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아일린 드 도나시엥(2)
사람을 소개해주는 대신 일을 부탁한 아일린.
그 제안을 승낙한 뒤, 그녀의 뒤를 쫓자 도착한 곳은 바이엘 아카데미였다.
미려한 광경.
황궁처럼 색의 콘트라스트를 잘 이용해 제국 7대 절경으로 불릴 정도는 아니었으나 튀는 곳 없는 자연스러움은 안정된 느낌을 주었다.
'안정이라.'
분명, 이런 기분을 느끼는 이유는 이 바이엘 아카데미가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주무대 중 하나인 까닭도 있을 것이다.
이곳은 주인공인 '하이든 라이히'와 꽤나 인연이 깊은 장소다.
처음으로 그가 '유리안'을 본 곳이기도 하며, 그의 과거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곳.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자주 보는 장소였다.
"그래서 부탁할 일은 뭡니까, 아일린 양?"
"간단한 일이에요."
아일린은 잘 닦여진 아카데미의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당신이 제일 잘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잠자코, 그녀의 뒤를 따라 걷고 있자니 주변의 시선들이 이쪽으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개중에는 '공포'의 색을 띄우는 자도 있었으며 힐끔힐끔 쳐다보며 경계하는 자들도 있었다.
"아일린 양, 구관에 가십니까?"
그때, 길 한복판에서 아일린에게 말을 걸어온 남자가 있었다.
어깨엔 '4위계, 레오'의 표식. 그리고 바이엘 아카데미의 교수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바이엘 아카데미에서 마법을 지도하는 교수이자, 마법사였다.
"네, 하디 고드프리 경."
아일린은 싱긋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유리안 님도 반갑습니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군요."
"예, 반갑습니다."
남자는 내게도 아는 척을 했다.
인사를 받아주며 작게 미소를 띠자 그는 잠깐 흠칫하더니 재빨리 아일린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건 그렇고, 아일린 양도 참 귀찮은 일을 맡게 되었군요."
"귀찮은 일이라뇨, 학생들을 위한 일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귀찮은 일이라 생각한 적 없어요."
"그렇습니까? 하긴, 출신을 따지면 아일린 양이 불만을 품을 만한 사항은 아니긴 하죠."
슬쩍 모멸 어린 웃음을 짓는 남자.
단순히 아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그걸 넘어 만나면 불편한 사이인가 보군.
"방계 출신 딱지를 떼려면 참고 노력해야 할 테니까요."
"그럼 하디 경도 참아야 할 게 있겠네요."
아일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뭘 말입니까?"
"저번 논문 심사에서 저보다 박한 평가를 받으셨잖아요. 방계인 저보다 더."
"뭐, 뭣...."
남자는 얼굴을 붉혔다.
덕분에 조금 전까지는 낌새만 보이던 멸시의 시선은 더욱 더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번거로운 일을 맡아 걱정을 해줬건만 감사 인사는커녕 모독하다니."
"어머, 저도 걱정을 해준 건데요?"
"누가 누구를 걱정한다는 겁니까!?"
높아지는 언성.
이거 잘못하다가 설전을 넘어서 싸우는 거 아닌지 몰라.
"하여간, 이래서 방계 출신의 버러지들은 등용하면 안 되는 겁니다. 자기의 분수도 모르는...."
"하디 경께선 그리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윽...."
내가 끼어들지 몰랐는지 그는 당황한 듯 보였다.
그래, 솔직히 내 일도 아니고 끼어들어 봤자 좋을 거 하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일분일초가 아까운 지금 여기서 괜한 일로 시간을 소모할 생각이 없다.
특히나 별 시답지 않은 시비 때문이라면 더 그렇다.
"방계든 직계든 상관없이 모든 귀족은 제국의 신민입니다. 방금 그 말은 제국의 규율을 쌓아 올리신 황제 폐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도 될는지요?"
"...유리안 경, 이, 이야기를 너무 비약하는 것 아니십니까? 저는 단순히 방계 혈통의 부족함을 말했을 뿐...."
"그렇습니까?"
고갤 끄덕이는 그를 보며 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도 방계 출신입니다. 하디 경의 말대로라면, 저도 부족한 족속들이란 소리시군요."
"...."
후후, 하고 짧게 미소를 짓자 남자는 점차 얼굴이 굳어갔다. 이윽고 머리 위에는 보라색 아지랑이가 나타났다.
보란 듯이 허리춤에 찬 검집을 툭툭 건드리자 공포의 색은 맹렬히 흔들렸다.
"쓸데없는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건 아카데미 교수답지 않군요. 제가 직접 베어 보니 혈통의 고귀함과는 상관없이 피는 붉었으니까요. 혹시 확인이 필요하십니까?"
"...딸꾹."
남자는 딸꾹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검집을 건드리는 시늉만 했을 뿐 뽑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괜한 시비를 걸면 어떻게 되는지 이 김에 뼈저리게 알았으면 좋겠군.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갑시다, 아일린 양."
"네? 아... 네."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아일린은 걷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남자에게 묵례한 뒤 따랐다.
"...진짜 검을 뽑으려고 한 건 아니시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일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금 전, 겁을 준 것 때문인 모양이다.
"설마, 그랬겠습니까?"
"그건 다행이네요."
그녀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 고마워요."
"뭐가 말입니까?"
"그낭요. 귀찮은 일 대신 해줘서."
"별말씀을."
얼마 지나지 않아 구관(舊館)이 눈에 들어왔다.
바이엘 아카데미의 막대한 예산을 자랑하기라도 하는 듯, 구관 또한 신관 못지않게 세련된 건축 양식으로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규모가 작은 것도 아니다.
이런 건물을 '구관'이라며 방치하고 있는 모습은 심히 돈 X랄이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제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뭡니까?"
"아까도 말했잖아요. 당신이 가장 잘하는 일이라고."
한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의 구관을 훑어본 뒤, 다시금 아일린에게 시선을 옮기자 그녀는 말을 이었다.
"데몬 잡는 일."
데몬을 잡는다고?
바이엘 아카데미에서?
"이곳은 공명석의 결계로 보호를 받고 있을 텐데요."
"저도 그리 믿기진 않았어요. 그런데, 구관 안에서 작은 생물이 감지되었거든요."
아일린은 나침반처럼 생긴 케이스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안에는 푸르스름한 빛을 뽐내는 돌, '공명석'이 들어있었다.
"크기를 보아하니, 그리 크진 않은 것 같은데...."
"공명석이 반응하는 것을 보아하니, 확실히 데몬이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크기라면 내버려 둬도 상관없을 정도로 작은 데몬이에요. 하지만, 최근 데몬의 출몰이 잦아지고 있고 피해 사례도 많아지고 있잖아요?"
빈민가에서의 사건도 있었고, 아일린은 그렇게 덧붙였다.
"분위기가 흉흉하니, 구관을 개방하기 전에 처리해두는 게 좋다고 결정이 났어요. 게다가, 최근엔 마신을 숭배하는 종교도 생겨났다고 하던데... 참 할 일도 없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일린은 구관의 데몬을 처리를 맡았다는 거다.
본래라면 기사나, '감은 눈' 같은 데몬 처리에 특화된 인원을 투입해야 정상이었지만, 지금 이 구관에 있는 데몬은 공명석의 결계에 미치지 않을 정도로 작은 크기. 그 탓인지 아카데미 측에서도 일을 크게 벌리고 싶진 않은 모양이다.
"문제는 이 데몬이 크기가 너무 작아 결계의 영향권에도 밖이고, 탐지 마법으로도 제대로 찾을 수 없다는 거예요."
"곤란하시겠군요."
"네, 아주 곤란해요. 이 넓은 구관에서 공명석에도 잡히지 않는 데몬을 어떻게 처리하라는 건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하던 아일린은 슬쩍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데, 어때요?"
"흠...."
나는 짧게 신음을 흘렸다.
말마따나, 지금 눈앞에 보이는 구관의 크기는 굉장히 넓었다.
한눈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넓은 크기의 구관.
이곳에서 감지되지 않는 작은 데몬을 죽이는 일은 사막에서 바늘 찾는 일처럼 쉽지 않은 일.
조금 전 하디란 남자에게 성가신 일을 맡게 되었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 방법을 쓰면 되려나.'
물론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시, 당신이라고 해도 가능하진...."
말을 잇던 그녀를 뒤로하고 난 구관 입구의 문을 열어젖혔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쿰쿰한 냄새가 날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구관은 의외로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복도를 가로질러 중앙에 도착한 난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체내의 '마나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숨을 고르고, 다시금 내쉬며 여러 차례 반복하자 '마나혈'들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속에선 은은하게 마나가 흘러나왔다.
빈민가에서 숨어있던 범죄자들을 찾아냈던 기술, '마나 탐지'다.
"...그걸로 찾아낼 수 있었으면 저도 진즉에 찾아냈죠."
아일린은 곁에서 중얼거렸다.
하긴, '마나 탐지'는 어디까지나 마법사들의 영역. 마법의 설정과 이론만 알 뿐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내가 아일린보다 '마나 탐지'를 능히 다룰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럼 방법이 없는 건가... 응?'
그때, 구관에 퍼져나가는 마나들 사이로 특수한 '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부정의 색>.
상대방이 품는 부정적인 감정을 보여주는 특성. 그러나, 그 '색'이 보이는 위치는 인간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 통로들이었다.
예를 들자면 천장 같은 곳 말이다.
"제 말 듣고 있어요? 너무 작은 개체는 마나 탐지로도...."
쉿.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그녀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더니 입을 닫았다.
나는 한층 더 많은 양의 마나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요동치던 마나들은 마치 기사가 사용하는 '오러'처럼 가시화되었다.
공기처럼 구관 복도를 가득 메운 그것을 보며 아일린에게 물었다.
"혹시, 건물에 손상이 생기면 제가 물어야 합니까?"
"네? 아... 아닐 거에요. 어차피 리모델링을 할 예정이었으니까."
잘됐군요.
검을 뽑아 들어 천장을 베어냈다.
파삭──!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천장에 순식간에 균열이 생겼다.
돌 부스러기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고.
"어, 어!?"
작은 발바닥이 안간힘을 쓰며 천장으로 올라가려는 것이 보였다.
"쥐에 기생한 데몬인 모양이군요. 저렇게 작으니, 결계와 감지가 무용지물이었겠죠."
천장 위로 필사적으로 오르려던 녀석.
난 다시금 검을 휘둘러 녀석을 떨어뜨렸다. 그후, 떨어지는 몸통을 베어내 숨통을 확실하게 끊었다.
그리곤 다시금 마나들을 더 넓게 퍼트리기 시작했다.
<부정의 색>이 보인다면, 다른 데몬이 있는 것이 되겠으나 다행히도 방금 죽은 녀석 외에는 다른 개체가 없는 모양이다.
"이 녀석 말고는 없는 모양입니다. 다행이군요, 일이 쉽게 끝나서."
"...어떻게 알았어요?"
"뭘 말입니까?"
"데몬의 위치요! 공명석의 결계도, 감지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작은 녀석인데 어떻게 알았냐구요."
날 보채듯 물었지만 쉽게 대답할 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떻게 말하겠는가?
데몬이 뿜어내던 <부정의 색>을 읽어 그 위치를 알았다고.
눈에 보일 정도로 짙은 마나를 사방에 흩뿌린 것도 그 <부정의 색>을 보다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비밀입니다."
둘러대자 아일린은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21화. 괜히 도와줬다!
지금 눈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노인의 이름은 '알롬 초르니'.
아일린에게 소개를 받은 사람으로 바이엘 아카데미의 부 교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관리하기 까다로워 보이는 수염을 한 손으로 훑으며 입을 열었다.
"이 작품을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구려."
"그렇습니까?"
"그렇소, 코루시어스란 대화가(大畫家)의 유작(遺作) '적색 포도밭'...."
가져온 그림을 훑어본 알롬은 어딘가 아련한 듯 중얼거렸다.
"짙푸른 먹구름 아래에서 격렬하게 흔들리는 밀밭, 검은 까마귀들은 낮게 날고 있지요. 그 밀밭 뒤로는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몇 갈래의 길들이 보입니다...."
그림이 담고 있는 그 너머를 보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게 무엇인지 난 알 턱이 없지만.
뭔데 그 너머가.
"폭풍의 하늘에 휘감긴 전경, 이 그림을 그린 코루시어스는 물질적으로 크게 지원해주던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지요. 내 슬픔과 극도의 고독을 이 그림에 담았다."
알롬은 고개를 돌려 나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마치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예, 맞습니다."
간단하게 맞장구.
아주 심플한 대응을 해주자 알롬의 얼굴엔 약간의 실망이 서렸다. 동시에 머리 위에는 '회색 아지랑이'가 엿보였다.
<부정의 색> 의미는 '의심'.
알롬이 원하던 것이 단순한 긍정이 아닌 예술에 대한 '공감'임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런 젠장.
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그림을 비싸게 팔기 위해선 상대방의 눈치도 살필 필요가 있겠지.
'유작... 유작... 아.'
그래, 이런 식으로 말하자.
"코루시어스란 대화가는 이 작품을 남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게 되지요."
"...그렇지요, 이 그림처럼 적색의 포도밭에서 말입니다."
알롬은 몇 초간 눈을 감고 명상을 취했다.
내 대답이 잘 먹혔나?
그의 머리 위에 회색 아지랑이가 사라져 있었다.
"설마 예술에 견문이 있을 줄이야, 난 상상도 못 했구려."
"본디, 사람의 깊은 부분은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진 모르기 마련이니까요. 당연합니다."
"그렇구려."
알롬 부교감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금액에 관해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유리안 경?"
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난 예술에 대해 왈가왈부하러 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알롬은 점잖은 척 헛기침을 한 번 내뱉었다.
"감정은 필요 없겠죠. 그 유리안 경이 제대로 되지 않은 물건을 가져왔을 리가 없을 테고 말이요."
"감은 눈의 명예를 걸고 진품임을 보증합니다."
나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일린이 말해주기 전까지 이게 진품인지 가품인지 몰랐지만 상관없는 얘기지.
"그럼... 이 정도는 어떻겠습니까?"
알롬은 이쪽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손가락 4개를 펼쳐 내게 보여주었다.
4만 나르인가.
월장석을 구매하고도 넉넉하게 자금이 남을 정도다.
'조금 아쉬운 가격이군.'
예상한 가격보단 많지만 아쉬운 것은 사실.
조금이라도 수중에 돈이 남았으면 하는 바람에 흥정에 나섰다.
"코루시어스란 화가는 생애에 그리 큰 성공을 거둔 화가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유리안 경."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엄청난 명화로 손꼽히는 작품들이지만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그의 사후. 생전에는 여타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삶을 살았죠."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머리 위로 '회색 아지랑이'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공감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코루시어스가 남긴 유작입니다. 생전 불우했던 그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어준 작품."
다시금 힐끔.
여전히 아지랑이는 보이지 않는다.
