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가짜 얼굴, 본성(2)
'뜨인 눈'이 발현되고 난 뒤부터 알파스는 온몸을 난자당했다.
극심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는 알파스 머리 위로 '공포'를 상징하는 짙은 보라색 아지랑이 계속 피어나고 있었다.
그래도 반격하려는 의지가 있는 것인지 녀석은 팔의 절단면을 부여잡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마..., 놓친 검을 찾기 위해서겠지.
알파스는 검을 찾느라 정신 팔린 나머지 내게 등을 보였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계속 주변 두리번거렸다.
"감히 제 앞에서 등을 보이다니, 데몬도 그런 짓은 안 합니다."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러 녀석의 등을 베었다.
"크아아아악!"
고꾸라지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가까스로 실소를 참아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유리안'의 악의적인 본능.
'뜨인 눈'으로 격해진 이 모든 감정을 수용해 버렸다간,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허억.... 허억."
알파스는 쓰러진 채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야 검을 발견했는지, 흐릿한 녀석의 동공은 자신의 검을 들고 있는 잘린 오른팔로 향해 있었다.
당장 땅을 박찬다면 가까스로 닿을 수 있는 거리.
"끄아아아아악...!"
"제 앞에서 검을 들려면 제 허락이 필요합니다."
물론 허락할 생각은 없다.
난 녀석의 복부를 짓밟고, 무게를 실었다.
알파스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왼팔과 오른 다리로 나에게 관절기를 시도하려 했다.
동시에 마나혈로부터 마나를 쥐어짜 순간적인 신체 강화를 통해 내 몸을 쓰러뜨리려고 했으나.
지금 나에겐 그런 그의 모습은 거북이가 기어가는 것보다 느리게 느껴졌다.
"크억...!"
"이게 최선입니까?
난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알파스의 명치 쪽으로 살며시 검을 박아넣었다.
마나혈인 '대혈맥' 개문(開門)이 위치한 곳.
극심한 통증과 함께 마나혈이 손상되자, 알파스의 얼굴은 사색으로 물들었다.
남은 왼손으로 안간힘을 쓰며 가슴에 박힌 검을 뽑아내려 했으나, 그것에 둘러싸인 오러에 손가락만 잘려 나갈 뿐이었다.
"크, 크큭...."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녀석은 손에 쥐던 힘을 풀었다. 그리고는 피를 머금은 웃음과 함께 나를 올려다보았다.
"테, 테넬론 아크 비숍께서 너를 총애한다고 해서... 다 가진 것처럼 행동하지 마라. 유리안!"
알파스의 말을 무시한 채, 검의 손잡이를 조금씩 돌리기 시작했다.
녀석의 숨통을 확실히 끊기 위해.
"비, 비숍들과 차기... 크윽! 비숍들… 대, 대부분... 크윽! 너, 너를 탐탁지... 않게 여, 여기고 있으니까.... 큭!"
조금 더 힘을 주자 거친 기침 소리와 함께 알파스의 입에선 피가 한 움큼 흘러나왔다.
"괴, 괴물 같은 놈... 지옥에서 기다리고...."
온갖 저주를 입에 담던 알파스의 고개가 옆으로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축 처진 녀석의 몸을 내려보고 있자니, 참으로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뜨인 눈' 때문인지 평소에도 뚜렷했던 격차가 이리도 벌어질 줄이야.
"이 정도 힘이라면 '검성'도 죽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도 모르게 나온 '유리안'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누구 들은 사람 없지?
"콜록... 콜록!"
뒤에서 들려오는 기침 소리에 놀란 난 재빨리 돌아봤다.
'아, 린네가 쓰러져 있었지.'
일단 큰 상처는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오러'를 운용하다 생긴 내상이 그녀를 이 꼴로 만들었으리라.
아버지의 복수.
원수가 눈앞에 있었는데도 무기력하게 쓰려져 버린 소녀
그러나 지금 린네에 비롯된 연민보다 따로 걱정해야 할 것이 있었다.
'들었나...?'
여전히 의식을 잃고 있는지, 아니면 정신을 차렸는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
만약 그녀가 깨어있었다면, 나와 알파스가 여명회에 관련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었을 수도 있다.
'조금만 유추한다면 내가 여명회에 속해있다는 걸 추론할 수 있을 법한 대화였지.'
물론 의식을 잃은 상태라면 듣지 못했을 것이지만, 그런 불확실성에 목을 매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흐음. 어떻게 하지.'
주연이 죽는 것은 원하지 않는 일이지만, 그것도 우선순위가 있기 마련이다.
난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가 검 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알파스와 마찬가지로 '앞으로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
멈칫.
그 모습에 난 린네를 향하던 검을 멈추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생각의 흐름은 '연기'의 수준을 넘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완벽한 '연기'지 '동화(同化)'가 아니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바깥에선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요란한 소리에 사람이 몰려든 것이다.
"이, 이건 대체!"
별관 안으로 들어선 아카데미 관계자들은 잔인하게 죽어 있는 시신과 여기저기 부서져 있는 별관 내부, 흩어져 있는 핏자국을 보더니, 당혹을 금치 못했다.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관계자 몇몇은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냈다.
"유, 유리안 경...?"
다행히도, 그 오해가 깊어질 일은 없었다. 다급하게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선 부교감 알롬 초르니가 나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
"아."
린네는 짧은 탄식과 함께 정신을 차려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하얀 색 천장과 벽지와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나는 유리병들이었다.
'아, 보건실이구나... 아얏.'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미미한 통증이 온몸을 뒤덮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안개가 낀 듯, 흐릿한 정신을 부여잡고 의식을 바로잡으니, 린네는 자신이 보건실에 오게 된 연유(緣由)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 '반반한 얼굴이 익숙하나 싶더니 데레인 론드벨, 그 기생오라비 놈의 딸내미였군.'
여명회 소속이자 저택을 습격하고 아버지를 죽인 괴한 무리 중 한 명인 알파스와의 조우.
- '꼴이 말이 아니군요. 이래선, 동문인 제 얼굴에도 먹칠하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동시에 자신이 이렇게 살아있는 이유 또한 떠올랐다.
스승이었던 하이든 라이히의 가르침을 오롯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사용하는 남자.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그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준 것이다.
린네는 두 눈을 질끈 감고는 침대의 시트를 꼭 쥐었다.
'...수치스러워.'
유리안에게 도움을 받아서?
전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것보단 자신의 나약함에 넌더리가 나서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지 못해서.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서.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소용돌이처럼 그녀의 머리에 휘몰아쳤다. 지금까지 자신의 노력은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일어났습니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할 무렵, 입구에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안 경."
평소라면 눈을 부릅뜨고 모욕적인 언사를 입에 담았겠지만, 린네는 꾸욱- 참았다.
저 남자가 자신을 구해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에.
일단 감사를 표하는 것이 먼저다.
'검성'의 수제자이자, 론드벨 가문의 영예로써의 명예를 더 이상 더럽힐 수 없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리안 경. 이 빚은 언젠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약한 동문에게 베푼 일말의 자비라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움찔.
유리안의 말에 린네는 치켜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그가 내뱉은 말에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묘하게 차분하군요. 제 말에 반박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지금 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럼 본인의 실력을 깨달으신 김에 이것도 재고해주십시오."
아무 감정도 안 느껴지는 말투와 함께 유리안은 품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이의 신청서.
유리안의 개인적인 견해를 재고(再考)해달라며, 린네가 학생처에 넘긴 서류다.
"오러 지속력의 부족은 당신의 결점입니다.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이런 이의 신청서를 작성하다니, 정말 파렴치하군요."
"이, 인정하지 못한 게 아니라...!"
"그렇다면 이런 신청서를 제출할 것이 아니라 제 의견을 겸허히 받아들였어야죠."
촤악──!
유리안은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실눈과 함께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린네가 제출한 이의 신청서를 찢었다.
테이블 위에 찢어발긴 서류를 올려놓은 유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셔츠의 윗단을 조정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풀이 죽은 린네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 말이 맞아....'
그의 말대로 의견을 겸허히 받아들였더라면, 저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유리안에 대한 반발과 알량한 자존심, 그리고 '천재'라는 이름에 취해 독선을 부린 것에 불과하다.
'대체 난 무엇을 위해 이토록 시간을 허비한 것일까?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아버지의 복수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난 대체 무엇을 위해──.'
"당신의 마나혈은 다른 이들보다 많습니다."
린네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유리안을 쳐다보았다.
"...네?"
"일반적인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죠. 대혈맥인 '개문'에만 마나를 축적하지 않고, 다른 대혈맥도 활용해야 할 겁니다."
린네는 당황한 나머지 유리안의 말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지금 조언해준 거야? 권력과 사치만을 원하며 온정은 뜬구름으로 보는 저 남자가?'
그녀는 멍하니, 유리안의 등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그런 걸 알려주시는 이유가 뭐죠?"
"동문이니까요."
동문(同門).
린네는 그 말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생각해 보니 나를 위해 한 말은 아닐 것이다. 분명 '검성'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며 돌려 말한 것이겠지.
그가 '검성'이란 이름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은 세간이 알고 있으니까.
"혹시.... 알파스는 어떻게 되었죠?"
"죽었습니다."
유리안의 그 말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런... 가요."
자신이 마땅히 이뤘어야 할 복수. 그 파편 중 하나가 손을 떠나자, 린네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완전히 의식을 잃었던 모양이로군요. 뭐, 다행입니다."
다행이라는 말에 린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당신과 알파스가 나눈 대화는 어렴풋이 기억나요."
흠칫.
그녀의 말에 당황한 유리안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가엔 늘 짓던 미소가 사라졌다.
항상 그랬듯이 당황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네."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유리안.
린네는 그 시선에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피하지 않았다.
- '...저는... 잃었습니다.'
말한 대로, 린네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 어느 정도 유리안과 알파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 '...그 사건 이후 저는... 아니, '유리안'이란 인물은 죽은 셈이 되겠군요.'
확실하지 않은 흐릿한 대화 내용 중에서 확실하게 뇌리에 남은 말들.
'잃었다'.
'그 사건 이후'.
'난 죽은 것과 다름없다.'
그 내용들을 한데 모아 간추린 린네는 결론을 내렸다.
유리안 또한 자신처럼 여명회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고.
"오해라고 하신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어디가.... 오해인 거죠?"
"전부입니다."
거짓말.
그녀의 직감은 유리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말했다.
"그러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발걸음을 옮겨 방을 빠져나갔다.
-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사실입니다.'
타인에게 정을 베풀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 또한 정을 받지 않겠다는 것.
남을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 또한 이해받지 않겠다는 것.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과거를 불문(不問)으로 부쳤다.
'바보 같은 사람.'
린네는 혀끝에서 씁쓸한 맛이 맴도는 것을 느꼈다.
저 남자의 가치관은 이해할 수 없지만 같은 복수를 바라는 자로서 그의 마음가짐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더 노력해야 해.'
그렇게 생각하며, 린네는 자신의 검집이 놓인 창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
한편, 유리안은 보건실을 빠져나온 직후 점차 발걸음을 빠르게 놀리기 시작했다.
'나와 알파스의 대화가 어렴풋이 기억난다고?'
가면을 쓴 듯한 실눈이 그의 감정을 가리고 있었으나, 빨라진 발걸음은 다급한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X된 것 아니야!?'
51화. 크라이파트 가문(1)
'여명회'의 밀정인 라즈롯은 담담한 유리안의 태도에 사뭇 감탄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평소처럼 난초를 관리하다니...…'
일반적인 사람이었더라면 하다못해 모종의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근래 벌어진 일들을 한데 묶어 자화자찬하거나, 갑작스레 신경질을 부리거나 그런 식으로.
그럼에도 유리안은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것처럼 평소와 같은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이걸로 에이든 경에 대한 보고를 간략하게 마치겠습니다."
"흠...."
그나마 관심을 내비친 것은 자신에게 어금니를 드러낸 여명회의 비숍, '에이든 드 도나시엥'.
현재 그의 행보에 대해 간단하게 보고를 한 라즈롯은 유리안의 짧은 탄식에 침을 삼켰다.
저 평온함 사이에서 간간이 내비치는 적의는 비수가 생각날 정도로 날카로웠다.
"딱히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군요. 알파스가 죽임을 당한 시점에서 확실하게 숨통을 끊기 위해 행동을 취할 줄 알았는데 말이죠."
나지막이 내뱉은 그의 말에는 대담함을 엿볼 수 있는 단어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목숨을 노린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저리도 평온하다니.'
자기 삶이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태도. 그 삶의 방식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라즈롯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밖에는 현재 여명회의 비숍, '핀텔' 경께서 혼석을 운반 중이라 짐작되는 상단을 습격하기로 하셨습니다."
"비숍 핀텔.... 혼석.... 흠."
유리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처럼 빙그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추천서는 제값을 해주었는지 모르겠군요?"
그런 미소와 함께 주제를 돌리는 유리안.
물론 저 의문이 단순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의 밀정이란 사실을 더욱 상기시킬 목적일 것이다.
"예, 덕분에."
"잘 되었습니다."
잘 되었다는 말과 함께 다시금 은근한 미소를 짓는 유리안.
감정의 명암(明暗)이 느껴지지 않는 실눈. 동시에 슬그머니 걸쳐진 입가에 웃음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했으니.
그 분위기에 라즈롯은 유리안이 두려움을 느낄 법할 일은 이 세상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
'...왜 이렇게 조용하지?'
'교관' 임무도 끝나 보고를 올렸고, 아카데미 별관에서 일어난 사건도 부교감 알롬에 의해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그런 내 머릿속에는 보건실에서 린네와의 나눈 대화가 자꾸 떠올랐다.
- '...사실, 당신과 알파스가 나눈 대화는 어렴풋이 기억나요.'
의식을 잃은 줄 알았는데....
그녀는 나와 알파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내가 '여명회'에 속해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을 법한 그런 대화를 말이다.
'분명 사람이 찾아올 것이라 예상했는데....'
검성, 또는 황실 측에서 사실 검증을 위해 사람을 보낸다면, 날 변호하기 위한 대본도 마련해둔 상태이다.
지금 테이블 위에 즐비하게 쌓아둔 서류가 바로 그것이다.
'제대로 못 들은 건 아닐까?'
린네가 눈치채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긴 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때의 린네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그럴 수 있다. '여명회'에 큰 원한이 있는 린네가 이걸 간과할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겠군요."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아직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아선 안 되겠지만, 며칠 동안이나 반응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에이든도 마찬가지일 테고.'
녀석이 내 목을 노리고, 알파스를 보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딱히 그에게 뭔가 보복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이든 라이히가 '검은 기사'로서 비숍 에이든의 숨통을 끊을 예정이니까.
"우리의 주인공께서 찾아갈 텐데 굳이 제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겠죠."
화려한 '검은 기사'의 무용담.
그것이 머리에 떠오르자, 내 입에는 빙그레 웃음이 걸렸다.
