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 10-20

10화

다음 날 아침.

전날 시청에서 있었던 사건 때문에 성 전체가 어수선했다.

소식을 듣고 분노한 섭정관이 감사부장의 뺨을 쳤다든가, 그동안 뇌물을 처먹은 감사관이 단체로 사직을 청했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성안에 퍼졌다.

로베르토가 적은 진술서에 적힌 상단들이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금을 가득 실은 마차를 타고 영주성으로 향했고, 섭정관과 감사부장, 치안대장까지 모두 이안을 만나 보려 했으나 정작 이안은 모두의 청을 거절한 채 리나와 함께 연무장에 틀어박혔다.

* * *

'유능한 무능력자'인 이안은 뭐든 할 줄 안다.

비단 설정이 그런 게 아니라 게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말 무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이 출중해야 했다.

특히 이안이 저항군 조장에 속할 때쯤이면 심지어 검술과 마법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조원을 가르쳐야 했다.

조장이 강한 무력을 가진 다른 조와 달리, 이안이 조장으로 있는 조는 조원들의 무력을 키워 살아남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그래서 비전을 외우기 시작했지.'

게임 최후반부에야 공유되는 각 가문과 영웅의 비전들.

모두가 쓸데없는 요소라고 생각한 비전들은 게임 진행에 필수적인 히든피스였다.

그 비전들을 외워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캐릭터가 존재했고, 이를 이용해 중후반부에 인류 세력을 더 키울 수 있었다.

"마나를 한 곳에 두는 게 아니라 몸 전체를 마나 홀로 쓴다는 생각으로 호흡하는 거야."

사소한 문제라면, 사람마다 익힐 수 있는 비전이 다르다는 것.

벌써 수십 개의 심법 구절을 알려 줬지만, 리나는 그중 단 하나도 익히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괜찮아. 재능이란 그런 거니까."

물론 무능한 사람도 익힐 수 있는 심법이 있다. 전 인류의 병력화를 위해 만들어 낸 저항군 마나 심법처럼.

재능이나 특성이 없는 사람조차 단기간에 마나를 쓰는 병사로 만들 수 있지만 고점이 명확해 리나에게 가르치기는 아쉬웠다.

'분명 특성의 빛이 보이는데....'

지금 이 성을 돌아다니는 이들 중 가장 또렷한 검은색 빛이다. 분명 어딘가에는 재능을 가지고 있을 터.

이안과 리나는 그 특성을 찾기 위해 새벽부터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다음은 귀흡법(鬼吸法)이야. 나가군 대족장을 암살했다던 암살자 귀왕(鬼王)이 만든 심법인데, 마나와 기척을 숨기고 몸을 가볍게 하는 심법이지."

수십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덤덤한 얼굴로 적어 내린 구절을 리나에게 건넸다.

"죄송해요, 공작님. 저 때문에...."

고개를 숙인 리나가 구절을 받은 뒤 읽기 시작했다.

물론, 오크 대전사를 죽인 대전사의 심법이라든가 언데드 군단을 이끌던 리치와 겨룬 위대한 마법사의 호흡법이라든가 하는 말은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런 비전이 있다는 것도 믿지 않았지만 있다고 한들, 뭐 하러 하녀에 불과한 자신에게 가르치겠는가.

다만, 이안이 열성적으로 가르치고자 하는 무언가를 못 하고 있다는 생각에 죄송할 뿐이었다.

'이번엔 꼭!'

사실 뭘 배워야 하는지도 몰랐다. 아침 댓바람부터 연무장에 앉아 이상한 글들을 읽고 있을 뿐.

어린 소공작은 글을 읽으면 알아서, 잘, 딱, 하고 깨닫는 바가 있을 거라고 했지만 리나가 보기에 이안이 적어 내린 글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낱말의 배열에 불과했다.

'귀신의 호흡은 들이마시는 흡과 내쉬는 호로 이루어진다....'

비전서를 읽어 내리는 그녀의 눈빛이 점점 몽롱해지고, 마침내 이안의 눈앞에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 * *

[특성 암군(暗君)을 획득했습니다.]

'거, 특성 이름 한번 재수 없네.'

암군이라니.

군주 될 자가 가지기에는 최악의 이름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미간을 좁히며 특성창을 확인했다.

[암군(暗君)]

제국의 가장 어두운 곳을 통치하던 왕의 재능.

-암살, 암행, 절도, 은신과 관련된 기술의 습득이 쉬워집니다.

-암살, 암행, 절도, 은신의 숙련도가 빠르게 상승합니다.

-독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암군이라… 어리석은 왕이 아니라 어둠의 왕인가. 뒷골목 두목 아니랄까 봐 네이밍 센스하고는, 쯧.'

어딘가 삐뚤어진 생각과 달리 특성을 확인한 이안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대박이다."

모든 부분이 다 좋지만, 그중에서도 독 저항력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독 내성 증가로 중독 의존도가 감소합니다.]

당장 중독의 여파로 몸을 괴롭히던 통증이 조금 약해진 게 느껴졌다.

'의존도가 내려갔다.'

73%까지 올라갔던 의존도가 69%로 내려갔다.

이 정도면 일주일 이상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비전서를 탐독하고 있는 리나를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 * *

그 후 일주일 동안 이안은 연무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식사 대신 약초를 씹으며 귀왕의 호흡법과 단검술을 훈련해 독 내성을 조금이라도 더 기르고, 통증이 심해질 때마다 약이 담긴 물을 조금씩 마셨다.

종종 섭정관이 수사 진행 상황을 알리기 위해 전령을 보냈지만, 이안은 그들에게조차 얼굴을 비추지 않고 수련에 매진했다.

중독의 영향으로,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처럼 들끓는 감정을 좀처럼 추스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짜증이 잔뜩 섞인 이안의 얼굴을 본 리나가 다가와 수건을 건네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니. 그냥 이제 슬슬 힘들어서. 전에 말한 거 기억하지?"

"그… 공작님을 묶어 달라는… 부탁이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묻는 리나의 모습에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함께 수련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었음에도 그녀의 머릿속에 박힌 인식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이상한 거 아니야. 그냥 날 묶은 뒤에 아무것도 못 먹게만 하면 돼. 특히 약은 절대 안 되고. 오늘은 버텨 볼 텐데 이제 슬슬 한계인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이안은 리나에게 훈련을 계속하라고 말한 뒤 연무장을 나섰다. 리나가 몇 번이나 자신이 도울 일은 없냐며 물었지만 아쉽게도 미쳐 가는 정신을 잡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 좋다."

복도를 나선 이안이 덜덜 떨리는 손을 억지로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읊조렸다.

"망나니 좋다! 기분 최고다!"

감정을 식히기 위해 즐겁다는 듯 억지로 소리 질렀다. 벌써 며칠이나 반복된 기행에 슬쩍 이안을 바라본 하인들이 바삐 자리를 피하는 게 보였다.

이제 한계였다.

아니, 새로 얻은 특성 덕에 버티고 있었을 뿐 사실 한계는 훨씬 일찍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길을 걷는 발걸음에 사방에서 쏘아진 시선이 질척거리며 엉겨 붙었다.

귓가에는 원망과 저주가 속삭이고, 무능하고 무가치한 소공자에 대한 욕설이 켜켜이 쌓여 갔다.

"젠장."

주먹을 휘둘러 분노를 표출하고 싶다. 저 건방진 시선을 던진 눈을 제 주인에게서 하나하나 떼어 내 개 먹이로 던지고 싶다.

동시에 이 생각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약에 의한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비현실과 현실을 구분하도록 도와주는 건 눈앞에서 점멸하고 있는 로스트 크로니클의 상태창뿐.

'아니, 어쩌면 이것조차 환상이려나.'

그래, 이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현실에 굴복한 이안이 만들어 낸 달콤한 환영일지도 모른다.

지구도, 로스트 크로니클도, 게이머 공략왕조차도.

모두 이안이 이 개 같은 통증과 환청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 낸 또 다른 환각은 아닐까.

며칠 전부터 고개를 쳐든 의심이 머릿속을 점령한 채 사고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럴수록 입술을 짓씹은 뒤 입안에 풍기는 혈 향을 음미하며 억지로 웃어 내뱉을 뿐이다.

"진짜, 진짜 좋다."

복도에 털썩 주저앉아 무릎 사이로 손을 감춘 뒤 고개를 숨기듯 파묻었다.

분노와 절망에 파묻혀 죄 없는 이들에게 분풀이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보지도 듣지도 않으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니까.

'괜찮아.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이제 곧 레이나가 올 거고, 어렵지 않게 해독할 수 있을 거야.'

복도 한복판에 주저앉은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급히 자리를 피하는 이들뿐.

'그 후의 계획은 대충 준비돼 있어. 일단 식량을 먼저 구해야겠지. 그 후에는 영지가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해, 같잖게 식량 따위로 협박할 수 없도록.'

벌써 2주가 넘도록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다. 물과 음식 대신 씹어 넘긴 약초들이 속에서 들끓는 것 같았다.

'그 전에 중독에서 벗어나면 이 세계의 음식도 제대로 먹어 봐야지.'

머릿속을 헤집는 악의 섞인 고함을 무시하고 앞으로의 계획에 집중했다. 여기서 넘어지면 노예가 된다. 노예 검사인 이안이 겪어야 할 수많은 난관에 비하면 고작 이 정도의 어려움이야 헤프닝에 불과하다.

"좋아. 할 수 있어."

머리와 손을 무릎에 파묻은 이안이 속삭였을 때 깊게 숙인 머리 위에서 미성이 들려왔다.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도련님?"

노랫가락같이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치켜드니, 레이나가 보였다.

커다란 눈에 담긴 절대적인 호의와 넘치는 애정.

오롯이 자신을 바라보고 그 애정 가득한 눈빛과 흔들리지 않는 미소.

"아...."

이래서 이안의 일기 후반부는 그녀에 대한 찬가로 가득 차 있었구나. 이안은, 그 불쌍한 놈은, 레이나 덕분에 이 지옥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있기에 목숨을 걸고서 약을 끊으려 노력할 수 있었으리라.

"레이나...."

"네, 도련님!"

봄이 만개하듯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 전까지도 난리 치던 머릿속 저주 어린 말들이 사라진 것 같았다.

"잘 돌아왔어."

"늦어서 죄송해요. 말씀하신 곳을 찾기가 영 쉽지 않더라고요."

진심으로 사죄하듯 고개 숙이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못 찾았어도 괜찮아. 정 안 되면 내가 직접 찾아가면 되니까."

레이나를 안심시키려는 말에 고개를 든 그녀가 찡끗 웃었다.

"네? 저는 도련님의 하나밖에 없는 레이나인걸요? 말씀하신 물건은 잘 챙겨 왔습니다. 원하지 않는 것도 같이… 딸려 왔지만요."

순간 안도감이 밀려왔다. 뭔가 딸려 왔다고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빌어먹을 중독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이제 중독을 해결할 수 있겠어.'

한시라도 빨리 해독하고 싶은 마음에 몸을 일으키려 하자, 레이나가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지난 이 주 동안 그 누구도 먼저 건넨 적 없는 손을 잡자 온기가 손을 간지럽혔다.

"고마워. 이제 방으로 가자."

"네, 도련님. 혹시 손님은 어떻게 할까요?"

'이 시기에 나를 찾아올 손님이 있을 리가 없는데. 시청 사건과 관련된 일인가?'

누가 됐든 그리 중요한 사람은 아니리라. 소공작이라고는 하나 실권 하나 없는 몸이다. 만약 중요한 인물이라면 섭정관을 찾아갔을 것이고, 굳이 망나니를 만나고자 하는 인물 중에 영양가 있는 인물이 있을 리 없을 터.

"누군진 모르겠지만 일단 다시 오라고 해. 내일모레쯤이면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에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쪽 숲의 엘프(Elf)인데, 최근 실종된 엘프들 때문에 소공작님을 꼭 뵙고 싶어 해서…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서쪽 숲의 엘프라는 그녀의 말에 급히 걷던 이안의 발걸음이 멈췄다.

"잠깐. 엘프가 지금 여기 있나?"

"네."

'서쪽 숲의 엘프라.'

"그럼, 거기부터 가지."

행운은 연달아 오는 모양이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http://blog.naver.com/jayplemedia1

ⓒ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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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레이나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한 후 응접실에 도착하니,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가 일어나 이안을 반겼다.

"마물의 숲을 지키는 위대한 모너 가문의 소공작을 뵙습니다."

우아한 몸짓과 당장이라도 선율처럼 퍼지는 목소리.

검은색 로브 아래에 있는 존재는 엘프임이 분명했다.

"서쪽 숲의 주민을 만나 영광이네."

말과 달리 그녀가 내민 손을 무시한 채 지나친 이안이 소파에 털썩 앉으며 심드렁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뭐, 좋은 만남은 아니지만 좋은 만남으로 만들어 가 보자고."

"그… 러시죠."

그 매몰찬 태도에 당황한 엘프가 자리에 앉자 이안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직접적이시네요. 단순히 친교를 위한 방문일 수도 있는데."

"엘프만큼 대화가 아까운 종족이 또 있을까. 아버지께서는 늘 숲을 조심하라고 하셨지. 숲만큼이나 이기적이고 자기 멋대로인 존재는 없다고 말이야."

이건 로스트 크로니클의 격언이다. 숲을 경계해라.

공략 초반, 공략할 수 없어 보이는 게임을 클리어 하기 위해 히든피스를 찾기 시작했을 때.

엘프를 만나고 드디어 히든피스를 발견했다며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게임 속 이안에게도 정직하고, 상냥하고, 친절한 엘프가 클리어의 열쇠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그러나 엘프는 갑작스럽게 몬스터 군단에 합류해 인간의 반대편에 선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던 가장 어이없는 엔딩.

<배드 엔딩 No. 002 속삭이는 숲>

엘프의 갑작스러운 배신으로 게임 오버를 당한 뒤 고작 게임 속 종족한테서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괜찮아. 이번엔 충분히 대비할 테니까.'

이 갑작스러운 만남조차 충분히 대비했다.

때마침 항아리를 든 레이나가 본성에 있던 기사 몇 명과 함께 응접실에 들어왔다.

완전무장을 한 채 기세를 풍기며 응접실로 들어서는 기사를 힐끗 쳐다본 엘프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건 협박인가요?"

"기사가 영주를 보호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굳이 따지자면 이건 자기방어지. 보다시피 나는 무력이 거의 없거든. 모든 엘프가 살인 병기나 다름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해야 할 것 아닌가."

그 말에 흠칫한 기사들이 재빠르게 이안의 뒤에 자리 잡았다.

"만약 제가 소공작을 해하려 했다면 이렇게 당당하게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연하지. 만약 내 털끝 하나라도 상하게 한다면 모너가는 숲 전체를 전부 불태울 테니까."

명백한 협박에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이안을 타박했다.

"모너가의 소공작이 점잖지 못하다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무례하시군요. 전쟁은 그렇게 가볍게 언급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점잖지 못하기는 무슨. 개망나니, 쌍놈, 죽일 놈, 악마 같은 놈. 내가 이 자리에 있으면서 더 심한 말을 못 들어 봤을까? 모너가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아. 저 방대한 마물의 숲과도 싸우고 있는데 고작 숲의 종족을 무서워할 리 없지."

이안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있는 엘프를 평가하듯 위아래로 훑어봤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는 이쯤 하지. 날 찾아왔으면 원하는 걸 말해 봐."

섭정관이 아닌 망나니를 찾아온 이유.

엘프는 무례한 자세로 삐딱하게 앉아 있는 이안을 지그시 노려봤다.

"말하기 싫다면 나부터 말하지. 나는 모든 엘프를 싫어해. 이건 개인적 선호의 문제라 어쩔 수 없어. 그들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면서도 본성을 잘 숨기거든. 아, 다크 엘프는 제외하고 말이야."

다크 엘프라는 말에 얼굴을 뒤덮고 있는 후드 사이로 그녀의 안광이 번뜩였다.

"왜냐고 묻지 마. 대륙에서 다크 엘프가 어떤 이미지를 가졌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마기에 오염된 엘프, 살인, 도적질, 거짓말을 일삼는 종족, 심지어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도 있지. 난 그중 단 하나도 믿지 않아. 그래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

"어떻게...."

놀란 엘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부족이 다크 엘프로만 이루어졌다는 건 모너 공작도 몰랐던 사실입니다."

