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20화
다섯 개나 되는 정수의 힘을 품은 만월학파의 비밀 공간.
루드는 침음을 삼켰다.
'큰일 날 뻔했군.'
만약 비밀 공간의 존재를 모르고 내부의 마법사들을 죽였다면, 그 충격으로 비밀 공간이 붕괴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정수의 힘이 비밀 공간과 함께 땅 밑 깊숙이 파묻힌다면 다행이겠으나 최악의 경우 의도치 않게 정수를 흡수할 수도 있던 상황.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수의 힘을 받아들이는 건 위험한 일이었으니, 여태 잘 관리해 왔던 리스크에 문제가 생길지도 몰랐다.
'제국이 정수를 모은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전생에도 흑음의 정수를 모았던 제국이다. 언제부터였는지 특정할 수는 없어도 그들이 정수를 모아 이용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했다.
이번 생에서도 요렌테를 비롯한 음지의 인물들을 이용해 정수를 찾지 않았던가.
하나 어쩌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의회의 숨겨진 힘인 만월학파. 그 비밀 공간에 놓인 다섯 개의 정수. 그간 진행됐을 많은 실험들....
'정수를 찾는 게 제국이 아니라 의회였다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들이 있었다. 온 대륙에서 정수의 힘을 모았던 제국이었지만 바깥대륙과의 전쟁에서 그 힘을 이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부작용 때문에 꺼렸다고 여기기도 힘들었다. 전장에 나타난 제국의 프로젝트 가운데는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끔찍했던 것들도 많았으니.
'의회와 정수.'
하지만 그것이 알고도 안 쓴 것이 아니라, 몰랐기에 못 쓴 것이라면?
루드의 머리가 팽팽히 돌아갔다.
때에 따라 서로를 견제하기도, 힘을 합치기도 하는 황실과 의회.
전쟁 당시에는 제국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힘을 합쳤을 터. 하지만 그 관계가 언제까지 계속될까.
힘을 합칠 이유가 사라진다면 두 세력은 또다시 서로를 물어뜯으려 들 것이었다.
'그때를 위한 거였다면?'
이번 생에 무려 소드마스터를 해친 의회다. 전생에선 이 정도로 격한 갈등은 없었다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 불과할 뿐. 수면 아래에선 어떤 일이 있었을지 몰랐다.
전생과 지금의 의회는 본질적으로 같았으니 그들이 바깥대륙과의 전쟁 후 다른 마음을 먹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가령... 황실을 배제한다던가.
정수의 힘은 어지간한 전력 차는 단숨에 뒤집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 전쟁으로 황실의 전력이 소모된 순간을 노리려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 더스틴을 처음 마주쳤을 때도.'
요렌테에게 떨어진 소집령을 듣고 발렌타노로 향하던 때.
그곳에서 마주친 더스틴은 아는 사람의 부탁을 받아 움직이는 중이라 했다.
당시에는 그가 말한 이가 당연히 제국의 높은 분, 즉 황실을 의미하는 거라 생각했지만.
'그랬다면 굳이 혼자 움직일 이유가 없었겠지.'
황명을 받아 움직이는 거였다면 기사단을 대동하거나 그들을 시켜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스틴은 그러는 대신 본인이 직접 움직였다. 본인의 정체마저 숨긴 채.
'더스틴과 의회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
줄곧 걸리던 것이 있었다. 황실과 마찰을 빚은 의회의 분풀이 대상이 왜 하필 더스틴이었는가. 다른 식으로 표출할 방법이 많음에도 어째서 그를 해하였는가.
'어떤 이유로 의회와 더스틴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면?'
하지만 그들 간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면....
'퍼즐이 맞춰진다.'
그들 간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모종의 거래가 이뤄졌고 그 과정에서 관계가 틀어졌을 거라 추측할 뿐.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퍼즐 조각들이 순간적으로 완성됐다.
더스틴 이전에 정수 수집 의뢰에 관련됐던 이들. 그들은 모두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는 범죄자 신분이었다. 그들을 활용한 것은 은밀히 정수를 모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터.
정수를 모은 게 황실이었다면 그런 귀찮은 과정을 거치기보다 황실의 전력을 파견했을 것이다. 그 소재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지만, 그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었을 테니.
"일단 물러나야겠군."
본래 오늘 만월학파를 처리하려 했던 루드였다. 의회에서 더스틴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나설 것이라 예상되는 상황.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단숨에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황실에서 정수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2황자를 통한다면 황실이 정수를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할 수 있을 터.
정수를 모은 주체가 누군지, 황실이 갖고 있는 정보가 어떤 수준인지부터 파악할 생각이었다.
만월학파를 처리하는 건 그다음.
그래야만 그 이후의 행보를 결정할 수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당장 일을 벌이기엔 변수가 많았다.
루드는 비밀 공간 내부에 존재하는 다섯 개의 정수를 바라봤다. 의회가 소유한 정수가 이게 전부일까?
'그럴 리가 없지.'
솔직히 말하면, 만월학파를 처리하는 데 큰 걱정은 없었다. 정수의 힘을 통한 마력 간섭은 마법사들에겐 쥐약이나 다름없었으니, 마법사와 철저한 상극관계에 있는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여러 날 정수를 가지고 실험해 봤을 그들이다. 정수가 가진 힘이나 그 여파에 관해 잘 알고 있을 터. 정수의 힘을 통한 이점이 어디까지 통할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정수의 힘을 흡수한 이가 있을 수도 있다.'
마법사들은 이성적인 존재지만, 때론 비이성의 극치를 보이기도 했다. 특히 호기심과 관련된 부분이 그랬다. 그들은 스스로가 품은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고, 그것을 깨닫기 위해 가진 모든 걸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존재들이 정수의 힘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흡수한다면 정수의 영향으로 흑마력을 품게 되겠지만,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궤의 마력과 마법 소양을 갖추게 되는 일이었으니. 그 또한 그들에겐 연구 대상이리라.
생각한 대로 만월학파의 마법사 중 정수의 힘을 흡수한 이가 있다면 루드로서도 각오를 해 둬야 했다.
지금처럼 가벼운 마음으로는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슬라브, 돌아가자."
하여 루드는 일단 복귀하는 걸 선택했다. 만월학파의 전력을 다시 상정해야 했다. 황실이 정수를 알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고.
"슬라브?"
돌아가고자 슬라브를 부른 루드. 하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의문을 표하길 잠시, 이윽고 구석에서 무언가를 먹고 있는 슬라브를 발견했다.
"슬라브!"
깜짝 놀란 루드가 슬라브를 확인했다. 혹 정수를 섭취한 건 아닐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공간 내부의 정수는 여전히 다섯 개였고, 슬라브에게서도 정수를 흡수한 반응은 없었다.
다만 무언가를 입에 머금고 있긴 했다. 그걸 뱉게 하려 한 루드였지만, 슬라브는 크게 저항하며 끝끝내 입안의 것을 지켜 냈다.
"...후, 어쩔 수 없나. 일단 빠져나가자."
결국 루드는 슬라브가 삼킨 것을 꺼내길 포기했다. 다행히 문제 될 걸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녀석이 있던 곳은 실험과 관련된 재료들을 모아둔 곳이었는데 여러 가지 샘플과 잡다한 소재들이 가득했다. 아마 그중 하나를 먹었을 터.
슬라브를 챙긴 루드는 비밀 공간을 빠져나갔다. 루드의 팔에 안긴 슬라브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오물거렸다.
* * *
라흐만 아피포는 인상을 굳혔다. 실험의 진척을 확인하기 위해 비밀 공간을 찾았건만, 실험보다 신경을 잡아끄는 게 있었다.
'...없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뭐래도 정수였다. 이곳의 시설 전부가 정수를 위한 것이라 해도 무방했으니, 다른 모든 걸 합쳐도 정수의 가치에 비할 바는 못 됐다.
하나 그것이 정수만 중요하단 의미는 아니었다. 정수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귀한 재료들이 많았다. 대륙 전체에도 몇 없는 희귀 소재라든가 돌연변이로부터 채취한 샘플이라든가.
지금 라흐만이 찾고 있는 것도 그런 것 중 하나였다.
혹여 자신이 놓친 걸까 싶어 여러 번 다시 살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이봐, 오늘 이곳을 찾은 이들이 누구누구지?"
"케닐로프, 디라만, 아훼. 이렇게 셋일 겁니다. 왜 그러십니까?"
"물어볼 것이 있어 그러니 그들을 불러 주게."
결국 라흐만은 그 행방을 알 만한 이들을 불렀다.
"...모른다고?"
하지만 그들도 라흐만이 찾는 것의 행방은 알지 못했다.
'분명 있었는데.'
미간을 찌푸린 라흐만.
이곳 실험실에 있는 희귀 소재들과 그 재고를 전부 기억하는 자신이었다.
기억에 의하면 분명 그것이 하나 남아 있어야 했다.
한데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군."
그는 제 앞에 선 마법사들을 응시했다. 이들 중 그것을 가져간 이가 없다면 누가 가져갔단 말인가.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래...."
라흐만은 여전히 인상을 찡그린 상태로 대답했다.
"세계수의 껍질이 안 보이는군."
* * *
저택으로 돌아온 루드는 만월학파에서 본 것들을 떠올리며 계획을 세웠다.
'일단 황실을 먼저 확인한다.'
황실이 정수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 의회가 그것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그 결과에 따라 행동 방침을 달리 가져갈 예정이었다.
'추측대로 황실이 모르고 있다면 이용해야겠지.'
정보의 불균형.
황실은 만월학파가 의회의 숨겨진 힘이란 건 알았지만, 그 아래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이건 분명 이용할 수 있을 터.
'정수를 보관할 방법도 마련해야겠어. 만월학파를 뒤져 보는 것도 괜찮겠군.'
루드는 만월학파를 몰살시킨 후 정수를 빼돌리고자 했다. 당장 흡수하지는 않더라도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를 힘이었다.
그들이 진행한 실험 결과와 연구 내용도 마찬가지. 정수를 보다 깊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들이었다.
그 후에는 만월학파의 건물을 무너트릴 생각이었다. 비밀 공간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황실과 의회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그럼 의회는 황실에서 자료를 가져갔다고 생각하겠지.'
그곳을 확인한 의회는 황실이 정수와 관련 자료들을 가져갔을 거라 생각할 터.
언제고 황실을 찌르려던 칼을 들킨 걸로 모자라 빼앗긴 셈이었으니 의회로선 속이 탈 것이었다.
어쩌면 무리수를 던질 수도 있겠지. 당하기 전에 먼저 황실을 공격한다거나 하는....
'물론 이 모든 건 정수를 모은 게 의회의 독단이고 황실은 그것을 모르는 상황일 때의 이야기.'
그러니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어째선지 모르게, 자신의 추측이 맞을 것 같단 강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추측만으로 섣부르게 일을 진행할 수는 없는 법.
루드는 추측을 확신으로 바꾸고자 했다.
"2황자와 만나 봐야겠군."
만월학파의 일을 의뢰한 2황자.
쿠두스의 처형에 직접 나섰던 것을 감안하면, 그가 황실에서 의회와 관련된 일의 대표권자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를 떠보면 황실이 정수의 힘을 인지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터.
그렇게 루드가 생각에 빠진 시각.
뀨우-.
한참 동안 오물거리던 세계수의 껍질을 삼킨 슬라브는 만족스러운 트림을 토해 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21화
다음 날, 루드는 곧바로 2황자 하자르를 만났다. 접선 장소는 지난번과 같이 그의 별장이었다.
"갑자기 만나고 싶다 해서 놀랐네."
"저도 바로 뵐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루드를 맞이한 하자르는 너스레를 떨었다.
설마 그가 먼저 만나자 할 줄은 몰랐던 상황. 혹여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했었다.
'다행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별다른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아우라도 이전과 똑같았고.
하자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설마 바로 보자고 할 줄이야.'
한편, 루드 또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2황자나 되는 인물의 일정이 여유로울 리 없을 터. 연락을 취하긴 했지만 그를 만나기까지는 꽤 시간이 소요될 거라 생각했다. 한데 연락을 보내자마자 만남이 성사된 것이었다.
'그만큼 의회의 일이 중요하다는 거겠지.'
황실과 의회의 갈등이 심해지는 중이었다.
그로 인해 소드마스터까지 잃은 황실이었으니, 현재의 그들에게 가장 큰 적은 의회라 해도 무방했다.
하자르는 그 황실을 대표하는 인물. 추측하건대 의회를 상대하는 일에 있어선 전권을 위임받았을 이였다.
어쩌면 그가 다른 일정을 미뤄서라도 자신과의 만남을 우선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현시점에서 의회를 겨눌 가장 날카로운 칼은 자신이었으니.
'나에게는 잘된 일이다.'
빠르게 성사된 만남. 덕분에 황실이 정수에 관해 알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그래,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건가?"
"맡겨 주신 일에 관해 말씀드릴 게 있어 뵙고자 했습니다."
"무엇이지?"
대답하기에 앞서, 루드는 하자르를 바라봤다. 지금부터 그의 표정과 기색의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을 셈이었다.
황자와 눈을 마주친 루드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부탁하신 일을 처리하기 위해 만월학파를 찾아갔었습니다."
"빠르군."
루드의 말에 하자르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만월학파를 처리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가 바로 나설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약속한 게 있다 한들 의회를 건드리는 건 그로선 괜한 원한을 살지도 모를 행위였으니 최대한 시간을 끌 거라 여겼었다.
한데 벌써 행동에 나섰다니.
"그곳에서 숨겨진 공간을 발견했습니다."
"숨겨진 공간인가. 그것 때문에 나를 찾아온 것이겠군."
"예, 알고 계셨습니까?"
"어느 정도는 짐작했네. 외부와의 접촉을 꺼리기로 유명한 곳이지 않은가. 단순히 의회와의 접점을 숨기기 위함이라 보기엔 정도가 심했지. 작정하고 파고들면 그들이 의회의 것이란 건 쉽게 알 수 있는데 말이야."
하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째서 자신을 보고자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에게 줬던 정보지에 첨부돼 있지 않은 내용이었지.'
비밀 공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으나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에게 전달한 만월학파 관련 정보에는 관련 내용이 삽입돼 있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선 비밀 공간을 발견했을 때 당혹스러웠을 터. 자신을 찾아온 것은 그 때문일 것이었다. 아마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묻기 위함이겠지.
"수없이 많은 마법들로 보호되고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여러 실험이 진행된 흔적이 있었고요."
"그런가."
비밀 공간의 존재에 크게 놀라지 않은 황자.
그 모습을 확인한 루드는 본격적으로 미끼를 던졌다.
"그중 흑마력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흑마력?"
"예. 뛰어난 지식은 아니나 마법에 관해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는데, 분명 흑마법을 연구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만월학파가 흑마법을 연구했다는 정보.
그것과 더불어 루드는 증거물이라며 무언가를 건넸다.
"사특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그곳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불길한 기운, 흑마력이 느껴지는 목각 인형이었다.
인형부터 내재된 마력까지 전부 루드가 만든 것이었지만, 황자가 그것을 알아챌 재간은 없었다.
"처음에는 그들 전부를 몰살시킬 계획이었으나, 그들이 흑마법을 연구했다는 사실은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발걸음을 돌리고 이리 찾아오게 됐습니다."
"확실히 그렇군. …흑마법이라."
