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자업자득
"쯧...."
혀를 한 번 찬 요슈아는 '감은 눈'의 문양이 크게 박힌 건물을 마땅치 못하다는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도련님, 아무리 가주님의 전언이라고는 하지만 도련님이 직접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용인들 중 한 명에게...."
"그럼, 네가 가라."
"...크흠."
그의 뒤를 따라오던 측근이 입을 열자, 요슈아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입을 열었다.
측근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헛기침을 하더니 이윽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멍청한 새끼."
욕지거리를 내뱉었으나, 요슈아는 저런 반응을 납득하고 있다. 이곳에 온 이유는 다름 아닌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을 보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됐어, 나 혼자 간다. 너희들은 여기에서 대기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요슈아는 '감은 눈'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몇몇 측근들은 그런 요슈아를 보며,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실 요슈아가 측근들을 두고 혼자 간다고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녀석이 내 약점을 쥐고 있으니까.'
이전에 유리안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여명회'란 불순한 단체의 손을 빌린 점을 그가 알고 있다.
심지어 그는 황실 전속 기관인 '감은 눈'의 일원이 아닌가? 그의 반쪽짜리 혈통을 깔보는 자는 있어도, 그가 가진 위상을 낮게 보는 이들은 없다.
그런 유리안이 자신을 고발한다면?
'보통 일로 끝나지 않겠지.'
그렇기에 요슈아는 유리안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 자신의 치부가 이대로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면 안 된다.'
그 누구에게도.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안내원으로 보이는 여성이 싱긋 웃으며 요슈아에게 물었다.
"유리안을 보러 왔다. 안내해라."
"아, 잠시만요."
그의 말에 안내원은 자신의 뒤편에 적힌 칠판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유리안 경께선 현재 개인 용무로 자리를 비우신 상태입니다."
"어디 갔지?"
"거기까지는...."
자리를 비웠다는 말에 요슈아의 이마엔 힘줄이 꿈틀거렸다.
가뜩이나, 싫은 얼굴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행차했는데 자리에 없다고? 게다가, 그 행방도 모른다니.
"왜 모르지?"
"네? 그, 그게...."
"그게 네년이 해야 할 일 아닌가?"
요슈아가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자, 안내원의 얼굴은 급속도로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하시죠?"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갑작스레 목소리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요슈아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유리안 경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은 당신도 알지 않나요?"
조곤조곤한 말투로 말을 이은 '감은 눈' 단장 오드윈은 천천히 다가왔다.
성인 여성치고는 작은 키지만,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듯 그녀의 몸에선 자신감이 느껴졌다.
"오랜만입니다, 오드윈 경. 아니, 몰락 귀족에게 경이란 칭호는 사치인가?"
요슈아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인사를 했으나, 오드윈은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지 딱히 개의치 않는 눈치다.
"어떻게 부르던 저는 상관없어요. 그건 그렇고, 요슈아 님이 유리안 경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당도하신 것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오드윈을 보자 요슈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오드윈이 현재 자신과 유리안의 관계를 알고 있을 리 없지만, 저런 짐작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요슈아는 실로 불쾌했다.
"쓸데없는 짐작하기는, 그런 일 없어."
"어머! 그럼 아무런 일도 없으시면서 유리안 경을 보러 온 건가요?"
오드윈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사이 좋은 형제네요."
꽈악.
그녀의 말에 요슈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목에는 평소보다 힘줄이 불거졌다.
'망할 년이.'
저 여자가 유리안과 크라이파트 가문과의 관계를 모를 가능성은 없다. 저 말은 단순히 자신의 성질을 긁기 위한 말이다.
하찮은 몰락 귀족이 사대 가문인 크라이파트 가문을 욕보이려 하다니.
"감히, 네까짓 게 못 하는 말이...."
"오랜만이군요, 요슈아."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것이 유리안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요슈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얼굴, 그러나 평소보다 피곤한 기색이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이곳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형님, 잠시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이야기를 말입니까?"
"예, 부디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얼굴을 보자, 요슈아는 정중한 태도로 부탁했다. 자신과 유리안의 관계에서 목줄을 쥐고 있는 쪽은 어디까지나, 유리안.
가뜩이나, 오늘 유리안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그가 쥐고 있는 자신의 약점을 가지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측할 수 없다.
"...이건 의외네요. 저 성질머리를 굽힐 줄이야."
그런 요슈아의 모습을 보며, 오드윈은 뒤에서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거리가 가까웠던지라, 그 혼잣말을 들어버린 요슈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우선 들어오시지요. 밖에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으니 말입니다."
***
녀석이 여기에 무슨 일이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요슈아의 얼굴을 보자, 든 생각이다.
요슈아가 나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것은 알고 있다. 가문 회의에서 내가 한 부탁을 이행했다면 찾아올 일은 없을 텐데.
귀찮은 일은 아니겠지.
가뜩이나, '검은 기사'의 일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데 말이야.
"아버지...아, 아니 가주님께서 유리안 형님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시답니다."
음, 귀찮은 일이 맞군.
"가주님께서 말입니까?"
"예."
"굳이 말입니까?"
나는 내 생각을 입에 담았다.
말 그대로, 굳이 볼 필요가 있냐는 뜻에서 한 말이다.
지금까지 크라이파트 가문은 '유리안'을 가문의 종양처럼 취급해왔다. 그것은 가주인 '오벤 크라이파트'도 마찬가지일 터.
"이유를 잘 모르겠군요."
그나마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요슈아가 내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무심하게 요슈아를 쳐다보았다.
윽, 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요슈아의 머리 위에는 '공포'의 색이 짙게 흘러나왔다.
이전에 있었던 일 탓에 나를 깔보던 성향은 많이 사라졌으나, 오늘따라 더 예의를 차리는 느낌이다.
"혹시..., 제가 한 부탁이 너무 어려웠던가요?"
"아, 아닙니다! 말씀하신 대로 가문 회의에서 형님을 차기 가주로 지지했습니다!"
토로하듯, 목소리가 커지는 요슈아.
내가 그에게 한 부탁은 가문 회의에서 날 지지하고, 되도록 '가주 후보'에 올릴 수 있도록 이목을 끄는 것이다.
크라이파트 가문은 가주 후보를 공적(公的)으로 다루기에.
내가 이름을 올린다면, 쉽사리 크라이파트 가문에서 손을 쓰기 어려워질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아, 아마... 부정적인 이유로 형님을 보자 하신 건 아닌 듯합니다."
요슈아의 읊조리는 목소리엔 분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흐음...."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은 하이든 라이히의 건도 있고, 여명회에 집중하고 싶은데.'
딱히 허비할 시간이 없다.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든 좋으니 본가에 연락해주십쇼. 가주님께서...."
"아뇨, 본가엔 가지 않겠습니다."
내 말에 요슈아는 몹시 당황한 눈치다.
"예? 유, 유리안 형님..., 분명 알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용무 때문에 바쁜 몸이라서요."
말을 거듭할수록, 요슈아의 얼굴은 굳어갔다. 내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 대강 유추가 되는 모양이다.
"가주님께서 직접 와주신다면 바쁜 일정 속에서도 시간을 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요슈아는 시선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갔다.
고작해야 방계인 내가 가문의 가주를 '호출'한 것이다.
녀석도 멍청이는 아니다. 이 의미가 '완고한 거절'이라는 것쯤은 알겠지.
'가주가 날 만나고 싶어 한다라.'
어느 정도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슬슬 예사롭지 않은 황실의 분위기 탓에 '유리안'이 가지는 유명세를 이용하고 싶은 것이겠지. 그것이 악명이든 뭐든 상관없이 말이야.
'마침 가문 회의에서 요슈아가 말을 꺼내줬으니, 그쪽으로 흐름을 옮겨도 이상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헤란드와 이야기했을 때부터 느끼던 감정이지만, 난 크라이파트 가문을 그리 좋게 보지 않는다.
본래의 '유리안', 그가 가지고 있던 자아 덕일 것이다.
"...그, 그러지 마시고, 직접 찾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형님."
으드득.
어쩐지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의 출처가 요슈아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주님께서 직접 찾아오게 하신다면 그... 가문의 안과 밖에서 좋게 보지 않을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요슈아는 가문의 체면을 중시하시는 분이셨군요. 그래서 저를 야밤에 몰래 만나러 오셨고요."
비꼬는 듯한 내 말에 요슈아의 동공이 살짝 커지더니 이윽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슈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일단.... 가주님께 형님 말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
집무실이 조용해지자, 자리에서 일어난 곧장 거울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후, 손바닥에 '솜브라'로 조형을 거치기 시작했다. 만들어진 것은 가면이다.
'어스름 불꽃'에서 사용하던 것과 모양이 똑같지는 않지만, 새까만 '솜브라'의 색 때문에 분위기는 흡사하다.
"...생김새는 큰 의미가 없고, 검은 가면이기만 하면 상관없는 건가."
습관처럼 흘러나오던 존댓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면을 착용할 시 '검은 기사'의 캐릭터성이 '존댓말'보다 우위를 가져가는 모양이다.
***
건물을 빠져나온 요슈아의 목에는 힘줄이 잔뜩 불거져 있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요슈아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측근들이 득달같이 달려왔으나, 험상궂은 분위기에 쉽사리 말을 걸지 못했다.
'젠장.... 젠장!'
현재 크라이파트 가문에서는 이상한 기류가 일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크라이파트 가문이라 인정받지 못했던 유리안, 그에게 붙은 '프라손'이란 멸칭마저 제거하자는 말이 나온 것이다.
물론 단순한 발언으로 그쳤다. 그가 지금까지 쌓은 악명은 포용하기엔 너무나도 거대했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런 말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는 것이야.'
어렸을 때부터, 혈통에 대한 중요성을 교육받은 요슈아는 반쪽짜리 방계가 이토록이나 언급되는 것이 불쾌했다.
심지어 그 발판이 된 것이.
'내가 저지른 짓 때문이라니....'
가문 회의에서 그가 반감을 살 수 있도록, 열렬한 지지를 보낸 것이 화근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또 헤란드 형님께서 유리안에게 동정을 품고 있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의 입지가 커질수록, 가문 내에서 자신의 입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은 유리안이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요슈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떻게든 아버지, 가주님과 유리안을 만나게 하는 수밖에 없다.'
아버지께서 왜 유리안을 호출한 이유.
아마도 그건, '가문 회의'에서 그에 대한 언급이 잦아진 탓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아버지라면, 헤란드 형님처럼 유리안에게 동정심을 품고 있었다던가, 그런 일은 절대 없을 일이겠지.
암, 그렇고말고!
지금 가문 내에서 불기 시작한 이 기묘한 기류는 가주님과 유리안이 만난다면, 저절로 해결될 터.
저 안하무인 인간쓰레기를 마주한다면 분명 그리될 터이다.
'...설마, 이번에도 내 탓에 저놈의 기세가 등등해지는 것은 아니겠지?'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불안감. 그러나 요슈아는 고개를 저으며 그것을 부정했다.
설마, 그럴 리가.
61화. 혈귀단
월장검의 보수가 끝났다는 소리를 들은 난, 곧장 '어스름 불꽃'으로 향했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대장장이들.
뜨거웠던 대장간의 공기는 내 등장으로 차갑게 식어갔다.
"...유리안?"
"설마, 그 '검은 기사'에 대해 조사하러 왔나?"
"그럴 수도 있어. 루피나를 도와줬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경단 비스무리한 행동이었으니까."
내가 '검은 기사'를 조사하러 왔겠냐.
그 당사자가 나인데 말이야.
그나저나 이곳 '어스름 불꽃'의 직원들은 '검은 기사'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는 눈치다. 신문 3면에서나 볼 수 있길래 아무런 소문도 안 났을 줄 알았는데.
"이 녀석, 못 하는 말이 없어! 루피나를 구해줬는데, 자경단이라니!"
"그래! 위인이라고 불러도 모자랄 망정에 말이야."
"아무런 보상도 없이 남을 도와주는 게 얼마나 힘든 지 너도 알잖냐. 그런 대단한 사람에게 자경단이 뭐야! 자경단이!"
"크흠."
낯간지러운 직원들의 발언에 난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관종끼가 있는 '유리안'의 에고 탓에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봐, 유리안 경께서 이 이야기를 그리 좋아하시지 않는 모양이야."
"하긴, 황실로부터 허가받지 않은 행동이니 말이야."
딱히 그런 것도 아니지만 헛기침이 위협적으로 들린 모양이다.
모여서 대화를 하던 대장장이들은 고개를 숙이고, 내 주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그런 와중, 다가온 루피나의 손에는 '월장검'의 검집이 들려있었다.
'음.'
나는 속으로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검은 기사'가 나라는 사실을 루피나가 알 리가 없겠으나, 어쩐지 움찔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기묘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루피나가 물었다.
"왜, 왜 그러시죠?"
"아무것도 아닙니다. 루거 어르신께선 안 보이시는군요."
"루거 할아버지께선 일이 있으셔서 제가 나왔습니다."
"그렇습니까?"
저번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루거는 꽤나 바쁜 모양이다. 하긴, 제도에서 제일가는 명장이라는데 그럴 수 있지.
어쨌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보수를 맡긴 '월장검'만 돌려받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근데 내가 언제부터 루거에게 '경'이 아닌 '어르신'이라 부르게 됐지?'
시간이 지날수록 내 인격과 '유리안'의 인격이 뒤죽박죽 섞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보수는 깔끔하게 잘 되었어요. 할아버지께서 새로운 공법을 도입하셔서 예전처럼 균열이 생기는 일은 쉽게 없을 거라 하셨어요."
흠칫 놀란 내 모습은 못 보았는지, 루피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보석으로 만든 검인지라 강철보단 단단하지 않을 거예요. 알고 계시죠?"
모를 리가.
애초에 이 '월장검'이란 물건은 강도(剛度)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닌, 내 마나와 궁합이 잘 맞아서 쓰는 것이다.
결국 '오러'만 잘 통하게 만든다면 강철보다 단단하게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주시죠, 확인해보겠습니다."
내가 손을 뻗자, 루피나는 흠칫했다. 머리 위로는 '공포'의 색이 일렁거리는 것이 내색은 하지 않았을 뿐 두려워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전에 유리안이 이곳에서 난리를 쳤다는 걸 두 눈으로 보았으니, 그럴 만도 한가.
"여, 여기요."
월장검을 건네받은 난 그것을 검집으로부터 꺼내 검신을 살펴보았다. 서슬 퍼렇게 빛나는 월장검의 자태는 이전과 조금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한 번 만들어 본 경험이 있어서 그걸로 노하우가 쌓인 건가.'
괜히 명인이라 불리는 게 아니로군.
난 월장검에 오러를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은은하게 빛나는 검의 자태는 언제 보아도 달빛을 연상케 했다.
"아."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루피나가 짧은 탄식을 입에 담았다.
어째서인지, 머리 위로 보이던 '공포'의 감정도 옅어지는 것 같았다.
...왜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다.
"왜 그러십니까?"
"네? 아, 아뇨... 그, 아무것도 아닙니다!"
호기심에 묻자, 루피나는 화들짝 놀라더니 양손을 저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은 검을 쥐고 있는 내 손을 쫓고 있었다.
'...오묘하군.'
월장검을 허리춤에 차고, '어스름 불꽃'에서 빠져나갈 때까지만 해도, 그 기묘한 기류는 사라지지 않았다.
***
월장검을 허리에 차자, 아까부터 느껴졌던 허전한 구석이 사라졌다.
역시 사람은 쓰던 걸 써야 하는 모양이다.
"유, 유리안 경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황궁으로 복귀한 난 '감은 눈'의 건물로 복귀하지 않고, 제 1문인 경천문(敬天問) 지하에 마련된 감옥으로 향했다.
그곳에 들어서자, 퀴퀴한 냄새와 함께 우중충한 분위기가 반겼고, 그에 걸맞게 눈이 퀭한 관리자가 나를 맞이했다.
