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변덕(2)
난 내심 생각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여명회'를 집어삼키기 위한 발판으로 '아크 비숍'의 자리를 받아들이는 게 어떨까? 하고 말이다.
일단, '아크 비숍'이 된다면 여명회에 속해있는 귀족들을 수족 부리듯이 부릴 수는 있을 것이다.
테넬론의 위광을 뒤에 업고 있으니 약간 탐탁지 않아 하더라도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테지.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처음 생각했던 '북부 전선'으로의 전출도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 것이며, '여명회'에 속해있는 귀족들을 필두로, '원로회'의 입김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나름 괜찮을지도....'
...는 개뿔.
그런 식으로 내 영역을 늘리다 보면, '여명회'의 완벽한 중심으로 자리 잡을 것이고.
이윽고, 도가 지나친 '여명회'가 황실에게 정리당하면 '아크 비숍'으로서의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추후, 단두대에 올라간 나를 보며 사람들은 이리 말할 것이 뻔하다.
- '하하, 웃는 처형대가 처형대에 걸렸구나!'
으윽. 젠장!
상상력이 쓸데없는 곳에 발휘되는 바람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찌 되었든, 내가 '아크 비숍'으로 임명되는 것만큼은 막기 위해, 테넬론을 찾아갔다.
임명식이 진행된다면, 무르기도 힘들 테니 이런 일은 빨리 찾아가는 것이 상책이다.
- '아크 비숍의 임명은 거절하겠다. 다른 사람을 찾아라.'
이 생각을 털어놓기 위해, 난 테넬론을 찾았지만, 그의 반응은 의외였다.
"사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
알고 있었다라....
무슨 뜻으로 한 말이지?
승계식을 마치고, '총대주교'가 된 테넬론은 자신의 권위를 자랑하려는 속셈인지 화려한 튜닉을 입고 있었다.
"유리안, 자네가 여명회에 깊게 관여하지 않으려는 점 말이야."
의표를 찌르는 말.
그가 자기 입으로 직접 말했다.
내가 '여명회'를 중요시하지 않고 있다고 말이다.
"후후,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곳에 입단하기 전부터, 난 그런 뉘앙스를 풍겨 왔으니.
- '내게 중요한 건 힘이고, 바람은 검성의 타도다.'
그 덕에 새삼스럽지 않았다.
문제는 테넬론이 내가 '아크 비숍'의 직위를 거절할 것을 이미 예상했다는 것이다.
"그래, 그래서 정식적으로 아크 비숍을 임명하기 전에 이런 식으로 찾아올 줄도 알고 있었지.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군."
말을 하던 테넬론은 손으로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개인적으로 '여명회'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권력을 거절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어서 말이야."
가면을 벗은 덕에 선명하게 보이는 그의 눈동자엔 '의구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넬론의 머리 위로 <부정의 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힘을 원한다는 말과 달리, 뿔을 거절하고, 여명회의 권력도 거절하니 말이야."
짙은 회색, '의심'의 색이다.
그가 나에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 것이다.
후우, 여기서 발각되면 안 되는데....
애타는 내 마음도 모른 채,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목적 없이 여명회에 입단한 것이라면, 무엇을 위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일까. 난 그게 궁금하다네."
테넬론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지면서, 머리 위 회색은 점점 짙어졌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유리안, 자네가 내 생각과 달리 황실의 밀정으로 여명회에 왔다고밖에 생각이 되지 않는다네."
엄중한 공기와 그의 살벌한 눈빛이 나의 피부를 찔렀다.
늘 보여주던 모습이 아닌, '총대주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테넬론의 태도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매번 모든 것을 거절하는 내 태도와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제라르의 건으로 기분이 상한 모양이군.'
상한 기분 탓에 드러나는 분위기는 내 입에서 만족스러운 답이 나오지 않을 경우, 무언가의 조치를 취할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유리안이 총애받고 있다지만.
그래, 당연히 의심해야지.
거기까지 생각을 안 하고 이곳에 찾아온 것이 아니니까.
신임하던 제라르의 배신 아닌 배신에, 그것을 고자질하는 비숍들에게 실망했을 것이고.
그렇게 감정이 날카로워졌을 때야말로.
"테넬론 경, 실망이 큽니다."
이놈을 다스리기 좋은 타이밍이다.
"...실망?"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그게 왜 내 입에서 나오냐는 뉘앙스다.
"제가 권력을 마다한 이유, 그것은 제가 이 여명회에 입단한 '이유'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라...."
내 말에 테넬론은 잠깐 고민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쉽게 답을 내주어선 안 된다.
"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테넬론은 짧게 탄식을 흘렸다.
"검성..., 그가 제도를 떠난 탓인가?"
미끼를 물었군.
그의 물음에 난 내심 미소를 지었다.
"예, 그가 제도를 떠난 지금, 아크 비숍의 자리가 제게 주어진들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군, 그래서 아크 비숍의 자리를 거절한 것이었어."
테넬론은 가면을 벗더니 입을 히죽 찢었다.
상흔 탓에 끔찍한 모습이다.
"하하! 그래서 그런 것이었군!"
이제야 유리안의 태도를 이해하게 된 테넬론은 아주 호탕하게 웃어 젖히기 시작했다.
"그 비열한 검성과 끝맺음을 맺기 위함이로군!"
내가 '여명회'와 함께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검성'의 타도다.
그 '표면적인 이유'를 거론하며, '아크 비숍'의 자리를 거절하는 것이니 그도 납득할 터.
"테넬론 경께서 저를 총애하고 계시고, 다른 비숍의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다만, 제가 그 '자리'에 머물게 된다면 운신의 폭이 좁아질 것입니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아크비숍 자리는 여명회에서도 중요하기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었다.
그렇기에 테넬론도 제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고.
맞장구치는 그의 모습에 난 쐐기를 박는다.
"예, 맞습니다. 제도에는 저의 '목적'이 없으니, '목적'을 찾아 떠나는 것이...."
"그래, 그래야 인지상정이지!"
뭔 인지상정이냐. 무슨 포X몬도 아니고.
호들갑을 떠는 테넬론에게 따지듯 말하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언제 신성국으로 떠날 생각이지? 원한다면, 몬시뇰들을... 아니, 비숍들을 몇 데려가도 상관없다."
파격적인 제시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비숍'들을 차출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테넬론이 '비숍'을 데려가도 좋다 허락하다니.
"후후,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그의 차고 넘치는 배려는 거절했다.
그것은 나에겐 감시나 다름없으니.
테넬론을 설득하기 위해 말을 번지르르하게 했으나, 당장 '신성국'으로 향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아크 비숍'의 자리를 거절할 명분이 필요했을 뿐.
"내가 유리안, 자네의 자존심을 긁는 소리를 했군. 대업을 이루는 데 타인의 도움은 필요 없는데 말이야."
"별말씀을. 그저 테넬론 경의 배려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이대로, '유리안'스러운 연기를 몇 번 해주고 아크 비숍의 자리를 거부하면 되겠지.
난 짧게 웃음을 흘렸다.
내 생각대로 테넬론이 반응을 해주니, 이보다 다행일 수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군."
됐다고! 이 끈질긴 양반.
불쑥 나온 테넬론의 말에 난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의기양양한 그의 목소리를 듣자니, 어쩐지 불안한 기색이 엄습했으나, 최대한 티를 내지 않도록 자제했다.
"괜찮습니다.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아니, 내가 부디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주게"
필요 없다고! 왜 이렇게 질척거려?
내 마음도 모른 채, 테넬론은 이것저것 생각하다, 이내 뭔가 떠오른 듯 눈빛을 반짝인다.
"그럼 내가, 자네가 아무런 의심 없이 신성국 페레난드로 향할 수 있도록 손을 써주도록 하겠네."
뭐? 왜...,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나는 속으로 테넬론의 말에 반문했지만.
"후후, 그러실 필요는...."
"거절하지 말게."
덥석.
자리에서 일어난 테넬론은 나의 손을 잡았다. 우악스러운 손의 감촉이 타고 전해지자, 약간 소름이 끼쳤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는 '마기'가 살짝 흘러나온다.
"검성을 죽이는 건, 유리안, 네 개인의 염원이기도 하지만 나의 염원이기도 하다. 그러니, 거절하지 말거라."
아니, 아직 그럴 생각이 없다니까!?
"난 말이지. 사실 이번 아크 비숍으로 유리안, 너를 임명하고 지켜볼 생각이었다."
모든 의심이 풀려, 기분이 좋아졌는지 테넬론의 말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후계자'로 네가 적합한지 말이야."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아크 비숍'의 자리를 거절하러 왔더니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단 말을 듣다니.
"테넬론 경, 죄송하지만 전 누군가의 뒤를 이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 그리 말할 줄 알았지. 그렇기에 자네가 내 후계자로 적합한 거야."
턱 밑까지 '네가 미쳤구나'라는 말이 치고 올라왔다.
"권력에 욕심이 없는 자야말로,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지."
"다른 비숍들은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일부러 약간의 조소가 담긴 웃음과 함께 말을 잇자 테넬론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당연히 내 비숍들은 믿고 있지. 하지만 그보다 더 너를 믿는 것이고."
그리 말한 테넬론에게서 옅게 서린 웃음이 보였다.
"...알겠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주었다.
이곳에서 테넬론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하는 녀석이었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군.'
'의심'을 상징하는 회색의 아지랑이가 여전히 테넬론의 머리 위에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어울려줘야겠지.'
녀석이 나를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자, 긴장으로 터질 것 같던 심장은 도리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이번만큼은 저도 테넬론 경의 부탁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나도 이 녀석을 이용하면 되니까.
***
현재 신성국 페레난드와 아드라탄 제국의 사이는, 우스갯소리로도 '좋다'고 말할 수 없는 관계이다.
오랜 기간, 진행된 전쟁은 '휴전'이라는 형태로 종료되기는 했으나 서로에게 쌓인 앙금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감은 눈'인 유리안이 신성국으로 향한다면,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황이 연출될 터지만.
'그건 테넬론이 알아서 하겠지.'
자신이 있다는 식으로 말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녀석이 이제 의심하고 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테넬론의 머리 위에 있던 <부정의 색>.
웃는 척을 하며, 감언이설로 나를 속이려고 한 녀석의 태도는 지금까지는 없었던 일이니.
'슬슬, 때가 되었나 보군.'
본격적으로 여명회를 갈아엎을 때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난 허리춤에 있는 월장검의 검집을 슬쩍 어루만졌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내가 지나던 길의 앞뒤로, 거뭇한 인영들이 튀어나왔다.
"겁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군요."
겐멜 수도원에서 나온 후, 계속해서 미행하던 괴한들.
이 녀석들이 '제라르'와 연관이 있는 놈들이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다.
조금 전, 나에게서 팔이 부러진 교단원이 저 무리에 끼어있으니 말이다.
"이젠 여명회의 일원도 아닌 쓰레기를 위해 그리 나서다니, 충성심이 대단합니다."
"제라르 경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철컥──!
앞과 뒤를 막은 교단원들은 일제히 자신의 무장을 꺼내 들었다.
어두운 밤 길이건만, 그들의 무기가 서슬 퍼렇게 빛났다.
"네놈의 존재가 우리 여명회의 근간을 위협하고 있다."
"고작해야, 비숍 둘이 자리를 잃은 것뿐입니다."
에이든과 제라르.
에이든의 경우, '비숍'의 자리를 잃은 건 아니지만, 그가 여명회 내부에서 발언권을 잃은 것은 자명했다.
제라르는 말할 것도 없고.
"그분들은 너와 달리 여명회 안과 밖으로 강한 영향력을 가진 분들이다. 너 같은 인면수심의 쓰레기가 우리 여명회의 내부를 더럽히는 일은 더 이상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와우! 이미 더럽다 못해 구역질이 나는 여명회의 내부를 이렇게나 보존하려는 사람이 있다니....
이들의 확고한 신념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말이 통하지는 않겠군.'
그리 생각하며, 난 검집에서 월장검을 뽑아 들려는 순간.
파밧──!
"크, 크아아아악!"
허공에서 갑자기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고, 동시에 뒤를 막던 교단원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누군가가 마법을 사용하려는 것은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것을 막아내려고 월장검을 꺼내려고 했거늘.
'...내가 아니었네?'
의아함을 느끼던 찰나, 마나의 흐름이 느껴진 허공에서 사람이 내려앉았다.
익숙한 얼굴이다.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말이 안 나왔다.
"피, 핀텔 경...! 어째서 저희를 막으시는 겁니까!?"
"닥쳐라!!"
비굴한 어투로 입을 여는 교단원을 향해, 핀텔의 일갈이 쏟아졌다.
지금까지 본 모습 중, 가장 분노에 찬 모습이었기에 난 당혹감이 들었다.
'너... 왜 그래?'
81화. 외통수(1)
활화산과도 같은 일갈에 조용한 새벽이 한바탕 소란스러워졌으나, 주변은 이내 조용해졌다.
상황을 그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핀텔.
그와 그렇게 깊은 교류를 해본 적은 없으나, 이자가 이토록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테넬론의 알현실에서도 이러진 않았는데 말이야.'
난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가 이렇게도 분노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기에 말이다.
하나, 그 이유를 알아채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감히 유리안 경에게 검을 들이밀다니, 이 무슨 불경한 짓이냐!"
...너 갑자기 왜 그래?
불경한 짓은 네가 하는 거 같은데.
저번에 봤을 때부터, 이상한 기류가 감돌기 시작하더니..., 아주 점입가경이다.
"하지만, 그는... 저희 교단의 본질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핀텔 경! 그를 내버려 둔다면, 더욱 큰 불상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나에게 이야기하던 것과는 달리 예의를 차린 교단원의 말투.
흠흠. 나도 같은 비숍인데, 온도 차이가 너무 심하군.
"네가 말한 불상사가 무엇이냐."
"...예?"
"무엇이냔 말이다. 그 불상사가!"
"다, 다른 비숍분들의 존속에 위협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당치도 않군!"
콧방귀를 뀌며, 교단원의 말을 반박한 핀텔은 날카롭게 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몬시뇰인 네놈 따위가 비숍의 걱정을 한단 말이냐?"
"그, 그건...."
"어디, 이런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지 보자."
그리 말하며, 핀텔의 몸에 마나가 일렁거리기 시작한다.
'마나 민감도'가 높은 난 핀텔이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파사삭──!
그에게 손을 들어 올린 핀텔은 자신의 장기인 '비수 마법'을 발현했다.
"...윽."
녀석에게 날아간 그것은 강대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지만, 그 마법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픽.
교단원의 뺨을 스쳐 지나간 마법.
그 탓에 그의 얼굴에 피가 한 방울, 한 방울 흘러내렸다.
"지금 이 마법이 숨통을 노리는 것을 네놈은 느꼈나?"
"...아닙니다."
"그렇다면, 보았나?"
핀텔의 일갈에 교단원은 입을 꾹 닫았다.
'마나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다면, 핀텔의 '비수 마법'은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정교하며, 조용하다.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 태반.
"네놈이 느끼지도, 보지도, 피하지도 못할 이 마법을 유리안 경께선 이미 예측하고 계셨다!"
그런 말을 하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핀텔의 눈동자엔 무한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 말이 맞기는 하지만.'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하다니....
자기 마법이 다른 사람에게 간파당했다는 건 '쓰레기'라고 자신하는 꼴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유리안 경께선 다른 비숍들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계신다. '감은 눈'의 실질적인 주인이시자, 크라이파트 가문의 혈통이신...."
"저놈은 방계 출신입니다! 핀텔 경! 그래서, '프라손'이란 딱지가 붙은...."
파삭──!
말을 잇던 교단원의 목 옆으로 다시금 날카로운 '비수 마법'이 지나갔다.
"다시 한번 지껄여 봐라."
"...죄송합니다."
조금 전보다 예리한 눈으로 핀텔이 쏘아보자 교단원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이내 고개를 숙인다.
"썩 꺼져라. 저기 쓰러진 쓰레기들과 함께 말이다."
핀텔은 표독스럽게 말하며, 처음 '비수 마법'을 사용했을 때 쓰러진 녀석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나와 핀텔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교단원은 쓰러진 인원들을 데리고 사라진다.
"...."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으나, 그것을 깨부순 것은 내 헛기침이었다.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감사합니다, 핀텔 경."
살며시 고개를 숙인 내 모습에 핀텔은 어깨가 살짝 움찔했다.
"다, 당치도 않습니다! 유리안 경께선 아크 비숍이 될 분, 저런 말단들과 섞일, 하등의 이유도 없으십니다!"
"음."
분에 겨운 듯, 흥분한 핀텔의 말에 난 짧게 탄식을 흘렸다.
이 녀석..., 나한테 이런 식으로 잘 보이는 이유가 내 '라인'을 타기 위해서....
곧 '아크 비숍'이 될 내 편에 서서 꿀을 빨려는 속셈이다.
...미안하지만, 난 아크 비숍에 관심이 없단다.
"핀텔 경께선 오해를 하시는 모양입니다."
"제가 말입니까?"
"예."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녀석은 의아한 듯 물어온다.
"대체 무엇을...?"
"저는 '아크 비숍'의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
침음을 흘리는 핀텔의 얼굴이 와장창 구겨졌다.
이제 이해한 것이겠지.
지금까지 내게 한 아첨이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어, 어째서입니까! 유리안 경!?"
아크 비숍의 자리를 거부했다는 내 말에 핀텔의 얼굴엔 당혹이 깃들었다.
"딱히 뜻이 있던 것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 그게 거절할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크 비숍이 되면...."
