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NOPERFECTODEOJOSENTRECERRA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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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10

완벽한 실눈 악역을 연기하다

1화. 팬에서 안티로.

- 그렇군요. 검은 기사가 당신이었군요. 좌천된 영웅, 낙성(落星) 하이든 라이히.

피칠갑이 된 검은 갑옷 너머로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새빨갛게 물든 검을 손수건으로 닦은 그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 사람들이 영웅이라 칭송하던 당신도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그러게, 영웅이라 떠받들어 줄 때 잘하지 그러셨습니까? 그 휘황찬란한 저택에서 자신의 안위만 생각했어도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요.

검은 갑옷의 남자가 쓰러진 자리 바로 옆.

찐득한 피 웅덩이 위에 여성이 한 명 쓰러져 있었다.

- 제 주제도 모르는 가엾은 것,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끊어질 것 같군요.

- 유리안....

- 예.

- 린네는 살려다오... 기사로 지금까지 제국에 봉사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푸욱.

검은 기사, 하이든 라이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리안은 쓰러진 여성의 심장에 검을 찔러넣었다.

미약하게나마 움직이던 여성은 이윽고 미동도 하지 않게 되었다. 숨이 완전히 끊겼다.

- 적의 숨통은 확실하게 끊어라. 스승님께서 제게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 그렇다면... 네 스승이었던 내 숨통도... 그리 비정하게 끊을 수 있겠느냐?

하이든의 말에 유리안은 피식하고 웃었다.

실눈을 뜬 그의 두 눈에선 안광이 보이지 않았지만, 모습은 마치 인두겁을 뒤집어쓴 악귀(惡鬼)와 같았다.

-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는 검을 휘둘렀다.

매정하게, 마치 당연한 일을 하듯이.

***

"아니,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모니터의 영상을 쳐다보던 나는 터무니없는 전개에 나도 모르게 불만을 입 밖으로 쏟아냈다.

방금 영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되는 내용이었다.

이건 지금까지 게임을 사랑해온 팬들을 향한 도발인가?

"하이든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게 DLC 트레일러라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자식들 돈 벌 생각이 있기라도 한 걸까?

내가 보고 있는 영상은 '프롬웰 소프트'라는 게임사의 작품 중 하나,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DLC 트레일러다.

그토록 고대하던 작품의 DLC가 나온다는 말에 주먹을 불끈 쥐고 기대하고 있었거늘.

정작 트레일러가 공개되자 가지고 있었던 기대감은 박살 나고 혐오감과 실망감이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이잖아, 하이든 라이히가!"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 주인공은 '하이든 라이히'이다.

하지만 정작 DLC 트레일러에서는 차가운 주검이 되어 죽는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 본편은 다채로운 AI와 다양한 스토리, 그리고 화려한 액션 등등, 수많은 매력 요소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 유명 게임이다.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으며, 나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이 게임에 팬이 된 건 캐릭터 때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공인 '하이든 라이히'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북부 전선의 영웅, 데몬 사냥의 귀재."

데몬이 끊임없이 출몰하는 절망적인 세계에서 그는 최강자였다.

물론 주인공이 강한 거야 당연하지만.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고결하고 영웅적인 행보를 하면서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를 희망찬 미래를 이끌기 때문이었다.

그런 살아있는 전설이자, 작품의 주인공인 '하이든 라이히'가 이리도 허무하게 죽는다고?

"그것도 유리안 손에?"

사대 명문가 크라이파트 가(家)의 방계혈족이자, 주인공 '하이든 라이히'가 키운 기사.

기껏 하이든이 북부 전선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알려주었더니,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그 검을 스승에게 돌린 변질자.

게임의 주인공 하이든 라이히는 그런 변질자의 손에 죽고 말았다.

도저히 지금까지 한 유명 작품을 이끌었던 주인공의 최후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성의가 없었다.

제작사인 '프롬웰 소프트'의 실책에 치가 떨렸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비록, 게임 속 인물에 불과했지만 나는 '하이든 라이히'라는 캐릭터에게 감화되었다.

인류의 적인 '데몬'에게 가족을 잃고, 자신과 같은 피해자를 만들지 않도록 제국 북부 전선에 올라간 귀인(貴人).

남에게 자신의 철학을 강요하지 않으며, 고고하게 자신만의 정의를 추구하던 검은 기사.

그런 멋들어진 주인공에겐 그만큼 멋진 최후가 있는 법이다.

이 게임을 좋게 평가했던 많은 플레이어는 분명 이를 기대하고 원했을 게 분명하다.

나처럼 하이든 라이히가 되어 세계를 탐험하고, 제국을 지키고, 제자를 육성하고, 동료와 뜨거운 전우애를 느꼈다면 예외가 있을 순 없다.

아니, 설사 안타깝게 죽더라 해도 이런 어이없는 최후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

그 대단했던 인물이 고작 스승님을 뒤에서 찌를 생각밖에 없는 변절자 제자 따위에게 죽는다고?

게임을 좀 해 본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이게 납득이 안 된다는 걸 충분히 알 텐데.

근데 정작 게임을 제작한 회사가 이걸 DLC라고 트레일러까지 만들어 올린 만행을 보면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 게임 팬에 대한 모욕에 가깝다고!

[이번 작 주인공은 유리안인가 보네요.]

[저딴 실눈 악역이 왜 이번 타이틀 주인공임?]

[사정이 있나 보죠. 이번 작품엔 그걸 보여주려는 듯?]

[믿고 사는 프롬웰 소프트니, 무조건 예구 각]

댓글도 가관이었다.

모두 엉터리 같은 '하이든 라이히의 죽음'에 관심은 없고 후속작이 나온다는 사실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개중에는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을 옹호하는 자도 보였다.

그래, 솔직히 나도 DLC가 나온다는 이야기 혹 하긴 했어.

하지만 내용물이 이러면 안 되지.

이건 게임 팬으로서 반발해야 할 부분이 아니야? 근데 왜 실드를 치고 앉아 있는 건데.

[예약 구매를 취소하시겠습니까?]

"하아...."

예약 구매 취소 버튼을 누르자 튀어나온 메시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는 내게 평범한 게임이 아니다.

직장 생활을 이제 막 시작한 사회 초년생의 노고를 조금이나마 잊게 해준 나의 자그마한 안식처였다.

그만큼 '하이든 라이히'라는 캐릭터에게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게임이었다. 어느 상황에서든, 어느 회차에서든.

근데 그런 안식처를 이리 망쳐놓다니.

[예약 구매를 취소했습니다.]

그래도, 별 수 있겠는가?

제작사가 이리 만든 이상 일개 게이머가 할 수 있는 건 불매밖에 없다.

이것이 그나마 게임의 팬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불만 표시다.

"...물이나 주자."

자리에서 일어나 최근 취미로 기르기 시작한 난에 물을 주었다.

가끔 이렇게 뒤숭숭할 때 난에 물을 주고 잎을 닦다 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괜히 지긋한 나이가 있으신 어르신들이 난을 키우는 게 아니다.

같은 식물이라도 난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안정감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혹자는 난을 키우는 게 마음을 키우는 거라고 하지 않던가.

너만은 저 게임처럼 되지 말고 꼿꼿하게 잘 커다오.

띠링─!

그때, 켜둔 컴퓨터에서 알림음이 들려왔다.

"뭐지?"

하던 걸 멈추고 확인하자 게임 유통을 대리해주는 사이트에서 온 쪽지였다.

보낸 사람은....

"프롬웰 소프트?"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제작사.

그리고 내 안식처를 산산조각 낸 장본인들.

속으로 혀를 차며, 도착한 쪽지를 열어보았다.

어차피 예약 구매를 취소한 대상에게 보내는 매크로 답변일 것이 분명했다.

[안녕하세요.]

하지만, 매크로 답변이 적혀있을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쪽지 내용은 실로 담백했다. 가벼운 인사, 그것밖에 적혀있지 않았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제작사, 프롬웰 소프트입니다.]

생각 없이 읽고 있더니 쪽지 하나가 더 도착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저희 게임을 5년 동안 플레이해주신 '이시후' 님 맞으시죠?]

[맞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 DLC의 예약 구매를 취소하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고작 그런 걸로 제작사에서 개인 쪽지를 보낸다고?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 따구로 스토리를 만들 생각이라면 이렇게 고객이 떠날 수도 있다는 걸 예상했어야지!

가만 생각해 보니, 더 화가 나네.

어떻게 주인공을 그렇게 허무하게 죽여버릴 수가 있지?

설마....

이 녀석들 진짜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거 아니야?

"...."

하지만, 더 이상 거기에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아졌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상대에게 뭔 말을 해봤자 소귀에 경 읽기니까.

그리고 DLC 트레일러를 보고 예약 구매를 취소한 시점에서 '프롬웰 소프트'에 대한 애정은 눈 녹듯 사라진 상태였다.

가장 좋아했던 게임을 이리도 어이없게 망쳐놓은 회사에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것도 기약 없는 헛된 희망이나 다름없고.

그리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이시후 님은 이번에 전개되는 스토리가 마음에 안 드시나 보군요. 그렇다면, 이시후 님께서 그 스토리를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다시 도착한 쪽지. 내용을 읽고 있자니 코웃음이 나왔다.

이젠 하다하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

진짜 정말이지 얼마나 밑바닥을 보여주려는....

"어...어?"

구구구──!

그때, 켜둔 모니터에서 굉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빛이 새어 나왔다.

뭐야, 무슨 일이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갑자기 쪽지 때문에 컴퓨터가 맛이 간 것도 아니고?!

"으... 으아아아아!"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방안을 모두 뒤덮었다.

뒤늦게 다급히 컴퓨터 본체 전원을 강제로 종료했다.

툭, 산만했던 방안이 다시금 고요해졌다.

"휴... 대체 무슨 일이...."

고개를 돌려 잠잠해진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방금 현상은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빛이 나를 어딘가로 끌고 가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탓일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었다면 상상도 못 할 상황이 떨어졌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그나마, 반응해서 다행이지. 가만히 있었더라면...."

쨍그랑──!

그때였다.

무엇인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시야의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내 난이....'

깨진 건 소중하게 키웠던 난이었다.

멀쩡히 탁자에 올려놓았던 난이 바닥에 떨어졌는지 모르겠지만, 화분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흙이 방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당연히 소중하게 매일매일 한 잎씩 닦았던 난도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이리저리 꺾기고 뜯어져 보기 흉한 꼴이 되었다.

순간 마음이 울적해졌지만, 거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어? 왜 바닥이랑 가까워지지?'

쿵!

어느샌가 나도 떨어진 난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게 뭐... 야....'

난 수면 마취를 한 듯 눈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다.

 

 

 

 

2화. 싫은 놈(1)

"후우...."

눈을 질끈 감고 숨을 고른 남자, 헤란드 크라이파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길게 나열된 복도를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입을 쩍하고 벌릴 정도로 휘황찬란한 저택.

마치 궁전처럼 장엄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은 모르는 사람이 온다면 예술품을 감상하듯 찬찬히 음미해봤겠으나 헤란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도리어 식은땀이 주르륵 흘렸다.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복도 끝에 괴물이 입을 벌리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누구든 그렇겠지.

'가고 싶지 않다. 만나고 싶지 않다.'

머릿속에 부정한 생각들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괴물이 기다리고 있는 문 앞에 도착하자 그냥 이대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헤란드는 고민했다.

"헤란드 님, 주인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다.

문 옆에 선 사용인에게 안내는 필요 없다며 손을 휘젖고, 헤란드는 옷매무시를 가다듬고는 문을 열어젖혔다.

복도보다 더욱 고급지게 꾸민 응접실이었다.

그곳엔 한 남자가 물뿌리개를 들고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난(蘭)?"

남자가 물을 주고 있는 식물은 난이었다.

휘황찬란한 저택의 주인치고는 소탈한 취미다.

그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실눈. 그리고 희미한 미소가 담겨있는 입가였다.

"오셨습니까? 헤란드 형님."

"그, 그래."

헤란드는 나긋한 목소리를 듣고는 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 주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크라이파트 가문의 방계혈족 출신이지만, 가문 내에서 제일가는 검술 실력을 지녔으며 동시에 냉정함과 잔혹함을 타고난 괴물.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웃는 처형대'이겠는가?

저 물뿌리개를 쥔 손에 수많은 데몬과 인간의 피가 묻어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헤란드는 자신보다 나이가 적으며, 호족상으로는 동생이었지만 유리안을 두려워했다.

그는 '데몬'을 죽이는 것도, 인간을 죽이는 것도, 심지어 가족을 죽이는 것도 눈 깜빡하지 않고 행할 귀신이었으니까.

"머, 머리는 괜찮느냐?"

헤란드는 공포를 최대한 숨기며 입을 열었다. 손가락으로 유리안의 머리를 가리켰다.

