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 70-80

70화. 무명객단(1)

어후, 진땀 뺐네.

아니, 내가 만들어 준다는데 뭘 그리, 이리 재고, 저리 재고.

하여간 똑똑한 것들은 이래서 안 돼.

엘레노아 앞에서 한껏 능청을 떨던 난 손 안쪽에서 또다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손을 비비며, 나뭇잎이나 가지를 꺾었다.

'지금쯤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이맘때쯤, 테넬론이 아크 비숍 자리를 내려놓고 총대주교 자리에 올라가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그걸 믿고 미리 선수 쳐서 엘레노아에게 말을 던졌는데, 다행히도 그녀가 내 말을 믿어줬다.

아크 비숍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냐는 물음에, 그녀가 거부하여 내가 반기(叛起)를 드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그리고 다른 비숍이나 테넬론에게 보고한다면?

충분히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다.

가뜩이나 일전에 '배신자'를 운운하며, 여명회의 분위기를 흐트러트린 상태니, 말이다.

'비숍을 끌어들이기 위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있지.'

그리고, 빌어먹을 제라르.

이 녀석의 야욕은 훗날의 '여명회'를 차지할 만큼 어마어마하다.

그 과정에서 테넬론에게 인정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초창기 게임 할 때는 그로 인해 사망했던 적도 있으니 말이다.

'그가 아크 비숍이 되기 전에 막아야 해. 그래서 엘레노아를 선택한 것이니까.'

그녀의 가문을 들먹인 것도 그 때문이다.

원래 스토리에서 '유리안'과 원만한 관계를 맺은 제라르는 아크 비숍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정적들을 처리한다.

그 와중, 많은 평민, 귀족들이 죽어 나가고.

제도는 혼돈에 빠진다.

검은 기사가 중간중간 나타나 여명회와 유리안을 막아서긴 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벅찼기에 겁나 짜증 났었지.

젠장! 몇 번 리셋 했던가. 10번? 20번?

그리고 제라르의 야욕이 계속되어 결국은 마신을 부르는 지경까지 되면....

답 없다.

게임오버. 리셋 해야지.

하지만 그건 게임상 그런 거고, 지금 내가 '유리안'이 된 상태에서 리셋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것이다.

***

생각한 대로 '테넬론'이 직접 '총대주교'에 관한 것을 공표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유리안 경, 아크 비숍께서 자신의 직위를 '총대주교'로 명명하시고, 그 승계식을 가까운 시일에 치른다고 하십니다."

저택의 집무실에서 난초를 관리하던 난, 은밀하게 저택에 들어와 보고하는 여명회의 교단원을 쳐다보았다.

평소라면, 라즈롯에게 보고를 받았을 터지만, 오늘은 교단원이 직접 찾아왔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교단원은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유를 묻지 않으십니까?"

난초 손질을 멈추고, 다시금 교단원에게 시선을 옮기자 그는 움찔했다.

듣지 않아도, 테넬론이 무슨 의도로 '승계식'을 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다.

내가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를 몇 번을 해봤는데.

"굳이 제가 물어봐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유리안 경!"

둘러댄 말에 교단원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더니, 사죄를 입에 담기 시작하더니, 그의 머리 위로 '공포'의 색이 일렁거렸다.

딱히 큰 의미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제, 제발..., 목숨만큼은...!"

아니, 목숨은 왜.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패닉에 빠진 녀석을 어떻게 잘 추스른 뒤, 돌려보낸 난 엘레노아에게서 건네받은 상자로 고개를 돌렸다.

안에는 전화처럼 양방향으로 음성을 전달해주는 마도구와 함께 자그마한 '혼석'이 하나 담겨있었다.

'드미셀 가문의 혼석.'

본래 '여명회'를 창단한 것이 드미셀 가문이라고 생각한다면, 혼석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이 사실을 안 것은 게임을 플레이했던 기억 때문이다.

'평소라면 이 혼석을 숨길 곳을 모색했겠지만....'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다.

이 '혼석'은 저승으로 보낼 제라르의 노잣돈이 될 것이니까.

놈의 예상치 못한 행동은 위험하다.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 뿐만이 아니라, 핀텔의 숨통을 끊으려 한 것도.'

그의 넘치는 야욕이 원천이다.

의욕이 있는 '비숍'은 곤란하다.

'여명회'는 어디까지나, 수면 아래에 있어야 한다. 온전하게 검성이 활동하려면 말이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더욱이 드러나면 안 된다.

직무 유기한 스승께서 온전히 제자리를 잡아야 할 때까지 '검은 기사' 노릇을 해야 하니 말이다. 젠장!

'불안의 싹이 자라나기 전에 베어내는 것이 현명하지.'

그런 의미에서 난 '불안의 싹' 중 하나라 부를 수 있는 '무명객단'이 있는 빈민가의 외곽으로 향했다.

'제라르'라는 머리를 치기 전에 그 '손발'부터 꺾어놔야 한다.

손에 쥔 '혼석'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

더는 '무명객단'이 허튼수작을 못 하게 목줄 하나쯤은 잡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검은 기사가 우리와 함께한다!

검은 기사는 우리의 희망이다!

이런 개소리를 퍼트리면 내 일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말이야.

***

최근, 많이 들렸던 빈민가는 과거 게임을 플레이했던 경험과 합쳐진 탓에 안방과도 같은 익숙함이 느껴졌다.

난 열심히 '무명객단'이 관리하는 구역의 바깥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시야에는 빈민가라는 말에 어울리는 청결하지 못한 오두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청결'에 강박증이 있는 유리안의 몸은 저 오두막으로 향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했으나.

'아쉽게도, 오늘의 목적지가 저곳이다.'

무명객단의 두목인 '바란'이 거주하고 있는 오두막. 가서 해야 할 말은 간단하다.

'검은 기사'를 언급하는 것도 피하며, 여명회의 승계식이 끝나기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래야 '검은 기사'가 조금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겠는가.

물론, 녀석이 내 말을 잘 듣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 쉬운 녀석이었다면, 내가 직접 이곳에 행차할 일도 없었겠지.

'작은 경고 정도면 충분하겠지.'

'검은 기사'란 이름을 사칭하고 다닌다면, '황실'이 추적할 수도 있다.

생존이 목적인 녀석들이니 이 말 한마디면 충분할 것이다.

'그것도 안 되면....'

난 허릿춤의 월장검을 쳐다보며, 그 검집을 손으로 살짝 튕겼다.

찰그락──!

조금 강경하게 나갈 수밖에.

'제라르를 처리할 때까지만 조용히 있어 줬으면 좋겠는....'

그때, 빈민가의 퀴퀴한 악취 사이로 불쾌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단순히 '악취'라면 이렇게 신경이 쓰이지 않겠지만, '유리안'의 몸은 이 냄새가 특히나 익숙했다.

'피 냄새로군.'

어쩐지 위험한 일이 일어났을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지저분한 문짝을 열자, 바닥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난 오두막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가림막을 손으로 젖히자 그곳엔.

'...뭐냐?'

무명객단의 두목, 바란으로 보이는 남자가 죽어있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뇌리를 타고 전신에 흐르자, 정신이 탁 트이기 시작했다.

시체를 보고, 경직될 줄 알았으나 몸은 도리어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혹여나,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 생기자, 검을 뽑아 든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나 탐지──.

흩뿌려둔 마나로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지 확인했지만, 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누구한테 당한 거지?'

빈민가를 삼분하고 있는 다른 조직?

아니, 가치도 없을뿐더러 남은 두 녀석은 분쟁을 피하고 싶을 터.

'잘 된 건가?'

'검은 기사'를 사칭하던 '무명객단'의 우두머리가 죽어버렸으니 말이다. 아니, 조금만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죽어버렸으니, 오히려 귀찮아졌군.'

시체를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비정상일지 모르나,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냐.

일이 귀찮아질 것을 직감하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책상 위가 어지럽혀져 있다.'

시체가 쓰러진 바닥 옆에는 서류가 난잡하게 흩어진 책상이 있었다.

더러운 오두막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상할 것이 없었으나, 죽은 바란의 시체에 내 시선이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뭔가를 찾으러 온 모양이군.'

무심코 눈에 들어온 서류의 내용들.

딱히 중요해 보이는 것은 없었으나, 오히려 그것이 내 이목을 끌었다.

'오클레앙 가문의 인장이 박힌 것들이 하나도 없어.'

'무명객단'의 우두머리, 바란은 본디 '제라르 오클레앙'이 키우던 사병의 일원이다.

이곳에 있는 이유도 훗날 '여섯 손가락'의 인프라와 '혈귀단'의 요정을 흡수하기 위한 사전 작업을 위해서고.

그런 녀석의 책상에 '오클레앙 가문'의 인장이 박힌 무언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하다.

'죽기 직전에 숨겨두었을 리는 없을 테고.'

이곳 말고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나?

그리 생각하며, 무엇인가 숨겨둘 수 있는 장소가 있나 둘러보기 시작했다.

'잠깐.'

그러던 도중, 지금 이 상황을 남에게 들킨다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싸늘하게 시체가 된 무명객단의 우두머리.'

그리고, 그곳을 뒤지고 있는 '웃는 처형대'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인과관계를 모르는 이가 본다면, 실로 오해하기 쉬운 현장이다.

'설마 지금, 이 타이밍에, 정말 기가 막힌 순간에, 누가 들어....'

벌컥!

"바란 오빠! 비상이야 비상! 우리 구역에서 유리안을 봤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는데, 혹시 무슨 일 저질렀어!?"

앙칼진 여성의 목소리가 입구 쪽에서 들려오자, 난 황급히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미, 미친...!'

시야의 사각이라, 들어온 여성은 내 모습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응? 바란 오빠?"

문제는 내가 숨은 방에 탈출구는 오직 입구 하나 뿐.

창문도 없어서 빠져나가려면, 저 여성과 마주쳐야만 한다.

"바란 오빠!!!"

절규와도 같은 찢어지는 목소리가 오두막을 가득 메웠다. 아마도, 바란의 죽은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한 모양이다.

"어, 어쩌면... 어쩌면 좋지? 대체 무슨 일이... 다,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야 해...."

안절부절못하는 기색과 함께 자리를 떠날 듯한 말투에 난 속으로 안도했다.

- 마이어, 오두막 안쪽에서 최근 마나를 사용한 기척이 느껴져...!

하지만, 안도의 순간도 잠시. 다른 목소리 하나가 속삭이는 것이 귀에 전해졌다.

희미한 마나의 향취, 온갖 마(魔)에 민감한 유리안의 '직감'은 저 목소리가 '정령'이라고 속삭였다.

'정령사였냐!?'

마법도, 마나도, 흡혈귀도 있는 이 세계관에는 당연히도 '정령'이라 불리는 초현실적인 개념도 존재한다.

'정령'들의 수많은 특징 중 하나.

그것은 자신들의 전신(前身)인 '마나'의 냄새를 귀신같이 찾아낸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알았지?

체내의 마나를 탐지할 정도로 고위 정령은 아닌 것 같은데.

'...마나 탐지 탓인가?'

바란의 시체를 발견하고, 주변에 적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용한 '마나 탐지'. 그 잔향이 정령에게 감지된 것이다.

"누, 누구야!? 당장 나와!"

정령의 말에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여성은 호전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젠장, 어쩌면 좋지.'

나가서 바란이 죽은 것과 나는 연관이 없다고 말해야 하나?

'...되겠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 현장에 '유리안'이란 캐릭터는 개연성 그 자체다.

일반인이 보는 이 상황이라면.

'바란'이 황실에 무언가 잘못해서 '유리안'이 그를 '숙청했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이 상황은 알리바이와 이유가 완벽하더라도 이 '실눈의 악역'을 적대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상황이 악화될 것 같은데.'

어쩌면 좋을까?

"빠, 빨리 모습을 드러내!"

잠깐 고민에 잠긴 사이, 격양된 여성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자 제압하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어.'

그런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간 특단의 대책.

그것을 위해 난 '솜브라'를 사용해 이전처럼 가면을 만들어 착용했다.

"오두막이랑 같이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당장 나오란...."

모습을 드러내자, 여성은 말끝을 흐리기 시작했다.

"어... 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제력 잃은 목소리에는 이성이 깃들기 시작했다.

적개심으로 가득 찬 두 눈과 머리 위의 일렁거리던 '분노'의 색도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거, 검은 기사 님?"

 

 

 

 

 

 

 

 

71화. 무명객단(2)

'검은 기사... 님?'

뭐 대단한 일 했다고 '님'자를 붙여주지?

일촉즉발 분위기에서 갑작스레 침착해진 여성의 태도에 난 속으로 난색이 피었다.

난 이들, 아니 대중에게 내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혼석을 습격할 때 마차에서 한 번.

대장간에서 핀텔을 공격할 때 한 번.

또... 있던가?

여튼! 얼굴을 가린 '검은 기사'는 의도치 않게 신비주의를 지향하건만.

단번에 내 정체가 '검은 기사'란 것을 알아챈 것은 심히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아, 그것..., 인가.'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던, 전설 같은 그 이야기. 그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게임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여기 세계관의 '실제' 이야기니까.

그렇다고 해도 그 '검은 기사'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 본래의 주인공이 아니다 보니 이런 반응이 생소할 뿐이었다.

'심지어, 그 검은 기사의 정체가....'

제국의 악명 높은 '웃는 처형대'란 사실을 이들이 알까?

하긴, 모르는 게 약이다.

"지, 진짜..., 거, 검은 기사님... 맞지? 어째서 검은 기사님이 여기에...."

난처한 기색으로 나에게 말을 거는 여성의 얼굴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린네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외모와 허름한 오두막에 어울리지 않는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은발.

'분명 마이어라고 했어.'

조금 전 정령이 언급한 '마이어'란 이름이 뇌리에 떠올랐다.

'솔베른의 사생아가... 여기에 있었나?'

그녀의 풀네임은 '마이어 드 솔베른 에아니아'.

아드라탄 제국 사대 가문 중, 도나시엥 가문과는 다른 의미의 '마법'으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솔베른 가문의 사생아이다.

'정령을 다루는 것을 보니, 피는 못 속이는군.'

그들 가문의 장기는 '정령 마법'.

도나시엥이 자연에 퍼져 있는 마나를 이용해서 법칙을 비트는 '마법'을 사용한다면, 솔베른은 자연에 존재하고 있는 '정령'을 활용해 자연 그대로의 '마법'을 사용한다.

다섯 속성의 정령을 다룰 수 있다는 의미에서 '오색(五色)의 유일(唯一)'이라 불리며, 훗날 제국 마탑의 한 축이 될 그녀가 이런 빈민가에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지금 나완 상관없는 일이다.

"아...."

내 얼굴을 쳐다보던 마이어는 짧은 탄식과 함께 바란이 쓰러진 곳을 쳐다보았다.

그 후,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엔 약간의 적개심이 피어올랐다.

"혹시, 검은 기사... 아니지! 네놈이 우리 오빠 죽였어?"

태생은 고귀한 귀족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는지 마이어의 말투는 저급하고 굉장히 날카로웠다.

"야이, 씨! 묻고 있잖아! 네가 그랬냐...."

"...아니다."

내 입에서 평소처럼 존댓말이 아닌, 반말이 흘러나오자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뭔가 어색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내가 왔을 때, 이미 녀석은 누군가에게 당한 상태였다."

"웃기고 자빠졌네! 여기에 네놈 마나가 이렇게나 많이 흩어져 있는데, 어딜 뺑끼를 써! 후닌이 다 알려줬거든!"

후닌? 아, 정령을 이야기하는군.

바람의 향이 나는 걸 보니, 지금은 바람의 정령만 계약한 상태인가?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부끄러웠는지 은은한 빛무리 하나가 마이어의 품속으로 쪼르르 들어갔다.