"하, 하하.... 그런데 말입니다. 유리안 경, 제안하신 대로 죄수의 출역 준비를 끝낸 상황입니다만, 그 뭐냐..., 소정의..., 하하."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관리자는 입술을 들썩였다. 그런 관리자를 보며, 난 이 녀석이 정신이 나간 것일까? 의문이 생겼다.
그 '유리안'에게 떡고물을 받으려고 하다니, 담이 대단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관리자를 향해 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제가 눈치가 없었군요. 제가 잘하는 것 하나 보시겠습니까?"
그 말과 함께 내 손은 돈주머니가 있는 허리춤으로 다가갔다.
그 모습에 관리자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지만, 이윽고 내 손은 주머니가 아닌 검집에 닿았다.
화들짝 놀란 관리자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실례했다는 말과 함께 열쇠를 넘겨주고 떠났다.
그 모습에 난 살며시 웃으며 계속해서 감옥의 안쪽으로 향했다. 칙칙한 공기와 무거운 분위기는 의외로 낯설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난 철창에 손을 얹고는 수감 된 죄수를 쳐다보았다.
"유, 유리안 경?"
안쪽에는 빈민가를 삼등분 한 세 개의 암흑 조직, '여섯 손가락'의 말단인 베이런이 수감 되어 있었다.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베이런의 얼굴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경께서 어찌 이런 곳에...?"
"관리자가 출역 준비를 시키지 않았습니까? 혹시 못 들으셨습니까?"
황실에 소속된 기관들은 절차를 거치기만 한다면 죄수들을 출역(出役)해 부려 먹을 수 있다.
당연히 황실 전속기관인 '감은 눈'도 마찬가지.
'검은 기사'가 세간에 등장했다는 신문을 읽은 다음 날, 베이런의 출역 신청을 해두었다.
"아뇨, 듣기는 했습니다만 경께서 부탁한 일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어쩐지 베이런은 나를 두려워하는 눈치다.
이전에 린네와 빈민가에 들렀을 때 협박 아닌 협박에 겁을 먹어 자수를 한 녀석이다.
그게 모두 '유리안'에 대한 공포 탓이라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납득이 간다.
"그, 그런데... 제가 나가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궁금합니까?"
궁금하냐는 물음에 베이런은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겁을 먹게 하려고 말한 건 아닌데.
"자세하게는 설명해드릴 수 없습니다. 황실에서 내린 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니까요. 이른바, 기밀입니다."
기밀이라는 말을 꺼냈지만 사실 황실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저 사리사욕을 위한 일.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울 때, '황실'의 이름을 팔면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황실의 기밀...."
하지만 그 사실을 베이런이 알 리가 있나.
녀석은 어쩐지, 경이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철컥.
난 감옥의 문에 열쇠를 집어넣어 비틀었다. 철창이 열렸고, 그 사이로 베이런의 꾀죄한 모습이 드러났다.
"일단 나오시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베이런은 움츠러든 채 천천히 철창에서 빠져나왔다.
***
앞장서서 걷고 있으니 베이런이 흘깃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빈민가에서 자신을 잡은 당사자가 이번엔 감옥에서 빼내어 무언가를 시킨다고 하니,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다.
"너무 경직되어 있군요. 앞으로 당신이 해줄 일을 생각하면, 조금 더 긴장을 푸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유리안 경...."
세차게 대답한 베이런은 얼마 가지 않아 말끝을 흐렸다. 이후, 그의 얼굴엔 의문이 맺혔다. 자신을 감옥에서 빼낸 이유를 도통 짐작할 수 없는 모양이다.
"유리안 경, 그런데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결국 그 의문은 다시 한번 베이런의 입에 담겼다.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분명 빈민가의 암흑 조직, '여섯 손가락'에 소속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예, 맞습니다."
"그럼, '여섯 손가락'뿐만이 아니라 다른 조직도 당신의 얼굴을 알고 있겠군요."
"뭐...,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제가 워낙 마당발이라서 말입니다."
마당발이라는 말에 자신감을 보이는 베이런.
그의 웃음을 보자, 나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딱 좋습니다."
계속해서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와 베이런은 제도의 바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방향이 익숙했는지, 베이런의 얼굴엔 의아함이 피어올랐다.
"이 방향은 빈민가 쪽이 아닙니까?"
"예, 맞습니다."
표지판과 함께 빈민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이전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일부러 꼬질꼬질한 후드를 뒤집어썼다. 금색이 감도는 회색의 머릿결과 휘황찬란한 코트는 빈민가에서 이목을 끌 뿐이다.
'게다가 정체를 들키지 않는 편이 좋으니 말이야.'
조금 더 빈민가의 안쪽으로.
032A라고 적힌 표지판을 지나치자 얼마 지나지 않아, 040A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유리안 경."
그러자, 베이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왜 그러십니까?"
"여기부터는 '여섯 손가락'의 구역이 아닙니다. '혈귀단' 녀석들의 구역입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네?"
알고 있단 말에 베이런은 화들짝 놀랐다.
혈귀단(血鬼團).
빈민가를 삼 등분하고 있는 3개의 암흑 조직 중 하나.
이놈이 속한 '여섯 손가락'은 노예 매매와 밀수, 경비와 도박 등 수지타산에 맞는 것이라면 뭐든 맡고 있다면, 반대로 이쪽 '혈귀단'은 단 한 가지의 일에 사활을 걸었다.
바로 요정(料亭) 운영이다.
당연히 일반적인 음식점과는 다르다.
흔히들 말하는 '높으신 분'들이 애용하는 장소이며, 은밀한 접대나 교섭이 많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 근방은 요정을 운영하는 혈귀단 녀석들의 영역이고.'
물론, 요정은 이 빈민가에 위치하지 않는다. 이런 꼬질꼬질한 곳에 '높으신 분'이 온다면, 격이 떨어진다며 혀를 내두를 것 아닌가?
"설마... 유리안 경, '흡혈귀'를 보러 오신 겁니까!?"
베이런은 당황한 기색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벌벌 떠는 손으로, 그는 '흡혈귀'라는 명칭을 입에 담았다.
'혈귀단' 수장의 별명이다. 이전 빈민가의 영역을 두고 조직원들간에 알력 다툼이 벌어졌을 때, 9척의 키를 지닌 '혈귀단'의 수장은 그 거구를 덮을 정도로 많은 피를 뒤집어썼다 한다.
그 모습이 마치 피를 먹는 괴물 같다며 빈민가 사람들은 두려워했고, 소문에 살이 점점 붙어 결국 지금의 '흡혈귀'라는 별명이 된 것이다.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이군요."
"치, 칭찬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그럼 이곳에서 난동을 부려주시겠습니까?"
후드를 한껏 눌러쓴 난 당연하다는 듯 베이런에게 말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흡혈귀'를 부르려고 합니다."
62화. 흡혈귀(1)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유리안 경?"
나의 말에 어지간히 당황스러운지, 베이런의 동공은 크게 흔들렸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곳에서 난동을 부려달라고."
"저, 저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긴 '혈귀단'의 구역이라고...."
"예."
"그 녀석들 다른 건 몰라도 조직끼리의 다툼에선 사정을 안 봐준단 말입니다...."
기어가는 듯, 작아지는 베이런의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베이런은 움츠러들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걸 원하는 겁니다."
암흑 조직, '혈귀단'은 제도에 큰 요정을 운영하는 탓에 다른 곳에 힘을 쓰려고 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지만, 다른 조직과의 영역 다툼에는 요정 운영만큼이나 신경을 쓴다.
"오늘은 우두머리를 만나러 온 것입니다. 저 같은 외지인이 난동을 부려봤자, 혈귀단에선 신경 쓰지도 않을 겁니다."
꿀꺽.
베이런은 침을 삼켰다.
"그래서 당신을 데려온 겁니다. '여섯 손가락' 소속의 당신을."
"...뭐, 뭘 하려고 그를 불러내시려는 겁니까?"
뭐긴, 하이든 라이히에게 미행을 붙이려는 발판이지.
'혈귀단'은 '높으신 분'들이 다니는 요정을 운영하는 만큼 여러 정보가 모이는 곳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보 수집 능력은 단순히 은밀한 접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완벽에 가까운 미행과 감시. '혈귀단'은 그것이 가능하다.
'검성이 검은 기사 노릇도 하지 않고, 어째서 신성국 페레난드로 날랐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우리의 고귀하신 주인공께서 도무지 할 법한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기밀이라고 했을 텐데요."
살짝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하자 베이런은 입술을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그, 그럼 하나만 약속해주십쇼 유리안 경."
"뭡니까?"
내가 그를 쳐다보자, 베이런은 다시 한 번 침을 삼키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혈귀단 녀석들이 온다면, 유, 유리안 경께서 처리해주시겠습니까?"
"당연합니다."
내가 미소를 짓자, 그는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도로의 한복판으로 향했다. 그를 보며, 나는 덮어쓴 후드를 한 차례 더 확인했다.
과연 '혈귀단'이 얼마나 빨리 반응할지....
"으, 으아아아아아악!"
응? 뭐야.
덮어쓴 후드를 확인하려던 순간, 베이런이 괴성을 지르며 내 앞으로 고꾸라졌다.
"유, 유리안 경! 흐, 흡혈귀입니다...!"
한바탕 바닥을 굴러 온몸이 진흙으로 더러워진 녀석은 정신은 잃지 않았는지 악착같이 기어 오며 말했다.
아니, 이렇게나 빨리? 베이런이 이목을 끌기도 전에 등장할 줄 상상도 못 했네.
고개를 드니, 소문대로 9척이 넘는 거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베이런, '여섯 손가락'인 네놈이 우리 영역에 무단으로 들어오다니, 우리가 모를 줄 알았나?"
'흡혈귀'의 낮은 중저음 목소리에 몸을 움찔한 베이런은 신음과 함께 내 뒤로 숨었다.
"저 거구도 당신을 알아보는 걸 보니, 정말로 마당발이 맞는 모양이군요."
"그, 그렇다니까요! 유리안 경!"
호소하듯 말하는 베이런의 목소리에 '흡혈귀'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리안...?"
그의 의문에 난 덮고 있던 후드를 걷어냈다.
"흡혈귀, 소문대로 9척을 훌쩍 넘는 거구시군요."
"황실전속기관, '감은 눈' 소속의 미친개, 크크. 넌 소문에 비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군."
'흡혈귀'는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로 어울리지도 않게 비아냥거렸다.
"그 정도 덩치면, 어머니가 고생 좀 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 시시한 농담 따위나 하러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왔나?"
"그럴 리가."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 오늘 '혈귀단'의 우두머리를 보러 온 겁니다."
우두머리를 보러 왔다는 말에 9척 장신의 키를 지닌 '흡혈귀'가 움찔했다.
"유, 유리안 경... 혈귀단의 우두머리는 지금 눈앞에 있는 녀석입니다!"
그 모습을 보지 못했는지, 베이런은 눈앞의 녀석을 보며 소리쳤다.
역시 아무리 마당발이라고 하지만, '혈귀단'의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지 눈앞의 거구가 '혈귀단'의 우두머리인 줄 아는 모양이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혈귀단의 통솔자는 나다."
끝까지 시치미를 뗄 생각이로군. 난 거구를 쳐다보며, 허리춤에 찬 검집을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 분이시군요. 굳이 예절을 가르쳐 드려야 합니까?"
'유리안'의 악명을 알고 있다면, 겁을 지레 먹을 상황. 가급적 전투를 피하고 싶은 입장에서 이 도발에 굴복해줬으면 좋은 심정이다.
"그럼 나도 혈귀단의 예절을 알려주마."
순간 어디서 꺼냈는지 징을 박은 장갑을 낀 '흡혈귀'는 내게 주먹을 뻗었다.
내 도발에 도리어 호승심이 자극된 모양이다.
가까워지는 주먹을 보며, 재빨리 '월장검'을 꺼낸 난 오러를 흘려보내 녀석의 정권을 비스듬히 흘려보냈다.
"뭣...!"
주먹에 꽤 자신이 있었는지, 공격이 흘려지자 녀석의 얼굴엔 당혹감이 서렸다.
하지만 거기에 끝나지 않고 난 월장검을 비틀어 녀석의 장갑 틈새로 쑤셔 넣었다.
이 일련의 과정이 머리로 생각하고 된 것이 아닌 습관처럼 저절로 움직여서 된 것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크윽!"
오랜만에 느껴보는 통증을 참지 못했는지 신음이 들려왔다. 동시에 잔뜩 일그러진 '흡혈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습니까, 이제 제대로 대답할 정신이 들었습니까?"
조소를 담긴 어투였으나, 평화롭게 가자는 내 나름의 배려다. 물론, '유리안'의 성격이 반영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콰직──!
살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장갑 사이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검이 박힌 상태에서 억지로 힘을 줘 검을 뽑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다.
'상남자군.'
난 월장검에 '솜브라'를 흘려보내자, 검신에 작은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조화되지 못한 두 힘이 반발을 일으킨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악!"
9척 덩치에 어울리는 쩌렁쩌렁한 비명.
우량아가 태어나는 줄 알았다.
엄청 아프겠지.
무려, 삼각 데몬의 혼석의 힘과 그에 상응하는 내 오러이니 말이야.
"허억.... 허억."
만신창이가 된 '흡혈귀'의 오른손.
그럼에도, 녀석의 눈엔 투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더 망가뜨려야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나?
그런 생각에 '월광검'의 출력을 높이려던 찰나였다.
"그, 그만해주세요!"
어딘가 앳된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은 황급히 내 앞까지 달려왔다.
나이가 어린 소년은 벌벌 떨면서, 누군가의 전언을 입에 담았다.
"마담께서 유리안 경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
하늘에 떠오른 달은 짙게 깔린 어둠을 물리치고, 산림 안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와 부엉이의 울음은 적막한 공기를 운치 있게 바꿔주었다.
동시에 나무를 타고 전해지는 시원한 밤바람. 그것을 받으며, 잘 트인 길을 걷고 있자니 내가 신선이 된 듯한 착각이 일었다.
[명월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눈에는 작은 표지판과 큰 건물이 들어왔다.
혈귀단이 운영하는 요정, 명월관(明月館).
불야성처럼 어두운 밤을 밝히는 건물의 자태는 실로 요사스러웠다.
마치 벌레들을 이끌게 만들도록 설치한 등불과도 같았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이 '명월관'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에서 선택지에 따라, 이곳에 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이곳의 마담. 아니, '혈귀단'의 우두머리를 보기 위해선 내부 인원의 인도를 받아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번거롭게 빈민가에 들린 것이고.'
아무래도 이곳은 '높으신 분'이 많은 곳이지 않은가?
쓸데없이 이목을 끌었다간, 가뜩이나 좋지 않은 평판이 나락으로 가버릴 수 있다.
"마, 마담은 5층에 계실 거예요."
빈민가에서부터 나를 안내해준 소년은 앞장서서 걷더니, 명월관 내부에 마련된 승강기에 탑승했다.
당연히도 전기가 아닌 공명석을 이용하는 것일 테지만, 이곳에 오래 있었던 탓인가.
승강기가..., 어쩐지 낯선 느낌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고 닫혔던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어마어마한 향수 냄새로군.'
안쪽으로 들어서자,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강한 향수 냄새와 함께 차광 커튼이 길게 늘어선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적발이 살짝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트알레 님, 유리안 경을 데려왔습니다."
그런 향수 냄새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년은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생각한 것보다 빨리 왔네."
고혹적인 목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보이는 적발이 스르륵 움직이더니, 차광 커튼이 젖혔다.
"반가워, 유리안."
트알레라 불린 여성, 그녀는 이곳, '명월관'의 마담이자 암흑 조직 '혈귀단'의 진짜 우두머리다.
"듣자 하니, 아르투르를 혼내줬다면서?"
