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30화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제국군은 빌레인 부족 내에 야영지를 차렸다.
적진의 한가운데 주둔하겠다는 과감한 선택.
하나 큰 위험을 느끼지는 않았다.
부족에 남아 있는 건 힘없는 어린아이와 여자가 대부분.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이들은 이미 죽었거나 도망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부족 외부에 야영지를 차릴 필요는 없었다. 품도 많이 들뿐더러, 이미 편히 쉴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마당에 새로운 곳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위하여!!"
승리의 여운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치러진 전투. 지금은 어느덧 해가 진 지 오래였으나, 병사들은 아직까지도 승리의 맛에 취해 있었다.
'분위기가 좋군.'
야영지의 한구석.
병사들을 관찰하던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군은 축제 분위기였다. 빌레인 부족을 순조롭게 격파한 데다 사상자도 몇 없었으니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칼바람 부족까지 단숨에 친다.'
낮의 전투에서 놓친 빌레인 부족 잔당은 칼바람 부족으로 향했을 것이다.
빌레인의 동맹 부족이라 할 수 있는 칼바람.
그들 또한 제국이나 다른 부족들을 약탈하며 살아가는 부족이었다.
사라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들.
루드는 그들을 이용해 원하는 바를 이룰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자원할 줄은 몰랐는데.'
한동안 병사들을 지켜보던 루드는 시선을 옮겼다.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 익숙한 얼굴이 제 동행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용사 아이리우스.'
병력들 가운데 섞인 그녀를 확인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바깥대륙과의 전쟁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긴 했지만, 제국의 입장에서 이번 전쟁은 총력을 기울인 전쟁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이민족들을 상대하는 일. 실상이야 어떨지 몰라도 그들의 입장에서 이민족들의 문명은 야만인 수준에 불과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임할 전쟁이었다.
제국 서부에 위치한 그녀의 가문이 이번 전쟁에 나설 이유가 없는 것도 그 때문.
제국 전체의 힘이 동원되는 대규모 전쟁이 아니었으니, 그녀를 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녀의 아버지인 에이나우디 공작은 전쟁을 반대했던 입장이 아닌가.
하지만 아이리우스는 루드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가문이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용병으로 참여했다지. 옆에 있는 건 가문의 기사인가. 꽤 수준이 높군.'
루드는 아이리우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기사의 실력을 가늠했다.
익스퍼트 상급은 확실히 넘은 것 같았다. 어쩌면 마스터의 벽을 느끼고 있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에이나우디 가에도 마스터가 하나 나왔었지.'
과거의 기억을 되짚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들리는 이야기로 제국에 새로운 소드마스터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었다.
에이나우디 공작가의 기사 출신으로, 그 이명은....
'바람의 기사.'
아마 아이리우스의 곁에 있는 사내가 바람의 기사일 것이었다.
제 가문에서 나온 소드마스터를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자신이 그녀였다면 회귀하고 가장 먼저 그를 포섭하려 들었겠지.
아이리우스 또한 같은 판단을 내렸을 거라 생각했다.
'…이번 전쟁에서 용사를 없앨 수도 있겠군.'
자신이 제국군의 총사령관이었으니, 그녀를 사지로 모는 것쯤이야 간단했다. 막말로 군영 내에서 암살을 시도해도 되는 것이었고.
하지만 루드는 그녀를 죽이는 걸 고민했다. 그녀도 결국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싸웠을 뿐.
무엇보다 그녀를 죽인다 해도 또 다른 용사가 튀어나올 것이었다. 새로운 변수를 파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는 일.
게다가....
'그녀가 죽는다면 페드리와 쿠두스 선생님이 슬퍼하겠지.'
그녀가 죽으면 슬퍼할 이들이 있었다. 비록 전생에선 어땠을지 몰라도 이번 생에 그녀가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이리우스를 죽인다면 그들이 적개심을 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내 손으로 죽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당분간은 지켜봐야겠어.'
오랜 고민 끝에 루드는 그녀의 처우를 결정했다.
미래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이번 전쟁에서는 그녀를 죽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그것이 그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 주겠단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직접 그녀를 죽이는 일이 없을 뿐.
전쟁 중 그녀가 스스로 위기를 자처해 죽는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의회와 뱀 부족을 없애기 위해 준비한 수단들 중에는 꽤 위험한 것도 있었으니, 어쩌면 거기에 휘말려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루드는 먼 곳을 바라봤다.
칼바람 부족이 있는 방향.
그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그를 통해 어떤 결과를 얻어낼지....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하는 사이 밤이 깊어 갔다.
날이 밝자 제국군은 곧장 움직였다.
이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척후병이 금세 도망친 잔당의 흔적을 발견했다.
"동북쪽의 산으로 이어집니다."
"고생했다."
인근의 산으로 이어진 흔적. 높은 나무가 빼곡한 산은 한눈에 봐도 산세가 험해 보였다.
하나 잔당의 흔적을 발견한 이상, 쫓지 않을 수도 없는 법.
"귀찮게 됐군요."
"병사들에게 경계를 늦추지 말라 전하게."
루드는 질레트를 통해 각 군에 이야기를 전달했다.
이동이 어렵고 시야가 한정되는 산은 기습을 감행하기에 적합한 장소.
더군다나 수적 이점을 살리기도 어려운 지형이었다.
언제 어디서 빌레인과 칼바람 부족의 전사들이 나타날지 몰랐으니 긴장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루드를 포함한 제국군 누구도 질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산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적습이다!!!"
"화살이다!"
기다렸다는 듯 화살이 쏟아졌다.
빌레인 부족의 합류로 제국군이 찾아올 것을 알고 있던 칼바람 부족이었다.
그러나 기습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방패를 들어라!"
"방향은 내가 잡겠다! 방패로 몸을 가린 뒤 내 뒤를 따라와라!"
기습을 예상했던 상황. 병사들이 방패를 들며 빠르게 반응했다.
기사들은 병사들의 앞에서 올바른 방향을 잡아 주며 길을 이끌었다.
"익스퍼트급은 단독 행동을 허가하겠다! 감히 제국군을 공격한 야만인들을 남김없이 추살하라!"
"저쪽이다!!"
거기에 루드의 명은 이번 전쟁을 통해 한몫 잡아 보겠단 열망을 가진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쏜살같이 튀어 나가는 이들. 대다수가 용병이었지만 기사나 일반병도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일남일녀의 조합.
"헤이론!"
"예, 아가씨."
가문이 아닌 개인으로 참전했기에 아이리우스를 부르는 헤이론의 호칭은 아가씨였다.
공녀란 사실이 밝혀지면 쓸데없는 이목이 늘 터. 분명 무언가를 얻기 위해 접근하는 이도 생길 것이었다.
혹시 모를 마왕의 등장에 집중하고 싶은 아이리우스로서는 반갑지 않은 일.
하여 그들의 호칭은 아가씨와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던 마음과는 달리, 두 사람의 무용은 사람들의 시선을 절로 끌었다.
휙, 하고 무언가 지나감과 동시. 사람의 목이 떨어졌다.
부릅뜬 눈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표정이었다.
순식간에 칼바람 부족의 전사를 처리한 아이리우스는 지체 없이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헤이론 또한 마찬가지. 두 사람은 종횡무진 산속을 누볐다.
'빠르시군, 역시 주군이시다.'
거침없는 아이리우스의 움직임에 헤이론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자신이야 야전 경험도 많았고, 나름 '바람의 기사'란 이명까지 갖고 있었다.
하나 아이리우스는 이러한 전투가 처음일 터. 아카데미에서 전투 수업을 받긴 했겠지만 수업과 실전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만한 실력을 보여 주다니. 역시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 싶었다.
'더 빨리, 더 간결하게, 과거의 감각을 떠올려라!'
그러나 헤이론의 감탄과는 달리 아이리우스는 스스로의 움직임에 만족하지 못했다.
바깥대륙의 환경은 전생에서 무수히 겪었던 것.
전생의 경험이 있었으니 이런 곳에서 애먹는 건 말도 안 됐다.
그녀가 원하는 건 처음으로 전쟁에 나선 귀족가의 영애가 아닌 백전불패의 용사로서의 모습.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전생의 자신이 움직이고 있었다.
숱한 가호와 무수한 이들의 기대를 안고 매일같이 전장에 서던 때.
하루빨리 그때의 감각을 깨우쳐야 했다.
바깥대륙 안쪽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이보다 더한 험지와 말도 안 되는 환경들이 나타날 터.
과거의 모습을 빨리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몰아붙여라!"
"우오오오오오!!!"
아이리우스와 헤이론의 활약을 앞세운 제국군은 진군에 박차를 가했다.
날아오는 화살을 쳐 내고 숨어 있는 적을 찌른다.
적의 저항이 줄며 점차 빨라지는 속도.
하지만 빌레인 부족 때와는 달리 압도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끼요로로로로로!!!"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찾아오느냐!"
"죽을 곳인지 모르고 찾아왔구나, 하하하핫!!!"
거기에 새롭게 등장한 적들은 직전까지 상대하던 이들과 수준이 달랐다.
하나하나가 익스퍼트급.
지형을 이용해 기습하길 반복하는 그들은 일반 병사들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병사를 대신해 기사가 상대하려 하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는 그들이었다.
"짜증 나게 구는군."
결국 한발 물러서 있던 루드가 나섰다.
"비켜라."
루드는 지금의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저들이 이용하는 가장 큰 무기를 깨부수면 되는 일.
'지형.'
백 년 전의 전쟁에서도, 전생의 전쟁에서도. 제국과의 전쟁에서 바깥대륙이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이유.
루드 또한 전생의 전쟁에서 숱하게 이용한 부분이었다.
아군만이 아는 지형으로 정보의 우위를 점하고 그것을 활용해 적은 숫자로 큰 숫자를 제압한다.
전투에 있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해결책은 간단하지. 지형을 통해 유리함을 만든다면, 지형을 무용지물로 만들면 될 뿐.'
다른 곳은 모르겠으나, 최소한 이곳의 지형만큼은 무위로 돌릴 수 있었다.
"오, 오러!!"
"더스틴 님께서 오러를 꺼내 드셨다!"
"제국의 위대한 소드마스터가 우리와 함께한다!"
검에 선명하게 맺힌 오러.
루드는 오러를 응시하는 질레트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대신 전방에 집중했다.
콰과가가강!!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쓸려 나가는 나무들. 어느새 검의 경로에 있던 곳들은 허허벌판으로 변했다.
부러진 나무들 사이로 적군이 보였다. 운 나쁘게 검의 경로에 서 있다 죽은 이도 있었으나 살아 있는 이들이 더 많은 상황.
하나 그들 또한 먼저 간 동료와 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은 분명했다.
콰과광!!
콰과과과광!!!
연이어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그간 적군이 이용하던 지리적 이점이 사라짐을 의미했다.
"전군, 진격."
마침내 그 소란이 멎어 들었을 때. 제국군에 명령이 떨어졌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우와아아아아아!!!"
"가자아아아아아!!!"
기합과 함께 진군하는 제국군.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칼바람 부족에 당도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31화
사방의 시야가 확보된 제국군의 발을 잡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빠른 속도로 산을 오르는 제국군.
산세가 험했던 것도 이젠 옛말이었다. 오러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높게 쳐 봐야 언덕 수준에 불과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군은 산속에 숨겨진 칼바람 부족을 발견했다.
"쳐라!!"
"죽여라!!"
"이놈들!"
칼바람 부족은 거세게 저항했다. 지난날 도망쳤던 빌레인 부족의 잔당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으니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했다.
"크악!"
"죽어!!"
"아아악!"
결사 항전을 이어 가는 그들. 족장과 정예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제국군을 상대했다.
치열해지는 전투에 제국군에도 피해가 생기기 시작한 상황.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두 부족의 족장들이 강하고 그 정예들이 숱한 전투 경험을 지녔다 한들, 제국군의 전력이 너무 압도적이었다.
"질레트, 지휘를 부탁하지."
"직접 나서실 생각입니까."
"그래."
전투에 종지부를 찍을 루드의 가세까지.
질레트에게 군의 지휘를 맡긴 루드는 칼바람 부족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목표는 빌레인과 칼바람의 두 족장.
'단숨에 머리를 친다.'
여러 곳에서 난전이 이어지고 있는 복잡한 상황이었지만, 루드의 눈은 한 번에 그 둘을 포착해 냈다.
"커허어억!!!"
"끄읍...."
일직선으로 이동하는 루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 명의 부족 전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네놈!"
루드를 발견한 칼바람 부족의 족장이 검을 휘둘렀다. 빌레인 부족의 족장도 곧바로 가세했다.
그들 또한 루드를 알아봤긴 마찬가지. 눈앞의 사내는 최소 지휘관급 인사로 보였으니, 그를 해치운다면 전황에 반전을 꾀할 수 있을 터였다.
부웅-!
쇠몽둥이가 허공을 갈랐다. 곳곳에 징이 박힌 쇠몽둥이는 스치기만 해도 뼈가 으스러질 정도.
하지만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얘기였다.
"컥-!"
몽둥이를 피한 루드가 검을 찔러 넣었다. 깔끔하게 목을 관통한 검. 확인할 것도 없이 즉사였다.
그사이 허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검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 힘을 합치던 이가 죽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에 전념하는 모습.
훌륭한 판단이었으나 그뿐. 그 또한 같은 결과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뭣?"
어느새 돌아온 루드의 검이 허리를 양분할 기세로 휘둘러진 검을 튕겨 내고, 그 반동으로 열린 적의 몸을 순식간에 난도질했다.
사방으로 튀는 피는 빌레인 부족과 칼바람 부족의 패배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더스틴 님께서 적장들을 섬멸했다! 항복하는 이들은 죽이지 않겠다! 다시 한번 말한다! 항복하는 이는 죽이지 않겠다!"
멀리서 그 모습을 확인한 질레트가 마력을 담아 외쳤다. 적장이 죽었으니 적군의 의지를 꺾을 기회. 적들이 항복한다면 더 이상의 피해 없이 전투를 마무리하는 것도 가능했다.
떨그럭-.
"하, 항복!"
"항복하겠다!"
이윽고 무기를 떨어뜨리며 바짝 엎드리는 적군들.
두 번째 전투의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이상해....'
아이리우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전투가 끝나고 전사자의 수습이 한창이었다. 부상을 입은 이들은 뒤로 빠져 치료를 받고 있었고, 몇몇은 사로잡은 포로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
하나 아이리우스는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이렇게 쉽다고?'
그러다 곧, 그것이 자신의 예상과 다른 현 상황에서 기인하는 감정임을 깨달았다.
'전사자가 있긴 하지만, 미미한 수준이고. 부상자들도 전투를 못 할 정도로 심각한 이는 없다.'
전날의 성과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대승이었다.
제국군의 피해가 적은 데 반해 상대가 입은 타격은 거의 궤멸 수준.
여성과 어린아이 정도를 제외한 모두가 속박되어 감시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바깥대륙에서의 전투가 이렇게까지 쉬울 줄이야.'
아이리우스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전생에서 겪었던 전쟁과 그 양상이 너무 달랐다.
아무리 제국군의 전력이 압도적이었다지만 마냥 쉬운 전투만은 아닐 거라 예상했던 그녀였다. 피해도 훨씬 클 거라 생각했고.
하나 막상 상대한 바깥대륙의 전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시기의 차이 때문인가.'
곰곰이 그 이유를 떠올려 보면 원인이 될 만한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시기의 차이.
과거보다 훨씬 빨라진 전쟁으로, 현재 바깥대륙의 전력이 전생의 그들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마왕의 유무도 크겠지.'
