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대성당의 심부(深部), 평소라면 신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했을 그곳이 피와 비명 소리로 가득했다.
거룩히 타오르는 밀초의 향내 대신 코를 찌르는 혈 향과 걸음마다 찰박거리는 핏물에 사제들은 주저앉아 신을 찾으며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봤다.
"신이 무섭지 않은가!"
수십 명의 견습 사제가 만들어 낸 보호막이 흔들리자 사제 중 한 명이 입술을 짓씹으며 백면을 쓴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신께서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을 이겨 내기 위해 사내가 소리친 순간, 백색 가면 너머로 놈과 눈이 마주쳤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은 명백한 비웃음을 담고 있었다.
"신이?"
민무늬의 백색 가면이 주변을 둘러봤다.
"신앙을 돈 몇 푼에 팔아넘긴 너희조차 방관한 그 신이?"
벌레 보는 듯한 눈빛과 무신경한 목소리에 조소가 어렸다.
"너희가 죽도록 놔둔 모든 이들이 신을 원망했을 것이고, 금에 움직이는 신성을 저주했을 것이다. 신이 정말 날 용서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나? 신을 욕보인 너희가 아니라?"
"치료를 하고 돈을 받는 게 어떻게 죄란 말인가! 이곳 모너 영지만 특별했을 뿐 다른 곳에서도 돈은 받는다!"
"신성력은 모두를 구하기 위해 신이 준 힘. 모너가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고, 너희는 모너가와의 신의와 너희의 신념을 동시에 어겼다."
이안이 보호막 뒤에 숨은 사제들을 바라봤다.
믿음과 신앙을 돈과 맞바꾼 이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들을 벌할 생각은 없다. 그들의 믿음이 황금 앞에서 흔들렸다고 한들 신과 그들 사이의 문제일 뿐.
그러나 범죄는 다르다.
신의 분노를 무서워하는 시민들은 사제의 죄를 밝히지 않고 치안대는 눈을 감는다.
그러니 누군가 분명히 해야 했다.
최소한 이 영지에서만큼은 신성불가침 영역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쨍그랑!
마침내 사제들을 보호하고 있던 보호막이 깨지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사제들 사이로 이안이 몸을 들이밀었다.
* * *
이안은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사제를 앞에 두고 레이나를 바라보면 이미 조사를 마친 그녀가 손짓으로 살생부에 있는 사람인지 알려 왔다.
판사도, 판시(判示)도 없다. 영지민을 겁탈한 자들도, 겁박한 자들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조롱한 자들도. 모두 죽음으로 그 죄를 갚는다.
이들은 암적인 존재다. 잘난 신을 위해서도, 영지를 위해서도 지금 확실히 정리하지 않으면 언제고 비슷한 것들이 자라 영지를 위협할 것이다.
'이대로라면 모너 영지는 성직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어.'
곧 스팀팩과 각종 약물을 개발해 상황이 나아진다고 하더라도 매일 사망자와 중상자가 발생하는 최전방에서는 성직자가 항상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에게 분명히 전해야 한다.
모너가가 필요한 건 신의 뜻을 따르는 성직자다. 돈의 무게를 따르는 장사치가 아니라.
"크억...."
기계적으로 단검을 박아 넣은 뒤 뺀 이안이 다음 사제를 향해 걸어가며 레이나를 바라보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흠."
신호를 확인한 이안은 바닥에 주저앉아 기도하고 있는 사제를 지나치며 읇조렸다.
"그 믿음에 보답받길."
그러고는 다음 상대를 찾아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 거의 다 정리한 것 같은데...?"
이안의 혼잣말에 수녀복을 훔쳐 입은 레이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리스트에 있던 사람은 거의 다 죽은 것 같아요."
"그래, 마지막으로 확인 한 번만 해 보자."
마나를 넓게 퍼트려 이 근방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자 고해실과 독방에 있는 사람들이 느껴졌다.
"쥐새끼들이 따로 없군."
독방으로 향하는 그의 목소리에 귀찮음과 피곤함이 역력히 묻어났다.
끼익
독방의 문을 열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남자가 질겁하며 소리쳤다.
"히익...! 제발! 난, 난 아무런 죄가!"
이안은 그의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 뒤로 고개를 슬쩍 돌려 레이나의 신호를 확인했을 뿐.
레이나의 엄지가 땅으로 향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이안의 단검이 사제의 심장을 꿰뚫었다.
푸욱!
"7살 아이가 아파서 찾아온 부모를 아이 앞에서 강간했다고 합니다."
"하… 세상 별...."
이쯤 되면 신성력은 악인에게만 주어지는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대성당에 성인(聖人)보다 악인(惡人)이 더 많단 말인가?
놈의 시체에 침을 뱉은 뒤 다른 사람을 찾았다. 방문을 열고 심장에 단검을 박아 넣는 단순노동의 반복에 지겨움이 몰려올 때쯤.
쾅!
잠겨 있던 문을 부수고 연 독방에 삐쩍 마른 시체가 보였다.
"…저거 살아 있는 것 같은데?"
미라나 다름없는 상태였지만 분명 미약하게 가슴을 움직이며 숨을 쉬고 있었다.
"부주교… 인 것 같네요."
"저게 부주교라고?"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저 존재가 살아 있는 건, 분명 몸에 지닌 성력 덕분일 것이다.
그냥 놔둬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레이나를 힐끗 바라보니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영주성 인근뿐 아니라 영지 전역에 고행길을 자처하던 명망 높은 성직자예요. 고행 기간이 끝난 후에도 꾸준히 전방에 나가 부상자들을 돌봐 주시던 분이셔요. 분명히 몇 년 전 수행을 위해 신성 제국으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그녀의 말에 놀란 눈으로 미라를 바라봤다. 썩어 있는 조직에서 홀로 빛나는 존재. 여기서 죽기는 아까운 인물이었다.
"그래? 진흙에서도 꽃은 피는 모양이군."
대충 왜 여기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교단이 잘못된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생명의 무게를 금으로 판단하며 가난한 이들을 치료하지 말라는 지령이 내려왔을 때, 그녀는 반항했을 것이다.
부러질지언정 굽힐 수 없는 신념을 가지고 영지 내 교단 전체와 맞섰을 것이다. 그렇게 빛도 출구도 없는 독방에 갇혔겠지.
'이대로 둬도 죽지는 않을 테니 괜찮겠지? 어차피 후에 영지 내 교단을 통솔할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한 이안이 뒤돌아 독방을 나서려 하자, 쓰러져 있던 부주교가 개미 같은 목소리로 속삭여 왔다.
"드디어… 드디어 악마가 왔군요."
오랜 시간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던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은 목소리에 기쁨이 묻어났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안은 습관처럼 가면을 더듬었다. 도대체 어떻게 가면을 써도 다들 악마와 헷갈리는 걸까. 이 정도면 이안의 악명이 아니라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물론 독방에 몇 년 처박아 놓는다면 누구든 미치기 마련이라지만 성직자가 악마를 기다려 왔다니.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한 이안은 그녀를 무시하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나, 나는 처녀입니다."
"미친."
아무리 어그로에 면역인 이안이라도 그 말에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라고 생각하기도 잠시, 여전히 쓰러진 채 꼼짝도 못 하고 있는 부주교가 말을 이었다.
"악마들은 처녀를 좋아한다고 하죠. 저는, 저는 성력을 가진 처녀입니다. 부디 저를 거둬 가시고 죄 많은 이들을 놔 주세요."
이안은 부주교의 몸에 남은 미약한 생명력이 점차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제 몸을 움직일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이 여자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 가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녀 스스로 죄 많다고 인정하는 쓰레기들을 위해서.
그 모습이 너무 한심하고 짜증나 이안이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내가 악마라고 치자. 내가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할 것 같나? 너와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을 취할 수 있는데?"
"저는...."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입을 열 때마다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과 성력이 동시에 빠져나갔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제 영혼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성력을 가진 인간의 영혼은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녀의 말을 듣던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로스트 크로니클에는 악마도, 마인도, 마족도 없다. 헛소리라고 치부하고 싶지만 안 그래도 독에서 해독됐던 날 나타났던 메시지가 계속 신경 쓰였던 차였다.
-[최초로 마계의 독을 이겨 냈습니다.]
퀸즈머시를 마계의 독이라고 불렀던 시스템. 여태까지는 이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무시해 왔다, 보상을 더 주기 위한 시스템의 배려였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만약 정말로 이 세계에 마족과 악마가 있다면, 그들이 직접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잠시 고민하던 이안이 부주교를 짐짝처럼 어깨에 둘러멨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악마여. 분명 내 영혼은 다른 이들의 생명을 살릴 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귓가에 다행이라는 듯 속삭이는 부주교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안은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악마가 여기까지 오면서 사람을 안 죽였을 것 같나?"
"빛나는 영혼을 원해 절 찾아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직 많은 사람이 살아 있겠죠. 저는 그들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아무래도 부주교는 큰 착각을 하는 것 같았다. 하긴 설마 독방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생존자들을 확인하다 우연히 그녀를 발견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이안이 어깨에 둘러멘 그녀를 향해 물었다.
"허… 어떻게 죄인들을 위해 자기 영혼을 바칠 수 있지? 당신이 저 독방에 갇혀 있던 건 밖에 있는 쓰레기들 때문 아닌가?"
"모든 죄를 죽음으로 씻을 필요는 없지요. 언젠가 저들도 자기 잘못을 깨우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신께서도 저들의 잘못을 용서하실 겁니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못한 이안의 몸에서 주체할 수 없는 살기가 새어 나왔다.
"용서? 그걸 왜 신이 용서하지? 부패한 성직자에게 아파한 것도, 죽어 간 것도, 이용당하고 버려진 이들도 전부 이 땅의 영지민이다."
오직 이 땅에 살아가는 이들만이, 고통받고 죽어 간 이들의 가족만이 용서를 논할 수 있다.
"만약 감히 그 쓰레기들을 용서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건 오직 이 땅의 주인뿐일 터. 장담컨대 그는 감히 영지민을 욕보인 이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이안이 방을 나서자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피가 그들을 반겼다. 이안은 어깨에서 꿈틀거리는 부주교의 움직임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쓰레기들을 죽여도 신께서는 용서하시겠지. 그렇지 않나?"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참혹한 현장을 마주한 부주교의 눈빛이 떨려 왔다.
* * *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벌써 대성당 내 성기사가 전부 당했어요! 이제 놈이 이곳까지 들어올 거라구요!"
주교 뎀녹의 고함에도 기사단장은 움직이지 않았다.
"당장 나가서 막지 않고 뭐 하시는 겁니까!"
뎀녹은 연달아 들려오는 절망적인 소식에 주교가 기사단장에게 소리쳤다. 수십 명의 사제가 만들어 낸 보호막을 부쉈다든가 기사단 하나를 몰살시켰다든가 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아무리 신성 제국에서 버려진 패배자들이 모인다는 모너가의 대성당이라도 그 수가 스물이다.
어찌 한 명의 침입자가 20명의 기사단을 몰살시킬 수 있단 말인가.
뎀녹은 당장이라도 그나마 쓸 만한 기사단장이 나서서 침입자를 제압하거나 최소한 그가 도망갈 시간을 벌어 주길 원했다. 성기사가 신의 아들을 위해 전장에서 죽는 것쯤이야 축복이나 다름없을 터.
뎀녹이 당장 나가 침입자를 처단하라 소리치기 직전, 문 쪽을 힐끗 돌아본 기사단장이 뎀녹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기다려."
기사단장의 하대에 얼굴이 벌게진 뎀녹이 뭐라 소리치려 했으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주교실의 문이 먼저 부서졌다.
쾅!
문 너머에는 한쪽 어깨에 시체를, 다른 한 손에는 부기사단장의 머리를 들고 있는 백면의 사내가 서 있었다.
"오, 신이시여...."
백면의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에게서 풍기는 짙은 혈향과 살을 벨 듯 선명한 살의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놈은 대성당의 주교와 기사단장 앞에서도 전혀 긴장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심한 듯 자신과 기사단장을 번갈아 바라보는 눈길에서는 오직 오금을 저리는 악의만이 느껴졌다.
'악마, 악마다.'
저건 성서 속 신이 그토록 조심하라고 경고했던 악마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이 저토록 짙은 악의와 살의를 가질 수 있을 리가 없다.
뎀녹은 악마에 대항하기 위해 급히 손을 모으고 성력을 끌어 올렸다. 아무리 타락했다 한들 대신성 제국의 주교급에 이른 성직자니만큼 앞서 죽어 나간 사제들과 급이 다른 성력이 모여들었다.
"하! 지옥으로 물러가라, 악마여! 디바인 에어리어!"
지정한 공간을 성역으로 지정해 악을 멸하는 신성 마법 <디바인 에어리어>가 발동되기 직전.
푹!
묵묵히 옆을 지키던 기사단장의 손이 뎀녹의 등을 꿰뚫고 심장을 붙잡았다.
"크헉!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심장을 움켜쥔 손이 뽑혀 나가자 뎀녹의 몸에 모여 있던 성력이 공기 중으로 흩뿌려졌다.
"칫, 쓸데없는 짓을."
공기 중의 따스한 성력에 인상을 구긴 기사단장은 별안간 손에 든 심장을 씹어먹기 시작했다.
우적, 우적, 우적.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백면 뒤 이안이 입을 벌린 채 어이없다는 듯 뇌까렸다.
"이건 또 뭐 하는 새끼야?"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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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이안은 기사단장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우적우적.
마치 이 공간에 있는 다른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주교의 심장을 탐하는 기사단장.
거룩한 빛의 신을 본떠 만든 조각상이 기사단장과 이안을 내려다보고, 순백의 바닥에 주교의 피가 번졌다.
"...."
그사이 이안은 굳은 얼굴로 기사단장을 바라봤다. 주교의 심장을 씹어 넘길수록 강해지는 기세에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젠장.'
놈이 식사를 마치게 둬선 안 된다는 직감에 급히 품에서 단검을 꺼내 던졌다.
챙!
놀랍게도 단장의 이마 정중앙에 부딪친 단검이 소리를 내며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마나를 담아 던진 단검으로도 상처조차 내지 못한 것이다.
"기다려라."
그렇게 말한 기사단장이 게걸스럽게 심장을 삼킨 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역시 타락한 사제의 심장만큼 별미가 없단 말이야. 거기다 부주교까지 데려와 주다니, 이거 고맙군."
놈의 입에서 언어와 함께 참을 수 없는 악취가 흘러나오고, 낮게 울린 놈의 목소리가 뱀처럼 발끝에서부터 몸을 타고 기어 올라와 온몸에 소름이 퍼졌다.
고작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온몸이 떨렸다.
놈은 재앙이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될.
게임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규격 외의 존재.
절대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숨조차 참아야 한다고 본능이, 온몸의 세포가 끊임없이 경고를 보냈다.
'뭐야 이거.'
망했다.
저런 규격 외의 괴물은 계획에 없었다.
몇 주간 이어진 조사에 따르면 기사단장은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 모너가에 버려진 4성급 성기사였다. 주교의 심장을 씹어 먹는 괴물이 아니라.
"야, 너 뭐냐?"
최소한 상대의 정체라도 알고 싶었다. 웬 알지도 모르는 잡몹한테 죽는다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을 터.
"호오… 힘을 드러낸 내 앞에서 말을 할 수 있다니, 대단한 인간이구나."
기사단장이 재밌다는 듯 이안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나는 아지요그. 이 땅의 주인이다. 가짜들 사이 오롯한 진짜이며 눈 가린 양들의 양지기지."
아지요그가 그의 진명을 밝히는 순간, 이안의 눈앞에 익숙한 창이 나타났다.
