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악연(2)
"다시 생각해도 참 잘한 결정이군요."
내가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야.
공명석의 보수를 위한 마법사의 호위.
이걸 수행하기로 한 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결정이었다.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적의 임무였다.
안전한 영역에서 이뤄지는 임무다.
아마 별다른 문제가 없는 이상 큰 위험은 없을 거다.
'게다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병력도 있지.'
난 고개를 힐끔 돌려 출발 준비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인원들을 살펴보았다.
그중에는 일반 병사들과 명백히 다른 분위기를 뽐내는 장정 둘이 보였다.
제국 정규 기사단인 청사자 기사단.
이번 호위 임무에는 나뿐만이 아니라, 기사단의 인원도 파견되었다.
어디까지나 지원이라는 명목이라 실상 목적은 다른 데 있겠지만, 나로서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마침 눈을 마주친 두 기사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더니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유리안 경, 수고 많으십니다. 청사자 기사단의 단원인 페른 텔런드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사단원인 하인리히라고 합니다."
두 기사는 정중히 인사했다.
하지만 정중한 말투와 행동과는 달리, 눈에서는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정의 색>으로 보이는 감정도 보라색.
내게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육체와 정신이 단련된 기사라 일반인처럼 뚜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악질이군, 악질이야.
나는 속으로 유리안의 평소 행실에 다시금 질려하며 인사에 답했다.
"관광특구인 줄린까지는 그리 멀지는 않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죠. 그러니 서로 주의하도록 합시다. 청사자 여러분. 후후."
유리안답게 말하며 쳐다보자 두 사람은 침을 꿀꺽 삼키며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 그런데 유리안 경. 줄린 특구까지 마차를 이용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차 말입니까?"
"예."
기사 '페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보다는 마차가 편하지 않겠습니까?"
"마차가 있었습니까?"
"마법사 호위용으로 준비한 마차가 있습니다. 긴 여정이 될 테니, 타고 가시는 게 편하지 않으실까 싶습니다만."
"흠."
난 짧게 신음을 흘린 뒤, 페른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편의를 위해 하는 말 같진 않았다.
이 정도의 배려를 받을 정도로 유리안이 괜찮은 인물이 아닌 건 내가 제일 잘 아니까.
'그거 말고도 뭔가 묘한 의도도 느껴지지만 말이지.'
세력 간의 알력 싸움인가.
황실 소속의 '감은 눈'인 날 선두에 세우는 게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아마 호위 임무에 편성된 병력을 멋대로 주물럭거리고자 지휘권을 가져가겠다고 선수를 치는 거겠지.
'알량한 자존심이로군.'
정규 기사들 대부분은 귀족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에 반해서 '유리안'은 명문이기는 하지만, 방계 혈통의 귀족. 그런 자의 지휘에 따라야 한다는 사실이 고깝지 않은 것이겠지.
게다가 그 '유리안'을 상대로 주도권을 가져온 거다.
추후에 이를 자랑거리로 말할 수 있을 테니 더더욱 자존심을 부리려고 하겠지.
"뭐, 그렇게 합시다."
의도야 다 알았지만 순순히 승낙했다.
굳이 저기에 반할 필요는 없었다.
뭣 하러 저 얄팍한 싸움에 끼어들 필욘 없었다. 게다가 굳이 편한 마차를 놔두고 말을 선택할 이유도 없었고.
"알겠습니다 유리안 경!"
내 대답에 페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마법사가 도착하면 말해두도록...."
"제가 도착하면 뭘 말씀하신다고요?"
"아, 도착하셨습니까?"
마침 공명석 보수에 투입되는 마법사가 도착한 모양이다.
나는 가볍게 인사라도 할 겸 고개를 돌려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
내 얼굴을 본 마법사의 짧은 탄식.
그리고 나도 역시도 속으로 비슷한 반응의 생각을 했다.
얘는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일린 드 도나시엥.
통칭 아일린.
내게 맹렬하게 적의를 드러내던 5위계(位階) 바르고 등급의 마법사가 서 있었다.
"페른 경."
"예, 유리안 경."
"번복해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호위를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예? 아 예."
"그러니, 저도 말을 타서 이동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즉시 대처할 수 있어야죠."
"조, 조금 전과는 말이 다르십니다, 유리안 경."
페른의 얼굴이 잠깐 일그러졌다.
마음 같아선 나도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싶었으나, 그럼 아일린과 같은 공간에 계속 있어야 한다.
그건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과 같이 있는 건 위험해.'
당연히 이 사정을 말할 수 없으니 '유리안'처럼 넘어가자.
"단순한 변덕입니다. 불만 있으신지요?"
싸가지 없게.
***
아드라탄 제국의 '웃는 처형대'.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압도적인 무력과 잔혹함으로 무장한 남자로 황실 전속 기관 '감은 눈'의 단장인 오드윈도 어찌하지 못하는 자로 유명하다.
신분의 차이나, 직급의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청사자 기사단에 막 들어온 일개 기사 따위는 넘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강자.
그럼에도 페른은 담백하게 잘라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실눈의 남자가 싫다고.
'변덕이라고? 그냥 단순한 변덕?'
이유는 '유리안'이라는 이름에 깃든 악명들 탓도 있었으나, 그보다 저 만용(蠻勇)에 가까운 성질머리 탓이다.
자신은 어떤 짓을 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또는 그것이 황실의 뜻이라 진심으로 생각하는 언행.
이제 막 기사의 직위를 얻은 페른에겐 용납할 수 없는 망거(妄擧)였다.
마차에 집어넣으려고 한 이유도 그 탓이었다. 그 기분 나쁜 얼굴을 꼴도 보기 싫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이 임무의 주도권을 자신이 속한 '청사자 기사단' 쪽으로 가져올 생각이었다.
비록 의도가 있는 '배려'였으나 어이없게 거절당하자 페른은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그것도 변덕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아니, 잠깐.'
생각 도중, 페른은 문득 뭔가 떠올랐다.
혹시 유리안이 자신의 의도를 알고 저렇게 행동한 것이라면?
'그럴 수 있어... 녀석은 혼란스러운 황실의 정치 속에서 파벌도 없이 살아남은 괴물 같은 놈이니까.'
어쩌면 '변덕'으로 포장한 일종의 도발일 수 있었다.
임무의 주도권을 가지려는 의도를 파악하고 말이지.
하긴,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된다.
굳이 편한 마차를 두고 말을 탈 일이 없지 않은가?
즉, 제안을 거절한 건 그 나름의 선전포고.
'...한 번 해보자 이거군?'
페른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씰룩거렸다.
***
'...투입된 마법사가 아일린이었다니.'
명령서를 제대로 읽어볼 걸 그랬다.
가슴이 들뜬 나머지 중요한 것들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불찰이군.'
난 바로 옆에서 비슷한 속도로 걷는 마차를 쳐다보았다.
저 안에는 아일린이 타고 있었다.
'감은 눈' 입단 테스트 당시, 내게 적의를 드러내던 그 여자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번처럼 '혐오'는 보이지 않다는 점이랄까.
하지만 그렇다고 껄끄럽지 않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감정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공포 이외의 감정은 원인이 무엇이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지금 당장이라도 적의가 발현되어 살기로 발전, 내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니, 내가 여기에서 해야 할 행동은?
'최대한 피한다.'
대화는 물론이고,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지금 난 아일린과 유리안의 관계가 어땠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이 전무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엮이는 건 오히려 괜한 사태의 불씨를 만든다.
'한시라도 빨리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가자.'
시간을 끌면 끌수록 아일린과 마주칠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그건 정말 곤란하다!
"줄린 특구에는 따로 마법사가 배치된 게 아닌 모양이군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차에 청사자 기사단원 페른이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으나 머리 위로 '공포'의 색이 살며시 보였다.
"이런 식으로 제도에서 사람을 보내야 할 정도라니... 특구라 불리는 것 치고는 규모가 작은 모양입니다."
"애초에 특구(特區)라고 불릴 만큼 큰 규모의 도시가 아니죠. 그저, 시골의 귀족과 관료들이 도시를 살려보겠다고, 카룬 숲의 이름을 팔아 관광특구란 명칭을 받아낸 곳이니까요."
"오...."
내가 가지고 있던 알량한 지식을 털어놓자, 페른은 짧은 탄식을 흘렸다.
"제도 밖의 사정도 잘 아시는군요. 혹시 줄린 특구에 가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뭐, '감은 눈'의 업무를 하다 보면 이곳저곳 들리게 되니까요."
"이곳저곳이라...."
사실은 모니터 너머로 본 것들이지만 말이다. 그것도 '유리안'이 아닌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주인공인 '하이든 라이히'의 시점으로.
그렇기에 알량한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지식은 경험을 대체할 수 없으니까.
물론 없는 것보단 낫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내가 말을 타는 법을 알았나?'
골똘히 생각하느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는 말을 능숙하게 타고 있었다. 말을 직접 타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말이다.
어쩌면 유리안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유리안 경. 이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페른은 휴식을 제안했다.
하긴, 제도를 빠져나오고 꽤 시간이 흘렀다. 말을 타고 이동하지 않는 일반 병사들은 피로를 느낄 타이밍이 아닐까 싶다.
"아뇨, 이대로 진행합시다."
하지만 난 거절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임무를 끝내야 하는데 쉴 틈이 어디 있는가.
내 대답에 페른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출발한 지 세 시간이 흘렀습니다. 병사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그러니, 휴식을 취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줄린 특구가 보일 겁니다. 여기에서 휴식을 취했다간, 제도로 돌아가는 길에 해가 지고 말 텐데요."
"그땐 야영을 하면 됩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페른.
맞는 말이다만 안 된다고.
난 빨리 임무를 끝내고 싶다고!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야영을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병사들은 하루라도 빨리 제도로 복귀하고 싶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휴식을 제때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데몬과 조우한다면 큰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유리안 경!"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구만.
어차피 그럴 일도 없을 텐데 너무 조심하는 거 아니야?
페른의 의중을 이해할 수 없던 도중.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출발 전, 마차에 태우려고 한 의도의 연장선인가?'
예로부터 제국의 기사단들은 '감은 눈'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감은 눈'은 소속된 인원들은 실력이 상당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출신을 평민.
거기서 오는 열등감에 페른이 대항심(對抗心)을 불태우는 것인지 모른다.
원래대로라면 그 말에 순순히 따랐을 거다.
야영은 싫어도 실전을 경험하기에 안성맞춤인 상황이었으니까.
게다가 괜한 다툼에 기력을 소모할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면 이 임무를 한시라도 빨리 끝내야 하니까.
"큰 위험이라니, 페른 경은 자신이 없는 모양이군요."
원치 않지만, 빨리 임무를 끝내기 위해서 유리안답게 끌고 가기로 했다.
"...자신 말입니까?"
"예, 데몬이든 야만인이든, 해방군이든. 그것들을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요?"
페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내가 뭘 말하려는지 알아차린 듯하다.
"본인의 실력에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후후."
끝에 작은 웃음까지 붙인다.
내가 하고도 정말 완벽한 대사와 표정이다.
완벽한 인간 쓰레기의 표본!
"지금... 청사자 기사단원인 제가 겁을 먹었다는 겁니까?"
눈동자에 적의가 깃들어있었다.
하지만 아일린 때와 달리 걱정되지 않는다.
저 적의의 근원이 내 도발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상, 어떻게 움직일지 훤히 보이니까.
"그럼 증명해보시겠습니까?"
더 자극했다.
"제 말이 틀렸다고."
그래야 내가 생각하는 대로 녀석이 움직여 줄 테니까.
11화. 데몬
목적지인 줄린 특구는 유리안의 말대로 시골에 가까운 도시였다.
제도(帝都)의 도로처럼 인파로 그득한 풍경은커녕 거주민들을 찾아보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멀리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도시에 도착하자 이곳을 담당하는 관리 한 명이 아일린들을 반겼다.
"제도에서 오신 분들이시군요. 환영합니다.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관리가 안내한 곳은 줄린의 외곽.
그곳에 공명석이 위치한 보관된 작은 탑이 있었다.
아일린은 대동한 병사들을 시켜 마차에 실려있던 새 공명석과 보수 과정에 필요한 도구들을 내리라고 지시했다.
"공명석이 담긴 상자는 저쪽으로, 마나관은 이쪽으로... 아 그건 제가 옮길게요."
아일린은 물건을 옮긴 뒤, 탑에 들어가 보수를 해야 할 공명석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역시, 균열이 조금 있네요. 이 정도면 보수가 아니라 교체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럼 어떻게 하죠? 결계가 사라진다면, 데몬들이 습격해 올 텐데요...."
관리의 안색이 안 좋아지자 아일린은 안심하라는 듯 싱긋 웃었다.
"걱정 마시고 절 믿으세요. 작업은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오...."
관리의 허락을 받자마자 작업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공명석 보수와 교체는 4위계(位階) '레오' 등급의 마법 지식이 필요한 까다로운 작업이다. 하지만 지식만 갖춰져 있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준비가 다 끝나자 아일린에게 잠깐의 여유가 생겼다.
'유리안.'
아일린은 유리안을 찾았다.
이번 호위 임무를 맡았기에 그는 탑 근처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유리안을 찾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이곳에 도착했을 당시.
대열에서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청사자 기사단과 유리안 사이에서 설전(舌戰)이 오간 모양이었다.
눈치가 빠른 아일린은 뭔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주도권을 두고 붙은 거겠죠.'
일종의 자존심 싸움.
아일린에겐 그리 새삼스럽지 않았다.
언제나 귀족 출신인 기사와 임무에 동행하게 되면 으레 벌어지곤 하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이번에 동행한 사람은 유리안이다.
출신도 출신이고, 상대가 황제가 아닌 이상 안하무인으로 생각하는 그가 있는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 '그럼 증명해보시겠습니까? 제 말이 틀렸다고.'
유리안은 주도권을 잡고자 하는 기사를 되레 도발했다.
이쯤 되면 기사도 알 수밖에 없었다.
감은 눈 단원 중에서도 유리안은 보통 작자가 아니란 걸 말이다.
신분이고 뭐고 자신이 맞다 생각하면 그는 절대 굽히지 않는다.
그야말로 어떤 것도 안 통하는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다.
- '...실례했습니다 유리안 경.'
결국, 청사자 기사는 꼬리를 내렸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개 기사가 그 '웃는 처형대'에게 대항하려면 목숨을 걸었어야만 했으니까.
'오만방자한 태도는 여전하네.'
이를 지켜보며 아일린은 생각했다.
참 한결같이 바뀐 게 없는 사람이라고.