"제도 변방에 나타난 데몬을 사냥하던 과정에서 머리를 다쳤다고 들었다."

"예."

"주치의의 말을 듣자 하니 기억 상실 증상이 있다고 하던데...."

"약간 있습니다. 다만, 형님께서 근심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길."

유리안의 말에 헤란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고 보니 최근 네가 숙청한 하이란스 가문의 생존자들이 페레난드 신성국으로 망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이란스 가문...."

"기억나느냐? 그 가문의 차남이 널 유독 싫어했던 걸로 아는데. 뭐, 결국 네 손에 죽었지만 말이다."

"죄송합니다만 형님."

고개를 돌린 유리안.

"기억나지 않습니다."

담백하게 이어지는 말에 헤란드는 흠칫했다.

기억나지 않는다.

유리안의 성격상 이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숙청한 인간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걸 하나 하나 기억하고 있을 리가 있겠나? 라고 되물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쓰,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의미로군.'

이 실눈의 괴물 앞에선 거짓말 따위는 통하지 않고, 품은 진의를 숨겨선 좋을 게 없어 보였다.

헤란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말대로 오늘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네, 네가 부상 중인 건 알고 있으나... 원로회 분들께선 오늘 있을 '감은 눈'의 입단 테스트의 교관으로 네가 참가하길 바라시는구나."

"'감은 눈'... 후후."

초연한 웃음에 헤란드는 다시금 겁을 먹었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괴물이 인간을 흉내 내며 웃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 그래...."

"헤란드 형님도 함께 가십니까?"

헤란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까지 안내해주라고 크라이파트가(家)의 원로분들이 명령하셨다."

제국 사대명문가 중 하나인 크라이파트가(家)는 예로부터 혈통을 중시했다.

철저히 모든 게 직계 혈족에게 집중되었고, 혹시라도 방계가 이를 넘어서라 싶으면 가만히 두지 않았다.

방계혈족은 아무리 공을 세워도 정식적인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해주지 않았으며, 세간에 이름을 날리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러기에 크라이파트 가문은 직계와 방계를 구분하고자, 방계인 혈족에게 '프라손'이라는 미들 네임을 사용하게끔 하였다.

원로회를 장악한 크라이파트 가문은 이 괴물,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이 추락하기를 원했다.

더러운 방계혈족인 것도 모자라, 황실의 명이라면 갓난아이도 죽일 수 있는 괴물.

그런 인면수심(人面獸心)이 크라이파트 가문의 성을 달고 있었으니, 보수적인 원로회가 보기엔 당연한 입장이었다.

헤란드가 이곳에 온 이유도 이를 위한 발판 중 하나였다.

데몬과의 사투로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

그 진위(眞僞)를 확인하고 그의 몸 상태가 어떤지 파악할 겸 말이다.

"안내... 안내라... 후후."

다시금 이어지는 미소.

저 미소를 통해 헤란드는 유리안의 생각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 저 초연한 웃음의 의미는... 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거겠지.

헤랄드는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습니까? 옷도 갈아입고, 오랜만에 일을 하는 거라 마음을 다잡고 싶습니다만."

"...그, 그럼 그렇게 하자꾸나. 어차피 테스트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그런데 형님."

그렇게 발걸음을 옮겨 돌아가려던 헤란드는 아우의 목소리에 움찔 멈춰 섰다.

또 뭐가 남았단 말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모두 털어놓았건만.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는군요."

순간, 헤란드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너 때문에 그렇다!'라 소리치고 싶어졌다.

"어... 어, 그래 보이느냐?"

"예,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은데 이걸 길러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유리안은 물을 뿌리던 화분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안에서 난초가 자라있었다.

"난...을 말이냐?"

"기르기 쉬운 식물이죠. 그늘 안에 두었다가 비가 올 때만 물을 주면 잘 자랄 겁니다."

그렇게 말한 유리안의 얼굴에는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 웃음을 보고 있자니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이 난초, 설마 관리를 못 해 죽인다면 내 목이 달아나는 건가...?'

지레짐작일 수 있으나, 유리안은 괜히 '웃는 처형대'라는 별명이 붙은 미치광이가 아니다.

북부 전선이건 제도이건, 목표로 한 상대의 목숨을 장난감처럼 여기는 정신 나간 녀석이다.

어떤 식으로든 명분이 생기면 바로 검을 휘두를 게 분명하다.

"고, 고맙다...."

"천만입니다."

유리한의 불길한 미소를 보며 헤랄드는 원치 않은 화분을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

응접실 구석 가득한 난초를 보며 나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본래라면 하나, 많아 봐야 두 개만 기를 생각이었다.

근데 사용인이 말을 잘못 이해했는지 응접실 한구석이 정글이 되어버릴 정도로 가져왔다.

이렇게나 많은 난초, 대체 어디서 구한 거냐?

그래도 방금 하나는 처리했다.

정신적 안정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에게 선물했으니 잘한 일이겠지.

"...헤란드 형님의 반응을 보아하니 연기가 통한 모양이군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난 응접실 안쪽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눈에 들어온 것은 머리에 칭칭 감은 붕대와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가면을 쓴 듯한 은은한 미소다.

"눈이 이런데, 앞이 이렇게나 잘 보인다니."

그것은 실눈.

눈동자의 안광이 전혀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실 같은 눈이다.

혼잣말을 내뱉으며 거울에 비친 '나'를 곰곰이 살펴보았다.

'걸어 다니는 위선', '배신의 온상', 흔히 '실눈 캐릭터'하면 연상되는 것들이 모조리 떠오를 정도로, 거울 속의 '나'는 음흉하게 생겼다.

아니 다른 사람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이 남자는 원래 내가 아니다.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내가 열광하고, 좋아했던 게임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에 등장하는 증오스러운 악역.

그렇다.

지금 난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등장인물인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이 되어 있었다.

'그 덕에 유리안으로 연기하기 편한 것도 있었지.'

거두절미하고, 난 이 캐릭터를 싫어한다. 아니, 혐오한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주인공인 '하이든 라이히'의 은혜를 원수로 갚고, 존댓말을 사용하지만 안하무인한 성격 하며, 최후에 순간엔 그의 숨통도 끊는 최악의 인물상이다.

그렇기에, 이 '유리안'을 연기하며 그의 대사를 떠올리는 것이 꽤 용이했다.

'싫어하는 놈일수록, 자세히 보이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이 상황이 달가운 것은 아니다.

첫날은 두통 탓에 침대에 드러누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사용인들과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와 괜찮냐는 등의 소리를 해댔다.

머리가 아픈 와중이었기에 나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당장 꺼지라고, 그 결과.

"기억 상실증이라는 소문이 도는 모양이군요."

하지만 딱히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다.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라는 게임의 등장인물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중에서 하필이면 유리안에 빙의했다는 사실이겠죠."

음, 그렇고 말고.

"그나저나 혼잣말도 존댓말로 변환되는 겁니까?"

나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은 뒤, 다시금 거울 속에 비치는 실눈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캐릭터 성향

⇒ 실눈

⇒ 존댓말

⇒ 포커페이스

⇒ 존재감 과시

⇒ 표리부동

⇒ ...

√특성

⇒ 놀라운 직감

⇒ 부정의 색

⇒ 타고난 검사

⇒ 마왕의 그릇

⇒ 탁월한 마나 컨트롤

⇒ ...

====================

눈앞엔 익숙한 창이 하나 떠올랐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에서 사용되는 UI 창이다.

지난 5일간 이 사용법을 깨우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는 그중, 캐릭터 성향에 적힌 '존댓말'이란 부분에 시선을 집중했다.

[ 캐릭터 성향 " 존댓말 " ]

√효과

└ 입 밖으로 내는 모든 언어에 존중이 담깁니다. 당신은 아이, 어른할 것 없이 모두에게 존대합니다.

음흉한 '실눈 캐릭터'라면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캐릭터 성향, 바로 존댓말.

지금 내가 빙의한 등장인물 '유리안'도 음흉한 '실눈 캐릭터' 중 하나였으며, 작중에서 모두에게 존댓말을 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혼잣말에도 적용이 된다니 너무한 것 아닙, 아닙... 아닙니까? 에이 됐습니다!"

억지로 말을 짧게 해 보려고 했으나, 어떻게 된 모양인지 존댓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가뜩이나 신경 쓸 일도 많은데, 여기에 쓸데없이 기운을 빼고 싶지 않다.

피로함에 응접실 중앙에 놓인 소파에 몸을 던졌다.

"젠장... 참으로 빌어먹을 일이 일어났군요...!"

격하게 불만을 토로하던 난 앞으로 '유리안'으로 살아야 한다는 막막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자타공인 대단한 검술 실력과 마법에도 조예가 있는 천재.

어린 나이에 황실 전속 기관, '감은 눈'의 일원이 될 정도의 실력자.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주인공인 영웅, 하이든 라이히의 수제자.

'동시에....'

미치광이. 소시오패스.

인두겁을 쓴 괴물, 북부 전선의 악마, 웃는 처형대.

이토록 사나운 이명이 많다는 것은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이 그만큼 적이 많다는 걸 의미한다.

심지어 그가 속해있는 '크라이파트 가문'은 유리안이 방계 혈족이라는 이유로 끔찍이도 싫어했다.

천애고독.

그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이 녀석은 기댈 곳이 없는 놈이다.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이 가진 무력뿐이다.

하지만 그 무력도 지금은 무용지물이다.

'실눈 악역'에 빙의한 나 '이시후'는 딱히 검술에 조예가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막막하군요...."

현재 상황이 막막한 건 이 때문이다.

'유리안'이 쌓아 올린 악명을 생각하면 이 제도(帝都)에 내가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적이 많을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사정없이 물고 뜯겨 죽을 게 자명했다.

그러니, 정말 싫지만. 아주 싫지만!

나는 완벽하게 '유리안'을 연기할 필요가 있었다.

제국 내 모두가 두려워하는 음흉하고 정신 나간 실눈 캐릭터를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원로회에서 말한 감은 눈 입단 테스트의 교관으로 참여하는 것부터겠군.'

그리 생각하며 머리에 둘둘 감았던 붕대를 풀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또 어떻게 하면 원래 대로 돌아갈 수 있는지.

그건 차차 알아내는 것으로 하자.

현재는 이 얼토당토않은 상황에서 살아남는 게 먼저다.

"골치 아프지만, 교관 노릇을 잠시 해야겠군요... 군요! 군요! 혼잣말은 좀 넘어가면 안 되는 겁니까!?"

 

 

 

 

3화. 싫은 놈(2)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이 정신 나간 실눈 캐릭터는 늘 존댓말을 사용하는 주제에 절대 겸손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는 괴상한 에고의 소유자다.

당장 저택 내부만 봐도 화려한 예술품들과 액자들, 그리고 보석이 가득했다.

심지어 입고 다니는 옷도 이를 증명하듯 상당히 요란했다.

옷장을 열자 눈이 아플 정도의 색상 옷들이 한가득이었다.

"미친놈입니까? 당신은...."

내 취향을 떠나서 일반적인 옷은 찾기 힘들었다.

"...그나마 이게 덜 눈에 띄는 편이군요."

그나마 괜찮은 옷들을 꺼내 몸에 걸치기 시작했다.

코발트 블루색 코트와 회색 와이셔츠. 그리고, 검은색 장갑.

자칫하면 과하다 할 색상의 조합도 '유리안'은 멋들어지게 소화해냈다.

'이 정도면 8등신... 아니 9등신인가?'

솔직히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이놈은 잘생겼다.

그것도 엄청.

비록, '실눈'이 음흉하게 느껴졌지만 말이다.

아니, 이건 나만 그리 느끼는 걸 수도 있겠네.

아무튼 인정하기 싫지만, 원래의 나보다는 '조금' 더 나았다.

"그럼 슬슬 나가볼까요... 까요, 까요! 이런 망할입니다...."

한껏 욕지거리를 입에 담은 뒤, 바깥으로 나가려던 찰나였다.

입구 가까운 벽.

그곳에 걸린 검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안'이란 캐릭터에 걸맞게 검집에는 화려한 문양들이 이리저리 박혀있었으나 손잡이 부분은 실로 단순했다.

기억상 '유리안'은 쓰레기 중의 쓰레기 악인이었지만, 검술만큼은 진심으로 연마했다.

"유리안이라면, 검을 두고 바깥에 나가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을 테죠. ...테죠. ...정말 젠장입니다."

찰싹.

저절로 존댓말을 치환되는 입을 손으로 친 뒤, 벽에 걸려 있던 검을 허리춤에 매었다.

***

마차에 오른 크라이파트 가(家)의 삼남, 헤란드의 얼굴엔 근심과 걱정이 그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차에 동승한 자가 그 '유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황실 전속 기관 '감은 눈' 소속이다.

