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 30-40

30화

"당장, 당장 거기서 내려와라!"

일영이 마차 위의 릭을 향해 소리쳤다. 이미 대부분의 상단 일꾼을 제압한 흑귀대가 마차를 포위하듯 모여들었다.

"큭… 안 돼, 아가씨만큼은 안 된다."

털썩.

주변에 모여든 흑귀대를 본 일영이 바닥에 무릎 꿇었다. 싸운다면 20명 중 절반을 죽일 수 있을 테지만, 자신의 임무는 전투가 아니다.

"항복, 항복할 테니, 아가씨의 안전을 보장해다오."

무릎 꿇은 그녀가 간청하듯 이마를 바닥에 찧었을 때, 어느새 따라온 리나와 퍽이 마차 위에 앉아 있는 릭을 멍하니 바라봤다.

"안전한 곳으로 가 있으라니까 저건 또 저기서 뭐 하는 거야?"

"몰라, 히히, 릭 오빠는 재밌어."

"아! 퍽! 리나! 이제 왔어?! 딱 하고 감이 왔다고! 여기가 제일 안전해!"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가장 안전한 장소를 찾아 도망쳐 왔을 뿐인 릭이 리나와 퍽을 향해 독 구슬을 쥔 손을 휭휭 휘둘렀다.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한 독 구슬을 본 퍽이 조심스럽게 리나에게 물었다.

"언니, 오빠는 저게 뭔지 모르지?"

"음…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말 안 했는데, 지금이라도 말하면 안 되겠지?"

"릭 오빠는 분명히 기절할걸?"

자신이 쥔 검은색 공이 독 구슬이라는 것조차 모른 채 해맑게 웃고 있는 릭을 보며 두 사람이 헛웃음을 흘렸다.

"자! 빨리 정리하고 돌아가자!"

리나의 활기찬 외침과 함께 흑귀대가 골드크로우 상단을 점령했다.

* * *

흑귀대와 리나가 골드크로우를 털어먹고 있는 사이, 릴라이와 함께 영주성을 나선 이안이 눈앞의 4층 건물을 바라봤다.

"이곳인가?"

"네. 그 악명 높은 상인 협회가 바로 이곳이랍니다."

릴라이가 특유의 귀족적이고 품위 있는 움직임으로 '상인 협회'라고 적힌 큼지막한 명패가 걸려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4층짜리 건물은 부를 과시하듯 거대했고, 용병들이 그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허, 참. 모너가의 땅에 용병이라니."

모너가에는 용병이 없다.

병사, 치안대, 사냥꾼, 약초꾼 등 인력 부족을 호소하지 않는 직업이 없는 모너가의 영지에서, 일도 비정규직인 데다가 보상도 적은 용병 일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모너가의 용병이란 다른 영지에서 흘러들어 온 뒷골목 깡패가 대부분이다.

"요즘은 어느 협회나 다 뒤숭숭하니까요."

조곤조곤하게 말했지만, 이안은 저 말이 갑작스러운 조사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일전에 감사부가 회계장부를 보러 들어가는 걸 용병들이 막았다는 말을 듣기도 했었고.

"그럼 들어가 볼까."

협회에 앉아 있을 돼지들과 나눌 이야기가 많으니 한시라도 빨리 들어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옮기자, 용병이 입구를 막아서며 소리쳤다.

"멈춰라!"

"...?"

설마 용병이 소공작인 자신을 막아서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이안이 당황한 눈으로 문을 막고 선 용병을 쳐다봤다.

"이곳은 상인 협회의 사유지. 그 누구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다!"

순간 비웃듯 한쪽으로 치켜 올라간 입꼬리를 본 이안의 눈빛이 이채를 띄었다.

'이 새끼들이 근데....'

"날 모르나?"

태연한 척 놈에게 말을 걸었지만 확신할 수 있다.

놈은 자신을 알아봤다.

그런데도 자신을 막아섰다.

고작 용병 따위가 소공작을 막아설 리는 없으니, 분명 누군가 이안이 협회로 향했다는 걸 전했고, 협회의 위쪽에서는 문을 걸어 잠그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네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곳은 영지법에 의해 보호받는 사유지! 누구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막아선 용병은 명백한 비웃음을 담은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설마 망나니의 앞을 당당히 막아서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허...."

잠시 할 말을 잃은 이안이 놀리듯 능글맞게 웃고 있는 용병을 바라봤다.

설마 이게 통하리라고 생각한 건가?

영주 회의에서 전쟁을 벌이겠다고 나선 내가.

고작 용병의 윽박에 겁먹고 물러설 거라고?

"나는 황금 고블린 상단의 상단주...."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릴라이가 급히 나섰지만, 이안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건물의 꼭대기에 있는 창문을 잠시 바라봤다.

'뭐 하는 새끼인지 몰라도, 잠깐만 기다려라.'

릴라이는 오늘의 조커 카드.

고작 이 정도에 오픈할 패가 아니다.

차가운 눈으로 창문을 바라보던 이안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덤덤히 말했다.

"날 모르는 사람이 이 주변에 있을지는 몰랐군. 나는 모너가의 정당한 계승자이자, 소공작 이안 드 모너. 네가 말한 그 잘난 영지법 위에 있는 사람이다."

말을 마친 이안이 마나를 가득 담은 주먹으로 앞을 막고 선 용병의 복부를 후려갈겼다.

"끄아아악!"

꾸득, 쾅!

마나가 실린 주먹을 정통으로 맞은 용병이 문과 함께 건물 안쪽으로 날아갔다.

"뭐야!"

"침입이다! 전원 위치로!"

쓰러져 미동조차 안 하는 동료의 모습에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용병들이 부랴부랴 건물에서 쏟아져 나왔다.

"뭐, 기선 제압으로는 이쪽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군."

달려오는 용병들을 보며 가볍게 몸을 푼 이안이 건물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어느새 철퇴를 꺼내 든 레이나와 손으로 이마를 감싼 릴라이가 그의 뒤를 따랐다.

* * *

콰드득!

"끄아아악!"

"치, 치안대는?!"

"괴물이다! 우리 상대가 아니야!"

주먹이 박히는 곳마다 뼈와 살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후… 그냥 협회치고는 용병이 좀 많은 것 같은데?"

잠시 땀을 식힐 겸 주변을 둘러보니, 미친 듯이 철퇴를 휘두르며 웃고 있는 레이나가 보였다.

"음… 괜찮은 것 같네."

저 무시무시한 흉기를 휘두르면서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그녀의 마음이 곱기 때문이 아닐까.

"저게 괜찮은 건가요...?"

뒤에 바짝 붙어선 릴라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고 계단을 올랐다.

이미 금귀의 눈과 암제를 사용해 용병들의 실력을 확인했다.

이제 고작 2급 중반에 이른 용병들은 절대 [피의 갈증]을 개화하고 혈귀의 능력을 이은 레이나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럼 우리는 가 볼까."

1층에 남아 있는 용병들을 레이나에게 맡기고 계단을 오르려고 하자, 준수한 마나를 가진 거한이 3층에서 날 듯 뛰쳐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얘들 대장이 너냐?"

최소 3급의 기사와 견주는 마나를 가진 거한이 자신의 대검을 꺼내 들었지만, 무려 20명의 성기사단을 홀로 처리했던 이안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며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

"애들 교육 좀 잘 시켜야겠어."

* * *

용병대장 한슨이 이안 너머로 1층을 둘러봤다.

피, 피 그리고 피. 온통 피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봐도 보이는 쓰러진 채 신음을 흘리는 부하들과 낭자한 핏자국 그리고 미친년처럼 철퇴를 휘두르고 있는 여자가 한 명.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부하들의 모습에 그들이 죽었다고 착각한 한슨이 분노에 몸을 맡긴 채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찢어 죽여 주마!"

황소처럼 돌진해 오는 그를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상황 파악 능력도,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도 부족해. 리더로서는 형편없어.'

단신으로 용병단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당연히 경각심을 키워야 한다.

만약 그게 공작가 같은 거대한 영지 한복판에서 일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미친 인간이라면 더더욱.

'그래도 아깝군.'

이안은 강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금귀의 눈을 사용해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당장 믿을 건 본신의 무력밖에 없는 만큼 위험을 정확히 판단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안의 눈에는, 얼굴에서 드문드문 읽히는 세월만큼이나 바랬지만 희미한 빛이 용병단장의 가슴팍에서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아마 어릴 적 특성을 깨우쳤다면 지금쯤 영웅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위대한 전사로 성장했을 터.

썩은 보물을 보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이안이 한슨을 보며 말했다.

"너도 저들처럼 죽이진 않으마."

한동안 피똥을 쌀 수도 있겠지만.

그건 망나니를 보고도 알아서 피하지 않은 본인들의 잘못 아니던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한슨의 대검을 향해 이안이 주먹을 뻗었다.

전신의 마나를 근육에 그러모아, 한계까지 응축시킨 뒤 터트리는 필살의 일격이 치명상을 줄 수 있는 급소가 아닌, 대검에 폭발하듯 내리꽂혔다.

쾅! 콰쾅!

검과 손이 부딪쳐서 나는 소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과 함께, 한슨의 몸이 달려들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벽에 처박혔다.

"넌 이따 다시 보자."

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돌린 이안은 1층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레이나를 뒤로한 채 릴라이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

* * *

끼이익.

상인 협회의 3층, 단 하나밖에 없는 문으로 들어서자 소란을 듣고 기다리고 있던 상인 협회의 간부들이 이안을 반겼다.

"소공작님!"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찌 모너가에서 신실한 상인들을 힘으로 위협한단 말입니까! 이런 식이라면 저희는 더 이상 모너가와 거래를...."

미리 대사까지 맞춰 둔 듯 차례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모습에 피식 웃은 이안이 방 한가운데로 걸어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 미안, 미안. 내가 그냥 오려고 했는데 말이지...."

망나니 칭호는 항상 양날의 검과 같다.

그러니까 그 지랄 맞은 날에 베이는 것만큼은 휘둘러 줘야 겨우 손해를 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안이 눈을 부라리며 앞에 선 상인을 바라봤다.

"아니, 싸가지 없는 용병들이 감히 내 앞을 막지 뭔가? 그것도 나를 내려다보면서 말이야."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음과 동시에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터지듯 퍼져 나갔다.

"히익!"

평생을 주판이나 두들기던 상인들이 하나둘 겁을 집어먹었을 때쯤,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귀족을 능멸한 죄로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버리려고 했지. 아무리 내가 정식으로 작위를 계승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감히 이 나라의 하나밖에 없는 공작을 무시하고 내려다보다니. 역모가 아닌가?"

이안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자 그 의도를 파악한 상인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단 한마디 제대로 섞지 않았음에도 여태껏 봐 왔던 이성적인 관리와 달리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큼… 뭐 그래도 상인 협회와 모너가의 오랜 우정이 있으니, 아무도 죽이지는 않았네."

1층에서는 아직도 레이나가 휘두른 철퇴에 당한 이들의 비명 소리가 끊이질 않았지만, 이안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 이제 협상을 시작해 보지."

"네, 네? 무슨 협상을...."

세상 무슨 협상이 폭력과 협박으로 시작한다는 말인가. 이안의 앞에 무릎 꿇은 상인들이 벌레 씹어 먹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볼 때, 이안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 참. 이거 소개를 깜빡했군. 릴라이!"

이안의 외침에 릴라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본 상인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 안 돼...."

"아, 아...."

상인 협회의 간부들은 각각 옵솔, 리트, 머천 영지 상단의 행수들로 구성되어 있다. 세 상단은 모두 황금 고블린 상단과 거래 계약을 체결했다.

즉, 릴라이는 그들이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채권자인 셈이다. 그것도 저 악명 높은 미치광이와 함께라면 더더욱.

세상을 잃은 표정으로 릴라이와 이안을 바라보는 상인들의 침묵이 방 안을 감쌌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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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릴라이는 황금 고블린 상단의 이름으로 칠천만 골드에 달하는 식량을 두 배 가격으로 구매했다.

그녀가 내건 조건은 단 하나, 납기일을 못 지킬 경우 계약금의 10배를 지불할 것.

이미 식량의 판권을 쥐고 있는 세 영지의 상단들은 엄청난 양의 식량을 구매하는 신생 상단을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내부 회의를 통해 계약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페일세이프에서 무슨 일이 있겠어? 이건 눈먼 돈이나 다름없어! 상인이 눈먼 돈의 냄새조차 맡지 못하면 상인의 자격이 없는 것 아니겠나!

-설령 납기일을 못 지킨다고 해도, 저들이 뭘 어쩌겠나? 협회는 이제 모너가도 건드리지 못하는데!

-자네 말이 맞네. 어차피 못 지킬 리도 없겠지만 못 지키면 뭐 어떤가. 계약이란 게 다 그런 거지 뭐. 원래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걸 저 핏덩이 같은 상단도 알아야 하지 않겠나! 하하하!

페일세이프라는 이름처럼 실패라는 게 존재할 수가 없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안전한 대로의 존재와 상인 협회가 가지는 우월한 위치 때문에라도. 절대 보상금을 지급할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바닥에 앉아 있는 상인들을 바라보니 헛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겠지.'

애초에 법보다 권력이 우선시되는 세상에서 저들은 무서운 것 없이 살아왔을 것이다.

리나의 부모가 신생 상단을 시작했을 때처럼 황금 고블린도 등쳐 먹거나 힘으로 밟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터.

그렇게 생각하니 리나가 이곳에 없는 게 조금 아쉽다. 그녀는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것 같은 협회 대신 로베르토만을 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의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간 건 눈앞의 돼지들 아닌가.

그녀의 복수를 대신한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오늘 갑자기 릴라이 상단주가 찾아와 말하더군. 분에 넘치는 채권을 얻었는데 도저히 받을 방법이 없을 것 같다고 말이야."

세 상인이 몸을 흠칫 떨었다.

안 그래도 오늘 오전까지 납품하기로 한 식량이 들어오지 않아 협회 전체가 비상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 영지의 상단 모두 연락이 되지 않았다.

말과 마차, 식량과 노예를 전부 약탈당하고 상처 때문에 이동속도까지 느려진 세 상단은 아직 리어에도 도착하지 못한 것이다.

"그… 리, 릴라이 상단주, 이제 겨우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네. 느, 늦어도 내일 오전까지는...."

상인 중 하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사정했으나 이안이 냉정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래서 내가 그 채권을 샀다네."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부러져라 쳐들었다.

"켄타우르스가 받은 계약금이 천오백만 골드, 골드크로우가 천만 골드, 볼트터틀이 천만 골드. 계약서를 보니 딱 열 배를 배상하기로 했던데, 맞나?"

"소, 소공작님!"

"저희는 황금 고블린 상단과 계약했습니다! 저희가 어떻게든 배상을 마련할 테니...."

볼트터틀과 골드크로우의 행수가 절박한 목소리로 애원하듯 매달렸지만, 이안은 연신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 채권의 주인은 나니까, 내 앞으로 좀 주게. 켄타우르스가 일억 오천, 골드크로우가 일억, 볼트터틀이 일억. 하하! 이거, 어마어마한 돈이구만."

"그, 그런...."

* * *

다른 행수들이 좌절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사이, 그때까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켄타우르스 상단의 행수, 로진이 결심한 듯 꽉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소공작님… 그게 정녕 모너가의 뜻입니까?"

위협하듯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재밌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살벌한 눈을 한 로진이 씹어뱉듯 말을 이었다.

"계약을 지키지 못한 것은 저희의 잘못이나, 상인으로서 이런 일은 종종 있는 법입니다. 만약 소공작님께서 저희에게 이토록 강압적으로 나오시면...."

조용한 방 안의 모든 눈동자가 로진을 향했다.

"배상금을 바라신다면 갑작스럽게 큰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저희는 판매하고 있는 물건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안이 묵묵히 자기 말을 듣고 있다는 걸 깨달은 그가 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그래, 아무리 미친 망나니라도 영지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는 없겠지.'