아르투르?
아, 빈민가에서 본 '흡혈귀'를 이야기하는 건가.
"예, 집을 지키는 개라고 하기엔 버르장머리가 없더군요."
"집 지키는 개라니, '흡혈귀'는 명실상부한 혈귀단의 대장인걸?"
"그 별명도 조금 웃기더군요. 진짜 '흡혈귀'는 정말 따로 있는데 말입니다."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트알레의 여유로운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에렌, 잠깐 나가 있으렴. 손님과 단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어졌거든."
트알레가 손을 흔들자, 안내하던 소년은 정중한 인사와 함께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방에 단둘이 남자, 트알레는 손을 뻗어 탁자에 올려둔 잔을 쥐었다.
새빨간 액체가 담긴 잔. 평범한 사람이라면, 저것이 적포도주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저것은 포도주가 아니다.
피.
그것도 인간의 피.
'이 피 냄새를 가리기 위해, 향수를 잔뜩 뿌린 거로군.'
트알레 게니드아 바토리.
그녀는 인간이 아니다.
정확히는 먼 과거, 특별한 이유로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그녀는 뱀파이어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며, 인간의 혈액을 식사로 섭취하는 그 종족 말이다.
사실 '혈귀단'이란 조직도 빈민가에서 쉽게 피를 구하기 위해 그녀가 만든 조직이다.
"후우...."
잔을 내려둔 트알레의 입에선 매력적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새빨간 입술은 본래 그런 것인지, 방금 마신 피에 물든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어쩐지 남심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느껴졌다.
"에렌?"
트알레는 다시금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그제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흠."
트알레는 잠깐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유리안 경."
어쩐지 처음 인사를 했을 때보다 정중한 말투.
"초면인데 시건방지게 말해서 죄송합니다, 그... 부하가 보고 있었던지라."
"그렇습니까?"
"네....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트알레.
소년과 같이 들어왔을 때와 달리 180도 바뀐 그녀의 태도에 당황할 법도 했지만, 도리어 내 입장에선 이것이 익숙했다.
본래 '트알레'란 인물은 자기 포지션을 잘 파악하고 있는 캐릭터이다.
흔히들, 판타지 속 '뱀파이어'는 자신들을 인간의 상위종이라 생각하며 인류를 피 주머니로만 보는 괴물 같은 존재지만 이 세계관에선 그렇지 않다.
멸종에 가까운 상황.
인간과 마찬가지로 '데몬'과 적대적인 위치에 있는 그들 종족이지만, 마왕의 등장으로 고위 순혈 뱀파이어들이 죽어갔고, 그 힘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어린 뱀파이어들만이 살아남았다.
'데몬'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량의 피가 필요해 인간을 사냥했지만, 역으로 황실의 명에 의해 사냥당하고 만 비운의 종족.
종족의 안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인간 사회에 녹아들어야만 했던 그들에게 제일 두려운 것은 무엇일까?
"부디 '감은 눈'에 보고만큼은...."
바로 공권력이다.
63화. 흡혈귀(2)
고개를 숙인 트알레의 머리 위에는 '공포'의 색이 한가득하다 못해 넘쳐흐르고 있다.
저렇게나 뚜렷한 색이라니, 참으로 오랜만에 본다.
'...어지간히 무서워하는군.'
정중한 몸짓의 그녀는 작게 웃음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본인의 감정을 대변하듯, 입은 웃고 있지만, 눈썹은 처져있었고, 입술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후, 후후... 유리안 경, 태양신 솔라룬에 맹세코 저 트알레는 절대 율법에, 정확히는 황실의 심기를 거슬리는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말투에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뱀파이어'가 태양을 상징하는 솔라룬에게 맹세하다니, 어쩌자는 거냐.
"크흠."
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서 한 차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자, 그녀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아아, 죄, 죄송합니다. 유리안 경께서 손수 누추한 이곳에 친히 방문하셨는데, 제가 대접을 소홀히 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단순한 헛기침이었으나, 내가 불쾌함을 내비치는 의사로 알아들었는지 그녀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잔을 하나 더 꺼내더니 거기에 무엇인가를 따르기 시작했다.
조금 전 그녀가 마시던 피와 똑같은 색이다.
설마 내게 피를 대접할 생각인가?
아무리 피를 많이 보는 '유리안'이라고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그걸 제가 마시라는 겁니까?"
"네? 아..., 포도주 싫어하시나요?"
포도주? 피가 아니라?
"바발디의 명물인 샤토 바발디... 드셔보시면 지금까지 드셨던 포도주는 싸구려라고 생각...."
두려움에 횡설수설하는 트알레의 말이 시끄러워 냉큼 넘긴 잔을 건네받자, 그녀가 말한 대로 달콤한 포도 향이 코끝을 타고, 진하게 감돌았다.
"유리안 경, ...아무리 제가 피를 주식으로 삼고 있다고는 해도, 이렇게 경에게 드리진 않겠...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모양인지, 트알레가 난처하게 웃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다.
그녀의 말에 다시 한번 잔의 향을 맡자, 포도 향이 진하게 스쳐 지나갔다.
혹시 독이 있진 않겠지?
설마 방금 트알레가 마시던 음료니 없겠지.
"음."
한 모금 마셔본 난 새삼 놀랐다.
사실 난 '포도주'라는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흔히들 '단맛'이라는 것은 찾을 수 없으며, 텁텁한 포도의 잔재가 혀끝에 맴도는 것을 심히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트알레에게 건네받은 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었을 때, 텁텁하지 않은 묵직한 바디감이 느껴졌고, 혀끝을 넘어갔을 때 느껴지는 달콤한 포도 맛과 향은 일품이었다.
'...그래도 자연을 품었다는 둥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로군.'
싸구려 내 입맛에는 대단한 포도주였지만, 이런 비싼 와인을 많이 마셔본 '유리안'에게는 '좋다'라는 느낌보다는 '별로'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럼, 절 찾아오신 이유에 대해 들을 수 있을까요?"
잔을 내려놓은 내 모습을 보고 있던 트알레가 살짝 긴장한 모습을 비추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제가 트알레 님을 찾아온 이유는 부탁 하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부탁?"
트알레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부탁인가요? 제가... 제 손에서 해낼 수 있는 일이었으면 좋겠는데."
"트알레 님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게 뭔가요?"
와인이 담긴 잔의 테두리를 손으로 한 번 훑은 난 미소를 지으며, 트알레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미형(美形)이기는 하지만, 호감(好感)과는 거리가 먼 '유리안'의 외모.
그리고 저도 모르게 쓰다듬고 있는 검.
이 모든 것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무언의 압박을 넣기에 적합하다.
꿀꺽.
그 덕에 트알레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주먹을 꽉 쥐고는 이쪽을 쳐다보았다.
"사람 한 명을 감시해주셨으면 합니다."
"...감시 말이에요?"
"예."
'감시'라는 단어가 그녀에게는 익숙한 단어였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녀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으니까.
"혹시..., 그 부탁을 들어준다면 제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함구해주실 수 있나요?"
"얼마든지 해드리지요."
능청스럽게 말하자, 트알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그나마 다행이네요. 제가 자신 있는 분야라서."
"예, 그게 아니라면 이곳에 찾아왔을 리도 없죠."
"그런데 어떻게 아셨나요? 제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후후, 굳이 듣고 싶으신가요?"
난 아까와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은 채, 이번엔 의도적으로 검을 만지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곤란한 질문이다.
'게임을 해본 경험'을 이야기 해봤자 못 알아먹을 것이 뻔하지 않은가?
"아뇨, 아뇨. 듣지 않겠습니다! 듣지 않는 게 현명한 것 같으니까요."
다행히도 번거로운 절차를 밟을 필요는 없어졌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트알레는 격하게 거절했기 때문이다.
"현명하시군요."
"가, 감사합니다. 유리안 경."
가볍게 목례하며, 트알레는 자신의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이 자신의 토벌이 아닌 '부탁'임을 알자, 그녀의 몸에선 여유로움이 흘러내렸다.
"그래서..., 저명하신 우리 유리안 경께서 감시하고 싶다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검성, 하이든 라이히입니다."
"네, 검성.... 콜록콜록."
짧은 기침 소리와 함께 트알레의 입가에선 포도주가 한 줄기 주르륵 흘러내렸다.
"네? 혹시 제가 잘못 들었나요?"
"반응을 보아하니, 잘못들은 게 아닙니다."
"그, 그래도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어요?"
"검성, 하이든 라이히. 그를 감시해주셨으면 합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트알레는 잔을 탁자 위에 내려두었다.
"저기, 유리안 경... 검성이라 함은 제국 검술의 마스코트이자,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어찌 말하면 '감은 눈'처럼 황실 전속 기관의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맞습니다. 그 자체로 살아있는 공권력이라 부를 수 있죠. 그가 제국에 미친 영향력은 웬만한 귀족들을 상회할 테니까요."
말을 이을수록, 트알레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가뜩이나 핏기가 없어 보이는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물들었다.
"거, 검성을 감시하다 걸려버리면 그 후폭풍은 어떻게 하나요?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제도에서의 안전한 삶. 하지만 그 '검성'을 감시하다 들키면, 본인에게 다가올 후폭풍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렇기에, 트알레는 '공권력'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뱀파이어'는 제국 신민에 포함되지 않기에 그것이 탄로 날 경우, 그녀는 명월관을 지키기는커녕 제국에서 쫓겨나 목숨까지 잃게 될 수 있다.
"검성이라면, 분명 '감은 눈'보다 힘이 있고, 황실에서도 인맥이 있을 텐데!"
"트알레 님, 실패를 염두 하는 것은 삼류입니다. 더군다나 미행이나 감시를 해서 들켜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다 알고 있다는 내 말에 트알레의 입술이 살짝 꿈틀거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혹여나, 스승님이 '발견'하신다고 해도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말입니다."
"처리...?"
"궁금하십니까?"
"아, 아뇨! 궁금하지 않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황급히 대답하는 트알레.
검성의 제자였던 유리안은 파문당한 이후, 그를 혐오하며 죽이고 싶어 한다.
이 세간의 상식은 뱀파이어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내가 처리하겠다 말하긴 했으나 트알레의 '감시'가 검성에게 들킨 확률은 희박하다.
"휘익!"
그녀가 휘파람을 불자, 창문을 통해 소동물 하나가 날아 들어왔다. 회색 깃털이 인상적인 소쩍새다.
트알레가 손을 뻗자, 그녀의 손등 위로 새가 앉았다. 그 후, 무엇인가를 속삭이자 새는 들어온 창문을 통해 다시 밖으로 날아갔다.
'저게 권속이로군.'
저 '작은 동물'들이야 말로, 내가 하이든 라이히를 감시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 이유다.
세간에서 아는 '뱀파이어'처럼 이 세계관의 뱀파이어들도 자신의 피로 권속을 만들어 그들을 수족처럼 부리며, 그것들의 눈과 귀를 빌릴 수 있다.
그것을 통한 감시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탐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일상적으로 주변에 많이 보이고, 아무런 마나조차 느껴지지 않는 작은 동물들.
그것에게 적개심을 갖는 멍청이는 없을 테니까.
"일단 말은 해두었어요. 하지만 신성국 페레난드는 거리가 꽤 멀다 보니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감사합니다. 트알레 님."
"가, 감사는요. '감은 눈'을 위해, 황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신민으로서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어정쩡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는 그녀.
악수하기 위해 손을 맞잡자, 미세하기 떨리는 것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이대로 유리안 경을 보내는 것도 아쉬운데, 어쩌시겠어요? 저희 명월관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가시는 것은."
그와 동시에, 그녀에게서 미혹의 향기가 흘러나왔다.
역시 보통이 아니야.
내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한, 자신은 평생 나에게 휘둘릴 수밖에는 상황이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이 구도를 깰 수 없을 터.
나에게 족쇄를 채우는 방법만이 유일한 방법.
'분명 저 극진한 '대접'에는 그런 의도가 있겠지.'
그것이 뇌물일 수도, 술 혹은 여색일 수도 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누구인지 잊으셨습니까?"
물론 어울려 줄 생각은 없다.
내 말에 트알레는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호, 호호... 역시 유리안 경은 황실에 어울리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
승강기를 타고 내려오자, '명월관'의 입구에선 베이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 유리안 경!"
벌벌 떠는 베이런이 내게 황급히 다가오자, 그 뒤로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그를 뒤 따라왔다. 빈민가에서 '혈귀단'의 대장 노릇을 하던 '흡혈귀'다.
이름이 분명, 아르투르였던가?
"유리안."
그는 으르렁거리는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녀석보다는 그의 붕대 감은 오른팔이 먼저 눈에 띄었다.
"아직 손이 남아 있는 걸 보니 제가 너무 살살했나 봅니다. 그러게 왜 괜한 자존심을 부리신 건지."
"...닥쳐라."
자존심과 두려움, 그 중간의 어느 말투로 녀석은 답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잊지 않겠다! 빌어먹을 놈."
어쩐지 삼류 악당이 할 법한 대사에 난 웃음이 나왔다.
"후후, 제 검에 단명하게 된 귀족들도 그런 말을 하던데, 그렇게 말하고 지키는 분들은 단 한 분도 안 계셨습니다."
절로 나오고 마는 유리안스러운 말투, 입을 열면서도 감탄하고 말았다.
"...너 같이 피비린내 나는 놈이 황실 직속 기관이라니. 황족과 귀족들은 보는 눈도 없군."
그러게 말이다.
난 아르투르에게 미소를 보이며 그를 지나쳐 명월관을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조심해라. 유리안. 곧 네놈의 그 높은 콧대를 꺾을 사람이 나타날 테니 말이야."
문득 그의 입에서 쌩뚱맞은 말에 흘러나왔다.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르투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내 콧대를 꺾을 사람?
물론 제도에는 '유리안'보다 강한 실력자가 몇 있겠으나, '나타났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아하니, 최근 제도에 등장한 인물인 모양이다.
누구지?
괜스레 긴장감이 생겼다.
"그게 누구입니까?"
"검은 기사...,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아, 걔.... 내가 잘 아는 사람이야.
순간 어이가 없어서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했다.
"검은 기사 말입니까? 그가 혹시 검성보다 강합니까? 전 '유리안 크라파이트 프라손'입니다."
내 말에 아르투르는 치켜뜬 눈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개의치 않고, 난 다시금 명월관을 빠져나갈 채비를 했다.
'아이러니하군.'
선선한 밤바람을 몸으로 받으며, 이제는 보이지 않는 명월관 쪽을 쳐다보았다.
작중, '검성'은 유리안의 행보를 의심하고 그가 여명회에 속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본래 트알레에게 부탁하는 건, 주인공인 하이든 라이히가 하는 일이었는데 말이야.'
검성의 요청으로 트알레는 유리안에게 방금 봤던 권속인 소쩍새를 감시역으로 붙였다.
이거 완전 반대가 되어버렸군.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려는 건지.'
64화. 일촉즉발(1)
"고생하셨습니다. 베이런. 이제 다시 들어가시죠?"
"수고하셨습니다, 유리안 경. 근데..., 이번 일도 있고, 어떻게 감형이나...."
쓸데없는 말을 하는 베이런을 다시 수감 시킨 뒤, 감옥을 지키던 경비병들에게 경례를 받은 난 황궁을 빠져나왔다.
그 과정에서 난 코트의 소맷자락에 코를 가져가 냄새를 맡아보았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한 '명월관'의 진한 향수 냄새, 그것이 남아 있는 탓에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싶군.'
내 몸은 이 냄새를 이상하리만큼 거부하고 있었다. 본래에도 독한 향수는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다행히 '유리안'도 비슷한 성질인 모양이다.
'...너무 섣부른 선택인가?'
불현듯, 트알레에게 맡겨둔 '부탁'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작은 동물을 사용하는 그녀의 감시가 발각될 확률은 그리 없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다.
