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 140-150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40화

하타이의 모습을 확인한 제노스는 고심했다.

'어떻게 할까….'

그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음은 분명했다. 여기서 자신이 눈앞의 상대를 죽인다면 영영 그 상처를 회복할 수 없을 터. 최악의 경우 하타이가 자신을 증오할지도 몰랐다.

'그건 안 되지.'

호랑이 부족은 아직 잃어선 안 될 패였다. 하타이 또한 이렇게 잃기엔 아까운 인물이었고.

고민하던 제노스는 결론을 내렸다. 위험 요소를 제거하면서 하타이의 상처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그렇다면 사로잡아야겠군."

그녀에게 패한 것이 문제라면, 하타이가 그녀와 다시 싸울 수 있게만 해 주면 되는 일. 굳이 그 배경이 전장일 필요는 없었다.

그녀를 생포하면 전장에서의 피해도 줄이고, 추후 몸을 회복한 하타이와 다시 붙게 할 수도 있을 테니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었다.

'어떻게 상대했을지 궁금하기도 했는데, 잘 됐군.'

제노스 또한 내심 두 사람의 전투 과정이 궁금했었다.

하타이의 용력은 대단했고 태도를 휘두를 때 느껴지는 위압감은 경험 많은 전사들도 두려움에 떨게 할 정도.

거기에 태도를 의식해 거리를 좁히는 순간 시작되는 박투는 대비하지 못한다면 당할 수밖에 없는 필살의 수였으니, 과연 눈앞의 기사가 그런 하타이를 어떻게 쓰러트렸는지 궁금했다.

'뭐, 그거야 천천히 알아내면 되겠지.'

하타이와 그녀가 다시 붙는다면 그 방법을 알 수 있을 터. 지금은 그녀를 사로잡는 게 우선이었다.

"어디 한번 내게도 하타이를 쓰러트린 기량을 보여 봐라."

선전포고와 함께 쏘아진 제노스의 신형.

"!!!"

아이리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들었다.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영혼에 새겨진 본능이 시킨 일.

채앵-!!

덕분에 그녀는 제노스의 검을 막아 낼 수 있었다.

'빠르다!'

엄청난 속도의 공격에 정신을 바짝 차린 아이리우스.

'헤이론과 동급, 어쩌면 그 이상이다.'

그녀가 알고 있는 인물 중 가장 빠른 건 헤이론이었다.

지금의 헤이론이 아니라 소드마스터로서, 명실상부 바람의 기사라 불리던 때의 헤이론.

하지만 눈앞의 소드마스터는 그때의 헤이론 이상의 속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집중하자.'

아이리우스는 집중했다.

가까스로 막아 내긴 했으나, 정작 자신조차 어떻게 막아 낸 것인지 설명할 수 없었던 첫 일격.

앞으로의 공격은 그것보다 더 빨라질 게 분명했다.

'할 수 있어. 버틸 수 있다.'

다행히 그녀에겐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많은 경험이 있었다.

'기억해 내. 떠올려. 움직여.'

자신보다 빠른 상대와 겨뤘던 경험.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겨뤘던 경험.

그리고… 끝내 그들을 이겨 냈던 경험!

제노스와 아이리우스의 검이 수차례 부딪쳤다.

아이리우스의 예상대로 제노스의 움직임은 점점 빨라졌다.

하나 그건 아이리우스 또한 마찬가지.

"회전결."

"천공."

서로 검을 나누던 제노스와 아이리우스가 비슷한 타이밍에 기술을 꺼내 들었다.

빠르게 회전하는 바람이 제노스의 검을 휘감았다. 모든 걸 찢어낼 기세로 맹렬히 회전하는 기류.

반면 아이리우스의 검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이윽고, 사나운 기세를 감추지 않은 제노스의 검과 아무런 기세도 느껴지지 않는 아이리우스의 검이 충돌했다.

콰가각- 후우웅!

그 결과는 놀라웠다. 제노스의 회전결이 아이리우스의 검을 깨뜨리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지고 만 것이다.

"!!"

소멸한 회전결에 당황한 제노스. 하나 아이리우스는 이리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천공은 그런 기술이었으니까.

'지금이다!'

결과를 예상한 자와 예상하지 못한 자의 차이는 그다음 수에서 나타났다.

"지토."

곧장 다음 수를 이어 나간 아이리우스. 그녀가 이번 전투에서 처음으로 속도의 우위를 점한 순간이었다.

지면 가까이 웅크렸던 몸이 폭발적인 속도로 도약했다.

마치 순간 이동한 것처럼 보일 정도의 엄청난 속도.

제노스에게 향하는 그녀의 뒤로 땅이 갈라졌다. 쇄도하는 그녀의 힘과 속도를 버티지 못한 까닭.

콰아아앙-!!!

'됐나.'

아이리우스는 자신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일지라도 지토를 정면에서 받아 내는 건 불가능.

죽이진 못했더라도 최소한 중상은 입혔을 터였다.

그 정도만 돼도 헤이론을 챙겨 도망칠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아이리우스는 제노스란 인물을 잘 몰랐다. 그가 어떤 고난과 역경들을 넘어왔는지도.

"...정말 놀랍군."

지토의 여파로 일었던 모래바람이 걷히며 제노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왼쪽 어깨에 상흔이 생긴 걸 제외하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

"말도 안 돼…."

아이리우스는 경악했다. 지토에 직격당했음에도 이토록 건재하다니!

'위험했군. 회류를 두르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큰 낭패를 볼 뻔했어.'

한편 제노스 또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지토라고 했던가. 그녀의 공격은 대단한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아마 마력을 응축했다 한 번에 터뜨리는 원리겠지.

회류를 펼치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큰 부상을 입었을 터.

'회류로 상쇄했음에도 이 정도 파괴력이라.'

제노스는 왼쪽 어깨를 의식했다. 뼈가 부러진 것 같은 느낌.

순간적으로 몸을 틀지 않았다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아이리우스의 공격이 절대에 가까운 방어력을 자랑하는 회류를 뚫어 냈다는 의미.

"생각이 바뀌었다. 넌 이 자리에서 죽는다."

제노스는 아이리우스를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는 사로잡을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살려 두기엔 너무 위험한 인물. 하타이에게 원망을 사더라도 이곳에서 죽여야 했다.

"할 수 있으면 해 보시든지."

그 말에 당당히 대꾸한 아이리우스.

하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속은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지토마저 통하지 않다니.'

천공과 지토는 현재의 그녀가 펼칠 수 있는 최선의 패였다. 상대를 무력화시키겠단 일념으로 힘도 한계치까지 끌어다 썼고.

한데 그게 실패로 돌아갔으니, 암담한 상황이었다.

'팔다리가 무거워.'

특히 체내의 마력을 응축했다 한 번에 폭발시키는 지토는 몸에 부담을 주는 기술.

이제는 이전만큼의 움직임을 보이기도 어려웠다.

"하앗!!"

그럼에도 아이리우스는 먼저 행동에 나섰다. 상대가 주도권을 쥐게 둘 순 없었기 때문.

그녀는 전생에서부터 익힌 것들을 모조리 쏟아 냈다.

검을 쓰는 법, 발을 움직이는 법, 상대의 시야를 현혹하는 법....

용사로서 여러 이들에게 수학하고 다양한 힘을 갖췄던 아이리우스였다.

전생의 경지를 되찾진 못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하는 그녀.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더 간결하게, 더 날카롭게!'

그러던 어느 순간. 아이리우스는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분명 제노스를 상대하고 있었건만, 어느새 눈앞에 제노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전생의 인물들.

'검은 그렇게 휘두르는 게 아니다. 자, 따라 해 봐라.'

용사가 되기 전 자신에게 검을 알려 주던 아버지.

'마법을 상대해야 할 땐 그냥 갈라 버리세요. 용사님 정도면 그게 제일 간단해요.'

마법에 대한 대처법을 묻자 무척 간단하다며 대답하던 어느 마법사.

그리고…

'고작 이 정도인가.'

자신을 상대하며 실망했다는 듯 말하던 마왕.

'고작 이 정도냐고?'

그 순간, 아이리우스의 기세가 일변했다.

"…그럴 리가아아아아!!!"

비명 지르듯 토해 낸 외침엔 그녀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때까지 쌓아 온 모든 게 사라질 것임을 알면서도 회귀를 택했던 마음. 제 모든 걸 바쳐서라도 마왕을 잡겠다는 각오.

자신은 고작 이런 곳에서 쓰러질 수 없었다.

"…벽을 허무는 건가."

그녀에게 나타나는 변화에 제노스는 혀를 차며 물러났다.

아마 제 앞을 가로막은 벽을 허무는 중일 터.

'더 서둘러야 했던 것을.'

하타이의 자존심을 고려한다고 생포하려 들었던 게 실수였다.

이대로라면 제국에 또 하나의 소드마스터가 탄생하게 될 터.

하나 그것을 알면서도 쉽사리 그녀를 공격하지는 못했다.

'각성 중인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간 손해를 본다.'

무아에 돌입한 그녀의 내면에서는 소드마스터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열렸을 것이다.

그게 어떤 형태인지는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확실한 건 지금 그녀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사실.

무아에 빠진 신체는 개인이 가진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하물며 제노스가 본 그녀의 재능은 루드란테 다음 가는 것.

정신이 온전하지 않으니 죽일 수는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을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소드마스터가 된 직후를 노리는 게 낫다.'

하여 제노스는 아이리우스의 무아가 끝날 때를 노리려 했다.

마스터가 되는 데 실패했다면 손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고, 마스터에 올랐다 해도 확장된 감각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니.

"...아이리우스 님."

한편, 일찍이 기사들과 함께 제노스의 발을 묶기 위해 싸웠던 헤이론은 다른 전사들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제노스만큼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 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실력자.

서둘러 처리한 뒤 아이리우스를 도우러 가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몰려드는 적들에 몸을 빼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리우스 님, 부디!'

헤이론은 지금 아이리우스가 겪고 있을 상태를 짐작했다. 자신도 겪어 봤던 상황이었기에 그녀가 소드마스터의 경계를 넘어서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단번에 넘으십쇼!'

비록 자신은 한 번 실패했지만, 그녀는 다를 것이다. 그녀는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천재였으니까.

무엇보다 지금의 상황을 돌파할 유일한 방법은 그녀가 소드마스터가 되는 것뿐.

헤이론이 본 아이리우스는 영웅의 자질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리고 영웅은 위기일 때 더 빛나는 법.

헤이론은 아이리우스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벽을 산산조각 낼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마침내.

"후...."

무아에 빠졌던 아이리우스의 의식이 돌아왔다.

동시에 그녀의 검에 깃든 건 선명한 오러. 마스터의 벽을 깨뜨리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기어코 마스터에 오른 건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제노스가 헛웃음을 뱉었다.

마스터를 앞에 두고 무아에 빠진다 해서 모두가 마스터가 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여러 차례의 무아를 겪고도 소드마스터가 되지 못하는 게 대부분.

자신만 해도 세 번의 무아를 겪은 뒤에야 소드마스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소드마스터가 됐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다."

절대의 경지에 오르긴 했으나 상황은 여전히 아이리우스에게 불리했다.

특히 소드마스터가 되며 이전과 달라진 감각에 괴리감을 느낄 터.

지금이 그녀를 죽일 가장 좋은 기회였다.

"그만, 거기까지다."

하지만 제노스는 또 한 번 멈춰야만 했다.

"...."

"고생했다. 잘 버텼다."

예상 밖의 인물이 개입한 까닭이었다.

"더스틴 님!"

제국군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더스틴의 등장. 그의 모습을 확인한 기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빠르게 주변 상황을 확인한 루드는 곧장 명을 내렸다.

"모두 후방으로 이동해 정비 후 병사들을 도와라. 검은색 후드로 모습을 가린 이들이 적의 특수 병력이니 그들을 먼저 처리하는 게 좋을 거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헤이론."

"예."

"아이리우스를 데려가라. 뒤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물론입니다."

순식간에 대열을 물리는 기사들. 아이리우스도 그들과 함께였다.

제노스는 멀어지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시 후, 제국의 병력들이 전부 빠져나가자 제노스는 곧장 루드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이냐. 저 녀석은 위험하다. 여기서 죽여야만 했어."

"그녀가 위험하다는 건 저도 잘 압니다."

아이리우스의 위험성은 이곳의 누구보다도 루드가 가장 잘 알았다.

전생에서도 용사로 숱하게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그녀.

하지만 마스터의 벽마저 허문 그녀를 보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더스틴의 모습으로 그녀의 죽음을 두고 볼 순 없습니다. 여태까지의 연기가 전부 물거품이 되니까요. 저 병력들 중 일부는 살아 돌아가야만 하고요."

"그렇다고 해도."

"그리고 무엇보다, 곧 사르한이 옵니다."

"…사르한, 그렇군."

이어지는 루드의 설명에 제노스는 마침내 수긍했다.

"확실히, 그 간사한 뱀이라면 이 상황을 이용하려 들었겠지."

"예, 그와의 싸움이 난전으로 가서 좋을 게 없습니다."

곧 있으면 사르한이 이곳으로 찾아올 예정이었다.

더스틴과 함께 제노스를 죽일 것이라, 의회와 약속한 까닭.

만약 아이리우스가 남아 있었다면, 제노스가 사르한이 도착하기 전에 그녀를 죽이는 데 실패한다면, 여러 가지 변수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처리하는 게 우선입니다."

"알겠다."

갓 소드마스터가 된 이보다 사르한을 상대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건 제노스도 동의하는 바.

납득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루드에게 검을 겨눴다.

"녀석이 오고 있다면 슬슬 시작해야겠구나."

"예."

사르한이 올 때에 맞춰, 그를 사냥할 함정을 만들 시간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41화

루드와 제노스는 서로를 응시했다. 조금 있으면 사르한이 도착할 시간, 그 전에 싸우고 있는 모습을 연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사르한이 의심하지 않고 전투에 섞여 들 테니.

"갑니다."

"오너라."

눈빛 교환을 마친 루드가 제노스를 향해 도약했다.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급소를 노리는 검.

오러를 담았기에 스치기만 하더라도 치명상을 입을 위험한 공격이었다.

하나 제노스는 아무렇지 않게 루드의 검을 흘려 냈다.

"느리다."

이번에는 제노스의 차례.

루드의 검을 흘린 그는 부드럽게 돌았다.

무게 중심을 그대로 이어 가며 빠르게 회전한 제노스.

이윽고 다시 정면을 바라본 그의 뒤로 검이 나타났다. 회전을 이용해 궤적과 타이밍을 흩트려 놓은 공격이었다.

스캉!

서로 교차한 루드와 제노스의 검. 부딪쳤다기보단 스쳤다는 표현이 알맞을 정도로 얇은 마찰이었다.

처저적!

처저적!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도 두 사람은 여러 발자국을 물러나야만 했다.

사르한이 도착한 건 그때.

"이미 시작했나. 미안하군, 늦었소."

두 사람과 약간 떨어진 거리에 나타난 그는 상황을 확인하고는 곧장 무기를 꺼내들었다. 제 몸만큼 긴 창이 제노스를 겨눴다.

"사르한."

"이렇게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군. 안 그런가?"

"처음부터 이럴 목적이었던 건가."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사르한은 제노스의 물음에 부정하지 않았다.

일찍이 까마귀 부족과 동맹을 맺었던 것도, 소크란의 죽음을 참고 넘어갔던 것도.

전부 까마귀 부족을 넘어설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 바로 지금 이 순간.

제노스를 죽이고 뱀 부족이 바깥대륙 최고의 부족으로 올라설 때를 위해!

스윽, 사르한은 콧잔등의 상처를 매만졌다. 이제는 옅은 흉터만이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

"예전에 입었던 상처가 시큰한가 보군."

"기억하고 있나."

"물론이다. 그때 죽였어야 했다고 여러 번 후회했지."