그녀의 감정을 눈치챈 정령들이 정령계에서부터 부르르 몸을 떨어 대고, 주변 공기가 그녀의 분노에 공명했다.

"다크 엘프는 만인의 증오를 받는 존재. 우리 부족은 오랜 시간 혐오와 박해를 피해 이 땅 위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 누구도 모르는 장소에요."

지긋이 이안을 노려보던 엘프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 숲을 노리고 엘프 사냥꾼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녀가 일으킨 선명한 살의가 몸을 옥좨 왔다. 뒤에 기립한 기사들이 급히 검을 빼 들려고 했지만, 이안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역시.'

"그래서 이곳까지 친히 방문한 건가? 우리가 그 사냥꾼들을 보냈는지 확인하려고?"

"그들은 마치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습니다. 우리 부족의 위치를 아는 것은 모너가의 핏줄뿐. 그 즈음 당신의 하녀도 우리 부족을 찾아왔죠."

쯧, 하필이면 레이나가 서쪽 숲을 찾은 시기와 사냥꾼이 출몰한 시기가 겹쳐서 오해를 산 건가.

귀흡법을 운용해 몸을 억죄는 살기와 마나를 억지로 버티며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아니야. 그러나 누가 사냥꾼들을 보냈는지는 잘 알고 있지."

이안의 침착한 설명에도 엘프는 조금도 의심을 풀지 않았다.

"정보를 풀어 타인을 움직인 건가요? 붙잡힌 엘프를 노예 삼아 당신의 추악한 본성을 채우기 위해서?"

역시. 저들은 답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

이미 찾은 답을 확인하기 위해 왔을 뿐.

이건 예견된 일이다. 다크 엘프는 이 시기쯤 엘프 사냥꾼에게 피해를 받고, 그 범인을 찾기 위해 혈안일 테니까. 인근 영지의 소공작에 대한 소문을 들은 엘프는 자연스레 의심을 키울 수밖에 없었을 터.

이성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라도 내 영지민이 사라지면 몬스터를 의심하겠지. 몬스터나 나나 평판이 그리 다를 것 같지 않으니 엘프의 의심은 의심이라기보다는 정당한 추론에 가까울 것이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한들 너희의 의심은 지워지지 않겠지. 그래도 당장 전쟁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기세를 죽여."

날 선 살의와 압박 속에서도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눈앞의 엘프를 바라봤다.

이건 기회다. 생각지도 못한 아군을 얻을 기회.

"나는 다크 엘프와의 전쟁을 바라지 않아. 오히려 견고하고 끊을 수 없는 동맹을 원하지."

그러니까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다. 저들이 절대 의심을 풀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난 진범을 알고 있거든.'

수백을 넘었다던 다크 엘프 부족을 멸종시킨 원흉을 알고 있다.

엘프는 여전히 당장이라도 마법을 퍼부을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고 덤덤히 기세를 받아냈다.

"자, 거래를 하자고."

"무슨 거래를요? 우린 필요한 게 없습니다."

날 선 듯 차가운 그녀의 말투에도 이안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있지 왜 없어. 엘프 사냥꾼을 푼 진범을 알고 싶지 않아?"

"죄송하지만, 설령 진범이 따로 있다고 해도, 제가 소공작의 말을 믿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나는 현명한 숲의 종족을 믿어."

스스로 말하고도 어이없는지 피식하고 비웃음이 새 나왔다.

'현명한 숲의 종족이라니.'

그보다 안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이 또 있을까.

"거래는 거래니까. 나는 진범을 밝혀 주고 그 진범을 피할 방법을 마련해 줄게."

"피할 방법을요? 우리 다크 엘프는 평생을 피하고 숨으며 우리에게 허락된 땅의 끝까지 도망쳐 왔습니다. 이 이상 어디로 피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건 정보를 듣고 나서 결정하도록 해. 어차피 그대들이 날 믿지 않는다면 의미 없는 거래니까. 대신 이건 분명히 하지."

눈앞에 있는 먹음직스러운 과실에 절로 넘치려는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대가로 나는 그대들의 활과 단검 전부를 원해."

순간 그녀 주변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기를 원하시는 것이길 바라겠어요."

"설마, 다크 엘프 레인저 말이야. 정령사, 마법사, 검사 전부 좋지만 내가 원하는 건 레인저들이야. 레인저들 전원을 지원해 줘."

엘프가 눈을 감은 뒤 다시 뜨자 차분히 가라앉은 검은색 안광이 번뜩였다.

"괜히 시간을 낭비했네요.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정말 정보를 듣고 싶지 않은 건가? 두고두고 후회할 텐데."

이안의 만류에도 엘프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려 했다.

'역시 고작 이 정도로는 안 믿으려나.'

그렇다고 구구절절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망나니라는 칭호가 남아 있는 한 아무리 진실되게 이야기한들 저들이 믿어 줄 것 같지도 않고.

이안은 방을 나서는 엘프의 등을 향해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돌아가면 세계수에 물어봐. 왜 다크 엘프의 멸종을 바라냐고."

그 순간, 엘프가 마나를 폭발적으로 움직이며 몸을 돌렸다.

"감히!"

엘프 주변에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정령들이 현신했다.

'샐러맨더와 님프, 실프인가. 생각보다 급이 높은 양반이었군.'

물론 이쪽은 응접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만반의 준비가 된 상태였다.

현실에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정령들을 본 이안이 쯧, 하고 혀를 찬 뒤 손을 들어 달려들려는 기사들을 막고 레이나를 바라봤다.

쨍그랑!

레이나가 들고 있던 항아리를 던지자 깨진 항아리에서 연기가 퍼져 나갔다.

만드라고라 뿌리와 절연초를 섞어 만든 마나 제압용 독기에 대기 중의 마나가 흔들렸다.

"이 무슨!"

그래 봤자 마법사에게 급성 호흡곤란을 잠깐 일으킬 뿐인 연기지만 마나로 호흡하는 정령들에겐 이보다 치명적인 독약이 없을 터.

이제 막 현실로 소환된 정령들이 현신했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정령계로 역소환 됐다.

"거기까지만 하는 게 좋아."

이안의 경고에도 엘프가 눈을 번뜩이며 몸을 날리자, 여태껏 이안의 뒤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순식간에 앞으로 튀어 나가 엘프를 제압했다.

'뭐야? 엘프를 이렇게 빨리 제압했다고?'

태어나서부터 그림자의 축복을 받는 만큼 뛰어난 체술을 타고난 다크 엘프를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제압하다니. 놀란 눈으로 기사를 바라본 뒤 제압된 엘프를 향해 이죽거리며 말했다.

"조금 진정됐나?"

"감히 세계수를 모욕하다니!"

"세계수를? 누가?"

이안이 정말로 놀랐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묻자, 붙잡힌 엘프의 검은 눈에서 살기가 폭발하듯 쏟아졌다.

"네놈!"

분노에 못 이긴 엘프가 기사를 뿌리치려 발악했지만, 이미 제압된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설마. 내가 그랬나?"

정말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기사들을 바라보는 이안의 모습에 엘프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세계수는 모든 엘프의 부모이며 신이나 다름없다! 감히 그 입으로 세계수를 모욕했으니 반드시 죽여 버릴 것이다!"

이래서 엘프와는 말을 섞지 않는 게 좋다. 아까 그 조신하고 꼿꼿한 모습은 어디 가고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저주를 퍼붓는 꼴이라니.

"이봐, 엘프. 내가 아직도 네 이름을 묻지 않은 건 이 만남이 그 정도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야. 미친년 이름 알아봤자 득이 없으니까. 안 그래?"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이런 식이면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다. 대화의 기본은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게 아닌가.

양쪽 팔을 붙잡힌 엘프를 향해 걸어가 머리채를 잡은 뒤 마나를 담은 손으로 뺨을 후려쳤다.

짝!

"감히!"

짝!

"서쪽 숲의 분노가...!"

짝!

"수, 숲이 분노할 것...."

짝! 짝! 짝! 짝!

마나를 담은 손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지만, 엘프가 입을 열 때마다 쉬지 않고 손바닥을 휘둘렀다.

"그만, 그만, 그만!"

짜악!

온 힘을 다한 풀 스윙에 터져 나온 엘프의 피가 응접실 바닥을 적심과 동시에 엘프의 간절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이미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어오른 얼굴을 본 이안이 흡족한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야 닥치는군."

짜악!

쓸데없는 힘을 쓰게 한 값으로 마지막 한 대를 때린 이안이 툭툭 손바닥을 털며 엘프의 앞에 주저앉았다.

"자, 다시 말할게. 모너가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아. 네가 여기서 날 죽이려고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린 전쟁을 시작할 명분을 얻었어. 다크 엘프 부족과의 전쟁이라면 대륙이 응원해 주겠지. 너희가 이 땅의 숲 한쪽에 살아 있는 건 온전히 모너가의 암묵적인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야."

진심을 전하기 위해 저주 서린 눈빛으로 노려보는 엘프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내 가문을 걸고 말하건대, 단 하나의 화살이라도 네놈들의 화살이 영지민과 영지를 향하는 순간, 우리는 북부 개척을 중단하고 전쟁을 시작할 거야."

물론 나에게 그럴 힘 따위 없다.

애초에 내가 죽는다고 모너가가 움직일 거라는 확신도 없다. 어쩌면 망나니가 드디어 뒤졌다며 축제를 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앞의 엘프는 모너가의 속사정 따위 전혀 모를 터.

검지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엘프의 이마를 꾹 누르며 협박을 계속했다.

"단 한 그루의 나무도 남지 않을 때까지 전화(戰火)가 숲을 뒤덮겠지. 모너가의 깃발 아래서 몇 명의 엘프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나?"

엘프는 피가 나도록 주먹을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http://blog.naver.com/jayplemedia1

ⓒ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2화

"멍청한 것, 만약 정말 내가 범인이라고 생각했다면 너희는 당장 꼬리를 말고 자취를 감췄어야 해. 최소한 모너가와 일전을 벌일 수 있을 때까지는 죽은 척 몸을 숨기고 힘을 키웠어야지."

고개 숙인 엘프는 비참함에 입술을 짓씹으며 침묵했다.

"설령 내가 범인이라도 너희가 감히 모너가의 소공작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마물의 숲의 주인에게?"

애초에 서쪽 숲은 모너가의 영지다. 대륙에서 서쪽 숲까지 도망쳐 온 엘프를 받아들인 선대 공작의 의지를 따라 암묵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용인해 왔을 뿐.

서쪽 숲의 엘프와 모너가 사이에는 채울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 모너가가 서쪽 숲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면 고작 한 부족에 불과한 다크 엘프들은 하루도 버티지 못하리라.

비아냥거리는 이안의 말소리가 덤덤히 퍼지고, 엘프가 짓씹은 입술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그녀의 무력감을 피력하듯 흘러내렸다.

"하지만 서쪽 숲은 모너가의 영토. 너희가 인정하지 않더라도 모너가의 땅 위에 살아가는 이상 너희도 모너가의 일원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거래를 하자고."

이안이 냉정한 눈으로 엘프를 바라봤다. 입은 다물고 있지만 그녀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말 몇 마디에 변할 수 있는 의심이었다면 이 자리까지 기어 나오지도 않았겠지. 지금은 의심의 씨앗을 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돌아가서 네 그 거룩하고 신성한 세계수한테 물어봐. 엘프 사냥꾼이 너희를 어떻게 찾았는지."

"세계수는 거짓을 고하지 않는다."

엘프가 조금의 의심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을 찾아오라는 것도 세계수의 의지였다."

"아마 네가 발광하다 뒤질 거라고 생각했겠지. 운 좋게 모너가와 서쪽 숲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길 원했거나. 세계수가 정말 내가 범인이라고 말했나?"

엘프는 고개를 숙인 채 들끓는 분노와 치욕에 몸을 떨었다. 기사에게 제압된 두 팔에서는 꽉 쥔 주먹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아니. 답을 찾기 위해 이곳으로 향하라 하셨다."

"그래. 내가 아니라는 정보도 답일 테니까. 세계를 떠받친다는 나무치고는 치졸한 방법이네."

"그럴 리가 없다!"

고개를 쳐든 엘프가 살기 등등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며 절규하듯 외쳤다.

"당연히 믿기 어렵겠지. 그것도 내가 하는 말이니 더더욱. 자, 돌아가서 세계수한테 물어봐. 그 뒤에 로브를 벗고 정식으로 다시 찾아오도록 해. 그때 이름을 나눠 보자고."

이안이 얼굴을 바싹 붙이며 손으로 퉁퉁 부은 얼굴을 우악스럽게 움켜줬다.

"명심해. 이건 거래야. 만약 내게 단 한마디, 단 한 글자라도 전하고 싶거든 거래 조건을 지켜. 세계수에게 묻는 것이 먼저, 그다음은 다크엘프 레인저 부대 전원을 데려와야 할 거야."

이 씨앗이 어떻게 자랄지는 모른다.

저들이 세계수의 뜻대로 얌전히 죽어 세계의 양분이 될 수도, 세계수를 향해 활과 검을 뽑아 들 수도, 아니면 마침내 세계수의 그늘에서 벗어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모너가를 찾아올 수도 있다.

'뭐든 상관없어.'

인간을 배신하고 몬스터 대군에 합류한 엘프와 달리, 게임 속 살아남은 소수의 다크엘프는 끝까지 인간과 함께 항전한다.

만약 지금 다크엘프를 구할 수 있다면 당장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큰 전력을 얻는 셈이니 도전했을 뿐.

다크엘프와 대면한 시간 외에 잃을 건 없다.

"부디 쓸 만한 열매를 가지고 돌아오길 바라지."

손을 풀어 엘프를 내친 이안이 기사를 향해 손을 휘저어 엘프를 내쫓으라고 명했다.

그렇게 책임을 묻기 위해 모너가를 방문했던 서쪽 숲의 다크엘프, 아카샤는 한밤중에 영지에서 쫓겨나듯 떠났다.

* * *

방으로 돌아온 이안은 굳은 자세로 앉아 눈앞에 놓여 있는 약을 바라봤다.

"후… 레이나."

"네, 도련님."

"혹시라도… 진짜 만약에라도...."

이미 각오한 일이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망설인 뒤에야 가까스로 마지막 부탁을 입밖에 내뱉을 수 있었다.

"내가 지… 지리면, 잘 부탁해...."

"네. 도련님."

흔들림 없는 밝은 표정으로 레이나가 답했다.

민망한 부탁에 이안은 귀 끝까지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져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중독시킨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치욕을 겪게 만들 거라 다짐했다.

'하… 개 같은 거 진짜.'

눈앞의 약을 바라보는 이안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이안의 몸에 빙의한 후 처음으로 느끼는 두려움에 사고가 마비되는 듯했다.

"이게 뭔가요?"

레이나의 물음에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스팀팩."

스팀팩.

엘프의 축복을 받은 나뭇가지와 감자만큼이나 흔한 데니언 잎 그리고 마물의 숲 전역에서 자라는 과일 목담과를 섞은 물약은 섭취자가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는 가속화 물약이다.

그 과정에서 치료 속도와 저주나 중독 해제 속도 역시 빨라진다는 걸 발견한 플레이어들은 스팀팩이 밸런스 조정용 히든피스 중 하나라고 믿었다.

"스팀팩이 뭔가요?"

"일종의 가속화 물약이야. 모든 치료에 효과적이라서 치료약으로 더 자주 쓰이지."

'지금 이 시기에는 그 누구도 모르는 약이지만.'

"이게 치료약인가요?"

레이나가 놀란 표정으로 접시에 볼품없이 담긴 물약을 쳐다봤다.

한 명에 수백 골드나 하는 물약은 성직자의 성력이 담기기 마련인데, 접시에 담긴 검은색 물약은 그 색부터가 신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응. 자연 치유력으로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나 상처를 훨씬 빨리 치료해 주거든."

이안은 착잡한 심정으로 딱 봐도 독약 같아 보이는 스팀팩을 쳐다봤다.

'문제는 고통이 일시불이라는 건데.'

스팀팩의 유일한 단점은 자연 치유력이 급증하는 만큼 고통 또한 급증한다는 것.

7일간 겪을 고통을 24시간 동안 느껴야 한다.

"후...."

한숨을 내쉰 뒤 주변을 둘러봤다.