거기에 더해 마왕이란 인물의 존재.
전생에서 겪었던 바깥대륙은 마왕 루드란테에 의해 규합된 연합군이었다.
방금 상대한 빌레인이나 칼바람 부족 같은 바깥대륙의 여러 부족들을 한데 묶어 구성한 군대.
그 강력함과 질은 앞의 두 부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들을 직접 상대해 봤었기에 자신할 수 있었다.
만약 지금 상대한 게 마왕의 군세였다면... 이 정도 병력만으론 힘들었을지도 몰랐다.
'까마귀 부족에 있다고 했지. 아직 마왕이라 불리기 전의 시간대인 거야.'
아이리우스는 사라 아즈문이 전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자신의 부탁을 받고 마왕을 확인하기 위해 떠났던 그녀는, 그가 까마귀 부족에 있다는 소식을 전한 뒤 연락이 끊겼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니면 배신? 아니, 금제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그녀가 배신할 리 없어.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가정이 훨씬 그럴듯해.'
그녀가 맡았던 임무가 마왕과 관련됐던 걸 감안하면 더욱 그랬다.
어쩌면 그에게 들켰을지도 모르는 일.
비록 아직은 마왕이라 불리지 않았으나, 언제고 마왕이란 이름으로 제국의 대적이 될 사내였다.
과거만큼은 아니겠지만, 지금도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은 분명했다.
'일단은 당장의 전투에 집중하는 게 좋겠지.'
한참 동안 마왕에 관한 것들을 곱씹던 아이리우스는 몸을 일으켰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야영 준비를 해야 할 시각이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이리우스 님."
"...."
"역시 맞으셨군요."
단단한 갑주를 입은 사내는 막시무스란 이름의 기사였다. 동부의 대귀족 카브레이 후작가를 대표하는 기사로, 이번 전쟁에서 귀족들의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막시무스 경."
"예, 헤이론 경. 오랜만이군요."
막시무스는 헤이론과도 연이 있었다. 실상 아이리우스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곁에 있는 헤이론 덕분이었다. 긴가민가하던 차에 그의 존재가 확신을 더해 준 것이다.
자신을 반기지 않는 기색을 느낀 막시무스는 분위기를 살폈다.
아이리우스의 무장 상태와 가문의 다른 병력 없이 헤이론만을 대동한 지금의 상황.
"...혹시 용병 신분으로 참전하신 겁니까?"
"예."
"이유를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방금 전의 질문은 없던 걸로 해 주시죠."
그는 곧장 물음을 철회했다. 대신 그녀에게 제안을 건넸다.
"제 병력에 편성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자신이 이끄는 귀족 가문의 병력에 합류하는 어떻겠냐는 제안.
에이나우디 공작가가 병력을 파견했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었다. 당연할지도 몰랐다. 황궁 회의에서 유일하게 전쟁을 반대했던 가문이 아닌가.
그 점과 지금 그녀의 행색을 고려하면 독단적으로 참전했을 확률이 높았다.
무슨 사정으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리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최소한의 안전은 확보해 둬야 했다.
운이 좋다면 이번 기회로 공작가와의 연을 만들 수도 있을 테고.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병력의 편성은 군의 총책임자인 더스틴 님의 권한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할 말이 없군요."
하지만 돌아온 건 완곡한 거절. 더스틴의 이름까지 언급했으니 막시무스로서도 더 이상 제안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막시무스는 실망하지 않았다. 가문의 입장을 거스르면서까지 전쟁에 참여한 그녀였다.
제 가문의 영애가 아니었으니 성격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 나이 때 특유의 반항심이 작용했을 거라 여겼다.
'시간은 충분하지.'
바깥대륙과의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녀를 자신의 부대에 편성할 기회는 차고 넘쳤다.
직전의 전투에서 보여준 무용은 분명 대단했으나 전쟁은 무력만으로 논할 수 없는 것.
온실 속 화초인 그녀가 언제까지 지금과 같은 태도를 고수할 수 있을까.
"참. 마침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길인데, 괜찮으시면 함께 가시겠습니까?"
"회의라 하면...."
"군사 회의입니다. 더스틴 님께서 저를 비롯한 군의 핵심 인사 몇을 소집하셨지요. 필요하다면 다른 이들을 대동해도 괜찮다 하셨으니, 아이리우스 님께서 함께하신다 해도 문제될 건 없을 겁니다."
아이리우스는 막시무스의 제안이 순수한 호의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알았지만, 거절하기엔 너무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군사 회의에 참석한다면 여러 정보들을 알 수 있을 터.
운이 따른다면 의견을 피력하는 것도 가능할지 몰랐다.
"염치 불구하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헤이론 경도 함께 오시고요."
"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감사합니다."
그렇게 세 사람은 회의가 예정된 곳으로 향했다. 칼바람 부족의 회의실이었다. 다른 준비를 더 할 필요 없이 곧장 회의를 진행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고른 장소였다.
"막시무스 경까지 왔군. 그 뒤는...."
"에이나우디 공작가의 영애이십니다. 그 옆은 가문의 기사이고요."
"알고 있다. 그저 함께 온 것에 놀랐을 뿐. 자리에 앉지."
막시무스와 아이리우스, 헤이론을 끝으로 회의에 참석할 이들이 모두 모였다.
총 여섯 명. 더스틴과 질레트, 조금 전에 도착한 막시무스 일행 셋에 콜론이란 이름의 기사가 그 면면이었다.
"콜론 경은 대동할 이가 없었나."
"예, 딱히."
루드의 물음에 콜론은 짤막하게 답했다. 과묵한 인상만큼이나 말수가 적은 그였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 이렇게 그대들을 소집한 건 의견을 나누기 위함일세."
"의견 말씀입니까."
회의실에 모인 여섯. 루드는 그들의 소속을 헤아렸다.
자신과 질레트로 대변되는 황실의 병력.
막시무스가 이끄는 귀족의 병력.
콜론이 운영하는 의회의 병력.
"부대를 세 개로 나눌까 하네."
그들을 콕 짚어 회의에 참석시킨 건 그 세력을 각기 운영하기 위함이었다.
황실과 의회, 귀족. 그렇게 셋으로 나뉜 병력이 따로 운영돼야 목적하던 바를 이루기 쉬웠으니.
"연이은 두 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지. 다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손쉬운 승리를 거둘 거라 장담할 수는 없네. 우리는 바깥대륙에 대한 정보가 적고, 시간이 지나면 저들도 우리를 상대하기 위해 힘을 보태겠지."
"...적들이 규합하는 걸 경계하는 것이군요."
"정확한 생각이야."
그 말뜻을 알아들은 아이리우스가 말을 보탰다. 전생에서 바깥대륙이 힘을 합치는 걸 봤던 그녀였기에 곧장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막시무스는 아니었다. 그는 바깥대륙이 협력할 거란 말에 회의감을 드러냈다.
"바깥대륙의 부족들은 중앙대륙의 국가들과 비슷한 관계라 들었습니다. 그들이 쉽게 힘을 합칠까요?"
"일리가 있는 말이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대적이 나타났을 때 힘을 모으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건 본능에 새겨진 것이거든. 당장 전멸할 위기에 처한다면 내 부족 네 부족 뭐가 중요하겠나. 일단 살아남는 게 중요할 테지."
"...그것도 맞긴 하군요."
루드의 대답에 한발 물러난 막시무스.
이쯤에서 루드는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미끼를 던졌다.
"무엇보다, 굳이 지금처럼 움직일 까닭을 못 느꼈네."
앞서 상대가 규합할 것을 경고했던 이유는 지금부터 나올 내용을 더욱 극대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빌레인 부족과 칼바람 부족을 상대하며 무엇을 느꼈나?"
"개개인의 무력은 강했으나, 그게 다였습니다."
루드의 질문에 답한 것은 아이리우스였다. 그녀의 의견에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군을 상대로 그들은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그간 저질러 온 악업의 대가를 치렀지."
그러면서 은근슬쩍 제국군을 치켜세웠다. 그들이 자만할수록 더욱 좋은 일이었으니.
"나는 연이은 두 부족과의 전투로 병력을 셋으로 나눠도 충분히 바깥대륙의 부족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대들에게도 병력을 셋으로 나누는 게 이득일 거야."
루드가 질레트를 바라보자 그가 준비해 뒀던 자료를 모두에게 전달했다.
"생각해 둔 병력 편성이네."
"…흐음."
그것을 확인한 막시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력을 나누는 게 자신들에게도 이득일 거라 호언장담하더니, 과연 그럴 만했다.
자료에 의하면 셋으로 갈라진 병력은 비등했다. 중요한 건 그중 하나가 온전히 귀족 가문의 병력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나와 질레트가 1군, 막시무스 경이 2군, 콜론 경이 3군을 맡으면 어떨까 하네. 물론, 각자가 이끈 군에서 얻은 전리품과 성과는 모두 그 군의 차지일세. 문제가 생긴다면 그 책임 또한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야."
거기에 각 군의 성과를 오롯이 보장하겠다는 약속.
성과를 보장하는 대신 책임도 져야 한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미 막시무스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공적과 전리품을 챙기는 행복한 미래가 펼쳐지고 있었다.
여러 귀족들의 기대를 안고 출정해 최대한 많은 성과를 얻어가야 하는 그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막시무스 경은 마음에 든 듯하고, 콜론 경은 어떠한가."
"병력 편성은 더스틴 님의 권한. 제 뜻을 물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군."
병력의 분할에 있어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않은 콜론.
이미 더스틴이 의회와 뜻을 같이하기로 한 인물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 구태여 의사를 피력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이렇게 나눈 병력을 각각 북동, 정동, 남동으로 진군시킬 생각이네."
곧 탁자에 지도가 펼쳐졌다. 바깥대륙을 그린 지도는 세세하진 않았으나 큰 지형지물 정도는 표기돼 있었다.
"내가 맡을 1군이 정동, 막시무스 경과 콜론 경이 각각 남동과 북동을 맡아 줬으면 하네."
지도 위로 그려진 세 개의 선.
각 군의 이동 경로를 표시한 선이었다.
"그리고 이곳, 대평원에서 다시 모일 생각이야."
현재의 위치에서 출발한 세 개의 선들이 다시 모이는 장소는 정동 방향으로 쭉 나아가면 나타나는 장소.
까마귀 부족의 바로 앞에 위치한, 대평원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32화
회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온 아이리우스는 회의에서 나왔던 내용을 곱씹었다.
'병력을 셋으로 나누면 진군 속도가 훨씬 빨라지겠지. 각 부대가 감당해야 할 전투 부담이 커지긴 하겠지만... 오히려 가장 적은 피해로 바깥대륙을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몰라.'
마왕이 등장하지 않은 바깥대륙의 전력은 생각보다 약했다.
전생에 겪었던 바깥대륙이 맞나 싶을 정도.
과거 지금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투입하고도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셨던 제국이었다. 그만큼 당시 마왕이 이끌던 연합군은 강력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왕도, 그가 이끄는 연합군도 없는 시점. 어쩌면 속전속결로 진군하는 것이 이번 전쟁의 중요한 열쇠일지도 몰랐다.
이대로 바깥대륙을 정복해 버린다면 마왕과 연합군의 존재 자체를 없던 걸로 할 수 있을 테니.
'그보다… 진짜 더스틴일까.'
회의 내용을 떠올리던 아이리우스의 생각은 이내 더스틴에게로 이어졌다.
이번 전쟁의 총책임자.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 죽음을 목격했던 인물.
'그게 위장이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자랑은 아니지만, 죽음에 익숙한 자신이었다. 전생에서 많은 이들을 죽였고, 많은 이들의 죽음을 목도한 까닭이었다.
덕분에 누군가의 죽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별하는 것 정도는 간단했다.
쿠두스의 검에 찔렸던 그는 분명 소생 불가의 상태였다.
'흑마법을 이용한다면 살려 낼 순 있겠지만….'
죽음을 거스르는 건 명백한 금기. 더군다나 흑마법을 이용해 소생한 것이었다면, 흑마법의 냄새가 났을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더스틴에게선 흑마법과 관련된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더스틴이 폭주한 시점부터 계속 걸리던 건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
회귀를 통해 정보의 이점을 쥐고 활용해야 할 자신이 오히려 달라진 역사에 휩쓸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일단은 황실에서 공증했고 그 곁에는 질레트 경까지 있으니 크게 걱정할 건 없겠지.'
곧 아이리우스는 더스틴과 관련된 생각을 정리했다.
황실에서 그의 신원을 보증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아마 황실에서 일부러 흘린 이야기였을 터, 적어도 황실은 그의 진위와 정체를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황실이 그를 가만히 둔 데엔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만약의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의 곁에는 질레트 경이 있었으니... 결국 자신이 나설 문제는 아니었다.
"아이리우스 님, 곧장 이동할 준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때마침 막시무스가 아이리우스에게로 다가왔다.
이번 부대 편성으로 아이리우스와 헤이론은 그가 이끄는 2군에 배정된 상태였다.
그가 두 사람의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당연히 그들이 2군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막시무스는 준비가 되는 즉시 출정하고자 했다. 각 군이 얻는 공적과 전리품을 고스란히 해당 군에 보장하기로 했으니 조금이라도 많은 것을 얻기 위함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씀 편히 하시죠. 전장에서 부하에게 존칭을 취하는 상관은 없습니다."
"…그리 말해 준다면 고맙군. 서둘러 준비를 마쳐 주게."
이전과 같은 상태라면 모를까, 엄연히 막시무스의 군에 속하게 된 상황. 아이리우스는 먼저 나서 서로 간의 호칭을 정리했다.
일개 부하에게 존댓말을 하는 상사는 없었으니, 괜히 주변의 이목을 끌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전장에서의 소통을 빠르게 해 주는 효과도 있었고.
아이리우스와 대화를 마친 막시무스는 콜론에게 다가갔다.
"콜론 경은 언제 출발하시렵니까."
"글쎄. 준비가 되는 대로 움직여야겠지. 더스틴 님께서 빠른 진군을 원하시니 말이야."
각 군의 경로가 정해져 있었으니 한동안 직접적인 경쟁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집결지에서 다시 만나게 될 터. 그때가 되면 각자가 세운 공로를 비교하게 되겠지.
어떻게 보면 집결지에 도착하는 시점도 경쟁 요소나 마찬가지였다. 누가 더 빠르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는가를 판가름할 수 있었으니.
막시무스는 최소한 콜론이 이끄는 3군보다는 먼저 집결지에 도착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시무스와 달리 콜론은 그러한 경쟁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할 뿐.
의회의 명을 받아 출정했고, 의회의 대리인이나 다름없는 더스틴이 명령을 내렸으니, 자신은 그저 그것을 수행하면 될 일이었다.
"먼저 가 보겠소. 아군을 견제하는 것보다는 적군을 경계하는 데 더 시간을 쓰길 바라오. 그럼 이만."
뼈가 담긴 말을 뱉고 떠나는 콜론. 얼굴이 붉어진 막시무스가 그 뒷모습을 바라봤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잠시 뒤, 간신히 분을 삭인 막시무스가 자신의 군영으로 향했다.
어떻게 해서든 3군보다는 빠르게 집결지에 도착할 생각이었다.
"막시무스 경이 2군을 이끌고 떠났습니다. 콜론 경도 조금 전 3군과 함께 출정하였고요."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겠군."
질레트의 보고를 받은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평원에서의 집결 시기를 맞추려면 슬슬 움직여야 할 때였다. 다른 약속도 마찬가지였고.