황실에서 내린 임무를 은밀하게 처리하는 기관이기도 하지만, 황실 근위대인 금위군(禁衛軍)의 역할도 소화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무력을 갖춰야만 입단할 수 있다.

당연히 그 무력이 일반적이진 않다.

맘만 먹으면 데몬이든 기사든 손쉽게 벨 수 있는 실력이다.

물론, 그것뿐이라면 이렇게까지 겁을 먹진 않았을 것이다.

아드라탄 제국에는 대단한 무력을 가진 강자가 많았다.

헤란드도 그런 자들을 한두 명 보고 만난 게 아니다.

그럼에도 유리안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저 검이 내게도 향할 수 있다.'

유리안은 황실의 명령이라면 누구에게도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른다.

거기엔 이해관계가 없다.

사람의 감정도, 개인의 생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황명이기에 죽인다.

그 결과 유리안의 검 끝에 맺힌 핏방울은 한둘이 아니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도 잔뜩 있었다.

'황실의 미친개...!'

그 덕에 '유리안'이라는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치를 떠는 귀족들도 있었다.

그의 죽음을 바라며 저주를 퍼붓는 자들도 많았다.

그런 인물과 단둘이 마차를 타고 간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헤란드 형님."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던 도중, 유리안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으, 응?"

"행선지는 어디입니까?"

"무, 무슨 말이냐?"

"이번 '감은 눈' 입단 테스트가 진행되는 곳 말입니다."

"아... 아, 아아!"

대체 왜 말을 거냐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했던 헤란드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입술을 씰룩거리며 대답했다.

"바, 바이엘 아카데미 연병장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바이엘 아카데미라...."

"그러고 보니, 넌 바이엘 아카데미 출신이 아니더냐?"

"글쎄요. 꽤 예전 이야기인지라 그다지...."

끼익, 히이이잉!

유리안이 말을 잇던 도중, 마차가 급정거를 하며 요란스럽게 흔들렸다.

"...무슨 일이냐!"

"죄, 죄송합니다! 그, 그게... 아이들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헤란드의 호통에 마부가 억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이들이 튀어나왔다고? 말이 다치진 않았고?"

"예, 예...."

"쯧... 마차에 갑자기 뛰어들 정도로 못 배운 녀석들이냐?"

헤란드는 혀를 찼다.

그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여타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평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어, 어떻게 합니까 주인님?"

"뭘 어떻게 하겠나. 당장 비키라고...."

그때 마차의 문이 열렸다.

"유리안?"

헤란드의 눈에 유리안이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여전히 섬뜩한 미소를 머금고, 조금 전 소란이 일어난 마차 앞으로 걸음을 옮긴 것이다.

"왜, 왜 그러느냐 유리안."

헤란드의 물음에도 그저 말없이 마차를 나서는 유리안.

이를 지켜보던 그의 눈에 유리한 허리춤에 걸린 검집이 들어왔다.

주인의 성격을 대변하듯 화려한 검집.

헤란드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제국 신민들이 괜히 그를 '웃는 처형대'라 부르는 게 아니다.

그는 감정이 없는 처형인이다.

황실의 명이라면 가족조차 죽일 수 있는 광인(狂人)이자 살인귀다.

별거 아닌 일로도 그의 심기를 건드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어쩌면 마차를 멈추게 만들었단 이유로 평민, 그것도 아이를 밸지도 모른다.

'그래도... 설마.'

설마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으나, 곧 헤란드는 황급히 마차에서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에서 유리안이 마차에서 내릴 다른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려야 한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함부로 평민을, 그것도 어린아이를 죽였다간 사회적 문제가 된다.

게다가 이건 유리안을 넘어 그가 속한 '크라이파트 가문'에까지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당연히 현장에 있었던 헤란드도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

유리안의 감시와 더불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것이기도 하니까.

"유리...!"

유리안을 부르던 그의 입이 굳었다.

설마 했던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7살 남짓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서로 끌어안고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이를 두고 유리안은 알다가도 모를 미소를 지으며 내려 보고 있었다.

여기까지라면 큰 문제는 아니다.

진정 문제는 유리안의 손이 허리춤에 있는 검 위에 올라가 있다는 거겠지.

이대로 두었다가는 피바람이 불고 만다.

'아...!'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 헤란드는 다급히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겁도 없이 귀족의 마차를 막느냐!"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느냐! 이래서 평민들이란...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마수가 손을 쓰기 전에 먼저 정리한다.

헤란드는 덜덜 떠는 아이들에게 윽박지르며 강하게 몰아붙였다.

벨 명분을 원천 차단해버리면 아무리 유리안이라도 쉽게 검을 휘두르지 못할 테지.

힐끔.

헤란드는 곁눈으로 유리안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있었다.

그저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서 더 하라는 것이냐?!'

이 정도론 부족하다는 건가....

헤란드가 망설이려던 찰나, 유리안이 움직였다.

한 손은 여전히 허리춤의 검집으로, 얼굴에는 섬찟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이 상황을 파하는 수밖에!

물론 잘못하면 유리안의 분노가 자신에게 향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게 먼저였다.

"썩 꺼져라! 이 빌어먹을 평민 녀석들!"

손에 든 지팡이를 붕붕 휘두르며 소리치자 겁에 질렸던 아이들은 부리나케 도망쳤다.

이걸로 일단 상황을 넘겼다.

그러나 이어 마수의 분노가 자신에게 향할 거로 생각하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 유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매몰차게 쫓아내지 않으셔도 됐을 텐데요."

"...미, 미안하다. 내가 아이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다."

"미안해할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후후."

소름 끼치는 미소.

"아쉽게 됐군요, 형님이 그리 싫어하지 않으셨다면 잘 대해 주었을 텐데 말이죠."

거짓말하지 마라, 이 괴물 같은 자식아!

헤란드는 혀를 차면서도 한편으로 안심했다.

다행히 유리안의 분노를 감내하지 않아도 되나 보다.

두 사람이 다시 마차에 오르자 마부가 다시금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마차엔 조금 전처럼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헤란드는 아까 상황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이 있더니만... 조금 전 행동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다행히 실제로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가만히 있었다면 그 아이들은 죽었을 거라고 헤란드는 확신했다.

검에 올라갔던 그 손은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어쩌면,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은... 이 녀석이 의도하고 퍼트린 게 아닐까?'

이번 기회에 숨어있는 정적(政敵)을 제거할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유리안이 보였던 행보를 보면 누구라도 의심할 만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헤란드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미끼로 이용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괴, 괴물 같은 놈....'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거추장스러워.

허리춤에 매어둔 검집의 위치를 고쳐잡기 위해 손을 갖다 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딱딱한 금속의 촉감이 적응되지 않는다.

그리고 검의 위치를 고칠 때마다 헤란드의 불편한 시선이 느껴졌다.

'겁을 먹었나 보군.'

어찌 보면 당연하다.

게임 내 자타공인 미친놈인 '유리안'과 한 마차를 타고 있는 거다.

구속하지 않은 살인자와 동행하고 있는 셈이나 다름없으니,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그나저나, 애들에게 그리 매몰차게 굴다니. 겁은 많아도 역시 귀족은 귀족이라는 소리인가.'

나는 조금 전, 마차에 부딪힐 뻔했던 아이들이 생각났다.

헤란드의 윽박에 부리나케 도망치던 그 뒷모습을 떠올리니 어쩐지 동정심이 피어올랐다.

어디 다친 데라도 없었는지 걱정이 되는데 말이지.

'...응?'

그때였다.

멍하니 헤란드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그의 머리 위로 희미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뭡니까 그건."

"뭐, 뭐가 말이냐...."

내 물음에 헤란드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반응을 보니 그가 뭔가 한 건 아닌가 보다.

'내 눈에만 보이는 건가?'

그리 생각하고 있자니 아지랑이에 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진한 보라색.

유심히 지켜보자 그 색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내게 직접 전달되었다.

그건 진한 '공포'였다.

▶ 특성, 「 부정(不正)의 색 」

등급 : 특별

▷ 당신은 자신에게 향하는 부정적인 감정에 민감합니다.

▷ 좋지 않은 감정이 향할 경우, 당신은 그것은 색(色)으로 판별할 수 있습니다.

이 녀석인가 보네.

생각해 보니, 작중 내 '유리안'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굉장히 잘 캐치했다.

특히, 타인의 감정을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공포'를 이용해 싸우지도 않고 적들을 무력화하기도 했으며.

'분노'를 이용해 상대가 먼저 자신에게 달려들도록 계략을 짜기도 했다.

아마 이 특성이 있어서 가능했던 거겠지.

'괜찮군.'

이건 써먹을 수 있겠다.

"유리안, 바이엘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벌써 말입니까?"

어느새 멈춰 선 마차에서 내렸다.

눈앞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부지와 그 위에 세워진 화려한 건물들이 보였다.

여기가 제국에서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교육 기관, 바이엘 아카데미.

비록 여기에 온 이유가 아카데미 견학이 아닌 '감은 눈' 입단 테스트를 위해서였지만, 그래도 감회가 새로웠다.

"실제로 보니, 어마어마하군요."

"뭐, 뭐라고 했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님. 후후...."

게임 속에서 보았던 장관(壯觀)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째선지 헤란드의 머리 위 '보라색 아지랑이'가 맹렬하게 흔들렸다.

 

 

 

 

4화. 타업자득(1)

'바이엘 아카데미'의 부지는 실로 웅장했다.

단순 계산만 해도 여의도의 면적과 흡사할 정도로 거대했다.

제국 내에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이는 곳, 말 그대로 최고 교육의 산실에 어울리는 규모일지 모른다.

"어, 어떠냐 유리안. 오랜만에 모교에 들른 기분은."

바이엘 아카데미를 둘러보고 있자니, 옆에 있던 헤란드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냐?"

여전히 '공포'를 뜻하는 보라색 아지랑이가 맹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음이야 이해 가지만, 딱히 아무것도 안 했는데 조금은 억울하다.

그냥 묻는 말에 대답한 게 다잖아.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형님. 굳이 시간 내셔서 여기까지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니다. 이왕 온 김에 '감은 눈' 입단 테스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고 싶구나."

응?

엄청 겁을 먹길래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은 줄 알았는데....

여기서 조금 기묘함을 느꼈다.

내 특성인 <부정의 색>에 따르면 헤란드가 품은 감정은 '공포'가 확실하다.

당연히 그 원인은 나 '유리안'과 원치 않은 동행.

그럼에도 저리 대답했다는 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감시인가.'

크라이파트가(家)는 세간에 이름을 날린 방계 혈족인 '유리안'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심지어 쌓은 명성이 대게 악명이라, 가문 입장에선 골칫덩어리였다.

어떻게든 사사건건 파문시키고 싶어서 안달이 났겠지.

'정확히는 이번 입단 테스트를 감시하려고 온 건가?'

물론, 지금은 파문당해선 안 된다.

유리안에 빙의되었지만, 그가 기존에 가진 무력을 온전히 손에 넣지 못했다.

세간에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상황에서, 가문에서 파문당한다면 외부 불만에 대한 억지력이 약해지고 말게 분명하다.

'원한을 품고 있던 녀석들이 득달같이 달려들겠지.'

이 실눈 악역 캐릭터는 몹쓸 짓을 굉장히 많이 했다.

전쟁에서 포로를 고문하는 것은 고사하고, 평민도, 귀족도 황실의 명이라는 미명 하에 수도 없이 죽인 악인이다.

제국 내 유리안에게 복수를 꿈꾸는 자들은 많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인다면....

'그 즉시 목을 노리겠지.'

이 바이엘 아카데미만 둘러봐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유리안이야...."

"그 '감은 눈' 소속의 유리안?"

"왜 여기에 황실의 미친개가 있는 거야?"

"조용히 해! 목소리 낮추고, 눈 마주치지 마!"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학생들.

모두 한결같이 머리 위로 보라색 아지랑이를 띄우고 있었다.

유리안을 본 것만으로도 공포에 사로잡힌 것이다.

현재야 공포로 인해 억지력이 작용할 수 있지만, 그 밑에 눌린 감정을 고려하자면 절대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젠장... 나도 잔뜩 공감해줄 수 있는데.'

나도 저들처럼 유리안 안티팬이 아닌가.

공포는 물론이고, 그 아래 묻힌 부정적인 감정에도 100%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어쩌겠는가, 내가 그 '유리안'인걸.

탐탁지 않은 현 상황에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곁에 있던 헤란드가 크게 움찔했다.

이쯤 되면 미안할 정도다.

조금이라도 현실을 잊고자 서둘러 입단 테스트가 진행되는 장소로 향하려고 했다.

"안녕하세요, 유리안 님."

바로 뒤에서 간드러진 목소리만 들려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유리안에게 아는 척을 하다니, 꽤 배짱이 좋네.'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간 큰 인물의 얼굴을 확인했다.