일억 골드가 필요하다면 식량 가격을 그만큼 올려 모너가로부터 일억 골드를 받아 내는 수밖에 없다. 결국 고통받는 것은 모너가와 그 영지민일 터.

'뭔가 해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여기까지 나왔겠지만, 상인의 세계는 네놈 따위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냉혹하단다, 이 머저리야.'

그러나 소공작 앞에서 채찍만을 고집하는 건 하책 중의 하책. 이제 애송이에게 뭐라도 얹어 줘 해냈다는 만족감을 줄 차례다.

"그러나 저희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사죄의 마음으로 황금 고블린 상단에 백만 골드를 배상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로진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이 일만 마무리하면 멍청한 볼트터틀과 골드크로우를 제치고 협회에서 더 큰 영향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망나니를 조련한 상인이라....'

그 달콤한 과실을 상상하고 있을 때, 낮게 가라앉은 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필요 없어."

이안이 재밌다는 듯 로진을 바라봤다.

"가격을 올리고 싶으면 올려. 가장 먼저 영지법을 어기고 식량 가격을 올린 놈의 목부터 성문 위에 걸어 주지."

모너가의 일 년 수익이 2억 골드가 조금 안 된다. 그중 일억 골드를 식량을 사들이는 데 쓰고 있으니, 중소 상단에 게서 사들이는 식량 등을 제외하고 나면 세 영지의 식량 판매 수익이 한 해에 일억 골드가 안 되는 셈이다.

애초에 상단 하나가 일억 골드나 되는 거금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을 리 없다. 이들처럼 수익 대부분을 영지가 가져가는 눈가림용 상단에 불과한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면 모너가가 식량을 구매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모너가가 세 영지의 도움 없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처럼, 세 영지는 식량 판매 수익이 수익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터.

'전쟁을 시작하기에 돈만큼 좋은 명분이 없지.'

놈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뿐.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켄타우르스 상단, 볼트터틀 상단, 골드크로우 상단, 각 일억 오천과 일억 골드를 계약서에 정해진 기간인 석 달 안에 내 앞으로 보내도록."

말을 마친 이안은 얼굴 전체에 번진 웃음을 숨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할 일이 많으니 여기서 더 많은 시간을 써서는 곤란했다.

"소공작님! 소공작님 기다리십시오!"

"저게 도대체 무슨...!"

"릴, 릴라이 상단주! 잠깐 얘기 좀!"

세 사람이 릴라이와 이안을 잡고자 매달렸다.

"진심으로 충고를 드리자면, 지금 당장 도망가세요. 최대한 멀리. 악마가 쫓아와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매달리는 상인들의 어깨를 응원하듯 하나하나 가볍게 두드린 릴라이는 이안을 따라 레이나와 함께 협회를 나섰다.

* * *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하기 위해 황금 고블린 상단으로 향한 이안 일행을 릭과 리나가 반겼다.

"공작님, 오셨어요."

"사장니이이이임!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쌀쌀맞은 목소리로 고개만 살짝 까딱이는 리나와 릴라이를 향해 목이 찢어져라 소리치는 릭의 모습을 본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상단주는 부하에게 정말 잘해 주는 모양이야."

"다 공작님 덕분이죠. 드디어 저 아이가 제가 얼마나 좋은 보스인지 깨달은 것 같아요."

부러운 눈으로 릴라이를 바라보자 뒤에 서 있던 레이나가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저도 항상 보고 싶었습니다, 도련님."

"어? 어...?"

예상하지 못한 레이나의 기습 공격에 화들짝 놀라 펄쩍 뛰어 거리를 벌렸다.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앞으로 그거 하지 마. 심장에 안 좋아."

"후후… 도련님은 부끄러움이 많으셔요."

"레이나가 날 너무 편하게 대하는 거야."

애써 레이나에게서 고개를 돌린 뒤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리나에게 물었다.

"갔던 일은 잘됐나?"

"네. 노예 20명과 식량을 실은 마차를 16대 얻었습니다."

16대라… 생각보다 적은 양이다.

"릴라이, 총 모은 식량이 얼마나 되지?"

"총 60대 분량입니다."

"생각보다 훨씬 적군."

"식량을 건드리지 않은 걸 보니 영지에 와서 모래와 섞을 생각이었나 봅니다."

"그럼 영지에 퍼져 있는 식량 기준으로는 120대 분량이겠군. 그 정도면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전쟁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상황을 봐야겠지만 만약 세 영지사이에 분쟁이 없다면 6개월 이상이 걸릴 수도 있을 터.

전쟁 기간 동안 소비할 식량이 없다면 전쟁도 일으킬 수 없다.

"아슬아슬하지만 4달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작 이틀 남짓한 시간 동안 노략질한 식량치고는 엄청난 양이었다. 결국 치킨 싸움을 4달은 이어 갈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전쟁을 벌이기에는 부족하다.

"그럼 계획대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이안의 말에 릴라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치안대에서 움직여 줄까요?"

"움직일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지. 일단 치안대보다는 감사부를 움직여 보자고."

치안대를 관리하는 건 회의실에서 흉흉한 도끼를 쓰다듬던 수비대장 모굴.

그를 신임할 수 없는 만큼 지금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굴려야 한다. 가령 이 영지를 정말 좋아하는 책임감 있는 감사부장 같은.

감사부장 베인이 갑작스러운 오한에 몸을 떠는 사이, 빙글 웃은 이안은 흑귀대와 함께 감사부로 향했다.

* * *

"영지에서는 뭐라던가?"

"켄타우르스와 리트 영지 모두 상단과 연락이 끊겼다더군. 치안대도 수비군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모너가는 아니야."

"크흠…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안이 나간 후, 상인 협회에서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소공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눈에서 광기를 읽은 켄타우르스의 로진 행수는 이마에 손을 짚고 고민을 거듭했다.

"큰소리쳤지만 식량 가격을 더 이상 올릴 수는 없어."

"어쩔 수 없이 지금 파는 밀에 모래를 더 넣어야 해. 당장 팔 물건도 부족한 상황인데,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지금도 모래를 판다고 불만이 하늘을 찌르는데 여기서 모래를 더 섞는다고? 과연 영지민들이 가만히 있을까?"

그러나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영지에서 도움을 받을 수는 없겠는가?"

"리트 백작께서 일억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노발대발했다더군. 따님인 스네일 아가씨야 별일 없겠지만 나는 목숨을 걸어야 하네."

골드크로우 상단의 행수가 불안감을 숨기지 못한 채 연신 손으로 얼굴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고작 석 달 안에 1억 골드라니. 그럼 한 달에 삼천만 골드 이상은 벌어야 한다는 것 아닌가. 지금의 세 배 이상을 벌어야 한다니...."

그 말에 옆에 있던 볼트터틀 상단의 행수가 잔뜩 쳐진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우리 쪽도 상황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야. 소공작에게 빚을 갚아도 머천 백작님은 아마 수입이 줄었다며 날 벌하시겠지."

눈빛을 교환한 세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역시 어쩔 수 없군. 모래를 조금 더 섞자고."

"우리라고 다른 방법이 있는가. 다 살자고 하는 것이지."

"그럼 다들 동의한 거로 알겠네. 내일부터 시장에 풀리는 밀 포대의 70%를 모래와 겨로 채우지."

로진 행수의 말에 다른 두 사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켄타우르스 상단과 머천 상단의 행수가 떠난 후, 할 일이 있다며 홀로 남은 리트 상단의 행수는 손에 꼭 쥐고 있던 쪽지를 살펴봤다.

황금 고블린 상단의 릴라이 상단주가 어깨를 두드리며 몰래 전해 준 메모.

얼마나 긴장했는지 땀에 흠뻑 젖어 원래의 형태조차 알아보기 힘든 종이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익일 새벽, 식량 전수조사 예정.]

메모를 확인한 행수가 몸을 떨었다.

'안 돼, 여기서 지금 있는 식량까지 잃었다가는....'

도저히 그 뒷감당을 할 수 없다.

상인이 물건을 모두 잃어서야 거지나 다름없다.

누가 볼세라 손에 쥔 메모를 씹어 삼킨 리트 상단의 행수가 결심한 듯 주먹을 쥐고 일어났다.

"일단, 황금 고블린 상단에 가 봐야겠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 메모를 전해 준 의도를 알아야 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2화

평소에 모너 영지에서 가장 바쁜 사람을 뽑으라면 모두가 섭정관을 뽑았을 테지만, 로베르토가 시장 한복판에 산 채로 묶인 이후 영지성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누가 뭐래도 감사부장 베인이다.

"으으으… 야, 나 조퇴 좀 할게."

서류를 보던 중 갑작스럽게 드는 오한에 연신 몸을 떨어 댄 그가 부관을 향해 말하자, 깜짝 놀란 부관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베인을 바라봤다.

"네?"

꼰대 중의 꼰대.

죽어도 직장에서 죽으라는 일념으로 살아가는 줄 알았던 베인이 조퇴라니.

'골렘'이라고 불릴 만큼 철저하고 쉴 줄 모르는 양반의 말에, 부관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아… 근데 오늘도 일이 엄청나게 밀렸는데요? 치안대 쪽 조사가 거의 끝나 가서 이제 어디까지 처벌할지 정해야 해요."

"하...."

부하의 말에 낙담한 베인이 머리를 헝클이며 푸념하듯 속에 있는 말을 뱉었다.

"씨발, 법을 어겼으면 법대로 처벌받아야지. 그냥 전부 감옥에 가두고 법원에 맡기면 안 되나?"

"올해 보고된 범죄가 지난 20년간 기록된 사건들보다 많아서 법원 쪽도 내년까지 예약이 찼다더라고요. 되도록 큰 건만 보내고 작은 건은 이쪽에서 벌금으로 쳐내 달래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야! 저 새끼들 태반이 다른 영지에서 돈 받은 놈들인데, 그 돈으로 벌금 내라 그러면 그게 나라냐! 최소한 감옥에는 처넣어야지!"

부장의 강력한 주장에 팀장이 난처한 듯 머리를 긁었다.

"그, 감옥도 지금 수용 인원이 한계에 달해서… 독방을 두 명이 쓰고 있답디다."

"허, 시발. 진짜 영지 꼴 잘 돌아간다."

금기어를 들은 팀장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감사부장실 한편에 걸린 큼지막한 나무판자에 적힌 주의문을 가리켰다.

['영지 꼴 잘 돌아간다.' 금지.]

*주의 소공작님이 소환될 수 있음.

눈을 뒤룩 굴려 사방을 확인한 뒤 이안이 없다는 걸 확인한 베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 내가 진짜 관두든가 해야지. 일은 빡세지, 섭정관은 지랄 맞지, 소공작은 미친놈이지...."

전에 봤던 소공작의 광기 어린 눈이 떠올라 몸에 다시 오한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날부터 몸이 으슬으슬한 것 같아. 그 미친놈을 만난 날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또 그럴듯했다. 죽어 나간 성직자들을 보고도 침묵을 지켰기 때문일까.

"설마!"

신의 저주를 받은 건 아닐까.

"에이!"

갑작스럽게 든 불안한 생각에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개를 흔들며 머릿속에 든 생각을 던지듯 뱉어 댔다.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가서 성직자를 죽였나? 아마 뒤진 성직자는 내 이름도 모를걸?"

아무렴 어떻게 소시민인 자신의 이름을 알까.

만약 거기서 죽은 성직자가 망령이 되어 저주했어도 그 악마 같은 소공작이나 소공작의 명령에 칼을 뽑은 기사를 저주했겠지.

혹시 모르니 다음번에 부주교를 만날 일이 있으면 꼭 정화 주문을 부탁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을 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베인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던 부관이 물었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미친놈이요? 성직자가 죽다뇨?"

소공작이 대성당에서 벌였던 일은 부하들도, 감사부도 모른다.

도대체 어떤 수를 썼는지 신성 제국에서 직접 나서서 마족의 개입을 주장하는 바람에 자신과 부주교를 제외한 영지의 모두가 마족이 성직자를 타락시키고 죽였다고 알고 있을 뿐.

"아니야. 그냥 소공작 생각하니까 재수가 없어서. 아니,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인간한테서 광기가 느껴진다니까? 너도 봤지? 그 어린놈이 눈깔을 희번덕거리면 오금이 저리다고."

악마 같은 놈.

성직자를 그렇게 죽여 댔으니 정말 악마가 맞을지도 모른다.

"재수 없는 놈이랑 얽혔어. 아이 씨! 생각 안 하려고 했는데 또 생각났네. 야! 가서 소금이나 좀 뿌려라!"

새침했던 첫사랑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아른거리는 이안의 얼굴에 베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부하를 향해 소리쳤다.

"얼른! 소공작, 그 악마 같은 인간이 생각나는 거 보니까 오늘 영 재수가 없을 모양이다."

지난밤 잠자리가 뒤숭숭했던 이유도 분명 그 악마에게 있을 거라며 구시렁대고 있는 사이, 부관이 멍한 표정으로 벽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야! 너도 나 무시하냐?! 소금 뿌리라고! 또 악마 같은 놈이 여기까지 쳐들어올라!"

마지막으로 왔을 때는 주교 대가리를 선물이랍시고 가져온 놈이다. 되도록 퇴임할 때까지 보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속마음이었다.

"부, 부장님...."

긴장한 듯 이상한 목소리에 베인이 고개를 들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부관을 바라봤다.

당황한 듯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떨리는 눈, 천천히 돌아가는 허리, 자리를 피하기 위해 슬그머니 뒤로 움직이는 다리.

'이런 씨발.'

불안한 예감이 강렬하게 뇌를 파고들었다.

'거룩한 빛의 신이시여, 부디 악을 멸하시어 제 삶이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재빨리 구마문을 외우며 신의 도움을 바랐지만, 그의 애절한 마음을 놀리듯 등 뒤에서 이안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또렷이 울려 퍼졌다.

"명색이 악마인데 소금 가지고 되겠어?"

끼기긱.

두려움에 떨리는 허리를 억지로 움직여 몸을 돌리자, 빙글 웃고 있는 악마의 현신이 보였다.

"아, 하, 하, 소, 소공작님...."

툭.

천천히 다가온 악마가 어깨에 손을 짚고 귓가에 속삭였다.

"요즘은 정말, 자살 방법이 특이해진 것 같아."

소공작의 살벌한 목소리에 아찔한 소름이 전신을 휘감았다.

"무,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십니까. 제가 정말 그렇게 새,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그게 다...."

마땅히 떠오르는 변명이 없었다.

이 영지에서 가장 고귀한 인간을 악마라고 욕했는데, 변명이 떠오를 리가.

순간 여우 같은 자식과 곰 같은 마누라가 떠올랐다.

'안 돼.'

자신은 죽어도 가족에게까지 귀족 모욕죄가 닿아서는 안 된다.

털썩, 쿵!

고민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오랜 충고처럼 베인은 재빨리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다.

"죽여 주십시오!"

* * *

"하."

이안이 엎드린 감사부장을 보고 혀를 찼다.

아무리 칭호가 있어도 그렇지, 장난 좀 쳤다고 바로 죽일 거라고 생각하다니.

아니, 생각해 보니 이 세계의 귀족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려나.

"내가 널 왜 죽여. 가뜩이나 일손도 부족한데. 사람 좀 모아 봐, 일 좀 하게."

그 말에 베인이 고개를 살짝 들고 물었다.

일이라니. 그것도 소공작 입에서 일이라니.

어감도 분위기도 에감도 좋지 않았다.

"일이요? 무슨...."

"시장에서 밀에 모래를 섞는 개새끼들이 있다지 뭐야. 옛말에 음식으로 장난치는 놈은 혀랑 손을 잘라 버리랬지."

'세상에 그런 과격한 옛말이 어딨어! 이 싸이코야!'