하자르는 손으로 미간을 쓸었다.
'설마 거기까지 갔을 줄이야.'
눈썹 끝을 매만지던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루드를 응시했다.
지금의 정보가 거짓일 확률도 배제할 순 없었다. 잠시 손을 잡기론 했지만, 눈앞의 사내는 자신의 부하가 아니었다. 전문성 있는 마법사도 아니었고.
하지만 그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의회가 그쪽에 손을 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미 그들이 흑마법사 요렌테와 접촉했단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간의 정황들을 따져보면 그들이 흑마법을 연구했다는 건 진짜일 가능성이 높았다.
"고맙군. 덕분에 뜻밖의 정보를 알게 됐어. 자네 말대로 이건 써먹을 수 있겠군."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한데, 이걸 왜 내게 알려 준 건가?"
다만, 그것을 자신에게 알려 준 이유가 무엇인가.
하자르는 제 앞에 선 인물을 바라봤다.
가짜 더스틴, 루드비코란 이름의 사내.
구르드손 가의 손님이자 소드마스터 미켈레 구르드손의 손녀를 치료한 인물.
일신의 무위는 소드마스터로 추정되며, 쿠두스와 그의 제자에게 관심을 보임.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고작 이 정도.
황실의 힘으로도 그의 정보를 알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인 것처럼 그에 관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으니.
"…일이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되길 바랄 뿐입니다."
루드는 그 시선을 받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야 아무 문제없이 떠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황자는 한동안 루드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에게 정보를 준 이유는 몰라도, 그 정보가 도움이 된다는 건 분명한 사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그에 관한 건 천천히 알아 가도 충분하겠지.'
이미 그에 대한 2차 조사를 명해 둔 상태였다. 특무대까지 동원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좀 더 세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
무엇보다 그가 쿠두스와 페드리란 인물을 보호하고자 하는 이상, 한동안은 자신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로 흘러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만.'
적색과 청색을 오가는 압도적 크기의 아우라.
그 색을 청색으로 고정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으나, 만약 적색으로 넘어가는 기미가 보인다면....
'미래의 위험 요소가 되기 전에 죽이는 수밖에.'
소드마스터로 추정되는 그의 무력이었으나 이곳은 제도. 자신의 명 한 마디에 목숨을 바칠 병력이 수만이었다.
물론 그들로 그의 목숨을 거둘 순 없겠지. 하지만 적어도 발목은 잡을 수 있을 터.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들이 소임을 다하는 동안 그를 상대할 진짜 병력이 당도할 테니.
"그곳의 정보들을 빼내야겠군. 어떤 실험을 했고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 그 배후에 누가 있으며 어떤 지원을 해 줬는지."
하나 그 속내를 내비치진 않았다. 모든 건 만약을 대비한 방편일 뿐. 최악보다는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행동해야 했다.
그의 속셈이 어떻든 그가 가져온 정보가 도움이 되는 것도 맞았고.
"사흘 뒤 일에 나설 생각입니다. 일처리가 끝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겠어. 나도 미리 조사단을 준비시켜 놓겠네."
황자와의 대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 뒤 만월학파를 처리하고, 비밀 공간에 있는 실험 자료들을 넘긴다.
'황실이 손에 쥐게 될 건 가짜겠지만.'
다만 그 자료들은 전부 바꿔치기 된 가짜일 터.
'황자는, 황실은 정수에 대해 모른다.'
이번 대화를 통해 확신했다. 황실은 정수의 힘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어떤 특성을 가졌고 어떤 힘을 품고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일부러 흑마력과 흑마법을 언급하고 반응을 살펴봤다.
정수는 흑마력을 띠는 성질을 갖고 있었으니, 황실이 정수와 의회가 그것을 연구하고 있단 사실을 알았다면 자연스레 정수를 떠올렸을 것이다.
하나 황자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흑마력이 아닌 흑마법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 증거를 찾으면 의회를 압박할 수 있을 거란 생각과 함께.
이 모든 모습은 정수를 모르기에 나온 반응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용건은 이게 끝인가?"
"예."
"그렇군. 이만 돌아가 봐도 좋네."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떠나려던 때. 황자가 한 소리를 덧붙였다.
"아!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접촉해 오는 이들을 조심하게. 자네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으니 말이야."
"…물론입니다."
루드도 황자의 말이 뜻하는 의미를 알았다.
당장 카리븐에서 더스틴의 죽음을 목격한 이들이 여럿이었다. 그들 중에도 돌아온 더스틴의 진위에 의문을 품은 이들이 많을 터.
그들만이 아니었다. 기존에 더스틴과 관계가 있던 이들도 그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 하겠지.
'아직 가짜 더스틴이란 사실을 들켜선 안 된다.'
특히 의회를 조심해야 했다. 의원들 가운데엔 그 신원이 밝혀진 이들도 있었지만,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으니. 그들 중 누가 우연을 가장해 접촉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생각과 함께 별장 복도를 걷던 도중, 반대편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사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더스틴 경."
루드는 사내의 정보를 떠올려 냈다.
"파라우드 님 아니십니까. 이곳엔 무슨 일로."
"하하, 황자님의 별장을 찾는 이유가 황자님을 뵙는 것 말고 더 있겠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파라우드란 이름의 사내는 도서관을 통해 받은 정보에 포함돼 있던 인물이었다.
제국 최고로 손꼽히는 후원자.
여러 기사단과 마법학파들이 이미 그의 후원을 받고 있었고, 그보다 많은 곳들이 그의 후원을 받길 원했다.
그가 후원하는 기사단 중엔 클라우드 기사단도 있었으니, 더스틴과도 관계가 있는 인물이었다.
"일을 겪으셨다 들었는데 무탈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장갑을 벗은 파라우드가 악수를 권했다. 루드는 옅은 미소와 함께 악수를 받았다.
악수를 마친 파라우드는 시답잖은 말을 몇 마디 나누다 황자를 만나기 위해 사라졌다.
'흠.'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루드도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 * *
'역시 가짜였어.'
황자가 기다리는 방 앞에 선 파라우드는 제 손을 바라봤다.
조금 전 더스틴과 악수했던 손은 은은한 파란빛이 돌았다.
그건 방금 전의 더스틴이 가짜라는 증거.
'놈은 더스틴이 아니다.'
더스틴이 황자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기 무섭게 황자와의 약속을 만들었다.
예정돼 있지 않은 일정이었으나, 황실에도 자신의 투자를 받아 진행하는 사업이 여럿 있었으니 약속을 만드는 것쯤이야 간단했다.
그렇게 찾은 별장에서 드디어 더스틴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손에 미리 발라 둔 것은 폴리모포르. 제조 과정에 섞인 마력의 주인과 접촉하면 반응하는 성질을 지닌 약품으로, 의회의 회의에서 더스틴의 정체를 간파할 수 있다 자신한 이유였다. 예전에 얻었던 더스틴의 마력을 아직 갖고 있었으니.
폴리모포르를 바른 손의 색이 변하지 않고 여전히 푸른빛이 돈다는 건 방금 전의 더스틴이 가짜란 의미였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장갑으로 손을 가린 파라우드는 황자를 만났다.
이후 준비해 둔 여러 대화거리를 소진한 후 천천히 황자의 별장을 빠져나왔다.
당장이라도 의회의 모두에게 더스틴이 가짜임을 밝히고 싶었지만, 조급해해선 안 됐다.
아직 보는 눈이 많았다. 특히 2황자는 자신들의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운 인물.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선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자신이 의회 소속이란 건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었으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황자가 자신이 의원임을 알지도 모를 일이다. 황실의 정보력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으니.
당장은 모르는 것 같아 보인다지만, 나중을 위한 기만술일 수도 있었고.
"흐흐…."
별장을 빠져나온 파라우드는 웃음을 머금었다.
더스틴의 정체가 가짜임을 파악했으니 다른 의원들과 강구책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황실은 자신들이 더스틴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여길 테니, 그를 역이용할 수도 있을 터.
대기시켜 놓은 마차를 탄 파라우드는 자택으로 향했다.
다음 회의가 기다려졌다.
한편.
들뜬 마음으로 돌아가는 그의 뒤를, 루드가 조용히 뒤따랐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22화
2황자를 만나고 나온 파라우드. 루드는 조용히 그의 뒤를 밟았다. 마차를 탄 그는 곧장 자택으로 돌아갔다.
파라우드의 저택은 제도의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었다. 상업지구와 가까우면서도 시끄럽지 않고 호화로운 저택들이 몰려 있어 제도에서도 이름 높은 주거 지역이었다.
'경비의 숫자가 상당하군.'
그 이름값에 걸맞게 주거 지역 곳곳엔 무장한 경비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주거 지역의 공공 경비들과 더불어 파라우드의 집은 그가 개인적으로 고용한 병력들이 지키고 있었다.
어지간한 이들은 침입하기도 전에 잡힐 수준. 하지만 루드에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내부는 생각보다 사람이 없다.'
그들의 눈을 피해 파라우드의 저택 안으로 들어온 루드는 조용히 저택을 수색했다. 확장시켜 놓은 기감으로 파라우드와 경비들의 위치는 지속적으로 파악 중인 상태였다.
'아무래도 직접 물어봐야겠군.'
저택 내부를 살피길 얼마간. 루드는 수색을 멈췄다. 파라우드를 찾아가 궁금한 것들을 직접 물을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접촉이 빨랐다. 행동도 노골적이었고.'
루드는 파라우드가 의원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의원들 중 일부는 신분이 드러나지 않았고, 현재의 파라우드는 그러한 이들 중 하나였지만, 미래에도 그런 건 아니었다.
전생의 경험을 통해 루드는 그를 비롯한 의원 대부분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더스틴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달려왔겠지.'
그가 2황자를 찾은 것은 자신과 접촉하기 위한 구실일 터. 두 사람의 대화가 금방 끝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손에 묻혀 놓았던 기묘한 액체. 처음에는 땀인가 했지만, 곧 아니란 걸 깨달았다. 티끌만큼에 불과했으나 마력이 느껴졌다. 짐작하건대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이었겠지.
루드는 파라우드가 있는 서재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얀 천으로 손을 닦고 있는 파라우드가 보였다.
"무슨 일이냐. 노크도 없이."
"실례 좀 하겠습니다."
갑작스런 방문에 인상을 찡그린 파라우드. 버릇없는 사용인이 잘못 들어온 건가 싶었던 그였으나 그게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넌 누구냐. 밖에 누구 없느냐! 경비!"
의문의 인물을 마주침과 동시, 파라우드는 기민하게 반응했다. 곧장 책상 아래의 스위치를 누르고 큰 목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조금만 있으면 무장한 경비들이 몰려올 터.
"네 녀석은 누구지?"
"궁금한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하나 그런 상황에도 루드는 여유로웠다. 루드는 자신도 더스틴도 아닌 제3자의 외양을 한 채 파라우드를 바라봤다.
"궁금한 게 여러 가지지만, 축약하자면 의회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겠군요. 파라우드 의원님."
"!!"
의회를 언급하자 동요하는 파라우드.
"의회의 회의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의원 간의 관계는 어떻고 각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어떤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뭐 그런 거 말입니다."
루드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뒤로 물러나며 연신 책상 아래의 스위치를 누른 파라우드였으나….
"소용없을 겁니다. 이곳에 있는 마법 장치들은 전부 망가졌을 테니까요."
대기 중인 경비병들에게 신호를 보내야 할 스위치는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후였다.
스위치만이 아니었다. 저택 곳곳에 존재하는 마법 장치들 모두 본래의 역할을 다할 수 없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이미 손을 봐 뒀으니.
마력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것들이라 이상을 일으키는 건 간단했다. 내부의 마력을 일그러트리기만 하면 됐으니.
"이익! 여봐라!"
마법 장치가 먹통이란 걸 깨달은 파라우드가 큰 소리를 냈으나, 그 또한 쓸데없는 발악에 불과했다.
"소리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부의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게 이미 차단해 뒀으니까요."
서재에 들어섬과 동시에 방 전체에 마력을 두른 루드였다. 이것으로 안의 소리가 밖으로 나갈 일은 없었다.
누군가 악에 받친 비명을 지른다 해도, 외부의 누구도 그것을 듣지 못할 터였다.
"…넌 누구냐."
파라우드는 상대가 예사 인물이 아님을 깨달았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마련해 둔 방책들을 순식간에 무용지물로 만들었으니.
'애초에 내가 의원이란 걸 알고 있는 시점에서 평범한 녀석일 리 없지.'
자신이 의원이란 걸 알고 있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같은 의원들과 추정컨대 황실의 극소수 정도만이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나 눈앞의 사내는 그들 중 누구도 아닌 생면부지의 인물.
그 정체를 추측하던 와중.
"우선 더스틴의 정체를 알아내서 어찌하려 했는지부터 여쭤보겠습니다."
"…네놈 설마."
더스틴과 관련된 질문에 파라우드의 눈이 커졌다.
상대의 정체에 관해 의심 가는 바가 생긴 연유였다.
"예. 맞습니다."
루드는 그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인시켜 줬다. 고개를 끄덕인 루드의 모습이 더스틴의 것으로 바뀌었다.
"가짜 더스틴이 바로 네놈이었구나!"
마침내 침입자의 정체를 깨달은 파라우드.
그는 경악했다.
분명 눈앞에서 보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얼굴과 몸이 뒤바뀌었다. 직접 확인한 게 아니었다면 믿지 못했을 상황.
"성실히 대답해 주신다면 고통 없이 죽여 드릴 것을 약속드리죠."
"…미친 녀석."
파라우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죽일 거란 소리를 듣고도 순순히 대답할 바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능력이 뛰어난 건 인정하겠으나, 그 오만함이 네놈을 죽게 만들 것이다.'
대화를 이어 가는 동안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씩 움직이던 파라우드였다.
침입자가 문을 막고 서 있어 방을 빠져나갈 순 없었으나, 바깥과 이어진 통로는 그곳만이 아니었다.
챙그랑-!!
목표하던 지점에 도착한 파라우드는 망설이지 않고 책상 위의 시계를 집어 창밖으로 던졌다. 창문이 깨지며 큰 소리가 났다.
마법적인 장치를 전부 해제하고 내부의 소리가 외부로 나갈 수 없게끔 차단해 놨더라도, 지금의 소리마저 막을 수는 없을 터.
파라우드는 비릿한 미소를 품었다. 곧 침입자를 제압할 병력들이 달려올 것이었다.
'네 능력은 잘 써 주마!'
외관을 바꾸는 녀석의 능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폴리모포르가 아니었다면 직접 마주했음에도 정체를 간파하지 못했겠지.
모습을 바꾸는 과정은 또 어떤가.
눈앞에서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되는 그 능력.
'우리의 꼭두각시로 만든다면 유용하게 쓸 수 있을 터!'
그 능력을 자신들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똑똑똑-!!!
"무슨 일이십니까!"
창문이 깨지는 소란에 경비들이 달려왔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상황을 묻는 경비들.
하지만 파라우드의 뜻대로 그들이 루드를 체포하는 일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손이 미끄러져 시계를 놓쳤을 뿐. 별일 아니니 돌아들 가도 좋다."
"아! 알겠습니다.
파라우드는 경악한 채 이어지는 상황을 지켜봤다.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로 문 너머의 경비와 대화를 나누는 침입자. 심지어 어째선지 자신은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커헉...."