'지금의 하이든 라이히는 원작과 너무나도 달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지금까지의 행보는 '주인공'이라고 하기엔 너무 산만하다.
본래라면 해야 할 '검은 기사'의 일도 하지 않고, 황실도, 혼석도 모두 내팽개치고 떠났다.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것처럼.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야겠어.'
넋 놓고 있다간, 내가 알던 스토리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유리안."
사념에 잠긴 도중,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다.
여기서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핀텔 경, 꼴이 말이 아니군요."
'어스름 불꽃' 대장간에서 '검은 기사'에게 된통 당한 핀텔 아그라드였다.
어쩐지 힘들어 보이는 몰골.
깜빡이는 가로등 아래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 피곤함이 물씬 풍겨왔다.
이전처럼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내가 '검은 기사'인 것을 알아채진 못한 모양이다.
"이전에 제게 말했던 일은 제대로 풀리지 않은 모양이군요. 헌병에게 끌려갔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 이제 막 풀려났다. 그래서 이 모양 이 꼴이지...."
"그 현장에서 발각된 것 치곤, 꽤나 빨리 풀려나셨군요?"
"귀족이니 말이다. '여명회'라는 증거도 없었으니까."
귀족.
그 말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것이 함축되어있는지 절절하게 느껴졌다. '어스름 불꽃'은 제국 최고 장인이 운영하는 대장간이지만, 그래도 결국 평민이니 말이다.
'하긴, 그 상황만 봐서 핀텔을 여명회의 일원이라 생각할 순 없어.'
단순히 귀족의 폭거라 생각할 뿐이겠지.
"그건 그렇고, '그 현장'이라니... 유리안, 네놈, 마치 장소에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군."
아차, 말실수했다.
나는 에둘러서 말했다.
"잠시 그곳에 들를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핀텔 경의 일 때문에 꽤나 소란스럽더군요. 그나저나, 후후. 이번에도 실패하셨군요."
"큭."
비꼬는 내 말투에 핀텔은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또 그놈이다."
"그놈?"
"일전에 내 '혼석'을 채간 그놈 말이다!"
"그게 누구입니까?"
누군지 확실히 알고 있지만, 난 능청을 떨며 되물었다.
"검은 기사, 그놈 말이다!"
크윽.
이번엔 내 속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이름을 직접 들으니, 낯이 간지럽군.'
아르투르 녀석도 그렇고, 왜 그렇게 '검은 기사'라는 이름을 입에 담을 때, 억양이 강해지는 것일까.
당사자는 생각하지도 않는 건가.
하긴 바로 옆에 있다고 생각하진 못하겠지.
"젠장, 우리에게 원한이 있는 놈이라는 건 알겠지만, 왜 나만! 이런 망신을 당해야만 것이냐?"
노발대발하며, 핀텔은 손을 부르르 떨었다.
'음, 어찌어찌 납득할 수 있는 불만이지만, 미안하군.'
지금의 '검은 기사'는 기이하리만큼, 핀텔의 일을 방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내 앞에서 본인이 버젓이 말하고 다닌 탓이란 걸 모르겠지.'
어쩐지 동정심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본래, 죽어야 했을 녀석이 살아남게 되었으니 이 정도 고난은 극복해야지.
본인이 알 방법은 없겠지만 말이다.
"다음에 만난다면, 반드시 죽여줄 테다!"
끓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부릅뜬 눈으로 핀텔은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네 눈앞에 있다.
"다음이라, 딱 패배한 쓰레기나 입에 담을 법한 말이야."
핀텔과의 대화 도중 끼어든 투박한 말투에 난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두 눈으로 확인하자, 난 속으로 혀를 찼다.
'제라르 오클레앙.'
여명회에는 현 아크 비숍인 '테넬론'에 상응하는 위험을 지닌 인물이 몇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저 '제라르 오클레앙'이란 인물이다.
훗날, '테넬론'이 '검은 기사'에게 죽고, 차기 여명회의 수장으로 거론되는 자들 중 한 명.
'본래라면, 제국 여명회 서부의 지부를 맡고 있어야 할 놈이 여기는 왜?'
잠시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드라탄 제국의 서부에는 '신성국 페레난드'가 존재한다.
그리고 최근 '검성'은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신성국'으로 향했다.
'검성과의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기 위해 제도로 온 건가.'
이 녀석의 호전적인 성격을 생각한다면, 직접적으로 '검성'과 맞붙을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제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테넬론'이 직접 호출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긴, 패배한 쓰레기니 할 수 있는 말이겠지. 안 그래? 푸하하하!"
제라르는 자신을 따르던 이들을 보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잇몸을 만개하며, 웃는 덕에 그의 입에는 금으로 덧칠한 어금니가 몇 개 보였다.
"제라르 경, 말조심하시오. 예전과 달리 난 자네처럼 '비숍'의 등급이니."
"비숍? 이 머저리 같은 양반 아직 소식을 못 들은 모양이로군! 그렇게 귀가 어두워서 쓰나!"
표독스러운 제라르의 말투에 핀텔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제라르는 신경을 쓰지 않는 태도다.
같은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제라르의 몸에서 흐르는 성품은 귀족의 그것이 아닌, 시정잡배의 그것과 흡사했다.
"네놈의 비숍 직위는 박탈되었다."
"...뭐?"
"혼석 확보에 실패하고, 테넬론 경께 보고도 없이 단독으로 진행한 일도 실패했으면서, 아무런 책임을 물지 않으리라 생각했나?"
크큭, 제라르는 짧게 웃음을 흘렸다.
제라르의 모욕적인 언사에 핀텔의 주먹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거린 제라르는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건 그렇고, 웃는 처형대! 인사가 늦었군. 나 제라르 오클레앙이라고 하네. 서부쪽 지부를 담당하고 있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제라르 경. 여기서 뵐 줄 몰랐습니다."
"하하. 네가 우리와 함께 할 줄은 상상도 못 했군."
핀텔에게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성큼 다가온 녀석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물론, 그 손을 받아들이진 않았다.
이 녀석.
'제라르 오클레앙'은 온갖 비겁한 수는 모두 사용하는 비숍으로서, '여명회'에서도 특히나 질이 나쁜 녀석이다.
장갑에 마비약을 설치해 악수를 받아들인 '린네'가 꼼짝없이 당하는 스토리도 존재한다.
"죄송합니다만, 사내와 악수하는 취미는 없는지라."
그 덕인지 저도 모르게 말투에선 불쾌함이 섞였다.
"크큭, 매정한 건 여전하군."
마치 나와 아는 사이인 것처럼 제라르는 말했으나, 게임 어디에도 유리안과 제라르가 안면이 있다는 기억은 없다.
신성국의 사건을 제외하면.
"그게 정녕 아크 비숍님의 입에서 나온 말인가...?"
나와 제라르가 이야기하던 도중, 당혹함이 서린 얼굴로 핀텔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다크 서클이 짙게 깔린 그의 두 눈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 그런 일이 있을 리...."
"현실을 봐라, 핀텔. 넌 두 차례나 실패하지 않았나?"
"내가 어떻게 비숍이 되었는데, 그럴 리...!"
핀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살기가 제라르의 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녀석은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챙──!
난 검집으로 제라르의 단검을 막았다. 사방에 불똥이 튀었고, 작은 불빛이 핀텔의 어두운 얼굴을 조금은 밝혀주었다.
"히, 히익...!"
놀란 핀텔은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걸 보던 제라르는 코웃음을 한 번 치더니,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의왼데?"
불독처럼 생긴 그의 얼굴엔 정말로 '의외롭다'라는 뉘앙스가 담겨있었다.
'...어.'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아마도 '제라르'라는 인물에 대한 거부감과 살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몸뚱아리 탓인 듯하다.
"엘레노아나 당테스라면 몰라도, 넌 모른 척 넘어갈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이래 봬도, 동료는 끔찍이 아끼는 편입니다. 아무리 핀텔 경이 덜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동료'가 아니겠습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웃는 처형대가?"
"후후. 제 '감은 눈' 소속인 것도 깜박하신 모양이군요. 버젓이 제도의 대로에서 '귀족을 살해하는 것'을 방치할 순 없지 않습니까?"
그 탓에 난 녀석의 기습을 막은 이유를 둘러대었다.
분명 '유리안'스럽지 않은 행동임이 분명했으니까.
"능청스러운 자식."
그런 나를 보며, 제라르는 한 마디를 덧붙인 뒤 핀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던 핀텔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너, 너 이 자식 지금 뭘...!"
"왜 그러나. 핀텔, 단순한 장난이었는데 말이야, 하하하!"
호탕한 웃음과 함께 제라르는 사병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핀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힘없이 어두운 골목으로 향했다.
'...왠지 미안하군.'
제라르의 말대로 비숍 직위를 박탈당한 것이라면 내가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테니까.
***
"유리안 경, 혹시 빈민가에 다녀오셨습니까?"
다음 날, '감은 눈'의 자잘한 서류 처리를 위해 출근하자 라즈롯이 조심스럽게 질문해왔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순간 당황했다.
이 녀석, 날 미행이라도 하고 있었나? 아니,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어제 빈민가에서 들어선 이후 내게 따라붙은 미행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았지.
"에, 에렌이라는 아이가 알려줬습니다. 겐멜 보육원에서 지내는 아이인지라, 가끔 제 소식통이 되어줍니다."
아, 날 '명월관'까지 안내해준 그 꼬마로군.
"예, 다녀왔습니다.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서 말이죠."
"개인적인 용무라 함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라즈롯은 당황한 눈치로 입을 열었다.
"최근 여명회의 내부에서 도는 소문과 연관이 있... 습니까?"
여명회 내부에서 도는 소문?
자세히는 모르지만, 라즈롯의 입에서 '소문'이라는 말이 나오자 내 눈 밑이 살짝 흔들렸다.
최근,'여명회'가 주목할 법한 소문은 여러 개 있지만, 그중 나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띄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검은 기사'.
'소문과 관계가 있냐고 묻는 것은 설마....'
현재 여명회 내부에선 내가 '검은 기사'와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인가.
"검은 기사에 관한 이야기입니까?"
"예."
내 물음에 라즈롯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제가 빈민가에 다녀온 것과 검은 기사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그게...."
살짝 대답을 망설이는 라즈롯. 그 모습에 어쩐지 내 손이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검은 기사의 정체를 알아냈다고 합니다."
65화. 일촉즉발(2)
"검은 기사의 정체를 알아냈다고 합니다."
조심스러운 라즈롯의 말에 내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뭐라고?'
당황한 나머지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고, 난 그저 우두커니 라즈롯을 쳐다보았다.
그동안 유지해왔던 '유리안'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지는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검은 기사'로 활동한 건 고작 두 번!
그 과정에서 들킬 법한 일은....
'뭐가 있었나? 없을 텐데....'
이 게임을 속속히 알고 있다고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나 때문에 스토리가 바뀌었어.'
이중 첩자로 있는 라즈롯이 확인되지도 않은 정보를 가지고 나한테 보고할 일은 없다.
그의 약점을 내가 쥐고 있기도 하고, 매번 만날 때마다 보라색 아지랑이가 아주 선명하게 잘 보이는 그인데 말이지.
'헛소문을 나한테 보고하지 않을 테고.'
굳건한 라즈롯의 시선을 보니....
'정말인가? X 됐네.'
폭탄과도 같은 라즈롯의 보고.
꿀꺽.
타들어 가는 속을 진화하기 위해 난 침을 삼켜 보았지만, 딱히 효과는 없다.
오히려 그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려, 라즈롯에게 들릴까 걱정이었다.
"후후. 그렇습니까? 저도 궁금하군요, 제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검은 기사'의 정체가 누구인지."
휴우, 힘들었다.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한 채,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말투로, 최대한 넌지시 의문을 던졌다.
내 말을 들은 라즈롯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보라색 아지랑이가 만발한 상태이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소문을 들은 아크 비숍께서 유리안 경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했습니다. 곧 전령이 올 것입니다."
음, X됐다.
나는 티가 나지 않도록 고개를 돌려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응? 그래도, 뭔가 이상한데?
핀텔의 혼석 확보를 방해하고.
핀텔의 루거 포섭을 방해하고.
비숍 핀텔을 물 먹인....
생각해 보니 핀텔한테 미안하군. 크흠.
여튼 그 범인이 나라는 걸 안다면, 여명회에서 이렇게 평화롭게 넘어갈 리 없을 것이다.
여명회의 전투 집단인 몬시뇰과 전투에 능한 비숍을 총동원하여....
'...진작에 날 죽였겠지.'
내가 알고 있는 여명회라면 충분히 그러고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도 모른다.
어쩌면, 오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다행이지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긴장이 역력한 모습으로 라즈롯이 묻자 난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다.
"테넬론 경과 단둘이라...."
일부로 말끝을 흐리며, 그의 얼굴을 살펴본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을 보아하니 지금 꺼낸 이야기 이상의 것을 알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함정인가.'
어찌 되었든, 날 의심하는 있는 상황에서 꽁무니를 뺀다면 의혹은 부풀어 오를 뿐이다.
짐작에서 확신으로 바뀌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그 전령은 언제 온다고 합니까?"
***
여명회에서 보낸 마차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자 도착한 곳은 제도 외곽에 위치한 유리 온실이었다.
"안에서 테넬론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차에서 내리자, 온실을 지키고 있던 경비들이 튀어나와 내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옷차림과 분위기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으나,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들은 '몬시뇰'이다.
'이들이 왜....'
평소라면, 아크 비숍을 경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넘어갔을 테지만, 지금의 난 이들이 왜 이곳을 지키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아니겠지, 설마 아닐 거야.
의심이 계속해서 커지니, 평범하던 모든 것들이 이상하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난 그들을 지나쳐 온실의 안으로 향했다.
'...꽤 잘 꾸몄군.'
내부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적당한 온도와 습기로 인해 온실에 배치한 식물들은 싱그러워 보였고, 누가 돌보고 있는지, 어디 모난 구석은 딱히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온실의 조화를 해치는, 이질적인 존재 한 명이 중앙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왔나? 이렇게 단둘이서 만나는 건 처음이로군."
어쩐지, 반가워하는 테넬론의 분위기에 난 어정쩡하게 인사를 했다. 물론 티는 안 냈지만.
"어떤가?"
손으로 주변을 둘러보라는 뉘앙스를 취하는 테넬론.
그의 주변에는 관리를 잘했는지, 싱그러움을 머금고 있는 화분들과 난초들이 몇 개 보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저 질문의 의도가 무엇일까.
날 부른 목적은 무엇일까.
다 알고 부른 건가.
오만가지 생각으로 인해 내 머리엔 작은 폭풍이 일었다.
"자네가 난초를 기르는 취미가 있다고 들었네. 어떤가? 이 난초, 괜찮게 길렀나?"
조금 생뚱맞은 질문에 당황했으나, 내 얼굴에 그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반달처럼 휜, 눈동자가 보이는 않는 웃는 눈과 다르게 무표정인 얼굴.
'실눈의 악역'이라는 캐릭터에 부합하는 그 얼굴에 내 감정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직접 기르신 모양이군요."
"그렇다네. 애 좀 먹었지. 어떤가? 전문가인 자네의 품평을 듣고 싶다네."
나는 테넬론이 길렀다는 난초를 손으로 한 번 훑고 난 뒤, 중얼거렸다.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인이 봐도 이건, 정말 끔찍하군요. 어떻게 기르면 난초를 이 정도로 망칠 수 있습니까? 시간 맞춰 물만 줘도, 적당히 햇볕만 쬐어줘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요. 정말 난에는 소질이 없으십니다."
적나라한 평가지만, 사실인 상황.
햇볕을 자주 쬐었는지 이파리 끝은 갈색으로 물들었고, 중간중간엔 곰팡이가 피었던 흔적도 엿보였다.
보이는 부위가 이 정도면, 뿌리는 안 봐도 이미 썩어있겠지.