마음속으로 울부짖던 베인과 빙글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는 이안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식량에 모래 섞인 게 하루 이틀인가? 아니, 그보다 그걸 다 잡아넣는다고? 시장에 상인이 총....'

잠깐 계산을 해 보니 최소 백 명. 아니, 수백은 넘는 상인들이 잡혀 들어올 것이다.

아직 조사의 20%도 끝마치지 못했는데 그만큼의 조사 대상이 추가되는 셈이다.

"그냥 죽여 주십시오!"

고민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옛말에 교단의 성서와 어머니는 틀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베인이 다시 납작 엎드렸다.

"부장? 부장, 왜 이래?"

"절대, 절대 불가능합니다! 저희 부서에는 그 많은 인원을 조사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뿐일까.

감사부와 치안대가 모래 섞인 밀 포대를 알지 못할 리가 없다. 다만 그들을 처벌할 수 없을 뿐.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대성당처럼 다 죽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베인은 미친 소공작에게 반한다는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도 해야 할 말을 아끼지 않았다.

"만약 상인들이 죽으면 상인 협회가 더 이상 식량을 공급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 한 달만 식량 공급이 멈춰도 수백, 수천의 영지민이 죽어 나갈 것입니다!"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거라곤 저주받은 마력에 오염된 동물들과 몬스터 부산물뿐이다.

땅에서 자라나는 모든 식물에조차 마력이 깃들여 있어 마나가 없는 일반인은 이 땅에서 자라는 식물도, 동물도 먹을 수 없다.

"제가, 제가 더 좋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순간 과거에 똑같은 말을 했던 기억이 났지만, 베인은 애써 불안한 기시감을 무시했다.

그러나 그보다 거부할 수 없는 악마의 속삭임이 먼저 들려왔다.

"미안해. 나도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그걸 따르고 싶은데, 지금은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네."

슬쩍 고개를 돌리는 이안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니, 검은색 로브를 둘러쓴 20명의 여자가 보였다.

"저, 저...."

대성당에서 성직자들을 막아섰다는 소영주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하녀들.

"하나는 흑귀대와 함께 시장에 가서 범죄자를 즉결 처형하는 방법이 있고."

베인의 심장이 쿵 하고 잠깐 멈췄다.

허무함과 증오를 닮아 책상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주교의 머리는 그날 이후 매일 밤 꿈속에서 자신을 괴롭혔다.

대성당에서 주교를 죽인 인간이 설마 시장통에서 사람 몇 못 죽일까.

"안 됩니다! 즉결 처형이라뇨! 모든 시민은 영지법에 따라 정당한 재판과 조사를 통해 처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눈을 질끈 감은 베인을 향해 이안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유혹하듯 들려왔다.

"감사부가 제 역할을 다해 불필요한 피가 흐르는 걸 막는 방법이 있지. 영지민들은 모르겠지만, 시장에 있는 어린아이들은 두 번째 방법을 더 좋아할 것 같아."

빌어먹을 악마 새끼.

눈을 질끈 감은 감사관이 뒤를 향해 소리쳤다.

"감사부 전원 하던 일 멈추고 집합! 밖에 나간 인원도 전부 소집한다!"

주먹을 불끈 쥔 베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까 조퇴했어야 되는데....'

그의 후회가 마음속에 공허히 울려 퍼졌다.

* * *

릭은 저녁 늦게 찾아온 손님을 불쾌한 눈으로 노려봤다.

"아니,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지금 몇 신 줄 압니까?!"

약초를 구하려고 저녁에 방문하는 손님이 없지는 않았던 터라 평소라면 충분히 이해하고 넘겼겠지만 11시는 정도가 심했다.

다시는 그렇지 못하게 내일 오라고 말한 뒤 손님 앞에서 문을 닫고 돌아가려는 찰나,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말했다.

"여기가 황금 고블린 상단인가?"

"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왔어? 이거 로브도 그렇고 거지인 거 같은데… 쯧."

다시 손님의 행색을 보니 영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꽉 쥔 손은 어디가 아픈지 덜덜 떨고 있고, 뒤집은 로브는 시장에서 가장 흔한 싸구려 천으로 만들어진 로브였다.

막상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문전박대를 할 수도 없다. 얼마나 절박한 상황이면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여기까지 왔을까.

"에휴, 내 안에 들어가서 적당한 약이랑 먹을 것 좀 내올 테니 잠깐만 기다리쇼."

"아, 아니, 나는 거지가...."

"아, 거참. 다 안다니까. 내 먹을 거랑 꽁쳐 둔 돈을 조금 줄 테니 가만히 기다리쇼. 마물한테 당한 모양이지? 요즘 성직자는 돈도 안 받고 사람을 고쳐 준답디다."

오랜 시간 동안 차별받아 온 평민들은 더 이상 교단이나 성직자를 찾아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며칠 전 벌어진 일로 대성당 전체에 큰 변화가 생겼음에도 그걸 아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우리 사장이랑 거기 부주교랑 잘 알아요. 편지라도 써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선한 상단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모양새가 마치 자신의 어릴 적을 보는 것만 같아 릭의 목소리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아니, 사람 말을 좀 듣게. 나는 거지가 아니라...."

골드크로우의 행수, 덤데드가 질색한 표정으로 릭을 바라봤지만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릭은 연신 덤데드의 등을 치며 응원을 건넸다.

"나도 바닥에 살아 봐서 알아요. 지금은 답도 없고 내일도 보이지 않겠죠. 근데 세상에 볕 들 날이 있더라니까요? 살다 보면 재수 없고 냉혈한인 사장에 악마 같은 소공… 아니, 사장 지인에...."

릭이 한참을 재잘거리는 동안, 그를 따라 건물 안에 들어선 덤데는 연신 상단 안을 두리번거렸다.

'생각보다 훨씬 규모가 크군. 분명 밖에서는 거의 다 쓰러져 가는 상단처럼 보였는데.'

사방에 놓인 잡기가 모두 고급품이다. 이건 그만한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누군가를 뒤에 두고 있다는 것.

릭을 따라 창고에 들어선 순간, 덤데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이게 대체...."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확인하는 덤데드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고작 중소 상단이 아니었다는 건가...."

순간 절망적인 얼굴을 한 덤데드가 멍하니 서서 중얼거렸다.

그의 눈앞에는 절대 이곳에서 볼 수 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한 물건들이 끝없이 쌓여 있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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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3화

덤데드는 족히 마차 수십 대 분량은 넘을 것 같은 밀 포대를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도대체 언제 이만큼의 식량을… 아니, 도대체 어디서....'

이안의 명령에 따라 이미 재포장까지 마친 밀포대에는 큼지막한 황금 고블린의 문양이 박혀 있어 덤데드는 저 식량 전체가 세 상단으로부터 약탈한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저 정도 식량이면 영지 전체를 몇 달은 먹이고도 남을 텐데. 도대체 왜 저만한 양을....'

절대 신생 상단이 구할 수 없어 보이는 어마어마한 양의 식량에 질린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을 때,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와 함께 나긋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뵙네요."

"릴라이 상단주."

"오전에는 통성명할 시간도 없었죠. 황금 고블린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릴라이라고 합니다."

"…골드크로우 상단의 행수, 덤데드라고 하네."

또각거리며 다가간 릴라이가 손을 건네 악수를 나누며 덤데드를 탐색했다.

긴장이 역력히 묻어나는 굳은 얼굴과 얼마나 긴장했는지 땀으로 축축한 손.

자신이 열세라는 걸 깨달은 상인은 이미 잡은 먹잇감이나 다름없다.

"아! 사장님!"

그제야 릴라이를 발견한 릭이 당황한 얼굴로 후다닥 달려오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거지라도 지금 밖으로 쫓아내면 안 됩니다! 몸이 어찌나 아픈지 식은땀이 가득하더라고요! 제 월급에서 깔 테니까 잠시만 시간을...."

릴라이가 사정하는 릭의 얼굴을 밀며 말했다.

"릭, 창고에서 비프타산 차 좀 찾아 줘."

"네? 창고에서요? 지금 창고가...."

고개를 돌려 수백 개의 밀 포대가 가득 찬 창고를 돌아봤다.

"저기서 차를 찾으라구요...? 그거 시제품으로 딱 한 박스밖에 안 들여왔는데...."

울상을 한 릭에게 릴라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는 꼭! 그 차가 마시고 싶네. 부탁해."

그 말을 끝으로 릴라이는 몸을 돌려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저벅저벅.

한참을 고개 숙인 채 걷던 덤데드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황금 고블린 상단 뒤에는 누가 있는가?"

섭정관이나 소공작은 아니다. 둘 다 저 정도의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면 이제껏 상인 협회에게 휘둘렸을 리가 없으니까.

결국 제삼의 세력이 모너 영지에 눈독 들이고 있는 셈이다.

"설마 세 영지의 상단이 갑자기 행방불명된 것도 황금 고블린과 관계가 있나?"

덤데드의 목소리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갑자기 나타난 세력, 몇 주간 급박하게 움직이던 영주성과 발작하듯 설치고 다니던 소공작.

그 모든 걸 아우르는 뭔가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아 답답해하던 순간,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생각지도 못한 제삼세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국? 설마… 설마 제국에서 모너가에 간섭하려는 건가?"

통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대륙 최고의 강대국.

그들이라면 저 정도의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야 큰일도 아닐 터.

"맞아. 그래서 갑자기… 직접 통치하기에는 얻는 게 너무 적으니 차라리 모너가를 지원하려는 거군."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의문을 스스로 정리하면서, 릴라이를 쫓는 덤데드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그래. 레임 왕국을 차지해 봤자 모너가가 움직이면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모너가를 꺾어 봤자 얻는 거라곤 마물의 숲밖에 없으니, 차라리 모너가를 이용해 레임 왕국을 차지하면...."

머릿속에 든 생각을 쉼 없이 뱉어 내자 상상에 상상을 더해 점점 그럴듯한 가설이 만들어졌다.

이미 의심은 확신으로 변한 지 오래.

끼이익.

"이쪽입니다."

마침내 상단주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덤데드의 눈에 릴라이는 제국이 파견한 비밀 요원이나 다름없었다.

* * *

"하...."

소파 자리에 앉은 덤데드가 릴라이를 바라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수완 좋은 신생 상단쯤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제국을 뒤에 두고 있었을 줄이야.

"그래, 처음부터 계획된 거였군. 식량을 두 배 가격에 사들인 건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나?"

"...."

이미 오는 동안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릴라이는 빙긋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덤데드가 알아서 그의 가설에 살을 붙여 나갈 거라 생각한 것이다.

"참으로, 참으로 놀라워. 독점을 위해 세 상단의 식량을 전량 구매해 영주성과 단독으로 거래를 트기 시작하면 시장 지배율을 미친 듯이 끌어 올릴 수 있겠지. 돈이야 넘쳐나니 그건 문제가 아닐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상단보다 더 큰 상단이 됐을 거야."

역시나, 릴라이의 침묵을 암묵적인 긍정이라고 생각한 덤데드가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결국 영주성에 영향력을 키우는 게 목적이었겠군. 굳이 제국이 뒤에 있다는 걸 밝힐 필요도 없이 식량을 쥐고 있으면 될 일이니."

단 며칠 만에 이 정도 식량을 모을 수 있는 상단이라면 세 상단이 식량 판매를 거부했어도 언젠가 독점에 가까운 점유율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덤데드가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세 상단을 습격한 거지? 가만히만 있으면 아무도 모르게 원하는 걸 다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그제야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릴라이가 덤데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건 저희가 아닙니다."

의도적인 '저희'라는 표현에 다시 한번 제국을 연상한 덤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준비를 해 놨는데 이제와 무력을 쓸 리가 없지. 그럼 세 상단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물론 릴라이와 이안은 처음부터 계약서에 따른 배상액을 노렸을 뿐이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덤데드는 그 사실을 알 방법이 없었다.

"처음."

릴라이가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뱃사람을 홀린다는 전설 속 사이렌처럼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미약하게 덤데드에게 남아 있던 경계심마저 눈 녹듯 사라졌다.

"처음 계약할 때는 상인 협회가 말을 바꾸지 못하게 배상금을 책정했을 뿐, 그 이상의 의도는 없었습니다. 제가 몰랐던 건 그 배상금을 협회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노릴 수도 있다는 점이었죠."

"그게 무슨...."

릴라이가 품에서 미리 준비한 검은색 편지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새벽에 누군가 이 편지를 제 사무실 앞에 놓고 갔더군요. 소공자를 찾아가 배상금을 진상하라고요."

그 말의 진의를 깨달은 덤데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협회의 누군가가 일부러...."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약금의 10배나 되는 금액이라면 어떤 상단에든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잠시 덤데드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 릴라이가 결정타를 넣었다.

"오늘 세 상단 중 하나의 상단에서는 물건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 상단의 물건이 모두 도착하지 않았더군요."

"그, 그럼… 세 상단 중 둘 이상이...."

"그럼 이 일에 참가하지 않은 상단은 단 하나밖에 없는 셈이죠."

말을 마친 릴라이가 여유로운 척 소파 깊숙이 몸을 밀어 넣었다.

"왜, 왜 나에게 이런 걸 알려 주는 건가?"

"만약 세 상단이 동시에 흔들린다면 저희 상단 혼자 이 거대한 영지에 식량을 지급하겠죠."

"그럼 누구든 황금 고블린을 의심할 수밖에 없겠군."

어떻게 고작해야 중소 규모도 안 되는 상단이 저만한 식량을 유통할 수 있는지, 그 식량을 어디서 수입해 왔는지 알고자 하는 이들이 줄을 설 것이다.

"결국 제국과의 관계를 밝히고 싶지 않다는 건가?"

"좋을 대로 생각하시죠.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이미 영주성과 식량 공급 계약을 마쳤고, 내일 새벽 대대적인 검사가 있을 거라는 사실뿐."

"그럼 겨와 모래가 섞인 밀을 파는 상인들은...."

"로베르토 아시죠? 아직도 시장 한복판에 묶여 있는.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게 소공작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과연 모래를 섞은 밀을 유통하다 걸리면 어떻게 될까요?"

말을 마친 릴라이가 능숙하게 차를 따라 여유롭게 찻잔을 들며 말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선택은 행수께서 하시는 거죠. 대신, 제 호의가 이 이상 전해질 거라고 믿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찻잔을 내려놓으며 위협하듯 차갑게 쏘아 뱉는 그녀의 말에 덤데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오늘 행수께서 하신 의심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죠."

릴라이가 딱 하고 튕기자, 암제의 능력으로 존재감을 숨기고 있던 이안이 하얀 가면을 쓴 채 덤데드의 그림자에서 나타나 단검을 목에 가져다 댔다.

"히이익!"

누군가 숨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행수가 바지에 오줌을 지리며 넘어졌다.

"쉬이잇. 아시겠죠?"

그런 덤데드를 향해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릴라이는 싱긋 웃은 뒤 그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 * *

방을 나선 릴라이가 긴장감으로 터질 듯한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작게 숨을 내쉬며 물었다.

"저 어땠어요?"

"연기가 훌륭해. 제국에서 극단을 해도 성공했겠어."

이안의 너스레에 피식 웃은 그녀가 앞서 걷는 이안의 등을 바라봤다.

"공작님은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말한 대로 움직였을 뿐. 이 계획에 자신이 관여한 부분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치 조각처럼 맞물리지 않는 곳 하나 없이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 냈다.

"설마, 내가 무슨 수로 골드크로우의 행수가 음모론에 빠진 인간인지 알았겠어."

아니, 아마 어떤 오해를 하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누가 이 자리에 왔는지와 상관없이 산처럼 쌓인 식량을 보면 황금 고블린 상단을 도와주는 누군가를 떠올릴 수밖에 없고, 그럴 수 있는 건 제국이나 신성 제국밖에 없으니까.