"하핫! 그건 내가 할 말이다. 그때 이 한 몸을 바쳐서라도 네놈의 숨통을 끊어 놨어야 했는데."

두 사람은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오래전, 제노스가 족장이 아니고 사르한 또한 뱀 부족 최강으로 불리기 전의 이야기.

대련을 빙자한 결투를 벌였던 둘은 백 합이 넘어가도록 승부를 가리지 못했었다.

사르한의 콧잔등에 남은 흉터도 그때 생긴 상처로 인한 것.

'그때 내지 못했던 승부를 지금 낸다.'

'이번엔 기필코 죽인다.'

같은 기억을 떠올린 두 사람은 비슷한 다짐을 했다.

"둘만 아는 옛이야기는 그만하지. 이렇게 허비할 시간은 없다."

"미안하군. 그만 향수에 빠지고 말았어."

그 상황에 루드는 짜증 어린 태도를 연기했다. 그 말에 바로 사과를 건넨 사르한.

'이 시간에도 제국군의 피해가 커지고 있으니 마음이 급하겠지.'

그는 루드의 말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루드 또한 그것을 의도하고 한 말이었고.

하나 그 속내는 달랐다. 루드는 최대한 빨리 사르한을 처리하고 뱀 부족 본진을 칠 생각이었다.

그 시간이 빨라질수록 자신들의 피해가 줄어들 터.

"이제 끝을 보자."

"같은 생각이다."

삼각형 형태로 대치 중이던 셋이 동시에 움직였다.

양 사선에서 제노스를 향해 달려든 루드와 사르한.

제노스 또한 그 경로를 예상했기에 곧장 대처에 나섰다.

"흐읍-!"

차앙-!!

루드보다 먼저 제노스에게 도달한 사르한이 창을 뻗었다. 뱀처럼 휘는 창.

하나 그 속도는 일직선으로 찌른 것보다도 빨랐다.

'여전히 지저분한 움직임이군.'

압도적인 속도로 흔들리기까지 하는 사르한의 창은 막기도 피하기도 어려운 것.

하지만 이건 과거에도 보았던 기술이었다.

그때보다 훨씬 파괴적이고 완성도도 높아졌지만, 중요한 건 이미 경험해 보았다는 점.

알고 있다면, 예상하고 있다면, 아무리 빠른 공격이어도 막을 수 있었다.

"큭."

몸을 비틀며 창을 흘린 제노스는 팔 안쪽과 몸통을 이용해 창대를 잡았다.

창끝의 날붙이를 무력화시키는 수.

하나 사르한은 조소를 머금었다. 과거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 그의 창에 있는 날붙이는 창날 하나가 아니었으니.

"어리석구나. 과거와 똑같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사르한이 창을 쥔 손목을 회전시키자 창대 속에 숨겨져 있던 칼날들이 솟아났다.

창대 전체에 송곳처럼 솟아난 칼날들은 그 끝이 갈고리처럼 생겨 한 번 살을 파고들면 뽑기 어려운 형태.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가?"

그러나 몸통과 팔 안쪽이 찢어졌음에도 제노스는 오히려 웃어 보였다.

"뭐…?"

상황과 맞지 않는 여유로운 태도에 의문을 느낀 사르한.

하지만 제노스는 설명 대신 회전결의 힘을 극성으로 사용한 검을 땅에 꽂았다.

그 여파로 가루가 된 흙과 돌이 비산하며 두 사람의 시야를 가렸다.

중간중간 돌가루가 튀는 건 덤.

'무슨 속셈이지.'

사르한은 제노스의 의중을 짚으려 했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흐릿해진 상황.

그러나 이 정도 잡기는 마스터 간의 싸움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말 그대로 잡기에 불과한 수준.

게다가 자신에겐 또 한 명의 마스터가 동료로 있었으니.

흠칫.

그 순간, 무언가를 느낀 사르한은 창을 놓았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감각.

하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공격을 완전히 피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서걱-!!

"크윽! 네놈!"

사르한이 어깨를 부여잡았다. 어깨 아래로 팔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을 뒹굴고 있는 제 팔.

"더스틴! 이게 무슨 짓이냐!"

가려진 시야 속에서 자신을 기습한 흉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의 감각을 속이고 마스터 간의 싸움에 개입할 수 있는 건 같은 마스터 말고는 없었으니.

그의 예상대로 서서히 걷히는 먼지구름 사이로 나타난 건 피 묻은 검을 든 더스틴이었다.

'그 짧은 순간 반응하다니, 역시 사르한이란 건가.'

경악한 표정의 사르한.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루드는 아쉬움을 삼켰다. 마지막 순간 반응하지 않았다면 팔이 아니라 목을 잘라 낼 수 있었을 터.

그래도 괜찮았다. 창을 휘두르는 오른팔을 잘라 냈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부관 질레트의 원한을 갚겠다."

"그게 무슨!"

사르한은 더스틴의 말에 기가 찼다. 본인이 죽여 달라 한 인물의 원한을 갚겠다니.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 타이밍에 배신이라니.'

더스틴의 배신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건 아니다. 자신 또한 더스틴을 배신할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 그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타이밍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배신하더라도 최소한 제노스를 쓰러트린 이후일 거라 생각했다.

그의 입장에서 제노스는 무조건 쓰러트려야 하는 적. 반면 자신은 일단 의회와 동맹 관계였으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진 모르나, 표면적으론 싸울 일이 없는 사이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나오다니.

'설마 눈치챈 건가.'

사르한은 더스틴의 눈을 바라봤다. 자신을 보는 그의 눈빛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런 거였어.'

제노스를 죽인 후의 다음 목표가 자신이란 걸 깨달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을 먼저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난전으로 이끌고 가겠단 생각이겠지.'

자신과 일대일로 싸우는 것보다는 삼파전으로 이끌어 가는 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일 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의 실수는 눈감아 줄 테니 함께 제노스를 죽이는 거다."

사르한은 어떻게든 더스틴을 회유하려 들었다. 제노스는 어려운 상대였다. 단순히 마스터란 경지만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큰 부상을 입은 지금 상태론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난적.

하물며 제노스만이 아니라 더스틴까지 신경 써야 하는 상황에선 절대 이길 수 없었다.

"남은 말은 저승에서 해라."

그러나 사르한의 말을 끊은 루드는 그를 향해 쇄도했다.

"네놈들!!"

그 모습에 예비용 단창을 꺼내 든 사르한. 하나 남은 왼팔로 쥐었지만, 그마저도 견고한 느낌을 주었다.

챙! 챙! 채챙!!

하지만 온전한 상태에서도 어려운 마스터 간의 대결. 부상을 당한 데다 제노스까지 신경 써야 하는 사르한은 속절없이 밀렸다.

'이놈, 제노스!'

몰아붙이는 더스틴의 검을 막아 내면서도 사르한은 움직이지 않고 있는 제노스를 의식했다.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모습은 자신들 중 살아남는 자를 상대할 생각인 게 분명했다. 누가 이기든 그에겐 좋은 일일 터.

까득- 사르한은 이를 갈았다. 절체절명의 상황. 이대로라면 제노스를 죽이기는커녕 자신이 죽을 판이었다.

"어쩔 수 없구나."

결국 그는 꺼내고 싶지 않았던 패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쾅-!!

온 힘을 다해 단창을 내리친 사르한. 그 여파로 약간이나마 시간을 버는 데 성공했다.

기회는 지금이었다.

"일을 이렇게 만든 걸 후회하게 될 거다."

조금의 여유가 생기자마자 사르한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작은 구슬.

전반적으로 검은색을 띠는 구슬에선,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사이한 기운이 느껴졌다.

"...…꿀꺽."

사르한은 곧장 그것을 삼켰다.

이것을 흡수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그리고 모든 상황이 끝난 후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런 고민은 사치였다.

상황이 이리됐으니 최후의 수까지 전부 사용하는 수밖에.

"크헉! 크허헉!!"

구슬을 삼킨 사르한은 목을 움켜쥐었다.

그의 얼굴과 목, 목을 움켜잡은 팔… 어디 하나 할 것 없이 혈관이 두드려졌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울룩불룩 솟아나는 근육들. 이전에도 건장한 체격이었던 사르한의 몸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이건...."

그 모습에 제노스가 루드에게 다가왔다.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사르한이 비명을 질렀다.

현재 그의 몸에서 이는 변화는 마스터조차 견디지 못할 만큼 끔찍한 고통을 동반하는 것.

통증을 주체하지 못한 사르한은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흐하...."

이윽고 일련의 과정이 끝났을 때.

"미치겠군."

"…조심하세요."

"그래. 너도다."

루드와 제노스는 침음을 흘렸다.

변화를 마친 사르한은 조금 전까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과 세 배는 커진 몸. 그 내부를 가득 채운 모종의 힘.

심지어 잘렸던 오른팔도 어느새 새로 돋아난 상태였다.

'모치란과 비슷한 느낌이다.'

루드는 변화한 사르한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일전 황혼 부족에서 독의 정수를 먹고 변화한 모치란에게서 느꼈던 감각.

그가 흡수했던 독의 정수가 뱀 부족에서 나온 것임을 감안하면, 조금 전 사르한이 섭취한 것 또한 비슷한 힘일 거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꽤나 고생했었지.'

당시의 모치란은 인간의 형태를 완전히 벗어났었다.

사르한은 아직까지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모치란도 처음부터 인간의 형태를 벗어났던 건 아니니 어떻게 될지 모를 일.

'그래도 그때보다는 나은가.'

루드는 전력을 가늠했다.

자신도 황혼 부족에서보다 훨씬 강해졌고 제노스까지 함께였다.

낫다면 더 나은 상황.

하나 낙관적으로만 바라볼 순 없었다.

자신들의 전력이 상승한 만큼, 사르한 또한 모치란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자였으니.

"내 창을 내놓으실까."

변화를 끝마친 사르한이 제노스를 노렸다. 대기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도약한 그는 이전의 부상을 완전히 회복한 모양새였다.

"쳇."

그 공격을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사르한의 손에 창이 돌아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둘 다 들어와라."

오른손엔 장창, 왼손엔 단창을 든 사르한이 이빨을 드러내며 서늘하게 웃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42화

루드와 제노스는 누가 뭐랄 것 없이 동시에 움직였다.

함께 퓨렐 협곡의 오우거를 상대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합공하는 두 사람의 연계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각기 사르한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돌며 사각을 노린 두 사람.

속도가 붙은 두 사람의 공격은 대단한 파괴력을 품고 있었다.

채앵-! 쾅!

"무슨!"

하지만 경악성을 지른 건 사르한이 아닌 제노스.

"약하군."

왼손에 들린 단창으로 제노스의 검을 막은 사르한은 시시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제노스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오른편에서 공격한 루드 또한 피해를 입히지 못한 건 마찬가지.

"!!"

공격이 막혔지만, 루드와 제노스는 멈추지 않았다. 연달아 검을 휘두르며 사르한을 압박하는 두 사람. 오러의 행렬이 쏟아졌다.

하지만 사르한은 양손에 든 창을 이용해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고작 이 정도냐!"

쿵! 장창을 크게 휘두른 사르한이 발을 굴렀다.

땅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 대기마저 진동시키는 파동에 루드와 제노스가 쭉 밀려났다.

흐트러진 자세를 가다듬은 두 사람은 이윽고 사르한의 발밑을 보곤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제자리에서 마스터 둘의 협공을 받아 내다니, 그야말로 괴물이군."

양쪽에서 전력을 다한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사르한의 발밑엔 그가 발을 구르며 생긴 자국밖에 없었다.

루드와 제노스의 공격을 전부 제자리에서 막아 냈다는 이야기.

'말도 안 되는군. 문제는 변화가 이게 전부가 아닐 거란 사실인데.'

루드는 사르한을 살폈다. 소드마스터 둘의 협공을 거뜬히 받아 내는 괴물. 하지만 모치란 때의 일을 생각하면 이게 끝일 리가 없었다. 분명 더한 무언가가 남아 있을 것이었다.

"이번엔 내 차례다."

그때, 사르한이 먼저 공격에 나섰다.

지금까지 선공을 양보했으니 이제부턴 자신이 먼저 움직일 차례.

양손에 든 창이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길 잠시, 회전하던 창이 멎는가 싶더니 무언가가 벌어졌다.

콰콰쾅!!!

"아버지!"

굉음과 함께 날아간 제노스. 갑작스러운 상황에 루드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버지? 그렇군, 그런 거였나."

그 말에 사르한은 루드의 정체를 깨달았다.

"네놈, 제노스의 사생아구나. 그래. 그때 한 번 보았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안 그래도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의회가 자신들을 배신할 것도, 그 타이밍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나 애초부터 배신이 아닌 기만이었다면, 지금의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그의 정체를 알아채자 이전의 상황들도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질레트라는 이름의 기사를 없애 달라고 했던 것.

그를 위해 습격한 자신의 병력을 열심히 상대하고, 반면 바깥대륙의 다른 부족들을 상대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

"기묘한 수를 부렸구나."

사르한은 탄성을 뱉었다. 상황을 보면 의회 또한 속은 게 분명했다. 방법은 모르지만 실로 대단한 수완이었다.

자신 또한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평생토록 그의 진짜 신분을 알지 못했겠지.

'방금 전의 공격은 뭐였지.'

한편, 루드는 제노스를 날려 버린 공격을 분석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사르한에게 정체를 들킨 건 괜찮았다. 어차피 이 일대엔 그들 셋이 전부. 마스터 간의 힘겨루기가 시작된 순간 주변의 모든 이들이 죽거나 도망쳤으니 사르한의 입만 막으면 될 일이었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상황이 쉽지만은 않았다.

'회복하는 데까지 좀 걸리시겠군.'

미처 회류로도 방어하지 못한 사르한의 공격이었다. 직격당하기 직전 가까스로 검을 가져다 댔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회복이 아니라 목숨의 위중을 논해야 했을 것이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구나. 두려운가."

"딱히."

사르한은 피식 웃었다. 아니라 했으나 아닐 수가 없을 터였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지금의 자신은 말도 안 되는 괴물 수준이었으니까.

"아량을 베풀어 주마."

연장자로서 어린 후배를 핍박해선 안 될 일. 사르한은 빠르게 루드의 숨통을 끊어 주려 했다. 그것이 그를 배려하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

'온다!'

그 순간, 루드는 사르한에게서 시작되는 무언가를 느꼈다.

사르한의 창에서부터 흘러나온 무형의 기운.

마력 같기도, 마력이 아닌 무언가 같기도 한 그것은 꿈틀대는 뱀처럼 현란한 움직임으로 쇄도해 왔다.

아마도 제노스를 날려 버린 게 이것일 터.

"크윽!!"

"…막았군. 막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끝까지 기운을 느끼며 공격을 막아 내는 데 성공한 루드에 사르한은 감탄했다.

역시 제노스의 아들이란 걸까, 대단한 담력과 집중력이었다.

자신이 쏘아 보낸 파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을 막으려면 그 미묘한 기운을 느끼고 정확한 타이밍에 대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건 노련한 마스터에게도 어려운 방법이었다. 실제로 제노스 또한 대처하지 못하고 당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괜한 발악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감탄하긴 했으나 상황이 바뀔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방금 전의 공격은 지금의 자신이 낼 수 있는 힘의 1할에 불과했고, 몇 번이고 거듭해서 쏘아 낼 수 있는 것이었으니.

"미친."

연달아 쇄도하는 무형의 기운을 느낀 루드가 욕을 뱉으며 내달렸다.

곡선을 그리는 사르한의 공격을 막기 위해선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정확한 시점과 위치에서 대응해야만 하기 때문.

그런 공격이 하나도 아니고 연달아서 오고 있다. 조금 전 한 번의 공격을 막는 것도 어려웠는데 이 모든 걸 막겠다는 건 과욕이었다.

괜한 오기로 피해를 자초하기보단 공격의 궤도에서 벗어나 피하는 게 상책.

"도망치게 둘 것 같으냐."