하이든 라이히가 '검성'이란 신분을 드러내면 곤란할 때 사용하는 숨겨진 신분.
조금 전 라즈롯이 언급한 '핀텔'을 처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검은 기사'라는 이름은 제도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에이든이 허튼수작을 부리는 것만 막으면 되는 일이지.'
일이 줄어든다는 생각에 내 입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후후. 후후후...."
그러나 그 웃음을 얼마 가지 않았다.
사람을 죽였을 때 느꼈던 끈적끈적한 감각. 그 불쾌한 느낌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딱히 신경 쓸 정도는 아니지만, '검은 기사'라는 이름이 대두되자 이 '유리안'의 감각이 심히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전에 본 '트레일러' 때문이겠지.'
어두운 제도의 골목길.
그곳에서 주인공, 하이든 라이히가 '검은 기사'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유리안'이 무참히 살해하던 그 장면.
처음 '유리안'에 빙의됐을 때만 해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하고 있었지만, <뜨인 눈>이란 특성을 사용할수록 '유리안'의 본능이 '이시후'가 가지고 있는 잠재의식을 계속해서 갉아먹는 것처럼 느껴졌다.
'먹히지 않기 위해 조금 더 수련할 필요가 있어.'
처음 <뜨인 눈>이 발현되었을 땐, 무자비하게 검을 휘두른 뒤 정신을 차렸으나 이번엔 끝까지 내 의지로 검을 휘두르지 않았는가?
'강한 육신에 강한 정신이 깃든다.'
그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이왕 생각난 김에 몸을 움직여야겠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하지 않았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난 검을 들고선 훈련장으로 향했다.
***
황궁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개의 훈련장 중, 난 3번 훈련장으로 향했다.
이곳은 비번이거나 임무가 없는 기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을 더욱 단련하여 지금보다 높은 순위의 기사단에 들어가기 위해 피땀 눈물을 흘려가며 검술을 갈고 닦고 있었다.
훈련장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이목은 내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유리안이다."
"꿀꺽."
서로 대련하는 자들도.
맹목적으로 검술을 수련하는 자들도.
모두 행동을 멈추고, 나를 힐끔거렸다.
개중에는 머리 위로 '공포'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자들도 있었다.
'새삼스럽지도 않군.'
그들을 뒤로한 채, 나는 무기 진열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손에 맞는 무기는 허리춤에 찬 월장석으로 만든 검이었으나, 새로운 무기를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다.
'기왕 몸을 움직이기로 한 것이라면, 새로운 가능성도 시험해봐야지.'
내가 진열대에서 꺼내 든 것은 다름 아닌 '창'이었다.
검과 달리 양손으로 잡아야 하는 무기.
그 탓인지 어쩐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창...?"
"유리안의 주특기는 검술 아니었나?"
"맞아, 괜히 '월광검의 유리안'이라 불리는 게 아닐 텐데."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던 주변 분위기는 내가 평소에 사용하지 않은 창을 들자 조금은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유리안 경, 창을 배워보실 생각이라면 저와 대련을 통해 그 감각을 익혀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처음에는 '공포'의 감정을 드러내던 이 녀석은 내가 창을 손에 쥐자, 비웃음을 감추며 대련을 요청한 것이다.
어떠한 기사단 문양도 없는 것을 보아하니, 아직 기사단에 입단하지 못한 견습기사인 듯했다.
'뻔히 보이는 의도로군.'
내 창의 숙련도가 미숙한 것을 노리고, 주변에 모인 기사단 관계자들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함이다.
하지만 딱히 거절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처음 잡아보는 창이라고는 하지만, 우두커니 허수아비를 치는 것보단 대련 쪽이 더 몸을 움직이는 보람이 생긴다.
'...예전에는 이런 대련조차 피했을 텐데 말이야.'
생각이 변해도 너무 변했군.
난 웃음을 지으며 '유리안'스러운 대답했다.
"후후. 제가 만만해 보였나 봅니다. 그럼 가볍게 해보시겠습니까?"
대련을 승낙하자, 자리는 순식간에 준비되었다. 훈련하던 수많은 기사는 모두 제 자리를 내주고 유리안의 대련을 구경하기 위해 주변으로 물러났다.
"창이라니.... 또 별난 짓을."
"아무리 잘난 놈이라도 무기가 다르면 제 실력의 절반도 나오지 않을 텐데."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군."
모인 기사 중 몇 명은 명백히 내 패배를 예상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 또한 처음 만져보는 창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평소 잡던 검보다 배는 긴 무기.
무게 중심을 잡는 축도 '검'과는 사뭇 달라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질 것 같지는 않군.
"흐아아아압!"
잠시 창의 무게 중심을 가늠하는 사이 대련이 시작되었다.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기사는 내게 달려들었다.
'검인가.'
내가 사용하는 무기이기에 리치가 어느 정도인지 쉽게 짐작이 갔다.
'창의 전투 방식은 긴 사정거리를 이용해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며, 상대를 무력화하는 것이겠지.'
쒜에에엑──!
가볍게 창을 내지르자 바람을 가르는 매서운 소리가 훈련장에 울렸다.
대련용 무기인지라 끝이 뭉툭했음에도 이 정도 소리가 날 줄이야.
그 덕에 깜짝 놀란 기사는 그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서는 과정에서 발을 헛딛어 자세를 잡는 것이 늦어졌다.
"이게 전부는 아니겠죠? 그런 실력이라면 어떤 기사단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놈의 주둥아리는 가벼운 대련에서조차 무의식적으로 상대를 비꼬는구나.
"이, 이이이익...!"
기사는 화가 잔뜩 났는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다시금 내게 달려들었다.
그 녀석에게 느껴지는 희미한 살기에 나는 다시 한번 창을 내질렀다.
하지만 녀석도 두 번 당할 바보는 아니었는지 내 공격을 예상하고 검으로 창을 받아내어 옆으로 밀어냈다.
비교적 길이가 짧은 검이 창에 비해 접근전이 용이 한 것은 전투의 기본
접근을 허용한다면 근거리에서 '검'을 상대로 공격할 수단이 없는 '창'은 패배한다고 보면 되겠다.
'물론 접근을 허용한다고 질 것 같지는 않지만....'
접근을 허용하는 순간, 아무리 익숙하지 않은 무기를 쓰고 있다 하더라도 그 드높은 '유리안'의 위신(委身)이 깎이게 될 것이다.
'일단 힘으로 밀어낼 수밖에.'
창을 쥐고 있는 내 팔에 파란색 힘줄이 더 불거지기 시작했다.
밀어내는 원심력을 이용해 난 기사의 머리로 창을 내리꽂았다.
깡!
나에게 검을 휘두르던 그는 머리로 오는 창에 놀라 황급히 검을 들어서 막았다.
"무, 무슨 힘이...!"
창을 막아내던 녀석은 자신의 검이 밀려 내려오기 시작하자,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땅에 발을 딛고 어떻게든 버텨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어림도 없다.'
빠직──!
내가 조금 더 힘을 주자, 창에서 불길한 소리와 함께 생긴 균열.
'자, 잠깐.'
동시에 갈라지기 시작한 창은 이윽고, 두 동강이 났다.
"크, 크아아아악!"
창이 부러지면서 내려치는 힘으로 기사의 가슴부터 배까지 부분을 가르게 되었다.
"크윽."
신음과 함께 물러선 기사는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자신 복부를 쳐다보았다.
부러진 부분이 날카로웠는지 셔츠를 가르고, 그 아래로 생긴 상처.
그곳에선 적지만 확실하게 피가 흘렀다.
'이런....'
대련 중에 생긴 불상사.
난 '유리안'답게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기사에게 다가갔다.
"고작 이런 실력으로 저에게 대련을 요청한 겁니까?"
고저 없는 나의 말에 기사는 피가 흐르는 자신 배를 쳐다보고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히, 히이익...."
화들짝 놀란 기사는 해괴한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 그의 머리 위에는 진한, 아주 진한 보라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련할 때만 해도 눈에 불을 켜고 덤비던 녀석이 갑자기 왜?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역시.... 유리안이다."
"대련이라 해도 어금니를 드러내면, 가만두지 않는다는 건가."
"가서 말려봐...!"
"저 괴물을 어떻게 말리냐."
창을 일부러 부러뜨리고, 그 파편으로 상처입힌 것이 주변 사람들에겐 '계획적인 고의'로 보인 것이다.
'과대망상 아니냐?'
자신이 이름을 날리기 위해, 비교적 익숙하지 않은 '창'을 잡았을 때 대련을 요청한 견습기사의 태도는 괘씸했지만, 그저 평범한 대련일 뿐이다.
그런데도, 어금니를 드러냈다고 상대를 죽일 정도로 '유리안'이 정신 나간....
'...충분히 가능하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이 분위기를 납득하고 말았다.
"유, 유리안...!"
그때 훈련장에 모인 인파를 뚫고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크라이파트 가문의 삼남, 헤란드 크라이파트다.
"헤란드 형님."
"두말할 것도 없는 너의 승리다. 그, 그만하는 게 어떻겠느냐?"
그는 평소처럼, 벌벌 떠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다행히도 그의 등장으로 살벌했던 훈련장의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들었다.
두려움에 떨던 견습기사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훈련장을 벗어났다.
"후후, 헤란드 형님, 아무리 저라도 사람을 쉽게 죽이진 않습니다."
난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헤란드에게 적당한 농담을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
"그... 그러느냐...? 그, 그럼, 아, 알다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내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헤란드의 머리 위에는 보라색 아지랑이만 풀풀 날릴 뿐이다.
52화. 크라이파트 가문(2)
훈련장에서 흘린 땀을 닦은 뒤, 난 헤란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황궁에서 뵙는 것은 오랜만이군요. 헤란드 형님. 무슨 용무라도 있으셨습니까?"
"자, 잠시 오른 의장님의 명으로 비서실에 다녀오는 길이다."
오른 의장이라.
그 이름이 언급되자, 난 헤란드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크라이파트 가문의 전(前) 가주이자, 귀족원로회의 의장.
그는 '혐오'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유리안을 싫어했다.
당연하다. 순혈주의인 오른 의장은 방계인 주제에 황실직속기관인 '감은 눈'으로 황실의 개가 됐음에도 그 유리안의 명성이 사대 가문보다 더 높았으니 말이다.
악명도 명성으로 친다면 말이지.
그나저나.
'오른이 비서실에.... 무슨 일이지?'
저도 모르게 관심이 생겼다.
"거, 걱정하지 말거라. 딱히 너와 관련된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야."
그런 내 생각을 어느 정도 눈치챘는지, 헤란드는 손을 휘휘 저으며 입을 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부정하는 그의 얼굴에선 거짓말의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다. 유리안."
"예, 형님."
"그... 밀레나 님의 유품 말이다."
밀레나의 유품?
아, 이전에 얻어 헤란드에게 맡긴 '혼석 목걸이'를 말하는 모양이군.
"정말 내가 가지고 있어도 되겠느냐? 너에게 각별한 물건이 아니더냐."
헤란드는 수염을 한 차례 쓰다듬으며,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을 빌미로 내가 자신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하려고 생각하는 듯, 당장 돌려주고 싶은 눈치다.
하지만 받을 수 없다.
딱히 보관해둘 장소도 없는 와중에 내가 '혼석'을 은밀히 습득했다는 사실을 여명회에서 알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조금만 더 보관하고 계십시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일단락되면 제가 직접 가지러 갈 것입니다."
"그... 그러느냐?"
일이 일단락된다는 말에 헤란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군.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형님. 가문 회의가 있다고 들었는데, 가주님께 안부 전해주시길."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다고 판단한 난 발길을 옮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훈련장에서 '창'을 시험해본 결과, 이 몸은 '검'뿐만이 아니라 다른 무기에도 재능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덕에 다른 무기들을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에 몸이 근질거렸다.
"...가, 가문 회의에 같이 가는 것은 어떻겠느냐, 유리안."
그러던 차, 헤란드의 갑작스러운 말에 난 다시금 시선을 돌려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헤란드의 머리 위로 '공포'의 색이 일렁거렸다.
"너, 너도... 크라이파트 가문의 일원이 아니더냐?"
"저는 방계입니다. 형님. '프라손'이란 딱지는 당신들이 붙인 것이 아니었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유리안'이라면 능청스럽게 웃으며 넘어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이 감정은... 뭐지? 분노?
"네, 네가 크라이파트 가문을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 감정은 내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유리안'의 표독스러운 분노,
그것을 받아내는 헤란드는 꽤 힘겨운 눈치였으나,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환경도, 대우도 너에게는 최악이었겠지. 밀레나 님의 장례도 형편없이 치러주었고, 심지어 우, 우는 소리가 듣기 싫다며 어린 널 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기억에는 없는 일이었지만, '밀레나'라는 이름이 다시 한번 언급되자 어쩐지 가슴 한구석에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화하는데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잠시 끓어오르던 분노가 조금 사그라들었을 뿐.
"과거의 일을 잊으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형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가문 회의에 참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을 자르고 내 의견 단호히 밝혔다.
"그러느냐...."
"예."
말끝을 흐리는 그에게 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난 '크라이파트' 정도 되는 가문과 척을 저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유리안, 그의 본능은 이성적인 '나'와 다르게 이미 어긋날 대로 어긋난 '크라이파트' 가문과의 화합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지.'
쓸데없는 일에 발을 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욱 크다.
분명, 콧대 높은 크라이파트 가문의 직계들은 내가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길 바라겠지.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더 이상 그만 말하마."
착잡한 속마음이 드러나는 표정으로 헤란드는 수염을 한 번 매만졌다.
이 겁많은 '크라이파트' 가문의 삼남은 표독스러운 다른 가문원들과 달리 정이 많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크라이파트 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거부감이 들지 않은 모양이다.
"밀레나 님의 건에 대해선... 정말 미안했다. 이 사과가 네게 큰 의미가 없다는 건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괜찮습니다. 오래된 기억입니다."
정확히는 경험한 적도 없지만.
"...하지만, 정말 괜찮겠느냐? 이번 가문 회의에는 요슈아도 참가할 예정이다. 최근 너에게 혼쭐이 난 막내 말이다."
아, 그것 때문에 가문 회의에 참여하길 바랐던 건가.
요슈아 크라이파트.
게임 스토리 상, 현 가주와 원로원의 오른 의장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자란 녀석은 가문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승승장구하며 결국 '차기 가주'라는 소리도 듣게 될 것이다.
"요, 요슈아가 가문 회의에 처음으로 참여하게 되는 만큼, 장로와 많은 가신의 관심이 녀석에게 쏠릴 것이 지당하다. 분명 이전에 있던 일로 너에게 처벌을 부탁할 수...."
"그건 걱정하지 마십쇼, 형님."
그의 걱정에 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식은땀을 흘리는 헤란드의 모습을 보니 썩 괜찮진 않은 모양이다.
"저와 요슈아는 최근 우애를 돈독히 할 기회가 있었으니 말입니다."