"야이, 개XX야! 똑바로 얘기해! 사지를 잘라 데몬의 먹이로 줘버리기...."

스르륵──.

언성을 높이는 마이어를 향해, 월장검의 검집을 들어 올려 보여주었다.

"네 잘난 바람 정령에게 물어봐라. 내 검에서 피 냄새가 나는지."

당당한 내 태도에 움찔한 마이어.

이윽고, 작은 목소리로 품속에 있는 후닌과 속삭이더니 이내 정령은 빛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 저 사람 칼에서는 혈향이 나지 않아. 저 사람은 아닌 거 같아.

작지만 똑똑히 들렸다.

"어, 어? 아니라고? 그럼 빨리 말해줬어야지!"

괜히 자신의 정령에게 화풀이한 마이어는 우물쭈물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검은 기사... 님께서는 여기에 왜 있어?"

"내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너도 '무명객단'의 소속이라면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을 텐데?"

'마이어'가 네임드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무명객단'의 소속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게 검성 주위의 메인 인물에 관한 서사나 설정은 잘 알고 있지만, 그 외 인물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너무 많단 말이다!

그렇기에, 마이어를 떠보기 위한 말을 하자.

"윽!"

...아직 어려서 속내를 못 숨기는 건지. 저러고 어떻게 '오색의 유일'이 됐지?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경고를 하기에도 늦은 것 같군."

냉정한 내 말에 죽은 바란에게 시선을 옮긴 마이어.

그녀의 눈에 눈물이 살짝 맺히기 시작하자, 당황한 그녀는 약함을 상징하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자신 눈을 손으로 비비기 시작했다.

이내 마이어는 벌게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당당히 말했다.

"도와줘."

갑자기 뭔 말이야? 앞뒤 다 잘라먹고 도와달라니?

"아이씨! 좀 도와달라고! 우리 바란 오빠 죽인 범인 좀 잡아달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힘있게 말하던 마이어의 말은 나의 반문에 무너져내렸다.

"어...?"

"왜냐고 물었다."

"그, 그게... 당신은 신민들의 영웅이잖아! 고귀한 순교자, 약자들의... 그림자!"

뭐? 신민들의 영웅?

고귀한 순교자?

약자들의 그림자?

누가 오그라든 내 손 좀 펴줬으면 좋겠다.

"흠흠, 그건 너희들이 멋대로 붙인 별명이다. 난 누군가를 돕기 위해 이 가면을 쓰는 게 아니다. 순전히 내 사리사욕을 위해서지."

더 정확히 말하면, 한 10% 정도는 직무유기한 검성을 대신해서 한 거고, 90%는 내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뭐 그런 거지.

"너희들과 똑같아. 너희들의 안전을 위해, 내 이름을 팔고 다닌 것처럼 말이다."

"거, 거짓말...."

실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마이어를 보며, 나는 이 복잡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두머리인 바란이 죽었으니, 그를 오빠라 부르는 마이어에게라도 이야기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두 번은 없다. 다음에도 내 이름을 사용한다면 그땐...."

마지막 경고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던 도중, 갑작스레 오두막 주변에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세 명의 기척. 발걸음을 죽이고 은밀하게 다가오는 것이, 암살 훈련받은 녀석들임이 분명하다.

'무명객단 소속인가?'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내가 있는 곳이 그들의 우두머리 바란의 거처였으니까.

어쩌면 마이어의 큰 소리를 듣고 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음?'

하나, 그 생각은 틀렸다는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증명되었다.

은밀하게 살결을 파고드는 살기.

<놀라운 직감>을 지닌 나에겐 비숍급도 아닌 이들이 내뿜는 살기를 감지한 건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리고....

'이들이 바란을 죽인 범인이다.'

"됐어! 나 혼자라도 범인을 찾...."

파삭──!

말을 하던 마이어를 향해 서슬 퍼런, 빛 하나가 입구의 천막을 찢고 날아들었다.

그 이전부터 위험을 느끼고 있었던 난 그녀의 손을 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미리 준비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어흑...."

푹!

괴상한 비명과 함께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마이어.

이윽고, 자신의 옆에 박힌 단검을 보니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다, 단검!? 어디서 날아온 거야!?"

"운이 좋군. 네가 찾던 녀석들이 되돌아온 모양이니까."

"내가 찾던...?"

- ...똑같은 냄새야! 바깥에서 바란의 피 냄새가 다가오고 있어!

내 생각에 확신을 불어넣어 준 것은 마이어의 품속에 있던 정령이었다.

난 다가오는 그들을 경계하며 정령이 있는 곳을 살짝 보며 말을 꺼내자, 그녀 품에 있는 빛무리가 살짝 꿈틀거렸다.

"확실한가?"

내 물음에 빛무리가 위아래로 크게 흔들린 것을 보아하니 아마도 긍정의 뜻인 모양이다.

- 근데... 저 사람, 내 모습이 보이나 봐!

'마(魔)'에는 조예가 깊어, 그들의 존재를 대충이나마 볼 수 있으나, 교감이 부족한지 외형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주인이 아닌 자가 자기를 볼 수 있는 것이 낯설었는지, 후닌은 다시금 마이어의 품속으로 숨었다.

"다시 한번 말할게. 도와줘."

자신의 눈앞을 스쳐 지나간 단검을 본 마이어는 날카로워진 눈으로 내게 부탁했다.

아까처럼, '검은 기사'의 별명을 입에 담으며 막연하게 하는 부탁이 아니었다.

"바란 오빠는... 혈육은 아니지만, 내 가족이라 부를 만한 사람이야. 복수는 꼭 해주고 싶어."

마이어의 말투는 실로 침착했다.

"제발, 뭐든지 들어 줄 테니... 어?"

그런 마이어를 지나쳐 나무 벽에 꽂힌 단검을 뽑은 난 도신을 한 번 훑어보았다.

'월장검은 너무 눈에 띄니, 일단 이걸 사용해야겠군.'

부탁이고 뭐고, 지금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나도 저 녀석들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

그 모습이 자신을 도와준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까, 그녀는 내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 검은 기사님. 역시! 당신은 소문, 그대로의 사람이야."

소문은 뜬구름과도 같아, 잡을 수 없고, 계속해서 그 몸집을 키운다고는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의 연속이었다.

뭘 소문대로의 사람이냐는 거야.

...나도 살아야지 않겠니?

***

평소에 쓰던 장검이 아닌, 도신이 짧은 단검.

익숙하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 감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타고난 검사>

유리안의 여러 재능 중 가장 훌륭하다 생각되는 그것.

최근 훈련소에서 여러 무기를 휘둘러본 경험이 지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넝마가 된 가림막을 손으로 걷어낸 뒤, 오두막을 빠져나오자, 단검을 던진 녀석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명회는....'

아닌 모양이군.

몸에서 나오는 기백이나, 분위기는 '여명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만약 그들이었다면, 정면으로 달려들지, 멀리서 단검이나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신을 숭배하는 단체답게 단순하고 무식하게 덤벼들었으니 말이다.

근데 바란을 왜 죽였지?

지금까지 알려진 건 고작해야 빈민가의 뒷골목 두목 수준일 텐데.

"뭐, 뭐냐!?"

무슨 목적으로 바란을 처리하고, 이곳에 다시 나타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도중, 당황한 기색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남자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저 녀석이 소문으로 듣던 검은 기사...?"

"무명객단 녀석들, 헛소리를 하는 줄 알았더니 사실이었나?"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익숙한 얼굴이지만, 그렇다고,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네임드 캐릭터는 아닌 듯했다.

'저 녀석을 어디서 봤더라.'

조금 생각해보니,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제라르의 부하로군.'

핀텔이 헌병에게 수감되고, 풀려났을 때 마주친 제라르.

'그때 녀석이 데리고 다니던 사병 중 하나군. 오오! 설마 이것도 '유리안'의 능력인가.'

내 기억력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그럼 바란이 죽은 건 제라르의 사주?

잘 모르겠다.

지금부터 알아보면 되겠지.

***

검은 기사.

그 소문이 무성한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은 없으나, 린네는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정체된 검술.

스승인 검성이 신성국으로 떠난 지금, 정진을 위해선 자신보다 뛰어난 자에게 가르침을 얻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 '검은 기사님의 검엔 달빛이 머무르고 있었다니까!? 그 검무, 한 번만 더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상황에서 루피나가 말한 '검은 기사'란 인물은 린네의 흥미를 이끌었다.

'...하아.'

본래라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최적의 상대가 있기는 했다.

'유리안.... 윽.'

자존심을 구기며, 그에게 가르침을 얻어보려 한 린네였지만, '어스름 불꽃'에서 마주친 유리안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평소엔 아는 척하지 말라 해도, 귀신처럼 나타나더니.'

그 탓에 그녀의 마음속에선 괜한 반발심이 생겼다.

'직접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더러운 빈민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문으로 듣자 하니, 검은 기사가 여기에 자주 나타난다지?'

과거의 설화와 몰상식한 귀족을 혼쭐내주었단 소문 덕분에 '검은 기사'의 인기는 적지 않은 편이다.

그중, 하위 계급이 모인 '빈민가'에선 인지도가 높았으며 그 인기를 방패 삼아 '검은 기사'가 빈민가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래도 괜찮을까?'

마음이 앞서 빈민가까지 찾아오긴 했으나, '검은 기사'가 황궁에서 어떤 위치인지 그녀는 알고 있다.

헌병도, 그렇다고 황실의 소속도 아닌 무법자.

괜히 엮였다가는 골치가 아플 수도 있다.

'...들키겠어? 어차피 어떤 사람인지, 어떤 검술을 사용하는지 보기 위해서 온 건데.'

그렇다고 괜한 걱정은 들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짜증 나는 게 있다면.

'...지저분해.'

빈민가가 처음은 아니었으나, 더러운 환경은 그녀의 눈살을 찌푸리기에 충분했다.

'딱 질색인데, 또 와버렸잖아.'

유리안과 이곳에 들렀을 땐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지만, 태생적으로 비위가 그리 좋지 않은 그녀였다.

그 당시 강한 척을 했던 이유는 순전히 유리안이 그 점을 캐치해 비아냥을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 어쩔 수 없지.'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기 마련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표정을 피고, 다시금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

문득, 그녀의 눈엔 어느 오두막을 대치하고 있는 남자 셋이 들어왔다.

잘 훈련받은 기사처럼 보였으나, 이상하게도 그들 사이에서 긴장의 기색이 역력했다.

'뭘 하는 거야?'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주고 싶지 않은 그녀였으나, 오두막에서 나온 남자의 모습에 린네는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칠흑처럼 새까만 가면과 기사와 같은 기백.'

루피나가 말해 준 대로의 모습.

'검은 기사가 저 사람이구나.'

그러나 루피나가 해준 말과는 달리 '검은 기사'의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흉측하게 생겼는데?'

 

 

 

 

 

 

 

 

72화. 복잡한 감정(1)

"소문난 귀인께서 이런 오두막엔 무슨 볼일이 있으셔서 오셨나?"

비아냥거리는 사병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손에 쥔 단검을 쳐다보았다.

평소에 사용하던 장검이 아니지만..., 제라르의 일개 사병 정도야 뭐, 어렵지 않지.

"이봐, 왜 말이 없어? 무슨 볼일로 이곳에 왔냐고 묻잖아."

이전에 보았던 녀석 중 한 명이 얼굴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이자, 뒤에 있는 둘은 언제든지 검을 뽑아 들어도 좋도록, 자세를 잡았다.

'우선..., 제압하는 편이 좋겠지.'

그리 생각하며, 난 고개를 들어 올려 사병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금 떠난다면, 뒤를 쫓진 않겠다."

최대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은 어투로 말을 내뱉었다.

사실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지금은 무색해지기는 했으나, '검성'의 영향을 받은 몸인지라..., 검술에서 저도 모르게 그의 색이 느껴질 터.

그런 상황에서 온 힘을 다했다간 '검은 기사'의 실질적인 정체가 탄로 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오러를 담는 것도 쉽게 할....'

그때, 대치하고 있었던 녀석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젠장, 옷이 또 더러워지겠군.

누가 '청결'에 강박증이 있는 '유리안'아니랄까 봐, 이런 생각이 먼저 드네.

살짝 짜증이 났지만, 우선 중요한 건 눈앞의 적들.

그들은 꽤나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으나, '몬시뇰'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느린 속도다.

'역시나.'

난 단검을 고쳐잡았다.

짧은 도신 탓에 품속에 뛰어들어야만 유효타를 넣을 수 있었으나, 검을 크게 휘두르는 녀석의 빈틈은 너무나 크기에, 가까이 파고드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내가 다가가자, 녀석의 얼굴엔 당혹이 서렸다.

"흐, 흐어어억!"

역수로 잡은 단검이 녀석의 몸에 박히자, 바람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이다.

녀석은 쓰러지려고 했지만, 혹시나 반격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여러 차례 단검을 휘둘렀다.

털썩.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달려든 녀석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지고 말았다.

특유의 결벽증 탓에 피가 튀는 것에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짜증이 났으나, 둘이 남은 상태라 최대한 신경을 껐다.

'응?'

하지만, 남은 두 녀석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요하다. 아니, 고요하다 못해 공기가 싸늘하게 죽은 것 같다.

조금 전까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녀석들의 머리 위로 '공포'의 색이 뚜렷이 보였다.

갑자기? 내가 뭘 했길래....

"말했잖나, 지금 떠나면 잡지 않겠다고. 이건 내 말을 거역한 대가이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게 내 입은 '유리안'의 생각을 즉각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너희도 덤빌...."

단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한 발을 앞으로 내딛자.

"으, 으아아아아!!!"

남은 두 녀석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응? 어디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는 두 녀석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한 난 잠시 제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 거, 검은 기사님?"

뒤에선 겁먹은 듯한 마이어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머리 위로도 똑같이 '공포'의 색이 뚜렷이 떠올랐다.

"꾸,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도대체 왜?

처음에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도움을 줬건만, 고마워하지 못할망정.

그러나, 마이어의 눈동자에 비친 '검은 기사'의 모습은 실로 섬뜩했다.

'공포 영화에서나 볼 법한 얼굴이잖아.'

사람 하나를 단검 가지고 완전 반송장까지 만들어놨으니.

그것도 엄청 잔인하고 처참하게....

음, 온몸에 칼자국이 없는 곳이 없네.

마이어나 저들이 겁에 질린 게 당연하다.

"쿨럭, 쿨럭...."

잠깐 사색에 잠긴 사이, 쓰러져있던 녀석이 기침을 토해냈다.

즉사할 수 있는 곳은 피해서 찔렀으니 목숨에 지장은 없겠으나, 움직일 수는 없는지 꿈틀거리는 것이 실로 인상적이다.

"바란은 제라르의 명령으로 죽였나?"

내 말에 공포심이 일렁거리던 녀석의 눈에 당혹이 깃들었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저 표정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제, 제라르 님을 배신한 놈에게 당연한 결말이다!"

헐떡이는 숨을 최대한 진정시키며, 녀석은 토하듯이 말을 내뱉었다.

'배신자라....'

현시점에서 제라르가 무명객단과의 연결 고리를 끊는 건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생각한 것보다 빠르다.

그리고, '배신자'라는 말에 그 이유를 어느 정도 감 잡을 수 있었다.

'연회장에서 바란의 이름을 꺼낸 게 문제였나?'

'무명객단을 창단한 것이 사실은 제라르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단 뉘앙스를 보이는 바람에 제라르가 오해한 모양이다.

바란이 자신을 배신하고 유리안과 결탁해, 그에게 정보를 흘렸다고.

죽은 바란에게 미안하게 됐군.

