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 90-100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90화

모든 준비를 마친 루드는 까마귀 부족을 떠났다. 소크란을 제거했고 제노스도 건재했으니 바깥대륙 걱정은 한동안 접어놔도 될 것 같았다.

'레지스도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진 않았고.'

떠나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가족 식사 자리. 그곳에서 만난 레지스는 작은 동물을 연상시켰다. 햄스터나 다람쥐 같달까.

전생에선 일찍 죽었던 까닭에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본 동생이었다. 직접 확인한 그녀는 문제를 일으킬 만한 인물로 보이진 않았다.

'그 모습이 연기라면 소크란보다 더 귀찮은 적이 될 테지만.'

가족들이 전부 뛰어났기 때문일까, 레지스는 위축된 모습이었다. 식사하는 내내 움츠러든 어깨와 작은 목소리를 보였다.

"바깥대륙은 정리가 끝났으니 이젠 중앙대륙 차롄가."

루드의 목적지는 제국이었다. 중앙대륙 중심부에 위치한 대륙 최강국이자, 훗날 대륙 곳곳에 전쟁을 일으키는 주범.

'해야 할 게 많다.'

가장 시급했던 바깥대륙의 일은 한 차례 정리가 됐으니, 이제는 다시 중앙대륙으로 시선을 돌릴 때였다.

현재의 제국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또 용사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 외에도 전생에서 보고 겪었던 것과 관련해 크고 작은 것들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리우스 에이나우디...."

루드는 용사의 이름을 곱씹었다. 제국의 선봉이자 제국군을 몰아냄에 있어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었던 존재는 사실 전생에도 인연이 있었다.

'전생과 마찬가지라면 아카데미에 있으려나.'

루드는 전생에서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다. 마왕 대 용사로서가 아닌, 같은 아카데미에서 함께 수학하는 동문으로서였다.

비록 정식 학생은 아니었으나, 우연히 연을 맺은 이의 호의로 카르반 아카데미에 몸담은 적이 있었다. 아이리우스를 처음 본 건 그때였다.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결정은... 직접 보고 해도 늦지 않겠지.'

그녀를 죽일지 살려 둘지는 그때 가서 결정해도 충분했다.

제국을 저지함에 있어 용사가 가장 큰 걸림돌인 건 분명했지만, 용사에게 큰 잘못이 있다 볼 수는 없었다.

용사도 자신도 그저 각자의 대의에 맞게 싸운 것뿐이니.

무엇보다 당장 아이리우스를 제거한다 해도 다른 용사가 나타나지 말란 법이 없었다. 그녀가 아직 용사가 아님을 감안하면 새로운 용사가 생겨날 수도 있었다. 제국의 용사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니.

'우선은 확인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만, 현황을 파악할 필요는 있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어느 정도의 힘을 갖췄고 어떻게 움직일 생각인지를 알아야 했다.

'그나저나 아카데미라면 그분도 계시겠군.'

아카데미에는 아이리우스 말고도 아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에게 있어 은사와도 같은 존재. 그에게서 검을 다루고 강해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지금의 자신은 존재하지 못했을 터였다.

"일단은 아카데미를 목적지로 삼아야겠네."

두 사람 말고도 아카데미로 가려는 이유는 더 있었다.

'그 녀석도 여전하려나.'

전생의 동료이자 친구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과거 가장 긴 시간을 함께했던 인물, 페드리를 떠올린 루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 *

루드는 까마귀 부족까지 왔던 길을 고스란히 거슬러 중앙대륙으로 향했다. 그때와 다른 점은 동행하는 이 없이 혼자란 것뿐이었다.

뀨!!

"그래, 너도 있었지."

촉수를 뻗으며 존재감을 표출한 슬라브를 한 차례 쓰다듬은 루드는 발렌타노에 입성했다.

드디어 중앙대륙에 도착한 것이다. 목적하고 있는 카르반 아카데미는 제도의 바로 옆에 위치했으니 아직도 갈 길은 멀었으나....

'가는 동안에 해야 할 것도 있지.'

그 길이 결코 한가롭지만은 않을 터였다.

발렌타노에서 하룻밤 묵으며 피로를 푼 루드는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걷는 시간이 쌓여 가며 주변의 풍경이 달라졌다.

화전민으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과 그럴듯한 모양새가 잡힌 마을 몇 개를 지나쳤다.

마침내 도시에 도착했을 때, 루드는 오래된 여장을 풀었다.

"통과, 베르타스에 온 걸 환영하지."

베르타스는 중소 도시였다. 치안과 병력이 확보돼 있고 도시 외곽엔 성벽도 둘러져 있었다.

아직도 목적지인 아카데미까진 많은 길이 남았으나 당분간은 이곳에서 머무를 예정이었다.

물론, 단순히 쉬기만 할 계획은 아니었다. 바깥대륙에 있는 동안 듣지 못한 중앙대륙의 소식을 접하고 필요한 정보들을 구할 생각이었다.

"어서 오세요. 서점 베르베르입니다. 편히 둘러보시고 원하는 서적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베르타스에 위치한 베르베르는 인근 상권의 판도를 뒤흔든 서점이었다.

소정의 입장료만 내면 일정 시간 동안 책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획기적인 발상은 손님이 마를 날이 없게 만들었다.

루드 또한 그렇게 찾아온 손님들 중 하나였다. 인파에 섞여 책들을 확인하던 루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경고가 소용없었던 건가.'

베르베르는 단순한 서점이 아니었다. 아무리 많은 손님을 확보한다 해도 소정의 입장료만으로 이만한 책들을 사들이고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정책을 펼칠 수 있는 건 그들의 진짜 돈줄이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정보 조직, 도서관.

서점 베르베르는 과거 제국의 프로젝트를 분쇄하기 위해 찾았던 정보 조직의 창구 중 하나였다.

'당분간 의뢰를 받지 않는다라...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한데.'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경고까지 했건만, 결국 문제가 생기고 만 모양이었다. 일반 서적들 사이에 섞여 있는 의뢰 관련 서적마다 의뢰 불가 표시가 되어 있었다.

도서관의 의뢰 방법은 두 가지였다. 사서를 통해 직접 의뢰를 넣거나 이곳에 있는 것 같은 의뢰 관련 서적들을 통해 의뢰를 넣거나.

베르베르는 후자의 방법을 사용하는 거점이었다. 도서관의 지부인 만큼 사서가 없진 않겠으나....

'어느 쪽 사서인지 알 수 없으니 귀찮게 됐군.'

현재 도서관이 겪는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그 해결을 도왔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내부 분열.'

도서관 내부에서 파벌이 나뉜 것이다. 다만 전생보다 그 시기가 일렀다. 벌써부터 이렇게 눈에 띌 정도로 분열이 돼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준 정보 때문인가.'

일찍이 도서관장에게 건넸던 경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했다.

'전생보단 낫기를 바라야겠군.'

그래도 희망적인 건 무방비한 상태에서 공격당했던 전생에도 끝내 도서관장의 파벌이 승리했다는 점.

이번 생엔 자신의 경고까지 있었으니, 전생보다 빠르게 회복할 터였다.

"의뢰를 넣으려던 건 텄군."

몇 가지 정보를 좀 얻어 보려 했는데 도서관이 이런 상태여서야 원하는 바를 얻는 건 불가능했다.

짧게 탄식한 루드는 다른 서적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와 놓고, 곧장 나가면 의심을 살 수도 있었으니.

그때, 빼곡히 꽂힌 책들을 구경하던 한 남자가 다가왔다.

"참 좋은 곳이죠? 약간의 돈만 내면 이곳의 모든 책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니."

"아, 예."

"혹시 읽을 만한 책을 못 찾으신 걸까요?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추천해 드려도 될지. 참고로 자랑은 아니지만, 이곳에 있는 책 대부분을 읽어 봤답니다. 원하시는 내용이나 분위기의 책이 있다면 말씀해 보시지요."

책 취향을 묻는 남자는 무척이나 적극적이었다.

"하하,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한번 말씀해 보시지요. 혹시 제가 인생 책을 찾아 드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인생 책이라, 글쎄요."

루드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음에도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연신 루드의 책 취향을 묻던 그는 루드가 끝까지 대답하지 않자, 자신이 추천하는 책들을 한 아름 안겨 주고 사라졌다.

"이것 참...."

졸지에 책 무더기를 품은 루드는 한숨을 쉬었다. 작은 소란에 무슨 일인가 지켜보던 사람들은 금세 고개를 돌렸다. 흔하진 않아도 가끔 저런 일이 있는 까닭이었다.

루드는 남자가 책을 뽑았던 위치를 떠올리며 품 안의 책을 하나씩 되돌려 놓았다. 마침내 모든 책을 제자리로 돌려 놓은 루드는 서점을 빠져나왔다.

"우연히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을 리는 없겠지. 내 뒤를 밟았던 건가."

그와 동시, 귀찮은 일에 휘말려 피곤함을 가장했던 얼굴이 뒤바뀌었다. 어느새 손에는 자그마한 쪽지가 있었다. 조금 전 남자가 건넸던 책들 사이에 끼어 있던 것이었다.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그 안에 적힌 말이 무엇일지 대충 예상이 갔다.

방금 전의 남자는 구면이었다. 이번 생에 처음으로 도서관을 이용했을 때 만난 사서가 그의 정체였다. 면구를 착용했는지 당시와는 달리 30대의 외관을 하고 있었으나, 자신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예상대로군."

쪽지에는 시간이 적혀 있었다. 아마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만남을 요청한 것일 터. 일찍이 경고를 보냈던 자신이니 무언가를 더 알고 있을 거란 생각도 한몫했을지 몰랐다.

'언제부터 추적한 거지.'

쪽지가 전달된 방법과 시기를 생각하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음은 분명했다. 아마 자신이 경고를 한 순간부터 조금씩 자신에 대한 정보를 모으지 않았을까.

다만 여태 알아차리지 못했던 건 그 방법이 미행이 아니라 정보 수집과 조사를 통해 이뤄진 추적이었기 때문이리라.

"괜찮네."

시간과 경험의 차이가 있으니, 전생만큼의 능력을 보여 주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계산기를 두드린 끝에 루드는 그들을 만나 보기로 결심했다. 도서관장은 은혜를 입혀 놓아 나쁠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관장이 처한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미 해결해 본 적도 있었으니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시간이 소요된다는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추후 관장을 통해 얻을 이익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안할 만했다.

그날 밤, 누군가 루드를 찾아왔다. 낮에 서점에서 만났던 남자였다.

"도서관장님을 보필하는 타미라고 합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기억력이 좋은 편이어서요."

타미가 면구를 벗자, 노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의 본모습이었다.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저희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경고가 소용없었던 모양이군요."

타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 또한 루드가 알칸타에서 했던 경고를 기억했다. 그 경고가 지금 상황과 닿아 있다는 것도 알았고.

"호의는 그때 한 번으로 족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옳은 말씀입니다. 저희도 맨입으로 도와 달라 부탁드리는 게 아닙니다. 일이 해결되고 나면 금화 백 개를 드리겠습니다."

"금화 백 개요."

작은 금액은 아니었다. 하지만 혹할 만큼 큰 금액도 아니었다.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죠."

"달리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도서관장을 돕기로 마음먹었지만, 아무 대가 없이 도와줄 생각은 아니었다. 무엇도 얻을 수 없는 상대라면 모를까 도서관장에게선 얻을 수 있는 게 많았으니 최대한 많은 걸 뜯어낼 생각이었다.

또 도서관장 측에서도 아무 대가를 받지 않는 것보단 거래를 통해 이뤄진 관계를 더 신용할 수 있을 터.

마침 생각해 둔 대가도 있었다.

"1할. 향후 도서관이 얻게 될 수익의 1할을 주시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협상은 결렬인 거죠."

입술을 질끈 깨문 타미는 무언가 망설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익의 1할은 너무 과한 요구였다.

"조심히 가세요. 생각이 바뀌시면 언제든 찾아오시고요."

결국 타미는 씁쓸히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처진 어깨로 여관을 떠나는 타미를 바라보던 루드는 이내 시선을 더 먼 곳으로 돌렸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한밤중의 고요를 깨뜨리는 이들은 짙은 피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쯧, 귀찮게 됐군. 아니지, 잘 됐다고 해야 하는 건가."

짧은 중얼거림이 끝남과 동시, 검은색 비수가 창을 뚫고 날아왔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91화

창을 뚫고 날아든 비수는 광택이 없는 묵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인지를 어렵게 하는 방법으로, 상대에게 암습 경험이 많다는 증거였다.

몸을 틀며 비수를 피해 내자 곧장 깨진 창문을 통해 누군가 들어왔다.

"흐... 맹탕은 아니란 건가."

습격자는 하관을 가리는 가면을 착용한 상태였다. 짐승의 이빨을 형상화한 가면은 습격자가 흘리는 살기와 어우러져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혼자인 건가."

다른 이들이 더 있을까 기다려 봤지만, 새로 나타나는 이들은 없었다. 확장된 기감에도 아무도 걸리지 않았다.

"쯧."

루드는 혀를 찼다. 차라리 이쪽으로 많은 숫자가 왔다면 더 편했을 텐데.

나머지 녀석들은 전부 타미를 따라간 것 같았다.

"잘못 걸렸다고 생각해. 운이 나빴던 거지. 엮여도 하필 그런 녀석들과 엮였으니."

할짝. 번개 모양의 비수를 핥은 습격자는 킬킬댔다. 자신은 운이 좋았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오롯이 하나의 사냥감을 가지고 놀 수 있었으니.

어떻게 죽일까. 토막 낼까? 몇 등분으로 썰지? 부위는 어떻게 나누지? 아니다. 천천히 피를 빼는 게 나으려나?

"그런 사고방식이라면, 억울하진 않겠군."

습격자의 음습한 생각은 더 이어질 수 없었다.

"...아?"

무언가 번쩍인 직후. 습격자는 자신의 시야가 기우는 걸 느꼈다. 더불어 몸이 제각각 노는 듯한 감각도.

후두둑. 자신이 쥐고 있던 검과 같은 모양으로 잘린 습격자의 시체가 떨어졌다.

순식간에 습격자를 처리한 루드는 창틀을 밟고 뛰어내렸다. 타미를 쫓아가야 했다.

* * *

도서관장의 부탁으로 루드와 접선했던 타미는 돌아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마련해 둔 은신처는 번화가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었다. 골목이 모여 있어 만약의 사태에 도주가 용이한 지형이었다.

골목길에 들어서 몇 번인가 코너를 돌자, 은신처가 나타났다.

"저 왔습니다."

"고생했어. 결과는?"

"...죄송합니다."

벨로티를 만난 타미는 고개를 숙였다. 믿고 맡겨 줬지만, 원하는 대답을 가져오지 못했다.

"금화 백 개를 거절했습니다."

"어쩔 수 없지. 애매한 금액이긴 하니까."

"향후 수익금의 1할을 주면 도와준다 했으나... 일단 제 선에서 거절하긴 했습니다만, 다시 찾아가 볼까요?"

"아냐, 괜찮아. 잘했어."

범인으로선 평생 만질 날이 없을지도 모르는 게 금화 백 개라지만, 어느 정도 능력이 있는 이들에겐 달랐다. 막말로 용병단만 잘 꾸려도 의뢰에 따라 금화 수십, 수백 개가 오갔다.

그럼에도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보상이 금화 백 개였던 건 당장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상황을 수습해야 하니.'

내부 분열과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그간 발생한 크고 작은 균열을 해소하는 데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당장 도서관을 정상으로 돌린다 해도 한동안은 수익금 전체를 정비하는 데 써야 할 정도. 루드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였다.

'뭐, 그마저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없는 미래긴 하지만.'

실소가 나왔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분명 잘 컨트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석 사서가 반역을 일으킬 거란 것도 알고 있었고.

'심지어 경고까지 들었었지.'

수석 사서 스테판의 수상한 낌새를 조금씩 느끼고 있을 당시 들었던 경고는 의중에 확신을 더해 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벨로티는 쫓기는 꼴이었다. 아직 도서관 내부에는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스테판이 주도권을 쥔 탓에 그들 또한 상황이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조금만 지나면 도서관의 권력 구도가 완전히 스테판에게 넘어갈 판국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스테판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패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로미네스 백작가를 이용할 줄이야.'