많이 당황한 모양이다.
아크 비숍이 되면 좋은 점과 권력에 대해 나불거리고 있으나.
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불과 몇 초 전까지 신념까지 느껴지던 목소리는 바람을 맞는 갈대처럼, 크게 흔들렸다.
"유리안 경께서 권력을 쥐시면, 아까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 뜻이 없습니다."
"그, 그렇다고 해도 자리에 앉으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아크 비숍'의 자리를 거절했다고 말하면, 평소의 핀텔처럼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일 것으로 예측했거늘.
녀석은 오히려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모든 것을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명회와 더욱 깊게 엮이기 싫다.
'난 여명회를 처단하러 온 사람이지, 부흥시키러 온 사람이 아니다.'
...그런 말을 어떻게 '여명회'의 비숍에게 할 수 있겠는가.
"제 뜻은 더욱 높은 곳에 있습니다. 핀텔 경."
그렇다고, 녀석을 설득할 이유도 없던 난 평소처럼 둘러대고 넘어가기로 결심했다.
"아크 비숍보다 높은 곳...."
"예, 그러니 괜한 간섭은 자제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럴 때, '유리안'의 얼굴은 참으로 도움이 된다.
두루뭉술한 말도 이 '실눈의 악역'의 얼굴을 빌린다면 의미심장한 것이 돼 버리니 말이다.
"그, 그런 말씀을 저에게 하셔도 되는 겁니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태도로 핀텔이 물었다.
...안 될 것이 있나?
"그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뭡니까?"
난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을 본 핀텔은 두 눈을 질끈 감더니, 이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저 핀텔 오브라딘. 유리안 경의 말씀을 무덤까지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응? 잠깐 이 녀석 뭔가 오해를....
에휴, 뭐 될 대로 되라지.
내 말에 무슨 의미를 부여했는지 모르겠으나, 핀텔은 주먹을 불끈 쥐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해할 수 없는 놈이군.'
아무래도 작품 초반에 사라지는 조연 중의 조연이다 보니, 녀석의 성격을 종잡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성격은 위험하지.'
혼자 무슨 생각을 할지, 어떤 행동을 할지 감이 잡히지 않으니 말이다.
특히, '핀텔'같이 스토리에 지장을 주지 않던 녀석은 더욱 그렇다.
'별 수 있나.'
핀텔 같은 케이스를 최대한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
"이번에 '감은 눈'에 새롭게 입단한 페른 크라니쉬 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은 눈'의 병영, 대원들을 모아두고 신입 환영식을 하던 도중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전에 공명석의 보수 임무를 함께 했던 '청사자 기사단'의 단원, 페른이 '감은 눈'에 대원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페른은 무려, 청사자 기사단의 소속이었던 분입니다."
마침 단장인 오드윈도 그 부분을 짚고 넘어갔다.
'청사자'라는 이름이 나오자, 다른 '감은 눈'의 대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기사단이란 집단은 일반적으로 '감은 눈'이란 황실 직속 기관을 싫어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표현을 왕성히 하는 기사단이 바로, 페른의 '청사자 기사단'이다.
"전(前) 청사자 기사단이 왜 '감은 눈'에 입단했는지, 다들 의아스러운 눈치로군요."
마침, 모두의 의문을 해소해주려는 듯 오드윈이 입을 열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해맑게 웃는 오드윈의 모습.
...알려주려고 한 것이 아니었나?
"굳이 기사단을 두고, '감은 눈'을 택할 이유가 있나요?"
오드윈은 오히려 대놓고 페른에게 질문하자.
"예! 기사단보다는 이곳이 저를 갈고 닦기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전(前) 기사단 출신답게 페른의 목소리엔 기합이 실려있었다.
"이해할 수 없네요. 그 생각이라면, 기사단에 머무는 게 훨씬 좋았을 것 같은데."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도대체 왜 온 거야?
오드윈이 내 생각을 대변하듯 말했지만, 페른은 대답 대신, 멋쩍은 웃음을 보일 뿐이다.
"뭔가..., 귀찮은 짐을 떠안은 느낌입니다."
나 혼자 중얼거리자, 어김없이 나오는 존댓말이다.
***
"제가 들겠습니다, 유리안 경!"
잠시 단장실에 들려 공문을 내려받은 난 그것을 집무실로 옮기던 도중이었다.
페른이 쏜살같이 내게 다가오더니, 들고 있는 걸 달라며 양손을 내밀었다.
거절할 이유도 없는 난 그에게 서류 더미를 넘겨주었다.
"그게 끝나면, 집무실에 있는 난초에 물을 주시겠습니까? 물뿌리개에 적당량 담겨 있으니, 그걸 나눠서 주면 될 겁니다."
잡무까지 하나 더 얹어서.
'청사자 기사단'이라면, 기사단 중에서도 네임밸류가 확실한 집단이다.
그에 비해, '감은 눈'은 황실 전속 기관이라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실속이 없는 집단이다.
오롯이 '유리안'이라는 미치광이.... 아니, 한 명의 집행자만을 위한 기관이라 봐도 무방하다.
다른 대원들도 어느 정도 실력은 있으나, 솔직히 기사단원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이다.
그러니, 페른의 행동에 의구심이 든 것이다.
대체 여기에 들어온 이유가 뭔지....
"예, 알겠습니다!"
페른은 여전히 기합이 실린 대답과 함께 내 집무실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통해 <부정의 색>을 확인해보았지만, 아무런 감정을 엿볼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시키는 일에 열중하겠다는 의미.
"청사자 기사단의 단원이 무슨 이유로...."
마찬가지로 단장실에서 나온 라즈롯이 나와 비슷한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그는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아직도 견습인데...."
후임이 언제 들어오게 될지, 넋두리하는 라즈롯이다.
***
테넬론과 만나고 난 뒤, 계속해서 들던 의문 중 하나, 신성국 페레난드에 입국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한 방법에 대해서다.
신성국의 교황청도 바보는 아니다.
제국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 입국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할 터.
'대체 어떤 방식을 하려는 건지.'
그런 생각을 하며, 페른이 옮겨둔 공문을 살펴보자 내 입에선 탄식이 흘러나왔다.
[제 4황자, 율시스 르노 아드라탄의 외교단 호위대장 선발 명단.]
...이거였나.
4황자, 율시스, 외교단 등의 단어를 보자,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제국과 신성국 사이에 쌓인 앙금, 그것을 풀기 위한 제 4황자 율시스의 첫걸음.
'데몬'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인류'는 힘을 합쳐야 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기는 개뿔.
사실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닌, 황위 계승권과 거리가 먼 율시스가 자기 안위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
앙금이 있다고는 하지만, 황실 내부에도 신성국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말은 주기적으로 나오고 있으니.
그런 세력들을 자기 산하로 끌어들이기 위한 퍼포먼스 말이다.
'그럼, 제 4황자가 화평을 위해 신성국으로 출발하면 거기에 호위대로 따라붙는 건가.'
예상대로 '호위대장'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다.
직접 신청하지 않았으나, 이렇게 등재된 것을 보아하니, '여명회'가 손을 써둔 모양이다.
최종 명단에는 나를 포함해 셋의 이름이 보였다.
'감은 눈'의 유리안.
'청사자 기사단'의 단장, 슈바르트.
황실 직속 마법사, '순백'의 제자인 아니에스.
'어차피 테넬론의 입김이 들어간 것이라면, 최종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갈 것이 자명하지.'
그 탓에 난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괜히 설레발을 쳤어.'
그에게서 한 말이 괜스레 후회스러워졌다.
그냥 적당히 둘러댈 걸, 괜히 신성국은 들먹거려서는....
수지타산이 안 맞으니, 가는 김에 다른 것들을 챙겨보기로 한다.
예를 들어 '성유물' 같은 거 말이다.
82화. 외통수(2)
[제 4왕자, 율시스 르노 아드라탄께서 신성국과의 화평을 위해 외교단을 결성하신다!]
지금 황실은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떠들썩한 상태다.
- '저희는 데몬이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들이 멸절을 위해서라도 저희는 신성국 페레난드와 화평을 해야만 합니다!'
고귀한 제 4황자, 율시스의 취지는 이러했다.
'인류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과거의 앙금을 씻어내고, 데몬에 맞서야 한다고.'
물론 그의 치기 어린 행동을 본 귀족들과 원로회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는구만.']
['어쩌겠나? 계승권과 거리가 먼 4황자님께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위험할 테니 말이야.']
['황실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나? 휴전 중이긴 하지만, 엄연히 적국에 외교를 가는 것인데 말이야.']
['알잖나, 아드라탄 황제께선 이런 일에 무관심하시다는 걸.']
평범한 일반 귀족이나 다른 이들이 그리 말했다면, 황실모독죄로 당장이라도 목이 땅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율시스 4황자는 자신의 '황자'라는 직위를 내걸고 자행한 것이다.
오히려 귀족들과 황족의 반응을 극한으로 치달아, 연민을 느끼게 하여 자신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하기 위한 상황을 만든 것.
['이런 불경한 말을 담기엔 뭐하지만, 4황자로 태어난 게 죄구먼.']
['황녀님들도 합쳐서 위로 7명이 있으니 말이야. 태어났을 때 운명이 정해진 것과 마찬가지지.']
['피에 맞지 않는 운명이야.']
['하하,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가?']
그렇기에, 이번 '화평'을 주위에선 그가 살아남기 위한 정치적 쇼라 생각하며 조소를 입에 담았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
그 드높은 피의 성질 탓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에 말이다.
[제 4왕자, 율시스 외교단의 호위대장.]
['감은 눈'의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이 유력.]
하나, 그 조소는 그를 호위하는 '대장'이 정해지자, 연민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호위대를 이끄는 대장으로서 기사단도 아닌, '감은 눈'의 유리안으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미, 미친 것인가?']
['아무리 그가 강하다고는 하나, 어울리지 않아!']
['가는 내내, 목숨을 위협을 받겠구먼.']
그의 악명은 제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웃는 처형대.
황실의 미친개.
고귀한 피를 죽이는 검.
검술은 일품이나, 타고난 품성은 천한 인간.
황자의 호위대 대장, 그것도 '화평'을 위해 '신성국'으로 가기엔 어울리지 않다는 말이 황실 내부에서 흘러나왔다.
['설마, 다른 황자분들께서 손을 쓰신 것 일지도....']
['정말 그런 걸지도 몰라....']
그래서인지, 나중엔 이런 소문도 제도에 떠들썩했다.
제 4황자, 율시스를 먼저 처분하기 위해 '유리안'이 호위대장으로 배치된 것이다.
공문을 읽은 귀족들은 모여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불쌍한 율시스 님...."
"아무리 힘이 없어도 그렇지! 그 인면수심의 악마를 호위대장으로 임명하는 게 말이 된단 말이냐!?"
"청사자 기사단의 단장인 슈바르트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그 당연함 속에서 새로움이 깃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 유리안 경은 그리 구설수에 오를 법한 일을 일으키지 않았다네."
"음, 의외로 별 탈이 없을지도 모르지."
근래 유리안의 행보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
오히려, 몇몇 데몬을 처리하여 그의 악명보다 위명이 조금이나마 더 높았다.
그로 인해 그동안 그가 쌓아온 안 좋은 경력은 '황실'이라는 방패로 막을 수 있던 것이고.
황실 명에 따르는 것은 귀족이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
***
[...이와 같은 사항으로 황실 전속 기관, 감은 눈 소속의 유리안을 제 4황자, 율시스 외교단의 호위대장으로 임명합니다.]
비서실에서 내려온 공문을 읽은 난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류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렇게나 빨리 된다고?'
여명회에서 손을 쓸 테니, 내가 될 것은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렇게나 빨리 발표될 줄이야.
미리 내정이라도 하고 있었나?
"대단해요. 계승권과는 거리가 먼 분이시긴 하지만, 황족 호위대의 대장을 우리 '감은 눈'에서 맡게 될 줄이야."
공문을 비서실로부터 받아온 오드윈은 기분 좋다고 말하는 대사임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달아오른 것을 느꼈다.
작은 흥분, 열띤 감정.
실제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의 머리 위에서 밝은색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듯했다.
딱딱한 오드윈은 딱히 '감은 눈'이란 단체에 정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의외군.
"꽤나 기뻐 보이는군요. '감은 눈'에 그리 연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싫어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네요."
하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표면상의 단장이라고는 하지만, 나름 마음에 드는 곳이니까요."
"그러면 다행이군요."
"마치 비꼬는 것처럼 들리네요?"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후후."
정말이다. 그녀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편한지..., 다른 이들은 모를 거다.
"그런데, 유리안 경. 언제 외교단의 호위대에 신청하셨나요? 전 금시초문인데 말이에요."
...나도 직접 신청한 적은 없다.
여명회가, 정확히는 테넬론이 '검성'과 연관을 지으며 제멋대로 행동을 한 것이다.
그렇다고 '여명회가', '아크 비숍인 테넬론이.', 뭐 이런 말 하다간 아무리 내가 유리안이라고 해도 당장 체포되어 죽을 것이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뭐, 당신이 제게 뭘 말하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요."
늘 보던 것처럼 평범한 말투로 오드윈은 이야기했다.
단장과 일개 단원. 위계질서가 충분히 어긋난 상태임에도 익숙하다는 듯 개의치 않아 했다.
이러니 오드윈이 편하다고 느껴질 수밖에.
***
호위대장 임명 건으로 황실이 떠들썩할 무렵, 내게는 걱정이 하나 있었다.
'말을 한 번도 안 섞은 것 같은데.'
그건 바로, 신성국 페레난드로 향할 때까지 호위할 대상인 제 4황자, 율시스와 말도 한 번 섞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외형은 알고 있다. 나름 황실 스토리의 조연으로서 활약을 한 캐릭터다 보니 말이다.
"유리안 경, 소식 들었습니다!"
단장실에서 집무실로 돌아가던 도중, 페른이 다가와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며 인사를 했다.
"이번 제 4황자 님의 호위대장으로 선발되신 것 말입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축하할 것까지야....
내가 신청한 것도 아닌데 말이지.
그래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성유물인 '정야의 종'을 회수하러 간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후후, 감사합니다. 페른 경."
"청사자 기사단의 단장이신 슈바르트 경도 대단한 기사거늘, 그런 단장님을 누르고 호위대장으로 임명된 건 비서실에서도 유리안 경의 위업을 높이 평가하신 것이겠죠!"
아니야. 그냥 뒤에서 누군가 무슨 일이 꾸몄을 뿐이야.
"페른 경."
"예!"
내가 호명하자, 페른은 군기가 잡힌 대답과 함께 양발을 착 붙였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군더더기 없는 제식은 절제된 기사의 그것이었으며, 완벽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에게 물어볼까, 내심 고민하게 된다.
'왜 청사자 기사단이 아닌, 감은 눈으로 왔느냐고.'
이전에 봤을 땐, '감은 눈'이라면 치를 떨던 그가 이적한 이유가 궁금하다.
그것이 악의적인 거라면, 이쪽도 귀찮아질 테니 말이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예! 유리안 경이 묻는 것이라면, 뭐든 대답하겠습니다!"
그런데, 저리 반응하니 물어보는 게 힘들다.
저 반응은 마치 나를 존경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훗,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도 바보는 아니다.
이 '유리안'이라는 인물에게 존경심을 품는다면, 그건 그 사람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는 증거다.
솔직히 생각해 봐라.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사람을 웃는 얼굴로 썰어대며 어린아이도 서슴없이 죽이는 인면수심의 미친놈.
늘 웃는 얼굴로 말을 걸며, 말투는 누구나 존대하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 상대방을 업신여기는 정신병자!
'이런 녀석을 어떻게 좋아해!'
평소 좋은 모습을 보이던 '라즈롯'도 결국, 끄나풀 노릇을 하기 위한 위장이 아니었는가?
'분명 의도가 있어.'
그리 생각할 수밖에.
"페른 경, 혹여나 좋지 않은 생각을 품고 황실 전속...."
쾅──!
귀를 때리는 굉음.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니, 입구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곰 같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안은 어디 있나?"
그 등장과는 달리 조용한 목소리로 남자는 나를 찾았다.
그러더니,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남자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거기 있었나?"
눈이 마주치자, 살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의 남자가 다가왔다.
'슈바르트.'
청사자 기사단의 단장.
저 송장처럼 차가운 얼굴과는 달리 '노력'을 중시하는 괴상한 놈.
최근에 읽었던 전문지, '더 나이츠' 대문짝에 실려있던 '노오오력' 관련 기사를 실은 장본인이다.
'실제로 보니, 꽤나 날카로운 인상이군.'
청사자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만큼, 실력이 보증된 기사다.
무려, 이각(二角)의 뿔을 맨손으로 부러뜨렸다는 설정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슈, 슈바르트 경! 여기는 무슨 일로...."
전(前) 기사단의 단장이 얼굴을 비치자, 페른은 당황했다.
그런 페른을 보며, 슈바르트는 혀를 한 번 차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천한 것, 누가 말을 걸어도 좋다고 했지?"
같은 기사단 출신이었음에도, 슈바르트는 비수와 같은 말투로 표독스럽게 페른을 쏘아붙였다.
"죄, 죄송합니다."
"그래, 당연히 죄송해야지."
자신의 옷깃을 매만지며, 슈바르트는 다시금 페른에게 시선을 옮겼다.
"네놈이 '감은 눈'으로 이적을 하는 바람에 기사단의 얼굴에 먹칠했으니 말이야."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본 페른은 몸을 흠칫했다.