"죽은 뒤 황금기를 가져온 작품. 그런 명화가의 인생을 대변하는 작품인 그림치고는... 취급이 조금 박한 게 아닐까요?"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난 예술을 모른다.
'하지만, 주어진 정보만으로 포장하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하지.'
적당한 사실을 버무려 그럴싸한 가치를 주장하는 건 어렵지 않다. 어디까지나 사실을 기반해서 하는 평가에 불과하니까.
'다만, 말실수하면 말짱 도루묵이 될 수 있겠으나....'
내겐 <부정의 색>이 있다.
이걸로 상대 의중을 파악해 실수는 바로 잡을 수 있다. 리스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끄응...."
인상을 잔뜩 찌푸리긴 했으나 거절할 것 같진 않다.
"그, 그렇다면... 조금 더 가격을 얹어서...."
"예."
"10만 나르를 더 얹어...."
음.
'뭐라고?'
10만 나르를 얹는다고? 처음 제시한 금액보다 많은 돈을 얹는 게──.
"50만 나르는 어떤가?"
'5... 50만 나르?!'
잠깐, 처음 펼친 손가락 하나당 1만 나르를 의미한 게 아니었어?!
'이 그림이 5억이 넘어간다는 소리야?'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화들짝 놀랐지만 유리안 특유의 얼굴 근육과 미소가 표정을 관리해주었다.
"이제야 가치를 알아주시는군요."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뻔뻔하게 말했다.
***
일을 끝마쳤다고 보고하자, 아카데미의 관계자들은 감탄을 마지않았다.
"하루 만에 구관 일을 처리하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말입니다. 역시 도나시엥 가문 출신은 일 처리가 남다르시군요."
아무렴.
몇 날 며칠이 걸릴지 예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걸 하루 만에 처리했으니 감탄할 수밖에.
"방계 주제에...."
"또 콧대가 높아지겠네."
물론 멸시의 시선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근거 없는 비방은 겁먹은 강아지가 짖는 거에 불과하다.
아일린은 그들을 향해 대놓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빌어먹을 방계가...."
"천한 것 주제에...."
그들의 잔뜩 구겨진 얼굴을 본 뒤, 행정실을 빠져나온 아일린.
그들의 분에 찬 얼굴이 떠올라 피식하고 웃었다.
저들이 '방계'란 이유로 자신을 싫어하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대놓고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도나시엥'이란 가문이 자신이 속해있는 가문보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탓이겠지.
'방계는 늘 증명해야만 한다.'
아버지가 늘 해주던 말.
아무리 방계라고 해도, 고고하게 자신을 증명해나간다면 그것은 이미 귀족. 혈통과는 무관하다.
"...윽."
하지만 그런 아일린도 비교적 최근에 잠시 마음이 크게 흔들린 적이 있었다.
- '도나시엥 가문의 반쪽짜리, 누가 말을 걸어도 좋다 허락했습니까?'
유리안의 그 발언은 충격이 컸다.
그가 입에 담았기에 더 심했다.
'그도 그럴 게... 나랑 같은 방계잖아.'
같은 비루한 혈통끼리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분통이 터지는 일이 아닌가.
'누군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도와주지 못할망정....'
그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방계'의 이름도, '크라이파트'라는 이름도 더럽히는 감정 없는 검이다.
온갖 악명으로 점칠 된 자.
- '방계든 직계든 상관없이 모든 귀족은 제국의 신민입니다. 방금 그 말은 제국의 규율을 쌓아 올리신 황제 폐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도 될는지요?'
그런데 왜.
- '저도 방계 출신입니다. 하디 경의 말대로라면 저도 부족한 족속들이란 소리시군요.'
근데 왜 그가 갑자기 그런 말을 했을까.
그는 자신의 혈통과 가문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원하는 것이라곤 오롯이 자신의 출세, 그리고 스승인 '검성'을 뛰어넘기 위한 무력뿐.
'...이제 와서?'
이미 더럽혀진 이름, 지금부터 바뀐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그래도. 그녀는 생각했다.
예전처럼, 아카데미 재학할 때의 유리안으로 돌아온다면.
주변에서 혈통을 운운하며, 자신을 깎아내리려고 한들 압도적인 실력과 고귀함으로 자신을 증명해온 유리안으로 돌아온다면.
그렇다면──.
"아일린 양, 마침 잘 만났구려."
사념에 잠겨있던 아일린은 뒤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바이엘 아카데미의 부교감, 알롬 초르니가 식은땀을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알롬 부교감님."
아일린이 인사를 하자, 알롬은 수염을 한 번 쓸어넘기며 난색이 깃든 웃음을 보였다.
"역시 유리안 경과 이야기하는 건 숨이 턱턱 막힙니다. 이 나이를 먹으면서 수많은 기사나, 마법사들을 봤지만 저리 살벌한 기백을 내뿜는 건 검성 하이든 라이히 경 말고는 본 적이 없구려."
"대단한 사람이기는 하죠. 어... 이야기는 잘 끝났나요?"
둘이 만날 수 있게 주선한 사람이 아일린이었다.
책임을 느끼고 묻자 그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아주 마음에 듭니다! 코루시어스의 '적색 포도밭'은 제가 아주 구하고 싶었던 작품이었지요! 지출이 뼈아프긴 하지만 그 작품을 이렇게 손에 넣을 줄이야...."
"그거 잘됐네요."
"다 아일린 양 덕분이지요. 하하하!"
크게 웃어 젖히던 알롬은 헛기침하며 들뜬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러고 보니 구관의 일을 끝마쳤다고 들었는데...."
"네."
"그거 잘 됐구려. 쯧... 여명회란 이단들이 활개를 치고 있단 소문이 돌던데, 그 탓에 아일린 양이 괜한 일을 맡았구려."
여명회(黎明會)
최근 제국에서 생겨난 데몬 신봉 단체.
아일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처리해두는 게 좋죠."
"그렇게라도 생각하니 다행이구려."
"아, 유리안 경은 돌아갔나요?"
"금액 일부를 현금으로 받더니, 급히 빠져나가더구려. 뭔가 사고 싶었던 게 있었는지...."
"그 유리안이 사고 싶어 하는 물건이라 저도 참 궁금... 아!"
갑작스레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아일린은 탄식을 흘렸다.
"죄송해요, 알롬 부 교감님. 급한 용무가 생각나서!"
"무슨 일이라도...?"
"이번에 마탑에 제출할 논문 때문에 월장석을 마련해야 하거든요!"
정중하게 인사를 한 아일린은 다급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갔다.
***
"네!? 월장석이... 하나도 안 남았다구요!?"
베네딕트 삼거리의 귀금속점, '델란의 눈물'에 도착한 아일린은 주인장의 말에 큰소리로 반문했다.
"예, 죄송합니다. 아일린 님."
"부, 분명 충분한 양을 준비해놨다고... 그, 그리고 제가 구매를 원한다고 미리 말해두지 않았나요?"
"그게, 처음에 월장석을 주문하신 분께서 가져가신 것이라서요. 그분께서 먼저 선약을 해둔 상태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아일린은 월장석이 남지 않았다는 말에 어깨가 추욱 쳐졌다.
마나를 구성하는 제 5원소 중, 금(金)의 원소를 주력으로 다루는 그녀는 이번에 '금속에 담긴 마나'라는 주제로 논문을 작성할 예정이었다.
근데 월장석이 없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혹시, 누가 구매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 많은 양의 월장석이라면 분명 다 사용하지 못하고 남았을 테니까요."
"그게...."
주인장인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대답했다.
"유, 유리안 경이십니다."
"네!?"
- '금액 일부를 현금으로 받더니, 급히 빠져나가더구려. 뭔가 사고 싶었던 게 있었는지....'
누가 알았을까.
급전이 필요했던 이유가 자신처럼 '월장석'을 구매하기 위함이었는지를.
"그 많은 양을요!? 대체 어디에 사용하려고?"
분명, 귀금속점 '델란의 눈물'에서 취급한 월장석의 양은 쉽게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걸 모두 사갈 정도라니, 대체 어디에 사용하려고?
"검을 만들기 위해서라 하셨습니다."
"검이요? 그런...."
그 귀한 것으로 검을 만든다고?
다른 좋은 소재들을 놔두고!?
'월장석은 보석이란 말이야...!'
사치를 부리기 좋아하는 유리안이다. 분명, 보석 검을 만들어 집에 장식하려는 생각이겠지.
"보석으로... 대체 무슨 검을 만들겠다고!"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이 그림을 팔 수 있도록 사람을 소개해준 탓에 이런 꼴이 된 것이 아닌가?
'바뀌기는 무슨, 그냥 도움이 안 돼!'
아일린은 바꿀 뻔했던 그에 대한 평가를 되돌리며 속으로 울분에 찬 소리를 내뱉었다.
22화. 몸에 맞는 옷(1)
땅, 땅──!
대장장이가 쇠붙이에 망치를 내려치는 소리. 그리고 새빨갛게 달군 철을 찬물에 담가 식히는 모습.
칸을 나눈 유리막 너머로 흔히 판타지에서나 볼 수 있는 대장간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으나....
"그건 검이 아니라 공예품에 불과하다. 그런 걸 만드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바로 앞에 앉아 인상을 쓰고 있는 노인의 모습에 다시금 이내 현실로 돌아왔다.
흰 머리가 자욱한 노인의 이름은 '루거 올랜드'.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대장간인 '어스름 불꽃'의 주인장.
그리고 검성 '하이든 라이히'의 검을 만들어준 대장장이다.
"공예품이 아닙니다."
"아니, 그런 건 공예품에 불과하다. 니가 가져 온 설계도를 한 번 봐라!"
쾅──!!
성을 내며, 루거는 나무로 만든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올려두었던 설계도 한 장이 펄럭이며 얕게 흔들렸다.
사실 '설계도'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낯부끄러운 물건이다. 그저, '월장석'을 이용한 검을 만들기 위해 참고할 수 있는 몇 가지 사항들을 적어둔 것에 불과하니까.
"이 설계도대로면, 네가 만들고 싶은 것은 검이 아니라 공예품이 맞다. 보석으로 만든 검이라니... 그걸 어떻게 무구라고 말할 수 있겠냐!"
날카로운 루거의 두 눈에는 내가 올려둔 설계도가 담겼다.
"우리 '어스름 불꽃'에선 오롯이 기사들을 위한 무구를 만들고 있다. 그러니, 아까도 말했듯 공예품이라면 다른 곳에서...."
"저도 몇 번이나 말했지만, 공예품을 만들러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무구를 만들러 온 것이죠."
찌릿.
루거의 눈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무구라고? 네가 넘겨준 설계도를 보면... 검의 중심부에 월장석을 박지 않느냐?"
"예."
"월장석은 보석이다. 일반적인 금속에 비해 훨씬 강도가 부족하지. 설계도를 보아하니, '마나혈'을 새기려는 모양인데, 한 번 휘두르면 쉽게 파손될 거다."
"상관없습니다. 일단 진행해주시죠."
말을 해도 들어 먹지 않는 내 태도에 화가 났는지 루거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미모의 여성이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루피나 올랜드.
눈앞에 보이는 고약한 노인네, 루거 올랜드의 손녀다.
"그, 유리안 경... 저희가 만든 무구에 아주 작게 대장간의 로고를 박아둡니다. 그런데 그런 무구들이 쉽게 부서져 버린다면 저희가 쌓아 올린 브랜드 가치가 손상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흠...."
"월장석은 보석입니다. 보석으로 중심을 잡은 검은 쉽게 부서질 수밖에 없죠. 유리안 경도 저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납득이 되는 얘기였다.
기사들에게 파는 무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강도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내가 대장간 '어스름 불꽃'에서 받은 검을 휘두르다 박살이 나버린다면 그걸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은 뭐라 생각하겠는가?
'저 브랜드는 쓰레기다.'
심지어 알아보기 쉽도록 작지만 로고를 박아둔다고 하니 원.
마음 같아선 다른 대장간에 일을 맡겨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 '어스름 불꽃'이란 대장간은 내게도 꽤나 인상 깊은 곳이었으니.
'무려, 검성 하이든 라이히의 검을 만들어준 곳이니까.'
즉, 품질 보증은 확실히 된 곳이란 소리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잠깐 고민을 하던 사이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결국, 이 사람이 지키고자 하는 건 브랜드 가치.
"그럼, 제가 그 검을 부러지지 않도록 사용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뭐?"
그렇다면 해답은 간단하다.
내가 검을 파손시키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되는 일이었다.
"여러분들의 말대로라면 주문 제작한 월장석 검을 손상 없이 다룰 수 있다면 되는 일이군요."
"예? 아 예... 물론, 그렇게 됩니다만."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느냐? 월장석은 여타 보석들보다 강도가 낮은 보석이다. 그런 걸 검으로 만든다면 아무리 검술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걱정되신다면 이렇게 하면 되겠군요."
난감한 상황에 난색인 루피나.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노려보는 루거.
난 둘을 보며 지갑을 꺼내 주문 제작에 필요한 금액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일단 주문 제작에 들어가주십쇼."
"내가 한 말을 여태까지 뭐로 듣고...."
"그다음, 제가 그 검을 부러지지 않고 다룰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해보면 되겠군요."
"뭐라고?"
당황하는 루거를 뒤로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혹여나, 그 테스트 과정에서 부러진다면 주문 제작에 들어간 비용은 돌려받지 않겠습니다. 어떠신지요?"
"...아주 자신만만하게 말하는구나."
"아, 테스트에도 비용이 들겠군요. 그것도 지불하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난 추가로 지갑에서 나르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주문 제작에 소모되는 비용에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검이 부러져버린다면 모두 허투루 날려버리는 것이 되겠으나 월장석을 박아둔 검이 부러질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으니까.
***
"유리안 경, 일단 주문하신 검을 완성하긴 했습니다만...."
며칠 후, 다시 대장간 '어스름 불꽃'을 찾아가자 루거와 함께 보았던 루피나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미려한 검집이 들려 있었다.
"역시, 강도가 부족합니다. 만드는 과정에서 대장장이들이 여러 번 부러뜨렸다고 하더군요. 형태를 잡는 게 고작이라고들 합니다."
"그렇군요. 상관없습니다."
곁으로 다가가자 그녀는 검을 내게 넘겨주었다.
잡자마자 서늘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으며.
'이거야.'
몸에서 흐르는 마나들이 검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요동치는 걸 느꼈다.
난 즉시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이라고 말하기엔 아름답고, 보석이라 말하기엔 투박한 '월장석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시다시피 공예품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기로 따진다면 아까도 말했듯...."
"쉽게 부서진다는 뜻이군요."
"예."
내 말에 루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는 이 검은 절대 '무기'로 사용할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도 담겨있었다.
"그런데, 루거 경은 어디에?"
"먼저 테스트장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잘됐군요. 그럼 앞장서시죠."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대장간의 안쪽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곳은 넓은 공터.
대장간에서 만든 무구를 전시하기 위한 장소로 보인다.
"사람이 꽤나 모여있군요."