<긴급 퀘스트 발생: 양지기 아지요그>
처음으로 마족을 마주했습니다.
지금 당장 자리를 피해 목숨을 보전하세요!
퀘스트 보상: ??
실패 페널티: 사망
"마족이라고...?"
갑작스러운 퀘스트창을 보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이안이 묻자, 아지요그가 흥미롭다는 듯 입술로 피를 훔치며 말했다.
"내가 마족인 것도 알았나? 그걸 어떻게 알았지? 용사의 후손은 다 죽었다고 알고 있는데...."
그러나 이내 흥미를 잃은 듯 그의 눈길이 이안의 어깨에 있는 부주교에게로 향했다.
"흥, 부주교나 내놓고 꺼져라. 네놈이 계획을 망치긴 했다만 덕분에 별식을 먹을 수 있게 됐으니. 네놈은 살려 주마."
부주교를 바라보는 놈의 눈빛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현신을 위해 얼마 모이지도 않은 힘을 쓰느니 이안을 보내 주고 만찬을 즐기기로 한 것이다.
순간 이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 부주교를 넘기면 살아 나갈 수 있다.
퀘스트 보상도 받을 수 있겠지.
누가 뭐래도 세상을 전부 뒤지면 특성 열댓 개쯤 모으지 못할 것도 없다. 아마 힘을 길러 다시 온다면 놈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일신의 힘으로 군대를 상대할 수 있는 영웅의 특성을 하나둘쯤 더 얻는다면 눈앞의 괴물도 어쩔 수 없으리라.
"...."
그러나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이안이 뭐라 말하기도 전, 어깨에 들쳐 멘 부주교가 이안의 귓가에 대고 입술을 달싹였다.
"역시… 역시, 당신은 인간이었군요. 저는 저 악마를 기다려 왔습니다. 처음부터 악마에게 영혼을 바치리라 다짐한 몸, 저를 넘기세요."
그 말을 들은 이안의 얼굴이 얼굴을 구겼다.
"이거 개나 소나 날 개무시하는데."
피할 수 없는 죽음과 같은 적을 마주하고도 이안의 몸에서 짙은 살기가 새어 나왔다.
* * *
이 게임 속 세상에서 진짜를 논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 땅의 주인은 나야. 가짜 중의 진짜도 나고, 이 세상에 유일하게 진짜를 논할 수 있는 사람도 나야."
더 이상 아지요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받은 기분이었다. 저건 전부 내 것이다.
"야, 나가서 아무나 잡고 물어봐, 이 영지의 악마가 누구냐고."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덮은 가면을 내던졌다. 게임 속에 들어와 개고생을 하는 것도, 매일 악마라 손가락질당하는 것도,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이 영지의 주인도,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나야, 이 새끼야."
입을 열면서 온몸의 마나를 움직였다.
본능을 거스른 움직임에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뛰었다.
숨을 깊게 들이켜 온몸을 뒤덮은 피 냄새를 다시 한번 들이마시자, 피의 욕망이 활성화되면서 근육의 적당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마나를 근육에 밀어 넣으며 놈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챙!
역시나 단검은 놈에게 큰 상처를 남기지 못했지만, 아까와 달리 놈의 이마에서 옅은 피가 흘러내렸다.
'죽이진 못해도 시간만 버는 거라면....'
악마를 상대할 계획은 없었지만 무려 대성당에 침입하면서 아무 준비도 없이 왔을 리가 없다. 혹시나 대성당이 숨겨 온 저력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레이나!"
다급히 뒤를 향해 소리치자 숨어 있던 레이나가 재빨리 품에서 검은색 공을 꺼내 이안을 향해 던졌다.
"이거 데리고 도망가! 최대한 멀리!"
공을 받음과 동시에 레이나를 향해 부주교를 던진 이안이 고개를 돌려 아지요그를 노려봤다.
"자, 누가 이 구역 미친개인지 가려 보자고."
레이나가 안전하게 방을 나선 것을 확인한 이안이 사납게 웃으며 검은 공을 바닥으로 던졌다.
* * *
푸스스스!
바닥에 떨어진 검은 공에서 흘러나온 메케한 연기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당장 눈앞도 분간할 수 없는 연기를 보고도 아지요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마치 버릇없는 강아지가 부리는 재롱을 구경하듯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조소어린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볼 뿐.
"독도 안 통한다고? 양심 없는 새끼."
무려 101가지의 맹독을 조합한 독 안개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인상을 구기는 것도 잠시. 귀흡법과 유령걸음의 조합에 이안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게임 속 가장 뛰어난 암살자였던 귀왕의 기술들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상대의 목숨을 끊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이 안개는 오직 이안만을 위한 맞춤 전장인 셈이다.
'죽이긴 어려울 것 같은데....'
마나를 전신에 퍼트리고 근육과 마나를 동시에 응축시킨다. 극한까지 응축된 마나가 꿈틀거리기 시작할 때.
'살(殺)'
안개를 뚫고 나온 이안의 신형이 아지요그를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흥!"
아지요그는 비웃음이 가득 담긴 눈으로 검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으나 이안은 피하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놈이 방심한 지금이 최선이다.'
본능은 지금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도망가라고 아우성치고 혀끝까지 올라온 두려움에 구역질이 올라왔음에도 이안은 감정을 억누른 채 굳게 쥔 단검에 마나를 더 쏟아부었다.
캉! 카캉!
단검과 검이 부딪쳤다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이 연속해서 방 안을 울렸다.
"하! 재밌는 놈이구나!"
정말로 재밌다는 듯 입꼬리가 귀까지 걸린 놈을 보면서 재빨리 몸을 뒤로 빼 다시 안개 속으로 몸을 숨겼다.
'...?'
안개에 몸을 숨긴 채로 놈을 노려봤다. 아직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당당하게 웃고 있는 마족.
'검술 실력이 형편없어.'
공격이 전부 막히기는 했지만 그뿐. 놈의 검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양도, 검술도 조악하기만 했다. 처음 검을 쥔 나무꾼이 이리저리 검을 휘두르는 것 같은 모습이랄까.
놈이 방심한 지금이 기회다. 어쩌면 다시는 없을지도 모를. 이안이 다시 안개 속에서 단검을 움켜쥔 채 튀어나왔다.
"어림없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다시 검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하는 놈을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미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 검을 맞댈 필요는 없다. 허리를 숙여 검을 피하고 빠르게 바닥을 구르며 놈의 무릎에 단검을 밀어 넣었다.
콰득!
다시 한번 단검이 뼈와 살점을 헤집는 만족스러운 느낌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살(殺)!'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릎을 파고든 단검에 계속해서 마나를 퍼부었다. 당장 놈을 죽일 방법이 보이지 않기에 최소한 기동력이라도 봉쇄하려 한 것이다.
분명 유리한 건 자신인데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놈이 놀아 주는 것이지 결코 자신이 우위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기특한 애완동물을 보는 듯한 놈의 미소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누굴 개새끼로 보고!"
콰드득!
마침내 단검의 손잡이까지 허벅지에 완전히 박히자 마인의 검은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기 시작했다.
공격이 통했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도 잠시, 어색한 고통에 잠시 얼굴을 살짝 찌푸린 놈의 몸에서 불길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 * *
'젠장'
머리카락이 삐쭉 솟는 살의가 등 뒤에서 느껴져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닥을 굴렀다.
픽!
그러나 등에서 날카로운 검에 베인 것 같은 통증과 함께 피가 뿜어져 나왔다.
'뭐에 당한 거지?'
밀려오는 통증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만약 이안의 몸이 아니라면, 영혼을 찢어발기는 고통을 겪어 보지 않았다면 분명 이성을 놓았으리라.
"크윽...."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입술을 짓씹어 입안을 비릿한 피로 가득 채웠다. 특성 [피의 욕망]에 따라 공격력과 공격 속도가 더 빨라지고 특성 [암제(暗帝)]로 고통을 조절했다.
"개 같은 놈...."
이안은 안개 속에 몸을 숨긴 채 기척을 죽이고 놈을 바라봤다. 놈의 호흡법, 마나, 움직임. 하나하나를 머리에 쑤셔 넣으며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공략법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제 그만 끝내자!"
꿰뚫린 허벅지를 한 손으로 움켜쥔 채 소리치는 놈을 한참이나 노려보던 이안의 얼굴에 의문이 번졌다.
놈은 주교의 심장을 씹어 먹었던 그 자리에서 아직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 * *
안개 속에서 이안의 단검이 빛을 발하면 아지요그의 몸에 구멍이 하나 생겼고, 동시에 이안의 몸에 상처가 하나 늘어났다.
공격이 끝나면 다시 안개 속으로 몸을 숨기고 타이밍을 계산해 다시 공격한다.
단검이 살과 뼈를 헤집고 몸에 박히는 감각을 느끼며 놈의 공격을 피해 구르고, 뛰고, 달린다.
이번 공격이 먹히지 않으면 또다시.
찌르기가 막히면 뒤에서 베고, 벨 것을 예상하면, 단검을 던지고. 단검 대신 팔과 다리를, 먹힐 수만 있다면 종종 물어뜯으면서까지.
'죽인다.'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그 생각을 이루기 위해 단검을 찌르고.
베고.
또 찔렀다.
어느덧 하나둘 생긴 상처에 이안의 피가 전신을 뒤덮었고 이제는 전신에서 느껴지는 벌레가 갉아먹는 듯한 통증에 정신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그런데도 이안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야."
안개 속 몸을 숨긴 이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 지금 힘들어 뒤질 것 같지?"
순간 여태까지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하던 아지요그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얼굴 구겨지는 거 봐라, 새끼."
아지요그의 뒤, 피로 전신을 적신 이안이 비웃음을 숨기지 않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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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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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상처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흐르고, 계속된 출혈에 가죽 갑옷에 눌어붙은 살점이 움직일 때마다 찢어져 나갔다.
마나는 이미 반 이상 써 버렸고, 특성 <피의 욕망>의 광기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놈도 마찬가지야.'
놈의 기세와 분위기에 속아 놓치고 있던 것들, 사소한 단서들이 모여 확신을 이뤘다.
기세만으로도 자신을 짓누를 수 있는 마족이 불필요한 상처를 늘려 가면서까지 이 지지부진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
"한계지?"
이안이 얼굴을 구기고 있는 아지요그를 바라보며 놀리듯 말했다.
"마족의 힘을 쓰는 데 제약이 있는 모양이야. 아까 주교가 뿌린 성력도 문제인 것 같고."
확신할 수 있다.
놈은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부터 정상이 아니었다. 굳이 눈앞에서 주교의 심장을 씹어 먹은 것도, 레이나가 부주교를 데리고 도망칠 수 있도록 놔둔 것도, 놈이 정상이 아니기에 그런 것이다.
"아니면 군침 흘리던 부주교를 그냥 보내지 않았겠지. 날 가지고 놀더라도 분명 부주교를 붙잡고 씹어 먹은 뒤에야 그랬을 거야."
그뿐일까, 피할 수 있는 공격을 허용하고 피가 철철 흐르는 허벅지로도 방어를 계속했다.
처음엔 놈이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눈앞의 마족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이라면 굳이 공격을 허용할 필요가 없었다.
저 마족의 몸에서 느껴지는 힘을 전부 사용했다면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놈의 장난감 신세를 면치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이것저것 잔재주를 쓴 모양인데."
눈으로 온몸을 뒤덮고 있는 생채기를 힐끗 훑었다. 한참이나 계속된 전투에도 전혀 아물지 않고 계속해서 느껴지는 고통. 이건 일종의 저주나 마법이 분명했다.
"그게 전부면 넌 죽어."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진 이안이 미리 준비한 단검을 품에서 꺼내 역수로 쥔 뒤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큭...."
미리 스팀팩을 발라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을 찌른 단검의 날을 따라 피가 끊임없이 흐르고,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피의 욕망이 최대로 발동합니다.]
기다리던 소식에 사납게 웃은 이안이 다시 한번 안개를 찢고 마족을 향해 쇄도했다.
* * *
아지요그는 안개 속에 숨어 있는 이안을 찾아 마기를 움직였다. 실과 같이 얇은 마기를 흩뿌려 이안의 접근을 방해하고 동시에 이번에야말로 지겨운 싸움을 끝낼 생각에 검을 치켜들었다.
벌써 수백 번의 공방 속, 놈의 속도와 힘은 충분히 확인했다. 놈의 힘으로는 절대 치명타를 입힐 수 없다는 확신에 방어를 포기하고 공격에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이윽고, 이안이 안개를 찢으며 화살처럼 쇄도해 왔다.
"감히 인간 따위가!"
아지요그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마기를 움직여 공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분명 늦출 수 있다고 생각한 놈의 움직임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고, 공격을 완성하기도 전에 눈앞까지 다가온 이안이 단검을 심장에 박아 넣었다.
쿠드드득!
가슴뼈가 부서지고, 단검이 살점과 심장을 파고드는 그 불쾌한 감각에 아지요그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가슴에 박힌 단검을 내려다봤다.
"어, 어떻게. 너에게는 이런 힘이 없었는데...."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잡은 그를 향해 이안이 웃으며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이 동네 미친놈도 나거든."
이안의 가슴 정중앙에는 반쯤 박힌 단검의 날을 따라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지요그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미친놈. 마족은 고작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 인간인 너는 분명 죽겠지."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놈이 갑자기 빨라진 건 놈의 가슴에 박힌 단검 때문인 것 같았다. 아마 생명력을 원동력으로 하는 자기희생 주문의 일종이리라.
그게 무슨 주문이든 간에 심장에 단검을 박아 넣은 채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분신체가 아깝기는 해도 얄밉게 웃어 대는 저놈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썩 만족스러웠다.
'이쪽도 손해가 만만치 않은데....'
무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간계에서 몰래 모아 온 마기를 일부 소진했을 뿐 아니라 다른 마족들에게 빼앗기지 않고 아껴 먹으려던 부주교까지 놓쳐 버렸다.
손해도 이런 손해가 없다. 차라리 처음부터 부주교를 포기하고 도망쳤다면 이런 손해도 없었을 텐데. 눈앞의 놈이 가진 힘을 완전 잘못 평가했다.
고통도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라니. 아무리 개체별 차이가 심한 인간이라도 이건 반칙 아닌가. 감히 마족인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 게 괘씸해서라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난 인간을 잘 알지. 너 같은 인간은 절대 죽어서도 편히 눈감지 못할 거야. 내가 돌아오는 날, 네놈의 영혼을 찾을 것이다. 영혼의 파편의 파편을 취하는 한이 있어도 영원토록 고통받게 만들어 주마."
그렇게 말한 아지요그는 마기를 추슬러 마계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어차피 놈이 죽으면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없으니 마기를 조금이라도 더 아끼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 *
아지요그가 떠나가자 기사단장의 몸이 허물어지듯 쓰러지고, 정적이 찾아왔다.
"크흐흐… 흐흐흐...."
굳건히 선 이안이 별안간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처음부터 죽일 힘은 없었다. 마지막 일격에 모든 마나를 쏟아부었으니 움직일 힘도 없었다. 놈이 전투 내내 여유로운 척했던 것처럼 이안은 마지막 단 한 순간, 딱 한 번의 여유를 부린 것뿐.
몇 번이고 같은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정말 목숨을 포기하고 전투를 계속할 것처럼.
"하, 지친다."
자리에 쓰러진 이안이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가슴에 박은 단검에는 스팀팩을 발라놔 자고 일어나면 어느 정도 치료가 되겠지만, 도저히 움직일 힘이 없었다.
'레이나를 찾아야 하는데....'
