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00화
일주일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루드가 매일같이 찾아와 한기를 제거해 준 덕에 미쉐린의 컨디션은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체력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왔고.
"이제 정수를 추출해도 될 것 같습니다."
"드디어...!!"
최소한 정수를 추출하는 과정에서 죽을 일은 없겠다고 판단한 루드는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일주일을 말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며칠이고 더 기다리려 했다. 하지만 미쉐린의 회복세가 상당히 빠른 덕분에 그럴 필요는 없었다.
'집중하자.'
넓은 공간에 미쉐린을 눕힌 루드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살아있는 인간에게서 정수의 힘을 추출하는 건 루드로서도 처음이었다. 가능할 것 같단 직감은 들었지만, 그 과정이 어떠할지,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 처음부터 끝까지 높은 집중력을 유지해야 했다.
'미쉐린의 정수를 흡수한다면 네 개째 정수.'
추출 후 방사했던 한기와 달리, 추출한 정수의 힘은 고스란히 흡수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처음의 정수부터 발렌타노에서 얻은 정수, 퓨렐 협곡의 오우거에 이어 네 번째로 얻게 되는 정수였다.
네 번째 정수를 흡수하는 것은 루드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미쉐린의 정수까지 하면 전생에 얻었던 정수의 개수를 넘어선다.'
전생의 루드가 취했던 정수의 개수는 세 개였다. 요렌테의 실험으로 주입됐던 첫 정수와 설산 트롤, 니르바 아틸테헨으로부터 얻은 정수들이었다.
당시 그 세 개의 정수만으로도 제국에 대항할 힘을 얻었었다. 물론 그만큼 엄청난 부작용이 함께 했지만....
'이미 전생의 개수와 같은데도 아직까지 부작용은 없다. 낌새도 안 보이고.'
정수가 가져온 끔찍한 부작용에 고통스러워했던 전생. 하나 현재는 당시와 같은 개수의 정수를 가졌음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신비 듀얼을 통해 일반 마력과 정수로부터 기인한 마력을 구분하고 상황에 따라 꺼내 쓴 덕분이었다.
'부작용 없이 정수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제국을 누르는 것도 꿈이 아니다.'
전생에도, 현생에도 정수의 힘이 품은 강력함은 명확히 인지했다. 이대로 정수의 힘을 모으고 그것을 부작용 없이 사용할 수 있다면, 감히 제국을 압도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하는 루드였다.
다만,
'언제까지고 부작용이 없을 거란 장담은 할 수 없다.'
한 번 걸었던 길인만큼 정수의 부작용에 대한 방비를 해 놨다지만, 정수가 모이며 과거의 경험에서 벗어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루드로서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이번 정수의 흡수가 더욱 중요하다.'
전생에 가졌던 정수의 개수를 뛰어넘는 순간.
앞으로도 부작용의 큰 피해를 받지 않는 선에서 정수를 모을 생각이었으니, 그 첫발이라 할 수 있는 지금은 매우 중요했다.
눈을 감고 누운 미쉐린의 가슴에 손을 얹은 루드는 그녀의 내부로 침잠해 들어갔다.
피부를 지나 근육을 느끼고, 그 아래 숨어 있는 혈관의 흐름을 따라 보다 깊은 곳으로 도달했다.
미쉐린의 몸 안에 남아 있는 한기가 루드를 방해하려 들었으나 일주일 동안 꾸준히 해소된 한기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루드는 모든 것의 근원지를 찾았다.
'내게로 와라.'
미쉐린 내부의 정수를 느낀 루드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검은색 문을 활짝 열었다. 그 안에 자리한 정수는 제 기운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꿈틀. 미쉐린의 안에 있던 정수는 그 기운에 반응했다. 동질의 기운이나,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기운.
그 반응을 느낀 루드는 계속해서 미쉐린의 정수를 자극했다. 금세 추출할 수 있었던 한기와는 달리 정수는 좀처럼 끌려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루드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쉐린의 정수에서 반응이 있었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곳보단 여기가 훨씬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나?'
루드는 스스로를 미끼로 삼았다. 루드의 내면에 활짝 열린 검은색 문은 마치 정수에게 언제든 이곳으로 오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루드는 미쉐린의 정수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저것이, 정수인가...."
미쉐린에게서 떨어진 루드의 손에 어린 기운. 미켈레는 그것이 정수의 힘임을 깨달았다.
추출 과정에 휘말릴까 멀리 떨어진 상태였으나 그것이 가진 힘과 위험성이 한 눈에 느껴졌다.
'저런 게 미쉐린의 안에 있었단 말이지.'
뭐라 말로 표현 못할 농밀한 기운은 마력을 다루는 이라면 누구나 혹할 만큼 매력적으로 보였다. 하나 그 안에 숨은 건 사용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끔찍한 부작용. 자세히 살피면 그것에서 나오는 음습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쓰으...."
미쉐린에게서 정수를 추출한 루드는 그대로 그것을 흡수했다. 이미 미쉐린의 정수를 흡수하기로 마음먹고 준비를 마친 상태였으니 지체할 건 없었다.
슈우우우우욱-!!!
루드에게 흡수된 정수는 이리저리 움직였다. 낯선 곳에 남겨진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것을 진정시킨 건 이미 루드의 내부에 자리 잡은 정수의 힘이었다.
아니, 그걸 진정이라 할 수 있을까. 루드의 인도로 저들끼리 마주친 정수의 힘은 애초부터 하나였다는 듯 순식간에 합쳐졌다.
'돌아가라.'
그렇게 합쳐진 정수의 힘은 기존의 곱절. 짐작하고 있던 바이긴 했다. 정수의 힘은 더하기의 개념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니.
이미 몇 차례 정수의 힘을 흡수하며 겪은 과정이기도 했다.
'돌아가.'
하지만, 곧장 검은색 문으로 돌아가지 않는 정수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큽...!"
루드의 몸에서 냉기가 터져 나왔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새로 마련해 둔 화 속성 아티팩트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해보자 이거냐.'
이전보다 힘이 늘었으니 반항해 보겠다는 건지, 제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기운을 내뿜는 정수에 루드는 이를 악물었다.
간만에 느껴 보는 몸이 얼어붙는 고통. 하나 고작 이 정도로는 자신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보다 더한 것도 긴 세월 버텨 냈던 자신이다.
루드는 정수로부터 기인한 한기를 고스란히 외부로 발산했다. 전생과는 달리 녀석들이 만들어 내는 한기의 양보다 자신이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한기의 양이 더 많았다.
쿵! 쿵! 쿵! 쿵!
단순히 한기를 뿜는 것만으론 어찌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녀석들은 마나로드를 질주하며 루드의 마력을 자신들의 힘으로 바꾸려 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기 싫다면, 집을 가져오는 수밖에.'
어느새 나타난 검은색 문이 녀석들을 집어삼켰다.
"후우...."
녀석들은 문이 닫히고도 한동안 소란스러웠으나 아무리 날뛰어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자 금세 잠잠해졌다.
"...된 건가?"
"예. 됐습니다."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쉐린에게서 정수를 추출했고 흡수까지 마쳤다. 모든 일이 마무리 된 상황이었다.
"그럼 이제 미쉐린은 괜찮은 건가?"
"예, 정수의 힘은 완전히 추출했습니다. 아직 몸에 남아 있는 한기들이 있긴 하지만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의식도 마찬가지고요."
정수가 빠져나온 여파로 의식을 잃었지만, 미쉐린의 상태는 괜찮았다.
흡수 과정에서 루드로부터 발산된 한기도 미리 마련해둔 아티팩트들이 막아 줬으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이었다.
"고맙다."
"제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괜찮은가?"
"예."
루드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미켈레의 걱정을 모르지 않았다.
정수의 추출과 흡수 과정을 지켜보며 그 또한 정수의 힘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이 품고 있는 강력한 힘과 그 이상의 강력한 부작용을.
오랜 세월 부작용을 겪었던 미쉐린의 곁을 지켰던 그이니 더욱 그러할 터였다.
아무리 준비를 마쳤고 필요에 의해서라지만, 그런 것을 흡수했으니....
'아직까진 문제가 없다.'
하지만 미켈레의 걱정과 달리 루드는 괜찮았다. 미쉐린의 정수를 흡수하며 얻은 네 번째 정수. 흡수 과정에서 반항이 있긴 했지만, 녀석들의 힘으론 자신을 어찌할 수 없었다. 방금 전 녀석들을 제압하며 확신한 바였다.
'계속 흡수한다면 그땐 어떨지 모르겠지만.'
흡수한 정수의 개수가 많아질수록, 그 힘이 방대해질수록 녀석들의 기운을 통제하는 건 더 어려워질 터였다.
그러니 앞으로 녀석들과의 균형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자칫 힘겨루기에서 밀렸다간... 지난날의 과오를 반복하게 될 것이었으니.
'절대 그럴 순 없지.'
정수의 힘이 강력하기에 그것을 토대로 제국에 맞서고자 하는 것은 맞았으나, 정수의 힘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어야 했다. 그것이 역으로 자신을 잡아먹는 일은 있어선 안 됐다.
최악의 경우 정수의 힘을 포기할 생각도 있었다.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그 힘이 없더라도 지금의 페이스라면 충분히 제국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었고.
"괜찮다니 다행이구나."
미켈레는 더 이상 걱정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본인이 괜찮다고 하는데 계속해서 뭐라 할 수도 없는 법이었다. 하물며 자신보다 정수에 대해 잘 아는 그였으니.
'무언가 바뀐 건가. 특별히 느껴지는 건 없는데.'
미켈레는 루드를 바라봤다. 정수를 흡수했으니 무언가 변화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루드를 봤을 때 느껴지는 변화는 없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듀얼을 통해 정수의 힘을 격리시켜 놓은 루드였으니, 그 힘을 개방하지 않고서야 외부에서 정수의 기운을 느끼긴 어려운 것이었다.
정수의 힘에 익숙한 이어야만 간신히 루드에게서 묻어나는 미약한 정수의 기운을 느낄 정도였다.
하나 정수를 흡수한 루드 본인은 스스로에게 생긴 차이를 깨닫고 있었다.
'5서클의 마법은 전부 사용할 수 있겠군.'
이번 정수의 획득으로, 퓨렐 협곡의 오우거에게 사용했던 저주의 메아리뿐만이 아니라 알고 있던 모든 5서클 흑마법을 되찾았다.
"이제 어떻게 할 게냐. 생각해 둔 게 있느냐."
"볼일이 있어 카리븐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아마 제도를 거쳐 카리븐으로 들어갈 것 같습니다."
"제도와 카리븐인가."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미켈레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루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미쉐린을 데리고 갈 생각은 없느냐."
"예?"
"염치없는 거 안다. 하지만 정수를 추출했다곤 해도 완전히 괜찮아졌다고 확신하기가 어렵구나. 너 또한 일전에 처음 시도해 보는 방법이라고 했고. 혹 네가 없을 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이 돼서 말이다."
미켈레는 서둘러 미쉐린과 동행하면 얻을 수 있는 이점을 덧붙였다.
"또, 제도로 간다면 네 외양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 거다. 불필요한 분쟁에 휘말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미쉐린을 데려간다면 그런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게다. 감히 누가 고르단 왕가의 일원이자 내 손녀인 그 아이를 건드릴 수 있겠느냐. 그 동행 또한 마찬가지고."
"흠."
갑작스러운 제안에 루드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제도에서야 변신 신비를 사용하려 했으니 미켈레가 걱정한 일은 없겠지만... 미쉐린과 함께하는 건 나로서도 반길 일이다.'
변신 신비를 사용하면 자신의 외양을 감쪽같이 바꿀 수 있었다. 제도에서는 그를 이용해 평범한 제국민의 모습으로 돌아다닐 생각이었으니 외양 때문에 분쟁에 휘말릴 일은 없었다.
하나, 앞서 그가 말했듯 살아 있는 인간으로부터 정수를 추출한 건 루드로서도 처음. 정수 추출 이후 미쉐린의 상태와 예후를 지켜볼 수 있다면 언젠가 귀중한 자료로 쓰일지도 몰랐다. 또 그녀에겐 궁금한 것들도 있었고.
"좋습니다."
"그래, 아주 좋은 생각이다! 흐흐."
루드의 결정에 미켈레는 기쁜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이걸로 일단은 됐다. 남은 건 미쉐린 너한테 달렸다. 아가!'
정작 당사자들은 모르는 손녀사위 구하기 프로젝트. 그 첫 단계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시점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01화
미켈레는 루드에게 별장 건물 한 채를 내줬다.
"매번 확인하러 오려면 힘들 테니 여기서 머무르는 건 어떠냐. 빈방이야 많으니 원하는 방을 사용하면 된다."
루드가 잡은 숙소와 별장의 거리가 머니, 루드의 편의를 봐주겠단 명목이었다. 물론 실상은 루드와 벨로티를 떨어트리고 그 옆에 미쉐린을 가까이 두려는 고도의 계략이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마침 숙소를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잘 됐군요."
그 속내를 모르는 루드는 미켈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다른 숙소를 구하려던 참이었다. 남자처럼 행세하는 벨로티였지만, 진짜 남자와 함께 지내는 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그녀를 위협할 적도 없었으니 떨어져 지내도 괜찮았다.
"그쪽엔 내가 연락하지. 마침 부탁할 일도 있고 말이야."
미켈레는 루드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재빨리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의 부름을 받은 사용인이 루드가 이곳에 머물게 됐다는 소식을 들고 벨로티가 머무는 숙소로 향했다.
그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루드는 매일같이 미쉐린의 상태를 살폈다.
정수를 추출한 부작용은 없는지, 회복의 추이는 어떤지.
사소한 것 하나도 언젠가 중요한 자료로 쓰일 수 있었기에 진찰은 무척이나 면밀했다.
"이제 미쉐린 님의 몸에는 더 이상 한기가 없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의 시간이 지났을 때. 루드는 모든 한기를 걷어 냈음을 알렸다.
"드디어!"
"축하드립니다. 축하해, 미쉐린."
"고마워, 로렐리아."
그 소식에 모두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얼마나 긴 시간이었던가. 오랜 시간 미쉐린을 힘들게 했던 것이 드디어 사라졌다.
"일주일 뒤에 떠나려 합니다. 미쉐린 님도 일정에 맞춰서 준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걱정 마세요."
완치 판정을 내린 루드는 일정을 공유했다. 앞으로 일주일 뒤, 미쉐린과 함께 하이오와를 떠날 예정이었다.
"폐를 끼치는 일은 없게 할게요."
미쉐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때문에 그의 일정이 차질을 빚는 일은 없게 할 생각이었다.
할아버님의 권유가 있었다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동행이 그의 배려로 인한 것임을 알았다. 최소한 그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어야 했다.
'체력을 올려야겠어.'
오랜 세월 거동하지 못한 까닭에 이전 같지 않은 몸이었다. 남은 일주일 동안 최대한 체력을 올릴 생각이었다.
지금은 비록 이렇다지만, 과거엔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뛰어난 체력을 자랑했던 자신이었다. 궤도에 오른다면 금방 체력을 올릴 수 있을 터였다.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미쉐린의 눈빛을 본 루드는 내심 가졌던 걱정을 덜었다. 그녀의 눈에서 의지가 엿보였다. 저런 눈이라면 여정에 필요한 준비는 충분히 해내리라.
'만약 문제가 있더라도 미켈레 님이 어떻게든 해결해 줬겠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동행이니만큼 미켈레는 어떻게든 미쉐린이 자신과 동행할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가 다시 증세를 보인다면 그에 대처할 수 있는 게 자신뿐이었으니.
완치 판정을 내리고 별장을 나온 루드는 벨로티를 찾았다.
"루드! 오랜만이네."