이상한 점이 있다면 공터에는 대장간에서 일하던 대장장이들이 모여있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루거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 그... 유리안 경이 그 검을 정말로 사용할 수 있을지 구경하고 싶다더군요."
"그렇습니까?"
구경거리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래도 썩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월장석으로 만든 검은 강도가 낮아 쉽게 부서진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결과가 궁금하다는 것은 '유리안'이 가진 검술 실력에 '혹시나?'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니까.
이제 막, '유리안'이 되었을 당시였다면 긴장감에 숨이 턱하고 막혔을 것이지만 시선을 받는 데 꽤나 익숙해졌다.
도리어 이 몸이 가진 강한 자기 과시욕 탓에 팬서비스를 해줄까? 라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유리안 경이 월장석 검으로 저 갑옷을 벨 수 있다면 저희도 주문 제작한 검을 출품해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루피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갑옷이 거치된 곳으로 향했다.
손으로 갑옷을 훑어내리자, 단단한 갑옷의 촉감이 전해졌다.
철판을 덧댄 곳의 이음매가 꼼꼼하게 메꿔진 모습을 보아하니, 대장간에서 마련한 상등품이 확실했다.
"...음?"
거치대 주변에는 산만하게 흩어진 철 쪼가리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갑옷 군데군데에는 약간의 스크래치가 보였다.
"그 갑옷은 두께만 1cm다. 일반적인 플레이트 아머가 2mm인 걸 생각하면, 갑옷이라기 보다는 강철 덩어리라 말할 수 있겠지."
1cm짜리 두께의 갑옷이라니.
그럼 주변에 흐트러진 철 쪼가리들은 이 갑옷에 검을 휘두르다 생긴 파편들인가?
"자, 테스트는 준비해뒀다. 네가 말했듯, 약속대로 검이 부러진다면...."
"지불한 금액은 돌려받지 않겠습니다. 검도... 부러졌다면 가져갈 필요가 없겠죠."
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평소에는 아무리 '유리안'을 연기하더라도 이토록 자신만만한 말투는 지양했던 나다.
그러나 월장석 검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모종의 근질거림이 몸속에서 넘실거렸다.
한시라도 빨리 실험해보고 싶은 욕망 말이다.
"스읍...."
간단한 심호흡.
뽑아 든 검을 갑옷에 가져다 대었다.
이대로 휘두른다면 볼 것도 없이 월장석 검은 중심부터 순식간에 부서질 것이다.
하지만, 이 검을 만든 이유는 순전히 월광검을 사용하기 위해서다. 당연히 '오러'를 불어넣고 사용하는 것이 베이스다.
월광검을 활성화하기 위해, 38개의 마나혈들 중 대혈맥 6개를 활성화했다.
심장의 대혈맥, '개문'.
심장에서 머리로 이어지는 '휴문'.
다음은 양팔로 이어지는 두 개의 '경문'.
양다리로 이어지는 두 개의 '정문'.
모든 대혈맥들을 활성화하자 월장석 검에선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게 그 소문의...."
"그래도, 저 검은 내구성이 너무 형편없어. 아무리 유리안 경이라고 해도 안 될 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난 검에 집중했다.
분명, 이전에는 초승달이 떠오를 정도로 <월광검>의 면적이 좁았다. 모든 마나혈들을 활성화한다면 평범한 검은 '유리안'의 마나를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날 것이 뻔했다..
하지만 검에 새겨둔 마나혈은 그런 마나의 몰림 현상을 막고 도신 전체에 흘려보내기 쉽게 만들었다.
<월광검>을 완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길. 이 월장석은 그 길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번처럼 대혈맥만 사용하는 것이 아닌, 소혈맥들을 사용해도 검이 버틸 수 있다는 소리.'
이번에 개방하는 것은 머리의 소혈맥인 4개의 금선 중 2개.
심장의 소혈맥인 6개의 활선 중 3개.
그리고 검 손잡이를 쥐고 있는 오른손. 그곳으로 이어지는 경선 4개.
'으윽.'
심장에서 월장석 검으로. 마나가 이동할 수 있는 통로를 활짝 열어젖히자 밑 빠진 독에 물을 퍼 붙듯 온몸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도 잠시.
"오오...."
탄식 어린 신음이 주변에서 들려왔다.
'이제야 완성했군.'
유리안이 사용하던 <월광검>.
원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빛나는 도신이 눈에 들어왔다.
==
⇒ 특성, 「불완전한 월광검」이 「월광검」으로 성장했습니다.
==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세계관에서 TOP5에 드는 오러.
이걸 완성했다는 사실에 내 몸은 주변에 널브러진 용광로들처럼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천천히 갑옷에 다가가 검을 가져다 대었다. 양손으로 잡아 온 힘을 다해 휘두른 것이 아닌 밀밭에 부는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갑옷의 끝에서 끝까지.
덜그럭──!
검을 가져간 부분은 깔끔하게 잘려 나가기 시작했고, 그 상태로 맞은 편에 도착하자 이음새가 끊긴 갑옷은 그대로 땅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마, 말도 안 돼...."
"힘도 전혀 안 준 것 같은데 저 갑옷을 두 동강 내다니...."
유리안의 전매특허, <월광검>의 특징이라면 넘쳐나는 마나를 검에 붙잡아둬 시도 때도 없이 회전하게 만드는 것.
예를 들자면 전기톱의 날처럼 말이다.
압도적인 절삭력을 지닌 능력.
유리안을 그토록 싫어했던 내가 이 능력을 이리도 잘 알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여러 번 죽어봤으니까.'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주인공, '하이든 라이히'의 전(前) 수제자이자 숙적.
대부분의 루트에서 주인공과 적대하는 악의 축과도 같은 녀석.
그렇기에, 질색할 정도로 까다로운 상대였기에 난 유리안이 가지고 있던 능력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 루거 경, 이 검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떨어진 갑옷을 한 번 살펴보고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루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고약한 인상의 대장장이는 여전히 찌푸린 인상을 필 생각이 보이지 않았다.
23화. 몸에 맞는 옷(2)
대장간, '어스름 불꽃'에서 검을 받아온 난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잘 닦여진 제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땅거미가 지고, 주변이 어둑어둑해지자 길거리에 설치된 '마나석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도는 다시금 낮처럼 환해졌다.
사람 냄새가 나는 길.
사람들이 한데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길을 나아가며 허리춤에 찬 두 자루의 검을 쳐다보았다.
하나는 기존에 쓰던 단순한 강철 검.
다른 하나는 '어스름 불꽃'에서 주문 제작한 월장석 검.
월장석 검의 미려한 검집을 보자 속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 웬만한 위협으로부터는 쉽게 대처할 수 있겠어.'
지금까지 유리안을 연기하기 위해 노력한 이유는 내가 완전히 무력을 손에 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광검>을 완전히 다룰 수 있게 된 지금. '완벽'까지는 아니더라도 7할 정도는 능히 손에 넣은 수준이다.
"후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히, 히익...."
"콜록, 콜록."
스쳐 지나가던 사람들 몇몇은 머리 위로 공포의 색을 띄웠다.
이런,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참아야지.
이 실눈의 악역은 소리죽여 웃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위협이 될 수 있으니 말이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정해야 하는데.'
굳이 마차를 타지 않고 도보로 저택으로 돌아가는 이유.
<월광검>을 완성한 나머지 기분이 좋아져 걷고 싶어진 탓도 있었으나, 앞으로의 일을 정리하기 위함도 있었다.
'유리안을 연기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 외에 돌아갈 방법은 찾는 것도....'
당연히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안고 있는 고민 중 하나였다.
전조도 없이 게임 속 등장인물, 그것도 최악의 악역에 빙의했다.
비록 잘 알고 있는 세계관과 캐릭터이기는 했으나, 이 현실에 계속 안주할 수는 없는 노릇.
'돌아가는 방법은 뭘까? 게임의 엔딩을 보는 것인가...?.'
사념에 잠긴 채 제도의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을 지나면 가는 길이 상당히 단축된다.
골목길에 발을 딛자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나를 반겼다. 햇볕이 들지 않아 이전에 온 비가 마르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마신의 부활을 막는 것이 최우선 과제. 여명회와 대립할 수밖에 없을 터.'
여명회(黎明會).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이 악인(惡人) 중 궤를 달리하는 자라면, 여명회는 게임 속 수많은 단체들 중에서 궤를 달리하는 집단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마신, 바르바토스의 부활.
그걸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단들이다.
게다가 플레이어의 분신인 '하이든 라이히'의 원수이며, 린네 론드벨의 아버지를 죽인 단체다.
흔히 말하는 '악의 축'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하이든 라이히와 협력을 해야 하나? 하지만....'
대의를 위해 검성에게 제안을 할 순 있겠으나, 자꾸만 머릿속엔 트레일러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유리안이 하이든 라이히와 린네의 숨통을 끊는 그 장면이.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응?'
그때였다.
전기 신호가 뇌리를 찌릿하고 자극했다.
유리안의 몸이 보내는 일종의 신호였다.
특성 <놀라운 직감>.
내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누굽니까?"
인기척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길.
쥐 죽은 듯 조용한 골목.
울려 퍼지는 것은 비단 내 목소리뿐이었다.
돌아오는 반응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분 탓이었나?
하지만 <놀라운 직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마나를 사용해 탐지하는 수밖에.'
체내에서 마나를 끌어 올리던 찰나.
찰박──!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다.
***
맡겨둔 검을 찾기 위해 어스름 불꽃에 들른 린네는 조금 전까지 이곳에 유리안이 있었단 말을 듣고 입을 열었다.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하하... 린네는 유리안 경을 정말로 싫어하네."
투덜거리는 린네의 말을 들으며 대장장이 루피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죠. 그런 철면피.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아요. 혹시, 여기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그러진 않았죠? 만약 그랬더라면 스승님의 얼굴에 먹을...."
"조금 소란이 있기는 했지만, 큰일은 아니었어."
가뜩이나 평소의 행실이 좋지 않아 여러모로 스승인 하이든 라이히의 먹칠을 하고 다니는 말종이다.
이곳에 들렸었다는 말에 린네는 속으로 걱정을 한 것이었다.
또 예전처럼 사고를 쳤나, 하고.
"저번처럼, 검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죽이겠다며 겁박하지는 않았으니 너무 걱정하진 마."
"그건... 다행이네요."
1년 전.
스승인 하이든 라이히에게 도전하고, 패배한 유리안은 패배의 이유를 검에서 찾았다.
하이든 라이히의 검과 똑같은 검을 만들어 달라며 이곳 '어스름 불꽃'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장인 정신을 발휘한 루거 올랜드가 똑같은 검은 만들지 않는다며 한사코 거절하자 검을 뽑아 들고는 위협을 한 것이다.
"오히려 이번엔 예전과는 달리 꽤나 정중했어. 요금도 정확히 지불했고, 추가로 발생한 금액도 모두 냈거든."
"그래요?"
린네의 물음에 루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문이 피어났다.
"그럼, 소란이라는 건...?"
"응? 아, 별거 아니야. 유리안 경이 와서 보석으로 검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거든."
보석으로?
린네는 대체 무슨 소리냐며 물었다.
"맞아, 보석으로. 월장석이란 보석을 잔뜩 가져와서 강철로 만든 검 중심에 그걸 넣어달라고 부탁했어."
"분명, 공예품으로 사용하려던 것이겠죠."
린네는 인연이 깊지는 않으나 같은 스승을 둔 동문(同門)으로서 '유리안'이란 인물의 인적 사항을 파악해두고 있었다.
그중 하나.
유리안은 예술품에 환장한다는 것.
"아니, 직접 사용한다고 하던데?"
"...네?"
"공예품으로 집에 장식하는 게 아니라 무기로 사용한다고 하더라고."
"말도 안 돼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린네는 루피나의 말을 부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월장석'은 강철에 비해 훨씬 강도가 낮은 보석이다. 그걸 검처럼 휘두른다면, 중심부터 부서지기 마련.
그건 린네도 알고 있는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몇 번 휘두르면, 내부부터 금방 부서질 거예요. 보석으로 만든 검을 사용할 생각을 하다니...."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본인이 그래도 상관없으니 만들어 달라고 하더라고?"
다시 한번 예상치 못한 답변.
망연한 표정으로 린네는 쳐다보았다.
루피나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한번 확인해볼래? 아직 테스트 현장을 치우지 않았거든."
"테스트?"
고개를 갸웃거리며 린네가 대답하자 루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후, 루피나가 앞장을 서 '어스름 불꽃'의 공터로 그녀를 안내했다.
린네는 그런 공터의 중앙으로 눈길을 돌렸다.
바로 눈에 들어온 건 갑옷을 거치하는 거치대와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있는 갑옷.
갑옷의 두께는 평범한 검을 휘둘렀다간 부러질 정도로 두꺼워 보였다.
"그 보석 검으로 저 갑옷을 자른 게 유리안 경이야."
루피나의 설명에 린네는 천천히 다가가 갑옷을 살펴보았다.
평범한 검으로도 해내기 힘든 것을, 강도가 월등히 부족한 보석 검으로 이런 것을 해내다니.
'아니, 이 정도면 나도....'
그렇게 생각하며 갑옷을 자세히 살펴보자 린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깔끔하게 잘려 나간 절단면.
매끄럽다 못해 외골수와도 같은 검로(劍路).
온 힘을 다해 휘두른 격(擊)이 아니었다.
대게 검이란 힘을 다해 휘두를수록 그 길(路)이 흐트러지기 마련.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도 마찬가지다.
근데 이 검로는 흐트러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큰 힘을 주지 않고, 천천히 베어낸 거야.'
린네는 생각했다.
자신도 이 정도 갑옷은 부술 수 있다고. 하지만, 결과만 같을 뿐.
과정을 따라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게... 가능해?'
두 눈이 아찔해졌다.
자신이 부족한 것은 알고 있다.
검성의 수제자란 호칭을 대고 있기는 했으나 전(前) 수제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도.
하지만, 이렇게나 아득히 멀 줄은──.
"절단면이 이리도 깔끔하다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린네는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회색빛 머리와 수척한 얼굴.
'검성' 하이든 라이히다.
"스승님, 루거 경에게 부탁하신 검은 받으셨나요?"
"그래, 받았다."
이곳, '어스름 불꽃' 대장간에 온 이유는 이전에 주문 제작을 맡겨둔 검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하이든은 허리춤의 검을 가리켰다.
그곳엔 어떠한 미적 감각도 집어넣지 않은 투박한 검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유리안이 이곳에 들렸나."
"어떻게 아셨어요?"
"이건 월광검으로 베어낸 것이다. 녀석의 오러는 오롯이 베는 것에 특화되었으니까."
그는 떨어져 있는 갑옷에 다가가더니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곧 두 눈에는 이유 모를 아련함이 맺히기 시작했다.
"여전히 대단하군."
하이든의 혼잣말을 듣자, 린네의 가슴 한켠엔 무엇인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꼈다. 하지만, 이 감정을 솔직히 토로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분을 삭이고 입술을 잘근 하고 깨물 수밖에 없었다.