'집결지까지 금방 도착할 수는 없겠지. 뭐,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2군과 3군이 빠르게 대평원에 도착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들이 향한 남쪽과 북쪽의 경로에는 미리 준비해 둔 패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최소 전력의 반은 깎을 수 있을 터.'
준비해 둔 패가 패였으니 각 군은 큰 피해를 면치 못할 것이었다. 어쩌면 대평원에 도착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고.
'아직 해 줘야 할 것들이 남아있으니 전멸해선 안 되는데 말이지.'
루드가 준비해 둔 패는 황혼 부족과 호랑이 부족. 그들은 각기 남쪽과 북쪽에서 2군과 3군을 맞이할 예정이었다.
'황혼 부족이야 문제가 없을 거고, 관건은 호랑이 부족인가.'
황혼 부족의 족장인 바치렌과는 전생과 이번 생 모두 연을 맺은 상태였다. 그러니 그들이 이번 임무를 잘 해낼 거라 믿을 수 있었다.
다만 걱정되는 건 북쪽의 패로 준비한 호랑이 부족.
전생에서는 연합군 소속으로 큰 역할을 해 줬던 부족이지만, 현생에는 별다른 접점이 없었던 만큼 생각대로 움직여 줄 거란 확신을 할 수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그들이 강자를 숭배한다는 점.
'아버지가 직접 나섰다 했으니 큰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얼마 전 제노스가 직접 호랑이 부족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제노스 정도라면 그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데 무리가 없을 터.
"출정 준비가 끝났습니다."
"좋아, 바로 출발하지."
얼마 뒤. 병력의 준비가 끝나자 루드는 출정을 선언했다.
황실 병력으로 편성된 1군의 경로는 정동 방향.
2군의 경로에 황혼 부족이, 3군의 경로에 호랑이 부족이 기다리고 있는 것에 반해 어떤 부족도 없는 경로였다.
'하지만 그게 아무 일도 없다는 소리는 아니지.'
대평원을 향해 정동 방향으로 쭉 나아가다 보면 중간중간 험지가 나타났다.
갖은 언덕들로 이루어지기도, 뾰족한 암석들이 지반을 이루기도 한 곳들.
물론 2군과 3군이 맞닥뜨릴 위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루드가 준비한 패는 남쪽과 북쪽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들이 향하는 동쪽에서 벌어질 일들 그리고 그를 통해 얻을 것을 계산하던 루드는 한 사람을 바라봤다.
'…여전히 의심하고 있나.'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걷고 있는 질레트. 이전부터 루드를 바라보고 있던 그였기에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오러를 꺼내 들어서겠지.'
사람마다 글씨체가 다르고 걸음걸이에 차이가 있듯, 소드마스터의 오러에도 제각각의 특색이 있었다.
오랜 세월 더스틴을 보좌한 질레트였으니 그의 오러를 알고 있을 터. 일전 칼바람 부족과의 전투에서 루드가 선보였던 오러가 자신이 알고 있는 더스틴의 오러와 다르단 걸 알아봤음이 분명했다.
'정체를 추궁하지 않는 건, 못 하는 건가 안 하는 건가.'
그럼에도 질레트는 루드의 정체를 떠보거나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지금처럼 차분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을 뿐.
이번 전쟁을 위해 소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질레트는 한결같은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루드는 질레트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포기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 전쟁 중이어서 추궁하지 않는 것이든, 명백한 증거가 없어 추궁하지 못하는 것이든.
그건 포기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를 확실히 밝힐 기회를 기다리는 것일 터였다.
루드의 추측은 정확했다.
'…가짜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걸 쉽사리 밝힐 수는 없어.'
가짜 더스틴을 바라보는 질레트의 시선은 차가웠다. 그의 부관으로서 이번 전쟁에 참여했지만, 질레트의 정신은 전쟁이 아닌 그의 정체를 밝히는 것에 가 있었다.
더스틴이 가짜란 사실은 명확했다. 일전의 사형대에서는 당황한 까닭에 '오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해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지만, 지난 전투에서 그의 오러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오러는 자신의 기억 속 더스틴 님의 오러와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쉽사리 폭로할 수는 없었다.
'황실도 한통속이다.'
갑작스러웠던 외지로의 파견. 그 배후에 황실이 있음을 알았을 때 황실 또한 가짜 더스틴과 한통속임을 깨달았다. 거기에 쐐기를 박은 건 황실에서 그의 정체를 공증한다는 소문.
그가 가짜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정체를 숨겨 주려는 황실이었다. 섣불리 그의 정체를 폭로했다간 위험해지는 건 자신일 뿐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얻은 근거로 놈의 정체를 드러낸다.'
가짜란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호출에 응한 덴 이유가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그 가면을 벗겨 낼 방법을 찾아내기 위함.
그것을 찾아 제도로 돌아가면 자신과 뜻을 함께할 이들을 모아, 황실도 덮지 못할 만큼 소란스럽게 그 정체를 폭로할 속셈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한다!"
행군을 멈춘 1군은 야영지를 꾸렸다. 칼바람 부족을 떠나 출정한 지 벌써 일주일째. 집결지인 대평원까지는 여태 이동한 것만큼의 거리가 남아있었다.
"아우… 죽겠네."
"그러게 말이야. 뭔 놈의 지형이 이렇게 지랄 맞은지."
"내 말이! 도대체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거야."
현재 1군이 지나고 있는 곳은 수백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지형이었다. 산이라 하기엔 작고 나무도 많지 않았지만, 울룩불룩 솟은 언덕들은 시야와 움직임을 제한했다. 덕분에 언덕 지형에 들어오고부턴 진군 속도가 많이 느려진 상태였다.
"아이고 죽겠다. 그래도 얼마 안 남았다니까 좀만 버티자고."
"그 말을 믿냐? 믿어? 거짓말일 게 뻔하지. 다 왔다, 거의 다 왔다, 좀만 더 가면 된다. 에라이 퍽이나 그렇겠다."
병사들은 앓는 소리를 냈다. 평탄한 지형에 비해 몇 배는 체력 소모가 큰데다 그 끝도 명확히 알 수 없으니 심력마저 갉아 먹히는 기분이었다.
"빨리 정리하고 얼른 자자고. 내일이면 또 불침번 차례니까."
한참 동안 잡담을 나누던 병사들은 저마다 휴식을 취하려 했다. 당장 내일부턴 불침번을 서야 했으니, 쉴 수 있을 때 쉬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그때.
쐐애액-!
"컭."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한 대가 병사의 목을 꿰뚫었다.
깔끔하게 목을 관통한 화살.
이윽고 수십 개의 화살 다발이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왔다.
"적습이다!!"
"이민족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화살 비가 멎음과 동시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병력. 긴 옷으로 모습을 가린 그들은 모두 길쭉한 창을 들고 있었다.
스--.
"부족의 영광을 위하여, 전사들이여 피의 축제를 벌여라."
대장으로 보이는 이의 외침과 함께 스산한 마력이 번졌다. 동시에 제국군을 겨냥하는 엄청난 살기.
곧, 창을 든 그들이 제국군을 향해 돌격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33화
갑작스러운 적의 등장에 병사들은 정신을 못 차렸다.
설마 먼저 공격을 당할 줄이야. 심지어 그 낌새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정찰병들은 뭘 한 거야!'
주변 확인은 정찰병의 임무였다. 근처에 적군이 있었다면 서둘러 그 사실을 알렸어야 했다. 그래야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있었으니.
하지만 이제 와서 그들을 욕해 봐야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적습은 시작됐고, 아마도 그들은 이미 모두 저승에 가 있는 상태일 테니.
"대열을 갖춰라! 놀라지 마라! 적보다 우리의 수가 훨씬 많다!"
"대열을 갖춰라!!"
노련함을 갖춘 백인장이 선창하자 금세 후창이 따라왔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병사들은 지휘에 따라 움직였다.
적은 많이 잡아야 백 명 정도. 수적 우위는 자신들에게 있었다.
지금이야 기습 때문에 저들에게 분위기가 넘어갔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이쪽으로 분위기가 넘어올 터.
"비켜라!!"
"나 비르투스의 검을 상대할 사람은 누구인가!"
거기에 기사들까지 합류했다. 말에 올라탄 그들은 적군의 대장을 노렸다.
다른 이들과 달리 처음 나타난 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적장.
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기사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람만큼 빠른 속도를 부여하라. 헤이스트!"
"상대의 걸음을 막아라. 슬로우!"
거기에 더해지는 마법사들의 보조 마법. 아군 기사에겐 보다 빠른 속도를, 적에겐 움직임의 둔화를 이끌어 내는 마법이었다.
"샤하아-!"
그때, 적장의 입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뱀의 울음소리를 확대한 것만 같은 음성.
그 뜻은 의미를 모를 것이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힘만큼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커헉!"
내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진 기사. 선두에서 달리던 그가 떨어지자 뒤따르던 기사들과 말들이 순식간에 뒤엉켰다.
결국 무사히 적장에게 도착한 것은 고작 세 명의 기사뿐.
하나 그들의 끝은 낙마한 이들보다도 좋지 않았다.
"제국이 자랑하는 기사가 고작 이 정도인가!"
적장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말에서 내려온 기사들. 아니,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내려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숨이 끊어진 채로 격하게 움직이는 말 위에서 버틸 수는 없었으니.
"기, 기사님들이…!!"
"…단 한 번에."
별다른 저항조차 못 해 보고 절명한 기사들의 모습에 병사들은 실의에 빠졌다.
"샤하르, 핫! 핫!"
기사들을 죽인 적장은 다시 한번 예의 소리를 냈다. 다만 이번에는 그 의미를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고, 공격해 온다!"
"모두 겁먹지 마라. 대열을 갖춰 대항하라!"
어느새 내부로 들어와 사이를 헤집기 시작한 적군. 제국군은 대열을 갖춰 대응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최고 전력인 기사들이 무참히 당하는 모습을 보았고, 마법사들은 근접전에선 일반 병사보다도 못한 존재였으니.
이미 병사들의 사기는 최악이었다.
"마, 막아!"
"으아악!! 살려 줘!!"
"죽기 싫어!"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 마구잡이로 무기를 휘둘렀다. 눈먼 공격은 아군을 상처 입히거나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병사들은 자신이 죽인 게 적군인지 아군인지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제국군! 정신 차려라!"
그때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등장했다.
자신들을 일깨운 목소리가 더스틴의 것임을 확인한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더스틴 님이시다!"
"제국의 위대한 소드마스터다!"
분명 상대가 강한 것은 맞았다. 하나 자신들에게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대강자가 있었다.
"빠르게 정리한다. 따라올 수 있겠지?"
그 옆에 함께 선 질레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더스틴이 가짜임을 확신하고 그 증거를 찾기 위해 따라왔다지만, 이곳은 전장. 게다가 그는 제국군을 이끄는 사령관이었다. 지금 상황에선 그의 말을 따르는 게 옳았다.
짧은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상대의 수는 많지 않았다. 백 명이 될까 싶을 정도의 소수.
그럼에도 2천에 달하는 1군이 이토록 밀리는 건 그들이 보여 준 충격적인 모습 때문이었다.
특히 한 수에 기사들을 무력화하고 어린아이 다루듯 간단히 죽인 적장의 압도적인 무력.
서걱-!
루드는 아군 진영 깊숙이 침투했던 적군을 베어 넘겼다. 단숨에 목을 자른 검은 다음 목표를 노렸다.
그와 함께 나타난 질레트 또한 마찬가지. 루드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그도 아군을 유린하던 적군을 하나둘 해치워 갔다.
적의 숫자가 많지 않았기에 두 사람의 개입만으로도 전황이 뒤집히고 있는 상황.
'....'
하지만 루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계획했던 것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할 판국이었다. 적의 수준이 예상했던 것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소모품으로 쓸 수 있는 병력이 이 정도인가.'
루드는 적들의 수준을 가늠했다.
간단하게 죽이긴 했으나 그건 상대가 자신이었기 때문이지 결코 그들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능히 제국군 열을 쓰러트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목을 벨 때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은....
"황실의 기사란 녀석들이 고작 이 정도 수준이라니."
"그러게 말입니다. 풍족함에 젖어 수련을 게을리한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입니다."
적의 수준이 뛰어난 것 외에도, 기사들의 죽음 또한 변수로 작용했다.
그들이 살아 있기만 했다면, 하다못해 압도적으로 당해 사기를 떨어뜨리지만 않았다면 지금처럼 전황이 밀리지는 않았을 터.
질레트 또한 그 말에 동의했다.
그들이 자신과 같은 기사라는 것에 분노할 정도였다.
'물론 상대가 나빴던 것도 있겠지만.'
루드는 여전히 처음의 자리에 서 있는 적장을 바라봤다.
긴 옷으로 모습을 가렸지만, 그 안에 있는 게 누구인지 알았다. 그를 이곳으로 부른 게 자신이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사르한.'
과거 뱀 부족의 사절단으로 까마귀 부족을 찾았던, 뱀 부족을 대표하는 전사.
그가 이끄는 뱀 부족의 습격은 미리 약속되어 있던 것이었다. 의회 차원에서 합의를 마쳤던 내용이기 때문.
이번 전쟁을 통해 황실의 병력을 줄이고자 한 의회였으니, 그들의 손을 빌려 황실 병력을 공격하는 건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 있었다. 뱀 부족도 동맹인 의회를 위해 흔쾌히 나서 주었고.
"질레트! 적장의 목을 가져와라!"
"예!"
루드의 명령을 받은 질레트가 주인을 잃고 방황 중인 말을 잡아채 고삐를 쥐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사르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인가.'
'그래, 그 녀석이다.'
루드는 사르한을 응시했다. 꽤나 거리가 있는 상태였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국군의 사령관이자 의회의 대리인 신분으로 루드가 사르한에게 요구했던 건 단순한 습격만이 아니었다.
또 하나, 질레트의 죽음.
이 장소, 이 시점에서 뱀 부족의 습격을 요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남쪽과 북쪽으로 향한 2군과 3군은 집결지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피해를 입을 터. 자신이 이끌 1군도 그 비중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질레트의 죽음이 그것을 맞춰 줄 것이었다.
우리 군의 피해도 컸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데다, 계획의 걸림돌이던 그를 제거할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의 방법이었다.
'생각보다 뱀 부족의 전력을 많이 죽이진 못했지만, 질레트만 죽어도 본전이다.'
그 과정에서 뱀 부족의 전력을 확인하고, 조금이나마 그것을 줄이는 것까지 꾀했으나… 생각만큼의 성과는 얻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질레트만큼은 확실히 죽일 수 있을 테니.
"제 죽음을 모르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잘것없구나."
질레트의 접근에 사르한이 움직였다. 그의 등 뒤로 기사들의 피가 묻어있는 창이 나타났다. 그것이 겨누는 건 당연히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질레트.
차창-!! 차차창!!
어느새 가까워진 두 사람이 공방을 나눴다. 말에 탄 질레트는 높이의 이점을 살려 사르한을 공격했고, 사르한은 창 특유의 긴 리치를 이용해 대응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올려다보려니 고개가 아프군. 이제 그만 내려오는 게 어떤가."
팽팽하던 싸움에 변곡점이 생긴 건 사르한의 창이 말의 무릎을 가르면서부터.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말에서 부드럽게 내려온 질레트는 사르한을 노려봤다.
"나이를 먹었으면 집에서 죽을 날이나 기다리지, 뭐 하러 여기까지 나왔나."
상대의 심기를 어지럽히기 위한 도발. 하나 그 정도 도발에 넘어가기엔 사르한이 쌓아온 경험이 너무 많았다.
도발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질레트는 곧장 입을 닫았다. 먹히지도 않는 것에 신경 쓰느니 상대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게 나았다.
