진 백작이 고개 숙여 사과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이 갔다.

분명 움직일 수 없었던 나름의 이유가 있었으리라.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구나."

모굴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바닥에 널브러진 섭정관의 잔해만 멍하니 바라봤다.

"우리 영지에 마족이 숨어 있었다니...."

"정확히 말하자면 섭정관은 마족이 아닙니다. 마족에게서 뭔가를 받은 게 아닐까 합니다."

"악의로 가득 찬 기운을 가졌는데, 마족이 아니라고?"

놀란 모굴의 목소리에 씁쓸히 웃으며 답했다.

"진짜 마족 앞에서는 숨조차 쉬기 어려웠습니다."

만약 진짜 마족이었다면 쉔델자르의 신성 마법과 모굴이 있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허… 이보다 더 지독한 존재라니, 상상조차 하기 어렵구나. 그가 사용한 어둠은 내가 전력을 다한다 해도 쉽게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작게 한숨을 내쉰 이안이 덧붙였다.

"반드시 살려서 심문했어야 하는데...."

설마 성녀의 신성 마법과 스팀팩으로도 못 살릴 줄은 몰랐다. 설마 인간이 마족의 마나를 쓸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일단, 취임식을 끝내야겠습니다."

* * *

짧은 축하를 건넨 쉔델자르는 마족의 유해를 살피고 싶다며 바삐 자리를 벗어났고, 한동안 자리를 지키던 왕자 또한 전대미문의 사건에 호기심이 생겼는지 쉔델자르를 따라나섰다.

외부인들이 빠지자 이안은 취임식 직후 살아남은 가신들과 관리들을 모아 영주 회의를 진행했고, 칼날 위를 걷는 듯한 살벌한 회의장 안에는 이안의 한숨 소리만 가득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럴 수 있는 겁니까."

분명 서류상으론 멀쩡했던 영지였는데 시스템으로 확인한 모너의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처참했다.

<센트럴 홀드>

- 인구: 12,000

- 식량: 부족

- 재정: 부족

- 군사: 빈약(상비군 200, 기사 6)

<리어>

- 인구: 25,000

- 식량: 부족

- 재정: 위험

- 군사: 빈약(상비군 150, 기사 4)

공작가의 인구가 고작 3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군벌가에 남은 병사가 고작 350명밖에 없다는 것이다.

"설마 수비군을 전부 최전방으로 보냈다니...."

지난 7년간 만성적인 병력 부족으로 고통받던 최전방을 지원하기 위해 수비군을 보내서 병력이 남아 있질 않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건 병사라고 하기 부끄러운 햇병아리밖에 없고. 이걸 영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소공작- 아니, 공작. 정말 어쩔 수 없었네. 병사들이 매일같이 죽어나는 최전선을 지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마물의 숲을 지킬 수 있겠나?"

막상 얻어 낸 모너는 인구도, 식량도, 자원도 없는 명성뿐인 영지였다. 재정과 식량이야 세 영지에서 뜯어 낼 수 있지만 바닥에 닿은 인구만큼은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백작님, 영지 내에서 징집할 수 있는 인구는 얼마나 됩니까?"

불현듯 생각난 이안의 물음에 모굴이 난처한 웃음을 보였다.

"글쎄, 재작년부터 지원자가 급격히 줄어든 걸 봐서는 강제 징집이 아닌 이상 병력을 늘리는 건 힘들 것 같네."

당연히 없는 인구에 병력을 무한정 만들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충성심이 높은 영지라고 한들 병사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

"후… 한동안은 인구를 늘리는 데 집중해야겠습니다."

처음 계획은 흑귀대와 함께 최전선으로 향하는 거였지만 이래서는 불가능하다.

"흑귀대는 영지에 남아서 신병 훈련과 모집을 계속하고, 황금 고블린 상단에서는 옵솔과 머천에서 받은 돈을 전부 쓰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을 더 구해 주세요."

거지든 노예든 일단 인구를 늘려야 한다.

"백작께서는 외부에서 사람이 들어오는 만큼 치안에 힘써 주시고요. 부족한 관리 인원은 감사부장이 데려올 테니까 다들 그때까지만 힘내 봅시다. 모굴 백작님과 릴라이 상단주만 남아 주시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합시다."

이안의 말에 힘차게 답한 관리들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벗어났다.

* * *

한동안 고민에 잠겨 있던 이안이 남아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프론트 홀드에 가 보겠습니다."

순간 모굴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수많은 관리와 가신들이 죽어 나간 지금, 이안은 영지에 있어 그 누구보다 중요한 존재였다.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다만, 현 모너의 문제는 제가 영지에 남아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인구를 늘리는 것도, 정예 병력을 키워 내는 것도, 모두 시간이 해결할 일이다. 영지를 키우는 것만큼이나 개인의 무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영지에 남아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앞으로 제가 없는 동안 해야 할 일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안이 고개를 들어 영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비록 감사부장인 베인이 자리에 없지만, 편지를 남겼으니 그 또한 잘 알아들으리라.

"리나는 흑귀대와 함께 병사 훈련에 집중해. 매일 정해진 시간에 영지민을 모아 심법과 검술을 가르치고."

"일반 영지민들한테요?"

"응. 참가자한테 식량을 조금 배급하거나 세금을 줄여 준다고 하면 될 거야. 흑귀대처럼 배우지는 못하겠지만 병사랑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훈련시키면 돼."

"이런 귀중한 심법을 함부로 가르쳐도 될까요?"

"외부인한테만 가르치지 않으면 괜찮아. 영지민이 모너가를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력이 뛰어난 자들을 모아 흑귀단에 영입하거나 훈련교관으로 써도 되고."

저항군 비전은 처음부터 전 인구의 병력화를 위해 만들어진 심법이다. 이 비전을 대륙에 배포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아낄 생각도 없다. 애초에 저항군 비전은 영지의 모든 병력에게 가르칠 생각이었다.

비록 게임 속에서는 시간 부족으로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었지만, 지금부터 준비한다면 위급한 상황에 비장의 한 수가 될 것이다.

"릴라이 상단주는 사람을 구하면서 약초꾼과 약사를 찾아 주세요."

"어머, 약사를요?"

"영지에 특산물은 몬스터 부산물밖에 없으니 특산물을 좀 만들어 봅시다."

"약사라… 최선을 다해서 찾아보겠습니다."

릴라이가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법과 신성력이 존재하는 이 대륙에서 약사는 마녀와 같이 불길한 취급을 받는다는 건 알고 있다. 약학이 발달하지 못해 살리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으니 어쩔 수 없다.

민간 의학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일단 효과적인 약품이 나오기 시작하면 천천히 바뀔 것이다.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 릴라이에게서 고개를 돌려 모굴 백작을 바라봤다.

"백작님께는 제가 전선에 가 있는 동안 모너를 부탁드립니다. 마땅한 부관이 없으시다면 감사부 부장 베인을 시키시면 됩니다."

마법 통신이나 전령을 통해 언제든 연락할 수 있으니 큰 걱정은 없다.

"아무리 그래도 영지가 안정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게...."

한참을 고민하던 모굴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있으나 없으나 크게 바뀌는 건 없습니다. 어쩌면 악명 높은 제가 없는 편이 영지 관리에는 더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잠깐 고민하던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신들이야 취임식을 피로 뒤덮은 소공작보다 자신을 선호할 것이다.

"제가 시간이 되는 대로 연락을 취할 테니 급한 일이 있으면 그때 전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네. 그럼 언제쯤 갈 생각인가?"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은 모두 끝냈으니 내일 아침에 떠날까 합니다."

영주성이 없는 전방에는 텔레포트 마법진도 없으니 장장 일주일을 이동해야한다.

"그곳에서 환영받지 못할 거다."

모굴이 심각한 표정으로 걱정하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미 예상한 일입니다. 프론트 홀드의 병사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한 진정한 모너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이 회의장에 남아 있는 면면을 바라보며 단언했다.

"다음에 이 자리에서는 진정한 모너가의 주인으로서 여러분들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안은 그 말을 끝으로 회의장을 나섰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4화

능히 왕국과 맞먹는다는 모너가의 힘은 몬스터로 둘러싸인 전방, 프론트 홀드에서 나온다.

모너의 역사는 곧 프론트 홀드를 지켜 낸 시간이며, 모너의 자랑이다.

공작이 사라진 지금까지도 긍지로 가득 찬 모너의 젊은이들은 프론트 홀드로 향했고, 수없이 많은 이들이 전투를 겪은 프론트 홀드의 병사들이 왕국 제일이라는 데는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최고의 병영이자 최악의 전쟁터이며 모너의 역사 그 자체인 요새에서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 그 망아지만도 못한 놈이 영주라고?!"

분노에 가득 찬 버질이 쥐고 있던 편지를 와락 구겼다.

유려한 글씨체로 써진 편지에는 소공작인 이안 드 모너가 국왕에 의해 임시 영주로 임명되었다는 안내와 현장 조사를 나서겠다는 통보가 적혀 있었다.

"네놈들이 뭐라 하던 신경이나 쓸 것 같으냐!"

현장 조사라니.

매일같이 목숨을 걸고 전투에 나서는 병사를 구경거리로 만들겠다는 통보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무시했으면 좋으련만."

지금껏 그래 왔듯 무시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센트럴 홀드와 리어는 결코 프론트 홀드의 긍지와 명예를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자신만의 전쟁이라며 호언장담하던 소공작의 광오한 태도가 잊혀지지 않았다. 망나니에 불과한 놈은 전쟁도, 전투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우리의 전장을 놈의 놀이터로 만들 수는 없다."

굳게 다짐한 버질이 편지를 움켜쥔 채 백작인 아버지를 찾아갔다.

* * *

슬쩍 눈을 돌려 편지를 확인한 스벤이 덤덤히 말했다.

"신경 쓰지 말거라."

"하지만 아버지!"

억울하다는 듯 소리치는 버질을 무시한 채 스벤은 말을 이었다.

"아들아, 프론트 홀드를 가지고자 해서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닙니다."

"그래, 만약 서류에 적힌 주인을 따랐다면 우리는 수년도 더 전에 섭정관을 따랐을 것이다."

