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검성(1)
신성국 페레난드.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중요한 단 하나, 나의 사심을 채우기 위한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후후. 다른 곳에서는 절대 못 구하는 것이지.
"하나 같이 잘 관리한 것이라,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무기냐고? 훗. 나에겐 이미 월장검이 있다.
그렇다고 방어구도 아니다. 오러를 두른 '유리안'의 몸은 웬만한 방어구, 빰 치니까.
그것은 바로....
'난초'를 구매하는 것이다.
고작 '난초'라고 말할 이가..., 분명 있겠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
제국에 존재하는 난초와 신성국에 존재하는 난초는 엄연히 다른 형태다.
굳이 비교하자면, 제국에서 나는 난은 동양란, 신성국에서 자라는 것은 서양란 정도의 차이라고 할까.
애초에 그 구분도 틀린 것이긴 하지만, 쉽게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꽃집 주인이 준비한 화분들을 하나둘 살펴보던 난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손으로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아유, 당연히 가능합니다!"
주인이 허락하자, 난 손으로 난초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군.'
손으로 난초를 훑은 난 꽤나 간지러운 촉감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이 두 개로 구매하고 싶습니다."
"린기아 난과 프라빈초를 고르셨군요.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이것들은 신성국에서만 자라는, 아주 진귀한 난초들이니 말입니다."
주인장의 입에 발린 말에 난 미소로 일관하며, 계산을 진행했다.
제국의 화폐인 '나르'가 이곳에서도 통할지 미지수였으나, 주인장은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조금 더, 웃돈을 지불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정말로 난초를 구매하러 시장에 온 것이라니...."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동행한 린네가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모처럼 타국에서 갖는 개인 시간인데, 저를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따로 돌아다니는 게 어떻겠습니까? 린네 양."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녀는 필요 없다는 듯,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
"검을 휘두르는 자, 아니 마나를 다루는 자는 자기 욕망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린네 양."
"욕망과 마나가 무슨 상관이죠?"
"마나는 사용자의 바람에 큰 반응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라는 뉘앙스를 풍긴 린네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화분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거, 제국으로 돌아갈 때 가져갈 수 있을까요? 그 크기라면, 안장에 매달아도 하나밖에 못 달 것 같은데."
"음...."
의표를 찌르는 말이다. 린네의 말에 입술을 다신 난 화분을 한 번 살펴보았다.
사실 이것을 살 때 그것조차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곤란하군요. 이거 두 개가 마음에 들었는데 말입니다."
조금 작은 걸 사야 하나.
고민하는 척, 린네를 바라본다.
"어쩔 수 없죠. 하나는 제 말에 달면 되겠네요."
"괜찮겠습니까?"
"네, 말 타는 법도 교정해주셨으니까요."
"아뇨. 그 실력으로 안장에 뭘 실어도 되냐고 묻는 겁니다."
린네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웃는 날 쳐다보았다.
"농담입니다. 린네 양. 배려에 감사합니다."
끼릭, 끼이이익──!
그때, 시끌벅적한 시장에 거북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린네가 흠칫하며,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난 이미 멀리서부터 알고 있었다.
'그것'이 오고 있다는 것을.
덜그덕. 덜그덕.
말들이 끄는 수레 뒤에는 쇠로 만든 거대한 철창이 있었고, 그 안에는.
"데몬?"
맞다. 그 철창 안에는, 데몬이 침을 흘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짐승형 데몬이군요. 뿔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일말의 지능도 없는 무각인 듯 보입니다."
"그건 보면 알아요. 제 말의 논점은 그게 아니잖아요."
나도 안다.
철창 안에 갇혀있기는 하나, 데몬이 왜 이곳에 있냐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말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신성국에는 '저속'한 문화가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저속한 문화요?"
"그렇습니다."
사실, 저렇게 강한 어투로 말할 생각이 없었으나 '유리안'은 '이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은 모양이다.
"...투기장입니다."
"투기장? 제가 아는 그 투기장이 맞나요?"
"아마 맞을 겁니다. 유흥과 돈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거는, 파리들이 향하는 곳이죠."
말을 내뱉고 보니, 유리안이 왜 투기장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투기장에 참가하는 이들은 일신의 명예나 자기 발전이 아닌 오직 타인의 유흥을 위해서 검을 휘두른다.
물론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오직 하루를 근근이 버텨가며 살아가는 벌레의 발버둥 같은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그런데, 투기장은 제국에도 있지 않나요?"
"맞습니다. 하지만, 데몬과 데몬. 더 나아가 데몬과 인간을 대결하게끔 하는 투기장은 저희 제국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곳 신성국에만 존재한다.
몸의 반응을 보니, 데몬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군.
내 말을 듣던 린네의 두 눈은 차갑게 가라앉는다.
"그렇다면, 저 데몬을 가둔 철창은 유리안 경이 말한 투기장으로 가는 것이겠군요."
"제가 '저속하다'라고 말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린네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본다.
순백의 하얀 건물과 절제의 미가 느껴지는 아름다움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충격적이네요. 수도의 풍경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거든요. 신성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기품있는 곳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미사여구로 자신을 포장하는 이들은 자신의 본질이 결여된 자들이지요. 신사의 나라엔 신사가 없듯이, 신성국에는 신성이 없기 마련입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이론이고, 나중에 나올 유리안의 대사 중 하나를 인용한 것이기도 하다.
- '빛이 있으니 어둠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승님.
"그 말도 맞네요."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평소에, 황실에 충성을 다한다는 둥, 검술의 극에 달했다는 둥, 그런 말을 떠들고 다니는 사람도 그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겠네요?"
많이 컸다. 이렇게 은근슬쩍 돌려 말할 줄도 알고.
"농담이에요. 유리안 경. 설명까지 해주시고, 배려에 감사하네요."
린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 방 먹었군.
그리 생각하며, 계산한 화분을 집어 든 난 대신관이 배정해준 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툭툭──.
돌아가는 와중, 린네가 손가락으로 내 등을 쳤다.
"미행이 세 명 따라붙고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화분을 구매하고 나온 이후, 세 개의 인기척이 우리를 따라붙고 있다는 것은 진작에 눈치챘다.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왜 그리 평온했던 거죠?"
늘 있던 일이라.
게다가, 그 경험이 쌓인 나머지, 판단도 빨리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아무래도, 습격이 목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방인인 저희 행동을 주시하는 것뿐이겠죠."
"...그걸 어떻게 알아요?"
감으로.
이미 몇 번이나 미행을 당해본 경험자의 직감이다.
예상대로 우리를 뒤따라오던 인기척에게서 그 어떠한 마나나 오러, 살기 같은 것은 드러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가롯 대신관과 관련이 있는 놈들이겠군.'
신성국에 입국하자마자 미행이 따라붙은 게 아닌, 대신관 가롯과 이야기를 한 뒤 따라붙은 미행이니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봐줄 수 있다.
괜히 저들을 잡았다가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더 골치 아파질 수 있지 않겠나.
"...음?"
그런 내 바람에도 불구하고, 별장의 입구엔 불청객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보였다.
예복을 입고 있는 신관 둘. 그리고 프라시온처럼 기사의 무장을 한 남자다.
'누구지?'
신성국의 네임드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 익숙할 텐데, 완전히 처음 보는 얼굴이다.
음, 그런데 저쪽은 아닌 모양이다.
한 남자와 눈을 마주치자 머리 위로 맹렬한 <부정의 색>을 띄웠다.
피처럼 붉은빛, 분노.
저 정도로 뚜렷한 감정이라면, 모르는 낌새를 비추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화를 자초할 수 있다.
"유리안...!"
심지어, 이를 까득거리며 남자는 내게 다가왔다.
누구지? 진짜 모르겠는데. 뭐라고 해야 하냐.
"감정을 추스르거라, 이델."
그때, 갑작스레 끼어든 중저음의 목소리.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린네와 난 저도 모르게 돌아보았다.
낯이 익은 얼굴이 보인다.
짙은 흑발 탓에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흰 머리. 그리고 굳은살이 잔뜩 배긴 손.
피곤함이 역력한 갈색 눈동자와 그에 대비되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표지에서 볼 수 있었던 그 얼굴이다.
"스승..., 유, 유리안 경!"
옆에서 린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그 이유를 알아챈 순간, 난 이미 땅을 박차고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캉──!
하지만 중년의 남자는 익숙한 듯이, 손쉽게 내 검을 막았다.
"성격은 여전하구나. 유리안. 보자마자, 인사 대신 검을 휘두르다니 말이야."
나와 검을 맞댄 남자는 사뭇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드리는 인사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스승님?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마찬가지로 나도 평온하게 대답했다. 빙긋 미소까지 보이며.
'미친놈 같으니라고!'
눈앞에 하이든 라이히가 보이자, 몸은 당연한 것처럼 반응했다.
그리고 내 머릿속, 한쪽에서는 엄청난 살의가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이 자를 죽여라.
너를 모욕하고, 파문한 이 남자를 죽여라.
'닥쳐라. 좀.'
속삭이는 유리안의 본능 최대한 억제하며, 이 상황을 모면하려는 순간, 오싹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무탈하다마다, 지금 이 모습을 보면 모르겠느냐?"
끼릭, 끼리릭──!
하이든의 몸에서 서슬 퍼런 마나가 일렁거렸고, 그와 동시에 맞댄 검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크윽...."
이렇게 힘으로 밀린 적은 처음이다.
아마도 하이든 라이히가 몸에 두르고 있는 푸르스름한 오러 때문일 것이다.
검신합일(劍身合一)
유리안을 대표하는 '월광검'이 있듯, 주인공인 하이든 라이히를 대표하는 오러.
전신을 짓누르는 오러의 기백에 몸이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주인공인 검성의 실력.
주인공의 '오러'에 압박당하는 전지적 피해자 시점이 된 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 그만 검을 거두세요. 유리안 경! 스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나와 하이든을 중재한 것은 다름 아닌, 린네였다.
그녀의 외침을 들은 검성은 린네를 힐끔 쳐다보더니, 서서히 오러를 거두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지 말거라. 린네야. 간단한 인사치레와 같은 거니 말이다."
나도 검을 거두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오랜만이구나. 그간 잘 지냈느냐?"
"네? 아...."
등장도 갑작스러운 하이든 라이히가 안부를 묻자, 린네는 당황했다.
한 번의 헛기침으로 감정을 다스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 스승님."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린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이든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할 이야기가 많을 테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하이든은 별장의 안으로 들어섰다.
허점 가득한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난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고 싶어졌다.
이상할 정도로 강한 불쾌함.
그런 불쾌함 속에서도.
'아!'
다행히 화분은 챙겼다.
***
"이야, 이렇게 검성과 유리안, 그리고 린네 양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면을 보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네."
자리에 앉자, 먼저 하이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율시스가 입을 열었다.
어쩐지, 그의 이마 사이로 식은땀 한 방울이 흐르는 것이 보인다.
표정은 괜찮은 척을 하고 있지만, 이 상황이 두려운 모양이다.
검성과 유리안.
나 같아도 무섭겠다. 언제 격돌할지 모르니.
"...후우."
마찬가지로 린네도 지금껏 보았던 표정 중 가장 긴장한 얼굴로 나와 검성을 쳐다보았다.
우리의 불편한 진실은 모두가 아니까.
당장이라도, 내가 검을 뽑아 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꽤나 괜찮은 취미가 생긴 모양이구나."
그런 불편함이 내려앉은 분위기를 뚫고, 하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난초를 기를 줄 상상도 못 했다. 그런, 자잘하게 손이 가는 것들은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스승님께서는 저를 제대로 알지 못한 모양입니다."
괜스레, 비꼬는 말투가 되었다.
그렇게나 꿈에 그리던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주인공을, 검성을 눈앞에 마주했건만 벅차오르는 감정보단 짜증이 먼저 일었다.
"하긴, 오랫동안 보지 못했으니 취향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군."
나를 잘 알고 있다는 뉘앙스의 말투.
오히려 가슴 속의 피어오르는 불쾌함에 기름을 뿌리는 격이었다.
"율시스 전하, 잠깐 제자들과 이야기하고 싶은데 자리를 비켜줄 수 있으시겠습니까?"
"흔쾌히 그러지. 그럼 지금껏 쌓인 회포를 풀.... 아, 풀면 안 되려나?"
황족에게 자리를 비워달라고 할 정도로 어마무시한 담력에 혀를 내두르며, 난 멀어지는, 왠지 작아 보이는 율시스의 등을 쳐다보았다.
그 후, 다시금 하이든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검성, 그 이름이 가진 무게감은 내게는 가볍지 않다.
이 게임을 붙잡게 만든 원인.
제작사에 분노하게 만든 근원.
그리고 내가 이 꼴이 된 이유.
지금까지 많은 문화를 접해오며, '주인공'이란 메타포를 쌓게 만들어준 당사자.
그런 존재가 자신의 본분을 버리고, 신성국으로 망명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이 정도로 불쾌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율시스도 자리를 비웠으니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그 불쾌함이 형태를 잡히기 시작했다.
==
⇒ 특성, 「솜브라」가 데몬을 감지했습니다.
==
91화. 검성(2)
특성, 「솜브라」가 데몬을 감지했습니다.
검성, 하이든 라이히에게서 데몬의 체취가 느껴졌다.
아주 최근 데몬을 죽이기라도 한 것일까?
그럴 리가.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의구심을 무르고, 하이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스승님."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내가 아닌, 린네다.
그녀의 두 눈은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나,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린네."
"어째서...."
무엇인가를 물어보려다, 숨을 한 번 들이마시는 린네는 이내 결심했는지, 말문을 열었다.
"정말..., 신성국으로 망명하신 건가요?"
린네의 솔직한 질문에 나 또한 흥미가 생겼다. 수많은 스토리를 진행해왔지만, 검성이 신성국으로 가는 라인은 없었으니.
"제국의 검사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신민으로서 봉사하라는 것이 스승님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 아니었나요?"
"맞다."
"그렇다면 왜...."
하이든은 말끝을 흐리는 린네를 쳐다보았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무슨 말을 잇고 싶었던 눈치였으나, 그녀는 하이든의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제 스승님은 저희가 알던 고결한 분이 아니라서겠지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워, 난 먼저 말을 꺼냈다.
배신감이 크겠지.
아버지가 죽은 뒤, '스승'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 공백을 채워준 것은 다름 아닌 검성이었으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스승님의 선택에 의구심을 갖지 마십시오. 비록 자신을 따르던 이들을 매몰차게 버리고, 수제자인 당신에게도 말없이 신성국으로 망명한 그를 이해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말을 이을수록, 린네의 얼굴은 구겨져 갔다.
그건 아마 내 말에 대한 불쾌함 때문이 아닐 거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격통 때문에.
자신이 믿었던 인물의 변절 때문에.
나 또한 말이 길어지는 것을 느꼈다.
'유리안'이라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검부터 들고 설쳐댔겠지.
하지만 자기 객관화가 가능한 부분이다.
'검성'이란 존재는 나에게도 큰 의미가 있었으니까.
"...미안하다."
그때, 한참을 가만히 있던 검성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린네, 너에게는 해줄 말이 없구나. 내 선택이 너에게 상처를 줄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귀띔도 해주지 않았으니 말이야."
하이든의 사과에도 린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무릎 위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초롱초롱하던 두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으니.
"그래서 너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사실 그걸 위해서, 율시스 전하에게 너희를 추천한 것이니까."
나는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분명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될 것 같기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면서 말이다.
"제국을 떠나, 신성국으로 망명하는 게 어떻겠느냐?"
이놈이 미쳤나.
***
누가 자신을 놀리는 줄 알았다.
검성의 제자인 자신에게 하는 짓궂은 장난.
그런 생각을 하던 그녀를 일깨워준 것은 다름 아닌 검성, 그의 제안이다.
- '제국을 떠나, 신성국으로 망명하는 게 어떻겠느냐?'
그 말을 들은 린네는 정말로 검성이 신성국에 망명했다는 사실과 함께, 커다란 감정이 가슴 속에 와 닿았다.
바로 '당황'과 '불안'이란 감정이 말이다.
'사, 사실이구나. 스승님께서....'
정말 터무니없는 제안이었다.
당장 칼을 뽑아 그 목을 치지 않은 것은 그 말을 꺼낸 이가 자신에게 무척이나 큰 무게를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고결한 검성.
자신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준 이.
존경하는 사람의 제안을 단순히 우스갯소리로 터부 할 수 없기에,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저, 저는...."
그녀의 본능은 거절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스승님께서 괜히 내게 이런 제안을 하실 분이 아니야. 뭔가 이유가.'
린네는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려 하이든의 눈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인자한 미소가 담긴 표정과 자신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 눈빛.
만약 자신이 거절한다면.
'실망이 크시겠지.'
그런 생각에 린네는 쉽사리 말문을 열 수 없었다.
"'감은 눈'의 대원인 제가 앞에 있는데, 감히 '망명'이란, 그딴 말을 꺼내시는 겁니까, 스승님?"
그때 유리안이 린네와 하이든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평소와 같이, 웃는 얼굴로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있으나, 그를 오래 보아온 그들은 그 안에 있는 약간의 분노와 불쾌함을 감지해 내었다.
"그렇게 화낼 줄 알고 있었다. 그런 너에게 해줄 말은 아니지만, 어떠냐?"