고작해야 도서관 내부에서의 파벌 싸움이나 힘겨루기가 전부일 거라 여겼다.

해서 스테판이 본심을 드러내길 기다리기도 했었다. 그를 빌미로 녀석을 제거할 수 있을 테니.

한데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일 줄이야. 그것도 정확히 자신 하나만을 타겟으로 삼아서.

'대체 언제부터 안 거지.'

로미네스 백작가의 목표는 도서관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 로미네스 백작가의 사생아 벨로티 로미네스만이 그들의 표적이었다.

"이런, 꼬리를 달고 온 모양인데."

"오늘은 야근이구먼."

그때, 신변 보호를 위해 계약한 용병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늙은이가 밖에 나갔다 왔다더니 꼬리를 달고 온 모양이었다.

"염병, 자칫하면 제삿날이 될 수도 있겠는데."

자리를 잡은 여섯 명의 용병은 인상을 찡그렸다. 서서히 다가오는 기척이 범상치 않았다. 의도를 감출 생각이 없는지, 선명하게 살기를 피운 채였다.

"형님, 포위 됐슈."

"나도 안다."

도주를 위해 선택한 은신처의 위치도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 은신처와 이어진 모든 골목을 포위당한 것이다. 이대로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

"흐흐흐, 잡았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다 숨었니?"

어둠 속에서 하나둘 나타나는 이들은 하나같이 하관을 가린 가면을 쓰고 있었다. 기괴한 외관이 그들의 분위기와 퍽 어울렸다.

"...처형부대."

벨로티는 그들의 정체를 알았다. 로미네스 백작가에서 운영하는 사냥개들이었다. 백작가의 행사를 방해하거나 이름을 더럽힌 이들을 찾아 잔인하게 살해하는 게 그들의 역할이었다.

"이 의뢰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용병들은 긴장했다. 업계에서 한가락 하는 자신들이었지만, 골목길을 점한 한 놈 한 놈이 자신들 이상의 실력자였다.

착수금이 높아 받은 의뢰였는데, 이제 보니 죽음으로 가는 노잣돈이었던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대화가 통할 것 같지도 않으니."

웬만하면 의뢰를 포기하거나 상대측과 대화를 시도해 봤겠지만, 용병대장은 일찌감치 기대를 접었다.

나타난 녀석들은 총 아홉이었는데, 전부 눈깔이 돌아 있었다. 그는 저런 눈을 잘 알고 있었다. 피에 절어진 살인귀들의 눈이었다.

"흐히히히히."

담장에 올라가 있던 사냥개 하나가 달려들었다. 경험 많은 용병답게 사냥개의 공격을 막고 옆으로 던져 냈지만.

"크악!"

곧장 튕겨 오르듯 돌아온 사냥개의 공격에 목덜미를 물리고 말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피를 보자 흥분한 건지 모든 사냥개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그들의 공격은 하나같이 잔인했다. 관절을 끊고 눈을 쑤셨다. 목을 찢으며 심장을 뜯었다. 그들이 보이는 잔인함과 광기는 사람을 절로 움츠리게 만들었다.

"크흐흐흐."

어느덧 남은 건 용병대장 하나. 그마저도 허벅지를 깊게 베여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크흑."

"아니, 나 때문이야."

죽음을 예감한 타미는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뒤를 밟혀서 적을 데리고 온 바람에 이 사달이 났다.

하지만 벨로티는 고개를 저었다. 이 모든 일은 자신이 로미네스 백작가의 사생아이기 때문이었다. 지독할 정도로 순혈주의를 따지는 그들에게 사생아의 존재는 용납할 수 없는 모독이었으리라.

'그러면 애초에 아랫도리 간수를 잘했어야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저주스러웠다. 자신이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가 로미네스 백작가의 일원이란 것뿐이었다.

'이렇게 죽는다고? 이게 내 운명이라고?'

자신이 사생아란 걸 깨닫자마자 도망쳤다. 로미네스 백작가가 어떤 곳인지 알았기에 그것만이 살길이라 여겼다. 도망쳐 나와서도 종종 그들이 자신을 쫓진 않을까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으려나.'

죽으면 그런 걱정도 안 해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너무 억울했다. 뭘 잘못했다고 죽어야 한단 말인가.

"크악!"

마지막 남았던 용병대장마저 쓰러졌다. 이제 남은 건 벨로티와 타미, 그리고 사냥개들뿐이었다.

"가문의 이름을 더럽힌 죄. 죽음으로 갚아라."

다 잡은 사냥감이라 여긴 것일까, 사냥개들은 천천히 다가왔다.

살아남을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정보 상인도 상인이니 알고 있겠지. 같은 물건을 거래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물건값이 바뀐다는 걸."

골목길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드였다.

벨로티와 타미, 사냥개들을 번갈아 바라본 루드는 제안을 건넸다.

"2할. 향후 도서관의 수익 2할을 넘기겠다고 약속하면 도와주지."

타미는 수익의 1할을 달라는 조건을 거절했었다. 벨로티 또한 그 판단에 별말을 하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의 조건은 2할.

그러나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때문에 결과도 달랐다.

"좋아요. 수익의 2할을 넘길게요. 도와주세요."

벨로티에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2할이 아니라 5할을 요구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받아들여야 했다.

"거래는 이뤄졌군."

루드는 벨로티와 타미의 앞을 막으며 사냥개들과 마주 섰다.

"네놈은 누구지?"

"일단은 일에 휘말린 사람인데, 봤다시피 이제는 단순히 휘말린 게 아니게 됐네."

"우리는 로미네스 백작가의 처형부대다. 백작가의 이름에 대해선 들어 봤겠지. 이것은 백작가의 내부 문제에 관한 행사다. 외부인이 끼어들 게 아니야. 썩 꺼져라."

"원래 그렇게 혀가 긴가? 아닐 거 같은데."

루드에게서 무언가를 느끼고 백작가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물러날 것을 종용한 사냥개들이었으나 루드는 그럴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미 너희들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거든. 날 죽이겠다고 덤벼든 녀석들을 놓아주기엔 뒤가 찜찜해서 말이야."

"어쩔 수 없군. 스스로 화를 재촉한다면 그렇게 해 주는 수밖에."

사냥개들은 천천히 간격을 벌렸다. 타협의 여지가 없으니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자신들의 숫자가 훨씬 많았으니, 피해를 감수한다면 충분히 제거할 수 있을 터였다.

"죽어!"

시작은 맨 우측부터였다. 사슬 끝에 연결된 낫이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루드의 목을 노렸다. 그것을 피할 자리는 이미 다른 사냥개가 공격을 준비한 상태. 하나 루드는 사슬낫을 회피하지 않았다.

"뭣?"

텁. 사슬낫을 낚아챈 루드는 강하게 잡아당겼다. 사슬을 던진 사냥개가 순식간에 끌려왔다. 그가 도착한 위치에는 이미 다른 사냥개가 검을 내지르고 있는 상황.

"크헉!"

동료의 검에 목을 꿰뚫린 사냥개가 쓰러졌다.

이윽고 루드는 아직 쥐고 있는 사슬로 방금 전 동료를 공격한 사냥개의 목을 휘감았다. 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목뼈가 으스러졌다.

"젠장! 뒤져!!"

삽시간에 절명한 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들이 달려들었지만, 그들도 다를 건 없었다.

비수를 내지른 사냥개의 숨을 끊고, 빼앗은 비수를 던져 근처의 또 다른 사냥개를 죽였다.

마력을 두른 검을 내뻗은 녀석도 있었으나, 그들 또한 그 끝은 마찬가지였다.

스걱-! 믿을 수 없다는 눈을 끝으로, 검과 목이 함께 잘려 나갔다.

벨로티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저들끼리 뒤엉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모든 사냥개들이 쓰러졌다.

"오러...!"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의 마지막을 장식한 건 짙은 어둠을 밝히는 오러의 빛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92화

로미네스 백작가의 사냥개들을 처리한 뒤, 루드는 자리를 옮기고자 했다. 벨로티를 돕기로 하긴 했으나 피차간에 나눠야 할 대화가 많았다. 벨로티 또한 루드와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자리를 옮기기에 앞서 해야 할 것이 있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죽은 용병들의 시신을 한 데 모은 벨로티는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의뢰를 완수하는 게 용병의 사명이라지만, 그 사명을 지키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그들이 버텨 줬기에 루드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희망도 생겼고.'

전투의 마지막 순간 어둠을 밝힌 환한 빛. 그건 분명 소드마스터의 상징인 오러였다. 그 말은 곧 자신들을 돕기로 한 이가 소드마스터란 이야기였다.

'운이 좋은 건가. 아니면....'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서일까. 흥분이 가라앉으며 다시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벨로티는 흘깃 루드를 바라봤다. 소드마스터의 도움을 받는다면 큰 위기는 모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막말로 백작가의 전 병력이 덤벼들지 않는 이상 소드마스터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아니, 전 병력이 덤벼든다 해도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괜한 불안감이 있었다. 자신에게 위기를 경고했고, 바깥대륙으로 향하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자신을 구해 준 이가 소드마스터라니. 이건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우연을 가장한 무언가?

"일단 내가 잡은 숙소로 장소를 옮기지."

세 사람은 루드의 숙소로 이동했다. 벨로티가 은신처로 삼은 이곳은 사냥개들과의 전투로 난장판이 된 상태였다. 아직 밤이 깊었으니 잘 곳도 필요했다.

"윽."

"이 자는...."

"깜빡했군. 잠시만 기다려라."

루드의 방에 들어선 타미는 입을 막았다. 바닥에 토막 난 시체가 있었다. 삼등분 난 시체의 모습에 벨로티 또한 안색이 나빠졌지만, 타미처럼 심하게 반응하지는 않았다.

"사냥개가 이곳에도 왔었군요."

"그래. 타미 씨가 떠나고 얼마 안 지나, 날 공격했지."

루드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용해액을 꺼냈다. 과거 수해에서 제국 특무대를 죽이고 빼앗은 것으로, 시체에 닿자마자 치이익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시체를 녹여 버렸다.

"이제 됐군."

순식간에 사라진 시체의 흔적. 진득하던 피 냄새도 어느새 오묘한 향에 뒤덮인 상태였다.

"최상품의 용해액이군요."

"눈썰미가 좋군."

주변의 다른 것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오로지 시체와 혈액에만 반응하는 건 최상품 용해액이란 방증이었다.

"이제 본격적인 대화를 나눠 보지."

벨로티를 도와 문제를 해결해 주는 대신 추후 정보 조직 도서관이 얻을 수익의 2할을 보장한다.

그들 간에 확실하게 정해진 건 이것밖에 없었다.

관계를 명확하게 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를 위해 루드는 정보를 요구했다.

"일단 정보가 필요해. 현재 어떤 상황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설명해 드리죠. 다만 그 전에, 저도 당신이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알아야겠어요."

"흠."

벨로티의 의사는 확고했다. 이미 도움을 받았고, 앞으로도 받을 것이긴 했지만 상대에 대해 자세히 알 필요가 있었다. 특히 그가 자신에게 했던 경고와 관련된 것을.

'로미네스 가의 사냥개들을 죽이긴 했지만, 그건 그들이 내 적이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덤벼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어.'

덕분에 적어도 로미네스가와 관련됐을 거란 걱정은 접었지만, 여전히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다. 그의 정적인 스테판과 연결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이만한 인물을 부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물론 그 확률은 매우 희박했다. 로미네스 백작가를 끌어들인 것도 자신의 신분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물며 소드마스터를 이용한다? 그럴 만한 재주가 있었다면 도서관은 진즉 스테판에게 넘어갔을 것이었다.

"당신은 제가 로미네스 백작가의 사생아란 걸 알고 있어요. 맞죠?"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알고 있다."

루드의 대답에 타미가 경악했다. 벨로티가 로미네스 백작가의 사생아란 건 비밀이었다. 도서관 내에서도 오래전부터 벨로티와 함께했던 자신만이 아는 사실. 비록 스테판이 알아차리며 이런 상황이 됐다지만, 아무런 접점도 없는 루드가 알 만한 정보는 아니었다.

"역시 그랬군요. 그래서 로미네스 백작가의 사냥개들을 보고도 놀라지 않은 거고요. 경고가 가능했던 것도 제 출생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겠죠."

루드는 로미네스 백작가의 이름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사냥개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당신의 정보를 알고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정보를 샀기 때문이지."

"...정보를 샀다고요? 제 정보를 말입니까?"

"아니."

루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산 건 로미네스 백작가의 정보다."

벨로티가 로미네스 백작가의 사생아란 것. 로미네스 백작가의 처형부대가 그를 노릴 거란 것. 도서관이 내부 분열로 골머리를 썩을 거란 것.

사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건 전생에서 직접 듣고 겪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법. 대신 루드는 준비해 둔 다른 구실을 댔다.

"로미네스 백작가의 정보를 샀다고요?"

"그래. 언제고 그들을 물어뜯을 수 있을 만한 정보. 원수를 갚을 기회를 포착하기 위한 정보. 당신은 그 과정에서 우연히 알게 된 정보 중 하나였다."

"복수...."

그제야 벨로티는 무언가 이해되는 것 같았다. 여태까지 신경 쓰지 않았던 루드의 외관도 눈에 들어왔다.

'바깥대륙의 이민족.'

눈에 띄는 외모였으나, 지금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던 사실. 그가 소드마스터이며 자신을 도와줄 수 있다는 점이 더 중요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만약 그가 로미네스 백작가에 원한이 있다면, 그게 그의 출신과 관련돼 있다면....

"사생아라지만 로미네스 백작가에 대해 모르지 않을 텐데? 아니, 오히려 사생아니 더 잘 알 수밖에 없겠지. 그들이 가진 저열한 사고관과 그 집착을."

벨로티는 루드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로미네스 백작가는 지독한 순혈주의자들의 집합체. 자신들의 고귀한 핏줄에 조금이라도 더럽거나 잡스러운 것이 섞여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이민족도 사생아만큼이나 멸시받기는 마찬가지.'

차라리 사생아인 경우가 나을지도 몰랐다. 다른 귀족가에선 평탄한 삶을 누리는 경우도 많았으니.

하지만 이민족은 다르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그들을 하찮고 더럽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 누구보다도 혈통을 따지는 로미네스 백작가는 더 심하면 심했지, 낫지는 않을 터. 만약 이민족이 로미네스 백작가와 엮였다면....

'험한 꼴을 당했겠지. 어떻게든 복수를 다짐할 만큼.'

몰래 도망친 사생아도 찾아 죽이려 드는 가문이었다. 그보다 더 불순하게 여기는 이민족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로미네스 백작가의 이름을 밝힌 사냥개들을 상대할 때 망설임이 없었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어쩐지 망설이는 게 없더라니.'

아무리 소드마스터일지라도 백작가와 정면으로 맞서는 건 부담이었다. 단순히 무력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백작가 하나가 아니라 다수의 귀족 가문, 나아가 귀족 전체의 표적이 된다면 아무리 소드마스터일지라도 감당하기 버거웠다.

그럼에도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던 루드의 검.

애초에 그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면 이해가 됐다.

"그런 이야기였을 뿐이다. 그 와중 당신에 대해 알게 됐고, 나와 비슷한 일을 겪었을 거라 생각하니 자연스레 눈이 가더군. 경고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 한 행동이었다. 어쩌면 동질감을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고."

루드의 말은 벨로티의 추측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와 관련된 그간의 모든 일이 납득됐다.

'대충 넘어간 건가.'

한편, 스스로 상황을 짐작하고 납득해 가는 벨로티의 모습에 루드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회귀를 통해 알고 있는 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 설명하는 건 난감한 일.

하지만 다행히도 루드는 벨로티란 인물을 잘 알고 있었다.

'똑똑한 이들일수록 한정적인 정보를 짜 맞추는 걸 잘하지. 지금의 상황도 이성적인 판단을 흐렸을 거고.'