그러나 옆으로 벗어난 루드를 따라 공격의 궤적이 바뀌었다. 순식간에 직각으로 꺾여 따라붙은 무형의 기운.

'그렇다면, 회류.'

그것을 확인한 루드는 일일이 방어하는 대신 회류를 일으켰다. 제노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뛰어난 방어력을 갖춘 회류가 무형의 기운과 부딪쳤다.

콰콰콰콰콱!!!

회류와 부딪친 사르한의 공격은 시시각각 위력이 줄어들었다. 하나 그건 회류 또한 마찬가지.

빠르게 회전하며 루드를 보호하던 회류의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로 떨어졌다.

거의 비슷한 시점에서 소멸될 공격과 방어.

"회류까지 쓸 줄이야. 네놈은 꼭 죽여야겠구나."

회류가 사라진 순간, 사르한은 루드의 앞에 있었다.

그의 장창이 루드의 머리를 쪼갤 듯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옆구리를 노리는 단창.

절대에 가까운 방어력을 자랑하는 회류지만 사용하는 동안엔 시야가 제한된다는 약점이 있었다.

일찍이 제노스를 통해 회류를 경험한 적 있는 사르한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그리고 그건, 루드 또한 마찬가지.

사르한이 회류의 약점을 이용할 거라 짐작했기에, 역으로 그때를 노렸다.

"첫 번째 검."

회류가 사라지는 순간에 맞춰 준비한 공격이 완성됐다.

지면에서 올라온 수십 개의 팔들이 사르한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잡을 공간이 없어이자 남은 팔들이 사르한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어느새 사르한의 몸 전체를 뒤덮은 정체모를 팔들.

"이깟 주술이 통할 성 싶으냐!"

사르한은 그것이 주술의 힘이라 생각하며 무시했다.

'일평생 여왕님을 모셔 온 나다. 고작 이 정도 주술 따위!'

뱀 여왕이야말로 바깥대륙 제일의 주술사였다. 사르한은 평생토록 그녀의 곁을 지켜 오며 온갖 주술을 접했고, 그 덕에 대부분의 주술이 통하지 않을 정도의 내성을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르한의 반응에 루드는 조소를 머금었다.

"주술이라… 어찌 보면 주술이라 할 수 있지."

지금 펼친 인간도에 담은 건 사르한에게 죽임당하고, 뱀 부족을 저주하고, 원통함에 눈 못 감았던 이들의 역사.

검으로 만든 현상이지만, 주술이라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커헉…!"

사르한의 어깨에서 자란 팔이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근방의 다른 팔들도 마찬가지. 순식간에 열 개가 넘는 팔이 그의 목을 졸랐다.

그를 옭아맨 팔은 그것들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팔들도 제각기 사르한의 사지를 구속했다. 옴짝달싹 못하게 사르한을 붙잡은 팔들은 빨리 그를 죽여 달라는 듯 아우성쳤다.

그 뜻을 받아들인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도."

어느새 완성된 인간도가 사르한을 크게 베었다.

"크아아아악!!!"

고통에 찬 신음을 지르는 사르한. 인간도에 베인 그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건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슬을 먹고 변화했을 때와 비슷했다.

기포처럼 들끓는 근육과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증기, 한눈에 봐도 정상이 아닌 걸 알 수 있었다.

'끝났나.'

한발 물러서 그 변화를 관찰하는 루드는 숨을 돌렸다.

비슷한 상황이었던 모치란을 마무리 지었던 것도 인간도.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불안한 상태를 봐선 사르한도 모치란과 같은 결과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아버지는 괜찮으신가.'

루드는 제노스의 부상이 크지 않기를 바랐다. 사르한을 처리하긴 했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와 함께 해야 할 것이 많았다.

하지만, 제노스를 걱정하기엔 일렀다.

콰앙-!! 창대에 맞은 루드가 멀리 날아갔다. 땅을 수십 번 구른 뒤에야 멈춘 루드의 몸.

"쿨럭!"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루드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그러나 부상을 확인하고 치료할 시간은 없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사르한. 그의 모습을 확인한 루드는 입안에 고인 피를 뱉었다.

'그래, 이렇게 쉬울 리가 없지.'

고작 이 정도로 사르한을 죽였다 여긴 건 오만한 생각이었다.

"크르르…."

루드를 향해 다가오는 사르한의 모습은 이전과는 달랐다.

죽기 직전의 모치란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형태를 벗어던진 괴물의 형상.

팔이 있어야 할 곳에는 팔 대신 창이 있었고, 하체는 말의 형태였다.

'아버지는 아직인가.'

괴물로 변한 사르한이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위압감을 넘어 왠지 모를 불길함까지 느껴졌다.

지금의 느낌만 따지면 퓨렐 협곡에서 상대했던 오우거 이상.

콰르릉!

번개가 치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사르한이 달려들었다. 말의 것으로 변한 하체가 땅을 박참과 동시, 둘 간의 거리가 사라졌다. 말도 안 되는 도약력.

콰앙-!

더 무서운 건 그것에 비례해 강화된 공격력이었다. 팔 대신 돋아난 창은 상대를 해치겠다는 목적에 충실했다.

직선과 곡선을 가리지 않는 변화무쌍한 궤적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으로 이어질 정도.

"큭!"

내리 찍힌 사르한의 창을 받아 낸 루드가 무릎을 꿇었다. 짓누르는 힘이 너무나 강력했다.

쿵! 쿵! 쿵!

한 번 기회를 잡은 사르한은 연거푸 창을 내리찍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앞다리를 들었다 떨어질 때에 맞춰 연거푸 꽂히는 창의 위력은 점점 강해졌다.

그 위력을 곱절로 만드는 건 그때마다 터져 나오는 파동.

이미 수차례 공격을 버텨 낸 루드의 발밑은 지진이라도 난 듯 쩍쩍 갈라진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얼마 못 버틴다.'

하다못해 공격의 방향이라도 바꿔야 했다.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지금의 공격이 계속된다면 몸이 부하를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때. 드디어 루드가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천."

엄청난 바람의 기류에 휘말려 밀려난 사르한.

"미안하다. 돌아오는 게 늦었구나. 몸은 어떠냐."

마침내 제노스가 복귀한 것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43화

'…저 모습은 대체.'

충격을 해소하고 돌아온 제노스는 달라진 사르한의 모습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반인반마의 괴물이 된 그.

처음의 변화도 기이하긴 했으나, 그땐 그래도 인간의 모습이었다.

하나 지금은 괴물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모습.

자신이 전열에서 빠져 있던 사이, 무언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온다."

"예."

그러나 제노스는 그간의 사정을 묻는 대신 곧장 움직였다. 어느새 회천의 여파에서 벗어난 사르한이 재차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빠르다.'

사르한은 엄청난 속도로 창을 휘둘렀다. 팔을 대신한 창이 수십 수백의 궤적을 그리며 루드와 제노스를 위협했다.

"큭."

창에 옆구리를 스친 루드가 신음을 흘렸다. 사르한의 공격은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날카로웠다.

심지어 창의 형태도 고정돼 있지 않았다. 시시각각 모양과 길이를 바꾸는 창은 섣불리 간격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자칫 실수라도 했다간 치명상을 입을 상황.

'이대로는 안 돼.'

루드는 입술을 짓이겼다. 계속해서 공격을 쏟아 내고 있지만 사르한의 피해는 미미했다.

의지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창은 두 사람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 냈으며, 간혹 공격을 허용하더라도 압도적인 내구력을 자랑하는 신체가 피해를 최소화했다.

괴물로 변한 사르한의 신체는 오러를 머금은 검으로도 근육을 찢는 게 고작일 정도.

'하체를 노리는 것도 위험하다.'

말의 형상인 하체를 노릴까도 생각했으나 금세 포기했다.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해 감수해야 할 부담이 너무 컸던 까닭.

하체를 노리기 위해선 더욱 가까이 다가서야 하는데, 그러면 사르한의 창을 피하는 게 더 까다로워졌다.

안 그래도 형태를 바꾸는 창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더 큰 어려움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남은 수는 하나인가.'

결국 루드의 생각이 미친 건 정수의 힘.

정수의 힘을 해방해, 한순간 압도적인 파괴력을 쏟아 낸다면 사르한일지라도 버틸 수 없을 터였다.

'주변의 이목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제국군과 바깥대륙의 여러 부족이 한데 모인 전장.

정수의 힘을 개방하고 흑마법을 썼을 때의 여파가 부담으로 다가오긴 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미 그들의 제외한 모두가 근방을 벗어났고, 전장에 흑마법사가 있다는 걸 깨달아도 그 정체를 특정할 순 없을 터.

'일단은 사르한을 죽이는 게 우선이다.'

모치란의 경우를 떠올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사르한이 더 강해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결심을 마친 루드가 정수의 힘과 함께 흑마법을 꺼내 들려던 그 순간.

"잠시만 시간을 벌어 줘라. 그러면 편히 움직일 길을 내주마."

그 의중을 알아차렸다는 듯 제노스가 나섰다.

'그 기술이라면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다. 사르한에게도 큰 피해를 입힐 수 있고.'

그는 흑마법을 노출하는 데 부담을 갖고 있을 루드를 위해 사람들의 시선을 가려 줄 수 있는 기술을 사용하려 했다.

예지안을 통해 흑마법을 사용하는 루드를 본 덕에 내릴 수 있었던 판단이었다.

"회전결, 회류, 회천."

그를 위해 필요한 건 그를 상징하는 기술들의 연쇄.

제노스는 하늘을 향해 검을 들었다.

회전결로 바람을 만들고, 회류로 극대화시켜, 회천을 통해 쏘아 낸다.

제노스에게서 시작된 거대한 바람이 하늘을 꿰뚫었다.

그렇게 구멍 났던 하늘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제노스의 검이 완성됐다.

"태풍의 검."

"크르르...."

루드와 대치 중이던 사르한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거칠고 위험한 기운. 그 정체는 거대한 태풍이었다.

닿는 모든 걸 파괴할 기세로 빠르게 도달한 태풍은 정확히 사르한과 제노스, 루드가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콰콰콰콰콰콰콰콰-!!!

맹렬한 기세로 일대를 집어삼킨 태풍.

"루드! 회류를 사용해라!"

제노스는 루드에게 회류를 사용하라 외쳤다. 태풍의 흐름에 맞춰 회류를 사용하면 태풍의 영향에서 무사할 수 있기 때문.

"!!"

제노스의 외침을 들은 루드는 곧장 회류를 사용했다. 태풍의 기류에 맞춰 만든 회류는 태풍의 영향에서 루드를 지켜 줬다.

하지만 두 사람과는 달리, 사르한에겐 별다른 보호 수단이 없었다.

"크르아아아앗!!!"

태풍을 정면으로 받아낸 사르한이 괴성을 질렀다. 오러도 견뎌 내던 피부가 갈기갈기 찢어지며 선홍색의 근육이 드러났다.

제노스가 만들어 낸 태풍은 평범한 태풍이 아니었다. 그의 마력과 의지가 깃들어 있는 태풍. 피부를 스치는 바람 전부가 오러를 머금은 칼날이라 할 수 있었다.

"크르...."

"끝내 견뎌 냈나."

하지만 태풍의 검으로도 사르한을 죽일 순 없었다.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제노스.

그러나 실망하진 않았다. 태풍의 눈을 펼치며 노렸던 건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

"루드!"

"감사합니다."

제노스의 차례가 끝나자 루드가 앞으로 나섰다.

세 사람을 덮친 태풍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럼에도 직전과 같은 오러 폭풍의 영향에서 벗어난 건 그들이 태풍의 눈으로 들어왔기 때문.

아직까지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바깥과 달리 내부라 할 수 있는 이곳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야말로, 외부와 동떨어진 공간.

'한 마디로, 밖에선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지.'

루드는 제노스가 태풍의 검을 사용한 이유를 깨달았다.

'예지안인가.'

아마도 예지안을 통해 자신이 흑마법을 사용하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일 터.

"후우-."

중요한 건 제노스가 어떻게 알았냐가 아닌, 제노스 덕에 마음 편히 흑마법을 꺼내 들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는 것이었다.

'나와라.'

내면의 검은색 문을 개방하자 정수의 힘이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왔다.

순식간에 차가워진 주변의 공기.

루드는 곧장 마법을 완성했다. 길게 끌어서 좋을 것 없는 싸움이었으니, 태풍이 사라지기 전에 끝을 볼 생각이었다.

"삼망경(三望鏡)."

루드의 의지를 따라, 사르한의 앞에 거대한 빙벽이 생겨났다. 단면이 깨끗한 얼음의 벽은 마치 거울처럼 사르한을 비췄다.

"크르…."

하나 정작 사르한에게 보이는 건 본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소크란과 하하호호 웃고 있는 과거의 모습.

삼망경 중 하나인 소망의 거울은 대상자가 바라는 것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이윽고 또 다른 거울이 솟아났다. 소망경 옆으로 생긴 거울은 대상자가 두려워하는 상황을 비추는 원망경.

"크르, 크르, 크르르!!!"

원망의 거울에 떠오른 건, 죽음의 순간 사르한을 저주하는 소크란의 모습이었다.

거울을 본 사르한은 아니라는 듯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몸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격한 몸짓.

루드는 고통스러워하는 사르한을 바라봤다. 여태껏 시도한 어떤 공격보다도 큰 충격을 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거울이 떠올랐다. 대상자의 심마를 건드리는 절망경.

"...."

그것을 마주한 사르한의 움직임이 서서히 멎어 들었다.

* * *

사르한은 주위를 둘러봤다. 온통 어둠으로 가득한 곳. 이곳이 어딘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옜다.

그때,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소크란!'

뱀 공주이자, 언제고 뱀 여왕이 되어 부족을 이끌어 갈 존재.

그러나 그에겐 그녀의 신분보다 그녀와의 관계가 더 와 닿았다.

'딸아.'

비록 친딸은 아니지만, 딸처럼 키운 아이였다. 그녀의 어미인 뱀 여왕이 그녀에게 큰 정을 주지 않았기에 더욱 마음이 쓰였던 아이.

그녀와의 추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그녀가 가진 환혹의 재능이 대단하단 걸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런 자신을 보고 바보 같다 놀렸던 그녀였다.

사르한은 미래의 소크란이 누구보다 찬란하고 아름답게 빛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는 그럴 만한 재능이 있었고, 그럴 만한 자격을 갖췄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맞이한 끝은 사르한의 생각과 달랐다.

'사르한!'

그 순간, 칠흑색만이 유일하던 공간에 유채색의 소크란이 나타났다.

조그마한 몸집의 소크란은 사르한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 잡아 봐라~!'

이런 시절 곧잘 했던 술래잡기. 도망치는 소크란의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소크란! 어디냐!'

사르한은 눈앞에 보이는 어린 시절의 소크란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새 사라진 뒤.

사르한은 그녀를 쫓던 모습 그대로 멈춰 섰다.

'사르한.'

경직된 그의 앞에 또 다른 소크란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성년이 가까워진 시기, 까마귀 부족으로 향하기 직전의 모습을 한 그녀였다.

'저건….'

이번에 나타난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앞에 또 다른 누군가가 서 있었다.

사르한은 곧장 그의 정체를 알아봤다. 저건 그 당시의 자신이었다.

'진짜 가야만 돼? 난 가기 싫어.'

'부족을 위한 일이다. 가는 것이 옳아.'

'하지만!'

'소크란.'

'...알겠어.'

부족의 대계를 위해 필요했던 까마귀 부족과의 동맹.

양 부족의 족장은 서로의 후계자를 혈연으로 묶으며 동맹을 성사시켰고, 그로 인해 소크란은 아무 연고도 없는 까마귀 부족으로 가 얼굴도 모르던 이의 아내가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녀가 떠나기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했고.

'사르한.'

그때, 소크란이 고개를 돌려 사르한을 바라봤다. 과거의 사르한이 아닌 현재의 사르한을.