새롭게 고용한 상단의 노예들을 부려 밀 포대를 새 포대에 담으라고 했을 때만 해도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가 처음부터 이 상황을 원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왜 하필 골드크로우의 행수였나요?"

이 자리에 누가 있든 상관없다면 셋 중 가장 규모가 큰 켄타우로스 상단의 행수가 더 어울렸을 터.

그 물음에 이안이 씨익 웃으며 창고를 가리켰다.

"오전에 영주 회의에 참석하느라 릭을 흑귀대랑 같이 남겨 두고 왔거든. 골드크로우의 상단주는 리트 영지의 막내딸이라지?"

쓸데없이 착한 릭은 분명 낄 때 안 낄 때 모르고 망아지처럼 돌아다니다 리트 영지의 소중한 막내딸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럼 착한 것 빼고는 영 별로인 릭이, 과연 그 어린 아가씨의 허벅지를 베도록 놔뒀을까?"

릴라이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일에는 절대 사적인 감정을 담지 말라고 몇 번이고 말했는데...."

"아, 아니야. 그 정도도 생각 못 하면 내가 등신이지. 릭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놔두라고 흑귀대한테 말한 것도 나니까. 여하튼, 보고를 들어 보니 릭이 결사반대해서 리트가의 아가씨는 건드리지 않았다고 해."

지금쯤 모너 영지의 후방 도시이자 수도인 리어에 도착했을 세 상단을 떠올린 이안이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이상하지. 옵솔 영지의 차남도, 머천영지의 삼남도 전부 허벅지를 다쳐서 돌아왔는데, 짠! 리트 영지의 막내딸만 멀쩡하다?"

처음에는 단순한 의심에 불과할 것이다. 머천 영지는 릭의 가슴팍에 달아 놓은 켄타우로스 기사단의 문양 때문에 옵솔 영지를 의심할 것이고, 옵솔 영지는 자연스럽게 막내딸을 지켜낸 리트 영지를 의심할 터.

"그런데 거기다 더해서 리트 영지만 조사를 피해 간다고 생각해 봐."

이안이 양팔을 넓게 뻗으며 말했다.

"결국 자연스러운 삼파전이 벌어지는 거야!"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세 영지가 눈치전을 벌이고 있을 때 우리는 세 영지 전체에게 통보하는 거지. 당장 돈 안 주면 전쟁이라고. 그럼 끝이야. 우리가 무조건 이길 수밖에 없어."

행복한 듯 헤실거리는 이안의 뒤.

릴라이는 한 발짝 멈춰서 떨리는 눈으로 공작을 바라봤다.

'처음부터 돈은 수단일 뿐이고 전쟁이 목적이었어.'

덤데드가 그녀를 보고 그랬듯, 그녀도 치밀하게 짜인 판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올가미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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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4화

일을 마치고 상단을 나선 이안은 골목길에 서서 하늘을 바라봤다.

수많은 별이 햇빛 한 점 드리우지 않은 새카만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거의 다 끝났네."

세 상단의 식량을 약탈해 비축분을 모았고.

상단 사이의 이간질을 시도해 세 영지 간 단결에 미세한 틈을 만들었고.

이곳저곳 뿌려 놓은 씨앗이 발화해 그 틈을 파고들 것이다.

"이제 전쟁을 벌일 병력만 있으면 되는데."

방법은 이미 생각해 뒀다.

치안대와 영지군을 움직이지 않은 채 흑귀대와 새로 고용한 상단의 노예들을 짧은 기간 훈련시켜 게릴라전을 펼치는 방법.

왕실에 편지를 보내 당장 중재하지 않으면 영지전을 벌이겠다 협박하는 방법.

정 안 되면 리나와 함께 암살행을 다니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떻게 생각하나?"

무심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이안의 시선이 어둠 속 지붕 한쪽을 향했다.

"오늘 네 주인에게 전해야 할 말이 많을 거야."

모굴 백작이 자신에게 꼬리를 붙였다는 사실쯤이야 회의장을 나선 순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내가 얻은 [암제]는 어둠을 지배하는 제왕의 특성.

암살자가 아닌 기사가 되기 위해 수련해 온 이들의 추적을 못 느낄 리가 없다.

"가서 전하거라. 고삐 풀린 개새끼의 주인이 제집도 못 지킨 개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한다고."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건물 위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사라졌다.

마지막 방법.

제 주인도 몰라보는 개새끼에게 주인이 누구인지 가르치는 것.

이 세계에서 기사의 충정이란 현대의 시선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단단하고 고귀한 믿음이다.

주인이 무슨 짓을 하든 의문 따위 품지 않고 무조건 따르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멍청이들.

모굴의 충정을 얻을 수 없어도 그 토대를 마련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결국 나를 못 믿고, 욕하고, 의심하더라도 내 말을 따라 줄 기사로, 충직한 개로 바꿀 수만 있다면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니까.

"으, 추워."

조용히 다가오는 전쟁을 의식한 것인지, 밤하늘이 여느 때보다 차갑게 다가왔다.

* * *

다음 날 새벽.

이안은 감사부, 흑귀대와 함께 시장을 습격했다.

"전부 다 잡아들여라! 거기! 장부 먼저 확인해!"

"흑귀대는 장부에 나온 유통업자를 잡아넣는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다!"

"모래를 섞지 않은 상인은 직접 밀 포대를 잘라 보여라! 상인들이 뭐라고 하든 듣지 마! 밀 포대에 밀 말고 다른 게 들어 있으면 무조건 일단 연행해라!"

갑작스러운 연행에 상인들과 상인 협회 직원들이 반항했지만, 이안의 명령은 단호했다.

"전원 반항하는 놈들은 반죽음을 만들어서 데려간다! 감히 내 영지를 좀먹던 놈들에게 관용은 없다!"

이안은 끌려가는 상인들을 욕할 생각이 없었다.

저들도 살아가기 위해 피치 못할 결정을 했을 뿐. 모래 섞은 밀을 공급한 건 저들이 아니니까.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단호함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다음 로베르토가 되기 싫다면 순순히 감사부에 협조해라!"

감사부장의 외침에 상인들의 시선이 시장의 한편, 로베르토 행정관이 묶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치안대와 성직자의 도움을 받아 아직도 죽지 못한 채 묶여 있는 로베르토.

"소, 소공작님… 제발, 제발 죽여...."

바싹 마른 입을 달싹거리며 애원하는 그를 본 상인들이 순순히 감사부에 협조하기 시작했다.

* * *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상인 협회 상층, 로진 행수가 협회를 향해 파도처럼 몰아치는 감사부와 흑귀대를 보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빌어먹을 망나니가 진정 굶어 죽길 원하는 건가!"

설마 이 땅에서 상인 협회와 척질 생각을 하다니. 로진 행수가 리트, 머천 영지를 대표하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놈들은 고작해야 며칠도 견디지 못할 거야. 절대, 절대 뜻을 굽히면 안 되네."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과격하게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식량 없이 영지를 운용할 수는 없을 터.

무슨 명목으로 자신들을 잡아간다 한들 결국 풀어 줄 수밖에 없으리라 믿었다.

"일단 자리를 피하지. 협회 직원들이 저들을 막는 동안 한시라도 빨리 각 영지에 이 소식을 전해야...."

로진 행수가 다른 두 사람에게 말을 하려던 순간, 어느새 상단까지 들이닥친 감사부가 협회 상층을 바라보며 외쳤다.

"켄타우르스 상단의 로진! 머천 영지의 싱글롤! 영지법을 어기고 기준에 미달하는 식량을 유통한 죄로 체포한다!"

순간 로진과 싱글롤의 시선이 이름이 불리지 않은 덤데드를 향했다.

"서, 설마...."

고개를 돌려 둘의 시선을 피한 덤데드가 창문을 열고 외쳤다.

"둘 다 여기 있소!"

쉬익! 탁!

"고마워요. 찾느라 귀찮을 줄 알았는데."

덤데드가 소리치기 무섭게 1층에서 도약만으로 상층까지 뛰어오른 리나가 웃으며 열린 창문으로 들어섰다.

"덤데드! 감히! 이 일을 옵솔과 머천 영지가 넘어갈 줄 아느냐!"

로진이 믿었던 동료의 배신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며 소리쳤지만, 덤데드는 슬픈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네가 내가 아는 걸 알았다면, 자네도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걸세."

이 일이 어떻게 흘러가든지, 뭉쳐도 부족한 판국에 흔들리는 세 영지의 결속으로는 절대 제국의 간계를 이길 수 없을 터.

"이것이 최선이었어."

쓸쓸하게 로진의 어깨를 두드리는 덤데드의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상인 협회의 두 간부가 영지에 보고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체포되었다.

* * *

영주성에서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모너가의 후방 도시 '리어'에서는 초죽음 상태의 상단이 하나둘 도착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볼트터틀과 볼트터틀의 상단주이자 머천 영지의 삼남인 티에르가 가장 먼저 리어에 도착해 수정구를 통해 머천 영지에 소식을 전했다.

"…네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어야 한다."

"제가 분명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아버지. 습격자의 리더로 보이는 녀석의 가슴에는 켄타우르스 기사단의 문양이 있었습니다."

머천 백작은 수정구를 통해 아직 어린 아들을 바라봤다. 피로 물든 다리를 치료도 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먼저 연락한 믿음직스러운 아들.

"그들이 전쟁을 원하는 것 같더냐?"

"…놈들은 제가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알고도 저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으득.

뻔뻔한 얼굴로 산적이라고 소개하던 릭을 떠올린 티에르가 이를 갈았다.

"증거가 없으니 발뺌을 할 셈인 것 같습니다. 만약 전쟁을 원했다면 입을 막기 위해 저를 죽였을 테니까요."

"옵솔 영지가 모너가를 독점하기 위해 그런 짓을 꾸몄단 말이지...."

같은 시각.

마찬가지로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리어에 도착한 리트 상단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뭐?! 누가 어쩌고 어째?! 스네일은, 내 막내딸은 괜찮으냐!"

보고받고 부리나케 달려오는 리트 백작에게 어딘가 몽롱한 표정의 스네일이 답했다.

"응, 아빠. 난 괜찮아. 기사님이… 구해 주셨어."

"아가씨, 제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 기사가 저희를 습격한 겁니다. 여기, 제 허벅지도 베었고요."

못마땅한 표정의 일영이 자신의 상처까지 보이며 정정했지만, 스네일은 그녀의 상처를 보지도 않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난 구해 줬는걸.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을 벨 수 있습니까!' 하면서."

그 모습에 똥 씹은 표정으로 얼굴을 구긴 일영이 말했다.

"정확히 '이렇게 어린아이를 꼭 베야 할까요?'라고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기사 같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아니야 분명히 켄타우르스 문양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기사님이 분명해!"

순간, 통신실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뭐라! 감히 그 말 대가리들이 우리 상단을?!"

스네일이 다급하게 말을 얼버무리려 했지만, 켄타우르스 기사단의 기사가 막내딸이 이끄는 상단을 습격했다는 말에 백작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한편.

"보, 보인다! 리어다! 리어가 보인다!"

보좌관의 말에 트레시가 신경질적으로 급조한 가마를 끌고 있는 짐꾼들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이 거렁뱅이들! 빨리 안 움직여!"

"도, 도련님… 이제 더 이상은...."

풀썩, 쿵!

"으악! 아프잖아! 너 이 새끼!"

촤악! 촤악!

가마에서 넘어지게 만든 일꾼을 향해 쉼 없이 채찍을 휘두르던 트레시가 주변을 둘러봤다.

30명이 넘는 인원으로 출발했지만 다친 다리로 가마를 끌고 움직이느라 하나둘 쓰러져 이제 남은 건 자신과 보좌관을 포함해 고작 4명뿐.

더 이상 가마를 들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트레시가 가마에 앉아 남아 있는 일꾼들을 향해 소리쳤다.

"끌어!"

순간 일꾼들이 눈을 부라렸지만 그때뿐. 영지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 했다.

"보좌관! 너도!"

그 말에 안색을 굳힌 보좌관이 가마의 한쪽 부분을 잡자, 채찍을 움켜쥔 트레시가 소리쳤다.

"가자!"

* * *

그 시각.

리나와 흑귀대를 리어 영지로 보낸 이안은 감사부로 향했다.

감사부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로진 행수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감히! 우리 영지가 가만있을 것 같으냐!"

그 말에 이안이 피식 웃었다.

"켄타우르스 상단이랑 옵솔 영지는 별개라며? 밀 포대에 모래를 섞은 건 켄타우르스 상단의 독단이라고 하지 않았나?"

모너가가 상단 협회의 만행을 막기 위해 각 영지에 경고를 전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때 분명 세 영지는 모두 각 상단의 독단이라고 못 박았었다.

"…우리 켄타우르스 상단은 더 이상 모너가와 거래하지 않을 것...!"

"아, 너희 상단은 우리 영지에서 거래가 금지됐어. 책임자를 효수해서 성문에 걸어 둘 예정이지."

상단이 영지와 관계가 없다는 말은, 곧 상단을 나노 단위로 부숴도 상관없다는 말과 똑같다.

"너 말이야, 너. 넌 이제 뒤졌어."

손가락으로 목을 가로로 그은 이안이 로진을 향해 으르렁거리듯 말을 뱉었다.

"언제까지 내 영지를 좀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너와 네 가족, 상단, 네 덕을 본 모든 인간이 내 영지에서 빈털터리로 쫓겨날 거야. 난 너희에게 단 하나도 줄 생각이 없거든."

이안의 몸에서 넘실거리는 살의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로진이 말을 더듬거리며 애원했다.

"자, 잠깐! 소공작! 식량 없이 영지를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이, 일단 화를 가라앉히고… 큽, 쿱?"

나불대는 놈의 주둥이를 움켜잡아 닥치게 만든 이안이 놈을 노려봤다.

"자,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할 일을 하자고."

이안이 손짓을 하자 레이나가 수정구를 든 통신 전문 마법사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네 상단주가 아직도 리어에 도착하지 못했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죽기 전에 말은 전해야 하지 않겠어? 영상을 남겨 놓으면 전해 줄게."

이미 리트의 골드크로우와 머천의 볼트터틀은 리어에 도착한 상황. 둘은 높은 확률로 그들을 덮친 도적이 옵솔 영지의 켄타우르스 기사단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단순히 심증만 가지고 당장 영지전을 벌일 리는 없겠지만, 저들의 결속을 흔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자, 네 주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남겨 봐."

"…무슨 말을 전하라는 것이냐."

"무슨 말이긴. 돈 갚으라고. 네가 죽어도 누군가는 돈을 갚아야 할 거 아냐. 세 달 안으로 1억 5천만 골드."

"크윽...."

잠시 고개를 숙인 로진이 마음의 결정을 한 듯 고개를 들고 말했다.

"좋다. 단, 상단주가 아니라 영주님께 연락해다오."

"못 할 것도 없지."

처음부터 그러기를 원했던 이안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하자 옵솔 영지로 연락이 갔다.

"무슨 일이냐?"

로진은 생각보다 옵솔에서 높은 위치에 있었는지 무려 옵솔 백작에게 직통으로 연락을 시도했다.

"배, 백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진? 이 수정구는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사용하지 말라고...."

옵솔 백작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로진과 옵솔의 중간을 막고 끼어들었다.

"아, 처음 뵙습니다, 백작님. 모너가의 이안이라고 합니다."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는 백작에게 계속해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켄타우르스 상단이 저에게 큰 빚을 졌거든요. 열심히 갚을 줄 알았더니 밀 포대에 모래를 섞어 팔고 있지 뭡니까?"

"...."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옵솔이 건방진 소공작을 노려보며 더 설명해 보라는 듯 침묵했다.

"그래서 이 기회에 다 잡기로 했습니다.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이번 사건에 가담한 인물들을 모조리, 싹 다 죽여 본보기를 세울까 합니다."

씩 웃은 이안이 손으로 동그란 표시를 하며 말했다.

