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 - 150-160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50화

호랑이 부족이 떠난 후, 여명과 황혼 부족도 본인들의 부족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전쟁이 끝났으니 다시 평소의 생활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나날이 이전과 똑같지만은 않을 터였다. 성공적으로 물리치긴 했으나 제국의 침략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두 명의 소드마스터가 탄생했으니 만약의 일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연합군 건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소."

"우리 또한 마찬가지요."

그를 위해 제노스는 연합군의 창설을 제안했다.

평소에는 지금처럼 각각 지내더라도, 외부의 위협이 생겼을 땐 힘을 합쳐 뜻을 함께하자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동맹의 진화한 형태라 할 수 있었다.

바치란과 콩파스는 연합군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두 사람으로선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제국의 침략이 이번 한 번으로 그칠 거란 보장이 없었으니, 함께 싸울 수 있는 동료가 생기는 건 반길 만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까마귀 부족을 아군으로 둔다면 만약의 사태에도 안심할 수 있었다. 두 명의 소드마스터를 보유한데다, 경험 많고 경지 높은 전사들도 많았으니.

세 명의 족장들은 연합군에 대한 짧은 얘기를 마치고 후일을 기약했다.

제노스는 떠나는 두 사람에게 연합군에 함께할 다른 부족들이 없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두 사람의 안목이라면 최소한 연합군에 해가 될 부족을 추천하진 않을 거란 판단이었다.

그렇게 전쟁에 함께했던 모든 부족들이 떠나고.

'이걸로 바깥대륙 내부의 문제는 모두 해결된 건가.'

루드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상황을 정리했다. 뱀 부족을 처리했으니 바깥대륙의 부족들 간에 상쟁하는 일은 이제 없을 터였다.

'더스틴의 퇴장도 이쯤이면 잘 마무리됐고.'

거기에 2황자와 약속했던 대로 더스틴의 죽음까지 잘 연출했다.

많은 병사들이 더스틴의 전사 소식을 들었으니, 그들이 제국으로 돌아가면 금세 소식이 퍼질 터.

모든 게 계획했던 대로 잘 마무리된 상황이었다.

"더 이상 파라우드의 신분을 써먹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한데."

다만 안타까운 건 의회에 잠입할 수 있던 파라우드의 신분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정기 회의의 주기를 생각하면 전쟁 중에 한 번은 열렸다고 봐야겠지.'

의회의 회의에 참석하려면 파라우드의 저택에 있는 비밀 공간을 통해야 했다.

하나 전쟁에 나선 루드가 그곳에 있을 수는 없는 일.

당연히 그간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고, 거리를 생각하면 앞으로도 한동안은 참석할 수 없었다.

그쯤 되면 의회도 이상함을 눈치챌 게 분명했다.

거듭 회의에 불참하는 파라우드의 행적을 조사하면, 곧 그가 가짜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겠지.

'이 정도면 의회에 충분한 타격이 됐을 거다. 남은 건 하자르가 잘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의회에 섞여 들 수단을 잃은 것은 안타까웠으나, 그것에만 발이 묶여 있을 수도 없었다.

어차피 자신 말고도 의회를 벼르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루드는 그를 믿어 보기로 했다.

여태 지켜봤던 하자르의 수완이라면 충분히 의회를 압박할 수 있으리라.

아쉬움을 삼킨 루드는 제노스를 찾았다. 전쟁에서 심한 내상을 입었던 그는 집무실에 있었다.

다만 예전과 같이 아픈 몸으로 업무를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업무를 대신해 줄 이가 생긴 덕이었다.

사라에게 서류 처리를 맡긴 제노스는 집무실 한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녀가 처리하지 못하는 일에 대비해 집무실에 머무르고는 있었지만, 아직까진 그 정도의 업무는 없었다.

"무슨 일이냐."

"…뱀 부족에 다녀오고자 합니다."

익숙한 듯이 서류를 처리하는 사라에게 잠시 시선이 뺏겼던 루드는, 이내 제노스를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뱀 부족에? 굳이 직접 움직일 이유가 있는 거냐? 잔당 정리라면 부하 녀석들을 시켜도 충분하다만."

"사르한을 괴물로 만들었던 것을 알아보려 합니다."

"…그렇군, 그게 있었지."

괴물로 변하기 전, 사르한이 정수를 섭취했었다는 걸 떠올린 제노스가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그런 이유라면 납득이 갔다. 잔당밖에 없다곤 하지만 그들이 사르한처럼 변한다면 다른 이들론 그들을 상대할 수 없을 테니까.

게다가 자신은 당장 운신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 최악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루드가 가야만 했다.

"뱀 부족이 갖고 있던 건 사르한이 흡수했던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전대 황혼 족장인 모치란도 뱀 부족이 건넸던 무언가에 의해 괴물이 됐었고, 뱀 여왕 또한 비슷한 걸 갖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예, 다행히 흡수하기 전에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만…."

한차례 숨을 고른 루드가 말을 이었다.

"그 위험성은 아버지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그런 게 더 남아 있다면 반드시 회수해야 합니다."

"맞는 말이다. 그럼 언제 출발할 계획이냐."

"어느 정도 회복을 마쳤으니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지금 바로?"

제노스는 루드를 바라봤다. 확실히 루드는 전쟁 때 입었던 부상의 여파에서 벗어난 모습이었다. 호랑이 부족을 상대하던 모습만 떠올려도 분명했다.

애초에 루드의 부상은 자신만큼 심각하지 않았었다. 뼈가 부러지긴 했었으나 그 또한 황혼 부족의 비전 약과 치료로 붙은 지 오래였고.

"흠...."

잠시 고민하던 제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라."

흔쾌히 떨어진 허락. 하지만 제노스는 그 끝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라도 데려가라."

"예?"

그 말에 반응한 건 루드가 아닌 사라였다. 제노스를 대신해 업무를 보던 그녀는 난데없는 제노스의 말에 반문했다.

"휴가라고 생각해라."

전쟁이 시작하기 전부터 쉴 새 없이 일한 사라였다. 루드와 제노스를 오가며 소식을 전한 것도, 사르한에게 접촉해 루드의 의사를 전달했던 것도 전부 그녀였다.

"아무리 그래도 숨 쉴 틈은 있어야겠지."

거기에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서류 더미에 파묻혔으니. 내색은 안 했으나 피로가 쌓였을 것이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한 대비도 될 테고.'

물론 휴식을 주려는 것만이 그녀를 대동하게 한 이유는 아니었다.

가능성은 낮겠지만, 뱀 부족에서 괴물이 되는 이가 나타날 수도 있었다. 그때 그녀가 함께한다면 루드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 줄 수 있을 터였다.

"가서 저 녀석이 무리하지 못하게 감시를 부탁한다."

제노스는 씨익 미소를 보였다. 소크란을 죽이고 뱀 부족까지 처리한 지금, 그는 이전보다 훨씬 여유로워진 기색이었다. 감정 표현이 늘었고 말과 행동에도 따뜻함이 생겼다.

"…뭐, 그녀가 함께하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는군. 사라 네 생각은?"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사라는 제노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겨우 서류 지옥에서 탈출할 기회가 생겼는데, 놓칠 수는 없었다.

'루드에겐 궁금한 것들도 있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언제고 루드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다.

그에게 잡히자마자 제노스의 보조로 끌려온 탓에 정작 그와는 별다른 이야기도 해 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이번 전쟁을 통해 여러 번 접촉하긴 했으나.

'대화할 시간 따윈 없었지.'

그때마다 시간을 다퉈야 했던 까닭에 용건만 간단히 하고 움직이는 것이 전부였다.

사라는 이번 여정을 함께하며 루드에게 궁금했던 것들과 그의 생각을 알아볼 마음이었다.

"준비되는 대로 출발하지."

"그래."

갑작스레 여정을 떠나게 됐으나 사라의 준비는 신속했다. 멸문한 가문의 후계자로 여러 날 밖을 떠돌았던 그녀는 여장을 꾸리는 데 도가 터 있었다.

뱀 부족은 까마귀 부족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절대적인 거리만 따지자면 황혼 부족과 까마귀 부족의 거리보다도 가까웠다.

하지만 뱀 부족으로 가는 길엔 장애물이 하나 있었다. 바깥대륙의 북동과 남서를 관통하는 커크 산맥이었다.

정수를 흡수한 오우거를 처리했던 퓨렐 협곡도 커크 산맥의 일부.

특히 까마귀 부족에서 뱀 부족으로 가는 가장 빠른 루트에 위치한 봉우리는 몬스터도 많고 산세도 험했다.

두 부족을 오가는 사람들도 대부분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회해서 인근의 다른 봉우리로 다닐 정도였다.

하지만 루드는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가장 짧고 빠른 길로 곧장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까마귀 부족을 떠난 루드와 사라는 머지않아 커크 산맥의 초입에 들어섰다.

"대단해. 이 정도 산은 중앙대륙에서도 못 봤어."

사라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력의 농도가 달라. 원기가 좋은 곳일수록 자연이 품은 마력의 양과 질이 높아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피부에 느껴질 정도라니.'

대기 중에 느껴지는 마력이 산맥 바깥과 차원이 달랐다. 당장 바깥대륙만 해도 중앙대륙보다 높은 마력 농도를 자랑했는데, 이곳은 그중에서도 특출난 곳 같았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뭐, 네 실력이라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마력의 질이 뛰어난 만큼, 그런 환경에서 나고 자란 커크 산맥의 몬스터는 바깥의 녀석들보다 훨씬 빠르고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조언을 건넨 루드였으나, 진심이 담긴 걱정이라기보단 형식적인 것에 가까운 말이었다.

비록 마스터는 아니지만, 그 목전까지 도달한 그녀였으니까.

커크 산맥에 들어선 루드는 속도를 높였다. 최대한 빠르게 이동한다면 사흘이면 뱀 부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맥을 넘기만 하면 뱀 부족이 코앞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산맥을 이동하는 덴 아무 문제도 없었다. 때때로 멋모르는 몬스터가 덤벼들긴 했으나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지고 말 뿐이었다.

타닥, 타닥-!

밤이 되자 야영지를 꾸린 두 사람은 말없이 타오르는 불꽃을 응시했다. 고요한 침묵이 맴돌았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하지?'

사라는 고민에 빠졌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바삐 움직이느라 대화할 여유가 없었다.

야영 준비를 마친 지금에야 처음으로 대화가 가능해진 것.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물어볼 게 많았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전쟁이 터지다니.'

자신은 제국 출신이었다. 제국에 좋은 감정은 없지만 그걸 루드가 알 도리는 없는데다, 그는 자신이 바깥대륙을 정탐하기 위해 제국이 보낸 인물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번 전쟁에서 그들을 도운 것도 아즈문 가의 율법에 의한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율법 때문에 묶인 게 맞긴 하지만….'

제국과의 전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어떤 식으로든 훼방을 놓았을 것이다. 아이리우스에게 해독제를 가져다줬던 것처럼.

가문의 율법과 그것에 걸린 금제는 분명 강력했으나 허점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

중요한 건 루드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을 상황에서 궁금한 것들을 직접적으로 물어보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때. 오히려 루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금제는 괜찮나?"

불꽃에 시선을 고정한 루드는 금제에 대해 물었다.

뜬금없는 루드의 질문에 사라가 의문을 표했으나,

"그게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다. 금제로 인한 피해는 없는지 묻는 거다."

돌아온 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루드의 말에 사라는 그가 어째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알 수 있었다.

"적군을 돕는 것 정도는 금제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건가."

"!!!"

경악한 사라와 달리 루드는 여전히 차분한 기색이었다.

그녀도 자신에게 궁금한 것이 많아 보였지만, 자신 또한 그녀에게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녀와 동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게 아니기 때문에 금제가 발휘되지 않는 건가, 아니면 고작 그 정도는 금제에 해당되지 않는 건가, 그도 아니면… 애초부터 금제 따위는 없었던 건가."

"...."

이어지는 루드의 말에 그저 침묵하는 사라.

하지만 루드는 이참에 그녀와 솔직한 대화를 나눠 볼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바라는 것이 자신과 같을 수도 있었으니.

이번 기회에 사라와의 관계를 재정립할 생각.

"이렇게 하는 건 어떠냐. 서로 하나씩 묻고 대답하는 거다. 대답을 하고 말고는 자유지만 대답하지 않은 질문은 무효가 되는 거지."

루드는 사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좋아."

그녀 또한 루드의 제안에 동의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51화

루드는 문답에 관한 몇 가지 규칙을 정했다.

"순서대로 하나씩 묻고 답하며, 답을 듣지 못한 질문은 무효. 서로의 문답 개수가 같은 상태에서 어느 한쪽이라도 문답이 끝나길 원한다면 그대로 종료하는 걸로 하지. 이견 있나?"

"아니, 동의해."

사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것은 없고, 공평성에 초점을 맞춘 규칙이었다.

'거짓말을 할 거란 걱정은 안 하는 건가?'

다만 거짓 답변에 관한 내용도 있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그에 관한 언급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문답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거짓 답변이란 걸 감안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 점을 인지하지 못한 게 아닐까도 싶었으나….

"참고로 거짓말을 하고 싶으면 해도 상관없다. 대신,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야 할 거야."

이어진 루드의 말은 그가 왜 그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았는지 알게 해 줬다.

그는 자신이 한 답변의 진위 여부를 간파할 자신이 있는 것이었다.

'그래, 그렇게 철두철미하던 남자가 그런 실수를 할 리 없지.'

잠시나마 루드가 놓친 게 아닐까 생각했던 사라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자신을 사로잡을 때부터 이번 전쟁을 준비하고 마무리하기까지, 그간 보아 온 루드는 치밀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문답을 먼저 제안한 것도 그가 아닌가. 거짓말에 대한 대비가 안 돼 있을 리 없었다.

"먼저 질문하겠나? 아니면 먼저 대답하겠나."

"…먼저 질문해."

사라는 루드가 먼저 질문하도록 했다.

상대의 질문에서 정보를 얻을 수도, 그에 따라 자신의 질문이 바뀔 수도 있었다.

어차피 질문의 기회는 똑같이 주어지니, 그렇다면 나중에 질문하는 게 더 유리했다. 문답을 끝내는 데도 이점이 있었고.

"좋아. 그럼 첫 번째 질문이다."

그 속셈을 짐작한 루드였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대신,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이리우스와는 무슨 사이지? 나와 같이 가문의 율법에 묶여 있는 대상인가?"

여태까지는 아이리우스에 대해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 없었다. 사라와 그녀의 관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그런 질문을 하면 자신이 그녀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들킬 수 있었기 때문.

현생에선 조금의 접점도 없던 아이리우스였기에 사라의 배후에 그녀가 있음을 알면서도 캐묻기를 포기했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이번 전쟁을 통해 아이리우스의 존재가 알려졌고, 사라가 먼저 그녀와 접촉해 준 덕에 그녀를 언급하는 게 가능해졌다.

루드는 사라와 아아리우스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파악하고 싶었다.