준비는 끝났다. 수십 개의 해독제와 진통제가 향로에 담겨 있고, 준비한 온갖 독과 스팀팩이 가지런히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이제 저 독들과 스팀팩을 먹고 나면 발작이나 중도 포기를 막기 위해 레이나가 온몸을 쇠사슬로 묶을 것이다.

"자, 시작한다."

이안의 목소리가 두려움으로 떨려 왔다.

호흡을 조절하고 귀흡법에 따라 아랫배에 있는 마나홀 부근에 있던 마나를 천천히 움직였다.

독의 저항성을 높이고 통증을 낮추는 귀왕(鬼王)의 호흡에 집중하며 차례로 약을 입에 부어 넣은 이안이 버릇처럼 읊조렸다.

"진짜, 개같이 좋다."

입안이 굉장히 썼다.

* * *

"끄아아아아악!"

레이나는 벌써 20시간이 넘도록 그녀의 주인을 기다리며 문 앞을 서성였다.

"아아아아악!"

마지막 2시간만 조금 힘들 거라던 주인은 쇠사슬을 묶고 방을 나오기 무섭게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떨리는 눈빛으로 괜찮을 거라 자신을 안심시켰던 모습이 기억나 가슴이 아파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주인을 믿고 끝까지 기다릴 뿐.

"이야아아아아악!"

당장이라도 들어가서 그의 고통을 멈춰 주고 싶다. 치료 따위 필요 없다고, 그냥 살아도 괜찮다고 그를 안심시키고 싶다.

그러나 그건 그가 원하는 게 아니다.

어느 순간 훌쩍 커 버리는 아이들처럼, 갑작스럽게 고치를 벗어나는 나비들처럼, 그녀의 주인은 변화를 원한다.

때문에 그녀 또한 변해야 했다, 성장하는 그의 옆을 지킬 수 있도록.

"커헉! 큭! 레이… 레이나!"

쾅!

주인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난 그녀가 애달픈 미소로 문 너머를 향해 물었다.

"네, 도련님."

"약, 약을...."

저번처럼 하인을 부를 수 있는 종도 없고 문은 밖에서 쇠사슬로 잠겨 있다. 약을 먹기 전 이안의 명령은 간단했다. 정확한 암구호를 말하지 않으면 절대 문을 열지 말 것.

"네, 지금 열어 드릴게요. 기분은 어떠세요, 도련님?"

"아아아아악!"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처절한 비명을 한참이나 들으며 레이나는 문 앞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이제 두 시간....'

암구호를 정확히 말하지 못하면 24시간 전에는 절대 문을 열어 주지 말 것. 이 층의 모든 인원을 소거하고, 그 누구도 못 들어오게 할 것.

치료가 끝난 후 문을 열지 않았다고 미움받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을 다시는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 열면, 또 실망하실 거야. 결국 또 더 심한 고통에 아파하시겠지.'

2주 전, 결국 해독에 실패했을 때처럼. 그때 실패한 그가 지금 저 안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주인이 미워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가슴 한편이 아려왔음에도 그녀는 그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미움받아도 돼. 괜찮아.'

바닥에 앉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익숙한 하녀 한 명이 다가와 말을 전했다.

"섭정관과 주치의가 올라오고 싶어 하십니다."

리나라고 했던가?

이안이 약을 먹기 전 갑작스럽게 소개해 준 귀여운 인상의 소녀.

레이나는 몸을 일으켜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된다니까요? 저도 같은 신분인데...."

"공작님께서 레이나 님을 자신과 같이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담긴 이안의 따듯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레이나가 작게 미소 지었다.

"섭정관과 남작에게는 기다리라 전하세요."

"공작님께서 발작하셨다는 말을 듣고 지금 당장 올라오신다고...."

"도련님께서는 공작님이 돌아오시거나 전쟁이 난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 문을 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꼭 원하신다면 직접 오시라고 전하세요."

이안은 명령을 듣지 않고 방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와 직위에 불문하고 죽일 것이라 말했다. 친히 친필로 작성한 편지를 섭정관과 남작에게 보냈으니 그 둘도 감히 문을 열지 못하리라.

"끄아아아악!"

몸을 돌려 나가려는 리나가 때마침 들려오는 이안의 비명에 흠칫 몸을 떨었다.

"공작님은… 괜찮으실까요? 말로푀유 남작이 지금 당장 치료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아, 제가 공작님을 못 믿는다는 건 아니지만...."

"분명 괜찮으실 거예요."

리나는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섭정관과 남작에게 말을 전하기 위해 내려갔다.

* * *

"하아… 하아...."

몇 번째 발작이었더라.

애벌레처럼 바닥에서 꿈틀거리다 정신을 잃고 쏟아지는 통증에 정신을 차린 지 수백 번.

"아아아아악!"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존재만으로 베드 엔딩을 끌어내는 약물이다. 거기서 벗어나는 게 쉬울 리 없다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안전장치를 만들어 뒀고, 심지어 통증을 중화하기 위해 수백의 독을 섭취하고 온갖 약초와 독초를 섞은 향을 방 안 가득 피웠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통증은 최악의 가정을 아득히 넘어섰다. 이건 육체의 고통 따위가 아니다. 영혼을 조각조각으로 찢어 내는 통증에 육체와 정신 모두 바스러지는 것 같았다.

'이건 게임이다, 이건 게임. 나는 이안 드 모너. 모두의 증오를 받는 모너가의 개망나니.'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무너지는 자아의 조각을 붙잡기 위해 상태창을 바라보며 속으로 같은 말을 끝없이 되뇌는 것뿐이다.

"끄흐흐흐흐...."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분명 일주일은 더 지난 것 같았다. 시간이 아무리 느리게 흘러갔다고 해도 며칠은 지난 게 분명한데, 굳게 닫힌 문은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만약 레이나가 밖에 있지 않았다면, 그녀가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르듯 대답해 주지 않았다면, 이미 백번도 더 포기했으리라.

"아...."

어느 순간 온몸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곧이어 밖에서 스르륵 하고 쇠사슬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나!"

"네, 도련님. 기분은 어떠세요?"

몇 번이고 절망 속에 주저앉을 뻔했던 날 위로하던 그 목소리에 안도감 밀려와 웃으며 미리 정해 둔 암구호를 말했다.

"끝내주게 행복해."

시스템이 퀘스트 클리어를 알리고, 문밖에서 들리는 그녀의 웃는 소리와 함께 이안의 눈꺼풀이 감겼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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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3화

정신을 차린 이안을 반긴 건 시야를 어지럽히는 시스템의 알림이었다.

[최초로 퀸즈머시 중독에서 벗어났습니다.]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최초로 퀸즈머시의 치료법을 찾았습니다.]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최초로 마계의 독을 이겨 냈습니다.]

-독 내성이 크게 증가합니다.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백 개의 독을 이겨 냈습니다.]

-독 내성이 크게 증가합니다.

-독과 관련된 스킬의 숙련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퀘스트 완료 - 생존!]

-보상이 변경되었습니다. 보상 수령을 눌러 보상을 획득하세요.

알림창을 확인한 뒤, 아직도 무거운 눈꺼풀을 껌뻑이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지긋지긋했던 두통도, 귓가를 떠나지 않던 환청도 사라졌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독에서 벗어났을 뿐인데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올랐다. 독의 영향으로 감소한 능력치가 복구된 것이다.

'이것만 해도 보상으로 충분한데, 더 준다고?'

첫 퀘스트인 만큼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지금 시점에서는 경험치, 돈, 능력치, 아이템 뭘 준다고 해도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 어린 눈빛으로 보상 수령을 눌렀다.

'역시 능력치가 가장 좋으려나? 아니면 아이템?'

그 기대에 화답이라도 하듯 밝은 빛이 쏟아지면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보상 획득: 특성 강화]

[특성 '유능한 무능력자'가 강화됩니다.]

-'유능한 무능력자'로 획득한 모든 특성이 강화됩니다.

-특성 암군(暗君)이 암제(暗帝)로 강화됩니다.

-특성 황금귀의 눈이 강화됩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보상에 몸을 움찔 떨었다.

"특성 강화...?"

수천 번이 넘는 플레이 중 단 한 번도 얻은 적 없었던 보상이다. 그만큼 기대를 뛰어넘는 보상이었다.

'대박, 대박이다...!'

앞으로 얻을 모든 특성을 강화한다는 건 특성빨로 그 특성의 주인들보다 앞설 수 있다는 의미다.

'영웅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얻으면 특성빨로 영웅이 될 수 있는 거 아니야?'

물론 특성을 얻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어디 세상에 돈과 권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게 있던가. 고작 하나의 특성으로도 인류의 정점에 설 수 있는 세계다.

수십 개의 특성을 가질 수만 있다면 혼자서 몬스터의 침략을 막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으리라.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방으로 들어온 레이나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일어나셨어요, 도련님? 몸은 좀 어떠세요?"

커튼을 걷자 뒤돌아선 그녀를 향해 쏟아진 햇살이 방 안을 밝혔다.

"너무 좋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하루 조금 넘게 주무셨어요. 리나 양이 계속 안부를 물으러 왔었는데, 깨우면 안 될 것 같아서...."

"잘했어."

눈을 간지럽히는 햇살을 잠시 즐기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레이나가 자연스럽게 다가와 반듯한 정복을 건넸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섭정관은 어디 있지?"

"아침에는 조찬 회의를 진행하십니다."

"조찬 회의? 식당에서 조용히 밥이나 처먹지, 뭐 하러 아침부터 회의야?"

"일정이 바쁘셔서 작은 안건을 조찬 중에 해결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하, 바쁘게도 사시는군. 말로푀유 남작도 거기 있나?"

"네. 아침마다 도련님의 건강 상태를 보고한다고...."

지금 가장 보고 싶은 두 명이 함께 있다는 사실에, 방을 나서는 이안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 * *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섭정관을 바라본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허, 저 새끼 저거 마나도 있었네?'

마크버그 백작.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왕립 아카데미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인 뒤 제국에서 유학 생활을 보내고 돌아와 단승 작위를 얻어 낸 입지전적인 인물.

그는 상대의 기척과 마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귀흡법이 아니라면 알 수 없었을 정도로 은밀히 숨겨진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고작 일주일 정도 마나를 연마했을 뿐인 이안으로선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마나가.

'저렇게 방대한 마나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내가 설치게 놔둔 거지?'

일전 회의실에서 검집으로 대머리를 다졌을 때, 마나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안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소공작의 위치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가신을 보호했다고 해서 반역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도 섭정관은 이안을 막지 않았다. 불쾌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을 뿐.

'내가 발광하길 원한 건가?'

순간 섭정관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근데 저 새끼가 사람 얼굴을 보자마자 비웃어?'

울컥 솟은 짜증에 섭정관을 노려보며 검 손잡이를 움켜잡자 놈의 눈꼬리가 호선을 그리듯 씰룩였다.

'날 비웃는 게 아니야. 검인가? 내가 검을 가져오길 바랐다고?'

하지만 왜? 내가 식당에 검을 차고 올 거라는 걸 어떻게 알고?

순간.

눈조차 마주치길 꺼리는 다른 가신들의 모습이 보였다. 소공작이 왔음에도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하고 있는 이들.

'아....'

이안은 약을 끊으려고 수백 번도 더 시도했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의 실패를 경험했을 것이다. 어리고 미숙한 이안이 어떻게 그 절망을 이겨 냈을까.

'분풀이. 놈은 내가 또 해독에 실패했다고 생각할 거야. 분노에 못 이겨 날뛸 거라 믿겠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검을 본 순간부터 내가 검을 뽑아 들고 설치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저 뱀 같은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엿보일 만큼.

소공작의 명성을 더럽히는 데 가신들이 가득한 식당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말보다 더 자극적인 소식은 없을 테니까.

'…멍청한 새끼.'

생각을 정리한 이안은 터져 나오려는 비웃음을 참으며 인사를 건넸다.

"이거, 다들 오랜만이야."

식당 안에 있던 열댓 명의 가신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건네는 인사를 무시하며 이안은 섭정관에게로 다가갔다.

놈은 모른다.

이안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내가 들어왔다는걸.

내가 약에서 벗어났다는걸.

그리고.

'나는 합리적인 망나니거든.'

내가 짖어야 할 곳을 기가 막히게 파악하는 훌륭한 개망나니라는걸.

* * *

섭정관이 이안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소공작님께서 또 약을 멀리하신다고 들어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몸은 괜찮냐는 걱정 따위는 없었다. 약을 끊었다는 사실에 대한 타박뿐. 저건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일종의 쇼다. 천천히 내 속을 긁어 검을 빼 들게 만들기 위한.

"소공작님, 그 약은 독약이 아닙니다. 제 친구인 말로푀유 남작이 제국에서 힘들게 들여온 귀한 약이죠. 작은 부작용이 있다고는 하지만 소공작님의 증세에는 그 약이 가장 좋다고 들었습니다. 벌써 영주성 인근의 모든 약사와 의사, 성직자에게 확인받지 않으셨습니까."

대놓고 이안의 신경을 긁으려는 듯 섭정관은 절대 약을 끊어서는 안 된다며 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했다. 빙빙 둘러 말하고 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 섭정관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했을 것이다.

'내가 미쳤다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성직자조차 인정한 약을 독이라고 우기면서 치료를 거부하는 망나니. 벌써 몇 번이나 발작을 일으키고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천치.

과거의 이안이라면 이쯤에서 약이 아니라 독이 분명하다며 길길이 날뛰었으리라.

'그러면 또 걱정하는 척 성직자를 부르거나 의사를 불러 다시 검사를 진행해 줬겠지, 되도록 많은 사람이 보는 곳에서.'

퀸즈머시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독이다. 설령 성황을 데려온다고 해도 숨겨진 독은 못 찾을 것이다.

섭정관은 이런 식으로 이안의 평판을 깎아내리면서 동시에 소공작을 위해 헌신하는 척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잔소리를 반복해 대는 섭정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무시했다.

힘이 부족해서 당장 죽일 수 없는 놈이다. 기분을 풀기 위해 뺨이라도 때리고 싶지만, 저 정도로 마나가 많으니 수백 번을 때린들 내 손만 아플 것 같았다.

그러나 이토록 좋은 무대를 마련해 줬으니 그냥 넘어가는 것도 실례일 터.

'그래, 내가 지랄하길 원한단 말이지?'

자고로 가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귀족만큼이나 실망스러운 건 없는 법이다. 슬쩍 희생양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니 혼자 고개를 푹 숙인 채 침묵하고 있는 말로푀유 남작이 보였다.

"아! 남작!"

이안이 섭정관을 무시하고 남작에게로 향하자 섭정관과 남작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졌다.

"아, 예, 예. 소공작님, 지난 며칠간 뵈려고 했는데...."

일그러진 얼굴로 슬쩍 시선을 피하는 남작을 향해 다가갔다. 뱀 같은 섭정관이야 내가 약 기운에 먹혀 검을 뽑길 바라겠지만, 그의 마나를 파악한 이상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릴 생각은 없었다.

'이 자리에서 남작을 죽인다고 기분이 풀릴 것 같지도 않고.'

최악의 경우 남작을 죽이기 직전에 섭정관이 막아서면, 결국 얻는 것 없이 좋은 일만 시켜 주는 꼴 아닌가.

"하하! 내가 또 유난을 부려서 미안하군. 이상하게 몇 년이나 먹었는데도 약이 영 맞질 않는 것 같아."

남작 앞에 선 이안은 그의 손으로 어깨를 툭툭 털며 정말 미안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이 약보다 좋은 약은 없다니, 병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내가 참아야겠지. 그나저나 남작."

말로푀유가 대답하기 위해 이안을 바라본 순간.

"모기가 앉았군."

이안이 사정없이 뺨을 후려쳤다.

짝!

손에 느껴지는 만족스러운 얼얼함.

"아! 놓쳤다."

짝!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딱 알맞은 경쾌한 울림.

"캬, 저게 오른쪽으로 날아가네."

짝!

손에서 느껴지는 마모된 영혼을 치료해 주는 것 같은 충만함을 만끽하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아, 진짜 미안. 방금은 진짜 잡을 수 있었는데."

* * *

말로푀유 남작은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부어오른 뺨을 부여잡은 채 소공작을 바라봤다.

'또, 또 왜!'