***
"젠장! 그 자식...."
가문 회의를 위해 회의장에 들른 요슈아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차려입은 예복의 넥타이를 연신 만지며, 불편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던 그는 벽에 걸려있던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곧 회의가 시작한다.'
처음 참여하는 가문 회의였지만, 평소의 그였더라면 이리 긴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드높은 콧대만큼,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요슈아에게 '긴장'이란 감정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으니까.
- '협상을 시작하죠, 요슈아. 이번 일은 불문으로 부치기엔, 절대 작은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평소와 달랐다.
유리안의 저택을 습격한 날.
그와 나눈 '협상' 탓에 요슈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 '일단, 감은 눈에게 알파스 메이핸드의 신분을 넘겨줄 것. 또 이번 일로 인해 벌어진 손해배상은 모두 요슈아가 처리해주셨으면 합니다.'
그와 나눈 '협상'의 내용 중,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은 요슈아를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 '곧 있을 가문 회의에서 절 가주로 지지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유리안의 행보 탓에 귀족 원로회와 '크라이파트' 가문은 그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엔 비서실을 통해 모종에 '경고'를 하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없었던 일에 자존심이 상한 '크라이파트' 가문은 다시금 그를 북부 전선으로 보내기 위해 건수를 찾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 '건수'로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은 참으로 적합했다. 고작해야 '방계'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직계'인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으니까.
'괜히 나섰나.... 괜한 감정에 치우쳐서...!'
연회장에서 당한 모욕적인 일로 인해, 분노에 몸을 맡긴 나머지 야밤에 그의 저택을 기습한 것은 요슈아의 입장에선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그것을 빌미로 유리안을 내쫓을 기회를 제 발로 차버렸으니 말이다.
"요슈아 님, 헤란드 님께서 회의장에 도착하셨습니다. 곧 회의가 진행될 테니, 안쪽으로 와주시겠습니까?"
사념에 잠겨있던 요슈아는 갑작스레 들려온 사용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 후, 고개를 끄덕인 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회의가 진행될 장소로 다가갈수록, 요슈아의 발걸음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그러나 그 마음을 떨쳐내고 요슈아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신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꽂혔다.
"왔느냐, 요슈아."
그 중, 크라이파트 가문의 현 가주이자 요슈아의 아버지인 '오벤 크라이파트'의 무감정한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요슈아는 가볍게 목례한 뒤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요슈아의 눈에는 익숙한 가신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식은땀을 흘리는 헤란드의 모습이었다. 그 뒤로는 집사장 라하르트가 비교적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가주, 오벤의 말과 함께 가문 회의는 시작되었다. 처음 대두된 화제는 '검성' 하이든 라이히의 행보다.
"검성이 제 2황자와 연이 깊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겠지. 만약 검성이 제 2황자를 지지한다면 황위 계승권은 그쪽으로 기울 것이요."
"하지만, 북부 전선에서 활약한 3황자, 칼드락 경도 간과할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군부의 대부분이 그를 옹호하고 있으니...."
"마탑에서 지지하고 있는 4황녀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위상이 검성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은 모두 알 것이오. 그나마 그 명예와 견줄 수 있는 자는...."
말을 잇던 일원은 말끝을 흐렸다. 비록 악명의 크기가 더욱 컸으나 '검성'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명성을 지닌 자는 한 명밖에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유리안은 황위 계승에 큰 관심이 없을 것으로 사료 됩니다."
"차라리 그편이 좋겠지. 괜히 유리안 녀석이 관심을 보였다간, 지금의 판도가 더욱 꼬일 수가 있으니 말이야."
"네 생각은 어떠냐, 요슈아."
한창 이야기가 진행하던 도중, 갑작스러운 오벤의 말과 함께 회의장은 조용해졌고 모두의 시선이 요슈아에게로 향했다.
"처음으로 가문 회의에 참여한 것이니, 긴장할 수도 있다 생각한다. 그러니, 침착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혀 보거라."
"예, 알겠습니다."
오벤의 말에 정중하게 대답한 요슈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유리안에 대한 반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도 있으나, 그것은 곤란하다.
- '허튼 생각은 하지 마시길. 이번 사태를 감은 눈과 비서실에 고발한다면, 수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협상의 목줄을 잡고 있는 것은 유리안 쪽이다.
'그렇다면....'
네 말대로 해주마.
"안녕하십니까, 요슈아 크라이파트입니다."
주변에 있는 가신들을 향해 인사한 요슈아의 모습에 대부분의 그들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 김에 유리안 형님을 정식적으로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런 표정들도 잠깐.
경악스러운 요슈아의 말에 당황스러움도 잠시 지나지 않아, 대부분 분노를 터뜨렸다.
"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그 불한당 녀석을 인정한다면, 크라이파트라는 이름 그 자체가 더러워질 것이다!"
요슈아는 강하게 나가기로 결심했다.
유리안과 약속 탓에 직접적으로 북부 전선으로 내쫓아야 한다는 말은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요슈아는 다른 방식으로 그를 엿 먹이기로 결심했다.
반발해라.
더욱더 반발해라.
"하지만, 유리안 형님의 명성은 그 '검성'과 견줄 수준이 아닙니까? 그렇기에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요슈아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신들을 보며, 입술을 뒤틀었다.
"유리안 형님이 차기 가주로 적합한 사람이라고."
네 말대로 널 옹호해주마.
그것도 강하게 주장해서 오히려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말이지.
"차, 차기 가주...!?"
"그,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그 발언은 납득하기 힘들구나. 요슈아!"
요슈아의 예상대로 가신들의 반발은 거셌다. 그 탓에 몇몇 일원들은 대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드높였다.
"하긴, 요슈아는 아직 어리니 소문에 감화되기 쉬운 나이겠지."
"그런 소문이 떠도는 근원이 제도에 지낸다는 게 난 어이가 없군."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장 녀석을 북부 전선으로 내쫓는 것이 가문의 입장에서도, 황실의 입장에서도...."
그래, 바로 그거야.
노발대발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요슈아는 속으로 이죽거렸다.
'오늘 있었던 일은 녀석을 내쫓은 다음, 대충 둘러대면 되는 일이야.'
충분히 사용하고 버리는 패로 생각했다고.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고.
'그러면, 딱히 문제 삼을 사람도 없겠지.'
그렇게 이야기의 화두가 점차 유리안을 다시금 북부 전선으로 내쫓아야 한다는 것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하, 하지만..., 전 요슈아의 말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헤란드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당황한 요슈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헤란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헤, 헤란드 형님?'
분명 헤란드 또한 유리안을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형님.
"그, 그토록 유리안을 싫어하던 요슈아였으나, 그에 대한 평가가 이리도 바뀌었습니다. 최, 최근... 그의 행보는 예전과 달리 인간미가 느껴지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헤란드 형님!
요슈아는 갑작스러운 헤란드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유리안을 옹호하던 자신이 말을 바꾸었다간, 줏대 없는 인물이라고 평판이 나빠질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확실히 현 황실의 정세를 생각하자면 유리안의 위상은 무시 못 할 수준이지요."
"맞습니다, 비록 악명이기는 하지만 그것 또한 명성입니다."
이런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헤란드를 시작으로 가신 중, 유리안에 대한 반감이 덜한 자들, 특히나 가진 재능으로만 이 자리에 올라온 이들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 시발점이... 내가 된 건가?'
헤란드를 힐끔 쳐다본 요슈아는 생각했다.
'제, 젠장...!'
53화. 이중 신분(1)
"크, 크윽.... 졌습니다."
낮은 신음과 함께 일그러진 얼굴을 한 기사가 결국엔 패배를 시인했다.
그런 그를 보며, 송골송골 맺혀있던 땀방울을 흘려보낸 난 싱긋 웃음을 지었다.
"다음은 없습니까?"
유리안이 익숙하지 않은 무기들로 기사들을 격파하고 있다,
언제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지, 훈련장에는 구경꾼들이 모여들었고, 더 나아가 '유리안'이라는 아성에 도전하기 위해 정식 기사들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얼떨결에 이런 꼴이 되어버렸군.'
물론, 내 입장에서도 썩 나쁘진 않았다.
저런 정식 기사들이 아닌 어중이떠중이들을 상대했다면 내 실력도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 「오러 변환」을 습득했습니다.
새로운 특성을 얻을 기회도 없었을 테니까.
처음에는 '검'이 아닌 다른 무기들에게 오러를 적용하는 것이 꽤 어려웠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대련을 반복할수록 어떠한 무기라도 금방 적응했기에 이런 식으로 '특성'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무도 없으신 모양이군요. 참으로 실망스럽군요. 고작 이 정도로 황실을 지키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입가엔 비웃음을 띄우며, 주변 기사들에게 말하자 그들은 침을 꿀꺽 삼킬 뿐이다.
더 이상은 없겠군, 아쉽게 됐어.
그리 생각하며, 난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레이피어를 무기 진열대에 걸어두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유리안 경."
그러자 근처에서 지켜보던 기사 한 명이 득달같이 달려와 수건을 건네주었다.
얼굴이 묘하게 익숙한 남자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 생각났다. 이전에 줄린 특구에 들렸을 때 함께 간 청사자 기사단의 단원이다.
아... 성은 기억나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페, 페른입니다. 오랜만에 뵌 지라 까먹으셨을 수도...."
"페른 텔런드 경. 제 기억력을 의심하지 마시길. 후후, 그나저나 같이 갔던 하인리히 경은 완쾌하셨는지요?"
알려준 이름에 성을 붙이며, 대답하자 페른의 얼굴엔 화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인지는 모르겠다.
"예, 예! 그때, 데몬에게 당한 상처 탓에 입원을 하기는 했지만 이제 막 재활을 끝마쳤습니다!"
"그렇습니까? 잘 됐군요. 그때 본 데몬은 고작해야 이각에 불과했으니 말입니다."
페른이 건넨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하자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 하하... 이각 데몬에게 '고작'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유리안 경밖에 없을 겁니다."
사실 페른의 말대로 그 당시를 회상한다면, '고작'이란 말을 붙이기엔 어폐가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월광검'을 완성 시키지도 못했고, 몸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지라 '고작' 이각 데몬을 상대로 죽을 뻔했으니 말이다.
"확실히 창에도, 평소 사용하던 것보다 도신이 얇은 검에도 자유자재로 오러를 입힐 수 있으신 수준이니,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이겠죠."
페른은 최근 이 3번 훈련장에 자주 들른 모양이다. 내가 다른 병장기들로 오러를 시험하고 있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한 말투다.
"또...,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전에 본 유리안 경의 오러보다 지금의 것이 더 날이 선 기분이 듭니다."
담백한 칭찬에 난 페른을 쳐다보았다.
예전보다 날이 섰다라.
확실히 내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유리안'이 되었을 때와 비교하자면 천지 차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가뜩이나, 높은 경지에 이르신 분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갈고 닦으실...."
"페른 경, 당신에게도 재능은 있습니다."
혼자만 만족하고 기뻐했던 나의 성장,
그것을 제 3자로부터 듣자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 덕에 평소와는 달리 페른에게 덕담을 건네주었다.
"예?"
"당신도 훌륭한 기사로서 성장할 겁니다. 어쩌면, 저와 같은 명성을 누릴 수도 있겠지요."
"그, 그런...."
"아, '웃는 처형대'와 같은 명성이라면 조금 기분 나쁠 수 있겠군요."
쓸데없는 말을 했나?
난 페른이 건네준 수건을 돌려주었다. 그러자, 그는 '감사합니다'라고 독백을 한다.
수건을 돌려줘서 감사하다는 건가?
어차피 내 것도 아니었잖아.
난 발걸음을 돌려 훈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예전보다 강해졌다라.'
처음 '유리안'이 되었을 때처럼, 벌벌 떨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로소 이 몸뚱아리를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으니까.
'게다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내가 할 일은 그리 없겠지.'
끽해야, '여명회'인 척을 하며 '감은 눈'의 업무를 수행하는 정도.
비록, 숨겨야 할 것들이 있기는 하겠지만 지금까지 잘 해내지 않았는가?
충분한 무력.
안정적인 일상.
더 이상 오글거리지 않는 연기.
이젠 이 세계에서의 생활이 안정권에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 내가 알던 세계관에서 크게 엇나가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
훈련을 마치고, 샤워를 마친 난 '감은 눈'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핀텔 경께서 혼석의 확보에 성공하셨습니다."
음.
라즈롯에게 그동안 여명회의 정보를 보고받은 난 속으로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왜?'
핀텔이 혼석을 확보하기 위해 상단을 습격한다는 이야기는 이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
여명회가 '혼석'을 확보할수록, '마신 바르바토스'의 부활이 가까워질 것이며, 그걸 방관할 수 없는 나는 여명회가 혼석을 확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핀텔'이 혼석 확보를 위해 움직인다는 말에는 딱히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저걸 막는 것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하이든 라이히의 이중 신분, '검은 기사'니까.
'...아니, 상단을 습격할 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제도로 귀환할 때 막아서던가?'
아니다.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 생각해도, '검은 기사'는 상단 습격할 때를 노려 막는다.
그것은 확실히 기억난다.
'검은 기사'는 이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핵심 컨텐츠 중 하나니까.
'내가 핀텔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이 때문인데....'
'검은 기사'의 데뷔전은 이 작품의 명장면 중 하나였으니까.
핀텔을 저지하는 정의의 기사.
온갖 임펙트와 멋짐으로 많은 유저의 환호를 받았던 그 장면.
그렇기에 비숍인 핀텔이 무사히 혼석을 확보했다는 보고에 당황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왜 일을 안 하는 거냐! 하이든 라이히....'
이 정도면 직무 유기잖아.
"유, 유리안 경.... 몸 상태가 안 좋으십니까?"
잠깐 사념에 잠긴 탓에 라즈롯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난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혹시..., 누가 나타나진 않았습니까?"
"...예?"
내 물음에 라즈롯은 당황한 눈치다.
"핀텔 경이 상단을 습격했을 때 말입니다. 특출나게 강한... 검을 매섭게 다루는 누군가가 등장하지 않았느냐는 말입니다."
"아뇨, 그런 보고는...."
내 물음에 정확하게 '아니다'라 대답하는 라즈롯.
그렇다는 소리는 만에 하나인 '검은 기사'는 등장했으나, '핀텔'에게 패배했다. 라는 가설은 사라졌다.
'...정말 직무 유기냐!'
속이 탄 나머지 입술을 잘근 깨물고 말았다.
이곳의 생활도 안정권에 들어섰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엔 '검은 기사'가 활약한다는 배경도 깔려있기 때문이다.
왜냐.
'여명회'가 습득해야 할 혼석을 가로채고, 주요 간부들을 하나, 둘 해치우며 이윽고 현 아크 비숍인 '테넬론'을 해치우는 것이 바로 '검은 기사'다.
'크으으윽....'
그런 검은 기사가....