"그래. 미켈레 님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의뢰를 받았다면서."
"응, 니르바 아틸테헨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셨어. 도서관도 재정비 중이라 좀 바쁘네. 그보다 곧 떠난다며."
"일주일 뒤에 떠날 예정이다."
"그렇구나."
오랜만에 만난 벨로티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분열된 도서관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 인원 정리와 확충, 시스템의 정비까지.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하고 있었으니 바쁘지 않으면 이상했다. 거기에 미켈레에게 받은 의뢰까지 있었으니.
'따로 조사해 보려는 건가.'
루드는 니르바에 대해 언급하던 미켈레를 떠올렸다. 고르단과 세바니아는 인접국이자 몇 세대 전까지만 해도 잦은 분쟁을 벌이던 사이였다. 미켈레의 입장에선 더 알아볼 필요를 느꼈을 것이었다.
'상당히 고생하겠군.'
세바니아 왕국은 대륙 북단에 위치해 있었다. 니르바 아틸테헨의 영지는 그중에서도 가장 북쪽이었으니, 제국 남부인 하이오와에선 무척이나 먼 거리였다.
의뢰자와 정보 수집의 대상을 감안하면, 벨로티가 직접 움직여야 할 테니, 그녀의 고생길이 눈에 훤했다.
"문제는 없나?"
미래의 벨로티를 애도하던 루드는 어려움은 없는지 물었다. 벨로티는 씩 웃었다.
"아무 문제없어. 도서관도 정상화되어 가는 중이고 로미네스 백작가도 물러났거든."
"로미네스 백작가가? 생각보다 간단히 물러났군."
"응. 웃기는 게 뭔지 알아? 잘 포장해 줄 테니 입적할 생각 없냐고 슬쩍 물어보더라니까."
스테판을 처리한 벨로티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도서관에 대한 정보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미켈레 구르드손을 포함한 두 명의 소드마스터가 도서관을 후원한다는 소식.
그 소식을 들은 로미네스 백작가는 코웃음 쳤다. 그들만이 아니라 소식을 접한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감히 소드마스터의 이름을 사칭하다니. 겁을 상실해도 제대로 상실한 게 분명했다. 일각에선 분노한 미켈레가 언제 도서관을 뿌리 뽑을지 내기까지 걸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금세 반전됐다. 미켈레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까닭이었다.
미켈레의 무반응은 다른 의미론 긍정의 반응이었다.
하물며 하이오와에서 시작된 소식이었으니, 사람들은 도서관과 그 간에 거래가 체결됐음을 직감했다.
"따로 확인도 했었나 봐. 미켈레가 도서관을 후원하는 게 맞는지."
확인을 마친 로미네스 백작가는 이전까지의 태도를 싹 바꿨다. 사생아인 걸 숨겨 줄 테니 가문으로 들어오란 제안까지 할 정도였다.
루드는 과연 벨로티가 뭐라 답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뭐라고 했나."
"사냥개들 죽인 거, 사생아인 거 눈감아 줄 테니 가문을 위해 힘써 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던데."
"아니, 네가 그들에게 한 대답 말이다."
"아. 아랫도리 간수나 잘하라고 했어."
"잘했군."
벨로티다운 답변이었다. 그녀가 노렸던 대로 미켈레의 이름을 등에 업은 도서관은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조직이 되었다. 같은 세계 내부의 경쟁이라면 모를까, 외부의 귀족가가 그들을 압박하긴 어려웠다. 그건 곧 미켈레와 반목하겠단 의미였으니.
"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카리븐으로 가나?"
"그래, 그 전에 제도에도 잠깐 들를 생각이다."
"저번에 말한 고대 문자 때문에?"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해결됐으면 좋겠네. 나도 개인적으로 더 알아봐 줄 테니까 기억에 있는 글자랑 모양 남겨 놓고 가."
"고맙다."
"에이 별말씀을. 그보다 이만 가 봐야겠다. 더 자리를 비웠다간 타미가 과로로 죽을지도 몰라."
"...타미 씨가 고생이 많군."
기존의 시스템을 정비해 새로운 도서관으로 바꾸는 중이었으니 한창 바쁠 시기였다.
벨로티와 인사를 마친 루드는 미켈레의 별장으로 돌아갔다. 도서관과 관련된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됐으니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걸로 군자금 수급에도 문제가 없다.'
군자금에 대한 걱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 * *
커다란 테이블에 열둘의 인원이 둘러앉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민무늬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다 오셨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들은 제국 의회의 의원들이었다. 호사가들이 말하길, 때론 황제보다 강한 입김을 발휘할 수 있다는 단체.
그러나 정작 본인들은 의회가 황제를 넘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최소한 지금으로선.
"이번 회의의 안건은 두 가지입니다. 바깥대륙에서 건너온 제안과 황실과의 마찰에 따른 대처입니다."
직사각형의 테이블 중 상석에 앉은 의장이 안건을 발의했다.
"먼저 바깥대륙, 뱀 부족의 제안에 대한 안건을 논의하겠습니다."
해당 안건은 바깥대륙의 이민족 하나가 의회를 찾아오며 시작됐다.
스스로를 뱀 부족의 사자(使者)라고 밝힌 그는 자신들과 손을 잡고 바깥대륙을 양분하지 않겠냐 제안했다.
민무늬 가면의 의원들은 열심히 의견을 나눴다.
"받아들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어차피 바깥대륙으로 진출할 계획이니, 이참에 그곳을 경험해 보는 것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내 생각 또한 같소."
바깥대륙으로의 진출은 그들이 세운 계획에 이미 포함돼 있는 것이었다. 당장은 시기가 아니라 생각해 준비하지 않았으나, 이번 기회에 바깥대륙이 어떤 곳인지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모두의 의견이 같다니 다행이군요. 해당 안건은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겠습니다. 이번 기회로 바깥대륙을 자세히 살펴보죠. 어떤 이들이 살고 있는지, 그곳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얻을 수 있는 건 뭔지. 전부요."
의장의 결정에 의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운이 좋은 걸지도 모르겠어.'
의장은 제안을 들고 왔던 뱀 부족의 사절을 떠올렸다.
'사르한이라던 그자,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다른 의원들은 직접 만나 본 적 없지만, 의회의 대표로서 사르한과 대면했던 의장이었다.
당시 느꼈던 사르한의 경지는 대단했다. 스스로가 무인이 아닌 까닭에 그 경지를 정확히 짚어 내긴 어려웠지만, 소드마스터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했다.
'바깥대륙의 힘이 생각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중앙대륙과 바깥대륙 중 어디가 더 뛰어날까.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두 중앙대륙이라 말할 것이다. 그건 사실이었다. 땅의 크기나 인구의 규모, 기술의 발전에서 중앙대륙과 바깥대륙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양 대륙이 전쟁을 한다면?
'중앙대륙이 이기긴 하겠지만 상처뿐인 승리일 거다.'
넌지시 사르한에게 물어봤을 때. 그는 바깥대륙에 자신과 같은 경지의 이들이 여럿 있음을 암시했다.
특히 동맹을 논하며 언급했던 까마귀 부족은 결코 얕잡아 보아선 안 될 강력한 적이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경지를 이룬 그가 그리 말할 정도라면, 그 저력은 가벼이 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만약 그러한 정보를 모른 채 바깥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했다면....
'큰 낭패를 볼 뻔했어.'
바깥대륙 진출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바깥대륙이 아니었다. 중앙대륙의 다른 국가와 제국 내의 권력 다툼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것이 사실이었다.
그들은 언제고 경쟁자가 약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나운 이빨을 박아 넣을 터였다.
'지금 알게 된 것이 천운이다.'
때마침 바깥대륙을 살필 기회가 왔다. 이참에 나중의 계획에 참고할 만한 것들을 모조리 조사할 생각이었다.
생각을 마친 의장은 두 번째 안건을 발의했다.
"그럼 두 번째 안건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최근 황실이 우리와 여러 차례 마찰을 빚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계속 한발 물러나는 태도를 취해 왔으나,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관해 논의하고자 합니다."
의원들은 첫 번째 안건과 달리 쉽사리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만큼 중요한 안건이었다. 자칫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간 의회가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당분간은 계속해서 그러한 모습을 취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반대입니다. 황실의 압박에 물러서는 자세를 취하더라도, 반항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반항하지 않은 것이란 걸 보여줘야 합니다."
조심스레 시작된 논의는 찬반이 갈렸다. 의견을 주고받으며 작았던 목소리도 점차 커져 갔다.
그때, 누군가 한 가지 의견을 냈다.
"아직 황실의 힘을 감당할 수 없음은 사실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고개만 조아리고 있을 수도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이건 어떠십니까. 한발 물러서는 태도를 취하면서 황실에 경각심을 심어 주는 겁니다."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예, 황실이 이리 강하게 우리를 압박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들에겐 힘이 있다. 언제고 우리를 제거할 수 있다. 그러니 조심해라. 그리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테이블 위로 양팔을 올린 그는 턱을 괴며 말했다.
"그 자신감을 꺾는다면, 그들에게도 경고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황실의 주축 전력을 제거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를테면... 소드마스터라든가."
그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스쳐 간 얼굴이 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02화
소드마스터를 죽이자.
아무렇지 않게 엄청난 소리를 뱉은 의원은 여전히 태연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눈엣가시 같던 이가 있지 않습니까."
이곳의 모두가 그게 누구인지 알았다.
더스틴 클라위베르트.
녀석이 보였던 오만방자했던 행동을 기억했다. 언제고 녀석이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하게 만들리라 했던 다짐도.
"좋은 생각입니다. 녀석도 짓뭉개고 콧대 높던 황실에도 충분한 경고가 되겠군요."
"벌써 더스틴 그 작자가 벌벌 떠는 게 눈에 선합니다. 하핫."
찬성하는 의원들은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다. 마음에 안 들던 녀석도 치워 버리고 목적하던 바도 이룰 수 있으니,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모두가 찬성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반대요. 아무리 그래도 소드마스터를 죽이자니. 위험부담이 너무 크오."
"맞는 말입니다. 잘못 건드렸다가 역으로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소드마스터란 이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반대하는 목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하나 같이 그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였다.
"더스틴을 죽이는 데 얼마나 많은 힘이 소모될지 모르고, 그를 죽인다 해도 황실의 분노가 우리에게로 향할 것임을 알아야 하오."
더스틴을 죽이는 건 문제가 안 됐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지만 자신들의 힘이라면 충분히 죽일 수 있을 테니.
다만 죽이고 난 뒤가 문제였다.
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소드마스터가 병력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작지 않았다. 오히려 큰 영토를 사수하고 타국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국가보다 많은 절대강자가 필요한 만큼, 소드마스터는 귀중한 자원이었다.
그런 존재를 잃는다면, 분노한 황실이 어찌 나올지 예상할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가 전면전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황실과 힘겨루기를 하는 건 시기상조요."
그리되면 결국 패하는 건 자신들이었다. 아직은 정면에서 황실을 상대하기엔 힘이 부족했다.
극명하게 갈린 찬성과 반대. 의원들은 의견 합치를 보기 위해 열띤 토론을 벌였으나 결론은 쉽사리 나지 않았다.
그때, 의견을 제시한 의원이 의장에게 물었다.
"의장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태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의장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전대 의장을 만나 뵀습니다. 그분께선 현재 저희가 겪고 있는 고충을 알고 계셨고, 그에 관해 작은 조언과 선물을 주셨죠."
의장의 말은 난데없는 것이었다. 갑자기 전대 의장의 이야기라니.
하나 그것을 꼬집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의원 모두가 의장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제국 소속인데, 적국도 아니고 자국의 소드마스터를 죽여서야 되겠습니까."
"하면...."
더스틴을 죽여선 안 된다는 말에 반대 의사를 밝혔던 의원들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의장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저희는 참 복이 많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저희를 도우니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마침 새로 얻게 된 우군이 선물이라며 주고 간 것이 있습니다."
동맹을 맺자며 의회를 찾았던 사르한은 동맹을 맺지 않더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며 작은 선물을 주고 갔다.
그는 선물의 이름을 혼미의 정수라 알려 줬다. 강력한 환각과 정신 이상을 유발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했다.
사르한의 선물은 전대 의장이 준 선물과 비슷한 결이 있었다. 둘 모두 정신에 간섭하는 효과를 지녔고, 높은 정신력을 지닌 이에게도 통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이 두 가지를 잘 활용한다면... 감히 소드마스터에게도 통할 독을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고 지금이야 베일지도 모르는 칼이라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또한 우리가 휘둘러야 할 칼이 아니겠습니까. 아까운 칼을 부러뜨릴 필요는 없지요."
의장은 미소를 지었다. 민무늬 가면이 얼굴을 가렸지만, 의원들 모두가 의장의 얼굴에 그려진 미소를 느낄 수 있었다.
"그저 성질을 죽이고 참회하게 할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씀입니다."
의견을 제시했던 의원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시작으로 모든 의원들이 의장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 안건은 이리 마무리하겠습니다. 더스틴을 반성하게끔 하는 건, 제가 직접 하지요."
의장은 안건을 마무리 지었다. 전대 의장과 사르한에게서 받은 선물을 잘 포장해 더스틴에게 전달할 생각이었다.
* * *
하이오와에서 제도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다. 중간에 위치한 도시도 여럿이었고 도시끼리의 거리도 상당했다. 다행인 것은 제도로 향하는 길이 넓고 깔끔하다는 것이었다.
루드와 미쉐린은 말을 타고 이동했다. 두 사람 다 말을 탈 줄 알았고 마차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기에 택한 수단이었다.
하이오와에서 제도까지의 길이 잘 닦여 있는 덕에 두 사람은 빠르게 제도에 가까워졌다.
"오늘은 여기서 쉬죠."
"좋아요."
산을 마주한 두 사람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야영을 준비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고 날이 밝는 대로 산을 넘어갈 생각이었다.
"야영 준비가 능숙하시네요."
"별것 아닙니다. 하다 보니 익숙해진 것뿐이죠. 그러는 미쉐린이야말로 야영이 익숙해 보입니다."
"예전에 이곳저곳 다녔었거든요."
여정을 함께한 지 벌써 5일째. 두 사람은 이전보다 편한 분위기로 대화를 이어 갔다.
언제까지고 말을 불편하게 할 순 없었으니,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호칭도 정리한 상태였다.
'생각보다 잘 따라오는군.'
루드는 야영 준비를 마친 미쉐린을 응시했다. 여정 중 그녀의 체력이 문제가 될까 걱정했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자신의 속도를 잘 따라오고 있는 그녀였다.
'마력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모은 것 같고.'
정수를 추출하며 모든 마력을 잃은 미쉐린은 여정에 앞서 체력을 올리며 마력 또한 다시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지금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못해도 익스퍼트급이었다.
이미 마력을 쌓았던 경험과 감각이 있으니 빠를 거라 짐작은 했으나 상상을 벗어나는 속도였다.
그때, 루드와 눈이 마주친 미쉐린이 질문을 던졌다.
"제도와 카리븐으로 가는 이유를 물어도 되나요?"
"마탑과 아카데미에 볼일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용무라 그 이상은 설명드리기가 어렵군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해요. 답해 줘서 고마워요."
이참에 루드는 자신도 궁금한 것을 묻기로 했다. 안 그래도 그녀에게 물어보려 했던 것들이 있었다.
"저도 뭐 하나 여쭤봐도 됩니까?"
"네, 뭐가 궁금하신가요?"
"정수의 힘은 어디서 어떻게 얻은 겁니까."
정수란 말 때문이었을까. 잠시나마 미쉐린의 얼굴이 경직됐다. 그러나 곧 표정을 풀어낸 미쉐린은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정확히는 저도 몰라요. 선물 꾸러미에 섞여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워낙 오래돼서 기억이 맞을지 모르겠네요."