좋게 에둘러 말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난초을 자식처럼 여기는 내 마음과 직설적인 유리안의 화법에 저절로 표독스러운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하하, 그런가?"
정중하지 않은 말투임에도 테넬론은 기분 좋은 어투로 받아넘겼다.
"유리안, 자네의 성격은 참으로 마음에 들어. 다른 비숍처럼 내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달콤한 말로 혓바닥을 놀리지 않으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테넬론의 입가는 웃고 있지만,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자네인지라, 이번 일은 굉장히 놀랐다네."
...뭐, 뭘?
당황한 난 속으로 뜨끔했다.
"자네가 '검은 기사'라는... 이름으로 ...움직일 줄 몰랐으니 말이야."
그의 입에서 '검은 기사'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커다랗고 무거운 무언가가 내 가슴에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중간에 테넬론이 무슨 말을 한 거 같지만, 전혀 내 귀에 들려오지 않고 오직 '검은 기사'란 단어만 들렸다.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테넬론을 보며, 난 침을 삼켰다.
'알고... 있나.'
필사적으로 그의 말에 반응하지 않게 전신을 조정하려 했지만. 약간의, 아주 미세한 떨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행동이 들켰을 수도 있는 상황.
최악의 전개라면, 여기서 테넬론과 검을 맞댄 후 필사적으로 벗어나, 밖에 있는 여명회의 추격을 받게 되는 상황이다.
아니, 어쩌면 이곳에서 도망치는 것부터 문제 될 수 있다.
이 온실 주변엔 '몬시뇰'을 포함한 여명회의 교단원들이 포진을 한 상태니까.
그리고 여명회 최강 무력인 테넬론도 있으니 말이다.
'괜히 왔나....'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내색하지 않은 채로 테넬론을 쳐다보았다.
"그 피해가 크든 작든, '검은 기사'는 용서할 수 없는 적이지. 우리 여명회의 일을 방해했으니 말이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테넬론 경. '그'를 그리 날뛰게 놔두면 안 되겠지요."
내 대답에 잠시 이채를 띤 테넬론의 눈은 끔찍한 난을 보며 만지작거렸다.
난 테넬론의 말과 행동을 주시하며, 그의 말에 동조하는 척했다.
동시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오른손을 살짝 옆으로 빼두는 와중.
'윽.'
옆구리의 상처를 건드렸는지, 그곳이 살짝 아려왔다. '어스름 불꽃'에서 핀텔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았다.
평범한 몬시뇰이나 비숍들 정도면 무리 없이 이곳을 벗어날 수 있겠지만, 무려 테넬론과의 전투다. 그 상황이 된다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도주의 최단, 최적의 루트를 계산해보았지만....
힘들다.
'X발, 겁나 빡시겠네.'
그 탓에 조급함이 피어올랐다.
'선수를 쳐야 하나.'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생각을 하던 도중, 느긋하게 테넬론이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설마, 자네가 먼저 '검은 기사'를 조사하고 다녔을 줄이야...."
으, 응? 뭐라고?
"하긴, 그것 말고는 자네같이 결벽증 있는 사람이 그 더러운 빈민가에 향할 이유가 없긴 했지."
어처구니가 없는 말의 연속.
"...아닌가?"
테넬론은 떨떠름한 내 반응에 의아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놓치면 죽는다.
마음 한구석에서 들린 어떤 목소리가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후후, 들키지 않게 조심했는데, 역시나 여명회의 정보력은 대단하군요."
"역시, 세상에 누가 알았겠는가?"
크큭, 짧게 웃으며 테넬론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설마, 제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검은 기사'가 빈민가를 삼분한 조직 중 하나인, '무명객단'에 속해있다는 것을 말이야."
응?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냐.
테넬론의 말로 인해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 찼으나.
"후후, 역시나 대단하십니다. 테넬론 경의 능력은 가히 추정이 불가하군요."
내 세 치 혀는 이미 이 오해에 힘을 싣고 있었다.
"빈민가를 직접 찾아가 조사했다는 건, 그 사실을 나보다 먼저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언제 알았나?"
지금! 방금!
너가 말해줘서 알았다!
"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감은 눈'의 대원들에게 '검은 기사'에 대한 은밀하게 조사를 시킨 것이 최근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래? 역시, 황실의 정보력은 대단하군! 하하하!"
큰 소리로 웃는 테넬론. 그의 모습을 보자, 나도 웃고 싶어졌다.
넌... 바보인 거니?
***
빈민가의 무명객단, 그들이 '검은 기사'를 자칭할 줄이야.
사실 그 이유가 대충 짐작은 간다.
빈민가를 삼분한다고 하지만, 다른 조직에 비해 빈약한 세력.
'여섯 손가락'처럼 인신매매나 마약, 도박 등을 이용한 수익이나 '혈귀단'처럼 고위 귀족들과 인연을 이용한 수익 창출이 거의 없는.
말 그대로 어정쩡한 조직.
작은 무력 하나만 믿고 나대는 소규모 조직일 뿐. 그 탓에 '검은 기사' 유명세 좀 타보려고 소문을 퍼트린 모양이다.
확실히....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는 점에서 '검은 기사와 '무명객단'은 공통점이 있다.
'어스름 불꽃'에서 귀족의 행패를 물리친 가면을 쓴 귀인, '검은 기사'는 자신들이라고.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자신들의 아이덴티티인 '누구나 무명객단이 될 수 있다'라는 점을 이용해 떠도는 소문을 흡수하고 자기를 보호한다.
가장 힘이 약하기에 할 수밖에 없는, 실로 지당한 생각이다.
문제는 '어스름 불꽃'에서 행패를 부린 귀족이 평범한 귀족이 아니라는 점.
'여명회와 엮여있다는 것이지.'
그렇기에, 무명객단의 입장은 꽤나 난처해졌다. 아니, 난처해질 것이다.
- '무명객단, 그 쓰레기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리해야겠군.'
테넬론이 무명객단의 멸절(滅絶)을 바라고 있으니까.
'그러게, 눈치 좀 보고 끼어들지.'
어지간히 운이 나쁜 녀석들이로군.
'내 경우엔, 오히려 다행인 건가?'
그들이 '검은 기사'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죽는다고 해서 이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검은 기사'로 향한 관심이 한곳으로 쏠려, 내가 활동하기 쉬워질 것이다.
어찌 되었든, 여명회의 일을 방해해야 마신이 부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니까.
"유리안 경."
온실에서 테넬론을 만나고 '감은 눈'의 업무로 돌아오자, 입구에서 오드윈이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 성인치고는 작은 키.
그 탓에 '감은 눈'의 단장이라는 직책을 잘 수행할 수 있나, 의문을 품겠지만 '유리안'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단장'의 자격이 있다.
"마침 좋은 타이밍에 도착했네요. 결국 예전처럼 무시할 게 뻔하지만, 그래도 의사를 물어봐야 하니까요."
사무적으로 말하던 그녀는 품속에서 작은 두루마리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 그녀의 태도와 일반적인 두루마리가 아닌 고급스러운 표면에 호기심이 생겼다.
"받으세요."
그녀가 화려한 문양이 박힌 두루마리를 건네자, 난 그것을 받아 끈을 풀어 내용을 확인하였다.
"...초대장이로군요."
"네, 그것도 장남인 아르바 고드 리히의 생일 초대장이에요. 이번에 고드 리히 가문으로부터 유리안, 당신이 '감은 눈'의 대표로 참석해주셨으면 한다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고드 리히 가문.
그 이름이 튀어나오자, 내 뇌리엔 '어스름 불꽃'에서 보았던 여자가 떠올랐다.
권위적이며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귀족' 그 자체의 면모를 품던, 버릇없던 여자.
'그건 그렇고, 장남의 성인식에 왜 나를 부르려는 거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식의 생일, 그것도 '장남'의 생일이라면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유리안'같은 자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일단, 나는 그럴 것 같다.
뭔 봉변을 당하려고.
"이상하군요, '감은 눈'의 대표라면 오드윈 단장일 텐데 말이죠."
솔직히 가기도 귀찮거니와, 괜히 갔다가 사건 사고에 휘말리면 골치 아프다.
또한, 그 '초대장'의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한 난, 넌지시 오드윈을 떠보았다.
"...뻔뻔하기는, 자랑하는 걸 좋아하는 당신이 정말로 그리 생각할 리 없겠죠. 제가 허수아비 단장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게다가, 고드 리히 가문은 사대가문 중 유일하게 당신을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텐데요?"
이상하군. '유리안'을 호의적으로 생각하다니, 그만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당신이 하이란스 가문을 숙청한 덕에 그 가문과 복잡하게 얽혀있던 백의점(百衣店)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에요."
그렇다면 이해가 되지.
"그런데, 그게 상관있나요? 어차피 당신은 이런 사교 파티에 안 갈 테니 말이죠."
마치, '유리안'의 거절이 당연하다는 듯 그녀는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감은 눈'을 통한 이런 초대에 유리안은 어울려주지 않은 모양이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요. 아무쪼록, 황실과 귀족의 눈치를 보는 제 입장으로선 당신이 가주는 편이...."
"알겠습니다. 가도록 하죠."
"보세요, 어차피 이런 식...."
내 말에 곧장 대답한 오드윈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이쪽을 쳐다보았다.
"네?"
"오드윈 단장의 간곡한 요청이라면 한번 가보도록 하죠."
66화. 전화위복(1)
"도착했습니다, 유리안 경."
마차의 뒷좌석에서 바깥 풍경을 쳐다보고 있던 와중, 마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에 들어온 것은 아드라탄 제국의 사대가문 중 하나, 고드 리히의 저택이다.
유난히 거대하고 웅장한 그 저택은 입구부터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마차의 문을 열고, 내가 내리자 저택의 안쪽에선 집사로 보이는 남자가 허겁지겁 다가왔다.
"유, 유리안 경! 바쁘신 와중에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르바 도련님도 기뻐하실 겁니다!"
-'고드 리히 가문의 장남 아르바 고드 리히 생일 초대장이에요.'
-'알겠습니다. 가도록 하죠.'
-'네? 정말요?'
-'오드윈 단장의 간곡한 요청이라면 한번 가보도록 하죠.'
'감은 눈'으로 들어온 초대장을 들고 난 아르바 고드 리히 생일 파티에 방문하였다.
마중을 나온 고드 리히 가의 집사는 정중한 태도로 내게 인사했으나, 두 눈동자엔 당혹스러운 깃들어 있었다.
'하긴, 오드윈도 당황했으니 말이야.'
지금까지 '유리안'이 '감은 눈'으로서 행한 일들은 귀족의 숙청과 데몬의 토벌, 그 외의 잡일은 전혀 손대지 않았다고 하니 말이다.
'감은 눈'을 대표한다는 말이 조금 어이가 없긴 하다. 그 의문에 오드윈은 이렇게 답했다.
- '어찌 되었든, '감은 눈'의 대명사는 당신이니까요. 게다가, 당신을 파티에 초청할 정도로 배포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거겠죠.'
확실히....
누가 '웃는 처형대'를 파티에 초청하겠는가?
내가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무려 '유리안'에게 초대장 보낼 수 있다는 배포 있는 모습을 주변에 보여주고.
만에 하나 내가 초청을 받아들였을 땐 '우리가 이 정도다'라는 것을 과시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 '그리고, 그것 아나요? 고드 리히 가문의 장남이 당신을 동경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덧붙인 오드윈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아니 '유리안'을 동경한다고?
데몬이 뿔 떼고, 사람 되는 소리 하고 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래도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니, 이 김에 친분을 다져 놓기로, 결심했다.
여러 가지 스토리가 꼬인 지금, 무슨 일이 벌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게임의 '유리안'처럼 혈혈단신으로 헤쳐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사대 가문과의 인연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집사의 안내를 받아 고드 리히의 연회장으로 가던 난 문득, 셔츠 너머로 살짝 튀어나온 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전에 '어스름 불꽃'에서 핀텔에게 당한 상처.
미미한 통증이 거슬려, 붕대로 압박하니 한결 나아진 느낌이 들었다.
'티가 나진 않지만, 자세히 보면 눈치를 챌 수도 있겠군.'
이게 '검은 기사' 노릇을 하다 다친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겠지.
"왜 그러십니까, 유리안 경?"
잠깐 멈춰서자 집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으나, 난 통증을 참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기 전시된 예술품들이 참으로 멋지긴 합니다만, 가품(假品)이 많군요. 후후."
"아, 아닙니다. 어찌 저희 가문에 가품을…."
"그렇습니까? 우선 가도록 하지요."
당황한 집사를 뒤로하고 난 연회장으로 당당히 앞장서 걸었다.
***
연회장은 고드 리히 가문이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낄 정도로 잘 가꾸어진 상태였다.
반쯤 열어둔 돔 같은 구조물로 실내와 실외의 인테리어를 구분하고, 그것으로 대비 효과를 줘. 보는 사람이 감탄을 입에 담에 만들었다.
"유, 유리안 경!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인테리어에 감탄을 하고 있을 무렵, 경직된 목소리 하나가 나를 아는 체했다.
넌 누구..., 아! 대머리!
바이엘 아카데미에서 교관으로 인해 친분을 맺었던 부교감인 알롬 초르니다.
여전히 비어있는 머리가 인상 깊은 남자다.
"저도 여기서 알롬 경을 뵙게 될 줄 몰랐습니다."
"하, 하하...! 저희 바이엘 아카데미가 워낙, 고드 리히 가문과 친분이 깊어서 말입니다."
제국 4대 가문과의 친분이라.
후원자라는 뜻이겠지. 바이엘 아카데미'는 국립이긴 하지만, 후원을 거절하진 않으니 말이다.
"이런 자리에서 쉽게 뵐 수 없는 경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더 반갑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하하!"
"근데... 다른 분들은 아닌 듯합니다?"
내 말에 호탕하게 웃던 알롬의 웃음은 점차 무뎌지기 시작했다. 그도 주변의 분위기를 어렴풋이 눈치챈 것이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귀족들은 날 탐탁지 않게 쳐다보며 소곤거렸다.
중간중간 날 죽일 듯이 쳐다보는 귀족들은 아마, '유리안' 손에 처리된 귀족과 친분이 있는 이들이겠지?
눈빛으로 사람 죽이겠네.
다행히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되어, 저 날카로운 눈총에도 딱히 큰 반감을 갖지 않게 되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다, 다들 유리안 경의 위신에 움츠러든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황실전속기관 '검은 눈'이란 이름은 보통 것이 아니니까요. 하, 하하."
알롬이 그 분위기를 좋게 해석하려고 했으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오, 율리우스 경! 여, 여기서 뵙는군요!"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귀족에게 아는 체를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난 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엘레노아인가.'
여명회의 비숍이자, 음(蔭) 마법 5위계에 달하는 '바르고' 마법사, 엘레노아 드미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여명회에서 보던 모습은 아니다. 자신의 장기인 '음(蔭) 마법'으로 외형을 바꾼 채 연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저게 진짜 '엘레노아 드미셀'이겠지.
'아는 척을 해볼까?'
...했지만, 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질 일은 없었다.
슬금슬금.
조심스럽지만, 은밀하지 않은 발걸음.
만약 은밀하고 살기까지 있었으면 검을 들어 베어버렸을 터.
모르는 척 난 가만히 있었다.
"괘, 괜찮은 작품이지요? 유리안 경? 코루시어스의 제자 중 한 명인 에테로나의 손을 빌려 만든 작품입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어쩐지 유약하고 소심한 기색이 엿보이는 소년이다.
"에, 에테로나 님은 대(大) 화가 코루시어스의 제자지만, 특이하게도 유화가 아닌, 인테리어와 건축에서 그 재능의 두각을 드러내셨죠. 유, 유리안 경도 잘 아시죠?"
그래, '유리안'은 잘 알겠지.
난 쥐뿔도 모른다만.