자리에 앉아 자신의 대검을 확인하는 스벤의 목소리에는 단 한 점의 의문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내가 병사들을 부린다고 해서 이 땅의 주인인 것 같더냐? 천만에. 나나 너도 가족을 잃고 이 땅 위에서 창과 검을 든 우리 병사들과 다를 바 없다. 우린 다만 지킬 뿐이다."

프론트 홀드에 남아 있는 가족들과 그 뒤에 있는 모너의 영토를.

프론트 홀드의 병사들은 지키기 위해 싸운다. 설령 영주에 부임한 소공작이 명령한다고 해도 병사들은 계급장을 벗어던지고 프론트 홀드에 남을 것이다.

그것이 프론트 홀드의 방식이니까.

망나니에 불과한 소공작이 어떤 억지를 부려도 단 한 명의 병사조차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달은 버질이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생존을 위한 전장에 현장 조사라니 웃기는군. 누가 온다더냐?"

"편지에는 모굴 백작의 인장만 찍혀 있었습니다."

"그 멍청이가?"

버질의 말에 스벤 백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천 번을 욕해도 움직이지 않던 모굴이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였다니, 흥미가 절로 동했다.

"하, 누가 공작의 자식 아니랄까 봐 대단한 놈인가 보구나."

"형편없는 놈이었습니다."

"응?"

그제야 버질이 자신을 대신해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는 걸 깨달은 스벤이 재밌다는 듯 물었다.

"형편없는 놈이었다고? 내가 무릎을 꿇고 사정해도 움직이지 않던 모굴을 움직였으니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무슨 일이 있었더냐?"

불쾌한 표정을 한 버질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스벤은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

'허… 단 한 명의 병사도 다치지 않는 혼자만의 전쟁이라니. 내가 가서 그놈을 봤어야 했는데.'

버질의 의도와는 달리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이안에 대한 스벤의 관심은 커져만 갔다.

* * *

- 쏴아아아아아아

"염병, 지랄 맞은 날씨구만."

프론트 홀드의 후방 경비를 담당하는 12조장 후드웍이 늘어지게 하품하며 전방을 바라봤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쏟아지는 비에 100걸음 밖도 확인하기 어려웠다.

"야, 야, 운 좋은 줄 알아, 임마. 나 아니었으면 너도 전방 경계였어."

"예, 예."

장난기 섞인 그의 말에 조원이 성의 없이 대답하자 그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이놈이 근데? 야, 전방에서 이 날씨면 눈먼 돌에 뒤지기 딱 좋은 거 모르냐? 너 마물의 숲 고블린이 얼마나 얼마나 돌을 잘 던지는지 모르지? 11조 조장이 그거 한 방 맞고 한 달을 쉬었다니까?"

"아무렴요."

후드웍의 말에도 조원은 심드렁했다.

"이 새끼 이거, 조장을 안 믿네?"

"조장님은 그게 문젭니다. 입만 열면 구라를 치니 어떻게 믿습니까?"

"어, 어? 근데 이 새끼가?"

당황한 후드웍이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지만 조원은 여전히 그를 믿지 않았다. 후드웍은 초임 병사인 그에게 고블린이 쌍검술을 썼다는 둥, 돌팔매질로 15미터짜리 돌을 넘겨 사람을 맞췄다는 둥, 믿을 수 없는 이야기만 하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좀 있으면 검기 쓰는 고블린도 나오겠습니다."

"어?! 너 어떻게 알았어! 곤다르 경이 검기 쓰는 고블린한테 당했다는 건 비밀인데!"

현실감 넘치는 후드웍의 태도에도 조원은 속지 않았다. 속는 사람이 바보니까.

"하, 참나. 요즘 애새끼들은 빠져 가지고 고블린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조장님, 진짜 그만 좀 하십쇼. 차라리 고블린이 아니라 오크라고 하든가...."

조원이 짜증을 부리기도 전에 성 아래를 바라보고 있던 후드웍이 손을 들어 그를 멈췄다.

"야, 전방 확인. 저기 마차다."

"또, 또 시작이시다. 상단 왔다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뭐야? 진짜네?"

그제야 성을 향해 돌진하듯 달려오는 마차를 확인한 조원이 다급히 종을 울리며 조장을 바라봤다.

"어… 혹시 마차 타는 고블린도 있습니까?"

"미친 새끼, 고블린이 마차를 어떻게 타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쇠뇌를 꼬나 쥔 후드웍이 달려오는 마차를 향해 소리쳤다.

"일단 정지! 더 다가오면 쏜다!"

프론트 홀드에 오는 외지인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마차를 타고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일반 준마(駿馬)는 마물의 숲을 달리지 못한다. 전마(戰馬)를 쓴 마차는 그 가격이 어마어마하니 센트럴 홀드에서 나온 배급이 아니면 마차는 구경도 하기 힘들었다.

"문양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중앙에서 온 걸 거야. 잘 확인해 봐, 긴장 풀지 말고."

후드웍은 왠지 아랫배가 싸하게 아픈 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중앙에서 보급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온 거지? 이번 보급이 많다더니 설마 다시 가져가려고 온 건가?'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와 멈춘 마차에는 화려한 모너가의 상징이 그려져 있었다.

"중앙 문양입니다!"

이제야 문양을 확인한 사수를 흘겨본 후드웍이 한껏 긴장한 상태로 마차를 향해 다가가 외쳤다.

"중앙에서 나오셨습니까? 신원 확인하겠습니다!"

마차 문이 열리자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와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웃으며 그를 반겼다.

* * *

"오래도 걸렸네. 그치 레이나?"

이안의 말에 레이나가 웃으며 답했다.

"그래도 백작님께서 신경 써 주셔서 예상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는걸요."

드디어 프론트 홀드에 도착한 두 사람이 마차에서 내리자 웅장한 성이 그들을 반겼다.

"프론트 홀드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12조 조장 후드웍입니다! 방문 사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태생이 군인인 듯 짧게 친 머리와 고집 있어 보이는 눈매의 사내가 큰 소리로 물었다. 물으면서도 한 손으로 잡고 있는 쇠뇌를 놓지 않은 걸 보니 혹독하게 훈련된 정병(精兵)이라는 게 눈에 보였다.

"흠… 방문 목적이라. 역시 현장 조사려나?"

"예? 현장 조사 말씀이십니까?"

당황한 병사를 향해 슬쩍 웃은 이안이 가문의 명패를 보이며 말했다.

"상관에게 말해서 중앙에서 현장 조사를 나왔다고 일러 주게, 후드웍 조장."

"예!"

* * *

'영주님께 안내하라니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일까?'

중앙에서의 보급이야 매달 있는 일이지만 지금처럼 영주를 찾아가는 일은 거의 없으니 절로 관심이 생겨 연신 뒤따라오는 남자와 여자를 힐끔거렸다.

귀족처럼 생긴 남자는 군데군데 헤진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가죽 갑옷이 특이한 건 아니다. 당장 이곳 프론트 홀드의 병사들도 몬스터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으니까.

그러나 기사나 귀족이라면 체면상이라도 갑옷을 입거나 전투 중이 아닐 때는 정복을 입는 게 일반적이다.

귀족이 아닌가 싶다가도 그를 바로 옆에서 따르고 있는 하녀 복을 입은 여자를 보니 귀족이 분명해 보였다.

'이상한 커플이네....'

그런 생각도 잠시, 영주성에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다가와 말했다.

"중앙에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근엄한 기사의 목소리에 후드웍이 경례하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백작을 직접 만날 생각에 두근거리긴 했지만, 일개 병사가 백작을 만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해 몸을 돌린 찰나, 조용히 뒤따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 병사와 함께 가도 되겠나?"

"네?"

"재밌어 보이는 친구라서, 백작에게 부탁할 것도 있으니 이 친구도 같이 갔으면 좋겠군."

이미 결론을 내린 남자가 터벅거리며 영주성을 향해 걸어 들어가다 뒤를 힐끔거리더니 물었다.

"안 따라오고 뭐 하나?"

당황한 후드웍이 이안을 따라 백작에게로 향했다.

* * *

백작은 화려한 환영식 대신 조촐한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현장 조사인 만큼 조사단에게 영지의 현실을 보여 주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조사단이 고작 2명이라니."

백작의 말에 버질이 끼어들었다.

"이건 저희 프론트 홀드를 무시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책상에 앉아 있는 놈들이 몬스터와 전선의 무서움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분명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트집 잡기 위해 소공작이 파견한 파렴치한 인물들일 게 분명합니다!"

자신을 닮아 끓는 피를 가진 아들을 잠시 바라본 스벤이 한숨을 내쉬었다.

"버질, 항상 생각한 뒤에 말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조사단이 소규모라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영지의 관리 실태를 문제 삼을 거라면 대규모 조사단을 보냈겠지."

그 말에 흠칫한 버질이 잠시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

"하지만 고작 2명이서 뭘 알 수 있겠습니까?"

"글쎄, 그건 나도 궁금하구나."

"제가 만난 소공작은 계획도 생각도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혼자서 전쟁을 벌인다고 장담하던 망나니였죠."

이안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린 버질이 말했다.

"그 소공작이라면 2명의 조사단을 보내 식량을 줄일지도 모릅니다."

지난 수년간 식량 때문에 고생해 온 전선의 병사들은 식사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버지, 절대 틈을 보여선 안 됩니다. 어떤 뱀 같은 작자들이 올지 모르니까요."

걱정 어린 아들의 말투에 피식 웃은 백작이 덤덤히 말했다.

"나보단 네가 훨씬 더 걱정이구나. 누굴 닮아서 그렇게 다혈질인지."

백작은 분명 침착하고 사려 깊은 자신과는 관련 없을 거라 장담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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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5화

백작이 자리에 앉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리병 몇이 주춤거리며 음식을 내왔다.

"백작님, 정말 오늘도 이런 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음식을 내온 병사들의 얼굴에는 염려가 가득했다.

설탕도 넣지 않은 딱딱한 빵에 멀건 국물에 스치듯 고기를 넣었다 뺀 고깃국, 질기다 못해 악착스러운 식감을 자랑하는 정체불명의 고기까지.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은 도저히 백작가의 음식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백작 가족이야 전통적으로 병사들과 똑같은 식단을 먹었다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 아니던가.