"우, 웃기지 마. 이 새끼야!"

마이어는 격양된 목소리로 사병의 멱살을 잡았다. 켁켁거리며, 마른기침을 내던 녀석은 그녀를 떨쳐 낼 힘도 없는 모양인지 아무런 대항조차 못 했다.

"바란 오빠가 얼마나 제라르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배신을 했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말을 들어보니 마이어는 바란이 제라르가 심어둔 사람이란 걸 진즉에 알고 있던 모양이다.

'이걸로 무명객단과 제라르의 전면전이 시작될 수 있어.'

그리 생각한 나는....

"복수하고 싶나?"

이 상황을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래도 될까?'라는 생각도 동시에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혈육 같은 오빠를 잃은 그녀에게 연민을 품어야 정상이거늘, 지금의 난 이 상황을 이용하는 쪽으로만 머리가 돌아갔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느낌이....

가끔은 불쾌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난 '유리안'인 것을.

"도와줄 생각도 없으면서, 괜한 말 하지 말아요!"

마이어는 두 눈을 땡그랗게 뜨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말을 잇기 전, 혹시나 내 말을 엿들을까, 쓰러진 사병의 몸을 발로 차 녀석을 기절시켰다.

"나도 제라르에게 빚이 있으니 말이야."

"빚이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자, 마이어는 다시금 사병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떻게 하면, 바란 오빠의 복수를 할 수 있을까요?"

물어보는 그녀에게 난 품속에서 상자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건 뭐죠?"

"통신기."

그 안에는 엘레노아를 지지해준다는 약속과 함께 받은 통신기가 들어있었다.

"지금은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때가 온다면 네 의지를 보여라."

"의지...?"

내 말의 의미를 짐작하지 못했는지 잠깐 마이어의 두 눈동자는 잠깐 방황하는 듯했으나.

"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눈동자에 깃든 의문이 사라졌다.

***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무명객단'의 일원을 포섭했다는 사실에 난 약간 얼떨떨했다.

'그것도 오색의 유일, 마이어를 말이야.'

얼마 가지 않아, 제라르의 야욕이 이곳에 들이닥칠 것이 분명하다.

곧 있을 '총대주교 승계식'. 공석이 될 아크 비숍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공적이 필요하니 말이다.

더군다나, 무명객단의 바란과 검은 기사의 커넥션을 의심해왔는데, '검은 기사'의 존재를 그곳 본부에서 확인한 부하들의 증언도 있으니, 확정적이다.

그는 더욱 활발하게 움직일 것이다.

자신이 뿌린 과오를 철저히 외면하면서 그 뿌리를 뽑으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명객단의 해체는 시간문제다.

시일이 앞당겨지기는 했으나, 여기까지는 본래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스토리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핀텔이 살아남았고, 검성이 제도를 떠났으나 큰 흐름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스토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검은 기사를....

'내가 하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그리고 하나 더.

본래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지면 안 될 사람이 쓸데없이 나를 미행하고 있는 것도.

...변수는 아니겠지?

"고귀한 론드벨 가문의 여식이 뒷골목 빈민가엔 무슨 볼일이 있어서 내 뒤를 그리 쫓으시나?"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연 뒤, 난 '솜브라'로 만든 가면을 고쳐 썼다.

절대로 정체가 들키면 안 되는 상대이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의 사각에선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금색 머릿결을 등 뒤로 길게 늘어뜨린 장발, 그리고 마이어와 같은 녹색의 눈동자였으나, 그것엔 침착함이 깃들어있었다.

"제가 미행하고 있다는 걸 언제부터 아셨죠?"

"처음부터."

...거짓말이다.

사실, 이 골목에 들어서고 난 이후 알았지만, 내 블러핑이 통했는지 린네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미행하는 걸 알고 있었더라면 그리 빈틈을 드러내지 않았을 거예요."

"기습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네...?"

"명문 기사 가문의 론드벨이라면, 그런 짓을 하지 않겠지."

그래, 이것도 거짓말이다.

"크, 크흠."

그러나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린네는 헛기침하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건 그렇고, 론드벨의 여식이 굳이 빈민가까지 찾아와, 왜 날 미행하고 있는 거지?"

"당신의 검술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예요."

약간 움츠러들 줄 알았던 린네는 의외로 당돌하게 미행의 이유를 밝혔다.

검술을 보기 위해서라고?

'다행히 검은 기사의 정체가 궁금한 건 아닌 거 같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전에 사태 때문에 그녀가 살짝 불편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내 검술에서 뭘 알아내기라도 했나?"

"있어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는 그녀를 보자, 나도 호기심이 생겼다.

내 검술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건 처음부터 갈고닦은 것이 아닌 '만들어져 있던' 것이다.

그 탓에 흥미가 생겼다.

"그게 뭐지?"

"세간에서 말한 것만큼 당신의 검술은 미려한 게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 지금의 난 살짝 발끈하고 말았다.

"내 검술을 평가하는 건 좋지만, 미행이나 하던 녀석의 입으로 들으니 조금 불쾌하군."

"하지만, 그게 사실인걸요? 당신의 검술은 투박해요. 달빛을 머금은 검술. 그 말은 당신 같은 무법자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린네가 누구를 생각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스승인 검성.

하이든 라이히일 테지.

린네가 상상하는 검술의 끝은 늘 그에게로 귀결되었으니 말이다.

"고작해야 단검을 사용하는 모습만 보고, 그렇게 단언할 수 있나?"

"마음가짐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조금 전 말한 '달빛을 머금은 검술'. 그걸 사용하는 자를 직접 본 적이 있나 보군?"

"네, 물론이죠."

역시....

저렇게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검성이 확실하다.

'...화나는데?'

내가 아무리 빙의했다고 하지만, 지금 '유리안'의 검술이면 충분히 미려하다고 생각했다.

'검성의 검술이 이름값을 하긴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무시를 당할 줄이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분이 언짢기 시작했다.

자신의 역할인 '검은 기사'를 나에게 떠넘기고 홀연히 제도를 떠난 검성.

그가 괜스레 미워진 것이다.

"그 사람을 꽤 동경하는 모양이군."

그래서인지, 평소와 달리 감정적인 말을 입에 담고 싶어졌다.

"'동경'이란 '이해'와 가장 동떨어진 감정이지."

이 말은 본래 스토리에서 '유리안'이 '린네'에게 해준 말이다.

'검성'을 동경하는 것만으로 그를 뛰어넘을 수 없다며. 그림자처럼 그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린네에게 표독스럽게 내뱉던 말이다.

그 말로 인해 한 단계 더 성장하는....

"...네?"

내 말에 린네는 적잖게 당황했는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이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내 말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 그녀는 입술을 꽉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린네를 뒤로 하고, 난 발걸음을 옮겨, 빈민가를 빠져나왔다.

그녀와 같이 있으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하고 불편하다.

그리고....

'빨리 이 지저분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

- '그렇다면, 그런 검술을 사용하는 자를 직접 보기라도 했나?'

검은 기사와 말을 섞던 린네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달빛을 머금은 미려한 검술.

그 검술을 사용하는 대상을 물었을 때, 린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말없이 제도를 떠난 자신의 스승, '검성' 하이든 라이히가 아니었다.

- '그 사람을 꽤나 동경하는 모양이군.'

그건 바로,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꼴도 보기 싫은 그 남자의 얼굴이 검성보다 먼저 떠오른 것이다.

- ''동경'이란 '이해'와 가장 동떨어진 감정이지.'

확실히 그 남자가 대단한 것은 맞다.

'그 사람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검에 진심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

그가 다루는 검술은 예술이라 할 정도로 좋은 경지였으니까.

'그렇지만, 동경은....'

본래, '검성'에게 해야 했을 터인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린네는 이해하기 힘든 감정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73화. 복잡한 감정(2)

"그 말이 사실이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방안을 울리자, 보고하던 이는 몸을 움찔했다.

제라르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무명객단'과 '검은 기사'의 연관성이 단순히 헛소문인 줄 알았으나.

"예. 예..., 바란이 사는 오두막 근처에서 검은 기사로 추정되는 인물을... 봤습니다."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는 것이 증명된 탓이다.

'바란, 이 자식, 쓸데없는 짓을....'

'무명객단'을 만든 것은 자신이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무용지물이 된 '무명객단'을 여명회의 산하로 은밀히 집어넣어, 자신의 공적을 쌓을 속셈이었으나, 그것이 힘들어졌다.

검은 기사.

갑작스레 나타난 그 무법자 탓이다.

여명회의 혼석을 가로채는 바람에 아크 비숍은 검은 기사에게 이를 갈고 있다.

그런 와중에, 자신과 '무명객단'의 연결점을 여명회에서 알아챈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설령, 지금은 손을 털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어떻게든 무명객단을 뿌리 뽑아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검은 기사'의 수급을 테넬론에게 바치던가.

"어땠지?"

"...예?"

"그 녀석을 봤을 때 말이다. 네가 보기에 어떤 수준이냐는 말이다."

"그, 그게...."

쏘아붙이듯 말하는 제라르를 보며, 사병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백은 당장이라도 남자를 찢어 죽일 정도로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빨리 말해라. '검은 기사'를 앞에 두고 도망친 죄를 네 목에 묻기 전에 말이다."

그러면서도, 담담한 그의 어투에 사병은 침을 삼켰다.

벌벌 떨며, 그가 입을 열려던 찰나.

"하하, 제라르. 일단, 나중에 이야기를 듣는 게 어떻겠는가?"

불쑥,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자신의 말이 끊기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제라르였으나, 끼어든 사람에게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테스, 이제야 왔군."

그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여명회의 '비숍'이자 귀족인, 당테스였기 때문이다.

"겁에 질린 상태에서 이야기를 듣는 건, 정보가 부풀어질 가능성이 있다네. 자네도 알지 않은가?"

친근한 기색이 담긴 말투에 제라르의 날카로운 감정이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그의 말에 수긍한 제라르는 손을 휘저어 사병을 내보낸 뒤, 당테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잘 생각했네. 차기 '아크 비숍'이라면, 감정을 추스를 줄 알아야 하니 말이네."

이미 내정된 일이라는 듯, 당연시하는 당테스의 말이, 자신을 추켜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을 제라르는 잘 알고 있다.

"크큭, 그 말대로야."

달콤한 그의 농간에 제라르는 나름 어울려주었다.

귀족 세계에서든, 여명회에서든 몇 없는 자기 편인 '당테스'.

그렇다고 한들, 제라르는 그를 100% 신뢰하진 않는다.

오묘한 정치판에서 영원한 내 편은 없는 법.

"하지만, 테넬론 경께서 총대주교의 자리를 승계하셔도 확실하게 내가 아크 비숍이 될 것 같다고 말할 수 없겠어."

"왜 그런가?"

"유리안, 그 망할 놈 때문이지."

제라르는 '유리안'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가장 최근에 비숍을 달았지만, 테넬론 경의 총애가 심상치 않아."

그리 말하던 제라르는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고드 프리 가문의 연회장에서 유리안에게 잡혔던 자국.

그것의 형태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하하, 그 말이 맞네. 하지만,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서슴없이 들어오는 당테스의 말에 제라르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테넬론 경께선 항상 검성의 숭고함을 혐오했으나, 그의 검술은 인정했다네. 그렇지만, 유리안은 그 '숭고함'을 절개한 남자. 심지어, 여명회의 편에 서기까지 했으니 말이야."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이 아니야.'

이 말을 하려 했으나, 제라르는 입을 닫았다.

지금 문제는 테넬론의 '총애를 받는 이유'가 아닌, 그 '총애 탓에 생길 일'이었으니까.

'유리안, 그놈이 아크 비숍의 자리를 차지했다간 내가 골치가 아파져.'

완전히 척 진 것은 아니나, 고드 리히 가문에서의 일을 떠올리면..., 제라르는 유리안과 관계가 개선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고작 황실의 사냥개 주제에....'

지금까지 유리안에게 도발 아닌 도발을 한 이유는 '아크 비숍' 자리에 대한 경쟁심뿐만이 아닌, 왠지 모를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적과도 손을 잡거나 최대한 이용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에게는 그게 안 되었다.

자기 의도에서 벗어난 일이 많은 탓에 제라르는 골머리가 아팠다.

심지어, 문제는 하나가 아니다.

밖으로는 '검은 기사'.

안으로는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이 두 녀석..., 너무 거슬리는군.'

한 번에 둘을 처리할 방법을 강구해 보았으나,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슬슬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네."

"그게 무슨 말인가?"

잠시 사념에 잠겨있던 제라르였으나, 당테스의 말에 현실로 돌아왔다.

"하이든 라이히. 그 숭고한 검성 말이네. 어째서 제도에서 벗어나 신성국으로 떠났는지, 아주 희미하게 윤곽이 잡혔단 말이네."

조금 전까지 사색에 잠겨있던 그의 눈에 호기심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래? 이유가 뭐지?"

"아드라탄 제국의 별이자, 검성이라 칭송받던 그가 숭고함을 잃은 게지."

"난 수수께끼를 그리 좋아하지 않네만...."

그의 말에 당테스는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검성이 신성국으로의 망명을 준비 중인 것 같다네."

"뭐?"

당테스의 말에 제라르는 적잖게 당황했다.

망명이라니....

하이든 라이히가 황실의 총애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검성(劍星), 그 이름에 담긴 위업은 황실의 아성을 넘볼 정도로 드높았다.

허나, 황실에서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의 명성이 황실의 그것을 넘어간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에게 어려운 업무나 더럽고 어두운 임무를 시켰다.

그로 인해 한껏 올라간 그의 명예에 흠집을 냈고, 황실은 반대로 정을 베풀어 그들의 아성을 견고히 했다.

"그렇게나, 황실의 손에서 놀아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렸나?"

"그래, 나도 그런 것 같다네. 그 '숭고함'이 꺾인 게지."

"숭고한 게 아니라, 멍청했던 거지."

제라르는 코웃음을 쳤다.

"그 정보가 사실이라면, 테넬론 경께서 분노하실 수도 있겠군. 자기 손으로 죽이려 했던 검성이 도망쳤다며 말이야."

"하하, 자네 말대로라네. 테넬론 경이라면 분명 그러시겠지."

호탕한 당테스의 웃음을 보며, 제라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대로 유리안, 그놈도 같이 페레난드 신성국으로 가버린다면 좋으련만.

이 생각이 안일하다는 것 정도는 제라르도 잘 알고 있었다.

'검은 기사든, 유리안이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싹을 뽑는 게 정답이다.

'지금으로선 별다른 방도가 없는 검은 기사는 제외하고, 유리안부터 견제할 방법을 찾아야겠군.'

***

...라고, 제라르는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지가 뛰어봐야 벼룩이지.

이미 충분한 배경지식으로 인해 스토리의 발단부터 결말까지 알고 있는 나에게 제라르의 흉계는 뻔하다.

권력욕이 강한 녀석은 '아크 비숍'의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날 눈엣가시로 볼 것이다.

'테넬론이 날 마음에 들어 하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니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쪽은 녀석의 의도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데 말이야.

아무튼, 나는 그 '자리'에 생각이 없으나, '아크 비숍'의 자리에 눈독을 들이는 녀석은 날 견제하기 위해 수를 쓸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그놈 성격상 뒤에서 은밀하게 움직일 확률이 높아.'

그렇다면 귀찮아질 것이 자명했다.

정면에서 오는 것이라면, 이 몸뚱어리의 무력으로 처리할 수 있으나, 암암리에 행동한다면, 그게 힘들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쪽에서 먼저 움직여서 녀석의 팔다리를 미리 잘라놓는 게 좋겠지.'

젠장, 이게 뭔 고생이냐.