'원망해. 증오해. 미워해. 저주해.'

그녀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얼굴을 타고 흐른 핏물은 순식간에 차올라 사르한의 발목을 뒤덮었다.

'왜 안 구해 줬어? 왜 안 잡아 줬어? 왜 안 도와줬어?'

피눈물을 흘리며 다가오는 소크란.

사르한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게 아니라고, 너를 위해서였다고, 부족을 위한 일이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목구멍이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피눈물을 흘리던 소크란의 몸이 녹아내렸다.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건 그녀의 얼굴. 처형당한 뒤 모두가 알 수 있도록 까마귀 부족에 효수됐던 그녀의 목이었다.

'이제 만족해? 이제 만족해? 이제 만족해?'

목만 남은 상태로 이야기하는 소크란.

'아냐, 아냐, 아니라고.'

사르한은 연신 뒷걸음질 쳤다. 이게 아니다. 자신이 원했던 건 이게 아니었다. 그저 소크란이 행복했으면, 그녀가 이끌 부족이 더 좋은 환경이었으면 했을 뿐이었다.

결코 이런 걸 원한 건....

* * *

"아...."

정신을 차린 사르한은 제 몸을 내려다봤다. '마의 정수'에게 몸을 뺏겨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순 없었지만, 스스로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영락없는 괴물이군.'

사르한은 조소를 머금었다. 각오는 했었지만, 지금 모습을 보니 그때의 각오가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팔이 있어야 할 곳에 자라난 창과 본래의 다리를 대신한 말의 다리.

어떻게 포장하더라도 괴물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것도 추하고 징그러운.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이런 걸 위해 소크란을 까마귀 부족으로 보낸 게 아니었다.

이런 걸 위해 가기 싫어하는 그녀를 밀어낸 게 아니었다.

이런 걸 위해 일평생을....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보다 깊게 침잠해 가던 사르한의 상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두 번째 검, 지옥도."

그가 삼망경에 빠져 있는 사이 완성된 지옥도가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스걱-!!!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44화

지옥도에 직격당한 사르한이 쓰러졌다.

"…끝났나."

루드는 긴장한 기색으로 숨을 골랐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한 공격이었다. 아무리 괴물로 변한 사르한이라도 지금의 공격마저 버티긴 어려울 터.

'만약 다시 일어난다면, 이곳에서의 승부는 포기해야겠지.'

하지만 만에 하나, 이번 공격마저 버티고 다시 일어난다면 몸을 피할 생각이었다. 당장 자신들의 힘으론 사르한을 죽일 수 없다는 의미였으니.

'시간이 지나면 자멸할 거다. 그동안의 피해가 걱정되긴 하지만 최대한 거리를 벌리면 문제는 없겠지.'

모치란과 마찬가지로 사르한 또한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무너질 확률이 높았다.

루드는 지옥도를 펼치던 순간을 떠올렸다.

'지옥도에 닿기 전부터 몸 전체에 괴사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마 흡수한 힘을 견디지 못한 것일 터. 어쩌면 괴물로 변하는 것 자체도 그 힘을 견디기 위한 현상일지도 몰랐다. 모습이야 어떻든 인간의 신체보다 압도적인 내구력을 갖추게 됐으니.

'그럼에도 끝끝내 힘을 견디지 못했다는 건가.'

루드는 쓰러진 사르한을 예의 주시했다. 다행히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한계에 달한 신체로는 지옥도를 견뎌 낼 수 없었던 것이다.

때마침 제노스가 만들어 낸 태풍이 사라지며 마지막 바람이 불었다.

스스스스....

가루가 된 사르한의 시체가 바람에 날려 허공으로 흩어졌다.

뱀 부족 최강의 전사라 불리던 이의 허망한 최후였다.

"진짜 끝났군."

안도의 한숨을 토해 낸 루드는 사르한의 시체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가루가 되어 사라진 사르한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역시 모치란 때와 똑같군.'

발밑을 바라본 루드는 금세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여전히 사이한 기운을 뿜어내는 작은 구슬, 사르한이 흡수했던 정수였다.

괴물이 됐던 모치란에게서 독의 정수를 발견했듯, 이번에도 사르한이 흡수한 정수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게 정확히 들어맞았다.

'독의 정수는 아니다.'

사르한이 삼켰던 정수를 확인한 루드는 표정을 굳혔다.

짐작하고 있던 대로 모치란이 먹었던 독의 정수와 다른 정수였다.

독의 정수와는 달리 사르한이 흡수했던 정수는 정확히 어떤 힘을 품고 있다 말할 수 없었지만, 둘이 서로 다른 힘을 품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역시 뱀 부족에선 이러한 정수들을 여러 개 갖고 있다 생각해야겠지.'

그건 예전, 감옥에 갇힌 소크란과 대화했을 때부터 추측한 사실이었다.

'흑음의 정수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 힘은 비등하다 여겨야겠지.'

편히 정수라고 칭하긴 했지만, 모치란과 사르한이 먹은 정수는 루드가 가진 흑음의 정수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흑음의 정수 특유의 냉기도 없었고, 일관된 힘을 보이는 흑음의 정수와 달리 뱀 부족의 정수는 각기 다른 효과를 보였다.

'뱀 부족이 가진 정수들의 공통점이라 한다면 사용자를 괴물로 만든다는 사실인가.'

사르한이 남긴 정수를 바라보던 루드에게 제노스가 다가왔다.

"루드, 어떻게 할 거냐."

모두의 이목을 가렸던 태풍이 걷히고 있었다. 강렬했던 바람은 이미 사라졌고, 바람에 날린 모래만이 아직 시야를 가려 주고 있는 상태.

"계획대로 움직여야죠."

"…괜찮으냐. 정상이 아닌 거 같은데."

루드의 대답에 제노스는 걱정을 표했다. 사르한과의 전투로 루드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고작 이 정도 부상으로 멈출 순 없어요.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뱀 부족을 없애야 합니다."

하나 루드는 덤덤히 말했다. 그도 제노스가 염려하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부상을 입은 자신이 무리할까 봐 걱정되는 것이겠지.

하지만 무리해서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지금 뱀 부족을 처리하는 것도 그러한 일이었고.

"여기서 뱀 부족을 놓치면 조금 전과 같은 괴물들이 더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무조건 끝을 봐야 합니다."

"…그래. 그 말이 맞구나."

루드의 단호한 태도에 제노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루드도 마냥 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뱀 부족을 없앨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나서는 것이었다.

'다행히 내상은 깊지 않다.'

천만다행으로 내상이 깊지 않았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몸에 피로가 쌓였지만, 마력으로 보조하면 당장 운신하는 덴 무리가 없었다.

"슬슬 더스틴도 마무리를 지어야겠구나."

"네. 처음 계획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좋은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본래 루드와 제노스는 사르한을 처치한 뒤 제노스와 더스틴 간의 대결 구도를 연출할 계획이었다.

제노스와 겨룬 더스틴이 패배하며 죽고, 그를 통해 더스틴을 퇴장시키려던 것.

하나 루드는 지금 상황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끌어 좋을 게 없습니다. 사르한이 잘못됐다는 걸 알면 뱀 여왕은 곧장 군세를 물릴 겁니다."

"그렇다면?"

"더스틴은 괴물이 된 사르한과 공멸한 걸로 하죠."

마스터 간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모두가 거리를 벌린 상태였지만, 분명 누군가는 괴물이 된 사르한을 봤을 것이다.

첫 번째 변화만 해도 범인의 세 배가 넘었고, 반인반마로 변한 뒤에는 중대형 몬스터만 한 크기였으니.

특히 어느 정도 경지를 갖춘 이라면 그가 내뿜었던 존재감을 알아차렸을 터.

"마스터가 죽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니 문제는 없을 겁니다."

"확실히, 사르한도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으니 그게 낫겠구나."

"더스틴이 죽었다는 증거는…."

고개를 끄덕인 루드는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출정을 앞두고 하자르에게 건네받았던, 왕가의 문양이 박힌 보검이었다.

당시 하자르는 이 검이 더스틴이 퇴장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콰직-!!

사르한과의 전투로 이미 한계에 달했던 검은 거친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깨지고 말았다.

완전히 산산조각 난 검은, 손잡이와 연결된 부분을 제외하면 멀쩡한 곳을 찾아볼 수 없는 지경.

루드는 단검에 가까워진 검을 제노스에게 건넸다.

하자르의 바람대로, 이 검은 더스틴이 퇴장하는 데 큰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다. 더스틴의 죽음을 증명할 증거가 돼 줄 테니.

"태풍이 멎었군."

"예, 다시 움직여야 할 시간이군요."

어느새 제노스가 만들어냈던 태풍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더스틴이 아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루드는 먼 곳을 바라봤다. 뱀 여왕과 그녀가 이끄는 뱀 부족이 있을 동쪽이었다.

이제부터 향해야 할 곳.

그들을 전멸시킨다면… 길었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겠지.

"뒷수습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 둬라. 그리고…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무리하지 마라."

"예."

짧은 대화를 끝으로, 루드와 제노스 모두 각자의 일을 위해 움직였다.

* * *

'끝났나!'

미친 듯이 요동치던 마력이 잠잠해진 걸 느낀 아이리우스는 먼 곳을 바라봤다.

까마귀 부족의 족장으로부터 도망쳐 왔던 곳.

'어떻게 됐지.'

그곳에서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다는 건 누구나 알았다.

형용할 수 없는 굉음과 진동 거듭됐고, 이곳까지도 느껴진 마력의 파장에, 심지어는 때 아닌 태풍까지 불었으니.

경지를 갖춘 이들만이 아니라 한낱 병사들까지 전부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 승부의 결과에 따라 이번 전장의 판도가 바뀔 터.

'그보다 그 괴물은 대체....'

하지만 모든 이가 그곳에서 벌어진 전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대부분은 소드마스터 간의 충돌이 있다고만 알고 있는 수준.

그러나 소드마스터에 오르며 감각이 확장된 아이리우스는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다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제국도, 까마귀 부족도 아닌 또 다른 소드마스터의 등장과... 이윽고 괴물로 변해 버린 그의 모습을.

'…제발.'

아이리우스는 더스틴이 승리했길 간절하게 빌었다. 최소한, 이기진 못하더라도 죽지 않았길 바랐다.

그들 간의 전투에 이번 전쟁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무방했으니.

하지만, 그녀의 소망은 간단히 짓뭉개졌다.

"제국의 소드마스터를 죽였다!!"

태풍이 사라지며 시야가 확보된 공간.

그곳에 서 있는 건 더스틴이 아니었다. 괴물도 더스틴도 없는 그곳엔 오직 까마귀 부족의 족장만이 존재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제노스! 제노스!"

"까마귀 부족 만세!!"

기세가 오른 까마귀 부족은 제노스의 이름을 연호했다.

거기에 방점을 찍은 건 제노스의 화답이었다.

"까마귀 부족 전원! 무기를 높이 올려라! 함성을 크게 질러라! 심장을 뜨겁게 불태워라! 그것이 부족의 미래를 위한 것일지니!"

삽시간에 달아오른 까마귀 부족의 사기.

"더, 더스틴 님이 지셨다고?"

"말도 안 돼."

"그, 그럼 이제 어떡해?"

그에 반해 제국군의 사기는 곤두박질쳤다.

여태껏 잘 버티던 전황이 한순간에 밀리기 시작한 건 당연지사였다.

"콜론 경!"

전장의 분위기를 읽은 아이리우스는 서둘러 콜론을 찾았다. 더스틴과 막시무스가 없는 현재 제국군의 최고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콜론이었다.

"콜론 경! 후퇴해야 합니다. 이번 전쟁은 실패입니다. 복귀해야 합니다!"

"…같은 생각이네. 애석하지만, 이번 전쟁은 우리의 패배야."

콜론도 아이리우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더스틴이 죽은 시점에서 이번 전쟁의 패배는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후퇴에 앞서 더스틴 님의 시신을 수습해야 하네."

하지만 곧장 군을 후퇴시킬 순 없었다. 더스틴의 죽음은 일반 병사의 죽음과 달랐으니, 최소한 시신이라도 가져가야만 했다.

'진짜 죽은 건지도 확인해 봐야 하고.'

물론, 그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의회에 소속된 이로서 더스틴의 전사가 진짜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

"더스틴 님의 시신을 수습하는 건 무리입니다. 저곳엔 상대 소드마스터가 있습니다. 지금 저곳으로 향하면 죽을 뿐입니다."

그런 콜론의 말에 아이리우스는 즉각 반대했다. 제노스는 대단한 강자였다. 더스틴이 죽은 게 납득이 될 정도로.

'그 괴물마저 꺾어 낸 것이라면… 승산은 없다.'

거기에 더해, 아이리우스는 그곳에 있던 또 다른 존재를 떠올렸다.

처음엔 인간이었지만, 어느 순간 괴물이 된 정체불명의 소드마스터. 그가 풍기던 사이함은 말로는 표현 못할 정도로 소름 끼치던 것이었다. 그에게서 느껴졌던 힘 또한 마찬가지. 이곳의 모두가 덤벼들어도 이길 수 있을까 싶은 존재였다.

하나 그 또한 현재엔 보이지 않는 상황. 아마 제노스가 쓰러트린 것이겠지.

'더스틴과 그만한 적을 동시에 상대했으니 상태가 정상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때, 콜론이 아이리우스를 바라봤다.

"자네가 병사들을 이끌고 후퇴해 주게. 그 나이에 소드마스터에 오른 자네라면 군을 이끄는 데 부족함은 없겠지."

"그럼 콜론 경께선."

"나라도 더스틴 님의 시신을 수습해야지."

"...."

콜론은 결연한 표정이었다. 기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상황이었다. 아니, 인간으로서의 그는 어떨지 몰라도 기사로서의 그는 이미 죽었다 생각했다. 하타이에게 패하고 제노스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부터.

'이 몸으로는 살아 돌아간다 해도 제대로 살 수 없다. 그럴 바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게 낫겠지.'

콜론은 스스로의 내부를 관조했다. 하타이에게 입었던 내상은 이젠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진 상태였다. 제대로 치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힘을 끌어다 쓴 까닭이었다.

아직까진 어떻게든 마력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마저도 어려워질 터.

그는 마력을 잃은 기사들의 최후를 알았다. 이전과의 괴리를 견디지 못하고 망가지는 이들이 태반이었고, 그나마 나은 결말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폐인처럼 살 생각은 없다.'

하여 콜론은 이곳에서 죽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게 도와준 의회에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도망칠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어 줄 수 있을 테니...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더스틴 님의 죽음을 확인하는 대로 통신하면 되겠지.'

콜론은 품 안에 있는 마력 통신구를 의식했다.

더스틴의 죽음을 확인하는 대로 통신을 보낼 의도.

출정 전 의회에게 받았던 최상급 마력 통신구는 격한 전투에서도 망가지지 않았다. 천운이 따랐다고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콜론의 결연한 의지를 깨달은 아이리우스는 마지못해 그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남은 병사들을 직접 이끌기로 한 것이다.

"…콜론 경의 의지가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제가 병사들을 이끌고 퇴각하겠습니다."

"무운을 비네."

"콜론 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은 짧은 악수를 나눴다.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그렇게 더스틴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콜론이 떠나고.

"제국군 전원! 후퇴한다! 다시 한번 말한다! 제국군은 후퇴하라!!"

마력이 담긴 아이리우스의 목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검에선 환한 오러가 빛나고 있었다.

"제국의 새로운 소드마스터가 너희를 이끈다!"

그 곁에서 제국군 모두가 알 수 있도록 큰 소리를 토하는 헤이론.

"후퇴하라!"

"후퇴! 후퇴! 후퇴!"

곧, 모든 제국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45화

후퇴하는 제국군의 첫 번째 목적지는 1군이 지나온 언덕 지형이었다. 많은 언덕들이 적의 시선을 가려 줄 것이고, 추격을 따돌리는 데도 이점이 있었다.