그것이 그가 뿜어낸 살기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 건 잠시 뒤의 일.
소란에 몰려왔던 경비들이 돌아간 후, 루드는 파라우드를 향해 풀었던 기세를 갈무리했다.
"아무래도 좋은 말로는 안 될 분이시군요."
동시에 품에서 비수를 꺼냈다. 좋은 말로 해서 들어먹지 않는다면 조금 강압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다가서는 루드.
"조금 아플 겁니다. 질문에 답할 의양이 생기신다면 언제든 오른손을 들어 주세요. 자, 따끔합니다."
오늘 하루가 끝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 * *
서재 곳곳에 최상급 용해액을 뿌리자 오묘한 향과 함께 진동하던 피비린내와 지린내가 빠르게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파라우드의 시신에 용해액을 뿌려 그 흔적을 지운 루드는 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협박과 고문을 앞세우자 파라우드는 원하던 정보를 빠르게 뱉었다.
의회가 접선하는 방법, 회의가 진행되는 방식, 더스틴의 정체를 판별한 후 하려 했던 계획, 그 외에도 의회와 관련된 여러 정보와 파라우드 개인에 관한 것 등.
고통과 공포에 물든 파라우드는 묻지 않은 것까지 세세하게 얘기했다.
한참 동안 정보를 수집하던 루드는 그에게서 더 이상 얻을 정보가 없다고 확신한 후 그를 죽였다.
제국 최고의 의사 결정 조직 의회. 그 의회를 조직하는 의원을 죽인 일.
의회를 구성하는 의원의 수는 고작 열둘에 불과했으니 파라우드의 죽음은 고작 하나의 죽음이라 할 수 없었다.
다만, 파라우드의 죽음이 밝혀지는 건 한참 나중의 일일 터.
변신 신비를 사용한 루드의 모습이 한순간에 파라우드의 것으로 바뀌었다. 키와 골격도 파라우드와 똑같이 변했다. 육안으로만 봤을 땐 누구도 가짜란 걸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파라우드의 모습으로 의회에 침투한다.'
굳이 정체를 드러내고 파라우드를 고문하면서까지 많은 정보를 얻은 것은 그를 위함이었다.
의회의 일원으로서 활동하는 것.
그리하면 의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그들의 생각, 향후 행동들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을 역이용하는 것도 가능했고.
'내부에서부터 뒤흔들면 아무리 강한 조직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지.'
루드는 의회를 흔들 생각이었다. 장기적으로는 의회뿐만이 아니라 제국 전체를.
파라우드를 죽이고 그의 신분을 획득한 건 그를 위한 단초였다.
"다음 회의는 5일 후인가."
의회의 다음 정기 회의는 5일 후.
그때면 의회를 직접 마주할 수 있겠지.
'만월학파를 처리하고 가면 딱 맞겠군.'
그전에, 만월학파를 처리할 계획이었다.
사흘 뒤, 늦은 밤.
루드는 은밀히 만월학파의 비밀 공간을 찾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공간 내부에는 다섯 개의 정수가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만월학파를 처리하기에 앞서 이곳의 정수와 재료들부터 수거할 생각이었다. 전투 양상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으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잠시 정수를 바라보던 루드는 아공간 주머니를 꺼냈다. 이후 비밀 공간 곳곳에 산재된 희귀 재료들과 연구 자료들을 전부 그곳에 담았다.
빠르게 채워지는 아공간 주머니. 상등품인 데다 이곳에 오기 전 비워 뒀음에도 어느새 포화 상태가 됐다.
"이제부터가 진짜지."
딱 한 줌 남겨 놓은 공간. 그건 정수를 위한 자리였다.
다만 지금 상태의 정수를 아공간 주머니에 넣을 수는 없었다.
루드는 품에서 다섯 개의 함을 꺼냈다. 정수의 기운이 밖으로 흐르는 것을 막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해 주는 함은 만월학파를 처리하기까지 사흘이란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였다. 이것을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렸으니.
루드는 조심히 정수들을 꺼내 함에 담았다.
그 순간.
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귀가 아플 정도로 크게 울리는 경보음.
만월학파 전체에 들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곧 경보음을 들은 사람들이 찾아올 터.
하지만 루드는 당황하는 대신 침착하게 나머지 정수들을 담았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놀랄 이유가 없었다.
마침내 모든 정수를 함에 담아 아공간 주머니에 넣은 루드.
'이제 됐군.'
이것으로 준비는 마무리.
이제부턴, 본격적으로 만월학파를 처리할 시간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23화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
내면의 검은색 문을 연 루드는 천천히 정수의 힘을 끌어올리며 그들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웬 놈이냐!"
이윽고 나타난 마법사들. 건물에 상주하고 있던 모두가 달려온 듯 많은 숫자였으나,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얼음 가시."
이미지를 그림과 동시에 만들어진 얼음 다발이 마법사들을 노렸다. 매서운 속도로 날아가는 얼음 창.
하나 마법사들도 쉽게 당하진 않았다. 경보와 함께 침입자의 존재를 인지한 그들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 둔 상태였다.
"파이어볼!"
"실드!"
"매직 애로우!"
미리 준비해 둔 마법이 펼쳐졌다. 파이어볼이 얼음 가시의 위력을 반감시켰고,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나머지 힘은 실드가 막아냈다. 동시에 쏘아지는 공격 마법들.
"상대는 혼자다!"
"영창할 시간을 주지 마!"
마법사들은 수적 우위를 토대로 밀어붙였다. 침입자는 자신들과 같은 마법사. 하지만 다수인 자신들과는 달리 혼자였다. 거리 유지와 템포 조절만 실수하지 않는다면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터.
'좋은 판단이군. 상대가 일반적인 마법사였다면 말이야.'
그들의 대처에 루드는 짧은 소감을 품었다. 보통의 마법사는 마법을 형성하는 데 고도의 집중력과 시간을 필요로 했으니, 차륜전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저들이 가진 이점을 살리는 훌륭한 대처였다.
그러나 루드는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었다. 갖고 있는 힘도 마찬가지였고.
"저주의 굴레."
마법사들의 머리 위로 음울한 보랏빛을 띠는 원이 생겨났다. 짙은 흑마력을 품은 굴레는 제 아래에 위치한 모든 생명에게 저주를 내렸다.
"끄어어억…!"
"흐어...."
"사, 살려…!!"
숨통이 죄이고 목 안이 타들어 가는 고통.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근육이 쪼그라들고 피부는 힘을 잃어 축 늘어졌다.
마법사들마다 일어나는 현상은 상이했지만 끔찍한 고통과 무력감을 선사한다는 건 똑같았다.
"흑마법사…!!!"
마법사들이 경악했다. 얼음 창에서도 스산한 기운이 느껴지긴 했지만 빙 속성 마법의 특성이라 여겼었다. 하나 지금의 마법은 분명한 흑마법. 그 말인즉, 상대의 정체가 흑마법사란 소리였다.
"이곳에서 재밌는 걸 연구하고 있더군."
씨익 웃는 루드. 루드는 흑마법사로서 만월학파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추후 2황자의 사람들이 이곳을 조사할 터. 흑마법과 흑마력을 언급해 놨으니 관련된 흔적을 남겨놓을 필요가 있었다.
마법으로 마법사들을 상대하며 마법의 감각을 올리려는 목적도 있었고.
다시 한번 생겨난 얼음의 창. 하지만 마법사들은 이전과는 달리 위력을 약화시킬 화염구도, 충격을 흡수할 실드도 만들 수 없었다. 저주의 굴레에 기력을 뺏긴 까닭이었다.
얼음 창이 마법사들을 꿰뚫을 상황.
그러나 그 직전, 얼음의 창이 부서졌다.
새로운 마력이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왔나.'
루드는 뒤늦게 도착한 이들을 확인했다. 만월학파의 마스터와 그의 바로 아래 경지를 구가하고 있다는 4서클 마법사 둘이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저희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마스터."
상황을 파악한 라흐만은 혀를 찼다. 침입자라니.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했었다.
"세계수의 껍질이 없어졌던 것도 네놈의 짓이렷다."
이리 자연스럽게 이곳에 들어와 있는 걸 보면 분명했다. 며칠 전 사라진 세계수의 껍질도 녀석이 가져간 것일 터.
"갈레트는 뒤의 아이들을 추슬러라. 바겟은 나와 호흡을 맞춘다."
"네, 스승님."
양옆의 마법사들에게 명령한 뒤, 라흐만은 곧장 움직였다. 루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빠른 속도로 마법을 발현시켰다.
"라이트닝."
전격과 얼음이 맞부딪쳤다. 얼음 가시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 전격이었지만 전격 또한 소실되는 걸 피할 순 없었다.
하나 전투는 이제 시작. 마법의 파괴와 상관없이 두 사람 모두 다음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만한 거리에서 마법사 간의 싸움이라면 마법의 위력만큼이나 속도도 중요했다.
짧은 시간 동안 얼음과 전격이 연달아 부딪쳤다.
생겨나고 터지고,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서로의 마법이 닿을 때마다 양쪽의 마법이 모두 깨져 나갔다.
회피 기동과 함께 마법을 발현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배틀 메이지의 정석과도 같았다.
'과연 의회의 숨겨진 힘이라는 건가.'
루드는 마스터의 움직임에 감탄했다. 상상 이상의 실력이었다.
끊임없이 마법의 궤적에서 벗어나는 까닭에 저주 마법을 사용하기도 어려웠고, 마법을 발현하는 속도도 상당했다.
자신이 영창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는 걸 감안하면, 그에 맞먹는 속도를 보이는 건 경악스러운 일.
"슬리프!"
"인탱글!"
신경 써야 할 건 라흐만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수시로 들어오는 다른 마법사들의 공격과 방해 공작.
위력은 강하지 않았으나 하나 같이 절묘한 타이밍에 들어와 자신의 흐름을 끊어 먹고 있었다.
그들을 먼저 처리하려 할 때면 마스터가 강력한 마법을 꺼내 들며 훼방을 놓았고.
아마 그들도 지금의 균형이 무너져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일 터.
'하지만 그것도 곧 끝이다.'
루드는 주변을 확인했다. 정수의 마력이 충분히 퍼졌으니, 서서히 마법 발현에 이상이 생길 시간이었다.
"마스터!"
그때, 누군가 라흐만을 불렀다. 동시에 옆으로 빠지는 라흐만.
그 뒤로 갈레트가 나타났다. 다른 마법사들의 보조를 받아 합동 마법을 준비한 상태였다.
"모든 걸 집어삼켜라. 불바다!"
화염계 5서클에 해당하는 대규모 마법 '불바다'. 전쟁에서도 흐름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마법이었다. 제아무리 경지에 오른 흑마법사일지라도 직격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터.
하지만 불길이 침입자를 집어삼키는 광경은 볼 수 없었다.
"이익…!"
"뭐하는 거냐!"
"마, 마법이 발현되지 않습니다. 마력이 안 움직입니다!"
마침내 루드가 기다리던 시간. 정수의 한기가 일대의 마력을 동결시키며 마법사들의 마법 발현을 봉인한 순간이 온 것이었다.
갈레트의 외침에 다른 마법사들도 마법을 펼치려 해 봤지만 전부 실패했다.
이윽고 그들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이, 이건…."
"…정수의 기운. 그랬던 거였나."
정수를 연구했었기에 그것이 어떤 힘을 가졌고,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 알고 있었다.
라흐만은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단순히 흑마법사가 자신들의 실험실에 흥미를 보인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었다.
"네놈. 정수의 힘을 다루는구나."
"이제 와 깨달아 봤자 늦었다."
"아니, 늦지 않았지."
정수의 힘을 다루는 침입자. 그 사실을 알자 라흐만은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다들 이곳을 빠져나가 흑마법사가 침입했다고 알려라."
"얼른!"
마력이 동결됐으니 마법사가 몇이 있든 무의미했다. 그럴 바엔 외부에 지원 요청을 하는 게 나았다. 마침 상대는 흑마법사였으니,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추궁받는다 해도 그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울 수 있었다.
결연한 라흐만의 의지에 마지못해 떠나려던 마법사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들이 살아서 이곳을 나가는 건, 루드가 허락하지 않은 일이었으니.
스걱-!!!
검을 든 루드가 마법사들을 도륙했다.
흑마법의 흔적은 이 정도면 충분했으니, 슬슬 빠르게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었다.
마법을 봉인당한 마법사들은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어느새 라흐만 혼자 남은 상황.
"네놈…."
쓰러진 이들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루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눈엔 부하들을 잃은 비통함보다는 흥미가 가득했다.
"신기하구나. 어떻게 멀쩡한 거지? 정수의 힘을 이렇게나 많이 썼는데 말이야."
"궁금한가?"
"궁금하냐고? 그렇고말고. 정수의 부작용을 없앨 방법을 알고 있는 건가?"
흥미를 넘어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
그것을 마주한 루드는 피식 웃었다.
부하들의 죽음에 분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현상에 집중하는 라흐만은 탐구에 미친 마법사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예상했던 대로인가.'
그리고 그런 이의 눈앞에 정수라는 미지의 힘이 있다면….
"부디 알려 주게나."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그래야 이 끔찍한 부작용을 벗어던질 수 있을 테니!"
라흐만의 몸에서 차가운 정수의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느껴지는 양은 결코 적지 않았다. 이곳에 있던 다섯 개의 정수를 합친 것보다도 많은 양.
'내 속도를 따라올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흡수한 모양이군.'
아무리 뛰어난 배틀 메이지라 하더라도 정수의 힘을 토대로 한 마법 발현 속도를 따라올 순 없었다.
정수를 통한 마법 발현에 미숙하다면 또 모르겠지만, 전생에서부터 그렇게 마법을 사용해 왔던 루드였으니, 결론은 하나였다.
상대도 정수를 통해 대부분의 과정을 생략한 채 마법을 발현했다는 것.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알아보든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네!"
라이트닝 10연발!
라흐만의 손끝에서 가느다란 전격이 쏘아졌다. 흑마력의 향을 풍기는 마법. 연속해서 쏘아지는 전류는 이전보다 가늘었지만, 그 안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
"부디 실험체가 되어 주겠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전격 전체가 라흐만의 몸을 휘감았다. 근처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타 버릴 정도의 강력한 전류였다.
"크흐… 고통스럽군. 하지만 괜찮아. 네놈만 잡으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도 알 수 있을 테니까!"
라흐만은 성큼성큼 걸었다. 얼마나 썼다고 벌써부터 몸에 신호가 왔다. 손과 발은 이미 감각이 안 느껴졌고, 심장 맥동도 느려진 것 같았다.
"봉인을 통해 이 끔찍한 부작용을 한시적으로 없애는 방법까지는 알아냈지."
그건 무수한 실험의 결과물이었다. 숱한 정수를 연구하고, 분석하고, 실험하고… 그 끝에 일시적으로나마 정수의 부작용을 없애는 방법을 알아냈다.
정수의 힘은 쓰면 쓸수록 강해지는 것. 봉인을 통해 그것을 잠가 놓는다면 일시적이나마 냉기와 격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그 또한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정수의 힘이 커지니 결국엔 부작용을 면치 못하겠지만… 지금의 라흐만에겐 당장의 부작용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다.
한데 지금 자신의 눈앞에, 정수의 힘을 사용함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녀석이 있었다.