최소한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대원들과 영주성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한순간 풀린 긴장에 눈꺼풀이 천근같이 느껴졌다.
"진짜, 진짜 잠깐만 좀 쉬자."
전투 후의 노곤함이 전신에 밀려들면서, 이안이 잠에 빠져들었다.
* * *
머리칼을 간지럽히는 느낌에 눈을 뜨자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레이나가 보였다.
"레이나...?"
재빨리 몸을 일으킨 뒤 주변을 살폈다.
검붉은 피로 더럽혀진 채 여전히 자애로운 표정을 잃지 않은 신상과 밝은 샹들리에,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주교의 시체.
"주교실? 레이나가 왜 여기 있어?"
"도련님을 모시러 왔지요."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고 레이나를 바라보며 묻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이안은 화도 내지 못한 채 한참이나 서서 복잡한 심경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절대 다신 그러지 마."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아니, 피의 욕망 같은 특성이 있으니 분명 짐승보다 민감한 본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즉, 그녀는 아까 그 마족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부주교를 넘겨주며 도망가라고 했던 게 사실 시간을 끄는 동안 도망가라는 뜻이었다는 것도.
"혼자서도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어."
"전 돌아오실 거라고 믿었어요."
만약 마족이 대신 살아남았다면 자신을 찾아온 그녀는 산 채로 잡아먹혔을 것이다.
"그럼 계속 기다렸어야지."
책망하는 말투에도 레이나는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저는 그러려고 했는데, 밖에 있는 사람들은 기다리지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리나는 대원들을 통솔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제가 왔죠."
그녀가 끈적한 피로 더럽혀진 백색 가면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다들 밖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리고 있어요."
웃으며 나가는 그녀를 따라 대성당을 나섰다.
* * *
그날 오후.
성으로 돌아온 이안은 가장 먼저 부주교를 찾았다.
"몸은 어때?"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그녀가 앉아서 고개를 살짝 숙여 이안을 맞이했다.
"그래, 그렇게 기다리던 악마의 맨얼굴을 보니 어떤가?"
장난스럽게 이죽거리는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자, 부주교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설마 모너가의 주인이 대성당을 습격하리라고는...."
"신이 책무를 다하지 않으니 나라도 해야지."
덤덤한 이안의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이안을 바라봤다.
윤기를 잃고 아무렇게나 늘어진 금색 머리카락과 바싹 말라 갈라진 입술,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몸은 그녀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 왔는지 역력하게 드러냈으나, 그 오랜 고통 속에서도 바래지 않은 그녀의 눈만큼은 형형히 빛났다.
"더 많은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 대성당의 성직자를 죽인 이상 성직자들이 치료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소공작님은 죄 없는 이들의 희망과 치료받을 수 있던 이들의 마지막 기회마저 빼앗으신 겁니다."
"오지 않을 구원에 대한 희망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환상 아닌가. 이 영지는 신성 제국이 성역을 선포하기 전에도 건재했고 앞으로도 건재할 것이다."
이안의 말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한 부주교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이 영지에서 하루 몇 명의 부상자가 나오는지 아십니까? 세상 어떤 약이 있다고 해도 성직자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 이안이 그녀의 앞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마주쳤다.
"부주교, 아슈이타. 그게 문제다. 이 영지는 성직자에게 너무 의존해 왔고 그렇기에 너무 많은 권리를 넘겨줬다."
생명을 다루는 이는 자연스럽게 그 생명의 우위를 점하기 마련이고, 우위를 확인한 인간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분명 백신으로서 영지에 자리 잡았던 이들이 얼마나 빨리 암으로 자라났는지 보라.
이안이 바라는 것은 모너가의 완전한 자립. 그걸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성직자를 확실하게 처리해야 했다.
"만약 이게 계속되면 언젠가 종교가 저 밖의 몬스터보다 더 많은 목숨을 취하기 시작했겠지. 그때가 되면 너무 늦었을 것이다."
아슈이타는 이안의 말속에 녹아 있는 성직자에 대한 깊은 혐오와 불신을 읽었다.
"그러기 전에 신께서 인도하셨을 것입니다."
확신에 가까운 그녀의 말에 이안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 그래서 날 보내셨지. 그나저나, 걸을 수 있나?"
"아직은 조금...."
그녀가 난처해하며 말을 얼버무리자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붙잡고, 무식하게 짐짝처럼 어깨에 짊어졌다.
"실례."
"이게 무슨! 제가 걸어갈 수 있습니다!"
아슈이타가 발을 동동거리며 바닥에 내려놓으라고 했지만 마른 몸으로 아무리 바둥거려 봐야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오래 걸려. 귀찮아."
심드렁하게 대답한 이안이 방을 나서자 그 뒤로 작은 자루를 짊어진 레이나가 따랐다.
* * *
영주성 감사부.
감사부장 베인은 이마에 얼음을 올려 둔 채 열을 식히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없는 무력한 상황에 시달리다 화병이라도 걸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소공작이 대성당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도대체 가서 무슨 말을 할지, 행여나 거기서도 지랄병이 돋아 패악을 저지르지는 않을지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하아...."
이 자리에 부임했을 때만 해도 어떻게든 영지를 발전시키겠다는 포부에 가득 찼었건만, 어째 시간이 갈수록 그렇게 무능하다 욕했던 전임 감사부장을 닮아 가는 것 같아 자괴감마저 들었다.
"쯧,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지."
부정적인 생각은 늪과 같아서 한번 시작하면 좀처럼 헤어 나오기 어렵다. 영지 사용인들의 부패를 막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서류로 눈을 돌린 순간, 부하가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장님, 소공...."
"나 없다고 그래!"
덜컥!
소공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베인이 자리를 피하기 위해 급히 일어서 주섬주섬 서류를 챙겼다.
왜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차라리 예지에 가까운 확신이 드는 날.
'오늘은 절대 만나면 안 돼, 절대.'
놈이 대성당에서 무슨 패악을 저지르고 왔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결국 섭정관이 해결할 터. 그렇게 몸을 피하려고 한 순간, 부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섭섭하군."
천천히 뒤를 돌아본 베인이 털썩하고 쓰러지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부하 뒤에는 특유의 비열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공작이 시체 하나를 짊어지고 서 있었다.
아. 젠장.
어릴 적부터 틀린 적 없던 불길한 예감이 똬리 튼 뱀처럼 뱃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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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이 │ 김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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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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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3화
"그러니까...."
베인이 떨리는 눈으로 책상 위에 놓인 물건을 바라봤다. 통통한 볼살, 얼굴을 뒤덮은 주근깨 사이로 보이는 욕심 가득한 눈.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몇 번이고 얼굴을 훑은 뒤,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떴다.
제발 자기 책상에 있는 게 주교의 머리가 아니길 바라면서.
"하아...."
그러나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떠도, 억울한 듯 눈을 치켜뜬 주교는 책상 위에서 변함없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선물… 선물이라고요?"
베인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아무리 배워 먹지 못한 망나니라도 정도가 있는 법 아닌가.
애초에 사람 머리가 썩 좋은 선물이 아니라는 걸 모른다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대성당의 주교 머리를 선물이라며 들고 오다니!
"소공작… 님."
당장이라도 영지의 미래를 위해 눈앞 망나니의 머리를 열고 도대체 뭐가 들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은 미소를 지은 채 베인을 똑바로 바라볼 뿐이었다.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성직자가 회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과 대화하는 거라고. 그래서 신의 곁으로 보내 줬지."
자신이 의미했던 건 사제들이 항상 말하듯 기도를 통해 미망을 벗고 광명을 찾으리란 뜻이었지만, 눈앞의 상대는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베인이 고개를 돌려 대화가 통할 만한 사람을 바라봤다.
"옆의 그 시체, 아, 죄송합니다. 옆의 그분이 정말 아슈이타 부주교님...."
"네, 빛의 신을 따르는 아슈이타라고 합니다. 몸이 회복되지 않아 일어나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진창과 전장을 오가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 뻗길 주저하지 않아 자애로운 천사라고 불리던 부주교에 대한 소문은 베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신성 제국으로 돌아갔어야 할 그녀가 몇 년 동안이나 독방에 갇혀 있었다는 말은 믿기 힘들었지만, 눈앞에 증거가 있으니 부정할 수도 없었다.
송장처럼 자리에 앉아 있던 그녀가 작게 고개를 숙이자, 감사부장이 손사래를 치며 재빨리 답했다.
"아, 아닙니다! 이 자리에 와 주셔서… 오신 게 아니지 참. 이렇게 불미스러운 일로 뵙게 되어… 여하튼 만나서 반갑습니다. 감사부장 베인입니다."
베인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주교의 머리 때문에 땀으로 젖은 손을 몇 번이고 허리춤에 닦은 뒤 악수를 위해 손을 뻗었다.
순간 사무실 안에 불편한 정적이 흐르고, 부주교가 난처한 눈으로 자기 몸과 베인이 뻗은 손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
그제서야 그녀의 몸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자각한 베인이 급히 손을 거두고, 이안이 이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런 줄 몰랐는데 감사부장은 생각보다 배려가 부족한 편이군."
최소한 사람 머리를 선물로 가져온 인간에게 듣고 싶지 않은 지적에, 감사부장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제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어색하게 자리에 앉은 베인이 이안이 아닌 부주교를 바라보며 물었다.
"주교가 죽었으니 다른 성직자들이 들고 일어설 것입니다. 어쩌면 대성당 전체가 돌아설지도 모르죠. 부주교님이 그들을 잘 이끌어 주실 수 있다면 불상사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난처한 표정을 한 표정을 한 채 협조를 부탁하는 그에게 부주교가 슬픈 소식을 전했다.
"대성당이 적으로 돌아설 일은 없을 거예요."
"정말입니까?! 다행입니다! 그래도 그 주교가 죽었는데 어찌...."
"…적으로 돌아설 이들이 없거든요."
순간 입을 다문 베인이 이안을 힐끗 바라봤다, 자기 생각이 틀리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설마...."
그 순간, 밖이 소란스러워지면서 감사관 몇이 노크도 하지 않은 채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부장님! 지금 치안대에서 연락이 왔는데 대성당에서 큰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력이 부족하다며 당장 지원을 요청하는데요?!"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이마를 짚은 베인이 일어서서 부하들을 보내고 문을 걸어 잠근 뒤, 들끓는 목소리로 이안에게 물었다.
"설마 선물… 이 주교만 있던 게 아닌가요?"
"그럼. 너희가 열심히 작성한 목록의 마지막 한 명까지 놓치지 않았지."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활짝 펴고 말하는 이안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정말 목록의 마지막 한 명까지 놓치지 않았다면 대성당에 남은 성직자는 스물도 채 되지 않는다.
"이, 이 일을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사건에 절망한 그의 귓가에 악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하지 마. 원래 이런 때일수록 당당한 놈이 이기는 거야."
* * *
다음 날.
신성 제국에서 파견 사제의 연락을 담당하는 사제는 믿을 수 없는 연락을 받았다.
<…하여 모너가는 오늘부로 성국의 성역 지정을 거부하는 바이다.
모너가의 정당한 요구와 탄원에도 불구하고 부패한 사제들이 신의 이름을 욕보이고 그 신앙을 진창에 처박는 것을 묵과하고 있는 성국의 진의가 의심되는바.
이 시간 이후로 성국의 그 어떤 지원도 필요 없음을 분명히 전하며 이 사건의 책임이 성국에 있음에 안타까움을 전한다.>
무려 성역의 지정을 거부하는 모너가의 전언에 신성 제국은 비상이 걸렸다. 수백의 수습 사제가 파견돼 있다는 것도 문제지만 만약 저 공문이 국제사회에 퍼지기라도 하면 힘들게 쌓아 온 성국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허허허...."
전후 사정을 보고받은 교황조차 헛웃음을 참지 못했다. 가뜩이나 교단의 행보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많은 지금, 교단이 스스로 정한 성역에서 쫓겨난다면 호사가들이 뭐라고 말할까.
"전에도 탄원서가 있었다고?"
"예. 모너가에 파견한 주교와 사제들이 가난한 이들의 치료를 거부하면서 패악질을 부려 왔다고 합니다...."
고개 숙인 상급 사제가 대답하자, 교황이 턱을 쓸어 넘기며 침음을 흘렸다.
성직자가 치료하는 데 돈을 받는 건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돈 대신 다른 것을 강제로 취했다든가 성직자에게 부여되는 면죄권을 가지고 범죄를 저질렀다든가 하는 성토가 매일같이 이어졌다.
"후…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을까."
현재 신성 제국은 교황과 신성 제국의 영주들인 선제후 간의 알력 싸움이 극에 달해 있는 상황이다. 더 강한 군력을 쥐고자 하는 선제후들이 작위를 사고팔기 시작하자 사제들이 더 높은 작위를 사기 위해 신도와 환자들로부터 돈을 착취했다.
선제후의 권력과 군사력이 증가할수록 교황청 또한 군대를 늘릴 수밖에 없으니, 한 국가 안에서 군비 경쟁이 일어나는, 그야말로 무의미한 소모전이 계속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신앙은 금에 짓눌리고 색을 잃어 가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본국의 사제들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신이 정한 성역을 포기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다고 성역 안에서 사제를 죽인 모너가를 도울 수도 없는 일이다. 군대를 보내 성역만 지키자고 하니 모너가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
한참을 고민하던 교황이 입을 열었다.
"레임 왕국에 당장 항의문을 보내도록 하지. 피해자들과 그 유족에게 사과하지 않고 정당한 보상을 하지 않으면 모너가뿐만 아니라 레임 왕국에 파견한 사제들을 전부 귀환시킬 것이라고."
이게 최선이다. 놈들이 아무리 분노했다고 한들 사제 없이 그 척박한 땅을 계속 방어할 수는 없을 터. 그렇게 생각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려는 찰나, 상급 사제가 머리를 긁적이며 친서의 뒷면을 가리켰다.
"그, 그게...."
뒷장에서 이어지는 모너가의 경고를 읽은 교황이 얼굴이 구겼다.
<…중략.
하나, 성국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것.
하나, 타락한 사제들에 의해 죽어 간 모든 이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지급할 것.
하나, 매년 성국의 교황이 직접 위령제를 치를 것.
위 모든 사항이 지켜지는 경우에만 성역의 존재를 인정할 것이며, 그 이외의 모든 접근을 침략이라 규정한다.
따라서 모너가에 파견된 모든 사제의 영주권과 사면권, 모너가와 레임 왕국이 발행한 사제 직위를 지금 현 시간부로 박탈한다.>
"이게 무슨...!"
어딜 봐도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신성 제국의 사제가 타락했다는 걸 인정하고 교황이 고작 촌구석 영지민의 위령제를 치르라니.
친서를 구긴 교황이 고개를 들어 상급 사제를 바라봤다.
"정말 모너가가 전쟁을 불사할 것 같은가?"
난처한 질문에 사제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모너가의 소영주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합니다만, 사제를 죽이고 이런 친서를 보내왔을 정도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거기다...."
어질어질한 보고에 머리를 부여잡은 교황에게 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모너가에서는 성국 내 마족의 존재를 확인했으며 요구 중 하나라도 거부하는 순간 이를 모든 나라 왕실에 알리겠다고 전했습니다."
말과 함께 사제가 조심히 꺼내 든 병에는 아지요그가 흘렸던 검은 피 일부가 들어 있었다.
"그게 뭔가?"
"모너가에서 보낸 증거입니다. 성국이 파견한 마족의 피와 사체를 가지고 있다고...."
그 말을 들은 교황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 질렀다.
"지금 당장 성국 내 있는 모든 주교와 선제후를 불러들여라!"
