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 40-50

40화. 아카데미의 불청객(1)

썩은 뿌리를 도려내어 정리한 뒤, 다시 난초를 돌보고 있는 태연스러운 유리안을 보고 라즈롯은 생각에 잠겼다.

'...저 성격 나쁜 괴물이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자들을 놔둘 리 없어.'

여명회의 일부가 유리안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는 것은 본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성격상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 '난초를 관리할 땐 이런 것도 대비해 뿌리 하나를 외곽 쪽으로 밀어둡니다. 미끼처럼 말이죠.'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에게 향하는 검은 부러뜨리고, 그 검을 쥔 자의 손도, 명줄도 끊어버리는 것이 바로 이 '웃는 처형대'가 아니던가?

'이 김에 여명회에서 자신을 적대하는 세력들을 모두 뿌리 뽑으려는 것이야.'

인정(人情)이 메마른 저 남자라면, 자신의 목숨 정도는 미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꿀꺽.'

유리안의 섬뜩한 심기에 라즈룻은 마른침을 삼켰다.

"볼일은 그걸로 끝입니까?"

생각에 잠긴 라즈롯에게 유리안은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공포에 질린 라즈롯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실눈과 희미한 미소. 라즈롯은 최대한 침착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그, 그 외에도 비서실로부터 '감은 눈'에게 업무를 맡겼습니다. 곧 있을 승전 기념일에 금군 임무를 수행할 대원들을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흠...."

"그것 외에도 아카데미의 검술 교관으로서의 강의와 실전 시험의 보조 임무도 있습니다."

말을 이어가면서도, 라즈롯은 유리안이 금군(禁軍) 임무를 수행할 것이 직감하고 있었다.

"...승전 기념일이라면, 제 스승인 검성 하이든 라이히께서도 얼굴을 비추실 수도 있겠군요."

"예? 아... 예, 그럴 것 같습니다."

파문당하긴 했으나 스승이었던 검성을 만날 수 있는 기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역시 이번 승전 기념일에...."

"아닙니다. 왠지 이번엔 간단한 일을 맡고 싶군요. 저는 아카데미 관련 임무를 받겠습니다. 금군의 역할은 다른 '감은 눈'의 대원에게 맡겨주시길."

"알겠습니다. 그럼... 예?"

전혀 '유리안'스럽지 않은 선택에 당황한 라즈롯은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출세에 미친 유리안이 이런 선택을 할 줄은 몰랐는데.... 설마!'

현재 기습을 모의하는 여명회의 비숍 아래 계급인 '몬시뇰' 일당들을 일제히 소탕하기 위해서.

'웃는 처형대' 유리안은 '출세'를 위해 임무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영악하게도 자신에게 적개심을 드러낸 적대세력들의 '처형장'을 선별한 것이다.

제국의 중요한 기념일인 '승전 기념일'을 위해 황궁은 경비 태세를 강화할 것이고, 그 덕에 아카데미의 경비도 황궁으로 차출될 터.

'그 말은 아카데미의 경비가 평소보다는 허술해진다는 소리야.'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유리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자들이 간과할 리 없다. 분명 유리안이 아카데미 쪽 업무를 수행할 때 기습을 결행할 것이다.

'그리고 유리안은 그걸 노리고 있는 것이고...!'

승전 기념일을 이용해 자기 적을 숙청할 생각을 한다니, 그 사실에 라즈롯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못 들었습니까? 아카데미의 임무를 맡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라즈롯은 다시금 침을 꿀꺽 넘겼다.

"아, 알겠습니다. 오드윈 단장님께 전달하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바람이 불 것을 직감한 그는 이 폭풍우가 빨리 지나가기를 속으로 조용히 빌었다.

***

"하, 하하...."

주름이 자글거리는 이마에 송골 솟은 땀이 맺힌 부교감, 알롬 초르니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바이엘 아카데미 본관의 복도를 함께 걷던 난 그의 행동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감은 눈'에게 강의나 교관직을 맡아줄 사람을 부탁하기는 했지만...."

아카데미의 부교감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치고는 어쩐지 움츠러든 웃음.

물론 나 때문이겠지.

"유리안 경이 직접 와주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곧 있을 승전 기념일을 대비해 따로 업무를 맡을 것이라 예상했지요.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말입니다. 껄껄."

하긴 알롬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흔히 세간에 알려진 '유리안'이라면, 황실에 조금이라도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승전 기념일의 업무를 선택했겠지.

그렇지만──.

'검성 하이든 라이히가 참가할 수도 있잖아.'

그런 의미로 난 이번 '감은 눈'의 업무로 황실 쪽 일이 아닌 바이엘 아카데미의 임무를 선택했다.

"전 일반 단원 중 한 명이 올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유리안 경이 직접 와주시니 정말 영광입니다."

"후후, 별말씀을요."

유리안은 가볍게 웃으며 별거 아니라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유리안 경?"

난 알롬 부교감의 근심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뭐가 말입니까?"

"'감은 눈'에 요청한 업무 중에는 그... 이번에 실기 시험을 보는 아카데미 학생들에 대한 특별 강의가 있습니다만...."

뭐?

알롬의 말에 당황한 난 되물으려 했으나, 그랬다간 임무 내용도 제대로 숙지 못한 얼간이로 오해할까 가까스로 참았다.

헛기침으로 속마음을 진정시킨 뒤 입을 열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대답을 들은 알롬의 표정엔 화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전전긍긍했던 모습은 내가 강의를 거부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랬던 것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은 들은 난 조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얘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검성'을 피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아카데미 실기 시험의 교관 임무라고 해봐야 저번에 있던 '감은 눈' 입단 테스트보단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말에 벌써 머리가 아찔해졌다.

"그럼 그 특별 강의는 언제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그래도 완전 불가능한 일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던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알롬 부교감에게 일정을 물어봤다.

"저..., 오늘... 그것 때문에 찾아오신 것 아니셨습니까?"

X됐다.

알롬의 대답을 들은 난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

아드라탄 제국에서도 최고라 불리는 교육 기관인 만큼, 바이엘 아카데미의 커리큘럼은 살기등등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힘들었다.

그런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특별 강의'란 살벌한 커리큘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작은 휴식 시간.

그 덕에 린네는 오랜만에 화기애애한 강의실의 공기를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린네, 왔구나? 초청 강사는 아직 안 왔어."

린네보다 먼저 도착한 동급생 파루나가 아는 척을 해왔다. 그 모습에 린네는 적당히 인사를 받아준 뒤, 늘어지듯 책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피곤해.'

밀물처럼 몰려오는 피곤함.

어제도, 그제도 늦게까지 검술을 훈련하는 바람에 그녀는 녹초가 된 상태다.

평소 아카데미의 커리큘럼을 생각한다면 이런 강행군을 하지 않았겠으나, 오늘은 특별 강의가 있는 날!

"특별 강의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맞아, 맞아. 딱히 성적에 큰 지장도 안 주고, 초청 강사가 떠드는 것만 잠자코 들어주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야."

"작년에 선배한테 들었는데, 기사 지망과는 대부분 '감은 눈' 사람을 초청한다더라."

"그럼 평민이겠네?"

"평민 주제에 무슨 강의야, 푸하핫!"

다른 수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거나 거의 없기에 초청 강사에게는 미안하지만, 린네는 이 시간을 휴식에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초청 강사님이 오셨어!"

바로 옆에 앉은 파루나의 목소리와 함께 린네의 눈에도 '초청 강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 야, 잠깐 저 사람...."

"뭔데? 어...?"

대화 소리로 웅성거리던 강의실엔 도미노가 넘어가듯, 정숙함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인물이 교단에 올라가고 있었다.

'...저 사람이 대체 왜...?'

말을 잃은 건 린네도 마찬가지였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눈꺼풀을 무겁게 누르던 피곤함은 초청 강사의 얼굴을 보자, 눈 녹듯 사라졌다.

"초청 강사인 '감은 눈'의 대원,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입니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악연이라면 악연이라 불러도 좋을 남자.

그의 말 한마디에 모든 학생의 시선이 쏠렸다. 동시에 잔잔한 호수처럼 조용해진 강의실은 조금 전까지의 소란스러움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길. 오늘은 곧 있을 실기 시험의 교관으로서 간단하게 강의하기 위해 왔으니까요."

유리안은 싱긋 웃으며 강당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친 학생 몇은 흠칫 놀라더니 침을 삼켰다.

그의 행동은 마치 이런 교단에 올라서는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여유가 느껴졌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린네의 머릿속에선 계속해서 의문이 떠돌아다녔다.

'...뭘 얻을 게 있다고.'

대체 자기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실기 시험의 교관을 지원한 것일까?

"오늘 이 특별 강의에서 하고 싶은 말은... 사실 별로 없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린네는 알 수 없는 유리안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감은 눈' 업무의 일부분이긴 하겠지만 초청받은 강사가 자신의 교육이 별 것 없다는 말을 하다니.

"여러분들이 검술을 배우는 이유는 뭡니까?"

교실의 경직된 공기와 학생들의 움츠러든 표정들.

유리안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절대 긍정적이라 말할 수 없는 분위기.

'...멋쩍군.'

비록 이런 시선들이 낯선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이 유리안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이 어정쩡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해소하고자 생각하고 생각한 질문이었지만.

"...콜록, 콜록."

돌아오는 것은 허망한 기침 소리뿐, 어떠한 학생들도 유리안의 질문에 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나 무안할 줄이야.

그래도 유리안은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은 채, 강의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유리안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요. 그렇다면 린네 양에게 묻죠."

"...네?"

갑작스레 이름을 호출당한 린네는 깜짝 놀란 얼굴로 유리안을 쳐다보았다.

"린네 양이 검술을 배우는 이유는 뭡니까?"

"그걸 왜 저...."

평소처럼 유리안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려던 린네는 말을 잇던 도중 흠칫 멈췄다.

현재 그는 강.사.

자신은 아카데미의 일개 학.생.

처지가 이렇다 보니 평소보다는 부드러운 어투로 린네는 입을 열었다.

"...유리안 경께서는 왜 검술을 갈고 닦으셨나요?"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던 그녀는 도리어 유리안에게 되물었다.

누군가에게는 쉽게 답할 수도 있는 질문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겐 사생활이 담긴 민감한 주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린네는 되물은 것이다. 네가 대답해보라, 라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출세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교단에 선 남자는 평범과는 거리가 먼 뻔뻔한 남자였다.

 

 

 

 

 

 

 

 

41화. 아카데미의 불청객(2)

'보는 눈이 이렇게나 많은데, 입에 발린 소리라도 황실을 위해서란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니야?'

린네는 유리안의 담백한 말투에 도리어 혀를 내둘렀다.

이 얼마나 솔직한, 아니 철면피와 같은 남자인가.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린네 양께선 무엇을 위해 검술을 갈고 닦으셨습니까?"

다시금 대답하기 껄끄러운 질문이 자신에게로 주어지자, 린네는 살짝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나 주변의 시선이 하나둘 그녀에게 향하자, 그녀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심신을 단련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복수를 위해서.

그래도 지금 내뱉은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으니 그녀의 얼굴색은 변하지 않았다.

"나쁘지 않군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원동력이 될 수 있으니까요."

린네의 말을 들은 뒤, 유리안은 다시금 강의를 재개했다.

"사실 이 주제를 꺼낸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크지 않지만,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두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잘 갈고 닦은 검술이란 그것을 쌓아 올린 시간만큼이나 고치기 힘들기 마련."

그가 손을 움직여 허리춤에 가져가자, 학생들은 긴장한 표정을 보이며 심플한 모양의 검집으로 시선이 향했다.

"초청 강사로 특별 강의를 맡은 지금, 얼마 없는 시간으로 여러분들의 검술을 손봐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겠죠."

검술은 쌓아 올리는 것.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 있더라도, 그것이 빛을 보기 위해선 오랜 시간 검술에 매진해야만 한다.

참으로 지당한 말이다.

저런 옳은 말이 유리안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기가 찼으나, 린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검술이 아닌, 오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죠."

그의 입에서 '오러'라는 말이 나오자, 고요했던 강의실에 조그마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황실에 속한 검사 중에서 오러 활용도로만 따진다면 한 손가락에 드는 강자.

그런 강자가 자신의 노하우를 푼다는 사실에 모두 적잖게 당황한 것이다.

"인간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마나혈. 그것을 활용해 신체를 강화하거나, 도구를 강화하는 것이 '오러'의 활용법 중 하나입니다."

누구나 알 법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 화자(話者)는 다름 아닌 유리안이다.

그가 늘어놓는 말들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학생들은 귀를 기울였다.

'뭐, 다 아는 거잖아.'

유리안의 식상한 말에 심드렁해질 찰나.

"추가로 이 '오러'라는 것은 상대방과 자신의 격차를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만들어주죠."

철그럭──!

유리안은 허리춤에 찬 검집을 손으로 쥐고 오러를 주입한 채 앞으로 내밀었다.

'와...이쁘다.'

확실히 '월광검'이라 불리는 그의 검은 화려하기로 정평이 난 오러들 중에서도 특출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지금 제 오러의 색이 어떤지 보이십니까?"

현재 유리안은 검집뿐만이 아니라 오른손에도 희미하게 '오러'를 두른 상태였다.

정말 집중하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아마 이 강의실에 모인 대부분 학생은 저 오른손에 두른 희미한 '오러'를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상대방과 자신의 격차를 알 수 있다는 말은 이걸 말하는 거구나?'

유리안이 이 강의를 통해서 알려주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하자, 린네는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슨 색이죠?"

유리안의 질문에 학생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회, 회색입니다."

"달빛에 가까운 회색입니다."

"은색... 아닙니까?"

린네도 다른 학생들처럼 '첫 번째 오러'의 색을 이야기했다.

"은색."

그리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옅은 코발트색입니다."

다른 학생들보다 한 마디 덧붙인 린네.

그녀의 말에 주변의 시선은 유리안에게서 린네에게로 옮겨졌다.

"유리안 경께선 지금 두 개의 오러를 사용하셨습니다. 검집에는 은색의 오러를, 오른손엔 코발트색의 오러를. 맞죠?"

"예, 맞습니다. 린네 양."

유리안의 긍정에 린네는 어깨를 살짝 으쓱거렸다. 그가 숨기려던 '두 번째 오러'를 자신은 확실하게 포착했다.

그 말은 즉, 유리안과의 간극(間隙)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이전 대장간에서 유리안이 남긴 검흔(劍痕)에 감탄한 이후, 린네는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 후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유리안과의 격차를 어느 정도──.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이어지는 담담한 유리안의 말에 린네는 동공이 커졌다.

그의 등 뒤로 일렁거리는 오러.

그것은 조금 전까지 보던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아닌, 명백한 '세 번째 오러'였다.

'말도 안....'

저 '세 번째'는 눈치채지 못했다. 대체 언제부터 저 큼지막한 오러를 숨겨두고 있었지?

"이 '세 번째 오러'를 눈치챈 학생은 없군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그의 실눈엔 어떠한 희로애락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이 사실이 당연하다는 듯 말을 나열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 상대방과의 격의 차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인지하지 못할 '오러'를 낼 수 있다는 건, 그 상대에게 웬만해선 질 일이 없다는 소리이니까요."