어쩐지 일을 거듭할수록, 내 예상과는 달리 이상한 쪽으로 공이 굴러가는 느낌이다.

아직까지는 컨트롤을 할 수 있는 영역인 것 같으나,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차라리 명문가 막내아들로 만들어주던가.'

아, 생각해 보니, '유리안'은 명문가 막내아들 비스무리한 게 맞다.

서자이긴 해도 말이지.

***

"하아...."

골머리가 아픈 듯, 아일린은 읽고 있던 자신의 책을 덮었다.

방계라는 이유로 본가(本家)에게 부정을 받는 것은 알고 있다. 피에 불순물이 끼었다며, 멸시를 받는 것도 이제는 익숙하다.

"그래도, 이건 짜증 나네."

아일린은 신물이 난다는 표정으로 책상 위에 올린 논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 논문이 반려 당할 줄이야. 상상도 못 했어."

'혼석'에 대한 연구는 이것이 처음이라, 이런 식으로 보류할 줄은 아일린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 결과에 대해 납득할 수 있었다.

'우리 고귀하신 에이든 님께서 어지간히 불편하신 모양이었네.'

도나시엥 가문의 차기 가주로 거론되는 에이든은 가문의 비원에 어마무시한 집착을 하고 있음에도, 극도의 '순혈주의'를 가지고 있는 남자다.

지금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혼석'과 가문의 비원인 '엘릭서'가 흡사하다는 것은, 그녀의 논문을 조금 읽어보면 다 아는 사실.

계속 연구가 진행되어, 만약 그 결실이 방계인 자신의 손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어지간히 불편한 모양이다.

"너무한 것 아니야!? 가문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뭐든 감수해야지!"

피의 순결함이 결과를 내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마탑도 마탑이야! 아무리 도나시엥 가문이 마탑에 큰 공헌을 하고 있지만, 일개 가문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니!"

고작해야, 마탑의 창립 가문 중 하나이며.

'금(金)' 원소 학파 중 하나인, '도나르 학파'의 주축인 가문.

수많은 돈을 기부하고, 바이엘 아카데미에 마법학과를 증설하기 위한 노력만 했을 뿐인데....

"아아...! 생각해 보니, 들어 줄 만했네."

새삼 느껴지는 가문의 힘에 아일린은 중얼거리며 마탑이 어째서 자신의 논문을 반려했는지 깨달았다.

동시에 쓸데없는 자긍심이 피어올랐다.

나도 그런 '도나시엥 가문'의 일원이라고!

물론, 자괴감도 들었다.

"이런 걸로 넘어갈 생각하지 말라고."

아일린은 혼잣말을 내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그런 식으로 날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나도 더 큰 결과물을 가져오면 되는 법...!"

말을 하던 도중, 아일린은 이상을 느꼈다.

자신이 저택에 설치한 방범 마법 중 하나의 기척이 사라진 것이다.

지이잉──!

동시에 소리를 울리는 알림 마법이 작동했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아일린은 이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방범 마법은 해체했으면서, 알림 마법엔 걸렸다고?'

순서가 이상하다.

침입자에게 물리적 피해를 주는 '방범 마법'은 '알림 마법'보다 은밀하게 숨겨뒀으며, 해제하기도 어렵다.

본래 '알림'을 해제하더라도, '방범 마법'에 당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거늘.

'반대잖아.'

그것을 느낀 아일린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날 부르려는 속셈인가?'

침입자의 알 수 없는 의도에 아일린은 방범 마법이 해체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모습을 드러내세요."

목적지에 도착한 아일린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침입자가 몇 명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이곳은 자신의 저택.

홈그라운드에선 웬만한 5위계 '바르고' 등급의 마법사들보다 자신이 있는 그녀였다.

"...당신은?"

그러나, 모습을 드러낸 침입자의 모습에 아일린은 적잖게 당황했다.

밤을 장막처럼 두른 살벌한 외형.

침입자임에도 불구하고 몸에서 흘러나오는 고결함은 이자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변호하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군지 아나?"

그런 그의 입이 열리자, 아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기사."

제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소문의 주인.

"당신이 왜 이곳에 있죠?"

아일린은 살짝 퉁명스러운 어투로 말을 이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이 가면을 무서워하지 않는군."

차갑게 내려앉은, 밤공기보다 더 가라앉은 묵직한 검은 기사의 목소리.

그의 말에 아일린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지만, 저 외형에는 겁을 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왜? 저 가면 멋있지 않나?'

아일린은 '검은 기사'란 인물이 생각한 것보다 미적 감각이 있다고 느꼈다.

 

 

 

 

 

 

 

 

74화. 가지치기(1)

외형에 대한 감탄도 잠시. 아일린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소문의 '검은 기사'가 이곳에 나타난 목적이 뭘까?

"궁금하나?"

자신의 속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흠칫했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걱정하지 마라, 용건만 말하고 돌아갈 생각이니."

검은 기사는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을 이은 후,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작은 물건이 들어갈 법한 평범한 상자.

세련되지 않고, 꾸미지 않은 투박한 형태이나 아일린은 어쩐지 그 안에 들어있을 내용물이 궁금해졌다.

"혼석이다."

'뭐?'

이번에도 건조한 말투였으나, 그것보다 그의 말에 그녀는 적잖게 당황했다.

"...혼석이라구요?"

"그래."

여러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스쳐 지나갔다.

검은 기사가 혼석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정말로 혼석이 들어있기는 한 걸까?

이걸 왜 나에게 주는 거야.

"...그게 뭐죠?"

온갖 잡다한 의미가 함축된 질문.

그 탓에 아일린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너무 얼빠진 질문이잖아!

"뭐라니, 네가 직접 연구하는 것도 못 알아보는가?"

"나, 나도 알아요. 무슨 의도로 이걸 제게 주냐는 것을 묻는 거예요!"

아일린은 부끄러움을 참기 위해 도리어 화를 내자, 검은 기사는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안에 든 것은 확실하게 혼석이다.

이전에 연구하던 것과 모양새는 조금 달랐으나, 영롱한 붉은 빛과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것이 분명하다.

"화합."

"...화합?"

"나는 황실과 대척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귀족의 명예에 위해를 가했지만, 이 모든 것은 제국의 위상을 위한 것."

아일린은 검은 기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을 통해 감정을 엿볼 수 없었으나, 황실의 '누군가'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거짓말."

"뭐?"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군요."

그와는 달리, 이 사람의 속내는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왜 그리 생각하지?"

"정말로 황실과의 화합을 원했다면, 비서실과 직접 이야기를 했겠죠."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검은 기사가 말한 대로 '화합'을 원하는 것이라면 그는 비서실에 직접 찾아갔을 것이다.

자신은 '혼석'을 연구하는 일개 마법사일 뿐, 황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분명, 저 사람도 이걸 알고 있을 거야.'

이렇게 '혼석'을 가지고, 자신에게 찾아올 정도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왜지?

"의외로 똑똑한 구석이 있었군."

무례한 말투에, 은근 비꼬는 듯한 뉘앙스에 아일린의 입술이 살짝 뒤틀렸으나, 구태여 발끈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말대로,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 하지만, 화합을 원한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럼 진짜 목적은...."

"그걸 네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

강하게 나오는 검은 기사의 태도에 아일린은 움찔했다.

"하나라도 더 많은 혼석이 있어야, 연구의 진척이 있을 터. 네게 큰 손해는 아닐 터인데?"

"굳이 하나 더 있을 필요는 없어요. 이미, 어느 정도 연구에 결실이...."

"겨우 제출한 첫 번째 논문, 반려 당하지 않았나?"

'윽.'

최대한 감정을 숨기려고 했던 아일린이었으나, 이번엔 얼굴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는 방법은 많지. 그래서, 이 혼석을 받겠나?"

거절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의중을 알 수 없는, 아무리 신민들의 영웅이라고 하지만, '검은 기사'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일린은 검은 기사가 손에 든 보석함을 가져갔다.

"좋은 생각이군."

기분이 나쁘더라도,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이 눈앞에 있다.

거절하는 것은 머저리나 할 짓.

"비서실에게 전해라. 검은 기사는 황실의 규율을 어길 생각이 없다고."

그렇게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검은 기사'를 보며, 아일린은 자신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 똑똑한 구석이 있다며 자신을 비아냥거린 것이 생각나서? 아니다.

'...저 가면, 왜 이렇게 마음에 드는 거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다.

***

"유리안 경,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감은 눈' 집무실에서 간단한 서류정리를 하고 있던 난 노크 소리와 함께 라즈롯의 목소리가 들리자 들어와도 좋다고 했다.

내 집무실에 들어서자, 그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전할 말이 있으신 모양이로군요."

"예."

가벼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라즈롯은 잠시 나를 쳐다보다, 침을 꿀꺽 삼킨 그는 이내 보고를 시작했다.

"아크 비숍의 승계식 날짜가 훗날로 미뤄질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이유는 검은 기사 때문이겠군요."

나지막하게 말하는 내 모습에 라즈롯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자가 혼석을 가져왔다는 일로 비서실이 꽤나 소란스럽더군요. 이래 봬도 '감은 눈' 소속. 모를 리 없잖습니까? 후후."

사실 내가 가져다줬으니까. 라는 말을 하면 당연히 안 되겠지.

"시, 실례했습니다. 제가 괜한 말을...."

딱히 의미를 두지 않은 말이었으나, 라즈롯은 자신의 결례를 사과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무명객단'의 정리가 앞당겨질 것 같습니다. '검은 기사'가 정말로 '무명객단'의 소속이란 것이 이번에 확인되었으니, 그것으로...."

똑똑──!

그런 라즈롯이 말을 잇던 도중, 집무실의 문에 노크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난 한 번 더 들어오라는 말을 내뱉었다.

"실례하겠네. 유리안.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왔네만...."

집무실 안으로 남자 한 명이 들어섰다.

익숙한 남자의 얼굴을 살펴본 라즈롯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

"다, 당테스 경."

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것은 '여명회'의 비숍 중 하나인 '당테스 크리스토'.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그는 라즈롯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오, 라즈롯 자네가 여기에 배속되었던 모양이군."

"그, 그렇습니다."

당테스의 말에 라즈롯의 머리 위로 '보라색' 아지랑이가 넘실거렸다.

현재 라즈롯이 '여명회'가 아닌, 나의 끄나풀로 일하는 것을 눈치챈다면, 골치 아파질 수 있다.

그걸 의식한 모양이다.

"...오호, 유리안이 왜 이렇게까지 여명회 내부의 일에 빠삭한 줄 알았나 했더니 자네 덕분이었나 보군?"

당테스는 노회한 귀족답게 우리 둘의 미묘한 관계를 금세 간파했다.

그의 말에 난 덤덤하게 가만히 있었지만, 라즈롯은 무언가 두려웠는지 그의 머리 위 보랏빛 일렁임은 맹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여명회에서 일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있지요."

내가 그 사실을 긍정해주자, 라즈롯은 화들짝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변호해줄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고, 당신도 그래야 할 겁니다. 당테스 크리스토."

강한 어투로 말하자, 당테스는 사람 좋아 보이던 웃음을 감추었다.

"운송업으로 부를 쌓아 올린 크리스토 가문. 제국의 위상을 위해 분투한 것은 알겠습니다만...."

나는 정리하던 서류 하나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곳엔 지금까지 '크리스토 가문'이 숨겨왔던 치부가 적나라하게 적혀있었다.

"신성국 페레난드와 내통하다니, 곤란한 일입니다."

당테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내가 건넨 서류를 읽기 시작했고 다 보았는지, 실없는 웃음을 짓더니 서류를 내게 돌려주었다.

"...하하, 꽤 많이도 알고 있군. 이걸 어떻게 알았나?"

"알아낼 방법은 많습니다."

나의 경우엔 알아낸 '알아낸'게 아니라,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말이야.

당테스 크리스토, 그도 여명회의 '비숍'이다보니, 스토리를 진행하다 보면 공략해야 할 대상 중 하나다.

그러나, 항상 의문이 들었다.

주인공인 '검성' 하이든 라이히가 불세출의 영웅이자 '검성'이라 떠받들어지는 인물이지만, 왜 정면으로 그들과 싸울 뿐 회유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이미 정보는 쌓여있는데 말이야.'

예를 들자면, '크리스토 가문'이 본래 신성국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태양신교의 신실(信實)한 단원이었다던가.

아니면, '무명객단'이 실은 제라르의 손에 태어난 집단이었다던가.

그런 것들 말이다.

"제국에도 태양신 솔라룬을 숭배하는 교회가 존재합니다. 크리스토 가문에서는 그걸 모르고 있나 보군요?"

사실 눈앞의 서류는 양식에 맞춰 적당히 갈겨쓴 '가짜'다.

그럼에도, 당테스에겐 이걸 확인할 여력은 없을 것이다.

"'감은 눈'이 왜 괜히 '감은 눈'이겠습니까? 정도를 지킨다면, 어느 정도 규율을 어겨도 '눈을 감아주겠다'라는 뜻에서지요."

증거가 아닌, '알고' 있는 것 자체가 이자에겐 문제일 테니까.

"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네."

초연한 표정으로 당테스는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유리안. '감은 눈'으로서 나타난 게 아니라면, 내게 원하는 게 있지 않나?"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음에도, 당테스는 꽤나 여유를 부렸다.

권력의 금자탑인 황실은 반역죄를 강하게 묻는 편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당테스가 여유를 부리는 것은 살 구멍이 있다고 감지한 것이다.

"예, 규율대로 다스릴 것이었다면, 지금쯤 당테스 경께선 교수대 위에 있었겠지요."

"그 말대로라네. 하하, 이거야 원, 살려줘서 고맙다고 해야겠군."

어쩐지 허탈한 웃음과 함께 당테스는 라즈롯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왜 유리안의 손에서 놀고 있는지 알겠군. 지금의 나와 비슷한 처지겠지?"

당테스가 그리 말하자, 라즈롯은 나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놈들은 뭐만 하면 날 나쁜 놈으로... 아니 맞네.

그래, 내가 바로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실눈 악역 '유리안'이니까.

***

"검은 기사 자식, 또 쓸데없는 짓을...."

제라르, 그 또한 '검은 기사'가 황실에 혼석을 전달해주었다는 사실에 몹시 짜증이 났다.

테넬론이 '총대주교'의 자리를 승계하고, '아크 비숍'의 자리가 공석이 된 다음, '일'을 진행할 생각이었으나, 그 승계 일정이 뒤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아니, 어찌 보면 다행일 수도 있겠군.'

유리안은 생각한 것보다 교활한 녀석이고.

'검은 기사'는 '무명객단'의 소속이라고는 하나, 신출귀몰한 놈이다.

둘을 정리하기로 다짐한 이상, 확실하게 기반을 다지고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테넬론 경께서 개인적으로 날 호출하셨다.'

승계식의 연기와 동시에 호출했다는 것은 테넬론이 속으로 '아크 비숍'을 자신으로 내정했다는 것이 아닐까?

물론, 헛된 꿈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 타이밍에 자신을 부른 이유가 그것 외에는 없을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그러는 와중, 테넬론과의 면담 장소에 도착한 그는 복장을 점검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

"검은 기사가 혼석을 황실에 전달했다고 하더군."

하나, 테넬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승계식'과 연관된 것이 아니었다.

"예, 저도 들었습니다. 그 괘씸한 놈, 대체 어디까지 우리를 물 먹여야...."

"제라르."

제라르는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테넬론을 쳐다보았다.

평소라면, 자신의 말을 끊는 것에 큰 불쾌함을 느끼는 그였으나, 테넬론 정도의 인물에게 그것을 드러낼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자네가 만든 정원에 쥐새끼가 돌아다닌다면, 어떻게 할 텐가?"