무감하면서, 아집과 경멸이 가득한 그의 눈빛.
"몰락 귀족 따위가...."
"몰락한 귀족이면 어떻습니까?"
그런 둘의 사이에 내가 끼어들자, 무뚝뚝했던 슈바르트의 얼굴에 불쾌함이 깃들었다.
그것도 찰나, 슈바르트의 얼굴은 평소와 같은 얼음장으로 변했다.
"몰락 귀족은 제국의 규율을 어겨 신분이 격하된 자들을 의미한다. 일반 신민들보다 그 격이 떨어지는 자들이지."
"그 말은 즉, 저희 '감은 눈'의 단장이신 오드윈 경을 욕하시는 것 같군요."
오드윈 또한 몰락 귀족.
조금 전, 슈바르트의 말은 페른뿐만이 아니라, 단장인 오드윈까지도 모욕한 셈이다.
딱히, 그녀를 옹호할 생각은 아니다.
그냥, 남의 직장에 찾아와 무례한 행위를 한 슈바르트를 면박 주기 위함이다.
"그걸 굳이 내 입을 빌려 말할 필요가 있나?"
뻔뻔하기도 하지.
"너도 마찬가지다. 크라이파트 가문의 프라손."
왜 저렇게 입을 놀리는지 모르겠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무슨 의도로 이곳에 왔는지 대강 눈치를 챘으나, 그렇다고 하기엔 슈바르트의 오만함은 그 도를 넘어서 오히려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호위대장으로 선발되지 못한 것에 반감 가져서 온 것 아니냐고.'
아니 막말로 그 선발에 내 의지가 적용된 것도 아니고, 여명회의 입김이 있다고는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비서실에서 뽑은 것일 텐데.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꼬장 부리는 이유가 뭐냐?
검성한테는 껌뻑 죽는 빌어먹을 놈 같으니.
그러나 '유리안'이라면 이렇게 얘기하겠지.
"후후, 그렇게 깔보셔도 되겠습니까?"
"깔보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그렇다면 그 천한 '프라손'에게 경쟁에서 밀린 자는 뭐라고 해야 할지, 혹시 아십니까?"
그렇게 말하며, 난 이번 외교단 호위대장 임명 공문을 슈바르트에게 보여주었다.
"모르신다면, 한 번 정해봅시다."
"이 쓰레기가...."
"쓰레기라... 선발에서 밀렸을 뿐인데, 쓰레기란 명칭은 좀 과하군요. '버러지'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비꼬는 듯한 말투에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슈바르트의 얼굴에 살짝 균열이 생겼다.
이 정도 비아냥은 이제 '연기'라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83화. 불협화음(1)
급속도로 식어가는 분위기 속에서 페른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감은 눈'의 전신(全身)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으며, 웃는 처형대라는 악명을 지닌 검사 유리안.
그런 그에게 살기를 뿌리고 있는 청사자 기사단의 단장이자, 청염(靑炎)이라는 별명의 슈바르트.
황실의 기라성(綺羅星) 중 두 명이 이렇게 대치하고 있는 모습은 그리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었으니 말이다.
'슈바르트 경....'
대부분 기사는 황실 전속 기관인 '감은 눈'을 좋아하지 않는다.
같은 업무를 수행하면서, 직급도 낮은 이들이 감히 '황실 전속'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이 심히 불편한 것이다.
그것은 청사자 기사단도 마찬가지다.
"딱히 율시스 황자님의 호위에 연연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슈바르트가 하는 말은 짐작과는 사뭇 달랐다.
호위 때문이 아니면, 그럼 왜 온 거야?
난 고개를 갸웃하는..., 아니 곳곳이 고개를 세우며 '할 말 해 봐'라는 태도를 보였다.
"하나, 너 같은 놈에게 심사에서 밀렸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대체 무슨 수를 부린 거지?"
"다 제 능력 아니겠습니까? 자기 능력이 부족한 것을 왜 저에게 와서 따지시는지...."
"웃기지 마라! 네놈, '감은 눈'이 비서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건 일개 기사단원들도 아는 사실이다."
"후후, 그렇습니까?"
낮게 조소를 품는 유리안을 보며, 페른은 슈바르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무뚝뚝한 얼굴이었으나, 표독스러운 눈빛은 비수와 같았다.
'...사실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없는 게 아니다.'
저런 식으로 대놓고 표출하지는 않았으나, 페른도 의아한 구석이 있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심사가 마치 '내정'되어있는 것처럼, 빨리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분명 수면 아래에서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이 중요한 심사가 이토록 빨리 끝날 리 없다."
슈바르트도 그 점이 이상했는지 짚고 넘어갔다.
청사자 기사단의 단장인 슈바르트는 유리안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명성을 쌓아 올렸다.
비록 그것이 대부분 데몬 토벌과 국경 수비에 관련된 일이지만.
한 기사단을 맡은 단장으로서, 직접 검을 맞대어 본 적은 없지만, 자신이 유리안에 비해 모자란 것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실력도, 출신도, 명예도 말이다.
그렇기에 본인은 '유리안'과 비교되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그는 드러난 결과에 승복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의구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니.
"너무 편향적인 생각을 가지셨군요. 제가 그런 것이라는 증거라도 있으십니까?"
"없다."
"그렇다면, 조용히 넘어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럴 순 없다! 감히 천한 방계...."
"후후, 청사자 기사단의 전(前) 부단장도 그런 말을 했었지요."
쩔그덕―
자연스럽게 검집을 만지는 유리안의 모습에.
움찔.
슈바르트는 저도 모르게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
청사자 기사단의 전 부단장, '알파스'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슈바르트가 모를 수 없었다.
바이엘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소란 탓에 한바탕 황실이 떠들썩했으니.
"지금 나에게 경고한 거냐? 알파스의 꼴이 되기 싫으면, 입을 닥치라며 말이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감히 제국의 청사자 기사단장님을 앞에 두고요."
미소를 입에 담으며, 능청을 부리는 유리안의 태도에 슈바르트의 두 눈은 날카로워졌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불과 같은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난 것에 대해 속죄하는 것처럼.
청염(靑炎).
그 이명에 걸맞게 푸른 불꽃과 같은 오라다.
그러는 와중에도, 유리안의 입가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고, 완만하게 휜,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그의 실눈은 여전했다.
'설마, 이걸 노리시는 건가?'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이 상황이 마치 유리안이 계획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미친개라고 할지언정, 황실 내부에서 전투를 벌일 만큼 유리안은 멍청이가 아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명분'이 있다면 이곳에서 칼부림을 부려도 비서실에선 죄를 묻지 않을 터.
'이걸 어찌해야....'
그 탓에 페른의 얼굴엔 난색이 깃들었다.
전(前)이기는 하나, 청사자 기사단원으로서 슈바르트와 유리안이 싸우는 것을 그는 원하지 않았다.
그들의 '죄'를 묻지 않을 뿐, 이곳에서 벌어진 일에는 그들은 '책임'을 물어야 한다.
황실에서의 전투는 곧 황족의 이름에 대한 도전과도 같은 것이니 말이다.
'유리안 경께서도 멈출 생각은 없어 보인다....'
페른이 청사자 기사단에서 '감은 눈'으로 온 이유는 저 유리안이 가진 '강함'을 어떻게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보기 위해서다.
우선 하나는 찾은 듯하다.
그 '강함'의 비결 중 하나가 바로, 전투를 피하지 않는 저 호전성이라고.
***
...이놈이 미쳤나.
기세등등하게 살기를 뿜으며, 오라를 표출하는 슈바르트를 보며 난 속으로 혀를 찼다.
알파스를 굳이 언급한 이유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비록, 불의(不義)를 저지른 탓에 기사단에서 쫓겨난 그였으나 부단장의 자리까지 차지했던 알파스다.
어느 정도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니, 불경한 그의 행동은 청사자 기사단의 명예에 먹칠했을 터.
'그 점을 생각해서 그냥 가는 게 어떠냐고 좋게 말한 건데 말이야.'
이렇게까지 적의를 드러내다니....
성격이 종잡을 수 없고, 안 좋다고는 하지만, '검성'으로 플레이했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너 같은 놈이 검성 님의 수제자라는 게 이해할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녀석은 '검성'의 추종자 중 하나이니 말이다.
저런 날카로운 반응도 그것 때문일 수 있다.
나 같은 녀석이 어떻게 검성의 수제자가 될 수 있었냐면서, 혀를 차던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이 저 슈바르트니 말이다.
"계속해서 쌓여 왔던 의문이지. 실력은 확실하지만, 그 성품은 귀족의 것도 아닌, 짐승의 것과 비슷했으니 말이야."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나는 코웃음을 치며, 녀석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든 라이히 경께서 하지 못했던 일을 내가 대신 해야겠다."
파캉──!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슈바르트는 허리춤에 팔을 뻗어 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뽑아 든 검이 난반사를 일으키며, 한바탕 '감은 눈'의 건물을 환하게 비추자, 그것을 지켜보던 페른은 화들짝 놀랐다.
"슈, 슈바르트 경! 지금 뭘 하시려는 겁니까!?"
"유리안, 결투다. 검을 뽑아라."
결투, 그것이 기사들 사이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도 알고 있다.
검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는 이들이 검으로 우열을 가리는 것.
'내가 더 세니까, 내가 옳다!'
뇌에도 근육이 잔뜩 뭉쳐있는 기사들이나 할법한 일이다.
단순 '힘'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려는 야만적인 행위.
나, 아니 '유리안'에게도 통용되는 것이니 내 얼굴에 침 뱉기일 테지.
그렇지만, 검을 뽑아 든 슈바르트를 보자,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후후. 무엇을 위해서 말입니까?"
"...뭐?"
기사라 하면, 그것도 평범한 기사도 아닌, 황실을 대표하는 기사단 단장의 결투라면 일반적인 이유로 이루어질 순 없다.
분명 황실에서 제재를 가할 것이다.
결투를 요청한 자뿐만 아니라, 결투를 받아들인 자도.
갑작스러운 내 말에 약간 당황한 눈치다.
난 당연한 말을 한 것뿐인데 말이다.
"당신과 결투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뭡니까?"
"...명예다."
순간, '그딴 건 개나 줘'라는 말이 턱 밑까지 치고 올라왔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유리안'이라면, 그 '명예'라는 두 글자에 환장한 정신 나간 녀석이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명예'가 아니면 유리안이 이 결투를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명예라니, 당신을 이겨서 얻을 수 있는 명예란..., 훗. 너무 하찮군요."
잠깐, 정신을 가다듬은 난 슈바르트를 한 차례 긁었다.
솔직히 귀찮았기에.
검을 휘두르는 게 그런 게 아니라, 나중에 황실 조사관들의 아우성이 듣기 싫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하찮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입에 담은 그 '명예'라는 것이 말이죠. 과연 당신에게 '명예'라는 것이 있을까요? 고작 심사에 탈락한 것으로 '결투'를 요청하신 당신에게 말입니다."
...아마 거울을 본다면 나라도 유리안을 한 대 때리고 싶을 것이다.
보지 않아도 내 표정이 지금 어떤지 충분히 감이 잡히기에.
소란을 피하고, 싸움을 피하고 싶은 입장에서 이런 도발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끓는 물이 빨리 식듯 한 번 속을 뒤집어 놔야 한다.
"네놈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상상도 못 했다."
내 생각과는 달리 슈바르트는 차분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실패했나? 아니, 부들거리는 저 손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명예를 위해선, 아이도 죽이는 네 입에서 감히...."
평소에 그가 생각하는 유리안의 행실을 단번에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멈출 생각이 없는지, 슈바르트는 부단장이었던 '알파스'보다 훨씬 날카로운 오러를 내뿜으며 다가온다.
저벅. 저벅.
그러나 전투로 번질 일은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놀라운 직감>
화가 잔뜩 난 탓에 슈바르트는 포착하지 못했던 발걸음 하나가 이곳을 중재해줄 테니까.
"세든, 꽤 소란스러운데 원래 이런 곳이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늘은... 별거 아닌 일입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세든과 한 남자.
황실의 비서실장으로 유명한 그의 얼굴을 보자, 슈바르트를 포함한 인원들이 모두 세든 옆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그 사이, 난 재빨리 황실 의례(儀禮)를 따랐다.
한쪽 무릎을 꿇고, 심장에 가장 가까운 손을 하늘에게 보인다.
여기에서 '하늘'이란 당연히 아드라탄 제국의 황족을 의미한다.
그 말은 즉. 지금 세든의 옆에 있는 자가 황족이자, 황자라는 것.
내가 자세를 갖추자, 뒤늦게 슈바르트도 무릎을 꿇었다.
"제,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그를 시작으로 페른을 포함한 다른 이들도 정신을 차렸는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하하, 사람 무안하게. 다들 일어나."
멋쩍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황족'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제 4황자, 율시스 르노 아드라탄.
황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은은한 보랏빛이 감도는 흑발.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어서 알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유리안 경."
그런 율시스의 입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내가 들어올 줄 알고 있었어? 눈도 마주치지 않았는데 무릎을 꿇길래 깜짝 놀랐어."
물론 알고 있었다.
율시스를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비서실장인 세든은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다.
그런 그의 기척이 이곳으로 향하는 것을 느낀 난, 바로 옆에 누군가가 따라온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그 기척은 항상 세든의 앞에서 느껴졌다.
비서실장을 대동할 수 있을 정도의 권력자.
그와 동시에 '감은 눈'에 목적을 가진 자.
그리 생각하면, 정체를 유추하기 쉬웠다.
"율시스 황자 님의 휘광에 저도 모르게 무릎이 꿇린 것뿐입니다."
나는 능청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전혀 몰랐다고 말을 했다.
높으신 분들이 흔히 접할 수 있는 아첨을 덧붙이며 말이다.
어찌 들으면, 권력에 굶주린 노예냐며 일갈해도 이상하지 않을 말이었으나.
"하하, 그대의 충의는 늘 새롭게 다가와. 형님들도 모두 그대의 충의를 의심하지 않을 거야."
인간 도살자 '유리안'이 하는 아첨은 오묘할 정도로 거부하는 이가 없었다.
어쩜..., 당연할지도 모른다.
황실 사냥개의 이빨은 적어도 황족에겐 안전한 것이었으니.
"오, 슈바르트!"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율시스는 내부를 둘러보더니, 어정쩡하게 있던 슈바르트를 발견했다.
"그대는 왜 이곳에 있지?"
"그건...."
"세든, 듣기로 기사단과 감은 눈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음."
비서실장 세든의 말에 율시스는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혹시, 이번 호위대장 건의 결과에 불만이 있어서 그런 거야?"
호기심이 그득한 목소리로 율시스가 묻자, 슈바르트는 정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에 저희 기사단원 중 한 명이 감은 눈으로 이적하는 일이 있어서 안부를 묻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미친X처럼 굴던 슈바르트도 황족 앞에선 예의를 갖추려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심지어, 거짓말까지 덧붙이며 말이다.
페른을 보던 율시스가 이해하려는 찰나.
"슈바르트 경, 분명 그 결정을 승복할 수 없어서 찾아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내가 그걸 방관할 리 있나. 후후.
넌 뒈졌어. 이 자식아.
84화. 불협화음(2)
아무리 황위와 동떨어진 4황자라 할지라도 황족은 황족.
슈바르트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뭔가를 압박하는, 그런 것이 보였다.
하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그것을 제대로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하하, 그렇단 말이지?"
그리고 이어지는, 황실의 기사단장에 대한 비웃음일지, 약자에 대한 조롱일지 모를 웃음이 끝나자, 슈바르트의 얼굴엔 난처함이 깃들었다.
"황자님, 고정하십시오. 여기 다른 이도 있습니다."
비서실장인 세든은 4황자를 진정시키며 내게 눈짓을 보내, 불편함을 표출했다.
아마..., 속으로 엄청 욕하고 있을 것이다.
굳이 그런 말을 해야 했냐.
일을 크게 만들 필요가 있었냐.
뭐 그런 식의 의미였겠으나....
"예, 슈바르트 경이 분명 그리하였습니다."
난 오히려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너무 쉽게 넘어가 버리면 아쉽잖아.
슈바르트가 싫어서, 그의 속을 뒤집어 놓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욱이 저놈 따위는 내가 신경 써야만 하는 캐릭터도 아니고, 놈은 그저 '검성 최고'만 외치다 뒤질 놈이다.
"슈바르트 경은 이번 심사 결과가 빨리 나온 탓에 제대로 승복하지 못한 모양이더군요."
내가 이리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닌, 이번 심사에 관여한 자들이 누구인지, 한 번 알아보기 위해서다.
신청도 하지 않은 명단에 날 집어넣은 것도 모자라, 순식간에 심사를 끝낼 정도의 권력자가 누구인지.
'그럼, 그 사람이 여명회의 일원이란 소리겠지.'
테넬론의 명령으로 날 세운 것이니 말이다.
가장 의심이 가는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자, 비서실장인 세든 오르비안이다.
황족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비서실의 장(將).
그의 입김이 닿는다면, 이번 심사가 이토록 빨리 끝낸 것도 당연하리라.
"심사가 빨리 끝나서라... 슈바르트 경, 유리안 경의 말이 사실이야?"
슈바르트는 난감한 기색을 드러내며, 살짝 머리를 숙였다.
여기서 거짓말을 해봤자, 골치가 아파질 것을 예상했는지 그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죄송합니다."
"그래? 결과가 아쉬웠단 말이지...."
뭔가 미묘한 율시스의 말투에 세든의 표정은 점점 더, 불편함을 넘어 짜증에 이르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에 난 확신했다.
