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 30-40

30화. 혼석(3)

지끈거릴 정도로 강렬한 탄내가 비강을 가득 메웠다.

불길이 나무를 잡아먹고, 그 사이로 몽수 하멜른이 거대한 몸뚱어리를 끌고 이쪽으로 천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곳이 바로 지옥이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끔찍한 현장에 혀를 내둘렀으나, 의외로 침착함을 쉽게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이미 익숙해졌으니까. 소위, 짬이 찼다는 소리다.

"여러분들은 물러서시죠. 저 데몬은 혼자 맡도록 하겠습니다."

"예?"

현재 눈앞에 나타난 데몬, 몽수 하멜른의 머리에는 세 개의 뿔이 돋아난 상태였다.

뿔의 수가 곧 힘의 척도가 되는 존재.

분명, 삼각(三角) 등급의 데몬은 이들이 태어나서 본 데몬들 중 가장 강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그런 데몬을 혈혈단신으로 상대하겠다는 말에 '감은 눈'의 대원들과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 그런...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여러분들은 토벌이 끝나면 불을 끌 준비를 해주시죠."

"하지만...."

"방해가 될 뿐입니다."

냉정하고 단호한 내 말투에 안절부절못하던 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발목을 잡을 뿐이라면...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유리안 경."

대답한 '감은 눈'의 대원의 표정은 꽤나 복잡했다.

삼각 데몬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면서도, 동시에 갈고닦은 실력을 부정당한 것이 착잡한 모양이다.

사실 나도 단신으로 몽수 하멜른을 상대하고 싶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요새'가 없어졌다고 해도 녀석은 삼각의 데몬.

이전에 상대한 이각의 데몬보다 강력한 존재임은 확실했으니까.

'그래도, 오러를 완벽히 다룰 수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은 하멜른의 입장에서 좋은 먹이감에 불과하니까.'

괜히 하멜른에게 몽수(夢獸)란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니다.

녀석의 전매특허는 꽃가루를 매개로 사용하는 정신 공격.

최면을 걸거나, 발작을 일으켜 피아식별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혼란을 주는 공격.

그렇지만, 그 강력한 정신계 공격도 '유리안'의 캐릭터성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 하멜른의 정신 공격으로부터 저항했습니다.

⇒ 안하무인

⇒ 표리부동

⇒ 포커페이스....

왜냐하면,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이란 캐릭터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한 나머지 자신에 대한 믿음이 극에 달했으며, 그건 흔들림 없는 신앙과도 같았으니까.

즉, 미친놈은 더 이상 미칠 일이 없다는 소리이다.

***

끊임없는 이권 다툼이 이뤄지는 환경.

그 덕에 피도 눈물도 인정도 배려도 없는 것이 귀족 간의 관계이다.

하지만, 오로닐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동고동락했고, 같은 아카데미 동창인 하이란스 가문의 가주와 끈끈한 이해 관계를 구축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오로닐은 자신의 저택에 유리안이 얼굴을 비췄을 때 불쾌함을 숨기기 바빴다.

친우의 가문인 하이란스 가(家)를 숙청한 제국의 '웃는 처형대'.

늘 미소를 짓는 저 얼굴을 보자, 오로닐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형용할 수 없는 강한 분노에 유리안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였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자신의 딸이 피룬 숲의 데몬 탓에 정신을 잃었다고 하자 오로닐은 유리안에 대한 불쾌감을 밀어두고 어쩔 수 없이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

"데몬 토벌에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실에서도 오로닐 경의 재빠른 결단을 치하하실 겁니다."

온갖 악명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으나, 그 악명의 기반이 되는 것은 유리안이 갖고 있는 압도적인 무력 덕분.

그렇지만,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삼각의 데몬을 토벌할 줄은 오로닐도 예상하지 못했다.

"따님은 눈을 뜨셨는지요?"

"그렇다네, 자네가 데몬을 처리해준 덕분이라네."

"아닙니다, 모두 황제 폐하의 성은 덕분이죠."

힐끔.

오로닐은 자신의 말에 답하는 유리안의 얼굴을 한 번 살펴보았다.

대화에서 눈을 쳐다봄으로써 감정을 읽는 것은 교제나 교섭의 기본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중요한 과정이다.

그렇지만 실눈의 유리안에게 감정을 읽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덕에 저 남자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오로닐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하이란스 가문과 내 사이는 막연하게라도 알고 있을 터.'

분명 이런 자신을 보며, 속으로 조소를 띠고 있을 것이다.

친우를 죽인 장본인을 앞에 두고, 복수는커녕 딸을 살려준 것에 고마워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따님이 테리나 양이라고 하셨습니까?"

음?

부풀기 시작한 자괴감을 최대한 숨기려던 찰나, 이어지는 유리안의 물음에 오로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그렇다네."

"그럼 테리나 양에게 이걸 전해주시겠습니까?"

유리안은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조그마한 목걸이를 꺼냈다.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가운데에 박힌 보석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었다.

"하멜른의 화분 결정을 목걸이로 만든 겁니다. 녀석의 꽃가루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체내에 형성된 마나혈이 또래에 비해 풍부하다는 뜻입니다. 아마, 마법사로서 가진 재능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탁월하다는 것이겠죠."

"...그럼 이건."

"마법사들은 어렸을 때부터 보석에 담긴 마나를 추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꿈을 키웠다고 하더군요. 이 화분 결정은 테리나 양이 나중에 마법을 배우고 싶어 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럼 이건 테리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건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행위였다. 크라이파트 가문 내에서 '프라손'이란 딱지가 붙을 정도로 평판이 좋지 않더라도, 그는 귀족이 아닌가?

이런 이해관계에 어긋난 행동이 대체 그에게 어떠한 이득이 된단 말인가.

'...도대체 왜?'

심지어, 눈앞의 남자는 '웃는 처형대'란 악명으로 유명한 유리안이다.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아이에게도 검을 들이밀 수 있는 극악무도한 남자다.

그런 그가 건네는 선물에는 의도가 있음이 분명하다.

"이유가 뭔가?"

오로닐은 참지 못하고 그에게 의중을 물었지만, 음흉한 미소를 짓는 유리안의 모습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후후. 제 성의입니다."

오로닐은 다시금 유리안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평상시와 같이 소름 돋는 느낌이 났지만, 오묘하게 사람이 다르게 보였다.

"성의...?"

"예, 데몬 토벌을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피룬 숲의 절반이 잿더미가 되지 않았습니까?"

유리안의 말에 오로닐은 끄응하며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앞으로 고생하실 오로닐 경을 위해서 작게나마 드리는 제 배려입니다."

배려라니.

어울리지도 않는 자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 오로닐의 입장에선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정말로 그게 전부인가?"

"예."

안하무인(眼下無人)

이 말에 너무나도 적합한 남자가 내뱉을 말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오로닐은 그 탓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유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오로닐은 다시 한번 지긋이 유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오로닐 경. 토벌에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중절모를 눌러쓴 뒤 유리안은 나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오로닐이 보기엔 실로 소름끼치는 웃음이었으나 그것이 해가 되지는 않았다.

***

테리나가 치료되고 있고, 데몬이 토벌되고, 비록 피룬 숲의 절반이 타버렸지만, 저택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오로닐은 떠나간 유리안의 발자취를 쳐다보았다. 테리나에게 준 선물. 값어치가 어쨌든 뜻이 없는 물건은 아니었다.

"여보."

"...테리나는 괜찮소?"

"네, 이제 움직여도 괜찮을 정도로 회복이 됐어요."

아내의 말에 오로닐은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내는 그에게 펜과 함께 둘둘 말린 두루마리 하나를 건네주었다.

"귀족 원로회의 오른 의장에게 서신을 하나 작성해야겠소."

"어떻게 하실 건가요?"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그가 토벌 임무를 위해 국경도시 베르니든에 온다는 것은 이미 귀족 원로회의 귀에 들어간 상태다.

현재 원로회. 정확히는 원로회장인 오든 크라이파트의 목적은 가문의 종양인 유리안을 적출해내는 것.

"원로회에서 유리안의 제제를 위해 조금이라도 좋으니 토벌 일정을 미룰 수 있게 협조해달라고 하지 않았나요?"

"어쩔 수 없었소. 테리나의 목숨이 걸렸던 일이었으니까."

서신에 펜을 끄적이던 오로닐은 그것에 인장을 찍은 뒤, 다시금 돌돌 말기 시작했다.

그 후, 바깥에서 머물던 사용인을 불러 그에게 전달해주었다.

"현재 베르니든에 머물고 있는 헤란드 경에게 전해라. 앞으로 협조하기 힘들 것이라는 말도."

사용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오로닐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의 복수보다, 가족의 평안을 택한 날 용서해다오.'

그리 생각하며, 오로닐은 유리안이 떠나기 직전 남긴 말이 떠올랐다.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탓에 아직도 괴리감이 남았으나,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하기엔 충분했다.

'웃는 처형대'라는 괴물의 몸속에도 자신과 똑같은 붉은 피가 흐른다는 것을.

***

제도로 돌아가는 길.

다시금 열차에 몸을 실은 난 떠나기 전 보석상에서 구한 보석함에 손을 가져갔다.

딸칵──!

작은 보석함 안에 있는 건 삼각 이상의 데몬에게만 얻을 수 있는 혼석(魂石). 어슴푸레 붉은 빛을 띠고 있는 몽수 하멜른의 심장이었다.

"새삼스레 말하는 거지만, 불쾌하기 짝이 없군요."

현재 여명회가 가장 원하는 물건.

그와 동시에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에서 만악(萬惡)의 근원인 '마신'을 깨울 수 있는 원료.

그 탓에 보석함을 열자마자 그것은 어마어마한 기운을 내뿜으며 존재감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이 그것에 손을 댄다면 정신이 아찔해진 나머지 의식을 잃을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다.

'이제부터 진짜로군.'

이 혼석을 전달하는 것으로 여명회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기정사실.

아니, 사실 아크 비숍인 테넬론이 이상하리만큼 '유리안'을 좋아하고 있던지라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도 들었으나.

'다른 비숍들에게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아야 하니까.'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여명회를 멸절시키거나, 하다못해 발밑에 둬 컨트롤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다른 비숍들의 신임을 얻는 것도 테넬론의 신뢰를 얻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란 소리다.

'그런데 혼석을 건네준다면 마신 부활에 일조하게 되는 셈이야. 테넬론의 권력도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이 혼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이대로 여명회에 갖다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선택지가 있을 수도 있다.

'그게 있다면 뭐지? 아니...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좋지 않을 수도 있어.'

골똘히 생각을 하던 중, 나는 열차가 점차 속력을 늦추는 것을 느꼈다.

[론드리안 스테이션에 정차하겠습니다.]

정차와 함께 들려오는 안내 방송. 아마도, 제도로 향하기 전에 경유하는 정거장인 모양이다.

공명석을 원료로 사용하는 물건답게 비효율의 끝판을 달리는 이 시대의 열차는 여러 차례 정차를 하며, 동력원을 보충해야 한다.

그 덕에 꽤나 많은 정거장이 있는 편이다. 그래봤자, 탈 사람은 한정적이지만 말이다.

'또 하이든 라이히 쪽은 어떻게 하지? 내가 여명회에 속하게 된 것을 끝까지 숨길 수 있을까?'

여명회에 깊게 관여하게 될수록, 검성과 대적할 확률이 늘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최대한 들키지 않는 쪽으로....'

깊은 사념에 잠겨있던 난 문득 인기척을 느껴 타고 있던 객실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114번 객실이.... 아, 여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누군가가 내가 있는 객실의 문을 열었다.

익숙한 얼굴의 여성.

린네 론드벨.

검성 하이든 라이히의 수제자인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난 재빨리 혼석이 든 보석함을 닫았다.

 

 

 

 

31화. 불편한 합석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백금색 머리카락의 조화. 미려한 용모를 지닌 린네의 얼굴을 보자, 내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을 느꼈다.

'...린네가 왜 여기에?'

지금 보석함에 담겨있는 혼석은 지금까지 세간에 드러나지 않은 마신 부활의 재료이다.

그러기에 이 물건이 그녀에게 들킬 경우, 그 여파는 예상조차 할 수 없다.

'들킨다면....'

현재 내가 여명회 소속이라는 것을 '검성'에게 들킬 건덕지를 제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내 과대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혼석을 소지하고 있다는 걸 목격했다고 해도 발뺌할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리품이라고 하면 되잖아.'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다.

괜한 모험을 하고 싶지 않은 나로선 혼석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이 상황에서의 능사(能事)이리라.

"이렇게 갑작스러운 만남이 잦은 편이군요. 린네 양, 하늘에서 이리 점지해주는 것을 보아하니 묘한 운명조차 느껴집니다."

난 속내를 최대한 숨기며, 평소처럼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어차피 늘 웃는 얼굴인 유리안의 표정은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을 터이니, 당황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114번 객실, 114번 객실...."

인사말을 듣고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던 린네는 재차 객실의 번호와 자신의 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가 맞구나, 그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하자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구겨졌다.

"'왜 여기에 있는 거야.'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딱 그거예요."

"국경도시 베르니든에 볼일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그러는 린네 양은...."

말끝을 흐린 난 그녀가 들고 있는 슈트 케이스를 쳐다보았다. 한 손으로 들고 있는 것도 모자라, 바퀴가 달린 케이스도 하나 끌고 있었다.

케이스는 물건을 잔뜩 담기라도 했는지, 옷이 빼꼼 튀어나온 상태다.

밖으로 나온 옷의 색깔과 디자인을 보아하니 바이엘 아카데미의 교복인 듯하다. 생각해 보니, 이 시기의 린네는 아카데미 졸업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

"친가에라도 다녀오신 모양이군요?"

슈트케이스에 담긴 내용물을 통해 유추한 답을 입에 담으며, 난 테이블 위에 놓여진 보석함을 힐끔 쳐다보았다.

둥그런 탁자 위에 떡하니 놓인 보석함은 실로 눈에 띄었다. 그녀가 이걸 눈치채고, 흥미가 생기기 전에 가방 안에 집어넣는 것. 그것이 지금의 최우선 해결 과제다.

"...어떻게 아셨죠?"

"두 개의 케이스를 가득 채울 만큼 짐을 담은 모양이군요. 계절이 바뀌는 타이밍이니 아마도 옷일 터."

"쇼핑하고 왔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면, 제도를 떠날 이유가 있겠습니까? 상품은 제도가 더 다양하고, 구하기 쉬우니 말이죠. 그리고...."

말일 잇던 난 케이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옷, 튀어나왔습니다."

린네는 살짝 고개를 돌려, 끌고 오던 케이스의 윗부분을 살펴보았다. 살짝 튀어나온 흰색 천과 연푸른 리본을 보자 그녀는 재빨리 그것을 집어넣었다.

린네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지긋이 날 노려보았지만, 표정과는 다르게 삐져나온 옷이 창피해서인지 귓불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남의 사생활엔 신경 끄시죠."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내가 대답하자 린네는 시크하게 짐칸에 케이스를 싣기 시작했다.

'이때다!'