"선물 꾸러미에 있었다고요?"
"네. 무슨 함 같은 것에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보석인 줄 알고 열었다 놀랐던 기억이 있네요."
뜻밖의 사실이었다. 미쉐린이 자연 상태의 정수와 접촉해서 그 힘을 얻었을 거라 생각한 루드였다. 한데 선물 꾸러미에 섞여 있었다니.
'누군가 일부러 정수의 힘에 노출시킨 건가?'
그 말은 곧 미쉐린이 정수의 힘을 얻은 것이 우연이 아니란 소리였다.
'최소한 정수의 힘을 알고 있는 자다.'
목적을 갖고 그녀에게 정수를 보냈다면, 정수의 힘과 부작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대체 누구냐는 것.
'미쉐린은... 알 리가 없겠지.'
그나마 미켈레가 알 확률이 있었지만 당장 그에게 정보를 확인하는 건 어려웠다. 아직 하이오와에 머물고 있는데다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고르단 왕국으로 복귀할 미켈레였다.
생각지도 않았던 정보에 루드는 심각해졌다. 미쉐린 또한 표정이 좋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루드의 질문으로 누군가 의도적으로 정수를 보냈단 걸 깨달은 까닭이었다.
"...그보다 마력을 회복하는 속도가 상당한 것 같습니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루드는 미쉐린의 기분을 환기시키기 위해 주제를 바꿨다.
"네, 저도 깜짝 놀랐어요. 할아버님도 마찬가지시고요."
미쉐린과 미켈레도 마력의 회복세에 놀랐다. 미쉐린은 자신의 내부를 관조했던 미켈레의 말을 떠올렸다.
"할아버님께서 제 몸 안의 마나로드가 이전보다 확장돼 있다고 하셨어요. 그 강도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튼튼해졌다고요."
"정수의 영향 때문입니까?"
"네, 그렇게 여기셨어요. 정수의 힘 때문에 확장된 마나로드가 정수의 힘이 사라지며 깔끔히 청소된 모양새라고요."
설명을 들은 루드는 미쉐린의 마나로드가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았다.
정수의 힘 때문에 조금씩 넓어졌을 미쉐린의 마나로드다. 정수의 힘을 견디기 위해 내구도 또한 강해졌겠지.
그 상황에서 정수가 추출되며 모든 힘이 사라졌으니, 텅 빈 미쉐린의 마나로드는 새로운 마나를 받아들이기에 최적의 상태가 된 것이다.
'이건 또 새로운 정보군.'
살아 있는 인간으로부터의 정수 추출이 처음이었던 만큼, 정수 추출 후 마나를 받아들이기 쉬운 몸이 된다는 것도 새로운 정보였다.
미쉐린과 동행하기로 한 이유가 이런 데 있었다. 지금과 같이 그녀에게서 얻는 정수에 관한 정보는 분명 앞으로의 계획에 도움이 될 터였다.
"제도가 얼마 안 남았네요."
"네, 쉬지 않고 이동한 덕분에 금방 도착할 것 같습니다."
루드는 야영지 앞의 산을 바라봤다. 저 산만 넘으면 제도까진 금방이었다.
'제도 카르반.'
카르바나 제국의 수도이자 제국 최대의 도시.
카르반엔 없는 게 없다고 알려질 정도였으나, 루드는 쓴웃음이 지어질 뿐이었다.
명백히 없는 것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민족에 대한 호의.'
중앙대륙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제도였다.
하나 그들 중 바깥대륙의 사람을 찾기는 어려웠다. 바깥대륙의 사람이 중앙대륙에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선민의식에 빠진 제도의 시민들은 이민족을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경험으로 그것을 뼈저리게 느낀 루드였다.
'물론 좋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세상 이치가 그렇듯, 제도에도 좋은 사람들은 있었다. 좋은 기억도 있었고.
하나 그들의 비중이 얼마나 될까.
'아무래도 모습을 바꾸는 게 낫겠지.'
루드가 고민에 빠진 건 그 때문이었다.
미켈레의 말처럼 이민족의 외양은 제도에서 너무 눈에 띄었다. 이유 없는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서 좋을 건 없지.'
용사 아이리우스가 아카데미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 아카데미가 있는 카리븐과 제도는 바로 옆이었으니 조심하는 게 좋았다.
'미쉐린도 함께이고.'
더군다나 곁에 미쉐린도 있었으니, 외양을 바꾸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은 분명했다.
'나에게 집중된 시선이 미쉐린에게 향하고 그녀의 정체가 밝혀진다면 또다시 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겠지.'
저 이민족의 정체가 뭐길래 미쉐린 구르드손과 동행하는 것인지, 사람들은 그 비밀을 알아내고자 혈안이 될 터였다.
그럼 조용히 목적한 바만 이루겠다는 바람도 물거품이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미쉐린에게 변신 신비를 밝히고 모습을 바꾸는 게 나았다. 애당초 가장 중요한 정수에 관한 걸 알고 있었으니, 변신 신비를 밝히는 것에 대한 부담은 적었다.
'그때 가서 말해도 충분하겠지.'
고민을 마친 루드는 잠을 청했다. 미쉐린은 이미 잠에 빠진 상태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03화
방학을 맞은 카르반 아카데미는 한산했다. 대부분의 학생이 본가로 돌아갔고 소수의 학생들만이 아카데미에 남아 있었는데, 아이리우스도 그중 하나였다.
귀족의 경우 방학 땐 가문으로 돌아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가문에서 후계 수업을 받거나 가문의 일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리우스가 아카데미에 남은 건 의외의 일이었다.
현 에이나우디 공작이 몇 년 뒤 공식 후계자를 정하기로 했다는 건 유명한 사실.
당연히 아이리우스가 가문으로 돌아가 동생과 후계 경쟁을 할 거라 여겼던 사람들이었다.
'가문이야 헤수스가 이끌어도 상관없어.'
하지만 아이리우스로선 당연한 선택이었다.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아카데미에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았다.
'헤이론이 잘하고 있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오가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워.'
거기에 가문과 아카데미 간의 거리도 짧지 않았으니, 오가며 쓰게 될 시간이 아깝기도 했고.
"선배, 대련할래요?"
"좋다."
무엇보다 이곳엔 최고의 대련 상대가 있었다.
아이리우스와 페드리는 강의실로 쓰는 공터에 섰다. 어느덧 익숙해진 공터는 다른 일반적인 강의실들을 낯설게 만들 정도였다.
두 사람은 곧장 대련을 시작했다. 첫 대련을 시작으로 꾸준히 거듭된 두 사람의 대련은 학기가 끝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이만한 재능이 알려지지 않았다니.'
페드리와 검을 섞는 아이리우스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페드리의 재능은 엄청났다. 회귀하기 전의 자신이 보았다면 좌절했을 만큼 뛰어난 재능이었다. 그런데도 전생에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다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잠깐의 상념에 빠진 사이, 페드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아이리우스의 검을 쳐 내고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눴다.
"이로써 49전 25승 24패군."
"제가 25승 아니에요?"
"아니, 내가 25승이 맞다."
"아닌 거 같은데. 저번에 제가 이겼잖아요."
"그 전엔 내가 이겼지."
"그 전에는 또 제가 이겼고요."
두 사람은 역대 전적을 갖고 으르렁거렸다. 비등비등한 실력의 둘은 서로에게 좋은 자극제였다. 두 사람의 대련 횟수와 그 전적이 그것을 증명했다.
"애들도 아니고 누가 더 이겼던 고작해야 하나 차인데 그렇게 싸워야겠냐."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고개를 저은 쿠두스였지만.
"물론이죠."
"당연하죠."
이럴 땐 의견 합치가 잘 되는 두 사람이었다.
전적을 갖고 떠들던 건 페드리가 기숙사로 돌아가며 마무리 됐다.
페드리가 떠난 후 아이리우스는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했다.
'생각보다 경지를 회복하는 속도가 늦어.'
현재의 경지는 익스퍼트 중급의 끝자락. 나이를 생각하면 빠른 속도였으나 그녀가 회귀자란 사실과 이때쯤 상급의 경지에 오르는 걸 목표로 했음을 따지면 만족스럽지 않은 성과였다.
이대로는 안 됐다. 더 빨리, 더 높은 경지에 올라야 했다. 그래야만 미래에 있을 숱한 일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뭐가 그리 초조하냐. 지금도 충분히 잘 가고 있는 것 같은데."
조급해하는 그녀를 본 쿠두스는 그리 말했다.
이미 나이에 비해 뛰어난 성취를 거두고 있는 그녀였다. 가진 재능도, 들이는 노력도 충분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높은 경지로 향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급해 보였다.
"마음을 차분히 가져라. 서두르다간 될 것도 안 되는 경우가 있으니."
그녀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이로서 건넨 조언이었다. 동시에 검에 관한 조언이기도 했다.
쿠두스 또한 일찍이 조급함에 휩싸였던 적이 있었다. 함께 수학했으나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경지를 구가한 친구에 부러움과 자괴감을 가졌었다.
그리 조급함을 가졌던 결과가 어땠는가. 처음에는 원동력이 됐지만 바른 방향으로 나가지 못한 마음은 언제고 스스로를 좀먹을 뿐이었다.
쿠두스는 조금은 마음을 편히 먹을 필요도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방학 내내 아카데미에 있었다지.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냐? 뭐, 지금 가기에도 늦긴 했다만."
"당장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어서요."
어느덧 길었던 방학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2주 뒤면 새로운 학기가 시작됐으니, 이제 와 가문을 다녀오려 해도 애매한 시간대였다.
애초에 그녀에게도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한동안 아이리우스를 바라보던 쿠두스는 마침 페드리가 퀘스트를 진행한다는 걸 떠올렸다.
"페드리 녀석한테 퀘스트에 껴 달라고 하는 건 어떠하냐."
"퀘스트요? 페드리 선배랑?"
아카데미 2학년생부터는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 전생의 그녀 또한 몇 번인가 퀘스트를 진행했던 적이 있었다.
퀘스트는 쉽게 설명하면 아카데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용병 의뢰 같은 것이었다.
아카데미 측에 의뢰가 들어오면 그것을 학생이 배정받아 의뢰를 해결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의뢰자는 믿을 수 있는 이에게 의뢰를 부탁해 안심이었고, 학생은 의뢰의 대가로 돈을 벌 수 있었으니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제도였다.
"그러고 보니 페드리 선배 돈이 없었죠."
특히 퀘스트 제도를 환영한 건 생활비와 학자금을 벌어야 하는 평민 학생들이었다.
아카데미의 학비는 만만치 않았으니, 장학금을 받는 게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돈을 마련해야 했다. 학비만이 문제인가? 제도 옆에 위치한 카리븐은 물가도 높았으니 생활비도 문제였다.
페드리의 경우는 장학금이 나왔지만, 본인의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였으니.
"물론 페드리가 괜찮다고 해야겠지만, 녀석의 성격이라면 높은 확률로 상관없다 하겠지."
"확실히... 그렇죠."
쿠두스의 말에 아이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으로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페드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학기 동한 함께 수업을 들으며 숱하게 보아 왔던 표정이었다.
"혼자 검을 수련하고 명상하는 것도 좋지만 때론 실전을 겪을 필요도 있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도 보고 말이다. 무엇보다 넌 바깥 공기를 좀 마실 필요가 있다. 페드리 따라서 바람 좀 쐬고 와라. 방학인데 아카데미에만 있기엔 청춘이 아깝지도 않느냐."
"...저 때문에 귀찮아서 그러시는 건 아니죠?"
"아무리 나라지만 그럴 리가 있겠냐. 큼, 크흠."
"정말 믿음이 가는 답변이네요."
사레에 걸린 듯 기침을 해 대는 쿠두스의 모습에 아이리우스는 미소 지었다. 한 학기 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어느새 이들이 편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함께 시간을 보냈기 때문만은 아니겠지.'
시간을 보낸 걸로 치면 가문의 기사들이나 아카데미의 다른 학생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쿠두스와 페드리로부터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 아닐까.
'교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도 괜찮겠네.'
쿠두스의 말처럼 생각을 조금 환기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공터에서 머무르던 아이리우스가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냐."
"페드리 선배한테요. 교수님이 퀘스트 같이 가도 되냐고 물어보라면서요."
"큼큼, 그래. 잘 다녀와라. 나가서 맛있는 것도 좀 사 먹고."
"보통은 용돈 주면서 그런 말 하지 않나요?"
"내 전 재산보다 네 녀석의 한 달 용돈이 더 많을 것 같다만."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이리우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런 면이 편안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제국의 희망인 용사도, 에이나우디 공작가의 영애도 아닌 그냥 아이리우스가 된 기분.
공터를 떠난 아이리우스는 페드리를 찾았다. 그는 기숙사 앞의 공터에 누워 있었다. 몇 개 없는 나무 아래로 커다란 그늘이 진 명당을 차지한 채였다.
페드리를 찾은 아이리우스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선배. 안 자는 거 아니까 일어나 봐요."
"무슨 일이냐. 아까도 말했지만, 대련은 내가 25승이 맞다."
"설마 그것 때문에 자는 척했던 거예요?"
"그럴 리가."
페드리는 시선을 피했다. 아이리우스는 아닌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굳이 따지는 대신 그를 찾아온 용건을 이야기했다.
"퀘스트 나간다면서요."
"그래."
"저도 같이 가도 돼요?"
"그래라, 뭐."
예상했던 것처럼 페드리의 반응은 싱거웠다.
"그게 그렇게 대충 결정해도 되는 거예요?"
"네가 발목을 잡을 녀석도 아니고, 퀘스트 보상을 달라고 떼쓰지도 않을 테니까 고민할 필요는 없지."
어찌나 성의 없는 답이었는지, 아이리우스가 한 번 더 물어야 할 정도였다.
그러길 잠시. 누워 있는 모습 그대로 슬쩍 눈을 뜬 페드리가 못을 박았다.
"...혹시나 해서 그런데 보상은 진짜 못 준다. 생활비가 간당간당하거든."
"필요 없어요."
* * *
페드리와 아이리우스는 제도로 향했다. 제도 카르반과 아카데미가 있는 카리븐은 바로 인접해 있었기에 이동하는 건 금방이었다.
"그런데 퀘스트 내용이 뭐예요?"
"말 안 해 줬었나?"
"네. 말 안 해 줬어요."
퀘스트 해결을 위해 제도로 향하는 길. 아이리우스는 정작 퀘스트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페드리는 자신이 받은 퀘스트의 내용을 떠올렸다.
"범죄자 체포랄까."
"범죄자요? 그런 건 방범대에서 나설 일 아니에요?"
"어른의 사정이란 게 있는 법이지."
알쏭달쏭한 말을 뱉은 페드리는 퀘스트에 관한 내용을 마저 설명했다.
"우리가 잡아야 할 건 코테야라는 녀석이야. 여자를 홀려서 금품을 갈취하고, 그걸로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녀석이지."
"그거... 아주 나쁜 놈이네요."
더 심한 욕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언어를 순화한 아이리우스였다.
목표인 코테야는 일종의 사기꾼이었다. 잘난 외모와 화려한 언변으로 여인들을 꼬시고 그녀들에게서 금품을 받았다. 문제는 그것이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있다는 것.
"여태까진 주로 부유한 평민들이 대상이었다고 해. 돈 많은 집 아가씨라든가 부인이라든가. 돈을 훔친 것도 아니고 그녀들이 갖다 바치게 만들어서 경비들이 나서기도 애매했고."
하지만 녀석은 최근 실수를 하고 말았다. 건드려선 안 될 인물을 건드리고 만 것이다.