밤바다를 연상하게 만드는 어두운 남색의 머릿결. 그리고 에메랄드를 수놓은 듯한 녹색의 눈동자.

남자라면 한 번쯤은 고개를 돌릴 법한 미모의 여성이었다.

"...아일린?"

아일린 드 도나시엥.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에 등장하는 조연 중 하나다.

아드라탄 제국 마탑 소속으로 바이엘 아카데미 정교수를 맡고 있었다.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제5원소 중, '금(金)' 원소를 5위계까지 다룰 줄 아는 마법의 천재다.

게임에서는 아카데미 스토리에 등장하여 주인공에게 여러 조언을 해주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아일린이 왜 유리안에게 아는 척을?

'...유리안과 아는 사이였나?'

모른다.

내가 자세히 아는 건 게임의 주인공인 '하이든 라이히'와 그 주위의 인물들 뿐이다.

아무튼, 상대가 아는 척을 한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인사말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녀 머리 위에 아지랑이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검은색에 가까운 적색.

'이 색은....'

처음 본 감정의 색에 당황하기 잠시.

시간이 지나자 '보라색 아지랑이'를 보았을 때처럼 어렴풋이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혐오.

공포와는 다른, 벼린 칼 같은 감정이 내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어째서지?'

알 턱이 없다.

아일린이 왜 저런 감정을 품고 있는지.

'분명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있었다는 소리인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그 감정이 '혐오'라는 거다.

'적대'보다는 낫긴 해도, 혹시 모를 리스크를 생각하면 그다지 희소식은 아니다.

공포야 적이라고 해도 갑자기 덤벼들지 않겠지만, 적대에 가까운 혐오라면 언제든 무력으로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 말이다.

'아일린이 적으로 돌변한다면... 만만치 않겠네.'

'금(金)원소'를 5위계에 상위 마법사다.

기존의 유리안 능력이라면 단번에 당하진 않겠지만, 현재의 나로는 이길 가망이 전혀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러니 더더욱 틈을 보여주어선 안 된다.

적어도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을 무색하게 생각할 정도로 강한 유리안을 완벽하게 연기할 필요가 있었다.

"도나시엥 가문의 반쪽짜리, 누가 말을 걸어도 좋다 허락했습니까?"

입에 담고 나서 생각한 거지만.

진짜 이 새끼는 몇 번 죽어도 할 말이 없다.

문제는 그게 나란 거지.

시발.

***

마법사에게도 방계란 평생을 안고 갈 불이익이었다.

마법사는 세대를 거듭하며 체내에 쌓이는 마나의 순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연히 이 축복은 직계만이 계승을 할 수 있고, 방계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를 두고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불순물이 섞였다고들 한다.

하지만 실제로 마법 활용 능력에선 큰 차이가 없다.

그저 혈통을 중시하는 마법사 사회에 만연한 차별이자 낡은 관습이었다.

'개새끼.'

아일린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아까 유리안이 자신을 보고 한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를 부르는 멸칭 '도나시엥 가문의 반쪽자리'.

젊은 나이에 금(金)원소 5위계라는 위업을 달성했지만, 도나시엥가의 방계 혈족이라는 이유로 반쪽짜리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녀의 피에는 마법과 하등 연관이 없는 평민의 피 절반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아는 척을 했던 게 실수였다.

상위 데몬을 사냥하다가 머리를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부 차 말을 걸었던 건데....

여전하다 해야 할지 그 천박한 인성은 어디 가지 않았다.

싸가지 없고, 겸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오만방자함의 극치였다.

'자기도 나랑 같은 방계면서!'

무엇보다 열받은 건 자신도 똑같은 처지인 주제에 그렇게 말했다는 점이다.

아일린은 주먹을 부르르 떨며 '감은 눈'의 입단 테스트가 진행되는 연병장을 내려다보았다.

아카데미의 마법 교수인 그녀가 굳이 기사만 올 장소에 온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황실 전속 기관, '감은 눈'의 일원이자 크라이파트 가문의 방계. '웃는 처형대'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유리안이 추락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흥, 입단 테스트가 함정인지도 모르고.'

아일린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연병장에 모인 희망자들 사이에는 크라이파트 가문과 친분이 깊은 토르소 가문의 차남이 포함되어 있었다.

입단 테스트는 교관에게 실력을 인정받아야만 입단할 수 있었다.

방식은 예로부터 대련으로 실력을 확인했다.

즉, 교관인 유리안은 입단 테스트를 위해 토르소 가문의 차남과 대련해야만 한다는 소리다.

'그 과정에서 토르소 가문의 차남이 다친다면 원로회가 가만히 두지 않겠죠.'

이전부터 원로회를 장악하고 있는 크라이파트는 방계이면서도 눈엣가시인 유리안을 파문시킬 명분을 찾고 있었다.

이번 입단 테스트는 이를 위한 연극에 가까웠다.

아무리 황실의 비호를 받는 유리안이라 하더라도 이번 추궁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원로원에 속한 귀족들이 똘똘 뭉쳐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쉽지 않겠지.

유리안은 어떻게든 이 자리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다.

곧 연병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유리안을 보고 아일리는 조소했다.

근데 그때, 입단 희망자를 쭉 둘러본 유리안이 그녀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입단 희망자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하지만, 전부 쓰레기들 뿐이군요."

순간 술렁이기 시작하는 입단 희망자들과 관중들.

하지만 그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다.

알다가도 모를 묘한 분위기에 압도된 것이다.

이를 지켜보면서 아일린은 과거를 회상했다.

저 모습이 이상적으로 보였던 때를 말이다.

아일린이 처음 유리안을 만난 건 바이엘 아카데미 재학 중이었을 때였다.

당시 유리안은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운 선배였다.

한 학년밖에 차이가 안 나는 데도 방계라는 꼬리표를 단 채 다른 직계의 귀족들보다 빛났으며 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전무후무한 검술로 제국의 신예로 금세 떠올랐다.

보통 출신에 절망해 방계는 그저 그런 사람이 되기에 십상인 상황에서 유리안은 특별했다.

특히 '방계' 꼬리표를 떼어내고 인정받고 싶은 아일린에게 더욱 그랬다.

말 그대로 동경했다.

이 사람이라면 '방계'를 대표해서 세간의 인식을 바꿔줄 위업을 달성할 수 있을 거라고.

당시 너무 어렸던 아일린은 '동경'과 '연정'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음을 담아 유리안에게 러브레터를──.

"아아아아악!"

자신의 흑역사를 떠올린 아일린은 머리를 부여잡고 조용히 절규했다.

너무나도 부끄러운 기억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후우...."

겨우 숨을 골라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무튼, 그때 유리안은 지금과 달랐다.

수많은 방계를 대변해주었으면 한다고 여길 정도로 명예를 중시하고, 신중하고, 거기에 실력도 상당한 인재였다.

하지만 기대가 무색하게 유리안은 변절했다.

방계 귀족의 희망에서 황실의 미친개로.

출세를 위해선 어린아이도 죽이는 등, 그야 말로 자신의 명예와 성공을 위해 악명을 점차 쌓아나갔다.

그런 행보에 세간의 평판은 물론, 특히 아일린과 같은 방계 출신 귀족들의 강력한 반감을 사게 되었다.

안 그래도 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유리안의 악명이 더해져 '방계는 이래서 안 된다니까' 하는 인식이 더욱 강해졌다.

'차라리 잘 됐어. 이 김에 귀족 직위를 박탈당하는 게 나아.'

최근에 사고가 있었단 얘기에 살짝 걱정되긴 했어도 그뿐이다.

심지어 안 좋은 쪽으로 멀쩡한 걸 확인한 이상, 이번 기회에 더는 설치지 못하게 몰락하길 바랐다.

애초에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으니까.

'대련하는데 상처를 입히지 않고 제압하는 방법? 그런 게 있을 리가....'

"입단 희망자 여러분...."

그때였다.

연병장에 고요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일린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입을 연 남자,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에게로 향했다.

"사람이 죽을 때 어떤 소리를 내는지 아십니까?"

그 한마디에 모두가 두려움에 전율했다.

아일린은 그 순간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자신이 너무나도 그를 과소평가했다는 걸 말이다.

 

 

 

 

5화. 타업자득(2)

연병장에 모인 입단 희망자들을 보며 난 미소를 띤 채 생각했다.

'저질렀다. 저질러버렸다!'

솔직히 말하자.

나는 '감은 눈'의 입단 테스트가 대련이라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비록 검을 챙겨오기는 했으나 그건 '유리안'이라는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서일 뿐 휘두를 일이 있을 거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안내원을 통해 입단 테스트가 대련이란 사실을 알자 내 머릿속은 하얗게 물들었다.

'유리안'의 탈을 썼을 뿐, 정말로 '유리안'이 아니었으니까.

처음엔 부상을 핑계로 도망칠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곳에는 유리안을 알고 있는 수많은 인물이 와 있었다.

안 그래도 기억을 잃어서 예전 같지 않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만약 여기서 틈을 보인다면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고 궁지에 몰릴 수 있다.

특히나 안 그래도 유리안을 노리고 있던 인물이 당장이라도 움직일지 모른다.

그럼 사망 확정이다.

'그리고 이미 변수도 있는 마당에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고.'

유일하게 유리안에게 '공포'가 아닌 '혐오'를 품고 있는 인물.

'아일린 드 도나시엥'.

입단 테스트를 지켜보는 사람들 사이에 그녀도 있었다.

무슨 이유로 저런 감정을 품고 있는지 모르는 시점에서 틈을 보이기가 더 어렵다.

어쩌면 이번 일로 '혐오'를 '적대'로 바꿔 공격해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이전에도 말했지만, 지금의 나, '유리안'은 이렇다 할 저항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녀가 움직이는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되어선 곤란해.'

그러니 이 입단 테스트에서 확실히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나 유리안은 아직 건재하다는 걸.'

그래서 대놓고 도발하기로 했다.

쥐뿔도 없지만, 철저히 유리안이 되어 완벽한 연기를 펼쳤다.

다행히 먹혔는지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그때, 겨우 한 희망자가 입을 열었다.

"사, 사람이 죽을 때... 말입니까? 유리안 경?"

"예."

"그걸 갑자기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나는 웃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의 머리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확인한다.

보라색.

내가 기대했던 '공포'가 나타났다.

좋아, 이대로 간다.

"여러분이 입단을 희망하는 '감은 눈'은 제국에 존재하는 그 어느 곳보다 피 냄새가 지독한 곳입니다."

꿀꺽.

모두가 일제히 침을 삼키며 긴장한 기색을 풍겼다.

의심하는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하다.

지금까지 내가 내뱉은 말들은 모두 작품 속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이 실제로 한 대사들이니까.

"얼굴들을 보아하니, 전혀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그런 마음가짐으로 감은 눈에 입단하려 하다니... 후후."

나는 끊지 않고, 연기를 계속했다.

"그렇다면, 선배로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경험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그저 겁을 주기 위한 궤변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하등 의미 없는 말이라도 화자(話者)에 따라 청자(聽者)는 이를 궤변이라 치부하지 못한다.

지금 나는 유리안이다.

이 이름이 가진 의미를 저들이 모를 리 없다.

오히려 작품으로 접한 나보다 실제 살아온 저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난 그걸 이용한다.

"그럼 입단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합격 조건은 저를 죽이는 것. 테스트 종료 시점은 제가 죽거나, 혹은... 더 이상 입단 희망자들이 남아있지 않거나."

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연병장에 모인 입단 희망자들을 쳐다보았다.

"...윽."

보라색 아지랑이

그들의 '공포심'은 점차 뚜렷해졌다.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것이다.

난 그들의 얼굴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감정의 색'뿐만이 아니라 얼굴에도 공포의 색이 뚜렷하게 올라왔다.

'공포에 의한 굴복.'

지금 당장 내가 이 상황을 넘길 수 있는 최적의 수였다.

악명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유리안'의 이미지를 가지고 벌이는 최후통첩.

죽고 싶지 않으면 스스로 포기해라.

제국의 최강 악인을 앞에 두고 자신만만하게 나설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포, 포기하겠습니다."

곧 효과는 확실하게 드러났다.

제 스스로 공포에 짓눌린 희망자 한 명이 포기 의사를 밝혔다.

이어서 그 뒤로....

"저, 저도 포기하겠습니다."

"포기... 하겠습니다."

"저, 저도요."

"...저도."

하나둘씩 '감은 눈' 희망자들이 차례차례 입단 포기를 선언했다.

'휴, 이걸로 일단 넘긴 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테스트를 마무리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한심하군요. 합격자는 없습니다. 도전해보지도 않고 꼬리를 내리는 꼴이라니, 후후."

나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입단 희망자들을 향해 조소를 흘렸다.

좋아, 마지막까지 유리안다웠다.

유리안을 싫어하는 나조차 소름이 끼칠 정도이니 다른 사람에겐 유리안 그 자체로 보일 게 분명하다.

