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 100-110

100화. 너 요즘 건방지다?

끼이익──!

온갖 소음과 안내 방송이 뒤섞인 가운데 공명 열차가 역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익숙한 풍경이 린네의 시선에 들어왔고, 동시에 수많은 인파가 율시스에게로 모이기 시작했다.

"율시스 전하, 무사히 귀국하셔서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가장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린네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황실의 비서실장인 세든 오르비안.

"응, 훌륭한 호위들 덕분에 아무런 일도 없었지, 뭐야."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세든에게 너스레를 놓으며, 율시스는 웃음을 지었다.

주변에는 비서실장을 제외하고도 많은 귀족과 신문사의 담당자로 보이는 인물들도 보였다.

기자들은..., 취재하기 위해서인가?

적국인 신성국에 갔다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확인하기 위한?

'다른 황실 직계와 귀족이라면 충분히, 이런 식으로 확인할 수 있겠지.'

예상대로라면, 황실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일이라며, 황실의 관계자들이 으름장을 놓았을 터인데.

생각 밖으로 황자의 인기가 많다는 것을 느낀 린네는 어깨를 으쓱인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마치, 동물원을 나간 멸종 위기종이 다시 돌아온 것처럼 보는군요."

율시스를 걱정하는 주변 인물들을 보며, 유리안은 신랄한 비난을 입에 담았다.

"...당신은 너무 적나라하게 말해요."

"이것 또한, 충성심을 표현하는 방법 아니겠습니까?"

그리 말한 유리안은 유유자적하게 율시스가 있는 인파 속으로 향했다.

능청스러운 미소를 흘리는 실눈의 남자.

나긋나긋한 말투로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가 싶더니, 주변에 모인 인파들이 움찔하며 벌벌 떨었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분명, 웃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살벌한 이야기를 했겠지.

그런 유리안의 모습에 혀를 차던 린네는 문뜩 신성국에서 겪었던 일을 곱씹어 보았다.

'그때, 투기장 지하에서 본 유리안의 오러는 평소와 달랐어.'

마지막 순간, 삼각 데몬의 몸을 난도질하며 안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검은색 오러.

그림자와 흡사한, 흉흉한 분위기를 품던 그것은 여태까지 유리안이 지향하던 '월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혼자서 두 가지 성능을 지닌 오러를 운영하는 거야?'

그건 불가능하다.

'아마도....'

하지만 쉽게 확실할 순 없었다.

일반적인 개념과는 거리가 먼 운용 방식을 사용하는 검사, 그것이 유리안이었으니까.

게다가.

'나만의 방법을 찾으라고 했어.'

스승인 하이든 라이히와는 달리 그는 오러에 '통속적'인 개념을 부여하지 않았다.

현대의 '오러 운용법'은 수많은 범재와 소수의 별(星)들이 쌓아 올린 집적물.

'그것의 가르침대로 수련해간다면 정형화된 검사가 되겠지.'

린네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유리안은 그것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방법을 찾으라고 했다.

'스승님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야.'

쉬운 길을 버리고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같으니. 자칫 잘못하다간, 그것은 길을 잃을 수도 있는 행위니까.

하지만 투기장에서의 전투를 본 이후, 그의 말이 어느 정도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지하에서 본 유리안의 오러는, 그동안 그녀가 알고 있던 일반적인 오러와 거리가 멀었다.

경지에 이른 검사들의 전투를 보면 개안한다고 하던데, 그것을 관찰한 덕에 그녀는 한 경지,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뿌듯함도 잠시.

'하지만....'

다시 '검은 오러'에 대해 초점을 잡고, 생각을 정리하던 그녀는 시선을 유리안에게로 옮겼다.

'언젠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인적이 드문 새벽.

서슬 퍼런 달이 뜰 시간이면, 그 아래엔 늘 '그림자'가 지기 마련이다.

최근 제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그 '그림자'는.

'검은 기사.'

유리안의 '검은 오러'는 왠지 모르게 그와 흡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과대망상과도 같은 생각이 순간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검은 기사가 유리안?'

'웃는 처형대'와 '민중의 영웅'이 한 사람이라고?

냉혹하고 살인을 즐기는 그가 이런 그녀의 의중을 알게 된다면.

- '어찌 그런 불경한 자와 저를 비교하십니까? 전 유리안 크라파이트 프라손입니다.'

그녀를 지탄하면서 자존감 높은 말을 내뱉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린네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래도. 비슷해도 너무 비슷해.'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는.

풋. 조소를 흘렸다.

'설마.'

***

참으로 웃기는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제도에 도착하자마자, 얼마나 지냈다고 내 저택이 그리워질 줄이야.

심지어 '집이 최고야'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돈내산도 아닌데 말이다.

"이러다, 나 자신을 정말 유리안으로 여길 것 같습니다."

이미 반쯤은 그런 경향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하던 존댓말도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돌아오셨습니까, 유리안 님."

"예, 이것들을 정원으로 옮겨주시겠습니까?"

"신성국에서 공수해 오신 난초인 모양이군요. 잘 알겠습니다."

저택의 집사는 이미 '유리안'의 변덕과 난초에 익숙해졌는지, 내 말에 당황하지 않고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여로.

녹초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내 몸은 홀린 듯 저택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이곳도 오랜만이군요."

코트를 대충 던져두고, 두 눈을 감고 지하에서 느꼈던 서늘한 감각을 한 번 더 곱씹었다.

솜브라와 월광검의 조합, 월식(月蝕).

강철보다 단단한 이델의 몸을 꿰뚫고, 그에게 안식을 안겨준 검을 떠올리자 마나혈이 한껏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몸이 반응하는군.'

나사 빠진 이 몸은 검을 다룰 때만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검을 손에 쥐어야만 따뜻해지다니.

미친놈도 아니고.

그렇게 어이없어하는 사이, 전신 마나혈에 있던 오러가 검에 집중된다.

우웅.

'...그때보단 약해.'

당시 감각을 되살려 '월광검'에 솜브라를 덧대 보지만, 지하에서 보던 것보다 색이 옅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델을 벨 때보단 확실히 출력이 약하다.

그 이유는 대강 알고 있다.

'뜨인 눈이 발현되지 않아서겠지.'

그래도 예전과는 달리, '보이지 않던 것'이 보다 '뚜렷'하게 보였다.

그 예로.

"흡."

솜브라를 거두고, '월광검'만을 휘두르자, 잔잔한 파문이 훈련장 중앙의 목인(木人)에게 날아간다.

비수처럼 날카롭진 않았으나, 나름의 속도를 가진 오러.

흔히 말하는 그 '검기'는 목인의 몸에 닿자, 작은 생채기를 남겼다.

"...후우."

마법이 통용되는 세계관이다 보니, 이런 식으로 마나를 방출하는 능력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법사야 그렇다 치지만, 검사들이 마나를 방출하기 위해서는 제법 높은 경지에 올라야 하는 것이 문제지만.

'오러'는 마나를 사용하기는 하나 마법과는 궤를 달리한다.

사용자의 색채가 입혀진 '오러'는 주체와 멀어질수록, 그 힘을 잃고 흩어지기 마련이니까.

하나, 지금처럼 일정한 '경지'에 도달한다면 그것조차 가능하게 만든다.

'일필휘지.'

마치 '오러'를 이용해 시원스럽게 글씨를 쓰는 것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본래라면 주인공인 검성이 얻었어야 할 능력이지만, 어찌하다 보니 내가 얻었다.

아마도, 이전에 얻은 '새로운 검성'이란 특성의 부산물이겠지.

'아직은 날카로운 검기를 쏘아낼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꽃피울 수 있겠군.'

이 나이 먹고, 잠재력이라는 것에 사뭇 가슴이 두근거리다니. 나도 어쩔 수 없는 놈인가 보다.

제대로 써먹을 구석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 능력을 고작해야 '목인' 따위로 확인하고 있다는 점에, 그것대로 아쉬움을 느꼈다.

"유리안 님, 말씀하신 대로 화분들을 갖다두었습니다."

우두커니 훈련장에 서 있던 내게 집사가 다가와 다시금 말을 걸었다.

"그런데, 황실에 들르지 않고 바로 집에 오셨습니까?"

"예."

"그렇... 습니까?"

약간 의아스러운 눈치다. 아니,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다.

예전, 명예에 눈이 먼 '유리안'이라면 이번 일을 널리 알리기 위해 황실을 돌아다니며, 거들먹거렸을 것이 분명하기에.

무려, 잠재적 적국인 신성국으로 향했던 황자의 호위를 무사히 마친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업적을 알리는 것보다 해야 할 일이 있지.'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난 '그곳'으로 가기로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멈칫.

순간 '유리안'이 제지한다.

'뭐지?'

본능적으로 발길이 침소로 향하자,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누가 결벽증, 아니랄까 봐.'

신성국에서 돌아온 그대로의 옷차림을 하고 있고, 검까지 휘둘렀으니.

먼지 덮인 옷은 입기 싫은 거겠지.

***

비가 잔뜩 내리는 회색의 제도.

평소에는 자주 없는 폭우에 라즈롯은 인상을 찌푸리며, 비가 내리는 길을 내달렸다.

퀴퀴한 우비의 냄새가 코끝을 찌르는 와중, 눈앞에 보이는 큼지막한 마차.

라즈롯은 그것으로 달려가 문에 노크했다.

"들어와라."

안에서는 중엄한 목소리가 들리자, 라즈롯은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그것에 올라탔다.

"말한 물건은 가져왔느냐?"

마차에 이미 탑승하고 있었던 것은 에이든이었다.

고압적인 자세로 누군가를 업신여기는 듯한 태도를 보인 그는 들어온 라즈롯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 모습이 익숙한 라즈롯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한 것을 건넨다.

"마탑에서 올라온 보고서들의 사본입니다."

"쯧."

아무리 우비 속에서, 비를 맞지 않게 가지고 왔다고는 하나, 그에서 떨어진 물방울에 서류는 지저분해져 있었다.

혀를 한 번 찬 에이든은 라즈롯이 건넨 서류를 받더니,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서류의 위에서 아래로 흐를수록, 얼굴은 굳어져만 갔다.

"혼석의 연구는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군. 아일린, 그 더러운 반쪽짜리 년."

표독스럽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에이든.

그가 소문난 순혈주의자라는 것은 제국의 마법에 종사하는 인물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피는 탁한 주제에 머리는 비상해서 문제야."

"그래도..., 같은 가문원이니, 가문의 입장에선 큰 문제가 없는 것 아닙니까?"

라즈롯은 한 마디 덧붙였다.

빈민가의 고아 출신으로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귀족들의 행보에 의구심을 품어오던 라즈롯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겪어온바, '순혈'보다는 그들이 말하는 '더러운 반쪽짜리'가 더 뛰어나고, 그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혼석을 연구하는 아일린이 그렇고, 유리안이 그렇지 않은가.

그는 평소에 들던 생각을 저도 모르게 입에 담자, 그것이 자신의 실수였다는 것을 싸늘하게 식어가는 분위기로 파악할 수 있었다.

"주관을 갖기 시작했군."

"쓰, 쓸데없는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비숍 에이든."

"아니, 괜찮다. 틀린 게 있으면, 고치면 되니 말이야."

늘 듣던 차가운 어투가 아닌 살가운 말투로. 에이든은 말했다.

퍽.

동시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라즈롯은 턱 아래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뒤늦게 올라오는 통증을 참으며, 라즈롯은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거기엔 에이든이 들고 다니던 마법 지팡이가 자신의 존재를 뽐내며 자리하고 있었다.

"어떠냐, 좀 정신이 드느냐?"

"으, 으윽...."

퍽. 퍽!

이번엔 지팡이를 들어 라즈롯의 머리와 등을 가격했다.

퍽, 퍽.

몇 차례 더.

에이든의 지팡이가 그의 몸을 후려칠 때마다, 억눌린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법의 적통성. 그것을 알지도 못하는 놈이 무슨 의문을 품는 것이냐?"

"죄, 죄송... 합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군."

신음을 머금은 라즈롯의 말에도 지팡이를 계속 휘두르려던 찰나.

히이이잉──!

갑작스러운 말의 비명에 에이든은 지팡이를 멈추었다.

"무슨 일이냐?"

"마, 말 앞으로 누군가가 튀어나왔습니다."

밖에서 비를 맞고 있는 마부의 말투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라즈롯을 한 번 노려본 에이든은 문을 살짝 열어, 바깥을 확인해 본다.

이 궂은 날씨에 감히 누가 귀족의 마차를 멈추게 하는지, 그 면상을 보기 위해.

그곳엔 우산을 쓴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어쩐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익숙한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경험한 기운도 아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에이든은 우산을 쓴 남자의 이름을 추정했다.

"...유리안 경?"

이곳에 나타나서는 안 될 자의 이름이 나오자, 공기가 경직되고, 통증에 신음하던 라즈롯은 움찔했다.

"쓸데없는 일을 저지르셨더군요. 에이든 경."

나긋하면서도, 살기가 어린 목소리에 에이든은 움찔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우산을 쓴 채 다가오는 그에게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언제 귀국했나. 꽤나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지금 막 했습니다."

"그래? 무사히 귀국해서 무엇보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에이든은 자신을 떠보는 듯한 어투에 잠시 주춤거렸지만, 의연하게 행동한다.

"당연하지. 같은 황실에 종사하고, 같은 교단원으로서 뜻을 함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말을 하는 주제에 황자 전하가 있는 열차에 데몬을 들이셨습니까?"

"흠."

유리안의 직설적인 태도에 에이든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내 입장에서도 별수 없었네. 제 3황자께서 제 4황자의 행보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지독한 순혈주의인 에이든은 '반쪽짜리'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이젠 과거의 일일 뿐이라네. 그리고, 진심으로 열차를 전복시킬 생각이었으면 자네가 이리 멀쩡히 돌아왔을 리 없지 않은가?"

덕분에 살짝 선을 넘을 법한 발언을 했지만, 에이든은 개의치 않았다.

"없던 일로 하는 게 어떻겠는가? 나도 유리안 경의 독단에 화를 입어 '뿔'에 대한 연구가 늦어지고 있다네."

'그 탓에 '반쪽짜리'가 가문의 염원을 이루는 것을 방관하고만 있다.'

...라는 말을 덧붙이려고 했으나, 자신의 눈앞에 있는 유리안도 '반쪽'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에이든은 말을 삼켰다.

"그러니, 과거의 일은 잊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을...."

콱──!

"크, 크으윽...."

섬광처럼 날카로운 검이 에이든의 어깨에 박혔다.

 

 

 

 

101화. 불온한 공기(1)

지금까지 난 현상 유지를 위해, 나서서 일을 만들지 않았으나, 에이든의 경우는 도를 넘었다고 생각했다.

그 탓에 녀석의 뇌리에 확실하게 우위가 누구인지 심어주기 위해 그를 찾아간 것이다.

위치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전에 '펠코르'에게 말을 해둔 덕분에 그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고, 위치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니가 여기 있어.'

에이든의 어깨에 검을 쑤셔 넣은 난 바로 옆에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라즈롯이 눈에 들어왔다.

"끄으으윽, 이게 무슨 짓... 이냐!"

잡생각 도중, 호통과도 같은 에이든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에이든 경, 저는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닙니다."

피를 흘리는 그를 보며 웃었다.

"끝맺음을 지으러 온 겁니다."

"크윽...."

그래, 난 마무리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다.

아무리 각자의 입장이 있다고는 하지만 저놈은 감히 내 목숨을 노렸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알파스의 건도 있고, 이번 공명 열차에서 일어난 일도.

도저히 간과할 수 없다.

"하, 하하... 끝맺음? 유리안, 네가 날 죽이지 못하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런 주제에 무슨 소리를... 으으으으윽!"

언성을 높이는 에이든이 조용해지도록, 난 검을 살짝 비틀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살생은 피하는 것이 맞긴 하지만, 이놈은 그냥 쓱싹해도 큰 양심의 가책이 없을 것 같다.

워낙 게임에서도 그렇고, 지금 이곳에서도 나쁜 짓을 오죽 많이 했어야지.

더군다나, 내 목숨까지 노렸으니.

양보는 없다.

"쓰,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지...."

입을 열던 에이든은 내 표정에서 진심을 느꼈는지, 점차 말끝을 흐리고 뭔가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응?

그때 녀석의 지팡이에서 마나가 일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허, 함부로 나대면 안 되지.

"크아아아악!"

그것보다 먼저 녀석에게 박아넣은 검을 살짝 들어 올려, 통증으로 마법 영창을 취소시켰다.

"죽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잘 아시잖습니까? 지금까지 제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 말입니다."

물론, 지금의 난 과거의 유리안이 아니지만, 적어도 녀석한테는 그렇게 보이겠지.

"심지어, 다른 귀족들의 입을 닥치게 만들 명분도 있습니다."

"크으으으윽."

