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 110-120

110화. 까마귀와 백로(2)

비숍 코룬드는 끔벅거리는 눈으로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천천히 곱씹어보았다.

현재 자신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다.

서늘한 감촉이 등을 타고 흘렀으며, 동시에 아찔한 통증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끄으으으으윽...!"

비명을 함축한 신음이 코룬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런 코룬드를 핀텔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내려보았다.

"너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경한 죄가 여럿 있다."

감정을 쉽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닌, 무감정한 목소리.

'핀텔'이란 인물과 나름의 교류가 있었던 코룬드였기에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 더러운 입으로 높은 '분'을 우롱한 죄."

잔잔한 호수처럼 무감정했던 핀텔의 얼굴에 모종의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둘, 그 높은 '분'께 모반을 꾀한 죄."

얼음장이라 생각했던 그의 얼굴엔 차가운 불꽃이 서리기 시작했다.

"셋, 내게 끔찍한 모반죄를 함께하자며 손을 내민 것이다."

"이... 이, 멍청한 새끼! 지금 내가 누굴 이야기하는 줄 알고 이러는 거냐!"

분노가 서린 코룬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핀텔은 자신의 지팡이를 빙글 돌렸다.

그 후, 의자에 앉은 채 입을 열었다.

"유리안 경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지. 내가 그것도 모르고 이런 짓을 하는 것 같나?"

"이 미친놈이...!"

격양된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코룬드.

그의 몸 주변에선 불그스름한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한다.

코룬드의 마나, 파괴력으로 유명한 화(火) 원소가 자신을 증명하려던 찰나.

파바박──!

"크아아아아악!"

조용하고도, 신속한 핀텔의 비수 마법이 그의 몸에 박혔다.

"마법사와의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선제공격으로 우위를 점하는 것."

"이... 이 개새끼가...!"

"실전으로 다져진 내 '비수 마법'이 네놈의 지지부진한 영창을 방관할 줄 알았나 보지?"

마치 지휘하듯, 핀텔은 지팡이를 흔들었다.

그의 지팡이 끝엔 물속의 물고기들처럼 날카로운 '비수'들이 따라다녔다.

"뭐..., 뭐 때문이냐! 그놈이 네게 뭘 해줬다고!"

흠칫.

코룬드의 말에 핀텔의 미간이 흔들렸다.

"반쪽짜리 쓰레기를 왜 옹호하고 있는 거냐!"

스르륵.

핀텔은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나 쓰러진 코룬드에게 천천히 다가선다.

"잘 생각해 봐라. 핀텔! 지금 여명회의 마법사들이 하나로 뭉쳐 대항하지...."

지팡이가 그의 허리를 내려찍는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코룬드의 입에선 거품을 무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려 퍼졌다.

"이 불경한 놈!!"

퍽, 퍽!

핀텔의 지팡이가 연거푸 코룬드의 몸에 박혔다.

"그 추잡한 입에서 나오는 것이냐!"

퍽!

"아님, '창피'란 단어를 모르는 네놈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냐!"

퍽!

"다시 한번 지껄여 보거라! 이 쓰레기가아아아앗!!!!"

"지, 진정하십쇼. 핀텔 경."

인정사정없이 지팡이를 휘두르던 핀텔을 막아선 것은 그가 데려온 몬시뇰이다.

그를 본 핀텔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지팡이를 거두었다.

"정리는 끝났나?"

"예, 코룬드가 데려온 병사들은 모두 제압해두었습니다."

"그래, 잘했다."

평정을 되찾은 핀텔은 쓰러진 코룬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 녀석은 감금해둬라."

"죽이시지 않는 겁니까?"

"유리안 경께서 거기까지 원하시진 않을 것이다."

'유리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몬시뇰은 살짝 당황했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일을 벌이지 않으셔도 될 일 아니십니까?"

"그렇지 않다."

핀텔은 몬시뇰의 말을 끊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유리안 경께서 신성국으로 출발하기 전, 총대주교께서 내려주신 아크 비숍의 직위를 거절한 이유를 묻자,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무엇을 말입니까?"

말을 잇던 핀텔은 곁에서 질문을 던진 몬시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제 뜻은 더욱 높은 곳에 있습니다.'

아크 비숍보다 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핀텔은 알고 있다.

그런 유리안의 앞길을 위해 주변을 정리해두기로 결심한 핀텔이다.

그것이 '선택'을 받고, '기회'를 준 장본인에게 해줄 수 있는 경의(敬意)이기에.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핀텔은 '유리안'과 나누었던 대화를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결심했다.

혹여나 이곳에서 나눈 말이 그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청사자 기사단의 움직임은 어떻지?"

핀텔은 재빨리 주제를 바꿨다.

"알하사르, 단원인 네 녀석이라면, 내부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쉽지 않느냐?"

"현재 청사자 기사단을 포함해서 다른 기사단들도 여명회를 주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흠."

핀텔은 짧게 신음을 흘렸다.

"그중, 제일 눈에 띄게 움직이는 것은 '감은 눈'인 것처럼 보입니다."

"...'감은 눈'은 어차피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황실 전속 기관이라고는 하지만, 그곳의 간판인 '유리안'이 여명회에 소속되어 있으니 말이다.

'어차피 유리안 경께서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모를 리 없으실 터.'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핀텔은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초석(礎石)에 유리안 경이 있을 것이란 믿음은 변치 않았다.

'신뢰를 준 자에게 신의(信義)를 다하라.'

오브라딘 가문의 가언(家言)이다.

"일단, 난 돌아가겠다. 이 주변엔 아무 일도 없던 걸로 만들어 둬라."

"예, 처리해두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몬시뇰을 보며, 핀텔은 어둠 속으로 발을 옮겼다.

또 다른 무언가를 하기 위해.

***

마법사와 기사는 사이가 좋지 않다.

당연히, 제국에 존재하는 권력 파이를 서로가 나눠 먹고 있으니, 좋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

"이런, 미친놈을 봤나! 홍차를 타오라고 했거늘, 이건 색깔만 붉은, 뜨거운 물에 불과하지 않느냐!"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점은 '플뤼겔'이란 인물은 아주 평등한 자라는 것이다.

신분이나, 직업에 따라 남을 차별하는 것이 아닌 오롯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개같이 구는 자.

이자는 마법사 계의 비글, 지랄 견, 아니 지랄 법사란 소리다.

"프, 플뤼겔 님께서 진한 것이 아닌, 연한 것이 홍차라고 하지 않으셨...."

"예끼, 이놈아!"

플뤼겔이 손짓을 하자, 차를 대접하던 마법사가 허공으로 부웅 날아올랐다.

"거기서 다시 생각해 봐라!"

"죄, 죄송합니다. 다시 타오겠습니다. 플뤼겔 님!"

"진즉에 그럴 것이지."

쯧, 하고 혀를 한 번 찬 플뤼겔이 다시 한번 손짓을 하자 허공에 오른 마법사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으, 으윽...."

신음하며, 수발을 들던 마법사는 재빨리 찻잔에 다가왔다.

옮긴 찻잔은 단 하나.

애초에 나와 마이어에겐 물도 대접해주지 않았다.

누가 지랄 법사 아니랄까 봐.

"아니, 이건 두고 가! 목은 축여야 할 테니 말이야."

"네, 넷!"

마법사가 허둥지둥 빠져나가자, 플뤼겔은 자신의 긴 수염을 한 번 쓸어넘겼다.

"흥, 그래.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

"예."

"난데없이 개 같은 상판을 들이밀고 한다는 말이 공명석을 달라는 게냐?"

개 같은 상판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다고 하고 싶었으나, 플뤼겔의 눈에 비친 얼굴은 내가 보기에도 욕이 나왔다.

"그렇습니다."

"뻔뻔한 놈, 너무나도 당연하듯이 말해서 어처구니가 없구나!"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플뤼겔 경."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당연히 거절하겠지.

친한 사이도 아닐뿐더러, '유리안'이란 인물의 평가는 제도에서 바닥을 긴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아쉽군요."

"흥, 아쉽기는. 어차피 거절당할 것은 알고 있었을 텐데."

그 말대로다.

단순히 '공명석 좀 줘!'라고 해서 받을 수 있다면, 마이어를 데리고 오진 않았겠지.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라면 플레이어들에게 '지랄 법사'라는 원성 어린 별명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꼴을 보아하니, 빈민가에서 사용할 생각인 것 같은데."

물론, '지랄 법사'라는 이름과는 달리 그 실력은 진짜배기다.

"알고 계시는군요."

"당연히 알고 있지. 그곳에서 데몬으로 모종의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쯤은 말이다."

공명석을 찾는 이유를 단번에 꿰뚫어 본 플뤼겔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다.

"데몬의 연구는 관심 가는 주제야. 덕분에 혼석의 연구 보고서도 일일이 확인하고 있을 정도니 말이야."

혼석의 연구 보고서라. 지금 혼석을 연구하고 있는 것은 아일린인 걸로 아는데.

'아일린 드 도나시엥.'

생각해 보니, 그녀도 도나시엥 가문의 일원이다. 에이든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만약 그녀를 적대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5위계인 '바르고' 등급의 마법사는 어떤 원소를 지녔던 귀찮은 상대가 될 것이다.

"공명석을 사용한다면, 연구하는 장소를 찾아내는 것에 도움이 되겠지."

"예, 그 말대로입니다."

"황실에서 내린 명령인가?"

플뤼겔의 물음에 난 고개를 저었다.

"개인적인 일이지요."

'황실'과 관련된 일이라면, 플뤼겔도 어쩔 수 없이 공명석을 내줬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황실'과 관여된 것이었더라면, 이런 식으로 '직접' 찾아올 게 아니라, '정식'적인 절차를 밟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관해도 되는 일이겠지."

플뤼겔은 피식 웃더니, 수염을 매만졌다.

"필히, 네놈은 그 연구를 방해하기 위해서 이곳에 찾아왔겠지."

난 대답하지 않고, 플뤼겔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가만히 놔두면 흥미 있는 주제를 대신 연구해주겠다는데, 그걸 왜 망치게 두냔 말이다."

"인체 실험. 그것도 어린아이로 진행하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까?"

"푸하하하하핫!"

지금까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던 플뤼겔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연신 수염을 쓰다듬으며, 노구는 모멸 어린 시선으로 날 보았다.

"웃는 처형대의 입에서 인의를 논하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내 오래 살고 볼 일이구만!"

영감탱이, 더럽게 오래 살았으면서 말은.

"하찮은 도덕적인 잣대로 마법을 논하려 드는 것도 웃기지만, 조금 전 말은 오늘날까지 밟아온 네놈의 행보와 너무도 달라 웃음이 나오는구나!"

확실히 플뤼겔의 말대로 방금 내뱉은 말은 '유리안'이라면 할 법한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이런 언어 선택을 한 이유는 빈민가에 사는 마이어의 분노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촤악──!

테이블 위에 잔을 집어 든 마이어가 망설임 없이 내용물을 플뤼겔에게 뿌렸다.

"영감탱이! 보자 보자 하니까 노망이 났나!"

"마이어 양, 지금까지 보는 게 아니라 듣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찌릿.

마이어가 나를 노려보았다.

"...듣자 듣자 하니까, 노망이 났나!"

그래.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홍차를 뒤집어쓴 플뤼겔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수염을 매만졌다.

"버르장머리가 없는 년이로구나. 내 손짓 한 번이면 순식간에 숨통이 끊어질...."

마이어에게로 시선을 옮긴 플뤼겔은 말끝을 흐렸다.

남자의 마음을 사뭇 당기는 마이어의 외모를 보고, 흠칫한 것일까?

훗. 그럴 리가.

아까도 말했듯 플뤼겔이란 인물은 고자다.

"어떠십니까, 이제는 조금 생각이 달라지셨는지요. 플뤼겔 경."

굳이 '검은 기사'의 이름을 팔아 치우면서 이곳까지 마이어를 데려온 이유.

플뤼겔은 그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오색(五色)의 유일(唯一)'의 재능을.

 

 

 

 

 

 

 

 

111화. 까마귀와 백로(3)

문뜩, 든 생각이 하나 있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세계관엔 '마법'이 존재하며, 그 마법을 연구하는 자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마법'이라는 요소를 연구하고 더 높은 위계(位階)에 도달하려는 그들은 과연 '워커홀릭'의 일종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년도 마법사였나?"

물론, 큰 관심이 가는 주제는 아니다.

그저 '마이어'의 모습을 보더니 사뭇 분위기가 달라진 플뤼겔 탓에 든 생각에 불과했다.

"마법사라니, 누가 빌어먹을 마법사라는 거야?"

"맞습니다. 그녀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욕지거리가 담긴 마이어의 말은 흘려들은 플뤼겔은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정확히는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니, 누가 빌어먹을 마법사라는 거야, 자꾸?"

나 또한 욕지거리하는 마이어의 말을 흘려들었다.

"빈민가에서 살아온 그녀는 마법을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마법을 배워본 적이 없다.'라는 내 말에 플뤼겔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럼 마나 운용을 배워본 적이 없다는 게냐?"

그 말에 난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더 플뤼겔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도록.

"어떠한 배움도 없이 체내에 '마나 환경'을 구성했다고?"

수염을 매만지는 플뤼겔의 얼굴엔 흥미가 깃들었다.

'드디어 관심이 생겼나 보군.'

플뤼겔이 갑작스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마법사들의 태생과 연관이 있다.

사실 마법사들이 '순혈주의'를 내세우는 것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다.

'가문의 명맥을 잇는 마법사들.'

그들은 '최선'의 마법을 연구하며 그것을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신체를 가꾸었다.

그리고 그 경험과 지식은 세대를 거듭하며 견고해졌고, 더욱 효과적으로 조형(造形)되는 것이다.

"맞습니다. 심지어 그녀는 '독학'으로 '정령 마법'을 구사할 수 있습니다."

"...정령 마법을 독학으로!?"

하나, 마이어는 세대를 이어주는 스승의 존재도 없이 자신만의 '환경'을 구축했다.

그런 플뤼겔에게만 들릴 수 있도록, 조용히 말했다.

"플뤼겔 경께서도 슬슬 제 7위계의 비밀을 파헤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하던 그의 두 눈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빛이 아른거렸다.

강렬한 욕망.

자신을 '다음'으로 이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의 조각. 그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법 비글', '지랄 법사'라는 플레이어 사이에서의 별칭과는 달리 플뤼겔은 제국에 얼마 없는 6위계 '리브라' 등급의 마법사다.

그런 플뤼겔이 50년이 넘도록 7위계의 벽을 두드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150년을 살아온 노친네도 슬슬 애간장이 타기 시작한 것이다.

'마법으로 삶을 연명하고 있지만, 그것조차 불가능해진다면, 난 지금 경지의 '다음'을 볼 수 없게 되는 건가?

그 탓에 초조해진 플뤼겔은 제자들을 육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수준을 정진시킬 수 있도록.

'영감'을 줄 수 있을 '천재'를 찾아서.

그러나 지금까지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아시잖습니까? 마법적 영감이란, 쌓인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닌...."

"근본적인 상상력에서 오는 것."

슬그머니,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자, 플뤼겔이 바톤을 넘겨받았다.

이 말은 평소 그 자신의 넋을 달랠 때 쓰는 말이었으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게냐, 이 능구렁이 같은 놈."

기가 찬듯하면서도 날카로운 플뤼겔의 시선이 내게 향하자 난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법 비글, 이 양반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질문 하나만 하자."