"너무 괘념치 말거라."
하이든은 그런 린네의 속내를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사람의 인품이 다양하듯, 개개인의 검술도, 그 오러도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마련이다. 넌 유리안과는 다른 방향으로 녀석보다 강할 수 있는 거야."
"네...."
하이든의 위로에도 린네의 목소리는 활기를 되찾지 못했다.
단련하더라도 이 정도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란 이미지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임무에서 만난 유리안은 어땠느냐?"
하이든은 갑옷을 손으로 훑으며 물었다.
며칠 전, 유리안과 함께 해결한 임무.
사실 그 임무에서 유리안과 린네가 엮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공동 수사를 제의한 것도, 유리안을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한 것도, 모두 하이든 라이히가 황궁 비서실에 찾아가 부탁한 일.
이유는 실로 간단했다.
암암리에 마신의 부활을 꾀하고 있는 교단, 여명회(黎明會).
그곳에 유리안이 속해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물론 린네는 사전에 들은 게 없었다.
"임무가 끝난 당시엔 개인적인 생각이 반영되었을 수도 있으니 지금까지 미룬 것이다. 넌... 유리안을 싫어하잖느냐."
그것도 끔찍이도.
라는 말을 덧붙이려는 것을 린네는 느꼈다.
"빈민가에서 발생한 데몬은 여명회의 소행이 분명했다."
"예."
"네가 보기에 그는 여명회의 일원으로 보이느냐?"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럼 네 생각이라도 말해보려무나."
시냇물이 흘러가듯 높낮이 없이 단조롭게 말하는 하이든. 조곤거리는 목소리에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데몬이 사람을 숙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녀석은 수많은 데몬의 숨통을 끊어보았으니, 여러 형태를 접해봤겠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갑옷의 단면을 훑던 하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은?"
"예?"
"그다음은 아무것도 없느냐?"
"...네."
"그럼 네 생각은 어떠느냐? 그가 여명회의 일원인 것 같느냐?"
강한 의지가 담긴 두 눈으로 린네를 쳐다보았다. 거짓을 고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유리안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린네.
뇌리에는 빈민가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 '이웃들을 식사에 초대해 약을 먹이고, 저 자물쇠가 잠긴 방 안에 있는 '데몬'에게 먹이로 준 것이겠죠.'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데몬의 숙주가 되어버린 아들, 그 아들을 살리겠다며 이웃을 먹이로 주던 노파에게.
그건 린네가 처음으로 본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이란 인물의 인간다운 모습이었다.
"지금은 판단하기 힘들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임무 중에는 그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어요. 게다가, 빈민가에서 발생한 데몬은 여명회의 소행, 그가 정말로 여명회였더라면 일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예요."
유리안을 싫어하는 린네이니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할 것.
하이든은 그녀의 똑 부러진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비록, 파문시킨 제자라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 정이 들었던 제자.
그와 적대하고 싶지 않았던 하이든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
찰박──!
어두운 골목, 마르지 않은 물웅덩이를 밟으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두 인영이었다.
하나는 두터운 로브로도 온몸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우락부락한 남정네.
다른 한 명은 왜소한 체격의 소유자. 윤곽을 보아하니, 여성이 분명하다.
...저 로브와 저 조합, 나는 저 여성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둘이 나타난 순간, 내 머릿속엔 의문이 떠올랐다.
'여명회가... 왜 여기에?'
주인공 하이든 라이히의 숙적.
굳이 입에 담을 것도 없는 악의 축.
그렇기에 난 허리춤에 준비해둔 검에 손을 얹었다.
"비숍, 엘레노아. 이곳엔 무슨 일로?"
구태여 여성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의 어깨가 흠칫한다.
"어머, 절 아시는군요."
"당연하죠. 무슨 의도로 찾아왔는지도 말이죠."
"역시나 유리안 경이시네요."
쿡쿡, 하며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엘레노아는 로브를 뒤로 젖혀 얼굴을 보여주었다.
"여명회 소속, 비숍 엘레노아에요. 이렇게 뵙는 건 처음이죠?"
여명회 소속의 비숍이자, '음(蔭)' 원소 5위계, 바르고 등급의 마법사.
엘레노아 드미셸.
고혹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이쪽을 쳐다보았다.
"무슨 의도로 찾아왔다고 말씀하셨으니, 슬슬 답을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게 뭔데?
순간, 이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으나 '무슨 의도로 왔는지 안다'라고 허세를 부려둔 상태라 차마 낼 순 없었다.
"글쎄요, 계속 고민을 하고 싶은 문제라서 말이죠."
어쩔 수 없이 이런 스탠스를 유지할 수밖에.
내 말에 엘레노아의 보라색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조금 짜증이 난 모양이다.
"그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죠 유리안 경. 당신이 먼저 접촉했고, 제안을 한 거잖아요?"
"맞습니다. 그러니, 조금 더 고민하고 싶습니다."
"...그 말은 즉, 여명회의 가입을 조금 더 미루겠다?"
"예."
이 순간, 나는 내 대처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리도 침착하게 '예'라고 답할 수 있다니.
'...여명회에 가입한다고!?'
속마음은 이렇게나 놀랐는데 말이다.
24화. 여명회
여명회(黎明會).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를 한 번이라도 플레이했다면, 모를 수 없는 이름.
동시에 플레이어들의 분노를 유발하는 단어.
무려 지난 100년간, 대륙을 병들게 했던 마신 바르바토스의 부활을 꾀하는 단체다.
가히, 인류의 숙적이라 말할 수 있는 단체.
"그렇습니다.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고작해야, 입단을 뒤로 미루는 것뿐이니."
그런 인류의 숙적에 유리안이 가입할 예정이었다니.
처음엔 놀랐지만, 곧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여러 루트에서 '유리안'은 한결같이 여명회에 소속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DLC 트레일러에서 보았던 하이든 라이히의 죽음과도 밀접한 관계를 띄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여명회'의 입단이 지금이었다고?
"맞아요, 당신 말대로 어려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저희 쪽에선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다는 걸 아셔야겠죠?"
내 말에 엘레노아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여명회 소속의 비숍이자, '음(蔭)' 원소 5위계, 바르고 등급의 마법사. 엘레노아 드미셸.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에 담긴 유리안은 평소처럼 실눈으로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렇게 약속을 잡지 않고 불쑥 찾아온 것도 조금 전에 말한 이해 불일치 때문이에요. 혹여나 당신이 입단을 미끼로 저희를 포획하려고 들 수도 있으니 말이에요."
당신은 황실 전속 기관, '감은 눈'이니까요.
엘레노아는 그렇게 덧붙였다.
"즉, 제 대답이 미뤄질수록 여명회에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을 하고 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군요."
"이해가 빨라서 좋아요."
고혹적인 웃음을 짓는 엘레노아.
남자의 마음을 사뭇 끌어당기는 매력 있는 미소였으나 독이 담긴 성배처럼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저희의 비밀을 안 이상 거절할 경우... 아시죠? 뭐, 그럴 일은 없겠죠. 애초에 당신이 먼저 접근했으니까요."
"그렇지요."
일당백(一當百)이자, 안하무인(眼下無人).
'힘이 곧 세상의 전부다'라는 야성적 사상을 가진 유리안은 하이든에게 패배한 직후, '데몬'의 힘도 넘보게 되었다.
여명회의 발을 들인 이유도 그것 때문, 스승인 '검성' 하이든 라이히를 뛰어넘기 위해서다.
"그럼 고민할 필요가 없겠네요? 당신이 찾는 것이 우리에게 있을 테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신중한 거죠."
엘레노아의 눈이 찌푸려졌다.
머리 위로 의문의 색을 띄우는 것도 보인다.
"...왜죠?"
왜긴, 너희들이 악의 축이니까!
'여명회'에 입단을 한다는 말은 즉, 황실과 등을 지겠다는 거다.
물론 들키지만 않는다면 문제가 될 것은 없겠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하이든 라이히와 확실히 적대하게 된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주인공, 하이든 라이히의 목표는 제국의 안녕. 그리고 복수.
하이든은 복수의 대상인 '여명회'를 참혹할 정도로 증오했다.
생사결(生死決)에서 패배한 유리안을 살려줄 정도로, 정이 두터운 그였으나 여명회에 소속된 사실을 안다면 망설임 없이 검을 들이밀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온전한 유리안의 무력을 손에 넣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저 이 게임의 주인공과 대척하는 길을 택하고 싶진 않아.
"저희 입장에선 어이가 없네요. 그리고 말했죠? 당신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여기서 발을 뺀다면 우리와 적대하는 꼴이 될 텐데요."
그렇지만, 여기서 문제가 하나 더 있었으니.
'하이든 라이히'와의 대립 구도를 피하기 위해 '여명회'에 입단하지 않는다면 정보의 누설을 막기 위해 여명회가 손을 쓴다는 거다.
그들은 '검성' 하이든 라이히가 쉽게 넘보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단체다.
그중, 여명회의 전투 집단인 '몬시뇰(Monsignor)'은 기사들을 월등히 뛰어넘은 전투력의 소유자들.
"말귀가 밝다고, 말이 통하는 상대는 아니란 소리지."
마침 엘레노아 드미셸과 함께 온 거구가 바로 언급한 '몬시뇰'이다.
혀를 찬 남자는 발을 앞으로 한 걸음 옮겼다.
보는 것만으로 중압감을 자아내는 덩치.
얼굴의 로브를 걷어내자 얼굴이 드러났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한쪽 눈을 덮을 정도로 잔뜩 새겨둔 문신이었다.
강완(强腕)의 펠코르.
나도 이름을 알 정도로 여명회 네임드 캐릭터이다.
"이 상처, 기억하시나?"
그는 손가락으로 문신이 그득한 왼쪽 눈을 가리켰다.
저거 상처였구나.
지금까지 단순한 문신인 줄 알았다.
"네놈이 새긴 이 상처가 밤마다 아주 욱신거린다!"
오늘은 깨닫는 게 많은 날이다.
저게 문신이 아닌 상처란 것과 그 상처를 내가 만든 것도 알았으니 말이다.
'...내가 한 적 없다고.'
물론 억울하다.
당연히 지금 내가 유리안이라 해명은 불가능하다. 젠장.
"죄송합니다. 잔챙이는... 기억하지 않는 편이라서요."
분명 이런 식으로 말하겠지.
"크, 크하하하하하핫!"
'유리안의 매운맛'을 맛본 펠코르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마치 우레를 연상케 할 정도로 거대한 웃음은 골목을 가득 메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소리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돌연 녀석은 땅을 박차며 내게 뛰어들었다.
<놀라운 직감>
육중한 몸을 지닌 것치고는 엄청난 속도.
순식간에 시야 한쪽을 뒤덮을 정도로 펠코르의 순발력은 굉장했으나 '유리안'의 몸은 당황하지 않았다.
'응...?'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유리안'의 몸에 밴 습관이었다.
<타고난 검사>
기습의 대응법은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어 방어하거나 반격하는 것.
그 일련의 과정이 체득된 유리안이었기에, 펠코르가 왼쪽에서 달려드는 모습을 보자 내 몸은 저도 모르게 반응해 오른쪽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온갖 정성을 다해 만든 '월장검'이 아닌 평범한 철검을 말이다.
'쯧...!'
일 초가 급박한 상황.
'유리안' 몸에 밴 습관은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월장검'이 아닌 평소에 사용하던 '익숙한 검'으로 손을 뻗게 만든 것이다.
그 탓에 뽑힌 철검에 혀를 차며, 오러를 불어 넣은 난 펠코르의 주먹을 향해 휘둘렀다.
속으로 혀를 차며 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무지막지한 펠코르의 주먹을 향해 휘둘렀다.
검(劍)과 권(拳)이 마주치는 교차점.
골목을 잠깐 밝힐 정도로 새빨간 불똥이 사방에 튀었다.
빠직──!
오러를 머금은 내 검에는 강한 균열이 생겼다. 이대로 대치가 지속된다면 검이 부러지는 것은 당연한 일.
이대로는 위험하다.
태세를 재정비하기 위해 발을 한 걸음 뒤로 옮기려던 찰나, 펠코르의 비릿한 웃음이 눈에 들어왔다.
눈치를 챈 것이다.
검이 부러지고 있다는 것을.
"흐아아아아앗!"
내 생각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녀석은 괴성을 지르며 주먹에 온 힘을 실어 넣었다.
빠악──!
검은 순식간에 부러졌다.
녀석의 두터운 주먹은 나의 명치에 제대로 들어왔다.
순식간에 내 몸은 골목의 외진 벽으로 날아갔고, 호흡이 안 될 정도로 아찔한 격통은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럼에도 몸은 당연하다는 듯 낙법을 시도했다.
"콜록, 콜록...."
마른기침이 연신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럴 때마다 펠코르의 주먹을 받아낸 늑골이 삐걱거리는 것 같았다.
"잔챙이의 주먹에 꼴이 말이 아니군 유리안! 드디어, 이 눈의 복수를 할 수 있겠어!"
비아냥거리는 펠코르의 목소리.
백안시하는 눈동자.
모든 걸 뒤로하고 난 부러진 검을 쳐다보았다.
내가 느낀 것은 펠코르의 주먹에 담긴 압도적인 무력에 대한 공포 따위가 아니었다.
짜증.
가뜩이나 이 험난한 세계의 등장인물이 되었으며 끔찍이도 싫어하는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이 되었다.
데몬이라는 위협과 대적하는 것도 모자라, 유리안의 추락을 바라는 귀족들이 직접적으로 불만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완벽'을 추구해야만 한다.
평범과는 거리가 먼 삶.
지금까지 영위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삶.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지?'
난 부러진 검을 땅바닥에 던졌다.
"응? 뭐냐, 유리안. 포기할 셈이냐?"
펠코르의 말을 뒤로 하고, 난 다른 검을 뽑아 들었다.
월장검.
손잡이에 힘을 잡고, '오러'를 흘려보내자.
==
⇒ 감정의 고조가 극에 달했습니다.
==
어둑했던 골목길에는 달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
⇒ 고유 특성, 「뜨인 눈」이 발현되었습니다.
==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에서 많이 보던 UI를 한 번 흘겨본 난 월장검을 치켜든 뒤 발을 옮겼다.
"뭐냐, 그 검은?"
펠코르는 월장검의 형태를 보며 의문을 표했다.
평소라면, '유리안'을 연기한답시고 녀석의 말을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답해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쌓여있는 짜증을 풀어내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 검도 박살을...!"
비아냥거림과 동시에 강한 적개심이 느껴지는 목소리.
하지만 끝까지 들을 필요가 없다고 느낀 난 땅을 박차고 녀석과의 거리를 좁혔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음에도 펠코르는 당황하지 않고 대응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가 갈고닦은 실력은 진짜배기라는 증거.
"크윽...!"
그러나 내 월장검이 녀석의 오른팔을 베어내자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내, 내 오러를 베었다고...!?"
오른팔에 생긴 상처를 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펠코르.