"그러니 그쪽 차남에게 좀 전해 주십쇼. 제때 돈 안 갚으면 너도 뒤진다고."

"이놈이!"

분노한 백작이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이안의 뒤에 있던 로진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백작님! 리트, 리트가 모너가와 협력하고 있습니다! 등 뒤를 조심하십...."

갑작스러운 외침에 이안이 몸을 돌려 로진의 멱살을 잡음과 동시에 깜짝 놀란 마법사의 마나가 헝클어져 영상이 끊겼다.

"하! 네놈과 리트의 더러운 속셈을 모를 줄 알았느냐! 옵솔과 머천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로진은 갇혀 있는 동안 단 한시도 덤데드의 배신을 잊지 않았다. 리트의 배신을 옵솔 백작에게 전했으니, 놈들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터.

그가 멱살이 잡힌 채로 의기양양한 미소를 띤 채 소리쳤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본 이안이 이를 보이며 웃었다.

"정말. 조금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군. 잘했어."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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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이 │ 김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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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5화

만족스러운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이로써 밑그림은 끝났다.

가만히 있어도 옵솔은 리트를, 리트와 머천은 옵솔을 경계할 테니 이쪽에서는 저들이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전쟁을 준비하면 된다.

"세 달 안에 전쟁이라...."

"뭐, 뭐라고?"

아, 이놈이 있었지.

방금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른 채 멱살 쥔 손을 잡고 바둥거리는 로진을 바라봤다.

"설마, 리트가 전쟁을 일으키려고...!"

여전히 감도 잡지 못하는 놈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영지 전체를 좀먹던 상인 협회의 기둥은 이처럼 보잘것없는 인간이었을 뿐이다. 자기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이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우드득.

목을 움켜쥔 손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놈의 머리가 힘없이 쳐졌다.

"레이나, 이놈은 사람을 시켜서 성문에 걸어 놔. 앞으로 걸릴 놈들이 많아질 테니까 최대한 잘 보이는 곳에다가."

"네, 도련님."

놈의 머리는 이 조용한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봉화가 될 것이다.

* * *

방으로 돌아온 이안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 위에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당장 꿈속으로 들어가라고 종용하듯 구름 위에 눕는 듯한 침대의 편안함과 부드러운 이불이 지친 몸을 반겼다.

"아아아… 힘들다."

이 세계에 온 후,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쉴 수 없었다.

선택지가 너무 적었다.

망나니로 죽거나, 망나니로 살거나.

멸망하는 세계와 함께 사라지거나, 멸망을 막기 위해 발악이라도 해 보거나.

결국 살아남기 위한 선택의 반복이다.

이 영지를 지켜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

10년 뒤, 몬스터의 대대적인 침략에 대비해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모너가만큼은 건재해야 한다.

"겨우 세 달이라니. 너무 짧아."

노략질로 얻어 낸 건 4개월분의 식량과 총 120명의 노예. 영지에 남아 있는 골드크로우 상단까지 생각하면 아마 반년 정도는 버틸 수 있는 식량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병력인데...."

부드러운 이불에 얼굴을 비비며 고민을 거듭했다.

영주 회의에서 호기롭게 외쳤듯, 이 전쟁은 나만의 전쟁이어야 한다. 내 사람으로 내가 시작하고 끝내는 나만의 전쟁.

단 한 명의 영주민도 이 전쟁에서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 수비군과 모굴 백작이 움직이더라도 압도적이고 일방적인 전쟁이 아니라면 손해다.

내가 원하는 건 절대적인 우위에서 벌이는 일방적인 전투의 반복.

"아무리 생각해도 병력이 너무 적어."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애초에 전쟁을 염두에 두지 않은 전략이었으니까.

리어 영지에 있는 세 상단주를 잡아들이고 그들을 인질로 배상을 요구하는 첫 번째 계획.

세 영지는 상단주로 파견한 자녀를 구하기 위해 불합리한 배당금도 지급할 수밖에 없을 터.

피를 흘릴 일도 누군가 다칠 일도 없다.

하지만 세 영지의 결속이 흔들리면서 각개격파가 가능해지자, 마치 퍼즐처럼 맞춰지는 그림에 욕심이 났다.

단순한 배상금 이상으로 영지전을 벌여 각 영지의 비옥한 경작지 중 일부를 받아 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 모너가가 작물을 기를 수 있는 경작지를 얻는다는 건 왕국과 주변 영지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고.

자립할 수 있는 영지로서의 첫 번째 계획이자 난관인 식량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러려면 최소한 세 영지 중 하나는 위협할 수 있는 병력을 모아야 하는데...."

몇 개나 드리운 낚싯대에 좀처럼 입질이 없어 답답해하는 찰나,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모굴 백작이 알현을 청해 왔습니다."

톡, 하고 낚싯대가 흔들렸다.

* * *

응접실로 향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백작이 인사를 건넸다.

"또 보는군."

알현을 청했다던 백작은 소공작 앞에서도 고개조차 까딱거리지 않았다.

"하나만 대답하거라."

그의 성격을 보여 주듯, 백작은 아무런 설명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이번 일에 제국을 끌어들였느냐?"

모너가를 지켜 온 기사의 서슬 퍼런 눈빛. 그는 노려보는 백작을 덤덤히 마주 봤다.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여기까지 올 줄이야. 생각보다 많이 급했나 본데?'

시간상 부하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보고받자마자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황금 고블린 상단의 넘치는 식량과 단 하루 만에 무너뜨린 상인 협회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모너가에 외부 세력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공작의 뜻."

이안을 노려보는 투명한 백작의 눈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것 같았다.

"네 망종 짓을 넘어가 주는 것도 한계가 있음을 알거라."

"내가 말해도 믿지 않겠지만 제국은 끌어들이지 않았어. 전부 내가 계획하고 일궈 낸 과실일 뿐."

백작과 이안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런가."

단신의 힘으로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선 백작은 칭호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그가 보고 경험한 일들이 만들어 낸 원칙에 따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내가 경솔했구나."

미세하게 고개를 까딱거리는 백작을 본 이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믿는 건가?"

"보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으나, 겪지 않았으니 의심하지도 않을 뿐. 나에게 설명해다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어린아이를 훈계하듯 자신을 바라보던 백작이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자, 이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가 모은 사람들을 부려 상단을 습격했다. 그 과정에서 세 영지를 흔들었고 습격을 통해 모은 식량으로 제국이 모너가의 뒤에 있다는 암시를 줬지."

"모은 사람들? 그 검은 기사단 말인가?"

이미 보고받았던 모양인지 백작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 영지에서 발굴한 인재들이지. 내 첫 기사단이다."

그 말에 백작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나를 사용하는 힘은 등급에 따라 나뉜다.

1~2성급은 몸 안에 마나를 축적할 수 있는 비기너.

3성급은 몸 안에 있는 마나를 운용해 힘을 쓸 수 있는 유저.

4성급과 5성급이 운용한 힘을 무기에 담을 수 있는 익스퍼트.

6성급이 바로 혼자서 군대를 상대할 수 있다는 마스터.

그중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건 최소 3성급에 들어선 이후부터다. 수년간의 수련을 통해 유저의 경지에 다다른 이들만이 기사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기사단을 고작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혼자서 만들어 내다니.

"누가 가르쳤지?"

영지의 모든 기사는 최전방과 수비대에 속해 있다.

기사가 아닌 자들이 기사를 길러 낼 수는 없을 터.

"내가."

순간 백작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이안이 감쪽같이 마나를 숨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뿐. 누군가를 가르칠 정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백작의 가늘게 뜬 눈이 이안을 바라봤다.

"말에는 책임이 따르지."

그가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는 순간, 잘 갈무리된 기세가 한 올씩 풀리며 이안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백작이 천천히 주먹을 내지르자 공기와 대기 중의 마나가 동시에 울려 댔다.

콰쾅!

"이 미친 영감탱이가!"

기세를 느낀 순간부터 긴장을 놓지 않은 덕분에 품 안의 단검을 꺼내 공격을 막은 이안이 질색한 표정으로 백작을 바라봤다.

"이 노망난 늙은이가!"

아니, 공격을 할 거면 한다고 말이라도 하든가.

마스터씩이나 되는 인간이 치사하게.

그러나 전투 중에 언제까지고 불평만 늘어놓을 수는 없는 법. 재빨리 귀흡법과 귀신 걸음을 발동시킨 이안이 백작을 노려보며 품속의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금귀의 탐욕]

* 공격에 성공할 경우 상대의 특성 하나를 획득합니다.

양지기 아지요그를 이기고 얻은 보상 아이템.

원래 계획은 영웅 중 한 명의 특성을 훔칠 생각이었지만 모굴 백작은 무려 모너가의 수호 방패로 이름을 떨치는 기사. 영웅 중 그 누구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뛰어난 기사가 아닌가.

거기다 도끼를 휘두르는 그의 전투 스타일을 볼 때 암제나 피의 욕망와 달리 일반적인 전투에 적합한 특성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문제는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냐는 것.

"이봐 백작."

절대 불가능하다.

6급의 마스터는 혼자서 군대를 저지할 수 있는 괴물들이다. 당연히 초월자의 반응속도를 넘어선 공격을 한다는 건 불가능.

그럼 압도적인 기량 차이에서 오는 방심을 노려야 한다.

"꽤 하는구나. 그러나 종사(宗師)를 자처할 만큼은 아니다."

어딘가 만족스러운 듯 미세하게 올라가 있는 백작의 입꼬리를 보자, 이상하게 배알이 꼴렸다.

"내가 한 방 막았으니, 이제 백작이 막아야 할 차례 아닌가?"

여유로운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손짓이나 다름없었던 공격을 막은 팔 전체가 부러진 것처럼 아팠다.

"뭐라? 하하하! 와 보거라!"

재롱을 부려 보라는 듯 제자리에 태산처럼 버티고 선 백작.

그를 바라보며 이안은 귀흡법에 집중했다. 전신의 마나를 움직여 다리와 팔근육에 쏟아붓는다.

'조금만 더.'

이질적인 마나에 비명을 지르는 근육을 무시하면서 때를 기다리며, 조금씩, 조금씩 한계까지 마나를 응축시킨다.

상대는 6급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강자.

무슨 짓을 하더라도 상처조차 내기 어렵다.

그러니 단 한 번의 공격에 모든 걸 쏘아 보내야 한다.

"…오래도 걸리는구나."

덤덤히 말하는 백작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저벅.

앞으로 고작 몇 걸음.

'지금.'

쾅!

순간 한계까지 쏟아부은 마나를 폭발시키며 발을 박찼다. 발바닥에서 터져 나온 마나가 바닥을 부수며, 순식간에 동그래진 눈으로 경악한 듯 바라보고 있는 백작의 앞으로 쏘아져 나아갔다.

'살(殺)'

귀왕의 단 하나밖에 없는 초식이자 극에 달한 무의. 상대를 죽이고자 하는 원념이 단검 끝에서 빛을 발했다.

콰콰쾅!

순간적으로 터져 나간 바닥과 마나의 충돌에 자욱한 연기가 방 안을 가렸다.

"하...."

그리고 연기 속, 단검을 손으로 막아 낸 백작이 어이없다는 듯 자기 손을 바라봤다.

똑.

막을 필요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3성의 기사가 전력을 다한들 6성에 다다른 기사의 옷자락도 닿지 않는 법이다. 손을 뻗어 공격을 막은 것도 단순히 그 격차를 보여 주기 위함이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똑.

그러나 부러진 칼끝에 베인 손에서 핏물이 떨어졌다.

고작 두 방울.

그조차 두 번째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나았지만, 기껏해야 3급의 끝에 달했다고 생각한 소공작이 마스터에 달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 것이다.

"대단하구나."

부러진 단검을 부여잡고 있는 어린 소공작을 대견하다는 듯 바라봤다. 아직 18살도 되지 않는 나이.

"그 나이에 벌써 4급이라니...."

광증에 미쳐 있다던 망나니가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었을까.

감탄과 경악이 반쯤 섞인 시선에 이안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사람은 원래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법이라지. 시장을 습격한 것은 내가 직접 기른 내 기사단이다. 마족을 죽인 건 내 기사가 아니라 나였고."

마나를 모두 쏟아부어 탈력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당장이라도 쓰러져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이 빌어먹을 양반이 이 시간에 부르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구름 같은 침대 위에서 꿈이나 꾸고 있었을 텐데.

순간 솟구친 짜증에, 말에 가시가 들었다.

"난 분명히 내 전쟁이라고 했다."

부러진 단검을 던진 이안이 한쪽 입술을 들며 말했다.

"내가 시작한 싸움에서 질 리가."

물론 수틀리면 즉시 신성 제국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지만, 짊어진 자는 항상 당당해야 하는 법.

"나는 혼자 힘으로 기사단을 키워 냈다. 단 하루 만에 이 땅을 좀먹던 상인을 몰아내고 식량을 확보했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숨기며 억지로 침착한 모습을 연기했다. 마스터에 이른 모굴이라면 분명 자신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지만 죽어도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백작이 믿든, 믿지 않든, 이 영지는 내가 구한다."

어둠이 삼킨 방 안, 냉정하게 가라앉은 이안의 눈이 늙은 기사를 책망하듯 빛났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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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억지로 뗀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굳게 다문 입술에서 특유의 고집이 느껴지는 듯했다.

'변명하기 싫다는 거겠지.'

무려 마스터급 기사다.

일신의 힘으로 군대도 멈출 수 있다는.

분명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었을 테지만 이제 와 변명하기도, 용서를 구하기도 싫었으리라.

"그만 가 보겠다."

한참을 서서 바라보다 고작 하는 말이 가 보겠다라니.

피식 웃으며 뒤돌아선 백작을 바라봤다.

잘 가라는 배웅도, 잘 있으라는 인사도 없다.

터벅터벅 걸어가던 백작이 응접실 입구에 서서 뇌까리듯 말했다.

"왕실과 제국을 조심하거라."

그리고는 부연 설명도 없이 걸어 나갔다.

"끄으으윽."

백작이 나가자마자 이안은 바닥에 쓰러졌다.

마나를 전부 긁어모아 마나 소진이 일어난 몸으로 지금껏 버티고 서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놀라운 집착이다.

도저히 소파까지 움직일 힘이 없어 찬 대리석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밝히고 있는 샹들리에를 바라봤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갈 거면 빨리 가든가, 경고를 할 거면 자세히 좀 말하든가."

도대체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인간이다.

"하… 괜히 나댔나."

막상 백작이 가고 나니 아쉬움이 몰려왔다.

조금만 잘 어르고 달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힘을 빌려 달라고 했으면 또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고 생각했겠지."

내 전쟁이라고 했으니 내 손으로 끝내야 한다.

모굴도 눈에 보이는 성과를 무시할 수는 없을 터.

"그래도 성과가 없는 건 아니야."

한쪽에서 빛나고 있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금귀의 탐욕 발동에 성공했습니다.]

['모너가의 철벽– 모굴'의 특성을 획득합니다.]

[특성 거인왕의 투쟁욕을 획득했습니다.]

유능한 무능력자로 획득한 게 아니라서 강화되지는 않았지만, 무려 모굴을 마스터까지 끌어 올려 준 특성이다.

힘 빠진 팔을 움직여 재빨리 특성을 확인했다.

[거인왕의 투쟁욕(鬪爭慾)]

거인족을 지배한 왕의 끝없는 투쟁심.

- 모든 무기 숙련도가 보다 빠르게 상승합니다.

- 전투에서 쉽게 지치지 않습니다.

- 전투에서 승리할 때마다 마나를 획득합니다.

믿을 수 없는 특성에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전투에서 승리할 때마다 마나를 획득한다고? 설마 마나통을 늘려 주는 건가?"