퍼즐 조각 몇 개로 전체의 그림을 추측하고 그려 내는 것. 벨로티는 특히 그러한 부분에서 일가견이 있었다. 비록 이번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경우 그 추측이 맞는 편이었고.

"그보다 나도 너희 측 상황이 궁금한데."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를 충분히 납득시켰다고 생각한 루드는 대화 주제를 바꿨다.

그 질문에 대답한 건 타미였다. 그는 빠르고 쉽게 현재 도서관과 벨로티가 처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도서관장을 보고 짐작은 했지만, 상황이 좋진 않군요."

"예. 아직 도서관 내에 관장님을 지지하는 이들이 있지만, 수석 사서와의 힘 싸움에서 밀리는 형국이라 그들도 적극적으로 나서진 못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은 벨로티와 스테판 간의 파벌 싸움이 한창이었다. 다만 로미네스 백작가가 개입하며 그 무게추가 한쪽으로 기운 상태였다.

"다행인 건 목표가 명확하다는 점이군요."

"예."

어느새 생각을 마친 벨로티가 루드의 말에 반응했다. 자신과 도서관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수석 사서 스테판을 없애야 합니다."

"그 수밖에 없겠지."

백작가를 무너트리는 건 불가능하다. 루드가 작정하고 멸문시키려 든다면 모르겠지만, 혼자서 그 후폭풍을 감당할 이유가 없었으니 백작가가 아닌 다른 쪽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

"스테판을 죽이면 금방 도서관을 정비할 수 있을 겁니다. 재정비를 마친 도서관이 운영을 시작하면 백작가의 눈에서 벗어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스테판이 정보를 넘기기 전까지 그들의 눈을 피해 잘만 살았던 벨로티였다.

도서관이 정상화되고 그 힘을 이용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서 숨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지금의 문제는 도서관의 힘이 분열돼 있고, 스테판이 벨로티의 정보를 로미네스 백작가에 공급한다는 것.

결국 스테판이 죽으면 끝날 일이었다.

"하루빨리 정상 운영이 됐으면 좋겠군. 그래야 수익의 2할을 받을 수 있을 테니. 스테판은 지금 어디 있지?"

다만 작은 애로 사항이 하나 있었다.

"그게 문제입니다."

스테판 또한 자신이 죽으면 모든 상황이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벨로티가 자신을 노리리란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여 그는 몸을 숨긴 상태였다.

"측근들을 잡으면 그 위치를 알 수 있겠지만, 측근들 또한 몸을 숨겼습니다."

도서관의 정보력을 이용할 수도 없는 상황. 몸을 숨긴 측근들을 찾아 스테판에 닿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사이 로미네스 백작가도 가만히 있진 않을 테고.

'정보 조직의 수장이란 자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니.'

벨로티는 스스로의 처지를 자조했다.

상대의 숨통을 끊을 명검을 들어도, 정작 상대를 찾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벨로티가 든 검은 단순한 명검이 아니었다.

"일단 함께 움직이지. 거래를 했으니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다."

명검을 뛰어넘은 전설 속 에고 소드.

'전생과 마찬가지라면 그곳에 있을 거다.'

루드는 전생에 스테판이 숨어있던 곳을 기억하고 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93화

하룻밤을 묵은 세 사람은 베르타스를 떠날 준비를 했다. 본디 베르타스에서 조금 머물려 했던 루드였지만, 상황이 이리 됐으니 어쩔 수 없었다. 도서관을 정상화시키고 벨로티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선 하루빨리 스테판을 처리해야 했다.

마차를 탄 세 사람은 베르타스를 빠져나왔다. 벨로티와 타미의 컨디션 관리와 이동 속도 유지를 위해 구매한 마차였다.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카리븐으로 가는 중이다."

"제도 옆에 위치한 도시 말인가요?"

"그래."

카리븐은 제도 카르반 옆에 위치한 소도시였다. 다만 일반의 소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와 높은 발전도를 자랑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카르반 아카데미가 있는 곳이군요."

카르반 아카데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제국 제일의 아카데미는 그 존재만으로 한 도시를 지탱하고 변모시킬 힘이 있었다. 도시의 상권과 시민의 생계가 카르반 아카데미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개인적인 볼일을 위해 그곳으로 가던 중이었다. 스테판이 어디 숨었는지 모르니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나도 내 일이 있으니 일단 그곳으로 가려 하는데 혹 불편한가?"

"아뇨, 괜찮아요. 말씀하신 대로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요. 이렇게 다니다 보면 그쪽에서 먼저 덤벼들 확률도 높을 테고요."

벨로티의 대답을 들은 루드는 마차의 속도를 높였다. 그들 중 마차를 몰 수 있는 게 루드뿐인 까닭에 마부 역할을 맡은 상태였다.

"너무 큰 걱정은 하지 마라. 사냥개들을 처리했으니 로미네스 백작가가 다시 움직이기까진 시간이 많을 거다. 그 안에만 스테판을 찾으면 된다. 네 말처럼 그쪽에서 먼저 접근할 확률도 높고."

"아무래도 그렇겠죠."

벨로티와 스테판, 둘 중 하나가 죽으면 끝나는 상황이었다. 벨로티가 그러하듯 스테판 또한 벨로티를 죽이려 들 터. 결국 누가 먼저 상대를 죽이느냐의 싸움이었다.

'우리에겐 녀석도 상상치 못할 패가 있어.'

루드를 바라보는 벨로티는 이전보다 편안한 기색이었다. 마차를 이끄는 이는 단순한 마부가 아니라 소드마스터였다. 군세가 아니고서야 감당할 수 없는 절대강자. 시간이 문제였지 싸움에서 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때와 같다면 녀석은 하이오와에 있다.'

한편 루드는 전생에서 스테판이 숨어 있던 곳을 떠올렸다.

제국 중남부에 위치한 하이오와는 따뜻한 기후와 일 년 내내 맑은 날씨로 유명한 휴양 도시였다.

자신이 개입한 만큼 과거와 다를 수도 있었지만, 스테판이 준비한 과정은 같았을 테니 높은 확률로 전생과 동일할 것이라 생각했다.

마침 하이오와는 카리븐으로 가는 경로에 있었다. 휴식차 그곳에서 머물며 스테판이 있는지 살필 생각이었다. 이동 경로에 위치한 곳이었으니 설령 스테판이 없더라도 일정상 큰 손해를 보진 않았다.

"좀 자는 게 어때. 타미 씨는 이미 주무시는 것 같던데."

"괜찮아요. 타미와는 달리 전 아직 젊으니까요. 생각해야 할 것도 있고요."

마부석으로 나온 벨로티는 루드의 곁에 앉았다. 시원한 바람에 푸른색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푸른색 머리카락은 로미네스 백작가의 특징이었다.

'생각이 많은가 보군.'

루드는 벨로티의 심정을 헤아렸다. 짧은 시간에 여러 일을 겪었을 테니 심란할 만했다.

도서관이란 걸출한 조직을 만들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을 넘겼다. 배신과 죽음의 위기를 거듭 겪고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기란 어려웠다.

뭐, 전생에서도 그러했듯 이번 일을 계기로 더 강해지겠지만.

"궁금한 게 있어요."

"뭐냐."

아무 말 없이 이동하길 얼마간, 벨로티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나이가 어떻게 돼요?"

"그건 왜 묻지?"

"그냥 궁금해서요. 그렇게 많아 보이진 않는데 소드마스터인 것도 신기하고요."

"...열여섯이다."

어딘가 어설픈 이유였지만 루드는 자신의 나이를 답해 줬다.

회귀를 겪으며 돌아온 것이 열넷에서 열다섯이 되던 겨울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지금은 열여섯의 나이였다.

"난 스물하나예요."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요?"

"말했지 않나. 정보를 샀다고."

사실은 전생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벨로티가 알 도리는 없었다.

담담히 돌아온 대답에 벨로티는 무언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형님이라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게 불만이었나."

"맞잖아요. 보니까 존댓말을 모르는 것도 아니던데."

예상대로 자신보다 나이가 어렸건만, 그는 자신에게 한 번도 존댓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 이민족이라 존댓말을 모르는 건가 싶기도 했으나, 타미에게 하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타미를 대할 때마다 꼬박꼬박 존대하던 그였다.

"이건 문제가 있어요. 나이를 떠나서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이기도 한데 고용주가 고용인한테 존댓말을 하고 고용인이 고용주한테 반말을 하다니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게 여길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면 이민족이라 존댓말을 모른다고 둘러대면 된다."

"아니, 문제가 그게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의심을 살까 걱정한 거 아니었나?"

살살 벨로티를 놀린 루드는 미소를 지었다. 긴장이 풀린 건지 전생에서 알고 있던 벨로티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능력을 가진 벨로티는 전생에서 대륙 제일의 정보 조직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하나 도서관장으로서가 아닌 인간 벨로티를 아는 이들은 그의 이면을 알았다.

지금 보이는 모습도 그러한 모습 중 하나.

"너 또한 타미 씨에게 존댓말을 안 하지 않나. 타미 씨가 훨씬 연장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야 타미는, 그러니까, 아이씨 이게 아닌데."

붉어지는 벨로티의 얼굴을 본 루드는 슬슬 놀리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혼자 존댓말을 하는 게 불만이라면, 너도 반말을 해라."

"어? 그래도 돼?"

"편할 대로 해라."

"알겠어. 편하게 할게."

마침내 원하는 바를 이뤄 낸 벨로티는 기분 좋게 헤실거렸다.

'...형님인가.'

그 모습을 지켜본 루드는 벨로티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형님으로 불러야 한다던 그의 말이 자꾸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러길 이내, 루드는 궁금했던 것들을 묻기로 했다. 긴장이 풀렸는지 푼수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옆에 앉은 이는 대륙 최고가 될 정보 조직의 수장이었다. 마침 궁금했던 것들이 있으니 좋은 기회였다.

"최근의 대륙 정세에 대해 아는 게 있나?"

"대륙 정세? 그렇게만 말하면 어려워. 구체적으로 원하는 방향이나 지역, 사건에 대한 걸 말해 줘야지."

"그렇다면 황실이나 의회, 카르반 아카데미와 관련된 정보가 있나?"

"음... 특별할 건 없는 것 같은데. 아! 황실과 의회가 마찰을 빚을 것 같은 정황은 있었어. 예전부터 쌓여 온 게 서서히 터질 기미가 보이는 중이야."

"황실과 의회의 마찰인가."

루드도 황실과 의회가 항상 뜻이 같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다. 바깥대륙을 침략하는 건에선 둘의 뜻이 맞아떨어졌었지만, 그들은 때론 협력하기도 때론 갈등하기도 하는 관계였다.

다만 지금 시기의 마찰은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벨로티가 저리 말할 정도라면 조만간 둘 간의 직접적인 마찰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일 터.

물론 전생의 이 시기에는 대륙의 정세나 정치 등에 관심을 갖지 않았었지만....

'한 번 살펴볼 필요는 있겠군.'

황실과 의회가 마찰을 빚는 건 루드로서는 호재였다. 제국이 스스로의 살을 갉아먹는 형국이었으니, 만약 거기에 개입해 피해를 극대화시킬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를 이룰 수도 있었다.

"혹시 고대 문자나 고대 벽화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있나?"

"고대 문자? 어떤?"

"뭐라 설명하긴 어렵군. 손바닥을 내밀어 봐라."

루드는 벨로티의 손바닥 위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대 문자를 그렸다.

과거 신비 듀얼을 얻었던 비동과 정수를 찾았던 우물에 적힌 글자였다.

"음, 글쎄."

손바닥의 감각을 느끼며 글자의 형태를 짐작한 벨로티는 고개를 저었다.

"고대 문자는 나도 흥미가 있어서 공부한 적이 있는데, 적어도 내가 아는 형태는 아니네. 꽤 오래전의 문자 같은데 이걸 해석할 수 있는 건 두 군데 정도일 거야."

"그게 어디지?"

"대륙 고고학계와 마탑."

"역시 그런가."

벨로티의 답은 루드도 짐작하고 있던 곳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오래된 글자와 그림이었다. 결국 해석의 단초를 얻기 위해선 대륙의 역사서를 집필했다는 고고학계나 오랜 세월 마법을 연구하며 다양한 기록을 남긴 마탑의 힘을 빌려야 할 것 같았다.

'마탑 지부를 찾아가 봐야 하나.'

마침 마탑의 지부 하나가 제도에 있었다. 마탑 지부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으로 마법에 관련된 다양한 물품을 판매하고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하는 곳이었다.

대륙 고고학계에 소속된 이를 찾으려면 또 발품을 팔아야 하니, 마탑을 찾는 게 가장 간단하긴 했다.

그때, 무언가 떠올린 벨로티가 탄성을 냈다.

"아! 이건 다른 얘긴데."

"뭐지?"

"카리븐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하이오와란 도시 알아?"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벨로티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다음 행선지로 생각하고 있는 곳이었다.

벨로티는 그곳과 관련된 뜻밖의 정보를 이야기했다. 루드로선 놀랄만한 내용이었다.

"지금 그곳에 소드마스터가 머물고 있어."

"소드마스터가?"

"응, 너도 소드마스터니까 관심을 보일 거라 생각했어."

"누군지도 아나?"

"물론이지. 그곳에 있는 소드마스터는 고르단 왕국의 미켈레 구르드손이야."

루드와 연이 있는 존재가 하이오와에 머물고 있었다.

* * *

타닥타닥, 작은 소리와 함께 불꽃이 타올랐다. 불이 꺼지지 않게 장작을 살핀 루드는 마차에 몸을 기댔다.

마차 안에선 벨로티와 타미가 자는 중이었다. 마차 내부는 세 사람이 들어가도 될 정도의 크기였으나, 루드는 벨로티를 배려하기 위해 바깥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

'미켈레 구르드손이 하이오와에 있다고.'

불꽃을 보던 루드는 낮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렇게 들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이름이었다. 어쩐지 반가운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그에겐 빚이 있지.'

비록 원치 않게 진 빚이었으나, 빚은 빚이었다. 과거 파바르의 비밀 경매장에서 추격자들이 알브족을 쫓지 못하도록 손을 써 준 미켈레였다.

당시 그는 루드에게 언제고 자신을 찾아와 빚을 갚으라고 말했었다.

"어쩌면 그때의 빚을 갚을 수도 있겠군."

벨로티가 해 준 얘기는 미켈레가 하이오와에 있단 것만이 아니었다. 그가 하이오와에 와 있는 이유와, 그곳에서 하고 있는 일도 이야기 해 줬었다.

"손녀가 아프다."

미켈레의 손녀, 미쉐린 구르드손은 몇 해 전부터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고 했다. 워낙 갑작스러웠던지라 여러 말이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잊혀 갔다고.

한데 그때의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그녀가 원인 모를 병을 겪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강력한 냉기를 발산하는 병이라.'

미켈레가 사시사철 따뜻한 하이오와를 찾은 것도 손녀의 증상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기 위함이었다.

'파바르의 비밀 경매에 참여했던 것도 손녀 때문이었나.'

자신과의 내기에서 지고 경매장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약속한 그는 딱 하나, 경매 물품 한 가지를 사게 해 줄 것을 부탁했었다.

'이상하긴 했다. 괴팍한 면이 있긴 하나 쉽게 사람을 죽일 만한 인물은 아니었는데 알브족을 전멸시켰었다니.'

전생의 미켈레는 비밀 경매장을 습격한 알브족을 모조리 죽였었다.

휴이에게서만 소식을 들었었을 땐 그러려니 했지만 직접 마주한 미켈레는 괴팍할지언정 잔악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의아한 점이 있었다.

'그게 경매 물품을 꼭 사야 했기 때문이라면.'

하나 그것이 가족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루드는 미켈레가 경매장에서 사 간 물품을 기억하고 있었다.

'불꽃의 눈물.'

화 속성을 품은 결정으로 경지에 따라 마력을 늘려 주거나 속성을 변환시켜 주는 보물.

분명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이긴 하지만 소드마스터가 목맬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필요한 게 자신이 아니었다면.

'모든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다.'

냉기를 발산하는 손녀의 증상과 불꽃의 눈물이 가진 효능. 그것은 아마 손녀를 위한 것이었으리라.