저런 사람을 보고, 그의 주치의(主治醫)는 왜 기억 상실이라고 판정했을까? 아일린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도나시엥 가문의 반쪽짜리, 누가 말을 걸어도 좋다 허락했습니까?'
"...윽."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일린 님?"
예전 일이 생각난 아일린은 탄식을 흘렸다.
물건을 옮기던 병사 하나가 안부를 물었다.
"아, 아뇨... 아무것도."
'감은 눈' 입단 테스트를 진행할 당시, 유리안이 자신에게 내뱉은 말.
하필이면 지금 떠오를 게 뭐람.
도나시엥 가문의 반쪽짜리.
아일린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멸칭(蔑稱).
참으로 웃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정작 말을 내뱉은 유리안 본인도 방계이면서 말이다.
'짜증 나는 놈.'
그리 생각하며 아일린은 다짐했다.
'역시, 사과를 받아야겠어.'
그녀는 발걸음을 옮겨 유리안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한 발, 한 발 발을 뗄 때마다 잡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상대는 그 유리안이다.
안하무인인 저 작자가 사과를 요구한들 과연 받아들일까?
오히려 그쪽에서 무력으로 밀고 나오면... 그녀로선 저항할 방법이 없다.
상대는 그 지옥에서도 홀로 살아남아 돌아온 괴물이니까.
'...아니, 그래도 말은 해야 해.'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기서 주눅 들고 넘어간다면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열 받는 건....
'너도 같은 방계잖아!'
같은 처지면서 마치 자신은 아닌 것처럼...!
분함을 거름 삼아 다가갔다.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유리안을 불러 아카데미에서의 망언을 사과하라 요구하면 된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아일린은 입을 열었다.
"유리안 님."
그리고 그 순간.
"데몬입니다! 데몬이 나타났습니다!"
다급한 병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
병사의 외침에 고개를 돌리니, 보라색 점액질들을 몸에 두른 짐승들이 그르릉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데몬.
마신 바르바토스의 잔재사념(殘滓死念)이 생물에 기생함으로써 태어나는 인류의 숙적과도 같은 존재.
'으엑....'
난 속으로 혀를 찼다.
데몬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니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모습이었다.
원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진 근육과 초점을 잃은 눈에는 맹목적인 살의만이 그득했다.
또 몸에서 뚝뚝 흐르는 점액질은 마치 모 RTS장르 게임의 원시 종족이 생각날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무각(無角)과 일각(一角)들 입니다!"
병사가 한 번 더 소리쳤다.
무각, 그리고 일각.
이건 데몬의 등급을 나누는 척도였다.
데몬에게는 개체마다 전투력이 남다르다. 보통 이를 머리나 몸에 자란 뿔의 개수로 분류했다.
뿔이 없다면, 무각(無角).
하나가 있다면, 일각(一角)
두 개가 있다면, 이각(二角) 이런 식으로 말이다.
당연히 뿔의 개수가 많아질수록 강한 개체였다.
"왜, 왜 하필 지금 데몬이...!"
흉측한 데몬의 외형에 겁을 지레 먹었는지 병사들 몇 명이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확실히 저 외형은 반칙이지.
"그만큼 공명석의 보수가 늦었더라면 큰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는 소리겠지. 모두 전투 태세!"
다행히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바로잡아줄 사람이 있었다.
청사자 기사 페른이 목소리로 소리를 치자 주변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 집중했다.
"데몬이라고 해봤자 무각과 일각들뿐이다! 병사들은 마법사님의 보조를 해라!"
"예, 예!"
"아, 알겠습니다!"
훈련받은 병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진형을 갖추고 각자 무기를 들어 데몬이 오는 방향을 향해 겨누었다.
"공명석의 교체까지 10분 정도 소요될 것 같아요."
아일린이 페른에게 다가가 공명석의 보수까지 걸릴 시간을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들은 페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수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사수하면 되겠지.'
내 예상이지만, 지금 상황에선 공격보다는 자리를 지키는 게 최선이다.
공명석 보수가 완료될 때까지만 버티면 결계가 복구되어 일각 이하 데몬들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으스러질 테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내 옆으로 페른이 다가왔다.
"여기는 저와 하인리히를 필두로 병사들과 함께 주변 데몬들을 모두 소탕하겠습니다."
페른은 자신감이 넘치는 눈으로 말했다.
공명석이 보수가 되는 걸 안 기다리고 나가겠다고?
굳이 사서 고생한다는 건데... 순간 이해 못 하다가 금세 눈치를 챘다.
이전에 내가 무시했던 발언을 이참에 반박하고자 직접 보여줄 속셈일 거다.
말 그대로 기 싸움의 연장선이다.
난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다.
딱히 말릴 이유는 없잖아. 본인들이 나서서 하겠다는데.
나는 적당히 지켜보다가 데몬과의 실전 경험을 쌓으면 그만이다.
"병사들은 모두 들어라!"
그는 목청을 높여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지금부터 이 주변의 모든 데몬들을 토벌하겠다!"
페른의 발언에 몇몇 병사들의 얼굴엔 난색이 깃들었다.
공명석의 보수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면 될 터인데, 굳이 움직일 필요가 있냐는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페른은 불만을 일갈하듯 소리쳤다.
"데몬들이 주변에 서성거린다면, 줄린 특구의 신민들은 편히 잠을 청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온 우리가 이곳을 정리하도록 하자!"
참으로 그럴듯한 이유였다.
뭐, 싸우는 병사들이야 죽을 맛이겠지만.
"나를 따라라! 일각(一角) 데몬들은 우리 청사자 기사단이 맡을 터이니, 너희들은 나머지 데몬들을 정리해라!"
검을 뽑아든 페른.
검신에 연한 푸른색의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높은 수준에 도달한 검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나 활용법, '오러'였다.
꼴에 기사라고 오러는 사용할 수 있는 모양이군.
"제국의 영원과 황제 폐하의 안위를 위하여!"
페른과 나머지 청사자 기사단원 한 명. 그리고 병사들이 뒤따랐다.
당연한 말이지만, 데몬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임으로 비교하자면 무각 데몬은 흔히 말하는 잡몹.
일각 데몬은 아주 높게 쳐줘야 네임드 몬스터도 못 되었으니 말이다.
그 탓에 전황은 아주 일방적이었다.
데몬의 탁한 혈흔이 사방팔방에 튀었으며 점액질이 된 살점들이 허공에 흩날렸다.
특히 오러를 머금은 기사의 검은 데몬의 몸을 두부를 썰 듯 손쉽게 도려내었다.
그런 학살의 현장을 눈으로 좇던 난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나도 참관해볼까.'
저택 훈련장의 목인을 상대로 연습했던 검술. 그걸 이곳에서 실험해볼 때다.
'유리안'의 강력한 검술을 실전에서 사용한다는 생각에 나는 몹시 고양감을 느꼈다.
'...잠깐.'
그런 고양감도 잠시, 난 불현듯 기묘함을 느꼈다.
공명석(共鳴石)으로 만든 결계는 데몬에게 특효약과 같은 존재라 아무리 효력이 줄어들었어도, 하위 데몬들은 결계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그건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설정을 빠삭하게 이해하고 있는 난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몇 가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로 데몬들을 통솔하는 우두머리가 있는 경우.
'무각과 일각의 지능은 거의 전무하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야. 본능을 거스르고 최소한의 전술을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그건 바로 이각(二角) 이상의 데몬이다.
슈웅── 퍽!
머릿속을 정리하던 난 바로 옆 나무에 무엇인가 날아와 처박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게 '하인리히'라는 이름의 청사자 기사단원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사라는 이름답게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그는 검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검에 맺힌 오러는 서서히 빛을 잃었다.
"하, 하인리히 경!"
페른의 다급한 외침.
나는 고개를 돌려 이 기사가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이각 데몬입니다!"
"히, 히이이이익!"
'데몬화'로 인해 흉측하게 체격이 부푼 데몬이 두 발로 서 있었다.
머리에 자란 뿔은 두 개. 그리고.
'인간형 데몬.'
상황이 급격히 안 좋아진 걸 느꼈다.
12화. 월광검
이각(二角) 데몬이 나타나자, 주변의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일린은 순식간에 변해버린 분위기를 피부로 체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에 부딪혀 죽었는지, 정신을 잃었는지 알 수 없는 청사자 기사단원.
이각 데몬을 노려보고 있으나,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는 다른 기사.
얼굴이 사색이 되어가고 있는 병사.
아일린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지금 메모라이즈된 술식들은 전투용이 아닌 공명석 보수용인데...!'
가뜩이나 만전 상태로 붙어도 제압할 수 있을지 모르는 수준의 데몬.
제 5위계(位階) 바르고 등급의 마법사인 아일린도 겁을 먹을 정도로 이각 데몬의 위용은 대단했다.
- 스으으읍...!
탑 주변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들리는 건 이각 데몬의 숨소리뿐이다.
'공명석의 결계가 이렇게나 약해졌다니... 아니면 데몬들의 공격성이 향상된 거야?'
아무리 이각 데몬이라고 할지언정, 공명석의 결계에는 속수무책으로 발이 묶인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공명석의 손상이 생각한 것보다 심했다는 소리.
'어떻게 해야 하지...!?'
아일린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최대한 진정시키고, 어떻게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이각 데몬에게 맞서 싸우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청사자 기사단원 한 명이 데몬의 공격을 받고 날아간 순간, 병사들의 사기는 곤두박질쳤다.
'도망치는 건?'
말을 타고 도망친다면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이 뚫리면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어진다.
데몬은 이 지역을 시작으로 제국 수도를 향해 진격할 것이다. 당연히 그 책임은 오로지 이곳에서 데몬을 막아내지 못한 자신과 이곳에 있던 모두에게 있었다.
이걸 외면하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때, 피부 찌르는 강력한 살의를 느꼈다.
아일린이 고개를 들자 짐승형 데몬 한 마리가 허공을 가르며 화살처럼 그녀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아차...!'
결계의 출력이 약해진 때를 노린 거다.
데몬에게 그만한 지능이 있다는 소리다.
날아드는 데몬을 보며 아일린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렇지 않았다.
서서히 눈을 뜬 그녀 앞에는....
"...유리안?"
자신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남자의 등이 보였다.
수많은 귀족과 평민을 처형한 황실의 검.
그 검이 위기의 순간,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겁니까."
조곤조곤히 이야기하는 유리안.
그는 한 차례 검을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냈다.
조금 전 아일린에게 날아든 짐승형 데몬의 피리라.
"바르고 등급의 마법사라는 게 이 정도밖에 안 될 줄이야."
놀랍게도, 유리안이 입을 열자 이각 데몬의 위협적인 숨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크지 않은 유리안의 목소리가 격한 데몬의 숨소리를 눌러버릴 정도로 이목을 끌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해야 할 일도 까먹었습니까?"
아일린은 잠시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마, 마나관과 새 공명석을 이쪽으로 가져오세요! 공명석의 보수를 재개하겠어요!"
아일린이 말하자, 줄린 특구의 관리들이 정신을 차리고 물건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기를 쥔 병사들도 조금은 사기를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유리안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함으로써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부터 7분 정도 걸릴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아일린은 다시금 유리안의 등을 눈에 새겼다.
과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황실의 개로 변절했고, 출세를 위해 영혼도 팔아치운 남자.
'으으....'
그러나 이 상황에서 '유리안'이란 존재는 무엇보다 든든했다. 바이엘 아카데미에 재학하던 그때처럼 믿음직스러웠다.
아일린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진 않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럼에도 그 등을 보고 있자니 황실의 개라는 관념을 단호히 거부하듯, 고귀함이 넘쳐흘렀다.
***
검에 묻은 데몬의 피를 털어낸 나는 생각했다.
X됐다. 상황이 좋지 않다.
굳이 작중 '유리안'의 대사를 입에 담으면서 상황과 캐릭터에 몰입해보려고 했으나 쉽지만은 않았다.
'실전 경험을 원하기는 했지만, 허들이 너무 높잖아.'
나는 멀지 않은 거리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이각(二角) 데몬을 쳐다보았다.
숙주가 사람이었는지 이족보행을 하고 있었으나 외견은 이미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괴물이었다.
3M에 육박하는 키와 머리에 자란 2개의 뿔과 터질 듯한 근육. 입에서 뚝뚝 흐르는 점액질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청사자 기사단 중 한 명은 재기불능. 나머지 한 명도 이각을 상대로 버틸지는 미지수.'
이 현장에서 저것과 대치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나,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뿐이다.
'할 수 있을까?'
물론, 굳이 해치워야 하는 건 아니다.
아일린이 공명석을 성공적으로 보수한다면 그것만으로 이 상황은 종료될 것이다.
'공명석의 교체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소 7분 이상.'
즉, 탈 인간급 전투력을 지닌 기사도 한 방에 나가떨어지게 만든 저 괴물을 7분 이상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
'해야 해.'
그래도, 할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도망쳐 혼자 살아남는다 해도 잠시뿐이다.
수도에 돌아가면 조금의 흠집이라도 잡아 흔들려고 하는 놈들이 이 일을 가지고 가만히 두지 않을 게 분명하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의 상황.
그래도 다행인 점을 하나 뽑자면 유리안의 육체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다는 거다.
아까 아일린은 노렸던 데몬을 단칼에 벤 걸 떠올렸다.
'깔끔하게 베어졌다.'
'유리안'이 보유한 막강한 근력의 반증이기도 했다.
심지어 <타고난 검사> 특성 덕에 어떻게 검을 휘둘러야 하는지 대강 감도 잡혔다.
'할 수 있어.'
희망을 느꼈다.
이 상황, 어떻게든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말이다.
검의 손잡이를 부여잡은 난 이각에게로 다가갔다.
한 발, 한 발, 다가갈수록 죽을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에 두 눈이 충혈될 것 같았다.
동시에 정신이 고양(高揚)되는 게 느껴졌다.
생사결의 상황.
이 가운데에서 유리안의 육체는 모종의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이 자식은 전투광이었으니까.'
마치 뜨거운 불과 같은 감정이었다.
평소 '유리안'이란 캐릭터를 혐오했던 나였다면 이 지독한 감정을 배제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 불꽃에 내 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다.
행동과 말투뿐만 아니라.
능력마저도 완벽하게 연기한다!
"유, 유리안 경!"
페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이각(二角) 데몬의 흉흉한 오른팔이 보였다.
아드라탄 제국의 정예라고 해도 좋을 기사를 한 번에 공격으로 제압한 데몬의 공격.
그럼에도 내 눈엔 명확하게 보였다.
이것이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이 목적인지,
그리고 어디로 검을 가져가야 막을 수 있는지.
<놀라운 직감>
<타고난 검사>
파앙─!