"황실의 사냥개인 저에게 신성국으로 망명을 하란 말씀이십니까? 후후. 정중히 거절하도록 하지요."
"내 목을 원하지 않았느냐? 바로 옆이라면, 그 기회가 더 많아질 터인데."
그건 린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유리안이 스승인 '검성'의 이름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다른 누구보다 '검성'을 인정하며, 또 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것의 방증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린네는 유리안이 저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비웃듯 유리안은 어김없이 후후, 하며 재수 없는 표정으로 짧게 웃었다.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습니다. 그것에 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알다마다. 내가 친히 말해주었으니."
"하지만, 땅에 떨어진 이름이라면 그 누가 탐을 내겠습니까? 오히려 '손'이 더러워질 뿐인데 말이죠."
참으로 일관성이 있는 남자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다른 이의 추락은 모른 척할 거라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
그리 생각한 린네는 스승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하다.
"뭐, 그렇게 답할 줄 알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하이든은 예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린네에게 시선을 옮겼지만.
"저도 거절하겠습니다."
유리안의 거절은 상정해두었으나, 린네의 거절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하이든의 얼굴엔 아쉬움이 깃들었다.
"제 아버지가 그랬듯, 저 또한 제국 신민이니까요."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대답이었으나, 확고한 유리안의 태도에 그녀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비록 그가 한 말이 마음에 와닿진 않지만, 결론적으로 지금 속한 제국에 대한 충성심만은 본받을 만했다.
게다가 한 번 내뱉으니, 뭔가 답답한 곳에 갇혀있다가 나온 것처럼 가슴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하이든의 얼굴에 떠오른 아쉬운 기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애초에 황자를 호위하러 이곳까지 온 너희들에겐 자기 주제도 모르는 제안이었지."
자조적인 자세를 취하다, 이내 다시금, 인자한 미소가 떠오른 하이든은 손으로 자신의 턱을 한 번 훑었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를 뻔한 순간에.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스승님."
이번 이야기의 화두는 유리안이 잡았다.
"얼마든지."
팔을 활짝 펼치며 당당히 외치는 하이든에게 유리안은 일침을 날린다.
"몸이, 그 꼴이 된 것은 자각하고 계십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린네는 유리안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 맥락을 잡을 수 없는 질문이었으니 말이다.
"흠."
하지만 스승인 하이든은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 흥미를 보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군. 유리안."
"아시잖습니까? 그 죽기 직전인 몸뚱어리."
차락──!
유리안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자신의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데몬화가 진행 중이지 않습니까?"
충격적인 유리안의 말에 린네는 화들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 했으나, 믿기 힘든 사실에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는다.
"스승님이?"
'거짓말.'
린네는 아니라고, 아닐 거라고. 계속해서 부정했으나.
"용케도 눈치챘군."
하이든은 유리안의 말에 수긍했다.
"마, 말도 안 돼...."
너무나도 깔끔한 스승의 인정에 린네의 안색은 창백해져 갔다.
저 둘의 말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평범한 일상 대화처럼 느껴지는 어투였으나, 실상 그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데몬화가 진행된다면, 그 사람은 자아를 잃고 '데몬'이 되어버린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땅에 잃고, 사람을 습격하는 괴물이 된다는 소리다.
"설마, 그 데몬화를 막기 위해서, 이 어리석은 망명을 선택하신 겁니까?"
아무 감정 없는 유리안의 말에 린네는 스승님의 망명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제국에는 없는 방법이 신성국에 있을 수 있고, 스승님은 그걸 알고서 망명을 했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글쎄."
하이든의 확실하지 않은 대답에 힘이 풀렸다.
"말해줘야 할 이유가 없군."
"숨기시려는 속셈입니까?"
"피차일반이지 않나? 유리안, 너도 숨기는 게 있듯 나도 숨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스승의 말에 린네도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녀도 이 음흉한 실눈 유리안이 숨기는 것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파헤쳐보려 했지만, 베일에 싸인 것처럼 윤곽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 그 어떤 것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다.
하지만 스승님인 하이든은 다른 걸까.
유리안의 그 흐릿한 무언가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렇습니까? 후후."
평범한 사람이라면, 검성의 비수와도 같은 말에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지만, 유리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재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평온하게 답하는 유리안의 모습에 린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급한 성질처럼 보이나, 필요한 부분에선 냉정하게 넘어가는 그 성격은 여전하군. 유리안."
이상하게도, '성격은 여전하다'라는 말에 유리안은 살짝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스승님은 많이 변하셨군요."
"사람이니 말이야. 변할 수밖에 없지."
"스승님도 아실 겁니다. 신성국에 데몬화를 막는 기술 따위 없다는 것을."
유리안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렇다면, 데몬화가 진행 중인 이유는 무엇일까. 신성국으로 망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하나 정도는 짐작이 가는군요."
허리춤의 검집으로 손을 뻗은 것은 아니었지만,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백은 뽑은 것만큼 날카로웠다.
"스승님은 타의가 아닌, 본의로 마기를 몸에 심었고, 그걸 진행해준 것이 신성국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스르릉──!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리안은 검집에서 검신을 뽑아 들었다.
"또 검을 뽑아 드는군. 괜찮겠느냐? 이번엔 인사치레로 끝나지 않을 터인데."
"제국을 배신했을뿐더러, 그자가 데몬이 되고 있습니다."
보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검. '어스름 불꽃'에서 이 무기를 만들었다고 들었을 땐, 얼마 가지 못해 부러질 것이라 예상했거늘.
그것은 아직도 보석검으로서의 자신을 증명하고 있었다.
"제가 베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군요."
"네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더냐?"
"후후, 약간의 사심이 있긴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배보다 배꼽이로군."
터무니없는 태도에 헛웃음을 입에 담은 하이든은 린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마치, 이 정신 나간 녀석을 막아보라는 뉘앙스였으나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스승님, 유리안 경의 말을 왜 부정하시지 않나요?"
"뭘 말이냐?"
"자신의 손으로... 마기를 몸에 심었다는 말을...."
"하아."
하이든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 유리안의 말을 그리 믿게 되었느냐? 넌 유리안을 혐오하고, 그의 행동 모든 걸 부정하지 않았느냐."
"그건...."
스승은 자신이 유리안을 싫어하는 가장 원론적인 이유를 말했지만, 잠시 말끝을 흐리던 린네는 이내 고개를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알아요."
알고 있다.
인면수심의 악마라고 불리며, '웃는 처형대'라고 손가락질받는 그였으나.
최근 들어 그는 자신에게,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선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눈'과 의도조차 파악하기 힘든 웃음으로 자신을 철저하게 숨길지언정, 하이든 라이히에게만큼은 모든 걸 털어놓았을 터.
"아쉽군."
속삭이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하이든.
그와 동시에 그의 몸에선 어마무시한 마기가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윽...."
한 발 움직이는 것은 고사하고, 손끝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마기.
이 정도라면, 삼각(三角) 데몬의 마기와 흡사하거나 그 이상이다.
'데몬화 뿐만이 아니라....'
그 힘을 오롯이 이용하다니.
유리안의 말대로, 검성은 자의로 데몬화를 진행한 것이란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대체 왜?'
그렇게나 고결했던 스승님이 어찌 이런 모습이 되었지?
주륵.
그런 의문을 품던 순간, 린네는 자신의 콧등 아래로 붉은 피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마나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지 않은 상태에서 강한 마기에 노출되면 생기는 현상.
곧 두통과 오한이 엄습했다.
'정신을....'
서서히 초점을 잃기 시작하는 눈. 그러나, 자신을 압박하던 마기가 한결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유리안 경?"
자신의 앞으로 발걸음을 옮긴 유리안이 하이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를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마기의 방출을 이리도 당연하게 대처하다니.
그의 역량에 린네는 혀를 내둘렀다.
그것은 하이든도 마찬가지였다.
"오러를 두르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마기에 쉽게 대처하다니. 역시, 너도...."
말을 잇기도 전에 섬광과도 같은 일격이 하이든에게 향했다.
마찬가지로 검을 꺼내 응수하는 하이든.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자, 소름 돋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의 미래를 점치기라도 한 듯.
그렇게 두 번째 인사가 시작되었다.
92화. 검성(3)
감정은 인체의 호르몬이 분비되어 일으키는 화학적인 작용이라고들 한다.
더 나아가, 신체 상태에 대한 뇌의 해석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정작, 난 이 상황이 난처할 뿐이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아까처럼 저도 모르게 검을 뽑아 검성과 대치한 난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놈의 몸뚱어리는 '검성'과 '데몬'에 엮이는 순간,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격한 감정을 자아낸다.
더군다나, 지금 검을 맞대고 있는 상대는?
'그 검성에 데몬까지!'
완전 '유리안'의 격노 스위치가 세트로 묶여 1+1 이벤트를 하는 것 아닌가!
"마기에 이토록 대항할 수 있다는 건,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지."
그러는 와중에도 검성은 시끄럽게 주절거리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말 많은 캐릭이었어?
난 하이든의 입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이번엔 자의로 힐트에 힘을 주었다.
까득──.
금속이 어긋나는 거북한 소리와 함께 검성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무지막지한 힘은 여전하군."
"죽어가는 주제에 스승님도 여전하십니다. 스승님의 자랑인 고결한 오러는 사용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인사치레라면 몰라도, 이 상황에서 '오러'를 사용한다면 정말 생사결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는데 괜찮겠느냐?"
물론 그건 싫다.
검성과 진심으로 싸운다면,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안 남을 터.
심지어, 내가 패배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거듭되는 검성의 도발에.
"그게 원하는 바라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이 실눈의 악역이라면 이런 상황에서조차 자신의 목숨을 내거는 것에 서슴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말을 던져두어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린네가 아까처럼 상황을 중재해줄 것이다.
그럼 마지못해, 지는 척 넘어 가주면 되는 것이지.
"스승님은 선(善)을 바로 잡는 것이 도리라고 말씀하셨어요."
응? 쟤가 갑자기 왜 저러지.
"어긋났던 유리안 경을 바로 잡지 못한 것이 항상 자신의 불찰이라, 늘 말씀하셨죠."
예상과 다른 린네의 반응에,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검을 뽑아 들었다.
"저도 지금 스승님을 막지 못한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야! 시X! 아니라고!
너는 말리는 역할이야! 제발! 너의 본분을 다하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자세를 잡는 린네의 모습에 나는 마지막 동아줄을 붙잡기 위해, 별장의 입구로 시선을 옮겼다.
하이든에게 자리를 비워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분위기가 흉흉해진 탓에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제 4황자, 율시스의 얼굴이 보인다.
'좀 말려보는 게 어떠냐?'
그런 생각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자니, 율시스는 난처하다는 웃음과 함께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치, '난 아무것도 못 봤고, 못 볼 예정이다'라는 뉘앙스로 말이다.
줏대 없는 4황자 같으니라고.
하긴, 녀석이 보기엔 그저 완만하게 휜 눈에 미소 짓고 있는 유리안의 모습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정도로 보이겠지. 젠장.
"린네야, 무엇을 어떻게, 막겠다는 것이냐?"
"유리안 경이 말한 대로, 스승님이 마기를 직접 주입하신 것이라면 여명회와 다를 바 없어요. 스승님이 그들과 같은 꼴이 되는 걸, 전 원하지 않아요."
피식 웃는 하이든의 웃음엔 명백한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
"여명회와 같다는 그 말, 아무리 내가 어여삐 여기는 제자의 말이지만, 내겐 너무나도 불쾌한 말이군."
파캉──!
나와 맞대고 있던 검을 아래로 내려 힘을 흘린 하이든은 어마무시한 속도로 내 복부를 걷어찼다.
잠깐이지만, 균형을 잃은 난 충격도 충격이지만, 갑작스럽게 느껴진 부유감이 온몸을 휘감았고, 주변의 풍경이 순식간에 변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잡고 낙법을 치는 순간.
[「간파」 특성이 위험을 감지했습니다.]
[「타고난 검사」가 위험에 대처합니다.]
날카로운 검신이 내게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큭!"
억지로 몸을 비틀어, 그것을 피하자 하이든의 날카로운 눈매가 눈에 들어왔다.
공중에서 몸을 한 번 움직인 상황인지라, 쉽게 반격을 못 하는 상태.
하이든은 빠르게 달려들어 내 멱살을 잡고는 땅에 처박았다.
[캐릭터성, 「포커페이스」로 인해 통증이 감소합니다.]
캐릭터성의 활약으로 고통은 미미했으나, 내 시야엔 서슬 퍼렇게 빛나는 검신이 다시 들어왔다.
파악!
고개를 살짝 돌리자, 내 바로 옆에 검이 박혔다.
"죽어가는 몸치고는 아직 건재하시군요. 스승님."
이 새끼가 진짜 날 죽일 셈이냐!
이런 상황에서 할 법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런 잡생각을 최대한 없애기 위해, 헛소리를 내뱉으며 하이든의 옆구리를 무릎으로 가격한다.
쿠웅.
'뭔 몸뚱어리가 바위 같냐!'
마기로 몸을 보호한 까닭일까, 하이든의 옆구리와 내 무릎이 부딪친 소리는 연약한 살들이 일으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 와중, 하이든은 다음 공격을 위해 땅에 박힌 검을 빼내고 있었다.
스릉──!
다행히도, 그 공격이 결실을 보는 일은 없었다. 빠르게 이쪽으로 붙어준 린네가 검으로 하이든을 내쫓았기 때문이다.
"하, 하아...!"
자신을 거둬준 스승에게 검을 휘둘렀다는 죄책감에 안색이 창백한 린네.
그럼에도 이격(二擊)을 위해 자세를 가다듬었으나, 망설이는 그 작은 틈을 하이든이 놓칠 리 없었다.
"검사에게 망설임은 죽음이라고 했을 텐데."
마치 제자를 타이르는 듯한 나긋한 말투로, 하이든은 린네에게 검을 휘두른다.
파캉!
이번에는 내가 그 공격을 대신 막아주었다.
"참으로 매정한 스승님이십니다. 제자에게 이렇게 살벌한 검을 휘두르다니 말입니다."
유리안스럽게 말을 하곤 있지만, 사실 욕지거리를 입에 담고 싶었다.
분명, 트레일러에선 내가 '린네'의 숨통을 끊으려고 하고 그것을 '주인공'인 하이든이 막아서는 것이었는데 완전 반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네 입에서 그런 말을 듣게 될 줄 상상도 못 했군."
복잡한 감정과 씁쓸한 맛이 혀를 타고 느껴지는 와중, 하이든의 몸에선 푸르스름한 마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검신합일(劍身合一)
그가 그토록 만류했던 오러를 사용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생사결(生死決)의 영역으로 흘러갈 것이 뻔하다.
그러고 싶진 않다.
아무리 변질했다고는 하나, 그는 내게 '주인공'이었으니까.
"상상력이 빈곤하시군요. 후후. 안쓰러운 스승님을 위해 제가 친히 일깨워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몸은, '유리안'의 몸은 그것을 원했다.
스승을 죽인다.
검성을 죽인다.
데몬을 죽인다.
[감정의 고조를 느꼈습니다.]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여기에서 「뜨인 눈」이 발현된다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폭풍처럼 강한 욕망에 내 정신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쥐고 있던 검에는 서서히 '달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쿨럭."
이제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쯤, 갑작스럽게 하이든이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쿨럭, 쿨럭...!"
탁류처럼 흐르는 피는 종양처럼, 그가 입은 셔츠를 검붉게 적시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에게서 살기등등하게 뿜어져 나오던 마기와 오러는 사그라들었다.
'아직 마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데몬화'를 최대한 억누르며 마기를 온전히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별한 성물(聖物)을 소유하거나, 유리안처럼 악인(惡人)의 특성인 「마왕의 그릇」을 보유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당연히도, 우리의 주인공에겐 「마왕의 그릇」이란 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 '주인공'이니까.
"비참하군요. 이것이 제국의 자랑이라던 검성의 말로입니까?"
가까스로 검으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는 하이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헛헛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것은 '유리안'이 아닌, 플레이어였던 내가 진실로 표현하는 것.
그 웃음에서 어쩐지 쓴맛이 느껴졌지만, 그게 이제 무슨 상관이랴.
"아니, 아직 끝이라고 할 수 없지. 시작도 안 했으니."
"추하더라도, 비루한 그 삶을 연명하시겠다는 겁니까?"
"추한 삶이라도, 연명만 할 수 있다면 뭐든 못하겠나?"
"유리안 경!"
그때, 다급한 린네의 목소리와 함께 소름 끼치는 살기가 내게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단 한 동작.
그것만으로 눈앞의 '주인공'을 죽일 수 있었으나, 우선 신변의 안전을 위해 난 뒤로 물러섰다.
부웅!
내가 있던 자리에 엄청난 오러가 담긴 검이 궤적을 그리며 지나갔다.
"괜찮으십니까, 검성 님."
검을 휘두른 것은 아까 입구에서 마주친 '이델'이란 이름의 남자다.
그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는 검성.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마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나, 눈빛에 깃든 투기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상 전투를 속행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는 모양이다.
"...가지."
이델에게 그렇게 말을 건넨 하이든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투기, 원망, 그리움, 열망, 체념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그의 눈빛에 서려 있었다.
결국 시야에서 그들이 사라지자.
"스승님!"