"최근 녀석이 건드린 인물 중에 한나로 가문의 영애가 있었어. 평민의 삶을 체험해 보겠다고 나왔다가 녀석에게 홀리고 말았다는데. 뭐, 녀석으로서도 그녀가 귀족인 건 몰랐던 것 같지만, 중요한 건 녀석의 입장이 아니라 한나로 자작이 화났다는 거지."
이번 퀘스트의 의뢰자는 한나로 자작이었다. 물론 의뢰자의 이름은 그의 이름이 아니었지만, 그가 사람을 시켜 의뢰했다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그는 제 딸을 홀리고 금품까지 받아 간 녀석에 크게 분노했고, 녀석을 혼쭐내 제 앞으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어떻게 보면 제삼자가 개입하기에 찝찝한 구석도 있는 퀘스트. 하지만 페드리는 이 퀘스트를 발견하자마자 누구보다 빠르게 선점했다. 보상이 가장 짭짤했기 때문이다.
"사기꾼 하나 잡는 거면 쉽겠네요. 어디 있는지 찾기만 하면 바로 해결할 수 있겠어요."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을 거야."
퀘스트 내용을 듣고 빠른 해결을 자신한 아이리우스. 하나 페드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생각만큼 쉬운 의뢰는 아니었다.
"아카데미에 퀘스트를 의뢰하기 전에 다른 용병들한테 먼저 의뢰를 했댔어."
어찌 보면 가문의 치부라 할 수 있는 내용을 퀘스트로 내건 덴 이유가 있었다.
"결과는 용병들이 역으로 당했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녀석이 어지간한 용병들로는 손쓸 수 없을 만큼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기꾼 녀석. 기사 출신이래."
코테야는 전직 기사 출신이었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정식 서약을 받은 기사.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의뢰를 받았던 용병들은 전부 어디 한 군데가 부러진 채로 의뢰를 포기했다.
"그래서 아카데미의 퀘스트로 의뢰가 들어온 거겠네요."
가문의 힘을 동원하면 처리할 수 있겠으나 그래선 딸아이의 치부를 크게 들추는 꼴이었으니, 아카데미의 퀘스트를 이용한 건 그 때문일 터였다.
"오히려 잘됐어. 현재 내 검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
상대는 전직 기사였지만, 페드리는 기죽지 않았다. 전직 기사건 현직 기사건 상대가 검을 휘두른다면 자신 또한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때마침 아이리우스까지 합류한 상황. 혼자서는 힘에 부친다 하더라도 그녀가 합세하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테니 만약의 사태에도 걱정은 없었다.
'이 퀘스트만 마치면 당분간은 쉬어도 되겠지.'
당장 생활비가 없는 까닭에 바쁘게 살고 있지만, 페드리는 바쁜 삶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돈 문제만 없었다면 퀘스트를 진행할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마침 이번 퀘스트의 보상이 쏠쏠했기에 이걸 마무리하면 한동안 검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아이리우스와 대련이 거듭될수록 무언가 잡힐 듯 말 듯 했으니.
"일단은 녀석을 찾는 게 우선이겠네요."
"그래. 일단 녀석이 자주 보일 만한 곳들을 체크해 놨다. 이건 녀석의 몽타주고."
페드리는 제도의 약도와 몽타주를 건넸다. 약도의 중심가에는 붉은색 원이 쳐져 있었다.
"...범위가 너무 넓은 거 아니에요?"
지도가 축소된 비율을 따졌을 때, 동그라미로 표시한 범위는 상당히 넓은 구역이었다.
'흠, 여자들에게서 돈을 얻고 사치와 향락을 좋아한다라....'
약도와 몽타주를 받아 든 아이리우스는 생각에 잠겼다.
몽타주 속에는 꽤나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 이러니 여자들에게서 돈을 뜯어냈겠지.
어떻게 해야 그를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아이리우스는 곧 최근 다른 학생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선배, 그거 알아요?"
"뭐 말이냐."
"마탑에 새로운 향수가 나왔대요."
제도에 위치한 마탑은 모든 지부를 통틀어 가장 커다란 규모였다.
그곳에선 마법과 관련된 다양한 물품을 팔았는데, 신상품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그리고 얼마 전, 마탑에서 새로운 향수를 선보였다.
"남성용 향수도 있댔어요."
개중엔 남성용 향수도 있었다.
주 고객인 여자들만 아니라 남자들도 관심을 가질 정도로 유행했던 마탑의 향수였다.
사치를 좋아하고 여자를 유혹해 돈을 뜯는 녀석이라면... 이 향수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가 볼 만하지 않아요?"
"확실히 가능성이 있어 보여."
두 사람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당장 단서가 없었으니, 마탑을 중심으로 수색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마탑을 찾은 두 사람은,
"저 녀석 아니야?"
"비슷한 것 같은데 좀 다른 것도 같고...."
"옆에 여자도 끼고 있어. 새로운 먹잇감인 건가."
여자와 함께 있는 코테야를 발견했다.
"멀어진다."
"일단 따라가요."
두 사람은 마탑을 빠져나온 녀석의 뒤를 밟았다.
'왜 익숙한 기분이 들지.'
그 뒤를 쫓는 아이리우스는 코테야의 곁에 있는 여자에게서 어딘지 모를 익숙함을 느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04화
페드리와 아이리우스는 코테야를 쫓았다. 마탑에서 나온 코테야는 길을 걸으며 일행과 이야기를 나눴다. 거리가 멀어 두 사람이 떠드는 내용을 들을 순 없었지만, 코테야가 떠들 내용이야 뻔한 것이었다. 사랑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이겠지.
인파에 섞여 두 사람을 따라가던 페드리는 아이리우스에게 언질을 줬다. 움직일 타이밍에 대해서였다.
"여자와 헤어지는 즉시 급습할 거야."
"알겠어요."
아이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봤던 얼굴 같은데.'
한편으로는 코테야 옆에 있는 여자의 정체를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분명 익숙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때, 인파 속에서 움직이던 코테야가 점차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수록 주변의 사람들이 없어지고 있었다. 동행하는 이로서는 꿈에도 모를 만큼 자연스럽고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이윽고 코테야와 여자는 큰길을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당했다!"
페드리는 코테야가 미행을 알아차렸음을 깨달았다. 서둘러 골목으로 들어갔으나, 간발의 차이로 코테야와 여자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코테야와 여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리!"
"여자 쪽은 제가 맡을게요. 선배는 코테야를 맡아 주세요."
아직 멀리 가진 못했을 터. 침착하게 쫓는다면 금방 발견할 것이었다.
'이 찜찜함이 뭔지 확인해 봐야겠어.'
코테야와 여자가 동시에 사라진 상황. 어쩌면 여자는 코테야의 다음 목표가 아니라 조력자일 수도 있었다.
페드리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가타부타하지 않고 코테야를 쫓아갔다.
페드리가 떠난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한 아이리우스는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가 유명한 범죄자라면....'
만약 그녀가 유명한 범죄자가 될 인물이고, 그래서 전생의 얼굴을 알고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그녀에게서 기시감을 느낀 것도 이해가 갔다.
아이리우스는 여자를 쫓는 걸음을 서둘렀다.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도와주러 가야겠어.'
상대는 기사 출신이었다. 물론 페드리를 쉽게 어찌할 수 있을 거라 여기진 않았지만 안전을 꾀해서 나쁠 건 없었다. 자신이 돕는다면 보다 수월하게 코테야를 잡을 수 있을 터.
"멈춰요!"
코테야가 미행을 따돌리려 한다는 걸 바로 알아차린 덕분에 여자를 따라잡는 건 금방이었다.
"카르반 아카데미의 아이리우스입니다. 잠시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리우스는 관례에 따라 소속을 드러냈다.
선량한 시민에게는 위험한 자가 아님을, 적대해야 할 상대에겐 소속과 신분을 밝히기 위한 절차였다.
이는 만약의 경우 방패막이로 쓰이기도 했다. 소속과 신분에 기대 화를 피하게 해주기도 하는 덕분이었다.
"...카르반 아카데미?"
"네, 퀘스트를 수행 중입니다. 조사에 협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 문제없다면 금방 끝날 것을 약속드립니다."
아이리우스는 여자를 바라봤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차분한 기색이었다. 어쩐지 의아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카르반 아카데미에서 왜 우리를 미행하죠?"
"당신과 함께 있던 자는 코테야라는 인물로 여러 여성을 유혹하고 금품을 갈취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그를 체포하려는 과정에서 미행하게 된 거고요."
아이리우스는 상황을 설명했다. 반응을 보면 여자는 코테야의 동료인 것 같진 않았다. 처음 생각대로 다음 타깃이었던 걸까.
그때, 여자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코테야라니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군요. 그의 이름은 코테야가 아니에요. 저와 제 조부의 이름을 걸고 보장할 수 있어요."
"!!!"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아이리우스는 마침내 그녀의 정체를 떠올려 냈다. 어디서 보았었는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정체는 미쉐린 구르드손.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갔던 연회장에서 만났던 인물이었다.
'병 때문에 외부 활동을 안 하는 걸로 아는데?'
전생에서도 그녀가 나았다는 소식은 들은 적 없었다. 아마 병으로 죽었을 거라 추측할 따름이었다.
한데 제도에서 만날 줄이야.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녀가 제도에 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럼 선배가 쫓아간 사람은 대체."
아이리우스는 큰일 났음을 느꼈다. 자신들이 코테야라 생각한 사내는 코테야가 아니었다.
미쉐린과 동행하는 걸 보면 구르드손 가문의 손님일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미쉐린을 치료하기 위해 초빙된 인물일지도.
그런 그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아이리우스는 서둘러 페드리에게로 향했다. 그 뒤를 미쉐린이 따랐다.
* * *
코테야를 쫓은 페드리는 빠르게 그를 따라잡았다. 미행을 눈치채고 일행과 흩어져 도주하던 코테야가 그만 가로막힌 골목으로 들어선 덕분이었다.
"흐읍-!!"
페드리는 관례로 존재하는 소속 증명도 생략하고 검을 휘둘렀다. 상대는 전직 기사 출신. 초반에 주도권을 가져오는 게 중요했다.
무엇보다 아이리우스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이번 퀘스트에는 한 가지 추가사항이 있었다.
'팔이나 다리 한쪽만 내놔라!'
팔다리 하나 정도는 부러트린 상태로 제 앞에 데려와 준다면 추가금을 주겠다는 내용.
그 추가금이 결코 작지 않았으니, 페드리가 공격적으로 나서는 것은 전부 그 때문이었다.
차차창-!!!
기사 출신임을 증명하듯 손쉽게 검을 받아 낸 상대.
하지만 페드리의 검은 지금부터였다. 속도와 움직임을 통해 만들어낸 환의 묘리가 코테야를 노렸다
"...!!"
순식간에 삼면을 점한 페드리의 검에 놀란 코테야였으나.
"이렇게 쉽게 받아 낸다고?"
그도 잠시, 어느 게 가짜고 어느 게 진짜인지 구별할 필요도 없다는 듯 모든 검에 응수했다.
너무나 간단하게 받아 내는 모습에 이번엔 페드리가 놀랐다.
'그렇다는 거지. 그럼 진심으로 간다.'
페드리는 대련에선 봉인해 뒀던 기술들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방금 전의 실력이라면 쉽게 죽을 것 같지도 않았고 상대가 다치는 걸 걱정할 필요도 없었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흡."
뒤로 물러나며 숨을 들이켜고, 지면에 발이 닿음과 동시 앞으로 도약하며 검을 휘둘렀다.
수평을 그린 검이 우악스럽게 공간을 집어삼켰다.
"공간 끊어내기."
몸의 반동을 이용한 가속과 그것을 뛰어넘는 검의 속도는 일순간이나마 공기의 흐름을 끊을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론 원하는 바를 이뤄 낼 수 없었다.
콰앙-!!
코테야는 페드리의 검을 그대로 받아쳤다. 검끼리 부딪치며 발생한 충격파에 페드리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페드리는 그 상태에서도 수십 개의 공격을 쏟아 냈다.
치명상을 입힐 목적보다는 시야를 현혹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마저도 위협적이었다.
상하좌우 할 것 없이 쏟아지는 공격은 소나기를 연상시켰다.
하나 그 무엇도 코테야를 적시지는 못했다.
"...정체가 뭐지?"
뒤로 물러난 페드리는 코테야를 바라봤다.
기사 출신이라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 수준일 줄은 몰랐다. 퀘스트를 통해 전달받았던 정보로는 익스퍼트 중급. 하지만 실제 마주한 그는 고작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여태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대체 왜?
'기회가 있었음에도 공격하지 않았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공격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공격을 막는 데만 집중할 뿐이었다.
"이제야 대화할 준비가 돼 보이는군."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에겐 페드리를 공격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우리를 미행했는지, 또 갑자기 공격한 이유는 무엇인지 설명해 주겠나."
"...카르반 아카데미의 페드리다. 한나로 가의 영애를 욕보였던 것은 기억하겠지? 그에 관련해 찾아온 이들에게 상해를 입힌 것도."
"전혀 모르는 이야긴데."
"발뺌할 생각이냐. 코테야."
페드리는 다시 자세를 취했다. 상대에겐 자신을 공격할 의사가 없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까지 그래야 한단 법은 없었다.
"애초에 본인의 이름은 코테야가 아닌데 말이지."
"뭐?"
하지만 뒤이은 코테야, 아니 스스로를 코테야가 아니라 밝힌 자의 말은 페드리의 사고를 정지시켰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제도에 들어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네. 자네가 말한 것과 비슷한 짓을 한 적도 없고. 그건 내 동행이 증명해 줄 수 있을 걸세."
"...그럼 왜 도망친 거지?"
"도망쳤다기보다는 미행이 붙었기에 확인해 보려 했던 것뿐이네. 대체 누가 왜 우리를 쫓는 건가 말이지."
가까스로 떠올린 논리마저 반론 당하자 페드리는 얼어붙었다.
...코테야가 아니라고? 그럼 이 자는 누구지...?
"당신이 코테야가 아니라고?"
"그래, 내 이름은 코테야가 아니라 루드비코일세."
루드비코, 변신 신비로 모습을 바꾼 루드는 본인의 이름을 밝혔다.
루드로서도 당혹스러운 지금 상황이었다. 갑자기 미행이 붙었단 걸 느꼈고 그걸 확인하고자 유인해 냈더니 그 상대가 페드리라니.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카르반 아카데미로 가려던 건 용사도 용사지만 눈앞의 페드리를 만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리 만나게 될 줄이야.
'상황을 보면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쫓고 있던 것 같은데.'
루드는 페드리가 사람을 헷갈렸을 거라 짐작했다. 전생에서도 사람들의 얼굴을 디테일하게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페드리였으니, 이번에도 비슷하지 않을까 추측했다.
'그나저나 같이 있던 사람은 누구지?'
미행의 기척은 하나가 아니었다. 살기가 없어 놔두긴 했지만, 미쉐린을 쫓아간 기척도 있었다.
루드는 이 시간의 페드리에게 쿠두스 말고도 같이 지낼 만한 이가 있는지 떠올려 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었다. 이 시기에 페드리가 다른 이와 어울렸다는 건 전생에서도 들어 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한 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선배! 잠시만요!"
그 주인공이 나타났다.
'...저 여자가 왜?'
그건 루드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아이리우스 에이나우디, 추후 용사가 될 그녀가 페드리의 옆에 있었다.
'왜? 어째서? 페드리가 내 동료란 걸 알고 접근한 건가?'
순식간에 쏟아지는 의문들. 지금 이 순간 루드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당황했다.
설마 페드리의 곁에 용사가 있을 줄이야.
물론 그녀 또한 아카데미에 다녔으니 오가며 마주칠 순 있겠으나....
'단순히 그런 관계가 아니다.'