네놈이구나? 날 뽑은 게?
이럴 줄 알았어. 세든이 여명회....
"유리안 경을 뽑은 건 난데 말이야. 그 결과가 아쉬웠다면, 내가 납득할 만한 말을 해줘야 할 텐데."
뭐지? 이 갑작스러운 전개는.
난 어이없는 감정을 숨기며, 율시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황자는 재밌다는 표정 반, 미안하다는 감정 한 스푼, 그리고... '니가 뭐 어쩔래'라는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비서실장이 아니었어?
아니, 그러면....
'율시스, 4황자가 여명회라고?'
다시 생각해보니, 가능성은 있었다.
황제에 자리에 오르기엔 계승서열도, 능력도 부족한 그이기에 여명회가 다가갈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는 자이다.
그러니 이 웃는 얼굴의 정신병자를 호위대장으로 임명했겠지.
'근데 게임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4황자 율시스가 여명회와 관련된 전개가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율시스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하는 캐릭이었으니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황실에 반하는 여명회에게 '황자'라는 카드가 있으면 긴히 써먹을 것인데. 그냥 죽게 내버려 뒀을까?
'설마....'
정말 단순히 '유리안'에 대한 믿음으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난 율시스에 대한 시선이 달라진다.
너도 정신병자구나?
***
율시스가 직접 뽑았다는 말에, 슈바르트는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유리안 경,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나?"
사라지는 슈바르트를 보고 있던 내 귓가에 황자의 말이 들려왔다.
"예, 물론입니다."
당연히 있지요.
황족의 말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굽신거리는 내 생각과 달리 유리안의 자세는 기사의 귀감이 될 만한, 번듯한 자세이다.
"그럼 잠깐 이야기 좀 하지. 하던 일 마무리하고 오도록 해."
율시스는 비서실에서 기다리겠다는 말과 함께 세든과 떠났다.
이야기라.
'이번 외교단과 관계된 일인가?'
아마도 맞을 것이다.
그것 말고는 딱히 황자와 나의 접점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유리안을 직접 뽑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딱히 이상하진 않았다.
유리안을 싫어하는 이들은 그 악명을 혐오하거나, 칼끝이 자신에게로 향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벌벌 떠는 자들뿐이다.
황실에서 생각하는 '유리안'은 '잘 드는 칼' 또는 '말 잘 듣는 사냥개' 정도로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다.
'뭐, 나쁠 건 없어.'
그리 생각한 난 집무실을 벗어나 율시스가 기다리는 비서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
"기다리고 계십니다. 유리안 경, 안쪽으로."
비서실에 도착하자, 관계자 중 한 명이 나를 실장실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곳의 문을 열자, 율시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린네 양도 계시는군요."
린네 론드벨, 그녀도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 내가 불렀어."
율시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 자리가 어찌 만들어졌는지 대강 예상이 되었다.
'아아, 그래서....'
그리고 외교단의 호위대장으로 율시스가 날 뽑은 것도 말이다.
"일단, 이야기하기 전에 자리에 앉자고."
율시스의 말을 들은 난 린네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살짝 불편한 기색을 품긴 했으나, 굳이 입으로 털어내진 않았다.
아무래도, 황자의 앞이다 보니 나름의 예의를 차리는 모양이다.
"스승님과 이야기를 먼저 나누신 모양이시군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자를 찔러보자, 그는 살짝 당황한 눈치를 보였다.
"맞아, 어떻게 알았어?"
율시스, 그는 황위 계승권과 거리가 먼 사람답게 다른 황족들처럼 '검성'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황위 계승을 위해 '검성'이란 동아줄을 잡고 있다고 해야 할까.
"린네 양과 제가 한자리에 모일 이유는 그리 많지 않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신성국으로 망명을 한 양반과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묻지 않았다.
황족쯤 되는 양반이면, 제국의 온갖 시설들을 이용할 수 있을 터.
거리가 멀어도, 연락을 할 수 있는 기구 정도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절 외교단의 호위대장으로 선발하신 것도 스승님과 연관이 있겠군요."
"음...."
율시스는 논리적인 내 말에 짧게 침음을 내뱉었다.
그때 율시스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뭔가 날카로워졌다고 해야 하나....
의아할 찰나, 그것은 바로 사라졌고, 이내, 율시스는 살짝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황족쯤이나 되는 자가 황실 전속 기관 소속이기는 하나, 일개 신민의 눈치를 보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유리안 경의 자존심에 상처가 생길 수 있으니 좀 돌려 말하려 했는데 말이야."
황족이라고 세상일을 모를까.
당연히 율시스도 검성과 유리안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 탓에 먼저 말을 꺼내기 어려웠나 보다.
이 정신 나간 놈이 '검성'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돌발 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
"제 자존심은 스승님이 제국을 저버린 순간, 이미 산산조각이 난 상태입니다."
"...그 정도로 부서질 자존심이었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요?"
린네의 톡 쏘는 목소리에 난 고개를 돌려 그녀를 가만히 쳐다본다.
"꼴에 수제자라고, 망명한 하이든 라이히 경을 옹호하다니. 스승님께서도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린네는 날카롭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눈빛을 가다듬었다.
그녀의 반응을 보아하니, '검성'이 현재 신성국으로 망명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맞아, 방금 말대로 호위대장으로 유리안 경을 뽑게 된 건 검성과 상의했기에 내린 결정이야."
상의? 망명한 사람과 무슨 상의를 했기에….
"하이든 라이히가 생각하기에 여명회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인물은 누구냐고 했거든."
뜨끔.
율시스의 입에서 '여명회'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나도 모르게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방금 뭐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날 지켜보고 있었는지, 린네가 미심쩍은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이 자리가....'
꿀꺽.
식도를 타고 뜨거운 무엇인가가 흘러 내려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은 곧 긴장감으로 바뀌어, 등 뒤로 식은땀을 흐르게 했다.
'내가 여명회에 속해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준비된 건가?'
의혹일 뿐이지만, 린네는 내가 '여명회'에 속해있다는 것을 알 가능성이 크다.
알파스와의 대화를 들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크흠."
난 헛기침을 한 번 하며, 긴장을 추슬렀다.
"여명회는 굳이 내가 말해도 어떤 녀석들인지, 알고 있을 거야. 린네 양은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유리안 경도 '여명회'란 이름 정도는 들어본 적 있겠지?"
"예, 당연히 압니다."
'저 음흉한 녀석이 그 여명회의 간부 중 하나입니다!'
린네가 이런 말을 할까 두려움에 떨며, 난 미소를 입에 담았다.
"제국의 율법을 거스르고, 드높은 황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우매한 자들이죠."
"하하, 그렇지."
작은 웃음을 보이던 율시스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말이야.... 요즘 여명회, 그 녀석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심상치 않다는 게 무슨 말이지?
순간, 진지해진 율시스의 얼굴 탓에 긴장감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보안국에 의하면, 여명회의 지부는 여러 개가 있고, 그 지부의 지부장들이 모두 제도로 모였다고 해."
그건 알고 있다.
"심지어, 제라르 오클레앙. 그 녀석이 여명회의 일원이었다는 말도 있더라고. 오클레앙 가문 전체가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조사 중이야."
그것도 알고 있다.
"제라르 경도 여명회라니,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지만 난 일부로 모른 척을 했다.
알고 있다고 한다면, 그 과정에 관해 설명해야 했으니, 어떤 추궁을 받을지 모른다.
"황실의 붕괴, 그걸 바라는 미치광이들과 함께 신성국으로 향하는 건 너무 위험하니까. 그래서 검성에게 물어본 거야."
"여명회에 속하지 않을 법한 인물을 말입니까?"
"하이든 라이히는 그동안 여명회를 쫓았으니 말이야. 적절한 인물을 골라 달라 부탁했지."
율시스의 행동에서 검성에 대한 강한 신뢰가 느껴졌다.
이미 경쟁 국가에게 망명을 한 검성을 이리 강하게 믿고 있다니 참으로 의아한 부분이지만, 황족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틀렸다.
진심으로 여명회와 함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지금 난 여명회 소속이었으니.
"역시! 언제나 스승님께서는 사람을 보는 안목이 정확하시군요."
그 말을 하는 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긴 했지만, 터질 듯한 웃음은 가까스로 참았다.
지금까지 검성의 행보 중 내게 가장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비록 4황자라고는 하지만, 황족의 눈에 띌 수 있도록 귀띔해준 것이니.
"맞아, 정말 대단한 사람이지. 유리안 경도 그렇고, 린네 양도 그렇고, 엄청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발굴한 양반이니 말이야."
율시스의 말에 긍정하는 분위기를 보이자, 그는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리안 경에게 부탁 하나 하고 싶은데."
"예, 말씀하십쇼."
"아마도..., 난 이번에 신성국에 도착한다면 검성과 만날 예정이야."
그 이야기를 한 율시스와 린네는 살짝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말이야. 그리고 난 이번 방문에서 아무런 사건 사고 없이 신성국의 여정을 끝냈으면 하는데 바람이야."
망명한 검성은 더 이상 제국의 법률에 보호받지 못한다.
그 탓에 자기 증명을 위해 검성의 목을 원하는 유리안의 행동이 사뭇 걱정되는 모양이다.
아이고. 걱정도 팔자다.
내가 미쳤다고 검성과 싸우겠냐?
내가 아는 '지금의 검성'은 '지금의 유리안'으로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야."
활짝 웃은 율시스는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 부탁해 호위대장."
***
덜그럭, 덜그럭──!
국경으로 향하는 열차.
그 좌석에 앉아서 바깥 풍경을 보던 난 익숙한 분위기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린네 양도 함께라니, 위험하니 제도에 있는 것이 좋을 텐데 말이죠."
머쓱한 표정의 린네는 내게 잠깐 시선을 던지더니.
"스승님께서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고 하셨으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비서실에서 율시스는 나뿐만이 아니라, 린네도 불렀으니 말이다.
"황자님께선 전용석에 계시나요?"
"예, 사용인과 함께 별도의 전용석을 배정받으셨습니다."
"...역시 황족은 다르네요."
이 제국 열차는 귀족만이 이용할 수 있는 비싼 금액과 더불어, VIP서비스가 운영 중이다.
그중, 최정상급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로열 패밀리'. 즉, 황족만 사용할 수 있다.
"썩 즐거워 보이진 않는군요."
"뭐가 말이죠?"
"스승님과의 재회인데 말입니다. 딱히, 기뻐 보이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녀는 입을 꾹 닫고, 미소 짓고 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린네와 유리안은 같은 검성의 수제자이나, 그 마음가짐에 대해서는 완전히 판이하다.
그럼에도 린네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검성의 뜬금없는 망명은 그녀에게도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단순히, 지금 이 자리가 불편할 뿐이에요."
그리 말하며, 린네는 다시금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율시스 황자님께서 탑승하셨는데도 승객들이 조용하네요."
그러나 불편한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고, 그것을 깨뜨린 린네가 입을 열었다.
황족이 탔음에도, 열차 안이 그리 소란스럽지 않다는 것에 의문을 품은 것이다.
"조용한 게 좋은 겁니다."
"...왜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줄어들었다는 소리니까요. 린네 양도 긴장을 푸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살짝 린네가 당황한 어투로 되물었다.
"황자 님의 호위라고는 하지만, 결국 해야 할 일은 똑같습니다. 적이 나타나면 벤다. 그것뿐이죠."
'아주 간단하지 않습니까?'
...라는 의미로 웃어 보인 난 린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이리 말하면, 그녀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야만'적이라 하겠지.
그렇게 불편한 침묵이 시작될 거고, 난 그것에 힘을 입어 눈을 붙이면 될 것 같다.
"...그래요, 긴장하면 안 되겠죠."
하나, 린네는 심호흡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의외로 퉁명스럽지 않은 분위기. 뭐, 상관없겠지.
예상대로 거북한 침묵이 내려앉았으니, 이대로 눈을 붙이면 될 것 같다.
'멍청한 놈이 아닌 이상, 황족을 습격하는 머저리가 있을 리....'
시X. 있네.
창문 너머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펠코르?'
유난히 큰 덩치를 소유한 여명회의 '몬시뇰'중 하나.
내가 '여명회'에 입단하기 전, 가장 먼저 나에게 당해 쓰러졌던 녀석이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85화. 불협화음(3)
린네가 눈치채기 전에 빠르게 객실에서 빠져나온 난 즉시 펠코르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녀석이 열차에 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험상궂은 얼굴에, 저 거대한 덩치하며.
그가 아무리 여명회 소속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정말 좋게 생각해서, 피크닉을 즐길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이 열차에 제 4황자만 없었다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납득은 안 되겠지만.
하지만 과연, 이게 우연의 일치일까?
"제가 그렇게 바보는 아닌지라, 이렇게 쫓아가고 있는 거겠지요."
하아. 혼잣말의 존댓말.
이제는 익숙해졌다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계속해서 펠코르를 뒤쫓고 있었지만, 그의 행동에서 기행이라 부를 법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잠깐 멈춰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 말고는 말이다.
'뭘 찾고 있나?'
'의심'할 정도의 행동은 아니지만, 녀석이 '여명회' 소속이라는 기저(基底)가 깔린 이상, 모든 동작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
'제발, 그냥 피크닉을 간다고 해줘. 문제 일으키지 말고.'
이윽고, 녀석이 멈춰선 곳에서 익숙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열차의 동력이자, 데몬의 행동을 경직시키는 '공명석'들이 설치된 장소다.
다시 한번 주변을 두리번거린 녀석은 큼지막한 손으로 공명석의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뭔가 하기 전.
쾅──!
"케, 케에에엑!"
펠코르에게 빠른 속도로 접근한 난 녀석의 목덜미를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누, 누구... 누구냐!?"
"조용히 하십시오."
발버둥 치는 그였으나, 뒤에서 제압한 뒤 힘으로 찍어누르니, 녀석은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덩치는 녀석이 크지만, 힘은 '유리안'이 더 세다.
"유, 유리안...!?"
지금 이 상황이 익숙하기라도 했는지, 녀석은 금세 나를 알아보았다.
혹시 이 녀석이 엄한 말을 할까, 난 주변부터 우선 둘러보았다.
다행히 객실이 아닌, 열차의 연결부였던지라 별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몬시뇰 펠코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추궁하는 듯한 내 태도에 펠코르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내가 그걸 왜 말해줘야...."
"빨리 말씀하십시오. 지금 이 상황이 심히 불쾌한지라, 제 손이 제 의지와는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자, 펠코르의 안색이 사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몬시뇰과 비숍.
등위(等位)의 차이뿐만이 아닌, 힘의 격차까지 몸에 새겨주었던 터라, 펠코르는 잔뜩 긴장한 채,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에, 에이든 경의 명령으로 왔다!"
"에이든?"
"그래! 이번 열차에 탑승해서 공명석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꽤나 익숙한 이름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켁! 말하고 있지 않은가!"
잠시 그가 투덜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우선순위의 차이지, 이 녀석도 언젠가 처리해야 할 상대.
"공명석을 제거한다라. 그 외에는 또 없습니까?"
"그 이상은 말할 수...."
우드득──!
찍어 누른 팔에 힘을 더 주자, 구슬피 우는 뼈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 그것뿐이야! 그것뿐이라고! 공명석을 제거하라는 일 말고는 아무런 말도...."
팔이 부서지는 일을 막기 위해 펠코르는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으나, 어쩐지 이상했다.
"이곳에 제국의 제 4황자님이 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까?"
역시나 내 말을 들은 펠코르의 안색이 더욱 어둡게 물들어 갔다.
"화, 황족이 여기에?"
녀석의 표정과 말투. 전혀 모르는 눈치다.
걸린다면 반역죄나 황족시해죄로 당장이라도 잡혀가, 목이 잘릴지도 모르는데.
더군다나 황실의 충실한 개, '감은 눈'의 '유리안'까지 있는 상황이다.
내가 여명회라 안심하고 있는....
"꺄아아아아악!"
그때,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열차를 타고 흘렀다.
집중하지 않으면, 듣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미한 소리였지만, '유리안'의 귀는 그걸 가능케 했다.
그리고, 이후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은, 그것을 상회할 정도로 내 불쾌한 감정을 일깨운다.
"...마기?"
열차 내부에서 데몬의 마기가 느껴진 것이다.
***
대부분의 안전 수칙은 피로 쓰인다.
아무리 조심하라고 소리쳐도, 관련된 예방법을 배포해도 직접 당하기 전까지는 모른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에.
제국을 누비는 이 열차 또한 그러하다.
시행 운전 후,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니, 가동했겠지.
분명 그 과정은 외부의 데몬에게만 초점을 맞췄을 것이다.
그런데 가정조차 안 해봤을 사건이지만, 만약 열차의 내부에 데몬이 출몰한다면?
'...완전, 움직이는 관짝이지.'
솔직히 이 정도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게임 속의 '공명 열차'는 위험에 취약하지 않았다.
하나의 '사건'이 있고 난 후, 공명 열차를 운영하는 철도 공사인 '마탑'에서 위험의 재발을 방지하고자 공명석의 수를 늘리며, 경비를 배치하는 등, 특단의 조치를 취하니 말이다.
허나, 그 '사건'은 이미 지금 세계관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검은 기사가 열차에서 데몬을 풀어놓는 핀텔을 해치우는 장면.'
있어야 할 것의 부재(不在).
그 덕에, 열차 내부의 위험성에 대한 고찰이 이제 시작되는 것이다.
"무슨 일이...?"