등장해야 할 시기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다니.
혀끝에서 쓴맛이 감돌기 시작했고, 그 탓에 난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예상외의 전개였기에.
"혹시, 핀텔 경의 복귀 경로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예?"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낸 탓일까, 라즈롯은 내게 되물었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혼석을 노리는 건 저희뿐만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아."
내 말에 납득을 한 라즈롯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우선 혼석을 확보에 성공한 핀텔 경께선 금일 서부 관문을 통해 제도에 들어오신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황실의 눈도 있을 테니 늦은 시간에 제도에 입성할 생각이겠죠."
"예, 그럴 것 같습니다."
라즈롯의 말을 들으면서도 혀끝에 감도는 씁쓸한 맛과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기운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산타클로스를 믿는 아이처럼 '검은 기사'가 나타나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양반이 일을 해야, 내가 할 일이 줄어드니까!'
그것이 동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순전히 자기 안위를 위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라즈롯의 보고를 받던 난 자리에서 일어나 황궁을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디 가십니까, 유리안 경?"
"예, 급한 용무가 생각났습니다. 오드윈 단장께 대신 말씀 전해주시겠습니까?"
'감은 눈'의 주력인 유리안만의 특권 중 하나.
그것은 임무가 없는 날에는 딱히 업무 시간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
"네, 알겠습니다."
라즈롯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기 쌓여있는 서류들도 단장님께 넘겨드리면 될까요?"
힐끔.
라즈롯은 내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인 서류를 쳐다보았다.
"예, 오드윈 단장께 고맙다고도 전해주시길."
***
"스읍...."
숨을 들이마시자, 벽의 찬 기운이 폐부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단련된 신체가 도움이 된 것일까? 추위가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괜스레 불만이 피어 올라왔다.
'하이든 라이히의 정보력이라면, 여명회가 혼석을 확보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현재 내가 있는 곳은 라즈롯이 말해준 서부 관문 근처 커다란 나무 위.
그곳에서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후드를 뒤집어쓴 채, 핀텔이 탄 마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이곳이 마지노선이기 때문에.
'나타나겠지. 나타나야만 해.'
이곳을 통과하면, '검은 기사'는 여명회가 혼석을 얻는 것을 방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제도 내부에는 여명회의 전투원인 몬시뇰과 비숍들이 대기하고 있을 테고, 그들이 잔뜩 몰린다면 '검성'이라고 할지언정 위험할 것이다.
'아직이냐?'
속으로 오만가지 감정이 피어오르던 사이.
저 멀리에서 마차 한 대가 관문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유리안의 눈. 그 두 눈에 비친 것은 '여명회'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심볼이었다.
'저거로군.'
핀텔이 확보한 혼석이 실린 마차. 그게 저것인 모양이다.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하이든 라이히....'
하지만, 여전히 '검은 기사'의 모습은커녕 부엉이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이 문을 통과하고 마차는 제도에 입성할 터.
그렇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는 셈이다.
'하아....'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검은 기사'가 여기에 나타나지 않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짐작이 가는 부분은 전혀 없었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성가신 일이 늘어나게 생겼다는 것을.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관문 위에 서 있던 난 무릎을 피고 일어섰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더라면, 연습이라도 해둘 걸 그랬어.'
그 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난 마차 위로 몸을 던졌다.
54화. 이중 신분(2)
관문에서 마차를 향해 뛰어내리자,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가득 메웠다.
동시에 멀었던 지상이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하다.
바스락──!
마차 지붕에 착지하기 직전, 나뭇가지에 손을 뻗어 속력을 줄인 난 가뿐하게 마차의 지붕 위에 착지했다.
"...응? 무슨 소리야?"
감이 좋은 녀석인지, 귀가 좋은 녀석인지 누군가 목소리가 짐칸에서 들려왔다.
난 기척을 죽인 채, 다시금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지금 이곳에서 내가 벌이는 일이 여명회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이전처럼 간단히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혼석이 문제가 아니라, 여명회의 최종 목적인 마신의 부활을 지연시키는 일이니까.
심지어 이 마차에 탑승한 인원들은 여명회 산하의 교단원들.
그러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별거 있겠어? 기껏해야 다람쥐겠지."
지붕에 올라탄 난 이전처럼 '마나 감지'를 이용해 마차 내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짐칸에 둘, 그리고 마부 한 명.'
그 중 특출나게 강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비숍 핀텔은 함께 오지 않은 모양이군.'
불행 중 다행이었다.
비숍 등급의 인원이 있었더라면,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슬슬 시작해야겠군.'
그리 생각한 난 마차 지붕의 지지대를 잡고는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뭐야!?"
기둥이 기우뚱거리며, 위에 덮은 천막이 요란스럽게 흔들리자 짐칸에 있던 남자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자, 잠깐 다람쥐가 아닌 것 같은..., 크아아아악!"
난 신속히 남자의 턱을 잡고는 마차 밖으로 집어 던졌다.
'어....'
센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무지막지한 힘이군.
성인 남자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려 던지는 행위가 너무나도 쉬운 탓에 난 혀를 내둘렀다.
그 후, 난 다시금 지지대를 부여잡고는 마차의 짐칸 쪽으로 몸을 던졌다.
"미친!"
동료가 나가떨어지는 모습에 당황했는지, 내가 짐칸에 들어서자 남은 한 명은 황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뽑으려 했다. 검집에서 검신을 드러내는 것보다 먼저, 내 오른발이 녀석의 복부를 걷어찼기 때문이다.
"큭!"
발끝을 타고 전해지는 짜릿한 감각은 공격이 정통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절로 느끼게 해주었다.
남자는 짐칸의 구석으로 날아가더니, 머리를 부딪치고 쓰러졌다. 잠잠한 것이 기절한 모양이다.
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간 뒤, 마부석과 연결된 천막을 걷어내었다.
"이봐! 짐칸에서 뭘 하고 있는..., 히, 히이이익!"
말을 하던 마부는 고개를 돌리더니, 후드를 뒤집어쓴 채, 자기 목에 검을 대는 내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언제나 익숙한, 그의 머리 위로는 '공포'의 감정이 뚜렷하게 엿보였다.
"누, 누구십니까...!?"
"그건 알 것 없으니, 마차를 멈춰주셔야 겠습니...."
찰싹.
입을 열던 난 절로 나오는 존댓말에 입을 손으로 쳤다.
다행히도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마부는 고삐를 부여잡더니 마차를 멈추고 짐칸으로 넘어왔다.
말을 한다면 방금과 같이 저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올 터.
그것으로 내가 누군지 특정할 수 있으니 난 만국 공통어인 바디 랭귀지를 하기로 결심했다.
척.
난 손을 내밀어 뭔가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저희는 그냥 지나가는 행인입니다. 나리께서 가지고 가실만한 물건이 없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부정하는 의미로 계속 손을 흔들어 댔다.
"제발, 나리. 살려주십시오. 집에 저만 기다리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습니다."
마부는 계속해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곁눈질하며 뭔가를 가리는 듯, 몸을 꾸물꾸물 움직였다.
짐칸에 몇 개의 상자들이 있었지만, 마부 뒤로 있는 작은 상자가 희한하게 눈에 밟혔다.
'저건가?'
난 마부를 제친 후, 상자를 채가기 위해 손을 뻗자, 서늘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흐아아아앗!"
어느새 작은 단도를 뽑아 든 마부가 나를 찌르기 위해 몸을 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다.
단도가 닿기 전, 뻗은 손을 비틀어 녀석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크헉!"
외마디 비명과 함께 마차의 밖으로 나가떨어지는 마부 녀석을 뒤로하고, 상자를 품에 넣은 난 마차를 빠져나와 자리를 이동하려 하는 찰나.
바깥에선 고꾸라진 마부가 숨을 헐떡이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우, 우리가 누구인 줄 알고는 있느냐!"
삼류 악당이나 할 법한 말을 내뱉는군.
"여명회다! 이대로 우리를 적으로 돌린다면, 너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내 정체를 알면 깜짝 놀라겠군.
자신들을 습격한 괴한이 최고 간부인 '비숍'이라는 것을 알면 말이야.
"그, 그렇게 얼굴을 가려도 결국 추적을 피할 수 없을.... 컥!"
시끄럽게 떠들고 앉아있어. 난 시도 때도 없이 떠드는 녀석의 명치를 발로 걷어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가뜩이나, 다른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을 해서 언짢은데 말이야.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에는 괴기한 기운을 내뿜는 붉은빛 혼석이 들어있었다.
'이걸로 일단 여명회의 혼석 확보는 막기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는 근심 걱정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검은 기사'가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등장하겠지.'
아무렴, 주인공이니까.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이 짓을 계속할 수 없잖아?
***
겐멜 수도원에 위치한 여명회의 알현실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 살벌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질식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엘레노아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알현실에 놓인 왕좌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테넬론은 불쾌한 기색을 역력히 뽐내며,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죄인처럼 무릎을 꿇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핀텔."
"예, 예... 아크 비숍."
그는 테넬론의 부름에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주변에 모인 비숍들과 테넬론의 살벌한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그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실망이구나."
그리고는, 실망이라는 테넬론의 말에 핀텔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에게 중요한 혼석을 네 놈이 직접 운반해도 모자랄 와중에, 고작 일반 단원에게 시켰다라."
"죄, 죄송합니다... 저의 불찰입니다...!"
"불찰이라...."
핀텔의 말을 다시 한번 읊조리는 테넬론.
그의 끈적한 시선은 핀텔에게서 들러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회할 기회를 주고 싶지만..., 그 방도를 알 수 없으니 말이야."
"제, 제가 마차를 습격한 녀석을 찾아내 반드시 혼석을 되찾겠...!"
"얼굴도 모르는 자를 말이냐?"
테넬론의 나지막한 한 마디에 핀텔은 입이 틀어막혔다.
"이름이 없는 자는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거늘 하물며, 얼굴이 없는 자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단 말인가, 핀텔."
말을 이어갈수록, 알현실의 분위기는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짙어.'
테넬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데몬의 마기(魔氣). 그것이 방안을 서서히 메우기 시작해서다.
주변을 압도하는 기백에 비숍들은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지금 핀텔에게로 향한 분노가 도리어 자신에게로 향할 수도 있었기에.
그것은 엘레노아도 마찬가지였다.
"비숍 핀텔, 꼴이 말이 아니로군요."
그런 숨 막히는 마기를 마치 유영(游泳)하듯 비집고 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유리안.'
그의 입은 테넬론의 마기로도 틀어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이전에 제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드높이던 사람이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참, 세상일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큭."
그의 비아냥에 핀텔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비숍 유리안, 꽤 늦었군."
"예, 감은 눈의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늦었습니다. 테넬론 경."
존경심을 담아 '아크 비숍'이라는 호칭을 담는 것이 아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름과 함께 '경'을 입에 담는 유리안.
이 태도는 그가 본격적으로 '여명회'에 속한 것이 아닌,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입단한 것임을 부각하는 듯했다.
"비숍 핀텔이 혼석 확보에 실패한 것은 질탄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지금은 저희의 '적'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실로 지당했다.
테넬론도 그리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오히려 전 이렇게 봅니다. 혼석 하나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그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으음?"
그가 덧붙인 사족에 엘레노아는 숨을 죽였다. 조금 전까지 핀텔에게 향하던 시선은 유리안에게로 천천히 옮겨갔기 때문이다.
다른 비숍들도 마찬가지였다. 각자 다양한 감정을 품은 시선으로 유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안은 핀텔처럼 몸을 벌벌 떨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을 즐기듯 미소를 짓고 있었을 뿐이다.
"생각해 보십쇼. 마차를 습격한 그 '적'은 저희가 혼석을 확보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마차가 돌아오는 경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엄청난 정보력을 지녔다는 소리죠. 황실, 더 나아가 '검성'에 필적하는."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엘레노아는 결국 입을 열었다.
"비숍 엘레노아, 참으로 안일한 생각입니다."
"그럼 무슨 뜻이죠? 부족한 저에게 알려주시겠어요?"
그녀의 말을 듣던 유리안의 입가엔 미소가 짙어졌다.
"여명회의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소리입니다."
소란스러워지는 알현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작은 파문처럼 퍼져나갔다. 엘레노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혼석을 가로채는 게 아니라 저희를 직접 노리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교구의 위치를 모르는 말단이거나, 아니면 여명회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는...."
"그만."
유리안이 한창 이야기를 하는 도중, 테넬론의 엄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어 말을 끊었다.
가면을 쓴 테넬론의 눈동자가 서슬 퍼렇게 빛났다.
목적을 달성한 유리안은 그의 말에 따라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
여명회에 들렸다 집으로 들어온 난 의자에 앉아 가만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여명회에 균열이 생길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활동 반경을 줄이는 것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
'존재하지도 않은 배신자와 싸우기 위해 서로를 견제할 테니 말이야.'
아니, 내가 있으니 배신자는 존재하는 건가?
이게 어느 정도의 효력을 발휘할지는 모르겠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아닌가?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검은 기사는 왜 등장하지 않았는가?
난 큼지막하게 '대륙력'이라 적힌 달력을 테이블 위에 올린 뒤, 일자에 펜으로 표시를 해두기 시작했다.
이 표시가 적힌 요일은 '검은 기사'가 제도에 등장해 활동한 날들이다.
"비록 데뷔 일은 지나쳤지만, 다른 날에 나타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표시해둔 요일들을 살펴본 난 이번 달 달력을 찢어 그것을 서랍에 넣어두었다.
"부탁입니다, 제발 나타나 주십쇼."
'검성'도 좋지만, 여명회의 비숍들을 죽이고 테넬론의 숨통을 끊는 것은 '검은 기사'였기에. 난 조심스럽게 기도했다.
"하이든 라이히, 제자인 제가 이렇게 부탁... 음?"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탁상 위에 정갈하게 놓인 신문이었다.
「아드라탄 저널」
신문사의 이름과 함께 앞면엔 헤드라인이 대문처럼 크게 적혀있었으니.
[검성, 하이든 라이히! 제도를 떠났다?]
[아드라탄 제국의 별, 검성이 제도를 떠난 이유는?]
그 헤드라인을 읽자, 내 입에선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스승님?"
검은 기사, 안 하십니까?
55화. 이중 신분(3)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황실에서 수많은 정보를 주무르는 비서실은 상당한 권력을 지닌 귀족들이 주둔하고 있다.
그러나 그 '권력'이란 것은 무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다른 귀족들과의 정치적인 관계와 연결점 덕분.
흔히 말하는 '남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자라면 비서실의 위엄을 딱히 두려워하지 않는다.
"크흠."
비서실장, 세든 오르비안은 그런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를 두고 헛기침을 입에 담았다.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이 황실의 미친개에겐 '목줄'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에 충성을 바치고 있지만, 그것은 명예도, 가문의 위신도, 물욕도 아닌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해 그런 것.
그렇기에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이 괴물을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그래, 이번 크라이파트 가문 회의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렇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삼류.