난데없는 질문에 제라르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성의껏 대답하기로 결심했다.

"저라면, 죽일 것 같습니다."

"왜지?"

"쥐새끼 한 마리가 보였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여러 마리도 정원에 있을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흠...."

"그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지요. 쥐는 어디에도 있습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낼 생각을 못 하게 본보기를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처럼 흐르듯 이야기하는 그를 보며, 테넬론은 자신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엔 '검성'에게 당했던 상흔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꿀꺽.

제라르는 조용히 침을 삼켰다.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그래? 자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체념한 듯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입이 뒤틀렸다.

미소를 지은 듯한 느낌을 받았으나, 상흔 탓에 거기엔 기괴함이 깃들어 있었다.

"왜 우리를 배신했나, 제라르."

 

 

 

 

 

 

 

 

75화. 가지치기(2)

- '왜 배신했나.'

그 말이 테넬론의 혀끝에서 흘러나오자, 제라르는 몸은 경직되고,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찝찝한 땀의 불쾌함이 경각을 다투며 엄습했으나, 제라르는 너무나 충격적인 말을 들어서 인지 그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 그게 대체 무슨...?"

"어째서 우리를 배신할 생각을 했냐는 말이다."

"저는 아크 비숍께서 하시는 말이 이해가...."

"무명객단."

테넬론이 내뱉는 짧은 단어 한마디에 그의 몸이 움찔한다.

'...어디서 들었지?'

'배신'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는지 상황의 전말을 눈치챈 제라르는 테넬론이 '무명객단'에 대해 누구에게 들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떠오르는 인물은 한 명밖에 없다.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그 빌어먹을 자식!'

분노에 주먹이 떨리던 제라르는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면서 지금의 상황에서 모면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네가 무명객단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들었다."

"...유리안, 그놈에게 들었습니까?"

'그놈의 거짓말에 놀아나지 말라.'

그런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난 당테스에게 들었는데 말이야."

의외의 인물이 테넬론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제라르는 당황했다.

그나마 믿을 만한 '비숍'이라고 생각하던 당테스에게 배신당해서?

아니다.

'믿을 만한' 것과 '믿는다'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법.

그는 당테스에게 '무명객단'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 경쟁하는 '비숍'이기를 떠나, 치부를 남에게 알려주는 멍청이가 어디에 있는가?

'...내 뒷조사를 하고 다녔나, 당테스!'

제라르는 이를 꽉 물었다.

"검은 기사가 소속된 무명객단이 자네의 손을 거친 곳일 줄이야."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그건 과거의 일입니다! 전 무명객단으로부터 손을 뗀 지 오래입니다!"

"그래?"

의문을 품은 테넬론의 어투에 제라르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는군. 어떻게 생각하나?"

상흔이 자욱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테넬론.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어두운 알현실 구석에서 가면을 쓴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

크지 않은 체구의 여성이다.

특별한 구석이라곤, '가면'을 하나 착용했다는 점뿐.

'무명객단 소속인가...!?'

그리고, 그 '가면'이 무명객단을 상징하는 것임을 제라르는 잘 알고 있다.

저 전통과도 같은 '가면'은 자신이 비밀리에 투입한 사병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함이었으니까.

"가장 최근에도 너희들은 제라르의 명을 받았다고 들었다. 맞나?"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자신을 침몰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저것의 입에서 나올 말은 하나뿐이다.

"네, 네... 그렇습니다."

역시나!

제라르는 입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그렇다는군."

"우, 웃기지 마라! 네년! 누구한테 사주받았지? 당테스? 그것도 아니면, 바란의 유언이냐!?"

"언성을...."

날카로운 제라르의 목소리를 가르고,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하나 끼어들었다.

작지만 사뭇 힘이 느껴지는 그 목소리의 주인은 유리안이었다.

모두의 이목을 끌며 등장한 그는 검지를 세우고는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언성을 높이시면 안 됩니다. 제라르 경. 여긴 테넬론 경께서 자리한 곳입니다."

능청스럽게 웃음을 짓고 있는 얼굴이 자신을 향하자, 제라르는 움찔했다.

'웃는 처형대'라는 거친 별명과 달리 기품이 넘치는 태도, 그리고 눈동자가 비치지 않는 얼굴은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네놈...!'

자신과는 달리 사뭇 차분함이 느껴지는 그 태도에 제라르는 분노가 솟구쳐올랐다.

***

'...너, 너무 멀리 온 것 같은데.'

나를 향하는 제라르의 표독스러운 시선을 최대한 무시하며, 가면을 쓴 이를 쳐다보았다.

'무명객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가면이 머리 위로 떠오른 '공포'의 색까지 숨겨주지 않았다.

'미안하게 됐군.'

나이에 걸맞은 모습이다.

저 떨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마이어였으니까.

아무리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천재라도, 테넬론이 뿜는 위압감은 그녀를 겁에 질리도록 만들기 충분했다.

그녀를 부른 것은 나다.

물론, '유리안'으로서 부른 것이 아닌 '검은 기사'의 호출로 온 것이다.

바란의 복수를 도와주겠다며 말이다.

"테넬론 경의 앞입니다. 잘 아시는 분께서 그리 언성을 높이면 되시겠습니까?"

다시금, 제라르에게 시선을 옮긴 난 마이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금은 진정하라는 나의 배려였으나.

'아차....'

'공포'의 색은 더욱 맹렬하게 흔들렸다.

"네, 네놈이 연관되어있을 줄 알았다. 그렇게도 아크 비숍의 자리가 탐났나!?"

"저는 권력을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그깟 아크 비숍의 자리, 누가 앉아도 상관없습니다."

'그깟 아크 비숍'이란 말에 주변의 공기에 살얼음이 끼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승계식'이 진행되지 않아 '아크 비숍'의 자리는 테넬론이 앉아있는 상황.

아마도, 그 탓이리라.

"음."

다행히도, 테넬론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도리어, 지금 내 말을 흡족하게 받아들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발끈한다면, 한 차례 식혀주려고 했거늘 뭐 저런 반응을 하냐.

"그리고, 지금의 요점은 그게 아닙니다."

테넬론의 눈치를 살짝 본 나는 계속해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제라르 경. 당신이 '무명객단'을 창단하고, 그 주인으로서 '검은 기사'를 방치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살짝 틀어진 이야기의 주제를 바로잡기 시작했고, 그것이 불쾌했는지 제라르는 부릅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심지어, 최근 '검은 기사'가 황실에 혼석을 넘겼다고 하더군요. 혹시..., 그것도 제라르 경, 당신의 소행입니까?"

"나는 그런 적 없다!"

당연히 그런 적 없을 것이다.

'검은 기사'도, 혼석을 황실에 넘긴 것도 나였으니까.

"뻔뻔하시군요. 하긴,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더하시겠습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제라르의 성질을 더 돋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붉다, 붉어.'

결과적으로 제라르의 머리 위 <부정의 색>은 선명하게 붉은빛, 분노를 띠고 있었다.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너무 깊으신 거 아니십니까? 검은 기사가 황실에 넘겼다는 그 혼석도, 같은 비숍이었던 핀텔 경이 확보한 것이지 않습니까?"

거기에 굴하지 않고, 나는 입을 놀리며 그의 죄질을 무겁게 만들기 시작했다.

"흐음, 황실에 넘긴 혼석이 핀텔에게서 빼앗은 것이었나?"

내 말에 가장 큰 흥미를 느낀 것은 테넬론이었다. 그는 상흔으로 구겨진 얼굴에 손을 가져가며, 탄식을 내뱉었다.

"정말 그렇다면, 나는 제라르, 네놈에게 더욱 큰 실망을 할 것이야."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그리고, 검은 기사가 넘겼다는 혼석이 핀텔의 것과 같다는 확증도 없지 않습니까!?"

"그럼 확인해보시겠습니까?"

그리 말하며, 나는 품속에서 '혼석'을 꺼내 들자, 가장 먼저 호기심을 보인 것은 테넬론이었다.

"음? 그게 '검은 기사'가 황실에 맡겼다는 혼석인가?"

"예, 제 권한으로 이렇게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대단하군. 역시 '감은 눈' 제일의 검사다워!"

"후후, 과찬이십니다."

그래, 과찬이다.

'혼석'을 아일린에게 맡긴 것도 나고.

그걸 황실을 통해 찾아온 것도 나니까....

"하지만, 증명이 끝나면 다시금 황실에 가져가야 합니다. 이걸 가져온 이유는 어디까지나, 제라르 경의 죄를 드러내기 위함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겠다는 거지? 그 혼석이 핀텔이 확보한 것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의문을 품는 테넬론을 보며, 난 미소를 지었다.

"간단하지요. 본인에게 물어보면 알잖습니까?"

말과 함께 제라르가 들어온 입구로 근엄한 표정의 남자 한 명이 들어섰다.

"피, 핀텔...?"

그의 정체는 예상했던 대로 핀텔이다.

그는 평소처럼 테넬론에게 무릎을 꿇으며, 인사했다.

"비... 몬시뇰 핀텔, 테넬론 경을 뵙습니다."

"그래, 핀텔. 지금 유리안이 들고 있는 혼석이 자네가 '검은 기사'에게 빼앗긴 혼석이 확실한가?"

테넬론의 맨얼굴을 본 핀텔은 흠칫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진정한 후, 내가 든 혼석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으, 음...."

짧게 신음을 내뱉은 그는 조금 더 혼석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잘 생각하고 말해라. 핀텔.'

네가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니까.

이 혼석은 핀텔이 '검은 기사'에게 빼앗긴 혼석이 아니다. 그건 본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핀텔 경, 이것이 상단을 습격한 뒤, 당신이 얻은 혼석이 맞는지요?"

하지만, 녀석이 제라르에게 원한이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를 업신여기는 말과 함께.

단검으로 죽이려는 시도도 했으며.

'비숍'에서 '몬시뇰'로 직위가 격하된 것.

이 모든 것에 제라르의 공이 아주 컸다.

그러니, 핀텔이 빼앗긴 혼석은 내가 흡수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더라도.

"예, 맞습니다."

그의 세 치 혀는 존재하지 않는 '혼석'을 살려냈고, 그것을 빼앗겼다는 중죄도 제라르의 것으로 만들었다.

'무명객단'과 '검은 기사'의 행적이 모두 자신의 소행이 되어버리기 시작하자, 제라르의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이 두 눈에 보일 정도였다.

"몰랐습니다, 제라르 경. 당신이 이토록 황실에 충성을 다하는 인물일 줄 말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미 이곳에 만연한 의심의 분위기는 제라르를 배신자로 몰고 가고 있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황실의 개'란 타이틀은 오히려 제라르 경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군요. 후후."

"아니야!! 다 거짓말이야!! 테넬론 경!!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전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라르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해보았지만, 테넬론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하다.

"제라르, 난 네놈이 그동안 나 몰래, 여명회의 이름을 팔고 다닌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척했다. 아무리 핀텔의 목숨까지 위협했어도 말이야. 모두 여명회에 도움이 된다 생각했지."

"아니, 그건...."

"허나! 이번 짓은! 절대 묵과할 수 없다. 적어도 황실의 개는 되지 말았어야지."

상처로 일그러진 테넬론의 얼굴은 명백하게 불쾌함을 표출하고 있었다.

뭔가 변명하려는 제라르를 그는 손을 들어, 막은 뒤, 말을 이었다.

"당테스와 핀텔, 유리안이 너의 죄를 증명했다."

테넬론의 선고에 제라르는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 모습에 난 나지막이 말했다.

"제라르 경, 겁먹은 강아지 마냥 뭘 그리 두리번거리십니까? 후후."

흠칫 놀란 그는 눈앞에 있는 나를 보며 이를 우드득 갈며 소리친다.

"네놈, 네놈은 내가 반드시 죽일 테다!"

"저를 말입니까? 후후. 놀라운 말이군요. 어디 한번 해보시지요."

나와 제라르가 살벌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순간!

푸욱──!

무언가 꽂히는 소리와 함께 제라르는 비명을 지른다.

"크아아아아악!"

상처가 난 어깨를 부여잡으며 그는 뒤를 돌아보니, 핀텔이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이걸로 한 번씩 주고받은 것인가?"

제라르에 어깨에 꽂힌 것은 핀텔이 평소에 자주 사용하던 '비수 마법'.

제라르의 목을 날려버리고 싶은 눈치였으나 아직 테넬론의 마지막 판결이 나지 않았기에, 치명상을 피해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네놈도...,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악에 찬 제라르는 두 눈이 벌게진 상태로 나와 핀텔을 바라본다.

이 상황에서 그래봤자, 하나도 안 무섭다.

"쯔쯧. 서부의 광기라고 불리던 제라르는 어디 가고 이런 쓰레기만 남았는지...."

분노를 표출하던 제라르에게 테넬론은 최후의 선고를 내렸다.

"죽여라."

담담한 그의 말에 뒤에 서 있던 몬시뇰들이 제라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 모습에 진땀을 흘리던 제라르는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의 정체는 마법 스크롤이다.

"도망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그리 말하며, 테넬론이 오른손을 뻗자 거뭇한 마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제라르가 스크롤을 뜯어버리는 것이 먼저였다.

"두고 보자."

거센 빛과 함께 삼류 악당 같은 대사를 남기고 사라진 제라르.

그렇지만, 사라지기 직전 테넬론의 마기가 그의 팔에 닿았고.

서걱-

잘려 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적막이 감돌았다.

그 순간, 테넬론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유리안, 왜 가만히 있었지?"

뜨끔.

테넬론은 눈치챈 모양이다.

내가 일부러 그를 놓아주었다는 것을.

다음 스토리를 위한 밑밥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제라르의 복수심을 이용해 여명회의 전력을 깎아내리는 나름의 계략, 그것을 말이다.

본심을 말할 수 없으니, 난 대충 둘러대기로 결심했다.

"전이 마법을 스크롤에 저장한 것이라면, 살 가능성은 없을 겁니다."

"...그렇기야 하지."

테넬론도 알고 있는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세계관에는 마법이 존재하듯, 그것을 저장할 수 있는 수단도 당연히 존재했다.

하나, 주류(主流)는 절대 될 수 없다. '마법 스크롤'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위험성 때문이다.

"만약, 살아있다면?"

"그렇다면, 제 손으로 처리하겠습니다."

난 빙긋 웃으며 말했지만, 내 표정을 본 핀텔은 갑자기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응? 너무 살벌해 보였나?

하지만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테넬론은 껄껄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런 번거로운 일은 없길 빌지."

그래.... 사실 나도 할 생각 없어.

 

 

 

 

 

 

 

 

76화. 가지치기(3)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핀텔 경. 저는 이만."

짧은 인사와 함께 유리안은 자신이 데려온 무명객단 단원을 데리고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고, 핀텔은 버틸 수 없는 분위기에 쫓기듯 자신도 방을 빠져나왔다.

'괴물이 되었다.'

발걸음을 옮기는 핀텔은 방금 상황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아드라탄 제국의 귀족으로서, 그는 유리안이 지금까지 밟아 온 행보를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반쪽이기는 하나, 고귀한 피가 흐르는 몸.

그 피의 유용성을 증명하지 못하며 '처형자'로 제국의 개가 된 멍청한 쓰레기.

...였을 터인데.

'그런 이전의 분위기는 대체 어디로 가고....'

유리안이 자신을 이 자리에 불렀을 때, 핀텔은 어떠한 이야기도 듣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자리에 선 순간 그의 직감이 맹렬히 속삭였다.

자신의 말 한마디로 저 가증스러운 제라르의 숨통을 죌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이후로, 말 한마디 섞지 않았지만 유리안은 내 속내를 이해하고 있었다.'

분명, 이전의 '유리안'이었더라면 불쾌했을 것이다.