난 그 틈을 타 보석함을 가방에 넣으려고 했지만.

"그런데 이 객실.... 예약을 했을 땐 분명 다른 승객이 없었는데요. 혹시 절 스토킹하고 계시는 건 아니겠죠?"

고개를 휙-하고 돌리며, 말을 꺼내는 그녀.

깜짝 놀라 손을 원위치로 돌린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

"제 열차표는 업무 특성상 황실의 비서분들이 대신 끊어주신 겁니다. 오히려 이 경우엔 린네 양이 절 쫓아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군요."

"제, 제가 당신을 쫓아왔다구요!?"

"너무 과민 반응하지 마시길.... 농담입니다."

후후, 하고 작게 웃음을 흘렸으나 내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보석함을 꺼내두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이건 불가항력이다. 이런 사태가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린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이쪽을 쳐다보았다.

내 옷차림새나 짐들을 한 번 훑어보는 것을 보니 조금 전의 나처럼 무엇을 하고 왔는지 유추하는 모양이다.

"국경도시 베르니든에 다녀왔다고 말하셨는데, 혹시 승천제라도 구경하고 오신 모양이죠?"

"'감은 눈'의 업무를 수행하기 다녀온 겁니다."

"그런 것 치고는 옷도 멀쩡하고, 검도 허리춤에 찬 것 하나뿐이네요."

무뚝뚝함을 가장한 그녀의 얼굴엔 모종의 감정이 깃들었다. 그 감정을 깊게 들여다볼 여유는 지금 없다.

"예전 빈민가에서의 임무는 제도와 그리 멀지 않았으니 그렇다고 쳐도, 베르니든까지는 꽤나 거리가 있을 텐데, 스승님께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늘 예비용 검을 갖고 다니는 게 좋다고 하셨을 텐데요?"

"이런 이런. 제가 그걸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지금' 제겐 예비용 검은 필요 없는 영역인지라... 아, 린네 양 '수준'이라면 서너 개 정도는 필요할 수 있겠군요."

"...뭐, 뭣...!"

"농담입니다. 괜히 얼굴 붉히지 마시길. 그저, 예비용 검들을 가져오는 것을 까먹었을 뿐입니다."

내 말을 듣던 린네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풀썩하고 좌석에 착석했다.

휙.

그녀는 더 이상 내 얼굴도 보기 싫다는 뉘앙스를 잔뜩 풍기며, 창문으로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좋아. 계속 밖에만 보고 있으렴.'

난 린네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며시 탁상으로 손을 뻗어 보석함을──.

"그런데, 저 보석함은 당신 물건인가요?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이미 눈에 담고 있었구나.

그녀가 탁자 위에 보석함에 흥미를 갖은 모습에 난 속으로 아차 싶었다.

하긴, 가뜩이나 눈에 띄는 디자인의 상자다.

그런 상자가 탁자 위에 떡하니 놓여있었으니 못 봤을 리가 없지!

"보이는 대로 보석을 담은 함입니다."

"...보석이라니, 그런 취향이라도 있으셨나?"

"네, 저는 누구와는 달리 고풍스러운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난 린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일부러 도발적으로 말했다. 내 말에 발끈한 그녀가 시선을 돌리면, 너스레를 떨며 자연스럽게 보석함을 넣으면 된다.

"흥."

역시나 내 예상대로 린네는 꼴도 보기 싫다는 모습으로 다시금 고개를 창문으로 돌렸다.

이때다!

나는 보석함에 손을 뻗었다.

딱딱한 감촉이 손끝에 닿자, 안도감이 들기 시작했으며 그것을 린네가 볼 수 없는 탁자 밑으로 내리고 나서야 작은 희열을 느꼈다.

'이제 가방에 넣기만─.'

달칵──!

그러나 그 희열은 오래가지 않았다. 철도를 달리던 열차가 크게 들썩이더니, 보석함의 입구가 열리면서 안에 있던 혼석이 보석함 바깥으로 튀어 나왔다.

하필 혼석이 떨어진 위치는.

'...X발.'

린네의 무릎 위.

지금까지 이 혼석을 감추기 위해 한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만천하에 어마어마한 위용을 뽐내는 붉은 혼석.

그것이 갑작스레 무릎 위로 올라와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린네. 이 광경에 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젠장....'

혼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린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언젠가 하이든 라이히 쪽이 눈치챌 것이라곤 예상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들킬 것이란 예상은 하지 않았다.

린네가 이 사실을 검성 측에 보고를 한다면 그들의 의심을 사는 것은 자명한 사실. 지금부턴 어떻게 해야──.

"아쉽네요, 당신이 아끼는 물건이라면 바닥에 떨어져 흠집이 생겼어야 했는데."

다행히도.

린네의 말투를 보아하니, 아직 '혼석'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혼석이 품고 있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혼석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뭔가 느끼는 게 있나?'

오만가지 생각이 들던 찰나, 린네는 관심 없는 듯 내가 들고 있던 보석함에 혼석을 올려두었다.

"이번 업무에 관한 것 같군요. 잘 간수하세요."

시큰둥한 목소리.

이럴 때는 나한테 관심 없는 네가 좋다.

***

"아가씨, 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열차가 제도에 도착하자, 유리안과 한시도 같이 있기 싫은 린네는 재빠르게 객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사용인에게 짐을 건네려는 찰나.

"아, 잠깐만요."

객실에서 유리안이 한 말이 떠오른 린네는 다시금 케이스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혹여나 옷가지가 튀어나온 부분이 있을까, 다행히 눈에 띄는 것은 없다.

"바로 아카데미 기숙사로 향하실 수 있도록, 마차를 준비해두었습니다."

"네, 고마워요."

사용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린네는 그에게 짐을 건네었다.

처벅처벅.

철계단을 밟는 구둣발 소리가 뒤에서 들리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곳을 쳐다보았다.

"긴 시간 열차를 타는 것도 꽤 고역이군요. 뭐, 마차보다는 낫지만 말입니다."

함께 114번 객실을 사용한 유리안, 그가 열린 문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명문가 출신답게 그의 걸음에는 기품이 실려 있었다. 비록 평소 저지른 행실과 언행 탓에 빛이 바랬음에도 말이다.

"그 말대로네요. 심지어 동승객도 불편한 사람이었던지라 여기까지 오는 게 지옥 같았어요."

"그렇습니까? 전 말 상대가 있어서 그나마 낫더군요."

마치 서로 다른 객실을 사용했던 것처럼 능청을 떠는 모습에 린네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성을 내봤자 저 남자의 기분만 좋게 만들어주는 꼴이었으니까.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나중에도 뵐 수 있다면 좋겠군요."

보는 사람에게 하여금, 경각심을 들게 하는 미소를 지은 유리안은 가방 하나만 손에 쥐고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뒷모습.

이대로 저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린네는 간절히 원했으나, 보잘것없는 자존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유리안 경."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름을 입에 담자, 유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실눈.

분명 스승인 '검성'에게 검을 겨누었을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으나 왠지 모르게 지금은 그때보다 인간미가 느껴졌다.

"빈민가의 일은 감사했습니다. 당신이 힘이 없었더라면 저도 많이 곤란했을 거예요."

린네도 자신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렇게 심경의 변화가 생긴 이유는 아마도 대장간 '어스름 불꽃'에서 본 그의 발자취 탓일 것이다.

그는 인간 말종에 신용할 수 없는 남자다.

다만 검술에서만큼은 진심인 사람.

그러니 같은 검사로서 경의를 표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뭘 그런 일 가지고 그러십니까? 우리는 같은 '동문' 아닙니까?"

"아뇨, 동문은 아니에요. 당신은 스승님으로부터 파문당했잖아요?"

경외심을 갖는 것과 호의를 품는 것은 별개의 문제. 동문이라는 말에 린네는 철저하게 선을 그었다.

"매몰차시기는...."

은은한 미소를 입에 담고는 유리안은 다시금 발걸음을 옮겨 스테이션을 빠져나갔다.

잠시 동안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린네는 사용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도 출발하죠."

"예, 아가씨."

대기 시켜놓았다는 마차에 탑승한 그녀는 멀어지는 역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불그스름한 빛이 쏟아져 내리는 가로등, 그것을 보자 불현듯 유리안이 가지고 있던 보석함이 떠올랐다.

"...그 보석, 내가 어디서 본 적이 있었나? 조금 낯이 익었던 것 같은데."

"예? 아가씨,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에 사용인이 반응하자, 린네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32화. 물 밑 작업

"제도에서부터 그 먼 국경도시 베르니든까지 다녀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단장실에 들어서자, 오드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거대한 서류의 산이 조막만한 그녀의 몸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서류의 산은 대체 무엇인가?

평범하게 의문을 입에 담으려던 순간, 오드윈과 유리안의 관계를 떠올렸다.

눈치 빠른 오드윈을 상대할 땐, 단순한 물음도 '유리안'스럽게 해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고생 많았습니다. 그에 비해 오드윈 단장께선 자신의 직무에 태만했던 것이 아닌지요?"

"예?"

"수북하게 쌓인 서류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비아냥거리는 말투.

그럼에도 수북한 서류들의 틈새로 보이는 오드윈의 얼굴엔 큰 감정의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럼 그렇지 하는 뉘앙스로 그녀는 입을 열었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서류가 쌓였다고 생각하나요?"

"오드윈 단장의 태만이 아닙니까?"

"전혀! 전혀요! 당신 때문입니다! 유리안 경!"

스르륵.

한 손으로 서류를 옆으로 밀친 그녀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피룬 숲은 왜 불태운 겁니까...? 그곳이 태양신교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 성역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상징성을 지닌 곳이라는 건 당신도 알고 있었을 텐데요?"

"현장에 파견된 '감은 눈'의 단원은 특별의 상황의 경우, 경험에 따른 독단적 판단을 용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제 경험은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단 빠르고 간단하게 데몬을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해도... 아, 아, 됐어요."

지끈거렸는지, 엄지와 검지로 두 눈을 꾸욱 누른 오드윈은 다시금 서류들로 시선을 옮겼다.

"앞으로는 제가 처리할 일도 생각하신 뒤에 행동해주세요. 여기 수북하게 쌓인 서류들 중엔 태양신교 측에서 보낸 경고장들도 있단 말입니다."

"국익을 위해선 종교의 상징성보단, 황실의 명이 더 중요하다 판단했습니다."

"당신의 종교적 가치관에 대해 물으려는 게 아니에요... 그래도 다행인 점은 황실에서 태양신교의 불만을 일축했다고 하더군요."

오드윈은 그렇게 말하며, '이런 세세한 것들을 처리하는 건 결국 저지만요'라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외에도 이 수북한 서류들은 당신과 연관이 있어요."

"태양신교 말고도 말입니까?"

"예, 모교인 바이엘 아카데미에 참여해 축사 한 마디 부탁한다는 것도 있고, 다른 건...."

부스럭. 부스럭.

오드윈은 뭔가를 찾는 듯 서류를 뒤적이다 이내 발견했는지 나에게 서류 하나를 보여줬다.

"하인리히 가문은 '감은 눈'의... 정확히는 당신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파티장에 가고 싶다고 하는 것도 있어요."

그녀의 말을 듣던 난 속으로 서류를 받아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유리안에게 그런 미친 부탁을 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정신이 나간 건가? 아님 죽고 싶은걸까?

"아, 그리고 하나 더. 피룬 숲의 삼각 데몬과 관련해 비서실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네요. 저번처럼 한 번 모습을 비춰주는 게 어때요."

"예, 이제 막 제도로 돌아왔지만,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고마우셔라.

전혀 고맙지 않다는 말투로 답한 오드윈은 다시금 서류뭉치로 시선을 옮겼다.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내 그녀의 집중을 깨는 건 좋지 않을 듯하다.

이 거대한 종이뭉치를 만드는 데 가장 많이 일조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니까 말이다.

***

"유, 유리안 경! 국경도시 베르니든에서 돌아오셨군요!"

비서실로 가기 전, 짐을 놔두려 잠깐 집무실에 들렸다.

집무실에 들어가는 나를 보았는지 '감은 눈' 견습 라즈롯은 잔뜩 긴장한 모습로 말을 걸어왔다. 그 모습에 난 나지막이 미소를 지었다.

"예, 막 도착했습니다."

"사, 삼각 데몬을 단신으로 토벌했다면서요!? 그 소문이 제도에서도 파다합니다!"

"그럼, 피룬 숲에 대해서도 소문이 돌고 있겠군요?"

"네? 아... 아, 하하...."

내 물음에 라즈롯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 그리고 복귀하신단 말에 유리안 경 앞으로 온 서신들과 물품들을 집무실에 정리해두었습니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는 걸요."

그의 말대로 집무실에는 적지 않은 짐들이 쌓여있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괴상한 예술잡지와 '기사회'의 회원 유지비 청구와 같은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 있었다.

모조리 뭉쳐 휴지통에 집어넣어 처분하려고 하던 순간, 익숙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겐멜 수도원."

여명회의 교구 중 하나가 위치한 겐멜 수도원에서부터 보낸 서신.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서 내게 서신을 보낼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굳이 있다면, 그 안에 정체를 숨기고 있는 여명회나 있겠지.

"정신 나갔습니까...?"

순간 입 밖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누구는 여명회 소속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외부에 노출되는 서신을 보낸다고?

부우욱──!

주위를 두리번거린 난 즉시 봉투를 찢어 내용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서신에는 내가 염려했던 것들은 적혀있지 않았다.

'여명회에서 보낸 편지일 텐데. 이렇게 안부를 묻는 글로 끝날 리가... 응?'

놓친 것이 있나 편지의 내용을 다시 읽어보려던 찰나 서신에 적힌 글자들이 하나둘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엘레노아가 작성한 모양이군.'

특정인이 봉투를 찢어야만 발동되는 마법.

이런 음(蔭)마법을 편지에 적용할 마법사라면 여명회 내엔 그녀밖에 없다.

- '아크 비숍께서 비숍 유리안의 교구 방문을 원합니다.'

편지의 내용은 실로 간단했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베르니든의 데몬 토벌로 얻은 혼석을 가져오라는 것이겠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

종이를 구겨버린 뒤, 그것을 기밀을 위해 태워버리려고 하던 난 문득 든 생각에 다시금 구긴 종이를 펼쳤다.

국경도시 베르니든에서부터 임무를 끝낸 뒤, 제도로 복귀한 날을 알고 있는 것은 단장인 오드윈과 황실 비서실 인원들뿐.

심지어 견습이긴 하지만, 내 비서처럼 있는 라즈롯도 모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복귀하는 날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라....'

황실 비서실에 존재하는 여명회의 끄나풀.

이렇게나 빨리 연락이 온 것을 보아하니 녀석은 꽤나 여명회에 충성스러운 인물인 모양이다.

'이득을 위해 일을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여명회에 감화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생각을 정리한 난 마나를 이용해 편지에 불을 붙였다. 불길이 종이를 모조리 집어삼키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썩 유쾌하진 않군.'

***

달빛이 깃든 겐멜 수도원.