이번엔 정말 아무 짓도 안 했다. 아니, 조찬 회의에 놈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평소에도 잊을 만하면 약을 끊겠다고 발광하던 놈이니, 한 며칠은 방 안에 틀어박혀 있을 거라 믿었다.

'근데 왜 벌써 기어 나와서!'

그나마 있던 근성도 없어진 것인가. 한번 시작하면 며칠은 지난 뒤에야 광증에 제 분을 못 이기고 날뛰던 놈이 고작 하루 만에 방에서 나올 줄이야.

혹시나 심기를 거스를까, 놈이 식당에 도착한 순간부터 눈을 내리깔고 숨도 쉬지 않았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불똥이 자신에게로 튄단 말인가.

"소, 소공작님! 제발!"

억울한 건 억울한 거고 일단 살고 봐야 한다.

이 주기적으로 미친놈은 가끔 똑같은 지랄병에 걸리고는 해 주치의로서 대응 방식도 잘 알고 있었다.

"저도 소공작님 앞에서 같은 약을 먹어 보지 않았습니까! 제 약에는 절대 독이 없습니다!"

벌써 몇 번째 같은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소공작이 귀여운 소년이었던 4~5년 전부터 계속된 일이니 지겨울 만큼 반복했다는 사실만 알았다.

"누가 뭐랬나? 모기가 있다고 했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는 모습에 억울함이 몰려왔다.

'한겨울에 모기가 어디 있어!'

아무래도 광증이 중증에 달한 모양이다. 그렇게 약을 처먹으라고 해도 안 처먹더니, 왜 그 분풀이를 나에게 한단 말인가.

답답함에 가슴이 쓰라리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어! 저기!"

"아이고!"

퍼억!

놈이 소리치자마자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지만, 놈의 주먹을 막을 수는 없었다.

"모기, 모기라면서요!"

세상 누가 모기를 주먹으로 잡는단 말인가. 저 양심도 없는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넘어진 남작이 속으로 천불을 삭히는데, 이안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오며 싱긋 미소 지었다.

'아, 악마다.'

이 상황을 즐기는 듯 휘어진 눈매와 자연스럽게 올라간 입꼬리. 놈은 악마가 분명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http://blog.naver.com/jayplemedia1

ⓒ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4화

침묵이 흐르는 식당 안.

붉게 물든 뺨을 부여잡은 남작이 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소공작님!"

"어! 벌레가!"

어딘가 즐거운 듯한 이안의 목소리가 들리고.

퍽!

이안이 있는 힘껏 방심한 남작의 명치를 걷어찼다.

"컥! 소, 소공작님, 제발...."

"미안, 미안, 자네 옷에 벌레가 있지 뭔가. 내가 워낙 벌레를 무서워해서."

진저리 난다는 듯 몸을 떨어 대는 이안의 모습에 남작이 울상을 지었다.

"식당에 벌레가 있을 리가...."

"어!"

"히끅!"

쾅!

위협적인 소리에 본능적으로 몸을 말아 명치를 보호했다. 물론 명치를 막는다고 다른 곳을 때릴 수 없는 건 아니다. 이안의 발이 남작의 텅 빈 옆구리를 걷어찼다.

"악! 아이고!"

바닥을 몇 바퀴나 굴러 쓰러진 남작의 얼굴 위로 발을 높이 쳐든 이안이 외쳤다.

"나만 믿게, 남작!"

뭘 믿으라는 말인지도 몰랐다. 확실한 건 이 미친놈이 사람 얼굴을 그대로 짓밟을 셈이라는 것.

남작은 급히 몸을 굴려 거리를 벌린 뒤 벌떡 일어나 발작하듯 몸을 털어 댔다.

"아이고! 소공작님 이놈의 벌레가! 이놈! 이놈!"

걸려도 된통 걸렸다는 생각에 남작의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명치와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제가, 제가 잡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죠."

울음이 반쯤 섞인 채 비는 것 같은 목소리에 이안이 발을 거둔 뒤, 고개 숙인 그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남작."

"네, 네. 소공작님"

"자네가 날 위해 애써 준 덕에 내 병이 다 나았네."

'지금 네 꼴을 봐라! 이 미친놈아!'

당장이라도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었지만, 광증에 걸린 놈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내일부터 약의 용량을 늘리는 게 더 득이 될 거라는 생각에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네. 소공작님, 완쾌를 축하드립니다."

"흠! 흠!"

남작의 말에 불쾌한 표정을 한 섭정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자기가 차여 보든가!'

남작은 절대 다시 차이고 싶지 않아 눈동자를 바닥에 고정하고 침묵을 유지했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완치됐다는 소공작을 믿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 * *

덜덜 떠는 남작에게서 눈을 뗀 이안이 식당 안의 가신들을 돌아봤다.

"이거, 내가 또 회의를 망친 모양이군."

장난기 섞인 이안의 말에도 누구 하나 입 여는 사람은 없었다.

"미안, 미안. 식당에 모기와 벌레가 가득하니 숨통이 조여 오는 것 같아서 말이야."

순간 마크버그가 인상을 구겼다.

공작가의 식당에 벌레나 모기가 있을 리 없으니 저 말은 자신과 다른 가신들을 가리키는 게 분명했던 것이다.

"자네도 보지 않았나? 이거, 식당까지 벌레가 기어들 정도라니 도대체 영지 관리를 어떻게 한 건지...."

"소공작님, 먼지를 잘못 보신 듯합니다."

"먼지라고?"

"예. 남작이 말했듯 식당에 벌레와 모기가 있을 리 없으니 잘못 보신 거겠지요."

"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이안이 섭정관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영지의 관리가 영지민을 좀먹고 있었으니 벌레나 다름없고, 상인들이 영지민의 고혈을 빨아 댔으니 모기 떼나 다름없지. 그런데 섭정관은 여기서도, 자네가 관리해야 할 땅에서도 자네를 좀 먹는 존재들을 영 보지 못하는군."

"그게 무슨...."

섭정관이 얼굴을 구기며 항의하려 했지만, 이안의 말이 더 빨랐다.

"왕명으로 키워 냈어야 할 영지에 그만한 사건이 있었는데도 자중하지 않고 본인의 눈과 귀가 멀어 보지도, 듣지도 못한 걸 보필해야 할 내 탓으로 돌리다니."

섭정관이 이안을 죽일 듯 노려봤지만, 이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섭정관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모양이야."

순간 식당이 정적에 잠겼다.

마크버그는 이죽거리는 이안을 쳐다보며 두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움켜쥐었다.

"없는 걸 없다고 했을 뿐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지."

고개 숙인 마크버그를 비웃으며 말한 이안이 가신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니 영주 회의를 열겠다."

"무슨...!"

갑작스러운 이안의 발언에 섭정관이 발끈하며 나섰으나 이안은 덤덤히 남작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 주치의도 내가 완치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여태껏 병 때문에 영지의 일에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 자네에게 그 긴 시간 동안 뭐 하나 배운 적 없으니까 말이야."

섭정관을 바라보는 이안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렇지 않나, 백작? 가르친 것도, 배운 것도 없으니 스스로 움직일 수밖에 없지."

갑작스러운 이안의 말에 가신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영주 회의는 영주 내의 모든 신하가 참석하는 회의다.

섭정관의 부름에 좀처럼 응하지 않는 군의 실세들도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회의인 만큼 그 무게가 달랐다.

"그게 아니라… 갑작스러워서 그렇습니다. 이제 막 병상에서 벗어나셨으니 충분한 휴식기를 먼저 가지시는 게 어떠신지요."

"병상에서 벗어나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으니, 그다음 소원을 이룰 시간이네. 영주로서 영지를 지켜야지."

고개 숙인 섭정관의 머리 위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영지에 벌레 새끼들이 이렇게나 많으니 말이야."

* * *

"그 천치가 감히!"

쾅! 쨍그랑!

마크버그가 내려친 주먹에 책상이 부서졌다. 백작은 손에 잡히는 걸 연신 던져 대며 분을 삭였다.

"7년이다, 7년! 이 개 같은 영지에 와서 밤낮없이 일한 게 벌써 7년이라고!"

아무리 노력해도 기울어져 가는 영지를 살리기 위해서 얼마나 헌신했던가. 잠과 식사 시간을 줄여 가며 영지에만 몰두했다.

그런데 그 보답이 고작 이런 취급이란 말인가.

"은혜도 모르는 망나니가 감히 날 벌레 취급해?!"

쾅!

백작의 마나에 집무실 한쪽에 자리한 초대 공작의 의자가 부서졌다. 영주성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의자였지만 흥분한 백작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을 뿐.

"뭣도 모르는 애송이가 감히!"

울분 섞인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섭정관은 군대를 움직이지 못한다. 회의를 통해 이견을 조율하고 군대가 스스로 움직이게 해야 하는데, 회의에 얼굴조차 비치지 않으니 그것도 불가능했다.

-모너가의 이빨이 빠졌다.

모너가의 눈치를 살피던 주변 영지들이 공작이 사라진 후 소공작까지 광증에 시달리자 재빨리 태도를 바꿨다.

모너가에 판매하는 식량에 점점 더 비싼 값을 매기고, 겨와 모래를 섞어 납품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도 상인협회를 벌할 수는 없다. 그들조차 없으면 식량을 도대체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그들의 부정을 알면서도 넘어가야 했고, 그게 최선이었다.

"제 분수도 모르는 놈!"

평생을 망나니로 산 놈은 모를 것이다, 이 자리에 앉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무게를 의미하는지.

"후… 그래도 그 천치가 제 무덤을 팠단 말이지."

한참 동안 가구를 부숴 대며 분을 삭인 백작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무너진 의자에 걸터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멍청한 소공작은 영주 회의를 열라는 명령과 함께, 할 것이 있다며 다른 가신들의 말은 듣지도 않고 방으로 돌아갔다.

"이건 기회야. 이참에 영지를 전부 장악할 수도 있겠어."

여태까지 몇백 번을 불렀음에도 움직이지 않던 백작들을 드디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영주 회의가 네놈이 망나니처럼 뛰어놀 수 있는 마지막 장소가 될 것이다."

약 이 주 전 소공작이 가져간 돈. 놈이 그 돈으로 온갖 독초와 약초를 대량으로 사들였다는 소식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 귀한 돈을 고작 그딴 곳에 썼다는 말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지만, 하늘은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모든 가신이 모인 자리에서 놈을 추궁하면 놈을 지지하던 세력들도, 군부도 소공작을 버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흐흐흐…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말해 보거라. 병사들은 모래 섞인 빵을 씹어 넘기고 있는 와중에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번 기회에 아직도 소공작을 완전히 몰아낼 계획에 기대에 찬 섭정관의 눈빛이 빛났다.

* * *

방으로 돌아온 이안은 급히 레이나와 함께 황금 고블린 상단으로 향했다.

"도련님, 정말 여기가...?"

"응. 대륙 제일의 상단이 될 황금 고블린이지."

레이나가 고개를 들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건물을 쳐다봤다.

과연 이걸 상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상단이라기보단 불법 노점이 더 걸맞은 것 같은 모습에 당황해 이안을 돌아봤을 때, 저 멀리서 달려오는 소년이 보였다.

"아이고, 소공작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밝게 인사를 건넨 릭이 재빨리 낮은 목소리로 레이나에게 경고를 전했다.

"저래 보여도 소공작님이에요. 어쩌다 만난 건지 모르겠지만 제가 시선을 끌 테니까 지금 도망가세요. 훠이, 훠이!"

물론 아무리 목소리를 낮춘다고 한들 바로 옆에 있는 이안이 못 들을 리가 없었다.

손짓까지 하며 레이나를 보내려는 릭을 보며 이안이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자네는 언제나 한결같군."

"네, 저희 사장님께서도 그 점이 매력이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나저나 오늘은 어쩐 일이십니까?"

이안을 대하면서도 연신 눈에 뻔히 보이는 손짓, 발짓을 해 가며 레이나에게 신호를 보냈지만, 그녀는 멀뚱히 서서 이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슬슬 준비됐을 것 같아서 찾아왔네. 상단주는 안에 있나?"

"네, 안 그래도 며칠 동안 소공작님이 오실 것 같다며 상단에 계셨습니다. 자기가 예언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궁금하면 물어나 보지...."

연신 구시렁거리는 릭을 뒤로하고 레이나와 함께 릴라이를 만나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소란스러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도, 저도 일할 수 있나요?"

"물론이죠. 일단 면접을 보시고, 그 후에 결정됩니다. 면접이 시작되면 심부름꾼을 보낼 테니 늦지 말고 오세요."

"정말요? 그럼 오늘은 그...."

"아, 수고비는 건물 앞에 있는 남자한테 말하고 받아 가시면 됩니다."

열댓 명도 넘는 여성이 좁은 건물에 옹기종기 모여 릴라이를 만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바쁜 모양이군."

"그럼요. 전에 소공작님이 오신 후부터 계속 시장 아낙네들에게 소문을 퍼트렸으니까요."

"계약 내용은 분명히 전했겠지?"

"네, 네. 소공작 직속 하인을 모집한다고 했습니다. 소공작에게 직접 일을 배워야 한다고도 말했고요. 무기를 다룰 일이 있을 거라고 분명히 경고했으니, 전하라고 하셨던 말은 숨기지 않고 다 전했습니다."

이안이 주변을 둘러봤다. 고작해야 대여섯 명 정도 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오늘 하루만 해도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몰려와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이 왔군."

"요즘은 다들 사는 게 팍팍하니까요. 게다가 소공작님 직속 하인이면 준귀족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딸 있는 집에서는 입도 줄일 겸 억지로 보내는 것 같습니다. 또 단순히 접수만 해도 수고비를 조금 쥐여 준다는 소문에 오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고요."

릭의 대답에 이안이 얼굴을 굳혔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망나니에게 딸을 보내는 만큼 부모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그런데도 자식과 생이별을 결정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가… 쯧.'

생각보다 답답한 영지 상황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나저나 병사로 키울 생각이니까 남자를 먼저 뽑으라고 하지 않았나?"

이안의 말에 릭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답했다.

"어떤 미친놈이 소공작님 밑에서 일하겠습니까? 차라리 마물의 숲에 나가 오크 가죽이라도 가져다 팔고 말지."

빠직하고 머리 위에 힘줄이 솟았지만, 이안은 웃는 얼굴로 릭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나랑 일하는 것보단 오크를 잡는 게 더 낫다는 말인가?"

"당연하죠! 아이고, 소공작님이 시장에 퍼진 소문을 들어야 했는데. 저기 푸줏간 아들한테 한번 일해 볼 생각 없냐고 물었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며 절교당했다니까요? 차라리 오우거 밑에서 하숙하겠답니다."

설마 오우거에게 질 줄이야.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릭의 뒤통수를 가격하자 릭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악! 소공작이 나 죽인다! 사장님!"

그 소리에 이안과 릭을 발견한 릴라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소리 질렀다.

"릭!"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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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5화

"소공작? 저분이 그 소공작...?"

"지금이라도 인사해야 하나?"

"죽기 싫으면 빨리 엎드려!"

건물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소공작의 등장에 놀라 하나둘 바닥에 넙죽 엎드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이안이 미간을 좁히고, 릴라이가 릭을 향해 들고 있던 펜을 던졌다.

"릭!"

"사장님!"

"나가 뒈져!"

이안은 릴라이가 던진 펜이 릭의 미간에 꽂히기 직전, 살짝 고민하다 펜을 잡았다.

"히끅!"

눈앞에 멈춰 있는 펜에 놀란 릭이 허물어지듯 쓰러지는 모습을 본 후 이안은 발걸음을 옮겨 이 층으로 향하며 릴라이에게 말했다.

"후… 일단 다들 돌려보내고 위에서 잠깐 보지."

이안과 레이나가 계단을 올라가는 사이, 릴라이가 있는 힘껏 릭의 등짝을 때리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내가! 소공작님이! 오시면! 닥치고 있으라고! 몇 번이나! 말해!"

* * *

"죄송합니다. 또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직전까지 릭에게 분풀이를 했기 때문인지 옅게 홍조를 띤 릴라이가 숨을 고르며 이안을 향해 고개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님. 이쪽은...?"

"이쪽은 내 전속 하녀 레이나."

"레이나 님을 뵙습니다."

릴라이가 레이나에게도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당황한 레이나가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아, 저, 저는 귀족이 아니라 이렇게 인사하실 필요 없습니다."