예상하기로는 자신과의 관계처럼, 아이리우스와의 관계 또한 아즈문 가의 율법에 인한 것일 확률이 높았다.

'여태까지는 그런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었지만, 이제는 다르지.'

이전까지는 그녀가 아이리우스의 수하든, 가문의 율법 때문에 마지못해 따르는 중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자신이 써먹을 수 있는 인물이란 게 중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갈 생각이었다.

사라는 쓰임새가 다양한 인재였다. 이번 전쟁에선 전령의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고, 그간 그녀의 보조를 받았던 제노스의 만족도도 상당히 높았다.

완전히 신뢰할 수 없어 활용이 제한되는 지금도 이 정돈데, 그녀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길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사라와 아이리우스의 관계를 확실히 하려는 건 그 때문이었다.

되도록 사라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어서.

"...."

루드의 질문에 사라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에 대해 어떻게 안 거지? 황혼 부족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알고 있는 건가?'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루드가 어떻게 자신과 아이리우스의 사이를 알았는지, 또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어느 정도 선에서 대답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을 셈인가? 첫 번째 질문부터 대답을 피한다면 문답을 이어 갈 수 있을지 의문이군."

루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의도가 섞인 이죽거림이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면 될 뿐이다."

"...그래. 그녀도 아즈문 가의 율법으로 엮인 사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사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 그의 말대로 간단하게 생각하면 됐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즈문 가의 율법에 얽힌 인물이냐 물었으니 그에 대한 답을 해 주면 되는 일.

"단순히 그게 끝인가? 율법이 아니라면 아무 사이도 아닌 건가?"

"그건 또 다른 질문인 것 같은데."

사라는 단호히 대꾸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끝났다.

"이제 내 차례군."

"그래, 뭐가 궁금하지?"

사라는 어떤 것을 질문해야 할지 고민했다.

질문할 것을 미리 정해 놓은 루드와 달리 그녀는 질문거리를 정해 놓지 않은 상태였다.

루드의 질문에 맞춰 질문을 바꾸려던 것도 그러한 까닭.

'아이리우스와의 관계를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볼까? 아니지, 황혼 부족에서의 일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물어보는 게 나은가? 그도 아니면....'

오랜 시간 고민하던 사라는 마침내 첫 번째 질문을 정했다. 아이리우스에 관한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이 있었다.

"나와 접촉하기 전부터 아즈문 가에 대해 알고 있었나?"

그건 바로, 그가 멸문한 자신의 가문을 알고 있었는가.

자신을 사로잡고 풀어 주겠다 했을 때, 루드는 분명 아즈문 가와 그 율법에 대해 모르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연기였을 확률도 배제할 순 없었다. 여태 보아온 루드라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조금 전 대놓고 금제를 언급한 것도 미심쩍었다. 여태 가문의 율법이라고만 했지, 그 안에 금제가 걸려 있다는 얘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니.

추론을 통해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가문을 옥죈 율법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가능성이 적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번 전쟁에서도 루드는 예측을 벗어난 방법들로 승리를 거뒀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둬야 했다.

만약 그가 아즈문 가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이라면, 어떻게 알았고 또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알아내야 했다.

가문을 멸문시킨 세력과 루드가 맞닿아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으니.

하지만,

"아니. 없다."

길었던 고민이 무색하게 루드의 답은 순식간에 나왔다.

"정말인가?"

"그래. 믿을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사실이다."

사라와 만나기 이전까지, 루드는 아즈문 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이번 생에서도 그녀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아즈문 가와 그들이 지고 있는 금제에 대해서 몰랐을 것이다.

전생에서도 사라가 에이나우디 가의 사람들을 암살하다 죽었다는 것만 알고 있는 정도였다.

"아니, 믿겠어. 사실인 것 같으니."

첫 번째 질문이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한 것은 아쉬웠으나 사라는 덤덤히 결과를 받아들였다.

어떻게 보면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루드가 가문의 멸문과는 전혀 관계없는 인물인 것을 확신하게 됐으니.

"두 번째 질문을 해도 되겠나?"

서로 첫 번째 문답을 마친 상황. 루드는 혹여 그녀가 문답을 끝낼까 물었다.

"그래."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사라 또한 아직 문답을 끝낼 생각은 없었다. 루드와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궁금한 게 더 남아 있었다.

이윽고 루드는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처음과 같이 아이리우스에 관한 것이었다.

"아이리우스도 나와 같이 가문의 율법으로 얽힌 사이라면, 앞으로 들어줘야 하는 그녀의 부탁은 몇 개가 남았지?"

"질문이 집요하네. 나에 대해 질문하는 건지, 그녀에 대해 질문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루드가 아즈문 가의 멸문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사라는 한결 편해진 기색이었다.

"없어."

"없다고?"

"그래. 그녀의 세 가지 부탁은 모두 들어줬어. 하나는 현재 진행형이긴 하지만."

제노스를 일 년간 돕는 조건으로 두 개의 부탁을 사용한 루드처럼, 아이리우스 또한 율법을 고지받자마자 두 가지 부탁을 사용했었다.

하나는 당시 계획하고 있던 에이나우디 가문에서의 암살을 포기하라는 것.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한 번 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먼저의 부탁은 아직도 진행되는 것이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다른 부탁은 이미 황혼 부족에서의 일로 사용됐다.

당시 그곳에 있던 황혼 부족의 전사들은 하나같이 극독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제국군을 향해 사용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독들.

그것들은 소지한 이가 죽으면 분출되어 주위를 덮게 돼 있었다. 일차적으로 뿌려진 독들을 이겨 내고 전사들을 죽일 정도의 실력자들을 없애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마스터에게도 영향을 미칠 정도의 극독이었으니, 만약 그들을 죽였다면 아이리우스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을 베려던 그녀의 검을 일부러 막아섰던 이유였다.

그녀는 꿈에도 모를 그 상황을 막아 주며, 위기에서 구해 달라는 부탁은 소멸했다.

'혹시 몰라 최상급 해독제까지 줬지.'

거기에 자신이 사라진 후 또 다른 전사를 추격할까 염려해 최상급 해독제까지 흘리고 왔다. 바치란에게서 얻은 것이니 그 효과는 확실할 터.

'남은 부탁 하나는 루드란테를 찾아, 조사 후 보고해 달라는 거였지.'

루드에게 잡히긴 했지만, 아이리우스에게 그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기는 했으니 그것도 문제없었다.

결국 지금 시점에서 아이리우스에게 주어졌던 세 개의 부탁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군."

"나도 두 번째 질문을 하지."

왠지 모르게 루드가 기뻐하는 느낌이었지만, 사라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질문을 이어 갔다.

"네 목적은 뭐지? 제국과 전쟁을 하고, 다른 부족을 멸망시키고, 또 다른 부족들과는 연대하고. 대체 그 모든 일의 끝에 뭘 원하는 거냐."

인간의 행동은 대체로 목적성을 띠었다.

재미, 우정, 사랑, 꿈....

목적을 품은 인간의 행동은 명료하고 확실해졌다.

하여 사라는 루드의 목적이 뭔지 알고자 했다.

그가 뭘 위해 중앙대륙과 바깥대륙을 오가는지, 소드마스터에 올랐으면서도 더 강해지려 하는지.

그의 목적을 알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내 목적이라, 내가 바라는 건 간단하다."

그녀의 질문에 답하는 루드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바깥대륙의 부족들이 평화롭게, 자신들이 바라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

제국의 침략을 이겨 내고, 중앙대륙의 위협에서 벗어나, 내부의 고름마저 완전히 제거한 바깥대륙.

그 안에서 각각의 부족이 각자 원하는 방향성의 삶을 살며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루드가 꿈꾸는 이상적인 미래였다.

그를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고, 앞으로도 달릴 생각이었고.

"...."

사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여태 봤던 어떤 표정보다도 따뜻하고 평화로웠다.

지금의 루드는 마왕도, 연합군의 대장도, 절대의 경지에 오른 소드마스터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꿈을 얘기하는 한 청년일 뿐.

"나도 물어보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금세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루드는 사라에게 똑같은 질문을 돌려줬다.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것은 뭐지?"

루드는 차분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사라가 루드의 목적을 토대로 그를 이해하려 했듯, 루드 또한 사라의 목표를 토대로 그녀를 이해하려 했다.

전생에서 에이나우디 가문의 사람들을 암살했던 사라가 바라는 것.

루드는 그것이 그녀를 자신의 편으로 삼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52화

"내가 원하는 것…."

사라에게 있어 그건 고민이 필요한 물음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가 바라 온 것은 하나뿐이었으니.

"아즈문 가를 멸문시키고 부모님을 살해한 원수들을 찾아 죽이는 것."

"복수인가."

사라의 답을 들은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서 에이나우디 가문의 사람들을 암살했던 것도 그와 관련된 이유였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파격적인 행보를 보일 이유가 없었다. 당시 그녀의 손에 죽어 간 에이나우디 가문의 사람만 다섯 명이 넘었다.

단순히 암살 의뢰를 받은 것이었다면 기껏해야 한두 명에 그쳤을 테니, 의뢰보단 개인적인 이유로 죽였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그리고 그 개인적인 이유는 복수였겠지.

'아즈문 가의 멸문에 에이나우디 가문이 연관돼 있다는 건가.'

솔직히 루드는 아즈문 가의 멸문도, 거기에 에이나우디 가가 연관돼 있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그것은 바깥대륙과는 상관없는 제국의 일. 전생에서도 정보 수집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의미였다.

사라라는 인물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순전히 그녀의 암살행이 유명했던 까닭이었다.

무려 공작가의, 심지어 당시 용사라 불리던 아이리우스의 가문 사람들을 연쇄적으로 암살한 일이었으니.

"마지막 질문을 할게."

"마지막이라면, 더 이상 문답을 이어 가지 않겠다는 건가?"

"그래. 어느 한쪽이라도 문답을 이어 나가길 원치 않으면 그것으로 끝. 그런 규칙이었잖아?

루드의 질문에 답한 사라는 마지막 질문을 고민했다. 가장 궁금하던 것들은 이제 해결됐으니, 어떤 질문이 좋을까 고민이 길어졌다.

"그게 좋겠네."

마침내 그녀가 결정한 질문은 개인적인 호기심에 근간한 것이었다.

"아이리우스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어."

"…뜻밖의 질문이군."

루드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자신이 아이리우스에 대해 묻긴 했지만 그건 사라가 그녀와 접점이 있어서였기 때문.

반대로 이번 생에서 자신과 그녀의 접점은 이번 전쟁밖에 없었으니, 사라가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하나 사라는 진심이었다. 루드가 아이리우스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할 생각인지 알고 싶었다.

이번 전쟁을 통해 소드마스터에 오른 아이리우스였다. 제국을 경계하는 그에겐 그녀의 존재가 거슬릴 터였다.

'되도록 그녀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사라는 아이리우스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오랜 세월 혼자이던 그녀에게 곁을 내준 이였고, 그녀의 태도에서 진심을 느꼈던 까닭이었다.

물론 자신이 쓰임새가 있어서였겠지만… 그래도 그녀가 죽지는 않았으면 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녀에게 헌신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도울 수 있으면 돕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안타깝지만 못 본 체해야겠지.

그녀에 대한 감정은 어디까지나 호의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이리우스라…. 뛰어나면서, 어리석은 이지."

루드는 아이리우스를 떠올렸다. 그녀가 뛰어난 재능을 갖춘 건 분명했다.

제국의 대대적인 원조가 있었다지만 어린 나이에 소드마스터에 올랐고, 정수의 힘으로 무장한 자신에게 대적할 정도의 힘을 갖췄었다.

하지만 그뿐.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힘이 어떻게 마련됐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눈물을 흘렸는지 알지 못했다.

'만약 알고도 무시한 거였다면… 여태까지의 평을 바꿔야겠지.'

그 모든 일들을 알고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앞에 섰던 거라면, 그건 영웅의 탈을 쓴 괴물이었다.

"이번엔 놓쳤지만, 다시 바깥대륙을 침공해 내 앞에 선다면 그땐 놓치지 않을 거다."

그간 아이리우스를 살려 둔 건 변수를 제어하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사라지면 그녀가 아닌 용사가 탄생할 테고, 그럼 이때까지의 대비가 틀어질 수도 있었으니.

하지만 이제부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제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영웅으로 추앙받겠지.'

더스틴이 전사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은 제국군은 분위기를 쇄신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새로 탄생한 소드마스터들이 있겠지.

'전생과 느낌은 다르더라도 그녀에게 힘이 집중될 거다.'

어린 나이에 뛰어난 외모, 훌륭한 가문까지 갖춘 그녀였다.

이번 전쟁을 통해 소드마스터에 오른데다 생존자들을 이끌며 영웅까지 됐으니, 이번 생에도 제국이 용사를 만든다면 그녀보다 적합한 대상은 없었다.

"…그렇구나. 알겠어."

사라는 안색이 굳어졌지만, 그에 관해 반박하거나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안타깝지만 루드의 반응은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그의 입장에서 아이리우스는 침략자에 불과했고, 개중에도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었으니.

"...."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사라는 오랜 시간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루드는 여기서 그녀와의 대화를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문답은…"

"이미 끝났지. 이건 문답으로 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묻는 거다.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다."

그러면서 루드는 사라의 반응을 살폈다. 장작불에 반사된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미묘했다. 항상 자리하고 있던 긴장감이 왠지 모르게 옅어진 느낌이었다.

타오르는 장작불을 바라보던 사라는 천천히 입을 뗐다.

"솔직히... 나쁘지는 않아."

비록 시작은 가문의 율법 때문이었지만, 바깥대륙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중앙대륙에서보다 마음이 편했다. 가끔은 가문도, 복수도 생각나지 않았다.

루드와 제노스도 악인 같지는 않았다. 첫인상이 강렬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자신의 과실이었다. 루드를 미행하다 잡혔고, 당시 둘은 큰 사건을 치른 뒤 예민해진 상태였으니.

"그렇다면 아예 이곳에 적을 두는 건 어떤가. 겉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아버지도 내심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신다."

"하하, 제노스 님이? 그건 내가 마음에 든 게 아니라 내 서류 처리 능력이 마음에 든 거 아닐까?"

사라는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장난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제노스가 자신의 편의를 많이 봐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표현은 안 해도 여러 곳에서 자신을 배려해 주는 그였다.

'문답의 이유를 알 것 같네.'

대뜸 문답을 제안했던 루드에 사라는 내심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와의 대화로 그 이유를 깨달았다.

'가문의 율법과 금제 때문이 아니라 진짜로 자신들과 함께하길 원하는 거였어.'

아이리우스와의 관계를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겠지.

만약 자신과 그녀 간에 남아 있는 부탁이 있었다면 이런 제안도 없었을 터였다.

'지금처럼 바깥대륙에 머문다라….'

끌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가문의 멸문과 동떨어진 곳이어서일까, 이곳에 머물면서 마음이 참 편했다.

하지만.