플뤼겔은 마이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언짢은 듯한 마이어의 표정엔 질문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일념이 보였으나, 내가 어울려주라는 제스쳐를 취하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엇인지 보이나?"

[특성, 〈간파〉가 발동되었습니다.]

플뤼겔이 검지를 세우자, 그곳엔 조그마한 '새'가 떠올랐다.

아주 흐릿하다. '간파'가 발동하지 않았더라면, 나조차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마나로 만든 새...?"

하지만 당연하게도 마이어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확실히 재능은 있나 보군. 아니에스, 그 정신 나간 녀석은 황실 마법사가 되고 싶다면서, 이것도 못 알아보는데 말이야."

말을 잇던 플뤼겔은 힐끔 날 쳐다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난 마지막 쐐기를 박기로 한다.

"어떻습니까, 빈민가에서 하고 있던 연구보단, 이 녀석이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크흠."

이 정도 했으면 줘야지. 어디 날로 먹으려고.

헛기침을 입에 담은 플뤼겔은 손가락으로 방 하나를 가리킨다.

"저기 선반에 넣어둔 공명석 중 아무거나 가져가거라."

위법(違法)의 소지가 있음에도, '7위계'라는 벽을 넘고 싶은 욕망이 도덕적 관념을 이긴 모양이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마이어 양. 당분간 이곳에 다니면서 플뤼겔 경의 가르침을 받아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뭐!?"

"저래 보여도, 실력은 대단한 마법사입니다."

"아니 그래도...."

말끝을 흐리던 마이어는 뭔가 고민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왜 죄책감이 드는 건지.'

'순백'이라 불리는 플뤼겔의 제일가는 제자, 마이어. 그게 이 게임의 정사(正史)다.

순전히 비틀어진 과정을 돌리겠다는 것이 아닌, '공명석'이라는 이득이 있어서 움직인 것이지만, 살짝 그녀에게 미안함이 들었다.

"정 싫다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마법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어. 싫은 건 어디까지나 마법사들이니까."

그리 생각하니 다행이군.

"그럼, 망설이는 이유가 뭡니까?"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플뤼겔'의 제자라는 명칭에 군침을 흘릴 것이 분명했다.

그는 제국에서 손꼽을 정도로 유능한 마법사니까.

비록, 자신의 마법적 정진을 위한 제자 육성이지만, 별칭에 어울리지 않게 플뤼겔은 자신들의 제자를 꽤나 아꼈다.

"그게...."

그렇기에 궁금했다. 마이어가 망설이는 진짜 이유가.

"딱 보니, 가르침을 받는다고 해도 잡다한 일을 도와주는 일도 생길 것 같은데."

그건 맞지.

어찌 보면, 대학원생 같은 거니까.

"그럼, 내 쪽에서 일당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니... 야?"

아, 그걸 걱정하는 거였어?

근데 너 배우는 입장에서 그리 말하는 게....

아, 빈민가 출신이지.

음, 그것도 맞다.

돈..., 중요하지.

***

플뤼겔에게서 받은 공명석을 '혈귀단'과 '무명객단'에게 나뉘어주면서 신신당부를 해두었다.

"혹여나, 공명석이 반응하는 위치가 있다면 내게 말해주십쇼. 내부를 탐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후, 간단하게 업무를 끝마치고 라즈롯의 보고를 들었다.

"유리안 경, 비숍 핀텔이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응? 핀텔이?

이 녀석이 갑자기 무슨 일이냐.

그런 생각을 하며, 핀텔이 말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제도의 변두리.

약속 장소라고 하기엔 을씨년스러운 오두막이 눈에 들어왔다.

핀텔이 이런 곳에서 날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뭘까? 가끔 그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여기입니다, 유리안 경."

어둑한 오두막에 가까워지자, 핀텔이 나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동시에 그 뒤로 인기척이 몇 개 느껴졌다.

핀텔이 데리고 다니는 사병인 것 같은데, 적의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수작을 부리려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핀텔과의 사이를 생각해보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과거보단 유순해진 것 같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본디 갈대와 같지 않은가?

이득에 따라 간에 붙고, 쓸개에 붙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듣자 하니, 저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습니까?"

"예, 유리안 경에게 긴히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십쇼."

다시 한번, 정중한 인사를 하는 핀텔.

'여차하면, 이곳에서 시도해볼 수도 있겠군.'

새로운 '일필휘지'의 경지.

이전에 '맹인무사'에게서 배운 '오러 활용'을 이곳에서 사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긴장감 반, 고양감 반이 몸속에서 맴돌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핀텔이 먼저 내려가자, 나도 그곳을 따라 내려갔다.

그러자 폐허와 같은 바깥과 달리 나름 관리한 듯한 철창이 눈에 들어왔다.

"으읍.... 으으으윽!"

안에는 처참한 몰골의 남자가 있었다. 익숙한 인상인데....

'...어?'

비숍 코룬드? 아니, 이놈이 왜 여기에 갇혀있지?

"후후, 코룬드 경 꼴이 말이 아니군요."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실소와 함께 헛소리를 읊조리고 말았다.

바로 옆에서 핀텔이 그걸 듣더니, '역시나'하는 분위기를 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유리안 경께선 알고 계셨나 봅니다."

응? 뭘?

"저자는 에이든과 협상이 결렬되자, 그것을 빌미로 다른 비숍들과 손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

"목적은 유리안 경의 타도. 유리안 경께선 저자의 행보를 예상했기에, 가만히 두신 것이지요."

아니 이럴 수가.

엄청난 계략과 책략이 밝혀지는 순간, 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를 시험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계략'을 짠 사람이 나란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데.

"만약, 저자와 손을 잡았더라면 유리안 경께선 모조리 소탕하셨을 테지요. 그걸 위해... 오늘 마탑에 들른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니,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는데.

"역시 대단하십니다. 핀텔 경."

그래. 제멋대로 오해를 해주는데 거절할 의향은 없다.

"오오.... 역시!"

거짓말을 하는 것에 왠지 모를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으나, 감탄하고 있는 핀텔을 보니 가책도 얼마 지나지 않아 먼지처럼 사라졌다.

문제는 코룬드다.

'이놈을 어찌하지.'

죽이면, 그것도 문제요.

이대로 두는 것도 문제다.

비숍의 실종은 총대주교인 테넬론이 민감하게 반응할 요소이기 때문이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

하나 좋은 수단이 생각났다.

"그럼 핀텔 경."

"예!"

"코룬드 경을 풀어주시겠습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지하에는 강철로 만든 철창보다 더욱 싸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마도 납득하지 못한 모양이다.

"이자는 유리안 경을 죽이기 위해서 작당을 하던 자입니다. 그런 자를 왜...."

"이해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예... 유리안 경이라면, 자신한테 이빨을 들이민 자를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 아아."

잠시 고민하는 듯한 태도의 핀텔.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탄식을 내뱉으며, 깨달음을 얻은 자처럼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유리안 경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제가 따르겠습니다!"

몇 번의 비슷한 과정을 거치니, 이제 알 수 있었다.

이 자식, 또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어이, 뭣들 하느냐! 유리안 경의 말대로 비숍 코룬드의 포박을 풀어라!"

하지만 이번만큼은 알아도, 방관하기로 결심했다. 핀텔의 오해로 생겨난 일은 거북한 것들이 많았어도 내게 곤란한 것들은 아니었으니까.

"콜록, 콜록!"

손을 묶고 있던 밧줄과 재갈이 풀리자, 코룬드는 기침을 하며 두려움에 찬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코룬드는 마법사였기에 재갈까지 풀면 마법을 영창 할 위협이 있었으니.

'부정의 색을 보니,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완벽한 공포의 색.

코룬드의 머리 위에 뚜렷하게 보였다.

"코룬드 경, 후후. 이런 일로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습니다."

"히, 히이익...!"

두려워하는 코룬드를 뒤로 하고, 난 그에게 말을 이었다.

"분명, 제게 이를 드러내는 귀족은 없을 거라고 하셨는데, 여기 있었군요."

 

 

 

 

 

 

 

 

112화. 지하수로(1)

"정말 저자를 풀어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오두막을 빠져나오자, 뒤따라붙은 핀텔이 의문을 입에 담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근심이 서려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미 정신적으로 굴복한 자이니까요."

"...그렇습니까?"

"예."

난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의 색〉으로 살펴본 코룬드의 얼굴엔 '공포'의 색이 그득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걱정입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과연 코룬드가 유리안 경의 말을 제대로 따를지 말입니다."

코룬드를 놓아주기 전, 녀석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해두었다.

에이든과 다시 만나, 협력하자는 이야기를 꺼내라고.

"약속 장소에 에이든이 얼굴을 비추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타당한 생각이다.

이미, 코룬드는 에이든의 제안을 거절한 전적이 있으니 말이다.

"상관없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아도 말입니다."

"...유리안 경께선 코룬드를 미끼로 에이든을 끌어낼 생각이 아니셨습니까?"

핀텔도 생긴 것과 다르게 생각이 깊은 편인지 내 의도를 어느 정도는 파악해둔 상태였다.

그러나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생각까지는 읽지 못한 모양이다.

'애초에 끝난 일에 계속 손을 쓰는 느낌이긴 하지.'

다른 건 몰라도, 핀텔이 날 위해 움직인다는 것은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같은 비숍을 두들겨 패서 제압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지.

"지금 당장 위협을 넘기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걸 위해서 당신이 있는 것 아닙니까, 핀텔 경."

난 지긋이 핀텔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실눈'은 마치 '흑막'에서 '암약'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넌 가만히 좀 있으라고!'

그건, 단순히 핀텔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코룬드의 감시를 맡기겠습니다. 그가 이상한 짓을 한다면...."

"알겠습니다, 유리안 경."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핀텔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결단을 한 것처럼 강한 의지가 느껴진 긍정이었으나, 별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예상된다.

코룬드의 의지는 확실하게 꺾였으니 핀텔이 움직일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

"아일린 님의 논문은 반려되었습니다."

"또!?"

사용인의 말에 아일린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보고하던 사용인이 살짝 움찔하자, 아일린은 헛기침을 하고 그녀를 돌려보냈다.

"하아.... 진짜."

방 안에 혼자 남게 된 아일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몇 번째 반려(返戾)인지 세는 것도 까먹었을 정도다.

"에이든 드 도나시엥."

조용한 방안. 아일린은 벽 위에 걸린 '도나시엥 가문'의 문양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전 논문이 반려된 건 이해하지만, 이번엔 아니잖아요!"

도나시엥 가문의 가주가 '혼석'에 대한 연구에 반감을 품고, 자신의 논문을 반려하는 것에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특정한 마나 패턴을 혼석에 투과하면, 섬유에 '마나흔'이 남는다! 이 정도면 나름의 성과를 낸 것 아닌가요!?"

가문의 문양을 보며, 아일린은 넋두리를 중얼거렸다.

"아니면 저 같은 반쪽짜리는 제대로 된 연구조차 하지 말라는 건가요!?"

푸념의 농도가 짙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그녀는 자제를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응?"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지럽게 흩어놓은 서류 중 하나였다.

"빈민가 데몬 토벌 지령서?"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이 있다.

빈민가에서 데몬이 출몰했다는 소문이 돌아 황실에서 사람을 파견했다는 것을.

당시 황실의 명을 받고, 일을 처리한 것은 아일린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황실의 인장과 함께 박힌 그의 사인은 아일린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휘갈겨놓은 그것은 평소 그의 행실과 달리 너무나 정갈해, 헛웃음까지 나왔다.

"그건 그렇고, 빈민가에서 데몬이라...."

제도와 비교하면 빈민가는 치안이 나쁜 편이기는 하지만, 데몬이 출몰할 정도로 나쁘냐고 묻냐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도의 근처인데 말이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일린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인위적으로 만든 건가?"

최근 혼석에 대한 연구를 한 아일린이었기에 이러한 가설에 접근할 수 있었다.

혼석에 깃든 에너지원은 '마기'이고, 그것을 다뤄 생물에게 기생한다면 그것이 곧 '데몬'이 되는 것 아닌가?

"가능성은 있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황실을 제외한 또 다른 누군가가 혼석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데."

더 나아가.

"인체 실험도...."

자세히 살펴보니, 그곳엔 명백하게 '인간형 데몬'이라고 적혀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인간에게 '데몬화'실험을 한 것이다.

"가설에 매몰되는 건 좋지 않아."

물론 이것은 단순히 '가정'이다.

어쩌면 위험한 발언이 될 수도 있다.

뭔가를 '안다'라는 것은 식견(識見)을 높이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모종의 적을 만들 수도 있다.

'정말로 인체 실험을 한 것이라면, 그 실험을 자행한 마법사가 존재한단 소리니까.'

"그러니, 매몰되지 않도록 내 두 눈으로 확인해 보는 수밖에."

아일린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위에 걸쳤다.

"어디 가십니까 아일린 님?"

"잠시, 볼일이 생겼어요. 오늘은 늦게 귀가할 것 같으니 먼저 퇴근들 하세요."

사용인들에게 당부해둔 뒤, 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데몬 출몰이 있었다고 하는 빈민가로.

***

아일린이 도착한 곳은 '데몬 출몰 사건'이 벌어졌다고 하는 빈민가의 구역이었다.

장소가 명확하게 표기되어있음에도 살짝 길을 헤맨 탓에 그녀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하아.... 왜 이리 증축을 엉망으로 해둔 거야!"

살짝 짜증이 난 어투로 중얼거린 뒤, 그녀는 시선을 올려 엉망이 된 집을 훑어보았다.

서류에 적혀있던 '데몬 출몰 사건'이 벌어진 장소.

제도에서 벌어졌다면, 후처리를 했겠으나 이곳은 아직도 사건이 벌어진 그대로다.

"...실례합니다."

문에 노크를 두어 번 한 뒤, 아일린은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찔러 불쾌함을 자아냈으나,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주 난장판이네...."

건물의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이 그녀를 반겼고, 그다음엔 기이할 정도로 커다란 손톱자국이 주변을 장식한 것처럼 벽면에 난무했다.

"이게 데몬의 흔적이야? 그다음엔...."

누군가가 했을지 한 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한 검로(劍路)가 그녀의 이목을 끌었다.

아마도 유리안이 휘두른 검격인 모양이다.

"당연하게도 데몬의 시체는 없네."

거뭇거뭇한 땅바닥을 손으로 한 번 훑은 아일린은 이곳에서 데몬이 죽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하긴, 끝난 일인데 인제 와서 얻을 게 있을 리가...."

말을 잇던 아일린은 거뭇한 땅바닥 주변으로 소름 끼치는 기운이 널리 퍼져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건....'

혼석이 확실하다.

여러 차례 연구를 진행하던 그녀였기에, 혼석이 품고 있는 모종의 기운을 명확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재빨리 '혼석'의 기척을 쫓기 시작했다.

'혼석'이 존재한다는 것은 최악의 경우, 삼각(三角) 데몬과 조우 할 수 있다는 소리이지만, 지금의 아일린은 자신이 있었다.

'전투용 메모라이즈와 보석들은 모두 챙겨왔으니까.'

만에 하나 일어날 최악의 사태도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는...."

'혼석'의 기척을 쫓던 그녀가 도착한 곳은 빈민가의 지하수로로 연결된 구멍이었다.

과거, 빈민가를 수용하려는 황실의 명에 따라 지어지던 인프라 중 하나지만, 아드라탄 황제의 변심으로 인해, 지금은 방치된 모양이다.

"그 방치된 세월을 생각하면, 더러워야 정상인데."