꽉 찬 만월이 비치는 겐멜 수도원은 평소 볼 수 있던 숭고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서슬 퍼렇고 을씨년스러운 한기만이 넘실거렸다.

그 한기들 사이로 섞인 팽팽한 살기들은 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

당장 누구 한 명 찢겨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살기의 중심에는 제국의 '웃는 처형대', 유리안이 우뚝 서있었다.

"비숍 유리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엘레노아는 이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유영을 하듯,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유리안에게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유리안을 노려보는 시선들을 하나 둘 살펴보았다.

유리안에게 크게 작게 원한을 품은 자들.

그가 교구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고 계획을 짠 모양이지만, 그 계획에 실행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저 몸에서 흘러나오는 고고한 자태와 차분함은 강자가 마땅히 갖춰야 할 자세.

"크흠."

그것에 압도되어 대부분의 자들은 꼬리를 내리고 불편한 기침만 하고 있었다.

"비숍 유리안의 도착을 아크 비숍께 알려드리느라 늦었습니다. 그럼 안으로 가실까요?"

"앞으론 기다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보는 눈이 많아, 꽤나 무서웠습니다."

"후후, 농담도 잘하셔라."

이 살기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 짓고 있던 사람이 무섭다는 말을 입에 담다니, 엘레노아는 그가 붙인 사족을 농담이라 치부하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베르니든에서 벌인 일로 제도가 떠들썩해요. 삼각 데몬을 단신으로 잡았다는 영웅담과 피룬 숲이 불타버렸다는 악재 탓에 말이죠."

"그렇습니까?"

작게 미소를 짓는 유리안. 그 두 화제의 주인공이 보여주기엔 너무나도 담백한 태도에 엘레노아의 흥은 차갑게 식었다.

"비숍 엘레노아"

대뜸 유리안이 자신을 부르자, 엘레노아는 걸음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네?"

"앞으로 부재중에 이런 편지를 보내는 것은 자제해 주시겠습니까? 개인적으로 곤란해서 말입니다."

그의 손에는 엘레노아, 그녀가 보낸 편지 봉투가 들려있었다.

'겐멜 수도원'이 발신자로 적혀있는.

"어머, 곤란할 일이 있을까요? 마법 덕에 다른 사람에게 들킬 일도 없을 텐데 말이죠."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극구 사양하는 유리안의 모습을 보며, 엘레노아의 입에는 살짝 미소가 걸렸다.

얼굴에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살짝 당황해하는 모습. 그 점이 실로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 탓에 평소와는 달리 말을 덧붙이고 싶어졌다.

동시에 '눈물점'을 드러내 의중을 떠볼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서신이 아니라 사람을 보낸다면 더 위험한 것 아닐까요? 들킬 위험이 배로 늘어날 텐데?"

"제가 제도에서 자리를 비웠을 때만 아니면 상관없습니다."

"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이야기가 나온 김에 비숍 유리안이 먼저 연락하고 싶을 때의 방법도 강구해야겠군요?"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네?"

생각지도 못한 유리안의 대답에 엘레노아는 의문을 표했다.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여명회에 들어온 유리안. 이 남자라면, 상호 연락이 불가능한 지금 상황을 탐탁치 않게 여길 것이라 생각했다.

"여차하면, 제가 비숍 엘레노아에게 찾아가도록 하죠."

"저를 말인가요? 음... 전 늘 겐멜 수도원에 있는 게 아니랍니다?"

볼 일이 생기면, 자신이 직접 찾아오겠다 말하는 유리안. 그 말에 엘레노아는 기가 찼다.

자신들의 정체를 들키면 안 되는 여명회 소속의 비숍 대부분은 이중 신분을 두고 있는 편이었다.

여명회로서의 신분.

그리고, 일반적인 제국의 구성원으로서의 신분.

그런 비숍 사이에서도 본래 신분을 엄중하게 숨기던 그녀였기에 유리안의 말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볼 일이 있으면 양지의 엘레노아 양을 뵈러 간다고 말하려는 겁니다."

이어지는 유리안의 말에 엘레노아는 지긋이 그를 쳐다보았다.

"비숍 유리안, 허풍이 지나치시군요? 농담은 싫어하지 않지만, 재미없는 농담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그런가요? 후후."

뜻 모를 대답과 함께 유리안은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분명 허풍일 것이다. 철저하게 숨긴 자신의 신분을 저 남자가 알고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가 남긴 웃음이 엘레노아의 마음에 걸렸다.

'...흥! 떠보는 거겠지.'

엘레노아는 유리안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테넬론이 있는 방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엄숙한 분위기와 함께 가면을 쓴 테넬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서 오게. 비숍 유리안, 드디어 도착했군. 자네의 얼굴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는가!"

그는 이전과 같이 유리안에게 맹목적인 신뢰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럼, 가져온 물건을 보여주게나. 자네 혼자 상대한 삼각 데몬의 혼석을 말이지. 하하."

이전에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테넬론의 호의는 계속될 것이다.

유리안이 크게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별다른 일이──.

"혼석은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유리안의 말에 엘레노아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테넬론도 마찬가지다.

"...가져오지 못했다고? 삼각의 데몬이 아니었다고 말하려는 겐가? 아니, 보고에 의하면 삼각이 분명할 터."

"베르니든에서 조우한 데몬은 삼각의 데몬이었습니다. 그 데몬의 몸에서 혼석을 얻는 것도 성공했습니다."

무슨 꿍꿍이라도 있다면 발뺌이라도 할 것이지, 도리어 뻔뻔하게 구는 그의 태도에 엘레노아는 혀를 내둘렀다.

가면 너머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워진 테넬론의 눈빛. 살기가 등등한 그의 눈에 미소를 짓고 있는 유리안의 얼굴이 비쳤다.

"그렇다면... 그 혼석은 어디에 있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대답해야 할 거야. 엘레노아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혼석은 황실 비서실에 넘겨주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유리안의 모습에 그녀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33화. 가짜 겁쟁이(1)

내게로 향하는 테넬론의 차가운 시선과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활화산처럼 뜨거운 분노가 느껴졌다.

그 덕에 방 안의 공기는 질척거릴 정도로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말해주겠나?"

그런 분위기를 꿰뚫으며, 입을 연 테넬론은 가면으로 표정을 엿볼 수 없음에도 심히 못마땅해 보였다.

기대했던 '유리안'이 혼석을 가져오기는커녕 그것을 비서실에 낼름 갖다 바친 탓에 테넬론은 불쾌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예, 아크 비숍. 전 삼각 데몬을 죽여 얻은 혼석을 황실 비서실에 넘겨주었습니다."

"이, 이익... 미친 것이냐! 분명 아크 비숍께서 네놈에게 한 명령은 혼석을 가져오는 것일...."

늘 테넬론 곁에 있던 비숍 한 명이 노발대발하며 성을 내자, 테넬론은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이유를 말해줄 수 있겠나?"

조곤조곤한 말투.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소리였으나 그의 머리 위로 희멀건 붉은 빛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붉은 색, 분노.

<부정의 색>으로 보는 상대의 감정이다.

"힘을 원하는 자네와 우리의 이해관계를 생각하면, 아무 의도도 없이 그런 행동을 취했을 것 같진 않을 것 같은데?"

"예, 맞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생각으로 황실에 혼석을 맡겼나? 대답에 따라선...."

우웅-

말이 끝나기도 전에 테넬론의 몸에서는 엄청난 오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어지는 말을 상상하는 것은 내게 맡기려는 듯 말이다.

"그렇군요, 제 행동에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그런 테넬론의 비수 같은 시선을 받아내며, 난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 걸음 전진을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것이라 하겠습니다."

최대한 차분하게.

최대한 나지막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들릴 수 있는 목소리로 말을 하자 주변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런 고요한 침묵을 깬 것은 맨 처음 내게 욕설을 퍼붓던 비숍이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던 비숍은 목청을 높이며, 말을 이었다.

"하나라도 많은 혼석을 확보해야 하는 시점에 일을 그르친 것도 모자라, 황실에 넘겼다는 것은 명백한 배반이다!"

"비숍 핀텔."

열변을 토하는 비숍의 이름을 읊자, 그는 흠칫했다.

아마 통성명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이름을 알고 있어서겠지.

"만약 제가 배반할 생각이었더라면 이 자리에 나타나지도 않았겠죠. 조금 생각이란 걸 하는 게 어떻습니까?"

"뭐, 뭣...!"

"그것도 그렇네요. 그럼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어떨까요? 타당한 이유가 없다면 그때 책임을 물어도 되는 거니까요."

무시당한 핀텔은 표정이 기괴하게 변하며 나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하려는 찰나, 엘레노아는 기가 막힌 타이밍에 그의 말을 막았다.

"...크흠."

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한 차례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여기서부터 중요하다.

느껴지는 부담감에 어쩐지 갈증이 느껴졌으나 최대한 의식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제가 굳이 혼석을 황실에 제공한 이유는 그들의 정보력을 이용하기 위함입니다."

"정보력을... 이용한다고?"

테넬론의 의문.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불쾌함이 서려 있던 그의 목소리는 황실을 이용한다는 말에 흥미가 담기기 시작했다.

"예, 제가 황실에 건넨 혼석은 '공식적으로' 발견된 삼각 데몬의 첫 심장입니다. 만약 황실에서 혼석의 잠재력과 활용법을 알아낸다면, 그때부턴 어떻게든 혼석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 나서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서서히 사라지는 테넬론의 격양된 감정.

여기까진 괜찮은 모양이다.

"그렇게 된다면, 더 많은 혼석의 위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과연...."

고개를 끄덕이는 테넬론.

"황실을 통해서도 혼석의 정보를 얻자는 소리로군. 확실히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감사합니다."

"게다가 그 임무는 '데몬 토벌의 달인'인 자네가 있는 '감은 눈'에 맡길 테고...."

"그렇습니다. 더욱더 혼석을 얻는 일이 편해질 테죠."

나의 설득력 있는 궤변에 어느 정도 납득한 테넬론을 보며 난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쉽게 넘어가 준다면 다행이지.

"하, 하지만, 아크 비숍! 아무 말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판단한 점은 처벌해야 합니다!"

내 독단적인 행동이 유야무야 넘어가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아까부터 큰 목소리로 불만을 표출하던 핀텔이 앞으로 한 발짝 옮기며 다시금 목청을 드높였다.

저 콧수염 자식, 확 뽑아버리고 싶군.

"교구의 어떠한 명령도 없이 혼자서 판단한 이 행동은 아크 비숍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본보기를 보여 주셔야 합니다!"

"예, 당신의 말대로 저의 독단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보십쇼! 자신도 인정하는...!"

"그리고! 그것이 여명회를 위한 대의라고 생각했습니다."

"뭐... 뭣?"

당황한 핀텔을 뒤로 하고, 말을 이었다.

"전 여명회의 교리를 여전히 이해 못 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해할 마음도 없습니다."

"그 무슨 망발을...!"

"하지만, 이해할 마음이 없다고 '이해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잠깐의 말장난.

여유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내뱉고 보니 별로다.

"독단적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제도의 이목이 제게 집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난 이번 일을 여명회에 보고도 없이 처리한 '표면적인' 이유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삼각 데몬을 단신으로 토벌한 덕에 온갖 소문이 떠돌아 다니더군요. '감은 눈'의 기둥, 차세대 검성, 그리고... 영웅!"

자기 자신을 '영웅'이라 칭하는 오만한 말투. 그럼에도 청중(聽衆)들의 눈빛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쪽팔려.'

나뿐인가 보다. 이런 오만한 말투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그리고 태양신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피룬 숲을 불태웠다는 소문도 파다하죠."

단어 선택에 낯이 간지러운 와중, 엘레노아가 말을 덧붙였다. 그녀의 한마디는 내가 말을 이어가는 데 꽤 도움이 되었다.

"맞습니다."

"그게 이유가 되나요?"

"보는 눈이 많으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여명회가 몰락하길 바라는 건 비단, 황실뿐만이 아니니까요."

"누굴 말하시려는 거죠?"

"굳이 제 입을 빌릴 필요는 없겠죠."

한창 연설하듯 떠벌리던 입을 멈춘 난 시선을 테넬론에게로 옮겼다.

"아크 비숍께서도 이름을 아시는 분일 겁니다."

"나와 말인가?"

"예, 그리고... 저와 아주 친밀하신, 아니 친밀했던 분이시죠."

이제는 청산한 과거라는 듯.

과거형으로 말을 하자 테넬론은 고개를 숙여 잠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짧은 신음과 함께 고개를 든 그의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알다마다. 으드득. 곱씹어 되새겨봐도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마치 심한 통증을 견디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으로 가면을 쓸어내린 테넬론.

그는 이를 갈며 말했다.

"내 얼굴을 이 꼴로 만든 장본인... 검성, 하이든 라이히...!"

"예, 제 스승님께선 아직도 당신을 추적하고 계십니다."

"나도 알고 있다."

"또 제가 여명회 소속인지 아닌지, 의심하고 계시죠."

짐작일 뿐이지만, 난 그것이 사실인 마냥 떠벌렸다.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중요한 것, 그리고 이용할 것은 테넬론이 '검성'에게 표출하는 맹렬한 증오심. 그것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삼각 데몬을 토벌하고도 전리품이 없다? 그럼 그들의 의심은 더욱 커질 터. 그렇기에 제 독단으로 혼석을 황실 비서실에 넘겨준 겁니다."

내 꼬리가 잡힌다면, 여명회도 위험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 말을 덧붙이고 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그 빌어먹을 검성은 자신의 제자였던 유리안, 자네까지 의심하고 있나 보군."

잠시 고민을 하던 테넬론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나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의 큼지막한 체구 탓에 순간 흠칫할 뻔했으나 다행히도 당황하진 않았다.

"인정머리가 없는 녀석이지. 그딴 걸 검성이라 치켜세우며, 영웅이라 부르는 민중의 모습은 참으로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어!"

끓어오르는 분노.

활화산과도 같은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테넬론은 내게 악수를 청했다.

맞잡은 그의 오른손엔 힘을 잔뜩 실려 있었다.

아플 정도로 강한 힘은 아니다.

오히려 피부를 타고 느껴지는 건 강한 신뢰였다.

그런 테넬론의 행동을 보니, 왜 이 녀석이 '유리안'에게 강한 신뢰를 보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검성 피해자 모임이로군.'

그는 유리안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이든 라이히'에게 당한 인물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수정할 필요는 없겠지.

"유리안. 이제야 자네가 여명회에 들어온 이유가 명확하게 보이는군."

그제서야 의심이 풀린 테넬론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마주 잡은 손을 흔들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난 빙그레 웃었다.

그거 잘못 보고 있는 거야 임마.

***

혼석을 황실 측에 넘김으로써 '마신 바르바토스'를 되살린다는 여명회의 대의는 뒤로 미루어졌다.

그렇다고 잠재적인 위협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명회는 여전히 혼석을 원하고 있으며, 그런 여명회를 검성과 황실이 추적하고 있다.

'나는 그 여명회의 소속이고....'

동시에 황실전속기관인 '감은 눈'이기도 하지. 그렇기에 혼석을 넘긴 일로 모든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란 소리다.