"불법적인 데몬의 뿔 연구. 그것을 세상에 밝힌다면, 당신의 죽음을 모두가 함구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 그건... 테넬론 경의 명령으로 모두 처분했다!"

"호오. 정말 그럴까요?"

거짓말.

난 그렇게 그의 말을 일축했다.

그가 연구를 그만두지 않은 것은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겠지.

'피의 화요일.'

작중 에이든은 온갖 역경을 딛고도, 데몬의 뿔에 관한 연구를 멈추지 않는다.

아마 지금도 테넬론의 명이 있었음에도, 계속해서 연구를 하고 있을 터.

그 탓에 녀석은 스토리에서 '검성'의 손에 죽는다.

'제도와 빈민가에 데몬을 활개 치도록 만들었으니, 주인공이 가만두지 않지.'

하나, '검성'의 손에 죽은 에이든의 연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에이든의 저택을 정리하던 중, 연구에 관련된 자료를 도나시엥 학파의 일원들이 발견하고, 학파의 비원을 이루기 위해 다시금 시작되는 실험.

그것이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란 게임에 등장하는 필수 이벤트 중 하나, '피의 화요일'이다.

큰 위험이 아니라면, 그 이벤트가 일어나도록 에이든을 방치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마왕이 탄생할 확률이 높으니 문제야.'

'마왕'은 '마신'의 부활을 원하고, '마신'의 부활은 곧 'Game Over'.

즉, 대륙의 멸망을 의미한다.

그러니 놔두겠냐?

초창기의 나였더라면, '검성'이 해결할 일이니, 놔두었을 테지만 지금 그 정신 나간 녀석은 망명해버린 지 오래다.

"나, 날 여기서 죽인다면 너도 평범하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엔... 다른 교단원의 눈도 있으니 말이다!"

누구? 라즈롯? 걔 내 편이야.

아무리 윽박지르고, 협박을 해도 내 표정에 표정의 변화가 없자, 슬슬 포기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후후, 농담입니다. 에이든 경. 설마 제가 경을 죽이기라도 하겠습니까?"

"그럼 당장 이 검을 치워라! 이 더러운 잡종... 크아아악!"

실컷 떠드는 녀석을 무시하고,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녀석의 오른쪽 눈을 그었다.

끔찍한 비명이 마차 안에 적나라하게 울렸다.

"하지만, 그 외의 짓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를 향해, 난 아주 친절한 미소를 보였다.

마음 같아선, 여기서 끝을 내고 싶으나 내 목적은 녀석의 '연구자료'다.

'필수적으로 진행되는 이벤트. 본래 진행되는 스토리와 검성은 그걸 막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가능하다.

'피의 화요일'이란 이벤트가 일어나는 원인, 그것을 제거해버리면 되니까.

당장 에이든을 죽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지만, 이자가 죽든 말든, 어디선가 연구는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도나시엥 가문의 마법사들은 그것을 토대로 발전, 연구할 것이고.

그러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도 있는 상황이 오니.

'당분간은 살려주마.'

한꺼번에 소탕하기 위해.

이런 소란을 벌였으니, 분노에 눈이 먼 에이든은 날 죽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데몬의 뿔 연구일지'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펠코르가 찾아줄 테니 말이야.'

그건 그렇고.

'미친, 소름 끼치는군.'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질퍽한 감촉.

아무렴 살아있는 사람의 눈을 벤 것이다. 단검을 타고 전해진 감각은 썩 유쾌하진 않았다.

"네, 네 이 녀석...!"

그럼에도 불쾌함을 억누르며, 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뭔가 부족한 느낌인데.

여기에서 '유리안'이라면 뭐라고 말했을까?

특유의 표독스러운 말투로 조금 더 속을 긁어냈을 텐데.

"너무 성내지 마십쇼. 이제는, 기껏해야 '과거'의 일이잖습니까?"

그래, 이놈이라면 상대가 했던 말을 태극권처럼 되돌리는 걸 잘하지.

아니꼬운 놈 같으니.

빙긋 웃어 보인 난 검을 거두고 마차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에이든은 분노가 이글거리는, 한쪽만 남은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그럼,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그 눈의 통증을 기억하시길."

그리 말한 난 마차로부터 몸을 돌렸다.

'...흠.'

문제는 이곳에 우연히 있던 라즈롯이다.

오늘 이곳에 있었던 일이 여명회 내부에서 소문이 난다면, 에이든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다.

공식적으로 테넬론의 명을 어김 셈이 되니.

에이든이 라즈롯을 처리하지 않을까, 살짝 걱정되긴 했지만, 아닐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에게 지금 단 한 명이라도 수족이 필요했으니.

발각도 됐겠다, 아마 대놓고 나를 감시하라고 시킬지도 모르지.

어찌 되었든.

'내가 원하는 건, 에이든이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것일 뿐이야.'

그의 직위는 비숍이고, 도나시엥 가문에 속해 있지 않은가.

모멸 어린 멸칭을 잔뜩 지니고, 무엇보다 '반쪽짜리'인 유리안에게 당하고 꼬리를 만다면.

'순혈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에이든은 자신의 기반을 잃게 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즉, 오늘의 일은 선전포고가 되어버리는 셈이지.'

그런 의미에서 라즈롯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 뒤, 검지를 입가에 가져가 지퍼를 잠그는 제스쳐를 취했다.

모 영화에서 입단속을 시킬 때처럼.

'조용히 해라. 임마.'

알아먹었겠지.

***

"이렇게까지 비서실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줄 몰랐는데, 율시스 황자님의 호위를 기가 막히게 해내신 모양이네요?"

사무적인 오드윈의 목소리가 단장실을 곱게 울렸다.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그녀의 말에 난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스럽게 답했다.

사실 온갖 버라이어티한 일이 있긴 했다.

율시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덕분에 넘어가지만 말이다.

"그래요, 그 콧대 높은 말투를 듣는 것도 오랜만이에요."

"그리우셨습니까?"

"그 정도로 정신이 이상해지진 않아서."

농담 아닌 농담에 오드윈은 살짝 어처구니가 없다는 어투로 답했다.

명색이 '감은 눈'의 단장이다 보니, 그녀는 유리안에게 대하는 태도에 거리낌이 없었다.

"새삼스럽지만, 전 당신이 호위에 지원할지 몰랐어요."

나도 지원하고 싶진 않았다고!

테넬론의 의심 가득한 시선과 성물, '정야의 종'을 회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원한다고 했을 뿐.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렴, 신성국은 위험하잖아요? 특히 당신 같은 사람한테는."

"실제로 위험했습니다."

"...네?"

몸에 바람구멍이 큼지막하게 세 개나 생기는 경험을 했다.

이걸 '위험'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그놈은 높은 확률로 정신병자다.

"율시스 황자님께선 딱히 위험한 일 따윈 없었다고 하셨는데요?"

"그만큼, 제가 분골쇄신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 네."

또 개소리하는구나.

그런 뉘앙스의 눈빛을 보인 오드윈은 무언가 찾는 듯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이거 가져가세요."

"뭡니까?"

그녀는 서류 하나를 내게 스윽 건네주었다.

"이번 호위 관련으로 들어온 상여금이에요."

상여금?

그 말이 웃기긴 했지만, 난 흔쾌히 받아들였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와우.'

하지만 생각 밖으로 서류에 적힌 숫자엔 '0'이 꽤나 많이 적혀있었다.

1나르가 1달러와 비슷한 가치를 지니는 것을 생각한다면.

'역시, 황실은 황실인가.'

한 건에 몇천만 원을 쏘다니.

"이번 일로 황실에선 유리안 경의 수행 능력을 높게 산 계기가 된 것 같네요."

"저야 뭐, 늘 대단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쓱싹하거나, 데몬을 쓱싹하는 것만은 정말 대단하죠."

무슨 의도로 오드윈을 말을 꺼냈는지 안다.

뭔가를 죽이는 것 말고는 쓸모가 없다고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딱히 반박할 순 없었다. 사실이니 뭐.

"그것 말고도 다른 쪽의 수행 능력을 말하는 것이에요. 과거... 라고 하기엔 좀 최근이긴 한데, 머리를 다치기 전의 당신은 죽이는 일 말고는 손도 대지 않았고, 수행하지 않으려고 했으니까요."

듣다 보니, '감은 눈'의 단장 입장에선 나쁘지 않을 법한 일이었다.

유리안이 황족을 수행하는 일이 늘어난다면, '감은 눈'의 단장도 황실에서 입지가 조금은 넓어질 테니까.

"오드윈 단장 입장에선 좋은 것 아닙니까?"

"네, 그렇죠."

"그러면, 왜 그리 퉁명스러우신 겁니까?"

살짝 오드윈의 말투에서 불만이 느껴진 난 직설적으로 그것을 물었다.

"저는 감은 눈의 단장입니다. 당신이 속한 감은 눈의 '단장'이라고요."

알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내 앞에서 그녀는 뭔가 우물쭈물한다.

"제가 딱히 권위주의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그 말도 맞는 것 같다.

"그래도 단장이라면, 단원보다는 많은 급여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와 달리 이상한 주제로 말문을 튼 이유를 알겠다.

"오드윈 단장, 돈이 궁하십니까?"

"궁하진 않아요. 귀족은 몰락했어도 3대는 먹고 살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뭐가 문제십니까?"

의아한 듯한 내 말투에 오드윈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위엄이... 없어 보이잖아요."

그녀의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조금 전에는 권위주의적이지 않다면서.

***

호위 임무를 마치고, 황실에 복귀하니 주변의 시선이 살짝 달라진 것 같았다.

"이번에 율시스 전하의 호위를 완벽하게 수행했다고 하더군."

"저놈이? 사건이나 일으키지 않았다면, 다행일 텐데."

"이상한 건, 예전이었더라면 호위 같은 임무는 수행하지도 않았을 녀석이...."

"황실의 눈에 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것이겠지."

사실 내가 언급되는 것은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귀족이건 신민이건, 원활한 대화를 위해선 가십거리를 쫓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근데, 좀 안 들리게 좀 해라.'

오드윈 방에서 나온 후, 잠시 비서실에 들렀다가 다시 '감은 눈'의 집무실로 돌아가는 길.

수군거리는 귀족들의 목소리가 연신 귀를 때렸다.

저놈들은 겁대가리를 상실한 걸까?

내가 칼 춤추는 게 무섭다면, 알아서 사리는 게 좋을 텐데.

"다들 유리안 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계시나요?"

그런 귀족들 사이로 목소리가 하나 끼어들었다.

생기가 돋친 친근감 있는 어투.

마탑 소속이자, 아일린의 친구인 디아나가 그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저기 계시는데, 직접 이야기하는 건 어때요?"

아무런 적의도 없이 순수한 의문만이 담긴 목소리.

그런 그녀의 말을 들은 귀족들은 헛기침하며, 서로 갈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자, 디아나, 아니 엘레노아는 내게 다가왔다.

"굳이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아는 체를 하자 가면을 벗은 것처럼 냉랭한 말투로 변했다.

"제가 신경 쓰여서요. 은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수군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잖아요?"

"은밀한 이야기라니, 따로 자리를 만들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저도 바쁘답니다? 엘레노아의 삶도 있지만, 디아나라는 삶도 살고 있으니까요."

다시금, '감은 눈'의 집무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옮기자 내 속도에 그녀가 맞춰 걷기 시작했다.

"많이 바쁘시겠군요. 마침, '아크 비숍'이 되었을 테니 일거리가 늘어났겠습니다."

"덕분에 말이죠."

"그래서, 하실 말씀이 뭡니까?"

황궁 내부에 있는 긴 정원을 통과하면서, 엘레노아는 미소를 지었다.

가짜 웃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있어서 미소 지은 모양이다.

"검성은 어떻게 되었나요?"

아, 이거였나?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이름인데.

"테넬론 경께서 물으셨습니까?"

"아직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래도, 미리 들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죠."

"살아있습니다."

내 말에 미소를 머금은 엘레노아가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확실하게 끝맺음을 맺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뭘 끝맺음을 맺어.

그건 테넬론이 직접 해야 할 일이지.

뭐, 지 손으로 못해서 날 보낸 거긴 하지만 말이야.

"예상외의 일이 생겼습니다. 그 건에 대해선 직접 테넬론 경과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머, 저에게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크 비숍인 제 업무는 비숍분들의 '관리'도 포함인데."

"너무 권위적으로 굴지 마십쇼. 제가...."

말을 하던 도중, 피부를 타고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적의'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불순한 의도가 숨겨진 기운.

===

⇒ 〈놀라운 직감〉이 은밀한 행동을 감지했습니다.

===

"흠."

짧게 신음을 흘린 난 슬쩍 엘레노아를 쳐다보았다.

"이것도 당신이 말한 '관리'의 일환입니까?"

 

 

 

 

102화. 불온한 공기(2)

⇒ 〈놀라운 직감〉이 은밀한 행동을 감지했습니다.

"이것도 당신이 말한 '관리'의 일환입니까?"

"네?"

살짝 당황한 얼굴로 엘레노아가 반문하자, 난 코트에 닿은 마나의 '기척'을 손으로 살짝 훑었다.

"도청 마법이군요."

"...칫."

도청이나, 위장, 은신 등, 그런 방면에서 뛰어난 힘을 발휘하는 '음(蔭) 원소'의 마법들.

엘레노아가 그런 음마법의 5위계 마법사다 보니, 이런 술수를 부리는 것에 능했다.

"여전히 눈치가 빠르시네요. 다른 비숍들은 알아채지 못했는데."

다른 비숍들이라.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놈들에게도 이런 짓을 한 모양인데.

나까지 당해줄 필요는 없겠지.

영, 꺼림칙하기도 하고.

"이게 당신이 말한 '비숍 관리'의 일환이냐고 물었습니다."

"네, 맞아요."

아직 다른 비숍들의 원성이 들리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은밀하게 설치한 '도청 마법'은 모두 성공한 모양이다.

"실망입니다. 전 당신이 아크 비숍이 되는 것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생색을 내는 것일 수 있으나, 그녀가 아크 비숍의 직위에 오르는 데, 꽤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내가 포기하고, 엘레노아를 밀어줬으니 그 지분은 상당할 것이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런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누구 때문이긴, 자기 사리사욕을 위해서겠지.

정보를 많이 알아낼 기회가 생긴다는 것은 힘의 축적을 의미한다. 그것이 '아크 비숍'의 위치라면 더욱더.

"당신 때문이에요. 유리안 경."

뭐? 왜 나 때문인데?

헛소리하고 있어, 이것이.

"저는 비숍들과의 사이를 중재해야 할 책임이 있어요. 아크 비숍은 그걸 위한 자리이고요."

지당한 말이다. 그런 거 하기 귀찮아서 거절한 것도 있는데.

그런데, 왜 나 때문이냐고.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이 비숍 에이든을 박살을 내버렸잖아요."

에이, 박살까지는 아니지, 그저 얌전히 경고, 그래, 경고만 했을 뿐....

응? 그걸 어떻게 알았지?

속마음과 다르게 내 표정에 변화가 없자, 한숨을 내쉰 그녀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여명회 내부에서 돌기 시작한 정보에요. 출처를 확실하게 알 수 없어 확신할 수 없지만, 마침 에이든 경이 눈을 다쳤으니 대부분 그 소문을 믿어버렸고요."

아마도, 라즈롯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소문을 낸 모양이다.

내가 분명 입 단속하라는 제스쳐를 취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도청 마법을 사용하신 겁니까?"

"네, 아무래도 제 입장에서는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거든요."

"설마 제가 무슨 일을 저지르겠습니까?"

"...."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런 뉘앙스로 엘레노아는 나를 어이없게 쳐다보다, 이내 또 한 번의 한숨을 쉰다.

"당신은 아니더라도, 에이든의 행보는 심상치 않아요."

"후후, 다른 비숍들과 함께 제 목을 칠 계획이라도 짜고 있나 보군요."

나는 그럴 법한 농담을 던졌다.

아무리 에이든이 화가 나, 눈이 돌았다고 해서, 그리 멍청한 짓을 할 놈이 아니다.

녀석은 5위계인 '바르고' 등급의 마법사이자 곧 6위계인 '리브라'에 도달할 가능성의 소유자.

지식과 이성을 앞세우는 마법사가 아무런 이득도 없이 감정적으로 일을 저지르지는....

"어떻게 아셨나요?"

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

당연한 일이지만, '에이든'이 '유리안'에게 서열 정리를 당했다는, 그 소문은 퍼트린 것은 현장을 목격한 라즈롯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도로 복귀한 뒤, 바로 에이든을 찾은 유리안이다.

그의 평소 행실을 생각하면,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할 터.

'에이든 경을 제압하는 것으로 다른 비숍들의 반면교사로 삼으실 생각이겠지.'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 라즈롯은 이 정보가 여명회 내부에서 퍼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갑작스레 눈을 다친 에이든.