저 남자와의 격차를 조금이라도 메웠다는 그 알량한 생각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그녀는 실감했다.

***

"여, 역시 대단하시구려 유리안 경."

특별 강의를 마치고, 강의실을 빠져나오자 마주친 부교감 알롬 초르니. 그의 얼굴에는 밝은 웃음이 머물고 있었다.

그나저나 강의실 밖에서 보기라도 했나?

어떻게 강의가 끝나자마자 나타났네.

"학생들이 특별 강의를 이렇게나 열성적으로 들을 줄을 상상도 못 했습니다! 유리안 경이 강의를 한다길래 조금 미심쩍은 부분... 크흠!"

신이 난 듯, 떠들던 알롬은 자신의 말실수에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뭐,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다름 아닌 그 '유리안'이 남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심지어 나도 나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는데, 이런 반응은 당연하지.'

다행인 것은 강의를 끝마쳤을 때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적어도 실패는 한 것 같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업무 수행 능력에 의구심을 품을 사람은 없겠지.

"이, 이 기세로 실기 시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리안 경."

멋쩍은 웃음을 지은 알롬은 그 말을 끝으로 종종걸음으로 아카데미 안쪽으로 향했다. 나도 슬슬 귀가해도 좋겠군.

그런 생각을 품고, 발걸음을 옮기려던 도중 꽤나 정감이 가는 아카데미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토록 정갈하고 세밀하게 꾸며놓은 풍경은 분명 낯설어야만 했다. 그러나 게임을 플레이했던 기억 덕분인지 어쩐지 정감이 간다.

- '그래, 검은 기사가 당신이었군요. 좌천된 영웅, 낙성(落星) 하이든 라이히.'

윽.

그렇게 생각에 잠겨 추억을 곱씹고 있던 와중, 내 머릿속엔 트레일러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의 나, '유리안'이 주인공인 하이든 라이히의 목에 검을 들이밀던 장면이 말이다.

'아마, 이번엔 그렇게 되지 않겠지.'

그리 생각하며, 나는 한 번 더 아카데미의 풍경을 눈으로 살펴보았다. 향수를 일으키기엔 충분한 경치다.

'좀만 둘러볼까?'

그 탓일까? 문득 변덕이 생겼다.

***

"...왜 이렇게 안 돌아오는 거냐?"

불만이 그득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던 요슈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현재 그가 앉아 있는 소파 주변은 괴상망측한 미술품들이 즐비했다.

도무지 형태를 알 수 없는 대리석상.

눈이 달린 태양이 보리밭을 비추는 괴상한 그림.

자신이 통속적인 예술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요슈아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예술품들이었다.

'...그리고 난초는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응접실 주변에 있는 수많은 양의 화분.

이 저택의 주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나 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도, 도련님, 말씀하신 결계를 설치해두었습니다. 며, 명령만 내리신다면 즈, 즉시, 마나의 흐름을 막는 결계를 펼칠 수 있을 겁니다."

장정 하나가 요슈아에게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크라이파트 가문에 소속된 기사 중 한 명.

알파스처럼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위압적인 실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으나, 어디 내놔도 부족함이 없는 강함을 갖춘 기사였지만.

"두려워?"

그런 기사가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보이자, 요슈아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물었다.

"예?"

"유리안이 두렵냐고."

요슈아의 물음에 기사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현재 이곳, 유리안의 저택에 있는 병력들은 저를 포함해 이각 데몬을 사냥한 경험이 있는 기사 둘, 크라이파트 가문의 병사 6명과 도련님. 그리고 마나의 흐름을 막는 결계와 3위계, '켄서' 등급의 마법사 한 명입니다."

"그래서?"

"일개 기사 한 명을 처치하기 위해 투입된 인원치고는 많지만, 그자가 '유리안'이라고 한다면 절대 부족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계속 말해봐.

요슈아는 기사를 계속 응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저택의 분위기도 이상합니다. 도련님... 늦은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사용인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른 시간에 퇴근한 모양이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유리안이 저희가 올 것을 예측하고...."

철썩──!

요슈아는 불안에 떠는 기사의 뺨을 후려갈겼다.

고개가 돌아간 기사는 잠시 멍한 눈이 되더니, 이윽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겁쟁이 새끼! 그렇게 겁이 나? 그러고도 네가 크라이파트 가문의 기사냐?"

"...죄송합니다. 도련님."

"어차피 너희들이 직접 싸울 일은 없어. 내가 명령하면 결계나 제대로 설치해!"

"알겠습니다."

뺨 맞은 기사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결계를 설치하기 위해 돌아섰다.

명색이 기사라는 것이 저렇게나 겁이 많아서 어디다 써먹겠단 말인가.

애초에 오러를 중점적으로 사용하는 유리안은 결계가 발동된다면 제대로 된 힘을 쓰지도 못할 터.

그렇게 된다면──.

"'그것'의 힘을 얻은 내가 이기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말이야."

요슈아 옆자리에 있는 보관함.

거기에 담긴 물건이 미심쩍은 기운을 내뿜는 것은 확실했으나, '그것'을 본 순간 요슈아는 알 수 없는 자신감에 휩싸였다.

'이것'만 사용한다면, 유리안을 이길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

"요슈아 도련님!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후후."

이제 복수를 이행할 시간이 다가왔다.

요슈아는 이죽거리며 웃었다

***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한 저택.

늦은 밤부턴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이곳에 별빛과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바스락──!

그런 저택 주변에선 낯선 인기척이 일기 시작했다.

수풀을 가르고 나타난 남자들.

"지금 시간이면 유리안도 슬슬 잠을 청할 시간이겠지."

그들 중 가장 앞에 선 남자의 이름은 윌리엄 하이란스다.

"아무리 교단의 아크 비숍이라고는 하지만, 그분께서 유리안에게 내린 처우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규율을 위반하면서도 그 뻔뻔함을 유지하다니."

"게다가 시작부터 비숍의 직위를 하사받은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인물들은 모두 여명회에 속해 있으면서 사적으로 유리안에게 앙금이 있는 자들.

"그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오늘로써 끝이다. 유리안의 숨통을 끊음으로써 말이지."

윌리엄은 한마음 한뜻으로 모인 동료들을 보며,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니 녀석이 하이란스 가문을 심판하지만 않았어도... 난 4위계에 도달할 수 있었고, 마탑에서도 쫓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웃는 처형대'란 거대한 악명을 가진 유리안의 목을 직접 칠 생각에 윌리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크흠."

이런 격한 감정에 침착함을 잊을 뻔했군.

나름 마탑에서도 인정받았던 마법사 윌리엄은 헛기침하며 들뜬 자신의 감정을 진정시켰다.

일류 마법사라면 평정심을 잃은 행동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저택에 침입하겠다. 모두 내게로 모이도록."

고조된 감정을 진정시킨 윌리엄이 조용히 주문을 읊조리자, 교단원들이 그의 주변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윌리엄.

얼마 지나지 않아 지팡이 끝의 보석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지팡이를 기준으로 반경 5M. 소리와 기척을 어느 정도 차단했으니, 우리의 인기척으로 유리안이 잠에서 깨는 일은 없을 거다."

"...오."

"대단합니다, 역시 윌리엄 경!"

자신이 독자적으로 만든 고유 마법, '불완전한 정숙'.

저택에 침입하기 위해 배운 마법은 아니었으나 이런 식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윌리엄은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시작하지."

윌리엄과 교단원들은 마법으로 잠긴 문을 연 뒤 안으로 들어서자, 쥐 죽은 듯 조용한 저택의 내부가 그들을 반겼다.

미리 유리안의 저택에 대해 조사한 결과,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해가 지기 전 모두 귀가를 한다.

그 말은 즉, 지금 이 저택엔 유리안 혼자만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꿀꺽."

윌리엄을 포함한 교단원들은 저택에 발을 들인 순간, 숨 막힐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그런 두려운 분위기를 물리치며, 윌리엄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목적지는 유리안이 잠을 청하고 있는 침실.

"...윽."

그때였다.

자신이 펼친 고유 마법, '불안전한 정숙'에 집중을 하던 윌리엄은 엄습한 낯선 기운에 두 눈을 찌푸렸다.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 경?"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이상함을 느낀 교단원들이 윌리엄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윌리엄의 안색은 더욱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지팡이 끝에 장식한 보석으로 향했다.

마법의 시행을 알려주는 빛.

희미하지만 청량한 그 빛은 먹구름이 낀 것처럼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마나의 흐름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점점 빛이 사라지는 보석.

그것을 지켜보던 윌리엄은 사색이 되었다.

"윌리엄 경?"

교단원의 물음에 긴장한 기색을 보이며, 윌리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리안 이 자식, 우리가 올 줄 알고 함정을 파놓았군!"

 

 

 

 

 

 

 

 

42화. 아닌 밤중에 오해(1)

"하, 함정인 것 같습니다, 요슈아 도련님."

뭐?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져 결계를 발동한 기사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함정인 것 같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임무를 마치고 유리안이 돌아왔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요슈아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제대로 말해봐."

"아무래도 유리안이 저희가 올 것을 알고 함정을 파둔 것 같습니다. 분명 어딘가에서 저희의 정보가 흘러간...."

"닥쳐!"

부릅뜬 눈으로 기사를 노려보던 요슈아는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정보가 새어 나갈 일 없다!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말해봐!"

"...마나 흐름을 방해하는 결계를 발동하는 순간...."

꿀꺽.

기사는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저택에 저희를 제외한 누군가가 다수 등장했습니다."

"다수?"

"예."

다수라는 말에 요슈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유리안의 저택에는 그를 제외하고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다.

사용인들도 늦은 시각까지 일하지 않으니, 이 시간이면 끔찍할 정도로 거대하고 조용한 이 저택엔 유리안만 있을 것이라는 소리이다.

그런데 갑작스레 인기척이 다수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그것도 하필이면 오늘.'

하필이면 지금!?

동행한 기사가 이 상황을 '함정'이라 짐작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평상시라면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이 갑작스레 일어난 것이니 말이다.

"요슈아 도련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직위에 걸맞지 않게 기사는 바짝 위축된 모양새로 물었다.

'이 빌어먹을 녀석은 돌아간다면 파면시키는 것이 좋겠어.'

그리 생각하며 요슈아는 입을 열었다.

"...함정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오늘 난 유리안을 죽여 버릴 거니까."

계속해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기사를 보며 요슈아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결계는 발동된 상태라 유리안은 약화된 상태. 처음의 계획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내가 유리안을 처치하는 사이 너희들이 다른 녀석들을 맡는 것뿐이야."

그로서 세간에 악명을 떨친 '유리안'보다 자신이 유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아니, 있어선 안 된다.

"현재 녀석들의 위치는 어디냐?"

"...저희가 있는 응접실 밖 복도입니다."

딱 좋군.

혼자 중얼거린 요슈아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차하면 '뿔'을 사용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이번 계획에서 '실패'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쪽에서 먼저 수를 쓰기 전에 이쪽에서 치고 나간다."

챙.

요슈아의 말에 기사와 사병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입구에 가장 근접해있던 기사가 문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어쩌면,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크악!"

복도에서 들려온 당황스러운 외침.

그것에 개의치 않고,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요슈아도 마찬가지로 응접실의 바깥으로 몸을 옮겼다. 그러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로브로 얼굴을 가린 수상한 낌새의 사내들.

척 보아도 '평범'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다.

분명 더러운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겠지.

그렇지 않다면 유리안의 하수인 노릇을 할 리가 없다.

"그딴 쓰레기의 밑에서 일을 하다니, 명예도 없는 버러지들이군."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는 요슈아.

비수처럼 날카로운 말투에 쓰러진 동료를 훑어보던 윌리엄은 눈을 부릅떴다.

"대체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것이냐...!"

격양된 목소리로 답한 윌리엄은 체내의 마나를 끌어모아 지팡이에 담기 시작했다.

마나의 흐름을 휘저어놓는 결계가 펼쳐져 있음에도 마법을 시전 할 수 있다는 소리는 마나 활용이 수준급에 달하는 마법사란 소리다.

"...도련님, 3위계 이상의 마법사입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곁에 있던 기사가 입을 열었다.

"그래봤자, 결계 덕에 제대로 된 위력은 아니겠지. 처리해라."

"예, 도련님."

명령이 떨어지자, 요슈아 측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일제히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들에게로 달려들었다.

어두운 밤중엔 철과 철이 부딪히는 날 선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요슈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유리안은 어디에 있지?'

이것이 그 가증스러운 '웃는 처형대'의 함정이라면, 본인도 모습을 드러내야 정상일 터.

그러나 눈을 씻고 찾아봐도 유리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크, 크아아아악!"

쨍그랑──!

그때였다. 가장 먼저 문을 박차고 나선 기사가 격한 신음과 함께 창문 바깥으로 튕겨 나간 것이다.

화들짝 놀란 요슈아는 나가떨어진 기사의 몸을 훑어보았다.

자욱한 화상과 함께 나무에 처박힌 그의 모습은 분명 마법에 의한 것이 분명. 문제는 그 위력이었다.

"겨, 결계가 펼쳐져 있음에도 이 정도 위력이라니...."

기사의 당혹감이 서린 독백을 듣던 요슈아는 저택으로 돌아간다면 이 기사 자식을 파면시킬 것이라 다시 한번 맹세했다.

***

"큭...!"

이글거리는 불꽃이 자신의 옆을 스치자, 요슈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한껏 날이 선 눈으로 요슈아는 눈앞의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마나 흐름을 방해하는 결계를 설치했음에도, 몇 가지 공격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마법사.

조금 전 기사가 말한 대로 3위계 이상이라는 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쿨럭, 쿨럭...."

물론 결계가 무용지물은 아니었다.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부담이 쌓여갔는지, 그의 입가엔 각혈을 한 흔적이 가득했다.

그런 위태로워 보이는 마법사의 모습에도 요슈아는 쉽게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한 번이라도 허용했다간 치명상이 될 것이 뻔한 마법들. 그것을 몸으로 받아냈다간 주변에 쓰러진 사병들과 똑같은 꼴이 될 터니까.

'빌어먹을 새끼, 그냥 쓰러져라...!'

현재 둘의 주변에는 혈흔과 함께 장정들이 쓰러져 있었다.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저 마법사와 자신뿐. 그러나 요슈아는 쉽사리 '뿔'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건 유리안을 상대하기 위한 비장의 수란 말이다.'

이것을 건네준 알파스는 분명 이것이 '소모품'이라는 것을 일러둔 상태였다.

아직 유리안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황에서 고작 이런 잔챙이를 잡는 용도로 쓸 수 없는 노릇이다.

이 저택에 발길을 들인 이유는 유리안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니까.

그 덕에 고착된 전황은 해소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젠장!'

길어진 전투 탓에 요슈아는 눈앞이 흐릿해졌다. 몸에 피로가 쌓인 것이다. 물론 저쪽도 마찬가지.