'이자, 강하다.'
질레트는 사르한이 강자임을 느꼈다. 창을 다루는 솜씨가 귀신같았다. 순수 무기술에 있어서는 자신보다 한 수 위가 분명했다.
거기에 기마를 통해 얻던 높이와 거리의 이점까지 사라졌으니 앞으로는 더 힘든 싸움이 될 터.
"하압!!"
질레트는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깔끔히 떨어지는 검. 얼핏 가벼워 보이는 움직임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함부로 공격을 막으려 하면 무기째로 상대를 분쇄할 터였다.
그러나 사르한은 그 힘을 느꼈음에도 싱긋 미소 지었다.
"재능이 있군. 하지만 그 정도 재능으론 부족해."
쾅-!
사르한의 창이 내려오는 검의 옆면을 강하게 후려쳤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재능들을 봐 온 사르한은 눈앞의 기사에게도 재능이 있음을 알아봤다.
하지만 여태 마주했던 압도적인 재능들에 비하면… 그의 재능은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했다.
자세가 흐트러진 질레트가 서둘러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그리고 그거 알고 있나?"
그보다 사르한의 혀가 그의 정신을 후벼 파는 게 더 빨랐다.
"저기 저 가짜가, 그대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뭐…?"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한 질레트. 강자와의 전투에선 조금의 방심도 용납되지 않는 것. 잠시라도 딴 곳에 정신이 팔린 순간 질레트의 패배는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콰가각-!!
사르한의 창이 그의 가슴을 X자로 찢어발겼다.
"...여...억시…."
쇄골과 가슴뼈가 죄다 부러진 채 쓰러진 질레트.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루드가 있는 곳을 바라보려 했지만,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질레트! 네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하의 죽음에 격분한 더스틴이 사르한에게 당도했다.
쾅! 콰쾅!! 쾅!!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더스틴의 공격. 하나 사르한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든 오러의 충격파에 주변의 병력들은 살아남기 위해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됐나.'
'훌륭하다.'
'그럼 다음에 보지. 그땐 대평원에서 보겠군.'
서로 맞서는 와중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는 두 사람.
"샤하라!! 샤하!!"
사르한이 신호를 보내자 그의 병력들이 빠르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루드는 빠르게 멀어지는 사르한과 그 병력들을 보다가, 이내 질레트의 시신 곁으로 쓸쓸히 걸어갔다.
천천히 질레트의 눈을 감겨 준 루드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이들을 수습해라. 부상병들은 한곳에 모여 상태를 확인하라."
이미 멀어진 적을 쫓는 것보단 부대의 수습이 우선이었다.
아군의 피해가 컸고 언덕 지형의 특성상 상대를 추적하는 것도 쉽지 않았으니 더욱 그랬다.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당연한 판단.
병사들이 피해를 수습하는 동안 루드는 줄곧 사르한이 떠난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적을 향한 분노와 쫓지 못한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듯한 눈빛.
병사들은 감히 그 근처로 다가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나 비통한 지휘관을 연기하는 루드의 속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내용을 품고 있었다.
'슬슬 2군과 3군도 일이 벌어졌겠군.'
지금쯤이면 자신이 준비해둔 패를 맞닥뜨렸을 그들.
과연 얼마나 많은 숫자가 살아남아 집결지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뭐, 그건 대평원에 도착하면 알 수 있겠지. 중요한 건 모든 세력이 모인 후.'
루드는 대평원에서 일어날 일을 생각했다.
제국군과 뱀 부족, 그리고 까마귀 부족을 위시한 바깥대륙의 부족들이 한데 모이는 그날.
이번 전쟁의 결말이 날 것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34화
막시무스가 이끄는 2군은 1군이나 3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군했다.
가장 먼저 칼바람 부족을 떠난 그들은 쉬는 시간을 최소화 하며 강행군을 이어 갔다.
'이런 흐름은 좋지 않은데.'
병사들을 훑어본 아이리우스는 안색을 굳혔다. 자신을 비롯해 말을 타고 있는 이들은 이 정도 속도로 움직여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일반 병사들은 달랐다. 그들의 체력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무거운 군장과 보급품까지 챙겨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저하된 체력으로는 이길 상대도 못 이긴다.'
셋으로 나뉘었음에도 제국군의 전력은 대단했다. 이곳 2군에 속한 기사만 무려 백 명. 만약 이 전쟁이 영지전 수준의 규모였다면 상대가 곧장 백기를 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 전쟁은 영지전이 아니었다.
전생에 비할 바는 아니라지만, 상대의 전력 또한 만만치 않을 게 분명했고.
길게 고민하던 아이리우스는 결단을 내렸다.
"막시무스 님, 이쯤에서 조금 쉬었다 가는 게 어떨지요."
"아직 해가 중천이다. 쉬는 건 야영지를 꾸리고 나서 해도 충분해."
하지만 막시무스는 휴식을 청한 아이리우스의 목소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다른 군보다 먼저 집결지에 도착해야 한다.'
그 또한 병사들의 체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의 체력을 일일이 고려하는 것보다는 집결지에 빠르게 도착하는 게 더 중요했다.
'누구보다 많은 성과를 가져가 그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
자신이 모시는 후작님을 비롯해 여러 귀족들의 병력을 맡게 된 상황.
스스로의 가치를 높일 절호의 기회였다.
이번 전쟁을 잘 치르면 기사 작위를 넘어 세습 귀족의 자리까지 넘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진짜배기 귀족이 될 수만 있다면야 무엇을 못 할까.
하지만 그것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는 없는 일. 특히 그 상대가 공작가의 영애여서야 더 그랬다.
"조금만 더 가면 황혼 부족이 나타날 거다. 그곳을 점령하고 피로를 푸는 게 나아."
마침 얼마 뒤 이민족의 영토가 나타날 예정이었다. 막시무스는 그것을 핑계 삼았다.
다만 황혼 부족을 점령하고 쉬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이 이상 강행군을 이어 가면 위험하단 걸 그 또한 알고는 있었으니.
한편, 아이리우스는 막시무스가 언급한 황혼 부족에 반응했다.
"황혼 부족… 그들이 이쪽에 있었군요."
"알고 있나"
"예, 조금."
아이리우스는 그들에 대해 생각했다.
마왕 루드란테가 이끌던 연합군에 소속되어 있던 부족. 기억하기로는 연합군의 의무 부대였다.
제국에 비해 절대적인 숫자가 부족했던 바깥대륙이 오랜 시간 전쟁을 이어 갈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의 역할이 지대했었다.
그들 부족이 이 근처에 있었을 줄이야.
"그렇군. 하기야 알 법도 한가. 다른 이민족들과는 달리 온순한 데다 몇 차례 제국과 교류하기도 했었으니 말이야. 상황이 이리됐으니 안타까운 일이지. 그들 정도는 교화를 시도해 볼 법도 했는데 말이지."
막시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경험으로 황혼 부족을 알고 있는 아이리우스였으나 막시무스가 그것을 알 수는 없는 일.
그는 그녀가 황혼 부족을 알고 있는 것이 그들이 제국과 교류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황혼 부족은 무조건 처리해야만 한다.'
아이리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황혼 부족을 미리 없앤다면, 추후 마왕과 연합군이 나타나더라도 그 전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을 것이었다.
빠른 속도를 유지한 2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황혼 부족에 다다랐다.
황혼 부족이 시야에 들어오는 거리에서 멈춰 선 2군.
"이곳이 황혼 부족. 제국의 도시가 연상되는군요."
"그래, 나도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확실히 소문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이군. 제국과 교류하는 데 적극적이라더니 이런 구조를 갖추고 있었나."
거리를 유지한 2군은 황혼 부족의 외관을 살폈다.
큰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황혼 부족은 꼭 제국의 도시를 연상시켰다. 이전에 봤던 빌레인이나 칼바람 부족과는 전혀 다른 모양새. 밖에서만 봤을 땐 어지간한 제국의 도시보다 깔끔하고 현대적이었다.
"전군, 진격하라."
이윽고 막시무스의 명이 떨어졌다. 그와 함께 공을 세울 기회만을 기다리던 기사들이 말을 몰고 튀어 나갔고, 빠르게 멀어지는 그들의 뒤를 병사들이 뒤따랐다.
'이상해.'
황혼 부족에 들어선 아이리우스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무도 없어"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황혼 부족 내부.
'입구에도 경비가 하나도 없었어.'
황혼 부족의 외관은 제국의 도시를 연상시킬 만큼 발전돼 있었다. 검문에 용이하고 외부의 침략을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는 모습. 하지만 막상 그곳을 지켜야 할 경비가 하나도 없었다. 위화감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텅 비었습니다!"
"미리 알고 도망친 것 같습니다!"
"여기 이동한 흔적이 있습니다!"
부족 내부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있으나 그뿐, 사람의 모습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막시무스 님, 어떻게 할까요."
"…귀찮게 됐군. 일단 주변을 샅샅이 수색한다. 발견되는 모든 걸 모조리 한곳으로 모으도록. 만약 몰래 숨기는 녀석이 있으면 즉시 군법으로 다스려라."
막시무스의 명을 받은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부족민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재화는 없는지, 도망친 곳에 대한 단서는 없는지 부족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점차 황혼 부족 깊숙이 들어서는 병력. 상황이 바뀐 건 그때였다.
"…어 몸이...."
"몸이, 이상."
"…허어억."
갑자기 목과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진 병사들. 그들을 시작으로 이상 증세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끄으으억…!"
"흐아아...."
"독이다! 모두 입과 코를 막고 피부 노출을 최소화해라!"
그것이 중독 증세임을 알아차린 기사들이 크게 외쳤다. 병사들은 서둘러 입과 코를 가렸으나 이미 중독된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들을 중독 시킨 건 증세가 나타날 때까지 중독됐단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독이었으니.
"저, 적이다!"
"지붕 위다!"
쓰러지는 병사들에 이어, 건물 위로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들은 모두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슉, 슈슉, 슉, 슈슈슉-!
동시에 쏘아진 건 작은 비침들. 피부에 꽂히거나 살갗을 스치고 지나간 그것들엔 전부 독이 발라져 있었다.
"크학!!"
"이것도 독이다!"
"방패를 들어 막아 내라!"
기사들이 방패로 비침을 막을 것을 지시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중독된 병사들은 제 한 몸 가누기도 어려웠으니.
게다가 몸 중심을 막더라도 사방에서 빈틈을 노리고 날아드는 비침이었다. 무거운 방패 하나로 그것들을 모두 막아 내는 건 불가능했다.
"큭!!"
"아악!"
2군의 피해가 늘어나는 상황. 적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더 이상 은밀히 움직여야 할 이유가 사라진 그들은 은밀함이 아닌 파괴력에 초점을 맞춘 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콰작, 프스스-
그들은 주먹만 한 구슬을 던졌다. 땅에 떨어진 구슬이 깨지면서 그 안에 담겨 있던 독연이 퍼져 나갔다.
"크흐어억…."
독연에 휩싸인 병사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녹아내린 피부가 독연의 독성을 증명했다.
"거리를 벌려라!"
"산개하라!"
심상치 않은 독기에 혼비백산하는 2군.
그 모습을 확인한 적군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도주하기 시작했다.
"적들이 도망친다!"
"녀석들을 쫓아라!"
막시무스의 외침에 그나마 멀쩡한 기사들이 도망치는 그들의 뒤를 쫓았다.
아이리우스와 헤이론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찍이 저항 신비를 얻었던 아이리우스는 독의 영향에서 무사했고 헤이론 또한 이 정도 독에 어찌 될 정도의 경지가 아니었다.
"찾았다!"
얼마 안 가 두 사람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적군의 뒤를 잡았다.
"하앗!"
빠르게 도약하며 공격하는 아이리우스. 하지만 그녀의 검은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상대를 베기 직전, 누군가 그 검을 막아선 까닭이었다.
'!!'
아이리우스의 동공이 확장됐다. 자신의 검을 막은 인물이 낯익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틀림없었다.
"…사라"
짧은 중얼거림에 움찔한 상대. 역시 사라 아즈문이 분명했다.
조금의 간격을 두고 마주한 사라와 아이리우스.
그사이 아이리우스가 공격했던 이는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너... 사라 맞지"
"사라 설마 행방불명된 시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라 아즈문을 단순한 시녀로만 알고 있던 헤이론은 의문을 표했다. 휴가를 떠난 후 복귀하지 않아 논란이 됐던 시녀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죽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복귀하지 않은 거지"
아이리우스는 가만히 사라를 응시했다.
'어째서 그녀가 나를'
내색은 안 했지만, 엄청나게 혼란스러웠다.
사라는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포섭했던 인물이었다. 금제의 영향 덕분에 배신할 걱정이 없고, 일신의 무력도 괜찮은 데다 활용도마저 높았다.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은 인재.
그녀가 아즈문 가의 율법에 얽매여 있다는 걸 알았기에 포섭하는 것도 간단했다.
'마왕에게 살해당한 게 아니었나'
마왕에게 보낸 그녀의 소식이 끊긴 지 오래.
당연히 마왕에게 발견돼 그 손에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금제에 걸린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
하지만 눈앞에 멀쩡히 살아 있는 그녀가 있었다.
'…금제의 영향에서 벗어난 건가'
순간적으로 든 생각은 그녀가 금제의 영향에서 벗어났을 확률.
에이나우디 가에 원한이 있는 그녀였으니 금제의 영향에서 벗어났다면 복귀하지 않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조금이나마 마음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다만 가문에 품은 원한과는 별개로 자신에게는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목적한 바를 이루면 그녀의 원한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단 약속을 했었고, 그녀 또한 줄곧 제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니.
...하지만, 그게 전부 연기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가씨!"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헤이론을 공격한 사라.
찰나 간에 열 번이 넘는 공방을 나눈 그녀는 헤이론이 아이리우스를 의식해 멈칫한 틈을 노려 순식간에 도주했다.
작정하고 도망치는 그녀를 잡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아이리우스와 헤이론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돌아가서 말해 줄게."
아이리우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상황이 이리됐으니, 헤이론도 사라 아즈문에 대해 알 필요가 있었다.
이제는… 그녀를 적이라 여기는 게 옳을 테니.
"일단 돌아가서 상황을 살피자.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다른 문제는 없는지 확인해야겠어."
적군을 놓쳤으니 이제 할 수 있는 건 돌아가 피해를 수습하는 것뿐.
그렇게 돌아가 상황을 살피려던 때, 무언가 아이리우스의 발끝에 걸렸다.
"응"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눈에 보인 건 보라색 용액이 담긴 작은 병. 그 겉면에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해독제'
어딘가 익숙한 필체로 적힌 글자. 아이리우스는 곧 그 글씨체의 주인공을 기억해 냈다.
'…사라'
이건, 방금 전 자신에게서 도망친 사라 아즈문의 필체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35화
병을 살피던 아이리우스는 이내 그것을 품 안에 갈무리했다.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가지고 있는 게 맞겠지.'
진짜 해독제이든 아니든 일단은 챙기는 게 나았다.
조사해 보면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 그를 통해 사라의 본심을 확인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녀 정도의 실력자가 이렇게 허술하게 흔적을 남길 리 없어. 그렇다면 일부러 흘렸다는 건데....'
만약 진짜 해독제를 놓고 간 것이라면 그녀의 배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무언가 사정이 생겨 배신한 척을 하고 있는 것일 테니.
반대로 그녀가 흘리고 간 게 해독제가 아니고 더한 피해를 유도하기 위한 무언가라면....
'죽여야겠지.'
배신자는 처단해야만 했다.
