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 - 160-170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60화

까마귀 부족을 떠난 루드는 베르타스를 첫 목적지로 삼았다. 이번 생에서 도서관장 벨로티와 처음 만났던 곳으로, 도서관의 지부가 있는 도시였다.

도서관을 가장 먼저 방문하기로 한 건 중앙대륙에서 해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즈문 가의 멸문에 대한 단서도 찾아야 했고, 페드리와 쿠두스도 만나야 했으며, 종말학파를 찾아가 고대문자의 해석이 끝났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그뿐 아니라,

'니르바 아틸테헨도 늦지 않게 만나 봐야겠지.'

세바니아 왕국의 소드마스터이자, 지난 생에서는 정수의 힘이 폭주하며 죽었던 니르바도 만나 볼 생각이었다. 가능하면 그녀에게서 정수를 추출해 흡수하고 싶었다.

이들은 모두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일들. 아즈문 가에 대한 걸 제외하면 자신이 직접 나서야만 했다.

아즈문 가에 대한 것도 도서관에 의뢰하면 된다지만, 그들이 정보를 모으는 데도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결국 도서관을 제일 먼저 찾은 이유는 효율성 때문이었다.

"여전히 사람이 많군."

지난 방문 때와 마찬가지로 도서관의 지부인 서점 베르베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정보조직은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있으리란 편견을 이용한 이곳은 사시사철 사람들이 가득했다.

"어서 오세요. 서점 베르베르입니다. 편히 둘러보시고 원하시는 서적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베르베르에 들어서자 익숙한 인사말이 방문을 반겼다. 루드는 과거의 향수를 떠올리며 서적들이 비치된 벽면을 천천히 훑어봤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 중 도서관에 의뢰를 넣을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하는 책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창구 역할을 하는 책이라도 모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책의 종류, 두께, 위치, 이름에 따라 의뢰 내용과 의뢰를 넣을 수 있는 자격 등이 나뉘었으니, 성공적인 의뢰를 위해선 자신에게 알맞은 책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찾으시는 도서가 있으실까요?"

하지만 루드가 책을 고르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일은 없었다.

미켈레 구르드손과 함께 도서관을 비호하는 또 하나의 소드마스터.

거기에 도서관이 직접 발급한 VIP 코드의 소유자.

도서관은 항시 루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베르타스에 입성한 순간부터 이곳의 모두가 그가 왔다는 걸 알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건 루드가 그들이 자신의 행적을 조사하는 것을 묵인해 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 오랜만에 오니 뭐가 어디에 있는지 도통 찾을 수가 없군요."

"하하, 그럴 만하지요. 책들이 워낙 많습니까. 이건 비밀이지만, 저희도 가끔씩 서적의 위치를 까먹곤 한답니다."

베르베르의 직원이 너스레를 떨었다. 루드는 그를 보곤 피식 웃음을 지었다. 여기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익숙한 얼굴이 옆에 있는 까닭이었다.

"혹시 마이데카에 관한 서적이 있을까요?"

"마이데카, 마이데카. 아마 저쪽에 있을 겁니다. 따라오시죠."

그는 루드를 안쪽 깊숙한 곳의 책장으로 안내했다.

서점 베르베르는 크기도 큰데다 책장들이 복잡하게 이뤄져 있어 꼭 미로 같았다.

표면적으로는 더 많은 책을 보관하기 위함이란 명목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정보 조직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구조였다.

안쪽으로 이동하자 금세 주변의 기척이 사라졌다.

"여기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벨로티도 여기 있는 겁니까?"

"아뇨. 도서관장님께서는 지금 세바니아에 계십니다."

"세바니아요? 미켈레 님의 의뢰가 아직 안 끝났나 보군요."

루드를 안내한 사서는 도서관장의 최측근인 타미였다. 그는 세바니아에 있을 벨로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미켈레가 내렸던 첫 번째 의뢰는 끝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미켈레는 첫 의뢰에 이어 연달아 두 번째, 세 번째 의뢰를 넣었는데, 모두 세바니아에서 해결해야 할 내용들이었다.

결국 벨로티는 오랜 시간 세바니아에 발이 묶여 있는 상태였다. 다른 이들을 동원할 수도 있었으나, 미켈레의 의뢰니 자신이 직접 맡겠다고 했다.

"벨로티의 곁에 있으실 줄 알았는데."

"저도 그러고 싶었지만, 벨로티 님께서 다른 일을 부탁하셔서요."

그리고 얼마 전, 벨로티는 제 곁을 보좌하던 타미까지 떠나보냈다.

"다른 일이라고요?"

"네, 루드 님께서 도서관을 필요로 하시면 성심성의껏 도우라 하셨습니다."

루드가 자신들을 필요로 할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이곳 지부를 이용하리란 보장이 없었을 텐데."

"바깥대륙에서 가까우면서, 나름의 추억이 있는 곳이니, 방문하신다면 이곳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군요."

타미가 이곳에 있는 건 루드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그가 직접 나서 준다면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원하는 정보들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

"어떤 정보가 필요하십니까."

"우선 아즈문 가에 대한 모든 정보가 필요합니다. 특히 그들이 멸문한 과정과, 그에 관련된 세력들을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아즈문 가라… 알겠습니다. 당장 생각나는 건 없으나 찾아보면 정보가 나올 겁니다. 혹 나오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찾아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사라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아즈문 가의 멸문에 얽힌 비밀을 풀어야 했다.

'가문의 복수를 이루기 전까진 어디에도 소속될 마음이 없어 보였으니.'

지금도 잠시 뜻을 함께할 수는 있겠으나, 루드가 원하는 건 그 정도가 아니었다.

결국 그녀를 완전히 영입하려면 그녀의 복수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

물론 정보를 얻는 게 쉽지만은 않을 터였다. 오랜 세월 복수를 위해 떠돈 사라조차도 흉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니….

하지만 루드는 도서관의 힘을 믿었다. 그들이라면 분명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가져다주리라.

아즈문 가에 대한 의뢰를 마치고, 루드는 또 다른 의뢰들을 건넸다.

도서관을 찾은 가장 큰 이유는 아즈문 가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또 페드리와 쿠두스가 잘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그건 바로 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두 사람의 근황을 묻자 타미가 빙긋 웃었다. 그들에 관해 질문할 거라 생각하고 미리 답을 준비해 둔 상태였다.

"두 분은 잘 지내고 계십니다. 쿠두스 님은 현재 구드르손 가의 검술 교관이십니다. 미켈레 님께서 제안하셨고, 쿠두스 님께서도 흔쾌히 받아들이신 결과였죠."

"잘 됐군요."

한계 이상으로 공허의 영역을 사용했던 쿠두스는 더 이상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폐인의 몸이었다.

하지만 마력이 없다 해서 여태 쌓아 온 검술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소드마스터를 넘어서겠다는 일념으로 닦아 온 검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그것을 알아본 미켈레 의해 그는 구르드손 가의 검술 교관이 되었다.

"페드리는 어떻습니까."

"페드리 님은…."

"어디가 안 좋은 겁니까?"

"아뇨, 제 입으로 말씀드려도 되나 싶어서요. 페드리 님은 미켈레 님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계십니다. 주변에서 페드리 님을 보고 미켈레 님의 제자가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말이죠."

한편 페드리는 힘든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페드리의 재능을 알아본 미켈레는 그를 제자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페드리는 자신의 스승은 쿠두스 한 사람뿐이라며 단호히 거절했고, 거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됐다.

그가 거절하자 미켈레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쫓아다니며 제자가 될 것을 종용했다.

날이 좋건 나쁘건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페드리로서는 꿈에도 없던 노인네의 관심을 받느라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미켈레 님의 미 자만 들어도 학을 떼신다 했지. 그 덕분에 소드마스터에 오르셨지만.'

다만 페드리는 그가 그토록 질색하는 미켈레로 인해 소드마스터에 올라섰다.

미켈레를 피하기 위해 기감이 날카로워졌고, 그에게서 도주하기 위한 순발력과 민첩성이 좋아졌으며, 붙잡힐 때면 꼼짝없이 대련을 하며 경험이 쌓인 덕분이었다.

일찍이 검술에서만큼은 루드와 견줄 정도로 뛰어났던 재능은 일련의 과정들을 토대로 그를 소드마스터로 만들었다.

'그건 페드리 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게 낫겠지.'

타미는 루드와 페드리의 관계가 정확히 어떤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루드가 쿠두스와 페드리를 구하고, 고르단 왕국으로 피신시켰으며, 도서관의 인력들을 동원해 꾸준히 소식을 확인한다는 건 알았다.

모르긴 몰라도 가벼운 관계는 아닐 터. 소드마스터에 오른 건 중대사였으니, 직접 만나 확인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다.

"미켈레 님의 관심을 받는 중이라, 예상했던 그림대로군요."

쿠두스와 페드리의 소식을 들은 루드는 고개를 주억였다. 페드리와 미켈레의 관계는 그를 구르드손 가에 위탁하며 노렸던 부분이기도 했다.

그간 보아 온 미켈레의 성정이라면 페드리를 가만히 둘 리 없다고 여겼다. 제자로 삼건 대련 상대로 삼건, 뭐가 됐든 페드리를 건드릴 거라 예상했던 것.

그리고 예상대로 미켈레는 열심히 페드리를 자극하는 중 같았다.

'가벼워 보이긴 하지만 마냥 가볍기만 한 인물은 아니니 페드리에게도 도움이 되겠지.'

언행이 경박하긴 했으나 미켈레 또한 어엿한 소드마스터였다. 그와의 교류가 많아질수록 페드리가 소드마스터에 오르는 시일 또한 빨라질 터.

페드리에 관한 생각을 마치고, 루드는 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왕 타미를 만났으니 궁금한 것들을 전부 해결할 요량이었다.

"혹시 대수림에 대한 소식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정확히는 알브 부족이요."

"최근에 들어온 소식이 하나 있긴 합니다. 다른 소식들은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최근에 들어온 거 하나면 충분합니다. 어떤 내용이죠?"

휴이와 함께 알브 부족을 떠날 당시, 루드는 그들에게 대수림을 떠나라 권유했었다.

그들의 멸족을 막긴 했으나, 제국은 계속해서 대수림을 노릴 테니 언제고 전생의 일이 반복되지 말란 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 스스로의 증명은 마쳤다.'

그때 알브 부족의 족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한 사람의 말만으로 부족의 거취를 결정할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는, 그 한 사람이 그만한 자격을 지닌 사람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는 말과 함께 루드에게 먼저 자격을 증명하란 말을 건넸다.

그리고 루드는 그 증명을 완벽하게 해냈다. 바깥대륙의 부족들을 분열시키던 뱀 부족을 제거했고, 제국의 군세를 막아 냈다. 자격을 증명하기에 차고 넘치는 성과였다.

그들도 소식을 들었을 테니, 과거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면 대수림을 떠나 새로운 터전을 찾았어야 했다.

"믿기진 않지만, 그들이 대수림을 벗어나려 하는 것 같다는 소식입니다."

"…!!"

아주 오래전부터 대수림을 터전으로 삼아 왔던 그들이 이제와 대수림을 떠난다는 건 타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루드에게는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그들이 자신과의 약속을 잊지 않았음을, 약속을 지켰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사실 알브 부족의 이주 준비는 이제 막 시작된 게 아니었다.

휴이는 루드와 헤어진 뒤 자신의 부족을 찾아 그간의 일을 설명했고, 그를 통해 루드의 자격을 확인한 알브 부족은 그때부터 이주 계획을 세웠다.

다만 당장 대수림을 떠나 향할 곳이 없기에 이주가 미뤄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버지께 그들이 머물 곳을 마련해 달라 부탁드려야겠군.'

제노스라면 그들이 머물 만한 곳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마땅한 장소가 없더라도 한시적으로 머물 곳을 제공하는 건 어렵지 않을 터.

"마지막 의뢰입니다."

"말씀하시죠."

알브 부족에 관한 질문까지 마무리한 루드는 타미에게 부탁할 마지막 의뢰를 떠올렸다.

"이런 생물에 대한 정보가 있습니까?"

뀨?

루드의 팔뚝 위로 슬라브가 고개를 들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61화

비경이라 할 수 있는 수해의 생물답게, 슬라브는 비밀에 싸인 존재였다.

어떻게 보면 초창기부터 함께했다 할 수 있었으나, 루드가 슬라브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몇 개 되지 않았다.

'내 마력을 좋아하고 수해와 다른 환경에선 힘이 제약된다는 것 정도.'

슬라브는 루드의 마력을 좋아했다. 가끔 루드가 마력을 건넬 때면 뛸 듯이 기뻐하며 춤을 추기도 할 정도였다.

다만 녀석이 마력을 섭취하는 게 필요에 의해선지 미식 행위에 불과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 번은 짧은 시간 내에 다량의 마력을 건넨 적이 있었다. 슬라브가 어디까지 마력을 흡수하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경우 음식 섭취를 필요로 하지만, 일정량 이상은 섭취하지 못하니, 슬라브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거의 모든 마력을 쏟아 부었는데도 남김없이 먹어 치웠지.'

그러나 슬라브의 한계를 알아볼 순 없었다. 녀석은 보란 듯이 루드가 건넨 모든 마력을 흡수해 냈다. 무척이나 만족한 듯한 몸짓을 보였던 건 덤이었다.

'그 뒤로 한동안은 이전만큼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어도 계속 먹으면 질리듯이, 그때의 일 이후로 슬라브는 한동안 마력을 달라 조르지 않았다.

"슬라임? 아니, 조금 다른 것 같은데... 흠, 이런 건 처음 보는군요."

"대수림의 중심부, 수해에서 만난 녀석입니다."

루드의 팔뚝에서 꼼지락 거리는 슬라브를 살피던 타미가 턱을 쓰다듬었다.

벨로티를 보좌하며 온갖 정보를 접해 본 그로서도 눈앞의 생명체는 낯선 것이었다.

접근이 어려운 대수림, 그중에서도 수해에서 발견한 생명체라니 그럴 만도 했다.

"의사소통은 가능합니까? 생명 활동은 어떻게 하죠? 팔에 기생하고 있는 겁니까? 주식은 뭐죠?"

타미는 슬라브에 대한 호기심 반, 루드의 의뢰를 수행하기 위한 기초 조사 반의 느낌으로 여러 질문들을 쏟아 냈다.

루드는 자신이 아는 선에서 모든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일단 저로선 처음 보는 생명체입니다. 다만, 수해에서 발견했다고 하셨으니 고서들을 찾아보면 뭔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수림이나 수해에 관한 정보는 의외로 지금보다 옛 문헌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뭐라도 알아내는 게 생긴다면 바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존재감을 내비치던 슬라브는 어느새 잠잠해진 상태였다. 루드는 제 팔뚝에 감긴 슬라브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조용한 모습이 수해의 환경과 달라 축 늘어져 있을 때와 비슷했지만, 그때와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지금의 슬라브는 외부 환경 때문에 힘이 없는 게 아니었다.

'뭐 때문에 그러는 거냐.'

수해를 벗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수해와 다른 환경으로 인해 힘을 못 쓴 게 맞았다.

하지만 수해의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며 점차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고, 최근에는 먼저 나서서 무기로 변하며 전투에 참여하기까지 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수해에서만큼은 아닐지라도 녀석을 전투에 활용하는 것도 가능해지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러다 갑자기, 이렇게 축 늘어지고 만 것이다. 이전과 달리 불러도 답이 없거나 매우 느렸고, 자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별일 아니면 좋겠다만.'