- '제라르가 직위를 박탈당하도록, 현재 벌어진 상황을 완전히 이용하다니.'

추잡하게 황실의 개로 전락한 녀석이 유일하게 자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며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녀석이야말로, 아니 유리안 경이야말로....'

핀텔은 지금 자신이 품은 생각이 불경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속에 흐르던 탁류는 경화(硬化)되었던 생각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의 결심이 되었다.

'여명회의 아크 비숍에 어울린다.'

그리 생각하며, 핀텔은 발걸음을 계속해서 옮겼다.

***

"검은 기사님은 어디에 있어?"

알현실에서 빠져나와 복도를 걷던 도중, 마이어가 입을 열었다.

불만을 티 내려는 듯, 퉁명스러운 목소리였으나 그녀는 여전히 겁에 질린 상태이다.

머리 위로 보이는 '공포'의 색이 그 반증이다.

"찾아서 어쩌시겠습니까?"

그래, 어쩌게.

눈앞에 있다고 해도 안 믿을 거면서.

"고맙다고 말을 할 거야. 바란 오빠의 복수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줬으니까."

"그럼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싫어."

왜 싫은 건지 이해할 수 없군.

"내가 직접 이야기하고 싶어. 그리고, 물어볼 것도 있어."

"그게 뭐죠?"

"그걸 왜 당신에게 말해야 해?"

지금 니가 그토록 찾고 있는 사람이 나니까.

"통신구를 사용하십쇼. 그에게 받지 않았습니까?"

"...나보고 먼저 하지 말라고, 검은 기사님께서 못을 박아뒀단 말이야."

거참 성가시게.

그래도, 약속을 잘 지키는 모습이 살짝 기특했다. 말투는 거칠지만 말이다.

"만나고 싶다고 전달해줘. 하지 않겠다면, 지금 당신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황실에... 꺄악!"

난 말을 잇던 마이어의 가면을 벗기자,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주제를 아십쇼."

평상시보다 쏘아붙이듯 말하자, 마이어는 움찔했다.

그것도 잠시, 그녀의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주제? 난 지금 당신의 약점을 쥐고 있어! 멍청한 게 아니라면, 이게 황실에 새어 들어갈 경우, 당신의 신상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을 텐데... 읍."

그런 마이어의 입을 난 손으로 틀어막았다.

야이, 미친년아! 조용히 좀 하라고!

"제 걱정은 감사하지만, 괜찮겠습니까? 당신에게 도움을 청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리 말하며, 난 마이어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강한 자존심만큼, 은혜를 받으면 갚지 않고 배기지 못하는 성격.

그러니, '검은 기사'에게 받은 은혜 탓에 오늘 있었던 일을 남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윽."

마이어는 어딘가 찔린 듯, 신음을 내뱉었다.

응? 갑자기 왜 그래?

"그래.... 당신 생각대로, 나 같은 빈민가 출신이 말해봤자 라는 건 나도 알아."

머리 위로 맹렬하게 '공포'의 색을 보이며, 그녀는 내 손을 밀어내고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나 같은 촌년은 쥐도 새도 없이 사라져도 아무도 관심 주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 말하고 싶은 거지?"

...아니다.

진심으로 걱정해서 한 말이었는데.

그러나, 이미 많은 경험으로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외형이 중요하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안부를 묻는 말도 이 음흉한 실눈이 한다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네 생각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게 망할 네놈이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라고!"

마이어는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태도를 보니, 아닌 것 같은데.

"거, 검은 기사님과의 인연이 있으니까 입 닫는 거야. 당신과는 달리 그 사람은... 믿을 만하니까!"

이야기를 듣던 도중, 난 헛웃음이 나왔다.

"뭐, 뭐가 웃겨!?"

내 헛웃음이 비웃음처럼 들렸는지, 발끈한 마이어가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난 최대한 '유리안'스러움을 연기하며, 살생은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그것만으로 이 인면수심의 악귀가 쌓아 올린 악명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가면 쓴 괴한을 더 신뢰한다는 게, 어이없지 않은가.

"가면을 쓰고, 정체를 숨기고 다니는 사람을 신뢰하는 모습이 웃겨서 말입니다. 완전 애나 할 법한 생각입니다."

"당신에 비하면 훨씬 나!"

"어느 면에서 말입니까?"

나의 말에 움찔한 마이어는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멋있어."

뜬금없는 말에 살짝 당황했다.

"...가면 속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면서, 뭐가 멋있다는 겁니까?"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아. 너 같은 놈과 달리 음흉한 실눈은 아닐 거라고!"

왠지 낯 간지럽군.

"그리고, 정체를 알지 못해도 신뢰할 수 있는 뭔가가 있어."

그런가? 뭐, 그런가 보지.

"당신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과 왜 협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당신과는 달라!"

"그렇습니까?"

"그래!"

강한 확신이 느껴지는 말투.

그녀의 태도가 웃긴 나머지....

'내가 검은 기사인데?'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런 멍청한 짓을 하는 건 피하기로 했다.

***

저택으로 돌아온 난 욕실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처음 테넬론의 밀실에 들어갔을 땐, 식은땀이 흘러 불쾌했으나 지금 돌이켜보니 처음만 긴장했을 뿐 시간이 지나니 무덤덤해졌던 것 같았다.

"유리안 님,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욕실에 나와 몸을 닦고 있자, 하녀 한 명이 다가와 정중하게 물었다.

"준비해주십쇼."

시간이 흘렀던지라, 공복감이 꽤나 올라온 상태다.

사용인에게 말을 해둔 난 물기를 닦은 뒤, 식당으로 향했다.

식전 요리인 아뮤즈 부쉬로 버섯과 치즈를 갈아 올린 빵이 나왔고, 다음엔 한입에 털어 넣기 좋은 새우와 허브가 나왔다.

'…식전 음식은 줄이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이전에 요리사에게 말한 적이 있다.

메인이 나오기 전, 음식이 너무도 많다고.

사치를 부리기 좋아하는 '유리안'이 만든 규칙이겠으나 난 딱히 좋아하지 않았기에 개수를 줄이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주방장이 어지간히 데였나 보군.'

변덕스러운 성격인 '유리안'이 몇 번이나, 주방장을 볶아댔고 그 탓에 지금의 규칙이 쉽사리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 '혹시, 날 시험하는 게 아닌가?'

그런 혼잣말도 들은 적이 있다.

"밀랍에 7개월 동안 숙성시킨 송아지 고기입니다."

그런 주방장이 카트를 끌며, 음식을 가져왔다.

이 고기는 무슨 고기이며,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다는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며 말이다.

"송아지 고기는 육향이 부족한 탓에 특별한 마리네이드를 통해 풍미를 보충했습니다. 유리안 님의 입맛에 맞도록 말이죠."

"그렇습니까?"

"예."

미식(美食)을 즐기는 입장은 아니지만, 저리 긴장한 채 설명하는 주방장의 모습에 난 흥미로운 듯한 태도를 연출했다.

예전부터 든 생각이지만, 음식이란 결국 에너지.

칼로리가 곧 음식의 품질을 가르는 척도라 생각한다.

"그럼 한 번 먹어보죠."

포크와 나이프를 든 뒤, 고기를 썰고 입에 집어넣었다.

주방장의 말대로, 육향이 그리 없으나 허브와 버터의 향이 혀끝에 맹렬하게 감돌았다.

거친 마리네이드와 부드러운 송아지 고기의 조화.

음, 상당히 매력적인데?

"입맛에 맞으십니까?"

"...좋군요."

주방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혹시, 더 있습니까?"

그런 주방장을 보며, 난 손가락으로 접시를 가리켰다.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주방장의 얼굴엔 웃음이 더욱 도드라졌다.

"예, 당연히 있습니다!"

"그럼, 같은 것으로 열 그릇 정도."

신체 능력이 어마어마한 만큼, 많은 열량이 필요한 몸이다.

심지어 '솜브라'를 익힌 뒤, 더욱 공복에 민감해진 느낌이다.

"예, 예...!?"

"워낙 허기가 져서 말입니다. 조금 더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흔들리는 주방장의 눈.

얼마 지나지 않아 결심한 듯,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준비해보겠습니다."

"아, 너무 힘들면 다른 것으로도 상관없습니다."

"아니요! 꼭 하게 해주십쇼!"

어쩐지 결의가 느껴지는 말투다.

이걸 모종의 시험으로 받아들였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리려고 했으나, 주방장은 다급한 발걸음으로 식당을 빠져나갔다.

'...힘들면 알아서 그만두겠지.'

난 다시금 포크를 움직였다.

텅 빈 뱃속에 만복감이 점차 오를수록, 머리에도 잡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본래의 스토리보다 빠르게 정리된 제라르.

그 탓에 불어닥칠 후폭풍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인제 와서?'

이미 순서가 뒤죽박죽이 된 스토리에 '본래'라는 말을 덧붙여서 무엇을 할까.

'그래, 내가 솜브라를 익히는 것도. 검성이 검은 기사의 역할을 유기한 것도 전부 예상외다.'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닥칠 일들을 잘 대처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유리안 님! 식,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만...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작게나마 마음을 다잡고 있었을 때, 다급한 사용인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사용인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으나, 내가 식사하는 중이라도 무조건 말해야 한다는 모습이다.

저리 급한 것을 보니 중요한 손님임이 분명하다.

"누구입니까?"

"오, 오벤 크라이파트 님이십니다."

오벤, 오벤....

이름을 곱씹던 난 움직이던 포크를 멈추었다.

크라이파트 가문의 가주의 이름이다.

동시에….

"아버지...?"

나, 아니, '유리안'의 아버지다.

"아,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내 혼잣말이 긍정으로 받아들여졌는지, 사용인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급히 입구로 뛰어갔다.

'왜 내 저택에?'

아무래도 이상했다.

'유리안'은 크라이파트 가문에서 내놓은 자식이 아니던가?

그런 내게 왜 가주가 직접 찾아왔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이유가 떠올랐다.

- '가주님께서 직접 와주신다면 바쁜 일정 속에서도 시간을 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내뱉었던 말이 씨가 된 건가?

설마, 진짜로 만나러 올 줄 알았겠냐고!

당혹감에 식사를 멈춘 난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포크를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중요한 건 이깟 송아지 고기가 아니다!

이런 상황은 게임에서도 없었던 일.

'유리안'에게 크라파이트 가주가 찾아오다니.

잘 대처해야 한다.

그의 말 한마디에 '유리안'의 스토리가 바뀔 수 있다.

설령 상대가 크라이파트 가문의 가주이며, 방계의 처분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자라고 해도 잘 넘기면 된다.

"유리안 님, 오벤 경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을 대하듯.

아니, 가주니까 조금 고개를 숙여주는 것도 괜찮겠다.

비록 '프라손'이라는 딱지가 붙긴 했지만, 그래도 크라이파트 가문의 일원이니까.

"식사 중이었나? 오랜만이다. 유리안."

식당으로 깔끔한 인상의 남자가 한 명 들어섰다.

'유리안'과 살짝 비슷한 외형이지만, 실눈을 제외하곤 어쩐지 닮아 있는, 척 보아도 아버지인 오벤이다.

어쩐지 살가운 기색을 보이며, 그는 손을 내밀었다.

"예, 오랜만입니다. 가주님."

다음은... 악수를 청하는 것이겠지?

난 살며시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잘하고 있다.

생각한 것보다 나쁘지 않은 반응에 속으로 안심하고 있는 와중.

"어째서 가문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느냐. 네가 왔다면, 내 친히... 으어어어억...!"

...간과한 것이 있었다.

'유리안'은 크라파이트 가주, 즉 아버지인 '오벤'을 미친 듯이 증오한다는 거.

'유리안'의 몸은 정말 온 힘을 다해 '오벤'을 부정했고, 그의 손을 부러뜨릴 기세로 힘이 들어갔다.

그나마 오러까지 쓰려는 거…, 내가 막았다.

미안하다. 오벤.

정말 내 의지가 아니야.

 

 

 

 

 

 

 

 

77화. 떨어진 별(1)

"지금 뭘 하는 짓이냐!"

오벤 크라이파트의 신랄한 비명과 함께 그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나와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 탓에 오벤의 얼굴엔 핏줄이 튀어나왔고, 그걸 본 노기사 한 명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 그만!"

자신의 기사가 검을 뽑아 들 기세를 보이며, 다가오자 오벤은 그를 막아 세웠다.

그 모습에 난 오벤의 손을 부숴 버리겠다는 의지가 다분한 '유리안'의 본능을 힘겹게 내리누르며, 그와 잡은 손을 억지로 떼어낼 수 있었다.

'젠장! 이 빌어먹을 몸뚱어리!!'

내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는 영문 모를 행동이었으나, 그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간다.

'프라손' 네임을 가지고 있는 '유리안'의 크라이파트 가문에 대한 생리적인 혐오감.

그 감정을 정점에 찍을 수 있게 도와준 것이 눈앞의 오벤 크라이파트다.

그 탓에 내 몸, 정확히는 그런 심리적인 부분을 강하게 자극받은 '유리안'의 몸이 반응한 것이다.

"오랜만이라고는 하지만, 인사가 꽤 격하구나. 유리안."

아직도 통증이 느껴지는지 오벤은 오른손을 주무르며, 인상을 찡그렸지만. 그는 딱히 개의치 않아 보였다.

그의 입장에선 충분히 경을 치고 남을 일임에도 가만히 있는 것이 조금 위화감이 들었다.

'오벤은 아버지인 오른을 닮아 권위적인 성격이라고 봤던 거 같은데....'

예전 게임 정보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봤지만, 사실 오벤에 대한 정보는 그리 없다.

'크라이파트 가문'의 가주라는 이름값이 있기는 하지만, 플레이어와의 접점은 스토리에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귀족 원로회 의장인 '오른 크라이파트'와 트러블이 많았고, 그로 인해서 '크라이파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발생하곤 했으니까.

차라리 '오른'이 가문의 대표처럼 보였고, 그렇게 행동했기에 '오벤'과는 만날 일도 적었고, 정보도 없었다.

"아직도 내가 미우냐?"

속으로 '오벤'에 대한 정보를 추스르던 도중, 그가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어찌 가주님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말을 하는 도중에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무엇인가가 끓어올랐다.

'밉다'라는 가벼운 감정이 아니다.

아마도..., '증오'라는 말과 더 어울리는 복잡미묘한 것이다.

"나도 늘 미안하게 생각하곤 있다."

"무엇을 말입니까?"

"밀레나에 대해서 말이다."

밀레나? 밀레나가 누구....

아! 유리안의 엄마?!

잠시 기억을 더듬는 사이 그녀의 이름을 들은, '유리안'의 심장은 두근대며 한구석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벅차오르는 감정이 추스를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하게 소용돌이쳤지만, '유리안'의 손은 허리춤의 검으로 향하려고 했다.

심장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리움과 아련함.

반면 '유리안'의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은 증오와 분노.

상반된 감정이 느껴진 난 당황스러웠지만, 우선 검으로 향하는 손을 막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말 좀 들어.'

내 손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한 노기사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가주님께서 하신 일들은 모두 이유가 있었겠지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겨우 손을 수습하고 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오벤에게 말을 건넸다.

"밀레나도 그렇고, 너도.... 크라이파트 가문의 본가에서 힘든 생활을 했다는 것은 나도 안다."

"그렇습니까?"

"그러니 과거의 일은 잊고 다시 시작하는 게 어떻겠느냐?"

과거를 반성하는 듯한 절절한 오벤의 말투에 '유리안'의 심장은 잠시 주춤하는 듯했으나, 이내 더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인제 와서 말입니까?"

"그래, 이제라도 널 가족으로서 인정하고...."