'몸이 얼어붙을 정도의 냉기를 발산하고, 소드마스터의 힘으로도 치유가 어렵다라. 내 생각이 맞다면....'

벨로티가 읊어 준 손녀의 증상은 루드로선 익숙한 것이었다.

밤이 깊었으나 장작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루드는 한참 동안이나 그것을 바라봤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94화

습격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동하는 길은 조용했다. 습격은커녕 추격자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예상외의 상황에 의아해했지만, 곧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백작가의 사냥개들을 처리해서 그런 것 같아."

사냥개들에게 벨로티의 위치를 전달하던 스테판이었다. 그들과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텐데, 죽은 이들이 연락을 할 순 없으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변고를 눈치챘을 터였다.

"아예 숨을 생각인 건가."

"아마도. 스테판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강력한 패가 로미네스 백작가였는데 그들의 사냥개가 당했으니, 내게 뭔가 있단 판단을 했겠지."

로미네스 백작가란 패는 아직 유효하고 여전히 강력했지만, 그들이 어느 정도 선까지 힘을 빌려줄지는 스테판으로서도 알 수 없는 부분일 터.

"로미네스 백작가에 함부로 연락할 순 없을 거야."

하물며 벨로티의 정보를 팔아넘겨 지원받은 사냥개들마저 전부 잃고 말았다. 그 사실이 밝혀지면 백작가의 분노는 더 이상 벨로티에게만 향할 게 아니었으니, 스테판으로서도 백작가에 연락하는 건 어려울 것이었다.

습격자도 추격자도 없는 건 그러한 연유였다. 벨로티에게 사냥개들을 처리할 수 있는 날카로운 검이 생겼음을 알았으니, 무언가를 시도해 화를 자초하기보단 가만히 숨어 있는 걸 택한 것이다.

어차피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갈라진 도서관의 힘은 점차 자신의 것이 될 테니.

"최악이네. 이러면 녀석이 숨어 있는 곳을 찾을 방법이 없어. 알 만한 녀석들을 찾는 데도 시간이 걸릴 거고."

몸을 숨기더라도 사람인 이상 흔적이 없을 순 없다. 하지만 그걸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은 상상 이상으로 길 것이었다.

발품을 팔아 스테판의 위치를 특정한다 해도 그때쯤이면 갈라진 도서관의 힘 대부분이 그에게 넘어가 있을 확률도 높았고.

당장 이 순간에도 분열된 도서관의 힘을 조금씩 제 손아귀에 넣고 있을 스테판이었다.

"그래도 당장 로미네스 백작가가 움직이지 않을 건 알았으니 좋게 생각하자고."

스테판이 로미네스 백작가에 연락하지 않는다면 백작가가 사태를 파악하고 움직이는 건 시간이 지나서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하이오와로 가자. 미켈레 구르드손과는 안면이 있으니 운이 좋으면 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거다."

"좋아, 찬성이야."

"만약 그의 도움을 받아 로미네스 백작가를 완전히 배제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땐."

"그때부턴 내가 해야 할 일이지."

루드의 말을 듣던 벨로티는 주먹을 쥐었다.

미켈레의 도움을 받아 로미네스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숨은 스테판을 찾는 게 쉬워졌다.

지금은 로미네스가의 눈을 피해 스테판을 찾아다니느라 번거롭지만, 그들이 해결된다면 도서관과 스테판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럼 뺏긴 도서관의 힘을 되찾아오는 것도 금방이었다.

'내가 찾든, 녀석이 찾아오든.'

되찾은 도서관의 힘으로 녀석을 찾든, 위협을 느낀 녀석이 먼저 모습을 드러내든.

그때가 이 모든 일의 종착지였다.

"하이오와에 도착하면 현재 도서관의 상태를 확인해 봐야겠어. 아무리 로미네스 백작가라도 미켈레 구르드손이 있는 곳에서 큰 소란을 일으키는 건 부담일 테니까."

"그래.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진 말아라."

미켈레의 도움을 받아 낸다면 좋겠으나, 그렇지 않더라도 하이오와로 가는 건 이점이 많은 선택이었다.

만약의 경우 로미네스 백작가가 힘을 행사하려 들더라도 타국의 왕족이자 소드마스터인 미켈레가 있는 곳에서 큰 소란을 일으킬 순 없을 터.

벨로티는 그 점을 이용해 도서관을 정비해 보려 했다.

"미켈레의 손녀에 관한 정보는 더 없나?"

"예전부터 알려진 걸 제외하면 없어. 몇 년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말이야."

"그녀의 병에 대한 추가 정보는?"

"이미 말해 준 것처럼 냉기가 몸을 잠식한다는 증상 외에는 없어. 아마 미켈레 측에서 정보를 막고 있는 것 같아. 무리하면 더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것도 도서관이 건재했을 때의 이야기겠지."

"맞아.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어. 미안."

"괜찮다. 어차피 직접 가서 확인해 볼 생각이었으니."

벨로티에게 묻긴 했으나, 루드는 높은 확률로 미켈레의 손녀가 보이는 증상이 정수의 부작용으로 인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증세에 관한 이야기나 미켈레의 과거 행적을 생각하면 더욱 심증이 굳었다.

하지만 함부로 속단하진 않았다. 결국 스스로의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할 생각이었다.

"혹시 손녀를 치료하는 것에 도전해 볼 생각인 거야?"

"그래."

"저번에 내가 해 준 이야기는 기억하고 있는 거지?"

"물론이다."

미켈레가 하이오와에 있다는 소식과 함께 그가 그곳에서 뭘 하고 있는지도 알려 준 벨로티였다.

'손녀를 고칠 방법을 찾고 있댔지.'

미켈레는 손녀를 치료해 주는 이에게 원하는 모든 걸 들어주겠다고 공언했다. 손녀와 결혼을 원한다면 자신이 책임지고 결혼시켜 주겠단 말까지 할 정도였다.

다만, 성공했을 때의 보상이 엄청난 만큼 실패했을 때의 대가도 무거웠다.

'죽음 혹은 감금.'

그 두 개를 나누는 기준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도전에 실패한 이들은 전부 둘 중 하나의 결과를 맞이했다.

그리고 아직 미켈레의 손녀는 치료되지 않았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도전하고 그 대가를 치를지 알 수 없는 대목이었다.

'손녀의 상태를 확인한 이들은 외부와 접촉할 수 없게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켈레가 내건 보상과 대가에 집중했지만, 루드는 실패했을 때 받은 대가의 결과에 집중했다.

죽거나 감금되거나, 미켈레의 손녀를 본 이들이 처한 결과는 둘 모두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되는 결과였다.

'점점 더 정수 쪽으로 기우는군.'

루드는 마차의 속도를 높였다. 하이오와까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 *

미켈레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맞았다. 갈색 머리에 약간은 비열한 인상의 사내는 자신을 정보 조직 도서관의 수석 사서라고 소개했다.

"위명이 자자한 미켈레 구르드손 님을 뵙습니다."

"인사치레는 됐고 본론만 얘기하지."

"알겠습니다. 긴 시간 뺏지 않겠습니다."

갈수록 위독해지는 손녀의 상태에 미켈레의 심기는 좋지 않았다. 증세를 완화하기 위해 따뜻한 하이오와까지 왔지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았다.

스테판도 미켈레의 심중을 짐작했기에 곧바로 자신이 준비한 가장 강력한 패를 제시했다.

"손녀분의 병을 치료할 방법이나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미켈레는 말없이 스테판을 쳐다봤다. 그러길 잠시, 지친 표정으로 대꾸했다. 보상에 눈이 멀어 허언을 뱉는 이들을 하루 이틀 마주한 게 아니었다.

"고르단 왕국의 왕족이자 소드마스터인 나도 오랜 세월 찾지 못한 것을 자네가 찾아 주겠다는 말인가?"

"예, 정확히는 저 개인이 아니라 제가 가진 도서관의 힘을 통해서 말입니다."

"흥미롭군. 그 도서관이란 조직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나조차 하지 못한 것을 그리 쉽게 호언하는지."

미켈레의 냉담한 시선을 받은 스테판은 몸이 굳는 걸 느꼈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에 겁먹고 물러설 거라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미켈레 님이시기에 더욱 찾기 어려웠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드마스터란 지고한 경지를 밟은 이의 명성. 일국의 왕족으로서 갖는 의무. 그 모든 게 역으로 어려움을 끼쳤던 건 아닐지요."

"...지금 내가 고작 내 명성과 왕족으로서의 품위 때문에 손녀의 병세를 악화시키고 있단 말인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숨통을 틀어막는 것 같은 목소리에 가까스로 침을 삼킨 스테판은 마저 말을 이었다. 얼굴엔 간신히 그려 낸 미소를 띤 채였다.

"성직자에게 보일 수 없고, 그 증세가 밖으로 퍼져선 안 되는 상황이니 미켈레 님께서 직접 나서시기에 부담이 컸을 거란 의미입니다. 그러니 저희가 대신 찾아 드리겠다는 말씀이기도 하고요."

미켈레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건가.'

숨긴다고 숨겼지만, 더 이상 손녀의 증세가 알려지는 걸 막을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태까지 사람들의 눈을 피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더 이상 정보를 숨길 수 없다면, 정보가 더 퍼지기 전에 선수를 치는 게 나았다. 자신이 어렵다면 다른 이를 이용해서라도.

"그렇다 치면, 그 아이를 치료할 방법을 찾을 수 있는가?"

"물론입니다. 저희 도서관의 힘이라면 가능합니다. 다만, 그에 앞서 작은 문제가 있는데 그걸 해결해 주셨으면 합니다."

"손녀의 목숨을 살리고 싶으면 협조해라, 그리 협박하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실 도서관의 힘이 온전치 않은 상황입니다. 손녀분을 고칠 방도를 찾기 위해선 도서관의 힘이 온전해야 하고요. 그를 위해 도서관이 온전한 힘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의미였습니다. 도움을 주신다면 완전해진 도서관의 힘으로 손녀분을 치료할 방도를 찾아다 드리겠습니다."

"담이 큰 건가, 겁이 없는 건가. 자네를 고문하여 얻어 낼 수도 있단 생각은 못 하는 건가?"

사나운 기세가 스테판을 덮쳤다. 금방이라도 지릴 것 같은 압박을 간신히 이겨 낸 스테판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문하셔도 아무 소용없을 겁니다. 제게 고문을 버틸 재간은 없지만, 손녀분을 치료할 방법도 없거든요. 아직은요."

"당돌하군."

"이왕이면 똑똑하다 해 주시죠."

미켈레가 기세를 갈무리하자 숨통이 트인 스테판이 인위적인 미소를 보였다.

'그 아이의 목숨을 걸고 거래를 제안하는 게 괘씸하긴 하지만.'

그로써 그 아이를 고칠 수만 있다면 이깟 괘씸함은 백 번이고 참아 줄 수 있었다.

"치료법을 찾을 수 있다는 말, 허언이 아니어야 할 게야."

"...물론입니다. 그럼 도와주시는 걸로 알아도 되겠습니까?"

스테판은 조심스레 미켈레의 눈을 쳐다봤다. 어떤 기세도 압박도 없이 단순히 눈끼리 마주쳤을 뿐인데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게 소드마스터.'

직접 겪어 보니 그들이 얼마나 괴물인지 알 것 같았다. 정보로만 알고 있던 것과 직접 겪은 것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좋아, 도와주지. 하지만 그 전에 자네에게 치료법을 찾을 능력이 있다는 걸 먼저 증명해 줘야겠어. 자네를 돕는 건 그다음이야."

"증명이라면?"

"손녀의 증세를 완화시킬 방법이라도 먼저 가져와 봐라. 그걸 가져온다면 치료법을 찾을 능력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도와주지. 아무리 온전치 않다지만, 네놈이 그토록 자신한 도서관이란 것의 힘이라면 가능하겠지?"

"물론입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목적하는 바를 이룬 스테판은 허리를 숙였다. 얼굴에는 비열한 미소가 만연했다.

* * *

"예정보다 빠르게 도착했네."

습격이 없을 거란 걸 깨달은 일행은 속도를 올렸다. 쉬는 시간을 아끼며 마차를 달린 끝에 예정보다 이른 시일에 하이오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이오와에 도착한 세 사람은 곧장 머물 곳을 찾았다. 오랜 시간 쉬지 않고 움직인 까닭에 몸에 쌓인 피로가 상당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벨로티와 타미는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잠에 들었다.

잠든 두 사람을 남겨 둔 루드는 거리로 나왔다.

'전생과 동일하다면, 그리고 기억이 맞다면 스테판은 이곳에 있다.'

휴양 도시로 유명한 만큼 하이오와에는 많은 별장이 있었다.

하루 단위로 건설되고 거래되는 별장의 수가 엄청났기에 소유주의 정체나 행방을 일일이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호화로운 도피 생활을 하기에 최적인 곳이었다.

'이쪽 어딘가였는데.'

전생의 기억을 더듬은 루드는 발걸음을 옮겼다. 시장을 지나쳐 쭉 이동하자 관광 명소인 호수가 나타났다.

스테판의 은거지는 이 근방이었다. 당시 대호수 옆에서 그를 죽였던 기억이 있으니 분명했다.

"계속 확인해 봐야겠군."

다만 그의 정확한 은거지가 어딘지는 몰랐다. 호수 근처에 위치한 별장 중 하나란 것만 알았으니, 근방에 있는 수많은 별장들 중 하나가 그의 은거지일 터였다.

"다음 장소로 가 볼까."

호수 근방의 별장을 쓱 훑어본 루드는 발걸음을 돌렸다. 운이 좋으면 스테판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미련을 두는 대신 루드는 다음 행선지를 향해 움직였다. 하이오와에 머물고 있다는 미켈레를 찾아갈 심산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95화

미켈레가 머무는 별장은 호수의 반대편에 있었다. 하이오와 최고의 경관으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호수의 정경이었으나,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그곳은 환자가 요양하기엔 좋은 곳이 아니었다.

하여 미켈레는 호수 반대쪽의 삼림에 위치한 별장을 이용했다. 삼림 일대가 전부 그의 소유였다.

"멈추십시오."

미켈레의 별장에 도착하자 병사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이곳은 고르단 왕국의 고귀한 혈족이 머무는 곳입니다. 용무가 없다면 돌아가 주십시오."

"미켈레 구르드손 님을 찾아뵙고자 왔습니다. 파바르에서 함께 오락을 즐겼던 이가 찾아왔다고 전해주세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병사들의 대처는 능숙했다. 손녀의 치료와 관련해 많은 도전자가 찾아오는 미켈레의 별장이었고, 그들을 상대하는 매뉴얼을 갖춘 병사들이었다.

안으로 이야기를 전달한 지 얼마 안 돼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오시랍니다."

"고맙습니다."

활짝 열린 문을 지나 정원을 통과하자 곧 커다란 건물이 나왔다. 별장의 본채였다. 본채 뒤로도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는데, 이곳 일대의 모든 건물이 미켈레가 지닌 별장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네요."

루드를 맞이한 건 파바르에서 미켈레를 보좌했던 로렐리아였다. 그녀는 루드를 미켈레에게로 안내했다. 미켈레는 본채의 접견실에 있었다.

"얘기를 듣고 설마 했는데 정말 네놈이었구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첫 만남과는 달리 도발할 이유도, 그의 성격을 파악할 필요도 없었기에, 루드의 태도는 그때와 달리 매우 공손했다.

그 모습에 미켈레는 피식 웃고 말았다. 지난날 서로 주고받았던 대화들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서로 얼마나 속을 긁어 댔던가.

물론 그 모든 건 자신을 꾀어내려던 녀석의 속셈 때문이었지만.

"그때 했던 약속대로 제 발로 찾아왔습니다."

"흐. 약속은 그것만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신께 진 빚 또한 갚을 준비가 됐습니다."

원하지 않는 빚이긴 했으나, 파바르에서 미켈레의 덕을 봤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당시 미켈레는 루드에게 직접 찾아와 빚을 갚으라 했고, 루드도 그를 기억했다. 그러기 위해 이 자리에 찾아왔고.

"...소드마스터에 올랐구나."