슬라브에 관한 정보를 의뢰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녀석에 대한 정보가 있다면 이런 변화의 이유를 알 수 있을 터.

"대수림을 나온 알브 부족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도 물어봐 주면 감사하겠습니다."

"확실히, 수해의 생명체니 알브 부족이 뭔가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요. 알겠습니다."

루드는 타미에게 알브 부족과 접촉해 정보를 확인해 달라고도 부탁했다.

슬라브를 막 얻었을 당시에는 미처 묻지 못했다. 수해에서 찾은 선조의 유상과 제국과의 일로, 알브 부족이 여유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하나 지금이라면 충분히 이야기해 볼 수 있을 터. 녀석에 대해 아는 이가 있다면 알브 부족에 있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직접 만나서 묻는 게 가장 좋겠지만.'

서로의 동선이 겹치지 않을 테니 당장은 요원한 일.

결국 지금으로선 슬라브의 변화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녀석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 보긴 하겠지만 딱히 제대로 된 설명이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았으니, 한동안은 면밀히 관찰하며 추이를 지켜보는 게 최선이었다.

"에스카토에서 오늘 의뢰한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시일이 빠듯하긴 하지만, 최대한 준비해 보겠습니다."

에스카토는 제도 카르반의 북쪽에 위치한 대도시로, 여러 마법 학파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곳에 있는 마법 학파 중에는 종말 학파도 포함돼 있었다.

모든 이야기를 마친 루드는 슬슬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도서관 측에서 어련히 주변을 정리했겠지만, 이곳에 오래 있어서 좋을 건 없었다.

하지만 타미는 떠나려는 루드를 붙잡았다. 그에게 해야 할 말이 남아 있었다.

"한 가지, 전해 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타미는 잠시 심호흡했다. 의뢰하지 않은 정보를 내주는 건 명백한 월권이나, 루드에게 빚진 걸 생각하면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리우스 에이나우디에 관한 소식입니다."

지난 전쟁으로 아이리우스는 제국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지금 시점에선 세간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전에 알게 된 소식대로라면, 곧 지금의 관심은 아무것도 아닐 수준의 이목이 쏠릴 터였다.

"…성국에서 그녀를 용사로 지정했습니다."

아이리우스는 제국에선 영웅이었으나, 바깥대륙의 입장에선 침략자에 불과했다.

특히 루드는 바깥대륙을 이끄는 입장이었으니, 그녀가 용사가 될 거란 소식에 분노하진 않을까 걱정됐다.

하나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그렇게 됐군요."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예. 예상했던 대로라."

전생의 경험으로 루드는 아이리우스가 조만간 용사가 될 거란 걸 짐작하고 있었다.

비록 전생보다 빨랐고, 과정 또한 달랐지만, 그녀가 용사가 된다는 결과만큼은 똑같았다.

'이제 진짜 거리낄 게 없어졌군.'

그녀가 용사가 된다면 다른 이가 용사가 될 것을 우려하지 않아도 됐다.

다음번에 그녀를 만나면 걱정 없이 죽여도 된다는 의미.

물론 그녀를 꼭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개입으로 이번 생의 제국은 전생과 다른 행보를 걸을 수도 있었다.

하자르가 의회를 처리하면 전쟁이 발생하지 않을 확률도 높았고.

그렇게 되면 굳이 제국과 척을 지지 않아도 되는 일.

사라 또한 아이리우스가 죽는 걸 원치 않는 듯했으니 되도록 그녀를 죽이지 않는 편이 좋았다.

다만, 그건 그녀가 자신의 앞을 막지 않을 때의 이야기였다.

'과거의 기억으로 실수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자신과 마찬가지로 회귀한 아이리우스였다.

전생의 기억과 감정이 남아 있을 테니, 이번 생에 제국과 대립하지 않는다 해도 그녀 개인과는 마찰을 빚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알고 있을 그녀였으니 본모습으로 마주친다면 당장에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를 용사로 임명하기 위해 성국에서 사절단을 준비 중입니다."

"사절단을요? 그녀가 성국에 가는 게 아니라, 그들이 제국으로 온단 말입니까?"

그건 전생과는 달라진 부분이었다. 과거에는 아이리우스가 성국의 수도 성 마르티나로 가 교황에게 직접 용사 임명을 받았었다.

하나 이번 생엔 그녀를 용사로 임명하기 위해 성국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역사가 바뀌며 생겨난 차이인가.'

아마도 용사가 되는 과정이 바뀌며 생긴 변화일 터.

"추기경 하나와 성기사단, 다음 대 성녀가 사절을 이룰 거라 합니다. 예식을 맡을 추기경으론 우리베 추기경이 가장 유력하고요."

"우리베 추기경 말입니까."

"예, 교황의 최측근이고 신탁을 들을 때도 함께 있었다니 최적의 인선이었겠죠. 교황이 직접 움직일 수는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아무리 용사 임명을 위해서라지만 예정돼 있지 않던 행사였다. 교황이 직접 제국에 행차하는 건 무리였고, 제국 또한 그것을 반기지 않았다.

하여 성국은 명망 높은 추기경과 다음 대 성녀가 될 성녀 후보를 파견하는 걸로 절충안을 내놓았다. 성국이 한발 물러서자 제국 또한 마지못해 그것을 받아들였고.

한편 사절단의 구성을 들은 루드는 한 사람의 이름을 곱씹었다.

추기경 우리베, 지난 생 성국이 부패하는 데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과거 리카엘이 끔찍한 화상을 갖게 된 것에도 그의 역할이 지대했었다. 그녀가 그의 부패를 폭로하려 들자 마녀로 몰아 화형대에 올렸던 것.

'리카엘은 어떻게 됐으려나.'

대수림에서의 경고를 새겨들었다면 무사할지도 몰랐다.

그녀의 곁에 있던 로이튼이란 젊은 성기사는 우리베의 사주로 그녀를 마녀로 몰았던 이였다.

개인의 욕심으로 오랜 세월 보필하던 그녀를 등진 배신자.

그 자리에서 죽일까도 했으나 과한 개입이라 여겨 그만두었다. 한데 이렇게 우리베의 이름이 들려오자 마음이 불편했다.

'그냥 그때 죽일 걸 그랬나. 아니, 그땐 그게 최선이었다.'

그때 로이튼을 죽였다 해도, 반복될 역사라면 똑같이 반복됐을 것이다. 그가 아니더라도 그런 역할을 할 인물들은 많을 테니.

'용사 임명식이 어디서 진행되든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성국에서 하든 제국에서 하든 용사가 탄생하는 결과는 같았다. 임명식은 그저 예식에 불과했으니,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보단 다른 일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종말학파도 찾아가야 했고 고르단 왕국을 거쳐 세바니아 왕국까지 이동해야 했으니 바삐 움직여야 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정보료는 예의 2할에서 떼는 걸로 하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2할에 관해서 벨로티 님께서 전하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로폴리 상회에 차명으로 계좌를 만들어 놨으니 필요하다면 언제든 빼 가라 하셨습니다."

로폴리 상회는 대륙십대상회의 말석이지만 현금 보유량에서만큼은 다른 모든 곳들을 압도하는 상회였다.

또한 로폴리 상회의 가장 큰 장점은 지점들이 많다는 것.

제국의 웬만한 대도시에는 전부 그들 지부가 입점해 있었고, 중소도시들도 일정 거리에 맞춰 입점돼 있었다.

제국만이 아니라 타 왕국들에도 상당수의 지점들을 갖고 있었으니, 어떤 상회보다도 접근하기가 편했다.

벨로티는 루드가 언제 어디서든 돈을 가져가기 쉽도록 로폴리 상회를 고른 것이었다.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 배려를 깨달은 루드는 타미에게 감사 인사를 부탁했다. 그녀 덕분에 대륙 전체에 자금망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용건을 마친 루드는 서점 베르베르를 나왔다. 떠나는 그를 타미가 먼 곳에서 정중히 마중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을 위치였지만 루드는 그가 자신이 사라질 때까지 허리를 펴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 *

한편, 휴이와 리카엘은 어느 주점에 있었다. 주점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벌꿀주를 시킨 두 사람은 가만히 앉아 주변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난 여정의 경험으로 휴이는 주점에서 꽤나 많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지나며 분위기가 무르익자 익숙한 얘기들이 들려왔다.

"용사님이 탄생했다는데?"

"용사?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용사 말이야?"

"그래. 마왕인가 뭔가 하는 괴물을 쓰러트렸다는 용사 말이야."

얘기를 듣던 털북숭이 사내가 맥주를 들이켰다. 크으, 하는 소리와 함께 수염에 묻은 맥주를 털어 낸 그는 안주를 집으며 물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이름도 모를 용사가 아니라 눈앞의 기쁨이었다.

"아이리우스 님이 용사였다고 하더라고."

그러나 아이리우스란 이름이 나오자 그는 먹던 것을 멈추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허어! 괜히 전쟁 영웅이 아니었던 거구만."

그는 아이리우스가 용사란 소식에 놀라며, 그럼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용사였다고 하니 이번 전쟁에서의 활약이 이해가 됐다.

한참 그녀에 대해 떠들길 잠시. 누군가 또 다른 소식을 전했다.

"용사 수임을 위해 성국에서 사절을 파견했다고 하더라고."

"!!!"

용사 임명식을 위해 성국에서 사절단을 파견했다는 소식.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리카엘이 눈짓을 보내자 휴이가 마력을 둘러 주변의 소리를 차단했다.

"그들보다 먼저 용사를 만나 봐야 합니다."

리카엘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다급했다. 말하는 모습에서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래, 알겠어. 너무 걱정하지 마. 녀석들보다는 우리가 더 빠를 테니까."

휴이는 그런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그들보다는 자신들이 아이리우스와 만나는 게 더 빠를 터였다.

그녀가 머물고 있을 제도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62화

며칠이 지나, 리카엘과 휴이는 제도에 도착했다. 용사 임명식을 일주일 남겨 둔 시점으로, 성국의 사절단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용사를 만날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만날 거냐고."

두 사람이 제도에 온 건 이곳에서 머물고 있는 아이리우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대중의 많은 관심을 받던 그녀는 이번 신탁으로 인해 대륙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이 됐다.

그녀를 만나고자 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개중엔 일국의 왕족도 있을 정도.

그러나 아이리우스는 그들 모두의 방문을 거절한 채 자신의 거처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건… 이제 생각해 봐야겠죠."

리카엘이라고 특별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신의 인도를 따라 그녀를 만나러 오긴 했지만, 칩거한 그녀와 접선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외부 활동이라도 하면 어떻게든 접촉할 수 있을 테지만.'

아이리우스는 스스로를 외부와 단절시켰다.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일단 조금 더 생각해 보자고. 안 되면 뭐,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을 써야겠지."

"최후의 수단이요?"

"그래. 최후의 수단."

리카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휴이가 말하는 최후의 수단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러나 휴이는 최후의 수단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대신 그들이 머물 곳을 찾아 나섰다.

두 사람은 번화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거처를 마련했다. 인근의 대형 여관이 소유한 독채 건물로, 비싸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성국을 벗어난 이래로 추격의 흔적은 느끼지 못했으나 리카엘은 엄연히 도망자의 신분이었다.

누군가 그녀를 알아보기라도 하면 곤란한 일이 생길 터였다.

"…방법이 없네요."

그로부터 이틀.

두 사람은 아이리우스와 만나기 위한 여러 방안들을 모색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것을 찾지는 못했다.

애초에 아이리우스가 거처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접촉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주변인과도 접점이 없었으니 연락을 부탁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결국 휴이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결심했다.

"어쩔 수 없군. 이렇게 된 이상 최후의 수단을 쓰는 수밖에."

"대체 그 최후의 수단이란 게 뭐죠?"

여전히 휴이가 말하는 최후의 수단이 뭔지 알지 못하는 리카엘이 그 정체를 물었다.

휴이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최후의 수단이 뭔지 알려 줬다.

"...기가 차지만, 그것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긴 하네요."

"그치? 이게 최선이라니까."

마침내 최후의 수단이 무엇인지 알게 된 리카엘은 헛웃음을 흘렸다.

어처구니가 없긴 하지만, 휴이의 말처럼 지금 상황에선 그게 최선이었다.

"그럼 언제 실행할 겁니까?"

"뜸 들일 것 없이 오늘 바로 해야지.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용사 임명식이 5일 후였다. 성국의 사절단이 제도에 도착하는 시일을 특정할 순 없었으나, 적어도 행사 전에는 도착할 터.

리카엘이 무엇을 위해 용사를 만나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뜻을 이뤄 주기 위해선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 * *

늦은 밤. 숙소를 나선 휴이는 아이리우스의 거처를 찾았다. 그녀가 머물고 있는 저택은 에이나우디 가의 별장으로, 제도의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난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문제 될 만한 건… 없고."

주변을 확인한 휴이는 가볍게 담장을 뛰어넘었다. 3m가 넘는 높이였지만, 뛰어넘는 과정에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밖에 나오지 않아 만날 수 없다면, 우리가 직접 들어가 만나는 수밖에.'

휴이가 말한 최후의 수단은 잠입이었다. 아이리우스를 만나 사정을 설명하고 리카엘이 있는 곳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를 위해 휴이는 기척을 죽였다. 그녀와 만나서 대화하기 전까진 숨어든 사실을 들켜선 안 됐다.

'바로 검을 휘두르진 않겠지?'

리카엘에겐 아이리우스를 데려오겠다고 큰소리 뻥뻥 쳐 놨지만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었다.

설득은 둘째 치고, 그녀가 자신을 암살자로 여길 가능성도 있었다.

목적이야 어찌 됐든 한밤중에 몰래 숨어든 것 아닌가.

'만날 방법이 없는데 어떡하라고.'

다만 변명의 여지는 있었다. 어떻게든 만나야 하는데 그녀가 도통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그녀를 만나기 위해선 이리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정중히 찾아갔을 때 거절한 건 너희니까.'

낮에 찾아오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저택을 지키고 있던 병사를 통해 만나고 싶단 의사를 전달했지만 돌아온 건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단 거절의 말이었다.

정원을 넘어 건물로 들어선 휴이는 아이리우스의 기척을 찾아 나섰다.

기감을 한껏 끌어올리자 얼마 안 가 마스터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저쪽인가.'

기운이 느껴지는 건 저택의 가장 높은 층. 휴이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4층짜리 저택이었기에 최고층이라 해도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다른 층과 달리 4층에는 오직 하나의 방만 있었다. 아마 아이리우스의 방일 터.

'큼큼. 뭐라고 말해야 하지. 같이 가 줘야 할 곳이 있다? 할 말이 있어 찾아왔다? 어렵네. 리카엘과 상의라도 하고 올 걸 그랬나.'

문 앞에 선 휴이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어떻게 해야 그녀의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 생각이 많아졌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나 이내, 너무 깊게 고민하는 것도 좋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방문을 열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 안에는 아이리우스가 있었다.

다만 예상하지 못했던 건, 그녀가 무장을 마친 상태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이 야밤에 무슨 목적으로 찾아온 거지?"

"그러니까, 그게."

"...너는!"

침입자의 존재를 알아채고 맞이할 준비를 하던 아이리우스는 달빛에 비친 침입자의 얼굴에 경악했다.

'제2군단장!'

과거보다 앳되긴 했지만 분명했다. 마왕의 오른팔이자 연합군의 일축을 이끌었던 휴이였다.

스팟-!

그의 얼굴을 확인함과 동시, 아이리우스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전생의 경험으로 그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여선 안 되는 상대!