시선을 관중석으로 옮겼다.

아알린 도나시엥.

그녀도 똑똑히 봤을 거다.

적어도 쉽사리 손을 댈 수 없는 유리안의 압도적인 살벌함을.

적어도 이전처럼 '혐오' 이상의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지 못할 게 확실했다.

'어떠냐. 이제 날 만만히... 어?'

잠깐. 뭐야.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를 무너뜨릴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라진 상태였다.

아일린의 머리 위에서 맹렬하게 존재감을 뽐내던 '혐오'의 색이 말이다.

물론 그 자체는 환영할 일이지만....

'아니, 제대로 먹혔다면 공포에 물들어야 정상 아니야? 그것도 아니면 경계라도 해야 하는 건데....'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예상을 벗어난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아일린은 묘한 표정으로 연병장을 떠났다.

"수고했다 유리안."

"유리안 경! 수, 수고 많으셨습니다!"

헤란드와 함께 기사로 보이는 듯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무심코 헤란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로 보라색 아지랑이가 맹렬하게 솟구쳤다.

"유리안, 왜 그러냐...!?"

특성, <부정의 색>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니다.

지금 헤란드가 그걸 여실히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아일린은 내게 아무런 감정도 품지 않게 된 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헤란드에게 미소를 지었다.

"수고가 많다뇨, 형님이 더 수고가 많으시지요."

"그, 그, 그,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울 따름이구나 유리안...."

안심하라고 미소를 지은 건데....

어째 무서워하는 것 같다.

***

입단 테스트를 끝마치고, 아카데미를 빠져나가는 길.

크라이파트 가문의 삼남인 헤란드는 힐끔 자신의 옆을 쳐다보았다.

그곳엔 사람의 탈을 뒤집어쓴 악마가 미소를 지으며 아카데미 복도를 걷고 있었다.

'대체 언제 말을 꺼내려고 하는 거냐....'

헤란드는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을 느꼈다.

유리안은 검을 휘두르지도 않고 순식간에 테스트를 끝내버렸다. 그거 자체야 지금까지의 유리안의 행보를 보면 딱히 이상한 건 아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수고를 했다니....'

유리안은 입단 테스트를 마치고 난 후, 수고 많았다는 자신의 말에 '오히려 형님이 수고가 더 많다.'고 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헤란드는 모를 리 없었다.

'원로회 높으신 분들의 계략을 이미 알아차렸던 건가....'

부상이 있음에도 그가 입단 테스트 교관직을 맡은 건 원로회의 입김 때문이었다.

테스트에 응시하는 토르소 가문의 차남, 그와 대련을 시켜 허실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진짜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이 사실이면 예전 같지 못한 실력이 들통날 거고, 설사 소문이 거짓이라도 그건 그거대로 원로회에겐 좋은 일이었다.

대련 중에 토르소 가문 차남이 부상 입을 걸 미리 짜놓았기에, 이를 명분 삼아 그를 북부 전선으로 내쫓을 생각이었다.

어디까지나 이번 입단 테스트는 유리안을 잡기 위한 무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상황은 원로회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유리안은 함정이나 다름없는 무대에 올라 이를 장악했다.

'필시, 원로회의 계략에 힘 빼느라 고생 많았다는 뜻일 터.'

그렇기에 헤란드는 두려웠다.

유리안은 원로회의 계략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 계략에 엮여있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다.

근데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체 언제 말을 꺼낼 생각이지?

추궁이 없는 데도 헤란드는 압박감에 목이 옥죄이는 기분이 들었다.

어깨와 발걸음이 점차 무거워졌다.

"기억을 잃으셨다는 소문은 모두 거짓말이었군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병장에서부터 따라붙은 기사는 계속해서 유리안을 떠받들기 바빴다.

평소라면 시끄럽다는 말로 일축했겠으나 헤란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을 하든 꼬투리가 잡힐 것 같아 두려운 나머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런데, 유리안 경. 이번 시험에 토르소 가문의 차남분도 응시하셨다는 걸 아십니까?"

"토르소 가문의 차남이 말입니까? 그거 참 의외군요."

그러나 둘 사이의 대화에서 '토르소 가문'이 튀어나오자 헤란드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토, 토르소 가문의 차남도 '감은 눈' 시험에 응시할 수 있지 않겠느냐? 설마, 토르소 가문의 차남이 테스트에서 떨어졌다는 불명예를 입에 담고 싶은 것이냐?"

"헤, 헤란드 님. 그렇지는...."

"견습 주제에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아라! 크라이파트 가문과 토르소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내뱉은 말이라면, 그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헤란드 형님, 이상하게도 큰 반응을 보이시는군요."

유리안의 지적에 헤란드는 순간 움찔했다.

"따, 딱히 이상한 반응을 보인 건 아니다...!"

"맞습니다. 이상한 건 토르소 가문이죠. 참으로 이상합니다...."

"뭐, 뭐가 말이냐?"

아무것도 없는 미소.

분명 미소를 지었으나 어떠한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그저, 무(無)에 가까운 무언가다.

"'감은 눈'은 황실에 얽히고설킨 복잡한 정치적 관계에서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기 위해 구성원들 대부분이 평민입니다. 설령, 귀족이라 해도 파벌이 없는 몰락 귀족뿐입니다."

"너, 너는 우리 크라이파트 가문의 일원이 아니더냐!?"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크라이파트라는 성보다 '황제의 미친개'라는 말을 더 많이 들어봤습니다."

헤란드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유리안은 '크라이파트'라는 성을 달고는 있으나 방계인 탓에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건 세간이 다 아는 사실이다.

"제가 '감은 눈'에 입단할 수 있었던 건, 제가 가진 조건이 어떤 상황에서도 중립을 유지할 수 있다고 황실에서 판단한 거 아니겠습니까?"

유리안의 말이 이어질수록 헤란드의 등골은 서늘해졌다.

"하지만, 토르소 가문 차남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제 상식으론 1차 테스트에 합격한다 해도 2차 서류에서 떨어질 게 확실한데 말이죠. 저도 아는 사실을 다른 당사자가 모를 리는 없을 테고. 그러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 뭐가... 말이냐?"

"떨어질 걸 알면서도 굳이 입단 테스트를 본 이유가 말입니다."

헤란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두려운 나머지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쳐다볼 수 없었다.

"후후, 아 물론 뭔가 있다고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설마... 황실 전속 기관, '감은 눈'의 단원을 뽑는 이 자리에 어떤 중상모략이 있었겠습니까? 단순히 착각했거나 몰랐던 것이겠죠."

"으, 응...?"

툭, 툭.

갑작스레 유리안이 어깨를 두드리자 헤란드는 시선을 올렸다.

"그게 아니면 참으로 곤란할 테니까요, 후후...."

"...."

그의 눈을 보고 헤란드는 직감했다.

유리안은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다는걸.

그리고 어깨에 손을 얹고 내뱉은 말도 자신을 겁박하기 위해 한 소리란 걸 말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내가 미안할 정도로 겁을 먹는군.'

그저 헤란드의 사정을 알고 동정심에 한 말이었다.

 

 

 

 

6화. 적응(1)

"수고하셨습니다, 주인님."

저택으로 돌아오자 사용인들이 마중을 나왔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던 코트를 벗어주자 헐레벌떡 다가와 양손으로 받았다.

"저녁이 늦으셨는데, 준비할까요?"

"아뇨, 저녁은 됐습니다."

"예? 아... 알겠습니다."

신기하게 저녁을 먹지 않았음에도 배는 그리 고프지 않았다. 심지어 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유리안'의 단련된 육체는 평범을 넘어선 탓이겠지.

대한민국 평범한 남성이었던 때와 비교하자면 천지 차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난 곧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잠을 자고 싶은 마음도, 뭘 먹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나 생각할 것들은 잔뜩 있었다.

먼저 오늘 '원로회가 보여준 행보'에 대해서다.

"저를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헤란드 형님을 보낸 건 알고 있었지만...."

허리춤에 매어둔 검을 풀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금속이 닿는 짤그락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설마, 입단 테스트에도 원로회의 입김이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군요... 군요, 군요! 젠장입니다!"

혼잣말도 존댓말로 치환하지 말란 말이야.

입을 손으로 한 대 툭 쳤다.

슬슬 적응할 법도 했지만, 여전히 이 거지 같은 존댓말을 익숙해지지 않는다.

적어도 혼잣말은 평범하게 나와도 상관없잖아.

"후우...."

한숨을 깊게 내쉬고 하던 생각을 재개했다.

원로회를 장악한 크라이파크 가문이 날 내치려고 하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유리안의 이전 행보는 가문의 눈살을 찌푸리기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나 빨리 그 속내를 드러낼 줄이야.

몇 번이나 말했지만, 지금 가문에서 쫓겨나면 큰일이다.

'유리안'이란 아성(牙城)에 금이 가는 순간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되어선 곤란하지.'

가뜩이나 보는 눈이 많다.

오늘 보았던 '아일린 드 도나시엥'을 포함해서 제국 내에 유리안에게 원한을 품은 자가 지천에 넘쳐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크라이파트 가문'에 관한 일까지 생각할 정도로 여건이 좋진 못하다. 최대한 미루고 나중에 도모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오늘 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잘 넘어갈 수 있을까?

'적어도 입단 테스트. 그 조건을 조금 손봐두는 편이 좋겠네.'

'감은 눈' 소속인 이상 앞으로도 입단 테스트 교관 노릇은 몇 번 정도는 할 터.

적어도 이것만큼은 조치 취하는 게 좋을 듯했다.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는 건 곤란하니까.

"내일 테스트 결과를 보고하면서 이야기를 좀 해야겠군요."

생각을 정리한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검집을 쳐다보았다.

'유리안'이라는 인물을 구성할 때, 그 뼈대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물건.

그가 표출하는 자존심과 자만심은 이 '검'을 다루는 실력인 검술에서 온다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무력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어느 자리에서든 누구든 압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도 적을 많이 만들어도 목이 붙어있는 거지.

'나도 그런 힘이 있어야 한다.'

다른 이들을 억제할 강력한 무력.

나는 검의 손잡이를 부여잡았다.

그립감을 늘리기 위해 덧댄 가죽 위로 금속의 딱딱함과 서늘함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입단 테스트에서도 검을 손에 잡긴 했으나 그땐 입단 희망자들을 겁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했다. 말 그대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도구였다.

'심지어 발검(拔劍)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이번이 처음으로 검을 뽑는 거였다.

묘한 긴장감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스르릉─

금속과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을 받아 은은한 빛을 뽐내는 검의 자태는 실로 요사스러웠다. 마치 자신을 휘둘러 달라는 듯 간청하는 것 같았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도구인데, 그런 느낌이 들다니.

어쩐지 간담이 서늘했지만 동시에....

"미려하군요."

달빛을 은은하게 반사하는 도신은 실로 아름다웠다.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으나 내 눈에는 어떻게 검을 휘둘러야 하는지 그 길이 보였다.

검로(劍路)라고 할까? 그런 것이 말이다.

'이거 때문이겠지.'

이유는 대강 알고 있다.

유리안이 보유하고 있는 특성 때문이겠지.

▶ 특성, 「 타고난 검사 」

등급 : 고유

▷ 당신은 태어났을 때부터 검에 익숙합니다. 검의 길을 걷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 '검'의 형태를 한 것이라면 종류에 불문하고 뭐든 다룰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에서 등장하는 네임드 검사 캐릭터들의 고유 특성.

이를 지닌 캐릭터들은 어렸을 때부터 검술에 두각을 드러내는 편이다.

당연히 검성 하이든 라이히의 눈에 띌 정도였던 유리안도 '타고난 검사'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휙─!

눈에 보이는 검로(劍路)를 따라 검을 휘두르자 서늘한 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이거론 부족합니다."

유리안의 검술 실력은 뛰어났지만, 이 정도 수준은 제국에 넘쳐흘렀다.

당장 생각나는 네임드 캐릭터만 해도 검성 하이든 라이히를 포함하면 수십 명.

더 나아가 조연으로 등장하는 캐릭터까지 생각하면 수백 명에 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병리적인 사고를 지닌 녀석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웬만한 캐릭터들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특출난 강점이 있었기 때문.

바로 감정을 꿰뚫어 볼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한 눈과 '오러'에 대한 압도적인 이해도 덕이다.

"오러를 다루기 위해선 마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난 가만히 서서, 심장에 존재하는 '마나'라는 요소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유리안의 몸을 가지고 있다.

기억이 없다고는 해도 녀석이 이루었던 모든 것들은 이 몸에 저장되어 있을 게 분명하다.

이걸 되살릴 수만 있다면 오러를 다루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거다.

그런 단순한 사고로 시작한 일이었으나, 결과는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설정으로만 알던 '마나'를 이리도 쉽게 느낄 수 있을 줄 상상도 못 했으나, 어찌 보면 이게 '유리안'이 가진 재능이겠지.