눈앞에 두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마족의 피를 바라보는 교황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 * *
영주성 내 연락을 담당하는 연락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앉아 있는 연락 담당 마법사와 베인, 아슈이타가 이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각, 다각, 다각.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에 부주교가 슬쩍 옆을 바라보니, 쉬지 않고 다릴 떨며 손톱을 뽑을 기세로 물어뜯고 있는 감사부장이 보였다.
"베인 님, 진정하세요."
타고난 성력과 휴식의 효과로 상태가 훨씬 좋아진 아슈이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베인을 바라봤다.
"부주교님은 지금 진정이 됩니까? 신성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 거나 다름없는데!"
잔뜩 긴장한 베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이며 입술을 짓씹었다.
아슈이타는 하룻밤 새 깊게 내려앉은 다크서클과 수척해진 얼굴에 그가 받은 스트레스를 짐작할 수 있어 그냥 내버려 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했어야 했어요. 내가 미쳤지, 성국에 그런 탄원서를 보내다니. 진짜 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정말로 성직자들이 떠나면?"
한번 피어나기 시작한 불안은 사그라들 줄 모르고 점점 커졌다. 그 불안감이 전염된 아슈이타가 조용히 손을 모아 기도를 시작했을 무렵, 훈련을 마치고 와서 땀에 전 이안이 마침내 연락실에 도착했다.
"응? 다들 벌써 와 있었군."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고 있던 아슈이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베인이 얼굴을 붉혔다.
"소공작님은 평안해 보이시는군요."
"이제 오십니까?!"
성국에서 연락이 왔다는 소식에 새벽부터 일어나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한참이나 늦은 이안을 타박하자, 이안은 오히려 유난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쓸데없는 걱정을 가지고 사는 건 건강에 안 좋아."
이안이 훈련하는 동안 입고 있던 가죽 갑옷도 벗지 않은 채 자리에 앉자 베인과 아슈이타가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지적해 봤자 옷을 갈아입을 것 같지 않았기에 둘 모두 이안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연결해 봐."
연락 담당관의 마나가 마나구를 향해 흘러들어 가고, 십여 분이 지난 뒤, 새하얀 성복을 뒤집어쓴 교황청의 인물이 마나구 위로 나타났다.
"모너가 소가주님?"
깊게 눌러쓴 성복 사이로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쪽은?"
"저는 쉔델자르. 미약하지만 빛의 신의 뜻을 대리하고 있습니다."
내심 추기경 이상의 고위 인물이 나올 줄 알았던 이안은 쉔델자르라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의 뜻을 대리한다고 할 정도면 위치가 높은 게 분명한데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이 협상 테이블에 누가 앉았나가 아니라 무엇을 가져가냐의 문제일 뿐.
이안이 마나구를 향해 말했다.
"이 자리에 나왔다는 건 자네가 성국을 대표할 수 있다는 거겠지?"
그 물음에 반대편에서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는 성신의 뜻을 대리합니다. 신성 제국은 어디까지나 성신의 뜻을 따를 뿐이죠."
여전히 고저도,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것 같은 사무적인 목소리.
"그러니 원하시는 걸 말씀해 보시죠, 모너가의 소공작님."
그러나 그 목소리에 신성 제국의 무게가 실려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의 몸에 전율이 일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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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꼭 뭐든 줄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이안이 재밌다는 듯 마나구 위의 쉔델자르를 바라봤다.
"저희는 오랜 시간 동안 빛의 신의 계시를 따라 악에 대항할 힘을 길러 왔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마족의 존재를 찾을 수 없었죠."
잠시 말을 멈추고 손에 있는 작은 병을 바라보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소공작님께서 주신 피가 마족의 피라는 건… 확인했습니다. 만약 신성 기사단장 중 한 명이 마족이었다면 악이 신성 제국 어디까지 퍼져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말한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부탁했다.
"염치없는 일이지만 모너가의 소공작께서 어떻게 마족을 찾으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 대가로 뭐든 줄 수 있다?"
"세상 그 무엇도 악에 대항할 지식보다 귀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무려 신성 제국을 대표하는 인물의 부탁에 입맛을 다셨지만 없는 걸 줄 수는 없다.
"아쉽네."
정말로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하자 쉔델자르가 고개를 들며 의문을 표했다.
"예?"
"마족을 찾은 건 완전 우연이었어. 이쪽 부주교를 노린 놈이 모습을 드러낸 거지, 내가 찾은 게 아니야."
만약 아슈이타가 아니었다면 마족은 그냥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주교야 영지 전체를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았겠지만, 살생부에 없던 기사단장이 사라졌다면 찾지 않았을 터.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이자 쉔델자르가 독촉하듯 말했다.
"마족과 관련된 정보라면 뭐든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 마족은 죽는 순간에 다시 돌아올 거라고 말했어. 육체가 죽기도 전에 몸에서 느껴지던 마기가 사라졌었지."
그 말에 쉔델자르가 의심쩍다는 듯한 목소리로 이안을 바라봤다.
"외람되지만, 소공작님께서도 그곳에 계셨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백색 가면을 쓴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고...."
"아, 그 친구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야."
신뢰도가 바닥을 치는 자신이 말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이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그 친구랑도 만나게 해 줄게. 지금은 내 말을 믿어.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아지요그라는 그 마족이 죽지 않았다는 것뿐이야."
나름 진심을 담아 말했음에도 상대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모너가의 악명 높은 망나니 소공작 아니던가.
"설마 3성급 성기사 스무 명과 주교급 사제를 죽인 백면도 마족을 죽일 수 없었다는 건가요...."
고개 숙인 채 턱을 괴고 고민하기 시작한 쉔델자르의 목소리에는 아직 불신이 남아 있었다.
"죽일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상대도 되지 않았다고 하더군."
이안이 진지한 눈으로 쉔델자르를 바라봤다.
'이 세계에서 내가 가진 가장 큰 힘은 정보다. 마족은 그 존재만으로 정보를 뒤바꿀 수 있어. 지금 당장은 이쪽에서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저들을 이용해야 해.'
게임 속에서 나오지 않는 마족이 나타난 만큼, 신성 제국을 이용해 마족을 조사하도록 움직여야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마족의 정확한 힘을 알려 주는 게 가장 중요했다.
문제는 쉔델자르가 자신의 말을 순순히 믿지 않으리라는 것. 다행히도 이쪽은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한 히든카드가 있다.
"그 자리에 있던 부주교라면 알고 있겠지. 그 마족이 얼마나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말에 아슈이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의 말을 받았다.
"제가 본 악마는 여태까지 봐 온 그 어떤 마물보다 강대한 마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공작… 아니, 백면은 그 마족이 조금만 더 힘을 회복했거나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면 마족이 아닌 자신이 죽었을 것이라 하더군요."
아슈이타에게는 자신이 백면인 걸 숨겨 달라고 미리 부탁을 해 뒀다. 평소라면 절대 따르지 않았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말을 맞춰 둔 것이다.
마족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살짝 몸을 떤 아슈이타가 작게 성호를 그렸다.
"흠...."
생각보다 훨씬 강대한 마족의 등장에 쉔델자르가 고민에 잠길 무렵, 이안이 입을 열었다.
"자, 이 정도면 우리는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 것 같군. 그럼 기사단장이 마족이었다는 건 인정하겠지?"
갑작스러운 그의 물음에 멈칫한 쉔델자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입니다. 그 불길한 흑혈(黑血)이 마족의 피라는 것은 이미 확인했습니다. 보내 주신 선물… 기사단장의 머리에서 흑혈도 확인했고요."
기어코 기사단장의 머리를 선물로 보냈다는 말에 베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안을 바라봤다.
"그럼 마족에 의해 타락한 안타까운 사제를 처단할 수밖에 없었던 모너가의 사정도 이해하겠군."
"...?"
갑작스러운 말에 방 안 모두가 이안을 바라봤지만, 이안은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당당히 말을 이었다.
"마족이 모너가 안에 있던 신실한 사제들을 타락시켰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말하던 이안이 가볍게 책상을 쳤다.
"물론! 고행을 자처해 이곳 모너가까지 찾아온 사제들의 고결함이야 모두 잘 알고 있지! 그런 이들조차 마족의 속삭임에 흔들리다니. 정말 무서운 일이야, 그렇지 않나?"
이안의 형형히 빛나는 눈이 쉔델자르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한동안 이단심문관이 바빠지겠군. 마족의 간사한 혀가 어디까지 퍼져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야. 듣자 하니 성국도 조용하지 않은 모양이고."
그 말에 쉔델자르가 흠칫 몸을 떨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내가 뭘? 그냥 걱정을 전하는 거지. 선제후가 돈에 미쳐 있다는 소문이 이 변방까지 흘러들어 오니 갑자기 궁금해서 말이야."
"...."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칙서를 보냈을 때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마족이 나타난 만큼 어떻게든 그들의 존재를 조커 카드로 유리하게 사용해야 한다.
지금부터는 이 협상의 결과는 온전히 혀끝에 달려 있다. 세 치 혀만으로 신뢰도와 호감도 디버프를 넘어서 어쩔 수 없이 계획에 따르도록 상대를 압박하고 조종해야 하는 것이다.
잠시 목을 축인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모너가가 바라는 건 신의 은총이 이 척박한 땅까지 닿는 것뿐. 그 이상의 욕심은 없어. 그러나 '마족'에 의해 사람이 죽은 이상 누군가 그들의 넋을 달래 줬으면 좋겠군."
신성 제국의 교황이 왕국의, 그것도 공작령의 신민을 위해 위령제를 지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교단의 타락이 그 원인이었다면 더더욱.
그러나 그 원인을 마족에게로 돌릴 수 있다면, 성직자와 성기사가 저지른 모든 죄를 마족에게 전가할 수 있다면 어떨까?
"마족에게… 당한 이들 말입니까."
"그렇지. 신의 은총이 이곳까지 닿지 않아 허망하게 져 버린 안타까운 목숨들, 그들을 위해 매년 위령제를 지내 준다면 그들의 넋을 기림과 동시에 마족에 대한 경고가 되겠지."
"그 과정에서 교단과 신성 제국은 마족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내부를 정리할 수 있겠군요. 사제를 이용해 금력과 군사력을 키우는 선제후들을 압박할 수 있을 테고요."
그렇게 되면 분명 교단과 교황의 힘은 커질 것이다. 애초에 썩을 대로 썩은 교단 내부를 정리한다는 점에서는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 방법이 가장 많은 피가 흐르는 방법이라는 것. 수많은 사제가 죽을 것이고 어쩌면 신성 제국에서 내전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눈앞의 남자는 마족을 빌미로 뒤틀린 교단을 바로잡으라고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잔인함과 무도함에 이안을 바라보는 쉔델자르의 눈빛이 살짝 떨려 왔다.
그러나 이안은 그녀의 눈빛을 무시한 채 상상도 못 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쉔델자르를 쳐다볼 뿐이었다.
"응? 신성 제국 내부에 문제가 있던가? 뭐, 쓰레기가 있으면 청소가 필요하겠지. 그건 신성 제국의 일이니까 우리가 뭐라 조언할 입장은 아니긴 하다만… 만약 청소가 필요하다면 모너가에서 벌어진 일이 증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리곤 한쪽 입술을 슬쩍 들어 올리며 웃었다.
"성국은 아무 잘못도 없었고 마족의 꾐에 넘어간 사제가 있었을 뿐이지. 피해자를 위한 구제금과 위령제까지 신성 제국이 책임진다는데, 개인의 타락을 어떻게 성국에게 따지겠어."
생각에 잠겨 이야기를 듣던 쉔델자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만약 거부한다면...."
"우연히, 아주 우연히 대륙의 모든 나라가 신성 기사의 시체를 발견하게 될 거야. 불길한 흑혈이 흐르는 마족의 유해를."
덤덤하게 말하는 이안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마도, 만약에 그런 일이 있다면 모너가는 마족을 숨기는 성국과 가장 먼저 척지겠지. 모너가에 있는 마지막 한 명의 성직자까지 추방당할 것이고, 교단은 성역을 잃어버리게 될 거야. 정말 불행한 일이지."
이안의 단호한 모습에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든 쉔델자르가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원하시는 건 마족… 에게 당한 이들의 위령제와 구호금입니까? 더 무리한 요구를 해 올 거라 생각했습니다. 모너가에 식량이 필요하다고 들었는데요."
역시.
이안도 처음에는 식량이나 신성 제국의 압박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신성 제국이 나서서 상인 길드를 압박한다면 상인 길드도 더 이상 식량에 장난치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만약 식량이나 돈을 요구했다면 신성 제국은 그 대가로 이 일을 불문에 부치라 요구했을 것이다.
원래 협상 테이블에서는 절박한 쪽이 항상 지는 법 아니던가. 없어도 있는 척, 쫄려도 아닌 척. 가슴 펴고 당당하게.
"모너가를 뭐라고 생각한 거야? 성직자에게 믿음이 아닌 다른 걸 요구할 리가 없지."
그 말에 쉔델자르가 어이없다는 듯 이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보다 훨씬 큰 걸 요구하셨습니다만...?"
이안의 요구대로 따른다면 신성 제국에서 엄청난 피가 흐를 것이다. 교황과 교단 세력이 부패한 교단 내 사제들을 향해 징벌을 시작하고 이단심문관의 활동이 시작되면 선제후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아무도 모른다.
결국 오랜 시간 교단의 위아래서 고여 있던 탁한 피가 마침내 터져 나와 세상을 덥힐 것이다.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이안이 손으로 이마를 누르고 있는 쉔델자르를 보며 귀를 후볐다.
"여하튼 이 정도면 서로 원하는 바는 충분히 전한 것 같고, 좋은 소식을 기대하지."
반문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아, 이쪽 대성당에 주교가 없는데, 그쪽의 추천을 받자니, 마족이 부임할지도 모르잖아?"
누가 들어도 모든 사제를 잠재적 마족 취급하는 이안의 말에 쉔델자르가 인상을 구겼다.
"속 긁지 마시고 원하시는 걸 말씀하시죠."
"별건 아니고, 그래도 명색이 파견 주교인데 아무나 받기가 참 그래서 말이야. 백면이 추천한 아슈이타가 주교직을 맡아도 되겠나?"
이안이 부주교를 가리키며 말하자, 그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사제가 된 기간도 길지 않고 교단에는 저보다 훌륭하신 분들이 훨씬 많...."
그러나 이안의 단호한 표정을 본 쉔델자르는 이미 이안의 부탁이 요청이 아닌 통보라는 걸 깨달았다.
"자국의 인사권에 침해하는 건 심각한 일입니다, 소공작님."
"그래서 부탁했잖아."
헤실헤실 웃으며 자리를 떠나려는 이안을 보는 쉔델자르의 미간이 좁혀졌다.
"다음번엔 꼭! 백면 님과 직접 대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안의 말을 전혀 못 믿겠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린 이안이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그러지 뭐. 근데, 짝사랑은 원래 끝이 좋지 않은 법이야."
조롱 섞인 이안의 대답에 쉔델자르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그럼 이만 가 보지. 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도 될까?"
"어차피 물어보실 거 아닙니까?"
서릿발처럼 차가운 쉔델자르의 목소리를 무시한 이안이 유난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인 뒤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빛의 신을 대리한다며? 직급이 뭐야? 추기경?"
그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숙인 쉔델자르가 모기보다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답했다.
"…교단에서는 성녀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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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5화
행정관 로베르토를 둘러싼 사건의 처리와 행정관 및 고용인의 전수조사, 거기다 갑작스러운 영주 회의의 주최 준비까지. 모너가의 영주성은 지난 10년 중 가장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영주성의 집무실, 어깨높이까지 쌓인 서류와 씨름하던 섭정관 마크버그가 갑작스러운 소식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어 보좌관을 쳐다봤다.