재빨리 고개를 꺾으며 아이리우스의 검을 피한 휴이는 양손을 들며 공격 의사가 없다는 걸 밝혔다.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 복면도 안 쓰고 온 건데. 결국 이렇게 됐나.'

혹시 자신을 암살자로 여길까 얼굴을 드러낸 채로 왔건만, 상황이 우려했던 대로 흐르고 있었다.

'적은 무투가. 양손을 들었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어.'

휴이가 양손을 들었지만, 아이리우스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무투술의 달인이었다. 맨손으로도 언제든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존재.

'나를 죽이러 온 건가?'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지만 역사는 이미 달라질 대로 달라졌다.

시기적으로도 바깥대륙과의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때였으니, 복수를 위해 찾아온 것일 수도 있었다.

'정보를 캐내는 건 제압한 후에 해도 늦지 않아.'

그는 분명 위험한 적이었지만, 소드마스터에 오르며 이전의 힘을 상당수 되찾은 자신이었다. 실수만 하지 않으면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아이리우스는 더욱 매섭게 휴이를 몰아쳤다. 오러가 맺힌 검이 연달아 쏘아졌다.

"아니, 잠깐만, 저기, 이봐!"

휴이는 필사적으로 검을 피하며 말을 걸었다.

아무리 암살자로 착각했다지만 공격 하나 안 하고 있는 상대에게 죽일 듯이 공격을 쏟아 내다니, 너무한 처사였다.

'제대로 상대할 수도 없고. 젠장!'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공격에 응수하고 싶었다. 그녀를 공격하진 않더라도 검을 막고 제압할 수는 있지 않은가.

마스터에 이른 이래로 처음 보는 소드마스터였으니 현재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휴이는 초인적인 인내로 승부욕을 가라앉혔다. 소란이 일어 사람들이 모이면 큰일이었다. 그의 목표는 아이리우스를 조용히 리카엘이 있는 곳까지 안내하는 것이었으니까.

"…어째서 공격하지 않는 거지?"

"휴… 이제야 진정이 됐어?"

아이리우스가 공격을 멈춘 건 휴이에게 진정으로 공격 의사가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였다.

거듭되는 공격에도 반격하지 않고, 일부러 빈틈을 노출했으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공격할 마음이 없는 게 아니고서야 반응할 수밖에 없는 기회였을 텐데....

'처음부터 공격 의사가 없었다?'

그러다 그녀는 휴이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살기를 내비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적으로 이 정도 했으면 이야기 정도는 들어줘야 한다. 안 그래?"

"…날 죽이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었나."

"그래. 아니야. 이제 됐어? 처음부터 설명하려고 했는데 냅다 검을 들이대는 바람에 말도 못하고. 이게 뭐야."

휴이는 앓는 소리를 냈다. 전부 피해내긴 했으나 그녀의 검을 피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날카로웠고 전부 오러가 맺혀 있었으니,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어디 하나가 잘려 나갔을 것이다.

아무리 휴이라도 꽤나 부담되는 일.

그래도 다친 곳 없이 대화할 상태를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 다행이었다.

"미안하단 말은 않겠어. 이 시간에 이렇게 찾아온 건 네놈의 잘못이니."

아이리우스는 자신이 착각했단 사실을 깨달았지만 사과하지는 않았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몰래 침입한 저쪽의 잘못이 먼저였다. 세상 사람 누구라도 밤중에 누군가 들어온다면 이렇게 대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는 상대에게 연신 검을 휘둘렀던 것이 내심 걸려서일까. 그녀는 휴이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결정했다.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지?"

"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

그 순간 아이리우스는 루드를 떠올렸다. 전생의 휴이는 그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고, 이번 생에도 두 사람이 함께 했던 걸 알았으니 휴이가 말한 이가 루드일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휴이의 말은 그녀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래. 네가 용사가 되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야."

"용사?"

난데없이 나온 건 루드가 아닌 용사란 단어. 전생의 그녀를 지칭하는 말이자 이번 생에도 똑같이 그녀의 것이 될 칭호였다.

"리카엘이라고, 성녀 후보였던 녀석이 있어."

"성녀 후보 리카엘. 들어 본 적 있다."

리카엘의 이름은 아이리우스도 알고 있었다.

뛰어난 신성력과 인품을 갖춘 이로, 다음 대 성녀가 될 확률이 가장 높다던 성녀 후보.

그러나 그녀는 얼마 전 성녀 후보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화형대에 올랐다고 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죽지 않고 도주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렇군. 네가 그녀를 구출했다던 마스터였군."

아이리우스는 일련의 사건들을 유추해 냈다. 사정은 모르겠으나 휴이가 그녀를 구했고, 그녀의 부탁으로 자신을 찾아온 게 분명했다.

'그녀가 어째서 나를?'

하나 여전히 의문인 건 그녀가 자신을 만나려 하는 이유.

몸을 의탁하려는 걸까 싶기도 했지만, 일면식도 없는 자신에게 될지 안 될지도 모를 부탁을 하려 들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아이리우스는 결정을 내렸다.

"좋아. 만나 보겠어."

직접 만나 보면 그녀가 자신을 만나려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터.

하지만 그 전에,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기로 했다.

"대신 한 사람을 더 대동하고 싶은데."

"바로 가야 하는데."

"가는 길에 데려가면 된다. 멀지 않은 곳에 있거든."

아이리우스는 헤이론을 떠올렸다. 그는 이곳 저택의 근처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가 함께한다면 휴이가 거짓말을 했고, 승산을 높이기 위해 아군이 있는 곳으로 자신을 유인하는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을 테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물론."

"그렇다면 뭐."

휴이가 제안을 받아들이자 두 사람은 곧장 저택을 빠져나갔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63화

아이리우스의 연락을 받은 헤이론은 자신의 거처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품이 큰 후드를 눌러써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소드마스터가 하나 더 있었지.'

휴이는 아이리우스가 말한 이가 헤이론이란 걸 깨닫고 나서야 그 사실을 떠올렸다.

제국에 새로 탄생한 소드마스터는 둘이었다. 아이리우스와 그녀의 기사 헤이론.

다만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헤이론은 에이나우디 가의 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잠입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만약 헤이론이 에이나우디 가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면 잠입을 선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리우스 님."

"오랜만이야."

아이리우스와 헤이론은 짧은 해후를 나눴다.

소드마스터에 오른 헤이론을 회유하려는 귀족들의 농간으로 그는 다른 숙소를 사용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아이리우스가 칩거를 선언하며 만나는 게 더 어려워진 상황.

"당분간 만나기 힘들 거라 여겼습니다만…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그러면서 헤이론은 아이리우스의 곁에 있는 휴이를 힐끗거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의문의 인물.

귀족들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한동안 거리를 두자고 말했던 아이리우스였다.

그런 그녀가 이런 시간에 자신을 찾아왔다는 건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

그건 아마 높은 확률로 옆에 있는 남자와 관련된 문제일 것이었다.

"되도록 빨리 움직여 줬으면 좋겠는데."

"알겠어. 헤이론, 설명은 가면서 해 줄게. 일단 이 자를 따라가자."

휴이의 재촉에 아이리우스는 이동하며 상황을 설명하기로 했다.

"…성녀 후보 리카엘."

"그래.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야."

"놀랍군요. 성국에서 쫓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녀가 이런 곳에 있다니."

아이리우스의 설명을 들은 헤이론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리카엘에 대해선 그도 알고 있었다. 성녀 후보였으나 성국을 배신한 마녀.

그녀가 화형 도중 도주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설마 제도에 숨었을 줄이야.

'아니, 어쩌면 이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을 수도 있겠군.'

아무리 성국이라도 제도에서 막무가내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제도에도 성국의 신전이 있긴 하지만 다른 곳보다는 그 영향력에 제약이 있었으니, 성국에 쫓기는 입장으로서는 피신처로 삼기에 좋은 곳이었다.

"이제 다 왔어."

어느새 일행은 리카엘이 기다리고 있을 장소에 도착했다.

휴이는 스스로의 성과에 만족해하며 문을 열었다.

비록 한 사람이 늘어났지만 목적했던 대로 아이리우스를 데려오는 데 성공했으니, 리카엘도 뭐라 하진 않을 터였다.

부드럽게 열린 문 안에는 리카엘이 기다리고 있….

"리카엘?"

어야 했으나,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릴 속인 거냐."

"역시 함정이었나."

대화를 위해 기다리고 있다던 리카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아이리우스와 헤이론은 곧장 임전 태세에 들어갔다.

"리카엘? 리카엘!"

하지만 휴이는 그들의 검이 자신을 겨누건 말건, 사라진 리카엘을 찾는 데 여념이 없었다.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있던 리카엘이었다. 미리 말을 해 두었으니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준비해 놓은 짐도 그대로였다.

"…함정이 아니라면, 정말 사라진 건가?"

당황한 휴이의 모습에 아이리우스는 약간의 긴장을 풀었다. 연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으나, 경황없어 보이는 게 진짜 같았다.

"아이리우스 님. 여기 뭔가가 있습니다."

그때, 헤이론이 테이블 위로 놓인 무언가를 발견했다.

짧은 메시지가 남겨져 있는 메모.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놓여 있었지만, 리카엘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놀란 휴이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825-24."

"주소 같군요."

메모에 적힌 건 주소로 추정되는 숫자였다. 단서가 있다는 소식에 순식간에 다가온 휴이가 메모를 확인했다.

"납치된 건가!"

"여기로 오라는 메시지 같은데."

숫자만 쓰여 있는 메모는 마치 이곳으로 오면 된다고 말하는 듯싶었다.

휴이는 메모지를 구겼다. 리카엘이 갑자기 자리를 비웠을 리는 없으니,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이곳을 떠나게 된 것이 분명했다.

'성국인가? 아니면 단순 범죄?'

납치범의 정체도, 뭘 원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가진 단서라곤 메모뿐이었으니 일단은 여기에 적힌 주소로 가야만 했다.

"일단은 가 볼 수밖에 없겠네."

"신뢰도가 떨어지는 단서입니다. 상황 자체도 그렇고요. 굳이 아이리우스 님께서 가실 이유가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아니, 이왕 이렇게 됐으니 뭐가 어떻게 된 거든 끝을 봐야겠어."

사라진 리카엘과 주소가 적힌 메모.

헤이론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아이리우스의 생각은 달랐다.

다른 이가 관계된 거라면 모를까, 전생에 마왕군의 군단장이었던 휴이가 연관된 일.

사소한 것도 놓쳐선 안 됐다.

개인적으로 리카엘이란 인물이 궁금하기도 했고.

"거기 적힌 주소가 가리키는 곳이 어딘진 아나?"

"…아니."

"그럼 내가 안내하지."

휴이가 제도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아이리우스는 안내역을 자처했다.

그녀는 익숙하게 메모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 나섰다.

"여긴… 로얄 스트리트가 아닙니까."

그녀의 뒤를 따라 걷던 헤이론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주소를 찾기 위해 그들이 들어선 거리가 로얄 스트리트였기 때문이었다.

로얄 스트리트는 제도에서 가장 비싼 저택들이 즐비한 거리였다. 우스갯소리론 이곳의 저택 하나의 값이 시골 영지의 일 년 치 예산과 맞먹는다는 소리도 있었다.

게다가 이곳의 저택은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구매자의 신분이나 명성 등이 뒷받침돼야만 저택을 구매할 수 있었다.

"납치범이… 이런 곳에 산다고요?"

헤이론의 상식에선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

"825-21… 825-22…."

아이리우스 또한 놀라긴 마찬가지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소의 저택을 찾는 데 집중했다.

"825-24. 여기야."

이윽고 일행은 메모에 적힌 주소에 도착했다.

주소에 해당하는 저택을 확인한 헤이론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이리우스를 바라봤다.

"정말 여기가 맞습니까?"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입안이 바싹 마르는 느낌. 헤이론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도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것이니 아이리우스로서는 모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자칫 실수라도 했다간, 몰랐다는 말로 웃어넘길 수 없었다.

"여긴, 황실의 별장 중 하나입니다."

"…뭐?!"

상상조차 못 했던 사실에 아이리우스가 경악했다.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반문한 그녀.

"모,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화들짝 놀란 헤이론이 입을 막는 제스처를 취했다. 새벽도 안 된 심야였으니 작은 목소리도 조심해야 했다.

"그래서, 메모에 적힌 주소가 이곳이란 말이지?"

"그래, 일단은."

"그럼 됐어."

한편, 아이리우스에게 다시 한번 확인한 휴이는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의 거침없는 태도에 놀란 아이리우스가 그를 붙잡았다.

바깥대륙 사람인 그는 모르겠지만 황실의 별장에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됐다.

"무슨 생각이야."

"무슨 생각이냐니, 당연히 리카엘을 데리고 와야지."

황실이고 나발이고, 휴이는 리카엘을 데리고 나올 생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동료니까. 설령 황실을 적으로 돌리더라도 그녀를 지켜야 했다.

그때. 저택의 문이 열렸다. 갑자기 열린 문 안에서 기사가 걸어 나오자 아이리우스와 헤이론이 얼어붙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드시죠."

소란에 엄히 죄를 물을 거라 여겼으나, 기사의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마치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뉘앙스.

"리카엘은 안에 있는 건가."

"물론입니다. 걱정하신 일은 없었으니 안심하시길."

세 사람을 맞이한 기사는 그들의 면면을 보고 눈을 빛냈다. 자신의 주인께서 말씀하시길 귀빈들이 올 것이니 정중히 맞으라 하셨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다.

'아이리우스 님과 헤이론 경. 그리고… 또 다른 마스터.'

눈앞의 세 사람은 전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들이었다. 무를 닦는 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경지. 그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회가 된다면 검을 겨뤄 보고 싶군.'

물론 그 전에, 주인께서 내리신 명을 완수하는 게 우선이었다.

"따라오시죠. 찾으시는 분은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초청하신 분도 함께요."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했으나 세 사람은 기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휴이는 가장 먼저 그를 따라가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생각해 보면 납치라 하기엔 이상했어. 저항의 흔적도 없었고, 글씨체도 리카엘의 것이었지.'

아무리 전투 요원이 아니라지만 리카엘은 제 한 몸 지킬 정도의 힘은 갖고 있었다. 수해에서도 제국 특무대를 상대로 오랜 시간 버티지 않았던가. 만약 그녀가 납치된 것이었다면 전투흔이 남아 있어야 했다.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당황하지 않고 냉정히 생각했다면 더 일찍 알아차릴 수 있었을 부분이었다.

"휴이!"

"리카엘!"

기사의 말대로 리카엘은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푹신한 의자에 앉은 그녀의 앞으론 다과가 놓여 있었다.

"깜짝 놀랐잖아."

"미안해요. 저에게도 갑작스러운 일이었어요. 하지만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어서…."

휴이가 거사를 위해 떠난 후, 얼마 안 가 그녀를 찾아온 이가 있었다.

처음에는 안에 없는 척도 해 봤으나 방문자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의 정체를 알고 나선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고.

리카엘의 시선이 맞은편에 앉은 인물에게로 향했다.

아까 전 그녀를 찾아왔던 이이자 저택의 주인. 그들을 한데 모은 당사자.

"…!!"

"!!!"

그 얼굴을 확인한 리카엘과 헤이론이 재빨리 부복했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의 정체는 2황자 하자르였다.

"일어들 나게. 제국의 영웅들이 그러고 있어서야 되나. 편히들 있게."

"감사합니다."