"미안한데 그건 불가능해."

그녀에겐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원치도 않는 가문의 율법을 따르면서, 이렇게 구차하게라도 목숨을 이어 가는 이유.

"복수 때문인가?"

"그래."

"배후는 알고?"

"어느 정도는. 아직 모든 걸 알아내진 못했지만 말이야."

루드는 그녀의 사정을 이해했다. 지금의 그녀를 살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건 가문을 그리 만든 이들에 대한 복수심이었다.

하여 루드는 제안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네 복수를 도와주겠다. 그러니 너도 우리를 돕는 건 어떤가."

"서로 돕자는 건가."

전적인 신뢰 관계가 될 순 없어도, 서로의 필요를 위해 돕고 돕는 관계가 되자고.

"네 가문을 그리 만든 건 중앙대륙의 세력이겠지. 너 정도 되는 실력자가 그 배후를 정확히 특정하지 못했다는 건 상당한 세력이란 뜻일 테고."

사라는 부정하지 않았다. 복수를 위해 중앙대륙을 떠돈 지 오랜 세월이었다.

그런데도 고작 에이나우디 가가 아즈문 가의 멸문에 연관됐단 사실만 간신히 알아냈다.

아무리 에이나우디 가라 해도 홀로 아즈문 가를 멸문시킬 수는 없는 일. 분명 다른 배후가 더 있었다.

하나 그 이상으로 별다른 소득을 얻지는 못했기에, 에이나우디 가에 잠입해서라도 정보를 더 구하려고 했으나....

'그러기도 전에 아이리우스에게 잡혀 버렸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멋모르는 소녀에게 들킨 것이었으니.

그러나 아이리우스가 소드마스터에 오른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잡히는 게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바깥대륙은 네가 믿을 수 있는 최고의 세력일 거다. 아직 특정하지 못한 배후의 후보에서 완전히 벗어난 곳일 테니."

"맞는 말이긴 해."

루드의 말에 사라도 동의했다.

"만약 네 제안대로 한다면, 내가 해야 할 건 뭐지?"

"지금과 다르지 않다. 아버지를 보좌하고, 필요에 따라 내 부탁을 들어주고, 제국을 비롯한 중앙대륙이 바깥대륙을 위협할 때 힘을 보태 주면 된다."

루드가 바라는 건 크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형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

하지만 사라는 의문이었다.

"그건 남아 있는 부탁을 통해도 되는 것 아닌가?"

"율법과 금제 말인가."

비록 기간의 제한이 있겠지만 저 정도 요구는 아즈문 가의 율법을 이용해도 충분히 이룰 수 있었다. 실제로 지금 제노스를 보좌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고.

그러나 루드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면 네 마음을 움직일 수 없지 않나."

그녀의 말처럼 아즈문 가의 율법을 이용하면 당분간은 그녀를 부릴 수 있을 것이었다.

하나 강제성으로 인한 것과 자발적인 것을 비교할 수 있을까.

또 그녀가 금제의 허점을 이용해 꼼수를 부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루드는 그보단 그녀가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신에게 협력해 주길 바랐다.

그를 위한 문답이었고, 그를 위한 지금의 대화였다.

"…좋아. 대신, 이것도 문답처럼 하자고."

"문답처럼?"

"어느 한쪽이라도 그만두길 원한다면, 그만두는 거야."

"일단은 협력하겠다는 소리군. 좋아. 지금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루드는 손을 내밀었다. 잠시 그 손을 바라보던 사라도 이내 손을 내 악수했다.

"날 돕기로 했으니 나도 널 도와야겠지. 개인적으로 아즈문 가의 멸문에 대해 알아보겠다."

"말은 고맙지만 쉽지 않을 거야. 십 년이 넘도록 쫓았지만 아직까지 찾지 못한 녀석들이야."

"어렵겠지. 하지만 알고 있는 유능한 정보상이 있다. 그 녀석한테 아즈문 가에 대한 정보를 부탁할 생각이다. 만약 그 녀석이 찾지 못한다면… 애석하지만 누구도 배후를 찾지 못할 거라 본다."

루드는 도서관과 벨로티를 떠올렸다.

'슬슬 한 번 찾아갈 때가 됐지.'

미켈레의 이름을 등에 업고 정상 운영을 시작한 도서관이었다. 지금쯤이면 완벽히 궤도에 올랐을 터.

일전에 약속한 수익금도 받아야 하니 의뢰를 겸해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깊은 얘기부터 사소한 얘기까지, 꽤 긴 시간을 대화하던 두 사람의 말소리가 멎은 건 밤이 깊은 때였다.

"이만 잘까."

"그래. 내일도 강행군을 해야 하니."

타오르는 불꽃에 장작을 추가한 두 사람은 잠을 청했다.

장작이 충분해서인지, 이전보다 공기가 따뜻했다.

* * *

며칠 뒤. 커크 산맥을 넘은 두 사람은 얼마 안 가 뱀 부족에 도착했다.

"여기가 뱀 부족인가."

"조심해라.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루드의 경고에 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괴물로 변한 사르한을 본 적 있었으니 루드의 경고가 허튼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럼, 들어가지."

특별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 뱀 부족의 영토.

감각을 날카롭게 세운 루드가 그 안으로 들어섰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53화

집단 간의 갈등 상황에서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지난한 갈등을 한 번에 해소할 수 있지만,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이 필요하고, 패배할 경우엔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입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전쟁의 결정은 신중해야 하고, 그 결과는 반드시 승리여야만 했다.

특히 모든 것을 내건 총력전에선 더욱 그랬다. 패배가 곧 세력의 몰락으로 이어질 테니.

뱀 부족의 풍경은 그 사실을 잘 드러냈다.

"한적하네…."

주변을 둘러본 사라는 나지막이 감상을 말했다. 텅 빈 뱀 부족엔 적막한 바람만이 불었다.

들어서기 전에 걱정했던 것과 달리, 뱀 부족에겐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정도의 여력이 남아 있어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거라곤 어린아이와 늙은이뿐인가."

"아무래도 전부 전쟁에 동원했던 모양이야."

사라의 말에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전쟁은 뱀 여왕에게 무척 중요한 전쟁이었다. 제국과 손을 잡아 제노스를 죽이고 바깥대륙을 정복하려 했으니, 부족의 모든 힘을 동원했을 것이다.

'뭐, 모두가 전쟁에 참여한 것 같지는 않지만….'

다만 어디든 전쟁을 피해 도망치는 이들은 있는 법.

루드는 도둑이라도 든 듯 문짝이 떨어져 있는 몇몇 집들을 눈여겨봤다. 어린아이나 노인이 문짝을 저리 만들 수는 없었다. 최소한 문짝을 뜯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이가 더 있다는 의미.

하지만 루드는 걱정하지 않았다. 문이 부서진 흔적을 보아 그들은 부족에 남은 재물을 들고 도망친 것 같았다.

애초에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것부터 그들이 뱀 부족에서 전력 외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몸을 숨기고 발버둥 치더라도, 뱀 여왕은 필요하다면 어떤 수를 써서든 그들을 전쟁에 동원했을 테니까.

하나 그러지 않았다는 건 그들이 보잘것없는 이들이라는 방증이었다.

루드와 사라는 계속해서 뱀 부족 내부를 걸었다. 부족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몸을 숨긴 채 두 사람을 흘깃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무력도 갖추지 못한 이들을 상대로 검을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저들은 그저 민간인에 불과했으니.

그때.

"이야아아아압!!!"

누군가 루드에게 칼을 휘둘렀다. 자신에게 달려든 이를 확인한 루드는 혀를 찼다.

텁, 쿠당탕!!

"으아악!!"

순식간에 칼을 뺏긴 꼬마가 땅을 뒹굴었다. 루드는 꼬마로부터 빼앗은 칼을 대충 던졌다. 칼이라고 할 수도 없는, 나무로 만든 조잡한 검이 멀리 날아갔다.

"이, 이 나쁜 녀석! 나쁜 까마귀! 부족의 원수!"

"시끄럽군."

루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마 자신의 외양을 보고 자신이 까마귀 부족이란 걸 알아차린 것 같은데, 악에 받친 어린아이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들 보고만 있는 건가.'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몸을 숨기고 있었다. 딱히 기습이나 공격할 타이밍을 재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었다.

각자의 집에 틀어박혀 창문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소년을 도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모두가 소년을 모른 체하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달려온 소녀가 무릎을 꿇었다. 소년보다 나이가 좀 더 있어 보이는 외양이었다.

"죄송해요. 제발 피로스를 살려 주세요. 앞으로 두 번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제가 잘 타이를게요."

"이로스 누나! 왜 저런 나쁜 놈한테 무릎 꿇는 거야!"

"조용히 하렴. 피로스."

이로스는 분을 삭이지 못하는 피로스를 따끔하게 꾸짖었다. 제 편이라 생각했던 이로스가 꾸중하자, 서러움이 북받친 피로스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루드. 아직 어린아이들이야."

"…알고 있다."

그 모습에 사라가 루드를 제지했다. 루드가 두 사람을 해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가 뱀 부족에게 갖고 있는 적대심은 엄청난 것이었으니.

하지만 루드 또한 두 사람을 해칠 생각은 없었다. 뱀 부족이 커다란 죄를 지은 건 맞았지만, 눈앞의 소년 소녀와는 관계없는 일. 그들은 그저 뱀 부족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뿐인 이들이었다.

"잘 타일러서 돌아가라."

"감사합니다!"

소년의 공격을 용서한 루드는 발걸음을 돌렸다. 아직 뱀 부족이 갖고 있던 정수에 대한 어떤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으니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혹시 도망친 녀석들이 가져가진 않았겠지.'

만약 그렇다면 골치가 아파졌다. 도망친 이들이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 모두를 쫓아야 했으니.

그들이 턴 집을 확인해 봐야 하나 고민하던 때. 루드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혹시 찾고 계신 게 있나요?"

"뭐?"

"착각이었다면 죄송합니다. 그냥, 꼭 무언가를 찾으시는 것 같아 보여서요."

피로스를 끌어안은 이로스가 루드를 바라봤다. 이곳에 있는 뱀 부족 모두가 루드와 눈 맞추는 걸 두려워했으나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혹시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는 두 사람 사이에 나선 건 사라였다.

그녀는 이 소녀가 자신들이 뱀 부족의 정수를 찾는다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뭔가를 찾고 있다는 것만 알지, 뭘 찾고 계신지는 몰라요."

"그럼 우리가 뭘 찾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니?"

"생각을 해 봤어요."

"생각?"

이로스는 두 사람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잠시 그들을 지켜보며 얻은 근거가 그녀의 추측에 확신을 더해 줬다.

"전쟁에서 패한 저희를 처리하기 위해 온 거였다면 군대가 왔을 거예요. 군대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둘보다는 많은 숫자였겠죠. 게다가 두 분은 딱히 저희를 공격하려는 마음도 없어 보이니…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목적이라. 하지만 그 목적이 꼭 뭔가를 찾으려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지 않느냐."

"네. 하지만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시던걸요. 꼭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요."

뭐, 틀렸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마지막 말을 덧붙인 이로스는 작은 미소를 보였다. 추리 과정을 설명할 때와는 달리 그 나이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루드는 곧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네 말이 맞다. 우리는 뭔가를 찾기 위해 왔다."

"역시!"

자신의 생각이 맞자 뛸 듯이 좋아한 이로스는 루드에게 제안을 건넸다.

"뭘 찾으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도와드릴게요."

"네가?"

"네. 이래 봬도 이곳의 뒷골목들까지 전부 알고 있어요. 뭘 찾으시든 도움이 될 거예요."

"…왜지? 보다시피 난 까마귀 부족인데."

루드는 이로스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은 그들 부족의 전사들을 전멸시킨 적군이었다. 아무리 어리다곤 하나 그 정도 사리분별쯤은 될 터. 한데 자신들을 돕겠다니....

"누나!"

"조용히 하렴. 피로스."

이로스의 발언에 놀란 건 루드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붙잡혀 있던 피로스 또한 소리를 질렀다.

녀석들은 부족의 원수였다. 아무리 부족을 좋아하지 않는다지만 이래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로스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저희는 뱀 부족이지만, 뱀 부족이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지?"

"빈민가 출신이거든요. 뱀 부족은 빈민가 출신의 사람들을 부족원으로 인정해 주지 않아요."

그녀의 말은 루드도 모르던 이야기였다. 이로스는 설명을 계속했다.

뱀 부족의 빈민가가 어떤 곳인지,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게 어떤 의민지. 왜 뱀 부족이 그들을 부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지.

모든 설명을 들은 루드는 그제야 그녀가 자신을 도우려는 이유를 이해했다.

'뱀 부족의 빈민가는 환혹의 힘으로 꾀어낸 다른 부족의 2세들이 태어나는 곳.'

뱀 부족은 바깥대륙 정복이라는 목표를 위해 환혹의 힘을 가진 부족원들을 외부로 보냈다. 황혼 부족에 있던 헤슬리도 이러한 경우였다.

그들은 임무에 따라 다른 부족을 이간질하거나, 그들의 힘을 훔쳤다. 때로는 그 과정에서 다른 부족의 생명을 잉태하기도 했다.

뱀 부족의 빈민가는 그렇게 생긴 아이들이 버려지는 곳이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살아갔다.

그들이 뱀 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환혹의 힘을 각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만큼 큰 공을 세우는 것이었다.

둘 모두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다. 이로스는 그곳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뱀 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이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것도 이젠 끝이지만.'

지긋지긋하던 뱀 부족은 이제 멸망했다. 듣기로는 전쟁에서 패해 뱀 여왕이고 뭐고 전부 죽었다고 했다.

"물론 공짜로 도와주겠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뱀 부족이 망했다고 해서 그녀의 인생이 피는 건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선 여태까지와 똑같은 하루를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나섰다. 인생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으니까.

"저희를 까마귀 부족으로 데려가 써 주세요. 시키는 건 뭐든 할게요. 먹을 것과 입을 것, 잘 곳, 그리고 약간의 보수만 주신다면 뭐든 잘할 수 있어요."

이로스는 두 사람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란 걸 한눈에 알아봤다.

아무리 뱀 부족이 모든 전력을 잃었다지만, 위협이 없을 거라고는 확신하지 못했을 터.

그럼에도 단둘이서 이곳을 찾았다는 건 무슨 일이 벌어지든 대처할 자신이 있다는 의미였다.

아마 까마귀 부족 내에서의 신분도 높을 게 분명했다.

"…좋다."

똑 부러지게 주장하는 이로스에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를 알 수 없는 것보단 의도가 확실한 협조가 더 믿을 수 있었다.

"우리가 찾는 것에 대해 설명해 주마."

마력으로 소리가 흘러나가는 것을 차단한 루드는 설명을 시작했다.

사이한 느낌을 풍기고, 섭취하면 높은 확률로 괴물로 변하게 만드는 구슬 형태의 무언가.

모든 설명을 들은 이로스는 코끝을 찡그렸다.