'마나를 이렇게 쉽게 느낄 줄이야. 그럼 그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욕심이 생겼다.

'마나'를 이리도 쉽게 느낄 수 있다면 유리안이 사용했던 특기도 쉽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유리안의 특기, 월광검(月光劍).

본래 무기에 오러를 휘감으면 날 테두리에 은은한 빛만을 띄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리안의 오러는 달랐다.

날의 테두리만이 아닌 도신 그 자체가 푸르스름하게 빛을 띄웠다.

이걸 보고 사람들은 경의와 공포를 담아 '월광검'이라 불렀다.

그 모습이 마치 달빛을 머금은 것과 같아서 말이다.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어차피 '유리안'이라면 갖춰야 할 무기 중 하나.

그렇다면 확인해 볼 필요는 있을 거다.

어디까지 가능한지 가늠이 돼야 대책을 마련하든 할 테니까.

'빠르든 늦든, 언젠가는 증명해 보여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눈을 감고, 다시금 체내에 마나가 집중된 심장에 집중했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의 설정을 꿰고 있는 난 당연히 '오러'라는 녀석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심장에 저장된 마나를 체내 마나 기관인 '마나혈'로 운반하면 된다.

물론 말로만 설명하면 쉬워 보인다.

하지만 이 일련의 과정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식물인간이 되어 버리고 만다.

자칫 잘못해 마나가 마나혈로 가지 못하고 역류하면 그대로 뇌를 포함한 주요 장기를 망가뜨려 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할까. 그러니 신중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다.

체내에 존재하는 마나혈은 총 38개.

거대한 강줄기와 같은 '대혈맥' 6개.

조그마한 시냇물과 같은 '소혈맥'이 32개.

이중 '오러'라고 부르기 위해 활성화해야 하는 것은 심장과 머리의 대혈맥인 '개문'과 심장에서 머리로 이어지는 '휴문'.

'줄줄 꿰고 있는 설정이긴 한데 말이지....'

이론은 잘 안다.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다고 원리를 현실에 적용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심지어 '마나혈'을 활성화하는 데는 큰 리스크를 감내해야 한다.

그렇기에 덜컥 겁이 났다.

나도 오러를 활성화하다가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던 자들처럼 되는 게 아닌가 하고.

그렇지만....

'몸이 알려주고 있어.'

유리안의 몸이 내게 '오러'에 대한 감각을 속삭여주고 있었다.

그 덕에 나와 이 몸 사이에는 모종의 연결 고리가 생겼다.

머리는 '이론'을.

몸은 '실전'을.

이미 시도하기 전부터 완성되어 있었다.

굳이 겁을 먹을 필요는 없었던 거다.

나는 숨을 들이마신 뒤, 대혈맥인 '개문'과 '휴문'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마나가 타고 흐르는 기묘한 감각은 실로 생소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곧 전신에 알 수 없는 힘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마나에 의한 신체 강화.'

이것 또한 '오러'의 일부.

그러나 유리안의 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전매특허라고 불러도 좋을 무기, '월광검(月光劍)'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집중하자.'

다시금 눈을 감은 난 양손으로 검을 잡고 감각을 모으기 시작했다.

"크윽...."

마나혈 때와는 달리 '검'에 집중하자, 마나가 거부반응을 보이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나혈'은 어디까지나 내 신체의 일부지만 검은 내 육신의 일부도 아닐뿐더러 유기물도 아니다.

다른 매질로 마나를 옮기는 건 생각 이상의 반발을 수반하는 작업이었다.

근데 잘도 이런 작업을 아무렇지 않게 하네.

그래서 괴물, 강자 등으로 불리는 거겠지만.

그렇게 타오르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기를 잠시.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함이 찾아왔다.

드디어 안정화된 것인가.

난 천천히 눈을 떴다.

"...월광검."

⇒ 새로운 특성, 「월광검 : 미완성」을 습득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청아한 푸른빛의 도신.

'달빛을 머금었다.'라는 표현이 허풍이 아니기라도 한 듯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였다.

두말할 것 없는 유리안의 월광검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데몬들의 목을 날려버린 예리함의 결정체이자 유리안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비기.

걱정한 거에 비해 구현은 쉽게 성공했다.

단지 문제가 하나 있다면....

"초승달입니까?"

그 '월광검'으로 변한 면적이 실로 작았다.

보름달보다는 가느다란 초승달이 뜬 것 같은 밝기였다.

"하하, 이런...."

그래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진짜 '월광검'에는 못 미칠지라도 이로써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증명했다.

게다가 1일 차다.

애초에 처음부터 완벽하게 다룰 수 있다는 건 자만이다.

"아직 개선해야 할 부분들이 많군요.... 군요, 군요! 이 빌어먹을 주둥아리... 대체 언제까지 지랄할 겁니까!?"

철썩! 참지 못한 나는 손바닥으로 입술을 한 대 후려쳤다.

이놈의 주둥아리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다.

 

 

 

 

7화. 적응(2)

어젯밤에 완벽한 '월광검'을 습득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아침이 밝자마자 일어나 훈련장으로 향했다.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거치된 목인(木人)에 겨누었다.

미완성된 '월광검'을 시전 하자 도신 끝에서 달빛이 맺히기 시작한 걸 보고 검을 휘둘렀다.

휘이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훈련장에 조용히 울렸다.

곧바로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목인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타고난 검사> 특성, 그리고 <월광검>.

이 조합으로 하루 만에 기사로서 1인분을 할 수 있는 기량을 손에 넣었다.

그래도 아직은 부족하단 느낌이 역력했다.

'최우선 과제는 '월광검'을 완성하는 것이겠지.'

사전에 가지고 있던 게임 지식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 세계에 있는 책을 보거나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그런 식으로 말이다.

물론 '유리안'이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선택지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 선택지는 하나뿐이군.

"주인님, 손님이 왔습니다."

사용인의 부름에 현실로 돌아왔다.

손님이라고? 나한테?

설마 유리안에게 친구라도 있었던 건가?

이놈 성격상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도 필시 정상은 아닐 터.

나는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전한 뒤,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허리춤에는 조금 전까지 휘둘렀던 검을 매었다.

검이 걸리적거려서 들고 다니기 싫었으나 완벽하게 유리안을 연기하려면 필요했다.

"유, 유리안 경!"

사용인이 말한 손님은 갈색 머리의 소년 티가 아직 엿보이는 남자였다.

일단, '네임드 캐릭터'는 아니다.

내 기억에는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도 낯설지 않았다.

'어제 본 녀석이었군.'

생각났다.

이 녀석은 어제 '감은 눈' 입단 테스트가 끝났을 때 헤란드와 같이 날 따라온 기사다.

당연하지만 이름은 모른다.

"죄, 죄송합니다! 제 소개를 깜빡했네요!"

내가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자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라, 라즈롯이라고 합니다. '감은 눈'의 견습으로 잡무를 맡고 있습니다. 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이놈이 그놈이군.

그나저나 견습이면 입단 테스트에는 합격한 모양이다.

물론, 어제의 테스트가 아니라 다른 날의 테스트를 말이다.

"견습입니까?"

"네, 네... 반년 동안 정식으로 승급도...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뭔가 하려다 만 것 같은데... 아무튼.

라즈롯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어제 바이엘 아카데미에서 진행되었던 입단 테스트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들렸습니다!"

"결과라면, 당신도 어제 봤을 텐데요."

"그게... 직접 듣는 게 절차라서요. 하하."

거참 쓸모없는 절차도 다 있네.

속으로 '감은 눈'의 비효율적인 행정에 혀를 찼지만, 그래도 절차라고 하니 답해주기로 했다.

"입단 테스트, 합격자 0명. 이렇게 보고하세요."

"네! 그, 그럼 오늘 하루도 수고하십쇼 유리안 경!"

이럼 직접 황실에 들리지 않아도 되겠지.

귀찮은 일을 하나 덜었다는 생각이 들던 와중이었다.

라즈롯의 뒷모습을 보자,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다시금 크라이파트 가문이 입단 테스트에 계략을 부리지 못하도록, 규정에 손을 써두기로 한 것이.

"아니, 잠깐 기다리세요."

"네, 네!?"

라즈롯은 소동물처럼 펄쩍 뛰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보고는 직접 하겠습니다."

"네? 아, 네."

"제 마차로 같이 가죠. 데려다주겠습니다."

나는 모처럼 선의를 베풀기로 했다.

황실에서 여기까지 꽤나 멀 텐데 말도, 마차도 없이 두 발로 왔다는 사실에 동정을 품어서다.

"...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라즈롯의 머리 위에 피어오른 보라색 아지랑이였다.

여기서 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누군가의 투명한 선의는 다른 누군가에겐 공포가 될 수 있다는 거다.

참 이 자식은 뭘 해도 문제구만.

***

로젠다 대륙에는 자타공인 3개의 강대국이 존재한다.

대륙 최대의 종교인 태양신교를 국교로 삼은 페레난드 신성국.

마신 바르바토스가 봉인된 이후, 피폐해진 국가들을 힘으로 병합한 패권국 아드라탄 제국.

그리고, 강대국 두 개와 인접하고 있던 왕국들이 대항을 위해 힘을 합친 브리만 연합국.

3국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와중에, 제일 강한 국가를 뽑는다면 거두절미하게 아드라탄 제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력한 왕권을 통해 다른 국가들을 병합하며 성장했다 보니, 다른 국가보다 강력한 체제 아래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제국의 중추인 황궁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그 거대하다는 바이엘 아카데미조차 코웃음 칠 정도의 규모로, 운영비로만 매년 몇십억 나르가 투입된다고 하니 가히 제국의 국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된다.

물론 단순히 황궁만 대단한 건 아니다.

황궁을 중심으로 깔끔하게 관리된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제국의 수도를 완성하는 화려한 건축물들도 상당한 완성도를 보인다.

전문 조경사와 건축가가 동원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제국 팔경(八景)인 황궁에 버금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런 5대 절경(絶境) 중 하나인 황궁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라스롯의 시선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유는 동행하고 있는 인물,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 때문이었다.

일명 제국의 웃는 처형대라 불리는 인물과의 동행이다.

한가로이 풍경 감상이나 하고 있기 어렵다.

'무서워...!'

저택에서 출발해 지금까지 유리안은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실눈인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결같은 표정에서 나오는 불길함에 라스롯은 혼란스러웠다.

돌연 황실까지 동행하겠다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보고를 전적으로 자신에게 떠맡겼기에 더 그랬다.

"저기 봐, 유리안이야."

"...부상을 당해서 기억을 잃었다고 들었는데?"

"멀쩡한 걸 보아하니, 뜬 소문이었나 보네."

유리안을 본 주변의 반응은 뚜렷했다.

경계와 더불어 몇몇 이들은 두려워하고 간혹 은연중에 살기를 보냈다.

평민 신분과 반년째 견습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받던 시선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라스롯은 느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움츠러들었다.

지금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유리안'이란 인물은 자신이 넘볼 수 없는 계위(階位)의 정점이다.

방계임에도 귀족들도 두려워하게 만드는 남자이자, 황실에서 휘두르는 차별 없는 검.

'으으....'

단장 오드윈을 제외하고, '감은 눈'에서 제일 위상이 높은 자.

새삼 이를 느끼자 라즈롯은 두 눈이 아찔해졌다.

그런 자와 함께 황실을 거니는 것은 큰 영광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숨이 멎을 듯 버거운 일이기도 했다.

"황실의 풍경은 여전히 장관(壯觀)이군요."

그때였다.

어찌할 줄 모르고 있던 라즈롯에게 유리안이 입을 연 거다.

"예, 아... 예!"

"아무래도 목적지는 제2문인 경의문(敬意門)을 통과해야 보이겠죠. 제1문인 경천문(敬天問)은 제국 신민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을 정도니, 황실 내부 행정을 보기엔 적합한 장소가 아니니까요."

"...예, 맞습니다."

마치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말하는 유리안을 보며 라즈롯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리안은 이제 황실에 입성한 지 반년이 지난 자신과 달리 제집 들르듯 다녔을 테니까.

근데 왜 모두가 알 법한 이야기를 입에 담았는가?

'혹시... 나, 나를 시험하시는 건가?'

유리안은 어제 입단 테스트에서 단 한 명의 합격자도 남기지 않고 모두 탈락시켰다.

그렇다고 희망자들의 수준이 낮았던 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반년이나 정식으로 승급하지 못한 자신보다 뛰어난 자들도 몇 보였다.

그럼에도 모두 탈락시켰다는 건 유리안이 생각하는 기준에 미달했다는 소리.

어쩌면 지금 이 발언은 운 좋게(?) 입단 테스트를 합격한 자신이 '감은 눈'으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걸 돌려 말하는 걸지 모른다.