하자르의 말에 두 사람은 자세를 바로 했다. 하자르는 그들을 보며 작은 미소를 보였다.

"궁금한 것들이 많은 표정이군."

"아닙니다."

"일단 자리에 앉지. 원한다면 전부 설명해 줄 테니까 말이야. 그렇게 서 있으면 자네들 다리보다도 내 고개가 먼저 아플 것 같거든."

하자르가 너스레를 떨며 권하자 두 사람은 그제야 의자에 앉았다. 휴이는 이미 리카엘의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 상태였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부르십쇼."

그들을 안내한 기사, 토르강이 하자르에게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그는 하자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기사로, 기밀 유지가 중요한 이번 일에 함께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목부터들 축이지. 놀랐을 텐데 말이야."

하자르는 여유로운 기색으로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이윽고 모두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듯하자, 그는 천천히 입을 뗐다.

"우선 놀라게 한 것에 사죄를 표하는 바이네."

하자르는 특히 휴이를 바라봤다.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리카엘과 대화하며 그간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죽었을 거고, 이곳까지 올 수도 없었을 거라던 말.

과연, 그녀에게 들었던 대로 그는 대단한 인물 같았다.

'이토록 선명한 아우라라니.'

그에게서 번져 나오는 파장이 심상치 않았다.

물론, 그건 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 평생 이런 모습을 볼 줄이야, 실로 장관이군.'

역시 마스터라는 걸까. 아이리우스와 헤이론의 아우라도 범상치 않았다.

리카엘, 휴이, 아이리우스, 헤이론.

네 명의 인물이 한 데 모여 뿜어내는 아우라를 보고 있자니 그 안으로 빨려 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냥 아우라를 감상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밤은 짧았고, 해야 할 이야기는 많았으니.

"내가 그대들을 보고자 했던 건, 그대들에게 알려 줄 것이 있어서네."

모두를 바라본 하자르가 눈을 빛냈다.

이들이라면, 자신의 숙원을 이룰 수 있으리라.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64화

황위를 노리는 자로서, 하자르의 눈과 귀는 대륙 곳곳에 퍼져 있었다. 그건 성국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덕분에 하자르는 리카엘이 마녀로 몰려 화형대에 올랐다는 것과 의문의 마스터가 그녀를 구해 탈출했다는 것, 그리고 도주한 그녀가 제도에 숨어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신분을 세탁하기 위함이라 생각했지.'

제도는 제국, 아니 대륙에서 제일가는 대도시였다. 그만큼 사람이 많다는 의미.

더군다나 제국과 성국의 사이는 좋은 편이 아니었으니, 다른 곳보다 성국의 시선에서도 자유로운 편에 속했다.

리카엘의 입장에선 몸을 숨기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성국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었어.'

그러나 다른 신분을 마련해 사람들 틈으로 녹아들 것이라 생각했던 리카엘은 전혀 다른 행보를 보여 줬다. 동행인을 통해 거처를 마련하고 여러 차례 거리를 오간 것이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제도에 도착하며 숨을 돌렸다 해도 그녀는 도망자의 신분. 저리 느긋하게 움직일 게 아니었다.

오랜 생각 끝에 하자르는 리카엘이 제도에 온 것이 도주를 위해서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녀는 다른 목적이 있어 제도를 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신탁 속의 용사, 아이리우스였지.'

수하들을 이용해 관찰한 결과, 그녀는 아이리우스와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다만 그 뜻을 이루진 못했다. 얼마 전 내려온 신탁으로 인해 아이리우스가 외부 활동을 멈춘 까닭이었다.

그 후, 하자르는 리카엘이 화형대에 오른 과정을 조사했다. 차기 성녀가 될 확률이 가장 높았던 그녀가 어째서 마녀란 오명을 썼는지, 그것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신탁에 문제가 있었다.'

신탁이 내려온 후 리카엘의 행동이 이상했다는 증언만 여럿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신탁과 관련해 무언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거기에,

'의회와 성국이 거래한 정황이 있었지. 신탁이 내려온 건 그 직후고.'

비약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거래 결과가 신탁이었다면? 리카엘이 거기에 의문을 제시했던 것이라면?

지난 전쟁의 실패로 의회는 입지가 좁아진 상황이었다. 황실의 압박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수비적인 태도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포기해서가 아닌, 언젠가 상황이 반전될 때를 기다리며 몸을 웅크린 것이라면....

그렇다면 리카엘이 아이리우스를 만나려고 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먼저 말해 둬야 할 게 있네. 아이리우스."

"예, 전하."

아이리우스는 자신을 부르는 하자르의 음성에 곧장 대답했다. 살아 있는 그와 마주하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앞으로 2년 뒤인가.'

전생의 하자르는 지금으로부터 2년 후 죽었다. 2황자임에도 황위 계승 후보 1위였던 그의 죽음은 대단한 파장을 몰고 왔다.

다만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이리우스로서도 알지 못했다. 황실이 그의 죽음을 자세히 밝히지 않은 까닭이었다.

호사가들은 1황자가 암살한 것이라 떠들고 다녔지만….

"신탁에 대해선 알고 있겠지."

"…예."

아이리우스가 전생의 그를 떠올리는 사이, 하자르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 신탁은 가짜다."

"예?"

이는 리카엘과의 대화를 통해 알아낸 사실이었다.

이들이 도착하기 전, 하자르는 리카엘과 여러 대화를 나눴다.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의회와 성국이 거래를 했고, 그 결과 거짓 신탁을 만들어 냈습니다."

리카엘이 말을 얹었다. 신탁이 가짜란 걸 직접 확인했고, 그로 인해 화형대에까지 올랐던 그녀였다.

'가짜 신탁을 만든 게 고작 그따위 이유 때문이었다니.'

서로 간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건 하자르만이 아니었다. 리카엘 또한 그와의 대화로 교황이 가짜 신탁을 만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국과 성국을 잇는 경로의 통행권과 세금, 교역 물품 제한, 그 외에 몇 가지 권리들.

경제적으로 봤을 때 성국에 이득을 가져다줄 것들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받은 대가로 내준 것이 문제였다.

'그따위 속물적인 것들 때문에 감히 신의 이름을 더럽혀?'

성국은 국가의 형태이지만, 일반적인 국가들과는 달랐다. 신의 이름 아래 모인 곳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분의 가장 가까운 데 선다는 이가 물질적인 것 때문에 그분의 이름을 더럽히다니.

리카엘은 그들의 이적 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다.

"신탁이 가짜라니, 그 말이 사실입니까?"

한편 아이리우스는 혼란에 빠졌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녀는 전생에도 용사였다. 용사가 된 과정 또한 지금과 비슷했다. 신탁을 통해 용사로 지정됐고, 주변의 도움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차츰 용사의 격을 갖춰 갔다.

신탁이 내려온 시기가 다르긴 했지만, 전생과는 상황이 달라졌기에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신탁 자체가 가짜라고?

"네. 분명합니다. 감히 그분의 이름을 걸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번 신탁은 교황과 추기경 우리베가 만든 가짜입니다."

"그럼 당신이 화형대에 올랐던 것도…."

"네, 그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죠."

거짓 신탁과 그것을 폭로하려던 리카엘, 그로 인한 누명.

그렇게 생각하면 상황이 딱딱 들어맞았다.

하지만 아이리우스는 신탁이 가짜란 걸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번 신탁이 가짜라면, 전생의 신탁도 가짜였단 말인가…?'

어쩌면 그게 이번 생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네. 모든 게 내 불찰로 벌어진 일이네."

그때, 하자르가 고개를 숙였다. 생각에 잠겼던 아이리우스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곁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헤이론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일은 황실의 압박에 못 이긴 의회의 농간이야. 지난 전쟁에서 패한 후 그들은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을 궁구했고, 그게 지금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지. 결국 그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내 과실일세."

그리 말한 그는 리카엘에게도 사과의 말을 건넸다.

"고초를 겪게 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그게 어찌 황자님의 잘못이겠습니까."

아이리우스와 리카엘에게 사과한 하자르는 슬슬 진짜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이들을 이곳에 모은 이유.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리카엘의 목적이 아이리우스란 걸 깨달았을 때, 어쩌면 의회를 끝낼 기회가 온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혹여 마스터의 기감에 걸릴까 매일 같이 사람을 바꾸면서까지 리카엘의 주변을 확인했다.

늦은 밤, 휴이가 거처를 벗어나자 하자르는 그것이 아이리우스와 접선하기 위한 것이라 판단했다. 하여 그때를 노려 리카엘을 찾아갔다.

그건 앞으로 나눌 이야기의 보안을 위한 것이기도 했으며, 대화의 주도권을 자신이 쥐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의 자리가 마련됐다.

"의회를 없애는 데 힘을 보태줬으면 합니다."

적지 않은 품이 들었지만 만족스러웠다.

의회를 없앨 기회가 눈앞으로 다가왔으니까.

'제국의 이권을 팔아 사적 이익을 취했으니 명분은 충분하다.'

명분뿐 아니라, 전력도 충분했다.

전 성녀 후보 리카엘.

의문의 마스터 휴이.

전쟁 영웅 아이리우스.

또 다른 제국의 소드마스터 헤이론.

황실의 병력에 이들이 손을 더해 준다면 의회가 사라지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과거의 의회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의 의회는 제국을 좀먹는 해충에 불과합니다. 지난 전쟁으로 입은 피해가 얼마입니까. 물질적인 것을 떠나 제국의 수많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그들은 앞으로도 여러 차례 전쟁을 시도할 겁니다. 지금처럼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요."

그를 위해, 하자르는 의회의 잘못을 성토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제국의 것을 팔아 사적으로 이익을 취했습니다. 제국의 것이 자신들의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더 이상 그들의 월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 기회였고, 지금 해야만 했다. 아이리우스가 용사로 임명되고 나면 저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갈 수도 있었다.

'의회를 없애겠다고.'

아이리우스는 하자르의 발언을 곱씹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의 의회는 본래의 목적에서 변질된 조직이 맞았다.

제국이 나아갈 올바른 길을 제시할 의무를 지녔으나 그 책임을 등진 이들.

'전생의 전쟁도 의회의 입김이 작용한 것들이었지.'

비단 바깥대륙과만이 아니라 전생의 제국은 중앙대륙의 국가들과도 수차례 전쟁을 치렀다.

조금 전 하자르의 말처럼 의회의 강한 의지로 인한 것들이었다.

'전쟁이 사라지면 고통받는 사람들도 사라진다.'

아이리우스는 전생을 떠올렸다. 전장의 비명과 전사한 가족을 받아든 이들의 통곡 소리.

그들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다면….

'용사란 이름 따위 아무래도 좋다.'

신탁이 가짜이건 진짜이건 상관없다. 자신은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면 될 뿐이었다.

"좋습니다. 돕겠습니다."

"아이리우스 님!"

아이리우스가 확답하자 헤이론이 걱정을 내비쳤다. 의회를 공격하겠다니, 자칫하면 큰일로 번질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아이리우스도 헤이론이 걱정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단, 황자님을 돕는 건 제 가문이 아닌 저 개인, 아이리우스입니다."

"충분하네. 제국의 영웅이 돕는다니 마음이 든든하군."

그녀는 가문과 자신을 철저히 분리했다. 이로써 만약 의회를 완전히 없애는 데 실패한다 해도 가문이 타격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거짓 신탁으로 인해 피해를 봤다는 명분도 있고 말이지.'

한편 그녀가 황자를 돕기로 하자 헤이론도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그대 역시 개인적인 협조겠지?"

"물론입니다."

하자르는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론은 생각지도 못한 전력이었다. 애초에 그가 이 자리에 함께일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질문이 있는데."

그때, 여태까지 상황이 돌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휴이가 말문을 열었다.

의회를 없애는 거야 그가 알 바 아니었다. 리카엘이 원한다면 도움을 줄 용의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었다.

"그 의회란 녀석들을 처리하면 리카엘은 어떻게 되는 거지? 신분을 회복할 수 있는 건가?"

뜻이 맞아 함께하는 모양새가 됐지만, 엄연히 말하면 하자르와 리카엘의 목적은 달랐다.

하자르는 의회를 없애는 데 중점을 뒀지만, 리카엘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신분의 복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신탁이 가짜란 사실을 밝힐 수 있을지 여쭙고 싶습니다."

리카엘의 눈동자가 하자르를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 하자르에게 보이는 그녀의 아우라는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솔직히 신탁이 가짜임을 밝히는 건 불가능합니다."

의회를 없애는 거야 제국 내부의 일이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후폭풍 또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러나 성국은 달랐다. 자칫 그들의 신탁이 거짓임을 밝혔다간 국가 간의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들에게 우리가 신탁이 가짜임을 알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최선입니다. 스스로 몸을 움츠리도록 하는 거죠."

"고작 그게 전부입니까."

"대신 리카엘 님께 제국에서 살 수 있을 새로운 신분과 충분한 지원을 약조 드리겠습니다. 물론, 이는 의회의 일과는 상관없이 드리는 약속입니다."

하자르가 약속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녀가 원하는 게 더 있다면 최대한 맞춰 줄 용의는 있었지만 성국을 직접 겨냥하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그렇군요."

리카엘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신분이야 어떻든 신탁이 가짜란 걸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하자르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

"어떻게 할 거야."

"휴이만 괜찮다면, 돕고 싶어요."

속 좁은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리카엘은 의회를 없애는 데 힘을 보태고 싶었다.

그들이 없어지면 어쨌든 교황과 우리베 또한 피해를 볼 것 아닌가.

"잘 생각했어."

그녀의 말을 들은 휴이가 씨익 웃었다. 그는 당하고만 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비록 자신이 직접 당한 건 아니었지만 동료가 당한 건 자신이 당한 것과 마찬가지의 일.

"그럼. 결정됐군요."

이곳의 모두가 함께하기로 하자 하자르는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결행일은 바로 내일이 될 겁니다. 성국의 사절단이 도착하기 전에 끝내야 하니."

의회가 사라질 날까지, 앞으로 하루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65화

돌아오는 밤을 결행일로 정한 하자르는 각자가 맡아야 할 일을 알려 줬다.

"한 사람 당 두 명의 의원을 처리해 줬으면 하네."

의회의 총원은 열둘이었다. 얼마 전 파라우드의 죽음을 확인했으니 남은 의원은 열하나.

아이리우스, 헤이론, 휴이. 세 명의 마스터가 각각 둘씩을 맡아준다면 황실이 처리해야 할 인원은 다섯으로 줄었다.

"그대들에게 부탁할 이들은 전부 제도에 들어와 있는 상황일세."

기본적으로 의원들의 신상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들 간에도 서로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하자르는 아우라의 힘을 바탕으로 그들의 정체를 파악해 둔 지 오래였다.

그리고 때마침, 다수의 의원들이 제도에 들어왔다. 본래 제도에 머무는 숫자는 몇 되지 않았으나 성국의 사절단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모인 게 아닐까 추측됐다.

'오히려 잘됐지.'

그들이 한 데 모여 있을수록 일망타진하기 쉬웠다.

하자르는 세 사람이 제도의 의원들을 처리하는 타이밍에 맞춰 황실의 병력을 파견, 제도에 없는 나머지 의원들도 섬멸할 생각이었다.

"간단한 일이네."

모든 설명을 들은 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들이 머무는 곳과 그들을 지키고 있는 병력, 주의해야 할 점들을 모조리 알려 줬으니 어려울 게 없었다.

"속도가 관건이겠군요."

"그래. 의원들이 눈치 채고 도망칠 수 없도록. 최대한 동시에 그들을 처리해야 하지."