데몬의 손을 막아내자 귀를 찢는 금속음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마, 막았다!"
"이, 이각 데몬의 공격을 막아냈어!"
나도 놀랐다.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막아낼 수 있을 줄이야.
유리안의 피지컬이 일반인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괴물 같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불완전한 월광검>
하지만, 이걸로 만족할 수 없는 노릇.
나는 정신을 집중해 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유리안의 전매특허, '월광검'의 빛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저게... 월광검."
직접 보진 않았더라도, 소문을 들어본 적은 있는지 '월광검'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내 기준으로 만족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도신 전체가 아닌 반의반 정도만 달빛을 머금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월광검'의 효력은 굉장했다.
아래에서 위로. 이각 데몬에게 종베기를 휘두르자 녀석의 몸에선 점액질과도 같은 피가 흘러내렸다.
끄르르륵──!
통증으로 인해 끓는 듯한 신음을 내지르는 녀석.
데몬을 통솔할 수 있을 정도로 지능이 있다는 건, 어느 정도의 이성이 있다는 것.
무각(無角)과 일각(一角)같은 잡몹들과는 달리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소리다.
'이대로 몰아붙인다.'
그렇게 생각하며 검 손잡이에 힘을 준 순간.
퍽─!
둔중한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붕 떴다.
뒤늦게 피를 한 움큼 입 밖으로 토해냈다.
무슨 일인지 아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녀석이 시야의 사각을 이용해 내 복부를 찬 것이다.
'존나 아파...!'
순간, 저도 모르게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평범하게 살던 '이시후'였다면 여기에서 무릎을 꿇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통증이었다.
그렇지만 머리는 상상 이상으로 차분했다.
'유리안 이었더라면'이라는 강박관념이 나라는 인간을 조금씩 바꾸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
찢어지는 포효와 함께 이각 데몬은 나를 호되게 몰아붙였다.
괴력으로 인해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몇 번이나 내 귀를 후려쳤다.
한 번이라도 허용한다면 치명상으로 이어질 흉악한 공격들.
그걸 피하며 데몬의 몸에 검을 휘두르는 일은 굉장히 어려웠다.
"마, 말도 안 돼...."
"이게 '감은 눈'의 유리안...."
그렇지만 지금은 가능했다.
이유는 모른다. 원리도 모른다.
그저 몸이 시키는 대로 검을 휘두를 뿐.
이각 데몬의 몸을 벨 때마다 점액질이 사방에 튀었다.
압도적인 재생력을 가진 녀석이라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그렇지만 격한 통증은 꾸준히 쌓여가고 있었는지 녀석의 몸은 점차 굼떠지기 시작했다.
'강하고 약하고 상관없어. 고통 앞에서는 주저할 수밖에 없으니까.'
고통 또한 감정.
지능이 높아지면 더욱 절절하게 느끼기 마련이다.
그르르륵──!
녀석의 머리 위에 '보라색 아지랑이'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명확한 공포의 감정이다.
"공명석의 보수가 끝났어요! 곧 결계가 다시 작동할 거예요!"
아일린의 외침과 동시에 이각 데몬에게 다가갔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갈수록 녀석이 품은 감정은 더욱 뚜렷한 색을 띄웠다.
결국 보랏빛이 녀석의 전신을 덮었다.
보호 본능이 발동했는지 이각 데몬은 땅을 박차 내게 덤벼들었다.
그리고 그건 기회였다.
아까와 상황이 달랐다.
겁을 먹은 녀석은 절대 두려워할 상대가 아니다.
정신이 맑아지자 이시후가 알고 있던 '지식'과 유리안의 '경험'이 속삭였다.
일격에 죽이겠다면 이곳을 베어라.
저택 훈련장에서 목인(木人)을 베어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난 그 검로(劍路)에 도신을 가져갔다.
==
⇒ 새로운 특성, 「간파」를 습득했습니다.
==
그러자 아까의 사투는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이각 데몬의 몸은 손쉽게 두 동강이 났다.
보고 있던 병사들과 기사, 그리고 아일린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헐.'
물론, 나도 놀랐다.
13화. 무대 뒤에선(1)
"데, 데몬들이 도망칩니다!"
아일린이 공명석의 보수가 끝나고 통솔하던 이각 데몬이 죽자, 나머지 잡졸들은 결계의 바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우린 살았어!"
병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힐끔거리며 유리안을 쳐다보았다.
이전처럼 '웃는 처형대'라는 악명에 두려움을 가진 시선이 아니었다.
위기에서 모두를 구한 영웅에 대한 존경과 감사가 서려 있었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유리안 경."
청사자 기사단의 페른의 눈도 제도(帝都)를 나섰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여전히 그는 '감은 눈'을 아니꼽게 여겼지만.
하지만 눈앞에 있는 유리안만큼은 다르게 생각했다.
적어도 격이 다른 강자라는 걸 뼈저리게 실감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믿기 힘들었던 소문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그의 몸에 흐르는 기품은 방계라 치부하기 힘들 정도로 고귀했다.
"상황 정리는 페른 경에게 맡기겠습니다. 전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죠."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전,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야겠군요. 이곳에 들르기 전, 괜찮은 호수 하나를 발견했거든요."
"그, 그럼 병사를 보내 수발을 들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후후, 하고 짧게 미소를 입에 담으며 유리안은 발걸음을 옮겼다.
페른은 문득 저런 괴물을 상대로 임무의 주도권을 두고 싸움을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정말 어리석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하등 의미 없는 짓이었으니까.
'이각 데몬이란 괴물을 단신으로 죽였으면서, 표정에 변화가 하나도 없다니....'
유리안의 뒷모습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혹시 심장이 강철로 되어 있는 걸까.
페른은 자신도 모르게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
"흐아아아아...."
호수에 비친 실눈 뜬 얼굴을 보며 나는 탄식을 내뱉었다.
'죽는 줄 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죽기 직전까지 갔다.
실제로는 처음 보는 데몬.
그리고 다짜고짜 '이각(二角)'수준의 괴물과 맞붙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살아서 다행이지만.
당시를 생각하면 어떻게 했나 얼떨떨한 심정이다.
세수하려고 물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서늘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동시에 덜덜거리는 떨림도 말이다.
'실전은 생각한 것보다 살벌하군.'
아직도 데몬을 벨 때의 촉감이 손에 아른거렸다. 동시에 그때 느꼈던 아찔했던 감정들도 밀려오기 시작했다.
흉악하게 생긴 데몬, 그들에 대한 혐오심.
죽음에 대한 공포.
이각 데몬의 무력을 보자 생겨난 절망감.
하지만 호수에 비친 유리안은 실눈과 함께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당연한 일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완벽하게 유리안을 소화하기 위해선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는 건가.'
불가능하다. 두렵다. 도망치고 싶다.
원래라면 이런 감정을 품어야 정상이었거늘, 지금의 나는 몹시 차분했다.
이런 상황이 다시 벌어진다 해도 크게 당황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조차 들었다.
"몸이 변하니, 생각도 변하는군요...군요!"
철썩, 손으로 입을 한 대 쳤다.
점차 몸에 적응하고 있었으나, 이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존댓말은 아직인 모양이다.
==
▶ 특성, 「간파」
등급 : 유일
▷ 당신은 눈썰미가 굉장히 좋아 대상의 약한 부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 상대방의 감정을 보다 쉽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 당신에게 '공포'의 감정을 품은 적에게 추가 대미지를 입힐 수 있습니다.
==
물로 손을 씻으며 새롭게 얻은 특성을 확인하기 위해 UI를 불러냈다.
이각 데몬의 숨통을 끊었던 마지막 일격.
그 직전에 보였던 검로(劍路).
아마도 이 <간파>라는 특성 덕분인 모양이다.
내 '지식'과 유리안의 '경험'이 하나가 되어 상대의 약점을 보여주는 특성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만전인 유리안이면 이각 데몬쯤은 쉽게 쓰러뜨리겠지만....'
아까 전처럼 단칼에 베어내진 못했을 거다.
근데 이 <간파>라는 특성이 그걸 가능케 만들었다. 아직 유리안의 능력을 다 쓰지 못하는 나마저도.
'이거면 유리안의 무력을 어느 정도 구현할 수 있어.'
좋은 패를 손에 넣었다.
실력적으로 '유리안'이 가진 강함을 완벽히 연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주위의 의심에 대해 걱정을 조금은 덜어도 좋았다.
"후...."
어느 정도 머릿속이 정리되자 첫 실전으로 쿵쾅거리던 심장은 이제 고요해졌다.
그리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각 데몬과의 전투에서 사용하던 <월광검>의 완성도였다.
'이가 나갔군.'
검을 뽑아 들자 검신에 작지만 많은 수의 틈새들이 보였다.
단번에 많은 마나를 불어넣은 탓에 생긴 균열이다.
이대로 몇 번 더 휘둘렀다간 부서질 게 뻔하다.
'위력도, 안정성도 아직 원본에 미치지 못한다는 소리겠지.'
하지만, 그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진 않았다.
이번 실전으로 인해 깨달은 사실은 '전투의 방법'뿐만이 아니다. 이 불완전한 월광검을 어떻게 완성 시킬 수 있느냐도 알아낼 수 있었다.
도로 검을 집어넣은 뒤, 나는 생각했다.
'돌아간다면, 가장 먼저 그 밑 준비를 해야겠어.'
***
제국 사대 명문가 중 하나인, 크라이파트 가문의 삼남, 헤란드.
그는 자신에게 향하는 표독스러운 시선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귀족 원로회.
오랜 세월 동안 귀족들을 대표해 그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설립된 귀족 자체 기구다.
여기엔 여러 가문의 중역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헤란드는 몸의 털이 곤두섰다.
말 한마디 까딱 잘못했다간 목숨이 날아갈지 모른다.
"그래서, 녀석이 우리의 계획을 알아차렸단 말이냐?"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준엄한 목소리에 헤란드는 고개를 푹 숙이며 답했다.
귀족 원로들은 혀를 쯧쯧 차더니,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헤란드를 손가락질했다.
"네 녀석이 무능해서 제대로 숨기지 못한 것이 아니냐?"
"죄, 죄송합니다. 오른 공...."
"현 가주의 핏줄만 아니었더라면, 너 같은 팔푼이는 진즉에 내쫓았을 것이다."
현 귀족 원로회에서 의장(議長)을 맡고 있는 오른 크라이파트.
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헤란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오른 공, 게다가 최근 '감은 눈'에선 황설 비서실에 이런 제안서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게 뭔가?"
"앞으로 '감은 눈'의 입단 테스트를 진행할 때, 그 책임을 교관에게 묻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른은 다른 원로의 말을 주의 깊게 듣더니, 인상을 팍하고 찌푸렸다.
하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설령 인명 피해가 나더라도, 책임을 묻는 행위는 황실의 이름 아래에서 엄격히 금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더군요."
"어허...!"
말이 끝나자, 다른 원로의 입에선 탄식 어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탓에 가뜩이나 주름이 자글거리던 이마는 더욱 도드라졌다.
몇몇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담는 자들도 있었다.
"'감은 눈'에 올렸다고 한다면, 그건 유리안의 말을 대변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당연하게도 비서실은 황실에 올리기 전에 반려한 것 같습니다."
의장인 오른은 난색이 깃든 표정으로 다른 원로들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감은 눈'은 황실의 규율에 반하거나 수정을 원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제안서가 올라온 것은 이번이 처음.
게다가 이 타이밍.
이 제안서가 무엇이 목적인지는 일목요연했다.
"그렇다면, 이건...."
"예, 아마 유리안의 경고인 것 같습니다."
다른 이들의 말에 오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수염을 쓸어넘겼다.
자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더 이상 쓸데없는 수를 쓴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저 제안서를 비서실에 제출한 이유는 아마도 이런 식의 경고를 하기 위함이리라.
"이 망할 방계 자식이... 가뜩이나, 그 악명으로 다른 귀족들과 크라이파트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협박까지 할 생각이느냐?"
그간 유리안의 행보를 떠올리며 오른은 분노했다.
"황실의 개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경고를...."
"하지만, 오른 공.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언성을 높이던 오른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는지, 중년의 남성 한 명이 불쑥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에이든 공, 그게 무슨 소리요?"
다른 원로보다 꽤나 젊은 에이든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까지 황실의 명령만을 듣던 유리안이 이런 식으로 경고를 해왔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도 이젠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거죠. 여기서 섣불리 움직였다간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유리안의 행동 원리는 황실의 의중만 파악하면 됐다.
하지만 이제 그가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인다면 생각해야 할 변수가 많다.
"그러니, 당분간 지켜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방관하자는 말입니까!?"
"그게 무슨! 그 인면수심의 괴물을 방치했다가 크라이파트란 이름에 얼마나 먹칠을...!"
"정숙하시오!"
원로회가 소란스러워지자, 오른이 그들을 일갈했다.
그는 뱀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에이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말을 계속해 보시오."
오른의 말에 에이든은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제 예상일 뿐이지만, 유리안을 북부 전선으로 내쫓는 것 보다 훨씬 쓸만한 사용법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던 황실의 검이 이제는 생각이란 걸 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에이든의 얼굴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
"노인네, 아직도 눈빛은 정정하군."
원로회의를 끝마친 에이든은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몸을 실은 뒤, 중얼거렸다.
그의 등에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조금 전, 오른의 뱀과 같은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까닭이었다.
에이든이 손짓을 하자 마차는 내달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통해 바깥 풍경을 감상하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귀족 원로회가 꼴이 말이 아니군.'
아드라탄 제국의 귀족 원로회.
이 단체는 수많은 가문의 중역들이 모여 황실의 견제로부터 이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
그러나 현재 귀족 원로회는 크라이파트 가문의 지배하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 의장, 오른 크라이파트의 말 한마디면 원로 대부분이 벌벌 떨었으며, 모든 결정이 크라이파트 가문에 이권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에이든은 그런 원로회의 현 상황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리안'이란 인물이 북부 전선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그야말로 현 크라이파트 가문이 안고 있는 몇 안 되는 종양이니 말이다.
"유리안 경이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은 낭설(浪說)인 모양이군요."
사념에 잠겨 있던 에이든은 마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래 보이는군."
"그럼, 예전이 진행하던 유리안 경의 포섭을 다시 진행해도 괜찮겠습니까?"
"뭐, 그러도록 하게. 어차피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이 거짓이라면 그쪽도 우리 일을 기억하고 있겠지. 그러니, 쓸데없는 절차 없이 바로 진행하도록."
"예."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답하는 마부.