'진짜 배신한 게 아니길 바랄 수밖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라가 갑자기 적으로 나타났으니.
하지만 놀라고만 있을 시간은 없었다.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해야 했다.
'상황이 복잡해졌네.'
아이리우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당장 제국군이 입은 피해를 수습하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을 터였다. 대충 봐도 피해가 작지 않았으니.
거기에 사라의 문제까지 겹쳤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아...."
"살려 줘…."
"하으…."
"끄아아...."
본진으로 복귀한 아이리우스는 고통을 호소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목을 쥐어 잡고 켁켁거리는 이, 게거품을 물며 바닥에서 몸을 비트는 이, 이미 숨이 끊어진 이.
'앞선 전투들이 너무 쉬웠던 까닭에 전부 방심했다.'
빌레인과 칼바람으로 이어졌던 두 번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던 제국군이었다. 군세를 셋으로 나눠도 되겠다 판단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하지만 오판이었다. 전생에 비해선 떨어진다 하지만 지금의 바깥대륙도 충분한 저력을 갖고 있었다. 결코 방심한 상태로 맞서도 될 이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피해가 아주 심각한 건 아니야.'
그나마 다행인 건, 걱정했던 것만큼의 심각한 전력 누수는 없다는 사실.
많은 병사들이 독에 노출된 건 맞았으나 죽은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중독된 병사들도 시간을 들여 독을 해소한다면 다시 전투에 나설 수 있을 터.
게다가 핵심 전력인 기사들의 피해가 미비했기에, 일단 최악은 피한 상황이었다.
'이제부턴 경각심을 갖고 움직일 테니, 좋게 생각하자.'
아이리우스는 긍정적으로 사고하려 했다. 쓴맛을 봤으니 이전처럼 방심하는 일은 없을 터. 일시적으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겠으나, 멀리 보면 지금의 상황이 더 적은 피해로 이어질지도 몰랐다.
"살려... 아니 죽여 줘…."
그때 고통에 몸부림치는 병사가 눈에 들어왔다.
검게 변한 피부와 울룩불룩 솟아난 핏줄,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이 돌출된 눈은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한눈에 봐도 살 가망이 없는 상태.
병사에게 다가가는 아이리우스에 헤이론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까닭이었다.
병사에게 다가가 무릎을 낮춘 아이리우스는 주변을 살폈다. 정도야 어떻든 독에 당한 이가 많은 상황. 주변까지 신경 쓸 여유를 가진 이는 없었다.
주변의 이목이 없다는 걸 확인한 아이리우스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금 전, 사라가 흘리고 갔던 해독제라 적힌 병이었다.
"조금은 편해질 거야."
병 속의 용액을 조금 덜어 병사의 입으로 흘려보낸 아이리우스는 병사의 상태를 관찰했다.
그녀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병사를 찾은 이유였다.
'해독제라면 한결 편해질 거고, 다른 무언가라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시간을 줄여 줄 수 있겠지.'
전문 지식이 없는 상태로 이 용액의 성분을 조사할 수는 없었다.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르나, 그들은 1군에 있었고 합류하자면 아직도 한참이 남아있었다.
하여 아이리우스는 그 성분을 확인하기 위해 가장 간단한 방법을 택했다. 실제로 사용해 보는 것이었다.
그 진위가 어떻든 병사에게도 나쁜 결과는 아닐 터였다.
'…진짜 해독제였어.'
소량의 해독제를 마시자 한결 편안해진 안색의 병사.
아이리우스는 사라가 흘리고 간 해독제가 진짜임을 깨달았다. 아마 자신이 중독됐을 것을 염려해 놓고 간 것일 터.
'배신한 척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사라가 배신하지 않았다는 쪽으로 기운 무게의 추.
'그러고 보면 나를 공격했다기보다는, 황혼 부족을 구출한 것에 가까웠어.'
아이리우스는 사라가 보인 태도를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마왕에게 잡힌 게 맞고 그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사라가 복귀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 마왕에게 잡혔기 때문일 터.
황혼 부족에 섞여 제국군을 공격하고, 그들의 도주를 도운 게 마왕의 명령 때문이었다면.
'…황혼 부족은 이미 마왕의 아래로 들어갔다'
마왕과 황혼 부족이 이미 연결돼 있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곧 또 다른 사실을 의미했다.
'전생의 연합군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과거, 제국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던 바깥대륙 연합군의 등장 가능성.
마왕이 언제 어떻게 연합군을 결성했는지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었으니, 어쩌면 지금 바깥대륙의 깊은 곳에선 연합군이 만들어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가씨,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역시 그건 가짜였던 겁니까."
삽시간에 굳어진 아이리우스의 얼굴에 헤이론이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그녀가 들고 있는 병에 고정된 채였다.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인물의 등장에 헤이론도 아이리우스만큼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아니. 잠시 딴생각을 좀 하느라. 이 해독제는 진짜야."
"그렇습니까."
허리를 펴고 일어난 아이리우스는 아래를 내려 봤다. 조금 전 해독제를 마신 병사는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든 상태였다. 고통이 가시자 긴장이 풀린 거겠지.
'대량 생산할 수 있으면 큰 도움이 되겠어.'
사라가 건넨 해독제의 효과는 대단해 보였다. 대량 생산해 낼 수 있다면 지금과 같은 독의 노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 당장은 무리더라도 제국으로 돌아가면 전문가에게 연구를 맡길 계획이었다.
'그때까지 이걸 써야 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
다만 무사히 해독제를 보존해 돌아갈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자신이야 저항 신비로 독에 내성을 갖췄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언제 해독제가 필요한 상황이 생길지 몰랐다. 당장 헤이론이 중독될지도 모를 일이었고. 경지가 뛰어난 만큼 범인보다 강한 저항력을 갖췄겠지만, 전장에선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전생의 연합군이 태동하고 있는 거라면 이번 전쟁은 더욱 중요하다.'
연합군 결성의 흔적을 발견한 상황. 과거의 결과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선 그것을 막아야 했다.
이번 전쟁을 통해 미래 연합군의 중추가 될 부족들을 없앤다면 그들의 결성을 저지하는 것도 가능할 터.
만약 연합군이 만들어진다 해도 그 전력이 확연히 약해지겠지.
'어쩌면 이번 전쟁에서 마왕을 만날 수도 있겠어.'
추측대로라면 연합군 결성에 시동을 건 마왕이었다. 그에게도 이번 전쟁은 분명 중요한 기로일 터.
'만나게 된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죽여야겠지.'
전생에 비할 바는 아니나 지금의 제국군도 충분히 강력했다.
소드마스터를 포함해 기사만 수백, 거기에 미래의 소드마스터가 될 자신과 헤이론까지 있었으니 대단한 전력이었다.
아직 여물지 않은 마왕을 죽이는 것쯤이야 간단할 터.
"문제는 사람인가."
"예"
뜻 모를 아이리우스의 말에 헤이론이 반문했다.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 대꾸한 아이리우스는 흘깃 막시무스를 바라봤다.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는 그.
전공에 눈이 먼 그가 이번 피해를 메우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지, 혹여 그것이 제국군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을지. 아이리우스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그 시각, 동북쪽으로 이동한 3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콜론 경!"
콜론이 피를 토하며 뒷걸음질 쳤다. 심각한 내상을 입은 그의 입에서 검은 피가 흘렀다.
"헹, 고작 이 정도냐!"
콜론의 앞에 선 건 우락부락한 체형의 사내. 다듬지 않은 머리와 수염의 사내는 제 몸만 한 태도를 들고 있었다.
"후퇴하라!"
"전군! 후퇴하라!"
일대일 대결에서 패한 콜론을 기사들이 서둘러 부축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쿨럭!"
격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한 콜론.
군을 이끄는 입장으로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그였으나, 더 이상 승부를 이어 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경께서 살아 계셔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일단 물러나 재정비하시죠."
다른 기사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콜론을 대피시킨 기사들은 서둘러 후퇴를 시작했다. 병사들도 빠르게 그들의 뒤를 따랐다.
"크허헝!! 전부 죽여라!"
그 순간 터져 나온 괴성. 대형 몬스터가 내뿜는 피어를 연상시킨 외침은 조금 전 콜론을 패퇴시킨 호랑이 부족의 족장, 하타이가 낸 소리였다.
하타이의 명령과 함께, 달아나는 3군을 쫓는 호랑이 부족의 전사들.
하나같이 웃통을 벗고 있는 그들은 동물 같은 움직임을 선보였다.
"크학!"
"켁!!"
"살려 줘!!"
순식간에 따라잡힌 병사들이 단말마와 함께 쓰러졌다.
하지만 동료들의 비명에도 다른 병사들은 뒤돌지 않았다. 자칫했다간 자신이 저 비명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으니.
호랑이 부족의 전사들은 콜론이 이끄는 3군을 유린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제노스가 타이밍을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그만 쫓는 게 낫겠군."
제국의 병력을 적당히 살려 보내 달라고 부탁했던 루드였다. 그 약속을 지키려면 이쯤에서 호랑이 부족을 제지해야 했다.
이곳에서 대평원으로 향하는 지형엔 늪지대가 있었으니,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금세 제국군을 따라잡은 호랑이 부족이 그들을 전멸시키고 말 터.
"크흥, 끝장을 보면 안 되는 건가."
"오늘은 여기서 참는 게 어떤가."
멈추라는 제노스의 말에 아쉬움을 하타이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다음 전투에선 날뛰고 싶은 만큼 날뛰어도 되네. 그런 약속이지 않았나."
"그래, 그랬었지."
하지만 자신을 다독이는 말에 결국 아쉬움을 삼키고 외쳤다.
"전사들이여! 그만 돌아와라!"
일대를 쩌렁쩌렁 울리는 힘찬 목소리. 도망치는 제국군과 그들을 쫓던 부족 전사 모두가 들을 수 있는 큰 소리였다.
족장의 목소리에 전사들은 멀어지는 적을 바라보며 쩝 입맛을 다시곤 부족으로 복귀했다.
"다음은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 진짜지"
제노스의 말에 하타이는 큼지막한 웃음과 함께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너만큼의 강자도 있다는 말도"
"당연하다."
"좋아, 좋아. 아주 좋아."
강자와의 결투를 기대하며 들뜬 하타이. 옅은 미소를 띤 제노스가 그를 바라봤다.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지만 하타이는 뛰어난 전사였다.
비록 마스터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순간순간 보이는 파괴력은 마스터를 상회할 정도.
호랑이 부족의 협조를 얻어 내기 위해 그와 싸워봤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아직도 욱신거리는군.'
제노스는 조용히 손목을 주물렀다. 적당히 힘 조절을 했다지만, 그의 검을 받아 냈던 손목이 아직까지도 뻐근했다.
'여기는 다 됐다. 이제 남은 대평원에서의 일뿐.'
욱신거리는 손목을 주무르던 제노스는 멀리 있을 루드를 떠올렸다. 자신을 포함해 집결지로 모일 여러 세력들도.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36화
뱀 부족의 습격 이후 1군은 별다른 전투를 겪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체력과 사기가 최악이군.'
열 명의 기사 중 다섯이 사망했고 둘이 중상이었다. 싸울 수 있는 기사는 고작 셋뿐.
그나마 마법사들이 모두 살아 있다는 점이 위안거리였으나 그들 또한 거듭된 행군에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거기에 질레트마저 적장에게 목숨을 잃었으니,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예상했던 대로군.'
루드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게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남은 건 황혼 부족과 호랑이 부족에게 달린 건가.'
대평원에서의 일을 위해선 제국군의 병력을 적정선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황혼 부족과 호랑이 부족에게 그들을 전멸시키지 말라 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각각의 상황을 겪고 대평원으로 모일 제국군. 저마다 피해는 다르겠지만 사기가 저하돼서 도착하는 건 마찬가지일 터.
"도, 도착했다!"
"대평원이다!!!"
집결지인 대평원에 가장 먼저 도착한 건 루드가 이끄는 1군이었다.
동선 자체도 가장 짧았고, 뱀 부족의 습격이 단발에 그쳤던 덕분이었다.
'2군과 3군은 아직인가.'
물론 거기엔 다른 군들이 늦는 것도 한몫했을 터.
"이곳에 군영을 차린다! 서둘러 진영을 구축하고 주변을 정찰하라."
대평원의 서쪽에 자리 잡은 루드는 군영을 차리도록 지시했다.
까마귀 부족 남쪽에 위치한 대평원은 이름처럼 엄청난 면적을 자랑하는 평야였다.
그 넓이는 시야를 방해하는 게 없음에도 그 끝을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
큰 전투를 치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병사들은 서둘러 움직였다. 루드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2군과 3군이 사용할 곳까지 만들라 명령했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깃발이 보입니다!"
"어디지?"
"3군입니다!"
3군이 도착한 건 1군이 도착하고 이틀째 되던 날.
깃발을 통해 소속을 드러낸 그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백에 달하던 기사들은 고작 서른 정도가 남아 있었고, 병사의 숫자도 본래의 절반 이하였다.
그중에도 부상자가 많아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이를 따로 가려내야 할 정도.
3군의 모습을 확인한 루드는 빠르게 달려가 그들을 맞았다.
"콜론 경, 이게 무슨 일인가."
"면목 없습니다. 제가 제국의 이름을 더럽히고 말았습니다… 쿨럭!"
선두에 서 있던 콜론은 고개를 숙였다. 아물지 않은 내상 때문에 연신 기침을 하는 그의 안색은 파리했다.
"오는 길에 호랑이 부족을 마주쳤습니다. 그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하나하나가 기사에 비견될 정도였습니다. 특히 족장이라던 이는 상상 이상으로 강했습니다."
"그런...!"
"콜론 경께선 홀로 족장을 상대하시다가 내상을 입으셨고요."
기침 때문에 발언이 힘든 콜론을 대신해 그의 좌우에 서 있던 기사들이 나서서 설명했다.
대평원으로 오는 길에 호랑이 부족이 있었고, 그들을 토벌하려 했지만, 역으로 당하고 말았다는 내용.
표현은 달랐으나 핵심을 간추리자면 그것이었다.
'딱 좋군.'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루드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군을 셋으로 나누지 않았다면 상황이 달랐을 수도 있었으니, 미안한 기색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하나 그들에게 보여 주는 표정의 이면에는 살아남은 3군의 전력을 확인하는 냉정한 시선이 숨어 있었다.
'아버지께서 잘 제어해 주셨나 보군.'
호랑이 부족이 얼마나 호전적인지 알았다. 한 번 전투를 시작한 그들은 끝장을 볼 때까지 멈추지 않는 이들이었으니, 3군이 이만큼이나 살아온 데에는 제노스의 역할이 톡톡했을 것이었다.
"모두들 얼른 쉬지. 부상자들은 서둘러 치료를 받게 하고 말이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닐세. 병력을 괜히 셋으로 나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군. 피해가 이리 심할 줄이야."
루드는 심란한 모습을 연기했다.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는 태도에 콜론과 기사들이 말을 붙였다.
"아닙니다. 저희가 미흡한 까닭입니다. 그 자리에 더스틴 님께서 계셨다면 상황은 달랐겠지요."
"아니, 그런 말 말게. 나 또한 떳떳한 상황은 아니니."
"...그 말씀은."
루드의 말에 안색이 굳어진 그들.
"우리 또한 적잖은 피해가 있었네. 기습을 당한 터라 대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
이어진 말들을 들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질레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본래라면 더스틴보다 앞서 자신들을 맞이했을 그였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쯤이면 더스틴의 곁에 있어야 했고.
하나 아직까지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질레트가 당한 건가.'