똑똑──!

지끈거리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슬쩍 누르자, 누군가가 집무실 문에 노크를 한다.

"예, 들어오셔도 좋습니다."

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온 건 멋쩍은 웃음을 짓는 견습 라즈롯이다.

"비, 비서실에서부터 내려온 공문입니다."

"거기에 놔주시겠습니까?"

"네, 넵!"

바짝 긴장한 태도로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라즈롯.

잠자코, 그를 쳐다보고 있으니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평소보다 더 굳은 얼굴이 되었다.

"그... 무,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유리안 경? 아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던 라즈롯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곳에서 업무를 보는 게 어렵지는 않습니까? 힘든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히, 힘든 일은 전혀 없습니다. 비록, 견습이지만 황실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제게 큰 영광입니다!"

"그렇습니까?"

난 깍지를 낀 양손에 턱을 괸 뒤, 넌지시 물었다.

"그럼 다른 쪽의 일은 어떻습니까? 그쪽 일에는 난항이 없으신지요?"

"다, 다른 쪽의 일...? 무슨 소리십니까?"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을 직감했는지, 라즈롯의 머리 위로 '공포'의 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라즈롯 군은 '감은 눈'의 견습이라는 자리를 이용해, 비서실에 자주 들락날락하는 걸로 보이는군요."

"예... 오드윈 단장님과 다른 대원들은 바쁜지라 제가 대신 비서실의 연락을...."

"그리고, 우연일 수도 있지만 제가 혼석을 갖다주던 날에도 비서실에 계시더군요."

"그, 그렇네요."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을 색으로 읽어낼 수 있는 특성이 바로 <부정의 색>이다. 물론, 눈앞의 라즈롯이 품고 있는 색은 단색(單色).

이런 감정의 색은 지금까지 목도(目睹)해온 것인지라 특별하다 할 것까진 아니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네?"

그렇지만 난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비서실에 혼석을 가져간 날. '우연히' 그 자리에 있던 라즈롯의 머리 위로 피어오르던 감정의 색을.

그것은 지금까지 보던 일색(一色)이 아닌, '당혹'을 상징하는 주황과 '의문'을 상징하는 회색. 그 두 개를 품은 이색(二色)이다.

"저는 당신 앞에서 '혼석'이란 명칭을 처음 꺼냈단 사실을요."

 

 

 

 

34화. 가짜 겁쟁이(2)

삼각(三角) 이상의 데몬에서만 얻을 수 있는 심장.

혼석에 관련된 정보는 나와 여명회, 그리고 검성만이 알고 있다.

세간엔 그리 알려지지 않은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혼석'이란 명칭을 알고 있는 자는 극소수.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는 듯이 답하시는군요."

"혼석이라고 하시길래 당연히 비서실에서 본... 그 물건이라고...."

라즈롯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갈피를 못 잡고 연신 좌우로 흔들리는 시선은 빠르게 박자를 맞춘 메트로놈 같았다.

"정말 그렇다면 저에게 물어봤겠죠. '혼석이 그때 본 보석인가요?'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근데 당신은 어땠습니까."

"아, 아니 전...."

"이래도 시치미를 뗄 참입니까?"

턱을 괴고 있던 양손을 풀어헤친 뒤, 의자에 등을 기댄 난 느지막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길. 딱히 어쩔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네?"

라즈롯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머리 위로 공포의 색이 더 짙어지면서 그 옆으로 다른 감정의 색도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의문을 상징하는 '회색'.

비서실 앞에서 봤던 것처럼 두 가지 감정의 색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거의 없었는데 말이야.'

<부정의 색>은 한 사람에게 하나만 나타난다. 설사 두 개의 감정을 동시에 느껴도 좀 더 강한 쪽이 드러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내 특성이 성장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라즈롯이란 인물에게 뭔가 있다는 거겠지.

라즈롯은 벌벌 떠는 손으로 자신의 품속을 뒤적거렸다.

'뭘 찾고 있는 거지?'

그 의문을 입으로 옮기려던 찰나, 라즈롯은 품속에서 루비가 박힌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평범한 목걸이로 보이지 않았고, 마법적인 처리가 된 물건으로 보였다.

라즈롯은 자신 이마로 목걸이를 가져가 두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지이잉──!

희미한 빛을 내는 목걸이.

이윽고 불빛이 사라지고 라즈롯 머리 위로 일렁거리던 두 개의 <부정의 색>은 사라졌다.

'정신에 영향을 주는 마법인가 보군.'

일반적으로 허공에 불을 내뿜거나, 대기 중의 공기를 얼려버리는 '물리적'인 영역에 간섭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나 사람의 감정이나 의식 같은 '정신적'인 영역에도 간섭을 할 수 있는 마법들도 존재했다.

'정신'에 영향을 주는 마법이 저 목걸이에 메모라이즈된 게 아닐까?

물론 내 예상일 뿐이지만....

통제하기 힘든 감정을 저리 바꾸는 걸 보면 맞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속여서 죄송합니다, 유리안 경. 누구에게도 들키지 말라는 여명회 명령을 받았습니다."

진지한 어투로 말을 꺼내는 라즈롯.

불과 몇 초가 흐르지 않았지만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내가 알던 그가 맞을까 생각될 정도로 침착하고 냉정해 보였다.

"역시 그렇군요. 근데... 사람이 달라진 것 같군요."

"...예, 황실에 출입할 땐 이렇게 정신계 마법이 새겨진 목걸이를 사용합니다."

"흐음, 그럴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황실에 득실거리는 괴물들까진 속이지 못할 테니까요."

상당히 당돌한 말투.

이게 원래 성격인가? 조금 적응이 안 되는데?

그리 생각하며 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 웃음을 본 라즈롯은 아직까지 나에 대한 무서움이 아직 남아 있는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서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좋습니다."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느낀 난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제부터 쌓여갈 '혼석'에 대한 정보.

그걸 컨트롤하기 위해선 비서실에 심어둔 여명회의 귀가 제대로 작동하지 말아야 한다.

'하다못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던가 말이야.'

"으음."

잠시 생각에 잠긴 나는 이내 결심했다.

"라즈롯, 제 밑에서 일하는 건 어떠십니까?"

여명회의 밀정을 포섭하기로.

***

라즈롯은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한 체 유리안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여명회의 밀정이라는 것을 알아챈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뜩이나 포악한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로 유명한 남자다.

어디까지나 대화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지금 당장에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라즈롯, 제 밑에서 일하는 건 어떠십니까?"

그러나, 정작 나온 말은 생각지 못했던 제안이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말 그대로입니다. 제 밑에서 밀정 노릇을 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냐는 말입니다."

라즈롯은 머리가 아득해졌다.

도대체 이 실눈의 괴물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온갖 의문이 머릿속에 폭풍처럼 몰아쳤으나 그 안에서 해답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간단합니다. 당신의 여명회의... 정확히는 비숍 중 한 명의 명을 받고 밀정 노릇을 하는 거겠죠."

꿀꺽.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어투. 라즈롯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기존 지시를 따르면서 동시에 제 아래로 들어오라는 소리입니다."

"...이중 첩자 노릇을 하라는 소리십니까?"

"이해가 빨라서 좋습니다."

히죽 웃는 유리안.

말투를 보아하니, 이건 그의 독단적인 행동임이 분명하다.

다른 비숍들은커녕 아크 비숍인 테넬론도 모르는 일이란 소리다.

그렇기에 라즈롯의 뇌리엔 의문이 떠올랐다.

'어째서?'

유리안 또한 여명회 소속일 텐데,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일까.

주어진 단편적인 정보를 얼추 모아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오롯이 하나.

"여명회를 배신하실 생각이십니까?"

"배신이라뇨,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하는군요. 그저 제가 활동하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고 싶은 것뿐입니다."

쓸데없는 말장난에 놀아날 생각이 없는 라즈롯은 저 웃음 너머로 무슨 진의가 있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유리안의 말에 수긍해준 다음 여명회에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샅샅이 고발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아무런 보험도 없이 말을 꺼낸 유리안을 속으로 비웃던 찰나.

라즈롯은 그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을 알아챘다.

"이거 한 번 확인해보시겠습니까??"

그의 손가락이 자신이 가져온 공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라즈롯은 탁상 위에 올려둔 서류들에 손을 뻗었다.

빼곡하게 적힌 글씨들.

하나하나 확인하던 라즈롯의 얼굴엔 당혹감이 떠올랐다.

"겐멜 보육원... 후원자 명단."

겐멜 보육원.

부모를 잃은 빈민가의 아이들이 모이는 작은 보육시설.

그곳에 요 몇 년간 보육원에 기부한 사람의 명단이 서류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라즈롯은 천천히 고개를 올려 유리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다.

"비서실에서 라즈롯 군의 반응을 본 뒤, 혹시나 해서 조사를 해뒀습니다. 그곳 출신이시더군요?"

평소와 다름없는 단조로운 말투에 라즈롯은 치를 떨며, 다시금 기부자 명단의 이름을 훑어보았다.

그곳엔 라즈롯의 이름도 실려있었다.

"그렇게 규모가 큰 보육원은 아닌 모양입니다. 혹여나 안 좋은 사건에 휘말린다면 단숨에 와해 될 정도로 말입니다."

라즈롯은 등 뒤로 식은땀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 내려갔다.

협박.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면 이 보육원을 어떻게 할지 상상해 보라는 것이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라즈롯은 목 밑까지 치밀어 오르던 욕지거리를 간신히 삼켜냈다.

"그나저나, 기부 금액이 상당하군요. '감은 눈'의 견습으로 받는 월급을 아득히 상회하는 금액입니다. 그것도 매달."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그럴 리가요. 자기가 나온 보육원이 보다 나은 환경을 갖출 수 있도록 기부해주시는 것 아닙니까?"

섬뜩한 웃음.

"조금... 더러운 돈이여도 말입니다."

거듭되는 유리안의 말에 라즈롯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하지만 최대한 침착을 가장하며 부릅뜬 눈으로 눈앞의 괴물을 노려보았다.

괴물의 표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쪽의 감정은 순식간에 파헤치면서 자신의 감정은 철저하게 숨긴 실눈의 가면을 쓴 채.

"어차피 손을 더럽힌 김에 조금 더 더럽히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유리안은 다른 서류 한 장을 품속에서 꺼냈다.

***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제도의 밤은 평소보다 싸늘해진 날씨 탓인지 마치 죽은 것처럼 고요했다.

그런 지척조차 분간하기 힘든 기후 속에서 우비를 쓴 남자 한 명이 골목을 내달렸다.

급하게 발을 옮기던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길모퉁이에 세워진 세련된 마차다.

그가 마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점잖은 분위기의 남자가 천천히 시선을 옮긴다.

"라즈롯, 내가 부탁한 것은 가져왔느냐?"

"예, 비숍 에이든. 부탁하신 검성 하이든 라이히의 다음 목적지입니다."

"잘했다. 다음은?"

"귀족 원로회의 원로 중 한 명이 개인적인 이유로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그 내용이나 이유까지는 저도 잘...."

"괜찮다. 어차피, 쓸데없는 내용이겠지. 중요한 건 검성이니 말이다."

비에 젖지 않도록 애지중지 감싼 서류 봉투를 받자 에이든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라즈롯이 준 봉투에서 내용물을 하나하나 꺼내 살피더니 이내 마부석에 앉아 있던 남자에게 서류를 넘겨주었다.

"아크 비숍께 전해라. 검성의 다음 행선지는 이곳이라고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비숍 에이든."

"그리고... 음?"

말을 잇던 에이든은 교단원에게 하던 말을 멈추고, 라즈롯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표정이 좋지 않군, 무슨 일이 있었나?"

"예? 아뇨 그...."

무슨 일이 있었나.

그 물음에 라즈롯의 뇌리엔 당연하게도 오늘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유리안이 이중 첩자 노릇을 종용하며, 여명회에 흘러가는 정보를 제한해달라는 부탁을 한 것을 말이다.

"이상하군. 평소와 다른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자, 눈치가 빠른 에이든은 뭔가 느끼기라도 했는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말을 할까?

아니면 끝까지 숨겨야 할까?

말을 한다면, 유리안은 여명회의 비숍들에게 질책당할 것이 분명했다. 더 나아가선 배신자로 낙인찍혀 몬시뇰들의 추격을 받겠지.

하지만 그는 몬시뇰의 추격을 받으면서도 내 목숨을 노릴 수 있을 것이다. 유리안은 그럴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악마니까.

그것이 두려워 숨는다면?

'...체르니아가 위험해질 거야.'

그렇다고 이 사실을 숨긴다면 이중 첩자가 되는 셈이다.

심각한 갈등 속에 주먹을 불끈 쥔 라즈롯은 헤어지기 전, 유리안에게서 들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 '당신의 여동생, 체르니아를 포함한 보육원의 인원들을 바이엘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직접 추천인에 섬으로서 말이죠.'

- '아무리 돈이 많아도, 보육원 출신은 바이엘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못하죠. 하지만, 귀족의 추천이 있다면 가능합니다. 그게 크라이파트라는 명문가의 추천서라면... 말할 필요도 없죠.'

여동생과 함께 빈민가에 버려진 뒤, 저울질이 익숙해진 라즈롯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내 결심한 듯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런 위험 부담도 끌어안을 정도로 내 여동생은 소중했다.

 

 

 

 

35화. 고상한 미적 감각

피부를 찌르는 송곳처럼 차가운 정적이 흐르는 저택 복도.

그 복도를 뚫고 침실에 도착한 난 이곳까지 들고 온 서류를 탁자 위에 던져두었다.

그러자 마음속 한 편에서부터 작게나마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활화산처럼 뜨거운 것은 아닌, 바다에서 이따금 치는 파도처럼 고요한 분노. 이런 감정이 싹을 트기 시작한 이유는 대략 짐작하고 있다.

그것은.

"완전 당신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행동, 생각, 기억.

그것들은 모두 '이시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감정.

더 깊이 들어가선, '본능'의 영역은 '유리안'의 색이 조금 더 짙은 느낌이다.

'...아무렇지도 않다니.'

그 짐작은 라즈롯이 여명회 쪽의 밀정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겁박할 때 여실히 드러났다.

약점을 붙잡고, 그를 협박 아닌 협박으로 포섭하려 했을 때 내 가슴과 머리는 너무나도 침착했다.

마치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여명회 쪽의 밀정이라는 점에서 라즈롯은 변호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약점을 쥐고, 이리저리 흔드는 행위에 일말의 망설임도 생기지 않았다니.

'이시후'라면, 그러지 않았을──.

"생각해보니...."

나는 고개를 들어 거울을 쳐다보았다. 거기에 비치는 실눈의 악역을 보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나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고 있었군요."

자기 표상을 정립하는 사춘기도 아닌데, 자아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될 줄이야.

더욱 화가 나는 건, 이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머리와 가슴은 잔잔한 바다처럼 평온했다는 것이다.

"지금 중요한 건 정체성에 대한 고민보단 앞으로 해야 할 일이죠."

지당한 말씀.

쓸데없게도 혼잣말에 공감하며, 의복을 옷걸이에 걸어두려던 찰나였다.