유일하게 신경 써야 할 게 있다면 그것이었다. 하나라도 도망쳐선 안 되니 서로 간에 타이밍을 잘 맞춰야 했다.

"너무 걱정들은 말게. 통신구를 지급해 줄 테니 그것을 통해 서로의 상황을 공유하면 될 걸세."

하지만 하자르는 아이리우스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통신구를 이용하면 두 번째 목표까지는 불가능하더라도 첫 번째 목표를 죽이는 시기는 맞출 수 있을 터였다.

"…저는 뭘 하면 될까요?"

세 명의 마스터가 각자 부여받은 타깃의 정보를 살피고 있을 때. 리카엘이 멋쩍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아무 임무도 받지 못한 그녀는 자신도 뭔가를 해야 한다 생각하는 중이었다.

"아무것도요."

그러나 리카엘의 기대는 배신당했다. 하자르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다른 셋에게 의원들을 처리해 달라고 간단하게 말하긴 했지만, 그건 그들이 마스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의원들은 많은 사병들을 데리고 있었다. 괜히 전투 요원도 아닌 그녀가 나섰다가 잡히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그래. 숙소에서 쉬고 있어. 빨리 끝내고 돌아갈 테니까."

휴이도 하자르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녀까지 나설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안전한 곳에 있어야 했다.

"아, 숙소에 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휴이가 숙소를 언급하자 하자르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한동안 이곳에서 머무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앞으로 머무를 거처를 마련하기 전까지만이라도요."

그들이 구한 숙소도 괜찮기는 했으나 안전성을 고려했을 때 이곳보다 뛰어난 곳은 없었다.

무려 황실이 소유한 건물이 아닌가.

몰라서라면 모를까, 이곳의 주인이 누군지 알면서 함부로 접근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더군다나 이곳 별장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사용인들도 전부 물려 놓은 상태였다. 앞으로도 며칠간은 사용인을 들일 예정이 없었으니, 그녀가 머물기에 적합했다.

"좋은 생각 같은데."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리카엘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하자르는 몸을 일으켰다. 모든 이야기를 마쳤으니, 슬슬 황궁으로 돌아가 봐야 할 때였다.

"그럼. 난 먼저 들어가 보겠네. 그대들끼리 남은 말이 있다면 마저 하도록 하게. 내일 해질녘에 이곳에서 다시 보는 걸로 하지. 그때 통신구를 비롯해 도움 될 만한 것들을 가져다주겠네."

하자르는 아이리우스와 헤이론의 인사를 뒤로 하고, 밖에서 기다리던 토르강과 함께 저택을 떠났다.

그가 떠나고. 남은 넷 사이로 적막이 내려앉았다.

'어색하네요….'

리카엘이 아이리우스를 만나려고 했던 건 신탁에 대해 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하자르가 개입하며 굳이 그녀에게 신탁에 대해 묻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루드란테에 대해 물어보고 싶지만... 괜한 경계만 사겠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건 아이리우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휴이에게 루드와 떨어져 있는 이유에 대해서 묻고 싶었으나 오랜 고민 끝에 그만두기로 했다.

괜히 그들을 알고 있다는 걸 노출했다간 경계를 사기만 할 뿐이었다.

"...하실 이야기가 없다면 저희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네! 내일 뵙겠습니다."

결국 오랜 침묵은 아이리우스와 헤이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끝을 맺었다.

그리고 하루라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 * *

야심한 시각. 의회의 회의장에 의원들이 입장했다. 파라우드를 제외한 열 한 명의 의원들이 모두 자리를 채웠다.

"이제 곧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용사 임명식이 끝나고 나면 숨통이 좀 트이겠군요."

용사 임명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계획대로 아이리우스가 용사로 임명된다면 그녀를 이용해 여러 가지 상황을 연출할 수 있을 터였다.

"사절단과의 교섭이 중요하겠네요."

"예, 그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여태까지의 일들이 모두 헛수고가 되니 말이죠."

그를 위해선 성국 사절단과의 만남이 중요했다. 용사 임명 후의 일들을 도모하기 위해 미리 약속해 둔 만남으로, 그곳에서 서로가 만족할 만한 합의점을 찾아야만 했다.

"모두 아시겠지만, 오늘의 회의는 성국과의 교섭에 대비한 회의입니다."

의장은 그리 말하며 회의를 시작했다.

"성국 사절단의 대표는 우리베 추기경입니다."

가짜 신탁을 내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던 우리베. 그가 의회와의 교섭을 위해 제도로 오는 중이었다.

"그에 대한 조사는 마쳤습니까?"

"네. 그가 수수한 뇌물과 청탁 등을 모조리 확인했고, 필요하다면 언제 어느 때는 터트릴 수 있게 조치해 뒀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우리베는 대단한 욕심쟁이였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요구할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그를 제어할 목줄이 필요했다. 그가 받은 뇌물과 청탁에 관한 자료는 그 중 하나.

'물론 실제로 사용하는 일은 없어야겠지.'

이건 도를 넘는 요구를 막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우리베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 의회로서도 폭로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이걸 사용한다면, 자신들과 성국 중 어느 한 곳은 끝장을 보게 될 테니까.

"후. 빨리 용사 임명식이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황실의 압박이 거세긴 했죠. 그래도 최근에는 좀 약해지지 않았습니까? 계속 압박을 하자니 저들도 힘이 빠진 모양새더군요."

의원들은 곧 다가올 날을 기대하며 떠들었다. 회의 중의 잡담은 삼가야 할 것이었으나, 근래 그들의 노고를 아는 의장은 구태여 질책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회의는 점차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하시렵니까."

"그거 좋죠."

서로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의원 몇은 술 약속을 잡았다. 평소에는 먼 거리로 만나기 어려웠으니, 함께 제도에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그럼. 이것으로 회의를... 음?"

부담감에 시달리던 의원들이 편안해 보이자 웃음과 함께 회의를 마무리하려던 의장이 별안간 발언을 멈췄다.

회의가 마무리되기 직전, 회의장을 떠난 이들 때문이었다.

"허어, 고생한 건 알겠으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저…."

사라진 건 조금 전까지 술자리를 언급하던 의원들.

그들이 술자리를 위해 빨리 퇴장했다고 여긴 한 의원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러나 그 또한 곧 회의장에서 사라진 건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회의장의 자리가 속속들이 비기 시작한 것이다.

'스스로 나간 게 아니다. 나갈 수밖에 없어진 거야.'

이곳 회의장은 마법의 힘을 빌려 만든 특수 공간이었다.

어지간한 외부의 개입으로는 회의장 내부에 영향을 미치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참여자가 강제로 이 공간을 벗어나게 되는 상황이 하나 있었다.

'전부 죽인 건가!'

그건 바로 참여자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어느새 회의장에 남은 건 의장 하나뿐이었다.

"하자르!!!"

의장은 의원 모두를 죽였을 주범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녀석이 분명했다. 녀석이 아니고서야 이런 짓을 할 인간이 없었다.

"하자르 네놈이 또...!!!"

일평생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녀석이 다시 한 번 제 미래를 부순 것이다.

회의장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자, 의장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이 사라졌다.

그렇게 드러난 맨 얼굴은 놀랍게도 하자르와 똑 닮아 있었다.

금색의 머리칼, 눈매, 입 꼬리. 얼핏 보면 동일 인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자세히 살피면 하자르보다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모습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의장은 문 너머에 있을 이가 누구일지 짐작했다.

"…들어와라."

예상대로, 그를 찾아온 건 하자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하자르는 의장, 자신의 형님이자 제국의 1황자인 에르단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지금 그가 에르단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였다.

"재밌는 짓을 벌였더구나."

"형님이야말로 도를 넘으셨더군요."

"내가 말이냐? 내 자리를 뺏은 네놈이 넘은 건 아니고?"

에르단은 황실의 적자임에도 불구하고 황태자가 아니었다. 그건 전부 하자르 때문이었다.

"네놈이야말로 아버지의 눈을 가리고 귀족들을 구워삶아 내 자리를 훔쳐 가지 않았더냐!"

"훔쳐 간 적 없습니다. 정당히 도전했고, 쟁취했을 뿐이죠."

특별한 결격 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 없지도 않았으니, 보통이라면 에르단이 차기 황제에 오르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문제는 하자르가 너무 뛰어났다는 데 있었다.

아우라를 보는 눈으로 적아를 구별하고 인재를 등용한 하자르는 날이 갈수록 대단한 업적들을 쌓았다.

그것들은 에르단의 숨통을 조여 왔고, 끝끝내 그의 자리를 앗아가는 결과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닿은 곳이 고작 의회입니까."

몇 년 전. 하자르에게 밀린 에르단은 칩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회의 새로운 수장이 되었다.

그가 어떻게 의장이 되었는지는 하자르로서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의회의 힘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 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재밌는 건 의회의 의원들도 그가 1황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제국의 주인이 되겠다는 자가 제국의 이권을 팔아넘기고, 제국의 백성을 제물로 바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자르는 강한 어조로 에르단을 규탄했다. 과거의 형님은 그래도 제국을 위하는 마음이 있던 분이셨다. 그래서 한편으론 그의 자리를 뺏은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에르단은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해 삐뚤어진 애새끼에 불과했다.

"이제 끝입니다."

"끝이라고? 하하.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를 하는구나."

모든 의원들이 죽었으니 의회가 사라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에르단은 오히려 하자르를 비웃었다.

제가 잘난 줄 아는 동생은 진짜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고작 의회 하나 없앴다고 기고만장한 꼴이라니.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아느냐?"

"황제 폐하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미 형님의 목숨을 거두는 것에 재가를 받고 왔습니다."

하자르는 에르단이 황제의 보호를 믿는 거라 여겼다.

과거에도 한 번 아버지의 은혜로 목숨을 부지한 적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그것을 믿고 강하게 나서는 것일 터.

"아버지마저 나를 버렸단 말인가. 크크크. 크하하하!!!"

황제가 자신의 죽음을 허락했다는 소식에 에르단은 크게 웃었다.

그러다, 미친 듯이 웃던 그의 웃음이 뚝 그쳤다. 하자르의 검이 그의 가슴을 관통한 탓이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형님."

"나는… 할아버지의 뜻을… 황제가…."

한이 맺힌 듯 중얼거리던 에르단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검을 뽑은 하자르는 쓰러진 에르단을 바라보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지 오래거늘, 아직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라니.'

철혈의 황제라 불리던 선황제 루카 카르바나.

그는 살아생전 에르단을 무척이나 어여뻐 했다. 우스갯소리로 그가 살아 있었다면 하자르가 황태자가 되는 일은 없었을 거란 얘기까지 있을 정도였다.

에르단이 할아버님의 이름을 꺼낸 건 그 때문일 터.

하지만 그는 죽은 지 오래였다.

검에 묻은 피를 닦은 하자르는 발걸음을 돌렸다.

마침내, 오랜 세월 제국을 좀먹던 의회를 끝내는 데 성공한 순간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66화

의회가 사라졌지만, 당장 그 소식이 퍼져 나가지는 않았다.

하자르는 의원들을 처리하는 데 동원했던 병력들을 단속했다.

의회가 없어졌다는 소식은 다음 황실 회의를 통해 밝힐 생각이었으니, 그전까진 기밀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용사 임명식이 오늘이군."

어제 오후. 성국의 사절단이 제도에 도착했다. 짧게 여장을 푼 그들은 오늘 용사 임명식을 진행한 후 내일 떠날 예정이었다.

하자르는 제국을 대표해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이 머물 곳이며 먹을 것, 시중을 드는 이들까지. 하자르의 손이 닿지 않은 게 없었다.

'그들과 접선하기로 했던 이들은 이젠 없지만 말이지.'

그것들은 사절단의 파견이 예고됐을 때부터 준비한 것들이었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들.

다만 의회가 사라진 지금 그것들을 활용할 일은 없을 터였다.

"황자님, 시간입니다."

"그래."

토르강의 언질을 받은 하자르가 황성을 나섰다.

제도는 축제 분위기였다. 제국의 영웅이 신성한 용사가 되는 날이었으니 모두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용사 임명식이 거행되는 광장에는 이미 무수한 인파가 몰려 있었다.

하자르는 광장 중앙에 마련된 귀빈석으로 향했다.

이번 임명식에는 제국과 성국을 비롯해 각국의 귀빈들이 자리할 예정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자님."

"고르발트 공, 잘 지내셨습니까."

먼저 앉아 있던 고르발트가 하자르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그는 고르단 왕국의 왕족으로, 왕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었다.

"저야 뭐, 늘 똑같죠."

고르발트와 하자르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그의 아우라를 확인한 하자르가 적극적으로 교분을 쌓으려 한 덕분이었다.

"그보다 축하드립니다. 용사까지 보유하게 되셨으니, 제국의 위세가 어디까지 뻗어 갈지 감도 안 잡히는군요. 하하."

"용사를 보유했다뇨. 큰일 날 말씀입니다."

용사는 신화 속의 존재였다. 많은 이들이 용사를 먼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 정도로 알았지만, 그 이야기의 원본은 대륙 전체를 관통하는 신화였다.

'그렇기에 더 상징적이지.'

이야기가 신화에 기반한 것이란 건 몰라도, 용사란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봤을 테니.

"이제 시작하나 보군요."

귀빈석이 가득 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국의 사절단이 도착했다. 그들은 광장 위로 마련된 단상에 올라 하늘을 향해 예를 갖췄다.

"용사 임명식을 시작하겠다."

식을 진행하는 건 사절단의 대표이자 성국의 추기경, 우리베였다.

예식용 검을 든 그는 단상 중앙에 서더니 무언가를 읊었다.

이윽고 마법을 통해 확장된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갔다.

"태초에, 대륙은 악으로 뒤덮였다. 악하고, 사이하며, 그릇된 것들이 세상을 물들이니, 그로 인해 인간은 항상 고통받았다."

그건 신화 속의 한 구절이었다. 동시에 의회와 성국이 합심해 만든 가짜 신탁의 구절이기도 했다.

'우리베! 이 더러운!'

광장에 인접한 건물. 하자르가 마련해 준 은신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리카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

뻔뻔하게 신의 이름을 빌려 거짓을 말하다니. 추기경이란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멀리서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하여 주신께선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선사하기 위해 용사를 내리셨다. 태초의 용사가 그분의 뜻을 따라 악을 멸하고 선을 행하니, 이윽고 대륙에 빛이 생겨났다."

그 시점에서, 아이리우스가 단상 위로 올라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시간이 흐르며 태초의 용사가 가져온 빛은 점차 약해졌고, 몸을 웅크린 채 빛이 약해지길 기다리던 악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베는 아이리우스를 바라봤다.

아름다운 외모, 절대의 경지, 빼어난 가문.

모든 것을 갖춘 그녀는 곧 자신들의 꼭두각시가 될 예정이었다.

'얼른 의회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앞으로 용사를 어떻게 활용할 건지. 신탁은 어떤 식으로 내릴 건지.

임명식을 마친 후 의회와 의논하기로 했다.

서로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테니, 벌써부터 그들과 나눌 대화가 기대됐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악하고, 사이하고, 그릇된 것들이 마왕의 이름 아래 다시 대륙을 집어삼킬 것이다."

우리베가 든 예식용 검이 아이리우스의 양어깨를 한 차례씩 두드렸다.

"그리하여, 다시금 어둠을 물리칠 대리인을 보내나니, 제국에서 새로 탄생한 빛나는 황금의 별을 따라 내 뜻을 펼치라."