여기서 끝나지 않고 난 계속해서 팔을 움직였다.
상처가 쌓여가는 것을 막기 위해 펠코르가 반격을 가했으나.
"이... 개자식...!"
거의 예지에 가까운 예측으로 인해 그것들은 모두 무용지물.
반격을 피하며, 난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사선에 도착할 때마다 주변에는 새빨간 혈흔이 포물선을 그렸다.
땅과 벽에 찐득하게 들러붙는 피를 보자 내 몸이 달아올랐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으니까.
검이라는 붓을 휘두를 때마다 골목이라는 새하얀 캔버스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만... 켁, 그만...."
그런 달아오르기 시작한 마음에 물을 끼얹은 것은 고통에 신음하는 펠코르의 목소리였다.
머리 위로는 공포의 색을 띠며 무릎을 꿇은 펠코르의 팔은 난도질을 당해 걸레짝과 같았다.
평소라면 저런 몰골을 보며 질겁을 했겠으나 지금 나는 이상하리만큼 침착했다.
아니, 웃음이 지어졌다.
"이젠 강완(强腕)이 아니라 팔병신의 펠코르라 불러야겠군요."
조소가 담긴 미소와 함께 무릎 꿇은 펠코르를 비웃었다.
연민의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고, 오롯이 쓰러진 거구의 모습이 웃길 따름이었다.
"사, 살려...줘...."
목숨을 구걸하는 펠코르.
이미 완전히 제압된 상대, 죽일 필요는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성적인 판단보다 먼저 난 자아실현에 대한 욕망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난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월광검>의 환한 빛이 골목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무릎 꿇은 펠코르의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처럼 가면을 쓴 실눈이 아닌 피처럼 새빨간 눈을 가진 광인(狂人).
'그'가 펠코르의 눈동자에 담겨있었다.
==
▶ 특성, 「 뜨인 눈 」
등급 : 고유
⇒ 감정이 격양된 상태에서만 발현되는 능력입니다.
⇒ 캐릭터 특성, '실눈'을 보유하고 있는 캐릭터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 매우 강한 공격성을 띠게 됩니다.
▷ 신체 능력이 좋아지며, 두 눈은 평소보다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
그 모습은 유리안을 연기하는 내가 아니었다.
그저, 웃는 처형대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일 뿐.
그 사실에 난 검을 내려두었다.
'이 특성은....'
위험하다. 내 직감이 그리 말하고 있다.
25화. 뜨인 눈
실눈 캐릭터들의 특징은 크게 세 개 꼽을 수 있다.
숨기려고 해도 드러나는 음흉함.
뒤에서 계략을 짜는 것 같은 언행.
그리고 진심으로 화가 나면 감고 다니던 두 눈이 뜨고 전투력이 증가하는 것.
그런 실눈 캐릭터의 특징은 단순히 캐릭터성의 일부라고만 생각했다.
솔직히 실눈으로도 앞을 보던 녀석이 두 눈을 뜬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살려... 줘...."
그러나 착각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졌으며 펠코르의 무지막지한 주먹들도 쉽게 보일 정도로 동체시력이 향상되었다.
근육의 밀도와 탄력 또한 증가했는지 녀석의 공격을 튕겨내는 것도 쉬워졌다.
'...실눈 캐릭터가 눈을 뜨면 강해진다.'
소설이나 게임 같은 매체에서 보여주는 클리셰. 그게 이 게임 내에서는 특성으로 구현된 것이다.
하지만 이 특성에는 패널티가 있었다.
'본래의 흉포함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시선을 내려 무릎 꿇은 펠코르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난도질당한 펠코르의 몸에선 걸레짝과 같았다. 군데군데 찢어진 상처와 그곳에서 흐르는 새빨간 피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렇지만 눈을 떴을 당시 난 이 상황을 유쾌하다고 받아들였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야.'
확연하게 체감될 정도의 신체 능력 향상.
그에 상응하듯 극심한 감정의 변화.
이 특성 <뜨인 눈>은 지금까지 본 모든 특성 중에서도 감정에 제일 큰 개입을 하는 모양이다.
그리 생각하며 난 가슴을 진정시켰다.
원래 살던 세계의 사회적 통념이 지키려는 생각은 아니다.
그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며 쌓아온 인간성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유리안으로서의 삶보다 이시후로서 살아온 세월이 더 길었으니까.
"거기까지 하시는 게 어때요?"
검을 거두려는 찰나, 지금까지의 일을 지켜보던 엘레노아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조막만 한 완드를 손에 쥐고 이쪽을 겨누고 있었다. 끝에는 '음(蔭)' 계열 마법 특유의 마나가 넘실거렸다.
"시작은 저쪽에서 했습니다만?"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엘레노아가 막으려고 들어 속으로 안심했다.
진정시키려고 해도, 계속해서 끓어오는 모종의 감정은 눈앞의 펠코르를 죽이라 연신 소리치고 있었다.
"...무례하게 굴은 건 알겠지만, 우리 쪽 사람이라서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방관하셨군요?"
"무례했으니, 벌을 받는 거죠."
엘레노아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 후, 완드에 맺어둔 마나를 거두었다.
나풀거리는 걸음으로 펠코르에게 다가가 간단한 치료 마법을 사용해 그의 상처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펠코르. 당신은 제 허락 없이 행동했습니다. 이 일은 가만히 묵과하지 않을 거예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엘레노아는 그것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좋아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실례를 용서해주시길. 아... 만약, 유리안 경이 원하신다면 펠코르에게 불경죄를 물 수 있어요. 어떠신가요?"
"그거 좋군요."
"그렇죠?"
그녀는 고개를 휙 하고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고혹적인 미소, 오른쪽 눈 바로 아래의 눈물점은 미소를 더 돋보이게 했다.
엘레노아가 저런 말을 덧붙인 이유는 실로 예측하기 쉬웠다.
빨리 결단을 하라는 거겠지.
여명회에 입단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과 적으로서 적대할 것인지.
"저희는 당신을 높게 평가하고 있답니다. 압도적인 무력과 그에 상응하는 결단력. 그리고 황실에서 보내는 신용까지. 괜한 떠보기는 그만하시고, 저희와 손을 잡으시죠.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손해 보는 건 없을 거예요."
"맞습니다."
"그럼 당장이라도...."
말을 잇는 그녀를 뒤로하고 난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그녀가 아무리 겁박하고 몰아붙이더라도 당장 결정할 생각은 없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
애써 숨기곤 있지만, 누가 우위에 있는지는 파악이 끝난 상황이다.
당연히 우위에 있는 사람은 대답을 하는 쪽에 있다.
"그래도, 조금 더 생각해보도록 하죠."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
유리안이 떠나자 엘레노아는 서늘했던 제도의 밤공기가 조금은 쾌적하게 변했다는 착각이 일었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의 앞에 서있던 엘레노아였으나 우중충한 골목에서 마주한 '웃는 처형대'의 냉랭함은 전신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처음 황실에서 마주쳤을 때와 똑같군.'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엘레노아는 자신의 눈물점을 쓸어넘겼다.
"그래서. 어땠나요, 펠코르?"
세간에 떠도는 소문, 유리안이 기억을 잃었다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뜬구름 잡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그토록이나 적이 많은 자가 소문이 돌고 시간이 꽤나 지난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그 소문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여명회에, 정확히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에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유리안이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당신의 눈을 그 꼴로 만들었을 때에 비해, 달라진 게 있다는 생각이 드나요?"
"여전히 무지막지한 놈이었습니다, 비숍 엘레노아."
"그래요? 역시, 제도에서 떠도는 소문은 거짓이 확실하다는 소리."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한 엘레노아는 다시 한번 자신의 눈물점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래도, 이건 개인적인 확인이었으니까 다른 비숍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괜찮죠? 펠코르."
"아, 알겠습니다. 비숍 엘레노아."
"좋아요."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펠코르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뺨을 붉게 물들였다.
그 이유는 그녀의 눈물점.
그건 드미셸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하나의 특이점.
이성에게 쉽게 사랑받을 수 있게 되는 축복이자, 그로 인해 무분별한 질투를 받을 수 있게 되는 저주.
평소에는 특기인 '음(蔭)' 마법으로 감추고 다니는 이것을 유리안을 상대로 꺼내 보았으나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다시금 눈속임 마법으로 눈물점을 지운 엘레노아는 유리안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을씨년스러운 공기만이 흐르는 그곳을 보더니 얼마 뒤. 제도의 골목에는 더 이상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
쨍그랑──!
부러진 강철검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자 거친 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골치가 아픈 일이 연달아 터지는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바람이 쐬고 싶어진 난 창문을 연 뒤, 의자에 몸을 뉘었다.
"후우...."
일단 가장 먼저 입 밖으로 나온 것은 한숨.
그도 그럴 것이 '유리안'이 여명회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유리안이 여명회에 속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으나 그것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당도하니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조금 전, 펠코르를 베어넘길 때를 떠올리며 오른손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피부를 타고 전기처럼 흐르는 쾌감은 자칫하면 중독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어마무시했다.
특성 <뜨인 눈>이 발현되었을 때 남은 후유증이다.
"젠장... 신경 쓸 일이 왜 이렇게 많아지는 겁니까."
자조 섞인 독백을 입에 담으며 몸을 조금 더 의자 쪽에 붙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뜨인 눈>이란 특성은 감정이 극에 치달았을 때에만 발동되는 것.
양날의 검처럼 위험도는 있었지만, 컨트롤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확실한 전투력의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여명회겠지.'
녀석들이 무슨 속셈으로 세력을 넓히고, 어떤 목적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나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여명회라는 교단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무력은 개인의 힘으로 대항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설령 그 유리안이라고 할지언정 말이다.
'고발하려고 든다면 여명회 쪽에서 날 제거하려 들 것이 분명해.'
여명회는 암암리에 활동을 하고 있는 조직이지만, 그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시피 했다.
그게 말하고자 하는 사실은 아드라탄 제국 황실 내에도 밀정(密偵)이 존재한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아무리 은밀히 보고하더라도 여명회 쪽으로 정보가 흘러 들어갈 게 분명하다.
'...누가 유리안의 말을 진심으로 믿겠냐.'
이 '실눈 악역'의 말을 완전히 신용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명회의 속하게 된다 해서 이 일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설령 여명회의 편을 들어준다면....'
검성, 하이든 라이히와 완전히 적대하는 꼴이 될 터.
심지어 여명회의 최종 목적인 마신 부활이 이루어졌다간 이쪽도 곤란하지 않은가?
대륙을 황폐화한 장본인이 다시금 세상에 강림하는 것이 될 텐데.
"곤란합니다... 참으로 곤란해요."
저절로 튀어나오는 존댓말이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대로 아무런 방법도 강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둔한 자가 말로(末路)를 기다리는 것에 불과하다.
긍정적인 부분을 집고 들어가면 지금의 난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보단 유리안이란 캐릭터에 가까워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유리안에 대한 연기가 완벽까지는 아니더라도 완벽을 추구할 수 있을 정도는 가능한 정도.
'일단 월장검이 완성되어서 <월광검>이 제 궤도에 올라온 것은 좋은 소식이야.'
완성된 미려한 검집을 쳐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펠코르를 제압할 때, <뜨인 눈> 특성이 큰 힘을 발휘한 것은 맞지만. 단단한 그의 오러를 뚫고 상처를 낼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이 완성된 월장검 덕분.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무력은 완벽한 유리안에 미치진 못했지만 그를 연기하기엔 충분한 수준입니다."
다시금 내 위치를 재정리하며 앞으로 내가 어떤 스탠스를 유지해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 생각에 잠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역시, 여명회에는 가입해야겠습니다."
이런 판단을 내린 근거는 실로 간단했다.
일단은 여명회와 직접적인 대립 구도를 세우고 싶진 않았으니까.
검성 하이든 라이히도 위협적으로 느끼는 그들을 단신으로 대립하는 것은 자살 행위가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기에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이다.
'입단한다면 당장에 여명회와 적대할 일은 없다.'
물론, 그들의 목적을 위해 일을 할 생각은 없다.
철저하게 그들의 편인 셈 연기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유리안'을 연기했던 것처럼 말이다.
비록 호랑이를 피한답시고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셈이었으나 지금 내릴 수 있는 선택은 이게 최선인 듯하다.
"그건 그렇고...."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한 난 힐끔 부러진 강철검을 쳐다보았다.
몰골이 된 강철검은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이건... 분리수거를 해야 하는 겁니까?"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달빛을 받으며 이리저리 난반사를 일으키는 고철.
사용인에게 던져줬다간 어떤 트러블이 생길지 모르니, 직접 처리하는 게 좋겠다.
26화. 본의 아니게(1)
겐멜 수도원.
제도(帝都)의 외곽에 위치한 이 수도원은 로젠다 대륙에서 가장 큰 신도를 지닌 종교, 태양신교에 속해있는 시설이다.
그곳에 제국의 웃는 처형대 유리안이 발길을 들이자 관계자들은 몹시 두려운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리안은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런 그가 수도원에 나타났다면 어떠한 연유라고 생각하겠는가?
'...누군가 숙청하러 왔나 보다.'
십중팔구 이런 생각을 하겠지.
"유, 유리안 경... 여기는 어쩐 일이신지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수도원에 속한 수사(修士) 한 명이 내게 다가와 정중한 어투로 말을 걸어왔다.
"수도원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안에 계시는지요?"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남자의 머리 위로는 공포의 색이 맹렬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헤, 헤르엔 수도원장님께는 무슨 볼일...이십니까?"
힐끔.
난 남자 수사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굳이 <부정의 색>을 통해 보지 않더라도, 여과 없이 드러나는 두려움의 감정. 그리고 내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는 태도.
아마도 이 남자는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볼 일은 없다.
"지금 헤르엔 수도원장님께선 안에 계십니다.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그때, 수도원 안쪽에서 나지막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라오시죠."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는 수녀.
나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수도원의 안으로 들어갈수록 주변에선 사람들의 신음과 코끝을 찌르는 약 냄새가 조금씩 짙어졌다.
이곳 겐멜 수도원은 어느 정도 병원의 속성을 띠고 있는 수도원이다. 그 탓에 코끝을 찌르는 퀴퀴한 냄새가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예상한 시일보다 빠르시군요."
대리석 기둥과 태양신교 문양의 적절한 조화를 보며 속으로 감탄하고 있던 찰나, 앞서 걷던 수녀가 입을 열었다.
휙, 하고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까진 일면식도 없었어야 할 수녀의 얼굴은 사뭇 익숙한 것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전 그렇게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엘레노아."
여명회의 비숍, 엘레노아.
안내해주던 수녀의 정체는 바로 그녀였다.
장기인 음(蔭) 마법을 통한 위장을 해제한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미소에는 호의적인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도리어 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을 보아 어느 정도 경계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다고, 하루 만에 마음이 변하나요? 세간에선 그런 걸 변덕이라고 한답니다."
어쩐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군말하지 않고 은은한 미소로 대답해줄 뿐이다.