혹여나 식사 자리에서 백작이 모욕당하지는 않을까 염려한 병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중앙에서 사람이 왔다던데 모처럼 맛있는 음식이라도 내와야 하는 게 아닐지...."

"아서라, 뭐가 이쁜 놈들이라고. 잘 처먹이면 전방에 배급이 넘친다고 배급을 줄이고 평소처럼 처먹이면 무시한다고 지랄할 놈들이다."

중앙에서 보낸 현장 조사단이 실제 전선에 나갈 리 없다. 현장 조사 대신 밥이나 몇 번 얻어먹고 그걸 빌미로 보급을 줄이려고 할지도 모른다.

"중앙에서 펜만 굴리던 놈들도 전투식단을 한 번은 먹어 봐야지. 크흐흐, 이참에 멧돼지 고기를 씹다가 턱이라도 나가면 좋겠구나."

병사의 염려에 버질이 신경질 부리자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스벤이 인상을 구겼다.

"버질, 너는 어떻게 입만 열면 짜증이구나."

그나마 검이나 좀 써서 다행이지 그조차 못했으면 어디 가서 사람 취급받기 참 어려웠으리라 생각한 스벤이 한숨을 내쉬었다.

"프론트 홀드의 희생으로 빌어먹는 놈들이 감사할 줄 모르는 게 문제입니다."

버질의 날 선 대답에 스벤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섭정관이 영지를 다스린 이후로 점점 중앙과 분리되다 보니, 어느새 이곳의 모두가 센트럴 홀드와 프론트 홀드를 별개의 영역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과연 이걸 바꿀 수 있을까....'

아무리 공작가에 충성하라고 명령한 들 곪은 배를 움켜쥐고 흙 섞인 빵을 먹고 싸우던 이들은 명령을 순순히 따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명령 이전에 명령에 따를 충성심이 있어야 하기에.

'소공작이라는 놈이 현명한 놈이었으면 좋겠건만.'

광증에 절여졌던 놈에게 걸기에는 너무 무거운 기대라는 걸 알지만, 만약 더 늦는다면 곪은 상처가 터지듯 프론트 홀드가 중앙으로부터 터져 나갈지도 모른다.

그건 백작인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 목숨을 버리고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영웅들의 마음을 어찌 명령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

"백작님, 중앙에서 온 조사단이 도착했습니다."

생각이 깊어질 무렵, 문 앞에 선 병사가 조사단의 도착을 알렸다.

"안으로 들여라."

그의 말과 함께 이안과 레이나가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 * *

"…소, 소공작? 네가 여길 어찌...?!"

이안은 놀란 버질을 가볍게 무시하고 스벤을 향해 작게 고개 숙였다.

"전방을 지키는 영웅을 뵙습니다."

"허, 설마 소공작 자네가 직접 올 줄은 몰랐군. 말했으면 직접 나섰을 텐데."

"이쪽의 병사가 훌륭히 안내해 줘서 즐겁게 올 수 있었습니다."

인사를 마친 이안이 식탁을 슬쩍 보며 말을 이었다.

"백작님, 실례인 줄은 알지만, 며칠 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식사 먼저 할 수 있겠습니까?"

"아...! 백작가는 항상 전장의 병사들과 같은 밥을 먹네. 입에 맞지 않을 텐데 미안하게 됐네."

백작의 염려와는 달리 자리에 앉은 이안은 걸신들린 것처럼 식탁을 비워 나갔다.

-우걱우걱.

애초에 해독하기 전까지 약초만 씹어 먹던 몸이다.

적당한 양의 소금만 있다면 어지간한 음식이야 억지로 먹어 삼킬 수 있다. 심지어 시간을 줄이기 위해 마차에서 밥 대신 질긴 육포를 씹어 먹던 이안에게 백작가의 식사는 꽤 만족스러웠다.

아무리 맛이 없어도 최소한 독은 없으니까.

"그...."

게걸스럽게 식탁 위의 접시를 비워 나가는 이안을 바라보던 백작이 난처한 목소리로 버질에게 물었다.

"정말 저게 네가 말한 그 소공작이 맞느냐?"

"네… 네, 맞습니다."

버질은 게걸스럽게 밥을 먹고 있는 소공작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회의장에서 자신만의 전쟁이라고 말하던 광오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설마 센트럴 홀드의 사정이 그렇게 나빠진 걸까? 공작이 밥을 굶어야 할 정도로?

두 부자(父子)의 복잡한 시선이 바삐 움직이는 수저만 좇았다.

* * *

대충 급한 불을 끈 이안이 수저를 놓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식사다운 식사를 한 적이 없어서...."

"허허! 아닐세, 잘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구나."

이안을 바라보던 백작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영지를 관리하느라 바쁠 소공작이 이 외지까지 어쩐 일이신가? 여긴 보다시피 먹을 것도 볼 것도 없다네."

아들이 전해 준 소공작은 흥미로웠으나 딱 그 정도였을 뿐.

"이미 몇 년 동안이나 전방을 등한시한 중앙에 줄 떡고물은 없네. 뭐 처먹을게 있다면 우리 병사들에게 먼저 먹였을 게야."

전방의 사정이야 뻔하다.

마물의 부산물을 팔고 있다고는 하지만 5개의 마탑에서 후려친 가격에 파느라 병사들 월급을 주고 나면 남는 것도 없다.

애초에 남는 게 있었다면 병사와 백작가의 식단이 이보다는 나았으리라.

"뭐 볼 게 있다고 왔는진 모르겠지만 조용히 구경만 하다 돌아가게. 눈먼 돌에 맞아 죽지 말고."

백작의 차가운 태도에도 이안은 덤덤했다.

환영 따위 바란 적도 없으니 실망할 일도 없다.

"백작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전방의 기사단과 함께 훈련하고 싶습니다."

* * *

백작의 기세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불가."

조금 전의 어딘가 어수룩한 모습은 사라지고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 같은 얼굴로 백작이 단언했다.

"부탁드립니다."

"네놈이 기사단의 훈련을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을뿐더러, 전장의 훈련은 장난이 아니다."

"제가 못 따라가면 그때 내치시면 됩니다."

"살아 있다면 그렇겠지. 전선의 기사단이 무슨 훈련을 할 것 같으냐? 여긴 허공이나 베면서 신선놀음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매일같이 병사가 죽고 기사가 다치는 곳이지."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으려는 듯 백작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죽고 싶으면 다른 곳을 알아봐라. 고작 그 정도 마나로 기사단이라니, 쯧."

고작 이 정도에 포기할 거라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검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언제까지 단검을 가지고 설칠 수는 없다.

당장 10년 뒤의 전장에서 단검이나 던지고 있다면 진짜 답답해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최소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영웅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검을 배워 둬야 한다.

[거인왕의 투쟁욕(鬪爭慾)]이 모든 무기 숙련도를 올려 주니 남들보다 빠르게 배울 터.

"모너가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마물의 숲을 지키고 싶습니다."

가문의 검술과 모너가의 피에 반응했는지 인상을 잔뜩 구긴 백작이 심각한 얼굴로 바라봤다.

"공작가의 비전은 나도 모른다. 기사단의 검술은 비전의 열화판일 뿐."

탁탁거리며 검지로 식탁을 치던 백작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기사단과 같이 훈련받고 싶다면 최소한 견습 기사 이상의 실력은 지녀야 할 터. 견습 기사를 이기면 네 뜻대로 해 주마."

백작의 왼편에 앉은 버질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무시했다. 딱 봐도 영양가 없는 놈보단 당장 눈앞의 협상이 더 중요했다.

"견습 기사를 이기면 프론트 홀드의 정예 기사단과 함께 훈련할 기회를 주시는 겁니까?"

"네게 검을 들 자격이 있다면 마땅히 그래야겠지."

백작은 큰 기대를 안 하는 눈치였다.

프론트 홀드의 정예 기사단은 모너가의 핵심인 만큼 견습 기사라 하더라도 4성급을 넘어설 터.

"한 달만 시간을 주십시오."

"고작 한 달 가지고 되겠나?"

냉정한 백작의 눈빛을 마주했다.

당연히 견습 기사와 싸우는 데 한 달이나 필요할 리가 없다. 목숨을 건 전투라면 당장이라도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피의 욕망과 암제를 극한까지 쓰면 견습 기사쯤이야.'

막상 판이 깔리니 욕심이 생겼다.

프론트 홀드의 병력은 모너가의 전력이나 다름없다. 바닥부터 구르면서 병력과 기사들의 마음을 조금씩 얻어 볼 생각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한 달 뒤에 단장급의 기사를 꺾겠습니다. 그때 단장 자리를 주십시오."

"하! 단장과 싸우겠다고? 대담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알 수가 없구나! 좋다. 네 마음대로 해 보거라!"

백작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허락했다.

절대 내가 이길 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겠지만, 아쉽게도 이쪽은 그 귀한 특성이 무려 세 개나 있다고.

백작이 웃는 모습을 잠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백작님, 한 달간 성에 머무르면서 도와 줄 사람이 필요한데, 제가 원하는 병사에게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응? 뭐 그러거라."

백작의 허락에 진득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 * *

한 달은 무언갈 배우기에는 짧은 시간이다.

몸을 만들기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니 고작 한 달 만에 엄청난 결과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넘치는 돈과 시간 그리고 지식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끄으으윽!"

병사들과 같은 훈련장에서 마나를 잔뜩 넣은 마나석을 힘껏 들어 올렸다. 담은 마나만큼 무거워지는 마나석은 더없이 훌륭한 운동기구다.

문제는 주먹만 한 돌을 가지고 낑낑대는 모습에 다른 병사들이 미친놈 보듯 한다는 거지만, 이 또한 걱정 없다.

"다시 하나!"

"하, 하나!"

"하나!"

옆에서 꺽꺽대며 함께 훈련하고 있는 후드웍과 레이나가 있으니까.

모든 무기는 근육의 힘과 탄력에 의존한다.