펠코르도 이상함을 직감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전(前) 청사자 기사단원과 '몬시뇰'이란 직위는 허투루 딴 것이 아닌 모양인지, 데몬의 마기를 어렴풋이 느꼈나 보다.
"데, 데몬?"
"그렇습니다. 열차 내부에 데몬이 출현한 모양이군요. '누군가'에 의해서 말이죠."
"대체 어떻게...?!"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하냐.
난 네가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아니야?
"위험하군요. 안에서 데몬이 날뛰어 탈선이라도 한다면, 여간 큰일이 아닐 텐데 말이죠. 무려 '황족'이 타고 있으니까요."
혼잣말로 지금 상황에 대한 위험성을 일깨워주며, 다시금 펠코르에게 시선을 옮겼다.
"공명석을 제거하는 것 말고 다른 지령은 없었습니까?"
"정말이야! 나도 이것밖에 모른다고! 제,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에이든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는...."
펠코르의 푸념 아닌 푸념을 한 귀로 흘리며, '마니 탐지'를 이용해, 데몬의 마기를 추적하던 도중,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죠!?"
잔뜩 날이 선 목소리의 주인공은 린네였다.
검성의 제자답게 마기에 민감하겠지.
"유리안 경, 열차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그 사람은 누구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내가 제압한 펠코르를 보더니, 두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내가 범인을 잡은 모양새.
"저, 저년... 검성의 수제자잖아! 유리안, 예전 일은 넘어가고, 빨리 여명... 컥!?"
우두둑──!
이번엔 팔보다 목 쪽에 힘을 주었다.
그런 방법으로 손을 쓰자, 순식간에 정신을 잃은 듯,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저항감이 사라졌다.
깜짝 놀랐네. 이놈, 대체 뭔 말을 하려고 했던 거야?
"지금 뭐 하시는 거죠? 그 사람 기절했잖아요!"
"열차에서 마기가 느껴지는 것쯤은 린네 양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네? 아, 네."
"거동이 수상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제압한 것입니다."
바닥에 쓰러지는 녀석을 힐끔 바라보곤, 난 이내 웃어 보인다.
'당연한 대처를 한 거야.'라는 뉘앙스를 풍기자, 추궁하는 린네의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의심을 감추지 못한 가늘게 뜬 눈은 여전했다.
"이 얼굴을 보시죠."
더해 린네가 보기 편하게 난 펠코르의 면상을 들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믿지 못하니 믿게 만들어야지.
'강완(强腕)'이라는 별칭과 함께, 오랜 기간 무(武)를 연마한 인물답게.
제법 험상궂은 얼굴이다.
"척 봐도, 일반인과는 거리가 멀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네요."
"분명, 어느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었다가 불명예한 이유로 퇴출당하고, 온갖 더러운 일을 손에 대었겠죠. 이번 사태와 연관이 있을 겁니다."
"묘하게 구체적이네요."
그럴 수밖에, 저기 쓰러진 본인 이야기인데.
"일단, 이 사람을 구속해두고 소리가 들린 곳으로 가야겠습니다. 율시스 전하께서 타고 계신 객실도 가까운 곳이니 말입니다."
최대한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화제를 전환한 난 펠코르를 처박아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지금 열차에서 일어난 일. 여명회의 소행인가요?"
린네라면 당연히 해야 할 질문이다. 그녀도 여명회를 찾는 상황이었으니.
"그럴지도, 아닐지도 모르지요."
확실하게 답했다간 도리어 의심을 살 수 있으니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테넬론의 의심이 다시 발발하여 이 상황까지 왔는지, 에이든의 독단적인 선택인지 파악조차 안 되었으니.
우선 난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적어도 나를 노리는 것을 아닐 것이다.
고작 데몬으로 나를 어찌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정도로 테넬론과 에이든은 멍청하지 않으니.
그럼 목표는.
'제4황자 율시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여명회라는 것을 감출 수 있으니.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어요."
내가 발걸음을 옮기자, 린네가 빠르게 따라붙는다.
"지금 열차에서 느껴지는 이 기운은 데몬이 맞나요?"
"누군가, 제가 황자님을 호위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드나 봅니다. 이렇게까지 환영해주지 않아도 될 것인데요."
대략적인 진실이 머릿속에 떠오르긴 하지만, 내 입으로 직접 얘기할 순 없다.
진짜 '유리안'이라면 일일이 설명해주진 않을 거니까.
다행히도 린네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정을 하나 생각해내었다.
"데몬의 뿔을 모방한 가짜 뿔...."
그것을 떠올린 린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을 사용하면, 평범한 사람도 데몬화가 가능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쉽군요. 누구인지 참 궁금했는데 말이죠."
빙긋 웃는 내 모습에 린네는 혀를 내둘렀다.
이런 상황에서도 황자의 안전보다는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이가 궁금하다니.
"가짜 뿔이라면 공명석을 통한 검사도 피하고 열차에 탑승할 수도 있었겠죠. 그렇다면 범인은 이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해요."
씨익.
린네의 간단한 추리에 난 답했다.
"사냥개의 이빨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보여드려야겠군요."
자신감에 찬 말투로 대답한 난 속으로 생각했다.
젠장. 귀찮아죽겠다!
왜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지.
난 통로의 문에 몸을 기대어 내부의 풍경을 확인할 수 있는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린네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금 최우선 순위는 열차 승객들이 아닌, 황자 율시스의 안전이다.
왜냐고?
'호위를 맡은 황자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X 되니까.
벌컥.
일반석 객실의 문을 연 난 빠르게 다음 칸으로 이동한다.
"가, 감은 눈이다."
"유리안 경이야...."
승무원들의 다급한 움직임이나, 열차가 간혹 흔들리거나 하는 것에 당황하는 승객들의 눈에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아마도 열차에 일어난 이변을 어느 정도 눈치챈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지나가자, 그 불안감은 경외의 시선으로 바뀌었다.
'그라면....'
'해결될 거야.'
라는 무한 신뢰.
성격은 나쁘지만, 실력만큼은 최고인 유리안이 있으니 안도하는 모습이 참 어색했다.
그런 그들을 지나치며, 율시스가 있는 VIP석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찰나.
"유, 유리안 경!"
자리에서 불쑥 일어난 승객 하나가 머리 위로 '의문'의 색을 띠며, 내게 다가온다.
"설마, 유리안 경도 저희 여...."
휘릭──!
난 말을 걸어온 남자의 목덜미를 잡고, 바닥에 고꾸라뜨렸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비명 하나 남기지 못한 남자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가, 갑자기 무슨!?"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린네는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이자는 여명회의 일원입니다."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녀를 대했다.
'어우! 깜짝이야.'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철두철미한 에이든이 펠코르 한 명만 보낼 리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딜 반가워하고 있어! 이 정신 나간 놈이.
"...정말인가요?"
"품속을 확인해보시죠. 교단증이 있을 겁니다."
'몬시뇰' 이상의 검증된 자들은 교단증을 들고 다니지 않으나, 이런 위험한 일에 투입되는 일개 교단원들은 교단증을 필히 들고 다녀야 한다.
누가 누구인지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사내의 품을 뒤적이던 린네는 무언가 발견한 듯, 들어 올린다.
"지, 진짜로 뱀 모양의 교단증이 있잖아…."
린네의 독백을 무시하며, 난 재빨리 다음 칸으로 넘어간다.
율시스의 객실로 향하는 도중, 얼마나 많은 교단원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들이 아는 척하지 못하도록, 재빨리 지나치는 것이──.
"유리안 경! 설마, 저희의 일을 도와주시러...!"
휘릭──. 퍽!
젠장!
도대체 얼마나 많이 보낸 거냐?
***
소란스러운 열차의 내부를 지나며, 율시스가 있는 객실로 향하던 린네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알아내는 거지?'
그녀도 '여명회'를 찾아내는 일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조사도 많이 했을뿐더러, 검성과 함께하며 많은 경험을 쌓았으니 말이다.
하나, 그것은 어느 정도 대화의 소통을 나누었을 때나 성립되는 것이다.
적대하는 세력에 대한 자세.
'여명회'란 이름을 꺼냈을 때의 눈동자.
황실이나, 마신에 관련된 단어 선택.
모두 '소통'을 통해야 그녀는 상대가 여명회라는 것을 '확신'이 아닌, '의심'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이게 당연한 거 아니야?'
당연한 생각의 기저(基底).
그렇지만, 유리안은 일절의 소통도 없이 상대가 여명회라는 것을 알아채고 제압하고 있었다.
'이 사람도 가지고 있어....'
쓰러진 남자의 품속에서 다시금 교단증이 튀어나오자, 린네는 거침없이 앞으로 이동하는 유리안의 등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대체 얼마나 많은 여명회를 상대했기에.'
얼마나 큰 증오심을 품고 있기에.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것일까.
"벌레가 이리도 많다니, 어서 빨리 율시스 전하의 안부를 확인해야겠군요."
방금 전의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지금은 임무에 충실히 하고 있다.
일전에 바이엘 아카데미에서, 알파스를 본 뒤 복수심에 눈이 먼 자신과는 다른, 기사다운 대처였다.
"네."
린네는 속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수치심을 숨기기 위해, 짤막하게 대답했다.
왠지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
'저 등이 오늘따라 든든....'
고개를 흔들며 헛된 생각을 털어낸 그녀는 마지막 칸을 남기고 멈춰 선 유리안을 바라본다.
문을 열지 않아도 분명하게 느껴진다.
'저기에 데몬이....'
벌컥.
그녀의 생각보다 유리안의 동작이 더 빨랐다.
화아아아.
진득하게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이 그녀를 엄습했다.
"윽...."
피부를 찌르는 불쾌함.
딱히 정체를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기운을 내뿜는 건 '데몬'밖에 없으니.
86화. 말로 합시다(1)
워낙 좁은 공간이라 그런지, 밀폐된 객실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는 사뭇 긴장될 정도로 강렬했다.
유리안 등 너머로 보이는 것은 흉측하게 몸이 비틀린 데몬의 모습.
많은 녀석을 봐온 건 아니지만, 저리 고약하고 징그럽게 생긴 데몬을 처음 보는 린네이다.
게다가 머리에 난 뿔의 개수는 두 개.
'이각이야.'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일반인 정도는 순식간에 찢어발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데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린네는 딱히 겁이 나지 않았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오라'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으나, 지금은 든든한 우군이 바로 곁에 있지 않은가.
"겨우 '이각'이군요."
완만하게 휜 유리안의 눈이 더욱 가파르게 휘어진다.
데몬을 만나 기쁜 것인지, 고작 이 정도로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는 자신감인지.
스릉.
후후, 하며 짧은 웃음과 함께 유리안은 검을 뽑아 들었다.
'월장석'이란 보석으로 만든 검이 모습을 드러내자, 린네의 안도감은 형태는 더욱 뚜렷해졌다.
데몬 토벌의 달인, 그 전문가의 손끝에서 이 상황이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란, 작은 신뢰마저 피어올랐다.
"이각 급의 데몬은 회복력도, 근력도, 일반 데몬을 상회하니 무척이나 위험한 놈입니다. 아주 무서운 상대죠."
린네를 살짝 바라본 유리안은 천연덕스럽게 '이각'이 무섭다며 중얼거렸으나, 그녀는 알고 있다.
이 상황이 그에게 전혀 곤란하지 않다는 것을.
***
'미친, 이각이잖아.'
눈앞의 데몬을 마주한 난 속으로 혀를 찼다.
꼼수를 사용하긴 했으나, 삼각 급의 데몬도 잡은 경험이 있다. 그런 경험을 토대로 이각 데몬을 해치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느껴야 정상이거늘.
'장소가 장소다 보니....'
지금 이곳은 달리는 열차 안이다.
급정거를 해야 할 정도로 비상시의 상황이었으나, 이 열차는 명백한 '타의'가 아니라면, 역에 들어야지만, 감속이 가능하다.
물론, 그 '타의'란.
'저놈이 깽판을 쳐서, 열차가 탈선되어 버리는 경우지.'
그르릉──!
낮게 신음을 낸 데몬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나와 눈이 마주친다.
부풀어 오른 몸, 사이사이로 공명 열차의 직원복이 형편없이 찢어져 걸려있었다.
가짜 뿔을 사용한 모양이군.
'직원 중 한 명이 여명회였고.'
빠르게 데몬의 정체를 파악한 난 다른 곳들에 비해 넓은 객실을 둘러보았다.
객차 하나가 오롯이 VVIP를 위한 장소. 그 구석엔 피를 뒤집어쓴 율시스가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내 뇌리를 타고 안 좋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윽.'
기간제이기는 하지만.
- '황족을 호위하는 호위대장으로서 도대체 뭘 한 건가!'
비서실장 세든이 호통을 치면서 책임을 묻겠지.
별도의 징계위원회가 결성되고, 가뜩이나 눈엣가시였던 나를 제도에서 내쫓으려고 혈안이었던 원로회가 이 떡밥에 걸린 나를 제대로 건져 올릴 것이다.
'X 됐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늦지는 않았다.
황자가 살아 있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도록, 난 월장검에 마나를 불어넣은 뒤, 발을 앞으로 한 발자국 내밀었다.
'저놈의 관심을 나에게 오도록 해야 한다.'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검의 모습에 데몬의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좋아!'
크륵.
한 번 더, 짧은 신음과 함께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난 재빨리 땅을 박차 데몬과의 거리를 좁힐 때.
"유리안 경! 그 데몬의 피와 타액엔 독성을 품고 있어!"
젠장! 그건 일찍 좀 말해주지.
율시스의 다급한 외침에도, 속전속결을 다짐한 이상, 멈춰 설 수도 없는 노릇.
거리를 좁힌 난 즉시 데몬의 왼쪽 다리에 검을 그어 올렸다.
한 몸뚱어리 하는 펠코르보다 큰 덩치 탓에 어디를 뻗든 검이 쉽게 닿았다.
치익──!
월광검이 가른 데몬의 피부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까짓 '피쯤이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점액질과도 같은 데몬의 피가 허공에 흩뿌려지자, 증기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게 율시스가 말한 것인가 보군.'
일반적인 독극물이 아닌, 공기와 접촉해 산화(酸化) 반응을 일으키는 타입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저 증기의 근처에 있으면 위험하다.
공기 일부분이 보랏빛이 변한 곳에서 한발 물러난 난 방법을 강구해 본다.
'밀폐된 곳에선 최악의 데몬이야.'
이런 놈을 '보는' 건 처음은 아니기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공략법이 머릿속에 있으나, 그래도 처치가 곤란한 건 어쩔 수 없다.
일반적으로 바람을 등지고 싸워야지만 유리한 것에 반해, 이곳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저 데몬의 피, 공기에 닿으면 독 안개로 변하는 것 같아요."
"그래 보이는군요."
나도 안다.
"어쩌면 좋죠? 이대로 죽인다면, 시체에서 계속 독 안개가 나올 텐데."
린네의 말대로, 저 데몬을 죽인다고 해도 그 시체에서 나온 독가스가 이 객차를 완전히 메울 것이다.
먼저 처리한 뒤, 율시스를 데리고 옮기는 방법도 있으나.
가스를 그냥 내버려 뒀다간, 작은 불꽃에 폭발이 일어날 수 있으니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뭔가 뇌리를 스쳤다.
과거 TV에서 봤던 장면이 하나 생각이 난 것이다.
'내버려 두는 게 위험하다면, 떼어내면 되는 것이지.'
이 객차가 맨 후방이라서 참 다행이다.
"린네 양."
"네?"
"율시스 황자님을 앞 객실로 옮겨주시겠습니까?"
"...그것 말고, 같이 데몬을 해치울 방법을 모색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고작 그 정도 실력으로 말입니까?"
씨익.
웃어 보이는 내 모습, 안 봐도 뻔하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일단 제 말을 따라주시겠습니까?"
근데 눈앞에 린네는 평소와 다르게 그냥 우두커니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안 통하나?
다른 설득할 수 있는 말을 생각하려던 찰나
"알았어요."
의외로 린네는 흔쾌히 수긍했다.
그녀가 율시스를 향해 달려 나가자, 데몬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돌아가더니 린네에게로 향한다.
그것을 느낀 난 재빨리 데몬의 핵이 있는 곳으로 검을 뻗어 휘둘렀다.
물론 이것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데몬은 너무나 간단히 양손을 들어 그것을 방어했다.
터억!
막았다고는 하지만, 상처가 생긴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치이익──!
움푹 파인 상흔에서 나온 피가 월장검에 닿자, 안개로 변하면서 화학 반응이 일어났다.
본래라면, 검신도 손상될 정도의 반응이었으나, '월광검'의 오러가 그것을 방지해주었다.
'...냄새, 한 번 고약하네.'
더 이상, 상처를 늘린다면 저 독가스를 듬뿍 들이마셔야 할 상황.
"유리안 경, 됐어요!"
때마침 린네의 외침이 들려온다.
'좋아! 여기서....'
오른발에 마나를 집중한 나는 데몬을 발로 밀어내듯 차버렸다.
말도 안 되는 각력과 오라의 조합.
콰앙──!
그것 덕분인지, 데몬은 열차의 가장 뒷자리까지 밀려났다.
"크륵, 크르륵."
당연하게도. 이각의 데몬은 발길질 정도로 쓰러지지 않았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움직이십시오. 린네 양."
"네, 네!?"
"다음 칸으로 말입니다!"
처음에는 의아한 얼굴을 하던 린네는 갑작스레 내가 달려 나가자, 황자를 부축하며 금세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크아악──!"