똑, 똑──!

갑작스레 들려온 노크 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들어오시죠."

내 대답과 동시에 안으로 들어온 것은 저택의 하녀 중 한 명이었다.

약간 경직된 얼굴로 정중히 인사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입을 열었다.

"보, 본가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본가?

하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리안에게 본가라는 곳은 제국 사대 명문가인 크라이파트 가를 말하는 것일 터.

'방계인 것도 그렇고, 온갖 악명 때문에 본가와는 사이가 안 좋을 텐데 말이야.'

'유리안'과 크라이파트 가문의 사이는 앙숙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앙금만이 남은 사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 사실은 굳이 내 입을 빌려 말할 필요도 없고, 세간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크라이파트 가문에서부터 온 연락이라니,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지?

"유리안 님의 누님이신 르니아 크라이파트 님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가문의 일원들은... 전부 참석하면 좋겠다고, 가주님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나한테도 말이냐?

그런 말이 목밑까지 치고 올라왔으나, 그냥 형식적인 이유로 보낸 것에 불과할 것이다.

유리안이 '프라손'이기는 하지만, 크라이파트 가문의 일원이었으니까.

"예전처럼 사유가 있어서 참석하지 않겠다고 답변할까요?"

"네, 그래 주시면...."

말을 끝내기 전에, 문득 머릿속엔 '혼석'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삼각 이상의 데몬들에게만 나오는 이 '마신'의 잔재 사념은 어울리지 않게 보석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자태는 고귀한 것에 환장하는 귀족들이 사치품으로 이용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미려하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플레이어는 혼석을 데몬에게만 얻는 것이 아닌, 인간에게서도 얻을 때가 종종 있었다.

'크라이파트 가문에서도 혼석이 하나 있지 않았나?'

크라이파트 가문이 갖고 있는 재력과 무력을 생각한다면 여명회에 빼앗길 걱정은 크게 들지 않지만, 만약의 일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그럼 본가에는 그리 연락을...."

"아뇨,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예?"

"이번 결혼식에 참여하겠습니다. 본가에는 그리 전해주시겠습니까?"

"아, 아... 네!"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하녀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긴 했지만 불안해 보이는 눈빛은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가는 길에 이것을 좀 처리해주시겠습니까?"

그런 그녀에게 난 서류를 하나 맡겨주었다. '겐멜 보육원'과 관련된 것들. 이것들은 직접 처리하기 위해 '감은 눈' 집무실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불에 태워주시길."

"알겠습니다."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중한 인사를 한 뒤 나가는 사용인을 본 나는 발걸음을 옷장으로 옮겼다.

아무리 본가(本家)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결혼식 연회에 참가해야 한다면 그에 걸맞은 복장을 입어야 한다.

그것이 귀족 사회의 예의였으니까.

"으음.... 깜박했군요."

옷장을 열자, 알록달록한 옷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난 '유리안'의 실험적인 패션 감각에 다시 한번 좌절했다.

예복(禮服)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예복이라 부를법한 옷들의 색깔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두 눈을 찌푸릴 법했다.

"그래도 핑크색은 아니잖습니까...."

이전에도 옷장 앞에서 이런 식으로 넋두리를 한 적이 있지. 그나마 코발트 블루색의 코트가 정상 궤도에 있었으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여전하다.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무슨 옷을 입든 그것이 '유리안'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납득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옷장의 문을 닫으려던 순간.

"...이런 생각이 '유리안'스럽다는 것 아닙니까?"

조금 전 짧게나마 사념에 잠기게 만든 철학적인 요점이 떠올랐다.

이 몸은 '유리안'이지만, 주체는 '이시후'다.

어느 정도 무력이 안정권에 오른 이상 의복(衣服) 정도는 내 주관을 가져도 될 터.

그래, 그 정도는 괜찮겠지.

아무렴.

내 미적 감각이 다른 사람에 비해 특출나다 생각하진 않지만 핑크색 정장을 옷장에 걸어두는 놈보단 나을 것이다.

***

"이걸로 제 5원소학의 기본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형식적인 의례로 강의의 끝을 알린 아일린은 가져온 책들을 들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걷던 그녀는 주변에 사람이 사라지자,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후... 피곤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

바이엘 아카데미의 높은 수준을 생각하면, 수업을 위한 예습, 복습으로만도 충분히 기가 빨릴 만했지만, 예전에는 이토록 피로를 느끼지 않았었다.

지금 아일린이 느끼고 있는 피로의 원인은 아카데미에서 받은 것이 아닌, 마탑에서 화제가 된 광석.

'혼석(魂石)'의 연구 탓이다.

'유리안이 월장석을 채간 것에 감사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올해 금(金)원소를 다루는 '바르고' 계위 마법사 중 개인 논문을 제출하지 않은 것은 아일린 뿐이다.

논문 주제였던 월장석을 선점한 유리안 탓에 아일린은 새로운 주제를 찾던 중 갑자기 나타난 '혼석'에 대한 황실 의뢰에 귀가 솔깃하였다.

'혼석'을 감식할수록 그녀는 새로운 논문 주제에 적합하다 느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고마워 죽겠어!'

수면 시간도 줄여가며 그녀는 연구에 몰두했다. 거기다가 아카데미의 수업도 내팽개칠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아일린의 눈에는 옅은 다크서클이 생겼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일린 양. 오늘도 마탑에 들르실 예정이신가요?"

원소학 과실에 도착하자, 교수 중 한 명이 그녀가 가져온 책을 대신 들어주며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아일린과 마찬가지로 아카데미에서 원소학을 담당하는 남교수.

사대명가에는 속하지 않지만 그래도 대단한 마법 명가의 자재인 그는 호의를 띈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곤한 표정을 감춘 아일린은 감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함께 가시겠습니까? 제가 에스코트 해드리겠습니다. 연약한 레이디에게 무거운 짐을 들게 할 순 없지요."

"어머, 정말요?"

아일린이 긍정의 표시를 하자 환희에 가득한 표정을 지은 남교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 모습에 아일린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이 행동은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좋게 말하면, '여자'라면 누구나 갖춘 처세술.

나쁘게 말하면 내숭이었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아!"

아일린은 남교수와 함께 마탑으로 가려는 찰나, 얼마 후 연회에 참가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제국 사대 명문가, 크라이파트 가문의 삼녀인 르니아 크라이파트의 결혼식.

그 결혼식에 방계인 자신이 초대받았다는 것이 조금 의문이었으나, 본래 크라이파트 가문은 '귀족의 품격'이라며 생색내는 것을 꽤 좋아했기에 그런가 보다 했다.

"죄송해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오늘은 다른 일이 있어서 마탑에 못 갈 것 같아요."

"아, 그러신가요...?"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는 남교수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한 뒤, 아일린은 바이엘 아카데미를 빠져나왔다.

혼석 연구를 위한 마탑행을 미루고, 그녀가 향한 곳은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종합 의류점이다.

사대 명문가 중 하나인 '하인리히 가문'과 황금상(黃金商) 하켈이 손을 합쳐 만든 거대한 의류점.

종류를 불문하고 백 가지가 넘는 브랜드를 보유한다는 뜻으로 '백의점(百衣店)'이란 이름을 내건 곳이기도 하다.

'화려해라....'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한 아일린은 휘황찬란한 의상들, 높은 천장,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의 건물에 혀를 내둘렀다.

'그냥 연회용 의복을 몇 벌 구매하러 온 것뿐인데....'

드레스를 시작해서 일반적인 평상복까지. 여러 가지 브랜드가 한곳에 모인 광경은 간단히 연회복만 사려고 생각한 아일린조차도 쇼핑에 흥미가 생기게 만들었다.

'이왕 온 김에 ...조금만 둘러볼까?'

그녀는 백의점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소품인 커프스와 단추부터 시작해서 정장까지.

온갖 의류들을 겸비한 백의점은 이름대로 백 가지 의류를 보유하고 있다며 호언장담할만했다.

"응?"

의류점의 규모에 감탄하고 있던 와중, 아일린의 눈에는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근래 몇 번의 만남 탓에 예전만큼 불편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거북한 상대임은 확실하다.

아는 척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인사하는 것도 어색한 사이.

아일린은 일단 못 본 척 넘어가 쇼핑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근데 웬일로 정상적인 옷을 보고 있지?'

그렇게 다짐한 아일린이었으나, 모종의 흥미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화려한 색감과 과감한 패션으로 유명한 유리안이 얌전한 예복들을 고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설마, 나처럼 르니아 크라이파트의 결혼식에 참가하는 건가?'

하긴, 아무리 사이가 나쁘고 방계라고 한들 같은 가문의 일원. 그가 초대받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잠깐....'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유리안은 직원의 추천해준 블랙 계열의 코트 하나를 보고 있었다.

평소 유리안이 입고 다니는 옷을 생각하면, 지극히 정상적인 의복.

그러나 의복 왼쪽 가슴에 박혀있는 문양은 연회의 주체자를 생각하면 절대로 피해야 했다.

'페브란스의 로얄티.'

일명 귀족 학살의 상징

과거 황실 소속의 기사들이 모욕죄를 읊으며 무단으로 귀족들을 처단했을 때 내건 문양.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그 의미가 퇴색되었고, 그것이 가진 의미와는 별개로 그 미려한 형태 탓에 많은 디자이너들이 채택하는 문양이 되었다.

그렇다고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난들 '감은 눈'의 그가 크라이파트 가문에서 주최하는 연회에 저 문양을 달고 가는 것은 조금 위험했다.

'감은 눈'은 황실 전속 기관이자, 황명을 받아 귀족을 처단하고 다니는 단체이고, 크라이파트 가문은 제국의 최고 귀족 가문 중 하나다.

가뜩이나 유리안의 신분은 방계, 그리고 귀족,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죽이는 탓에 높아져 버린 악명을 가진 그가 '페브란스의 로얄티' 문양을 달고 나타난다?

'에이 설마, 아무리 유리안이라고 해도 대놓고 도발하는 짓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아닐 거라 생각하는 사이 그는 직원이 건넨 예복을 입어보려는 듯 보였다.

아일린은 모른 척하자는 다짐을 뒤로 하고, 말을 걸고야 말았다.

"혹시 크라이파트 가문에 선전포고하러 가실 생각인가요?"

 

 

 

 

36화. 못된 혈육과 더 못된 혈육(1)

"혹시 크라이파트 가문에 선전포고하러 가실 생각인가요?"

직원의 추천으로 그나마 무난한 코트를 구매하려던 도중,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아일린 드 도나시엥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밤바다를 연상하게 만드는 어두운 남색의 머릿결, 콘트라스트가 강하게 느껴지는 연적색의 눈동자.

그 조화는 그녀의 찌푸린 인상도 빛바랠 일 없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안녕하십니까? 아일린 양도 필요한 의복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네, 분명 당신이랑 목적지도 같을 거예요."

나와 목적지가 같다라.

그녀도 예복 코너에 있는 것 보니 결혼식에 초대받은 모양이다. 나처럼 정상적인 예복이 없는 건가.

"아일린 양도, 르니아 누님의 결혼식에 초청받은 모양이로군요."

"네, 저도 어찌 되었든 사대가문인 도나시엥의 구성원이니까요."

"그렇군요."

난 관심 없는 듯 대답하며, 들고 있던 코트를 구매하려던 찰나 그녀가 꺼낸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아일린 양. 아까 하신 말씀은 어떤 의미이신지요."

"...그 문양, 혹시 모르시는 건 아니죠?"

아일린은 손가락으로 내가 쥔 코트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곳엔 황금 왕관과 검들이 장식된 세련된 문양이 자리 잡고 있었다.

"페브란스의 로얄티, 황실의 권력을 등에 업은 기사 가문 몇몇이 황권을 어지럽힌다는 핑계로 자신의 숙적들을 처단했을 때 내건 문양이죠."

"그렇습니까?"

"그게 말이에요? 지금은 그 의미가 무색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치적인 의미가 담긴 문양이에요. 그걸 당신 가문의 결혼식에 입고 간다면, 다들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군.

그녀가 '선전포고'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유리안은 황실 전속 기관인 '감은 눈'의 소속이며, 크라이파트 가문은 황실에 반대급부라 불러도 좋을 귀족 원로회의 수장 격인 가문이 아닌가?

지금 내 목적은 '크라이파트 가문'에 있는 혼석을 미리 확보하는 것.

가문과 유리안의 사이는 좋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으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건 현명하지 않다.

"확실히 좋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군요."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네요."

"하지만 아쉽군요. 지금 이 색상은 저것 말고 없으니 말입니다."

난 가볍게 탄식을 내시며, 들고 있던 옷을 직원에게 돌려주었다.

"그럼 다른 색을 고르면 되는 것 아닌가요?"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아일린.

아주 지당한 말씀이시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리안'의 얼굴과 체형이라면 뭘 입어도 어울리겠지만.

난 평범하고! 무난한 어두운 계열을 샀으면 좋겠다고!

근데 왜, 눈에 들어오는 건 핑크, 형광색 계열인지.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유리안'의 본능은 자신의 에고를 드높게 표출하고 있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벽에 걸린 형광색 별 모양 선글라스에도 계속 눈길이 갔다.

'내가 알고 있는 통속적인 개념의 예복은 모두 검은 쪽에 가까웠으니까.'

핑크와 형광색의 조합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의 범주가 아니다.

그럼에도 저것들이 '좋다.'라고 여기는 자신을 보니, 오늘 이 쇼핑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만약 지금 이 상태라면 앞으로 구매할 의복들은 '유리안'의 감각이 짙게 배어날 것이다. 하지만 오늘 쇼핑을 나온 이유는 '이시후'의 정.상.적인 패션 주관을 갖기 위함이 아닌가.

'아, 그래.'

계속해서 발랄한 컬러에 눈길이 가는 와중 문득 한 가지 묘수가 떠올랐다.

눈앞의 아일린의 옷차림을 보니 일단 '유리안'보다는 훨씬 일반적으로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추천받는다면 이 고민이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게 좋겠군요."

그녀가 선의로 자신을 도와줄 일 없으니 격장지계(激奬之計)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한 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평범한 짙은 회색의 상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척을 한 뒤, 예복 상의와 세트가 되는 하의를 골랐다.

당연히 핑.크.색으로.

"자, 잠깐만요."

"왜 그러십니까?"

그녀의 적잖게 당황한 목소리.

좋아, 내가 원한 반응이야.

"그, 그 조합... 맞아요?"

"예, 이것보다 어울리는 배색은 딱히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 대체 누가 핑크와 회색을 섞어요!"

혀를 내두르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은 그녀를 보자, 슬슬 그녀의 자존심을 자극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난하지만 어딘가 밋밋한 회색. 그런 무난함에 포인트를 줄 수 있도록 선택한 핑크입니다. 철저하게 유행을 따른 선택이라 말할 수 있겠죠."

"포인트를 넣는답시고, 부위 전체를 튀는 단색으로 정하다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케이스잖아요!"

"아니라고 떠드는 건 쉬운 일이죠. 예술 쪽으로도 정평이 난 도나시엥 가문의 일원이 이렇게도 미적 감각이 부족하다니."