제도에 복귀하자마자, 에이든을 찾은 유리안.

직접적으로 퍼트리진 않았으나, 사람들이 연상하기 쉽도록 다른 교단원들에게 정보를 돌린 것이다.

감은 눈 집무실로 돌아온 유리안은 대기하고 있던 라즈롯에게 진실을 들었다.

"...그렇군요."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즈롯, 제가 에이든 경을 제압한 그 날.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간 것을 보셨습니까?"

"네, 봤습니다."

"무슨 의도였는지, 혹시 아십니까?"

혹시 자신이 잘못된 짓을 저질렀나, 라즈롯은 두려운 눈빛으로 유리안의 의중을 확인해보려 했지만.

실눈의 눈동자에 감정이 비칠 리 없다.

무슨 의도로 저런 질문을 했는지 의구심을 느낀 라즈롯은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한다.

"...그날 있었던 일을 퍼트리라는 의미가 아니었습니까?"

라즈롯의 대답에 집무실은 잠깐 침묵에 잠겼다.

아무런 말도 없이 지긋이 자신을 쳐다보는 유리안의 모습에 '혹시 내가 잘못했나?', '더 강하게 얘기했어야 했나?'라는 생각에 라즈롯은 숨이 막혀왔다.

물이 없는 곳에서도 익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려던 찰나.

"잘하셨습니다. 후후."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린 라즈롯은 내심 안심했다.

***

아,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라즈롯의 대답에 내 머리는 아찔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입에 지퍼를 채우는 제스쳐를 취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잠깐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세계에 '지퍼'라는 개념이 있었나?

'미친....'

너무 '유리안'처럼 연기하다 보니, 뒤도 생각하고 막 던진 것이 화근이었다.

너무 생각 없이 행동했구나.

내 불찰이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더 이상 에이든 경에 관한 이야기는 퍼트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일이 커지기 전에 난 라즈롯의 입을 막기로 결심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할걸.

제도에 복귀한 뒤 여러모로 정신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쓸데없이 상황을 크게 벌린 꼴이 되었다.

"에이든 경이 이상한 수작을 부린다면 보고해주십쇼."

"알겠습니다."

두 눈 반짝이며 자신만 믿으라는 표정으로 대답한 라즈롯은 정중하게 인사를 남긴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이거야 원....'

집무실에 혼자 남게 된 난 생각에 잠겼다.

이걸로 에이든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원하는 바이지만, 쉽게 갈 일을 조금 돌아가는 것이 문제긴 하다.

'비숍'들은 서로 자의식이 강해 자신과 같은 '비숍'에게조차 고개를 숙이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런데 에이든이 그런 짓까지 해가며 유리안에 대적할 비숍들을 모으는 중이다.

'...핀텔?'

아, 걔는 빼자. 이상한 놈이다.

어찌 되었든, 내게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소문처럼 떠도는 이상, 자존심이 상한 에이든이 나를 방관할 수 없을 것이다.

'소문은 부풀어, 곧 일반 귀족들도 알게 될 거고.'

그렇다면 '순혈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은 '유리안'이라는 '반쪽짜리'에게 당했다고 생각하겠지.

'귀찮은 마법사 새끼들.'

난 표독스러운 독설을 입에 담으려 했으나, 참았다.

존댓말로 욕해봤자 뭐하겠나.

사실, '마법사'라는 것은 이런 세계관에서 만능과도 같은 존재다.

뭐든지, '마나'와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와 동시에, 적으로 돌리면 굉장히 까다롭다는 소리다.

'심지어 도나시엥 가문은 5원소 중, 금(金) 원소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가문.'

습격당할 수 있으니, 방비를 해두는 것이 좋겠지.

저번처럼 에이든이 쉽게 접근을 허용해줄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도나시엥 가문에 대한 상대법은 이미 파악하고 있다.

그건 곧, 도나시엥 가문의 전투 마법인 '보석 마법'에 대한 약점이다.

'보석의 수는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고로, 마법의 수도 정해져 있는 법.

들고 다니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파훼법은 간단하다.

순발력과 나름의 견제를 이용해 보석의 수를 줄이며 천천히 접근하는 것이다.

'마침, 최고의 견제 수단을 배우긴 했지.'

그것은 '솜브라'가 아닌, '새로운 검성' 특성의 부산물인 '일필휘지'이다.

검기, 또는 검강을 날릴 수 있는 능력.

아직 '특성'으로 자리 잡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면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터.

그렇다면 에이든, 더 나아가 도나시앵 가문과의 전투에서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연습하지?'

멍하니 서 있는 목인 말고, 이왕이면 실전 데이터를 쌓고 싶었다.

"유리안 경, 안에 계십니까?"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페른이 안으로 들어섰다.

"이번 황자 전하의 호위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은 눈'답지 않게, 군기 잡힌 목소리.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청사자 기사단의 단원이었지?

"유리안 경의 앞으로 온 편지들과 공문들입니다. 이곳에 올려두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페른은 테이블 위에 가지고 온 서류들을 올려두었다.

개중에는 '더 나이츠'라는 잡지에서 취재를 원한다는 것도 있었다.

뭐지? 내가 저거 구독 해지하지 않았던가.

"페른 경."

"예!"

누가 기사단 출신 아니랄까 봐, 목소리 한번 우렁차다.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시간이라면 괜찮습니다만, 시키실 일이라도...?"

"예."

말해주십쇼!

라며, 당차게 말하는 페른.

"저와 대련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잠깐의 침묵.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페른의 머리 위로 '공포'의 색이 살짝 떠올랐다.

"제,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말해주십쇼. 시정하겠습니다."

***

두려워하는 페른에게 딱히 불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검을 휘두르고 싶다는 생각에 꺼낸 말이라고 겨우 설득했다.

'감은 눈'의 훈련장으로 자리를 옮긴 난 우두커니 서서 페른을 쳐다보았다.

"후우...."

녀석은 여러 차례 심호흡을 반복했다. 아마도, '유리안'과 대련한다는 긴장을 풀어보기 위해 노력하는 듯 보인다.

"저는 준비 되었습니다."

페른이 결의의 찬 목소리로 말하자, 그런 그를 향해, 난 손을 뻗어 먼저 오라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대련에서 선공을 한다는 것은 하수임을 자처하는 것과 같다.

'어쩌겠어, 데이터를 쌓아야 하는데.'

굳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일필휘지'를 실전에서 사용해보며 그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검에 형성한 '오러'를 검기의 형태로 날리는 것엔 엄청난 집중이 필요하니까.

⇒ 놀라운 직감

⇒ 타고난 검사

⇒ 간파

⇒ 새로운 검성

온갖 특성으로 무장한 나도 제대로 사용하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애초에 사용해본 적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냐?'

그러니 '연습'이라도 조금은 실전과 비슷한 환경을 조성하도록 페른을 도발한 것이다.

상대가 날 죽일 기세로.

살기를 가득 머금고 달려들도록 말이다.

"가겠습니다."

평소처럼,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가 아닌 보다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페른은 땅을 박찼다.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그런 페른을 상대로 난 검에 오러를 불어넣은 뒤.

쉬이이익──!

그것을 검기처럼 발산해보았다.

아주 가볍게.

"윽...!"

서슬 퍼런 '월광검'의 검기가 자신을 향해 날아들자, 당황한 페른은 황급히 공격을 멈추고 검을 휘둘렀다.

'본래라면, 저런 어정쩡한 자세로 일필휘지를 막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생각과는 달리 페른의 검에 '월광검'의 검기는 쉽게 흩어졌다.

'역시나.'

예상대로 완전히 깨우치지 못한 '검기'는 큰 힘을 갖추지 못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쿠크다스처럼 부서지는 건 좀 너무한데.

===

⇒ 〈새로운 검성〉에 대한 이해도가 향상되었습니다.

⇒ 특성, 〈일필휘지〉의 존재를 깨우쳤습니다.

===

다행인 건 이번 공격으로 '검기'라는 개념을 몸이 조금 파악했다는 것이다.

"바, 방금... 오러를 날리신 겁니까?"

검에 맺힌 오러를 검기처럼 날리는 행위.

그것의 어려움을 알고 있는지 페른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이번 여정으로 요령을 깨우친지라."

"...대단하십니다. 저 같은 놈은 오러를 온전히 다루기도 어려운데."

"놀랄 것 없습니다. 재능과 격의 차이란 이런 것이니 말입니다."

넋두리를 늘어놓는 듯한 페른을 보며, 파렴치한 말을 내뱉었다.

녀석도 기사라면. 아니, 정확히는 '기사'였지.

여튼, '기사'였으니 검과 오러를 다루는 재능에 대해선 나름의 콧대가 높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발끈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비겠지.'

이 세계관에서 기사란 그런 것이다.

쌓아온 경험의 차이는 있어도, 서로 간의 완전한 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자존심의 덩어리들.

하이든 라이히가 그러했고.

유리안도 그러했고.

지금까지 봐온 기사들 모두 그러했다.

'그러니, 너에게도 너만의 자존심이 있겠지.'

자, 보여라.

그것을 긁는 것이 조금은 미안했으나, 지금은 날 죽일 기세로 덤볐으면 좋겠다.

앞으로 있을 에이든과의 싸움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테넬론과의 싸움을 위해서라도.

"이 정도로 당황해선 곤란합니다. 그런 시정잡배와 같은 실력으로 저와의 대련을 허락한 겁니까?"

조금 더 도발의 수위를 높였다. 먼저 대련 이야기를 꺼낸 당사자가 이런 태도를 취하면, 화가 날 법도 할 터.

"예! 몸으로 맞아가며 배워보겠습니다!"

아니, 화를 내라고.

 

 

 

 

103화. 일필휘지

⇒ 〈일필휘지〉의 이해도가 오를만한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페른과의 대련을 통해서, '검기'의 개념을 쌓는 중이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그마저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생사가 오가는 전투 현장도 아니고, 페른이 일부로 검기를 맞거나, 검으로 일일이 쳐내고 있으니, 제대로 감이 안 잡히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도 약하군.'

쏘아낸 '검기'는 유의미한 피해를 입힐 정도로 강한 위력을 내지 못했다.

심지어, 집중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발산은커녕 허공에서 쿠크다스처럼 부서지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허억... 허억."

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페른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련은 여기까지 하지요."

"아, 알겠습니다... 허억, 유리안 경."

짤그락──!

그만하자는 말에 페른은 검을 놓고,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어쩐지, 의기소침한 녀석의 눈을 보니 어지간히 지쳤나 보다.

하긴 아무리 힘을 뺐다고는 하나, '검기'이다. 맞으면 아프고, 실수로 급소에라도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

이 정도 버틴 것도 용한 거지.

"도움이... 되었습니까?"

도움? 당연히 되었지.

심화 과정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초 학습은 된 거 같으니.

하지만, 단순히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녀석의 자존심에 흠집이 생길 것만 같았다.

자고로 '기사'는 자신만의 프라이드로 살아가는 비정상적인 족속들.

애초에 피가 난무하고, 칼빵을 수시로 맞고 다니는, '검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상이겠냐.

"아쉽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역시... 죄송합니다."

"조금 더 정진하십시오. 그 정도 실력으로 임무 나갔다간 죽기 십상이니 말입니다."

쏟아지는 혹평에 페른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기사로서 당신은 유능합니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뭔 일인가 싶은 눈으로 페른이 고개를 올려 나를 쳐다본다.

"예?"

"당신의 정갈한 검술과 마나 운용은 기사의 표본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죠. 하나, 그 탓에 저에겐 큰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필휘지'라는 검기를 다루는 능력은 이름과 달리, 정갈함과는 거리가 먼 능력이다.

정석적이지 않은, 본능적인 특성에 오히려 더 어울린다.

그래서 계속해서 페른을 도발한 것이다.

분노에 정신을 잃어, 죽기 살기로 덤벼들면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니까.

페른에게 원한 건, 날 것 그대로가 느껴지는 검술. 하지만....

그 역시 기사.

몸에 익숙한 검로를 쉬이 바꿀 수는 없던 것이다. 그냥 '기사'의 표본 그 자체였으니.

더군다나 대련이 길어질수록, 페른은 나와의 격차를 뼈저리게 실감했고, 투쟁심은 무뎌져 갔다.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유리안'이고, 본인만의 독특한 검술을 사용한다 해도.

배운 게 정석이라.

'유리안'의 검은 어느 정도는 정돈되어 있고, 체계화가 잡혀 있다.

게다가 '정신 무장'의 특성과 '포커페이스'의 캐릭터성도 보유하고 있는지라 일반적인 대련으론 '실전'의 영역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상황은 죽일 기세로 덤벼드는 적이야.'

그 정도가 되지 않으면, '경험'조차 되지 않는다.

"유리안 경, 실례되는 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려던 순간, 페른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르침을 달라고? 흠, 잘 모르겠다.

무엇을 알려줘야 할지.

사실 내가 사용하고 아는 검술은 천부적인 신체 조건과 게임적 지식을 기반으로 둔 것들일 뿐.

처음부터 내가 직접 쌓아 올린 것이 아니다.

그 지식에 '페른'이 사용하는 검술은 당연히 포함되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말해주지?'

아니, 뭐가 주특기이고, 무슨 검법을 주로 사용하는지 알아야 어떤 조언이라도 해줄 텐데.

나도 검술에는 큰 소양이 없던지라. 무언가 자세히 설명해 줄 순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밝힐 수 없던지라, 난 약간의 립서비스를 해줘, 상황을 넘기기로 결심했다.

"죄송합니다. 전 '경쟁자'에게 가르침을 줄 정도로 마음이 너그럽지 못합니다."

"제가 경쟁... 자...."

머리에 근육만 가득 찬 기사들은 다른 상위 기사의 인정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

비록, 악명이 철철 넘치는 '웃는 처형대'의 인정이긴 하지만.

나름의 값어치는 있겠지.

게다가.

'대련도 도와줬는데 이 정도는 말해줄 수 있잖아?'

수고하시길.

짧게 고개를 숙인 난 훈련장을 떠날 채비를 했다.

"유, 유리안 경!"

페른이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혹시, 실전을 생각하고 계시는 거라면... 추천해드리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

"하아...."

엘레노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의 귀족이라면,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한 그녀는 같은 비숍들끼리의 분쟁이 익숙했다.

서로의 것을 빼앗는데, 그 누구보다 앞장서는 이들이니.

하지만 그들을 관리하는 '아크 비숍'의 직위에 오른 그녀에게는.

'아크 비숍으로서 그들을 통제하는 건 너무 성가신 일이야.'

동시에 어긋나버리긴 했으나, 여명회의 존속을 바라는 그녀로선 이번 큰 분쟁은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그녀는 다른 비숍들에게 '도청 마법'을 걸어두었다. 혹여나 일어날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러나 제일 요주의해야 할 인물에게는 실패했다는 거야.'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그는 비숍 중에서도 특출난 존재라고, 과감히 말할 수 있었다.

아무렴, 지금 '아크 비숍'의 자리에 자신이 올라올 수 있도록 해준 것도 그다.

총대주교, 테넬론이 그에게 보내는 총애는 어마무시했으니 말이다.

'그게 문제야.'

그 총애를 등에 업고 안하무인으로 구는 탓에 모든 비숍의 원(怨)을 사는 남자. 최근에는 그를 지지하는 교단원들도 생긴 것 같지만.

'행동에 망설임이 없어.'

이번에 에이든을 건든 일은 여명회 내부에서 큰 소란으로 커질 것이 자명했다.

에이든을 필두로 여명회에 입단한 마법사들이 잔뜩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마법사들은 대부분 '순혈주의'에 가깝기 때문이다.

'마법사란 그런 것이니까.'

엘레노아의 시선은 책상 위에 올려둔 책으로 향했다.

[마법표해록]

표지 아래에 적힌 부제는.

[순정한 마나는 피에 축적되며.

혈통은 지고의 마법사를 가리는 척도다.]

지금 와서는 과거만큼의 위용을 자랑하지 못하는 글귀이나, 아직까지도 마법사들에게만큼은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아직도 순수한 혈통이 아니라면, 반쪽짜리라며 폄하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으니.'

하지만 그 '반쪽짜리'에게 당한 에이든은 어떻게든, 복수하려고 할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 "그래, 곧 연락이 올 줄 알았지."

마침, 누군가에게 설치해둔 도청 마법을 통해, 마도구로 목소리가 전달되었다.

호걸 같으면서도, 그렇지 못한 성격의 소유자, 바로 비숍 코룬드다.

'근데, 누구와 이야기하는 거지?'

엘레노아가 걸어둔 도청 마법은 대상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청(監聽)하지 않는다.

다른 누군가와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전언(傳言) 마법을 사용할 경우, 활성화되는 방식이다.

즉, 비숍 코룬드는 누군가와 통신으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소리.

- "콧대 높은 도나시엥 가문도 유리안을 혼자 처리하기엔, 역부족일 테니 말이야."