항상 귀족답게 우아하고, 절도있게.
자신의 가치관을 속으로 되새김질하며, 세든은 유리안을 쳐다보았다.
"예."
"내용은 알고 있나? 크라이파트 가문은 황실에서도 예의 주시 중이니 말이야."
황실에서 크라이파트 가문을 주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위 계승권으로 언제 피바람이 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 상황에서 사대가문 중 하나인 '크라이파트 가문'이 움직였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힘들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가문에서 버림을 받은 입장인지라."
"그래?"
정중한 유리안의 말투에 세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짐작하곤 있었다.
그는 크라이파트 가문의 '프라손'이니까.
"아쉽게 되었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세든의 얼굴엔 아쉬운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그가 유리안을 호출한 이유는 최근 있던 '가문 회의'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호기심은 있지만, 사실상 목적은 다른 것이지.'
비서실장인 자신과 '감은 눈'의 유리안은 황실 전속 기관으로서 공적인 관계다.
하지만 그런 공적인 관계를 넘어 개인적인 사담(私談)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것을 과시할 수 있다면.
'내 위치를 보다 확고히 주장할 수 있다.'
악명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지만, 그의 무력은 진짜배기.
딱히 큰 투자 없이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다른 귀족들에게 경고를 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우아한 처세란 말인가?
"그런데 말입니다. 세른 경."
"음?"
자신의 작은 책략에 흡족하며, 찻잔을 손에 쥔 세든은 조곤조곤한 유리안의 말투에 고개를 들었다.
"검성 하이든 라이히 경께서 제도에서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이든 라이히란 이름이 유리안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세든은 흠칫했다.
"그래, 알고 있네."
"혹시, 어떤 목적으로...,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 있습니까?"
세든은 그 둘의 관계가 어떤지 알고 있기에.
너무나도 유리안의 의도가 훤히 보이는 발언이다. 그가 '검성'에게 갖는 감정이 긍정적이지 않다는 건 세상이 아는 이야기니까.
"그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군. 자넨 '검성'과 공식적으로 친분이 없지 않은가?"
세든은 거북한 기색을 내비치며 자기 의사를 최대한 돌려 비추었다. 그 후, 유리안의 표정을 한 번 살펴보자.
'꿀꺽.'
섬뜩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얼굴엔 미소를 띠고 있는 남자지만, 그에게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기백이다.
'...여전히 검성을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로군.'
흩뿌려지는 살의에 침을 삼킨 세든은 현재 검성의 행방을 말해주기로 결심했다.
사적인 용무로 사람을 불렀으니, 응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
'그래, 난 겁을 먹은 게 아니다.'
그것이 또 귀족의 의무이며, 우아한 삶이 아니겠는가.
***
저택으로 돌아온 난 소파에 몸을 던졌다.
- '현재 하이든 경은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신성국 페레난드로 향했네.'
이 시기에 신성국 페레난드로 향하다니.
'검은 기사는 어쩌고....'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검은 기사'.
그 의무를 우리의 주인공이 수행하지 않는다는 불안이 현실이 되자, 두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곤란하다.... 이 상황....'
당장 핀텔이 확보한 '혼석'을 가로채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여명회의 행보는 끝나지 않는다.
'어쩌면 좋지.'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는 바람에 내 속은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어찌할 방도도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당사자에게 찾아가 '검은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애초에...."
나는 시선을 돌려 창문 밖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높은 하늘과 저 멀리 보이는 황궁.
묘한 정겨움이 얽혀있는 장소다.
"지금 이곳엔 '검은 기사'란 존재 자체가 없는 겁니까?"
최애 장면이자, 캐릭터인 인물이 없다는 사실에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같지만, 다르다.'
난 품속에 넣어둔 종이 한 장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이전에 '검은 기사'가 활동한 요일들을 적은 달력의 가장 앞면이다.
'정말로 없다면, 앞으로 검은 기사가 막았던 일들은 모두 실현될 터.'
귀찮게 됐군.
심지어, 지금 '검은 기사'뿐만이 아니라,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난 서랍에 숨겨두었던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핀텔이 확보했던 '혼석'이 담겨있다.
'이 녀석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일전에 엘레노아가 찾아왔을 때를 기점으로 혼석을 저택에 두는 것은 멍청한 행위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중이다.
일정 수준으로 마나를 다룰 수 있거나, 마기에 익숙한 자들이라면 숨겨둔 혼석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헤란드에게 맡길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사연이 있는 목걸이였기 때문.'
지금 내게 덩그러니 혼석만을 맡길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할까?
단연코 없다.
"이대로 둔다면, 위험이 될 것이 뻔하겠죠."
잠시 고심하던 난 이내 결심했다.
달칵──!
상자를 열자, 안에 담긴 혼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작은 크기.
'실험해보기에는 적당한 크기로군.'
손을 뻗어 그것을 꺼낸 난 안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피를 머금은 듯, 불길한 붉은 빛의 돌에는 얼굴이 비쳤다.
실눈을 띄고 있는 유리안의 얼굴.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한 것보다 빠르군요."
살아남기 위해선 뭐든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 특성, 「 마왕의 그릇 」
등급 : 전설
혼석에 담긴 마신의 잔재 사념.
「마왕의 그릇」이란 그것을 흡수할 수 있게 만들어주며, 이윽고 보유자를 '마왕'으로 만들어주는 '악인'의 특성이다.
'혼석을 흡수한다.'
혹여나, 데몬화가 진행된다면 어떻게 하지?
살짝 걱정이 생기기도 했으나, 그것보다 먼저 본능적으로 힘에 대한 갈망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힘이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이 몸뚱아리.'
그렇다면 먹어라.
난 혼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자그마한 돌멩이가 피부를 뚫고 액체처럼 흘러들어오면서, 동시에 '마기'의 흐름도 느껴졌다.
'집중해라.'
손끝을 통해 마기가 마나혈에 스며드는 것이 느껴지자, 대혈맥에 정신을 집중해 그것들의 침범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본디 마나란 순수한 것.
그 '순수'에 '마기'라는 이름의 탁한 기운이 스며들었으나 통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쉽군요. 이 정도는...."
쿨럭.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저도 모르게 입으로 손을 가져가니, 새빨간 피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입가에서 떨어진 핏방울. 그것을 시작으로 몸속에선 인두로 지지는 듯한 타오르는 격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체내에선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이질감이 넓게 자리 잡았다.
"크윽...."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다.
작은 혼석이라고는 하지만, 무려 삼각 데몬의 마기가 응축된 정수다. 그것을 흡수해놓고, 아무런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다니.
그러나 그런 통증과 불쾌함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내 정신은 꺾이지 않았다.
"후, 후후...."
도리어 모종의 감정 하나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기대감.
이 폭풍만 지나간다면, '힘'을 얻을 수 있다는 희열.
그렇다고 하지만, 이 통증 속에서 웃음이 새어 나오다니.
'유리안'의 본능에 혀를 내두른 난 자세를 바로잡고 가부좌를 틀었다.
'이 상태가 좋겠어.'
조금이라도 마나혈에 집중할 수 있는 자세로 몸을 바꾼 호흡을 한 차례 가다듬었다.
그 후 가장 먼저 한 것은 내 몸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흐름을 차단해서 마나혈로 들어오지 못한 마기들이 체내에서 맴돌고 있다.'
조금 전의 각혈은 아마도 이것 때문이다.
어찌하면 좋을까?
'오히려 마나혈을 열어서 마기를 받아볼까?'
생각이 일자, 자연스럽게 이 빌어먹을 몸은 마나혈의 '입구'라고 부를 수 있는 '대혈맥'을 열어 버렸다.
마치 그것이 정답인 것처럼.
심장의 대혈맥, '개문'.
심장에서 머리로 이어지는 '휴문'.
다음은 양팔로 이어지는 두 개의 '경문'.
양다리로 이어지는 두 개의 '정문'.
"쿨럭...."
마기가 마구잡이 혈맥을 돌아다니자, 다시 한번 입술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튀어나왔다.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아프지만, 통증이 불안으로 번질 일은 없었다.
'혈맥들이... 적응하고 있다.'
일반적인 사람이었더라면, 혼석을 흡수한 순간 '데몬화'가 진행되었겠지만, 이 몸뚱아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비단 「마왕의 그릇」이란 특성 덕분만은 아니었다.
'남들보다 월등한 마나의 양.'
작은 호수의 변색(變色)은 쉽지만, 넓은 바다의 색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
'유리안'의 체내 마나량은 흡사 '바다'와 같았으며, 그 덕에 마기에 몸이 잠식되는 '데몬화'의 진행이 그만큼 더딘 것이다.
"후우...."
집중 또 집중.
난 천천히 마나혈을 열고, 닫으며 흡수하는 마기의 양을 조절했다.
그렇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마나혈을 조율하고 있자니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똑──!
확실한 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엄청난 양의 땀을 흘리는 바람에 탈수 증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입술을 쩍쩍 말라가기 시작했으며, 통증 때문에 느껴졌던 현기증은 탈수에 의한 것으로 변모되었다.
'...물.'
그러고 보니, 저택에 도착했을 때 사용인이 침실에 물을 가져다 두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마신다면, 이 타는 갈증을 해소할 수 있겠지.
'...쉽사리 움직일 수 없다.'
물론 그건 희망일 뿐이다.
온 신경을 집중한 이 상황.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집중이 흐트러질 것이 뻔하다.
참자.
그래도 마시고 싶다.
내 방에 물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기 전만 해도 갈증이 이리 강렬하진 않았거늘.
'물병을 책상 위에 뒀던가....'
젠장! 한 번 떠올리니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난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욕구는 강해졌고 말라가는 입안은 모래를 삼킨 것처럼 푸석푸석했다.
'괜히 떠올렸... 응?'
그 순간, 내 머리 위로 자그마한 물줄기가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흘러내리는 물은 다행스럽게도 입술 근처로 내려와, 갈라져 버린 입술을 조금씩 적시기 시작했다.
가뭄 속 단비가 이럴까.
갈증으로 인한 현기증이 조금이지만 무뎌지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무리 집중하고 있다고 하지만, 방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내 머리 위로 물을 흘려준 것일까?
"...그림자?"
칠흑색의 줄처럼 늘려진 그림자는 내 등에서 빠져나와 책상에 올려둔 물병을 가져온 것이다.
"너는 뭡니까?"
56화. 일보 전진, 일보 후퇴
"이건... 아! 그겁니까?"
살짝 손을 가져가 칠흑색 '줄'을 훑어보니, 이것의 정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마나. 즉, '오러'다.
⇒ 새로운 특성, 「솜브라」를 습득했습니다.
글귀를 읽던 찰나 물병을 쥐고 있던 '줄'은 먼지처럼 사라졌다.
"윽...!"
떨어지는 물병을 겨우 잡아낸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전에서 준동하던 '마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히 흡수한 건가?'
모르겠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그런 것이겠지. 그렇다면, 저 '오러 물체화' 특성은 혼석을 흡수한 결과물인가?
"솜브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드라탄 제국의 서쪽에 위치한 뷔브르 협곡. 그곳에서 활동하던 삼각(三角) 데몬의 이름이다.
"이것이 그 데몬의 혼석이었군요."
능력은 '솜브라'라는 어원대로 자신의 마기를 이용해 대기의 마나를 물체화(物體化)한 뒤, 수족처럼 다루는 것.
'물체화라....'
혼석이 품고 있던 이름을 깨달은 난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마나를 손끝으로 흘려보냈다.
오러의 물체화.
이 세계관의 상식과 어긋나는 것.
아니, 원래 세상에도 존재할 수 없는 개념.
그렇기에 무슨 말인지 이해하긴 힘들었으나, 조금 전 보였던 '줄'은 내 상상력에 힘을 실어주었다.
스르륵──.
"...의외로 쉽게 되는군요."
고정관념을 깨부수니, 아까의 새까만 줄인 '솜브라'를 다시금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 특성, 「 솜브라 」
등급 : 고유
▷ 당신은 마나와 오러를 물체화시킬 수 있습니다.
▷ '솜브라'의 힘과 길이는 숙련도에 비례합니다.
▷ 아직 완전히 습득하지 못한 특성입니다. 새로운 혼석을 흡수할 경우, 강한 반발이 일어납니다.
한 차례, 특성을 살펴본 난 멀리 있는 책에 '솜브라'를 뻗어 가져오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건을 가져오는 것 정도는 쉽군.'
아직 수족처럼 다룰 수는 없지만,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이 '솜브라'를 다루는 법과 사용법이 피부로 와닿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것을 검에 덮어씌운다면 어떻게 될까?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어느 정도의 확신이 들었다.
'월장석은 내 마나와 상성은 좋지만, 보석인지라 내구성이 부족해.'
그렇기에 무의식적으로 힘을 제한한 상태에서 월장검을 휘둘렀었다. 하지만, '솜브라'를 통해 내구성을 강화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터.
'시도는 해볼 법 한 일이지.'
그리 생각한 난 허리춤의 검을 뽑아 온 정신을 집중시키자, 손끝을 타고 '솜브라'가 흘러나왔다.
은은한 빛을 품고 있던 월장검은 그림자가 달을 삼키듯 순식간에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나쁘지 않군.'
칠흑으로 물든 검에 다시금 오러를 흘려보내며, 난 <월광검>을 사용했다.
웅, 웅──!
아주 고요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월광검은 솜브라와 공명하기 시작했다.
"...굉장합니다."
그 모습에 내 입에선 저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본래 데몬의 능력이었던 '솜브라'.
그런 데몬을 죽이기 위한 '월광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두 능력을 혼합하니, 반발이 일어난 것이다.
'섞일 수 없는 두 특성이 서로를 밀어내는 과정.'
'솜브라'의 반발을 맞춰 '월광검'은 그 출력을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었다.
"내구성뿐만이 아니라, 출력까지 올릴 수 있습니까? 꽤 요긴하게... 음?"
파직──!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
동시에 '월장검'에서 들려오던 공명음이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하자, 불안이 엄습해왔다.
"이런...."
맺혀있던 솜브라를 거두자, 월장검의 모습이 드러났다.
"...금이 갔군요."
***
제도에서 제일가는 대장간 중 하나, '어스름 불꽃'에 들린 린네는 뜨거운 열기를 피부로 느끼며 건물의 안쪽으로 향했다.
"린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 머리카락을 길게 묶어 뒤로 넘긴 여성 한 명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팔은 괜찮아? 분명 아프다고 들었는데."
"금방 나았어요. 루피네 언니."
"정말? 역시! 젊은 피는 다르구나."
배시시 웃는 루피나.
나이 차이도 그리 나지 않으면서, 어른인 척 너스레를 떠는 루피나의 모습에 린네는 웃음을 지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마침 잘 왔어. 린네! 네 검, 여태까지 만든 것 중 가장 잘 빠지게 나왔어!"
오늘 린네가 이곳에 들린 이유는 일전의 싸움으로 기존에 사용하던 검의 망가졌기 때문이다.