아일린은 내 도발에 미간을 찌푸린 채, 성큼 걸음으로 주변을 돌아다니더니 의복들을 하나씩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저라면 이런 식으로 코디했을 거예요. 당신이 보기엔 무난할 수 있지만, 적어도 이건 당신이 고른 옷처럼 광.대.같.진 않아요!"

그 말을 끝으로 아일린은 고개를 휙하고 돌리더니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떠난 자리엔 조금 전, 흥분한 그녀가 골라 놓은 평범한 옷들이 있었다.

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직원을 향해 말했다.

"저것들로 계산해주시죠."

***

계절을 품은 것처럼 아름다운 정원.

그 너머로 보이는 고풍스러운 크라이파트 가문의 저택은 예술품이라 치부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크라이파트 가문에 도착한 난 속으로 거북함을 느끼고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행사에 참여하는 것만큼 거북한 것은 없을 것이다.

'같은 가문임에도 직접 얼굴을 본 사람은 헤란드 뿐이지.'

아무도 모르는 친족들에게 휩싸여, 인면부지한 인물의 결혼을 축복해줘야 한다니. 참으로 개탄을 금치 못할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크라이파트 가문'의 혼석을 확보한다는 목적이 있는 지금, 불만이 있어도 연회에 참가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불편한 기색을 감춘 채 난 경비에게 초청장을 건넸다.

받은 초청장과 내 얼굴을 본 경비는 적잖게 당황했다.

"...유,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님. 초청장을 확인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연회장에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하긴 유리안은 이제 크라이파트 가문과 연을 끊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인데, 그럼에도 직접 연회장에 찾아왔단 사실에 놀란 것이겠지.

"예, 감사합니다."

가볍게 경비에게 인사를 한 난 곧장 사용인의 안내를 받으며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수많은 그림과 비싸 보이는 공예품들이 줄지어 있고, 천장엔 휘황찬란한 샹들리에들이 달려있었다.

꽤 인파가 있던 홀은 북적이는 사람만큼 어수선했다.

그러나 번잡함은 잠시.

내가 홀에 들어서자 북적거리는 소란은 서서히 잦아지기 시작했다.

호수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고요함이 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거북하군.'

파티에 초청받지 않은 불청객을 보는 눈들이다. 아마 짐작이 아니라, 확실하겠지.

가문의 방계이자 제국의 '웃는 처형대'가 축복만이 가득 해야 할 결혼식에 나타났다?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기엔 충분했다.

"저놈은 눈치도 없나? 이런 자리에 왜 모습을 드러낸 거야?"

"그러게 말이야. 방계면 방계답게, 황실의 개면 황실의 개답게 굴 것이지."

"누가 아니래. 꼴도 보기 싫은 자식."

심지어 몇몇 귀족들은 숨기지 않고 입을 놀렸다.

난 이미 저런 떨거지들에게는 이골이 난 상태다. 고개를 살짝 옮겨 나지막이 미소만 지어준다면 꼬리를 내릴 터.

"...윽."

"크흠."

저렇게 말이다.

그렇다고 이 불편한 자리가 쾌적해진 것은 아니다.

크라이파트 가문에 있는 '혼석'을 챙겨 나가는 것이 목표이니 연회가 끝나면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는 편이──.

"유리안! 와줬구나!"

불편한 고요함을 걷어내며 들려온 목소리 하나. 고개를 돌려 그 주인을 확인하니 세련된 웨딩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복장을 보아하니 이 연회의 주인공이자 유리안의 누나인 '르니아 크라이파트'가 분명하다.

"르니아 누님."

드레스 치마 중간을 손으로 붙잡으며, 종종 걸음으로 다가온 그녀는 거리가 좁혀지자 양손을 뻗어 나를 와락 껴안았다.

뭐지, 유리안에게 이런 식으로 감정 표현을 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오랜만이야, 유리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오랜만에 동생을 보는 진심 어린 말투였다.

지금까지 이런 류의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나?

아니 없다.

그 탓에 모종의 경각심이 생긴 난 르니아의 머리 위를 <부정의 색>으로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색도 없네?

"오랜만입니다, 르니아 누님."

"그 실눈은 여전하구나! 어쩜 어렸을 때랑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이런 식으로 유리안에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지금의 난 혼석을 빼돌리기 위해 방문한 것이기에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있다는 건 긍정적으로 봐도 좋을 일이었으나,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인간쓰레기와 친분이 있는 사이라니....

르니아와 인사를 나누는 도중, 그녀의 뒤로 익숙한 얼굴인 아일린이 다가왔다.

"아일린, 미안. 이야기 도중 뛰쳐나갔네."

내 목에 양팔을 건 체 고개를 돌린 르니아는 그녀에게 사과했다.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둘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뇨. 괜찮아요. 르니아 님."

르니아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아일린은 시선을 돌려 내가 입고 있던 의복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일련의 행위가 이어질 때마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듯 보였고, 기세도 등등해진 느낌도 들었다.

"소개할게, 유리안 크라이파트. 내 동생... 아, 어차피 소개할 필요 없겠지? 둘은 선후배 사이니까 말이야."

르니아의 말에 난 슬쩍 아일린을 쳐다보았다.

선후배 사이였군.

그렇다는 건 그녀를 처음 봤을 때 '혐오'의 색을 드러낸 이유는 아카데미 재학 시절과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그건 그렇고, 유리안. 이렇게 평범하게 입으니 얼마나 깔끔해? 평소에는 너무 광대같이 입는단 말이야."

"그게 근래 제도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입니다."

"어머, 그런 스타일이 유행한다면 난 하루라도 빨리 제도에서 떠날 거야. 호호."

르니아는 자신의 농담이 만족스러웠는지 피식하고 웃어젖혔다.

그 웃음을 뒤로 하고, 난 이곳에 온 목적을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르니아 누나."

그때 나보다 먼저 르니아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어머, 요슈아!"

르니아에게 요슈아란 이름으로 불린 앳된 소년은 날카로운 표정으로 우리 주변으로 다가왔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앳된 외모와 어깨에 새긴 크라이파트 가문의 문양. 그리고, '유리안'과 다른 종류의 오만함이 느껴지는 얼굴.

엮이면 성가실 것 같다는 인상을 잔뜩 주는 녀석이었다.

"와줬구나, 요슈아."

"응, 누나. 옷 이쁘네."

"고마워."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거야?"

생긴 대로 논다더니.

순식간에 변한 녀석의 태도에 르니아는 적잖게 당황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다른 귀족 참석자들을 제쳐두고, 왜 이런 덜 떨어진 두 명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거야?"

실로 불쾌할 법한 언사였으나, 르니아는 딱히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대했던 것처럼 실실 웃으며 너스레를 떨 뿐이다.

"반가워서 그렇지. 그러고 보니 요슈아는 유리안 형을 마지막으로 본 게 십여 년 전...."

"누가 이딴 걸 형이라 불러? 미쳤어! 누나?"

요슈아는 험상궂은 얼굴로 욕지거리를 입에 담자, 그제야 르니아의 미소는 사라졌다.

"누나가 저놈에게도 초청장을 보내겠다고 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노하셨던 것 기억 안 나?"

"미, 미안...."

"그렇게 고집을 피운 것도 모자라, 식장에선 대놓고 방계 따위랑 말을 섞고 있다니.... 그리고 너희들은 눈치도 없나 보지?"

"요슈아 님, 르니아 님에게 먼저 이야기를 한 것은 저희...."

"도나시엥 가문의 반쪽짜리, 누가 입을 열라고 했어!"

당황한 아일린은 르니아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요슈아는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며 입조심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본 아일린은 기분이 상했는지 미간을 찌푸렸지만 어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곳은 르니아의 결혼식장.

혹여나 구설수를 들을 법한 일을 벌이게 된다면 비난의 화살은 자신과 함께 방계 출신들에게 돌아올 터.

"그리고, 너."

아직도 뭔가 부족한지 요슈아의 불만은 이어졌다.

이번 타켓은 난가.

녀석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넌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온 거야? 너 같은 천한 방계따위를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할 줄 알아?"

"크라이파트 가문의 일원으로 참가한 것이 아닙니다. 저 또한 초청장을 받았으니 온 것이지요."

난 당당히 품속에서 초청장을 꺼내 요슈아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그것을 채가더니 갈기갈기 찢기 시작했다.

"이제 됐지? 당장 꺼져."

"그럴 순 없습니다. 저도 르니아 누님의 앞날을 축복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니까요."

내가 최대한 조곤조곤한 어투로 요슈아의 말에 반박하자, 녀석의 머리 위로 붉은 아지랑이가 떠올랐다.

'분노'의 적색.

그 순간, 요슈아는 근처에서 서빙 하던 사용인이 들고 있는 쟁반 위의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설마 뿌리려는 거냐?'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요슈아의 와인 잔을 든 손은 내게로 향하려 했다.

색이 진한 적포도주.

저걸 뒤집어쓴다면, 옷이 지저분해지겠지. 그걸 감안하더라도, 난 속으로 맞아주자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 온 이유는 소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닌 크라이파트 가문의 '혼석'을 확보하려는 것.

그걸 위해서 와인을 뒤집어쓰는 것 정도야──.

'...잠깐. 지금 옷이 지저분해진다면 갈아입을 옷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내가 보유한 옷들 중 유일하게 '평범하다.'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나마 마음에 든 코발트 블루색의 코트는 베르니든을 다녀온 뒤 수선을 맡긴 상태.

즉, 이 옷이 없다면.

'핑크와 형광색만 남는다.'

짜악──!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난 요슈아의 뺨에 손찌검을 날렸다.

핑크만큼은... 죽어도 싫다.

 

 

 

 

37화. 못된 혈육과 더 못된 혈육(2)

"너... 너!"

붉게 상기된 얼굴, 부들부들 떠는 손과 치켜뜬 눈.

굳이 머리 위의 <부정의 색>을 살펴보지 않아도 요슈아의 감정이 극에 치달았음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녀석은 새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뺨을 움켜잡고는 다른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자세는 꽤나 봐줄 만했다.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아하니 어느 정도 단련을 한 모양이고, 자신의 실력에도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컥!"

짜악──!

요슈아가 유리안에게 달려들기도 전에 녀석의 뺨은 한 번 더 불이 났다.

상대가 나빴다.

불세출의 천재라 칭송받은 유리안.

그의 눈으로 본 요슈아는 형편없는 어린양이었다.

원래는 옷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부득이하게 행사한 폭력이었지만, 지금은 '유리안'을 연기하기 위한 과정이 되었다.

"또... 또, 내 뺨을 때려!? 네까짓 천한 방계 따위가...!"

"태양교의 성인 중 한 명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누군가 오른쪽 뺨을 때린다면, 왼쪽 뺨도 내밀어라.'라고."

짜악──!

그렇게 말하며, 나는 한 번 더 요슈아의 뺨을 후려갈겼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이거야 원.... 계속 때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과도한 처사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나, 요슈아가 와인잔을 들어 나에게 향한 순간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자신에게 이빨을 들이민다면 같은 가문의 일원도 불문하고 철저하게 교육하는 인면수심(人面獸心). 그것이 유리안이니까.

"이, 이익...!"

요슈아는 새빨갛게 부어오른 양 뺨을 부여잡고는 나를 살기등등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결국 참지 못했는지 녀석은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화려한 문양이 박혀있던 검집으로 손을 옮겼다.

"요, 요슈아...!"

다급한 르니아의 외침.

동시에 철없는 요슈아의 행동에 주변은 공기는 싸늘하게 변모했다.

"뽑으시겠습니까?"

그런 요슈아를 보며 난 나지막이 물었다.

"지금이라면 이 자리에서 일어난 일을 가족사로 치부할 수 있습니다. 성격 더러운 동생을 훈육하기 위한 과정이라 변명을 댈 수 있죠."

"누가... 누가, 너 같은 천한 놈의 동생이야!?"

"하지만! 검을 뽑아 든 순간, 당신은 크라이파트 가문의 요슈아가 아닌 검사 요슈아로서 제 앞에 서는 것이 되죠."

나는 태연하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을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물론 뽑아 들 생각은 없지만, 이 생각은 요슈아에게 전해지진 않을 것이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이 갖고 있는 악명과 그의 본성뿐일 테니까.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잠시 멈칫하는 요슈아의 목에는 여전히 힘줄이 불거져 있었고, 두 눈에는 흰자위가 새빨갛게 도드라져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난 천천히 다가갔다. 혹여나, 녀석이 검을 뽑아 들 수도 있는 상황.

주변에선 긴장감을 참지 못하고, 침을 삼키는 이들도 있었다.

'보라색.'

그렇지만 녀석의 머리 위로 보이는 <부정의 색>은 그럴 일이 없다며 속삭이고 있었다.

겉으로는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으나, 녀석도 결국 유리안의 악명 앞에 움츠러든 것이다.

"현명합니다."

짜악──!

***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냉혈한으로 유명한 그가 르니아 크라이파트의 결혼식에 찾아와 가문의 직계에게 행사한 폭력의 편린은 참석자들의 두 눈을 찌푸리기에 충분했다.

비록 요슈아 크라이파트가 지독한 독설을 입에 담기는 했으나 그 정도가 지나쳤다.

봐라, 저 요슈아의 뺨이 퉁퉁 붓지 않았는가?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지탄받아야 마땅할 행위였지만.

'...속이 다 시원하네.'

아일린이 느끼는 감정은 저 인면수심에 대한 규탄보단 통쾌함이었다.

요슈아 크라이파트.

바이엘 아카데미의 학생인 그는 학내에서 유명한 문제아다. 파벌을 꾸려 평민 학생을 따돌리거나 계급 낮은 교수들의 수업을 망치는 등의 행위로 말이다.

크라이파트 가문의 위상을 등에 업고 있는 바람에 아카데미 내에서도 딱히 손 쓸 방도가 없는 학생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유리안에게 손찌검당하는 모습을 보니, 아일린의 마음 깊숙한 곳에선 기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통쾌함이란 기묘한 감정.

'...이, 이런 감정을 품으면 안 돼.'

헛기침으로 심정을 가다듬은 그녀는 유리안에게 다가갔다. 더 이상 소란을 일으키면 르니아도 곤란하다고 말을 하기 위해서.

"그, 그만해라, 유리안."

그런 아일린보다 먼저 유리안을 중재하는 이가 나타났다.

헐레벌떡 연회장 안으로 뛰쳐 들어온 크라이파트 가문의 삼남(三男), 헤란드 크라이파트다.

"형님, 오셨군요."

헤란드를 보며, 유리안은 미려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웃음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한 행위는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 다른 손님분들께서 보고 계신다. 이제 그만하는 게 어떻겠느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요슈아 앞에 선 헤란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건방진 동생의 훈육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다른 분들도 이해해주시겠죠."

"천한 방계 새끼가...! 누가 네 동생이라고!"

"그만해라, 요슈아! 네가 먼저 르니아와 유리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느냐!"

"하, 하지만... 헤란드 형님."