그렇게 드넓은 겐멜 수도원의 안쪽을 가로질러 지나자 내 눈앞에는 큼지막한 나무문 하나가 나타났다.
"이 너머에 아크 비숍님께서 유리안 경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디 예의를 갖춰주시길."
"저는 늘 예의를 갖춥니다. 모두에게 말이죠."
그리 말을 하며 거대한 문을 열어젖혔다.
문 너머는 흰 대리석으로 꾸며놓은 겐멜 수도원과 구조적으로 다르진 않았으나 어딘가 다른 분위기가 넘실거렸다.
'...음습하군.'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교단원들이 있었다.
탐탁지 않아 보이는 표정.
머리 위로 보이는 '분노'의 색.
그리고, 방을 가득 메울 정도로 팽팽한 살기.
그런 부정적인 것들이 화살처럼 내 몸에 박혔다.
난 최대한 내색 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진짜야, 유리안이다."
"그 유리안이... 여명회에...?"
"녀석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대가 유리안 경이군."
들려오는 목소리에 수군거림은 점차 가라앉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가면을 쓴 남성.
현재 여명회의 우두머리였다.
가면을 쓴 남자는 옥좌(玉座)에 앉아 귀족과도 같은 말투를 사용했지만 고풍스러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본디 귀족이 아닌 자가 귀족의 말투를 따라하는 듯한 뉘앙스.
당연하다, 저 가면을 쓴 남자. 테넬론이란 자는 귀족은커녕 농부로서 살아오던 자였으니까.
"유리안, 아크 비숍님의 앞이다. 예의를 갖춰라."
테넬론의 바로 옆. 희끗희끗한 머리가 살짝 엿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입을 열었다.
걸음을 멈춘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왜 예의를 갖춰야 합니까?"
말을 내뱉은 순간, 주변의 온도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서늘하게 변한 공기는 바늘처럼 내 피부를 찔렀다.
"비숍 엘레노아에게 듣기론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이 자리에 찾아온 것으로 안다. 그러니, 무릎을 꿇어 네 충성을 증명해라."
"제가 전한 말과는 다르군요."
말을 잇자 주변은 쥐 죽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벅차게 느껴질 정도였다.
"제가 이곳에 찾아온 건 알량한 신앙에 기대기 위함이 아닙니다. 비즈니스 파트너를 구하기 위해서죠."
여명회의 교구에서, 특히 무력이 출중한 녀석들이 잔뜩 모인 이곳에서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내가 취해야 할 스탠스는 여명회의 신도가 아닌 모종의 협력 관계. 그걸 위해선 무릎을 꿇는 것은 좋지 않다.
'여기서 무릎을 꿇었다간... 내가 여명회를 장악할 때까지 드는 시간이 배로 증가할 테니까.'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왜 이런 꼴이 되었는지에 대한 원망이 살짝 서리긴 했으나 최대한 무시한 채 나는 말을 이었다.
"제 목적은 오롯이 힘. 여러분들의 목적은 협력.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기에 이곳에 온 것일 뿐입니다."
"한배에 타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 아니었나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엘레노아의 목소리.
어쩐지 살짝 당황한 기색이 엿보였다.
"한배를 탔다고 방식이 같다는 법은 없죠."
"현명하지 않은 처사네요."
현명하지 않다라.
단편적으로 본다면 그리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비정상적인 생각을 지닌 '유리안'을 연기함과 동시에 안전한 위치를 지키고 싶어서 벌인 일이다.
'...완전히 여명회에 녹아든다면, 검성 하이든 라이히와 척을 지게 되는 것. 그렇다고 여명회에서 발을 뺀다면 이들이 놔두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이런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다.
여명회에 속하기는 하겠으나 그들에게 녹아들지 않고 언제든지 발을 뺄 수 있도록.
'게다가 이런 태도는 테넬론의 입장에서도 환영일 터.'
늘 실눈으로 다니며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유리안.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 여명회에 가입하려는 것일까?
그런 의문이 들 때, 여명회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할 경우 그 의구심은 더욱 짙어질 것이 명백하다.
최악의 경우 배신을 하기 위해 이중 첩자 노릇을 하기 위함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심지어 나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본디 실눈 캐릭터란 신용할 수 없는 녀석들이니까.
"두루뭉술한 신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보단 확실한 무력에 의존하는 게 더 현명한 것이 아닐지요?"
그러니 힘을 원한다는 목적을 확실하게 밝혀두는 것이다. 다른 녀석들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유리안! 아크 비숍님의 앞에서 그리 무엄하다니!"
"저 오만방자한 놈...! 이곳에서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려고...!"
"그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우기 시작할 때쯤, 옥좌에 앉아있던 테넬론의 목소리가 그들을 잠잠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교단원이 되기 위함이 아닌, 협력 관계를 위해서라. 그럼 이렇게 대할 필요가 없겠군."
꿀꺽.
나는 속으로 침을 삼켰다.
혹시 너무 오버했나?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테넬론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유리안 경과 엘레노아를 빼고, 모두 나가도록."
***
테넬론의 지시대로 나와 엘레노아를 제외하고, 다른 교단원들이 자리를 비우자 조금은 한산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천천히 카펫을 밟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레노아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하하핫! 역시, 소문대로 기백이 대단하군. 유리안, 사대 명문 크라이파트 가문의 프라손."
경박한 웃음소리.
이 자리에 모인 비숍들이 내뿜는 삼엄한 기운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어쩐지 즐거워 보인다.
가면 뒤로 웃는 얼굴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말투에선 그의 감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하긴 대놓고 교단원이 아닌 협력자가 되겠다고 말하긴 했으나 그럼에도 여명회의 입장에선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그 '유리안'이 적대를 하지 않고, 협력하겠다고 밝힌 것이니까.
"그래도 괜찮아. 그대는 그래도 괜찮아. 오히려 이리 뻔뻔하게 구는 것이 마음에 들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후, 교구의 안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자 엘레노아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런 테넬론의 뒤를 따라붙었다.
교구의 안쪽으로, 조금 더 안쪽으로.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 무렵 테넬론이 입을 열었다.
"이 안은 비숍들을 제외하면 접근을 엄격히 금하는 곳이다. 성물이 있는 곳이니 말이야."
"그렇습니까?"
"그런 장소를 내가 자네에게 보여주는 이유가 뭘까?"
"글쎄요. 현명하지 않은 탓에 잘 모르겠군요."
엘레노아가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에게 미소를 보이자 엘레노아는 다시금 시선을 앞으로 옮긴다.
"자네는 우리와의 관계가 어디까지나 협력 관계라고는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충실한 교단원이지 협력 관계가 아니야."
"그거 아쉽군요."
"하지만, 여기까지 온 자네를 돌려보낸다면 그것은 적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네. 우리에게 있어서 좋은 일이 아니지."
여명회가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악의 축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밀결사.
개개인이 가진 무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암암리에 활동하는 단체인 이상, 인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여명회에 입단하는 순간, 자네의 직위는 비숍으로 인정해주겠네."
"자, 잠깐... 아크비숍님!? 그게 무슨...!"
"조용."
불만을 표하려던 엘레노아의 말을 일축한 뒤, 테넬론은 말을 이었다.
"유리안은 북부 전선의 영웅이 아닌가? 그런 영웅에게는 마땅한 대우를 해줘야 내 체면이 살지 않겠어?"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네."
명백한 직권 남용이었으나 여명회에서 그에게 불만을 표할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여명회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눈앞의 남자, 테넬론 덕분. 정확히 말하자면 성물이 그를 선택했기 때문이지만.
흡족한 웃음을 지은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유리안.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 어떻겠나? 지금까지 없었던 파격적인 대우를 보장하지."
"협력 관계여도 좋다는 말씀이신지요?"
"자네는 목적이 뚜렷한 남자가 아닌가?"
테넬론의 말을 들어보니, 조금 전의 기 싸움이 쓸데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좋아, 그럼 웃는 처형대가 우리의 일원이 된 기념이네. 자네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겠네."
그 말을 끝으로 도착한 곳은 중간에 분수대가 보이는 넓은 공터였다.
하지만 평범한 분수대는 아니었다.
주변에는 새빨간 피가 도포되어 있었으며 중앙에는 눈부실 정도로 밝은 금색의 잔(盞)이 놓여있었다.
저것이 바로 성물 마신성(魔神盛).
마신 바르바토스의 잔재사념(殘滓死念)을 물질로 빗어낼 수 있는 물건.
촤락──.
분수대의 핏물에 발을 집어넣은 테넬론은 곧장 마신성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 잔의 안쪽. 칠흑처럼 새까만 물에 손을 집어넣더니 모양을 빗기 시작했다.
이윽고 손을 꺼내자 거대한 막대가 하나 형성되었다.
"이건 데몬의 뿔이라네. 나는 이 마신성을 통해 데몬들이 갖고 있는 힘의 원천, 뿔을 제조할 수 있지."
거뭇거뭇한 물이 뚝뚝 떨어지던 막대는 점차 '뿔'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전에 보았던 데몬이 가진 뿔과 똑같아졌다.
"대단하지 않은가?"
내 의중(意中)을 파악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테넬론.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데몬의 뿔만을 이렇게 형태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은 말이다.
그렇지만 저 성물의 정체가, 그리고 저 뿔이 어떤 힘을 갖추기 있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굳이 놀란 연기를 해주는 게 테넬론의 환심을 사는 데 좋을 것이다.
속으로 한숨을 깊게 내쉰 난 최대한 놀란 척 말을 이었다.
"대단하군요... 설마, 그 뿔을 사용한다면 데몬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맙소사...."
이 정도는 충분하겠지.
이 뒤에는 힘을 손에 넣기 위해 열심히 하겠다는 뉘앙스를 보여주면 되는 것.
"관심 있나?"
관심이 있겠냐?
저 뿔을 사용하면 X 되는 건 이미 알고 있는데.
하지만 완벽한 연기를 위해선 생각과 말이 다르게 나가야 한다.
"당연합니다. 그 뿔은 제 꿈을 이뤄주는 발판이 될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렇게나 원한다면, 지금 당장 자네에게 줘도 상관없네."
응?
대사를 생각하던 도중, 이어지는 테넬론의 말에 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쉽게 준다고?
27화. 본의 아니게(2)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에 존재하는 성물(聖物)이란 현재와 과거를 망라하고 이름을 남긴 성인들의 유품. 혹은, 살아생전 품던 그들의 욕망이나 사념이 담긴 것들의 통칭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성배, 마신성(魔神盛) 또한 그런 성물 중 하나.
'저 성배의 능력은 데몬들이 가진 힘의 근원, 마신의 잔재사념을 물질로 빚어낼 수 있다는 것.'
이 성물이 가진 힘은 굳이 어렵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빈민가에서 본 데몬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그곳에서 본 인간형 데몬은 바로 이 '마신성'이 만들어낸 작품이니까.
평범한 인간이라고 할지언정 데몬에 필적하는 힘을 주는 마신의 산물(産物).
하지만 그 대가는 만만치 않다.
...데몬이 되어버린다는 점.
뿔을 이식받는다는 인간임을 포기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 뿔 하나를 만들기 위해선 많은 데몬의 피와 혼석(魂石)이 필요하지. 이 하나의 뿔을 위해 많은 돈과 시간이 투자했네."
"그렇습니까?"
"이 뿔을 자네가 사용한다면 대체 얼마나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을까?"
그걸 왜 네가 궁금해하는데?
순간적으로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 검성이 가진 아성을 무너뜨리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
테넬론은 말을 이으며 뿔을 든 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난 속으로 생각했다.
'X 됐다.'
이렇게 쉽게 줄 것이라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유리안이 여명회에 입단한 이유는 오롯이 힘을 위해. 그러니, 그 목적의 기반인 '뿔'을 보면 갖고 싶다는 의사를 밝힐 것이라 생각했다.
유리안인 척 연기를 하며 예의상 말한 것뿐인데....
'이렇게 쉽게 준다고!?'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며 속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테넬론은 뿔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가 필요했는지 말했다. 당연히 권유를 거절하면 그의 기분이 상할 터.
그렇다고 거절하지 않는다면 뿔을 이식하게 되는 셈이다.
'...미친.'
슬쩍 난 테넬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면을 쓰고 있어 표정을 읽는 것은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눈매와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게 엿보였다.
살짝 떠본 것만으로도 냉큼 뿔을 준다고 하다니, 얼마나 환영하는 거냐 넌.
"그... 아크 비숍님,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과도한 호의에 개탄을 금치 못할 때, 곁에 있던 엘레노아가 입을 열었다.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유리안 경은 제대로 된 의사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에게 비숍의 작위를 주는 것도 모자라 구태여 이런 특혜를 준다는 것은 시기상조. 다른 비숍들이 안다면 불만을 표할 게 분명합니다."
"흠... 그런가?"
잘한다, 엘레노아!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유리안."
"어쩔 수 없지요. 저 또한 조직의 와해를 바라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가? 의외의 배려심이로군."
테넬론이 쓴 가면의 안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더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럼, 유리안. 거추장스럽게 비숍 임명식을 거치진 않겠네. 자네는 협력 관계를 원했으니 말이야."
그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명회의 아크 비숍으로서 자네에게 부탁 하나를 하려고 하네만...."
***
테넬론과의 대화를 끝마치고 밖으로 나온 엘레노아는 슬쩍 고개를 돌려 유리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늘 미소 짓는 얼굴.
그 덕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엘레노아였으나, 이 남자가 품고 있는 원초적인 욕망을 그녀는 알고 있다.
'힘에 대한 집착.'
황실에서 처음으로 마주쳤을 때,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힘에 대한 강렬한 갈증을 이 남자는 품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아크 비숍의 호의를 거절할 줄이야.'
엘레노아는 방을 나서기 전, 테넬론이 유리안에게 한 파격적인 제안을 떠올렸다.
단번에 비숍의 자리에 앉히는 것도 모자라 성물로 빚은 뿔을 하사하다니, 너무나도 파격적인 처사에 엘레노아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마신성(魔神盛)으로 빚은 뿔은 완벽하다고 말할 순 없었으나, 사용자에 따라 막강한 힘을 부여해주는 것은 여과 없는 사실.
그 덕에 뿔 하나를 빚어내기 위해서는 막대한 시간과 돈이 필요했다.
'유리안의 명성이 아무리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이렇게나 환영할 줄이야.'
테넬론이 유리안에게 대하는 태도는 다른 교단원들을 대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조금 불안감을 느꼈다.
아크 비숍의 과도한 대우에 불만을 품을 법한 교단원들이 분명 있을 테니까.
"엘레노아 양."
생각을 정리하던 도중, 문득 들려온 유리안의 목소리에 엘레노아는 속마음을 숨기며 웃음을 지었다.
"네, 무슨 일이시죠?"
"표정이 좋지 않군요. 어딘가 불안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엘레노아는 순간 흠칫했다.
유리안을 끌어들임으로써 피어오르던 모종의 불안. 그것을 속마음을 들여보기라도 한 것처럼 알아챘으니까.