그러자, 밀려난 데몬이 큰소리로 울부짖더니, 우리 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다다다다.
온갖 집기들을 뿌리치며 미련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꽤나 흉포해 보였다.
황자와 린네가 열차의 연결부를 지나가는 것을 본 난 다시 한번 데몬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퍼억!
녀석은 다시 한번 팔로 막아 뒤로 물러섰지만, 이번 공격은 상처를 줄 목적이 아니다.
시간을 벌기 위함일 뿐.
난 그대로 뒤로 한 발짝 뛰어 객실을 넘어갔다.
문을 부숴버릴 듯 달려오는 데몬의 우악스러운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이 보인다.
"어쩌실 생각이에요, 유리안 경!"
다급하게 외치는 린네를 뒤로하고, 난 뽑아 든 검을 열차의 연결부에 꽂아 넣는다.
푹.
오러를 두른 검이라 웬만한 강도를 넘어서, 너무 쉽게 들어갔다.
이제 저것만 끊어내면 되겠군.
"지금 뭘 하시려는 거예요?!"
"분리수거가 필요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혹시, 저 객차를 분리하실 생각인가요? 불가능해요! 연결부는 마법적인 처리를 한 강철이라서...."
<놀라운 직감>
<간파>
카앙──!
린네의 말과는 달리 강철로 만든 연결부에는 쉽사리 금이 갔다.
마법적인 처리를 하더라도, 유리안의 눈썰미와 특성은 그것의 약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윽."
그러나, 시원스럽게 균열이 간 것에 비해 연결기는 완전히 잘라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거 보세요! 역시, 연결기를 검으로 자르는 건 힘든... 어?"
난 '솜브라'를 월장검에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모자라면 채워야겠지.'
부족한 출력은 '솜브라'와 월장검의 반발력을 이용하면 된다.
파캉──!
다시 한번,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연결기는 완전히 끊어졌다.
'잘가라.'라고 생각하며 데몬을 쳐다보자, 녀석은 열차의 끄트머리로 달려오더니 땅을 박차고 이곳으로 튀어 올랐다.
'뭔 멀리 뛰기를 하고 있어!'
퍽!
내 발길질 한 방에 바닥을 뒹굴던 녀석은 이내 우리를 보며 포효한다.
"크아악──!"
뛰어보려 하지만, 고작 데몬인 주제에 열차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이내 한 점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런 일련의 행동을 보고 있던 린네는 멍하니 날 보다, 멀어지는 VIP 객실 차량을 바라본다.
"...그런데, 저 분리된 객차는 어떻게 하죠? 마탑에서 책임을 물 수도 있을 텐데."
공명 열차의 책임자는 까탈스럽기로 소문난 마탑이다. 그 탓에 린네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전지전능하신 제국의 작은 태양, 율시스 황자 전하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요."
마탑이면 뭐, 어떻게 할 건데?
지금 우리 뒤엔 황실이 있다고.
***
목적지인 국경도시, 베르니든에 도착하자, 뭔가 분주한 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제 4황자가 방문한 것과 더불어 객차 하나가 손실된 탓에 관계자들이 찾아온 모양이다.
"율시스 전하, 몸은 괜찮으십니까!?"
"이 상처를 보십쇼! 호위대장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냐!"
황자의 부상에 화가 난 관계자들이 그의 위광(威光)을 방패 삼아, 날 헐뜯기 시작했다.
저놈들은 나중은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나 '유리안'이라고.
"그만, 내가 자초한 일이다."
"하, 하지만 율시스 전하...."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호위대장을 다른 객실에 둔 것, 그것이 내 실책이야."
"그렇지만, 이번 습격을 예상하고 대책을 강구했어야 합니다!"
저벅저벅.
언성을 높이던 귀족은 내가 다가가자,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누구 앞에서 성을 높이시는 겁니까?"
"아니, 난 그저...."
"불경하군요. 귀하의 언행은 율시스 전하의... 아니 황실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짤그락──!
천천히, 허리춤의 검집으로 손을 옮기자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웃는 처형대.
제도가 아니더라도, 그 이름을 아는 자들은 많다. 그가 '황실'의 이름을 운운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그, 그만하는 게 어때? 유리안 경."
일이 벌어지기 전에 율시스가 나를 중재했다. 당연히도, 이 자리에서 검을 뽑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건 차후의 나를 위한 퍼포먼스다.
"예, 죄송합니다. 율시스 전하."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난 언성을 높이던 귀족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드라탄 제국의 '황제'라는 자리는 피의 고귀함을 물을 뿐, 성별은 불문(不問)한다.
그렇기에 3명의 형뿐만이 아닌, 4명의 누나까지 존재하는 율시스는 황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피의 고결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본래의 '유리안'이라면 명분이 생겼다며 좋아할 상황이었으나.
'내가 정신병자도 아니고.'
그렇고말고. 난 절대! 아니라고.
상처를 입었음에도, 신성국으로 향한다는 일념은 꺾이지 않았는지, 율시스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상 율시스, 본인의 기반을 위해서였으니.
목숨이 걸린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포기하긴 싫은 모양이다.
"유리안 경, 수고 많으십니다."
"예."
"열차를 습격한 괴한들은 체포해두었습니다."
잠깐, 역을 둘러보고 있자 국경도시에 주둔하던 '감은 눈'의 대원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국경 수비대와 함께 열차를 습격한 여명회의 일원들은 검거해둔 상태였다.
"혹시, 괴한들 중 대머리에 덩치가 큰 녀석이 한 명 있지 않았습니까?"
그중, 난 굳이 꼭 집어 펠코르를 언급했다.
내 물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이 있었는지 감은 눈의 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있습니다."
"그럼, 그자는 그냥 풀어 주십쇼."
"...예?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내 말에 대원이 당황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그냥 까라면 좀 까.
내가 다 생각이 있으니.
***
전(前) 청사자 기사단원이었던 펠코르는 이전에 유리안에게 당했던 상처가 지끈거려 손으로 한 번 훑었다.
이 상처가 유난히도 지끈거리는 이유는 자신도 알고 있다.
바로 눈앞에 이 상처를 낸 장본인이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으윽....'
펠코르는 자신의 팔을 쳐다보았다.
그곳엔 범죄자를 포박하기 위한 수갑이 그의 손목을 포박하고 있었다.
사용만 해봤지, 당해보진 않았던 펠코르는 긴장감에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대체 어디까지 갈 생각이냐!"
"조용히 하시길."
불만을 토로해도, 유리안은 조용히 하라는 말 말고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
팔은 묶여있고, 유리안은 자신보다 마나도, 신체 능력도 월등하다.
그의 변덕 탓에 아직은 살아있으나,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정말로 머리가 목 위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이, 이봐 유리안. 나도 에이든이 왜 이런 명령을 했는지 잘 모른다고! 알파스가 죽고 난 후 교단에서 내 위치도 애매해져 버린 탓에...."
"그렇습니까?"
고해성사하듯, 지난 일을 이야기해도 유리안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몇 분이 더 흘렀을까.
국경도시, 베르니든의 밤을 밝히는 조명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오자, 유리안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기면 좋겠군요."
철컥.
유리안은 펠코르의 수갑을 풀어 주었다.
'응?'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는 유리안을 쳐다보았다.
'무슨 속셈이지?'
잠시 그를 바라보던 펠코르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찔러본다.
"그, 그래. 날 풀어 주려고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었군! 아무래도, 도시에서 날 풀어줬다간 보는 눈이 많으니 말이야!"
"후후."
유리안은 대답 대신 짧은 웃음을 보였다.
"하긴, 나 정도면 아는 것도 많으니 잡혔다간 네놈도 곤란하겠지! 아무렴, 황실 전속 기관이신 '감은 눈'의... 응?"
턱.
횡설수설 떠드는 펠코르의 말을 끊고, 유리안은 들고 있던 막대기 하나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불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밤이었기에 그 형태를 잘 알아볼 수 없던 펠코르였지만, 자세히 보니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건... 삽?
"유리안!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냐?"
"삽의 용도를 모르십니까?"
평소처럼 미소를 짓고 있지만, 어쩐지 우매하게 보는 어투에 펠코르는 살짝 화가 났다.
"파내거나,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 '무엇인가'에 들어갈 것은 무궁무진하다.
"잘 아시는군요. 그러니, 파주시겠습니까? 되도록 넓고, 크게 말입니다."
씨익.
웃어 보이는 유리안과 달리 펠코르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내 무덤을 내가...?'
87화. 말로 합시다(2)
삽을 쥔 펠코르의 이마엔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자신의 손으로 자기가 묻힐 곳을 판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직접 해보지 않은 사람이면 절대 모른다.
공포가 뱀처럼 전신을 휘감기 시작한다.
손발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으며, 싸늘한 기운이 단전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펠코르는 슬쩍, 유리안의 얼굴을 쳐다본다.
장난이겠지.
그저 겁을 먹이려는 속셈이겠지.
그런 행복회로를 돌리며, 유리안의 얼굴을 살폈으나.
젠장! 얼음장처럼 차가운 미소를 지닌 그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뭐하십니까? 손이 놀고 있습니다."
미동조차 없는 냉혹한 목소리에 펠코르는 삽을 놀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전무했다.
한 삽, 한 삽 계속될수록 구덩이의 모양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그 깊이와 넓이가 커질수록,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형태를 이루며 자신에게 다가온다.
'죽는다.'
펠코르의 이성은 빨리 이곳을 벗어나라고 권고하고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고.
어떻게든 뿌리치고 움직여야만 한다고.
하나, 쉽사리 행동에 나설 수가 없었다.
'저, 저 괴물을 어떻게 이기라고...!'
이미 몸에 각인된 공포심은 쉽사리 떨칠 수 없었기에.
"유리안 경. 사, 살려주십시오. 저는 죄가 없습니다!"
이윽고, 펠코르의 입에선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공명석을 제거하라는 명령만 받았지, 레플리카를 투입할 것이란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만약, 알았더라면 제가 그 일을 했겠습니까!? 저, 저도 이용당한 것...."
팍──!
힘들게 삽질을 하면서도 큰 목소리로 자신을 변호하던 펠코르는 문득, 삽이 단단한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을 알아챘다.
'응? 뭐지...?'
잠시 의아해하던 펠코르의 의식을 깨우는 것은 냉혹한 유리안의 말이다.
"거기까지입니다."
멍하니 유리안을 바라보는 펠코르는 삽질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꺼내주시겠습니까?"
완만하게 휜 유리안의 눈이 그를 재촉한다.
"예? 예, 예...."
삽을 집어 던지고, 황급히 손으로 흙을 걷어내자, 무언가 보이기 시작한다.
"...검?"
파묻혀있던 것은 다름 아닌, 녹슬고 부서진 '검'이었다.
***
펠코르가 파낸 구덩이에서 부러진 검이 튀어나오자, 난 속으로 혀를 찼다.
녹슬고, 부러지고, 검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물건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쓰레기가 묻혀있었다고 생각할 법한 고철이었으나.
'예상은 했지만....'
아직도 이게 여기에 있네?
나에게는 '그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게 뭐냐고?
이건 무려, 검성 하이든 라이히가 현재의 아크비숍 테넬론이 세운 '위색결사(僞色結社)'란 단체를 괴멸시켰을 때 사용했던 검이라는 말씀.
한 마디로, 고결하고 귀한 검인데..., 그런데 말이지.... 젠장!
'프롤로그는 어디로 간 거야!!'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는 스토리를 중심적으로 다루는 게임답게 일종의 '프롤로그'가 존재한다.
마신을 잠재운 대업을 이룬 뒤, 검성은 다시는 검을 들지 않겠다는 일념 아래, 사용하던 검을 땅에 묻는다.
두 번 다시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나, 그 바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연히 들은 테넬론의 생존 소식.
그로 인해 발족된 '여명회'라는 단체.
그 탓에 검성은 이곳에 다시 찾아와 파묻은 자신의 검을 다시금 꺼내며 다짐한다.
비극의 끝은 되풀이되지 않을 거라는 결심으로.
그것이 바로,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를 시작하는 모든 플레이어가 보는 프롤로그다.
'그것조차 진행하지 않은 주인공. 그를 과연....'
주인공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애초에, 지금 검성의 행보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다.
지금껏 그가 행한 일들과 내가 알던 스토리와 비교를 해봐도 연관성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
'인정할 수 없다.'
고개를 끄덕이던 도중, 난 깜짝 놀랐다.
지금 이 감정에 '유리안'의 몸이 놀랍도록 동조하고 있는 것.
아무리 천하의 나쁜 놈 '유리안'이라고 하지만, 그도 인정하고 있었다.
검성은 늘 고결해야만 했으니까.
검성은 늘 '유리안'의 목표였으니.
우리의 정신병자, '유리안'은 그 고결함을 꺾어,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삶의 목표이자 방향성이다.
'...미친놈.'
웃기지도 않는 목표였으나 '검성은 고결하다'라는 생각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주인공이니까.
세상은, 실눈 악역 따위가 아닌 고결하고 광명정대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그 탓에 이번만큼은 이해할 수 있는 '유리안'의 감정선이다.
하지만, 자신을 게임에 그토록 열광하게 만들었던 주인공은 어찌 된 영문인지, 스토리와 다르게 조금씩 변화되고 있었다.
검은 기사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고.
갑자기 신성국에 망명을 하지 않나.
'흐음. 나도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야.'
그렇게 검성이 사용하던 검을 보며 상념에 잠긴 날 일깨운 것은 펠코르였다.
"이, 이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쩐지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
"주십쇼.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내가 손을 뻗어 그것을 달라는 제스쳐를 취하자, 펠코르는 부리나케 내게 부러진 검을 건네주었다.
단검만큼 작아진 검 조각을 가져온 천으로 꼼꼼히 덮은 난 품속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굳이, '검성이 사용했던 검'이란 이유도 아니고, '대박! 이것을 만든 철이 세상에 둘도 없는 고귀한 철'이란 거창한 이유를 부여해서 가져가는 것도 아니다.
이 부러진 검은 성유물, 정야(靜夜)의 종을 얻기 위한 준비물이니 가져가는 것이다.
오직 플레이어들만 아는 이유겠지만.
'이 검이 이곳에 있는 걸 보니....'
아마도, 검성은....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험상궂고 덩치 큰 녀석이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난 펠코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실 이곳에 온 이유는 이 '검'을 챙기는 게 목적이기도 했으나, 다른 것도 하나 있다.
"그만 파도 되겠습니까?"
"그럴 리 있겠습니까."
난 희미한 미소를 입에 머금는다.
"사람이 들어가기엔 아직 작은 크기잖습니까?"
지금 이 상황, 펠코르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잘 알고 있다.
무섭겠지. 도망가고 싶겠지.
무력으로도 안 되니 덤비기도 쉽지 않겠지.
그러면 이용해 줘야지.
"아, 아까도 말했지만 에이든은 저에게도 아무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만약, 데몬이 열차를 탈선시켰다면 저도...!"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율시스 전하의 행보가 거슬리며, 에이든과 특별한 관계를 지닌 분. 아마도, 제 3황자이신 칼드락 드 아드라탄 님께서 에이든 경에게 사주하신 것이겠지요."
스토리의 중후반에 나오는 제 3황자는 호전적이고 입지적인 인물로 누군가 자기 자리를 뺏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인물이다.
사실 '율시스'가 하는 일을 막으려고, '에이든'이 수를 썼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비숍 에이든은 3황자와 여명회 사이에서 이득을 저울질하다, 검성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캐릭이니 말이다.
'그는 단순히 경고만 할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이 상황을 굳이 키운 건....'
에이든일 것이다.
나에 대한 나비효과로, 아크 비숍으로서 거론도 되지 못하고, 제라르가 떨어진 지금, 에이든은 '비숍'으로서의 입지도 흔들렸다.
그 탓에 강수를 둔 것이다.
"지금 전, 총대주교이신 테넬론 경의 지령으로 율시스 전하와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알고 계셨습니까?"
"...그, 그건."
"모르고 계셨어도 문제입니다. 어찌 되었든, 총대주교의 명을 정면에서 거슬렀으니 말입니다."
내 말이 이어질수록, 펠코르의 얼굴은 사색으로 물들어 갔다.
강건한 육체에 어울리지 않게 말이다.
"그러니, 고마워하셔야 할 겁니다. 여명회에서 정식적으로 절차를 밟기 전에, 제가 펠코르 경의 '명예'를 지켜주려는 것 아닙니까?"
궤변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이 정도로 형편없는 말로도 펠코르의 정신을 옥죄기엔 충분하다.
극한에 이르는 공포로 삽질을 그렇게 시켰으니, 안 되면 이상한 거지.
예상대로, 그의 머리 위로 <부정의 색>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짙은 '공포'의 색이다.
"후후, 농담입니다. 그리 겁먹지 마십쇼."
"...예?"
"저도 '연민'이라는 게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묻을 만큼, 인면수심이 아니란 소리입니다."
"...."
묵음 처리된 저 녀석의 머릿속에 이런 말이 한가득하겠지.
개XX, 미XX, 씨XX.
당연하게도, '유리안'이 아닌 '나'란 사람에게는 '연민'이라는 감정이 존재한다.
비록, 대머리의 거한에겐 그리 통용되지 않는 말이지만.
"자, 펠코르 경."
난 구덩이 안에 있는 펠코르에게 손을 뻗었다. 무언가 다른 속내가 있을까,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내 손을 잡은 그는 벌벌 떨며,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겁나 무겁네.'
그가 눈치 못 채게 어깨를 한 번 돌린 난 새로운 제안을 하나 던진다.