연속해서 사용하던 마법들은 슬슬 끝자락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좋지 않은 상황에서 억지로 마법을 사용한 탓인지 마법사의 동공은 서서히 초점을 잃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든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입에 묻은 피를 닦아내려던 순간.

'지금이다!'

요슈아는 드러난 빈틈을 놓치지 않고 화분을 던져 시선을 분산시킨 뒤, 곧장 거리를 좁혀 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큭...!"

요슈아가 달려오는 모습을 본 마법사는 당황하여 허둥지둥 지팡이를 들어 마법을 시전 하려 했지만, 그가 먼저 던진 화분에 시야를 빼앗겨 타이밍을 놓쳤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요슈아는 횡으로 검을 휘둘러 마법사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옆으로 쳐낸 뒤, 남자의 배를 발로 차버려 쓰러뜨렸다.

"빌어먹을 새끼."

쓰러진 마법사의 목에 검을 가져간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마나 흐름을 막는 결계가 있음에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나 운용력.

이 정도 운용력이라면 적어도 4위계 정도의 마법사일 텐데, 그런 재능을 지녔음에도 빌어먹을 유리안의 개노릇을 하다니.

"명예도 없는 쓰레기가.... 감히 내 앞길을 막아?"

"크, 크윽!"

"유리안에게 얼마에 고용됐지? 5천 나르? 1만 나르? 개 같은 자식, 그게 네 목숨값이 될 줄 상상도 못 했지?"

"뭐... 뭣!?"

요슈아는 조롱 섞인 말을 하면서 마법사의 명치를 발로 짓눌렀다.

으드득──!

"켁.... 크어! 자, 잠깐!"

마법사의 신음을 무시한 채, 요슈아는 갈비뼈를 으스러뜨리겠다는 생각으로 더욱 발에 힘을 주었다.

"나, 난... 유리안에게... 고용된 게 아니다!"

마법사의 충격적이고 다급한 말에 요슈아는 발에 힘을 더 준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누가 믿을 것 같아? 자존심도 없는 쓰레기였군."

"크윽! 케, 켁! 저, 정말이다! 난...크윽. 오늘 유리안을 기습하기... 켁켁. 위해 온 거야! 고용된 게 아니라고!"

"그래? 뭐, 상관없어. 날 방해했으니 죽어 마땅해."

마법사의 계속되는 말에 요슈아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무시했다.

결론적으로 정해진 자신의 일정을 훼방 놓은 것은 사실.

요슈아는 손잡이에 힘을 준 뒤, 쓰러진 마법사에게 검을 휘둘──.

"이런, 이런, 이런...."

멈칫.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린 목소리에 검을 휘두르려고 하던 요슈아는 검을 멈춘 뒤,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발단이자, 원인.

동시에 난장판이 된 저택의 주인인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이 평소처럼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대체 언제....'

비록 바닥에 널브러진 마법사를 상대하여 힘이 빠지긴 했으나, 날카로워진 그의 신경은 주변 소리를 포착하지 못할 정도로 둔감해지지 않았다.

'어떻게? 분명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전투로 인해 민감해진 요슈아의 신경에도 유리안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실에 요슈아는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수준의 차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

'이 괴물 같은 놈....'

오만하게 굴던 요슈아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이치였다.

요슈아가 윌리엄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던졌던 화분의 깨진 파편과 널브러진 난을 본 유리안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가볍게 말을 이었다.

"난초 화분이... 깨졌군요."

꿀꺽.

그런 생각을 하던 요슈아를 뒤로한 채, 유리안은 무릎 꿇고 깨진 화분의 흙을 천천히 손으로 매만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요슈아는 뿔이 든 상자를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금 시선을 유리안에게로 옮겼다.

'그래도 결계 때문에 오러는 많이 사용하지 못할 거다. 그렇다면 순수하게 검술로만 승부를 볼 수 있어!'

내가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공포.

그것을 최대한 억누르며 요슈아는 검을 다시 한번 고쳐 잡고 전투 준비를 하였다.

"아끼던 녀석인지라, 조금 마음이 아픕니다."

사르르.

깨진 화분을 손으로 훑고 일어나는 유리안.

그의 손 틈 사이로는 한 움큼 쥐었던 흙이 쏟아져 내렸다.

이 화분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지 요슈아로선 알 방도도 도리도 없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말도 안 돼.'

고작해야 마나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 정도로는 그의 '오러'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요슈아는 눈앞의 현상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몸을 일으킨 유리안의 몸 뒤로 푸르스름한 '오러'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예절 교육이 필요해 보이는군요."

 

 

 

 

 

 

 

 

43화. 아닌 밤중에 오해(2)

아카데미 임무를 끝내고 저택으로 들어오던 난 갑작스레 바뀐 저택의 분위기에 당황했지만,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였다.

살벌함이 넘실거리는 저택.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외부.

불안정한 마나.

'올 것이 왔구나....'

내가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악역, 유리안이 된 이후 이런 일이 한 번쯤은 일어날 것이라 예상하였으니까.

제국의 밤을 수놓은 별만큼이나 이 실눈의 악역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자들은 많다.

그 원한을 해소하려는 녀석들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

'하지만 실력은 충분히 쌓았다.'

지금의 난 처음과 달리 '월광검'까지 완성한 상태다.

내 몸 하나는 거뜬히 지킬 수 있는 상태이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난 신경을 곤두세우고, 천천히 저택의 입구를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 안은 난장판이었다.

이리저리 흩날리는 이름 모를 파편들과 여기저기 산산이 조각난 채 쓰러져 있는 예술품.

바닥과 벽에 뿌려진 검붉은 색 액체와 사방팔방에 널브러져 있는 누구인지 모를 시체들.

그것들은 이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일어났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뭐지? 왜 여기서....'

난 의아함을 느꼈지만, 인기척이 느껴지는 응접실 쪽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형편없이 망가지고, 부서진 미술품들.

나도 모르게 욱- 하는 분노의 감정이 잠시 올라왔다 내려갔지만, 딱히 '내가' 정감 가는 물건들이 아니어서인지 그렇게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진짜 유리안이라면 여기서 분노의 외침을 질렀겠지.'

난 '유리안'과 '나' 사이에 있는 기묘한 경계선을 느꼈다.

비록 '유리안'의 저택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거주한 지도 꽤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난장판이 된 저택의 모습에 큰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에 말이다.

'이 삶이 내 감정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닐... 응?'

그러던 찰나, 조금 전의 기묘했던 감정이 무색해질 정도로 내 안에서 뜨거운 감정이 끓어올랐다.

'안젤리카!!'

응접실 안쪽, 애지중지 아끼던 난초의 화분이 박살 난 채 구석에 널브러진 모습을 보고 말이다.

- '유리안에게 얼마에 고용됐지? 5천 나르? 1만 나르? 개 같은 자식, 그게 네 목숨값이 될 줄 상상도 못 했지?'

- '켁, 켁... 자, 잠깐! 나, 난... 유리안에게... 고용된 게 아니다!'

격양된 목소리와 함께 신음이 들려왔으나, 무시한 채 난 깨진 화분으로 다가갔다.

내가 '유리안'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물을 준 난초 화분.

'안젤리카'

현 세계에서부터 난초를 기르기 시작하면서 생긴 습관이다.

이름을 붙이고 키우는.... 그래야 더 정감이 갔으니까.

"이런...."

그런 '안젤리카'의 마지막 모습이 두 눈에 들어오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전신에선 '오러'가 흘러나왔다.

마나를 사용할 때 모종의 불쾌함을 느끼긴 했으나, 분노가 그 불쾌함을 뒤덮어버렸다.

"오, 오러... 어떻게...."

스르릉.

당황한 어투로 중얼거리는 요슈아를 뒤로 하고, 난 검을 뽑아 들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검신은 '월광검' 스킬로 인해 푸르스름한 은색으로 물들었고, 내 머릿속은 눈앞의 보이는 두 명의 불청객에 대한 분노만이 가득했다.

'안젤리카'의 죽음을 기려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 녀석들은... 죽여버려야겠지.

'으, 응? ...잠깐!'

너무나도 급격하게 진행되지만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에 난 나 자신에게 당황했다.

난장판이 된 집안의 모습과 시체처럼 널브러진 사람들에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던 내가 고작 난초 하나에 이리도 분노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이것도 '유리안'이 됨으로써 생긴 변화인가?

어찌 되었건 평범한 감정선이 아니다.

지금까지 최대한 '유리안'을 연기할 뿐 감화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런 식으로.

'크윽....'

혼란스러움에 우연히 눈에 들어온 부서진 화분을 본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진정하자.

감정에 휩쓸리지 말자.

별것 아닌 난초일 뿐이다.

그저 매일 물을 주고, 햇빛이 드는 창가에 옮겨주고, 자기 전에 이파리를 닦아주고, 특식으로 영양제도 그때그때 챙겨주고....

그런 안젤리카를...!!

존X 빡치네.

"그의 말대로 전 누구도 고용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힘들 것 같아서, 난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었다.

나지막한 내 말에 그나마 의식이 있는 두 명은 흠칫했다.

요슈아와 윌리엄.

서로를 당황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둘.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둘은 절대 아군이라 말할 수 없는 사이로 보였다.

심지어 싸운 흔적도 보였다.

'나를 기습하기로 한 두 무리가 마주친 바람에 이 꼴이 된 건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었으나, 그렇지 않다면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난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둘을 쳐다보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 물음에 고착 상태에 빠진 둘은 넋을 잃은 표정이 되었다.

"야밤의 기습은 실패했으니 말입니다. 혹시, 다음 계획이라도 있으십니까? 요슈아."

"...윽."

그나마 아는 이름을 부르자 녀석은 움츠러들더니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완전한 굴복 상태.

녀석의 머리 위로는 '공포'의 색이 짙게 흘러나왔다. 쓰러져있는 다른 한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슬슬 이 상황을 정리해볼까?

그런 생각으로 발을 옮기려던 순간 모종의 걱정거리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꼴에 '유리안'을 기습하려 했다는 건 실력에 나름대로 자신이 있다는 소리 아닌가?'

같은 검사로 보이는 요슈아는 아마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저 마법사인가....'

어느새 떨어진 지팡이를 들고 요슈아의 곁에 서 있는 마법사.

아직 난 이 세계에서 '마법사'와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다.

물론 어떤 마법이 존재하고, 무엇을 사용할지는 게임을 해본 경험으로 예상은 가지만, 그것은 예상일 뿐 경험하지 못했기에 신중해졌다.

'물론 마법사 혼자라면 쉽게 꺾을 수 있는 상대일 것 같지만....'

상황의 정리를 위해 두 명 모두 처리하려 든다면, 같은 목적을 지닌 둘은 똘똘 뭉쳐 대항하겠지.

'그럼 조금 곤란하겠군.'

패배의 예감은 들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성가실 듯하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 난 불현듯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일단 그 방법을 위해선 이곳에서 누가 포식자의 위치에 있는지 알려줄 필요가 있다.

"두 명이 협력해도 절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겠죠? 그리고 전 제게 송곳니를 드러낸 적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계시리라 믿겠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말을 잇자, 그들의 머리 위로 '공포'의 색이 더욱 짙어졌다.

이 정도로 겁을 먹었다면 직접적으로 위협을 하지 않는 한 적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제가 기분이 좋으니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후,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두 분이 싸우십쇼. 후후. 승리를 거둔 쪽은 살려는 드리겠습니다."

난 최대한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

뭐라고?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요슈아는 유리안의 말에 자기 귀를 의심했다.

나와 이 마법사가 싸워서 이긴 쪽은 살려 주겠다고?

너무나도 거만한 말투에 분개한 요슈아는 쥐고 있던 검에 힘을 주었다.

'나에게 광대 노릇을 하라고...?'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지금 유리안은 기습을 꾸민 자신과 다른 한쪽에게도 기습의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 이유를 어렴풋이 눈치챈 요슈아는 분노로 인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큭...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거냐!'

권모(權謀)와 술수(術數)를 짠 연유(緣由)는 관심 없다. 그저, 너희들은 내 저택에 침입한 적에 불과해.

은연히 풍기는 그 분위기에 화가 난 요슈아는 유리안에게 달려들려고 자세를 잡았으나 단신으로는 저 괴물을 이길 수 없다는 직감이 그의 행동을 틀어막았다.

마법사도 쉽사리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유리안은 자연스럽게 '오러'를 사용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 머저리 마법사와 힘을 합쳐야 한다. 그리고 뿔도....'

요슈아는 자신이 가져왔던 보관함을 쳐다보았다.

그것에 담긴 물건이 무엇인지 떠올리자, 오슈아의 눈에서 서려 있던 공포가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슬쩍.

요슈아는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본래 이 저택에 온 목적은 같았으니, 이제 와서라도 협력하면 되는 일.

"이, 이이이익!"

붕붕-.

하지만 겁에 질린 마법사는 마법을 발현을 생각을 안 한 채, 그저 요슈아에게 지팡이만 휘둘러 댔다.

"이 미친놈...!"

요슈아는 몸을 뒤로 날리며 욕지거리를 입에 담았다. 이렇게 싸워선 유리안이 원하는 대로 될 뿐이다.

그것이 치가 떨릴 정도로 싫은 요슈아는 입을 열었다.

협력하자고.

"우, 웃기지 마라...! 그렇게 말해놓고, 뒤통수칠 생각인 걸 모를 줄 알고!?"

멍청한 놈!

공포에 굴복한 나머지 유리안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마법사 윌리엄의 모습에 요슈아는 치를 떨었다.

이긴 한쪽을 살려준다고?

'웃는 처형대'가?

정말로 그럴 것으로 생각하는 건가?

'녀석은 우리가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고 즐기려는 것뿐이라고!'

그런 요슈아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윌리엄은 겁이 질린 눈으로 계속서 지팡이를 휘둘렀다.

체내 마나를 모두 소진한 탓인지 게거품을 물고 있는데도 악착같이 요슈아에게 들러붙었다.

"머저리 같은 새끼!"

슈욱- 스윽.

결국 화가 난 요슈아는 지팡이를 피하는 중 윌리엄의 상체로 검을 휘둘러 그의 어깻죽지를 베어냈다.

"크아아아아악!"

참혹한 신음과 함께 윌리엄은 피가 솟구치는 어깨를 잡으며 쓰러졌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요슈아는 윌리엄을 노려보았다. 치명상까지는 아니지만 더 이상 지팡이는 휘두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적대하던 마법사를 쓰러뜨린 것이지만 요슈아는 도리어 절망을 느꼈다.

이제 자신의 차례.

저 '웃는 처형대'는 자기에게 적의를 드러낸 자를 방관하지 않는다.

죽음.

크라이파트 가문의 장로에게 총애받아, 콧대 높은 삶을 살아오던 요슈아에겐 거리가 있던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음.... 끝났습니까?"

그 '죽음'이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저런.... 피가 저렇게나 많이 나오다니.... 아프겠군요."

인두겁을 뒤집어쓴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그것이 진짜 감정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을까?

'뿔!'

알파스가 건네준 데몬의 뿔.

부작용이 어떤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었으나, '데몬'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힘을 얻게 해준다는 물건.