녀석을 실험하고 해부해 본다면… 부작용을 없앨 비밀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라흐만의 이성을 집어삼켰다.
"벼락 줄."
라흐만은 벼락을 꼬아 만든 기다란 줄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제게 닿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벼락 줄. 어느새 실험실은 본래의 형체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처음에 정수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던 건 봉인 때문이었나.'
가벼운 몸놀림으로 벼락 줄을 피한 루드는 라흐만을 관찰하며 갖고 있던 궁금증들을 하나씩 지워 갔다.
그에게서 처음엔 정수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
그가 정수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
흥분한 라흐만이 본인의 입으로 설명해 준 덕에 어려울 건 없었다.
"슬슬 그만하지."
마침내 모든 궁금증을 해소한 루드는 라흐만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라흐만을 살려 뒀던 이유는 그가 정수의 힘을 사용하는 모습을 확인하기 위함.
이제 그것을 봤으니, 더 이상 그를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라흐만이 휘두르는 벼락 줄의 궤적을 피한 루드가 그의 앞에 당도했다.
"한 가지 말해 주자면, 정수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가 훨씬 까다로웠다."
짧게 밝힌 소감.
정수를 통한 마법은 분명 강력했지만, 그뿐이었다.
파괴력만을 앞세운 단조로움.
오히려 마법 간의 연계가 매끄럽게 이뤄지던 이전이 훨씬 까다로웠다.
서걱-!!
루드의 검이, 라흐만의 목을 날렸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24화
"흐아~암."
제도 동남쪽의 관문. 경비를 서던 병사는 긴 하품을 뱉었다. 조금 있으면 동이 터 오를 시간. 길었던 업무의 끝이 얼마 안 남은 시점이었다. 얼른 퇴근해 늘어지게 자고 싶었다.
"이봐. 저거 뭐야."
"하암, 뭔데."
기지개를 켜며 뻐근한 몸을 풀던 병사는 동료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저 멀리서부터 무언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몬스터인가?"
"그럴 리가, 여긴 제도라고. 제국의 중심! 여기까지 어떻게 몬스터가 와?"
병사들은 눈에 힘을 주고 다가오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다.
"...다시 보니 사람인 것 같은데?"
"내 눈에도 그렇게 보여."
관문으로 다가오는 것의 정체는 사람이었다. 다만, 어딘가 행색이 이상했다.
"다친 건가?"
"피를 흘리는 것 같아."
"무기는 보이지 않는데. 습격이라도 당한 걸까."
비틀거리는 걸음. 심지어 발밑으로 떨어지는 건 핏물 같았다.
관문을 지키던 두 명의 병사는 침을 삼켰다. 창을 쥔 손엔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윽고 관문 앞에 도착한 의문의 인물.
"지, 지원... 을…."
그는 단말마와 같은 소리를 뱉고 쓰러졌다. 안간힘을 다해 간신히 뻗은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병사 하나가 조심스레 그것을 확인했다.
"그게 뭔데."
두 병사는 서로를 바라봤다. 의문의 인물이 건넨 건 원형의 메달. 중요한 건 그 안에 음각된 문양이었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커다란 보름달. 그것은 만월학파의 상징으로, 이 메달은 만월학파 소속의 마법사임을 입증하는 신분패였다.
"당장 알리자!"
"그, 그래."
병사들은 곧장 사태를 인지했다. 만월학파의 마법사가 피투성이가 되어 이곳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만월학파에 변고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메달을 쥔 병사가 관문 안으로 뛰어갔다. 지금의 사태를 알리고 상급자에게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홀로 남겨진 병사는 쓰러진 마법사를 보고 고민에 잠겼다.
동료가 보고를 위해 자리를 비웠으니, 원칙대로라면 자신은 이곳에 남아 관문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빨리 알려야 하는데.'
하지만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왔던 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어느 높은 분의 부탁으로 왔다던 사내.
그는 돈을 건네며, 관문 앞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자신에게 알려 줄 것을 부탁했다.
직감적으로 사내가 말한 것이 이번 일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위험한 일에 연루됐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약속을 지키면 더 큰 돈을 주겠다고 했었지.'
언질과 함께 주었던 돈도 결코 적지 않은 금액. 사내에게 소식을 전한다면 얼마나 큰 돈을 만질 수 있을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자리를 비웠던 걸 모르게 빨리 다녀오면 되지 않을까...?"
들킨다면 징계를 면치 못할 게 분명했다.
하나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돈.
잘하면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 한 차례 주변을 훑은 병사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곤 빠르게 움직였다.
일전에 자신을 찾아왔던 사내에게 소식을 전해야 했다.
그렇게 병사들이 관문을 비우고.
덩그러니 남겨졌던 시체가 천천히 일어났다.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턴 그는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던 조금 전과 달리 무척이나 태평한 기색이었다.
"이제부턴 2황자가 알아서 하겠지."
그의 정체는 루드였다. 만월학파를 처리한 뒤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만월학파의 마법사로 위장해 관문까지 온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소식을 알렸으니 대기하고 있던 황자가 곧장 움직일 터.
만월학파에 도착한 황자의 세력은 비밀 공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그 안에 남아 있는 여러 실험과 흑마법의 흔적도.
'전부 조작된 것들이지만.'
만월학파를 몰살시킨 루드는 그들이 연구한 자료들과 그간 모아 둔 재료들을 찾아 미리 준비해 간 가짜들로 바꿔치기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낸 후에는 건물을 무너트렸다. 비밀 공간이 붕괴하지 않을 정도로. 그곳을 발견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낼 수 있게끔.
'황실은 의회가 흑마법에 손댔다 여길 테고, 의회는 황실이 정수를 알게 됐다 생각하겠지.'
만월학파를 확인하는 건 황실만이 아닐 터. 의회 또한 변고가 발생한 만월학파를 조사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황실을 의심하겠지.
두 세력의 갈등은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었다.
'드디어 끝났는가.'
동남쪽 관문에서 일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하자르는 그것이 기다리던 소식임을 직감했다.
제도 동남쪽에 위치한 만월학파였다. 게다가 오늘은 루드비코가 약속했던 날, 틀림없었다.
"황자 전하."
"다들 준비하라, 바로 움직인다."
이미 조사대를 꾸려 둔 상태였다. 기사와 마법사, 성직자로 구성된 조사대는 만월학파에서 일어난 일을 확인하고 증언할 것이었다. 그곳에서 어떤 실험이 이루어졌는지도.
"토르강, 부탁하지."
"맡겨만 주십시오. 전하의 기대에 부응하겠나이다."
다만 하자르가 그들을 직접 이끌 수는 없었다. 갑작스레 일어난 사건에 황자가 예상했다는 듯 나타날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 당장 조사대를 파견하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컸다.
그럼에도 발 빠르게 움직이는 이유는 하나. 그곳에 있을 흑마법의 흔적을 미리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자칫 행동이 늦었다간 의회가 먼저 나서 흔적을 지울 수도 있었으니.
"반드시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하여 하자르는 자신을 대신할 인물을 골랐다.
토르강, 믿음직한 수하이자 뛰어난 실력의 기사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라면 자신의 기대에 부응해 줄 터.
하자르의 기대를 등에 업은 토르강은 조사대를 이끌고 만월학파로 향했다.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쳐 놓았기에 빠른 속도로 출발할 수 있었다.
"흠…."
만월학파에 도착한 조사대.
토르강을 비롯한 모두는 침음을 삼켰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까닭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말도 안 되는 광경이군요."
"세상에, 건물이 죄다 반파됐습니다. 심지어 마법 금속으로 이뤄진 건물인데."
반으로 쪼개진 채 무너져 내린 건물. 소라 모양의 외관으로 유명하던 만월학파의 건물이었으나 본래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갈라지고 부서진 잔해만이 남아 있을 뿐.
"...흑마법의 냄새가 납니다."
그때 조사대에 포함된 성직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코끝을 찌르는 싸한 냄새와 불쾌한 감각. 흑마법의 기운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조사해 보지. 건물이 불안정하니 다들 조심하게.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바로 알리고."
"네."
조사대는 무너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워낙 심하게 부서진 탓에 언제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무려 황자 전하의 명이었으니.
게다가 성직자가 흑마법의 냄새가 난다고 하지 않았나. 흑마법은 대륙 공통의 적. 이번 일이 흑마법과 연관돼 있다면 더욱 면밀한 조사가 필요했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처럼 건물이 붕괴되는 일은 없었다. 조사대는 내부 곳곳을 확인하며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흑마법의 흔적은 어디에 있는지 등을 알아내기 위해 움직였다. 가끔 발견되는 만월학파의 연구 자료를 챙기는 것도 당연했다.
"토르강 님! 이곳에 숨겨진 공간이 있습니다!"
"어디인가!"
"지면 아래인 것 같은데, 저희 힘으론 입구를 벌리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러길 얼마 후.
별다른 소득을 내지 못하던 조사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지하에 위치한 비밀 공간의 발견.
아래로 내려온 토르강은 다른 조사대와 함께 아래를 확인했다.
'드디어 찾았나.'
황자의 언질로 비밀 공간이 핵심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나, 다른 이들 앞에서 그것을 드러낼 순 없는 일.
누군가 그곳을 발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윽, 이곳이 분명합니다. 흑마력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군요."
좁은 틈새로 드러난 비밀 공간에 성직자가 고개를 내둘렀다. 아까 전 느낀 흑마법의 향은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이곳을 조사하면 무언가 알아낼 수 있을 터.
문제는 비밀 공간으로 들어서는 입구가 너무 좁다는 것이었다.
"입구가 좁습니다. 들어가다 자칫 붕괴되기라도 한다면…."
"다들 비키게."
토르강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조사대를 뒤로 물렸다.
'입구가 좁은 게 문제라면 넓히면 될 뿐.'
검을 든 그는 건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비록 건물을 이리 만들 정도의 파괴력은 담지 못하지만... 검술은 파괴력만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는 자신만의 길과 기교가 있었다.
'보였다.'
집중한 토르강의 눈에 비친 궤적.
어디를 어떻게 잘라야 다른 잔해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입구만을 벌릴 수 있을지.
그 길을 꿰뚫어 본 토르강의 검이 날카로운 궤적을 그렸다.
삭! 사삭-! 서거거걱!!!
순식간에 그려진 수십 개의 선을 따라 절삭된 잔해.
부드럽게 흘러내린 잔해들은 놀랍게도 반파된 건물의 균형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들어가지."
가장 먼저 비밀 공간으로 들어선 토르강.
"이곳은…!"
"여기가 조사의 핵심이겠군요."
뒤늦게 따라 들어온 조사대가 경악했다. 성직자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들 또한 짙은 흑마법의 기운을 느낀 까닭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건물이 반파됐음에도 보이지 않아 어디 있나 싶었던 마법사들이 죄다 이곳에 있었다. 그것도 전부 목숨이 끊어진 채로.
'정체가 무엇인진 모르겠으나, 대단한 실력이다.'
토르강은 마법사들의 시체를 살폈다. 그들의 사인은 모두 똑같았다. 목을 가른 자상. 심지어 그 위치와 간격도 전부 동일했다. 그들을 죽인 자의 검술이 상당하다는 의미.
'파괴력만 뛰어난 게 아니었군.'
시체의 흔적을 봤을 때 흉수는 하나였다. 그 말인즉, 마법사들을 죽인 이와 건물을 파괴한 이가 동일 인물이란 소리.
'한번 견주어 보고 싶군.'
무인으로서의 호승심이 샘솟았다.
'황자님께 부탁해 보면 되려나.'
하자르가 지금 일과 연관돼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누구를 동원해 만월학파를 처리했는지는 몰랐지만, 부탁한다면 그 인물을 만날 수 있을 터. 기회가 된다면 대련이라도 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찾았습니다. 흑마법의 흔적입니다."
"여기도 있습니다!"
"흑마법과 관련된 실험 자료로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만월학파의 마스터 라흐만 아피포의 시체를 확인했습니다!"
"그의 두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밀 공간에 입성하자마자 빠르게 진척되는 조사.
이윽고 모든 조사를 마친 조사대는 다시 제도로 복귀했다.
제도로 돌아온 토르강은 곧장 하자르를 찾아갔다.
"어떻게 됐나."
"모든 것은 전하의 뜻대로."
하자르의 앞에 부복한 토르강.
고개를 숙인 그는 조사 과정에서 찾은 자료와 증거물들을 하자르에게 건넸다.
"됐군. 이제 됐어."
그것을 확인한 하자르는 눈을 빛냈다.
흑마법을 연구한 흔적들.
마법사와 성직자를 다수 포함시켰던 조사대였으니, 그들 또한 만월학파가 흑마법을 연구했음을 입증해 줄 터.
'서서히 숨통을 조이다… 한 번에 끊어 낸다.'
의회의 숨통을 끊을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25화
루드는 파라우드의 서재에서 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조금 있으면 의회의 정기 회의 시간. 의원들을 직접 대면할 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루드는 책장의 책들을 연달아 뽑았다. 순서에 맞춰 책을 움직이자 책상 밑의 바닥이 갈라지며 숨겨진 공간이 나타났다.
"이런 시스템인가."
그 안으로 들어서자 지상과 연결됐던 통로가 닫혔다. 내부를 밝히는 불빛이 켜진 덕분에 시야가 어둡지는 않았다.
루드는 입구에서 시작된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의 끝에 나타난 건 밀실이었다. 탁자와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작은 공간.
하지만 이 공간 전체에 강력한 마법이 걸려있었다.
지잉-
의자에 앉자 환하던 시야가 암전됐다. 다시 시야가 밝아졌을 때, 루드는 조금 전의 밀실이 아닌 새로운 공간에 와 있었다.
'이곳이 의회의 회의장.'
작은 탁자와 의자만 놓여 있던 풍경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나타난 건 커다란 탁상과 그곳에 둘러앉은 가면인들.
이곳이 바로 의회가 회의를 진행하는 장소이자, 그들의 의사가 결정되는 공간이었다.
'대단한 마법이군.'
루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제각기 다른 환경에 있었을 의원들이 동일한 장소에 모일 수 있는 건 조금 전에 느꼈던 마법의 힘 덕분일 터.
'환영과 통신, 그 외에도....'
처음 보는 형태의 마법. 루드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며 이 상황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느껴지던 기운과 마법의 결과를 토대로 내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 추측했으나, 그것으로 전부를 간파할 수는 없었다.
'이 안에서 일어난 일이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날지도 궁금하군.'
생각하면 할수록 대단한 힘. 당장 회의가 이뤄질 이 공간은 마법의 힘으로 구축된 환상의 영역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만약 이 안에서 일어난 일이 외부에도 똑같이 영향을 미친다면....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를 죽이는 것도 가능하겠지.'
새로운 형태의 암살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모두 모였군요."
의원들의 수를 헤아린 의장이 운을 띄웠다.
루드가 들어온 후에도 두 명의 의원이 더 나타났으나 아직 한 자리가 비어 있는 상황.
하지만 의장은 모두 참석했다며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오늘 회의는 저희 열한 명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 이유는…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도 고생이 많겠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지 뭡니까."
"역시 황실의 소행이겠죠?"
그러나 그것에 놀라는 의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 모두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지난밤 들려온 만월학파의 전멸 소식.
자리를 비운 의원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그와 관련해 처리할 일이 엄청날 테니.