"펠코르 경, 우리 과거의 앙금은 없던 것으로 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실 난 이 녀석에게 앙금이라고 말할 것도 없다. 펠로르가 나에게 가진 적의는 오롯이 그가 품고 있는 불만일 뿐이다.
약자로서의 자존감과 패배감.
그럼에도 나는 '우리' 사이의 앙금을 풀자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알파스도 죽은 지금, 굳이 당신 정도의 인재가, 에이든의 수족을 자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난 안타깝다는 뉘앙스를 보이며 펠코르를 두둔해주었다.
'공포'에 사로잡혀있던 그는 내 언행에 모종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
감동이든, 격노든, 뭐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이미 난 심리적으로 녀석을 지배할 수 있도록 밑밥은 다 깔아놨으니.
물론 100% 성공할 것이다.
녀석의 <부정의 색>이 나에게 보이는 이상, 실패란 없으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번 일에 대해 당신에게 자세히 알려주지 않고, 일을 진행한 이유를 말입니다."
"생각...?"
"에이든 경이 열차에 율시스 전하가 타고 있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런데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은 당신이 죽었어도 상관없다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잠시 갈등하던 펠코르의 표정이 이내 절망으로 바뀐다.
짐작을 확신으로 바꾸어 주었으니, 극한 상황에 다다른 그의 비관은 배가 되었다.
툭. 툭.
그런 펠코르의 어깨를 난 두어 번 쳐주었다.
'유리안'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지만, 현대 사회를 살아온 난 그 행동이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것을 격려라고 느꼈는지, 그의 머리 위로 보이는 '공포'의 색이 약간 흐릿해졌다.
"이런 인재를, 제국의 대(大) 청사자 기사단의 단원까지 했던 인재를 버리는 패로 이용하다니, 에이든 경도 참 멍청합니다."
"유리안 경...."
그 덕에 이렇게 말을 해도 그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눈에 물이 가득 찬 그는 나를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래, 내가 보살펴 주마.
나를 따르면 광명이... 아니, 광명까지는 아니지.
어찌 되었든, 열차 안에서 처리해야 할 놈을 지금껏 살려둔 이유가 이것이다.
녀석은 에이든의 행동을 일거수일투족 내게 보고해줘야 하니까.
난 희미한 미소를 입에 머금는다.
아까와 같은 똑같은 미소였지만, 눈앞의 펠코르는 그런 나를 보며, 뭔가 편안해 보인다.
마치 내 등 뒤에서 광휘가 비치는 듯하겠지.
***
"어쩐지, 자네가 이곳에 올 때면 늘 소란스럽군."
다음 날, 베르니든에 위치한 '감은 눈'의 숙소에서 눈을 뜬 난 마중 나온 의외의 남자에게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오로닐 경, 잘 지내셨는지요."
이곳, 국경도시 베르니든을 맡은 변경백, 오로닐이었다.
과거 삼각 데몬 때문에 숲을 태운....
큼큼. 부끄러운 과거는 잊어버리자고.
"페레난드까지 향할 때 사용할 마차와 마부, 말들을 준비해두었다네. 사용인들도 모두 탈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말이야. 율시스 전하께는 미리 말씀해두었으니, 따로 전해드릴 필요는 없을 것이라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이 있나, 황실의 명인데 당연히 해야지."
이전과는 다르게 오로닐의 눈에는 적의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따님은 잘 지내십니까?"
"...덕분에 말이지."
"그거야 잘 되었군요. 아이가 아파하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찢어지니 말입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으나, 듣고 있던 오로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어쩐지 정색한 모습을 보인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나는 태양신교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이곳의 담당자지만, 그래도 율시스 전하의 행동은 믿기 힘들다네."
"그렇습니까?"
"죽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곳엔 제국을 혐오하는 자들도 있을 텐데, 까딱하다간 전쟁이라는 불꽃으로 번질 수도 있단 말이라네."
나도 알고 있네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살려고 저리 발버둥 치는데.
"그래도, 유리안 경이 호위대장으로 붙는다면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오로닐의 말을 듣던 도중, 그의 말에 어폐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왜? 이미 큰일, 한 번 일어났잖아?
"어찌 되었든, 율시스 전하를 잘 부탁하지. 나 또한, 태양신 솔라룬 님을 모시는 입장이니 말이야."
다시 한번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며, 오로닐은 돌아섰다.
"...이곳의 변경백과 아는 사이인가요?"
오로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찬가지로 '감은 눈'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린네다.
"린네 양, 잠자리는 괜찮았습니까? 린네 양이 사용할 만큼 고급진 장소는 아닌지라 걱정스럽군요."
"스승님을 따라다니면서 익숙해졌어요. 그나저나, 말 돌리지 마시죠."
퉁명스럽기는.
"유리안 경, 당신이 어젯밤 자리를 비운 사이 열차를 관리하는 마탑 쪽에서 사람이 왔어요."
"그렇습니까?"
황족인 율시스에게 따질 수 없으니, 그나마 건드리기 쉬운 린네에게 찾아온 모양이다.
"척 봐도, 끊어진 객차의 청구를 하러 온 것 같았는데... 오로닐 변경백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구겨진 얼굴로 돌아가더군요."
"잘 되었군요. 오로닐 경께서 잘 이야기하셨나 봅니다."
"네, 말 그대로네요."
'그래서, 무슨 사이시죠?'라는 린네의 물음에 난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제가 오로닐 경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린네는 오만가지 감정이 깃든 표정을 지었다.
88화. 신성국 페레난드(1)
솔직히 말하자면, 제 4황자, 율시스가 하려는 이 일은, 본인이 겁을 지레 먹고, 뒤로 미뤄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계획이다.
이미 데몬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았고, 실제로 상처까지 입은 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마음이 꺾여 신성국으로 떠난다는 원대한 목표를 포기하는 게 당연할 터.
"페레난드까지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야. 날씨가 좋지 않았으면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텐데 말이야."
그러나 율시스는 하루도 지나기도 전에 결단을 내렸다.
하긴, 제 4황자 위로는 그보다 계승 서열이 높은 3명의 형이 있다.
심지어 제국의 황제 자리는 성별보단 피의 고귀함이 더 중요했으니, 4명의 누나도 그보다 서열이 높은 셈이다.
'안간힘을 써도 황제가 될 수 없는 황자.'
그러니 빠르게 판단을 내린 모양이로군.
지당한 생각이다.
이렇게라도 자신의 공적을 만들어 놔야, 나중에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기에.
혹시 아는가.
여명회나 다른 외부의 도움으로 형과 누나들이 싹 없어질지.
말도 안 되는 상상에 난 피식 웃었다.
그건 그거고.
'...초라하군.'
신성국으로 향하는 이 행렬의 이 마차!
제국의 황자가 타고 있음에도, 행색이 참, 말로 표현하기 민망할 정도다.
마차는 단 둘 뿐이다.
여덟 마리의 잘생긴 말들이 끌지도 않고, 휘황찬란한 금빛이 가득한 마차도 아닌.
마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허름한 마차... 보다는 조금 낫지만, 별다르게 보이지 않는 그것에는 황자와 그의 사용인들이 나눠서 타고 있었다.
황자가 타고 있는 마차와 그의 사용인들이 탄 마차. 이렇게 말이다.
본래 국경도시 베르니든에서 경비를 포함한 사람들을 붙여줄 예정이었으나, 율시스는 한사코 그것을 거절했다.
- '여명회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몰라. 그러니, 나와 일면식이 있는 자들로만 데려가고 싶어.'
나름 타당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열차에서 벌어진 일도 있었으니 말이다.
푸히힝──!
"...윽."
마차의 주변을 호위하며, 말을 타고 이동하던 도중 이상한 소리에 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탑승한 말의 고삐를 잡은 린네가 보였다. 매우 어색하게 타고 있는 꼴이.
"승마는 검성이 가르쳐주지 않았나 보군요. 당신의 오러만큼이나 부족해 보입니다."
"평소에 타던 말이 아니라서 그래요! 헙!"
비꼬는 내 말에 린네는 발끈하다, 옆으로 떨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고삐를 잡아, 중심을 잡는다.
평소에 타던 말이 아니라 그렇다라.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타는 법을 모른다'라고 생각하기로, 그녀 모르게 암묵적 합의를 했다.
"아쉽군요. 철도가 신성국까지 이어졌더라면, 그렇게까지 애를 먹진 않았을 텐데요. 후후."
당연하게도, 제국을 가르는 공명 열차의 철도는 신성국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적국까지 편의를 봐줄 정도로 제국이 무르지 않다.
애초에 이어졌다고 하더라도, 탈 수 있을지도 미지수지만.
"바보 취급하지 말아요! 이 말 성격이 나빠서... 히끅! 그런 것뿐이니까요. 조금만... 악!"
발끈한 린네가 다시 한번, 안장의 위치를 조정하며 허벅지에 힘을 주었지만, 말이 들썩거리며, 그녀를 거부했다.
'감히 너 따위가 나를....'
이란 말의 표정이 잠깐 보인 거 같은데.
착각이겠지.
저렇게까지 힘이 들면, 그냥 마차에 타는 것이 편할 텐데... 아, 황자와 함께 있는 건 더 불편하겠지.
불편한 자리를 피하려는 그 노력에 박수를 보내며 난 팁을 몇 개 주기로 결심했다.
물론 내가 아니라 '유리안'의 경험이 주는 것이지만, 뭐, 생색은 낼 수 있으니.
"그렇게, 힘으로 제압하려니 싫어하는 겁니다."
"그,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이익!"
나의 조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린네는 자기 나름대로 말을 다루려 하지만.
쯧쯧. 안 될 텐데.
"모르는 것 같군요. 일단 자세를 제대로 잡으십쇼. 어깨, 골반, 뒤꿈치를 일직선으로 만드는 것부터."
사실 처음 자세를 잡으려고 하면,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한 탓에 많이들 앞으로 곤두박질친다.
게다가 약간 민망한 자세이기도 하고.
린네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놀리는 것이 아닌지 확인하듯 말이다.
그렇게 싫으면, 하지 말던가.
조언을 넘어가려던 순간, 린네는 내가 말한 자세로 바꾸었다.
"...그리고요?"
뾰로통한 얼굴로 내 말을 수용하는 린네의 태도는 꽤나 볼만했다.
하기 싫은데 무조건할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의 표정.
내심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할 건 해야지.
"허벅지가 아닌, 엉덩이에 집중하는 겁니다."
린네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곧장 행동으로 나섰다.
고작해야 말로 몇 마디 들었을 뿐인데, 린네는 쉽게 승마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이죠?"
평소처럼, 무뚝뚝한 얼굴이었으나 그녀의 눈동자에선 자신만만함이 묻어났다.
확실히, 타고난 신체 능력은 무시 못 할 수준인가 보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는데, 확실히... 힘을 빼니, 고삐를 잡는 게 한결 쉬워졌어요."
"잘 되었군요."
"유리안 경은 말 타는 법을 누구에게 배웠죠?"
나도 모른다. 그냥 이 몸뚱어리가 된 이후 저절로 탈 수 있게 되었다.
"전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건 비단, 말을 타는 방법뿐만이 아니다.
검을 쓰는 방법도.
마나를 다루는 방법도
전부 '유리안'이 되었을 때, 몸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가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잘 타나요?"
여기서 '유리안'이라면 '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라는 얼빠진 대답은 하지 않겠지.
"그게 당신과 저의 차이입니다."
린네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무시하며 말 타는 것에 집중한다.
그때, 율시스가 탄 마차의 창문이 열리더니, 그 사이로 그의 얼굴이 살짝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신성국의 국경이 보이겠네."
"예, 그럴 것 같습니다."
"그 전에 검성이 보내준 신성국의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안 보여?"
율시스의 말대로 저 멀리, 능선을 한 번 살펴보았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합니다."
"아, 그래? 근데 린네 양은 신성국 페레난드에 가본 경험은 있나?"
괜히 멋쩍어진 율시스는 화제를 돌렸다.
"아뇨,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래? 난 경험은 있긴 한데, 어렸을 적이라. 유모의 말에 의하면, 세례를 받기 위해 갔었다고 하더라고. 난 기억에 없지만 말이야."
지금 받으러 가는 '세례'와는 다른 의미의 '세례'이다.
그저 태어났다는 것을 알리는 정도.
지금 그가 받으러 가는 것은 정식적인 세례, 태양신교가 되었다는 증명이다.
작게 웃음을 보이는 율시스는 그 후, 내게로 시선을 옮긴다.
"유리안 경은, 꽤 최근에도 신성국에 다녀온 것으로 아는데, 맞지?"
...금시초문인데?
순간, '내가 언제?'라는 말이 턱밑까지 타고 올라왔으나, 가까스로 참아냈다.
저렇게까지 확신에 차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겠지.
그리 생각하며, 난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표시를 하였다.
"후후, 맞습니다."
"역시! 신성국은 어땠어? 듣자 하니, 신성국의 수도는 제도에 버금갈 정도로 세련된 양식이라고 들었거든!"
율시스는 상당히 기대하는 어투로 나를 쳐다보았다.
스윽.
곁눈질하자, 린네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으나, 어쩐지 내 말을 기다리는 눈치다.
아니, 나도 '가'본 적 없다고!
"큰 창과 얇지만, 여러 개의 기둥. 그리고, 대리석을 이용해 경건한 순백색의 양식은, 예술을 사랑하는 저도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를 플레이했던 시간이 얼마인가.
화면상으로 봤던 모습을 경험을 토대로, 대강 설명할 수 있었다.
"유리안 경에 말을 들으니, 나도 꼭 빨리 보고 싶네. 아! 음식은 어땠어?"
적당히 좀 하라고.
"율시스 전하, 앞에 사람들이 보입니다. 아까 말씀하신 신성국의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때마침 린네의 말이 들리자, 다행히도, 음식에 관한 설명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맛은 게임에서도 안 나온다고.
내심 가슴을 쓸어내린 난 앞을 바라보자, 저 멀리서 무언가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우리를 기다리는 것처럼.
***
능선 근처에 도달하자, 신성국에서 보냈다는 인원들의 옷차림을 확실하게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깔끔한 흰색과 청색으로 이루어진 예복. 보석이 박혀있는 등.
세련되게 꾸미진 않았으나, 차림새에선 어쩐지 이유 모를 경건함이 느껴졌다.
그들 사이로, 말을 끈 인물 하나가 튀어나왔다.
다른 이와 다르게 예복이 아닌, 갑옷을 입고 있는 남자.
허리춤에 찬 순백색의 검집과 함께, 뿜어내는 기백으로 보아 검술에 꽤나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까지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전 백야전성(白夜典聲)에 소속된 프라시온이라고 합니다. 아드라탄 제국의 4황자, 율시스 드 아드라탄 전하."
"응, 수고가 많았지."
"하하, 하지만 더 수고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갈 길이 꽤 험난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제국의 황자를 호위하는 인원들치고는 조촐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군요."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이 말하는 남자의 어투에 불쾌함이 서려 있는 것을 보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하다.
"웃는 처형대, 당신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 몰랐군요. 멍청한 건지, 염치가 없는 건지."
신랄한 비난과 함께 남자는 내게 아는 척을 해왔다.
참, 대단한 인지도가 아닐 수 없다. 국가도 다른데, 알아보는 인물이 이리도 많다니.
"괜찮으시겠습니까? '웃는 처형대'란 이명에 치를 떨고, 원한을 갚고 싶어 하는 이는 제국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죽거리는 입꼬리로 남자는 경고 아닌 경고를 나에게 보냈지만, 난 오히려 능청을 떨었다.
"제 걱정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이곳에 제 목을 위협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후후."
쩔그럭──!
검집을 흔들자, 프라시온을 비롯해 뒤에 있는 이들이 흠칫한다.
"긴장하지 마시길. 전 황자님을 모시고 온 호위대장일 뿐입니다."
이걸로 기선 제압은 됐고.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난 내 신상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제국과의 오랜 전쟁을 끝내고, 휴전에 들어갔으나 서로에 대한 앙금은 여전한 상태.
그럼에도, 신성국은 제국과의 화평을 도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종교'에 의한 화평.
'태양신교'를 제국 내에 널리 퍼트리려는 속셈이다. 그런 원대한 계획의 시작인 '율시스'와 그 외교단들을 건드리는 것은 멍청한 짓일 터.
'문제는 이 녀석이 왔으니, 무슨 속셈이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는 건데.'
난 눈앞의 남자를 한 번 더 살펴보았다.
종교색이 강해 제정일치(祭政一致)의 특색을 뛴 국가, 신성국 페레난드에는 제국과 마찬가지로 특수부대 비스무리한 것이 존재한다.
그 이름은 칠위전성(七位典聲).
그들이 수행하는 일은 요인 호위부터 암살까지, 거의 모든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정예 중의 정예이다.
그리고 자신을 백야전성(白夜典聲)이라 소개한 프라시온.
칠위전성 중에서도 호위에 적합한 이들이 속한 곳이다.
'칠위전성은 대신관들 직속이다 보니, 어떤 비밀 명령을 받고 왔는지 알 수 없어.'
그 탓에 오히려, 나도 긴장을 하고, 프라시온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신성국이 원대한 계획을 품고 있다고는 하나, 그 계획에 '개개인의 일탈'까지는 포함되지 않을 테니.
혹여나 벌어질 일에 주의하는 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신성국까지 남은 시간은 저희가 호위하도록 하죠."
프라시온은 나에게 보내던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고, 말을 신성국 쪽으로 돌렸다.