이어지는 코룬드의 목소리.

도나시엥 가문, 유리안.

코룬드의 말을 추측해보니 그의 대화 상대가 누구인지, 엘레노아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에이든.'

곧 여명회에 닥칠 폭풍의 주역이 될 수도 있는 자다.

- "도와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 나 또한, 순혈주의를 주장하는 자로서 반쪽짜리인 유리안이 활개 치는 건 그리 달갑지 않거든."

아마도, 에이든이 코룬드에게 협력을 요구한 모양이다.

유리안을 여명회로부터 내쫓기 위해, 또는 그를 죽이기 위해서 말이다.

'하아, 성가셔.'

적당히 숨죽이고 있어도 될 것을, 굳이 자존심이 드높은, 이놈의 귀족들은 꼭 사달을 낸다.

엘레노아는 다시금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하지만, 에이든. 난 이번 사태가 의심쩍기 그지없어."

그녀는 갑작스레 변화된 이야기의 흐름에 다시금 마도구에 귀를 기울인다.

- "자네 정도나 되는 마법사가 유리안의 접근을 허용했다는 것을 말이야."

나름 납득이 가는 말이다.

금(金) 원소 5위계 '바르고' 등급의 마법사인 에이든은 실력 있는 마법사라 단정할 수 있다.

- "마법사와 기사의 싸움은 본디, 두 가지, 케이스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정말로 진실되게 에이든과 유리안이 붙었다면, '눈'의 상처로만 끝나지 않았을 터.

- "생채기조차도 없는 승리, 혹은 사지의 결손으로 인한 패배, 더 나아가 죽음."

코룬드 또한 마법사였던지라, 그런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 "마법사란 심장과 주문을 시전할 입과 뇌만 있다면 전투력이 사라지지 않을 테니 말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자?'

엘레노아는 고개를 들어 집중했다.

- "고작 눈에 생채기가 생긴 것으로 싸움이 끝나진 않았을 것이야. 그렇다면, 왜 그런 식으로 소문이 난 것일까?"

잠깐의 침묵이 지나자, 코룬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 "유리안과 결탁해 반기를 드는 비숍들을 정리하려는 것 아닌가?"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가정이다.

귀족 원로회의 입김으로 제도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던 유리안을 '여명회'에 끌어들인 것은 다름 아닌 에이든이었으니까.

'설마 그럴 리가.'

물론, 엘레노아는 믿지 않았다.

에이든의 실험을 막은 것은 유리안이고, 그런 유리안을 죽이기 위해 알파스를 보낸 것도 에이든이다.

비록 스카우트할 땐, 유리안을 쓸모 있게 보고 있었다고 해도, 지금은 아닐 것이다.

- "하하, 기습당했다는 이야기로 넘어갈 것이 아니야."

기분이 좋아 보이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어찌 되었든, '그곳'에서 만나서 다시 이야기하지. 유리안에 대한 이야기는 그때 해도 늦지 않으니."

그것을 끝으로 도청 마법은 종료되었다.

"...정말이지, 성가셔 죽겠어."

마도구를 내려놓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리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이럴 줄 알았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리안에게 아크 비숍의 자리를 넘길걸.

그리 생각하는 엘레노아였다.

***

- '실전에 가까운 전투를 원하신다면, 무투관을 관람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대련을 끝마친 페른이 권유해준 것은 다름 아닌 무투관이다.

신성국에서 본 투기장과 비슷한 장소로, '데몬'과의 혈투를 볼 순 없지만, 무투가들끼리 전투를 벌이는 장소다.

'확실히, 무투관이면 실전 데이터를 쌓을 수 있겠어.'

페른의 제안을 괜찮다고 생각한 난 곧장 제도 변두리에 있는 요정(料亭) 명월관(明月館)으로 향했다.

무투관을 관리하는 단체 중 하나가 빈민가에 있는 '혈귀단'이기 때문이다.

"뭐냐."

오늘은 저번에 왔을 때와는 달리, 트알레의 전용 보디가드이자 '혈귀단'의 페이크 보스 '흡혈귀' 아르투르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트알레를 보러 왔습니다."

"현재 트알레 님은 계시지 않는다."

아르투르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던 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중천인데?'

뱀파이어답게 트알레는 햇빛을 기피한다.

대게 서브컬쳐에서 다루는 온갖 흡혈귀의 약점을 그녀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 유리안 경...!"

그때, 다급한 목소리가 나와 아르투르를 막아섰다.

늘 안내해주던 에렌이란 이름의 소년이다.

"트, 트알레 님께서 올라오셔도 좋다고 하십니다."

그래, 없을 리가 있나.

뱀파이어는 태양광을 직격으로 맞으면, 화상을 입거나 잿더미가 되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대낮에 돌아다니진 않겠지.

"쯧."

불편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는 아르투르를 뒤로하고, 난 승강기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알레가 있는 층에 도착했고, 그녀의 얼굴이 보이자, 난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투관을 관람하고 싶습니다."

내가 언급한 '무투관'은 회원제로 운영된다.

고상한 취미를 가진 귀족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다.

물론 그게 돈이 되다 보니, 혈귀단에서 오히려 더 장려하는 상황이고.

무턱대고 찾아간다고 해도, 나를 저지할 정도의 멍청한 이는 없겠지만.

감히 '웃는 처형대'를 막겠다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나 트알레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깃들었다.

"뭐라고!?"

약간 성이 난 것처럼 언성을 높이는 그녀.

"내가 잠을 청해야 할 시간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것도 모자라, 뻔뻔한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녀의 적갈색 눈동자는 언성을 높인 것에 비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는 나와 함께 올라온 '에렌'이란 소년을 비추고 있었다.

여전하군.

"일단, 누군가 들어서 좋을 이야기는 아니니, 단,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 진의를 알고 있는 난 먼저 운을 띄워주었다.

"무투관에 관람하고 싶다고?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인상을 찌푸린 트알레이 손짓하자, 에렌이란 소년은 인사를 하더니 승강기를 타 방을 빠져나가자마자.

"이쪽에 입장에선 좋... 은... 이야기는...."

드르륵, 승강기가 작동했다.

"아, 아닌 것 같습니다... 유리안 경."

너도 참 힘겨우면서도, 웃긴 삶을 살고 있구나.

 

 

 

 

104화. 맹인무사

"뭐가 아닌 것 같습니까?"

우물쭈물.

내 부탁을 거절하려는 트알레를 향해 난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게... 아무래도, 유리안 경이 좋아할 만한 장소는 아닌지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조명도 그리 밝지 않고, 우중충하고... 또, 유리안 경께서 끔찍이도 싫어하는 야만스러운 자들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래! 난 그런 야만스러운 놈들을 보러 갈 거라고.

내 능력을 조금이라도 갈고닦기 위해서.

"상관없습니다."

그럼에도 괜찮다는 내 말에 트알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어지간히 거절하고 싶은 모양이군.

대강, 이유는 알고 있다.

내가 '무투관'을 관람하는 것, 아니 가는 것 자체가 탐탁지 않겠지.

유리안은 '감은 눈' 소속. 그 말은 즉, 황실 전속 기관이며, 그들의 뜻을 대신 수행하는 집행자란 소리다.

'무투관은 귀족들도 많이 관람하지.'

게다가 무투관 자체는 합법적이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이 불법적인 일들.

그런 곳에 황실의 집행자가 입장한다? 자신들의 놀이터에 불청객이 끼어든 것처럼 불쾌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당신에게 폐를 끼치진 않겠습니다."

"...이, 이미 폐는 충분히 끼치고 있습니다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지만, 이번엔 꽤나 강하게 나온다.

"이, 이번만큼은 안 됩니다.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군다면 저도 강하게 나갈 수밖에 없어요!"

그럼 나도 거기에 맞게 대해 줄 수밖에.

"트알레. 황실 감옥 중에 은으로 만든 감옥이 있다던데, 한번 가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트알레의 머리 위로 익숙한 색이 짙게 떠올랐다.

"으, 은... 이요?"

모든 매체에서 그렇게 다루듯, 이 세계관의 '흡혈귀'도 은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 외에도 태양 빛에 화상을 입거나.

흐르는 물 위를 걷는 것도 불가능하다.

"설마, 뱀파이어의 약점을 모두 꿰고 계시는 건가요...?"

"예, 그 불멸성이 어떻게 하면 사라지는지도 잘 알고 있지요."

"그렇다면... 심장에 나무 말뚝을 박으면 죽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그런가요? 어떻게, 제가 한번 도전해봐도 되겠습니까?"

당장이라도 허락하지 않으면 그리해주겠다는 협박으로 들렸는지, 그녀의 보랏빛 아지랑이는, 아주 맹렬히 그 존재감을 뿜어냈다.

근데, 심장에 말뚝을 박으면, 굳이 뱀파이어가 아니어도 뒤지지 않을까?

***

협박 아닌, 협박이 통했는지 트알레는 무투관의 회원권을 발급해주었다.

- '제발, 소란만 일으키진 말아 주세요....'

이런 당부가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도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날 본 녀석들이 지레짐작으로 호들갑을 떨어서 문제인 거지.

"유리안 경."

무투관의 근처에 도착하자, 누군가 내 옆으로 와, 아는 척을 해왔다.

'누구지?'

트알레가 무투관을 안내해줄 사람을 붙여줬다고 했는데, 그게 저 남자인 모양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익숙한 얼굴이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 그래! 베이런!

"베이런, 이곳에서 뭘 하시고 계시는 겁니까?"

녀석은 빈민가를 삼등분하는 세력 중 하나, '여섯 손가락'의 말단 아니었나?

이전에 내게 협력해준 덕분에 출소가 당겨졌다는 말은 들었는데.

"지금은 무투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기존에 있던 곳은?

'여섯 손가락'은 탈퇴를 할 때, 손가락을 자를 정도로 악랄한 곳이거늘.

"그게... 유리안 경을 따라 '흡혈귀'를 보러 갔을 때, 그 소문이 이상하게 난 것 같습니다요."

'여섯 손가락'의 말단인 베이런이 지금은 '혈귀단'에서 일하게 된 전말은 이러했다.

날 도와 '혈귀단'의 관리 구역에 들어갔을 때, 그 모습을 본 '여섯 손가락'의 일원들이 그가 배신했다고 소문을 낸 모양이다.

"깜짝 놀랐습니다요. 갑자기 제 손가락을 자르려고 '핑거 커터'들을 보내지 않나...."

"그래도, 용케 살아남으셨군요."

"예, 다행히도 우연히 지나던 아르투르 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아르투르? 아, 그 8척 덩치.

나름 살길을 찾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 때문에 '여섯 손가락'에서 쫓겨나 직장을 잃을 뻔했으니 말이다.

'...아니,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잖아?'

생각해 보니, 범죄 단체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준 셈이다. 개과천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되겠다.

그나마 '혈귀단'은 '여섯 손가락'보단 그래도 양심이 있는 곳이니 말이다.

"일단,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따라오시죠!"

베이런은 활기찬 목소리로 무투관의 안내를 시작했다.

"그런데, 유리안 경께선 왜 이곳을 찾으셨습니까?"

"제가 못 올 곳이라도 왔습니까?"

내 반응에 베이런의 몸이 살짝 움찔한다.

"하, 하하... 왠지 유리안 경께선 이곳을 싫어하실 것 같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싫어한다라....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유리안은 특유의 결벽증 때문에 땀 냄새로 그득한 무투관의 환경을 선호하지는 않으니.

하지만 투기장에 들어서자, 이곳에 가득 찬 투기(鬪氣)가 온몸을 근질근질하게 만들었다.

'그래! 이것 때문에 여기 온 거지. 제대로 찾아온 거 같군.'

조금이라도 좋으니, 내가 가진 기술을 정진시키기 위한 과정. 더 나아가.

'일필휘지를 완성하는 게 내 목표지.'

그러기 위해선, '정갈함'뿐만이 아닌 '투박함'까지 익혀야 한다.

유리안의 검술은 태생적인 성격과 본성에 의해 예술에 가까운 정교함을 지니고 있다.

막강한 힘은 그것을 보강해줄 뿐, 검술에 대해선 FM의 성질을 띠고 있다는 소리다.

'그에 비해, 이곳 무투관에선 야성 가득한 녀석들을 쉽게 볼 수 있지.'

음과 양의 조화.

...라는 거창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검술에 무엇인가를 가감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정반대의, 투박한 것을 보고 싶기 마련이지요."

"투박한 것이라... 아하!"

내 말을 곱씹던 베이런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더니, 무엇인가를 깨달았는지 손뼉을 쳤다.

"과연, 그렇다면 좋은 타이밍에 오셨습니다. 이번 무투관에서 열 이벤트는 유리안 경이 찾으시던 '투박'과 아주 어울릴 테니 말입니다."

아주 기대하라는 베이런의 말에 난 의구심을 가졌다.

"무슨 이벤트입니까?"

"12명을 거대한 경기장에 몰아넣은 뒤, 최후의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죠!"

아, 배틀로얄을 이야기하는군.

"마침, 저기에 오늘 메인 이벤트에 참가하는 우승 후보가 있습니다요."

베이런은 싱글벙글 웃더니, 대기실 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둠과 선수들의 긴장으로 가득한 대기실. 그곳의 구석엔 무자비한 투지와 욕망을 숨기지 않은 거대한 갑옷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강하군.'

얼마나 강한 실력자인지 확실하게 가늠할 수 없으나, 녀석의 몸에서 느껴지는 피의 냄새는 평범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녀석의 이름은 카굼, '데몬 먹는 광인'이라는 별명을 지닌 녀석입니다."

"데몬 먹는 광인?"

"예, 북부에서 살던 녀석으로 마식을..., 데몬을 먹으며 살던 녀석이라 하더군요."

데몬을 먹는다고?

그런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닐 테지만, '마식'을 한다면 마신의 잔재 사념을 몸에 받아들인다는 건데.

그렇게 되면 데몬화는 무조건 진행될 터.

'네임드로 보이지는 않는데.'

작중, '마식'하는 네임드가 존재하긴 한다.

근데 왜 '네임드'겠는가?

'데몬을 먹고도 데몬이 되지 않아서 네임드지.'

그런 의미에서 저 중갑옷을 두른 남자는 처음 보는 녀석이다.

내가 모르는 등장인물인가?

아니, 카굼이란 이름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래도 강해 보이는 건 확실해.'

저런 중갑옷을 평상시에도 입고 다니는 것을 보니, 덩치만큼이나 터프한 전투를 할 것 같다.

'저 녀석과의 전투는 내 성장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을 하던 찰나.

눈이 마주쳤다.

"어? 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철그럭, 철그럭.

금속끼리 서로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중갑옷을 입은 거인은 점점 가까워졌다.

꾸, 꿀꺽.

카굼이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두려움에 떤 베이런의 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계속 쳐다본 탓에 기분이 상했나?

'여기서 한 번 실력을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의 무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 수 없으나, 한 번 경험해보는 것이 좋을....

'응?'

이상하다.

굉장한 위압감을 지닌 카굼이란 녀석의 머리 위로 '공포'의 색이 보인다.

기분... 탓인가.

"유리안 경, 이, 이런 곳에는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아니었네.

두꺼운 강철 투구 너머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카굼, 말을 할 수 있었어!?"

그 목소리를 듣고 가장 놀란 건, 베이런이다.

"데몬을 먹고, 지성을 잃고 피를 갈구하는 광인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랬으면, 어떻게 무투관에 신청을 했겠어."

그건 그렇네.

"그리고, 세금을 안 내면 제도에서 쫓겨난다. 네 말대로 지성이 없다면, 내가 이 자리에 있겠냐?"

베이런의 호들갑 떠는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지성이 느껴지는 카굼의 말투에 난 헛웃음이 나왔다.

'마식'하는 놈이… 의외로 모범 시민이었다.

***

"자, 이것을 먼저 착용해주십쇼."

이곳의 관중들에겐 이것이 기본 룰이라며, 무투관에 입장하기 직전, 베이런은 내게 가면을 건네주었다.

아무래도 빈민가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보니, 고귀한 취미를 가진 귀족님들께선 정체를 숨기고 싶으시겠지.

그나저나.

'...어쩐지 익숙한데.'

가면을 쓰려는 행위가 낯이 익다. 아무래도, '검은 기사' 노릇을 하던 탓에 그런 모양이다.

"오오... 잘 어울리십니다. 유리안 경. 자, 들어가시지요."

무투관의 경기장에 들어서자, 베이런의 말대로 모든 관중이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열광하는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뜨거운 관중석의 열기는 피부를 타고 충분히 전해졌다.

"본래 유리안 경정도 되시는 분이라면, 귀빈실로 잡아드려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최대한 가까이에서 구경하고 싶으니 말입니다."

죄송스럽다는 태도를 보인 베이런을 뒤로 하고,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사람이 많은 탓에 썩 기분이 좋지 않군.'