고작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페드리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혼란에 빠진 루드의 앞으로 아이리우스와 페드리가 허리를 숙였다.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어.'
고개 숙인 아이리우스는 자책했다.
사람을 착각하다니, 말도 안 되는 실수였다.
큰 상해를 입거나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다른 사람이야.'
가까이서 보니 확실했다. 눈앞의 사내는 코테야가 아니었다. 몽타주와 비슷한 인상이었으나 면밀히 살펴보면 몽타주 속 인물과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마탑에서 발견했을 당시 거리가 있던 데다 이후에도 미행을 위해 거리를 유지했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선배의 페이스에 말린 것도 있지만... 변명이지.'
솔직히 말하면 페드리의 기세에 밀린 것 말고도, 사내와 동행하던 미쉐린의 정체에 정신이 팔린 이유도 있었다.
'여러모로 최악이야. 하필 구르드손 가문의 손님을 건드리다니.'
구르드손가에서 이 일을 걸고넘어지면 아무리 아이리우스라도 곤혹스러웠다. 특히 페드리가 문제였다. 자신이야 어찌할 수 없겠지만, 혹 그에게 죄를 묻고자 한다면... 가문의 이름으로도 도와주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해가 풀린 것 같군요."
하지만 루드는 그들의 실수를 문제 삼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긴 했으나, 오히려 고마운 그들의 실수였다.
반가운 얼굴을 본 데다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어 확인하려 했던 이가 제 발로 찾아왔으니,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용사의 현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
"페드리 씨와, 음...."
"아이리우스라고 합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네. 페드리 씨와 아이리우스 씨."
루드는 그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사과의 의미로 제도 구경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도는 처음이어서요."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05화
네 사람은 길을 걸었다. 제도를 구경시켜 달라는 루드의 부탁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무려 타국의 왕족과 그 손님을 건드린 일. 자칫 큰일로 번질 수도 있는 상황을 제도 안내로 무마할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페드리는 제도에 대해 잘 몰랐기에 안내역은 자연스럽게 아이리우스의 차지였다.
"여기가 문화의 거리예요. 하루에 두 번 연극이 서죠."
많은 사람들이 나들이를 위해 찾는 공원부터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광장 거리, 각 지방의 음식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먹거리 지구와 예술가들의 성지인 문화의 거리까지.
아이리우스는 열과 성을 다해 제도를 안내했다. 루드와 미쉐린은 그녀의 뒤를 따르며 제도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가끔씩 새어 나오는 감탄은 덤이었다.
"과연, 어째서 대륙의 중심이라 불리는지 알 것도 같네요."
카르바나 제국은 중앙대륙의 가운데에 있었다. 그런 제국의 수도인 카르반은 또다시 제국의 중심부에 위치했으니, 사람들은 제도를 대륙의 중심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 별명에 걸맞게 제도는 다양한 문화와 모습을 보유한 곳이었다.
'운이 좋았어. 두 사람을 한 번에 가까이서 확인할 수 있을 줄이야. 심지어 저들이 먼저 다가왔으니 의심을 살 일도 없겠지.'
루드가 눈에 담은 건 제도의 풍경만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안내하는 아이리우스와 그 옆을 말없이 따르는 페드리. 두 사람을 보며 현재 그들의 수준과 관계 등을 헤아렸다.
그들과의 접촉은 예기치 않은 기회였다. 제도에 들어서며 제국민의 외양으로 얼굴을 바꾼 것이 이런 우연을 만들어 냈다. 아이리우스에게 자신이 루드란테란 것을 들킬 걱정도 없었으니 마음 편히 그들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아이리우스 씨는 제도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덕분에 많은 것을 본 것 같아 기쁩니다."
"별말씀을요. 루드비코 씨께 끼친 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걸요."
루드의 칭찬에 아이리우스는 겸양을 보였다.
"평소에도 제도에 자주 나오시는 편인가요?"
"그건 아니지만, 주위 친구들이 제도 어디에 뭐가 좋다 하도 말을 해 줘서요. 솔직히 그땐 좀 귀찮았는데 덕분에 이렇게 두 분을 안내해 드릴 수 있게 됐으니 고마운 일이죠."
서서히 분위기가 풀어지자 서로 간에 오가는 대화도 늘어났다.
"코테야라는 자와 제 모습이 그리도 비슷하게 생겼습니까?"
"네, 죄송한 말씀이지만 순간적으로 봤을 땐 정말 비슷한 인상을 받았어요. 착각한 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사람이 어떻게 실수 없이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덕분에 새로운 인연도 만들고 제도 관광도 하게 됐으니, 좋은 게 좋은 것이죠."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 이건 코테야의 몽타주인데 혹시 궁금하시다면."
"마침 호기심이 생기던 참입니다. 보여 주시면 고맙겠군요."
루드는 아이리우스에게서 코테야의 몽타주를 받아 들었다.
'확실히 착각할 만하네.'
몽타주 속 얼굴과 지금 자신의 외양은 확실히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두 사람, 특히 디테일한 구분을 어려워하는 페드리가 충분히 착각할 만한 정도였다.
"그보다 미쉐린 님께선 몸이 안 좋으시다 들었는데 이렇게 뵈어 놀랐습니다. 다 나으신 걸까요?"
"네, 옆에 계신 루드비코 님 덕분에요."
"정말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저희 예전에 뵀던 적이 있죠?"
"네,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예전에 아버지를 따라갔던 연회장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아이리우스가 미쉐린을 기억하듯, 미쉐린 또한 아이리우스를 기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과거의 만남을 떠올리며 대화를 이어 갔다.
'정보 탐색인가.'
미쉐린의 쾌유를 축하한 아이리우스였지만 루드는 그녀가 정보를 얻고자 한다는 걸 간파했다.
'전생에서 미쉐린이 낫는 일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자신과 마찬가지로 회귀자인 그녀였으니, 전생에서 없었던 미쉐린의 쾌차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쉐린을 낫게 한 것이 루드비코란 이야기를 들은 아이리우스는 미쉐린과의 대화 도중 연신 자신을 흘깃댔다.
루드비코란 이가 어떤 인물인지, 과거와 역사가 달라진 이유는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함이리라.
그리고 그건 루드도 마찬가지였다.
"두 분은 카르반 아카데미에 다니신다 하셨죠."
"네, 저는 현재 1학년이고 선배는 2학년입니다."
"페드리 씨가 2학년이라니. 제국의 미래가 창창하군요. 대단한 검이었습니다."
"...그 검을 모조리 막은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멋쩍군요."
"하하, 저야 나이가 있지 않습니까. 이래 봬도 서른이 넘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아이리우스 님의 검도 견식하고 싶군요. 아이리우스 님의 검도 대단할 것 같은데요."
"별거 아닌 실력이지만, 기회가 된다면 보여 드리겠습니다."
루드는 이번 기회를 통해 많은 걸 알아보고자 했다.
두 사람의 수준과 관계... 가능하다면 아이리우스가 자신의 회귀를 알고 있는지까지.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떠볼 생각이었다.
자신이 상대를 아는 것에 반해 상대는 자신을 알지 못했으니, 잘하면 큰 소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같은 교수님께 수학한다고요?"
"네."
그렇게 알게 된 것은 아이리우스가 쿠두스의 수업을 듣는다는 사실.
루드는 그제야 아이리우스와 페드리의 관계를 이해했다.
'그렇게 된 거였나.'
쿠두스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단순히 소드마스터를 죽였다는 업적만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경받아 마땅한 이였다.
전생의 루드에게 제대로 된 검술을 알려 준 것도, 페드리를 지하투기장에서 구해 준 것도 전부 그였다.
루드는 아직까지도 그의 마지막을 기억했다.
제 모든 것을 불태워 하이엔 왕국의 소드마스터를 죽인 그는 뒤늦게 찾아온 페드리와 자신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마치, '봤냐? 어때, 쩔지?'라 말하는 것 같았던 모습이었다.
'당시의 전장에 용사도 있었던 건가.'
그때의 루드는 큰 흐름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니르바 아틸테헨이 폭주하며 세바니아 왕국이 멸망했고, 그 연쇄 작용으로 중앙대륙 전반에 전쟁이 번지던 시기였다.
제국과 왕국, 그 어디의 소속도 아니었지만 전쟁에 휘말린 루드는 바깥대륙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자신과 동료들을 챙기는 데 급급했던 시기.
지금 생각해 보면 쿠두스가 있던 전장에 용사 또한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러니 쿠두스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그를 찾았겠지.
'페드리가 내 동료였다는 건 모르는 건가.'
아이리우스가 쿠두스의 제자가 되고 페드리와 유대 관계를 형성한 것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가 페드리의 전생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
알았다면 어떻게든 페드리를 죽였을 용사였다. 과거 자신 다음으로 많은 제국군을 죽인 페드리였으니.
아마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 그가 전장에 설 때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면을 착용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상황이 꼬였군.'
페드리가 자신의 동료였단 걸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 아니겠으나, 상황이 꼬였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전생과 많은 게 바뀔 거라 생각은 했다만....'
자신과 용사의 행보에 따라 전생과 많은 게 달라질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이미 많은 것이 바뀌기도 했고.
하지만 페드리의 곁에 용사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어쩌면 과거 가장 신뢰했던 동료가 가장 까다로운 적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만약 페드리가 용사의 편에 선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어. 애초에 용사는 페드리가 내 동료였단 것도 모르니 기회는 충분해.'
루드는 초조해진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번엔 저쪽으로 가 보실까요?"
아이리우스는 루드가 가진 생각은 꿈에도 모른 채 제도 안내를 계속했다.
그들이 함께한 지 두 시간이 넘어가는 시점.
그때 루드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저건...."
화려한 옷을 걸친 남자가 여인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길을 걷다 보면 가끔 볼 수 있는 장면이었지만, 루드의 시선은 한동안 남자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코테야?'
추파를 던지는 남자의 얼굴. 몽타주 속 코테야의 얼굴과 똑같았다. 몽타주보단 조금 못생긴 느낌이었지만, 이목구비의 조화와 전체적인 인상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동일 인물임을 말하고 있었다.
일행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 한 루드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코테야?"
"...누구?"
빙고. 혹시 몰라 언급해 본 이름. 그가 보인 반응에 루드는 눈앞의 사내가 코테야임을 확신했다.
"페드리 씨, 아이리우스 씨. 이 자가 코테야입니다!"
"!!!"
뒤늦게 코테야의 얼굴을 확인한 페드리와 아이리우스가 황급히 달려왔다. 이상함을 느낀 코테야가 몸을 빼려 했지만, 가만히 놔둘 루드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코테야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도망쳤다.
"대체 왜들 그러는 거요!"
"카르반 아카데미의 페드리다. 코테야 본인이 맞나?"
이미 한 차례 실수한 전적이 있기에 추가 확인까지 한 페드리.
"...이익!!"
"어딜!"
자신을 찾아온 이들이란 걸 깨달은 코테야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사방이 막힌 후였다.
결국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코테야가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에 페드리가 앞으로 나섰지만.
"괜찮으시다면 아이리우스 님의 검을 견식하고 싶은데, 어떠실까요?"
루드는 아이리우스를 바라봤다. 아이리우스는 페드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앞으로 나섰다.
'선배의 검을 아무 피해 없이 막아 낸 걸 보면 대단한 실력자야. 어쩌면 소드마스터일지도.'
내색은 안 했지만, 루드비코를 관찰하던 그녀였다. 구르드손가의 손님인 그는 어쩌면 소드마스터일지도 몰랐고, 아니더라도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임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생에 아무도 치료하지 못했던 미쉐린의 병을 치료할 순 없었을 터.
'그에게서 뭔가를 배울 수 있다면.'
비록 시작이 좋진 않았으나, 그것을 잘 풀어낸 만큼 앞으로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번 일을 토대로 구르드손가와 연을 맺을지도 모를 일이고.
"퀘스트 보상은...."
"달라고 안 할 테니까 걱정 말아요."
페드리의 걱정을 단박에 종식시킨 아이리우스는 코테야를 바라봤다.
"아리따운 아가씨를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은데."
"다치는 게 누구일지는 두고 봐야겠죠."
흰소리를 하는 코테야에 응수한 아이리우스.
그녀는 곧장 돌진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과연, 어느 정도일까.'
루드는 아이리우스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폈다.
비록 대단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검을 보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그녀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을 터.
'숨기고 있을 확률도 배제할 순 없지만....'
그래도 분명 얻어 갈 수 있는 게 있을 것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06화
더스틴 클라위베르트의 하루는 바빴다. 남들이 봤을 땐 전혀 바쁘다 할 수 없는 그의 일상이었지만, 더스틴은 자신의 하루가 너무 짧다고 생각했다.
'하루가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겠다. 그럼 잠을 더 길게 잘 수 있을 텐데.'
더스틴의 일과는 먹고 자는 것의 반복이었다. 늘어지게 자다 눈이 떠지면 밥을 먹고, 배가 불러 노곤해지면 또다시 잠을 잤다.
마음만 먹으면 식사도 없이 며칠이고 잘 수 있는 그였지만, 끼니는 최대한 챙겨 먹으려 했다.
건강을 지키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 정도로 망가질 몸도 아니었고.
'배부른 상태에서 자는 게 또 별미거든.'
오직 하나, 포만감을 가진 상태에서 자는 게 기분 좋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 주무시네."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뭐 어때, 우리야 편하고 좋지."
며칠 동안 먹고 자기만 하는 더스틴에 시녀들이 소곤댔다. 솔직히 더스틴은 좋은 고용주였다. 일도 많이 시키지 않았고 성격도 괜찮았다.
가끔 월급이 늦는 날이 있긴 했으나, 그건 고의가 아니라 귀찮음 때문에 미루다 까먹은 경우로, 넌지시 얘기를 건네면 금방 처리해 주곤 했다.
"그래도 침실 관리는 완벽하게 해 놔. 다른 건 용납해도 식사와 수면에 관해서는 타협이 없으신 분이니까. 새로 온 아이한테도 잘 가르치고."
"네."
시녀장의 지시에 시녀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임 시녀는 신입을 데리고 더스틴의 다섯 번째 침실로 들어갔다.
"이곳이 다섯 번째 침실이야."
"다섯 번째요?"
"그래, 이 저택에는 총 일곱 개의 침실이 있어. 각 방마다 조명과 온도, 습도 등이 전부 다르지. 더스틴 님이 언제 어떤 방에서 주무실지 모르니 모두 신경 써야 해."
더스틴은 무던하고 온화한 성격의 고용주였지만 딱 한 가지, 침실 관리에 있어선 완벽을 요구했다.
기실 그가 시녀들을 고용하면서 바란 건 많지 않았다. 자신이 자는 곳을 최상의 상태로 관리하는 것과 자신이 자고 일어나서 먹을 것을 요구할 때 즉각적으로 가져다주는 것. 그 정도가 그가 바라는 전부였다.
만약 그것조차 지켜지지 않는다면... 더스틴으로선 시녀들을 고용할 이유가 없었다.
'저번엔 진짜 무서웠지.'
선임 시녀는 침실 관리를 소홀히 한 시녀들을 대하던 더스틴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날 그녀는 말과 분위기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실제로 죽거나 한 건 아니었으나, 저택을 떠나던 시녀들의 모습은 꼭 시체 같았다.
"잘리기 싫다면 특히나 주의해야 할 거야. 더스틴 님에게 침실은 이 저택 전부와 다름없거든."
"알겠습니다."
선임 시녀는 그리 대답한 신입을 바라봤다. 대답은 잘했는데 어쩐지 느낌이 안 좋았다. 뭔가 사고를 칠 것만 같달까....
'에이, 설마. 들어오자마자 사고를 치겠어?'