"귀족이라고 생각해서 인사드린 건 아닙니다. 귀족이 아니어도 특별한 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녀가 이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굉장히 빛나는 분이기도 하고요."

그 말에 흠칫 몸을 떤 이안이 릴라이를 바라봤다.

"무재(武才)도 볼 수 있었나?"

"거의 못 본다고 봐야죠. 살면서 이제 딱 두 명밖에 못 봤거든요."

릴라이의 눈동자가 이안과 레이나를 차례로 향했다.

"신기하죠. 분명 저번에 봤을 때 공작님에게 무예의 재능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나저나 이렇게 빛나는 보석을 방치하실 건가요?"

이안은 릴라이의 궁금증을 무시하고 금귀의 눈을 쓴 채 레이나를 바라봤다. 가슴에서 붉게 타오르고 있는 붉은빛. 왕의 재능을 가졌던 리나보다도 한참이나 밝은 빛이었다.

"검을 들면 검에 죽기 마련이야."

그러나 그토록 밝은 빛을 가진 특성을 발견했음에도 레이나에게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녀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에게 검과 마법을 가르쳐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도, 그렇게 빛나게 된 그녀가 자신을 떠나는 것도 모두 두려웠다.

당장 특성 하나도 아쉬운 판국에 멍청한 짓이라고 욕할지도 모르지만, 화면 속 게임과 달리 내가 숨 쉬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홀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새를 가둔다고 해서 날지 못하는 건 아니랍니다."

냉정한 눈으로 이안을 흘겨본 릴라이가 레이나에게 다가가 곱게 뻗은 손을 건네며 싱그럽게 웃었다.

"저는 릴라이, 이 상단의 주인입니다. 언제든 공작님이 괴롭히시면 찾아오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 네, 안녕하세요. 저, 저는 레이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제야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채 멀뚱히 듣던 레이나가 손을 잡은 채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인사는 그쯤 하고,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이야기부터 해 보자고. 생각보다 지원자가 꽤 되는 것 같은데, 얼마나 모였지?"

"지금까지 천 명이 조금 넘게 지원했습니다. 영지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인 리어가 아니면 그 이상은 어려울 것 같아요."

이안의 계획은 간단했다.

도시 내 모집 공고를 뿌리고 특성이 있는 사람들만 고용한다. 그리고 간단한 훈련 후 일대일 맞춤 교육을 진행해 특성을 얻어 낸다.

적은 시간 최대의 효율을 얻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다가 계획한 일종의 특성작. 이안은 특성을 얻어서 좋고, 고용된 이들은 여태껏 개화하지 못했던 특성과 직업 두 가지를 한 번에 얻어 좋으니 윈윈 전략이라 할 만했다.

다만, 이 계획을 구상하고 있을 때만 해도 소공작이라는 이름이 가진 악명 때문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지원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천 명이나? 생각보다 훨씬 많기는 한데… 일단, 계획대로 무재가 보이는 사람은 전부 고용할 거야. 아직 꽤 자금이 남아 있으니 괜찮겠지."

"전부요?"

"응. 악명 때문에 사람이 모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쁘지 않아. 어차피 찾아봐야 10명 안팎일 것 같기도 하고."

결국 특성을 얻기 위해 모은 인재들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특성을 얻을 확률도 늘어나니 돈을 조금 더 투자한다고 해서 문제는 없을 터.

"다음 달 정도에 영주 회의가 있을 거야. 그 후에 곧 리어로 갈 테니까 준비해."

"네. 그쪽에도 먼저 사람을 보내 모집공고를 돌릴까요?"

"그쪽은 대도시니까 지원자가 없지 않을까? 일단 돌려봐, 말했다시피 지원자가 많을수록 좋으니까."

이안은 특성을 얻은 뒤에도 남고자 하는 이들을 추려 별동대를 만들 계획이었다. 고작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이지만 전원 특성을 가진 인원만 모이는 만큼 한 달 만으로도 정예병으로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이안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치며 말했다.

"어렵겠지만, 면접은 앞으로 일주일 안에 끝내야 해."

"그럼 오늘 오후부터 면접을 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따로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성에 심부름꾼을 보내 리나라는 하인을 데려와 줘. 그 친구와 함께 일할 동료를 뽑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방을 나서는 릴라이를 뒤로하고 고개를 들어 낡은 천장을 바라봤다.

"이제 겨우 시작인가...."

게임에 비하면 훨씬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면접이 시작되기 전 낡은 소파에 앉아 잠깐의 휴식을 즐겼다.

* * *

면접은 간단했다. 금귀의 눈을 쓴 상태로 들어오는 면접자를 바라본 뒤 재능이 있으면 합격, 재능이 없으면 탈락.

전부 모아 두고 쓴다면 3초도 안 걸릴 작업이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마나 소모가 너무 심해 어쩔 수 없이 한 명씩 면접을 진행하고 있었다.

"다음."

"가, 감사합니다!"

서둘러 나가는 여자아이를 바라보며 한심한 눈으로 릴라이를 바라봤다.

"진짜? 방금 쟤는 10살도 안 돼 보이는데?"

"나이, 성별, 직업 무관이라고 하셨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쟤 부모는 뭐 하는 인간들이야? 아무리 돈이 급해도 그렇지, 애를 이런 곳에 보낼 수가 있나?"

"설마 소공작님이 직접 면접을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죠. 다른 면접관이라면 탈락시키는 대신 참가비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뭐, 말하자면 영악한 부모네요."

영악한 부모라. 절박한 부모겠지.

영지 상황이 조금만 더 나았다면 그 어떤 부모가 고작 몇 푼에 자식을 보낼까 싶어 답답한 마음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사이 다음 참가자가 들어오고 이안은 기계처럼 금귀의 눈으로 숨겨진 빛을 찾았다.

"다음."

"가, 감사합니다!"

깊게 고개 숙인 채 허둥지둥 뒤로 돌아 나가는 여자를 보며 옆에 서 있던 릴라이가 말했다.

"이거 어째 탈락하는 사람들이 더 신난 것 같네요."

"시장에 나도는 소문을 조사해 봐야겠어. 내 얼굴만 봐도 실신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말이 돼?"

방금 그 사람처럼 얼굴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는 정도면 양반이다. 면접장에 들어오자마자 실신한 사람이 벌써 다섯을 넘어갔다.

"그건 공작님이 웃으셨으니까 그렇죠."

"뭐? 난 웃지도 말아야 하나?"

이안의 짜증 섞인 물음에 옆을 지키고 있던 리나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공작님, 웃으시면 조금 무서우셔요."

"리나...?"

어이가 없어 고개를 돌려 리나를 보니 정색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랑 같이 일할 친구들인데 그래도 좋은 인상을 심어야죠. 되도록 웃지 마세요."

"푸흣, 푸하하하!"

진지한 그녀의 모습에 이안이 작게 울상을 짓고, 릴라이가 자기 무릎을 쳐 가며 웃어 댔다.

"다음! 릭! 다음!"

괜히 억울한 마음에 다급히 릭을 찾자, 다음 사람을 들여보낸 릭이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집어넣은 채 말했다.

"맞습니다, 공작님! 밖에서 달래는 것도 일이니까 웃지 마세요!"

"근데 저게!"

재빨리 들고 있던 펜을 집어 던지려고 했지만, 위협을 느낀 릭은 이미 레이나를 찾아 1층으로 도망간 뒤였다.

"후. 이제 150번대인가. 다… 응?"

습관적으로 다음을 외치던 이안의 눈에 회색빛으로 빛나는 특성이 보였다.

"오! 합격!"

"네? 네?! 그럴 리가...."

드디어 발견한 특성에 이안이 반색하며 외치자, 깜짝 놀란 참가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안을 바라봤다.

"맞아! 합격!"

순간 세상을 잃은 듯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던 여자가 풀썩 쓰러지자 릴라이가 급히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안내했다.

"참가번호 153번 마르시?"

"네, 네."

"걱정하지 말아요. 이쪽으로 와서 잠깐 얘기 좀 하죠."

방을 나서는 두 여자를 보며 리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웃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웃음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다들 합격하고 싶어서 모인 거 아니야?"

아무리 참가비 때문에 모인 사람이 많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합격을 바랄 줄 알았는데, 역시 진심으로 망나니 밑에서 일하길 원하는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다.

"설마요. 잠깐 나갔을 때 보니까 서로 어떻게 하면 불합격하는지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던걸요?"

죄책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리나의 목소리에 이안이 그녀를 흘겨보며 물었다.

"그걸 그대로 놔뒀다고?"

"네. 혹시라도 저랑 같이 일할 친구들일지도 모르는데 벌써 공작님 편들면 앞으로 저 혼자 지내야 하는걸요. 저는 모두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그렇게 말한 리나가 바쁜 릭과 릴라이를 대신해 문밖으로 나가 다음 참가자를 안내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웃지 마세요."

"아. 그, 그래...."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그녀의 부탁에 풀 죽은 이안이 작게 대답했다.

* * *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매일 저녁까지 면접을 진행하고, 새롭게 고용한 직원들에게 적합한 기술을 찾다 보니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이제 드디어 끝이네요."

황금 고블린 상단 2층. 마지막 면접자를 기다리는 이안에게 릴라이가 말했다.

"총 19명인가요?"

"아까워. 20명은 채우고 싶었는데."

천 명이 넘는 인원 중 빛나는 특성이 있던 건 고작해야 19명에 불과했다.

"괜찮아요. 저는 꽤 많은 보석을 발견했거든요."

오히려 이번 면접을 통해 얻은 건 릴라이가 더 많았다. 면접자 중 대부분이 여자였기 때문일까, 상재(商才)를 가진 사람이 더 많았던 것이다.

"쯧, 내 돈으로 릴라이만 좋은 일 한 것 같은데."

"공작님의 은덕에 감사할 뿐입니다."

실실 웃는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음 참가자를 기다리며 한참이나 문을 째려봤다.

"뭐야? 또 기권인가?"

벌써 몇 번이나 이안에게 겁먹은 사람들이 도망친 전례가 있어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고 할 때,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저도 면접 볼 거예요!"

"이게 어딜! 아저씨 말 안 들어?!"

"아저씨가 뭔데요! 분명히 공고에 나이, 성별, 직업 다 상관없다고 쓰여 있잖아요!"

"이 쥐콩만 한 게, 그래도 안 돼! 너 인마 저 안에 누가 있는지 알기나 해?"

익숙한 릭의 목소리에 조용히 문을 열고 슬쩍 밖을 바라보니,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와 다투고 있는 릭이 보였다.

"그냥 참가비 줄 테니까 돌아가라니까!"

"싫어요! 저는 꼭 취직할 거란 말이에요! 빨리 안 보내 주면 여기서 똥 쌀 거예요!"

"이게 정말!"

울상을 한 릭은 아이의 기상천외한 협박에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헤진 옷이라… 가난한 모양이군.'

마물의 숲은 몬스터 시체가 넘쳐나는 땅이다

식량은 항상 부족할지 몰라도 털과 가죽이 넘쳐 옷을 제대로 못 입고 있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 저 아이처럼 해진 옷을 입고 있다면 그만큼 상황이 안 좋기 때문일 터.

'그래서 일자리가 필요한 건가? 나이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며칠 전 릭과 레이나에게 너무 어려 보이는 아이는 되도록 돈을 쥐여 주고 돌려보내라고 말했다. 어린아이들은 비기의 구절을 알려 줘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안이 직접 알고 있는 기술을 보여 주면서 가르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기술 대부분을 구절로만 전수할 수 있는 만큼 어린아이들을 받는 건 시간 낭비에 가까웠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필사적으로 면접장 안으로 들어가려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어! 거기 무서운 아저씨! 저 좀 들여보내 주세요!"

손을 붕붕 흔들며 자신을 부르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마나를 눈으로 보내 금귀의 눈을 활성화하자 아이의 가슴팍에서 선명히 빛나고 있는 특성이 보였다.

지금껏 봐 온 그 어떤 특성보다 밝게 빛나는 백색 특성.

입이 귀에 걸린 이안이 손을 흔들고 있던 아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즐겁게 외쳤다.

"합격!"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http://blog.naver.com/jayplemedia1

ⓒ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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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합격이요?"

놀란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당연하지! 합격!"

벌써 며칠 동안 반복된 리나의 경고에도 보석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입가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아이의 떨리는 눈을 보자마자 급히 입꼬리를 내렸지만 어색한 얼굴은 한층 더 날카롭게 보일 뿐.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아이의 얼굴에 급히 릴라이를 불러 아이를 데려가게 한 뒤, 1층에서 레이나와 합류해 먼저 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제 정말 끝인가요?"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지."

일주일 동안 구한 건 조금 전 발견한 그 아이를 포함해 총 20명. 단 한 명이라도 구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던 만큼 생각보다 훨씬 큰 수확을 얻었다.

"이제 남은 기간 동안 잘 가르치기만 하면 돼."

물론 스무 개의 특성 중 하나도 못 얻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내가 직접 지도한다고 해도 지도받는 20명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까-

더 이상 멍청히 있을 수 없다.

"레이나."

"네, 도련님."

밝게 웃는 레이나의 얼굴 뒤로 옅은 슬픔이 보였다. 눈을 뜬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 하루 종일 함께 생활하며 가장 많이 보는 얼굴이다. 어떻게 그 얼굴에 진 그늘을 모를 수 있을까.

"혹시 다른 애들이랑 같이 훈련해 보지 않을래?"

"네? 아… 저, 저는 괜찮아요."

거짓말.

손사래 치며 하는 말과 달리,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 나왔다.

지난 며칠간 리나와 훈련하고 있는 합격생들을 바라보던 레이나의 눈빛에 담긴 부러움을 못 읽기에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저는 아무런 재능도 없잖아요. 그렇죠? 재능이 보이는 사람만 뽑겠다고 하셨으니까...."

아. 그걸 걱정하고 있었던 건가.

"걱정할 필요 없어, 레이나는 그 누구보다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까."

방금 만났던 아이만큼이나 밝게 빛나는 재능. 욕심 같아선 이 빛나는 보석을 숨기고 싶었다. 아마 그녀가 그걸 원했다면 나는 그녀의 재능을 숨기고 빛을 감춰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 유일한 내 편을 절대 빼앗기지 않도록.

"정말요?"

너무나 밝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 한편이 아려 와 저도 모르게 변명이 흘러나왔다.

"레이나는 하나밖에 없는 내 전담 하녀니까 힘든 일은 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야."

"그럼 해 볼게요! 저는 힘들더라도 도련님께 더 큰 도움이 되고 싶은걸요!"

얼마나 신났는지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레이나가 목소리를 들으며 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유독 평소보다 짧게 느껴졌다.

* * *

모너가의 영주성에서 일하고 있는 두 하녀가 멀찍이서 쉴 새 없이 달리고 있는 이안과 22명의 여자를 쳐다봤다.

"저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왜 왕은 자기가 얼마나 많은 첩을 가졌는지 자랑한다잖아? 그런 거 아닐까?"

"그러면 왜 달리는 건데?"

"왜긴, 달리기가 밤일에 최고라잖니? 상대가 저렇게 많으면 밤에 남아나질 않겠지."

"얘는 못 하는 말이 없어!"

두 사람이 소공작의 기행에 고개를 저으며 성으로 돌아간 후에도 이안 일행의 뜀박질은 멈추지 않았다.

가죽 갑옷을 갖춰 입은 채 새벽부터 나와 뛰고 있는 이안 일행은 누가 봐도 훈련 중인 것처럼 보였지만, 영주성의 그 누구도 망나니 소공작의 기행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이안의 광증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든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하녀들에게까지 손을 뻗어 몇 명이 임신한 상태로 쫓겨났다든가 하는 흉흉한 소문만 늘어갔을 뿐.

* * *

"헉, 헉, 헉"

내뱉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비릿한 위액의 냄새가 퍼질 때쯤이 되어서야 이안의 발걸음이 멈췄다.

흐르는 땀에 끈적하게 절여진 가죽 갑옷을 풀고 뒤를 돌아보니, 뛴다기보단 몸을 억지로 끌고 오는 일행이 보였다.

"흐악!"

"드디어!"

"살았다!"

멈추자마자 그 자리에서 드러누운 일행을 보며 살짝 웃었다. 평균 나이 18세의 어린 소녀들이다. 당연히 이런 구보에 익숙할 리가 없음에도 단 며칠 사이에 놀랄 정도로 적응한 이들이 자랑스러워 한동안 바닥에 널브러진 그들을 바라본 뒤, 리나에게 다가갔다.