활은 근력만큼 멀리 나가고 창은 근력만큼 빨리 나간다. 무기의 기교는 근력에서 시작되어 근력에서 끝난다.

심지어 마나로 강화하는 혈맥마저 근육의 크기에 비례하니, 근육이야말로 다다익선(多多益善), 아니 거거익선(巨巨益善)이라 하겠다.

고작 한 달 만에 근력을 어떻게 키우냐고?

"한 세트만 더하고 약 먹자!"

약빨을 세우면 된다. 몸의 자연 치유력을 극대화하는 스팀팩만 있으면 하루 만에 한 달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근육을 찢고 회복하고, 찢고 회복하는 걸 반복하기만 하면 된다.

"아, 안 돼! 공작님 제발!"

근육이 회복하는 동안 겪을 통증을 일시불로 받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것도 다 훈련이야. 입 벌려 약 들어간다!"

"끄아아아악!"

이 또한 훌륭한 고통 내성 훈련이다.

* * *

모너가의 긍지라고 불리는 프론트 홀드의 병사들은 강인하고 야성적이다.

그들을 마주한 몬스터들이 겁을 집어먹을 정도로 잔혹한 사냥꾼인 이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끼아아아악!"

그런 프론트 홀드의 훈련장에는 마나석을 들고 훈련하는 병사들이 가득했다.

매일같이 변하는 이안과 후드웍의 몸을 본 이들이 너도나도 훈련을 따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몬스터의 핵인 마나석이 넘쳐나는 프론트 홀드에서는 뜬금없이 마나석을 이용한 중량 운동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비록 스팀팩이 없는 이들은 이안 일행처럼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는 없었지만 마나를 사용해 극한까지 근육을 단련할 수 있는 새로운 운동법은 훈련장에 퍼지는 새된 비명만큼이나 널리 퍼져 나갔다.

56화

마나석에 깃든 마나가 무게를 늘리고, 온몸의 근육을 끊을 듯 짓누른다. 마나가 빠져나간 탈력감을 뒤로한 채 토하듯 숨을 내쉬며 마나석을 들어 올린다.

"흐아아아앗!"

쉴 수 있는 시간은 오직 근육과 마나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뿐.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회복 과정에서 마나가 깃든 근육은 전보다 훨씬 질기고 억세져 마나석 훈련에도 좀처럼 한계를 느끼기 어렵다는 점이다.

"흐아아앗!"

지난 3주간 소공작과 이 지옥 같은 훈련을 반복해 온 후드웍에게 이 정도의 통증은 익숙했다. 소공작이 있었다면 무게를 늘려야 된다며 한 손에 마나석을 하나씩 쥐여 줬겠지만, 오늘은 휴일이다.

그것도 3주 만에 처음 가져 보는 휴일.

"흐아아아앗!"

오늘의 계획은 분명 완벽했다.

방 안에 들어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

성문이 부서져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지난 3주간 나도 모르게 이 빌어먹을 훈련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설마 운동하지 않으면 잠도 못 자는 몸이 되어 버렸을 줄이야.

지쳐 쓰러지듯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훈련장에는 소공작의 마수에 걸려든 불쌍한 병사들이 가득했다.

"이게 말이 되나?"

고작 3주다.

심지어 소공작의 정체는 누구도 모른다.

그런데도 소공작은 병사들의 일상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휴일이면 술이나 찾던 병사들이 훈련장에 기어 들어와 마나석과 씨름했고, 기사를 포기한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정체도 알 수 없는 검술에 매진했다.

하급 병사들이야 그럴 수도 있지만, 조장도 백인대장도 앞다투듯 훈련장을 찾았다.

"말도 안 되지. 백작님이 시킨다고 훈련할 놈들도 아니고."

첫 한 주는 분명 장난이었다.

중앙에서 왔다는 조사관의 신기한 훈련법을 장난삼아 따라한 병사들이 훈련의 난이도를 깨달으면서 도전 의식을 불태웠다.

누가 더 무거운 마나석을 들을 수 있을까 장난스럽게 시작된 내기가 유행이 되었을 뿐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끝나리라 시작한 유행은 날이 갈수록 퍼져 나갔다. 마나석으로 훈련한 병사가 날린 화살이 보이지도 않는 오크를 맞췄다든가, 입대한지 일 년도 안 된 놈의 창에 마나가 실렸다든가 하는 소문이 들려왔다.

놀랍게도 소문은 진짜였다.

2주가 지나기도 전에 1,000걸음 밖의 몬스터를 잡는 병사들이 늘었다. 정찰 임무 중 오크를 마주한 병사들이 전멸은커녕 오크의 수급을 들고 귀환했다.

이쯤 되자 뚱한 기색을 보이던 백인대장들도 앞다퉈 훈련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믿을 수가 없네."

"뭐가 믿을 수 없어요?"

옆에서 들려온 레이나의 목소리에 투정하듯 답했다.

"저렇게 하고 싶어 난리인 놈들 천지인데, 하필이면 내가 걸려서...."

심지어 부럽다고 쳐다보는 놈들도 있다.

혼자만 좋은 약을 먹는다며 질투하던 놈도 있었다. 스팀팩이 어떤 약인지 모르니 질 좋은 포션 정도로 생각하는 놈들이 태반이다.

"저놈들 목구녕에 스팀팩을 꽃으면 덜 억울할 것 같은데 말이죠. 처음엔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소공작이 지나가듯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고 했으니 그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때가 오면 부럽다고 말했던 놈들을 일일히 찾아가 친히 먹여 주리라.

"풋."

명백한 비웃음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땀에 흠뻑 젖은 레이나가 마나석을 두 손에 꼭 쥔 채 말했다.

"이러고 있다가 도련님이 오시면 더 억울할걸요?"

그 말에 급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푹 쉬라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믿음직한 인간은 영 아니다.

설마 함정이었을까 급히 훈련장을 훑어보며 소리치듯 물었다.

"오늘 안 오신다면서요!"

"글쎄요, 회의가 끝나면 백작님을 뵈러 간다고는 했지만 후드웍 씨처럼 심심해서 오시지 않을까요?"

"무슨 악담을!"

질린 얼굴로 레이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소공작은 훈련에 미쳤다.

악에 받쳐 검을 휘두르고 마나석을 들어 올린다.

몸을 전부 회복시키는 스팀팩이 통하지 않을 때까지 단 한시도 쉬지 않는다.

소공작의 반의반도 못 따라간 자신도 훈련장에 나왔는데, 과연 그 훈련에 미친 인간이 곱게 쉴 수 있을까.

"젠장."

버릇처럼 집어 든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언제 올지 모르겠지만 소공작은 오늘도 분명 나온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훈련이 부족한 모양이라며 내일부터 훈련을 배로 늘렸겠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검을 움직였다.

오늘도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 안심하고 혼자 하라고 하지 않을까.

* * *

"안녕하십니까!"

밝은 인사 소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를 걸었다.

벌써 3주.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살갑게 인사하는 이곳의 병사들은 좀처럼 적응되지 않았다.

경멸도, 비난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반가움으로 건네는 인사는 사람을 간질여 댄다.

"저들도 내가 망나니란 걸 알면 바뀌려나."

숨길 생각은 없었다.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을 뿐.

솔직히 이제는 모르겠다. 곧 백작과의 내기가 끝나고 모두 내가 누군지 알게되면, 그때도 간지러운 인사를 들을 수 있을까.

"애새끼도 아니고 뭔 청승이냐."

짝 소리가 나게 뺨을 때린 후 백작성의 통신실로 향했다. 센트럴 홀드의 보고가 기다리고 있다.

* * *

"도대체가! 일주일에 한 번씩 연락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리나와 모굴 백작의 질책 어린 눈빛을 어색한 웃음으로 넘겼다.

"나도 연락하고 싶었는데 워낙 바빠서...."

"훈련장에서 사신다면서요! 훈련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이런.

밀고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매주 한 번씩 늦던 레이나가 대신 연락한 건가.

"리나와 백작이 있으니까 걱정이 없더라고."

굳이 말하자면 리나와 흑귀대를 믿은 거지만 곧이곧대로 말하지는 않았다. 입에 발린 칭찬에 냉정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리나와 달리 백작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설마 저 덩치로 칭찬에 약한 타입인가.

"후… 일단 알겠어요. 급한 일은 없었고 레이나가 계속 연락해 줬으니까요."

역시 믿을 건 레이나밖에 없다. 만약 센트럴 홀드에 급한 일이 있었다면 레이나가 알려 줬겠지.

"일단 현황 보고부터 하겠습니다. 현재 센트럴 홀드에서 훈련하고 있는 병사는 총 1,300명입니다. 3개의 기수를 모집했고, 1기는 엘프들에게 궁술을, 2기는 마나 호흡법과 무기술을, 3기는 체력 단련을 하고 있습니다."

"1,300? 생각보다 훨씬 많은데?"

"황금 고블린 상단에서 유입된 인원 중 입대 지원자의 비율이 굉장히 높습니다."

하긴, 낯선 땅에서 적응하는 데 병사만큼 좋은 직업도 없겠지.

세상의 어떤 영주도 병사를 차별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 외에 주민 대상 훈련에서 흥미를 느낀 주민의 지원율도 크게 늘었습니다."

"그래?"

"네. 병사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좋아진 모양입니다."

나쁘지 않다.

군벌가인 모너의 힘은 당연히 병력에 있다.

과거 모너를 세운 건 초대 공작과 기사들의 힘이었고, 그 오랜 시간 모너가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 건 외부의 어떤 잡음에도 흔들리지 않을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이랑 외부에서 유입된 인원들은 어때?"

사실 가장 걱정되는 건 이 부분이다.

릴라이가 데려오는 인원은 사회 밑바닥에 있던 이들이다. 길거리를 전전하던 거지들과 은화 몇 푼에 팔린 노예들.

병사에 지원한 이들이야 걱정 없지만, 영지민과 섞여 있는 이들 중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폭력에 노출되었던 이들은 주먹으로 말하는 법이니까.

"그게...."

순간 움찔한 리나가 작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외부 유입 인원으로부터 주민들이 폭력적이라는 신고가 다수 있었습니다. 주민들이 무서우니 격리해 달라는 요청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리나의 말에 헛웃음을 삼켰다.