"그럴 리가요. 이제부터 북부 전선의 '악마'가 저희와 함께하는데, 불안할 일이 있을까요?"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유리안의 고개는 수도회의 안쪽으로 돌아갔다.
무엇인가 쳐다보는 기색.
엘레노아도 그가 시선을 던지는 곳을 쳐다보니 그곳엔 익숙한 인영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유리안. 내가 누구인지는 기억하고 있겠지?"
비릿한 웃음과 함께 입을 연 남자의 이름은 알파스 메이엔드.
그 뒤에는 어마어마한 덩치의 몬시뇰, 펠코르의 모습도 보였다.
엘레노아는 알파스가 찾아온 이유를 대강 예상할 수 있었다.
펠코르와 마찬가지로 청사자 기사단원 출신.
동시에 부단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실력 있는 기사다.
'...역시나, 이런 일이 있을 것 같긴 했어.'
알파스의 얼굴을 보며 엘레노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부단장의 자격을 박탈당한 이유는 그가 저지른 비리 때문. 그 비리를 고발하고 처리한 것은 다름 아닌 눈앞의 유리안이었다.
유리안을 여명회에 끌어들임으로써 생겨날 불안 중 하나가 벌써부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마도 알파스가 전 기사단원들을 이끌고 모인 이유는 알량한 복수심을 해소하기 위함일 터.
'안하무인이라고는 하지만 이 남자도 알파스의 얼굴 정도는 기억하고 있겠지.'
황실에서 자주 충돌이 있던 사이였으니까.
"죄송합니다만, 초면이 아니신지요?"
응? 몰라?
조소를 흘리는 유리안의 모습에 엘레노아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모를 수 없는 사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엘레노아는 황실에서 둘이 다투는 모습을 똑똑히 봤으니까.
저도 모르게 엘레노아는 유리안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가면을 쓴 것과도 같은 웃음 탓에 속내를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빌어먹을 말투는 여전하구나 이 개자식."
알파스의 욕설에는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자신처럼 당황한 것이겠지.
평범한 사람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만방자한 남자란 것쯤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였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 오만함의 기반은 자신이 갖고 있는 무력에 대한 믿음 덕분.'
살기등등한 이런 상황에서 그의 표정은 잔잔한 호수처럼 미동이 없었으니, 유리안이라는 남자가 가진 대담함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순간이었다.
"크흠."
분명, 이 상황을 방관한다면 큰일이 일어날 것이 자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엘레노아는 한 차례 헛기침을 입에 담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이자 비로소 그녀는 입을 열었다.
"소란을 일으키실 생각이라면, 그만두시는 게 어떤가요?"
"비숍 엘레노아, 이건 하나의 교육입니다. 이제 막 여명회에 입단한 자를 위한 교육."
"그래요? 그렇다면, 더 말려야겠네요.
'그렇습니까?' 하고 대답하는 알파스를 보며 엘레노아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제 유리안 경의 위계가 여러분들보다 더 높아졌으니까요."
엘레노아의 말에 알파스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크흠,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한 엘레노아는 말을 이었다.
"아크 비숍께서 유리안 경을 교단원으로 인정하며, 동시에 비숍의 직위를 내리셨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비숍 엘레노아!"
깜짝 놀라 수군거리는 교단원들을 뒤로 하고 엘레노아는 지긋이 알파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알파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입니까?"
"제가 얻는 것도 없을 텐데, 구태여 여러분께 허언할 필요가 있을까요?"
까드득──!
알파스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히죽 하고 웃는 유리안.
그 미소엔 눈앞에 보이는 전(前) 청사자 기사단원들에 대한 비웃음이 서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볼 일이 없다면 전 이만 가보도록 하죠."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알파스는 부릅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몸에선 당장 터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살의가 넘실거렸다.
피부를 찌르는 살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도 유리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지나쳤다.
'괜히 그 '북부 전선의 악마'란 소리를 듣는 게 아니네.'
엘레노아는 그리 생각하며 유리안의 뒤를 따랐다.
***
복도를 걷던 난 알파스의 머리 위로 떠 오르는 분노의 색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 빌어먹을 놈은 참으로도 많은 악연을 쌓아두었구나.'
가뜩이나 여명회에 입단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골머리가 아픈 와중이다.
그런 와중에 사연도 모르는 이들이 내게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이제는 아플 골머리도 없을 수준이었다.
일단 알파스가 품고 있던 감정은 명확했다. 언젠가 내게 칼끝을 겨눌 정도로 확실한 분노다.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나 증오할 수 있다니... 아님 저놈이 쪼잔한 건지.'
저렇게 만든 유리안이 대단한 건지.
"그럼 아까 나누던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죠."
속으로 투덜거리는 도중, 뒤따라오던 엘레노아가 입을 열었다.
"아크 비숍께서 유리안 경에게 부탁한 것은 혼석을 확보하는 것이에요."
혼석(魂石).
삼각(三角) 이상의 데몬에서만 나오는 데몬의 심장. 그리고 마신의 잔재 사념을 모아두는 그릇이다.
"결국, 데몬을 죽여달라는 이야기로군요."
"뭐, 따지고 보면 그렇죠."
"그래도 터무니없는 일이라면 거절하겠습니다. 전 '감은 눈'의 소속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단독 행동이 보장된 감은 눈이기는 하지만, 도가 지나친다면 꼬리가 잡히기 마련.
어디까지나 난 여명회라는 것을 숨겨야 하는 입장이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감은 눈 쪽과 연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테니까요."
어딘가 흡족스러운 말투.
그녀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감은 눈으로서 업무를 하기 위해 집무실에 들르자 날아온 비보(飛報)에 그 자신감이 어디에 나온 것인지 예상할 수 있었다.
"유, 유리안 경! 비서실로부터 삼각(三角) 데몬 토벌 임무가 내려왔습니다!"
라즈롯의 다급한 말투를 뒤로 하고 난 그가 가져온 명령서를 훑어보았다.
여명회에 입단하자마자 날아온 삼각 데몬 토벌 임무.
지금까지 마음속으로 품고 있던 짐작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황실 비서실에도 여명회의 끄나풀이 있는 모양이군.'
28화. 혼석(1)
혼석(魂石).
삼각(三角) 이상의 데몬들에게만 추출되는 이 데몬의 심장은 마신 바르바토스의 성물인 '마신성'으로 뿔을 만들기 위한 재료이자 마신의 잔재사념을 모아두는 그릇이기도 하다.
더불어, 그 잔재사념(殘滓死念)을 한 데 모은다면 그것은 곧 마신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으니, 현재 여명회의 목적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띄고 있는 물건이라 말할 수 있겠다.
'여명회에 입단한 순간, 삼각 데몬 토벌 임무가 내려지다니.'
황실에도 여명회의 끄나풀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곤 있었지만, 그 예상이 현실로 다가오자 혀 끝에는 씁쓸한 맛을 맴돌았다.
비밀결사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규모가 크며, 독보적인 힘을 갖추고 있는 조직.
그렇기에 이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여명회를 앞으로 어떻게 다뤄야 할지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속하게 된 이상 끝장을 봐야 하는데.'
그리 생각하며, 난 창틀에 팔을 얹은 뒤 계속해서 이동하는 풍경을 눈으로 쫓았다.
현재 내가 타고 있는 것은 아드라탄 제국이 자랑하는 관광 고속 열차다.
목적지는 비서실을 통해 전달받은 '삼각 데몬'의 출현지인 국경 도시 베르니든이다.
열차 안은 그리 북적거리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값어치의 '공명석'을 사용해 움직이기에 열차란 돈 많은 귀족들의 이동 수단에 불과했다.
게다가, 철도가 깔린 곳이 제국 전토(全土)가 아니니 이용할 고객들은 더욱 한정되겠지.
***
"조, 조용하니 좋구나. 대도시들을 이어주는 이동 수단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받은 일이야."
그렇게, 열차에 대한 평가를 속으로 늘어놓는 사이 맞은 편에 앉아 있는 헤란드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헤란드 형님."
"하, 하하...."
그는 식은 땀을 흘리며 어딘가 불편한 웃음을 지었다.
우연히도 열차 지정석에서 마주친 헤란드의 얼굴은 참으로 볼만 했다. 악귀나찰을 두 눈으로 목격한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헤란드 형님께선 어디가 목적지이십니까? 저처럼 국경도시 베르니든에 갈 생각이신지요?"
"그, 그래. 곧 태양신교의 승천절이 있지 않느냐? 크라이파트 가문의 대표로 내가 가게 되었다."
승천절이라, 그러고 보니 슬슬 이 시기로군.
헤란드의 물음에 '그렇습니까?'라고 답하며 미소를 짓자 헤란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러는 너는 임무 때문이냐?"
"예, 그렇습니다. '감은 눈'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함이죠."
"그렇군. 네가 고생이 많구나."
"별 말씀을."
힐끔, 헤란드의 머리 위를 쳐다보자 그의 위로 연신 '공포의 색'이 꿈틀거렸다.
한 시라도 빨리 자리를 떠나고 싶어 하는 듯, 몸을 좌석 바깥으로 떼어놓은 모습은 굳이 '색'을 보지 않아도 이 자리가 얼마나 불편한지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형님, 제가 준 난초는 잘 기르고 계십니까?"
그런 헤란드의 불편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난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그래 아주 잘 기르고 있다. 잎사귀 하나도 소중하게... 내 목, 목숨처럼 말이다!"
"목숨처럼 길러주시다니,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하, 하하...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헤란드의 얼굴에는 '공포의 색'은 더욱 맹렬하게 꿈틀거렸다.
그저, 난초 잘 기르고 있냐 물어봤을 뿐인데 어디까지 생각한 걸까?
***
국경도시, 베르니든에 열차가 도착하자 난 역을 빠져나와 도시로 향했다.
한창 개발 중이던 줄린 특구와는 달리 베르니든에는 어느 정도의 인파를 엿볼 수 있었고, 군데군데 사람 냄새가 나는 도시였다.
덕분에 이번 임무로 차출된 인원은 나뿐이다. 공명석 보수를 위해 마법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라 호위가 필요하지도 않았으니까.
그 말은 즉, 데몬과 대치할 때 나 혼자 토벌에 임할 수도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아는 놈이긴 한데, 그래도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 하는 게 낫겠지.
'베르니든에는 '감은 눈'대원들이 몇 명이나 있을려나.'
***
"그럼, 먼저 가보마."
"예, 수고하시길."
"...혹여나 하는 말이지만, 변경백인 오로닐 경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은 하지 말거라."
쌩뚱맞는 소리에 헤란드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는 근심어린 목소리로 다시금 말을 이었다.
"이전에... 네가 그 손으로 끝장을 낸 하이란스 가문... 그 가문과 돈독한 관계였으니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헤란드는 가져온 케이스를 질질 끌며, 도시의 안쪽으로 향했다.
내가 끝장을 낸 하이란스 가문이라.
'아마 그 차남이 날 지독히 싫어했다고 했었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가문이 역적으로 몰려 숙청당하고 생존자들은 페레난드 신성국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내가 직접 한 일은 아니지만, 찝찝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수준에 달하게 되었다.
어차피 난 임무를 위해 온 것이지, 귀족과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니란 말이지.
"유, 유리안 경. 제도에서 이리 먼 곳까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가 도착한 것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기라도 했는지, 헤란드가 사라지자 베르니든에서 주둔하던 '감은 눈' 대원 몇 명이 다가왔다.
따사로운 햇빛이 눈을 찌르자, 한 손으로 그것을 가리며 인사를 한 대원을 힐끔 쳐다보았다.
"보고 받은 데몬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보고서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국경도시 베르니든 주변에 출몰한 데몬은 삼각(三角)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이전에 토벌한 이각보다 뿔이 하나 더 많은 수준.
쉽지 않은 일이 될 터지만 <월광검>을 완성 시킨 지금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새로 얻은 <뜨인 눈> 특성도 있으니까.
"지금 페레난드 신성국과 제국의 국경 사이인 피룬 숲에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어딘가 난처한 기색이 엿보이던 대원이 어딘가 말끝을 흐리자,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유리안이 쌓은 명성은 어마어마하다. 단순히 데몬을 토벌하는 일이라면, 그가 온 순간 해결되었다고 생각할 터.
그런데, 이렇게 말끝을 흐리는 이유는 '데몬 토벌'이외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필 태양신교의 기념일인 승천절과 토벌 일정이 겹치고 말았습니다. 그 탓에 변경백께서 토벌 일정을 승천절이 끝난 뒤로 미뤄달라고 하셨습니다."
"일정을 미뤄달라고 했습니까?"
"예!"
비록 이번 임무에 시간 제한이 있지는 않지만, 이쪽은 하루라도 빨리 제도에 돌아가 여명회의 다음 움직임을 주시해야 하는 입장이다.
'검성 하이든 라이히 쪽의 움직임도 파악해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사건의 근원지라 불러도 좋을 제도로 빠른 시일 내에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승천절이 시작하는 날은 언제입니까?"
"지, 지금으로부터 1주 후입니다. 그리고, 이틀 동안 축제가 진행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난처하군.
가히 열흘 동안을 이곳에 묶여버린다면, 여명회의 다음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할 터.
"너무 일정이 늘어지는군요. 변경백과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국경도시 베르니든을 담당하고 있는 가문은 오로닐 가문이라고 했나? 그렇게, 오로닐의 저택으로 안내해달라는 말을 꺼내려던 찰나.
- '...혹여나 하는 말이지만, 변경백인 오로닐 경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은 하지 말거라.'
문득, 헤란드가 헤어지기 전에 던진 말을 머릿속에 떠올랐다.
"...귀찮아졌군요."
"예?"
"아뇨,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상황도 결국, '유리안'이란 인물이 만든 것. 그 사실에 속으로 혀를 차며, 난 말을 이었다.
"변경백의 저택까지 안내해주시죠."
***
"미안하지만, 유리안 경. 현재 피룬 숲은 승천절 준비로 인해 태양신교를 제외한 외부인의 입장을 일절 금하고 있다네."
예상했던 대로, 기념일인 승천절을 시작하기 전 일을 끝마치겠다는 제안은 거절되었다. 참으로 안이한 결정에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현재 피룬 숲에 출현한 데몬의 등급은 삼각으로 예상됩니다. 이 데몬이 활동을 재개한다면, 승천절이 엉망이 될 것이 뻔할 텐데요?"
"하지만, 지금은 미동도 없지 않은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어처구니없는 탓에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난 가까스로 그것을 속으로 삼켰다.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데몬이라네. 그런 데몬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다시금 활동을 재개했다간 그거야말로 본말전도가 아닌가?"
"지금 이것은 황실에서 내린 명입니다만?"
"그 명을 거절하겠다는 것이 아니라네. 잠깐 일정을 미뤄달라는 것일 뿐."
지긋이 그를 쳐다보자, 오로닐의 머리 위로 작게나마 '공포'의 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색은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승천절은 이곳 베르니든에 주요 관광 요소 중 하나라네."
수입 요소겠지.