이놈의 결벽증이 또 도졌다.

많은 인파가 심히 거슬린 것이다. 썩 청결하지 않은 위생도.

'불쾌함을 참고 있는데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면.'

그것만으로도 짜증은 배가 될 텐데.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메인 이벤트!"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것은 내 목적에 부합할 전투를 벌여줄 '카굼'이라는 선수가 있다는 걸 확인한 점이다.

- "가장 먼저 우승 후보인 '데몬 먹는 광인' 카굼!!!"

척 보아도 강자라는 것을 느낄 정도로, '카굼'의 신체는 가다듬어져 있었다.

호흡과 자세. 그것을 넘어 오러까지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환호성이 경기장을 뒤덮었다. 관중들은 '카굼'이 배틀로얄의 승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모양이다.

"유리안 경께선 누가 우승할 것 같습니까?"

베이런이 물었다.

나도 물론, 카굼이다.

다른 11명의 선수 중에 '카굼'정도의 실력자가 없다면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난 경기장 내부를 슬쩍 둘러보았다.

'음...?'

놀랍게도 경기장 내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수 있었다.

회색으로 물든 머리와 함께 백내장이 걸린 것처럼 상이 맺히지 않는 동공.

그 얼굴을 보자,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투쟁심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누가 우승할 것 같냐고 물어보셨습니까?"

"아, 예."

"전, 저 남자가 이길 것 같군요."

"...저기 보이는 저 중년 말입니까?"

내 손짓에 베이런은 경기장 구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나무 지팡이로 땅을 더듬으며, 대기 장소로 이동하는 중년이 있었다.

"저, 저런 장님이 말입니까? 제 눈에는 저런 장님이 이런 무투관에 참전한 것 자체에 의구심이 듭니다만...."

"보면 알겠지요."

의아함이 가득한 베이런이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경기장으로 고개를 옮겼다.

내 시선은 여전히 그 중년에게로 향한 채로, 고정되어 있었다.

'맹인무사 자하트.'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 세계관 속에서도 손꼽히는 강자 중 한 명.

저자의 얼굴을 보자 끓어오르는 투쟁심을 보니, 유리안도 자하트를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자하트도 북부 전선에서 생활했을 테니 어느 정도 안면 정도는 있겠지.

난 그것보단 다른 의미로 저자를 주목하고 있다.

정확히는 유리안의 사백(師伯)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검성, 하이든 라이히의 동문이니까.

 

 

 

 

105화. 일거양득(1)

엘레노아 드미셀.

그녀는 찝찝한 기분을 감추며 평민이나 이용할 법한 무투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하필 많은 곳 중에서 왜 여기야?'

유리안만큼은 아니지만, 고결한 귀족의 길을 걸어온 그녀에게 청결하지 못한 장소와 더러운 냄새는 고역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유리안에게 그렇게 강조하던 '비숍의 관리' 때문이다.

유리안과 충돌이 있었던 에이든이 수작을 부릴 것이라는 것쯤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솔직히 그들의 자존심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아니지만, 아직 여명회는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상태가 아니다.

더군다나, 유리안과 에이든은 여명회의 무력에서 상당히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

'전력 손실이 있어서는 안 돼.'

여명회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비숍의 관리 차원에서도 이들의 충돌은 막아야만 했다.

때마침 도청 마법으로 에이든이 비숍 코룬드와 함께 일을 도모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그녀는 여러 루트를 통해 그들이 무투관에서 만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은밀한 취미를 가진 귀족들을 위해 VIP들만 입실이 가능한 귀빈실이 있었고, 그곳에 들어간 엘레노아는 대화를 기다렸다.

그들의 계획을 알기 위해.

- "하하, 오랜만이야 에이든. 얼굴이 그리 밝지 않는 걸 보니,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야?"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비숍 코룬드.

에이든과 한때 같은 학파를 연구했던 남자.

그 덕에 에이든이 가장 먼저 접근할 것이라 예상해 제일 먼저 도청 마법을 걸어둔 것이다.

'유리안에게도 성공했다면....'

그랬더라면, 비숍 관리나 이런 상황에서 중재하기도 더 편했을 텐데.

아무튼, 그녀는 오늘 에이든의 작당 모의를 저지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 "그나저나, 이곳으로 직접 행차할 줄 상상도 못 했군. 에이든."

마도구를 통해 전해지는 코룬드의 말.

같이 있음에도 누군가 들을까, 전언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엘레노아에게는 호재였다.

도청 마법은 그 마법을 사용할 경우에만, 활성화되니까.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해했다.

천박한 코룬드의 습성이야,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에이든의 움직임은 의외였으니.

'순혈주의에 집착할 정도로 고상한 양반이 왜 이런 곳에.'

그녀가 추측하는 와중, 무투관의 분위기는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기운으로 넘실거렸다.

와아아아아!!!

무투관의 가운데에 있는 경기장에선 여러 사람이 한 데 뒤엉켜, 서로에게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 무기가 허공을 가를 땐 야유가.

상대를 타격할 땐, 격한 환호가.

폭발적인 감정의 여파가 사방을 울렸다.

누군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유흥의 장소겠지만.

'딱 질색이야.'

저급한 취미라 비웃을 생각은 없으나, 인파로 북적거리는 이곳을, 엘레노아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얼굴이 팔리지 않도록 가면을 썼기에 망정이지,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더라면, 그 불쾌함이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 "나야, 이곳에 취미가 있다 보니 그러려니 하지만. 에이든, 자네는 무투관을 비천한 장소라 말한 적이 있잖나."

능글맞게, 은근히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코룬드의 말이 마도구를 통해 들려왔다.

비숍이 되기 전이나, 된 이후에도 그리 말을 섞어보지 않은 남자였으나, 이번 그의 말은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잘했다, 가린! 너한테 건 이유를 톡톡히 보여주는구나!]

[나가 뒈져라! 이 멍청한 새끼야!]

무투관이 터져가라 외치는 시끄러운 함성에 그녀의 인상이 찌푸려질 때쯤.

- "그러니 이런 곳을 약속 장소로 잡은 거다."

가라앉은 에이든의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 "내가 이런 곳에 찾아올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테니 말이야."

- "음, 그럴 수 있겠군."

-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지금부터가 중요한 순간.

엘레노아는 그들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 "잠깐. 에이든,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맞춰보지."

뭔가 조롱하듯, 비웃는 듯한 코룬드의 목소리였다.

- "마법사들의 순혈주의는 도가 지나쳤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자네의 기반이 그들이다 보니 이번 사태에 어쩔 수 없이 손을 쓸 수밖에 없는 게야."

아직 유리안을 경험해보지 못한 코룬드는 지금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하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에이든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으니.

- "유리안, 그 반쪽짜리의 숨통을 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게지."

역시나.

- "나 또한 그가 탐탁지 않아. 테넬론 경의 총애를 받으며, 하늘 무서운지 모르는 반쪽짜리. 비숍을 떠나, 마법사로서 그를 좋아할 수 없는 운명이야."

순혈주의의 마법사는 평민과 피가 섞인 '방계'를 극도로 혐오한다.

그 풍토는 마법사인 엘레노아도 잘 알고 있다.

- "하지만 말이야, 난 이런 생각도 하고 있어. 유리안을 이용해 다른 '순혈주의' 학파들을 제거할 생각은 아닐까? 하고."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 "생각이 비약적이군."

- "비약적이라니, 당연한 의문을 품은 것뿐이지."

'크큭.' 하는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약간 경박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마도 코룬드의 것이 확실하다.

'아마, 에이든이 유리안과 손을 잡지 않았다는 것쯤은 코룬드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 이유는?

'앞으로 있을 교섭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겠지...'

생각을 정리하던 엘레노아는 관중석이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무투관의 뉴 페이스가 우승 후보인 카굼을 쓰러뜨렸습니다!]

이 정적의 이유가 들려왔으나 엘레노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어디까지나 비숍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응?'

무투관의 경기장엔 관심조차 없던 그녀였으나, 관중석에서 튀어 오른 인영엔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뭐야, 저 녀석은?]

[빨리 꺼지지 못해?!]

[흐름 끊지 말고, 썩 꺼져 이 새끼야!]

성인 남자로 보이는 인영이 경기장에 착지하자, 온갖 욕설이 그에게 쏟아졌다.

'...소란스럽게 굴기는.'

어차피 난장판인 분위기 속에서 고작 사람 한 명이 난입한 것이 아닌가.

툴툴거리던 그녀는 다시 도청 마법에 귀 기울이려는 찰나, 난입한 남자가 얼굴을 가리던 가면을 벗어던졌다.

얼굴이 드러난, 거기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있었다.

'...당신이 대체 왜?'

끔찍이도 인파가 많은 이곳에, 불결하고 저급한 이곳에, 자신을 오게 만든 장본인.

유리안이 오롯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

이 몸으로 사는 동안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

'유리안'이란 녀석은 결투를 좋아하고.

자기애가 강하며.

'감은 눈'의 업무에 프라이드를 느끼는 놈이라는 것을.

'미친 새끼.'

순식간에 시야가 바뀐 난 우선 주변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관중석에서, '아래'를 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경기장 안에서 '위'를 보고 있으니.

즉,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여, 경기장에 난입한 것이다.

'내가 앓으니 죽지.'

아마 이렇게 된 이유는 내가 우승 후보인 카굼을 꺾은 이를 '알고 있다'라는 사실도 한몫했을 것이다.

작중에서 유리안은 '맹인무사'가 '검성'과 동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렇지만, 게임을 플레이했던 난 그들이 '동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 탓에 몸이 격하게 반응한 모양이다.

'더 나아가.'

맹인무사, 자하트는 범법자다.

정확히는 '군법'을 어긴 범죄자.

그렇기에 황실전속기관인 '감은 눈'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있던 '유리안'은 움직일 수밖에 없던 모양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관중석에서 사람이 난입... 잠깐, 저 얼굴은 설마!?]

해설인지, 진행자인지 모르겠으나 당황한 남자의 목소리가 마도구를 타고 증폭되어 울렸다.

관중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얼굴로 향하자, 동시에 고요했던 관중석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유, 유리안이다."]

["그 웃는 처형대?"]

["왜 이런 곳에...."]

그런 술렁거림을 뒤로 하고, 난 허리춤의 검집에 손을 얹었다.

쩔그럭──.

사실 엉겁결에 이런 상황이 되기는 했으나, '맹인무사'는 내가 무투관에 찾은 이유에 걸맞은 인물이다.

그 이명에 걸맞게 그는 두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로지 오감과 또 하나의 감각인 '오러'를 통해 움직이고, 전투를 벌인다.

"...이거야 원, 이런 곳에서 자네를 만날 줄이야."

===

⇒〈놀라운 직감〉

⇒〈간파〉가 상대방의 오러를 감지합니다.

===

자하트의 주변엔 눈에 보이지 않은 오러가 넘실거렸다.

동문인 '검성'과는 정반대의 성향.

예술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절제된 것이 아닌, 계속해서 요동치는 폭풍과도 같은 오러.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플레이어들은 '맹인무사'의 오러를 이렇게 불렀다.

'오러 소나.'

이른바 '오러 탐지기'.

계속해서 오러를 주변에 흩뿌림으로써 보이지 않는 눈을 대신해 상대를 감지하는 것이다.

===

⇒ 〈일필휘지〉의 이해도가 향상되었습니다.

===

내가 익힌 '검성'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운용법. 그렇기에 두 눈으로만 쫓았을 뿐인데도 '오러'를 사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하나 깨달을 수 있었다.

"유, 유리안 경...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돌발 행동을 한 나를 따라 베이런이 경기장의 바로 앞까지 뛰쳐 내려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베이런이나, 트알레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나도 그렇고, '유리안'의 본능도 이 상황을 무르고 싶진 않았다.

'하찮은 자기 증명 따위가 아니야.'

조금 더 정진하기 위해서.

어긋나기 시작한 흐름을 바로 잡기 위해서, 지금보다 강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유리안, 북부 전선에서 만난 이후로 처음인 것 같군."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경기장의 중앙에 서 있던 자하트가 카굼의 큼지막한 몸을 발로 밀치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에게 이런 취미가 있을 줄 몰랐군."

"후후. 범죄자를 잡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것이 황실전속기관 '감은 눈'에 소속된 저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크큭."

자하트가 허탈하게 웃었다.

"북부 전선에서 봤을 때보다 '생각'이란 걸 하게 된 모양이군."

당연하지. 완전히 다른 사람인데.

***

'대체 여기엔 무슨 의도로 나타난 거야?'

무투관 경기장에 난입한 유리안의 모습을 보며, 엘레노아는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예상하는, '무투관'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인물 중 한 명, 바로 유리안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항간에 떠도는 흉흉한 소문과는 달리 고상한 취미와 예술품을 좋아하는 그다.

'그런 사람이 왜....'

특유의 결벽증과 북적거리는 인파를 싫어하는 경향도 있는 유리안이 굳이 무투관에 나타난 이유는....

- "뭐냐, 저놈은 유, 유리안이잖아!?"

당황한 기색의 비숍 코룬드의 목소리가 마도구를 타고 여실히 전해졌다.

- "저놈이 이곳에 나타날 이유는 없을... 잠깐, 에이든. 네놈!"

그의 목소리가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혹에서 분노로.

잠깐, 상황을 살펴보던 엘레노아는 그가 왜 분노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 "역시, 유리안을 이용해 여명회의 다른 학파들을 정리할 생각으로...!"

- "진정해라, 코룬드. 난 정말 그럴 생각이 아니다!"

도청 마법으로 전해지는 귀빈실의 상황은 실로 엉망이었다.

이리저리, 몸싸움하는 기색도 느껴졌고, 코룬드의 적나라한 욕지거리가 엘레노아의 귀를 연신 때렸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야.'

이곳에 유리안이 등장한 것.

그것만으로도 코룬드의 행동은 이해할 수 있었다.

말했듯 유리안은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이인데 그런 그가 굳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그뿐이야.'

모습을 드러냈을 뿐, 경기장에 있는 유리안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모종의 경고를 보내기 위함이었더라면, 등장하는 것 말고도 다른 액션을 취해야만 했으니.

- "그저 나타났을 뿐이다! 내가 정말로 네 말대로 다른 학파의 처리를 생각했더라면 경기장이 아닌 이 귀빈실로 들어왔을 것이 아니냐!"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에이든의 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그렇지. 나, 나도 방금 그런 견해를 갖기 시작했다."

- "그래, 진정해라."

- "하, 하긴 여기서 나눈 대화 내용을 저기서 알 순 없겠지. 에이든, 자네가 녹음 마법이나 도청 마법을 걸지 않은 한.... 음?"

파지직──!

도청 마법이 걸린 마도구 귀걸이에서 약한 전류가 흘렀다.

엘레노아는 이 현상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건 '음(蔭)마법'이 상대방에게 감지되었을 때 만든 신호니까.

즉.

'...들켰다.'

엘레노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이 걸어둔 도청 마법이 걸린 것이라면, 일이 귀찮게 흘러갈....

- "에이든, 이 개 같은 새끼가!"

하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코룬드의 입에선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 "도청 마법이 걸려있잖아! 이게 어떻게 된 거냐!"

- "뭐...?"

- "빌어먹을 새끼! 역시 예상대로, 유리안과 결탁하고 있었어!"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야?'

'도청 마법'을 걸어둔 당사자인 본인이 아닌, 이야기의 주제가 '유리안'으로 다시 돌아가자, 엘레노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그러나, 잠깐 생각을 정리하니 알 수 있었다.

- "잠깐! 이야기는 아직 안 끝났다. 코룬드!"

- "닥쳐! 더 이상 네놈과 할 이야기는 없다!"

치이익.

잔불이 꺼지는 소리가 마도구로 전해졌다. 그녀가 건 '도청 마법'을 해제한 것이다.

더 이상, 어떠한 전언(傳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귀걸이를 떼어낸 엘레노아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경기장에 서 있는 인물을 쳐다보았다.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비숍들에게 도청 마법을 걸어둔 건, 이미 알고 있어.'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엔 잔잔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설마.... 여기까지 내다 보고, 이 자리에 나타난 거야? 굳이 일부로?'

동공이 보이지 않는 실눈.

동시에 서서히 맺히는 입가의 미소.

그것들을 보자, 엘레노아의 귓가엔 환청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이곳에 나타났겠습니까?'

 

 

 

 

106화. 일거양득(2)

뭐야 저긴.

경기장에 내려와 자하트와 대화를 나누는 중 난 문득, 소란스러운 '귀빈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남정네 두 명이 실랑이하는 모습.

얕은 천막이 처져있어, 얼굴은 확실히 보이지 않았으나, 분명 그리 보였다.

"그렇군, 범죄자를 잡으러 이곳까지 '감은 눈'이 행차하셨다, 이건가?"