린네는 그런 하이든을 뒤쫓아가기 시작했지만, 뒤따라붙은 예복의 남자들이 그녀를 막아섰다.
"비켜!"
"린네 양, 그만하시죠."
나까지 자신을 말리자, 린네는 적잖게 당황했다.
검성과의 전투를 고대하던 유리안이 직접 막아선 것이었기에 그런 모양이다.
"왜 막죠?"
"이곳은 제국이 아니다 보니, 보는 눈이 많군요. 아까의 미행들이 이곳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린네는 잠시 정신을 집중하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아까의 미행이 다시금 따라붙었다는 것을 깨닫자,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래서 막았군요. 하긴, 당신이라면 절대 의미 없이 행동할 리 없었을 테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린네를 보며,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검성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심지어 이곳은 아드라탄 제국의 제도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피하자. 오직 그런 생각뿐이다.
'그런 와중에, 이 빌어먹을 몸뚱어리가 격하게 반응한 것뿐이라고.'
빼꼼.
한바탕, 소란이 정리되자, 제국의 자랑스러운 황자, 율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 역시 이렇게 되는구나."
이런 미친놈을 봤나.
이보다 더한 욕지거리가 턱 밑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차마 말할 순 없었다. 젠장.
초대받은 손님이기는 하나, 제국의 황자가 타국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중재하지 않는다니.
이놈, 대체 무슨 생각이냐.
"감사합니다, 율시스 전하. 잠시 회포를 푸는 것을 용인해주셔서,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런 생각을 살짝 내비치며, 말하자 율시스는 그저 멋쩍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망명한 사람보단 오래 볼 사람이니 말이야. 어느 정도 어긋난 건 눈감아줄 수 있어야지."
나름의 저울질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율시스.
고마워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해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
스산한 밤공기가 몸을 훑자, 어쩐지 머리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마기를 몸에 두르는 것을 보니, 검성은 자신의 몸이 데몬화가 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 있나.
'유리안'만큼이나, 데몬 사냥을 많이 해온 그였으니, 몸의 변화 정도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후우...."
한숨을 내쉬자, 차가운 밤공기 탓에 입김이 살짝 맺혔다.
주인공의 데몬화.
게임이었더라면 'Game Over'인 문구가 눈앞에 아른거릴 상황인지라,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겠으나.
지금의 난 묘하게 침착했다.
빌어먹을 검성이 그 꼬라지를 하고 있는데도 왜 내 감정은 왜 이리 고요한지.
나를 이곳으로 보낸 자들에게 정말 묻고 싶다.
내게 무엇을 원해, '검성'을 죽이는 유리안으로 빙의시켰고, '검성'을 저런 꼴로 만들었는지.
"정말 X 같습니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던 이런 와중에도 '존댓말'이 절로 나와 속으로 혀를 찼다.
웃긴 건 이런 상황에서도 내 얼굴은 잔잔한 바다를 보는 듯 차분하기만 했다.
아마도 「포커페이스」와 「표리부동」 라는 감정 특성 탓이겠지.
'대체 왜 검성이 변절한 것일까.'
'데몬화'라는 과정을 밟게 된 것이 순전히 검성의 의지였다면, 왜 '데몬화'라는 과정을 택한 것일까.
'힘을 위해서?'
유리안도 아니고.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길래.'
곰곰이 '하이든 라이히'라는 인물에 대해 떠올리던 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지금은 사연에 초점을 잡을 때가 아니지.'
지금은 내가 해야 할 일에 초점을 잡자.
지금도 화분을 구매할 때부터 따라붙은 미행이 내 뒤를 밟고 있지 않은가?
'아주 착실한 녀석들이야.'
떨어질 생각을 안 하니 말이다. 이럴 시간에 자기 개발이나 할 것이지.
그래도 다행인 것은, '율시스'의 세례식이 끝났으니 내일 제국으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그 전에 성물을 챙겨야 할 테니, 여러모로 바쁜 하루가 되겠어.'
당연히 그 성물이 위치한 장소도 알고 있다.
성도, 아르테아의 명물.
만종(萬種) 투기장이다.
사실 이곳 신성국 페레난드에 온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성물 '정야(靜夜)의 종'을 가져오기 위함이다.
율시스는 황자이기는 하지만, 계승권과는 거리가 먼 제 4황자.
신성국에 온다는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매력적인 인간관계는 아니란 소리다.
하나, '정야의 종'은 다르다.
'최근 테넬론이 나를 의심하고 있다.'
제라르의 사건이 지난 뒤, 그의 시선은 묘하게 날카로워졌다.
나뿐만이 아니다. 여명회에 관한 모든 것에 날카로워졌다.
'그러니, 지금이 적기지.'
여명회를 삼키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기엔 최고의 시기다.
93화. 예상 외
신성국 페레난드의 최고 권력자들, 12대신관 중 하나인 가롯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검성과 마주쳤다고?"
꽤나 관심이 가는 현안 사항이었다.
'유리안'의 명성이 제국만큼은 아니었으나, 이곳 신성국에서도 제법 알아주는 이다. 물론 악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게다가 그가 '검성'이란 인물에 집착하고 있는 이유도 어느 정도 파악해둔 상태.
"어떻게 되었지? 둘 다... 는 욕심인지 몰라도, 하나 정도는 재기불능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가롯은 '대신관'이라는 직책에 어울리지 않게 비릿하게 웃었다.
"아쉽게도, 양측 모두, 큰 부상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흑위(黑僞)의 보고에 아쉬운 기색을 내비친 그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검성, 본디 제국인이었던 그가 가진 고결한 명성은, 대륙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더욱이, 단순히 검술로 그와 맞상대해 이긴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만에 하나, 검성이 수제자의 손에 쓰러졌다고 알려진다면?
기껏해서 수용했던 '검성'이란 이름이 무뎌지고 새로운 강자가 제국에 도래한 셈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 둘의 충돌에 다른 대신관들은, 반응을 보였나?"
"전천주력 님과 샬라나 님께서 의문을 표하기는 하셨습니다."
전천주력(全天主力). 그 이름이 나오자, 가롯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싸늘해진 분위기에 흑위는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갖추며 한 마디 더 보탠다.
"그래도, 아직 큰 움직임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긴, 그 양반은 검성의 고독전에 관심이 있을 뿐이니, 그에 따른 반응인 거겠지. 샬라나는... 뭐, 고독전에 반감을 갖곤 있지만, 무거운 엉덩이가 쉽게 움직일 리 없을 테고."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흑위의 모습에, 무엇이 생각났는지, 가롯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갑작스럽게 깃들었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세례식도 끝난 지금, 율시스를 신성국에 붙잡아둘 명분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세뇌가 꼭 필요한 이 시점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순 없다.
''제국과의 화친'이라는 정책이 날 대신관의 자리까지 오르게 만들어줬지만.'
대비책은 언제든 존재해야 하는 법.
가롯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지금은 강경책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을.
***
성물을 얻는 게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자, 그럼 슬슬 돌아갈 채비를 해볼까?"
아침 댓바람부터 뭐가 그리 급하길래.
표면적이기는 하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율시스의 호위'가 아닌가?
그런 내가 다짜고짜, 투기장에 가보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마차를 준비해두었습니다."
"역시, 유리안 경. 빠릿빠릿한 점이 참 마음에 든단 말이야."
율시스가 마차에 타자, 본격적으로 제국으로의 귀국이 진행되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지?'
투기장에 볼일이 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유리안'이 철면피라고는 하지만, 이유와 명분이 없이는 안 될 텐데.
"어..., 유리안 경, 저기 멀리 보이는, 저 건물은 뭐 하는 건물이야?"
그런 와중에 율시스가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투기장입니다. 이곳 신성국의 수도, 아르테아의 문화 시설 중 하나죠."
"역시 유리안 경. 검술만 뛰어난 게 아니구나?"
"이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에 들려본 적이 있던 지라."
후후, 짧게 웃음을 지은 난 율시스의 얼굴을 한 번 살펴보았다.
마차의 창문을 통해 '투기장'을 살펴보는 그의 두 눈엔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허점이 보이는데, 찌르지 않으면 검사가 아니다.
"한 번 가보시겠습니까?"
"응?"
"저희 제국에도 투기장은 존재하지만, 이곳만큼 거대하진 않죠. 성도 아르테아에서 투기장은 제일가는 문화 시설이니 말입니다."
"그래?"
"예, 게다가 저희 제국과는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투기장이 다 똑같지 않나?' 그런 말을 하는 율시스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검투사와 데몬이 싸우는, '마투'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오오...."
호기심은 얼마 가지 않아, 흥미로 바뀌었다.
그래, 관심이 가지?
한번 들려보고 싶지?
"아, 하지만 율시스 전하와 같은 고귀하신 분께서 그런 추잡스러운 행태를 하는 곳에 갈 일이 없겠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말을 했군요."
여기서 단순히 밀어붙이는 건, 너무 속내가 뻔히 드러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렇게 한 번 물러나는 게 흥미를 돋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 그 추잡한 행태라는 것에 흥미가 생겼어! 한번 가보고 싶어졌는데, 상관없지?"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황자께서 가실 만한 곳은...."
"아니야. 가볼래. 가보고 싶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데리고 가주지. 큼.
"린네 양, 황자님께서 원하시니, 잠시 투기장을 둘러보려고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친절한 '유리안'은 린네에게도 의향을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린네 양."
"...네, 네? 아앗!"
당황한 그녀는 말고삐를 놓칠 뻔하더니, 허둥지둥 겨우 붙잡았다.
"잡념이 깊습니다. 낙마하셔도 아픈지도 모르겠군요."
"쓸데없는 참견이에요."
내 말에 린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호위로서의 자세가 안 되어 있군요. 황자님 말씀은 들으셨습니까?"
"...윽."
신음 비스무리한 것을 내뱉은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뭐라 말씀하셨죠?"
"황자 전하께서 귀국하기 전, 투기장을 둘러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내 말에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 이곳에 올 때, 투기장을 향한 경멸하던 그 눈빛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투기장으로 향하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난 율시스가 타고 있던 마차로 말을 타고 갔다.
'의기소침한 모양이군.'
그렇지 않다면, '린네'라는 캐릭터에 부합하지 않기도 했다.
신경질적이긴 하나, '검성'에게 품은 존경심만큼은 진짜인 그녀이니 말이다.
그런 '검성'이 자신의 위업을 모두 퇴색하게 할 정도로 이상한 행보를 밟고 있으니, 그녀로서도 납득하긴 힘든 모양이다.
'...나도 힘든데, 관계자는 오죽하겠냐.'
만약, 지금의 '나' 말고. 과거의 '나'라면 어땠을까?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주인공, 검성이 신성국으로 망명했다.
동시에, '데몬화'가 진행 중이며 제도에서 중요한 이벤트인 '검은 기사'를 방치하고 있다!
이런 소식을 접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들까.
'어....'
지금 생각해보니, 그 결과 비스무리한 게, 지금의 '나'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린네에게 응원해주고 싶어졌다.
잘 극복해봐라.
그렇다고, 누구처럼 장문의 편지나 게임 삭제 통보를 게임사에 보낼 생각은 말고.
그럼 나처럼 X 된다.
***
아르테아의 명물, 만종(萬種) 투기장에 대한 호기심이 굉장했는지 율시스는 이곳저곳 살펴보기 여념 없었다.
경기장부터 관중석 그리고 귀빈실. 심지어, 경기 참여를 위해 가두어놓은 데몬들의 철창까지.
"정말로 투기장에 데몬이 있구나... 이봐, 이 데몬을 기르는 방법이라는 게 있어?"
그중, 율시스가 관심을 보이는 것은 투기장에 배치된 데몬들이었다. 그는 사육사로 보이는 이에게 다가가 환경이라던가, 먹이에 관계된 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런 율시스를 보며, '잠깐 자리를 비워도 상관없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잠깐이니까, 그 시간 동안의 호위는 린네에게 맡기면 되겠지.
"잠깐, 황자 전하의 호위를 맡기겠습니다. 린네 양."
"네?"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서 말입니다."
"...호위를 내팽개쳐 둘 정도의 중요한 용무인가요?"
당연하지. 성물을 가져와야 하거든.
그러나 솔직하게 말할 수 없으니 난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생리적인 현상입니다."
"아...."
납득을 한 듯, 린네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후, 난 발걸음을 옮겨 목적지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만종 투기장의 물품들을 관리하는 창고.
그중, '8종' 창고로 향하자, 피골이 상접한 남자가 서류판을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응? 넌 뭐야?"
신성국의 귀족 신분인 신관이 아닌, 그저 만종 투기장에서 일하는 관계자.
남자의 이름은 8종 관리자 '쿠사트'다.
하도 많이 와서 그런지 이름도 기억이 난다.
이 남자가 하는 일은 투기장 내에서 발생하는 분실물과 임대 기간이 지나, 방치된 물건을 관리하는 것이다.
"잊어버린 물건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잊어버린 물건? 뭘 잊어버렸는데?"
"아둔하게도, 그것조차 잊어버렸습니다."
쓸데없는 말 같았지만, 이것은 하나의 '키워드'이다.
주인공인 검성이 '정야의 종'이란 성물의 존재를 알고 이곳을 찾아왔을 때, 선택지에서 내뱉을 수 있는 말이다.
"흠... 그렇다면, 그냥 잊어버린 채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만, 소중한 물건인지라. 혹시, 8종 관리창고의 안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감히 자신이 관리하는 창고를 확인하겠다는 말에 쿠사트는 인상을 찌푸린다.
"이렇게 부탁하겠습니다."
그런 그의 서류판 위로, 작은 주머니를 하나 올렸다.
무려 100나르가 들어있는 금화 주머니다.
원래의 나라면 상상하지 못할 수단일 것이다. 뇌물을 준다는 행위는 실로 위험한 것이니.
심지어, 그 뇌물의 단위가 어느 정도 되어야 통하는지 모르고 말이다.
무조건 성공할 것이란 보장도 없고, 걸린다면 성가신 일이 생길 것이 분명할 터.
'원작에서도 이런 식이었지.'
우리의 주인공인 '검성'은 이런 식으로 성물을 확보했다.
당시 화면에 표시된 것은 '뇌물'이라는 단어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일단 많이 넣었다.
"크, 크흠."
금화 주머니를 본 남자는 그것을 들어보더니 헛기침을 했다.
"뭘 잊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포기해. 아…, 그래. 난 점심이나 먹으러 가봐야겠군."
주머니를 든 관리관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속이 뻔히 보이는군.
'그럼 뒤져볼까?'
관리자 쿠사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난 창고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난 이 '성물'을 몇 번이나, 얻어본 경험이 있었으니까.
혹시나 다른 무언가 있을까 했지만, 역시 이곳에서 얻을 것은 '이것'밖에 없다.
"여기 있군요."
익숙한 상자의 모습에 속마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작고 낡은 상자.
그 안에 있는 나무로 만든 형편없이 생긴 '종'이 내 눈에 들어왔다.
'성물, 정야의 종.'
실로 오랜만이다.
어느 정도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에 익숙해진 뒤, 무조건 얻던 성물인데 말이다.
손잡이 부분을 들어 올리자, 까슬까슬한 촉감이 느껴졌고, 어쩐지, 정겨움마저 피부를 타고 전해졌다.
==
⇒ 새로운 특성, 「마성 이해」를 습득했습니다.
==
이 글귀도 오랜만이다.
성물, '정야의 종'의 효과는 종이 울릴 때, 주변의 마기를 흩어지게 하는 것이 주된 능력이다.
비록 그 효과는 없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미약하지만 말이다.
'이 성물의 존재는 마신성을 견제하기 위한, 그뿐이라고 말해도 좋으니까.'
그나마, 평범하게 도움이 되는 부분은 '정야의 종'을 획득할 시 얻는 부산물 <마성 이해> 특성이다.
말 그대로 '마성'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이 특성은 죽어서도 대륙을 혼란스럽게 만든 마신, 바르바토스의 '잔재 사념'을 보다 쉽게 느끼게 해준다.
'예를 들자면, 이렇게....'
난 '마나 감지'를 사용하던 것처럼 눈을 감고 집중했다.
이번에 찾아낼 것은 몸속에 '마기'를 지닌 생물들.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마나 감지'를 사용했던 경험을 되살리니 의외로 쉬웠다.
'율시스가 보는 데몬도 느껴지는군.'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음에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동시에, '마기'이다 보니 몸이 근질거리며 거북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 외에도.'
응용을 위해 범위를 넓히니 만종 투기장에 있는 다른 데몬들도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아마도, 검투사와 데몬의 혈투이자 메인 이벤트인 '마투'를 위해 사육 중인 데몬들인 모양이다.
'조금만 더 넓혀볼까?'
오랜만에 얻은 익숙한 특성을 몸으로 느끼며,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고양감이 생겼는지 난 조금 더 범위를 넓혀보았다.
그러던 차, 지금 이곳에서 놀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표면적으로 자신은 생리적인 현상으로 자리를 비운 것이니 말이다.
'장난칠 때가 아니었군. 돌아가야....'
특성을 종료하려 할 때, 불쾌한 감각이 피부를 타고 흘렀다.
<마성 이해>에 데몬이 감지된 것이다.
'...지하?'
불쾌함이 느껴지는 방향은 지하다. 문제는 그 숫자에 있었다.
'하나둘이 아니다.'
적어도 수십.