의외로 지하수로의 입구는 더럽지 않았다.

물론, 제도의 풍경과 비교한다면 더러운 편에 속하겠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빈민가를 뒤덮은 퀴퀴한 냄새가 이곳에선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빈민가'라는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자주 오간 듯 보인다.

무언가 결심한 아일린은 지하수로의 입구를 통해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처음 그녀를 반긴 것은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훼손된 황실의 인장이다.

복잡한 감정이 속에서 피었으나, 괘념치 않고 그녀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윽.'

이윽고, 혼석의 기척이 강해진다고 느껴졌을 때쯤 그녀의 눈앞엔 세 갈래 길이 나타났다.

마냥 혼석의 기척을 쫓기엔 주변에 팽배한 기운이 그녀의 감지를 막아섰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마법으로 길을 알아낼 수밖에."

혼잣말을 내뱉으며 그녀는 품속에서 보석이 달린 완드를 꺼내 들었다.

은은한 녹색이 감도는 보석은 아일린의 마나를 머금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그 후, 마법을 영창한 그녀는 왼쪽으로 뻗어진 길로 완드를 내밀었다.

"나오지, 그래?"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연 아일린.

지금까지 '혼석'의 기척을 쫓던 그녀는 문득 알아챌 수 있었다.

세 갈래 길의 왼편에서 '혼석'의 기운을 품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나오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될 거야. 이런 좁은 장소에서 사용하는 마법은 힘 조절이 어렵거든."

아일린의 말에는 강한 자신감과 함께 적의가 서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눈앞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빈민가에서 벌어진 '데몬 출현 사건'의 진의를 가지고 있는 자라 여겼기에.

"정확히 셋을 새겠어."

그리 말한 아일린의 완드엔 강렬한 마나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실력을 판별할 수 없는 상대라면, 도망치더라도 순식간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응?"

매복하던 자가 얼굴을 드러내자, 아일린의 감정이 요동쳤다.

모습을 드러낸 자는 이전에 자신의 저택에 찾아왔던 '검은 기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전설 속의 존재기 때문이다.

"죽기 싫으면, 마나를 거둬라."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어두운 목소리가 장엄히 울렸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아일린은 '검은 기사'의 말을 듣고 완드에 맺힌 마나를 서서히 풀기 시작했다.

팟──!

그 순간, '검은 기사'가 땅을 박차고 자신에게 뛰어들었다.

'어, 엄청 빨라!'

속으로 감탄을 하며, 아일린은 다시금 완드에 맺힌 마법을 발현했다.

정제된 마나가 완드에서 빠져나오자, 그것은 금속으로 이루어진 벽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이 완성되기 직전,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날아들어 아일린의 마법이 완성되는 것을 방해했다.

'뭐, 뭐야!? 검격을 날린 거야!?'

오러를 마법처럼 사용하는 기사는 들었지만, '검격' 그 자체를 마나에 실어 날리는 기사는 듣지 못했다.

그녀가 당황하는 사이, 좁혀드는 거리.

금속 벽은 허물어졌고, 검은 기사는 이미 자신에게 검을 휘둘러도 좋을 정도로 접근한 상태였다.

'으윽...!'

거리가 이리도 가까워졌다면, 마법사에게 승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음 마법을 위해 완드에 마나를 담기 시작했다.

휘이익──!

"케, 켁!"

검은 기사는 그런 아일린의 완드를 쳐내고, 목을 부여잡았다.

무지막지한 힘이 그녀를 덮쳤고, 균형을 유지할 수 없던 아일린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런....'

검의 도신이 목에 닿는 것을 느낀 아일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그녀의 전신을 뒤덮었으나, 눈동자엔 여전히 힘이 실려있었다.

"마법사치곤 꽤나 과격한 싸움법이로군."

검은 기사는 그런 아일린을 한 번 보더니, 고개를 내려 자신의 배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꺼내 들었는지, 마나를 머금은 보석과 그것을 쥔 아일린의 손이 검은 기사의 복부를 향하고 있었으니.

과연 바르고 등급 마법사다운 행동이었다.

 

 

 

 

 

 

 

 

113화. 지하수로(2)

'공명석'을 통해 '에이든의 연구실'이 위치한 장소를 찾아냈다는 혈귀단의 소식을 전해 들은 난 즉시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정리해둔 '데몬 연구'의 정수를 박살 내고, 없애둬야 이후 발발한 '이벤트'에 대한 위험을 미리 제거할 수 있으니 말이다.

'빈민가의 지하수로라....'

이름만 들어도 불결한 것들이 마구 떠오른다.

가뜩이나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유리안'의 몸은 격렬히 거부했고, 나 또한 그에 동조했다.

아니, 오염된 물과 냄새나고 지저분한 수로, 게다가 쥐들이 찍찍대는 곳이라면 누가라도 가기 싫을 것이다.

그럼에도 '피의 화요일'이라는, 제도가 쑥대밭이 되는 이벤트, 그 싹을 제거하기 위해 난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친 이는 너무나도 익숙한 이였다.

'...아일린?'

그녀가 왜 여기에 있지?

나름 머리를 굴려봐도, 잘 모르겠다.

게임 중 이런 상황은 없었으니.

그러다 이런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혹시, 에이든 드 도나시엥의 연구실을 지키기 위해서?'

상상하긴 했으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럴 가능성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아일린은 여타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올바른 도덕적 잣대를 지닌 편이니까.

심지어 방계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에이든이 아일린에게 중요한 연구실의 위치를 알려줬을 리도 없을 테고.

"나오지, 그래?"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도중, 아일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치챘나...?

"나오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될 거야. 이런 좁은 장소에서 사용하는 마법은 힘 조절이 어렵거든."

젠장! 걸렸네.

'어떻게 해야 할까나.'

아직은 어두운 곳에 있어, 정체를 들키진 않았지만, 이대로 나간다면, 아일린은 의아한 반응을 품을 것이다.

애초에 '유리안'이 이곳에 있다면 누구라도 의심을 하겠지.

에이든의 연구와 유리안이 연관 있다고.

'별수 없군.'

난 '솜브라'를 이용해 가면을 만들어 얼굴을 덮었다.

당분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가면이 완성되는 것을 느낀 난 밝은 곳으로 걸음을 옮겨 정체를 드러냈다.

방계이기는 하지만, 아일린도 도나시엥 가문의 핏줄이니 에이든과 손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 방해될 수 있으니, 미리 제압해두는 게 좋겠지.

***

라고 생각했지만, 배에 닿은 딱딱한 보석의 감촉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당해주진 않는군.'

도나시엥 가문의 주류 마법은 보석에 마나를 저장해둬, 추후 필요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즉, 내 배에 갖다 댄 보석에도 마나가 저장되어 있고 그것을 통해 언제든지 마법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소리이다.

'솜브라로 방어가 가능할 것 같지만, 위력이 어느 정도 될지 확신할 수 없으니.'

일단은 이야기를 통해서 상황을 바꿔봐야 할 것이다.

영 석연치 않지만 말이다.

'당신이 왜 이곳에 있죠?'

그런 생각으로 말을 꺼내려던 순간, 아일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연적색의 눈동자에 비친 '검은 기사'의 가면.

그것을 바라보는 아일린의 눈빛엔 동경이나 강직함이 아닌, 의문이 가득 담겨있었다.

'왜 이곳에 있냐고?'

나 또한 그녀의 물음으로부터 의문을 느꼈다.

이곳에 '에이든의 연구실'이 있다면, 그것은 제국이 제멋대로 휘두르는 규율에 어긋나 있다는 것쯤은 아일린도 알고 있을 것이다.

즉, 이곳에 그녀 자신 말고 다른 이가 있다면 연구실과 관계가 있거나, 그 시설을 박살 내기 위한 이가 방문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텐데.

'설마, 아일린은 에이든과 관계가 없나?'

같은 도나시엥 가문이라고 무조건 같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아일린은 마지막까지 검성의 편에 있는 정의로운 마법사 중 한 명.

아, 지금 신성국에서 이상한 짓을 하는 검성이 아닌 게임 속 검성이다.

게다가 그녀 또한 에이든이 표방하고 있는 '순혈주의'에 어긋나는 인물이니 말이다.

"혹시, 혼석의 기운을 쫓아온 것인가요?"

가정에 불과했던 잡념이 그녀의 물음으로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이거 놓으세요. 저도 혼석의 기운을 쫓아 이곳까지 온 것이니까요."

아일린은 조심스럽게 말한 후, 내 배에 갖다 댄 보석을 치워 품속에 집어넣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군."

너무나 무방비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난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혀를 찼다.

"예?"

"대답도 듣지 않고 무기를 치우다니. 설령, 들었더라도 내가 거짓말을 할 확률이 있을 텐데."

'검은 기사'의 가면을 착용할 때만큼은 특성이 적용되지 않아서인지 '존댓말'이 발동되지 않는다.

그 덕에 어이없는 감정을 적나라하게 토로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적이었더라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그랬더라면, 그런 말도 하지 않았겠죠."

아일린의 두 눈에 비친 '검은 기사'의 가면은 내가 보아도 실로 흉측하기만 하다.

이런 것을 보고도, 겁에 질리지 않는다니, 대담하기도 하지.

"게다가 당신은 제게 혼석을 제공해줬어요."

"...그랬지."

나도 검을 치운 뒤, 그녀에게 손을 뻗으니, 아일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혼석'의 기운도 황실과 연관이 있는 건가요?"

"아니."

그녀의 물음을 부정하자, 아일린은 잠시 상념에 잠긴다.

그런 그녀가 다시금 입을 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혼석'의 기운은 황실이 반길만한 일이 아니라는 소리겠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전에 당신이 자기 입으로 말했잖아요? '난 황실을 위해 일을 한다'."

한 적 있다. 이전에 혼석을 건넸을 때 농담처럼 건넨 말인데, 그걸 기억하고 있다고?

"그건 거짓말이다."

자신을 놀리는 듯한 내 태도에 아일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사실 저도 안 믿고 있었어요."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 치곤 당혹스러움이 엿보였다.

***

"그건 그렇고, 넌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상황을 정리하고, 지하수로의 안쪽으로 향하는 나를 뒤따라오는 아일린을 돌아보았다.

"아마 당신과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요?"

"황실의 명이라도 받았나?"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재차 입에 담으니, 아일린이 헛기침으로 주변을 환기시켰다.

"빈민가에서 일어난 데몬 출현 사건. 제 생각엔 그 사건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닌, 인위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래서, 그 '인위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러 왔다는 건가?"

"예, 명명백백하게 인체 실험을 했을 테니까요."

역시 5위계 '바르고' 등급의 마법사는 농담 따먹기로 얻은 계위가 아닌 모양이다.

그녀의 말대로 '에이든의 연구실'에선 인체 실험을 하고 있다. 인간형 데몬이 출현했다는 것은 그런 뜻이니까.

문제는, 이곳의 진실을 확인하고도 아일린이 이런 태도를 유지할지가 관건이다.

"만약, 그 실험을 하는 이가 너와 아는 사람이라면?"

"...아는 사람이라고요?"

그래, 바로 에이든 드 도나시엥이라고.

그녀가 모를 리 없는 이름이다.

"설령,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어떻게든 해야죠."

"마법사라면, 인의(人義)를 따지기 전에 탐구적 욕망을 해소하는 것이 덕이라고 가르칠 텐데?"

"전 마법사이기 전에 사람이니까요."

꽤나 듣기 좋은 말이다.

지금까지 본 녀석들 대부분은 '사람'이기 전에 '마법사'를 자처하던 녀석들이 많았으니.

"그런데, 아직 당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듣지 못했...."

"쉿."

===

⇒ 〈놀라운 직감〉

⇒ 〈간파〉

⇒ 당신을 관찰하는 부정적인 시선을 감지했습니다.

===

걸음을 멈추고,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가자 아일린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맞은 편 모퉁이에서 들개처럼 보이는 데몬의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데몬이 있는 걸 보니, 제 짐작이 어느 정도 맞았나 보네요."

그렇고말고.

나도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제가 처리할게요."

아까처럼 '월장검'을 '솜브라'를 덧씌워 정체를 숨기려던 찰나, 품속에서 완드와 보석을 꺼내든 아일린이 앞으로 나섰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낮게 우는 데몬들.

입에서 보랏빛 점액을 질질 흘리던 녀석들은 경계의 낌새도 없이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지저분하게 어딜."

촤라락──!

어두운 지하수로를 수놓는 보석들.

데몬들을 향해 아일린이 완드를 휘두르자 허공의 보석들이 몇 차례 점멸하기 시작했다.

"흩어져."

읊조리듯 아일린이 중얼거리자 허공의 보석들은 산산조각이 나더니 가루처럼 흩어졌다.

물론, 그것들은 단순한 가루가 아니었다.

가루 하나하나에는 아일린이 부여해둔 마나들이 있었고, 그것은 자그마한 칼날처럼 연단 되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달려오는 들개 데몬들. 녀석들은 자기 몸이 폭풍 속에 던지는 것도 모른 채 속도를 멈추지 않았고.

- 크르륵, 크륵!

- 켁, 케켕!

결국 다진 고기처럼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게 변해 버렸다.

'어마무시하군.'

아까 놔뒀으면 내 몸도 저런 꼴이 되었다는 것 아니냐?

그런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쳐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별 볼 일 없는 데몬들에게 시간을 뺏기고 싶진 않아요."

한 차례 마법을 사용한 뒤의 아일린은 어쩐지 의기양양한 태도가 되었다.

"어서 안쪽으로 가죠. 진위를 확인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그러지.... 음?"

아일린의 말대로 지하수로의 안쪽으로 향하려던 찰나, 품속에 넣어둔 공명석이 희미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결계로 사용하기엔 터무니없이 작지만, 데몬을 찾아내는 데 탁월한 효과를 가지고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지고 온 공명석이다.

'이게 빛난다는 건.'

주변에 데몬이 아직 있다는 것인데.

예상대로 천장에 있는 균열에서 마기와 함께 날카로운 살기가 감지되었다.

아까 아일린이 해치운 들개 데몬, 그것들과 똑같은 개체다.

'아일린은 눈치를 채지 못한 모양이군.'

아직 경험이 부족한 탓인지, 뒤처리가 미흡한 경향이 있는 듯하다.

검집에 손을 얹은 난, '맹인무사'와 겨뤘던 경험을 되살렸다.

사용자와 멀어져도 형태와 용도를 잃지 않는 오러.

무의식적으로 '맹인무사'가 활용하던 그 능력에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오러의 테두리에 또 다른 오러를 두르는 것.'

그것을 통해 허공에서 의미 없이 소모되는 마나를 최소화하고, 적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있는 '검기'를 다루는 것이다.

"흡."

한 차례, 집중하고 그것을 흩뿌리듯 균열에서 튀어나온 데몬에게 휘둘렀다.

캐캥──!

그러자 검기에 적중한 들개 데몬은 피를 흩뿌리더니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우와아악!"

자신의 바로 위에서 큼지막한 들개 데몬이 떨어지자, 자신감 넘치게 걸어가던 아일린의 입에서 둔탁한 비명이 들렸다.

"뭐, 뭐였죠!?"

"보면 모르나, 데몬이다."

의아해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검기에 맞은 데몬에게 다가가 상처를 훑어보았다.

페른에게 실험적으로 사용하던 '검기'보단 날카롭고, 살상력이 있었으나.

'두 동강을 내려던 시도는 실패했군.'