콜론과 기사들은 그 이유를 짐작했으나 구태여 말로 꺼내진 않았다. 수하를 잃은 더스틴의 심정을 배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놀란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천재 기사라 불리던 그가 당하다니. 심지어 더스틴 님께서도 함께 있으시지 않았나. 대체 상대가 누구였기에….'
천재 기사라 불리던 질레트였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부터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졸업 이후 곧장 클라우드 기사단에 들어가 그 재능을 뽐내며 최연소 부단장에 올랐다.
'직접 상대해 본 그는 이름값에 걸맞은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가끔 실력에 비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도 있었으나, 질레트는 그런 류의 인물이 아니었다.
본인의 실력과 성과로 정당하게 얻은 부단장의 자리.
과거, 그와 대련을 해 봤던 콜론은 그의 재능을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자신이 이겼으나 몇 년 후의 결과는 장담할 수 없었던 상대.
이대로 세월이 흐른다면 제국의 또 다른 소드마스터가 될지도 모를 인물이었다.
그런 인재가 이리 허망하게 저물고 말았다니....
"자세한 얘기는 2군이 도착하면 하도록 하지. 일단 휴식을 취하게."
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막사를 안내하는 병사의 뒤를 따르며 주변을 살폈다.
'질레트 경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보이지 않는군. 병사들의 사기도 좋지 않고.'
1군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2군과 3군에 비할 숫자는 아니지만 1군 또한 열 명의 기사가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죽었거나 부상을 입은 것일 터.
병사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처진 어깨와 무거운 발걸음은 그들의 사기가 얼마나 저하되어 있는지를 나타냈다.
'큰일이군. 만약 2군마저 우리와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면....'
자신들 3군에 이어 1군의 피해도 적지 않은 상황.
아직 도착하지 않은 2군까지 피해를 입은 채 도착한다면, 제국군의 전력이 본래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고 봐야 했다.
문제는 자신들이 상대했던 호랑이 부족과 1군을 공격했던 정체불명의 세력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
남은 병력들로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대로라면 황실의 전력을 깎을 수는 있겠지만, 의회의 전력마저 극심한 손해를 입을 터.
바깥대륙으로 진출하겠다는 의회의 포부 또한 물거품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의회와 더스틴 님께서 특별한 수를 갖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결국 콜론이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자신은 기사로서 명을 따르면 될 뿐.
부디 윗선이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갖고 있길 소망했다.
3군이 도착한 다음 날, 2군도 대평원에 도착했다.
루드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직접 나서 2군을 맞이했다. 가장 먼저 그들 병력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살아 있군.'
2군의 피해는 1군과 3군을 통틀어 가장 적은 규모였다. 기사들은 거의 그대로 보존돼 있었고, 병사들의 피해가 있긴 했으나 그마저도 3군보다는 적은 숫자였다.
"고생했네."
루드는 막시무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곧이어 뒤늦게 2군의 도착 소식을 들은 콜론이 나타났다.
"고생하셨습니다. 다행히 2군의 피해는 많지 않군요."
막시무스의 뒤로 늘어선 병력들을 보고 콜론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가정했던 최악은 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막시무스의 귀엔 아무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가장 늦게 도착했다고…?'
셋 중 가장 먼저 출발한 자신이 제일 늦고 만 것이었다.
황혼 부족과의 전투가 있었다지만... 자신만 그런 상황을 겪은 것은 아닐 터.
최대한 빠르게 피해를 수습하고 부상병들을 재촉하며 행군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저희가 제일 늦었군요."
"아니, 딱 맞춰 왔네. 3군도 어제 막 도착한 찰나야."
"혹시 2군의 정확한 피해 규모를 말해 줄 수 있겠나?"
콜론은 2군의 피해 규모를 물었다. 각 군의 전력이 얼마만큼 남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이번 전쟁의 승산을 점칠 수 있는 까닭이었다.
"…꼭 명령처럼 들리는군요."
그에 막시무스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콜론과 그는 상하 관계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모두에게 명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더스틴 하나뿐.
"그런 의도는 아니었소. 그리 들렸다면 사죄하지. 그저 먼저 도착한 1군과 3군의 피해가 컸던 이유로 2군의 정확한 피해 규모를 파악하고 싶었던 것뿐이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 막시무스에 콜론이 사죄했다.
하지만 사과를 들었음에도 막시무스의 기분은 여전히 풀어지지 않았다.
'먼저 도착한 3군이라. 하, 은연중 생색내는 꼴이라니.'
오히려 2군보다 3군이 먼저 도착했다는 말에 심기가 더더욱 불편해졌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인데… 잘하면 유용하게 쓸 수도 있겠군.'
여전히 불퉁한 막시무스의 표정에 루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콜론에게 경쟁심을 갖고 있는 막시무스.
콜론은 딱히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지만, 막시무스가 그와 신경전을 벌이려 한다는 건 명백했다.
아마도 그보다 높은 전공을 세우려 하기 때문일 터.
그 모습을 본 루드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2군의 피해가 3군보다 적은 상황임에도 그들보다 늦게 도착했다는 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건, 다른 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야기.
"할 얘기가 많겠지만 일단은 조금 쉬는 게 좋겠군. 그간의 피로를 풀 필요가 있겠어. 병사를 붙여 쉴 곳을 안내해 주겠네."
"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내일 오후에 회의를 갖도록 하지. 자세한 건 병사를 시켜 다시 안내해 줄 테니 푹 쉬게."
루드는 막시무스와 콜론의 대화가 마무리 지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2군에게 쉴 곳을 안내했다.
두 사람의 경쟁이 심해지고 갈등의 골이 깊어질수록, 상황은 더욱 자신에게 유리해질 것이었다.
막시무스는 곧장 루드가 붙여 준 병사를 따라갔다. 콜론과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다는 걸 보여 주는 태도였다.
콜론 또한 그것을 알아차렸기에 더 이상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한편, 막시무스를 따라 이동하는 아이리우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우려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아야 할 텐데.'
황혼 부족에서의 습격 이후 막시무스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이전에 약속했던 휴식일도 지키지 않았고, 부상자들의 걸음을 재촉하며 강행군을 계속했다.
어떻게든 황혼 부족에서의 피해를 만회하고 전공을 세우려는 모습.
전장에서 지휘관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었으니....
어쩌면 이번 전쟁에서, 그로 인한 문제가 생길 것만 같다는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37화
다음 날 오후, 루드는 언급했던 대로 회의를 소집했다. 참석자는 질레트를 제외하면 칼바람 부족에서의 회의와 똑같았다.
"모두 앉지."
"예."
올 사람들이 전부 왔음을 확인한 루드는 곧장 운을 띄웠다.
"일단 그간의 보고부터 듣지. 나야 대강의 사정은 들었다지만 경들끼리는 전혀 모르는 상황이고, 나 또한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으니."
"옳은 말씀입니다."
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적의 전력을 명확히 파악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더군다나 각기 다른 루트로 이동해 아군의 정보를 모르는 상황.
서로가 겪은 일과 피해를 확인하는 것은 꼭 필요한 수순이었다.
다만, 콜론은 바로 3군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대신 슬쩍 막시무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자신에게 경쟁 의식을 갖고 있음을 아는 까닭이었다.
"막시무스 경, 자네가 먼저 이야기해 보지."
"알겠습니다."
콜론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루드가 먼저 나서 상황을 정리했다.
"아시겠지만, 남쪽 루트에는 황혼 부족이 있습니다. 저희 2군은 그들을 목표로 빠르게 움직였고, 도착한 즉시 공격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저희의 습격을 알고 있었다는 듯 부족을 비우고 도망친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뒤를 쫓기 위해 빈 부족을 수색하자 숨어 있던 자들이 독으로 공격해 왔고요."
"…독 말인가?"
"예, 대단치는 않은 독이었습니다. 은밀하긴 했으나 일반 병사들에게나 통할 정도였고, 그마저도 죽음에까지 이른 이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이 단발성으로 투척한 독은 강력했습니다. 구슬 같은 것이 깨지며 기화된 독이었는데 병사들은 물론 기사까지 피해를 입을 정도였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큰일이군. 독공 한 번에 전력이 무력화될 수도 있단 말 아닌가."
막시무스의 설명에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은 루드.
하지만 막시무스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할 것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리 걱정하시진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 독이 많았다면 진즉 사용했을 터. 그러지 않았다는 건 수량에 제한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보다 기습이 아닌 적아가 섞인 전장에서는 아군이 휘말릴 위험 탓에 함부로 독공을 사용하지 못할 겁니다."
"일리가 있군. 황혼 부족에서의 일 말고 다른 문제는 없었나?"
"예, 그 후로는 다른 부족과의 접촉이나 이렇다 할 전투가 없었습니다."
막시무스는 황혼 부족에서의 일 이후 다른 상황이 없었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차라리 다른 전투가 있었다면 황혼 부족에서 입은 피해를 만회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럼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지?"
"…기사 백 중 열넷, 병사 이천 중 약 이백이 전사했습니다. 병사들 중 아직까지 중독 증세를 겪고 있는 이들이 있으나, 상태가 많이 호전돼 전투에는 문제가 없을 걸로 보입니다."
"고생했군."
2군의 피해는 세 부대 중 가장 적었다. 루드는 그의 노고를 치하하곤 콜론을 바라봤다. 막시무스의 보고가 끝났으니 이젠 콜론의 차례였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면목이 없을 뿐입니다."
루드의 시선을 받은 콜론은 그렇게 운을 떼며 보고를 시작했다.
"저희가 마주한 건 호랑이 부족이었습니다."
"낯선 이름이군. 어떤 부족이었지?"
황혼 부족과 달리 호랑이 부족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부족이었다. 바깥대륙 내에서도 다른 부족과의 교류가 많지 않았기에 현재의 제국군이 그들을 알 도리는 없었다.
하지만 현재가 아닌 미래의 제국군이라면, 사정은 달라졌다.
'호랑이 부족! 그래서 그렇게 피해가 심했던 거였어.'
아이리우스는 호랑이 부족이란 말에 기함했다.
그들이 누구인가. 연합군의 전투 부대로 속칭 미친개라 불리던 이들이 아닌가.
'싸우기 위해 태어난 족속들 같았지.'
아이리우스도 그들을 상대해 본 적이 있었다.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드는 투지. 강적을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는 오기. 한 번 정한 적은 죽을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념.
그들을 상대하는 건 끔찍한 경험이었다.
특히 족장이었던 사내는….
아이리우스가 호랑이 부족과의 전투를 떠올리는 사이, 콜론의 보고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호랑이 부족의 전력은 대단했습니다. 그들 전사 하나하나가 기사와 견줄 정도였고, 특히 족장이라던 인물의 힘은 혼자선 상대가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과장이 심한 것 같소만."
"그렇게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소. 하나 사실이오."
막시무스가 딴지를 걸었지만, 콜론은 담담한 기색으로 받아넘겼다.
그것이 오히려 막시무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냥 경이 이끄는 3군이 무능력했던 것은 아니고?"
막시무스의 날 선 목소리가 재차 콜론을 찔렀다. 콜론은 이번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막시무스를 바라보다 더스틴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
'이, 이!! 나를 무시해?'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린 모습에 분개한 막시무스.
고작해야 부족 하나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한 주제에, 입만 살아서 뻗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국군의 이름을 더럽혔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콜론은 더스틴을 향해 고개 숙였다. 진중함이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낮아진 그의 머리를 바라보던 루드가 입을 열었다.
"3군의 피해 규모는?"
"…남은 기사가 스물일곱에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은 천 명이 조금 넘습니다."
"피해가 막심하긴 하군."
"면목 없습니다."
착잡한 목소리의 콜론. 하나 루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됐네. 나 또한 그대들을 볼 면이 없긴 마찬가지니."
2군과 3군의 보고가 끝났으니 이제는 1군의 차례.
루드는 천천히 입을 뗐다. 한 마디 한 마디 안타까움을 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짐작했겠지만… 질레트 경이 전사했네."
"…제국의 샛별이 하나 졌군요."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질레트의 죽음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나 혼자 생각하는 것과 더스틴을 통해 직접 확인받는 것은 그 충격이 달랐다.
모두의 반응을 살핀 루드는 마저 말을 이었다.
"우리를 공격한 이들의 정체는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네. 전부 긴 후드로 모습을 가렸고, 피해를 수습하느라 도망치는 그들을 쫓을 수 없었거든. 혼자서라도 쫓아가고 싶었지만… 그사이 또 다른 습격이 있을 것을 우려했네. 뭐, 뭐가 됐든 부하 하나 지키지 못한 못난 상관의 변명일 뿐이겠지만."
그리 말한 루드는 고개를 떨궜다. 자세히 살피면 그의 몸이 얕게 떨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현재 1군이 기용할 수 있는 병력은 기사 셋과 마법사 열, 병사 천오백 정도네."
비통함을 연기하던 루드는 이내 고개를 들고 1군의 전력을 공유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정보가 있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직 전달해야 할 중요 정보가 남아 있었다.
"아까 우리를 습격한 세력의 정체를 특정하지 못했다고 했지.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것이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질레트를 죽인 그들의 수장, 그는 소드마스터였네."
"!!"
"그게 정말입니까."
모두가 경악했다. 소드마스터라니… 제국에도 몇 없고, 중앙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두 자릿수가 될까 싶은 존재였다.
그만큼 되기 어렵고 대단한 경지.
한데 이민족 중 그 자리에 오른 이가 있다고?
'어쩐지 이상했다. 질레트 경이 그리 쉽게 당할 인물이 아니건만… 상대가 소드마스터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루드가 전한 정보 덕에 콜론은 질레트가 어떻게 죽었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 상대가 소드마스터란 걸 파악하지 못한 채 덤볐다가 죽은 것이겠지.
'설마... 마왕?'
한편, 아이리우스는 소드마스터란 말에 누군가를 떠올렸다.
다른 이들과 달리 이미 바깥대륙의 마스터들을 여럿 보았던 그녀는 소드마스터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진 않았다.
하지만 1군을 습격한 소드마스터의 정체가 마왕이라면….
"다들 놀란 것 같군.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그는 내 손으로 직접 죽일 것이니."
루드는 충격에 휩싸인 모두를 다독였다.
'이로써 더스틴이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
상대 중에 소드마스터가 있다는 사실을 흘린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더스틴은 이번 전쟁 중에 전사할 예정.
하나, 소드마스터인 그가 쉽게 죽는 건 말이 안 됐다. 적어도 상대가 같은 마스터여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그림이 그려질 터.
"각 군의 정보 교환은 이 정도면 될 것 같군. 이제 본 회의에 들어가겠네."
각 군의 현황을 모두 공유했으니 이젠 다른 내용을 논할 시간.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 대평원의 동북쪽에는 까마귀 부족이 있다. 정보에 의하면 바깥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세를 자랑하는 부족이라고 하더군."
까마귀 부족에 대해 설명한 루드.
"우리의 목표는 그들을 섬멸하고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이상 전쟁을 이어 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 그들을 처리하고 일단 제국으로 복귀한 뒤, 다시 정비해 돌아올 예정이다. 그땐 이곳을 기점으로 남은 부족들을 정리할 수 있을 테니, 훨씬 간단해지겠지."
이어 루드는 제국군의 목표를 설정해 줬다.
까마귀 부족과의 전투가 이번 전쟁의 마지막이고, 이들을 처리하고 나면 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그래야 더 열심히 전투에 임할 것이고 그것이 제국과 뱀 부족의 힘을 갉아먹는 원동력이 될 까닭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이번 전쟁에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공적을 올릴 가장 확실한 기회가 남아 있지."
더불어 공적이란 먹잇감을 눈앞에 흔들었다.