그 뿔을 사용한다면, 유리안을 죽일 수도, 아니 죽일 순 없어도 도망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요슈아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자신이 가져온 보관함으로 시선을 던졌다.

'...없어?'

그러나 뿔을 담아둔 보관함은 본래의 위치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요슈아는 겨우 보관함을 찾아냈다.

내용물이 비어있는 보관함.

"이, 이건... 데몬의 뿔?"

아이러니하게도 보관함의 내용물은 자신이 쓰러뜨린 마법사 앞에 떨어져 있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윌리엄은 그것을 다친 손에 쥐고는 홀린 듯이 입으로 가져갔다.

 

 

 

 

 

 

 

 

44화. 레플리카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에서도 존재하는 성물인 '마신성(魔神盛)'을 통해서 빚어낸 '데몬의 뿔'은 사용자에게 막강한 힘을 쥐여주나 그만큼 치명적인 부작용이 존재한다.

'데몬화.'

마신 바르바토스의 잔재사념(殘滓死念)을 받아 드림으로써 자아를 잃고, 본능만을 추구 하는 데몬이 되어가는 것이다.

"으, 으아아아... 크아아앙!"

우드득. 우득.

그 과정은 실로 혐오스러웠다.

뼈와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사용자의 육신은 비대해졌고, 동시에 보라색 점액질이 온 구멍에서 흘러나온다.

격통에 가득 찬 비명은 점차 짐승의 그것으로 바뀌었고, 동시에 그것의 눈에는 살기만이 가득해졌다.

"뭐, 뭐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슈아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알파스.... 이런 미친 새끼! 데, 데몬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했지 데몬이 된다고는 하지 않았잖아!"

"아하! 저 뿔은 당신이 가져온 물건인가 보군요."

'뿔'이 자신의 물건인 마냥 말을 하는 요슈아를 보며 난 가볍게 말을 흘렸다.

'뿔'의 사용법은 여명회만이 알고 있기에 여명회 소속으로 보이는 마법사가 가지고 온 물건인 줄 알았다.

"그, 그건...."

"알파스, 알파스라...."

그래도 요슈아의 혼잣말 덕분에 어떤 경로로 '뿔'을 획득했는지 대강 예상할 수 있었다.

알파스 메이핸드.

여명회 소속 '몬시뇰'중에서 유리안에게 특히나 적개심을 품고 있던 남자.

그와 요슈아가 어떤 관계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었으나, 모종의 인과가 있었나 보다.

'다행인 점은 뿔이 진품이 아닌, 레플리카라는 거로군.'

이전에 처리한 빈민가의 데몬과 비슷한 형태.

엘레노아가 찾아와 내게 물었던 '데몬 이상 현상'의 연장선이 분명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복제품인 '레플리카'는 마신성으로 빚어낸 뿔의 성능을 반도 흉내 낼 수 없다.

불순물이 섞이는 바람에 기껏해야 이각(二角) 수준의 출력만 낼 수 있는 하급품.

"크륵, 크르륵.... 크아악!"

물론 이각 데몬의 수준이라면 멀쩡한 요슈아가 어느 정도 상대가 가능하겠지만, 이미 지친 상태인 그가 어찌해보기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요슈아는 점차 적의를 들어내는 데몬을 보며 잔뜩 겁을 먹었다.

공포에 의한 위축.

그것을 감지라도 했는지 데몬이 된 마법사는 고개를 돌려 요슈아를 쳐다보았다.

"이, 이기면 내가 살 수 있다. 살 수 있다."

원본에 미치지 못하는 레플리카라 해도, 사용한 순간 완전히 '데몬'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잠깐 사이에 남아있던 무의식이 행동 원리가 되는 모양이다.

"히, 히이익!"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의 살기.

그것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요슈아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일그러졌다.

"유리안...! 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 저 데몬을 처치해줘!"

"아직 한 쪽이 살아있지 않습니까?"

"너, 너는 '크라이파트 가문' 일원이잖아! 나를 지켜야지!"

방계라며 날 무시하고, 날 죽이기 위해 저택에서 매복하던 놈이 이제는 데몬을 처치해달라며 부탁하다니.

요슈아가 겁에 질려 유리안에게 부탁하는 사이, 데몬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에게 다가갔다.

인간성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데몬의 눈동자는 요슈아를 바라보았다.

"나는 산다, 산다."

팟!

머릿속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는 것인지 계속 똑같은 소리만 반복하던 데몬은 순식간에 도약해 요슈아와의 거리를 좁혔다.

요슈아의 검에 의해 갈라졌던 어깻죽지의 상처는 데몬이 되는 과정에서 치유됐는지 오른팔을 휘두르는 동작에 부자연스러움은 없었다.

"으, 으아아악!"

평소에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요슈아는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오는 데몬의 팔을 검을 들어서 막아내는 듯했지만.

"아, 안 돼!"

챙!

체력이 떨어졌는지 부딪히는 충격으로 검을 놓치고 말았다.

검이 떨어진 위치는 요슈아의 뒤편.

주우려고 몸을 돌렸다간, 재빠른 데몬의 일격을 맞고 죽을 것이 자명한 상황이다.

"후후. 분발하지 않으시다면 정말 죽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성을 잃어버린 듯한 데몬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요슈아는 울상이 되었다.

"유, 유리안 ...형, 형님. 제발...."

형님? 가당치도 않은 개소리를.

결혼식장에선 천한 혈통이라며 열변을 토하던 놈이 말이야.

- 크륵.... 크륵.

데몬은 뿔의 마기를 완전히 흡수해 동화가 되었는지, 인간의 소리보다는 동물의 소리가 목에서 나왔다.

완전히 싸울 의지를 잃은 요슈아를 보던 데몬은 무엇을 느꼈는지 눈동자가 나에게로 향했다.

'역시 데몬은 데몬인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인간의 모습이 사라져 완전 데몬화 되어 버린 마법사를 본 내 몸은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데몬 사냥꾼'으로서 유리안이 가지고 있는 본능일 터.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혐오감은 곧 살기로 바뀌었고, 데몬은 자신을 향한 그것을 감지한 모양이다.

'지긋지긋한 녀석.'

이렇게나 데몬을 혐오하는 주제에 '힘'이라면 사족을 못 써 그것의 힘을 갈구하다니.

'유리안'이란 캐릭터의 이중성에 혀를 내두르며 난 검을 들어 올렸다.

- 크아아아아아악!

자기에게 쏟아지는 내 살기에 공포를 느꼈는지 데몬은 무지막지한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이전 줄린 특구에서 보았던 이각 데몬과 흡사한 속도로 느껴졌지만, 이미 '월광검'을 완성 시킨 나에겐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려 보였다.

"벌레가 기어 오는군요."

감히 내게 살의를 보이다니.

데몬이 내게 살의를 드러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달빛으로 물든 월광검으로 녀석의 다리를 베었다.

요슈아의 검도 튕겨내던 육중한 몸이었지만, 마나를 머금은 월광검이 닿자 종잇장처럼 손쉽게 갈라졌고 데몬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 크악!

"히, 히이이이이익!"

뜻 모를 굉음과 사방에 퍼지는 데몬의 보라색의 피.

공포 서린 눈동자로 그것을 지켜보던 요슈아는 놀란 나머지 괴상한 소리를 입에 담았다.

난 녀석을 무시한 채 쓰러진 데몬의 어깻죽지에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 크아아아아악!

붕-

그 와중, <타고난 검사> 특성이 내게 적신호를 보내주었다. 위험을 감지한 난 뒤로 한 발 물러났고, 그곳엔 데몬의 육중한 손이 한 차례 허공을 갈랐다.

"흐음."

다리를 베었는데도 멀쩡히 일어나다니.

의구심을 품은 난 데몬의 모습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분명 '월광검'으로 데몬의 다리를 깔끔하게 잘라... 거품이 올라오네?

어라? 살이 다시 재생되고 있잖아?

'재생력을 지닌 데몬이라.'

게임 설정상, 일반적으로 데몬은 '데몬화'되기 전의 능력이 극대화 되어 발현되지만, 마지막에 남은 의식이 강할 경우 그 능력이 데몬의 능력으로 발현되는 경우도 있었다.

데몬이 된 윌리엄은 유리안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한 탓에 재생력을 가지게 된 경우였다.

"저, 저런 걸 어떻게 죽이라고...!"

당황하는 요슈아와는 달리 난 오히려 일이 편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데몬화'가 진행된 녀석은 본래 마법사.

그것도 4위계의 고위 마법을 쓸 수 있는 인간이었다.

일반적으로 '데몬화' 되었다면 굉장히 성가신 능력을 가진 데몬으로 변이될 수 있었겠지만, 단순히 '재생'의 능력이라면.

할만하다.

'<간파> 특성 덕분인가? 핵이 확실하게 보이는군.'

재생력을 지닌 데몬이라고 해도 불사는 아니다. 인간의 '심장'과 마찬가지로 데몬에게도 '핵'이 존재한다.

그것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과 사념, 마기가 쌓이면 '혼석'이 되는 것이고.

'확인해보면 알겠지.'

그리 생각한 난 마나를 끌어 올려 신체 능력을 강화하고 데몬에게 달려들었다.

- 크르르르륵!

내가 달려오는 것을 본 데몬은 괴성과 함께 오른팔을 휘둘렀지만, 난 그 박자에 맞춰 아래에서 대각선 위로 검을 치켜올렸다.

촤아아악──!

- 크아아아!

마나가 실린 검으로 오른팔을 베어버리자 기분 나쁠 정도로 진득한 피가 뿜어져 나와 시야를 가렸다.

아픔을 호소하는 듯 괴성을 지른 데몬은 성한 왼팔로 나에게 또다시 덤벼들었지만, 이미 녀석의 행동 패턴은 뇌리에 각인된 상태.

"괜한 발악을 하는군요."

"감히 '데몬 사냥꾼'인 나에게 덤벼들다니, 역시 '쓰레기'답습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유리안'스러운 독백에 질색하며, 난 허리춤을 돌려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왼팔.

- 크아아아악!

데몬의 괴성을 무시한 채, 난 <간파> 특성이 알려준 대로 데몬의 머리를 향해 검을 찔러 갔다.

그러자 긴박한 기색을 보인 데몬의 양팔에서 거품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데몬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핵을 보호하기 위해 잘린 양팔을 순식간에 재생해서 내 검을 막아보려 했으나.

"죽으십쇼, 이 버러지."

은은한 달빛으로 둘러싸인 내 검은 재생되는 데몬의 팔보다 먼저 그것의 머리에 있는 '핵'을 꿰뚫었다.

"제가 바로 '데몬 사냥꾼' '유리안'입니다. 후후."

- 끅, 크륵.

힘이 다 빠진 듯한 데몬의 소리와 함께 거품은 더 이상 일지 않았다.

광기 어린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순간, 그것은 지푸라기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죽으십쇼 버러지는 또 뭐냐!'

다시 한번 습관처럼 튀어나온 대사에 넌더리를 떨며 난 요슈아를 쳐다보았다.

"마, 말도 안돼...."

그 광경을 본 요슈아는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난 요슈아를 보며 세상 맑은 미소를 지은 채, 검에 묻은 진득한 피를 그 녀석 근처 허공에 툭툭 털었다.

한밤중에 날 기습한 것을 생각하면, 엄벌을 처해도 마땅한 일이었으나 요슈아는 이제부터 '크라이파트 가문'의 어마어마한 지분을 가지게 되는 녀석이다.

'그러니 미리 목줄을 채워두는 것도 좋겠지.'

괘씸해서라도 말이야.

"어서 앉으시죠."

난 지금까지 웃었던 어떠한 미소보다 밝게 웃으며 요슈아에게 의자를 권하며 말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녀석의 머리 위에는 지금까지 본 색 중에 제일 진한 보라색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예, 예! 형님!"

***

"레플리카 뿔이라...."

한바탕 사건을 정리하고 난 뒤, 데몬에게서 뿔을 잘라낸 난 그것을 보관함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빈민가에서 본 '레플리카'를 이 시기에 제도(帝都)에서 보게 될 줄이야.

기존의 스토리에도 여명회의 마수가 제도에도 뻗치며, 이 '레플리카'탓에 여러 문제가 생기기는 하지만.

"너무 빠르군요."

본래라면 검성의 수제자 '린네 론드벨'이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난 뒤에나 일어나는 일이다.

린네가 복수심을 불태우는 대상이 '레플리카'의 제작자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이 '레플리카'와 연관된 스토리는 그녀를 중심으로 이어지곤 했다.

'지금은 내가 플레이어가 아니다 보니, 그녀와 깊게 연관될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제도에서 '레플리카'를 보는 건 시기상 빠른 감이 있다.

난 걸음을 옮겨, 창문 앞으로 이동했다.

탁 트인 시야와 함께 하늘에 떠오른 보름달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예정된 수순이었더라면, 레플리카 뿔의 개발을 저지하는 것은 '검은 기사'였을 텐데 말입니다."

검은 기사.

제도(帝都)에서 검은 가면으로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막강한 무력으로 여명회의 활동을 암암리에 저지하는 게임 내의 주연.

그 정체는 플레이어의 대변인이자 주인공인 검성 '하이든 라이히'의 이중 신분이다.

'이미 '검은 기사'가 등장했다면 레플리카 뿔의 등장도 이렇게 빠르지 않았을 테고, 약간이나마 소문이 돌아야 정상일 텐데.'

어찌 제도는 이리도 조용하단 말인가?

스토리 전개상 '검은 기사'라는 이명을 떨치기 시작하는 것은 여명회의 비숍, '핀텔'이 혼석을 구해오는 것을 저지한 이후부터 이기는 하다.

'그 덕에 내가 핀텔의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고.'

게임 스토리의 분기점이 되는 곳이 바로, '비숍 핀텔을 저지'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너무 조용해.'

'검은 기사'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나?

'그럼... 곤란한데.'

마신의 부활을 막으며 여명회의 해체를 원하는 내 입장에서 '검은 기사'는 숨겨진 동료다.

그런 '검은 기사'가 활동을 안 한다면....

'아니, 그럴 리 없어.'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검성 '하이든 라이히'가 신민들의 위험을 좌시할 리 없다. 이것은 스토리의 진행을 떠나 내가 가진 '하이든 라이히'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주인공이니까.

'뭐 여하튼, 지금 중요한 건....'

생각을 떨쳐낸 나는 데몬의 뿔이 담긴 보관함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래도 본보기가 필요해 보입니다."

 

 

 

 

 

 

 

 

45화. 나를 위한 경고(1)

"주, 주인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른 아침.

출근한 사용인들은 저택의 몰골을 보더니,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몇몇 사용인들은 저택의 꼴과 내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막 왔을 땐, 저택이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맞아. 핏자국도 장난 아니었고...."

"이런 저택에서 하룻밤 주무신 거야?"

"게다가, 먼저 온 집사장님 말로는 침입자들이 10명이 넘었다는데..., 단신으로 처리하신 건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사용인들을 날 쳐다보았다. 마치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으나 난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실 나라고 침입자들이 무섭지 않았겠는가?