그래도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일필휘지'라는 경지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라, 데몬이 그곳에 숨어있는지 어떻게 알았냐는 거예요."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질문이었지만, 품속에 있는 '공명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아무리 작아도, 마탑에서 운용하는 '공명석'을 사용하고 있다면 추적을 당할 위험이 크다.

게다가 '검은 기사'가 유리안이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으니까.

"알 필요가 있나? 비밀이다."

말하기 힘든 것들은 비밀로 치부해두는 게 좋지.

그리 말한 난 다시금 연구실이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음?"

이상하다. 뒤를 돌아보니 아일린이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어졌나?"

혹여나 데몬들을 본 탓에 겁에 질렸나?

그럴 리 없을 텐데.

마법도 잘 전개했고, 5위계 바르고 등급 마법사면 이 정도 데몬은 쉬울 텐데 말이지.

내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 아일린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따라갈게요."

 

 

 

 

 

 

 

 

114화. 재확인

지하수로를 걸어가던 아일린은 어쩐지 데자뷔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

관리를 안 한 나머지 퀴퀴한 냄새가 나는 수로의 풍경을 보며, 느끼는 감정은 절대 아니다.

조금 전, '검은 기사'가 자신을 도와주며 내뱉은 말이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다.

'분명, 저택에서 마주친 게 처음일 테니 이런 기시감을 느낄 이유는 없을 텐데.'

저런 흉측한, 눈에 띄는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다. 쉽게 뇌리에 남는 인상이다 보니, 마주친 적이 있다면 확실하게 기억에 남을 터.

- '알 필요가 있나? 비밀이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느낌이 드는 것일까?

'비밀이다... 비밀이다....'

- '비밀입니다.'

'검은 기사'가 내뱉은 말을 곱씹던 그녀는 이전에 구교사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감정을 엿보기 힘든 실눈과 함께 늘 미소를 짓고 다니는 남자.

"그러고 보니, 그때도 지금과 상황이 비슷했... 나?"

조용히 중얼거리는 아일린.

생각해 보니, 그때의 상황도 지금과 비슷했던 것 같았다.

유리안이 구교사에 숨어든 작은 데몬을 발견하고, 그 방법을 '비밀'로 치부했던 것을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일린은 고개를 들어 앞장서서 걷던 '검은 기사'의 뒷모습을 쫓았다.

'체격은 비슷해.'

그것 외에도 비슷한 부분은 상당히 많았다.

일단, 검을 사용한다는 것.

그리고, 검술도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

'아니, 그걸 말고는 없네...?'

자세히 생각해 보니 큰 공통점은 찾을 수 없었다.

검을 잘 사용하고, 검술에 능하다고는 하지만, 사용하는 검도 다르지 않은가?

그림자처럼 새까맣고, '월광검'과는 달리 그 검에서는 질척거리는 느낌이 연신 들었다.

'게다가....'

'검은 기사'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풍(氣風) 또한 귀족의 그것처럼 고상했으나, 유리안과는 그 방향성이 달랐다.

게다가 유리안만의 독특한 그 말투와 행동.

'노력한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녀가 아는 '유리안'의 성격이라면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서슬 퍼런 칼날 위를 걸으면서도 미소를 잊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것보단 자존심에 익사하는 것을 택하는 남자니까.

"자꾸 늦는군. 따라오지 않는다면, 두고 가겠다."

이런 것들을 미루어 짐작해봤을 때, 분명 '검은 기사'는 '유리안'과 거리가 멀다는 것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머리가 아닌 가슴에선 여전히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검은 기사'는 유리안이 아닐까? 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 사람, 의심스럽다.

"죄송해요, 지금 갈게요."

***

주르륵, 뚝.

뺨을 타고, 흘러내린 땀 한 방울이 턱 끝에 맺히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코룬드는 자신이 얼마나 긴장했고, 위축이 되었는지 절절하게 실감했다.

'새, 생각지도 못했다.'

핀텔이 크라이파트 가문의 방계인 유리안의 수하였을 줄.

어떻게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핀텔은 자신과 같은 '순혈주의'에 뜻을 두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뿌리를 넓혀가던 마법사 중 하나'였'다.

그랬던 그가, 자신 권력의 방향성을 부정하고, '유리안'이라는 종양을 선택할 것이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코룬드 경, 잠시 도련님을 기다리시는 동안 마실 것이라도 내겠습니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코룬드는 흠칫했다.

그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단순히 사용인에 불과했으나, 최근 핀텔에게 당한 일 덕분에 그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정말로 유리안의 편이 아니라고 예상했던 비숍 핀텔이 사실은 그의 편을 들고 있었다는 것, 그 덕에 모든 이들에게 '혹시?'라는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그, 그래."

물론, 이런 사용인까지 유리안이 매수했을 리는 없다.

그가 아무리 간계에 능한 자라고 해도, 귀족도 아니고, 평민들까지 수족에 넣는 건 오히려 악수일 것이다.

"요슈아 도련님께서 곧 오실 겁니다. 기다리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사용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코룬드는 한숨을 깊게 내신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재 코룬드가 있는 곳은 '크라이파트 가문'의 저택.

그는 평소 제국의 사대 가문 중 하나, 크라이파트 가문의 막내인 요슈아에게 '마나 운용'을 가르쳐왔다.

비록 납치, 감금이라는 모종의 사태를 겪었음에도, 개인 교습의 시간만큼은 미룰 수 없었다.

제국의 사대 가문은 그만큼 위용이 있는 가문이라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크라이파트 가문의 본가라면, 유리안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녀석들일 터....'

가문의 멍울.

아픈 손가락이 아닌, 사라져야 할 손가락.

귀족 중 유리안이 크라이파트 가문에서 받는 대접을 모르는 이는 없다.

'이곳에서 유리안의 행태를 낱낱이 밝힌다면...?'

여명회의 비숍으로서가 아닌, 제국의 수많은 귀족 중 한 명으로서.

"코룬드 선생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념에 잠겼던 코룬드는 방 안에 들어오는 요슈아를 보자, 속으로 분을 삼키며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도련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코룬드 선생님, 그 얼굴의 상처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요슈아의 질문에 그는 상처 부위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유리안의 경고 또한 머릿속에 다시 각인되었다.

빙긋 웃으며 검집을 은근히 잡는,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두려움이란 감정이 그의 가슴에 다시금 스며 들어갔다.

유리안의 행태에 대해 폭로한다는 생각은 가슴 속의 응어리가 되어 파묻히기 시작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여명회'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굉장히 적다.

게다가, '유리안'은 자신의 명성에 먹칠하는 행위를 해도 그에겐 그다지 큰 손해가 되지 않는다.

이미 검게 물든 이름에 먹을 칠해도 무용지물일 테니.

"하하, 실험하다, 작은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요슈아 도련님이 걱정을 할 만한 일은 아니지요."

그 탓에 코룬드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런 코룬드를 지켜보던 요슈아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헤란드 형님께서 가문 회의에서 유리안을 지지할지 상상도 못 했어.'

가문 회의를 통해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요슈아는 피부를 통해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아버지이자 크라이파트 가문의 가주인 오벤도 유리안을 마냥 혐오하지 않는 눈치.

'차기 가주의 자리가 위험해지고 있다.'

그러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것쯤은 우매한 자들도 알 것이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불만을 말할 순 없다....'

가짜 데몬 뿔, 레플리카를 사용해 소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유리안이 함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목줄은 유리안이 쥐고 있는 상황.'

게다가 가문원들에게 마냥 '유리안'을 처리하자는 말도 꺼낼 수 없게 되었다.

그에게서 긍정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으니, 누가 '유리안'의 편에 섰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니 말이다.

'해결책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눈앞에 있다고 요슈아는 생각했다.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순혈주의'를 밀고 있으니.

뿌리를 짚고 올라가다 보면, 피의 순도는 '순혈'과는 거리가 멀 테지만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지위를 탄탄히 하기 위해, 일부러 꾸며대는 말이다.

'코룬드 선생, 댁도 순혈주의를 따르는 마법사 중 하나지.'

자신을 지지해주고, '유리안'을 규탄할 힘을 가진 존재들.

더러운 집안싸움에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은 달갑지 않았으나, 헤란드 형님의 행보가 이상한 지금 어떻게든 '가주'의 자리는 확보하고 싶은 요슈아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저는 또 최근 제도로 귀국한 '골칫덩어리'가 사고를 친 줄 알았습니다."

"골칫덩어리.... 말씀입니까?"

요슈아는 의문을 표하는 코룬드를 보며, 속으로 히죽 웃었다.

"예, 저희 가문의 종양인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녀석이 최근에 신성국에서 귀국하지 않았습니까?"

"하, 하하.... 설마요."

"마음 같아선, 가문을 위해서 정리하고 싶습니다."

은근슬쩍, 의중을 밝힌 요슈아.

"...그렇게까지 싫어하시다니. 유리안 경도 슬퍼할 겁니다."

"슬퍼해도 상관없습니다. 지금까지 그자가 행한 짓의 결과니."

성인이 아니라 사교회를 가질 기회가 적은 요슈아지만, 나름 머리가 잘 돌아가는 그였기에 '마법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대강 알고 있다.

귀족들과의 연.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돈.

마법의 연구에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간다. 그것도 일반적인 귀족 가문도 휘청거릴 정도로 많은 돈이 말이다.

"귀족 원로회의 의장이시자, 크라이파트 가문의 전 가주, 오른 경께서 슬슬 유리안이 날뛰는 걸 보고 싶지 않은 모양입니다."

요슈아는 떡밥을 던졌다.

오른 크라이파트.

'사대 가문' 중 하나인, 크라이파트 가문의 실질적인 주인이자 '귀족 원로회'를 주무르는 의장의 이름으로.

'아직 할아버지에게 뜻을 전하진 않았지만.'

오른이 어렴풋이 자신을 차기 가주의 자리에 놓고 싶다는 것은 요슈아도 알고 있다.

수도회에 들어간 큰 형.

망나니 둘째.

사대 가문 가주에 어울리지 않는 포부의 셋째.

그리고 방계이자 황실의 개노릇을 하는 유리안.

모두가 그의 눈에 차지 않았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찰나, 요슈아가 태어난 것이다.

오른은 요슈아가 어렸을 때부터 조기교육을 시켰다. 다른 핏줄처럼 엇나가지 않도록.

- '너야말로 크라이파트 가문을 이을 인재이다.'

이런 말을 늘 입버릇처럼 요슈아에게 주지시켰다. 인제 와서는 그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연지사.

하지만 최근 유리안의 입지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자신이 미루어 짐작했을 때.

'할아버지도 유리안을 정리하고 싶을 터.'

그런 이유로 요슈아는 코룬드에게 제안할 수 있던 것이다.

'오른 크라이파트와 교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줄 테니, '유리안'을 정리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라.'

분명 평범한 마법사 가문이라면 침을 흘릴 제안이다.

귀족 의회의 의장인 '오른 크라이파트'는 마탑에서도 힘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권력의 금자탑.

그와의 연을 발판으로 삼는다면 마법 연구에 소모되는 천문학적인 금액도 손쉽게 줄이는 것도 가능할 터.

'어떠냐, 마법사라면 거절할 수 없겠지?'

평범한 마법사 귀족이라면 군침이 흐를 제안에 요슈아는 콧대가 높아졌다.

하지만.

'이, 이놈이 미쳤나....'

그걸 듣던 코룬드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왜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지?'

오른 크라이파트와의 인연.

그것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코룬드도 알고 있다.

평소의 그였더라면 이 제안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유리안'같은 녀석을 처리하기 위해 손을 빌려줬을 터이다.

문제는.

'하필 이런 타이밍에...?'

또다시 온몸의 상처가 욱신거리기 시작했고, 동시에 '그날' 있었던 일이 뇌리에 맺히기 시작했다.

바로 광기가 들린 것처럼 눈을 치켜뜨고, 연신 지팡이를 휘두르던 핀텔의 모습.

'서, 설마 이것도....'

그렇지 않다면 이 타이밍에 이런 제안이 오지 않을 것이다.

코룬드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두려움을 무릅쓰고 입을 열었다.

"요, 요슈아 도련님. 오늘 있었던 일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예?"

"오늘 수업은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제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은지라...."

살짝 당황한 요슈아의 대답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재빨리 자신이 입고 온 코트와 가방을 정리한 뒤, 코룬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와중에도 지팡이로 두들겨 맞은 상처가 지끈거렸고, 그 탓에 코룬드는 서둘러 크라이파트 저택을 떠났다.

"이게 무슨...."

적막이 감도는 방 안에서 요슈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말실수라도 한 것일까? 아니, 곰곰이 생각해봐도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왜 코룬드는 겁에 질린 것처럼, 쫓기듯 방을 빠져나간 것일까?

요슈아로선 도무지 알 방도가 없었다.

 

 

 

 

 

 

 

 

115화. 공공연한 비밀(1)

어두운 지하수로의 안쪽으로 걸어갈수록, 기묘한 기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퀴퀴한 냄새는 점차 사라졌고, 오히려 청결해지는 것이,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고 있었다.

"확실히.... 누군가 손댄 거 같은, 인위적인 공간이네요."

"그 말은 곧, 얼마 지나지 않으면, 찾던 곳이 나온다는 소리겠지."

그렇게 말한 난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익숙하지 않은 지하수로의 풍경이 슬슬 정겹기 느껴지던 찰나.

"검은 기사, 당신은 누구죠?"

느닷없이 아일린이 질문해왔다.

"조금 전, 네가 말하지 않았나? '검은 기사'라고."

"그게 아니라..., 정체 말이에요."

뭐지? 갑자기 왜 물어보는 거지?

내가 뭐 실수한 게 있나?

"이런 흉측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릴 정도다. 게다가 그걸 묻는다고 순순히 말해 주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

나름 타당한 말을 내뱉었다고 생각했으나, 당사자는 그리 느끼지 않았던 모양이다.

"흉측한 것까지는 아닌 거 같은데...."

난 그녀의 작은 혼잣말을 무심코 듣고 말았다.

의외의 감상인데?

세간에선 계속 '끔찍'하다던가, '흉측'하다던가 라는 등의 원성 어린 소리만 들었는데.

백의점에서 코트를 골라줬을 땐 정상이라고 생각했건만, 모난 구석이 하나 있었군.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분명 제국 내에서 따로 신분을 가지고 있겠죠? 그것도 귀족에 상응하는 높은 신분을 말이죠."

"왜 그렇게 생각하지?"

"가지고 다니는 장비와 정보력. 이것들은 일반인들이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리 말한 아일린은 내 허리춤에 매고 있는 검집을 가리켰다.

"특히, 그 검은 어떤 광물로 만든 거죠?"

"평범한 검들과 비슷하다."

"거짓말, 지금까지 본 검들은 모두 일관성이 있었지만, 당신이 쓰는 검은 처음 보는 광물이에요. 그림자처럼 새까만 게... 마치, 생물 같았거든요."

생물 같다라..., 마법사라 그런지 꽤나 정확하군. 진짜로 생물 비스무리한 것이니까.

"그 광물을 사용한 덕에 검에 서린 오러를 날릴 수 있던 것이었죠?"

"...그래."

솔직히 관계없는 일이지만, 일단 그렇다고 해두자.

어차피 '솜브라'에 대해선 말해줘봤자 의구심만 들 뿐이니까.

"그런 광물을 확보하고, 또 검으로 가공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제국의 귀족 이상의 권력자란 소리예요."

"...추리력이 대단하군."

"어쩌면 제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소리기도 하죠."

모종의 의도가 느껴지는 말투.