"...괴물로 변한다고요?"

"그래, 반응을 보니 뭔가 알고 있는 것 같군."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짐작 가는 게 있긴 해요."

몇 년 전부터 주기적으로 빈민가의 아이들이 사라지곤 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사라지기 전날까지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는 것.

누군가에게 듣기론 뱀 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기회를 잡았다고도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돈을 벌 기회를 얻은 것만큼은 분명했다. 평생 그러지 않던 녀석들이 먹을 것을 나눠 줬으니.

그러나 그들 중 뱀 부족의 일원이 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태반이 빈민가를 떠난 후 돌아오지 못했고, 간신히 돌아온 이도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로스는 그와 관련해 남들이 모르는 사실을 하나 더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사라졌던 키르가 돌아와서, 녀석들이 애지중지하던 걸 훔쳤다고, 그걸 가지고 다른 부족으로 도망치자고 했었어요."

키르는 그녀가 피로스를 보살피듯, 그녀를 보살펴 주던 소년이었다. 살아 있었다면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됐을 나이.

하지만 청년이 된 그의 모습은 평생 볼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죽었으니까. 그것도 괴물이 되어.

"부족의 북쪽에 위치한 산속. 제가 아는 건 그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거예요."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54화

빈민가의 다른 아이들에게 피로스를 맡긴 뒤, 이로스는 루드와 사라를 북쪽 산으로 안내했다.

주변의 여느 산들과 마찬가지로 북쪽 산은 커크 산맥의 일부였다. 다만 본백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산세가 그리 험하진 않았다.

"어째서 이곳에 뭔가 있다고 생각한 거지?"

"키르 때문이에요."

"키르?"

"절 보살펴 주던 빈민가의 선배예요."

빈민가의 아이들은 외부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아서 생존해야만 하는 환경. 하지만 지식도 경험도 없는 아이가 혼자 살아남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많은 아이들이 굶어 죽거나 병에 걸려 죽었다.

그래도 개중에 몇은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들 중 몇은 다른 아이들의 보호자를 자처했고, 키르도 그중 하나였다.

"다 비슷비슷한 처지지만,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다른 이들을 챙기기 시작했어요. 지금 제가 피로스를 챙기듯이 말이에요."

"너에겐 키르가 그런 존재였던 거군."

"네,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키르를 의지했어요. 가장 똑똑하고 힘도 셌거든요."

세 사람은 대화를 이어 가며 계속해서 걸었다. 가파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산길이었으니, 루드는 이로스의 체력을 신경 쓰며 속도를 조절했다.

"그래서 그 키르란 아이는 어떻게 됐지? 뉘앙스를 봐선 현재 이곳에 없는 것 같은데."

"죽었어요. 괴물이 돼서."

"…괴물이라. 그렇군. 그래서 짐작 가는 게 있다 했던 건가."

"네, 키르는 뱀 부족이 중요하게 여기는 무언가를 훔쳐서 달아나려다 걸렸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그걸 입에 넣었어요. 그리고…."

"괴물이 되었겠지."

"...."

몇 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사라졌던 키르는 며칠이 지난 뒤 다시 나타나더니, 자신과 함께 도망치자고 했었다.

외각의 마구간에서 기다리겠다고, 자정에 맞춰서 나오라던 그의 말에 한밤중에 몰래 빈민가를 빠져나왔을 때.

이로스는 보고 말았다. 그가 도둑질을 했다는 걸 깨닫고 찾아온 뱀 부족 전사들과, 증거를 없애기 위해 훔친 물건을 입에 넣은 키르를.

'아아....'

괴물로 변했던 키르를 떠올린 이로스의 몸이 잘게 떨렸다.

"괜찮니?"

"…네, 괜찮아요. 오래된 일인 걸요."

사라가 이로스를 다독였다. 빈민가의 아이들 중엔 나이가 많은 편일지 몰라도, 그녀 또한 열두 살이나 됐을까 싶은 어린아이였다.

'너도 참 힘들게 살았구나.'

사라는 그녀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로스의 짐작이 맞았던 것 같군."

"뭔가 느껴져?"

"그래."

그때, 루드가 한껏 인상을 찡그렸다. 뱀 부족의 정수들은 다양한 힘을 품었지만, 사이한 기운을 풍긴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와 똑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어떤 비밀을 숨겨 둔 거냐.'

처음에는 그들의 정수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꿔 먹었다. 정수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말도 못 할 정도로 끔찍한 데다,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다른 부족의 비전을 훔치고 여러 실험들을 했다 한들,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그들 부족의 최강자인 사르한마저도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지 않았던가.

'전생에도 정수를 사용했었던 건가.'

전생에도 이러한 힘이 있었는지는 의문이었다. 자신의 회귀로 인해 생긴 변화일지, 아니면 그저 자신이 몰랐던 것뿐일지.

전생의 전쟁에서 루드는 뱀 여왕과 뱀 공주를 쫓았다. 사르한과 레이예스는 제노스와 카이예스의 몫. 자신의 소임을 다한 두 사람은 당시의 전장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확인을 해 볼 것을.'

두 사람이 전사한 전장을 따로 확인해 보진 않았었다. 전쟁을 수습하고 바깥대륙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것만도 바쁜 때였다.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제노스의 장례도 예를 갖춘 선에서 최대한 빠르게 끝냈을 정도였다.

'만약 전생에도 있던 힘이라면 썼다고 봐야겠지.'

이번 전쟁을 떠올려 보면 확실했다.

"이건 대체…."

잠시 생각에 빠졌던 루드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약간 뒤에서 따라오던 사라와 이로스도 우두커니 멈춰 섰다.

"이게 다 뭐야?"

"…유적 같은데."

탁 트인 시야에 나타난 건 커다란 유적지였다. 앞서 보였던 산속 풍경 대신에 단단한 바닥과 곳곳에 세워진 동상들이 보였다.

'저건 괴물로 변했던 사르한의 모습과 똑같군.'

개중엔 익숙한 형태도 있었다. 괴물로 변했던 사르한과 마찬가지로, 반인반마 형상의 동상이었다.

"빈민가의 아이들이 동원됐던 이유를 알 것 같군."

천천히 주변을 훑어본 루드는 동상들 근처의 바닥을 가리켰다. 바닥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땅굴처럼 아래로 이어졌단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깊이가 상당한 것에 비해 폭은 넓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아니고서야 들어갈 수 없을 크기였다.

'아이들을 지하로 보냈다는 건, 정수가 지하에 있다는 뜻인가.'

눈앞의 단서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사라졌던 빈민가의 아이들은 정수를 얻는 데 이용됐고, 그 과정에서 정수의 기운에 노출된 아이들이 죽은 것 같았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이도 얼마 안 가 죽었다니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정수의 힘은 어린아이가 견딜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

파삭-!!

오러를 피워 낸 루드가 바닥을 긁어냈다. 순식간에 기존에 있던 토굴보다 넓은 구멍이 생겨났다.

이대로 조금만 더 파면 성인도 쉽게 들어갈 수 있는 토굴이 완성될 터.

하지만 루드는 돌연 바닥을 파내는 걸 멈췄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이것보단 다른 방법이 나을 것 같군."

사라가 그 이유를 물었으나 루드는 정확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흘깃 이로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흙더미에 유골들이 있었다.'

크기를 봤을 땐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뱀 부족에게 이용당한 빈민가 아이들이겠지.

이로스와 친분이 있는 아이들일지는 모르겠으나, 굳이 그녀에게 그런 걸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이로스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문 같은 게 있어요."

"정말이잖아."

유적지의 가장 깊은 쪽, 동상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곳에 동굴이 하나 있었다. 이로스가 말한 문은 그곳을 막아 둔 문이었다.

토굴에 비하면 크지만 그렇다고 엄청 큰 크기는 아니었다. 성인 다섯이 일렬로 서면 꽉 찰 정도의 크기. 문의 양옆에는 마치 문지기처럼 동상들이 서 있었다.

'느낌이 안 좋군.'

루드는 위화감을 느꼈다. 동굴과 문의 위치며 모양이 꼭 이곳에 뭔가가 있으니 확인해 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할 거야?"

"들어간다."

하지만 루드는 동굴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유도하는 것 같으나 그게 안에 들어가지 않을 이유는 되지 못했다.

'이 유적지가 뱀 부족의 정수와 관련돼 있다는 건 확실하다.'

유적 전체에서 사이한 기운이 느껴졌다. 뱀 부족의 정수와 똑같은 기운.

뱀 부족이 빈민가의 아이들을 동원해 땅굴을 팠다는 걸 고려하면 지하에 뭔가가 있음이 분명했다.

세 사람은 동굴 앞으로 향했다. 루드는 유적지 전체와 동굴의 입구를 면밀히 살펴봤다.

동상들의 개수와 위치, 땅굴의 모양… 모든 장면이 머릿속에 새겨졌다.

"이건…."

"왜? 뭐가 있어?"

문 앞에 도착한 루드는 눈을 빛냈다. 동굴 앞, 문을 지키듯이 좌우로 선 동상들에 새겨진 글자가 눈길을 붙잡았다.

'종말학파에게 넘겼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문자들.'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형태가 유사했다. 개중에는 종말학파에게 건넸던 것과 똑같은 글자도 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종말학파에게 해석을 의뢰한 고대문자는 신비와 흑음의 정수와 연관돼 있었다.

신비 듀얼이 있던 공동과 정수를 얻었던 우물에서 발견됐던 글자들.

'그림은 없나.'

앞선 장소들에서 그림도 있었단 걸 떠올린 루드는 그림이 있는지 살펴봤으나 딱히 보이는 건 없었다.

하나 아직 유적 전부를 확인해 본 게 아니었으니, 다른 곳에 그림이 있을지도 몰랐다.

"루드, 갑자기 왜 그래?"

"아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했다. 들어가지."

유적지의 풍경과 마찬가지로, 동상 아래에 새겨져 있던 글자들을 전부 암기한 루드가 동굴 입구를 열었다.

끼이이이익-.

동굴을 가로막은 문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듯 거친 소음을 일으켰다.

사라와 이로스가 귀를 틀어막았다. 반면 루드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뱀 부족의 정수는 흑음의 정수 못지않게 위험한 것. 이곳은 그런 정수와 관련된 곳이었으니,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대처할 수 있게 손이 자유로워야 했다.

끼이이익, 쿵!!

세 사람이 모두 동굴 안으로 들어선 순간. 열린 채 고정돼 있던 문이 닫혔다.

"이게 갑자기 왜."

갑자기 문이 닫히자, 사라는 문을 다시 열려 했다. 하지만 문은 이전과 달리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켜 봐라."

그에 루드가 문을 향해 검을 휘둘러 봤지만, 오러를 머금은 검으로도 겨우 흠집만 내는 수준이었다.

"말도 안 돼…."

사라는 경악했다. 아무리 힘을 줘도 여리지 않고, 오러로도 부술 수 없다면… 이곳에서 어떻게 나간단 말인가.

'지옥도를 써야 간신히 뚫을 수 있으려나. 아니, 어쩌면 지옥도로도 어려울 수 있겠군.'

루드는 손의 감각을 느끼며 문의 강도를 가늠했다. 지옥도를 사용하면 뚫을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놓아야 했다.

게다가 자신의 검은 '생물'을 대상으로 고안된 것이었으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효율이 떨어졌다.

"우리 갇힌 거예요? 이, 이제 어떡해요?"

"괜찮아. 걱정하지 마렴. 우리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

갇혔다는 걸 인지한 이로스가 크게 동요했다. 사라가 그녀를 다독였다.

여태 의젓한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결국은 어린아이였다. 하물며 지금은 루드와 사라조차 놀란 사태였으니, 그녀에게 침착함을 바라는 건 과한 처사였다.

괜찮다는 듯 한차례 그녀의 머리에 손을 댔던 루드는 동굴 내부로 시선을 두었다.

"안으로 들어간다."

"뭐?"

"문이 닫힌 것과 문의 강도가 이만한 게 우연일 리 없다. 안쪽에 문을 닫게 만든 무언가가 있겠지. 그 말을 달리 해석하면 문을 열 방법도 안에 있다는 것이고."

그게 기계 장치든, 미지의 힘이든.

루드는 이 문을 열기 위해선 안으로 들어가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다. 뭐가 됐든 문을 여는 실마리는 안쪽에 있을 테니까.

"그리고 경사를 봤을 때 이 길은 지하로 향하고 있다. 아마도 뱀 부족이 아이들을 동원하면서까지 닿고 싶어 했던 곳이겠지. 만약 이 문을 여는 데 실패한다면, 그곳에서 새로운 문을 만들어 나가면 된다."

"…땅굴!"

"그래, 밖에서 들어올 수 있다면, 반대로 밖으로 나갈 수도 있겠지."

안에서 문을 여는 방법을 찾지 못하더라도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최악의 경우엔 바깥의 토굴들처럼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야 했으니.

"이로스를 챙겨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사라가 이로스를 안아 들었다. 동굴 속 공기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가지."

세 사람이 지하에 숨겨져 있을 비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55화

동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구조였다. 문이 있던 곳은 성인이 대여섯만 있어도 꽉 찰 정도였으나 지금은 서른 명도 거뜬히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커진 건 좌우의 폭만이 아니었다. 동굴 내부의 높이도 훨씬 높아졌다. 초반에는 머리 위로 여유 공간이 얼마 없었건만, 이제는 있는 힘껏 점프를 해도 닿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곳이 있었다고? 그렇다면 전생에는 왜 몰랐지?'

아래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걸으며, 루드는 생각에 잠겼다.

전생에서 뱀 부족을 처리한 후 그들 부족 인근을 전부 수색했었지만 이런 곳을 발견한 기억은 없었다. 비슷한 소식을 들은 적도 마찬가지.

'시기의 차이가 있으니… 전생의 뱀 부족이 미리 이곳을 정리했었다고 봐야 하는 건가.'

전생과 이번 생에 전쟁이 일어난 시점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것을 감안하면 얻을 것을 전부 얻은 뱀 부족이 이곳을 정리했다 여기는 게 가장 그럴듯한 일.

"상당히 깊네."

"길이 직선으로 뚫린 게 아닌 것 같다."

30분을 넘게 걸었음에도 동굴은 여전히 이어졌다.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은커녕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계속해서 어두운 길을 따라 내려가고만 있을 뿐이었다.

'도착지는 결국 동상들의 밑이겠지.'

루드는 내심 이 길의 끝에 있을 곳을 짐작했다. 뱀 부족이 바깥의 동상들 주위로 구멍을 뚫었던 걸 생각하면 동상 아래에 그들이 원하는 게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지면의 경사가 급하지 않은 데다 미로 형태여도 알 수가 없었으니,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루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점점 더 기운이 짙어지고 있다.'

바깥에서부터 느꼈던 사이한 기운, 뱀 부족의 정수에서 나타나는 그 기운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드."

"그래. 뭐가 나올진 모르겠지만, 곧 도착할 것 같다."