지금도 어제의 일을 떠올리면, 손발이 덜덜 떨리곤 한다.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유리안'의 육신과 그를 완벽하게 연기해야 한다는 마인드 덕분.

혈흔이라는 둥, 시신이라는 둥, 평범한 사람이라면 화들짝 놀랄 법한 주제에 초연하게 구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오늘 있었던 일은 분명 막으려고 해도 제도(帝都)에 소문이 날 테니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웃는 처형대'로서의 면모를 더 강하게 보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 그럼 주인님 이건 어떻게 처리할까요?"

"쓸데없는 것이라면 굳이 저에게 묻지 말고...."

사용인의 말에 난 고개를 돌려 그녀가 들고 있는 물건을 바라보았다.

'안젤리카'라는 이름의 깨진 난초 화분.

너저분한 몰골을 보자 괜스레 코끝이 매워졌다.

"그건 마당에... 잘 묻어주십시오."

***

예상대로 내가 저택의 침입자들을 격퇴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그 '웃는 처형대'말이야. 자신의 저택에 침입한 괴한들을 모두 죽였다면서?"

"유리안의 저택에 침입하다니, 정신이 나간 것 아니야?"

특히나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귀족들에게 그 소문이 빠르게 돌았다.

암투와 음모가 난무한 귀족사회의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해소하고자, 또는 다른 이들과의 대화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소문은 조금씩 살점이 붙고,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

"유리안 경, 당신의 일로 황실이 아주 떠들썩하네요. 듣자 하니 기사단 하나를 괴멸시켰다고...?"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소문은 어마어마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처음에는 진실을 기반으로 몸집을 키워가더니, 이윽고 유언비어(流言蜚語)와 비스무리한 형태가 되어간 것이다.

"기사단 괴멸이라니.... 아무리 저라도 단 하루 만에 그런 일을 해낼 수 없지 않겠습니까? 오드윈 경."

"뭐, 그렇겠죠?"

"예. 단순히 제 저택에 침입한 파렴치한들을 처리한 것에 불과합니다."

당연하다는 어투로 말하는 내 모습에 오드윈은 살짝 헛웃음을 지었다.

"그 일도... '단순히'라는 말로 치부하기엔 평범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까? 저에게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라서 말이죠."

"그런 게 일상이 될 수 있을 리가...."

나 또한 그녀의 혼잣말에 동의했다. 원한을 품은 자가 야밤에 기습하는 인생이라니.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 아닌가.

단장 오드윈의 말에 이런 식으로 답하고 싶었으나, 난 가까스로 참아냈다.

도리어 자신감이 가득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당분간 업무는 중지하고 쉬는 게 어떤가요? 바이엘 아카데미의 실기 교관 건은 다른 대원에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나의 거절에 오드윈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작 이런 일로 업무 중단할 정도로 나약한 몸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마음 같아선 업무를 쉬고,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고작 이런 일로 유리안이 일을 쉴 것 같지는 않다.

'또 아카데미 쪽 일을 다른 대원에게 넘겼다가 승전 기념일에 차출될 수도 있으니까.'

어찌 되었건 '검성'과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했다.

"뭐, 당신 몸이니 당신이 더 잘 알겠죠. 알았어요, 아카데미 쪽에는 제가 연락해두죠."

오드윈의 확답을 들은 나는 그녀에게 간단한 인사를 한 뒤, 단장실을 빠져나왔다.

이걸로 겉으로 드러난 '유리안 습격 사건의 보고'는 대강 마무리되었다.

남은 것은 '레플리카'에 관한 마무리뿐.

'...아무래도, 가만둘 수 없는 노릇이니.'

요슈아가 구한 '레플리카 뿔'과 나를 습격하려한 '몬시뇰'들은 여명회와 아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태를 방관한 여명회의 간부들에게 난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젠장! 난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그렇지만 '이 세상'은 '유리안'에게 이런 사태를 방관하지 말라며 속삭이고 있었다.

***

"비숍 엘레노아, 오랜만에 보는군."

"어머! 비숍 에이든 아니신가요? 겐멜 수도회에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싱긋.

엘레노아는 웃음을 지으며 화답한 듯했지만, 그 웃음에는 적나라한 가시가 돋쳐있었다.

비숍들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여명회에 들어온 것이기 같은 계급인 비숍은 하나의 경쟁 상대였다.

"겐멜 수도원에 들린 다른 이유가 있겠나? 아크 비숍, 테넬론 경을 알현하기 위함이지."

씨익.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는 에이든이었으나, 엘레노아는 저 웃음 속에 스며든 음흉함을 눈치챈 지 오래다.

'에이든 드 도나시엥.'

마법을 대표하는 제국의 사대 가문 중 하나인 도나시엥 가문의 직계이자, 다음 가주로 언급되는 남자.

가문의 비원(悲願)인 현자의 돌인 '엘릭시르'를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 유능을 강조한 탓에 극심한 순혈주의를 지향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신가요? 그런데 이걸 어쩌죠? 아크 비숍과의 선약은 제가 먼저 잡은 것 같은데."

"하하, 그럼 어쩔 수 없지. 알현실에서 기다릴 수밖에 말이야."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은 에이든과 함께 엘레노아는 아크 비숍이 머무는 알현실로 향했다.

'잠깐.'

엘레노아는 슬쩍 고개를 돌려 에이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겐멜 수도회에 온 이유는 빈민가와 제도에서 떠도는 뿔의 복제품, '레플리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테넬론이 직접 제작하는 뿔보다 열등하고, 불순물이 잔뜩 낀 하급품이지만 그런데도 '데몬화'가 가능한 물건.

'그런 복제품을... 원본도 없이 제작할 수 있을 리 없어.'

'레플리카'를 제작하고 있는 당사자는 당연히 '뿔'에 접근할 수 있는 여명회 소속인 비숍일 확률이 높다는 소리.

그리고 예상일 뿐이지만 눈앞의 에이든이 그 '후보' 중 한 명이다.

'아크 비숍이 만든 뿔은 에이든의 '엘릭시르'와 성질 자체는 흡사한 물건이니까.'

만약 그렇다면 에이든은 진정한 '엘릭시르'를 완성 시키기 위해 자신의 단체와 상관없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인체 실험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음.... 아니, 확신하지 말자. 아직 증거는 없으니까. 만약 그가 하는 일이 맞는다면 아크 비숍에게 전달하면 끝나는 일.'

그렇게 한들.

과연 현 여명회의 아크 비숍인 테넬론은 '레플리카 뿔' 사태에 개탄하고, 당사자를 처벌하려고 할까?

어쩌면 그가 다른 비숍에게 '레플리카 뿔'을 제작하도록 명령한 것일 수도 있다.

제국의 몰락을 위해.

증오하는 검성 '하이든 라이히'를 하루라도 빨리 처리하기 위해.

'테넬론도 관여했다면 여기에서 이야기를 꺼내봤자 나에게 좋은 것 없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는 도중, 어느새 알현실에 도착한 엘레노아는 테넬론을 바라보고 결심했다.

"강녕하셨습니까. 아크 비숍."

"그래, 비숍 엘레노아.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들었다."

"아뇨, 제가 정보를 착각한 모양이에요. 죄송합...."

콰앙──!

엘레노아가 말을 하던 찰나, 알현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남자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절제되어 있지만 가장 귀족스러운 자세와 당당한 걸음걸이.

동시에 표정을 엿볼 수 없는 실눈이 인상적인 남자, 유리안이었다.

"비숍 유리안! 아, 알현실에는 지금 다른 비숍분들이 먼저...!"

문을 지키고 있던 교단원 한 명이 당황한 나머지 유리안을 말렸으나 그는 순식간에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어 교단원에게 겨누었다.

"히, 히이익...!"

유리안이 검을 뽑아 들자, 알현실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아크 비숍이 머무는 방에서 무기를 꺼내는 행위는 불경죄로 다스려도 마땅한 죄.

그런데도 유리안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기백 때문인지 달려드는 이들은 없었다.

"...비숍 유리안, 이건 무슨 의도지?"

살벌한 분위기.

불쾌함이 서린 목소리로 테넬론이 입을 열었다.

유리안은 지긋이 가면을 쓴 그를 몇 초간 쳐다보았다.

잠시 후, 검을 거둔 유리안은 품속을 뒤지더니 무엇인가를 바닥에 내던졌다.

달그락──!

그것은 본인을 습격한 윌리엄에게서 얻은 '뿔'이었다.

"존경하는 아크 비숍. 현재 당신의 손으로만 빚을 수 있는 뿔의 열등한 복제품이 제도에 떠도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어라? 저거 내 대사인데.

유리안의 입에선 본래 엘레노아가 품었어야 할 의문이 흘러나왔다.

***

나의 말에 교단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자,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저질러버렸다.'

비록 일반 교단원에게 겨누긴 했지만, 알현실에서 무기를 뽑아 드는 것 자체가 아크 비숍의 권위에 반하는 행위.

그 덕에 알현실은 당장이라도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팽팽한 살기가 나에게 쏟아져 왔다.

그렇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작금의 사태를 방관할 수 없는 내겐 필요한 절차다.

"뿔의 열등한 복제품이라...."

내 말을 들은 테넬론은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지긋이 나를 바라보았다.

"흐음."

테넬론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고민을 하던 중, 다른 비숍 하나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비숍 유리안."

신사와 같은 분위기의 중년 남성, 에이든 드 도나시엥이다.

"그 말의 진실과 거짓을 밝히기 전에, 비숍인 자네의 부덕한 행동은 문제 삼을 수 있다 보네."

난 에이든과 시선을 마주하자, 그는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에이든은 여유로움과 자신의 당당함을 보여주려 한 듯 자연스럽게 얘기를 했으나, 머리 위로 엿보이는 '공포'의 색까지 숨길 순 없었다.

"자네가 아크 비숍께 총애받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나, 난데없이 알현실에 들어와 검을 뽑아 든 만행은.... 무뢰한의 행실이 아닌가?"

머리 위로 보라색 아지랑이가 피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에이든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알현실에서 감히 내가 검을 휘두르진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는 모양이다.

"후후, 웃기는군요."

이어지는 나의 비웃음에 에이든은 살짝 거북한 기색을 드러냈다.

"뭐가 웃긴단 말인가?"

"웃기지 않습니까? 뿔의 모조품으로 여명회에 불안을 초래한 비숍 에이든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말입니다."

난 던져둔 뿔에 살짝 시선을 던진 뒤, 다시금 에이든으로 고개를 옮기자 그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헛기침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지? 나는 모르는...."

"가문의 숙원을 이루는 것은 좋지요."

나는 은은한 미소를 흘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욕망은 이 '여명회'라는 교단을 활성화하는 훌륭한 원동력이니 말입니다."

"...크흠."

"그러나! 그 욕망 탓에 저희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면...."

일부러 뒷말을 끌며 에이든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의 머리 위로 '공포'의 색을 뚜렷이 띠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다.

"비숍 유리안, 이해 못 하겠군. 도나시엥 가문의 숙원과 자네가 말한 뿔의 모조품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이지?"

지금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하는 건가.

모르쇠로 일관한 에이든의 대답에 난 머리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레플리카 뿔'을 양산했다간 검성이나 황실 측에게 꼬리를 붙잡히게 된다고!'

네가 그 짓을 하다 죽건 말건 상관하지 않겠지만, 그 과정에서 여명회의 전신이 드러난다면....

'나 또한 여명회에 소속되었다는 걸 만천하가 알 것 아니야!'

지금의 내가 온전한 '웃는 처형대'라 해도, 제국을 적으로 돌린다면 살 수 있을 방법이 만무하다.

그런 상황을 용인하라고? 무조건 사양이다.

"현자의 돌, 만능의 약, 엘릭시르. 그 신화 속에서만 전해지는 물건을 제작하는 것이 도나시엥 가문의 숙원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크 비숍께서 만드는 데몬의 뿔은...."

"고맙군, 가문의 숙원을 알아줘서 말이야."

"에이든 경, 지금 제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이네. 자네가 그런 식으로...."

⇒ 고유 특성 「뜨인 눈」이 발현되었습니다.

"제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46화. 나를 위한 경고(2)

⇒ 고유 특성 「뜨인 눈」이 발현되었습니다.

"내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쩌어억. 파밧!

항상 눈을 감고 다니던 유리안이 눈을 뜨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러로 알현실 바닥은 금이 갔고, 돌 파편이 주변으로 튀었다.

단어 하나하나에 섞여든 살기.

혹한의 겨울을 연상되는 오러.

지금까지 '여명회'에서 거만한 모습이나, 압도를 위해 오러를 보인 적은 있었으나 유리안이 이런 식으로 적나라한 살기를 뽐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적의를 숨길 생각이 없는지, 그의 검신은 달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유리안의 장기인 '월광검'.

그 미려한 칼날이 세상에 드러나자, 어둑했던 알현실엔 달빛이 스며들었고.

"히, 히이이익...!"

저 달빛에 난자당한 기억이 있던 '몬시뇰', 펠코르는 사색이 된 표정으로 몸을 움츠렸다.

"콜록... 콜록."

이 중에서 가장 큰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에이든이었다. 유리안의 살기에 호흡이 힘들어진 듯, 그는 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역시.... 괴물은 괴물이야.'

그런 유리안의 모습을 지켜보던 엘레노아는 혀를 내둘렀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무력.

여과하지 않은 힘의 편린을 마주한 것만으로 에이든은 호흡이 곤란해진 것이다.

"이런, 이런. 제가 흥분했군요."

자신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유리안도 멋쩍은 웃음과 함께 팽배한 살기를 거두기 시작했다.

아마 에이든이 걱정되어서 자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테넬론의 권위를 떠받들진 않지만, 목적을 위해 '~하는 척'을 한다는 것은 그녀도 눈치챈 사실이다.

"대단하군."

그런 겉치레가 싫지는 않은지 테넬론은 가면 뒤로도 알 수 있는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자네는 오러로 인한 기백만으로 이곳에 모인 비숍들과 교단원들을 능히 압도했다네."

모든 비숍을 아끼는 테넬론이지만, 그는 특히나 유리안에게 더한 신뢰를 보냈다.

'...증오하는 검성, 하이든 라이히와 동격의 무력을 지닌 자.'

마찬가지로 '검성'에게 치욕을 받았으며, '검성'의 제자로서 그의 힘을 지닌 자.

참으로 탐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대단한 검성의 예리한 검을 배우고, 사용할 수 있는 그를 곁에 둔다는 것은 말이다.

"비숍 에이든."

"예, 아크 비숍."

"비숍 유리안이 말한 대로 내가 만든 '뿔'의 모조품을 제작하고 있나?"

어쩐지 나긋나긋한 테넬론의 말투에 움츠러든 에이든은 잠깐 고개를 숙였다.

긴장한 기색을 보이며, 혀로 입술을 축이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예, 맞습니다."

"좋지 않군. 내게도 말하지 않고, 독단으로 그런 행동을 한다니 말이야."

역시나.

불안한 태도로 말하는 에이든의 모습에 엘레노아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딱히 개의치 않는다네."