개중에는 말도 안 될 정도로 강렬한 마기를 지닌 데몬도 존재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지독하고, 불쾌한 기운.
이 정도 마기를 지닌 데몬은 예전에도 느껴본 경험이 있다.
'...삼각 데몬.'
바로 혼석을 몸에 지닌 데몬들.
강력함이 다른 녀석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인, '삼각(三角)' 데몬이 뿜어내는 마기다.
94화. 정야의 종
상념에 잠긴 린네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자신에게 정도를 걸으며, 옳은 길만 제시하던 스승의 몸이, '데몬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나아가, 자신과 유리안에게 검을 휘두르던 그 모습도.
'유리안 경을 파문할 때도, 그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 놔주었던 분이....'
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길래 이렇게 달라졌단 말인가.
노쇠한 기운을 뒤로 하고, 손에 든 검으로 몇십, 몇백의 위험을 물리친 자.
제국에 빛나는 별들의 틈에서 오롯이 자신의 이름을 크게 빛냈던 검(劍) 중의 별(星).
그랬던 이가 이제는 '제국'이라는 이름조차 저버렸다.
"...자세히 보니, 아는 얼굴이었네?"
그런 생각을 정리하던 린네는 높아진 율시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에 율시스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옷차림만 보아도 이곳 만종 투기장에서 데몬을 사육하는 자는 아니다.
조금은 익숙한 얼굴.
'아!'
기억났다.
스승인 검성 하이든 라이히와 함께 찾아왔던 '이델'이란 이름의 남자다.
'대체 언제 다가왔지?'
생각을 정리하느라,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일까? 그것도 있지만, 저 남자도 어느 정도 자신의 기척을 죽이는 것에 통달한 느낌이다.
"오래간만입니다, 율시스 전하."
"그래, 이름이... 뭐였더라?"
율시스는 익숙한 안면에, 살짝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아는 사이인가?'
율시스가 그런 의문을 품던 사이, 그들의 주위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전에 따라붙었던 미행들.'
세 명의 살기가 오롯이 자신에게 향한다는 것을 느낀 그녀는 천천히 검집에 손을 얹었다.
"이델이라고 합니다."
"이델! 그래, 이델 하이란스!"
익숙한 가문 명이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는 이윽고 '하이란스'라는 가문이 제국의 귀족 가문 중 하나이며, 어떤 종극(終極)을 맞이했는지 깨달았다.
위험하다.
"그러고 보니, 너희도 신성국으로 망명을...."
그가 그런 생각이 들던 때, 이델은 율시스의 복부에 주먹을 가져간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맥없이 쓰러지는 율시스의 모습에.
"전하!"
채앵──!
빠르게 검을 뽑아 든 그녀는 순식간에 이델이란 남자와 거리를 좁히려 했으나, 그것은 바람에 불과했다.
주변에서 튀어나온 그림자 둘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비켜!"
전신에 마나를 순환시켜, 오러로 치환한 그녀가 검을 휘두르자, 남자 한 명이 단검을 들어 그것을 막아낸다.
캉──!
날 선 금속음과 함께 불똥이 튀었고, 린네의 검을 막아낸 남자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큭...."
단검을 든 그의 얼굴엔 당혹이 서렸다.
아무리 검성의 수제자라 하지만, 어리고 여자이기에 방심한 것이다.
그것을 눈으로 좇으며, 린네는 남자의 빈틈에 회수한 검을 내질렀다.
"오러가 날카롭군."
그러나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따라붙은 남자가 동료의 빈틈을 메워주며, 들고 있던 곡도를 휘둘러 반격에 접어든 것이다.
'까다로워.'
린네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개개인의 기량으로 붙는다면, 아슬아슬하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저쪽은 둘이다.
심지어 이런 연계에 익숙한 움직임조차 느껴졌다.
"황자는 의식장으로 데려갈 테니, 여기는 너희에게 맡기마."
그 말을 남긴 이델은 쓰러진 율시스를 업고는 투기장의 안쪽으로 향했다.
"거기 서!"
멀어져 가는 그를 따라붙기 위해, 다시금 린네는 검을 휘둘렀으나, 이번에도 두 명의 남자들에게 막힐 뿐이었다.
"거기까지다. 이교도. 너희의 황자는 '의식'을 통해 '진정한' 태양신교의 일원이 되는 것뿐이니까."
"...의식?"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들을 보며, 린네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사실 이들은 가롯 대신관이 보낸, 신성국의 더러운 일을 하는 칠위전성 중 흑위들이다.
그들이 정체를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린네는 거의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실력의 이들을 보며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율시스의 신변에 모종의 일이 일어나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막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자신의 힘으로 저 둘을 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나아가, 이들을 꺾었다고 해도 조금 전에 말한 '의식'이라는 것이 이미 끝날 수도 있는 상황.
'하필 이럴 때....'
유리안 경은 왜 없는 거야! 아니, 이때를 노린 것이 맞겠지.
"이런, 제가 자리를 비우지 말았어야 했군요."
하지만 그런 불평도, 더 나아가 불안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맞아요, 당신이 자리를 비워서예요!"
린네는 약간 표독스럽게 말했다.
저 남자라면, 뭐든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란 안도감은 있었으나, 그런 감정에 반발감이 든 것이다.
"율시스 전하는 어디로 모시고 간 것입니까?"
어느새 나타난 유리안은 침착했다.
이 광경의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한 모양이다.
"스, 스승님이 데려왔던 남자가 끌고 갔어요. 위치는...."
"아마도, 지하겠군요."
"확실해요?"
"후후, 사실 잘 모릅니다. 그냥 짚어본 것뿐이죠."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라니.
살짝 화가 난 린네가 퉁명스럽게 입을 열려고 했으나, 지하라는 말에 대치하고 있던 흑위 두 명이 흠칫한 것이 보였다.
"그래도, 제 농담 덕분에 위치는 알아낸 것 같습니다."
단순히 농담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 상황에서 저런 능청으로 정보를 캐내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남자다.
"그럼, 이들을 정리하고 빨리 황자 전하를 모시러...."
"이들은 제게 맡기고, 유리안 경께선 율시스 전하에게로 가세요."
그런 의미에서 린네의 판단은 빨랐다.
이곳에서 자신이 저 흑위 둘을 붙잡고, 유리안을 먼저 보낸다면, 일을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
"괜찮겠습니까? 저들은 흑위, 신성국의 특무부대입니다. 죽을 수도 있을 텐데요."
"어차피."
그녀는 검 손잡이에 힘을 잔뜩 주었다.
"황자 전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겨도, 죽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린네의 말에 유리안이 짧게 웃었다. 평소 보던 조소와는 달리 조금 더, 감정이 실린 웃음이었다.
"그 말도 맞습니다."
말과 동시에 유리안은 땅을 박찼다.
놀라운 속도로 벽을 찬 뒤, 건너편으로 넘어가려던 그를 흑위가 막아서려 했으나, 린네가 그것을 가만두지 않았다.
"너희 상대는 나야!"
오러를 머금은 검을 한 차례 휘둘러, 흑위들을 몰아내었고 그 탓에 유리안의 이동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
만종 투기장의 지하에는 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데몬과 '삼각 데몬'이 서식하고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인지 지하로 통하는 원형 계단을 밟는 것은 꽤나 고역이었다.
피부를 찌르는 마기는 조금 전 '마성 이해'를 통해 느낀 삼각 데몬이 실존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내려갈수록, 그 농도가 짙어지는군.'
왜 이런 곳에 율시스를 데려갔는지, 의문이 생겼다.
삼각 데몬이 서식하고 있는 것도 모르는 건가? 그렇다면,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일 텐데.
'...아, 그거군.'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 의문은 해소되기 시작했다.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 정도로 짙은 마기는 내가 다가가고 있음에도, 적개심이 보이지 않았다.
'데몬 학살자'라 불리는 유리안의 체취는 데몬에게 불쾌할 정도로 끔찍한 것일 터.
그럼에도, 후각이 발달한 녀석들이 아무런 적개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곳은... 고독전이었군.'
고독전(蠱毒殿).
독기를 머금은 생물들을 한 곳에 집어넣고, 서로를 잡아먹게 만들어 더욱 강한 독기를 품게 만드는 장소.
이곳에서 독기란 데몬의 마기를 의미한다.
그 말은 즉, 데몬들을 한 장소에 여럿 집어넣어 어마어마한 마기를 만들고, 가둬두는 주술을 하는 장소란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수많은 데몬을 잡아야 했으나 이곳은 우연히도 '많은 데몬의 시체'가 모이는 장소다.
"투기장에서 사용한 데몬과 그 시체들을 이곳에 모아둔 모양이군요."
마침내, 지하에 도착한 난 철퍽거리는 바닥을 밟으며 입을 열었다.
내 몸을 감싸는 데몬의 마기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거품을 물고 기절할 정도로 어마무시했으나, 내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정신 나간 결벽증 환자는 데몬의 피와 점액질로 더러워진 바닥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둘러보지도 않고, 알아채다니. 여간 눈치가 빠른 게 아니군."
지하에 도착하자, 이전에 별장에서 검성과 함께 찾아온 남자, 이델이 입을 열었다.
녀석의 주변엔 신관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과 율시스가 보였다.
의식을 잃은 듯, 축 처진 그의 머리 위에는 월계관처럼 보이는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율시스 황자님께 암시를 걸 생각이십니까?"
신성국에 존재하는 음습한 성물 중 하나.
'새겨진 거짓'은 최상위 음(蔭) 원소 마법인 '정신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물건이다.
"...이걸 어떻게?"
"이 성물은 신성국 내부에서도 최고 기밀이거늘...."
"그 최고 기밀을 기록해둔 문서가 따로 있어서 말입니다."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하자 신관 둘의 머리 위로 '공포'의 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허세를 보이는 것이 적의 정신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몸에 익힌 상태다.
심지어, 거짓말도 아니다. '설정집'도 문서잖아. 안 그래?
'흠.'
두 신관과 달리, '이델'이라는 남자는 내 말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둘과 달리 뚜렷한 '분노'. 아니, '증오'에 가까운 붉은 감정의 색이 보였다.
아니, 유리안 이 새끼는 타 국민한테까지 무슨.... 에휴, 말을 말자.
"저놈의 말을 귀담아듣지 마라. 어차피,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으니까."
이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신관 둘은 다시금 율시스에게, 정확히는 그가 머리에 쓴 월계관에 집중한다.
신관들의 손에서 마기를 머금은 자색 빛이 일렁거리자, 그것들이 월계관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새겨진 거짓'이란 성물은 마법적 지식이 없어도, 고위 정신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지만.
그만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마나든, 마기든, 상관없이 막대한 에너지를 말이다.
이 고독전에는 그 에너지인 '마기'가 넘치다 못해 공기처럼 팽배하니, 큰 문제가 없다면 '정신계 마법'은 시전될 것이 자명했다.
그래,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말이지.
스르릉──!
의식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던 도중, 검집에서 검이 뽑히는 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혔다.
"의식을 방해할 생각은 하지 마라. 그러면, 목숨만큼은 살려주지."
거짓말하기는.
"그렇게, 살기를 머금고 계시면서 살려주겠다고 말씀을 하시다니. 저보다 얼굴 가죽이 두꺼운 분이시군요."
"너만큼은 아니지. 하지만, 네 말대로...."
손을 들어 이델의 말을 제지했다.
녀석의 얼굴에 불쾌함이 깃들었으나, 난 크게 연연하지 않고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제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지만, 사과의 뜻으로 아름다운 종소리를 선물해드리죠."
그리 말하며, 조금 전 습득한 '영야의 종'을 한 번 흔들어주었다.
짤랑──!
작고, 은은한 소리가 호수 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 상황에서 무슨 속셈이지?"
"좋은 소리지 않습니까?"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이델의 눈엔 의심이 깃들었다.
이 녀석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을 할 리 없다는 확신 탓에 살짝 긴장한 것 같으나.
'종을 울린다'라는 터무니없는 행동에 짜증이 난 모양이다.
"그 언행은 언제 들어도 짜증이 나. 그래도, 오늘로 마지막이 될 테니 한 번쯤은 용인해도...."
"어, 어어!?"
"월계관에 깃든 마기가 왜...!?"
말을 잇던 이델은 뒤에서 들려온 신관들의 당황스러운 목소리에 그쪽을 쳐다보았다.
성물, '새겨진 거짓'이 머금고 있던 자색 빛이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설마, 아까 흔든 그 종도 성물이었나?"
"만져보지도 않고 알아채다니. 여간 눈치가 빠른 게 아니군요."
난 아까 녀석이 했던 말을 돌려주었다.
이델의 말대로 '새겨진 거짓'의 빛이 사라진 이유는 이 성물 '정야의 종' 덕분이다.
마법적 지식 없이 고위 '정신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성물. 그러나, 그것을 위해선 많은 양의 '마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많은 마기가 모였어도 그 마기들이 공명하지 못하도록 활동성을 막는다면?'
이곳에 팽배한 '마기'는 그저 단순히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공기에 불과해진다.
그럼에도 데몬이나 데몬화가 진행되는 인간은 '마기'를 사용할 수 있다.
잠잠해진 '마기'는 활동성만 줄어들었을 뿐, 위력은 여전하니 말이다.
이 '정야의 종'은 살아있는 생물이 아닌, 무생물을 대상으로 효과적인 성물.
즉, 성물을 위한 성물.
다른 상황에서는 쓸모없으나, 상등급 성물의 담당일진.
약한 자에겐 약하고, 강한 자에겐 강한.
'강강약약'의 성물이란 말이다.
95화. 악착같은 자식(1)
성도 아르테아의 심장부, 제의성(祭儀城).
그곳에 머물고 있던 대신관 가롯은 커튼을 거두고 바깥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의 두 눈에 들어온 것은 아르테아의 문화 시설 중 하나인 만종 투기장.
"의식은 진행 중이겠지?"
"예, 그렇습니다. 대신관 님."
가롯의 말에 대답한 것은 세 명의 흑위 중, 마지막 한 명이었다.
"의식장에 있던 신관들에게서 율시스 황자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잠자코 듣던 가롯은 투기장을 보던 눈길을 돌려 말을 하던 흑위에게로 향한다.
"다른 대신관들은 아직 반응이 없나?"
"예, 아직까지는."
신성국에서 성물을 보관하는 장소인 성위청(聖位廳)에서, 자신의 특권을 이용해, 몰래 '새겨진 거짓'을 꺼내 온 상태.
당장은 괜찮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들킬 위험이 크기에 그는 대신관들의 반응이 없다는 말에 안도했다.
이것을 빌미로 다른 대신관들이 무슨 꼬투리를 잡을지 모르니 말이다.
그러나 그 불안도 오늘로써 끝이다.
'날 너무 원망하지 마라. 율시스 황자.'
제국과의 화친이라는 줄이 자신을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들어줬으니, 그 줄이 사라지지 않게 붙잡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나아가, 4황자에게 그 줄을 대신 잡게 만들어 줄 수 있으니, 그로선 이래야만 했다.
어차피 황위 계승권과 거리가 먼 제 4황자.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똑같을 터이니 자신에게 도움이 되면 그만이리라.
"특별한 보고 사항은 없나?"
"현재 율시스 황자가 대동했던 호위와 대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건 흑위들과 이델, 그놈이 처리하겠지."
신성국으로 망명한 제국의 귀족 중 한 명.
뛰어난 기사들이 많은 제국에서도 상위 기사단에 속해있었던 만큼, 대단한 실력자라고 했다.
"그놈을 믿으십니까? 망명한 뒤, 검성의 가르침을 받고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놈입니다."
"믿진 않지. 하지만, 그놈이 품고 있는 복수심은 믿는다."
"복수심 말씀입니까?"
"애초에 그것 때문에 검성의 당부를 무시하고, 내 말에 따라 의식장으로 향한 것이 아니더냐?"
지금 이곳에 없는 이델을 비웃으며 가롯은 다시금 투기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설령, 이델 녀석이 유리안을 이기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암시 마법'을 무사히 성공시키는 것뿐. 그것만 성공한다면, 마법사가 없는 호위들로선 마법을 해주(解呪)할 수 없을 것이다.
'율시스를 확보하고, 그를 의식장에 보낸 시점에서, 이미 내 계획은 완성되었다.'
가롯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새겨진 거짓'이란 성물은 많은 영적 자원을 필요로 하는 만큼, 신속하고 확실한 '정신계 마법'을 시전할 수 있으니까.
***
"왜, 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지!?"
율시스의 머리에 씌워진 월계관을 보며, 당황한 신관들이 중얼거리는 모습에 난 천천히 월장검을 꺼내 들었다.
'정야의 종'의 효과는 그리 길지 않다.
잠시 후면 잠잠해졌던 마기가 다시 준동하기 시작할 터.
그 전에 귀찮은 녀석들을 먼저 정리하기 위해 난 땅을 박찼다.
'죽여야 하나?'
난 '유리안'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우선순위를 정해두었다.
1순위는 신변의 안전.
2순위는 정신건강.
최대한 살생을 피하는 것이 내 모토였으나, 지금의 난 과격한 행위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신관들에게 접근하기 전에 검을 뽑아 든 이델이 나를 마중 나왔다.
캉──!
그가 꺼낸 검과 내 월장검이 맞닿자, 불똥이 튀었다.
'오러인가?'