다급하게 뛰어와 요슈아를 두둔할 줄 알았던 헤란드는 도리어 그를 꾸짖기 시작했다.

"저, 저 천한 녀석이 이런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넌 크라이파트 가문이 주최하는 연회에서 소란을 일으켰다!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단 말이다!"

"형님, 왜 저에게...."

"그만 돌아가거라! 아무리 원로께서 널 아끼신다고는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벌인 네 행동은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다!"

헤란드가 으름장을 놓자, 요슈아는 억울하다는 눈으로 유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잠시 유리안을 노려보던 요슈아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힘없는 발걸음으로 연회장을 벗어났다.

"철없는 동생 대신 내가 사과하마 유리안."

멀어지는 요슈아의 등을 쳐다보던 유리안은 헤란드의 말에 다시금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이만한 일은 여기 올 때부터 각오했으니까요."

"르니아도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오빠. 요슈아는 아직 어리니까 그럴 수 있죠."

르니아에게 고개를 숙이던 헤란드는 아일린과도 시선을 마주치며 가볍게 사과를 표했다.

"그런데 헤란드 형님. 가주께서는 연회장에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아버지 말이냐?"

"예."

"아버님께서는 일이 있어서 불참하셨다. 그 대리자로 내가 온 것이고."

"그렇습니까?"

어쩐지 아쉬움이 깃든 목소리.

유리안은 갑작스레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르니아에게로 향했다.

"르니아 누님, 소란스러운 일을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응? 아... 응, 괜찮아 이 정도는."

"아뇨. 한 번밖에 없을 날에 이런 추태를 부렸습니다."

"뭐, 살다 보면 두 번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어쩐지 뼈가 있는 농담에 유리안은 실소했다.

그렇게 잠깐 담소를 나눈 뒤, 헤란드와 르니아는 다른 초청객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유리안과 단 둘만이 남은 상황.

둘 사이로 불편한 공기가 흐르자, 아일린은 이리저리 시선을 굴렸다.

"아."

문득, 그녀의 눈에 들어온 유리안의 커프스. 백의점(百衣店)에서 도발을 당했을 때, 뿔난 나머지 추천한 물건이다.

"예복에 대해 고상한 척 다하시더니, 그 옷들 결국 제가 고른 것 아닌가요?"

아일린은 턱을 살짝 치켜 들으며 기세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백의점에서 마주친 유리안이 자신의 예술 감각에 대해 조롱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랬습니까? 기억나지 않는군요."

유리안이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또 그렇게 내빼시려고?

그의 태도에 아일린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치곤 커프스도, 단추도, 벨트도 모두 제가 말한 것들인데요?"

"우연의 일치로군요."

"...우, 우연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녀는 뻔뻔스러운 유리안의 태도가 괘씸하게 느껴졌다.

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남자는 신념이라는 이름에 벗어나지 않는다면, 절대 고개를 숙이거나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 무게에 깔려 죽더라도 남을 인정하는 일 따윈──.

"농담입니다. 사실 아일린 양의 말대로입니다. 이 옷들... 꽤 마음에 드는군요."

"...네?"

"역시 아일린 양도 도나시엥 가문의 일원입니다."

난데없는 농담과 칭찬 그리고 인정.

어울리지 않는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아일린은 도리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남을 칭찬하면, 혀에 가시가 돋치기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아... 벌써요?"

당황한 탓에 목소리의 음이 이탈했다. 그 탓에 아일린의 얼굴에 붉어졌다.

"저도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라서요. 제가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눈치를 보지 않습니까?"

요슈아와 벌인 한 바탕 소란이 끝나 연회장의 분위기는 한결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유리안'이란 인물이 갖고 있던 악명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힐끔힐끔.

눈길을 보내는 그들에게 유리안이란 존재는 거북함 그 자체다.

"애초에 인사만 하러 왔습니다. 쓸데없는 일에 엮이기는 했지만 말이죠."

그 말을 끝으로 유리안은 발걸음을 옮겨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유리안에게 저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처럼.

언제지? 아, 바이엘 아카데미 재학 당시였다.

- '마치 별을 담은 것 같습니다. 마법 명문 도나시엥의 일원답게 아름다운 마법이군요.'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기억.

이 추억이 이토록 뚜렷하게 떠오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과거 유리안에게 인정받은 당일.

아일린은 아카데미 뒷산 왕벚나무 아래에서──.

"끄아아아...."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일을 떠올리는 바람에 그녀는 신음을 지르며,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

가주가 참석하지 않는다.

이곳에 온 목적은 크라이파트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혼석'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그 혼석을 게임상 가주가 가지고 있는 것이었기에 가주가 없는 이상 연회에 더 머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혼석을 확보해두려는 속셈이었는데, 가주가 없을 줄이야....'

괜스레 혀끝에서 씁쓸한 맛이 맴돌았다.

다시 이런 기회가 오기나 할까?

가주는 방계이면서 악명 높은 유리안을 끔찍이도 싫어하기에 직접 찾아간다 한들 만나줄지 미지수다.

골치 아프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는 와중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안!"

그때 빠져나온 연회장 쪽에서 르니아가 처음 만날 때와 같은 모습으로 종종 걸어오고 있었다.

"벌써 가는 거야? 그러지 말고 끝까지 참석해줬으면 했는데."

입을 여는 대신 난 그냥 미소로 대답했다.

내가 웃는 이유를 이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인 르니아는 품속에서 작고 평범한 보석함을 꺼냈다.

"사실 내 결혼식에 온 건 아버님을 뵈러 온 거지? 이걸 가져가려고?"

"이건...."

"너희 어머니의 유품."

어머니의 유품?

그 말을 들은 난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그것을 받았다.

보석함치고는 투박한 상자다.

"보석 창고에서 결혼 예물을 고르는 중에 이게 보이더라고. 문득 네 생각이 나서 가지고 나왔지. 유리안, 너 이것 때문에 아버지랑 설전을 벌였잖아?"

"아, 예. 그랬죠."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지만,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유리안에게 그런 가정사가 있었군.

"그래서 내가 예물로 고르는 척하면서 몰래 가지고 왔어. 너한테 돌려주려고."

"...감사합니다."

르니아는 감사 인사를 한 나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본 보석함이지만 왠지 모를 따뜻함과 애틋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안에는.

'...혼석.'

크라이파트 가문에서 소유하고 있던 혼석.

어머니의 유품이라는 보석함엔 그것을 목걸이로 만든 물건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게 유리안 어머니의 물건이었군.

유품이란 소리는 이제 고인이라는 뜻이겠지.

난 목걸이 중심에 있는 보석, '혼석'을 손으로 훑어보았다.

마법적인 처리를 한 것인지 피룬숲에서 얻은 혼석과 달리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렇게 얻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응? 뭐라고?"

"아닙니다. 어머니의 유품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르니아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며 인사를 하고 손에 들고 있는 보석함으로 눈길을 돌렸다.

차가운 금속의 촉감과 다른.

사무치는 그리움.

편안하면서 따뜻함.

안타깝지만 섭섭한 마음.

이것은 내가 느끼는 게 아니라 '유리안'이 느끼는 감정인 게 확실하다.

 

 

 

 

38화. 못된 혈육과 더 못된 혈육(3)

마차에서 보는 제도(帝都)의 밤.

은은한 가로등 불빛과 함께 도로 옆에 늘어진 세련된 양식의 건물들.

제국 5대 절경이라 불리는 이 모습도 인제 와서는 각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 되었다.

마차에 탑승한 체, 저택으로 귀가하던 난 르니아에게 건네받은 보석함으로 시선을 던졌다.

'...과정은 어땠든 목적은 이루긴 했네?'

사실 여러 가지 플랜을 구상해둔 상태였다.

결혼식에서 크라이파트 가문의 가주와 만나, 어떻게 인사를 하고, 자연스럽게 '혼석 목걸이'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갈 수 있을지 말이다.

'뭐, 결과만 좋으면 좋은 것이겠지.'

그래, 당연하고말고.

스스로 말에 수긍하며, 난 확보한 '혼석'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선, 누구에게도 보고하지 않고 단독으로 '혼석'을 확보한 이유는 훗날 여명회의 손에 들어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검성 측도 마찬가지다. 굳이 괜한 오해를 만들 법한 행위는 피하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이 혼석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

'...흡수할까?'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세계관 안에는 타이틀에 걸맞게 '마왕'이 존재한다.

마신을 깨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플레이어의 숙적이자, 최종 보스.

이 게임의 공략 목표는 마왕 바르바토스가 마신을 부활시키기 전에 그 마왕을 죽여 부활 의식을 막는 것이다.

만약 마왕을 저지 못 하면 마신이 부활하게 되어 공략 실패로 게임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여명회의 아크 비숍, 테넬론이 그 후보 중 하나고.'

그리고.

'...유리안도.'

▶ 특성, 「 마왕의 그릇 」

등급 : 전설

▷ 당신은 마신 바르바토스의 부활을 꾀하고 있습니다.

▷ 마신이 남긴 잔재 사념을 흡수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악' 성향 성물들이 사용 가능합니다.

▷ 이 특성은 '마왕'이 출현할 경우, 사라집니다.

동공에 들러붙은 것처럼 떠오른 UI.

보이는 것은 <타고난 검사>, <부정의 색>처럼 유리안이 처음부터 소유하고 있던 특성 중 하나이다.

이 특성을 활용해 마신의 잔재 사념을 흡수한다면, 분명 손쉽게 무력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성물인 마신의 뿔보단 안전하게 힘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이 경우의 수는 최후의 최후까지 남겨두고 싶다.

가뜩이나 <뜨인 눈> 특성이 발현되었을 때마다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느껴지는데, 그런 와중에 잔재 사념인 혼석까지 흡수한다면 내 본연의 자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예전처럼 힘이 절실하진 않으니까.'

그러니 흡수한다는 선택지는 우선 제외다.

***

저택에 도착한 난 침실 구석에 마련된 금고에 보석함을 넣고, 잠금을 걸어두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간단한 잠금 마법이라도 배워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일단 지금은 주린 배부터 채우도록 하자.

"...음?"

침실을 빠져나와 복도로 나오자,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저택의 분위기가 피부에 와닿았다.

<놀라운 직감>

공기의 흐름 속에 느껴지는 미묘한 기운

유리안은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 인해 미묘하게 달라진 저택의 변화와 자신을 이끄는 듯한 마나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저택에 불청객이 있다.

그런 확신이 들자, 허리춤에 찬 월장검을 확인한 뒤 천천히 복도를 걸어 나갔다.

'정확한 위치는 어디지? 목적은? 혼자인가, 아니면 둘 이상인가?'

온갖 의문들이 밀물처럼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다.

몇 가지 요소라면 '마나감지'로 파악할 수 있겠으나, 그런 짓을 했다간 내가 눈치챘다는 정보를 상대에게 제공하는 꼴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살기가 없다는 건가?'

그 말은 즉, '유리안'을 암살하러 온 녀석은 아니란 소리다.

그렇지만 이것을 다행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아무도 모르게 저택에 온 시점부터 내 목숨은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쌓아둔 '유리안'의 악행에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평소보다 을씨년스러운 복도를 나아갔다.

'마나감지'만큼은 아니더라도, '유리안' 몸이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직감은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다.

'...응접실?'

그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다름 아닌 응접실.

"어머, 생각한 것보다 늦게 돌아오셨네요?"

문을 열고 들어간 나를 반기는 건 은발의 머리카락이 허리춤까지 길게 늘어뜨린 여성, 엘레노아 드미셸이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테이블 위에 찻잔을 손에 쥐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적적해서 사용인분들에게 차를 부탁했어요. 손님에게 이 정도는 해주실 수 있겠죠?"

사람을 끌어당기는 고혹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그녀.

저택의 사용인들에겐 약속을 잡은 손님이 아니라면, 절대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상태다.

그런데도 그녀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둘 중 하나.

몰래 침입했거나, 아니면──.

'마법을 사용한 건가?'

어쩐지 저택이 평소보다 고요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특기인 매혹을 사용해 저택의 사용인들이 자리를 비우도록 만든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갑작스레 찾아온 그녀가 내 처지에선 달갑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혼석을 확보한 사실이 여명회에 알려졌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비숍 엘레노아로군요. 제 저택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같은 동료끼리 친목을 도모하러 온 거죠. 인간이란 사회적인 동물이잖아요?"

웃기지도 않는 말장난을.

친목을 도모하러 온 사람 주제에 남의 저택에 무단침입한단 말이야?

난 속으로는 열변을 토했지만 찔리는 것이 있는 상황인지라, 가벼운 엘레노아의 농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묻고 싶은 게 있어서에요."

탁자에 찻잔을 내려둔 엘레노아의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서자, 난 속으로 침을 삼켰다.

"최근 유리안 경이 맡았던 빈민가 쪽의 임무...."

예상한 것이 아닌 다른 주제가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곳에서 데몬을 발견했고, 토벌에 성공하셨다고 했죠?"

"예, 맞습니다."

"혹시 그 데몬은 인간형 데몬이었나요?"

난 슬그머니 시선을 올려 엘레노아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입술을 살짝 깨무는 모습.

크게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긴장한 기색을 살짝 내비쳤다.

그렇군.

그 물음으로부터 그녀가 저택에 찾아온 이유를 유추할 수 있었다.

"예, 인간형 데몬이었습니다."

"...역시나."

"하지만 테넬론 경이 빚은 뿔은 아니었죠.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을 참고한 레플리카인 것 같았습니다."

"예?"

깜짝 놀란 그녀의 반응에 난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왜 그러십니까? 이 말을 듣고 싶어서 찾아오신 것 아니셨습니까?"

약간 도발적인 어사(語辭).

아무래도 난 혼석을 숨겨두고 있는 탓에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되돌려보내고 싶은 입장이다. 그렇기에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는 것은 중요했다.

이야기를 끝낼 권한은 주도권을 잡은 쪽에 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시는 줄 알았는데... 어디까지 알고 있죠?"

"후후, 그리 많은 것을 알고 있진 않습니다."

"어머, 그런 사람이 뿔의 레플리카가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계시는군요?"

"운이 좋았나 봅니다."

게임에서 다 나오거든.

능청을 떨자, 그녀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뭐, 됐어요."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마음속 한구석에 응어리가 남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묻고 싶은 건 모두 물어보셨습니까?"

"예."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응접실의 입구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는 모습에 안심하려던 찰나, 엘레노아는 휙하고 고개를 돌렸다.

"비숍 유리안, 여명회의 현 사정을 꿰고 있는 당신이라면 앞으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현명한지 잘 아실 거예요."

심정을 토로하듯, 말을 늘어놓는 그녀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다못해 서로의 칼끝이 상대에게 향하진 않도록 해요. 적이 된다면 당신만큼이나 저도 까다로운 여자니까요."

자신의 편에 서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방관자가 되어라. 그런 뉘앙스의 말을 남긴 그녀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겨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

저택은 고요해졌다. 사용인들도 모두 자리를 비운지라, 내부에선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덕에 긴장이 풀린 난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깜짝 놀랐습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탓에 엘레노아 탓에 든 경각심.