이 세계에서 마나는 마나 호흡법을 통해 오랜 시간 수련하거나 각종 영약을 먹어 늘리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수련한 시간보다 더 많은 마나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특성을 가진 천재들로만 이루어진 흑귀대조차 3급의 끝에 다다랐을 뿐, 4급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모굴이 그렇게 무식한 마나를 가지고 있던 이유가 있었구만."

단지 서 있을 뿐이었는데도 태산처럼 느껴지던 모굴을 떠올렸다. 얼마나 많은 마나를 가졌는지 대해처럼 느껴지던 그의 저력(底力)의 뒤에는 바로 이 특성이 있었으리라.

모너가의 수비군으로 있었으니 하루에도 수십 번은 전투를 벌여 왔을 터.

만족스러운 보상에 혼자 웃고 있으니, 문을 열고 레이나가 다가왔다.

"도련님, 이제 돌아가실까요?"

벌써 여러 번 마나가 고갈된 이안을 봐 왔던 레이나는 이안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걸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응. 도저히 힘이 없어서 못 움직이겠네. 나 좀 방으로 옮겨 줘."

그 말을 끝으로 이안은 억지로 붙잡고 있던 정신을 놓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도련님."

곧이어 레이나가 공주님을 안 듯 이안을 소중히 들어 올렸지만, 이미 꿈나라로 떠난 이안은 알 수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이안은 새벽부터 하인을 시켜 리나와 릴라이, 흑귀대 전원을 모두 감사부에 모았다.

"…소공작님, 도대체 왜 여기서… 그보다 전 도대체 왜...."

갑작스럽게 사무실을 빼앗긴 베인이 울상을 지었지만, 황금 고블린은 흑귀대 전원이 모이기 너무 좁으니 연무장 아니면 이곳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자네도 듣고 좋은 계획이 있으면 말해 봐. 전쟁을 벌인다면 앞으로 3개월 뒤가 적기야. 한번 흔들린 동맹은 절대 견고하지 않아. 서로 의심하다가 무너지기 직전, 한 방을 먹일 수 있는 거지."

이안은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지금까지는 신뢰도와 호감도 디버프 때문에 어떤 계획도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 그럴듯한 계획을 만들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병력. 세 영지 중 하나를 주춤하게 만들 수 있는 병력이 필요해. 지금의 흑귀대처럼."

이안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흑귀대를 마주 봤다.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밝혀 낸 보석들이자 마스터에 이른 모굴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숨겨진 비수.

"사람을 많이 구할 수 있어야 해. 저번처럼 영지 곳곳에서 모집을 받는 방법도 있겠지만 영주성에서 멀어질수록 지원자가 적어지겠지?"

고개 숙인 채 조용히 듣고 있던 베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당장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부족해서 아무 일이나 구해야 하고 집도, 가족도 없는 사람을 찾고 계신단 말씀이십니까?"

묘사가 묘하게 부정적이다.

"…그렇지?"

"그럼 그거 노예 아닙니까?"

빠직.

뭐라고 한마디를 하기 전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먼저 나섰다.

"아니, 공작님께서 급여와 숙식을 전부 제공하겠다는데...!"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리나 양 들어 보십시오. 노예나 거지들이야 집이 없을 것이고, 가족이 있으면 이쪽으로 같이 오면 되고, 먹을 것만 준다고 해도 두 팔 벌려 오지 않겠습니까?"

리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그거 재밌는 생각이네."

생각해 보니 굳이 영지 안에서만 사람을 찾으란 법은 없다.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모너가와 달리 노예도, 거지도 넘쳐나는 영지가 바로 옆에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원하는 부대는 특성을 가진 사람뿐.

무작정 사람을 모은다고 능사가 아니다.

이안의 눈이 한쪽에 서 있던 릴라이를 향했다.

"상단주, 아직도 손이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나?"

"세 상단이 하던 일을 거의 저희 상단이 전부 맡아야 하니 아무래도 손이 부족할 수밖에 없지요. 이번에 새로 '고용'한 친구들 덕분에 급한 불은 껐지만, 아직 한참 부족합니다."

그 말에 이안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럼 추가 고용을 진행하지. 흑귀대가 세 영지에 들어가는 노예 상단을 약탈하고, 노예들은 나와 황금 고블린 그리고 영지에서 고용하는 걸로."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노예 상단을 약탈하라고요?"

악마라고 불리는 노예 상인들을 약탈하라니.

도둑을 도둑질하는 셈 아닌가.

"노예 상인들은 전부 각 영지의 영주와 연관되어 있을 텐데요."

옆에 선 릴라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염려를 표했다.

노예 상인이란 직업 자체가 떳떳하지 않은 만큼 대부분의 노예 상단은 영주의 허가를 받고 경비대와 용병을 고용해 움직인다.

"괜찮아.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많을 테니까. 다들 우리 고객이니까 가능하면 살려서 보내고, 리트와 머천을 털 때는 옵솔 가문의 기사 문양을, 옵솔을 상대할 때는 리트 가문의 기사 문양을 쓰는 걸로 하지."

세 달 동안 몇 번이나 산적질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쏠쏠한 재미를 볼 수 있을 터. 고작 한번 털고 상단을 몰살시켜서야 곤란하다.

이안이 저렴한 인력을 얻을 생각에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릴라이 상단주는 우리 영지 말고 세 영지에도 모집 공고를 돌려 줘, 황금 고블린 이름으로. 신분도, 성별도 보지 않는다고 말이야. 대신, 나이는 보는 걸로 하자고."

지금 영주성 감옥 어딘가에 갇혀 있을 용병대장을 떠올렸다. 상인 협회에서 봤던 희미한 재능의 빛.

늙은 개에게는 새 재주를 가르칠 수 없다던가. 후에 만나 봐야 알겠지만 분명 희미한 빛보다 밝은 빛을 가진 이들이 특성을 개화할 확률이 더 높을 터.

"그 외에도 가능한 모든 수를 동원해서 영지민을 늘려야 해. 사람을 풀어서 세 영지에 전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퍼트려 이주민을 늘려도 좋고."

센트럴 홀드에서만 20명의 흑귀대를 찾았으니, 세 영지와 리어를 합하면 최소한 100명의 병력을 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원이 특성을 가진 특수부대라면 충분해.'

놈들이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의 전력을 보여 줄 수 있으리라.

* * *

"제국이라고...?"

리트 백작이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수정구에 비친 사내를 바라봤다.

골드크로우의 행수이자 자신이 가장 믿던 부하 중 한 명인 덤데드가 말을 이었다.

"예. 상황을 보니 확실해 보입니다. 영주성과 식량 공급 계약까지 마쳤다고 했습니다."

"허...."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의 등장에 백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다른 두 영지의 행수가 죽었다?"

"네, 식량을 가지고 장난친 악덕한 무리를 효수해 일벌백계하겠다는 공고문이 광장마다 붙었습니다."

"설마 그런...."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내부에서는 옵솔이 리트와 머천을 노리고 모너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제국을 등 뒤에 두고 있다니.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가?"

백작이 심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두 행수를 전부 죽였다면 두 상단도 끝이라고 봐야겠지?"

"예. 아직 리어의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여기에 있는 두 상단의 모든 재산을 압류하고 있습니다. 아마 머지않아 두 상단을 영지에서 추방한다는 공고문이 내려올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단호한 모너가의 결정에 백작이 침음을 삼켰다. 영지의 가신이나 다름없는 두 행수를 통보도 없이 죽일 정도라면 두 영지와 척지겠다는 뜻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일단, 제국 쪽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당장 그들이 움직일 일은 없겠지만 그들이 움직이면 그때는 우리가 가장 먼저 알 수 있어야 해."

"알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리트 백작이 수정구 너머를 향해 물었다.

"혹시 제국은 이번 사건의 배후가 누구라고 생각하던가?"

리트 영지는 홀로 무사히 귀환한 딸 때문에 난처한 상황이었다.

산적들이 모든 일꾼을 죽였다고 주장하는 켄타우르스 상단이나 모두가 허벅지에 상처를 입고 귀환한 티에르와 달리 골드크로우의 스네일만 상처 하나 없이 귀환했다는 사실에 옵솔은 공공연히 리트가 습격자라고 주장하고 있을 정도다.

머천은 여전히 옵솔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지만 모너 영지에서 골드크로우 상단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퍼지면 또 다른 의혹을 피할 수 없을 터.

"…제국은 이번 상행에 성공한 상단이 없다는 사실에 최소 두 영지가 움직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끄응...."

백작도 동의하는 바였다.

어떤 영지든 혼자서 실행했다면 결국 하나의 상단은 손실 없이 센트럴 홀드에 도착했어야 하니까.

"그럼 결국...."

"예. 제국의 비밀 요원인 황금 고블린 상단주는 저희 영지를 제외한 두 영지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리트 백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설마 십 년도 넘게 이어지던 세 영지의 결속이 이제 와서 흔들릴 줄이야.

"두 영지를 조심하십시오."

보고를 마친 덤데드를 바라보는 백작의 시선이 떨렸다.

"한동안 피바람이 불겠군. 덤데드, 자네도 내 말을 잊지 말게."

모너가에서는 대대적인 상단 정리가, 세 영지에서는 이번 사건의 범인을 찾기 위한 알력 다툼이 끊이지 않을 터.

"위험한 상황일수록 자세를 낮추고 있어야 해. 되도록 제국의 첩자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그들에게 협력하도록."

예상치 못하게 황금 고블린이 골드크로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 저녁이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7화

회의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이안은 리어에 보낼 명령서를 작성했다.

리어에 있는 세 상단주가 절대 리어를 벗어나지 못하게 막음과 동시에 세 영지의 급습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미리 명령을 내려야 했다.

"과연 치안대와 수비군이 명령에 따를까요?"

명령서를 작성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이나가 물었다.

"확인해 보지 않는 이상 내가 보냈는지 섭정관이 보냈는지 알 수 없으니까. 마침 어수선한 분위기니까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명령서를 받고 이유를 묻는 병사는 없다.

원래 군대란 까라면 까는 직업 아니던가.

설령 망나니의 명령이라는 것이 밝혀져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한다. 누가 뭐래도 이 영지에서 가장 높은 계급을 가진 귀족의 명령이니까.

"…섭정관은 그냥 두실 건가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레이나를 바라봤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밝은 미소를 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 다른 이유는 아니고, 이제 독에서 벗어나셨으니 소공작님께서 직접 영지를...."

그 말에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야.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테니까. 거기다 영지 업무를 시작하면 다른 일은 하나도 건들지 못할 거야."

섭정관의 정확한 수준은 알 수 없지만, 모굴 백작이 경계하지 않는 모습을 볼 때 4급 이상은 아닐 것이다.

지금이라면 암습으로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왕실에 섭정관을 교체해 달라고 요구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강제로 승계식을 앞당겨서라도 공작위를 계승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 후의 파란을 막을 수 있냐는 것.

정당한 승계식이 아닌 이상 기사들은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민중은 갑작스러운 망나니의 통치에 불안에 떨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약이라고는 하지만 외부의 적이 있는 상태에서 내부에 문제를 일으키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레이나가 어딘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안을 간호하는 동안 레이나도 섭정관에게 쌓인 게 많았던 걸까.

"걱정하지 마. 이번 일이 끝나면 프론트 홀드에 가 봐야 하니까, 그 전에는 처리할 생각이야. 돌아오는 대로 승계식을 치르면 그만이고."

명령서를 영주의 인장으로 봉한 뒤, 레이나에게 건넸다.

"일단 눈앞에 있는 적들에게 집중하지."

섭정관은 이안의 적이지만 세 영지는 모너가의 적이다. 꺾을 수 있을 때 확실히 꺾어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 * *

한 달이 지났다.

가장 먼저 변화를 눈치챈 건 세 영지를 오가는 상단들이었다.

"여기도 뭔가 바뀐 것 같은데...."

"이 사람도 참, 저기 모너 신생 상단에서 거지란 거지는 전부 데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래? 거지를 뭐 하러?"

"나야 모르지. 요즘 노예 상단이 산적이다 뭐다 난리가 나니까 노예 대신 거지 몇 명 데려다 쓰고 있는지도."

릴라이는 공고문을 내고 사람을 모으지 않았다.

아무리 거지들이라고 하더라도 타 영지에서 온 상단이 영지민을 데려가는 걸 곱게 볼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각 영지에 상행을 나갈 때마다 구걸하는 아이들을 모아 그중 함께 가고자 하는 아이들을 데려갔다.

며칠 전까지 함께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친구가 탱탱하게 살이 올라 상단과 함께 번듯한 옷을 입고 돌아오면 그 모습을 보고 더 많은 아이가 합류했고, 거지를 고용한다는 모너 영지의 신생 상단에 대한 소문이 영지 가장 구석진 곳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자! 오늘도 함께 가실 분들은 저쪽에 서 주시면 됩니다! 갈아입을 옷이랑 간단한 식사를 드릴 테니까 조용히 대기해 주세요!"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한 일정을 보내던 릭이 누더기를 입은 거지들에게 옷을 나눠 주다 멀쩡한 옷을 입은 남자 앞에서 멈춰 섰다.

"댁은 거지가 아닌 거 같은데?"

"…거지만 고용하는 거요?"

"아니, 뭐 그건 아니고...."

잠시 릴라이가 있는 쪽을 바라보던 릭이 말을 이었다.

"일이 험해서 쉽지 않아요. 한번 고용되면 다시 여기로 못 올 수도 있고. 이따 계약서 보면 알겠지만, 가족이 여기 있으면 그냥 남는 게 좋을 텐데...."

릭이 넌지시 충고를 건넸음에도 남자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도, 나도 사람답게 살고 싶소."

옵솔 영지의 소작농.

일 년 내내 일해 작물을 키워 봐야 영주에게 모두 뺏기고 입에 풀칠이나 할 뿐인 신세.

살아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싶은, 가진 것 하나 없는 인간.

"아니, 이 양반아. 지금이야 좋다고 가도 가족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니까?"

"돈만 좀 보낼 수 있다면 상관없소."

"으… 알았으니까 이거 입고 저기 가서 서 있어요."

그렇게 세 영지의 소작농들마저 하나둘 황금 고블린 상단을 따라 모너 영지로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 * *

쾅! 쾅!

"또, 또 사지 않는다던가?!"

옵솔 백작이 분노로 떨리는 주먹으로 연신 탁자를 내리쳤다.

"벌써 한 달째야! 리트 영지는? 그 배신자들은 뭐라던가?!"

처음 소공작이 배상금을 요구했을 때만 해도 식량 가격을 올려 갚아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모너가는 배상금을 요구함과 동시에 돌연 옵솔과 머천의 물건을 받지 않기 시작했다.

"가격을 줄여도 살 생각이 없다니… 리트 영지가 같이 움직이지 않으면 꿈쩍도 안 할 생각인 거야."

쾅!

마침내 내려친 탁자가 무너져 내렸지만, 백작의 분노는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도대체 왜! 머천 그 머저리는 왜 연락도 안 받는 거야!"

리트 영지가 모너가에 식량을 독점으로 납품하고 있으니 머천과 함께 리트를 압박해야 하건만, 머천은 옵솔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도대체 무슨 액운이 씐 건지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었다. 영지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상단은 모너가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고, 모너가는 리트 영지를 통해서만 식량을 거래하고 그 와중에 머천까지 등을 돌리다니.

"머천 그 멍청한 새끼한테 다시 전보를 보내. 놈들도 굶어 뒤질 생각은 없겠지. 그리고 말 잘 듣는 상단 몇 개를 리트로 보내서 얼마에 팔고 있는지도 알아 와."

지난 몇 년간 굽실거리던 모너가의 관료들은 어디 갔는지 연락조차 닿지 않고 센트럴 홀드에 파견했던 로진은 마지막 연락 이후 종적을 감췄다.

"아무래도 로진이 죽은 것 같아."

"네? 설마요. 아무리 협회 인물인 척 갔다고는 하지만 로진이 옵솔의 가신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어쩌면 리트뿐만이 아니라 모너가도 움직이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그, 그런...."