그를 보며 에이든은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상위 데몬도 단신으로 잡을 정도의 괴물. 그런 괴물을 우리 쪽으로 포섭한다면, 그것만큼 든든한 것이 없겠지.'
그런 에이든에겐 의문점이 하나 생겼다.
유리안의 주치의가 내린 병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크라이파트 가문의 일원들 뿐이었다.
그럼에도 소문은 날개가 돋친 것처럼 귀족들의 귀에 들어갔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퍼트린 것처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에이든에게는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어쩌면, 유리안 본인이 그런 소문을 퍼트린 것일 수도 있겠군.'
그런 생각을 하자, 에이든은 소름이 끼쳤다.
덫에 미끼를 장식하는 것은 사냥의 기본 중의 기본.
그러나 어떠한 사냥꾼도 자신을 미끼로 덫을 설치하진 않는다.
그런 짓을 했다간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짐작이 맞다면 유리안은 자신을 미끼로 사냥감을 모색한 것이 되는 셈이다.
자신이 약해졌다는 소문을 듣고, 이빨을 들이밀 짐승들을 일제히 소탕하기 위해서.
"생각한 것보다 미친놈일 수도 있겠어."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14화. 무대 뒤에선(2)
공명석 호위 임무를 끝마치고, 제도(帝都)로 복귀한 다음 날.
나는 곧장 황궁으로 출근했다.
마음 같아선 하루 늘어지도록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이쪽은 황실 전속 기관에 고용된 몸.
아무리 유리안이 멋대로 산다곤 해도 '감은 눈'의 업무에는 충실한 편이었으니, 여기선 출근을 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사실 그게 당연했고.
황궁 1문, 경천문(敬天問)을 지나 감은 눈 건물로 향했다.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가져온 화분들을 방안에 배치해두었다.
"이 정도면 예전보다 훨씬 낫군요."
예전에는 형용할 수 없는 유리안의 미적 센스로 꾸며 놓았던 집무실.
그 장식품들을 모조리 치운 뒤, 난초 화분을 갖다 두자 조금은 사람 냄새가 나는 곳으로 바뀌었다.
난초는 참으로 좋다.
특별히 관리할 구석도 없으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의 안정을 주니 말이다.
옛날엔 이런 고상한 취미를 이해할 수 없었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이 취미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정말이지,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른다.
한껏 차분해진 집무실을 둘러본 뒤, 햇살이 잘 비치는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눈에는 제국 7대 절경(絕景)으로 선정될 만큼 예술성이 뛰어난 황궁의 모습이 보였지만, 동시에 곳곳에 배치된 공명석과 외곽에 설치된 붉은빛의 술식들이 보였다.
데몬과 더불어 침입자라면 가리지 않고 잿더미로 만드는 살벌한 결계다.
'월광검을 완성하는 방법.'
이를 보며 머릿속으로 유리안의 전매특허인 '월광검'을 어떻게 완성할까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분명 이각 데몬을 상대로 훌륭한 성능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도신 전체가 아닌 일부만이 오러를 띄고 있었으니까.
'그 탓에 검이 버티지 못한 것이고.'
내 시선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검집으로 향했다.
호위 임무에서 사용하던 검.
몇 번 사용하면 부러질 정도로 처참한 상태였다.
당연히 이런 검을 사용할 수 없었으니, 저택에서 새로운 검을 가져오긴 했다.
'이각 데몬을 물리치긴 했지만, 앞으로 더 강한 적들과 조우하는 것은 필연. 그러니, 월광검을 완성하는 게 최우선이다.'
다행인 부분은 이번 실전을 통해 그 방법을 어렴풋이 깨달았다는 것이다.
똑똑─!
흐뭇한 얼굴로 가져다 둔 화분을 쳐다보고 있자니,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내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자 '감은 눈'의 견습인 라즈롯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 실례하겠습니다. 유리안 공!"
여전히 겁을 잔뜩 먹은 목소리와 사색이 된 표정.
보는 사람이 미안해질 정도로 움츠러든 모습이 안쓰럽다.
아니, 내가 무슨 잘못한 것 같잖아.
"부탁하신 대로 황궁 내고(內庫)에서 보석들을 가져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라즈롯의 말에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 후, 손짓해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라고 지시했다.
그는 낑낑거리며 보석이 담긴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제 가치를 알아 달라는 듯 은은하게 빛나는 보석들.
난 케이스에 손을 뻗어 보석 하나 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리안 경... 이 많은 보석으로 뭘 하시려는 겁니까?"
궁금해하는 라즈롯을 힐끔 쳐다보자, 녀석의 두 눈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렇게 무서워할 거면 왜 물어봤어.
"제 마나의 파동과 맞는 보석을 찾기 위함이죠."
라즈롯에게 이유를 털어놓았다.
굳이 비밀로 할 필요 없는 얘기였으니까.
"마, 마나의 파동 말입니까?"
"예. 체내에 흐르는 마나는 사람마다 각각 다른 성질을 띄고 있습니다. 견습이라고 해도 그 정도는 알고 있겠죠?"
라즈롯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품속을 뒤지더니 수첩과 펜을 꺼내 내가 하는 말들을 받아적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마법사들마다 주특기인 마법이, 기사들마다 오러의 능력과 색이 다른 것이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받아적는 라즈롯.
단순히 게임 속 설정을 풀어놓는 것뿐인데 강의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동경 어린 시선을 받으며 보석을 하나 꺼내 들었다.
불꽃처럼 새빨간 루비였다.
"이 세상 모든 물질엔 마나를 수용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중, 이런 보석들이 마나 전도율과 수용량이 가장 큰 편이죠."
마나를 불어넣자 루비의 색은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 그렇군요."
"하지만, 자신의 마나와 반대되는 성질을 띄고 있다면 이렇게 됩니다."
파직.
마나를 불어넣은 루비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 앗!"
균열은 본 라즈롯의 입에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깜짝 놀람과 동시에 아깝다는 감정이 엿보였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마나의 성질을 원소라 부르며 그것을 오색(五色)으로 구분한 것이죠. 보다 명료하고, 확실하게 마나의 성질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던 도중, 난 상자 안에 달빛처럼 푸른 빛을 머금고 있는 보석을 찾아냈다.
월장석(月長石).
그걸 집어 마찬가지로 마나를 불어넣었다.
월장석의 푸른 빛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비처럼 균열이 생기진 않았다.
아마도 이게 유리안의 마나와 가장 성질이 비슷한 보석이리라.
"마법사들도 보석으로 술식을 사용하듯, 기사들도 보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보다 쉽게 오러를 활용할 수 있도록 검에 '마나혈'을 새겨놓는 것이죠."
"그, 그럼 저도... 오러를 사용할 수 있게 될까요!?"
"그 정도야 가능하겠죠."
내 말에 라즈롯의 얼굴은 환해졌다.
"저 정도의 마나만 보유하고 있다면 말이죠."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유리안의 몸은 마법사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풍부한 마나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 덕에 이런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일 뿐, 다른 기사들은 생각지도 못할 방법임이 분명했다.
현재 <월광검>이 원본에 비해 부족한 이유는 아마도 '유리안'의 마나를 검에 완벽하게 전달하지 못해서 일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마나혈'이란 길을 만들어 준다면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전달할 수 있을 터.
난 월장석을 도로 상자에 집어넣었다.
이건 황궁에서 빌려온 물건.
그러니 돌려보내야 했다.
"그럼 이 보석들을 모두 내고(內庫)로 돌려보내 주세요."
"알겠습니다, 유리안 경."
그리 지시하고 월장석을 새로 어떻게 확보할까 방법을 생각하는 사이.
"그런데 유리안 경...."
라즈롯이 자리에 남아 난색인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이 루비... 박살이 났는데 어떻게 합니까?"
"아."
아까 처음 실험하다 균열이 생긴 루비였다.
황실의 물건이다 보니 이대로 돌려주었다간 당연히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내가 박살 난 보석을 고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신 저걸 가져가세요."
"예?"
어쩔 수 없다. 대체할 물품을 쥐여줄 수밖에.
난 구석에 박아둔 공예품들을 가리켰다.
유리안이 집무실을 꾸밀 때 사용한 괴상한 미적 감각의 예술품들. 그것이었다.
"내, 내고(內庫) 직원들이 용납해줄까요...?"
라즈롯은 납득 못 한 눈치였으나 이 물건들은 명실상부한 명품들이다.
유리안은 자신을 과시하는 에고를 타고났으며 월급 대부분을 명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사용했다.
분명 보석보다 비싼 값어치를 하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믿음직스럽지 않다면 한 마디 덧붙여 주자.
"그럼 제 이름을 파시기를."
"유, 유리안경의 이름을요?"
"예."
***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감은 눈'에서 이 이름이 가진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사실 제대로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내가 그의 위치를 깨닫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단장인 오드윈과의 대화 덕이었다.
월장석을 구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하는 입장.
그걸 오드윈에게 전하자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 "언제는 말하고 사라졌나요...?"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이냐 유리안.
그리고 초연하듯 말하는 오드윈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이냐.
아무튼 연민보단 살아남기 위해 '월광검'을 완성하는 게 최우선.
'감은 눈' 본부를 빠져나와 제도(帝都)로 향했다.
다만 그러기 전에 들릴 곳이 있었다.
- '나가기 전에 황실 비서실에 들려주세요. 이번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번 임무 보고를 직접 듣고 싶다고 해서요.'
황실 비서실에서 이번 임무에 대한 경위를 직접 듣고 싶단 말이 나와서다.
그 연유에 대해서 짐작이 가는 부분이 하나 있긴 하다.
일반적인 '감은 눈'의 대원으로 이야기하자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유리안'은 이 황실 전속 기관에서도 특출난 존재.
좋게 말하면, 동반자이며 나쁘게 말하면 쓰기 좋은 개다.
그러니 상태가 어떤지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해두려 하는 것이다.
또각, 또각──.
황실의 복도는 얼마나 잘 닦아두었는지 바닥에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감은 눈'의 유리안입니다. 비서실의 세든 오르비안 경을 뵙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황실의 비서 정도 되는 위치면 웬만한 귀족보다 높은 권력을 갖고 있어서인지, 그들에게 배정된 건물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나를 호출한 황실 비서실장, '세든 오르비안'의 이름을 비서실 직원에게 말하자 그녀는 웃으며 말한다.
"지금 세든 님께서 선객 때문에 자리를 비우신 상태입니다. 얼마 안 걸린다고 하시니, 혹여나 유리안 경이 오신다면 대기실에서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대기실로 향하자 휘황찬란한 방의 내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유리안의 미적 감각과는 사뭇 다른 클래식한 화려함이라 말할 수 있었다.
"...저건?"
그런 와중, 구석에 놓인 검집이 내 시선을 끈다.
세련된 분위기와는 달리 투박한 검집 모양새의 검집은 그 콘트라스트 때문에 겉도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마 선객분의 동행께서 지니고 계셨던 물건인 것 같네요."
나보다 먼저 온 선객.
그 사람의 동행자가 있었나 보군.
그나저나 검이라니?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기실의 분위기를 해치는 검집에 천천히 다가갔다.
"익숙하군요."
첫 감상은 이 검은 내게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검집을 들어 올리자 기억을 간질이던 묘한 기시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강한 육체엔 강한 정신이 깃든다."
검집에 가장자리에 적혀있던 글귀를 읽자, 아까부터 나를 괴롭히던 '기시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당장 그 검에서 손을 놓으세요. 이 변질자."
갑작스레 등 뒤에서 들려온 표독스러운 목소리.
비서실 직원의 목소리가 아닌 것쯤은 진즉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적개심이 넘쳐흐르는 목소리였다.
이 검집의 주인이 누구인지 예상이 된 상황.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짐작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내 예상은 확신으로 변했다.
세련된 금색 머릿결을 등 뒤로 길게 늘어뜨린 장발. 그리고, 에메랄드를 연상케 하는 눈동자.
비록 눈에 불쾌함이 서려 있긴 했으나, 그녀의 외모를 빛바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랜만입니다, 린네 론드벨."
린네 론드벨.
아드라탄 제국의 명문 기사 가문 중 하나인 론드벨 가문의 여식이자, '유리안'과 마찬가지로 검성 하이든 라이히의 수제자 중 한 명.
그리고, DLC 트레일러에서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주연 캐릭터다.
15화. 린네 론드벨(1)
린네 론드벨이란 캐릭터를 설명하는 단어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중 하나만 꼽으라면 이것이다.
경국지색(傾國之色).
린네의 외모는 출중했다.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자태는 사뭇 남자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플레이어의 대변자인 주인공 '하이든 라이히'를 잘 따르는 성격 덕에 그녀는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한 인기 투표에서 늘 상위권을 차지하곤 했었다.
실제로 본 외모도 상당했다.
만약 내가 유리안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친해지려 했겠지.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난 스승과 척을 진 제자니까.
당연히 스승, 하이든 라이히를 따르는 그녀와 호의적인 관계일 리가 없다.
아무튼, 그녀가 나타난 이유는 쉽게 예측이 됐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검집은 '하이든 라이히'의 것.
비서실장의 선객은 '하이든 라이히'이란 거겠지.
"인사는 됐어요. 스승님의 검을 돌려주세요."
역시나.
린네는 질색하며 검을 돌려달란 제스처를 취했다.
"스승님이 황실에 들른 모양이군요?"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가요?"
"물어본 것뿐입니다, 린네. 하이든 경은 제 스승이기도 하니까요."
난 린네에게 검집을 돌려주었다.
가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그저 호기심에 확인한 것뿐이니까.
그 후, 자리에 앉아 부르기를 기다렸다.
'따갑군.'
맞은편 끝자리에서 날아오는 시선에 매우 따갑다.
신경도 안 쓴다는 듯 팔짱을 끼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으나, 이따금 이쪽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애써 아닌 척하겠지만 무척이나 신경이 쓰일 거다.
'그녀의 성격상, 그리고 설정상 그럴 수밖에 없지.'
하이든 라이히의 제자란 사실에 누구보다도 자부심을 느끼는 린네였다.
그녀에게 있어 하이든 라이히는 인생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유리안은 하이든의 사상과 가르침을 받은 주제에 그것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다행인 점이라면, 아일린 때처럼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란 거지.'
<부정의 색>을 통해 본 린네의 감정은 '분노'를 뜻하는 붉은색이었다.
공포 외에 감정을 처음 마주했지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사정을 아는 노골적인 감정은 어떤 면에선 안심이 된다. 어차피 그 감정에서 시작되는 그녀의 태도와 행동의 한계를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먼저 선을 넘지 않는 이상 움직이지 않을 거다.'
현재 내게 제일 까다로운 인물은 언제든 기습해 올지 모르는 상대다.