"마족이라고...?"
"예, 대성당 주위를 우연히 배회하던 소공작의 기사가 대성당에 있던 마족과 잔당을 처단했다고 합니다."
요즘 피곤해 보인다 싶더니 사람이 갑자기 미쳐 버린 걸까. 보좌관을 유심히 바라봤지만, 기계 같은 보좌관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세상에 마족이 어딨어?"
물론 마족에 대한 전설이야 많다. 인간을 잡아먹는다든가 악마의 하수인이라든가 하는.
아무리 마물이 판치는 세상이라도 마족이 정말 존재할 리가 없다. 애초에 신들의 축복을 받는 이 대륙에 마족이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거기다.
"…그 망나니한테 기사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 누가 망나니에게 자신의 평생을 바치고 싶어 할까. 소공작임에도 불구하고 이안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아니, 없다고 알고 있었다.
"백색 가면을 쓴 자가 소공작의 기사를 자처했다고 합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단검을 쓰는 암살자 같았다고...."
"허… 어디 암살자 길드에서 청부업자라도 주워 온 건가? 근데 그 암살자가 우연히 마족을 죽였다고?"
소공작이 우연히 발견한 암살자가 기사가 되어 또 우연히 마족을 사냥했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애초에 천사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존재가 고작 암살자에게 당했다고?
갑작스럽게 영주 회의를 요구한 것도 그렇고. 왠지 불안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그래서 신성 제국에서는 어떻게 하고 싶다는데?"
"그게… 마족의 현혹에 빠진 사제의 책임을 통감한다며 위로금을 보내왔습니다."
그 말에 섭정관이 침음을 흘렸다.
교단이 썩은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설마 마족을 핑곗거리로 삼을 줄이야.
"허, 마족의 현혹이라니. 누가 생각했는지 몰라도 좋은 변명이군. 그래서 뭘 하고 싶다는데?"
"마족에 의해 패악을 저지른 사제들의 행동에 깊은 유감을 표하며, 피해자를 위한 위령제를 진행하겠다고 요청해 왔습니다."
"허...."
마크버그가 경악한 눈으로 보좌관을 바라봤다. 설마 그 신성 제국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움직이다니, 어딘가 영 이상했다.
"뭐지? 신성 제국이 갑작스럽게 모너가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섭정관이 수상쩍다는 듯 턱을 훑으며 고민하자 보좌관이 말을 이었다.
"그게, 고위 성직자를 보내면서 현재 영지에 있는 사제의 악행을 조사해 보겠다고 합니다. 마족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면서요."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내전을 벌이려는군. 교황이 무모한 선택을 했어."
신성 제국은 마족의 등장이라는 비상식적인 사건을 권력투쟁의 단초로 삼고 싶은 모양이다. 사제의 부패를 모두 마족의 탓으로 돌리고 교단 내의 부패와 부정을 척결하려는 것이다.
"신성 제국이야 그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야 돈도 주고 위령제까지 치러 준다니 웃으며 떡이나 먹자고."
섭정관이 굴러 들어온 떡에 빙글 웃었다가 다시 얼굴을 굳히며 보좌관에게 당부했다.
"당장 다음 주가 영주 회의야. 소영주의 기사가 너무 부각되지 않게 이건 치안대가 잘 활약한 걸로 해 두지."
이번 영주 회의는 아직도 소공작을 지지하는 세력을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이니만큼 그 망나니에게 조금의 관심이라도 흘러가선 안 됐다.
"놈이 무슨 짓을 해도 오천만 골드를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거야. 가진 거라곤 쓰지도 못하는 직위밖에 없는 그 망나니가 뭘 어쩌겠어."
말을 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마크버그는 다시 한참이나 쌓인 서류 속으로 뛰어들었다.
* * *
"흠...."
연병장 한가운데 누워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는 퀘스트창을 바라봤다.
[퀘스트 완료]
-퀘스트 목표 초과 달성으로 보상이 증가합니다.
[마족을 패퇴시켰습니다.]
-퀘스트 보상이 증가합니다.
[최초로 마족을 속였습니다.]
-늙은 양지기 아지요그가 당신의 영혼을 노리고 있습니다.
-퀘스트 보상이 증가합니다.
반짝거리는 [보상 수령] 버튼을 누르면 이번 퀘스트는 완전히 끝날 것이다.
'부족해....'
성녀와 협상을 마친 후 이안은 하루의 대부분을 연병장에서 보냈다.
마족과의 싸움에서 얻은 심득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 아니라 힘이 부족하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작 이런 어중간한 힘으론 죽도 밥도 안 돼. 압도적인 힘과 조직이 필요한데....'
그때 대원들과 훈련을 진행하고 있던 리나와 퍽이 다가와 바닥에 널브러진 이안을 보고 질색하며 말했다.
"공작님, 또 마나를 다 쓰신 건가요?"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검흔(劍痕)을 보건대, 새벽부터 나와 계속 단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마족을 봤다던 그날 이후로 이안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조급해 보였다.
"대장! 저희는 준비 끝났어요!"
옆에 있던 퍽이 팔짝 뛰면서 소리쳤다. 특성을 개화하지 못해 한동안 우울해하던 퍽은 어느새 기운을 차려 그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에 참여하고 있다.
"대장이 아니라 소공작."
몇 번이고 자신을 대장이라고 부르는 퍽에게 피식하고 웃어 보인 뒤 몸을 일으키니, 저 멀리서 다가오는 대원들이 보였다.
"…진짜 아무도 안 갔네."
저 중 대성당에서 있었던 일의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음에도 모든 대원이 이곳에 남아 있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장, 대장. 리나랑 언니랑 레이나 언니가 그랬는데 이제 우리도 기사단처럼 이름을 정할 거래요. 뭐가, 뭐가 좋을까요?"
퍽이 기대에 가득 찬 눈을 깜빡거리며 사탕을 원하는 아이처럼 이름을 졸라 댔다. 이안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대원들을 바라봤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본인의 특성조차 모른 채 집과 시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이들.
그들을 바라보던 이안이 천천히 말했다.
"흑귀단(黑貴團)."
지구에도 저런 이들이 있었다.
적들이 습격한다는 걸 깨닫고 집과 주방에서, 빨래터에서 나와 고작 손도끼 한 자루로 성을 방어해 낸 위대한 여성들.
성 토르토사를 지켜내고 기사 작위를 받아 명예로운 '자귀 기사단(Order of the Hatchet)'이라고 불리던 그들처럼, 흑귀단도 언젠가 가장 고귀한 어둠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안이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대원들의 면면을 훑었다.
"뭐야… 하나도 안 멋있어."
"꼭 암살단 이름 같네요."
"암살단은 무슨, 뒷동네 깡패 조직 이름이지. 요즘은 깡패들도 부끄러워서 저런 이름은 안 지을걸?"
퍽, 레이나, 리나의 말이 순서대로 가슴을 후벼 팠다.
"뭐 그래도 지금 별명보다는 좋으니까요."
작게 웃은 레이나가 새로 정한 이름을 알려 주기 위해 퍽을 데리고 대원들에게로 향했다.
"지금 별명?"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이들에게 이름을 준다는 건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해서 저들은 대원이라고 불렸을 뿐, 별명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그런 생각에 리나를 바라보니 리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소공작의 베개들'이나, '밤 시녀'들이라거나. 사람들 생각하는 거야 뻔하죠, 뭐."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그녀의 말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내가 데려온 이들인 만큼 충분한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
"…너희가 아니라 날 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오면서 그 정도도 예상하지 못한 사람은 없을걸요? 다들 울며 불며 왔었는데 지금은 다들… 자랑스러워해요.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궁금해하기도 하고."
리나의 눈길이 이안에게 닿았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어린 공작. 무모한 듯 보이면서도 모든 행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단순한 우연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우연일 것이다. 퍽의 말을 듣자마자 성직자를 죽인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운 점이나 자기 말을 듣고 당장 시청으로 쳐들어가는 모습을 봤을 때, 공작은 전략이나 전술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무식한 인간.'
말 그대로 무식한 인간이다. 세상 그 누가 평민 여자들의 말을 들어 주고, 공감해 주고, 함께 아파해 줄까.
그래서 리나는 자신의 재능을 깨워 준 이안의 운에 인생을 걸어 보기로 했다.
부모의 억울함을 갚아 준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사람답게 걷고 말할 수 있게 된 지금을 선물한 그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러니까 앞으로도 자랑스러워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물론이지."
힘차게 답한 이안이 흑귀단을 향해 걸어갔다.
* * *
그날 오후, 이안은 영주 회의 전 마지막 점검을 위해 레이나와 황금 고블린 상단으로 향했다.
"소공작님!"
여전히 능글맞은 얼굴을 한 릭이 이안을 보자마자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아휴,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저기 대성당에서 큰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려! 그 무서운 전설 속 마족이 숨어 있었다고...."
옆에서 쉼 없이 재잘거리던 릭이 순간 멈칫하더니 이안을 보는 그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하하! 설마 내가 마족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예?! 아유, 설마요! 소공작님 농담도 참!"
그러면서도 몰래 손을 깍지 끼고는 눈을 감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말? 진짜 지금 걸으면서 기도하는 거야?"
"네? 아, 제가 어제 저녁 예배를 깜빡했지 뭡니까. 대성당도 난리고 상단 일도 넘치니 정신이 있어야죠. 하하...."
이안은 어이없다는 듯 멈춰 서서 입술을 달싹거리며 걸어가는 릭을 바라봤다.
"거룩한 빛의 신이시여, 부디 악을 멸하시어 제 삶이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저 새끼 저거 구마문(驅魔文)으로 기도하네."
눈을 감고 걸어가는 릭의 입에서는 악마를 쫓아낸다는 성전의 일부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엄연히 산 사람을 악마로 몰아가는 릭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쳐다보던 이안이 억울한 표정으로 레이나를 바라보자, 그녀가 재밌다는 듯 입을 가린 채 작게 웃고 있었다.
"그래, 그래도 애는 착하니까...."
* * *
"어서 오십시오."
릴라이는 어딘가 평소보다 더 험악한 인상을 하고 사무실로 들어온 이안과 옆에서 살짝 몸을 떨고 있는 릭을 바라봤다.
"혹시 릭이 무슨 실례라도...?"
"아이, 무슨 소리십니까, 사장님. 사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정중하고 세련되게, 매너 있게 모셔 왔습니다."
다급한 릭의 변명에 미심쩍은 얼굴로 잠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릭의 손가락으로 몰래 성호를 그리고 있는 게 보였다.
"릭."
"네, 네! 사장님."
잠시 손으로 이마를 짚은 그녀가 방문을 가리켰다.
"당장 꺼져."
"네! 네! 감사합니다!"
꺼지라는 말에도 릭은 드디어 구원받았다는 듯 깊숙이 고개를 숙이곤 헐레벌떡 밖으로 나갔다.
"저 아이가 겁이 워낙 많아서요...."
"괜찮아, 뭐 사람이 악마처럼 보일 수도 있지."
말과 달리 이안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릴라이가 오늘은 기어코 릭의 손가락을 모조리 부러뜨리리라 다짐하고 있을 때, 소파에 앉은 이안이 몸을 숙이며 물었다.
"그래, 부탁한 일은 끝났나?"
"네. 남은 삼천오백만 골드로 전부 식량을 사들였습니다. 조건은 말씀하신 대로 배상금을 최대로 설정했구요."
여러 장의 계약서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은 그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뭐가?"
"정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잖아요...."
그러자 이안이 책상 위의 계약서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전쟁은 하고 싶어도 못 해. 공작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최전방에 있는 기사단 중 하나만 움직여도 왕국의 기사단이 이쪽으로 달려올걸?"
정말 전쟁이 일어나면 모너가는 질 리가 없다. 전방의 모든 검과 방패가 왕국을 향한다면 왕실과도 충분히 일전을 벌일 수 있는 전력을 갖추고 있다.
그걸 알고 있는 왕실은 전쟁의 조짐이 보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쟁을 막기 위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세 영지가 믿고 있는 것도 그거고."
무슨 짓을 해도 전쟁까지 번지지는 않으리라는 확신. 그 확신 때문에 세 영지가 저토록 오만한 자세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모너가를 좀먹어 온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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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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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모너 공작가의 영토는 마물의 숲 전역이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땅은 마물의 숲 초입에 있는 번화 도시 리어, 영주성이 위치한 도시 센트럴 홀드 그리고 마물의 숲 심부이자 경계를 맞고 있는 프론트 홀드뿐이다.
영주성이 위치한 도시를 수도로 지정한 다른 가문과 달리 모너가는 가장 안전한 도시 '리어'를 수도로 두고 있다.
영주성이 위치한 센트럴 홀드는 경계가 뚫렸을 때를 대비한 2차 방위 도시.
설계할 때부터 영주민의 안전한 대피와 소거를 위해 만들어진 만큼 리어에서 센트럴 홀드 사이는 거대한 대로인 '페일세이프'로 이어져 있다.
"그러니까...."
그 페일세이프 인근에 흑귀대와 이안이 숨어 있었다.
"산적이요?"
검은색 후드를 걸친 리나가 당황한 듯 물었다.
"그렇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식량을 실어 나르는 상인을 털 거야."
이게 무슨 고블린 대학 가는 소리인가.
페일세이프에는 산적이 없다.
아니 애초에 산도 없는 잘 닦인 대로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페일세이프에 산적이 어디 있어요!"
"바로 그걸 노리는 거지. 리어에서 센트럴 홀드로 가는 길은 산적도 몬스터도 하나 없는 평화로운 대로밖에 없단 말이야."
모너가는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검만 쥘 수 있으면 병사든 사냥꾼이든 될 수 있는 영지니 만큼 당연히 산적이나 도적이 존재할 리가 없다.
모래 섞인 빵이 배급되는 중에도 아사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건, 그만큼 도시의 평균 소득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왕국에서 가장 안전한 도로가 바로 이 페일세이프일 터.
"그럼, 여기로 오는 상단이 호위를 데리고 올까?"
"그래도 데리고 오지 않을까요? 어떤 상단이든 리어까지는 호위를 데려왔을 테니까...."
"그럼 돈이 더 나가잖아. 아마 백이면 백 호위는 리어에 두고 식량이랑 일꾼만 데리고 왔을걸?"
잠시 생각하던 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면 왜 산적인가요?"
"...?"
리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 근처에 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는 거라고는 끝없는 도로밖에 없으니까, 음… 그냥 강도 아니에요?"
순진한 얼굴을 한 그녀의 잔인한 팩트 폭격에 이안이 몸을 흠칫했다.
"무슨 소리야, 강도라니. 강도는 멋이 없어서 안 돼. 자랑스러운 흑귀단의 첫 번째 임무가 강도질이라니, 절대 안 되지."
"…산적질은 괜찮구요?"
그러게.
순간 할 말이 없어진 이안이 얼버무리듯 말했다.
"여하튼 우린 산적이야. 목표는 이곳을 지나가는 모든 상인이고."
"강도질이 아니라 산적질이라니 엄청나게 명예로운 첫 번째 임무네요."
"첫 번째 임무는 대성당 지키기였어. 그건 정말 명예로운 임무였지."
"공작님이 이게 첫 번째 임무라고 하셨으면서."
어쩐지 시간이 갈수록 리나가 자신을 막 대하는 것 같다고 느끼는 사이, 레이나와 퍽이 다가와 상인들의 접근을 알렸다.
"도련님, 저 멀리서 켄타우르스 깃발을 든 상단이 다가오고 있어요."