'그 많던 병력이 고작 이것밖에 안 남은 건가.'

남은 병사들의 수를 확인한 아이리우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출정할 당시만 해도 7천이 넘었던 병력은 고작 2천도 안 남은 상태였다.

"빠르게 이동한다. 기사들은 주위를 경계하며 다가오는 적들을 확인해라!"

"예!"

아이리우스의 명을 받은 기사들은 즉각 움직였다. 반발하거나 그녀가 여자라며 무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검에 서린 오러는 신분과 나이, 성별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니.

게다가 검의 경지만 높다면 또 모를까, 전생의 경험으로 이미 군을 이끌어 본 적 있는 아이리우스는 뛰어난 카리스마를 보이며 병력을 통솔했다.

그녀가 내리는 명령도 전부 시의적절한 것들이었으니,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곳만 빠져나가면 숨통이 트일 거야. 이후부터는 어렵지 않을 테니, 여기서 하나라도 더 많은 목숨을 지켜 내야 해.'

아이리우스가 기사들에게 병사들을 지키게 한 건 그런 이유였다.

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미 오는 길에 정리가 끝난 상태. 까마귀 부족의 추격만 따돌린다면 제국까지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다.

당장 대평원만 빠져나가더라도 재정비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터.

다시 말해, 이곳에서 살아 나가는 병력의 수가 곧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병력의 수였다.

"후방에 적 셋을 발견, 처리했습니다!"

"좌측엔 이상 없었습니다."

"우측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위를 경계하는 기사들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자리를 바꿨다.

이는 아이리우스가 명령한 것으로, 기사의 숫자를 최대한 많아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기사들은 적을 해치우고 아군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

모든 기사들이 그랬지만, 그들 중에도 특히 눈에 띄는 이들이 있었다.

"가이로!"

"확인했어. 비켜!"

붉은 머리와 푸른 머리의 일남일녀.

오랜 시간 합을 맞췄는지 두 사람의 연계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아이리우스는 그 두 사람을 눈여겨봤다.

강맹한 검을 사용하는 남자와 순간적인 움직임으로 남자를 보조하는 여자의 합은 일절이었다.

그 둘을 상대한 적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저 사람들은….'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던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들도 2군에 속해 있었기에 오가며 여러 차례 보았고, 짧지만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다.

흘러가는 얘기로 남자는 귀족, 여자는 평민 출신이며 두 사람 모두 사관학교 졸업생이라 했었다.

하나 그들의 신분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들이 갖춘 무력과 성품, 전장에서의 능력.

'저런 이들이 많을수록 나중의 전쟁이 쉬워지겠지.'

저 둘은 분명한 인재였다. 성품이야 일찍이 문제 될 게 없단 걸 깨달았었고, 지금 확인해 보니 무력 또한 뛰어났다.

전쟁을 겪으며 경험이 쌓인 두 사람의 검은 이전보다 날카롭고 노련해져 있었다.

게다가 사관학교 출신이니 병력을 이끄는 것도 가능할 터.

언제고 두 사람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은 제국으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야.'

먼저 지금의 위기를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조금만 더 힘내라! 대평원만 벗어나면 살길이 열린다!"

"제국군이여! 기개를 보여라!!"

아이리우스는 병사들을 독려했다. 헤이론도 곧장 목소리를 보탰다.

"오오오오!!!"

그에 화답하듯 힘을 내는 제국군. 조금이지만 이동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

어느덧 제국군은 대평원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조금만 더 이동하면 대평원을 벗어나 언덕 지형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생각보다 추격이 약해. 포기한 건가?'

병사들을 재촉한 아이리우스는 의문을 품었다. 추격해 오는 이의 숫자와 수준이 걱정했던 것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다 이긴 상대를 쉽게 놓아줄 이유가 없건만… 어째서인지 까마귀 부족의 추격 의사는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다.

"!!!"

그러나 얼마 안 가, 아이리우스는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깨달았다.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어느새 제국군의 뒤를 따라잡은 추격자들. 그 숫자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까지 추격하던 이들보다도 현저히 적은 숫자였다.

하지만 그 면면을 확인한 아이리우스의 안색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 선두에 위치한 게, 제노스였기 때문이었다.

"제노스!"

그와 함께 선 이들도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최악이다.'

까마귀 부족은 추격을 포기한 게 아니었다. 굳이 추격에 열을 올릴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어떻게 도망치든 잡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어디서 저런 강자가….'

하타이와 달리 제노스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대였다.

상대는 물론 저런 인물이 있다는 얘기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전생에서는 전쟁이 시작하기 전 모종의 이유로 자취를 감췄거나, 죽었던 것일 터.

쐐애애액-!!!

그 순간, 제노스로부터 무언가가 날아왔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것을 쳐 낸 아이리우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건!'

공중으로 튀어 오른 것은 더스틴의 검이었다. 검신이 산산조각 나 있었지만 분명했다. 폼멜에 새겨진 문양이 기억 속에 있는 것과 똑같았다.

그의 검이 이런 상태로 제노스의 손에 들려 있다는 건....

'정말 죽고 만 건가.'

더스틴의 죽음이 진짜라는 사실.

기적적으로 살아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던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것도 받아라."

제노스는 더스틴의 검에 이어 무언가를 더 던졌다. 힘없이 땅에 떨어진 건 만신창이가 된 콜론의 시체였다.

더스틴의 죽음을 확인하고자 이동하던 길에 제노스와 맞닥뜨리고 말았던 것.

그가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음은 당연했다.

"콜론 경!!"

바닥을 나뒹구는 콜론의 사체를 확인한 기사들이 분노를 드러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기사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리우스가 그들의 행동을 제지한 까닭이었다.

'상황이 안 좋다.'

기사들을 말린 아이리우스는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쳤고, 남은 기사들로는 제노스를 어찌할 수 없었다.

더스틴에 이어 콜론마저 죽었다는 게 병사들 사이로 퍼진다면 사기는 더 떨어지고 말 터.

그렇다면 여기서 할 수 있는 것. 해야 할 것은....

"헤이론."

"예."

"병력들을 부탁해. 할 수 있겠지?"

"그게 무슨… 설마, 안 됩니다. 절대 그럴 순 없습니다."

아이리우스의 결심을 깨달은 헤이론이 정색했다.

그녀는 혼자 남아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그건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막말로 헤이론에겐 다른 제국군 전부보다도 아이리우스 하나가 더 중요했다.

"정정하지. 헤이론, 이건 부탁이 아닌 명령이야."

"...."

하나 아이리우스의 뜻은 완고했다. 이곳에서 제노스를 막을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그도 거듭된 싸움에 지쳤을 테니, 시간을 끄는 것 정도는 가능하리라.

"…절대 죽지 마십쇼."

결국 아이리우스의 뜻을 꺾지 못한 헤이론은 착잡한 표정으로 병사들과 함께 사라졌다.

도망치는 그들을 제노스를 제외한 추격자들이 뒤쫓았다.

"…혼자 남았군. 시간을 벌 생각인가."

"그래."

한편 제노스는 도망치는 제국군을 쫓는 대신 홀로 남은 아이리우스에게 집중했다.

어차피 그의 목적은 아이리우스를 죽이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이야 큰 위협이 되지 않았으니, 당장 죽이지 않더라도 문제될 게 없었다.

반면 아이리우스는 달랐다. 시간이 지나면 분명 더 큰 위협이 될 터.

반드시 이곳에서 죽여야 했다.

"...."

"...."

대치 상태로 잠시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 이윽고 전투가 시작되려던 순간.

"아이리우스 님!"

"헤이론?"

병사들과 함께 도망쳤던 헤이론이 돌아왔다.

병사들을 안전한 곳까지 후퇴시키고 왔다기엔 너무도 이른 시간.

"내 명령을 거스른 거야?"

헤이론이 병사들을 버렸다고 생각한 아이리우스는 짙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헤이론도 나름의 조치를 취하고 온 것이었다.

"아가씨께서 눈여겨보신 두 사람에게 부탁하고 왔습니다. 그 둘이라면 충분히 말씀하신 곳까지 병력을 이끌어 줄 겁니다."

아이리우스의 명령에 마지못해 물러났지만, 주군을 두고 떠나는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결국 헤이론은 자신을 대신해 군을 지휘해 줄 사람을 찾았고, 때마침 아이리우스가 눈여겨보던 두 사람에게 부탁한 뒤 서둘러 돌아온 것이었다.

'경계에 서 있던 녀석이군.'

제노스는 다시 돌아온 헤이론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마스터의 경계에 발을 걸치고 있던 기사로, 아이리우스 다음으로 까다로웠던 상대였다.

'상황이 어려워졌군.'

제노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솔직히 말해, 지금 그의 몸은 빈말로도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사르한과의 격전으로 부상을 입은 데다, 남은 마력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마스터와 마스터에 걸쳐있는 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

위험도를 따지자면 후일을 도모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제노스는 물러서는 대신 승부를 보고자 했다.

'이곳에서 둘을 죽인다면 제국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제국 전력의 핵심이 될 게 분명했다. 이들이 중심이 된 미래의 제국은 지금보다도 훨씬 강해질 터.

하물며 이번 일로 바깥대륙의 전력을 가늠했을 테니 더욱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이 둘을 한 번에 처리할 기회는 지금뿐.

'아이리우스 님.'

'그래. 헤이론.'

제노스가 결심을 내린 순간, 타이밍을 재고 있던 아이리우스와 헤이론이 먼저 움직였다.

속도를 내세우며 공격한 헤이론.

제노스는 기민하게 반응하며 헤이론의 검을 쳐 내고 그의 빈틈을 노렸다.

하지만 반격하던 제노스는 공격을 포기하고 몸을 빼는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을 노리고 들어온 아이리우스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오겠다는 건가.'

두 사람의 전략은 간단했다.

헤이론의 속도를 앞세워 공격을 주도하며,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빈틈은 아이리우스가 가진 마스터의 감각으로 메우겠다는 생각.

'귀찮게 됐군.'

제노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을 죽이는 게 목표였다면 공격하는 이와 보조하는 이가 반대였을 것이다. 시간을 끌겠다는 목적이 훤히 보였다.

"시도는 좋았다. 하지만 부족하다."

그러나 이 정도만으론, 자신의 시간을 뺏을 수 없었다.

"내 시간을 뺏으려면 목숨 정도는 걸어야지."

그 말과 동시, 제노스의 신형이 사라졌다.

"!!"

사라졌던 그가 다시 나타난 건 헤이론의 앞.

"우선 하나."

촤악-!!

제노스가 휘두른 검에 헤이론의 가슴이 길게 갈라졌다.

"헤이론!"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아이리우스가 소리쳤으나 헤이론의 상태를 살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제노스의 다음 목표는 당연하게도 그녀였으니.

"큭!"

제노스의 검을 받아 낸 아이리우스는 헤이론이 쓰러진 방향을 흘깃거렸다.

조금씩 움직이는 걸 봐선 즉사는 면한 것 같았다. 다만 바닥을 적신 피가 적지 않았다. 이대로 두면 죽을 수도 있었다.

'쯧, 얕았나.'

한편, 제노스는 헤이론을 벨 때 느꼈던 감각을 상기했다.

검에 닿기 직전 헤이론이 몸을 트는 바람에 원하던 만큼 깊이 베는 데 실패했다.

몸이 정상이었다면 반응하든 말든 단번에 두 동강을 냈을 테지만....

'변명일 뿐이지.'

정상이 아닌 건 헤이론 또한 마찬가지일 터.

'단번에 무력화시키려던 건 실패로 돌아갔군.'

조금 전의 움직임은 제노스로서도 무리한 것이었다. 부상이 심해지는 걸 감수하더라도 숫자를 줄이려고 했는데, 완전히 끝내지 못했다.

출혈이 많긴 하지만 그건 상처가 깊어서라기보다는 면적이 넓어서일 터.

지금이야 충격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금세 회복할 게 분명했다.

'...무리해서라도 그 전에 치고 빠져야겠군.'

직전엔 실패했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제노스는 헤이론이 복귀하기 전에 아이리우스를 처리하고자 했다.

"회전결."

한 단계 더 가속한 제노스가 아이리우스에게 달려들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46화

제노스는 쉴 새 없이 아이리우스를 몰아붙였다.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공격엔 그가 쌓은 경험과 기예가 모조리 녹아 있었다.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의도가 있고, 사용하는 모든 기술은 다음 기술을 위한 포석으로 작용했다.

제노스는 진정한 강자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 줬다.

하지만 아이리우스도 만만치는 않았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녀는 침착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해내고 있었다.

'큭, 아직인가.'

제노스의 공격을 튕겨 낸 아이리우스가 신음을 흘리며 물러섰다. 반응이 조금만 늦었다면 어깨를 베였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마스터의 세계에 적응해야 한다.'

마스터에 이르며 감각이 확장된 탓에 이전과의 괴리감이 있었다. 조금 전의 공격에 뒤늦게 반응했던 것도 그 때문.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이미 겪어 본 적 있다는 점이었다.

'떠올리는 거다. 전생에서 소드마스터에 올랐을 때를, 그 당시의 감각과 움직임을.'

처음 소드마스터에 올랐을 때,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주변의 변화를 받아들였는지.

'흠?!'

그 순간, 아이리우스를 상대하던 제노스가 흠칫했다. 이전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달라졌다.

'설마, 벌써 적응했다고?'

마스터에 오르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확장된 감각은 이곳이 자신이 알던 세계가 맞나 싶을 정도로 여러 정보를 전달하고, 스스로의 움직임도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보였다.

기존의 상식이 파괴되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진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

마스터가 되면 한동안 괴리감을 느끼는 것이 그러한 이유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괴리에서 벗어나 완전한 마스터로 자리 잡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개개인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평균적으로 한 달은 고생할 만한 것.

당장 자신만 해도 마스터의 감각에 적응하는 데 3주가 걸렸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아이리우스는 마스터가 되자마자 그 괴리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아무리 마스터에 오르자마자 전투를 겪었다지만….'

분명 실전은 마스터의 감각에 적응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전투야 말할 것도 없었고.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빨랐다. 마스터가 된 지 고작해야 반나절이었다.

소드마스터의 세계를 미리 경험해 본 것이 아니고서야 벌써 그 세계에 적응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말도 안 되는 재능!'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마스터의 세계에 적응을 끝마친 아이리우스는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다.

"유성검."

그녀의 심상에 밤하늘이 떠올랐다. 그곳을 가득 메운 건 찬란히 빛나는 무수한 별. 이윽고, 존재감을 표출하던 별들이 떨어져 내렸다.

"큭!!"

위험을 감지한 제노스가 땅을 굴렀다.

콰콰쾅!!!

제노스가 서 있던 땅에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다. 별똥별처럼 쏟아진 오러 다발이 지상을 폭격하며 만들어진 것이었다.

실로 압도적인 파괴력.

이후로도 아이리우스는 오러를 앞세워 제노스를 공격했다.

사르한과의 전투로 상당수의 마력을 소모한 제노스와 달리 대부분의 마력을 보존하고 있던 그녀였다.

"회신류."

반면, 파괴력을 앞세운 아이리우스에 맞서 제노스는 속도에 치중했다.

그의 내부에 작은 회전이 일며, 혈액과 마력의 순환을 가속시켰다.

스팟-!

한계 이상의 속도를 내는 제노스.

점멸하듯 사라졌던 그가 순식간에 아이리우스 앞에 나타났다.

"!!!"

콰앙-!!

압도적인 속도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아이리우스가 멀리 날아갔다.

마지막 순간 검을 끼워 넣지 않았다면 몸이 양분됐을 공격.

"쿨럭-!!"

수차례 땅을 구르다 가까스로 멈춰선 아이리우스가 기침을 토했다.

마스터의 세계에 적응했음에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던 엄청난 속도.

'어떻게!'

그녀는 속으로 의문을 토했다.

어떻게 아직까지도 이런 속도를 보일 수 있는 건지.