"그들을 상대하는 방법에 있어 의견을 구하고자 하네. 좋은 생각이 있다면 가감 없이 말해 주게."
"방법이랄 게 따로 있겠습니까. 기껏해야 야만족 아닙니까. 성세를 자랑한다 해도 고작 바깥대륙의 수준에 불과하니, 저희가 한 번에 몰아붙인다면 이전의 두 부족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할 게 분명합니다."
예상대로 미끼를 문 막시무스는 곧장 전면전을 주장했다.
'누구보다 뛰어난 공을 쌓을 기회다. 심지어 지형도 기사들이 활약하기에 최적의 장소. 1군과 3군 모두 기사들이 큰 피해를 입었으니, 전면전으로 이끌고 간다면 우리가 가장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게 분명하다.'
2군은 기사들의 피해가 적었다. 대평원의 특성상 기마 돌진에 유리했으니, 기사들과 함께 나선다면 누구보다 뛰어난 공을 세울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러한 판단엔 이곳까지 오며 제대로 된 전투가 없었던 것도 한몫했다.
황혼 부족에서 피해를 입긴 했지만, 기습과 독공에 의한 것이었지 정면으로 맞붙어 입은 피해가 아니었다.
막시무스에겐 야만족 따위야 쉽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단순한 전면전은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적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소드마스터까지 있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자칫 운이 나쁘면 더스틴 님께서 소드마스터를 처리하시기 전에 많은 병력들이 희생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콜론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호랑이 부족만 해도 대단한 전력이었다. 하물며 그들을 넘어 바깥대륙 최고로 꼽히는 부족이라면....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물론 성세를 자랑한다 해서 꼭 무력이 뛰어나란 법은 없었다. 경제적이나 외교적으로 뛰어난 부족일 수도 있었고.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혹시 모를 피해를 예방할 수 있을 테니.
"한 번 패배하더니 겁쟁이가 되셨군."
"뭐라 했소."
"겁쟁이가 됐다 그랬소."
그러나 막시무스는 그런 콜론을 힐난했다. 지금이 기회란 듯 거침없는 태도였다.
"선을 넘는 언행이라 생각하는데."
"글세,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서로 노려보는 두 사람.
"그만."
그것을 멈춘 건 루드의 단호한 음성이었다.
"두 사람 다 지금 뭐 하는 건지 모르겠군."
약간의 짜증이 담긴 말투. 두 사람은 그제야 자신들이 누구의 앞에서 날을 세우고 있는지 자각했다.
"죄송합니다."
"송구합니다."
곧장 꼬리를 내린 두 사람.
루드는 잠시 두 사람을 응시하다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리우스와 헤이론이 있는 방향이었다.
"두 사람은 따로 갖고 있는 생각이 없나."
루드의 질문을 받은 아이리우스.
"제게 한 가지 방안이 있습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38화
"소수 정예로 적의 중추를 타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별동대를 이야기하는 건가?"
"예."
회의실 내의 모든 시선이 아이리우스에게 집중됐다. 침착하게 그들의 눈빛을 마주한 아이리우스는 설명을 시작했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큰 위험 요소는 상대가 보유한 소드마스터입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자는 더스틴 님이 아니고서야 상대할 수 없을 테니."
질레트의 목숨을 앗아 갔던 소드마스터.
소드마스터는 소드마스터로만 상대할 수 있다는 게 정설이었으니, 그를 막기 위해선 더스틴이 필요했다.
다만 문제는 적의 소드마스터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는 것.
운 나쁘게 더스틴과 먼 곳에서 나타난다면 얼마만큼의 피해가 생겨날지 몰랐다.
물론 적군도 그동안 더스틴을 상대해야 하겠지만… 정예 전력만 따지면 제국군보다 한 수 위인 그들이었다.
더스틴과 상대 마스터가 각기 날뛴다고 가정하면 더 큰 피해가 예상되는 건 분명 제국.
"우리가 가진 이점은 숫자입니다. 반면 상대의 이점은 소수의 정예 전력이죠."
아이리우스는 현재의 상황을 상기했다.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그럼에도 남은 병력이 4천에 달하는 제국군이었다. 전투에 나설 수 있는 기사도 백이 넘었고.
'전생에서도 연합군의 숫자 자체는 크지 않았다.'
중앙대륙과 비교해 절대적인 인구가 적은 바깥대륙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과거의 연합군도 아니고 단일 부족을 상대하는 일. 그들의 병력은 많아 봐야 천이 안 될 것이었다.
"그들의 내부로 파고들어 적의 정예 전력을 없앨 수만 있다면 전쟁의 승기를 가져오는 게 쉬워질 겁니다."
"…그렇군. 무슨 뜻인지 알았다. 우리의 이점은 살리고 적의 이점은 죽이자는 말이겠지."
"정확합니다."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나쁘지 않은 계책이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의 생각인지 저마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 말고도 노리는 건 하나가 더 있겠지."
아이리우스가 말한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군의 이점을 극대화하고, 적군의 이점을 약화시키는 것에 더해 하나 더.
"예, 그때 상대 소드마스터를 처리하는 겁니다."
"확실히 묘안입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는 적군의 소드마스터도 그들 진영에 머무르고 있을 터. 그 위치가 특정돼 있으니 추후 전장에서의 변수를 줄일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콜론이 격하게 반응했다. 그녀의 계책이 가져올 수 있는 이점이 상당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루드는 안색을 굳혔다. 아이리우스의 의견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하나 거기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거기엔 문제가 있다."
"...."
"표정을 보아하니 알고 있는 것 같군."
아이리우스 또한 그가 말하는 문제가 뭔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소수 정예로 꾸린다 해도 상대 진영의 중추까지 들어가는 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가? 만약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치더라도, 누구도 살아 돌아올 수 없겠지."
작전 수행의 현실성과 위험성.
그것이 바로 아이리우스가 말하는 작전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마스터 급이라면 어떻게든 살아 돌아올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외에는 전멸이다.'
별동대를 편성한다 해도 내부에 침투하기 전 발각 돼 전투를 치를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적진 한가운데서 외로이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
스스로 수적 이점을 포기하고 적의 정예 전력을 상대하는 꼴이었다. 자충수나 다름없는 일.
하여 루드는 아이리우스의 의견에 반대했다.
당장이야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녀의 작전이 성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점에 혹했겠지만,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이 작전의 맹점을 깨달을 터.
더스틴으로서 제국의 지휘관을 연기해야 했으니 결과가 눈에 보이는 작전을 수용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때, 아이리우스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피해가 없을 거라 할 순 없지만…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살아 돌아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고요."
작전의 위험도는 인정하지만, 그 결과는 다를 거라는 이야기.
"그게 무엇이지?"
"숨겨진 길을 이용하는 겁니다."
"숨겨진 길?"
"예."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를 짚었다.
제국군의 진영 근처에서 까마귀 부족의 진영으로 이동하는 그녀의 손가락.
"이쪽에 숨겨진 길이 하나 있습니다. 정확히는 중간이 막혀 있지만, 조금만 뚫는다면 곧장 까마귀 부족의 바로 앞까지 이어지는 길이죠."
회의에 사용하는 바깥대륙의 지도는 정보가 적은 까닭에 완성도가 떨어졌다. 주변의 큰 지형지물과 병사들이 눈으로 보고 확인한 걸 조합해 만든 지도였으니 당연한 일.
하지만 아이리우스의 눈에는 조잡한 지도 위로 전생의 제국군이 만들었던 지도가 비쳐 보였다.
바깥대륙에서 숱한 시간을 보내고 많은 전투를 치르며 완성한 당시의 지도는 지금보다 훨씬 정교하고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이쪽에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 막힌 벽을 뚫다 보면, 또 다른 동굴의 끝과 이어지죠. 그 동굴의 입구가 까마귀 부족 근방에 있습니다."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았소."
"…가문의 힘을 빌렸습니다."
"에이나우디 공작가인가. 하지만 아무리 그대 가문이라 할지라도…."
생전 처음 듣는 정보에 의문을 표하는 콜론과 막시무스.
에이나우디 공작가의 위명은 분명 대단했지만, 이곳은 바깥대륙이었다. 그들의 힘이 여기까지 미친다고?
그들의 시선을 받은 아이리우스는 초조함을 느꼈다. 전생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정보를 전달한 것이었으니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가문의 이름으로 넘어갈 수 있길 바랄 수밖에.
"그만, 그녀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다행히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이리우스, 방금 말한 길에 대해 장담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아이리우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아이리우스가 말한 길은 루드도 알고 있는 길이었다.
전생에서 제국군이 사용했던 길.
당시 그 길을 통한 기습에 큰 피해를 입었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시도해 볼 법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모르는 길이라면 접근과 도주 루트가 생기는 것이고, 빠르게 치고 빠진다면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 적군의 피해는 최대화할 수 있을 겁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콜론이 아이리우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적이 모르는 탈출로가 있다면 시도해 볼 만한 가능성이 있었다.
"위험부담이 있긴 하지만 나쁘진 않아 보입니다. 다만 별동대의 편성이 어떻게 이루어질지가 문제일 것 같습니다."
막시무스도 그녀의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
"그럼 그녀의 의견에 모두 찬성하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의사를 확인한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작전이 타결됐다.
"그럼 그녀의 의견대로 진행하는 걸로 하지. 곧장 별동대 편성에 대해 얘기해 보지."
루드는 바로 관련된 얘기를 진행시켰다.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하지만 그의 정신은 회의에서 벗어나 있었다. 전쟁을 어떻게 이끌어 갈지 방법을 논하고 있었지만, 이곳에서 나온 결과는 무용지물이 될 예정이었으니까.
성사되면 까마귀 부족이 큰 타격을 입을 아이리우스의 작전을 수용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결국 지금의 회의는 보여 주기에 불과했으니.
루드는 제국군이 이번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할 생각이 없었다.
먼저 움직이는 건 제국군이 아닌 바깥대륙일 터.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냐!"
그때,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입이 바짝 마른 채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병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기색이었다.
"전방에 적군이 나타났습니다!"
"뭐라?"
"까마귀 부족이 진군해 오고 있단 소리냐?"
깜짝 놀란 콜론과 막시무스의 물음. 하나 병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까마귀 부족이 아닙니다. 그들과 다른 방향에서 나타난 세력입니다."
"까마귀 부족이 아니라니…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이냐."
그때 또 다른 병사가 찾아왔다.
"속보! 서쪽에서 정체불명의 전력이 등장했습니다!"
"뭣?"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북쪽에서 호랑이 부족이!"
"남쪽에선 황혼 부족이 나타났습니다!"
연달아 새로운 소식을 들고 온 병사들. 차례차례 등장하는 여러 부족들의 이름에, 모두는 머리가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작전을 준비할 여유는 없겠군."
루드는 굳은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가 무얼 위해 일어섰는지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출정을 준비하라. 신호를 보내면 바로 움직일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기해야 한다."
"예!"
명을 듣고 서둘러 막사를 벗어난 콜론과 막시무스.
"아가씨, 저희도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
갑작스러운 적의 등장에 혼란스러워하던 아이리우스도 헤이론과 함께 그들의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비워진 막사.
'역시 아버지야.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혼자 남은 루드는 조금 전의 상황을 곱씹었다.
병사들이 가져왔던 소식들은 자신과 제노스가 미리 준비해 둔 상황이었다.
이미 주둔하고 있던 까마귀 부족에, 동북쪽의 호랑이, 남쪽의 여명과 황혼 부족이 차례로 등장했다.
거기에….
'서쪽에서 나타났다는 건 뱀 부족이겠지.'
이번 전쟁의 대미를 장식해 줄 뱀 부족까지.
'이제 남은 건 매듭짓는 것뿐인가.'
생각을 정리한 루드는 막사를 벗어났다.
곧 있으면 전투가 시작될 예정이었으니, 준비가 필요했다.
서서히 전쟁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제노스는 뒤를 돌아봤다.
부족의 전사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은 그들의 눈빛.
수백의 전사들이 내뿜는 기백은 실로 대단했다.
'언젠가는 이 풍경을 루드란테 그 아이가 보게 되겠지.'
몇 번이고 그들을 이끌었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감회를 품게 하는 모습.
잠시 제 부족의 전사들을 바라보던 제노스는 이내 몸을 앞으로 향하고 하늘 높이 검을 들었다.
"까마귀 부족!"
그의 함성과 함께 세워지는 부족의 깃발.
"출격한다!"
펄럭이는 깃발과 함께 까마귀 부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까마귀 부족의 움직임을 확인한 하타이는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크흐흐, 이제 시작이다!!"
까마귀 족장이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왔다. 눈치 볼 것 없이, 거리낄 것 없이 싸우고 강자와 붙을 수 있는 시간! 이 얼마나 오래 기다려 온 순간인가.
"싸우자!"
"이기자!"
"물어뜯자!"
하타이의 포효를 따라 호랑이 부족의 전사들도 고함을 질렀다.
"가자아!!!"
호랑이 부족이 대평원 복판을 향해 달렸다.
* * *
"분위기가 심상치 않구나."
"…확실히, 생각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입니다."
대평원 서쪽에 나타난 사르한은 주변을 살폈다. 굳이 기감을 넓히지 않더라도 이곳에 모인 숫자가 상당하단 걸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제국군과 까마귀 부족만 있는 게 아니었다.
"까마귀 부족을 돕기 위해 나선 것이겠죠."
"제노스 그 아이가 알게 모르게 주변 부족들을 돕더니, 그 값을 이렇게 받나 보구나."
"걱정하지 마십쇼. 반드시 여왕님께 승리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뱀 여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의 명운이 이번 전쟁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랜 계획의 결실이 코앞이었다. 까마귀 부족과 동맹을 맺었던 것도, 주변 부족들을 야금야금 잡아먹었던 것도, 모두 그때를 위해서였다.
그러니 절대 여기서 스러질 수는 없었다.
"딸의 죽음에도 참아야만 했던 어미의 심정을, 모두에게 알리고 오너라."
"명을 받듭니다."
부복한 사르한이 예를 갖춘 뒤 일어났다.
대평원 중심을 향하는 그의 뒤를 많은 병력이 뒤따랐다.
뱀 부족의 모든 전력을 이끌고 나온 전장이었다. 패배는 있어선 안 될 일.
'반드시 이긴다.'
사르한은 승리를 다짐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39화
북, 동, 남 삼면에 자리 잡은 세력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대평원의 중앙으로 향했다.
"전군, 출전한다!!"
그건 제국군 또한 마찬가지.
"제국에 영광을!"
"제국에 영광을!"
난전이 예상되는 전투였기에 제국군은 처음의 형태로 돌아와 있었다.
압도적인 숫자와 화력으로 적들을 찍어 누르겠단 계획.
"막시무스 경! 콜론 경!"
"예!"
"기사들을 이끌고 제국의 위대함을 보여라."
"예!!"
그 선두에 선 건 막시무스와 콜론이었다.
'기회다!'
기사들과 함께 앞으로 나선 막시무스는 전방을 확인했다. 병력들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보병.
'공적을 위한 제물들이 가득하구나!'
갑작스러운 전투였으나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아이리우스의 계획대로 움직였다면 승리를 거두더라도 큰 공적은 세울 수 없었을 터.
하나 상황이 이리됐으니, 누구보다 뛰어난 공을 세울 기회가 마련된 것이다.
"돌격! 나를 따르라!!"
뒤에 서 있는 기사들과 눈을 맞춘 막시무스는 말의 고삐를 당겼다. 거친 행동에 놀란 말이 움찔하는가 싶더니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 목적지는 모든 세력들이 모이고 있는 대평원의 중앙!