그런 면에서 린네는 경계 대상까진 아니다.
분명 날 향해 적의를 드러내곤 있지만, 말 그대로 목줄이 채워진 채 짖는 강아지에 불과하다.
당연히 목줄은 하이든 라이히이다.
그의 곁에 있는 한 린네는 설사 내가 마음에 안 들어도 손을 댈 순 없다.
'하이든 라이히가 그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훗날 유리안을 뛰어넘을 정도로 출중한 인물로 묘사되긴 하지만 아직은 풋내기에 불과하다.
"린네 론드벨 님, 하이든 라이히 경께서 부르십니다."
침묵 속 일방적인 적의는 비서실 직원에 의해 끝났다.
린네는 검집을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초라도 이 자리에 있기 싫었던 것인지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하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유리안 경. 앞으론 두 번 다시 마주치지 말도록 하죠."
린네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표독스러운 말투로 작별을 고했다.
"너무 쌀쌀맞게 굴지 마시길. 저흰 같은 스승님을 둔 사이 아닙니까, 린네 양."
내 대답에 린네는 싸늘하게 쳐다봤다.
유리안 연기가 제대로 된 모양이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
황실 비서실장이 직접 부른 이유는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임무 보고에 더해 겸사겸사 날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인지 임무 보고는 형식적으로 넘어갔고, 몸은 괜찮은지 부상은 어떤지 하는 잡스러운 이야기만 나누다 끝났다.
볼일이 끝나자 황궁을 빠져나와 제도(帝都)로 향했다.
'이참에 완성해 두는 게 좋겠지.'
아직 불안전한 <월광검>을 완성하기 좋은 시점이었다.
지금까지 무기가 받쳐주지 못했던 만큼, 이참에 무기를 맞출 필요가 있었다.
도신에 보석을 사용해 마나혈을 새기는 게 지금에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물론 아무 보석으론 안 된다.
이전에 확인했다시피 내게 가장 맞는 월장석(月長石)이 필요했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라면 월장석은 귀금속 상인이 취급한다. 그쪽에 물어보면 구할 수 있겠지.
'북적거리는군.'
아드라탄 제국은 대륙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인구가 많았기에 제도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이 가운데서 목적지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약도가 있어서 다행이지.'
사용인에게 받은 약도를 꺼내 확인하고 걸음을 옮긴다.
자기과시가 심한 유리안은 공예품만큼이나 보석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전부터 애용하던 귀금속점이 있는 모양인지 사용인에게 그 위치가 그려진 약도를 받을 수 있었다.
"유리안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몸은 괜찮으신지요!"
귀금속점에 들어서자 단안경(單眼鏡)을 쓴 중년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맞이해주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단골이 확실한 모양이다.
"월장석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월장석 말입니까?"
"예."
귀금속점 주인은 난색을 지었다.
"그게... 월장석은 저희 쪽에서 취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아쉽군.
하지만 납득은 갔다.
이 세계관에서 월장석은 구하긴 까다로웠지만 수요는 거의 없는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아쉽군요."
약간 탄식 어린 한숨을 내쉬자, 상점 주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빙긋 웃었다.
그의 머리 위로 '보라색 아지랑이'가 아른거렸다.
"그, 그래도 유리안 경의 부탁이라면 제가 어떻게든 구해보겠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네에... 어렵겠지만, 신경 써보겠습니다."
이럴 땐 악명이 도움이 되기도 하는군.
아무튼 잘된 일이다.
솔직히 나 혼자 구하려고 하면 고생길이 훤하거든.
그렇게 볼일을 마치고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이게 다 뭡니까."
책상 위에 여러 서류가 가득 쌓여 있었다.
처리해야 할 업무 서류뿐만 아니라 저택에서 가져온 개인 관련 서류도 있었다. 관리비 청구서라던가 괴상한 예술 협회의 등록비라던가 등등.
'뭔 놈의 예술 협회인지....
쓸데없는 서류는 휴지통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때쯤 노크와 함께 라즈롯이 안으로 들어왔다.
"유리안 경! 오, 오드윈 단장께서 부르십니다!"
오드윈이?
무슨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알겠다고 대답한 난 단장실로 향했다.
"유리안, 임무입니다."
또?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녀에게 어떤 일이냐 묻자, '제도 빈민가'에 데몬이 출현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고 한다. 이에 조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난 거기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저희가 천한 빈민들을 신경 써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일부러 표독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황실이 언제부터 그쪽에 신경을 썼냐고.
데몬 출현 정보야 문제지만, 당장에 나타나서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니다. 실제 조사해 보면 의혹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특히나 그 장소가 빈민가다.
황실에서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곳이다.
움직인다고 해도 실제 데몬이 출현하고 나서야 움직이겠지.
"저도 그게 이상해서 좀 물어봤어요. 황실은 빈민가를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오드윈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이미 물어봤던 모양이다.
빈민가는 제국이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합병한 탓에 생긴 잔재와도 같은 것이다.
제국의 주류가 되는 문화나 종교를 믿지 않으며 심지어 인종조차 다른 사람들이 제도(帝都)에 발을 딛는 걸 거부당해 모여 형성한 곳이 바로 동쪽 빈민가다.
"황실에서 빈민가에게 손을 뻗었다간 반발한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까요.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이지만요."
"그런데, 왜 입니까?"
"하이든 라이히 경께서 부탁하신 모양이에요. 데몬 출현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황실에서 사람을 파견해 달라고 하네요."
윽.
주인공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이 시점에 그와 엮기는 건 좋지 않다.
안 그래도 유리안으로서 완전체가 아닌데 다짜고짜 작품 주인공과 엮이는 건 득보다 실이 크다. 게다가 설정상 관계도 그리 좋지 않고 말이지.
'그치만 마냥 거절할 수도 없고.'
정식 의뢰가 들어온 이상 거절하는 것도 좋은 그림이 아니다.
애초에 유리안이라면 주인공이 관련되어 있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기사단을 보내면 너무 눈에 띄니, '감은 눈'에서 한 명 보내기로 한 거죠. 아마 하이든 경이 직접 오실 것 같진 않아요."
"혹시, 스승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오는 겁니까?"
"아마도요. 비서실에서 전달받은 정보로는 그럴 것 같더라고요."
오드윈의 말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근데 다른 사람이 온다고?
우리의 주인공은 누군가를 밑에 두며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린네에게 경험을 쌓게 할 생각인가?'
아마도 확실할 것이다.
유리안과 의절한 이후, 그는 자신의 수제자로 린네를 임명했으며, 그녀의 양성에 온 힘을 다하고 있었으니까.
문득, 그녀가 헤어지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먼저 가보겠습니다, 유리안 경. 앞으론 두 번 다시 마주치지 말도록 하죠.'
그런 말을 하니까, 이렇게 다시 만나는 것 아니냐.
***
"분명 두 번 다시 마주치지 말자고 말한 것 같았는데요."
볼멘소리로 말하는 린네 론드벨.
표정은 볼 것도 없이 일그러져 있을 테지.
"어찌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겠습니까?"
"듣기 싫네요. 이번 순찰 임무에 당신은 필요 없어요. 따라오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따라오지 마시죠."
"스승님이 직접 부탁하신 일입니다. 그걸 어기란 말씀입니까?"
"그, 그건..."
퉁명스러웠던 그녀의 태도가 한풀 꺾였다.
주인공을 걸고넘어지자 한마디도 못 한다.
참으로 마법의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조용해진 린네를 뒤로하고 지령서 내용을 다시금 확인했다.
장소는 빈민가, 데몬 출현이 의심되니 조사하라는 내용이다. 사전에 들은 내용과 같다.
"그런데, 왜 저희 둘 뿐이죠? 데몬 토벌 임무라면 병사들도 대동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정확히는 토벌이 아닌 조사입니다. 아마 괜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서겠죠."
"...."
갑작스레 말이 없어 고갤 돌렸다.
내가 아는 린네라면 뭔가 더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당신이 정상적인 말을 할 줄 상상도 못 했어요."
"...."
아니, 그 정도로 나락 간 이미지였다고?
얼마나 제멋대로 했길래 이런 당연한 의견에도 저런 반응인 건데....
살짝 한숨을 내쉬고 걷길 시작하자 불만스런 얼굴로 린네가 뒤따랐다.
'아무튼, 이번 임무는 조사에서 끝났으면 하는 데 말이지.'
아직 제대로 된 무력을 얻기 전이다.
저번 호위 임무와 마찬가지 상황이지만, 주인공의 제자이자 날 적대하고 있는 린네가 곁에 있는 만큼 그때보다 더 주의해야 한다.
솔직히 되도록 '토벌'까지 나서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으면 한다.
휘익──!
지령서에 써진 위치 확인하던 도중, 린네가 날 지나쳐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 앞에 적힌 표지판을 보곤 오른쪽으로 가려 했다.
"린네 양."
"왜요?"
"그쪽이 아닙니다. 빈민가는 허가받지 않은 불법 증축으로 길이 뒤죽박죽 꼬여있죠. 표지판을 믿었다간 길을 헤맬 겁니다."
발을 멈추고 지긋이 나를 쳐다보았다.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믿음을 주기 위해 미소를 지었지만, 그게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럼 이 표지판은 왜 있는 건데요? 적어도 이곳 출신이 아닌 유리안 경의 말보다는 정확할 거라 보는데요."
악역의 미소 앞에서 린네의 적개심은 더욱 짙어졌다.
"당신이 스승님의 명성을 넘어서고 싶어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 임무에도 당신이 참여한 거겠죠. 현 검성의 수제자를 짓밟았다고 소문내고 싶어서."
"...."
"공과 사는 구분하실 줄 알아야죠. 일에 사심을 집어넣으면 어떻게 하나요?"
그 말을 끝으로 린네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에 사심을 집어넣은 게 누군데.
할 말이야 많았지만 넘기기로 했다.
말한다고 해서 믿지도 않을 거고.
아무튼 길은 왼쪽이 맞다.
이 동쪽 빈민 구역은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플레이어라면 한 번쯤은 느낄 통곡의 벽.
미로와 같이 꼬인 길 탓에 이곳에서 손을 놓는 유저들도 잔뜩 봤다.
물론, 여러 회차를 반복한 나로선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는 장소지만.
'하이든 라이히의 시점에선 참 귀여웠는데.'
뭐만 하면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를 받아적던 그녀의 모습은 실로 귀여웠다.
물론 지금 내 시점에서야 말만 하면 태클부터 거는 밉상이지만 말이야.
멀어지는 린네를 보며 난 한 차례 머릴 쓸어넘겼다.
그리고 천천히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16화. 린드 론드벨(2)
군데군데 묵은 때가 보이며, 제대로 켜지 않은 조명 탓에 어두운 빈민가의 거리.
린네는 자신을 뒤따라오던 남자를 쳐다보았다.
실눈의 남자는 군더더기 없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본성을 숨기기 위한 가면이라는 걸 린네는 알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스승 하이든 라이히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황실의 개로 전락한 변질자다.
그가 자신을 따라오는 걸 확인한 린네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못 알아듣는 거야?'
조금 전.
린네는 유리안에게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각자 할 일 하자고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그는 못 들은 것마냥 린네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저 능청스러운 인간이 그 신호를 못 알아들었을 리 없다.
"같은 스승을 모시는 사이지 않습니까? 너무 매몰차게 굴지 마시기를."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린네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는 자기 표출에 대한 욕구가 강한 남자다.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하이든 라이히의 제자'란 말을 극도로 싫어했다. 동시에 최고 검사의 칭호인 '검성(劍星)'에 대한 염원도 무엇보다 강했다.
오죽하면, 하이든이 유리안을 파문(破門)시켰을 때 생사결(生死決)을 입에 담았을 정도였다.
그렇다.
그는 스승인 '하이든 라이히'라는 벽을 넘고 싶어 했다. 스승을 적으로 돌려서라도.
근데 그런 인간이 사제 관계를 운운하다니, 웃기는 노릇이다.
"그만 따라오세요."
결국 린네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린네 양, 그리 말하면 저도 곤란합니다. 임무잖습니까?"
후후, 하는 미소를 보자 린네는 등골이 오싹했다.
저 소름이 끼치는 미소 뒤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말자.
린네는 애써 못 본 듯 무시하며 지령서를 다시 한번 읽었다.
'빈민가에 데몬이 출몰한 낌새가 보이니 조사해라.'
장소는 034A 구역.
빈민가의 한 구역으로, 현장에 도착하는 게 임무의 시작이었다.
린네는 시원스러운 발걸음으로 더러운 빈민가의 도로를 나아갔다.
곧 눈에 꼬질꼬질한 표지판이 들어왔다.
현재 위치는 031A.
조금만 더 나아가면 목적지인 034A 구역이 나타날 것이다.
"어...?"
하지만 다음 나타난 표지판에 적혀있는 숫자는 011C.
순차대로라면 032A 지역이 나타났어야 할 텐데?
린네는 몹시 당황했다.
곧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말했잖습니까? 불법 증축으로 이 빈민 지구에서의 표지판은 이정표로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유리안의 목소리.
말투는 평소와 다를 것 없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평소보다 얄밉게 느껴졌다.
"괜한 참견하지 마세요. 그리고, 그렇게 잘 아시면 절 따라오지 말고 혼자 가시는 게 어때요?"
쏘아붙이듯 말을 한 뒤, 계속 나아가려는 그녀.
하지만 연이어 나오는 표지판들은 목적지인 034A 도로에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차 멀어졌다.
"이이익...! 뭐야 대체!"
01A.
결국 처음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오자 린네는 발을 동동 구르며 성을 냈다. 그 와중에도 뒤에는 유리안이 따라오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오늘이 끝나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린네는 뒤따라오던 유리안을 힐끔 하고 쳐다보았다.
말하는 걸 봐서는 이곳 지리를 아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은근슬쩍 기다렸다가 따라가면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을까.
'죽어도 싫어.'
하지만 그래서는 유일한 스승님의 제자로서 면이 서지 않는다. 특히나 저 변절자에게만큼은 죽어도 질 수 없다.
유리안, 그는 '검성' 하이든 라이히가 인정할 정도로 엄청난 재능을 소유한 자다.
인정하기 싫지만, 린네도 알고 있었다.
걸음걸이만 보아도 대강 알 수 있다.
허투루 사용되지 않는 깔끔한 보폭, 완벽한 호흡, 검의 길을 걷는 자라면 저절로 알 수 있을 정도로 뿜어져 나오는 흉흉한 살기.
'체득'한 것이 아닌, '태생'적인 것.
'죽어도.'
그렇기에 '검성'의 제자인 린네는 늘 유리안과 비교당했다.