정기 회의는 되도록 참석을 권장하는 의회였지만, 특수 상황에서는 피치 못하게 불참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이 그런 경우였다.
'무단 불참이었다면 다른 의원들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왔을 터. 상황을 보면 의장에게 미리 언질을 해 둔 건가. 지금 시점에서 급하게 자리를 비웠다면... 만월학파 때문이겠지.'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정황상 의회 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추측해 낸 루드.
그렇게 한참 대화를 분석하고 있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공간 안에 울려 퍼졌다.
"다들 놀랐을 것을 압니다. 하지만 우선은 정해져 있던 안건부터 처리하려 합니다. 만월학파에 관한 안건도 오늘 회의에 예정돼 있으니, 그에 관한 말은 그때 하는 걸로 하시죠."
"옳은 말씀입니다."
만월학파의 이야기와 함께 시끄러워지던 의원들을 단번에 진정시킨 의장.
'저자가 의장… 정체가 뭐지?'
장내의 분위기를 살피던 루드는 그의 정체를 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생의 경험으로 의원 대부분의 정체를 알고 있는 루드였다. 파라우드의 접근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의원들 대부분의 신분을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의장의 정체는 전생에도 지금에도 베일에 싸여 있었다.
바깥에서의 신분이 어떤지, 이름이 무엇인지, 하다못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지 못했다.
'마법 때문에 목소리로 구분할 수도 없다.'
회의장을 구성한 마법은 감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의장뿐 아니라 의원들 모두의 목소리가 연령과 성별을 파악할 수 없는 변조된 목소리로 들렸다.
'의장의 정체를 특정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을.'
루드는 아쉬움을 삼켰다. 전생에서 얻은 정보 중에는 의회의 결정에 의장의 역할이 상당하단 내용이 있었다. 지금의 모습만 봐도 의회 내에서 그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는 상황.
그를 제거한다면 의회를 처리하는 게 한결 수월해질 터였다.
하나 그 정체를 알지 못했으니, 그를 찾아가 암살할 수도 없었다.
'이 안에서의 죽음이 실제 죽음으로 이어지는지도 모르니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고.'
만약 이 안에서의 죽음이 바깥의 죽음과 같다면, 지금 시점에서 의회와의 싸움은 끝난 것과 같았다.
이 자리에 루드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
하지만 그것을 확인하지 못한 상황에서 모험을 택할 수는 없었다.
가짜란 걸 들켰다간 앞으로의 회의에 참석할 수 없을 터.
거듭될 회의들에서 얻어 가야 할 것이 많았으니 당분간은 잠자코 파라우드를 연기할 생각이었다.
"첫 번째 안건은 또다시 더스틴에 관한 것입니다."
"참 지긋지긋한 이름이군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의장이 안건을 밝히자 불쾌감을 드러낸 의원들.
그 모습에 루드는 눈을 빛냈다.
정수를 모으는 것이 의회의 단독 행동임을 깨달았을 때 든 생각이 있었다.
의회와 더스틴 간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고, 어떤 이유로 인해, 그 사이가 틀어졌을 거라는 추측.
지금 의원들의 반응을 봤을 땐 그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더스틴의 정체는 파악하셨습니까?"
의장의 말에 파라우드에게로 향하는 의원들의 시선.
지난 회의에서 더스틴의 정체를 밝히겠다고 했던 그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지 궁금했다.
"예, 물론입니다."
"허어, 좋은 소식이군요."
"녀석은 역시 가짜였겠죠?"
의원들의 시선을 받은 루드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자신이 가짜 파라우드란 사실을 들킬 순 없었으니, 의심을 받을 만한 꼬투리도 남겨선 안 됐다.
"더스틴은 가짜였습니다.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고생하셨습니다."
루드의 대답에 좋아하는 의원들.
하나, 모두가 무조건적인 수긍을 한 건 아니었다.
"의원님을 못 믿어서는 아니지만, 더스틴이 가짜란 증거가 있을까요? 추후 그를 빌미로 황실을 공격하려면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하니까요."
증거를 묻는 물음.
"폴리모포르를 사용했습니다."
"폴리모포르, 과연 그게 있었군요. 한데 그건 사용자의 마력이 없으면 무용지물일 텐데요."
"예전에 우연히 더스틴의 마력을 얻은 적이 있습니다. 그걸 사용했죠. 아직 그의 마력이 섞인 용액이 남아 있으니, 증거가 필요하다면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넘어가는 데 무리는 없었다.
다만,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진짜 파라우드가 어떤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루드는 더스틴과 관련된 판을 더욱 키울 생각이었으니.
"한 가지 의견을 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어떤 의견이실까요?"
"가짜 더스틴을 이용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가짜 더스틴을 이용한다라… 그가 가짜란 사실을 통해 황실을 압박하려는 기존의 방법을 말씀하시는 것 같지는 않고. 다른 생각이 있으신 걸까요?"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라면 모르겠으나 그는 가짜. 황실에서 무엇을 약속받고 더스틴을 연기하는 것인지, 혹은 황실조차 속이고 있는 것인지는 불명확하지만… 그를 포섭할 수만 있다면, 더스틴의 정체로 황실을 압박하는 것보다 훨씬 큰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를 우리 편으로 만들자. 이 말씀이신 건가요?"
"맞습니다. 그를 우리의 뜻대로 쓸 수 있다면 황실의 바로 옆에 첩자를 두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의회가 바라는 것은 황실과의 힘겨루기에서 우세를 점하는 것.
가짜 더스틴을 포섭한다면 조커로 이용할 수 있을 테니 매혹적인 제안으로 여길 게 분명했다.
다만 문제는....
"그가 포섭이 될까요? 황실과 관계없는 인물이라면 다행이겠으나 아예 황실의 사람일 확률도 배제할 수 없는 일인데요."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도 가짜를 포섭하자는 제안은 확실히 구미가 당기네요."
의회가 그의 포섭 가능 여부를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
"제게 한 번 더 맡겨 주신다면 넌지시 떠보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의회의 신분이 노출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포섭에 실패하더라도 우리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는다면… 손해 볼 건 없지 않겠습니까."
"흠. 그것도 그렇긴 하군요."
그러나 그에 대한 대비도 생각해 온 루드였다.
'지금 시점에서 파라우드를 향한 의원들의 신뢰도.'
더스틴의 진위를 밝힌 데다 증거물까지 갖췄으니, 파라우드의 일처리가 뛰어났음을 부정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시점에서 그의 입지는 상당히 높았다.
혼란스럽던 상황을 확실히 정리해 준 것이었으니.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 줬던 그가 이리 자신하며 나선다면 다시 한번 임무를 맡기려 들 확률이 높겠지.
예상대로 의원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의원들의 시선이 의장에게 향했다. 루드 또한 마찬가지. 모두의 시선을 받은 의장의 입이 열렸다.
"확실히 그를 포섭한다면 최고의 패가 되겠죠. 좋습니다. 다른 분들도 긍정적이신 것 같으니, 포섭에 실패하더라도 우리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시도해 볼 법하겠죠."
"존재가 드러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루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렇게 되면 황실과 의회 모두 가짜 더스틴이 자신들의 편이라 생각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서로의 착각을 이용한다면 큰 이득을 볼 수 있었으니, 황실과 의회를 옭아맬 수단이 하나 생기는 것과 같았다.
"더스틴에 관한 안건은 이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다음 회의 때는 더스틴과 관련된 안건이 완전히 끝나겠군요."
그렇게 첫 번째 안건을 정리한 의장.
그는 곧장 다음 안건을 꺼내 들었다.
"두 번째는, 예상하셨겠지만 만월학파에 관한 것입니다. 어제 새벽 만월학파가 공격당했고, 학파의 모든 마법사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크흠...."
의원들은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힘들게 키운 병력을 잃었군요."
"병력만이 문제가 아니죠. 그곳에서부터 들어오는 돈이 한두 푼이었습니까."
공들여 키웠던 마법학파였다. 5서클 마법사 하나와 4서클 마법사 둘, 그 외에도 3서클 마법사가 다수 있었으니 전쟁에 나선다면 능히 일개 부대를 상대하고도 남을 전력이었다.
무력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들어오는 자금도 쏠쏠했다. 마탑에 등록된 효자 상품들의 매출액은 전부 의회의 군자금이 되었다.
하나 만월학파가 전멸한 지금 더 이상 그것들로부터 돈을 얻을 수는 없었다. 만월학파가 의회의 것이란 사실은 비밀이었으니, 뒤늦게 그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안에서 진행되던 연구와 실험이 아니겠습니까."
무력과 자금력을 잃은 것보다 심각한 것은 만월학파가 정수를 연구하고 실험하던 시설이었단 사실이었다.
"뒤늦게 사람을 보냈지만, 이미 모든 자료가 사라진 상태였다고 합니다."
"황실 조사대가 모조리 가져간 게 분명합니다."
"양지의 자료들이야 아깝긴 해도 괜찮지만… 아래의 자료마저 가져간 것 같더군요."
"허어, 큰일이군요."
사람을 보내 확인했지만, 남아 있는 연구 자료는 전무. 전부 황실 조사대가 가져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수에 관해서도 알게 됐을 터.
"만월학파를 공격한 것은 황실이 분명합니다."
"그거야 의심할 것 없는 명백한 사실이죠. 문제는 그들이 만월학파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공격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의원들은 분개했다. 만월학파를 공격한 것이 황실일 거란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더스틴에 대한 분풀이를 이렇게 하는 걸까요."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높아지는 목소리.
황실의 노골적인 압박에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계획했던 대로군.'
그 모습을 보며 루드는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유도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앞으로의 대응에 대해 작은 의견이 하나 있습니다."
그때, 의장이 목소리를 냈다.
"황실의 이목을 돌리면서 미래를 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황실과의 갈등이 점차 고조되고 있는 상황.
더스틴과 만월학파라는 각자의 전력을 하나씩 잃었다 할 수 있었지만, 자세히 따지고 들어가면 의회가 불리한 게 사실이었다.
이렇게 계속 서로를 공격한다면 먼저 무너질 것은 의회인 게 분명했으니.
하여 루드는 의회가 당장 황실에 맞서기보다는 그들의 시선을 돌리려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담담히 운을 띄우는 의장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불길함이 느껴졌다.
'설마....'
이윽고 의장의 말이 떨어지자,
"전쟁을 일으키는 겁니다. 제국과 바깥대륙 간의."
루드는 주먹을 질끈 쥐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26화
바깥대륙과 전쟁을 일으키자는 충격적인 발언.
루드는 깜짝 놀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 언젠가 제국과 전쟁을 할 거란 건 알고 있었다. 그를 위해 쉬지 않고 움직이는 중이었고.
한데 벌써 전쟁이 언급되다니… 전생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루드는 놀란 감정을 내비치는 대신 이어지는 의장의 말에 집중했다.
"만월학파의 흉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앞으로도 밝혀질 일이 없겠죠."
만월학파를 몰살시킨 것은 황실이었으니 사건은 유야무야 묻히고 말 것이었다.
평생토록 범인을 찾지 못하거나 엉뚱한 이를 범인으로 세우겠지.
관련된 정보들 또한 통제될 터.
의장은 그것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바깥대륙의 이민족들을 그 흉수로 내세우는 겁니다."
잡히지 않을 범인을 이민족으로 특정하고, 그를 빌미로 이민족들과의 전쟁을 주장한다.
"황실에게도 마냥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테니, 어쩌면 그들 또한 적극적으로 동조할지도 모릅니다."
외부의 범인이 생기는 건 진범이라 할 수 있는 황실에게도 괜찮은 상황이었다.
"전쟁을 시작하면 황실도 마냥 우리를 공격할 수만은 없겠죠."
"명안이군요."
"정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황실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계획을 한층 앞당기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위기라 생각했던 것이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르겠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의원들. 바깥대륙으로의 진출은 원래의 계획에도 있던 것이니 문제될 게 없었다.
"설령 황실이 전쟁을 반기지 않는다 해도 전쟁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순 없을 겁니다. 제아무리 황실이어도 대세를 거스를 순 없을 테니까요."
"...귀족들까지 염두에 두신 거군요!"
"맞습니다. 바깥대륙의 이민족과 전쟁을 치른다면 귀족들도 한몫 챙기기 위해 전쟁을 지지하겠죠. 중앙대륙의 국가를 상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작은 투자로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상황 아닙니까."
자신들이 마음먹은 이상, 바깥대륙과의 전쟁은 확정적이라 할 수 있었다.
이민족과의 전쟁으로 얻을 자원은 귀족들에게 탐스러운 먹잇감일 터.
그렇기에 그들 또한 전쟁을 지지하고 나설 것이었다.
그리되면 아무리 황실이라 해도 전쟁 의견을 묵살하는 건 불가능했다.
거기에 의장은 한 가지 생각을 덧붙였다.
"전쟁 중에 뱀 부족과 합을 맞춘다면 황실의 전력을 손실시킬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루드는 다시 한번 놀랐다. 난데없이 언급된 뱀 부족의 이름.
하나 곧 의회와 뱀 부족이 동맹을 맺었음을 알아차렸다.
'소크란이 죽었을 때 순순히 물러났던 건 의회와 손을 잡고 후일을 도모하려던 것이었나!'
소크란의 죽음과 이들 간의 동맹 중 어느 것이 먼저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곧장 전쟁을 일으킬 거라 생각했던 뱀 부족이 한발 물러섰던 데에는 이 동맹이 연관돼 있을 게 분명했다.
'파라우드를 좀 더 살려 뒀어야 했던 건가.'
상황이 이리 되자 파라우드를 죽였던 게 아쉬워졌다.
그에게서 모든 정보를 뽑아냈다 생각했지만, 자신이 전혀 모르는 정보를 물을 수는 없는 법. 질문이 없으니 답이 없는 건 당연했다.
의회가 뱀 부족과 동맹을 맺었단 정보를 알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은밀한 곳에 감금시키는 걸 선택했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다시 물을 수 있었을 터.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그러나 루드는 곧 생각을 다잡았다.
이미 더스틴과 파라우드의 신분을 오가며 주의할 게 많은 상황.
괜히 신경 쓸 일을 하나 더 늘릴 필요는 없었다. 정보는 이곳에서도 충분히 뽑아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묘안이군요. 황실이 전력을 제공한다면 그 전력을 없앨 기회로 삼을 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전쟁을 통해 재물을 얻고 공을 세울 수 있으니."
루드가 잠시 생각에 빠졌던 사이에도 회의는 계속되고 있었다.
의원들은 의장의 의견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황실에 압박받는 현재의 상황을 탈피하면서도 손해 없는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계책.
'생각하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
여기서 반대표를 던져 봤자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이미 바깥대륙과의 전쟁은 확실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홀로 분위기를 거스른다면 의심만 살 뿐.
의원들이 자신하는 것처럼, 황실이 꺼린다 해도 전쟁의 시작을 막을 순 없을 거다.
결국 제국과 바깥대륙의 전쟁은 일어날 일이었다. 전생보다 훨씬 빨리.
'…전쟁을 꼭 막아야 하나?'
그러다 루드는 생각을 전환했다. 전생보다 훨씬 빨라진 제국과의 전쟁. 그러나 전생과 달라진 건 그 시기만이 아니었다. 자신도, 자신이 준비한 것도, 제국과 바깥대륙의 전력도. 전부 과거와 달랐다.