이만한 힘을 왜 진작 꺼내 들지 않았던 건지.

"큽, 쿨럭."

하지만 그 답은 다가오는 제노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제노스의 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눈의 실핏줄이 전부 터진 까닭.

그것은 단지 눈만이 아니었다. 피부 위로 자잘하게 나 있던 모든 상처에서도 핏물이 나오고 있었다.

신체 내부를 순환하는 혈액과 마력을 과도하게 회전시킨 부작용이었다.

'무리하고 있는 거구나!'

아이리우스는 제노스가 한계에 가까워졌단 걸 확신했다. 그가 이곳에 오기 전 겪었을 전투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두 명의 마스터를 상대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중 하나는 괴물로 변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일어서. 일어서는 거야. 아이리우스!'

아이리우스는 스스로에게 소리쳤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충격 때문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움직이면 제노스를 죽일 수 있는 기회였다.

"흐아아아아-!!!"

마침내 그녀는 몸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그사이, 제노스는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회신류의 영향으로 그 또한 상태가 안 좋기는 마찬가지.

서로의 바로 앞에 선 두 사람은 누가 뭐랄 것 없이 동시에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켜라."

그러나 그 둘보다 먼저 움직인 이가 있었다.

"…아이리우스 님의 앞에서 비켜라."

"...."

가슴을 움켜잡은 헤이론이 비척이며 다가왔다. 가슴을 덮은 손 위로 피가 울컥하며 흘러나왔다.

"내 주군이시다. 나를 먼저 상대해라."

그리 말하는 헤이론의 표정은 비장했다.

그는 아이리우스와 처음으로 했던 대련을 떠올렸다. 한량처럼 시간만 허비하던 때, 그녀는 자신을 그녀의 기사로 삼기 위해 대련을 신청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

고작 몇 개월 수련했을 뿐인 영애와 정규기사 간의 대련. 누가 봐도 결과가 뻔히 보이는 승부였다.

하나 그녀는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자신을 기사로 삼는 데 성공했다.

시간이 흐르고, 그때의 일을 물은 적이 있었다. 많고 많은 기사들 중 왜 하필 자신이었냐고.

그 질문에 미소와 함께 대답하던 아이리우스의 모습을 기억한다.

'내가 소드마스터가 될 거라서. 그래서 침 발라 놓는 거라고 했었지.'

자신이 소드마스터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때 느꼈던 전율은 누구도 모를 것이다.

'나조차 믿지 못한 나를 믿어주신 분이다. 내 유일한 주인이며, 평생 지켜야 할 주군.'

그날 이후, 헤이론의 인생은 바뀌었다.

스스로의 재능에 확신하지 못해 도피하는 대신 그녀의 눈을 믿고 수련에 매진했다. 누구보다 먼저 수련을 시작했고 누구보다 늦게 수련을 마쳤다.

혹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들 때면 자신이 마스터가 될 거라던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천재였으니, 자신이 아닌 그녀의 안목을 믿기로 했다.

그렇게 그는 달라졌다.

바람둥이 기사란 이명은 어느새 바람의 기사가 됐고, 마스터의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비록 실패했었지만.'

헤이론은 이미 몇 번인가 각성 상태를 겪어 봤었다. 그때마다 마스터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그 문을 확인한 데 만족해야 했지만....

'이번엔 다를 거다. 아니, 달라야만 한다.'

그래야 아이리우스를 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제 주군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헤이론은 제노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전만큼 그가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보인다. 이 자가 두르고 있는 바람의 결이!'

헤이론은 죽고 싶지 않았다.

살아서 주군의 믿음에 보답해야만 했으니까.

하여, 목숨을 걸고 앞으로 나섰다.

역설적이지만, 이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제노스와 헤이론의 검이 어지럽게 얽혔다. 한 호흡에 수십 번의 공방이 서로를 오갔다.

'뭔가 바뀌었군.'

제노스는 헤이론에게 변화가 생겼음을 알아챘다.

회전결과 회류를 섞으며 빠르게 처리하려 했지만, 쉽사리 떨쳐지지 않았다.

이전이었다면 이미 떨어지고도 남았어야 할 상황.

하지만 헤이론은 아직도 의연하게 제 앞에 서 있었다.

휘이이이잉-!!!

공방이 거듭되던 와중, 큰 바람이 불었다.

'그런 거였나.'

제노스는 그제야 헤이론이 겪은 변화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소드마스터에 올랐군.'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 것 같으나, 그 또한 아이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소드마스터에 오른 것이었다.

'운도 없군. 하필 이 타이밍이라니.'

제노스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하늘이 제국의 편을 들기라도 하는 건지, 결정적인 순간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합세할게!"

곧이어 충격에서 벗어난 아이리우스도 전투에 가세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제노스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

두 사람의 공격을 흘려낸 제노스가 잠시 물러났다.

이렇게 시간이 흐른다면 불리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내상은 더 깊어질 테고, 회신류의 부작용이 더 심해진다면 의식을 잃을 수도 있었다.

'두 명의 소드마스터라.'

제노스는 잠시 계산을 해 봤다. 이쯤에서 포기하고 물러났을 때와 큰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끝까지 싸울 때.

'팔 한쪽을 내주더라도 잡는다.'

계산 끝에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둘 모두는 무리더라도, 최소한 여자만큼은 없애야 한다.'

헤이론의 재능도 뛰어나긴 했다. 그만한 나이에 소드마스터를 이룬 이가 몇이나 될까.

하지만 아이리우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녀가 보여 준 재능과 미래에 성장할 가능성을 생각하면 그녀를 죽이는 게 우선이었다.

생각을 마친 제노스는 두 사람에게 쇄도했다.

이전과 똑같이 헤이론을 먼저 노린 제노스는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한 회전결을 일으켰다.

이제는 가장 기본적인 회전결을 만드는 것조차 어려웠으니, 기회는 이번 한 번뿐.

"이젠 네놈이 두른 기류가 전부 보인다고!"

자신에게 다가선 제노스에 헤이론이 눈을 빛냈다.

이젠 그가 두르고 있는 바람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그건 아마도 자신이 그와 비슷한 힘을 다루기 때문이겠지.

'좋은 공부가 됐다.'

제노스와의 공방은 헤이론에게 좋은 자양분이 돼 주었다.

자신과 비슷한 힘을 다루는 소드마스터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훌륭한 교보재였으니.

실제로 헤이론은 자각하지 못했으나 그가 소드마스터에 이른 데에는 제노스와의 공방이 큰 역할을 했다.

"받아라!"

회전결에 맞춰 바람을 응축한 헤이론이 검을 뻗었다.

계산대로라면 서로 맞닿은 순간, 회전결과 그의 공격이 소멸할 터였다.

'됐다!'

혼자인 제노스와 달리 자신의 뒤에선 아이리우스가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헤이론은 승리를 자신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제노스의 목표는 헤이론이 아니었다.

헤이론의 검과 닿기 직전, 궤적을 바꾼 제노스의 검이 땅을 찍었다.

그 힘을 이용해 순식간에 방향을 전환한 제노스.

어느새 그의 눈앞에는 헤이론의 뒤에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아이리우스가 서 있었다.

"!!!"

헤이론에게 측면을 훤히 노출하는 대신, 아이리우스를 죽일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

"팔 한쪽쯤은 내주마. 대신 난 제국의 미래를 앗아야겠다."

서슬 퍼런 제노스의 음성에도 아이리우스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인 데다, 상황을 마무리 지을 기술을 준비하고 있던 탓이었다.

그저 가만히 목을 내줄 수밖에 없던 그때.

"그 여잔 내 거라니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나타났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47화

제노스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하타이의 모습에 경악했다.

'이 미친 녀석이…!!'

그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그 원인인 아이리우스에게 집착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행동할 줄은 몰랐다. 자신이 그녀를 죽이는 걸 막기 위해 자신을 공격할 줄이야!

콰앙-!!

하타이의 어깨에 받힌 제노스는 속절없이 날아갔다.

아이리우스를 죽이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그에게 하타이의 공격을 막아 낼 여유는 없었다.

"쿨럭!"

튕겨 나간 제노스는 수차례 바닥을 구르고 나서야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땐, 이미 큰 부상을 각오하며 간신히 만들어 냈던 기회가 사라진 후였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이 기회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아이리우스는 준비하던 기술을 마저 완성해 냈다.

지금의 상황을 마무리 짓고, 자신과 헤이론을 무사히 도망칠 수 있게 해 줄 기술.

"플레어(flare)."

그건 태양을 본떠 만들어진 기술이었다.

엄청난 마력과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탓에 이전까진 사용할 수 없었지만, 마스터에 오른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완성할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그 시간은 하타이가 벌어다 줬다.

'고맙다. 하타이.'

아이리우스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하타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플레어를 완성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어렵게 완성한 플레어를 제노스가 아닌 하타이에게 사용해야 한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여기서 더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하타이가 아니었다면 완성은커녕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코앞까지 다가온 하타이를 처리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행히 플레어의 부가 효과만으로도 도망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벌 수 있을 터.

결국 아이리우스는 아쉬움을 삼키며 플레어의 위치를 조정했다.

"헤이론, 눈 감아."

"예."

그와 동시에 헤이론에게 명령한 아이리우스.

전투 중에 눈을 감는 건 위험한 행위였지만 헤이론은 주저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아이리우스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이리우스는, 그의 믿음에 보답했다.

"이… 이게 무슨!"

아이리우스를 공격하려던 하타이가 경악했다.

어마어마한 열기와 빛을 동반한 구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몸의 수분이 마를 정도로 뜨거운 열기, 한순간 바라본 것만으로 시력을 잃을 정도로 강렬한 빛.

그건 작은 태양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끄아아아악!!!"

플레어를 마주한 하타이는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작은 태양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만 누구도 그 움직임을 확인할 순 없었다.

아이리우스와 헤이론은 진즉 눈을 감았고, 하타이는 시력을 잃었으며, 제노스 또한 광열을 느낌과 동시에 눈을 감아 시력을 보호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지 못한다 해서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없이 느리게 낙하한 태양이 지면에 닿은 순간.

치이이이이이이이익-!!

지면에 닿은 플레어가 들끓는 소리와 함께 땅을 녹였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뜨거운 열기는 주변을 휩쓸었다. 용광로가 숨을 토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

광원이 사라진 걸 깨닫고 눈을 뜬 제노스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놓쳤나."

아이리우스의 헤이론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도 시야가 제한된 틈을 타 도망친 것일 터.

제노스는 잠시 추격을 고민했으나 이내 포기했다.

정상이 아닌 지금 상태로 그들과 다시 붙어 봐야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대단한 기술이군.'

플레어가 떨어진 곳에는 용암이 흐르고 있었다. 가히 압도적인 파괴력.

기술의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은 아닐 터였다. 완성에 필요한 시간도 길어 보였고.

하나 그렇다고 해서 폄하될 만한 기술은 아니었다. 그만한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사용할 만한 가치가 충분해 보였으니.

한동안 아이리우스가 떠난 빈자리를 응시하던 제노스는 이내 하타이를 바라봤다.

그는 용암이 흐르는 곳 근처에 쓰러진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플레어에 직격당하는 건 간신히 피해 냈지만, 몸 전체에 심한 화상을 입는 것까진 피할 수 없었다.

눈 또한 완전히 기능을 잃었는지, 얼핏 보이는 눈동자가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용케도 살아남았군.'

호랑이 부족 특유의 강한 신체 능력이 아니었다면 죽고도 남았을 정도.

그러나 제노스는 그에게 걱정 어린 말을 건네는 대신, 분노를 억누르며 그의 행동을 질책했다.

"이번 일은 책임을 져야 할 거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다. 미래의 대적이 될지도 모르는 이를 그 때문에 놓쳤으니.

하나 그럴 순 없었다. 어리석긴 해도 호랑이 부족의 족장이었다. 그를 함부로 죽였다간 호랑이 부족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었다.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지만.'

사실 호랑이 부족과의 전쟁은 큰 부담이 아니었다.

개개인이 강력하다지만, 족장을 잃은 그들을 상대하는 건 쉬웠다. 아닌 말로, 루드 혼자 나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과정에서 생겨날 다른 부족들의 반발.

'괜히 부족들 간의 연대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아무리 죄를 졌다지만, 한 부족의 족장을 마음대로 죽이면 다른 부족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선 안 되지.'

더 이상 바깥대륙의 부족들끼리 상쟁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하여 제노스는 하타이를 죽이는 대신 그를 챙겼다. 죽이더라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죄를 밝힌 후 죽여야 했다.

그래야 명분이 생기고, 정당한 처벌이란 게 입증될 테니.

'뭐, 이 상태라면 가만히 내버려둬도 금방 죽을 것 같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으나. 하타이의 상태는 심각했다. 온몸이 녹았다 눌어붙어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고, 각각의 신체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 수준이었다.

"제노스 님!!"

그때, 제국군을 추격했던 부하들이 돌아왔다.

제국군이 언덕 지형에 들어서며 추격이 어려워지자, 너무 깊숙이 따라가지 말라던 제노스의 명을 기억하고 복귀한 것이었다.

"이건 대체…!"

그들은 변화한 주변 풍경을 보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땅이며 암석이며 이 지경이 됐단 말인가.

"고생했다. 돌아가지."

그러나 제노스는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대신, 바닥을 기는 하타이의 복부를 가격했다.

이렇다 할 소리도 내지 못하고 기절한 하타이.

그를 부하들에게 넘긴 제노스가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하타이를 잘 챙겨라. 전쟁이 끝난 후 죄를 물어 처벌할 것이니."

"하타이라니… 설마 이 자가 하타이입니까?"

"자세한 건 돌아가는 길에 설명해 주마. 일단은 복귀하지. 조금 힘들구나."

"아, 알겠습니다."

부하들은 자신들이 받아 든 이가 하타이란 소식에 깜짝 놀랐다.

워낙 화상이 심해 누군지 알 수 없었는데 그 정체가 호랑이 부족의 족장이라니.

어쩌다 이런 꼴이 됐는지, 그보다 어떻게 이곳까지 쫓아왔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하타이를 들쳐 맸다. 한눈에 봐도 제노스의 상태가 좋지 않았으니 복귀가 우선이었다.

'루드는 잘하고 있겠지.'

부하들과 함께 돌아가던 제노스는 멀리 동쪽을 바라봤다.

뱀 부족의 본진이 자리하고 있는 방향.

지금쯤이면, 그쪽에서의 싸움도 끝났을지 몰랐다.

* * *

제노스와 갈라선 루드는 곧장 뱀 부족 진영으로 향했다.

제국군이 빠진 덕에 대평원에 남아 있는 적은 그들 하나였다. 적아를 구별하는 게 훨씬 수월해진 상황.

뱀 부족을 공격하는 루드의 행동엔 거침이 없었다.

빠르게 적을 처치하며 이동한 루드는 어느새 뱀 부족의 본진에 다다랐다. 안력을 돋우지 않아도 뱀 여왕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제 다 왔다.'

길었던 전쟁의 끝이 가까워졌다. 이대로 뱀 부족을 처리한다면 전생보다 훨씬 빠르게 바깥대륙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다. 그럼 제국에 대항하는 것도 훨씬 수월해지겠지.

"저자를 막아라!"

그때, 루드를 발견한 뱀 여왕이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홀로 서 있는 그에게서 무언가 꺼림칙함을 느낀 까닭이었다.

여왕의 명에 곧장 움직이는 병사들.

'이 녀석들 역시 세뇌된 상태군.'

그들을 확인한 루드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세히 살피면 그들의 눈에 초점이 없고 입가에 침이 흐르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환혹의 힘으로 정신을 건드린 건가.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병사들이 루드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콱-!!

루드의 검이 병사의 목에 박혔다. 원래라면 단숨에 목을 잘라 냈어야 할 공격이지만 목뼈에 걸린 검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정신만이 아니라 신체도 건드렸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뱀 부족이 가진 정수를 활용해 무언가를 했을지도 모를 일.