근데 이 녀석이 바로.
'...아르바 고드 리히인가 보군.'
유약해 보이는 이 소년이 내게 다가온 순간, 주변의 시선이 살짝 변했다.
역시나 이 연회의 주인공.
그리고, 소년의 바로 옆에선 깐깐해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따라붙었다.
"크흠, 아르바 도련님."
집사가 귀에 대고 속삭이자, 무엇인가 깨닫기라도 했는지 아르바가 살짝 당황한다.
"죄, 죄송합니다. 유리안 경. 인사를 먼저 해야 했는데 오랜만에 뵙는 게 반가워서 그만...."
제국 사대가문 중 하나의 장남.
그것도 '사교계'를 주름 잡는 귀족의 일원이라고 하지만.
'뭐야 이 어리숙한 놈은.'
내가 본 아르바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오랜만이라는 건, 어디선가 예전에 한 번 만났다는 소리인데, 잘됐네.
그렇다면, 연을 쌓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어느 정도의 접점이 있다면, 그걸 통해 이야기의 화두를 잡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저 유약한 도련님과 유리안의 접점이라.'
사교계는 아닐 테지. '유리안'이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으니.
그리고 기백을 보아하니..., 검술을 연마한 것도 아니고.
기껏 해봐야 황궁에서나 오다가다 만난 적 있겠지.
"예, '황궁'에서 뵙고 난 이후 오랜만이로군요."
"...네?"
의아해하는 아르바의 얼굴을 보자, 나는 아차, 했다.
황궁에서 만난 게 아니었나?
"마, 마지막으로 만났을 땐 제국 예술협회가 개최한 심포지엄였던 것으로...."
제국 예술협회?
그 이름을 들으니, 문득 생각이 났다.
'유리안'의 이름으로 날아든 수많은 납부고지서 중, '회원 유지비'라는 이름으로 돈을 갈취하는 곳이다.
"혹시, 제가 착각이라도 했단 말입니까?"
"아뇨, 아닙니다. 유리안 경이 그럴 일 없지요."
내 말에 당황한 아르바는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했지만, 내 말은 계속되었다.
"착각이 아닙니다. 그 심포지엄이 진행되던 장소의 양식이 '황궁'과 실로 흡사했지요. 그래서 제가 '마치 황궁에 와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이미 아는 척을 한 나머지, 되돌릴 수 없다.
이럴 때 '유리안'을 연기하기 참 낯 뜨겁다.
얼굴에 철판 깔고 도리어 뻔뻔하게 굴어야 했기에.
"그, 그랬던가요?"
"기억나지 않으신가 봅니다?"
"...황궁의 양식은 여러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달라붙어 만든 복합 양식인지라.... 아!"
아르바는 무엇인가 깨달은 듯, 눈이 커졌다.
"황궁 건축을 도운 예술가 중, 한 명이 그 홀의 디자인을 맡았던 것이로군요! 이제야 경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후후."
나는 대답 대신, 짧게 웃음을 지었다.
아르바는 그런 내 모습에 아까보다 더 진해진 동경의 눈빛을 보내왔다.
'...분위기 덕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어도 알아서 해석해주니 말이야.
아르바는 당시에 있었던 일을 회고하며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대단하십니다. 저는 황궁 건축물들의 양식과 관계있으리라곤 상상도...."
"안녕하십니까, 아르바 도련님!"
아르바가 말을 잇던 도중, 호탕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 제라르 경."
"제 얼굴을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이 따로 없습니다. 하하!"
깔끔한 차림새와 정중한 태도.
핀텔과 이야기를 나누던 밤, 시정잡배와 같은 분위기의 녀석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녀석도 있었군.'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제라르가 성큼 걸음으로 다가왔다.
"고드 리히 가문의 가주이신, 비나란 님께 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오호, 유리안 경도 있었군. 음?"
애초에 알고 접근한 것이 확실함에도 녀석은 너스레를 떨었다.
그 뒤,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제라르는 내 옆구리를 가리켰다.
붕대를 감은 탓에 살짝 셔츠가 붕 뜬 자리. 그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제라르는 히죽 웃었다.
"붕대라도 감았나 보군. '감은 눈'의 일로 다친 모양이지?"
"예, 황실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자들은 말로 해결할 수 없는 우매한 것들 뿐이니 말입니다."
"진짜입니까? 모, 몸은 괘, 괜찮으십니까? 유리안 경?"
말을 듣던 아르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옆구리를 쳐다보았다.
"예, 별것 아닙니다."
"다행입니다. 그래도, 거동이 불편하시다면 저희 쪽에서...."
"아르바 도련님."
아르바의 말을 끊은 것은 그의 옆에 서 있던 집사였다.
"이렇게 담소를 나누시는 것도 좋으나, 연회의 주인공이시라면 다른 많은 분과도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어? 하지만 아직...."
"가주님도 그걸 원하실 것 같습니다."
가주라는 말이 나오자, 아르바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알겠어. 그럼 나중에 다시 뵙도록 하죠 유리안 경, 제라르 경도."
가볍게 목례를 한 아르바는 집사를 따라 연회장의 안쪽으로 향했다. 처음 보았을 때 느낀 소심한 기색은 내 착각이 아닌 모양이다.
"장남이란 사내새끼가 저렇게 자신감이 없으니, 고드 리히 가문은 측실들이 날뛰는 게지."
멀어지는 아르바의 뒷모습을 보며, 제라르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앞에서는 헤실거리며 웃더니, 사라지자마자 뒷담을 하는 꼴이 실로 우스웠다.
"그런데 유리안 경 정도 되는 괴물에게 상처를 입힐 정도라니, 대단한 실력자였나 보군."
그런 그의 말에 답해주지 않았다.
일일이 대답하기 귀찮고, 이 녀석과 엮이면 고달프다.
관심도 주지 않고 다른 곳으로 향하려던 찰나.
"혹시나, 핀텔이라던가?"
제 자리에 멈춘 난 서서히 제라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핀텔에게 당한 상처는 맞다.
그러나 이 상처를 입을 당시 난 '검은 기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속이 뜨끔할 만한 상황이지만, 이미 여명회는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테넬론으로부터 확답을 들었다.
'...너도 확신까진 아닌 모양이군.'
다행히도 제라르의 말투에서 확신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굳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날 떠보기 위함일 터.
"녀석과 같이 헌병대에 잡힌 교단원을 풀어주면서 물어봤지. 그 '검은 기사'란 놈에게 어떻게 당했냐고 말이야."
"그러셨습니까?"
"녀석은 대단한 검술 실력을 보유했다더군. 그런 그에게 핀텔의 공격이 단 한 번 통했으니, 그 부위가 공교롭게도 말이야."
제라르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붕대를 감은 내 허리춤을 쳐다보았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 딱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런 그를 보며, 난 코웃음을 쳤다.
"후후,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67화. 전화위복(2)
"제가 '검은 기사'라면 경은 어찌하실지 물었습니다."
그 뜻을 다시 한번 강하게 내비치자, 제라르는 도리어 주춤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확실한 증거는 없는 모양이다. 기껏해야 지금 입으로 열거한 자신의 추론뿐이겠지.
어딜 사람을 떠봐!
"세 치 혀로 사람에 누명을 씌우는 건 귀족들의 특기죠. 제라르 경."
한 번 더, 강하게 나가자 제라르는 고개를 살짝 돌려 코웃음을 쳤지만,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보다 확신에 찬 기백이 느껴지지 않는다.
'...휴.'
제라르의 분위기를 살펴본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일전에 있던 테넬론의 경우처럼 이야기가 좋게 흘러갈 것 같지는 않다.
테넬론은 오해였지만, 제라르는 내게 '의심'을 품고 있으니까.
'괜히 붕대를 감았군.'
난 옆구리를 힐끔 쳐다본 뒤, 다시금 제라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황실의 검으로 일하면서 비슷한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전 아직까지 살아서 황실 전속 기관인 '감은 눈'에 속해 있고, 더군다나 그곳의 대표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나는 허리춤에 찬 검집을 살짝 흔들었다.
"혀끝으로 사람을 다치게 할 순 있겠지만, 검 끝엔 확실하게 죽으니까, 말입니다."
찰그락──!
검과 검집과 부딪히는 소리.
그 금속이 닿는 소리와 함께 내가 미소를 짓자,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낮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제라르 경, 전 귀족의 매끄러운 '혀'보다는 확실한 '검'을 더 즐겨 사용합니다만. 어디 한번 구경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유, 유리안 경...?"
"갑자기 왜 검에 손을...."
"저 미친놈. 이번엔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내 행동에 연회에 모인 사람들이 화들짝 놀란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았고, 이 연회의 주인인 아르바조차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제라르의 입가엔 비릿한 웃음이 지어졌다. 이 상황을 이용하려는 것인지 녀석은 능청스러운 제스처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하하, 왜 그렇게 정색하시나, 유리안 경. 지금 떠들썩한 소문인 '검은 기사'와 같은 부위를 다쳤다고밖에 하지 않았거늘."
게임에서나 여기에서나.
역시 마음에 안 드는 놈이다.
그런 제라르의 행동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발 물러나야 한다.
여기서 쓸데없는 반박을 해봤자, 제라르가 원하는 이야기로 흘러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유리안이 검은 기사?"
"설마, 그럴 리가."
본래 '유리안'이라면 저런 시선들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검을 뽑아 제라르를 베었을 것이다.
휴, 릴렉스. 릴렉스.
'유리안', 지금은 참아야 해.
'우리'가 살려면 우선 '고드 리히'가문과 친분을 유지해야 한다고! 인맥은 중요하다!
이번만 조용히 넘어가자.
"그렇군요. 저를 '검은 기사'라 '오해'하시길래, '검'으로 증명하려 했을 뿐, 저도 별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이것도 귀족 유흥의 일부라네. 조금 더 배워야겠군. 유리안 경. 이런 사교 파티에 자주...."
주절주절 떠드는 제라르의 말을 끊고 그의 약점 아닌 약점을 슬며시 흘렸다.
"하지만! 그 농담에 진실은 찾아볼 수 없군요. 최근, '무명객단'이란 곳에서 '검은 기사'를 자칭하지 않았습니까?"
무명객단.
그 이름이 나오자, 제라르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찰나, 눈 깜빡할 사이 지나간 변화인지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유리안'의 몸을 가진 난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뭐, 안 봐도 뻔한 스토리지만,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내가 이 게임을 몇 번을 했는데.
"제라르 경 정도 되는 분이시라면 '무명객단'과 인연도 있을 테니, '직접' 물어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설마 모른다고 하시진 않으시겠죠? 후후."
"...유리안, 너 이 새끼."
응? 새끼? 분명 그렇게 들은 거 같은데.
주변을 힐끔 보니 나만 들은 듯하여 따지기도 애매했다.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르게 표정이 굳은 제라르는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내가 그 비천하고 하등한 잡것들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말하는 건가?"
제라르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우두커니 서서 날 쳐다보았지만, 내 눈에는 그가 긴장했다는 것이 너무나 확연하게 보였다.
제라르 오클레앙.
그의 게임 속 캐릭터 설정은 단순했다.
'어마어마한 독점욕을 지닌 남자.'
그 독점욕으로 '여명회'에서 서부 지부장을 맡았고, 음지로 눈을 돌려 빈민가의 '혈귀단'이 소유한 요정 '명월관'도 눈독을 들였다.
그곳을 차지하면 제국 귀족의 숨겨진 비사와 비밀을 이용하여, 그들의 약점을 쥘 수 있으니.
그러나, 귀족인 그가 빈민가에 직접 진출한다는 것은 주위의 시선 때문에 쉽지 않았다.
'그래서 몇몇 무력이 강한 이들을 차출해, 그곳으로 잠입시켜 무명객단이라는 조직을 만든 거지.'
제국의 기사나 병사였던 정체가 들킬까 두려워 얼굴을 가린 것은 그런 연유 때문인데, 어느새 그것이 '무명객단'의 아이덴티티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빈민가는 '무명객단', '혈귀단', '여섯 손가락'이 삼등분 하게 되었고, 그들은 '혈귀단'과 '여섯 손가락'이 공멸하게 지속적으로 견제, 공작하였다.
결국엔 자신의 세력인 무명객단이 음지를 통합지배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왜 그러십니까? 제라르 경? 그저 '귀족의 여흥' 아닙니까?"
내가 살짝 거들먹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자, 제라르는 작게 혀를 차고는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붕대를 감은, 내 허리춤에 향했다.
"어디까지 알고 있지?"
나밖에 들리지 않도록 작게 말하는 제라르.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단 사실이 어지간히 불편한 모양이다.
하긴, 여명회가 '검은 기사'를 불쾌히 여기는 지금, 이 사실이 테넬론의 귀에 들어간다면, 제라르의 신변도 위험해질 것이 자명하다.
"후후, 제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요? 고매하신 제라르 경께서 '직접' 바란 경에게 확인해보시지요."
분노로 인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제라르는 '바란'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더불어 주변에선 이곳을 쳐다보고 있던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농담이 불쾌했다면 이렇게 사과하지. 미안하네. 유리안 경."
더 이상의 언쟁은 위험하다, 판단했는지 제라르는 재빨리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내게 악수를 신청했다.
상황이 안 좋으니, 한 발 빼시겠다?
'...그래, 이 정도로 끝내자.'
더 큰 소란을 만들 생각은 없다.
유리안이 아무리 '웃는 처형대'고 '황실의 개'라고 하지만, 여긴 제국 사대가문 중 하나인 고드 리히 가문.
더군다나 지속적인 친분 유지로 내 편으로 끌어 들어야 하는 가문 중 하나이다.
어쩔 수 없이 제라르의 악수를 받아들이려던 순간.
'큭...!'
옆구리에 용암이 끓는 듯,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려던 찰나 제라르의 웃음이 시선에 들어왔다.
"크큭, 역시 내 손으로 '직접' 확인해보지 않으면 모르겠단 말이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관통하는 통증에 눈이 돌아갈 정도로, 아니 '뜨인 눈'이 될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그것보다 먼저 결백을 위해 내 몸은 마나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개XX!!
"듣자 하니, '검은 기사'는 핀텔의 마법에 당해 옆구리에 큰 상처가 생겼다고 하더군. 손으로 훑어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음?"
내 옆구리를 만지던 제라르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없다니, 설마 그럴.... 컥!"
그런 녀석을 제압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격통에 몸이 움직인 난 녀석의 목을 잡고는 검집에서 뽑은 검을 목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
연회장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엘레노아는 목을 붙잡힌 제라르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멍청한 남자 같으니.'
저 독점욕이 강한 남자는 예로부터 장소를 불문한 무례함이 몸에 배어버린 남자다.
비록, 그의 무례함이 여명회나 '아크 비숍'에게 향한 적은 없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손한 기운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엘레노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상대를 봐가면서 했어야지.'
그런 제라르의 '무례함'이 이번엔 상대를 잘못 골랐다.
"컥..., 커억."
연회장은 급격하게 조용해졌다.
오직 들리는 것이라곤 풍선에서 바람이 새어 나오는 듯한 제라르의 신음뿐.
체격에 비해 우악스럽다는 표현에 걸맞은 유리안의 괴력이라면, 당장이라도 제라르의 목을 비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름의 처세... 인가?'
유리안이 제라르의 '만행'을 간과하고 살려두고 있다는 것은 그가 같은 '여명회'의 비숍이란 것을 알아서 일지도 모른다.
엘레노아는 우선 유리안과 제라르를 지켜보기로 했다.
솔직히 그녀 입장에서는 누가 죽거나 다치거나 크게 상관없었기에.
'둘 다 죽어버리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그녀는 그들이 하는 행동을 지긋이 살펴보았다.
"지, 지금 뭐 하는 것이냐?"
"당장 검을 거두시오!"
"아르바 님이 주최하신 연회를 더럽힐 생각입니까!"