마지막으로, 예식용 검이 아이리우스의 정수리를 건드린 순간.

화아아악-!!!

아이리우스의 몸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비, 빛이다."

"그분의 뜻이다!"

"성스러운 빛. 용사의 탄생이다!!!"

그 모습을 본 군중들은 하나같이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신께서 대륙을 보우하시기 위해 보낸 존재를 감히 선 채 맞이할 순 없었다.

'신성력인가.'

한편, 정작 빛의 중심에 선 아이리우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터져 나온 빛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아마도 우리베 추기경의 것이겠지.'

전생의 경험으로 신성력에 익숙해져 있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생, 갖은 가호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신성력을 다뤄 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몸을 휘감은 빛은 신성력을 통한 연출이라는 것을.

'...정말 가짜였군.'

일부러 이런 연출을 한 것은 용사의 상징성을 위해서라 여길 수도 있었다.

'리카엘의 말이 맞았다. 이들은 타락했어.'

그러나 지금 우리베의 표정은, 결코 신실한 성직자의 것이 아니었다.

빛을 뿜은 것은 용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서였다.

용사가 화려하게 빛날수록 그를 이용해 이득을 취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 쉽게 이용당하진 않을 거다.'

강렬했던 임명식이 끝나고 단상을 내려오는 아이리우스는 이를 꽉 깨물었다.

어쩌면 과거에 얻었던 용사의 이름도 연극에 불과했을지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아렸다.

그때.

'음?'

"어…?"

단상을 내려온 아이리우스와 멀리서 단상을 바라보고 있던 리카엘이 동시에 반응했다.

"저건 뭐냐."

"일단 막아!"

누군가 단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뚜벅뚜벅 걷는 발걸음에선 다급함도,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 충실한 움직임이었다.

쿠당탕!!

"크악!"

"막아! 절대 단상에 올라가게 해선 안 돼!"

병사들이 그의 앞길을 막아섰지만, 누구도 그의 발을 묶지 못했다.

순식간에 제압당한 병사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

귀빈석에 앉은 하자르는 후드를 뒤집어쓴 그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사이, 기사들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해 쓰러졌다. 이대로는 제국의 위상이 곤두박질칠 상황.

"제가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잠깐, 기다려 보지."

보다 못한 토르강이 직접 나서려 했지만, 하자르가 그를 만류했다.

앞을 가로막은 이들을 모조리 쓰러트린 사내는 마침내 단상 위로 올라섰다.

그는 우리베를 향해 걸어갔다. 단상 위의 다른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오직 그만을 바라보면서.

"오랜만이야."

"그게 무슨, 나는 네놈 같은 녀석을 본 적이...!!!"

사내의 말에 의문을 표하던 우리베는 이내 경악하고 말았다.

"너, 너, 너...!!!"

사내가 후드를 벗자, 성도 성 마르티나에서 리카엘을 데리고 도주했던 마스터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

"!!"

우리베만이 아니라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성기사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자가 대체 왜 여기에.

'설마 리카엘 그년도?'

하지만 리카엘이 있는지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우리베는 손에 들린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예식용 검이라 날도 서 있지 않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을 여유는 없었다.

'죽는다!'

우리베는 죽음을 느꼈다. 녀석이 다시 나타난 건 자신을 죽이기 위함이 분명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자신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사, 산 건가?'

겁만 주기 위해서 온 걸까?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겁을 먹은 걸지도 몰랐다.

아무리 마스터라 해도, 제국과 성국이 함께 주관한 데다 타국의 귀빈들도 많은 자리였으니.

"우리베 님!"

"추기경 님!"

근데 어째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달려오는 거지? 표정은 왜 또 저렇고?

배에 구멍이 뚫린 우리베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절명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죽음을 눈치채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제야 좀 속이 시원하군."

손에 묻은 피를 털어 낸 휴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신탁이 가짜인 건 밝히지 못하더라도, 우리베가 의기양양하게 살아있는 꼴은 볼 수 없었다.

휴이는 리카엘이 있을 위치를 바라봤다.

이것으로 그녀의 마음속에 있을 응어리가 조금은 풀렸길 바랐다.

"벼, 병사들은 무엇 하느냐! 녀석을 포박하라!"

귀빈석에서 큰 목소리가 나왔다.

무려 추기경을 살해한 악한이었으니 당장 잡아서 죽여야 했다.

하지만 이미 근방의 병력들은 모조리 쓰러진 상태. 남은 이들이라곤 귀빈들이 보유한 경호 인력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쉽사리 나서지 않았다. 섣불리 덤벼 피해를 보는 것보단 자신의 주인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 판단한 것이다.

주변을 쓱 훑어본 휴이는 하자르와 눈을 마주치곤 씩 웃었다. 하자르 또한 옅은 미소를 보였다.

그 직후, 휴이는 도주를 선택했다. 등장했을 때와 달리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토르강."

"예, 전하."

"녀석을 쫓아라. 단, 무리하지 마라. 공범이 있을 수도 있다. 귀빈들의 안전을 최우선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토르강은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귀빈의 안전을 우선하라는, 외교적 문제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명령이었으나 그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쫓는 시늉만 하고 보내 줘라.'

'알겠습니다.'

그를 직접적으로 도울 수는 없지만,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사건을 수습하는 데 품이 들긴 하겠지만, 의회를 처리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따로 알려 줄 필요는 없겠군.'

토르강을 보낸 뒤, 리카엘에게 제공했던 건물을 바라본 하자르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전까지 그곳에서 보이던 아우라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고 성국을 압박할 패로 쓸까 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녀가 어디로 향했을지는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 * *

제도에 위치한 어느 산.

휴이는 토르강과 마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너무 빨라서 도통 잡을 수가 없군요."

휴이가 바로 앞에 있음에도 토르강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어디로 도망간 건지도 모르겠고요."

그 모습에 휴이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떠나실 겁니까? 황자님께서 여러 제안을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어서 말이야."

하자르는 휴이에게 귀족의 자리를 약속했다. 그가 알브족인 것을 깨닫고는 원한다면 대수림과 가까운 영지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휴이가 있어야 할 곳은 제국이 아니었다.

'북부를 둘러보고 나면 슬슬 돌아가야겠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마스터에 올랐으니 곁에 있을 자격은 충분하리라.

리카엘도 이제 안전해졌으니 너무 늦지 않게 여정을 마치고 루드의 옆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렇군요. 아쉽지만, 여러분의 생각을 존중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토르강은 아쉬움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휴이는 '여러분'이라는 말에 의문을 느꼈으나 이내 별것 아니겠지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그때.

"휴이!"

예상치 못한 이가 그의 앞을 막았다.

"리카엘?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후우, 후우. …저도 같이 가요."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은 리카엘이 턱에 흐른 땀을 닦았다.

"저 때문에 도망치는 것만 두 번짼데, 어떻게 저 혼자 편하게 있겠어요."

"하지만 하자르가 많은 지원을 약속했잖아. 이제 위협될 것도 없을 텐데."

휴이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자르는 리카엘에게도 몇 가지 제안을 건넸다.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건 제국에서의 안락하고 평안한 삶이 아닌 자신을 위해 나서는 동료의 곁이었다.

"여기 있으면 심심하기만 할 것 같아서요. 당신과 함께하면 재밌을 것 같은데. 안 되나요?"

"안 될 게 뭐 있겠어. 좋아."

휴이로서는 반가운 말이었다. 내심 리카엘과 헤어지는 게 아쉬웠으니까.

"잘 부탁해."

"저도,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립니다."

새로운 여정에 앞서,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눴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67화

제국 북부의 대도시 에스카토는 마법의 도시라고도 불렸다.

지금이야 '마법사가 되고 싶다면 에스카토로 가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지만, 이곳이 처음부터 그렇게 불렸던 건 아니었다.

시작은 어느 마법 학파가 에스카토에 자리 잡으면서부터였다.

그들은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고, 그들과 교류하기를 원한 다른 학파들은 그들을 따라 에스카토로 들어왔다.

하나둘 마법 학파들이 모이자 다른 학파들도 에스카토로 몰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 시점에서 에스카토는 마법의 도시로 불리기 시작했다. 마법사들끼리 교류할 수 있는 창구가 된 것이다.

본디 마법사란 지극히 개인주의적 성향의 생물이었으나, 진리에 대한 갈구와 탐구심은 그것을 뛰어넘게 했다.

에스카토에 모인 마법 학파들은 때론 경쟁하고 때론 협동하며 점점 발전해 나갔다. 이곳만큼 마법사들의 교류가 활발한 곳은 없었다. 몇 도시들이 에스카토를 따라 마법의 도시로 탈바꿈하고자 했으나 전부 실패하고 말았다.

에스카토가 유명해지자 마법 학파에 적을 두지 않은 자유 소속 마법사들도 늘어났다. 이곳에선 학파를 초월해 배움을 얻을 수 있단 소식을 들은 이들이었다.

'마탑도 이곳에서 시작된 거였지.'

현대 마법계의 중추인 마탑도 에스카토에서 비롯됐다.

정확히는 에스카토에서의 선순환을 전 대륙으로 확장시켜 보자는 몇 마법 학파의 합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들의 뜻은 성공했고, 마탑은 이제 마법사들에게 없어선 안 될 곳이 되었다.

'정작 에스카토를 마법의 도시로 만든 학파는 힘들어 죽으려 그러지만.'

긴 여정 끝에 에스카토에 도착한 루드는 실소를 흘렸다.

괜히 마법의 도시라 불리는 게 아니라는 듯, 에스카토의 풍경은 다른 어떤 도시들과도 달랐다.

"그만! 이 정도면 오늘 장사는 충분해요."

한 술집에선 빙결계 마법사가 장사에 쓰일 얼음을 만들어 냈고.

"어때, 현란하지? 비싼 돈 주고 만든 거야. 멀리서도 한눈에 딱 알아볼 수 있게 말이야. 크크크."

어느 가게의 간판에는 환영 마법이 걸려 있어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켰다.

에스카토가 처음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이 휘둥그레질 풍경.

하지만 루드는 놀라는 대신 에스카토를 마법의 도시로 만들었던 마법 학파를 떠올렸다. 그들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중심지구가 저쪽이었지."

기억을 더듬은 루드는 종말 학파로 향했다. 에스카토의 중심 지구는 크고 번듯한 건물들로 가득했는데, 그중 유일하게 낡고 허름한 건물이 바로 종말 학파의 거처였다.

'건물만 팔아도 몇 년은 걱정 없을 텐데.'

아무리 작더라도 중심지에 있는 건물이었다. 가격을 잘 받아 낸다면 몇 년간은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종말 학파는 전생에서도 끝끝내 이곳을 떠나지 않았었다.

'과거의 영광을 못 잊어서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당장 먹고살 돈도 없는 그들이 비싼 중심지에 있을 수 있는 건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오래전 에스카토에 처음 들어왔던 마법 학파.

에스카토가 마법의 도시로 불리는 기원이 됐던 것이 바로 그들 종말학파였으니까.

'이제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가 되고 말았지만.'

하지만 과거의 영광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종말 학파가 쇠락하자 교류를 원해 찾아오던 학파들은 발걸음을 끊었고, 어느 순간에는 그들의 기원을 욕하기까지 했다.

가장 큰 고비는 종말 학파가 흑마법사를 배척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퍼졌을 때였다.

그나마 연을 이어 오던 학파들도 그때 전부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게 벌써 수십 년 전의 일.

예전처럼 압도적인 실력이 있다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그들에겐 그만한 능력이 없었다.

특정 분야에서는 다른 학파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자신하지만, 문제는 그것들 모두가 현대 마법계에선 소외된 분야라는 점이었다.

"실례합니다."

종말 학파의 내부는 외관과 마찬가지로 허름했다. 벽에는 금이 간 곳이 많았고 청소가 잘 안 됐는지 먼지도 날아다녔다.

'전생과 똑같군.'

건물 구조는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다른 건물에 비하면 작았지만, 종말 학파의 건물도 나름 5층짜리였다.

1층에서 3층은 여러 실험과 연구를 위해 통으로 연결돼 있었고, 4층과 5층은 학파원들의 개인실로 쓰였다.

"누구인가."

목소리가 들려온 건 위쪽이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자 5층의 복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가 보였다.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예정된 손님은 아닌 듯한데."

눈을 가늘게 뜨며 방문객을 확인한 마법사, 아크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알기로 외부인이 방문하기로 한 일은 없었다.

"고대문자의 해석은 잘 되어 가십니까."

"!!!"

그 순간, 아크쉘의 몸이 경직됐다.

그가 제도에서 얻은 고대문자를 연구하고 있다는 건, 의뢰주인 루드비코를 제외하곤 그들 학파의 마법사들만 알고 있는 사실.

그걸 어떻게 처음 보는 젊은 남자가 알고 있는 걸까.

"다른 분들은 안 계시나 봅니다."

루드는 주변을 확인하며 말했다. 건물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아크쉘의 것이 전부였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모두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위험하군. 상당한 강자로 보이는데.'

한편 아크쉘은 식은땀을 흘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대였으나 그렇기에 더욱 위험했다.

비밀에 부친 고대문자를 알고 찾아온 이가 평범할 리 없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건 제대로 파악하기도 어려운 강자란 의미일 터.

'하필 지금이라니. 아니, 지금 같은 기회를 기다린 건가.'

고대문자의 소식을 어떻게 알았을지는 몰라도, 좋은 마음으로 찾아오진 않았을 터였다.

학파의 다른 이들은 외부 행사로 인해 전부 나가 있는 상태. 돌아오려면 멀었으니 도움을 기대할 순 없었다.

아크쉘은 초조함을 다스리며 마법을 준비했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다만 언제든 완성할 수 있도록.

'그러고 보니 지금의 모습은 모르겠군.'

아크쉘의 마력이 조금씩 움직이는 걸 느낀 루드는 그가 자신의 본모습과는 처음 대면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하다 했는데 자신을 경계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이 모습이라면 알아보시겠습니까."

"…자네는!!"

루드의 외관이 루드비코의 것으로 변했다. 순식간에 그의 모습이 바뀌자 아크쉘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접니다. 아크쉘 님께 고대문자의 해석을 부탁드렸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마법보다 더 마법 같았던 상황에 아크쉘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그는 루드를 맞이하기 위해 아래로 내려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본의 아니게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아닐세. 조금 놀라긴 했지만 괜찮네. 조금 전의 그건 신비의 힘인가?"

"맞습니다."

아크쉘은 루드가 모습을 바꾼 게 신비의 힘이란 걸 금방 알아차렸다.

그의 마력이 움직이지 않은 데다, 마법으로는 이렇게 빠르고 폭넓은 변화가 불가능했으니.

"그렇구먼, 그래서… 고대문자 때문에 왔다고?"

"맞습니다."

"마침 잘 왔네. 안 그래도 슬슬 연락을 하려던 참이었어. 따라오게."

아크쉘은 루드를 5층에 있는 자신의 개인 연구실로 안내했다.

"맡겨 준 문자는 80% 정도 해석을 마쳤네. 자료가 더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시점에선 이 정도가 최선일 걸세."

"기대 이상의 성과로군요."

"뭘. 저번에도 말했지만, 예전부터 연구하던 것과 맞닿아 있는 덕이 컸지."

"아뇨, 아크쉘 님이 아니라면 누구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크쉘의 겸양에 루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자신했던 대로, 대륙 전체를 뒤져도 그보다 빠르게 고대문자를 해석할 이는 찾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 빈손으로 온 겐가? 아무리 손님이라곤 하나 첫 방문인데 하다못해 마실 것 정도는 사 왔어야지."