환희에 찬 표정을 지은 루피나는 린네의 손목을 잡고 서둘러 안내했다.
"자, 봐봐. 린네의 부탁대로 특별히 가볍게 만들었어."
온갖 도면과 금속 조각들이 널브러진 테이블. 그 위에 놓인 검집을 집어 든 루피나는 그것을 린네에게 넘겨주었다.
"확실히 가벼워요."
"그치? 우리 린네가 부탁했으니, 내가 특별히 힘 좀 썼지."
뿌듯함에 어깨가 한껏 올라간 루피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뒤, 린네는 검집에서부터 검을 뽑아 들었다.
잘 닦인 검신은 거울처럼 반짝거렸다.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살짝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구겨진 얼굴.'
검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린네는 쓴웃음을 지었다.
평소보다 가벼운 검.
이 검을 주문한 이유는 다름 아닌 '유리안'의 충고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 '당신의 마나혈은 다른 이들보다 많습니다.'
마나의 분산.
그것을 막기 위해 검의 무게를 줄이고, 조금이라도 마나혈에 집중을 하기 위해서 특별히 제작 주문한 것이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지만, 검술 실력과 오러에 관해서는 일류이니까.'
그가 준 조언은 틀림없으리라. 그리 생각한 린네는 다시금 루피나에로 시선을 돌렸다.
"어때? 아직 검집의 마감이 끝나지 않았는데 괜찮지?"
"제 손에 딱 맞아요. 역시! '어스름 불꽃' 차기 주인다워요."
"후후, 그렇게 아부해도 가격을 깎아주진 않을 거야?"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고 말을 덧붙이려던 찰나.
"루피나! 루거 마스터가 부르셔!"
"아, 그래? 린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줄 수 있을까?"
다급하게 느껴지는 말에 루피나는 린네에게 부탁한 후 종종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린네는 다시금 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 '일반적인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죠. 대혈맥인 '개문'에만 마나를 축적하지 않고, 다른 대혈맥도 활용해야 할 겁니다.'
연신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어느 정도 감이 잡히긴 했으나, 이해할 수는 없는 말.
그 탓에 린네는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애초에 두 개의 대혈맥을 이용하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세간에 널리 알려진 상식으로도.
바이엘 아카데미의 교수들에게도.
심지어 스승인 '검성'에게도.
그녀는 그런 오러 운용법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유리안'이 말한 방식은 통속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설마, 나를 골탕 먹이려고 그런 말을 한 걸까?'
그럴 수도 있다.
충분히.... 왜냐고? 그가 바로 '유리안'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눈을 감은 그녀는 '유리안'이 말한 '통속적'이지 않은 방식을 사용할 수 있도록 온 신경을 집중했다.
'...내 약점을 눈치채고, 조언을 해준 건 그 남자뿐이니까.'
하지만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유리안이 힌트를 더 준다면....
"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남자에게 기댈 셈이야?
같은 목표를 지녔다고는 하지만, 유리안은 상종하기 힘든 남자야.
'약한 마음을 먹으면 안 돼. 도움을 받는 건 한 번으로....'
근심을 털어내며, 감은 두 눈을 뜬 린네. 그런 그녀의 눈에는 익숙한 인영이 들어왔다.
흑색과 백색을 동시에 품은 듯한 회색의 머리카락.
감정이 절제된 듯한 웃음.
자신에게 '오러'에 대한 조언을 해준 남자.
'유리안'이다.
'...여기에는 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진 유리안. 린네는 그런 그의 뒤를 쫓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존심 따위는 접어둬.'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가르침을 청하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어른스러운 행위야.
린네는 검을 검집에 수납한 뒤, 유리안의 뒤를 따라붙기 시작했다.
코너를 지나자, '어스름 불꽃' 건물의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보인다. 그곳을 지나치니.
"...응?"
유리안의 모습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 탓에 당황한 린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유리안은 이곳으로 향했을 텐데.
"어, 어디로... 간 거지?"
해가 지기 시작해 어두워지는 주변과 서서히 불이 들어오는 조명. 동시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린네는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엔 갑자기 나타나 아는 척하는 사람이.'
이렇게 찾으려고 하니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다니.
***
평상시에도 예리하게 단련된 직감.
당연한 말이지만, 인기척에 민감한 이 몸은 누군가의 미행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이미 '어스름 불꽃'에 들어선 순간 따라온 린네가 뒤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얼떨결에 숨어버렸네.'
솔직히 말하자면, 린네와 마주치는 것이 조금 꺼림칙하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이전, 아카데미에서 있던 사건 탓이다.
- '사실.... 당신과 알파스가 나눈 대화는 어렴풋이 기억나요.'
그 사건으로부터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긴 했으나,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내가 '여명회'의 소속이라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는지, 아닌지도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린네가 먼저 접근하는 건 처음 아닌가?'
그녀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난 지붕에서 내려왔다. 린네의 성격상, 단순히 아는 척을 하려고 접근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도통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데.'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때 들었다는 대화 내용을 기반으로 나를 떠보려고 접근하는 것.
그럴 거면 직접 찾아오는 것이 좋을 텐데.
'어찌 되었든, 당분간은 마주치고 싶지 않군.'
생각을 정리한 난 다시금 '루거 올랜드'의 공방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명장'이란 칭호에 비해 크지 않은 개인 공방.
그 앞에 서 있는 '어스름 불꽃'의 직원의 두 눈은 나를 발견할 때부터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 어서 오십쇼. 유리안 경...."
정중하지만, 어색하게 인사하는 그였다.
제국 최고의 장인을 만나기 위한 선약은 필수. 난 사용인을 보내 미리 내가 가는 목적을 말한 상태였다.
뭐, 선약을 안 하고 가도 이 '유리안'의 방문은 프리패스겠지만.
"루거 경께서는 안에 계십니까?"
내 미소에 파르르 떠는 직원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하지만, 그...."
음?
난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단순히 의문에서 비롯된 습관이었는데, 직원 머리 위에는 방금보다 더 짙은 '공포'의 색이 아른거렸다.
내가 불쾌함을 느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서, 선객이 아직 떠나질 않으셔서 말입니다... 제, 제가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드리겠...."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선객이라....
평소라면 기다려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딱히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곳 '어스름 불꽃'에 린네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한시라도 빨리 용무를 끝내고 싶을 뿐이다.
"제가 들어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자 직원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덜컥!
"...최근 내 아들이 기사단에 입단했단 말이야!"
공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언성을 높이고 있는 신경질적인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반지에서 시작해서 브로치까지.
온갖 장신구로 몸을 치장한 그녀는 팔짱을 낀 체 거만한 표정으로 루거를 쳐다보고 있었다.
"고작해야, 검 하나 만들어달라는 것인데, 너무 비싸게 구는 것 아니야?"
"이제 막 기사가 된 어중이떠중이가 사용할 검을 만들어줄 만큼, 난 한가하지 않다!"
"어, 어중이떠중이...? 너 말조심해! 너 같은 평민, 내가 황실에 부탁만 한다면 순식간에 목이 날아갈 수 있다고!"
루거의 말에 얼굴이 붉어진 여성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던 도중, 내가 들어온 것을 깨달았는지 슬그머니 이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황실에 부탁한다면... 뭐라고 하셨습니까?"
57화. 애프터 서비스
그녀의 가슴팍엔 '황금 사과'의 문양을 딴 목걸이가 보였다.
아드라탄 제국 사교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대 가문, '고드 리히'가문의 상징이다.
"...뭐야, 넌."
게슴츠레 뜬 눈으로 여성은 나를 흘겨보았다. 그러더니 자신의 바로 옆에서 수발을 들고 있던 남자에게 입을 열었다.
"뭐해? 내보내지 않고."
호위기사로 보이는 남자는 헛기침을 하며 껄끄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가 귓가에 무엇인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거만스러운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 사람이 그 '웃는 처형대'라고...?"
"그렇습니다, 에르제나 님."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실제로 봤을 땐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유명 연예인을 카페에서 봐도 '어디서 많이 봤는데.'라고 느끼는 것과 같은 케이스이다.
"흐, 흐음...."
손에 쥐고 있던 부채로 자신의 입가를 가린 여자. 에르제나는 나를 지긋이 쳐다보더니, 고개를 휙-하고 돌렸다.
"다, 다음에 다시 오겠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여는 그녀였지만, 머리 위로 '공포'를 상징하는 보라색이 뚜렷하게 일렁거렸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재빠르게 그곳을 빠져나갔다.
넓은 공방 안에 나와 루거만이 남자 조금 전의 소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조용해졌다.
"망할 년, 이래서 고드 리히 가문 녀석들은 질색이야."
그 고요함을 깨부순 것은 '어스름 불꽃'의 주인, 루거 올랜드의 욕지거리였다. 머리가 찌근거리는 지 한 손을 관자놀이에 가져간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넌 뭣 때문에 온 거냐? 설마, 검성 놈이 제도를 떠난 이유에 관해 물으러 온 게냐?"
불처럼 성난 목소리로 루거는 보채듯 말했다.
'어? 그런 것도 알고 있나?'
궁금하기는 하지만 오늘은 그 일로 찾아온 것이 아니다.
"설마요. 제가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이것의 보수 때문입니다."
미소와 함께 난 월장검을 책상 위에 올렸다.
새로 얻은 능력, '솜브라'와의 결합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검신이 살짝 망가진 월장검을 내밀었다.
"...별꼴이로군. 네놈이 새로운 걸 주문하는 게 아니라 보수를 부탁할 줄이야."
루거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내가 건넨 월장검의 검집을 벗겨내었다.
그 후, 잠시 검을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검신이 신기하게 망가졌구만. 꼴을 보아하니 마나를 이용해 뭔가 실험을 한 모양이지?"
정확하군.
괜히 명공(名工)이 아니다.
"수리 비용으로 어느 정도 들 것 같습니까?"
"...됐다, 돈은 안 받아."
루거의 말에 난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직접 만든 물건이니, 내 이름을 위해서라도 관리를 해줄 생각이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네놈에게 만들어줬고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말과 함께 루거는 월장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넣었다.
처음 '월장검'을 만들기 위해서 왔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습니까?"
"3일."
"알겠습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하는 루거.
3일이라, 짧지 않은 시간이군.
그래도 기다리지 못할 시간은 아니다.
문제는 그동안 쓸만한 검을 찾는 것.
"나가기 전에, 저 위에 올려둔 검도 가져가라."
마무리 인사하고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루거가 다시금 말한다.
"아까 고드 리히 가문의 망할 년을 내쫓아줬으니 말이야. 그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검을 만들어 달라는 데 얼마나 짜증이 나는지 원."
루거의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그 탓에 더욱 의아했다.
예전엔 대금까지 치르고도, '월장검'의 제작에 그토록 노발대발하던 양반이 말이다.
"사람이 달라지셨군요. 일전엔 검 제작을 부탁한 것만으로 성을 내셨던 분이 말입니다."
난 속마음을 내비쳤다.
"달라진 건 내가 아니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루거.
그런 그의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자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변한 건 네놈이지. 예전에 비하면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느냐?"
그의 말에 난 우두커니 자리에 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유리안'과 나는 엄연히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했으나, 슬슬 그 벽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그 살벌한 상판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그건 나도 동감이다.
***
얼떨결에 검을 받았군.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밖으로 나온 난 루거에게 받은 검을 검집에서 뽑아, 전체적으로 살펴보았다.
하찮은 것을 넘기듯, 루거는 시큰둥한 태도로 줬으나 그가 준 검은 일반적인 대장간의 최상품을 월등히 상회하는 것이었다.
'월장검의 보수도 그냥 해주는 것도 모자라, 이런 검도 주다니.'
받은 선의에 감사함을 느껴야 하거늘, 난 도리어 이상함을 느꼈다.
오죽하면, 루거가 노망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스름 불꽃'의 뒷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온 난 쌀쌀한 밤바람을 몸으로 받으며,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음.'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도중 내 피부엔 따끔할 정도의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흩뿌리는 것이 아닌, 확실하게 나를 대상으로 표출하는 살기다.
"비숍 핀텔, 아니 밖이니까 핀텔 경으로 불러야겠지요?"
여명회의 은신처만 가면 언제나 느꼈던 것이기에 난 이 살기를 보내는 인물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에선 '여명회'의 비숍 핀텔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쩐지 초췌한 핀텔의 얼굴.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이 몹시 당황스러웠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노력했다.
'...설마 눈치챘나?'
최근 '혼석 확보'의 훼방을 놓은 것은 다름 아닌 나.
사적인 관계도, 친분도 없는 핀텔이 두 발로 직접 날 찾아온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혼석'을 가로챈 범인이 나라고 확신해서인 듯하다.
'...심지어 혼자가 아니군.'
이 생각에 힘을 실어주듯, 어둠 속에선 여명회의 일원으로 보이는 자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꿀꺽.
지금은 내 애검인 '월장검'도 보수를 맡긴 상태.
조금 위험할 수 있겠다.
"동료에게 그런 살기라니, 제가 잘못한 일이 있습니까? 핀텔 경?"
난 핀텔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알기 위해 그의 속을 떠보았다.
가로등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골목의 안.
그곳에는 핀텔의 시퍼렇게 뜬 두 눈만이 가장 크게 보였다.
"...유리안, 난 너를 동료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렇습니까?"
태연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미소를 지으며 말했으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로 눈치챈 건가.'
드러내는 적의에 적잖게 당황스러웠다.
이 늦은 시간에 세 명의 교단원들과 함께 온 이유,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뿐이다.
난 루거가 주었던 검으로 천천히 손을 옮겼다.
"애초에 넌 교리가 아닌, 힘을 위해 입교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아쉬울 구석은 없을 텐데."
처음 여명회의 입단했을 때 내뱉은 말.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 대잔치를 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리안, 네놈이 원하는 힘에 더 빨리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마. 나에게 협력해라."
응?
갑작스러운 이야기의 흐름에 검집으로 향하던 내 손이 멈칫한다.
"저한테 힘을 주시겠다는 말입니까?"
"어스름 불꽃의 대장장이, 루거를 포섭할 생각이다."
핀텔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당황스러웠으나, 한 편으로 안심했다.
내가 '혼석'을 가로챈 장본인이란 사실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그 명장이 만든 무기를 우리 여명회가 사용한다면, 전투력의 향상으로 연결될 터."
"그 꽉 막힌 대장장이가 당신의 말을 들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나온다면..., '억지로' 하게 만들 수밖에."
'억지'라는 말에 핀텔은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난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뭐가 웃기지?"
"이런, 죄송합니다. 고작 이런 일로... 제 손을 빌린다는 게 좀 웃겨서 말입니다."
고작이란 말에 핀텔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이걸 시작으로 협력 관계를 구축하자는 생각으로 한 말이다."
"죄송하지만, 경께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뭐?"