그 탓에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릴 뻔했으나.

'떠보고 있는 건가?'

쓸데없는 짓을 하기는.

대답 대신, 침묵으로 일관하며 걸음을 재촉하자 뒤에선 종종걸음으로 따라붙는 소리와 함께 날 부르는 외침이 들려왔다.

열심히 따라와 보라고.

궁금한 건 내가 아니라 너니까.

***

'유리안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크라이파트 가문에서도 그를 암암리에 지원하고 있다.'

그런 오해를 하게 된 코룬드의 다음 행보는 정해져 있었다.

- '이날, 에이든과 약속을 잡으십쇼.'

'에이든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가 되어라.'

아마도, 유리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이런 말을 한 것이겠지.

처음에는 '에이든'과 '유리안'은 한통속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작스럽게 무투관에 등장한 유리안이, 코룬드의 눈에는 에이든과 작당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틀렸다.

'그곳에 유리안이 모습을 드러낸 건 나와 에이든의 협력을 막기 위해서....'

인제 와서 다시 에이든과 협상을 하기엔 이미 늦었다. 코룬드의 몸에는 이미 유리안이 새긴 상흔이 짙게 남겨진 상태였다.

'공포'라는 이름의 짙은 흉터가 말이다.

"에이든...."

자신의 그릇이 작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며, 코룬드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네가 다시 보자고 할 줄 몰랐군."

냉정하면서도 약간의 조소가 섞인 목소리.

어쩐지, 이렇게 다시 만날 걸 예상했다는 어투였다.

"내가 유리안과 손을 잡고, 너희 학파를 몰아낼 것이라며 노발대발하던 때가 그리 옛날 일은 아닐 텐데."

"...내가 오해를 했어. 네가 유리안과 손을 잡았다고 지레짐작을 해버린 게야."

"이제야 알았나? 내가 그 더러운 황실의 개와 손을 잡아서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그것도 그렇지...."

어처구니없어하는 에이든의 태도를 뒤로하며, 코룬드는 유리안이 했던 이야기를 곱씹었다.

- '그와 만난다면, 잠시 품속의 마도구들을 정지시켜달라 하십쇼.'

그것이 유리안의 유일한 요구였다.

에이든을 만나, 그가 지닌 마도구를 정지하라는 것.

"그럼, 타협점을 찾아가는 게 중요하겠군. 이렇게 다시 만났다는 건, 서로의 목적이 일치했다고 말해도 좋을 테니."

"유리안의... 타도 말이냐?"

"그래."

"그 전에 부탁이 하나 있다. 에이든."

코룬드는 조금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자신이 앞으로 할 말이 얼마나 얼토당토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에이든은 살짝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뭐지?"

"지금 지니고 있는 마도구들을 모두 꺼내서, 멈춰줬으면 한다."

"...뭐?"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에이든.

당연하다. '마도구'들은 마법사들이 자신의 몸을 지키는 수단이자, 최후의 보루이다.

그것들의 '정지'를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목을 내밀어달라는 것과 똑같은 소리.

"아직 무투관에서 있었던 사건 탓에 의심을 저버리지 못한 모양이군."

사실은 '유리안 타도'를 앞두고, 그 '유리안'의 명령으로 이런 말을 꺼낸 것이지만, 코룬드는 에이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협력의 방향성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모였지만, 계속 의심한다면 어쩔 수 없지. 마법사에게 마도구가 뭘 의미하는지, 자네가 모르진 않을 테니 말이야."

드르륵.

독백과 함께 에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이 협상은 없던 것으로 치부하려는 것처럼.

'아, 안 된다...!'

그런 에이든의 모습에 코룬드는 다급해졌다.

자신이 유리안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핀텔에게 두들겨 맞은 상처가 욱신거리기 시작하자, 정신이 든 코룬드는 에이든과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뭐 하는 것이냐."

후두두둑──!

코룬드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마도구와 완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 이야기하러 왔으니 의심의 여지는 없애는 것이 좋잖나."

"그게 마도구를 꺼내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무투관에서 있었던 일. 그때, 내게 '도청 마법'이 걸린 마도구를 심어뒀잖아!"

솔직히 그 도청 마법이 에이든이 걸었는지, 다른 이가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코룬드는 무조건 해야만 했으니.

자신의 목숨, 가문의 영광.

모든 게 걸려 있는 상황에, 점차 자신이 조급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탓에 목소리가 커졌고, 식은땀으로 등이 흠뻑 젖는 것이 느껴졌다.

게다가, 마땅치 않다는 에이든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불쾌함이 배가되고 있었다.

"...확실하게 해두지. 그때 생긴 불상사는 나와 전혀 관계가 없다."

그 사실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자네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니 나도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그리 말한 에이든은 코룬드와 마찬가지로 걸치고 있던 마도구들을 빼기 시작했다.

귀걸이와 반지.

목걸이와 귀금속들.

그런 것들을 올려둔 뒤, 다시금 에이든은 자리에 앉았다.

"됐나?"

그런 에이든의 모습에 코룬드는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치고 올라온 공포심을 삼켜냈다.

'이, 이제 됐나, 유리안? 난 할 만큼 했다고.'

***

"결계네요."

슬슬 연구실에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것을 증명하듯 나와 아일린의 앞에 마법으로 만든 결계가 눈에 들어왔다.

일반인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마법이었으나, '마나'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다면 무조건 알아챌 수밖에 없는 결계다.

"어떤 종류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건 사용자에게 모종의 신호가 가는 결계에요."

"해제하면 되는 것 아닌가?"

"당신이 제 저택에 들어왔을 때 기억나시죠? 해제한다고 해도, 당사자가 알아챌 수밖에 없는 구조에요."

그렇게 말한 아일린은 결계를 한 번 훑어보았다.

"이런 곳에 알람 마법까지 설치한 결계가 있다는 것은, 안에 뭔가 숨기고 싶은 게 있다는 뜻이겠죠."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던 아일린은 천천히 결계가 설치된 장소로 다가가던 나를 말린다.

"너무 다가가진 마세요. 알람을 보내는 건, 결계가 가진 능력 중 하나지, 그게 전부는 아닐 테니까요!"

나도 알고 있다.

눈으로 좇았을 뿐인데, 성가실 것이란 예상이 벌써부터 들기 시작했다.

'폭발과 함께 금속으로 이루어진 구슬들이 여럿 발사되는 형태.'

흔히 말하는 세열(細裂) 수류탄의 효과를 지닌 함정들이 보인다.

문제는 저것들을 '간파' 특성이나, '놀라운 직감'을 통해 제거한다 해도 에이든에게 알람이 간다는 것이다.

'결계가 있는 것을 보니, 코룬드는 내 부탁을 거절한 모양이군.'

어차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에이든이 이곳에 없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는 상황.

스르릉──!

난 검을 뽑아 들었다.

'월장석'으로 만든 검을 가리기 위해 '솜브라'를 칠하는 것도 있지 않았다.

"잠깐만요! 지금 결계를 베어버릴 생각이에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일린이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아무리 당신이 검술에 조예가 깊어도 그건 불가능해요!"

"물러서 있어라. 휘말리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여차하면 '솜브라'로 전신을 막을 생각을 하며, 검을 휘둘렀다.

츠츠츳──!

하지만 내 검은 '결계'가 아닌, '허공'을 갈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월장검이 닿기 직전 '결계'가 사라진 것이다.

'...코룬드가 내 '부탁'대로 따라줬나?'

그것 말고는 이 현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 결계는 원작에서 에이든이 지니고 있는 '마도구'가 몸에 떨어져 있어야만 해제되었으니 말이다.

'타이밍이 좋았군.'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

"마, 말도 안 돼."

뒤에서 아일린의 당황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계를 검으로 잘라내다니! 불가능한 일... 인데...."

나도 알아. 근데, 이건 우연의 일치야.

이 과정을 설명할 것을 생각하니 골머리가 아파진다.

근데 굳이? 할 필요가....

난 무턱대고 실험실에 발을 들였다.

"잠시만요! 어떻게 한 거죠!? 복합적으로 얽힌 결계를 발동시키지 않고, 해제할 수 있었던 건 역시 그 검 덕분인 거죠!?"

아니라니까, 그냥 우연이라고.

성가실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아일린의 호들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연구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되었으니까.

그것뿐만이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가, 이내 사색이 되고 말았다.

"배치 구도와 도구의 종류가 어쩐지, 낯이 익나?"

눈치를 챈 모양이다.

이곳이 에이든의..., 정확히는 자신이 속해있는 '도나시엥 학파'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이곳이... 저희 가문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말은 바로 해야지.

관계가 있는 수준이 아니라, 그 마법사들의 머리가 운용하고 있는 곳이지.

"아뇨,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네요. 혹시, 알고 계셨나요?"

"그래."

"...그럼, 누구인지 '특정' 하셨을 수도 있겠군요."

"에이든 드 도나시엥."

"...네?"

망설임 없이 즉각적으로 나오는 내 대답에 아일린은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그가 이 연구실의 주인이지."

말을 마친 난 조용히 아일린의 얼굴을 보며, 혹여나 일어날 사태를 대비했다.

자기 가문의 가주 후보를 옹호한다면 지금 이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판단을 내려야만 했으니까.

"아는 이름이 나와서, 이 상황을 조용히 묻어버리고 싶어졌나?"

"조용히.... 그럴 순 없겠죠."

무엇인가 결심한 눈치의 아일린.

언행을 보니, 그녀도 역시 귀족으로서 도나시엥 가문을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다.

"대대적으로 묻어야 해요!"

역시, 방계라 해도 핏줄은....

"아예, 이런 시설에서 불법적인 실험을 자행했다고 '감은 눈'에 고발해야죠!"

 

 

 

 

 

 

 

 

116화. 공공연한 비밀(2)

너무나도 지당한 말에 난 속으로 헛웃음을 머금었다.

"의외로군. 도나시엥 가문의 일원은 모두 마법을 위해서 도덕적 잣대를 버린 것으로 아는데."

"전 도나시엥 가문에서 마법을 배운 게 아니니까요."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말을 내뱉은 아일린.

그녀의 얼굴엔 복합적인 감정이 맺혀 있었다.

"아니, 에이든 님께서 조달해주신다던 실험체는 언제 도착하는 거야?"

그런 도중, 안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일린은 황급히 무릎을 꿇어 선반 뒤로 몸을 숨겼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안 숨어요!?"

인기척이 이쪽으로 향한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는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훗날 일어날 '피의 화요일'이란 이벤트를 막기 위해서다.

그것을 막기 위해선 '에이든의 연구 일지'와 그것들로 실험을 재개하는 '에이든의 제자들'.

즉,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도 제거해야 할 대상들.

"아우- 조금만 있으면 결과가 나올 것도 같은... 응?"

기지개를 피며 입구 쪽으로 나오던 마법사와 눈이 마주친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싶지만, 그럴 타이밍은 아닌 거 같고.

얼떨떨한 그의 시선은 나를 넘어 뒤로 향한다.

아마 결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겠지.

"결계가.... 컥!"

어이없다는 듯한 독백을 마치기 전, 땅을 박찬 내가 녀석을 발로 걷어찼다.

딱히 강하게 차진 않았지만,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거, 걸리면 안 되는 것 아니었나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결계를 제거한 이유가 들키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아일린은 헛기침을 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싹 다 정리하는 걸로 해야겠네요."

내 말을 대신해준 그녀를 뒤로하고, 난 날아간 마법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쿨럭, 쿨럭!"

기침을 토하던 마법사는 고개를 슬쩍 올리더니,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흉측한 가면을 쓴 남자.

비록, 맛이 간 내 미적 감각으론 괜찮았지만.

"히, 히이이이익!"

그걸 보는 저놈은 아닌 모양이다.

뚜렷하게 '공포'의 색을 띤 녀석. 그 탓에 괜스레 화가 살짝 치밀어 올랐다.

미친놈의 예술 병 같으니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난 뽑아 든 검을 마법사의 목에 겨누었다.

"이곳에서 진행한 연구의 기록들은 어디에 있지?"

"뭐, 뭐 하는 놈이냐, 넌!?"

알아서 뭐 하게?

그런 생각으로 검 손잡이에 힘을 주자, 마법사의 목을 타고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린다.

"끄으으윽...."

잔뜩 겁을 먹었음에도 마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외로 뚝심이 있는 녀석이군.

여기서 더 시간을 낭비해봤자, 별일이 없을 것이라 예상한 난 녀석의 목을 잡고, 연구실의 안으로 향했다.

'대화하는 낌새가 있었으니, 안에 누군가 있겠지.'

예상은 적중했다.

거대한 책장과 함께 입구보다 실험 기구들이 많아 보이는 방안엔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으, 으음?"

그중 한 명이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내 쪽을 쳐다본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먼저 쓰러진 녀석의 목에 칼을 겨누자 얼굴이 사색이 된다.

"어, 어떻게 여기를...!?"

"반응이 너무 일관되었군. 찾던 장소에 도착했다고 확신을 주지 않나, 마법조차 날리지 못하고 멍하니 당하기만 하고. 마법사들은 똑똑하다고 하던데, 아닌가 보군."

"에, 에밀을 놔줘!"

내가 붙잡고 있는 남자의 이름이 에밀인 모양이다. 그를 놓아주라며, 마법사 한 명이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마라."

그런 그들을 보며, 한마디 거들자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법사들은 물러섰다.

'아니, 누가 보면 내가 나쁜 놈인 줄 알겠네.'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 이 상황을 본다면 그렇게 보일 확률이 높다.

괴상한 가면을 낀 남자가 인질을 붙잡고,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상황으로 보일 게 아닌가?

"에이든의 연구 일지는 어디 있지?"

"...일지?"

"이곳에서 진행한 연구의 기록을 담은 서적 말이다."

그 말을 듣자, 대치하고 있던 마법사들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책장 한 켠으로 향했다.

'저곳인가 보군.'

난 인질을 부여잡은 채 책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 있는 에이든의 제자들은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손에 피를 묻히는 행위가 겁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거부감이 드는 건 사실이다.

아니, '거부감'이 든다고 '내'가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지금도 인질로 잡힌 마법사가 벌벌 떠는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게 와닿았으니 말이다.

'심경의 변화가 크군.'

내가 유리안에 동화되고 있는 것인지.

메소드 연기로 유리안에 적응한 건지.

그렇다면, 내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내 눈에는 철창 하나가 들어왔다.

세 개로 분리되어있는 철창.

그중 하나엔 뿔이 자라기 시작한 데몬이 축 늘어져 있었다.

'...후우.'

인간형 데몬.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이제 에밀을 놔줘!"

살짝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이런 녀석들을 정리하는 것에 '거부감'이 한순간이나마 들었다는 것이.

"커, 커어어억!"

"에, 에밀!!!"

검의 잡는 방법을 바꾼 난 그대로 붙잡고 있던 녀석의 목을 베었다.

과도한 선혈이 한바탕 포물선을 그려, 땅을 수놓자 그것을 본 동료 마법사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한 명은 절규와도 같은 목소리와 함께 눈물을 머금고, 영창을 했다.

나머지 한 명도 그 모습을 보더니, 따라서 마법을 영창하려 했으나.

"크으으윽!"

숨어 있던 아일린이 모습을 드러내며, 먼저 마법을 시전해 녀석을 제압했다.

"이 빌어먹을 새끼, 죽어!"

눈물을 머금었던 여자 마법사가 손을 뻗자, 그의 손에선 아일린이 사용했던 금속마법이 방출되었다.