루드와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느낀 사라가 긴장했다. 이로스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나 루드야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지만 이로스는 아니었다. 그녀는 마력을 익히지도, 몸을 단련하지도 않은 평범한 아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이 그녀를 지켜야만 했다.

"…또다시 문이군."

얼마 안 가, 두 사람의 예상대로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건 동굴의 입구와는 비교도 안 되게 커다란 문이었다. 어찌나 큰지, 전력을 다해서 밀어도 열릴까 싶을 정도였다.

"들어간다."

"그래."

끼이이익-

하지만 문은 생각 외로 손쉽게 열렸다.

거친 소리가 나긴 했지만, 손을 대자 큰 저항 없이 가볍게 움직였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인 내부는 칠흑 같았다. 그래도 빛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천장에 나 있는 구멍을 통해 바깥의 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밖에서 봤던 구멍들인가.'

루드는 그것이 동상들 주위에 있던 구멍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다만 외부의 빛이 조금씩 들어옴에도 공간 전체를 덮은 어둠이 시야를 제한했다.

천장의 구멍이 아니었다면 한 치 앞도 확인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터벅터벅.

잠시 낌새를 살피던 루드는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문 내부로 발을 디뎠다.

그 순간.

화악-!!

어둡던 시야가 한순간에 밝아졌다. 루드는 찰나의 순간 재빠르게 눈을 감았다 뜨며 빛의 변화에 적응했다.

"이건...."

밝아진 시야 속, 내부를 확인한 루드가 침음을 삼켰다. 그에 이어 안을 확인한 사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무래도, 아이들이 돌아오지 못했던 게 정수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군."

문 안쪽은 평평한 지반의 밀실이었다. 입구를 제외한 모든 면이 막혀 있었고 지상과 마찬가지로 몇 개의 동상이 있었다.

중요한 건 동상들 주위로 유골이 흩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바닥엔 피가 눌어붙은 흔적도 보였다.

"이로스, 눈 감으렴."

"...."

사라는 재빨리 이로스의 눈을 가렸다. 하지만 이로스는 이미 이곳의 모든 풍경을 본 뒤였다.

'바깥의 동상들과 조금 다른데.'

한편 루드는 지하에 놓인 동상들에 집중했다.

이곳에 있는 동상은 총 네 개였다. 제각기 형태는 달랐지만 모두 바깥에서 한 번씩 본 모양들이었다.

그러나 동상들에게서 어째선지 모를 어색함이 느껴졌다. 분명 밖에서 본 것들과 똑같건만....

'아니, 완전히 같지 않다. 이곳의 동상들에겐 바깥의 것들엔 없던 게 있다.'

곧 그 이유를 깨달은 루드는 동상들을 면밀히 살펴봤다. 각 동상의 이마나 가슴 부위에 조그만 홈이 있었다. 모두 비슷한 크기.

네 동상 중 세 개는 홈이 드러난 상태였고, 하나만 무언가에 의해 막혀 있었다.

한동안 동상에 새겨진 홈을 살피던 루드는 그 모양이 익숙하단 느낌을 받았다.

'설마.'

루드가 품 안에서 작은 함을 꺼냈다. 봉인된 함은 뱀 여왕에게서 뺏었던 정수를 보관해 둔 것으로, 혹 정수의 흔적을 찾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가져온 것이었다.

정수를 꺼낸 루드는 홈과 정수의 모양을 맞춰 봤다. 아니나 다를까, 정수는 그곳이 제자리였다는 듯 홈에 딱 들어맞았다.

"뭔가 알아낸 게 있어?"

"그래. 뱀 부족이 정수를 어디서 구했는지 알아낸 것 같다."

정수를 다시 함에 넣은 루드는 동상들을 바라봤다.

'이 동상들의 정체가 대체 뭐기에….'

뱀 부족이 갖고 있던 정수는 이 동상들에 붙어 있던 것이 분명했다.

빈민가의 아이들을 동원해 토굴을 뚫었던 것도 이곳에서 정수를 가져가기 위함이었겠지.

'이상한 건 어째서 이곳에서 이렇게 죽었냐는 건데.'

그러나 모든 의문이 풀린 건 아니었다. 단순히 그뿐이라면 아이들이 이곳에서 죽을 이유가 없었다.

정수의 기운에 노출돼 죽은 것이라기엔 바닥에 핏자국이 있는 데다 유골들 전부 신체 일부가 부러진 상태였다.

"루드! 저기 봐!"

그때, 사라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지하실의 입구와 정반대편, 가장 안쪽에 커다란 비석이 있었다.

"문을 여는 장치인가."

루드는 그것이 동굴의 출입구를 여는 장치라고 직감했다.

그것을 어떻게 작동시키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 다가가려던 순간.

끼익-.

동상 하나가 고개를 꺾어 루드를 바라봤다.

"!!!"

그건 악마의 얼굴에 날개를 달고 있는 동상이었다. 다른 동상들과 마찬가지로, 누가 봐도 몬스터의 형상이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김새.

'유일하게 홈이 드러나 있지 않던 녀석.'

고개를 돌린 녀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몸을 꿈틀거렸다. 뻣뻣하던 움직임이 빠르게 부드러워졌다.

끼이이이이이!!!

백미를 장식한 건 녀석의 울음소리였다. 돌끼리 긁어내는 듯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날개를 퍼덕인 녀석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루드!"

"이로스를 챙겨라."

녀석의 울음을 들은 이로스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체내에 쌓인 사이함과 괴물이 내뿜은 기운에 버티지 못한 것이었다.

당장은 괜찮지만, 시간이 지나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다른 녀석들은 움직일 기미가 없다. 저 녀석 혼자 움직이는 건… 유일하게 정수가 남아 있기 때문이겠지.'

루드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동상의 정체도, 정수의 정체도 정확하게 밝혀내진 못했지만 정수가 동상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원이란 것은 분명했다.

그 증거로 이미 뱀 부족이 정수를 빼 간 다른 동상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해야 할 건 간단하지.'

녀석에게 달려 있는 정수를 추출하면 되는 일.

움직이는 녀석에게서 정수를 뽑는 게 어렵다면, 그 전에 녀석을 파괴하면 될 뿐이었다.

루드는 허공에 떠 있는 괴물, 가고일을 향해 검을 겨눴다.

'이제야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비밀이 풀리는군.'

아이들을 해친 건 이곳의 동상들이 틀림없었다. 아마 눈앞의 녀석과 더불어 정수를 뽑히기 전의 다른 녀석들에 의한 것이겠지.

루드가 알아차린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발을 딛자마자 밝아졌던 시야. 뱀 부족이 굳이 아이들을 동원하면서까지 땅굴을 팠던 이유."

처음에는 뱀 부족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동굴을 통해 이곳으로 올 수 있으니, 정예 병력을 동원하는 게 낫지 않나 했던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괴물과 이곳에 들어서며 불이 켜졌던 걸 떠올리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면에 닿는 것으로부터 침입자를 인식하는 방식인가.'

굳이 동상을 상대하며 피해를 감수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었기 때문.

'위에서부터 내려오면 땅에 발이 닿지 않지. 어린아이들을 이용했던 건 토굴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무게 때문이었어.'

루드의 추측은 정답이었다.

이곳을 발견한 뱀 부족도 처음엔 루드와 똑같이 문을 통해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무사히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움직이는 네 개의 동상이 그들 전부를 해치운 까닭이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정보를 얻은 뱀 부족은 계획을 바꿨다. 동상들이 땅을 밟는 순간부터 움직인다면, 땅을 밟지 않고 상대하면 된다 생각한 것이다.

끼이이이-!!

공중을 활보하던 가고일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콰앙-!!

녀석이 부딪힌 지반이 쩍 갈라지며 돌조각이 튀어 올랐다. 실로 압도적인 파괴력. 제대로 맞는다면 루드라도 무사할 수 없을 위력이었다.

하지만 그건 맞았을 때의 이야기.

'강하긴 하지만, 정수를 먹었던 모치란이나 사르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루드는 빠르게 승부를 보기로 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었다간 이로스의 상태를 장담할 수 없었으니, 무리해서라도 서두를 생각이었다.

'머리 아래를 날려 버린다.'

녀석의 이마에선 정수가 반짝이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 그 아래를 산산조각 내고 그것을 추출할 계획이었다.

"후읍."

숨을 가다듬은 루드가 가고일을 조준했다.

"두 번째 검, 지옥도."

콰콰콰콰콰콰!!!

생물을 상대할 때에 비하면 위력이 떨어진다지만, 지옥도의 파괴력은 여전히 엄청났다.

순식간에 몸을 잃은 가고일의 머리가 덩그러니 땅에 떨어졌다.

'...동상이 아니다?'

정수를 뽑기 위해 그것을 주어 든 루드는 안색을 굳혔다.

움직이기 전까지 동상이었고, 움직이면서도 동상 같은 모습이어서 몰랐는데 직접 만져 보니 알 수 있었다.

'석화된 생물이라 봐야 하는 건가.'

이건 동상이 아니었다. 겉은 분명 딱딱한 돌 같았으나 안을 조금만 파고들면 다른 촉감이 느껴졌다. 질긴 가죽 같은, 꼭 몬스터의 피부 같은 느낌이었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루드는 녀석의 머리에 박힌 정수를 뽑았다.

"루드. 동상들이 사라지고 있어."

"그래, 모든 동상의 정수가 뽑혔기 때문인가."

그와 동시, 다른 세 개의 동상이 가루가 돼 흩어졌다. 루드가 들고 있던 가고일의 머리도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모든 동상들이 정수를 잃어버렸기에 일어난 현상이 아닐까 추측했다.

혹시 몰라 챙겨온 함에 정수를 넣은 루드는 비석으로 다가갔다.

'손자국?'

비석에는 손바닥 자국이 나 있었다. 그 자국에 손을 대자 옅은 진동이 울렸다. 동굴의 입구가 열린 것이었다.

"얼른 나가자. 이로스의 상태가 안 좋아."

"그러지."

그것을 깨달은 사라는 루드를 재촉했다. 사이한 기운에 노출된 탓인지 이로스의 상태가 위중했다.

서둘러 지하를 빠져나가려던 때.

"이로스를 데리고 먼저 나가라."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래도, 이곳에 숨겨진 게 더 있는 것 같다."

갑자기 멈춰 선 루드가 바닥을 바라봤다. 동상들이 사라진 자리에 이상한 흔적이 있었다.

"…알겠어. 난 밖에서 이로스를 살피고 있을게."

사라는 루드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잘 대처할 터. 그보다는 당장 이로스가 문제였다.

사라가 떠나자 루드는 아래를 자세히 살펴봤다.

아까 전 동상들이 서 있던 바닥 중 한 곳에, 비석과 똑같은 손바닥 자국이 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56화

비석과 마찬가지로 손바닥 자국이 나 있는 바닥. 비석이 동굴의 문을 여는 장치였음을 감안하면, 바닥 또한 숨겨진 기능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

루드는 몸을 낮췄다. 혹시 함정이 발동할 수도 있었으니 몸의 긴장을 끌어 올렸다.

그렇게 바닥에 새겨진 자국에 손바닥을 댄 순간.

'!!!'

루드의 눈앞에 드넓은 황야가 펼쳐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방이 꽉 막힌 지하에 있었건만… 순간이동을 한 게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환영 마법?'

그 실체를 파악하려는 사이, 황야에 변화가 생겨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고 자잘한 알갱이들이 나타나더니, 이내 결합해 거대한 형체를 이루었다.

'저건 뭐지?'

그건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하고, 그 존재감 또한 대단했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 모습을 정확히 인지할 수는 없었다.

꼭 녀석을 이룬 검은색 입자들이 계속해서 자리를 바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그것이 루드를 바라봤다.

"크흡."

생김새도, 눈의 위치도 인지할 수 없었지만 루드는 녀석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가슴이 울렁이고 내부의 마력이 들끓었다. 온 감각이 녀석이 위험하다 경고했다.

'도망쳐야 한다.'

많은 경험을 해 왔지만, 지금과 같은 감각은 처음이었다.

제대로 인지할 수조차 없는 상대. 정체가 무엇인진 모르겠으나 여태껏 마주친 무엇보다도 이질적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녀석이 성큼 발을 뻗었다.

쿵. 쿵. 쿵. 쿵.

그 걸음에 맞춰 황야가 진동했다.

발자국이 찍힌 자리엔 녀석과 비슷한 작은 것들이 태어났다.

그렇게 태어난 작은 것들은 또다시 검고 자잘한 알갱이들을 만들어 냈다. 거대한 본체를 이룬 것과 똑같은 알갱이들이었다.

작은 존재들에게서 비롯된 검은 알갱이들은 다시 본체에게 흡수됐다.

큰 녀석이 작은 녀석을 만들고, 작은 녀석에게서 비롯된 검은 알갱이가 다시 큰 녀석에게로.

그 일련의 과정이 무수히 반복되며 본체는 점차 몸집을 불려 나갔다. 안 그래도 거대하던 몸은 이젠 고개를 들어도 그 끝을 확인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녀석의 주위에 자리한 작은 존재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상태.

"크윽!!"

루드는 가슴에 이는 격통을 느꼈다. 내부에 자리한 흑음의 정수들이 갑자기 요동쳤다.

그 사이, 황야는 검은색 물결로 가득 찼다. 거대한 녀석의 뒤로 작은 녀석들이, 그들의 주위로 검은색 알갱이들이 온 세상을 물들였다.

대체 뭘 보여 주는 건지, 무엇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던 그때.

"언젠가 찾아올 종말에 대비하라."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뭐…?"

그건 이질적인 소리였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언어. 아니, 애초에 언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 소리였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 뜻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귀가 아닌 정신에 직접 닿은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돌아왔나."

어느새 루드는 유적의 지하로 돌아와 있었다.

황야도, 검은색 녀석들도 보이지 않고 사방이 꽉 막힌 지하의 풍경만 보였다.

환상에서 벗어났음을 인지하고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아무래도, 단순한 환상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루드는 아래를 보며 눈을 빛냈다. 익숙한 형태의 문자가 바닥에 빼곡했다. 가고일의 공격으로 파손됐던 부분도 말끔히 메워져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

'그림까지.'

나타난 건 글자만이 아니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른다 여겼던 그림들도 곳곳에 그려져 있었다.

루드는 바닥의 글자와 그림들을 모조리 암기했다. 그 양이 상당했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다 됐나."

외운 것을 다시 한번 점검한 루드는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밖으로 나가 옮겨 적기만 하면 됐다.

'운이 좋았군.'

바닥에 새겨진 손자국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러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도 몰랐을 뻔했다.

"동상들은 파수꾼 역할이었나."

바닥의 손자국은 동상이 서 있던 아래에 있었다. 동상들이 먼지가 돼 사라지지 않았다면 가려져 있던 손자국을 볼 수 없었을 터였다.

물론 침입자를 인식하면 살아 움직이는 녀석들이니, 그 위에 있던 게 우연일 수도 있지만….