"예, 누가 꼬우면 너도 소드마스터 하라고 해서 좀 서둘렀습니다."

"크핫!! 녀석 말본새하고는. 소드마스터가 되더니 혓바닥이 더 길어진 것 같구나."

말은 그리했지만, 미켈레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당시의 예감대로 녀석은 흥미로운 존재였다. 한참 동안 웃음을 터뜨리던 미켈레는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일단 축하하마. 빚을 잊지 않고 찾아와 준 것도 고맙고."

"별말씀을요. 축하 인사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 하지만 내게 빚을 갚는 건 어려울 것 같구나. 네가 무슨 생각으로 왔을지 안다. 손녀의 이야기를 들었겠지. 소드마스터가 됐으니 어지간한 어려움은 전부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테고. 해서 빚을 청산하러 온 걸 게야."

그렇게 말하는 미켈레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고한 경지를 이루고 지난날의 빚을 갚고자 찾아온 루드였겠으나, 손녀의 문제를 해결할 거란 기대는 없었다. 어려움을 겪는 자신 또한 소드마스터가 아닌가.

"내 힘으로도 어쩔 수 없었던 문제다. 네 힘이라고 다를까 싶구나."

솔직히 많이 놀랐다. 소드마스터가 되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이토록 빠른 시일 내에 이룰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파바르에서의 만남으로부터 고작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길다면 길지만, 검을 닦는 데 있어선 턱없이 부족한 시간.

하나 다시 만난 녀석은 완숙한 소드마스터의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큰 기대를 할 수 없는 건, 자신이 이미 온갖 수를 다 써 봤기 때문이었다.

"많이 늙으셨군요."

"뭐야?"

"파바르에서 뵀을 땐 말과 행동에서 젊음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는데 말입니다."

하나뿐인 손녀가 아픔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미켈레에게서 젊음을 앗아 갔다.

외관상의 젊음이 아니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지닌 생기와 푸릇함을 말하는 것이었다.

"성직자에겐 보이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

미켈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미켈레가 한 번도 손녀를 성직자에게 보인 적이 없다 알고 있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딱 한 번. 손녀 미쉐린이 자신의 증세에 대해 고백하고 찾아왔을 때, 잘 알고 지내던 성직자에게 보인 적이 있었다.

당시 성직자의 대답을 들은 그는 제 손으로 성직자를 죽여야만 했다.

"흑마력이 느껴져서입니까?"

성직자가 손녀 미쉐린으로부터 흑마력이 느껴진다 한 까닭이었다.

"그걸 네가 어찌!!!"

삽시간에 낯빛이 굳은 미켈레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치료에 실패한 이들을 죽이거나 가둔 것도 그 사실이 알려져선 안 되기 때문이었겠죠."

"미쉐린은 결코 흑마법에 손을 댄 적이 없다. 내 모든 걸 걸고 장담할 수 있어."

"그러나 그녀가 흑마력을 품었음은 부정할 수 없고요."

흑마력은 흑마법사의 상징. 그리고 흑마법사는 대륙의 공적이었다.

미쉐린이 흑마력을 지녔단 게 밝혀지는 즉시 엄청난 파장이 일 게 분명했다.

성국에서 가장 먼저 나설 것이고 어쩌면 고르단 왕국에서 먼저 그녀를 처단하려 할지도 몰랐다. 왕가의 피를 이었음에도.

어쩌면 왕가의 피이기에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손녀분을 한 번 뵙고 싶습니다."

"...따라와라."

루드를 죽여야 하나 생각하던 미켈레는 그 생각을 접었다. 대신 루드를 미쉐린에게로 안내했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루드였다. 나쁜 마음을 먹고자 한 것이었다면 진즉 손을 썼을 터, 그러지 않았다는 건 다른 생각이 있다는 뜻이었다.

미켈레는 부디 루드가 가진 생각이 미쉐린에게 좋은 방향이길 바랐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아이에 관한 건 비밀로 해 다오."

"알겠습니다."

미쉐린은 본채에서 떨어진 별채에 머물고 있었다.

'점점 공기가 차가워진다.'

미켈레의 뒤를 따르던 루드는 미쉐린이 머무는 곳에 가까워질수록 공기가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이곳일세."

말하는 미켈레의 입에선 입김이 흘렀다. 겨울이 아닌데도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미쉐린의 거처로 향하는 문에는 불꽃의 눈물을 비롯한 화 속성의 아티팩트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놀라운 건 그럼에도 문에 하얀 김이 서려 있다는 것이었다.

루드의 시선이 닿은 방향을 확인한 미켈레가 씁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아이에게서 나오는 냉기 때문이야."

현재 미쉐린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흑마력이 아니었다. 그깟 흑마력이야 가지고 있는 걸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없었다. 미켈레에겐 그것을 가능하게 할 힘도 있었고.

하지만 냉기는 달랐다.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는 냉기는 점점 강해지더니 결국 미쉐린을 집어삼키기에 이르렀다.

여태까진 미켈레의 마력 보조 등을 통해 버텨 냈으나 이젠 그마저도 어려운 상태였다.

벌써 미쉐린이 의식을 잃은 지도 여러 날이었다.

"내 마력으로 어떻게든 막고 있었지만, 이젠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야."

미쉐린을 바라보는 미켈레는 절망스러웠다.

미쉐린을 집어삼킨 냉기는 하루가 지날수록 강해졌다. 그 속도도 엄청났다. 단 하루만 지나도 어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지는 냉기였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그 속도는 더 빨라질 터. 이대로 가다가는 미쉐린을 잃을 상황이었다.

"빚을 갚을 수 있겠군요."

하지만 미쉐린의 상태를 확인한 루드는 절망스러움 속 한 줄기 빛을 제시했다.

"...뭐? 그 말이 정말인가?"

"예,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쉐린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얼 정도로 강력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웬만한 이들은 곁에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얼어붙을 정도였다.

미쉐린이 살아 있는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아마 미켈레의 마력과 방 안팎으로 마련된 화 속성 아티팩트들 덕분인 것 같았다.

'역시, 정수의 부작용이다.'

그녀의 상태를 살핀 루드는 확신했다. 예상했던 대로 미쉐린이 겪는 것은 정수의 부작용이었다.

그녀의 증상은 전생의 자신과 유사했다. 정수의 힘에서 비롯된 한기가 몸과 마력을 넘어 정신까지 얼려 버리는 중이었다.

다행히 루드에겐 한기를 해소할 방법이 있었다. 정수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며 깨달은 추출과 흡수의 묘리를 통해서였다.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정수의 힘을 제거하는 거겠지만.'

아쉽게도 죽이지 않고 정수의 힘을 제거하는 법은 몰랐다.

미쉐린을 죽일 순 없는 일이었으니, 당장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했다.

다만 지금의 증상을 완화시킬 순 있었다.

"넓은 곳이 필요합니다. 이왕이면 뜨거운 기운이 강한 곳이 더 좋고요. 화 속성의 아티팩트들도 전부 모아 주십쇼."

"바로 준비하겠네."

미켈레는 움직임을 서둘렀다. 로렐리아가 그 곁을 보좌했다. 미쉐린의 상태를 다른 이들에게 보일 수 없는 까닭에 둘이서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구나, 로렐리아."

두 사람이 모든 준비를 마치자 루드는 미쉐린을 안고 미켈레가 마련한 장소로 나왔다.

미켈레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미쉐린의 오랜 친구인 로렐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

"지금부터 제가 보일 것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말아 주십시오. 외부로의 발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알겠다. 그 아이의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

"또 하나. 저와 연을 맺은 이가 어려움에 빠졌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신지요."

"말했지 않느냐. 무엇이든 하겠다고."

조급함이 묻어나는 반응에 루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정신을 집중하고 미쉐린의 상태를 관조했다.

'정수의 한기가 심장까지 닿았다. 한기를 막고 있는 이것들은 미켈레의 마력인가.'

미쉐린의 상태는 심각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루드조차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였다.

하나 아직 방도가 있었고, 루드에겐 그 방도를 행할 힘이 있었다.

'원리는 같다.'

여태까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기를 추출하면 될 뿐이다.

그 양과 질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미 여러 차례 한기를 추출해 봤으니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한기만 제거해 주면 충분히 깨어날 수 있을 터.'

비록 정수 자체를 제거할 순 없겠지만, 한기만 사라져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건 금방일 것이었다.

쓰으읍-

루드는 정수의 힘을 일으켰다. 내면의 검은색 문이 열리며 정수의 힘이 빠져나왔다.

"저건...."

"쉿,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우린 아무것도 못 보고 아무것도 못 들은 게다."

루드의 뒤로 나타난 기운에 흠칫한 로렐리아였으나 미켈레는 그녀를 진정시켰다.

루드가 부탁한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또 그가 어떻게 미쉐린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인지도.

'정말 고칠 수 있는 건가!'

로렐리아에겐 단순히 흑마력으로 보였겠지만, 미켈레는 달랐다. 소드마스터의 예민한 기감과 오랜 세월 미쉐린을 보살핀 그의 눈은 루드에게서 나타난 흑마력이 미쉐린이 품은 것과 동질하단 걸 알아챘다.

루드에게서 나타난 변화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흑마력과 마찬가지로 냉기 또한 느껴지기 시작했다.

'맞다. 틀림없이 미쉐린과 같은 기운이다.'

미쉐린이 품은 것과 같은 기운. 다만 기운에 잡아먹힌 미쉐린과는 달리 루드는 기운을 통제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 점이 중요했다. 기운을 통제할 줄 안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방법을 알려 줄 수 있지 않을까.

"제발...."

하나밖에 남지 않은 핏줄이었다. 미쉐린마저 이리 잃는다면 훗날 일찍 보내고 만 아들 내외를 볼 면목이 없었다.

'서두르지 말자. 기운의 양과 농도가 심상치 않다. 체력도 많이 소진된 상태고.'

한편 미쉐린에게서 한기를 추출하는 루드는 정신을 집중했다.

한기를 추출하는 게 중요했지만, 그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오랜 세월 정수의 부작용을 겪은 미쉐린의 몸은 연약해진 상태였다. 애초부터 자신이나 제노스와 같은 소드마스터가 아니었으니 거칠게 한기를 추출했다간 반동이 올 수도 있었다.

다치지 않게, 상처 나지 않게.

조금씩, 천천히, 서서히.

조심스럽게 한기를 추출하던 루드는 마침내 체내를 얼어붙게 한 한기를 모두 뽑아냈다.

쩌저적-!!!

추출한 한기를 미리 준비해 둔 아티팩트 위로 발산하자 순식간에 모든 아티팩트들이 얼어붙었다.

불꽃의 눈물과 화염잉어의 내단, 죄인의 업화... 전부 미쉐린의 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해 미켈레가 모아 둔 것들이었다.

화 속성 마법사에겐 비약이나 다름없고,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금액을 자랑하는 것들.

하나 그깟 것들이 얼어붙는 건 미켈레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모든 재산을 털어서 미쉐린을 살릴 수 있다면 응당 그리할 각오가 되어 있었으니.

"미쉐린!!!"

"급한 불만 끈 정도입니다. 일단은 혼자 쉴 수 있게 놔두죠."

미쉐린에게서 한기를 추출한 루드가 물러섰다. 고도로 집중한 까닭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미켈레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미쉐린을 바라봤다. 다행히 바닥에 눕힌 미쉐린의 표정은 한결 편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전까지 주변을 에던 한기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96화

미쉐린을 방으로 옮긴 미켈레는 루드가 기다리고 있는 접견실로 향했다. 들뜬 발걸음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으나, 큰 기대를 하지 않으려 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이었고 자신으로서도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던 상황이었으니.

하나 루드가 보여 준 건 기대 이상의 결과였다. 도저히 방법을 찾지 못했던 미쉐린의 한기를 해소시켰고, 증상의 완화를 넘어 완치의 가능성마저 보여줬다.

루드에게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루드가 어디 도망가지 않을 거란 걸 알았으나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러했다. 가까스로 찾은 희망을 놓칠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루드!"

"오셨습니까."

미쉐린의 한기를 추출하고 쉬고 있던 루드가 미켈레를 맞았다. 그 안색은 약간 창백해져 있었다. 미쉐린의 한기를 추출하며 그것에 노출된 까닭이었다.

오랜 세월 쌓인 미쉐린의 한기는 농밀하고 방대했다. 누구보다 정수의 힘에 통달했다 자부하는 루드로서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전생의 내 상태 못지않았다.'

전생의 루드도 정수의 부작용을 고통을 겪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끔찍한 고통과 정신마저 얼려 버리는 한기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단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였다.

미쉐린의 몸 상태는 그때의 루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의 루드가 소드마스터였단 걸 감안하면 미쉐린이 여태 죽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아마 미켈레의 원조와 갖은 기물들의 보조가 그녀의 목숨을 연명시켰을 터였다.

"좀 더 쉬어도 괜찮다."

"아닙니다. 충분히 쉬었습니다. 말씀드려야 할 것도 있고요."

"그렇다면야."

미켈레는 로렐리아를 시켜 따뜻한 차를 가져오게 했다. 자세를 바로잡은 루드는 건네받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미켈레를 마주했다.

"우선 고맙구나. 미쉐린 그 아이가 그토록 편한 얼굴로 자는 건 정말 오랜만에 봤어."

"위급한 상황만 겨우 넘겼을 뿐입니다.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언제고 또 이런 상황이 찾아올 거고요."

"그렇겠지. 처음부터 이렇게 심했던 것도 아니니 말이야."

그리 말하는 미켈레의 얼굴엔 씁쓸함이 묻어났다. 처음 미쉐린의 상태를 알았을 때만 해도 은은한 흑마력의 기운이 느껴지는 정도에 불과했다. 서늘함이 느껴졌던 것도 흑마력의 영향으로 치부했었고.

하나 점차 힘을 키운 냉기는 조금씩 미쉐린을 집어삼켰다. 지금이야 루드의 도움으로 괜찮아졌다지만, 그의 말처럼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언제고 이런 일이 반복될 터였다.

"미쉐린이 가진 것과 같은 힘을 다루는 것 같더구나."

"맞습니다."

그래도 이전만큼 절망적이진 않았다. 급한 불을 끈 데다 문제의 해결책을 알 만한 이가 눈앞에 있었다.

미켈레와 눈을 마주친 루드는 미쉐린과 자신이 품은 힘, 정수에 관해 설명했다.

"저는 이 힘을 흑음의 정수라고 부릅니다."

"흑음의 정수. 직관적인 이름이구먼."

"예. 미켈레 님께서도 아시겠지만 흑음의 정수는 흑마력과 한기를 띱니다. 대개는 이 중 흑마력이 문제라 생각하지만 진짜 문제는 흑마력이 아닙니다."

"한기지."

"맞습니다. 흑마력은 지니고 있다 한들 들키지만 않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기는 다릅니다. 끊임없이 생겨나는 한기는 사용자의 몸과 마력을 좀먹고, 끝내는 목숨마저 뺏습니다."

"나 또한 그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의 마력을 아무리 투여해도 미쉐린의 몸을 얼린 한기를 어쩔 수 없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미켈레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해결책이 있나?"

"당장 생각나는 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근본적인 원인인 정수를 제거하는 것.

다른 하나는 주기적으로 한기를 제거하며 그것을 다루는 법을 익히는 것.

"정수를 제거할 수 있는 건가."

"확신할 순 없습니다. 사실 처음엔 정수를 제거하는 건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이유가 있나?"

"그 사용자를 죽인 것 말고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짧은 침묵이 맴돌았다.

"않았었다는 건, 지금은 다르단 것 같은데?"

"네. 말씀드렸다시피 확신할 순 없으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쉐린에게서 한기를 추출하던 중 루드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건 한기만이 아닌, 한기의 근원인 정수를 추출할 수 있을 것 같단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정수를 제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가?"

"예, 한기는 물론 흑마력도 사라질 겁니다. 애초에 정수 때문에 생긴 것이니까요."

다만, 정수를 제거하는 것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다만, 만약 정수를 제거한다면 여태까지 손녀분이 모은 모든 마력은 사라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수의 힘에 물들었기 때문인가."