다른 기사들도 막시무스를 따라 말을 재촉했다. 순식간에 그의 뒤로 붙은 건 전부 2군에 속했던 기사들이었다.
"막시무스 경! 같이 움직여야 하오!"
상의 없이 뛰쳐나간 막시무스의 행동에 놀란 콜론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멀어진 막시무스에겐 닿지 않는 목소리.
"우리도 뒤따른다."
결국 콜론은 남은 기사들을 이끌고 먼저 출발한 이들의 뒤를 쫓았다. 서둘러 말을 모는 그의 표정은 초조했다.
마상돌진의 핵심은 감히 막아설 생각조차 못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파괴력.
그것을 위해선 다수의 기사가 동시에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하나 함께해야 할 기사들이 이미 반으로 나뉘어 버렸으니….
"적을 섬멸하라!!"
"바깥대륙의 야만인들에게 중앙대륙의 힘을 알려 줘라!"
그 사이, 빠르게 질주한 막시무스와 기사들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누구보다도 먼저 다다른 대평원 중앙.
하나 그들은 멈추는 대신 속도를 더욱 높이며 인근의 적군을 향해 질주했다.
"까마귀 부족이다!"
"적의 부대를 관통해라!"
그들의 앞에 위치한 건 까마귀 부족. 까마귀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기에 정체를 특정하는 건 간단했다.
"제국의 위상을 높여라!"
검을 높이 든 막시무스가 까마귀 부족에게 돌진했다. 그를 따르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점 돌파로 까마귀 부족을 관통하는 그들.
수십 명의 기사가 만들어 낸 파괴력은 대단했다. 괜히 그 앞을 가로막았다간 온몸이 바스러져 절명하고, 스치기만 해도 중상을 입을 정도였다.
'역시, 별것 아니다.'
기사들을 이끌고 까마귀 부족을 돌파한 막시무스는 미소를 지었다.
바깥대륙 제일의 부족이라지만, 그 명성은 고작해야 바깥대륙 사이에서나 통하는 것. 그들로선 위대한 제국의 기사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이깟 녀석들에게 겁먹다니. 기사란 이름이 아깝군.'
이런 이들을 경계하고, 심지어 두려워하기까지 한 콜론이 그저 머저리였을 뿐.
"막시무스 경!"
그때 콜론과 다른 기사들이 뒤늦게 합류했다. 앞서 출발한 기사들을 쫓아 서둘러 움직인 덕분에 가까스로 돌파 타이밍을 맞추는 데 성공한 것.
"기사들은 나를 따르라! 다시 한번 돌파한다!"
하지만 막시무스의 독단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조금 전의 돌파로 자신감을 얻은 막시무스는 곧장 다음 행동에 나섰다.
"안 돼! 위험하오!"
"겁쟁이는 빠지시오. 내게 필요한 건 겁쟁이가 아닌 용맹한 제국의 기사들이니."
콜론이 어떻게든 막으려 했지만 막시무스는 오히려 그를 꾸짖었다.
지금이야말로 까마귀 부족의 전력을 약화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한 번 더 타격한다면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터!
"공을 세울 자들은 나를 따르라!"
전공에 눈이 먼 막시무스가 다시 한번 고삐를 당겼다. 기세를 몰아 한 번 더 까마귀 부족을 통과할 계획.
그의 뒤를 따르는 기사들의 숫자는 이전보다 늘어나 있었다. 공을 세울 기회라는 말에 혹한 이들이 합류한 까닭이었다.
"재정비가 필요하오! 이미 속도를 잃었으니 선회해서 복귀해야 한단 말이오!"
콜론이 악을 쓰며 소리 질렀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큰일이다! 이대로라면 역으로 당하고 만다.'
마상 돌진은 분명 강력했다. 기사들로 이루어진 일점 돌파는 아무리 잘 훈련된 군대일지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
하나 거기에도 명백한 약점이 존재했다.
바로 그들의 돌파가 직선적이고, 짧은 시간 동안에만 유효하다는 사실.
기사들이 탄 말의 특성 때문이었다. 속도가 붙은 상태에선 방향 전환이 쉽지 않았고, 한 번 전력 질주를 한 후에는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후퇴를 주장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
지금만 해도 그랬다. 재정비할 틈도 없이 까마귀 부족을 향해 달려가는 막시무스와 기사들에게선 이전의 속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속도와 파괴력을 잃은 마상 돌진은 고립을 자처하며 적진으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
"돌격하라! 적을 죽이고 공을 세우는 거다!"
하지만 이미 까마귀 부족에 진입한 기사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직 적을 죽이고 공을 세우겠단 생각만 가득한 상태.
'미래가 보이는구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내 미래가!'
막시무스는 커다랗게 웃었다.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으나 입 전체가 벌어질 정도로 커다란 웃음이었다.
'금은보화! 세습 귀족!'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막시무스. 그는 눈앞의 적이 아닌 미래의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어…?'
이상함을 느낀 건 그때.
"여, 여봐라!"
조금 전까지 자신을 따르던 기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적군을 응시했을 땐, 이미 모든 게 늦은 후였다.
"어리석은 녀석."
어느새 양옆에서 나타난 두 거한이 도끼와 칼을 내리쳤다.
'…어? 이게 아닌데.'
서걱-!!!
잘린 목이 빙글 돌았다. 말에서 쓰러지는 제 몸을 바라보던 막시무스의 목이 땅으로 떨어졌다.
* * *
"막시무스 경이 죽었습니다."
기사 하나가 그리 말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또한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이곳의 모두가 막시무스가 죽는 모습을 지켜봤으니까.
죽은 건 막시무스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따라 나섰던 기사들도 전부 목숨을 잃었다.
"...."
그들과 함께하지 않고 재정비를 택한 콜론과 기사들은 아연실색했다.
아무리 처음만큼 강력하진 않다지만 그래도 기사들로 이루어진 마상 돌진이었다. 이리 허무하게 당할 게 아니었다.
'다시 들어오도록 유인했던 건가.'
그들이 당한 모습을 복기한 콜론은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한차례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야 보인 그림.
'애초에 첫 번째 돌파에서부터 까마귀 부족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물론 기사들이 그들 중앙을 관통한 만큼 피해가 적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일반병에 한정된 것. 지금 생각해 보면 마상 돌진에 당한 이들 중 정예 병력으로 보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기사들의 돌진을 예상했던 것일 터.
자신들의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며 상대의 강력한 공격을 소모시키겠단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신난 막시무스는 연달아 공격을 감행하다 죽고 만 거고.
"콜론 경! 후퇴해야 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했군. 본진으로 복귀한다."
생각에 잠긴 콜론을 일깨운 건 아이리우스였다.
그녀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콜론은 서둘러 복귀를 명했다.
'남은 기사는 고작 서른도 안 되는 건가.'
막시무스와 그를 따르던 기사들이 전멸했으니 이제 남은 건 이곳에 있는 기사들이 전부.
상대의 전력을 정확히 가늠하지조차 못한 지금 상황에선 결코 좋지 않은 흐름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랬던가. 항상 최악이라 생각한 것 이상의 최악이 있는 법이라고.
"어딜 가는 거지."
"그대는…."
본진으로 돌아가려는 기사들을 막아선 누군가. 콜론은 곧장 그의 정체를 파악했다.
'까마귀 부족의 족장인가.'
까마귀 부족의 지휘관으로 보이던 인물. 아마도 까마귀 부족의 족장일 터.
놀라운 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적진의 한복판에 있던 그가 어느새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크흥! 다시 만났군. 이번엔 안 놓친다!"
그 뒤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일전 패배의 쓴맛을 겪게 했던 호랑이 부족의 족장이었다.
2군의 전력이 온전한 상태에서도 상대하기 어려웠던 강적.
절망스러운 건 그의 등장이 지금 상황의 정점을 찍은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 오러!"
"소드마스터!"
제노스가 오러를 피워 내자 기사들이 경악했다.
정상일 때도 감당하지 못했던 적에 이어 소드마스터까지 나타난 상황.
'여기가 내 무덤이겠군.'
콜론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도무지 살아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형국.
"조금만 버텨라! 소드마스터가 이곳에 있다는 게 알려지면 곧 더스틴 님께서 오실 거다!"
하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더라도, 그냥 죽을 생각은 없었다.
"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진정한 기사가 무엇인지 보여 주자!"
한껏 각오를 불태운 콜론을 따라 의지를 다지는 기사들.
"콜론 경, 이자는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경께선 다른 기사들과 함께 소드마스터의 발을!"
아이리우스도 그들과 뜻을 함께했다. 하타이의 상대를 자처한 것도 그러한 이유. 더스틴이 올 때까지 버티려면 자신이 하타이를 상대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타이와는 여러 번 싸워 봤다.'
하타이는 전생에서 몇 번이고 싸워 본 적 있는 상대. 심지어 그의 목숨을 끊었던 것도 자신이었다.
지금의 그가 전생과 비교해 어느 정도의 경지를 갖췄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전투 방식과 특징, 심지어는 약점이랄 것까지 알고 있었으니.
"…부탁하네!"
잠시 아이리우스를 바라본 콜론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옮겼다. 다른 기사들과 함께 제노스를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계집, 넌 뭐냐."
일전에 놓친 사냥감을 잡을 생각에 들떠 있던 하타이가 불쾌감을 드러냈다.
서로 마주 선 하타이와 아이리우스.
"네게 알려 줄 이름은 없다."
"어디 죽을 때도 그리 말할 수 있는지 보자!"
그녀의 대답에 하타이가 힘껏 태도를 휘둘렀다.
'역시 이전만큼 강하진 않아.'
하지만 아이리우스는 쉽게 그 공격을 막아 냈다.
예상했던 대로 지금의 하타이는 기억 속의 그보다 약했다. 전생이었다면 조금 전의 공격으로 자신의 검이 부러졌을 터. 하지만 지금은 고작 검 전체가 울리는 정도에 불과했으니.
'문제라면 나 또한 전생의 경지가 아니라는 점이지만… 쓰러트리는 데 문제는 없다.'
경지의 부족은 경험으로 메우면 될 일.
거기에 현재 하타이의 경지는 자신과 같은 익스퍼트 상급으로 추정됐으니, 딱히 경지에서 밀리는 상황도 아니었다.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는 상대.
"하앗!"
하타이의 태도를 흘려 낸 아이리우스는 앞으로 도약하며 서로 간의 거리를 없앴다.
폭과 길이가 상당한 태도의 활용이 어려워지는 거리.
반면 아이리우스의 검은 태도만큼 크지도, 길지도 않았으니 이점을 가져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거리를 좁힌 아이리우스의 모습에 하타이는 서슬 퍼런 미소를 흘렸다.
많은 이들이 태도를 의식해 이처럼 거리를 좁히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이야기.
"너도 똑같구나! 딱 걸렸어!"
태도를 애용하긴 하지만 태도만 사용할 줄 아는 건 아니었다.
하타이가 가장 자신하는 무기는 그의 단련된 몸, 그 자체.
거리가 좁혀짐과 동시, 곧장 태도를 놓은 하타이는 주먹으로 아이리우스의 관자놀이를 노렸다.
"그래, 걸렸어."
"!!"
하지만 아이리우스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슉, 슈슉, 스거억-!!
하타이의 무릎과 팔꿈치를 스쳐 지나간 검. 한계까지 마력이 응축된 검은 그의 관절을 지탱하던 힘줄과 인대를 끊어 냈다. 주변의 큰 근육 또한 마찬가지.
"이년!"
하타이는 통증을 참고 도약하려 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땅을 딛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통을 견디는 것과 별개로 신체가 의지를 따르지 못하는 상황.
'호랑이 부족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압도적인 신체 능력.'
계획했던 것을 완벽히 행한 아이리우스는 차가운 눈으로 하타이를 응시했다.
호랑이 부족은 하나같이 범인을 초월한 신체 능력을 갖고 있었다. 마력을 단련하지 않은 몸으로도 기사 이상의 속도와 힘을 낼 수 있을 정도. 체력 또한 대단한 그들은 태어나길 타고난 전사로 태어난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자신하는 무기가 부러졌을 때의 대처가 미흡한 측면이 있었다.
'그가 전생과 같은 수준이었다면 불가능했겠지.'
하타이는 충분히 위협적이고 강한 적이었다.
자신의 마력이 조금만 약했어도, 그의 몸이 조금만 더 강했어도 방금 전의 수는 통하지 않았을 터.
실제로 전생의 그에겐 지금과 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당시 그의 몸은 마력을 담은 공격도 튕겨 낼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으니.
"이제 그만 끝내자."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전생처럼 오러조차 견디는 신체가 아니고, 마력의 활용 능력도 떨어진다.
전생보다 떨어지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라지만… 능력의 활용이나 경험의 측면에서 지금의 하타이는 제 상대가 안 됐다.
"네년! 죽일 거다! 죽일 거라고!"
말을 듣지 않는 몸에 악을 지르는 하타이.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했던 상대에게 손도 못 쓰고 당한 그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고작 이 정도였나.'
그런 하타이에게 아이리우스는 검을 겨눴다. 그와 관련된 과거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이끌던 전투 부대와 맞서고, 목숨을 잃을 뻔하고, 끝끝내 그를 죽이는 데 성공했던….
'이번에는 없어도 될 기억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부 이번 생엔 없을 예정이었다. 하타이는 여기서 죽을 테니까.
"꼴이 말이 아니군. 하타이. 그리 자신하더니 고작 이런 어린애한테 진 건가?"
"!!!"
하지만 아이리우스는 하타이를 죽일 수 없었다. 그의 목을 치기 직전, 제 뒤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 때문이었다.
"당신은."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아이리우스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콜론 경과 다른 기사들이 상대하고 있었을 텐데... 설마 벌써 당했다고?'
아무리 상대가 소드마스터라지만 두 자릿수의 기사들이었다. 하나같이 그의 발을 묶기 위해 목숨을 각오한 이들. 거기에 미래의 소드마스터가 될 헤이론까지 포함돼 있었으니 결코 만만한 전력이 아니었다.
한데....
"쿨럭! 아가씨…!"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피한 듯했다.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헤이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만 목소리만 들어도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타이를 구하기 위해 온 건가.'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아이리우스.
기사들과 전투를 치르던 소드마스터는 하타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뺀 게 분명했다.
문제는 그를 상대하던 기사들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소드마스터는 규격 외의 존재였으니.
'더스틴 님은 아직인가.'
결국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소드마스터뿐. 이 자를 상대하기 위해선 더스틴이 필요했다. 지금쯤이면 그도 이곳에 소드마스터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터. 조금만 더 버티면 희망이 생길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대단하군. 이렇게 쉽게 하타이를 쓰러트리다니 말이야."
한편, 하타이와 아이리우스를 번갈아 본 제노스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력 사용에 미흡함은 있지만 하타이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순수 힘에 있어선 소드마스터조차 애를 먹을 정도. 그런 그를 별다른 상처조차 입지 않고 제압하다니.
'역시 세상은 넓군. 루드란테 말고도 이런 천재가 있다니. 하나, 만개하지 못해서야 재능의 의미는 없다.'
제노스는 아이리우스를 죽일 생각이었다.
살려둔다면 언제고 위협이 될 수 있는 인물. 그 싹을 잘라야 했다.
하지만.
"멈춰. 그 여잔 내 거다. 내가 죽일 거라고!"
뒤에서 들려온 악다구니가 제노스를 멈추게 만들었다.
"내가 죽일 거야! 내가! 직접! 내 손으로!"
상처 입은 짐승마냥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핏발 가득 선 눈으로 아이리우스를 노려보는 하타이가 그곳에 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4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