'칫, 귀찮게 됐군.'

오러를 사용한다면 단숨에 벨 수 있겠지만 루드는 그러지 않았다.

'이런 병사가 몇이나 있는 거냐.'

사르한이 언덕 지형에서 이끌었던 병사들도 전부 이런 상태였다.

현재 전장에서 후드를 쓰고 있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

그들의 수가 얼마나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 전부를 오러로 상대할 수는 없었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마력을 아껴야 했다.

결국 루드는 목에 박힌 검을 그대로 둔 채, 다른 검을 찾아 나섰다.

한눈에 봐도 성한 것들이 없었지만, 무엇을 들든 빈손보단 나을 터.

하지만 그때, 슬라브가 의사를 전달했다.

뀨-!

- 도와줄게!

팔뚝에 감겨 있던 슬라브가 한순간에 장검으로 변했다. 루드의 손에 익숙한 크기. 심지어 날에서 느껴지는 예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고맙다."

스걱-!

검을 쥐자마자 느꼈던 대로, 검이 품은 예기는 대단했다.

슬라브는 강화된 병사들을 종이 자르듯 베어 넘겼다. 실로 압도적인 절삭력.

강화 병사들을 처리하는 루드의 속도가 빨라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마력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검이 가진 예기로만 적을 쓰러트린 루드는 어느새 뱀 여왕의 앞에 당도했다.

그가 지나온 길은 강화 병사의 시체로 가득했다.

"너, 너는! 황혼 부족의!"

그때 루드의 얼굴을 확인한 누군가가 경악에 찬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본 루드는 씨익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잘 지냈나, 헤슬리?"

하얗게 질린 얼굴의 그녀는 헤슬리였다. 일전, 황혼 부족의 비전을 훔치란 명을 받고 모치란과 합을 맞췄던 인물.

딱딱하게 굳은 그녀는 입만 벌린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너로구나. 바로 너였어."

그 반응에 무언가를 깨달은 뱀 여왕은 탄식을 흘렸다.

눈앞의 상대가 자신의, 뱀 부족의 대계를 망가뜨린 주범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비단 황혼 부족에서의 일뿐만이 아니었다.

"사르한을 죽인 것도 너구나."

뱀 여왕은 루드에게서 느껴지는 사르한의 잔재를 느꼈다. 정확히는, 그가 가져갔던 '마의 정수'의 흔적을.

'이상하다 생각했다. 적이 제노스 하나가 아니었던 거야.'

제노스는 분명 대단한 강자였다. 하지만 그건 사르한도 마찬가지.

마의 정수까지 가져간 사르한이었으니, 전투에서 패배할지언정 제노스의 목숨은 뺏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사르한은 마의 정수를 흡수해 괴물이 됐음에도 제노스를 죽이는 데 실패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됐다.

"모든 게 네놈 탓이로구나."

뱀 여왕은 루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사르한은 이번 전쟁의 핵심이었다. 그가 제노스를 처리해 줄 거라 믿고 모든 계획을 세웠었다.

하지만 이제, 그 계획들은 전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오랜 대계가 이리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무려 두 세대에 거쳐 준비한 대계였다. 이리 간단하게 무너질 게 아니었다.

그때, 뱀 여왕의 동공이 확장됐다.

현실에서 동떨어진 기분과 함께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자신과 소크란이 함께 참살당하는 모습.

그리고 그들을 벤 것은… 눈앞의 적이었다.

'…미래? 아니 소크란은 이미 죽었으니 그럴 리 없다. 그렇다면 대체….'

경지에 오른 주술사는 때때로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볼 때가 있었다.

하여 미래를 본 걸까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기에는 이상했다.

소크란은 이미 죽었고, 그녀가 다시 살아 돌아와 이곳에서 죽을 리도 없을 테니.

'설마.'

혼란에 빠졌던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조금 전 자신이 본 것이 미래도, 현재도 아니라면....

'아니, 그럴 리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과거에 있었던 일이라니!'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며 상념을 떨친 뱀 여왕은 주술을 맺었다.

비록 이번 전쟁은 패배했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정수들도 있으니 숨죽이고 기다리다 보면 언제고 기회가 생길 터.

"사라바라 하라사라마사라 사!!"

그런 희망과 함께 완성된 주술이 루드를 공격했다. 그녀의 주위로 자리 잡은 주술사들 또한 갖은 주술을 펼쳤다.

그러나.

"통할 성싶으냐."

역대 최고의 재능이라 꼽히던 사르한의 주술도 통하지 않았던 루드에게, 그들의 주술이 통할 리 없었다.

아무런 효용도 발휘하지 못한 채 사라진 주술들.

그나마 뱀 여왕의 것이 조금 더 길게 버텼지만, 그녀의 주술 또한 사라지고 만 건 똑같았다.

주술을 파훼한 루드는 거침없이 주술사들의 목을 베었다. 강화 병사라는 보호 수단을 잃은 그들은 속절없이 쓰러졌다.

'어쩔 수 없다. 힘을 견디지 못해 괴물이 되더라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뱀 여왕은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최후의 최후까지 망설였지만, 이대로는 모든 게 끝이었다.

그녀는 품에서 만지작거리던 정수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내버려둘 것 같으냐."

그때를 기다리고 있던 루드의 검이 그녀의 손목을 갈랐다.

"위기에 몰리면 그렇게 나올 거라 예상했지."

"아, 안...!"

정수를 쥔 채로 떨어진 손목을 짓밟은 루드는 천천히 뱀 여왕에게 다가갔다.

최후의 수단마저 봉쇄당한 뱀 여왕이 무언가 말을 뱉으려 했지만… 그보다 루드의 검이 그녀의 머리를 베는 게 더 빨랐다.

서걱-!

용이 되길 꿈꿨던 삿된 뱀의 머리가 떨어졌다.

길었던 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48화

전쟁이 끝났지만 쉴 시간은 없었다.

까마귀 부족을 도와 전쟁에 참여했던 부족들은 각각의 피해를 확인했다.

전사자가 몇이나 되는지, 부상자들의 상태는 어떤지.

이외에도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적군의 시체를 불태워야 했으니, 오히려 전쟁 중일 때보다도 더 바빴다.

마침내 전쟁의 수습이 끝난 건, 루드가 뱀 여왕의 목을 벤 지 나흘이 지났을 때였다.

시체로 가득하던 대평원이 본래의 푸름을 되찾자 제노스는 전쟁의 완전한 종결을 선언했다.

"다들 고생하셨소."

"우리야 뭐, 거들기밖에 더 했나. 까마귀 족장이야말로 고생하셨소."

제노스의 인사에 콩파스가 겸양을 보였다. 하지만 제노스는 고개를 저었다.

"여명 부족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쉽게 끝날 수 없었을 거요."

"그렇게 말해 준다면야 고마울 따름이오."

비록 직접 전장에 서진 않았지만, 콩파스가 이끄는 여명 부족은 후방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질 좋은 무구들을 공급하고 진지 공사를 도맡아 준 덕에 다른 이들은 온전히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제국군의 수를 줄이기 위해, 자신들의 터를 미끼로 쓴 황혼 부족에게 머물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준 것도 여명 부족이었다.

누구도 그들이 전선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공을 깎아내릴 수는 없었다.

"모두 모였으니 시작하겠소."

까마귀, 황혼, 여명, 호랑이.

뜻을 함께한 각 부족의 족장들이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제노스가 운을 띄웠다.

지금 이 회의는 이번 전쟁의 결과를 공유하고 향후 대책을 논하기 위한 것으로, 제노스의 제안으로 마련된 자리였다.

시작은 부족들의 사상자 현황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제국군을 직접 마주한 호랑이 부족과 까마귀 부족에서 피해가 가장 컸으며, 황혼 부족은 타 부족보다는 덜했지만 대신 정예병들의 손실이 꽤 있었다.

"생각보다 많군."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제국과 뱀 부족이 입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피해. 하지만 그들이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는 큰 피해였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들이 많았으니."

그 이유는 단순했다. 상정했던 것을 벗어난 일들이 거듭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인정하오. 사르한 그 작자가 괴물이 됐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얼마나 놀랐던지."

"동감이네. 설마 그 괴물이 사르한이었을 줄이야."

모두가 그 사실에 동의했다.

괴물로 변하기 전의 사르한도 소드마스터에 오른 대단한 강자였으나, 괴물로 변한 그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존재였다.

그가 내뿜는 마력의 파동에 닿은 것만으로도 호흡이 어려웠을 정도.

뒤늦게 그 괴물의 정체가 사르한이었단 걸 깨닫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칫하면 전멸하는 게 뱀 부족이 아니라 우리일 뻔했어."

"그러게나 말이야. 제노스 공께서 쓰러트려 줘서 천만다행인 일이지."

바치란과 콩파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제노스와 루드가 사르한을 막지 못했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자신들이 아니라 뱀 여왕이었을 것이다.

"지긋지긋한 뱀 부족이 드디어 사라졌군."

"맞아. 그들의 영토에 남아 있는 이들이 있겠지만… 이곳에 오지 않은 이들이야 이렇다 할 전력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니 걱정할 건 없겠지."

하지만 사르한은 죽었고, 뱀 부족 또한 패망했다. 오랜 시간 다른 부족들을 이간질하며 그 힘을 갉아먹던 존재가 마침내 사라진 것이다.

그들의 술수에 직접적으로 노출됐던 황혼과 여명 부족이 느끼는 감회는 특히 남달랐다.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제노스는 이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제국군을 패퇴시키고, 목적했던 대로 뱀 부족을 정리한 것도 좋았지만... 모든 게 잘 끝난 건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제국에 두 명의 소드마스터가 탄생했소."

"그게 정말이오?"

"그거 큰일인데, 괜찮은 겁니까."

제국에 탄생한 새로운 소드마스터들. 그 소식에 바치란과 콩파스가 염려를 나타냈다.

하나만 해도 전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존재가 무려 둘이나 생겨나다니.

'누구의 방해만 아니었어도 죽일 수 있었건만.'

아이리우스와 헤이론을 떠올린 제노스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타이만 아니었어도 아이리우스를 죽일 수 있었을 터였다.

"하타이, 무언가 할 말이 없나."

제노스의 차가운 시선이 회의실 한구석의 하타이를 응시했다. 그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상태였다.

금세 죽으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생사의 고비를 넘어 기적적으로 살아남는 데 성공한 것.

남은 평생을 끔찍한 몰골로 살아가야 하겠지만, 그로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글쎄."

제노스에게 지목당한 하타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대 일부가 녹아내린 그의 목소리는 무언가 날카로운 것을 긁는 것처럼 소름 끼쳤다.

"너 때문에 제국의 새로운 소드마스터를 놓쳤다. 그런데도 할 말이 없다고?"

"녀석들을 놓친 게 내 탓이라고? 네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뭐?"

"내가 없었으면 녀석들을 잡았을 거란 보장이 있나?"

쉰 소리로 대꾸하는 하타이의 태도는 날 서 있었다.

'괜히 낮추고 들어갈 필요 없다.'

실수를 인정했다간 빌미를 줄 뿐이니, 강하게 나서기로 한 것. 다른 부족도 있으니 자신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거란 계산도 있었다.

"...."

뻔뻔한 하타이의 태도에 제노스는 말문이 막혔다. 사과까지는 아니어도 미안한 기색 정도는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너무 과대평가한 모양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아는 바 있소?'

'나도 처음 듣는 소리요. 일단은 지켜봐야 할 것 같소.'

바치란과 콩파스는 숨죽인 채 상황을 지켜봤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타이 때문에 제국의 소드마스터를 놓친 것도 같은데,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분위기.

그때, 제3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당신의 말처럼, 당신이 없었어도 아버지께서 그들을 잡았을 거란 보장은 없죠."

"너는 또 뭐냐."

"루드란테라고 합니다. 까마귀 족장의 후계자이자, 아들이죠."

루드는 하타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타이 또한 루드를 향해 웃어 보였다.

"거봐라. 네 아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냐. 내가 없었어도 너는 녀석들을 잡지 못했을 거다."

생각지도 못했던 우군을 얻은 하타이는 의기양양해졌다. 하지만, 루드는 그의 생각처럼 그의 아군이 아니었다.

"반대로, 당신이 없었다면 아버지께서 그들을 잡았을 수도 있는 거고요."

"…뭐 하자는 거지. 지금 말장난이나 할 때인가!"

그것을 깨달은 하타이가 으르렁거렸다. 이 어린 녀석이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이렇게 됐나. 아깝긴 하지만 하타이의 역량은 딱 이 정도라는 거겠지.'

한편, 그런 하타이의 모습에 루드는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다.

전생의 하타이는 호랑이 부족과 함께 많은 제국군을 쓰러트렸었다.

그들의 이름만 들려도 두려움에 떠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으니, 제국과의 전쟁에서 그들이 큰 역할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하타이의 성정은 문제가 됐었다. 잦은 항명과 독단적인 행동은 다른 연합군에게 악영향을 미쳤다.

무력을 통해 찍어 누르기도 했으나 그것도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특히 전쟁 후반에는 자신의 몸 상태가 안 좋아져 그것마저도 어려웠다.

결국 명령을 벗어나 움직인 하타이는 마음대로 용사를 상대했고, 끝내 죽음을 맞았다.

그로 인해 연합군이 큰 피해를 봤음은 당연했다.

'이번 생엔 다를까 했지만....'

지금의 모습을 봐선 헛된 희망 같았다.

루드는 여기서 하타이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제노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만한 일을 저지르고도 저런 태도라니, 갱생의 여지가 없었다.

하타이의 무력이 아깝긴 했지만, 이번 생의 연합군엔 독단적이기만 한 무력 부대는 필요하지 않았다.

이대로 둔다면 추후 만들어질 연합군에 악영향을 미칠 게 뻔했으니, 여기서 처리할 생각이었다.

"장난이라뇨. 서로의 의견이 이토록 다르니 누구의 말이 맞는지 가리자는 말입니다."

"그걸 무슨 수로…."

"호랑이 부족에서 이럴 때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설마."

"예."

씨익 웃은 루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투(虎鬪) 말입니다."

호투는 호랑이 부족의 전통이었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가릴 수 없을 때, 대립하는 사람끼리 대결을 펼쳐 승자의 손을 들어 주는 제도.

다시 말해 지금 루드의 말은, 한판 붙자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으나 보다시피 부상이."

제노스의 무력을 떠올린 하타이는 곧장 핑계를 댔다. 하지만 부상을 핑계로 대리란 건 이미 예상했던 바.

"대리인을 내세워도 좋습니다. 아니지. 호투의 당사자가 호랑이 부족의 족장이시니, 호랑이 부족 전체를 동원해도 좋습니다."

루드는 굳이 본인이 아니어도 되고, 심지어는 부족 전체를 이용해도 좋다고 대답했다.

상대의 자존심을 긁는 말.

"…이 오만한! 죽고 싶은 거냐."

"아비를 믿고 뻗대는 것도 정도가 있다."

그 말에 반응한 건 하타이의 곁에 서 있던 호랑이 부족의 대전사들이었다.

까마귀 족장이 대단한 강자인 것은 맞았으나, 그것이 그의 아들이 저지른 실수를 눈감아 줄 이유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루드는 제노스의 그늘에 숨을 마음이 없었다.

"참고로 호투에 참석하는 건 제가 될 겁니다. 아버지의 대리인 신분으로요."

호랑이 부족은 루드의 진면목을 몰랐다.

이번 생에선 루드와 그들이 직접 만난 적이 없었고, 대평원에서도 루드가 더스틴의 모습으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루드는 뱀 여왕을 상대할 때가 돼서야 본 모습으로 활동했고, 그 당시 호랑이 부족은 루드와 먼 곳에서 미처 도망치지 못한 제국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일부러 호랑이 부족의 전통에 맞추고, 대리인까지 허용해드렸습니다. 이래도 피하실 겁니까?"

"...좋다."