"네, 정수의 힘은 사용자의 마력을 먹어 치우며 자신의 힘으로 바꿉니다. 손녀분의 마력은 이미 정수의 힘과 다름없는 상태니, 정수를 제거하면 그 또한 사라질 겁니다."

보통이라면 문제될 게 없는 일이었다. 일단 살아남는 게 우선 아닌가.

하지만 문제는 미쉐린이 일반인이 아닌 검을 익힌 무인이란 데 있었다.

그녀는 정수의 부작용에 시달리기 전까지 오랜 세월 검은 닦은 무인이자 고르단 왕국의 촉망받는 기재였다.

마력을 지녔고 그걸 다루는 게 당연하던 이에게서 마력을 뺏어간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할애비의 입장에선 마력을 잃더라도 원인을 제거했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그 아이의 생각도 들어 봐야 할 것 같구나. 두 번째 방법은 어떻게 하는 건가."

"저 또한 미켈레 님과 생각이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원인을 제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게 힘들다면... 주기적으로 한기를 추출하고, 정수의 힘과 줄다리기하는 법을 가르칠 생각입니다."

자신이 찾아와 주기적으로 한기를 제거해 준다면 충분히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정수의 힘에서 비롯된 마력을 토대로 무를 쌓는 것도 가능했고.

그것을 선택한다면 정수의 힘을 다루는 법과 그 부작용을 견디는 법을 최대한 가르칠 생각이었다.

다만 이 경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작용이 강해져, 결국 그 끝이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수의 힘은 쓰면 쓸수록 강해지는 힘입니다. 강해진 힘은 지금처럼 손녀분을 집어삼킬 거고요."

"그 아이의 의견을 듣고 싶다. 결국 인생을 사는 것은 본인이니 내가 쉽게 결정할 수가 없구나. 당장 결정해야 할 것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손녀분이 깨어나면 직접 의사를 물어보시죠."

끄덕. 미켈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제가 하이오와에 머무는 동안엔 주기적으로 찾아와 이번처럼 한기를 제거할 생각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상태는 훨씬 나아질 겁니다."

"다시 한번 고맙구나. 정말 큰 은혜를 입었어."

미켈레는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현했다. 루드가 아니었다면 미쉐린의 상태가 악화되는 걸 지켜보기만 했을 터였다.

"제가 도움을 드렸음을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대신 저 또한 당신께 도움을 부탁드리려 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 어떤 것이냐. 뭐든 말해라."

미켈레는 미쉐린을 치료하기 전 루드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자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었다.

"연을 맺고 동행중인 이가 있습니다. 이름은 벨로티 로미네스, 로미네스 백작가의 사생아입니다. 여태까진 백작가의 눈을 피해 잘 살고 있었으나 최근 들어 그들에게 쫓기게 됐습니다."

"로미네스 백작가라. 이름은 들어 봤지. 그들을 막아 달라는 게 부탁인가?"

미켈레는 난색을 띠었다. 아무리 자신이라지만 제국의 백작가에 함부로 간섭할 수는 없었다. 한다면 할 수는 있겠지만 타국의 왕족이 제국의 귀족에게, 그것도 제국의 영토에서 간섭하는 모양새는 결코 좋지 않았다.

하나 루드에게 받은 것이 결코 작지 않았으니, 무리해서라도 부탁을 들어주고자 했다.

"예, 대신 이곳 하이오와에서 정도면 충분합니다. 당신께서 하이오와에 머무는 동안, 그들이 이곳에서 힘을 행사하려 하거든 그것을 막아 주십쇼."

"내가 하이오와에 머무는 동안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군."

미켈레의 사정을 짐작한 루드는 그의 부담을 덜어줬다.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행동 하나가 외교적인 사안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미켈레였다. 그런 그가 대놓고 로미네스 백작가를 압박하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그가 하이오와에 머무는 동안 하이오와에서라면 사정이 달랐다.

"미쉐린의 요양을 위해 찾아온 곳인데 소란스러워서야 안 될 일이지."

그가 먼저 머무르고 있고, 심지어 손녀의 치료를 위해 이곳을 찾았음이 널리 알려진 상황. 명분은 그에게 있었다.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미켈레는 루드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한데, 그 벨로티라는 아이가 혹 네놈의 정인이냐?"

부탁을 듣는 내내 줄곧 걸리던 것이었다.

'그래선 안 될 진데. 아무리 봐도 미쉐린의 짝으로 딱이란 말이지.'

미쉐린과 나이차도 얼마 안 돼 보였고 미쉐린의 병을 치료할 능력까지 갖췄으니 딱이었다.

미쉐린이 왕가의 일원이라 루드가 이민족 출신인 게 문제라면 문제겠으나, 그 또한 그가 소드마스터임을 감안하면 큰 문제는 아닐 터였다.

'정 안 되면 불만 있는 녀석들을 모아다가 푸닥거리 한 번 하면 될 일이고.'

다만 루드에게 정인이 있다면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었다.

'제발. 부디. 신이시여.'

그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음일까.

"...벨로티는 남자입니다."

미켈레는 제 계획에 차질이 없음을 확인했다.

"큼, 그렇군. 제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기에 정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지 뭐냐."

"그를 돕는 건 그가 가진 능력과 잠재력이 투자할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호오? 어떤 녀석일지 궁금해지는데."

내심 안도한 미켈레는 벨로티란 인물이 궁금해졌다. 어떤 이이기에 저 녀석이 저리 말할까. 그만한 인물이라면 자신도 투자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머리가 비상한 인물입니다. 조직을 만들고 다루는 능력도 좋고요. 비록 지금은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지만요."

벨로티의 미래를 아는 루드는 확신했다. 지금의 역경을 이겨 낸 그는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었다.

"그리 말하니 더 관심이 가는군. 그가 만들었다는 조직이 혹 내가 알 법한 곳이더냐."

"도서관이란 곳인데, 들어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혹 도서관이란 그곳이 정보 조직이더냐?"

루드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미켈레는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었다. 그는 곧 도서관의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려 냈다.

"이상하구나. 얼마 전 날 찾아온 녀석이 있었는데, 그 녀석도 도서관의 이름을 언급했다. 자신을 도와주면 도서관의 힘으로 미쉐린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 오겠다고도 했지."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리 말하던 녀석의 태도는 진심이었다.

다만 그때의 녀석은 도서관이 마치 제 것인 것처럼 말했다.

"벨로티란 녀석이 도서관의 주인인 게 맞긴 한 게냐?"

루드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나 자신이 보고 들은 것도 있었으니 확인이 필요했다.

한편 미켈레의 이야기를 들은 루드는 이야기 속 인물이 스테판임을 직감했다.

분명 미켈레의 소식을 듣고 그와 거래하고자 찾아온 것이겠지.

"혹시 찾아왔던 이가 갈색 머리에 비열한 인상의 남자였습니까?"

"맞다. 관계가 있긴 한가 보구나."

"네, 녀석은 도서관의 이인자입니다. 로미네스 백작가에게 벨로티의 존재를 알린 것도 그 녀석이고요. 그가 접촉해 왔다면 높은 확률로 벨로티를 제거하는 데 도움받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루드는 간략히 벨로티와 스테판 사이에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스테판이 로미네스 백작가를 끌어들인 것도, 미켈레를 찾아온 것도 그러한 일환의 하나일 거란 것도.

"흐음... 그런 상황이었군."

모든 설명을 들은 미켈레는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했다.

"요는 그 녀석만 잡으면 끝인 거구나. 좋아, 내가 녀석을 붙잡아 주마."

"정말이십니까?"

"그래. 어차피 다시 나를 찾아오기로 했으니 그때 녀석을 붙잡아 두마. 로미네스 백작가의 일을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한 것 같아 못내 걸렸는데 이렇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구나."

미켈레로서도 잘 된 일이었다. 받은 것에 비해 줄 수 있는 도움이 작은 것 같아 마음에 걸렸는데, 상황이 이리 됐으니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호의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켈레의 호의는 루드로선 뜻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미켈레가 스테판을 잡아 준다면 도서관의 일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미켈레와 몇 가지 대화를 나눈 루드는 해가 저물 때가 돼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많이 피곤했나보군.'

벨로티와 타미는 여전히 자고 있는 상태였다. 그간의 강행군에 많이 지쳐 있었단 증거였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루드는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뀨!

슬라브가 본인의 존재감을 피력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두 사람 옆에 남겨 두고 갔던 것이었다.

수고의 대가로 마력을 건넨 루드는 미켈레의 별장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미쉐린이 품었던 정수의 힘과 도움을 약속한 미켈레, 도서관의 문제를 해결할 단초.

그리고.

'한기만이 아니라 정수 자체를 추출할 수 있다면....'

생각지도 못했던 것에 대한 가능성.

깊어지는 생각과 함께 길었던 하루가 저물어갔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97화

벨로티와 타미는 밤이 돼서야 일어났다. 오랜 수면으로 체력을 회복한 두 사람은 자신들이 자는 사이 루드가 가져온 성과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이야?"

"그래. 적어도 이곳에선 로미네스 백작가가 나설 수 없게 해 주겠단 약조를 받았다. 더불어 스테판도 곧 잡을 수 있을 거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다니."

벨로티는 어안이 벙벙했다. 몇 주 동안 자신을 압박하던 것들이 잠들어 있던 짧은 시간에 전부 해결됐다.

'모두 루드 덕분이야.'

로미네스 백작가의 사냥개들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미켈레 구르드손의 도움을 받게 된 것도.

전부 루드가 도와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잘 됐군요. 정말 잘 됐습니다."

"예, 스테판이 미켈레를 찾아갔던 것도 운이 따랐습니다."

설마 스테판이 미켈레를 찾아갔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전생에선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자신의 개입으로 사건이 벌어진 시간대가 빨라지며 발생한 변화 같았다.

스테판이 미켈레를 찾은 건 그의 힘을 빌려 이번 일의 종지부를 찍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벨로티만 죽으면 모두 끝나는 일이었으니.

그의 생각대로 모든 일은 곧 끝날 터였다. 다만,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할 필요 없다. 대가를 받고 한 일이니. 수익의 2할, 잊지는 않았겠지?"

"물론 기억하고 있어.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대가를 받기로 하고 도운 루드였지만, 그가 해 준 일의 가치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그는 충분히 감사를 받을 만 했다.

루드에게 고마움을 표현한 벨로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앞으로 바빠지겠는걸. 지금까지 쉬었으니 열심히 일해볼까."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우선 분열된 도서관의 힘을 원상태로 돌려놔야 했다. 그 과정에서 스테판 쪽에 선 이들은 전부 갈아치울 예정이었다. 또 제2의 스테판이 나오지 않도록 시스템을 재정비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부로부터 도서관을 보호할 수단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루드, 혹시 미켈레 님과 다리를 놔 줄 수 있어?"

"미켈레 님과?"

"응, 사업적으로 제안할 게 있어서."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미켈레도 도서관과 벨로티에게 관심이 많아 보였으니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걸리는 건 벨로티에 대해 물었던 미켈레와 자신이 했던 답이었으나....

'문제될 건 없겠지.'

그것도 별다른 문제는 없을 터였다.

"이제 다 끝났네. 이곳에 있는 동안엔 위험할 일도 없을 거고 미켈레 님께서 스테판도 잡아 주신다고 했으니."

도저히 타개책을 찾을 수 없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일이 풀리니 이렇게 순식간에 해결되고 말았다.

마음을 놓은 벨로티는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이젠 새로 선보일 도서관에 대한 구상만 하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루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미켈레 님께서 스테판을 잡아 준다고 하긴 했지만, 개인적으론 그보다 앞서 우리가 스테판을 확보했으면 한다."

"굳이 저희가 나서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타미는 의문을 표했다. 이미 모든 일이 해결된 마당인데 굳이 나서야 할 이유가 있나 하는 의문이었다.

그 반응에 루드는 설명을 이어 갔다.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고, 미켈레 님이 스테판을 잡아준다면 그것 또한 결국 빚으로 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그것도 그렇네."

그 말에 반응한 건 벨로티였다. 루드가 말하는 바를 깨달은 그는 곧장 몸을 튕기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빚이 늘어나는 건 결코 좋지 않지. 그게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이미 로미네스 백작가를 막아 주기로 한 미켈레였다. 그것만으로도 그에게 진 빚이 상당했다. 거기에 스테판의 처리까지 해 준다면 빚은 더욱 무거워졌다.

'안 그래도 불리한 입장인데 더 불리한 입장을 만들어선 안 되지.'

벨로티는 미켈레에게 거래를 제안할 생각이었다. 그것을 감안하면 더 이상 빚을 늘리는 건 지양해야 했다.

물론 미켈레가 해 주는 모든 것을 통틀어도 미쉐린의 치료에 견줄 것은 아니었으나, 그건 벨로티로선 모를 사정이었다. 미켈레가 진 부채는 루드 개인에게 해당하는 것이기도 했고.

'미켈레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테판을 처리한다면 빚을 더 남겨 둘 수 있겠지.'

한편 루드의 속내는 이러했다.

소드마스터쯤 되는 이에게 빚을 지울 기회는 많지 않았다. 언제고 구명줄로 돌아올 수도 있는 빚이었으니 가능할 때 최대한 많은 빚을 지워 놓는 게 좋았다.

'고작 스테판을 잡는 걸로 청산하기엔 아깝지.'

미쉐린을 치료하며 입혀 놓은 빚은 상당했으나 이런 식으로 조금씩 청산하면 어느 순간 가치가 퇴색될지도 모른다.

고작 스테판 따위를 잡는 데 쓰기엔 아까웠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스테판을 잡는 건 자신들의 힘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미켈레가 빚을 청산하는 건 늦을수록 좋았다.

"스테판이 하이오와에 있는 건 확실하니 우리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다."

벨로티에게 설명할 순 없지만 이미 스테판의 거처가 있는 곳을 알고 있는 루드였으니, 그곳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게 유도한다면 얼마 안 가 스테판을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거기까지 어떻게 유도하나가 고민이었으나,

"스테판이 이곳에 있단 말이지."

그건 필요 없는 고민이었다.

"절경으로 유명한 관광지 인근의 별장들을 뒤져 보자. 일단 호수부터 시작하면 될 거 같아."

자신이 갖고 있던 정보와 루드가 가져온 정보를 조합한 벨로티가 순식간에 정답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단번에 스테판의 은거지가 있는 곳을 짚어낸 벨로티에 루드는 눈을 빛냈다.

"이유가 있나?"

"유동 인구가 많고 외지인이 머물러도 이상하지 않으며, 비상시 도주에 용이한 곳. 그리고 녀석의 힘으로 구할 수 있을 만한 곳. 이 모든 걸 충족시킬 곳은 몇 개 되지 않으니까. 그중 가장 확률이 높은 게 호수가의 별장들이고."

도서관의 힘을 미끼로 미켈레에게 거래를 제안했으니 스테판은 정보를 수급할 수 있는 곳에 거점을 마련했을 것이었다. 정보가 오가려면 사람들이 오가야 했고, 그것이 자연스러워 보이려면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어야 했다.

동시에 외부 활동을 아예 안 하진 않을 테니 외지인이 머물러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어야 했고, 혹시나의 상황에 대비해 몸을 빼기 쉬운 곳일 확률이 높았다.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하면서 녀석이 구할 수 있을 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그중 가장 확률이 높은 곳이 호수가 근처의 별장들이었다. 워낙 거래가 활발한 데다 외지인의 방문이 많았으니 은거지로 삼기에 최적이었다.

'역시, 머리 하나는 좋다니까.'

벨로티의 추리에 감탄한 루드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날이 밝는 대로 하나씩 뒤져 보자고."

"저도 거들겠습니다."

"거기에 관련해서 나한테 생각이 있어."

은거지의 위치를 특정해낸 벨로티는 그 뒤로도 적극적인 의견을 냈다.

호수 주변으로만 한정해도 엄청난 숫자의 별장들이었다. 그 모든 별장들을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는 법. 엄한 이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여 생각해 둔 방법이 있었다.

'개인적인 복수도 하고 말이야.'

다음 날, 여관을 나선 세 사람의 모습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다들 가자고."

깔끔히 차려입은 벨로티와 타미의 뒤로 검을 찬 루드가 이동했다.