험상궂게 생긴 것과는 달리 제법 실력이 있는 놈이었나?
"크, 크으으윽...."
하지만 힘은 형편없군.
'월광검'에 접어든 내 검이 강한 빛을 내며 밀어내자, 이델은 눈살을 찌푸린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물러나는 게 어떻습니까?"
유리안이라면 할 법한 말은 아니었으나, 내 '정신건강'을 책임지기 위해 내뱉은 말이다.
한 명이라도 덜 베어야 좀 쾌적하게 이곳을 빠져나갈 것 아닌가?
"웃기는군."
그때, 이델의 웃음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수가 있나?
오러도, 힘도, 검술도 내게 역부족인 상황인데 말이야.
"음?"
아주 잠깐, 이델이 검에서 오러를 풀자, 힘의 균형이 어긋나, 내 몸은 녀석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검신을 비스듬히 꺾어 검의 끝자락 포인트를 내 눈으로 향하게 했다.
'이건....'
난 옆으로 몸을 틀어 가까스로 그것을 피해냈다.
위험했다. 피하지 않았더라면, 눈이 찔려 실명을 했거나,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역시, 검성의 수제자로군. 바로 대처할 줄이야."
사실 저놈이 말한 '대처'는 내가 한 게 아닌, 유리안의 몸이 저절로 반응한 것이다.
'검성의 유파들 중 하나를 습득한 건가.'
일도유수(一刀流水).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운 검술을 추구하는 유파.
이 유파의 특이점이라고 한다면, 힘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것이 아닌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중점이라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유리안에겐 어울리지 않았고, 검성은 이 기술을 그에게 가르치지 않았다.
"난 너와 달리 그분의 곁에서 허송세월 보내지 않았다."
방금의 공격으로 자신감이 생겼는지, 이번엔 이델이 먼저 공세를 가져갔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빠른 검으로 사람을 까다롭게 만드는 검술을 선보였다.
'...현명하군.'
아까와는 달리 녀석은 검과 검이 맞붙는 것을 피했다.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으니, 최대한 내 공격을 유도하고 빈틈을 찌르는 형식으로 바꾼 것이다.
'짜증 나는군.'
그런 일도유수(一刀流水)의 검술에 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초조함에 일렁거리는 감정은 검 끝을 더욱 무디게 만들었고,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푸욱──!
그 탓에 이델의 검이 내 옷을 뚫고 들어오는 것조차 막지 못했다.
"크윽...."
"드디어, 그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구나."
조소가 가득 담긴 목소리와 함께 이델은 검을 조금 더 깊게 밀어 넣었다.
"확실히, 검성 님의 가르침을 대단하군. 그 짧은 시간에 너 같은 괴물을 죽일 수 있을 힘을 얻게 만들어 주셨으니."
녀석이 찔러넣은 검의 안쪽은 오러를 활성화시켰는지, 활화산처럼 끓기 시작했다.
"곁에서 배운 게 없는 모양이군. 하긴, 그 모양이니 파문을 당한 것이겠지."
"맞습니다... 그래서, 불쾌합니다."
그 끓어오름은 통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품속에 박힌 이델의 검을 붙잡고, 난 고개를 들어 녀석과 시선을 마주했다.
"검성이란 이름을 버리고, 신성국에 망명을 해 한다는 게 고작, 당신과 같은 쓰레기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것이라니 말입니다."
이델은 검을 뽑아내기 위해 힘을 주었지만.
"아, 안 뽑혀!?"
내 품에 박힌 검은 꿈쩍하지도 않았다.
당연하다. 믿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리 쉽게 내준 것이지.
==
[특성, '솜브라'가 적의 일격을 방어했습니다.]
⇒ 감정의 고조가 극에 달했습니다.
⇒ 고유 특성, 「뜨인 눈」이 발현되었습니다.
==
내 눈동자를 마주한 이델.
나에게서 뿜어져 나온 기운에 그 머리 위로 '공포'의 색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연연하지 않고, 난 솜브라에 박힌 이델의 검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월광검'의 오러는 일반적인 금속은 버틸 수 없다.
심지어, '뜨인 눈'이 발현된 순간 그 오러의 예기는 더욱 날카로워졌으니.
파캉──!
이윽고, 이델의 검은 유리 파편처럼 부서져 버렸다.
"내, 내 검이.... 커억!"
당황하는 이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월장검이 녀석의 목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검성이 당신께 '일도유수'와 같은 수비적인 검술을 가르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쏟아지는 피를 최대한 막기 위해 양손으로 목을 부여잡는 이델의 모습에 내 입에선 왠지 모를 웃음이 새어 나왔다.
'뜨인 눈' 탓에 감정이 고조된 탓도 있겠지.
"방어적인 검술이란, 약자의 검술."
난 그가 배운 검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검성은 애초에 당신에게 가르침을 줄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
이델의 목에선 연신 피가 흘러내렸다.
입고 온 제복 비스무리한 것은 이미 새빨갛게 물들었으며, 바닥에도 핏빛 웅덩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검성께선 안목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일도유수..., 일격으로 흐르는 물이 되어버리셨으니 말입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법한 농담과 함께 이델을 보자, 녀석의 두 눈은 분노로 일렁거렸다.
끄륵, 끅──!
그렇지만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감정을 입에 담을 순 없었다.
치고 올라오는 혈액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녀석은 과다 출혈로 죽을 것이다. 거기에 개의치 않고, 난 신관들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히, 히익...!"
겁에 질린 신관 중 하나가 '새겨진 거짓'을 회수하려고 했으나, 율시스의 머리에 있는 월계관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의식 도중이었던 지라, 고정이 된 듯하다.
"음?"
잠깐 신관들에게 한눈을 판 사이, 주변의 공기가 이상해졌다.
벌레가 꿈틀거리는 듯한 불쾌함.
데몬의 폐기장인 이곳이 마치, 누군가의 뱃속이 된 것처럼 불길하게 느껴졌다.
"쿨럭.... 쿨럭."
불길한 직감은 언제나 정확하다.
투기장에서 쓰이고 난 뒤, 버려진 데몬들의 피와 점액질. 그것들이 쓰러진 이델에게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성가신 일이 되기 전에 숨통을 끊어야겠군.'
그리 판단한 난 율시스에게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이델에게로 옮겼다.
의식을 잃어가는 녀석의 초점엔 내 얼굴이 비치지 않았다.
푸욱.
"커억...."
이윽고 손에 든 월장검으로 심장을 찌르자 신음하던 이델은 이내 곧 조용해졌다.
죄책감은 딱히 없다. 저쪽에서 먼저 내 목숨을 노렸으니까.
평소라면 살인한 것에 대해 벌벌 떨며 두려워했겠지만, '유리안'의 특성인 <포커페이스>와 <뜨인 눈>의 고조된 감정이 그걸 무마시켜주는 듯하다.
'...문양?'
월장검의 끝자락, 녀석의 왼쪽 가슴팍엔 제국에서나 볼 법한 귀족의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검성처럼 망명한 녀석인가? 그렇지 않다면 제국의 귀족 문양 따위는 없을 텐데.
'무슨 상관이겠어.'
그래, 뭔 상관이겠냐. 이미 죽은 놈인데.
녀석의 데몬화는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마신의 잔재 사념을 끌어당길 정도로, 막대한 원념이 있지 않다면 말이야.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두근──!
처음에는 혹시나 했다.
내게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고.
두근──!
두 번째, 심장 박동 소리는 내가 경솔했던 생각을 거둘 수 있을 정도로 확실히 들렸다.
두근──!
이델은 분명 죽었다. 죽었음에도, 녀석의 심장은 명백하게 '다시' 뛰기 시작했다.
주변에 쌓인 데몬들의 피는 뭉쳐 심장이 되었고, 살점은 모여 새로운 육신이 되었다.
동시에 일어난 녀석의 머리 위로 뿔이 나타났다.
삼각(三角).
"이런... 젠장입니다."
말도 안 돼.
죽어서도, 마신의 잔재 사념을 끌어당길 정도로 강한 원념을 가지고 있다고?
그 의문은 '데몬화'로 인해 부푼 이델의 몸에서 해소할 수 있었다.
왼쪽 가슴팍.
데몬이 되어버렸음에도, 자신의 가문 문양을 가릴 수 없었는지 열려있는 장소.
그곳엔 날개가 달린 방패와 검이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문양을 아주 예전에 본 적이 있었다.
- '그, 그러고 보니 최근 네가 숙청한 하이란스 가문의 생존자들이 페레난드 신성국으로 망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막 '유리안'이 되었을 때, 헤란드 형님이 가져온 명단에 작게 그려져 있던 문양이다.
"후후."
그것을 확인하자, 입에선 웃음이 흘러나왔다.
"유리안, 참으로 개 같은 새끼입니다."
지금의 욕지거리가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 "하, 하, 하이란스 가문에...."
삐걱거리며, 가래가 잔뜩 낀 거슬리는 목소리로 삼각 데몬이 입을 열었다.
녀석의 두 눈이 이리저리 돌아가더니, 내게 초점이 맞춰진다.
- "영광을."
터질 것 같은 강렬한 적의가 인간형 데몬에서 뿜어져 나왔다.
==
[특성, '놀라운 직감'이 적의 일격을 감지합니다.]
==
'온다.'
특성의 알림에, 난 '월광검'을 두른 검으로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한다.
절단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오러.
지금까지, 위력으로는 밀려본 적이 없는 월광검이니, 선제공격은 언제나 필승으로 이어지는....
캉──!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오러가 가득 머금은 월광검으로도 녀석의 몸에 생채기도 낼 수 없었다.
갑옷처럼 단단해진 삼각 데몬의 외피는 '월광검'의 예기(銳氣)를 완고하게 거부했다.
'...하하.'
그 모습에 난 속으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삼각(三角)부터는 다른 데몬들과 달리 게임 시스템의 보조를 받아, '이름'과 '특성'을 부여받는다.
녀석의 부여 받은 특성은, 이번의 격돌로 추측해본 건데 아마도, 초경화(超硬化).
강철보다 단단하게 자신의 몸을 굳힐 수 있는 능력인 듯했다.
하필, '절단력'이 주무기인 나를 상대로 이런 재능을 꽃피운 이유가 무엇일까?
'왜겠냐.'
삼각이 부여받는 특성은 살아생전 품던 원념과 밀접한 관계를 띤다.
즉.
'내가 X나 싫어서지.'
96화. 악착같은 자식(2)
스윽.
린네는 뺨을 타고 흐르는 땀 한 방울을 손으로 닦아냈다.
지금 대치하고 있는 흑위(黑僞)는 신성국의 특무부대라는 말에 걸맞은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개개인은 기사와 비슷한 기량을 가지고 있으나, 힘을 합치면 그들의 역량은 월등히 뛰어넘을 정도.
그럼에도 이런 둘을 상대로 린네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오러'의 질로 둘의 공세를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다는 것.
"잘도 버티는군."
하지만, 그것도 머지않아 끝날 것이다.
그녀의 마나 총량은 정해져 있었고, 소모할수록 싸움은 버거워지고 있었으니.
"그러게, 말이야, 내 딸이랑 비슷한 또래인데 이런 경지에 이르다니."
저런 복장에, 살벌한 검술을 휘두르면서 말하고는 있지만, 어쩐지 인간미가 두드러졌다.
그것과는 별개로 린네는 전신에 산개되어 있던 오러를 자아냈다.
'더 이상의 소모전은 위험해.'
일격에 한 명 이상을 제거하지 않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쓸데없는 싸움은 여기까지 하자고."
그 와중, 조금 가벼워 보이는 흑위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하자고? 내 방심을 유도할 생각이겠지?'
그리 생각하던 린네였으나, 흑위 둘은 자신들의 무기를 거두었다.
"무슨 속셈이지?"
"싸움의 이유가 바뀌었다. 그것뿐."
이유가 바뀌었다고?
"...당신들은 대신관의 명령을 받는 특무부대 아니야?"
"맞아. 정확히는 대신관 님'들'의 명령을 받지."
"그게 무슨 뜻이야."
"모든 대신관들이 가롯 님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란 소리죠."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린네는 고개를 돌렸다.
"대신관 샬라나 님을 뵙습니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자신과 대치하던 흑위 둘이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었다.
"타국의 기사여, 비록 이런 식으로 첫 만남을 가지는 것은 아쉽지만, 어쨌든 반가워요."
중년으로 보이는 여성, 대신관 샬라나가 먼저 린네에게 인사를 전했다.
주변에는 그녀의 사용인들이 잔뜩 있었고, 개중에는 샬라나에게 양산을 씌어주는 이도 있었다.
"조금 전, 흑위들의 말대로 이제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는 없어졌어요. 지금부터 저 흑위들은 가롯 대신관의 명이 아닌, 저의 명을 우선시해야 하니까요."
"...가롯 대신관? 지금 벌어진 일은 모두 가롯 대신관이 저질렀단 말인가요?"
"예."
샬라나는 린네의 경악에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 그의 선택이 저희 신성국 전체를 대변한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본래, 국가 전체의 손익 이전에, 사람은 개인의 이익을 먼저 좇는 편이잖아요?"
그 말을 당신들이 한단 말이야? 신성국의 신관인 주제에?
린네는 그런 말이 턱 밑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녀에게 더 이상 다툴, 검을 들 힘조차 거의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 나타난 목적이 뭐죠?"
적개심을 거두지 않은 채, 린네는 샬라나 대신관을 노려보았다.
"호호, 아직 어려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시는 모양이네요."
촤악.
샬라나는 부채를 펼쳤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으면, 대충 예상이 되지 않나요? 가롯 대신관의 돌발 행동을 수습하기 위해서죠."
린네는 눈살을 찌푸릴 뻔했으나, 이번에도 참았다.
"너희들은 지하로 내려가 가롯이 밀반출한 성물, '새겨진 거짓'을 회수해오거라."
"예, 대신관이시여."
샬라나는 흑위들에게 명령한 뒤, 린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린 기사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와 함께 안전하게 제의성으로 가시는 건 어떠신지요?"
"지금 일어난 일을 보고도, 그곳이 안전하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표독스러운 린네의 말에 샬라나는 부채를 살짝 흔들었다.
"호호,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네, 마음대로 할 거예요. 아줌마."
"...아줌마?"
빠직.
자꾸 어리다고 하는 샬라나에게 린네가 도발성 짙은 단어를 내뱉어주자, 그녀의 얼굴엔 주름이 두드러졌다.
"호, 호호.... 어린 친구라서 그런지 생각이 참 얕네요. 이런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쓴소리를... 야! 말은 끝까지 듣고 가!"
부채로 최대한 주름을 숨기던 샬라나는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지하로 향하는 린네를 향해 윽박질렀다.
최대한 입가의 주름을 조심하며.
***
막무가내로 들어오긴 했지만, 만종 투기장이 처음인 린네는 지하의 입구가 어디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어이, 여기야."
그런 그녀를 안내해주기 시작한 것은 조금 전까지 검을 맞대던 '흑위'들이었다.
어쩔 수 없이 린네는 둘을 따라 내려갔지만, 긴장의 끈은 놓지 않았다.
이 둘이 자신들을 미행하고, 검을 휘두르는 것에 대한 용서는 아직 하지 않았으니까.
"너무 적대하지 말라고. 우리라고, 그러고 싶었겠어? 위에서 시키는 일이니 어쩔 수 없이 한 거지."
"위에서 시킨다면, 사람도 죽이는 건가요?"
"명령이라면 그렇겠지. 죽이고 싶어서 죽이는 거겠어? 그런 미치광이는 우리 흑위에 없어."
"없지는 않을 거다."
"음, 한두 명 정도밖에 없어."
그들의 말에 린네도 당장 떠오르는 한 명이 있었다.
먼저 율시스 황자를 구하러 간 유리안이다.
'괜찮겠지?'
그라면... 괜찮을 것이다. 아마도.
황실의 칼끝, 웃는 처형대라 불리며 온갖 악명을 떨친 그였으나 검술 실력만큼은 누구보다 앞섰으니까.
분명 저번처럼 혼자의 힘으로 일을 처리하고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윽."
그런 생각을 하며, 흑위를 따라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밟자, 지독한 마기가 그녀를 반겼다.
아마 처음 수도에 방문했을 때 봤던 '마투'를 위한 데몬인 듯했다.
하지만 무각 데몬이 내뿜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마기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정신이 아찔해졌으나, 내려가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윽고, 지하에 도착하자 그녀의 불안은 눈앞의 현실로 바뀌었다.
지하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공간. 그곳엔 데몬의 시체와 피가 가득해, 머리가 아플 정도로 불쾌한 냄새가 준동했다.
그리고 중앙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크기의 인간형 데몬.
자신이 느꼈던 그 마기의 주인인 듯 보였다.
- "죽었다. 죽었나?"
녀석은 괴상한 말을 뇌까리며 사람으로 보이는 새빨간 덩어리를 손에 쥐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휘릭.
흑위 한 명의 혼잣말에 데몬의 고개가 이쪽으로 향했다.
세 개의 뿔.
'삼각(三角)이다.'
일각(一角)과 이각(二角) 데몬의 차이가 어마무시하듯, 이각과 삼각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데몬과는 달리 특별한 특성이 있는 탓에, 숙련된 기사들이 여럿 달려들어도 죽일 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
"미친...!"