"뭐?"

"옵솔 쪽 뒷골목에서 활동하던 건달이나 노예병으로 일하던 이들도 시장 바닥에서 맞고 다니는 모양이라...."

"허...."

"덕분에 영지민의 훈련 참여율이 크게 늘었습니다. 전에는 배식 때문에 참가했다면 요즘은 호신용으로 배우는 것 같습니다. 참석한 주민들도 훨씬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걱정할 대상을 잘못 찾은 모양이다.

"이거 영지민들을 걱정하고 있을 게 아니네. 차별당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외부 인원도 훈련에 참여시켜 줘. 영지민들과 섞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테니까."

지금이야 알게 모르게 영지민들과 외부인들이 나뉘어 있겠지만, 함께 훈련을 진행하면 전우애라도 생길지 모르지.

"다른 사항은?"

"엘프 부족이 훈련이 끝난 레인저를 몇 더 보냈습니다. 또한 신성 제국에서 방문 요청을 보냈습니다."

둘 다 찾아가야 되는데.

프론트 홀드가 먼저다.

"일단 아카샤한테 고맙다고 전해 주고 쉔델자르한테 편지 좀 보내 줘. 영지가 안정되는 대로 가겠다고."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기다리고 있던 백작을 바라봤다.

리나 혼자서 보고해도 되는데 이 양반은 굳이 왜 여기 있는 걸까.

"뭐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눈이 마주친 모굴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영지는 별일 없다."

고작 3주다.

별일이 있을 리가....

"소문이 돌고 있다."

별일이 있을 수도 있나 보군.

"소문이요?"

"거지와 노예를 들이고 있으니 이상한 소문이 퍼진 모양이다."

슬쩍 리나를 바라보자, 그녀가 설명했다.

"영지에 유입된 화전민 몇몇이 소문에 대해 떠드는 걸 들었습니다. 새롭게 부임한 모너가의 가주가 인간을 데리고 인체 실험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합니다."

"하!"

순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내 악명이 모너의 명성만큼이나 커진 모양이다.

"젠장. 날 욕하는 건 아무 상관 없지만 모너가 욕먹는 건 억울한데."

당장 외부에서 인력을 구해 와야 하는 만큼 이런 소문은 치명적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너는 고작 소문 따위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인체 실험이 벌어진다는 마굴에 걸어오려는 사람이 있을까?"

"오히려 소문이 퍼지면서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소문을 듣고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고?"

"당장 하루를 살아남기 어려운 사람도 많으니까요. 혹시 몸이라도 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화전민과 전쟁 난민들이 모너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덤덤한 그녀의 목소리에 쓴웃음을 삼켰다.

인체 실험에 자원할 정도로 삶의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라.

꽤 모너와 어울리는 이들 아닌가.

"다행이네. 영지민이 늘어나는 만큼 수입을 늘려야 해. 릴라이한테 약초꾼과 치료사들을 더 빨리 찾아 달라고 전해 줘."

"네, 알겠습니다."

"백작님은 병사 훈련에 더 신경 써 주십시오."

다른 영지라면 절대 불가능할 일이지만, 모너에서는 무려 마스터급의 검사가 훈련을 지도한다!

모굴도 영지민들과 훈련하는 걸 나름 즐기는 모양이고.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혹시 급한 일이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주십시오."

아쉬운 얼굴로 인사를 전하는 백작과 리나를 뒤로하고 연락실을 빠져나왔다.

"1,300이라...."

내가 없는 동안에도 모너는 성장하고 있다.

"나만 성장하면 돼."

휴식을 뒤로하고 훈련장으로 발걸음을 올린 순간.

때앵! 때앵! 때앵!

몬스터의 침략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57화

때앵! 때앵! 때앵!

공습경보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뭐지?'

몬스터의 공격이야 지난 3주 동안 수도 없이 겪었다. 프론트 홀드는 몬스터의 침입에 대비한 요새라 어지간한 공격에는 종조차 울리지 않는다.

"훈련보다 백작을 먼저 만나야겠는데?"

창밖을 보니 급히 뛰어가는 수십의 병사가 보였다. 휴식 중인 병사들까지 소집할 정도라면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 * *

백작을 찾아간 사령부에서는 이미 수십의 지휘관이 모여 회의가 한창이었다.

"요새 밖에서 싸우는 건 절대 불가능합니다! 요새 밖에서의 전투는 자살행위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백작의 왼편에 앉은 젊은 남자의 말에 오른쪽에 있던 중후한 노인이 끼어들었다.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나! 당장 이곳으로 향하는 오우거만 기십인데 수성을 하자고? 성문이라도 무너지면 어쩔 텐가!"

"프론트 홀드가 고작 오우거에게 무너질 리가 없지 않습니까!"

"만약을 말하자는 거네, 만약을! 오우거만이라도 처리해 놔야 오크의 침략에도 흔들리지 않겠지!"

"늙으면서 느는 건 겁밖에 없다더니만! 오우거가 그리 무서우면 직접 나가서 싸우십시요! 단 한 명의 기사도 사지로 몰 수 없습니다!"

남자의 말에 노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근데 이 새끼가? 너 내가 업어 키웠어, 임마!"

"그 말이 왜 여기서 나옵니까? 나이를 그렇게 드셨으면 좀 모범을 보이십시요! 누가 밖으로 나가던 죽은 목숨 아닙니까? 언제부터 모너가 전우를 버렸습니까?!"

점점 커지는 음성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만."

양쪽 모두의 의견이 타당했다.

화살은 오우거의 두꺼운 피부를 뚫지 못한다. 기사만 오우거를 상대할 수 있다는 건 상식이지만, 상식을 벗어나는 마물의 숲에 있는 오우거는 기사 서넛을 상대하고도 남는다.

문제는 그런 오우거와 오크가 동시에 남하하고 있다는 것.

지금 당장 기사들이 출진한다고 해도, 오우거와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오크가 퇴로를 막을 게 분명했다.

성공적으로 오우거를 사냥하고 나서 돌아온다고 해도, 일단 오크가 몰려오기 시작하면 수성이 끝나기 전까지는 성문을 열 수 없다.

"흐음...."

백작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고민에 빠졌다.

피해 없이 오우거와 오크를 동시에 막으려면 자신이 직접 움직여야 하지만....

"'놈'은?"

"테헤키는 이미 영역을 벗어났습니다."

그렇겠지. 놈이 이런 기회를 포기할 리가 없으니까.

"개 같은 놈."

백작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고블린 왕 테헤키는 자신을 그리고 이 요새를 증오한다.

그를 따르는 고블린이 있건 없건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프론트 홀드의 백작을 죽일 수 있는 조금의 기회만 있다면 언제나 나타나 창을 휘둘렀다.

트롤 전쟁에서 백작을 막아선 것도, 나가 정찰대에 숨어서 백작을 기습해 기사단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트린 것도 놈이었다.

"놈은 분명 오우거와 함께 나타나겠지."

영악한 놈은 기사단만으로 오우거를 사냥하고 제시간에 귀환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백작이 나서는 순간을 기다리며 창을 갈고 있을 터.

그러나 도무지 다른 방법이 없다.

"…나와 기사단 전원이 나서서 오우거를 사냥하고 복귀한다. 복귀 실패 시 수성을 포기하고 전면전으로 돌입하지."

"아버지!"

"사령관님!"

"절대 안 됩니다!"

백작의 결정에 모두가 경악한 순간.

"내가 가지."

조용히 듣고 있던 이안이 탁자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 * *

답답한 인간들.

어지간하면 넘어가려고 했더니 뭐?

수성을 포기한다고?

어깨 위에 달린 건 장식인 모양이지?

"백작, 상황이 상황이니 내기를 바꾸시죠. 병사 몇 명을 데리고 오우거를 사냥하고 오겠습니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이안을 향해 벼락처럼 떨어졌다.

"만약 성공하면 내게 기사단장의 직위를 주십시요."

말도 안 되는 주장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흰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객기 부리다 뒤지지 말고 찌그러져 있거라!"

중앙에서 온 정체도 모르는 조사관 따위가 중요한 회의에 나선 게 어지간히도 기분 나빴던 모양인지, 회의장의 모두가 갑자기 나선 조사관을 향해 분노와 멸시를 숨기지 않았다.

'뭔가 고향에 온 기분인데?'

기꺼운 마음으로 따가운 시선을 전부 무시하고 백작을 바라봤다.

누가 뭐라고 씨불이던 결정은 백작이 내릴 테니.

"여기서 전투가 벌어지면 늦습니다. 오우거와 오크가 합류하지 못한 지금 오우거를 사냥해야 합니다."

다행히도 백작의 눈에선 조금의 멸시도 느껴지지 않았다.

* * *

생각에 잠긴 백작은 눈을 감고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며 머릿속으로 전투를 그렸다.

오우거를 상대하기 위해 직접 나선다고 하더라도 테헤키가 나서는 순간 전황이 불리해진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자신과 수십의 기사가 죽을지도 모른다.

'오우거를 격파할 수 있는 병력을 지금 보낸다면....'

오우거 한 마리를 잡는 데 필요한 기사는 최소 3명. 기십의 오우거가 있다고 했으니, 최소한 일개 기사단이 투입되어야 한다.

'그러면 오크와의 싸울 병력이 비겠지.'

그러니 기사단은 보낼 수 없다.

적의 수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병력을 나누는 건 멍청한 짓이니까.

"몬스터를 본 적 있나?"

"본 적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장담하건데, 저보다 몬스터를 잘 아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그 허무맹랑한 주장에 소공작을 바라봤다.

우스운 일이다.

평생을 센트럴 홀드에서 보낸 눈앞의 햇병아리는 고블린 면상만 봐도 오줌을 지릴 게 분명하건만, 놈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말도 안 되는 기대가 갔다.

고작 3주 만에 눈에 띄게 달라진 놈의 기세 때문일까 아니면 공작을 잘 부탁한다는 미련한 친우의 편지 때문일까.

머리를 털며 잡생각을 정리한 뒤 차가운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불가(不可)."

예상했다는 듯 소공작은 차가운 거절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다만, 아쉽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을 뿐.