하나, 그 위력은 편린이라는 말도 우스갯소리로 들릴 정도.

설령 어마무시한 위력이라고 했어도 궤적을 읽힌 순간 그 공격을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몸을 돌려 그것들을 피하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난 마찬가지로 여성 마법사의 목에 검을 가져갔다.

"끄르르륵...."

고통을 주는 것에 취미가 없던 지라, 오른팔에 힘을 줘 순식간에 검을 당겼다.

그러자,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피 분수가 치솟아 올랐고 거품을 문 마법사는 땅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 뒤, 난 아일린에게 다가갔다.

남은 에이든의 제자는 한 명.

아일린이 제압하기는 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는지 내게서 멀어지기 위해 엉덩이를 끌며 뒤로 물러섰다.

"사, 살려줘! 연구 일지가 있는 위치도 알려주지 않았나!"

"웃기지도 않는군."

시선을 감옥에 갇혀있는 인간형 데몬에게로 잠시 옮겼다.

"저들도 네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우, 우리는 실험을 한 거야! 어떠한 기술도 발전을 위해선 희생이 필요하지 않나!"

"그럼 이것도 기술 발전을 위한 일환으로 받아들여라."

스르륵──!

검 끝이 빛나자, 목숨을 구걸하던 마법사의 입은 더는 열리지 않았고, 이내 조용해졌다.

"...기분이 복잡하네요."

"뭐가 말이지?"

도와준 아일린이 입을 열자, 난 의문을 표했다.

"이 자들, 도나시엥 학파라서 몇 번 약간 일면식이 있는 사이에요."

"친했나?"

"친했으면, 저도 이 아래에 널브러져 있지 않았을까요? 이래 봐도 꼴에 도나시엥 학파에 속해 있어서."

맞는 말이군.

아무리 천대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가문은 '도나시앵'이었으니.

검에 묻은 피를 휘둘러 닦아낸 뒤, 난 철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간형 데몬은 죽은 것처럼 쓰러져 있었지만,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어요."

"그래서 끝을 내주려고 한다."

"...그렇다면, 제 손으로 끝낼게요."

인간형 데몬, 지금은 이 꼴이 되었지만, 이전에는 사람이었다.

마음이 부담이 클 것이다.

마치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같은 느낌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전 도나시엥 가문의 일원이고 학파에서 연구하던 몸이니까요."

참회하는 듯한 어투에 그녀는 천천히 완드를 꺼낸 뒤, 철창 안의 데몬에게 그것을 겨누었다.

***

마법사들은, 인의(人義)를 따지기 전에 탐구적 욕망을 해소하는 것이 덕이라고 배웠다.

잠깐의 도덕적 해이(解弛)가 가져올 이득은 양심의 손상보다 중요하다고 모두가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도나시엥 가문의 가르침.'

가문 내에서 마법에 대한 배움은 거의 없었으나, 고고한 그놈의 기지(氣志)는 귀에 피가 날 정도로 전해 들었던 그녀다.

'그게 이런 꼴을 가져온 거네요. 에이든 님.'

본래부터 '도나시엥 가문'이, 갖고 있는 귀족으로서의 기풍이 썩 마음에 들진 않던 그녀였다.

그런 아일린은 이번 일을 계기로 가문의 가르침이 '마음에 들지 않다'라는 단순한 말로 넘길 수준이 아니게 되었다.

"이것들을 처리해야겠군."

사념에 잠겨 있던 아일린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검은 기사.

흉측한, 동시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세련미가 느껴지는 가면을 착용한 남자다.

"이렇게나 많이 쌓아둔 자신의 실적이 사라지는 모습을 녀석이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에이든 님께 많이 맺히신 게 있나 보네요."

"많았지. 많아질 예정이기도 했었지만, 그걸 막은 것이기도 하고."

많아질 예정? 그게 뭘까.

그의 말에 살짝 의문이 들었으나, 큰 관심을 가지지 않기로 결심한 아일린이다.

어차피 가면으로 정체를 숨기는 사람이다 보니, 그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터.

"역시, 빈민가에서 일어난 데몬 출몰 사건과 연관성이 있는 장소인 것 같아요."

"음."

짧게 신음을 내뱉는 '검은 기사'의 뒷모습.

조금 전, 마법사들에게 검을 휘두르던 그의 모습에서 인간미가 느껴졌다.

어처구니가 없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도의에 어긋난 행동을 보고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단순히 기분 탓일 수 있지만.

"이걸 가져가 마탑에 제출해도, 에이든 님의 죄를 증명하기엔 힘들겠죠?"

그런 나를 뒤에서 보고 있던 아일린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힘들겠지. 그가 하던 실험이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을 테니 말이야."

"맞아요. 그러니, 없애는 게 최선이겠네요."

그리 말한 아일린이 품속에서 보석을 꺼내 책장으로 던졌다.

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나와 반응하던 보석은 이윽고, 불꽃을 일으켰고 책장과 함께 책들을 전소시키기 시작했다.

"탐나지는 않았나?"

"그다지요?"

타닥거리며, 불타기 시작한 책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잿더미가 되었다.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지식이..., 가문의 비원이 그렇게나 중요했던 것일까?

그런 의문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올랐지만, 저 꺼져가는 잔재들처럼 서서히 작아졌다.

"궁금한 모양이군."

의표를 찌르듯 '검은 기사'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네,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동감이다."

"동감이라니, 당신은 마법사가 아니잖아요?"

"그것도 맞는 말이군."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럼,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왜 이딴 일을 저질렀는지, 무슨 생각이었는지 말이야."

"네?"

살기가 자신의 피부를 찌르자, 아일린은 저도 모르게 연구실의 입구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서슬 퍼런 눈으로 당장으로 찢어 죽일 듯한 표정의 남자가 서 있었다.

에이든 드 도나시엥.

이곳 연구실의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제117화. 공공연한 비밀 (3)

에이든 드 도나시엥.

연구실의 입구에 나타난 그의 얼굴을 보자, 어처구니가 없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코룬드 놈,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거냐.'

결계는 해제되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에이든은 이곳에 있다니.

난 슬쩍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서슬 퍼런 살기와 함께 독기를 품은 녀석은 마치 날붙이를 연상케 했다.

이전에 눈을 베어냈을 때처럼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란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팽팽한 살기는 '유리안'에게 놀기 좋은 놀이터에 불과했고.

피부를 찌르는 독기는 이미 적응하다 못해 잠깐의 유희로 느껴질 정도였다.

문제는.

'여기서는 싫은데....'

장소.

이곳은 에이든이 연구실이다 보니,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 마법들이 잔뜩 설치되어있을 것이다.

===

⇒ 〈간파〉 공격 마법진을 발견했습니다.

⇒ 〈간파〉 방어 마법진을 발견....

⇒ 〈간파〉 함정 마법....

⇒ 〈간파〉 ....

===

이것 봐라.

에이든이 들어오니, 그와 연결된 마법진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젠장.

게다가 위험한 것들도 잔뜩 있었다. 직접적으로 이것들을 받아낸다면, 아무리 유리안의 몸이 튼튼하다고는 하지만, 성치 않을 터.

'...참 내.'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

'유리안'의 자아가 이곳에서 피하고, 도망치는 것에 대해 거부하고 있던 것.

전투에 대한 갈망과 자극을 유야무야 넘기지 못한 이 몸뚱어리는, 여러 차례 이어진 '에이든'의 도발을 간과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끝장을 내라.'

내 몸은 그리 설득당하고 있었다.

'머리보다 앞장서는 몸이라니.'

에고가 강하다는 게 이리 작용할 줄이야.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유리안'의 생각에 나도 공감했다. 이만하면 끝맺음을 지을 때가 된 것이다.

"책장에 설치해둔 알람이 작동했길래, 무슨 일인가 해서 달려왔더니...."

지팡이를 땅에 짚은 에이든은 한숨을 내쉬더니, 무뚝뚝한 얼굴이 되었지만, 알 수 있었다.

평온을 가장할 뿐, 속에선 엄청난 분노가 끓고 있다는 것을.

그 예로, 녀석의 머리 위로 '붉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 보였다.

"아일린."

탁──!

지팡이를 한 번 강하게 내려친 에이든은 나를 한 번 훑어보더니, 아일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빈민가의 데몬 출몰 현상. 그것을 조사하다 이곳의 위치를 알게 되었어요."

"마탑의 마법사가 왜 그런 짓을! 감은 눈이나, 기사들 같은 황실의 개들에게나 맡기면 되는 것 아니냐!"

일반인이 본다면, '검은 기사'가 왜 이곳에 있는지가 제일 궁금하겠지만, 에이든은 일부러 날 화두에서 제외하려는 듯했다.

'당연한... 건가?'

'검은 기사'가 부패한 귀족들을 단죄하며, 신민들의 안전을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검은 기사'는 '여명회'를 견제하는 행동을 해왔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것을 에이든이 모를 리 없을 거고.

그런 이유로 에이든 '검은 기사'와 말을 섞지 않으려는 것이다.

괜한 말실수로, 아직은 수면 위로 올라와서는 안 될 여명회가 드러나면 안 되니.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은 마법사의 본분이라고 가주님께서 늘 하시던 말이죠."

"도가 지나친 탐구는 화를 부르는 법이라고도, 가주가 덧붙인 적이 있지."

"그 말은 가주님에게 돌려주고 싶네요."

아일린이 한 발 나서 에이든의 말을 끊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안에서 데몬화의 실험을 주도하던 것은 에이든님이시죠?"

그녀의 얼굴은 혐오감이 서려 있었다.

"비인륜적인 실험을 자행하신 것이라면…."

"그런 도덕적인 잣대로 마법을 지향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나!"

탁!

노기 가득한 표정을 지은 에이든은 지팡이로 다시 한번 땅을 내리쳤다.

"무단으로 내 연구실에 들어온 것은 없던 일로 해주겠다. 그러니, 이쪽으로 오너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 녀석은 아일린에게 손짓을 했다.

근엄한 에이든의 목소리에 평소의 아일린이라면 주눅이 들 뻔도 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그의 말을 거절했다.

"오늘 제가 보았던 일은, 없던 일이 되어선 안 됩니다."

당당한 아일린의 태도에 에이든은 혀를 한 번 찬다.

"가문의 사명도 제대로 지키지 않으니, 이래서 반쪽짜리는 그냥 놔두는 게 아니었어."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에이든은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금(金) 원소를 다루는 마법사답게 날카로운 금속들이 사방팔방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사사삭. 사삭.

그것들을 피하거나, 튕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죽하면 에이든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아일린도 마법으로 자신을 보호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노림수가 따로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보다 먼저 몸은 땅을 박차고 에이든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바르고' 등급의 마법사를 상대하는 것 치고는 너무나도 쉬운 전개.

비장의 패라도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잠시.

내 몸을 지배하는 유리안의 본능은 이 악연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거기, 위험해요!"

그때 뒤에서 들려온 아일린의 다급한 목소리가 내 정신을 바로 잡았다.

'여기였나?'

내 발 바로 아래 있는, 돌 밑에서 은은한 빛을 뽐내는 마법진이 눈에 들어왔다.

'함정인가?'

그것을 밟기 전에 난 황급히 뒤로 물러서자, 폭발과 함께 파편화된 금속들이 활화산처럼 치솟아 올랐다.

'위험했군.'

함정이 발동된 자리를 한 번 쳐다본 난 다시금 에이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일린이 경고하기 전에 '간파'로 알아내긴 했으나, 너무 많이 퍼져있기에, 일일이 찾기 힘든 마법진들이다.

폼새를 보아하니, 녀석은 쉬지 않고, 마법들을 영창할 것으로 보인다.

그게 마법사가 기사를 상대로 하는 일이니.

접근만 한다면 쉽게 이길 수 있겠으나, 마법사가 접근을 허용하는 것은 멍청한 만용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날을 위해 준비한 것이 있지!

일필휘지

온 신경을 검 끝에 집중한 뒤,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월장검'을 내질렀다.

마나혈을 통해 변환된 오러.

그것들이 물리적인 힘을 갖추고 허공을 날아가자, 에이든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거리 정도는 안전하다고 생각했겠지.'

'검기'가 에이든의 팔에 적중하자.

"크아아아악!"

신랄한 비명과 함께 들고 있던 지팡이를 놓친 에이든.

녀석은 땅을 몇 번 구르더니, 황급하게 떨어뜨린 지팡이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잠시, 내가 달려드는 모습을 본 녀석은 지팡이도 내버려 두고 사색이 된 얼굴로 지하수로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간다고?'

꼴에 귀족이라고.

'난 도나시엥 가문의 가주 후보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쯧.

그런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녀석이 꽁무니를 빼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자니,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이대로... 놓아줘도 상관없... 겠지?

'아니!'

그런 나약한 생각이 피어오르자, 검을 붙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두 다리는 이미 에이든이 도망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지금 끝내야 해.'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여기는 놈을 단죄한다. 그런 정의감 넘치는 이유가 아닌, 내 안위를 위해서였지만.

기회가 생겼으니 잡아야겠지.

***

지하수로의 지리를 모두 파악하고 있는 에이든은 이곳에 무엇이 위치했고, 마법이 존재하며, 함정을 설치했는지 모조리 기억하고 있다.

꼴사납게 도망치는 것도 그것을 활용하기 위한 과정....

'빌어먹을, 빌어먹을!'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지팡이를 놓친 것도, 허공을 가르고 날아온 '오러'에 팔을 베인 것도.

모두 실력이 부족해서 당한 것이다.

'검은 기사가 왜 이곳에....'

흐르는 통증을 참으며 에이든은 어두운 길을 나아갔다.

'아일린, 그년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불법적인 일을 자행했다는 것을 황실이 알아채려면 '검은 기사'와 '아일린'이 살아남아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터.

혹여나 아일린이 이곳을 벗어나 오늘 있었던 일을 고발하더라도.

'내 권력이면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

문제는 검은 기사.

'녀석은 무조건 이곳에서 죽여야 한다.'

연구 일지를 잃어버린 것은 뼈아픈 일이다.

그것들을 운용하던 제자들을 잃은 것도.

그렇지만 자신만 살아남는다면! 이 역경만 넘는다면!

어떻게든 재기할 수 있을 것이라 에이든은 생각했다.

그리고.

왜 핀텔이. 왜 제라르가.

'검은 기사'라는 이름에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에이든은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오늘에야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질척거리는 모종의 감정을 느꼈다.

세간에선 이것을 '공포'라고 말하겠지.

'이상할 정도로, 나에 대한 강한 집착을 느꼈다. 놈은 분명 끝까지 따라올 거야.'

수많은 일을 벌인 에이든은 그와의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에게 굉장한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휘이잉.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에이든은 달리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지하수로의 끝, 댐으로 이어진 낭떠러지.

본래라면 비나 강물을 모아뒀어야 할 장소였지만, 사용하지 않는 지하수로는 늘 열려있는 상태.

그렇기에, 어떠한 물도 담겨있지 않은 마치 절벽과도 같은 장소다.

'떨어지면 죽는다.'라고 확신하던 순간.

뒤에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다른 길이로군."

고개를 돌려 다시금 그의 얼굴을 보니, 에이든은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저게 어떻게.... 설화에서나 전해지던 영웅의 모습이겠나.'

차라리 목숨을 앗아가는 사신에 어울린다고 에이든은 생각했다.

"높이가 어마무시해 보이는군. 떨어져도 살 수 있나? 그게 아니라면 이곳까지 도망친 이유를 알 수 없군."

"닥쳐... 라!"