"대장! 사람들이 엄청 많아! 사람도 많고 말도 많고 마차도 엄~청 많아!"
'켄타우르스 상단이군.'
켄타우르스 상단은 후방 도시 리어를 경계로 마주하고 있는 세 영지 중 하나인 옵솔 영지의 둘째 아들이 운영하는 상단이다.
영지민에게 헐값에 강제로 징수한 식량을 모너가에 판매해 수십 배의 수익을 내고 있다는 말을 릴라이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럼 영업을 시작해 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의 뒤편으로 검은색 후드를 걸친 21인의 흑귀대와 여전히 하녀복을 입은 레이나가 뒤따랐다.
* * *
"빨리빨리 안 움직여?!"
짜악!
옵솔 백작가의 차남 트레시의 고함과 동시에 채찍이 살갗을 찢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굼벵이 같은 것들! 오늘 물건을 넘겨야 주말까지 영지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이다!"
트레시는 마물의 숲에 위치한 이 불길한 영지에서 단 하루도 더 보낼 생각이 없었다.
'언제까지고 경비견들 사료나 주면서 살 수는 없어. 결국 중앙으로 나가야 해.'
백작위를 계승하지 못하는 차남으로서 이 상단은 스스로 작위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기 위해선 하루라도 빨리 영지로 돌아가 곧 있을 왕국의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해야 했다.
"더 빨리 걸어라! 속도를 늦추는 놈들은 버리고 가겠다!"
말을 탄 트레시가 채찍을 휘두를수록 쓰러지는 짐꾼들에 의해 행군 속도는 늦어졌지만, 트레시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쓰러진 놈들은 이곳에서 죽도록 놔둬라! 어차피 쓸모없는 것들, 짐만 챙겨서 계속 이동한다!"
그렇게 반쯤 이동했을 때, 선두에서 상단을 이끌던 보좌관이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도련님, 한 시간쯤 거리에 길을 막고 있는 무리가 있는데 어떡할까요?"
"뭐야, 다른 상단에서 낙오된 이들인가?"
목숨이 두세 개쯤 있지 않은 이상 혼자서 마물의 숲에 있는 센트럴 홀드까지 올 리는 없으니, 아마 주변 영지의 상인이 버리고 간 낙오자들일 것이다.
"좋아, 상태가 괜찮으면 우리가 주워서 가고 상태가 영 아닌 것 같으면 버리고 가지."
"그럼 더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도 오면서 버린 쓰레기가 많아서 좀 채워 가긴 해야 돼. 저것도 다 돈이라고."
페일세이프를 지날 때면 종종 있는 일이었다. 며칠은 지루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만큼 노예나 짐꾼 중 환자가 발생하면 행군 속도를 늦추기보다 길 중간에 버려 두고 가는 것이다.
버려진 이들은 운 좋게 센트럴 홀드까지 걸어가거나 아니면 길을 걷는 다른 상단이 주워 간다.
노예들이 상단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고 길을 막고 있다는 점은 이상했지만, 아마 굶어 죽기 직전의 노예 무리가 어떻게든 연명하기 위해 매달리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상단을 재촉했다.
"자! 속도를 높여라!"
그의 고함 소리와 함께 채찍이 바람을 가르고, 어김없이 낙오자가 상단에서 버려졌다.
* * *
"흠...."
검은색 복면을 쓴 이안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상단을 보며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마차를 버리고 떠나라!'는 어때?"
"절대 안 돼요."
산적에게 첫 한마디만큼 중요하고 임팩트 있는 게 없다. 모든 소설 속 악당의 첫 대사가 그의 무게를 정하지 않던가.
"그럼, '지금 당장 안 꺼지면 다 죽는다!'는? 너무 고전적인가?"
"공작님은 정말… 편하게 사셔서 좋겠어요."
도대체 저게 무슨 뜻일까 고민하는 사이, 리나가 말을 이었다.
"저희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거예요. 아마 낙오된 노예라고 생각하겠죠."
"노예? 길 한복판에?"
"모너 영지에서는 노예 거래가 불법이지만 외부에서 들어온 상단은 일꾼보다 노예를 더 많이 쓰거든요. 가축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니, 쓸모를 다했다 싶으면 오고 가며 버리기도 하는 거죠."
하긴, 10년 뒤 이안도 상단에 노예 검사로 팔려 가는 만큼, 이 세계의 노예는 생각보다 흔할지도 모른다.
"그럼 노예도 저들의 자산인 건가?"
"…그러겠죠?"
"우리 영지는 시급도 좋고 대우도 좋은데 말이야...."
저 멀리서 접근하는 상단을 바라보는 이안의 눈이 기분 좋게 휘자, 이안의 의도를 읽은 리나가 물었다.
"노예도 훔치시려고요?"
"훔치다니, 정중하게 고용을 제안해 보자는 거지."
노예는 영지에 돌아가면 병사로, 인부로, 사냥꾼으로 뭐든 할 수 있는 전천후 자원이다.
'로크에서 식량과 인력만큼 중요한 건 없지.'
"그럼 신입을 받으러 가 볼까?"
기대에 찬 모습으로 이안이 흑귀대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멈춰라!"
다가오는 상단 행렬을 향해 이안이 마나를 담아 소리쳤다.
사실 산적단장이 소리치는 건 영 멋없는 일이라 리나에게 부탁했지만, 선두에 여자가 있다는 걸 알면 더 무시할 거라는 그녀의 의견에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는 릭을 데려와야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상단에서 쥐 새끼처럼 수염을 기른 남자가 나와 소리쳤다.
"바쁘니까 한 번만 말한다! 병자를 제외하고 사지가 멀쩡하면 후위에 따라붙어 짐을 나눠 들어라! 배식은 단 한 번, 센트럴 홀드에 도착하면 지급한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더 할 말도 없다는 듯 상단의 행렬에 합류했고, 이안과 흑귀대만 멀뚱히 남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상단을 바라봤다.
"...."
"푸흣!"
뒤에서 리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특성 『암군』에 의해 숨소리까지 조절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저 코웃음은 의도적인 비웃음이 분명했다.
"하...."
이래서 임팩트 있는 협박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원래 산적질이라는 게 보통 협박으로 잘 끝나지 않는 법 아니던가.
"어쩔 수 없지, 뭐."
챙!
이안이 오른쪽 손을 들며 말하자, 흑귀대 전원이 검을 뽑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려 일백 이상의 상단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떨지 않고 초연히 명령을 기다릴 뿐이었다.
"시작하지."
이안의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21개의 인형(人形)이 도화지 위의 먹물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 * *
전투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애초에 전투 인원이 전혀 없었던 상단은 흑귀대의 등장에 무방비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땅에 엎드려라! 항복한 이들은 공격하지 않겠다!"
리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수십의 노예가 재빨리 땅에 엎드렸고, 흑귀대는 상황을 판단하지 못한 짐꾼들의 무릎을 찔러 빠르게 제압해 나갔다.
"막아! 막으라고! 여자 하나 못 잡는 거냐?! 몸이라도 던져서 막으란 말이다!"
트레시는 연신 채찍을 휘두르며 노예를 닦달했지만,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허벅지를 꿰뚫는 검을 본 일꾼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뒤였다.
고작 십여 분.
이십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흑귀대는 켄타우르스 상단을 제압하고 트레시를 끌고 왔다.
"이이익...! 너희는 뭐 하는 것들이냐!"
밧줄로 제압된 채 바닥에 질질 끌려온 트레시가 소리치자, 이안이 반색하며 답했다.
"우리? 보면 몰라? 산적인데."
트레시가 바닥을 끌려온 치욕과 억울함을 숨기지 못하고 핏대를 세우며 부정했다.
"거짓말하지 마라! 이 근처에 산이 어디 있다고! 누가 보낸 것이냐?! 리트 영지? 그 뱀 같은 것들이 감히!"
그의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페일세이프는 모너가가 직접 관리해 지난 10년간 단 한 번의 사고도 없던 가장 안전한 무역로 중 하나였다. 산적 따위 있을 수도, 있을 이유도 없다.
"옵솔 가문은 절대 오늘을 잊지 않을 것이다!"
트레시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 질렀지만,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고민에 잠겼다.
'이거 잘하면 생각보다 일이 재밌게 흘러가겠는데?'
원래 계획은 여기서 놈들의 식량을 터는 것뿐.
상인 협회의 단단한 결속력을 생각해 볼 때 세 영지 사이에는 들어갈 틈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감히! 내가 네놈들의 속을 모를 줄 알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치욕을 갚을 것이다!"
자신을 절대 죽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칼을 든 상대 앞에서도 고함을 멈추지 않는 트레시를 보며 이안이 빙글 미소 지었다.
"이거,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는데?"
과장된 몸짓과 어색한 말투로 대답한 이안이 트레시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우리는 리트 영지에서 온 기사들이 아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이런 비겁한 짓을 할 약삭빠른 놈이 또 있을까?!"
"우리와 비슷한 기사단은 없다."
"아니야! 그… 그… 그래! 페이블 기사단! 내가 확실히 기억… 꾸엑!"
원하는 대로 오해해 주는 호구의 훌륭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거리던 이안이 트레시의 뒤통수를 쳐 기절시킨 후 리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놈들이 가져온 식량과 노예를 전부 챙겨서 떠난다."
이안의 명령에 흑귀대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리나가 옆으로 와 이안에게 물었다.
"사람을 몇 시켜서 세 영지의 기념품이라도 구해 볼까요?"
그 악랄한 아이디어에 빙긋 미소 지은 이안이 답했다.
"바로 그거야. 그냥 기념품 말고, 기사단 문양이 큼지막하게 박힌 거로. 알았지?"
만약 놈들의 결속이 보이는 것만큼 단단하지 않다면, 생각지도 못한 내부 분열로 무너져 내릴 것이다.
어부지리라니.
그 생각만으로도 달콤한 과실에 이안이 미소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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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7화
켄타우르스 상단을 성공적으로 약탈한 이안은 식량과 노예의 처리를 황금 고블린 상단에 맡긴 뒤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페일세이프로 돌아왔다.
"저기, 소공작님 저는 정말 도움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저는 힘도 약하고 재주도 없거든요!"
기껏 준비한 비장의 무기는 굉장히 불만이 많았지만, 이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처음에는 조금 미안했지만, 오는 길 내내 구마문을 읊어 대던 릭의 모습에 마지막 남은 양심조차 사라졌다.
"걱정하지 마, 릭. 오늘은 네가 가장 잘하는 일만 하면 되니까."
덤덤하게 말하는 이안의 말에 릭이 드디어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다는 듯 당당하게 소리쳤다.
"저희 사장님께서 매일! 단 하루도! 빠짐없이 저한테 말해 주시거든요! 저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
스물이 넘는 흑귀대가 그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지만, 릭은 목숨을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위 뒤도 안 보고 버릴 수 있는 남자였다.
"저는 정말 쓸모가 없습니다! 제가 장담하죠!"
릭이 가슴을 탕탕 치면서 말하자 이안이 릭의 어깨를 잡았다.
"아니야, 릭. 사람은 모두 소중한 가치와 재능을 가지고 있지. 네가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 너는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
태어나서 처음 듣는 칭찬에 릭이 대체 무슨 개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안을 바라봤다.
"난 널 믿어."
그 말을 끝으로 이안은 리나와 레이나를 향해 걸어가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릭의 눈동자가 아련히 떨려 왔다.
아무래도 모너가의 소공작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 듯했다.
* * *
"정말 저 애한테 재능이 있나요?"
"그럼, 상상도 못 할 어마어마한 재능이지."
리나는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 멍청한 얼굴을 한 릭을 바라봤다. 상단의 유일한 일꾼으로서 발이 빠르고 짐을 잘 나른다는 점을 제외하면 도무지 장점을 찾기 힘든 남자였다.
"흠… 그런가?"
다만, 이안이 직접 뽑은 흑귀대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리나는 이안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단검을 휘두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듯 릭도 나름의 재능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준비는 끝났나?"
이안의 물음에 리나가 허리 한쪽에 묶어 놓은 자루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네. 세 영지의 기사단 문양이 있는 기념품을 챙겼어요. 짐꾼들 사이에서 부적처럼 쓰이는 모양이더라고요."
"좋아. 다음번에 누가 올지 기대해 보자고. 되도록 리트 영지에서 왔으면 좋겠는데...."
이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서 다가오는 상단을 확인한 퍽이 연신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대장! 대장! 상단이 오고 있어! 거북이 모양 깃발!"
"볼트터틀인가. 머천 영지군."
신입을 받을 준비에 신난 이안이 비장의 무기를 불렀다.
"릭!"
"네, 넵, 소공작님!"
상단이 다가온다는 소리에 조심스럽게 도망가려던 릭은 고양이처럼 발을 든 상태로 몸을 돌려 이안을 바라봤다.
"하, 여기서 도망갈 데가 어디 있다고?"
"헤, 헷… 저는 검도 못 쓰니 아무쪼록 안전한 곳으로 먼저 피신해 있으려고...."
자기는 아무 잘못도 한 적 없다는 듯 헤실거리며 답하는 릭을 본 이안이 천천히 상단을 가리켰다.
"가라! 릭!"
"네, 네?!"
드디어 악마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생각에 릭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 *
"이노오오오옴! 멈춰라!"
마나 하나 담기지 않았음에도 어딘가 신경을 거스르는 릭의 목소리가 대로를 덮치듯 퍼져 나갔다.
"우리는 악명 높은 대로 위의-"
당장이라도 울 듯 그렁그렁한 눈으로 리나를 한번 바라본 릭이 눈을 꼭 감고 소리쳤다.
"…대로 위의 산적단! 가진 걸 다 놓고 꺼지면 죽이지는 않으마!"
덜덜 떨리는 목소리와 몸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원래 산적질은 기세와 목소리가 절반인 법.
"당장 가진 걸 내놓고 꺼져라!"
릭의 고함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무 효과도 없었다.
"뭐야? 미친놈인가?"
"산적이라는데?"
"여기 산이 어디 있어? 쯧. 여기에 버려지고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
볼트 상단을 이끌던 티에르는 상단을 멈춰 세운 미친놈을 바라봤다. 앙상한 몸과 어딘가 신경을 긁는 목소리.
"오전에 켄타우르스가 먼저 출발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쪽에서 떨어져 나온 놈이 아닐까요?"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으니까 그냥 가자. 옵솔에서 나온 게 다 그렇지 뭐."
역시나 릭을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하자, 당황한 릭이 온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살고 싶다면 당장 항복해라! 제발! 서 있는 놈들은 모조리 허벅지에 구멍을 뚫어 주겠다!"
그 절박한 외침과 동시에 검을 뽑아 든 흑귀대가 볼트 상단을 덮쳤다.
* * *
"크흐흐… 옵솔 영지의 기사였나."
티에르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에 비참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낙오된 짐꾼인 척 상단을 노리다니, 말 성애자 머리에서 나온 것치고는 대단한 전략이군."
단 한 명의 짐꾼도 죽이지 않고 제압하다니, 확실히 생각지도 못한 한 수였다.
피해자가 수도 없이 많으니 돌아가는 길은 한없이 지체될 것이고 옵솔 영지의 비겁한 습격은 며칠이 지나야 겨우 영지에 알려질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설마 우리의 계약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신생 상단인 황금 고블린과의 계약.
무려 2배에 가까운 가격으로 식량을 사들인 신생 상단은 단 한 가지 조건을 고수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시간에 물건을 배달할 것.
만약 제시간에 물건을 납품하지 못하면 10배의 배상금을 물어 줘야 한다.
계약 당시까지만 해도 신생 상단이라 페일세이프의 안정성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처음부터 이걸 노렸군."