굳이 다 아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말이다.

라즈롯은 쫓겨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언행을 더욱 주의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 유리안의 발언은 라즈롯을 시험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게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크잖아? 그리고 '감은 눈'의 건물이 황실 어디에 있는지 도통 감이 안 잡히는군.'

정말로 길을 몰라서 확인차 물어보는 거였다.

***

황실의 거대한 구역을 나누는 3개의 문들 중, 제1문인 경천문(敬天問)과 제2문 경의문(敬意門)을 지나자 하얗게 빛나는 건물들이 맞이한다.

균일하게 심어진 푸른 나무들과 쏟아져 내리는 햇빛이 적절한 조화를 이뤄 절경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나는 몹시 고양감을 느꼈다. 예술을 보며 충족감을 느껴서는 아니다.

단지 게임 화면 너머로만 봤던 광경을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어서다.

"그, 그럼 유리안 경! 저는 다른 곳에 들를 곳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예, 수고하세요."

"죄, 죄송합니다!"

이곳까지 안내해주던 라즈롯은 다른 업무가 있다며 도망치듯 떠났다.

근데 도대체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어찌 되었든, 나는 발길을 돌려 '감은 눈'의 본부로 향했다.

목적지는 당연히 단장실.

"유리안 경, 오드윈 단장님께서 안으로 들어오셔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비서의 말에 곧장 단장실로 향했다.

황실 전속 기관, '감은 눈'은 황실을 모시는 기관이었기에 기본적으로 단원들끼리는 수평적인 관계였다.

하지만 유일하게 딱 한 사람이 책임자로 단원 위에 있었는데.

그 사람이 지금 만날 단장 오드윈 발라디르란 여자였다.

'몰락한 발라디르 가문의 여식.'

이전에도 말했지만 '감은 눈'에 입단하기 위해선 정치적인 중립 신분이어야 한다.

따라서 귀족 출신은 '감은 눈'의 입단이 힘들다.

특별한 케이스로 유리안처럼 가문과 동떨어지거나, 그게 아니면 이름만 귀족 신분인 몰락 귀족 정도다.

현 '감은 눈'의 단장인 오드윈은 그런 몰락 귀족 중 한 명이다.

단장실에 앞에 선 나는 노크를 두 번 했다.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와요."

허락을 맡은 나는 옷매무새를 한번 매만진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의자에 앉아 있는 여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안, 어서 와요. 오랜만이군요."

담담한 태도로 반기는 은발의 여성.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한 발, 두 발 그녀가 가까워지자 나의 시선은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그 이유는 '감은 눈'의 단장, 오드윈 발라디르의 키가 몹시 작았기 때문이다.

"부상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괜찮나요?"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전에 아일린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유리안이 각 인물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번에는 특히나 예상하기 어렵다.

상대는 단순하게 적대, 또는 공포를 심어야 할 대상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내뱉은 말 한마디가 어떤 파급을 일으킬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잘못하면 내 정체가 들통날지도 모르고.

'...여기선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면 되겠지?'

'오드윈 발라디르'는 유리안의 상급자다.

천하의 유리안이라 해도 단장인 그녀에게 예를 갖추고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상이 경미하진 않았지만, 황실에 대한 제 충성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평소보단 점잖고, 거기에 아주 약간의 정중함을 더해 답했다.

이거면 상급자에 대한 예의로는 충분하겠지.

"...이상하네요."

응?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말했나요? 그게 아니면...."

손을 턱으로 가져간 그녀는 흐음─ 하며 짧은 신음을 흘린 뒤, 게슴츠레 뜬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저거 100% 의심하는 눈이다.

젠장! ...이게 아닌가 보군.

 

 

 

 

8화. 적응(3)

난 속으로 탄식을 내뱉으며 눈앞의 여성과 시선을 마주쳤다.

오드윈의 연보라색 눈이 날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게슴츠레 뜬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심지어 그녀의 머리에는 '회색 아지랑이'가 떠올랐다.

<부정의 색>으로 보이는 감정의 색 중 '의심'이다.

그게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짐작은 갔다.

평소 자신이 알던 유리안과 다르다는 거겠지.

'말이 길다... 존대가 문제인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거다.

유리안에게 '존댓말'이란 에고의 표출이자 하나의 아이덴티티.

오히려 존댓말을 하지 않았을 경우 의심은 지금보다 커졌을 것이다.

애초에 혼잣말도 존대가 나오는데 그걸 어떻게 할 도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도저히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더는 가만히 있다가는 의심이 더 커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어떤 의미에서 뻔뻔한 것도 유리안의 평소 모습 중 하나이니 큰 문제는 없을 거다.

"아니, 유리안... 평소에는 별말 없이 보고만 끝내고 돌아가지 않았나요?"

그거였나....

도대체 이 자식은 상급자를 뭐라고 생각했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문제라면 다행이다.

이 정도는 어떻게 넘어갈 수 있다.

"부상으로 오랫동안 업무를 쉬지 않았습니까. 그 보고 차원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그래요?"

"네. 무슨 문제라도?"

짧게 조소를 흘리며 시치미를 뗐다.

유리안식 대응에 그녀의 의심은 예상대로 사그라들었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여전하네요."

여전하다는 말에 안심하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X 같았다.

아니, 유리안이 제정신이 아닌 것도 알고 그걸 충실히 연기하곤 있지만, 저런 평가를 대놓고 들으니 기분이 좋은 게 이상한 거지.

지금까지 만났던 인물들은 그리 생각해도 직접 말로 한 적은 없었다.

오드윈이란 이 여자 적어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유리안을 앞에 두고도 저런 발언을 서슴지 않는 걸 보면 보통 인물은 아니다.

"그럼 보고해주세요. 입단 테스트에서 쓸모 있는 녀석은 있었나요?"

자리로 돌아간 그녀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거기에 대한 보고라면 간단해서 곧바로 대답했다.

"없었습니다."

"뭐, 그렇겠죠. 그렇게 말할 줄은 알고 있었어요. 무려 검성 하이든 라이히의 제자니까, 웬만한 수준의 기량 따윈 우습게 보이겠죠."

고개를 끄덕이던 오드윈은 의자에 몸을 기대더니 팔짱을 끼었다.

"그래도, 견습으로 써먹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는 있었겠죠? 몇 명 정도는."

"없었습니다."

"응?"

들썩─!

팔짱을 낀 손을 푼 오드윈은 의자에서 급히 등을 떼어냈다.

"아니, 그럼 한 명도 안 뽑은 거예요?"

"예."

"한 명도?"

몇 번이나 묻는지 모르겠지만.

내 대답은 변하지 않는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건지 오드윈의 입이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다.

"왜 그랬어요! 지금 '감은 눈'은 인력이 그리 많지 않아 한 명이라도 인원을 충원하고 싶은데!"

"인원이 부족하다고 어중이떠중이를 받을 순 없잖습니까. 이번 지원자는 모두 '감은 눈'에 어울리지 않는 자들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견습으로 뽑아 굴려보면 사용할 수 있을지 누가 아는데요!"

"시간 낭비입니다. 견습이란 자리도 부족한 자들이었습니다."

나는 짧게 웃음을 흘렸다.

사실 무안해서 흘린 웃음이다.

결과적으로 모두 탈락시켰지만 그건 희망자들의 기량 때문이 아니다.

단지 내 목적 때문이었다.

그래놓고선 견습 자리도 부족한 녀석들이라 말하다니.

연기지만 나 자신이 뻔뻔하다 느껴졌다.

"하아...."

골치가 아프다는 듯 오드윈은 관자놀이를 꾹꾹 짓눌렀다.

그사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을 던지듯 내놓았다.

이를 받아든 오드윈이 뭐냐는 듯 쳐다본다.

"이건 또 뭔가요? 지금 입단 테스트 이야기 중 아니었나요?"

"예, 이것도 입단 테스트와 관련된 겁니다."

"...뭔데요?"

"이번에 알아낸 입단 테스트의 문제점을 정리해봤습니다."

"문제점?"

성가신 물건이라는 듯 보며 오드윈이 되묻는다.

"교관과 대련해서 인정받고, 이후엔 면접을 통해 황궁 비서실에서 최종 결정을 내린다. 뭐가 문제라는 거죠?"

"대련의 방식입니다."

"대련 방식?"

고개를 갸웃하는 오드윈에게 미리 준비해두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입단 희망자들은 경각심이 부족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응시 전에도 전속 기관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필요가 있겠죠."

"뭐, 담당했던 교관이 그렇게 말한다면 맞는 말이겠지만...."

오드윈은 내가 건넨 '입단 테스트 개선안'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시선이 아래로 향할수록 표정은 일그러져갔다.

"...입단 테스트에 응시할 경우, 어떠한 사고가 생겨도 '감은 눈'은 책임이 없다?"

"예."

"이건 대련 강도를 올리겠다는 소리죠?"

"맞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은 눈' 입단 테스트에선 모종의 제한이 잔뜩 있었다.

그중 하나가 교관은 테스트 과정에서 입단 희망자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조항이다.

당연히 희망자가 다치거나 죽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면 책임은 무조건 교관에게 있었다.

'그날 바이엘 아카데미에서 시험을 보던 입단 희망자들도 이 조항은 알고 있었을 터.'

그럼에도 내가 '죽이겠다'라는 말에 겁을 지레 먹고, 시험을 포기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 말을 내뱉은 사람이 나,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이었으니까.

설마 규율을 어기겠어?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더라도, '유리안'이라는 이름에 얼마나 많은 시체가 쌓였는지를 떠올린다면 다시금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저 미친놈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걸 이용했기에 가능했던 도박수였고.

개선안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오드윈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윽고 손가락으로 종이를 집어 들어 흔들었다.

"일단 알겠어요. 의회에 올려보도록 할게요."

"예, 감사합니다. 오드윈 단장님."

"그런데, 설마 이것 때문에 이번 입단 테스트에서 한 명도 안 뽑은 건가요?"

"그럴 리가요. 그릇된 테스트로 등용한 인재는 하등 쓸모가 없을 뿐이죠. 저희는 황실 전속 기관이 아닙니까? 그 고귀한 이름을 더럽히는 건 용서할 수 없는...."

"아, 알았어요. 알았어요!"

질색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난 표표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황실'과 관련이 되면 미친 듯이 주절거리는 것.

이 또한 '유리안'이었으니까.

***

유리안이 떠나고 난 뒤, 단장실에는 적막함이 감돌았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던 현 '감은 눈'의 단장, 오드윈 단장은 유리안이 두고 간 서류로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서류에 적힌 것은 '감은 눈' 입단 테스트의 개선안.

원래라면 일개 단원에게는 이 정도까지의 권한이 없다만, 유리안이 '감은 눈'에서 갖는 위치는 일개 단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굳이 말하자면, 단장인 자신 바로 아래.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개선 방안을 제출해도 용납이 됐다.

심지어 그의 출신은 방계혈족이기는 하지만 귀족이 아닌가?

"그래도, 이런 식으로 규정에 간섭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오드윈은 흥미로운 눈으로 서류를 살펴보았다.

한 페이지를 꽉 채울 정도로 가득한 유리안의 필기체.

하지만 이 많은 내용은 중요한 수단 하나를 가리기 위한 연막에 불과했다.

결국 중요한 내용은 하나다.

"어떠한 사고가 생겨도 '감은 눈'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라."

이 새로운 규정이 적용된다면, 말 그대로 입단 테스트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교관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설령 사람이 죽더라도 황실의 비호 아래 '무죄'가 된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까지 진행되었던 입단 테스트의 본질이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감은 눈'에 응시하는 자들 대부분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할 수 있는 몰락 귀족과 평민뿐이니까.

그들은 힘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권력이 없다.

그런 자들의 불만은 일축하기 쉽다.

"유리안도 그건 알고 있겠지. 그러니, 이 개선안의 진짜 목적은 다른 곳에 있다고 봐도 무방한데."

오드윈은 잠깐 눈을 감아 생각을 정리했다.

평소엔 규정에 아무런 관심도 없던 사람이 왜 갑자기 이런 서류를 제출한 것일까?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사실이 생각났다.

바로 입단 테스트에서 벌어진 하나의 '모략'에 대해서다.

원로회와 토르소 가문이 작당해 이번 입단 테스트에 수작을 부린 것.

이에 대해서 그녀도 대강 사정은 파악하고 있었다.

황실 전속 기관 '감은 눈'의 단장이란 요직에 앉아 있다 보면 듣고 싶지 않아도, 세간의 별의별 소식이 저절로 흘러들어오기 마련이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 하등 쓸모없을 '개선제안서'를 왜 제출했는지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이 모여 의미를 갖추었다.

"경고로군."

그래, 이건 경고다.

유리안이 토르소 가문과 원로회에 보내는 경고.

