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10화
쿠두스는 성치 않은 몸으로 더스틴의 시신을 수습했다. 더스틴 다음은 이번 일로 죽은 경비병과 시민들이었다. 페드리와 아이리우스는 수습을 도우며 혹여 쿠두스가 쓰러지진 않을까 안절부절못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교수들도 그들을 따라 상황 정리에 나섰다. 큰 부상을 입은 탓에 거동이 불편했지만, 느린 속도로나마 시신을 거두고 눈 감지 못한 이들의 눈을 감겨 줬다.
"...이만하길 천만다행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어느 정도 현장 정리가 끝나고. 크게 숨을 내쉰 가빈의 말에 사냥 수업의 교수인 맨디가 동조했다.
무려 소드마스터가 이성을 잃고 날뛴 사건이었다. 수십이 넘는 피해자가 생겼지만, 이만한 게 다행이었다. 본디 소드마스터란 제대로 갖춰진 군세로도 대응하기 어려운 존재였으니.
물론 피해가 적다고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맨디는 가빈을 바라봤다. 그의 왼쪽 어깨는 텅 비어 있었다.
오른손잡이인 가빈이었으니 검을 휘두를 순 있겠으나... 과거의 모습을 되찾긴 어려우리라.
"우리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어."
"…창피하군요."
그럼에도 더스틴을 막아 낸 건 엄청난 성과였다. 그리고 그 중심엔 여태까지 결격 교수라 무시받던 쿠두스가 있었다.
'실로 대단했지.'
가빈은 다시 한번 그와 더스틴의 싸움을 떠올렸다.
서로의 마력을 무위로 되돌린 영역도 대단했지만, 가빈이 정말 놀랐던 건 쿠두스의 검술이었다.
한 번의 휘두름도 결코 낭비하는 법이 없었다. 가볍게 휘두르는 듯했지만 무거웠고, 무거운 듯 보였으나 재빨랐다.
그 안에 담긴 깊이는 또 어떻던가. 당장이라도 그와 함께 검에 대해 논하고 싶었다.
"그래도 그를 알아봐 줬던 이들이 있는 듯하니 다행이지."
하지만 가빈은 그 마음을 꾹 눌렀다. 당장 자신의 몸 상태가 안 좋기 때문이 아니었다. 더스틴과의 전투 중 왼팔을 잃었지만 지혈을 마친 데다 통증도 견딜 만했다.
그럼에도 더스틴에게 향하지 않은 것은.
"진짜 괜찮은 거 맞죠? 갑자기 쓰러지는 거 아니죠?"
"괜찮다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검진은 꼭 받으셔야 해요."
"아이리우스 너까지."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그를 걱정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럽군.'
가빈은 그들을 알았다.
페드리와 아이리우스, 2학년과 1학년을 대표하는 천재들.
둘 모두 자신의 수강 권유를 거절했던 이들이었다. 자신만이 아니었다. 다른 교수들도 일찍이 그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가르칠 욕심을 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저 아이들의 눈이 우리보다 정확했군.'
당시에는 자신을 비롯한 다른 교수들을 거절하고 쿠두스의 수업을 듣는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격교수에게 밀린 것인가 하는 자격지심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쿠두스가 결코 결격교수란 멸칭으로 불릴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저 둘은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보기 좋은 사제 관계를 바라보고 있을 때.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음."
한둘이 아니었다. 정돈된 기세는 멀리 있음에도 압박감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 소드마스터란 재앙을 맞이했던 상황.
교수들이 한껏 긴장했다. 만약 적의를 가진 이들이라면....
하지만 이윽고 기척의 주인들이 나타났을 때, 모두가 안도했다.
"클라우드 기사단의 질레트입니다. 제국 최고 아카데미의 석학들을 뵙습니다."
나타난 이들은 기사단이었다. 가빈은 그 선두에서 스스로를 질레트라 소개한 이를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질레트 경."
"가빈 님이십니까. 격조하였습니다."
"괜찮네. 자네의 소식이 가끔 들려왔거든. 부단장이 되었다 들었네. 늦었지만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질레트는 오래전 카르반 아카데미를 졸업한 학생이자 가빈의 제자였다.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다른 기사단들의 구애를 거절하고 클라우드 기사단에 들어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클라우드 기사단의 단장이 더스틴 클라위베르트였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 것 같군."
"그렇다면 에두르지 않고 여쭙겠습니다. 더스틴 님께선 어디 계십니까."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스틴 님이 이곳으로 향한 건 분명했다. 피 냄새가 짙게 풍겼고 가도에는 아직 끈적한 핏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굳이 주변이 아니라 눈앞에만 봐도 더스틴이 이곳에 왔었음은 알 수 있었다.
외팔이가 된 가빈과 심각한 부상을 입은 교수들. 소드마스터쯤 되는 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들을 이리 만들 수 있겠는가.
다만, 이들을 이리 만들었을 더스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더스틴 님, 어찌 된 일입니까.'
더스틴은 빈말로도 좋은 상관은 아니었다. 어디서 뭘 하는 건지 허구한 날 사라졌고, 자신의 기사단임에도 책임은커녕 나 몰라라 도망 다녔다.
그럼에도, 더스틴은 클라우드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자신의 단장이었다.
"더스틴 님께선... 돌아가셨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심스럽게 입을 뗀 가빈의 말. 질레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죽으셨다고?'
누가? 더스틴 님이?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어떻게? 왜? 대체 누구한테?
질레트의 몸에서 기세가 흘러나왔다. 격해진 감정을 따라 흐른 기세는 그 감정만큼이나 크게 요동쳤다.
"큭."
"기세를 갈무리해주게. 내상을 입은 이들이 많네."
가빈의 부탁이 있었으나 질레트는 기세를 죽이지 않았다.
더스틴을 죽인 이가 있다면 그 죄를 물을 생각이었다.
"더스틴 님이 죽었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네."
가빈은 힘겹게 대답했다. 더스틴의 죽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이곳의 모두가 죽었을 터였다.
"기세를 멈추게."
핏발 선 눈이 질레트를 바라봤다. 막 격한 전투를 마친 참이었다. 내상을 입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이리 사나운 기세를 계속 마주한다면 내상이 심해질 것이었다. 자신 또한 질레트의 기세 때문에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질레트는 여전히 기세를 갈무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끌어올렸다.
그때.
"내가 죽였네."
"...당신이 말입니까?"
쿠두스가 질레트의 앞에 섰다. 그의 기세를 덤덤히 받아 낸 쿠두스는 고요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래, 내가 더스틴 클라위베르트를 죽였네."
"거짓말."
"왜. 내가 더스틴 클라위베르트를 죽였다는 게 믿기지 않는가?"
질레트는 쿠두스를 바라봤다.
그의 몸에 나 있는 수많은 상처는 더스틴의 검에 의한 흔적이 맞았다. 오랜 세월 더스틴의 검을 견식해 왔기에 알았다.
하지만 그가 더스틴과 싸웠고, 끝내 그를 죽였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자는 마력을 다룰 수 없다.'
그의 몸은 마력을 다룰 수 없는 몸이었다. 이런 몸으로 더스틴 님을 상대해 이겨냈다고? 말도 안 됐다.
순간적으로 자신 이상의 경지라 읽어 내지 못하는 걸까 싶었지만, 그것도 아닌 듯했다.
쿠두스는 질레트의 생각을 읽었다. 자신의 몸 상태를 간파하고 자신이 더스틴을 죽일 수 있을 리 없다 여기는 것이겠지.
"더스틴을 죽인 건 나이니, 더 이상의 압박은 그만두지. 명색이 제국의 기사단이 죄 없는 이들을 핍박해서야 되겠나."
"흥."
질레트는 그제야 기세를 거둬들였다. 잠시 쿠두스를 바라보던 그는 이내 자신의 뒤에 도열한 기사들에게 명했다.
"저자를 포박하라."
"!!!"
"질레트 자네!"
그 명에 교수들은 깜짝 놀랐다.
"제국의 소드마스터를 시해했다고 자백한 이다. 어떤 간악한 수로 그분을 죽였는지 직접 죄를 물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네. 더스틴 님의 소식에 흥분한 것은 알겠으나 사리를 판별하게.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저 개인과 제 가문은 물론, 아카데미의 이름으로 강력하게 항의할 겁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일세."
교수들은 쿠두스를 지키기 위해 엄포를 놓았다. 쿠두스를 지키고자 하는 건 교수들만이 아니었다.
"저 또한 이번 일을 아버지께 말씀드리겠어요."
"...그대는?"
"아이리우스 에이나우디, 에이나우디 공작가의 장녀입니다."
아이리우스 또한 마찬가지. 더스틴을 상대하는 건 돕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 상황에서만큼은 쿠두스를 지키고자 했다.
"...…."
"어떻게 할까요."
명망 높은 아카데미 교수들과 공작가를 등에 업은 학생의 강력한 반발.
잠깐 고민하던 질레트는 제 의견을 묻는 기사에게 말했다.
"포박은 취소다. 정중히 모셔라. 이번 사건과 관련된 중요한 참고인이니."
"자네 끝내!"
"참고인 조사를 위해 데려가는 것뿐입니다. 아무 죄가 없다면 금방 풀려나겠죠."
끝끝내 쿠두스를 데려가겠다는 질레트의 말에 가빈이 나섰지만, 그의 의사는 확고했다.
더스틴을 죽인 인물이었다. 어떻게든 확보해야 했다.
포박이 아닌 참고인 소환의 성격을 띠었으니, 한때의 스승에게 보일 최소한의 예의는 갖춘 셈. 질레트의 입장에서는 이마저도 나름 양보한 것이었다.
"그렇다는군. 잠시 갔다 와야겠구나.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너무 걱정들 말아라."
쿠두스는 페드리와 아이리우스를 다독였다. 기사단과 함께 가는 건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카데미 측에서 정식으로 항의하도록 하겠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가빈의 말에 다른 교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참사를 막았으니 상을 줘도 모자랄 판에 죄인 취급이라니. 말도 안 되는 처사였다.
짧은 인사를 마친 쿠두스는 질레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질레트는 등을 돌렸다.
"돌아간다."
기사들도 그를 따라 몸을 돌렸다.
"교수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가문 차원에서 움직일 수 있게 해 볼게요."
아이리우스가 떠나는 쿠두스를 향해 소리쳤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기사단은 처음 나타났던 것처럼 빠른 속도로 떠났고, 쿠두스의 모습도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클라우드 기사단과 쿠두스가 떠난 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가빈이었다.
"우리는... 마저 수습을 해야겠지."
더스틴이 도시 중앙으로 진입하는 건 막아 냈지만, 피해가 적지 않았다. 백에 가까운 수가 죽었으니 당분간 도시 내부는 침울한 분위기가 이어질 터였다.
"학기의 시작을 미뤄야겠군요."
"그래야지. 교수들도 새로 뽑아야 할 거고."
"다행인 건 학생들의 피해가 없다는 것이군요."
"정말 다행이지. 전부 쿠두스 덕분일세."
"맞습니다."
하나둘 해야 할 것을 정리한 교수진은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대피를 준비하고 있을 이들에게 상황을 알려야 했다.
그러고 나면 다음 계획을 세워야겠지. 당장 다음 학기를 어떻게 운영할 건지, 이번 일로 죽은 교수들의 빈자리는 어떻게 채울 건지.
해야 할 일이 한가득이었다.
'이사장님께도 말씀드려야겠군. 어쩌면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나서실 수도 있겠지만.'
가빈은 이사장을 떠올렸다.
쿠두스가 최악의 평판을 가지고도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그를 교수로 두려는 이사장의 의지가 강력했던 까닭이었다.
아마 쿠두스의 진면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터.
불명예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를 붙잡아 뒀던 이사장이라면 이번 일에 관해서도 목소리를 내 주리라.
교수들이 돌아가자 아이리우스는 페드리를 바라봤다.
"선배,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요?"
"어디 가려고?"
"네, 가문에 좀 다녀오려고요."
페드리는 쿠두스가 떠난 뒤로 혼이 빠진 모습이었다.
이런 상태의 그를 남겨 두고 가도 되는 걸까 걱정이 됐지만…
짝!
"정신 차려요."
아이리우스는 양손으로 페드리의 뺨을 쳤다. 페드리의 눈이 조금 또렷해졌다.
"아까 교수님께 말씀드렸듯 가문 차원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할 거예요. 아버지를 통해서 정식으로 항의하고, 교수님께 문제가 생기는 일이 없게끔요."
"...부탁할게."
"부탁하지 않아도 돼요. 선배가 부탁하지 않아도 제가 먼저 할 거였으니까."
페드리의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자, 아이리우스는 곧장 가문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가문까지의 거리가 있었으니 서둘러 움직여야 저쪽과 속도를 맞출 수 있을 터였다.
교수진에 이어 아이리우스까지 떠난 상황.
"페드리 씨는 아카데미에 남아 있는 겁니까?"
"네, 딱히 갈 곳도 없으니까요."
페드리는 아카데미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쿠두스가 돌아오길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렇군요. 저는 다시 제도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아직 볼일을 다 못 마쳐서요. 마음이 동한다면 언제든 절 찾아오세요. 이래 봬도 당신의 후원자이니까요."
루드는 제도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갑작스레 사건에 휘말린 까닭에 카리븐으로 왔지만, 아직 제도에서의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이리우스와 페드리를 확인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다시 제도로 돌아가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을 마칠 심산이었다.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마탑에서도 고대 문자에 대한 답을 내놓을 터.
"조만간 또 뵙죠. 언제든 편히 연락하세요."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루드는 다시 제도로 향했다.
'클라우드 기사단이라.'
그리 돌아가는 길. 루드는 조금 전 쿠두스를 데려간 이들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알아봐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11화
돌아온 제도는 어수선했다. 루드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탐문하는 병사들이 보였다. 몇몇은 더스틴이 지나간 길을 닦으며 참극의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죠."
"좋은 생각이에요. 안 그래도 피곤하던 참이었어요."
루드와 미쉐린은 미리 잡아 둔 숙소로 이동했다. 제도에 들어오며 잡은 숙소는 독채 하나를 통째로 쓸 수 있어 고른 곳이었다.
숙소에 도착한 루드는 변신 신비를 해제했다. 30대의 외양에서 순식간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미쉐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신기한 능력이었다. 한순간에 모습을 휙휙 바꾸다니.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많았네요."
"그러게요."
루드는 오늘 하루를 되짚었다.
갑자기 붙은 미행의 주인공이 페드리와 아이리우스였던 것도. 더스틴이 폭주한 끝에 쿠두스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것도. 그 끝이 쿠두스의 체포로 끝난 것도.
전부 생각조차 못 했던 것들이었다.
'참고인 조사라 했지만... 온건하기만 할 리는 없겠지.'
쿠두스를 데려간 질레트라는 인물. 더스틴의 죽음에 흥분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곧바로 쿠두스를 체포하려 들지 않았던가.
주변의 반발에 체포가 아닌 참고인 조사를 위한 동행으로 말을 바꿨지만, 그게 구색 맞추기란 건 모를 수 없었다.
'잘 풀리면 다행이겠지만 최악의 경우도 생각을 해 놔야겠군.'
더스틴이 죽었다. 심지어 상대국과의 전투도 아니고 혼자 폭주한 끝에 이름 없는 아카데미 교수에게 목숨을 잃었다.