"상대 병력의 수도 모르면서 섬멸 작전을 계획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숲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심상치 않다.

수십 년간 움직이지 않던 오크가 구역을 벗어났다. 수백 년간 단독생활을 하던 오우거가 무리를 꾸렸다.

숲에 바람이 불 땐 납작 엎드려 상황을 지켜보라던 선대 백작의 말처럼, 지금은 납작 엎드릴 때다.

"대신 정찰을 나가 놈들을 직접 보고 오거라."

"정찰이요?"

"거의 모든 척후조의 연락이 끊겼다. 침입에 대한 보고를 받은 게 기적이라고 봐야겠지."

순간 심드렁한 표정을 하던 이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척후병이요?"

"그래. 일백의 척후병 중 단 세 명밖에 귀환하지 못했다."

"이런 젠장...."

그제야 소공작의 뻔뻔한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라고 생각한 순간, 그의 입에서 불길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오크 전쟁 군단...?"

전쟁 군단에 대해 알고 있다니, 아무리 허수아비 신세였다고 한들 공작가의 핏줄이란 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소공작을 향해 말했다.

"그걸 확인하고 오거라."

그동안 요새는 전쟁을 준비할 테니.

* * *

복도를 걷는 내내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젠장, 젠장, 젠장!'

여태까지는 별걱정 없었다.

모너가의 몰락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앞으로 10년. 게임이 시작되는 순간까지는 안전할 거라고 확신했다.

'프론트 홀드가 혼자 오크 전쟁 군단을 막았다고?'

그럴 리가 없다.

모굴 백작이 여기에 있다면 모를까, 한 종족을 대표하는 군단의 힘을 고작 한 명의 마스터가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최소 수백, 재수 없으면 수천이 죽는다.'

최악의 경우 요새를 버려야 할 수도 있다.

모너의 전력이 몰려 있는 요새를 버리고 수백, 수천의 사상자가 생길 수 있는 전투라니.

"이 빌어먹을 돼지 새끼들이...!"

내 소중한 병사와 기사는 안 된다.

미래 그 자체인 요새는 더더욱 안 된다.

"씹어 먹어 주마."

믿을 건 역시 튼튼한 몸뚱이뿐이다.

* * *

"미친놈들."

앞에 선 열 명의 병사를 바라봤다.

후드웍을 포함한 병사들의 눈빛에 이글거리는 분노와 광기가 엿보였다.

"우리는 죽으러 가는 게 아니다."

동료가 죽었다는 소식에 찾아온 놈들은 하나같이 죽음을 각오한 표정이었다.

"들었겠지만, 이번 임무는 척후다. 너희가 누구의 복수를 하기 위해 왔건, 상황을 봐서 아니다 싶으면 바로 도망칠 거야."

내 말을 듣기는 한 건지, 병사들은 새로 지급받은 활을 더 세게 움켜잡았다.

고개를 푹 숙인 후드웍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냥 먼저 간 씨벌넘들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성벽 위에서 죽으면 몰라도, 요새를 벗어나 죽으면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다.

"그래그래."

물론 진짜 넋을 기리기 위해 모인 게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다.

선발대가 죽은 위치까지 갈 일은 없으니, 실종된 병사들의 얼굴은 볼 수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동료를 찾아 나서는 멍청이들에게 모르는 척 말했다.

"가서 시원하게 욕이라도 하고 오자고."

"예!"

* * *

식사가 끝나자마자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시간이 생명인 척후조인 만큼 반나절도 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출발 준비를 서두르던 중, 버질과 세명의 기사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뭔가 재수 없는 예감이 들어 고개도 들지 않고 군장을 확인하며 말했다.

"바빠."

"저도 바쁩니다."

"안 데려가."

"저도 멍청한 작전에 함께하기 싫습니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영 재수 없는 상판을 바라봤다. 기사의 고집이 잔뜩 느껴지면서도 미남인 게 재수 없게 생겼다.

"그럼 꺼져."

물론 꺼질 생각이라면 출동 직전에 찾아오지도 않았겠다만.

"이번 임무에 동행하라는 아버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젠장."

세상 귀찮은 표정으로 막판에 붙은 혹덩이를 노려봤다. 혹덩이가 4개라니.

"제가 안전하게 지켜드릴 테니 임무에만 집중하십시오."

심지어 이 혹덩이는 명령 체계가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아무리 디버프가 있다고 해도 그렇지, 임무에서까지 불신이 번지면 곤란하다.

내가 왜 신분도 밝히지 않고 병사들을 모았는데.

'지금 확실히 정리해 두지 않으면 급할 때 위험하겠지.'

결심과 동시에 손이 움직였다.

허리에 찬 검이 뽑힘과 동시에 지난 한 달간 연습한 귀왕의 살수(殺手)가 검을 통해 그려졌다.

종으로도, 횡으로도 베지 않고 급소를 향해 일직선으로 움직이는 검.

경악한 버질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기도 전에, 내 손의 검이 버질의 목에 닿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제야 검을 잡았지만 뽑지도 놓지도 못한 채 눈동자만 하염없이 흔들렸다.

역시 선빵 필승.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이번 척후조의 조장은 나다. 불만이 있으면 꺼지든가, 아님 여기서 뒤지든가."

검 끝이 버질의 목을 조금 파고들었다.

놈이 가주 회의 때 소리쳤기 때문은 아니다.

"어떤 게 마음에 들어?"

얼굴을 구긴 버질이 놀란 기사와 병사들을 차례로 본 후 눈을 감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그 정도로 봐줄 줄 알았나?

"말로 해, 말로. 잘 굴러가는 혓바닥 두고 쇼하지 말고. 이번 임무는 전적으로 내가 지휘한다. 동의하나?"

백작의 아들이면서 5성급 기사인 버질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일 것이다. 누구나 그를 인정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을 테니.

악다문 버질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한숨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겠으니 검 좀 치워 주십시오."

"그래."

그제야 검을 내리고 버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거 고작 정찰병으로 쓰기는 아까운 막내가 조에 들어왔네!"

내 마음속 임무가 방금 바뀌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버질이 씁쓸하게 웃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그럼! 남은 시간 동안 잘해 보자고."

5성급 기사 하나에 4성급 기사가 셋.

이런 고급 인력을 쓰기에 정찰은 너무 하찮은 임무가 아닐까.

'오우거 한 마리씩… 한 열 마리만?'

이미 생각해 놓은 방법도 많지만, 5성급 기사만큼이나 유용한 패는 없었다.

'잘 쓰고 돌려 드리겠습니다, 백작.'

분명 백작도 이걸 원했을 것이다.

분명.

58화

"잘 다녀오거라."

지금이라도 멈춰 세워야 하는 건 아닐까.

배웅하는 백작의 얼굴에 미련이 어른거렸다.

아무리 기사가 있다고 해도 수십의 척후조가 실패한 임무에 나서는 게 영 불안한 모양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백작을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댁 아들만큼은 살려 보내 줄 테니."

흠칫한 백작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평소와 똑같은 얼굴이었지만, 덤덤한 척하는 얼굴 속 염려와 걱정을 모를 리가 없다.

제아무리 모너가를 지키는 요새의 주인이라 한들 아들 걱정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백작을 향해 고개 숙이자 성큼 다가온 백작이 가볍게 몸을 끌어안았다.

'이 인간은 제 아들 냅두고 왜 또!'

불편한 포옹이 끝나자, 백작은 별말 없이 몸을 돌려 성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백작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 포옹은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하여튼, 죽음을 벗으로 두고 살아가는 요새의 주인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말랑말랑한 인간이다.

* * *

일행은 침묵 속에서 걸었다.

동료의 복수를 하겠다던 병사의 결의도, 마물의 숲을 나선 기사의 각오도 숲의 어둠이 집어삼켰다.

"기괴하군."

마물의 숲에 들어온 지 5일.

숲은 말 그대로 기괴했다.

마나 밀도가 터무니없이 높아 공기는 끈적하고 마나를 머금은 나무는 단 한 줄기의 빛도 땅에 허락하지 않았다.

숲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불청객을 경계하는 듯, 숲에서는 불길한 비명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더 나가면 첫 번째 개활지가 나옵니다. 초대 공작님이 코볼트를 내쫓고 얻어 낸 땅입죠."

"그런데 왜 요새를 개활지로 옮기지 않았지?"

"기사가 아니면 숲의 나무를 베어 낼 수도 없으니까요. 숲을 지나는 통로를 만들 수 없으니 개활지를 포기한 거죠."

마나를 머금은 나무는 그 자체로 성벽이나 다름없다.

"숲을 경유하는 건 불가능한가?"

"저희가 건너온 숲은 주인이 없지만 그 좌우에는 고블린과 놀(Gnoll)이 있습니다. 놈들의 영토 끝이긴 하지만 통행로로 쓰기에는 위험합니다."

"놈들을 토벌하거나 숲을 개간해야 한다는 건가."

이제야 초대 공작이 개활지를 포기한 이유를 알겠다.

"놈들을 토벌하려면 양쪽을 동시에 상대해야 합니다."

고작 무리가 아니라 영토를 일군 두 종족을 한 번에 몰아내는 일이다. 얻을 수 있는 이익은 한없이 작고 감당해야 하는 위험은 터무니없이 많다.

땅이라면 그 어떤 가문보다 많은 모너가가 굳이 개활지 하나에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초대 공작의 목표는 마물의 숲을 정복하는 게 아니라 틀어막는 거였을 테니까.

"어찌 됐든 상관없으니 하늘 좀 봤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횃불을 든 병사가 한탄하며 하늘을 바라봤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숲에서 밤낮조차 모른 채 걷길 5일.

긴장을 놓을 수 없는 행군에 병사들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야영을 준비해라."

"예? 조금만 더 가면 숲을 벗어날 수 있는데요?"

사방이 트인 개활지가 야영에도, 경계에도 훨씬 좋겠지만....

"이미 다른 척후대가 실패한 임무인 만큼 우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움직인다."

개활지에 언제까지고 주인이 없다고 믿을 수는 없다. 영역 싸움에서 패배한 몬스터가 자리를 잡았을 수도 있고, 휴식을 취할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만약 매복이라도 있으면 차라리 이곳이 더 안전하겠지."