가뜩이나 유리안이 의도적으로 검집을 만지작거리던 모습에 긴장한 귀족들은 기어코 검을 뽑은 유리안을 질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달려들어 중재하는 이들은 없었다. 심지어 '고드 리히 가문'의 경비들도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유리안의 무력은 악명으로 익히 증명했기에 다가가는 걸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다행이군.'
'유리안'의 과거 행동으로 보아, 검을 뽑아 든 이상 그에게 덤벼든 자는 끝맺음을 맺어야 하니까.
"검은 기사...."
이때가 기회이다 싶어, 유리안은 나지막하게 말을 시작했다.
소란의 중심에 있는 자라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그 불한당과 저를 동일시하던, 말던 전 상관없습니다. 물론 제가 모른다면 말이죠. 하지만!"
"컥...."
"제가 있는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제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제라르 경?"
유리안이, 제라르의 목을 잡은 팔에 힘을 주자, 가뜩이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던 그의 안색이 퍼렇게 물들었다.
'...당장이라도 비틀어버리고 싶지만.'
격통과 불쾌함.
그것 때문에 냉정한 이성을 넘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라 유리안은 생각했다.
"고, 고작해야 세간에 떠도는 소문과 자네를 비교한 것뿐 아닌가!"
귀족 한 명이 목소리를 높이자, 유리안은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는 명예로운 황실 전속 기관인 '감은 눈'의 소속입니다."
당연하다는 듯, 유리안은 말에 힘을 주어 은근히 그를 압박하였다.
"황실의 율법도 지키지 않는 불한당과 저를 비교하는 것은 황실의 위상에 먹을 칠하는 행위. 그것을 방관하라는 것인지요?"
"그, 그건...."
"제라르 경도, 저를 도발할 때는 그만한 각오를 했겠지요."
"...."
"이런, 이런. 제가 너무 얌전히 지냈나 보군요. 그동안, 제 이명을 잊어버리셨나 봅니다?"
웃는 처형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황실에 거역하면 죽여버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
그런 생각이 그들 머릿속을 다시금 지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유리안은 생각했다.
지금은 제국 신민들을 위해, 귀족을 물리친 영웅, '검은 기사'가 아닌.
다시금 실눈 악역, '유리안'이 되어야 한다.
"유, 유리안 경...!"
그런 그들 사이로 유약해 보이는 소년이 튀어나왔다.
'응? 네가 왜 나와?'
연회의 주인공인, 아르바 고드 리히다.
"아르바 도련님, 위험합니다!"
"저 미친... 큼, 유리안 경이 검을 들고 있습니다. 접근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용인들의 만류에 겁먹은 듯 아르바는 주춤했지만, 이내 주먹을 불끈 쥐더니 유리안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 그만 하세요. 이곳은 저희 고드 리히 가문의 연회장입니다."
부들거리는 몸이건만, 강단 있게 입을 연 아르바.
그의 행동에 유리안은 실소가 지어졌다. 이 녀석을 이용한다면, 조금 더 쉽게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자는 황실 소속인 저를 모욕함으로써 황족들의 명예를 더럽히려고 했습니다."
조곤조곤하지만, 확고한 유리안의 말투에 그는 더 겁먹은 모습을 보였다.
꼬리를 만 강아지 마냥 보기 안쓰러울 정도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연회장에 모인 모두가 생각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용감하게 나서긴 했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만큼, 아르바는 사대가문의 한 축을 담당하는 고드 리히의 장남으로서의 기백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르바 경, 그만하면 됐습니다. 경께선 평소 하시던 대로 방관하시면 되는 이야기입니다."
"네?"
"고드 리히 가문의 허수아비 장남. 그 이름처럼 말입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엘레노아는 유리안의 표독스러운 말에 살짝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제라르와 무관한 연회의 주역에게 굳이 저런 말을.
"지금 감히 아르바 도련님을 욕보이신 겁니까!?"
엘레노아의 생각대로 아르바를 보필하던 집사와 귀족들이 광분하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아무리 황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하지만, 너무 오만한 것 아니오! 유리안 경!"
"어서 아르바 도련님에게 사과를...."
"조용히 해주시겠습니까? 지금 아르바 경과 이야기 중입니다. 아니면 제가 직접 그 입을 직접 닫게 해야겠습니까?"
그러나, 고드 리히의 집사들과 귀족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한순간에 입을 닫았다.
그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아르바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유, 유리안 경, 연회에 참가해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더 이상의 행패는 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힘이 실린 아르바의 말투에 유리안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거야.'
벌벌 떨며, 유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는 확실하게 말했다.
이곳에서 떠나라고.
"돌아가십쇼."
아르바의 말에 연회장에 모인 귀족들은 적잖게 놀랐다.
저 자신감 없는 고드 리히의 장남이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다니.
심지어, 상대는 유리안이다.
실눈의 악마, 웃는 처형대.
곧 있을 폭풍에 귀족들은 침을 삼켰다.
"아르바 경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예. 그렇게 하지요."
긴장감이 연회장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과 달리, 유리안은 흔쾌히 그의 말을 따랐다.
털썩.
그가 목을 부여잡던 손을 놓자, 숨을 쉬지 못하던 제라르가 바닥에 추욱 쳐졌다.
"코, 콜록... 콜록!"
숨통이 트이자, 격렬한 기침과 함께 제라르의 얼굴엔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축하받을 자리에서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아르바 경. 부디 즐거운 시간 되시길."
유리안은 아르바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제라르를 위아래로 한 번 훑으며.
"앞으로 제 앞에서 '검은 기사'라는 불쾌한 이름을 입에 담지 마시길 바랍니다. 제.라.르.경."
경고를 보냈다.
그런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유리안은 연회장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났다.
***
유리안이 자리를 떠나자,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
"대, 대단하십니다! 아르바 경."
"예, 그 유리안을 내쫓으시다니!"
"아르바 경, 아주 잘하셨습니다!"
"그럼요, 그럼요. 이런 연회와 그 미친개는 물과 기름! 절대 섞일 수 없어요!"
연회장에는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번 그들의 화두(話頭)는 아르바 고드 리히였다.
그 유리안을 상대로 나름의 성과를 냈으니 말이다.
"아뇨, 그 저는 아무것도...."
"그 '웃는 처형대'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기백이었습니다!"
"허허, 제 아들이 아르바 경을 본받았으면 좋으련만."
일련의 사태가 끝난 후.
아르바를 향한 귀족들의 태도는 명확하게 바뀌었다.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르바를 부르는 호칭이다.
인식이라는 것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람의 본성과 연관된 것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도련님에서 경으로 바뀌었네.'
고드 리히 가문의 유약한 장남에서, 차기 가주 후보로.
몇 달은커녕, 몇 년이 걸려도 바뀌지 않을 수 있는 '인식'을 유리안은 단 한 번의 행동으로 그 '인식'을 바꿔주고 만 것이다.
'설마, 유리안 경께서 여기까지 계산하시고...?'
아르바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유리안을 모멸차게 비웃는 멸칭(蔑稱) 중 하나인 '웃는 처형대'.
자신이라면 오히려 비웃는 이들을 향해 검을 들이밀던지, 공을 세워 다른 '멸칭'으로 바꿨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사람들의 공포를 자극했다.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한다....'
물론 유리안 경의 월광검에서 오는 강한 무력도 아름답지만.
자신에게 없는 그 태연자약(泰然自若)을 아르바는 더 동경했다.
처음 황실에서 만났을 때부터, 데몬의 습격으로 도움을 받을 때까지.
아니, 앞으로도 계속.
누가 뭐라고 해도.
아르바의 우상은 '유리안'일 것이다.
***
'...확실해, 의도된 행동이야.'
같은 '비숍'이지만, 무례한 제라르에게 격의 차이를 몸에 새겨주고, 동시에 고드 리히 가문의 차기 장남에게 빚을 만들어두기로.
물론, 본인이 모른다면 허투루 돌아갈 일이었으나.
'저 유약한 아르바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모양이니 말이야.'
엘레노아는 아르바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유리안이 사라진 장소로 하염없이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도 유리안이 저지른 행동이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엘레노아는 유리안이 사라지기 전, 그와 시선이 교차한 것을 떠올렸다.
지금 이 '모습'으로는 처음 보는 것임에도 유리안은 엘레노아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기분 탓이겠지.'
***
빌어먹을, 더럽게 아프네!
고드 리히 가문의 연회장을 떠나, 화장실에 들어간 난 조금 전, 제라르가 움켜 진 상처 부위의 붕대를 천천히 풀어헤쳤다.
그러자, 단단하게 굳은 '솜브라'가 상처 부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로 제라르에게 들키진 않았을 테지만....'
상처의 틈새.
제라르의 손이 다가오기 전, 빛과 같은 속도로 그곳에 '솜브라'를 접착시킨 뒤, 굳혀 그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더럽게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다.
무엇보다 마력을 담은 '솜브라'는 이질적인 감촉이다. 신경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그런 느낌마저 받았다.
'후우....'
긴장을 풀고, 마나의 흐름을 차단하자 '솜브라'는 평소처럼 흐물흐물해지더니 형태도 없이 사라졌다.
'그 어린놈이 눈치 좀 채면 좋을 텐데.'
통증 탓에 빨리 자리를 떠나기 위함이라고는 했지만, 그렇게 열심히 '연기'해줬는데.
'제라르.'
빌어먹을 면상이 떠오르자, 옆구리 통증이 도져오는 거 같았다.
고개를 들어, 세면대에 배치된 거울을 쳐다보았다.
흠뻑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실눈이 그곳에 있었다.
평소라면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실눈이라고 욕했겠지만, 이번엔 확실히 알았다.
'아무래도, 넌 안 되겠다.'
68화. 가면 속 의도(1)
"...이번에도 반응하지 않아. 왜지?"
서류를 수북하게 쌓아둔 연구실.
그곳에서 머리를 부여잡은 아일린은 시험관에 들어있는 새빨간 원석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시험관 안에 담긴 내용물은 여명회에서 애타게 찾던 혼석이지만, 아일린에게는 애물단지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원망스럽다는 듯 그것을 쳐다보았다.
"분명, 역치만큼의 마도액을 투여한 것 같은데 어째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거야!?"
신경질적인 뉘앙스로 그녀는 근처에 쌓아둔 서류 뭉치를 다시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후, '이론은 이게 맞잖아!'라며 탄식이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으으.... 내 가설이 틀린 건가? 그렇다면, 어디부터 수정이 들어가야.... 꺄아아아악!"
쿵──!
바닥에 깔린 서류 한 장을 밟고, 넘어진 아일린은 신음을 흘렸다.
몇 날 며칠, 연구실에 틀어박혀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녀는 몸을 일으킬 힘도 쉽사리 짜내기 힘들었다.
"내가 맡는 게 아니었나...."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치는 법.
약한 소리를 입에 담은 그녀는 오른팔을 눈에 올렸다.
피곤함이 밀물처럼 몰려왔고, 신체는 그 물을 빨아들인 스펀지처럼 묵직했다.
그렇게 무거운 눈꺼풀이 점차 눈을 덮기 시작할 무렵.
"그래도 어떻게 해! 다른 방법이 없었는걸!"
그녀는 투정 어린 혼잣말을 기합 삼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뜩이나 협회는 그녀를 고깝게 보고 있다.
고귀한 혈통에 불순물이 섞인 '방계'라며, 어떻게든 자신을 깎아내리려고 했으며 5계위, '바르고'를 박탈시키기 위해 이를 갈고 있었다.
"그래, 협회의 노인네들이 원하는 대로 두는 건 분하잖아. 할 수 있어, 아일린! 넌 도나시엥 가문의 일원이잖아!"
주먹을 불끈 쥔 아일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자, 할 수 있다!"
"아자, 할 수 있다~"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일린은 넘어질 때보다 더 큰 목소리로 비명을 내질렀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니, 아일린의 시선엔 동기인 디아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디, 디아나...?"
"슬슬 이상해졌을 것 같아서 찾아왔지. 아일린은 연구실에 오래 박혀있으면 꼭 이상한 짓을 저지르잖아?"
"내가 언제 그랬어?"
"음..., 지금?"
말을 듣고는 헛기침을 하는 아일린.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줍는 모습에 디아나는 실소가 새어 나왔다.
"연구도 좋지만, 잠깐 머리 좀 환기시키는 게 어때? 며칠을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았잖아."
"진전이 있다면 그랬겠지만, 그 틀어박힌 시간이 무용지물이 되었어."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반문에 아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다른 마법사들에게 말했다간 감사가 들어올 사항이었으나, 동기인 디아나에게만큼은 사실대로 밝히기로 결심했다.
"응, 내 가설에 의하면 혼석은 마나뿐만이 아니라 물에도 큰 반응을 보인다고.... 응?"
그러던 도중, 아일린의 눈에는 은은하게 빛을 머금은 혼석이 들어왔다.
"반응했다!"
"응?"
"반응했어!"
갑작스레 반응관으로 뛰어가는 아일린을 보며 디아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
성공적인 실험 결과를 서류에 정리한 아일린은 한결 나은 표정으로 실험실을 빠져나와, 보고를 위해 마탑으로 향했다.
"그럼 세미나까지 여유가 생긴 셈이네?"
"응, 정말 다행이야."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풍기던 침울한 공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마침 잘 됐다. 이번 주말에 백의점에 들러, 옷 좀 보려고 했는데, 아일린도 같이 가는 게 어때?"
"백의점?"
그 이름이 튀어나오자, 아일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최근 예복을 장만하기 위해 백의점에 들렀을 때, 유리안과 엮였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사실 아일린 양의 말대로입니다. 이 옷들은 꽤나 마음에 드는군요.'
- '역시, 아일린 양도 도나시엥 가문의 일원입니다.'
자신이 추천해준 옷차림으로 유리안이 나타났을 때, 아일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이 고집이 강하며, 자신의 미적 감각이 제일이라 여기는 남자가 자신의 추천을 수용할 줄이야.
'그런 주제에 처음엔 인정하지 않으려고 아득바득 우겼지.'
그 높은 콧대가 생각한 것보다 쉽사리 꺾이긴 했지만, 유리안이 인정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일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응? 갑자기 왜 웃어?"
혼자 미소를 짓고 있자니, 바로 옆에 있던 디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일린은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어떻게 할래?"
"응? 뭘 말이야?"
"아까 물어봤잖아. 옷 좀 고르고 싶은데, 주말에 백의점에 가자고."
"그래, 나는 상관...."
디아나의 물음에 대답하려던 아일린은 시선에 비치는 익숙한 얼굴에 말끝을 흐렸다.
마탑의 중심부로 향하는 승강기, 그 안에서 나온 익숙한 얼굴 탓이다.
"아일린 양, 여기 계셨군요."
"...유리안 경."
중절모를 쓴 채로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유리안.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보던 아일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기엔 무슨 일이시죠?"
"혼석의 연구 결과를 보고 받으러 왔습니다. 비서실에서 공문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아!"
"설마, 깜빡하신 겁니까?"
유리안의 물음에 아일린은 속으로 흠칫했다.
"곤란하군요. 도나시엥 가문의 사람들은 깐깐하기로 유명하다더니, 아일린 양을 보면 그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윽.'
옅은 미소를 짓는 유리안을 보며, 아일린은 흠칫했다.
특유의 실눈 탓에 확연하게 감정을 엿볼 수 없었지만, 비아냥거리는 것이 분명했다.
그 탓에 아일린은 살짝 발끈했다.
저 남자는 꼭 쓸데없는 사족을 붙여 사람의 속을 긁는 구석이 있다며, 속으로 혀를 차는 와중이었다.
'응?'
아일린의 시선은 유리안이 입고 있던 코트로 향했다. 이전에 백의점에서 자신이 골라준 그것이었다.
내심 피어오르던 불쾌함은 점차 그 모습을 감추었다.
자신이 추천해준 옷을 계속 입고 다닌다.