티에르의 목소리에 분노가 어렸다.
이 자리에서 살아 나가기는 어려울 테지만, 머천 영지는 제 자식의 죽음을 그냥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끝까지 추적해서 이 비통함을 갚으리라.
"볼트터틀은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지지 않는다."
비장함이 깃든 목소리로 말하자 예의 그 신경을 긁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이 양반아. 그러니까 빨리 엎드리라니까! 꼭 고생을 사서 하는 인간들이 있어요. 쯧."
싸움이 벌어지자마자 몸을 숨겼던 주제에 어느새 티에르에게 다가온 릭이 계속 입을 나불거렸다.
"그러니까, 응? 좋게 말했을 때 엎드렸으면 허벅지도 안 찔리고 얼마나 좋아요?"
말과 함께 허벅지를 쿡쿡 찌르던 릭이 얄밉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큰 착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옵솔 영지랑 아~무 상관이 없어요. 우린 그냥 산적이라니까?"
"끝까지 나를 멸시할 생각이냐?!"
티에르가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모너 영지에서 강도질할 무뢰배가 어디 있을까?!"
그 고함에 기겁을 한 릭이 티에르의 앞에 주저앉아 입술을 찰싹 때렸다.
"강도질이라니! 엄연히 산적인데 산적질이지!"
그렇게 말하는 릭의 로브 안, 켄타우르스 형상을 한 브로치가 미약하게 빛났다. 이안이 선물이라며 달아 준 브로치는 옵솔 가문의 켄타우르스 기사단의 상징.
"이, 이, 끝까지 나를 능멸하다니...!"
"진짜 아니라니까! 우린 산적! 산적이라고!"
릭이 억울해 죽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미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 티에르의 목소리가 차게 가라앉았다.
"내가 너희의 정체를 파악한 이상 살려 줄 마음이 없는 모양이군. 그냥 죽여라. 내 복수는 머천 영지에서 대신할 것이다."
삶을 포기한 듯 티에르가 고개를 숙이자 기다리고 있던 이안이 뒤통수를 쳐 그를 기절시켰다.
"수고했어."
이안이 릭에게 부탁한 건, 단 한 가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티에르가 이안 일행을 산적이라고 믿게 할 것.
"소공작님, 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이런 거 잘 못 한다니까요? 완전 오해한 거 같은데 이걸 어떡하지? 한번 깨워 보실래요? 제가 차근차근 다시 한번 설명해 볼게요."
이안의 의도를 모르는 릭이 울상을 지으며 아쉬워했지만, 이안의 입가에는 선명한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너는 특별해."
특성이 아닌 건 분명하다. 릴라이가 릭의 특성은 위험을 간파하는 본능이라고 했으니까.
그러나 사람의 신경을 긁는 릭 특유의 말투와 놀라울 정도의 임무 실패율은 분명 빛나는 재능임에 틀림없다.
"헤헤, 역시 그렇죠? 사장님이 몰라서 그렇지 제가 또 시킨 일은 잘하는 편이거든요. 돌아가시면 저희 사장님한테...."
이안이 입을 나불거리는 릭의 어깨를 두드린 뒤 레이나를 찾아갔다.
이제 잠깐의 외유를 마치고 성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쾅!
"도대체 소공작님은 어디 계십니까?!"
최전방 프론트 홀드를 지키는 스벤 백작가의 장남 버질은 솟구치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아침에 시작되었어야 할 영주 회의는 저녁이 늦도록 시작도 못 했다. 영주 회의를 진행해야 할 소공작이 몇 시간이 지나도록 참석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죄송합니다. 소공작님이 워낙 갑자기 자리를 비운 터라...."
"그러니까 섭정관의 역할이 그거 아닙니까!"
살벌한 얼굴을 한 스벤이 윽박지르자 섭정관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지금 하인들에게 최대한 빨리 소공작을 모셔 오라 했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전사로서 자란 버질은 처음부터 갑작스럽게 개최된 이 영주 회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그 망나니가!'
전방에서는 매시 매초가 전쟁이다.
이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도 바로 어제 웃으며 인사를 나눴던 이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 소중한 시간을 이렇게 멍하니 보낸다는 생각에 울분이 가시질 않았다.
"벌써 몇 시간째입니까! 소공작은 도대체 어디...!"
참다못한 버질이 다시 한번 소리치기 직전, 옆에 앉은 거한이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지."
거한의 몸만큼이나 무거운 존재감을 풍기는 목소리가 퍼지자, 순식간에 어수선하던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직 계승식을 치르지 않으셨지만, 소공작님은 유일한 공작님의 혈육. 공작님을 모시듯 예를 다해라."
모너가의 뚫리지 않는 방패. 철벽의 기사라 불리는 모굴 백작의 말에 한 발짝 물러서 성질을 죽이며 말했다.
"모굴 백작께서도 아시겠지만, 전방은 매 순간이 전쟁입니다. 이 시간에도 누군가 죽어 나가고 있을 겁니다."
모굴은 가슴을 치며 답답함을 표현하는 친우의 아들을 바라봤다. 전장의 전우와 부하들이 눈에 밟힐 그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모너가의 그 누가 위대한 전사들의 희생을 모를까."
그러나 지금 이 자리는 소공작이 마침내 알을 깨고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다.
"소공작님께서 오시면 많은 이야기를 해 보자꾸나, 스벤의 아이야."
말을 마친 모굴이 애병인 도끼를 움켜쥐었다.
마침내 침묵을 깨고 움직이기 시작한 소공작.
모굴은 망나니라는 악명을 뒤집어쓴 아이에게 큰 기대가 없었다. 어렸을 적에만 총명했을 뿐, 어느 순간 광증과 함께 이어진 술과 약으로 몸과 정신을 망친 불쌍한 아이.
공작의 충신인 자신은 그 아이와 이 영지에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러니까 이 자리는 영지와 공작의 아들 중 어느 쪽의 충성이 더 무거운지 확인하기 위한 중요한 자리였다.
만약 한쪽이 다른 한쪽을 위협하는 독이라면, 이 자리에서 끊어 내기 위해서.
애병인 도끼를 살짝 움켜쥔 모굴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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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적막감이 감도는 회의장 안.
"소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이안의 등장을 알리는 시종의 말에도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이 없었다.
벌써 반나절이나 늦어 버린 이안의 등장에 버질은 눈을 부라리며 입술을 짓씹었고, 모굴은 도끼의 날을 쓰다듬었을 뿐.
덜컹
드디어 등장한 이안을 향해 수십 쌍의 눈빛이 쏟아졌다. 멸시와 혐오, 짜증을 담은 시선이 발끝에 엉겨 붙어 질척일 정도였다.
"이거, 내가 늦었네."
그러나 벌써 한 달 가까이 영주성에서 살아왔던 이안이다.
모든 시종과 하녀가 눈을 피했고, 누구 하나 저들보다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 준 이가 없었다.
수십 쌍의 눈이 보내는 악의를 가볍게 떨쳐 낸 이안이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 미안. 워낙 바쁜 몸이라."
별일 아니라는 듯한 그의 반응에 버질이 발끈하고 나서려 했으나, 이안이 한 발짝 더 빨리 입을 열었다.
"나만큼이나 다들 바쁠 테니, 빨리 끝내자고."
말을 마친 이안이 뒤를 향해 손짓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종 몇이 밀 포대 몇 자루를 회의장 안으로 가져와 테이블에 올려 두기 시작했다.
"소공작님, 이게 대체 무슨 짓...."
갑작스러운 만행에 섭정관이 벌떡 일어나 이안을 막으려 했으나, 이안은 품에서 꺼낸 단검으로 밀 포대 자루를 잘라 탁자 위에 쏟았다.
사각.
차르르르륵.
밀 포대의 잘린 옆구리에서 쏟아진 밀과 모래, 겨가 회의실 책상을 넘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이게 영주 회의를 소집한 이유다."
쾅!
이안이 단검을 반쯤 빈 포대에 꽂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없다고 모너 공작가가 무너진 줄 아는 놈들이 늘어났어. 아버지는 모너가의 기둥이었지만 모너가의 전부는 아니다. 모너가는 당신들이지."
갑작스러운 이안의 말에 당황한 이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모너가를 지키고."
모굴과 버질의 눈을 차례로 바라본 이안이 그들을 향해 살짝 고개 숙였다.
"모너가를 수호하는 이들."
마지막으로 이안의 눈이 감사부장을 향했다.
"그리고 모너가의 전부나 다름없는 영지민들."
임무 중에 먹은 모래 섞인 빵의 텁텁함이 아직도 입안에 남아 있는 듯, 그 불쾌한 텁텁함에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놈들이 감히 내 영지민을 노렸다."
모욕과 망신을 당해야 할 이안이 예상과 달리 이상한 방향으로 회의를 이끌어 가자, 당황한 섭정관이 급히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상인들은 영지의 살을 파먹고 있죠."
주변을 둘러본 마크버그는 바닥에 떨어진 겨와 모래를 주워 손가락 사이에서 굴렸다. 부드러운 밀과 까끌한 겨, 모래가 섞여 불쾌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전쟁을 벌이지 않는 이상 놈들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식량 가격은 매년 상승하고 있으니, 허리를 아무리 졸라매도 영지의 상황은 나날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까끌함이 며칠 동안이나 자신을 괴롭히던 불쾌함의 정체인 것 같아 손을 털어 버린 그가 주변을 바라봤다.
자신과 뜻을 함께하든 그렇지 않든 이들은 지난 세월 동안 자신과 함께 영지를 꾸려 온 이들.
저들은 영지가 처한 상황을 망나니보다 훨씬 잘 알고 있다. 상인들이 담합을 시작한 건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고, 벌써 몇 번이나 해결책을 찾아 노력해 보지 않았던가.
"올해는 특히나 어렵게 됐습니다."
정말로 난처한 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섭정관이 말을 이었다.
"매년 여유가 없었지만, 올해는 소공작님께서 받아 가신 내탕금 오천만 골드가 특히나 무리였는지라...."
마크버그의 말에 버질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성질이 급한 어린 기사는 벌써부터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어 대며 말했다.
"…내탕금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전방의 병사들이 모래 섞인 빵을 피와 침으로 넘기고 있는 동안, 영주성에 편히 있던 소공작은 내탕금이나 받아먹고 있던 것인가.
밀려오는 자괴감에 목소리마저 떨려 왔다.
"그게… 소공작님께서 식량을 구해 오시겠다며 호언장담하시는 바람에...."
면목 없다는 듯 고개 숙인 마크버그가 아무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됐어. 이제 네놈은 끝이다.'
스벤 백작이 직접 오지 않은 것은 아쉬웠지만 침착한 백작보다는 아직 어리숙한 장남 쪽이 더 움직이기 쉬웠다.
"내탕금으로 오천만 골드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장 전선에서는 그 모래 섞인 빵조차 부족한 판국에!"
역시나 원하는 대로 반응하는 젊고 혈기 넘치는 기사를 향해 속으로 미소 지은 마크버그가 난처한 얼굴로 답했다.
"예, 예,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분기에는 제가 특별히 사비를 털어 식량을 추가로 구해 왔습니다."
그 말에 놀란 버질이 눈을 동그랗게 뜬 사이, 묵묵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모굴이 이안에게 고개를 돌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소공작."
일인의 힘으로 군단을 이긴다는 마스터의 경지, 그 초입에 이른 6성급 기사가 입을 열자 그의 존재감이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어릴 때 보고 굉장히 오랜만이구나. 아직 정식으로 작위를 승계하지 않았으니, 예의를 차리지 않는 무례를 용서하거라."
부드러운 모굴의 목소리에서는 수없이 많은 전선을 견뎌 낸 전사의 기개가 느껴졌다. 흔들리지도, 부러지지도 않는 올곧은 신념을 따라가는 기사의 목소리에 이안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충성을 다하지 않는 기사에게 존중을 바라는 건 무의미한 짓이겠지."
"허… 그래. 그렇지."
이안은 마땅히 충성을 요구해야 할 상대이고, 모굴은 충성을 바쳐야 할 위치다. 모굴은 기사로서 그 사실을 단 한시도 잊은 적 없었다. 그래서 그 오랜 시간 섭정관의 요구에도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 아이에게 충성을 바친 것도 아니지.'
자신이 충성을 바친 상대는 지금은 없어진 전대 공작일 뿐. 눈앞의 드높은 악명을 가진 망나니가 아니다.
명예로운 기사로 남고 싶은 욕심인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금은 그랬다.
"그래, 말은 잘하는구나. 네 말대로 영지민이 영지의 전부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느냐?"
모굴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책상 위에 놓인 밀 포대가 조각조각 찢겨져 나가고, 그의 사나운 마나에 모래바람이 휘날렸다.
"말해 보거라."
위협이라도 하듯 기세를 뿜어 대는 모굴을 향해 이안이 미소 지었다.
"전쟁. 우린 전쟁을 노린다."
* * *
이안은 차가운 눈으로 회의장 주변을 바라봤다.
항상 그랬듯, 이 자리에 자신의 편은 없다.
지금 당장이라도 레이나를 보고 싶었다.
리나와 릭에게 실없는 소리를 해 긴장을 풀고 싶었다.
퍽과 대원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며 기분 좋게 훈련이나 하고 싶었다.
그들이 없는 공간은 이토록 적대적이다.
명백한 악의를 담은 버질의 눈빛에 피부가 저릿했고 모굴 백작의 마나에서는 염려와 의심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무기를 가지고 들어올 수 없는 영주 회의에서조차 애병인 도끼를 쓰다듬고 있는 것을 볼 때, 저 살벌한 기세를 풍기는 전사는 나름의 결단을 내리기 위해 이 자리까지 나온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매일의 일상과 다름없었다.
심지어 하루 중 가장 대부분을 함께 보내고 있는 흑귀대의 대원조차 아직도 자신을 두려워한다.
고작 이 정도의 악의와 살의는.
오명으로 점철된 의심은.
전혀 새롭지 않다.
"전쟁. 우린 전쟁을 노린다."
상상도 못 한 발언에 회의장 안은 침묵이 자리했다. 모굴이 무언가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대책 없이 무책임한 이안의 발언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전쟁은 수없이 많은 목숨을 걸고 벌이는 일이다. 아무리 상인 협회가 못마땅하다고 한들, 전쟁을 통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을 것인지 생각해 봐야 했다.
거기다 설령 모너가가 세 영지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왕실이 모너가의 영토가 늘어나는 것을 두고 볼 리가 없다.
괜히 모굴이 수비대장을 맡고 있음에도 몇 년이나 침묵을 지켰던 게 아니다. 때로 명분과 필요성을 가진 전쟁조차 벌이지 못할 때가 있기에 참고 있었을 뿐.
"소공작...."
마침내 모굴이 입을 열자, 이안이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아, 맞아. 명확히 해야겠군. '내가' 전쟁을 벌일 거야. 나를 존경하지 않는 기사를 움직일 만큼 멍청하지 않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크버그의 물음에 이안이 장내의 면면을 훑어보며 말했다.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하듯 나도 너희를 못 믿겠다는 거지. 위대한 모너가의 기둥이라고 하나, 결국 그 모너가를 무너뜨린 장본인들 아닌가."
버질을 바라보는 이안의 눈이 차게 식었다.
"영지민과 전우를 지키기 위해 살아간다면서 결국 아무도 지키지 못한 이들이나."
낮게 가라앉은 시선이 천천히 도끼를 움켜쥐고 있는 모굴에게로 향했다.
"영지와 영지민의 안전을 위해 살아간다면서 금력에, 권력에, 성직자의 만행에 죽어 가는 영지민을 못 본 척한 장님이나."