대충 봤을 때 높은 분과 그를 모시는 집사, 그들을 호위하는 병력으로 보일 모습이었다.

"...이렇게 할 필요가 있나."

"나만 믿어. 이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니까."

루드의 불만을 무시한 벨로티가 앞장서서 걸었다. 그들은 곧 호수가 일대의 별장을 관리한다는 상단에 도착했다.

"큼큼, 이리 나와 보거라!"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목을 가다듬은 벨로티가 큰 소리를 내자 상단 안에서 헐레벌떡 누군가 뛰어나왔다. 돈줄이 왔다는 걸 깨달은 이의 다급한 몸짓이었다.

"호수 근처의 별장을 사고 싶어 알아보니 누가 이곳으로 가라더군."

"잘 오셨습니다! 호수 근처의 별장들은 전부 저희가 관리한답니다. 어디 호수만이겠습니까. 이곳 하이오와에서 이름난 별장들은 전부 저희 관리이죠."

"호, 그런가?"

"예예,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겁니다. 안으로 드시죠. 해가 뜨겁습니다."

타미와 루드를 대동한 벨로티의 모습은 퍽 귀족가의 자제 같았다. 세상 물정 모르고 돈을 펑펑 쓰는, 상인에게 있어선 호구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물론 잘못 건드렸다간 목이 날아가는 귀족이니만큼 등쳐먹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조금, 약간의 이문만 남길 생각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상인은 자신들이 보유한 별장의 카탈로그를 보여 줬다.

"현재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별장들 명단입니다."

"흠...."

하지만 벨로티의 반응은 탐탁지 않았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무래도 너무 늦게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생각해 보면 좋은 것들은 이미 주인이 있지 않겠나. 이곳에서 찾을 게 아니라 그들과 직접 담판을 지어야겠어. 웃돈을 준다면 그들도 기쁜 마음으로 별장을 넘기지 않겠나."

"하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헌앙하신 분께서 웃돈까지 얹어 주신다면야 그분들도 기쁜 마음으로 양보하시겠죠. 다만...."

"다만?"

"그분들이 항상 별장에 머무는 건 아니어서요. 말 그대로 별장이지 않습니까. 별장."

"그것도 그렇군. 그럼 어떻게 해야겠나?"

상인은 벨로티와 눈을 맞추며 웃음을 보였다. 일평생 갈고닦은 신뢰가 가는 웃음이었다.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귀하신 분께서 직접 찾아가시는 것보단 저희 같은 이들이 찾아가 의사를 물어보는 게 모양새도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긴 하지, 하면?"

"원하시는 별장이 있다면 저희가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다만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웃돈을 얹어 주셔야 하긴 합니다. 저희가 최대한 조율을 해 볼 테지만 아무래도 그분들께서도 다 마음이 있어 구매하신 걸 테니까요."

"당연한 소리를."

벨로티는 크게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인도 환히 웃었다. 눈앞의 청년이 제시할 웃돈이 정확히 얼마일지는 모르겠으나, 청년 또한 자신이 거래에서 건넬 웃돈이 얼마일진 알 수 없으리라. 그리 남은 차액은 전부 자신의 주머니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하나만 더 부탁하지."

"말씀하시죠."

"별장들의 구매자 등이 기록된 장부가 있을진대, 그것을 좀 볼 수 있겠나?"

"...예? 그것은 어찌."

장부란 것은 쉽게 노출해선 안 될 것이었다. 특히 외부인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물론 이곳에 있는 장부는 대외적인 것이라 크게 문제될 건 없었으나, 그게 함부로 보여 줄 수 있단 의미는 아니었다.

난색을 표하는 상인에 벨로티는 그와의 거리를 가까이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리 나라도 조심해야 할 이들은 있는 법이거든. 내 가문보다 존귀한 가문의 분들에게 웃돈을 줄 테니 별장을 내놓으라 할 순 없지 않겠는가. 그러다 가문의 어른에게 꾸중이라도 듣는다면... 내 기분도 상당히 나쁠 것이고 말이야."

"그렇긴 할 것 같습니다."

상인을 바라보는 벨로티의 눈은 전형적인 망나니의 것이었다. 내 기분이 나쁘면 네 기분도 나쁘게 해 주겠다는, 그게 궁금하면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는 눈빛이었다.

"그러지 않기 위해 부탁하는 걸세. 예를 갖춰야 할 곳을 추려내야 하지 않겠나."

"...그런 것이라면,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눈빛에 압도된 상인은 고민 끝에 장부를 가져왔다. 몇 년간의 거래 내역이 기록된 장부였다.

"됐네, 고맙네."

장부를 살핀 벨로티는 상인에게 장부를 넘겼다. 제대로 확인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에 상인이 의아해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찾았다.'

이미 스테판이 몸을 숨긴 곳이 어딘지 알아낸 후였으니.

"대금은 어찌할까요?"

"자네가 먼저 별장들을 알아봐 주면 그때 처리하는 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연락은 어디로 드리면 될까요? 성함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이름을 물어보는 상인의 말에 벨로티는 인상을 찡그렸다. 한참 동안 말을 않고 상인을 째려보던 벨로티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들어 보였다.

"이 푸른빛의 머리카락을 보고도 몰라보는 건가, 아니면 모르고 싶은 건가."

"혹시 로미네스 백작가의...."

"자네를 믿고 거래해도 될지 심히 의심스러워지는군. 가지, 거래는 없던 걸로 해야겠어."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한 번만 만회할 기회를 주십쇼.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당장이라도 떠날 듯이 몸을 돌렸던 벨로티는 이번 한 번뿐이란 말과 함께 상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음은 없네. 연락을 어디로 해야 할지는 알겠지?"

"물론입니다. 일을 마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그러지. 이건 팁일세."

금화 하나를 튕겨 준 벨로티는 상단을 나섰다. 찾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유롭고 느긋한 걸음이었다.

팁이라며 금화까지 건넸으니 신분을 의심할 걱정은 접어 두어도 됐다.

"후하... 뭐 실수한 건 없었겠지?"

"완벽했다. 누가 봐도 가문을 믿고 막 나가는 철부지였다."

상단이 보이지 않을 거리가 돼서야 기존의 모습으로 돌아온 벨로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긴장돼서 죽는 줄 알았네."

"그런 것치곤 즐기는 것 같았지만. 그보다 찾았나?"

"물론이지. 내가 나만 믿으라고 했잖아. 이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라고."

벨로티는 별장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대신 그들을 관리하는 상단의 장부를 통해 스테판의 은거지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자신했던 대로, 스테판의 은거지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별장들의 값과 매매자의 소속 등만 확인하면 추리는 건 금방이지.'

이미 별장을 살 만한 이들의 목록은 머릿속에 들어 있었으니, 남은 건 장부에서 그들의 이름을 제외한 이름을 찾는 것뿐이었다.

"가자. 이쪽이야."

스테판을 찾는 건 이제 시간문제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98화

미켈레의 별장을 찾은 스테판은 이유 모를 한기를 느꼈다. 바깥의 병사며 내부의 사용인이며 모두 똑같았지만, 오랜 세월 단련된 눈치는 분명 무언가 바뀐 것이 있음을 호소하고 있었다.

"왔는가. 기다리고 있었네."

하지만 그게 뭔지 확인해 볼 시간은 없었다. 어느덧 미켈레가 나타난 까닭이었다.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됐네. 그보다 약속했던 건 갖고 왔나."

"물론입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희 도서관의 능력이라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스테판은 자신만만했다. 미켈레는 어디 한번 읊어 보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니르바 아틸테헨을 아십니까?"

"세바니아 왕국의 니르바 아틸테헨을 말하는 것이냐."

"예. 맞습니다."

대륙 북부에 위치한 세바니아 왕국은 고르단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였다.

니르바 아틸테헨은 그곳의 공작이자 소드마스터. 미켈레로선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오랜 세월 전쟁이 없었다지만, 언제 어느 때 깨질지 모를 평화였다. 만약 양국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서로의 상대가 되어야 할 미켈레와 니르바였다.

"그녀의 이름은 왜 말한 거지?"

"그녀가 미쉐린 님과 똑같은 증세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니르바 그 여자가?"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양국은 서로에 관해 많은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켈레는 지금 스테판이 언급한 정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믿어도 되는 정보인가.'

스테판의 말과 더불어 짐작 가는 상황이 있긴 했다.

한동안 모습을 감춘 적이 있던 니르바였다. 다시 나타났을 때 소드마스터에 오른 상태였기에 깨달음을 얻기 위한 칩거였다고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면?

'모르겠군.'

스테판의 말대로 그녀가 미쉐린과 같은 증상을 겪었다면 모습을 감췄던 건 그와 연관돼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아무 검증도 없이 스테판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일부러 확인이 어려운 정보를 그럴듯하게 가공해 제시했을 경우도 배제해선 안 됐다.

"니르바의 마력 속성은 냉 계열이죠."

"마력 속성이 냉 계열이라 해서 미쉐린과 같은 증상이라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은데... 일전에 말했던, 성직자와 관련된 부분도 남아 있고."

"그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여태 그녀의 검과 그 마력을 명확히 목도한 이가 있습니까?"

"...없군."

스테판과의 짧은 문답을 마친 미켈레는 수긍했다. 진실일지 아닐지는 여전히 의문이나 확실히 그럴듯해 보이긴 했다.

니르바의 마력 속성이 냉 계열이란 건 유명했지만, 그건 그녀가 전투를 마친 곳에 남아 있는 얼음의 흔적 때문에 알려진 것이었다. 그녀의 검과 마력이 어떠한지 정확히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투 상황에서 항상 홀로 싸우길 자처하는 그녀였고, 그 적은 전부 목숨을 잃었다.

"공작이나 되어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비추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원래도 공식적인 자리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다 하여도 국왕이 직접 초청한 건국제에서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는 걸로 해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스테판의 말처럼 니르바는 소드마스터가 된 이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영지에서 조용히 머무르기만 할 뿐이었다. 이 때문에 왕과 힘겨루기를 한다는 평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전부터 공적인 자리를 꺼리던 니르바였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정수의 힘과 관련된 까닭이라 여길 수도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니르바의 예를 살폈을 때, 손녀분의 증상을 완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손녀분께서 절대의 경지에 오르시는 것입니다. 쉽지는 않겠으나... 미켈레 님의 재능을 물려받으신 분이니 충분히 가능하다 생각합니다."

"흠."

미켈레는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스테판이 가져온 정보가 사실이라면 꽤나 놀랄 만한 일이었다. 고작 며칠 만에 고르단 왕국에서도 모르던 정보를 가져온 것이었으니.

'며칠은 아닐 수도 있겠군.'

어쩌면 이전에 찾아왔을 때부터 갖고 있던 정보일 수도 있었다. 지금에서야 얘기하는 건 짧은 시간 동안 이러한 정보를 가져올 만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함일 수도.

그래도 도서관의 능력이 뛰어나단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미켈레 님."

"무슨 일인가."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로렐리아가 다가와 기다리던 소식을 알렸다. 고개를 끄덕인 미켈레는 스테판을 바라봤다. 기다리던 그에게 답을 주기 위함이었다.

"도서관의 능력은 잘 알았네. 그 정보가 사실일지는 교차 검증을 해 봐야겠지만 지금 듣기에는 꽤 그럴듯한 정보였네."

"확인해 보신다면 단순히 그럴듯한 게 아님을 아시게 될 겁니다."

"한데 말이야."

미켈레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 이 정보를 지난 만남에서 들었다면, 그래서 자신이 교차 검증에 나섰고 그 결과가 빠르게 나왔다면, 스테판은 살길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그를 도울 것을 약조했더라면 최소한 목숨만큼은 살려 주고자 했을 테니.

그러나 그건 불필요한 가정이었다.

"자네보다 먼저 정보를 가져온 이가 있었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심지어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지. 미쉐린의 증세를 완화시키는 것은 물론 근본적인 해결책까지 제시했으니."

거기까지 말한 미켈레는 몸을 일으켰다.

"마침 지금 도착했다고 하는군. 자네도 함께 만나볼 텐가? 반가운 얼굴도 있을 것인데."

스테판은 혼란스러웠다. 불완전하다지만, 도서관의 힘으로도 명확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미쉐린의 증세였다.

한데 그것을 알고 있는 이가 있다니.

반가운 얼굴도 있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인가.

머리를 가득 채웠던 혼란스러움이 가시는 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수석사서."

환한 웃음을 보이며 다가오는 인물은 미켈레의 말처럼 익숙한 얼굴이었다.

"과, 관장."

"오랜만입니다. 드디어 찾아뵙는군요."

벨로티와 타미를 마주한 스테판의 몸이 굳었다. 두 사람이 하이오와로 향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이리 마주칠 줄은 몰랐다.

"왔나.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구나. 이제 막 연락이 닿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연락을 받고 온 게 아니어서요."

두 사람과 함께 미켈레의 별장을 찾은 루드는 스테판을 바라봤다. 벨로티와 대치 중인 그는 전생과 변함없이 비열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그를 본 루드는 못내 아쉬움을 느꼈다.

'조금만 더 빨랐어도 손을 빌리지 않는 건데. 아쉽게 됐어.'

벨로티의 계책으로 스테판의 은거지를 찾아냈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텅 빈 별장이었다.

책상 위로 널브러진 정보지들에 미켈레를 찾아갔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그 뒤를 쫓았으나, 이렇듯 간발의 차이로 늦고 말았다.

"미켈레 님! 어찌하여 제게 이러시는 겁니까!"

다급하게 외치는 스테판. 하나 미켈레는 스테판에게 시선을 두는 대신 벨로티를 바라봤다.

'흠... 이 아이가 녀석이 말한 벨로티란 녀석인가.'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미켈레의 시선을 느낀 벨로티가 뒤늦게 예를 갖췄다.

"고르단 왕국의 고귀한 핏줄을 뵙습니다. 저는 정보 조직 도서관의 관장 벨로티라고 합니다."

"그래, 반갑구나. 루드, 저 녀석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투자할 가치가 있는 재목이라 하더군."

"그에겐 감사할 뿐입니다."

몸을 더 깊게 숙인 벨로티는 허리를 펴지 않은 상태로 입을 열었다.

"감히 넓은 아량에 기대어 작은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거라."

"앞에 있는 스테판과는 개인적인 연이 있습니다. 제 손으로 직접 해결할 수 있게 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다."

"미켈레 님!"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에 스테판이 기함했다. 설마 벨로티가 미켈레와 연을 만들어 뒀을 줄이야.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호위 병력 하나 데리고 오지 못한 상태였다.

'아니. 연이 있는 건 벨로티가 아니다.'

스테판은 벨로티의 옆에 선 루드를 바라봤다.

저 녀석이다. 저 녀석이 모든 일을 망친 원흉이었다. 이미 죽었어야 할 벨로티가 번듯하게 살아 있는 것도. 안전했어야 할 미켈레의 별장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도. 전부 저 녀석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테판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미 미켈레가 그를 저버렸으니 이곳에서 살아 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하, 하핫. 이런 젠장."

넋을 잃은 채 웃던 스테판.

"혼자 죽을 수는 없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달려들었지만,

"커억...!!"

그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뭔가를 해 보기도 전에 심장에 단도가 박힌 까닭이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스테판을 찌른 벨로티는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숨이 끊긴 스테판의 몸이 허물어졌다.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탐닉한 자의 보잘것없는 최후였다.

"후... 드디어 끝났다."

"고생했다."

"고마워."

루드의 말에 답한 벨로티는 스테판의 옷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동요는 없었다.

혼란스러운 조직의 상황과 백작가의 위협 때문에 흔들리긴 했으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돌며 자신만의 조직을 만든 벨로티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흐으음....'

벨로티와 루드의 모습을 번갈아 보던 미켈레는 어딘가 뚱한 기색을 표했다.

벨로티는 그런 미켈레에게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럴 것 없다. 은혜를 입힌 게 아니라 받은 것을 갚은 것에 불과하니. 그리고 너무 과한 예도 필요 없다. 저 녀석의 동행으로 온 이가 그러니 외려 불편하구나. 정작 저 녀석은 내게 그만한 예를 갖추지도 않는데 말이다."