잡념에 잠겨 있던 날 깨운 것은 맹인무사, 자하트의 목소리였다.

"당연합니다."

...당연하진 않지요.

사실, 있는지도 몰랐고, 무투관에 찾아온 이유는 기술적인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곤란하군. 지금 잡히면 안 되는 몸인지라."

덜그럭.

농담을 던지듯, 가벼운 말투로 말한 그는 카굼을 제압했던, 지팡이에 넣은 검을 도로 꺼낼 채비를 했다.

"예전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눈을 감아주면 안 되겠나? 황실도 내 체포에 그리 혈안이 되진 않았을 터인데."

확실히.

'맹인무사' 자하트는 제국에 반하는, 끔찍한 중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는 아니다.

단지 나의 '필요'에 의해서 잡아두려는 것뿐.

그렇기에 놓아준다는 선택지는 없다. 이자의 실력은 진짜배기니까.

'검성'보다 강하냔 말엔 고개를 갸우뚱하겠으나, 견줄 수 있냐고 묻는다면 확실히 긍정할 수 있다.

"그럴 순...."

없다. 라고 말하려던 찰나, 날카로운 오러가 일직선으로 내게 달려들었지만.

이미 알고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무사'가 상대방과의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쏘아낸 이 오러의 '목적'을 말이다.

공격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파밧──!

예상대로 섬광과도 같은 검격이 날아들었다.

'미친, 말도 안 될 정도로 빠르네.'

욕지거리가 나올 정도로 굉장한 속도다.

하지만 이것이 '맹인무사'의 특기, '일점 찌르기'라는 것은 수백 번도 더 봐, 이미 인지하고 있는 상황.

보이지 않는 눈을 '오러'로 대신하고, 그 '오러'로 거리를 파악한 뒤,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일격을 가하는 것.

그것이 '맹인무사'의 승리 패턴이다.

"으음...?"

그것을 '알고 있다'라는 것은 '맹인무사'라는 적을 상대로, 너무나도 큰 강점이다.

그의 습성, 생각, 동작.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심지어.

===

⇒ 〈간파〉 특성이 오러를 감지합니다.

===

높은 마나 감응력 덕에 '맹인무사'가 쏟아내는 오러를 두 눈으로 좇을 수 있었고, 그것은 곧 자하트가 공격하는 방향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척도가 되었다.

그 덕에 살짝 옆으로 점프하는 것으로 자하트의 일격을 피할 수 있었다.

자신의 필승 패턴이 막히자, 자하트는 살짝 언짢은 기색을 비쳤다.

검사로서 쌓아온 기술, 그것에 막대한 자존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공격을 이어나가는 것보단 자하트는 한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계속 안 하십니까?"

난 그런 자하트를 도발했다.

그가 내뿜는 '오러'는 실로 도움이 되고 있었으니.

이것을 응용한다면, '일필휘지'의 경지에 조금 더 일찍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즐겁다.'

평소 검을 맞대는 것으로 이렇게까지 감정이 고조된 적은 없었다.

아마도, 〈새로운 검성〉이란 특성을 얻고 난 뒤, '검'을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진을 위한답시고, 이런 곳에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그나저나, 변장 마법이 걸린 마도구를 착용하고 있는데 알아보다니, 황실의 미친개는 코도 기가 막힌 모양이야."

사실 외형은 내가 알던 '맹인무사'가 아니라 살짝 놀라긴 했으나,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에서 '맹인무사'를 가리키는 지표를 기억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초점이 맞지 않는 동공.

그리고, 검이 숨겨진 장님용 지팡이.

"범죄자들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허허, 장난삼아 한 말이거늘."

씁쓸한 웃음과 함께 자하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모른 척, 해줄 수는 없는가? 북부 전선에서 함께 데몬을 잡으며, 전우애를 돋구지 않았나?"

"용병으로서의 당신이었더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만...."

굳이 케케묵은 옛날 일까지 들추며 살짝 약한 모습을 한 자하트에게 난 빙긋 웃어주었다.

"...범죄자로서의 당신을 봐준다면, '감은 눈'으로서 제, 자신에게 면목이 없어서 말입니다."

당신만 한 대련 상대를 찾기 어디 쉬운 줄 알아? 얌전히 내 스킬의 숙련도나 되라고.

"꽉 막힌 건 여전하군. 하아, 간단하게 용돈벌이나 하려 했더니."

한숨을 쉬던 자하트는 지팡이 검을 오른손으로 꽉 쥐었다.

다시 한번 승부를 볼 생각인가.

"어쩔 수 없지, 비장의 수를 쓸 수밖에."

비장의 수?

나도 모르는 이야기에 살짝 흥미가 생겼다.

'맹인무사'의 전매특허인 '오러 소나'와 '일점 찌르기' 제외하고, 다른 수법이 또 있었나?

'...기대되는걸?'

긴장감과 고양감.

상반되는 두 감정이 얽혀 온몸을 휘감았다.

"유리안, 예전에 북부 전선에서 나누었던 이야기 기억하나?"

아니, 안 나는데?

"전 하찮은 범법자 따위와 나눈 이야기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닌,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지당한 말이다.

제아무리 만인에게 추앙받는 검성이라고 해도 죽으면 끝이니.

"이번 기회에 내가 강하다는 걸 증명해 보이지."

그의 자신만만한 미소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지자, 난 검에 힘을 주었다.

성장을 위해서 온 것이나, 혹여나 하는 사태에 대비해 '솜브라'를 이용하는 것도 염두에 두었다.

취지지직──!

응? 이상한 소리인데.

마치, 영화에서나 보던 도화선이 타오르는….

'도화선...?'

설마, 폭탄?

콰콰앙!

예상이 적중했는지, 자하트의 주변으로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난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간파〉 특성이 이 폭발은 '연막'이라는 것을 알려주었기에.

"둘 다 살았으니, 둘 다 강한 걸로 하세."

연막 사이로 자하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싸우려고 내뱉은 말이 아니었나?'

자욱한 연기 속에서 '오러'처럼 맺힌 자하트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고, 경기장을 빠져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쫓을까?'

아니, 쫓는다면 그땐 정말 생사결을 나누게 될 것이다.

게다가 자하트는 지금 잡거나, 죽여선 곤란하다. 그는 나 대신 '삼각 데몬'을 잡아줄 테니 말이다.

"유리안 경!"

연막이 걷히자, 가면을 쓴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베이런인 모양이다.

"괘, 괜찮으십니까?"

"예, 괜찮습니다."

"아니, 왜 갑자기 튀어 나가신 겁니까!?"

평소 말만 섞어도 공포에 질리던 베이런은 너무나도 뜬금없는 사태에 본심을 털어냈다.

"범죄자가 있었습니다."

"범죄자... 아까 그 장님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베이런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설마, '감은 눈'에 연락해 이곳을 수사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내 말에 베이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까스로 들어온 새 직장에서 또 쫓겨날까 봐 걱정했나 보다.

"그럼 유리안 경께서 무투관에 오신 이유는 범죄자를 잡기 위해서셨군요!"

그래, 일단 그렇다고 해두자.

'맹인무사'가 이곳에 있을지 몰랐지만.

"아쉽게 되었습니다. 녀석이 도망친 탓에 수확이 없으시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럴 리가요. 수확은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베이런과 다르게, 난 '월장검'을 스윽 쳐다보았다.

어쩐지, 그동안 막혀있던 '일필휘지'에 대해 감을 잡은 느낌이다.

***

엘레노아는 무투관 바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당연히도 유리안.

평소라면,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는 걸 피하려는 그녀였으나, 오늘만큼은 할 이야기가 있었다.

'날 이용하다니.'

자신을 그리하는 것, 자체엔 불쾌함은 없었다.

애초에 유리안에겐 빚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녀이다. 아크 비숍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도와준 덕분이었으니까.

문제는 그가 이번 일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안 해주었다는 점이다.

"여기까지 꿰뚫어 보신 건가요? 저도 당신의 손에 놀아났네요."

그 탓에 유리안을 보자, 엘레노아는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뭐, 피차일반인가.'

사실 뻔뻔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자신도 도청 마법을 유리안에게 걸어두려고 했으니 말이다.

분명, 유리안도 이 점을 짚고 넘어가겠지.

"무엇을 말입니까?"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능청을 부렸다.

은은한 미소와 저 실눈.

자신을 떠보려는 듯한 저 태도에 엘레노아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발뺌하지 마세요. 비숍 코룬드에 걸어둔 도청 마법을 눈치채고, 이용하셨잖아요?"

"비숍 코룬드... 아, 그 돼지 같은 남자를 말하는 겁니까?"

또 능청을.

순식간에 에이든을 궁지로 몬 유리안의 전략을 생각한다면, 그가 여기에 있었다는 걸, 모를 리 없건만, 그럼에도 모르는 척을 하다니.

"네, 당신이 무투관에 일부러 모습을 드러낸 덕분에 에이든과 코룬드의 밀담이 불발되었어요. 게다가 오늘 일로 에이든은 더 조급해질 테죠."

"흠...."

살짝 말끝을 흐리는 유리안.

마치, '정말 몰랐다'라는 뉘앙스를 보이려는 듯했으나, 엘레노아는 속지 않았다.

인파가 많은 곳을 싫어하는 이 사람.

에이든과 더불어 '무투관'과는 가장 거리가 먼 남자가 굳이 이곳을 찾았고, 더 나아가 정체를 숨기기 위한 가면도 벗어던졌다.

'이게 우연의 일치라고?'

그런 생각을 하는 머저리가 있을 리가.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데없이 찾아와 쌩뚱맞는 소리를 해대는 엘레노아를 보며, 잠시 사념에 잠겼다.

'에이든의 계획이 틀어져, 녀석이 초조해질 거다'라는 것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녀석은 조금이라도 빨리 자신의 연구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과감하게 굴 것이 뻔했고.

'본래의 스토리에서도 그랬으니.'

그러다 결국 검성에게 죽었지.

'그럼 지금인가?'

이전에도 말했듯, '에이든'은 죽으면 곤란해지는 캐릭터다.

정확히는 스토리에 큰 지장을 준다기보다는 녀석의 죽음이 이벤트의 도화선이 되니 말이다.

그 탓에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게임처럼, 무작정 불리한 이벤트가 일어나는 걸 기다릴 필요는 없지.'

에이든의 연구 결과가 문제라면, 그걸 없애면 되는 것이다.

그 탓에 번거롭게 녀석을 계속해서 살려주고, 내 마음이 조급해져만 가고.

"이번 일을 계기로 에이든 경께선 이전에 연구하던 가짜 뿔에 더 몰두하시겠군요."

"그렇겠죠. 오늘 있었던 일이 소문이라도 난다면, 다른 비숍들이 그에게 손을 빌려줄 리 없을 테니까요."

"잘 되었습니다."

"...그 연구 내용들을 가로채기 위해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었나요?"

엘레노아는 머리 회전이 빠른 모양이다.

지금까지의 내 행보를 보고 어떤 의도였는지 쉽게 도출한 모양이다.

"에이든 경에서 말씀하실 겁니까?"

"그럴 리가요. 저는 누군가의 편을 들 생각은 없지만, 굳이 한 쪽에 서자면 도움을 받은 쪽에 서겠죠."

역시, 어느 쪽 줄이 더 튼튼한지 본능적으로 깨닫는 모양이군.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지만, 에이든이에요. 도나시엥 가문의 '에이든'. 가짜 뿔에 관한 연구는 꼭꼭 숨겨두어서 찾기 힘들 텐데요?"

"아마, 그 연구실은 빈민가 쪽에 있을 겁니다."

엘레노아가 살짝 의아해했다.

"어찌 그리 확신하죠?"

에이든의 비밀 연구실은 랜덤한 위치로 설정되기는 하지만, 대게 빈민가 안이나, 대부분 그 근처에 있었다.

'게임에서 그랬으니까요.'

물론, 이렇게 말할 수는 없겠지.

"전 유리안입니다. 황실 '감은 눈' 소속, 유리안 크라파이트 프라손."

그녀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엘레노아는 어처구니없는 기색을 드러냈다.

"운 좋게 감이 맞았다고 해도, 그 넓은 빈민가를 어떻게 다 찾을 생각이시죠?"

지당하신 말씀이다.

몸은 하나인데 어떻게 그 넓은 곳을 혼자 다 찾겠나.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빈민가를 삼등분하는 세 개의 조직 중 두 조직.'

무명객단.

혈귀단.

이 두 곳과 내가 접점이 있다는 사실을.

 

 

 

 

107화. 마탑의 괴짜(1)

엄중한 분위기가 흐르는 겐멜 수도원의 복도. 이곳을 거니는 것은 이제 익숙하다 못해 신물이 날 지경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부를 줄은 몰랐군.'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당연히 여명회의 총대주교 테넬론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다.

'검성과 결착을 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는 바람에, 잔뜩 기대감을 부풀리고 있었을 텐데.'

결과적으로 '하이든 라이히'의 목을 가지고 오지 못했으니, 실망할 테지.

'하려면 해라.'

설마, 이 정도 일로 분노해서 날 죽이라고 하진 않겠지.

그동안 빌드업한 게 얼마인데.

척살 명령만 떨어지지 않으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너진 신뢰야, 다시 쌓으면 되고, 여차하면 처리해버리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골칫덩어리인 여명회를 수습하기 위해선 테넬론의 존재가 없어져야만 하니 말이다.

아직 그의 상대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얼추 대적은 될 듯싶었다.

'멀지 않았다.'

이 골칫덩어리들을 처리하는 일이.

예전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긴장한 나머지 손에 땀이 맺히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처리하고 속 시원하게 다른 일을 처리하고 싶어졌다.

'음?'

그렇게 알현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수도원 안쪽에서 용무를 보고 나오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 안쪽은 최소 '몬시뇰' 이상의 등급만 입장할 수 있거늘.

상당히 두터워 보이는 풍채의 남자.

저 남자가 '코룬드'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될 줄이야. 오랜만입니다. 코룬드 경."

일면식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사이긴 하다. 이전에 테넬론에게 알현을 할 때, 모여있던 비숍들 사이로 얼굴을 본 정도에 불과하니까.

그럼에도 난 아는 척을 했다.

- '발뺌하지 마세요. 비숍 코룬드에 걸어둔 도청 마법을 눈치채고, 이용하셨잖아요?'

일전에 엘레노아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녀가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직도 무투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엘레노아의 언질로 에이든의 노림수가 실패했다는 것만 알 뿐이다.

"으, 윽... 유리안."

그 탓에 코룬드를 붙잡은 것이다.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말 좀 해달라고.

"그, 그래. 신성국에서 별일은 없었나?"

"예, 다행히도 말입니다."

"자네도 고생이 많았겠어. 황위 계승권과는 무관한 황자를 호위하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겠지."

"후후, 썩 그렇지만도 않더군요."

짧게 웃음을 흘리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자, 코룬드의 몸이 흠칫한다.

반응을 보니, 날 무서워하는 것은 확실한데, 그 연유를 아직 모르겠다.

"그나저나, 제가 신성국에 가기 전, 알현실에서 뵈었을 때 이후로 처음 뵙는 것 같군요."

"쿠, 쿨럭, 쿨럭!"

말을 잇던 도중, 코룬드는 사레가 들린 것처럼 거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 왜 이래.'

생각하던 찰나,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처, 처음이라니.... 무투관에 날 보지 않았나?"

"그게 무슨 소리인지요?"

나는 능청을 떨었다.

사실 나도 코룬드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엘레노아에게 전해 들었을 뿐이지.

그렇기에 오히려 더 뻔뻔하게 군 것이다.

이런 식으로 행동을 해야, 녀석이 보기에 내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으로 보일 테니.

"혹시, 무투관에 계셨습니까?"

"으, 음?"

그리고, 이 대화는 내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에 더해 '비숍 코룬드'에게 향하는 '경고'가 될 것이다.

"신기하군요. 그런 곳에 가실 법한 인상은 아닌데…, 모종의 '약속'이 있으셨나 봅니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흐으음?"

살짝 조소를 흘려주자, 코룬드의 안색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유, 유리안, 잘 듣게. 그곳에서 에이든과 만나긴 했지만, 난 녀석의 제안을 거절했어!"

"제안이라.... 에이든 경께서 저에게 안 좋은 생각이라도 품으셨나 보군요."

"그, 그래!"

"그래서 같은 마법사이신 코룬드 경께 협력을 제안하신 것이로군요."

흠칫하는 모습이, 어쩐지 일의 전말이 나름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코룬드 경께선 협력을 거절하셨다고 하셨지요?"

"다, 당연하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제도에서 웃는 처혀..., 아니 자네에게 이를 들이미는 귀족은 없을 거야!"

그런 것치고는, 대놓고 불만을 가진 놈들이 꽤 많던데.