백작의 말에 부관이 난색을 보였다.

'중심을 잃은 모너가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 말 하나만 믿고 모든 계획을 세워 왔던 옵솔에게 모너가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만약 모너가가 움직이는 것이라면 우리가 막을 수는 없겠지. 친서를 적어 줄 테니 발 빠른 기사 몇 명을 시켜 왕성으로 보내야겠다."

"왕성이요?"

"왕궁에 중재를 요청해야겠어."

만약 정말 모너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그들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왕궁밖에 없을 터.

말을 마친 백작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부러진 탁자를 내려다봤다.

"왕궁에서 뭘 요구하던 주는 수밖에. 모너가가 이대로 거래를 끊으면 말라 죽는 건 모너가가 아니라 우리가 될지도 몰라."

리트 영지에서 나온 식량만으로 모너 영지 전체를 먹일 수는 없다. 모르긴 몰라도 분명 다른 공급원을 찾은 것이 분명했다.

"하… 일단 모너 쪽은 수도에 연락한 뒤에 대응을 결정해 보도록 하지. 다음은?"

머리가 아픈지 손으로 미간을 누르고 있는 백작을 향해 부관이 난처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영지로 오던 노예 상단이 또 산적에게 당했다고 합니다."

쾅!

반으로 부서졌던 탁자가 가루가 되며 뿌연 안개가 방을 채웠다.

"그놈의 산적은 무슨 산적! 이 근처에 산 하나 없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해!"

"하, 하지만 보고하러 온 상인들이 하나같이 산적에게 당했다고 하는 터라...."

리어 영지에 있는 트레시에게 정확한 설명을 듣지 못한 백작은 설마 중소 기사단에 버금가는 전력을 가진 흑귀대가 노예를 얻기 위해 산적질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새끼들은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기사단은? 기사단을 전부 풀어서라도 당장 잡아들여!"

"그, 그게… 영지 경계에 나가 있는 기사단을 제외하고는 전부 보냈지만, 기사단만 보이면 귀신같이 도망간다고 합니다."

"뭐? 후… 멍청한 새끼들, 세상 어느 산… 아니 강도가 기사단을 털겠냐!"

딱! 타닥!

백작이 던진 펜이 보좌관의 이마에 부딪친 뒤 바닥을 굴렀다.

"기사단한테 전부 기사단 문양도 지우라고 해. 아니 아예 갑옷도 벗고 용병처럼 보이라고 해, 용병처럼. 내가 하나씩 다 가르쳐 주지 않으면 기본도 못 하니, 등신 같은 것들… 쯧."

미간을 좁히고 역정을 내는 백작에게 보좌관이 죄송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임무를 내릴 때부터 기사인 것을 철저히 숨기라고 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기사단이 숨어 있는 상단만 건드리지 않는 터라...."

그 말에 백작이 보좌관을 노려봤다.

"뭐? 가죽 갑옷을 입고 창이나 꼬나쥐고 있으면 그게 기사인지 용병인지 어떻게 알아?"

"그걸 모르겠다고 기사들도 난리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주나 계속된 외근에도 성과가 없어서...."

이야기를 들은 백작이 고심에 빠졌다.

"그럼 이야기가 새어 나갔다는 소리인데… 이 와중에 첩자까지 잡아내야 하는 것인가."

사방에 난제가 산적한 상황에 두통이 몰려오는 듯했다.

"지금은 더 큰 문제에 집중하자고."

모너가와의 거래가 끊긴 지금, 노예 상단이 지급하는 각종 세금과 뒷돈은 절대 적다고 할 수 없는 양이었지만 위기 상황일수록 우선순위를 확실히 해야 했다.

* * *

"오늘도 그냥 돌아가죠."

릭이 멀리서 오는 상단을 본 뒤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오늘도? 요즘 너무 자주 돌아가는데?"

리나가 눈을 번뜩이며 물었지만 벌써 한 달이나 산적질을 같이 해 온 릭은 꿈쩍도 하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리나 양, 여기 좀 봐요. 저길 딱 보자마자 나 소름 돋았다니까? 뭔가 있는 게 분명해요."

"흠...."

리나가 한참이나 멀리 있는 상단을 바라봤다. 이미 흑귀대 몇 명이 상단에 있는 병사들의 수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상단주의 병사 열 명 남짓과 오는 길에 고용했다는 용병이 또 열 명 남짓.

흑귀대라면 아무 피해 없이 이길 수 있는 전력이다.

그러나 이안의 명령은 단호했다.

"돌아간다."

릭의 본능에 따를 것.

성과가 하나도 없어도 좋으니 릭이 원하지 않는 상단은 건드리지 말 것.

노예 상단은 뛰어난 용병단과 각 영지의 영주들과 관련이 있는 만큼, 위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릭의 특성을 활용해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노예 상단을 털어먹고 있던 것이다.

물론 릭의 능력을 모르는 리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명령이었지만, 어느새 이안을 따르는 게 최선의 결과를 불러온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달은 그녀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오늘 저녁에 머천으로 향하는 상단이 있다고 하니 그쪽을 노려보지."

세 영지의 거지와 부랑민을 빠른 속도로 흡수한 황금 고블린 상단은 그 어떤 상단보다 길거리에 퍼진 소문에 해박했다. 당장 먹고살기 위해 흘러 다니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이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문들은 이안과 흑귀대에게 퍼져 적절한 노예 상단을 털어먹을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분은 이것도 다 계획하셨을까?"

새삼 이 모든 걸 계획한 이안에 대한 경의가 생기려는 찰나, 옆에서 재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요? 소공작님? 엥, 뭔 소리시래? 우리 사장님도 그러더니 그거 병이에요, 병."

릭은 말을 몰면서도 입을 잠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세상에 이걸 다 계획한 인간이 있으면 신이지, 신. 소공작님이야 별 생각 없이 그냥 노예 상인들이 아니꼬워서 그러는 걸걸요?"

그 말을 들으니 또 그런 것 같기도 해 리나는 미간을 좁힌 채 말을 몰았다.

"그렇게 운 좋은 사람이 있으면 신에게 사랑받는 사람 아닐까?"

신이거나 신에게 사랑받는 인간이거나.

범접할 수 없는 비범함이 있다는 점에서 리나에게는 별 차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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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8화

조용한 전쟁 준비가 시작된 후.

이안은 그 어떤 때보다 바쁜 시간을 보냈다.

아침 훈련을 마치면 황금 고블린 상단의 신입과 노예 상단에서 구한 노예 중 특성을 가진 사람을 선별하고 오후에는 신입 대원들의 개인 훈련을 지도했다.

저녁에는 상단과 흑귀대의 보고를 들은 뒤 다음 계획을 수정하고 남은 시간을 쪼개 개인 훈련 시간을 늘렸다.

"후...."

여유가 생길 때마다 흑귀대와 함께 노예 상단 습격에 참여했으니, 쉬는 시간이라고는 마나를 한계까지 짜낸 뒤 마나 고갈로 쓰러져 있는 순간뿐이었다.

"이제 두 달인가."

마나 고갈로 바닥에 널브러진 채 고개를 돌려 연무장 한쪽을 차지한 훈련생들을 바라봤다.

각자 손에 맞는 무기를 찾아 하염없이 각종 무기를 휘두르고 있는 신입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흑귀대는 새로 들어온 신입이 귀여운지 함께 훈련하거나 신입을 가르치곤 했다.

"나도 슬슬 다른 무기를 써 보기는 해야 하는데...."

특성 [암제(暗帝)]와 귀왕의 무예 때문에 영향으로 암습에 유리한 단검이 가장 손에 맞지만, 피를 볼수록 효과가 좋은 [피의 욕망]이나 전투에 몰입할수록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거인왕의 투쟁욕(鬪爭慾)]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기다.

모굴 백작이 쓰는 도법을 알면 좋겠지만 모너가가 게임 속에 등장하지 않는 만큼 모굴 백작의 비전도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영웅 중 한 명을 만나는 수밖에는 없는데."

흘리듯 말한 혼잣말에 지나가던 레이나가 다가와 물었다.

"영웅이요?"

"응. 검성(剣聖)이나 창신(槍神)이나. 하나의 무기로 극(極)에 이른 사람들 말이야."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가 말했다.

"검성이면 모너 공작님이요?"

순간 마나가 고갈되었다는 것도 잊고 고개를 번쩍 쳐든 채 레이나를 바라봤다.

"뭐라고?"

"모너 공작님은 레임 왕국의 제일검(第一劍), 검성이라고 불렸으니까요."

"공작이 검성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게임 속 검성은 이제 막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한 햇병아리다. '로스크 크로니클'은 집요할 정도로 과거에 대한 정보를 여기저기 흘렸기 때문에, 만약 공작이 검성 같은 위대한 인물이라면 그에 대한 기록을 읽어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만약 누군가 의도적으로 기록을 지운 게 아니라면.

'마족에 이어 두 번째인가...?'

게임 속 로스트 크로니클과 이 세계의 두 번째 차이점이 분명했다.

"혹시 아버지의 검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을까?"

별 기대 없이 레이나에게 물었다. 설령 공작의 비전 검법이 가문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해도 한낱 하녀에 불과했던 그녀가 알 리가 없으니까.

그러나 맑은 웃음을 띤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야, 당연히 전방의 기사단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요? 전방의 기사단은 전부 공작님과 같은 검법을 배웠다고 들었거든요."

순간 심장이 철렁하고 가라앉았다.

"같은 검법을?"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게임을 하면서 영웅의 스킬과 능력을 가진 기사단을 만들려는 시도를 안 해 봤을 리 없다. 영웅을 만들 수 있다면 인간과 몬스터의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을 테니까.

그 모든 노력의 유일한 결실이 흑귀대가 익힌 '저항군 마나 심법'을 비롯한 '저항군' 비전이다. 누구나 익힐 수 있고 누구나 성과를 낼 수 있는.

귀왕의 귀흡법보다 못한 '저항군 마나 심법'이 레전더리인 이유가 그 범용성에 있다.

그러나 영웅의 비전은 다르다.

재능이 없는 자는 익히지도 못한다.

영웅의 비전을 익힐 수 있는 건 오직 유사한 특성을 가진 사람뿐.

즉, 비전은 특성을 공유하지 않는 이상 전수가 불가능하다. 이 세계의 무술이 유독 폐쇄적이고 직계 전승으로 전해지는 이유가 특성이 피를 타고 흐르는 유전적 성질이 있기 때문.

"전원 비슷한 특성을 가진 기사단이라...."

고개를 돌려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흑귀대를 바라봤다. 전원 특성을 가진 기사단은 이안에 빙의한 후 내가 가장 먼저 꿈꿨던 이상적인 병력이다.

특성 [무능한 유능력자]와 [금귀의 눈]을 이용해 만든 비장의 병력.

만약 레이나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공작은 단순히 뛰어난 특성을 가졌을 뿐인 흑귀대를 뛰어넘어 비슷한 특성을 가진 사람만 모아 기사단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특성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많을 리가 없으니....'

결국 공작은 특성을 전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이거 기사단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전방에 가 봐야겠어."

"네, 도련님. 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던 레이나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저번에 그 무례한 다크엘프가 소공작님을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름조차 듣지 못했던 다크엘프.

오랜 시간 기다렸던 낚싯대가 거세게 흔들렸다.

* * *

이안은 레이나와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만약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한 발자국 뒤에서 이안을 따르던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전방에 가는 시간이 늦어지겠지. 세 영지를 박살 낸 다음 숲을 불태워야 할 테니까."

만약 진실을 듣고도 세계수를 따른다면 엘프가 그랬듯 다크엘프도 결국 인간의 반대편에 서게 될 것이다.

내부에 적을 두는 것보다 마지막 씨앗 하나까지 전부 불태워 없애 버리는 게 낫다.

"…네, 도련님."

서쪽 숲에 있는 다크엘프 전원을 죽이겠다는 이안의 말에도 레이나는 눈도 깜짝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는 훈련 시간을 늘려야겠어요."

조용히 등 뒤의 철퇴 손잡이를 움켜쥘 뿐.

"걱정하지 마. 아무리 멍청한 것들이라도 진실을 마주한 이상 모너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테니까."

응접실에 도착하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다크엘프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마물의 숲을 지키는 위대한 모너 가문의 소공작을 뵙습니다."

전과 같은 인사말.

전혀 다른 분위기.

사람을 현혹시킬 것 같은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세계수를 욕한 이안을 죽일 듯 빛나던 눈빛은 탁하게 죽어 있었다.

"서쪽 숲의 주민을 보는군."

이안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다크엘프는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젖혔다.

신의 형상을 베낀 듯 아름다운 외모와 엘프임을 나타내는 뾰족하고 기다란 귀 그리고 매혹적인 짙은 갈색 피부.

다크엘프가 이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는 가치 없는 상대의 이름 따위, 알 필요가 없다고 하셨죠."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세계수를 광신하는 엘프만큼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도 없을 테니까.

아마 마지막에 봤을 때는 대화가 통할 때까지 뺨을 때렸던가.

"저는 아카샤. 다크엘프입니다. 신에게, 부모에게 버림받은 종족이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그녀가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뱉듯 말했다.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

낮게 깔린 그녀의 목소리에서 절박함과 분노가 묻어났다.

"세계수에게 물어본 모양이군."

"...."

정확히 왜 세계수가 다크엘프를 버렸는지는 모른다. 게임 속에서 나온 정보는 세계수가 단 한 번도 다크엘프를 아낀 적 없다는 사실뿐.

"나는 너희를 구해 줄 의무가 없어."

"하지만...!"

"말 좀 들어.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말했지, 거래하자고. 너희를 구해 줄 의무는 없지만, 거래는 할 수 있지."

잠시 진정한 아카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레인저 부대를 원한다고 하셨죠."

"그래, 다크엘프 레인저."

대륙의 가장 날카로운 활이라고 불리는 초원의 기마 전사들도, 숲속의 엘프들도, 다크엘프 레인저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석궁이 아닌 나무 활과 마나로 1km 밖의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궁수들은 대륙 전역을 다 뒤져도 다크엘프 레인저밖에 없을 테니까.

끝없이 남하하는 몬스터를 상대로도 굳건한 방벽을 만들어 낸 전선의 귀신들.

그들을 위해서라면 영지의 일부를 주는 것도 손해는 아닐 터.

"...."

침묵을 지키던 아카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 대가로 복수를 원합니다."

그녀가 분노로 번뜩이는 눈을 마주쳤다.

"수없이 긴 시간 동안 제 가족이, 친구가, 동료가 죽었습니다. 매일같이 세계수에 평화와 안녕을 기도하며 땅끝까지 쫓겨 오는 동안에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종족의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은 어떤 기분일까.

낮게 가라앉은 그녀의 덤덤한 목소리에서 씻을 수 없는 한을 느끼며 그 아픔을 가늠할 뿐이었다.

"대륙에 다크엘프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린 것도, 그 긴 시간 동안 숨어 살던 우리를 추적해 사냥한 것도, 세계수의 의지라고 했습니다."

오랜 시간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던 다크엘프는 이제야 진실을 마주했고, 더 이상 자신의 아름다운 갈색 피부를,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 하지 않는다.

"내 가족을, 친구를, 동료를 그리고 우리의 희망을 뺏어 간 신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십시오."

다크엘프의 절절한 애원을 들은 이안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 * *

"하, 이거 양심 없네."

거래의 기본은 기브 앤 테이크다.

뭐든 준 만큼 받는 법.

세계수에게 복수하려면 대륙의 엘프 전체를 불러와도 부족한데, 고작 다크엘프 하나 가지고 복수를 해 달라니?

하여간 엘프들은 이게 문제다.

죄다 숲속에서 살면서 풀이나 뜯어 먹으니 야생이나 다름없는 세상이 얼마나 척박하고 삭막한지 모르겠지.