그 말에 후미에서 따라오던 기사들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최악을 가정하는 건 로스트 크로니클의 기본이다.

99%의 일격도 실패하는 게임에서 방심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병사들은 야영지를 꾸리고 기사는 지금부터 경계를 시작한다."

"네!"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한 병사들을 바라보다 습관처럼 자리에 앉아 주변으로 마나를 퍼트렸다.

지난 5일간 익숙해졌는지 첫날보다 훨씬 더 넓은 숲이 느껴졌다.

'만약 게임이라면 딱 지금쯤 적이 나타날 텐데....'

숲을 벗어나기 직전, 혹시나 하는 기습에 대비해 야영을 준비하고 경계병까지 세워 방심할 수밖에 없는 순간.

로스트 크로니클은 플레이어가 가장 안심한 순간을 노릴 터.

수백 번의 게임 속 경험이 머릿속에서 요란하게 경종을 울려 댔다.

* * *

"단장, 이건 진짜 너무한 거 아닙니까?"

테인의 말에 버질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참아. 돌아갈 때까지는 명령에 따르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단장만 매일 경계를 선다니, 말도 안 됩니다! 도대체 병사들은 왜 경계를 안 서는 건데요?!"

그의 말에 슬쩍 병사들을 둘러봤다.

어느새 야영 준비가 끝났는지 병사들은 활과 화살을 제외한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조장한테 생각이 있겠지."

"생각은 무슨! 분명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당장 전투가 벌어지면 저 녀석들을 지켜야 할 건 우린데 우리만 경계를 선다뇨!"

버질은 테일의 불평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이번 여정은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되지 않았으니까.

'아버지께서 큰 실수를 하셨어.'

평생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의심한 적 없었건만.

이번 임무를 저 녀석에게 맡긴 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설마 병법의 기초도 모를 줄이야.'

위급 상황에 대비해 기사의 체력을 낭비하지 않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인데, 소공작은 기사들에게 단 한 순간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4명의 기사가 돌아가면서 경계 근무를 서고 야영 중에도 무장을 풀지 못했다.

갑옷을 입고 침낭에 들어가 쪽잠을 청하며 5일을 버텼다.

'심지어 조금만 더 가면 개활지인데 횃불 없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곳에서 야영하다니.'

야영은 밝고 사방이 트인 곳에서 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저게 모너가의 소공작이라니...."

"씁!"

테일의 말에 버질이 쌍심지를 치켜뜨며 그를 노려봤다.

"입 밖에 꺼내지 말랬지!"

절대 저 입 싼 녀석에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임무가 끝나기 전까지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면 정말 혀를 뽑아 버린다."

"헤헤, 무슨 말을 그리 험하게 하십니까."

엄포에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는 놈을 보며 혀를 찼다.

도대체가 기사의 중후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녀석이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경계나 제대로 서라."

"횃불 없이 한 치 앞도 못 보는 숲에서 도대체 뭘 본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테일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전방을 주시했다.

"빌어먹을 마물의 숲."

무겁고 끈적한 공기.

비명처럼 울려 퍼지는 바람 소리.

바닥에 박아 놓은 횃불 너머 전부를 잠식한 어둠.

정말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는 곳이다.

검 손잡이를 움켜잡은 채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느껴지는 어둠을 하염없이 경계했다.

일렁이는 어둠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아 단장을 바라본 순간.

"전투 준비!"

검과 화살을 챙겨 나온 소공작이 자신을 밀치며 외친 고함과 시위를 벗어난 화살의 파공음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 * *

『암제』의 특성을 가진 이상 어둠은 문제 되지 않는다.

마나에 몬스터의 기척이 읽힌 순간,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검을 움켜쥔 손이 미친 듯이 떨렸다.

거칠게 울어 대는 심장 때문에 다급하게 움직이는 기사들의 발걸음도, 병사들의 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겨도 침착을 유지할 거라 장담했건만.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억누르기도 벅찼다.

경계를 서던 기사들로부터 고작 10걸음.

"크르륵?"

기습을 준비하던 고블린들이 어둠 속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콰득!

검이 고블린의 기름진 목을 꿰뚫는 감각이 생생히 느껴졌다.

아....

미친놈처럼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간다.

이제 고작 한 마리.

남은 건 마흔여섯 마리.

쓰러지는 고블린을 피하면서 다음 고블린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달려갔다.

독을 쓸 작정이었는지 얇은 대롱을 움켜쥐고 있던 녀석은 대롱을 입에 물기도 전에 쓰러졌다.

옆에 있던 고블린을 슬쩍 바라본 뒤,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이미 대비를 마친 일행들이 전투를 시작했을 터.

내가 해야 할 일은 당황한 고블린들이 진형을 이루지 못하도록 최대한 혼란을 주는 것뿐.

다른 고블린의 두 배 이상은 되는 덩치의 홉고블린을 향해 달려 나갔다.

제 몸만큼이나 거대한 검을 들고 있던 녀석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검을 휘둘렀다.

후웅!

매서운 바람 소리와 함께 몰아치는 검을 피해 바닥을 굴렀다.

매력적인 상대지만, 지금은 아니다.

바닥을 차 모래를 뿌린 뒤, 다시 고블린 무리를 돌파하며 나아갔다.

콰득!

곧게 뻗은 일 검에 고블린의 목이 떨어지고.

후웅!

쉽게 죽이기 어려울 것 같은 놈들은 일행에게 양보한다.

'크흐흐....'

어느새 몸을 적신 더러운 피에 몸이 달아올랐다.

[어둠 속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특성 『암제』가 유리한 발걸음으로 당신을 이끕니다.]

[몬스터의 혈액에 특성 『피의 욕망』이 반응합니다. 공격력과 공격 속도가 증가합니다. 광기가 침식합니다.]

[몬스터와의 전투에 『거인왕의 투쟁욕(鬪爭慾)』이 반응합니다.]

잠잠하던 특성들이 마땅한 적과 전장에 화답하듯 꿈틀거리자, 아득할 정도의 고양감이 밀려왔다.

"흐아아아!"

몸속의 마나를 움직여 검을 찔러 댈 때마다 한 구의 시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도무지 못 믿겠다는 듯 제 목을 움켜잡고 컥컥대는 놈을, 앞을 막고 선 홉고블린을 향해 밀쳤다.

"컥, 컥, 컥!"

목을 움켜쥔 고블린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지만.

콰직!

홉고블린의 거대한 검이 인정사정없이 고블린의 두개골을 부쉈다.

그 잠깐의 틈을 타 놈을 지나쳐 더 깊숙한 곳을 향해 달려 나갔다.

뒤에 있는 일행에 대한 걱정도, 사방을 막고 불길한 울음소리를 토해 내는 고블린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그저 발이 가는 대로 고블린 진형을 뭉개며 나아갈 뿐.

"하아아앗!"

드디어 저 멀리 다른 고블린보다 한 뼘은 더 작은 고블린이 보였다.

기껏해야 동물 가죽이나 기워 입은 다른 놈들과 달리 전신을 로브로 가린 구부정한 고블린.

로브 속 몸에는 빈틈없이 들어찬 문신이 놈의 마나에 반응해 발광하고 있으리라.

'고블린 주술사!'

기습에만 당하지 않으면.

독에 기사를 허무하게 잃고 병사들이 활을 들기도 전에 홉고블린이 난입하지 않는다면.

어둠 속에서 병사들을 유린하는 고블린 주술사를 막을 수만 있다면.

빌어먹을 고블린들을 만날 때마다 얼마나 기도했던가.

기습은 막았고, 고블린의 대롱은 완전 무장을 유지한 기사들의 갑옷을 뚫을 수 없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병사들의 활은 이미 고블린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제 변수라고는 네놈뿐이구나.'

육체 능력만 가진 다른 고블린과 달리 마나를 이용해 주술과 저주를 부리는 주술사는 악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몸을 훤히 드러낸 이곳에서 주문조차 완성하지 못한 주술사가 뭘 할 수 있을까.

"이거나 먹고 꺼져라!"

콰드드드득!

있는 힘껏 날린 검이 놈을 향해 비수처럼 날아갔다.

59화

"저 미친 새끼가!"

버질은 자신을 밀치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 소공작을 향해 욕을 내뱉었다.

"기사단!"

기사단을 소집하는 그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소공작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맞을까.

과연 저 어둠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소공작을 구하려면 당장이라도 조장을 따라 기사단과 함께 달려야 한다.

아니, 지금이라도 요새로 돌아가야 한다.

저 미친놈을 믿고 요새를 나선 것부터가 문제였다.

언제고 분명 자신과 모너를 위험에 빠트릴 놈이다.

지금 죽는 게 차라리 좋은 일일지도 모르지.

함께 요새를 나선 세 명의 기사가 주변에 모인 걸 확인하고 귀환을 명령하려던 찰나.

소공작을 졸졸 따라다니던 하녀가 흉흉한 철퇴를 움켜쥔 채 제 주인을 따라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이런!"

어둠이 나풀거리는 하녀복을 집어삼켰다.

"척후대는 조장을 따라 달려라!"

"연습한 대로만 하면 된다!"

그 뒤로 활과 화살통을 짊어진 병사들이 겁도 없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이런! 멈춰!"

달려 나가는 병사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지만, 어둠을 향해 나선 병사 중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적이 보이면 주저하지 말고 활부터 날려라! 조장의 명령대로 우린 검이 아니라 활로 싸운다!"

정찰조를 집어삼킨 어둠 속에서 간간히 12조 조장의 외침만 울려 퍼질 뿐.

"젠장!"

이미 퇴각은 늦었다.

병사들을 버리고 돌아가는 게 옳은 결정이겠지만, 고작 기사 4명이서 이미 지난 마물의 숲을 통해 안전하게 돌아갈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기사단! 전원 돌격!"

버질의 명령에 그의 곁에 선 세 명의 기사가 버질과 함께 어둠을 향해 내달렸다.

* * *

모너의 기사는 두려움을 모른다.

우리는 베어 내고 썰어 내어 기어코 증명한다.