그 말은 즉, 자신의 에고로 꽉 찬 남자가 자신의 예술 감각을 인정했다는 소리니까.
"혼석의 연구는 나름의 결실을 보았어요. 그 결과를 정리한 서류도 이미 준비해두었고요."
그 덕에 자신감이 생긴 아일린은 도리어 유리안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렇습니까? 모습이 보이지 않으시길래, 호언장담한 것치고 연구의 결과가 나오지 않아 도망친 줄 알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티내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요!"
도망친다는 말에 아일린이 발끈했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커졌다는 것을 느꼈으나, 저 유리안에게 한 방 먹이려는 속셈인 듯 입을 열었다.
"유리안 경에겐 겸손이 부족한 것 같네요. 이번에 제가 연구하는 혼석을 비서실에 전달해줬다는 분을 본받으시는 건 어떠세요?"
"아, 아일린."
그런 아일린을 보며, 진정하라는 어투로 곁에 있던 디아나가 그녀를 말렸으나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아일린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분은 '혼석' 정도나 되는 물건의 중요성을 황궁에서 가장 먼저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호오."
"유리안 경, 그런 겸손이 당신에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유리안이 짧게 탄식을 흘리자, 아일린은 저 실눈의 수완가가 상당히 당황했다고 생각했다.
"저, 저기 아일린?"
"왜? 디아나."
"아일린이 말한 혼석을 가져왔다는 관계자, 말이야."
"응."
"그게 유리안 경이야."
디아나의 말에 아일린이 움찔한다.
잠깐의 정적.
그 찰나의 시간이 끝나자,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한 아일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지금 비서실에 보낼 보고서를 가져올 테니, 기다리고 계세요."
점잖게 말한 그녀는 디아나에게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과 함께 몸을 돌려 연구실로 향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으나, 그녀의 귀가 새빨갛다.
멀어지는 아일린의 등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디아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 하하... 유리안 경 오랜만이네요. 바이엘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 처음인가요?"
"예, 디아나 양."
동공을 엿볼 수 없는 시선이 자신에게 들러붙자,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음마법을 연구하고 계시는지요?"
"네? 아, 아무래도 이전부터 갈고 닦은 마법이다 보니...."
"하긴, 심리에 간섭하는 음마법은 경험의 축적이 중요하니 말입니다."
아일린 덕에 '유리안'이란 이름이 크게 낯설지 않은 디아나였으나, 그를 직접 보고 있자니 역시 두 눈으로 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과는 확연히 달라진 이미지.
혹여나, 그때 유리안에게 불경한 짓을 저지르진 않았나 기억을 더듬어가는 도중.
"사실 오늘 마탑에 들른 이유는 비서실의 부탁도 있지만, 디아나 양을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디아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네? 저를요?"
"예. 디아나 양, 라즈롯이 사용하던 액세서리는 당신이 만든 것이더군요."
영문 모를 이름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네? 액세서리...요?"
"착용자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마법'이 담겨있는 그것 말입니다."
해명하는 디아나의 모습을 보며, 유리안을 짧게 실소를 흘렸다. 눈을 통해 감정을 볼 수 없었기에, 그녀는 유리안이 자신을 간파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것 덕분에 라즈롯은 쉽게 비서실에 녹아들 수 있었죠. 작은 동물처럼 움츠러든 라즈롯은 황실에서 무해한 인물이라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유리안 경. 전 라즈롯이란 사람이 누구인지도 잘...."
"아직도 발뺌하실 생각입니까?"
굳은 의지까지 느껴지는 유리안의 목소리.
"비숍 엘레노아."
당황한 디아나의 몸이 살짝 튀어 올랐으나, 이내 진정한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절부절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녀의 눈동자는 한숨과 함께 또렷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자신의 눈 밑을 손가락으로 훑자, 숨겨져 있던 매혹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부터죠?"
한껏 날카로워진 분위기는 지금까지의 '디아나'와 사뭇 달랐다.
"뭐가 말입니까?"
"능청 부리지 마세요. 언제부터 제 정체를 알고 있었냐는 말이에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다시금 짧은 실소를 흘리는 유리안을 보며 디아나, 아니 엘리노아는 두통을 느끼듯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유리안이 이곳까지 찾아와 굳이 민감한 '주제'를 입에 담았다는 것에 엘레노아는 속으로 안도했다.
'부탁이 있어서 온 모양이네.'
그렇다면 자신의 치부가 들켰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자신이 끌고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그녀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럼 화두를 돌리죠.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뭔가요?"
"혼석의 보고서를 챙기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헛소리를."
또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유리안의 태도에 디아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비서실의 잡무를 위해 굳이 마탑까지 찾아왔을 리가."
"맞습니다, 사실 긴밀한 부탁을 위해 이곳에 찾아왔죠."
역시나.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엘레노아의 입가는 느슨해졌다.
'긴밀한 부탁이라.'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듣지 못했으나 부탁을 한다는 건 이야기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소리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엘레노아는 눈앞의 남자, 유리안이 몹시 괘씸하게 느껴졌다.
부탁이 있는 주제에 이런 자리에서 대놓고 '엘레노아'란 이름을 입에 담다니.
"부탁이 있는 사람치고는 예의를 모르시는군요. 유리안 경이 그런 염치없는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이 괘씸한 남자를 조금이라도 좋으니, 골탕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후후,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그런 감정의 탁류가 녹물과 같이 가슴에 스며들 때쯤.
"제가 부탁하는 게 아닌, 당신이 제게 부탁하는 겁니다."
유리안은 다시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69화. 가면 속 의도(2)
'내가 유리안한테 부탁을?'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엘레노아는 당황스러웠으나, 그것을 내색할 만큼 어리숙하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봐온 '유리안'은 멍청하다, 아니 멍청'했다'.
만약 자신이 '유리안'이라면 '웃는 처형대'라는 악명과 '감은 눈'이라는 위치를 교묘히 이용해,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충분히 활용하고도 남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유리안은 그런 점은 없었고, 그저 살인을 유흥처럼 여기는 사내였을 뿐.'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그건 엘레노아가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 변방에 데몬 토벌 갔다가 머리를 다친 이후였지.'
천성(天性)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웃는 처형대'였고, '황실의 개'였다.
그러나 거기에 교활함 한 스푼과 정치적 색깔이 한 스푼 가미된 느낌이다.
직접 나서지는 않지만, 뒤에서 전체적인 흐름, 또는 무언가를 조정하는 흑막의 느낌.
'그렇지 않고서야....'
고드 리히 가문의 장남이 주최한 연회장에서 그런 소란을 내지 않았을 터.
제라르가 도발한 이유는 사실 '검은 기사'의 정체를 밝히기 위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유리안이 자신의 경쟁 상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아크비숍에게 총애받는 이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검은 기사'와 연관이 있다?
그의 두터운 신임에 살짝이라도 금을 그을 수 있다면?
제라르가 한 도박은 성공한 것이다.
허나, 유리안은 오히려 그와 자연스럽게 어울려주며, 동시에 고드 리히 가문의 '장남'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운 것이다.
제라르가 나타나고 도발하는 그 짧은 순간.
'저 남자는 거기까지 생각했겠지.'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
분명, 돌발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제 말이 어렵진 않았을 텐데요. 디.아.나 양께서는 아무런 말도 없으시군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죠."
"그렇습니까? 후후."
"주변에 눈이 많군요. 자리를 바꾸는 게 어떨까요?"
그리 말하며, 엘레노아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러자 눈 밑의 눈물점이 머릿결 사이로 살며시 존재감을 뽐내었다.
이성의 마음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축복이자, 저주.
엘레노아의 습관적인 행동으로 그것이 자연스럽게 발동되었지만, 유리안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역시나....'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엘레노아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차면서 궁금증이 들었다.
'근데 왜 이 순간, 이 시간에 나를 찾아왔지?'
굳이 엘레노아가 '일반인' 신분을 가지고 있을 때, 말이다.
유리안이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기던 엘레노아는 슬쩍 고개를 돌려, 자신을 뒤따르는 유리안을 쳐다보았다.
- '제가 부탁하는 게 아닌, 당신이 제게 부탁하는 겁니다.'
가장 의뭉스러운 그의 한 마디.
'...들어보면 알겠지.'
어느덧,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장소까지 온 엘레노아는 뒤돌아 유리안을 바라보았다.
"여기 정도면 괜찮을 것 같네요. 유리안 경. 도대체 제가 무슨 부탁을 한다는 거죠?"
"...엘레노아 양."
한 박자 쉬고 말하는 것이 자신이 상대방에게 많이 써먹는 방법이다.
주도권을 잡기 위한 대화의 기술.
대답하면 끌려갈 것 같지만, 내용은 들어봐야 했기에 엘레노아는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후우, 예."
"혹여나..., 가문의 '원래 위치'를 찾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꼿꼿했던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유리안에게로 향했다.
큰 표정의 변화가 없으나, 자기 얼굴에 다른 감정이 섞여 있다는 것은 엘레노아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어떻게 알고 있지?'
당혹감.
최근 들어 이런 느낌을 받아본 것이 언제였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은은한 미소가 입가에 맺힌 유리안의 얼굴을 본 엘레노아는 살짝 아차 싶었다.
'그는 아직 진짜 목적을 말하지 않았어. 내가 지레짐작할 뿐이다.'
표정을 가다듬은 엘레노아는 말을 이었다.
"흐음, 전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저희 가문은 아시다시피 제국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흥미를 보이면 안 된다.
유리안이 그것을 캐치 한다면, 의도가 어떻든 이야기의 흐름을 잡기 쉬워진다는 것이다.
"이런, 이런. 제가 말을 너무 돌려 했나 봅니다. '직접' 말해드리지요. 아크 비숍 자리...."
엘레노아의 눈 밑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유리안은 쐐기를 박았다.
"...탐나지 않으십니까?"
유리안의 말에 당황한 그녀는 속으로 대화가 진행되며 벌어질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따지기 시작했다.
"아크 비숍의 자리라.... 저에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자리 같네요. 유리안 경은 어떠시나요? 아크 비숍의 자리, 잘 어울리실 거 같은데요...?"
그의 진짜 의중을 알아야 한다.
"전 '황실의 개'로 만족하고 살고 있습니다. '개' 주제에 주인을 무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후후, 근데 엘레노아 양의 가문에겐 그 '자리'가 특별하지 않겠습니까?"
가볍게 서로의 의중을 체크하는 가운데 '가문'이란 말을 들은 엘레노아가 먼저 칼을 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즉, 테넬론 경께 반기를 드시겠단 소리인가요?"
"제 말이 그렇게 들린 모양이로군요."
"실제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엘레노아는 말을 하며, 유리안의 표정에 변화가 생기는지 확인해보았다. 가면을 쓴 듯한 그의 얼굴엔 변화가 전혀 없다.
"유리안 경께서 저희와 뜻을 함께하게 된 이유는 힘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나요?"
비록, 지금은 그 색이 옅어지기는 했으나 유리안은 스승을 꺾기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인간이다.
그런 그가 테넬론에게 반기를 들어서 얻는 이득이란 무엇인가?
"예, 그게 문제라도 되는 겁니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지내면 되는 것 아닌가요? 테넬론 경께선 유리안 경을 마음에 들어 하시니, 시간이 지나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내려주실...."
"후후."
유리안의 짧은 웃음에 엘레노아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뭐가 웃기죠?"
"제 말을 오해하시는 모양이군요, 엘레노아 양."
천천히 걸어간 유리안은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꺾었다.
"전 '반기', '반역'이라는 단어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충분히 아실 테지요. 그리고 여명회의 내부에서 갈아엎어 그 '자리'를 꿰차자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능청을 부리는 그의 태도에 엘레노아는 사뭇 기분이 나빠졌으나, 그래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테넬론 경의 총애를 받는 엘레노아 양도 아직도 모르고 계시는군요. 테넬론 경께선, 지금까지 공석이던 여명회의 '총대주교'의 자리를 승계하실 생각인 모양이더군요."
"...총대주교 말인가요?"
"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하는 유리안의 모습을 보며 엘레노아는 드러나지 않도록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여명회에서 총대주교(總大主敎)란 직위는 다른 교단들과 사뭇 다르다.
지금까지 저 직위에 다다를 수 있었던 자는 '여명회'를 처음으로 창단한 자.
올렌트 드미셀.
바로, 엘레노아의 아버지다.
'그 직위에 딱히 의미를 부여할 생각은 없지만....'
그녀는 기분이 살짝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궁금증이 일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지?'
"표정이 좋지 않군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전혀! 테넬론 경께서도 때가 됐다, 생각하신 것이겠죠."
"예, 맞습니다. 시기적으로 조금 이른 감은 있으나 그 정도는 여명회의 결속을 위해 그런 거라,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결속이라.'
혀끝에서 맴도는 씁쓸함을 곱씹으며, 엘레노아는 테넬론의 의중을 생각해 보았다.
'...다른 지부의 인원들도 제도로 불러들인 이유도 그 탓인가?'
사실 타 지부에서 모종의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엘레노아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건 바로, '테넬론'의 행동에 반기를 들고 여명회를 꿰차려는 자들의 존재다.
여명회에서 그가 가진 권력의 중추(中樞)는 성유물인 '마신성(魔神盛)'이지 '테넬론'이라는 인간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신성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난다면 테넬론에게 불만을 품은 자들이 일어나겠지.'
굳이 '총대주교'라는 직위로 승계를 결정한 이유도 여명회의 권력을 조금 더 제도에 집중시키고 싶어서 일 것이다.
여명회의 숨은 간자들이 많은 제도 내에서라면 언제든 불만을 가진 자를 처리할 수 있으니까.
"제 제안이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으십니까?"
생각을 정리하던 엘레노아에게 불쑥 유리안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테넬론이 '총대주교'가 된다면, 필연적으로 그 밑에서 비숍과 몬시뇰을 총괄하는 '아크 비숍'의 자리는 공석이 될 터.
탐나지 않을 리 없다.
'이런 뜻이었어.'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닌, 부탁을 '받으러' 왔다는 그의 말.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바스락.
한 번 더, 그가 나뭇잎을 꺾자 부스러지는 소리가 그의 손끝에서 들려왔다.
'근데..., 대체 어디서 손에 넣은 정보지?'
문득,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어찌, 이리도 많은 정보를 그가 꿰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물어본다고 해도 저 남자는....
'절대 곱게 대답해 주지 않겠지.'
"유리안 경의 말대로 아크 비숍의 자리가 공석이 되고, 그 자리를 비숍 중 누군가가 차지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제가 부탁한다는 식의 말투가 납득이 가네요."
유리안은 몸을 돌려 엘레노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영민하신 엘레노아 양께서 이 좋은 기회를 호기롭게 날려버리시진 않으시겠죠?"
흡족한 분위기가 감도는 그의 얼굴.
어쩐지 악마와 계약을 맺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좋아요! 정식으로 '부탁'하죠. 제가 아크 비숍이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후후."
그렇게 말한 엘레노아의 두 눈에, 나뭇잎을 만지작거리던 유리안의 손이 갑자기 들어왔다.
'...응?'
그의 손가락에 부서진 나뭇잎의 조각들이 약간이지만 붙어있었다.
평소의 '유리안'이라면, 손이 건조할 것이다.
언제든 검을 들 수 있게 대비하고 있기에.
검사에게 손은 언제나 깔끔해야 한다. 아니면 검을 들다, 미끄러져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 그것들이 붙어있다는 것은 손에 '물기'가 있다는 것이고, 그 말은....
'긴장했다? 천하의 유리안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음마법을 다루는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누구보다 '감정'에 대해 민감하기에.
엘레노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슬쩍 유리안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평소처럼 이 실눈의 남자는 반달 눈을 한 채,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것이 조소(嘲笑)처럼 느껴진 그녀이다.
'설마, 그럴 리가....'
70화. 무명객단(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