어째선지 동상이 손자국을 가리고 있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혹시 다른 손자국이 있는지 확인한 루드는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얻고서야 밖으로 향했다.

'아까 전의 환상...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예사롭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는 길. 루드는 환상이 보여 줬던 풍경을 떠올렸다.

황야를 가득 채웠던 검은 녀석들은 실체를 정확히 인지할 수 없었지만, 위험하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애초에 녀석들을 명확히 인지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점부터 녀석들이 평범하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아무리 환상 속이라지만, 소드마스터의 눈으로도 꿰뚫어 볼 수 없다는 것이었으니.

'아무래도 종말학파를 찾아가 봐야 할 것 같군.'

고대문자의 해석을 의뢰한 지도 여러 날이 흘렀다. 지금쯤이면 성과가 나왔을지도 모를 일.

결과가 아직이더라도 이곳에서 발견한 자료를 가져다주면 그 시일이 더 빨라질 터였다.

'돌아가는 대로 준비해서 중앙대륙으로 향하자.'

그것 말고도 중앙대륙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사라를 위해 도서관에 의뢰도 해야 했고, 고르단 왕국으로 피신시킨 페드리와 쿠두스도 만나 봐야 했다.

"안에서의 볼일은 잘 해결됐어?"

"그래. 이로스는 어떻지?"

"많이 좋아졌어. 누가 몰래 손 써 놨던 덕분에 말이야."

동굴 밖에선 사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닥에 누워 있는 이로스는 안색이 한결 편안해진 상태였다.

"대체 언제 마력을 주입해 놓은 거야?"

"동굴에 갇혔단 걸 인지했을 때부터였다."

"머리에 손을 댔던 그 순간이구나. 미리 언질 좀 해 주지. 그랬다면 나도 도왔을 텐데."

"괜찮다. 내 마력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긴장한 이로스를 다독이던 때. 루드는 이로스에게 자신의 마력을 흘려보내 놨었다. 동굴 내부에 퍼진 사이한 기운으로부터 그녀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정신을 잃은 이로스였지만, 미리 취해 놨던 조치 덕분에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사라는 피식 미소를 보였다.

"처음엔 네가 이로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싫어하진 않는다."

"그래 보여. 나도 신경 쓰지 못한 부분까지 배려해 주고 말이야."

"그거랑은 상관없는 일 같다만."

루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딱히 이로스를 싫어하지 않았다.

다만, 어린 나이에도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우리를 안내하다 생긴 위험이니 그에 대한 책임을 졌을 뿐이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지 못했던 건 뱀 부족의 정수와 관련된 경험이 적어서였겠지."

"그렇게 말한다면야 할 말은 없지만…."

그리 대꾸한 루드는 이로스를 바라봤다.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그녀.

'자신과 피로스를 거두어 달라고 했지.'

루드는 그녀가 했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녀 덕분에 뱀 부족의 정수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확인하고, 하나 남아 있던 정수까지 수거할 수 있었다.

자격은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더군다나 두 사람에겐 가능성이 보였다.

이로스는 명석한 두뇌를 가진 듯했으니 행정 쪽으로 공부를 시키면 차후 부족에 보탬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사라가 서류를 처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까마귀 부족은 대대로 행정 쪽의 인재가 부족했으니.

루드는 성장한 이로스가 제노스의 부담을 덜어 주길 바랐다.

'피로스는 전사로 키워 봐야겠지.'

피로스의 경우는 전사로 키워 볼 속셈이었다. 자질은 둘째 치고, 자신을 공격하던 때의 용감함을 계속해서 간직한다면 나쁘지 않은 전사가 되리라.

"뱀 부족으로 돌아가서 피로스를 챙기고 까마귀 부족으로 돌아가자."

"좋아."

* * *

의회의 회의장. 회의에 참석한 의원들은 하나 같이 무거운 분위기였다.

승리를 확신했던 전쟁이었다. 황실의 눈을 돌리고 부가적인 이득도 취할 수 있다 여겼건만....

그런 전쟁을 패하고 말았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소수의 병력만을 파견했다는 변명거리는 있었지만, 제국에게 패배란 있어선 안 될 것이었다.

황실은 전쟁을 주장했던 의회와 귀족들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백성들의 여론도 안 좋았다.

"더스틴이 죽었다는 소식이 가도에 파다하오."

"웃기는 일이군. 진짜 더스틴은 이미 진즉 죽은 상태였거늘. 이럴 줄 알았다면 가짜 더스틴을 전장에 내보내는 게 아니었어."

이번 전쟁이 특히 충격적이었던 건 더스틴이 전사했기 때문이었다.

진짜 더스틴은 이미 죽은 지 오래였으나, 그건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

모략과 술수가 판치는 정계에서도 진짜의 죽음을 아는 이가 몇 되지 않았으니 대중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황실의 압박이 날로 거세지고 있소."

"기회를 잡았다는 거겠지. 빌어먹을 녀석들."

거기에 불을 지핀 건 황실이었다. 패전과 더스틴의 죽음을 구실로 삼은 그들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파라우드는, 아직 소식이 없는 건가?"

"그러게 말이야. 아무래도 우리의 짐작이 맞는 것 같아."

의원들은 비어 있는 한 자리를 바라봤다. 파라우드의 자리였다.

처음에는 그가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모습을 감췄다고 생각했다. 더스틴을 전장에 세우자 주장했던 그였으니, 혹 이번 전쟁이 잘못된 것 때문에 잠적했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그가 참석하지 않은 회의가 벌써 세 번째였다. 띄엄띄엄도 아니고 연이은 불참. 이쯤 되니 모두는 그가 참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참석하지 못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죽었다고 보는 게 옳겠지."

"언제 죽었는지가 관건이겠군."

의원인 것과 별개로 파라우드는 유명 인사였다. 그가 후원하는 기사단과 마법학파가 여러 곳이었으니, 그만한 인물이 죽었다면 소문이 나야 했다.

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이는 그의 죽음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에 관한 정보가 있습니다."

"역시 의장님이시군요."

그때 의장이 입을 열었다. 파라우드가 죽은 시일을 알아내기 위해 그의 행적을 거꾸로 되짚어 본 의장이었다.

그는 파라우드가 회의에 불참한 날부터 이상함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 끝에, 마침내 파라우드가 죽은 날을 추정해 냈다.

"파라우드가 가짜 더스틴의 정체를 파악하겠다고 나섰던 날. 2황자를 만난 후 그의 자택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단 걸 알아냈습니다."

"그 말씀은...."

"예, 파라우드는 그때 죽은 것 같습니다. 자택 내의 방범 장치가 모조리 파괴돼 있었고, 그의 집무실에서 용해액이 사용된 흔적도 발견했습니다."

의장의 말에 모두는 경악했다. 파라우드가 죽은 게 그때라면 말이 안 됐다.

"하지만 파라우드는 그날 이후의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더스틴의 정체를 파악했다고도... 아!!!"

놀라서 얘기하던 의원은 뭔가를 깨닫고 굳어 버렸다.

파라우드가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로 했던 가짜 더스틴은 위장의 달인이었다.

만약 그가 파라우드를 죽이고 그로 위장했다면....

"예, 맞습니다. 가짜 더스틴. 그가 파라우드를 죽이고 회의에 참석한 겁니다. 근래의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던 건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이겠죠."

의장은 모두를 바라봤다.

"우리는 완전히 놀아난 겁니다. 가짜와, 황실의 손에."

"이번 전쟁에서의 전사도 진짜라고 확신할 수 없겠군요."

"맞습니다. 죽음을 위장한 거라면, 언제고 또다시 등장할 수도 있을 테니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의원들은 목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황실의 공격에서 벗어날 방법이라 생각했던 게 사실은 황실의 공격을 더욱 거세게 해 줄 것이었다니.

이젠 황실의 이목을 돌릴 방법도 없었으니, 압박은 더욱 강해지겠지.

'전면전으로 간들… 결국 수세에 몰리는 건 우리다.'

만월학파에 이어 이번 전쟁으로 오랜 시간 투자한 기사들도 전멸했다. 주요 전력들을 전부 잃은 상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전면전을 해 볼 것을....'

의원들의 수심이 깊어졌다.

하지만 의장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록 이번 전쟁에서 패하긴 했지만, 소득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소드마스터 하나를 잃었지만, 새로운 소드마스터가 둘이나 탄생하지 않았습니까."

모두는 의장이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아이리우스와 헤이론이었다.

패잔병들을 이끌고 복귀한 그들이 둘 모두 소드마스터에 올랐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얼마나 놀랐던가.

더스틴의 죽음에도 제국의 분위기가 최악이 아닌 데는 그 두 사람의 영향이 컸다.

"그들을 이용하시려는 겁니까? 하지만 그들은 에이나우디 가의 사람들 아닙니까."

의원들은 의장의 생각을 짐작했지만, 우려를 표했다. 그들이 소속된 에이나우디 가는 황실과 가장 가까운 가문.

심지어 아이리우스는 에이나우디 가의 차기 가주였다. 아직은 후보였지만 소드마스터에 오른 그녀가 다음 대 공작이 되는 건 명실상부한 일.

"맞습니다. 그러나 그게 그들을 이용하지 못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의장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 확실히 에이나우디 가는 황실의 우호 세력이었다.

그러나.

"영웅은 가문을 초월하는 법이죠."

그들의 가문이 걸린다면, 가문이 관여할 수 없게 만들면 될 뿐.

이미 전대 의장에게도 허락을 구했으니 거리낄 건 없었다.

"바깥대륙에서부터 수많은 병사들을 구해 왔으니, 영웅이 아니고서야 그들을 뭐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특히 모두를 이끈 아이리우스는 영웅이란 말로도 부족했다.

하여.

"그녀를 '용사'로 만들 생각입니다."

의장은 그녀를 용사로 만들 생각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57화

개인의 명성이 가문의 이름을 뛰어넘게 하자. 의원들은 그 말의 뜻을 곧장 알아차렸다.

'에이나우디 가의 아이리우스'가 아니라 '아이리우스의 에이나우디 가'로 만들자는 소리였다.

확실히 그렇게 된다면 가문으로부터의 제약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었다.

"그녀에게 제 가문 이상의 명성을 주자는 건 알겠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가문을 넘어선다면 가문이 그녀에게 간섭하긴 힘들겠죠. 그러나 그래도 그녀가 에이나우디 가의 사람이란 건 변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게다가 에이나우디 가의 가주가 될 사람 아닙니까. 가문의 뜻과 상관없게 움직일 수 있다 한들, 우리를 도울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의원들의 의견은 타당했다. 의장도 그 사실을 알았다. 아이리우스에게 단순히 명성만 주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명성을 높이는 건 계획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녀를 용사로 만드는 건 초석에 불과합니다."

"초석이라고요?"

"예. 용사가 무엇이겠습니까. 신의 뜻을 받아, 세상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내고 빛을 가져올 존재. 신이 아닌 그 누구도 감히 용사를 강제할 수 없죠. 설령 황제일지라도요."

그녀에게 굳이 '용사'란 이름을 주려 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용사란 신에게 선택받은 존재. 신이 아닌 누구도 그에게 명령하거나 제약을 걸 수 없었다.

심지어는, 용사 본인조차도.

'겉으론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용사를 움직일 확실한 방법이 있지.'

신의 뜻만을 받든다면, 그 신이 되면 될 일.

"성국에게 거래를 제안할 겁니다. 신탁을 통해 아이리우스를 용사로 만들자고요."

"…그들이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그럴 겁니다. 그들이 거부하지 못할 제안을 건넬 생각이니까요."

그간 성국이 바라던 제국의 이권들을 내준다면 제안을 성사시키는 건 간단할 터였다.

'당장은 피해가 있을 테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미래를 위한 일이다.'

이대로 손 놓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승자는 모든 것을 갖고, 패자는 모든 것을 잃는 싸움이었으니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야 했다.

"신탁을 통해 아이리우스를 용사로 만든다면, 그녀를 조종하는 것도 쉬워질 겁니다."

아이리우스가 용사가 된다면 황제도 그녀의 가문도 그녀를 어찌할 수 없다.

'그리고 그녀 또한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겠지.'

그건 아이리우스도 마찬가지. 용사가 되는 순간, 그녀의 몸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 대륙 모두의 것으로 바뀔 것이다. 용사란 이름은 그녀를 옭매는 훌륭한 족쇄가 돼 줄 터.

"그녀를 움직이는 것 또한 신탁을 이용하면 되겠군요."

"맞습니다. 성국이 요구할 것들이 걱정되긴 하나, 적정선에서 타협할 수 있을 거라 예상합니다. 결국은 그들 또한 한배를 타게 될 테니까요."

모든 설명을 들은 의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도 국가도 초월한 용사의 탄생.

그 용사를 마음껏 조종할 수 있게 된다면….

"여러 가지 상황을 주도적으로 만들 수 있겠군요."

"성국과의 협조가 관건이겠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희망을 느낀 의원들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성국과의 협상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그들이 요구할 조건을 예상했다.

그러던 와중, 한 의원이 의문을 던졌다.

"한데, 용사라면 그에 걸맞는 소명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군요."

"그리 중요하진 않겠으나 용사에 관한 신탁이 내려온다면 그만한 이유도 있어야 자연스러울 테니."

"좋은 의견입니다."

용사라곤 하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짜에 불과했으니,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용사가 탄생한다면 그만한 이유와 배경이 있어야 했다.

"뭐, 마왕이라고 해둘까요?"

"이야기에 나오는 마왕 말입니까? 악귀를 이끌고 세상을 집어삼킨다는."

"예, 용사라는 것도 어차피 이야기 속 이름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적 또한 그러해도 이상하지 않겠죠."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다. 어차피 진짜 용사도 아니고, 명분을 만드는 것에 불과했으니 아무렴 상관없었다.

"아직은 다가오지 않았으나 언제고 찾아올 마왕에게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그래서 신이 용사를 내렸다고 하죠."

"좋은 생각입니다."

저들끼리 의견을 교환한 의원들은 작게 웃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성국과 그들 간에 은밀한 거래가 성사 됐다.

* * *

까마귀 부족으로 돌아온 루드는 제노스에게 이로스와 피로스를 소개했다.

"잘 가르친다면 유용한 인재가 될 겁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기대가 되는구나."

제노스는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았다. 특히 이로스에 관한 얘기를 들을 때는 옅은 미소까지 보일 정도였다.

소개를 마친 이로스와 피로스를 물린 뒤, 루드는 뱀 부족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뱀 부족이 갖고 있던 정수는 그들 부족 인근의 유적지에서 나온 거였습니다."

"유적지?"

"예. 무엇에 관련된 유적인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유적지의 지하 공간에 살아 움직이는 동상들이 있었고, 녀석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원이 바로 뱀 부족의 정수였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동상이라."

"다만, 동상이라곤 했지만 그 정체가 진짜 동상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전부 확인하진 못했으나 하나를 만져 봤을 때 받았던 느낌은 꼭 살아 있는 생물이 석화된 것 같았습니다."