그 탓에 함께 온 흑위가 겁에 질린 듯,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황자 전하는?'
뿔의 개수를 보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린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도, 그는 삼각 데몬과 제법 거리가 먼 곳에서 쓰러져있었다.
'그럼, 유리안 경은?'
다시 주위를 살피자, 그도 율시스와 마찬가지로 꽤나 거리가 먼 곳에서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말도... 안 돼."
그의 상태를 확인한 린네는 넋이 나갈 뻔했다.
어두운 탓에 생사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으나, 그의 몸통엔 팔뚝만 한 창이 여럿 박혀있었다.
다른 이라면, 즉사했을 법한 상처다.
하지만 그를 방치하고 율시스 전하를 우선시해야만 한다.
자신은 황자를 보호해야 하는 호위대의 일원이니.
...알고 있다. 그게 타당하다는 것쯤은.
그럼에도 린네의 발은 그에게로 향했다.
"유리안 경!"
"괜찮습... 으윽."
가까이 다가가 보자, 유리안의 상태는 예상보다 더 끔찍했다.
몸에 박힌 팔뚝만 한 창은 세 개.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피하기는 했으나, 모두 치명상이라 불러도 좋을 법한 장소에 박혀있었다.
'뽀, 뽑으면 안 돼.'
저도 모르게 그것들을 뽑으려던 린네는 가까스로 팔을 멈추었다.
이걸 뽑는 순간 과다 출혈로 사망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좋지?
"어떻게 해야 하냐?"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흑위 한 명이 중얼거렸다.
"뭘 어떻게 해. 삼각 데몬이랑 맞붙을 생각이야? 신관들도 다 뒤진 모양이니, 샬라나 님의 명대로 우린 성물만 가져가면 돼."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흑위들은 땅을 박차 율시스에게 달려간다.
- "크르륵."
한참을 가만히 있던 삼각 데몬은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기와 적의로 불타는 녀석이 처음으로 한 행동은 흑위들에게 달려드는 것이 아니었다.
휘이이익, 퍽──!
데몬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날카로운 물체.
그것이 유리안의 몸에 박힌 '창'과 비슷한 것으로 파악했을 땐 이미.
우르르, 쾅!
그들이 내려온 계단을 무너뜨려, 입구를 봉쇄했다.
"녀석이 출구를...."
쓰러진 율시스의 머리에서 월계관을 빼낸 흑위가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이각부터 데몬의 지능은 비상식적으로 높아지니까요."
린네는 넋이 나간 것처럼 본능적으로 중얼거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처럼.
그녀는 최대한 집중하려 했으나, 절망적인 상황에, 타개책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스승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생각으로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했으나, 쿵쾅거리는 심장은 좀처럼 잠잠해지지 않는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마법처럼 자신을 도와주던 '검성'이란 단어는 이제 예전 같은 위상을 갖지 못했다.
데몬화와 신성국으로의 망명.
항상 고결하던 그 위상은 더 이상 그녀가 생각하던 그 '검성'이 아니다.
'당신이었다면, 어떻게 했나요?'
힐끔.
린네는 고개를 돌려, 쓰러진 유리안을 쳐다보자.
'...어?'
이상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새까만 그림자처럼, 꿈틀거리는 무엇인가가 그의 상처를 메워주고 있었다.
'마력이 느껴지는... 생물?'
이상하리만큼, 린네는 저 '검은 그림자'가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저것이 유리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활동에 들어섰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시간을 번다면....'
다시 그가 일어설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싸워야 해요. 삼각의 데몬이라면 내부에 핵이..., 혼석이 있을 테니 그것을 깨부순다면 활동이 정지할 거예요."
도망치면 안 된다. 정확히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이겠지만.
린네의 말에 흑위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 싸운 딸뻘 아이랑 이번엔 협력하다니...."
다시금, 곡도를 뽑아 든 그들은 몸속에서 오러를 끌어올렸다.
마찬가지로, 린네도 검을 뽑아 태세를 가다듬었다.
"저 데몬은 몸속에서 창을 생성해서 날리는 것 같아요."
"어떻게든, 그 창을 피해서 핵을 부수는 게 핵심이겠군."
"네."
- "큭, 킥킥."
그런 자신들을 결의를 비웃듯, 삼각 데몬의 날숨소리가 들렸다.
지성이 있다는 것은 상대를 비웃을 수도 있는 것. 분명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기회는 한 번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휴가를 쓸 걸 그랬어."
무너진 입구를 보며, 창의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한 흑위들은 숨을 골랐다.
"가요!"
린네의 외침과 함께 셋은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평소, 합을 맞춘 둘은 어떻게 해야 상대방의 주의를 끌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듯, 서로 반대 방향에서 달려들었다.
- "크르륵."
그 탓에 삼각 데몬의 첫 타겟은 왼쪽으로 빠진 흑위였다.
투캉──!
투석기가 작동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데몬의 몸에선 창이 발사되었다.
두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무지막지한 속도.
"크아아아악!"
제일 먼저 타겟이 된 흑위는 다리에 창을 맞고 멀리 날아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좁혀지는 거리.
붙는다면 희망이 있을까?
확신할 순 없지만, 일방적으로 공격을 허용하진 않으리라.
"젠장...!"
남은 흑위 한 명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데몬에게로 달려들었다.
투캉──!
그런 그를 향해 데몬의 창이 또다시 발사되었다.
"커억!"
가까스로 공중에서 몸을 틀어 창을 회피한 그였지만, 무지막지한 운동 에너지 탓에 흑위는 입구 쪽으로 날아갔다.
'고마워요.'
린네는 그가 데몬의 이목을 끌기 위해 점프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덕에 이렇게 가까이 붙을 수 있었으니.
"흐읍...!"
전신에서 모든 오러를 짜낸 그녀는 검에 모든 것을 걸었다.
양질의 오러를 압축한 그녀의 검에서 섬광처럼 푸른 빛이 터졌다.
더 이상, 물러설 자리는 없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녀는 '혼석'이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데몬의 왼쪽 가슴에 검을 내질렀다.
캉──!
"아."
그러나 그녀의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오러를 머금은 그녀의 검은 강철도 벨 수 있으나, 데몬의 피부는 그런 강철보다 더욱 단단했다.
'...창을 쏘아내는 게, 이 데몬의 특성이 아니었어.'
아마도, 신체를 경화(硬化)시키는 것이 데몬의 능력. 창을 쏘아내는 것은 부가적인 것에 불과하리라.
- "킥, 키킥, 키키킥."
고요해진 지하.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내려앉자, 데몬의 웃음은 더욱 두드러졌다.
- "투기가 곧... 시작... 시작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뇌까리며, 데몬은 팔을 휘둘렀다.
공격을 피하고자 뒤로 물러선 린네는 데몬의 행동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죽일 수 있었는데, 죽이지 않았어.'
"이게 놀이인 줄 아는 모양이구만."
그런 데몬의 행동을 보며, 시간을 벌어준 흑위가 중얼거렸다.
"놀이요?"
"그래, 이곳은... 만종 투기장에서 사용했던 데몬들의 종착점이야. 거기서 들었던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야. 쿨럭."
피를 한 움큼 토하며,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도 아는 것이다.
데몬과 데몬, 데몬과 인간과의 투기가 얼마나 저속한지.
"이거 미안하게 됐구만."
"...미안한 줄 알면, 닥치고 있어요."
쏘아붙이듯 말한 린네는 데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놀이라고?'
이번 격돌로 삼각의 데몬이 얼마나 강한지, 그녀는 절절하게 느꼈다.
혼신을 다한 공격이었다.
게다가 그 공격을 위해 특무부대인 흑위 둘이 자신을 희생하며 틈을 만들어 준 것인데.
'그 과정을 이 데몬은 놀이로 느꼈다고?'
분하다. 그리고, 두렵다.
이 놀이가 끝난다면 닥칠 암담한 미래가 미치도록 무섭다.
'그래도, 당신이라면 포기하지 않겠지.'
그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유리안이었기에.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넘은 괴물 같은 호승심의 소유자.
'하다못해 율시스 전하를 살릴 방법을....'
- "하이란스 가문의...."
그때, 삼각 데몬의 말투가 달라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보다 또렷하고, 인간의 무엇인가를 흉내 내는 것처럼.
- "위대함을 알려야 한다."
몸에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적개심이 새어 나왔다.
마치, '증오'와 흡사할 정도로 강렬한 적개심이다.
"...어, 어떻게 일어선 거지?"
흑위의 독백을 들으며, 린네는 데몬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옮겼다.
"유리안 경?"
그곳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넝마가 된 유리안이 서 있었다.
97화. 악착같은 자식(3)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는 말이 실감 나는 상황이었다.
생전 이런 통증과 아픔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평범하게 게임이나 하던 소시민 중 한 명인 내가 언제 이렇게 죽을 정도로 다쳐봤겠는가.
특성 덕에 감소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관통하는 무지막지한 고통은 잠깐이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몸이 성한 곳은 하나도 없었으며, 생존에 대한 본능은 꺼져가는 촛불처럼 희미해져 갔다.
'손끝도..., 움직이기 힘들다.'
창이 박힌 곳은 세 군데.
복부.
오른쪽 가슴.
허벅지.
전투 지속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치명상들 뿐이다. 일반인, 아니 그 누구라도 출혈과 쇼크로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이다.
하지만 난 다시 한번 깨달았다.
'유리안 몸의 내구성은 엄청나군.'
그가 빙의한 몸은 상식을 벗어나고 있었다.
수면 위를 떠다니는 부유감을 느끼며, 몸 상태를 오로지 감각으로만 살펴보았다.
튼튼하다고는 하지만, 사실 '유리안'이라고 해도, 이 정도 상처라면 죽어 마땅했다.
이리 숨을 쉴 수 있는 이유는 순전히 '솜브라'가 장기들을 보호하며, 출혈을 최대한 막은 덕분이다.
'녀석도 죽고 싶지 않겠지.'
혼석을 흡수한 순간, '솜브라'는 나와 일심동체가 되었다. 이렇게 치료에 열심히 인 것도 자신이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고작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나와 전혀 없는 일로,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닌 것의 업보로 죽는 것은 완전 사양이다.
'일어나야 해.'
그렇게 마음을 먹자, 손끝조차 움직일 수 없었던 육신이 점차 말을 듣기 시작했다.
동시에.
"큭."
잠자고 있던 신경도 눈을 떴는지, 망가진 육신의 통증도 모두 나의 것이 되었다.
불쾌함이 하늘을 찔렀다.
기력은 없어,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데, 격통은 뚜렷하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이 정도는..., 버틸 만하군요."
그럼에도, 이 빌어먹을 입은 허세를 부리며 자기최면을 걸었다.
병리적인 기풍(氣風)은 나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래. 어떻게 하든, 버텨라.'
내가 죽는다면,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난초에 물을 줄 사람이 없지 않은가?
새로 입양한 두 아이도 눈에 밟히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졌다.
"끄으으으윽...!"
정신을 가다듬은 난 몸에 박힌 창을 하나하나 뽑기 시작했다.
쾅──!
옆에서는 누군가가 날아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쿨럭, 쿨럭!"
거기에 개의치 않고, 난 창을 뽑는 것에 집중했다.
내 몸을 관통한 이것들을 뽑는다면, 과다 출혈이 일어날 것이 명백했으나.
'너도 살고 싶으면, 알아서 막아.'
대화가 통할지 모르겠지만, '솜브라'에게 말을 걸었다.
녀석도 생각이 있으면 알아서 하겠지.
하나.
"끄으으윽...."
둘.
"허억, 허억."
셋.
"...큭."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손을 움직여 간신히 창 세 개를 모두 뽑아냈다.
예상대로, 출혈이 생길만한 큰 구멍은 '솜브라'가 대신 막아주었다.
충혈된 두 눈은 끓는 물을 부은 것처럼 아팠으나, 내 시선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월장검은...?'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대단한 투쟁심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검을 찾고 앉아있다니.
하지만 이번만큼은 '유리안'의 정상이 아닌 투쟁심을 부정하지 않았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데몬이 된 이델은 아직 살아있고, 난 아직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다.
'어디에 있지?'
비싼 돈 주고 만든 검이 보이지 않는다.
가뜩이나, 통증에 돌아버릴 것 같았는데 검까지 보이지 않자, 괜스레 짜증이 났다.
쿨럭.
기침하며, 난 가까스로 두 발로 일어섰다.
검이 부러졌나?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산더미처럼 쌓인 데몬들의 시체, 그 어딘가에 있겠지.
'찾을 수 있을까?'
절레절레.
이건 확신할 수 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일일이 시체들을 뒤져야 하는데, 이델이 그걸 기다려주지도 않을 것이고, 나에게 그럴 힘도 없다.
짤그락.
그때 품속에서 천으로 감아둔 짧은 검 하나가 떨어졌다.
검성 하이든 라이히가 사용하던 검.
과거의 영광 따윈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노쇠하고, 검신도 반절 이상은 사라진 검이다.
'마치, 지금의 검성과 같은 꼴이군.'
그럼에도 난 검의 힐트를 잡았다.
까슬까슬하면서도, 이상한 감촉.
통증의 폭풍 속에서도 그것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본래라면 검성이 아니, 주인공이 썼어야 했던 검이다.
===
⇒ 〈기억상실〉 특성이 〈새로운 검성〉으로 변모했습니다.
===
낯선 텍스트가 떠오름과 동시에 통증이 작게나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지금 잡은 검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조금 더 명확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 "하이란스 가문의."
〈오러 변환〉을 통해, 짧은 검신을 '월광검'으로 보강하자, 날카로운 살기가 내게로 향했다.
삼각 데몬, 이델.
그 괴물의 관심이 나에게로 옮긴 것이다.
"유리안 경!"
어느새 도착했는지, 린네가 이곳에 있었다.
- "위대함을 알려야 한다."
"조심하세요!"
그녀의 외침과 함께, 바람을 가르고, 내게 쏜살같이 창이 날아들었다.
카앙──!
가까스로, 검을 가져가 그것을 빗겨나가게 했으나, 상반신이 휘청거릴 정도로, 그 위력이 굉장하다.
게다가 억지로 서 있는 두 다리는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후들거렸다.
- "크르륵...!"
그래도 여기서 쓰러질 순 없지.
명색의 '데몬 사냥의 귀재'라고 불리는 '유리안'인데 말이니까.
전신의 힘을 다리에 모은다.
흐물흐물하던 근육이 팽팽해지는 것을 느낀 난 땅을 박차 이델과의 거리를 좁혔다.
투캉!
나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한 번 더 창이 날아온다.
새로운 특성을 얻고, 눈이 좋아진 것이 느껴졌다.
이를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라도, 그 궤적이 보인다던가.
하지만, '눈'이 좋아진 것이지 이미 망가진 신체는 여전했다.
더욱이 데몬의 점액과 피로 점철된 바닥은 너무나도 불안정했다.
철퍽!
'피하지 못하면 죽는다.'
뇌리를 엄습하는 불길함.
"흐읍!"
다행히 그것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내 옆으로 따라붙은 린네가 검을 휘둘러, '창'을 간신히 빗겨내 준 것이다.
직접 막아보았지만, 그 '창'에 담긴 위력은 만만치 않다. 그 탓에 린네는 중심을 지키지 못하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충분해.'
그 광경을 보며, 나는 한 발 더 이델에게 다가섰다.
내가 접근하자, '창'을 쏘아내는 것이 아닌 근접전을 시작하려는 이델.
녀석의 초경화(超硬化)로 단단해진 팔이 일직선으로 짓쳐들어왔다.
콰지지직──!
얼굴 옆으로, 검을 들어 간신히 막아냈으나, 시뻘건 불똥이 번쩍거린다.
이델의 팔이 검에 닿을 때마다 '월광검'으로 무장한 오러가 점차 깎여나갔다.
"크, 으윽...!"
지면에 달라붙은 것처럼, 끈적한 하반신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난 억지로 팔을 들어 녀석의 몸에 '월광검'을 휘둘렀다.
콰지직──!
이번에도 튀기는 불똥.
깎여나가는 것은 이델의 몸이 아닌, 검성의 검에 두른 오러뿐.
'그렇다면, 더욱 예리하게.'
토막 난 검에 투박하게 오러를 입힌 것뿐이지만, 계속해서 오러를 정제했다.
강도는 높이고 절삭력은 날카롭게.
초경화를 전신에 두른 녀석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신 검을 휘둘렀다.
허공에 튀긴 불똥이 내 뺨에 닿아, 화상을 입기도 했으나 멈추지 않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니.
- "하이란스 가문에 영광을."
당연하게도 이델 또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내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반격이 날아왔고, 그걸 피하고자, 데몬의 질퍽한 피와 난자한 살점이 있는 바닥을 굴렀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지만.
좀 꺼져. 지금은 생존이 먼저야.
- "하이란스."
검성의 검에 점점 익숙해질수록 내 '월광검'은 날카로워졌고.
- "가문에."
반비례하듯, 검신은 더욱 짧아져 갔다.
- "영광.... 크르륵!"
이윽고, 녀석의 입에서 비명이 나올 정도의 유효타를 입힐 수 있을 때쯤, 깎여가던 검신은 이루던 오러는 더 이상, '검'이라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아, 안 돼...."
- "키킥, 키키킥."
린네의 절망 어린 목소리와 이델의 조소 서린 웃음.