"몸풀기는 이 정도로 하고, 십 분 휴식 후 개별 운동을 시작하지."

개별 운동이라 봐야 각자 검, 활, 도끼, 창, 메이스 따위를 들고 백 번 휘두른 뒤 무기를 바꿔 보는 정도지만, 빛나는 특성을 가진 이들은 자신에게 맞는 무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적합한 기술을 알려 주기도 쉬워질 터. 이미 특성을 얻은 리나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든 가장 효율적인 교육법이었다.

"무기가 정해진 것 같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부터 먼저 교육한다. 혹시 적당한 무기가 없는 사람이 있으면 따로 오라고 전하고."

"네."

명령을 전한 뒤 돌아가는 이안의 곁으로 땀에 흠뻑 젖은 레이나가 따라붙었다.

"조금 쉬었다 할까?"

"아뇨, 괜찮아요."

두 손을 불끈 쥔 레이나와 함께 연무장으로 향한 이안은 그녀가 검, 활, 창, 도끼를 번갈아 휘두르는 것을 지켜봤다.

'흠… 딱히 맞는 무기가 없는 모양이네.'

레이나가 무기를 잘 못 다룬다는 것은 아니다. 영주성의 하녀인 만큼 최소한의 호신술을 주기적으로 익혀 왔을 뿐 아니라 체구에 비해 근력도 강해 대부분의 무기를 어색하지 않게 다뤘다.

"역시 잘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미안할 필요가 없다니까. 여기 맞는 무기가 있다는 보상도 없고. 다음은 단도랑 도끼 그리고 지팡이 종류로 해 보자."

"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뒤 적당한 무기를 찾아 움직이는 그녀를 보며 이안도 품에서 단검을 꺼내 움켜쥐었다.

"슬슬 나도 시작해 볼까."

안 그래도 최근 개인 훈련 시간이 터무니없이 적어 리나와의 실력 차가 꽤 벌어진 참이다.

더 나은 특성을 가지고 같은 시기에 시작했는데도 리나와의 대련에서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후 수면 시간을 줄이며 개인 훈련 시간을 틈틈이 늘려 왔다.

아직 한참 부족하긴 하지만 남은 것은 시간과 앞으로 얻어 갈 특성이 해결해 주리라.

단검을 든 이안의 몸이 천천히 움직였다. 특유의 호흡법을 따라 마나가 근육에 스며들고, 스며든 마나가 근력을 강화한다. 그 후 천천히 모든 근육을 응축시킨 뒤 일점에 폭발시키듯 마나를 터트렸다.

팡!

단검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나아갔다. 그 어떤 기교도 섞이지 않은 일격필살의 찌르기.

[살(殺)의 숙련도가 증가했습니다.]

귀왕(鬼王)의 비기는 다른 비기와 달리 초식도, 형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눈앞에 존재하는 적을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만들어진 귀왕의 무술에는 베기, 찌르기, 던지기라는 세 가지 동작만 존재할 뿐.

상대와 검을 마주하는 것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은, 그야말로 암살자를 위한 전투법은 단순한 만큼 무식한 살상력을 자랑했다.

'조금 더 빠르게.'

귀왕의 보법인 귀신 걸음을 따라 걷자 이안의 신형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신체가 빨라지는 만큼 단검의 움직임도 점점 빨라지며 암살자의 끈적한 살의가 연무장을 채웠다.

* * *

[스킬 사용을 위한 마나가 부족합니다.]

[스킬 사용을 위한 마나가 부족합니다.]

쨍그랑!

벼락같이 나아가던 단검이 허무하게 바닥으로 추락하며 온몸에 탈력감이 찾아왔다.

"커헉!"

마나가 바닥났다는 사실도 모른 채 훈련하고 있던 이안이 바닥에 허물어지듯 쓰러지자 레이나가 다가와 수건을 건네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미안, 좀 무리한 모양이야."

레이나가 무기를 고를 동안 잠깐 연습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연무장 주변에는 단검으로 만들었다고는 절대 믿을 수 없는 검흔이 가득했다.

'생각보다도 훨씬 일찍 마나를 움직일 수 있게 됐어.'

고작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마나를 운용했을 뿐임에도, 단검에 미약한 마나가 실리기 시작했다.

이제 체내의 마나를 호흡법으로 운용하는 2급의 비기너를 넘어 실질적으로 마나를 활용할 수 있는 3급 유저 단계에 진입했다는 증거일 터.

눈으로 검흔을 좇는 이안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아, 레이나는 어때? 마음에 드는 무기는 찾았어?"

마나 탈진으로 꼼짝도 할 수 없어, 여전히 바닥에 누워 레이나에게 묻자 그녀가 우물쭈물하며 부끄러운 듯 무기를 내밀었다.

"…배틀메이스?"

"네...."

무기를 확인한 이안의 눈이 반짝였다.

로스트 크로니클 속 배틀메이스에 특화된 직업은 많지 않다. 상대를 죽이는 것보다 뼈를 부러뜨려 제압하는 전투 방식이 전쟁에서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무거운 메이스류의 무기는 공격 속도가 빠른 검이나 창에 대항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단심문관, 성직자와 성기사, 배틀메이지 정도인가? 아, 하나 더 있긴 하네.'

순간 아쉬움과 기쁨이 동시에 느껴졌다. 신성력을 다루는 모든 직업은 앞으로의 계획에 큰 도움이 되겠지만 신성력이 없는 자신은 무슨 수를 써도 신성력과 관련된 특성을 얻을 수 없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신성 제국에서만 비밀리에 전수되는 성직자의 비전을 모른다는 점이다.

'이거 지금부터라도 신을 믿어야 하나.'

잠시 실없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레이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안 되나요? 사실 이것보다 조금 더 뭉툭하고 던질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마땅한 무기가 없어서요."

"아, 아니. 안 되는 건 아닌데… 응?"

레이나는 적당한 무기를 찾지 못해 정말로 아쉽다는 듯 가시 박힌 메이스를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메이스가 뭉툭해지고 던질 수 있으면 그건… 그냥 철퇴 아닌가?

급히 시종을 시켜 무기고에서 철퇴를 꺼내 오라고 한 뒤 레이나에게 건네자 그녀가 행복한 표정으로 철퇴를 받아들였다.

'철퇴를 무기로 쓰는 특성 중 아는 건 하나밖에 없는데....'

무식하고 다루기 까다로운 철퇴를 쓰는 직업은 거의 없다. 애초에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용병들이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쓰는 무기인 만큼 천시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철퇴를 상징으로 삼던 영웅이 바로....

'혈귀.'

몬스터의 대대적인 남하가 시작된 후 전선이 밀릴 정도로 치열한 전쟁터에 등장하던 혈귀는 한번 피를 보면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 명성보다 악명이 더 높은 영웅이었다.

그럼에도 분명 단신의 힘으로 군단에 대항할 수 있던 영웅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비전은 외우고 있지만....

"정말 이걸로 괜찮겠어?"

"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소중한 선물이라도 받은 듯 손수건으로 철퇴를 광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철퇴 좋아한다고 설마 그 혈귀랑 같은 특성을 가졌겠어?'

수만 개가 넘는 특성 중 철퇴를 사용하는 특성이 하나밖에 없을 리가 없다. 분명 레이나에게 어울리는 침착하고 우아한 특성이 있지 않을까.

"후. 좋아 그럼 시작하자. 미안하지만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어."

이안이 내뱉는 단어와 구절에 따라 마나를 운용하던 레이나의 얼굴이 점점 몽롱해져 갔다.

* * *

"젠장."

잔뜩 찌푸린 얼굴로 신난 듯 철퇴를 휘두르는 레이나와 특성창을 번갈아 쳐다봤다. 설마, 그 많고 많은 특성 중에서 이따위 특성을 얻을 줄이야.

[피의 갈증]

피를 탐하던 고귀한 자가 남긴 사그라지지 않는 갈증.

-피를 볼수록 공격력과 공격 속도가 증가합니다.

-버서커 관련 스킬의 숙련도가 더 빠르게 상승합니다.

-피를 볼수록 피에 대한 갈증과 광기에 휩싸입니다.

[특전으로 인해 특성이 강화되었습니다.]

[피의 갈증이 피의 욕망으로 강화됩니다.]

-피를 볼수록 공격력과 공격 속도가 증가합니다.

-버서커 관련 전투 스킬 숙련도가 더 빠르게 상승합니다.

이건 혈귀의 특성이 분명했다.

특성에 불과한 주제에 피를 볼수록 공격력과 공격 속도를 올려 주다니, 이건 특성이라기보단 스킬에 가깝다.

'아니, 스킬이 아니라 저주 아니야 이거?!'

문제는 압도적인 성능만큼이나 분명한 디버프인 광기와 피에 대한 갈증.

부동심과 스틸하트를 가지고 있는 나로선 큰 영향이 없겠지만 상태 이상에 저항할 방법이 없는 레이나는 다르다.

'아니야. 진정하자. 괜찮을 거야. 피를 볼 일이 없게 만들면 되지.'

좀처럼 가시지 않는 걱정을 물리려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쾅! 콰쾅!

갑작스러운 굉음과 부서진 벽 사이로 한결 가벼운 얼굴을 한 레이나가 걸어 나왔다.

적 한 명 없이 연무장에서 홀로 철퇴를 휘둘렀을 뿐인데도 몸 여기저기 생긴 생채기에선 피가 흐르고 호선을 그린 눈은 붉게 빛났다.

'피를 볼 일이 없게… 아니, 최소한 레이나가 자기 철퇴에 피 흘릴 일은 없게 하자.'

재빨리 계획을 바꾼 이안이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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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미2023

※본 작품은 제이플미디어(주)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내용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형사, 민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7화

레이나의 특성을 개화한 이후, 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됐다.

아침에 일어나 쓰러지기 직전까지 영주성을 뛴 후 개인 훈련 뒤 레이나나 리나와 대련을 한다. 이미 두 가지 특성을 이용해 리나를 여유롭게 이길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섰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거 완전히 글러 먹었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는 대원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리나에게 투덜거렸다.

"왜요?"

"하… 그래도 솔직히 하나는 얻을 줄 알았는데 벌써 15명째야. 이거 괜히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15개의 특성을 개화시켰음에도 그중 단 하나의 특성도 얻지 못했다.

"분명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있어. 그게 뭘까?"

"공작님, 죄송한데 진짜 무슨 소리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리나가 특유의 무신경한 눈을 하고 바라봤다. 분명 대원들과 함께 있을 때는 세상 밝게 웃는 아이인데, 왜 내 주변에만 있으면 사람이 바뀌는 걸까.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답을 얼버무렸다.

"그런 게 있어. 세상일이라는 게 다 주고받는 거거든? 근데 퍼 줘도 받는 게 없으니 영 속상하다는 거지."

"방금 샐리가 감사하다고 했잖아요. 가진 게 없어서 여기까지 온 애들한테 뭘 더 바라시는 건데요?"

이제는 완전 속물 보듯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냉정히 외면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특성 '유능한 무능력자'는 가르치는 대상이 진심으로 배웠다고 느낄 때 특성을 복사한다. 그럼 진심 어린 감사를 받은 지금은 특성을 얻었어야 했다.

'그럼 나한테 배운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럴 리는 없는데....'

애초에 그들의 특성에 맞는 무기를 찾아 준 것도, 비전을 제공해 준 것도 나니까 아무리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한들 명백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는데… 그게 도대체 뭘까!"

답답한 마음에 소리치고 있을 때, 멀리서 앳된 소녀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기...."

'이름이....'

마지막 날 면접을 보게 해 주지 않으면 똥을 싸겠다고 릭을 협박했던 아이였다.

여전히 대원들은 나와 대화하는 걸 어려워해서 그들의 이름을 미처 다 외우지 못했다. 사실 일대일로 가르칠 때를 제외하고는 대화를 한 적이 없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리나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퍽, 무슨 일이야?"

"소공작님을 뵈려고요."

그 말에 이안이 반색하며 퍽을 반겼다.

"아, 무기를 찾았구나?"

"아, 네! 그것도 있고… 저, 저기, 정말 감사드립니다!"

힘찬 소리와 함께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허리를 굽히는 아이를 본 이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뭘 했지?'

요새 한 거라곤 연무장에서 훈련한 것과 체력 훈련밖에 없던 터라 뭐가 고맙다는 건지 감조차 잡을 수 없어 다시 리나를 바라봤지만, 그녀도 사정을 모르는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무슨 일이지?"

어쩔 수 없이 고개 숙인 퍽에게 물어보자 눈물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 저, 저희 부모님이 돈을 받아 약을 살 수 있었다고 편지가 와서요.... 이제 괜찮으시다고 하셨어요! 감사합니다!"

"그… 계약금을 받아서 고맙다고?"

"네! 정말 주실 줄 몰랐는데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대체 어떤 악명이 퍼져 있길래 주기로 한 계약금을 못 믿는 걸까. 언제 한번 반드시 세간에 퍼진 소문들을 하나씩 확인하리라고 다짐하면서 퍽에게 다시 물었다.

"돈과 약? 부모님이 아프신가?"

"네? 아, 네. 마물 멧돼지에게 당한 후로 아버지가 일을 못 하셔요. 어머니께서 대신 약초꾼을 하시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물 사냥으로 수입 대부분을 충당하고 있는 이 기형적인 영지에서 남자가 다친다는 건 가정이 흔들린다는 걸 의미한다.

"치료는? 영주성에서도 마물에 당한 사냥꾼을 지원하고 있을 텐데?"

그런 만큼 사냥꾼과 병력에 대한 지원도 철저했다. 병자는 성직자를 불러 치료하고 치료할 수 없는 경우 종잣돈을 내준 뒤 후방에 있는 대도시 리어로 보낸다.

모너가의 영지는 영지로서의 성격보다 마물을 막는 최전방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했기 때문에 영지민의 안전과 복지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그, 그게… 치료를 신청하려면 돈을 내야 한다고...."

순간 인상을 구긴 이안이 퍽을 바라봤다. 조절되지 않은 살기가 뿜어져 나오자 울상을 지은 퍽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니야. 잘못한 게 없을 땐 사과할 필요 없어."

살심을 억누른 이안이 퍽을 달랜 뒤 먼저 돌려보냈다.

'고작 한 명으론 경고가 부족하다는 건가.'

로베르토의 역할은 분명했다. 공작가가 더 이상 범죄를 좌시하지 않으리란 경고를 보내는 것.

지금 영주성에서 벌이고 있는 모든 조사도 아직도 광장에서 말라 죽어 가고 있는 로베르토도 부정과 부패를 막아 영지를 안정시키기 위한 긴급조치에 가까웠다.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니라서 참고 있었건만.'

당장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없어서 보낸 경고장이 영 부실했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개 같은 것들이 개싸움을 원한다면 응당 가서 짖어 줄 수밖에.

결심을 세운 이안이 리나를 바라보며 명령했다.

"리나, 레이나에게 말해서 퍽의 부모님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받도록 도와줘. 그 후에 단원 중에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그쪽도 레이나에게 말하면 잘 처리해 줄 거야."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것처럼 더없이 차가운 목소리 사이로 짙은 살의가 묻어 나오는 걸 확인한 리나가 고개 숙여 대답했다.

"네, 공작님."

연무장을 떠나는 이안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올라갔다.

* * *

영주성 감사부는 창립 이래로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소공작이 밝혀 낸 행정관 로베르토의 비리를 조사하는 도중, 가뜩이나 부족한 감사관 중 40%가 돌연 사직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물론 퇴직을 신청한 이들이 뒷돈을 받아 온 감사관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같은 건물에서 일했던 만큼 감사부는 이 일을 조용히 묻어 두고 눈앞에 산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뿐이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최선이 곧 최고의 결과를 낼 수는 없는 법. 좀처럼 나가지 않는 진도에 원형 탈모가 생긴 감사부장이 대뜸 부하들을 닦달했다.

"야! 나가서 뭐라도 건져 와 봐! 기욤 상회랑 직스 상단은 뭐래?!"

"당연히 그쪽은 전혀 모르는 사실이라고 하죠.... 심지어 상단에 들어가서 서류만 보고 나오겠다는 데도 용병으로 입구를 막던데요?"