루드의 설명을 따라 상황을 그려 본 제노스는 안색을 굳혔다.

'복잡하군.'

뱀 부족의 정수가 더 이상 없다는 건 다행이었다. 루드가 말한 동상은 총 네 개였고, 그들이 수거한 정수도 네 개였으니 모든 정수를 처리한 상황.

그러나 모든 게 해결된 건 아니었다. 아직도 정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고, 그것을 품고 있었다던 동상과 유적에 관해서도 짐작 가는 게 없었으니.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제노스는 루드를 바라봤다.

"다시 중앙대륙으로 갈 거냐?"

"네.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남아서요. 한시름 놓긴 했어도, 이번 전쟁이 끝일 거란 보장도 없고요."

짐작했던 대로 루드는 또다시 부족을 떠나려 했다.

다음 대 족장이 될 그가 오랜 시간 부족을 떠나 있는 것은 반갑지 않은 일.

하지만 제노스는 루드를 붙잡지 않았다.

그의 행동이 전부 의미 있고, 부족에게 도움 되는 것임을 알았기에, 그가 뭘 하든 지지할 생각이었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말리지 않겠다. 다만 네가 차기 족장임은 항상 명심해야 한다."

"예,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돌아올 겁니다."

"그래. 이만 나가 봐라."

제노스가 자신에게 신뢰를 보낸다는 걸 루드도 알고 있었다. 꾸벅 고개 숙인 루드가 제노스의 집무실을 벗어났다.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루드는 다시금 중앙대륙으로 향했다.

* * *

리카엘은 빠른 속도로 걸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뛰는 것과 다름없는 속도였다. 경건한 신전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쳐다봤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베 추기경님!"

"리카엘이 아닙니까. 무슨 일입니까."

그녀의 걸음이 멈춘 건 막 기도를 마친 추기경, 우리베의 앞에서였다.

"밖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인지 알고 싶습니다."

"무슨 소리를 듣고 왔는지 모르겠으나 일단 숨을 좀 고르시지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녀 후보가 이리 경망스러워서야 타인의 귀감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베는 흥분한 리카엘을 진정시켰다.

"그래요. 무슨 일 때문에 찾아왔습니까."

"신탁이 내려왔다고 들었습니다."

신탁은 그분께서 직접 내리시는 목소리였다. 때론 신탁의 내용에 따라 성국의 운명이, 나아가 대륙의 운명이 바뀌기도 했다.

"신탁이… 사실입니까?"

얼핏 듣기로는 용사에 관한 내용이라 했다. 앞으로 대륙에 닥쳐올 위기를 대비해, 그분께서 직접 대리인을 내세우셨다고.

신탁에 따르면 용사로 지정된 건 제국의 새로운 소드마스터였다. 아이리우스 에이나우디, 얼마 전의 전쟁에서 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살린 그녀는 제국에선 이미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었다.

'그럴 리 없어.'

하지만 리카엘은 그 소식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용사와 관련된 계시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어.'

오랜 수행을 마치고 성국으로 복귀하며 깨달은 게 있었다. 짐작은 했었지만, 어느 날부턴가 시작되었던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불쌍한 여인을 비추는 걸로 시작했던 꿈은 점차 보여 주는 범위를 넓혀 갔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정도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화상을 입은 여인, 여인 주변의 사람들, 여인과 그녀의 동료들이 겪은 일, 그들이 헤쳐 온 전장….

여인의 세계 자체가 확장돼 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꿈엔 더 이상 불쌍한 여인이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비춘 건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그분이셨지.'

온통 빛으로 가득 찬 세계. 그 가운데 그분이 계셨다.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순 없었지만 그녀의 앞에 서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매일같이 기도를 올리고, 뵙길 소망하던 존재가 그녀라는 것을.

그날 이후 리카엘의 꿈엔 항상 그분이 나왔다. 불쌍한 여인의 꿈을 계속해서 꿨던 것처럼, 이제는 그분이 나오는 꿈만이 반복됐다.

몇 번인가는 그녀에게 다가가려고도 해 봤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꿈에서 깼다.

결국 리카엘은 멀찍이서 그분의 존재만을 느끼기로 결심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경험이었고, 말로 표현 못할 충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분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건 그때쯤이었다.

'하지만 그분께선 용사에 관해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

리카엘은 이번 신탁과 관련된 어떤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물론 그분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지 않은 걸 수도 있지만….

'왜 가짜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걸까.'

정말 계시를 내리신 걸까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흔들리는 리카엘의 눈동자를 바라본 우리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선 짐작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교황님께서 신탁을 받으셨고 감사하게도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럼 정말…."

"네. 그분께서 용사를 점지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대륙에 찾아올 위험과 함께요."

"대륙에 찾아올 위험이라니. 그게 뭐죠?"

용사에 관한 것과 달리, 위험에 관한 내용은 아직 밝히지 않은 상태였다. 괜한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

위험까지 알고 있는 건 교황청 내부에서도 소수뿐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우리베는 리카엘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왕이라고 합니다."

"…마왕."

"예, 전설 속에나 있다고 생각했던 존재였지만, 그분께서 거짓을 말씀하실 리는 없으니. 우리도 대비를 해야겠지요."

마왕이란 말에 리카엘은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그분께서 나오기 전의 꿈. 마왕은 거기서 자주 등장하던 단어였다.

'하지만 꿈에서의 마왕은....'

한편, 우리베는 속으로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마왕이라니, 어린아이들을 겁주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대륙을 위협한다니.

신탁의 이면에 숨겨진 비밀을 아는 그로선 웃음만 나왔다.

'용사와 마왕이라 누가 생각한 건지 참.'

제국, 정확히는 의회와의 거래로 이뤄진 가짜 계시. 녀석들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덕분에 자신들은 제국의 이권을 여럿 가져올 수 있었으니, 지금의 상황을 즐기면 될 뿐.

'그보다 리카엘 이 아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건가?'

그러다 리카엘을 바라본 우리베는 생각에 잠겼다.

신탁에 관한 소식을 듣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온 그녀였다. 자신에게 묻는 모습이 꼭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도 같았다.

은밀하게 이뤄진 거래였으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비밀을 알고 있는 거라면 처리할 수밖에.'

그녀가 위험요소가 된다면 제거해야 했다.

'혹시 모르니 미리 준비해 둬야겠군.'

우리베는 리카엘을 호위하는 이를 떠올리곤 미소를 지었다. 마침 적합한 인물이 있었다.

'그 녀석에게 부탁하면 되겠군.'

그라면 리카엘에 관한 정보를 가져다주고, 만약의 상황에서 칼이 되어 줄 터.

우리베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58화

리카엘은 늦은 밤의 거리를 달렸다. 달리는 도중 연신 뒤를 돌아보는 모습은 영락없이 쫓기는 사람의 것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신탁에 의문을 품은 리카엘은 남몰래 그 진위 여부를 조사했다.

교황이 직접 받은 신탁을 의심하는 건 대단한 불경이었으나, 거짓으로 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건 그보다 더 커다란 죄였으므로 고심 끝에 벌인 일이었다.

그리고 조사 끝에, 그녀는 성국에 드리운 어둠을 깨달았다.

'어디까지 관여된 건지 알 수 없어. 믿을 수 있는 건 지오바니 추기경 님 뿐이야.'

어둠은 이미 깊게 퍼져 있었다. 교황도 우리베 추기경도 믿을 수 없었다. 다른 추기경들 또한 마찬가지.

지금 상황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건, 그녀가 아는 한 가장 신실한 존재, 지오바니 추기경 뿐이었다.

만약 그마저도 이번 일에 연관되어 있다면 그땐....

"위험하게 이 시간에 호위도 없이 어딜 가십니까."

쉬지 않고 달리던 리카엘은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춰 섰다.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골목에서 누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로이튼."

그 정체를 확인한 리카엘은 침음을 삼켰다. 로이튼은 리카엘이 수행을 다닐 때 그녀를 경호하던 성기사 중 하나로, 젊은 나이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 성국의 기대주로 꼽히는 이였다.

그리고 또 하나.

'대수림에서의 경고가 이렇게 돌아오다니.'

루드가 조심하라고 경고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리카엘은 그의 경고를 되새기지 않았던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는 이렇게 될 거란 걸 알았던 걸까.'

신탁을 조사하기 위해 은밀히 움직였다곤 하지만 모두의 이목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어느 순간 자신을 감시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했는데, 로이튼의 소행이 분명했다.

"로이튼.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겁니까."

그가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지시를 한 인물이야말로 가짜 신탁에 깊게 관여돼 있으리라.

"리카엘 님께서 아실 필요는 없는 이야기 같군요."

"우리베입니까?"

"...."

역시 그랬다. 우리베는 교황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신전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이였다. 신탁이 가짜였음을 모를 리 없었다.

"추기경이란 자가 감히 신의 이름을 더럽히다니!"

누구보다 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뜻을 전파해야 할 존재가 신탁을 기만했다는 사실에, 리카엘은 크게 분노했다.

하지만 로이튼은 오히려 그녀를 꾸중했다.

"당신께서 함부로 입에 올려도 될 이름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는 건 우리베 추기경이 아닌, 바로 당신입니다."

"그게 무슨."

"감히 신탁을 의심하고, 신탁이 거짓이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죄. 당신은 더 이상 성녀 후보가 아닙니다."

그 말을 끝으로 로이튼은 검을 뽑았다. 달빛에 비친 검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누군가를 베었던 게 분명했다.

혈흔의 주인이 누구일지 짐작한 리카엘은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피는, 설마…."

"피가로 그 영감이 제 앞을 막더군요. 안 그래도 거슬리던 차에 잘된 일이었지요. 신의 뜻을 저버린 배신자를 옹호했으니 죽어 마땅한 이였습니다."

피가로는 리카엘이 가장 의지하던 인물이었다. 연륜 있는 그는 때론 리카엘이 생각하지 못한 길을 제시하거나 이정표가 돼 주었고, 지오바니 추기경만큼이나 신실한 존재였다.

리카엘이 이번 신탁을 조사하려 한다는 걸 밝힌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그녀의 뜻을 존중한다며, 마땅히 그 길을 함께 하겠다고 했었다.

그랬던 그가....

'…죽었다고? 나 때문에?'

숨이 막혔다. 손이 떨리고 몸이 주체가 안 됐다. 어느새 손의 떨림은 몸 전체로 퍼져 갔다.

"모두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모두가 이전과 같이 살 수 있었습니다. 성녀 후보나 돼서 어째서 성국을 배신한 겁니까."

"…배신이라고?"

로이튼은 리카엘을 향해 다가갔다.

우습게도 그녀는 자신이 성국을 배신했다는 인지조차 안 돼 있는 듯했다.

성녀 후보나 되는 이가 성국의 뜻을 거스르다니.

'그러니 내 희생을, 헌신을 내팽개친 거겠지.'

로이튼은 리카엘이 성녀가 되리라 믿었다. 많고 많은 성녀 후보 중 그녀를 골랐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른 이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빛, 월등한 성력, 굳은 심지.

경험을 쌓고 시간이 흐르면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성녀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리카엘은, 성녀가 되리라 생각했던 그녀는, 그간 쌓아 온 자신의 헌신과 노력을 한순간에 뭉개 버렸다.

리카엘이 성녀에 오르면, 오랜 세월 그녀의 곁을 지킨 자신의 가치도 높아질 게 분명했다. 어쩌면 언젠가 모든 성기사들을 다스릴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성녀가 됐을 리카엘은 쓸데없는 행동으로 제 미래를 걷어찼다. 자신의 미래도 함께.

그래도 다행히, 모든 게 끝나진 않았다. 아직 꿈을 이룰 기회가 남아 있었다. 전부 우리베 추기경 덕분이었다.

"당신에겐 성녀의 자격이 없습니다. 이 시간부로 당신에게 주어진 성녀 후보의 자격을 박탈합니다. 이는 교황님과 우리베 추기경께서 결정하신 내용으로, 성기사 로이튼은 그 뜻을 받들어 신의 의지를 대행합니다."

"신의 의지를 대행한다고요? 그들의 뜻이 어찌 신의 뜻이란 말입니까! 그분의 뜻을 전파해야 하는 소명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리카엘은 격분했다. 성국이 마냥 깨끗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본 성국은 깨끗하지 않은 걸 넘어 썩어 가고 있었다.

부패의 중심에는 교황과 몇몇 추기경들이 존재했다. 가장 고귀한 자리에서 신의 뜻을 행할 의무를 지닌 이들. 그러나 그들은 신의 뜻을 전하는 게 아닌, 신의 뜻으로 포장된 자신들의 뜻을 얘기했다.

"로이튼! 입이 있다면 말을 해 보십쇼! 당신 또한 그분의 은총을 받은 성기사가 아닙니까!"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큰 호통이었지만 로이튼은 꿈쩍도 안 했다. 그는 그저 목적을 완수할 생각뿐이었다.

"그리 소리를 질러도 당신을 도와줄 이는 없습니다. 누구도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테니까요."

그녀의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로이튼은 일대의 기척을 차단해 놨다. 그녀가 아무리 큰 목소리로 외쳐도 그것을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의미.

"그간의 정으로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의 처분은 우리베 추기경께서 직접 맡으실 겁니다."

마지막 말을 마친 로이튼은 리카엘의 뒷목을 쳤다. 허물어진 그녀를 어깨에 짊어진 그가 조용히 밤거리를 걸었다.

* * *

신전 앞의 광장에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같은 곳으로 향했다.

광장 중앙, 빼곡히 쌓인 나무 장작들 사이로 십자가가 꽂혀 있었다.

커다란 십자가는 장작들 위로 삐쭉 솟아 있었는데, 그곳엔 한 사람이 묶여 있었다. 리카엘이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묶인 리카엘을 욕했다. 성녀 후보면서 신의 이름을 더럽힌 그녀를 저주했다.

리카엘은 아니라고, 신의 이름을 더럽힌 건 내가 아닌 저들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여러 날의 고문으로 그녀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지금도 십자가에 묶인 게 아니었다면 곧장 아래로 굴러떨어졌을 정도였다.

예정된 시간이 다가오자 병사들이 다가와 장작 위로 기름을 부었다. 기름을 붓는 행위는 장작이 충분히 기름을 먹을 때까지 계속됐다.

'결국 이렇게 죽는 건가.'

그 장면을 지켜보던 리카엘은 눈을 감았다. 조금 뒤면 불이 붙을 테고, 타들어 가는 장작 속에서 자신의 숨도 멎겠지.

'이럴 줄 알았다면 재밌게 살아 볼 걸 그랬어. 꿈속의 여인처럼 친구들이랑 술도 마시고 투닥거리기도 하고.'

아득바득 살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성녀가 되지 못했을 때를 대비해 어떻게든 쓸모를 입증하려 했다.

힘들고 포기하고 싶었던 때도 여럿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분의 뜻을 전파하는 자신의 행동이 조금이라도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거란 생각 덕분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전파했던 건, 정말 신의 뜻이었을까.