제국이 이를 어찌 받아들일까.
소드마스터보다 강한 존재가 나타났다며 환영할까? 아니면 자국의 소드마스터를 잃었다는 사실에 분노할까.
'쿠두스 선생님이 소드마스터였다면 상황이 달랐겠지만....'
어쩌면 전자처럼 생각할 수도 있었다. 소드마스터를 잃었지만 그를 이긴 강자가 등장한 것이었으니, 새로운 검으로 삼으려 들 수도 있었다.
'선생님의 몸 상태를 알게 된다면, 최악의 경우 사형이다.'
그러나 쿠두스는 더 이상 마력을 쌓을 수 없는 몸. 더스틴의 자리를 대체하는 건 불가능했다.
제국도 금방 그것을 깨달을 터. 그리되면 소드마스터를 잃었다는 분노가 고스란히 쿠두스에게 향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생각이 깊어졌다. 물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하지만 여유가 있을 때 생각해 두어 나쁠 건 없었다. 당장 급히 닥쳤을 땐 시간에 쫓길 수 있었으니.
* * *
다음 날, 루드는 느지막이 숙소를 나와 마탑으로 향했다. 고대 문자에 관한 의뢰를 해 둔 까닭이었다.
정수, 어쩌면 신비와도 연결돼 있을 고대 문자였다. 해석할 수 있다면 분명 정수의 힘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103번 고객님~ 안내 창구로 와 주세요."
직원의 호출을 들은 루드는 안내 창구로 향했다. 의뢰 당시 받은 카드를 내밀자 곧 다른 직원이 나타나 해당 파트의 마법사에게까지 안내해 줬다.
"음, 여러분이 이 문자의 해석 여부를 의뢰한 분들이군요."
고대 문자의 해석을 담당한 마법사는 풍만한 체형의 소유자였다. 턱에 달린 수염은 가슴까지 내려왔는데 그의 호흡을 따라 오르내리길 반복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하나, 아무래도 이곳에선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탑 본부로 가보심이 어떨지요. 아니면 제가 본탑에 의뢰를 전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다만 답을 듣는 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저도...."
"...그렇습니까. 대신 전달해 주시는 것은 괜찮습니다. 나중에 제가 직접 찾아가죠."
마탑에 의뢰를 맡긴 지 고작 하루. 그럼에도 의뢰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애초에 의뢰가 고대 문자를 해석해 달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해석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그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가능하다면 문자를 해석하는 데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완전한 해석을 의뢰하기 전, 1차적인 사안을 확인하고자 한 의뢰였다.
그에 대한 마탑의 답은 불가였고.
"자료를 돌려주시겠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루드는 마법사에게서 고대 문자에 관한 자료를 돌려받고자 했다. 해석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제시했던 자료였다.
"혹 개인적으로 연구를 더 해 봐도 되겠습니까?"
자료를 돌려주던 마법사는 못내 아쉬운지 그렇게 물었다.
당장 자신의 지식과 이곳 지부의 힘으론 해석이 불가능했지만, 언제고 시간과 환경이 갖춰진다면 또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 저 사내가 건넨 고대 문자는 낯선 형태. 어떤 비밀을 품고 있을지 몰랐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시대라거나, 새로운 문명이라거나....
상상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본디 마법사란 세상 만물에 궁금증을 품고 그걸 해소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이었으니.
루드는 마법사를 바라봤다. 그가 이 문자를 해석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무리 높게 잡아도 1퍼센트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굳이 그것을 막을 이유는 없었다.
자료를 쥐고 있던 루드는 손의 힘을 살짝 뺐다.
"결과를 얻는다면 가장 먼저 제게 알려 줄 것을 약속하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오."
"그것을 마나에 대고 맹세하실 수 있으십니까?"
"...마나에 대고 말이오?"
"예."
마법사는 잠시 고민했다. 마나의 맹세를 어긴 마법사는 모든 마나를 다룰 수 없게 됐다. 마법사에게 마나의 맹세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강력한 구속 수단인 이유였다. 실수로라도 맹세를 어겼다간 여태 이룬 모든 것을 잃게 될 테니.
하지만 고민하던 마법사는 결단을 내렸다.
다른 조건은 없었고, 맹세를 지키면 문제될 것도 없었으니. 자신만 주의하면 될 일이었다.
"좋소."
새로운 형태의 문자는 마법사에게 엄청난 흥미를 느끼게 했다.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지, 어떤 형식으로 구성된 글자일지 벌써부터 궁금했다. 어쩌면 이 문자를 연구하다 새로운 영감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법사가 마나의 맹세까지 마치자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넘겨드린 자료는 가지시죠."
"고맙소. 내 뭔가를 알아낸다면 곧장 연락하리다. 연락은 어디로 하면 되겠소?"
"구르드손 가로 보내 주세요."
"구르드손... 고르단의?"
"네."
연락책을 묻는 마법사의 말에 대응한 건 미쉐린이었다.
'한곳에 머무를 사람이 아닌 것 같으니 일단 가문으로 연락하게 하는 게 낫겠지.'
미쉐린은 흘깃 루드를 바라봤다. 같이 다닌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그가 한곳에만 머물러 있을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연락할 일이 생긴다면 그곳으로 부탁드립니다."
미쉐린의 답이 상의되지 않았던 탓에 잠깐 놀란 루드였으나, 곧 그녀의 대답에 동의했다.
미쉐린의 대처는 꽤 괜찮은 것이었다. 미래에 대비해 앞으로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했으니 연락을 주고받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구르드손 가가 도와준다면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정기적으로 정보를 확인하는 것도 가능했고, 보안에 대한 걱정도 덜 수 있었다.
무엇보다 현재 자신의 대외적인 신분은 구르드손 가의 손님. 그쪽을 통해 연락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기운 내세요. 본탑에서는 분명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미쉐린은 마탑을 빠져나오며 루드의 기운을 북돋았다.
그가 제도를 방문한 것은 아마도 고대 문자의 해석을 위한 것일 터.
목적이 허사로 돌아갔으니, 아무리 그라 해도 허탈감을 느낄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쉽게 해결할 거라 여기지도 않았고요."
솔직히 기대를 아예 안 했다면 거짓말이었다. 본탑이 아니라지만 마탑의 지부 중 가장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었으니, 해석의 단초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거라 여겼건만.
그렇다고 해도 루드는 결과에 수긍했다. 쉽게만 풀리지는 않을 것을 예상했었다.
신비와 정수가 있던 곳에서 나온 문자들.
그것들이 어떤 내용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신비와 정수의 비밀에 맞닿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한 가치를 가진 것을 쉽게 알아내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그래도 그걸 위해 제도까지 왔는데...."
하나 루드의 생각을 모르는 미쉐린은 그가 큰 상심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그의 기분을 풀어 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녀는 마침 아이리우스의 안내를 받을 때 눈여겨봤던 것을 떠올렸다.
"잠시만 계세요."
루드를 남겨 놓고 자리를 떠나는 미쉐린.
"...생각보다 제멋대로군."
어느새 사라진 미쉐린의 모습에 루드는 작은 감상을 내뱉었다. 조금 전 마탑에서도 그랬지만, 일단 저지르는 경향이 있어 보였다. 처음의 느낌은 차분하고 얌전하다는 인상이었는데....
'어쩌면 이게 원래 성격일지도 모르겠군.'
오히려 지금이 본래의 모습이고 여태까지는 정수의 부작용을 겪으며 변했던 모습일지도 몰랐다.
루드는 미쉐린을 기다리며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본탑에는 언제 찾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
본탑이라 불리는 마탑의 본부는 하이엔 왕국에 있었다.
당장 그곳으로 갈 예정이 없었으니, 고대 문자의 해석을 맡기는 건 한참 뒤에나 가능할 터였다.
그때.
"날씨가 참 좋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햇볕이 따스하군요."
누군가 루드의 옆에 앉았다. 이전부터 기척을 느끼고 있던 루드였기에 놀라는 일은 없었다.
'누구지?'
대신 제 옆에 앉은 인물의 정체를 추측했다. 곱상한 외모의 남자는 20대로 보였는데 금색 머리칼이 햇빛에 반사돼 밝게 빛났다.
'기억 속엔 없는 인물이다.'
기억을 더듬어도 마땅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우연히 같은 벤치에 앉아 말을 걸었을 확률도 있었지만....
'그렇다기엔 아까부터 보고 있었다.'
마탑을 나온 직후부터 느껴졌던 사내의 시선이었다. 미쉐린을 보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으나 그것도 아닌 듯했다. 미쉐린이 사라지자마자 제게 다가온 사내였으니.
"어제 제도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데, 혹 들으셨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조금이지만 관계되기도 했고요."
더스틴에 관한 일을 묻는 사내.
자신이 그 일에 연루됐음을 알고 조사하기 위해 접촉한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내의 반응은 그 사실을 알고 접촉한 것 같지도 않았다.
"어제의 일에 관계되셨다고요? 이런, 제가 무례했군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직접적인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어제의 일에 얽혔다는 말에 놀란 기색. 연기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뭐지?'
루드는 혼란스러워졌다. 사내가 일부러 접촉한 것은 분명한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이상한 사람이라 치부하기도 어려웠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도 사내의 호위일 터.
'저 정도 수준의 호위를 데리고 다니는 이라....'
낮게 잡아도 익스퍼트 상급. 그만한 수준의 인사를 호위로 대동하는 사내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의 정체를 고민하던 사이, 어느새 미쉐린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일행분이 오셨군요. 전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드는 그의 정체가 궁금했으나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괜히 자신이 사내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는 걸 알려 줄 이유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누구랑 같이 있지 않았어요?"
"지나가던 사람이 잠시 쉬었다 갔습니다. 그보다 이건 뭡니까?"
"크레페예요. 드셔 본 적 있나요?"
돌아온 미쉐린은 크레페를 건넸다. 과일과 시럽이 가득 든 크레페는 보기만 해도 입이 달 정도였다.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그렇습니까."
크레페를 받아든 루드는 그것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괜찮군.'
역시나 입이 마비될 정도로 달았지만, 미쉐린의 말처럼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쿠두스에게 벌어진 일도, 고대 문자의 해석도, 조금 전 사내의 정체도, 지금 순간만큼은 생각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별거 아니에요."
크레페를 다 먹고 자리를 옮기려는 찰나, 그들을 향해 누군가 다가왔다. 왠지 어색해하는 듯한 모습의 노인이었다.
미쉐린이 지긋이 쳐다보자 노인이 무안한 듯 입을 열었다.
"큼, 크흠. 이보게 말 좀 묻겠네."
"무슨 일이시죠?"
두 사람의 앞에 선 노인은 연신 헛기침을 했다.
"큼큼. 그러니까 말일세, 그러니까...."
말을 더듬는 노인.
루드는 그를 알고 있었다.
'이 분이 왜 여기에?'
노인과는 전생에 연이 있었다. 이번 생에도 언제고 노인을 만날 생각이었다.
"그, 거시기, 뭐야. 자네들이 마탑에 의뢰했던 것 말일세."
한참 동안 머뭇거리던 노인, 아크쉘 미크로티는 마침내 하려던 말을 마쳤다.
"내게 해석을 맡겨 줄 순 없겠는가?"
루드가 가진 고대 문자를 해석하고 싶단 내용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12화
아크쉘이 루드가 가진 고대 문자에 관해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보조금을 지원받기 위해 찾은 마탑.
언제나와 똑같이 매몰찬 대답이 돌아왔으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면 학파에 남아 있는 이들이 쫄쫄 굶을 판이었다.
마탑에 어필할 만한 성과는 없을까. 무언가 돈 될 만한 사업 아이템은 없을까. 하다못해 후원자가 될 만한 사람은 없을까.
그리 고민하며 마탑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아크쉘은 마탑을 찾은 루드를 보았다.
처음엔 별 관심 없었다. 마탑을 찾는 이들이야 하루에도 수십 수백이었다.
그중엔 부유한 상인도, 이름 높은 귀족도 있었으니 이름도 모를 청년에게 시선을 둘 이유는 없었다.
하나 그가 안내받은 곳을 확인한 아크쉘은 생각을 바꿨다.
분명 그 위치는 사료의 해석과 분석을 맡은 마법사의 자리. 심지어 엉덩이가 무거워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때 느낌이 왔다. 청년이 무언가 연구할 만한 것을 갖고 있구나!
마법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확인까지 마쳤더니, 예상대로 엄청난 가치의 자료가 오간 게 맞았었다.
'세상에...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고대 문자라니!'
대륙의 역사가 깊은 만큼 고대 문자는 여럿 존재했다.
다만 현대에 이르러선 해석이 완료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가 갖고 있는 건 아직 해석되지 않은 고대 문자.
그것을 해석한다면? 분명한 실적이고 성과였다.
'저것을 해석해내면 마탑의 지원금을 받는 건 확정이다.'
마탑은 마법사 학계의 구심점이었다. 대부분의 마법 학파들이 마탑이란 연합체에 소속돼 있었고 마탑을 통해 교류했다. 주류와 비주류의 차이는 있었지만, 흑마법 계파를 제외한 대륙의 모든 마법 학파가 마탑에 소속돼 있다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또한 마탑은 각 학파가 이룬 성과를 발표하는 장이자 마법계와 일반인을 잇는 창구였다.
여러 학파에서 만든 아이템은 마탑을 통해 공개됐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다시 각 학파의 연구 자금이 되거나 도움이 필요한 학파의 지원금으로 사용됐다. 마법계의 선순환이라 할 수 있는 구조였다.
다만, 모든 학파에게 지원금을 줄 수는 없었다. 지원금의 규모와 횟수에도 기준이 있었다.
어떤 성과를 냈느냐, 어떤 인재를 키워 냈느냐,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느냐.
면밀한 심사를 거쳐 통과한 학파만이 마탑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크쉘이 속한 종말학파는... 벌써 3년째 고배를 마시는 중이었다.
원래부터도 재정이 좋지 않던 종말학파였다. 올해마저도 지원금을 받지 못한다면 모두가 굶어 죽을지도 몰랐다.
"내게, 우리 종말학파에게 그 해석을 맡겨 주게."
"흠, 당신께서 누구신지부터 밝히는 게 순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든 학파를 살려야 한다는 마음에 자신에 대한 설명도 없이 물은 아크쉘.
루드가 그 점을 언급하고서야 아크쉘은 자신이 본인의 소개조차 안 했다는 걸 깨달았다.
"큼큼, 실례했군. 종말학파의 마법사 아크쉘 미크로티라고 하네. 5서클이지."
아크쉘은 소개의 마지막에 제 경지를 덧붙였다. 5서클이라 함은 어디서든 중용될 수 있는 경지. 자신이 고대 문자를 해석할 자격을 충분히 갖췄음을 어필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렇군요. 저는 루드비코라고 합니다. 이쪽은...."
"미쉐린이에요."
뒤늦게 통성명을 나눈 이들.
루드는 슬쩍 미쉐린을 바라봤다. 미쉐린은 그 시선에 담긴 의도를 읽었다.
"자리를 비켜 드릴 테니 두 분 말씀 편히 나누세요."
미쉐린이 자리를 떠나고, 루드는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이야기했다.