"확실히, 최근 에이든 경과 충돌이 있었지요. 저 나름으로는 납득할 수 있는 처치였다고 생각했는데, 에이든 경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워, 원래 마법사들이란 뻔뻔한 것들이니 말이야."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코룬드를 보며 난 코웃음을 쳤다.

너도 그 마법사 중 하나잖냐?

***

알현실에 들어간 난 총대주교인 테넬론에게 예를 갖추고 신성국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이든 라이히가 데몬의 힘을 사용했단 말이냐?"

처음에는 '결착'을 맺지 못한 탓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였으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의 얼굴엔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예,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은 오러와 더불어 '마기'였으니까요."

"천하의 하이든 라이히도 마왕님의 힘 앞에선 자존심을 굽힐 수밖에 없었나 보군!"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테넬론.

대충 감이 왔다.

그가 가지고 있는 성물 마신성(魔神盛)은 마기를 이용할 수 있고, 데몬을 조정할 수 있게 만드는 성물이다.

말 그대로 '마왕을 위한 성물'.

'마신성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마기를 머금은 검성 정도는 쉽게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물론, 그건 테넬론이 엄청난 김칫국을 마시는 형국이다.

'검성도 마신성의 존재를 알고 있을 텐데, 나름의 대책을 안 세우겠냐?'

설령 없다고 해도, 온갖 '정신 저항' 능력을 보유한 검성에게 '마신성'이 통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정말이지, 그 말대로입니다. 테넬론 경."

하지만 굳이 먼저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지 혼자 좋아 죽어서 북치고, 장구치고 자빠졌는데.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까짓거 기름 좀 더 부어주지 뭐.

"그건 그렇고, 그 정도 되는 데몬 사육장을 만들 정도면 대신관들과 협력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겠군."

오! 나름 '생각'이라는 걸 하는 모양이군.

테넬론의 말대로 고독전(蠱毒殿)을 만들 정도면 신성국 내의 대신관이 모를 리 없다.

그 말은 즉.

'신성국은 검성의 일을 지원해주고 있다.'

그렇게 되면 더 나아가, 일전에 부순 고독전이 하나만 있으리라는 보증도 없어진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해줄 말이 있었지."

갑작스레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는 테넬론.

무슨 일이냐며, 슬쩍 그에게 시선을 옮기자 녀석이 입을 열었다.

"최근 '감은 눈'이 우리를 조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 같더군."

감은 눈이? 나는 왜 모르고 있는데?

"그렇습니까?"

"그래, 알고 있는 것이 있나?"

"글쎄요. 금시초문이로군요."

"그럴 수 있지. 이제 막 신성국에서 복귀했을 테니 말이야."

'감은 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대부분 '유리안'이 알 것으로 생각하지만, 어찌 되었든 난 '감은 눈'의 단장이 아니다.

게다가 '황실전속기관'이라는 이름답게, 공식적이지 않은,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자네가 처리해줬으면 하는데."

어처구니없는 말에 속으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내가 왜 해주겠냐? 이건 내가 할 수 있어도 안 해야 하는 게 답이다.

"곤란합니다. 저 또한 '감은 눈'의 일원이니 말입니다."

여명회에 속해있으면서, '비숍'이라는 직위를 가진 내가 그리 말하기엔 뻔뻔한 말이었지만, 이것이 '유리안'스럽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저, 일신(一身)을 위해서지만, 예를 갖추는 척을 하는 것이다.

"하긴, 같은 감은 눈의 일원이 당하면 유리안 자네가 의심받을 수도 있겠군."

나름 타당하다고 생각했는지 테넬론은 이해했다.

"그럼 다른 비숍에게 처리를 맡길 수밖에 없겠어."

"그럼 전 이만...."

수긍하는 테넬론에게 간단하게 목례를 한 뒤, 알현실을 빠져나가려던 찰나였다.

"에이든의 건에 대해선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지?"

당연한 일이지만, 총대주교 테넬론은 나와 에이든 사이에서의 일을 눈치채고 있는 모양이다.

"제라르 때와 같은 '방법'으로 처리할 생각인가?"

살짝 의구심이 엿보이는 질문.

처음 여명회에 입단했을 때와 달리 테넬론은 내게 조그마한 적개심과 의심을 띄고 있었다.

저 물음에 무슨 의도가 담겨있는지 알 수 없으나, 이전처럼 모든 것을 눈감아줄 만큼 관대하진 않으리라.

"저는 제라르를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알아서 처리'당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 인제 와서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 말도 맞지."

어쩐지 납득이 가면서, 납득가지 않는 태도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안, 네 짐작대로 제라르가 사라진 후, 검은 기사도 등장하지 않게 되었으니 자업자득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군."

"후후, 맞습니다."

"하지만, 검은 기사가 다시 등장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여운을 남기듯, 테넬론은 그 말을 끝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그래, 그런 일이 있겠냐.

네가 말한 검은 기사가 난데.

당분간 그 신분을 사용할 생각은 없다.

다른 일 하기도 바쁜데, 언제까지 흉내 내야 하는 건가.

그런 건 사절이다.

***

에이든의 연구실이 빈민가에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다.

하나, 자세한 위치까지는 확정하지 못한 상태.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난 빈민가의 인원들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혈귀단의 협력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이, 이번 일만 협력해주신다면 무투관에서 범죄자가 활동했단 사실을 묵인해주시는... 거죠!?"

혈귀단의 주인인 트알레가 무투관에 있었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문제는 일시적으로 '무명객단'을 맡고 있던 마이어가 그리 협조적으로 보이지 않다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 빈민가에서 데몬이 출몰한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게 왜?"

"지금 찾고 있는 것은 그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꺼져, 우리랑은 관계없잖아."

짧은 말투, 경박한 태도.

빈민가에서 자랐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린 녀석이 버릇없이.

"이곳의 치안을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우리가 하지 않아도 돼. 빈민가엔 우리 말고도 다른 놈들이 잔뜩 있잖아?"

에이, 그 정도는 아니지. 고작해야 두 집단이 더 있는 것뿐이니까.

"도와주지 않으실 겁니까?"

"그래, 무엇보다 네 속도 모르는데, 도와줘야 할 이유도 모르겠고."

말하는 뽐새하고는.

'겁을 줄까?'

그것도 가능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다가 마이어가 이상한 마음을 품으면 곤란하다.

잠재력이기는 하지만 '오색'의 마법사와 척지고 싶지도 않고.

잠시 고민하던 난 번뜩이는 생각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쉽군요."

"당신이 아쉽던 말던, 우리랑 상관없거든?"

"제가 아니라, 검은 기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상관없다고 하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기까지 말을 한 뒤, 난 몸을 돌려 돌아가려는 '척'했다.

"이, 이봐! 다, 다시 말해봐. 누가 아쉬울 거라고?"

어찌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지.

"검은 기사 말입니다. 이 일을 부탁한 게 다름 아닌, '그'입니다."

"그 말..., 정말이야?"

그래, 정말이다.

'내가 검은 기사니까.'

뭐, 딱히 지금은 활동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냥 그런 걸로 하자.

"이번 일이 여명회를 위한 일이 아니란 말이야?"

"예, 정확히는...."

슬쩍.

난 마이어에게 귓속말했다.

"그들을 뿌리뽑기 위함이죠."

마이어가 살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자, 그저 빙긋 웃어 보였다.

언제 들통날지 모를 위험한 발언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유리안'의 말이다.

'마이어는 검은 기사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생명의 은인이란 그런 것이니.

 

 

 

 

108화. 마탑의 괴짜(2)

에이든의 비밀 연구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에 등장하는 이벤트, '피의 화요일'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장소.

랜덤 요소가 들어간 탓에 이곳의 위치를 확정할 순 없으나, 지금까지의 경험 탓에 오직 나만이, '연구실'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를 조사하면 되는데?"

"지하수로가 연결된 근처. 그 근처에서 수상한 것을 발견한다면, 이야기해주십쇼."

에이든이 굳이 이런 곳에 연구실을 만든 이유는 실험이 외부에 드러나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동시에 '폐수'를 처리하기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데몬의 뿔, 복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선 폐수가 많이 나온다.'

그렇기에, 에이든의 '연구실'은 랜덤적인 요소를 지녔음에도 늘 빈민가에, 그리고 수로와 연결된 곳에 있었다.

"지하수로.... 거긴 왜?"

"...검은 기사의 지시입니다."

설명을 원한다면, 할 거리는 많다. 귀찮을 뿐이지.

'피의 화요일'이라는 이벤트도.

가짜 뿔에 관련된 스토리도.

앞뒤 서사에 배경 설명까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알았어. 검은 기사님이 말씀하신 거니, 나름의 이유가 있으시겠지."

'검은 기사'에 대한 막대한 신뢰.

내가 그 신뢰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면, 이 녀석 얼마나 놀랄까.

"근데 말이야, 빈민가 전체를 조사하는 것이라면 우리 '무명객단'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이미 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씀.

"괜찮습니다. 다른 쪽에서도 협력을 얻고 있으니까요."

"...역시, 검은 기사님이야. 우리도 모르는 사이 다른 녀석들을 설득하신 거구나."

음. 착각은 자유지만, 뭐, 그런 걸로 하자.

"일단, 알겠어."

그리 말한 마이어는 손끝으로 마나를 모으더니 하늘로 올려보냈다.

그녀가 다루는 정령 중 하나다.

속닥속닥.

마이어가 무엇인가를 속삭이는 모습을 보던 난 그녀에게 한마디 거들었다.

"이왕이면, 가면을 벗고 활동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무명객단'은 제라르 경의 사건 이후, 여명회의 감시를 어느 정도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마이어가 정령에게 몇 마디 더 말을 건네자, 희끗거리던 녀석은 하늘 위로 이내 사라졌다.

"그럼, 나도 다른 단원들처럼 수색을...."

"아뇨, 마이어 양은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저를 좀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완만하게 휜 눈으로 빙긋 웃는, 이 실눈 변태, 아니 악역의 말에 마이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반발하는 마이어의 모습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 녀석에게 '유리안'에 대한 신뢰는 거의 '0'에 수렴하니, 당연한 태도겠지만.

'유리안'이 아무리 달콤한 말로 설득하고, 휘황찬란한 미래를 펼쳐줘도 믿지 않을 것이니.

마성의 치트키를 사용할 수밖에.

"검은 기사의 부탁입니다. 마이어 님만 할 수 있는 것이라며, 특별히 당부하시더군요."

"나만이 할 수 있는...."

잠시 그녀의 눈이 반짝였지만, 이내 고민에 빠진다.

'과연 검은 기사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라고 몇 차례 중얼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어디로 가면 되는데?"

"마탑입니다."

"마탑? 거기는 왜?"

'마탑'이라는 말이 나오자, 마이어의 얼굴은 징그러운 벌레를 본 것처럼 잔뜩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오히려 내가 의아했다.

그곳을 싫어하는 이유라도 있나? 그저,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연구를 위해....

'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알 것 같기도 하다.

여태까지 본 마법사 중 정상인들은 손에 꼽을 정도이니.

처음에는 나를 보고 이를 갈더니, 지금은 상급자처럼 대하는 이상한 놈.

가짜 뿔을 연구, 실험하는 정신 나간 놈.

그런 정신 나간 놈과 협력해, 나를 없애려던 눈치 없는 놈.

완전 놈놈놈이 아니던가?

본래 탐구하는 자들이란 그런 것인가?

어디 하나 나사가 빠진 듯한....

'아니, 생각해 보니 싹 다 비숍이네?'

여명회가 문제인 게 아니라, 문제 많은 놈들이 여명회에 들어간 것일지도.

"그곳에서 가져와야 할 물건이 있습니다."

"가져와야 할 물건? 그게 뭔데?"

"공명석입니다."

에이든의 연구실은 '가짜 뿔'을 연구하는 곳이다 보니, 데몬이 있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

무슨 데몬이 나타날지 확실하게 알 수 없으니, '공명석'이라는 보험 정도는 마련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공명석을? 그것도 검은 기사님의 부탁이라고 했지?"

"예."

"음...."

마이어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검은 기사님은 분명 정체를 숨기고 다니시는데, 왜 당신은 검은 기사님에 대해 이리도 잘 알고 있는 걸까."

흠칫.

마냥 모자라기만 보였던 마이어가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하긴 이 정도 머리는 굴려 줘야, 마법사를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혹시, 당신...."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디서 실수했나?

지금까지 이야기할 때, 생각 없이 내 중심적으로 말을 한 것 같긴 한데.

조금의 눈치가 있다면 내가 '검은 기사'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이어를 너무 무시했나....

"검은 기사님께 어마어마한 신뢰를 얻고 있구나?"

역시, 넌 그냥 바보였어.

"...소문과는 달리, 검은 기사님처럼 고결하신 분이 신뢰할 정도로 당신에게 믿음직한 구석이 있는 건가?"

생각보다 눈치가 없는 마이어에게 난 감사함을 느꼈다.

***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제도의 밤안개를 가로지르는 마차 하나.

도나시엥 가문의 문양이 명확하게 박혀있는 그 마차는 천천히 속력을 줄이기 시작하더니, 어두운 골목에서 멈추었다.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최근 비숍 '코룬드'와의 협력에 실패한 에이든이었다.

"이런 지저분한 곳에서 살고 있을 줄이야."

평소처럼, 냉소적인 표정의 그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어울리지 않는 비웃음을 입에 담았다.

그의 조소가 향한 곳은 골목에서 비참하게 몸을 기대고 있던 남자였다.

넝마와 같은 옷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그의 두 눈은 모종의 감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이 제도의 지형에 대해 나만큼 빠삭한 사람은 드물겠지."

"그 빌어먹을 '연구실' 때문인가 보지?"

연구실, 그 단어가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에이든의 조소는 더 짙어졌다.

"자네도 알고 있었나 보군. 비숍 제라르. 아니, 제라르 경이라고 해야 하나?"

'비숍'이라는 말에 제라르는 살짝 흠칫했다.

그 후, 활화산과도 같은 눈으로 제라르는 에이든을 노려보았다.

"아, 쫓겨났으니 이제 비숍이라 부르기엔 어폐가 있겠군?"

"그 입 닥쳐라! 지금 당장 그 입을 찢어버리기 전에!"

제라르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자, 안쪽에서 서슬 퍼렇게 빛나는 단검과 함께 펄럭이는 오른쪽 소매가 에이든의 눈에 들어왔다.

"진정하지.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배신자란 딱지가 붙은 널 제거하기 위함이 아니니까 말이야."

그 후, 에이든은 살짝 웃었다.

"우린 서로 같은 적을 둔 동지가 아닌가?"

'같은 적'이란 말에 제라르의 어깨가 또다시 살짝 움찔한다.

"유리안, 그 가증스러운 놈을 말하는 게냐?"

"그래."

에이든의 수긍에 제라르는 왼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을 슬쩍 훑어본 에이든은 속으로 혀를 찼다.

'글렀군.'

제라르의 주먹은 분노에 떠는 것처럼 흔들렸으나, 그 감정엔 '탁함'이 끼어들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몸에 새겨진 부정적인 감정인 '공포' 말이다.

"천하의 제라르가 이대로 물러선다고?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이미 여명회에서 이미 자신과 같이할 사람이 없는 에이든은 제라르의 마음을 살살 긁었다.

"그 잘린 오른팔의 복수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테넬론 경께 복수할 마음은 없다."

"그 과정은 '유리안'이 만들었지."

까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

"유리안, 그 녀석을 죽일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면, 협력할 수 없다."

에이든은 살짝 이마를 찌푸린다.

복수심에 제라르의 두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지만, 왠지 모를 망설임이 보였다.

"녀석은 간계를 꾸미는 화신이다.... 아니 악마란 말이다! 그런 악마를 다시 상대하라는 건 질색이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말하는 제라르.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무명객단도, 검은 기사도, 모두 녀석이 꾸민 간계였다니...."

어느새 그의 동공에는 분노가 사그라들고, 감출 수 없는 두려움만이 넘실거렸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네놈 또한 재기를 노리고 있지 않나?"

욕망을 형상화한 것 같은 남자, 제라르는 이런 생활로 만족할 놈이 아니다.

어떻게든 '여명회'의 재계를 노릴 것이며, 지금 자신에게 따라붙은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것이냐? 유리안을 죽일 방법이라던가."

'확실한 수단과 방법이 있다면, 굳이 여기까지 발품을 팔 이유가 있을까?'

그런 말이 턱 밑까지 치고 올라왔으나, 에이든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당연하지."

어차피 제라르는 쓰다 버리기 위한 패.

여명회에서 쫓겨났음에도 여전히 그가 가지고 있는 동아줄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내게 요구하려는 것이 뭐냐?"

"이제야 이야기가 통하는 것 같군."

그리 대답한 에이든은 자신의 계획을 열거하기 시작한다.

"어린 애들. 이왕이면,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애들이라면.... 그래, 그게 좋겠군."

"굳이 어린 애여야 할 필요가 있나?"