거듭된 도발에 하타이가 마침내 루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신들의 전통인 호투를 언급하며 나섰으니, 이 이상 피하는 것도 어려웠다.

'제노스라면 모를까 그 아들을 상대하는 거라면 얘기가 다르지. 차라리 잘 됐다. 본인들이 먼저 제안한 것이니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다른 말은 못 하겠지.'

하타이는 이참에 제노스의 아들을 꺾어 제노스의 입까지 막을 생각이었다.

먼저 호투를 제안한 건 그들이니, 결과를 따를 수밖에 없을 터.

한 가지 걸리는 건 제노스의 아들이 보이는 자신감이었다. 이렇게 나선다는 건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소린데….

하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이쪽에선 부상당한 자신을 대신해 대전사가 나설 테니.

'대전사라면 상대하고도 남겠지. 정 안 되면 녀석들이 원하는 것처럼 부족 전체가 나서면 될 일이고.'

만약 대전사가 진다고 해도 최후의 수단이 남아 있었다. 분명 부족 전체가 덤벼도 된다고 했었으니.

하타이는 붕대 속으로 웃음을 띠었다.

하지만 시력을 잃은 그는 루드와 제노스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없었다.

"결정됐군."

제노스가 상황을 정리했다.

"하타이와 내 의견 중 누구의 것이 맞는지 호투를 통해 정한다."

다만, 단순히 누구의 의견이 맞는지만 판가름해선 의미가 없겠지.

"만약 내 아들이 이긴다면, 하타이는 제국의 소드마스터를 구해 준 것이니, 그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요."

제노스는 호투의 결과에 따라 하타이를 처벌하길 원했다. 그러자 하타이도 지지 않고 나섰다.

"그럼 반대로 내 의견이 맞는 걸로 나온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거지?"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그게 뭐든."

"내 발밑을 기는 것도 말이냐."

"그런 걸 원한다면 기꺼이."

"좋아."

하얗게 물든 하타이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저 대단한 소드마스터를 제 발아래 둘 기회였다.

'제정신이 아니군.'

그 모습을 확인한 루드는 혀를 찼다. 패배의 충격 때문일까, 하타이는 어딘가 망가진 것 같았다.

전생의 그는 막무가내일지언정 사내로서의 기개가 있었는데, 지금의 그에겐 그마저도 없어 보였다.

"호투는 언제 진행할 거지?"

제노스가 루드와 하타이에게 의견을 물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대답했다.

"당장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바로 하지."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49화

호투는 대평원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힘을 쓸 수 있는데다, 많은 군중들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소식이 알려지자 어마어마한 인파가 대평원으로 몰렸다. 당사자라 할 수 있는 까마귀와 호랑이 부족은 물론, 아직 자신들의 부족으로 돌아가지 않은 여명과 황혼 부족의 사람들도 모두 호투를 보기 위해 대평원을 찾았다.

누군가는 이 싸움의 결과가 가져올 반향을 확인하기 위해.

누군가는 순전히 싸움 구경을 즐기기 위해.

저마다의 목적은 달랐으나 그들 모두가 호투의 결과를 궁금해한다는 것은 똑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향한 중심엔, 루드가 서 있었다.

"약속대로, 이쪽은 아버지를 대신해 제가 나설 겁니다. 호랑이 부족에선 누가 나설 거죠?"

"그리 재촉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네놈을 상대할 이는 정해 놨으니."

하타이가 신호하자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조금 전의 회의에도 참석했던 두 명의 대전사 중 하나였다.

"호랑이 부족의 대전사, 카모이다."

"까마귀 부족의 루드란테입니다."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던 아까 전과 달리, 호투를 위해 나선 카모이는 차분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루드는 그의 내면이 활화산처럼 들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뛰어난 전사군.'

불타오르는 감정은 전투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도 했다.

카모이 또한 그것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가슴은 뜨거우면서도 머리는 차가운 상태를 만든 것이겠지.

하지만 그가 아무리 훌륭한 전사더라도, 루드에 비할 바는 못 됐다.

'조금은 미안하군.'

하타이를 제거하기 위해 호투를 이용하고 호랑이 부족을 상대하게 됐지만, 그게 호랑이 부족에게 악감정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몇몇을 제외한 호랑이 부족의 전사들은 전사의 표본으로 본받아 마땅한 이들이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러나 하타이를 없애기 위해선 이게 최선이었다. 호투를 통해 그를 제거해야지만 다른 부족의 동요를 예방할 수 있었다. 호랑이 부족도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테고.

"양측, 준비됐나."

호투의 심판을 맡은 건 바치란이었다. 루드와 카모이의 준비를 확인한 그는 손을 내리며 호투의 시작을 알렸다.

"시작!"

그와 동시, 카모이가 루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비호의 걸음은 바람과 같으니."

양손에 클로를 찬 카모이는 중심을 흔들며 루드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커다란 몸집에서 나온 것이라곤 믿기지 않는 속도와 현란함이었다.

하지만 루드는 이런 움직임에 익숙했다.

'휴이가 생각나는군.'

카모이의 움직임은 휴이를 연상시켰다. 클로를 착용한데다, 그의 몸집이 휴이와 비슷했기에 더욱 그랬다.

'휴이에 비하면, 한참 느리다.'

그러나 그와 휴이 사이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었다.

루드는 카모이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미 최고 속력에 도달한 카모이에 비해 한참 늦은 움직임.

사람들은 카모이와 충돌한 루드가 큰 충격을 입고 튕겨 나갈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루드를 눈앞에 둔 카모이의 생각은 달랐다.

'!!!'

절묘하게 뻗은 한 걸음. 자신의 움직임에 맞춰 정확히 디딘 그 걸음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늦는다!'

카모이는 무언가를 느꼈다.

지금은 자신이 더 빠르지만, 어째선지 서로 교차하는 순간엔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감각.

"큭!!"

위화감을 느낀 카모이는 본능적으로 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이 충돌하기 직전, 간신히 경로를 비튼 카모이의 신형이 직각으로 꺾이며 멀어졌다.

'훌륭하군.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상함을 느끼자마자 공격을 포기한 판단력과 최고 속도에 이른 몸을 제어한 신체 능력은 분명 대단했다.

그러나 루드가 카모이와의 싸움을 빠르게 끝내기로 결정한 이상, 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건 남아 있지 않았다.

"비호의 걸음은 바람과 같다 했나? 그럼 어디 한번 도망쳐 봐라."

반발력을 이용해 멀리 벗어나던 카모이의 앞에 루드가 나타났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슨!"

루드가 순식간에 자신을 따라잡자 카모이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정지 상태에 있던 그였다.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그러나 진짜 놀라운 건 이제부터였다.

'태호의 발톱은 바위를 쪼개니.'

카모이는 몸을 회전시키며 클로를 휘둘렀다. 제대로 걸린다면 트롤의 가죽도 단숨에 찢을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다.

"빈손을 휘둘러서 어쩌자는 거지?"

"그게 무슨…!!!"

하나 그의 공격은 루드에게 닿지 않았다. 아니, 닿을 수 없었다. 그의 클로는 이미 가루가 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으니.

콰앙-!!

루드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수도에 목을 직격당한 카무이가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의식이 날아간 그는 쓰러진 채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승자는 루드란테군."

바치란은 덤덤히 승자를 호명했다. 다른 군중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루드의 승리를 예상했기에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때, 바치란의 판정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뇨, 아직입니다."

놀랍게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루드였다. 그는 제노스의 곁에 앉아 있는 하타이를 바라봤다.

"다른 이들을 더 내보내도 상관없습니다. 애초에 그런 약속이었으니까요."

"이익, 사루이! 이번엔 네가 나서라."

카모이가 패배했음을 깨달은 하타이는 또 다른 대전사를 내보냈다.

자존심이 상하긴 했으나 상대의 제안에 응했을 뿐이니 문제될 건 없었다.

"호랑이 부족의 사루이."

"까마귀 부족의 루드란테."

처음과 마찬가지로 대결은 서로의 이름을 나눈 뒤 시작됐다. 그리고 그 결과도 첫 번째 대결과 다르지 않았다.

쿵-!!

부러진 참마도와 함께 사루이가 힘없이 고꾸라졌다.

"승자, 루…."

"여전히 안 끝났습니다."

이번에도 바치란의 판정을 막은 루드는 계속해서 하타이를 자극했다.

"고작 이게 전부입니까? 더 없습니까? 아니지, 호랑이 부족이 전부 덤비는 건 어떻겠습니까. 모두 한꺼번에 말이죠."

일개 개인으로서 한 부족을 상대하겠다는 말. 하타이만이 아니라 이곳에 자리한 호랑이 부족 전체를 무시하는 태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얼굴이 붉어진 호랑이 부족의 전사들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감정은 나중에 풀어도 된다.'

지금의 언행이 그들을 자극한다는 건 루드도 잘 알았다. 다만 그로 인한 문제는 나중에 해결해도 충분했다.

"감히 우리를 능멸해? 모두 저 애송이에게 쓴맛을 보여 줘라!"

하타이의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전사들이 모조리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전사들의 세례는 보고만 있어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의 공격도 루드에게 닿지 못했다.

털썩-.

대평원에 쓰러진 전사들이 쌓여 갔다.

루드는 검조차 꺼내 들지 않은 상태로 그들 모두를 상대했다.

"이이이익!!!"

마침내 마지막 전사까지 처리한 루드는 천천히 하타이를 향해 다가갔다.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루드는 이내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그런데, 왜 호랑이 부족의 모두가 나서는 와중에도 안 나오시는 겁니까? 부족의 족장이시란 분이."

"뭐어…? 그야 부상이!"

"저기 쓰러져 있는 이들은 모두 정상으로 보이는 겁니까? 아, 죄송합니다. 이제 앞이 안 보이신다는 걸 깜빡했군요."

"네놈!"

한차례 어깨를 으쓱한 루드는 눈이 보이지 않는 하타이를 대신해 쓰러져 있는 전사들의 모습을 설명했다.

"저기 쓰러져 있는 이들 중 온전한 상태인 이가 몇이나 될 것 같습니까."

"뭐?"

"내상이 다 낫지 않은 이, 팔이 부러진 이, 다리를 저는 이, 심지어는 팔다리 중 한 곳이 잘린 이도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각자의 몸을 돌보는 대신 호랑이 부족을 모욕한 저를 쓰러트리기 위해 달려들었고요."

루드가 굳이 호랑이 부족 전체를 자극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더 이상 하타이는 긍지 높은 호랑이 부족의 전사가 아니고, 그에겐 족장의 자격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무엇보다 이 호투의 주인은 당신이 아닙니까. 정말 당신의 부상이 당신이 호투에 나서지 않을 이유가 된다고 생각합니까?"

어느덧 정신을 되찾은 호랑이 부족의 전사들은 루드와 하타이의 대담을 전부 듣고 있었다.

'예전의 하타이였다면 자신이 죽을 걸 알더라도 달려들었겠지.'

하타이가 생각했던 대로 움직여 줄까 하는 걱정도 있었으나, 다행히 지금의 하타이는 생각했던 그대로의 인물이었다.

과거의 그는 막무가내였을지언정 겁쟁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소인배에 불과했다.

"하타이 당신에게 호투를 신청합니다."

대리인도, 부족을 내세우는 것도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루드는 다시금 호투를 신청했다.

"...."

하타이로선 그것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아니, 명분이 있더라도 거절할 수 없었다.

이대로 호투에서 패배했다간 제국의 소드마스터를 살려 보낸 죄로 처형을 면치 못할 테니.

"좋다, 그리 원한다면 내가 직접 상대해 주마."

그는 분노했다. 한때 부족 최강의 전사이자 바깥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던 자신이다.

하지만 지금, 새파란 애송이가 자신의 권위를 조롱하고 있었다.

이제 부족이고 뭐고 상관없었다. 저 나불거리는 주둥이를 직접 뭉개 버리지 않고서는 마음이 편치 않을 테니까.

그런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하타이의 어깨를 짓누르는 손이 있었다.

"이번 호투의 패배를 인정한다."

"뭐? 누구 마음대로!"

"족장님. 아니, 하타이."

그 손의 주인은 카모이였다. 금방 의식을 되찾았던 그는 일련의 사태를 모조리 지켜봤고, 결론을 내렸다.

"그대에겐 더 이상 족장의 자격이 없다."

"카모이! 네놈이 감히!"

"이건 나만의 생각이 아닌, 호랑이 부족 모두의 생각이다. 안 그런가?"

그건 비단 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카모이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금세 정신을 차렸던 전사들을 바라봤다.

'귀신같은 솜씨군. 이 많은 이들을 모조리 기절시키고 깨어나는 시간까지 조절하다니.'

루드에게 당했던 전사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모두 깨어나 있는 상태였다.

이 많은 숫자를 상대하며 의식을 되찾는 시점까지 조절하다니.

카모이는 감히 루드가 어떤 경지에 올랐을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족장에게 실망했다."

"족장이란 이름이 아깝군. 저런 인물을 여태 족장이랍시고 따랐다니."

"서둘러 새로운 족장을 뽑자고!"

카모이의 시선을 받은 전사들은 입을 모아 하타이를 규탄했다.

"이, 이이... 뭐가 어쩌고 어째?!"

순식간에 등 돌린 부족원들을 향해 하타이가 분노를 드러냈으나, 겁먹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타이는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최소한의 긍지조차 잃어버린.

"...기권으로 알아도 되겠는가?"

"예."

"그럼, 결과를 발표하지. 이번 호투는 루드란테의 승리. 따라서 제노스의 의견이 맞는 걸로 판결하겠네."

잠시 루드의 눈치를 살핀 바치란은 그가 끼어들지 않자 호투의 결과를 발표했다.

"애석한 일이군."

호투가 마무리되자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제노스가 몸을 일으켰다. 하타이를 바라보는 그는 정말로 안타까워했다.

"그토록 강자와 싸우고 싶어 하더니, 정작 진짜 강자와 싸울 기회는 스스로의 발로 차 버렸으니 말이야."

호랑이 부족을 떠날 때만 해도 대평원에서 있을 강자와의 싸움을 기대하던 하타이였다.

하지만 아이리우스에게 패배한 뒤, 그는 어딘가 뒤틀려 버리고 말았다.

고작 마스터의 경계에 서 있던 인물이 아닌, 진짜 마스터를 상대할 기회가 왔음에도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이란... 한심을 넘어 연민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한 가지 청이 있소."

그때. 카모이가 조심히 말문을 열었다.

"그대들이 이겼으니 그대들의 뜻처럼 하타이를 처벌할 생각이겠지."

"그래."

"혹 그것을 우리가 대신 해도 되겠소?"

아무리 한심하게 변했다고는 하나, 한때 믿고 따랐던 족장이었다. 그때까지 보여 줬던 모습들은 기개 높은 전사의 것이었고.

하여 카모이는 하타이가 그냥 죽게 둘 수 없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하타이는 죽을 거요. 다만 전사로서 죽을 수 있게 해 줄 생각이오."

최소한 그의 죽음은 자신들의 손으로 이뤄져야 했다. 그것이 그를 위한 것이자, 자신들 부족을 위한 것일 테니.

"흠. 좋아. 그렇게 하지. 대신, 그가 죽었다는 건 확실히 증명해 줘야 할 거야."

"물론이오. 그대들의 배려에 고마움을 표하는 바요. 우리는 먼저 떠나 보겠소. 해야 할 일들이 많을 것 같거든."

제노스를 향해 작게 고개 숙인 카모이는 그대로 하타이를 들쳐멨다.

"뭐, 뭐 하는 짓이냐! 놔라! 누구 마음대로 날 죽인단 말이냐! 카모이! 네놈! 네 녀석들!!!"

어깨에 실린 하타이가 악을 질렀으나, 누구도 그 목소리에 대꾸하지 않았다.

"호랑이 전원, 부족으로 돌아간다."

그저 카모이의 말을 따라 동료들과 함께 부족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를 뿐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5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