"고대 문자의 해석을 맡길지는 둘째 치고, 어떻게 제가 고대 문자를 갖고 있다는 걸 아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루드에게 고대 문자가 있단 사실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도서관장인 벨로티와 현재 동행하고 있는 미쉐린 정도가 끝이었다. 이들이 정보를 흘렸을 리는 없을 테니, 다른 어디선가 정보를 입수했다는 말인데....
그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아크쉘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탑에서 보았네. 자네들이 5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자신들이 5층으로 올라갔던 것과 고대 문자를 갖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된 것에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의문스러운 루드의 표정에 아크쉘은 얼굴을 보다 가까이 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대부분은 모르지만 마탑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각 층과 구역별로 어떤 의뢰를 받는지 대충 알 수 있지. 자네들이 찾은 5층은 연구에 집중된 부분, 그중에서도 자네들을 맞이했던 뚱땡이는 고문서와 사료를 연구하는 녀석이고."
그리고....
아크쉘은 주변을 흘깃 쳐다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자네들이 고대 문자를 갖고 있는 걸 알았던 건 아니네. 뭔가 연구거리가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그게 고대 문자란 건 나도 보고 나서야 알았지."
"보고 나서라면 설마."
"...훔쳐봤네. 이건 비밀로 해 주게. 걸렸다간 두 번 다신 마탑에 출입할 수 없을 테니."
절대 들켜선 안 될 비밀까지 밝히며 설명을 끝낸 아크쉘은 초조한 눈으로 루드를 바라봤다.
개인 사무실에 몰래 들어갔다는 사실까지 실토했다. 만약 이 소식을 마탑에 알린다면 지원금은커녕 한동안 마탑 근처엔 얼씬도 못 할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솔직하게 고백한 것은, 자신이 고대 문자에 대해 알게 된 경위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으면 어떠한 설득도 불가능하리란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부디 우리에게 그 고대 문자를 맡겨 주게."
"흠, 마탑에 불법 침입하시는 분의 뭘 믿고 맡겨 달라 하시는 건지."
눈썹을 찡그린 루드는 아크쉘을 바라봤다.
"거기다 종말학파라면 마법 학계에서 비주류 중의 비주류가 아닙니까. 고대 문자를 맡긴다 해도 해석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군요."
"그건!!"
설마 종말학파에 관해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아크쉘은 시무룩해졌다.
그의 말대로 종말학파는 비주류 학파였다. 마탑의 지원금을 받는 것도 힘들고 근래엔 이렇다 할 성과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학파에 비해 떨어진다 생각하진 않았다. 오히려 몇 분야에 있어선 다른 학파의 추종을 불허할 능력이 있었다.
고민하던 아크쉘은 조심스레 물었다.
"자네가 가진 그 문자. 혹 신비와 관련된 건 아닌가?"
"...그걸 어찌."
아크쉘의 말에 루드는 깜짝 놀랐다.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결국은 아크쉘에게 고대 문자의 해석을 맡길 생각이었다.
그의 실력은 전생을 통해 잘 알고 있는 바. 아크쉘이 고대 문자의 해석을 도와준다면 루드로서도 반길 만한 일이었다.
다만 이번 생에선 초면에 불과했으니 약간의 줄다리기를 하려던 것이었는데.
'내가 가진 고대 문자에 관해 알고 있다?'
아크쉘이 고대 문자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생각대로, 아크쉘은 루드가 가진 고대 문자에 대해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조금 전까진 그도 긴가민가했으나, 루드의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그가 가진 문자는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것과 닿아 있었다.
"우리 학파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으니 하나만 묻지. 우리 학파가 어째서 비주류인지 아는가?"
"...그 기원과 신조 때문인 걸로 압니다."
"맞네. 학파의 이름이 종말인 것도 그 이유 때문이지."
종말학파는 언젠가 세상에 종말이 올 것이라 믿는 마법사들로부터 시작한 계파였다. 그들은 마법이 종말에 대처할 수단이고, 마법사는 종말을 막을 구세주라 여겼다.
하나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이성적인 존재. 그들은 언젠가 세상에 종말이 올 거라는 종말학파의 기원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근래엔 종말학파에 소속된 이들마저 그 기원을 믿지 않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비주류로 만든 것은 그 기원만이 아니었다.
"들리는 바로는 흑마법도 배척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맞네. 사악한 흑마법사는 척결의 대상이지만, 단순히 흑마력을 소지했거나 그 마법을 바른 방향으로 사용하는 이들은... 보듬어야 할 존재지."
흑마법 또한 마법의 일종일 뿐. 그것을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배척할 이유가 없다는 태도.
대륙 전반과 상반되는 그 태도로 인해 그들은 비주류로 낙인찍혔다.
'언제고 은혜를 갚아야 할 이들이지.'
전생에 그 신조의 덕을 봤던 루드이니 모를 수 없었다. 제대로 된 흑마법을 깨우친 것도 종말학파의 도움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지금 상황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의아했다.
반면에 아크쉘의 입장에선 앞으로의 설명을 위해 방금 전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는 많이 흐려졌다지만 우리 학파의 기원은 아직까지 내려오고 있지. 그에 관련된 것 중 하나가 신비일세."
"...신비 말입니까?"
루드는 의문을 표했다.
그가 알기로 마법사들은 신비로 인한 힘을 반기지 않았다.
마법도 아니면서 마법과 같은, 혹은 그를 뛰어넘는 힘을 내는 신비는 마법사들에게 있어 사도와 같은 것.
신비를 입에 담는 것조차 꺼리는 마법사도 있을 정도였다.
"그래, 세상에 존재하는 힘 중 가장 불가사의한 힘. 어디서 시작했는지 어디에 존재하는지 어떻게 그런 힘을 부여하는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힘. 만약 세상에 종말이 온다면, 그만한 힘이 아무 관계도 없을 리가 없지 않겠나."
아크쉘의 주장은 루드로서는 생각해 본 적 없는 방향이었다. 그가 신비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는 것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몰랐던 것도 당연한가.'
전생에 종말학파에 몸담긴 했었으나 그들의 기원이나 다른 이들의 연구에 관심 갖기보다는, 본인의 흑마법을 수련하는 데 열중했었다.
당시에는 강해지겠다는 일념밖에 없었으니, 주변의 것들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자네가 물었지. 고대 문자를 해석할 수 있겠냐고. 그렇다고 확언을 할 수는 없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지."
그리 말한 아크쉘은 단언했다.
"대륙의 누구도 우리보다 그 문자를 빨리 해석할 순 없을 걸세."
해석의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만약 해석이 가능하다면 그것을 가장 먼저 해내는 건 자신들일 것이다.
이미 관련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 자료가 늘어날수록 진척에 속도가 붙을 터였다. 그렇게 하나둘 자료가 늘고 속도가 붙다 보면... 문자를 해석해 낼 수 있겠지.
그리 자신하는 아크쉘에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당신께 제가 가진 고대 문자의 자료를 나눠 드리죠."
"최고의 선택일세. 실망하지 않을 거네."
하나, 그냥 줄 생각은 없었다.
"단, 고대 문자의 자료를 넘겨드리는 대신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십쇼."
"부탁? 그게 무엇이지?"
"별다른 건 아닙니다. 귀중한 자료를 맡겼으니 언제고 연구가 잘 진행되고 있나 확인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그거야 당연한 소리지. 나는 연구 내용을 감추고 그러는 꼬장꼬장한 늙은이가 아닐세. 언제나 당당한 마법사지."
호언장담하는 아크쉘의 모습. 루드는 타인의 사무실에 몰래 들어가는 것도 당당한 일이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굳이 말하진 않았다.
"그럼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머지않은 시일에 종말학파를 찾아가죠."
"위치를 알고 있나?"
"예.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난 이만 가보겠네. 자네 덕에 자료가 많이 생겼으니 당분간 연구에 매진할 수 있겠어."
루드에게서 고대 문자에 관한 자료를 받아 든 아크쉘은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아크쉘 님이라면 높은 확률로 뭔가를 알아내시겠지.'
루드도 기대하긴 마찬가지였다.
5서클도 5서클이지만 연구의 영역에서 대단한 역량을 지닌 아크쉘이었다.
전생을 경험으로 그가 어떤 성품을 가졌는지도 알았으니, 마나에 대고 맹세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결코 연구 결과를 외부로 빼돌리거나 할 인물이 아니었다.
마탑에 넘겼던 것을 포함해 혹시 몰라 필사해 둔 모든 자료를 전달했다. 이것으로 한동안은 고대 문자에 관한 생각을 접어 둘 예정이었다.
그렇게 아크쉘이 떠나가고.
아크쉘과의 대화를 위해 자리를 비켜 줬던 미쉐린이 돌아왔다.
"루, 루드비코 씨, 큰일 났습니다."
돌아온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
루드는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그녀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렇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쿠두스 님이... 사형당할 것 같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13화
제도에 입성한 쿠두스는 바쁜 시간을 보냈다. 더스틴과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를 돌볼 틈도 없었다.
그를 기사단으로 데려간 질레트는 강도 높은 심문을 이어 갔다. 참고인 조사의 형식을 띤 만큼 폭력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그 외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 쿠두스를 몰아붙였다.
'인정할 수 없다. 분명 뭔가 손을 쓴 게 분명해.'
질레트에게 더스틴은 오랜 선망의 대상이었다. 다른 기사단의 적극적인 제안을 거절하고, 굳이 클라우드 기사단을 선택했던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 그것도 그의 죽음이 제 눈앞에 있는 보잘것없는 인물에 의한 것이란 사실은 질레트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흉계가 감춰진 게 분명했다. 더스틴의 상태가 이상했던 것도 그와 관련돼 있을 터.
질레트는 쿠두스가 숨긴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내 대답은 전과 같네. 그와 싸웠고, 결국 이겼지. 반쪽짜리의 내 영역과 그의 강한 의지 덕분에."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그 답도 일관적이었다.
'정녕... 그리 쓰러지셨단 말씀입니까.'
질레트는 더스틴을 떠올렸다. 그가 가끔 보였던 미소가 스치듯이 지나갔다.
"저희 측의 조사는 이걸로 끝입니다."
질레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심문이 끝났음을 고지했다. 쿠두스는 창백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도에 들어오자마자 시작돼 쉬지 않고 이어진 심문이었다. 전투의 여파를 수습하기도 전에 끌려와 여러 날을 꼬박 샜으니, 안색이 파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오늘 오후부터는 황실 측에서 조사에 나설 겁니다."
더스틴 클라위베르트는 클라우드 기사단의 단장이기 이전에 제국의 소드마스터.
중요 전력을 잃은 건 황실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그들도 직접 이번 사건을 조사하고자 했다.
때마침 클라우드 기사단이 사건과 관련된 인물을 잡아 놨으니 양도받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
질레트가 떠나고 황실의 조사단이 도착하기까지의 짧은 시간. 쿠두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질레트와의 심문을 복기했다.
'섣불리 의회에 관한 말을 꺼낼 순 없다.'
더스틴이 폭주했던 건 아마 그가 마지막에 꺼냈던 '의회'와 연관돼 있을 터.
하나 쿠두스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더스틴의 상태가 이상했던 것에 짐작 가는 바가 있느냐는 질문에도 모른다고 잡아뗐다.
'누가 의회와 닿아 있을지 모른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어디에 의회의 끄나풀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질레트라는 기사는 아닌 듯했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말을 꺼내긴 어렵다. 그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고, 그에게 전달된 소식은 다른 기사들에게도 퍼져 나갈 터. 그들 중 의회와 연관돼 이가 없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
그건 황실 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무엇을 물어보든 있는 그대로 성실히 답할 계획이었지만, 더스틴의 상태와 관련해 아는 바가 있느냐 묻는다면 똑같이 대응할 생각이었다.
잠시 후 황실의 조사단이 도착했다.
"자네들은 자리를 비켜 주게."
"그럴 순 없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기사단에게 물러나 줄 것을 종용한 그들.
"지금 항명하겠다는 건가?"
"...."
"이곳에 오신 분이 누구신지 모르지 않을 텐데."
기사단은 자리를 지키라던 질레트의 명을 떠올렸으나 황실에서 나온 이들의 의사를 거스를 순 없었다.
"길게 비우긴 어렵습니다."
"30분이면 되네, 고맙군."
"...아닙니다. 제국의 미래에 영광이 있기를."
조사단의 가운데 위치한 인물에게 경례한 기사들은 자리를 비웠다.
30분 정도라면 질레트 님도 사정을 이해해 주시리라.
기사단이 자리를 비우자 황실 조사단은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심문을 맡은 건 조사단의 가운데 위치한 사내였다.
"안색이 안 좋군요. 좋은 대우는 받지 못했나 봅니다."
"뭐... 보시는 대로."
너스레를 떠는 사내의 말에 쿠두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그 태도에 사내의 옆으로 선 이들이 발끈했으나 정작 그들을 제지한 사내는 아무렇지 않은 기색이었다.
오히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먼저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겠군요. 덕분에 최소한의 피해로 참사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갑작스러운 상황. 고개 숙인 사내의 모습에 양옆으로 선 이들이 경악했다.
쿠두스 또한 놀라서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곧 그 인사를 받아들였다. 상대의 태도에 맞춘 정중한 모습이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사내는 쿠두스를 바라봤다.
"카르반 아카데미에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의 수업을 듣지 않았던 게 조금 후회되는군요."
사내는 쿠두스를 알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카르반 아카데미에 다녔던 그였으니 그 유명한 결격교수를 모를 수 없었다.
실적과 평판 모두 압도적인 꼴찌를 달리는 교수.
얼마나 심각하면 교수로서 모든 부분이 결격이라며 결격교수란 호칭을 얻었겠는가.
'그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하지만 이제 와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기사단에게 증언했던 부분은 전부 검토를 했습니다. 더스틴 클라위베르트와 오랜 친우셨다고."
"녀석이 처음 검을 잡을 때부터 안 사이입니다."
"덕분에 그를 죽일 수 있었고요?"
"예. 녀석의 검을 몰랐다면, 무언가를 해 보기도 전에 죽었겠죠."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인지 거짓인지와는 별개로, 쿠두스의 증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일관됐다.
"긴히 나눌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자네들도 자리를 비켜 주겠나?"
"그, 그건."
"위험합니다."
자리를 비켜 달라는 사내의 말에 양옆에 선 이들이 걱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사내의 의지는 확고했다.
"괜한 걱정들 말게. 저자가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이젠 마력조차 다루지 못하는 이네."
"그건 그러하나...."
"두 번 말하기 싫네. 나가 있게."
사내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그들은 결국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좀 편히 얘기할 수 있겠군."
쿠두스와 단둘이 남자 사내는 말을 편히 바꿨다. 쿠두스는 그 자연스러운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사내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으니.
"황자님을 뵙습니다."
"알고 있었나?"
"예, 일전 아카데미에 다니실 때 멀리서나마 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군. 그럼에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았던 것은 역시... 저들 때문인가?"
황자의 손가락이 조사단원들이 지키고 있을 밖으로 향했다. 그들은 황자의 호위를 위해 대동된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오롯이 황자의 사람이냐 묻는다면....
"굳이 티 낼 필요가 없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렇군."
뭔가 다른 속내가 있는 것 같았지만 황자는 묻지 않았다.
대신, 이곳으로 오면서부터 생각했던 질문을 던졌다.