아무래도 '혼석'을 저택에 보관하는 일은 현명하지 않다고 느꼈다.

언제 어디서 갑자기 나타날지 모를 불청객이 혼석의 기운을 느끼기라도 했다간, 내가 숨기고 있다는 것이 들통 날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곤란하다.

'저택이 아니라 다른 곳이 좋겠어.'

다행히도 이 혼석을 맡길 만한 곳은 금방 떠올랐다. 혼석이 뿜어대는 기운을 느낄 수 없으며, 검성과 여명회와 관계가 없는 자를 말이다.

***

"...이걸 맡기고 싶다는 말이냐?"

"예."

유리안이 슬그머니 미소를 짓자, 헤란드는 곤란한 기색을 보이며 수염을 매만졌다.

"의, 의외로구나... 난 요전에 있던 요슈아에 대한 처벌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다만."

"그때도 말했지만, 전 그리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 그러느냐? 다행이구나."

지팡이를 오른손에 쥔 헤란드는 화가 나지 않았다는 유리안의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후, 지팡이를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탁자 위에 놓인 보석함을 가리켰다.

"그런데 이건 뭐냐? 뭐길래 내게 맡기고 싶다는 것이냐?"

"제 어머니의 유품이 담긴 보석함입니다."

어머니.

그 단어가 유리안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헤란드는 순간 흠칫했다.

"미, 밀레나 님의 유품이라는 소리구나. 그런데 이걸 왜 내게...?"

어쩐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헤란드의 모습에 유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 물어보려 했으나, 일단 '혼석'을 맡기는 것이 우선이다.

"이... 이, 물건은 네게 소중한 것이 아니더냐?"

소중한 것이라.

하긴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리라.

이 혼석이 여명회와 같은 '마왕' 후보자들에 손에 들어간다면, 마신은 부활하고 대륙은 피폐해진다.

그렇게 된다면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두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맞습니다. 제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물건입니다."

"그, 그런 물건을 왜 내게... 맡기는 것이냐?"

"지금 제가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죠."

자신이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물건.

유리안의 그 말엔 거짓이 없었다.

현재 그가 남몰래 혼석을 확보한 사실을 남들이 안다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테니까.

그러나 헤란드의 입장에선 조금 다르게 들렸다.

'...미, 밀레나 님의 물건을 왜 가지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냐?'

그는 알고 있다.

아무리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사는 유리안이라고 할지언정,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게는 늘 진실만을 토로했다.

그녀 앞에서 짓는 웃음은 기만이 아니었으며, 평상시 남을 능멸하는 차가운 세 치 혀로 따뜻한 말들을 입에 담았다.

즉, '밀레나'라는 여성은 유리안에게 어머니임과 동시에 그에게 남은 실낱같은 '인간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 밀레나 님의 유품을 다른 이에게 맡기겠다는 것은....'

황실의 개로서.

온전히 괴물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는 것일까?

헤란드는 유리안의 의도를 알아챌 수 없었다. 그래서 두려움을 최대한 버텨내며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유리안, 무슨 결심이라도 한 게냐?"

그 '결심'이 무엇인지 헤란드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생각나는 것은 최근 '귀족 원로회'가 벌인 행보뿐.

유리안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예."

어쩜 이리 잔혹한 미소인가?

얼마 가지 않아, 황실에선 피바람이 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헤란드는 근심으로 숨이 막혀왔다.

 

 

 

 

39화. 고육지계

"요, 요슈아 도련님, 수건을 교체하러 왔습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뺨에 수건을 갖다 대고 있었던 요슈아. 그는 자신의 방에 차가운 물과 깨끗한 수건을 들어온 하녀를 게슴츠레 뜬 눈으로 쳐다보았다.

"바꿔!"

"네, 넵...!"

날이 선 목소리에 하녀는 바짝 긴장한 채 볼의 열기로 인해 미지근해진 요슈아의 수건을 바꿔주었다.

다시금 차가워진 수건.

그러나 그와 반대로 요슈아의 가슴 속에선 분노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열등한 방계 주제에...!'

요슈아는 자기 뺨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피도 옅은 방계인 주제에 크라이파트 가문 특유의 회색 머리카락을 진하게 타고난 남자.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안하무인인 그가 저지른 행위에 요슈아는 끓어오르는 분개(憤慨)를 참을 수 없었다.

- '검을 뽑아든 순간 당신은 크라이파트 가문의 요슈아가 아닌 검사 요슈아로서 제 앞에 서는 것이 되죠.'

오만방자한 말투.

모두를 업신여기는 비열한 웃음.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지 못하는 태도.

-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엇 하나 고귀한 '크라이파트 가문'에 걸맞지 않는 남자였으나 어쩐지 그의 물음에 요슈아는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본인 검술에 대한 자신감.

그것은 이미 고결함의 경지를 넘어선 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요슈아는 활화산처럼 끓는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어째서 그 남자인가?

크라이파트 가문의 일원 중, 하필이면 그 열등한 방계란 말인가?

어째서 검성은 그런 보잘것없는──.

찰박──!

연신 속으로 되묻던 요슈아는 자신 얼굴에 물이 튄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요, 요슈아 도련님 죄송합니다!"

그곳엔 수건을 교체해준 하녀가 있었다.

여분의 수건에 차가운 물을 먹이던 과정에서 물이 요슈아의 뺨에 튄 것이다.

그의 눈빛은 볼에 갖다 댄 수건의 차가움보다 서늘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하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순간.

"호출하셨습니까, 요슈아 도련님?"

익숙한 목소리.

자기가 사람을 부른 사실이 떠오르자, 요슈아는 들어 올린 손을 내리더니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알파스."

알파스 메이엔드.

제국에서도 강하기로 유명한 '청사자 기사단'의 부단장까지 올라간 실력자.

비록 부정한 짓을 저질러 기사 직위를 박탈당한 남자였지만, 검사로서의 실력은 제국에서도 인정받은 자다.

그런 알파스의 얼굴을 보자, 요슈아는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하녀를 바깥으로 내보냈다.

"내 뺨이 보이느냐?"

그러곤 요슈아는 자신의 부어오른 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예, 보입니다. 도련님."

"이 지경이 될 동안 경호대의 일원인 넌 어디서 뭘 하고 있었지?"

"요슈아 도련님. 전 가주님의 명을 받고...."

"그딴 걸 물은 게 아니야! 네 역할은 크라이파트 가문의 직계를 경호하는 것이잖아!"

분노에 몸을 맡긴 채 말하던 요슈아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요슈아는 끓는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먼저였다.

"역시.... 너 같은 패배자를 경호대로 들이는 것이 아니었어."

"죄송합니다. 요슈아 도련님."

잘못을 인정하는 알파스에게 요슈아는 비아냥거리는 조소 지었다.

"죄송한 건 알고 있나 봐? 어차피 그 자리에 있어봤자 겁을 먹고, 아무 것도 못 했겠지만."

요슈아는 무시하는 듯한 말을 내뱉으면서 물이 잔뜩 머금은 수건을 손에 들었다.

철썩──!

그 수건을 곧장 알파스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머저리 같은 새끼."

흠뻑 젖은 수건이 알파스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말끔하게 관리했던 그의 머리는 산발이 되어 이리저리 흩어졌고, 제복 상의는 물 자국으로 가득했다.

그런 모욕을 당했음에도 알파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반쪽짜리 방계에게 모욕을 당한 것도 모자라 헤란드 형님에게는 꾸지람도 들었다! 그게 내 입장에서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어!?"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수모를 갚을 방법을 알아 오란 말이야!"

요슈아의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화마(火魔)는 잠잠해질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요슈아 도련님, 유리안에게 복수하고 싶으십니까?"

알파스는 분노에 찬 요슈아의 가슴에 장작을 던졌다.

"뭐?"

요슈아의 되물음에 알파스는 자신의 망가진 머리를 손질했다.

"묘수라도 있는 게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그렇다면 당장 말해!"

요슈아는 알파스가 하는 말을 끊고, 일갈하듯 소리치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금의 유리안은 확실히 강합니다. 일반적인 기사들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을 지닌 검사입니다."

알다마다.

부정하고 싶지만, 인정해야 할 현실이다.

"하지만 그 실력의 기반은 오러. 그가 체내에 가지고 있는 막대한 양의 마나입니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이냐!"

"집중력 증진, 자세 교정, 근육 강화 기타 등등. 모든 행위에 오러를 불어넣어도 부족하지 않을 마나와 그 활용의 정점이라 부를 수 있는 월광검."

"그래서 뭐? 내가 듣고 싶은 건 그딴 게 아니야!"

눈앞의 남자, 알파스는 명실상부한 제국에 포진한 괴물들 중 한 명.

유리안의 실력에는 비할 바 없이 초라하지만, 그래도 제국의 별 중에 한 명이었다.

그런 알파스의 입으로 유리안의 강점을 듣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롯이 유리안.

그 천한 방계의 드높은 콧대를 짓밟을 방법.

"그런 유리안의 강점인 오러를 사용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요슈아 도련님에게도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제국의 별들에 범접할 정도의 무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으나, 요슈아도 어느 정도 검술에 능한 편이기에 일반기사 정도는 능히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

잠시 생각에 잠긴 요슈아에게 알파스는 품속에서 작은 광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은은한 푸른 빛이 감도는 광석.

이것을 세간에서 '공명석'이라 부르는 것쯤은 요슈아도 알고 있다.

"그건 공명석이 아니냐?"

"지금 생산되는 공명석이 아닌 '실패한 공명석'입니다."

"...실패?"

"예. 본디 공명석이란 데몬이 보유한 마기를 강제로 억눌러 심리적 거부감을 들게 만드는 장치죠."

알고 있다.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알파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실패작은 데몬의 '마기'뿐만이 일반적인 '마나'의 흐름도 억누릅니다."

"마나도?"

의문에 답을 주기 위함인지, 알파스는 품속에서 꺼낸 실패작을 요슈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윽?"

그러자 요슈아는 신체에 모종의 이상을 느꼈다. 지금까지 선명하게 느껴졌던 대기와 몸속의 마나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진 것이다.

"이것으로 만든 간이 결계는 마나의 흐름에 지장을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리안의 장기인 오러도, 월광검도 사용할 수 없을 테죠."

그의 말대로 이 공명석으로 결계를 형성한다면 오러를 사용하기 껄끄러운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그렇지만, 네 말대로라면 나 또한 오러를 사용하지 못할 텐데?"

"그래도 유리안과의 간극을 조금은 메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분명 그의 말대로 간극을 메울 순 있겠지.

그렇지만 장점을 하나 지운다고 해서 '웃는 처형대'란 괴물의 역량에 따라잡을 수 있을까?

그 의문이 요슈아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도중이었다.

"그리고 부족한 나머지 차이는 이것으로 메울 수 있겠죠."

그의 의문을 눈치라도 챘는지, 알파스는 다시금 품속에서 자그마한 상자를 꺼내 들었다.

"...뿔?"

그 상자에 담긴 것은 거북한 마기를 내뿜는, 작은 데몬의 뿔이었다.

***

'헤란드가 흔쾌히 허락해줘서 다행이군.'

이야기를 끝마친 난 헤란드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여명회와 검성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그로 인해 관계자가 접근할 걱정 없는 외부인.

분명 웬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발각될 리 없겠지.

이렇게 걱정거리 하나를 덜었구나.

그리 생각하며, '감은 눈' 집무실에 가져다 둔 난을 손질하던 찰나였다.

벌컥!

"유리안 경! 경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여명회 인원들 몇 명이 모여 기습을 모의하고 있습니다!"

움찔.

갑작스럽게 들어온 라즈롯의 말에 손질하던 난의 끝부분이 살짝 꺾여 버렸다.

"그게 확실합니까?"

"...예. 겐멜 수도원에서 직접 들은 것입니다."

"혹시..., 비숍 중에 관계된 자가 있습니까?"

난데없는 기습 모의에 어안이 벙벙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것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작당을 이루는 것들의 정체다.

특히 '비숍'급이 연관되어 있다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것이다.

표면적으로 '여명회'의 중심은 아크 비숍이지만 그 밑에 속해 있는 비숍들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여명회에 들어온 사람들.

자기네들의 이익을 위해서 유리안을 제거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아, 아마도 없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그럼 비숍도 아닌 녀석들이 저에게 기습을 가한다고요? 후후."

그건 불행 중 다행이군.

정확하게는 아직은 날 적대하는 비숍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부러진 난초의 끄트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러자 갑자기 보고하던 라즈롯의 머리 위로 '보라색 아지랑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한 '공포'의 감정.

왜? 고작해야 난초를 매만졌을 뿐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에게 질문하는 와중에도 라즈롯의 시선은 어긋난 난(蘭) 끝자락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글쎄요, 아직 행동으로 옮긴 것도 아니니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작당 모의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심증뿐 확증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움직여봤자,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한 발 뒤로 물러나서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자.'

괜히 이쪽에서 먼저 나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모의(謀議)라는 것은 행동으로 이어지기 전까지는 그저 모의일 뿐이 아닌가?

어쩌면 그냥 그렇게 계획이 무산될 수도 있는 노릇이고 말이야.

"...꿀꺽."

생각을 정리하던 도중, 시선을 돌리니 라즈롯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뚜렷하게 보이는 '공포'의 색.

이중 첩자 노릇을 하게 된 것이 어지간히 불편했는지, 그의 얼굴엔 어색한 기색이 역력했다.

앞으로 서로 신세를 질 사이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자, 오지랖일 수도 있으나 저 긴장을 풀어주도록 잡담을 잠깐 나누기로 마음먹었다.

뭐가 좋을까... 아, 그래.

"본래 건강한 난초는 이런 식으로 잎이 구겨지지 않습니다."

"예?"

조금 전까지 난초에 관심을 보였지? 흥미가 있어 보이는 것 같으니 잠깐 팁이라도 건네주자.

"이런 경우, 대부분 문제는 뿌리에 있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라즈롯의 대답을 들은 난 화분의 흙을 가볍게 털어낸 뒤, 조심스레 난초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수많은 뿌리가 모습을 드러냈고 내 예상대로 한 줄기의 뿌리가 누렇게 변색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제 말대로 뿌리 하나가 썩어있죠? 이런 식으로 썩은 뿌리 하나는 난초란 식물의 전신을 갉아 먹습니다."

"예, 예...."

대답하는 라즈롯을 뒤로 하고, 난 뿌리에 손을 갖다 대었다.

"하지만 난초를 관리할 땐 이런 것도 대비해 뿌리 하나를 외곽 쪽으로 밀어둡니다."

혹여나 뿌리가 상할 일이 일어났을 때, 다른 뿌리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미끼처럼 말이죠."

파삭──!

손으로 뿌리를 잘라낸 뒤, 다시금 난초를 화분에 집어넣은 난 뿌듯한 얼굴로 라즈롯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이런 시시한 잡담 정도면, 긴장감을 누그러뜨리는 데 충분하겠지?

"역시.... 방관하는 이유는 이번 기회에 반대 세력을 모조리 뿌리 뽑기 위해...."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라즈롯의 머리 위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40화. 아카데미의 불청객(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