마지막으로 섭정관을 바라보는 이안의 눈에 옅은 혐오가 서렸다.
"영지와 모너가의 안녕을 위해 살아간다면서 결국 영지와 모너가를 썩게 만든 장본인이나."
이들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는 모른다. 이해할 생각도, 그럴 필요도 없다.
군림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결과로 보여야 한다.
눈앞의 이들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졌든지 간에 모너가라는 압도적인 위세를 가지고도 가문과 영지를 지켜 내지 못한 패배자들에 불과했다.
"…뚫린 입이라고 마구 지껄이는구나."
순간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굴의 몸에서 압도적인 위압감과 살의가 쏟아져 나왔다.
"히익!"
대부분의 기세가 이안을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압감을 견디지 못한 이들이 숨을 헐떡이고 있을 때, 이안이 모굴을 마주 본 채 이죽거렸다.
"백작은 최소한의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모양이군."
"뭐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백작은 영지의 수호와 치안대를 담당하지 않는가! 저 밖의 돼지들이 모래와 겨 섞인 밀을 가지고 기어 들어왔을 때, 놈들의 마지막 한 놈, 그 돈으로 덕을 본 모든 이들까지 처벌했어야 했다!"
언성을 높인 이안의 몸에서 모굴의 위압감에 맞서는 짙은 살의가 넘실넘실 뻗쳐 나왔다.
"섭정관의 목을 비트는 한이 있더라도 이 영지의 부패를 묵과해서는 안 됐다! 그대가 그 잘난 중도를 지킴으로써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사그라졌는가! 얼마나 많은 영지민이 고통받았는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 이안을 향했던 혐오와 증오만큼, 딱 그만큼의 혐오를 담은 눈으로 모굴을 바라봤다. 힘이 있음에도 기사도를 따라 움직이지 않은 등신.
영지민과 부하의 고통에도 움직이지 않은 머저리들.
"백작, 만약 최소한의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내가 전쟁을 벌이자고 했을 때, 아니 그 전에 스스로 나섰어야 했다. 백작의 손으로 직접 저 빌어먹을 것들을 모조리 벌해야 했단 말이다!"
"…배운 게 없어서 그런가. 전쟁의 무게를 모르는구나."
젊은 시절을 전장에서 보낸 그는 전쟁의 지긋지긋함을 잘 알고 있었다. 단 한 순간도 진심으로 웃을 수 없는 절박함을. 눈먼 검과 활에 맥없이 사그라드는 전우들의 소중한 목숨의 무게를.
그래서 그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아니, 전쟁을 두려워했다. 이미 마스터의 반열에 든 그가 움직인다면 세 영지를 상대로도 승산을 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불필요한 피를 흘리느니, 조금 질 나쁜 빵을 씹어 넘기는 게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 무게만큼이나 많은 생명을 구했나? 영지민의 삶이 풍족해졌나? 아버지가 자네에게 지키라고 명한 영지는, 영지민은 지켰나?"
책상에 꽂힌 단검을 뽑은 이안이 모굴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통보하듯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저들의 만행을 가만둘 생각이 없다.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저들의 개짓거리를 막을 것이고, 왕국 전체에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모너가를 욕보일 수 없다는 걸 분명히 보여 줄 것이다. 모너가의 검이, 모너가의 방패가 해야 했을 일을, 내가 대신하겠다."
물론 단순한 전쟁보다 훨씬 세련된 방법을 생각해 두고 있지만, 이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한다고 한들 믿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이 몸을 돌려 나가려고 하는 순간, 그를 보낼 수 없던 섭정관이 벌떡 일어서서 이안을 막았다.
"소공작님, 기다리십시오!"
마크버그가 입술을 짓씹으며 회의장을 나서려는 이안을 급히 붙잡았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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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이안의 막말에 움켜쥔 주먹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마크버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전쟁이라니, 내 것이나 다름없는 영지를 고작 영지민들이 먹는 빵에 모래가 섞였다는 이유로 뺏길 수는 없다.
놈이 뭐라고 하던 일단 당장이라도 나가 전쟁을 일으킬 것 같은 소공작을 진정시켜야 했다.
"전쟁이라니요. 모너가는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습니다. 최전방 경계의 병력을 이동시키면 셀 수 없는 몬스터가 영지 전역으로 퍼져 나갈 것입니다."
섭정관이 도움을 바라는 듯 버질과 모굴에게 시선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설령 전쟁을 벌여 이길 수 있다고 해도, 왕국은 세 영지의 편을 들 것입니다. 전쟁 끝에 어떤 보상을 받는다고 해도 식량을 구할 수 없다면 어떻게 승리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럼 전면전이 되겠지."
"최전방 병력 없이 왕국과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설령 전면전을 벌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고요!"
언뜻 논리적인 섭정관의 말에 이안이 잠시 그를 바라봤다. 분명 이런 이유로 영지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럴 일은 없어."
이안이 빙글 웃으며 섭정관을 안심시키듯 말했다.
"말했잖아, 이건 내 전쟁이라고."
"소공작, 잠깐...!"
모굴 백작은 멍하니 회의장을 나서는 이안을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이안을 잡아서 전쟁은 안 된다고 못 박아야 한다는 생각과 이안이 무슨 짓을 벌일지에 대한 궁금증이 동시에 들었다.
'자기의 전쟁이라고?'
도대체 혼자서 뭘 할 수 있다는 걸까.
7년 만의 영주 회의는 소공작의 일방적인 통보로 끝났다. 어린 공작은 병사도, 돈도, 식량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만의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선포했을 뿐.
"백작님, 소공작은… 아직도 정상이 아닌 모양이네요."
버질이 어딘가 얼이 빠진 듯한 눈으로 이안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지가 더 병들기 전에 칼을 뽑아야 한다는 주장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매일 하던 말이나 다름없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공작을 기다려야 한다는 답답한 말만 반복했었다.
"혼자서 전쟁을 벌이겠다니, 전쟁이 무슨 장난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요?"
"글쎄, 섭정관 자네는 뭔가 알고 있나?"
모굴과 버질이 동시에 섭정관을 쳐다보자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섭정관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의 소공작님은… 예측할 수 없는 분이니까요."
로베르토나 그의 비밀 기사까지.
마치 사람이라도 변한 듯 최근의 망나니는 망아지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였다.
"모굴 백작님. 절대, 절대, 세 영지와 전쟁이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섭정관이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모굴에게 간청하듯 말했다.
"모굴 백작님께서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는다는 건 잘 알지만, 이건 저희만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전쟁이 벌어진다면 무의미한 피가 흐를 것입니다."
"크흠...."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모굴이 불쾌한 표정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지난 7년간 군권을 쥐고 있는 자신과 스벤 백작을 견제해 온 섭정관이지만, 전쟁에 있어서 만큼은 뜻을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내 소공작에게 사람을 몇 붙여 놓지. 만약 선을 넘는 짓을 하려는 조짐이 보이면 내가 직접 막겠네."
체념한 듯 바닥을 바라보는 모굴의 눈에 깊은 회한이 서렸다.
* * *
"도련님, 원하시던 일은 잘 풀리셨나요?"
회의장을 나서자마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레이나가 뒤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아니. 처음부터 저들에게 원하는 건 없었어."
가신과 가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세 영지를 무릎 꿇리는 것도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을 믿지 않는다.
이 지긋지긋한 칭호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한 '모너가의 망나니'를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슨 일을 부탁한들 방해나 안 하면 다행이겠지.
"리나는?"
"도련님께서 시키신 대로 리트 영지의 상단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릭도 같이 있고?"
"네. 오늘은 도련님이 없어서 좋다고 웃으며 나가던걸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입을 가리고 웃는 그녀를 보며 이안은 방으로 돌아가 가죽 갑옷과 단검을 챙겨 영주성을 나섰다.
"좋아, 우리도 할 일을 하러 가 보자고."
* * *
"이노오오옴드으으을!"
릭의 고함 소리가 페일세이프에 울려 퍼졌다.
"당장 짐을 내려놓고 꺼져라!"
이미 한차례 흑귀대의 힘을 본 적 있는 릭이 자신감에 차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저건 또 뭐야?"
"미친놈인 것 같은데?"
"쯧, 앞서간 상단이 버리고 간 놈들인가?"
그 광경을 본 리트 영지의 상단이 멈춰 서기도 잠시, 버려진 노예라고 생각한 상단은 검은 로브를 입은 무리를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아무리 공짜 인력이 좋다고 한들 며칠이나 걸리는 여정에 미친놈을 데리고 가는 건 상단의 속도에도, 정신에도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하고 올게, 먼저 출발시켜."
리트 영지의 상단, '골드크로우'의 총관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는 릭을 무시하고 별생각 없이 상단주에게 향했다.
그사이.
릭은 최고의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야! 길 한복판에 검은 옷 입은 무리가 있으면 알아서 기어야 하는 거 아니냐?!"
매일 개처럼 일해도 구박밖에 안 하는 사장과 영지 내에서 무서운 인간을 뽑으라면 단연코 1등을 놓치지 않을 소공작에게 시달려 온 스트레스를 있는 힘껏 소리 지르며 풀기로 한 것이다.
"내가, 내가 안타까워서 그런다! 사람이 좋게 말하면 좀 들으라고!"
정말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치는 릭의 입가에는 큼직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미친놈."
그 모습을 본 골드크로우의 상단주이자 리트 가문의 금지옥엽 막내딸, 스네일은 미친 듯 날뛰는 릭을 보며 입술을 핥고 있었다.
"눈깔이 돌아간 게 보통 미친놈이 아니야. 내가 가질래."
"절대 안 됩니다. 저런 걸 주워 가면 제가 백작님께 혼납니다."
"싫어! 가질 거야."
그녀의 곁을 지키던 호위가 정색하며 스네일을 만류했지만 이미 그녀의 눈에는 저 멀리서 당당하게 소리치고 있는 릭에 대한 호기심과 호감이 자리해 있었다.
"일단, 마차로 돌아가십시오. 안전이 확보되면 제가 부르러 가겠습니다."
"에이~ 나도 구경하고 싶은데. 언니는 진짜 깐깐하다니까. 대신 저 아이는 다치게 하면 안 돼, 내꺼니까. 알았지?"
그녀의 호위 일영(一英)이 스네일의 말을 잡아끌며 말하자 스네일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특이한 사람에 대한 그녀의 관심이야 하루 이틀 있었던 일도 아닌지라, 일영은 고개를 돌려 검은 옷을 입은 무리를 바라봤다.
'진짜 뭔가 있나?'
이곳 페일세이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그 허점을 노린다면 이곳을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예상치 못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원 멈춰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단을 멈춰 세운 일영이 말을 몰아 상단의 앞으로 나아갔다. 어차피 동생이나 다름없는 스네일이 원하는 물건이니, 겸사겸사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 * *
"어? 어! 진짜 멈췄다!"
당황한 릭이 목이 부러질 듯 고개를 돌려 리나를 바라봤다.
"와! 봤죠! 이것도 몇 번 해 보니까 느네!"
이미 몸을 반쯤 뺀 릭이 다가오는 말을 가리키며 쉬지도 않고 나불거렸다.
"검이다! 검! 저기 저 여자는 검도 차고 있는 게 영 실력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요! 그냥 튀죠! 제가 소공작님께 잘 설명하겠습니다!"
물론 영지에 돌아가자마자 사장에게 매달려 안전한 곳으로 피할 생각이었지만, 당장은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릭이 살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을 때, 검은색 후드를 덮어쓴 리나가 입을 열었다.
"흑귀대 전원 준비."
챙!
마치 하나의 움직임을 보는 듯 스무 명의 대원이 동시에 발검하는 소리가 대로에 울려 퍼졌다.
"독부터 써서 제압한다. 이번 상대는 경비가 있는 듯하니 안전을 최우선으로."
대원들과 떠들 때면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그녀였지만, 임무에 나선 그녀의 얼굴은 얼음장같이 굳어 있었다.
'소공작은 만약 경비가 있으면 피하라고 했지만 내가 도와야 해.'
그녀는 이안이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정확히 몰랐다. 믿지 않을 걸 알기에 이안도 굳이 설명하지 않았고, 그저 따르기로 결심했기에 리나도 묻지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실은 되도록 세 영지의 직속 상단을 터는 게 가장 좋다는 것뿐.
품에서 꺼낸 단검을 움켜쥔 그녀가 릭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아이 씨… 어째 꿈에서 소공작님이 나온 게 재수가 없을 것 같더라니."
리나의 시선을 받고 후퇴가 보기에 없음을 깨달은 릭이 깊은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말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투항하는 자는 공격하지 않겠다!"
* * *
릭의 고함이 퍼져 나가기도 전에 리나와 흑귀대가 골드크로우를 덮쳤다.
"감히 어딜!"
검에 마나를 담을 수 있는 4단계의 검사인 일영이 검을 뽑아 들자 그녀의 주위에 미리 준비한 대로 네 명의 흑귀대가 몰려들었다.
"여긴 우리가 막는다!"
푸쉬시식!
네 명의 흑귀대가 바닥에 검은색 공을 던지자 노란색 연막이 퍼지고, 나머지 대원들이 일영을 무시한 채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젠장, 일단 아가씨를 지켜야 해.'
한 명 한 명이 강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체계적으로 훈련이 잘되어 있는 적이다. 검기를 보자마자 독을 쓸 정도라면 분명 훈련된 정병(呈病)에 대한 대비도 돼 있을 터.
무력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아가씨의 호위인 자신밖에 없는 이쪽이 너무 불리했다.
"저리 꺼져라!"
마음이 급해진 일영이 두꺼운 검기를 담은 검을 연신 휘둘렀으나, 흑귀대는 일영의 발걸음만 막을 뿐, 검조차 마주 대지 않았다.
"쥐새끼 같은 것들!"
그녀의 울분 어린 외침에 일영의 검을 멀찍이 피한 리나가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그게 우리 모토거든."
그러자 옆에서 리나를 도와 독 구슬과 단검을 뿌려 대던 퍽이 변명하듯 말했다.
"아닌데… 언니, 대장이 우리는 검은색 귀신(黑鬼)이 아니라 귀한 어둠(黑貴)이랬어."
"넌 그걸 믿니? 우리가 속상해하니까 그냥 한 말이지."
"진짠데… 우린 한 명 한 명이 모두 귀하다고 했는걸."
리나와 퍽은 일영의 검을 여유롭게 피하면서도 대화를 계속했다.
애초에 흑귀대는 전투를 대비한 채 온갖 독과 무기, 암기를 준비한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
아무리 익스퍼트에 달하는 4급 검사가 있다고 한들 이기는 게 아니라 발을 묶어 놓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이, 익! 날 무시하다니! 저리 꺼져라!"
한동안 검을 휘두르던 일영이 눈을 번뜩이며 몸을 던졌다.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네 명의 흑귀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스네일을 구하기 위해 말 그대로 방어는 도외시한 채 스네일이 있는 마차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끄악!"
"허, 허벅지가!"
사방에서 허벅지를 관통당한 일꾼들이 쓰러지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네놈들 전부 찢어 죽여 주마!"
단검과 암기에 당한 상처에서 흐르는 피에 눈조차 뜨기 힘들었음에도 일영은 멈추지 않고 마차를 향해 나갔다.
마침내, 마차에 다다라 스네일을 구하려 할 때, 예의 신경을 긁는 목소리가 마차 위에서 들려왔다.
"에이, 아가씨, 늦어도 한참 늦었지. 난 여기로 바로 뛰어왔는데."
검은색 독 구슬을 쥔 릭이 빙글 웃으며 일영을 맞이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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