'지금 시점에서 제국과의 전쟁은 해 볼 만하다. 아니, 오히려 기회다.'
갈등이 극에 달한 황실과 의회.
전생과 달리 온전히 보존된 바깥대륙의 전력.
그 힘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제국.
과거의 경지를 되찾지 못한 용사.
판단이 섰다. 결심을 마친 루드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더스틴과 파라우드라는 신분, 가진 패를 활용할 때였다.
"가짜 더스틴을 포섭한다면 전장에 세우는 건 어떻겠습니까."
"가짜 더스틴을요?"
의견을 제시한 루드는 곧장 설명을 이어 나갔다.
"바깥대륙과의 전쟁이 성사되는 건 예정된 일 아닙니까. 황실이 얼마만큼의 전력을 내줄지는 모르겠으나 병력이 소집돼 바깥대륙으로 향하는 것은 정해진 일이니, 그 총책임자에 더스틴을 포섭해서 내세우는 겁니다."
"…호오."
"그렇다면 본회 측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얻을 수 있는 것도 많아질 겁니다. 말씀하셨던 것처럼 뱀 부족과 손을 맞춰 황실의 전력을 없애는 것도 용이할 테고요."
그 설명을 들은 의원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좋은 상황이긴 하군요."
"확실히 그를 포섭해 총책임으로 세울 수 있다면 황실의 방심을 이끌 수도 있겠죠. 자신들의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
그러나 그 의견이 성립하기 위해선 절대적으로 선행돼야 할 조건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가짜 더스틴을 포섭한 뒤에나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가짜 더스틴의 포섭. 이전 안건에서도 나왔던 내용이지만, 의원들은 그 성공 확률을 높게 점치진 않았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어떻게든 포섭해 보이겠습니다."
하나 루드는 각오를 다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떻게든 포섭을 성공시키겠다는 태도.
그 모습이 통했음일까, 의장이 내용을 정리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해 보는 걸로 하죠. 전쟁의 발의는 항상 그랬듯, 황실 회의에서 대변인을 통해 하겠습니다."
의원들을 쭉 훑어본 의장.
마지막으로 그의 눈이 닿은 건 파라우드로 위장한 루드였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내부를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시선.
"가짜 더스틴의 포섭 결과는 그곳에서 확인하는 걸로 하죠. 이견이 없다면 이번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한동안 루드를 바라보던 그는 다시 모두를 둘러보곤, 회의의 종료를 선언했다.
그와 동시에 뒤바뀐 공간.
"돌아왔나."
어느덧 루드는 회의 참석을 위해 찾았던 작은 밀실에 있었다.
회의 공간에서 벗어났음에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던 루드는 회의 내용과 생각을 전부 정리한 끝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아버지께 소식을 전해야겠군."
* * *
분기에 한 번 열리는 황궁 회의는 제국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분기마다 한 번인 까닭에 그간 있었던 일을 확인하고 재정비하는 것에 그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전과 다른 정책을 발의하거나 굵직한 내용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제국에 변혁의 바람이 일곤 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지.'
황제와 고위 귀족이 전부 모인 자리. 더스틴의 모습을 한 루드도 그곳에 있었다.
소드마스터이자 백작인 더스틴이었으니 황실 회의에 참석하는 건 당연한 일.
2황자 하자르도 참석을 종용했었다.
더스틴의 진위를 의심하는 이들이 많은 지금 황실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슬슬 시작하겠군.'
하자르의 말이 없었더라도 황실 회의에 참석했을 루드였다. 지난 의회의 회의에서 나온 바깥대륙과의 전쟁이 이번 황실 회의에서 발의될 예정이었으니.
"카르바나 제국의 위대한 태양! 영원한 주군!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점차 많아지는 고위 귀족들의 숫자에 회의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던 루드.
그 예상대로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과 장년의 경계에 있는 사내. 황족 특유의 금발과 나이를 무색케 하는 체격을 가진 그가 바로 당대의 황제, 에반스 폰 카르바나였다.
"회의를 시작하지."
황제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회의는 빠르게 진행됐다. 지난 회의에서 결정했던 안건을 되돌아봤고 새로운 안건에 대해 논했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인가 귀족들 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으나 큰 문제는 없었다.
평탄하게 흘러가던 회의의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한 건 누군가 목소리를 냄과 동시였다.
"만월학파가 참변을 당했습니다."
믿음직한 목소리와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한 중후한 외관의 인물.
'의회의 대변인이군.'
루드는 그가 의회의 대변인임을 알아봤다.
의회에는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대변인' 체계.
제국의 의사 결정에 있어 황실과 맞먹는 힘을 가졌다는 의회는 오직 대변인을 통해서만 목소리를 냈다. 목소리를 내는 장소도 황궁 회의 하나로 한정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의회'이기 때문. 열둘의 의원들로 이루어진 의회였지만 의회의 목소리는 의원 개개인의 것이 아닌 하나의 것이란 의미를 담기 위해서였다.
'회의장에서 똑같은 가면을 쓴 것도 그 때문이지.'
의회라는 조직이 한목소리를 낸다는 걸 강조하기 위함.
다만 감히 황제의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을 순 없는 까닭에 대변인의 얼굴은 민낯이었다.
하나 문제될 건 없었다. 그가 의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인물이란 건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
신분이 드러난 의원 중 하나인 그는 이곳의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존재였다.
대변인을 바라보던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월학파의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던 바, 기다리고 있던 이야기였다.
"들었다. 아직 흉수가 잡히지 않았다지."
"그렇사옵니다. 하지만 흉수의 정체를 밝히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무어라?"
순간적으로 미간을 찡그린 황제.
"그게 정말이오!"
"대체 흉수의 정체가 무엇이오."
대변인의 말에 다른 귀족들도 놀란 반응을 보였다.
황실 조사대가 직접 나섰음에도 그 흉수를 밝히지 못한 상태였다. 정체를 알 수 없으니 잡을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한데 의회에서 그 정체를 알아냈다니!
"조용,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중이오."
소란스러워지는 분위기를 정리한 건 하자르였다. 주위를 진정시킨 하자르는 황제 폐하와 대변인의 이야기가 계속되길 기다렸다.
"…그 정체가 무엇일지 궁금하군."
잠시 하자르를 바라봤던 황제의 시선이 대변인에게 닿았다.
이미 의회에 경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월학파를 없앴다는 보고를 받은 상황이었다.
하여 이번 회의에서 적당히 수습하고 넘어가려 했었다.
의회에서도 그 배후에 황실이 있음을 짐작하고 있을 터라 여겼는데….
'아니었던 건가.'
하지만 이어진 대변인의 대답에 황제는 의회가 만월학파의 일이 황실의 소행임을 알고 있단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만월학파를 몰살시킨 건 이민족들입니다."
"바깥대륙의 존재들 말인가."
"예, 폐하."
갑작스레 언급된 이민족. 그들이 만월학파를 몰살시켰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들을 언급한 것은 진짜 흉수를 묻기 위한 것일 터.
'의회가 내미는 타협안인가.'
황제는 그 저의를 추측했다.
일전 더스틴을 잃은 자신들이 그러했듯, 의회 또한 비슷한 결론을 내린 게 아닐까.
황실의 소행이란 걸 알지만 묻고 넘어가겠다. 그러니 이쯤 하자.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러나 황제의 예측은 빗나갔다.
"작년 남부의 대도시 파바르에서도 이민족에 의한 피해가 컸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해마다 바깥대륙과의 접경지에선 이민족에 의한 피해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
이민족에 의한 피해를 언급한 대변인.
"이번 만월학파의 끔찍한 참사까지 그들의 소행임을 확인했으니, 더 이상 묵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 사료됩니다."
양팔을 넓게 벌린 그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하여, 바깥대륙 정벌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바깥대륙과 전쟁을 하자고.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27화
바깥대륙과의 전쟁을 말한 대변인. 황제는 곧장 의회의 속셈을 알아챘다.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려는 건가.'
근래 격한 마찰을 빚고 있는 황실과 의회였다. 양측의 갈등이 하루 이틀 된 일은 아니었으나 여태까지 지금처럼 심했던 적은 없었다. 현재의 상황은 의회로서도 버티기 힘든 것일 터. 숨 돌릴 시간을 벌고자 함이 분명했다.
하나 그 의도를 깨달았다고 해서 마냥 그들의 주장을 묵살할 수만은 없었다.
황궁 회의를 주도하는 건 분명 황실이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황궁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한 이들.
"바깥대륙과 닿아있는 동부의 전선을 유지하는 데 매년 10만이 넘는 백금화가 소모됩니다. 제국 방위비의 절반 가까이 되는 금액이죠."
의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쟁을 하자는 건 황제에게만 건넨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황제보단 이 자리에 참석한 귀족들을 겨냥한 말.
"그만한 돈을 쏟아부음에도 이민족들로 인한 피해는 나날이 커져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변방의 마을을 약탈하는 건 물론, 그 과정에서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잡아가 노예로 삼습니다."
대변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작년, 파바르의 비밀 경매장을 급습한 세력도 이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을 유구한 역사의 경매장을 습격해 많은 사람들을 해치고 재물을 훔쳤습니다."
이민족의 악행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
말과 행동을 통해 대변인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렇게 얻은 재물들은 언젠가 제국을 침략하는 군자금으로 쓰일 게 분명합니다. 그 전에 그들을 정벌해야 합니다."
격한 감정을 토해내는 대변인의 주장에 몇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세세한 내용은 달랐으나 알브족이 파바르의 비밀 경매장을 습격했던 것은 사실.
이번 만월학파의 일까지 이민족의 소행으로 몰고 갔으니… 전쟁을 할 명분은 차고 넘쳤다.
대변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바깥대륙을 정벌한다면 그들 때문에 주둔시켰던 동부 경계의 병력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자연히 그곳에 필요한 예산이 줄 테고, 남은 예산을 필요한 다른 곳이나 새로운 사업에 쓸 수 있게 되겠죠."
전쟁 이후에 얻게 될 이점.
여태까지 대의와 명분을 논했다면, 이제부턴 실리를 따질 차례였다.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제 잇속을 챙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귀족들이었으니.
"또 바깥대륙의 개발되지 않은 땅과 자원을 토대로 제국의 영광을 높일 수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곳에 많은 자원이 있다는 건 이곳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제국 내의 자원이 점점 말라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희 세대에는 괜찮겠지만, 앞으로 제국을 이끌어 갈 이들을 위해서라도 대비책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귀족의 숫자가 늘었다. 대변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이민족이 횡포를 부리게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 지금도 변방에서는 그들로 인한 피해가 생기고 있을지 몰랐다.
무엇보다, 그들을 토벌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았다.
'공기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루드는 귀족들의 달라진 분위기를 느꼈다. 처음 전쟁을 주장할 때만 하더라도 한 발 뒤에서 사태를 지켜보는 방관자 같았다면, 지금은 전쟁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의회의 생각에 찬성하는 바입니다."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제국의 태양께서 만백성을 굽어살핀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해야 합니다."
전쟁에 찬동하는 목소리. 겉으론 백성의 안위와 황제의 치세를 언급했지만, 속에 담긴 본심은 그와 달랐다.
'전장은 가능성의 장이지. 가문의 이름을 드높일 기회다.'
'병력의 손실이 불가피하겠지만... 바깥대륙의 땅을 선점하면 막대한 재물을 취할 수 있을 터. 손실된 병력을 메우는 것쯤이야 간단하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후를 생각했다. 바깥대륙을 정벌하면 어떤 이득을 취할 수 있을까.
전쟁에 쓰일 자금과 병력, 손실의 정도와 전쟁이 끝난 후 얻을 수 있는 것들.
마침내 손익 계산이 끝났을 때, 귀족들은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바깥대륙의 이민족들은 미개인이다. 중앙대륙의 다른 국가도 아니고 야만인에 불과한 녀석들과의 전쟁은 손쉽게 끝날 게 분명해.'
'전쟁이 끝난 후를 생각하면, 무조건 해야 하는 전쟁이다.'
전쟁이 선포되면 가문의 병력들을 내놓아야 하겠지만, 나쁘지 않은 투자였다.
오히려 여유가 있다면 가능한 많은 병력을 내놓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야 전쟁이 끝난 후 남들보다 더 큰 공로를 주장할 수 있을 테니.
"저는 반대입니다."
하지만 모든 귀족들이 전쟁에 찬성하는 건 아니었다.
좌중을 관통하는 나지막한 목소리. 그 주인공을 바라본 루드는 눈을 빛냈다.
'카일론 에이나우디 공작.'
귀족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모두가 찬성하는 와중 반대 의견을 던진 카일론.
어디 변방의 귀족도 아니고, 무려 삼대 공작가 중 하나의 주인이었다. 그 의견은 가벼이 넘길 것이 아니었으니, 모든 귀족들이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은 과거에도 바깥대륙과 전쟁을 치렀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패퇴했죠."
"패퇴라는 말은 어감이 좀 그렇지 않나. 황제 폐하께서 계신 자리일세. 언행에 주의하는 게 어떻겠나."
카일론의 말투를 걸고넘어진 마르셀루 공작.
카일론과 마찬가지로 삼대 공작가를 이끄는 그는 카일론보다 훨씬 많은 나이를 가진 인물이었다.
"...후퇴라고 하죠."
잠시 그를 바라봤던 카일론은 이내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견제하려는 목적이 한눈에 보였으나, 지금 중요한 건 알량한 기 싸움이 아니었다.
"얻은 것 하나 없이, 잃은 것만 가득한 후퇴."
"자네가 기어코!"
하나 그 또한 마르셀루에게는 먹잇감으로 보였다. 카일론의 말은 제국이 고작 야만인들에게 졌다는 것과 같았으니.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나설 수 없었다. 표현을 빌미로 카일론을 공격하기 직전, 황제가 직접 나선 까닭이었다.
"마르셀루 몬레알 공작."
"나도 귀가 있다. 그대의 충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내가 가만히 듣고 있지 않나. 에이나우디 공작의 말이 과격하긴 하나 틀린 것은 없으니. 그대는 한발 물러서 이야기를 들으라."
"…알겠습니다."
마르셀루를 제지한 황제는 카일론을 바라봤다. 하던 말을 마저 이으란 신호.
'에이나우디에 대한 신뢰도가 상당하군.'
허무하게 끝난 공작 간의 신경전에 루드는 황제가 몬레알보다는 에이나우디 가를 더 신뢰한다고 추측했다. 가문이 아니라면 마르셀루보다 카일론이란 개인을 더 신뢰하는 것이겠지.
"당시에도 바깥대륙을 정벌해 그곳의 자원들을 확보하고자 했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죠. 만약 지금 전쟁을 벌인다면… 그때와 같은 결과를 피하지 못할 겁니다."
황제의 도움을 받은 카일론이 마침내 말을 마쳤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 해도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벌써 백 년도 더 된 이야기가 아닙니까."
"제국은 나날이 발전했고 강해졌으나, 야만인들은 그때와 똑같이 미개함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걱정하시는 바는 알겠으나 너무 과하다 사료됩니다."
삼대 공작 모두가 반대한다면 모르겠으나 다른 두 공작은 전쟁에 찬성하는 입장.
그 둘의 조력을 믿은 귀족들이 카일론의 의견에 반박했다.
'...잘못 생각했군.'
씁쓸해 보이는 그를 관찰하던 루드는 조금 전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다른 귀족들이 반박하자 순간적으로 황제와 시선을 마주쳤던 카일론.