"더스틴의 상태에 관해 정말 아는 바가 없는가?"
클라우드 기사단이 심문하며 남긴 기록은 전부 훑어봤다. 쿠두스가 그에 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대답한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진짜일까?
'황실과 의회... 그렇게 된 거였나.'
한편, 황자의 질문을 받은 순간 쿠두스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더스틴이 어째서 그런 꼴로 죽어야 했는지.
그는 황실과 의회가 벌인 힘 싸움의 피해자였다.
고작 자신을 심문하는 데 황자가 직접 행차한 것이 증거였다.
"...마지막 순간, 의회를 언급했습니다."
"역시 그러했나."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렇군, 고맙네."
황자가 의회의 끄나풀일 리는 없으니, 최소한 그에게만큼은 자신이 아는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
쿠두스의 대답을 들은 황자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짐작했던 바였다. 그들이 아니고서야 감히 누가 소드마스터를 건드릴 수 있겠나.
타국의 공작일 확률도 배제하진 않았었으나... 이로써 의회의 소행인 게 확실해졌다.
'끝내 선을 넘는군.'
의회는 본디 황실의 정책을 보완하고자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선 본래의 목적에서 완전히 벗어난 조직이 되었다.
황실은 오래전부터 그들의 불손한 기운을 느꼈다. 하지만 쉽사리 건드릴 순 없었다. 어느새 그들이 품은 힘은 황실로서도 쉽게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황실에 보다 강한 힘이 있었더라면.'
대륙 최강국인 제국을 다스리는 황실이다. 힘이 없다면 이상한 일. 하지만 그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었다.
황실의 권위를 넘보고 있는 의회.
작정하고 힘겨루기를 한다면 황실이 승리하겠으나, 말 그대로 상처뿐인 승리에 불과했다.
황실과 의회의 싸움은 곧 제국의 전력 손실로 이어질 테니, 주변국들에게 먹이를 던져 주는 꼴.
그리하여 황실은 결정했다.
더스틴의 죽음에 의회가 관여했다는 것을 짐작했음에도, 그의 폭주를 막은 쿠두스가 영웅임을 인정함에도.
"자네는 사형당할 거네."
쿠두스를 사형시키기로.
"솔직히 말하지. 자네가 소드마스터였다면 상황을 바꿀 수 있었을 걸세."
쿠두스가 더스틴을 대체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상황은 달랐을지 모른다.
하지만 더스틴을 죽인 쿠두스는 소드마스터가 아니었고, 이제는 마력조차 쌓을 수 없는 폐인의 몸이었다.
황실은 그를 살려 둬야 할 필요를 전혀 못 느꼈다.
"미안하네."
황자는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
언젠가는 반드시 의회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에 대한 준비도 차근차근 진행되는 중이었고.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지금 시점에서 맞붙기에는 감수해야 할 피해가 너무 많았다.
결국 쿠두스는 황실이 의회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모든 걸 알면서도 눈감아 주겠다는, 그러니 이쯤에서 적당히 하자는 휴전 제안.
"...."
그 사과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황자는 차마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오랜 시간 동안, 쿠두스는 빈방에 홀로 남아 있었다.
* * *
에이나우디 공작가에 때 아닌 고성이 오갔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다. 네가 나설 문제가 아니다. 우리 가문이 나설 문제는 더더욱 아니고."
"그게 무슨...!"
카일론은 아이리우스를 바라봤다. 방학이 시작됐음에도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던 그녀는 방학이 끝날 때가 돼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곤 가문의 이름으로 어느 사건에 관해 목소리 내 줄 것을 부탁했다.
하나 카일론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리우스가 언급한 사건이 무엇인지, 그녀가 부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았다.
제도에서 벌어진 일은 이미 알 만한 이들은 다 알았다.
폭주한 더스틴이 끝내 카리븐에서 죽었고, 그를 죽인 것이 카르반 아카데미의 어느 교수라는 소식.
'쿠두스라고 했나.'
더스틴을 죽인 그가 어떤 상황에 직면했는지도 마찬가지였다.
카일론 또한 마음 같아선 도와주고 싶었다. 아이리우스가 그를 많이 의지한다는 게 느껴졌으니.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이미 결정된 사안이다."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고요? 대체 뭐가요? 누가 결정했는데요!"
카일론은 창밖을 바라봤다.
제도에서 벌어진 일에 관해 유력가들에게 전달된 내용이 있었다.
"그는 사형당할 거다. 위에서 그리 결정했으니."
더스틴을 죽인 교수가 사형대에 오르리란 것.
그리고 그 행사에 황실이 직접 나설 것이란 소식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14화
페드리는 쿠두스를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기숙사의 짐을 빼 쿠두스의 사무실로 옮겼다. 쿠두스가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반겨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약속은 아직 지켜지지 않았다. 쿠두스가 떠난 지 벌써 5일째.
"선배...."
"왔어?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그사이 본가로 향했던 아이리우스가 돌아왔다. 평소에 의식하진 않았으나 아이리우스는 공작가의 영애. 이번 일에 도움을 줄 수 있을 터였다. 막연한 기대감을 품은 채 페드리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죄송해요."
하지만 그 기대는 배신당했다. 아이리우스는 입술을 질끈 물고 고개를 내저었다. 분한 표정이었다.
'어째서.'
페드리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리우스에 앞서 교수들이 찾아와 쿠드스에 관한 소식을 전했다. 아카데미 측에서 정식으로 항의했으나 묵살당했고, 이사장 또한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선생님은 정말 사형당하는 거야?"
쿠두스가 사형당할 거란 얘기는 덤이었다. 소식을 전달하던 교수들은 하나같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말이 안 되잖아. 선생님이 왜 죽어야 하는데.'
소드마스터고 뭐고, 폭주했을 때의 더스틴은 살인귀에 불과했다. 그를 죽여 큰 피해를 막았으니 쿠두스를 영웅으로 대접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한데 사형이라니.
"미안해요."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아이리우스는 페드리에게 사과했다. 그의 표정이 너무나 괴로워 보였다.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게 한없이 미안할 뿐.
'할아버님께서 살아계셨다면....'
아이리우스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전대 공작이었던 할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아끼던 분이셨다. 살아계셨다면 자신의 뜻을 지지해 주셨겠지.
하나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살아 돌아와 가문의 결정을 뒤집을 순 없는 일이었으니.
"나는 도통 이해가 안 돼. 상을 줘도 모자란 거 아니야? 그런데 벌을 주다니. 그것도 사형? 선생님이 왜 사형당해야 하는데!"
"선배...."
"제대로 조사를 하긴 한 거야? 제도에 가신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사형이란 판결이 나와? 그냥 소드마스터를 잃은 분을 표출할 제물이 필요한 건 아니야?"
페드리는 분노에 차 소리쳤다. 상식을 벗어난 일처리였다. 영웅을 죄인 취급하고, 제대로 된 조사 없이 판결을 내렸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단 생각밖엔 안 들었다.
'확실히 이상하긴 해.'
그건 페드리만 느끼는 부분이 아니었다. 아이리우스 또한 마찬가지.
분명 더스틴의 죽음은 큰일이었다. 무려 소드마스터의 죽음. 심지어 전쟁 중도 아니고 홀로 폭주한 끝에 죽음을 맞았으니, 모두가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일 처리는 명백히 이상했다. 쿠두스를 데려간 과정이야, 더스틴의 변고를 알게 된 질레트가 바로 나선 것이라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쿠두스가 사형이란 판결을 받기까지의 과정. 클라우드 기사단을 따라 제도로 향하고 이틀 만에 사형이란 결과가 나왔다.
'애초에 더스틴 님이 그리된 것부터가 이상하지.'
따지고 보면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모든 일의 시작점인 더스틴의 폭주도 그러했다.
전생에선 없던 일인 데다 아직까지 폭주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
분명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모든 게 결정됐다는 건 누가 개입했다는 소리인데. 그러려면 어지간한 인물로는 불가능해.'
아이리우스는 쿠두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을 존재를 추측했다.
소드마스터의 죽음이란 소란을 한 번에 종식시킬 수 있고,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며, 누구도 그 결정에 반박할 수 없는 존재.
한 가지 결론이 스치듯이 떠올랐다.
'황실에서 직접 나선 건가?'
황실, 제국의 주인인 그들이 결정한 것이라면... 아버지가 가문이 나설 일이 아니라 한 것도 이해가 됐다.
'최악이네.'
황실이 결정한 사안이라면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누가 그들의 결정에 반기를 든단 말인가. 하물며 아무 뒷배도 없는 평민 출신 교수를 위해.
"선배,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거예요?"
"입맛 없어."
"그래도 잘 챙겨 먹어야죠."
아이리우스는 페드리를 바라봤다. 쿠두스의 소식에 충격받았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고작 몇 개월 함께한 자신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오랜 세월 쿠두스와 함께한 페드리의 심정은 오죽할까.
"미안해요.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
"위에서 결정한 사안이래요. 저희로서는...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요. 힘들 거란 거 알아요. 하지만 선배가 잘 이겨 내길 바라요. 교수님도 분명 그러실 거예요."
페드리를 위로하고자 한 말. 하지만 돌아온 것은 날 선 목소리였다.
"...네가 뭘 알아."
차가운 눈동자가 아이리우스를 응시했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교수님도 그럴 거라고?
'네가 뭔데 다 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야.'
지하투기장이란 지옥에서 자신을 세상으로 꺼내 준 은인이다. 검을 제대로 다루는 법과 살아갈 방법을 제시해 준 선생님이다. 자신의 앞날을 응원하고 미래를 궁금해하는 아버지다.
고작 몇 달 함께 했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진정하자.'
하지만 이내 페드리는 숨을 골랐다.
아이리우스가 노력했다는 걸 안다. 가문의 힘을 빌어서라도 도움을 주려 했던 그녀였다. 방금 전의 말도 자신을 걱정해서 한 것이겠지.
그러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엔 차이가 있었다.
화는 억눌렀지만, 그녀에게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난 어떻게든 선생님을 살릴 거야."
"선배."
"내가 죽더라도 상관없어. 선생님을 살릴 수만 있다면."
"하아...."
아이리우스는 얕게 한숨을 쉬었다. 도무지 얘기가 통할 상태가 아니었다. 가장 의지하던 사람을 잃기 직전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일어나요."
더 이상 설득하는 대신, 아이리우스는 페드리를 일으켰다. 같이 갈 곳이 있었다.
"일단 씻고 와요."
쿠두스를 기다리느라 사무실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페드리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씻지도 못했는지 냄새가 났으며,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런 몰골로 교수님을 뵈러 갈 건 아니겠죠?"
"!!!"
쿠두스를 만날 거란 소식에 바로 반응한 페드리.
가문의 힘으로도 상황을 바꿀 수 없단 걸 깨달은 아이리우스는 아버지에게 했던 부탁을 바꿨다. 쿠두스를 위해 목소리 내 달란 부탁은 하지 않을 테니, 최소한 작별 인사는 하게 해 달란 것이었다.
사실 그녀 본인보다는 페드리를 위한 부탁이었다. 물론 그녀도 쿠두스를 만나 물어볼 것이 있었지만....
"따라와요."
페드리가 씻고 나오자, 아이리우스는 곧장 출발했다. 큰길을 따라 제도 외각으로 빠지자 금세 목적지가 나타났다.
"여긴...."
"클라우드 기사단이 소유한 부지예요."
쿠두스는 여전히 클라우드 기사단의 관리 아래 있었다. 모든 조사를 마친 현재에는 기사단이 소유한 작은 감옥에 수감된 상태였다.
"짧게나마 면회를 허가받았어요."
"...고마워."
"별말씀을요. 큰 도움이 못 돼 죄송해요."
가문의 이름을 통해 성사시킨 면회였다. 그나마도 긴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엔 충분할 터였다.
'한심하네, 나.'
페드리는 아까 전 아이리우스에게 실망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녀라고 쿠두스를 구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녀 또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단지, 그 최선의 범주가 자신과 다를 뿐.
아이리우스의 얼굴을 확인한 기사단원은 두 사람을 통과시켰다. 이미 그녀가 올 거란 언질을 받은 듯했다.
"선생님."
"페드리와, 아이리우스냐."
며칠 만에 만난 쿠두스는 많이 야윈 상태였다. 전투의 여파를 수습하기도 전에 강도 높은 심문을 받으며 고초를 겪은 까닭이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조금 쉬다 간다는 게 늦어져 버렸네."
하지만 말투와 태도는 이전과 똑같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아쉽네.'
쿠두스는 창살 너머의 페드리와 아이리우스를 바라봤다.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솔직히 실감은 안 됐다. 자신이 죽을 거란 말이었으나 누가 죽었다는 소리보다 더 먼 이야기 같았다.
사실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소드마스터를 꺾겠다는 염원도 이뤘고, 잘못된 길로 향하던 친구도 구했으니 할 만큼 했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여전히, 살고 싶었다는 것을.
'이 아이들의 미래는 보지 못하겠군.'
두 녀석이 그려 갈 미래가 궁금했다. 특히 페드리가 그려 갈 미래. 어린 시절의 어둠에서 벗어나 세상을 경험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연을 맺으며 만들어 갈 나날이 어떨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확인하는 건... 자신에겐 주어지지 않을 기회였다.
세 사람은 여러 대화를 나눴다. 원망 섞인 목소리도 있었고, 그 와중에 잔소리를 늘어놓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던 중 아이리우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꺼냈다.
"더스틴 님을 상대하셨을 때 뭔가 이상한 점은 못 느끼셨나요?"
"...."
지난 심문에서 몇 번이고 들었던 질문. 쿠두스는 그때와 똑같이 입을 다물었다.
'말하는 게 좋을까, 말하지 않는 게 좋을까.'
다만 그건 당시와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두 사람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믿기 때문에.
혹 자신의 말이 그들에게 족쇄가 될까 봐, 그게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 목표가 될까 봐.
'아이들에게 짐을 지울 수는 없는 법이지.'
고민 끝에 나온 답은 회피였다.
"글쎄다. 어떻게든 대처하는 데 급급했던지라...."
의회에 대한 정보를 감추고.
"이젠 너마저 날 조사하는 거냐? 차암~ 나, 처음 찾아왔을 때 제자로 받아 주는 게 아니었는데."
"그, 그게 아니라...."
"장난이다, 장난. 크큭, 넌 아무래도 사회생활을 더 해야겠구나."
평소와 똑같은 모습을 가장한다.
"다음에 또 올게요."
"그래. 그땐 맛있는 것 좀 들고 와라. 여기 음식이 영 부실하거든."
쿠두스는 그렇게 두 사람을 떠나보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만남.
'미안하다 더스틴. 그래도 저 녀석들한테 짐을 지울 순 없는 법이잖냐. 대신 황실에 전달했으니 봐줘라.'
떠나는 두 사람을 보며 쿠두스는 소망했다. 녀석들이 다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본인을 위한 삶을 살기를.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가고, 하고자 하는 것을 하는 그런 삶을.
그때, 누군가 그를 찾아왔다.
면회가 끝났으니 본래라면 기사들이 와야 할 시간이었지만, 그를 찾아온 건 기사가 아니었다.
"두 사람에겐 의회에 관해서 말씀하지 않을 생각인가 보군요."
폐부를 찌르는 질문과 함께 찾아온 사내. 쿠두스는 그의 정체를 알았다.