"그래, 굳이."

가짜 뿔에 관한 실험에 무엇이 필요한지 익히 알고 있던 제라르는 에이든이 말하는 바를 바로 이해했다.

에이든은 자신의 실험을 위해서, 더 나아가, 가문의 비원을 위해서, 인간의 도의 정도는 얼마 정도 내팽개칠 수 있다.

이것은 '에이든'이란 인간이 가진 욕망이었고, 동시에 인간이기를 포기한 결심이었다.

"미친놈 같으니."

"하하, 빈민가에서 사병을 꾸리던 자네가 할 말인가?"

에이든의 반박에 제라르는 눈을 날카롭게 떴다.

"빈민가에서 그런 애들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지 않나?"

에이든은 빈민가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던 시선을 다시금 제라르에게로 돌렸다.

"그게 유리안을 해치우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지?"

너무나 조심스러운 제라르의 모습에 에이든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지만, 티 내지는 않았다.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 어디까지나, 내 연구를 완성하기 위함이니까."

"...지금 그런 쪽으로 시선을 돌려서 유리안을 처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거냐?"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어렵지 않다는 에이든의 말에 제라르는 도리어 의심하기 시작했다.

"최근 코룬드와의 협상도 실패했을 텐데? 게다가, 제 3황자인 칼드락의 명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터고."

"...용케도 칼드락 황자와의 일도 꿰고 있군."

"이 꼴이 되었지만, 아직 황실 내부와 연결점은 있다. 가문이 망한 건 아니니 말이야."

에이든은 살짝 긴장했다.

그가 이 일을 알고 있다는 것은, 자칫하면 자기 발목을 잡는 일이 될 테니까.

"제 3황자는 신성국과의 화합을 원하지 않는다. 군부와 통하고 있는 그는 전쟁을 일으켜야만 황위 계승권을 확고히 지킬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잘도 알고 있군."

크흠.

에이든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잠시 환기시켰다.

"확실히 신성국 건은 나도 상정하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비숍 코룬드와의 협상 결렬은 내 노림수라고 봐도 무방하지."

"노림수... 였다고?"

"그래."

비록, 일련의 과정까지는 노림수의 영역이 아니었으나 가져올 나비 효과는 에이든의 예상대로일 것이다.

"...그렇군, 유리안을 몰아낼 다른 세력을 만들어내기 위함이었나?"

정확하게 자신의 의도를 알아챈 제라르의 모습에 에이든의 입에서 피식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코룬드도 마법사라면, 이번에 유리안이 일으킨 사태가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겠지."

마법사의 권위에 대한 도전.

그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불손한 생각인지 코룬드는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이다.

'내 명예가 손상되는 건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건, 성가신 유리안의 죽음뿐.

"그런 의미에서 제라르, 너도 갈고 닦은 복수심을 이번 기회에 표출하는 건 어떻겠나?"

"음."

직접적인 에이든의 제안에 제라르는 신음과 함께 고민을 시작했다.

어차피 이 물음에 긍정 말고는 할 수 없는 답변도 없을 터.

에이든은 속으로 웃음을 머금고 기다렸다.

미끼를 물기를.

어쩔 수 없이 제라르는 자신에게 협력할 수밖에.

"아니. 네놈과 협력하지 않는다."

 

 

 

 

109화. 까마귀와 백로(1)

"아니. 네놈과 협력하지 않는다."

예상외의 답에 에이든은 살짝 당황했으나, 티를 나지 않도록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의외로군. 복수를 원하지 않았나?"

제라르가 유리안을 철천지원수라고 생각하는 것쯤은 알고 있다.

둘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기 전부터, 굴러들어온 돌인 '유리안'을 제라르는 좋아할 수 없었을 터.

"그런 자네가 꼬리를 말 줄이야."

"네놈이 감히...."

에이든의 조롱에 명백한 불쾌함을 표출하는 제라르였다.

제라르마저 거절한다면 혼자서 유리안을 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계속 그의 복수심을 자극해야 해서 제라르를 끌어들여야만 한다. 그게 쓰고 버릴 패든, 계속 가지고 있을 패든 상관없이.

여기서 노발대발해도 상관없다.

그 분노를 이용한다면, 어처구니없는 제라르의 태도를 인정할 정도로 유리안을 처리할 확률이 올라갈 테니까.

극에 올랐던 분노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는지, 침착을 가장한 제라르는 완곡한 거절의 뜻을 보인다.

"확실한 비전도 없는 네게 내가 협력한다 해도, 얻을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뭐?"

에이든도 알고 있는 사실.

완벽한 동맹은 없다. 이것은 서로가 이점을 챙기기 위한 줄다리기라는 것을.

하나, 조금 전 제라르의 말에는 '어떠한 의도'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너와 함께 한다고 해도 유리안을 죽일 수 없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니.

"완전히 꼬리를 내려버렸군. 제라르."

순전히 이야기의 주도권을 가져오려는 의도였다면, 가소로움에 혀를 찼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더라면, 흔쾌히 내줄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제라르는 순수하게 '넌 유리안을 이길 수 없다'라고 들려준 것이다.

불쾌함이 배가 되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근시안적인 사고에, '비숍'이었던 제라르가 역겨울 정도였다.

이런 자와 같은 직위였다니.

"항상 꼬리가 서 있다면, 죽기 딱 좋을 뿐이다."

"계속 이렇게 살 텐가? 도망치고, 끝까지 도망쳐서 뭘 얻을 수 있겠나?"

"너보다 영향력이 있는 자가 일어날 때, 나도 일어난다."

자신보다 영향력이 있는 자?

지금 생각나는 인물은 두 명뿐이다.

아크 비숍인 엘레노아.

다른 하나는 총대주교 테넬론.

엘레노아는 잠정적이지만, 유리안의 편에 섰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까지 아무런 말과 행동이 없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총대주교께선 유리안을 총애하신다."

"곧 테넬론 경께서도 눈을 뜨실 거다. 녀석이...."

꿀꺽.

제라르가 침을 삼키는 것이 들려왔다.

"녀석이 '검은 기사'라는 것을 테넬론 경께서도 알아챈다면 말이다."

유리안이 검은 기사라고?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망상의 범주를 넘어섰군.'

그리 생각한 에이든은 혀를 찼다.

"증거라도 있나? 증거가 없는 심증뿐이라면, 테넬론 경은 고사하고 나조차도 설득할 수 없을 터인데?"

"증거는... 없다."

역시나.... 과대망상이로군.

"하지만, 확실한 심증을 가지고 있어."

"세간에선 자네가 '검은 기사'였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네만?"

충혈된 눈으로 제라르는 에이든을 노려보았다.

"검은 기사는 '무명객단'의 소속이었고, 자네는 그 '무명객단'이라는 사병 조직의 소유자였지. 검은 기사의 행보는 결국, '핀텔'을 몰아붙이고 자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지 않았나?"

"그게 유리안이 파 놓은 간계라고!"

"만약 유리안이 그 정도로 대단한 계획을 짤 정도라면, 이렇게 너와 내가 대화하고 있는 것도 알아챘겠지."

콧방귀를 뀌는 에이든은 부들부들 떠는 제라르를 경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네 모습은 정말로 의외지만, 유리안이 간계에 능하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래도 그의 '능함'을 믿는 자네는, 마치 광신도처럼 보이는군."

공포와 두려움이 한가득한 제라르를 보며 에이든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끝날지 예상하지 못했지만, 꼬리 내린 개는 나도 필요 없네."

"예상할 수 없었다라...."

어느새 표정이 바뀐 제라르는 비릿하게 웃었다.

누가 보면 실성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분노와 공포, 실소와 체념의 감정이 순식간에 오가고 있으니.

"그 말 덕분에 난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에이든, 넌 유리안에게 죽는다."

허물없는 악담에 어처구니가 없던 에이든은 대꾸하지 않은 채, 더러운 길가를 벗어나 마차에 탑승하자, 움직이기 시작한다.

"제라르를 죽여라."

무미건조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에 마부의 눈빛이 번쩍였다 이내 사라진다.

"그리고, 펠코르에게 연락해라. 연구를 위해 '소재'가 필요하니, 빈민가의 어린아이들을 모색하라고."

***

첫 만남에 내게 이빨을 들이밀며, 주먹으로 인사를 나누던 거구가 찾아왔다.

당시 생긴, 눈에 난 상처를 가리키며, 상처의 원한을 토로하던 사내.

'몬시뇰'이라는 계급에 어울리게 출중한 실력을 지녔지만, 쉽사리 나의 기백에 겁을 먹는 거한.

"그, 그렇습니다. 제가 유리안 경에게 거짓된 정보를 가져왔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런 녀석이 이제는 내게 와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니.

절대, 이놈과는 좋은 쪽으로 엮일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건만.

정말이지, 세상 사는 일은 모른다.

"흠...."

난 짧은 신음을 흘리자, 눈앞의 거구, 강완(强腕)의 펠코르가 살짝 움찔한다.

그가 에이든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다.

그의 말에 거짓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나는 '의심'을 해야 하는 입장이다.

아무래도, 원한 관계가 아니었던가?

아무리 녀석의 자존심을 한 번 부셔놓았다고 해도, 이렇게 쉽사리 굴복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펠코르 경."

"예, 예!"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에이든 경께선 펠코르 경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여기서, 쓴소리할 필요가 있나?

이 녀석이 정말로 변심했던 아니던, 구슬려두는 것이 좋겠지.

죽음은 순간이고, 복종은 계속되니.

"그래서, 가져왔다는 정보가 무엇입니까?"

게다가 무슨 소식을 가져왔으니 들어두자.

"에이든이 자신의 연구를 위해서 빈민가의 어린아이들을 모색하는 것 같습니다."

정중하게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존댓말을 하는 펠코르.

무의식적으로 뱉는 내 말투도 적응이 안 되는데, 저놈은 더 적응이 안 된다.

"어린아이라고 하셨습니까...."

말끝을 흐렸다.

개인적인 비원을 이루기 위해서 아직 꽃도 피워보지 못한 어린아이를 실험 재료로 사용한다는 행위가 역겨워서 말이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어린아이를 모색하는 것 정도는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데."

그런 내 속 마음을 이해하진 못했는지, 펠코르의 비인도적인 말이 계속되었다.

그게 싫다고, 이 새끼야!

잠시 고민하던 중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일단, 방치 해두는 게 좋겠군요."

"방치... 말씀이십니까?"

"예."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결과가 없으면 에이든이 저를...."

"걱정하지 마시길."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활짝 미소를 지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

펠코르가 돌아간 뒤, 난 마이어와의 약속대로 마탑으로 향했다.

에이든의 연구실을 찾기 위한, '공명석'을 마련해두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선 마탑의 협력이 필요하다.'

사실 공명석(共鳴石) 자체를 받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감은 눈' 소속인 내가 달라고 하면, 데몬을 토벌한다 생각할 수 있기에 자연스레 내줄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아무도 모르게 공명석을 가져오는 일.'

과한 생각일 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움직인다면 '비서실'에선 공명석의 반출이 기록될 것이다.

그것을 '여명회'에서 알게 되면, 비숍인 에이든이 그 정보를 접할 것이고, 내 목적을 알아챌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절차를 다 무시하기 위해서는 마탑을 지탱하고 있는 '세 현자' 중 한 명과 담판을 지어야만 한다.

그건 어려울 것 같지 않다.

'순백의 플뤼겔.'

풀네임은 플뤼겔 코라노이아.

이전에 제 4황자 호위대장 최종 명단까지 살아남은 '아니에스'의 스승이다.

내가 생각하는 '마법사'라는 명칭에 제일 가까운 남자이며, 동시에.

'마법에 미친 놈이지.'

그게 '플뤼겔'에 대한 세간의 평가다.

신경질적이고, 자신의 인생을 오롯이 '마법'과 '지식'을 위해 희생한 노인네.

마법으로 150살을 넘게 살고 있는 이 노친네의 놀라운 점은 비단 '나이'뿐만이 아니다.

'마법에 일신하기 위해서....'

콜록──!

젠장, 헛기침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규화보전(葵花寶典).

어디선가 한 번쯤 다 들어봤을 것이다.

말로만 듣던 '그것'을 실제로 행한 남자였기에. 그 말인즉.

'...고자다.'

불쌍한 놈....

하지만 그 대단한 정신력에 박수를 보낸다.

'마법'이라는 일념을 위해 자신의 신체를 거뜬히 자를 수 있는 결단력이라니.

'신체부모수지발부(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유교적인 관점으로 보면, 불효자라 말할 수 있겠군.

제국에서 그를 '현자'라는 둥, '순백'이라는 둥 치켜세워주는 이유는 사실 동정표가 아닐까?

'흠..., 충분히....'

어찌 되었든, 그 신경질적인 노친네의 고삐를 그나마 잡을 수 있는 것이 지금 곁에 있는 마이어다.

시대가 낳은 천재.

확실한 색깔의 마법사.

쟁쟁한 인재들 속에서도 자기 능력을 당당히 뽐내는 불세출의 기재.

천재는 천재끼리 서로 영감을 준다고 하지 않는가?

'플뤼겔'에게 있어서 그 대상이 '마이어'라는 것이다.

"으아아아.... 못 볼 걸 봤어."

따라오던 마이어가 푸념을 입에 담았다.

"마법에 과몰입하면서, 사회생활이라고는 1도 안 해본 듯한 저 샌님들을 보라고!"

"조용히 하십시오."

"분명 신발 신는 법도 모를 거야! 마법으로 어떻게든 해결해보겠다면서, 꼴깝을 떨고 있을 테지!"

호들갑을 떠는 마이어에게 얼굴을 가까이한 난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잔뜩 환한 얼굴로.

그러자, 마이어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죽기는 싫지?

'게다가 너도 마법사잖냐!'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지금의 그녀는 '정식적인' 마법사의 절차를 아직 밟지 않았다.

어떠한 교육도 받지 못했다는 소리.

즉, 자신은 '마법'을 다룰 수 있을 뿐, '마법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보니, 이것도 선민의식이로군.'

어찌 보면 너희와는 다르다! 라며 선을 긋는 것이 아닌가?

뭐, 나랑은 딱히 상관없지만.

"그런데, 내가 마탑에서 봐야 할 사람이 누군데?"

"있습니다. 높으신 분."

퉁명스러운 마이어의 질문에 난 적당히 둘러대었다.

약간 불만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던 마이어는 얼마 안 가, 드높은 마탑의 꼭대기로 시선을 옮겼다.

마법사들이 집결하여 고위 경지의 마법을 실천하고, 지식과 지혜를 교류하는 장소.

그런 곳을 보며, 고작 한다는 소리가.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뒤지겠지?"

...정말 이놈 머릿속에 뭐가 살까?

"저 꼭대기에서 마법을 연구해보는 상상은 해본 적 있습니까?"

"뒤지는 게 나을 것 같아."

신랄한 비판을 입에 담는 마이어.

응, 그래. 지금을 즐기렴.

너, 곧 저기 대학원생 되는 거야.

***

사실 피의 농도에 따른 우월주의가 과거의 명맥을 벗어나 새로운 의미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쯤은 코룬드도 알고 있다.

순결했던 마법사들의 피에는 이미 '탁함'이 깃들기 시작했으니.

그러나 자신들의 뿌리를 부정하는 순간, 자신들이 그토록 주장해왔던 순수(純粹)도 무용지물이 된다.

그럼에도 마법사들은 '순혈주의'를 내세웠다.

"우리들의 권역에 그 반쪽짜리가 끼어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말이야."

피가 탁하든, 묽든, 순수하든.

'순혈주의'라고 자신을 지칭하는 순간, 연결점이 생기는 것이다.

"넌 어떻게 생각하지? 이대로 있다간, 우리들의 위치도 위태로운 것은 당연한 상황이야."

그 '연결점'을 이용해 코룬드는 유리안을 타도하기로 결심했다.

"아크 비숍의 자리는 비록 엘레노아가 차지했지만, 지금 놈의 위용은 '아크 비숍'을 '따위'라고 치부해도 될 정도지."

에이든의 계획대로.

"확실히, 녀석의 실력은 어마무시하다. 일전에도 내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 의표를 찔렀지."

그는 에이든의 의도대로 다른 비숍과 접촉해 '유리안 타도'를 위한 새로운 세력을 꾸리기 시작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공포였다."

코룬드는 일전에 무투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웃음과 함께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얼굴.

그때 느꼈던 감정은 분명 '공포'라고 형용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녀석을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더 이상 우리들의 자리가 없어진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 말한 코룬드는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지엽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순혈주의'의 표방자.

동시에 자신과 같은 마법사이며, '비숍'의 위치에 선 자.

"핀텔, 너라면 날 이해해줄 수 있겠지?"

잠자코, 코룬드의 말을 듣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주 냉정하면서 분노가 가득한 표정으로.

 

 

 

 

 

110화. 까마귀와 백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