"그런 승천절이 자네들의 토벌 임무 때문에 엉망이 된다면... 그 책임을 자네가 질 수 있겠는가?"
명백하게 적의가 깃든 시선으로 오로닐은 나를 쳐다보았다. 말로는 해결되지 않겠군. 그리 생각하며,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칫하는 오로닐. 그는 순간, 내 허리춤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 설마 이런 일로 검을 뽑겠냐고.
"아빠!"
그때, 앙증맞은 목소리가 팽팽해진 분위기를 뚫고 들어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7살에서 8살 남짓 되어 보이는 소녀다. 이제 막 유치(乳齒)를 뽑았는지, 앞니가 하나 없는 모습은 영락없는 그 나이 또래의 아이다.
"테, 테리나!"
"응? 아빠, 이 사람은 누구야? 엄청 잘생겼다!"
"다, 다가가지 말거라 테리나! 이리로 와라, 어서!"
딸아이가 들어오자, 사라졌던 오로닐의 '공포'는 다시금 머리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아이에게 검을 휘두를 정도로, 정신 나간 사람이 있겠느냐?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유리안'이 가진 악명을 떠올리니 이 정도는 호들갑이 아닐 것이다.
"그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로닐 경."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어진 난 오로닐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저택을 빠져나왔다.
잘 닦여진 정원을 지나, 저택의 입구를 지나치자 기다리고 있던 '감은 눈'의 대원들이 내게 다가왔다.
"어,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리안 경?"
"미룬 일정을 앞당기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꽤나 외골수시더군요."
"그렇습니까...?"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대원들. 하루라도 빨리 제도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다.
"그럼, 변경백께서 일러 주신 대로 일주일 후에 토벌 일정을 진행하는 게...."
"아뇨, 무장을 해제하지는 마십쇼. 아마도, 일정대로 흘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예? 그게 무슨...."
다시금 오로닐의 저택을 쳐다보던 난 앞으로 피룬 숲에서 벌어질 일들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이곳, 국경도시 베르니든은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플레이어가 최초로 삼각(三角) 데몬과 조우하는 곳.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승천절을 앞두고 있으며 그 덕에 피룬 숲의 데몬이 다시금 활동하는 시간을 난 짐작할 수 있었다.
"현재 베르니든에 주둔하고 있는 대원들의 인원은 어느 정도 됩니까?"
"다섯 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들만으로 그것을 막아내기란 턱없이 부족한 수.
토벌 일정을 미뤄달라는 오로닐의 명에 따라, 베르니든에서 병사를 차출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난 이번 토벌 일정이 길어질 것이란 예상이 들지 않았다.
29화. 혼석(2)
이 세계관에선 데몬들의 강함을 형태와 뿔의 수로 분류한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삼각(三角) 이상의 데몬부터는 그들이 가진 특수한 능력을 토대로 고유적인 명칭을 부여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몽수(夢獸) 하멜른.
베르니든 근처 피룬 숲에 출현하는 데몬의 이름이다.
이렇게나 확실하게 녀석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이 '하멜른'이란 데몬이 가지고 있는 악명 덕분이다.
'오죽하면, 위키에 공략 페이지만 15페이지가 넘었지.'
침식형 데몬으로서 일정 영역에 대한 침식이 끝난다면, 그때부터 하멜른은 그 구역을 자신의 요새로 바꾸어버릴 수 있다.
입구와 출구가 매일 바뀌는 미궁.
색은 멀쩡하지만, 발을 담구는 순간 중독되는 늪.
온갖 상태 이상으로 무장한 데몬들과 하멜른 본체의 정신 공격.
그 외 기타 등등.
플레이어의 악몽과도 같은 데몬이었기에 국경도시 베르니든, 삼각 데몬, 피룬 숲이라는 이 세 단어를 들었을 때 쉽게 '하멜른'이란 데몬을 떠올릴 수 있었다.
승천절 이후로 밀린 토벌 일정이 앞당겨질 것이라 예상한 것도 '하멜른'이 가진 능력을 떠올릴 수 있어서다.
이제 2일 정도가 지났으니, 아마도 내일.
그것도 아니라면 기념일을 시작하는 당일....
"유리안 경! 오로닐 경께서 지금 즉시 저택으로 와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라고 예상했는데, 생각한 것보다 빠르다.
따사로운 햇살을 등지고 식빵에 베르니든 명물, 베이컨 잼을 바르고 있던 나는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감은 눈' 대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로 '공포의 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식사 중이신지도 모르고!"
"아뇨, 괜찮습니다. 급한 용무였으니까요."
빵을 한 입 베어 물자, 풍부한 단짠이 혀끝을 타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괜히 명물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난 미소를 지었다.
하루를 시작하기 딱 좋은 맛이다.
***
저택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자존심 세우던 어제와는 달리 죽어가듯 사색이 된 오로닐이었다.
그의 옆에는 아내로 보이는 여성도 서 있었다. 그녀 또한 오로닐과 마찬가지로 표정이 좋지 못했으며,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부르셨습니까. 오로닐 경."
오로닐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올려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제 막 12시를 넘긴 시각. 어제 이야기를 나눈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건만 모종의 사연이 있었는지 그의 얼굴엔 근심이 잔뜩 서려 있다.
"...."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자신의 딸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 딸, 테리나가 어제 밤 이후로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네."
"그렇군요."
"주치의도 어떠한 이유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더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오로닐, 말을 듣자하니, 어제 본 그의 딸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모양이다.
병명은 불명.
주치의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니, 변경백과 그 가족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리라.
"테리나는 수차례 유산 끝에 겨우 얻은 내 보물 같은 아이일세. 대체 왜 테리나에게 이런 일이...."
만약 유리안이었더라면 여기서 비아냥거렸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딸 때문에 애통함을 느끼고 있던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할 만큼 난 냉혈한이 아니었다.
"자네를 부른 이유는 내 딸, 테리나 때문이라네. 혹시 자네라면... 내 아이가 눈을 뜨지 못하는 이유를 알지 않을까 싶어서."
"애초에 전 의료기술 전문가가 아닙니다. 데몬 토벌의 전문가죠. 그런 저를 부르셨다는 건 오로닐 경께서도 짐작 가는 부분이 있다는 것 아니십니까?"
크흠.
오로닐의 자책이 가득한 낮은 신음 소리가 방안을 적적하게 울렸다.
"그럼, 제가 먼저 말씀드리죠. 오로닐 경께서 짐작하신대로, 지금 따님이 눈을 뜨지 못하는 이유는 피룬 숲의 데몬이 맞을 겁니다."
내 말을 들은 오로닐의 눈에는 희망이 깃들었다.
지금까진 알 수 없었던 딸아이의 이상(異常)과 발병의 근원인 적을 내가 확실하게 명시해주었기에,
오로닐는 조금 전 다 죽어가는 모습이 아니라, 허겁지겁 다급한 모습으로 다시 나에게 물어봤다.
"그, 그렇다면... 어제 미루었던 토벌 일정을 앞당겨주게나! 승천절이 지금 대수겠는가! 내 딸이...!"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어난 일이 데몬의 소행이라는 것을 짚어줬을 때, 그의 얼굴에 피어오르던 희망은 내 대답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
"피룬 숲에서 잠자고 있는 데몬은 '몽수 하멜른'이란 이름의 데몬입니다. 세 개의 뿔을 지닌 삼각 등급의 데몬이며, 대지에 뿌리를 내려 근처의 땅을 자신의 영역으로 만드는 침식형 데몬이죠."
계속해서 말을 잇자, 오로닐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내가 입을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
"땅의 기운을 흡수함과 동시에 녀석은 꽃가루를 뿌려 주변의 동물들에게 자신의 씨앗을 심습니다."
"씨, 씨앗 말인가?"
"씨앗이 심어진 동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멜른의 수족이 되어 움직이게 되죠. 다행히도, 인간에게는 큰 효과가 없지만, 예외라는 것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어린 아이들."
그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지금 내가 내뱉은 말로 자신의 딸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모양이다.
"특히 이제 막 유치가 빠진 아이들에겐 더 치명적이죠. 이가 빠진 자리는 신경과 연결이 되어 있어, 머리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이 될 테니까요."
"그, 그러니 지금이라도 빨리 그 데몬을 토벌하는 것이 좋은 것 아닌가!"
답답한 마음에 오로닐은 나에게 소리쳤지만, 내 대답은 냉정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늦었습니다. 이미 활동을 시작한 것 아닙니까? 데몬은 멍청이가 아닙니다. 특히 삼각 정도 되는 녀석들은 지능이 꽤나 발달한 녀석들이죠."
전쟁은 내가 상대를 이길 수 있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야만 비로소 행동으로 나서게 되는 것이다.
"몽수라고 불리는 하멜른은 피룬 숲을 자신의 발 아래에 두었다고 판단해 다시금 활동을 개시한 겁니다. 그리고 그 지배한 피룬 숲을 이용해 저희가 녀석을 찾기 위한 모든 노력을 방해를 하겠죠."
"그럼, 지금이라도...."
"그 사이, 오로닐 경의 따님은 목숨을 잃을 겁니다."
부릅 뜬 눈으로 오로닐은 나를 쳐다보았다. 머리 위로는 '분노'의 색이 일렁거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격한 감정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 더 이상 태울 것이 없는 불꽃처럼 서서히 작아지던 '분노'의 색은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유리안 경, 혹시 해서 묻겠다만...."
"예."
"어제 자네가 왔을 때, 토벌을 허락해주었더라면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나...?"
"예, 전 그것을 위해 제도에서 온 겁니다."
크흑.
애통함이 가득 찬 신음이 오로닐의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그의 아내가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리자 오로닐은 그녀를 다독여주기 시작했다.
"따님을 살리시고 싶습니까?"
그런 그들에게 한 마디를 건네자, 화들짝 놀란 오로닐은 다시금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그게...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오로닐 경에게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국경도시 베르니든에게 피해가 갈 테지요."
"피해... 말인가?"
"예."
어딘가 미심쩍은 낌새를 느꼈지만, 딸에 대한 걱정이 더욱 컸는지 나에 대한 불신은 금세 사라졌다.
도리어, 그런 불신은 거대한 신뢰로 바뀌어갔다.
제국의 웃는 처형대,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이 캐릭터는 여러 가지의 이명을 가지고 있고, 그중 하나가 바로 '데몬 토벌의 달인'이 아닌가?
"어, 어떤 피해라도 감내할 수 있다네. 내 딸을 위해서라면...!"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오로닐의 대답에 미소를 지으려던 도중, 아차! 싶어 최대한 감정을 숨기기로 결심했다.
가뜩이나, 평판이 좋지 않은 유리안이 이런 상황에서 웃음을 짓는다면 딸의 목숨으로 장난치는 악인처럼 보였을 테니까.
***
몽수 하멜른.
아까도 말했지만 이 이름에 치를 떠는 플레이어들은 한두 명이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한다면, 피룬 숲을 미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으로 시작해 온갖 상태 이상으로 무장한 하수인들로 플레이어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심지어 이 미궁은 하루가 지날 때마다 출구가 바뀌며 그로 인해 체계화된 공략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이 하멜른을 보고 제작진의 악의가 잔뜩 깃들어 있는 데몬이라 불렀다.
'게시판에 이 울분을 토하면, 악으로 깡으로 버티라는 댓글만 잔뜩 달렸지.'
물론, 나 또한 이 악의의 덩어리에 당한 피해자 중 하나다. 위키에 등재된 15페이지 중, 7페이지 정도는 내가 작성했었으니 그때 품던 분노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작금에 이르러선, '유리안'이 되어버린 내가 그 악의의 덩어리를 해치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때처럼 막막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미궁이 된 피룬 숲을 뚫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고뇌할 수도 있었고.
독과 발작. 부패와 실명 등 온갖 상태 이상으로 무장한 적들과 마주할 수 있음에도 두렵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실로 간단했다.
그런 위험들을 마주하는 것보단 난 가장 간단하면서 쉬운 공략법을 선택했으니까.
나중 일은 생각하지 않은.
***
"준비 끝났습니다, 유리안 경. 이젠 바람의 방향만 바뀐다면 시작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해야만 합니까?"
"이렇게 해야 하지요. 이대로 놔둔다면, 베르니든에게도 위협이 될 것은 자명한 사실. 위험 요소를 방치하는 것은 멍청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피룬 숲을 태워버린다니...."
'감은 눈' 대원들은 다 뿌린 기름통을 들고 얼떨떨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룬 숲을 모조리 태워버릴 생각은 아닙니다. 그저, 데몬이 뿌리를 내린 곳을 소.독.하는 것뿐이죠."
"괜찮겠습니까? 오로닐 경께서 크게 노하실 겁니다. 피룬 숲은 승천절과 밀접한 관계를 띄고 있는 곳이지 않습니까?"
감은 눈 대원 중 한 명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난 대답했다.
"오로닐 경께서도 허락하셨습니다. 승천절보단 베르니든 시민의 안전을 우선시하신 것이지요."
"어제만 해도 반대하시던 분이 대체 왜...."
말을 잇던 대원은 힐끔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를 향해 넌지시 미소를 지어주자 헛기침을 하던 대원은 고개를 푸욱 숙였다.
"아, 아닙니다. 제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이거 오해를 풀어줘야 하나? 딱히 겁박을 한 것도 아닌데, 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그때였다. 다른 대원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주변의 모든 시선들이 내게 몰렸다.
'감은 눈'의 대원들. 그리고, 오로닐의 말에 이쪽으로 투입된 베르니든의 병사들까지도.
"그럼 시작합시다."
굳이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내 말과 함께 대원들과 병사들은 일제히 치켜든 횃불을 피룬 숲의 안쪽으로 던졌다.
기름을 잔뜩 뿌려둔 나무들에 횃불이 닿자 불꽃은 화마(火魔)가 되어 몸을 키우기 시작했다.
타닥, 타닥──!
불똥이 튀는 소리, 매캐한 연기가 주변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고 그것을 보며 난 허리춤의 검을 툭툭 건드렸다.
그아아아악──!
그리고, 고통에 찬 괴물의 비명과 함께 거대한 땅울림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의 중심엔 사람의 얼굴이 잔뜩 새겨진 괴물 나무, '몽수 하멜른'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히, 히이이익!"
"데몬이다! 전투 준비!"
거대한 삼각 데몬의 돌격에 겁을 지레 먹은 병사들 중 몇 명은 제자리에 주저앉거나 뒷걸음질 쳤다.
나는 그 모습에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앞으로 한 발 나아가 허리춤의 월장검도 뽑아든 뒤, 늘 하던 대로 검신에 오러를 흘려보냈다.
끔찍한 외모와 거목에 흡사한 크기. 그럼에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위키에 등재된 15페이지 중 14.9페이지는 모두 녀석이 만든 요새를 타파하는 방법.
'몽수 하멜른'이란 데몬 공략에 서술된 글자수는 고작해야 500자도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순간, 녀석의 운명은 끝이라 봐도 좋은 것이다.
30화. 혼석(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