"아아아악! 그럼 어쩌라고! 치안대에는 연락해 봤어?"

"그쪽도 지금 손이 부족할 지경이라… 거기다 되도록 상인협회를 건들지 말라는 지령이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개소리! 미친 소공작은 범죄를 찾지 못하면 우리 목을 걸라 그러는데, 정작 범인은 건들지 말라고? 씨발, 진짜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오만상을 찌푸린 채 답 없는 고민을 하던 부장이 일단 말을 이었다.

"그럼 다음, 다음으로 리스트에 있던 게 뭐였지?"

"어… 그, 성직자들이 치료를 거부했다고… 그걸 행정관한테 뒷돈을 주면서 신고하지 못하게 했다나 봐요."

"허! 한쪽은 금력불가침이고 한쪽은 신성불가침이네? 아주 영지 꼴 잘 돌아간다!"

답답한 상황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오른 부장이 소리칠 때, 유령보를 쓴 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안이 작게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진짜 영지 꼴 잘 돌아가는군."

"그러니까 말이다. 휴, 리스트의 다음 안건은 뭐였지? 성직자랑 상인들이었으니까 다음은 뭐 우리 소공작님 마약 커넥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무력감에 몸을 떨던 부장이 어디선가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순간 흠칫했다. 천천히 벌린 손가락 사이로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날카로운 눈매, 비열한 미소, 전체적으로 비정하고 망나니 같은 느낌이 꼭....'

"감사부장?"

"…소공작님을 뵙습니다!"

부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절도 있게 경례하자 감사부에 남아 있던 모든 감사관이 하나둘 눈치를 보며 경례했다.

"소공작님을 뵙습니다!"

* * *

"그래서 성직자들이 치료를 거부한다고?"

감사부장 베인의 안내에 따라 그의 사무실에 들어선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 네. 사실 영지에서 품위 유지 명목으로 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만, 워낙 부상자가 많아 철야를 반복하는 터라...."

"허, 신에게 귀의한 몸으로 성력을 쓰면서 돈이 필요하다고?"

"네. 성력 확보를 위해 돈이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미친놈들...."

로스트 크로니클의 성직자가 썩었다는 건 비밀도 아니다. 아마 시골 영지의 아무나 잡고 물어봐도 성직자를 좋게 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 모너 영지에서만큼은 달랐다.

성황이 직접 모너 영지를 고행의 전당으로 선포하고 모든 예비 성직자에게 신의 뜻에 따라 병든 자를 치료하라 명했기 때문이다.

더 깊이 파고들면 타국에 있는 마물의 숲에 성국의 병력을 지원하기 싫었던 성황이 아쉬운 척하며 치료도 제대로 못 하는 예비 성직자를 던져 준 것에 불과하지만.

"후… 그럼 그냥 몇 푼 더 쥐여 주고 치료를 계속하라고 하면 되지 않나?"

"그게, 벌써 몇 번이나 품위 유지비를 올려 줬다고 합니다. 심지어 영주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 같은 경우에는 촌장을 대신할 권한까지 쥐여 준 경우도 허다하고요. 그런데 놈들이 치료할 때마다 신에게 헌납금을 바치지 않으면 치료할 수 없다고 우기는 탓에...."

그 말에 할 말이 없어진 이안이 베인을 바라봤다.

"그 버러지들이 감히 돈 몇 푼 때문에 내 영지민이 죽어 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단 말이지...."

설마 이안의 광증이 도질까 조마조마해 하던 베인이 심상치 않은 이안의 모습에 벌떡 일어났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공작님. 저희가 잘 해결해 보겠습니다."

물론 그에게 해결 방법 따위는 없었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성직자들이 이제 와 자세를 낮출 리도 없고 그들을 설득할 만한 좋은 방안도 생각나지 않았다.

단지 눈앞의 망나니가 성직자와 척지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안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매일 수천 명의 부상자가 생겨나는 이 영지가 성직자에게 버림받는다면 이 영지에 미래는 없다는 생각에, 베인은 최대한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성직자들이라고 하면 역시 신의 뜻을 듣는 이들 아니겠습니까? 제가 성국에 연락해 이들의 방만함에 대한 탄원서를 보내면 그 후에는 성직자들도 신의 뜻에 따를 테니 걱정하지 마십쇼."

베인은 말을 하면서도 툭하면 폭력을 휘두른다던 광인의 광증이 눈앞에서 터지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까. 그의 말을 들은 이안이 크게 기뻐하면서 그의 어깨를 연신 두드리며 말했다.

"맞아, 바로 그거야! 놈들이 직접 신의 뜻을 들어야 하지 않겠어?"

순간 미친놈이 뭔가 저지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지만, 베인은 웃는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퇴역 군인인 베인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이 영지를 진심으로 아꼈다. 그러니 소공작이 자기가 얻은 첩들과 주지육림의 파티를 벌이든, 마약굴을 만들든, 성직자를 건드는 것보단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고개 숙인 그는 살의로 번뜩이는 이안의 눈빛을 보지 못했고, 성직자가 직접 신의 뜻을 듣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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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연무장으로 돌아온 이안은 즉시 리나와 레이나를 찾아 명령을 전했다.

"그러니까… 공작님, 죄송하지만, 한 번만,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시겠어요?"

리나가 입을 쩍 벌린 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안에게 묻자, 이안이 웃으며 답했다.

"간단해. 우리 대원들을 시켜서 며칠은 대성당의 소문 좀 파악해 봐. 어떤 소문이 퍼졌는지, 특히 누가 죽일 놈인지. 영주성 인근 사람들 전부에게 물어서라도 확실히 알아 와야 해. 감사부에 들러서 혹시 확인된 신고가 있다면 문서를 요청하고."

"네, 그건 알아들었어요. 그다음이 문제죠."

"첫 임무니까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걱정할 필요 하나도 없어. 너희는 아무것도 안 하고 문만 지키고 있을 테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리나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이안을 바라봤다.

"대성당에서 성직자를 죽이시겠다고요? 천벌을 받을 거예요! 아니 그보다 성직자를 죽인다고 뭐가 변하겠어요? 그냥 더 많은 사람이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겠죠! 레이나, 너도 뭐라고 말 좀 해 봐!"

이안의 비현실적인 계획을 받아들이지 못한 리나가 레이나를 향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레이나는 살며시 웃으며 이안의 곁에 섰다.

"전 도련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벌써 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 만큼 리나는 그 미소 사이로 엿보이는 광기를 느낄 수 있었다. 레이나가 저런 미소를 지을 때면 항상 대련에 불필요한 피가 흘렀던 것이다.

"너, 너!"

리나가 쌍심지를 켜고 레이나를 째려보자 레이나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덤덤히 말했다.

"도련님의 첫 번째 명령인걸. 나는 목숨을 걸고 지킬 거야. 그럼 도련님, 저는 조금 더 훈련하러 가 보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레이나가 철퇴를 애착인형처럼 안아 든 채 총총거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으면 된다는데 무슨 훈련이 필요한지, 저 망할 철퇴는 왜 또 껴안고 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리나가 이안을 바라보며 마땅한 단어를 찾아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걱정하지 마. 내 영지민들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아."

할 말은 많다. 성직자를 죽이는 건 신성 제국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다. 단순히 홧김에 죽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닐뿐더러 정치, 외교적인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

수십, 수백 개의 충고가 입속에서 맴돌다가도 단호한 이안의 눈빛을 보면 꿀이라도 먹은 듯 한마디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레이나의 말처럼 스스로 모시기로 한 이안의 첫 번째 명령이다. 착잡한 표정으로 리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애들한테 전하고 올게요."

"아, 오는 길에 퍽 좀 데려와 줘. 나머지도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하지."

"네."

모처럼 만난 동료들과 함께 지옥에 떨어지겠다는 생각에 어깨를 잔뜩 숙인 리나가 뒤돌아 나가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안이 작게 미소 지었다.

"신뢰가 –100이라 믿지 못하는데도 따르겠다는 건가?"

리나는 자신을 믿지 못한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레이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랬다.

'어쩌면 레이나도 믿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단지 이안에 대한 애정이 불신을 덮을 만큼 커다란 걸지도.'

이건 저주다.

리나에게 무술을 가르치고 그녀가 알고 있는 이안과 전혀 다른 모습을 매일 보여 줘도 깊게 뿌리내린 불신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신뢰도를 천천히 쌓아 0까지 만드는 일은 목숨을 걸어 줄 동료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터.

그러니 이안으로서 가져야만 하는 건 믿음을 줄 필요도, 강요할 이유도 없이 오로지 명령에 따라 움직여 줄 맹목적인 전력이다.

"진짜 기사들의 충성심이라...."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리나에게서 게임을 할 때마다 멍청하다고 욕하던 기사들 특유의 충성을 조금 맛본 것 같아 가슴 한쪽이 간질거렸다.

* * *

잠시 후 부름을 받고 달려온 퍽은 이안을 보자마자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대장님!"

첫날 면접을 못 보게 하면 복도에 똥을 싸겠다며 협박하던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이안을 바라보는 퍽의 눈동자에는 두려움도, 조급함도 엿보이지 않았다.

"레이나 씨가 부모님께 성의 치료사를 보냈다고 들었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대장 아니고 소공작. 무기는 정했다고 했지?"

"네. 정하기는 했는데...."

퍽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연무장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목검을 꺼내 들었다.

"저는 그냥 목검이 제일 좋더라고요."

"검 좋지. 괜히 만병지왕(萬兵之王), 모든 무기 중의 왕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니까."

아쉽게도 검에 대한 비기는 그만큼 많다.

"검과 관련된 비기는 하루 이틀 만에 전하기에는 너무 많아. 일단 내려치기부터 시작하자. 내려치기, 횡베기, 찌르기, 순서로 10번만."

"네!"

대답과 함께 퍽이 힘차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흠....'

느리지만 정확한 움직임. 검에 조예가 깊지 않은 이안이 보기에도 열다섯의 움직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한 내려치기였다.

'분명 검이 손에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이안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퍽의 검에는 이렇다 할 특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나가 무의식중에 급소를 노리고 레이나가 혈맥을 노리듯 특별한 특성이 있는 사람은 무의식중에 특성에 가까운 검로를 찾아가기 마련인데, 퍽의 검은 흔들림 없이 정확하고 깔끔했지만, 단조로웠다.

'분명 영웅급의 특성인 것 같기는 한데....'

"좋아. 일단 하나씩 해 보자."

그렇게 둘의 훈련이 시작됐다.

* * *

이 주 후.

퍽은 결국 특성을 개화하는 데 실패했다. 이안도 퍽도 아직 포기하지 않았지만, 언제까지고 훈련을 계속할 수 없어 잠시 휴식기를 가지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총 20개 중 19개의 특성이 개화됐다. 아쉽게도 운 좋게 비전을 통해 특성을 개화한 리나나 레이나와 달리 다른 대원들은 비전을 익히지 못했다. 영웅들의 비전을 익힐 재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훈련 과정에서 가지고 있던 특성을 깨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단지 그뿐. 게임 속 일인 군단에 비견하던 영웅들의 비전을 익힐 만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뭐 대신 저항군의 비전을 익혔으니까.'

대신 나머지 사람들은 게임 후반 등장하는 저항군 마나 수련법과 검법, 보법을 익히는 중이다.

전 인구의 병력화라는 거창한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저항군의 비전은 게임 속에서도 레전더리 아이템에 속할 만큼 성능이 좋았다.

'한계가 명확하다는 점만 빼면 말이지.'

특성과 무관하게 익힐 수 있지만 성취가 늦고 대성하기 힘들다는 문제 때문에 실제 게임에서는 비전이 만들어질 때쯤이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은 몬스터의 침략으로부터 10년 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복병을 준비하기에 차고도 넘치는 시간이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이안은 리나, 레이나 그리고 20명의 대원 전원과 함께 성을 나섰다.

아침 체력 운동을 제외하고는 연무장을 벗어나지 않던 소공작이 갑자기 성 밖으로 향하자 영주성의 관리와 가신들이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영주성 인근 대성당으로 향했다는 전보를 받고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종종 그래 왔던 것처럼 성직자를 찾아가 독을 검사하라며 행패를 부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완전 무장한 22명의 대원과 검은색으로 광을 낸 가죽 갑옷을 차려입고 무늬가 없는 백색 가면을 쓴 이안이 대성당 근처까지 도착한 뒤, 이안이 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 다칠 일도 없고 싸울 일도 없어. 그저 자리를 지키고 그 누구도 못 나가게만 하면 되는 거야."

벌써 몇 번이나 했던 이야기지만 막상 일이 시작되면 어떻게 꼬일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대원들에게 말했다.

"이곳으로 도망쳐 오는 건 성직자밖에 없을 거야. 성기사는 성전에 침입한 적을 두고 볼 수 없을 테니까. 싸우지 마. 내키지 않으면 무기도 들지 마. 그냥 몸으로 막아도 돼. 적어도 오늘은 너희가 책임져야 하는 일은 없어."

말을 마친 뒤 영 믿음직스럽지 않은 대원들을 둘러봤다. 평균 나이 18세, 훈련 기간 총 3주의 핏덩이들.

무기를 잡기에도, 실전에 뛰어들기에도 이른 시기다. 도망치는 성직자를 죽이라고 시켜서 준비가 덜 된 이들에게 마음의 짐을 씌울 생각은 없었다.

이건 일종의 훈련이자 솎아 내기다. 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 전에 쓸 만한 인재를 골라내기 위한.

앞으로 내가 걷고자 하는 길은 악의와 오욕으로 점철될 것이고 내 옆에선 이들은 비난과 멸시, 조롱을 견뎌야 할 테니, 성직자의 죽음을 방관하는 건 첫 임무로 썩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한 이안이 무늬 하나 없는 백색 가면을 바로 쓰며 조용히 뇌까렸다.

"그럼 시작하지."

천천히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이안의 뒤에 철퇴를 든 레이나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 * *

"기사님, 제발, 제발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

"저리 꺼져! 네 누나는 신을 모시기로 했다고!"

"아니에요, 저희 누나가 성직자님을 데려오겠다고 했는데, 누나도, 성직자님도 오지 않았어요!"

"에이, 좀 꺼지라고!"

퍽!

"커억! 아, 안 돼, 누나!"

"너 이 새끼, 좋은 말로 할 때 알아들었어야지. 내가 운 좋은 줄 알고 곱게 돌아가라고 했지!"

콰득!

"커, 커헉!"

끝까지 기사의 발에 매달린 채로 애원하던 아이는 성기사의 발길질에 차이고도 다시 성기사에게 매달리려고 했지만, 성기사는 아이의 복부를 주먹으로 후려친 뒤 성당 밖으로 집어 던졌다.

"젠장, 아침부터 재수가 없으려니까."

소공작이 온다는 소식에 안 그래도 성당에 비상이 걸렸다. 놈이 최근 들어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다닌다는 것은 익히 들었던 터라 그 엉덩이 무거운 주교마저 절대 그 망나니를 자극하지 말라며 경고를 내렸다.

'물론 제깟 게 감히 신의 땅에서 무슨 짓을 하겠냐만.'

매년 이맘때쯤, 광증에 시달리는 소공자가 주교에게 해독과 축복을 요청한다는 사실은 대성당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번에도 똑같겠지 뭐, 다들 괜히 걱정이라니까.'

특별한 일은 없겠지만, 시장 한가운데서 말라 죽어 가고 있는 행정관의 얼굴이 생각나 괜히 불안한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놈이 미친 척하고 검을 꺼내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의 아들로서 자비를 베푸는 게 옳은 것인가 아니면 감히 신의 전당에서 검을 뽑아 든 악을 처단해야 하는가.

그런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결국 망나니 때문에 모두가 힘들어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신이시여, 그런 망종을 어찌 가만 놔두십니까."

작게 성호를 그리며 신에게 원망을 전한 뒤 자신의 경계 위치로 돌아서려 할 때, 백색 가면을 쓴 남자가 그의 앞길을 막았다.

"팔라딘 퓨리스트?"

온몸을 덮은 검은색 외투와 얼굴을 가린 민무늬의 흰색 가면. 어딘가 불쾌한 조합이었다.

단언코, 신의 전당에서 할 수 있는 행색은 아니었다.

"뭐야 넌? 여긴 어떻게 들어왔냐? 여긴 교인들이 예배하는 공간이고, 치료받으러 온 거면 저쪽으로 가라."