다행히 그녀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신입은 잘 적응하는 듯했다. 동료들과의 마찰도 없었고 침실을 관리함에 있어서도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선임 시녀의 걱정은 괜한 기우가 아니었던 걸까.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에 찾아간 더스틴의 다섯 번째 침실.
그곳에서 모두는 더스틴에게 목을 잡힌 신입 시녀를 볼 수 있었다. 더스틴에게 잡힌 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더, 더스틴 님."
깜짝 놀란 시녀장이 더스틴을 말렸으나.
꽈득-.
더스틴의 손은 이미 시녀의 목을 꺾은 뒤였다.
방금 전까지 함께 일하던 이의 죽음. 심지어 그것을 눈앞에서 목격했으니, 시녀들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나 더스틴에겐 그녀들을 신경 써 줄 정신이 없었다.
"이곳에 출입했던 이가 누구누구지?"
"그, 그게."
"평소 이년과 친하게 지내던 이들은 있나?"
"그것이...."
목숨을 잃고 축 늘어진 시녀를 내던진 더스틴은 머리를 감쌌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일평생 마신 술을 한 번에 때려 넣으면 이러할까. 세상이 돌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독이다.'
평소와 똑같이 낮잠에서 깬 뒤 침대 옆에 놓인 물을 마셨다. 자면서 갈증이 났던 터라 물맛을 느낄 새도 없이 꿀떡였다. 하지만 침대 옆에 놓여 있던 건, 물이 아니었다.
독, 그것도 소드마스터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로 엄청난 독이었다.
다행히 즉사 계열의 독은 아닌 모양으로, 꽤 많은 양을 마신 데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런 느낌은 없었다.
'마지막 순간 의회를 입에 담았다....'
그렇다 해도 독을 먹은 건 간단히 넘길 일이 아니었다.
설마 자신의 저택에서, 그것도 매일 같이 반복되던 일상에서 암살 시도를 당할 줄이야.
'그놈들이 기어코!'
자신이 뿜어낸 살기에 몸을 떨며 의회를 언급했던 시녀.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보였던 공포를 생각하면 딱히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큭!"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 더스틴은 벽을 짚었다.
그 순간.
"괜찮... 으그르어어."
"더스라아하라타."
기괴한 형체의 괴물들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어느새 그는 황량한 벌판에 서 있었다.
'뭐지? 분명 방금 전까진 저택이었는데.'
그러나 상황을 판단할 시간은 없었다. 괴물들이 금세 코앞까지 다가왔다.
스걱- 검을 들지 않았다지만, 소드마스터다. 본인이 곧 검과 같은 경지였으니 괴물들을 베어 내는 건 간단했다.
"아...?"
그리고 곧, 더스틴은 자신이 벤 것이 괴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방금 전 괴물을 베었던 손에는 새빨간 피가 묻어 있었다. 오랜 세월 자신의 저택에서 일한 시녀들의 피가.
"하하, 그런 건가."
그제야 더스틴은 자신이 먹은 독이 어떤 종류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이 아니었다.
환각과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독. 다만, 그 정도가 여태 들은 어떤 독보다도 강력했다. 소드마스터의 정신 방벽마저 뚫어 낼 정도로.
'위험하다.'
의회의 짓인지 확실하진 않아도, 이대로면 위험하단 것은 확실했다.
자신의 저택이 위치한 곳은 제도.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과 고위 귀족들, 심지어는 황궁마저 위치한 곳이었다.
만약 이곳에서 자신이 정신을 잃고 방금 전과 같이 행동한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터였다.
더스틴은 저택을 빠져나왔다. 시녀들에게서 흐른 핏물로 발자국이 찍혔다.
"히익...!"
"저, 저거 피 아니야?"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이 겁에 질려 물러났다. 한가롭던 오후에 갑자기 등장한 피칠갑의 사내는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더스틴은 주변을 무시한 채 걸었다.
'점점 심해지고 있다.'
독 기운이 퍼지고 있는 걸까. 착란 증세가 말도 안 되게 강해지는 중이었다. 처음의 실수 이후 어떻게든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대로 가단 저택에서의 일이 반복될 터.
그러면 대참사였다. 제도 한복판에서 소드마스터가 미쳐 날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고 다칠지 가늠조차 안 됐다.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돼.'
슬슬 자신에게 독을 먹인 이들이 원하는 게 뭔지 알 것도 같았다.
자신이 폭주해서 감당할 수 없는 사고를 일으키는 것이겠지.
'의회다.'
그 시점에서 더스틴은 확신했다. 자신에게 독을 먹인 것이 의회 녀석들임을.
귀족파의 짓이었다면 최소한 자신이 제도를 벗어났을 때를 노렸을 것이다. 그들의 기반 다수가 제도에 위치했으니, 이곳에서 자신을 미치게 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의회는 달랐다. 그들은 귀족파와 달리 제도란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 이들.
자신이 미쳐 날뛰면 가장 큰 득을 보는 것도 그들이었다.
소드마스터를 잃은 황실과 그 소드마스터에게 큰 피해를 입은 귀족들 간에 줄타기를 하며, 저들의 잇속을 챙기겠지.
'그 꼴만큼은 볼 수 없다.'
하여 더스틴은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쭉 가면 카리븐이다.'
그가 향하는 곳은 카리븐이었다.
아카데미가 방학 중이었으니 학생들도 적을 거고, 교수들이 있을 테니 만약의 사태에서도 다른 곳보다 대처가 나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최악의 경우 자신이 모든 이를 죽이려 한다면... 그것을 막아 줄 만한 인물도 있었다.
'쿠두스, 이리 찾아갈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만.'
더스틴은 과거 동문이었던 사내를 떠올렸다.
자신보다 먼저 검을 잡았고 같은 시기에 수학했으나, 자신이 소드마스터가 되는 동안 같은 경지를 답보했던 사내.
세간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았지만, 더스틴은 그의 진면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라면,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을 죽여 줄 것이었다.
"이봐! 멈춰!"
"경고한다. 당장 멈춰!"
더스틴은 주변의 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말을 거는 것 같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사람의 소리인지도 의문이었다.
서걱-!
"컥...."
더스틴은 제 앞을 막는 이를 치웠다.
시민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던 경비대원이 고꾸라졌다. 갈라진 목에서 새어 나온 피가 땅을 적셨다.
"사, 살인이다! 경비병을 살해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조금의 자비도 없었던 손속.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단순히 피를 묻힌 이를 보는 것과 눈앞에서 살인을 저지른 이를 보는 시선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더, 더스틴 님 아니야?"
"진짜. 더스틴 님이셔."
소란스럽던 상황은 더스틴을 알아본 이가 등장하며, 보다 혼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은 더스틴이 어째서 경비를 죽였는지. 그에게 묻어 있던 피가 누구의 것인지 궁금해 했지만, 그것을 답해 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벅저벅. 더스틴은 걸음을 계속했다. 이미 그의 눈과 귀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끊임없는 무저갱을 걷고 있는 그였다. 그럼에도 그가 걸어가는 방향은 시종일관 똑같았다.
도시 카리븐이 있는 방향.
완전히 정신을 잃기 전, 세뇌 수준으로 스스로에게 가야 할 길을 각인한 덕분이었다.
"...."
"어디다가 신고해야 하는 거야!"
"제발 누가 좀 도와줘! 제발...."
"히이익, 이쪽으로 온다!"
"도망쳐! 다들 살고 싶으면 도망치라고!"
사람들은 더스틴의 상태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근처에 다가가는 이들을 족족 죽였으니 깨닫지 못하는 게 어려웠다.
이성을 잃은 소드마스터.
규격 외의 재앙을 마주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발만 굴렀다.
'흐... 역시 의장님이시라니까. 완벽한 일처리시군.'
그들 사이로, 누군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 *
성공적으로 코테야를 확보한 넷은 그를 한나로 자작가에 넘겼다. 얼굴 곳곳이 부어오른 까닭에 신원을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성공적으로 퀘스트를 완수할 수 있었다.
'곧 익스퍼트 상급에 오르겠군.'
루드는 아이리우스의 검을 상기했다. 코테야를 상대할 때 확인한 그녀의 수준은 익스퍼트 중급의 끝자락. 약간의 계기만 있으면 곧장 상급에 오를 터였다.
"당분간 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퀘스트를 마친 페드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보상으로 받은 돈주머니가 묵직했다.
"혹시 돈 문제가 있는 건가요?"
루드는 페드리에게 물었다. 이맘때의 그가 돈이 없어 허덕인다는 걸 알았지만, 그걸 티 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페드리 씨를 후원해도 되겠습니까?"
"후원... 이요?"
"네."
안 그래도 페드리와 접점을 만들 방법을 고민하던 루드였다. 그를 후원하게 된다면 그것을 구실로 자주 만날 수도 있을 것이고, 그의 돈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였다.
"흠."
하나 페드리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아니 선배, 이 좋은 제안을 왜 고민해요?"
오히려 그 옆에 있던 아이리우스가 나설 정도였다.
"제게 뭔가 바라시는 게 있습니까? 후원을 해 주는 대가가 있다거나."
"아뇨, 없습니다. 그런 게 걱정이었습니까?"
루드는 미소를 보였다. 페드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후원을 받으면 그를 대가로 뭔가 해 줘야하거나, 얽매이게 되는 거라 생각했겠지.
'후원으로 동료가 돼 준다면 좋겠지만. 넌 그럴 녀석이 아니잖아?'
어린 시절을 지하투기장에서 보낸 녀석이었다. 무언가의 대가로 녀석의 몸을 움직일 순 있어도, 마음을 움직일 순 없었다.
그러니 지금 루드가 보이는 건 순수한 호의였다. 과거의 동료에 대한, 또 형제에 대한.
"아, 바라는 게 아예 없진 않네요."
"그렇다면 거절...."
"종종 당신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시죠. 옛날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또 지금은 어떤 일이 있는지. 그런 것들이요."
루드의 말에 페드리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봤다.
"혹시...."
"혹시?"
"성적 취향이 타인과 다르시다거나."
"하하, 절대 아닙니다."
페드리의 걱정을 깨달은 루드는 크게 웃고는 다시 물었다.
"당신을 후원해 드리죠. 받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좋습니다."
페드리는 루드가 건넨 악수를 받았다.
그때.
"무슨 일이 생겼나 본데요?"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소리의 근원지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지만, 워낙 시끄러운 까닭에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가보시죠."
소란의 근원지와 가까워지며 점차 선명해지는 피비린내.
'불길한데.'
루드는 어쩐지, 불길함을 느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07화
소란스러움의 근원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였다.
"이게 무슨...."
네 사람은 그 이유를 금방 깨달았다. 사람들이 모인 곳 앞쪽으로 핏자국이 즐비했다. 핏자국만이 아니었다. 경비병들은 시신으로 보이는 것을 수습하고 있었고, 그들 주위로 굳은 표정의 기사들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루드의 얼굴도 딱딱해졌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진 못했지만, 적어도 제도의 대로변에서 일어날 법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바닥에 흐른 피를 봤을 때 죽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아이리우스가 한 시민에게 물었으나 그는 벌벌 떨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완전히 겁에 질려 실신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살인사건이 났어요."
그 물음에 대신 답한 건 중년의 여성이었다. 장을 보기 위해 나왔던 그녀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근처에 있었다.
"피를 잔뜩 칠한 사내였는데, 근처에 누군가 다가올 때마다 사람들을 죽였어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린 듯 그녀의 목소리는 잘게 떨렸다.
여유롭던 오후였다. 날씨도 좋았고 기분도 상쾌했다. 갑작스러운 일을 겪지 않았다면 정말 행복한 하루로 기억됐을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마주한 살인 사건. 눈앞에서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은 정말 비현실적이었다.
행복하던 하루는 순식간에 끔찍한 하루로 변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고작 그녀의 하루가 바뀐 데 있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사람을... 더스틴 님이라고 했어요."
"...뭐라고요?"
더스틴 클라위베르트.
시장 구석에서 옷이나 파는 중년 여성도 그 이름을 알았다.
제국의 소드마스터로서 제국의 적을 섬멸하고 제국을 수호해야 할 의무를 지닌 이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제도의 한복판에서 시민들을 학살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그럴 리가."
그녀의 설명을 들은 아이리우스는 저도 모르게 부정했다. 더스틴이 무슨 이유로 제국민을 죽인단 말인가.
하지만 여인의 말을 믿지 않기도 어려웠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두려움은 진짜였다.
'주화입마라도 걸린 건가?'
미친 사람 같았다던 모습과 이성을 잃고 주위 사람들을 죽였다는 증언.
혹 그가 주화입마에 걸린 것은 아닐까, 생각됐다. 그 때문에 본인을 잃고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지금의 일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됐다.
하지만.
'저번에 만났을 때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어.'
아카데미의 추천서를 얻기 위해 가문에 초빙했을 당시 그는 아이리우스가 아는 대로 나른하고 만사가 귀찮은 듯한 모습이었다.
평소와 똑같은, 걱정이라곤 없어 보이고 어떻게든 쉴 궁리만 하는 사람.
그런 그가 갑자기 심마를 입어 주화입마에 빠진다고?
'무엇보다 과거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고.'
더 의아한 건 그녀가 기억하는 전생에서 더스틴이 주화입마에 빠진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제도에서 사람들을 죽인 건 물론이고.
'어떻게 된 일이지.'
아이리우스가 생각에 빠졌을 때, 루드 또한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아이리우스의 표정을 보면 그녀 또한 모르는 상황이다.'
혹여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했으나, 그녀의 표정을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만이 가득했다.
'그렇다면 역사가 바뀌었다는 소리인데.'
전생과 달라진 역사.
자신과 아이리우스가 회귀했으니, 전생과 역사가 바뀌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의 문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더스틴의 생이 바뀔 만한 무언가가 있었던가?
'발렌타노에서 마주쳤던 까닭인가?'
물론 그와 직접 마주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이런 식의 반향을 이끌어 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 하죠?"
미쉐린이 루드를 바라봤다. 사람들의 말처럼 더스틴이 미친 게 맞다면, 더스틴을 막을 수 있는 건 같은 소드마스터인 루드밖에 없었다.
'굳이... 개입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루드는 고민했다. 더스틴에게 악감정은 없었지만, 그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건 제국 전력에도 이상이 생겼다는 뜻.
언젠가 상대해야 할 제국이었다. 그들이 스스로의 힘을 깎아 먹는다면, 루드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가 미친 게 사실이라면 그를 막기 위해 소모될 병력도 상당할 테니, 이대로 있기만 해도 이득을 보는 상황.
한 가지 걸리는 건 그 과정에서 죽게 될 일반인이었으나....
'이미 제도를 빠져나갔다고 했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길을 따라 쭉 이동했다고 했다. 근처에 다가오지 않으면 누구를 죽이지도 않았다고.
생각보다 피해가 적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만약 그가 근방의 모든 생명을 죽이고자 했다면, 이곳에 모인 이들은 이미 전부 죽었을 터였다.
'그 와중에도 최선의 선택을 내린 건가.'
그가 향한 곳이 어디든 제도에서 날뛰는 것보단 낫다. 심마가 자신을 집어삼키는 순간 그것을 깨닫고 최대한 제도를 벗어나고자 했을 그였다.
그때, 더스틴이 향한 방향을 깨달은 페드리와 아이리우스가 서로를 바라봤다.
"이 길로 갔다고?"
"선배, 이 길을 따라가면...."
그들이 서 있는 길은 곧장 카리븐까지 이어지는 대로였다. 만약 더스틴이 그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쭉 간다면... 그 종착지는 카리븐이었다.
"따라가야겠어."
"위험해요. 상대는 소드마스터라고요. 만약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죽을지도 몰라요."
이성적인 아이리우스의 판단. 하나 이미 페드리의 귀엔 누구의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쿠두스 선생님!'