루드의 칭찬이 부끄러웠음일까. 아크쉘은 괜한 소리를 하며 주의를 돌렸다.

'어쩌면 진담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 생각하며 피식 웃은 루드는 마실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건네기로 했다.

"반기실지는 모르겠으나 선물을 준비해 오긴 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추가적으로 맡길 고대문자와 그림이 있습니다."

"…!! 그거 꽤나 기대가 되는군."

짧은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두 사람은 아크쉘의 개인 연구실에 도착했다.

"잠시 기다리게. 방 안이 좀 어질러져 있어서 말일세."

연구실 안쪽엔 온갖 서류가 나뒹굴고 있었다. 언뜻 보면 막 어질러 놓은 것처럼 보이는 모양새였으나, 나름의 규칙성이 있는지 아크쉘은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

오히려 괜히 타인의 손을 타기라도 하면 자료를 찾는 데 한 세월이 걸릴 터.

"됐네. 들어오게."

바닥의 서류를 정리해 공간을 만든 아크쉘이 마침내 루드를 방 안으로 들였다.

"일단 추가적으로 맡기겠다던 자료들을 줄 수 있겠나?"

"여기 있습니다."

루드는 품 안에서 종이 더미를 꺼냈다. 뱀 부족 인근의 유적지에서 발견한 고대문자와 그림을 적어 놓은 종이였다.

"상당한 양이군."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확인한 아크쉘은 감탄했다. 일전에 받았던 자료보다도 방대한 양이었으니까.

이 정도라면 80%가 아니라 90%, 어쩌면 완전히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지 몰랐다.

"잠시 기다려 주겠나? 기존의 것과 조합해 알아낼 수 있는 게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 말이야."

"물론입니다. 천천히 하시죠."

아크쉘은 새로운 자료를 토대로 기존의 해석을 보충해 볼 생각이었다.

약간의 시간만 투자하면 보다 완성도 높은 해석본을 만들 수 있을 터.

"심심하면 건물 내부를 둘러보아도 좋네. 마법 학파의 건물에 들어와 본 적이 있나?"

"예, 뭐. 한 곳 있습니다."

"그래? 그래도 둘러보면 꽤 재밌을 걸세. 마법 학파마다 특색이 다르니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아크쉘은 새로운 자료에 빠져들었다. 기존의 자료와 새로운 자료를 비교하며 자신이 놓친 부분은 없는지, 새로 도출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집중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드는 조용히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이곳들도 그대로군.'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루드는 학파 내부를 천천히 구경했다.

아크쉘의 말대로 꽤나 재미있었다. 물론 그가 생각했던 재미와는 좀 차이가 있겠지만.

'여기가 세일룬의 방이었던가.'

4층 복도의 방 중 하나에는 아기자기한 팻말이 붙어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세일룬'이라 적혀 있었는데, 반가운 이름에 루드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 녀석도 똑같으려나.'

전생과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종말 학파의 모습은 똑같았다.

그러니 세일룬도 기억 속의 모습과 똑같지 않을까?

다른 동료들도 그렇지만, 그녀에게는 빚이 있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종말 학파에 오지도, 마법을 배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흑음의 정수에서 비롯된 흑마력을 다루는 법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녀 말고도 종말 학파에는 신세 진 이들이 참 많았다.

'자라카, 히살리오, 콜롬보.'

루드는 옛 인연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1층으로 내려왔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자리를 비운 그들이지만 금방 만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때. 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 정말! 그러니까 내가 한댔잖아! 이 바보 멍충아!"

"어허. 어른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란다."

"뭐래, 이 밥팅이가."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과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 그리고 그들에게 막말을 쏟아내는 10살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역시 이때도 똑같네.'

그들의 모습을 본 루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68화

마탑의 근원지라 할 수 있는 곳인 만큼, 에스카토에서는 여러 마법 학파와 마법사들이 활발히 교류했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마법 경연 대회도 그중 하나였다.

전투와 이론으로 나뉘는 경연 대회는 학파 단위로 출전이 가능했고, 우승하면 상금과 함께 여러 혜택이 주어졌다.

오늘 아크쉘을 제외한 모두가 학파를 비웠던 것도 마법 경연 대회 때문이었다.

"손님이신가?"

"그러게요. 예정됐던 약속은 없었던 걸로 아는데."

경연 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그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는 얼굴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도둑이야?"

자라카와 콜롬보 뒤에서 고개를 내민 세일룬이 소리쳤다. 뒤늦게 루드를 발견한 그녀는 겁이라도 주려는 듯 눈을 매섭게 떴다.

루드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드란테라고 합니다. 아크쉘 님께 부탁드렸던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뭐야. 아크쉘 영감의 손님이었구만."

"투자자라도 나타난 줄 알았더니 헛물이었네. 에잉."

자라카와 콜롬보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새로운 돈줄이라도 나타난 걸까 기대했건만, 역시나였다.

'그래, 우리 주제에 무슨 투자자냐. 당장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종말 학파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게 오래였다. 마탑에 납품할 만한 아이템을 만들지도, 경연 대회에서 입상하지도 못한 자신들에게 투자하기 위해 찾아올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정신들 차려! 괜한 기대 말고 이번 경연 대회 문제나 다시 풀자. 내년에는 꼭 입상해야 할 거 아냐!"

실의에 빠진 그들을 세일룬이 다그쳤다. 비록 이번 대회에선 입상하지 못했지만, 가능성을 보았다. 내년에는 자신이 더 발전할 테니 분명 입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이고, 난 나이가 들어서 힘들다. 내년까지 살아 있을지도 모르겠구만, 그게 무슨 고생이냐."

"그래. 일단은 좀 쉬자. 경연장에서 머리를 하도 썼더니 하늘이 핑핑 도는 것 같아."

자라카와 콜롬보는 능구렁이처럼 세일룬의 손아귀를 빠져나가 자신들의 방으로 올라갔다.

"이익... 이 바보 똥 멍청이들!!"

홀로 남겨진 세일룬은 그들을 향해 악을 질렀다. 그러나 이미 방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에게서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나 혼자라도 할 거야!"

세일룬은 1층의 책상 위에 커다란 종이를 펼쳤다. 이윽고 종이 위로 어지러운 도형과 글자들이 새겨졌다. 이번 경연 대회의 문제로 나왔던 마법진이었다.

그들이 끝내 시간 안에 풀어내지 못했던 문제는 마법진을 분석해 간결화하는 것.

가장 높은 점수가 배당됐던 문제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면 입상했을지도 몰랐다.

입선한 팀과의 점수 차이가 몇 점밖에 안 났으니.

'포스테코 마법진인가.'

세일룬이 그린 마법진을 확인한 루드는 아무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는 것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포스테코 마법진이 확실했다.

포스테코 마법진은 겹쳐진 비슷한 성질의 마법들을 간략화해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걸 목표로 했다.

미래에는 마탑에서 판매하는 아이템 대부분에 쓰일 정도로 대중화된 마법진.

하지만 지금 시점에선 아직 미완성의 상태일 터였다.

'이게 문제로 나왔던 경연 대회가 이번이었나.'

포스테코 마법진을 처음 고안해 낸 학파는 몇 년이 지나도 연구의 진척이 없자 결국 포스테코 마법진을 경연 대회의 문제로 내놓았다.

독점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누구라도 마법진을 완성시켜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으으…."

한참 동안 마법진과 씨름하던 세일룬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조그만 손안에서 머리카락이 구겨졌다.

'여기만 넘어가면 뭔가 알 것도 같은데. 자꾸 여기서 막힌단 말이지.'

조그만 미간에도 주름이 잡혔다. 그녀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미간에 파인 주름도 함께 깊어졌다.

"이걸 치워 보는 건 어때."

"뭐? 이게 뭔지 알고 말하는 거야? 그렇게 간단히... 어?"

막혔던 영감이 팍 하고 튀어 나간 건 그 순간이었다.

루드의 손끝이 가리킨 선을 머릿속에서 지워 내자, 세일룬의 사고가 순식간에 확장되어 갔다.

'이걸 없애도 기능에는 문제가 없어. 이게 없어지면 저것도 있을 필요가 없고. 그럼 과정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야.'

무아지경에 빠진 세일룬은 종이 위로 미친 듯이 펜을 그었다. 그녀의 손이 움직이며 종이 위의 마법진은 점차 루드의 기억 속 포스테코 마법진과 똑같아졌다.

'역시 대단한 재능이야. 고작 힌트 하나로 이렇게 빨리 포스테코 마법진을 완성시키다니.'

루드가 도와주지 않았어도 세일룬은 포스테코 마법진을 완성해냈을 것이다. 전생에서 포스테코 마법진을 상용화시킨 게 바로 그녀였으니.

하지만 시간은 훨씬 더 걸렸을 것이다. 발상에 균열이 생기면 그것을 깨부수는 건 시간문제지만, 처음의 균열을 만드는 게 무척이나 어려웠다.

실제로 전생의 세일룬이 포스테코 마법진을 완성해 내는 건 앞으로 1년이 지났을 시점이었다.

"됐다…!!"

마침내 펜을 내려놓은 세일룬은 종이를 높이 들었다. 종이 위로 새겨진 마법진이 영롱하게 빛났다.

다른 마법 학파가 몇 년을 매달리고도 성공하지 못한 걸 혼자 힘으로 완성해 낸 것이다.

"큼, 큼큼. 고마워."

한참 동안 마법진을 바라보던 세일룬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인정하긴 싫으나 정체 모를 손님의 도움으로 막혔던 구간이 뚫린 건 사실이었다.

자신은 고마운 것엔 고맙다고 말할 줄 아는 멋진 사람이었으니 감사 인사를 해야 했다.

"뭘, 별거 아니었다."

"별거 아니라니. 이걸 못 풀어서 입상을 못 했는데."

아쉬운 건 이제야 마법진을 완성했다는 사실이었다. 경연장에서 완성했다면 분명 입상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아크쉘도, 자라카도, 콜롬보도, 히살리오도 모두 행복해했겠지?'

세일룬은 입술을 삐죽였다. 입상해서 상금을 탔으면 학파의 재정에도 도움이 됐을 터였다.

그러길 잠시. 세일룬의 생각은 이내 루드에게로 미쳤다.

'근데 이 사람은 뭐지? 천재인 이 몸도 어려워한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다니. 대단한 마법사인가? 아크쉘의 손님인 걸 보면 그럴지도?'

스스로의 입으로 말해서 믿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세일룬은 명실상부한 천재였다.

숱한 마법사들이 모인 에스카토에서도 그녀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는 없었다. 이는 종말 학파의 사람들만이 아닌 다른 학파의 사람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이번 경연 대회에서도 자라카와 콜롬보가 조금만 더 도움이 됐다면 입상에 성공했을 거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자신조차 애를 먹었던 문제를 단숨에 풀어낸 인물.

세일룬은 루드에게 호기심과 승부욕을 느꼈다.

"이봐 당신,"

"이제 와 보겠나! 다 됐네!"

그러나 그녀가 루드에게 말을 붙인 순간, 기존의 해석을 보완한 아크쉘도 루드를 불렀다.

루드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 그럼 난 볼일이 있어서 이만."

작은 웃음과 함께 인사를 건넨 뒤 아크쉘이 있는 위쪽으로 향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고? 그거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루드가 위로 향하고. 1층에 남겨진 세일룬은 찬찬히 루드의 말을 곱씹었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마지막 순간엔 비웃음까지 머금지 않았던가!

한편, 아크쉘의 연구실에 도착한 루드는 완성된 고대문자의 해석본을 받아 들었다.

"이게 완성된 내용입니까?"

"그래. 자네가 먼저 건넨 두 개의 자료들을 해석해 놓은 거라네."

신비를 찾았던 공동과 흑음의 정수를 발견했던 우물.

두 곳에서 얻은 고대문자의 해석본을 받아든 루드는 그 내용을 확인했다.

'우선 신비를 찾았던 쪽부터.'

/모두의 힘을 모아 마왕을 사냥하리라.

하나로 안 되면 둘, 둘로 안 되면 셋, 셋으로 안 되면 넷.

끝없이 쏟아지는 어둠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왕을 사냥하리라./

'벽에 그려져 있던 거대한 게 마왕을 표현한 거였나.'

공동에는 고대문자와 함께 거대한 무언가를 사냥하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해석된 내용을 토대로 생각하면 아마 마왕을 그려 놓았던 게 아닐까 싶었다.

'우물 쪽에도 비슷한 그림이 있었지.'

다만 구도 자체는 반대였다. 공동의 그림은 여럿이 거대한 무언가를 사냥하는 모습이었지만 우물의 그림은 거대한 무언가가 여럿을 압도하는 모습이었다.

양쪽의 그림을 떠올린 루드는 남아 있는 해석본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세상 모든 이에게 두려움을 품게 했다.

그것은 때론 마왕으로, 때론 어둠으로, 때론 악신으로 불렸다.

세상 전부가 힘을 모아 그것에 대항했으나 그것은 죽여도 죽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우물 쪽의 내용도 함께 있던 그림과 연관된 것이었다.

'고대 신화를 적어 둔 건가?'

두 곳은 모두 '마왕'이라 표현된 존재와의 전투를 묘사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꼭 오래도록 내려온 신화의 내용과 비슷했다. 문자 자체도 고대의 것이었으니 당시의 신화나 전설을 적어 둔 것이라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신비와 흑음의 정수가 있던 곳에 새겨져 있던 게 우연일까?'

그러나 맨 처음 고대문자를 발견했을 때부터 이어져 온 의문이 남아 있었다.

'뱀 부족의 유적지도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게다가 최근 추가로 고대 문자를 발견한 곳에는 흑음의 정수와는 또 다른 사이한 힘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유적지에서 봤던 환상도 해석본의 내용과 비슷한 느낌이었지.'

루드는 그곳에서 봤던 환상을 상기했다. 자신조차 압도당했던 존재감의 무언가.

과연 이것들이 전부 우연에 불과할까?

"이 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루드는 아크쉘의 의견을 물었다. 오랜 시간 신비와 고대 문자를 연구해 온 그라면 무언가를 알고 있을까 해서였다.

"개인적으론, 신비가 고대 신화와 연관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네."

"그렇게 여기신 이유가 있습니까?"

"신비가 있던 곳에서 발견했다 하지 않았나. 그리고 신비의 힘을 설명하려면 고대 신화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일세."

이렇다 할 근거는 없다는 의미였다. 다만 심증을 가질 만은 했다.

루드 또한 신비, 나아가 정수가 고대 신화와 연관돼 있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었으니.

'마왕, 악신, 어둠... 만약 흑음의 정수가 그것에 관련된 거라면?'

인간의 몸으로 버티기 어려운 부작용.

흑음의 정수에서 비롯되는 흑마력.

신화에서 말하는 그런 존재가 정말 있었던 거라면, 흑음의 정수가 녀석과 관련된 힘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신비는… 용사의 것인가?'

두 곳에서 얻은 내용 중에는 용사에 관한 언급이 없었지만, 용사는 마왕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흑음의 정수가 마왕의 것이라면 신비는 용사의 것이라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일단은 이번에 가져다준 내용들을 서둘러 해석해 보겠네. 양이 상당하니 해석을 마치면 뭐라도 더 나오겠지."

"부탁드립니다."