에이든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며, 불쾌함을 자아냈다.

"네놈, 대체 목적이 뭐냐...!?"

"...세계 평화다."

세계 평화?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에이든은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었으나, 그것보다 '검은 기사'가 서 있는 곳에 시선을 던졌다.

'조금 더 가까워져야 한다.'

주먹을 꽉 쥐며, 에이든은 '검은 기사'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

"내게 원한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게 아니면, '여명회'에 울분을 푸는 것이냐!"

악에 받쳐 소리치는 에이든에게 '검은 기사'는 다가갔다.

'오러'를 마법처럼 쏘아내던 새까만 검을 쥔 채, 천천히.

"후자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여명회'의 정보와 현재 '여명회'를 관리하는 아크 비숍의...."

"현재 '여명회'를 관리하는 건, 아크 비숍이 아닌 총대주교일 텐데 말이지."

말을 잇던 에이든은 움찔했다.

"어, 어떻게...."

"알 방법은 어디에든 있지."

다시금 '검은 기사'가 다가오자, 에이든은 그와의 거리를 재기 시작했다.

한 발, 두 발. 마지막 세 번째 발걸음.

그가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에이든은 천장에 설치해둔 '보석 마법'을 발동해 폭파시켰다.

쾅──!

굉음과 함께 돌 파편이 사방에 튀었고,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죽었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해보지만.

"쓸데없는 짓을...."

먼지 속에서 '검은 기사'의 독백이 들렸다.

에이든도 알고 있다. 이 정도 작은 폭발로 죽을 놈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애를 먹진 않았을 것이라고.

"...큭!"

하지만 에이든의 노림수는 그다음에 있었다.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선 무엇인가가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철퍽──!

흙먼지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것은 '데몬 실험'을 하며 생긴 잔재물이다.

훗날 한 번에 처리하기 위해 모아둔 실험의 폐기물.

독성이 강하고 마기가 가득하여 누군가 죽이기엔 알맞았다.

"크아아아아악!"

단말마와도 같은 비명이 먼지 속에서 들려오자, 에이든은 광소를 터트렸다.

"크, 크하하하핫! 멍청한... 콜록, 콜록!"

치이익──!

천장에서 쏟아진 '점액질'이 낭떠러지 쪽으로 흘러내리자, 지독한 '마기'가 증기처럼 피어올랐다.

이 정도로 독한 마신의 '잔재 사념'이라면 '데몬'과 무관한 일반인은 온몸의 마나혈이 뒤틀리고 오염된다.

운이 좋다면 '데몬화'를 통해 '데몬'이 되겠으나, 그것은 곧 자아의 상실, 생물학적인 죽음을 의미할 터.

"빌어먹을 새끼, 기껏 모아둔 걸 쓰게 만드는군."

긴장이 풀리자, 에이든은 욕지거리를 입에 담았다.

평소엔 이런 욕지거리를 품는 자들을 천박하다며 질타하던 그였으나 이번만큼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다음은 아일린이다. 그 우둔한 년, 무엇보다 가문의 비원을 우선시하라... 고...."

말을 잇던 에이든은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천장에서 흘러내리는 점액질은 여전히 지독한 '마기'를 뽐내며, 존재감을 여실히 뽐내고 있었다.

'뭐지? 뭐가 잘못....'

그때, 점액질 가득한 곳에서 검은 인영이 튀어나왔다.

"허어어억...!"

순간 에이든은 숨이 멎을 뻔했다.

'검은 기사'의 신체는 '잔재 사념'을 뒤집어쓴 것 치곤 멀쩡했으나, 흉측한 그의 가면엔 강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오늘 아끼던 코트를 입고 오지 않은 것에 감사해라."

"어, 어떻게 멀쩡한 것이냐!!!"

벽력과도 같은 목소리로 에이든은 소리쳤다.

마신의 '잔재 사념'은 모든 생물을 오염시키며, 그것을 통해 자아가 없는 마신의 수족, '데몬'으로 변환시킨다.

"그 많은 점액질을 뒤집어썼는데, 어떻게... 자아를... 멀쩡할 수 있지!?"

"글쎄."

이 현상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완전히 뒤집는 일이다.

에이든은 자신이 쌓은 데이터가 부정당했단 사실에 격노했지만.

저벅저벅.

동시에 천천히 다가오는 '검은 기사'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상반된 감정은 충돌을 일으켰고, 두 다리는 도망쳐야 할지 맞서 싸워야 할지 방황했다.

"어쩌면, 이 망할 몸뚱어리엔 '자아'라 부를 만한 게 없어서 그럴 수 있지."

에이든은 충혈된 눈으로 '검은 기사'를 바라보았다.

빠지직──!

그러던 도중, 균열이 생긴 '검은 기사'의 가면이 점차 부서지기 시작하더니.

"이제 와선 '나'라는 사람도 누굴 지칭하는지 헷갈리는 수준이야."

안에선 얼굴이 드러났다.

"너, 너는...."

"그것과는 별개로 지금의 선택은 어느 쪽도 큰 불만이 없는 것 같아 다행이군. 제일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저의 정신건강이니까요. 에이든 경."

익숙하고, 가증스러운 실눈의 남자.

그 윤곽이 정확히 드러난 순간.

툭.

에이든은 '검은 기사'의 손에 밀쳐져 높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제라르의 말을 안 믿은 자신을 원망하며.

 

 

 

 

 

 

 

 

제118화. 인간미(1)

높은 낭떠러지의 아래, 검은 공간만이 가득한 그곳을 내려다보자, 등 뒤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산다면, 그놈이 태양신 솔라룬이고, 마신 바르바토스겠지.

"후우...."

절벽에서부터 한발 뒤로 물러선 난 내가 방금까지 있었던, 땅에 흘러내리는 점액질을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쉬지 않고 실험을 했나 보구만. 이렇게까지 '잔재 사념'을 많이 모아둘 정도였으면 말이야.

'옷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형광색이나, 핑크색 같은 괴랄한 감성의 옷은 아니었으나 나름 '상식'의 선을 지킨 듯한 코트.

그 덕에 '마음에 든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 답네'의 수준이었던 옷은 '잔재 사념'으로 인해 여기저기 손상된 상태였다.

'아끼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명품 중의 명품이었는데, 짜증 나는군.'

자신의 취향과는 관계없이 '명품'이라는 딱지만 붙으면 좋아죽는 놈의 패션 감각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잔재 사념을 뒤집어썼는데도 난 왜 멀쩡한 거지?'

에이든의 마지막 수는 나도 깜짝 놀랄 비장의 수였다.

'사념'에 맺힌 원념과 독성은 아주 독하다.

그것에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일반인은 마나혈과 함께 온몸이 뒤틀려버리고, 내부에서부터 오염되어, '데몬화'는 물론, 더 나아가 이성을 잃은 '데몬'으로 만들어버릴 정도이니.

시야 한구석에 확인하지 못한 시스템 메시지가 떠 있었다.

===

⇒ 〈마왕의 그릇〉 특성이 오염으로부터 보호했습니다.

===

이것 덕분이었나.

글귀를 한 차례 읽은 난 이 몸이 왜 멀쩡한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하게 알았다면 '자아'라는 둥,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철학의 '철'자도 모르는 놈이 헛소리한 셈이 아닌가.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긴장의 끈을 늦추면 안 되겠군요...? 음?"

'군요, …군요, ...군요.'

존댓말이 내 머리에 메아리쳤다.

왜 저절로 존댓말이 튀어나오는 거지?

'검은 기사'라는 캐릭터성이 '존댓말'보다 먼저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나?

"으, 으음...."

신음을 내뱉으며 머리를 부여잡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면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그 너머로 피부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 녀석, 왜 이러는 겁니까?"

'솜브라'로 만든 가면은 예전처럼 강한 경도를 유지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정도로, '진흙'에 가까운 형상으로 이미 떨어지기 시작한 몇몇 '솜브라'들은 내 그림자에 흡수되는 중이다.

===

⇒ 〈솜브라〉가 마기로부터 몸을 보호했습니다.

⇒ 〈솜브라〉가 재구성 중입니다.

===

자세히 보니, '솜브라'도 '잔재 사념'으로부터의 피해를 막기 위해 피부 위에 얕은 막을 전개한 상태였다.

그래도 이상한데.

아무리 〈마왕의 그릇〉이라는 악당의 숙명을 지고 있어도, '잔재 사념'의 물리적인 손상까진 막을 수 없었을 터인데.

'이놈, 진짜 살아있는 게 분명하다니까.'

신성국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뒤, 부쩍 든 생각이다.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이런 짓을 하다니.

아무래도, 나를 지키기 위해 독단적으로 행동한 모양이다.

정확히는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는 이기심이로구만.'

약화된 '솜브라'는 시간이 지난다면 치유가 되겠지만,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

빠르게 원상태로 복구할 방법은.

'알고는 있지.'

데몬이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 중 하나, 바로 '동족 포식'이다.

그런데 아무리 미친놈이라고 해도, 데몬을 먹는 사람이 있을까?

'북부의 야만인'들을 제외한다면, 그런 일 없겠지. 아마도.

'우웩.'

점액질의 몸을 입에 갖다 댄다고 생각하니, 벌써 구역질이 났다. '유리안'도 그것만큼은 싫은지 닭살도 살짝 돋았다.

'혼석을 이용해 천천히 치유해보는 수밖에.'

'동족 포식'만큼 획기적으로 복구되지는 않겠지만, 그 시간은 줄여줄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여분의 혼석을 가지고 있었다. 신성국에서 얻어온 녀석이 말이다.

일단, 상황이 정리되었으니 저택으로 돌아가 정비를 해볼까? 추후 일어날 일을 생각하며 대비도 해야 하고....

"거, 검은 기사?"

잠깐 머리를 정리하던 도중, 아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렇지도 않듯, 당연하게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아차!'

'잔재 사념'에 의해 가면이 망가진 상태.

아무 생각 없이 고개 돌려, 말하려고 했던 내 몸을 정지시킨다.

얼굴이 드러난 상태이고, 무슨 말만 하면 〈존댓말〉이 튀어나올 게 분명하니.

"으윽...."

그때 뒤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바닥에서 흐르는 '잔재 사념'을 발견한 모양이다.

"에이든님은 어디에 계시죠?"

한참을 싸우던 이가 사라졌으니, 당연한 질문이려나?

'잔재 사념'과 솜브라가 만나 일어난 뿌연 연기 덕에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 아일린은 계속 질문해왔다.

대답해주고 싶지만.

'아....'

그놈의 〈존댓말〉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은 난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냐.

말도 못 해, 얼굴도 못 돌려.

답답한 상황에서 난 만국 공통어인 바디랭귀지를 사용했다.

스윽.

손으로 낭떠러지 쪽을 가리킨 것이다.

"...그렇군요."

간단한 바디랭귀지였지만, 알아들었는지 뒤에선 씁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얼굴에선 '솜브라'로 만든 가면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철퍽.

땅에 점액질의 '솜브라'가 닿자, 지하수로에 소리가 울렸다.

"피...? 다치신 건가요!?"

야,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성큼 다가오는 그녀를 막기 위해 돌아보지 않은 채, 검을 들어 그녀에게 겨누었다.

"다친 것이라면, 치료해야 해요! 여기엔 마기가 넘실거리고 있다구요!"

마기가 상처에 스며들어, 더 위험할 수 있다고 말을 내뱉고 있지만.

'아냐. 마기보다 네가 더 위험해.'

앞에는 낭떠러지. 뒤는 아일린.

정체를 들키면 안 되는 상황.

젠장! 사면초가네.

"어서 나와요! 사념의 양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그녀의 말대로 천장에 생긴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사념의 양이 많아지고 있다.

"이해할 수 없네. 진짜! 그냥 제가 갈게요!"

아니, 오지 말라고!

너무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입을 열자.

"필요 없습... 습...."

존댓말이 나오려 한다.

"윽!"

어떻게든 들키지 않도록 움직이려는 혀를 깨물어 막았다.

말은 막았지만, '월장검'을 가리기 위해 둘러둔 '솜브라'도 형태가 무뎌지기 시작했다.

제발.... 너 나한테 왜 그러냐.

휘황찬란한 보석검도 숨기기 위해, 서둘러 검집에 집어넣은 난 낭떠러지 쪽으로 한 발 나아갔다.

'여기가 댐으로 이어진 수로라면, 아래에도 통로가....'

있다!

"잠깐, 지금 무슨...!"

낭떠러지의 아래로 뛰어내릴 준비를 하자, 아일린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미친놈처럼 보이겠지. 당사자인 나도 어이가 없는데.

급하게 '월장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난 아래로 뛰어내렸다.

바로 아래, 다른 수로로 이어지는 구멍의 끝자락을 손으로 붙잡은 뒤, 도망치듯 안쪽으로 향했다.

***

"윽...!"

'검은 기사'가 떨어진 낭떠러지로 다가가려던 아일린은 지독한 마기에 호흡기를 가리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죽으려고 뛰어내린 것은 아닐 것이다. 무슨 방법이 있기에 그런 판단을 한 것이겠지.

그런데 왜?

조금 전, 땅에 질퍽이며 떨어진 액체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피로 짐작했다.

"상처도 깊어 보였는데, 굳이 도망친 이유가...."

모르겠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말을 섞는 것을 피하지 않았으면서.

"설마, 다쳐서 도망친 거야?"

얼굴을 가면으로 숨기고 다닐 정도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던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불신하는 사람일 것이고,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약해진 틈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을 절대적으로 피하려 한다.

"고집불통이네. 진짜."

지하수로에서 조우했을 때, 자신에게 검이 겨누어진 상태에서도, 마법을 거둘 정도로 신용을 주었는데.

정작 자신은 어떠한 신뢰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 괜스레 기분이 나빠진 아일린이다.

어찌 되었든, 남이니까.

그런 생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지우며 사념이 흘러내리던 낭떠러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에이든 님."

가까이 다가갈 순 없으나, 엄청난 높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비록 '검은 기사'도 뛰어내리긴 했으나, 그 남자라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에이든'의 경우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허약한 마법사의 육체로 이 깊은 곳에서 살아남기란 힘들 것이다.

아마도.

***

저택에 도착해 뜨거운 물로 몸을 씻고, 적당한 옷으로 갈아입자 손님이 도착했다며 사용인이 전해왔다.

문이 열리자, 익숙한 얼굴이 들어온다.

코룬드?

"죄, 죄송합니다. 유리안 경!"

다짜고짜 녀석은 고개를 처박고 사과를 입에 담았다.

"에이든이 도중에 돌아가는 바람에 마도구를 모두 해제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한숨이 나오긴 했지만, 솔직해서 좋긴 하네.

그만큼 '유리안'이 무서웠던 거겠지.

"괜찮습니다. 어차피 생각해둔 일은 대강 '정리'되었으니 말입니다."

"정리... 말입니까?"

"궁금하십니까? 알려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정리'라는 말에 코룬드의 머리 위엔 '공포'의 색이 짙게 퍼졌다.

"아, 아닙니다!"

"고개를 드십쇼 코룬드. 당신도 나름 '노력'해주지 않았습니까?"

내 말에 코룬드는 땅에 처박았던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노, 노력.... 그렇다면 저는 살려주시는 겁니까?"

살려주고 자시고.

애초에 코룬드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겁을. 아, 핀텔....

"핀텔 경께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괜찮습니다. 저희는 같은 비숍이잖습니까?"

"가, 감사합니다...!"