그였더라면, 해냈을 것이다.
그였더라면, 당연한 일이다.
그였더라면, 그였더라면.
교단에 복수하기 위해 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 계속해서 듣던 '그였더라면' 이 말은 벌레처럼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나 혼자서 해낼 거야. 설령, 임무에 실패하더라도 당신에게 손을 벌리진 않을 거라고.'
어쩌면 저 '웃는 처형대'는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자존심을 꺾고, 자신에게 손을 벌리는 것을.
'유리안'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독한 심성의 남자였으니까.
"길을... 잃었소?"
그때,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던 몰골의 남성이 말을 걸어왔다.
옷차림이나 모양새가 꾀죄죄하고, 불편한 자세를 보아하니 금치산자(禁治産者)가 분명했다.
"내가 몸이 불편해 길은 안내해드릴 수 없으나, 저 길을 통과하자마자 보이는 첫 번째 골목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건물이 나온다오. 거기 사람이 근방의 지리를 잘 아니 물어보시오."
"...이 동네엔 가이드가 있나요?"
"워낙 복잡한 곳이니까."
절뚝거리는 발로 몸을 겨우 지탱하며 방향을 가리켰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보상을 바라지 않는 호의는 없으며, 까닭 없는 베풂은 없다.
처음 보는 사람이 베푸는 선의는 쉽게 믿어선 안 된다는 것은 린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리안'에게 얕보여선 안 된다는 생각이 계속 그녀를 다그쳤다.
"감사합니다!"
싱긋 웃으며, 린네는 금치산자의 거지에게 제국 화폐인 100나르를 쥐여 줬다.
순간, 거지의 눈에 욕망의 불길이 타올랐으나 린네는 알아채지 못했다.
"보셨죠? 당신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전 이번 임무를 해결할 수 있어요."
"린네 양, 대단합니다."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린네를 보며 유리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린네는 얼굴을 찌푸릴 뻔했으나, 조금 전 노인이 설명해준 장소가 보여 최대한 표정을 숨겼다.
***
아드라탄 제국에는 거대한 범죄 조직이 3개 있다.
그중, 황실이 관리하지 않는 빈민가에서 주로 활동하는 조직의 이름은 '여섯 손가락'.
인신매매를 포함해 암살, 밀수, 절도와 도박.
범죄 조직답게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저지르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자들이 모여 있었다.
여섯 손가락의 일원, 베이런은 자신의 근무지에 찾아온 어린 양 두 명을 보며 속으로 실실 웃었다.
'멍청한 놈들.'
제국의 드높은 공권력이 크게 미치지 못하는 빈민가는 그에 걸맞게 치안이 아주 좋지 못했다.
사람 한두 명 사라져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용했다.
이 미로와 같은 곳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길을 잃기에 십상이었고, 그로 인해 행방불명이 되는 사람도 꽤나 있다. 당연히 대부분은 범죄 조직이 벌인 일들이었다.
'남자 쪽은... 그럭저럭인 편이고, 여자 쪽은....'
금발의 여성, 린네를 보며 베이든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이 절로 생각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
저 새하얀 피부를 손으로 주무르고 싶은 욕망이 베이든의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길을 찾고 있다고?"
"네, 034A 구역을 찾고 있어요."
"어허...."
린네의 말에 베이든은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세 개의 컵을 꺼내 커피를 따랐다.
당연히 베이든의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 주문한 컵.
뜨거운 물이 닿으면 아래에서 수면초의 물이 우러나오게 만든 특별한 컵이었다.
베이든은 의심을 피하려고 먼저 커피를 들이켰다. 그리곤 곧바로 말을 이었다. 허튼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는 거다.
"034A 도로까지라면 안내비로 300나르는 들 텐데, 돈은 가지고 있수?"
사람이란 생물은 뚜렷한 목적이 없는 선의에는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확실한 보수를 원하는 선의에는 그 반응이 조금 무뎌진다.
상대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눈으로 보이기 때문.
즉,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고 안심하는 것이다.
"300나르..., 알겠어요."
린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가 든 잔을 붙잡았다.
무방비하게 행동하는 건 상대가 '돈'을 보수로 원한 '계약'이라 생각해서다.
하지만 베이든의 목적은 '돈'이 아니었다.
바로 그녀, '린네' 자체였다.
컵을 입으로 향하는 린네의 얼굴을 보며 베이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쾅──!
그러던 도중, 갑작스레 끼어든 손이 린네의 잔을 뺏더니 거칠게 테이블로 내려놓았다.
베이든이 인상을 찌푸리던 찰나.
실눈의 남자는 천천히 걸어가 주전자의 손잡이를 잡더니.
"끄아아아아아악!"
그대로 베이든에게 집어던졌다.
"뭐, 뭐하는 거야 이 개XX야!"
펄펄 끓던 주전자 속 내용물을 뒤집어쓴 베이든은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당장 허리춤에 매고 있던 검집에 손을 뻗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얼굴엔 살기가 등등했다.
"이, 이, 미친...!"
"유리안 경, 지금 뭐 하는 거죠!?"
남자의 이름을 듣고 베이든은 송장처럼 경직되었다.
'유리안? 지금 유리안이라고?'
베이든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웃는 처형대.
황실의 개로서 귀족도, 평민도 차별 없이 모조리 벤다는 극악무도한 귀인(鬼人).
제국에서 그 악명을 모르는 자는 없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그렇다 해도 설마 눈 앞에 남자가 그 웃는 처형대겠어?'
베이든은 그렇게 생각했다.
"음료에 불순물이 들어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확인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후후, 하고 짧은 웃음을 흘리며 '유리안'은 앞에 놓인 두 개의 컵으로 시선을 옮겼다.
"음료에 수작을 부린 건 아닌 것 같고, 컵에 수를 썼나 보군요."
"그, 그게 무슨...."
"아니라면 저희에게 주신 컵으로 드셔보시죠."
실눈의 남자는 컵을 들어 베이든에게 건넸다.
"어...?"
망설이자 린네의 눈에도 의구심이 깃들었다.
베이든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근처에 배치한 조직원들을 호출하자 마음먹었다. 그 순간.
짤랑──!
실눈의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히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안내비, 분명 300나르라고 하셨죠? 그게 아니면...."
짤랑──!
그게 끝이 아니었다.
유리안은 한 차례 더 동전을 올렸다.
테이블에 쌓인 금액은 1200나르가 되었다.
"근처에 배치한 호위 3명의 몫도 계산해줘야 합니까?"
"...?!"
마치 달밤이 비친 호수처럼 고요한 말투였다.
짧은 한마디에 함축된 의미는 비단 하나가 아니다.
몰래 배치한 조직원들을 순식간에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감. 그리고 그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 집안에 들어온 담력.
아마 실력에 엄청난 자신을 가지고 있는 자임이 분명하리라.
'그, 그렇다는 건....'
눈앞의 남자는 소름 끼치도록 두려운 악명의 본인일지도 모른다는 소리.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곤조곤한 목소리.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눈앞에 돈은 단순한 '의뢰금'이 아니다.
이건 노잣돈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4명의 '목숨'이다.
"제...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베이든은 굴복했다.
살기 위해선 받아들이는 것밖엔 없었다.
"034A 도로의 위치, 최근 034A 도로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정보."
은은한 미소에서 자애(慈愛)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볼 수 있는 것은 깊은 심연.
헤어 나올 수 없는 늪.
베이든은 벌벌 떨었다.
이 상황이 끝나기를 간절히 빌며.
"그리고, 자수하시길. 간단하죠?"
17화. 린네 론드벨(3)
불야성(不夜城)을 연상케 하는 화려한 제도(帝都).
중앙의 동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엔 거대한 규모의 빈민가가 존재했다.
이 빈민가가 생긴 이유는 거두절미하고, 아드라탄 제국이 '합의'가 아닌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병합한 점에 있었다.
과도한 정복 전쟁.
비록, 대부분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그 과정에서 생겨난 출혈과 전쟁 후 제국의 문화와 체계에 적응하지 못한 신민이 제도(帝都)의 중심에서 벗어나 모여든 장소가 이곳이었다.
아마도, 이번 황제가 즉위하고 있는 동안엔 이러한 사회구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난 바로 옆 034A 도로라 적힌 표지판을 쳐다보았다.
'여긴가.'
데몬 출몰 의혹 신고를 받은 도로다.
표지판을 읽은 난 '베이든'이란 남자에게 받은 약도를 꺼내 들었다.
호랑이가 없는 곳엔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빈민가는 황실이 크게 관여하지 않는 구역.
'베이든'이란 남자는 이 빈민가에서 왕 노릇을 하는 범죄 조직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이 빈민가에서 일어난 일들 대부분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물론, 이 034A 도로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렴풋이 아는 듯했다.
약도에는 이 근방에서 발생한 사건 사고들도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어떻게 아셨죠?"
간략하게 약도를 훑으며 이곳까지 오기 전에 눈여겨봤던 장소를 확인하려던 찰나, 뒤따라오던 린네가 말을 걸어왔다.
"뭘 말입니까?"
"그 집에 다른 사람들이 숨어있다는 것 말이에요."
린네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는 의구심이 서려 있었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를 묻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도 말이다.
"궁금하십니까?"
"예, 가르쳐주세요."
그녀는 의외로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린네 론드벨.
누구에게든 본받을 점은 있다 생각하는 그녀다.
아무리 악명이 높은 유리안이라도 실력은 진짜배기.
'사람'보다 '현상'을 우선시하는 그녀는 끔찍이도 싫어하는 유리안에게 배움을 청한 것이다.
그런 태도가 싫진 않았다.
물론 적의가 없으면 더 좋겠지만 말이야.
"마나 감지입니다."
"마나... 감지?"
"모든 생명, 모든 사물, 모든 현상, 삼라만상(森羅萬象)에는 마나가 깃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마나는 다른 마나에 큰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죠."
"마나는... 다른 마나에 반응을 보인다."
"집안에 들어가기 전에 저는 '마나혈' 38개 중, '대혈맥' 2개를 사용해 잔잔한 마나를 주변에 흘려보냈죠. 그렇게 상대가 숨어있는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박쥐의 초음파처럼 말이죠?"
린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방법이 가능하다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 방법은 '유리안'이 사용하는 방법이라기보다는 '마법사'들이 주로 쓰는 방식이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설정을 어느 정도 꿰고 있었던 난 이런 방법을 통해 주변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쉽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마도 유리안의 넘쳐흐를 정도로 풍부한 마나가 있어서 가능한 거겠지만.
본래 기사들은 특유의 직감이라거나, 인기척을 통해 숨어있는 적들의 위치를 파악했으나 지금의 난 완벽한 '유리안'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라도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근데 아까 그 남자에게 034A 도로에서 벌어진 사건 사고가 아니라 주거 실태에 관해 물어본 거죠?"
아직 궁금한 점이 끝나지 않았는지, 린네는 또다시 입을 열었다.
시선은 내가 들고 있는 '약도'에 향해 있었다.
"저희는 034A 도로에 누가 사는지가 아니라, 이곳에서 데몬이 출현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조사하러 온 것일 텐데요?"
"당연히 그걸 위해서입니다."
"...그걸 위해서?"
미소를 짓자, 오히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다.
"<데몬화>에 대해서 얼마나 아십니까?"
"...누굴 바보로 알고 있나요? 마신 바르바토스가 남긴 사념이 인간이 아닌 생물체에 기생할 경우, 그 사람이 '데몬'이 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잖아요?"
"인간은 <데몬화>가 되지 않는다고, 누가 말했습니까?"
"그게 사회적 통념이니까요. 지금까지 그런 경우를 본 적도 없구요."
"보기 힘들 겁니다. 아주 희귀한 케이스일 테니까요."
린네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아무리 빈민가라고는 하지만, 공명석이 도배된 제도(帝都)와 인접한 장소. 그런 장소에서 데몬이 발생하려면 자연 발생으로는 무리입니다. 작은 동물들은 크기가 작아 성장에 용이하지 않을 테고요."
말을 이을수록 린네의 표정은 굳어갔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자연 발생도, 기생 발생도 없다는 소리인가요? 빈민가엔 데몬의 숙주가 될 만한 존재가 없어서?"
"그럴 리가요. 여기 널려있는 게 숙주가 아닙니까?"
주변을 한 번 둘러보자 린네의 눈에는 당혹이 서렸다.
"그 말은 즉, 유리안 경은 현재 이 구역에 <데몬화>가 진행되는 인간이 있다. 그 말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예."
"말도 안 돼요!"
큰소리로 부정하는 린네를 보아하니, 아직 이 시기엔 인간도 <데몬화>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다.
"인간은 <데몬화>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사회적 통념이라고 말하셨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러면 좋겠다는 '근거 없는 기대'입니다."
"...그렇다고 쳐요. 그럼 그거랑 주거 실태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소리죠?"
하나 하나 설명해줘야 한다는 것이 조금 귀찮았으나, 그래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니 설명할 필요는 분명히 있었다.
"<데몬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인간은 고열을 겪습니다. 지금 이 약도에 적힌 것은 이 도로를 통괄하는 조직, '여섯 손가락'에 해열제를 타간 집들이 적혀있죠."
펄럭.
난 손에 든 약도를 흔들었다.
"타간 곳은 1주일간 세 곳. 이곳들만 둘러보면 될 겁니다.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는 일이죠."
불만이 그득한 린네의 얼굴엔 '만약 아니라면?'이란 추궁이 따라온다.
"만약 아니라면 린네 양이 원하는 대로 다음 날부턴 따로 행동하도록 하죠."
정말 이래저래 귀찮은 아가씨다.
***
첫 번째와 두 번째 집에선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그렇게 세 번째 집으로 향하는 길, 린네는 어쩐지 기분 좋은 듯한 뉘앙스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이네요."
거기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조금 전, 인간이 <데몬화>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자신의 말이 맞다며 의기양양해진 거겠지.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모든 생물은 <데몬화>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생물에 비해 가능성이 희박할 뿐.
"저기로군요."
약도를 한 번 훑어보고는 저 멀리 있는 가정집을 가리키는 린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가정집이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짙어지는 향초 냄새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거무죽죽한 저택 주변을 밝히는 등불.
소모되는 연료는 정제된 기름이 아닌 정체불명의 무언가다. 거기서 괴상한 냄새가 풍겨왔다.
"냄새가 고약하네요...."
린네도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난 '마지막 집'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없습니까?"
안에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 번 더 문을 두드리려던 순간.
끼익──!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은 듯, 나무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서서히 열렸다.
"누, 누구?"
안에서 나온 것은 흰 머리가 자욱한 노파였다.