테넬론은 상관없다는 투로 말을 하며 에이든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내가 빚는 뿔에 비하면 열등한 레플리카가 아닌가? 그런 모조품이 황실에 대항할 힘이 된다면 상관없겠지."

테넬론은 '레플리카 뿔'을 제작하는 교단원을 용인(容認)하겠다고 생각했던 엘레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반인을 상대로 인체 실험을 하는 것도 용인하겠습니까?'

엘레노아는 그 말을 꺼내려고 했으나, 하등 의미가 없음을 느꼈다. 통속적인 윤리의 개념을 제시해봤자, 무시만 당할 뿐이겠지.

"그는 모조품의 완성도를 위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인체 실험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방관하시겠단 말입니까?"

엘레노아는 살짝 놀란 눈으로 유리안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자신이 물었어야 할 말을 그가 대신해준 것이다.

"제국의 율법을 따르는 신민 또한 황실의 이념에 복종하는 공범자라 볼 수 있지. 그것들을 이용해 여명회의 힘을 기를 수 있다면, 뭐가 문제겠는가?"

...궤변이자, 역설, 극단적인 이기주의.

자신이 생각해 온 여명회의 목표와 다른 테넬론의 가치관에 엘레노아는 적잖게 놀랐다.

그와 동시에 일반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유리안에게도 의구심을 느꼈다.

그저 힘을 좇아 여명회에 입단한 그가.

누구보다 '뿔'을 열망하던 그가.

'일반인들한테 그래도 괜찮은가?'라는 의문을 품은 것에 말이다.

"저는 모조품의 실험으로 본 회의 꼬리를 잡히는 게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물론 유리안의 저 의문이 일반인에 대한 연민보다 자기 안위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다.

"뿔을 이용한 인위적인 데몬이 늘어날수록, 저희가 했다는 사실을 모를지언정 그것을 이용하는 단체에 대한 주목도는 늘어나겠죠. 비숍 에이든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그들의 정보망을 모조리 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음... 그것도 맞는 말이로군."

"그러니 일반인에 대한 실험은 자제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비숍 에이든, 후후."

짧게 웃음을 흘리는 유리안.

처음에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너스레를 떨던 에이든이었으나 더 이상 그런 여유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비숍 유리안. '웃는 처형대'라고 불리면서, 일개 평민의 죽음에 애통함을 느끼고 있나 보군."

이대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것을 직감한 에이든은 어떻게든 전세를 역전하기 위해 비웃음 가득한 눈으로 유리안을 도발했다.

"난초를 기른다고 들었는데, 자네 입장에서 일반 평민들은 그 난초보다 못한 존재가 아닌가?"

"후후, 설마 그렇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황실의 명에 무턱대고 신민들을 죽이진 않았겠지."

에이든은 표독스러운 말투로 유리안을 비꼬았지만, 그는 괘념치 않고 고개를 휙 돌렸다.

쓸데없는 도발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태도였으나 엘레노아는 확실히 보았다.

부르르르.

대답하던 유리안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에이든의 도발에 대한 분노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일반인을 학살했다는 죄책감에?

'설마.... 저자가 그럴 리 없겠지.'

그녀의 예상은 전자(前者)와 후자(後者) 모두 어긋났다.

유리안이 주먹이 살짝 떨린 이유는.

'...안젤리카.'

에이든이 꺼낸 '난초' 이야기에 부득이하게 이별한 '안젤리카'가 떠올랐을 뿐이다.

***

"빌어먹을 자식...."

겐멜 수도원을 빠져나온 에이든은 마차에 몸을 실었다.

점차 작아지는 겐멜 수도원의 모습을 보자, 쿵쾅거리던 에이든의 심장은 안정을 찾아감과 동시에 불쾌함에 휩싸였다.

유리안.

그 괴물 같은 녀석에게서 멀어진다는 사실에 느끼는 안도.

동시에 그가 자신의 실험을 훼방 놓았다는 사실에 느끼는 굴욕.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 감정이 솟아오르니, 에이든은 거북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욕지거리를 입에 담았다.

'테넬론이 선처해주신 것은 좋지만 앞으로 레플리카 뿔의 실험은 힘들어지겠어.'

그가 황실의 추적을 받는 여명회에 위험을 감수하고 발을 들인 까닭은 오롯이 가문의 숙원을 위해서.

그것을 이루기 위한 실험을 당분간 행할 수 없게 되었으니, 초조함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아니지. 데몬의 뿔을 이용해 엘릭시르를 만드는 것은 차후를 기약하면 되는 일이지.'

다급함은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인체 실험을 해야 하는 에이든이었으나, 오늘의 경과를 보아 유리안이 지켜보고 있다면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강수를 둬야 하는가....'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런 생각에 에이든은 마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알파스 메이핸드."

부름에 마부는 쓰고 있던 후드를 넘기고는, 에이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크라이파트 가문의 추적은 버틸 만한가?"

"예, 괜찮습니다. 가문 전체도 아니고 요슈아가 직접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은 저와 같은 기사라 해도 급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지요."

비릿한 웃음을 짓는 그의 얼굴엔 혈흔이 묻어있었다.

"그럼 하나만 더 묻지. 아직도 내게 갚을 은혜가 남아있는가?"

알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목숨은 본래 형장의 이슬이 되어 없어질 운명이었으나 에이든 경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이 은혜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다."

알파스의 거리낌 없는 대답에 에이든은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내 앞으로 유리안의 목을 가져와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

겐멜 수도원에서 에이든에게 보낸 경고 덕에 레플리카 뿔에 대한 양산은 늦춰질 것이다.

'검성'측과 '황실'이 여명회의 꼬리를 붙잡는 것 또한 미래의 일이 되면서 그동안의 시간을 번 셈이다.

'문제는 내게 앙심을 품은 에이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것인데.'

설마 무슨 짓을 저지르겠어?

이번에 있었던 '저택 습격 사건'도 에이든이 주도하진 않아 보였다.

가문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선 반인륜적인 일도 개의치 않고 하는 녀석이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얘기했는데 섣불리 움직이진 않겠지.'

하지만 녀석은 뼛속까지 마법사.

어떻게 행동할지 예상이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본인의 목숨을 생각한다면 유리안을 적으로 돌릴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

똑똑.

"부, 부르셨습니까? 유리안 경."

다음 날 아침, 집무실 안으로 라즈롯이 들어서자 난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다.

"어서 오십시오."

가벼운 눈웃음으로 인사하자, 라즈롯의 머리 위로 엷은 보라색이 꿈틀거렸다.

과거엔 저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지금은 어느 정도의 공포심을 주입해야 부려 먹기 편해지기에 딱히 관심 가지지 않았다.

"당신의 '여명회 일원의 기습'에 대한 보고는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다면 즉각 보고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유리안 경."

물론 '채찍'만 때리는 것은 능률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끔은 '당근'도 필요하다.

"아, 라즈롯. 나가기 전에 이걸 받아 가시죠."

"...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던 라즈롯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서류에 손을 뻗었다.

"이건?"

내용을 읽던 그의 시선은 서류의 하단부, 바이엘 아카데미의 인장(印章)이 큼지막하게 찍힌 곳에서 멈추었다.

"바이엘 아카데미 입학 추천서가 아닙니까...?"

"예, 이전에 약속했던 입학 추천서입니다."

"...약속?"

"여명회의 밀정으로 제 아래에서 일한다면, 천한 고아원의 아이들도 바이엘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천한'이란 말을 입에 담는 것이 조금 어려웠으나, 이 경우 '유리안'이라면 이런 식의 어투를 사용하겠다고 생각했다.

라즈롯은 다시금 입학 추천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위, 위조는 아니겠죠?"

대륙의 패권국 중 하나답게,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자랑하는 아드라탄 제국은 그만큼 교육열이 뜨거운 곳이기도 하다.

그런 제국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교육 기관, 바이엘 아카데미는 늘 입학생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심지어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는 학생을 무작위로 선발했으니 고위 귀족도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라즈롯의 의문은 당연하다.

바이엘 아카데미의 입학 추천서는 사대가문도 쉽게 구할 수 없으니까.

"감히, 이 유리안이 위조를 했다는 말입니까?"

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저건 위조가 아니라고.

최근 있었던 '감은 눈' 임무였던, 특별 강의를 할 때 부교감 알롬 초르니에게 받아낸 것이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럼 다행이군요. 이 입학 추천서가 있다면, 당신이 다니던 고아원의 아이들도 입학시험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잠자코 내 말을 듣던 라즈롯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불안함이 깃든 눈동자에 비친 실눈의 유리안은 좋게 말해도 선인(善人)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분명 '약속을 지킨다'라는 선의에서 시작된 행동임에도 말이다.

"참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인상입니다."

"...예?"

"아뇨, 혼잣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난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챙겼다.

둘의 이야기의 주제였던 바이엘 아카데미.

오늘 그곳에서 실기 시험이 있을 예정이고, 난 그곳의 교관 노릇을 해야만 한다.

'그래도 오늘이면 끝이네.'

홀가분한 느낌으로 아카데미를 향했지만, 발걸음은 왠지 모르게 무거웠다.

 

 

 

 

 

 

 

 

47화. 원한

린네 론드벨.

그녀의 비극은 16살 때 일어났다.

그날은 유난히 조용한 날이었다. 평소 들리던 새들의 울음소리도,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던 소리도 전혀 없던 그런 날.

린네는 늘 마중 나오던 집사가 입구에 쓰러져있는 모습에 이변을 눈치챘다.

"대, 대체 무슨 일이...."

피 웅덩이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집사의 모습은 린네에게 위험을 경고했다.

"...머저리 같은 데레인. 발을 너무 깊이 들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나 보지?"

그녀는 숨을 죽인 채, 희미한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창문 너머로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와 피를 쏟으며 무릎을 꿇은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 아버지...!'

당장 소리를 지르고 아버지에게 달려가고 싶었으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린네는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 기생오라비 같은 낯짝이 말이야."

검을 든 남자가 아버지에게 다가갈수록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직감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원초적인 공포가 온몸을 지배한 린네는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그때, 창문 밖에 있는 린네를 찾은 건지, 아버지의 눈에 희망이 감돌았다.

린네와 시선을 마주친 아버지는 괴한에게 들키지 않게 작은 입 모양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도망가렴.'

분명 아버지의 입 모양은 그러했다.

"크큭. 그러게 여명회를 떠나지 말았어야지."

다행히 괴한은 아버지의 그런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냉소적인 비웃음을 흘리며 무릎 꿇은 아버지 앞에 서서 검을 들어 올렸다.

'안 돼─!'

서걱, 툭──.

무언가 가르는 소리.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린네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소리를 지르고, 달려 나가고 싶었으나 그래봤자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녀는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을 상기하며, 입을 틀어막고 들어올 때처럼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벗어나는 그녀 뒤의 아버지 얼굴은 왠지 모르게 편안해 보였다.

***

"여보... 여보!"

"형님, 이렇게 가시면 안 됩니다...!"

아버지가 관에 들어가는 날, 린네는 다른 이들처럼 울지 않았다. 아니 울 수 없었다.

눈물은 복수가 끝나고 흘려도 괜찮다.

'여명회....'

뼈에 사무치는 그 이름. 그리고.

'...목에 난 상처.'

아버지를 벨 때, 괴한의 후드가 흩날리면서 드러난 상처. 린네는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힘이 필요해.'

린네는 아드라탄 제국의 별 중, 가장 강하다고 칭송받는 자에게 찾아갔다.

검성 하이든 라이히. 그에게로.

"복수하고 싶어요. 검을 가르쳐주세요."

***

검성에게 1년간의 혹독한 수련을 받고, 최고라 칭하는 바이엘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 '린네, 정말 굉장하다!'

- '맞아, 맞아! 그 정도면 평범한 기사보다 훨씬 오러를 잘 다루는 것 같은데?'

그 덕에 수준이 높다고 정평이 난 아카데미에서도 그녀의 실력에 도달한 동급생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검의 손잡이도 시간이 지나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그런데도 그녀는 항상 부족하다 느꼈다.

주변에 너무 강한 사람들만 있어서인가.

검성, 유리안, 여명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기사 지망생들은 10살이 채 되기도 전에 검을 잡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그에 반해 자신은 어떤가?

복수하기 위해 검을 들었지만, 그 시작은 16살. 다른 이들에 비하면 최소 6년이나 늦은 시작이다.

- '이번 실기 시험에서도 분명 린네가 1등이겠지?'

-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하지!'

- '천재잖아, 천재!'

- '맞아, 천재 중의 천재!'

그렇지만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주변에선 그녀를 '천재'라며 치켜세웠다.

재능도 재능이었지만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일정 기간 무려 '검성'에게 검을 배운 그녀가 일반적인 검술을 연마한 다른 이들보다 약하면 그것조차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그녀는 더욱더 자신을 채찍질했고, '천재'라는 타이틀에 목을 매었다.

'천재여야만 해.'

그날, 아버지를 죽인 검사에게 닿기 위해선 남들보다 월등히 앞서야만 하니까.

하지만....

"린네 양, 그때와 변한 게 전혀 없군요. 이래선,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유리안이 내린 판단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린네는 멍한 눈으로 유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가증스러운 실눈의 남자는 평소 짓던 미소를 숨긴 채,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안 경,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이런, 실수입니다. 쓸데없는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린네 양."

유리안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아무렇지 않게 발길을 옮기려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린네는 그의 망언을 지적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이번 실기 시험, 오러를 다루는 시험이 아니었나요? 거기에서 전 최고 등급을 차지했을 텐데요?"

아카데미의 기사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시작한 실기 시험 결과를 화두로 내놓으며, 린네는 따지듯 입을 열었다.

"예, 당신은 최고 등급인 '르 메이에르'입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조금 전의 실언을 정정해주시겠어요?"

이번 실기 시험에 응시한 동급생 중, 최고 등급을 받은 그녀였기에 유리안이 내린 평가에 수긍할 수 없었다.

자신의 노력을 무시하려는 유리안에게 반박하고 싶었다.

"후우...."

그 말을 듣던 유리안은 난처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낯선 모습이었으나, 그것보단 평가 정정이 먼저다.

"아카데미의 기준은 그럴지 모르겠지만 그 기준을 벗어나 평가하자면.... 당신은 범재의 수준이 맞습니다."

문제는 이 실눈의 남자는 자신에게 향한 평가를 정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실 평소라면 이런 말 정도는 우스갯소리로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검성'에 대한 왜곡된 존경과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남자였기에, 이런 발언쯤은 시비 걸기 위한 말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빈민가에서, 어스름 불꽃 대장간에서, 아카데미 특별 강의에서 거듭된 만남 속에서 린네는 유리안을 달리 볼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격의 차이.

그것을 경험한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유리안'을 인정하고 있었다.

"...왜죠?"

그래서인지 유리안의 입에서 나온 '범재'란 말을 단순히 실언이라 치부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을 테죠. 그 이유를 말해주세요."

난감해하는 유리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포기한 채 대답하였다.

"빈민가에서 임무를 해결했을 때와 지금. 그때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은 그리 큰 차이가 없습니다. 린네 양."