사실 이런 식으로 빈정거리는 말투는 좋지 않다. 핀텔 뿐만이 아니라, 그를 섬기는 교단원들이 이빨을 드러낼 수도 있으니까.
"협력이란 대등한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죠. 호랑이가 여우와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나 있으신지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이제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래야 쓸데없는 벌레가 붙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곧 다른 지부의 비숍들이 이곳으로 합류할 예정이다. 네가 없다고 해도 일은 진행될 것이다."
"하하. 고작 대장장이 하나 포섭하려고 몇 명의 비숍들이 오는 겁니까? 다들 한가하신 모양이죠?"
난 핀텔의 말에 조소를 날리며 비웃자, 꿈틀거렸던 그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유리안, 마지막으로 말하지. 우리에게 협력해라. 네가 에이든 경을 적대한 이상, 다른 여명회의 비숍들과 협력하는 건 힘들...."
"핀텔 경은 제 자리를 지키기 급급한 모양이군요."
핀텔은 대답이 없었지만, 나를 향하는 살기가 약간 짙어진 기분이 들었다.
"하긴, 비숍으로 승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럴 법도 하겠군요. 얻은 지 얼마 안 된 것은 잃기도 쉬울 테니까요."
말을 이을수록, 정곡이 찔린 듯 핀텔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으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골목에서 선명하게 들려왔다.
"역시! 네놈 따위 기대하지 말라고 생각했건만. 나만 우습게 돼버렸군."
감정이 서린 말과 함께 핀텔은 자신이 데려온 교단원들과 함께 사라졌다.
비로소 한산해진 주변.
아무도 없는 것을 느낀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복수하러 찾아온 줄 알았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핀텔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어스름 불꽃'의 주인장, '루거'를 포섭하는 것이라고 했다.
'루거의 포섭이라....'
분명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겠지. 그렇다면, 핀텔이 말한 '억지'가 시작될 터이다.
'월장검의 보수에 3일은 걸린다고 했었나.'
지금 루거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 내 '월장검'은 제대로 수리되지 않을 것이다.
'...쯧.'
난 속으로 혀를 찼다.
본래 핀텔은 '혼석'을 확보하기는커녕, 그 과정에서 '검은 기사'에게 목숨을 잃는다.
그런 핀텔이 살아남는 바람에 이런 계획을 꾸미게 되는 것이니, 괜스레 하이든 라이히에 대한 원망이 짙어졌다.
'비숍과 대적하는 것은 피하고 싶지만, 월장검의 수리를 위해선 어쩔 수 없지.'
허리춤을 쳐다보니 그곳엔 루거가 건네준 검이 매달려 있었다.
"주인님, 돌아가시겠습니까?"
타고 온 마차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곳에선 나를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정중한 인사와 함께 입을 열었다.
"잠시 산책이 하고 싶어졌습니다. 먼저 돌아가세요."
난 마차의 문을 열어서 뒤 칸에 실려있던 케이스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산책..., 말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집사는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수긍이 빠른 것이 '유리안'이 이런 변덕을 부린 것은 꽤 많았던 모양이다.
멀어지는 마차의 모습.
그것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난 마차에서 꺼낸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 든 것은 일전에 '혼석'을 훔칠 때 사용한 후드.
'버릴려고 가지고 나온 것인데, 다시 사용할 줄은 상상도 못 했군.'
입고 있던 코트를 벗고, 후드로 갈아입은 난 쓴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스승님이 직무 유기를 하는 탓에 제자가 고생하고 있습니다.
환복을 끝낸 난 후드를 덮어썼다.
하지만 이번엔 '비숍'인 핀텔도 있는 상황.
격한 전투가 진행되는 와중에 후드가 벗겨질 수도 있다.
'...혹시, 솜브라로 얼굴을 가릴 수도 있나?'
정체를 들키면 안 되는 입장이다 보니, 난 '솜브라'를 이용해 얼굴을 가려보기로 결심했다.
[오러 변환]
이전에 새로 얻은 특성 덕분인지, 다루는 방법이 익숙해진 것인지 '솜브라'의 모양을 잡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충 얼굴을 가릴 수 있을 정도로 솜브라를 늘린 뒤, 가면으로 만든 난 그것을 착용했다.
의외로 착용감은 나쁘지 않았다.
'생김새는 어떻지?'
마침 어제 온 비 탓에 바닥에는 물웅덩이가 고여있었다. 그곳을 들여다보니.
'끔찍하리만큼 무섭게 생겼군.'
우리의 타고난 예술가, '유리안'의 미적 감각이 여실히 드러나는 조형 탓에 가면의 모습은 흉측하다 못해 꿈에 나올까 두려운 수준이었다.
이 모습을 헌병이 발견한다면 마찰을 빚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X같이도 생겼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다니.'
내 미적 감각은 이미 오염된 상태인가 보다.
58화. 검은 기사(1)
루피나 올랜드.
제도에서 손꼽히는 대장간, '어스름 불꽃'의 주인인 '루거 올랜드'의 손녀라고 불리는 그녀는 루거의 후계자이며, 대장간의 차기 주인으로 언급될 정도로 인망과 능력이 있었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늘 미소를 잃지 않는 그녀를 싫어하는 직원은 없다 해도 무방했다.
"루피나, 아까 말한 대로 오늘 마감은 너에게 맡기마."
"네, 할아버지. 월장검 보수에 필요한 것들을 사러 가신다고 하셨죠?"
"그래."
모자를 눌러쓰고, 자신을 쳐다보는 루거를 보며 루피나는 배시시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마감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구요."
"그랬으면 좋겠구나."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을 이은 루거는 몸을 돌려,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루피나는 직원이 모두 퇴근한 '어스름 불꽃'의 마감을 위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 다들 잘 정리해두셨네."
마감이라고는 하지만,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다른 대장장이들이 도구들을 잘 정리했는지, 불을 켜두고 간 곳은 없는지, 잡다한 것들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다른 대장간에선 말단이 이 일을 한다고 들었으나 '어스름 불꽃' 대장간에선 일의 마무리는 꼭 관리자가 해야 한다는 것이 전통이었다.
"마법등도 모두 꺼져있고, 내일까지 발주해줘야 하는 것들도 다 있네! 좋아!"
한바탕, 공방을 둘러본 루피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응?"
그녀의 눈엔 불이 들어온 방 하나가 들어왔다. 루거의 집무실이다.
'할아버지 방은 가장 먼저 꺼두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혹시나 볼일을 마친 것일까?
의아한 구석이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루거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덜컥──!
루피나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할아버지, 볼 일은 벌써...."
입을 열던 그녀는 말을 멈추고,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며 집무실 안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누구?"
방안에는 후드를 뒤집어써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네 명이 있었다.
무예에 조예가 없는 그녀였지만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백이 평범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둡고 음침한 그것.
"...이상하군, 본래 이 시간까지 남아있는 건 루거 뿐일 텐데."
그 음험한 기운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남자가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쩐지 피부를 훑고 지나가는 서늘한 감촉에 루피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확인을 해봤어야...."
"아니 됐다, 그건 그렇고 저 여자는 루거의 손녀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남의 직장에 불법으로 침입해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한바탕 큰소리를 내뱉고 싶었던 루피나였으나, 지금은 당찬 소리를 할 차례가 아닌 듯했다.
"어쩌시겠습니까?"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겠어."
가장 강한 기운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잡아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루피나는 곧장 몸을 돌려 뒤로 도망쳤다.
***
어둠을 틈타서 '어스름 불꽃'의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 번의 경험으로 이런 짓도 익숙해지고 말았다.
'...또 이런 짓거리를 하게 될 줄이야.'
한 편으로는 별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검은 기사'가 존재하지 않는 지금, 그의 뒤처리를 내가 해야 한다는 것에 약간의 짜증도 있었지만.
'그래도 게임 속 한 장면을 재현하는 것 같군.'
적지 않은 고양감도 있었다.
'여명회'의 일을 암암리에 저지하는 것, 마치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라는 게임의 '검은 기사'가 하던 일과 흡사하지 않은가?
'진정해.'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희열을 가슴 속 한편으로 치워두고, 난 두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많이도 사용했던 '마나 감지'.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서다.
'다섯 명인가?'
'마나 감지'를 통해 현재 '어스름 불꽃' 건물 내에 몇 명의 인원이 있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한 명은 핀텔, 다른 한 명은 루거겠지.'
시각이 늦은지라, 대장간의 직원들은 루거를 남겨두고 모두 퇴근한 듯 보인다.
'근데 왜 서로 떨어져 있지?'
문득 이상함을 느낀 난 체내의 오러를 조금 더 얇고 가늘게 만들어 건물 주변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조금 더 세심하게 '마나 감지'를 사용하자, 건물 내부의 인원들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한 명은 위층이고, 넷은 내가 있는 1층.'
이상한 점은 나와 같은 층에 있는 4명이다. 나머지 3명이 한 명을 쫓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루거가 쫓기고 있는 건가?'
'마나 감지'를 통해 느껴지는 4명의 오러는 실시간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꽤 빠른 속도로 말이다.
루거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속도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디를 먼저 가지?'
잠깐의 고민을 마친 뒤, 난 4명의 오러가 느껴지는 곳으로 향하자고 결심했다.
발걸음을 옮기기 전, 불현듯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참, 다시 봐도 X같이도 생겼군.'
'솜브라'로 만든 가면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난 건물의 안쪽으로 나아갔다.
***
그녀는 뒷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태어나서 이렇게 빨리 달려본 적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헉,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는 귓가에 연신 맴돌았다.
'뭐야..., 대체 뭐냐고.'
혹시, 강도?
아니, 아마도 아닐 것이다.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괴한들의 목적은 도둑질이 아닌 것 같았다.
"꺄아아악!"
그러는 와중,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루피나의 몸이 흔들렸다. 격한 통증과 함께 고꾸라진 그녀는 재빨리 자세를 잡으려고 했으나, 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사이, 마법등이 모두 꺼진 캄캄한 복도에서 인기척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도, 도망가야 해.'
어느새 괴한들의 모습이 두 눈으로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격통을 무시하며, 루피나는 가까스로 일어나 달리려고 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보았다.
"헉!"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흉측하다 못해 꿈에 나올까 두려운 모양의 가면을 쓴 남자였다.
어두운 복도, 흉측한 모습, 누군가에게 쫓기는 상황.
이 모든 것이 종합되어 압도적인 공포가 루피나의 온몸을 휘감았다.
"으으... 사, 살려주...."
그녀는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벌려 말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면의 남자는 공포에 떨고 있는 그녀를 무심하게 지나쳤다.
"...누구냐?"
복도의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
집무실에서부터 루피나를 추격하던 괴한들의 목소리다. 가면을 쓴 남자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아하니, 저들은 서로 동료가 아닌 듯 보였다.
"고약한 가면이군."
이번만큼은 루피나도 동감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의 모습은 상투적인 관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반인은 아닌 모양이야."
"저런 쓰레기 같은 가면을 쓰는 놈이 일반인일 리가 없지."
움찔.
쓰레기 같다.
그 말에 가면을 쓴 남자의 몸이 순간 흔들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도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가면을 쓴 남자는 다시금 조용해졌다. 잔잔한 호수처럼,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가라앉을 것처럼 깊게.
'...대, 대체 누구지?'
그때 루피나를 따라오던 괴한 셋이 땅을 박차 가면의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자신을 쫓아오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에 루피나는 당황했다.
그 사이에도 가면의 남자는 침착한 손짓으로 루피나를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녀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가면을 쓴 남자의 몸에선 그림자가 흘러나왔다.
'마, 마법?'
어두운 밤공기를 타고, 남자에게서 흘러나온 '그림자'는 쏜살같이 괴한들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채찍처럼 '그것'을 휘둘러 한 명을 제압한 뒤, 달려든 가면의 남자.
수적 불리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든 그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었다.
'와...!'
루피나가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검을 뽑아 든 그는 괴한이 휘두른 검을 피하며, 다른 한 명을 베어 넘겼다.
"크아아아악!"
"이, 이 자식이!"
그의 검술에선 절제됐지만, 아름다운 기품마저 느껴졌다.
섬뜩한 가면, 미려한 검술.
그 콘트라스트는 하나의 예술처럼, 루피나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이 두려움을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그렇지만 검이 닿기도 전에 다시금 남자의 몸에선 '그림자'가 새어 나왔고, 그것은 괴한의 목을 부여잡았다.
"커, 커어억...!"
후드를 뒤집어쓴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연신 들려오는 신음은 그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괴한의 손이 추욱- 쳐졌고, 그림자는 다시금 가면의 남자에게로 돌아왔다.
'...대, 대단하다.'
상황을 정리한 가면의 남자는 우두커니 자리에 서서 자신의 손을 살펴보기 시작했지만, 그 이유는 루피나가 알 수 없었다.
'아.'
문득, 루피나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루거 할아버지가 해준 옛날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
아주 오래전.
치안이 좋지 않은 제도(帝都)엔 신민들의 고혈을 빨며 그들을 수탈하는 악마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악마들의 광란은 극에 이르러 신민들의 참상은 형용할 길이 없었고, 무능한 왕조는 현 상황을 방관하고 있을 무렵.
가면을 쓴 한 귀인(貴人)이 나타났다.
갑작스레 등장한 귀인은 악마들을 처치했고, 신민들의 신망은 왕조의 일을 대신한 그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귀인을 두려워한 왕조는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
그럼에도 그는 신민들을 위해 악마들을 죽였다고 한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며, 혈혈단신으로.
'아닐 거야.'
루피나는 백마 탄 왕자와 같은 어중간한 이야기보다,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물론 그녀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눈앞의 가면 쓴 남자가 옛날부터 구전(口傳)되어온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쯤은.
다만, 이 세상에 단 홀로 남은 것처럼.
쏟아지는 달빛을 쓸쓸히 받는 그의 모습은 오래전 혀끝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종착점이 되었다.
그 '이야기'의 이름은.
"거, 검은 기사...?"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루피나는 말했다.
그러자, 미동도 없던 가면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
'솜브라'의 힘에 감탄하며, 여운이 잠겨 있던 난 루피나의 어이없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뭐라는 거냐.'
넋을 잃은 듯 동공이 풀린 루피나의 중얼거림을 들은 난 어처구니가 없어 그녀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검은 기사?
지금 누구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음?'
잠깐! 지금 검은 기사라고 했잖아.
그렇다는 건, 내가 모를 뿐 '검은 기사'는 이미 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리인가.
"할아버지에게 들었어요. 과거 제도에는 검은 기사라는 귀인이 있었다고...."
과거? 귀인? 착각인가 보다.
하긴 '검은 기사'가 정말로 실존했다면 여명회가 혼석을 확보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겠지.
'그건 그렇고.'
난 루피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 여명회의 일원들에게 습격당한 것은 그녀가 확실하다.
'루피나가 아니라 루거가 있어야 하지 않았나?'