뿔도, 데몬 특유의 점액질, 그리고, 확실히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데몬화>와 관계없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공포.'
노파의 머리 위로 드러난 <부정의 색>은 익숙했다. 어딘가 초조해하는 눈빛과 더듬는 말투는 덤이었고.
게다가 희미하게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불쾌한 냄새.
이건 '향초' 냄새가 아니다.
이전 '공명석 호위 임무'과정에서 잔뜩 맡은 그 냄새다.
데몬의 체취가 섞인 피 냄새.
──지잉.
두 눈이 충혈되는 것처럼 따갑고, 코끝은 시큰거렸다.
'유리안' 몸속에 잠재되어있던 전투 본능이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
이전에 이각(二角) 데몬과 마주했을 때 느낀 감각도 같았다.
'있다.'
이 안에는 분명 데몬이 있다.
지령서에 적힌 '데몬 출몰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난 최대한 끓어오르는 감정을 잠재웠다.
"황실 전속 기관, '감은 눈'에서 왔습니다. 집안의 수색을 하고 싶은데, 협조해주시겠습니까?"
"가, 감은 눈...?"
노파는 두 눈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개심으로 바뀌었다.
"다, 당장 꺼져! 내 집에서 당장 꺼지란 말이야!"
휙 하고, 문을 닫으려는 노파.
문 틈새로 발을 집어넣어 닫히는 것을 막았다. 그후, 강하게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문은 너무나도 쉽게 열렸다.
'가족 구성원은 노인 한 명과 그의 젊은 아들 한 명.'
<데몬화>가 진행되는 일반인은 마신의 잔재사념(殘滓死念)이 보내는 충동을 버틸 수 없을 터.
눈앞에 노파가 아니라면 현재 안 보이는 아들이 의심스럽다.
"윽...."
문이 완전히 열리자 안에선 지독한 피 냄새가 폭풍처럼 내 몸을 강타했다.
린네도 맡았는지 탄식과 함께 손으로 코를 막았다.
이 정도면 집안에 '데몬'이 있다는 것은 이미 확실시.
더 나아가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 노파는 데몬이 인간을 먹는 것을 방치했다. 혹은──.
'...데몬에게 인간을 먹이로 줬다.'
식탁에는 두 개의 식사용 도구와 그릇이 두 개 올려져 있었다. 그 점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가족 구성원 2명. 그중, 아들이 <데몬화>가 진행되는 와중이라면 인간다운 식사는 하지 못할 터.
그렇다면 식탁에 올려진 두 개의 나이프와 포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끔찍하군.'
난 냄새의 근원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 가장 내부, 자물쇠가 걸려있는 문이다.
"아, 아들은 정신이 이상한 것뿐이야! 가, 가끔 거칠게 행동하는 것뿐이지 정상이라고!"
"유리안 경! 무작정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게...!"
"이 상황에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게 필요합니까?"
"그래도, 이건 너무 강압적이에요!"
"아니요. 도리어 원리적이죠."
"저희는 토벌을 목적으로 온 게 아니라, 신고받고 조사하러 온 거라고요! 하다못해 최소한의 설명은 해야...!"
"저 식탁을 보시죠."
린네는 고개를 돌려 식탁을 쳐다보았다.
"두 개의 식기 도구, 한쪽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지만 다른 한쪽은 깔끔하게 비어 있군요."
"이 집의 가족 구성원은 두 명이라고 아까 당신이...."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물쇠가 잠긴 방안에 감금하지 않습니다."
반박할 수 없었는지 린네는 입을 다물었다.
"이웃들을 식사에 초대해 약을 먹이고, 저 자물쇠가 잠긴 방 안에 있는 '데몬'에게 먹이로 준 것이겠죠."
"...설마."
린네는 믿을 수 없다며 얼굴에 당황이 깃든 와중, 노파는 다급하게 잠긴 문으로 다가갔다.
급히 품속을 뒤져 꺼내든 열쇠로 자물쇠를 열었다.
"도, 도망쳐라 아들아! 빨리 바깥으로...!"
콰직──!
열린 문에선 순식간에 뻗쳐나온 우악스러운 입이 순식간에 노파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잔혹한 광경에 말을 잇지 못하는 린네.
한편 내 머리는 이성적이었다.
이전에 이각(二角) 데몬과 전투를 했을 때처럼 '유리안'이란 캐릭터가 가진 본능이 이런 상황에도 침착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이다.
걸신이 들린 것처럼 노파의 시체를 잡아먹는 데몬. 그 머리 위로 서서히 뿔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데, 데몬!"
린네는 급히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뿔 개수가 하나임을 확인한 그녀는 땅을 박차고 검을 휘둘렀다.
한눈에 봐도 몸은 경직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데몬의 등장에 당황한 거겠지.
키아악──!
"윽...."
난폭하게 휘두른 데몬의 팔이 린네에게 적중하고 말았다.
동시에 흐릿해지는 검의 '오러'를 보자, '린네 론드벨'이란 캐릭터가 안고 있는 한 가지 문제점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보다 많은 마나혈의 수.'
그녀는 세간에 알려진 방법이 아닌 자신만의 방법으로 마나를 다뤄야 하지만, 지금의 린네는 그걸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
이대로 놔둔다면 린네가 데몬에게 당하는 건 시간 문제겠지.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긴 하지만, 이건 유리안이 맡은 임무.'
임무에서 사상자가, 그것도 '검성의 제자'가 다친다면 사람들의 이목이 모이고 만다.
내겐 골치 아픈 일이다.
완벽한 '유리안'을 연기해야 하는 내게 의심이 섞인 관심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
키아아아악──!
데몬이 다시금 린네에게 덤벼들자 나는 땅을 박차 녀석의 머리를 발로 찼다.
끔찍한 괴성과 함께 녀석은 벽에 처박혔다.
아직은 죽지 않았다.
피어오르는 먼지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으니까.
"도움은 필요 없어요...!"
"필요 없다니요, 일이잖습니까?"
볼멘소리를 중얼거리는 그녀를 뒤로하고 검을 뽑아 들어 데몬에게 겨누었다.
그런 와중, 불현듯 걱정거리 하나가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이 시기의 린네가 <월광검>을 직접 본 적이 있던가?'
현재 <월광검>은 유리안의 그것처럼 완벽하지 못한 상태다.
만약 린네가 유리안이 가지고 있는 무력을 알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내 불완전한 <월광검>을 본다면....
'기억 상실이란 소문에 힘을 싣는 꼴이 된다....'
고민하는 와중, 벽에 처박혔던 데몬이 내게로 뛰쳐나왔다.
어쩔 수 없이 <월광검>을 사용하지 않고 녀석을 베어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각(二角) 데몬 때처럼 녀석의 몸을 시원스럽게 베어지진 않았다.
데몬의 신체는 금속처럼 단단했으며, 그것을 베기 위해선 '마나'를 활용해야만 했으니까.
크아아악──!
그러나 유리안,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오러를 사용하지 않아도 베어낼 수 있었다.
새로 얻은 <간파>란 특성은 마나를 사용하지 않아도 벨 수 있을 정도로 약한 부위를 점지해주었다.
그 검로(劍路)에 도신을 갖다 대니 치명상까진 아니어도 자잘한 상처를 계속해서 입힐 수 있었다.
"말, 말도 안 돼... 오러도 없이."
뒤에선 린네가 당황한 말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도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오러도 없이 데몬의 몸을 베다니.
그렇게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 몇 합을 번복하니, 데몬의 몸은 넝마처럼 걸레짝이 되었다.
키엑, 키에에엑──!
공포에 물든 데몬의 울음.
처절한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로 울부짖던 녀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땅에 추욱 늘어졌다.
과도한 출혈 탓에 죽고 만 것이다.
"월광검을 사용하면 단번에 끝났을 텐데, 왜 사용하지 않은 거죠?"
"그편이 재미있으니까요."
"...."
정신 나간 실눈의 악역.
그가 내뱉었던 대사들을 떠올리니, 참 정신나간 녀석이었단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18화. 난행
"이번 임무 수당은 모두 당신의 것이에요. 결과적으로 전 아무것도 못 했으니까요."
빈민가에서의 임무가 끝나고, 황궁에 들어가기 직전.
제자리에 멈춘 린네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유리안은 고개를 돌려 린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늘 그렇듯 실눈 위에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말 하지 마시길 린네 양, 동문이잖습니까?"
"저는 당신이 싫어요."
구태여, 린네는 입으로 말했다.
유리안을 싫어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걸 노골적으로 입에 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노골적인 적의에도 유리안은 한결같았다.
"유감입니다. 같은 스승을 둔 사이잖습니까? 후후."
"잠시 같은 스승을 모셨다고 해서 다 같진 않죠. 스승님께선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당신이 휘두르는 힘에는 책임이 없어요. 지금이라도 절제를 가지시는 게 어떠신가요?"
조금 전, 데몬에게 보여준 압도적인 무력을 떠올리자 린네는 그간 품었던 불만이 떠올랐다.
어째서, 스승의 가르침에 반하는 행동을 하냐고.
어째서, 스승님을 죽이고 싶어 하냐고.
"절제라는 건 겁쟁이들이나 갖춰야 할 덕목이죠."
"그 말은 즉, 스승님을 겁쟁이라 말씀하시는 건가요?"
스승을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린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화가 치밀어올랐는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가 화난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안은 태연하게 말했다.
"린네 양은 세상을 참 모르는군요."
"...뭐라구요?"
"누군가는 절제하면 안 되는 삶을 살 수도 있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찰나, 먼저 유리안이 선수를 쳤다.
"아무튼 오늘은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이번 임무의 몫은 모두 제가 가져가도록 하죠."
후후, 짧은 웃음소리와 함께 유리안은 황궁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며 린네는 인상을 찌푸렸다.
"절제하면 안 되는 삶이라니...."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 생각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린네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역시 그는 이해할 수도, 이해하기도 싫은 사람이었다.
"돌아가는 거니?"
그때 자신에게 묻는 목소리에 고갤 돌렸다.
마차에 탄 남자가 린네를 쳐다보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에 그녀는 작게 웃음을 지었다.
"에르겐 숙부님."
에르겐 론드벨.
자신과 같은 론드벨 가문의 일원이자, 아버지의 동생.
다정한 어투로 말을 걸어온 그에게 인사를 하자 마차 문이 열렸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면 태워주마, 타렴."
"아뇨, 혼자서...."
"사양할 필요 없단다."
여기서 거절한다면 그것도 민폐겠지.
린네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마부에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명하자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이든 경이 부탁한 일을 끝내고 오는 길이니?"
"네."
"그렇구나, 일은 잘 끝마쳤니?"
에르겐의 물음에 '예'라고 대답하려던 순간, 그녀는 불현듯 이번 임무에서 자신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잘 끝마치긴 했으나, 순순히 긍정하기엔 낯부끄러웠다.
"...그럭저럭요."
"그래, 다행이구나. 하이든 경이 네 재능을 잘 알아보신 게야.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거라."
걱정스러운 얼굴로 에르겐은 린네를 쳐다보았다.
"미안하구나, 괜한 잔소리하는 모양새가 되어서."
"아니에요, 숙부님."
"근데, 조금 전에 같이 있던 남자는... 설마 유리안 경이니?"
그 이름 석 자가 나오자 린네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다가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예."
"요즘 그의 행보 탓에 원로회의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졌더구나. 비서실에 검토안을 올려 원로회의 압박을 넣었다는 소문도 돌고 있고."
제국 귀족 중, '유리안'에 관심이 없는 자는 찾기 힘들다.
귀족인 에르겐이 이런 의문을 갖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온갖 악명을 지닌 황실의 개.
그의 상승과 추락은 권력을 가진 이들에겐 관심사였고, 가십거리로 삼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잔뜩 있었다.
무엇보다 황실의 개이면서 출신은 귀족이니, 이래저래 신경이 아니 쓰일 수밖에 없는 거겠지.
"같은 귀족이면서 귀족 원로회에 압박을 넣다니. 이해할 수 없는 남자로구나."
"그러게요."
"그래도, 무엇보다 조심해야 할 건 유리안, 그 인물 자체란다."
조곤조곤히 말하던 에르겐은 린네의 손을 잡더니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슨 이유에서든 그를 가까이하지 말거라. 그 남자는 너무나도 위험한 인물이야. 정(情)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관계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황실의 검이란다. 귀족이라면 피해야 할 인물이야."
"예. 알고 있어요, 숙부님."
"하지만, 조금 의구심이 드는구나."
"예?"
"그렇게나,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째서 하이든 경께서 그를 내쳤는지 말이야."
골똘히 생각하던 에르겐의 입엔 약간의 조소가 담겼다.
"소문만큼 대단한 검사는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는구나."
"그건...."
"응?"
"아닐 거예요."
린네는 깔끔하게 부정했다.
완벽한 검로(劍路).
다급한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침착함.
허투루 사용되지 않고, 절제된 힘의 분배.
그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검술과 상당히 유사했다.
"다른 건 몰라도 검술만큼은 진짜배기에요. 스승님께서도 알아보시고 제자로 들이셨던 거겠죠."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도 데몬을 벨 수 있게 급소만을 철저하게 베어내던 눈썰미.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낸 육체 능력.
비록, '재미'를 위해서 그런 행동을 했다지만, '현상'만을 보자면 그는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데몬을 벤 셈이다.
"그는 강해요."
나보다 훨씬.
말을 하려 했으나 알량한 자존심이 린네의 입을 틀어막았다.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빈민가에서의 임무를 끝낸 뒤.
단장인 오드윈에게 보고하자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혹시, 실수라도 저질렀나?
그러고 보니, 오드윈은 처음 내 말투를 보고 의구심을 느낀 적이 있었지.
"뭐가 말입니까?"
"데몬 출몰 의혹을 확인하기 위해 빈민 구역에 간 것이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확인해 보니 사실이더군요."
"근데 왜 범죄자가 자신의 죄를 자수하러 온 건가요? 그것도 당신의 이름을 대면서요."
처음에는 오드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잠깐 생각을 하자 빈민가에서 마주친 '베이든' 얘기라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분명 그에게 자수하라고 말하긴 했다.
근데 이렇게 순순히 자수했다고?
"뒤늦게라도 자신의 죄를 안 거겠죠. 뉘우치고 자수한 거 아니겠습니까. 거기서 왜 제 이름이 나온 이유는 알 수 없지만요."
"...."
의구심 섞인 시선이 날아왔지만 무시했다.
일단 이런 식으로 넘겼다.
어차피 뒷일은 오드윈이나 황실에서 처리하겠지.
나를 쳐다보고 있던 오드윈은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서류 한 장을 슬쩍 내밀었다.