"아, 죄, 죄송합니다."

뒤늦게 감정적으로 나섰다는 사실에 당황한 아카샤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이안이 말을 이었다.

"장담은 못 해. 너나 나나 그 전에 죽을 확률이 훨씬 높고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머리에 꽃밭이 펼쳐져 있는 눈앞의 아가씨는 모르겠지만 세계수와 엘프는 결국 인간의 반대편에 선다.

"그래도, 만약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그때 기회를 준다고 약속하지."

"살아남는다면… 말씀이십니까."

살아남는다면 기회는 있을 것이다.

아니, 기회는 살아남은 자에게만 주어질 것이다.

이 세계, 로스트 크로니클의 클리어도, 다크엘프의 복수도 우리가 살아남지 못한다면 불가능할 테니까.

"그러니까 한번 잘 살아남아 봐."

아쉽게도 이건 거래 대상이 아니다.

"그럼 거래를 마저 해 보자고. 내가 저번에 너희를 사냥한 사냥꾼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준다고 했지?"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누가 그랬는지 내가 잘 알고 있는데 말이야."

그러니 적절한 보상을 안겨 줘야겠지.

* * *

이안은 레인저 부대의 대가로 자유를 약속했다.

더 이상 숨어 살지 않아도 될, 세상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자유.

서쪽 숲에 있는 다크엘프 전체를 모너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저주받은 엘프를 가문에 받아들인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다. 대륙이 적대시하는 다크엘프를 받아들였다는 것만으로 모너가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걱정하지 마."

이미 황금 고블린이 동네 거지를 고용하는 걸 보고 소공작의 인체 실험 희생양이니, 인신 공양을 위한 제물이니, 흑마법 재료니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는 상황에서 다크엘프가 악명에 영향을 미칠 것 같지도 않았다.

섭정관이나 가신들이 반대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엄연히 너희를 받아들인 건 선대 공작. 나는 그분의 의지를 잇는 거라고 말할 생각이니까."

'공짜로 고급 병력을 가져오는데 이 정도 수고쯤이야.'

아카샤는 묘한 표정으로 삐뚜름한 미소를 지고 있는 이안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올가미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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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다크엘프의 합류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소공작의 신분으로 새로운 가신을 중용할 수도 없고 다크엘프라는 비대칭 전력을 광고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수비군을 담당하는 모굴 백작에게 서쪽 숲의 경계를 삼엄히 하라는 명령을 담은 친서를 보냈다.

그 뒤, 다크엘프에게 약속한 복수를 선물하기 위해 흑귀대를 전원 불러 모았다.

"오늘부터 계획을 바꾼다."

여태까지 노예 상단을 습격했던 건 흑귀대 신입과 영지의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서였지만 뛰어난 병력을 얻은 지금부터는 달라질 것이다.

"리나, 아직 활동하는 노예 상단이 몇이나 되지?"

"각 영지별로 두세 개씩 대여섯 상단은 활동하고 있어요. 릭이 그냥 보내라고 한 상단은 건드리지 않았거든요."

한 달이나 이어진 산적의 출몰에 노예 상단 대부분이 세 영지에 발길을 끊었다.

아직 남아 있는 상단들은 뛰어난 용병을 고용했거나 근처 영주의 도움을 받아 기사 몇 명을 대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우선 옵솔부터 시작해 보자고."

이안이 탁자에 놓인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손속에 여지를 남기지 마.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싸워야 해."

산적으로 위장한 흑귀대가 활보하는 영지에서 아직 활동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은 노예 상단의 저력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는 되도록 상인들을 살려 보냈지만, 언제까지고 그런 물렁한 태도를 유지할 수는 없다.

그런 생각으로 겁주듯 말하자 옆에 선 리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저희만으로 가능할까요? 만약 상단에 진짜 기사단이 숨어 있으면 저희만으로는...."

"기사단 전원이라면 무리겠지. 하지만 저쪽은 기사단 전원을 파견할 여유가 없어."

세 영지 사이에 의심이 피어난 후, 각 영지는 대부분의 병력을 영지 경계에 배치했다.

"그중에서도 옵솔은 왼쪽의 리트와 오른쪽의 머천을 동시에 경계하느라 거의 모든 기사단을 움직였을 거야. 노예 상단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기껏해야 기사 몇 명 배치해 놨겠지."

거기다 이쪽은 상대가 절대 대비할 수 없는 히든 카드를 가지고 있다.

"지금부터 우리 목적은 더 많은 노예를 구하는 게 아니라 엘프 사냥꾼의 위치를 찾는 거야."

노예 상인에게 엘프는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물건이다. 아직까지 활동할 정도로 규모가 큰 상단이라면 당연히 엘프 사냥꾼과의 연결망을 가지고 있을 터.

"다시 한번 말한다. 지금부터는 손속에 여지를 두지 마. 영지에서 파견한 기사들이 병사로 위장했을지, 상인으로 위장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고개를 돌려 모여 있는 흑귀대와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절대 방심하지 마. 어려울 것 같으면 그냥 방심할 이유가 없게 만들어. 노예 상인 따위에게 알량한 죄책감 가지지 말고, 죽일 수 있을 때 죽여. 정보를 얻는 건 상단을 이끄는 한두 놈이면 충분해."

그 말을 끝으로 이안과 흑귀대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산적질을 위해 옵솔로 향했다.

* * *

"개 같은 산적 놈들!"

옵솔의 기사 테이너가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벌써 이게 몇 주째야!"

기사인 자신이 가죽 갑옷을 입고 빌어먹을 병사처럼 생활한 지도 벌써 한 달째다. 그사이에 수십 번도 넘게 출몰했다던 산적은 귀신같이 자신이 숨어든 상단만 건들지 않았다.

"야영도 더러운 노예도 다 싫다고! 그 산적 놈들 눈에만 보이면 그냥!"

처음 노예 상단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만 해도 다른 기사단원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었다.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영지 경계에서 경계 근무를 하는 것보다야 얼마든지 범할 수 있는 장난감이 넘치는 노예 상단을 지키는 게 훨씬 재밌을 테니까.

"장난감은 무슨."

하지만 실제로 본 노예 상단은 기대했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노예 상단을 반기는 마을이 있을 리 없으니 노숙을 밥 먹듯 할 수밖에 없었고, 당장 팔 계획이 없는 노예들은 오물 범벅이 되어 철장 안에 갇혀 있을 뿐 재미를 보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마을에 머무는 날이면 상단주가 괜찮은 노예를 대충이라도 씻겨 방으로 보냈지만, 그런 날을 제외하고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행군과 노숙의 연속이니 짜증이 날로 늘어갔다.

"아무래도 어디선가 말이 퍼진 게 아닐까요?"

"나도 출발 한두 시간 전에 명령받고 나왔는데 산적 놈들이 무슨 수로?"

후배의 말에 차갑게 대답했지만, 대부분의 기사는 어디선가 정보가 새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노예 상단을 습격하는 게 산적이 아니라 리트의 계략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으니 당연한 의심이리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상단주한테 휴식 없이 다음 마을까지 가자고 말하고 와. 앞으로 4시간만 더 가면 내가 아는 마을이 있으니까 거기서 쉬고 가자고."

"어? 정말요?!"

고향에 노예 몇 명을 넘기고 오랜만에 푹 쉬고 갈 생각에 벌써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그래, 인마. 빨리 가서 전하고 얼굴 반반한 노예로 몇 명 따로 빼놓으라고 해. 난 저번에 왔던 걔가 좋더라."

벌써부터 욕정이 끓어올라 흐흐흐 하고 웃은 후배가 상단주를 향해 재빨리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뒤 다른 기사들에게도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숲에서 거뭇한 형체가 보였다.

"저건 또 뭐...."

순식간에 다가온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이들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품에서 검은색 구슬을 꺼내 던져 댔다.

산적에 대한 보고를 들을 때마다 수백 번도 더 들었던 모습. 지난 한 달간 기다리던 그 빌어먹을 산적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순간, 어느샌가 다가온 흰색 가면을 쓴 남자의 단검이 목을 꿰뚫었다.

"끄, 끄르륵!"

적의 습격을 알리기 위해 있는 힘껏 소리쳐 봤지만 꿰뚫린 목에서는 공기 빠져나가는 소리만 울려 퍼질 뿐.

테이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뜬 눈을 감지도 못한 채, 고개를 떨궜다.

* * *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라! 움직이는 인간은 전부 죽인다!"

낭랑하게 퍼진 리나의 외침을 시작으로 사방에 퍼진 흑귀대가 재빠르게 진압을 시작했다.

"최대한 빠르게 진압한다!"

그 사이에서 병사 하나의 멱을 딴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귀흡법을 최대로 운용해 마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몰래 접근하고, 뒤에서 단검을 박아 넣는다.

일꾼의 옷을 입고 있건, 상인 복장을 하고 있건, 마나를 가지고 있으면 단 한마디도 묻지 않고 단검을 쑤셔 박는다.

우연히 호신용으로 마나를 키워 온 상인일 수도, 기연을 얻은 짐꾼일 수도 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단검을 움직였다.

"이놈들! 꺼헉!"

어느새 검을 꺼내 든 일꾼의 등에 단검을 쑤셔 박고, 발로 차 근처의 대원에게 뒤처리를 맡긴 뒤 계속해서 움직였다.

'지금까지 총 7명.'

기사가 몇 명이나 있는지 모르는 만큼 상대가 당황한 지금이 피해 없이 기사의 수를 줄일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사방에서 벌어지는 학살에 멍한 눈으로 좌우를 돌아보고 있는 상인의 뒤를 점한 뒤, 단검으로 목을 그었다.

'8명.'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상단의 용병들과 기사들이 하나둘 무기를 꺼내 들었지만, 이미 전세는 급격하게 기울은 뒤였다.

암습에 대비한 상황이었다면 몰랐을까, 벌써 한 달이나 이어진 지루한 상행에 지칠 대로 지친 기사들은 흑귀대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끄으윽!"

9명의 숨어 있던 기사를 죽이고서야 이안은 멈춰 서서 마나의 흔적을 찾아 주변을 둘러봤다.

검을 든 기사는 위험하지 않다. 검을 든 상대에게는 두세 명의 흑귀대가 달라붙어 안전하게 기사를 사냥할 것이다.

'숨어 있는 놈이 있을 거야.'

이미 상황을 뒤집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숨어 버린 놈들이나 처음부터 정체를 숨기고 있던 놈들이 가장 위험하다. 투항한 상인에게 아무 생각 없이 다가갔다가 귀중한 흑귀대원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

'응?'

순간 이안의 눈에 주변의 다른 노예와 멀찍이 떨어진 노예 한 명이 보였다. 쇠창살로 만들어진 케이지에 들어가 있지만 다른 노예들과 달리 족쇄를 차고 있지 않은 남자.

잔뜩 겁먹은 듯 몸과 고개를 수그리고 있지만, 대충 봐도 다른 노예들의 두 배는 넘는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는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4급에 가까운 거대한 마나를.

"흑귀대! 노예 구출 중지!"

이안이 마나를 담아 소리치자, 사방에 있던 흑귀대가 같은 명령을 반복해 외치며 명령을 퍼뜨렸다.

"흑귀대! 노예 구출 중지!"

그리고 남자가 갇힌 마차를 열려고 다가가던 퍽도 복명복창과 함께 멈춰 서서 몸을 돌렸다.

순간 움찔거리는 남자의 몸.

"재수 없는 새끼네."

이안이 놈이 있는 마차로 다가가며 말했다.

"우리가 노예를 구하는 걸 알고 일부로 숨은 건가?"

남자와 멀찍이 떨어져 납작 엎드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노예들을 둘러봤다.

"아니면 승산이 없어 보여서 도망치려고 노예인 척 몸을 숨긴 건가?"

어느 쪽이든 굉장히 영악한 놈이다.

놈은 이안이 마차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엎드린 상태를 유지했다.

"벌써 들켰는데 끝까지 모른 척할 거야?"

마차 앞에서 남자를 바라보며 묻자, 그제야 남자가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엎드려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알았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단호한 목소리를 보건대, 실력자가 분명했다.

"알 거 없어."

만약 이안이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흑귀대는 큰 의심 없이 노예를 구출했을 것이다. 놈은 모너가로 향하는 과정에서 도망치거나 모너가에 잠입해 정보를 모았을 터. 모너가가 습격의 배후에 있다는 사실이 노출됐을 것이다.

"설마 이 세계에서 트로이를 볼 줄이야."

실패할 리가 없는 계획이었다.

무려 귀왕(鬼王)이라 불리던 영웅의 비전을 획득한 이안이 아니었다면 흑귀대뿐만 아니라 레인저가 있더라도 깜빡 속았을 테니까.

마침내 고개를 든 남자가 이안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아쉽군. 너희의 배후를 파악할 절호의 기회였는데."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하게 선 남자가 인사하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대옵솔 영지의 자랑스러운 기사 테이온...."

"응. 관심 없어."

이안은 놈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나와 레이나를 불러들였다.

"이! 이 비겁한!"

포위하듯 마차를 둘러싼 리나와 레이나를 본 테이온이 눈을 부라리며 이안에게 소리쳤지만, 이안은 귀를 후비며 말했다.

"야, 전쟁에서 비겁한게 어딨어, 똑똑한 거지."

* * *

켄타우르스의 부기사단장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후, 상단은 생각보다도 훨씬 무력하게 무너졌다.

"자, 딱 한 번, 기회를 줄게."

이안이 상단주의 머리채를 잡은 채 물었다.

"혹시 최근에 서쪽 숲을 노렸던 엘프 사냥꾼이 어디 있는지 알아?"

"저, 전!"

상단주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안의 단검이 상단주의 손을 꿰뚫고 바닥에 꽂혔다.

"으아악!"

"잘 생각해 봐. 사람 목숨은 하나잖아."

"제발, 제발...."

상단주가 허망한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흰 가면을 쓴 이안을 바라봤다.

"저는, 저는 모...."

상단주가 모른다고 말하기 직전, 잔당을 정리한 리나가 피를 뒤집어쓴 채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레이나와 함께 다가왔다.

"정리 끝났습니다. 아쉽게도 엘프 사냥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서 전부 죽였습니다."

"수고했어."

슬쩍 상단주를 본 리나가 몸을 돌리기 무섭게 이안이 단검을 높게 쳐들었다.

"아아악! 옵솔! 옵솔에 있습니다!"

단검이 목을 노릴 것이라 직감한 상단주가 엎드린 채 두 손으로 목을 가리고 소리쳤다.

"옵솔?"

"네! 네! 두 달 전쯤인가 저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다크엘프를 사냥할 예정인데 생각이 있으면 옵솔 영주성으로 오라고요!"

"허… 영주성이라고?"

"네, 네! 영주가 직접 초대했다고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상 밖의 정보를 얻은 이안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 채, 손을 움직였다.

푹!

"왜, 왜...."

믿지 못하겠다는 듯 목에 박힌 단검을 움켜잡은 상단주가 이안을 바라봤다.

"그냥 네가 마음에 안 들어서."

한번 흑귀대가 습격했다는 사실이 퍼지면 다른 상단의 경계가 한층 더 삼엄해질 것은 자명한 일. 애초에 노예 상단의 상단주를 살려 줄 생각은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단검에 묻은 피를 훔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레이나가 다가와 수건을 건넸다.

"아니, 레이나부터 좀 닦지...."

여전히 피를 뒤집어쓴 그녀가 건넨 새하얀 수건을 받으며 한마디 하자, 레이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수건을 딱 하나밖에 안 챙겨 와서요. 다음부터 주의하겠습니다."

분명 출발하기 전 마차에서 예닐곱 개의 수건을 본 것 같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고 레이나를 향해 마주 웃어 보였다.

"레이나도 수고했어."

이제 감히 모너가를 침범한 사냥꾼들을 사냥할 시간이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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