"당신은... 그때, 아이들과 함께 있던 사람이군."
"네, 루드비코라고 합니다."
"그래, 이야기는 들었지."
조금 전 떠난 두 사람과 했던 얘기 중 사내에 관한 얘기도 있었다. 퀘스트 중 연을 맺었고 페드리의 후원자가 되어 주기로 했다고.
'의도적인 접근이었나?'
'의회'에 관해 정확하게 언급한 그.
어쩌면 페드리의 후원자를 자처한 것도 계산된 행동일지 몰랐다.
쿠두스는 경계 어린 눈초리로 루드비코를 바라봤다.
"방금 전의 얘기는 어디서 들었지?"
"당신께서 더스틴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을 뿐입니다. 본의 아니게 훔쳐 듣게 된 점은 죄송합니다."
"...그때인가."
아이리우스는 그를 소드마스터로 추측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과 더스틴이 나눴던 대화를 듣는 것도 가능했다.
"아이들에게 말할 생각인가?"
"아뇨. 당신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걸 굳이 제가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짧은 문답이 오간 뒤, 잠시간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시 말문을 연 건 루드였다.
"그대로 죽으실 생각입니까?"
"어쩔 도리가 있는가. 사형이 확정됐으니, 죽을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살 수 있다면 어쩌실 겁니까."
"...위험한 말을 하는군."
쿠두스와 루드의 눈이 마주쳤다. 쿠두스는 루드의 생각을 읽으려 했지만, 좀처럼 읽히지 않았다.
그가 뭘 바라는지, 뭘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나."
그렇기에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살 수 있다면 살고 싶다. 아이들의 미래를 보고 싶다.
"그렇군요."
그 대답에 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가는 건가."
"예, 들어야 할 답은 들었으니까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너무 놀라지 마시길."
몸을 돌린 루드는 자리를 떠났다.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기척이 사라졌다.
* * *
면회를 마치고 기사단을 빠져나오는 길. 아이리우스는 씁쓸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 면회를 오겠다고는 했으나, 이번 면회도 가까스로 성사시켰던 것. 다음 면회가 허락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금 전이 그와의 마지막 인사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선생님을 죽게 둘 순 없어.'
페드리는 쿠두스가 사형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다.
문득 어제 자신을 찾아왔던 루드비코의 말이 떠올랐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거냐던, 가진 모든 걸 포기할 수 있겠냐던 질문.
페드리는 그에게 답했다.
'선생님만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거고, 가지고 있는 전부를 포기할 수도 있어.'
그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다고.
돌아가는 페드리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맺혀 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15화
어마어마한 인파가 광장으로 몰렸다. 평소에도 사람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오늘의 인파는 다른 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조금만 움직여도 어깨끼리 부딪칠 정도였다.
"거, 밀지 마쇼!"
"악! 누가 내 발 밟았어!"
"안 보이니까 고개 좀 숙여 봐!"
이곳저곳에서 터지는 고성.
천 명도 거뜬히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의 광장이었지만, 이미 이곳에 모인 사람들만 해도 천 명을 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숫자는 더 늘어날 터. 광장은 지금보다 더 혼잡스러워질 게 분명했다.
이렇듯 많은 이들이 광장으로 나온 건 한 행사 때문이었다.
"얼마만의 처형식이야."
"감히 더스틴 님을 암습한 작자라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더스틴 님과 오래 알고 지낸 이라고 하던데. 어려서 같이 수학하던 사이랬나. 열등감에 빠져서 해선 안 될 짓을 한 거지."
소드마스터를 중독시켜 참극을 야기하고, 끝내 그를 살해한 흉악범의 처형식.
무려 황실에서 직접 나선 행사였으니 사람들이 몰리는 게 당연했다.
'아니야, 선생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라고!'
인파 속에 섞인 페드리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어찌나 세게 다물었는지 턱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반박하고 싶었다. 너희가 뭘 아냐고, 선생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고. 그리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주먹 쥔 손이 손톱에 파여 피가 날 정도로 분했지만, 견뎌 냈다.
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었다. 쿠두스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함부로 이목을 끌 수는 없었다.
'선생님.'
사형대는 광장 중앙에 위치했다. 며칠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멀리서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크고 높았다.
조금 뒤 쿠두스가 저곳에 오를 예정이었다. 모두가 그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저열한 욕을 내뱉겠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선생님의 죽음을 바라는 이들. 그들의 틈에 껴 있는 게 구역질 날 정도로 역겨웠다.
'....'
하지만 페드리는 그들 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사형대에 가까이 가야 했다.
"나온다!"
"오오!"
시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포박된 쿠두스가 병사들과 함께 사형대 위로 오르는 중이었다.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머리, 생기를 잃은 눈. 걸음마저도 불안정해 보였다.
"선생님...!"
그 모습에 페드리는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갈 뻔했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인내했다. 아직, 아직 때가 아니었다.
'기회는 한 번뿐이야.'
페드리는 로브 속의 검을 의식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광장 곳곳에는 병사들이 배치돼 있었다.
그러니 기회는 단 한 번, 일단 검을 뽑으면 돌이킬 수 없었다.
어느새 쿠두스는 사형대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페드리도 그에 맞춰 사형대 바로 앞으로 향했다.
"뭐야, 밀지 마!"
"어떤 녀석이야!"
사람들이 불만 어린 목소리를 토했으나 페드리에겐 들리지 않았다.
사형대 앞에 도착한 페드리는 사형대 위의 쿠두스를 바라봤다. 그는 지친 기색이었다. 얼굴색도 이전보다 훨씬 나빴다.
"죄인! 쿠두스의 죄목을 읊겠다!"
처형식이 시작됐다. 집행인은 곧장 쿠두스의 목을 치는 대신 그가 저지른 죄업과 죽어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추악한 열등감과 시기심으로 오랜 친구이던 더스틴 클라위베르트에게 독을 먹인 죄!"
"그로 인해 제도와 카리븐의 시민들을 죽게 만든 죄!"
"더스틴 클라위베르트를 죽이며 영웅 행세를 하려 했던 죄!"
연거푸 밝혀지는 쿠두스의 죄목, 페드리로서는 하나도 인정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집행인의 말에 맞춰 쿠두스를 향한 거친 비난과 야유를 쏟아 냈다. 몇몇은 상한 음식과 오줌, 돼지 피 같은 오물을 던지기도 했다.
"모두 죽어 마땅한 죄이니, 황실의 이름으로 죄인 쿠두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바이다!"
"와아아아아!!!"
마침내 마무리된 집행인의 말. 사람들은 커다란 환호성을 질렀다.
제국의 영웅을 음해하고 영웅 행세까지 하려던 악한.
당장 죽여야 했다. 쉽게 죽이는 게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쇼맨십을 마친 집행인이 칼을 높이 쳐들었다. 멀리서도 잘 보일 만큼 커다란 칼이었다.
물론 당장 내리칠 생각은 없었다. 처형식은 하나의 행사. 뜸을 들이고 분위기가 무르익은 뒤에야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할 생각이었다.
'지금!'
그리고 바로 지금이, 페드리가 기다리던 타이밍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사형대 위로 향해 있을 때.
누구도 문제가 생길 거라 예상하지 못한 때.
여태까지 참았던 것은 전부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공멸(空滅), 공간 집어삼키기.'
공간을 끊는 것에서 나아가 공간 전체를 소멸시키겠다는 의지.
비록 완벽하진 않았지만, 사형대를 무너트리기엔 충분한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페드리는 공멸을 완성시키지 못했다.
텁-.
"그만둬라."
검을 뽑기 직전, 누군가 그의 어깨를 짚은 까닭이었다.
"...!!"
페드리는 경악했다. 아무리 사람이 많다지만, 긴장으로 감각을 벼려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어깨에 손이 닿을 때까지 누군가 다가온 것을 몰랐다니.
'들켰나!'
페드리는 돌아서며 팔을 휘둘렀다. 검이 들려 있진 않았지만, 마력이 담긴 손짓으로도 사람의 목숨 정도는 손쉽게 뺏을 수 있었다.
"물러서라. 귀찮게 만들지 말고."
하지만 허공을 가르고 만 팔. 고개를 젖히며 공격을 피해 낸 상대는 페드리를 무시한 채 앞으로 걸었다. 사형대가 있는 방향이었다.
'...이자는.'
그 순간, 뒤늦게서야 상대를 확인한 페드리는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로브를 쓰고 있는 상대.
움직일 때 슬쩍 드러났던 모습을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사이, 사형대 위에선 집행인이 막 칼을 내리치려 했다.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쿠두스의 목보다 앞서 집행인의 칼날에 닿은 것이 있었다.
채앵-!!
"...?"
집행인은 지금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 죄수의 목을 치기 위해 칼을 휘둘렀다. 그런데 왜 죄수의 목이 아닌 자신의 칼이 잘린 걸까.
"...!!"
경계를 서던 병사들도 뒤늦게 상황을 인지했다. 설마 황실의 행사에 난입하는 이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까닭에 반응이 늦었다.
"무엄하다! 이곳이 어디라고!"
"당장 정체를 밝혀라!"
하지만 상황을 인지하고 난 뒤엔 즉각적으로 대처했다. 황실에서 주관한 행사인 만큼 여러 귀빈들이 자리한 상태. 심지어 황실의 일원도 계셨으니, 어리숙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순식간에 사형대를 포위한 병사들은 정체 모를 인물을 향해 창칼을 겨눴다.
"...마음이 급해 무례를 저질렀군."
사형대를 포위한 기사와 병사들만 수십이 넘는 상황. 하나 정체불명의 인물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마침내 그가 얼굴을 가린 로브를 벗었을 때, 모두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쿠두스는 아무런 죄가 없다. 나, 더스틴 클라위베르트의 이름을 걸고 말한다."
"...무슨!"
더스틴 클라위베르트.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그가 멀쩡히 살아 있었다.
"더스틴 님이라니… 돌아가신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나도 지금 사형이 그분의 죽음 때문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럼 뭐야. 저분이 유령이라도 된단 말이야?"
좌중이 웅성거렸다.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건 사형을 주관하던 황실도, 더스틴의 죽음을 확인했던 클라우드 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되는!'
참관인석의 질레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더스틴 님이 살아 계셨다고?
믿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진짜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
'설마... 가짜인가?'
하지만 그는 곧 이성적으로 사고했다.
'인피면구를 쓴 건가? 그렇다면....'
타인을 흉내 낼 수 있는 수단은 얼마든지 있다. 대표적으로 인피면구가 그랬다. 특히 사람의 가죽을 벗겨 만든 인피면구는 겉으로만 봤을 땐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
질레트는 참관인석을 벗어나 사형대로 향했다. 녀석의 정체를 직접 확인할 심산이었다.
만약 저자가 인피면구를 쓰고 더스틴 님을 연기하는 가짜라면... 백 갈래 천 갈래로 갈가리 찢어 죽이리라.
"어찌된 일인지 혼란스럽겠지. 설명해 주겠다."
질레트가 사형대로 향하는 사이, 사형대 위의 더스틴은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최근 나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걸 느꼈다. 꼬리를 잡으려 했지만, 쉽사리 잡히지 않더군. 그래서 오랜 친구인 쿠두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내 죽음을 위장하는 것을 도와 달라고."
더스틴은 쿠두스를 바라봤다. 초췌한 표정의 쿠두스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더스틴을 응시했으나,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줬고, 덕분에 나는 며칠이고 죽음을 위장한 채 나를 음해하려는 세력에 대해 조사할 수 있었다."
그리 말한 더스틴은 양팔을 좌우로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상식적으로 소드마스터도 아닌 그가 나를 죽일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건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쿠두스가 더스틴을 어떻게 죽였는지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의 전투 당시 현장에 있었거나 쿠두스의 심문 기록을 살펴본 이들만이 그 과정을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일반의 상식에서 소드마스터도 아닌 이가 소드마스터를 죽이는 건 이상한 일.
그 점을 파고든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의문이 풀리는 건 아니었다. 일단 그가 더스틴 본인이 맞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정말 더스틴 님이십니까?"
"질레트인가."
사형대에 도착한 질레트가 차분한 눈으로 더스틴을 바라봤다.
인피면구를 착용한 느낌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특상품의 인피면구는 직접 만져 봐도 이상함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였으니, 의심을 거둘 순 없었다.
다행인 건 특상품의 인피면구라 할지라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
"...얼굴에 상처를 내 봐도 되겠습니까."
"인피면구를 의심하는 건가. 마음대로 해라."
질레트는 천천히 더스틴에게 다가갔다.
인피면구를 썼다면 얼굴을 베었을 때 피가 흐르지 않을 터였다. 그 과정에서 진짜 살가죽마저 벤다면 피가 흐르겠지만, 이상함을 느낄 것이고.
무엇보다 질레트에겐 인피면구만을 벨 능력이 있었다.
스윽-.
질레트의 손이 더스틴의 얼굴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그의 손에 들린 비수는 더스틴의 얼굴 가장 바깥쪽만을 얇게 훑었다.
주륵. 비수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피가 흘렀다. 일부러 출혈이 쉬운 부분을 훑은지라 흘러내리는 핏줄기가 선명히 보였다.
"...정말, 더스틴 님이십니까."
"그래."
더스틴의 얼굴은 인피면구로 위장한 것이 아니었다.
"오러라도 보여 주랴?"
"...됐습니다."
질레트는 일단 물러났다. 더스틴의 얼굴은 인피면구가 아니라 진짜였다.
'....'
하지만 여전히 의심을 거두진 않았다. 더스틴이 살아 있길 바라지만, 그의 시신을 직접 확인했던 질레트였다.
앞으로도 몇 번이고, 의심이 사라질 때까지 그의 정체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 * *
더스틴의 정체 확인이 일단락되고 질레트가 한발 물러선 그 시각.
"페드리 씨. 이쪽으로."
"당신은...."
"교수님께 안내해 드릴게요."
사람들로 가득 찬 광장에서, 미쉐린이 페드리에게 접촉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16화
죽었다던 더스틴이 등장하자, 상황이 어지럽게 흘러갔다.
처형식을 구경하러 왔던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대관절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사형대에 오른 쿠두스의 죄목은 더스틴을 시해한 것이었다. 한데 더스틴이 멀쩡히 살아있는 데다가, 죽음을 위장하기 위해 쿠두스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라니.
'그럼 처형식은...?'
그런 의문이 피어오를 때쯤.
더스틴이 쿠두스를 속박하던 구속구를 잘랐다. 쿠두스의 죄목이 사라졌으니, 그가 사형당할 이유가 없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혼란을 겪게 한 점 깊이 사죄드립니다."
이윽고 더스틴은 귀빈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번 행사에 황실이 직접 나서기로 공언한 바, 분명 저들 사이에 황족이 있을 터였다. 아무리 소드마스터일지라 하더라도 황족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더스틴을 완벽하게 연기한다.'
쿠두스를 살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더스틴이 살아 돌아오는 것이었다. 하여 루드는 더스틴을 가장했다.
인피면구 등의 도구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변신 신비의 힘은 더스틴과 똑같은 모습을 가능하게 해 줬으니.
다만, 그 말투와 행동에 있어선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도서관의 도움으로 최대한 정보를 모으긴 했지만, 루드는 더스틴 본인이 아니었으니까.