'너희들이 계략을 쓴 건 꿰뚫어 보고 있다. 다음에도 똑같은 짓을 한다면, 그땐 지금처럼 넘어가지 않겠다.'

유리안의 속내(?)를 알게 되자 오드윈의 즉시 바깥에서 대기중인 사용인을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급하게 단장실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사용인에게 유리안이 작성한 제안서를 넘겨주었다.

"이것 좀 의회 쪽으로 넘겨줄래요?"

"의회 쪽 말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오드윈 단장님."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사용인은 서류를 들고 단장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긋이 지켜보고 있던 오드윈은 오른손을 턱에 가져간 후 생각에 잠겼다.

"부상을 한 번 크게 입더니 사람이 달라졌네."

그녀가 알고 있던 '유리안 크라이파트 프라손'이란 인물은 끔찍할 정도로 잔혹하고, 그에 걸맞은 무력을 손에 쥔 검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소름 끼치는 미소와 아무것도 들여다보이지 않는 실눈.

그 탓에 감정을 읽는 게 불가능하다시피 했으나, 지금까진 상관없었다.

유리안은 그저 황실의 명(命)에 충실한 개일 뿐이었으니까.

위에서 떨어진 명령을 실행하며, 상부에 불만을 품지 않는 무감정(無感情)한 검이었으니까.

근데 문제는... 그런 개가 자신의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9화. 악연(1)

'감은 눈'의 단장, 오드윈 발라디르와 만남을 끝낸 난 건물 안에 마련된 개인 집무실로 향했다.

끼익─!

문을 열자 방안의 풍경이 맞이한다.

이를 보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미친놈.'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화려한 예술품들과 공예품들.

유리안 저택에도 가득했던 것들이 이곳에도 지천에 널려 있었다.

도자기와 액자, 그리고 보석이 잔뜩 박힌 액세서리.

그렇다.

이 미친놈은 자기 직장도 본인의 저택처럼 꾸며놓은 것이다.

자기 표출에 대한 강한 에고.

그게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건 저택보다 심하군요... 미친놈입니까?"

대체 사용하지도 않을 액세서리들은 왜 이곳에 놔둔 거냐 그것도 마네킹이랑 같이!

설마 충동구매를 했는데 저택엔 놔둘 곳이 없어서 여기로 옮긴 건가?

아무래도 이것까지는 용납할 수 없다.

나는 집무실을 한번 싹 정리하기로 했다.

상자를 하나 가져와 거기에 액자 하나와 액세서리 대부분을 집어넣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본래 '감은 눈'에 소속된 인원들은 대기할 일이 많지 않아 개개인에게 방을 내줄 이유도, 필요도 없는 편이다.

그럼에도 유리안은 '감은 눈' 전용 건물에 집무실을 갖추고 있었다.

유리안의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대강 짐작이 갔다.

똑똑.

그렇게 한바탕 정리를 끝내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황실에서 찾아올 사람이 있기라도 한 건가?

"들어오세요."

내가 허락하자 문이 서서히 열렸다.

'감은 눈'의 견습인 라즈롯이 서 있었다.

"시, 실례하겠습니다, 유리안 경!"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인사를 하는 라즈롯.

나는 마침 잘 왔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잘 왔습니다, 라즈롯."

"예... 예?"

"이것 좀 제가 타고 온 마차에 실어줄 수 있습니까? 그리 무겁지는 않을 겁니다."

상자 하나를 가리켰다.

조금 전, 집무실을 가득 채웠던 사치품들이 담겨 있는 상자다.

"이건...."

가득 담긴 공예품들을 보자 라즈롯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 알겠습니다, 유리안 경."

"그래서,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내 물음에 라즈롯은 무엇인가 생각이 났다는 듯, 자신의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곧 황실의 인장이 박힌 편지를 내밀었다.

"황실 비서실에서 복귀를 축하한다고, 서신을 보냈습니다!"

비서실에서 보낸 서신?

내가 손을 뻗자, 라즈롯은 꾸벅 인사를 하더니 천천히 다가와 편지를 건네주었다.

'친애하는 크라이파트 가문의 일원이자, 감은 눈의 대원 유리안 경에게.'

대강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부상이 어느 정도 나았다고 들었다? 그러니 이제 일 좀 해야지?

이 내용을 정중하게 글로 적어 보낸 것에 불과했다.

뭐,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곤 예상했다.

'감은 눈'에서 써먹을 수 있는 단원 중, 유리안만큼 충성스럽고 일 잘하는 인재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는 하지만 바로 부려 먹으려고 하는군.'

서신에 적힌 임무는 '공명석의 보수'.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공명석을 수리하는 마법사를 호위하는 임무였다.

<지금부터 마왕을 죽입시다>라는 게임에는 '데몬'이라는 괴물들이 존재한다.

마신 바르바토스가 죽은 후, 그가 남긴 잔재사념(殘滓死念)이 생물에 기생하거나, 형태를 갖춘 존재를 이 세상에선 '데몬'이라고 불렀다.

인류의 숙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녀석들이다.

개체마다 힘의 차이는 명백하지만, 최하급의 데몬도 일반인 정도는 우습게 죽이리라.

그런 데몬의 활동과 발생을 억제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언급된 '공명석'이다.

특수한 파장으로 마신의 잔재사념을 흩트려 놓아 접근을 막는 데 주로 사용된다.

이 과정이 '마나'와 밀접한 관계를 띄고 있는 탓에 보수를 위해선 4위계(位階), '레오' 등급 이상의 수준급 마법사가 필요하다.

'공명석의 보수라....'

임무의 내용을 한 번 더 살펴본 나는 속으로 저울질을 하기 시작했다.

데몬과 조우할 수도 있다는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처리해야 할 문제.

게다가 손에 넣은 전용 특성을 사용해보기에도 적합해 보이는 임무였다.

▶ 특성, 「 불완전한 월광검 」

등급 : 고유

▷ 당신의 오러는 월광(月光)을 머금은 듯 미려합니다.

▷ 월광(月光)을 머금은 당신의 검은 데몬들에게 추가 피해를 줍니다.

▷ 아직은 불완전한 특성입니다.

유리안이 다시 '감은 눈' 업무를 재개했다는 것을 공공연히 알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거절할 이유는 없겠군.'

결심했다. 이 임무는 받아들이기로.

게다가 마법사 호위에는 다른 병사들도 동원될 터.

혹시라도 데몬의 위용에 싸울 엄두가 안 난다면 그들에게 맡겨버리자.

음, 그래.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단장에게 직접 이야기하겠습니다."

"넷!"

라즈롯은 큰소리로 대답하더니 상자를 들어 올렸다.

"그, 그럼 이건 마차로 옮겨두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상자를 든 체 방안을 빠져나가는 라즈롯.

"으앗!"

그러던 도중, 문턱에 발을 걸려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들고 있던 상자 안에서 성대한 소리가 울렸다.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였다.

"...."

"...."

순간 방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낯빛이 창백한 라즈롯을 뒤로하고, 난 상자안의 물건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런, 액자가 부서졌군요."

라즈롯이 휘청거리면서 액세서리를 거치해둔 마네킹과 액자가 서로 부딪힌 모양이다.

"죄, 죄송합니다, 유리안 경...!"

"괜찮습니다. 어차피 처분하려고 했던 것들이니까요."

딱히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구매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유리안'의 취향이 반영된 물건은 내 취향과 너무나도 달라 솔직히 처치 곤란한 잡동사니나 다름없었다.

"망가진 건 제가 어떻게 해서든 갚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제가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갚겠다는 일념을 입에 담는 라즈롯.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동정심이 피어올랐다.

앞으로 자주 얼굴을 마주할 텐데 늘 이런 식이라면 나도 좀 곤란하다. 그러니 저 긴장을 풀어주도록 하자.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후후. 괜찮습니다, 라즈롯. 견습이라면 마땅히 할 법한 실수였습니다."

"예...예?"

갈 곳을 잃은 라즈롯의 시선이 이곳저곳 방황한다.

"유, 유리안 경...."

"예."

"혹시... 저 '감은 눈'에서 짤리는 건가요?"

갑자기 왜 그렇게 되는데...?

***

"수고하세요."

황궁 제2문인 경의문(敬意門)의 경비들에게 인사를 한 뒤, 아일린은 빠져나왔다.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도 논문 작성으로 녹초가 된 아일린이었다.

바이엘 아카데미의 '금(金) 원소학'을 가르치는 인정받는 교수지만,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로서 끊임없이 논문을 제출해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학위와 마법사로서의 '계위'를 인정받지 못하니까.

참 누구 말 따라 엿 같은 제도였다.

"아일린, 돌아가는 길이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일린이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

바이엘 아카데미의 동창이자, 제국 마탑에 소속된 여성 마법사인 디아나를 보고 아일린의 얼굴에 옅게 화색이 돌았다.

"너도 돌아가는 길이야?"

"응, 아! 이렇게 같이 돌아가는 것도 오랜만인데 사거리에 새로 생긴 카페에나 들를래?"

"아니, 난 됐어."

"괜히 그러지 말고! 예전에 학창 시절에 자주 같이 갔잖아!"

디아나는 볼멘소리했다.

그녀의 친근한 투정을 보고 있자니, 아일린은 저도 모르게 입에 미소가 걸렸다.

"아니, 오늘은 조금 일이 있어서. 그나저나 디아나, 너는 옛날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구나?"

"사람은 한결같은 게 중요하잖아? 그치... 응?"

갑자기 디아나가 말문을 멈추자, 아일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고 있자, 디아나는 검지로 한 마차를 가리켰다.

"저거 유리안의 마차 아니야?"

"응?"

"봐봐, 저기에 서 있는 마차. 크라이파트 가문의 문양이 반쪽만 그려져 있잖아."

진짜다.

디아나가 가리키는 곳에는 마차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마차 중앙엔 크라이파트 가문의 '검과 장미' 문양이 반쪽만 그려져 있었다.

크라이파트 가문의 방계 혈족, '프라손'들만이 사용하는 문양. 모멸과 핍박의 상징이었다.

"복귀했나 보다! 하긴 입단 테스트의 교관 노릇도 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그러게."

조금 전까지 은은한 미소를 입에 머금고 있던 아일린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때 디아나의 얼굴엔 장난기가 감돌았다.

"이야. 바이엘 아카데미를 졸업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꽤 다사다난했지?"

"응."

아일린은 관심이 없는 척 다른 곳으로 시선을 휙 돌렸다.

이내 카페는 나중에 가자고 거절하려던 찰나.

"그때, 우리 아일린 많이 순진했지."

"내가?"

"응. 바이엘 아카데미 뒷산 왕벚나무 아래에서 고백하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헛소문을 듣고 유리안에게 고백...."

"디아나! 디아나! 카페... 카페 갈까!?"

허공을 휘저으며 다급하게 말하는 아일린.

디아나는 히죽 하고 웃었다.

"응? 갑자기 왜 그래? 그리 가고 싶은 눈치가 아니었잖아. 우리 아일린, 왜 갑자기 마음이 달라졌을까?"

"으, 응... 나도 옛날 생각이 나서 말이야."

"그래? 잘 됐다! 그럼 빨리 갈까?"

싱글싱글 웃는 디아나의 얼굴을 보고 아일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완전 제대로 당한 느낌이었다.

"응, 참 즐거운 추억이지! 5위계나 되는 마법사님을 이렇게나 주무를 수 있는 추억이라니 말이야."

"나한텐 흑역사라고...."

"뭐 어때? 그 당시 유리안은 진짜로 멋있긴 했잖아."

그 말대로다.

바이엘 아카데미에서 본 유리안은 귀족 방계들의 불평등을 앞장서서 성토하는 참된 선배이자 모범이 되는 사람이었다.

귀족보다 더 귀족 같은, 그런 고귀함이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북부 전선을 다녀오고, '감은 눈'에 입단한 이후부터는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감정 없는 황실의 개만이 있을 뿐.

"그런데 괜찮겠어?"

"뭐가?"

"유리안이 복귀했다는 건 앞으로 황궁에서 자주 마주칠 수 있다는 거잖아?"

확실히.

디아나의 지적대로 한 번쯤은 마주칠 게 분명하다. 당연히 아직 묵은 감정이 남은 아일린으로서는 꽤 꺼려지는 상황이다.

너무나도 변해버린 그를 직접 보는 것은 변하지 않는 현실을 여실히 비추는 듯했다.

방계 혈족에 대한 매정한 현실을.

"뭐, 어쩌겠어? 그냥 인사만 하고 넘어가면 되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

"그리고, 당분간 황궁에 갈 일이 없거든."

"어? 왜?"

디아나의 의문에 아일린은 마탑에서 받아온 서류를 봉투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그곳엔 큼지막하게 '공명석의 보수'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잠시 줄린 특구(特區)로 출장 가거든. 그곳 공명석이 수명을 다해서 보수해야 한다더라고."

 

 

 

 

10화. 악연(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