아크쉘은 의지를 다졌다. 그 덕분에 자신의 개인적인 연구도 진척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각 문자들이 뜻하는 걸 거의 다 알아냈으니, 추가로 가져온 고대문자를 해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것까지 해석을 완성하면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터.

"이봐! 너! 아까 뭐라고 했어!"

그때, 아크쉘의 연구실 앞에서 세일룬이 소리를 질렀다.

긴긴 생각 끝에 루드가 자신을 얕봤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따라 올라온 것이었다.

"세일룬, 예의 없이 이게 무슨 짓이냐!"

하지만 그녀에게 대답한 건 루드가 아닌 아크쉘이었다.

너무 오냐오냐 키운 탓일까, 평소 학파 내의 사람들에게도 곧잘 반말을 하는 세일룬이었다.

자신들이야 그녀를 가족 같이 여기니 웃어넘길 수 있다만, 타인에게까지 그 잣대를 기대해서는 안 될 일.

아크쉘은 성을 내며 세일룬을 크게 나무랐다.

"어서 사과하지 못하겠느냐!"

"이이… 아크쉘 미워!"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한 세일룬은 움찔하더니 빽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가 울며 사라지자 아크쉘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미안하네. 봐서 알겠지만 저 아이를 제외한 모두가 나이가 있다 보니, 너무 오냐오냐 키운 것 같네. 그래도 너무 나쁘게 보진 않았으면 좋겠네. 행동은 저래도 마음은 따뜻한 아이거든."

루드도 알고 있었다. 세일룬은 마음과 행동이 반대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전생에도 동료들과 시도 때도 없이 마찰을 빚었다.

'대부분 세일룬이 떼를 쓰고 다른 녀석들이 받아 주는 형태였지만.'

휴이와 페드리가 제 고집을 받아 주지 않으면 곧잘 리카엘에게 가 칭얼대던 세일룬이었다.

그때의 모습을 떠올린 루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찾기 어려울 텐데… 부탁 좀 함세. 못 찾겠거든 그냥 돌아오게. 그 아이도 마음이 가라앉으면 금방 돌아올 걸세."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세일룬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중심지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있으려나.'

하지만 루드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로 갔을지 알 것 같았으니까.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69화

에스카토의 남쪽에는 언덕이 하나 있었다. 도시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세일룬은 가끔 이곳을 찾았다. 주로 고민이 많거나 부모님 생각이 날 때였다. 이곳에 가만히 앉아 있자면 기분이 한결 나아졌으니까.

'아크쉘 미워.'

오늘도 어김없이 언덕을 찾은 세일룬은 쪼그려 앉아 무릎을 감쌌다.

명소라 부를 만한 장소였지만 대개의 마법사들은 연구실을 잘 벗어나지 않았고, 덕분에 그녀는 매번 언덕을 독차지 할 수 있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학파를 위해 열심히 하고 왔는데 화내기나 하고!'

나무 그늘 아래 앉은 세일룬은 씩씩대며 분을 삭였다.

입상에 실패하긴 했지만, 이번 대회는 최근의 경연 중에서 가장 높은 성적을 거둔 대회였다.

그런데 칭찬은 못할망정 화를 내다니!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심통이 났냐."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세일룬이 움찔했다.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였다.

이곳을 발견한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태까지 다른 사람과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역시 여기 있었나.'

그녀에게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 앉은 루드는 도시의 전경을 바라봤다.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곳은 전생의 세일룬 덕분에 알게 된 곳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어떻게 따라온 거야."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한 세일룬은 부루퉁한 얼굴로 루드를 흘깃거렸다.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는지 확인하는 모양새였다.

"아쉽지만 나 혼자다. 아크쉘 님은 당분간 바쁠 거고, 다른 이들은 네가 삐졌다는 걸 모르니 말이야."

"뭐래."

루드의 말에 세일룬은 훽 고개를 돌렸다. 혹여 다른 이들이 자신을 달래러 왔을까 싶었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창피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루드는 여전히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로 말을 걸었다.

"네가 끙끙대던 문제를 내가 한 번에 푼 게 불만인 거냐?"

"뭐?"

"무지는 죄가 아니다. 게다가 넌 아직 어리지 않나. 앞으로 더 배워 가면 되는 거다."

무지와 어린 나이.

둘 모두 세일룬이 가장 싫어하는 부분을 건드린 말이었다.

"난 무지하지 않아! 어리지도 않고!"

"그래그래. 원래 어린아이들은 스스로가 어린아이란 걸 부정하는 법이지."

"야아아아!!!"

아크쉘은 루드가 세일룬을 다독여 데려오길 원했을지도 모르지만, 루드는 딱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위로할 마음도 마찬가지였고.

그는 익숙하지 않은 따뜻한 말을 건네는 대신 그녀를 도발했다. 그것이 지난 삶의 경험으로 터득한, 세일룬을 다루는 방법이었으니까.

'세일룬은 누구보다도 강한 승부욕을 가진 녀석이지.'

승부욕은 향상심을 품게 하는 강한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세일룬은 루드가 아는 이들 중 누구보다도 강한 승부욕을 갖고 있었다.

때론 그 승부욕이 화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으로 썼던 그녀였다.

"너 지금 나한테 무식하다고 한 거야?"

"그런 말은 한 적 없다만."

어느새 몸을 일으킨 세일룬이 루드를 노려봤다.

뭐? 무지하다고? 어린애라고?

'용서 못 해!'

그가 한 수 재간을 가졌다는 건 인정했다. 그의 의견 덕분에 마법진을 완성한 것은 분명했으니.

하지만 지금의 말은 용납할 수 없었다.

"너! 나랑 대결해!"

세일룬의 내면엔 더 이상 아크쉘을 향한 섭섭함과 서운함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건 루드를 향한 승부욕이었다.

"대결하자고?"

"그래!"

"무슨 대결을 말하는 거지?"

"당연한 걸 뭘 물어! 마법 대결이지!"

그러나 루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법 대결이라… 난 마법사가 아닌데?"

루드의 마법은 흑음의 정수를 토대로 한 흑마법이었다. 이런 곳에서 가볍게 보일 만한 마법이 아니었다.

종말 학파가 흑마법사를 배척하지 않는다곤 하나 그건 그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

다른 마법사들은 흑마력이 느껴지는 즉시 대처에 나설 게 분명했다.

'꼭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현실적인 이유를 제외하고도, 루드가 본인은 마법사가 아니라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세일룬의 반응을 구경하기 위해.

"…뭐? 마법사가 아니라고?"

천천히 굳던 세일룬의 표정이 이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법사도 아닌 녀석한테 마법 지식에서 밀렸단 말인가?

'아냐. 거짓말이야. 그럴 리 없어! 날 놀리려는 게 분명해.'

하지만 루드는 그녀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허리춤에 찬 검을 툭툭 건드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천천히 검을 뽑은 루드는 오러까지 피워 냈다.

"말도 안 돼…."

오러는 마스터의 상징.

세일룬은 루드가 마법사가 아니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소드마스터가 마법까지 다루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검사라 불리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검과 마법 모두 제대로 된 경지를 이루지 못한 이들.

검이든 마법이든 절대의 경지에 오른 이가 양쪽 모두를 사용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특히 마스터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건 더 말이 안 되고.'

그럴 이유는 없겠지만, 대마법사가 검을 수련해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갖추는 건 가능했다.

검에 마력을 담을 수는 없겠지만, 애초에 칼밥 먹고 사는 용병들 중에도 그게 가능한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스터가 마법을 사용하는 건 사정이 달랐다. 오러가 마법사로서의 마력에 반발할 테니, 성립 자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

루드가 정말 마법사가 아니란 걸 깨달은 세일룬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그녀는 대단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잠시 그 모습을 구경하던 루드는 그쯤에서 어깨를 으쓱였다.

"뭐, 마법을 겨루는 게 아니라 마법 지식을 겨루는 거라면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마법사가 아니라며."

"마법사가 아니라 했지 마법에 대해 모른다고 하지는 않았다."

말장난에 가까운 말.

세일룬은 놀림 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나, 화를 내는 대신 루드와 대결할 기회를 잡기로 했다.

"좋아. 그럼 그렇게 승부해."

"근데 난 내기가 안 걸린 승부는 하지 않는 주의라서 말이야."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하나 들어주기. 이 정도면 돼?"

"거기에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앞에서 무릎 꿇고 손들기까지 더하지. 어떤가."

"좋아. 두말하기 없기야."

"내가 할 소리다."

대결은 질의응답의 형식으로 하기로 했다.

상대가 자신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거나 틀리면 1점씩 획득하는 방식이었다.

다섯 번의 질문이 끝난 후 점수가 더 높은 쪽이 승리. 만약 동점이라면 서든데스 룰을 적용하기로 했다.

"나부터 질문할게."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대결.

"...."

"자, 이제 뭘 해야 할지는 알겠지?"

그 승자는 루드였다.

대결이 끝났을 때의 점수는 4대 0.

각 다섯 번씩의 질문에서 루드는 세일룬의 물음에 전부 답했고, 세일룬은 하나만을 간신히 맞췄다.

'미래의 그녀라면 모를까, 지금의 그녀는 내 상대가 못된다.'

루드는 이번 대결에서 미래의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아직 만개하지 않은 그녀였으니 그러지 않았어도 결국 승자는 자신이었을 테지만, 압도적인 승리를 위해서였다.

그에게 패한 세일룬은 정신이 혼미한 모습이었다. 마법사도 아닌 인물에게 자신하던 마법에서 밀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물며 주변에서 천재라 칭송받던 그녀가 아닌가.

범인이라면 박탈감에 삐뚤어질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루드는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의 패배가 그녀의 성장을 촉진하는 자극제가 돼 주겠지.'

틱틱대고 말을 험하게 하긴 해도, 그녀는 단단한 인물이었다.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를 잘 삐지고 신경질적인 이로만 받아들이겠지만, 루드는 아니었다.

목표한 것을 반드시 이루고 제 울타리 안의 사람들을 위해 항상 노력하는 인물.

세일룬은 그런 사람이었다.

"무릎 꿇고 손들어야지?"

"...."

하지만, 그런 그녀의 얼굴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진 것도 서러운데 무릎 꿇고 손까지 들어야 하다니.

"흐에에에엥!!"

땅을 향해 내려가던 무릎이 땅에 닿은 순간. 찰나 간의 접촉을 끝낸 세일룬이 울면서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흠."

루드는 그 뒷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 전생에서 세일룬과 처음 만났던 건 지금으로부터 3년 후.

세일룬이 지금보다 훨씬 성숙했을 때였다.

* * *

루드와 세일룬은 말없이 길을 걸었다. 언덕을 내려온 후부터 계속 이런 상태였다. 목적지가 같았기에 함께 걷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루드는 혹여 그녀가 또 다시 울면서 뛰쳐나갈까 봐 조심스러웠고, 세일룬은 마음이 진정되자 조금 전 자신이 보였던 추태가 창피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음? 왜 사람들이 몰려 있지."

숨 막히던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도착한 학파 앞에는 일단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종말 학파의 사람들이 누군가와 실랑이 중이었다.

"아크쉘!"

"아크쉘 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세일룬과 루드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뛰어갔다.

"자네 왔는가. 별 것 아닐세. 세일룬도 왔구나. 이제 좀 괜찮으냐?"

"응… 미안."

"아니다. 되었으니 안에 들어가 있거라."

아크쉘은 돌아온 두 사람에게 손을 저으며 안에 들어가 있을 것을 권했다.

그러나 루드와 세일룬 둘 모두 안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바깥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몇 번을 말해도 내 생각엔 변함이 없네. 우리는 이곳을 팔 생각이 없네."

종말 학파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이던 건 마법 학파 코반의 마법사들이었다.

코반 학파는 에스카토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학파였다. 마탑에 입점시킨 제품도 여럿이었고 이번 경연 대회에서도 수상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지 마시고 값은 잘 쳐 드리겠습니다. 이곳만 저희에게 넘겨주시죠."

다만 그들의 거처는 에스카토의 변두리에 있었다. 그게 그들의 콤플렉스였다.

에스카토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마법 학파는 이곳 중심지에 있었고, 그렇기에 그들은 언제나 이곳으로 오고 싶어 했다.

그건 비단 코반 학파만의 바람이 아니었다. 에스카토에 있는 마법 학파들은 전부 중심지에 입성하길 원했다.

이렇게 종말 학파를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위치도 좋고,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았으니.

"일 없네. 이만 돌아가 주게."

그러나 생각과 달리 종말 학파의 의사가 너무 강건했다.

'어쩔 수 없네. 좋은 말로 했는데도 들어먹질 않으니, 험한 방식을 택할 수밖에.'

그래도 괜찮았다. 그들이 팔지 않는다면, 내쫓으면 됐으니.

"그렇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아르난 상회에서 돈을 빌리셨더군요."

"그게 그대들과 무슨 상관인가."

"하하. 지금은 상관이 없지만, 앞으로 상관이 있어질 예정이어서요."

코반 학파는 오래 전부터 종말 학파의 거처를 탐냈다. 그를 위해 물밑 작업을 해 둔 것들이 많았고, 드디어 그 결실을 보는 데 성공했다.

"저희가 아르난 상회를 인수해서 말이죠."

"…뭐?"

"빌리신 돈이 금화 백 개. 흐음, 종말 학파의 사정이 안 좋은 걸로 아는데 상환 기한에 맞추실 수 있을지 우려가 되는군요."

"걱정 말게. 어떻게든 갚을 테니."

"글쎄요. 가능하실지 모르겠군요. 당장 다음 주가 기한인데, 이자까지 하면 금화 백삼십 개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아르난 상회는 에스카토의 오래 된 지역 상회였다. 종말 학파와의 연도 오래됐고, 종말 학파가 주로 거래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전, 코반 학파는 아르난 상회를 인수했다. 종말 학파가 그들에게 돈을 빌렸다는 걸 알고 그 채권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자가 원금의 30%나 붙는 게 어디 있나! 애초에 기한도 한참 남았었건만!"

"그건 아르난 상회일 적의 이야기고요. 지금은 아르난 코반 상회여서 말이죠. 정책이 바뀌었습니다."

코반 학파의 마법사는 비열한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돈을 갚지 못하신다면 건물이라도 내놓으셔야 할 겁니다. 대신 건물값은 톡톡히 쳐 드리죠."

"이이...!!!"

누가 봐도 억지인 이야기.

"이 미친놈의 새끼들이 어디서 깽판질이야! 얼른 안 꺼져?!"

결국 참다못한 세일룬이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나 코반 학파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돈 없고 힘없는 그들이 소리쳐 봐야 귀만 간지러울 따름이었다.

"하하. 이거 세일룬 양 아니십니까. 혹시 종말 학파가 망해서 갈 곳이 사라진다면 저희를 찾아오십쇼. 당신이라면 저희도 두 손 벌려 환영할 테니 말이죠."

그들은 오히려 세일룬을 보며 욕심 어린 눈을 빛냈다.

종말 학파의 세일룬은 어린 나이에 대단한 재능을 가진 천재. 이대로 성장하면 대마법사가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어린애에 불과하지.'

미래에 대마법사가 될 재능이건 뭐건. 지금 당장은 버릇없는 꼬맹이에 불과했다.

그녀가 악을 쓰고 바락바락 대들어도 바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내기를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대는…?"

내기를 제안한 루드.

"내기에서 지면 돈도 갚고 건물도 내놓겠습니다."

그의 폭탄선언에 아크쉘이 깜짝 놀랐으나, 루드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신, 저희가 이긴다면 빚은 없던 걸로 하죠. 어떻습니까."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7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