"그게 이유인가요? 제대로 된 설명을...."

"당신 오러의 질은 분명히 다른 동급생에 비해 월등히 좋습니다. 그렇지만 린네 양. 당신은 그걸 얼마나 유지할 수 있습니까?"

"그, 그건...."

린네의 말문을 막히자, 유리안은 평소처럼 미소를 지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었기에 더욱이 거북한 실눈과 유리안의 비릿한 미소를 마주하자 린네의 눈빛은 가늘게 떨렸다.

"오러를 오래 유지할 수 없다는 건 검사로서 삼류라는 소리죠. 아무리 양질의 오러라도.... 장기전으로 가면 무용지물인데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의 몸에선 은은한 오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린네 양, 당신의 오러는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으나 일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균등하게 오러를 분배하는 것이 너무나도 미숙하죠."

자신의 약점.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입에 담는 유리안.

"이전에 열차에서 만났을 때, 예비용 검을 가지고 다니는 게 좋다고 말씀하셨죠?"

"네...."

"저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했죠. 왜 그러겠습니까?"

"...."

린네는 답을 알고 있었지만, 분한 마음에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저는 당신처럼 불완전한 오러로 검을 파손시키지 않으니까요."

담백한 그의 말투에 린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녀의 입술을 붉게 물들었다.

"그래서 당신이 범재라는 겁니다."

***

노을 덕에 붉게 번지는 아카데미 부지(敷地). 땅거미가 지는 경치는 실로 아름다웠으나, 지금의 린네에겐 그리 와닿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 유리안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더 침울해졌다.

'사실 알고 있던 사실이잖아....'

머리로는 부정하려고 해도, 내면에선 그의 말이 맞다며 수긍하고 있었다.

그 탓에 린네는 모두가 떠난 강의실에 우두커니 앉아 상념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고쳐야 한다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고.'

씁쓸함이 혀끝을 맴돌았고, 지끈거리는 분노가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참으로 지독한 감정이 아닐 수 없었다.

끈적하게 들러붙은 부정적인 생각은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오러 운용의 미숙함.'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일이었으나 최근 그는 모종의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혼자서 고칠 수 있을까?'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사념을 떨쳐냈다.

'스승님의 가르침이 없어도 난 방법을 찾아낼 수 있어.'

주먹을 불끈 쥔 린네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도 말씀하셨지. 마음에 내키는 것이 있다면 확실히 말하고.... 틀리면 고치면 된다고.'

린네가 향하는 곳은 아카데미의 본관이었다.

그곳에서 부교감 알롬 초르니와 대화를 끝마치고, 돌아가는 유리안을 붙잡아 다시 한번 말할 것이다.

'당신의 말대로 난 오러 운용이 미숙해. 하지만! 한 달 내에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일종의 선언.

그것을 통해 나약한 마음을 바로잡기 위함이다.

"소식 들었어? 크라이파트 가문의 호위기사 한 명이 동료를 살해했다 하더라고."

"그 요슈아 가문의 기사 말하는 거구나? 전(前)청사자 기사단의 부단장 출신."

"응."

"무섭다, 무서워. 크라이파트 가문을 적으로 돌리고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 학생들의 잡담이 귓가에 들어왔으나 린네는 신경 쓰지 않고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관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눈앞에 보였....

'...윽.'

비릿한 피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자극했다.

그녀는 황급하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는 중, 희미하지만 꺼림칙한 혈향(血香)의 근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지독한 화상.'

그 냄새의 근원은 얼굴의 반이 화상자국으로 뒤덮여 신원을 파악할 수 없는 남자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눈길이 가는 남자였지만 그것 말고도.

'...강해.'

단련된 몸에서 풍겨오는 기백과 검술에 조예가 깊은 듯한 걸음걸이는 연신 린네의 시선을 빼앗고 있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화상의 남자는 고개를 돌려 린네와 눈을 마주쳤다.

씨익.

남자의 비열한 미소.

'아, 저 상처....'

목에 난 상처.

그것을 본, 린네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저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 당시 괴한의 얼굴은 검은 후드 탓에 볼 수 없었으나, 저 목에 난 상처만큼을 확실히 기억난다.

수련하는 와중에도 검성과 함께 당시 사건을 조사하면서 알아낸 그 이름.

'알파스... 메이핸드!'

이글거리는 눈으로 린네는 알파스를 노려보았다. 끓어오르는 분노에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몸은 부르르 떨렸다.

쿵쾅, 쿵쾅.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린네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쿵쾅, 쿵쾅.

가라앉지 않는다. 도리어, 한가지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할 뿐이다.

'죽여야 해.'

그녀의 눈은 복수심이란 불꽃이 일렁거렸다.

 

 

 

 

 

 

 

 

48화. 실눈과 비웃음

알파스 메이핸드.

그 이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린네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3년 전, 평온했던 론드벨 가문에 생긴 이변.

그때 본 풍경은 여전히 린네의 뇌리에 들러붙어 그녀를 괴롭혔다.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저택.

붉은 피로 물든 집사의 시체.

서늘하게 빛나는 검.

자신에게 도망가라고 하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린네는 동공에 지진이 난 듯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그 '이변'을 만든 존재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저 가증스러운 얼굴에 칼을 꽂고 싶었으나, 스승 하이든 라이히의 말이 떠올라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했다.

- '린네, '몬시뇰' 계급 이상의 교단원을 만난다면, 일단 자리를 피하고 다른 동료들을 불러라.'

하이든 라이히의 말은 지극히 당연하다.

단신으로 '몬시뇰' 이상의 계급과 조우할 시, 전투의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노릇.

일단 자리를 비우고 다른 이들을 불러 상대하는 것이 지당한 일이었다.

'...발이 안 떨어져.'

그러나 린네는 흉수를 찾았다는 흥분과 강자에 대한 두려움, 혹시 본인이 도움을 청하러 간 사이 사라질까 하는 고민 탓에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어쩌지, 어쩌지.'

잠깐의 고민 끝에 그녀는 일단 그의 뒤를 쫓자고 결심했다.

평상시의 그녀였더라면 이런 무모한 판단을 선택하지 않았겠으나, 힘들게 찾아낸 원수를 놓칠 수 없다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그녀의 몸은 알파스의 강함을 느끼고 있기에 원초적인 공포가 그녀의 육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이러면 안 돼! 이런 나약한 마음가짐으론 아버지의 복수를 이룰 수 없어.'

마음을 다잡은 린네는 알파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검을 뽑아 달려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실낱같은 이성이 그녀를 막았다.

'여기에 왜 온 거지?'

분노로 끓는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린네는 알파스의 뒤를 살며시 쫓기 시작했다.

본관 외부의 정원을 지나, 알파스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여기는....'

이윽고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아카데미 외곽의 별관.

노후한 시설 탓에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인적 드문 장소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의중(意中)을 알 수 없는 행동에 린네는 의문을 품었으나, 홀린 듯이 그가 사라진 별관에 들어섰다.

"미행이라고 하기엔 너무 티가 나는군."

윽.

놀란 린네를 기다리고 있던 것 다름 아닌 알파스.

다 알고 있다는 그의 표정에 자연스럽게 린네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교복을 보니... 크라이파트 가문에서 보낸 기사 같지는 않고. 혹시 날 알고 있나?"

알고 있냐고?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3년 전, 론드벨 저택...."

능글맞은 알파스의 말에 린네는 분노로 인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응? 론드벨이라.... 음. 아! 설마...."

잠깐 생각에 잠기던 알파스는 이내 생각이 난 듯 그의 얼굴에 점차 음흉한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반반한 얼굴이 익숙하나 싶더니. 데레인 론드벨, 그 기생오라비 놈의 딸내미였군."

추악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린네는 뽑아 든 검으로 당장 달려 나갈 듯한 자세를 취했다.

"복수하러 왔나?"

그녀의 흉흉한 기세에도 알파스의 표정과 말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못 본 척 지나가던가 기사단의 고발을 하는 것도 방법이었을 텐데. 참 아쉽군그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인데 말이지."

마지막 말이 끝나자마자 린네를 옥죄는 마나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린네는 몸속에 있는 마나를 활성화해 압박해오는 알파스의 마나에 힘겹게 대항했다.

"그 나이치고는 대단하군."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알파스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냥 모른 채 지나가는 건 어때? 데레인이 죽었던 그 날, 창문에서 훔쳐보던 것처럼 말이야."

"그냥... 죽어!"

린네는 체내 마나를 다 쥐어짜서 알파스의 마나를 벗어나, 그에게 달려들었다.

"후후. 역시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군."

콰아앙!

알파스가 가볍게 휘두른 주먹에 린네는 달려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반대편 벽으로 날아갔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군. 또래와 비교하면 오러가 제법이야. 그래도 아직은 멀었어. 크크. 우선 말 좀 잘 듣게 다져볼까."

알파스는 살짝 긁힌 주먹을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황당한 표정의 린네에게 다가갔다.

***

나의 적나라한 말투에 충격을 받은 린네의 표정. 떠오르는 바람에 난 괜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평소의 린네였다면, 내 평가에 코웃음을 치거나 딱히 연연하지 않았을 터인데 말이다.

그렇다 해서 내가 한 발언을 취소하거나 직접 찾아가 사과를 할 생각은 없다.

분명 그 자리에서 '유리안'이라면 그런 식으로 말했을 터. 하물며 사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틀린 말도 아니지.'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말이긴 했으나 린네에 향한 평가가 아무 이유 없이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다.

자세나, 호흡, 걸음걸이로부터 '검술'의 향상은 찾아볼 수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오러'에 대한 문제점을 해소하지 못한 상태였다.

빈민가에서 보았던 그 문제점을 말이다.

'일반적인 사람보다 많은 마나혈.'

그 탓에 린네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오러를 운영했다간, 체내 마나가 금방 바닥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본래 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그녀의 스승이자 검성 '하이든 라이히'이다. 수제자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스승의 본분이었으니까.

"뭐, 알아서 하겠죠. 지금 제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쏘아붙이듯 쓸데없는 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말이다.

"껄껄. 수고 많으셨습니다. 유리안 경."

'감은 눈'의 업무와 관계된 간단한 행정 처리를 끝내고 난 뒤, 아카데미 부지를 떠날 채비를 하자 부교감 알롬 초르니가 접근했다.

"과연 황실 전속기관 소속이자 훌륭한 기사이신 유리안 경께서 관리 감독을 맡으니, 학생들이 이번 시험 결과에 그리 불만을 갖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유리안'의 평가가 들어간 시험이다. 거기에 수긍하지 못할 경우, 내 의견을 전면 부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후후, 불만을 가질 정도의 수준이라면 학생이 아닌, 정식 기사 절차를 밟고 있었겠죠."

"그 말도 맞습니다!"

알롬은 한바탕 웃어 젖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괜한 오지랖이라는 것은 알고는 있지만...."

"예, 말씀하시죠."

"그... 승전 기념일이 아닌 이 업무를 맡으셔서 곤란한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요."

이전에도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표면적으로 드러내시진 않았지만, 황실에서 유리안 경의 행동에 의문을 가진 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하물며 하이든 님도 얼굴을 비춘 마당에 그 수제자였던... 크흠!"

검성의 이름을 입에 담던 알롬은 다시금 헛기침하더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제도에 거주하는 신민들이라면, 대부분 '검성'과 '웃는 처형대'의 관계성을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저러는 것이겠지.

"괜찮습니다, 스승님과의 갈등은 해결한 지 오래니까요."

"하, 하하! 그, 그것참 다행입니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사실 아직 '검성'과 한 마디도 섞어본 적이 없다.

'결과적으로 참석하지 않는 게 정답이었군.'

알롬의 말을 듣다 보니, 이번 '승전 기념일'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하이든님과 잘 해결하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예."

"아! 그러고 보니, 이번 실기 시험에서 유리안 경의 평가에 유일하게 이의를 제기한 것이 린네 양 아닙니까?"

알롬은 품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어렴풋이 '린네 론드벨'이란 이름이 보인 것 같다.

"최고 등급인 '르 메이에르'를 받기는 했으나, 그 과정에서 유리안 경이 내린 평가에 정정을 요구한다 적혀있습니다."

왠지 곤란한 표정으로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번 실기 시험에선 이의 신청이 없을 것이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 이의 신청서를 제게 주시겠습니까?"

알롬은 신청서를 달라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순순히 내게 서류를 건네주었다.

"제가 맡은 일이니, 일 처리는 깔끔하게 하고 싶군요."

"일 처리... 말입니까?"

"예, 린네 양이 납득할 수 있도록 잘 타일러 보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번 테스트에 이의 신청은 한 건도 없게 될 테죠."

"오, 오오...."

내 말에 감탄하는 알롬. 그 후, 부교감 알롬은 잘 부탁한다며 연신 고개를 숙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의 신청서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긴 하지만.'

지금 난 그 유명한 '검성'도 얼굴을 비쳤다는 '승전 기념일'을 뒷전으로 하고 아카데미 교관 노릇을 한 것이 아닌가?

'그런 와중에 잡음이 생기면, 트집 잡히기 좋겠지.'

승전 기념일을 패스한 건 어디까지나 검성과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 황실의 눈총을 받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럼 일단, 린네가 어디 있는지부터 찾아봐야겠군.'

그리 생각하며, 난 눈을 감고 단전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이전에도 자주 사용했던 '마나 감지'. 그것의 범위를 늘려 현재 바이엘 아카데미에 있는 린네를 탐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아니, 큰 기대는 하지 말아야겠지.'

바이엘 아카데미의 규모는 굉장히 넓은 편이다. 이 광활한 땅덩어리에서 사람 한 명의 마나를 감지하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같은──.

"음?"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 넓은 아카데미 부지에서 린네의 마나를 탐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최근 실기 시험에서 본 린네의 오러.

그것과 익숙한 느낌의 마나가 '마나 감지'에 탐지된 것이다.

'이 위치라면.... 별관인가?'

대략 아는 곳이군.

린네의 위치가 가늠되자, 난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린네 양, 그때와 변한 게 전혀 없군요.'

린네의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또렷하게 떠오르는 단 한마디.

그녀가 그동안 해왔던 뼈를 깎는 듯한 노력을 전부 무시한 그 말.

"대단한데? 그 나이에 일반 기사급을 상회한 오러를 다룰 줄이야. 하지만 유지력이 형편없어."

유리안과 똑같은 말을 내뱉는 알파스를 보며 린네는 그저 자신의 부족함에 입술을 파르르 떨 뿐이었다.

'고작 내 한계가 여기까지인 건가.'

그녀는 남들이 붙인 '천재'라는 말에 도취(陶醉)해 아집을 부리는 머저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일어나지 마라. 곧 편하게 만들어 줄 테니."

퍼억──!

린네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려 했지만, 알파스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우악스러운 발길질로 그녀를 걷어찬 그는 쥐고 있던 검을 린네의 얼굴 앞에 들이대었다.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모습에 린네의 눈에서 후회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금 더 노력할걸.

한 번 더 검을 휘두를걸.

'아버지, 죄송해요.'

그녀의 눈물 사이로 서슬 퍼런 검이 비쳤다.