용맹은 모너의 자랑이요, 우리가 모너의 기둥이니.

우리는 실패도, 두려움도 모른다.

분명 그럴 터였다.

"조장을 구할 때까지 멈추지 마라!"

단장의 명령에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검을 애써 무시하며 계속해서 달렸다.

성벽 위에서 죽인 몬스터의 수만 기백이 넘을 텐데 뭐가 이리도 두려운 건지, 테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빌어 처먹을.'

앞서 나가는 소공작과 달리 뒤따르는 기사들을 가로막는 적은 없었다.

아니. 소공작이 덩치 큰 홉고블린이나 멀리 있는 고블린들은 죽이지 않았으니, 기사를 가로막을 적은 있었다.

핑! 핑! 핑!

단지, 도대체 뭘 처먹은 건지 눈을 부라린 병사들이 활시위에서 손을 놓을 때마다 앞의 적들이 차례로 쓰러졌을 뿐.

'홉고블린을 화살로 사냥할 수 있던가?'

아니면 화살이 대가리를 꿰뚫어 쓰러지는 저놈이 홉고블린과 닮은 큰 고블린일까 하는 멍청한 생각이나 하며 쉬지 않고 뛰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은 미칠 듯 뛰어 대고, 검을 잡은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렸지만, 소공작을 향한 뜀박질은 멈추지 않았다.

콰직!

"기야악!"

허공을 가르며 눈앞에 떨어진 살덩이에 계집애 같은 비명이 절로 나왔다.

"씨발, 이게 도대체 뭔!"

그제야 저 멀리 앞서 나간 하녀가 보였다.

후웅! 콰직!

철퇴를 휘두를 때마다 그녀의 눈에서 새빨간 광망(光芒)이 쏟아지듯 출렁거렸다.

누가 저 모습을 보고 귀여운 얼굴로 물을 건네던 그 하녀를 떠올릴 수 있을까.

"테일!"

멈춰 선 그를 향한 불호령에 테일이 다시 뜀박질을 시작하며 대답했다.

"네, 네, 갑니다!"

철퇴를 휘둘러 길을 내는 하녀도, 그 바로 뒤에서 홉고블린을 활로 잡아 내는 병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 모너가는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 * *

날아간 검에 주술사의 목이 바닥에 떨어지는 걸 보고 나서야 다리를 멈췄다.

"아!"

개운하다.

터질 듯 박동하는 심장이, 격양된 호흡이, 전신을 순환하고 있는 마나가 살아 있음을 알렸다.

바닥에 떨어진 조잡한 검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눈앞을 가로막는 고블린은 모조리 죽였다.

홉고블린도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한 번에 죽이지 못한다면 다시 한번 검을 내지를 뿐.

눈앞을 막아선 고블린이 쓰러지면 그다음 놈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분명 처음 본 놈들에게 느껴지는 이 증오와 분노가 수없이 죽었던 게임 속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인간으로서 느끼는 종(種)에 대한 경계심인지조차 불분명했다.

놈들의 혈액으로 땅을 뒤덮어 이 증오를 풀어 낼 뿐.

마지막 홉고블린을 쓰러뜨린 순간.

"키에에엑!"

"키엑, 키엑, 키에엑!"

전장에 처절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

살아남은 고블린들이 앞다퉈 검과 대롱을 던지고 바닥에 엎드렸다.

"키엑, 키에에에엑!"

바닥에 엎드려 두 손을 위로 치켜든 놈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항복한 모양새였다.

"하!"

고블린이 항복이라고?

"놈들이 항복했다! 척후조는 놈들을 포박해라!"

저 멀리서 놈들을 포박하라는 버질의 외침에 활을 든 병사들이 어정쩡하게 멈췄다.

갑자기 시작된 전투에 챙기지 못한 포승줄을 가져와야 할지 아니면 자리를 지켜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모양이다.

후읍!

폐 속 가득 공기를 밀어 넣어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정찰대! 고블린을 죽이고 집결!"

병사들이 고블린들을 처리하는 걸 확인하고 있으니 묘한 표정을 한 버질이 다가왔다.

"늦었네."

이게 게임이었다면 정찰대 전원이 이안을 버리고 퇴각했겠지.

그래서 기사단에는 별다른 기대가 없었다.

버질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까.

"전의를 상실한 놈들을 사냥하는 건 화살 낭비입니다. 대화가 통할지도 모르니 살려서 심문했어야 합니다."

왜 이놈은 뚫린 주둥이로 똥을 쌀까.

"멍청한 새끼, 검이나 들어."

내가 가져온 검은 이미 부러진 지 오래라 바닥을 뒹구는 조잡한 검을 주워 들며 말을 이었다.

"나랑 너만 먼저 돌아간다. 다른 놈들한테는 여길 지키라고 말해."

"네? 저희만요?"

왜 버질이 입을 열 때마다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걸까. 멍청함에 알레르기가 있나?

"임무 중 실종 시 지침은?"

"예? 그야 실종자를 찾을 때까지 탐색합니다."

"그럼 찾지 말라고 말하고 와."

"네?!"

쯧. 한 번에 좀 알아들으면 좋으련만.

눈은 또 왜 떨리는데? 둘만 갔다가 내가 검이라도 휘두를까 봐?

"고블린은 영악하지만, 유약하진 않아."

"예, 예?"

"고블린이 항복했다는 건, 둘 중 하나지. 풀려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든가, 아니면 야영지에 숨은 복병이 있든가."

여전히 남은 고블린 잔당을 처리하느라 바쁜 다른 사람들은 천천히 야영지로 향하는 우리에게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았다.

"어떤 경우든...."

방금 전까지 느껴졌던 고양감과 흥분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을 촘촘히 막아선 나뭇잎을 잘라 내면 푸른 하늘이 반겨 줄까?

"놈들이 우리의 죽음을 확신한다는 거야."

머릿속으로 과거의 경험을 되짚으며 경우의 수를 헤아렸다.

'운이 좋으면 오크와 오우거에게 죽길 바라는 걸 수도 있고. 아님 기습 부대가 더 있으려나?'

일행은 절대 약하지 않다.

병사가 10명, 4성급 기사 셋과 5성급 기사 하나. 거기에 레이나와 나까지.

이 정도 부대를 전조도 없이 전멸시키려면....

"고블린 왕이 친히 여기까지 행차한지도 모르지."

그 말에 버질이 우뚝 멈추며 말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이상 테헤키는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요."

별 쓰잘데기없는 확신이다.

그걸 깨달은 버질의 얼굴도 굳어 갔다.

적이 내 생각대로 움직여 줄 거라는, 그야말로 근거 없는 믿음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만약 놈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면, 살아 돌아가기는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버질이 그렇게 말하며 검을 움켜쥐었다.

"혼자 또 무슨 소설을 쓰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린 절대 안 죽어."

뭐, 최악의 경우라도 이놈 한 명 정도는 살려 보낼 수 있겠지.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 *

발소리마저 죽인 채 걸음을 옮겼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설령 오우거가 있다고 해도 들키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그렇게 야영지로 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일렁거리는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젠장.'

불빛을 발견한 두 사람의 발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모닥불인가?'

불빛을 발견하자마자 검을 뽑으려는 버질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흔들며 입을 움직였다.

-조심.

마수가 들끓는 마물의 숲에서 모닥불을 피운다는 건 자살행위다. 아니면 그 들끓는 마수를 신경 쓰지 않을 정도의 강자거나.

'아무래도 감이 안 좋아.'

버질의 손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발을 뒤로 옮겼다.

적의 규모만 확인하고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모닥불을 본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적이 누구든 퇴각한다.

'몬스터가 정찰대를 노리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귀중한 정보다.

저 모닥불을 피운 놈들이 뭐 하는 놈들이던 간에 기사단에 가까운 전력을 보유하고 있을 터.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친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순간, 뇌를 파고드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오거라."

걸죽하고 낮은 음성에 반사적으로 버질을 잡아 뒤로 던지고 그 자리에 멈춰서 수신호를 보냈다.

-퇴각.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버질이 도망칠 때까지 그를 등지고 서 있는 것뿐.

미련하게 움직이지 않는 버질을 향해 몇 번이고 수신호를 보내자, 뒤에서 느껴지던 기척이 사라졌다.

두 사람 다 도망치는 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시간이라도 벌어 줘야겠지.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모닥불을 걸어가며 속으로 생각했다.

밀려오는 후회에 변명하듯 되뇌었다.

'이게 최선이야.'

정말 최선이었을까.

버질을 남기고 내가 원군과 함께 돌아왔으면?

버질과 함께라면 이길 수 있는 상대라면?

병사와 레이나가 돌아올 때까지 버텼다면?

'멍청한 놈. 그럼 다 죽었겠지.'

그러니까 내가 남는 건 가장 이성적인 선택이었다.

가장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건 나니까.

'버질이 죽었다면 백작이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

복수한답시고 날뛰다가 요새가 무너지면 모너가는? 흑귀대는? 내가 없어도 흑귀대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백작과 요새의 병사들이 없으면 모너도 없다.

'그래, 이게 최선이야.'

내가 안일했다.

최악의 최악을 가정해 당장 퇴각했어야 했다.

후방의 적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말고 나와 레이나의 안위를 먼저 챙겼어야....

"생각이 많구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장작 타는 소리를 내는 모닥불과 로브로 몸을 가린 채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왜소한 남자 그리고 그의 옆에 놓인 커다란 자루가 보였다.

"걱정하지 말고 앉거라, 아직 죽일 생각은 없으니."

그 말에 그의 맞은편으로 향하자, 그가 정체불명의 고기를 뒤집으며 말을 이었다.

"스벤의 아들이 도망이라니. 모너도 얼마 남지 않았어."

나는 말없이 모닥불 너머의 남자를 바라봤다.

"그렇지 않나, 모너가의 어린 주인아?"

드디어 고개를 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사납게 찢어진 눈, 제멋대로 길게 늘린 뾰족한 귀와 코, 귀 바로 아래까지 흉측하게 찢어진 입과 파충류처럼 번들거리는 초록색 피부.

"...."

[고블린 왕, 테헤키를 마주했습니다.]

내 앞에.

왕이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