요즘 문둥병이 유행이라더니 하필이면 얼굴에 난리가 난 건가 싶어 놈에게 손짓해 보내려 했으나 놈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가면 너머로 보이는 광기 어린 눈빛이 보였다.

"팔라딘 퓨리스트?"

놈이 똑같은 질문을 반복할 때쯤, 목소리에서부터 느껴지는 냉혹함과 살을 저리게 하는 살의에 잔뜩 긴장한 퓨리스트는 검을 뽑아 들고 그게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강하게 움켜쥐었다.

"감히 어디서 성기사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누군지 몰라도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줄 테니, 그냥 가라."

여유로운 척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예전 모너 영지에 막 부임했을 당시 최전선에서 느꼈던 그 아찔한 생명의 위협보다 더 선명한 죽음이 엄습해 오는 것 같았다.

'위험해.'

온몸의 신경이 상대가 방심하고 있는 지금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을 쳐 댔다.

놈이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든지 간에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야 할 정도라면 절대 좋은 의도는 아닐 터.

'죽인다.'

검에 마나를 실은 퓨리스트가 백면을 쓴 남자를 향해 달려들기 직전, 어느새 옆까지 다가온 남자의 악의에 젖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팔라딘 퓨리스트, 신께서 보자고 하셨다."

서걱!

성기사 중 가장 낮은 직급이었지만 소드유저의 최상위라는 3성급의 기사치고는 허무한 결말이었다.

* * *

"이 정도인가."

이안이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에 가볍게 몸을 떤 뒤, 떨어져 있는 퓨리스트의 머리통을 들었다.

"팔라딘 퓨리스트, 미성년자 납치, 감금, 강간, 폭행으로 신고 건수가 32건이나 있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성당 기둥 뒤에 숨어 있던 레이나가 웃으며 다가오다 바닥을 적신 피의 열기에 흠칫 멈춰 서더니 시선을 돌렸다.

'피가 무서운 건가?'

하긴, 바닥을 구르는 머리통과 피를 뿜어 대는 시체는 아무리 그녀라 해도 웃으며 볼 수 없는 광경이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리나가 옆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만… 좋겠다...."

연이어 들리는 꼴깍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

이안은 그 모습을 모른 척 외면한 뒤 한 손에 성기사의 머리통을 든 채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펴낸곳 │ 제이플미디어(주)

마케팅 │ 한재혁

주 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 288, 204호(구로동, 대륭포스트타워1차)

전자우편 │ jplusmedia@hanmail.net

홈페이지 │ www.jayplemedia.com

ⓒ올가미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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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저벅, 저벅, 저벅.

이안이 걷는 복도를 따라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은 팔라딘의 머리에서 더러운 피가 한 방울씩 떨어졌다.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알아달라는 듯, 순백의 타일 위로 떨어진 피가 타일을 붉게 물들였다.

떨어진 빗방울에 우연히 고개를 든 누군가가 우연히 이안을, 더 정확히는 그가 들고 있는 머리를 발견했다.

"꺄아아아악!"

귀가를 찌르는 날카로운 비명에 더 많은 사람이 이안을 발견하고 순식간에 혼란과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갔다.

"살인, 살인이다!"

"살인자다!"

"퓨리스트 경?! 팔라딘 퓨리스트가 죽었다!"

이안은 자리에서 서서 번져 나가는 혼란을 묵묵히 지켜봤다.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사제들과 떨리는 다리로 이안의 앞을 막아선 교인들.

'누구의 신앙이 진짜일까.'

성력이 개인의 신실한 신앙에 대한 신의 선물이라면, 어째서 성전을 지키기 위해 살인자의 앞을 막아선 교인들이 아니라 제 몸을 지키기 위해 피신한 저 돼지들이 성력을 가지고 있는 걸까.

저 알량한 성력이 금화에 팔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신이 그만큼 인간에게 무신경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앞을 막아선 교인 중 하나가 소리쳤다.

"신성한 성역에서 생명을 빼앗다니! 신이 벌할 것이다!"

"악마야! 악마가 분명하다!"

맹목적인 신앙이 두려움마저 가려 버렸는지, 성기사의 머리를 든 이안을 막아선 교인들이 하나로 뭉쳐 목소리를 키웠다.

"신벌을 피하고 싶으면 지금 당장 돌아가십시오!"

"회개해라, 이 악마야!"

"오오! 신이 우리와 함께한다! 악마는 절대 이곳을 지나가지 못할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이들은 피해자에 가깝다. 지켜지지 않은 신의 약속에 속은 피해자들. 신은 이들에게 평안과 안녕을 약속했지만, 두 손을 모은 채로는 그 둘 중 무엇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알려 주지 않았다.

"신의 뜻을 따르러 왔다."

소공작이 여기까지 와서 직접 팔라딘을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는 건 곤란했다. 어디까지나 아무런 힘도 없는 망나니가 생각 없이 자유 기사인 '백면(白面)'을 보냈다고 믿도록 만들어야 했다.

얼굴을 덮고 있는 백색 민무늬 가면은 정의롭고 강하지만 잘못된 충성을 바치고 있는 안타까운 기사의 상징이 될 것이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곧 신의 뜻이다. 신께서 신의 이름을 뒤집어쓴 악을 불러오라 하심에, 내가 나섰다."

백면을 쓴 이안의 목소리가 냉정한 교인들의 귓가에 울려 퍼지고, 이안이 천천히 그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감히 신의 이름을 더럽힌 추악한 죄인들을 도우려 하는가."

전신을 덮은 흑색 외투와 백색 가면, 그 기이한 조합과 살아 있는 것처럼 오금을 저리는 목소리에 멈칫한 것도 잠시, 교인 중 누군가 목을 옥죄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소리 질렀다.

"궤변이다! 사제들이 성기사를 불러올 때까지 악마를 막아야 한다!"

"놈의 혓바닥에 흔들리지 마라! 성역을 지켜라!"

"신의 뜻이 우리와 함께하리라!"

아예 자리에 앉아 기도를 올리는 교인들의 모습에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진정으로 성역을 지켜야 할 이들은 어디 가고 두 손 모아 합장밖에 못 하는 이들이 죽음을 불사한단 말인가.

'진정으로 신의 뜻을 믿는다면, 앞으로 벌어질 일도 신의 뜻이라 믿겠지.'

궤변이라고 소리친 남자에게 다가간 이안이 손에 마나를 둘렀다.

'죽지는 않게.'

그 맹목적인 믿음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믿음은 자유인 법.

이안은 결의에 가득 찬 표정으로 모은 두 손을 놓지 않는 남자의 머리채를 붙잡고 뺨을 후려갈겼다.

짜악!

"신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보고도 경계하지 않음이 죄요."

"커, 커억!"

혼이 빠지는 것 같은 충격에 교인의 깍지 낀 두 손이 자연스럽게 풀려 얼굴을 막았지만,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원래 모든 일에는 결과가 따르는 법. 머리통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함부로 욕하고 막아서면 안 된다는 기본적인 상식을 주입할 시간이다.

짜악!

"신을 믿지 않고 신의 이름을 팔아넘긴 자들을 믿은 것이 죄요."

"무슨! 이곳은 신성한 대성...."

짜악!

"신이 아니라 인간을 섬김에도 부끄러움 없이 침묵한 것이 죄다."

이미 정신을 잃은 남자는 말없이 늘어졌다. 이안은 쓰러진 남자를 옆으로 던지고, 다른 교인들을 바라봤다.

"너희도 같은 죄인이나 용서해 줄 테니, 꺼져라."

악마라 부르짖던 믿음은 어디로 갔는지, 경악한 눈으로 쓰러진 남자를 바라본 교인들이 하나둘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안은 그들을 뒤로한 채 복도를 따라 대성당의 심부로 들어갔다.

* * *

"뭐라고요?"

모너 영지에 파견된 주교 뎀녹이 얼빠진 표정으로 보고하러 온 성기사에게 되물었다.

"침입자가 팔라딘 퓨리스트를 죽이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팔라딘과 몽크 전원에게 소집 명령을 내렸습니다."

뎀녹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주변을 둘러봤다. 호화로운 장식으로 가득 찬 예식장의 심부, 신의 형상을 한 조각상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침입자가? 여길?"

도대체 세상 그 누가 감히 성역을 침범한단 말인가. 전쟁 시에도 종교만큼은 건드리지 않는 법인데.

"별 미친놈을 다 보겠군요. 치료를 못 받아서 죽은 지인이라도 있나...?"

어떻게 아픈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있냐며 하소연하는 이들은 매일 있었다. 생명을 구하는 일에 그 생명의 가치만큼 돈이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무능하고 이기적인 인간들.

평소라면 예비 몽크나 성기사를 시켜 흠씬 두들겨 팬 뒤 쫓아 버렸겠지만, 이 성역에서 살인을 일으켰다면 얘기가 달랐다.

"교인 몇 명을 영주성으로 보내 치안대를 불러오세요. 이 기회에 섭정관에게 단단히 항의해야겠어요."

안 그래도 돈을 더 뜯어 낼 명목을 찾던 중 제 발로 굴러 들어온 복이 아닌가.

"이 영지의 무뢰배들이 이렇게나 위험하니 우리도 치료할 때마다 치료비에 생명 수당을 요구해야죠."

뎀녹은 출렁거리는 배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십 년 전, 처음 이곳에 부임했을 때만 해도 이제 성직자로서의 경력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

이제 모너가 영토 전체에서 빛의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없고 성직자가 생명줄을 잡고 있는 한 그 누구도 교단의 뜻을 거스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번 기회에 상납금을 조금 더 높이면 대주교가 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겠군.'

성복을 입은 뒤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꿈이 손에 잡힐 듯해 몇 번이고 뱃살을 움켜쥐었다.

* * *

"멈춰라!"

복도를 걷던 이안이 뒤에서 들려온 고함에 뒤를 돌아보자 6명의 성기사가 길을 막고 있는 게 보였다.

"감히 성역에 피를 뿌리다니, 네 죄는 신께서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나선 기사가 검을 움켜쥔 채 이안을 위협해 왔다. 성기사 특유의 따듯한 신성력이 느껴지는 것이 제법 뛰어난 실력을 갖춘 성기사인 듯했다.

"부단장 크롬웰?"

"죄인에게 알려 줄 이름은 없다! 템플 기사단, 악을 멸하라!"

이안을 승진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본 부단장은 놈과 접전을 피하고 영주성의 치안대를 기다리라는 상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6명의 부하와 함께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사단장이 될 기회다!'

무려 대성당에서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다. 잡기만 하면 새로운 기사단장이 되거나 이단심문관에 지원할 수도 있을 터.

퓨리스트를 죽였다기에 긴장했으나 죄인의 몸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안은 검을 움켜쥔 채 달려드는 그를 바라보며 사형선고를 내리듯 조용히 읊조렸다.

"부단장 크롬웰 외 템플 기사단 6인. 신께서 찾으신다."

성력을 두르고 달려드는 기사들을 향해 이안이 퓨리스트의 머리를 던져 시야를 가렸다.

"감히!"

선두에서 달려오던 부단장이 재빨리 퓨리스트의 머리를 베어 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쏟아지는 뇌수와 그 사이로 찔러 오는 이안의 단검이었다.

콰직!

투구의 이음새를 정확히 노린 이안의 단검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부단장의 목을 꿰뚫었고, 뿜어져 나온 선홍색 피가 이안의 몸을 적셨다.

부단장은 급히 성력을 끌어 올려 뚫린 목을 움켜쥐었지만, 고작 4성급 초입에 불과한 그의 성력으로는 뚫린 목을 치료할 수 없었다.

"그르륵...!"

애초에 상대의 역량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부단장은 실력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목숨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 * *

몸을 적시는 더운 피에 오감이 날카로워졌다. 갑자기 몸에 활력이 생기고 근육이 질겨진다.

[피의 욕망이 발동됩니다. 공격력과 공격 속도가 증가합니다.]

[버서커 상태에 진입합니다. 피의 욕망이 광기를 일으킵니다.]

[부동심이 광기에 저항합니다.]

[스틸하트가 광기에 저항합니다.]

품에 안긴 채 죽은 성기사를 밀쳐 내며 가볍게 몸을 털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양감과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에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마저 느껴졌다.

'한 명에 한 방씩. 네놈들이 믿는 신의 곁으로 보내 주마.'

이건 일종의 애프터 서비스 요청인 셈이다. 제품에 문제가 있으면 응당 서비스 제공자에게 항의하기 마련 아닌가. 그러니 눈앞의 불량품들을 신의 곁으로 보내 빠른 A/S를 요청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사이에 놈들은 그토록 만나길 바라 마지않는 신을 독대할 수 있을 테니 그야말로 윈윈, 상부상조를 위한 대출혈 서비스가 아닐 수 없다.

"죽어라!"

진을 이룬 성기사들이 다섯 방향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을 피해 공중으로 피한 뒤, 한 명의 목을 다리로 감싸 안았다.

"갑옷이 부러질 것...."

콰드득!

놈은 발힘으로 철을 구부릴 수 없다고 믿은 모양이지만, 아쉽게도 놈이 틀렸다.

'광신도라 그런가? 이상한 믿음이 있단 말이야.'

마치 자기가 소설 속 주인공인 것처럼, 눈앞의 악당쯤이야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라 믿었을 것이다.

무려 팔라딘의 머리통을 붙잡고 당당히 대성당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긴장한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잘난 신앙심이 그들에게 잘못된 믿음을 준 모양이다. 전능한 신이 자신을 도와 악을 벌할 테니 절대 지지 않으리라고.

그러나-

"주체가 틀렸어."

다리 힘만으로 옭아맨 목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 뒤, 찔러 오는 두 개의 검 사이로 몸뚱이를 던져 검로를 방해했다. 나머지 두 개의 검이 머리를 쪼갤 듯 매서운 기세로 내려쳐 왔으나 바닥을 굴러 피했다.

팽!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바로 옆을 지나가는 검과 설마 내려치는 검을 향해 굴러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기사.

"내가 악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역수로 쥔 단검을 뿌리듯 놈의 눈을 향해 던졌다.

챙그랑! 카득!

기사가 검을 놓고 급히 단검을 손으로 막았으나 마나를 담은 단검은 손을 꿰뚫고도 나아가 원래 목표였던 눈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내 쪽이 정의야."

굳은 얼굴을 한 성기사들이 다시 한번 이안을 포위했다.

그중 가장 직급이 높아 보이는 기사가 전의를 높이기 위해 동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잠시만 버티면 된다! 이미 다른 성기사들과 성직자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방어에 집중해라!"

세 명의 기사는 검을 치켜든 상태로 거리를 벌렸다.

성기사의 장점은 뚫을 수 없을 정도로 강건한 방어력. 쉽게 죽일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알았으니, 도움이 올 때까지 자리를 지킬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안타깝게도, 상대가 좋지 않았다.

"세상에 무너지지 않는 성벽은 없다."

바닥에 쓰러진 기사의 눈에 박힌 단검을 꺼내 든 이안은 성기사를 바라보며 호흡을 조절하고 귀왕의 보법을 따라 걸었다. 그러자 이안의 신형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사술이다!"

이안을 경계한 기사 중 한 명이 소리쳤을 때는 이미 신형을 날린 이안이 눈앞까지 다가온 뒤였다.

콰득!

이안의 단검이 기사의 관자놀이를 꿰뚫고, 다른 두 명을 향해 품에서 두 개의 단검을 꺼내 던졌다.

챙! 챙!

둘 모두 던진 단검을 막는 데 성공했지만, 이어 짓쳐들어오는 이안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온몸의 근육을 한계까지 응축시킨 뒤 폭발하는 내뿜는 일격.

'살(殺).'

서걱!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 기사의 투구와 목을 한 번에 분리시키자, 홀로 남은 기사가 주저앉으며 검을 놓쳤다.

"이, 이럴 수는 없어… 고작 한 명이 도대체 어떻게...."

두 손으로 기어가는 기사의 가랑이 사이로 오줌이 흘렀다.

"자, 이제 그만 가자. 신께서 기다리시겠다."

"잠깐, 제발, 제발! 내가...."

연신 손을 휘젓는 기사에게 다가간 이안이 무신경한 얼굴로 기사의 미간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망겜 속 공작가의 망나니로 살아남는 법 (연재)

지은이 │ 올가미

펴낸이 │ 김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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