벨로티를 도운 건 미켈레로서도 마음이 편해지는 일이었다. 루드에게 진 빚이 컸으니 이렇게라도 부채감을 덜어야 했다.

"그러시다면야 과한 예는 생략하겠습니다."

미켈레의 말에 벨로티는 허리를 폈다. 자세를 똑바로 하고 침을 삼킨 그는 곧 미켈레와 눈을 마주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루드에게 제가 투자할 가치가 있는 재목이라고 들었다 하셨습니다."

"맞다."

"그 평에 관련해 감히 거래를 제안드리고자 합니다."

벨로티가 미켈레보다 먼저 스테판을 찾고자 한 건 미켈레에게 거래를 제안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서로 간 감당할 수 없는 부채가 있다면 거래의 상대가 될 수 없는 법. 그것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한 것이었다.

비록 스테판을 넘겨받는 모양새가 됐지만, 미켈레가 루드에게 받은 것을 갚은 것에 불과하다 해 줬으니, 안면몰수하더라도 거래를 제안하고자 했다.

"어떤 거래일지 궁금하군. 다만, 내가 저 녀석의 평가만 듣고 무언가를 쉽게 내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임을 알아 둬야 할 것이네."

"물론입니다. 루드의 평은 저로서도 고마운 것이지만, 결코 그것에 기댈 생각은 없습니다. 정보 상인도 엄연한 상인. 상인이라 함은 스스로의 역량에 기대어야 하는 법이죠."

미켈레에게 제안할 거래는 일찍이 생각해 뒀다.

"미켈레 구르드손, 고르단 왕국의 고귀한 핏줄이자 위대한 소드마스터시여. 도서관의 후원자가 돼 주실 수 있겠습니까?"

벨로티는 이번 사건을 통해 절감했다. 만약의 상황에서 조직을 지켜 줄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도서관이 미켈레 님의 이름을 걸게 해 주십쇼. 그리해 주신다면 도서관의 VIP 코드를 드리겠습니다."

"나를 뒷배로 쓰겠다는 거구먼."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이것은 도서관을 보호하기 위한 거래였다. 일국의 왕족이자 소드마스터인 그가 비호하는 조직이 된다면 외부의 위협에 대한 걱정은 한시름 덜어도 좋았다.

"너도 마찬가지야. 도서관의 후원자가 되어 준다면 약속했던 수익금과는 상관없이 VIP 코드를 내줄게. 수익금을 받아 가더라도 정보를 의뢰하려면 당연히 돈을 내야 한다는 거 알고 있었지?"

"처음 듣는 소식이군."

"그럼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됐네."

벨로티의 넉살에 루드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도서관의 VIP 코드라면 원하는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을 테니.

"좋아. 이름만 빌려주는 정도야 어려울 것도 없지."

루드의 승낙 이후, 도서관의 시스템과 VIP 코드에 관한 설명을 들은 미켈레도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하지 않는 거래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세 사람은 곧장 계약서를 작성했다. 로렐리아가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준 덕에 금세 모든 일이 마무리됐다.

"이제 자리를 좀 비켜 주겠나? 이 녀석과 할 말이 있어서 말이야."

"물론입니다. 다음에 정식으로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정중한 축객령에 벨로티는 루드에게 여관에 가 있겠단 신호를 보내고 타미와 함께 별장을 떠났다.

그렇게 루드와 미켈레만이 남은 자리.

"뭐냐."

"무엇이 말입니까."

"남자라고 하지 않았나?"

미켈레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물었다.

"...예."

약간 망설인 루드의 대답에 그를 바라보는 미켈레의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

그럴 리가 없지.

벨로티를 본 순간 단숨에 알아차린 미켈레였다. 남자처럼 하고 있지만 벨로티는 분명한 여자였다.

숨긴다고 숨겼겠지만, 그 정도론 소드마스터의 예민한 감각과 넓은 시야를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것을 루드가 모를 리 없었다. 지금 반응을 보니 역시나였다.

"...본인이 스스로 남자를 자처하니 그렇구나 해 주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고얀 놈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미켈레에게, 루드는 그리 항변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99화

내심 미쉐린의 짝으로 점찍은 루드의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걸 본 미켈레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둘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친밀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를 위해 자신에게 도움까지 청하지 않았던가.

'순 구라쟁이 같으니라고.'

투자할 가치가 있어 돕는 것뿐이라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말이었다.

물론 도서관에 투자할 가치가 있다는 건 인정했다. 하지만 정말 그녀를 돕는 이유가 그것 때문만일까?

다행인 점은 서로 간에 연정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남녀 사이는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것이지. 음. 그렇고말고.'

지금 없다 해서 나중에도 그러란 법은 없었다. 남녀 간, 특히 한창때의 나이에선 언제 어느 때에 감정이 생길지 몰랐다. 루드와 벨로티, 둘 모두 외모도 뛰어난 편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둘을 붙여 놓아서는 안 되겠군. 미쉐린, 이 할애비만 믿어라. 네 남편은 내가 지켜 줄 테니.'

미켈레는 루드와 벨로티를 떨어트릴 방법을 고민했다. 마침 도서관의 후원자가 되기로 했으니 그것과 관련해 방법을 떠올려 보면 될 것 같았다. 후원자로서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일을 부탁한다든가.

그렇게 루드의 옆이 비면 그 자리에 미쉐린을 밀어 넣을 생각이었다. 앞서 말했듯 남녀 간의 사이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 손녀라서가 아니라 미쉐린의 미색도 대단했으니 붙어 있다 보면 자연스레 사이가 발전할 수도 있었다.

"손녀분의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미켈레의 그런 생각을 알 리 없는 루드는 미쉐린의 안부를 물었다. 당장 목숨을 위협하던 문제는 해결했으나 정상적인 생활을 하려면 여러 날 공을 들여야 할 그녀였다.

"훨씬 좋아졌다. 안 그래도 지금 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같이 갈 테냐?"

"좋습니다. 함께 가시죠."

루드와 미켈레는 미쉐린이 머무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 길에 미켈레는 스테판이 가져왔던 정보에 관해 물었다.

"스테판이라던 그 녀석이 그러더구나. 세바니아의 니르바 아틸테헨이 미쉐린과 같은 증세를 보였다고 말이다. 소드마스터가 되며 그 증상을 극복했다고 하던데... 혹시 알고 있는 바가 있느냐?"

"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이 사실인 거냐?"

미켈레는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니르바 아틸테헨에게 그런 비밀이 있었다니. 동시에 작은 기대를 품었다. 그녀가 소드마스터가 되며 증세를 극복했듯이 미쉐린 또한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니르바 아틸테헨이 정수의 힘을 취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했냐고 묻는다면, 아닙니다."

하지만 루드는 그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었다. 니르바 아틸테헨이 정수의 힘을 가진 것도, 소드마스터가 되며 어느 정도 그 힘을 제어하게 된 것도 맞았지만... 정수의 부작용을 극복했냐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그녀 덕분에 알게 됐지. 정수의 힘에 잠식된 이의 최후를.'

전생의 루드는 니르바가 정수의 힘을 다루는 걸지도 모른단 걸 깨닫고 그녀를 찾았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기 위해 세바니에아 도착했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오랜 세월 쌓인 정수의 부작용은 소드마스터로서도 버틸 수 없었던 것이었다.

최악인 건 정수의 힘에 잠식된다는 것이 단순한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단 것이었다.

'소드마스터였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소드마스터가 아니고서야 정수의 부작용을 그 정도까지 버틸 수도 없을 테니, 그건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정수의 힘에 잠식된 니르바는 세바니아 왕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녀가 내뿜는 한기는 안 그래도 북부에 위치한 세바니아의 기온을 더욱 떨어트렸고, 그 결과 수만 명의 동사자가 생겨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고 일평생 수호하던 국가를 자신의 손으로 망가뜨렸다. 그녀가 휘두른 검에 왕국의 수많은 미래가 목숨을 잃었고, 그녀가 걸어간 곳 뒤로는 얼어붙은 핏물이 발자국처럼 생겨났다.

나라를 수호하던 칼이 역으로 나라를 위협하는 상황.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던 세바니아 왕국은 결국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제국에 원조를 요청한 것이다.

'결국은 제국에게만 좋은 꼴이었지.'

세바니아 왕국의 요청을 받아들인 카르바나 제국은 병력을 파견했다. 다만 폭주한 니르바 아틸테헨을 죽일 목적의 파병은 아니었다.

미쳐 버린 소드마스터를 죽이려면 얼마나 많은 병력이 필요할지 짐작조차 안 됐으니, 제국으로선 구태여 시도할 이유가 없었다.

니르바의 활동 반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둔지를 차린 제국군은 그녀와 맞서 싸워 줄 것을 요청하는 세바니아 왕국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제국군이 무거운 엉덩이를 뗀 건 더 이상 세바니아 왕국으로부터 얻을 게 없어진 때였다.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판단한 제국군은 제국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올랐다.

"아직까진 버티고 있겠지만, 니르바 또한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 끝이 좋진 못할 겁니다."

회상을 마친 루드는 그리 단언했다. 정수의 부작용을 해결하지 못한 그녀가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가."

"예."

루드의 말에 미켈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길 잠시, 조심스레 입을 뗀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 연이 닿아 니르바를 만나게 된다면 그녀 또한 도와줄 생각인가."

"...."

"그런가."

대답하지 않은 루드였지만, 미켈레는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근래엔 조용하다지만, 고르단과 세바니아는 미켈레의 부모 세대까지만 하더라도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던 관계였다.

지금은 함께 웃는 사이라지만 국가 간의 관계도 남녀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바. 이러다가 언제 또 칼을 들이밀지 몰랐다.

니르바 아틸테헨은 그런 세바니아의 공작이자 핵심 전력이었으니, 고르단 왕가의 일원으로서는 그녀가 죽거나 잘못되는 것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하나 루드의 행동을 강제할 수는 없었다. 그럴 자격도 없었고.

'니르바를 만난다면 미쉐린을 도와줬던 것처럼 도와주겠지.'

미쉐린을 통해 정수가 가져오는 부작용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알았다.

영향은 덜하다지만 루드 본인 또한 그런 부작용을 안고 있을 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건 인간으로서 가진 도리에 관한 것일지도 몰랐다.

"미안하구나. 방금 전의 말은 잊어다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구나."

미켈레는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미쉐린의 쾌유를 그리 소원했으면서 같은 증상을 겪고 있을 니르바는 경쟁국의 주요 인물이란 이유만으로 외면하길 바랐다.

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루드는 자책하는 미켈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잘못을 느끼고 있는 이에게 다른 말을 얹을 필요가 없는 까닭이었다.

'이전보다 훨씬 약해졌다.'

대신 루드는 어느새 도착한 미쉐린의 거처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느꼈다. 저번과는 달리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냉기가 거의 없었다. 그녀에게서 나오는 한기가 눈에 띄게 줄었다는 의미였다.

"...세상에.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현실인가."

문을 연 미켈레는 망부석처럼 굳었다. 몇 달간 의식을 찾지 못했던 미쉐린이 일어나 침대에 몸을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쉐린! 아가!"

"...할아버님."

"그래. 할애비다. 고생 많았다. 많이 두려웠지. 이제 다 괜찮다. 다 괜찮아."

몇 달간 사용하지 않았던 성대는 작은 소리만을 간신히 토해 냈지만, 미켈레에겐 자신을 부르는 미쉐린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선명히 들렸다. 얼마 만에 들어본 손녀의 목소리던가!

'영락없는 손녀 바보군.'

미쉐린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미켈레의 모습은 딱 그러했다. 미쉐린은 익숙한 듯 자신을 껴안은 미켈레의 등을 천천히 토닥거렸다. 서로의 모습이 바뀐 듯한 광경이었으나 루드는 뭐라 말하는 대신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소드마스터이기 전에 사람이고 누군가의 가족이었다. 경지에 오르며 기존의 관계에 초탈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적어도 미켈레에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오랜 시간 동안 쌓인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잠시 후 눈시울이 붉어진 미켈레가 문을 열고 나왔다. 멋쩍은 웃음을 보인 그는 루드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미켈레는 미쉐린에게 루드를 소개했다.

"이 녀석이 너를 깨어나게 해 준 녀석이다. 어디 깨어난 것뿐이냐. 앞으로 이런 일을 겪지 않게 할 방법도 알고 있지."

"미쉐린 구르드손입니다. 할아버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루드란테입니다."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잠시간 서로를 쳐다봤다. 짧은 침묵이 맴돌길 잠시, 루드가 미쉐린에게 다가갔다.

"잠시 상태를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아, 네."

"신체 접촉이 있을 건데 확인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괜찮아요."

허락을 받은 루드는 미쉐린의 등에 손을 올렸다. 심장을 비롯한 장기들과 가깝고 몸의 전체적인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위치였다.

'따뜻해... 어? 따뜻하다고?'

등에 닿은 루드의 손에서 따뜻함을 느낀 미쉐린은 깜짝 놀랐다. 냉기가 몸을 채운 이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그리고 어딘가 포근해.'

생소한 감각은 따뜻함만이 아니었다. 왜인지 모를 포근함도 느껴졌다.

'나를 살려 준 사람이라 그런가?'

할아버님에게 자신을 살려 준 사람이라고 듣긴 했으나, 조금 전까진 특별한 것을 못 느꼈었다. 줄곧 의식을 잃고 있었던 까닭인지 생명의 은인이란 인식도 잘 안 됐고.

하지만 그의 손이 닿은 순간 그가 자신을 살렸다는 게 체감됐다. 오랜만에 느껴 본 따뜻함과 포근함이란 감각은 그가 자신의 생명의 은인임을 깨닫게 했다.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군요."

"그런가. 다행이야."

"이참에 몸 안의 한기를 추출하겠습니다."

미쉐린의 몸 상태를 확인한 루드는 곧장 그녀 안에 남아 있는 한기를 추출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정수의 부작용 때문에 계속해서 생겨나는 한기였으니 틈틈이 제거해 주는 게 좋았다.

"아...."

미쉐린은 제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느꼈다.

"이건."

"네 몸 내부에 있는 냉기를 추출하는 거란다."

"냉기를 추출... 한다고요?"

낯선 변화를 설명해 준 건 미켈레였다. 이전보다 혈색을 띠는 미쉐린의 얼굴에 미소를 지은 미켈레는 루드가 그녀를 살린 방법을 설명했다. 루드에게 들었던 정수와 그에 관한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긋지긋한 냉기에서 벗어나는 게 가능하다고요?"

"가능하다고 하더구나."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다는 말에 미쉐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린 시절 뭣 모르고 접촉한 미지의 기운. 처음에는 강력한 힘을 얻었다는 생각에 고양됐지만, 그것이 독이 든 성배임을 알아차리는 덴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미쉐린은 미지의 기운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것이 선사하는 부작용에 시름했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큰 각오 끝에 미켈레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으나, 그 또한 특별한 해결법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근본적인 해결법이라는 거. 할게요."

"모든 마력을 잃게 될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마력은 다시 모으면 그만이에요. 남들보다 늦은 출발이 되겠지만, 그만큼 더 열심히 하면 되는 일이고요."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미쉐린이었다. 장래 미켈레를 이어 소드마스터가 될 수 있단 평까지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여태까지 모은 모든 마력을 잃으면 소드마스터가 되는 건 요원한 일. 설령 소드마스터에 오른다 해도 그 시기가 비약적으로 늦춰질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미쉐린의 의사는 확고했다.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걸 잃더라도 이 미지의 기운, 정수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로 의사가 확고했으니 더 이상 물을 필요는 없었다.

루드는 미쉐린에게서 정수를 추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당장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루드도 준비가 필요했고 미쉐린의 컨디션도 더 끌어 올릴 필요가 있었다.

'정수를 추출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살아 있는 존재로부터의 정수 추출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 별일 없다면 다행이겠으나, 혹시 모를 사태에 대해 대비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일주일 뒤에 시행하죠. 그때까지 매일 찾아와 한기를 제거해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일주일 뒤. 루드는 그때 미쉐린이 품은 정수를 추출하기로 결정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0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