사실 이대로 겁에 질린 그를 방치하여 아무것도 못 하게 놔두는 것이 베스트이긴 하나, 조금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처음 봤을 땐, 분명 살이 뒤룩뒤룩 쪘었는데.'

그동안 신경쇠약으로 식음을 전폐하기라도 했는지, 약간은 홀쭉해진 느낌이 들었다.

공포 다이어트라..., 꽤 효과적인데?

"수고하셨습니다. 코룬드 경, 그럼 이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이 뒤에 개인적인 용무가 있던지라."

"알겠습니다!"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인 코룬드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돌아갔다.

근래 비숍들이 저택에 방문하는 일이 많은 것 같다.

누가 보면, 내가 '총대주교'인 줄 알겠어.

'...한번 해볼까?'

***

코룬드가 돌아간 뒤, 집사에게 부탁해 집무실에 아무도 들이지 말고 손님도 들이지 말라 당부했다.

그 후, 서랍에 넣어둔 작은 보석함을 꺼냈다.

안에 든 것은 혼석.

신성국에서 날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삼각(三角) 데몬, 이델의 것이다.

'솜브라에게 먹이면 어느 정도 회복이 되겠지.'

두려울 정도로 검붉은색을 띠는 혼석은 지하수로에서 '잔재 사념'을 뒤집어썼던 기억 때문인지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

안에 담긴 마신의 힘, 그것에 대한 거부감이 아닌, 생리적인 거부감이다.

무려! 옷을 태웠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줘야 합니까?"

밥그릇에 혼석을 올려두고, 솜브라에게 먹으라고 시켜야 하나?

나름 생명체라고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그건 너무 애완동물 같잖아.

반려 데몬도 아니고 말이야.

"...먹으십쇼."

혼석을 손에 올려둔 난 이전에 '솜브라'를 흡수하던 기억을 되살려 혼석을 흡수하도록 유도했다.

그때, 죽어있는 것처럼 잠잠했던 '솜브라'가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역시 데몬, 먹을 게 있으니 죽기 살기로 움직이는구만.

스르르.

혼석 주위를 맴돌던 '솜브라'는 뭔가 확인하는 듯 그것을 찔러보더니 행동을 멈추고 다시금 내 몸속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뭔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뭐야. 설마....

"지금 편식하는 겁니까?"

 

 

 

 

 

 

 

 

제119화. 인간미(2)

사전 지식이 많을 뿐, 경험까지 많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적응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데몬'이 편식을 한다는 생각이 들자,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떨떠름한 웃음까지 나왔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너무나도 인간다운 모습에 난 '솜브라'를 하나의 인격체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질척거리며, 다시 몸 밖으로 나온 녀석은 '이델'의 혼석에게 다시 다가간다.

억지로 먹어 보려는 모습이 가상하....

툭. 뎅구르르.

솜브라에게서 튀어나온 혼석이 집무실 구석에 처박혔다.

마치 '퉤'하고 내뱉는 듯한 모습이 보인 건 내 착각일까.

"...어처구니가 없군요."

여전히 형태를 유지 못 하는 솜브라.

'이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짓이야'라는 말이 턱 밑까지 치고 올라왔으나, 내가 이놈의 부모도 아니고 관두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솜브라'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듯싶었다.

녀석은 내 무기이자, 방패이고, 정체를 숨기는 가면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혼석을 먹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음?"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내 시선에 '솜브라'가 내뱉은 이델의 혼석이 들어왔다.

불길한 기운을 뽐내던 녀석은 솜브라의 입을 한 번 거치자, 조금 더 맹렬하게 마기를 준동시키고 있었다.

'무슨....'

평소와 다른 반응에 살짝 당혹감을 느꼈다.

그쪽으로 다가가니, 그 특유의 기운은 배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잡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애초에 '마기'는 〈마왕의 그릇〉 특성 덕분에 어느 정도 조종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을 집어 들자, 더 격렬한 떨림이 전해왔다.

'거부하고 있군.'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 혼석은 지금 나를, 정확히는 '유리안'을 밀어내고 있다고.

일반적인 혼석이었다면 '왜 이러지?' 반문하고 있었겠지만, 이것은 '이델 하이란스'의 것.

유리안의 손에 멸문당한 가문의 생존자이기에 강한 원념이 서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전에 쌓은 경험이 혼석이 되어서도 작용하고 있는 것인가.'

거참, 웃기지도 않는군.

'복수하겠다. 살아서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뭐, 그런 건가?

"애초에 그렇게 강한 원념이었더라면, 이렇게 작은 돌멩이가 되어 제 손에 들어오진 않았을 텐데요."

의미도 없는 독백이다.

하지만 이런 돌이 되어버렸음에도 '복수'라는 신념을 버리지 못한 '이델'의 영혼을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내 생각과 '유리안'의 생각이 같았다.

단지, 방향성의 차이겠지만.

난 굳이 데몬이 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찾으면 했던 거고, '유리안'은 남을 깔보는 그저 음흉한 습성 때문이다.

"솜브라가 거부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군요."

난 혼석을 도로 집어넣었다.

사용하지도 못할 거, 다른 이가 보기라도 한다면 문제가 될 소지가 있기에.

이델의 혼석을 사용할 기회는 잃었지만, '혼석' 정도나 되는 물건이니까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겁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난 집무실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물뿌리개로 손을 뻗었다.

아이들에게 슬슬 물을 줘야 할 시간이었다.

***

한 차례, 난초들에게 물을 주던 난 그리운 이름이 눈에 들어오자 멈칫했다.

'안젤리카.'

유난히 색감이 이쁘고 잘 자라던 그 녀석.

그 탓에 아직도 이름표를 버리지를 못하고 있었다.

뿌리가 심하게 상한 탓에 도무지 살릴 수 없던 녀석의 빈자리를 보자, 씁쓸한 맛이 혀끝을 덮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안젤리카는 '요슈아'가 헛짓을 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정확히는 녀석과 함께 쳐들어온 마법사 녀석이 한 짓이지만.

빌어먹을 놈들.

그나저나 솜브라 치유를 위해 혼석을 구해야 하는데.

'아! 크라이파트 가문에 있었지.'

유리안의 어머니인 밀레나의 유품.

지금은 크라이파트 가문의 삼남인 헤란드에게 맡겨둔 상태지만, 그 물건의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내게 있다.

'이델의 혼석이 나를 거부하고 있으니, 그거라도 사용해야겠는걸?'

이왕이면 빠른 시일 안에 헤란드와 만날 수 있도록 약속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똑, 똑!

계속해서 난초들에게 물을 주던 도중, 노크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들어오라는 말을 하자, 안으로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여명회의 단원이자, '감은 눈'의 견습 라즈롯이다.

"현재 황실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그를 호출한 이유는 간략하게나마 황실 내부의 상황을 파악해두고 싶어서다.

에이든의 죽음이 대대적으로 보고되지 않고, 행방불명으로 접수된 탓에 황실은 그에 따른 조사에 착수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 과정에서 같은 에이든 경의 인체실험 정황이 간략하게나마 발견되어 마탑에서도 조사에 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음."

난 짧은 신음을 흘렸다.

이렇게나 빨리 에이든의 행방불명이 접수되고, 불법적인 실험의 정황을 발견하다니.

'아일린이 움직였나 보군.'

아무 말 없이 입 닫고 있어야 편할 텐데. 그 고지식함 탓에 괜히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될 것이다.

"도나시엥 가문도 큰일이군요. 가주 후보가 그런 일을 하다니요. 심지어 당사자는 행방불명이라니, 참 골치 아프겠군요."

난 후후, 하고 짧게 웃음을 흘리자,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기괴한 표정을 지은 라즈롯의 머리 위로 '공포'의 색이 넘실거렸다.

"그,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라즈롯,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예, 얼마든지 물어봐 주십쇼."

"최근 '감은 눈'이 여명회의 뒤를 밟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그게 사실입니까?"

"아아...."

라즈롯은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건너서 들은 말이긴 하지만, '감은 눈'인 제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 조금 미심쩍어서 말입니다."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유리안'은 '감은 눈'의 간판이자, 얼굴인데, 내게 그 어떠한 보고나 말도 없이 '여명회'를 조사한다고?

혹여나, 황실 내부에선 날 '여명회'라 예상하여, 조사에서 제외했을 경우도 생각해야 한다.

"사실, 조사는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 대대적인 것은 아닌지라 고드윈 단장께서 말해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흠, 그런가.

하긴 말이 '얼굴'이지 '감은 눈'의 단장은 어디까지나 고드윈 발라디르다.

"게다가, 여명회는 세간에 그리 드러난 조직이 아니니까요."

"마신의 부활을 꿈꾸는 미치광이들. 배척받아 마땅한 곳이긴 합니다."

신랄한 비판에 라즈롯은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여명회의 조사를 담당하고 있는 단원은 누구입니까?"

"예?"

"궁금해서 말입니다."

이름 정도는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감은 눈'을 팔 생각은 없지만, 총대주교인 테넬론이 이 일에 관여하고 있냐며 직접 의문을 표하지 않았는가?

"페른입니다. 이전에 청사자 기사단에 속해있던 기사 말입니다."

"음...."

페른이라, 그건 좀 곤란하군.

녀석은 '감은 눈' 치곤 나름의 이름값이 있는지라 '여명회'에서도 감시를 붙였을 수도 있다.

'뭐, 전 청사자 기사단 출신이긴 하니까 나름 몸을 보호하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겠지.'

애초에 '여명회'를 조사한다고 해도 그 깊고 짙은 어둠을 어떻게 파헤칠 건지.

온갖 귀족들이 엮여있는지라, 괜히 손을 썼다간 신상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 예로.

'이번 에이든에 관련된 사건도, 여명회와 관련된 소식은 전혀 떠돌지 않잖아.'

여명회가 제국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강한지 대략 알 수 있는 상황이다.

"페른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막아주십쇼."

"...청사자 기사단 출신이 저 같은 견습의 말을 들을 것 같진 않습니다."

"그럼 제가 시켰다고 하십쇼."

그 말에 라즈롯은 수긍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견습의 말은 안 듣는다면, 내 말은 듣겠지.

내가 더 상급자니 말이야.

'까라면 까야지.'

기사들이 좋아하는 말이다.

***

요슈아는 코룬드와 있었던 일을 되새기며, 고뇌에 잠겼다.

'코룬드 선생이 그렇게나 격한 반응을 보이다니....'

직접적인 원인은 알 수 없었으나 요슈아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유리안'이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

아무리 '크라이파트 가문'의 지원과 귀족 의회의 후원이 탐난다고 해도, 코룬드가 생각하는 그 인면수심의 남자가 가진 이름값엔 비할 바 없다는 것이다.

저택의 복도를 걷던 요슈아는 응접실에서 들려온 웅성거림에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유파트 형님, 어, 어제 대체 얼마나 마시고 오신 겁니까?"

"으으으... 닥치고, 물이나 좀 가져와 봐."

그곳엔 숙취로 고생하고 있는 둘째 유파트와 셋째 헤란드가 말을 섞고 있었다.

'...쯧, 머저리 같은 놈.'

유파트를 보며, 혀를 찬 요슈아는 난처해하는 헤란드의 얼굴을 본 뒤 다시금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빌어먹을, 대체 헤란드 형님은 왜 그 녀석을 두둔하는 거지!?'

생각이 깊어질수록, 이전 가문 회의에서 그를 두둔한 삼남 헤란드가 괜스레 미워지는 요슈아였다.

가주 후보로 단 한 번도 언급이 되지 않은 힘없는 삼남.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큰 관심도 보이지 않던 헤란드였다.

그런 그를 형님으로 모시며, 나름 대우를 해줬건만, 돌아오는 것이라곤 '유리안'에 대한 지지라니.

"이익.... 에휴, 됐다 됐어."

가슴 속 응어리를 풀어내기 위해서 욕지거리를 입에 담으려 했으나, 참기 위해서 요슈아는 한숨을 내뱉었다.

가문의 후계자로서 저급한 표현은 자제해야 한다는 오른의 지시가 있었기에.

게다가 다른 건 몰라도, 헤란드에 대한 험담을 할 수 없던 요슈아였다.

첫째 형과 둘째 형이 가문 내에서 어긋난 이후, 어떻게든 크라이파트 가문의 일원으로서 열심히 활동해온 그에게 어찌 쓴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둘째 형에게 욕을 먹으며, 오른 할아버지가 헤란드를 두들겨 패던 모습은 아직도 요슈아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그저 가문을 위해서 뭐든 해보려고 했을 뿐인데.

"형님이라면 나름의 생각이 있겠다만… 응?"

그때, 저택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낀 요슈아는 바깥의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크라이파트 가문은 사대 가문 중 하나이다.

나름, 사대 가문 중에선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귀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크기의 저택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큰 저택의 소란이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면 어마어마한 사람이 손님으로 왔다는 뜻.

요슈아는 재빨리 옷을 추슬러 입은 뒤, 입구로 달려갔다.

그러자 금으로 수놓은 크라이파트 가문의 문양과 함께 '귀족 의회'의 마크를 박은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고집 가득한, 냉정한 모습의 노년의 신사가 보이자, 요슈아는 해맑게 웃음을 보이며 정중히 인사했다.

"오른 할아버지!"

일부러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그것이 할아버지에게 잘 먹힌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영악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마차에서 크라이파트 가문의 전 가주인 오른이 내리고 있었다.

요슈아의 얼굴이 보이자, 근엄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담기기 시작했다.

"내가 오는지 어찌 알고 이리 기다리고 있었느냐? 갑자기 온 것인지라, 아무런 말도 전달받지 못했을 텐데 말이야!"

"에이, 제가 할아버지가 오는 걸 굳이 들어야 알겠어요?"

"요놈, 말하는 것 봐라! 한 번 안아보자, 우리 강아지!"

"에이, 저도 이제 나이가 있잖아요."

작은 웃음과 함께 거절하는 요슈아의 모습에 마차를 이끈 마부와 사용인들이 살짝 경직되었다.

오른, 그는 권위적인 성격으로 가문 내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요슈아도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오히려 한껏 미소 지은 그는 한발 더 나아갔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한정으로, 자신의 권위를 살짝 거스르는 것 정도는 용납하신다.'

그것을 도전적이라고 받아들이는지 알 수 없었으나, 요슈아는 적당히 오른의 성격에 어울려줬다.

"크하핫, 그래 우리 강아지가 이젠 다 큰 모양이구나!"

'역시나.'

요슈아는 속으로 웃었다. 의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

"그런데, 다른 녀석은 없는 게냐? 내가 왔는데 막내인 요슈아만 마중을 나오다니...."

"현재 유파트 형과 헤란드 형님이 있긴 합니다만...."

"쯧, 쓰레기 같은 새끼들."

자신을 대하던 때와 달리 순식간에 차가워진 오른의 말투에 요슈아는 움찔했다.

"그건 그렇고, 헤란드는 안에 있다는 게지?"

'네.' 그렇게 요슈아는 대답을 하려 했으나, 오른의 두 눈을 보자 망설였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불꽃이 오른의 두 눈에서 일렁거리고 있었으니, 요슈아는 그것을 보자 직감했다.

"으, 으음...."

'오늘 헤란드 형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라는 그런 불안감이 묘하게 피어올랐다.

"저도 막 아카데미에서 볼일을 끝내고 돌아온지라, 잘 모르겠어요. 형님들과 그리 친하게 지내는 게 아닌지라."

그 탓에 요슈아는 거짓말을 내뱉었다.

 

 

 

 

 

 

 

 

제120화. 익숙한 오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