또, 임무야?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으나 상단에 적힌 글씨를 보아하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업무 수행비예요. 요번에 수행한 두 개 임무에 대한 상여금도 포함해서요."
수행비.
이른바 월급이라는 소리.
월급 내역이 적힌 서류를 훑어본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1만 1천 나르?'
아드라탄 제국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단위는 '나르'이다. 이전에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설정을 간단하게 정리한 사이트에서 본 바로는 '나르'는 지구에서의 '달러'와 유사한 가치를 갖는다고 들었다.
즉, 1만 5천 나르라는 소리는.
'월급이 1,500만 원이라고?'
자세히 보니 '감은 눈 급여'라 적힌 부분엔 그리 많은 금액이 적혀있지 않았다.
근데도 이렇게나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상여금이 측정된 방식 덕. 즉, 근래 2개의 임무를 끝마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번 임무에선 린네가 모든 몫을 내게 넘기기도 했다.
"대단하군요."
어마어마한 급여에 난 무의식적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드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예."
"평소보다 적을 거예요. 아무래도, 이번 달은 부상 때문에 쉰 날이 많았으니까요."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평소엔 이것보다 더 많이 받는다는 건가?
역시 유리안은 보통 녀석이 아니었다.
'황실의 개'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어.
하긴, 괜히 '황실 전속 기관'이겠는가?
아드라탄 제국이 지금까지 건재할 수 있는 이유는 황실이 가진 압도적인 권력 덕분이다.
감은 눈이 황실 전속 기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황실의 명성을 위해 적은 급여를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겠다.
"음?"
그렇게 급여 명세서를 읽던 도중 문득, 마이너스와 함께 숫자가 휘갈겨 적혀있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엔 급여에 붙은 공제(控除)가 적혀있었다.
[- 저택관리비]
[- 사용인 월급]
뭐, 그래.
여기까진 납득할 수 있다.
그렇게 큰 액수는 아니었으니까.
[- 제국예술협회 회원 유지비]
[- 잡지, 더 나이츠(The Knights) 구독비]
음.
그래, 이 정도까지도 납득할 수 있었다.
유리안이 예술품들을 좋아하며, 그것에 돈을 처박는 녀석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근데 구독비치곤 너무 비싸다.
[- 도나시엥 아트리움의 도자기 '피앙세' 할부]
[- 명화가(名畫家) 코루시어스 작품, '이드 코스모스' 할부]
이런 미친 새끼를 봤나.
제국 신민이라면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예술가들.
그들의 아트리움에서 구매한 작품들은 실로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그 덕에 급여 명세서에 적힌 공제 내역엔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가 적혀있었다.
[지급 급액 = 900 나르]
결과적으로 내게 떨어진 금액은 900나르.
유리안이 귀족 신분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터무니없는 금액만이 남았다.
'이 녀석이... 저금을 했을까?'
잠깐 눈을 감자, 내 시야에는 쓸데없는 골동품으로 그득한 저택 내부의 풍경이 떠올랐다.
예술품으로 도배된 거실과 침실, 그리고 서고까지.
'있겠냐, 이 개자식.'
갑자기 머리가 아찔해지기 시작했다.
곧 귀금속점에 부탁해둔 '월장석'을 찾으러 갈 텐데, 돈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누구한테 돈을 빌리기라도 해야 하는데....'
아니, '유리안'이라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하나라도 임무를 더 맡아 자금을 확보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오드윈 경."
"왜요?"
"혹시 들어온 임무가 더 있습니까?"
오드윈의 눈에는 의아함이 떠올랐다.
"당신이 직접 그런 말을 꺼내는 건 처음이네요. 아쉽지만 없어요."
이어지는 말에 난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제국의 웃는 처형대, 인두겁을 쓴 귀신. 검성의 전(前) 수제자.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악명을 포함하기는 했으나, 온갖 명성을 온몸에 두른 남자인 유리안이 되었으나, 이런 속물적인 이유로 앞길이 막힐 줄 상상도 못 했다.
19화. 아일린 드 도나시엥(1)
"어쩜 이리 도움이 되지 않는 인생입니까."
독백과도 같은 혼잣말.
이게 지금까지 '유리안'이 밟아온 행보에 대한 나의 평가다.
이 빌어먹을 실눈 악역 녀석은 주인공인 '하이든 라이히'와 대적하며, 스승을 죽이려 한 것도 모자라 제대로 된 저금도 하지 않은 멍청이다.
"멍청이도 이런 멍청이가 없습니다. 자기 처지를 생각하면 미술품을 모으는 것보다 비상시를 대비해 돈을 축적해두는 게 정답이 아닙니까?"
물론 개탄해봤자 바뀌는 건 없다.
곧바로 난 저택에 처박힌 공예품들을 몇 개 들고 약속한 귀금속점으로 향했다.
제국에서도,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
이것이라면 '월장석'을 교환할 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다.
- "그... 유리안 경,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물물교환을 통한 거래는 하지 않습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귀금속점 주인은 머리 위로 '공포'의 색을 드러냈지만 그럼에도 명백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상인이라면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 법.
무작정 예술품이라고 사지 않는다.
본디 예술품이란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만 예술이니까.
하지만, 어느 세계에서든 이런 물품들을 사주는 곳이 있다.
바로 아트 갤러리다.
"바, 반갑습니다. 유리안 경. 아트 갤러리 '이드 코스모스' 소속의 감정사 피르소입니다."
"예, 반갑습니다."
제도(帝都)에 있는 아트 갤러리 중 하나인 '이드 코스모스'에 들어서자 난 직원에게 감정사를 소개받았다.
본래라면 이런 감정을 맡기기 위해선 몇 주가 소모되어야 했으나 우리의 '유리안'은 단 하루 만에 일정을 잡는 게 가능했다.
"그럼 감정을 맡기고 싶으신 물품을 볼 수 있을까요?"
물건을 보여달라는 감정사의 말에 난 저택 입구에 걸려있던 그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유화(油畫) 방식의 인물화.
유화 특유의 크리미한 질감으로, 작가만의 독특한 심상(心想)세계를 투영한 그림이었다.
"오오...."
감정사의 입에선 탄식이 흘러나왔다.
척 보아도 예사 물건은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그쪽 관계자가 침을 질질 흘릴 물건이라는 느낌을 잔뜩 받은 듯 보였다.
감정사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림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슬쩍 기울여 다양한 각도로도, 돋보기를 꺼내 들어 자세히 살펴보기도 하였다.
그렇게 수 분 흐르자 감정사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가품(假品)이로군요."
"...가품말입니까?"
"예."
물음에 감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작품의 원화는 '코루시어스 빈센트'란 화가입니다. 그의 특유한 기법을 따라 그리는 것이 한때 미술계에 유행을...."
결국 그의 말은 유명 화가의 기법을 따라 한 가짜라는 거였다.
그럼 값어치가 나가지 않는다는 소리.
다른 걸 가져올 걸 그랬나?
저택 입구에 떡하니 걸려 있길래 괜찮은 예술품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비슷하게 따라 그린 작품은 처음 보는군요. 구매하고 싶습니다. 1,000나르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그마다 다행인 건 감정사가 구매 의사를 밝혔다는 점이랄까. 값도 어느 정도 쳐주는 것 같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불완전한 <월광검>을 완성하기 위해 월장석이 당장이라도 필요한 입장. 한 푼도 귀중한 상황에서 1,000나르 정도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유리안 경, 잠시 계약서를 가져와도 되겠습니까?"
"예."
고개를 끄덕이자, 감정사는 조금만 양해를 바란다며 아트 갤러리의 안쪽으로 향했다.
혼자 갤러리에 남겨진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꽤 붐비는군.'
아트 갤러리에는 나 말고도 방문자가 많았다. 모두 예술품을 보는 데 정신이 없었다.
참으로 특이한 점은 여기 모인 예술품이 대부분 인상주의 기법을 사용한 작품이란 거였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세계관이 중세와 근대 사이 어디쯤이란 걸 생각하면, 참으로 진취적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제일 눈에 띄는 그림을 감상했다.
음.
역시, 모르겠다.
아는 거 하고 감상은 다르다고 하는데, 역시 내 감성에는 그냥 잘 그린 그림이란 말이지.
"예술품 관람이라니, 당신치고는 고풍스러운 취미네요."
심오한 예술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내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날 아는 말투로 보건대 면식이 있다는 소리.
천하의 유리안에게 이리 쉽게 말을 거는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고갤 돌렸다.
어두운 남색 머릿결.
그리고 사람을 돌아보게 만드는 외모.
아일린 드 도나시엥.
처음 만났을 때부터 뭔 생각인지 모를 인물이었다.
날 바라보는 연적색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러는 아일린 양도 관람하러 오셨습니까?"
무심한 척 말을 받았다.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인물인 만큼 기회가 될 때마다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그녀 머리 위로 떠 오르는 <부정의 색>은 딱히 없었다.
"당연하죠."
아일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긴, 아트 갤러리에 오는 이유가 예술품 관람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돈 때문에 작품을 팔러 온 내가 특이한 케이스지.
"친척이 이곳 '이드 코스모스'에 작품을 걸었거든요."
아일린은 내 앞에 걸려있던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들이'라는 그림 제목과 함께 '페일른 드 도나시엥'이란 이름이 적혀있었다.
방금 언급한 '친척'의 작품은 눈앞에 이걸 말하는 모양이다.
"그거 아시나요?"
그림을 감상하던 아일린이 문득 입을 열었다.
"뭘 말입니까?"
"최근 원로회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요."
이 여자 별거 아닌 투로 엄청난 소릴 하는군.
아무렇지 않은 척 그림을 감상하며 아일린은 말을 이었다.
"하긴, 이전에 '감은 눈' 입단 테스트를 진행했을 당시. 원로회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대강 알고 있었죠?"
"...."
"그러니, 테스트를 그런 식으로 진행했겠죠. 원로회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음,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있긴 했지만, 내 속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방금 아일린이 한 이야기는 전혀 모르던 사실이다.
알고 있었다면 입단 테스트 교관 노릇을 어떻게든 거절했겠지.
"계략이 통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최근 당신이 비서실에 올린 제안서 때문에 원로회는 당신에게 이를 갈고 있어요. 자신들에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하고 있다구요."
이전에 '감은 눈' 입단 테스트의 문제점에 대해 올린 제안서.
그게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고?
"그렇군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는. 어쨌든 조심하세요. 이후, 그쪽에서 무슨 수를 쓸 것이라는 건 기정사실이니까."
"감사합니다, 아일린 양.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아일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이쪽을 쳐다보았다.
"뭐가 말이죠?"
"아일린 양도 귀족인 이상 원로회의 도움이 필요하실 텐데요. 이런 식으로 내부 사정을 말하는 게 괜찮냐는 뜻입니다."
"상관없어요. 전 귀족이지만, 동시에 마탑의 마법사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이쪽을 쳐다보는 두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으나, 이윽고 강한 의지가 서렸다.
"당신은 줄린 특구에서 절 도와줬으니까요. 전 남에게 진 빚은 그대로 두지 않는 편이거든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아일린은 그렇게 덧붙였다.
은혜는 반드시 갚고, 원수도 반드시 갚는다는 소리.
"좋은 습관입니다."
난 짧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유, 유리안 경! 계약서를 가져왔습니다."
계약서를 가지러 간 감정사가 허겁지겁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는 가지고 온 서류들을 테이블에 정성스럽게 나열하기 시작했다. 난 품속에서 펜을 꺼냈다.
"...지금 뭐 하는 중이죠?"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아일린이 물었다.
나는 대강 설명했다.
예술품 관람 겸 그림을 매각하러 왔다고.
"저 그림인가요?"
"예, 아일린 님."
감정사가 대답하자, 아일린은 천천히 테이블에 올려둔 액자에 다가갔다.
그림을 살펴본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이 작품, 이렇게 아무렇게나 올려놔도 되는 건가요?"
"역시 아일린 님도 코루시어스 빈센트의 작품이라는 걸 알아보시는군요. 하지만, 그건 가품으로...."
"진품이잖아요. 이 정도로 유화를 다루는 화가는 제국에 없는 걸로 아는데요. 그리고, 구석에 적어둔 사인까지 코루시어스의 것과 일치하고요."
"...예?"
감정사는 다시금 그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까 아일린이 지적한 부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정사의 얼굴은 점차 사색이 되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진, 진품이었다니.... 도통 구하기 힘든 물건인지라 제가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이 퀄리티가 절대 가품일 수 없어요."
진품이라고?
중얼거리는 감정사의 말에 내 시선은 테이블에 올려둔 그림으로 향했다.
"그래서, 감정가에 변동이 생기는 겁니까?"
솔직히 진품이고 가품이고 관심 없다.
조금이라도 가격을 높게 쳐주면 된다. 물론 일반적으로 진품일 때 가격이 더 높게 되겠지만.
"죄, 죄송합니다 유리안 경... 이, 이 작품이 진품이면 지금 저희 아트 갤러리에선 구매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구매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그럼 이 그림이 대체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제가 물었잖습니까, 감정가가 어떻게 변하는 거냐고."
그래서 이 그림이 얼마쯤 되냐고.
사색이 된 감정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동공은 끊임없이 흔들렸고, 머리 위로는 '공포'의 색이 맹렬하게 떠올랐다.
"유, 유리안! 감정에 실수할 수도 있는 거예요! 사람이 실수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죄, 죄송합니다. 유리안 경...!"
뒤늦게 둘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알아차렸다.
실수한 감정사를 이 자리에서 심판하려는 '웃는 처형대'.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위협하고 만 모양이다.
악명 높은 '유리안'이라 해도 이러진 않겠지.
...아마도.
"저도 실수에 대한 책임을 물 생각은 없습니다. 아일린 양의 말대로 사람은 실수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러지 걱정하지 말라는 뉘앙스로 말을 했으나 아일린은 전혀 믿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거 곤란하군요. 이 그림을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월장석의 구매가 미뤄진다면 내 입장이 곤란해진다.
하루라도 빨리 <월광검>을 완성해야 조금이라도 신변이 안전해질──.
"...그럼, 제가 소개해드릴까요?"
잠시 고민을 하던 사이, 아일린이 불쑥 입을 열었다.
"코루시어스의 그림이라면 무조건 사들이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거든요."
"정말입니까?"
난데없는 희소식에 저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이렇게 운 좋게 도움의 손길이 나타난다고.
그것도 알다가 모를 아일린이 하는 제안이라 의심부터 들었다.
"대신, 일 하나만 도와줘요."
역시나.
세상일에 공짜란 없다는 걸 상기시켜주는 그녀였다.
20화. 아일린 드 도나시엥(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