그것들을 무시하며, 난 질척거리던 바닥을 걷어찼다.
쩔그럭──!
그곳엔 그토록 찾던 '월장검'이 놓여있었다.
찾았다.
"설마...."
착──!
뭔가 중얼거리는 린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난 어느새 익숙해진 월장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아무런 거부감 없이 내 오러를 받아들인다.
이래야 내 검이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 왼손에 있는 검을 힐끔 쳐다본다.
'검성이 사용했던 검....'
난 그것을 손에서 놓았다.
내게 무엇보다 큰 의미가 있는 검이지만, 지금 이 세상에 이 검을 사용할 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변질되어 버린 고결함만이 남아있을 뿐.
'잘 가라.'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양손으로 월장검을 잡았다.
- "크아아아아악!"
방금보다 강력한 기운을 느꼈는지 이델의 두 눈이 활짝 뜨였다.
흉흉한 포효와 함께 양손을 치켜든 녀석은 '초경화'라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을 필두로 우악스럽게 팔을 휘두른다.
탓.
난 데몬화로 거대해진 그 손을 타고, 녀석의 명치로 달려들었다.
'앞으로 쥐어짤 수 있는 공격은 단 한 번.'
몸 상태를 생각하면, 지금 이것이 마지막 일격이 될 것이다.
===
특성, 〈솜브라〉를 사용합니다.
===
그렇다 보니,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내,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
특성, 〈월광검〉과 〈솜브라〉가 서로에게 반발합니다.
===
이 특성은 멀쩡한 몸 상태였을 때도 감당하지 못한 화력이다.
'아.'
그러나 사경을 헤매고 난 뒤, 머리가 깨끗해진 탓일까?
이 능력을 내가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던 이유를 방금 깨달았다.
'이름이 없었어.'
이 세계관에서 '이름'이라는 것은 아주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강한 마법일수록, 독자적인 이름이 붙어있고, 개개인의 특성에도, 오러에도 있다.
심지어, '데몬'에게 조차도 이름이 있다면, 그 강함이 달라졌다.
- "하, 하이란스 가문에!"
중요한 순간인데, 이델이 인간의 말을 흉내 내며 내 상념을 방해한다.
빌어먹을 녀석.
아마 저 녀석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런 녀석을 끝내기 위해, 난 '솜브라'를 머금은 '월광검'을 쳐다보았다.
은은하게 빛나는 달빛과 그림자에 가려지는 것처럼 검게 물든 검신.
'월식.'
그래, 너의 이름은 바로 '월식(月蝕)'이다.
===
새로운 특성을 생성했습니다.
최초로 〈월광검/월식〉을 획득했습니다.
===
이름이 새겨진 '월식'은 이전처럼 컨트롤할 수 없을 정도로 오러가 요동치지 않았다.
덕분에 조금 더 정교한 일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이란스 가문의 문양이 사라지지 않은 왼쪽 가슴.'
- "영광을!!"
공중에 떠 있는 내게 이델의 창과 주먹이 날아들자, 몸을 회전하며 그것들을 털어냈다.
그 후, 왼쪽 가슴팍에 검을 내질렀다.
푸우욱──!
환한 검은색을 띠는 검신은 아까와는 달리, 순식간에 녀석의 심장을 침범했다.
- "쿠르르륵, 쿠우욱."
일격에 쪼개진 '하이란스 가문'의 문양.
인간형 데몬의 혼석은 거의 대부분 심장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델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심장 부근이 아니었어요...!"
"정말 영악한 자식... 입니다."
말로는 가문의 영광을 어쩌고 했으면서, 심장이 아니라니.
다행인 것은 애초에 이 공격은 혼석을 노리고 내지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특성, 〈월식〉은 예리함도 예리함이지만, 그 위력의 중점은 반발력에 의한 '폭발력'.
데몬을 죽이는 검과 데몬의 특성.
서로를 밀어내는 특성이 합쳐지자, 절제된 폭발이 검 끝에서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 "컥, 커어어억...."
콰직──!
이델의 몸에서 그림자처럼 새까만 검신이 여러 갈래 뿜어져 나왔다.
"내부는 그리 단단하지... 않은 모양이로군요."
파바밧!
점액질과도 같은 피가 내 얼굴에 튀었고,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델은 나를 내려다보았다.
데몬의 검붉은 광폭한 기운이 깃든 눈동자가 아닌 인간의 눈빛에 가까운, 여러 감정 중 오직 한 감정만이 그 시선에 담겨 있었다.
- "유, 유리... 안."
머리 위로 '증오'의 색을 띠고 있는 그는 데몬 이델이 아닌, 하이란스 가문의 이델로서 나를 보고 있었다.
"황실에 잘하지, 그러셨습니까? 분란을 일으키니 멸문당한 거 아닙니까?"
이게 '유리안'다운 것이겠지.
- "유리아아아아아안!"
절규와도 같은 포효와 함께 이델의 몸은 부스스 허물어지고.
절그럭.
동시에 그의 심장에 박힌 검도 바닥에 떨어진다.
'월식'을 둘러, 새까맣게 물들었던 검은 점차 본래의 '월장검'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하, 말도 안 되는 괴물이잖아."
구석에 처박힌 흑위가 허탈하게 웃는다.
창을 빗겨내기 위해 몸을 날렸던 린네도 너덜너덜한 몸을 이끌고, 내게 다가왔다.
"괜찮나요, 유리안 경!?"
괜찮냐고? 시X. 죽기 일보 직전이다.
"고작 데몬에게 상처 입은 것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놈의 에고는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농담하지 마세요. 상처 너머로 건너편이 보일 정도라구요!"
그녀의 말대로다.
창에 뚫린 상처는 솜브라가 출혈을 막아주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남아있다.
이 정도 상처, 아프다고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
"검사에게 이 정도 부상은 늘 있는 법입니다."
그놈의 자존심.
98화. 좋은데, 나쁘다
터벅, 터벅.
어두운 집무실을 어수선하게 돌아다니는 인물이 있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연신 창문 밖을 살펴보던 대신관 가롯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흑위들은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이냐!"
으름장과도 같은 그의 말에 주변에서 보좌하던 신관들이 움찔한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대신관님."
그런 신관 중에서 한 명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입을 열었다.
"뭐가 좋지 않다는 거냐?"
"흑위들은 대신관님뿐만이 아닌, 다른 대신관들의 명도 따릅니다. '칠위전성'이란 그렇게 만들어진 기관입니다. 혹여나, 그들이 저희가 배신을 해, 성위청에서 성물을 빼돌린 것을 다른 대신관에게 발설했다면...."
공포로 인해 몸을 한껏 움츠린 신관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렇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성위청(聖位廳)에서 성물을 밀반출하는 것은 중죄.
대신관의 지위를 박탈당할 만큼의 중죄라 확언할 수는 없으나, 그 위치를 흔들기엔 충분한 죄목이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성도에서 잠시 몸을 피하심이 어떻겠습니까?"
나름 지당한 말이다.
이 소란이 잠잠해지기 전까지 조용히 잠적한다면 다른 기회가 생길 수도 있기 마련.
"나보고 도망치라는 것이냐?"
하지만 가롯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투자가 있었는데.
성도를 떠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노고를 모두 버리는 것과 같았다.
"이델은 어떻게 되었지?"
"...그게 이델 경 또한 연락이 없습니다."
"빌어먹을 새끼!"
대신관답지 않게 가롯은 욕지거리를 입에 담았다.
그에게 건 기대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는 것 같으니, 괜스레 그의 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유리안...!'
만약, 이델이 죽었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아드라탄 제국에서 찾아온 율시스 황자의 호위.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됐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직접...."
"어머, 어디를 가실 생각이신가요? 가롯 대신관."
의식장으로 직접 발걸음을 옮기려던 가롯의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부채로 얼굴을 가린 여성 한 명이 들어왔다.
"...샬라나 대신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가롯은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호호, 너무 인상 쓰지 마세요. 가뜩이나, 험상궂은 얼굴, 나이까지 들어 보이면 곤란하잖아요?"
"걱정해줘서 고맙군."
"뭘, 같은 대신관이잖아요?"
하관을 부채로 가리며, 눈웃음을 짓는 그녀.
'같은' 대신관이 아니라 생각하기에,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가롯도 알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 찾아온 이유가 뭐지?"
"호호, 본인이 더 잘 아시지 않나요?"
"글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가롯은 등 뒤로 식은땀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성위청에서 몰래, 성물 하나를 반출하셨잖아요? 그것도 높은 금계의 성물을."
"이런 식으로 누명을 씌우는 것은 불편하군. 샬라나."
"호호, 누명이라뇨 오히려 그 말에 제가 불편하네요. 증거와 증인이 없더라면 제가 이런 식으로 찾아왔을 리 없는 거, 아시죠?"
딱!
그녀가 손을 튕기자, 익숙한 얼굴이 들어온다.
"네놈...."
자신이 부른 세 명의 흑위 중, 다른 대신관들의 감시를 맡긴 자다.
도도한 표정을 지은 샬라나는 여유롭게 부채를 부치기 시작한다.
"의식을 진행한 신관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한 명은 사망한 것 같습니다. 다른 한 명은 정신을 잃었지만, 증인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머나, 운도 좋지."
착.
빙그레 웃은 샬라나는 부채를 접었다.
"뿐만이 아니라 뇌물수수, 기밀 유출, 루스나 신관 암살 의혹, 등등... 아주 알차게 사셨더라구요."
"무, 무슨... 내게 얼마나 많은 누명을 씌우려는...!"
"심지어 제국의 4황자 율시스 황자에게 밀반출한 성물을 사용하기까지 하다니."
이어지는 샬라나의 말에 가롯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본래라면, 어둠 속으로 묻어둘 수 있는 일들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너무... 성급했다.'
일개 신도에서 '대신관'의 직위에 오르기까지 온갖 악행을 저지른 그였다.
그것이 들춰진다면, 지금까지 쌓은 자리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
- '파리 목숨이라... 후후.'
이전 유리안의 독백처럼, 지금 이 대신관이라는 위치는 '파리 목숨'으로 만들어 낸 자리였으니.
그 탓에 조급해진 것이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실눈, 감정조차 담기지 않는 두 눈에 성급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럼, 재판이 있기 전까지 가롯 대신관의 신변은 저희가 맡도록 하죠. 너무 걱정 마세요~ 정말로 죄가 없다면, 태양신께서 가롯 대신관을 도와주시겠지요~"
까드득.
말꼬리를 울리며, 능구렁이처럼 웃는 샬라나의 말에 가롯은 이를 갈았다.
이번만, 이번만 지나갈 수 있다면.
복수할 것이다.
샬라나는 물론! 그 빌어먹을 실눈 놈에게!
***
유일한 출구인 계단이 무너졌지만, 다행히도 지하에는 탈출구가 존재했다.
데몬 시체의 폐기장이다 보니, 독기를 순환하기 위해 천장이 개폐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제법 높이는 있었지만, 일정 수준의 능력을 지닌 그들에겐 그곳으로 나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곳을 빠져나온 뒤, 율시스는 병동으로, 나와 린네는 처소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내내, 린네는 나에게 치료하라고 잔소리를 해댔다.
"...구멍이 그렇게 뚫렸는데 안 춥나요?"
약간은 퉁명스러우면서도 걱정이 깃든 목소리로 린네가 물어 왔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샐쭉한 린네의 표정에 난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모습으로 신성국의 병동에 가라고?
당장에 내 상처를 막고 있는 '솜브라'가 마기라는 것을 들키고 말 것이다.
그럼 내 목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번 생의 내 목표는 '안전 제일'이다.
근데, 진짜 희한하게도 '솜브라'에 진통 효과가 있는지 아니면 이놈의 병리적인 기풍(氣風)이 '진통'을 하는 것인지, 통증은 많이 사라진 상태다.
===
⇒ 〈기억상실〉 특성이 〈새로운 검성〉으로 변모했습니다.
===
아니, 어쩌면 새로운 특성의 여파일 수도 있겠지.
이델과의 전투에서 '검성'이 사용하던 검을 사용한 난 특성이 변했다는 텍스트를 볼 수 있었다.
'새로운 검성이라....'
처음 보는 특성이자 칭호이다.
애초에 '검성'이라는 호칭에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는 의미가 없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검성'이었고, '새로운'이라는 수식어가 등장했다는 건, 그 주인공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정말 나보고 주인공 노릇을 하라는 거냐?'
설마, 그럴 리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쩌면'이라는 가능성도 동시에 들었다.
직무유기를 하는, 게다가 몸에 직접 마기를 심은 검성이 주인공이 될 수 없으니.
"저는 율시스 전하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올게요."
린네의 목소리에 상념이 깨진다.
린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곳에서 치료받을 율시스를 보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이 아무래도 잠정적인 적국이고, 사건 사고가 많은 탓에 그리 행동하는 것일지도.
그녀가 사라지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생각을 정리하기 용이한 환경이었으나, 인기척이 따라붙었다.
'마나감지'로 확인해 본 바, 그것의 정체는 '흑위'.
'혹시, 마무리를 지으려고 온 거냐.'
아마도, 이놈은 이전부터 나를 따라다니던 미행 중 한 명일 것이다.
대신관의 명을 받고 온 것일 터.
지하에선 '데몬'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어서 협력한 것이지, 이제는 아닐 수 있기에.
잔뜩 긴장한 나는 검을....
"유리안 경, 아니...."
음?
"비숍 유리안, 이렇게 늦게 인사드려서 죄송합니다."
흑위의 말에 잠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 참, 여기에도 여명회의 끄나풀이?
"당황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역시 눈치채고 계셨나 봅니다."
그냥 황당해서 아무런 말도 안 나온 것뿐이다.
"같은 목적을 둔 동료를 어찌 몰라볼 수 있겠습니까?"
"...미행을 눈치채셨으면서 가만히 두신 이유가 그것 때문이셨군요."
아니, 가만히 둔 이유는 순전히 소란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해서인데....
"아니었다면 이렇게 살아서 저와 대화할 일도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후후."
그럼에도 난 녀석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을 복 돋아 주기로 결심했다.
애초에 이것이 '유리안'스러운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꿀꺽.
경고 아닌 내 경고에 흑위는 침을 삼키자, 익숙한 것이 눈에 보였다.
공포를 상징하는 보랏빛 아지랑이.
'지금 내 몸에 구멍이 세 개나 뚫렸다는 걸 알고서도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솔직히 말하자. 신성국 사람들은 '유리안'이란 이름에 조금 둔감하게 굴어서, 조금은 아쉬운 경향이 있었다.
이제 나도 '유리안'스러워진 건가.
'관심종자'라는 타이틀이 나름 몸에 각인이 된 듯하다.
이게 본토의 맛이지.
'그건 그렇고, 여기에도 여명회의 일원이 있다니.'
대체 얼마나 뿌리를 뻗어댄 건지.
"저희를 이렇게 곤란하게 만든 대신관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거 대신관이 한 일 맞지?
은유적인 표현으로 넌지시 흑위를 떠본다.
"...지금 성물을 밀반출한 죄로 샬라나 대신관이 가롯 대신관의 신변을 확보해둔 상태입니다."
역시, 예상대로 대신관의 소행이 맞았다.
심지어, 율시스에게 직접 세례를 진행해주었던 가롯이 한 일이었을 줄이야.
율시스가 신성국과의 화평을 동아줄로 삼았듯, 가롯도 제국의 황자를 그리 생각했을 터.
그 줄을 조금이라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암시'라도 걸려고 했던 것인가.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빨리 알려드리거나, 손을 썼어야 했는데 주변의 시선들이 많았던지라."
"괜찮습니다. 밀정의 일이란 본디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으니까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하기는 개뿔! 난 죽을 뻔했다고!
"그나저나, 이 모든 일이 가롯 대신관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다니... 고독전에서 전투를 벌이신 것도 역시 계획대로이신 모양입니다."
여명회 소속의 흑위가 살짝 감탄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 고독전은 검성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만든 것. 그런 고독전을 완전히 엎어버리셨으니...."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냐.
그 고독전이 대신관이 아니라 '하이든 라이히'가 만든 것이라고?
'아주 갈 때까지 가는구나. 정신 나간 놈.'
힘에 미친 놈은 '유리안'이거늘, 실상 직접 경험해 보니 검성도 만만치 않다.
하긴, '플레이어'가 선택지를 통해 검성을 성인군자처럼 만든 것이지, 본래 그의 방식은 무자비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난 내가 선택한 '검성'이 참 좋았는데 말이지.
"아크 비숍 아니, 테넬론 총대주교님도 만족하실 겁니다."
그놈의 만족을 위해서 한 건 아니다.
그저 내가 살기 위해서 한 것뿐이지.
그렇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게 무슨 상관이랴.
립서비스 좀 해주고 넘어가자.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것 모두 여명회의 대의를 위해서니까요. 당신도 잘하고 계십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유리안 경!"
약간 움츠러들었던 흑위의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눈에 존경이 가득했다.
***
데몬의 마기를 응집하기 위해 '고독전'을 구성한 검성.
성물을 밀반출하고, 우리에게 칼끝을 들이민 대신관.
그것들은 막론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건들이었으나, 지금 내 신변에 가장 큰 위험이 되는 것은 이것이다.
'...율시스가 도통 눈을 못 뜨는군.'