"가주님, 저희는 너무도 멀리 왔습니다."

내 몸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니, '유리안'은 오벤을 용서할 마음이 없는 듯하다.

이 정도 감정을 표출한다는 걸 보면, '유리안'과 그의 어머니가 얼마나 핍박받고 무시당하며 살았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난 '유리안'과 그의 어머니인 밀레나, 오벤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전혀 모른다.

그저 미루어 짐작만 할 뿐.

"쌓인 앙금을 해소하기 위해선 시간이 조금 많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즉..., 시간을 달라는 이야기냐?"

"...예."

난 애써 얼굴 근육을 조정하여 작은 미소를 보이자, 오벤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격통으로 보이던 핏줄도 누그러들었으나, 그 자리에 세상이 무색한 주름이 자리를 잡았다.

"네 말이 그렇다면, 기다리도록 하마."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오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늦지 말거라. 그만큼..., 아니다. 다음 가문 회의에서 네 얼굴을 뵐 수 있다면 좋겠구나."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그는 애써 그 말을 삼키며 웃으며 미소 지었다.

"마음이 내킨다면 그러겠습니다."

"돌아간다. 엔닐. 앞장서거라."

오벤의 말에 노기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몸을 돌렸다.

그러는 도중에도, 나를 향해 뿌리는 살기가 거두어지는 일은 없었다.

***

오벤의 모습이 저택에서 사라지자, 내 속에선 의심암귀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가주가 찾아올 줄이야.'

사대가문의 가주라고 하면은 엉덩이가 무겁고, 행동이 신중할 것이라 예상했거늘.

잠들어있던 '유리안'의 본능과 밀접한 것이었으나, 내 개인적인 견해도 이와 비슷했다.

'이 타이밍에?'

본래의 이야기에선, 시간이 흘러도 유리안은 '프라손'이란 딱지를 떼기는커녕, 가문에게 인정조차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주인 오벤이 여기까지 와서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이시후'로 인해 변화된 '유리안'이 필요한 일이 생긴 것이다.

더군다나 가문 회의에서 보인 요슈아의 태도도 예상하기 힘들었겠지.

유리안을 가주로 추대하니....

여러 정황을 생각해봤을 때, 나에게 좋은 의도는 없어 보인다.

특히나 자신이 직접 움직일 만한 일은 몇 가지 안 된다.

데몬 토벌, 반역 죄인의 숙청.

그리고 '검성'에 대한 견제.

황실에 충성한 듯 보이지만, 그곳의 견제와 강압적인 폭거에 지쳐버린 검성.

그래서인지 우리의 주인공, 하이든 라이히는 '귀족 원로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귀족 원로회의 의장은.'

크라이파트 가문의 전(前) 가주인 오른 크라이파트.

"그렇군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느 정도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

나를 받아들이려는 이유.

그리고, '유리안'이 저 남자를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

'검성이 신성국으로 떠난 틈을 타, 원로회를 잡아먹고 자기가 직접 권력의 중심을 잡으려는 건가.'

난 거울에 비치는 실눈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음흉한 모습이 그곳에 비쳤다.

"버린 아들을 마지못해 찾아온 이유가 결국 사리사욕을 위해서라니.... 아버지, 역시 피는 못 속입니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말.

'아마..., 유리안이 했겠지.'

여명회와 검은 기사로 바쁜 날을 보내고 있는 나는, 어디에 깊게 관여할 여유가 없었고, 또한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순간적인 기지였지만, 시간을 달라고 한 게 정답인 듯했다.

어차피 거절할 테지만.

***

새벽을 막 지나, 슬슬 일출이 시작될 시간이 되면 유리안의 몸은 각성하고, 저절로 눈이 떠진다.

몸을 단정하게 한 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난 '감은 눈'의 업무를 위해 출근했다.

그렇게 개인 집무실에 들어선 순간, 내 눈에는 '유리안'이 한참 구독했던 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기사 전문지, '더 나이츠'.

문득 흥미가 생겼다. 그 오만방자한 놈이 이런 잡지를 구독하고 있다니.

'검이라면, '내가 가는 방향이 곧 길이다'라고 할 녀석인데 말이야.'

그 탓에 난 잡지를 펼쳐 내용을 살펴봤다. 대문짝에 크게 걸린 덕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 문구다.

- '태양이 기사를 강하게 만든다.'

내용은 이러했다.

오러를 다루는 행위는 정신력과 연관이 있으며, 그 탓에 땡볕에서 단련한 기사는 다른 기사보다 강할 수밖에 없다.

'쓰레기 같군.'

심심풀이로 읽던 전문지를 집무실 구석에 던진 뒤, 내린 짤막한 평가다.

노오오오력을 중시하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방법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것에 적힌 대로 마나를 다루는 것에 '정신력'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띄고 있기는 하다.

'솜브라도 그 예중 하나긴 하겠지.'

심심풀이의 연장으로 난 '솜브라'의 사용 방법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월광검과 솜브라. 둘은 강한 반발력을 보인다.'

중점으로 생각해야 할 부분은 두 기술의 조화(調和).

하나, 그 반발력은 너무도 강한 나머지 '월장검'을 산산조각 낸 전적이 있었다.

'이걸 자유자재로 다룬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하지만 쉽사리 손을 댈 수도 없는 노릇.

'솜브라'는 설정으로만 알던 능력이었고, 그것과 '월광검'의 조합은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에 이름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응?'

생각을 정리하던 도중, 하나의 가능성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름이 없으니, 컨트롤 할 수 없었던 건가?'

설마 그럴 리가.

나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우스갯소리로 치부하며, 이전처럼 월장검에 '솜브라'를 덧씌워 보기로 결심했다.

검이 부러진 이유가 내가 출력을 조절하지 못한 까닭이라면, 이번에야말로....

"유리안 경,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체내의 마나를 끌어 올리려던 찰나,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껴지는 기운이 라즈롯은 아닌 듯하고, 아마 다른 '감은 눈'의 대원인 것 같다.

"누구입니까?"

혹시나 하는 가능성에 결실을 볼 수 있다는 부푼 기대감에 방해를 받자,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 감정이 목소리에서 드러났는지, 문밖의 대원은 움츠러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에렌'이라는 이름의 소년입니다! 유리안 경이 시키신 일 때문에 왔다고 하길래 들여보냈습니다만, 빨리 내쫓겠습니다!"

에렌?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인데.

'아, 트알레의 밑에서 일하던 소년인가 보군.'

그렇다면, 지금 날 찾아온 손님은 '명월관'에서 보냈다는 것이 된다.

이전에 맡겨둔 '검성'의 미행이 어느 정도 결실을 보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아닙니다, 안으로 들여보내십쇼."

"예?"

"들여보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드려야 합니까?"

"아, 알겠습니다!"

모처럼 '솜브라'를 실험할 수 있는 시간이 밀릴 것은 조금 아쉽지만, 별 수 있나.

내가 시킨 일인데.

***

"이렇게나 빨리 올 줄이야. 기대가 많았던 모양이지?"

명월관의 5층에 마련된 트알레의 개인실.

그곳에 도착하자, 낯간지러운 목소리와 함께 그녀가 마중 나왔다.

이전에 봤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거만한 모습이다.

"트알레 님, 저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응, 돌아가렴. 에렌."

"네, 넵!"

아, 이 소년 때문이었군.

짐작대로 에렌이라는 이름의 소년이 사라지자, 거만했던 트알레의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하, 하하.... 화나지 않으셨죠?"

거만했던 인상은 어디로 가고, 트알레는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작게 웃어 보였다.

"예, 화나지 않았습니다."

"다행입니다! 유, 유리안 경도 아시다시피 제가 이 바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카리스마인지라...."

이딴 게 카리스마?

그런 말이 턱 밑까지 치고 올라왔으나, 난 가까스로 참아냈다.

나는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게 보이니 명월관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겠지.

"그, 그럼 유리안 경. 오신 김에 와인이라도 한잔하시겠어요?"

"아뇨, 됐습니다. 어서 스승님에 대한 정보나 알려주시겠습니까?"

"예? 그, 그걸 원하신다면야 뭐."

움찔한 트알레는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더니 자세를 바꿨다.

특유의 고혹적인 분위기는 비굴한 말투와 함께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유리안 경께선 충격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쩐지 조심스러운 어투로 트알레는 말을 이었다.

"검성, 하이든 라이히께서는 제국 신민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신성국 페레난드로 망명을 선택하셨어요."

망명이라....

'검은 기사' 노릇을 하지 않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나.

"...생각한 것보다 놀라지 않으시네요?"

놀랐다. 그것도 엄청 많이.

"사실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트알레는 재차 물었다. 당황한 기색이 그녀의 말에서 묻어났다.

"저...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유리안 경께선 검성 님의 제자셨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럼, 검성께서 제국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또 숭고한 희생을 하셨는지도 잘 아실 텐데...."

"희생이라, 후후."

트알레의 말을 듣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보니..., 그녀가 말한 '숭고함'이 웃겨서다.

 

 

 

 

 

 

 

 

78화. 떨어진 별(2)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는 자유도를 자랑하는 스토리 게임답게 플레이어는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플레이하는 주인공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이상적이며 인의(人義)를 지키는 쪽으로 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 바람이 반영된 주인공, '검성'은 누구보다 제국에 헌신적이었으며, 숭고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선택을 해주던 플레이어가 없는 거야.'

어찌 보면, 그에게 인간미가 생겼다고 할 수 있겠다.

아드라탄 제국의 황실은 검성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를 옹호하는 듯 보이지만 내심 그의 몰락을 원하고 있었다.

신민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그 탓에 황실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자.

그를 제거하기 위한 시도가 몇 번이나 있었으나, 검성은 그걸 견디고도 제도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다 결국 터질 것이 터져버린 것이다.

'신성국으로의 망명'.

나 같아도 이런 제국에 남는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 유리안 경이 그렇게 웃을 이야기일 줄은 몰랐네요."

검성이 제국을 버린다는 말에 생각을 정리하던 찰나, 트알레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게 웃을 일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그, 그런가요? 호, 호호!"

긴장한 기색을 보이며, 사뭇 진지한 어투로 묻던 트알레는 내 말에 멋쩍은 웃음을 입에 담았다.

비굴함도 극에 달하면, 오히려 개성이 되는 것 같다.

'신성국 페레난드라.'

언젠가 가봐야 하는 곳이긴 하다.

태양신 솔라룬을 모시는 태양신교의 본 고장. 대륙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보유한 종교의 총본산이며, 동시에....

'가장 많은 성물을 보유한 나라지.'

당연하지만, 성물에도 등급이 있다.

테넬론이 보유한 성물, 마신성(魔神盛)처럼 포괄적이며, 영향력이 많은 성물을 '국보(國寶)'급이라 불리며 신성국엔 그에 상응하는 성물을 몇 개 보유하고 있었다.

'성물을 얻기만 할 수 있다면 좋지만....'

하지만 국보가 괜히 국보겠는가?

원한다고 쉽게 얻을 수 있다면, 그 이름이 아깝겠지.

그런데, 단 하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성물이 신성국에 있기는 하다.

정야(靜夜)의 종.

국보급은 아니지만, 효율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래서, 유리안 경은 어쩌실... 생각인가요?"

트알레는 두려움과 호기심이 그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뭘 말입니까?"

"하이든 라이히 경 말입니다. 그..., 혹시 신성국으로 따라가실 생각은 아니겠... 지요?"

그럴 리가.

하지만, 세간이 '유리안'을 보는 시선은 스승의 목을 따고 싶어 하는 미치광이다.

"생각 없습니다."

"그, 그렇지요?"

"지금은 말입니다, 후후."

그 기대에 부응해주기 위해, 난 낮게 웃으며 트알레를 쳐다보자, 그녀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아, 안 돼요! 전 검성 님의 정보를 알려준 꼴이 되었으니... 만약 유리안 경이 하이든 라이히 경을 습격한다면, 저도 중죄로 엮일 수 있다구요!"

"그럼, 죽이면 되는 것 아닙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마련이니까요."

"...딸꾹."

살벌한 말을 당연시 얘기하는 내 태도에 트알레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에 난 웃음이 나올 뻔했다.

흡혈귀 주제에 귀여운 구석이 있다.

***

언제나처럼, 나는 분재를 가꾸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란에 근심이 찬 머리를 비우는 데 가장 좋은 방법. 그것이 바로 이 분재를 가꾸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잔가지를 치고, 잎을 고르고.

그 과정에서 복잡했던 머리를 차분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지금 내 심정은 잔잔한 호수와 같으니, 이것을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라고 하던가.

그 말이 실로 딱 어울린다.

'제라르의 건도 정리되었고, 어느 정도 잠잠해졌으니, 슬슬 테넬론이 승계식 일정을 잡겠군.'

머리가 맑아지니 생각의 뿌리는 그 영역을 더욱 쉽게 넓힐 수 있었다.

그 덕에 여명회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밟을지 간략하게나마 예상되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난 화분을 쳐다보았다. 작은 자연 하나를 떼어서 옮긴 듯한 풍취. 역시....

"아름답군요."

에고가 강한 '유리안'의 자아도 이것은 인정했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동시에 아련함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안젤리카.'

이곳에서 나와 함께 새 삶을 시작한 분재 중 하나의 이름. 녀석도 자랐다면, 이렇게 위용을 뽐내고 있었을 텐데. 크흑!

똑똑──!

슬픔에 잠기려던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라즈롯일 것이다.

아마 승계식에 관한 정보를 전하려고 왔을 테지.

"테넬론 경께서 승계식 일정을 잡으셨습니다."

예상대로, '그날'이 온 모양이다.

"언제입니까?"

"3일 후, 겐멜 수도원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흐음."

짧은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제부터 '여명회'가 궐기하고, 지금까지 쌓아둔 명분을 터트리기 시작하는 시기.

조금 이르기는 했지만, 검성이 떠난 지금을 테넬론이 더할 나위 없는 적기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으음.'

그러나, '여명회'의 중역인 난 이 현상을 반갑게 보지 못했다.

왜?

'이 자식들의 성공이 거듭되면 X 되니까!'

여명회의 수장인 테넬론은, 정확히 말하자면, 마신성(魔神盛)에 깃들어 있는 마신의 잔재 사념은 자신을 봉인한 인간들의 멸절을 기원(祈願)한다.

그 '마신성'이 권력의 중추인 집단이 성장하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나는 어디까지나 여명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거니까.'

겉으로는 편을 들면서,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다.

"다른 비숍들도 대부분 참가할 예정인 듯합니다."

"저는 참가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난 이번 승계식에 참여하지 않을 생각이다.

"예, 당연히 참여하실 테니, 다른 비숍들과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리안 경이 비숍 직위를 빨리 얻고, 최근 에이든 경과 제라...."

내가 무조건 참가할 줄 알았는지 라즈롯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던 도중,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그는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네?"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 왜입니까, 유리안 경."

'왜'라니.

더 이상 테넬론과 친해지기 싫어서지.

"최근, 무명객단을 통합하고 제라르의 속내를 밝히신 탓에 테넬론 님께서 유리안 경을 아주 좋게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승계식을 참가하지 않는다고 하신다면...."

그래, 그 이유 때문이다!

가뜩이나, 근래 테넬론의 시선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부정적인 의미로 '좋지 않다'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로 말이다.

라즈롯이 말한 대로 그 일이 있고 난 후, 평소에도 '유리안'을 좋게 보던 테넬론의 시선이 더 끈적해졌다.

'심지어 검성 놈도 제도를 떠난 탓에!'

내 감일 뿐이지만, 차기 '아크 비숍'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비숍'이라는 직책을 덜컥 받는 바람에 문제가 되기는 했으나, 이상은 안 된다.