"...."
귀빈석을 향해 숙였던 고개를 든 루드는 누군가와 눈을 마주쳤다.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적잖은 동요가 일었다.
'저자는....'
귀빈들 가운데 위치한 사내. 방금 전 눈이 마주친 그는 일전 마탑 앞에서 마주친 인물이었다. 이제야 그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황족이었나.'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햇빛을 받아 빛나는 금색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왜 이제야 깨달았나 싶을 정도로 선명한 금색의 머리칼은 황족의 특징 중 하나였다.
하나 의아한 건 어째서 첫 만남 당시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방계인가?'
직계 황족은 전부 알고 있었다. 제국과의 전쟁 당시 황족들의 명단을 모조리 꾸렸었으니.
그렇다고 대놓고 황실의 이름을 건 이번 행사에 방계를 보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루드가 생각에 빠진 때, 시선을 마주쳤던 사내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더스틴 경에게 깜빡 속았군. 처형식은 없던 걸로 하지. 죄가 없는 이에게 죄를 물어서야 안 될 일 아닌가."
사내, 제국의 2황자 하자르 폰 카르바나가 상황을 정리했다.
"좋은 친구를 두었군. 그대의 부탁을 받았단 사실을 죽을 때까지 가져가려 하다니.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게 부러워."
곧이어 그는 쿠두스를 치켜세웠다.
"다만, 다음부터 이런 일을 계획할 땐 황실과 상황을 공유해주겠나. 이번 일이야 워낙 급해 그랬다지만 말일세."
"송구합니다."
모든 일의 종지부를 찍은 건 약간의 잔소리. 자신의 일을 마친 황자는 피곤하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내려가지, 친구."
"...."
황자가 떠나고, 루드는 쿠두스의 팔을 붙잡고 사형대를 내려왔다. 체력을 회복하지 못한 쿠두스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내려가면 아는 얼굴이 기다릴 겁니다."
쿠두스를 부축하던 루드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에게만 들릴 정도의 크기였다.
지금쯤이면 미쉐린이 페드리와 합류했을 터. 남은 건 쿠두스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뿐이었다.
팔을 잡은 쿠두스의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알아들었다는 의미일 터.
'국경만 빠져나가면 안전하다. 아니, 하다못해 제도만 빠져나가더라도 숨통이 트이겠지.'
미쉐린에게 두 사람을 구르드손 가에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흔쾌히 자신의 부탁을 수락했고, 고르단 왕국에 도착하는 즉시 구르드손 가의 사람들이 그들을 맞이하러 올 것이었다.
'국경을 벗어날 때까지 시간을 끈다.'
무려 제국의 소드마스터를 가장했다. 잘못됐을 때 감당해야 할 여파가 어느 정도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루드가 더스틴의 모습으로 나선 덴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쿠두스의 죄를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것.
'쿠두스를 살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데다....'
그리고 둘째는.
'황실과 의회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황실과 의회, 다시 말해 제국에 혼란을 야기하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전력을 깎을 수도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둘 모두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열을 올리겠지.'
더스틴을 죽음으로 몰고 간 건 의회였다. 높은 확률로 황실도 그 사실을 알 터.
그럼에도 쿠두스를 사형시키고자 했던 건 이쯤에서 합의를 보자는 그들 간의 메시지였으리라.
하지만 루드는 그들이 계속해서 알력 다툼을 하길 바랐다. 그것이 곧 제국의 전력 손실로 이어질 테니.
'황실과 의회 사이에서 정보를 혼동시키고 그들의 관계를 악화시켜야 한다. 그 과정에서 기밀까지 빼낼 수 있다면 최고겠지.'
그러나 거기까진 바라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갈등이 더 심해져 서로 죽이지 않고선 못 사는 관계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였다.
'위험부담이 크지만... 그만큼 얻을 수 있는 것도 크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루드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그 결정에는 최악의 경우에도 제 한 몸은 빼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한몫했다.
정체가 밝혀진다 해도 그때쯤이면 페드리와 쿠두스도 제국의 영역을 벗어났을 테니, 만약의 상황이 오면 있는 힘을 다해 날뛸 생각이었다.
"고생 많았네. 이만 쉬게, 얼굴이 많이 상했어."
사형대를 내려온 루드는 병사들을 불렀다.
"쿠두스를 맞이할 이들을 준비해 뒀으니 그들이 있는 곳까지만 부축해 주게."
재빠르게 달려온 병사들은 쿠두스를 부축했다. 곧이어 쿠두스는 루드가 말했던 아는 얼굴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역시 그자였나.'
제 앞에 나타난 여인의 모습을 확인한 쿠두스는 곧 더스틴의 얼굴로 나타난 이의 정체도 확신했다.
페드리의 후견인을 자처했고, 일전 감옥에 갇힌 자신을 찾아왔던 사내. 그가 분명했다.
"이쪽으로."
병사들에게서 쿠두스를 넘겨받은 미쉐린은 그를 부축하여 광장을 빠져나갔다.
페드리는 준비해 둔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쿠두스를 직접 데리고 오겠다며 날뛰는 걸 간신히 진정시키고 온 참이었다.
'저쪽은 됐고.'
광장을 벗어난 미쉐린과 쿠두스. 걱정을 던 루드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제부턴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형대에서 내려오자마자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이 다시금 앞을 가로막았다.
"더스틴 님."
"또 무슨 일이지?"
더스틴의 얼굴이 본인의 것임을 확인했지만, 질레트는 왠지 모를 의구심을 느꼈다.
그가 정말로 더스틴 본인이라는 증거가 필요했다.
만약 더스틴이 진짜 본인이라면, 그래서 자신의 이 무례함이 그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 각오가 돼 있었다.
고작 그 정도로 더스틴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나설 수 있었다.
"제 생일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
질레트의 물음에 루드는 입을 다물었다.
'생일이라.'
도서관을 통해 얻은 자료에는 질레트의 생일도 있었다.
이미 더스틴 본인뿐만이 아니라 그의 주변인까지 전부 조사를 마친 상태.
문제는 더스틴이 질레트의 생일을 알고 있는가였다.
자칫하면 정체가 탄로 날지도 모르는 상황.
"실례하겠습니다. 더스틴 경을 모셔 오란 황자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루드가 대답하기 직전, 그들 사이로 끼어든 이가 있었다. 황자의 명을 받고 더스틴을 데려가기 위해 온 기사였다.
"잠시만이면 됩니다. 아주 잠시!"
"질레트 경, 황자님의 명입니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질레트가 언성을 높였으나 황자의 명이라 일축하는 기사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황실, 그것도 무려 황자의 명이었다. 이견이 있어선 안 될 일.
"...."
결국 질레트는 답을 듣지 못한 채 물러나야만 했다. 대신 그는 기사와 함께 떠나는 더스틴의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봤다.
* * *
먼저 광장을 떠났던 황자는 별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간간이 시찰에 나설 때 사용하는 곳이었다.
별장에서 가장 커다란 방, 더스틴을 기다리는 황자의 표정에는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재밌군.'
쿠두스의 사형이 없던 일이 되며 바깥은 혼란스러웠다. 엄청나게 몰려들었던 인파가 허탕을 치고 돌아감에 따라 커다란 소음과 소란이 느껴졌다.
비단 바깥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면 황실 내부에서도 혼란을 겪을 터. 제대로 조사하고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를 위해 더스틴을 불렀다. 그가 죽음을 위장했던 이유와 조사했다던 세력의 정체,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등... 이야기를 나눌 부분이 많았다.
'...라는 게 그를 부른 대외적인 이유지.'
하지만 황자가 더스틴을 부른 진짜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똑똑-.
"말씀하신 대로 더스틴 경을 모셔 왔습니다."
마침 기다리던 이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명을 받고 떠났던 기사의 뒤로 더스틴이 보였다.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는 그의 모습에 황자는 미소를 지었다.
"고맙네. 자네는 이만 물러가게."
"하오나...."
기사에게 축객령을 내린 황자. 기사는 머뭇거렸으나 황자의 의지는 단호했다.
"나가 있게. 인선을 바꿔 달라해야 하는지 원, 도통 명령을 한 번에 들어먹는 이들이 없으니."
"...나가 있겠습니다. 말씀이 끝나시거든 언제든 부르시옵소서."
결국 기사가 바깥으로 나가며 널찍한 방에 두 사람만이 남았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루드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완벽하게 예법을 갖춘 모습이었다.
더스틴 클라위베르트는 제국의 소드마스터들 가운데 황실과 가장 밀접한 인물.
황실을 자주 오가며 대외 행사에도 익숙했으니 예법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야 했다.
'2황자, 하자르 폰 카르바나.'
이곳으로 오는 길에 넌지시 기사를 떠본 결과 그의 정확한 정체를 알아냈다.
제국의 2황자 하자르 폰 카르바나.
무려 황제의 둘째 아들로, 황위 계승권에서도 2위를 달리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 이름을 듣자 그에 관한 정보가 떠올랐다.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도.
'전생에선 이른 시일에 죽었던 인물이다.'
전생에서 제국에 관한 정보를 모을 때 그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물론 그의 죽음이 당장 이뤄질 것은 아니었다. 그가 죽는 것은 앞으로 몇 년 뒤.
황위 계승 경쟁 중 죽는 황족의 숫자가 적지 않았으니 그의 죽음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선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권력 다툼으로 죽더라도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는 으레 소문이 나는 법이었건만....
"내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소."
"무엇이든 말씀하소서."
무릎 꿇은 상태 그대로 고개를 숙인 루드. 하자르가 뭘 묻든 대답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어떤 세력이 자신을 노린 것인지, 어떻게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고 조사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하지만, 이어진 황자의 물음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지 않소?"
도통 의미를 모를 갑작스러운 말.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처럼 말이오."
하나 그 의미를 깨닫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대의 정체는 무엇이지?"
루드는 깨달았다. 황자는, 자신이 더스틴 클라위베르트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17화
황자가 자신이 가짜란 사실을 알고 있다.
'죽여야 하나?'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살인멸구였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는 법이었으니.
하지만 그럴 경우 일이 너무 커졌다. 더스틴을 위장한 것보다도 훨씬 심각한 문제였다.
'무슨 생각이지?'
루드는 일단 황자의 의중을 파악하기로 했다. 자신을 적대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자신에게 적의를 품었다면 이리 대담하는 게 아니라 곧장 체포했을 터. 그러지 않고 독대하는 자리를 만들었다는 건 그에게 다른 생각이 있다는 뜻이었다.
"...설마 황자 전하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생각보다 쉽게 실토하는군."
단순히 떠보는 수준이었다면 발뺌했겠지만, 황자는 자신이 더스틴이 아니란 걸 넘어 마탑 앞에서 대화를 나눈 사람이란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부정하는 건 하책.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나았다.
"다 알고 있는 분 앞에서 거짓말을 해 봤자 광대놀음밖에 더 되겠습니까."
"현명하군."
하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더스틴이 아니란 것은 둘째치고, 내 정체를 정확하게 특정하고 있다. 어떻게 된 거지?'
한편 루드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어디서 정보가 샌 건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자신이 변신 신비를 갖고 있단 건 미쉐린밖에 모르는 상황. 아무 접점도 없는 황자가 알 만한 정보가 아니었다.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게다가 황자를 처음 만났을 당시, 그는 일부러 자신에게 접촉해 왔었다. 우연을 가장했지만, 자신을 향하던 시선이며 미쉐린이 자리를 비웠을 때 다가왔던 정황을 생각해 보면 분명했다.
'...변신 신비를 꿰뚫어 보는 건가?'
그때와 지금의 공통점은 변신 신비로 모습을 바꾼 상태라는 것.
루드는 높은 확률로 황자에게 변신 신비를 꿰뚫어 볼 능력이 있을 거라 추측했다. 그렇다면 마탑에서 관심을 보였던 것도, 지금 자신의 정체를 간파한 것도 설명이 됐다.
"그래서, 자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을 생각인가?"
"...루드비코라고 합니다."
루드는 자신의 정체를 묻는 말에 루드비코란 이름을 밝혔다. 이미 마탑에서 루드비코의 모습으로 마주친 적이 있는 바, 그가 알아내고자 하면 순식간에 밝혀질 이름이었다. 그럴 바엔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는 게 나았다.
"루드비코, 인가."
하자르는 루드비코란 이름을 되새겼다. 정체를 묻긴 했지만 사실 그에 대해선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이미 조사를 통해 그가 구르드손 가의 손님이란 것까지 알아낸 후였으니.
'오랫동안 요양하던 손녀의 병세를 고쳤다지.'
다만 그가 어째서 더스틴으로 위장하면서까지 쿠두스를 살리려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진짜 중요한 건 그를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
'여전히 크고, 여전히 선명하군.'
하자르는 루드비코에게서 흘러나오는 아우라를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크고 선명한 파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색도... 여전히 바뀌고 있고 말이야.'
하자르는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가 '아우라'라 일컫는 파장은 누구나가 갖고 있는 것으로, 그 색과 크기에 따라 어떤 인물인지 판별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청색은 길, 적색은 흉, 파장의 크기는 영향력의 크기.'
청색은 하자르에게 도움이 되는 인물을 의미했다. 반대로 적색은 하자르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을 의미했고.
청색과 적색 외에도 몇 가지 색이 더 있었다. 각각의 색들은 선명할수록 그 색이 의미하는 일의 절대성이 높아졌고, 파장이 클수록 하자르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커졌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루드비코는 특수한 케이스였다.
'색이 계속해서 바뀐다.'
청색과 적색을 오가는 루드의 아우라. 심지어 그 크기는 여태 본 누구의 것보다도 커다랬다.
처음 그를 봤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더스틴의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나섰던 길이었으나 그를 마주친 순간 조사는 뒷전이 되었다.
더스틴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를 곧장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아우라 덕분이었다. 그만한 아우라가 둘이라 생각할 수도 없을뿐더러, 더스틴의 아우라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
'내가 하기에 따라 최고의 패가 될 수도, 최악의 패가 될 수도 있다는 건가.'
하자르는 루드비코의 아우라를 관찰했다. 지금도 그의 아우라는 청색과 적색을 오가고 있었다.
아우라의 색이 변하는 경우는 이전에도 몇 번 있던 일이었다.
루드비코처럼 시시각각 바뀌는 건 아니었어도 색이 변화하는 이들이 있었고, 상황과 사건에 따라 개인의 아우라 색이 변한 적도 있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하자르는 아우라가 절대불변의 성질이 아님을 깨달았다. 동시에 아우라의 선명도가 그 색이 변화할 확률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도.
'신기하단 말이지. 정반대를 오가면서 이렇게 뚜렷한 색을 띈다는 게.'
아우라는 선명할수록 그 색이 잘 바뀌지 않았다.
지금은 계속해서 바뀌고 있는 루드비코의 아우라 색이었지만, 그 선명도를 봤을 때 하나의 색으로 고정된 순간 그것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하자르는 그간의 경험으로 지금 같은 상황이 중대한 갈림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하기에 따라 저 색이 청색으로 고정될 수도, 적색으로 고정될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말하지. 나는 자네가 진짜 더스틴이든 가짜 더스틴이든 상관없네. 그걸로 죄를 물을 생각도 없고."
"...그 말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하자르는 루드비코의 아우라를 청색으로 고정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이곳으로 부른 것이고.