'어스름 불꽃'의 주인장, 루거는 억척스러운 성격이다. 그 덕에 이 늦은 시간까지 대장간에 남아 뒤처리를 하는 건 그 영감일 텐데.
어째서 이 시간까지 남은 게, 루거 영감이 아닌 그 손녀인 루피나인가.
"맞죠? 다, 당신이 그 '검은 기사'라는 이야기의 주인공."
생각에 잠겨 있던 난 루피나의 물음에 다시금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말을 부정해야 했으나, 「존댓말」이라는 캐릭터 특성 탓에 입을 열 수 없는 상황이다.
⇒ 새로운 캐릭터 특성, 「검은 기사」를 습득했습니다.
그때! 난데없이 튀어나온 UI.
그것에 적힌 글귀를 읽자 당황스러운 나머지 동공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뭐냐 이건.'
캐릭터성, 「검은 기사」
니가 왜 여기서 나와?
59화. 검은 기사(2)
"얼굴을 가린 검은 가면과 달빛을 품은 듯한 검술, 루거 할아버지가 말한 그대로야!"
어쩐지 달아오른 말투로 말하는 루피나. 당연히도 그녀가 왜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모습, 이 상황이 무섭지도 않은 건가? 그리 생각하며, 크게 뜬 그녀의 두 눈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했다.
비친 내 모습은 '검은 기사'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품고 있는 분위기는 이상하리만큼 흡사했다.
'...설마.'
현재 이 세상엔 '검은 기사'가 없다.
정확히는 '검은 기사'라는 역할을 이행해야 할 대상이 그 의무를 저버리고 있다.
'본래 하이든 라이히가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함으로써.'
비어있던 공백에 내 이름이 들어가고 만 것인가.
'이런.'
난 '검은 기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저, 이 작품의 스토리가 본래의 궤도에서 어긋나는 것을 방지했을 뿐이다.
"저, 저..., 당신을 한번 보고 싶었어요! 루거 할아버지에게 들었을 땐, 허무맹랑한 소리인 줄 알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루피나는 자신의 우상을 본 것처럼, 상기된 얼굴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생각을 정리하던 도중이었던 난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다가오지 마라."
아차 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은 평소 나오던 존댓말이 아니었다.
"...네?"
"다가오지 말라고 했다."
역시 존댓말이 아니다.
조금 전에 얻은 '검은 기사' 특성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루거는 어디에 있지?"
"루, 루거 할아버지께선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럼 이 건물 내에 없다는 소리인가?"
"네."
고개를 끄덕이는 루피나. 그 모습에 루피나가 쫓기게 된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럼 남은 한 명은 루거가 아니라...."
콰직──!
갑작스레 느껴진 살기에 고개를 돌린 찰나,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이쪽으로 날아들었다.
다행히도 내 몸에 닿기 전에 '솜브라'가 흘러나와 그것을 막아주었다.
"말도 안 돼!"
마나로 이루어진 칼날을 쏘아낸 것은 다름 아닌 여명회의 비숍 핀텔이었다. 그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방금 그 마법은 4위계에 도달하며 쌓은 노하우를 모두 함축한 마법이란 말이다!"
2층에서 느껴진 인기척은 핀텔의 것이었나보다. '솜브라'에게 가로막힌 마나 칼날은 땅바닥에 떨어지더니, 연기처럼 사라졌다.
"속도도, 발동 시간도, 소리도 나지 않도록 개발한 특수한 마법이거늘.... 어찌 반응할 수 있었지!?"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만큼 대단한 마법은 아니었단 소리지."
"뭐, 뭣!?"
난 핀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최대한 내색은 안 하려 했으나, 녀석의 얼굴엔 초조한 기색이 엿보였다.
"빌어먹을."
짧은 욕지거리와 함께 핀텔은 주변에 쓰러진 교단원들을 훑어보았다.
"하다 하다... 병신같은 가면을 쓴 놈도 날 방해하는군."
녀석은 혼잣말을 입에 담았다. 별안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야 하거늘 어쩐지 화가 났다.
가면에 대한 욕설 때문인가? 지도 프링글스 같은 콧수염을 달고 있으면서 말이야.
잠시 후, 핀텔의 손에서는 희미한 빛이 일렁거리더니 아까 보았던 마나 칼날이 그의 손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번에는 눈에 안 보일 정도로 빠른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전보단 확실하게 큼지막했다.
'이건 막을 수 없겠군.'
이번에는 '솜브라'로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난 뒤로 한 발짝 크게 물러섰다.
그 생각은 정확했다. 바닥에 박힌 '마나 칼날'은 전기톱처럼, 회전하고 있었으며 지면을 파고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갔다.
'내 솜브라를 한 번 보더니 공격 방법을 바꿨군.'
역시나, 가장 먼저 당하는 녀석이지만 비숍은 비숍이라는 건가.
'...어쩌지?'
솔직히 싸우고 싶지 않다. '비숍'과의 전투는 위험이 너무 많으며, 까딱 잘못하다간 치명상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도망칠까?'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핀텔의 목적인 '루거'는 지금 이 건물에 없으며, 그렇다면 녀석도 오늘은 물러날 터.
"그렇군. 네가 그 자식이로군."
잠시 고민을 하던 찰나, 핀텔은 조용히 읊조리며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날카롭게 뜨인 그의 눈에는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
"마차를 습격해 혼석을 훔쳐 간 그 자식,"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능청 떨지 마라, 이 개자식!"
내 대답을 듣던 핀텔은 윽박질렀다.
"그 인상착의, 부하에게서 들은 것과 상당히 흡사하다."
그래? 옷도 좀 바꿀 것 그랬나.
"네놈, 목적이 뭐냐."
핀텔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다니지만 '무명객단'은 아닌 듯하고, 검성 녀석의 추종자로도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둘 다 아니다.
"그렇다면 목적이 뭐지? 왜 우리를 노리는 게냐."
"세계 평화."
비아냥거리는 말투. 아무리 '존댓말'이 아니라고 해서 '유리안'의 성격까지 사라지진 않는 모양이다.
그 덕에 핀텔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머저리 같군."
핀텔이 지팡이를 들어, 다음 마법을 준비하려 하자 난 재빨리 땅을 박차 녀석과의 거리를 좁혔다.
'월광검.'
...은 사용하면 안 되겠군. 정체를 확실하게 숨기기 위해선 말이다.
어마어마한 각력 덕에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 탓에 평범한 마법사였더라면, 당황할 법도 했으나 핀텔의 행동에선 침착함이 느껴졌다.
'함정이었나?'
불현듯, 뒤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 아까 핀텔이 박은 '마나 톱날'은 땅으로 파고든 뒤, 사라진 게 아니었다.
"뒤, 뒤에요!"
루피나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등 뒤로 '마나 톱날'이 다시금 내게 향하는 것을 느꼈다.
겨우 공중에서 자리를 바꿔, 등 뒤에서 날아든 톱날을 피하자 이번엔 핀텔이 마법을 영창하는 것이 보인다.
"공중에선 피할 수 없을 테지."
녀석의 말대로, 공중에선 피할 수 없다. 그러니, 난 '솜브라'로 핀텔의 손을 묶어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커억!"
그 후, 이쪽으로 당겨진 녀석의 명치를 발차기로 후려갈겼다.
"...큭."
하지만 그 과정에서 쏟아진 '마나 톱날'은 내 옆구리에 박히고 말았다. 격통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으나, 일단 핀텔을 처리하는 것이 먼저다.
발차기가 통했는지, 무릎 꿇은 핀텔의 입가엔 피가 한 움큼 흘러내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녀석의 눈가엔 적의가 엿보인다.
'빨리 끝내야겠어.'
장기인 '월광검'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 싸움이 길어진다면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다.
"쿨럭, 이 개자식!"
내가 다가가자,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핀텔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아니, 정확히는 들어 올리려고 했다.
"뭐, 뭐냐!?"
땅에 들러붙은 핀텔의 지팡이. 그곳엔 녀석을 잡아당길 때 붙여둔 '솜브라'가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떼어낼 수가...!"
퍽──!
당황한 핀텔의 턱을 폼멜로 후려치자, 그 충격으로 인해 뇌가 흔들렸는지 녀석은 경련을 일으키더니 조용해졌다.
'후우.'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난 옆구리를 쳐다보았다. 아드레날린이 잔뜩 분비된 탓에 통증은 미미했으나,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핀텔을 쓰러뜨린 후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명객단'
'여섯 손가락'과 '혈귀단'과 마찬가지로, 빈민가를 삼분하고 있는 조직 중 하나.
여명회의 비숍 중 하나와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핀텔이 알 정도로 수면 위로 드러난 곳은 아닐 터인데.
"괘, 괜찮으세요?"
핀텔을 쓰러뜨리고 잠시 상념에 빠져 잠잠해진 틈을 타, 밖으로 나온 루피나가 물었다.
"그래."
"그래도, 상처는 치료해야 해요."
"필요 없다. 그건 그렇고."
가면을 고쳐 쓴 뒤 난 시선을 루피나에게로 돌렸다.
"나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왜요?"
왜긴, '검은 기사'는 내가 아니라 하이든 라이히니까. 괜히 소문이 돌 경우,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 있다.
"이유는 알 필요 없어."
"...싫어요."
겁에 질려 있다고 생각한 루피나는 의외의 대답을 입에 담았다.
"당신이 정말 이야기 속의 '검은 기사'라면, 옛날처럼 숨겨선 안 돼요!"
어쩐지 아련하고, 힘이 실린 말투로 루피나는 말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과거처럼, 실수를 답습하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과거는 무슨 과거야. 난 이 세계의 신생아 같은 입장이라고.
"어쨌든! 저는 숨길 생각 없어요!"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목소리와 표정.
그런 그녀를 설득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 느껴졌다.
***
그런 소동이 있고 다음 날, 주문 제작 맡긴 검을 찾기 위해 '어스름 불꽃'에 다시 들린 린네는 소란스러운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라니까요!"
그 소란의 중심엔 루피나가 있었다. 평소처럼 견인력이 있는 목소리로 그녀는 '어스름 불꽃'의 주인장인 루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루피나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거짓말하지 말아라. 그 이야기는 옛날에나 인기 있던 허구에 불과해!"
"정말이에요 루거 할아버지!"
루피나의 호소를 들으며, 린네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큰소리를 치던 루피나는 린네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가뜩이나 붉었던 얼굴은 그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그것을 루거가 놓칠 리 없다. 그는 혀를 차며, 팔짱을 끼었다.
"쯧,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는 건 너도 어렴풋이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아, 아니라니까요!"
"됐다! 린네에게 검만 건네주고, 쉬어라."
으름장을 놓은 루거는 고개를 돌리더니, 개인 공방의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던 루피나는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루피나 언니."
"응, 우리 린네 왔구나. 검 찾으러 왔지? 가자."
"네."
루피나가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자, 린네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에 본 공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언니, 무슨 일이 있었나요? 대장간이 조금 소란스럽네요?"
린네의 물음에 루피나는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입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제, 우리 건물에 괴한이 들었거든."
"...괴한이요?"
"목적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서운 사람들이 불법으로 침입했단 말이야."
"그 사람들은 무사히 잡혔나요?"
"응, 헌병들이 데려갔어."
아무런 피해도 없이 끝난 눈치에 린네는 '다행이네요'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린네!"
"...네?"
"검은 기사가 나타났어."
"...검은 기사요?"
"응!"
루피나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했던 괴한들로부터 날 구해준 게 바로 그 검은 기사였다니까!"
농담도 참.
그런 말을 하려고 했으나, 진심 어린 루피나의 눈동자에 대고 린네는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 그래요?"
"응! 그 세련된 검술을 린네도 봤어야 했는데.... 마치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니까!"
"하하...."
린네는 어설픈 웃음을 입에 담았다. 아무래도, 믿기지 않아서다.
검은 기사.
분명 오래전부터 제국에서 떠돌던 민담(民譚)이다. 이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지만, '론드벨 가문'의 여식으로서 민심을 파악하고자 얻었던 정보에서 얼핏 보았던 린네는 알고 있는 구전(口傳) 이야기다.
그 말은 즉.
'검은 기사'라는 존재는 허구에만 존재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린네, 너도 안 믿는구나?"
그런 린네의 생각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다.
"아까 루거 아저씨 앞에서 목소리가 높아진 이유가 이 탓이었군요?"
"응, 나는 실제로 봤으니까! 검은 기사가 실존한다고 말해줘도 믿지를 않는 눈치더라고!"
"...저, 저도 좀."
그녀의 반응을 살피던 루피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뭐, 그럴 줄 알았어.... 흐윽."
작게 탄식을 내뱉으며, 토라진 얼굴로 돌아서는 루피나의 모습에 린네는 작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는 듯한 검술이라고?'
짐작이 가는 사람이 단 한 명이 있긴 하다.
'설마..., 아니겠지.'
그 짐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에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루피나가 언급한 대로, '달빛'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검로(劍路)를 소유한 남자.
그렇지만 '목적'이 없다면 무서우리만큼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그가 이유 없이 남을 도와줄 리 없을 터.
'응, 유리안을 절대 아니야.'
린네는 그리 확신했다.
***
'검은 기사'라는 캐릭터성을 부득이하게 얻은 뒤, 평소처럼 업무를 위해 출근을 한 난 신문을 펼쳐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에 관한 이야기는 말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제도 제일의 대장간, '어스름 불꽃'에 악감정을 가진 괴한들.]
[위기에 빠진 '어스름 불꽃'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검은 기사!?]
아주 있는 것, 없는 것 다 떠벌렸군.
'검은 기사'의 기사 대부분에는 '루피나 올랜드'라는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렇게나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거늘 결국 다 떠벌리고 다닌 것이다.
난 신문을 고이 접어 저 멀리 탁자로 던지자,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솜브라'가 그것을 무사히 탁자로 옮겨주었다.
'윽.'
옆구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핀텔이 사용한 마법에 당한 상처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확실히..., 비숍은 비숍이로군.'
본작의 스토리에선 가장 먼저 당한다고는 하지만, 역시 비숍 타이틀은 아무나 다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나저나 검은 기사에 대한 화제성이 꽤 낮군.'
'검은 기사'의 이야기는 신문의 헤드 라인이나 전면부가 아닌 3면의 일부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간에서도 '검은 기사'라는 존재는 상상 속에나 존재한다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중요하게 다루지 않은 듯하다.
'하긴 화제성을 가진 주제는 아니니 말이야.'
문제는 '하이든 라이히'의 역할을 뺏은 시점에서 그가 무슨 행동을 취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전에 본 'DLC 트레일러'에선 '검은 기사'의 정체를 유리안이 밝혀내고, 하이든 라이히와 린네의 숨통을 끊는 것으로 영상이 끝났다.
'지금은 하이든 라이히가 검은 기사 노릇을 하게 되지 않았으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
그렇게 되어서인지, 우리의 '주인공'이 앞으로의 행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이든 라이히에게 미행이라도 붙여야 하나.'
60화. 자업자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