아무리 '비숍'이라고 해도 지금까지 여명회의 일원으로서 '황실'의 규율에 위반되는 행위까진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신한다.

그런데 아크 비숍이 된다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일들을 처리해야 할 경우가 많아질 거야.'

그건 곤란하다.

물론, 내가 '아크 비숍'의 직위를 이어받을 것이란 확신은 없지만, 만에 하나를 준비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어디까지나 난 '여명회'에 잠입 중이란 스탠스를 취해야 한다.

훗날, 이 교단이 뿌리뽑힐 때 내 정체가 들키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둬야 한단 말이다.

'그러니 한 번 더, 우리의 관계는 비즈니스와 같다는 어필을 해야 한다.'

속으로 울분을 삭이며, 라즈롯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신나게 떠들던 녀석은 정신을 차렸는지, 헛기침하기 시작한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유리안 경께선 힘을 원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음, 그렇지요."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한 적기가 아닙니까?"

아무래도 라즈롯은 내 판단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다.

하긴, 승진을 위해서 남녀노소, 어린아이도 죽이던 살인광이 중요한 시점에 일을 그르친다니 의문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겠다.

너무나도 지당한 반응이었기에 딱히 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속내를 탈탈 털어버리면, 그것도 웃긴 일이겠지.

"라즈롯, 목표를 크게 가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냥 얼버무리자.

"그릇..., 말씀이십니까?"

"예, 저는 힘을 원해서 여명회와 함께하나, 뜻이 같은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유리안 경께선 어디까지 보시는 겁니까."

어디까지 보기는.

그냥 한 말인데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공포'의 색을 머리 위로 띄우며, 라즈롯은 사뭇 진지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목적이 무엇인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예?"

"보는 위치가 다르면, 보는 곳이 같아도 풍경이 다르기 마련인데."

이전에 '유리안'이 '검성'에게 검을 겨누며 했던 말.

그것을 내뱉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제는 대사를 인용해도, 딱히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는 어처구니가 없던 말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렇... 습니까?"

라즈롯은 어딘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유리안 경은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전하겠습니다."

그래, 그래라.

정중한 인사와 함께 라즈롯이 자리를 비우자, 고요한 집무실에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총대주교 승계식은 테넬론에게 큰 의미가 있겠지.'

그 덕에 내가 자리를 비운다면, 정나미가 떨어지는 것도 자명한 일이다.

오히려 그게 목적이다.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야 하는 입장이니 말이다.

이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지만, 계속해서 유지해야만 한다.

승계식이 끝나면, '황실'과 '여명회'는 확실하게 충돌할 것이다.

'폭풍이 지나가는데, 그 중앙에 있을 필요가 있어?'

피하는 게 상책이지.

빠각──!

"...음?"

그렇다면 차기 '아크 비숍'은 누가 될 것인가?

그 고민을 하던 도중, 손끝에서 기묘한 감각이 타고 흘렀다.

"아...."

손으로 훑던 분재의 가지. 그 끝자락이 부러지고 만 것이다.

어쩐지 불길한데.

***

"축하드려요. 차기 아크 비숍."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난 귀를 살짝 매만졌다.

잘못 들은 건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당신이 여명회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어요. 대주교께서 유리안 경을 많이 아끼시는 모양이더군요."

장난을 치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으나, 상대는 엘레노아다.

이런 장난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행위도 싫어할 터.

"장난이 심하시군요. 제가 그 자리에 어울릴 것이라고 보십니까?"

그럼에도,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구심을 입에 담았다.

에이, 엘레노아. 장난이 너무 심한데?

"겸손도."

엘레노아는 짧게 웃으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난 지끈거리는 두통 탓에 관자놀이를 한 번 손가락으로 짚었다.

'어쩌면 좋냐?'

문득, 엘레노아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엘레노아 양께선 이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겠군요."

"왜죠?"

"당신이 아크 비숍이 될 수 있도록, 제가 협력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하."

뭔가 생각이 났다는 뉘앙스.

"유리안 경을 추천한 건 저예요."

...네가 그러면 어떻게 하냐.

 

 

 

 

 

 

 

 

79화. 변덕(1)

엘레노아가 날 '아크 비숍'으로 추천했다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지금껏 '아크 비숍'이 되면 안 되는 이유를 장황하게 생각하던 난, 나를 '아크 비숍'의 자리에 추천했다는 엘레노아를 쳐다보았다.

'이 미친....'

…X.

욕지거리가 턱 밑까지 치고 올라왔으나, '유리안' 특유의 냉소적인 품성과 <존댓말>이라는 캐릭터성이 그것을 틀어막았다.

"이상하군요, 엘레노아 양. 아크...."

말을 잇던 도중, 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마나 감지>까지 활용했다.

혹여나, 듣는 사람이 있다면 귀찮아질 일이 벌어질 것이 자명했기에.

다행히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 후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에게 부탁하지 않으셨습니까? '아크 비숍'이 될 수 있게 말이죠. 근데 지금에 와서...."

"아, 물론 그랬었지요. 하지만, 당신에게 그 말을 하고 나서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었어요. 그 결과가..., 보시다시피 이렇네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여는 엘레노아의 모습에 다시 한번 욕지거리가 나올 뻔했다.

도대체 무슨 의도인 거지?

"제가 아크 비숍이 될 수 있게 부탁한 것은 다른 의도는 없어요. 제가 원하는 건 여명회의 존속이에요."

"...."

"아, 물론 아크 비숍이라는 직위가 살짝, 아주 살짝 탐나긴 했지만, 회(會)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저보다는 유리안 경이 그 자리에 오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게 그거잖아!

테넬론이 마음대로 주무르는 여명회는 악명을 떨치기는 하나, 오래 가지 못한다.

결국 검성의 손에 마무리되는 스토리다.

"생각 없이 당신을 추천한 건 아니에요. 저도 저 나름 저울질을 한 뒤, 유리안 경. 당신을 추천한 거랍니다."

실눈에 무표정으로 서 있는 나에게 그녀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뿐만이 아니에요. 절 포함한 총 세 명의 비숍이 당신을 지지하고 있답니다."

총 세 명?

대체 내가 뭘 했다고 세 명이나 날 지지한단 말이냐.

오히려, 비숍들은 날 싫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지할 구석이라곤 찾을 수 없는 오명투성이에, 입단하자마자 '비숍'의 직위를 받은 굴러온 돌이고, 테넬론의 총애를 받아 비숍들의 눈엣가시 같을 텐데.

"핀텔 경과 당테스 경. 그 둘이 저와 뜻을 같이하고 있죠."

엘레노아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도 이해할 수 없는 인사들이다.

물론 제라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핀텔은 조금 달라질 줄 알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고, 아무리 협박했다지만, 당테스가 나를?

"...그런데, 핀텔 경이 다시 비숍이 되신 겁니까?"

"여명회의 내부 사정에 전혀 관심이 없으시네요. 이번에 제라르의 자리를 그가 가지게 되었어요."

빌어먹을 핀텔 녀석!

비숍 직위도 되찾았으니 평소대로 자기 주관을 뚜렷하게 유지해야지!

뭐 하는 거냐고!

알현실에서 으름장을 놓던 그 모습은 어디 간 거야!

"그렇군요. 하지만, 전 아크 비숍의 자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왜죠?"

왜긴 왜야, 깊게 엮이기 싫어서지!

"유리안 경의 목적이 뭔지 명확하게 알지는 못하나, 한 명이라도 많은 편이 더 도움이 될 텐데요?"

아이고 이 답답아!

그 한 명, 한 명이 여명회면 도움은커녕 내 목을 조르는 꼴이다!

"약자나 뭉쳐 다니는 법. 강자는 자기 뜻을 고독하게 펼칠 뿐입니다."

"그래서, 아크 비숍의 자리는 거절하겠다는 뜻이군요?"

"역시 엘레노아 양은 눈치가 빨라서 좋습니다."

그리 말하며, 난 테넬론과의 약속을 잡을까 고민했다. 아니, 이럴 땐 강하게 나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런 식으로 하면 '총대주교'가 된 테넬론의 권위를 무시하고 호감도까지 깎을 수 있을 것이다.

'...웃기지도 않는군.'

이전에는 눈에 들도록 '여명회'의 일을 도왔더라면, 이번엔 눈밖에 벗어나도록 해야 하다니 말이야.

***

"오늘 아침 해가 다른 곳에서 떴는가? 그렇게나, 유리안에게 으르렁거리던 자네가, 인제 와서는 그를 지지하다니...."

수도원에 발걸음을 옮긴 핀텔은 자신을 향해 말을 건 사내에게 천천히 고개를 옮겼다.

핀텔의 눈에 어쩐지 가벼워 보이는 분위기의 남자가 들어왔다.

"이렇게 말을 섞는 건 오랜만이군, 당테스."

반가운 기색이라고는 1도 보이지 않는 태도로, 핀텔은 대답했다.

당테스 크리스토.

제라르와 깊은 사이를 지내며, 제국 운송업의 한 축을 자랑하는 크리스토 가문의 귀족.

'밖'이라면 친히 웃으며 살갑게 구는 것도 용인해줄 수 있었으나, 여명회의 '안'에서 그가 이런 식으로 말을 섞는 것에 대해 핀텔은 치가 떨렸다.

"하하, 삭막한 말, 하지 말게나. 핀텔!"

자신의 생각을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지. 당테스는 친한 척을 하며 다가왔다.

"예전에야 뜻이 맞지 않았지, 이제는 한배를 타지 않았나?"

한배를 탔다라....

그 말에 핀텔의 눈이 묘하게 날카로워졌다.

"너무 표독스러운 눈으로 보지 말게나. 자 일단 앉지. 서서 담소를 나눠봤자, 발만 아플 뿐 아니겠는가?"

"'한배를 탔다'라는 말은 거북하기 짝이 없군. 넌 제라르를 대신할 방패로 유리안 경을 택한 게 아닌가?"

"음...."

앉는 것을 권유하던 당테스는 이어지는 핀텔의 말에 탄식을 입에 담았다.

"자네도 그렇지 않았나?"

"뭐...?"

"나처럼, 이 '여명회'라는 이름을 쓰기 좋게 거대한 방패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무엇이든 독이 될 수 있다.

특히나, 이런 어두운 쪽에 관계된 단체라면 더욱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테스, 자신은 수면 밑에서 조용히 득실만을 챙기기 위한 하나의 방파제가 필요했다.

"이해관계란 그런 것이라네 하하!"

"너와 같은 취급하지 마라!"

그러나, 호통과도 같은 핀텔의 목소리에 당테스는 당황했다.

"유리안 경께선 내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다! 네가 불경한 생각으로 그를 지지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그 뜻을 내게 내비치지 마라."

강한 신념조차 느껴지는 목소리.

그 탓에 당테스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하, 하하... 핀텔. 자네는 조금 더 이성적인 남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난 충분히 이성적이다. 그리고, 난 오브라딘 가문의 일원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당테스는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이름을 준 자에게 생을 바쳐라. 우리 가문의 가언이 아니더냐?"

'단단히 정신이 나갔군.'

당테스는 속으로 혀를 차며 생각했다.

"이름을 줬다고 말할 정도로, 심도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핀텔 경."

그때, 엘레노아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걸 지켜보던 핀텔은 어쩐지 불쾌한 뉘앙스를 풍겼으나, 당테스는 오히려 팔을 벌려 환영했다.

"엘레노아 양의 외모는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군요. 나 같은 반딧불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강렬한 불빛처럼 말이요."

입에 발린 말을 하며, 아첨하는 당테스를 보았으나, 엘레노아는 그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준 자'라는 부분은 황실이 초대 오브라딘 가주에게 직위를 내린 것 때문. 즉, 황실에게 충의를 다하라는 것을 돌려 말한 것 아닌가요?"

"크큭."

엘레노아의 말에 핀텔은 짧게 웃었다.

마치, 그녀의 말을 듣고 할 말은 준비했다는 듯 그는 빠르게 받아쳤다.

"그건 선조의 이야기다, 엘레노아. 이름을 준 황제도, 그 이름을 받은 당사자도 지금은 이 세상에 없어."

정말로 터무니없는 말이다.

아무리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잊었다고 해도, 귀족은 귀족.

불경한 말을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은 삼족을 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행이었으니까.

"터무니없기는."

"난 죽은 자의 이름을 짊어지는 것에 뜻을 두지 않는다. 쓸데없는 것을 중시하는 데카당들처럼... 응?"

"...왜 그러나, 핀텔."

"유리안 경이 오셨군."

그의 말에 모두의 고개가 핀텔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의 말대로 실눈의 남자가 수도원을 걷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고요한 수도원을 걷는 그의 모습은 잔잔한 호수 위에 뜬 달처럼 이목을 당겼다.

"벌레가 꼬였어."

당연하게도, 핀텔이 말한 '벌레'는 '여명회'에 속해 있는 교단원 중 한 명이었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 '유리안'의 행보를 백안시하고, 그를 시기하는 녀석들.

"하하. 제라르를 따르고 있는 몬시뇰인 것 같구만. 내, 저 친구를 잘 알고 있지!"

"그럼, 가서 말리는 게 어때요? 유리안 경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이던데."

"호오, 엘레노아 양은 독심술을 사용할 수 있나? 내가 보기엔, 평소와 똑같아 보이는데... 핀텔, 자네 어딜 가나?"

말을 하던 당테스는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한 핀텔에게 말을 걸었다.

"저런 괘씸한 놈. 몬시뇰 따위가 누군 줄 알고, 유리안 경에게 함부로 말을 거는 것이냐?"

충성심이 지극한 핀텔의 말에 당테스는 헛웃음을 짓더니, 엘레노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평소와 다른 핀텔의 행동에 어깨를 으쓱하자.

"끄, 끄아아아아악!"

신랄한 비명이 정적이었던 수도원에 울려 퍼졌다.

유리안이 말을 걸었던 몬시뇰의 팔을 비틀어, 땅에 처박은 탓이다.

"죄송합니다만, 지금 바빠서 말입니다."

그 후, 유리안은 당연한 것처럼 수도원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인지라,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경직되었다.

수도원에서만큼은 분쟁을 피하던 그의 불문율(不文律), 그것이 눈앞에서 깨졌기 때문이다.

"...엘레노아 양의 독심술이 정답이었네. 악명과 달리 수도원 내에선 되도록 조용히 지내던 그가 이런 소란을 일으키다니 말이야."

"뭘, 당연한 일이다."

당테스의 혼잣말에 핀텔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엔 이유 모를 자긍심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 곧 '아크 비숍'이 되실 유리안 경이시다. '비숍'이나 '몬시뇰'과는 달리 '아크 비숍'은 책임자의 자리. 유리안 경께선 여명회의 책임자 중 한 분으로서 그 위엄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본보기를 보이신 거다."

중후한 태도로 말하는 핀텔.

그런 그를 당테스는 한 차례 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엘레노아도 마찬가지다.

'...멍청한 사람.'

유리안이 이곳에 들른 이유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멋대로 떠드는 모습이 웃길 따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사람은 아크 비숍 직위를 받지 않겠다고 말하기 위해 온 건데 말이야.'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지금 이곳에서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엘레노아는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아크 비숍의 직위를 받고,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제일 적합한 사람은 저 남자일 텐데.'

테넬론을 대항할 수 있으며, 그의 폭주를 막아설 수 있는 유일한 남자가 '아크 비숍'의 직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내심 아쉬웠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리에 적응하는 것이지! 유리안 경께선 그 누구보다 현명하시게 대처하시는 중이다!"

"알았으니, 조용히 좀 하세요. 핀텔."

도대체 이 사람에게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까지 사람이 변한 거야?

 

 

 

 

 

 

 

 

80화. 변덕(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