***
프라시온이 호위대에 합류하자, 이제 신성국 페레난드에 가까워진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순백색의 구조물, 대리석을 위주로 사용해 경건함이 느껴지는 건물 양식.
페레난드를 대표하는 것들이 다시 한번,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 덕에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를 플레이했을 때의 향수가 느껴질 것이라 난 예상했지만.
그것보다 먼저 난 '그'를 만날 것 같다는 추측에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검성.'
나를 이 꼴로 만든 발단, 아니 발단까지는 아니더라도, 근본적인 원인과 같은 인물.
'보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어쩐지 복잡한 심정이다.
처음에는 '유리안이 검성과 린네를 죽이는 트레일러'를 보고, 최대한 그 둘과의 접점을 피하려고 했던 나다.
혹여나, 그것대로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선 걱정보단 괘씸함이 앞섰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기에 자기 일도 내팽개치고 신성국으로 망명을 했는지 원.
'그놈의 상판이 궁금해 졌... 음?'
말의 고삐를 잡고, 프라시온의 뒤를 따르던 난 두 갈래 길이 나온 것을 확인했다.
지금 이 길은 나도 알고 있다.
게임을 플레이했을 때, '검성'이 신성국으로 향할 때 겪는 첫 선택이니 말이다.
'왼쪽과 오른쪽, 모두 베르니든의 국경으로 통하는 건 똑같지만.'
왼쪽이 포장된 도로.
오른쪽은 포장되지 않은 도로.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그리고 뒤에 뭔가 있었던 거 같은데.
그렇다면, 포장된 도로 쪽으로 가는 것이 당연지사다. 말뿐이라면 상관없지만, 이쪽은 마차도 있으니 말이다.
"오른쪽으로."
그런 내 생각과는 다르게 프라시온은 당연하다는 듯 대열을 오른쪽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오른쪽 도로가 잘 닦여져 있었으니.
왼쪽은 아직 완공되지 않았는지, 울퉁불퉁한 모습이 보였다.
"기다리십시오."
"뭡니까? 유리안 경."
프라시온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본다.
"그쪽은 포장된 도로가 아닌지라, 마차로 가기엔 어려울 것 같군요."
나는 생각한 것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친다.
"이곳의 지리는 저희가 더 잘 압니다. 유리안 경, 당신은 신성국에 오는 것이 '처음'일 텐데요?"
'살인자 따위가 뭘 아냐,'라는 눈빛을 보낸 그에게 난 그저 따뜻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그래 처음이지.
하지만 난 안 단다. 그곳으로 가면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를. 후후.
내 기억으로는 유리안이 신성국에 들리는 것은 훨씬 이후의 내용.
프라시온이 말하는, 지금은 '처음'이 맞다.
하지만 난 이곳을 수백 번, 수천 번 방문했었다.
"네. '공식'적으로는 그렇지요."
완만하게 휜 눈과 위로 올라간 입꼬리가 오늘따라 유독 마음에 든다.
허를 찔린 프라시온은 내 말을 곱씹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그래. 난 '비공식'적으로 여기에 와봤다는 말이다.
너보다 내가, 이곳 지리는 더 잘 알 거다.
89화. 신성국 페레난드(2)
'공식적으로는 없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칠위전성(七位典聲)의 프라시온은 처음에는 감이 잡히지 않았으나, 국경이 가까워질수록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다.
'비공식적으로는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신성국의 이익을 위해 일곱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칠위전성(七位典聲)엔 온갖 더러운 일들도 수행하는 자들도 존재한다.
그 '더러운 일'이란 저자가 말 한대로, '비공식'적인 일이다.
경쟁국의 요인을 암살하거나, 타국의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일들.
신성(神聖)을 이정표로 삼는 나라치곤 더럽다 손가락질할 수 있으나, 국(國)을 이끌어 가는 이들에겐 그런 부정적인 부분은 다소 감수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대체 언제지?'
프라시온은 유리안의 말을 곱씹어 본다.
단순히,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었다.
신성국의 위상에 겁을 먹어 허세를 부리는 자들은 지금까지 많이 봤으니.
그러나, 그는 '웃는 처형대'다.
제국 소속의 인물임에도 신성국에 그 악명을 끼친 그가 고작 허세를 부리기 위해 저런 말을 꺼냈을까?
'아니, 확실해.'
프라시온은 그가 신성국으로 첩보 활동을 왔었다고 짐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방금 두 갈래 길에서 그런 확신을 보이지 못했을 테니까.
"프라시온 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신성국의 국경 수비대가 프라시온을 알아보고는 가까이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한 번 흘겨본 프라시온은 입을 열었다.
"대신관님들에게 전해라."
비수와 같은 눈으로 그는 국경 수비대를 훑어보았다.
뒤늦은 조사지만, 유리안의 첩보 활동이 확실시된다면 '너희들은 내 손에 죽으리라.' 그리 생각한 그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제국에서 보낸 사절단, 그 호위대장이 신성국에서 첩보 활동을 했을 수도 있었다고."
"알겠습니다!"
멀어지는 수비대원의 등을 본 뒤, 프라시온은 다시금 제국의 사절단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정확히는 행렬의 앞에서 말의 고삐를 쥐고 있는 '유리안'에게로 향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꺼낸 것이냐.'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프라시온은 유리안을 바라보았지만, 눈동자가 보이지 않은 실눈은 그의 속내를 쉬이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종전 협정이 아닌 휴전이 진행 중인 적국에 발을 들이면서도, 능청스러운 미소를 입에 머금고 있음에도, 그에게서 그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
신성국, 페레난드의 수도이자 태양신 '솔라룬'을 믿고 있는 태양신교의 총본산, 아르테아.
그곳의 분위기를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바로 '경건함'이다.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네요. 이런 광경은 본 적이 없어요."
아르테아에 입성한 린네가 말의 고삐를 한 번 쥐어 잡더니 중얼거렸다. 나도 나름, 이해가 갔다.
남녀노소, 어린아이, 노인 할 것 없이 솔라룬의 석상에 기도를 드리는 모습은 사뭇 가슴 속에 있는 무언가를 자극했으니 말이다.
"태양신교의 총본산이니 말이야. 다른 곳은 몰라도, 아르테아는 이런 분위기일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막상 보니, 생소한 기분이 드네."
마차를 타고 있던 율시스도 중얼거렸다.
황족으로서 많은 것을 경험한 그도 지금 이 광경은 낯선 모양이다.
"이 도로를 쭉 따라가면, 목적지인 '제의성'에 도달할 겁니다. 아마, 신성국의 최고위 인사들이 율시스 전하를 마중하러 나와 있겠죠."
"...많이 익숙한 눈치네요. 정말로 신성국에 온 적이 있었나 보군요."
린네의 물음에 난 속이야 어떻든,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와본 사실도 없고, '플레이'해본 경험만 있으니.
에이 모르겠다, 그냥 와본 거로 치자.
잘 다듬어진 도로를 지날수록, 사람들의 인기척은 적어지고, 반비례하듯 건물의 웅장함은 돋보이기 시작했다.
그 정점에 달한 것은 아르테아의 심장부, 제의성(祭儀城)으로 향하는 돌다리를 지날 때다.
후두두두.
수많은 백색의 비둘기가 구름을 가르며, 드높은 성벽을 타고 오르자, 그것에 감탄한 린네가 탄식을 내뱉는다.
"와...."
"확실히, 유리안 경이 말한 대로 색다른 매력이 있는 건물 양식들이야. 없던 신앙심도 생길 정도라니까?"
율시스도 그 광경에 탄복해 한 마디 내뱉었다.
그런 말을 해도 되냐, 그 신앙심을 땡겨, 쓰러 온 놈이 말이야.
물론 나도 놀라긴 했다.
작은 모니터 화면으로 보던 거와 실제로 눈으로 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
큼큼. 뭐, 좀 괜찮네.
'유리안'이 입 벌려 놀란,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없으니, 최대한 속으로 삭여야 했다.
성에 가까워지자, 이번에는 위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양식에 어울리는 백색의 갑옷을 입은 자들인데, 우리를 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
"눈길이 좋지 않아."
"지금은 휴전했지만, 한때 전쟁까지 불사했던 사이잖습니까."
"하하, 맞아. 우린 불청객이지."
"하지만 이렇게나 높게 성벽을 쌓아 올린 모습은 보기 좋지 않습니까? 마치 저희 제국의 위상이 두려워, 겁을 먹은 것 같습니다."
시답지 않은 내 농담에 린네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라는 의도인 것 같은데.
물론 나도 안다.
이 높은 성벽은 제국과의 전쟁 이전에 이미 지어진 것이라는 걸.
참 삭막하네. 농담이잖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하지만 율시스는 작게 웃었다.
이런 농담도 '유리안'이 하면 마치 진실 같이 느껴진다나 뭐라나.
이놈의 상판대기는 보증수표 같은 거니까.
***
"이곳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율시스 황자 전하. 전 페레난드의 대신관 중 하나인, '가롯'이라고 합니다."
제의성, 깊숙한 곳에 다다르자 12명의 대신관 중 한 명인 가롯이 우리를 마중 나왔다.
어지간한 일로 움직이지 않던 놈들인데, 그래도 제국의 황자가 왔다고 엉덩이를 뗀 모양이다.
그들은 프라시온과 함께 있던 사제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으나, 그보다는 조금 더 화려한 무늬가 박혀있는 예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가롯 대신관."
"하하,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아드라탄 제국의 황자 전하는 그 이름에 걸맞게 기품이 넘치는 분이시군요."
신성국의 예법에 따라 인사를 건넨 황자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예의를 차린 가롯은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 길을 헤매지는 않으셨습니까? 이 제의성은 꽤나 구조가 복잡한 탓에 처음 발길을 들이는 분들은 길을 헤매기 십상인데 말입니다."
"제 호위대장이 길을 찾는 것에 능숙해서 다행이지, 뭡니까."
성큼 걸음으로 다가온 가롯은 율시스의 말에 내게로 힐끔 시선을 옮겼다.
분명 입은 웃고는 있지만, 가롯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길 찾기에 능숙한 사람이라, 부럽군요. 그런 인재가 저희 신성국에도 있었으면 좋았거늘."
표독스러운 눈빛.
그야말로, '불청객'을 보는 시선 그 자체다.
실질적으로 내뱉지는 않았으나, 가롯은 내게 질문하는 중이다.
'비공식적으로 신성국에 와본 적이 있느냐.'
그것도 '이 제의성에 들른 적이 있느냐.'라고 말이지.
프라시온에게 벌써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모양이다.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유리안 경. 그 고귀한 검성의 수제자들 중 한 명이시라고요."
뻔히 유리안과 검성의 관계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굳이 입 밖으로 그 사실을 꺼낸다.
그렇다고 여기서 행패를 부릴 수는 없지.
"예, 저도 만나서 영광입니다. 가롯 대신관."
그의 눈빛이 살짝 빛이 났다, 사라진다.
"그럼, 옆에 있는 저 여성분은 다른 수제자이신 린네 양이겠군요."
가롯의 시선이 내 옆에 있는 린네에게로 향하자, 그녀도 가볍게 인사를 했다.
"하이든 라이히 님께선 제자 복이 많으시군요. 아니, 워낙 뛰어난 분이다 보니 좋은 인재가 모이는 것일 수도 있겠군요."
윗대가리들의 말은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된다. 항상 정치적인 성향과 비꼼의 달인들이었으니.
지금 눈웃음 짓는 가롯은 실상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검성이 신성국으로 망명했으니, 너희 수준의 제자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이제 다시 제국과 싸울 날이 머지않았다.'
하지만 우리 중에 그것을 눈치챌 사람은…, 안타깝게도 없다.
그저 뿌듯한 미소만 짓고들 있다.
"그럼, 율시스 전하. 세례의 절차에 관해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인사말을 뒤로 하고, 가롯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해 운을 뛰었다.
"율시스 전하께서 제국에 존재하는 태양신교 교도들을 집결하기 위해서, 신성국에 찾아와 직접 세례를 받으시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역시나....
멍청이가 아닌 이상, 신성국도 율시스의 상황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황위 계승권과 거리가 먼 제 4황자.
그가 굳이 위험한 신성국까지 발품을 판 이유가 제국 내부에 존재하는 '태양신교'의 교도들을 자신에게로 집결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을.
"하지만, 그런 의도와 상관없이 세례의 절차는 정식적으로 밟았으면 하는 게 저희의 소관인지라."
"알겠습니다. 저 또한 의례를 따르기 위해, 이곳에 왔으니까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 바로 진행하지요."
가롯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앞장서자, 율시스가 그의 뒤를 따라간다.
호위 대상이 움직이자, 나와 린네도 뒤따라가려는 찰나.
"아, 세례는 율시스 전하, 혼자 받으셔야 하니, 나머지 두 분은 대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가롯이 나와 린네의 동행을 거절한 것이다.
"그럴 수 없습니다. 세례가 중요한 것이긴 하나, 제국의 황자 전하이십니다. 제가 호위를 맡은지라 그러기는 어렵겠군요."
당연히 가롯의 말을 거절했다.
이미 열차에서 사건이 한 번 터졌으니, 이곳도 안전하리라 생각되지 않았다.
"역시! 듣던 대로, 유리안 경께선 충성심이 굉장하시군요."
충성심은 개뿔!
무슨 일이 터지면, 내 목이 위험하다.
"하지만, 저희의 룰을 따르셔야죠. 신성국에 입국한 순간, 당신들의 목숨은 파리목숨과 같다고 인지하셔야 할 겁니다."
가롯은 경고를 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진지한 표정으로 말이다.
"아니! 저흰 제국의 외교단입니다! 그에 맞는 대우를...."
격분하는 린네를 난 손을 올려 제지했다.
그의 말대로다.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제국인인 우리의 목숨은 자연스럽게 신성국이 관장하게 되었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국가를 상대로 이길 수 없을 테니.
짤그락──!
손이 움직이다, 검집에 닿아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이 경건한 곳에서 이런 소리가 울리는 건 좋지 않겠지.
소리 나지 않게 검집을 잡은 난 어떤 말로 이 상황을 타개할지 고민에 빠진다.
"파리목숨이라... 후후."
시간을 벌기 위해 말을 내뱉고 작게 웃음을 짓던 도중이었다.
"하, 하하 농담입니다. 이번만큼은 제 재량으로 여러분들도 참관할 수 있도록 해보지요."
응?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진땀을 흘리는 가롯의 얼굴을 보며 난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 감사합니다, 가롯 대신관."
***
쨍강──!
황자의 세례를 끝마치고,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선 가롯은 책상 위의 촛대를 손으로 밀쳐버렸다.
"지금 검성은 어디에 있나?"
독백하듯, 중얼거리며 가롯은 방 안에 있던 신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고독전의 상태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일 겁니다."
"후우...."
신관의 말을 들은 가롯은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딴 정신 나간 곳을 만드는 것도 모자라, 하루가 멀다하고 관리하러 가는 꼴을 보니, 검성의 위상도 땅에 떨어진 게 맞나보군."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을 하던 가롯은 의자에 몸을 뉘었다.
"빌어먹을 놈."
그러자, 그의 머릿속엔 조금 전 말을 섞었던 '실눈'의 처형대의 모습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괜스레 검집을 잡는 폼이, 마치 동행을 허락하지 않으면 베겠다는 의미.
- '파리목숨이라... 후후.'
게다가 자신의 경고를 받아치는 유리안의 말투는 마치 '가소롭다'라고 반문하는 것 같았다.
- '너의 생각은 알고 있다.'
- ''비공식'적으로 이곳에 들렸다고 말한 이유를 생각해 봐라.'
유리안이 하지도 않은 말조차 귓가 울리는 듯하다.
'쯧....'
가롯은 속으로 혀를 한 번 찼다.
다른 대신관들이 제국의 황자를 들이는 것을 반대했으나, 가롯은 이번 일을 강행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설마, 알고 있었나?'
황자를 세뇌해 자신의 발아래에 두고,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위해서 성위청(聖位廳)에 '성물(聖物)'도 준비해둔 상태.
세례가 진행할 때, 조용히 일을 진행할 생각이었으나 유리안의 동행으로 일이 틀어져 버렸다.
'알고 있으니,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겠지.'
가롯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롯 대신관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례식에서 제국의 황자에게 손을 댈 수 없었으니, 더 이상 방법이 없을 수도...."
"현재 다른 대신관 님들의 관심도 이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서둘러 정리하지 않는다면, 성위청에서 성물을 꺼낸 것을 다른 대신관님들이 알아챌 수도 있습니다."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하는 신관들을 한 번씩 훑어본 가롯은 결단을 내렸다.
"흑위, 셋을 소집해라."
칠위전성(七位典聲) 중, 어두운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집단, 흑위(黑僞)를 부르라는 말에 신관들은 화들짝 놀랐다.
"그, 그들을 부른다면 피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가롯 님!"
"혹여나, 저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외교적인 문제가...."
"괜찮다. 어차피, 율시스를 세뇌한다면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 있어."
"나머지 둘은...."
신관의 물음에 가롯은 소름끼치는 미소를 입에 담았다.
"제국으로 귀국 도중, 데몬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 정도면 납득할 수 있는 시나리오겠지."
인류의 적이라 불리는 데몬.
어느 한 외교단이 귀국하는 도중 데몬의 습격을 받아 전멸하는 경우는 아주 흔하지 않은가?
신성국 영토 밖에서 죽어준다면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니,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모든 가정을 예상한 가롯은 한가득 미소를 지었다.
음흉하고, 비열한 미소를.
90화. 검성(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