"자, 이제 끝내자고."

검을 쥐는 것은 고사하고, 원수인 알파스의 말에 반응도 못 할 정도로 그녀의 신체는 망가져 있었다.

그래, 그냥 이대로 편해지는 것도 방법일 수 있어.

늦은 나이에 시작한 검술. 앞서 나간 이들을 추월하기 위해서 잠도 줄이고, 다른 이보다 배 이상 검을 휘둘렀던 기억.

'다 부질없는 짓이었지.'

-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겁니까?'

어디선가 환청처럼 들려온 유리안의 목소리에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복수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과 '유리안'에 대한 분노가 얽혀 다 죽어가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지금 자기 모습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본다면 얼마나 한심스럽게 보실 건가.

덩달아 '역시 거기까지군요.'하며 자신을 비웃을 유리안의 모습까지.

'그건... 싫어!'

아버지 복수를 해야 한다는 마음도 컸지만, 그에 못지않게 가증스러운 유리안의 모습도 보기 싫었다.

감히 자신을 가르쳤던 스승에게 검을 들이민 안하무인.

황실의 명이라면 갓난아기도 죽일 수 있는 무감정(無感情)한 검.

출세를 위해서라면 동료도 버리는 파렴치한.

존경심이라곤 전혀 들지 않는.

그런 주제에 엄청난 실력을 갖추고 있는.

분명 그런 그가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이런 식으로 비꼴 것이다.

'꼴이 말이 아니군요.'라며....

"꼴이 말이 아니군요. 이래선 동문인 제 얼굴에도 먹칠하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가증스러운 실눈의 유리안은 별관 입구에 서 있었다.

 

 

 

 

 

 

 

 

49화. 가짜 얼굴, 본성(1)

린네의 실기 시험 성적 변경을 위해 그녀를 찾아왔을 뿐이다.

근데 이 상황은 뭐지?

난 쓰러져 있는 린네와 그 앞에서 검을 들고 있는 남자를 보며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이곳에는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아카데미와 연이 있을 정도로 교양이 있으신 분 같지는 않습니다만."

하지만 난 태연한 척, 빈정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 몸에 익숙해진 나머지, '유리안'이라면 내뱉을 법한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다.

"오랜만이군. 유리안, 이렇게 마주하는 건 수도원 이후로 처음인가? 얼마나 네놈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지."

화상으로 인해 얼굴 반쪽이 몰골이 된 남자는 쓰려진 린네를 뒤로 하고 나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그가 나를 돌아봄과 동시에 피부를 깎아내리는 듯한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아, 그렇군.'

저 살기는 이전에 '겐멜 수도원'에서 느껴본 적이 있었다.

여명회의 '몬시뇰' 등급이자, 전(前) 청사자 기사단 부단장.

동시에 요슈아에게 '레플리카 뿔'을 준 당사자.

알파스 메이핸드.

"본 얼굴보다 지금 얼굴이 더 봐줄 만하군요. 알파스 경."

비웃음이 가득 실린 말투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알파스의 입술은 괴기하게 뒤틀렸다.

"날 쫓던 마법사와 싸우다 당한 상처지. 역시 4위계의 마법사더군. 그래서 내 친히 그놈의 사지를 잘라서 개들에게 주었지."

"그러길래 그런 '위험'한 건 아무한테나 주면 안 되지요. 덕분에 '중요'한 샘플이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크큭, 그 신랄한 주둥아리는 여전하군."

이놈이 하는 짓으로 보아 분명 나와 끔찍한 악연으로 얽혀있겠지. '유리안'은 뭔 짓을 저지르고 다닌 거야.

우선 잡생각은 그만하고 난 알파스가 바이엘 아카데미에 찾아온 이유를 생각했다.

지금까지 쌓인 '유리안'에 대한 앙금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건 아닌 것 같고....

'...에이든의 명령인가.'

요슈아는 이놈에게 '뿔'을 받았다고 했다.

그 '뿔'은 에이든이 자신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 만드는 것.

결론적으로 실험을 방해받은 에이든이 날 제거하라고 한 모양이다.

'그리고 린네... 이 놈을 그렇게 찾아 헤매더니 결국 찾았군.'

처음에는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으나, 조금만 생각하니 쉽게 정리가 되었다.

'어찌 되었든, 죽이면 되는 것이겠지.'

'유리안'스럽게 생각하며, 난 허리에 찬 검집에 손을 갖다 대었다.

멈칫.

하지만 난 알파스에게 덤벼들려고 하는 '유리안'의 몸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놈의 몸뚱아리야, 말 좀 들어라. 죄 없는 린네가 저기 있잖니.'

'유리안'의 본성답게 동료는 무시한 채, 적을 사살하려는 본능이 '유리안'의 몸을 계속해서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년. 네가 사용하던 검술과 비슷한 검술을 사용하더군."

현재 내가 품던 불안을 눈치라도 챘는지, 알파스는 발치에 쓰러진 린네의 목을 부여잡았다.

젠장!

검성과의 만남을 피한 이유는 그 '트레일러' 영상처럼 되는 걸 피하기 위해서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주연은 어디까지나 '유리안'이 아닌 검성과 린네, 그리고 그의 동료들.

주연 캐릭터의 죽음으로 메인 스토리에 어떠한 나비효과를 불러올지 모른다.

그리고 그건 스토리의 주요 내용을 대략 파악하고 있는 나한테도 마이너스이다.

'어떻게 하지.'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은 채 송장처럼 들어 올려지는 린네를 보며 난 고민에 빠졌다.

"이년도 검성에게 검술을 배운 모양이지?"

"예, 그녀는 제 동문입니다. 아쉽게도 말이죠."

"그래? 크큭."

웃음과 함께 알파스는 린네를 내게로 집어 던졌다. 붕 뜬 그녀의 몸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내려던 찰나.

린네의 몸에 가려진 시야 너머로 '분노'의 빨간색 아지랑이와 피부를 찌르는 살기가 느껴졌다.

[놀라운 직감]

[부정의 색]

보이지 않아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는 알파스의 검신(劍身).

살의를 가득 실은 오러는 린네와 함께 나까지 베어내기 위해 가차 없이 달려들고 있었다.

'베어라.'

태생적인 직감과 '유리안'의 마음가짐은 린네 따윈 상관하지 말고, 베어버리라 외쳤으나 난 린네의 몸을 끌어안은 뒤 옆으로 뒹굴었다.

"크으으윽!"

그 과정에서 알파스의 검은 내 등을 훑고 기다란 상처를 남겼다.

내가 한바탕 구른 자리에는 혈흔이 선명하게 남았고, 아찔한 통증이 뇌리를 강타했다.

"푸, 푸하하하핫!"

그런 내 모습을 비웃듯, 알파스는 호쾌하게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많이 변했군,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피가 잔뜩 묻은 검을 털어낸 녀석은 온몸으로 오러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강한 자신감! 그것이 오러를 통해 느껴졌다.

"예전의 너였더라면 그년을 지키는 게 아니라 도리어 꿰뚫어서 내 목을 노렸을 거다!"

녀석은 비소(砒素)를 머금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도리어 꿰뚫어서 자기 목을 노렸을 거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린네는 '검성 하이든'의 수제자이자 최측근이라고 봐도 무방한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죽거나 한다면 당연코 검성은 모든 힘을 모아서 범인을 찾을 것이다. 그 와중에 '여명회'가 드러난다면?

그리고 내가 '여명회'와 관계있다는 게 알려진다면?

'나와 동문이라고 말했을 때, 그 정도는 알아챌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멍청한 놈 같으니.

"살기는 여전하군."

나에 대한 짜증이 살기로 느껴졌는지 알파스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악명이 무색하군!"

내가 뭐 어쨌다고!

쓸데없는 감상을 입에 담으며, 땅을 박찬 알파스는 내게 일직선으로 달려와, 오러를 품은 검을 휘둘렀다.

'빠르다.'

그러나 받아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캉──!

순식간에 검집에서 검을 꺼낸 난 오러를 주입해 녀석의 검을 쳐냈지만, 공세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팟.

녀석은 벽을 발로 찬 뒤, 궤도를 비틀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신체의 무게와 함께 오러를 잔뜩 실은 검은 굉장히 묵직했다.

이 두 합만으로도 지금까지 상대했던 검사들과 궤를 달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타고난 검사]

하지만 '유리안'을 연기하기 위해 투자한 노력은 절대 헛수고가 아니었다.

녀석이 검을 휘두르는 일련의 과정.

그 검로(劍路)를 명확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동시에 '데몬'을 상대했을 때처럼, 이곳에 검을 가져간다면 효과적이라고 '유리안'의 몸이 속삭였다.

"...크, 크윽!"

연격, 또다시 연격.

이어지는 검의 교류 속에서 알파스는 자신의 기량이 밀린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그는 전보다 더 오러가 가득한 거센 공격으로 날 몰아붙이려 했다. 그럴수록 호흡이 가빠지고, 검 끝은 흔들렸다.

조급함이 극(極)에 달했다고 느껴진 것은 녀석이 더 깊은 보폭으로 내게 접근해, 검을 치켜올렸을 때였다.

'속전속결로 끝내려는 그 생각.'

난 조급해 보이는 녀석에게 조금씩 떡밥을 던졌다. 빈틈이 없어 보이는 연격 속에서 알파스가 눈치채지 못하게 일부로 조금씩 약점을 노출했다.

바로 목 위의 가드가 굳건하지 않다는 점. 눈치챈 녀석은 어떻게든 거리를 좁혀 온 힘을 실은 내려 베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예상된 공격에 반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

'쉽게 끝내려고 한, 그 판단이 널 죽인 거다.'

난 머리로 내려오는 검을 옆으로 한 발 옮겨 피한 뒤, 훤히 보이는 알파스의 복부로 시선을 옮겼다.

월광(月光)으로 물든 검으로 베어낸다면, 아무리 오러로 방어를 한다 해도 무리 없이 갈라낼 수 있을 터.

'어? ...잠깐.'

알파스의 복부를 베어버린다면, 치명상으로 끝나지 않고 절명(絶命)할 것이 분명하다.

그 말은....

내가 살인(殺人)을 저지른다는 소리.

지금까지 내 손에 죽은 사람들은 데몬으로 변이된 사람들뿐.

'데몬'을 죽인다는 생각으로 검을 휘둘렀기에 거리낌 없이 죽인 것이다.

하지만 알파스는 아직은 인간─.

"죽어라! 유리안!"

잠깐 사념에 잠겨있던 도중, 내 머리로 향하는 알파스의 검은 궤도를 틀어 어느새 내 몸에 작렬했다.

왼쪽 어깨에서 복부까지.

손으로 틀어막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혈흔이 흘러내린 탓에 머리가 핑 돌았고, 갑작스러운 현기증에 뒷걸음질 쳤다.

"멍청한 놈! 집중이 흐트러졌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알파스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이어지는 연격(連擊).

폭풍우처럼 몰아지는 알파스의 공격 속에서도 내 몸은 반격은커녕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쿨럭."

검상(劍傷)에서 흘러내린 피가 코트를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젠장, 아끼던 코트였는데.'

이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짜증이 난다.

'살인.'

그 질척거리는 감정은 조금 전, 알파스의 목숨을 끊을 수 없었던 나 자신에게로 향했다.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은 있었다.

저 시건방진 알파스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순간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왜 끝장을 내지 않은 거지?

"이렇게 쉽게 죽일 수 있을 줄이야. 예전에 비해 약해진 것이 아닌가, 유리안!"

그 이유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지금까지 태어나 살인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이시후'의 마음가짐 때문이겠지.

자연스레 알파스의 배를 갈라 죽이려 하던 '유리안'의 몸을 본능적으로 억눌러버린 '이시후'의 마음.

그리고 내 손을 더럽히지 않더라도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안일하고, 얕은 생각이 나 자신을 이 지경으로 이끈 것이다.

"어떠냐, 유리안! 반피스트 대교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지 않나?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지만 말이야!"

이렇게 해선 안 돼.

알파스는 '유리안'에게 살기를 내뿜고, 죽이려는 하는데, 그런 그를 이대로 보낸다?

그건 '웃는 처형대' '유리안'이 할 법한 행위가 아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앞으로 닥칠 위험들을 모두 받아내는 것이 역부족일 터.

살아남기 위해 완벽한 실눈 악역을 연기하기로 마음먹었잖아.

***

알파스는 비릿한 웃음을 입에 담으며, 눈앞의 상처 입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제국이 웃는 처형대,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지금까지 그가 써나간 연대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알파스의 몸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무력하구나, 너무나도 무력해."

비아냥거리는 말과 함께 알파스는 검을 치켜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안의 숨통을 끊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쉽게 보내줄 수 없지. 네 놈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해야지 않겠어?

알파스는 종지부를 찍기 전에 이 즐거움을 조금 만끽해지고 싶어졌다.

"내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라. 유리안. 그렇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알파스는 비릿한 웃음 지으며 거만한 말투로 나에게 제안을 건넸다.

당연한 거짓말.

제안 뒤에 숨겨진 조롱.

어떤 고귀한 혈통도 목숨이 걸린 일에선 자존심도, 명예도 내팽개쳤다. 그 사실을 의심치 않았던 알파스는 눈앞의 남자 또한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자존심이라는 무게에 침몰 될지언정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는 '웃는 처형대'.

그가 고고하게 지켰던 '자신'을 잃고 무너져내리는 것은 실로 우스꽝스럽겠지.

"반피스트 대교라.... 저는 그때의 기억은 잃었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유리안이 내뱉은 말은 알파스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 상실'이란 소문이 떠돌게 된 사건 이후 저는.... 아니! '유리안'이란 인물은 죽은 셈이 되겠군요."

유리안의 혼잣말을 이어졌다. 독백을 듣던 알파스는 그의 모습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죽을 때가 되니, 정신이 이상해졌나 보군."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풍문처럼 떠돌 경우, 제 신상에 위험이 생기겠죠."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의 연속.

그나마 이해할 수 있던 것은 유리안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역시 모든 것은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감정이 고조되었습니다.]

[고유 특성, '뜨인 눈'이 발현되었습니다.]

스르륵.

항상 닫혀있던 유리안의 눈꺼풀이 열렸다.

'...헉.'

그 순간 알파스는 소름 끼치는 살기가 전신을 찌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잔털이 곤두설 정도의 어마어마한 살의는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검술의 경지와 함께 높아진 자신의 본능은 반사적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살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크, 크아아악!!!!"

상대의 경지가 자신의 본능이 느끼는 것보다 아득히 높았다는 것.

살이 잘려져 가는 끔찍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며, 알파스는 자기 오른팔을 쳐다보았다.

없다.

깔끔하게 잘린 오른팔에선 오롯이 붉은 피만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사람을 벤다는 거....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군요."

당장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통증을 참아내며, 알파스는 실핏줄이 터져 붉어져 버린 눈으로 유리안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이곳에서 죽어야겠습니다. '유리안'인 제가 그리 마음먹었으니까요."

 

 

 

 

 

 

 

50화. 가짜 얼굴, 본성(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