아카데미엔 쿠두스가 있었다. 자신을 구원해 주고 살아가게 해 준 은인. 틈만 나면 틱틱대지만, 자신의 행복을 바라고, 자신이 그려갈 미래를 기대해 주는 사람.
"놔, 가야 해."
페드리는 자신을 잡는 아이리우스의 팔을 내팽개쳤다.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쿠두스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같이 가죠."
"예?"
"최소한 당신이 죽지 않게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 모습에 루드가 나섰다. 본래 개입하지 않으려던 그였으나... 더스틴의 목적지가 카리븐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페드리는 아직 여물지 않았다. 쿠두스 선생님도 걱정되고.'
이대로 더스틴과 맞부딪친다면 페드리는 죽고 말 터였다. 그렇게 둘 순 없었다.
아카데미에 남아 있을 쿠두스가 걱정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번 일로 페드리의 마음을 얻을 수도 있었다. 그를 움직이는 건 오직 그 스스로의 마음뿐이었으니, 그를 동료로 만들기 위해선 조금씩 그의 마음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루드비코 씨가 가신다면 저도 가겠습니다."
"그럼 저도 갈래요."
루드의 합류 선언에 미쉐린과 아이리우스도 동참했다.
'그가 함께한다면 그의 말대로 최소한 죽는 일은 없을 거야.'
아이리우스는 루드비코가 소드마스터임을 확신했다. 그의 어조와 분위기, 미쉐린의 반응 등을 토대로 한 확신이었다.
미쳐 버린 소드마스터를 상대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상대 또한 소드마스터라면 사정은 달라졌다.
최소한 죽지 않게 지켜주겠다 한 그였으니 만약의 상황에서도 목숨을 잃는 일은 없을 터였다.
'쿠두스 선생님께 문제가 생기진 않았겠지.'
페드리를 말리긴 했으나, 그녀 또한 쿠두스가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결격자 쿠두스의 진면목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그가 소드마스터를 꺾을 때보다 몇 년이나 이른 시간.
전생과는 또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몰랐다. 애초에 그 상대와 상황도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고.
"서두르죠. 그가 카리븐에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아야 합니다."
루드의 재촉과 함께 일행은 더스틴의 뒤를 쫓아 나섰다.
* * *
해가 서서히 기우는 시각. 누군가 카리븐의 입구에 나타났다.
"정지, 신분패를 보여... 크악!"
"미친! 종을 울려라! 아악!!"
더스틴은 제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미 환각과 착란에 물든 더스틴은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그에게 남은 건 단지 카르반 아카데미로 가야 한다는 의지와 주변에 알짱거리는 이들을 전부 죽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경비병들은 서둘러 종을 울리고 병력을 모았다. 검문소에서 참극을 일으킨 범인은 어느새 도시 내부로 들어온 상태였다. 아직은 초입에 불과했지만 이대로라면 곧 도시 중심부에 도착할 터.
경비대를 이끌고 범인과 마주한 경비대장은 경악했다.
'저분이 대체 왜...!'
경비대장은 천천히 걸어오는 이의 정체를 알아챘다. 오래전, 그의 밑에서 복무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속한 기사단도 아니고 그 산하의 병력에 불과했지만, 그곳에서 복무했던 건 평생의 자랑거리였다.
"더스틴 님! 정신 차리십쇼!"
더스틴이 제정신이 아님을 깨달은 경비대장은 크게 외쳤다. 부디 그가 되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더스틴에게선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한편 경비대장의 외침을 들은 수하들은 깜짝 놀랐다. 미친 살인귀라 여겼던 인물의 이름이 익숙한 까닭이었다.
"후안, 얼른 아카데미 측에 연락해."
"알겠습니다. 부디... 죽지 마십쇼."
"빨리 가!"
자신들의 힘으로 더스틴을 막기란 불가능.
경비대장은 달리기가 가장 빠른 병사를 불러 아카데미로 보냈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아카데미의 교수들이 오기 전까지 더스틴이 도시 중심가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내는 것.
"절대 안쪽으로 들어가게 해선 안 된다. 어떻게든 막는 거다!"
"오오!!"
상대는 고작 하나였으나 이곳에 모인 전부는 죽음을 각오했다.
그 하나가 자신들 같은 한낱 경비대가 아닌 기사단조차 전멸시킬 수 있는 소드마스터였으니까.
패배가 확정된 싸움, 죽음이 보이는 결과.
그러나 물러서는 이는 없었다. 모두 이곳에 지켜야 할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다.
"내 목숨을 앗아간 게 소드마스터라면 저승에서도 자랑거리는 되겠지!"
"대장은 그놈의 자랑 좀 그만하쇼. 직속도 아니고 산하의 산하의 산하에서 복무한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리 따지면 나도 황제 폐하의 아래에서 복무하는 거 아니겠소."
"크하하하!! 맞네. 대장의 논리대로라면 우리 모두 황제 폐하의 병사였네. 크크크!"
경비들은 두려움을 잊고자 더 크게 웃고 떠들었다.
"가자."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그저, 해야 할 것을 할 뿐.
* * *
사무실에서 늘어져라 하품을 하던 쿠두스는 바깥이 시끄러워진 걸 느꼈다. 누가 사고라도 쳤나 생각하며 가볍게 넘겼으나, 곧 고작 그 정도 사안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삽시간에 부산스러워진 바깥. 듬성듬성 고음도 들렸다.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쿠두스는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온 이를 바라봤다. 가빈 아르투아, 아카데미에서 가장 명망 높은 검술 교수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 같던데."
"문제가 발생했네. 자네도 가야 하니 서둘러 무장을 챙겨 나오게."
"...."
긴장한 표정과 긴박한 말투.
쿠두스는 뭔가를 물으며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곧장 무장을 챙겼다.
"...빠르군."
"특별할 것도 없는 무장이어서요."
검 한 자루만을 챙긴 쿠두스. 가빈은 그를 데리고 걸음을 서둘렀다.
가빈을 따라 도착한 곳엔 이미 아카데미의 모든 교수진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무장을 갖춘 상태였다.
'사달이 나도 대단히 났나 보군.'
쿠두스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론 중심의 교수들도 있었지만, 저마다 각자의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전부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못 들은 이들은 이동하면서 듣게. 서두르지, 시간이 없네."
가빈 아르투아가 선두에 서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차이가 있는 만큼 교수들 간의 거리가 벌어지기도 했으나 누구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인 거지. 어떤 일이기에 다들 이 정도로.'
정확한 사정 설명을 못 들은 쿠두스는 무엇이 이들을 이리 긴장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하… 하하...."
하지만 그것을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저 멀리서 느껴지는 엄청난 존재감.
그에 질세라 압도적으로 뿜어 나오는 마력.
쿠두스는, 그 기척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08화
문제의 장소에 도착한 교수진은 침음을 흘렸다. 일대에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바닥에는 이미 수많은 이들이 쓰러져 있었다.
"드디어...."
교수들을 본 경비대장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앉은 채로 벽에 기댄 그의 배는 뻥 뚫려 있었다. 아직까지 의식이 있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경비대장은 죽음이 다가오는 걸 느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교수진들이 오기 전까지만 시간을 끌겠다던 목표를 완수했으니. 이제부턴 그들에게 맡기고, 조금 쉬어도 되겠지....
경비대장이 죽었으나 그를 애도할 시간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다들 목숨을 걸어 주게."
앞으로 나선 가빈이 부탁했다. 그는 자신의 부탁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알았다. 소드마스터와 싸워 달라니, 죽으란 것과 같은 말이 아닌가. 하지만 죽을 걸 알더라도 싸워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뚫리면 다음은 학생들이야."
방학을 맞아 대다수의 학생들이 자리를 비웠다지만, 아카데미를 떠나지 않은 학생들도 있었다. 다음 학기 준비를 위해 일찍 돌아온 학생들도 있었고.
자신들이 막지 못한다면, 그들 모두가 더스틴의 손에 죽을 터였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절대."
그렇게 되게 내버려두지 않겠다.
의지를 다진 가빈이 검을 쥐었다. 그의 곁으로 저마다 각오를 마친 교수들이 도열했다.
저벅, 저벅, 저벅.
더스틴이 천천히 다가왔다. 무언가 앞을 막는다면 치우고, 길이 없다면 만들며 걸어온 그였다.
그 결과 그의 발밑엔 피 웅덩이가 고였고 몸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살점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더스틴은 계속해서 걸었다. 본인조차 자신이 걷는 이유를 잊어버렸지만, 이제 와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쪽으로 걷는다는 처음의 의지를 고스란히 실천할 뿐.
"하압!"
"보조할게요!"
천천히 걸어오는 더스틴에게 공격이 쏟아졌다. 마법 교수들의 마법을 시작으로 사냥 수업을 담당하는 교수의 화살이 쏘아졌고, 그 뒤로 근접 병장기를 다루는 교수들이 쇄도했다.
'어쩌다 이런 꼴이 된 거냐.'
더스틴을 향해 도약한 쿠두스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소드마스터란 영광스러운 경지에 오른 그는 한때 자신에게 질투란 감정을 품게 만들었던 이였다. 동시에, 자신을 괴롭히던 아집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 이이기도 했다.
한데 이렇게 스스로를 잃은 모습이라니.
"오른쪽!"
"옛!"
가빈 아르투아 신호에 맞춰 교수들이 산개했다. 가장 먼저 노리는 건 검을 든 더스틴의 손이었다.
'정상이 아니야. 소드마스터라 할지라도 충분한 승산이 있다!'
더스틴의 상태는 온전치 않았다. 검게 물든 눈은 그가 자아를 잃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승산이 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일지라도, 아니 소드마스터이기 때문에 그를 제압할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갔다.
'소드마스터의 두려움은 그 깨달음에 있으니.'
자신과 검에 대한 깨달음.
소드마스터를 소드마스터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
제정신이 아닌 지금으로선 그것을 완전하게 펼쳐 낼 수 없을 터.
하지만, 가빈이 착각한 게 하나 있었다.
분명 더스틴은 본래의 상태가 아니었다. 제정신이었다면 이렇게 참극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겠지.
그러나 지금 검을 휘두르는 건 더스틴이었다. 의식을 잃은 것도 아니고, 다른 이의 의식이 덧씌워진 것도 아니었다.
단지 환각과 착란에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
더스틴이 휘두르는 검에는 여태껏 그가 쌓아 올린 깨달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서걱-!
"아...!"
나직한 탄성. 그와 함께 더스틴의 오른쪽으로 달려들었던 교수가 쓰러졌다.
세계가 느려진 것 같은 감각.
그 속에서 둥실 떠오른 목이 뒤늦게 땅으로 떨어졌다.
동료 교수가 죽었지만, 누구도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지금 일어난 일이, 자신들이 겪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으니.
"정신들 차려!"
그들을 일깨운 건 쿠두스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다른 교수의 목을 노리던 더스틴의 검을 막아 낸 그가 교수들을 향해 일갈했다.
"상대는 소드마스터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누구든 언제 어느 때 죽을 수 있단 말이야. 누가 죽든 신경 쓰지 마. 자기 자신이 죽지 않는 데 집중해."
남을 신경 쓸 여유 따윈 없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해라.
교수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평소와 동떨어졌던 느릿한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쉬지 말고 움직여!"
건물 잔해에서 몸을 일으킨 쿠두스가 소리쳤다. 더스틴의 검을 막고 튕겨 나갔던 것이었다.
서둘러 몸을 일으킨 쿠두스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키고자 움직였다.
"크악!"
"눈 돌리지 마! 앞에 집중해!"
"마법!"
"눈치 보지 말고 쏴!"
곳곳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 쓰러져도 눈 돌리지 않는다. 한 사람이 목숨을 바쳐 검을 막아 내면, 누군가 그 틈을 노린다. 마법의 경로에 동료 교수가 있더라도, 그것이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면 이를 악물고 쏘아 낸다.
교수들은 최선을 다했다. 아카데미 내에서 서로 경쟁하기도, 때론 힐난하기도 했던 그들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절대 저 괴물이 아카데미로 가게 해선 안 된다.
쿠두스 또한 최선을 다했다.
'아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게 맞나?'
고작 익스퍼트 중급에 불과한 자신으로선 더스틴의 검을 막는 것조차 버거웠다. 아까 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더스틴으로선 가볍게 휘둘렀을 뿐이지만, 그것을 막는 것만으로도 벽으로 날아가 부딪치지 않았나.
여태 그가 했던 유의미한 일은 교수들의 정신을 일깨우고 더스틴과 관련된 정보를 전하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과거 더스틴과 함께 수학하며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쿠두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이냐 묻는다면....
"아니, 아니야. 아니라고."
스물이 넘었던 교수들은 어느덧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만 남아 있었다.
목숨을 잃은 이들, 팔다리를 잃은 이들, 마나홀을 잃은 이들.
저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더스틴을 막아 내려 했다.
그러나 자신은 어떤가.
'난 뭘 망설이고 있던 거지?'
언젠가 소드마스터를 뛰어넘겠다고 맹세했다. 소드마스터는 소드마스터만으로 상대할 수 있다는 정설을 깨부수겠노라 다짐했다.
'모든 걸 걸고도 질까 봐?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모든 걸 잃을까 봐?'
쿠두스는 깨달았다. 자신은 그저 두려움에 떤 것이었다.
모든 걸 걸고도 실패할까 봐. 여태껏 큰소리쳤던 게 거짓말이 될까 봐.
마치 겁쟁이처럼.
"후...."
쿠두스는 검을 들었다. 부러지기 직전이던 의지를 바로 세웠다.
"...도망치게. 자네의 상대가 아니야."
그런 그를 왼팔이 날아간 가빈이 말렸다.
가빈은 쿠두스라도 도망쳐 살길 바랐다. 더스틴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더 이상 승산이 없었다.
자신을 비롯해 경지 높은 이들은 전부 죽거나 크게 다쳐 싸울 수 없는 상태였고, 실전 계통이 아닌 이들은 이미 시민과 학생들의 대피를 위해 후방으로 빠진 상태였다.
이곳에 남은 이 중 온전한 건 쿠두스뿐. 평소 그를 냉대했던 건 사실이나 그건 결코 그가 미워서가 아니었다.
가빈은 진심으로 그라도 살길 바랐다.
그러나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노라 결심한 쿠두스였다. 그는 제 모든 걸 불태워서라도 더스틴을 막을 생각이었다.
"기억하냐, 더스틴."
"...."
"우리의 첫 대련은 내 승리였던 거."
더스틴과 처음 만났을 당시, 쿠두스는 더스틴에게서 승리를 거뒀다.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였지만, 중요한 건 첫 대결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검을 맞대는 건 각자의 길을 찾아간 이후 처음이지. 그러니 이번에도 내가 이겨야겠다."
말도 안 되는 논리. 하지만 쿠두스는 진심이었다.
"공(空)."
주변의 공간을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고.
"허(虛)."
그 영역의 모든 것을 비워 낸다.
"오랜만에 붙어 보자고. 친구."
쿠두스가 만든 공허의 영역에서 모든 마력은 무로 돌아갔다.
자연 속에 있는 마나도, 각자가 지니고 있던 마력도 전부 사라진 공간.
이곳에서만큼은 모두가 각자가 갈고닦은 검과 몸만을 믿어야 했다.
'최대 10분이 한계다.'
다만 그것이 언제까지고 허락되는 건 아니었다.
쿠두스는 공허의 영역을 발휘할 수 있는 한계치를 가늠했다.
길어야 10분, 그나마도... 자신의 미래를 내걸어야 가능한 시간이었다.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이전과 같은 충격은 없었다.
서로 마력을 잃은 상태였으니 조금 전까지 보이던 인간을 뛰어넘은 능력은 보이지 못했다.