물론, 그것만이 목적의 전부는 아니었다.
"의회에 대해 알고 있나?"
"어떤 말씀이신지."
"이번 사건에 그들이 연관되어 있는 걸 알고 있는지 묻는 걸세."
루드비코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그 일을 통해 루드비코가 가진 아우라의 변화를 관찰할 수도 있을 터.
자신의 질문에 그가 대답하지는 않았으나, 황자는 그것이 긍정의 침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 모를 리가 없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자네가 의회의 힘을 견제해 줬으면 하네."
그것은 선을 넘은 의회에 대한 경고였다.
본래는 쿠두스의 사형을 통해 적당한 타협점을 제시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의회의 농간에 의해 죽었던 더스틴이 살아 돌아온 상황. 물론 진짜 더스틴은 아니었지만, 남들에겐 그걸 구별할 능력이 없었다.
'이건 이용할 수 있다.'
의회는 지금의 상황에 혼란을 겪을 터. 그들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지금이 의회의 힘을 줄일 절호의 기회였다.
"마침 사형대에서 말하지 않았나. 자네를 음해하려는 세력을 조사했다고."
그 세력이 의회였다 밝힌다면 의회를 공격할 명분이 됐다. 그들의 힘이 강력한 만큼 한 번에 무너트릴 순 없겠지만... 차근차근 해 나가면 될 터.
"저를 칼로 쓰실 생각입니까."
"그래."
하자르는 상대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당분간은 자리를 지켜 줘야겠어."
루드는 황자의 제안을 곱씹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의미로 자신에게 제안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황실과 힘겨루기를 하는 의회다. 이번 기회에 그들의 힘을 줄여놓고 싶은 거겠지.
마침 자신이라는 좋은 수단도 생겼으니 욕심을 낼 법했다.
'나에겐 좋은 일이군.'
황자의 욕심은 루드로서도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황실과 의회가 서로의 힘을 갉아먹는다면 결국 제국이 스스로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으니,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은 황자가 자신의 무엇을 믿기에 일을 맡기냐는 것.
이 때문에 황자의 부탁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자네가 힘을 보태 준다면 자네의 정체가 밝혀진 후 쫓기는 일이 없게 해 주지."
고민하는 기색을 느낀 것일까. 황자는 첨언을 달았다. 추후 자신이 가짜 더스틴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쫓기지 않게 도와주겠다는 말.
"물론 자네만이 아니라 쿠두스도 마찬가지일세."
"...좋습니다."
결국 루드는 결국 황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자신을 쓰려는 것이 자신을 믿어서인지,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든 제어할 수 있다 여겨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황실의 힘을 등에 업고 의회를 공격할 좋은 기회임은 분명했다.
심지어 더스틴을 가장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을 황자가 책임지고 무마해 주겠다 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동안 황자가 가진 비밀도 알아내야겠어.'
안 그래도 쿠두스와 페드리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야 하는 참이었다. 그 사이 의회의 힘을 줄이게 됐을 뿐인 일.
그동안 황자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간파했는지도 알아낼 생각이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현재 제국의 상태와 그들이 갖춘 힘을 확인할 수도 있을 터.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에 앞서, 루드는 황자에게 한 가지를 요청했다.
"황자님께서 그러하셨듯 제가 더스틴이 아니란 걸 알아차릴 이들이 있을 겁니다. 당장은 넘어가더라도 이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점점 더 의심할 거고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질레트를 떨어뜨려 놔 주십시오."
"질레트 경 말인가. 확실히 그대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인물일 테지."
하자르는 루드비코의 부탁을 수락했다. 애초에 기사를 통해 재빨리 그를 데려오려 했던 것도 질레트를 의식해서였다. 그와 오랜 시간 붙어 있으면 정체를 들키는 건 시간문제일 터.
"파견 임무를 보내야겠군."
"되도록 멀리, 길게 보내 주셔야 합니다."
"알겠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상황. 황자는 본격적으로 루드가 맡아야 할 일을 설명했다.
"그대가 해 줘야 할 건 두 가지네. 하나는 아까 전 말했듯 자리를 지켜 주는 것."
자리를 지켜 달라 했지만, 단순히 제도에 남아 있으란 의미만은 아니었다. 대외적인 상황에서 더스틴의 이름으로 의회를 압박하란 의미였다.
"다른 하나는 그들의 실질적인 힘을 하나 없애는 것이네."
"실질적인 힘이라 하면...."
"만월학파."
"...만월학파 말씀입니까?"
의회의 힘은 여러 가지였다. 의원 개인이 소유했거나 이름이 알려진 것도 있었고, 의회의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그들의 소유인 것도 있었다. 만월학파가 그중 하나였다.
이십 년 전 세워져 마법계의 주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학파.
그곳에 속한 마법사들은 의회의 사병들이나 다름없었으니, 향후 최소한의 피해로 의회를 처리하기 위해선 미리 제거해 둘 필요가 있었다.
다만, 그들을 제거함에 있어 황실의 힘을 사용할 순 없었다.
"은밀하고 조용히 처리해야 하네. 누가 그들을 해쳤는지 알 수 없게."
"그래서 제게 부탁하시는 것이군요."
"그렇지.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황실의 힘으론 그들을 공격할 명분이 없다. 애초에 만월학파는 겉으론 의회와 아무 접점도 없었으니, 자칫 건드렸다간 오히려 역풍을 맞을 뿐이었다.
하지만 정체 모를 흉수에 의해 만월학파에 변고가 발생한다면?
의회가 큰 타격을 입을 터. 심지어 만월학파와의 관계는 겉으로 드러난 게 아니었으니 보복에 나서기도 어렵겠지.
황실에서 나선 것임을 깨달아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의 내게 딱 알맞은 임무군.'
루드는 황자가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황실 소속이 아니면서 만월학파를 처리할 능력을 갖췄고, 일을 마치면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을 인물.
설령 자신이 일을 실패해도 황실에는 피해가 가지 않을 테니, 최적의 인사라 여겼으리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대담이 끝나고. 루드는 황자의 별장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제도에 위치한 더스틴의 저택이었다.
'만월학파라.'
루드는 황자와의 대담을 곱씹었다. 자신이 가짜란 걸 들켰을 때만 해도 걱정이 많았는데, 오히려 자신에게 득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대한 피해를 입혀야겠군.'
황자를 등에 업고 의회를 상대할 수 있게 된 상황.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 의회를 분쇄할 생각이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18화
죽었다던 더스틴이 살아 돌아왔다. 그 소식에 제국민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그의 생환을 반기는 것이 하나요, 그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것이 다른 하나였다.
하나 극명하게 나뉘었던 사람들의 반응은 곧 하나로 귀결됐다. 더스틴의 복귀를 환영하는 것이었다.
"황실에서 확인을 마쳤다지?"
"어쩐지 이상했어. 소드마스터가 그리 쉽게 죽을 리 없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네. 무언가 숨겨진 비밀이 있을 거라고 말이지. 하핫."
제도를 거닐다 보면 쉽게 들을 수 있는 대화. 그 내용을 들은 루드는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의심받을 일은 없겠군.'
황실에서 더스틴의 신분을 보장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다. 황실은 단 한 번도 그들의 입으로 '더스틴은 진짜다'라고 말한 적 없었지만, 어느새 사람들은 더스틴이 진짜며 황실이 이를 보증한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2황자가 손을 쓴 건가.'
아마 2황자가 한 것일 터. 당분간 같은 배를 타기로 한 사이였으니, 그가 도움을 준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신분이 의심받으면 그 또한 곤란했으니.
공언이 아닌 소문의 형태로 퍼트린 건 나중에 자신이 사라졌을 때를 대비한 것이겠지.
형태야 어떻든 상관없었다. 그 덕에 자신을 의심하는 이들이 줄어들었으니 운신이 훨씬 편해졌다.
'가장 까다롭던 인물도 해결했고.'
질레트, 자신이 가짜란 걸 알아차릴 가능성이 가장 높던 그는 황자의 명으로 장기 임무에 파견됐다.
그가 돌아오는 것은 자신이 더스틴의 모습을 벗어던진 후일 터. 어처구니없는 실수만 안 한다면 모두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더스틴의 저택으로 돌아온 루드는 변신 신비를 해제했다. 지난 참사 이후 새로운 사용인을 고용하지 않았기에 저택엔 루드 혼자뿐이었다.
"더스틴과 의회…."
루드는 더스틴이 폭주하게 된 과정을 추측해 봤다. 어떠한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폭주했던 더스틴. 그 배후에 의회가 있음은 분명했다.
문제는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더스틴을 폭주하게 만들었는가.
'독인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독이었다.
소드마스터에게 웬만한 독은 통하지 않는다지만 모든 독이 통하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
전생의 제노스 또한 황혼 부족의 비전 독으로 인해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의회의 역량이라면 소드마스터에게 통하는 독을 구하는 것도 가능했을 터.
그렇다면 어떻게 그를 중독시켰는가.
"가장 확률이 높은 건 사용인들이겠지."
공식적인 업무가 아니고서야 하루 종일 집에서 잠만 자는 그였다. 실제로 참사가 일어났을 당시도 며칠 동안 집에만 머물렀던 걸로 확인됐고.
그런 그에게 독을 먹일 수 있는 인물은 많지 않았다. 수상한 낌새를 들키지 않고 소드마스터에게 접근할 수 있는 이들은 더더욱 그랬고.
하여 용의자를 특정 짓는 건 간단했다.
더스틴의 주위를 맴돌아도 이상하지 않고, 의심받지 않고 그가 먹고 마시는 것에 개입할 수 있는 존재.
그의 저택을 관리하는 사용인들이었다.
'당사자들을 직접 조사할 수 있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들을 직접 조사하는 건 불가능했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참사 당일 전부 더스틴의 손에 죽었으니.
다만 그들의 가족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추측이 맞으면 그들을 조사함으로써 더스틴의 중독 과정을 보다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도서관에 의뢰를 맡겨 놨으니 금방 정보를 전달해 주겠지.'
이미 도서관에 의뢰를 넣어 둔 상황. 머지않은 시일 내에 원하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
'페드리와 쿠두스도 무사히 제도를 빠져나갔다고 했고.'
도서관은 두 사람에 관한 소식을 전해 줬다. 구르드손 가에서 돕기로 했으니 큰 위험 없이 제국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당분간은 그들을 고르단 왕국에서 머물게 할 생각이었다. 제국의 눈을 피할 수도 있고, 미켈레가 있었으니 페드리의 성장에도 좋은 양분이 돼 줄 터였다.
'이제부턴 내게 달렸군.'
이번 사건은 루드에게 있어서도 중요했다. 전생에선 없었던 일. 그 반향도 얕잡아 볼 게 아니었다.
이런 변수가 계속해서 생긴다면 앞으로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지금이야 자신에게 득이 되는 방향의 변수라지만....
'언젠가 내게 해가 되는 변수가 생기지 말란 법도 없지.'
그러니 더 면밀히 알아봐야 했다.
"이제 어떻게 나올 거냐, 의회."
가장 궁금한 건 현 상황에서의 의회의 대처.
죽었던 더스틴이 살아 돌아온 지금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것을 잘 살핀다면 의회의 행동 패턴이나 원리를 알아낼 수도 있을 터였다.
'만약 녀석들이 직접 접근해 온다면....'
어쩌면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접촉해 올지도 모르지.
그런 상황이 온다면,
'줄을 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황자는 만월학파를 제거해 줄 것을 부탁했다.
만약 의회에서도 그런 종류의 부탁을 한다면, 루드는 흔쾌히 그러할 용의가 있었다.
황실과 의회 사이를 오가며 서로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이번 일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소득이었으니.
"일단 만월학파부터 해결해야겠군."
다만 의회가 무언가를 제안하고 그것을 수락한다고 해서 한쪽을 등지거나 한쪽의 편만을 들 생각은 없었다. 변신 신비를 적극 활용하며 양쪽 모두를 오갈 생각이었다.
'황자의 눈이 걸리긴 하지만.'
그의 눈에만 띄지 않으면 될 일. 비록 이번엔 정보가 없어 당황했지만, 이젠 그렇지 않았으니 조심하면 문제 될 건 없었다. 황자란 신분으로 언제까지고 일선에 있을 수만도 없을 테니.
생각을 정리한 루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체형도 마찬가지였다.
루드의 본모습도, 아까까지 위장하고 있던 더스틴도 아닌, 제3의 인물.
모습을 바꾼 루드는 은밀히 저택을 빠져나왔다.
* * *
긴급회의가 열렸다. 정기 회의까진 아직 사흘이란 시간이 남았으나 의원들 모두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 바, 회의가 소집되자마자 금세 전원이 참석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더스틴이 살아 있다니."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의원들은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차라리 잘 된 것 같습니다. 원래 그를 죽일 생각까진 없었던 것 아닙니까. 의장님께서도 그를 참회시키는 정도에 그칠 거라 하셨고요. 그가 죽었다고 해 깜짝 놀랐었는데 살아 있다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개중엔 안도하는 이도 있었다. 애초에 지난 회의에서 통과된 안건은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에게 벌을 주는 것 정도였으니.
반면 대놓고 아쉬움을 드러내는 이도 있었다.
"저는 아쉽습니다. 물론 말씀하신 것처럼 죽이려는 생각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죽었고 큰 피해 없이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까. 황실 측에서도 별다른 압박 없이 넘어갔고요."
의도하진 않았으나 더스틴이 죽었고, 그럼에도 걱정했던 황실의 공격은 없었다. 오히려 쿠두스라는 이름 모를 제물을 통해 한발 물러서는 모습까지 보였었다. 한데 더스틴이 살아 있다니... 아쉬운 마음이 컸다.
"맞습니다. 오히려 그가 살아 돌아오면서 저희를 공격할 명분을 갖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나아가 우려를 표하는 이도 있었다. 더스틴의 죽음도 위험했지만, 죽음에서 돌아온 지금이 더욱 위험했다.
마음먹으면 자신이 겪은 일의 배후에 자신들이 있음을 공표할 수 있었으니.
공표하지 않더라도 그로 말미암아 압박을 가할 것은 분명했다.
"이쯤 되니 더스틴의 자작극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우리를 공격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더스틴의 행적을 의심하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그가 중독되긴 했던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들이 더스틴의 손에서 놀아난 꼴에 불과했는가.
그때, 한 의원이 의견을 냈다.
"저는 아무래도 지금 나타난 더스틴이 가짜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군요."
"가짜 말입니까?"
"예."
그는 처형식에 나타났다던 더스틴이 가짜일 거라 확신했다.
더스틴의 얼굴, 행동, 소드마스터로서 풍기는 기백까지... 그 모든 것들이 진짜처럼 보였으나, 그에게는 더스틴의 정체를 의심하게 만들어 준 이유가 있었다.
"더스틴의 시신을 직접 확인했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클라우드 기사단을 통해 확인했었습니다. 분명 그의 시체였습니다."
더스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가 그의 시신을 확인했었다. 상식적으로 죽었던 이가 돌아올 순 없는 법. 자연스레 지금 나타난 더스틴은 가짜란 결론이 나왔다.
"하면...."
"가짜일 거라 생각합니다. 황실에서 신원을 보증했다는 소문이 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황실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 소문으로 그런 이야기가 퍼지다니요. 마치 언제든 발 뺄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군요."