황제가 그의 손을 들어 줬던 건 단순히 그를 신뢰해서가 아니었다.
'조력자였나.'
두 사람 간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마 황제가 직접 말하기 어려운 것을 카일론이 대신 발언한다거나 하는 것일 터.
황제의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것과 귀족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본인보다는 타인의 입을 빌리는 게 여러 상황에서 유리한 결과를 도출할 수도 있었고.
그리고 황제의 표정은 대변인이 전쟁을 발의했을 때부터 줄곧 굳어 있는 채였다.
만약 카일론이 그 심기를 읽고 나선 것이라면....
'조금 더 표본이 많았다면 좋았을 것을.'
다만 확신하지는 않기로 했다. 황궁 회의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 이번이 특수한 경우일 수도 있었다.
하나 조력자는 아닐지라도, 두 사람이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에이나우디 가문은 제국 서부에 있지.'
반면 바깥대륙은 제국의 동부에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서부에 있는 그의 영지에서 병력을 차출할 확률은 극히 드물었다. 만약 차출을 한다 해도 기사 서넛과 병사 수십이 전부겠지.
다시 말해 카일론의 입장에선 전쟁이 일어나든 말든 별다른 영향이 없다는 것. 개인의 영달만 생각하면 이리 나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나섰지. 그것도 제국이 패퇴했다는 강한 표현까지 쓰면서 말이야.'
자칫하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는 표현. 하나 그는 과감하게 그리 표현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마르셀루와 마찰을 빚기까지.
황제와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모습들이었다.
"전쟁을 윤허하겠다."
귀족들의 이야기를 듣던 황제는 결정을 내렸다.
루드는 그 결정을 이해했다. 전쟁은 이미 피할 수 없는 흐름.
게다가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었다.
'이쯤에서 숨통을 트여 줄 필요도 느꼈겠지.'
만월학파를 처리하며 의회에 경고를 보냈으니, 어느 정도 숨통을 풀어주며 앞으로의 행보를 지켜보겠단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황실 입장에서 바깥대륙과의 전쟁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닐 테고.
"폐하의 하늘 같은 은혜를 제국 모두가 알게 하겠습니다."
원하던 답을 얻어 낸 대변인은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그가 얻어야 할 것은 전쟁의 허가만이 아니었다.
'이제부터다.'
대변인이 허리를 폄과 동시, 루드는 기다리던 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전쟁과 관련하여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더스틴 님을 전쟁 총책임자의 자리에 임명해 주십시오."
"...더스틴을 말인가."
대변인의 요청에 미간을 찌푸린 황제. 그의 시선이 회의에 참석한 더스틴에 닿았다. 2황자가 의회를 압박하기 위해 세워 놓은 '가짜'.
한편 하자르는 경악한 채 대변인을 바라봤다.
'여기까지 생각한 거였나!'
전쟁을 발의할 때만 해도 압박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만 생각했다.
한데 더스틴을 총책임자로 요구할 줄이야... 그의 정체를 까발리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더스틴이 가짜란 걸 모르진 않을 거라 여겼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이용하려 들 줄은 몰랐다.
"일전에 있었던 더스틴 님의 사건을 두고 이야기가 많습니다. 당장 제도를 거닐면 더스틴 님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논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대변인은 거침없었다. 더스틴이 가짜란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그를 이용해 황실을 압박하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이곳에도 더스틴 님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심스러운 말씀이나... 예, 저 또한 그중 하나이고요."
이곳에 자리한 귀족들까지 언급한 대변인. 그는 곧 더스틴이 받고 있는 의심을 거둘 해결책을 제시했다.
"하나 그 모든 건 더스틴 님이 스스로를 증명하시면 간단히 끝날 문제 아니겠습니까. 제국의 위대한 소드마스터, 더스틴 클라위베르트. 전장이야말로 그 이름을 증명할 수 있는 자리일 테니... 부디 여러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더스틴 님을 총책임자로 세워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루드는 주변의 시선들을 느꼈다.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다수의 귀족들도 더스틴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있었을 터.
대변인을 통해 확인할 방법이 마련됐으니, 그들도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들 것이었다.
"...본인의 의견은 어떠한가."
황제는 직접 답을 내리는 대신 더스틴에게 물었다. 그가 거절할 것을 예상하고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하며.
하나,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더스틴, 루드는 황제와 대변인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이어지는 답은 예정돼 있던 것이자, 파라우드가 가짜 더스틴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를 내포한 답.
"맡겨만 주신다면, 이 목숨 바쳐 제국에 영광을 가져오겠습니다."
더스틴은 기꺼이 제국군의 선봉에 서겠다고 대답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28화
출정 선언을 한 루드는 세 명의 반응을 확인했다.
우선 대변인, 이번 대답으로 파라우드가 가짜 더스틴을 포섭해 냈다는 걸 깨달았을 그는 흐릿한 미소를 띤 채였다.
어쩌면 앞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계산하는 중일지도 몰랐다.
다음으로 황제, 더스틴에게 결정을 넘겼던 그는 당혹감이 엿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역시 황제도 내가 가짜란 걸 알고 있다.'
회의가 진행되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의 반응으로 확실해졌다. 황제도 자신이 가짜란 걸 알고 있었다. 아마도 하자르를 통해 들었을 터.
자신에게 결정권을 넘겼던 건 본인의 입으로 대변인의 말을 거절할 명분이 없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하여 당사자에게 답을 미루고 그 상황을 수습하려 했던 것이겠지.
하지만 생각과 다른 결과가 나온 지금이었으니, 당혹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마지막으로 하자르, 그는 세 사람 중 가장 큰 동요를 보이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났던 감정을 빠르게 숨겨 냈지만 루드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상의되지 않은 돌발 행동에 놀라서일까, 약간의 분노마저 보였다.
'2황자 입장에선 배신당했다 생각하겠지.'
황실의 입장에서 더스틴의 가장 현명한 대처는 결정을 보류하고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그사이 자신들과 입을 맞추고 긴밀히 대응하는 것도 가능했을 터.
하지만 루드는 시간을 끌기는커녕 즉답을 내줬다. 그것도 많은 귀족들이 자리한 이곳에서.
황실, 최소한 더스틴이 가짜란 사실을 아는 이들로선 놀랄 수밖에 없는 일.
슬쩍 하자르를 바라보니 그의 시선은 아직까지도 제게 고정돼 있었다.
'무슨 생각이냐, 루드비코! 이렇게 되면 전장에 서는 걸 무를 수 없다.'
루드비코를 바라보는 하자르는 생각에 잠겼다.
그간의 대화를 떠올려 보면 루드비코가 시간을 버는 게 정석이란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전쟁에 나서겠다고 확답한 상황.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조금 전의 대답은 섣부른 것이었다.
최소한 자신과는 협의했어야 했다. 일단은 같은 배를 탄 사이가 아닌가.
'...다행인 건 아우라에는 변화가 없다는 사실인가.'
불행 중 다행은 루드비코의 아우라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
만약 지금 그의 선택이 자신을 배신하고 공격하려 하는 것이었다면 적색으로 변화했을 터였다.
그러지 않았다는 건 지금 그의 대답이 그런 목적을 위해서는 아니라는 사실.
여전히 무슨 속셈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건 따로 알아보면 되는 일. 일단은 더 이상 일이 걷잡을 수 없게 흐르는 걸 막아야 한다.'
지금은 일을 수습하는 게 우선.
하자르는 황제를 바라보며 발언했다.
"더스틴 경께서 전쟁의 책임자를 맡아 준다면 황실로서도 안심할 수 있는 일이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폐하."
"...황자의 말이 맞다. 제국의 병력을 이끄는 건 범부로서는 불가능한 일. 더스틴 경이 그 무게를 지겠노라 나서 줬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황제는 하자르의 의중을 깨달았다. 그 또한 일을 마무리 지을 필요를 느끼고 있던 상황. 괜히 시간을 끌었다간 의회가 또 어떤 수작을 벌일지 몰랐으니, 지금의 기회는 놓쳐선 안 됐다.
"병력의 차출과 기용, 원정 일정 등 전쟁에 관한 건 2황자 하자르에게 위임하겠다. 2황자는 더스틴 경과 충분한 대화를 통해 가장 좋은 방책을 마련하라."
여타 안건이 끝나고 나왔던 전쟁 논의, 황궁 회의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던 안건이 끝났다.
세세한 일정과 병력 차출 등의 논의가 더 필요하겠지만, 그건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 할 일.
바깥대륙과 전쟁을 치르고 그 책임자에 더스틴을 앉히기로 결정했으니 이 자리에서 더 논할 것은 없었다.
"회의를 마치도록 하지. 다들 물러들 가도록."
"제국의 앞날에 무궁한 영광이 있기를."
황제가 회의의 종료를 선언하자 귀족들이 차례로 물러났다. 가장 먼저 삼대 공작들이 궁을 벗어났고, 높은 작위의 귀족들부터 그 뒤를 따랐다.
루드도 궁을 벗어나려던 순간. 그의 발을 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더스틴 경은 잠시 시간을 내주시지요. 전쟁과 관련해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까. 마침 제가 시간이 되니 경께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지금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죠."
"좋습니다. 안 그래도 전쟁과 관련해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인물, 하자르였다.
권유를 받아들인 루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와 나눌 대화가 많았다. 그 대화로부터 얻어 갈 것도.
곧장 하자르의 거처로 이동한 두 사람.
"앉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주변의 시선을 모두 물린 하자르는 루드에게 자리를 권했다. 먼저 자리에 앉은 그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솔직히 말하지."
"말씀하시죠."
"자네에게 화가 나네."
회의를 위해 딱 맞춰 입었던 옷을 느슨하게 푸는 하자르의 행동은 거칠었다. 내부의 감정이 바깥으로 흘러나온 까닭.
"최소한 그 자리에서의 확답은 피했어야 했어. 그걸 모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대체 무슨 속셈인 건가."
"그저,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최선? 그것이? 의회의 손에서 놀아나 주는 것이?"
하자르는 인상을 찡그렸다.
높은 확률로 더스틴이 가짜란 걸 알고 있을 의회. 그들이 굳이 더스틴의 출정을 언급한 건 그를 통해 무언가를 얻어 내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알고 있으니 당해 줄 이유가 없는 상황. 하나 루드비코의 성급한 대답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게 생겼다.
하지만 루드의 입장은 달랐다.
"의회의 손에서 놀아날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의 손을 이용한다면 모를까."
"그들의 손을 이용한다?"
루드비코의 대답에 반문한 하자르.
루드가 더스틴으로서 대변인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앞으로 의회에 더 큰 타격을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번 제안이 꼭 '루드'로서만 이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루드비코'로서도 충분히 이용할 구석이 있었다.
"언제까지고 더스틴을 연기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진위를 의심하는 이들이 많아질 테고, 제가 가짜임을 확신하는 이들도 생길 겁니다."
루드는 하자르를 바라봤다.
"부탁하셨던 대로 만월학파를 처리해 드렸고 이번 회의까지 자리를 지켜 드렸으니, 더 이상 더스틴으로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짜 더스틴을 연기하는 걸 그만두겠다는 말.
"그 말은."
"그래서 전장에 나가는 걸 받아들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사라지기 위해."
"...전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래, 그런 거였군."
이어진 루드의 설명에 하자르는 그제야 그가 보였던 행동의 이유를 깨달았다.
'떠날 생각이었던 거였나.'
하기야 그럴 만했다. 자신에게 정체를 들키고 약속을 맺은 까닭에 아직까지 더스틴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 사라졌을 인물.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에만 집중한 탓에 미처 놓치고 있던 부분이었다.
"전쟁 중의 전사나 실종은 허다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사라지면 황실의 피해가 없을뿐더러, 전쟁을 주장한 의회에 책임을 씌울 수도 있으니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일리가 있군."
루드비코가 떠나려 한다는 걸 알자 모든 게 이해됐다. 그런 목적이라면 그의 말대로 전장에 나서는 것이 가장 확실했다.
전장에선 정보의 확인이 어려운 데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으니.
다만 아쉬운 건....
'아우라는 여전히 뒤바뀌는 중이다.'
그의 아우라를 푸른색으로 고정시키지 못했다는 것. 그렇다고 적색으로 고정된 것도 아니었지만....
처음과 같이 계속해서 바뀌고 있는 루드비코의 아우라는 불확실성을 의미했다. 언제고 그라는 인물이 큰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죽여야 하나. 아니, 놔두는 게 최선이다.'
변수의 위험성 때문에 잠시 고민했던 하자르였지만, 그냥 놔주는 게 최선임을 깨달았다.
그를 죽이는 게 어렵기도 했고, 괜히 시도했다 실패하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모습을 바꾸는 능력이 대단했으니 작정하고 몸을 숨긴다면 찾을 수도 없을 터. 만약 나쁜 마음을 품고 황족들을 암살하거나 한다면…
'어쩔 수 없군.'
그를 옭아맬 수단으로 생각하던 쿠두스와 페드리의 추적도 실패했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그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게 나았다.
'인연이라면 또 만나겠지. 그게 부디 좋은 관계이길 바랄 수밖에.'
하자르는 마음을 조금 편히 먹기로 했다. 황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전장에서 사라지는 걸 택했고, 그를 통해 의회를 공격할 명분까지 쥐어 주겠다 약속한 루드비코. 최소한 의회보단 황실을 위하는 게 분명했다.
그 순간.
'...아우라가 조금 변했다?'
미묘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푸른색과 붉은색을 오가던 루드의 아우라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여전히 색을 오가는 건 같았으나 그 시간에 차이가 생겼다. 좀 더 오랫동안 푸른색을 띠기 시작한 아우라.
'하, 하하!! 그랬던 거였나.'
하자르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여태까지 루드비코의 아우라를 푸른색으로 고정하기 위한 방법들을 많이 고민했었다.
대화를 나누며 성향과 장단점, 약점을 분석했고, 그를 이용해 제 곁에 두려 했다.
모두 그의 아우라를 변화시키고, 언젠가 적이 된다면 위협이 되기 전에 그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하나 지금, 그를 어찌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자고 결심한 순간. 요지부동하던 그의 아우라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루드비코의 아우라는 그가 아니라 내게 달린 문제였나.'
상대가 자신을 어찌 생각하고 여기는가가 아닌, 자신이 상대를 어찌 생각하고 여기는가.
루드비코의 아우라를 변화시키는 열쇠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었다.
'이 사실을 이제야 알았으니.'
늦어 버린 깨달음. 하자르는 아쉬움을 삼켰다.
얼마 뒤 전쟁을 위해 바깥대륙으로 향할 그였다. 그때까지 그의 아우라를 푸른색으로 변화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
그의 아우라가 자신의 마음에 달렸다 한들, 사람의 마음이란 그리 쉽게 변하는 게 아니었다.
그에 대한 경계를 풀고 편안한 마음으로 맞으려 하겠지만, 평생을 의심과 경계로 살아온 자신이었으니 그게 쉬운 일일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단 나으니. 좋은 일이라 생각해야겠지.'
하나 아쉬워만 하지는 않았다.
이제라도 그와의 관계가 자신에게 달렸다는 것을 알았으니.
언젠가 또 조우한다면 넓은 마음으로 맞으면 될 일.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루드비코를 바라본 하자르는 그에게 물었다.