다만, 더스틴의 검은 여전히 매섭고 날카로웠다.
"큭, 잠자느라 바빴을 텐데 운동은 또 언제 한 거냐...!"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더스틴의 검. 안간힘을 써서 그것을 밀어낸 쿠두스는 안쪽을 파고들었다.
'신체 능력은 더스틴이 한 수 위.'
아무리 마력을 잃었다고 하나 소드마스터의 신체는 일반의 범주를 뛰어넘는 것.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자신이었으나 더스틴과 신체 능력으로 승부를 보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더스틴의 속도에 반응할 수 있고 그 힘에 압도당하지 않으니,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애초에 공허는 소드마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영역. 신체 능력에서 밀릴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공허의 영역을 설계하며 진짜로 원했던 것은 마력을 토대로 한 압도적인 화력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는 상황.
달리 말해, 서로의 검술로 승부를 가를 수 있을 정도만을 바랐었다.
거리를 좁힌 쿠두스의 검이 더스틴의 늑간을 노렸다.
몸에 붙어서 나오는 짧은 궤적.
그사이에 검을 끼워 넣으며 그것을 막은 더스틴이었으나 쿠두스의 노림수는 거기에 있었다.
늑간을 벨 것 같이 빠른 속도로 휘두르던 검의 궤도를 수정한다.
최고 속도에 달한 검의 궤적을 바꾸는 건 그의 근력으론 무리인 일.
하지만 검을 몸에 붙여 나오게 한 이유가 있었다.
쿠두스는 검을 쥔 손을 느슨하게 풀며 손목의 각도를 수정했다. 더스틴의 검과 부딪친 검이 더스틴의 검을 지지대 삼아 그 방향을 바꿨다.
"...!!"
흘리기를 공격에 접목한 기술.
상대가 방어하기 위해 펼친 수단을 역이용하는 이 기술은 상대가 막을 수 없는 공격을 가능하게 만들어 줬다.
"칫, 얕았다."
쿠두스는 아쉬움을 삼켰다. 더스틴의 목 아래, 쇄골을 훑는 데 그친 공격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더스틴이 상체를 빼며 궤적에서 비껴간 까닭이었다.
그 뒤로도 쿠두스와 더스틴은 계속해서 검을 섞었다.
쿠두스가 공격하는가 싶었는데 더스틴이 공격을 하고, 더스틴이 몸을 빼는가 싶더니 쿠두스가 방어를 하고.
모르는 이가 봤을 때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쿠두스, 저자는 대체....'
하지만 오랜 세월 검을 수련한 사람이라면, 제국 최고의 아카데미에서 검술 교수를 맡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그 진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실제 검으로 논검을 펼치는 것인가.'
가빈은 경악스런 표정으로 두 사람의 전투를 지켜봤다.
더스틴과 쿠두스는 꼭 논검을 펼치는 것 같았다.
난 이렇게 하겠어. 그럼 난 이렇게 하지. 그 수는 안 될 텐데? 그럴 리가,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을.
다만 두 사람은 논검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구현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논검으로만 이뤄져도 따라가기 버거운 속도였다. 하물며 각자의 수에서 느껴지는 깊이감은 어떤가.
'놀랍구나.'
가빈은 무아지경으로 두 사람의 싸움에 빠져들었다.
둘의 공방이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것은 그들이 서로의 수를 미리 읽고 그에 대응해 자신의 수를 수정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과정들이 여러 차례 반복되다 보니 춤추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나 분명한 건, 둘의 싸움이 백중세란 사실.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모르는 균형이지만, 아직까진 팽팽히 맞서 싸우고 있었다.
"안 돼!"
그 순간, 가빈은 경악을 내질렀다. 방금 전까지 비등했다 여긴 싸움이었건만....
더스틴의 검이 쿠두스의 가슴을 꿰뚫으려 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09화
검을 나누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쿠두스는 환희했다.
소드마스터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는다. 여태까지 걸어온 길이 틀리지 않았다.
그 증거로 더스틴의 몸에 상처가 늘고 있었다.
물론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깟 상처 따위!'
소드마스터가 아닌 몸으로 소드마스터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면 상처쯤이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고양감에 휩싸였던 까닭일까.
'놓쳤다.'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순간 시야에서 사라진 더스틴의 검. 쿠두스는 더스틴의 검이 그릴 궤적을 예상하고 그에 맞춰 대응했다. 이미 시야에서 놓친 마당에 눈으로 좇는 건 무의미였다.
'녀석이라면.'
더스틴과 했던 대련들을 떠올렸다. 그와의 대련은 오래된 것이었으나 그 이미지만큼은 또렷했다.
몇 번이고 복기하고 마음으로 그려 냈던 검.
심상에서 그와 겨룬 것만 수백 번에 달했다.
그러니 감히 예상했다. 더스틴의 검이 사선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그러나.
'...찌르기?!'
쿠두스가 과거에서 나아갔듯 더스틴 또한 과거에 머무르지 않았다.
쿠두스가 놓친 것은 그 부분이었다.
간결하게 상대의 몸통을 노리는 찌르기.
그 순간 쿠두스는 패배를 직감했다. 어떻게 하든 피할 수 없다.
급소를 비껴 나가게 하는 것은 가능하겠으나, 그마저도 큰 피해를 입을 터였다.
지금 상태로도 간신히 백중세를 유지하는 형국이었으니, 부상을 입는다면 균형은 순식간에 무너지리라.
더스틴의 검이 천천히 다가왔다. 세상이 느려진 것 같은 감각. 쿠두스는 그것이 절대의 경지에 오르며 더스틴이 얻은 영역임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영역의 효과만이 아니었다.
스걱-!
쿠두스의 옆구리를 길게 벤 더스틴의 검.
"!!"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공격이었다.
궤적과 속도, 호흡을 전부 뺏겼으니 급소를 피하는 게 최선일 정도였다.
하나 더스틴의 검은 고작 옆구리만을 베었을 뿐이었다.
"더스틴!"
쿠두스는 그 이유를 곧장 깨달았다.
"크으...."
검이 닿기 직전, 더스틴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그 궤적을 바꾼 덕분이었다.
"정신이 드는 거냐!"
"크아...!"
분명했다. 아직 제정신을 찾진 못했지만, 서서히 이상 증세에서 회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캉-! 챙! 차창!
서로의 검이 맞물렸다. 연신 부딪치는 검들은 가벼운 금속음을 튕기며 그 속도를 높여 갔다.
"정신 차려라!"
쿠두스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짰다. 옆구리를 길게 베인 까닭에 움직이기 불편했지만, 겨우 이깟 상처 때문에 주저앉을 순 없었다.
희망도 있었다. 더스틴이 조금씩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중간중간 멈칫하는 모양새나 급소를 노리던 궤적이 조금씩 비틀리는 걸 보면 분명했다. 그 또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겠지.
"조금만 더 힘내라. 오랜만에 만나서 이딴 식으로만 얼굴을 볼 생각은 아니겠지?!"
그리 말하는 쿠두스의 입에선 핏물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며 쌓인 상처와 충격이 슬슬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쿠두스는 시간을 가늠했다.
소드마스터와의 싸움을 가능하게 해 주는 공허의 영역.
실로 대단한 능력이지만, 여기에도 치명적인 한계는 존재했다.
영역을 펼치기 위한 대가가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그 유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 모든 마력을 걸고서라도 버텨야 한다. 미래를 잃어도 좋다. 지금만 지킬 수 있다면...!'
공허의 영역은 소드마스터를 상대하겠다는 쿠두스의 집념이 만들어 낸 산물이었다.
마력을 소실시킨 영역의 구축.
어찌 보면 소드마스터의 깨달음과 비슷한 성질의 것이었다.
다만, 영역을 구축하고 절기를 펼침에 있어 아무런 대가도 없는 그들과 달리 쿠두스의 공허는 대가를 필요로 했다.
그 대가는 스스로의 마력. 쿠두스는 자신의 마력을 불태움으로써 주변의 마력을 함께 전소시켰고,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이 공허의 영역이었다.
"더스티이이이인-!!!"
허물어져 가던 공허의 영역이 재차 강해졌다.
가진 마력을 넘어, 체내의 모든 마나로드까지 희생시킨 결과였다.
쿠두스와 더스틴의 검이 얽혔다.
눈에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충돌.
속도에 있어선 쫓아감에 무리가 없었으나 각각의 검에 담긴 묘리가 연신 시야와 감각을 속였다.
"기형적이구나....
그 모습을 바라본 가빈은 그리 읊조렸다. 쿠두스의 검에서 느껴지는 깊이와 그가 만들어 낸 영역을 알아본 까닭이었다.
처음엔 제 안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게 더스틴과의 싸움에서 다 써 버렸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건, 쿠두스가 만들어 낸 영역 때문이었다.
본디 영역이란 소드마스터의 증표나 다름없는 것. 소드마스터가 얻은 깨달음이 실체화된 것이 곧 영역이었다.
그러나 쿠두스는 소드마스터가 아님에도 영역을 펼쳐 내고 있었다.
그건 스스로와 검에 대한 쿠두스의 깨달음이, 소드마스터와 같은 경지에 있기 때문이겠지.
"결격교수... 보다는 결격자란 말이 어울리겠군."
쿠두스의 마력은 소드마스터가 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알려졌기로 그의 경지는 고작 익스퍼트 중급. 그나마도 가진 마력의 양은 경지의 평균보다도 떨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깨달음은 신체의 역량을 훨씬 상회했다.
지금 이 순간, 쿠두스는 마력 소양이 갖춰지지 않은 소드마스터와 다름없었다.
'이 영역이 마력의 차이를 없애 줬으니.'
부족한 마력 소양은 그의 영역이 해결해 줬으니, 남은 건 오롯이 스스로의 검에 대한 믿음뿐!
"하아아아-!!!"
쿠두스는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몸이 삐거덕거렸다. 한계를 넘은 부하에 근육과 관절이 소리 질렀고, 공허의 영역을 구축하는 대가로 타들어 가는 마나로드가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다.
그러나 멈출 수 없다.
그 각오에 부응한 것일까. 전황은 조금씩 쿠두스의 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더스틴의 몸에 상처가 늘어났다. 이전과 다른 것은 상처가 나는 부위.
손목, 팔꿈치, 어깨, 무릎, 눈두덩이... 하나같이 전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늘고 있었다.
서걱-!
쿠두스의 검이 더스틴의 가슴을 베었다. 뼈가 드러나거나 장기가 손상되진 않았지만, 근육은 확실히 찢어 낸 공격. 엄청난 양의 피가 튀었다.
마무리 공격을 가할 기회.
멈칫.
하지만 그는 활짝 열린 더스틴의 가슴에 검을 꽂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공격을 멈추게 한 것은, 과거의 편린이었다.
'더스틴 클라위베르트.'
동문이자 과거의 라이벌, 오래전 심마의 근원이자... 제국의 소드마스터.
그를 죽여도 되는 것일까?
비록 지금은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시간이 지나면 제정신으로 돌아올 확률이 높았다. 방금 전의 전투에서도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한데... 이렇게 죽게 둬도 되는 것인가?
"...여."
그때,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쿠두스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더스틴을 바라봤다. 그에게 말을 건 것은 더스틴이었다. 검게 물들었던 눈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빨리 죽여 이 새끼야. 다시 정신을 잃기 전에 빨리."
"...오랜만에 본 친구한테 부탁하는 태도가 그따위냐."
피식.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오직 둘에게만 보이고, 둘만 느낀 미소였다.
푹-!
쿠두스의 검이 더스틴의 가슴을 찔렀다.
'아... 엿 같네.'
살을 파고드는 서늘한 감각. 그것이 쿠두스의 검이란 건 모를 수가 없었다.
더스틴은 쓰러진 채로 쿠두스를 응시했다.
녀석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 큰 남정네가 질질 짜는 모습은... 솔직히 보기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이게 최선이다.'
이대로 살아 있으면 의회에게 먹잇감을 던져 주기만 할 뿐이다. 자신이 벌인 일을 빌미로 황실을 압박하겠지.
무엇보다 지금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어떤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찾았지만, 아직 독의 효과가 남아 있음을 느꼈다. 완전히 사라질 때까진 지금 같은 모습을 반복하겠지. 그렇게 다시 정신을 잃는다면... 이곳의 모두가 죽을 뿐이었다.
그보단 차라리 자신 하나가 죽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래도 다행이네.'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피해가 이만한 게 다행이었다. 역시 녀석이 있는 이곳으로 오길 잘했다.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더스틴은 쿠두스의 손을 잡았다. 쓰러진 더스틴을 받치고 있던 쿠두스였기에 의사를 전하는 건 간단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해후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말해야만 하는 게 있었다.
"...…의회."
생명의 촛불이 꺼져 가는 게 느껴졌다. 더스틴은 마지막 힘을 모아 말했다.
"뒷일… 부탁... 뺑이...."
"뭐? 그게 무슨 소리냐."
전할 것을 모두 전한 더스틴은 눈을 감았다. 편안한 표정이었다.
쿠두스 녀석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뺑이 쳐 달란 부탁까지 마쳤으니, 이제는 편히 쉴 생각이었다.
* * *
제도에서 출발한 루드 일행은 해가 저물 때가 돼서야 카리븐에 도착했다.
"늦었군요. 서두르죠."
카리븐의 입구는 이미 초토화된 상태.
한눈에 봐도 더스틴의 짓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일행은 서둘러 더스틴을 쫓았다. 바닥에 가득한 시체들이 그 길을 안내한 덕분에 그를 찾는 건 금방이었다.
마침내 발견한 더스틴. 걱정했던 것처럼 그를 상대할 일은 없었다. 그는 이미 쓰러진 채였으니.
쓰러진 더스틴의 곁에는 쿠두스가 있었다.
'선생님께서 해결하신 건가.'
더스틴을 쓰러트린 게 쿠두스일 거란 사실은 쉽게 추측이 가능했다.
전생에서도 소드마스터를 꺾었던 쿠두스였고, 두 사람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으니.
"선생님!"
"잠깐."
루드는 쿠두스를 발견하고 달려가려는 페드리를 제지했다.
오랜 친구 간에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페드리의 마음은 알지만, 쿠두스의 마음도 헤아려 주고 싶었다.
그의 생에서 더스틴이란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 그 또한 마음이 어지러울 터였다.
그때 더스틴이 입에 담은 단어가 들렸다. 작았지만 분명 의회란 단어였다.
'...의회가 벌인 짓이었나.'
벨로티에게 들었던 황실과 의회의 마찰이 떠올랐다. 이번 일이 그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면....
'황실과 의회의 마찰이 커질수록 유리해지겠군.'
제국의 소드마스터 하나가 사라졌다. 그들이 계속 서로의 힘을 갉아먹는다면 루드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언젠가 상대해야 할 제국의 힘이었으니.
다만, 이는 전생엔 없었던 일. 어떻게 된 건지 전후 사정과 그 반향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이제 됐습니다. 가 보시죠."
쿠두스와 더스틴의 인사가 끝났음을 느낀 루드는 페드리를 제지한 손을 풀었다.
페드리는 즉시 쿠두스에게 달려갔다.
"선생님!"
"어떻게 벌써 온 거냐. 퀘스트는 어쩌고."
제도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페드리가 눈앞에 나타나자 놀란 쿠두스.
그러나 그는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 씨익 웃어 보였다.
"괜찮다. 다 끝났거든. 내가 누구냐. 이깟 것 아무것도... 쿨럭!"
하지만, 소드마스터를 상대한 몸이 멀쩡할 리 없었다. 더스틴은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모든 마력을 불태우신 건가.'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쿠두스를 바라본 루드는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조금의 마력도 남아 있지 않은 쿠두스의 몸.
그는, 더 이상 마력을 쌓을 수 없는 상태였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