'성국이 이렇게까지 부패했을 줄이야.'

성녀 후보가 됐을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었다. 아니, 어쩌면 그때도 그랬지만 자신이 몰랐던 것일 수도 있겠지.

신탁을 조사하며 발견한 부정부패들은 하루 이틀 된 정도가 아니었다.

'교황도, 추기경들도. 모두 한통속이야.'

언제부터였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타락했음은 분명했다.

'지오바니 추기경님께선 무사하시길.'

고귀한 뜻을 품은 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예상했던 대로, 지오바니 추기경은 가짜 신탁에 연루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고문 과정에서 그를 비롯한 몇몇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직 그들 같은 이들이 있었으니, 어쩌면 성국에도 미래가 남아 있을지 몰랐다.

다만 걱정인 것은, 그들이 언제고 화를 입진 않을까 하는 것. 그래, 지금의 자신처럼.

"더러운 마녀의 처형을 시작하겠다! 불을 지펴라!"

우리베의 명을 받은 병사들이 횃불을 던졌다. 기름을 잔뜩 먹은 장작은 작은 불씨를 곧장 불꽃으로 바꾸어 냈다.

화르륵-!!!

순식간에 큰불이 붙었다.

십자가가 큰 덕에 아직은 불에 닿지 않았지만,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불꽃이 리카엘의 몸을 불사를 터였다.

그 전에 질식으로 숨이 끊어질 확률도 높았다.

불타서든, 숨이 막혀서든, 그녀의 죽음은 확정적이었다.

'아아....'

자신의 발밑에 피어오른 불꽃을 본 순간. 리카엘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꿈속의 여인은 나였구나.'

오래전 꿈속에 나왔던 화상을 입은 여인이 자신이었다는 사실.

'나의 미래였던 건가....'

리카엘은 차라리 그러기를 바랐다. 꿈속의 여인이 입었던 화상은 분명 끔찍한 것이었으나, 어떻게든 살아남아 좋은 동료들과 함께 한다는 뜻이었으니.

하지만 그런 미래를 영위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점점 다가오는 불꽃은 당장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이 넘실거렸다.

매캐한 매연으로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럽고, 숨을 쉴 때마다 목 안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끝… 나는….'

조금씩 의식이 멀어져 갔다. 어느새 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용사를 만나세요.]

그 순간, 뇌리를 관통하는 목소리에 꺼져 가던 의식이 되살아났다.

'이 목소리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 분명했다. 그분의 것이었다.

'용사를 만나라니, 그게 무슨 뜻이십니까.'

간신히 정신을 유지하며 답을 구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신께선 용사를 만나라는 말만 남긴 채 사라졌다.

의미도, 의도도 짐작할 수 없지만 그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니 따라야만 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해.'

그러기 위해선 일단 이곳에서 살아남는 게 우선.

리카엘은 간절히 소망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기를, 끔찍한 화상을 입어도 좋으니 그분의 뜻을 이룰 수 있기를.

그 기도가 통한 것일까.

"웬 놈이냐!!"

난데없는 고성과 함께 화형대가 무너졌다.

아래로 떨어지며 불꽃에 빠질까 싶던 때, 리카엘은 누군가 자신을 안아 드는 걸 느꼈다.

그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무거워진 눈꺼풀은 도통 떠질 생각을 안 했다. 의식이 점점....

"넌 뭐냐!"

그 사이, 병사들은 정체불명의 인물을 향해 창칼을 겨눴다.

"나? 이 녀석의 동료."

그것을 마주한 휴이가 씨익 웃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59화

휴이가 성국의 수도, 성 마르티나에 도착한 건 이틀 전의 일이었다. 그는 루드와 헤어진 이래로 긴 여정 중이었다.

루드의 보호를 받는 게 아니라, 동등한 자격으로 그 곁에 서기 위해, 휴이는 대륙을 떠돌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성국을 방문한 것도 그 일환 중 하나였다.

그러던 중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다. 마녀의 화형식이 열린다는 얘기였다.

자세히 알진 못하나, 마녀란 이름은 꽤나 흥미를 끄는 것이었다.

'골이 아프군.'

리카엘은 안아 든 휴이는 한 차례 고개를 흔들었다. 전날 과음을 한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리카엘을 알아보고 구조하는 게 늦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불이 붙은 후에야 광장에 도착했고, 연기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이가 그녀란 걸 깨닫는 데 시간이 걸렸다.

'성녀 후보라던 녀석이 왜 이런 꼴이 됐는지 모르겠네.'

함께 수해를 탐험했을 당시만 해도 그녀는 성녀 후보였다. 성녀에 비할 바는 아니라지만 충분히 대단한 위치.

아직까지도 그녀의 정체를 깨달은 제국의 사절단이 태도를 바꾸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처음 화형식에 대해 들었을 때도 그 위에 오르는 게 그녀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뭐, 나중에 물어보면 알겠지.'

그 이유는 모르지만 하나 확실한 건, 휴이가 본 리카엘은 결코 마녀가 아니란 점이었다.

"이 녀석이 무슨 잘못으로 여기 섰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이 녀석은 죽을죄를 지을 만한 녀석이 아니라서 말이야."

"녀석을 죽이고 마녀를 되찾아라!"

수십의 병사들이 휴이를 포위했다. 그를 둘러싼 건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성국의 최고전력이라 할 수 있는 상급 성기사들도 그의 손에서 리카엘을 탈환하기 위해 나섰다.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군."

"네놈, 지금이라도 마녀를 내놓는다면 편히 죽여주마."

그중에는 리카엘을 잡아온 공로를 인정받아 상급 성기사에 오른 로이튼도 있었다.

휴이는 그의 얼굴을 알아봤다. 리카엘을 대하는 태도가 대수림에서와는 완전히 달랐다.

혹여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노심초사하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의 그는 리카엘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군.'

리카엘이 거느리고 있던 성기사가 둘이었단 걸 떠올린 휴이는 늙은 성기사가 어디 있는지 둘러봤다.

그러나 전면에 나선 로이튼과 달리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차마 그녀가 화형당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거나, 자리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 터.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 이유가 무엇이든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리카엘을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기만 하면 됐으니.

"의미 있는 술기운을 날리게 한 대가는 클 거다."

리카엘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휴이는 마력을 끌어 올려 숙취를 날렸다. 흐릿하던 눈이 또렷해지며 시야가 맑아졌다.

술을 즐기긴 하나 만취할 때까지 마신 적은 몇 없었다. 다음 날 숙취로 고생하는 경험도 마찬가지.

그럼에도 어젯밤 많은 술을 마시고, 구태여 그 기운을 해소하지 않았던 건 지난밤의 술이 스스로에게 보내는 축배였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리카엘을 지키던 네가 거기 있다는 건 좋은 이유에서만은 아니겠지."

한순간. 모두의 인지를 벗어난 휴이가 로이튼의 앞에 섰다.

'대체 언제…!'

누구도 반응하지 못한 움직임.

경악스러운 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로이튼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휴이의 주먹을 바라봤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굼벵이가 기어가는 것도 이보다는 빠르겠다 싶을 정도로 천천히 다가오는 주먹이었다.

'왜….'

한데 어째서, 자신은 저 느린 주먹이 다가오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는 걸까.

"컥…!"

무릎 꿇은 로이튼이 피를 토했다. 힘을 잃은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점차 흐려져 가는 시야 속, 로이튼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자신의 몸을 보았다.

그것이 로이튼이 살아서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로이튼 경!"

"주먹으로 판금 갑옷을 뚫다니…."

과정이야 어땠든 젊은 나이에 상급 성기사에 올랐을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은 로이튼이었다. 더군다나 예식을 위해 완전 무장까지 갖춘 상태.

그러나 고작 일권에 가슴이 뚫려 절명하고 말았다. 심지어 상대는 맨손.

성기사들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동요는 곧 혼란으로 이어졌다.

"오, 오러!!"

"마스터다!"

오러를 피워 낸 휴이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더 이상 사람들에겐 그가 맨손인지, 무기를 들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러를 사용하는 이에게 무기의 유무 따위가 중요하랴.

한편으론 로이튼의 죽음을 이해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어도, 판금 갑옷으로 온몸을 보호했다 해도, 마스터의 앞에선 모든 게 무용했으니.

"다음은 누구냐."

한 가지 의문인 건 어째서 마스터나 되는 이가 마녀를 옹호하느냐 하는 것.

그러나 누구도 그 이유를 묻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이곳을 지배하고 있는 건 정체불명의 마스터였으니까.

쾅! 쾅! 쾅! 쾅! 쾅!

휴이가 움직일 때마다 성기사가 하나씩 날아갔다. 로이튼처럼 가슴에 구멍이 뚫리지는 않았지만 전부 판금 갑옷이 찌그러진 채였다.

'공포를 심는다.'

일부러 과격하게 움직이는 건 그를 위함이었다.

언제까지고 이들을 상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곳의 전부를 죽일 것도 아니었으니.

우선은 리카엘을 챙겨 도주하는 게 급선무였다. 다만 그 후를 생각하면 감히 쫓을 생각을 못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슬슬 벗어날까.'

예식을 위해 자리했던 성기사들은 모두 무력화된 상태였다. 대다수가 죽었고 살아 있는 이들도 그에 준하는 부상을 입었다.

당장에 거슬리던 건 전부 해결했으니, 슬슬 리카엘과 함께 이곳을 벗어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지막 선물이다."

순식간에 응집된 마력이 실체가 있는 것처럼 넘실거렸다.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 의식이 날아갈 정도로 강렬한 기운. 이윽고 그 기운이 휴이의 양팔에 맺혔다.

"놈! 신벌이 두렵지도 않더냐!"

"신의 뜻을 거스르다니!"

뒤늦게 정신을 차린 우리베와 다른 추기경이 협박하듯 성토했다.

하지만.

"신 따위야 알게 뭐람. 난 그냥 내가 옳다고 생각한 걸 했을 뿐이야.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으니 걸릴 것도 없지. 그리고 너희가 말하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이라는 존재가 올바른 행동을 가지고 트집 잡진 않겠지."

휴이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다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휴이가 양 주먹을 맞부딪쳤다.

오러와 오러의 충돌에 명중 신비가 더해지며 엄청난 기파가 터져 나왔다.

살상력은 떨어지지만, 일대를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는 기술.

오러가 아닐 때도 강했던 기파는 오러를 이용하자 말도 못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콰아아앙-!!

정신을 잃은 모두가 깨어났을 때, 휴이와 리카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 *

몸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리카엘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여긴…."

"깼어? 오랜만이네."

의식을 찾은 그녀를 반긴 건 휴이였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리카엘은 그제야 의식을 잃기 직전 누군가 자신을 구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당신은 분명 알브족의…."

"이름을 까먹었다면 실망인데."

"…휴이. 당신이 절 구한 겁니까?"

휴이의 걱정과 달리 리카엘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짧았지만 서로 목숨을 빚졌던 존재니 잊을 수 없었다.

기억 속의 모습과 조금 달라진 것 같긴 하지만….

"이름 안 까먹었네. 그래, 주제넘을 수도 있지만 두고 볼 수 없어서."

"아뇨.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리카엘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휴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죽음을 맞았을 거다. 설령 죽지 않았더라도, 험한 꼴을 면치 못했겠지.

'화상은… 없는 것 같네.'

슬쩍 얼굴을 만져 봤을 때 이전과 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불길이 직접 닿기 전에 휴이가 구해 준 덕이었다.

심한 화상을 입더라도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 여겼지만, 그러지 않고도 살아남게 된 것이다.

"이제 그만 내려 주셔도 됩니다."

휴이는 리카엘을 안은 채 달리고 있었다. 광장에서 그녀를 구조해 도주를 시작한 이래로 계속 그래왔다. 그녀의 의식을 깨웠던 진동도 그 과정에서 생긴 것이었다.

최대한 그녀에게 영향이 없도록 노력했지만, 원체 빨리 달리는 탓에 약간의 진동이 전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 돼. 언제 추격이 따라붙을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멀어지는 게 중요해. 너, 느리잖아. 지금 몸 상태도 안 좋고."

"...."

"위험한 곳을 벗어났다는 판단이 들면 내려 줄게."

리카엘의 몸이 정상이라고 해도 휴이보다 빠를 순 없었다. 추격에 대비하기 위해선 이게 최선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리카엘도 더 이상 내려 달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어봤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몰라.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아니면 몸을 의탁할 만한 데가 있어?"

리카엘이 의식을 찾기 전까진 경비가 가장 취약한 곳들을 노려 이동했다. 성국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수도에서 멀어지려는 중이었다.

하나 만약 리카엘이 도움을 청할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그래도 성녀 후보였으니, 한 곳쯤은 그녀를 도울 곳이 있으리라.

"제국으로 가야겠습니다."

"…제국?"

그러나 리카엘의 목적지는 뜻밖의 곳이었다.

"왜? 그곳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죽음을 느꼈던 순간 들었던 목소리는 분명 그분의 음성이었다. 용사를 만나라, 그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시니 지켜야 했다.

다만 걸리는 건, 그분께서 말씀하신 용사가 아이리우스 에이나우디를 지칭하는 게 맞는지였다.

용사라고 불리긴 하나 그녀는 가짜 신탁으로 인해 만들어진 용사.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게 정말 그녀일까.

'당장 다른 대안도 없으니 일단은 그녀를 만나 봐야 해.'

그러나 그녀 말고는 용사라 불릴 이가 없었으니, 그녀를 만나는 게 최선이었다.

"흠. 제국이라."

"성국만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그 후는 스스로 해결하겠습니다."

"아니야. 어차피 제국도 아직 안 가 본 곳이니까. 마지막에 가려던 곳이었는데 이렇게 된 거 순서를 바꾸지 뭐."

여정을 시작하며, 휴이가 정했던 목표는 마스터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 정도는 돼야 루드의 곁에 당당히 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리고 얼마 전 그 목표를 이룬 덕에 심적 부담이 적어진 상태였다.

예정했던 경로는 성국을 거쳐 대륙 북쪽으로 향한 후 마지막으로 제국에 들르는 것이었지만, 순서를 바꿔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지금 급한 건 자신의 여정이 아니라 리카엘의 안전이었으니.

"정말 감사합니다. 갚지 못할 만큼 큰 빚을 졌습니다."

"뭘, 짧았지만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겼던 동료잖아."

"동료…."

리카엘은 휴이의 말을 곱씹었다.

동료, 동료라….

그녀가 아무 대꾸도 없자 휴이는 흠칫 놀랐다.

"그 반응은 뭐야.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거야?"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기에 그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거니 했는데, 억측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은 까닭이었다.

하지만 리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동료라는 말이, 참 좋은 울림 같아서요."

꿈속의 여인이 떠올랐다. 과거, 그녀가 자신을 향해 보였던 미소의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리카엘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몸이 작게 떨렸다. 그건 아마, 달리는 휴이에게서 전해진 진동 때문이었을 거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6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