"개인적으론 황실이 꼭두각시를 세워 저희를 압박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쿠두스란 작자를 내세웠던 일도 실제로는 눈 가리기용에 불과했던 것이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가 진짜이든 가짜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때 침묵하고 있던 의장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차분한 목소리였다.
"더스틴이 죽지 않았던 것이든, 죽었다 살아 돌아온 것이든, 가짜이든, 중요한 건 그의 모습을 한 것이 멀쩡히 돌아다닌다는 사실입니다. 언제고 우리를 찌를 수 있는 검을 품은 채로요."
더스틴의 생사보다 중요한 건 황실이 자신을 공격할 명분을 쥐게 됐다는 것.
"먼저 사죄드리겠습니다. 제 일 처리가 미흡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의장이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직접 더스틴의 일을 맡겠다고 나섰던 자신이었다. 그 일 처리가 미숙했으니 지탄받아 마땅했다.
'완벽히 파악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더스틴이란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중독 시키는 과정까진 완벽했다. 폭주한 그가 자신의 사용인을 비롯해 제도의 시민들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성공을 자신했다.
하나 그 이후부터 상황이 급변했다. 자신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자의 정신력이 그 정도였을 줄이야.'
카리븐으로 향한 더스틴의 죽음. 생각보다 피해가 적은 것도 놀라웠지만, 더스틴이 죽었단 소식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그가 죽을 줄이야.
만날 게으름만 피우는 한량이라 생각했다. 한데 몸에 이상을 느낌과 동시에 목적지를 정하고 친우에게 찾아갈 정도로 자신을 통제하다니... 소드마스터란 이름은 허명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일이 이리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맞습니다. 저희에게 사죄하실 일이 아닙니다."
사죄하는 의장에게 의원들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일단, 당분간은 황실의 눈치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지금의 흐름은 명백히 황실에 있었다. 이럴 땐 맞서 싸우는 것보다 흐름에 거스르지 않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것이 마냥 손 놓고 있겠단 소리는 아니었다.
"제가 그의 정체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의원 하나가 의견을 피력했다.
"그가 가짜란 것을 폭로할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그가 가짜란 사실이 드러나면 황실 또한 타격을 피할 수 없을 터."
"한데 어떻게 확인하실 생각입니까? 저번 일로 경계가 삼엄해졌고, 저들도 바보가 아니니 어떻게든 정체를 숨기려 할 텐데 말입니다."
곧 다른 의원들도 그 의견을 지지하고 나섰다. 다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의견을 제시했던 게 아니었다.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맡겨 주시면 제가 그의 정체를 파악해 보겠습니다."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마침내 의장의 허락이 떨어졌다. 민무늬 가면 아래로, 결연한 표정이 자리했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19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마법학계에서 만월학파는 신생학파 축에 속했다. 오십 년을 넘긴 학파들이 수두룩한 가운데 고작 이십 년밖에 안 됐으니.
하지만 그들을 신생이라 무시하는 학파는 아무 곳도 없었다. 고작 이십 년. 다른 학파의 반도 안 되는 역사를 가진 그들이 만든 실적 때문이었다.
공기 청정 스크롤, 정수 스크롤, 온도 최적화 스크롤.
그들은 재치 있는 발상과 뛰어난 마법 실력으로 연달아 히트 상품을 내놓았다. 하나같이 마탑의 효자 상품으로 자리매김한 것들.
만월학파는 상업적인 면뿐만이 아니라 순수 이론과 마법학에서도 뛰어난 모습을 드러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마탑 학술 대회에서 사상 최초로 3연패를 달성한 그들이었다.
전투 마법이 조금 약하다는 평가가 있었으나, 그들이 마탑의 주류 학파 중 하나란 덴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이곳이 만월학파인가.'
루드는 멀리서 만월학파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거꾸로 세운 소라 형태의 건물. 그 전체가 만월학파의 연구실이자 거처였다.
의회의 숨겨진 힘.
이곳을 무너트리면 의회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으리라.
만월학파는 제도 바깥에 위치했다. 제도에서 멀리 떨어진 거리는 아니었다. 제도에서 카리븐 정도의 거리. 어쩌면 그보다 더 가까울지도 몰랐다.
다만 잘 닦인 제도와 카리븐 사이의 대로와는 달리 제도에서 만월학파까지의 길은 거칠고 복잡했다.
'마스터가 5서클이라 했나.'
2황자가 전한 정보에 의하면 그랬다.
마스터 아래로 4서클의 마법사가 둘 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3서클 이하라고 했다.
도서관을 통해 교차검증까지 마친 상황.
마스터와 그 아래 두 명의 마법사만 조심하면 어려울 건 없어보였다.
'애초에 정수의 힘이 마법사에게 천적이기도 하고.'
몸과 마력을 넘어 정신까지 얼려 버리는 정수의 힘.
정수의 힘을 응용하면 마력을 동결시키는 현상까지 만들 수 있었다.
세심한 작업이었기에 정수의 힘을 품었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루드에겐 가능했다.
츠팟-.
만월학파를 관찰하던 루드의 모습이 사라졌다. 기척을 지우고 은신한 것이었다.
루드는 그 상태로 만월학파에 다가갔다. 바깥을 지키는 이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루드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외부인의 모습으로 접근할 방법이 마땅치 않단 말이지.'
처음에는 후원자의 모습으로 위장할까 생각했었다. 전문적으로 마법학파에 후원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후원을 명목 삼아 만월학파 내부로 들어서려 한 것이었다.
하나 도서관에서 받은 정보를 확인하고 마음을 바꿨다.
'후원과 투자를 전혀 받지 않는다라….'
심지어 그들이 후원을 받지 않는다는 소식은 이미 학계에 파다한 것이었으니, 외려 후원을 하겠다고 나서면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외부 자금이 필요하지 않아서라지만, 실상은 의회와의 연결점을 들킬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겠지.'
루드는 그들이 후원을 받지 않는 이유를 짐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지만 만월학파는 의회의 전력인 바, 이미 그들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고 있을 터였다.
괜히 외부의 지원을 받겠다고 함부로 사람을 들였다 그 관계가 탄로 날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소속 마법사의 신분을 빌리는 것도 위험할 것 같고.'
후원자로 위장하는 걸 포기한 후엔 만월학파 소속의 마법사로 위장하는 것을 고려했었다.
내부를 살피기 용이한데다 그들이 가진 자료에 접근하는 것도 자연스러울 테니, 활동하기 편할 거라 여긴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금세 포기했다. 위장하는 것은 쉽겠으나 안에 들어가서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몰랐다.
'내부가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지 모르니 어쩔 수 없지.'
만월학파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 관한 것.
학파 내부의 구조가 어떻고, 어떤 시스템으로 생활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 변수가 생길 만한 일은 지양해야 했다.
만약 마법사의 모습을 위장했다 다른 마법사를 만난다면 상황이 꼬이겠지.
'때론 간단한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
하여 루드는 기척을 죽이고 잠입하기로 했다.
작정하고 은신한다면 이곳의 누구도 자신을 찾을 수 없을 터. 마법적인 경계 시스템만 조심하면 됐다.
루드는 바깥을 지키는 경비들의 시선을 피해 만월학파 내부로 들어섰다.
아무도 루드가 학파 내부로 들어왔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단 들어오는 덴 성공했고.'
잠입에 성공한 루드는 주위를 둘러봤다. 학파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내부에 몇 명이나 있는지, 어디가 뭘 하는 곳인지 파악하는 데 열중했다.
'서른 정도인가. 수준은… 정보대로고.'
마탑 내부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어림잡아 서른. 그중 대부분이 3서클 정도의 수준이었다.
'마스터는 맨 윗층인가.'
가장 경계해야 할 마스터의 위치도 특정했다. 건물 최상층에서 5서클 마법사의 기운이 느껴졌다.
'저쪽에서 연구와 실험이 이뤄지는 건가.'
만월학파의 거처는 뒤집힌 소라 형태였기에 1층이 가장 넓었다. 그중 절반가량의 부지에서 연구와 실험이 이뤄지는 것 같았다.
'최대한 날뛰어 줘야겠지.'
황자의 부탁으로 만월학파를 없애기로 한 상황.
루드는 최선을 다해 황자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만월학파의 피해가 클수록 의회가 분노할 테고, 그것은 곧 황실과 의회의 관계 악화로 이어질 테니.
하여 마법사들을 전부 죽이고 건물을 무너트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었다.
'녀석들이 모아둔 재료와 마법에 관련된 자료를 탈취한다.'
의회의 지원을 받으며 실험에 열중했을 만월학파다. 분명 무언가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냈을 터.
그들이 공표한 대부분의 결과물이 실생활에 유용한 마법들이었지만, 루드는 그것이 그들이 가진 전부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진짜 중요한 건 철저히 숨겨 놨겠지.'
애초에 만월학파가 전투 마법에 약하다는 것부터가 의문스러웠다. 의회의 숨겨진 힘인 그들이다. 의회의 야욕과 그들이 전생에서 보였던 행보를 생각하면 전투 마법을 등한시할 리 없었다.
루드는 그 자료들을 탈취할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그들이 모아뒀을 희귀한 마법 재료들도.
'마법도 가다듬을 때가 됐다.'
현재 루드의 마법 수준은 5서클. 미쉐린의 정수를 흡수하며 5서클의 흑마법을 전부 되찾은 상황이었다.
하나 그 정도론 부족했다. 최소한 전생의 수준은 갖추고 싶었다. 7서클 흑마법. 그것이 루드의 목표였다.
여태까진 정수를 흡수하면서 손쉽게 경지를 올렸지만, 이제부턴 마법에 대한 본질적인 고찰이 필요했다.
마법에 대한 사고와 궁리. 그 과정을 거쳐 현재의 틀을 깬 순간, 이전의 경지를 보다 많이 되찾을 수 있으리라.
마침 만월학파를 찾았으니 좋은 기회였다. 그들이 애지중지 모아둔 자료를 얻는다면 마법에 관한 영감을 얻을 수도 있었다.
'아공간 주머니의 빈자리도 충분하고.'
자료와 재료들을 가져갈 공간도 충분했다. 과거 흑마법사 요렌테를 죽이고 얻은 아공간 주머니의 용량은 아직 넉넉했으니.
'슬슬 움직여 볼까.'
만월학파의 마법사들이 움직이는 동선의 파악을 마쳤다. 실험실에 중요한 자료가 있는지 교대하며 자리를 지키는 마법사들. 그들의 교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루드는 교대를 마친 후를 노리려 했다. 약간의 소란이 일더라도 방금 일을 마치고 들어간 이들이 기민하게 움직이진 않을 거란 계산이었다.
이윽고 마침내 교대한 그들.
'...뭐냐.'
하지만 루드는 계획과는 달리 곧장 움직이지 못했다.
'뭐 하는 거냐. 얼른 돌아와.'
뀨우-
슬라브가 갑자기 돌발행동을 보인 까닭이었다.
'시간이 없다.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야.'
- 기다려 봐!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는 슬라브. 심지어 큰 목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물론 슬라브의 목소리야 루드에게만 들리는 것이었지만....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요즘 마력 간식이 조금 부족했던 거냐?'
난데없는 반항이었으나, 루드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슬라브를 다그쳤다.
- 아이참! 잠깐마안!
결국 바닥에 붙은 슬라브를 직접 떼려고 움직인 순간.
'!!'
무언가를 느낀 루드가 흠칫했다.
'설마 너… 이걸 느낀 거냐?'
- 너도 느껴져?
루드는 슬라브가 붙은 바닥, 정확히는 그 아래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한 번 인지하고 나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여기에 또 다른 공간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흐릿하지만 절대 모를 수 없는 기운.
'정수의 힘...!'
루드는 본능적으로 이 아래에 숨겨져 있을 공간이 '의회의 힘'인 만월학파의 본모습일 거라 생각했다.
'확인해 봐야겠어.'
루드는 보상의 의미로 슬라브에게 마력을 건넸다. 녀석이 아니었다면 아래에 숨겨진 공간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겠지. 심지어 마법사들을 죽인 뒤 건물을 무너트리려고 했으니, 평생토록 숨겨진 공간의 존재를 모를 뻔했다.
'공간 전체에 마법 처리를 해 놓은 건가.'
루드는 숨겨진 공간을 가늠했다. 보안을 위해 여러 가지 마법 처리를 해놓은 게 느껴졌다. 자신의 감각을 속였던 것도 이 덕분이었다. 인지 저하와 마력 차단 등 온갖 마법으로 도배해 놓은 게 분명했다.
'내려가는 길은… 외부인가.'
비밀 공간으로 향하는 길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내부에서 아래로 가는 길은 없는 것 같았다. 이곳에 잠입한 이후 계속해서 관찰했음에도 비밀 공간으로 향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
루드는 바깥으로 나와 만월학파의 건물을 다시 살폈다. 곧 아래로 이어진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을 위한 건물 구조였나.'
뒤집어진 소라 형태의 건물. 소라의 껍데기 틈에 미묘한 공간이 있었다. 비밀 공간과 마찬가지로 마법 처리가 된 상태였다.
'마력 차단, 소리 차단, 충격 차단, 기척 차단, 온도 유지, 습도 유지… 많이도 둘러놨군.'
다행히 전부 알아볼 수 있는 마법들. 그중 자신의 침입을 들킬 만한 마법이 없다는 걸 확인한 루드는 껍데기 틈으로 몸을 넣었다.
'돌계단인가.'
틈의 내부는 비좁은 돌계단의 형태였다. 루드는 계단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좁은 통로라 반대편에서 누군가 온다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다행히 누군가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감각을 흐리기 위한 구조군.'
계단을 걸으며 루드는 계단의 존재 의도를 짐작했다.
나선형으로 이어진 좁은 계단은 걷다 보면 방향 감각과 거리감을 상실하게 했다.
심지어 비밀 공간은 분명 아래 존재했음에도 계단은 위와 아래를 오가는 형태로 꼬아 놨다.
또 계단 곳곳에 인지 저하와 혼란을 야기하는 마법이 내장돼 있었으니,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계단을 걷다 쓰러질 정도였다.
하나 그 무엇도 루드의 걸음을 막을 순 없었다.
끼이익-
마침내 계단 끝에 도착한 루드. 앞에 위치한 문을 열자 예상대로 숨겨진 공간이 나타났다.
"역시 정수였군."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정수의 기운. 그것이 밖으로 새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은 공간 전체에 도배되어 있는 마법들이었다.
"심지어 하나가 아니야."
공간 내부의 정수의 힘은 다섯. 물론 하나 같이 작은 크기였지만, 정수의 힘은 작다고 무시할 게 못 됐다. 고작 새끼손톱만 한 크기로도 그 수백 배의 마력을 능가할 수 있었으니.
'뭘 하려 했던 거지.'
정수를 가지고 실험을 하려 했다는 건 분명했다. 다만 그 목적이 무엇이고, 실험은 어떤 내용이었는가.
뀨!
루드가 생각에 빠진 사이. 슬라브가 환희에 가득 차 소리를 질렀다.
- 찾았다! 맛있는 냄새!
아까 위에서 느꼈던 맛있는 냄새.
슬라브는 그것의 근원을 한입에 삼켰다.
용사는 마왕의 회귀를 모른다 120화