성물, '새겨진 거짓'의 발동은 막은 상태다.
하나, 그 준비 과정에서 모종의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머리가 다쳤을 수도 있고 중요한 장기인 뇌에 이상이 생겼을 수도 있다.
'만에 하나, 율시스가 일어나지 못한다면….'
호위로 온 내가 어떻게 되는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아무리 율시스의 위로 누나와 형이 잔뜩 있어 황위 계승권과 관계는 없다고 해도, 황족은 황족이 아닌가?
심지어 그 지위 탓에 큰 죄를 묻지 않는다고 해도, 황실엔 내 목을 단두대로 보내기 위해 안달이 난 승냥이들이 잔뜩 있다.
그러니, 율시스가 여기서 눈을 못 뜨거나 사망 판정을 받는다면 냉철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검성을 진짜 따라가야 할지도.'
벌컥.
밖에서 대기하던 도중, 투기장 병실의 문이 열리자, 안에서는 율시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던 린네가 튀어나왔다.
"율시스 전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음, 다행히도 망명 준비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99화. 나만 아는 사실
직접 눈으로 확인한 율시스는 다행히도 멀쩡했다. 상처를 입은 곳도 보이지 않았고, 딱히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것 같지도 않았다.
이번 사태에 대한 전말을 듣던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봤는데, 이번 일은 황실에 보고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음.... 정신에 이상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이상이 생겼을 수도 있겠다.
그리 생각했으나, 잠깐 생각을 정리하니 율시스가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저도 함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유리안 경."
잠시 두 눈을 감은 율시스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조금만 쉬다, 다시 귀국길에 오르자고. 원래 지금쯤이라면 국경을 지났어야 했을 텐데 말이야, 하하!"
조금 더 안정을 취하는 게 좋을 텐데, 그래도 황자의 말이니 군말하지 않았다.
나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으니.
이번 일을 불문으로 붙이려는 율시스의 태도에 린네는 의문을 느낀 모양이다.
"왜...."
병실을 빠져나온 그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난 오히려 그녀에게 되물었다.
"린네 양. 혹시, 전하께서 '왜' 그리 말씀하시는지 모르십니까?"
내 물음이 비꼬는 것처럼 들렸는지, 린네의 눈이 살짝 가늘어진다.
"네, 그러니 알려주세요."
"저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신성국과의 화평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신성국에서 황자님께서 피습을 당했다면 황실에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
내 말에 린네가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니, 황자님께서는 오늘 있었던 일을 조용히 넘어가시려는 겁니다."
제 4황자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일환이라고 굳이 말하지도 않아도, 그 정도는 알겠지.
제국과 신성국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곧 율시스의 자격과 쓰임새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니.
"황족이어도, 약점을 보이면 공격당하는군요."
"그건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심해지지요."
그리 말한 난 투기장의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신관들과 사용인들을 대동한 여성 한 명이 우아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올 줄 알았다.'
대신관 샬라나.
가롯과는 달리 제국과의 전면전을 원하는 호전적인 대신관.
이번 일로 그녀가 찾아올 것이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좋든 싫든, 이번 일은 그녀가 물어뜯기 좋은 건수였으니까.
"쯧."
샬라나의 얼굴을 보자, 옆에 있던 린네가 혀를 찼다.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내가 모르는 사이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는 모양이다.
"호호, 안녕하세요. 제국의 귀인분들."
정중히 인사하는 샬라나에게 그녀의 이름을 '직접' 밝히며 난 예를 표했다.
"반갑습니다. 대신관 샬라나."
"어머나, 저를 아시나요?"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진격의 대신관' 샬라나의 이름을요. 다른 대신관들의 이름들도 모두 외워두고 있습니다."
내 말에 다시금, 웃음을 흘린 샬라나는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호호호, 농담도 참."
살짝 눈웃음을 짓는 그녀였으나, 목소리에선 약간의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대신관의 이름과 그 힘에 대해서는 신성국에서도 극비에 속하기에.
"율시스 황자 전하의 몸은 어떠신가요?"
"다행히도 이상은 없어요."
"와, 그것참 다행이네요. 호호."
린네의 말에 샬라나는 호들갑을 떨며, 웃었다.
뻔히 아는데, 전혀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지. 이 아줌마는.
"이번 일은 저희의 불찰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불찰뿐이겠냐! 난 죽을 뻔했다고.
"주동자는 지금 신변을 확보해 재판에 회부 할 예정이랍니다."
당연한 소리를.
스토리대로라면 사형이 되겠지.
"하지만.... 그 재판이 끝날 때까지 여러분들은 증인으로 남아주셨으면 하는데 말이죠."
"그게 무슨 소리죠?"
샬라나의 말도 안 되는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린네였다.
역시. 내가 아는 그녀라면 아무런 속셈도 없이 이곳에 나타났을 리 없지.
"호호, 이해력이 부족하시나? 말 그대로 이번 사태에 피해자인 여러분들이 가롯 대신관을 죄를 증명하기 위한 증인으로 남아주셨으면 한다는 것인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내 말에 샬라나는 눈웃음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글쎄요. 최소 한 달은 걸리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대신관'의 재판이다 보니. 호호."
"저희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요?"
"이유는 없더라도, 의무는 있지요. 게다가 유일한 피해자 아닌가요?"
반발하는 린네의 모습에 샬라나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이곳은 신성국이잖아요? 이곳에 오셨으니, 이곳의 룰을 따르셔야죠."
마치 먹잇감을 보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뒤로 따라왔던 신관들과 사용인들이 슬그머니 앞으로 나왔다.
'이럴 줄 알았다.'
우리가 성도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잠잠했던 이유는 단순히 다른 대신관들의 시선이 있어서다.
그런 와중, 사건이 하나 터져줬으니, 전쟁을 원하는 그녀의 입장에선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인 것이다.
'우리를 성도에 붙잡아두고, 무슨 누명을 씌우려고.'
제국과의 전면전을 다시 원하는 그녀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대놓고 칼춤을 추면 모를까.'
이전에도 말했지만, 신성국은 '신성'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이면을 지닌 국가다.
좋게 말하면, 암투가 많은 곳.
나쁘게 말하면 음습한 국가란 소리다.
"저희는 율시스 전하께서 몸을 추스르시면, 바로 귀국 절차를 밟을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못 들으셨나요?"
"아뇨, 모두 듣고 있습니다."
난 그녀에게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자신만만하게.
이미 이런 상황을 상정해두었던지라, 이미 방도를 마련해두었다.
"신성국에선 당연히 신성국의 법을 따라야 하겠지요. 하지만! 모든 법에는 예외가 있기 마련입니다."
윽.
말을 하던 도중, 이델에게 당했던 허리 쪽의 상처에서 통증이 살짝 느껴졌다.
그 탓에 전신이 주춤거렸고, 그것을 지탱하기 위해 난 오른손을 허리춤에 갖다 대었다.
차차자자작──!
동시에 지켜보던 샬라나의 호위들이 일제히 나에게 창을 겨누었다.
이 자식들이 왜 이래!?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내 손이 허리춤에 매여있는 '검집'에 닿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지, 지금... 무슨 속셈이시죠?"
나보다 더 당황한 샬라나.
마찬가지로 깜짝 놀란 눈으로 날 지켜보는 린네.
"이곳은 신성국입니다. 대신관인 저의 앞에서 검을 뽑을 생각이셨나요? 그게 당신이 말한 예외인가 보죠?"
미친, 오해다!
그냥 자세를 다시 잡은 것뿐이라고!
"후후, 맞습니다. 이것도 예외의 일종이죠."
이게 핑계처럼 들릴 것이란 걸 알고 있다. 그러니,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자.
"지금은 검을 통한 예외가 아닌 다른 예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대신관 샬라나"
***
대신관 샬라나는 이야기 도중, 검을 뽑아 들려던 유리안의 행동에 지레 겁을 먹었다.
'검성의 수제자....'
그 소문은 신성국 사람인 그녀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이제는 망명한 검성의 제일가는 제자라고 불릴 정도로, 어마무시한 검사. 그런 그가 검을 휘둘렀다간, 피바람이 불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선 그가 검을 뽑아주는 쪽이 더 좋았다.
'율시스 황자의 호위로 온 그가 제멋대로 검을 휘둘러 난동을 부렸다면, 이곳에 묶어둘 이유는 더욱 견고해지니까.'
그래, 그게 맞거늘.
대담하게도 진짜로 검을 뽑아 들려는 행동에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호위를 포함해 신성국의 인원이 그렇게나 모였는데 검을 뽑는다고?'
그 광경에서 샬라나의 뇌리엔 '유리안'이란 남자가 어떤 인물인지 굳혀졌다.
'미친놈.'
그것도 평범하게 미친놈이 아니다.
검을 잘 쓰는 미친놈이다.
"호호호, 그래서 다른 예외는 뭔가요?"
"일단,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시죠. 이곳은 보는 눈이 많으니 말입니다."
유리안의 제안을 그녀는 거절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검으로 협박을 하는 미친놈이랑 따로 이야기하자고?'
미친개와는 협상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의 모토다. 그런 종속들이랑 상종해봤자, 자신만 피곤해지니.
'응?'
하나, 이다음 유리안이 허리춤에 매단 검집을 풀어 린네에게 건네주는 모습을 보자, 살짝 생각이 바뀌었다.
'아까는 경고로 사용하던 검을 이제는 자신이 무해하다는 것을 알릴 때 사용하다니.'
조금 전, 허리춤에 검을 가져간 이유는 이런 식의 연출을 하기 위함이었구나.
실로, 고풍스럽지만 정석적인 교섭 방식.
이렇게나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나름의 카드가 있으니 말문을 연 것이겠지.
"호호, 한 번 들어나 볼까요?"
아까 유리안이 검집에 손을 대던 때와는 달리 사뭇 부드러운 어투가 된 그녀는 그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도착한 곳은 투기장의 귀빈실.
"도청 마법은 없겠지요?"
유리안의 의심에 샬라나는 미소를 지었다.
"호호호, 당연한 소리를."
"다행입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할 생각이길래 그리 조심스럽게 구시나요? 본인의 신변이 걱정될 정도의 말인가 보죠?"
망명이라도 할 생각이냐?
그리 물으려고 했으나, 샬라나는 참았다.
성급히 먼저 자신의 의중을 꺼내 놓는 것은 하책 중 하책이니.
"저 때문이 아닌 샬라나 대신관을 위해서지요."
오만방자한 말투에 살짝 화가 났으나, 유리안이 먼저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다.
"아무도 안 듣는 게 대신관에게 좋은 이야기일 텐데, 저 둘은 그냥 놔두셔도 되겠습니까?"
유리안은 턱짓으로 샬라나와 함께 귀빈실로 따라 들어온 두 신관을 가리켰다.
"이 둘은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을 신관들이니까요."
"호위로군요. 하긴, 검이 없어도 제가 샬라나 대신관의 목을 꺾는 건 일도 아니니 말입니다."
신관이 아닌, 그녀의 호위라는 것을 바로 파악한 유리안의 어깨가 으쓱거렸다.
"호호, 무례에도 정도가 있답니다. 지금 당신의 처지를...."
"현재 성위청에서 밀반출된 성물 '새겨진 거짓'을 제가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부채로 하관을 가리고 있던 샬라나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호, 호호. 그런가요? 잘 되었네요. 지하에서 발견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까?"
"네, 당연하죠. 아무렴, 저희 신성국에서 관리하는 높은 금계의 성물이니까요."
자신의 진의(眞意)를 최대한 숨기기 위해 샬라나는 웃었다.
"그럼, 돌려주시겠어요?"
"당연히 돌려드려야지요."
"호호호, 말이 통해서 다행이에요."
"지금 당장은 저희 쪽에서도 처리할 것들이 있으니 내일 성위청에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샬라나는 당혹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어차피 재판의 증인으로 성도에 머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내일 돌려드려도 딱히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이 제게 주시면 될 텐데요. 호호호."
"대신관 샬라나."
유리안의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샬라나를 응시했다.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입가는 마치 그녀의 '노림수'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롯 대신관이 밀반출했다는 성물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흑위에게 회수를 명하셨더군요."
마치, 뱀이 자신의 몸을 휘감는 듯.
"신기합니다. 마치, 마법적인 수단으로 실시간으로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일까요?"
"과연, 정말 상관없으십니까?"
유리안의 느긋한 어투가 그녀를 옭매기 시작했다.
"성물, '새겨진 거짓'을 확보하기 위해 지금까지 가롯 대신관을 방관하신 것 아니십니까?"
아니라고 거짓말을 해도, 저 감정이 담기지 않는 실눈이 꿰뚫어 볼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가롯 대신관이 소란을 일으켰을 때, 그를 소탕하고, 몰래 성물을 회수하기 위해서."
애초에 이 이야기를 꺼낸 것 자체가 '확신'을 갖고 한 것일 테니까.
"성물은 소탕 과정에서 '파손'되었다. 성위청에는 그리 말하면 되겠지요."
유리안의 말이 거기까지 이어지자.
탁.
샬라나는 부채를 접었다.
유리안, 저 남자는 그녀의 계획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샬라나는 성위청에서 성물이 밀반출되는 것을 알고도 방관하고 있었다.
훗날 가롯 대신관이 성물을 사용하려들 때 그것을 소탕하고 몰래 회수해, 본인이 사용할 목적으로.
그녀의 예상대로 갸롯은 움직여줬고, 계획은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듯했다.
데몬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빌어먹을 검성이 만든 고독전에서 데몬이 날뛰는 바람에 박살 난 줄 알았는데.'
유리안이 가지고 있었다니, 다행이야.
내심 안도한 그녀는 속으로 웃었다.
"아까 당신이 말한 '예외'가 이걸 말하는 것이었군요?"
유리안의 고개가 끄덕인다.
그가 원하는 대로 교섭이 진행되는 것이 살짝 마음에 걸렸으나, 인제 와서는 상관없어진 그녀였다.
부서졌다고 생각했던 성물이 돌아왔다.
그것만으로 그녀는 만족했다.
"호호, 알겠어요. 그렇다면, 아까 했던 말은 없던 걸로 해도 될 것 같네요. 지금 당장 성도를 떠나셔도, 붙잡지 않겠습니다."
"이야기가 통해서 다행이군요."
"저야 말로요. 호호호호!"
촤르르르.
다시금, 부채를 펼친 그녀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아, 성물은 어디에?"
유리안은 품속에서 월계관을 꺼내 그것을 테이블에 올렸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그 월계관이 자신이 찾던 '새겨진 거짓'이란 것을 확인한 샬라나는 그것을 사용하여,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고 위치를 확고하게 할 생각을 하니.
'이제 곧....'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부채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가롯 대신관만 불쌍하게 되었군요. 밀반출뿐만이 아니라, 성물의 파손죄까지 물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멍청한 자가 요직에 앉으니 그런 꼴이 된 거랍니다."
"후후, 맞습니다."
유리안은 자리를 떠날 채비를 하기 위해서인지,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짧은 인사와 함께 유리안은 돌아섰다.
"호호호호."
"대신관님, 저자를 그냥 보내실 겁니까?"
"명령만 내리신다면, 당장 저놈을 제압하고 율시스 황자도 성도에 남아있을 수 있도록 수를 쓰겠습니다."
"아뇨, 그만두세요."
다른 신관들을 샬라나는 제지했다.
"확실히 제압할 수 있는 상대인지도 미지수고, 그 과정에서 소란이 일어나 '새겨진 거짓'이 멀쩡하다는 걸 들킨다면, 본말전도잖아요?"
"대신관님 하지만...."
"선택과 집중, 이 말을 명심하세요. 지금까지 가롯을 방치한 이유는 모두 이 성물을 위해서니까요."
테이블에 올려진 월계관을 손으로 매만진 그녀의 입에선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자, 돌아갈 채비를 하죠."
"해결되었나요?"
당당히 돌아가자는 말을 하는 내 모습에 린네는 살짝 당황한 듯 물어왔다.
"예, 말이 통하는 사람이더군요."
"...혹시, 아까처럼 무력으로 협박하셨나요?"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입니까?"
"아니라곤 할 수 없죠."
뭐,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나도 아니라곤 못 하겠다.
"대신관 샬라나가 원하는 걸 줬습니다. 이 소란을 일으키면서까지도, 손에 넣고 싶었던 것을 말입니다."
"그런 걸 어떻게 유리안 경이...?"
어떻게 하긴, 의식장에서 한바탕 싸우면서 슬쩍 가져왔지.
"그런데, 대신관을 물릴 정도의 물건이면...,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잖아요."
"그렇습니다."
어마어마한 가치라, 맞는 말이지.
하지만 욕심을 부리는 것 또한, 그리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난 품속에 숨겨둔 이델의 '혼석'을 한 번 살펴보았다.
급격스럽게 데몬화된 탓에 색은 탁하고, 그것에 담긴 힘도 보잘것없지만, 틀림없는 삼각의 혼석이다.
''새겨진 거짓'이란 성물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이번엔 이 혼석으로 충분하다.'
정야의 종도 얻었으니.
게다가.
'샬라나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지.'
'암시'를 통해 정적을 쉽게 제거할 수 있는 무서운 성물이 왜 '마신성'과 비슷한 금계에 들어서지 못했는지.
'그거 1회용이야.'
이미 지하에서 한 번 사용되었고.
100화. 너 요즘 건방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