"군의 편성에 있어 의견이 있나?"
"특별히 없습니다."
루드는 하자르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약간은 불쾌해 보이던 표정을 한 그였으나, 지금은 어딘가 편안함이 엿보였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기뻐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의회를 압박할 수단이 생겨서 기뻐하는 건가.'
더스틴이 사라지며 얻게 될 패. 어쩌면 그것을 이용하는 모습을 그리는 중일지도 몰랐다.
잠시간 그를 바라보던 루드는 고민 끝에 한 가지 의견을 덧붙였다.
"…다만, 의회의 군세가 많은 것이 낫지 않겠나 싶습니다."
바깥대륙으로 향할 군대에 의회의 병력을 많이 포함시키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
'황실은 전쟁을 반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만약 전생의 전쟁들도 의회로 인한 것이었다면....'
황제가 보였던 태도나 그를 지원하던 에이나우디 공작의 모습은 전쟁을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쩌면 의회가 없다면, 과거의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역시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이번 전쟁은 구린내가 너무 난단 말이지."
"무엇보다 총책임자가 사라질 병력입니다. 그 뒤까지 생각해 병력을 편성하시죠."
병력 구성에 대한 언질을 준 건 그 때문이었다.
조심스럽지만 의회가 사라진다면 제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전쟁을 하면 사상자가 생기는 걸 피할 수 없었다.
아무리 대승을 거둔다 한들, 아무리 대의와 명분이 있는 싸움이라 한들, 죽고 다치는 이들이 없을 순 없는 일.
그로 인해 고통받을 이들도 생길 터였다. 과거의 심마와 같이....
하지만 미래의 제국이 바깥대륙을 침범하지 않는다면, 전쟁을 불사할 이유가 없었다.
'일단은 당장의 전쟁에 집중하자.'
루드는 상념을 털어 내고 현재에 집중했다.
'이번 기회에 의회의 힘을 뭉텅이 채 깎아 낸다.'
황실이 병력 차출을 최소화한다면 자연스레 의회의 병력이 군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질 터.
제국의 이번 전쟁은 실패로 끝날 것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었으니.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식이 돌았다. 십 년이 넘도록 전쟁이 없던 평화의 시기. 그것이 깨지기 직전이었다.
다행인 건 그 적이 바깥대륙의 이민족이라는 것.
미개한 그들을 상대한다는 소식에 전쟁의 공포에 떠는 이보다는 명성을 날리고 신분을 상승시킬 기회라며 반기는 이들이 더 많았다.
"전쟁이 일어난다고...? 바깥대륙과?"
그리고 그 소식은 본가로 돌아와 머물고 있던 아이리우스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이렇게 빨리? 과거와 너무 많이 달라지고 있다.'
쿠두스의 일부터 시작해 이번 전쟁까지.
혼란스러움을 느낀 아이리우스였지만, 그녀가 해야 할 것은 정해져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군."
아이리우스는 일찍이 수하로 거뒀던 헤이론을 찾았다.
어느덧 익스퍼트 상급 너머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는, 미래의 소드마스터.
"바깥대륙과의 전쟁 소식은 들었지?"
"물론입니다."
"준비해."
"준비라니... 그 말씀은?"
일찍이 그를 선점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마왕에게 패배했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그리하여 제국의 수많은 생명을 구하고자.
"우리도 그 전쟁에 참전할 거야."
그러니 그녀가 마왕이 있을 바깥대륙과의 전쟁에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용사였으니까.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29화
제국 동부의 도시 튜러스는 바깥대륙과의 접경지 중 하나로 인근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대도시급은 아니어도 중견도시로 부르기엔 충분한 규모.
바깥대륙과 가까우면서 많은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였다.
먼저 튜러스에 도착한 루드는 병력이 전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총력이 아닌데도 이 정도인가....'
전달받은 병력의 총원은 7천 명이 조금 넘는 숫자.
황실과 의회, 귀족들의 병력을 전부 합친 인원이었다.
'황실이 2천, 의회가 3천, 귀족이 2천.'
의회의 전력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병력.
하나 의회의 전력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았다. 의사 결정 단체인 그들이 무력 부대를 소유해서는 안 될 일. 직접 병력을 차출한 귀족들과 달리 의회의 이름을 단 병력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황실과 귀족파에 소속되지 않은 기사단과 용병들.'
루드는 하자르와 도서관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확인했다.
의회가 후원하는 기사단 중 상당수가 이번 전쟁에 참가했다. 외부에는 그 접점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회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그들이었다.
또 용병으로 등록된 이들의 대다수 또한 의회의 병력이었다. 기사단이나 마법학파에 소속되지는 않았으나 의회가 은밀히 키워 온 병력들.
그들을 전부 따지면 황실과 의회, 귀족 세력 중 가장 많은 병력을 내놓은 건 의회였다. 거기에 약속되어 있는 뱀 부족의 협력까지.
의회가 이번 전쟁에 임하는 태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잘된 일이다.'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제국의 패배가 예정된 전쟁. 투자하는 게 많을수록 잃을 것도 많았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의회는 많은 것을 잃으리라.
'하자르는 내 의견을 받아들였군.'
황실과 의회, 귀족 세력이 비슷한 숫자의 병력을 차출한 상황. 얼핏 대등해 보이는 그들 간의 병력이었으나 실상은 달랐다.
루드는 정보에 적힌 세부 병력을 확인했다.
의회와 귀족파가 백에 달하는 기사들을 파병한 데 반해 황실은 고작 10명의 기사만을 파병했을 뿐이다.
그마저도 잃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이들.
'특수 전력은 전부 죽어도 되는 이들로 보냈군.'
도서관을 통해 얻은 정보에는 그들이 저지른 부정부패와 범법행위가 포함돼 있었다.
황실 또한 그것을 알고 그들을 내준 것일 터.
그 외에도 마법사가 열 명 있었으나 이들 또한 앞의 기사들과 마찬가지였다.
죽는 게 제국에게 이득인 존재. 그러면서 다른 병력들과 비슷하게 구색을 맞출 수 있는 전력.
'나머지 2천의 병력 중에도 보급에 치중하는 후방 자원이 오백.'
실질적으로 황실의 진짜 병력은 일반병 천오백 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의회와 귀족 세력에 비해 확연히 빈약한 전력.
하나 겉으로는 기사의 숫자만 부족하고 비슷해 보이는 수준이었으니 그를 빌미로 황실을 압박할 순 없을 터였다.
오히려 자신들이 공적을 쌓을 기회가 늘어났다며 좋아할지도 몰랐고.
'제국군이란 하나의 이름 아래 존재하는 세 가지 세력.'
루드는 이번 전쟁에 참전한 병력들을 다시 되짚었다.
황실과 의회, 귀족의 병력으로 구성된 제국군.
이것을 잘 이용한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으리라.
그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더스틴 님, 병력들이 하나둘 당도하고 있습니다. 슬슬 움직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외부 임무를 받고 멀리 파견됐던 질레트였다.
더스틴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는 인물이자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
한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먼 곳으로 파견됐던 질레트를 복귀시킨 건 자신의 의지였다.
하자르를 통해 그를 멀리 보냈던 이유는 가짜임을 들킬 것을 우려했기 때문.
더스틴은 이번 전쟁에서 사라질 계획이었으니, 정체를 들키는 것에 대한 걱정은 조금 접어 두어도 괜찮았다.
'만약 들킨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꼴이 되겠지.'
객관적으로 질레트는 훌륭한 기사였다. 일신의 무력도 뛰어난데다 사람을 다루는 능력도 일품이었다. 여러모로 쓰일 곳이 많은 인재.
'뭐, 그것 때문에 부른 건 아니지만.'
루드는 이번 전쟁에서 그를 죽일 생각이었다.
질레트의 죽음은 이번 전쟁을 연출하는 데 필요한 조각 중 하나였으니까.
다만 그를 죽이는 건 자신이 아닌 뱀 부족일 터.
"더스틴 경을 뵙습니다."
"위대한 소드마스터를 직접 마주하게 돼 영광입니다."
질레트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그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느덧 일대를 가득 채운 병력들. 문제는 그 숫자가 아니라 그 선두에 선 이들이었다.
'귀족들이군.'
직접 병력을 이끌고 온 귀족들.
전장에까지 함께할지는 모르겠으나, 이곳까지 병력을 이끌고 온 그들을 질레트가 응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본인보다는 총책임자가 맞이하는 게 격식에 맞을 것이라 생각했겠지.
"이쪽은 산시아테 백작가의 주인이신 라핀 산시아테 백작님이십니다. 이쪽은 블라디 자작가의 주인이신 디아스 블라디 자작님이시고요."
앞에 선 두 사람을 소개하는 질레트.
두 귀족이 주변 가문들의 병력도 이끌고 왔다는 정보는 덤이었다.
'블라디 자작가?'
그 소개에 포함된 익숙한 이름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 순간.
"반갑습니다. 블라디 자작가를 이끄는 디아스 블라디입니다. 이쪽은 제 아들, 가이로입니다. 감히 더스틴 님께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같은 길을 꿈꾸는 녀석이지요."
디아스 자작의 옆으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일전에 제국의 강화 병사 프로젝트를 분쇄했을 때, 칼리텍 사관학교에서 연을 맺었던 가이로 블라디였다.
'…이렇게 보게 되는군. 그러고 보면 칼리텍이 이 근방이었지.'
그때보다 성숙해진 모습의 가이로.
생각해 보면 사관학교가 위치한 칼리텍도 제국 동부의 도시였다. 그의 본가인 블라디 자작가 또한 마찬가지.
반가운 얼굴은 가이로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뒤로, 약간 거리를 둔 낯익은 이가 또 있었다.
'루시아란 이름이었나.'
과거 가이로와 매일같이 대련을 했던 푸른색 머리의 사관생도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연인이라도 되는 모양새. 가이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꽤나 다정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가이로 블라디라고 합니다."
"그래, 이름은 들어 봤다. 블라디 가의 한량이라고."
"...부끄러운 과거입니다."
루드는 제 앞에 선 가이로를 바라봤다. 망나니 흉내를 내는 건 그만뒀는지 굳건한 기세가 느껴졌다.
잠시 동안 그를 지켜보던 루드는 이내 디아스에게 물었다.
"이번 전쟁에 직접 나설 생각인가."
"아뇨, 저는 다시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대신, 제 아들 녀석이 가문의 병력을 이끌 겁니다."
"그런가."
"예, 비록 얼마 전까지는 한량이라 불리던 녀석이지만... 결코 폐를 끼치진 않을 겁니다."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만난 과거의 인연. 마음 같아서는 돌아갈 것을 권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작은 인연 하나에 연연하다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었으니까.
'죽지 않길 바라지만… 죽는다면 그 또한 본인의 운명이겠지.'
다만 그가 죽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많은 이들이 죽어 갈 전쟁 속에서, 부디 가이로가 그들 중 하나가 되지 않길 바랐다.
"남은 병력이 도착하면 곧장 바깥대륙으로 향할 거다. 그때까지 전력을 잘 추스르고 있도록."
"알겠습니다."
병력을 이끌고 왔던 산시아테 백작과 블라디 자작은 내일 떠날 예정이라 했다. 그때부턴 가이로가 그들이 데려온 병력의 책임자였다.
'의회만 남았나.'
가이로를 물린 루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병력들을 생각했다.
자신과 함께 가장 먼저 이곳에 자리 잡은 황실의 병력.
조금 전, 가이로의 도착과 함께 완성된 귀족들의 병력.
'레인부츠 기사단만 도착하면 끝인가.'
용병으로 위장한 병력은 이미 도착한 상태였으니, 그들만 도착하면 의회의 병력도 모두 집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마침내 모든 병력이 튜러스에 모였다.
황실 소속의 기사 열과 마법사 열, 병사 2천.
귀족들이 지원한 기사 백과 병사 2천.
의회의 후원을 받는 기사 백과 용병으로 위장한 그들의 사병 3천.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원병과 용병 5백.
거기에....
"참전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기사 한 명을 대동한 채 나타난 아이리우스.
"…출정하지."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루드는 내심 놀랐으나 이내 출정을 선언했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튜러스에서 출발한 제국군은 바깥대륙으로 향했다. 사실 말이 바깥대륙이지, 제국의 동부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바깥대륙에 들어선 것이었다.
진군하는 제국군의 분위기는 좋았다. 소드마스터가 이끄는 데다 기사만 이백이 넘는 숫자였으니, 누구도 패배를 생각하지 않았다.
국경을 벗어나 이동한 지 며칠. 정찰병이 기다리던 소식을 갖고 왔다.
"앞에서 이민족들의 영토를 발견했습니다."
"규모는 어떻지?"
"천 명쯤으로 판단됩니다."
"갖고 있는 정보와 같군."
보고를 들은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대륙에 무지한 제국이지만 모든 것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최소 몇 부족에 관한 정보는 확보돼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이제 곧 나타날 빌레인 부족. 국경 지대의 도시나 마을을 습격해 약탈하길 반복하던 이들이었다.
계속되는 피해에 국경 부대가 몇 차례 소탕을 시도했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는 기록이 있었다.
'잔인하고 빠르다 했지.'
그들을 상대해 본 병사의 말에 의하면 사람을 해침에 주저가 없고 습격과 도주가 순식간에 벌어진다 했다.
'죽어 마땅한 녀석들이다.'
바깥대륙의 부족이라 해서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진 건 아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부족을 운영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다른 부족이나 국가를 노략질하며 살아가는 이도 있었다.
현재 제국군의 경로에 있는 빌레인과 칼바람 부족이 그러한 이들이었다.
앞으로의 바깥대륙을 위해서라도 없어지는 게 나은 부족들.
제국군의 집결지를 튜러스로 정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 부족을 자연스럽게 거쳐 가기 위해.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의 눈에 빌레인 부족이 들어왔다.
"전군, 전속력으로 전진한다. 기사들은 녀석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라."
루드의 명이 떨어지자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 병력들. 말을 탄 기사들은 벌써 빌레인 부족의 입구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어, 어어, 웬 놈들...!"
"고, 공격이다!! 적습이다!"
큰 목소리로 습격을 알린 빌레인 부족의 경비병. 빌레인 부족의 전사들도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서둘러 대응했다.
하지만 속도를 붙인 제국군을 막기에는 역부족.
"크악! 웬 놈들이냐!"
"제국군이다!!!"
"으아악!!!"
"죽여라!!!"
"이 새끼들! 죽어!!"
"살려 줘!"
순식간에 뒤엉켰던 목소리가 빠르게 정리돼 갔다.
제국군의 압도적인 우세.
병력의 숫자에서부터 차이가 났고, 그 전력도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도망쳐!!"
"물러나라!"
"다들 피신해라!"
상대가 안 됨을 깨닫고 도망치는 빌레인 부족.
"깃발을 높이 들어라!"
"제국의 승리를 알려라!"
병사들은 소리를 질렀다. 잔당이 몇 살아 도망치긴 했으나 원정은 이제 시작이었다. 도망친 이들이 향할 곳이야 정해져 있었으니 진군하다 보면 금방 다시 만나게 될 터. 그때 죽여도 늦지 않았다.
루드는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대승을 거둔 첫 전투. 사기가 잔뜩 오른 병사들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승리는 계속될 거다!"
마력을 담아 외친 목소리.
"와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본격적인 전쟁의 서막이 열렸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3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